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임진년산행 /2012.9.10. 도봉산

2012.9.10. 도봉산 산행 가을날의 도봉산 바위들 ..

아베베1 2012. 9. 10. 20:26

















































서계집 제2권
 시(詩)○석천록 상(石泉錄上) 무신년(1668, 현종9)에 선생이 벼슬을 그만두고 물러나 석천에 거처한 이후에 지은 것이다.
사예 조여길(趙汝吉)이 도봉서원(道峯書院)에 있다는 소식을 도중에 듣고서 가서 유숙하고, 이어 그 시에 차운하다


말을 멈춘 채 사람 만나 얘기 나누고서 / 駐馬逢人說
그대가 어제 도성을 나간 줄 알았어라 / 知君昨出城
바야흐로 시내를 지나가려다가 / 方將過溪去
도리어 숲 속 길로 접어들었네 / 却復入林行
눈 아래엔 푸른 산이 펼쳐지는데 / 眼底靑山在
머리 가엔 흰 머리털이 생겼구려 / 頭邊白髮生
계창에서 지난 십 년 얘기하다가 / 鷄窓十年事
졸다 깨어 새벽 시간을 묻노라 / 睡醒問殘更



권하노니 그대 일이 없거든 우선 머물러 / 勸君無事且遲留
모쪼록 다시 한 번 깊은 골 찾아보게나 / 深處應須更一搜
야윈 말 채찍질하여 도성으로 들어간 뒤에는 / 從此鞭羸入城去
이 운산이 좋다지만 속절없이 그리워하리니 / 雲山雖好謾回頭



형창에서 옛적 독서하던 소년이 / 螢窓昔日少年生
백발에 다시 이곳에 찾아왔네 / 白首還從此地行
산새와 물고기 모두 낯이 익건만 / 山鳥溪魚皆舊識
하염없는 세월만 홀로 무정하여라 / 悠悠歲月獨無情

[주C-001]도봉서원(道峯書院) : 1573년(선조6) 조광조(趙光祖)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여 위패를 봉안하였다. 창건 때 ‘도봉(道峯)’이라는 사액(賜額)을 받았고, 1696년(숙종22)에는 송시열(宋時烈)을 배향하였다. 서울시 도봉구 도봉동에 있다.
[주D-001]계창(鷄窓) : 서재를 말한다. 진(晉)나라 때 연주 자사(兗州刺史) 송처종(宋處宗)이 잘 우는 닭 한 마리를 사서 항상 서재 창 사이의 조롱에 두고 매우 사랑하며 길렀다. 닭이 마침내 말을 하게 되어 송처종과 담론하였는데 매우 말재주가 있어 종일토록 그치지 않았다. 송처종이 이로 인해 언변이 크게 진전하였다 한다. 《幽明錄》



청음집 제2권
 칠언절구(七言絶句) 110수(一百十首)
사제(舍弟) 중정(仲靜)이 나를 전송하기 위해 도봉(道峰)에 이르렀기에 이별에 임해서 써서 주다 2수

동문 밖서 길 떠나자 헤어짐이 아쉬워서 / 靑門行色惜分携
말 뒤 따라 오다 보니 해가 서산 기울었네 / 相逐征鞍至日西
곳곳마다 한스러운 소리 귀에 들리는데 / 到處恨聲偏入耳
골짜기엔 낙엽 지고 말은 발굽 뒤치누나 / 夾溪乾葉馬飜蹄

너의 말은 히힝 울고 나의 말은 슬피 울며 / 君馬蕭蕭我馬悲
갈래길이 나뉜 곳서 다시금 또 머뭇대네 / 路歧分處更躕踟
가을 산은 참담하고 찬 시냇물 흐느끼니 / 秋山慘澹寒泉咽
헤어진 이 만났다가 다시 이별하는 때네 / 邂逅離人去住時


홍재전서 제6권
 시(詩) 2
도봉(道峯)으로 가는 도중에 장주(長洲)에게 주다

만장봉 앞에 말을 멈추는 때에는 / 萬丈峯前駐馬時
누구나 건복 차림에 들어가길 머뭇거리리 / 也誰巾服入然疑
땅은 비록 지척에 있으나 천 리와 같으니 / 地雖咫尺猶千里
다시 화창한 봄날로 야유회를 기약하세나 / 更卜春風野外期

[주C-001]장주(長洲) : 정조(正祖) 때의 문신(文臣)인 황승원(黃昇源)의 호이다.



간이집 제6권
 초미록(焦尾錄)
차운하여 도봉서원(道峯書院)에 제하다. 도봉이란 이름은 옛날 이곳에 사찰(寺刹)이 처음 창건될 때부터 붙여졌다고 한다.

옛 절터에 새 서원 영욕이 서로 점철된 듯 / 榮辱新規與舊基
도봉이란 그 이름 기이한 인연을 깨닫겠네 / 道峯終覺設名奇
봉우리마다 수려한 빛 하늘을 향해 치솟았고 / 巖巖秀色當空聳
콸콸 흐르는 찬 시냇물 잠시도 쉬질 않는구나 / 活活寒流不蹔衰
선현을 모신 이곳 혼령이 오르내리나니 / 揭妥前賢森陟降
학문 닦는 후학이여 미위를 삼가 살필지라 / 藏脩後學謹微危
만정의 이적보단 정사가 더 낫고말고 / 幔亭異迹輸精舍
오늘날 우리 동방 무이정사(武夷精舍)를 보겠도다 / 今見吾東一武夷

[주C-001]도봉서원(道峯書院) : 선조(宣祖) 6년(1573)에 조광조(趙光祖)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하여 도봉산에 세워진 사액(賜額) 서원이다.
[주D-001]미위(微危) : 《서경(書經)》 대우모(大禹謨)에 나오는 바 “인심은 위태하고 도심은 은미하니, 오직 정밀하고 일관되게 하여 그 중도(中道)를 진실로 잡아야 한다.[人心惟危 道心惟微 惟精惟一 允執厥中]”라는 16자(字)를 압축해서 말한 것이다. 주희(朱熹) 등 송유(宋儒)가 이것을 요(堯)ㆍ순(舜)ㆍ우(禹) 세 성인이 서로 도통(道統)을 주고받은 십륙자심전(十六字心傳)이라고 강조한 뒤로부터, 개인의 도덕 수양과 치국(治國)의 원리로 숭상되어 왔다.
[주D-002]만정(幔亭)의 …… 낫고말고 : 만정은 무이산(武夷山)의 산신인 무이군(武夷君)이 진 시황(秦始皇) 2년에 마을 사람들을 산꼭대기로 초청하여 만정(幔亭)의 연회를 베풀고 술과 음식을 주었다는 ‘무이만정(武夷幔亭)’의 고사를 말한다. 《雲笈七籤 卷96》 정사(精舍)는 주희(朱熹)가 한탁주(韓侂冑)를 피하여 무이산으로 들어가서 문인들과 함께 강학(講學)을 하였던 무이정사(武夷精舍)를 말하는데, 여기서는 각각 절간과 서원의 비유로 사용하였다.




홍재전서 제22권
 제문(祭文) 4
도봉서원(道峯書院) 치제문

이해 임자년(1792, 정조16) 중양절 다음 날 아침에 광릉(光陵 세조(世祖)의 능)을 참배하기 위하여 갈 때 길이 선정신 문정공(文正公) 조광조(趙光祖)와 송시열(宋時烈)을 제향하는 서원의 사당 앞으로 나가게 되었는데, 돌아오는 길에 근신(近臣)을 보내어 양현(兩賢)에게 다음의 글로 제사를 드리게 하노라.

절벽이 선 듯한 봉우리여 / 壁立之峯
마치 정암(靜菴)과 우암(尤菴)을 보는 듯하네 / 如覿靜尤
뜻은 요순에 있었고 / 志在堯舜
의는 춘추(春秋)에 밝았네 / 義炳陽秋
땅이 사람과 더불어 만나니 / 地與人遭
양현을 한 서원에 제향하네 / 兩賢一院
광세의 감회가 있어 / 曠世之想
안주와 술을 이에 바치네 / 殽觴是蕆

 해동역사 제32권
 석지(釋志)
명승(名僧)

