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세 휘 덕지 등/연촌공과 녹동서원

연촌 선생 존양루 관련 기사

아베베1 2012. 8. 18. 22:03

 

 

문성공 5세손 19대조고 연촌 존양  휘 덕지 관련기사  

 

山堂集卷之四
 附錄
請賜額疏 農巖金昌協 a_016_614c


伏以臣等竊觀自古以來。朝廷之士。入而不出。懷祿耽寵。以失其世者多矣。其能決然勇退。不爲富貴所沒溺者。廑可指數。然考論其世。又皆遭時衰亂。怵迫016_614d禍患。思所以自全。而不者亦以名位已極。無所覬於後耳。若乃處明聖之世。嚮用未艾。而能從容自引去者。千百無一焉。況能不以一節自喜而志乎大道。不以閒散自適而力於實踐者。豈不益卓絶難覯哉。臣等下邑蒙士。耳目不遠。而獨聞我世宗文宗之世。有臣崔德之。其仕嘗自翰苑。歷玉堂,臺閣而後以南原府使。退居本邑。築書樓。扁以存養。杜門不出。時則世宗晩年也。及文宗卽位。召拜藝文直提學。奬以純實。且將留用。而在朝不二年。上書乞骸骨歸。遂不復起焉。臣等竊念本朝治化。莫盛於世016_615a文兩廟之際。當是時。才俊應運。鱗集雲蒸。經學文章之士。瑰瑋卓犖。比肩立朝。咸以功名自奮。蓋亦千載一時也。以德之之賢。翺翔其間。亡所與讓。使其從容逶蛇。附會時運。亦可以致位卿相。功名爛然矣。顧乃棄而不取。高蹈遠引。棲遯山海。以沒其身。此非審乎外內之辨。超乎榮辱之境者。不能也。彼世之審機逃禍。與位極乃止者。殆不足道也。且自古退遯之士。率多自標其高。以爲極致。而優游放曠。無所用心。是雖賢於沒溺富貴。終身不返者。而去道則亦遠矣。今德之之歸也。乃取孟氏所稱存心養性者。名其所居之016_615b室則其留心正學。不忘進修之實。槩可見矣。昔朱子有言曰。取舍之分明。然後存養之功密。存養之功密。則其取舍之分益明矣。若德之者。其庶乎此矣。惜乎史乘疏略。其言論風旨。無得以考其詳也。然其所立之高。所存之正。亦旣遠過於人。而足爲後來之師範矣。是以。及其孫而有忠成者。學於文敬公金宏弼之門。茂材篤學。克稱高弟。是其師友淵源。固有然者。而亦不可謂不漸於先訓矣。蓋自德之之世。今已二百餘年。而人猶慕之不衰。士大夫之道南州者。必問其所謂存養樓者。瞻禮其遺像。咨嗟歎息而不能去。其016_615c遺風餘韻。感人亦深矣。往在庚午年間。一邑章甫。協力建祠。以祀德之。且以忠成配焉。俎豆之事。久益不懈而顧以遐遠固陋。尙未能請額于朝。以爲多士羞。今者竊見聖明。尊賢重道。凡斯文曠典。士所願行者。無不樂施。臣等以爲此時不可失也。遂敢相率以來。請命于闕下。伏惟殿下覽察德之出處本末。學問大致。宜爲多士所尊奉。特命有司。宣賜恩額以褒奬之。使下邑之士。得遂尊賢之誠。而來者有以觀感興起。不勝大願。臣等無任仰首祈懇之至。
016_615d山堂集卷之四


 

 

농암집 제7권

 소차(疏箚)
영암(靈巖) 유생을 대신하여 지은 연촌서원(煙村書院)의 사액(賜額)을 청하는 소 경신년(1680)


삼가 아룁니다. 신들이 삼가 살펴보건대, 예로부터 조정에서 벼슬했던 인물들 중에 일단 들어가면 물러나지 않고 녹을 끌어안고 총애를 탐하다가 신세를 망친 사람은 많고, 결연히 물러나 부귀의 유혹에 빠지지 않은 사람은 겨우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입니다. 그러나 그 시대 상황을 고찰하여 논하자면, 이들은 또 모두 쇠하고 어지러운 세상을 만나 화를 당하는 것이 두려운 나머지 자신을 온전히 할 방도를 궁리한 끝에 벼슬하지 않은 경우이거나, 이미 최고의 명성과 지위를 누렸기에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어 그리한 것일 뿐입니다. 성군(聖君)의 시대를 만나 임금이 크게 등용할 의향이 여전한데도 아랑곳하지 않고 떠난 경우는 수백 수천 사람 중에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더구나 절조(節操) 하나만으로 자족하지 않고 대도(大道)에 뜻을 두며, 유유자적 한가로이 지내지 않고 실천에 힘쓰는 경우로 말하자면 어찌 더욱 뛰어나 그와 같은 사례를 찾아보기 어렵지 않겠습니까.
신들은 먼 고을의 어리석은 선비로서 견문이 넓지 못하지만 한 가지 들은 것이 있습니다. 세종(世宗), 문종(文宗) 때에 신(臣) 최덕지(崔德之)가 있었으니, 그는 한림원(翰林院)에서 출발하여 옥당(玉堂)과 대각(臺閣)을 거치고, 남원 부사(南原府使)로 있다가 물러나 영암에서 지내면서 서재를 지어 존양(存養)이라고 편액을 달고 두문불출하였는데, 당시는 세종의 만년이었습니다. 문종이 즉위했을 때 불러 예문관 직제학(藝文館直提學)을 제수하고 순수하고 진실하다고 칭찬하며 계속 등용하려 하였는데, 조정에 있은 지 2년도 못 되어 사직소를 올리고 돌아와서 끝내 다시는 벼슬에 나아가지 않았습니다.
신들이 삼가 생각건대 우리나라의 정치와 교화는 세종, 문종 때보다 더 융성한 적이 없었습니다. 당시에 뛰어난 인재들이 시운(時運)을 타 구름같이 모여들고 경학과 문장에 밝은 선비들이 진기하고 뛰어난 식견으로 줄지어 조정에 서서 모두 공명(功名)을 떨쳤으니, 이는 천년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시절이었습니다. 최덕지의 그 훌륭한 재주로 그들과 어울릴 때에 조금도 손색이 없었으니 만일 느긋하게 따라가며 시운에 편승하였더라면 경상(卿相)의 자리에 올라 공명이 찬란했을 터인데, 벼슬을 버리고 멀리 떠나서 변방 산천에 은둔한 채 일생을 마쳤습니다. 이는 경중의 구분에 밝고 영욕(榮辱)의 경계를 초월한 사람이 아니라면 그렇게 할 수 없는 것이니, 저들 기미를 살펴 화를 피하는 자들과 지위가 극도에 이른 뒤에야 그만두는 자들의 경우는 말할 가치도 없습니다.
그리고 예로부터 은둔한 선비는 대부분 스스로 고상함을 표방하여 가장 훌륭하다고 여기고 유유자적 세월을 보내면서 마음 쓰는 것이 없었으니, 이들이 비록 부귀의 유혹에 빠져 종신토록 돌아오지 않는 자들보다는 낫다 하나, 그 역시 도(道)와는 거리가 멉니다. 그런데 지금 최덕지는 귀향하여 마침내 맹자(孟子)가 말한 ‘마음을 보존하고 본성을 함양한다.[存心養性]’는 말을 택하여 거처하는 집의 이름을 지었으니, 그가 바른 학문에 마음을 두고서 덕을 향상시키고 학업을 닦는 일을 잊지 않았다는 것을 대략 알 수 있습니다. 옛날에 주자(朱子)가 말하기를, “부귀와 빈천을 취하고 버리는 기준이 분명해진 뒤에 마음을 보존하고 본성을 함양하는 공부가 치밀해지고, 마음을 보존하고 본성을 함양하는 공부가 치밀해지면 부귀와 빈천을 취하고 버리는 기준이 더욱 명백해진다.” 하였는데, 최덕지로 말하면 이에 가깝다 할 것입니다. 그런데 역사에 기록된 것이 소략하여 그의 말과 풍격을 상세히 상고해 볼 수 없으니 애석합니다.
그러나 그 높은 지조와 바른 마음은 보통 사람보다 훨씬 뛰어나 후세의 모범이 되기에 충분했습니다. 그래서 손자 대에 이르러 최충성(崔忠成)이 문경공(文敬公) 김굉필(金宏弼)의 문하에서 수학하여 특출한 재주와 독실한 학문으로 수제자라 일컬어졌으니, 이는 그 사우(師友)의 연원이 본디 그럴 만했을 뿐만 아니라 선조의 가르침에 영향을 받지 않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최덕지의 시대로부터 지금까지 이미 200여 년이 흘렀는데도 그를 흠모하는 사람들의 마음이 아직도 변치 않아서 남쪽 고장을 찾아오는 사대부는 반드시 이른바 존양루(存養樓)라는 곳을 방문하여 그의 초상 앞에 예모를 갖추고 탄식하며 발걸음을 떼지 못하곤 하니, 그가 남기고 간 영향이 사람을 감동시키는 것 또한 깊다 하겠습니다.
지난 경오년(1630, 인조8)에 온 읍의 선비들이 힘을 모아 사당(祠堂)을 세워 최덕지를 향사하고 최충성을 배향하였는데, 향사하는 일이 세월이 아무리 오래 지나도 여전하였습니다. 그런데도 먼 지방의 고루한 곳인 관계로 아직까지 조정에 사액(賜額)을 요청하지 못하여 사류(士類)의 수치가 되고 있습니다. 지금 삼가 보건대 성상께서는 현인을 높이고 도를 중시하여 선비들이 행하고 싶어하는, 사문(斯文)의 누락된 전례(典禮)를 모두 흔쾌히 행하고 계시니, 신들은 지금 이때를 놓칠 수 없다고 생각하여 감히 여럿이 함께 와서 대궐문 아래에서 명을 청하는 바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최덕지의 출처의 전말과 학문의 대체가 사류의 존경을 받을 만함을 살피시고 특별히 유사(有司)에게 명하시어 편액을 하사함으로써 그를 표창하시어 먼 지방의 선비들이 현인을 존경하는 성심을 이룰 수 있도록 하시고, 후세에도 보고 느끼는 점이 있어 분발하게 하시기를 바라는 마음 그지없습니다. 신들은 우러러 기원해 마지않습니다.


 

[주C-001]영암(靈巖) …… 소 : 작자의 나이 30세 때인 1680년(숙종6)에 지은 소로서, 작자의 부친인 김수항(金壽恒)이 전라도 영암에서 귀양살이할 당시에 작자가 부친을 만나기 위해 그곳에 여러 번 왕래한 적이 있었던 인연으로 대작한 듯하다. 연촌서원은 세종과 문종 때의 문신인 최덕지(崔德之)와 그의 손자 최충성(崔忠成)을 향사(享祀)하는 서원으로, 전라남도 영암의 사류들이 1630년(인조8)에 세운 것이다. 당시에 최덕지의 생존시에 그린 초상화인 영정(影幀)이 그가 거처하던 존양루(存養樓)에 봉안되어 있었다. 《煙村遺事》
[주D-001]존양루(存養樓) : 최덕지가 남원 부사를 그만두고 내려와서 건립하여 거처하던 곳으로 영암 덕진면(德津面) 영보리(永保里)에 있는데, 존양당(存養堂)이라고도 한다.

澤堂先生集卷之九
 
煙村崔先生家傳詩文錄後敍 a_088_155a


昔在景泰間。我朝有淳德高節正學之士。曰煙村崔先生名德之。嘗由禁近。出守州府。又不樂而退歸靈巖永保村。築書樓。扁以存養。若將終身。顯陵卽位。召拜藝文直提學。明年冬。又告老而歸。同朝賢卿名士。賦詠贐行。以高其事。且爲存養樓題識。又先生家大人參議公有壽有後。一時多贊頌之作。凡茲詩文筆迹。崔氏子孫。世守之甚謹。及丁酉倭亂。存養樓088_155b而簡編隨以散逸。今其鄕人。旣爲先生立祠祀之。先生七代孫前參奉珽。又收拾燼餘詩文。尙得九十餘首。以圖不朽之傳。乃以題跋之辭命植。植竊惟先生純實之行。著於聖諭。淳德也。中歲納祿。遯迹山海。高節也。存心養性。揭扁自警。正學也。有一於是。尙可師範百世。況兼有之者乎。抑先生之退。當景泰二年辛未。越四年癸酉,七年丙子。國家禍故相繼。縉紳多及焉。則先生之擧。誠若炳幾保身者然。以此世尤稱其明智。以余攷之。顯陵賓天之促。而魯山遜位之遽。此天數也。先生雖明智。安能推測及此。且先生在088_155c世廟朝。已解帶方之印。彼時又何難之可違耶。易曰天道虧盈而益謙。詩曰愷悌君子。神所勞矣。先生急流勇退。道與神謀。自不蹈於大亂。豈規規焉審幾逃禍者之足儗也。今就是卷。閱其人物。則安平,節齋之事。不可言也。若河東,高靈,泛翁,四佳諸公。勳名雖盛而情節或歉。成謹甫諸人。自靖則有之而葵足莫衛。其視先生淸福完名。當何如也。噫。觀斯集者。不但据其詩文。知先生之所存。論其世尙其人。亦可以見先生之不可及矣。崇禎丙子七月之望。德水後學李植識。

 

택당선생집 제9권
 서(序)
연촌 최 선생의 집에 전하는 시문록 뒤에 쓴 글[煙村崔先生家傳詩文錄後叙]


