16세 휘 보천 (사상공) 관련기록/16세

16세손 10대조고 관련 자료

아베베1 2012. 7. 8. 11:40

순암선생문집 제26권
 행장(行狀)
처사 불우헌 정공 행장(處士不憂軒鄭公行狀) 갑진년


공의 휘는 상점(相點)이고, 자는 중여(仲與)이며, 본관은 수양(首陽)인데, 고려 때 시중(侍中) 휘 숙(肅)의 후손이다. 조선조에 들어와 휘 역(易)이란 분은 태조(太祖)와 태종(太宗)을 섬겨 관직이 좌찬성(左贊成)에 이르렀고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정도공(貞度公)인데, 바로 공의 11대조이다. 4대를 지나 진사로서 이조 참판(吏曹參判)에 추증된 휘 희검(希儉)이란 분에 이르렀는데, 이분은 백씨(伯氏)인 허암 선생(虛菴先生) 희량(希良)이란 분과 함께 수학하였다. 연산군(燕山君)의 정치가 혼란한 때를 당하여 허암이 은둔하자, 참판공도 과거(科擧)를 그만두고 시(詩)를 읊고 술을 마시며 스스로 즐기면서 호를 계양어은(桂陽漁隱)이라 하였으니, 세상 사람이 그의 절의를 훌륭하게 여겼다. 또 3대를 지나 호가 농포(農圃)이고 휘가 문부(文孚)인 분에 이르렀는데, 이분은 문무(文武)의 재능을 겸비하였다. 선조(宣祖)의 임진왜란 때 북평사(北評事)로서 의병을 일으켜 토적(土賊)을 주벌하고 왜적을 몰아냈으니, 그 일이 국사(國史)에 기록되어 있다. 관직은 병조 참판이었는데, 인조(仁祖) 갑자년(1624, 인조 2)에 시안(詩案)에 연루되어 무함을 받아 화를 당했다. 뒤에 비록 신원(伸寃)되어 이상(貳相 좌찬성(左贊成))에 추증되고 ‘충의(忠毅)’라는 시호를 내렸지만 사람들이 지금까지도 그 일을 슬퍼하고 있으니, 공에게 고조가 된다. 고려 때부터 농포공에 이르기까지 수백 년 사이에 대대로 관직을 계승하였으니 실로 우리 나라의 이름난 성씨이다. 증조의 휘는 대륭(大隆)인데 좌승지에 추증되었다. 지극한 효성을 타고났으며, 가화(家禍)를 당한 이후로 애통한 마음을 지닌 채 백씨(伯氏) 진사공(進士公) 모(某)와 함께 남쪽으로 진양(晉陽)에 와 살면서 세상 사람들과 서로 왕래하지 않았다. 그 뒤로 자손들이 그 고장에 그대로 눌러 살았다. 조부의 휘는 유인(有禋)이다. 선고의 휘는 구(構)이고 호는 노정헌(露頂軒)인데, 지조와 기개를 지녔고 문장을 숭상하였으며, 성품이 고결하고 남에게 은혜 베푸는 것을 좋아하였다. 증, 조, 부 3대가 모두 은거하며 출사하지 않은 것은 선조의 뜻을 따른 것이다. 선비(先妣) 청주한씨(淸州韓氏)는 통덕랑(通德郞) 석운(碩運)의 딸이자 현감(縣監) 시중(時重)의 손녀로서 부덕(婦德)을 지닌 현숙한 분인데, 명릉(明陵 숙종의 능호) 계유년(1693, 숙종 19) 11월 17일에 고을의 동쪽에 있는 용암리(龍巖里)의 사가에서 공을 낳았다.