○ 정 법사(定法師) : 정 법사는 고려 사람이다. 《고시기(古詩紀)》 ○ 살펴보건대, 정 법사의 영고석시(詠孤石詩) 한 수가 《진시(陳詩)》에 실려 있으며, 고려는 바로 고구려이다.
○ 신성(信誠) : 당나라 고종(高宗) 총장(總章) 원년(668) 12월에 고구려를 격파하고 승 신성을 은청광록대부(銀靑光祿大夫)로 삼았는데, 먼저 항복한 데 대해 상을 내린 것이다. 《책부원귀(册府元龜)》 ○ 신성에 대한 일은 본서 인물고(人物考) 천남생전(泉男生傳)에 상세하게 나온다.
○ 혜관(慧灌) : 일본 추고천황(推古天皇) 32년(624)에 고려(高麗)의 승 혜관이 와서 조회하자, 그로 하여금 원흥사(元興寺)에 머물게 하였다. 그해 여름에 크게 가물자 기우(祈雨)하도록 명하였다. 《화한삼재도회(和漢三才圖會)》
○ 혜자(慧慈) : 일본 추고천황 때 고려의 사문(沙門) 혜자가 와서 태자(太子)의 사(師)가 되었는데, 백공(百工)이 모두 혜자를 조사(祖師)로 삼았다. 《상동》
○ 혜편(慧便) : 일본 민달천황(敏達天皇) 13년(584)에 파마국(播磨國)에서 수행(修行)하는 자를 찾아 고려의 승으로서 환속한 자를 찾아내었는데, 이름이 혜편이었다. 《일본서기(日本書紀)》 ○ 살펴보건대, 이상의 혜관, 혜자, 혜편 세 승은 백제의 승인 듯하나, 상고할 수가 없다.
○ 진표(眞表) : 진표는 백제 사람이다. 집이 금산(金山)에 있으며, 대대로 수렵을 일삼았는데, 뒤에 깊은 산속으로 들어가서 칼로 머리카락을 잘랐다. 그러고는 고통스럽게 참회하면서 온몸을 들어 땅에다가 짓찧었으며, 뜻이 계법(戒法)을 구하는 데 있었다. 미륵보살(彌勒菩薩)이 자신에게 계법을 전해 주기를 서원(誓願)하면서 밤을 낮삼아 공력을 쏟았는데, 빙빙 돌면서 물동이를 두드리되, 마음 마음마다 간단(間斷)이 없었고 생각 생각마다 부지런히 하였다. 7일이 지난 다음 아침이 되자, 지장보살(地藏菩薩)이 현신하여 손으로 쇠로 된 석장(錫杖)을 흔들면서 진표를 위하여 가르침을 발하고 계율을 발하였으며, 이어 앞에서 방편(方便)을 주었다. 그러자 진표는 이 상서로움에 감동하여 전보다 더욱더 용맹하게 정진하였다. 14일이 되자, 어떤 커다란 귀신이 무서운 모습으로 나타나서는 진표를 바위 아래로 밀어 떨어뜨렸는데, 진표의 몸이 상한 곳이 없었다. 이에 기어서 석단(石壇) 위로 올라가자, 다시금 마귀의 형상이 끊임없이 나타났는데, 백 가지 천 가지의 형상으로 나타났다. 21일째 되는 날, 아침 동이 틀 무렵에 길한 상서를 나타내는 새가 울면서 말하기를, “보살이 온다.” 하였는데, 이에 보니 흰 구름이 자욱하게 깔려 높고 낮음을 분간할 수가 없고, 산천이 평탄하여 은색의 세계를 이루었다. 도솔천(兜率天)의 주인이 그 속에서 천천히 모습을 드러내고서는 눈부시게 아름다운 모습으로 석단 주위를 돌았는데, 향기로운 바람과 꽃비가 한꺼번에 어우러져 모여들었다. 조금 있다가 자씨(慈氏)가 천천히 걸어 나와서 석단 앞에 이르러서는 손을 드리워서 진표의 이마를 어루만지면서 말하기를,
“선재(善哉)라. 대장부가 계법을 구함이 이와 같아 두 번에 이르고 세 번에 이르렀구나. 소미로(蘇迷盧)는 손으로 밀쳐 버릴 수 있지만 너의 마음은 물리칠 수가 없구나.”
하고는, 이어 계법을 주었다. 진표는 몸과 마음이 화락해지면서 마치 삼선(三禪)의 경지와 같아져, 의식(意識)이 낙근(樂根)과 더불어 서로 호응하였다. 그리고 4만 2천 가지의 복하(福河)가 항상 흘러 일체의 공덕(功德)에 의해 이윽고 천안(天眼)이 트였다. 자씨(慈氏)가 직접 세 벌의 법의(法衣)와 와발(瓦鉢)을 주고는 다시 진표(眞表)라는 이름을 내려 주었다. 또 무릎 아래에서 두 개의 물건을 꺼내었는데, 상아도 아니고 옥(玉)도 아닌 것이 바로 첨(籤)과 같은 것이었다. 그 가운데 하나에는 구자(九者)라고 씌어 있고, 다른 하나에는 팔자(八者)라고 씌어 있어 각각 두 자씩 씌어 있었는데, 이것을 진표에게 주면서 이르기를,
“만약 사람이 계법을 구하고자 할 경우에는 마땅히 먼저 죄를 참회하여야만 하는데, 죄와 복은 성품을 지키는 것[持性]과 성품을 범하는 것[犯性]이다.”
하였다. 다시금 108개의 첨을 더 주었는데, 각 첨 위에는 백팔 번뇌(百八煩惱)의 명목이 씌어 있었다. 여래(如來)가 사람에게 계법을 줌에 있어서는 혹 90일 동안이나 40일 동안이나 21일 동안을 고통을 참으면서 정진하여 참회해 기한이 다 차면 구자첨(九者籤)과 팔자첨(八者籤) 두 첨에다가 백팔 번뇌의 첨을 합하여서 부처 앞에서 하늘을 바라보면서 첨을 던지는데, 땅에 떨어진 첨을 보고서 그 죄가 없어졌는지 그대로 남아 있는지를 징험한다. 만약 백팔 개의 첨이 사방으로 날아가고 오직 팔자첨과 구자첨만이 단(壇) 한가운데 우뚝하게 서 있을 경우에는 바로 상상품계(上上品戒)를 얻는다. 만약 여러 첨이 비록 멀리 날아갔다 하더라도 혹 한두 개의 첨이 날아와서 팔자첨과 구자첨에 부딪치면 이 첨을 뽑아 보고서 거기에 무슨 번뇌의 이름이 씌어 있는가를 보고, 사람으로 하여금 다시 참회하게 한다. 그런 다음 다시 참회한 번뇌첨을 가지고 구자첨과 팔자첨과 함께 던져서 그 번뇌첨이 날아간 자는 중품계(中品戒)라 이름한다. 만약 여러 첨이 팔자첨과 구자첨을 뒤덮으면 죄가 없어지지 않아서 계를 얻을 수가 없으며, 다시금 더 참회해서 90일이 지나면 하품계(下品戒)를 얻는다. 자씨가 다시금 거듭 고하면서 가르치기를,
“팔자첨은 신훈(新熏)이고, 구자첨은 본유(本有)이다.”
하면서, 여러 차례 부탁하였다. 자씨의 행차가 이미 돌아감에 산천을 덮었던 구름이 걷혔다. 이에 진표가 천의(天衣)을 가지고 천발(天鉢)을 잡았다. 그런데도 진표는 오히려 오하(五夏)를 더 비구(比丘)로 있으면서 수행한 다음 길을 따라 산을 내려왔다. 그러자 초목들이 가지를 낮게 드리워서 길을 덮음에 계곡이 높고 낮음이 없이 평탄하게 되었으며, 새와 짐승이 다 진표의 발걸음 앞에 엎드려 있었다. 또 공중에서 소리가 울려 촌락과 고을에 고하기를,
“보살이 산에서 나오는데 어찌하여 영접하지 않는가.”
하였다. 그러자 남녀의 백성들이 머리카락을 펴서 진흙을 덮는 자도 있었고, 옷을 벗어서 길에 까는 자도 있었고, 천과 담요로 발을 감싸는 자도 있었고, 꽃자리와 아름다운 방석으로 구덩이를 메우는 자도 있었다. 이에 진표가 여러 사람들의 마음에 곡진히 부응하여 일일이 다 밟고 지나갔는데, 어떤 여자가 반 단(端)의 백첩(白氎)을 가지고 와서 길 가운데에 폈는데, 진표는 이를 보고 놀라는 표정을 지으면서 이를 피하여 다른 길로 갔다. 그 여자가 불평등하게 대하는 것을 보고 괴이하게 여기니, 진표가 말하기를,
“내가 자비심이 없어서 평등하게 대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마침 보니 그 천 사이에는 모두 도야지 새끼가 있기에 내가 산 목숨을 상하게 될까 염려되어 밟지 않고 피해 간 것이다.”
하였다. 그 여자는 본디 도축하는 집의 여자로 고기를 팔아서 이 포(布)를 산 것이었다. 이때부터 항상 호랑이 두 마리가 있어 진표의 좌우에 붙어서 따라다녔는데, 진표가 호랑이에게 말하기를,
“나는 성안으로 들어가지 않을 것이니, 너희들이 길을 인도하라.”
하였다. 그러고는 가다가 수행할 만한 곳을 만나면 천천히 걸어서 갔다. 호랑이가 30리쯤 가다가 어느 산 언덕으로 올라가서는 앞에 쭈그리고 앉았다. 이에 진표가 주장자를 나뭇가지에 걸고서 풀을 깔고 단정히 앉으니, 사방의 신자들이 권하지 않아도 스스로 찾아왔다. 그들과 함께 가람(伽藍)을 짓고는 금산사(金山寺)라고 이름하였다. 《신승전(神僧傳)》
○ 도침(道琛) : 현경(顯慶) 5년(660)에 백제(百濟)를 평정하자, 부도(浮屠) 도침이 주류성(周留城)에 있으면서 반란을 일으켰다. 《신당서》 ○ 백제세기(百濟世紀)에 상세하게 나온다.
○ 관륵(觀勒) : 일본 추고(推古) 10년(602)에 백제국의 승 관륵이 와서 천문지리서(天文地理書)와 역서(曆書), 둔갑방술서(遁甲方術書)를 바쳤다. 《화한삼재도회》
○ 법명(法明) : 대직관겸족(大織冠鎌足)이 집정(執政)할 때 백제의 선니(禪尼)인 법명이 대마도(對馬島)에 와서 오음(吳音)으로 《유마경(維摩經)》을 읽었는데, 그때 오음으로 읽었으므로 “대마도에서 읽은 것이 일본에서 오음으로 불경을 읽게 된 기원이다.” 한다. 《일본유마회연기(日本維摩會緣起)》
○ 묵호자(墨胡子) : 사문(沙門) 묵호자는 신라 사람이다. 눌지왕(訥祗王) 때 고구려로부터 일선군(一善郡)에 이르자, 군인(郡人) 모례(毛禮)란 사람이 자기 집에 토굴(土窟)을 짓고 그를 거기에서 살게 하였다. 이때 양(梁)나라에서 사신을 파견하여 왕에게 향(香)을 하사하였는데, 임금과 신하가 그것의 용도와 이름을 몰랐다. 이에 묵호자가 말하기를,
“이것을 사르면 향기가 아름답게 퍼져 신성(神聖)에게 치성을 드릴 수 있습니다. 이른바 신성이란 것은 삼보(三寶)보다 더한 것이 없으니, 첫 번째는 불타(佛陀)이고, 두 번째는 달마(達摩)이고 세 번째는 승가(僧伽)입니다. 만약 이를 살라서 축원을 드리면 반드시 영검이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이때 왕녀(王女)의 병이 위독하였는데, 묵호자가 향을 사르고 축원을 드리자 병이 얼마 있다가 나았다. 이에 왕이 기뻐하면서 몹시 후하게 보답하였다. 《화한삼재도회》 ○ 살펴보건대, 이것이 신라 불교의 시초인데, 《삼국사기》 신라본기(新羅本紀)에 실려 있는 것과 내용이 같다.
○ 무루(無漏) : 석(釋) 무루의 성은 김씨(金氏)로, 신라국왕의 둘째 아들이다. 어려서 바다 배를 따라 중국으로 들어갔다가 다시 오천축국(五天竺國)으로 가서 팔탑(八塔)을 예배하려고 하였다. 이미 사막(沙漠)을 건너서 우전국(于闐國)을 지나 서쪽으로 가 총령(蔥嶺)에 이르러서 큰 절에 들렀는데, 그 절의 비구(比丘)들은 모두 예측할 수 없는 중들이었다. 중들이 무루가 천축으로 가는 뜻을 물어보고는 기절(奇節)이 없으면서 천축으로 간다고 여겼다. 이에 승들이 말하기를,
“옛 기록에 이름나지 않은 사람은 천축으로 갈 수가 없다고 하였다. 이곳에는 독룡(毒龍)이 사는 연못이 있는데, 그곳에 가서 독룡을 교화하여 징험이 있으면 그곳을 건너갈 수 있을 것이다.”
하였다. 무루가 그들의 요청에 의하여 연못가의 언덕에 올라가 보니, 오직 호상(胡床) 하나만 보였다. 이에 그 호상에 앉아 있었다. 밤이 장차 다하려고 할 때에 이르러서 우레와 번개가 치더니 그 괴물이 기운(氣運)을 토하매 갖가지로 변화가 일어나면서 밝았다가 어두워지곤 하였다. 무루는 눈을 감은 채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얼마 뒤에 큰 뱀이 나타나서는 그의 무릎 위에서 머리를 쳐들었다. 이에 무루는 그를 몹시 불쌍하게 여겨 삼귀(三歸)를 받게 하자 뱀이 떠나갔다. 그러고는 다시 노인의 형상으로 변하여 와서는 감사해하면서 말하기를,