옛날 경태(景泰 1449~1456) 연간에 아조(我朝)에 덕이 순일하고 절조(節操)가 드높았던 정학지사(正學之士)가 있었으니, 연촌(煙村) 최 선생이 바로 그분으로서 이름을 덕지(德之)라 하였다.
일찍이 금근(禁近 시종신(侍從臣)을 말함)을 거쳐 주부(州府)의 목민관으로 나갔다가, 이를 또 즐겁게 여기지 아니하여 벼슬을 그만두고 영암(靈巖) 영보촌(永保村)으로 돌아가서는, 서루(書樓)를 지어 존양(存養)이라 편액(扁額)을 내건 뒤 거기에서 생을 마칠 것처럼 지내었다.
그러다가 현릉(顯陵 문종(文宗))이 즉위하여 선생에게 소명(召命)을 내리면서 예문관 직제학(藝文館直提學)을 제수하였는데, 이듬해 겨울에 이르러 다시 늙었다는 이유로 사직을 청하고 향리로 돌아가자, 조정에 함께 있던 현경(賢卿)과 명사(名士)들이 시를 지어 떠나는 길을 전송하면서 선생의 사적(事跡)을 높이 기렸다. 그리고 이와 함께 존양루(存養樓)에 제(題)하는 글을 짓기도 하고, 또 선생의 가대인(家大人 부친)인 참의공(參議公 이름은 담(霮)임)이 장수(長壽)를 누리고 훌륭한 자손을 둔 데 대해 일시에 찬송하는 작품도 많이들 내놓았다.
이 모든 시문(詩文)가 필적(筆迹)들을 최씨의 자손들이 대대로 지키면서 그지없이 조심스럽게 보관해 왔는데, 급기야 정유왜란(丁酉倭亂)을 겪는 바람에 존양루가 소실(燒失)되면서 간편(簡編)들도 함께 산일(散逸)되고 말았다.
그러다가 이번에 고향 사람들이 선생을 위해 사당을 세우고서 제사를 올리게 되었고, 선생의 7대손인 전 참봉(參奉) 정(珽)이 또 타고 남은 시문(詩文)을 수습하여, 그나마 90여 수(首) 정도를 찾아낸 뒤 영원히 전할 방법을 모색하면서, 나에게 발문(跋文)을 써 달라고 요청해 왔다.
내가 삼가 살피건대, 선생은 순실(純實)한 행동이 성유(聖諭)에 드러나게 될 정도로 순덕(純德)의 소유자였고, 중년에 봉록(俸祿)을 마다하고 산해(山海)에 자취를 숨겼으니 고절(高節)의 인사라 할 만하며, 존심 양성(存心養性)의 의미를 되새기며 이를 편액(扁額)으로 내걸어 자신을 깨우쳤으니 정학지사(正學之士)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이 중에 한 가지만 있다 해도 백세(百世)의 사범(師範)이 된다고 할 것인데, 더구나 이를 모두 아울러 지니고 있는 분이야 더 말해서 무엇하겠는가.
한편 생각건대, 선생이 조정을 물러난 것은 경태(景泰) 2년인 신미년(1451, 문종 1)의 일이었다. 그런데 4년 뒤인 계유년과 7년 뒤인 병자년에 국가에 변고가 잇따라 일어나면서 진신(縉紳)들이 많이 해를 당하게 되었다. 그러고 보면 선생이 조정을 물러난 것이 그야말로 이런 기미를 미리 환하게 알아 몸을 보전하려는 계책에서 나온 것이라고 생각될 법도 하다. 그래서 이런 이유로 세상에서는 선생의 명지(明智)를 더욱 일컫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내가 고찰해 보건대, 현릉(顯陵)이 일찍 빈천(賓天 임금이 세상을 떠난 것을 말함)하여 노산(魯山 단종(端宗))이 갑자기 왕위를 내 주게 된 것은 하늘의 운수와 관계되는 일이라고 여겨진다. 그러니 선생의 지혜가 아무리 밝다 하더라도 어떻게 이렇게 될 줄이야 추측할 수가 있었겠는가. 그리고 선생은 세묘(世廟 세종(世宗))의 조정에서도 대방(帶方 남원(南原)의 옛 이름임)의 인끈을 풀었던 적이 있었는데, 그때에 또 떠나야만 할 무슨 어려운 일이 발생하기라도 했었던가.
《주역(周易)》에 이르기를, “천도는 가득 차면 무너뜨리고 겸손하면 더해 준다.[天道 虧盈而益謙]”고 하였고, 《시경(詩經)》에 이르기를, “화락한 군자는 신명이 위로해 준다.[愷悌君子 神所勞矣]”고 하였다. 선생의 급류 용퇴(急流勇退)는 그야말로 천도(天道)와 신명(神明)이 도와준 것으로서, 저절로 대란(大亂)에 떨어지지 않게 된 것이니, 어찌 눈치 빠르게 화(禍)의 기미를 살피다가 도망치는 자들과 견줄 수가 있겠는가.
지금 이 시문록(詩文錄)에 등장하는 여러 인물들을 두루 살펴보건대, 안평(安平)과 절재(節齋 김종서(金宗瑞)의 호임)에 대한 일은 차마 말할 수가 없지만, 가령 하동(河東)이나 고령(高靈) 범옹(泛翁)이나 사가(四佳)같은 제공(諸公)으로 말하면 훈명(勳名)은 비록 성대해도 정절(情節)의 측면에서는 혹 부족한 점이 있고, 성근보(成謹甫 근보는 성삼문의 자(字)임) 등 제인(諸人)으로 말하면 자정(自靖)한 점은 있지만 규족(葵足)처럼 보호하지는 못하였다. 그러니 선생의 맑은 복과 완전한 명성에 비교해 본다면, 어떻다고 해야 하겠는가.
아, 이 문집을 살펴보노라면, 그 시문들을 통해 선생의 심지(心志)가 어떠했는지를 알게 될 뿐만이 아니요, 세태(世態)를 논한 것이나 기인(其人 단종을 가리킴)을 향한 정성이 또한 선생을 능가할 수 없다는 것을 감지하게 될 것이다.
숭정(崇禎) 병자년 7월 보름에 덕수 후학 이식은 쓰다.


 

[주D-001]4년 뒤인 …… 되었다 : 단종(端宗)이 즉위한 계유년(1453)에 수양대군(首陽大君)이 황보인(皇甫仁), 김종서(金宗瑞) 등을 죽이고 안평대군(安平大君) 부자를 강화에 유배시킨 뒤 사사(賜死)한 일과, 세조(世祖) 2년인 병자년에 단종의 복위(復位)를 꾀하던 성삼문(成三問) 등 집현전(集賢殿) 학사들을 사형에 처했던 일을 말한다.
[주D-002]천도는 …… 더해 준다 : 겸괘(謙卦) 단사(彖辭)에 나오는 말이다.
[주D-003]화락한 …… 위로해 준다 : 대아(大雅) 한록편(旱麓篇)에 나오는 말이다.
[주D-004]급류 용퇴(急流勇退) : 한창 벼슬이 높아질 때에 물러나 명철 보신(明哲保身)하는 것을 말한다. 송(宋) 나라 전약수(錢若水)에게, 어떤 노승(老僧)이 끝내 신선은 되지 못하겠지만 벼슬에 연연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뜻으로 “是急流中勇退人”이라고 말한 데에서 유래한 것이다. 《聞見前錄 卷7》
[주D-005]하동(河東)이나 …… 사가(四佳) : 하동부원군(河東府院君) 정인지(鄭麟趾), 고령부원군(高靈府院君)이면서 호가 범옹인 신숙주(申叔舟), 호가 사가정(四佳亭)인 서거정(徐居正)을 가리킨다.
[주D-006]자정(自靖) : 각자 의리에 입각하여 자신의 뜻을 정해서 결행하는 것을 말한다. 《서경(書經)》 미자(微子)의 “스스로 뜻을 정해서 각자 선왕에게 고하라. 나는 여기를 떠나 숨지 않겠다.[自靖 人自獻于先王 我不顧行遯]”라는 말에서 나온 것이다.
[주D-007]규족(葵足)처럼 …… 못하였다 : 몸을 제대로 보전하지 못했다는 말이다. 춘추 시대 제(齊) 나라 포견(鮑牽)이 난세(亂世)에 처하여 남의 악행을 참지 못하고 고발했다가 발이 끊기는 월형(刖刑)을 당했는데, 이에 대해 공자(孔子)가 “포장자의 지혜는 해바라기보다도 못하구나. 해바라기는 그래도 잎사귀를 가지고 제 다리를 가려서 보호해 주는데.[鮑莊子之知不如葵 葵猶能衛其足]”라고 비평한 고사가 있다. 포장자는 포견을 가리킨다. 《春秋左傳 成公 17年》

 

山堂集卷之四
 附錄
甲申十一月日。請額疏章。 a_016_620b


伏以臣等竊惟賢人者。一代之矜式。多士之師表也。雖在百世之久。千里之遠。猶令人聞風興起。俎豆崇奉之不暇。況乎生幷一世。居同一道。漸染於敎導之化。薰陶德美之盛者。其所以尊慕愛悅者。尤當如何而立廟享祀之典。烏可已乎。然則頒額表章之擧。自不能無於右文之聖朝。而在聖朝褒賢興學之政。亦安可聽之邈邈。視若常謝煩外之請也哉。臣等所居靈嚴。雖曰海濱一小邑。而卽故名臣崔德之及其孫忠成棲息之所也。故相臣金壽恒偏配之地也。曾在016_620c崇禎庚午。一道章甫。始爲崔德之。創建書院于本郡而以忠成配焉。逮至乙亥。又以金壽恒。幷享一祠。而朝家宣額之典。尙今闕焉。爲此之羞。陳疏仰精者凡兩度俱該曹。而其在辛酉春則適當朝家多事。終無回啓之擧。其在壬午春則或稱金某不爲別立一祠。或稱建院旣久。猝難輕施。而仍爲防啓。臣等於此。誠不勝訝惑之至也。蓋本朝書院之設。眆於明廟中年。而恩額之宣。始於宣,仁兩朝。其間年數。實爲七八十年之久。而近年以來。年久書院之請額蒙許。亦不止一二則其所謂年久難施。何所據也。事儀應行016_620d之典。而祖宗朝所未遑者。其將一皆以年久爲諉。而莫之擧耶。此誠臣等之所未曉也。列邑書院旣建之後。復有後人幷美於前輩者。則仍爲追享於一廟者。歷數八路。若此類何恨。而曾未聞士林之議以此爲非者。則獨於臣等之請。諉而不爲別立。而有所靳許者。亦何所據也。稽之於國家之典。考之於古今之例。臣等之請。無一可疑。而姑爲稱托之辭。沮遏多士之望。臣等安得不抑鬱恨也哉。三臣之學問德業。固已略陳於前後兩疏。而一經睿覽後。日月已久。或萬機之中。有難留槪於宸衷。茲敢將其一二。仰達於紸016_621a纊之下。冀蒙聖明之垂察而俯許焉。蓋德之。登我世宗朝文科。歷翰苑三司。出爲南原府使。自南原棄官歸靈巖。築書樓以居而扁存養。杜門不出。逮于文廟初年。召拜藝文館直提學。亟加褒奬。且將大用而在朝未久。卽又乞骸而歸。遂終老不起。此其出處之大略也。是以。故判書臣李植蓋嘗評之曰。純實之行。著於聖諭。純德也。中歲納履。遯跡山海。高節也。存心養性。揭扁自警。正學也。有一於此。尙可師範百世。況兼有之乎。植之文學德望。爲世所信服則此爲百世之正論也。其孫忠成。又就從文敬公臣金宏弼學。016_621b而其茂材博學。世皆推以爲高弟。是其師友淵源。固有所自。而亦可見其有得於先訓矣。所謂存養樓。在於世居之地。歷數百年。遺像存焉。人慕之愈久而愈不衰。搢紳之道南州者。必問存養樓在於何處。而致其瞻拜之禮。咨嗟歎息。而不能去。其遺風餘韻之感人也亦深矣。至於金壽恒。旣是聖主之所嘗任使者也。行己本末。立朝大節。固不暇臣等之一一指陳。而因乙卯一疏。謫居是邑凡四載。而一郡縫掖。莫不慕其名而愛其德。一接容儀。如襲春風。其薰炙濡染之化。不特負笈問學者爲然。則泰山喬嶽之功。信其及016_621c人之深矣。昔唐臣韓愈在潮州。未滿壹歲。所授未過章句而立祠饗之。況今臣等之於某。實非區弘趙德之所得於韓愈者。則追慕報祀之擧。蓋出於好德之良心。而有不能自已者矣。噫。此三臣者年代雖殊。其有功於南土則前後一揆。故遠近章甫。詢謀僉同。立廟享祀。已多年所而登聞朝廷。祈請恩額。今且至三。臣等其心悅誠服。而寓沒世不忘之思者。亦已至矣。今若復爲該曹之所沮格。終靳宣額之命則此豈但士林之缺望而已。噫。若以三臣學問德業。爲有歉於享祀則已。若而臣等依見向日該曹啓辭中褒美016_621d三臣。靡有餘憾結之誠如疏中所陳。而末乃以勿施靳定者。何也。豈出於一時偶未之思耶。以故士氣之鬱抑。愈往愈甚。茲敢裹足千里。復此來籲於象魏之下。伏乞殿下。察三臣事業之卓異。念多士尊慕之至誠。亟命有司。頒以華額。以示尊賢象德之盛意。千萬幸甚。臣等無任瞻天仰聖激切祈祝之至。謹昧死以聞。

