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최씨 금석문 등/문정공 지천 최명길 비문(방조)

영의정 완성부원군(完城府院君) 최공(崔公) 신도비명

아베베1 2012. 8. 7. 22:43

 

 

 

서계집 제11권

 비명(碑銘) 5수(五首)
영의정 완성부원군(完城府院君) 최공(崔公) 신도비명


재주가 한 시대의 위망(危亡)의 화(禍)를 구제할 만하고 식견이 의심스런 중론(衆論)의 미혹을 깨뜨릴 수 있으며 충성은 사직의 계책을 위하여 일신과 집안을 돌아보지 않고 용기는 호랑이의 발톱과 이빨을 어루만지면서도 두려운 기색이 없는 것, 이는 모두 세상에서 지극히 어려운 것으로서 군자가 깊이 허여하는 바이다. 상국(相國) 문충공(文忠公) 같은 분은 간직한 지조와 세운 공업이 어찌 전후에 밝게 빛나고 고금에 우뚝하지 않겠는가. 비록 그 국사를 위한 고심(苦心)과 임금을 위한 혈성(血誠)은 신명(神明)에게 질정할 만했으나 독자적인 견해는 중의(衆議)에 부합하지 못하였고 심오한 의논은 세속과 화합하지 못하였다. 그 때문에 헐뜯는 논의가 사방에서 일어나 거의 한 세대 동안 매몰되어 있었으나 하늘이 정한 이치는 결국에는 반드시 이기고 사람의 마음은 속일 수 없는 법이니, 채 백 년이 못 되어 선생과 장자(長者) 가운데 공과 동시대 사람으로서 공을 칭찬하는 자들의 말이 차츰 나오고 학사(學士)와 대부(大夫) 가운데 공보다 후대에 나온 사람으로서 공을 이야기하는 자들의 논의가 점차 공평해졌다. 이에 이르렀으니 공이 평소 스스로 의리에 편하게 여겼던 바에 대해서 천하와 후세에 할 말이 있어 부끄럽지 않을 것이다.
공은 휘는 명길(鳴吉), 자는 자겸(子謙), 성은 최씨(崔氏), 본관은 전주(全州)이니, 고려로부터 본조(本朝)에 이르기까지 명망과 덕행이 있는 분이 계속 이어졌다. 증조 휘 업(嶪)은 빙고 별제(氷庫別提)를 지냈고 이조 판서에 추증되었다. 조부 휘 수준(秀俊)은 벼슬하지 않았고 좌찬성에 추증되었다. 부친 휘 기남(起南)은 영흥 부사(永興府使)를 지냈고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3대가 추증된 것은 모두 공이 존귀해졌기 때문이다. 의정공(議政公)은 호가 만옹(晩翁)이니, 젊어서 우계(牛溪 성혼(成渾))의 문하에서 공부하였다. 문장과 행실로 이름이 드러났으나 세상의 배척을 받아 높은 벼슬을 하지 못하였다. 모친 전주 유씨(全州柳氏)는 관찰사 영립(永立)의 따님이다.
공은 선조(宣祖) 19년 병술년(1586)에 태어났다. 을사년(1605, 선조38)에 생원진사시(生員進士試)에 장원하였고 이어 문과에 급제하였다. 신 현헌(申玄軒 신흠(申欽))이 어떤 이에게 말하기를, “자겸이 비록 병약하나 끝내는 반드시 이름을 떨치는 인물이 될 것이다.” 하였다. 승문원에 분관(分館)되었다.
기유년(1609, 광해군1)에 사관(史館)에 천거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전적에 서임(敍任)되었고 수년 동안에 감찰(監察)과 제조(諸曹)의 낭관을 두루 맡았으나 일에 연루되어 삭출(削黜)되었다.
병진년(1616)에 모친상을 당하였다.
기미년(1619)에 부친상을 당하였다.
광해(光海)가 도리를 잃어 영창(永昌)을 학살하고 대비(大妃)를 유폐(幽閉)하자 공이 제공(諸公)과 더불어 비밀히 논의하여 중대한 계책을 세웠다. 제공이 사저(私邸)에서 인조(仁祖)를 뵙고자 하였는데 공만 홀로 달가워하지 않으면서 말하기를, “사사로이 뵙는 의리는 없다.” 하였다. 한참이 지나도록 논의가 제때에 결행되지 못하니, 공이 “시일을 오래 끌면 대사를 그르치기 십상이다.” 하고는 마침내 스스로 거사할 날짜를 잡고 계책을 정해 계해년(1623, 인조1) 3월 계묘일에 인조를 받들어 대통(大統)을 잇게 하고 대비를 서궁(西宮)에서 맞이하였다. 먼저 이조 좌랑에 제수되었고 정랑으로 천전되었다. 여름에 참의에 발탁되었다. 이해 겨울에 정사 공신(靖社功臣) 1등(等)에 책록되고 자급이 올랐으며 완성군(完城君)에 봉해지고 이조 참판이 되었다.
갑자년(1624) 봄에 역적 이괄(李适)이 반란을 일으켜 대가(大駕)가 남쪽으로 파천하자 공이 총독 부사(摠督副使)가 되어 장 원수(張元帥 장만(張晩))와 만나 안령(鞍嶺)에서 역적을 격파하였다.
을축년(1625) 봄에 상차하여 관제(官制)를 논하여 의당 옛 제도를 차츰 회복하여 다스림의 근본을 바르게 해야 한다고 하였으나 시행되지 못하였다. 부제학이 되었고 대사헌으로 이배되었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부제학에 배수되어 12가지 일을 차자로 진달하였는데 모두 시폐(時弊)에 꼭 맞는 것이었다.
상이 처음 대위(大位)에 올랐을 때 원종(元宗)을 추존하여 대원군이라 하고 인헌왕후(仁獻王后)를 높여 계운궁(啓運宮)이라 하였다. 병인년(1626, 인조4)에 인헌왕후가 훙서(薨逝)하매 상이 삼년복을 입고자 하였는데 조정의 논의가 “남의 후사(後嗣)가 되면 참최(斬衰)를 두 번 입지 않는다.”라는 말을 인용하면서 합사(合辭)하여 쟁론하였다. 그러자 상이 또 장기(杖期)의 복을 입고자 하였는데 제신(諸臣)이 또 부장기(不杖期)로 강복(降服)하고 상의 아우 능원군(綾原君)을 상주(喪主)로 삼을 것을 극력 청하였다. 그러나 공은 홀로 말하기를, “아비가 사(士)이고 아들이 천자(天子)이거나 제후(諸侯)이면 사의 예로써 장사 지내고 천자와 제후의 예로써 제사 지내는 법이니, 오늘날의 예는 오직 이것만이 확실한 전거가 된다.” 하였다. 이윽고 제공의 논의가 분분하여 예법을 정하지 못하자 공이 또 만여 자의 차자를 올려 강복과 입후(立後)의 잘못을 극론하여 아뢰기를, “전하는 승중(承重)한 것이지 출계(出繼)한 것이 아닙니다. 곧바로 조부의 대통을 이었는데 남의 후사가 된 것으로 간주하고 임금의 부모인데 방친(旁親)으로 대한다면 그 폐단이 장차 예제(禮制)를 무너뜨리고 대륜(大倫)을 멸절시키는 데에 이를 것이니,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고 이어 별묘(別廟)를 세워 몸소 제사를 주관할 것을 청하였는데, 거듭 조정의 의논에 거슬려 탄핵을 받고 해직되었다.