“법사의 덕분에 도탈(度脫)하게 되었으니, 의리상 이곳에 오래 있을 수가 없습니다. 제가 3일 후에 비늘이 덮인 몸을 받은 고통에서 벗어나 좋은 곳에서 다시 태어날 것입니다. 이곳에서 남쪽으로 가면 반석(盤石)이 있는데, 그곳이 이 제자가 형체를 버린 곳이니, 역시 저의 유해를 찾아 거두어 주시기 바랍니다.”
하니, 무루가 묵묵히 이를 허락하였다. 그러자 또 말하기를,
“모름지기 천축국에 가고자 하는 사람은 이곳에 관음성상(觀音聖像)이 있는데, 그곳에다 기도하면 영검이 있으니, 기도하면서 고해야 합니다. 그러면 길하고 상서로운 조짐을 얻을 것이니, 의심하지 마십시오.”
하였다. 무루가 이에 관음성상 앞에 서서 선정(禪定)에 들어갔다. 이와 같이 하여 49일이 지나자 온몸에 종기가 생겨 몸을 지탱할 수가 없게 되었는데, 곧바로 탄알만 한 크기의 쥐새끼가 나타나 왼쪽 넓적다리에서 누런 색깔의 고름을 여러 말 빨아내자 종기가 모두 나았다. 무루가 기한이 다 되어 응험을 얻자, 여러 중들이 말하기를,
“선사를 보건대 화연(化緣)이 마땅히 당나라 땅에 있겠다. 마음속에 다른 사람을 교화할 뜻을 간직하고 있으면 이익되는 바가 많을 것이다. 이곳저곳 떠돌아다니면서 부질없이 보고 듣는다 하더라도 억지로 교화할 수 없다는 것을 선사는 알아야 할 것이다.”
하였다. 무루는 성현(聖賢)의 말이 반드시 헛된 말이 아닐 것이라고 여겨 즉시 되돌아왔는데, 출발할 즈음에 중들이 무루에게 말하기를,
“난(蘭)을 만나면 즉시 그곳에 머물러라.”
하였다. 돌아오는 길에 산의 이름에 난(蘭) 자가 들어간 곳이 있었다. 이에 말[馬] 앞에서 그 말을 기억해 내고는 드디어 그 산속으로 들어가서 백초곡(白艸谷)이란 곳을 찾아내어 집을 짓고 그곳에서 살았다. 얼마 뒤에 안사(安史)의 난(亂)이 일어나 숙종(肅宗)이 영무(靈武)에서 군사를 훈련시키고 있었는데, 여러 차례 금색(金色)을 한 사람이 어전(御前)에서 보승불(寶勝佛)을 염불하는 꿈을 꾸었다. 다음 날에 꿈속에서 있었던 일을 가지고 좌우의 신하들에게 묻자, 어떤 사람이 대답하여 아뢰기를,
“사문(沙門) 가운데 행적이 일반 중들과 다른 사람이 이 산에 살고 있는데, 항상 그 부처의 이름을 외우고 있습니다.”
하였다. 이에 그를 불러오자, 황제가 보고서 이르기를,
“참으로 꿈속에서 본 그 사람이다.”
하고는, 곧바로 내사(內寺)에 있게 하고 공양하였다. 무루는 여러 차례 표장(表章)을 올려서 예전에 숨어 살던 곳으로 되돌아가게 해 주기를 원하였다. 그러나 황제의 마음에 그를 몹시 아꼈으므로 산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있었는데, 얼마 뒤에 없어졌다. 어느 날 갑자기 내문(內門)의 오른쪽 미닫이 위에 두 발이 생겨났는데, 땅 위로 몇 자가량 떠 있었다. 문지기가 이 사실을 상주하자, 황제가 보련(步輦)을 타고 직접 그곳에 임하여, 옛날에 숨어 살던 산 아래에 장사 지내 주기를 바란다는 내용의 유표(遺表)를 찾아내었다. 이에 즉시 그대로 하게 하고는 중사(中使)를 파견하여 상여를 호송해 가게 하였다. 이보다 앞서 무루가 회원현(懷遠縣)에서 교화를 많이 행하였으므로, 그를 인하여 그곳에다 집을 짓고는 하원(下院)이라고 불렀는데, 상여가 이곳에 이르러서는 신좌(神座)를 들 수가 없었다. 이에 여러 사람들이 의논하여 별도로 당우(堂宇)를 지어 그곳에다 안치하였는데, 지금에 이르러서도 진체(眞體)가 단정하게 그대로여서 변하거나 부서지지 않았다. 《신승전(神僧傳)》
○ 무루(無漏)는 신라의 승이다. 현종(玄宗)이 어느 날 저녁에 어떤 사문(沙門)이 온몸에 금빛을 띠고 보승여래(寶勝如來)의 이름을 외우고 있는 꿈을 꾸었는데, 이에 대해 좌우의 신하들에게 물으니, 대답하기를,
“하란(賀蘭) 백초곡(白艸谷)에 이름이 무루라고 하는 신라의 승이 있는데, 항상 이 부처의 이름을 외우고 있으니, 자못 이상합니다.”
하였다. 이에 황제가 그를 불러 행재소(行在所)에서 만나 보고는 기뻐하면서 말하기를,
“참으로 꿈속에서 본 바로 그 승이다.”
하고는, 드디어 호승(胡僧) 불공(不空)과 더불어 행궁(行宮)에 머물면서 기도하게 하였다. 입적(入寂)할 때는 합장을 하고서 땅에서 몇 자가량 공중에 뜬 채로 죽었다. 예전에 그가 살던 골짜기에 장사 지내려고 하였는데, 호송하여 가다가 회원현(懷遠縣)의 하원(下院)에 이르자 문득 시신을 들 수가 없었다. 이에 마침내 향니(香泥)를 전신에 바른 다음 하원에 두었다. 《속문헌통고》
○ 지장(地藏) : 석(釋) 지장의 속성(俗姓)은 김씨(金氏)로, 신라국왕의 지속(支屬)이다. 마음은 자비로웠으나 얼굴 모습이 추악하였으며, 천부적으로 영오(穎悟)함을 타고났다. 머리를 깎고 출가한 다음 바다를 건너 중국으로 가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면서 사방을 살펴보았다. 그러다가 지양(池陽)에 이르러서 구자산(九子山)을 보고는 마음속으로 몹시 좋아하였다. 이에 곧바로 산봉우리로 올라가서 그곳에서 살았다. 지장이 일찍이 독충(毒蟲)에 쏘이고도 단정히 앉아서 무념 상태에 있었는데, 잠시 뒤에 어떤 아름다운 부인이 예를 올리고는 약을 먹이면서 말하기를,
“소아(小兒)가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 원컨대 샘물을 나오게 하여 허물을 보충하고자 합니다.”
하였다. 말을 마치고는 사라졌는데, 앉은 자리의 좌우를 보니 샘물이 펑펑 솟아올랐다. 그러자 당시 사람들이 “구자산의 신령이 샘물을 솟아나게 하여 쓸 수 있게 한 것이다.” 하였다. 지덕(至德) 연간 초에 제갈절(諸葛節)이란 사람이 촌부들을 데리고 산기슭에서 높은 곳으로 올라갔는데, 아주 깊이 들어가자, 다른 사람은 아무도 없고 오직 지장만이 홀로 석실(石室) 안에서 눈을 감고 있었다. 그 방에는 다리가 부러진 솥이 있었고, 솥 안에는 흰 흙과 쌀을 섞어서 밥을 지어 먹고 있었다. 여러 아이들이 이를 보고는 경탄하면서 말하기를,
“화상(和尙)이 이와 같이 고생하고 있는 것은 산 아래에 살고 있는 우리들의 잘못이다.”
하였다. 그러고는 서로 더불어서 선방(禪房)을 지었는데, 몇 년이 지나지 않아서 큰 절이 되었다. 신라에서도 그 소문을 듣고 바다를 건너 서로 찾아왔다. 그를 따르는 무리들이 많아짐에 따라 그들을 먹일 길이 없었다. 이에 지장이 돌을 헤쳐서 청백색의 흙을 얻었는데, 껄끄럽지가 않고 국수와 같아서 그것을 대중들에게 먹였다. 그의 대중들이 법설(法說)을 들어 정신을 기르기를 청하면서 음식으로 목숨을 기르지 않으니, 남방 사람들이 ‘삐쩍 마른 대중[枯槁衆]’이라고 부르면서 모두들 숭앙하였다. 용담(龍潭)의 곁에 흰 흙무더기가 있었는데, 아무리 취해도 없어지지 않았다. 어느 날 갑자기 대중들을 모아 놓고 이별을 고하였는데, 간 곳을 알 수가 없었고, 단지 산이 울고 돌이 떨어지며 종이 울리는 소리만 들렸다. 결가부좌한 채 죽으니, 나이 99세였다. 그의 시신을 함 속에 앉혀 두었다. 그 뒤 3년이 지나서 탑 속에 넣으려고 하였는데, 얼굴 모습이 마치 살아 있는 사람 같았다. 그리고 시신을 마주 들 즈음에는 골절(骨節)이 마치 쇠로 된 사슬이 흔들리는 것 같았다. 《신승전》
○ 김지장(金地藏)은 신라국의 승이다. 지덕(至德) 연간에 바다를 건너와 청양(靑陽)의 구화산(九華山)에 살았다. 일찍이 바위 틈에 있는 흰 흙을 밥과 섞어 먹자 사람들이 기이하게 여겼다. 나이 99세에 갑자기 대중들을 불러 모은 다음 이별을 고하였는데, 단지 산이 울고 바위가 떨어지는 소리만 들릴 뿐이었으며, 잠시 뒤에 함 속에서 입적(入寂)하였다. 3년이 지난 뒤에 장차 탑 속에 넣으려고 하면서 보니 얼굴이 마치 살아 있는 사람 같았으며, 마주 들 때에는 골절이 모두 쇠사슬이 흔들리는 것 같았다. 《속문헌통고》 ○ 《전당시(全唐詩)》에, “김지장은 신라국의 왕자이다. 지덕(至德) 초에 바다를 건너와 구화산(九華山)에서 살았다.” 하였다. ○ 《구화산록(九華山錄)》에, “화성사(化城寺)가 구화산에 있는데, 절이 매우 아름답다. 당나라 때 신라의 왕자 김지장이 수행하던 곳이다. 김지장탑(金地藏塔)이 또 절 뒤에 있다.” 하였다. ○ 주필대(周必大)의 《성재집(省齋集)》에 실려 있는 ‘김지장탑을 배알하다.[謁金地藏塔]’는 시는 다음과 같다. “덩굴 잡고 험산 타긴 재빠르기 원숭인데, 돌 모서리 옷 걸리고 신발 자주 뚫어지네. 멀리서 김지장탑 찾아온 걸 이상하게 생각 말라, 일찍이 옥계 앞을 천천히 걸었노라.[攀蘿度險捷猱猿 石角鉤衣屨屢穿 莫訝遠尋金地藏 也曾徐步玉階前]”
도수충(屠粹忠)의 김지장찬(金地藏贊)에,
밥에는 진흙이 뒤섞이어 있었고 / 食飯雜泥
함 열자 골상이 생시처럼 나타났네 / 開函見骨
산봉우리 어찌하여 구 자로 이름했나 / 峯何取九
살아 백 년 채우지 못하였네 / 生不滿百
하였다. 《삼재조이(三才藻異)》
○ 금사(金師) : 승 금사는 신라 사람이다. 수양(雎陽)에 살았는데, 녹사참군(錄事參軍) 방완(房琬)에게 이르기를,
“태수(太守) 배관(裴寬)이 바뀔 것입니다.”
하였다. 방완이 언제 바뀔 것인가를 묻자, 말하기를,
“내일 오전에 칙서가 반드시 올 것입니다. 그리고 공과 더불어 군(郡)의 서남쪽 모퉁이에서 서로 만날 것입니다.”
하였다. 이에 방완이 칙서가 오는가를 살피고 있었는데, 오전에 역사(驛使)가 두 차례 봉첩(封牒)을 가지고 왔으나 그런 내용이 아니었으므로, 방완은 금사의 말이 틀린 것으로 여겼다. 그런데 정오가 되자 또 한 역사가 봉첩을 가지고 와서는 말하기를,
“배공(裴公)의 관직이 바뀌어 안륙별가(安陸別駕)로 되었다.”
하였다. 이에 방완이 수레를 보내어 금사를 맞이해 오게 하고, 또 자신이 직접 갔는데, 과연 군의 서남쪽 모퉁이에서 배관을 만났다. 금사를 불러다 물으니, 금사가 말하기를,
“관직은 비록 바뀌었으나, 복장은 바뀌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공의 생질들은 각각 흩어지게 될 것입니다.”
하였다. 그 뒤에 칙서가 도착해서 별가에 제수하였는데, 자주빛 인끈은 그대로 있었고, 생질들은 각자 흩어지게 되었다. 《신승전》