訒齋先生文集年譜
 [年譜]
訒齋先生年譜 a_067_495a


皇明世宗皇帝嘉靖四十二年 明宗大王十八年 癸亥六月初十日丙辰。 子時 先生生于善山府海平縣之松山第。 在縣南二里○先生之先。全州人也。高祖承旨公以比安縣監。聘海平金氏。仍家焉。
四十三年甲子 先生二歲
四十四年乙丑 先生三歲
四十五年丙寅 先生四歲
穆宗皇帝隆慶元年丁卯 先生五歲
二年 宣祖大王元年 戊辰 先生六歲
三年己巳 先生七歲
067_495b四年庚午 先生八歲
受業於杜谷高先生 力學不倦。嘗以雨夜明燈命題。先生應聲對曰。燈前堯舜日。窓外戰國風。杜谷先生大奇之。稱以遠到。
五年辛未 先生九歲
八月。丁內艱。 執喪如成人。參贊公尤加愛重曰。吾家其不替矣。
六年壬申 先生十歲
神宗皇帝萬曆元年癸酉 先生十一歲
二年甲戌 先生十二歲
三年乙亥 先生十三歲
肄業於金烏書院 方伯發策。問以性理。先生一揮而篇已就。及課次。先生居首。
067_495c四年丙子 先生十四歲
五年丁丑 先生十五歲
六年戊寅 先生十六歲
七年己卯 先生十七歲
八年庚辰 先生十八歲
九年辛巳 先生十九歲
春。拜鶴峯金先生于臨河。仍請受業。 先生謂從姪眞寶公山立曰。居是邦。事其賢大夫。禮也。鶴峯先生。今之賢大夫。同道而不得見。可愧也。白公見龍適在座曰。汝欲見金某乎。此我同門友也。目今居廬于花山之臨河縣。士子之負笈往從者。皆閉門而拒之。先生曰。奈何。白公曰。第躡我後。先生共白公至臨河。投拜于廬所。敷衽而前曰。蒙學小生。無所依歸。獲拜先生。願承敎誨。鶴峯067_495d先生曰。南州賢士。不爲不多。子苟誠矣。何患無師。哀疚草土。非講學討論之時。先生曰。嚴不敢更請。願在別齋隨子弟學焉。鶴峯先生曰。癡劣輩不可爲益友。齋舍隘陋。難留遠人。奈何。伯氏藥峯先生曰。此人雖少。以是心來。姑留以答其意可也。遂處齋舍。與子弟朝夕侍見數月。益聞所不聞。乃知先生之學踐履克治。鞭辟近裏。問人不問其才而問其行。勸人不先其文而先其實。嘗謂先生曰。資質旣美。前程又遠。子勉哉。先生對曰。質鈍才短。恐朽木之難雕也。鶴峯先生曰。人患立志不誠。何患才不足乎。有才不免爲小人。無才不妨爲君子。在所學之爲己爲人耳。又曰。善必積而後成。有一善自足。則是驕其善也。惡雖小而可懼。有一惡自恕。則是長其惡也。又曰。涵養克治之功不力。而欲一蹴以到者。學者之通患也。比如養苗者慇懃培植。成熟然後可以供粢盛。去草者朝暮鋤治。翦除根條。然後不得害我嘉禾。忘其田而不耘。與助之長而揠苗者其心雖異。而爲害則一也。又曰。毋自欺三字。須終身佩服爲善。去惡一有不誠。則皆自欺也。曰。善惡何以實見得。曰。義利公私之分。不可不嚴。毫忽之微。遠於千里。在學而明之耳。曰。學則何先。曰。067_496a善哉問。學不在章句文詞之間。只向日用事物上求之。所謂事上學也。其本在於主忠信先孝悌。而其要只在收放心。自灑掃應對。至修齊治平。其節目次第工夫先後。如示諸掌。在乎循序漸進。深玩實體而已。七月。聘夫人義城金氏。 府使復一女。鶴峯先生姪女。時夫人從內舅草澗權公文海于公州任所。
十年壬午 先生二十歲
哭伯氏學生公
十一年癸未 先生二十一歲
十二年甲申 先生二十二歲
十三年乙酉 先生二十三歲
八月。子山輝生。
067_496b十四年丙戌 先生二十四歲
十五年丁亥 先生二十五歲
二月。哭夫人金氏。○秋。赴榮川試發解。○十二月。讀書于桐華寺。 寺在公山。時草澗權公莅大丘府。先生往拜。仍留棲。
十六年戊子 先生二十六歲
三月。中生員一等第二人。 先生居第一。考官以爲鄕人。置第二。聘昌寧曹氏。 年月無可據。而今按草澗權公日記。語及參贊公襄禮。以爲初卜於己丑冬。以內室遘癘。不克葬云。內室。指曹夫人而言也。據此。聘禮在先生丁憂前。故第附于此。
十七年己丑 先生二十七歲
六月。丁參贊公憂。
067_496c十八年庚寅 先生二十八歲
三月四日。行參贊公襄禮。 以癘退行故也○旅軒張先生銘其墓。
十九年辛卯 先生二十九歲
二十年壬辰 先生三十歲
春。被金吾郞薦。 西厓柳先生時在相位。抵書于吏曹參議曰。金吾郞有闕云。崔生晛。政合薦擬。可一言於判相云云。而書中無年月可考。未知薦在何時。然先生筮仕在癸巳。恐是薦在亂前。未及擧行。而始擬於翌年爾。夏。島夷入寇。連陷三都。大駕播遷龍灣。先生與一鄕同志倡起義旅。推盧公景任爲義兵將。朴公遂一爲副將。先生爲掌書。 有鄕兵約束文及通開寧義兵文 八月。避亂寓義城申姨兄仡家。○與兵使朴晉書。請067_496d先討豐山賊。○九月。上右巡察鶴峯先生書。論禦敵。○十月。爲善山鄕兵。呈左巡察韓孝純書。乞軍器。○十二月。與韓巡察書。論軍機。○哭曹夫人
二十一年癸巳 先生三十一歲
正月。在金谷。上鶴峯先生書。論軍機。○聘夫人載寧李氏。 設紙榜告由 三月。除軍資監參奉。不就。○四月。哭鶴峯先生。 有祭文 自義城轉寓寧海。
二十二年甲午 先生三十二歲
正月。呈韓巡察書。請設善山屯田。 是時先生在上枝。與金錫良同呈。
二月。還海平故里。祭先考妣墓。○琴生異聞錄成 此乃067_497a先生寓言。而發揮鄕賢事蹟者也。作於辛卯。失於亂中。甲午。因健齋朴公得本草。乃更輯成。蒼石李公跋。
二十三年乙未 先生三十三歲
著友愛箴 時在寧海。有人兄弟爭訟大鬩。病中書此示之。其人戚然心動。歸而相責。遂止其訟。
二十四年丙申 先生三十四歲
正月。上都體察使完平李相公九目書。 書見本集。李公答書有曰。處野憂國。陳書屢百言。極可奬嘆。二月。著論山城形勢郡縣合幷之宜。○四月。浴平海溫泉。 調理于白巖寺。時久旱。太守尹悅求文於先生以祭。翌日大雨。
二十五年丁酉 先生三十五歲
正月。與體府從事官金雲川涌書。論山城設柵便民之策。○自寧海還海平見諸族。訪朴健齋遂一及張旅軒。067_497b因論避亂之策。○二月。奠梧洞先妣墓。因向靑松。○訪朴大菴惺于大穴。因登周王山。歷覽形勝。○來寓寧海東面內甲谷。 從事農畝。日以爲常。十月。哭朴健齋。 有祭文 改葬先妣李氏于上林。○移寓眞寶論谷。
二十六年戊戌 先生三十六歲
二月。除健元陵參奉。肅命。 西厓先生送人勞問 拜東岡金先生于旅邸。○擬入王子師傅望。 按日記。金參議昌遠言政事時。上問有學識否。人物何如。對曰。李德馨爲判書時所薦。故擬望矣。八月。南還。上九條疏。○九月。除典牲署參奉。不就。○十一月。觀望洋亭。訪忘憂堂郭公寓居。
067_497c二十七年己亥 先生三十七歲
正月。送別忘憂堂。 聞郭公挈家還鄕。要路相敍。
二十八年庚子 先生三十八歲
正月。與郭兵使再祐書。論禦敵。○四月。改題廟主。 兵亂中遺失廟主。至是還故里。改題有祝文。
二十九年辛丑 先生三十九歲
三十年壬寅 先生四十歲
三十一年癸卯 先生四十一歲
四月。以朝命撰輯亂中雜錄。 時完平李公以亂後事蹟撰輯事。陳于榻前。道伯因朝令差出左右道都廳及列邑有司。先生爲右道都廳。宋進士遠器爲左道都廳。
067_497d三十二年甲辰 先生四十二歲
四月。哭東岡金先生。 先生與旅軒張先生約遊伽倻山。入哭東岡先生。轉拜寒岡鄭先生。五月。以撰輯事。通告道內。○六月。哭從姪山立。○上伸辨晦齋李先生疏。
三十三年乙巳 先生四十三歲
酬詩諷鄭仁弘。 先生始與仁弘相從。見其名譽日盛。作此以諷之。詩曰。世事升沈古到今。春榮秋索理相尋。靑山獨立雲來往。莫把浮名攪此心。○按先生答仁弘丁未書。有曰。三四年來。賤跡絶不近門屛。蓋自甲辰乙巳年間。斷絶尋問。而此詩有規諷戒切之意。則已於是時。見其心術之微。而仍與之漸相疏絶也。此詩之作。不出兩年。兹附于此。
三十四年丙午 先生四十四歲
067_498a七月。中增廣,東堂,鄕解 三場。居首 九月。中文科丙科第四人。
三十五年丁未 先生四十五歲
二月。以翰苑指揮。取才于議政府 講左傳 。三月。薦授藝文館檢閱。○四月。署經入直。○內賜生薑一封。感恩作詩。 詩曰。黃金芽嫩犀角長。去穢通神孔所嘗。謾嚼天香薰入骨。顧何才德荷龍光。答書鄭仁弘辨斥誣賢事。 先生嘗與人語及南冥先生。而仁弘聞之。以爲詆毀南冥。先自抵書。張皇辭說。侵逼退溪先生。故先生據理辨斥。而極言各尊所聞之意以答之。七月。上疏南還。 時首相柳永慶當國用事。先生入史院。直書時事。有一臺官言于首相。欲擊去之。首相曰。雖欲攻之。史草宣泄之罪。誰使當之。言者遂止。又有一名官言于吏判崔天健。亦如之。崔曰。此人與我有同年相識之分。自吾入東銓。同在藥房。而未嘗私相求見。與人言。直擧過失。其心之公正可知。新進067_498b之人見聞未廣。褒貶之際。未盡其實則或有之。至於黨南而攻北。必無是理。銓郞成俊耇亦語其儕類曰。吾輩之薦此人。乃公論。非有私於彼也。彼之直書不諱。是亦公道也。且公等誤矣。若以直書而去史官。則何處盡得曲筆之史官乎。自是一隊紛紜者少止。然其猜嫌未釋也。先生不欲苟容。卽呈辭棄歸。八月旣望。會張旅軒泛舟于鯉埋淵。○往崇巖修史○有旨催促還仕。 還家祗受 九月。修葺松岡書亭。○又上桃李寺修史○十月。又有旨促還。 還家祗受 撰修杜谷先生遺集。○十二月。內賜椒丹木新曆三物。 在家祗受
三十六年戊申 先生四十六歲
正月。遞檢閱。 以不趁還朝論遞 二月初一日。宣祖大王昇遐。赴哭闕下。○光海卽位。除藝文館待敎。○三月。067_498c拜侍講院說書。 自四月初五日至五月二十五日。連入書筵。有講義。五月。除司諫院正言。○作九知銘○八月。以冬至使書狀官赴京。○九月初八日壬辰。到義州。以銀禁變通事封啓。○癸巳。渡鴨江。○十月十六日庚午。到山海關。 有詩二律 甲戌。過首陽山。謁夷齊廟。 有感詠二律曰。孤竹千年廟。荒城古渡濱。天長名不朽。地老像猶新。大曜輝黃道。淸霜映碧旻。誰能繪日月。鐫刻莫頻頻。一律載原集。癸未。入玉河館。○十一月初四日丁亥。詣闕行朝見禮。○己亥。詣闕。隨參冬至賀禮。○十二月十九日壬申。詣闕祗受冬至頒賞。 衣一表裏。靑絹二段。紅絹二段。黃紗二段。纁紗二段。戊寅。受勑旨辭朝。
067_498d三十七年 光海元年 己酉 先生四十七歲
正月十八日辛丑。留玉河館。謁文廟。○癸卯。皇帝特賜銀子,大學衍義,昭代典則。是日發行向通川。○二月初一日癸丑。到永平。望哭大行大王初朞。○戊辰。登十三山。 有詩一律 辛巳。到三流河。 有詩一律 三月二十日辛丑。復命。旋被拿推。卽蒙宥。 以勑書中權署國事未及改正事有臺論。與上副使同被拿推原情後蒙放。四月。還鄕。○五月。往拜張旅軒于院堂。講周易太極圖說。○又會旅軒于崇巖講易○九月。游金烏山。○十月。拜司諫院正言。在道呈遞。○十二月。自不知巖轉往泗水。拜寒岡先生。論書院入067_499a享事及喪禮諸條。 日記略曰。陪話至夜。見朝報數三條。因問曰。移御新宮。臺諫必至於啓請。何如。先生微哂曰。臺論如是。草野何敢議朝廷事乎。余因稟吾鄕書院事曰。初建冶隱書院于金烏山下。今以地勢不便。移卜洛江之濱。請額之際。瞢然啓達。以金烏賜額書院。爲冶隱刱建。而以佔畢齋,新堂,松堂幷祀。或言冶隱自稱金烏山人。院號金烏無妨。此議如何。先生曰。今旣移設洛濱。號以金烏。未穩。且幷祀三賢。而獨稱冶隱之號。亦未安。聞善山有十賢之號。可得聞耶。對曰。前者四先生外。以忠節稱者有金判書澍,李正言孟專,河參判緯地。以學問稱者有金司藝淑滋,金眞樂堂就成,朴龍巖雲耳。先生曰。多乎哉。善山之忠賢也。余曰。或以爲鄕賢宜幷入書院。或以爲四先生旣入書院。其他鄕賢。宜別立廟。何說爲是。先生曰。旣無聞見之詳。又乏可考之事。吾豈敢議爲。必有行狀碑碣等可記者。願見其書。余曰。從當書進。夜深退宿。翌朝入謁。問喪禮數條。日晩辭出。
三十八年庚戌 先生四十八歲
067_499b正月。赴宣祖大王再朞哭班。○二月。拜司憲府持平。○三月。拜實錄廳兼春秋。○製京畿監司尹昉敎書○四月。製中宮殿賀文。○參試增廣,東堂會試。 取金搢等三十三人 入弘文錄。○五月。以持平參世子冠禮。因上疏極陳輔養講學之方。○十八日。以平安道暗行御史下封書。受命西征。 有關西錄 八月。復命。○九月。又拜實錄廳兼春秋。○十月。爲體府從事官。 都體察使李公恒福,副體察使黃愼啓請差下。十二月。遞兼春秋。○差舟師句管司從事官。備邊司啓曰。舟師句管司堂上張晩從事官一員。稱以司郞廳。爲先下送事。入啓蒙允。卽今春節已迫。召集浦邊流民。設屯耕農。且審防汛形止。一日爲急。今方事目磨鍊。刻日下送矣。第念此事非諳委南邊事067_499c情。誠於任事者。蓋難責以成功。而措置號令之際。或不無生弊於列邑。司果崔晛前在嶺南。熟察本道人情物態。且多誠懇。允合是任。方以都體察使從事官。難於遷動。以此意議于都體察使。則答以本局時無緊急公幹。彼此同是國事。先爲下送。似無所妨云。聞崔晛今在善山本家。以此人差下。行文該道。給馬上送。指授應行事宜。不多日內急急發送爲當。敢啓。傳曰。允。