정묘년(1627) 봄에 북쪽 오랑캐의 군대가 패수(浿水)를 건너 내달아 나라 안 깊숙한 곳까지 쳐들어오니, 조야가 두려워하였다. 적의 군사가 평양(平壤)에 이르러서는 우리에게 글을 보내 강화를 요구하였다. 공이 말하기를, “적이 한창 기세가 올랐으니, 부드러운 말로 답하여 그 예봉을 늦추어야 합니다.” 하니, 제공의 뜻이 일치하여 장 신풍(張新豐 장유(張維))으로 하여금 글을 써서 적들의 뜻에 답하게 하였으나 적들은 진병(進兵)을 그만두지 않았다. 상이 도성을 나가 강도(江都)로 행행하였는데 오랑캐의 사신이 재차 강화 문제로 와서 상을 뵙기를 청하였다. 공이 다시 말하기를, “교전이 있기 전에는 사신이 그 사이에서 왕래하는 법이니, 들어줄 만합니다.” 하였는데 조정이 따랐다. 오랑캐의 군대가 평산(平山)에 이르러 화약이 비로소 맺어지니, 이에 적의 군대가 물러나 더 이상 진격하지 않았다. 당시 적병은 가까이 닥쳤는데 행재소(行在所)의 군대는 단약(單弱)하여 상하가 위태롭게 여기고 두려워하였다. 계책은 오직 화약을 맺는 것뿐이었지만 감히 말을 꺼내지 못하였는데 적이 물러간 뒤에는 또 화약을 맺은 것을 분분하게 공의 탓으로 돌렸다. 언자(言者)가 교대로 소장을 올려 벼슬을 떼고 찬축하기를 청하였으나 상이 허락하지 않았다. 공은 조정에 있는 것이 편치 않아 오래도록 강가에 거처하였다. 가을에 장릉(章陵)을 옮길 때에 상구(喪柩)가 장차 도성을 지나가게 되었다. 중의(衆議)가 사친(私親)의 상구가 도성을 통과해서는 안 된다고 하여 백성을 동원하여 도성 동쪽의 비탈에 길을 닦고자 하였는데 공이 홀로 쟁변하여 불가하다고 하였고 대신 또한 잘못임을 깨달아 마침내 중지하게 되었다. 계운궁(啓運宮)의 담제(禫祭)가 끝나 합부(合祔)하려고 하였다. 공이 다시 별도로 묘(廟)를 세우고, 예(禰)라 칭하고, 악장(樂章)을 만들 것을 청하였다. 그러나 논자들의 배척을 받아 경기도 관찰사로 나갈 것을 청하였다.
기사년(1629, 인조7)에 이르러 선후배들 간의 논의가 일치하지 못하여 노서(老西)와 소서(少西)의 색목(色目)이 있게 되었다. 승평부원군(昇平府院君) 김류(金瑬)가 상에게 참소하여 명류(名流) 5, 6인을 붕당으로 지목하니, 상이 매우 노하여 세당(世堂)의 선공(先公) 및 유공 백증(兪公伯曾), 나공 만갑(羅公萬甲)을 귀양 보내고 장공 유(張公維)도 나주 목사(羅州牧使)로 보외(補外)하였다. 공이 선후배들이 서로 책망한 것이지 붕당을 지은 것은 아니라고 극력 진달하니, 상이 느껴 깨닫는 바가 있어 세 학사가 얼마 지나지 않아 모두 귀양에서 풀려 돌아오고 장공 또한 부름을 받았다. 당시 공이 군적(軍籍)의 정리를 맡아 이를 완성하여 자급이 올라갔다.
이듬해에 우참찬에 배수되었다. 모문룡(毛文龍)이 죽자 진계성(陳繼盛)이 대신 그 무리를 거느렸는데 유흥치(劉興治)가 또 진계성을 죽이고 대신 거느렸다. 우리나라에서 군사를 일으켜 그 죄를 묻고자 하니, 공이 말하기를, “가도(椵島)의 무리가 비록 굶주리고 지쳤으나 그래도 그 무리가 수만에 달합니다. 곤궁에 처한 짐승도 오히려 사람을 상하게 할 수 있는데 하물며 수만의 무리가 반드시 죽겠다는 마음을 품고 험준한 지형에 의지하고 있는 경우이겠습니까. 그런데 지금 마침내 외로운 섬을 포위하여 시일을 끌다가 식량이 고갈된다면, 싸우자니 어렵고 그만두자니 위엄이 손상될 것입니다. 군사를 일으켜 바다를 건너가 농사철을 헤아리지 않고 죽기를 각오한 도적과 대치하는 것은 좋은 계책이 아닙니다.” 하였는데, 후에 과연 군사를 발동하지 않았다.
신미년(1631, 인조9) 봄에 여러 공신들을 춘휘당(春暉堂)으로 불렀는데 세자 및 두 왕자가 모두 시립하였다. 상이 친히 술잔을 들어 술을 권하고 또 공이 새로 득남한 것을 치하하니, 세상 사람들이 영광스러운 일로 여겼다. 여름에 상이 장릉을 추숭하고자 하였는데 조정의 논의가 불가하다고 다투었다. 그러자 또 천자에게 주문(奏聞)하고자 하였는데 또 불가하다고 하였다. 5월에 특별히 공에게 부제학을 제수하니, 이는 상이 공의 지론이 조정의 신하들과는 다소 다르다고 여겨 도움을 받고자 해서였다. 공이 또 차자를 올려 예제에 대한 조정 신하들의 논의가 잘못되었음을 진달하고 거듭 별묘(別廟)를 세울 것을 주장하여 아뢰기를, “추숭의 거조는 예경(禮經)에 분명한 글이 없고 의리에 맞게 예제를 바꾸는 일에 관계됩니다. 조정의 논의가 같지 않은데 중국 조정에 주청(奏請)부터 먼저 하고자 하니, 조정이 성상의 뜻을 받들어 따르지 않는 것은 당연합니다. 예제를 논의한 지 지금 9년째입니다. 그간 노사숙유(老師宿儒)가 두루 전거를 찾고 널리 예문을 인용하였으나 모두 오늘날에 맞는 전거는 아니었습니다. 오직 사(士)의 예(禮)로 장사 지내고 제후의 예로 제사 지내는 것만이 가장 확실한 전거가 됩니다. 신이 쟁집(爭執)하는 것은 다만 이것뿐입니다.” 하였다.
임신년(1632)에 예조 판서에 배수되고 예문관 제학을 겸하였다. 상이 하교하기를, “성인의 효도는 어버이를 높이는 것을 으뜸으로 여기니, 아버지의 사당을 오래도록 누항(陋巷)에 둘 수 없고 아버지의 신위(神位)를 오랫동안 비워둘 수 없다.” 하고 예관(禮官)으로 하여금 속히 논의하게 하였다. 이에 공이 또 광무제(光武帝)의 고사를 따라 별묘를 세우기를 청하니, 상이 엄히 책망하였다. 공의 소청이 오직 별묘를 세우는 데에 있고, 낮추어 강복(降服)하는 것도 높이어 추숭하는 것도 모두 공의 뜻이 아니었기 때문에 처음에는 조정의 논의를 거슬렀고 끝내는 상의 책망을 받은 것이다. 겨울에 이조 판서에 배수되었고 자급이 숭정대부로 올랐다. 양관(兩館)의 대제학(大提學)에 제수되고 또 체찰 부사(體察副使)를 겸하였다. 공이 전후로 전조를 맡고 있는 동안에 붕당을 깨뜨리고 공도(公道)를 넓히며 어질고 재주 있는 자를 나아오게 하고 무능하고 나약한 자를 퇴출하여 제대로 된 사람을 선발하여 등용하니, 세상 사람들이 중흥(中興) 이래로 인사의 공정함은 공이 으뜸이라고 칭송하였다.
