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임진년산행 /2012.9.10. 도봉산

2012.9.10. 도봉산 산행 (도봉산 계곡)

아베베1 2012. 9. 10. 20:09




홍재전서 제6권
 시(詩) 2
야차(野次)에서 만장봉(萬丈峯)에 제하다


큰 용의 몸통 줄기가 뻗쳐 나와서 / 大龍抽正榦
그 형세 천 리를 굼틀굼틀 내려왔네 / 千里勢蜿蜒
칼 차고 달려와 대궐을 호위하는 듯 / 劒佩趨環闕
홀 들고 엄연히 임금님을 향하는 듯 / 珪璋儼拱天
터전은 만세에 길이 굉장하겠거니와 / 基宏於萬世
공렬은 풍년이 잦은 데에 너르도다 / 功博屢豐年
지나는 길에 글 읽는 소리 들리어라 / 過路聞絃誦
넉넉히 한 구렁을 독차지할 만하구나 / 剩敎一壑專

嘉梧藁略冊四 月城李裕元景春著
 
萬丈峯歌 a_315_119d


漢北名山諸嶽宗。有峰有峰萬丈峯。不咸落來鐵嶺315_120a峻。分水一脉白雲鍾。蜿蜒而行復回旋。神鳳翥舞挹老龍。中祖特立殿王京。天作高城壯垣墉。千里來勢精靈秘。萬古秀氣雲霄衝。猗乎根固枝幹列。玉以琢之金以鎔。眞相磅礴共媧柱。古色蒼健商周鐘。巨靈仙人壯大軀。天竺先生儼然容。有時起霧拂冠冕。如聞北闕鳴五琮。有時出雲作霖雨。須臾南畒慰三農。有時霞葆羽盖張。滿眼蒼翠揷杉松。過客魂夢有時驚。身遍金粟髮髼鬆。天送西風雲霧捲。空中欲墮玉芙蓉。緬惟渾然中處地。夫子端拱座和雍。屹屹其志巨人在。巖巖之像天下從。聖人大闢萬年基。壁立千315_120b仞道中庸。欝䓗佳氣帝王居。三角崒嵂望重重。千一休運民物育。五江縈抱來溶溶。文明肹蠁彬彬會。毓靈禀淑賁笙鏞。君不見七千七百七十丈。霍山之上無人逢。又不見泰山頂上已不屬泰山。道軆無窮拓心胷。



























한수재선생문집 제22권
 기(記)
소광정기(昭曠亭記)