三十九年辛亥 先生四十九歲
正月。入都拜完平相公。稟議舟師事。○二月。疏陳舟師利害。請停不急之役。以省浮費。專力防備事。因辭朝南下。○在洗兵館。與統制使李慶濬論兵事。因出洋中觀水操。至閑山島打圍。○四月。到泗川三歧里。祭先祖開寧公墓。 崔堈諸族人來參 到晉州。與兵使林得義067_499d周覽山川形勢。 鶴峯先生歿于此地。倡義諸人。陷於此城。不勝感慨。吟一絶示兵使。六月。到玉山謁晦齋先生廟。遍尋諸名勝。○八月。重到兵營。議分防事。轉往湖南。入防踏點閱戰船軍器什物。○到玉川書院。謁文敬公廟。○九月。在長興游月出山。 有詩一律 十一月。歷尋威鳳山城。 山在全州。先生旁先祖護軍公龍角曾游賞。有舊蹟故竣事將還歷尋。有感懷一律。除鏡城判官。旋遞仍任本職。以從事官仍留。專管事備局。初啓不允。再啓曰。去九月。朴東亮所啓南方舟師虛疏。宜別遣人。使之巡歷。整勅邊務事。傳曰。南方舟師邊備遣官巡飭事。言于備邊司事傳敎矣。自數年以來。南警稍息。海防諸務。頗似弛廢。議者之憂此久矣。上年秋冬間。本司別爲建請。料理措置。而只緣朝家事勢。不得專意於邊事。軍兵半歸於上番。貢物遽設於沿海。雖欲大段着力於舟師。依舊復設。而其勢末由。然而備邊之重。不可067_500a不另加檢飭。故自本司郞廳崔晛下送。兩南使之往來巡檢。悉心料理矣。崔晛終年在彼。採訪邊情。其所規畫。稍有頭緖。若其實效之成就。當在於明年。故本司之意。欲令崔晛仍爲竣事。而移授鏡城判官之後。其代尙未差出。今欲別遣使命。而若不遵倣崔晛所規畫。則前後號令。或至相背。邊情眩於奉行。有害無益。此甚可慮。文官中極擇有計慮盡心國事之人。急速差出。以爲崔晛之代。下送巡檢。使崔晛未及措置之事。有所完結。似爲宜當。傳曰。崔晛鏡城判官遞差。使之仍察前管之任。復命。
四十年壬子 先生五十歲
二月。又除實錄廳兼春秋。○製進大司諫具義剛致祭文。○三月。以舟師從事官。兼兩南巡撫御史。○稟議舟師事于三公。仍辭朝南征。○五月。到統營。與統制使會操于前洋。 同乘上船。分坐東西。較閱殿最。犒賞而罷。自固城到三067_500b歧里。祭先祖墓。○登順天梨花亭試射。○到靈巖。尋存養樓傍親直提學煙村先生德之之遺宅 九月。在扶安。調理察任事有旨。 辭狀回下 浴井亍沈源。○十月。登南原廣寒樓試射。○除弘文館修撰○還到茂朱赤裳山城。審視形勢。○詣闕書啓。仍謝恩復命。 因登對請建實錄閣于赤裳山。仁祖朝。復申前說以建白。其後遂置藏史庫。閏十月。上箚請寢交河遷都事。 五箚始寢十一月。以鳥嶺主屹山城巡審御史。承命拜辭。○到聞慶。與縣監趙稷同審山城形勢。○看審加恩,鳳笙,會溪,舟津等處。 有傷時一絶曰。馬上憂時默念行。無端老淚自縱橫。蚩蚩郵卒焉知我。却訝梨園戀別情。復命。○除弘文館副校理。兼差備邊司鳥銃067_500c廳都廳。○十二月。上箚請勿追錄僞勳。
四十一年癸丑 先生五十一歲
二月。上箚請寢奉慈殿奏請誥命事。 答曰。明有舊例。勿爲煩論。三度呈辭遞○三月。拜侍講院文學。 陳疏請博選山林賢士。輔導東宮。入書筵。講史略五代漢隱帝紀。○三度呈辭遞○四月。拜司諫院正言。○五月。詣闕避嫌。 時李爾瞻慫慂廢主。羅織成獄。以大妃父金悌男爲首逆。以八歲王子永昌大君爲禍本。按律之啓垂發。朝野汹汹。先生以白衣出弔故承旨金時獻發引。因餞鄕友金允安於門外。路逢崇陽府院君金信元。馬上相見。以此引嫌。柳活,朴弘道啓遞。廢主下備忘記曰。當此主辱臣死之日。三司之官。尤當忘身殉國。以扶討逆之義。而前正言崔晛敢生規避之計。故擧微瑣之事。瀆擾於推鞫之日。其情可惡。姑先罷職。以警他人。鄭造,尹訒啓曰。當此067_500d鞫逆之日。知有大論。故着白衣往弔出餞。期得避遞之資。掇拾細瑣之事。至瀆天聽。自稱鄕闇。欲掩其跡。臨事規避之罪。不可不懲。請削奪官職。廢主從之。卽日出寓富平。○七月。南還。○十二月。歷入安東壽洞。拜西厓先生墓。○在金溪撰輯鶴峯先生言行錄。
四十二年甲寅 先生五十二歲
正月。留在金溪。校讐鶴峯先生遺集。○二月。移栽冶隱竹。○三月。與金洗馬潗共往泗水。拜寒岡先生。請撰鶴峯先生行狀。○四月。築堤于松山南坡之下。○十月。約會旅軒于桃李寺論史記。○十一月。校讐冶隱先生行錄及杜谷先生遺集。○八月。覽馬史。釐正067_501a中國地誌山川經緯誤處。○寄詩鄭桐溪輝遠 大靜謫所。 先生自爲小序曰。永昌獄起。輝遠見爾瞻。極言大君幼稚。不與其謀。今若請罪。恐傷慈殿之心。李怫然曰。討逆是何等事。君奈何出此言。輝遠正色爭辨面斥李。李大怒曰。吾知邪論之所自出。時吾與吳翼承日相見。翼承又與輝遠相從。論議皆同。有人言嶺南三人力主全恩。李聞此語。因怒輝遠。將欲移禍於我二人。及輝遠爲弼善。抗疏極言永昌之冤。遂係獄逾年。栫棘海外。余寄書付一短律云云。第二聯曰。擬將所學扶人紀。豈爲虛名觸世罾。
四十三年乙卯 先生五十三歲
正月。往留金陵。轉往茂長尋源。○九月。哭夫人李氏。在尋源聞訃還鄕 十二月。改葬先考妣。 合堋于上林
四十四年丙辰 先生五十四歲
067_501b正月。往留尋源。○九月。還鄕。○與張敬堂興孝,金東籬允安論理氣。 張敬堂請改鶴峯先生行狀草來到。東籬金公亦適來會。仍與先生同宿。論理氣之說。東籬曰。天地之性與氣質之性。各有所主。有主理而言者。有主氣而言者。不可混同說也。譬諸水焉。天地之性。川流之水也。氣質之性。貯器之水也。先生曰。天地氣質之性。不可太分別。天地之性性字。與氣質之性性字。初無分別。但有理氣之別爾。敬堂問東籬曰。高明之見是矣。而取譬之言。頗有可疑。古人云。人生而靜以上。不容說。川流之譬。無乃認命爲性乎。又問先生曰。若子之說。則夫所謂天地之性。就氣質中拈出不雜乎氣質者而爲言否。曰。然。
四十五年丁巳 先生五十五歲
四月。往拜寒岡先生。與李石潭潤雨諸友參訂五先生禮說。○九月。與縣人築石界池。 是池大關一縣生理。故松亭先生蓋067_501c嘗有志而未就。至是。先生呈書巡營。遂築之。後人至今賴之。
四十六年戊午 先生五十六歲
正月。往留金陵。○四月。還鄕。○往拜寒岡先生○十一月。與盧敬菴景任諸友會金烏書院。議定奉安諸規。○一善誌成○往拜寒岡先生。
四十七年己未 先生五十七歲
二月。與金烏山長盧景任宿書院。議定院規。○三月。與主倅金雲川涌,張旅軒會書院。奉安四賢。 書院舊在金烏山下。兵火之後。不免蕩析。地且偏遠。不便於學子往來。故移建于藍山。四月。拜寒岡先生。考訂鶴峯先生行狀。○往拜張旅軒。請參贊公墓067_501d碣。○七月。自靑松椒井還無語坪。○與鄕士友共賞月巖書堂。仍議三仁廟刱建事。 三仁卽籠巖金先生澍,丹溪河先生緯地,耕隱李先生孟專也。先生終始主張是役。宜有記事。而時大司諫李偉卿詆先生以作史謗訕朝廷。將欲拿鞫。遂絶筆不書。故無日記可考。
光宗皇帝泰昌一年庚申 先生五十八歲
正月。哭寒岡先生。 有祭文○許眉叟撰寒岡墓誌。引先生祭文百餘言。以爲結語。
熹宗皇帝天啓元年辛酉 先生五十九歲
二年壬戌 先生六十歲
擬上攻李爾瞻疏
三年 仁祖大王元年 癸亥 先生六十一歲
067_502a三月。仁祖反正。除弘文館修撰。○四月。入都謝恩。陳疏乞遞。上優答。 疏略曰。壬子春。有推戴大君之說。飛語城中。播傳宮禁。人心汹汹。朝夕待發。臣時拜正言。欲言不得。遂引身苟避。竟遭削黜之罪。臣責在言地。職當碎首。而坐見群兇誣殺幼稚大君。而噤無一言。終未免惜一死負先王。爲鄭蘊之罪人。自是杜門絶跡。自分終身於窮谷。幸際龍飛。得列彙征。顧省前罪。忸怩于中。臣何敢不有物議。冒恥靦面。重以負罪之身。玷辱淸朝之名器乎。入直本館。自九月至十月。連入經筵。 講大學衍義首章。先生進曰。德不明。則天理滅私慾勝。而身不能修矣。身不修。則好惡不正。家道日亂。安能親睦九族。古今帝王孰不欲明德新民。而以堯舜不可幾及。安於自畫。所以日向昏蔽而不能明也。願殿下勿以堯之克明峻德爲高遠難行。而顧諟明命。加自明之功。如衣服飮食之不可一日廢。則是亦堯而已矣。爲學最難於終始如一。而人君尤難。殿下監覆轍爲戒。克終其德。無少間斷。則親九族和萬邦不難致矣。因067_502b陳所懷曰。天下自有一定不易之法。非執法者所可低昂。如有罪犯綱常。謀廢國母。投疏之首唱儒生。論啓之臺官。必殺無赦。請殺大君者。當置次律。附托元兇。陷害忠良者次之。陰主其議。名漏疏箚。而久秉銓衡。廣植徒黨者次之。其或本心不然。而怵禍隨波。參於庭請啓事及儒生之被脅參疏者。宜從脅從罔治之律。以次科罪。斷以公議。則何有紛擾淹滯之患乎。○講論語詩三百章。先生進曰。思無邪者誠也。毋不敬者敬也。爲學終始。不出立誠居敬而已。○講周而不比章。先生進曰。君子小人所爲不同。而亦相近似。小人之陷君子也。亦以朋黨目之。漢之黨錮。我朝己卯之禍。可以見矣。若人君以至正之心。大公之道。行之以誠。悠久持循。則偏私之習。自然丕變矣。○講子在川上章。先生進曰。大而天地造化之往來屈伸。小而吾人之死生呼吸。皆流行不息之妙。由人有私慾間之故息也。學者時時省察。不爲私慾間斷。而天理流行。則乃自強不息也。又曰。程子言天德王道其要只在謹獨。所謂天德。卽純亦不已。誠而無私也。純天理而不雜以私。則王道可成也。然其要在於謹獨。能謹於幽獨之地。則誠而無私僞。所以做得王道。067_502c有一毫私僞雜乎其間。謹獨工夫不至也。如何做得王道。聖人觀川流之不息而悟道體之無窮。程子因夫子之言而論王道之至要。誠萬古傳心之要訣也。若非程子。誰知純亦不已之德。蕩蕩平平之道。只繫乎幽獨隱微之能愼也。拜弘文館校理。○五月。陪祭文廟後。以對讀官。參試謁聖文科。 取洪靌等十人 製進祈雨祭文。○參圈弘文錄。 錄全湜等二十人 聯箚論全恩事。○六月。以都元帥從事官拜辭。 傳曰。姑勿退去。因有旨賜酒賜弓一長箭片箭各一油芚一部。七月。到黃州。査點列邑軍兵。○八月。除弘文館應敎。陳辭疏兼請全恩。○十月。竣事。呈病帥府啓遞。○十七日。還朝肅拜。○除成均館司藝○入將薦 上令備邊司薦儒士中有將才者。先生及尹守謙,李溟,李昌庭,李聖求,李敏067_502d求,金時讓,沈光世,鄭基廣等九人被薦。○閏十月。拜司䆃寺正。○十一月。拜議政府舍人。○十二月。拜司憲府執義。俄拜弘文館應敎。轉拜成均館司成,侍講院輔德。
四年甲子 先生六十二歲
正月。拜體府從事官。 李相公元翼以都體察使啓請李時發,鄭曄爲副使。先生及金時讓爲從事官。拜知製敎,春秋館編修官。○拜議政府舍人○拜督戰御史。 賊适擧兵叛。上特有是命。授之以劍曰。副元帥以下不力戰者。皆斬之。先生承命馳赴。元帥張晩擁重兵不戰。先生移文責之。晚怒。至猪灘始與交鋒。官軍見敗。晩歸咎先生。上達天聽。先生乃狀啓曰。張晩以其見敗。歸咎臣身。而猪灘之戰。我軍雖敗。物故僅六百人。賊兵逃散者。多至累千。前果累戰。則賊兵自底散亡。而養寇貽患。以致鴟張。元帥烏免其罪。晩大憾067_503a之。及鞍峴大捷。行朝論功。以副元帥李守一爲首。奪張晩職。白衣從軍。先生馳詣行在。上問曰。鞍峴之功。何人爲首。先生對曰。李守一狀啓雖先到。指授方略。皆出於張晩。晩當爲首功也。上從之。鑾輿還宮。特陞通政大夫僉知中樞府事。○六月。自鄕入都謝恩。疏辭陞秩。○七月。拜兵曹參知。俄拜承政院同副承旨。○啓請還收勿治宮奴之敎。 時有宮隷冒稱慈殿圖書以作挐者。憲府推治之。上下敎政院。以爲非尊敬慈殿之道。命諭憲府。先生封還曰。宮奴犯科。而憲府治之。職也。臣不敢奉旨。頃之。憲府又請治宮奴踵惡者。上愈怒。下旨切責之。先生又封還曰。天子之父殺人。有司按之。況一宮奴乎。臣等前以此獲罪而猶不知止者。寧臣之重得罪於殿下。而不欲殿下之得罪於丘民也。其隨事盡節如此。九月。遞拜副護軍。○十月。拜司諫院大司諫。 先生上箚極論時務。上下批優奬。而勳067_503b臣以箚中論宿衛一事。衆怒朋興。先生避嫌請遞。上意欲調劑。特命遞差。而勳臣猶懷不平。上下敎于筵臣曰。曾雖相善。後見其不是。當絶之。曾雖不知。後見其善處。則當許之。若雖有不善之過。而以爲故舊而庇護之。豈不爲偏黨之獘乎。鄭曄曰。此則聖敎至當矣。且崔晛箚辭似緊。故勳臣不安。其所言差過。自上特命遞差。臣觀其爲人。似是嶺南人之醇厚者。其言亦不至爲大段過擧。而如此處置。而群臣不安。似有妨於國事。故敢達矣。 出政院日記。 拜知製敎。○十一月。拜兵曹參知。○被誣賊招。陳疏自明。 時逆賊金愿伏辜。先生及一時名流。多入誣招。傳曰。竝拿問。崔晛勿問可也。出政院日記。先生雖蒙天日之照臨。而事有不能已者。遂陳疏自明。左贊成金瑬箚論先生甚峻。上下批曰。崔晛不思反省。陳疏自明。猥濫甚矣。然其本心則質直而已。豈有知逆謀而不告之理乎。卿言亦過。勿以情外之說論人之罪可也。 出政院日記。 十二月。呈辭還鄕。