을해년(1635, 인조13) 봄에 전장(銓長)에서 해면(解免)되었다. 여름에 호조 판서가 되었다.
병자년(1636) 봄에 질병으로 사면하였다. 여름에 병조 판서가 되었으나 또 병으로 사직하였다. 가을에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이 되었다. 이해 봄에 청나라가 비로소 칭제(稱帝)하고 사신을 보내왔다. 조정의 논의는 그 글을 받아들이지 말고 단지 구두로만 거절하고자 하였다. 공이 말하기를, “저들이 큰 사막 지대를 차지하고 있으면서 제재를 받을 대상이 없으므로 제멋대로 칭제하였으니, 누가 다시 금제(禁制)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도 기어이 우리한테서 구실을 찾고자 하니, 그 속셈을 알기 어렵습니다. 만약 단지 구두로만 거절하게 되면 일이 불분명해져 증거가 없게 됩니다. 만일 저들이 도리어 그 말을 뒤집어 우리를 무함한다면 우리는 무엇으로써 스스로 천하에 해명하겠습니까. 지금은 의당 답서 하나를 만들어 대호(大號)를 참칭해서는 안 되고 신절(臣節)을 바꿀 수 없음을 말하고, 이어 오랑캐의 글과 우리의 답서를 황조(皇朝)에 보고하는 한편으로 군사를 신칙하여 변란에 대비해야 합니다. 저들은 춘신사(春信使)와 조제(弔祭)를 명분으로 내세울 뿐입니다. 사리에 어긋난 것은 팔고산(八固山) 및 몽고(蒙古) 왕자(王子)의 글이니, 예에 관한 요구에는 대답하고 사리에 어긋난 것에 대해서는 거절하는 것이 마땅한 계책입니다. 지금은 시기의 차이만 있을 뿐 어차피 병화(兵禍)를 입는 것은 매일반이니, 공연히 불분명하게 처리하여 우리를 이용하게 하거나 경솔하게 거절하여 병화를 재촉해서는 안 됩니다.” 하였는데, 오랑캐의 사신이 과연 글을 받지 않은 것 때문에 노하여 지레 돌아갔다. 공이 반드시 침입이 있을 것을 알고 상을 뵙고 아뢰기를, “오랑캐의 사신이 곧장 돌아갔으니, 맹약을 어기는 것은 필연적인 형세입니다. 일찌감치 전쟁에 대비하소서.” 하였다.
당시 조정의 논의가 분분하여 척화(斥和)만 주장했지 적을 막을 계책이 없었다. 공이 홀로 이를 깊이 염려하여 상차하기를, “요즈음 대간(臺諫)은 모두 척화를 주장하나 묘당에는 정해진 계책이 없습니다. 대간의 말을 받아들여 결전하지도 못하고, 또 신의 말을 받아들여 재앙을 늦추려고도 않으니, 노기(虜騎)가 휘몰아쳐 와 생령(生靈)이 어육(魚肉)이 되고 종사가 파천(播遷)하게 된다면 그 허물은 장차 누가 떠맡겠습니까. 신은 원하건대, 체신(體臣)과 수신(帥臣)이 모두 관서(關西)에 개부(開府)하고 제장(諸將)과 약속하여 오직 전진만 있고 후퇴는 없게 하는 한편으로, 심양(瀋陽)에 글을 보내 대의(大義)를 모두 개진하고 이어 오랑캐의 정황을 탐지하여, 저들이 다른 생각을 품지 않았다면 우선은 형제지약(兄弟之約)을 지키면서 내부적으로 정사를 닦아 후일을 도모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만일 그것이 아니라면 용만(龍灣)을 굳게 지키면서 한바탕 결전해야 하니, 비록 이것이 만전지책은 되지 못하더라도 속수무책으로 망하기를 기다리는 것보다는 낫습니다. 그런데 나아가 싸우자는 말을 하자니 의구심이 없지 않고 화친의 주장을 펴자니 또 비방이 두려워 내내 미적거리고 있습니다. 이러다가 강물이 얼게 되면 화가 목전에 닥칠 것이니, 이른바 ‘너희들이 논의를 정하는 사이에 나는 이미 강을 건넌다.’라는 말과 불행히도 가깝습니다.” 하였다. 공이 창졸간에 적이 도발해 오면 반드시 멸망의 근심이 있을 줄 알고 매양 부드러운 말로 답하여 병화를 늦추는 동안 싸울 계책을 세울 시간을 벌고자 하여 중의(衆議)를 무릅쓰고 누차 계책을 진달하였으나, 화의를 주장한다고 언관이 공을 공격하였다.
공이 또 말하기를, “석진(石晉) 때에 경연광(景延廣)이 거란(契丹)의 분노를 자극하자 상유한(桑維翰)이 공손한 말로 사죄하기를 청하였으나 출제(出帝)가 듣지 않았습니다. 그 뒤에 스스로 보전할 수가 없어 비로소 다시 칭신(稱臣)하기를 청하였으나 거란이 허락하지 않아 진나라가 드디어 멸망하였습니다. 주자(朱子)가 《통감강목(通鑑綱目)》에서 경연광을 폄하하고, 호안국(胡安國)이 경연광을 비난한 것은 약속과 우호를 가볍게 배반하고 스스로 흔단(釁端)을 만들어 그 몸을 망치고 나아가서는 그 임금을 망하게 했기 때문입니다. 신하가 국가의 계책을 세우면서 먼 앞일까지 내다보지 못해 멸망에 이르게 했다면 그 일이 비록 바르더라도 죄를 면할 수 없습니다. 선조 때에 천조(天朝)의 장수들이 싸우는 것이 싫어 화의할 계획이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우리나라로 하여금 천조에 청하게 하였는데 성혼(成渾)이 허락할 만하다고 하였습니다. 이정암(李廷馣)이 성혼의 뒤를 이어 주장하여 장차 죄를 입게 되었는데 성혼이 그 충성심을 가엾게 여겨 상 앞에서 신구(伸救)하니, 선조가 대로하였습니다. 이로부터 논자들의 성혼에 대한 공격이 더욱 치열하였는데 성혼이 말하기를, “한탁주(韓侂冑)가 금(金)나라를 공격한 것을 두고 선유(先儒)는 사직을 위태롭게 하였다고 책망하였고, 장 남헌(張南軒 장식(張栻)) 또한 금나라를 칠 수 없다고 말하였으니, 이는 종묘와 사직이 중하기 때문에 시세(時勢)를 살피고 역량을 헤아리는 것을 의롭게 여겼기 때문입니다.” 하였습니다. 오늘날은 석진만큼의 병력도 없는 데다가 또 북쪽 오랑캐가 조종(祖宗)의 원수도 아니니, 시비와 득실을 정하기가 어렵지 않습니다. 그런데 논의하는 자들은 “정묘화약(丁卯和約)이 진실로 해롭지는 않으나, 지금 오랑캐가 이미 대호(大號)를 참칭하였으니, 상호 사신을 왕래할 수 없다.” 하는데, 저들이 대호를 참칭하는 것은 우리가 물어야 할 바가 아닙니다. 신이 이렇듯 강화론(講和論)을 주장하는 것은 감히 시비를 돌아보지 않고 한갓 이해에 관계된 말을 하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시의(時宜)를 참작하고 지난 사적을 참작해 보건대 필연적인 형세임을 확신해서입니다. 신이 일찍이 마음속으로 ‘나라는 약하고 오랑캐는 강하니, 우선은 정묘화약을 지켜서 몇 년 동안 전쟁의 화를 늦추어 그 사이에 성을 쌓고 군량을 비축하여 변방의 수비를 더욱 굳건히 하며 군사를 갈무리해 두고 저들의 빈틈을 엿보아야 하니, 이보다 나은 계책은 없다.’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입술이 마르고 혀가 타도록 조정에서나 물러나서나 쟁변하면서 스스로 그만둘 줄 모르는 것이 어찌 다른 뜻이 있어서이겠습니까. 종사와 나라가 위태로워지는 것을 근심할 뿐, 일신의 이해를 헤아릴 겨를이 없었습니다.” 하니, 군의(群議)가 또 들고일어나 시끄럽게 공격하였다.
