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세 휘 덕지 등/연촌공과 녹동서원

연촌유사 관련 자료

아베베1 2016. 3. 21. 00:37



문집명연촌유사 (烟村遺事)(15-16c)
간략서지古 4650-20烟村 崔德之의 문집. 1책.
간략해제1805(순조 5) 崔世榮이 편찬하였다. 표지에는 문집명이 ≪烟村集≫으로 되어 있고‚ 序·目錄·판심 등에는 모두 ≪烟村遺事≫로 되어 있다. 또 목록과 <先生出處事蹟>의 卷頭에는 ≪연촌유사≫로 제목을 달고 번호를 매기고‚ <論貢法踏驗便否疏>의 권두에는 ≪烟村遺稿≫로 제목을 달고 번호를 매기고 있다. 이상의 경우처럼 문집명이 일관성이 없지만 서문과 발문을 보면 문집 제작 당시 ≪연촌유사≫를 만들려고 했다는 주장을 확인할 수 있어 본문집의 제목을 ≪烟村遺事≫로 통일한다. 본 문집에서 소 1편과 시 3수만이 최덕지의 저술이고‚ 대부분은 최덕지의 관직 사퇴를 연유로 쓴 전별시와 그가 학문을 연마한 존양루의 제영시로 되어 있다. 또 부록으로 <叅議公遺事>는 최덕지 부친의 2수의 시를 말하고 <少尹公墓碣>은 호조참의를 지낸 그의 셋째 형 최득지를 가리킨다.
편저자최덕지 (崔德之)
저자개요1384-1455 (우왕10-세조1)字: 可久‚ 號: 烟村·存養·迂叟‚ 本貫: 全州‚ 父: 霮‚ 母: 全州 朴氏
저자내용1405(태종 5) 식년문과에 同進士로 급제한 뒤 추천을 받아 사관이 되었고‚ 1409년 교서관정자로서 圜丘壇에서 기우제를 지낼 때 五帝祭文을 준비 못하여 한때 투옥되었다. 뒤에 감찰 등 三司의 淸要職을 거쳐‚ 외관으로 김제군수·남원부사 등 여러 주·군을 다스렸다. 남원부사를 사퇴한 뒤 영암의 永保村에 내려가 학문연구에 몰두하였는데 이 때 존양이라는 호를 사용하였다. 문종이 즉위하자 그를 불러 예문관직제학에 임명‚ 그의 학문을 높이 평가하였으나 그는 아직 치사할 나이가 안되었는 데도 연로함을 이유로 사직하고 고향으로 내려갔다. 당시 풍습으로 볼 때 명예로운 직책을 사임하고 귀향하는 경우가 드물었으므로 동료들은 그의 높은 덕과 행동을 칭송하며‚ 다투어 시부를 지어주고 노자를 마련해 주었다. 72세에 죽으니 영암의 주민들이 사당을 세워 제사하고 存養祠라 이름지었다. 그는 세종 때 배출된 많은 학자 중 한 사람으로 정치적 격동에 휘말리지 않고 문신이자 학자로서 명예로운 삶을 마쳤다. 전주의 西山祠·남원의 舟巖書院·영암의 鹿洞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내용제목烟村遺事 내용개요청구기호古 4650-20
권수권제목:
제목 없음.1805. 宋煥箕(1728-1807)가 ≪연촌유사≫의 중간에 즈음하여 최덕지의 후손 爀과 趾欽의 부탁으로 서문을 짓게 되었다. 송환기는 자신의 선조인 송시열이 최덕지의 ≪연촌유사≫에 발문을 썼다는 사실을 알고 직접 ≪연촌유사≫를 보려고 했지만 그러지 못하다 이번을 기회로 보게 되었다고 술회함. 전란으로 최덕지의 시문집이 전란으로 소실되어 본 문집에는 一疏‚ 二詩 밖에 수록되지 않았지만 당대 제현들의 제영을 보면 그의 덕망을 알 수 있다고 함. 또 여러 서와 발 중에서 澤堂 李植이 최덕지를 淳德·高節·正學으로 높이 평가한다는 사실을 적고 있다. 최덕지의 ≪연촌유사≫를 편집하면서 동시에 그의 손자인 崔忠成(1458-1491)의 ≪산당집≫을 편집했는데 송환기 본인이 두 사람 문집의 서문을 쓰면서 문집을 검토해 보니 최씨 가문의 世德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先生出處事蹟 (1) 최덕지의 가계·관직·절의 등을 기록하고 있다. 남원부사를 끝으로 나이를 들어 사직한 뒤 영암의 영보촌에서 존양루를 짓고 존심양성의 연구에 몰입했다. 영암은 벽촌으로 문교의 영향을 받지 못하다가 최덕지의 노력으로 문화를 접하게 되었다. 또 영조대에 와서 향인들이 사우를 건립하여 그의 학덕을 추모하려고 한 일을 적고 있다.