도봉(道峯)은 옛날 영국사(寧國寺) 유지(遺址)가 있던 곳이다. 봉만(峯巒)이 빼어나고 수석(水石)이 깨끗하여 본디부터 기내(畿內) 제일의 명구(名區)로 일컬어졌다. 만력(萬曆 명 신종) 계유년에 사옥(祀屋)이 창건되어 마침내 서울 동교(東郊)의 대유원(大儒院)이 되었다. 그런데 그 사체와 규모가 성균관에 다음가므로, 서울의 선비들이 여기에 많이 모여들었다. 그리고 강당(講堂)의 서쪽으로 백 보를 다 못 가서 시내 위에 조그마한 대(臺)를 지어 무우(舞雩)라 이름하고, 대의 동쪽으로 문(門)을 내어 이를 영귀(詠歸)라 이름하였으니, 대체로 증점(曾點)이 무우에서 바람 쐬고 읊으며 돌아오겠다던 뜻을 취한 것이다.
대의 남쪽 시내 건너편에는 푸른 절벽이 우뚝 솟아 있는데, 여기에는 동춘 선생(同春先生)이 쓴 여덟 대자(大字)가 있고, 그 아래에는 큰 바위가 시내 위에 가로 뻗치어 있는데 여기에는 우재 선생(尤齋先生)이 회옹(晦翁)의 시(詩) 두 구(句)를 한데 써서 모아 놓은 것이 있는바 그 필세(筆勢)가 매우 힘차서 만장봉(萬丈峯)과 기세가 서로 등등하다. 그런데 계사년 여름에 큰비가 와서 홍수가 산을 삼켜버림으로 인하여 절벽이 갈라지고 암석이 빠져 떠내려감으로써, 무우대와 영귀문은 주춧돌이 뽑히었고 두 선생의 필적도 어지러이 표류되었으니, 참으로 고금에 없던 변고였다. 그로부터 수년 뒤에는 대(大)가 물러가고 소(小)가 옴으로써 소인들의 중상(中傷)이 두 선생의 묘향(廟享)에까지 미칠 뻔하였으니, 이것이 어찌 하늘이 사문(斯文)의 변이 일어날 것을 걱정하여 먼저 그 조짐을 보여 준 것이 아니었겠는가.
그리하여 친구 파평(坡平) 윤봉구 서응(尹鳳九瑞膺)이 바야흐로 원사(院事)를 주관하여 이에 침류당(枕流堂) 남쪽 가 빈 땅에다 영귀문을 세우고, 조금 아래 시냇가의 깎아지른 절벽 꼭대기를 편편하게 닦아서 무우대를 지었다. 이는 대체로 구기(舊基)가 이미 파여서 못 쓰게 됨으로써 부득불 겁수(劫水)에도 안전할 수 있는 지금의 위치로 옮겨 짓게 되었으니, 또한 기이하지 않겠는가.
무우대 아래에 두어 길쯤 되는 폭포가 있고, 폭포 밑 오목한 암석 바닥에는 물이 돌아들어 담(潭)을 이루었으며, 담 남쪽에는 울퉁불퉁한 흰 암석이 있어 5, 60인이 앉을 만하니, 맑은 경치가 이전에 건축한 곳보다 나았다. 담 북쪽에는 기수(沂水) 두 글자를 새겼으니, 이는 무우와 영귀의 뜻이 본래 기수에 목욕한다는[浴沂] 데서 나왔기 때문이다. 그리고 마침내 두 선생이 옛날에 쓴 필적의 진본을 돌에 새기고 또 무우대(舞雩臺) 세 글자를 그 곁에 새겨 놓으니, 이에 문(門)과 대(臺)의 필적이 한결같이 다 복구되어, 사람들이 모두 중신(重新)한 것임을 모를 정도이다.
그러나 새로 지은 건물 좌우에는 그 위를 그늘지어 줄 소나무나 노송나무가 없으므로, 이곳에 오르는 이들이 이를 흠으로 여겼다. 그러자 서응(瑞膺)이 등나무와 풀숲 속을 헤치고 들어가 남쪽 비탈의 층암(層巖) 위에서 조그마한 돈대(墩臺) 하나를 찾아내어 이곳의 잡초 등 지저분한 것들을 깨끗이 제거하고 나니, 사방의 넓이가 기둥 4개를 세울 만하였다. 그런데 이곳에서 보면 저 돌아드는 물과 깔려 있는 암석은 바로 눈 밑에 있고, 무우대와 두 석각(石刻)과 튼튼한 장옥(墻屋)과 우뚝우뚝 솟은 봉만(峯巒)들이 모두 조망(眺望) 가운데 죽 배열되었으니, 그 누가 이렇게 그윽한 속에 이토록 밝게 탁 트인 지경이 있으리라고 생각했겠는가. 혹 조화옹(造化翁)이 짐짓 이곳을 비장(秘藏)해 두었다가 호사자(好事者)를 기다려서 내놓은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그리하여 마침내 여기에 모정(茅亭) 한 칸을 지어 소나무와 노송나무의 그늘을 대신하니, 그 제도가 정밀하면서도 사치스럽지 않아서 산중의 한 가지 진기한 완상거리가 되기에 충분하다. 서응의 성근한 뜻이 아니면 그 누가 이 일을 해냈겠는가.
서응이 하루는 나에게 와서 이 모정의 이름을 묻기에, 내가 말하기를 “학자가 학문을 끝까지 힘써 연구하다가 활연관통(豁然貫通)의 경지에 이르면 고인(古人)이 이를 일러 소광(昭曠)의 근원을 보았다고 하였는데, 지금 이 동(洞)에 들어온 이들도 언덕을 경유하고 골짜기를 찾아서 여기에 오르고 나면 가슴이 시원하게 탁 트일 것이니, 그 기상이 저 소광의 근원을 본 것과 서로 같을 것이다.” 하고는, 마침내 소광정(昭曠亭)이란 세 글자로 제명(題名)하고 아울러 그 전후의 사실을 기록하여 문지방 사이에 걸도록 하노니, 후일 이 원(院)에 노닐고 이 정자에 오르는 이들은 이 명칭을 돌아보아서 더욱 힘쓰기 바라는 바이다.

[주D-001]증점(曾點)이 …… 뜻 : 공자가 제자들에게 각자의 뜻을 물었을 때, 증점이 말하기를 “늦은 봄에 봄옷이 이루어지면 관자(冠者) 5, 6명과 동자(童子) 6, 7명으로 더불어 기수(沂水)에서 목욕하고 무우(舞雩)에서 바람 쐬고 읊으며 돌아오겠습니다.”고 한 것을 말한다. 《論語 先進》
[주D-002]대(大)가 …… 옴으로써 : 대는 양(陽)으로서 군자의 도를 뜻하고, 소(小)는 음(陰)으로서 소인의 도를 뜻한다. 《周易 否卦》
[주D-003]겁수(劫水) : 불가(佛家)의 말로, 세계가 괴멸(壞滅)할 때에 일어난다는 큰 수재(水災)를 말한다.

   




















弼雲詩稿册一
 [詩]
讀書道峯。敀路歷入北漢寺。忽遇同志諸友呼韵。 b_058_122b


萬丈峯頭翳晩暉。三旬齋舍講書敀。奔趍白足迎蘿巷。邂逅靑眸坐石磯。殘雪欲迷尋寺路。暮雲猶濕下山衣。賞花勝會前期在。留待春風共浴沂。