11월에 도로 이조 판서가 되었다. 12월에 청주(淸主)가 스스로 군사를 거느리고 우리나라를 공격하여 그 선봉이 경기(輕騎)를 휘몰아 수일 만에 서교(西郊)에 이르렀다. 14일에 상이 강도(江都)로 행행하는 길에 남문(南門)에 이르렀는데 적기(敵騎)가 길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상이 어가를 멈추고 성루(城樓)에 올라 군신(群臣)을 소집하여 계책을 물었다. 당시 사세가 급박하여 상하가 사색이 되어 무슨 계책을 내야 할지 몰랐는데 공이 나아와 아뢰기를, “일이 경각에 달려 있으니, 시간을 지체해서는 안 됩니다. 신이 단기(單騎)로 저들을 맞이하여 맹약을 저버린 것을 책망하겠습니다. 저들이 만약 우호에 뜻이 없어서 멋대로 포악을 부린다면 신은 칼날 아래에서 죽을 것이고, 만약 신을 거부하지 않아서 쌍방이 서로 만나 문답하게 된다면 그 사이에 시간을 벌 수가 있을 것입니다. 서울에서 가까운 튼튼한 성으로 남한산성만 한 곳이 없으니, 어가를 돌려 그곳으로 들어가 사태의 변화를 관망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계책이 옳다. 하지만 경이 홀로 목숨을 내놓고 호구(虎口)로 들어가 임금의 위급을 풀어 주고자 하니, 이는 고인도 어려워하던 바이다.” 하고 탄식하면서 보냈다. 공이 또 아뢰기를, “이경직(李景稷)이 강개하여 기절(氣節)이 있으니 함께 가기를 청합니다.” 하였다. 하직하고 떠날 때에 금병(禁兵) 20기를 거두어 그들로 하여금 공을 따라 성을 나가게 하였는데 따르던 기병이 모두 흩어졌다. 공이 이공(李公) 및 군교(軍校) 한 명과 더불어 급히 말을 몰아 사령(沙嶺)에 이르러 적기와 마주쳤다. 말을 멈추고 더불어 이야기하여 맹약을 무시하고 군사를 일으킨 까닭을 따지니, 적장이 다만 강화할 것인지 싸울 것인지를 일찌감치 결정하기를 청하였다. 공이 일부러 그와 함께 오래도록 수작하면서 말을 반복하였는데 해가 기울려고 하였다. 이 틈에 상이 동쪽으로 수구문(水溝門)을 나와 어가를 달려 남한산성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공이 적기와 더불어 도성으로 들어와서 적과 더불어 이야기한 바를 행재소(行在所)에 아뢰었다. 이튿날 해가 저물도록 통보를 받지 못하자 적들이 대로하여 공이 자신들을 속였다 하여 공을 해치고자 하였는데, 혹자가 불가하다고 하면서 말하기를, “강화가 이루어지기도 전에 갑자기 죽여서는 안 된다.” 하여 남한산성으로 진군하였다. 공 등이 돌아와 상을 뵈니, 상이 공의 손을 잡고 위로하기를, “조정 신료들이 모두 경처럼 충성스럽다면 어찌 오늘과 같은 일이 있었겠는가.” 하고는 오열하며 눈물을 흘렸다.
당시 성 안에 있는 군사가 채 1만이 되지 않아 성가퀴를 분담하여 지킬 수가 없었는데 적기가 대대적으로 이르러 산과 들을 뒤덮었다. 성을 몇 겹으로 포위하고 사방에서 위협하니 상하가 두려워하여 조석을 보전하지 못할 것만 같았다. 그런데도 적들이 오히려 날마다 사람을 보내어 강화를 요구하기를, “강화가 이루어지면 군대를 즉시 철수하겠다.” 하였다. 그러나 군의가 분분히 일어 강화의 주장을 더욱 준엄하게 공격하여 대신이 망설이며 결정을 하지 못하니, 공이 홀로 개연히 말하기를, “오늘의 계책은 강화하든 싸우든 양단 간에 결정을 내려야 합니다. 그런데 싸우자니 군사가 약하고, 강화를 주장하자니 거리끼는 마음이 있습니다. 하루아침에 성이 함락되어 상하가 어육이 된다면 종묘와 사직을 어디에 두겠습니까.” 하였다. 포위되어 있던 40여 일 동안에 성이 거의 함락될 뻔한 적이 여러 번이었다. 원군은 끊어지고 식량이 고갈되었을 뿐 아니라 땔감과 말먹이도 모두 떨어졌다. 적이 포를 쏘아 성곽을 공격하여 성곽에 온전한 성가퀴가 하나도 없게 되니, 사람들의 기가 완전히 저상되어 강화하고자 하는 자가 더욱 많아졌다. 이리하여 강화의 글이 비로소 작성되었는데 김공 상헌(金公尙憲)이 조정에서 통곡하면서 손으로 그 글을 찢으니, 공이 주워서 붙이며 말하기를, “문서를 찢는 자가 없어서도 안 되겠지만 붙이는 자도 있어야 합니다.” 하였다. 제공이 청성(靑城)의 치욕을 면키 어렵다고 근심하였으나 공이 홀로 말하기를, “오랑캐는 우리의 영토를 탐내는 것이 아니라 그 뜻이 다만 강화하는 데에 있습니다. 다른 염려가 없다는 것을 장담할 수 있습니다.” 하였다. 강도가 함락되어 패보(敗報)가 이르고 적이 또 우리에게 사로잡은 포로를 과시하니, 온 성 안이 두려워하고 놀랐다. 그리하여 마침내 성하지맹(城下之盟)을 맺으니, 실로 정축년(1637, 인조15) 정월 그믐날의 일이었다. 적의 군대가 물러가자 상이 비로소 환도하였다.