○ 무상(無相) : 석(釋) 무상은 신라국 사람으로, 그곳 왕의 셋째 아들이다. 현종(玄宗)이 불러다 보고는 선정사(禪定寺)에 있게 하였는데, 호를 무상(無相)이라 하였다. 마침내 깊은 계곡으로 들어가 바위 아래에서 좌선(坐禪)하였다. 검은 소 두 마리가 있어 앉아 있는 자리의 아래에서 뿔을 마주 댄 채 빙빙 돌면서 몸 가까이 다가와 아주 위태로웠고, 차갑기가 얼음 같은 털북숭이 손이 소매 속으로 들어와서는 몸을 더듬으면서 배에까지 이르렀다. 그런데도 무상은 조금도 경동하지 않았다. 매번 입정(入定)에 들 때마다 대부분 5일을 기한으로 하였는데, 눈이 많이 쌓이자 갑자기 맹수 두 마리가 다가왔다. 그러자 무상은 스스로 몸을 깨끗이 씻고 알몸으로 맹수 앞에 누워서 자신의 몸을 맹수에게 보시(普施)하고자 하였다. 그런데 두 마리의 짐승이 머리에서 발끝까지 냄새를 맡으면서 빙빙 돌다가는 그대로 떠났다. 무상은 가끔씩 밤중에 좌상(坐床) 아래로 내려가 호랑이의 수염을 움켜잡고 있었다. 얼마 뒤에 산에서 산 지 조금 오래되자 옷은 떨어지고 머리카락은 길게 자라 사냥꾼들이 이상한 짐승인 줄 알고 활로 쏘려다가는 멈추곤 하였다. 다시 무덤 사이에 정사(精舍)를 짓고 사니, 성도 현령(成都縣令) 양익(楊翌)이 사람들을 현혹시킨다고 의심하였다. 이에 그곳에 와서는 그의 무리 20여 명에게 명해서 그를 잡아 끌고가게 하였다. 그런데 그의 무리들이 무상의 몸 가까이 다가가자 모두들 몸이 떨리면서 정신을 잃었다. 조금 뒤에는 큰 바람이 갑자기 일어나면서 모래와 돌이 바람에 날려 곧장 청사(廳舍) 안으로 날아들었으며, 발과 장막이 바람에 날아갔다. 이에 양익은 머리를 조아리고 엎드려 절하면서 숨이 차서 감히 말을 못하였다. 양익이 잘못을 뉘우치자 바람이 그쳤다. 이에 무상을 받들어 모시고 예전에 있던 곳으로 되돌려 보냈다.
무상이 성도(成都)에 이르렀을 때 홀연히 어떤 역사(力士) 한 사람이 나타나서는 말하기를,
“저의 힘을 희사하여 땔나무를 베어 스님께서 밥 지을 때 쓰도록 공양하겠습니다.”
하였다. 무상의 동생이 신라에서 새로 왕이 되었는데, 무상이 갑자기 본국으로 돌아와서 나라를 위태롭게 할까 두려워하였다. 이에 장차 자객을 보내어 죽이려고 하였는데, 무상은 이런 사실을 이미 모두 알고 있었다. 어느 날 갑자기 말하기를,
“땔나무를 하는 현자(賢者)는 잠시 이리 오라.”
하고는, 그에게 말하기를,
“오늘 밤에 작연(灼然)이라는 손님이 올 것이다.”
하고, 또 말하기를,
“불자(佛子)가 상하지 않게 하라.”
하였다. 밤이 되자 땔나무를 하는 자가 칼을 가지고 방석을 끼고는 선자(禪者)의 곁에 홀로 앉아 있었는데, 얼마 뒤에 벽 위에서 어떤 물체가 떨어지는 것을 느끼고는 드디어 몸을 날리면서 칼을 휘두르니, 거한의 몸체와 목이 나누어져 땅에 떨어졌다. 뒷문에 본디 큰 구덩이가 있었으므로 그를 끌어다가 그곳에 매장한 다음, 다시 흙으로 덮어 그 흔적을 없애 버리고는 땔나무를 하던 자가 떠나갔다. 날이 밝으려고 할 때 무상이 땔나무를 베던 자를 불러서 사례하려고 하였으나 이미 보이지 않았다. 무상이 일찍이 부도(浮圖) 앞에 있는 잣나무를 가리키면서 말하기를,
“이 잣나무가 탑 높이와 똑같아지면 탑이 무너질 것이다.”
하였다. 회창(會昌 841~846) 연간에 이르러서 탑이 무너졌는데, 잣나무와 탑의 높이가 똑같았다. 또 말하기를,
“절 앞에 있는 두 개의 작은 연못은, 왼쪽은 국이고 오른쪽은 밥이다.”
하였는데, 대중들에게 먹일 때 음식이 모자라면 사람들을 시켜서 그것을 퍼내게 하니, 과연 사람들을 먹일 수 있었다. 그의 신이(神異)함이 대부분 이와 같았다. 지덕(至德) 원년(756, 경덕왕15)에 죽으니, 나이 77세였다. 《상동》
○ 현광(玄光) : 석 현광은 해동(海東) 웅주(熊州) 사람이다. 어려서부터 영특하였으며, 형산(衡山)으로 가서 사대화상(思大和尙)을 만나 본 뒤에 강남(江南)에 머물러 있었다. 본국에서 온 배에 부탁하여 몸을 싣고 해안을 떠났는데, 이때 채색 구름이 해를 가리더니 아름다운 음악 소리가 하늘에 울려 퍼졌다. 그러면서 붉은 깃발과 오색 깃발이 휘날리며 하늘에 소리가 울려 퍼지기를, “천제(天帝)께서 해동(海東)의 현광 선사(玄光禪師)를 부르신다.” 하였다. 현광이 공수(拱手)의 예를 올리고는 사양하여 피하니, 푸른 옷을 입은 사람이 나타나서 앞에서 인도하였다. 조금 뒤에 궁성(宮城)으로 들어갔는데, 인간 세상의 궁전이 아니었다. 호위를 하고 있는 사람들이 모두 물고기들이었으며, 귀신들도 간간이 섞여 있었는데, 누군가 말하기를,
“오늘은 천제께서 용왕궁(龍王宮)에 내려오셔서 선사의 법설을 들어 친히 법문(法門)을 증득(證得)하려고 하신다. 우리들 수부(水府)에서도 선사의 은혜를 받고자 한다.”
하였다. 이미 보전(寶殿)에 올라간 다음에 다시 높은 대(臺)로 올라가서는 물음에 따라서 말해 주었다. 대략 7일간 그렇게 한 다음에 용왕이 몸소 나와 전송하였다. 그가 탔던 배는 바다에 떠 있는 채 가지 않고 있었다. 현광이 다시 배에 오르자, 뱃사람이 반나절이 지났을 뿐이라고 하였다. 현광이 웅주(熊州)의 옹산(翁山)에 집을 짓고 머물렀는데, 그 집이 사찰로 되었다. 그 뒤에는 간 곳을 모른다. 《상동》
○ 법융(法融), 이응(理應), 순영(純英) : 조열지(晁說之)의 《반야경소(般若經疏)》 서문에 이르기를,
“진(陳)나라에서 수(隋)나라로 넘어오는 사이에 천태산(天台山)의 지자대사(智者大師)가 멀리 용수(龍樹)에게 연원(淵源)을 대어 하나의 대교(大敎)를 세웠는데, 아홉 번 전하여 형계(荊溪)에 이르렀고, 형계가 다시 전하여 신라에 이르러서 법융, 이응, 순영에게 전하였다. 그러므로 이 가르침이 일본(日本)에 전파되어 해외에서 성하여졌다.”
하였다. 《석문정통(釋門正統)》
○ 원효(元曉) : 당나라 초기에 해동(海東)에 원효란 자가 있었는데, 성은 설씨(薛氏)이다. 동해(東海)의 상주(湘州) 사람이다. 어린 나이에 마음을 내어 불법(佛法)으로 들어와 스승을 따라 배웠으며, 항상 떠돌아다녀 있는 곳이 일정하지 않았다. 의리의 굴레를 용감하게 깨뜨리고 법문(法文)의 진(陣)을 마음대로 넘나듦에 씩씩하고도 굳세어서 앞으로 나아감에 걸리는 것이 없었다. 이에 그곳 사람들이 만인(萬人)을 상대할 사람이라고 하였다. 일찍이 상법사(湘法師)와 더불어 당나라로 들어갔으나 인연이 닿지 않아 당나라로 들어갈 마음이 없어졌다. 얼마 뒤에는 말투가 미치광이 같고 행동거지가 제멋대로여서 거사(居士)와 같이 술집과 사창가를 돌아다녔는바, 마치 지공(誌公)이 쇠칼과 쇠지팡이를 잡고 다니는 것 같았다. 혹 소(疏)를 지어서 저잣거리에서 강론하기도 하고, 혹 가야금을 뜯으면서 사우(祠宇)에서 노닐기도 하였으며, 혹 여염집에서 자기도 하고 산속에서 좌선(坐禪)하기도 하여, 마음 내키는 대로 인연에 따라 행동하여 전혀 정처가 없었다. 이때 국왕이 백좌(百座)를 두고 《인왕경(仁王經)》을 강하면서 널리 덕이 높은 사람을 찾았다. 그러자 본주(本州)에서 그의 명망이 높다는 이유로 천거하여 나아가게 하였는데, 덕이 높다고 하는 여러 사람들이 원효의 사람됨을 싫어하여 왕에게 들이지 말라고 참소하였다. 얼마 뒤에 왕이 당나라로 사신을 보내어 《금강삼매경(金剛三昧經)》을 구하였다. 왕이 대안성자(大安聖者)를 불러 보충하게 하였다. 그런데 대안은 헤아릴 수 없는 사람으로, 형상과 복장이 특이하였으며, 매번 시장 바닥에서 동발(銅鉢)을 두드리면서 ‘대안대안(大安大安)’이라는 소리를 외쳐댔으므로 그렇게 불렀다. 대안이 말하기를,
“속히 원효에게 가져다주어야만 강론할 수가 있습니다. 나머지 다른 사람은 안 됩니다.”
하였다. 이때 원효가 상주(湘州)에 있었는데, 사자(使者)에게 말하기를,
“이 경(經)은 시본이각(始本二覺)으로 종지(宗旨)를 삼는다. 그러니 나를 위하여 각승(角乘)을 마련하라.”
하였다. 그런 다음 책상을 가져다가 두 뿔 사이에 놓고 벼루와 붓을 다시 그 위에 놓아두었다. 그러고는 처음부터 끝까지 소 수레 위에서 소(疏)를 저술해 5권을 이루었다. 또 《약소(略疏)》 3권을 지어 황룡사(皇龍寺)에서 강론하였다. 그러자 왕과 신하와 도사(道士)와 속인(俗人)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어 법당을 에워쌌는데, 원효가 설법하는 것이 위의가 있고 어지러운 것을 풀어 감에 있어서 법도가 있었다. 그러고는 다시 큰소리로 말하기를,
“지난날에 백 개의 서까래를 뽑을 때에는 내가 비록 참여되지 못하였지만, 오늘 아침에 대들보 하나를 건너지르는 데는 오직 나만이 할 수가 있다.”
하니, 당시의 덕이 높다고 이름난 여러 사람들이 모두들 고개를 숙이고 부끄러운 기색을 띠었으며, 마음속으로 참회하였다. 처음에 원효가 자취를 보이는 것을 알기가 어렵고 사람을 교화함에 있어서 일정하지 않아, 혹 쟁반을 던져서 대중을 구하고 물을 뿜어 불을 끄기도 하였으며, 혹 여러 곳에서 모습을 드러내기도 하고 혹 천지 사방에 죽었다고 고하기도 하였으니, 역시 배도(盃渡)나 지공(誌公)의 무리이다. 《탐현기(探玄記)》에 이르기를,
“원효 법사는 이 경소(經疏)를 저술하여 사교(四敎) 등급을 세웠다.”
하였다. 《회현기(會玄記)》
○ 당나라 초기에 해동의 원효 법사(元曉法師)가 역시 사교(四敎)를 세웠는데, 첫 번째 삼승교(三乘敎)는 사제(四諦)와 연기(緣起)에 관한 경(經)이고, 두 번째 삼승통교(三乘通敎)는 《반야경(般若經)》, 《해심밀경(解深密經)》 등이고, 세 번째 일승분교(一乘分敎)는 《범망경(梵網經)》 등이고, 네 번째 일승만교(一乘滿敎)는 《화엄경(華嚴經)》 등이다. 《현담(懸談)》 ○ 삼가 살펴보건대, 원효는 바로 신라 사람 설총(薛聰)의 아버지이다.
○ 의상(義湘) : 의상은 해동 화엄종(華嚴宗)의 초조(初祖)이다. 원효(元曉)와 함께 당나라로 들어가다가 밤중에 고총(古塚)에서 자게 되었는데, 이를 인하여 유심(唯心)의 진리를 통달하게 되었으므로 원효는 신라로 돌아가고 의상은 당나라로 들어갔다. 종남산(終南山)에 가서 현수 국사(賢首國師)와 함께 지상(至相)을 섬겨 화엄종을 전수받아 해동으로 돌아와 크게 넓혔다. 《회현기(會玄記)》
○ 홍혜(弘惠) : 피일휴(皮日休)의 ‘신라 홍혜상인을 전송하며[送新羅弘惠上人]’라는 시의 서문에, “경인년(870) 11월에 신라의 홍혜상인이 신라의 동서(同書)와 더불어서 나에게 영취산(靈鷲山) 주 선사(周禪師)의 비문(碑文)을 지어 주기를 청하여, 이를 가지고 돌아감에 시를 지어 전송하였다.” 하였다. 《전당시(全唐詩)》
○ 《전등록(傳燈錄)》에 실려 있는 신라의 여러 승은 다음과 같다.
남악(南嶽) 양 선사(讓禪師)의 법사(法嗣)에 신라국 본여 선사(本如禪師)가 있다.
서당(西堂) 장 선사(藏禪師)의 법사에 계림(鷄林) 도의 선사(道義禪師), 신라국 혜철 선사(慧徹禪師), 신라국 홍척 선사(洪陟禪師)가 있다.
마곡(麻谷) 철 선사(徹禪師)의 법사에 신라 무염 선사(無染禪師)가 있다.
장경(章敬) 운 선사(惲禪師)의 법사에 신라국 현욱 선사(玄昱禪師), 신라국 각체 선사(覺體禪師)가 있다.
남전(南泉) 원 선사(願禪師)의 법사에 신라국 도균 선사(道均禪師)가 있다.
염관(鹽官) 안 선사(安禪師)의 법사에 신라국 품일 선사(品日禪師)가 있다.
대매(大梅) 상 선사(常禪師)의 법사에 신라국 충언 선사(忠彦禪師), 신라국 가지 선사(迦智禪師)가 있다. 승이 묻기를, “어떤 것이 서쪽에서 온 뜻입니까?” 하니, 가지 선사가 말하기를, “네가 과두(裹頭)해 가지고 오기를 기다려서 너에게 말해 주리라.” 하였다. 승이 묻기를, “어떤 것이 대매 선사(大梅禪師)의 종지(宗旨)입니까?” 하니, 가지 선사가 이르기를, “낙(酪)과 근본[本]을 동시에 던져 버리라.” 하였다.