공은 어렸을 때 총명하고 영리했으며 기억력이 뛰어나 외우기도 잘 하였는데, 7, 8세 때에는 사람들을 놀라게 하는 시구를 많이 지었다. 11세 때에 동지(冬至)에 대해서 지은 시에,
북두 자루가 자방(子方)에 돌아오자 / 斗柄初回壬癸間
하늘의 양기가 땅 속에서 자라나네 / 天陽一氣地中生
하니, 노정공이 기이하게 여기며 말하기를, “이 아이가 이치를 연구하는 선비가 될 것이다.” 하였고, 다른 사람들은 말하기를, “정씨(鄭氏)의 가문을 다시 일으킬 것이다.”라고 하였다. 12세 때에 경서(經書), 사서(史書)를 모두 통달하였는데, 얼마 안 되어 기이한 병에 걸려 근 10년이 지나서야 병이 약간 회복되었다. 그런데 ‘병은 조금 나았을 때 더해진다’는 경계에 유의하여 과거(科擧)를 그만두었으며, 단지 독서하고 수양하는 데에만 힘쓰면서 번화한 세상의 명리(名利)와 부귀에 대해서는 아예 관심도 갖지 않았다.
성품이 효성스럽고 우애가 지극하여 부모의 뜻을 받들어 어기지 않았고, 장사 지내고 제사 지내는 데는 모두 예절대로 하였다. 임자년(1732, 영조 8)에 노정공이 관찰사(觀察使)에게 미움을 받아 체포되어 달성(達城)의 관저에서 죽었는데, 공은 애통한 심정이 너무도 깊어 종신토록 달성 땅을 밟지 않았다. 먼 곳에 시집간 누이가 있었는데 차마 오래 떨어져 있지 못하여 자주 찾아가 보는 일을 늙을 때까지 그만두지 않았으며, 서제(庶弟)도 사랑하여 어루만지기를 친아우처럼 하였다.
예법으로 가정을 다스렸으므로 집안이 엄숙하여 내외의 분별과 장유(長幼)의 질서가 엄격하였고, 여러 자손들을 옳은 도리로써 가르치고 조금도 너그럽게 용서하는 기색을 보이지 아니하였기에 모두가 가르침을 따르고 잘못을 저지르지 않았다. 그리하여 고을에서 자제를 가르치는 사람들은 모두 공의 집안을 모범으로 삼았다.
사람을 접대할 적에는 너그럽고 화평하게 대하고 진심을 환히 내보였으므로 찾아오는 손님과 벗들이 걸핏하면 백여 명이나 되었는데, 만나는 사람마다 친절하게 접대하여 그들의 환심을 모두 샀다. 그리고 이 때 당론(黨論)이 유행하여 사람들이 각자 편견을 가졌지만 공은 모두 의리에 따라 절충하여 말하고 자신의 호오(好惡)에 따라 어느 한쪽을 비판하거나 편들지 않았으며, 사람들의 과오를 말한 적이 없었으므로 이 때문에 사람들이 모두 공을 사랑하고 존경하였다. 그리고 곤궁한 사람을 구제해 주는 경우에는 인정과 의리가 모두 극진하였다. 취할 만한 한 가지 재주를 지니고 있으면서도 스스로 생활하지 못하는 사람은 데려다 기르기도 하고 지도하여 성취시키기도 하였는데, 그러한 일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이전에 외가댁의 눈먼 종이 먼 길에 얻어먹으면서 찾아왔기에 공이 가엾게 여기고 점치는 법을 가르쳐 주어 그로 하여금 점을 쳐 스스로 생활할 수 있게 하였고, 자신의 어린 종이 실명하였을 적에도 역시 그에게 점치는 법을 가르쳐 주었다. 남을 구제하는 인자한 마음은 천시하는 사람도 버리지 않았으니, 그것이 바로 군자의 마음가짐인 것이다.