067_503c五年乙丑 先生六十三歲
春。拜刑曹參議。轉拜禮曹參議,大司成,副提學。條陳八務箚。 一曰。明心學以爲出治之本。二曰。謹辭令以順群下之情。三曰。嚴宮掖以絶街巷之議。四曰。重相臣以責治平之效。五曰。器使人以盡一代之才。六曰。戒數遷以存敦樸之風。七曰。植公論以消朋黨之弊。八曰。崇儒學以培風化之原。因進講。陳修明弊政箚。 一官制。二田制。三兵制。又拜大司成兼承文院副提調。 時詔使將到。上命極選本院提調。先生及李澤堂植,張谿谷維,李白洲明漢。同被是選。
六年丙寅 先生六十四歲
二月。拜承政院右副承旨。俄陞左副。 時有白虹貫日之變。先生聯啓陳勉。○以延慰使。承命向定州。 時以皇子誕生詔使姜曰廣,王夢,067_503d尹越海將到。先生膺是命。道中疾作。控辭蒙遞。六月。還朝。○閏六月。遞職下鄕。○又拜承政院左副承旨。 陳疏乞遞。上允之。特賜藥物。八月。拜江原道觀察使。 時虛位田結。國穀逋欠。爲本道巨弊。先生爲虛實兩册。陳疏請蠲。自上特命蠲減虛結。蕩滌逃故。一道之民。均蒙實惠。八月二十三日。追贈考嘉善大夫兵曹參判。妣東萊鄭氏,德陽奇氏,星山李氏貞夫人。○二十七日。加贈考參判府君資憲大夫議政府左參贊。 以先生前參振武原從功臣一等故
七年丁卯 先生六十五歲
春。虜入平山。大駕幸江都。承命防守漢江。移檄道內。倡起義旅。 先生聞變。領兵勤王。以朝命防守漢江。又調發精銳。赴海西副元帥067_504a陣下。時都元帥及南兵使領軍來駐淮陽,鐵原間。先生殫心經紀。給餽餉不絶。又爲檄文。曉諭一路。其略曰。義無定處。惟所在致忠之爲義。勇無別人。惟張膽厲氣之爲勇。元沖甲以敢死數十人而能收奇功。郭再祐以同志五十人而屢摧勁寇。丈夫氣節。前後炳朗。此人豈必有百夫之勇哉。不過一斗忠膽耳。諸君子生長禮義之邦。不習軍旅。値此顛沛之日。救死不贍。而惟懷主辱臣死之義。共奮與國同仇之志。倡起義旅。鳩聚義粟。誠有古烈士之風。而于國家有光云云。檄到。人莫不奮勵焉。四月。大駕還都。疏陳禦敵洒恥之策。 其略曰。堂堂我朝受命于天。二百年于玆。惟我殿下計存宗社。念及元元。包羞忍恥。屈從犬羊之約誓。此政君臣上下唾手扼腕。惕然改慮。翻然易轍。同心戮力。共發憤慨。雪會稽千載之恥。洗城下百代之辱。嘗膽瞋目。以圖恢復之秋也。臣竊念夷狄。禽獸也。詐譎反覆。朝和夕叛。已然之情狀。昭載往史。臣固知我殿下以宣,光之明哲。思周,漢之再興。益勵尊周之志。計切攘夷之擧者。未嘗斯須忘也。雖然。凡有作爲。先立大志。志者。萬化之本源。萬事之根柢地。偸067_504b安江左。無意興復者。晉主之昏庸也。甘心和議。忍辱忘親者。宋帝之懦弱也。此皆志不立而安於姑息。越王棲于山上。請爲臣妾。當時似乎怯懦矣。然其沼吳之志。已定於臣妾之日。堅苦刻厲。至於二十年之久。若使越王少惰其志。則種蠡之輩。亦豈能盡其心膂。卒建霸功哉。句越,晉,宋講和一也。而成敗懸殊。其不在兵之強弱。而在立志之強弱可知也。伏願殿下先立大志。堅剛奮發。恢弘志士之氣。振作三軍之勇。則今日之恥。可以一洒矣。爲治之道。先擧大要。紀綱之謂也。我國紀綱之不立。專在於官員多而委任不久。官員多。則莫肯盡心。而惟事塞責。委任不久。則遞易無常。而事無終始。今也一司之中。官員之數。多至七八。坐席不煖。轉授他職。庶績之凝。固無其暇。臣以爲各司只存堂上一員郞廳二員。朝夕治事。勿爲遷動。則權不下移。而紀綱自立矣。苟得其人。一夔足矣。何待乎十羊而九牧乎。至於兩司之多員。所以繩君過糾官耶。意甚盛也。然古無其官。人無不諫。漢置御史。唐有司諫。亦不過一二員。君能從諫。何人非諫官。君苟愎諫。雖設百臺諫而何益。臣愚以爲憲府,諫院。亦存執義,司諫兩員。數年一遞。則亦可以繩愆弼違。067_504c而無避嫌騷擾之弊矣。當今之務。莫急於養兵。而不分兵農。則養之不專。我國兵制。倣三代寓兵於農之意。而時世旣異。制度亦變。結繩不可以治亂。文舞不可以解圍。今玆之變。勢若土崩。堅城巨鎭。觸處糜碎。兩道山河。盡染腥血。此豈徒歸罪於將卒哉。不敎於平素。而用之於倉卒。百戰百敗。固無足怪。爲今之計。先擇武臣之可堪牧民。文臣之可堪領衆者。爲州郡之長。分爲兵農。各專其業。年少勇健者。敎之兵。老鈍孱弱者。歸之農。守令親自簡閱。擇其精銳。日習超距。明其賞罰。以奬其勇敢之氣。蠲其徭賦。以厚其資活之路。申之以約束。則見賊無驚潰之患。結之以恩信。則臨急有捍衛之誠。夫然後使守令各領其軍而赴戰。則恩威素立。將卒相信。如身之使臂。臂之使指。坐作進退。可以如意矣。一片東區九種三韓之時。其兵食豈甚夥哉。而唐宗敗於遼陽。隋煬退於孤城者。蓋以養兵有素故也。今也統三爲一。地非不廣也。民非不衆也。而見賊失魄。畏之如虎。臨急獻策。不過去邠。廟堂籌畫。只是講和。反而思之。心寒肝裂。伏惟殿下隨時變通。亟布兵農之政。則國步庶可以扶持也。養兵之道。必蓄財用。財用之蓄。亦多其方。本067_504d末俱擧。方可足食。今之所謂校生閑良及托屬諸處者甚衆。其餘遊食之徒。不可勝計。各出米布。以養軍士。則此有身有庸之遺法也。雖然。生財之道。不但專恃末節。必先務本。惟在省浮文而崇節儉。罷都監而汰宂官也。浮文之弊。可以亡國。奢侈之害。甚於天災。漢文之惜露臺。衛侯之衣大布。豈徒然哉。誠以人君以身先之。以爲民勸也。今之事勢。無一可恃。而保障之地。尙未堅定。漢都雖曰龍盤虎踞。而決非可守之地。南漢形勢。勝於漢都。而奴賊長技。乃其攻城。背城一戰。是或危道。亦不可定爲萬全之地也。江都形勢。自成天塹。地利之便。無出於此。然以臣愚意。虜必不遠而渝盟。渝盟則必大擧分路而長驅。如粘罕兀朮之謀。則一帶通津。奚足恃乎。如不得已則無如茂朱之赤裳山城。臣曾於巡撫三南。目見其形勢。兵不滿萬。足以必守。臣於其時。請建實錄閣于此者。意有在也。目今自漢以北。皆爲蕩敗之地。自漢以南。尙爲完全之域。居空虛之地。而聚遠方之兵糧則其勢難。據完富之地。而爲保障之計則其勢易。況湖嶺相連。閑山諸島。統營舟師。前後相望。屹爲聲援。若以城守爲危。則臨機應變。恢恢乎有餘地矣。措辦軍067_505a需。送助龍骨山城義兵將鄭鳳壽。 城在平安道。鄭鳳壽與張士俊唱義旅。守孤城。多有摧賊之功。先生慮其勢孤無援。自辦木綿弓矢桶兒火藥鉛丸等物及戰馬一匹。定軍官送助。旋以無朝令。越送他道爲未安。狀啓以聞。○平安監司啓曰。當此纔經大亂物力蕩竭之日。雖有朝廷命令。其勢或有所未及擧行。而今此趙翼,崔晛入送銀參軍器。其數甚優。臣以爲鄭鳳壽守龍骨易。趙翼,崔晛救龍骨難云云。時開城留守趙翼亦送助糧械故云。九月二十六日。巡到橫城縣。 原州牧使洪靌亦隨後同至 二十七日。以試閱事留橫城。 先是。縣居前翊贊李仁居因縣道封疏。上屢加嘉奬。又下別諭。有優給食物之敎。由是先生有相見際接之事。是日朝。仁居使人來曰。方欲上疏而來。仍有求見之意。先生答以明日見之。已而洪靌入見曰。俄見李仁居。問其上疏之事。則答曰。將欲倡義討賊。因具道其酬酢之語。時縣監李擢男在座。相與駭笑之際。仁居入來。其所言一如洪靌所傳。先生責喩其事理之不然。仍揮斥而罷。二十067_505b八日。向洪川。 先生將發。與洪,李兩人同見仁居。仁居出示疏草。語意與昨日所言。頗加删略。而有起兵討賊等語。先生嚴辭揮斥之。仁居曰。然則當待上疏回下矣。先生先起。洪,李繼出。臨別密屬兩人以詗察事機相通之意。中途又送人申飭。及到洪川。又送書申飭。皆以仁居爲慮。而觀勢急通之意也。二十九日。在洪川。封啓上李仁居疏。夜又馳啓仁居起兵狀。勑諸軍進勦。復啓請嚴宿衛備不虞。自橫城報來仁居疏本。其疏曰。國運不幸。屬此艱虞。臣未知天心何所怒於殿下。而有如此之變乎。殿下自賊變以來。躬擐甲冑。不避風雨。與祖宗休養之群臣。豆粥麥飯。臥薪嘗膽。同心同德。而至誠祈天。則可以感鬼神格天地。而況於人乎。以此制敵。何敵不摧。以此圖功。何功不成。殿下中興之本。專在於此也。此之不爲。而內以胡差接待爲事。外而譏察爲謨。其故何歟。此所以天地神人之所共憤也。大槪凶奴者自絶于天。故天下之大賊也。殺其父妻其母。所謂犬戎者此也。二百年禮義之封疆。反爲犬戎067_505c之地。則宗社何依。聖廟何托。被髮左袵。其可忍乎。思之至此。不若早死之爲安。故臣分雖貧賤。性則人也。參以義理。則固難不出。故臣首倡大義。奮然起兵。伏願殿下勿以臣之起兵爲妄。而特賜兵權。曲副討賊之大義焉。請斬主和賣國之姦臣。以雪殿下萬世之恥。然後肅拜西下。臣無任慷慨憂恐之至云云。先生顧謂縣監南瀞曰。疏中無顯然悖逆之語。若還退則近於沮抑。第爲狀啓。使朝廷預知而善處。如何。南瀞曰。甚當。遂捧上。狀啓曰。橫城縣監李擢男馳報內。縣居前翊贊李仁居上疏上使事牒呈。疏中所陳起兵一事。似非其時。未知作何處置。不敢不達。馳啓上送云云。是夜疾甚不寐。與縣監南瀞相議之際。橫城縣吏文報內。縣監以事往原州。仁居之子乘其空官。潰出軍器。擇弓子三十餘柄。不能呵禁云云。先生始知仁居起兵狀。卽爲馳啓曰。當日臣在洪川縣。試閱百餘名束伍。罷遣後疾甚臥閤矣。戌時量。橫城守官文狀內。縣監以軍兵點閱事。原州馳去後。李仁居子弟一人。從後二三人。到軍器庫。潰門擇弓矢三十餘張。使不得禁止云云。聞來不勝驚駭。馳送營門軍官一人。偵探處置計料矣。臣來時。067_505d行到橫城。仁居來邑內。送人于臣及原牧洪靌處曰。欲爲一上疏。嫌於干謁公門。不敢入見云云。臣答言以送。而洪靌及李擢男先爲往見。來言曰。李也上疏後欲爲率兵二百餘名。乞兵糧于湖西南等處。守令之不從者斬。仍往京城肅拜後。斬誤國姦臣。因爲討賊。俺等明言起兵之無理。而自執己見。不爲回意云。臣大駭曰。有是哉。處士之迂闊也。賊在境上時。不待命令。倡起義兵。猶或可也。今賊兵已撤。無可相戰。又不可以二百之軍投賊巢穴。彼欲何爲。自古請斬佞臣者則有之矣。不待朝廷命令。而徑先起兵。以誅姦爲名者。其名爲逆。賢者而亦爲此言乎。相與駭笑。三人偕往見之。亦以此意反復喩之。仁居曰。然。上疏後當待回下而起兵云。臣以爲彼爲處士之大言。而必無實事。且仍日晩。便卽起出。來到洪川。翌日其疏果至。觀其疏。語亦甚不的。而彼以林下之人。以討賊陳疏。不敢沮抑。卽自捧上。而縣吏馳報如是。近境騷動。彼自謂慷慨所激。不顧事體。而賊不在境。起兵非時。不待朝廷之命。徑先調發。乘其空官。潰出軍器。處事顛倒。有若喪心之人。不可任其所爲。故傳令橫城縣監李擢男,原州牧使洪靌。朝令未下之067_506a前。絶不可借以兵權。嚴守本官。觀其所爲而處之云云。彼乃迂僻之人。不聽人言。不揆事理。實爲起兵。以討賊爲名而上京。則何以處之。朝廷從速處置云云。先生旣已封啓。因念原,橫兩守旣有屢度申勅。終無一番馳報者。已極怪駭。而事迫蒼黃。未暇往復詰問。乃星火傳令于原,橫兩守。使之整軍進勦。又傳令春川府使閔機。使之領兵馳來。洪川之兵則因試閱留待官門。故使縣監更加整飭。且念仁居以討賊爲名而不顧事理。如是妄動。則可遺一言而罷其兵。遂募可信武士二人。付書以送。責以順逆之理。速令罷兵待罪。纔送人。洪,李兩人馳通始到。蓋洪靌已先直啓。而不以牒報爲意故也。先生憤激于中。更爲狀啓曰。當初仁居上疏之時。已見其言語無倫。擧措顛倒。莫知其由。狀啓中已陳起兵一事。似非其時。作何處置。今此擧措。尤極悖逆。追捕一事。不可少緩。一邊整勅近官軍兵。左右共進。期於擒滅。一邊作書入送。責以順逆。令速罷兵待罪。以試其所答。自朝廷嚴勑宿衛。以備不虞云云。三十日。留洪川。馳啓仁居就擒狀。 先生方欲進兵合攻之際。所送偵探軍官來言曰。仁067_506b居雖欲聚兵。四五將官。數三卒徒之外。人皆走避不出。仁居只與三十餘人在官奴永守家。不敢動。原州軍。今日卯時馳入。盡爲生擒。目見以來云云。以此具由馳啓。因分囚賊魁妻孥及支黨于橫,原兩獄。○初。先生屬原,橫兩守以詗機急通。非止一再。而仁居叛。先生因縣吏文報而始知之。及仁居擒。又因偵伺軍官而聞之。二守馳通。率皆後時。此不可曉。今附洪啓于下。以備參考。○洪靌狀啓曰。臣本月二十六日。監司臣崔晛出巡北關。臣陪行行到橫城。縣居前翊贊李仁居以監司相見事。已來本縣。二十七日朝。李仁居來到監司處。出言曰。吾欲有一陳疏事云。監司問曰。所欲陳疏者何事乎。曰。朝廷與奴賊相和。吾欲起義兵。