귀종(歸宗) 상 선사(常禪師)의 법사에 신라 대모화상(大茅和尙)이 있다. 대모화상이 설법을 하러 당(堂)에 올라가서 말하기를, “부처님의 스승을 알고자 하면 무명(無明)의 마음속에서 알아차려야 할 것이며, 상주(常住)하여 마르지 않는 성품을 알고자 하면 만물(萬物)이 변천하는 속에서 알아차리라.” 하였다. 승이 묻기를, “어떤 것이 대모화상의 경계입니까?” 하니, 선사가 이르기를, “기봉(機鋒)을 드러내지 않겠노라.” 하였다. 승이 말하기를, “어찌하여 기봉을 드러내지 않습니까?” 하니, 선사가 이르기를, “맞설 자가 없기 때문이다.” 하였다.
신라(新羅) 증 선사(證禪師)의 법사에 문성대왕(文聖大王)과 헌안대왕(憲安大王)이 있다.
신라 척 선사(陟禪師)의 법사에 흥덕대왕(興德大王)과 선강태자(宣康太子)가 있다.
천룡화상(天龍和尙) 법사에 신라 언충 선사(彦忠禪師)가 있다.
앙산(仰山) 적 선사(寂禪師)의 법사에 신라 오관산(五冠山) 순지 선사(順支禪師)가 있는데, 본국에서는 요오대사(了悟大師)라 부른다. 승이 묻기를, “어떤 것이 서쪽에서 오신 뜻입니까?” 하니, 순지 선사가 불자(拂子)를 세웠다. 승이 말하기를, “그것만이면 되지 않겠습니까?” 하니, 순지 선사가 불자를 놓아 버렸다. 승이 묻기를, “이(以) 자도 아니고 팔(八) 자도 아니면 그것이 무슨 자입니까?” 하니, 순지 선사가 원상(圓相)을 그려 보였다. 어떤 승이 선사의 앞에서 다섯 꽃으로 된 원상을 그리니, 순지 선사가 그 그림을 지워 버리고 따로 하나의 원상을 그렸다.
임제(臨濟) 현 선사(玄禪師)의 법사에 신라국 지리산화상(智異山和尙)이 있다. 어느 날 대중들에게 말하기를, “겨울이 춥지 않으니 섣달 뒤에 보리라.” 하고는, 문득 자리에서 내려갔다.
석상(石霜) 저 선사(諸禪師)의 법사에 신라국 흠충 선사(欽忠禪師), 신라 행적 선사(行寂禪師), 신라 낭 선사(朗禪師), 신라 청허 선사(淸虛禪師)가 있다.
동산(洞山) 개 선사(价禪師)의 법사에 신라국 금장화상(金藏和尙)이 있다.
구봉(九峯) 건 선사(虔禪師)의 법사에 신라 청원화상(淸院和尙)이 있다. 승이 묻기를, “말을 달려 공을 다투면 누가 그것을 얻습니까?” 하니, 청원화상이 이르기를, “누가 그것을 얻지 못하는 자이겠는가?” 하였다. 승이 말하기를, “그렇다면 다투지 않는 것이 좋겠군요.” 하니, 청원화상이 이르기를, “다투지 않더라도 역시 허물이 있는 것이다.” 하였다. 승이 말하기를, “어찌하여야만 허물이 없게 할 수 있습니까?” 하니, 청원화상이 이르기를, “요컨대 애당초 잃지 않았어야 하는 것이다.” 하였다. 승이 말하기를, “잃지 않는 곳을 어떻게 하면 단련할 수 있습니까?” 하니, 선사가 이르기를, “두 손으로 떠받들어도 일어나지 않는다.” 하였다.
운개(雲蓋) 원 선사(元禪師)의 법사에 신라 와룡화상(臥龍和尙)이 있다. 승이 묻기를, “어떤 것이 대인(大人)의 상(相)입니까?” 하니, 와룡 선사가 이르기를, “자라장(紫羅帳) 속에는 손을 드리우지 않는다.” 하였다. 승이 말하기를, “어찌하여 손을 드리우지 않습니까?” 하니, 선사가 이르기를, “존귀하지 않아서이다.” 하였다. 승이 묻기를, “12시 가운데 어떻게 마음을 써야 합니까?” 하니, 선사가 이르기를, “원숭이가 털 있는 짐승을 잡아먹었다.” 하였다.
곡산(谷山) 장 선사(藏禪師)의 법사에 신라 서암화상(瑞巖和尙)이 있다. 승이 묻기를, “흑과 백이 모두 없어지고 불안(佛眼)이 열렸을 때는 어떠합니까?” 하니, 선사가 이르기를, “네가 속[內]으로만 집착할까 염려된다.” 하였다. 승이 묻기를, “어떤 것이 새로 탄생한 왕자입니까?” 하니, 선사가 이르기를, “깊은 궁궐에 있어서 끌어내어도 나오지 않는다.” 하였다. 또 신라의 박암화상(泊巖和尙)이 있다. 승이 묻기를, “어떤 것이 선(禪)입니까?” 하니, 선사가 이르기를, “옛 무덤은 집이 되지 못한다.” 하였다. 승이 묻기를, “어떤 것이 도(道)입니까?” 하니, 선사가 이르기를, “한갓 거마(車馬)의 자취만 남겼구나.” 하였다. 승이 묻기를, “어떤 것이 교(敎)입니까?” 하니, 선사가 이르기를, “패엽(貝葉)으로는 다 거두어들이지 못한 것이니라.” 하였다. 또 신라의 대령화상(大嶺和尙)이 있다. 승이 묻기를, “겨우 동관(潼關)에 와서 그만둘 때에는 어떠합니까?” 하니, 선사가 이르기를, “그것은 단지 길거리의 살림이니라.” 하였다. 승이 말하기를, “그 가운데의 살림이 어떠합니까?” 하니, 선사가 이르기를, “체득하면 얻으나 맞닥뜨리면 얻지 못하느니라.” 하였다. 승이 말하기를, “체득하면 얻는데 어찌하여 맞닥뜨리면 얻지 못합니까?” 하니, 선사가 이르기를, “체득한다는 것이 어느 정도 되는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인가?” 하였다. 승이 말하기를, “그 가운데의 일이 어떠합니까?” 하니, 선사가 이르기를, “존귀하지 않느니라.” 하였다.
설봉(雪峯) 존 선사(存禪師)의 법사에 신라국 대무위 선사(大無爲禪師)가 있다.
운거(雲居) 응 선사(膺禪師)의 법사에 신라 경유 선사(慶猷禪師), 신라 혜 선사(慧禪師), 신라 운주화상(雲住和尙)이 있다. 승이 묻기를, “여러 부처님들이 말씀하시지 못한 것을 어떤 사람이 말합니까?” 하니, 운주화상이 이르기를, “노승이 말할 수 있느니라.” 하였다. 승이 말하기를, “여러 부처님들이 말씀하시지 못한 것을 화상께서는 어떻게 말씀하십니까?” 하니, 운주화상이 이르기를, “여러 부처님들이 바로 나의 제자이니라.” 하였다. 승이 말하기를, “화상께서는 그 뜻을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하니, 운주화상이 이르기를, “군왕(君王)을 상대하지 않았더라면 20방(棒)은 때렸어야 하겠구나.” 하였다.
백조(白兆) 원 선사(圓禪師)의 법사에 신라국 혜운 선사(慧雲禪師)가 있다.
장경(長慶) 능 선사(稜禪師)의 법사에 신라국 구산화상(龜山和尙)이 있다.
홍주(洪州) 백장산(百丈山)의 명조(明照) 안 선사(安禪師)는 신라 사람이다.
영주(郢州) 파초산(芭蕉山)의 혜청 선사(慧淸禪師)는 신라국 사람이다.
육조대사(六祖大師)가 입적(入寂)하였을 때 흙덩이 속에 넣으면서 철엽(鐵葉)과 칠포(漆布)를 가지고 목 부분을 감쌌는데, 육조대사가 일찍이 말하기를, “5, 6년 뒤에 어떤 사람이 와서 나의 머리를 가져갈 것이다.” 하였기 때문에 그렇게 한 것이다. 그 뒤에 장만(張滿)이란 자가 홍주(洪州)의 개원사(開元寺)에서 신라의 승 김대비(金大悲)에게 돈 2만 냥을 받고는 육조대사의 머리를 가지고 해동(海東)으로 가서 공양하게 하였다. 그런데 한밤중에 탑을 열다가 발각되었다. 《이상 모두 전등록》
○ 신라의 무명승(無名僧) : 상주(商州) 사람 가운데 병이 들어서 수족(手足)이 제대로 자라지 않아 걸음을 못 걷는 자가 있었는데, 수십 년 동안 병을 잘 고치는 의원들이 온갖 처방을 하였으나, 치료하지 못하였다. 이에 집안사람이 길가에다 놓아두고는 구해 줄 자를 찾았는데, 우연히 어떤 신라의 중이 보고는 고하기를,
“이 병은 약초 하나면 치료할 수가 있는데, 이 땅에도 그 약초가 있는지 모르겠다.”
하였다. 그러고는 병자를 위하여 산으로 들어가서 그 약초를 찾아내었는데, 바로 위령선(威靈仙)이었다. 병자로 하여금 이를 복용하게 하니, 며칠이 지난 뒤에는 걸을 수 있게 되었다. 그 뒤에 산인(山人) 등사제(鄧思齊)가 이를 알고는 드디어 그 사실을 전하였다. 《본초도경(本草圖經)》
부(附) 신라의 무착 선사(無著禪師) -《전당시(全唐詩)》에 석법조(釋法照)의 ‘무착 선사가 신라국으로 돌아가는 것을 전송하며[送無著禪師歸新羅國]’라는 시 한 수가 실려 있다.-
신라의 승 아각(雅覺) -《문원영화(文苑英華)》에 장교(張喬)의 ‘승 아각이 신라로 돌아가는 것을 전송하며[送僧雅覺歸新羅]’라는 시 한 수가 실려 있다.-
○ 도신(道侁) : 조선(朝鮮)의 최씨(崔氏) 집 채마밭에서 자란 오이[瓜]의 길이가 한 자 남짓하였는데, 여자가 이를 먹고 임신을 하였다. 아들을 낳아 7일 동안 버려두었는데, 비둘기와 제비가 날아와 날개로 아이를 덮어서 길렀다. 자라나서 승이 되어 당나라로 들어와 일행(一行)의 지리법(地理法)을 전수받았다. 《삼재조이(三才藻異)》 ○ 살펴보건대, 도신은 신라 말기에 당나라로 들어가서 일행의 지리법을 배웠는바, 세상에서는 동방지리가(東方地理家)의 시조라고 칭한다.
도수충(屠粹忠)의 도신찬(道侁贊)에,
후손을 하늘이 이어 줌에 / 瓜瓞天綿
칠일 동안 새들이 날개로 덮었다네 / 鳥覆其七
법중들의 가슴속 포부 가운데 / 法衆胸羅
승이 그 가운데 하나를 얻었도다 / 僧得其一
하였다. 《상동》
○ 제관(諦觀) : 송나라 태조(太祖) 건륭(建隆) 원년(960, 광종11) 10월이다. 당초에 천태교(天台敎)의 경전이 오대(五代) 때의 난리를 겪으면서 불에 타 완질이 갖추어지지 않았다. 오월왕(吳越王) 숙(俶)이 사신을 파견하여 일본(日本)과 고려(高麗)로 가서 이를 구하게 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고려에서 사문(沙門) 제관(諦觀)을 파견하여 천태교에 관한 논소(論疏)의 여러 글을 가지고 나계(螺溪)에 이르러서 적 법사(寂法師)를 알현하게 하니, 일종(一宗)의 교문(敎文)이 다시 중국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나계(螺溪)가 이를 보운(寶雲)에게 전수하고, 보운이 이를 법지(法智)에게 전수하고, 법지가 크게 강설(講說)을 열어 드디어 교관(敎觀)을 중흥시켰다는 이름을 독차지하게 되었다. 《오월왕전(吳越王傳)》
○ 여가(如可) : 송나라 단공(端拱) 2년(989, 성종8)에 고려가 승 여가를 파견하여 표문을 가지고 와 알현하면서 《대장경(大藏經)》을 내려 주기를 요청하였는데, 이를 내려 주고, 이어 여가에게 자의(紫衣)를 하사하여 귀국하게 하였다. 《송사》
○ 의천(義天) : 의천의 성은 왕씨(王氏)로, 고려국 인효왕(仁孝王)의 넷째 아들이다. 영화를 버리고 출가하여 우세 승통(祐世僧統)에 봉해졌다. 원우(元祐) 초에 중국으로 들어가 도를 묻자, 주객(主客) 양걸(楊傑)에게 칙명을 내려 의천을 전당(錢塘)의 혜인원(惠因院)에 가서 법(法)을 전수받게 하였다. 금산(金山)에 이르자, 불인(佛印)이 앉은 채로 그의 예를 받았다. 이에 양걸이 놀라서 불인에게 물으니, 불인이 말하기를,
“의천은 이국(異國)의 중일 뿐입니다. 만약 내가 도를 굽히고 세속의 방식을 따라 제방(諸方)이 이미 한쪽 눈을 잃은 것처럼 행동한다면 무엇을 가지고 중국의 선법(禪法)을 보여 주겠습니까.”