4월에 우의정에 올랐다. 당시 전란의 참화가 눈에 가득하여 모든 일이 경황이 없었는데 공이 나아가서는 임금의 마음을 위로하고 물러나서는 조정을 수습하니, 내외가 다소 안정되었다. 상이 성하지맹을 맺은 뒤로 늘 우울하여 조정에 임했을 때 기쁜 기색이 없었다. 공이 상에게 간언하기를, “뜻〔志〕은 만사의 근본이고 기(氣)는 또 뜻을 돕는 것이니, 그 뜻과 기를 길러 굽히거나 꺾이지 않을 수 있게 된 뒤에야 공을 이룰 수 있습니다. 한 번 뜻대로 되지 않았다고 하여 기운이 저상되고 만다면 천하에 할 수 있는 일이 없으니, 쇠미한 나라를 부흥하는 일을 어찌 바랄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또 아뢰기를, “하(夏)나라는 사방 10리의 땅을 가지고도 소강(少康)이 부흥시켰고 월(越)나라는 궁벽한 회계(會稽)로 내몰려 있었으면서도 구천(句踐)이 패업(霸業)을 이루었습니다. 하물며 지금 국가의 영토는 결손된 바가 없고 조종(祖宗)의 덕택은 아직 다하지 않아 호령이 사방에 막히지 않고 재력이 오히려 삼남(三南)에 남아 있으니, 오직 전하께서 뜻을 어떻게 세우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만약 큰일을 하고자 한다면 어찌 일이 이루어지지 않는 것을 근심하겠습니까.” 하였으니, 공이 임금을 위로하는 데에 고심하여 그 말이 이와 같았다. 또 의정부가 육조(六曹)의 일을 서리(署理)하던 제도를 회복하고 관제를 개정하며, 전조(銓曹)의 낭천(郞薦)과 대간의 피혐 제도를 혁파하여 조금씩 잘못된 규례를 바로잡아 난리를 극복하고 치욕을 씻을 계책으로 삼기를 청하였는데, 공경(公卿)에게 내려 논의에 부쳤을 때에 의견이 분분하여 끝내 시행되지 못하였다. 또 제도(諸道)로 하여금 전사한 장사(將士) 및 충신과 열녀를 기록하여 차례로 포장하도록 하며, 전장의 시신을 사람을 모집하여 묻어주고 관(官)에서 제사를 지내주기를 청하였다. 포로를 속환(贖還)할 때에 그 대가의 다소를 정하여 그 한도를 넘지 않도록 하고 길양식도 없이 돌아오는 자를 곡식을 운반하여 구제하니, 이 때문에 속환된 자가 매우 많았다.
가을에 좌의정으로 올랐다. 난리 뒤에 역병으로 죽은 소가 많아 농민이 어려움을 호소하자 공이 그 화(禍)가 병화보다 극심하다고 하고 도살을 엄히 금하였고, 호미와 괭이를 더 많이 주조하여 빈민에게 지급해서 농사에 이용하도록 하였다. 성하지맹을 맺은 날에 우리 군사를 동원하여 중국을 범하는 일이 없기로 약속하였는데도 마침내 이해 가을에 와서 군사를 요구하자 이 연양(李延陽 이시백(李時白))이 공을 보내어 거절하게 할 것을 청하였다. 이에 공이 심양에 가서 말하기를, “우리가 명나라를 섬긴 지 300년이 되었으니 군사를 일으켜 공격을 돕는 것은 의리상 불가하다.” 하면서 반복하여 쟁론하니, 청인(淸人)이 그 뜻을 꺾지 못하였다. 돌아올 때에 포로 수천 명을 속환하여 왔다.
무인년(1638, 인조16) 가을에 영의정에 올랐다. 북쪽 오랑캐가 다시 중국을 침범하여 우리에게 군사를 요구하자, 공이 말하기를, “성하지맹은 형세가 급박하고 역량이 달려 어쩔 수 없이 나온 계책이었습니다. 오늘날 군사를 돕는 것은 의리상 허락할 수 없으니, 들어주어서는 안 됩니다.” 하였다. 청인이 대로하여 힐책하는 글이 날마다 이르니, 온 조정이 크게 두려워하였다. 공이 상에게 아뢰기를, “우리 한두 사람의 대신이 이 일을 위해 죽어야만 비로소 천하와 후세에 떳떳이 할 말이 있게 됩니다. 더구나 이 일은 실로 신이 주도하였으니, 가서 스스로 감당해 보겠습니다.” 하였다. 이에 공이 다시 심양에 가게 되었다. 도착하니 여러 귀인들이 당(堂)에 열좌(列坐)하고 있었다. 공을 맞아들이고 힐책하기를, “누가 군사를 돕는 일을 저지하였습니까?” 하니, 공이 대답하기를, “내가 상상(上相)으로 있으니, 주관하지 않는 일이 없습니다. 이 일이 내게서 나왔으니, 감히 죽음을 피하지 않겠습니다.” 하니, 청주가 의롭게 여기고 풀어 주었다. 이렇게 해서 공이 상부(相府)에 있는 동안에는 한번도 돕는 군사를 보내지 않았다. 처음에 공이 떠날 때에 사람들이 반드시 죽게 될 것이라고 하였고 공 또한 스스로 죽음을 면치 못하리라고 여겨 상구(喪具)를 가지고 갔다. 친척과 자제가 모두 길에서 곡송(哭送)하였으나 공은 태연하였다.
기묘년(1639, 인조17)에 상이 오래도록 몸져누워 있었는데 궁중에 무고(巫蠱)로 인해 옥사가 일어났다. 공초(供招)에서 정명공주(貞明公主)와 관련된 내용이 나오자 밀지(密旨)로 공으로 하여금 그 옥사를 철저히 조사하게 하였는데 공이 불가하다고 쟁집하였고 일이 맡겨지자 또 힘껏 쟁변하니 상이 더욱 노하였다. 그래서 공을 심양에 사자로 보내고 나서, 공의 죄를 논하지 않았다고 하여 삼사(三司)를 문책하였다. 공이 도중에 소장을 올려 파직을 청하기를, “신이 차마 공주를 다스리지 못하는 것은 감히 선왕(先王)을 저버릴 수 없고 감히 전하를 저버릴 수 없기 때문입니다. 가령 신이 한갓 원칙을 고수한다는 생각만 품고 경솔하게 큰 옥사를 일으킨다면 이야말로 참으로 신뢰하기 어려운 사람이니, 전하께서 그런 신하를 어디에 쓰겠습니까.” 하고, 또 강충(江充)과 이필(李泌)의 일을 반복하여 개진하였다. 그렇지만 이렇게 해서도 옥사가 끝내 종결되지 않았다. 용만(龍灣)에 이르러 병이 심해져 가지 못하게 되자 조정이 부사(副使)를 대신 보내는 것을 허락하였다.
경진년(1640) 봄에 사직을 청하여 허락을 받았다. 2월에 돌아와 경사에 이르러 또 일에 연루되어 파직되었다.