공은 본성이 청렴 결백하여 손으로는 돈을 만지지 않고 입으로는 재물을 말하지 아니하면서 늘 《맹자(孟子)》의 “불의(不義)의 재물은 하찮은 물건도 갖지 않는다.”는 뜻을 지녔다. 함안(咸安)에 있는 큰 사찰(寺刹)은 바로 사자(士子)들이 학업을 공부하는 곳이었다. 그 절의 중들을 통영(統營)에 역부(役夫)로 소속시키려 하자 중들이 매우 두려워한 나머지 공이 통제사(統制使)와 친밀하다는 말을 듣고 공에게 한 번 말해주기를 요청하였고, 그 결과 그 일이 잘 해결되었다. 이에 중들이 공의 주선을 은혜롭게 여겨 1백 꿰미의 돈을 가져와 사례하였는데, 공은 웃으며 되돌려 보냈으며, 이후로 여러 아들에게 다시 그 절에 가서 공부하지 말라고 경계하였다. 그리고 일찍이 말을 사서 수년 동안 기르며 타다가 가족이 다시 본전을 받고 판 적이 있었는데, 공이 그 일을 알고 가족에게 말하기를, “수년 동안 타고 다니다가 어떻게 본전을 받고 팔 수 있겠는가.” 하고는, 말을 산 사람을 뒤쫓아가 다시 값을 깎아 차액을 돌려주자 그 사람은 놀라 감사해하며 돌아갔다. 사람들이 이 일을 정도에 지나친 처사라고 하니, 공이 이르기를, “당신들은 비록 정도에 지나친 일이라고 말하지만, 이렇게 하지 않으면 나의 마음에 불안하다.” 하였다.
공이 평소에 좋아한 것은 단지 서적(書籍)뿐이었는데, 어떤 사람이 서책을 가지고 있다는 말을 들으면 사서 간직하기도 하고 빌려서 베껴 놓기도 하였으므로 장서(藏書)가 수천 권이 되었다. 그리고 처가댁에서 서책을 많이 소장하고 있었는데, 끝내 한 번도 빌려오지 않으면서 여러 아들들에게 말하기를, “처가댁은 내가 혐의를 피해야 할 대상이다.”라고 하였다. 노정공이 본시 글씨를 잘 썼는데, 일찍이 어떤 사람에게서 조송설(趙松雪 조맹부(趙孟頫)의 호)의 서첩(書帖)을 빌려와 미쳐 돌려주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고 서첩의 주인도 자손이 없이 죽었다. 이에 공은 그에게 촌수가 먼 일가가 있다는 말을 듣고 그 서첩을 소매 속에 넣어가지고 가서 돌려주었다. 그리고 집에 있는 한호(韓濩)의 서첩을 매제(妹弟)인 송군(宋君)이 매우 좋아하였으므로 공이 주려고 마음먹은 지 오래였는데, 송군이 죽자 공이 제문에 그 뜻을 말하고 주었다. 이러한 일들은 모두가 사소한 것이지만 사람마다 할 수 있는 바가 아니다.
공은 병을 요양하며 한가롭게 지낼 때에도 매우 아픈 때가 아니면 서책을 하루도 손에서 놓은 적이 없었다. 사람들과 담론할 적에는 고금의 일을 끌어대어 말하고 경서(經書), 사서(史書)의 내용을 논하였으며, 심지어 백가(百家), 패사(稗史), 잡설(雜說)까지도 모두 알았다. 사람들과 이야기할 경우에는 말이 진지하여 끊이지 않았으므로, 문학의 선비들 가운데 따르며 교유하는 사람이 많아 방문 밖에는 신발이 늘 가득하였다. 그리고 과거(科擧)의 문장에는 종사하지 않았지만 박람하여 쌓은 학식이 많았으므로 시문(詩文)을 지으면 문리가 정세하였으니, 학사(學士) 오원(吳瑗)으로부터 칭찬을 받았는데, 오원은 바로 공의 외척으로서 친분이 두터운 사이였다. 공은 또 인륜에 성실하여 처신이 엄정하였으니, 어렸을 때 정자(程子)가 주공숙(周恭叔)에게 “짐승보다도 못하다.”라고 책망한 대목을 읽고는 그 말을 종신토록 마음에 지녔으며 아내 이외의 여색을 돌아보지 아니하여 마치 처자처럼 몸을 단속하였다. 그의 청백하고 고상한 지조와 화평하고 인자한 마음은 타고난 성품이 그러한 것이었지만 모두 독서하여 실천한 데서 나온 것이었다. 공은 비록 학자라고 자처하지는 않았지만 그 행실의 고상하기란 당대의 학자라 일컬어지는 사람들도 흡사하게 흉내낼 수 없는 것이었다. 그리고 공이 널리 대중을 사랑했고 교유하는 사람도 많았지만 마음에 서로 허여한 친구는 몇 사람에 불과하였는데, 우리 선군(先君)이 그러한 친구 중의 한 분이시다.