烟村遺稿∕論貢法踏驗便否疏 (1) 이 소는 조세의 단위와 면세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토지의 등급을 정해 조세를 징수하게 되면 토질의 다양함과 작황의 불규칙함이 조세에 제대로 반영되지 않는다. 특정 경작지를 몇 등급이라고 규정하더라도 실제 경작지가 규정된 등급에 완전히 일치할 수 없다고 본다. 그래서 그는 토지의 등급 단위보다는 경작지 소출을 단위로 조세를 부과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물론 경작자의 태만‚ 소출량에 대한 민과 관의 조작 가능성을 예상할 수 있지만 그것은 제도의 운용의 문제이지 제도 존폐와 관련이 없다고 반란을 제기한다. 손실답험법은 자연재해나 병충해로 손실된 작황을 경작지에서 실측하여 조세의 면제 정도를 결정하는 제도이다. 관리와 민이 이 제도를 악용할 소지가 있지만 민의 고통을 덜어주는 측면이 있기 때문에 실보다는 득이 더 많다고 주장한다.
題存養樓(二首)
貢院唱和詩: 序(朴彭年)‚ 原韻-幷小序(河演)‚ 次韻(李思哲‚ 名氏失傳‚ 申叔舟‚ 成三問‚ 辛碩祖‚ 河緯地‚ 徐居正‚ 崔德之‚ 李石亨‚ 姜希孟‚ 柳誠源) 退休時送別詩序(李芮): 有美辭送崔先生-東文選載錄(柳誠源‚ 成三問‚ 李塏‚ 河緯地‚ 鄭麟趾‚ 申叔舟‚ 辛碩祖‚ 徐居正‚ 金淡‚ 尹子雲‚ 徐岡‚ 李孝長‚ 崔善復‚ 李承召‚ 韓瑞鳳‚ 尹起畝‚ 朴元貞‚ 沈愼‚ 金潤福‚ 金之慶‚ 金孝寧‚ 金禮蒙‚ 辛永孫‚ 洪若治‚ 金勇‚ 金鉤‚ 崔恒‚ 崔興孝)‚ 跋(朴彭年)追詠(金宗瑞‚ 安止‚ 金銚‚ 金先齊‚ 鄭麟趾‚ 河演‚ 安崇信‚ 權孟孫‚ 鄭鄰‚ 李石亨‚ 失其姓名‚ 李淑瑊‚ 成任)
제목 없음.存養樓記 (20) 
제목 없음.1446. 최덕지 본인의 부탁으로 그와 동년인 紆山 宋乙開가 지었다. 먼저 존양루의 위치와 조경을 설명하는데 특히 주위 풍광의 아름다움을 봄날 꽃을 보면 그림 속에 있는 듯하고 가을날 달을 마주 대하고 있노라면 학을 타고 노는 듯하다고 묘사하고 있다. 그는 존양루에서 손님이 찾아오면 신발을 거꾸로 끌며 반갑게 맞이하고 루에 올라 <伐木> 시를 읊조리며 유유자적한 생활을 했다. 그의 이러한 행태에 대해 주위에서 그의 마음은 선수의 즐거움에만 얽매여 있으니 병통이 아닌가‚ 또 어느 겨를에 마음을 보존하고 본성을 길러서 루각의 이름에 부합될 수 있겠는가‚ 결국 그는 바람이나 그림자를 잡으려는 게 아닌가(捕風繫影) 라는 말이 있었다. 이에 대해 송을개는 다음과 같이 반박한다. 군자의 마음은 진실로 포착하기 어렵다. 일례로 범중암은 악양루에 올랐지만 루의 장관을 즐거움으로 삼지 않고 세상에 앞서 근심했고 세상보다 뒤에 즐거워하겠다는 포부를 가지게 되었다. 최덕지도 일찍 출사하여 여러 관직을 지내면서도 권세에 굴복하지 않고 자신의 포부가 조정에서 반영되지 않자 관직에 물러났다. 루각의 명명은 물에 나아가 이치를 터득하여 자신을 수양하려는 것(卽物觀理)으로 보아야 한다. 일례를 든다면 강산의 험준함을 보고서 명예가 사람을 압도함이 태행산이 수레를 엎어버림보다 심각하다는 점을 이해하게 된다고 한다.