由忠淸道得軍器。直向京城。請斬主和姦臣一人頭。掛於旗竿。因爲西下討賊云。監司答曰。然則西下後欲直擣巢穴乎。曰。巢穴則不可去。監司答曰。奴賊已盡撤還。欲擊何賊。仁居不答。須臾辭出。監司以試才事因留。二十八日朝向洪川時。與臣及橫城縣監李擢男約以同往。察其辭色。則仁居出其疏草。其大槪首言與虜不可相和之意。末端言起兵討賊。請斬主和奸臣。又言殿下勿以臣起兵爲067_506c疑。賜臣兵權等語。多有悖慢之語。監司答曰。欲起兵則兵在何處。所得之兵幾許。仁居曰。已募數百餘名云。監司大駭。色變而出。行到里許。送人於臣處曰。吾當留洪川。凡事須與橫城縣監細探馳報云。臣與李擢男密議。使之備細譏察。連續馳報事言說後。臣卽爲還官。傳令將官。聚會軍兵待變矣。當日巳時量。橫城縣監李擢男不意馳進。面言李仁居擅自傳令於本縣將官出身等。聚會軍兵。縣監事出蒼黃。罔知所措。欲與臣面議軍務。只率衙奴與吏房,給唱等。棄其妻子。馳到本州。追後馳到橫城縣戶房金應瑞進告內。李仁居發遣同縣出身高纘,高繼立等。追捕橫城縣監而未及。仁居已爲聚兵於本縣云云。追後橫城縣戶長草報內。李仁居子二人。潰軍器廳。取弓矢云云。李仁居爲逆之狀。益加明白無疑。臣與橫城縣監臣李擢男聚會本州軍兵。一邊進勦。而監司旣已出巡。臣不得已事出蒼黃。從聞見馳啓。追後偵探賊勢。詳細馳啓計料云云。十月。因賓廳啓。就理原情。 賓廳啓曰。伏見原州牧使洪靌狀啓。逆豎仁居已取橫城軍器。射天之志已著。臣等不勝憤憤。急遣宣傳官。探其蹤跡以067_506d來。觀察使崔晛若見此等事狀。則所當具由馳啓。設機措捕。而狀啓之辭。但曰起兵似非其時云。尤爲駭然。請崔晛拿來推問云云。○先生原情。矣身慮事素遲。而過於詳審。每有緩不及事之患。至於討賊。是何等事。而敢有一毫慢忽之心哉。逆魁仁居。素昧平生。而頗有高士之名。聖明亦加優禮。頻下題給食物之敎。矣身依送饌物。原州牧使洪靌聞其貧窮。遺以糧饍。上年冬間。仁居適來原州。致謝于牧使及矣身。始得相見。與之接語。不過迂闊固滯之人也。然爲其林下處士。年近大耋。待以長者之禮。自此仁居間或送人通書矣。九月間。仁居送書于牧使及矣身。書中有憤慨不平之語。洪靌謂矣身曰。仁居書中有前萬古所未有等語。未知爲何事也。矣身曰。我亦怪之。所答略及寒暄而已。此等怪語。不必答也。今年束伍改定後。因備局事目。將爲試閱。而以國舅禮葬。未暇出巡。冬防已迫。軍政可憂。今春變亂之時。以繼糧爲難。矣身欲爲儲糧於伊川近西六七官。一以除嶺東遠輸之弊。一以繼北路將士之供。艱難拮據。別備大小米千餘石。又收拾營儲木匹。將換貿戶曹唐糧及贖罰之徵米竝千餘石。分置近西列邑。而未措其067_507a半。必身親巡歷。然後方可了事。去九月二十六日。強疾作行。與原州牧使洪靌同往橫城。翌朝。仁居送人曰。欲爲一上疏。昨日來此邑內。而嫌於干謁公門。不敢投拜。矣身答以今日有故。明日出行時就見。洪靌見臣謂曰。今朝見李仁居。問其上疏之事。將欲倡義討賊。已得軍二百餘人云。矣身曰。賊不在境。此非義兵之時。設使討賊。其以二百軍當之乎。相與一笑。洪靌又言曰。問其軍器軍糧出處。則仁居答以此處兵糧乏少。欲往湖西南。借得兵糧云。矣身曰。此言尤不近理。此時軍器。處處修備。猶患不足。誰得以贏餘借乎。官家軍器。萬無見借之理矣。洪靌曰。彼言我乃爲國討賊。則守令孰敢不從。不從者。雖斬之可也云。矣身與橫城縣監李擢男相顧而言曰。此言尤可駭也。無朝廷命令。而孰肯受制於彼乎。洪靌等相與拍手曰。大大迂闊也。須臾仁居入來。初頭矣身曰。欲爲上疏。未知何事。仁居曰。我耕耘山谷。老而無用。今春胡變之時。人或勸爲義兵。自知無能。欲偸生計也。今聞國家與虜講和。胡差往來云。二百年禮義之邦。將爲左袵之屬。不勝慷慨。兹欲陳疏。倡義討賊。死於戰場。上京肅拜後。請先斬主和奸臣。因往賊路也。067_507b矣身始思其書中云前萬古所未有者此也。謂仁居曰。賊已撤歸。戰于何所。曰。欲斬胡差耳。矣身曰。斬胡差不難。惹出大寇。則其以二百義兵能敵乎。且請斬佞臣者。古亦有之。起兵而誅姦者。亦有之乎。此不過處士之大言。矣身心氣不平。不肯酬酢。仁居出。矣身謂洪,李兩人曰。若不待朝廷命令。徑先起兵。以討賊誅姦爲名。則是無異於淸君側之惡。卽當勦捕。而彼有重名。情跡未露。只以言語問答之辭。捕治以啓。則非但朝廷不信。擧國亦當論之以誣殺處士。此事極難處。當觀其所爲。擧其實狀而治之。翌日。矣身將行。與洪靌,李擢男同往仁居所寓處。問曰。上疏已書乎。仁居自袖中出示疏草曰。無寫疏者。未及書耳。其意蓋欲請得下人之寫疏者也。矣身聽而不聞。三人同見其疏。與昨日所言頗加删略。矣身曰。疏中起兵誅姦等語。大不順理。朝廷萬無許之之理。未許之前。絶不可起兵。反復戒止之。辭與昨日無異。仁居曰。然則當待上疏回下。今日未及寫疏。明當封疏。付送橫城下人矣。矣身行忙先起。洪靌,李擢男追別于籬外。矣身密囑兩人曰。若有可通之事。須卽馳通。兩人曰。已知之矣。半程。送人于兩人。及到洪川。又送067_507c書。皆觀勢急通之意也。矣身到洪川試閱時。仁居之疏至。矣身顧謂縣監南瀞曰。此疏似不當捧。時無顯然悖逆之語。今若不捧而還退。則近於沮抑。欲爲狀啓。使朝廷預知而善處。如何。南瀞曰。甚當。矣身遂爲捧上。狀啓中所謂起兵似非其時。未知作何處置之語。蓋欲朝廷預知其所爲也。是夜疾甚。心神昏悶。達夜不寐。與縣監南瀞相議之際。橫城縣吏文報內。縣監以事往原州。仁居之子乘其空官。潰出軍器。擇持弓矢三十餘柄。不能呵禁云。矣身始知仁居起兵之狀。卽爲馳啓。而未見洪,李兩人馳通。只據縣吏之報。猶不敢斷以仁居爲謀逆。而謂或喪心妄作。不知自陷於悖逆之罪。蓋仁居之素所自許。不至於如此之甚故也。且駭且怪。一邊傳令于原州牧使,橫城縣監。使之整頓軍兵。相機進勦。春川之兵。因先文試閱。整待官門。故傳令于府使閔機。使之領來。洪川之兵則昨因試閱。留待本縣。矣身與縣監南瀞更加整飭。矣身又思仁居實爲討賊。不顧事體。如是妄動。則可遺一書而罷散其兵。遂募可信武士二人。付書而送。責以順逆之理。速令罷兵待罪。以觀其所答。若遲疑一刻。則謀逆無疑。其時狀啓中。亦陳遺067_507d書之意矣。其書終乃不傳而迴。雜在文書中。想已入內矣。分付移時。洪,李兩人馳通始到。矣身始悔見事不敏。憤激于中。更爲狀啓。又申飭左右軍兵。約以是夜竝進。方欲行兵之際。矣身所送偵探軍官來言曰。仁居雖欲聚兵。四五將官。數十卒徒之外。人皆奔避不出。仁居只與三十餘人在官奴永守家。不敢動。原州軍。今日卯時馳入。盡爲生擒。目擊以來。以此具由狀啓。仍留洪川。以待諸賊之盡擒。移送原州。逆魁妻子奴屬。囚于橫城。無有遺漏。然後矣身前進春川。大槪矣身知人不明。不能早知仁居謀逆之狀而先爲捕治。又不能及期領兵親進。掩捕凶賊。而與洪,李兩人密議約束。終始同事。一邊狀啓。一邊整兵設策。傳令左右。刻期進勦之事。非一非再。仁居之聚兵橫城也。李擢男方在原州。矣身方在洪川。橫城距原州四十里。距洪川七十里。賊之動靜。縣人先報原州。轉報於矣身。事機之遲速。狀啓之先後。是固不同。矣身情實。暴白無餘。惟在天日孔昭。幽枉畢燭云云。禁府啓請照律。上下敎特命放釋。 謹按長陵誌狀曰。崔晛被逮於逆獄。鞫廳請刑。王曰。頃年夜對。其時067_508a適有處置未盡之事。此人以入侍之官。力爭不已。予頗苦之。厥後思量。眞是愛予者也。今雖被罪。必不負初心。卽命放釋。蓋崔晛不知李仁居之叛逆。妄稱處士大言之事被罪也。其言忠則不惟取於一時。又能久而識之也如此云云。兩司啓請依律。不允。 上曰。崔晛之事。實爲駭異。難免刑章。眚災肆赦。亦是古人恤刑之道。爾等須體予意。亟停勿煩。二十四日。合啓不允。 上曰。已爲議定。更勿煩瀆。二十六日。合啓不允。上曰。愚戇之人。昧於逆順。以至於此。罪固重矣。其情則不無可恕之端。減死論罪。何傷。爾等須體予意。更勿煩瀆。十一月初二日。朝講。兩司榻前啓。不允。上曰。崔晛之罪。固重矣。故前已言之。但昏昧所致。非故犯之事也。其情可恕也。古人有言曰。眚災肆赦。此亦肆赦之意也。○玉堂臨文。因論以愛己之心愛人則盡仁啓曰。凡人皆受天地生物之心以生。故皆有愛人之心。此所謂仁也。至於人君則尤以愛人爲職。故曰爲人君止於仁。天子則天下之人。皆在吾067_508b仁之內。諸侯則一國之人。皆在吾仁之內。盡仁之言。自上所當深體也。上曰。古之人君。於人有犯罪而情在可貰者貰之。其後。其人或有益於國。此亦仁之事乎。答曰。此是聖人好生之德。正是仁也。刑者。聖人之所不得已。善善長而惡惡短。乃聖人之心也。上曰。崔晛之事。眞是眚災也。其人頗有計慮。朝議皆以可用之材擬之。而何故如此處置乎。對曰。臣與晛居相近少相善。知其爲人甚熟。反正以後。與爲同僚甚久。今番處事。直是迷惑。大不類渠平日事。此是死厄將至。天奪其魄。倘非聖明視爲眚災。則渠之所爲。死亦甘心矣。上曰。必以仁居爲隱士耳。對曰。渠性白直。見仁居除官不就。認爲隱士。做錯至此。安有如此可慨之事乎。上曰。以所犯言之。罪果重矣。可以依法。而但其本情實非故犯。情與罪不同。如無可貰之事。何可強拂群情乎。書曰。宥過無大。今須停論可也。
崇禎皇帝元年戊辰 先生六十六歲
正月初八日。合啓不允。 上曰。不允之意。前已盡喩。而如是堅執。至於閱歲067_508c經年。殊爲過矣。凡事有當堅執者。亦有不必堅執者。予非有私意。但以其情不至於死。故不得允從。當此鞫獄多事之時。速爲停止可也。兩司爭執不已。特命流配會寧。○九月。特命放還。道經洛山寺。 有山水屛記
二年己巳 先生六十七歲
春。還鄕。 先生感激天恩。列錄備忘記。書遺戒於其後。傳示子孫。勖以世世圖報之意。
三年庚午 先生六十八歲
冬。被誣逮獄。卽蒙特放。 時無賴賊楊天植謀逆發覺。誣及先生被逮。上曰。崔晛嘗指陳宮闈得失。言甚切直。予甚苦之。厥後思之。眞愛予之言。尋常不忘于懷。如此忠亮之人。豈有與賊相知之理乎。卽令放釋。
四年辛未 先生六十九歲
067_508d五年壬申 先生七十歲
著東國通鑑 春秋以魯國之年編次。而月則用周月。故先生以新羅年號爲主。而其餘高麗,百濟及中國年號則分行書之。
六年癸酉 先生七十一歲
十月。築楓川亭。 亭在草谷東洛江西岸。今有遺址。○旅軒張先生丙子記行云。江之右畔。萬疊層崖。上有亭翼然。亭是何名。晩間其揭也。亭之主誰。默坪崔斯文也。
七年甲戌 先生七十二歲
八年乙亥 先生七十三歲
九年丙子 先生七十四歲
十二月。淸兵猝至。大駕入南漢。與一鄕士友倡義067_509a起兵。
十年丁丑 先生七十五歲
正月三日。整頓軍旅。 一鄕推先生爲大將。金彥陽寧爲副將。李聞慶景節,金公羾,朴參奉晉慶,金參奉翧等三十餘人。皆在陣中。地主給軍七十名,鳥銃數柄以助。四日。發行。 先生有疾。使副將代領先行。追到舍方里。五日。面喩誓衆。行軍宿梧里院。 先生命中軍許申生列立行伍。躬至陣中。喩以一心進退。無敢違令。無敢驚動云云。六日。雨雪留。夜半。地主傳令。來自聞慶。聞雙嶺戰左右兵使敗死之報。七日。行軍至論谷。子山輝追至。 風雪尤緊。先生強疾行軍。轉加添劇。至是氣塞。良久乃蘇。十日。到聞慶杜谷留陣。○十六日。入聞慶縣見地主。因留宿。 先生病勢轉劇。不能管攝軍務。委任於朴參奉晉慶。使之替領。尋聞南漢解圍。遂罷。二月。還寓會溪。送067_509b子山輝。奔問于朝。○三月。哭子山輝。 府使公歸自奔問。道遘痘患。沒于楓川精舍。有哀辭祭文。九月。哭旅軒張先生。 有輓詩祭文
十一年戊寅 先生七十六歲
十二年己卯 先生七十七歲
十三年庚辰 先生七十八歲
五月。寢疾轉谻。遺書戒子孫。 二十五日。先生疾革不能操筆。呼門生曺俊南書。書曰。萬曆己丑六月二十五日。是我先君永諱之辰也。先君不知不肖子之不可以敎。臨沒丁寧敎戒。以爲永世遺書。今我以先君之望於我者。再告於汝等。如是以後。庶不負先君九泉之意。每念及此。悲痛罔極。汝等稍知人子之情。則此非動心處乎。先君臨終時。呼我戒之曰。居處恭。執事敬。與人忠。雖之夷狄。不可棄也。此非吾言。乃孔聖之言。汝宜終身服膺也。六月初四日。考終于067_509c金山鳳溪之別墅。 先生屢遭慘慽。不樂家居。移寓已屢年矣。七月二十七日辛丑。上遣禮曹佐郞張應一賜祭。○八月二十七日。贈純忠補祚功臣,資憲大夫禮曹判書兼知經筵義禁府春秋館事,同知成均館事,弘文館提學,完城君。 以子山輝參勳故也 九月。返葬于善山默語坪坤向之原。
我肅宗大王三十三年 丁亥
四月。鄕人立社于松山。奉安位版。 幷享松亭先生
我英宗大王五十二年 丙申
九月。移建松山社于昌林洞。
067_509d訒齋先生年譜終