하니, 조정에서는 그가 예를 아는 사람이라고 여겼다. 전당의 혜인원에 이르러서 《화엄소초(華嚴疏鈔)》를 가지고 의심나는 부분을 자문받아 깨우치면서 해가 바뀌어서야 끝마쳤다. 이에 화엄(華嚴) 일종(一宗)의 글 뜻이 없어졌다가 다시 전해졌다. 《속문헌통고》 ○ 살펴보건대, 《고려사》를 보면, 의천이 선종(宣宗) 2년(1085) 을사에 송나라로 들어갔는바, 바로 원풍(元豐) 8년이다. 그 뒤에 원우(元祐) 4년(1089, 선종6)에 수개(壽介) 등을 파견하여 정원(淨源)에게 제전(祭奠)을 올리고, 겸하여 금탑(金塔)을 바쳤다. 그렇다면 이곳에서 “원우 초에 중국으로 들어가서 도를 물었다.”고 한 것은 틀린 것이다.
송 원풍(元豐) 8년에 고려국의 왕자 승통(僧統) 의천(義天)이 들어와 조공을 바쳤는데, 인하여 정원 법사(淨源法師)에게 수교(首敎)를 배우기를 청하면서 금으로 쓴 한역본(漢譯本) 《화엄경(華嚴經)》 3백 본을 절로 들이고, 금을 시주하여 화엄대각(華嚴大閣)과 화엄장탑(華嚴藏塔)을 건립하여 숭배하니, 영종(寧宗)이 화엄경각(華嚴經閣)이라고 쓰고 이종(理宗)이 이암(易庵)이라고 썼다. 원나라 연우(延祐) 4년(1317, 충숙왕4)에 고려의 심왕(瀋王)이 조서를 받들고서 이곳에서 향(香)을 올리고 경(經)을 읽었으며, 지정(至正) 말년에 절이 불탔다가 조선 초에 중수하였는데, 세속에서는 고려사(高麗寺)라고 칭한다.
원우 4년에 고려의 승통 의천이 정원(淨源)에게 제전(祭奠)을 올린다는 명분으로 탑 2개를 바쳤는데, 이때 마침 소자첨(蘇子瞻)이 항주(杭州)의 지사(知事)로 있다가 상소를 올려 이르기를,
“금탑(金塔)을 바치는 것을 거절하여 그가 오고자 하는 뜻을 끊어 버리소서.”
하니, 신종(神宗)이 따랐다. 《이상 모두 서호지(西湖志)》 ○ 살펴보건대, 《동파집(東坡集)》에 이르기를, “원우 4년에 고려의 승통 의천이 수하시자(手下侍者) 수개(壽介)ㆍ계상(繼常)ㆍ영류(領流)와 원자(院子) 김보(金保)ㆍ배선(裵善) 등 5명을 데리고 와서 항주(杭州)에서 죽은 승을 제사하였다.” 하였는데, 예문지(藝文志)에 상세하게 나온다.
일찍이 상고해 보건대, 고려사(高麗寺)는 본디 선종(禪宗)의 사찰로, 천성(天成) 2년(927)에 오월(吳越)의 충무왕(忠武王)이 실로 절을 창건하고 칙명을 내려 혜인사(慧因寺)라고 이름하였으며, 송나라 신종조(神宗朝)에 이르러서 진수 법사(晉水法師)란 자가 있어서 마명대사(馬鳴大士)의 가르침을 전하면서 《화엄경(華嚴經)》의 여러 경의(經義)에 주석을 내고 해석하였는데, 이것이 사람들에게 유전(流傳)되었다. 고려의 세자가 -살펴보건대, 왕자 의천(義天)은 세자가 아니다.-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와 조회함에 미쳐서는 사문(沙門)이 되어 모시면서 스승의 법을 전해 받기를 청하였다. 이에 고려사(高麗寺)라고 칭하게 되었다. 지금에 이르러 남아 있는 법파(法派)는 고려의 세자로부터 이미 17대나 전해졌다. 신종조(神宗朝) 때에는 좌승(左丞) 포맹종(蒲孟宗)이 항주(杭州)를 안무(安撫)하면서, 혜인사(慧因寺)가 고려사(高麗寺)로 바뀌었고 선종(禪宗)이 교종(敎宗)으로 바뀌었다는 내용의 상소를 올려 돌에 이름을 새기기를 주청하였다. 그 뒤로 종(宗)과 교(敎)가 번갈아 나왔는데, 《전등록(傳燈錄)》에서 칭한 회상사(懷祥寺), 의령사(義寧寺)는 바로 선종이다. 《서하집(西河集)》
살펴보건대, 《고려사》 종실열전(宗室列傳)에 이르기를, “문종(文宗)의 넷째 아들 대각 국사(大覺國師) 왕후(王煦)는 자(字)가 의천(義天)인데, 송나라 철종(哲宗)의 휘(諱)를 피하여 자로서 불리어졌다. 왕후는 문종 19년(1065) 을사에 출가(出家)하였는데, 천성이 총명하여 오교(五敎)를 문득 통달하고 널리 유술(儒術)을 섭렵하여 정통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이에 호(號)를 우세 승통(祐世僧統)이라 하였다. 왕후가 송나라로 들어가서 불법(佛法)을 구하려고 하였으나, 왕이 허락하지 않았다. 선종(宣宗) 2년(1085) 4월에 이르러서 왕후가 몰래 제자 두 사람을 데리고 송나라 상인 임영(林寧)의 배를 따라 송나라로 갔다. 송나라에 도착하자 황제가 수공전(垂拱殿)에서 인견하였는데, 객례(客禮)로 대우하면서 총애함이 지극하였다. 왕후가 사방을 돌아다니면서 불법을 묻기를 청하니, 황제가 조서를 내려 주객원외(主客員外) 양걸(楊傑)을 관반(館伴)으로 삼아 오중(吳中)의 여러 사찰을 두루 돌아다니게 하였다. 그 뒤 조서를 받들고서 동쪽으로 돌아오자, 왕이 태후(太后)를 모시고 봉은사(奉恩寺)에서 왕후를 맞이하였다. 왕후가 석전(釋典) 및 경서(經書) 1천 권을 바쳤다. 그리고 또 흥왕사(興王寺)에 교장도감(敎藏都監)을 설치할 것을 주청한 다음, 4천 권이나 되는 많은 서책을 요(遼)나라와 송나라에서 사와 이를 모두 다 간행하였다. 처음으로 천태종(天台宗)을 창시하여 국청사(國淸寺)에 두었다. 그 뒤에 해인사(海印寺)로 물러나 있다가 숙종(肅宗) 때에 졸하니, 책봉하여 대각 국사(大覺國師)라고 추증하였다.” 하였다.
또 살펴보건대, 동파(東坡) 소식(蘇軾)이 올린 상소에 이르기를, “복건(福建)의 상인이 항주(杭州)에서 고려의 화물(貨物)을 받아 본문 사이에다 주석을 달면서 《화엄경(華嚴經)》을 만드는데, 비용을 아주 많이 들여 인판(印板)을 만들어서는 공공연하게 배로 실어 가고 있습니다.” 하였다. 그렇다면 왕후(王煦)가 바친 석전(釋典)은 항주에서 새겨 만든 것인가? 우리나라의 해인사(海印寺)에 있는 장경판(藏經板)은, 고지(古志)에 “신라 애장왕(哀莊王) 정묘년에 새겨 만든 것이다.”고 하였는데, 애장왕이 재위한 19년 동안에는 정묘년이란 해가 없다. 이는 대개 선종(宣宗) 4년 정묘년에 의천(義天)이 교장도감(敎藏都監)을 설치하고서 간행한 것인데, 애장왕 정묘년으로 잘못 전해진 것이다. 의천이 해인사로 물러나 있었으니, 해인사에 판(板)을 보관하는 것 역시 안 될 것이 없다.
○ 진각(眞覺) : 항주(杭州) 용화사(龍華寺)의 영조(靈照) 진각 선사(眞覺禪師)는 고려 사람이다. 거처함에 있어서 오직 납의(衲衣) 한 벌만 입고 지냈으므로 민중(閩中) 사람들이 ‘조포납(照布衲)’이라고 불렀다. 승이 묻기를,
“보리수(菩提樹) 아래에서 중생을 제도하였다는데, 어떤 것이 보리수입니까?
하니, 선사가 이르기를,
“크기가 고련수(苦楝樹)만 하다.”
하였다. 승이 그 까닭을 물으니, 이르기를,
“본디 좋은 말[馬]이 아닌데 어찌하여 수고롭게 채찍질을 해 대는가.”
하였다. 천복(天福) 정미년(947, 정종2)에 항주의 대자산(大慈山)에서 입적하여 탑에 안치되었다. 《속문헌통고》
○ 《전등록》에 실려 있는 고려의 여러 승은 다음과 같다.
천룡(天龍) 기대사(機大師)의 법사(法嗣)에 고려 설악산(雪嶽山) 영광 선사(令光禪師)가 있다. 승이 묻기를, “어떤 것이 화상의 가풍(家風)입니까?” 하니, 선사가 이르기를, “분명히 기억하라.” 하였다. 승이 묻기를, “어떤 것이 제법(諸法)의 근원입니까?” 하니, 선사가 이르기를, “지시한 데 대해 사례하노라.” 하였다.
청량(淸涼) 익 선사(益禪師)의 법사에 고려 도봉산(道峯山) 혜거 국사(慧炬國師)가 있다. 처음에 정혜(淨惠)의 문하에서 기봉(機鋒)을 발하였는데, 고려의 왕이 그를 사모하여 사신을 보내어 돌아오기를 청하자 드디어 고국으로 돌아갔다. 국왕이 마음의 법문을 듣고 예우하기를 아주 극진하게 하였다. 어느 날 왕궁으로 들어오기를 청하자 설법을 하러 당(堂)에 올라갔다. 혜거 국사가 위봉루(威鳳樓)를 가리키면서 대중에게 이르기를, “위봉루가 여러 상좌(上座)들을 위하여 벌써 다 거량을 마쳤다. 여러분들은 알겠는가? 만일 알았다면 어떻게 알았는가? 모른다 하면 어째서 위봉루를 모르는가? 진중(珍重)하라.” 하였다. 혜거 국사의 설법은 중국에 퍼지지 않았으며, 또한 어디에서 죽었는지도 모른다. 또 고려 영감 선사(靈監禪師)가 있다. 승이 묻기를, “어떤 것이 청정한 가람(伽藍)입니까?” 하니, 영감 선사가 이르기를, “소의 외양간이 그것이다.” 하였다. 승이 묻기를, “어떤 것이 부처입니까?” 하니, 영감 선사가 이르기를, “저 어리석은 놈을 끌어내라.” 하였다.
보문(普門) 변 선사(辨禪師)의 법사에 고려국 혜홍 선사(慧洪禪師)가 있다.
육왕(育王) 심 선사(諶禪師)의 법사에 고려국 탄연 국사(坦然國師)가 있는데, 왕위를 버리고 사문(沙門)이 되었다. 《이상 모두 전등록》 ○ 살펴보건대, 《전등록》에 실려 있는 우리나라의 여러 승들은 드러난 사실이 별로 없으므로, 지금 각자 별도로 조목을 세워 기록하지 않고, 단지 신라와 고려로 구분하여 조목을 세운 다음 합쳐서 기록하였다.
환상인(幻上人) -《원시선(元詩選)》에 부약금(傅若金)의 ‘환상인이 고려로 돌아가는 것을 전송하며[送幻上人還高麗]’라는 시 한 수가 실려 있다.-
식무외(式無外) -《원시선》에, 장저(張翥)의 ‘식무외가 고려국으로 돌아가는 것을 전송하다.[送式無外歸高麗國]’라는 시 한 수가 실려 있다. ○ 살펴보건대, 고려 정포(鄭誧)의 《설곡집(雪谷集)》에 ‘식무외상인이 연경에서 노닐다가 장차 강남으로 가는 것을 전송하며[送式無外上人遊燕京將往江南]’라는 시가 있다.-
엄상인(嚴上人) -《열조시집(列朝詩集)》에 유기(劉基)의 ‘차운하여 신라 엄상인의 가을날에 부쳐 보인다는 시에 화답하다.[次韻和新羅嚴上人秋日見寄]’라는 시 2수와 ‘거듭 운을 써서 신라 엄상인의 시에 답하다.[重用韻答新羅嚴上人]’라는 시 2수가 실려 있다. ○ 살펴보건대, 신라는 마땅히 고려로 되어야 한다.-
굉연(宏演) -《열조시집》에 조선의 석(釋) 굉연의 ‘자청궁에서 노닐며[遊紫淸宮]’라는 시 한 수가 실려 있다.-
○ 송운대사(松雲大師) : 일본 경장(慶長) 11년(1606, 선조39)에 조선의 송운대사가 와서 강화(講和)를 요청하였다. 《이칭일본전(異稱日本傳)》
○ 무명 선사(無名禪師) : 강희(康煕) 30년(1691, 숙종17)에 내가 자성(慈聖) 현 선사(賢禪師)를 보내어서 고려사(高麗寺)로 들어가 당에 올라가 설법하게 하였는데, 그때 재관(宰官)과 사민(士民)들 몇 명이 당 아래에 늘어서서 절을 하였다. 그러고는 모두들 말하기를,
“선사가 고려의 선사에게 법을 받았는데, 현 선사에게 법을 준 고려 선사가 아직도 방장(方丈)으로 있다.”
하였다. 이에 모두들 첨앙하는 예를 올릴 생각으로 그를 찾았으나 어디론가 가고 없었다. 얼마 뒤에 음식의 공양을 마치고 수희(隋喜)를 하고자 하여 욕당(浴堂)에 이르니, 노납(老衲)이 흰머리를 드리우고 화로를 끼고 있는 것이 보였는데, 다 떨어진 가사를 입은 채 두 눈을 감고 구부리고 앉아 있었다. 따르는 자가 말하기를,
“이 사람이 바로 그 노선사(老禪師)이다.”
하였다. 이때 보고 있던 사람 수십 명이 모두 공경하는 마음으로 우두커니 서 있으면서 그를 놀라게 하지 않고 있다가, 얼마 뒤에 모두 탄식하면서 흩어져 갔다. 《서하집(西河集)》