題存養樓(李石亨‚ 愼幾‚ 尹自堅)‚ 次韻(崔孝孫‚ 崔興孝‚ 高等宗‚ 奇虔‚ 金國光‚ 辛永孫‚ 金晐‚ 閔孝悅‚ 李徽‚ 朴居明‚ 元自直‚ 金連枝‚ 安德孫)‚ 追詠(愼喜男‚ 閔德鳳‚ 崔鳴吉‚ 李景奭‚ 崔應亨‚ 崔珽)‚ 題存養書院-幷序(金壽恒)
題烟村先生畵像 (26) 金鎭商(1684-1755)이 최덕지의 관직에서 조기 사직한 일과 유상에 나타난 얼굴에 가득찬 소탈하며 질박한 기상을 읊고 있다.
書院請額疏 (27) 金昌協(1651-1708)이 제진했고 신유(1681) 생원 柳章玉 등 85명이 연명으로 상소를 올렸다. 최덕지가 관직을 조기 사직하고 존양사를 지어 정학 연구에 진력한 점을 들어 사원의 사액을 요청하는 글. 관직에 한 번 그만둘 줄 모른 채 봉록에 연연하고 군주의 총애를 탐하는 경우가 많다. 반대로 산림에 은둔하는 사류 중에는 자신의 고결함을 기치로 내걸고 優游放曠하며 현실의 문제를 무시한다. 후자는 부귀에 빠져 헤어나지 못하는 경우보다는 낫지만 올바른 처신이라고 할 수 없다. 최덕지의 경우 治化가 융성했던 세종과 문종 대에 벼슬살이하면서 일찍 사퇴하고 맹자의 존심양성을 추구하기 위해 존양사를 짓고 정학 연구에 매진했다.
畵像贊 (29) 사태 전환의 미묘한 전기를 포착하여 위험한 상황에 생활하면서 더욱 편안함을 누렸던 최덕지의 학덕을 칭송함. 愼天翊(1592-1661)이 지었다.
畵像改粧贊 (29) 제목 밑 소기를 보면 1610년 4월에 龍山에서 개장하고 1635년 2월에 德津橋에 봉안했다고 한다. 최적지의 명철보신을 칭송함.
亂後文稿收錄誌 (29) 1621. 먼저 구양수의 三不朽로 글을 시작한다. 세 가지는 몸 수양이라는 도덕의 측면‚ 사업의 실시라는 공업의 측면‚ 언어적 표현이라는 문장의 측면이다. 세 가지 중 가치면에서 보면 문장이 가장 뒤쳐지지만 문장이 남아 있지 않으면 덕과 공업을 알 수 없게 되니‚ 문집의 필요성이 여기에 있다. 그렇지만 그의 문집은 임진왜란으로 거의 일실되었다. 그 와중에 자손들에게 문집의 일부 남아 있었지만 탈오가 많았다. 정유왜란이 발생하자 앞의 유문과 화상을 창졸 중에 羅州 細花里에 묻어 두었다. 왜적이 물러가고 난 뒤 1년만에 파보니 다행히 보관상태가 양호했다. 후손 珽이 지었다.