南溪先生朴文純公文正集卷第六十九
 題跋
題煙村遺蹟後 癸亥閏六月八日 a_140_401d

完山崔邦彥美伯以大人察訪公之命。請跋先祖煙村生遺蹟。世采謹卒業曰。夫士有至德範世。而民或知其賢。不知其所以爲賢。苟推其極而言之。如我夫子論泰伯事亦其一也。先生仕至直提學。乃於文宗二年乞退而歸。未幾國家多故。人皆橫罹。而先生已去。所築存養樓本在場圃中。其詩只道當時居閒祝聖之趣而已。未嘗及於命名正義。將使百世之下聞其風者。想像咨嗟。不知其心胸面目爲何許人。眞所謂知其賢不知其所以賢者矣。然而尙論140_402a之士往往以高節正學歸之於先生。久而不已者。必有其故也。蓋竊思之。國家禮樂人文。莫盛於英顯之際。先生年未七十。乃懇請致仕。程朱之學。猶不大顯於時。而先生輒得以存養揭號。則其後所値雖或否泰相乘。酬酢萬變。而先生素履固浩而自在也。然則爲此說者。固已有聞於聖人微顯闡幽之意。而摠其歸趣。雖謂之至德範世亦可矣。不識美伯以爲何如也。察訪公名世榮。是爲跋


寒圃齋集卷之四
 疏箚
代湖南儒生鹿洞書院請額疏 a_177_394c


伏以靈巖郡南。有古名臣崔德之書院。以其孫忠成配焉。崇禎庚午鄕儒之所建也。至今乙亥。又以故相臣金壽恒幷享。此三臣年代雖不同。其有功於南方人士。而爲沒世不忘則一也。臣等略將三臣事蹟。立祠顚末。仰冀聖明之垂察焉。盖德之仕我世宗朝。登文科歷翰苑玉署。出爲南原府使。自南原棄官居本郡。築書樓。扁以存養。逮文廟初年。拜藝文直提學。卽又乞骸歸。遂終老。此其出處之大略也。今177_394d 以其遺事及諸名賢所撰述者考之。當治化方隆之日。乃能羽儀王庭。歷敭華要。至蒙聖主之褒。則其人之所存。已可知矣。世衰道微。色斯退藏者。猶足稱美。况上有明良之遇。下有彙征之吉。而超然遠引。甘心肥遯。其高風峻節。有非俗人所可窺測者也。東方正學。雖倡於麗末。至於國初。猶未大顯。而存養二字。深得孟氏之心法。不事放浪。加意於進修之方。老而不倦。則其所踐履。亦可想矣。是以故判書臣李植嘗評純實之行。著於聖諭。淳德也。中歲納履。遯迹山海。高節也。存心養性。揭扁自警。正學也。有一於此。177_395a 尙可師範百世。况兼有之者乎。此盖深得其爲人。而爲百世正論也。忠成隱居讀書。不出於世。而受之家庭。篤於孝友者。已不失其世守。而又能受業於文敬公金宏弼之門。究心於性情理氣之蘊。其師友淵源之正。足以徵信於後世也。所謂存養樓。在其世居之地。歷數百年。遺像猶存。立祠于樓後。屢經兵燹。三易其處。尊祀不怠。初因子孫之奉。而今此書院之設。則實由後學之追慕興感。愈久而愈新者也。豈可與一節之士。修姱自好。沒而寢忘者。比哉。至於壽恒。行己本末及立朝大節。聖主之所嘗任使。臣等不暇一177_395b 二談。而逮乙卯編配本郡。四載之後。始乃北遷。在謫之日。雖未嘗以師道自處。而縫掖之徒。莫不慕其名而愛其德。一接容儀。各滿其望。襲春風者易爲溫。飮河水者易爲飽。此其薰陶濡染之盛。不止於問字之益。而泰山喬嶽之功。不自覺其及人之深也。昔唐臣韓愈在潮州。未滿一歲。所敎不過章句。而猶能立祠俎豆。今臣等所尊慕者。不後於趙德,區弘之徒。則設春秋之享而寄沒世之思者。亦其宜也。噫。三臣之遺風餘烈。照人耳目。如彼其卓卓。南方章甫之慕悅崇奉。必欲家尸而戶祝。而書院之幷享。日月已久。則宜177_395c 卽登聞朝廷。請賜美號。以示來世。而顧念臣等愚蒙無似。所居僻遠。不能自達於堂陛之前。此則臣等之罪也。方今聖明在上。右文爲治。重儒尙德之意。逈出百王。斯文闕典。靡不畢擧。臣等於此。遂敢裹足遠來。仰叫象魏之下。伏乞殿下察三臣事業之優異。念多士尊享之至誠。亟命有司。頒額致享等典。照例擧行。以慰一邦之望。以重士林之光。千萬幸甚。