[주D-001]혜관(慧灌) : 고구려 영류왕(榮留王) 때의 승으로, 수나라에 가서 길장(吉藏)에게 삼론종(三論宗)의 종지를 배우고 돌아와, 영류왕 7년(624)에 일본으로 가 삼론종을 선양하여 일본 삼론종의 개조(開祖)가 되었다.
[주D-002]고려(高麗) : 고구려이다. 《일본서기》에서는 고구려를 통상 고려로 표기하고 ‘고마’로 읽고 있는데, 이러한 훈독(訓讀)은 맥(貊)에서 연유한 듯하다.《韓國學基礎資料選集 古代篇, 241쪽》
[주D-003]혜자(慧慈) : 영양왕(嬰陽王) 6년(595)에 일본에 건너가 백제의 승 혜총(慧聰)과 함께 법흥사(法興寺)에 살면서 포교하였으며, 성덕태자(聖德太子)의 스승으로 있었다.
[주D-004]혜편(慧便) : 일찍이 일본에 건너가 불도를 펴려 하였으나, 일본의 백성들이 너무 미개하여 속세에 숨어 있었다. 그러다가 평원왕(平原王) 26년(584)에 백제의 사신 녹량(鹿梁)이 미륵불상(彌勒佛像)을 가지고 오자, 일본의 대신인 소아마자(蘇我馬子)가 불상을 모시고 봉향(奉香)할 사람을 구함에 혜편이 마침내 뽑혔다. 이에 소아가 혜편을 스승으로 모셨으며, 그의 세 딸을 혜편에게 보내어 비구니(比丘尼)가 되게 하였는데, 이것이 일본 비구니의 시초이다.
[주D-005]파마국(播磨國) : 현재의 일본 병고현(兵庫縣) 일대에 있었다.
[주D-006]금산(金山) : 《삼국유사(三國遺事)》 권4 진표전간(眞表傳簡)에는 진표의 출생지를 완산주(完山州) 만경현(萬頃縣)이라고 하였다.
[주D-007]도솔천(兜率天)의 주인 : 미륵보살(彌勒菩薩)을 가리킨다. 도솔천은 욕계(欲界) 육천(六天) 가운데 제4천(天)으로, 수미산(須彌山) 꼭대기에서 12만 유순(由旬)되는 곳에 있는 천계(天界)이다.
[주D-008]자씨(慈氏) : 미륵보살(彌勒菩薩)을 말한다.
[주D-009]소미로(蘇迷盧) : 수미산(須彌山)을 가리킨다. 수미산은 불교(佛敎)의 세계설(世界說)에서 세계의 한가운데에 높이 솟아 있다고 하는 산으로, 꼭대기에는 제석천(帝釋天)이 살고 있고, 중턱에는 사천왕(四天王)이 살고 있다고 하는데, 높이는 물 위로 8만 유순(由旬)이고 물 아래로 8만 유순이며, 가로의 길이도 그와 같다고 한다.
[주D-010]삼선(三禪) : 욕계(欲界), 색계(色界), 무색계(無色界)의 삼계(三界) 가운데 색계의 제삼선천(第三禪天)을 말한다. 이 천(天)을 정생희락지(定生喜樂地)라 하며, 심묘(深妙)의 선정(禪定)에 따라 심신(心身)의 쾌락이 생긴다.
[주D-011]천안(天眼) : 육안(肉眼), 천안(天眼), 혜안(慧眼), 법안(法眼), 불안(佛眼)의 오안(五眼) 가운데 하나로, 색계(色界)의 천인(天人)이 가지고 있는 눈을 말한다. 사람 가운데에서도 선정(禪定)을 닦으면 얻을 수 있으며, 색계(色界) 사대(四大)로 만든 청정한 안근(眼根)이 거칠고 자세하고 멀고 가까운 일체의 모든 색(色)과 중생(衆生)의 미래에 있을 생사(生死)의 상(相)을 미리 알 수가 있는데, 여기에는 선정(禪定)에 의하여 수득(修得)한 천안과 태어나면서부터 얻는 생득(生得)한 천안이 있다.
[주D-012]와발(瓦鉢) : 흙으로 만든 바리때로, 부처가 제자들에게 쓰게 한 것이다.
[주D-013]첨(籤) : 첨은 끝이 뾰족하여서 물건을 꿸 수 있도록 만든 도구인데, 여기서는 점을 치는 대쪽인 간(簡)의 뜻이다. 《삼국유사(三國遺事)》 권4 진표전간(眞表傳簡)에는 간자(簡子)를 받은 것으로 되어 있다.
[주D-014]하나에는 …… 있어 : 《삼국유사》 권4 진표전간에는 이 부분에 대해 “미륵보살이 감응해 나타나 189개의 간자(簡子)를 주면서 이르기를, ‘이 가운데에서 제8간자는 새로 얻은 묘계(妙戒)를 비유한 것이요, 제9간자는 구족계(具足戒)를 얻은 것에 비유한 것이다. 이 두 간자는 나의 손가락뼈이며, 나머지는 모두 침향(沈香)과 단향(檀香)으로 만든 것이다.’ 하였다.” 하였다.
[주D-015]신훈(新熏) : 신훈종자(新熏種子)를 가리킨다. 유식종(唯識宗)에서 팔식(八識) 가운데 제8 아뢰야식(阿賴耶識) 중에 있는 종자로, 후천적으로 여러 가지 정신 작용에 의하여 훈부(熏附)한 것을 말한다.
[주D-016]본유(本有) : 본유종자(本有種子)를 가리킨다. 신훈종자의 반대 개념으로, 아뢰야식에 잠재되어 있는 종자로서, 훈습(薰習)에 의하여 생긴 것이 아니라 선천적으로 존재한 것을 가리킨다.
[주D-017]오하(五夏) : 5년 동안 수행하였다는 뜻으로, 하(夏)는 하안거(夏安居)를 뜻한다.
[주D-018]주류성(周留城)에 …… 일으켰다 : 주류성은 지금의 충청남도 한산(韓山) 지방에 있던 백제의 성으로, 지라성(支羅城)이라고도 한다. 그 위치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으나, 금강(錦江) 하류의 한산 부근에 있는 건지산성(乾至山城)이라는 설이 유력하다. 백제 부흥 운동의 중심지였다.
[주D-019]관륵(觀勒) : 삼론(三論)의 대가로, 무왕(武王) 3년(602)에 일본에 건너가 원흥사(元興寺)에 있으면서 불교 전파에 힘썼다.
[주D-020]법명(法明) : 백제의 비구니로, 의자왕(義慈王) 15년(655)에 대마도에 가서 오음으로 《유마경》을 독송하였다.
[주D-021]대직관겸족(大織冠鎌足) : 일본의 대신으로, 천지천황(天智天皇) 8년(669)에 내대신(內大臣)이 되었다. 《해행총재(海行摠載)》 권1 일본국기(日本國紀)에는 대직관(大職冠)으로 되어 있다.
[주D-022]오음(吳音) : 중국 오월(吳越) 지방에서 쓰인 음으로, 일본에서는 불교도가 경전을 독송(讀誦)할 때 대개 오음으로 읽으며, 불교어(佛敎語)는 대개 오음으로 발음된다.
[주D-023]묵호자(墨胡子) : 《해동고승전(海東高僧傳)》에는 흑호자(黑胡子)로 표기되어 있다.
[주D-024]일선군(一善郡) : 지금의 선산(善山)이다.
[주D-025]승가(僧伽) : 범어 Samgha의 음역으로, 입도자(入道者)를 뜻한다. 불제자(佛弟子), 비구(比丘), 사문(沙門)이라고도 한다.
[주D-026]오천축국(五天竺國) : 동, 서, 남, 북, 중의 다섯 천축국을 말한다.
[주D-027]팔탑(八塔) : 팔대영탑(八大靈塔)을 가리킨다. 팔대영탑은 석존(釋尊)과 관계가 깊은 성지(聖地) 여덟 곳에 세운 탑으로, 부처가 탄생한 가비라국(迦毘羅國) 남비니원(藍毘尼園)의 탑, 성도(成道)한 마가타국(摩迦陀國) 이련하원(泥連河園)의 탑, 최초로 설법한 파라내국(波羅奈國) 녹야원(鹿野園)의 탑, 신통력을 나타낸 사위국(舍衛國) 기타원(祇陀園)의 탑, 도리천(忉利天)에서 칠보(七寶)의 계단으로 내려온 승가시국(僧伽尸國) 곡녀성(曲女城)의 탑, 대중을 교화하여 돌아오게 한 마갈타국(摩竭陀國) 왕사성(王舍城)의 탑, 수량(壽量)을 생각하여 열반(涅槃)에 들 것을 예언한 비야리성(毘耶離城)의 탑, 입멸(入滅)한 구시나성(拘尸那城)의 탑을 말한다.
[주D-028]우전국(于闐國) : 서역(西域)의 여러 나라 가운데 하나로, 총령(蔥嶺)의 북쪽에 있으며, 우전(于殿), 계단(谿丹), 굴단(屈丹), 구달살라(瞿怛薩那) 등으로도 표기한다. 인도에서 중국으로 오는 경전(經典)이 모두 이곳을 경유하여 들어왔다.
[주D-029]총령(蔥嶺) : 지금의 파미르 고원(高原)에 뻗어 있는 큰 산맥을 말한다. 옛날에 중국에서 인도로 가기 위하여서는 반드시 넘어야 하던 산맥이다.
[주D-030]삼귀(三歸) : 불문(佛門)에 처음 귀의할 때 하는 의식으로, 불(佛), 법(法), 승(僧)에 귀의함을 말한다. 삼귀의(三歸依), 삼귀계(三歸戒)라고도 한다.
[주D-031]도탈(度脫) : 생사(生死)의 바다를 건너서, 미계(迷界)를 벗어나 오계(悟界)로 들어가는 것을 말한다.
[주D-032]화연(化緣) : 교화하는 인연을 말한다. 부처와 보살이 이 세상에 출현하는 것은 교화할 인연이 있는 까닭이므로, 만일 이 화연이 다하면 곧 열반(涅槃)한다.
[주D-033]산의 …… 곳 : 하란산(賀蘭山)이다.
[주D-034]안사(安史)의 난(亂) : 안녹산(安祿山)과 사사명(史思明)이 일으킨 난을 말한다.
[주D-035]영무(靈武) : 당나라 때 현(縣)을 두었던 곳으로, 신성(新城)의 서북쪽에 있었다.
[주D-036]보승불(寶勝佛) : 금강계(金剛界) 만다라(曼茶羅) 팔엽연대(八葉蓮臺)의 남방월륜(南方月輪) 중앙에 위치해 있는 부처를 말한다. 일체의 재물과 보배를 맡은 부처이다. 보생불(寶生佛)이라고도 한다.
[주D-037]불공(不空) : 진언종(眞言宗)의 부법(付法) 제6조(祖)로, Amoghavajra의 음역이다. 불공금강(不空金剛)이라고도 한다. 사자국(獅子國) 사람으로, 남양의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다가 16세 때 중국에 들어와 밀학(密學)을 닦아 부법의 조(祖)가 되었다. 현종(玄宗)이 그에게 귀의하여 궁중에 단을 만들고 관정(灌頂)을 받았다.
[주D-038]지장(地藏) : 중국에서 활동한 우리나라의 승으로, 그가 죽을 때 대중(大衆)에게 고하고 함 속에 들어가 가부좌하고 죽었는데, 함 속의 얼굴이 3년 뒤에도 그대로였다 한다. 그 자리에 탑을 세웠는데, 최근에 그 탑 속을 확인한 결과 아직도 죽을 때의 모습과 같이 유체가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고 한다. 중국에서는 그를 육신보살(肉身菩薩)로 추앙하고 있으며, 그가 있던 곳에 육신전(肉身殿)을 세웠다.
[주D-039]도수충(屠粹忠) : 청나라 정해(定海) 사람으로, 호가 지암(芝巖)이며, 《삼재조이》의 저자이다.
[주D-040]방완(房琬) : 원문에는 ‘方琬’으로 되어 있다. 《신승전(神僧傳)》 권6에 의거하여 ‘房琬’으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41]부도(浮圖) : 범어인 Stupa의 음역으로, 탑(塔)을 말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승의 사리나 유골을 넣은 석종(石鐘)을 부도라고 한다.
[주D-042]현광(玄光) : 신라 진흥왕 때의 승으로, 중국 진(陳)나라로 가서 형산(衡山)의 혜사(慧思)에게 《법화경(法華經)》 안락행품(安樂行品)을 배운 다음 돌아왔다. 뒤에 남악(南岳)의 조영당(祖影堂)에 28인을 그렸는데, 그 가운데 들었고, 천태산(天台山) 국청사(國淸寺)의 조당(祖堂)에도 들었다.
[주D-043]웅주(熊州) : 신라 9주의 하나로, 지금의 공주(公州)이다.
[주D-044]조열지(晁說之) : 송나라 사람으로 자가 이도(以道)이며, 사마광(司馬光)을 흠모하여 호를 경우(景迂)라고 하였다. 소식(蘇軾)의 천거에 의해 관직에 나왔으며, 여러 서책을 박람하였고, 서화에 뛰어났다.
[주D-045]지자대사(智者大師) : 수(隋)나라의 승으로 천태종(天台宗)을 개창한 지의(智顗)를 말한다. 《법화경(法華經)》을 중심으로 해서 불교를 통일하여 천태종을 완성하였으며, 진왕(陳王) 양광(楊廣)에게서 지자대사(智者大師)의 호를 받았다. 《법화현의(法華玄義)》, 《법화문구(法華文句)》 등의 저서가 있다.
[주D-046]용수(龍樹) : 인도의 대승 불교(大乘佛敎)를 크게 드날린 Nagarjuna의 음역이다. 마명(馬鳴)의 뒤에 세상에 나와 대승 법문(大乘法文)을 성대히 선양하매 대승 불교가 이로부터 발흥하였다. 제2의 석가(釋迦), 팔종(八宗)의 조사(祖師)라고 일컫는다.