烟村崔先生家傳詩文錄後叙 (31) 1630. 정유재란으로 존양루가 소실되고 얼마 안 남은 문집이 산일되었다가 향인들이 최덕지를 위해 사우를 건립하게 되자‚ 그의 7대손 정이 남아 있는 시문과 제현들의 시 90여수를 묶어 문집을 간행하게 되었다. 최덕지의 학덕에 대해 순실한 행실이 군주의 고유문에 나타나 있음으로 淳德함을 알 수 있고‚ 관직을 조기 사직하고 산과 바다로 자신의 형적을 숨겼으니 高節이고‚ 존심양성을 표방하고 루락의 편액을 쓰고 경계로 삼았으니 正學임을 알 수 있다고 평가한다. 또 최덕지가 관직을 조기에 사퇴함으로써 단종과 세종의 왕위 분쟁에 연루되지 않은 점을 두고 명철보신으로 보는 시각을 반대한다. 정치적 사건은 천수이기 때문에 그가 아무리 명지하더라도 예상할 수 없다. 李植(1584-1647)이 지었다.
烟村先生遺事跋 (32) 최덕지의 8대손 榮夢과 邦彦이 구본의 탈오를 교정하여 문집을 중간하려고 할 때 宋時烈(1607-1689)이 쓴 발문. 송은 최덕지의 ‘손실답험’이 ≪주자대전≫에도 자주 보일 뿐만 아니라 주희가 열성적으로 실현하려고 했고‚ ‘業去稅存’ 4자의 경우 주희가 당시 현실에 통탄하며 개혁을 하려다 吳禹圭의 중상을 받은 적이 있다. 이 사실을 500여년이 지난 뒤 최덕지의 글에서 다시금 확인하게 되니 이식의 평가 중 정학이라는 말이 실제에 부합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위의 말 중 업거는 주자의 주장과 조금 차이가 있고‚ 많은 서발문 중에 이식의 글이 가장 자세하고 인용의 전거도 풍부하지만 知幾 부분은 조금 부족하다고 주장한다.
題烟村崔先生遺事後 (33)  최덕지의 후손 방언의 부탁으로 朴世采(1631-1695)가 쓴 글. 최덕지는 완전한 덕성으로 세상의 모범이 되어 사람들도 그의 현능의 사실은 알지만 왜 현능하게 되었는지 이유를 모른다고 하며 안타까워하고 있다.
烟村崔先生家錄後跋 (34) 송시열의 발문 중에 이식의 글을 일부 회의하는 귀절이 있었는데‚ 최덕지의 후손이 이 점의 해명을 위해 李端夏(1625-1689)에게 부탁하여 쓰게 된 글.
附元直學碣銘畧 (36) 생육신의 한 사람인 元昊의 묘갈명에서 최덕지 관련 사항을 전재한 글. 최덕지는 관직을 조기 사직한 연유로 단종과 세조의 왕위 계승 분쟁에 연루되지 않았다. 그러나 최덕지의 출처를 성삼문의 절의와 異塗同歸로 보고 “김시습은 오늘날의 伯夷이고 사육신은 오늘날의 方練이고 烟村霧巷도 사육신과 견주더라도 뒤지지 않는다”라는 구절에 대해 무항은 원호가 거처하던 장소이고 연촌은 최적지를 가리킨다고 설명한다. 이처럼 최덕지를 높이는 이유로 그의 見幾勇退를 들고 있다.
권말권제목:附錄(叅議公遺事)


朴  晉   郡守父病棄官歸侍常不離側夜不解帶藥必先嘗父殆作詩遺晉曰八十年嘗臥蟻床六旬老子藥先嘗死生有命終難避近汝慈墳
           立壽堂及父卒葬祭以禮廬墓三年 太祖七年 旌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