공의 병이 위독할 때 자손들이 곁에 둘러앉아 울자, 공이 말리며 말하기를,
“그러지 말라. 내가 계유년에 태어났는데, 오늘이 있을 것을 알았다. 사람의 생사는 일정한 이치이니 비통하게 여길 것이 없다.”
하며 전혀 죽음을 슬퍼하는 뜻이 없었다. 정침(正寢)에서 고종(考終)하였는데 바로 정해년(1767, 영조 4) 4월 7일이었고, 향년은 75세였다. 부음(訃音)이 알려지자 멀고 가까운 곳의 사람들이 모두 애석하게 여기며 말하기를, “남주(南州)의 고사(高士)가 세상을 떠났다.”고 하였고, 장사 지내는 날에는 여러 고을의 사람들이 모두 왔으며, 그 해 7월 어느 갑일(甲日)에 영봉산(靈鳳山) 묘좌(卯坐)의 자리에 장사 지냈다.
유고(遺稿) 2권이 있고, 또 시송(詩誦) 2편이 있다. 임자년(1732, 영조 8)에 걱정스러운 상황에서도 자신의 정력을 시험해 보고자 하여 고금의 시율(詩律)을 암기하면서 중간에 자신의 논평을 가하였고 만년에 또 추가하여 완성하였으니, 전후 각 1편이 모두 외우고 기억하여서 기록한 것이다. 여러 아들들이 그 시송을 가져와 본문(本文)과 대조해 본 결과 한 자도 틀린 곳이 없었으니, 공의 총명이 다른 사람들보다 뛰어난 것이 이러하였다.
배위 안동권씨(安東權氏)는 통덕랑(通德郞) 수창(壽昌)의 딸이자 문관 목사[文牧使] 우형(宇亨)의 손녀인데, 현숙하고 화순하여 시가에 들어와 도덕에 위배되는 일이 없었다. 시부모를 섬기고 부군을 공경하며 자녀를 가르치고 비복을 거느리는 거조가 모두 법도에 맞았고, 인자한 은택이 이웃 사람들에게 미쳤으므로, 지금까지 사람들이 칭송하고 있다. 공의 가정은 본시 풍요(豊饒)로웠는데 중년에 재산이 탕진되었다. 그러나 부인이 어려운 살림살이를 맡아 애써 모으고 빈틈없이 꾸렸으므로 공으로 하여금 집안 살림에 대한 걱정이 없게 하였고 공도 생활의 경비에 대해서 물은 적이 없었으니, 사람들이 말하기를, “공이 훌륭한 인물이 된 데에는 부인의 내조가 한 몫을 했다.”고 하였다. 부인은 갑술년(1694, 숙종 20) 12월 28일에 태어나 병자년(1756, 영조 32) 1월 27일에 별세하였다. 처음에 영봉산(靈鳳山) 을좌(乙坐)의 자리에 임시로 장사를 지냈는데 병신년(1776,영조52) 2월에 자리가 좋지 않다 하여 고을의 서쪽에 있는 마동(馬洞)의 경좌(庚坐)의 자리에 이장하였다.