임오년(1642) 가을에 다시 영의정에 배수되었다. 누차 사면을 청하였으나 돈유하여 마지않았으므로 나와 일을 보았다. 10월에 이르러 또 심양에 사신으로 갔다. 이에 앞서 정축년(1637)에 화약(和約)을 청한 본말을 갖추어 도독(都督) 진홍범(陳弘範)에게 이자(移咨)하여 그를 통해 황조(皇朝)에 보고될 수 있기를 바랐으나 해로(海路)가 멀고 험난하며 왕래가 단절되어 글이 반드시 전달되리라는 것을 장담할 수 없었으므로 다시 갈 만한 사람을 구해 글을 전한 다음 반드시 돌아와 보고하게 하려고 하였다. 마침 서변(西邊)에서 승려 한 사람을 구했는데 이름은 독보(獨步)이고 전에 살던 곳은 향산(香山)으로, 가도(椵島)에 들어갔다가 난리로 인해 돌아오지 못하고 중국으로 들어가 홍승주(洪承疇)의 군중에 머무르게 되었다. 무인년(1638, 인조16) 가을에 홍승주가 독보를 보내 우리나라로 돌아와 사정을 엿보게 하였는데 강을 순찰하던 군졸에게 붙잡혔다. 평안 병사 임경업(林慶業)이 경사로 보냈는데, 공이 그와 더불어 말을 해 보고는 이 일을 맡길 만하다고 생각하여 논의한 다음 상에게 아뢰어 주문(奏文) 및 군문(軍門)에 보내는 자문을 갖추어 독보로 하여금 바다를 건너 다시 중국에 들어가게 하였다. 신사년(1641) 가을에 이르러 중국이 우리의 포로를 돌려보냈는데 독보가 또 그들과 더불어 와서 회자(回咨)를 받게 되었다. 그 회자는 대략 “귀국의 괴로운 정상은 하늘과 사람이 함께 알고 있는 바입니다. 대대로 절개를 지키고 순종한 그 공로가 민멸될 수 없으니, 비록 잠시 시세(時勢)에 내몰려 오랑캐에게 곤경을 당하고 있으나 어찌 차마 귀국을 독책(督責)할 수 있겠습니까. 안심하고 협력하여 뒤에라도 충성을 다하십시오.”라는 내용이었다. 당시 공은 벼슬에서 물러나 있었다. 신 평성(申平城 신경진(申景禛))이 정승이 되어 공에게 다시 자문을 지을 것을 청하여 재차 독보를 보냈다. 청인이 이를 탐지하고 우리에게 화가 나서 와서 힐책하였으므로 만금(萬金)을 주고서야 일이 무마될 수 있었다. 그런데 홍승주가 싸움에 패해 항복하게 되자 그 일을 다 발설하였는데 우리는 모르고 있었다. 마침 이계(李烓)가 한인(漢人)과 잠상(潛商)한 일이 드러나 청인이 세자의 위엄을 빌려 이계를 포박하여 봉황성(鳳凰城)으로 데리고 갔는데 이계가 국가의 기밀을 고해바치고 살고자 하여 드디어 독보의 일을 고하였다. 이에 청인이 우리 대신에게 와서 답변할 것을 요구하니, 일이 어떻게 될지 예측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논의하는 자 중에 혹자가 “일이 증거가 없으니 발뺌하는 것만 못하다.” 하니, 공이 말하기를, “저들이 중국의 배가 왕래한 것을 알고 있으니, 지금 사실대로 밝히지 않으면 저들의 의심만 키우게 됩니다. 그리고 일이란 어찌될지 모르는 법입니다. 끝내 자취가 드러나는 데에 이른다면 재앙이 반드시 클 것이니, 사실대로 밝혀 재앙이 나와 임경업이 죽는 것에서 그치도록 하는 것만 못합니다.” 하였는데, 상이 공으로 인해 주저하며 차마 결행하지 못하였다. 드디어 공이 떠나 용만에 이르니, 혹자가 공에게 말하기를, “전후에 걸쳐 승려를 보낸 것은 모두 임경업의 계책이니, 끝내 죽음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 그가 죽기를 기다려 그에게 책임을 전가한다면 공은 화를 면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는 그를 저버리는 것도 아닙니다.” 하였는데, 공이 말하기를, “불가합니다. 처음에 명의(名義)를 천하에 세우고자 했다가 생사의 갈림길에 서게 되어서는 남에게 전가하여 자신만 화를 모면하는 것이 가한 일이겠습니까.” 하니, 제공(諸公)이 차탄하며 말하기를, “충신과 열사는 진실로 이와 같아야 하지 않겠는가.” 하였다. 당시 임경업 역시 붙잡혔으나 도중에 도망하였다. 공이 봉황성에 이르자 청인이 군사의 위용을 성대히 갖추고서 공을 뜰로 인도하여 누가 승려를 보내는 일을 주관하였는지를 물으니, 공이 말하기를, “내가 실제로 주도하였고 임경업이 보냈으니, 이미 왕명으로 한 일도 아니고 여러 사람들과 모의한 것도 아닙니다.” 하였다. 이에 그 답변을 심양으로 보냈는데, 청주(淸主)가 공을 형틀에 묶어서 압송하게 하여 북관(北館)에 가두었으니, 북관은 사수(死囚)를 가두는 옥이었다.
계미년(1643, 인조21)에 비로소 남관(南館)으로 옮겨졌다. 당시 김공 상헌(金公常憲), 이공 경여(李公敬輿)도 같이 남관에 구금되어 있었는데 중국 사람으로 심양에 포로로 잡혀 온 자가 차탄하며 말하기를, “동방의 경상(卿相)으로 중조(中朝)를 위하여 이곳에 잡혀 온 자가 세 사람이니, 의(義)를 중시함을 족히 볼 수 있다.” 하였다. 공은 붙잡혀 갇혀 있는 4년 동안에 갖은 위험과 치욕을 당하면서도 늘 《역경(易經)》 읽기를 그만두지 않았다.
갑신년(1644)에 청인이 연경(燕京)에 들어가 대략 남북을 평정하였다.
을유년(1645)에 비로소 우리 세자 및 두 왕자가 돌아왔는데, 공과 제공도 함께 돌아왔다. 가을에 진천(鎭川)에 우거하면서 와룡계(臥龍溪) 가에 띳집을 엮었다. 겨울에 부름을 받고 도성으로 들어왔다.
병술년(1646)에 폐빈(廢嬪) 강씨(姜氏)를 사사(賜死)하자 공이 은혜를 온전히 하기를 청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이해 가을에 공의 병이 심해지자 어의(御醫)를 보내 간병하였고 어선(御膳)을 나누어 주었으며, 위독하게 되어서는 문병하는 사자가 연이어 나왔다. 마침내 정해년(1647, 인조25) 5월 17일에 집에서 운명하였다. 상이 공을 위해 5일 동안 고기를 들지 않았고 3일 동안 조회를 정지하였다. 중사(中使)가 상사(喪事)를 살피고 관에서 염빈(殮殯)을 도왔으며 내탕(內帑)에서 옷과 이불을 내어 치부(致賻)하였고 3년 동안 녹봉을 지급하도록 하였으니, 애휼(愛恤)의 은전(恩典)이 규례를 벗어난 것이었다. 후에 상이 조정에 임하여 한숨을 쉬며 이르기를, “임금에 대한 충성이 최 완성(崔完城)만 한 자를 어찌 얻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이해 8월에 청주(淸州) 치소(治所)의 북쪽 대율리(大栗里) 감좌(坎坐)의 언덕에 장사 지냈다.
전 부인 인동 장씨(仁同張氏)는 우찬성 만(晩)의 따님이고, 후 부인 양천 허씨(陽川許氏)는 종묘서 영(宗廟署令) 린(嶙)의 따님인데 모두 공의 묘에 부장(祔葬)하였다. 처음에 장씨 부인에게 아들이 없어서 공이 조카 후량(後亮)을 취하여 후사로 삼았는데 뒤에 허씨 부인이 아들 후상(後尙)을 낳았다. 당시 사대부들은 이미 후사를 세운 뒤에 아들을 낳으면 소생자(所生子)로 제사를 주관하게 하였는데 이것이 풍속으로 굳어졌다. 그런데 공은 생각하기를, ‘부자 관계를 이미 정했고 천륜에 차서가 있으니 바꿀 수 없다.’ 하고 조정에 청하여 후량으로 하여금 제사를 주관하도록 하였는데, 이로 인하여 이를 법으로 만들게 되었다. 후량은 마지막 벼슬이 한성부 좌윤이었고 완릉군(完陵君)에 습봉(襲封)되었다. 후상은 벼슬이 응교에 그쳤다. 측실에게서 나온 1녀는 첨지 구횡(具鐄)에게 시집갔다.