性潭先生集卷之十三
 
烟村崔先生遺事序 a_244_290b


昔我先祖尤菴文正公。嘗作烟村先生遺事跋。余以未見其遺事。尋常致恨矣。一日先生後孫爀趾欽兩君。以遺事新件一冊來示余。卽其以舊本重刊者也。遺稿散逸於兵燹之餘。惟一䟽二詩載存於卷首。固可爲一臠而知全鼎矣。若其所附諸賢詩文。一繙閱244_290c而有以見先生德望之隆。爲一世所景仰也。貢院之唱和。退休時贈別。曁存養樓題詠。一何盛哉。後之有題跋於錄後者。亦皆珍重。至若李澤堂極其誦慕。乃以淳德高節正學穪之。吾先祖亦以先生文字有出於朱書語句。爲正學之一端。噫。觀此前後所穪揚。益使人興歎靡已。維玆編錄。不啻如遺文之攟輯。豈不善矣乎。况參議公事蹟之共編。山堂公文集之繼修。尤不偶爾。先生世德有如是焉。世之覽此者。亦孰不欽聳哉。今兩君之問序意甚勤。有不可孤。遂書此以致崇慕之私云。

蘆洲先生文集卷之三
 
崔直提學出處事蹟後叙 b_043_150d


上之十八年辛未初夏。余遞栢府宰靈巖。到任十餘日。煙邨書院儒生二人來謁。仍袖一卷書以進。余受043_151a而披之。則崔直提學出處事蹟也。首記先生出處梗槩及立祠顚末。其下附以先生退歸時。一代名公鉅卿送別詩篇序跋及先生所居存養樓記文題詠摠若干首。中有先生二絶句及貢法便否陳言一通。末有遲川崔相公詩一絶,澤堂李相公叙文一篇。噫觀此足以知先生之出處大致。可爲百世之師範。而當時及後來諸賢之所以贊詠而稱道之者。莫不出於欽慕景仰之誠。則後之人尋先生之事蹟者。不於是而何哉。第以遲川之詩澤堂之文。有不可不辨者。何以言之。遲川詩云六臣可是公知己。卷裏分明各贈043_151b詞。畢竟行藏較誰勝。至今樓影照荷池。澤堂叙云今就是卷。閱其人物。成謹甫諸人自靖則有之。而葵足莫衛。其視先生淸福完名當何如也。嗚乎。崔李二公何其見之淺而言之戾歟。此非徒不諒六臣之心事。實是並先生而不知者也。夫先生當英廟顯廟培養人材之際。出而與集賢殿諸公聯班比肩。羽儀王庭。鴻毛順風。衆方有爲。而先生忽投紱高厲。退老丘園。芥軒冕而不顧。堂存養而高臥。蓋其恬退之節。出於素性而然也。若古之所謂高尙其志而急流中勇退人者非耶。至如六臣。俱以經綸之材。懷不可奪之043_151c志。致身於文廟。受托孤之重寄。而時丁不幸。義在可死。則糜身粉骨而不悔。以報先王於地下者。不過盡臣子之職分而扶萬古之綱常者也。烏可以六臣爲昧行藏之道。而智不能保其身者歟。先生之帶方賦歸。已在於英廟之聖世。及其暫出旋退。亦在顯廟之初年。則先生之淸福完名。固已享於退休之初。而非規規於先幾避禍也明矣。彼六臣則平生之所以自許者。知有國而不知有家。知有君而不知有身。夷險一致。死生以之。堂堂之節。凜凜之風。追配於首陽而無愧。今乃一以行藏評之。一以葵足譏之。043_151d咄哉爲此說者。不幾於後世爲人臣者忘君背國懷利偸生之嗃矢也耶。余懼此說肆行。則君臣之義遂廢。不揆僭猥。贅以一言。以俟後之君子。先生諱德之。郡東五里許永保邨。其故居也。煙邨是先生自號。因以爲院名云。

山堂集卷之五
 附錄
附錄僉知公遺事 a_016_627c



通政大夫。僉知中樞府事崔公行狀。[崔尙重]
公諱福男。字德胤。完山府人也。成均進士諱彥潾。其考016_627d也。蔭官補木浦萬戶諱演文。其祖考也。蓋以豪邁之士。責其主倅時政之得失。而主倅投印而歸。其後竟坐其事。有是補。諱忠成。其曾祖考也。以文章學行負重名。世稱山堂先生是也。上祖諱阿。仕麗朝。爲門下侍中。贈諡文成公。其子諱龍鳳。爲中郞將。是生諱乙仁。爲司醞直長同正。是生諱霮。年十七。司馬。三十二。登洪武丁巳文科。仕至檢校戶曹參議集賢殿提學。其第四子德之。亦以生員。登永樂乙酉文科。由槐院入翰院。歷玉堂臺閣。屢典州郡。皆有聲績。官至中直大夫。藝文館直提學。嘗以南原府使。退居靈巖永保016_628a村。扁其樓曰存養。若將終身。其後文宗召拜藝文館直提學。未幾。告老而歸。名公巨卿至如六臣輩。皆以詩送別。嗟羨不已。世所稱存養先生是也。是生諱,潎。司勇。母夫人珍原吳氏。進士彭壽女。有至性篤行。以嘉靖乙巳八月日生公。幼有器度。藻思超絶。稍長。峻潔剛正。風姿玉峙。不爲戲言。進士公奇愛之。期以遠到。十九歲。委禽於咸陽朴參奉文精之女。朴公見其丰姿秀異。氣宇軒昂。亦以遠大期之。其年。捷鄕試第二。入京。晦齋李公見而加敬曰。如某人物。置之顯隆。何所不宜。其推尙之重。可知。宣廟甲戌。以大臣薦。除016_628b光陵參奉。辭以疾不就。明年乙亥。復拜直長不就。己亥四月。拜僉知中樞府事。始入謝。蓋丁酉之亂。與弟吉男及其子澈。收義糧。南原兵賴以無飢。上以爲扶植國脈。多活人命。有是命。公每戒子弟以謹身寡言。毋或忝辱先祖。又常擧古人格言善行。俾爲之法。不免內困。而常暇貸以給。尤謹於辭受。雖交知所饋。非義則輒却之。雅不喜紛華。竹素書畫之外無他好。不談財利爭訟之事。門庭之內。不設聲妓博奕翫好之物。此皆本自家之法。而亦公之天性然也。同時流輩。咸謂一第不足取。而不幸數奇。生居草野。身極蹇躓。016_628c用不究才。論議惜之。前後喪。皆廬墓三年。每朝夕上食。哭泣之戚。感動閭閈。祭饌必自其手。不委之婢僕。與李栗谷曺南溟。爲忘年之友。南溟則稱曰。氣味心事峻潔貞固者。罕見如此人。栗谷曰。不爲崖異之行衒飾之態者。始見此人矣。平居。必晨謁家廟。出入必告。執友有過。輒加規正。或見其持心不韙者則雖其爲人一時所尊重者。而直斥不撓。以是多忤時論。屢蹈禍機。而亦不之悔也。公自乙巳三月九日。偶得奇疾。不幸於翌年丙午正月二十一日卒。得年六十二。以遺命不書官職。三月。葬于羅州尺洞甑峴丑坐之016_628d原。公配朴氏。先公二年而卒。合爲一窆焉。有子四人。男子子二人。女子子二人。男長澈。主簿。次澂。奉事。女適金拭。次適李榮先。主簿二男三女。男長由巘。女適金宗慶。餘幼。奉事三男一女。男長由峽。餘幼。內外孫總若干人。嗚呼。公自幼仰奉庭訓。以溫厚持心。謹潔制行。事進士公無少違。與二弟一妹。盡其友愛之道。奉祭事。必以誠愨。待宗族。必務和睦。接朋友。必事款密。平生不作矯飾之態。躁暴忿厲之言。不出於口。傷人傲物之念。不萌於心。一見輒知其爲善人長者。公卒而有年。墓道無文。公之子澈。類公之行。以不朽之016_629a圖。來請狀於尙重。尙重竊惟公平日言行。亦可謂聞之熟矣。於此不敢以無文辭焉。公雖未及積學攻文以廣其志業。然其著於身修於家。皆誠實粹白。表裏一致。雖巧毀者。不敢以惡聲加焉。所謂談義理。通古今者。夷考其實。不能無遜於公。豈非公生質之美。宅心之善。有大過人者耶。顧公屈跡鄕閭。才未得展於當時。壽又未極於耇耋。天之報施。抑何舛歟。惟其令德懿行。不可泯泯無傳。略加詮次。以俟立言君子之採擇焉。
歲著雍涒灘之四月上澣。嘉善大夫。同知經筵事016_629b司諫院大司諫朔寧崔尙重。謹識。

崔公 福男 行狀 [尹濟弘]
余嘗奉使過朗州。先訪鹿洞書院。是維煙村崔先生俎豆之所。遂摳衣升堂。磬折審眠。下階再拜訖。退與院中諸生。揚扢古蹟。頫仰三百餘年。其遺風遺俗。尙藹然如可見。令人感慕徘徊不能去。先生當英陵盛際。早年羽儀。翺翔於翰苑,玉署。出爲南原。則卜築於月出山下以居之。扁其樓曰存養。若將終身。逮顯陵御極。召拜藝文館直提學。方進塗大闢。而決意勇退。告老歸鄕。當時賢士大夫。皆爲歌詩以榮其行。後數年。莊陵遜位。六臣遘禍。尤齋宋文正公尙論016_629c先生。以朱門之正學。大易之知幾推之。嗚呼賢哉。自後世有令聞。山堂公以先生孫。受業於寒暄門。姿質英邁。學問正大。以明人倫闢異端爲己任。又三世。有諱福男。字德胤。是爲僉樞公。公之賢德至行。無愧爲煙村,山堂之孫。崔氏之門。一何多賢也。鼻祖諱阿。籍完山。仕高麗侍中。諡文成公。是生諱龍鳳。中郞將。是生諱乙仁。司醞直長。是生諱霮。我朝集賢殿提學。號月塘。自是大顯。是生諱德之。實煙村先生。於公爲五世祖。是生諱潎。司勇。是生諱忠成。卽山堂公。是生諱演文。蔭補萬戶。是生諱彥潾。成均進士。卽公考也。妣016_629d珍原吳氏。進士彭壽女。以嘉靖乙巳八月日生公。公幼嬉。志屹然。警慧絶出。纔扶床。玉峙剛潔。絶無兒戲。進士公奇之。年十九。咸陽朴參奉文精。一見大歎異之。妻以女。是年秋。中鄕試。入京。晦齋李公見之。大加敬重曰。如某年雖少。置之隆顯。無所不宜。宣廟甲戌。相臣薦除光陵參奉。辭以疾。乙亥。陞直長不就。丁酉之亂。輸義糧。南原兵賴以全。己亥。上聞而甚嘉之。敎以扶植國脈。多活人命。超拜僉知中樞府事。以特恩入謝。居家。晨興謁祠宇。退以齋坐。以古人格言善行訓後進。以爲家法。終身無疾言遽色。戒子弟。必016_630a以謹身寡言。無忝辱先祖爲重。家甚貧。饘粥不繼。尤謹於辭受。苟或以非義至者。去之若凂。雅不爲紛華。四壁圖書而已。事親務養志。居喪主寧戚。廬墓三年。常如袒括日。祭之也必致著存。雖蔥韭之微。手自斷切。與二弟一妹。盡其友于之道。湛樂至老不少衰。與曺南溟,李栗谷兩先生爲忘年友。南溟曰。氣味心事。峻潔貞固。栗谷曰。不爲崖異之行。衒飾之態者。始見此人。常自矯矯不苟合。見不善如坐塗炭。雖其人隆顯可畏者。必正色面折之。是以。多忤於世。或有厭薄而媒孼之者。終亦不之悔焉。丙午正月二十一日卒。016_630b享年六十二。遺命不書職。三月。葬于羅州尺洞甑峴丑坐之原。朴氏克有梱範。先公二年卒。墓合封焉。有二男二女。長男澈。主簿。澂。奉事。女適金拭。次李榮先。主簿。二男三女。男長由巘。女適金宗慶。奉事。三男一女。男長由峽。內外孫曾。不多記。嗚呼。公以若剛方之性。篤至之行。宜其乘運高蹈。展布所蘊。足以振世敎。正士趨。措國勢於鼎呂。而事與心違。命與世仇。隱約遐陬。韜晦以終。至于今諶於古乘。往往有慨然興歎者。此所謂有命者存。而不可以才德致者耶。公以存養山堂兩先生爲祖。又進士公性嚴峻。敎以義方。吳016_630c夫人亦有令德懿範。所以公之成就。若是其貞固深厚。雖公生質之美。亦豈無所自而然歟。顧余後公世遠矣。且其家藏文蹟。蕩散於兵燹之餘。其學業造詣之淺深。平生著述之豐約。有未得其詳。而今就其家庭記聞。士夫傳錄者而觀之。其天資峻潔。風標秀異。讀書飾躬。誠實粹白。孝友之敦。訓戒之要。其必大有得力於洛閩法門。且嘗從事擧業。早年蜚英。若將有爲於當世。及登薦剡。一再除命。力辭不就。因不赴擧。似非偶然而然。必有秉執之可據。遺事所謂多忤於世。或有厭薄而媒孼云者。果何指也。抑無乃當時世016_630d途。別有拘礙難進之端耶。斂以藏之。甘忍窮枯於荒山野水之濱者。卽亦審愼出處之義。非直果於忘世者歟。不然則晦齋李先生何以曰。置之隆顯。無所不宜。南溟曺先生何以許之以峻潔貞固。栗谷李先生何以稱曰。不爲崖異之行。衒飾之態。噫。三先生卽我東大賢長德也。明足以知人。言足以爲法。觀公之言。聽公之言。而乃有此稱道者。眞可謂不易之定論也。善觀者。有以徵公之賢於百世之下者其在斯歟。其在斯歟。是爲狀。
崇禎紀元後二百二年戊子夏。通政大夫行承政院016_631a同副承旨兼經筵參贊官坡山尹濟弘。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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