7남 2녀를 낳았는데, 장남 단(壇)은 일찍 죽었고, 둘째 육(堉)은 학문과 덕행이 있어 사우(士友)들의 추대를 받았는데 공이 죽고 나서 너무 지나치게 슬퍼한 나머지 건강을 상하여 상복을 벗자마자 죽었다. 셋째는 훈(壎)이고, 넷째 근(墐)은 숙부 상림(相臨)의 양자로 갔고, 다섯째는 기(垍)이다. 장녀는 박인혁(朴仁赫)에게 출가하였고, 여섯째 아들은 전(㙉)이며, 차녀는 강간(姜稈)에게 출가하였고, 일곱째 아들은 식(埴)이다.
단은 분성(盆城) 허구(許榘)의 딸에게 장가들어 1남 현의(鉉毅)를 낳았다. 육은 한산(韓山) 이맹화(李孟和)의 딸에게 장가들어 4남 1녀를 낳았는데 아들은 진의(鎭毅), 탁의(鐸毅), 강의(鋼毅), 찬의(鑽毅)이고 사위는 박지원(朴之源)이다. 훈은 진양(晉陽) 하한장(河漢章)의 딸에게 장가들어 3남 1녀를 낳았는데 아들은 명의(銘毅), 굉의(鈎毅), 황의(鎤毅)이고 사위는 권무중(權懋中)이며, 측실(側室)이 2남 1녀를 낳았는데 사위는 박우상(朴羽祥)이고 두 아들은 어리다. 근은 초취가 함양(咸陽) 여선함(呂善涵)의 딸인데 아들을 두지 못했고, 재취는 완산(完山) 최보천(崔普天)의 딸로 1녀를 두었으나 아직 출가하지 않았다. 형의 아들 탁의를 양자로 삼았는데 일찍 죽었고, 서자(庶子), 서녀(庶女)가 두 명씩인데 아들은 약의(鑰毅), 경의(鏡毅)이고 사위는 이단중(李端中), 손은역(孫恩繹)이다. 기는 함안(咸安) 조희팽(趙希彭)의 딸에게 장가들어 2남 2녀를 낳았는데 아들 한 명은 감의(鑑毅)이고 한 명은 어리며, 사위는 권경(權燝), 하석규(河錫圭)이다. 박인혁은 2남 4녀를 낳았는데 아들은 형천(馨天)이고 사위는 이종운(李宗運), 권태중(權泰中)이며 나머지 아들과 딸은 아직 어리고 출가하지 못했다. 전은 진양(晉陽) 강필주(姜弼周)의 딸에게 장가들었는데 아들을 두지 못하여 형의 아들 황의를 양자로 삼았다. 강간은 1남 3녀를 낳았는데 아들은 사현(師顯)이고 사위는 윤석보(尹碩輔)이며, 두 딸은 어리다. 식은 진양 하덕원(河德遠)의 딸에게 장가들어 3남 1녀를 낳았는데 아들은 연의(鍊毅)이고 나머지는 모두 어리다. 공의 친손, 외손, 증손, 현손이 80여 명이다.
나는 늘 기억나는데, 어렸을 때 보니 노정공(露頂公)과 우리 조부님께서 서로 만나시면 기뻐하셨고 공과 우리 선군께서 서로 만나시면 기뻐하셨다. 서로 만났을 때 웃는 모습이 화기가 애애하였고 성의가 서로 미더워 어느 분이 주인이고 어느 분이 손님인지 알 수 없었다. 그런데 지금 공의 넷째 아들 근(墐)이 가장(家狀)을 지어서 그의 아우 기(垍)에게 주고는 천리의 먼 길을 달려와 나에게 이르게 하기를,
“우리 집의 일이 바로 공의 집의 일이니, 공께서 우리 양가의 교분을 생각하신다면 선친의 덕행을 기록하는 글은 공이 아니고 누가 지을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근, 기씨 형제와 나는 선대의 세의(世誼)를 대대로 지키며 사귀어왔으므로 서로의 마음은 천리를 사이에 두고 멀리 떨어져 있어도 환히 통하는 사이이니, 당대에 문장을 잘하는 훌륭한 사람이 없지 않은데도 기필코 나에게 행장의 글을 받으려는 것은 그 뜻의 소재가 있는 것이다. 따라서 내가 비록 몽매하고 고루하여 문장을 잘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지금 80세의 나이에 재주가 줄고 생각이 사라져서 실로 이 일을 감당할 수 없게 되었지만 의리상으로는 감히 사양할 수 없었기에 이상과 같이 삼가 서술하였다.