좌윤의 아들로 장남 석진(錫晉)은 현령이고, 그다음 석정(錫鼎)은 영의정이고, 그다음 석항(錫恒)은 감사이다. 딸은 진사 윤제명(尹濟明), 정랑 신곡(申轂)에게 시집갔다. 응교는 석정을 후사로 삼았다.
공은 타고난 성품이 영민하고 과감하였으며 생각이 깊고 식견이 넓었다. 큰 논란거리를 만나거나 큰 난리를 당해도 생각이 안정되고 기색이 편안하였다. 자신의 견해를 용맹하게 밀고 나가 일찍이 우유부단하게 행동하거나 중론에 뜻이 꺾인 적이 없었다. 멀리서 보면 매우 연약해 보이나 가까이 다가서면 목소리가 금석(金石)에서 우러나오는 듯하였으니, 공이 하늘에서 타고난 자질이 대개 이와 같았다. 젊어서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 현헌(玄軒 신흠(申欽))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는데 두 공이 모두 깊이 인정하고 허여하였다. 조공 익(趙公翼), 장공 유(張公維), 이공 시백(李公時白)과 일찍부터 교유를 맺어 절차탁마하였는데 늙어서도 우정이 변치 않자, 세상에서 사우(四友)로 일컬었고 학사(學士)와 대부(大夫)가 모두 아름답게 여겼다. 흉금이 넓어 경계를 짓지 않았으며 허물을 고치는 데에 용감하고 선을 따르는 것을 즐거워하여 남이 자신의 잘못을 바로잡아주면 진심으로 받아들여 기쁨이 얼굴에 드러났다. 중흥의 시대를 만나 성군(聖君)이 위에 계시고 현사(賢士)가 조정에 가득하였는데 공은 원훈(元勳)으로 중추가 되는 직임을 맡아 몸소 경세제민(經世濟民)을 자임하여 매양 군재(群才)를 고루 등용하고 서정(庶政)을 개혁하여 국세(國勢)를 튼튼히 하고 외침을 막고자 하였으니, 장주(章奏)에 드러난 계획 치고 정확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그러나 앞서서는 예론(禮論)으로 곤경을 당하였고 뒤에는 화의(和議)로 배격을 받아 논의가 시론에 부합하지 못하여 끝내 뜻을 크게 펴지 못하였으니, 탄식을 금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별묘(別廟)를 세우자는 주장은 변례(變禮)에서 절충하고 경사(經史)에서 근거하여 예조(禰祖)라 부르는 것이 잘못된 것임을 밝혔고, 화의의 주장에 이르러서는 시의(時義)를 깊이 헤아려 애당초 함부로 강한 적을 자극하여 전복(顚覆)을 자초하지 않으려고 하였고, 또 스스로 목을 매는 필부의 하찮은 절개를 우선시하여 막중한 종사를 저버리는 일을 차마 하지 못하였다. 이는 명나라 가정(嘉靖) 때와 송나라 정강(靖康) 때의 일과는 함께 견주어서 논할 수 있는 바가 아님이 매우 분명한데도 사람들 중에는 혹 명분에 현혹되어 마음을 굽혀가며 남의 견해를 추종하여 같은 죄목을 붙여 함께 기롱하고자 하니, 사리에 어긋난 것이 아니겠는가. 일에 임해 결단을 잘하였으니, 시비를 가리는 것이 손바닥을 들여다보듯 분명하여 중론이 분분할 때에도 굽히지 않고 주장을 견지하였다. 매번 상 앞에 나아가 일을 논할 때에 주장을 고집하였으니, 상이 혹 큰소리를 내면 공은 번번이 다시 분변하여 기어이 하고자 하는 말을 끝까지 다하였다. 어느 날 연양군(延陽君)이 소대(召對)에 나아갔다가 공이 반복해서 한사코 쟁변하여 허락을 받은 뒤에야 그만두는 것을 보고 나와서 공에게 이르기를, “작은 일을 무엇 때문에 그토록 힘써 간쟁합니까?” 하였는데, 공이 말하기를, “일이 크든 작든 모두 시비가 있는 법이니, 어찌 작은 일로 치부하여 구차하게 임금의 뜻을 따르겠습니까.” 하니, 연양군이 탄복하였고, 후에 “대신 가운데 임금과 시비를 다투는 자는 오직 공뿐이다.”라고 말하곤 하였다. 또 말하기를, “완성(完城)의 사업으로 그 큰 것이 8가지이니, 반정(反正)에 참여하여 나라를 바로잡아 부흥한 것이 첫째요, 예제(禮制)를 논하여 부자(父子)의 인륜을 밝힌 것이 둘째요, 단기로 적진에 나아가 그 예봉을 무디게 한 것이 셋째요, 비방을 무릅쓰고 화의를 주장하여 종사를 보존한 것이 넷째요, 군사의 징발을 극력 거부하면서 죽음을 전혀 아랑곳하지 않은 것이 다섯째요, 천조(天朝)에 글을 보내고서 스스로 그 책임을 감당한 것이 여섯째요, 남의 골육을 잘 대한 것이 일곱째요, 붕당에 물들지 않은 것이 여덟째이다.” 하였으니, 연양군이 공을 가장 깊이 알았기 때문에 그 말이 이와 같은 것이다. 장계곡(張谿谷 장유(張維))은 매양 공을 칭송하기를, “일편단심으로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쳐 죽음을 마다하지 않았으니, 자겸(子謙)은 참으로 사직과 명운을 같이한 신하이다.” 하였고, 이공 경여(李公敬輿)는 말하기를, “굴원(屈原)의 충성은 충성스러우나 지나쳤고 지천(遲川)의 충성 또한 지나치리만큼 충성스러웠다.” 하였다.
세당이 삼가 보건대, 공은 경전을 깊이 연구하여 경훈(經訓)에 통달하였고 사서(四書)를 숙독하여 터득한 것이 심오하였다. 그러므로 사업에 나타나고 논의로 드러난 것이 모두 이를 근본으로 하였으니, 원래 학문이 얕고 식견이 천박한 자가 대번에 그 한두 가지라도 엿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질책과 비방이 벌 떼처럼 일어났던 것은 이러한 점을 대번에 이해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오호라, 말류(末流)가 도도히 흘러 한번 가서는 돌아오지 않아 그 근원을 전혀 찾지 못하니, 이런 지경에 이른 것은 이상할 것이 없다. 비록 그렇기는 하지만 이것이 공에게 무슨 손상이 되겠는가. 공에 대한 평가는 백세가 지나도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공의 문장은 논리와 지취(志趣)를 위주로 하였고 주의(奏議)의 경우는 세상 사람들이 모두 붓끝에 혀가 달렸다고 칭찬하였다. 공의 저작은 시문(詩文) 19권과 《경서기의(經書記疑)》 약간 책이 있다. 세당이 일찍이 공의 유집(遺集)에 서문을 썼는데 지금 상국이 또 신도비명을 부탁하기에 감히 사양하지 못하여 삼가 묘지(墓誌)와 행장에 의거하여 차례대로 사적(事蹟)을 기록하고 그 끝에 명을 붙인다. 명은 다음과 같다.

하늘이 영준한 인물을 내어 / 天生英彦
한 시대의 / 以爲一世
동량과 주즙으로 삼았다네 / 棟梁舟楫
큰 집을 부지하고 큰 내를 건너게 하여 / 乃扶乃濟
혹여라도 우리를 어그러지게 하지 않았으니 / 無我或戾
우리가 의지하는 바였다네 / 繄我所賴
문충공은 / 玆惟文忠
그 공적이 크다네 / 厥功之大
밝으신 성상을 보좌하여 / 羽翼明聖
재앙을 말끔히 제거하였으니 / 蕩除陰沴
그 덕에 천지가 안정되었으며 / 乾坤泰寧
일월이 밝게 드러났다네 / 日月廓霽
장릉의 복제를 논의할 때 / 章陵服議
유자들 거개가 정견을 잃어 / 群儒多蔽
모피로 울타리를 둘러치고 / 毛皮藩壁
안팎으로 빗장을 잠갔다네 / 外鍵內閉
추존의 예제가 정해지지 않아 / 尊親未定
대의가 장차 흐려지려 하거늘 / 大義將晦
공이 홀로 분연히 의견을 개진하여 / 公獨奮舌
의혹을 분변하고 편견을 깨뜨렸으니 / 剖疑破滯
천륜과 인륜이 / 天秩民彝
동방에서 밝게 드러났다네 / 待我昭揭
대운이 항구하지 않아 / 大運靡恒
의상이 바뀌고 말았으니 / 衣裳變改
가엾도다 우리 동토가 / 愍予東土
먼저 그 해독을 입었도다 / 先罹毒害
하늘을 삼킬 듯한 기세로 / 滔天勢壯
질풍처럼 짓쳐 내려오거늘 / 捲地鋒銳
호랑이의 아가리에 몸을 던져 / 身餌虎口
사직을 수호하였다네 / 爲社稷衛
고립된 성에 원군 끊어지고 / 孤城援絶
강도마저 궤멸되니 / 江都又潰
놀라 서로 돌아보며 / 爾我相顧
너 나 할 것 없이 혼란에 빠졌을 뿐 / 小大憒憒
일찍이 한 사람이라도 / 曾無一人
멀리 보고 깊이 생각한 사람이 없었다네 / 遠算深計
충성을 다하고 심력을 다해 / 竭忠殫力
안팎에서 분주히 주선하였으니 / 奔走內外
공에게 기대지 않았다면 / 非公是仗
그 누가 패망을 구했으리오 / 孰當救敗
영토를 그대로 보전하고 / 四封如舊
종묘에 제사할 수 있었으니 / 七廟以祭
우리나라를 보전하여 / 保我家邦
만년토록 이어지도록 하였다네 / 迄于萬載
이들 북쪽 오랑캐가 / 曁玆北人
천조를 치도록 위협하자 / 脅之反吠
의리를 지킬 것을 맹세하고 / 誓心守義
기꺼이 죽고자 하였네 / 甘於殞斃
북관 깊고 어두운 곳에 / 北館幽幽
몇 해를 갇혀 있었으나 / 經年縶繫
적들이 두려워하고 공경하여 / 敵知憚敬
큰 곤경에서 끝내 벗어났네 / 大難卒解
아 공의 공렬은 / 嘻公功烈
고인 중에도 필적할 이가 없도다 / 古無匹對
내가 지은 신도비명은 / 我銘神道
큰 행적만 들었으니 / 擧迹之最
금석에 새겨 / 刻之金石
영구히 민멸되지 않게 하노라 / 永久靡替


 

[주D-001]광무제(光武帝)의 고사 : 광무제가 처음에 낙양(洛陽)에 사묘(私廟)를 세웠다가 중랑장(中郞將) 장순(張純)의 말을 듣고는 즉시 헐고 사친묘(四親廟)를 용릉(舂陵)으로 옮긴 일을 말한다. 《後漢書 卷35 張純列傳》
[주D-002]석진(石晉)……않았습니다 : 석진은 오대(五代) 때 후당(後唐)에 이어 석경당(石敬塘)이 세운 후진(後晉)을 가리킨다. 후진은 거란의 도움으로 나라를 세웠으므로 16주(州)를 거란에 떼 주고 칭신하고 있었는데 경연광이 신하의 호칭을 없애고 손자라고만 칭하자는 주장을 역설하자 거란이 노하여 사신을 보내 책망하였다. 이에 경연광이 “우리 진나라는 10만 명의 사람들이 칼을 갈고 있으니, 싸우고 싶다면 오라.” 하여 거란의 침입을 받게 되었다. 이에 상유한이 공손한 말로 사죄할 것을 청하였으나 출제가 듣지 않았다. 《舊五代史 卷88 景延廣列傳, 卷89 桑維翰列傳》
[주D-003]한탁주(韓侂冑)가……것 : 송나라 영종(寧宗)이 즉위하여 오 태후(吳太后)가 수렴청정했을 때, 한탁주가 신임을 받아 평원군 왕(平原郡王) 평장군국사(平章軍國事)가 되었는데, 전횡이 극심하였다. 뒤에 중원을 회복하여 자기의 지위를 강화할 목적으로 금나라와 무력 충돌을 극력 주장하다가 패하였다. 이에 그의 머리를 함(函)에 담아 금나라에 보내 사죄하였다. 《宋史 卷474 韓侂冑列傳》
[주D-004]청성(靑城)의 치욕 : 송나라 휘종(徽宗)과 흠종(欽宗) 두 황제가 재궁(齋宮)인 청성궁(靑城宮)에서 금나라에 포로로 잡히고, 금나라 말제(末帝)가 청성궁에서 원나라에 포로로 잡힌 일을 말한다.
[주D-005]강충(江充)과 이필(李泌)의 일 : 강충은 한(漢)나라 무제(武帝) 때의 간신으로, 자신의 영리를 도모하기 위해 무고(巫蠱)의 일로 태자를 무함하여 옥사를 일으켰는데 태자가 궁지에 몰린 나머지 군사를 일으켜 강충을 참하고 자살하였다. 《漢書 卷97上 外戚傳》 이필(李泌)은 당나라 사람으로, 현종(玄宗)ㆍ숙종(肅宗)ㆍ대종(代宗)ㆍ덕종(德宗)을 두루 섬겼는데 덕종이 태자를 폐하려 하자 온 가족을 담보로 삼아 태자의 무죄를 보증하겠다고 울면서 아뢰니 덕종이 감동하여 중지하였다. 《舊唐書 卷130 李泌列傳》
[주D-006]폐빈(廢嬪) 강씨(姜氏)를 사사(賜死)하자 : 소현세자(昭顯世子)의 빈인 강씨가 인조의 애첩 조 소용(趙昭容)의 무고로 사약을 받고 죽은 사건을 말한다. 《仁祖實錄》
[주D-007]모피로 울타리를 둘러치고 : 허례(虛禮)에서 벗어나지 못함을 이른다. 《오백가주창려문집(五百家注昌黎文集)》 권2〈귀팽성(歸彭城)〉 시에 “모피를 제거하지 못하였다.〔未能去毛皮〕”라는 말이 보이는데, 그 주에 “모피는 허례(虛禮)이다.”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