 

 黎湖先生文集卷之二十四
 墓碣銘
成均生貟金公墓碣銘 a_196_500a


古今稱人之孝者多以居喪爲言。非謂養生之不爲孝也。盖以喪爲人道之終。必於此而自盡。視養生爲尤孝故也。且夫自親之始死。至於練祥二十五月之間。聖人必就夫飮食哭泣衰絰而制爲許多禮節。若是者。無非因其變而順之也。是雖修飭之君子。其哀情不能不視初漸輕。有能一於哀慕。其心未始有老少之異。如故成均生貟金公者。則其爲孝也可不謂至矣乎。盖公八歲而孤。血泣哀毁。素食能經年。侍母夫人疾。晝夜扶護。甞糞驗甜苦。禱北辰祈代。有苦庾196_500b黔婁之爲者。一日。母夫人氣塞。公如不欲生。亟割手指以血進。卽有奇效。頓然回甦。夜纔艾而旋欲。雖再進血而竟不幸。公呼天痛擗。屢絶屢甦。日噉溢糜。不甞塩豉葅蔬之屬。氣息綿綴。不能拜起。以伯氏參奉公聲大慟哭懇諭之故。小祥後始進䟽食。哭泣愈哀。若不保朝夕。而卒能免於滅性。人以爲得神助。雖除喪而孺慕內篤。拜墓必哭盡哀。讀書至說孝子追慕處。未嘗不流涕。與公言者不忍及於父母。恐聞之而悲慟也。以二親筆迹及手澤所存。藏之篋衍。以爲時省展痛之地。及歿而命並殉于壙。嗚呼。子之孝於父196_500c母。天性固爲最切。而然而允蹈者則亦鮮矣。若公幼能致哀。老益追慕。直至臨死之日而猶不忘乎孝。豈非發於誠心自然而不能已者耶。其居喪與喪畢而終身慕如此。則前乎此而事生之孝爲可知也矣。公壽五十六而以肅廟己卯二月二十日歿。歿而洞人上公行誼於朝。命贈公司憲府持平。公諱聲玉。字集卿。氏出安山。上祖高麗左僕射肯弼。入我朝有諱定卿。吏曹典書。蓮城君。生諱漑。左贊成。謚平胡。公之六世祖也。高祖諱琳。郡守。曾祖諱彦樑。副護軍。祖諱台祿。贈司僕寺正。考諱讚。以行誼稱。贈左196_500d承旨。妣安東金氏。奉訓郞鼎三之女。直提學塡之後也。公制行高。燕居無惰容。雖盛暑不脫行縢。熟於吉凶。綿蕞食卒。應之無錯。事兄與嫂如父母。撫諸姪如子。睦親族信朋友。此又見孝之推也。公弱年抱疾。不能課學。忽奮發自力。晩中辛未生員。人惜其屈於大科。甞隨李公世弼訟宋文正寃。每以不得同李公竄逐爲恨。娵恭人李氏。國姓。生貟昌徵女。定宗大王第六男從生之後也。事姑甚孝。後公一年以毁終。宗黨頌其仁。久而有餘思。祔公葬於永平淸溪山負丁之原。擧二男。錫垕生貟。錫奎。一女婿。士人崔普命196_501a錫垕一男相一。側出四女幼。錫奎三男。相德進士,相澤,相泌。三女。長適鄭百曾。相一一男。相德一男。並幼。崔普命未育。有所後子致雲。公歿今四十有三年而相德謁余爲墓銘。銘曰。
秉彛則一。民不興行。若公然後。不愧孝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