[주D-047]형계(荊溪) : 중국의 승으로 형계(荊溪)에 살았던 잠연(湛然)을 가리킨다. 잠연은 천태종의 5세로, 종풍(宗風)을 선양하고, 주석서(註釋書)를 많이 지었다. 묘락대사(妙樂大師), 기주 법사(記主法師)라고도 한다.
[주D-048]상주(湘州) 사람이다 : 원문에는 ‘相州’로 되어 있는데, 《송고승전(宋高僧傳)》 권4에 의거하여 ‘湘州’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원효의 출생지가 《삼국유사》 권4에는 압량군(押梁郡) 불지촌(佛地村)이라고 되어 있는데, 지금의 경산군(慶山郡) 압량면(押梁面) 신월동(新月洞) 부근으로 추측된다.
[주D-049]상법사(湘法師) : 원문에는 ‘相法師’로 되어 있는데, 《송고승전》 권4에 의거하여 ‘湘法師’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50]지공(誌公) : 원문에는 ‘志公’으로 되어 있는데, 《송고승전》 권4에 의거하여 ‘誌公’으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지공은 양(梁)나라의 승 보지(寶誌)로, 성은 송씨(宋氏)이고, 시호는 묘각대사(妙覺大師)이다. 음식을 수시로 먹었고, 머리카락의 길이가 몇 자나 되었으며, 신통한 일을 많이 나타내었고, 예언을 많이 하였다.
[주D-051]백좌(百座) : 《인왕경(仁王經)》을 강독하는 불교의 법회로, 인왕회(仁王會), 인왕도량(仁王道場)이라고도 하는데, 나라의 안녕을 기원하는 호국적(護國的)인 성격이 강하였다.
[주D-052]인왕경(仁王經) : 구마라습(鳩摩羅什)이 번역한 《불설인왕반야바라밀경(佛說仁王般若波羅蜜經)》과 당나라 불공(不空)이 번역한 《인왕호국반야바라밀다경(仁王護國般若波羅蜜多經)》 두 종류가 있다. 부처가 16국 왕으로 하여금 그 나라를 보호하고 편안하게 하기 위해서는 반야바라밀을 수지(受持)하여야 한다고 말한 경이다.
[주D-053]대안성자(大安聖者) : 신라 진흥왕 때부터 선덕왕 때까지 활동하였던 고승으로, 원효가 그에게 사사(事師)하였던 듯하다.
[주D-054]시본이각(始本二覺) : 시각(始覺)과 본각(本覺)을 말한다. 본각은 우주 법계의 근본 본체인 진여(眞如)의 이체(理體)를 말하고, 시각은 수행에 의하여 증(證)한 각체(覺體)를 말한다. 기신론(起信論)은 심생멸문(心生滅門)의 아리야식(阿梨耶識)을 무명(無明)인 불각(不覺)과 진여(眞如)인 각(覺)으로 나누며, 각은 다시 시각과 본각으로 나눈다.
[주D-055]각승(角乘) : 각(覺)과 각(角)이 음이 같으므로 소의 두 뿔로 시각(始覺)과 본각(本覺)을 비긴 것이고, 승(乘)은 불법(佛法)을 수레에 비긴 것이다.《韓國學基礎資料選集 古代篇, 635쪽 주》
[주D-056]약소(略疏) : 원효의 《금강삼매경론(金剛三昧經論)》을 말하는데, 중국에서 크게 유행하였다.
[주D-057]배도(盃渡) : 진(晉)나라의 승으로, 기주(冀州) 사람이며, 성명은 미상이다. 항상 나무로 만든 잔[盃]을 타고 물을 건넜으므로 사람들이 배도화상(盃渡和尙)이라고 불렀다. 세세한 행실에 구애되지 않았으며, 신통력이 탁월하였는데, 세상에서는 그의 유래를 알지 못하였다.
[주D-058]탐현기(探玄記) : 당나라 법장(法藏)이 지은 《화엄경탐현기(華嚴經探玄記)》를 말한다. 모두 20권으로 되어 있다.
[주D-059]경소(經疏) : 원효가 지은 《반야삼매경소(般若三昧經疏)》, 《반야심경소(般若心經疏)》, 《금강반야경소(金剛般若經疏)》 등을 말한다.
[주D-060]사교(四敎) : 이른바 원효사교(元曉四敎)를 말한다. 원효사교는 원효가 부처의 일생 동안의 가르침을 판단하여 4교로 나눈 것으로, 삼승교(三乘敎), 삼승통교(三乘通敎), 일승분교(一乘分敎), 일승만교(一乘滿敎)를 말한다.
[주D-061]사제(四諦)와 …… 경(經) : 사제는 사성제(四聖諦)라고도 하며, 고(苦), 집(集), 멸(滅), 도(道)를 말한다. 제(諦)는 불변여실(不變如實)의 진상(眞相)이란 뜻이다. 연기(緣起)는 범어 Pratiyasamutpada의 음역으로 인연생기(因緣生起), 즉 연이 되어서 결과가 일어난다는 뜻이다. 경은 이들 내용이 실려 있는 《아함경(阿含經)》을 말한다.
[주D-062]유심(唯心)의 …… 들어갔다 : 원효가 34세 때 동학(同學)을 하던 의상(義湘)과 함께 불법을 닦으러 당나라로 가던 길에, 요동(遼東)에 이르러서 어느 무덤 사이에서 자다가 목이 말라 물을 마셨는데, 다음 날 아침에 깨어 보니 해골 속에 있는 더러운 물이었음을 알았다. 이에 급히 토하다가 깨닫기를, “마음이 나면 여러 가지 법이 나고 마음이 없어지면 해골과 둘이 아니다. 부처님 말씀에, 삼계가 오직 마음뿐[唯心]이라 하셨으니, 부처님이 어찌 나를 속이겠는가.” 하고는 곧바로 본국으로 돌아왔다.
[주D-063]현수 국사(賢首國師) : 중국 화엄종의 제3조인 법장(法藏)으로, 현수는 그의 자(字)이다. 속성(俗姓)이 강(康)이었으므로 강장 국사(康藏國師)라고도 한다.
[주D-064]지상(至相) : 종남산 지상사(至相寺)에 주석(住錫)하면서 화엄종을 드날렸던 지엄(智儼)을 가리킨다. 지엄은 화엄종의 제2조로, 지상 존자(至相尊者), 지상대사(至相大師)라고도 칭한다.
[주D-065]피일휴(皮日休) : 당나라의 문장가로, 자가 습미(襲美), 일소(逸少)이며, 육귀몽(陸龜蒙)과 친하게 지내 당시에 피륙(皮陸)이라고 칭하였다. 함통(咸通 860~873) 연간에 진사시에 합격하였다.
[주D-066]남악(南嶽) 양 선사(讓禪師) : 형산(衡山)의 남악(南嶽) 관음원(觀音院)에서 주석하였던 회양(懷讓)을 가리키는데, 육조(六祖) 혜능(慧能)의 전법(傳法) 제자로, 대혜 선사(大慧禪師)라고도 한다.
[주D-067]법사(法嗣) : 법통(法統)을 사속(嗣續)하는 제자라는 뜻으로, 스승의 인가(印可)를 받아 법을 전하는 자를 말한다.
[주D-068]서당(西堂) 장 선사(藏禪師) : 강서(江西)의 개원사(開元寺)에 있었던 서당지장(西堂智藏)을 가리킨다.
[주D-069]계림(鷄林) : 신라를 말한다. 중국에서는 흔히 계림과 신라를 혼용하였다.
[주D-070]도의 선사(道義禪師) : 법호는 원적(元寂)으로, 중국에 가서 강서(江西)의 개원사에서 법장에게서 의심을 결단하고 법을 이어받으니, 법장이 “불법을 전하는 것을 그대가 아니면 누구에게 하겠는가.” 하고는 드디어 이름을 도의(道義)라고 고쳤다.
[주D-071]혜철 선사(慧徹禪師) : 동리산파(桐裡山派)의 개조(開祖)로, 혜철(惠哲)이라고도 하며, 자는 체공(體空)이고 시호는 적인(寂忍)이다. 지장(智藏)이 이미 죽은 뒤에 중국에 들어가서 심인(心印)을 받았다.
[주D-072]홍척 선사(洪陟禪師) : 남한조사(南漢祖師)라고도 하며, 시호는 증각(證覺)이다. 당나라로 들어가서 법장에게 심인을 받았다.
[주D-073]마곡(麻谷) 철 선사(徹禪師) : 보철(寶徹)을 가리킨다. 마곡은 산서성(山西省) 하동현(河東縣) 남쪽에 있는 지명으로 보철이 이곳에 주석하면서 설법하였다.
[주D-074]무염 선사(無染禪師) : 신라 때 구산선문(九山禪門) 가운데 하나인 성주산파(聖住山派)의 개조로, 휘(諱)는 무주(無住)이고, 시호는 대랑혜(大朗慧)이다. 중국에 들어가 마곡 보철(麻谷寶徹)을 참방(參訪)하여 인가(印可)를 받고 여러 곳을 두루 찾아다님에 그의 이름이 알려져 동방대보살(東方大菩薩)이라 불리었다.
[주D-075]장경(章敬) 운 선사(惲禪師) : 당나라 때의 승인 회운(懷惲)을 가리킨다. 장경은 경조(京兆)에 있는 사찰의 이름이다.
[주D-076]현욱 선사(玄昱禪師) : 구산선문(九山禪門)의 하나인 봉림산파(鳳林山派)의 개조로, 현육(玄育), 혜목(慧目)이라고도 하며, 시호는 원감(圓鑑)이다. 회운(懷惲)이 입적한 뒤에 중국에 들어가 인가를 받았다.
[주D-077]남전(南泉) 원 선사(願禪師) : 보원(普願)을 가리키는데, 남전(南泉)은 지명인 동시에 그의 호이다. 마조도일(馬祖道一)의 제자로, 지양(池陽)의 남전(南泉)에 선원을 짓고 30년 동안 내려가지 않았으며, 학인(學人)을 준엄하게 다루어서 남전참묘(南泉斬猫), 남전겸자(南泉鎌子), 남전모란(南泉牡丹) 등 많은 일화를 남겼다.
[주D-078]도균 선사(道均禪師) : 도윤(道允)을 가리키며, 도운(道雲)이라고도 한다. 호는 쌍봉(雙峰)이며, 시호는 철감(澈鑑)이다. 황해도 봉산(鳳山) 출신으로, 헌덕왕 17년(825)에 당나라로 들어가 남전 보원(南泉普願)에게 법을 받았으며, 문성왕 4년(842)에 귀국하였다.
[주D-079]염관(鹽官) 안 선사(安禪師) : 원문에는 ‘監官’으로 되어 있는데, 《경덕전등록(景德傳燈錄)》 권10에 의거하여 ‘鹽官’으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제안(齊安)을 가리키며, 염관은 항주(杭州)에 있는 현(縣) 이름이다. 당나라 말기의 호법승(護法僧)으로, 지엄(智儼)에게서 배웠으며, 염관현의 해창원(海昌院)에서 강설하였다.
[주D-080]품일 선사(品日禪師) : 구산선문 가운데 도굴산파(闍崛山派)의 개조로, 범일(梵日)이라고도 하며, 시호는 통효(通曉)이다. 흥덕왕 6년(831)에 당나라에 들어가 제안 선사를 참방하여 제안 선사의 “평상심(平常心)이 바로 도이다.”라는 한마디 말에 크게 깨우치고 6년 동안 섬겼다.
[주D-081]대매(大梅) 상 선사(常禪師) : 법상(法常)을 가리킨다. 대매는 그의 호이면서 동시에 절강성(浙江省) 영파부(寧波府)에 있는 산 이름으로, 그는 이곳에 호성사(護聖寺)를 짓고 종풍을 크게 떨쳤다.
[주D-082]서쪽에서 온 뜻 : 초조(初祖)인 달마(達磨)가 서천(西天)으로부터 중국에 와서 선법(禪法)을 전한 뜻이 무엇인가 하는 것으로, 그 뜻을 참구(參究)하는 것이 바로 불조(佛祖)의 심인(心印)을 참구하는 것이다. 선문답에서 자주 인용되는 문구이다.
[주D-083]과두(裹頭) : 승들이 입는 가사(袈裟)로 머리를 싸매는 것으로, 선문답(禪問答)에서 자주 인용된다.
[주D-084]근본[本] : 근본은 낙(酪)을 만드는 근본인 우유(牛乳)를 뜻한다.
[주D-085]귀종(歸宗) 상 선사(常禪師) : 지상(智常)을 가리킨다. 귀종은 여산(廬山)에 있는 사찰의 이름이다.
[주D-086]상주(常住) : 이 부분이 원문에는 ‘常任’으로 되어 있는데, 《경덕전등록(景德傳燈錄)》 제10권에 의거하여 ‘常住’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87]기봉(機鋒) : 기(機)는 수행에 따라 얻은 심기(心機)이고, 봉(鋒)은 심기의 활용이 날카로운 모양을 뜻한다. 선객(禪客)이 다른 사람을 대할 때의 예민한 활용을 말한다.
[주D-088]신라(新羅) 증 선사(證禪師) : 대증 선사(大證禪師)를 가리킨다.
[주D-089]신라 척 선사(陟禪師) : 홍척 선사(洪陟禪師)를 가리킨다. 홍직 선사(洪直禪師)라고도 한다.
[주D-090]천룡화상(天龍和尙) : 중국 항주(杭州)의 승으로, 명주(明州) 대매산(大梅山) 법상 선사(法常禪師)의 법을 이어받았다.
[주D-091]앙산(仰山) 적 선사(寂禪師) : 혜적(慧寂)을 가리킨다. 앙산은 그의 호이며, 위앙종(潙仰宗)의 개조로, 대앙산(大仰山)에서 크게 선풍(禪風)을 드날렸다.
[주D-092]오관산(五冠山) 순지 선사(順支禪師) : 오관산은 장단(長湍) 주위에 있는 산이다. 순지는 헌안왕(憲安王) 3년(859)에 당나라에 가서 혜적(慧寂)에게서 법을 받았으며, 그의 시호(諡號)가 요오 선사(了悟禪師)이다.
[주D-093]불자(拂子) : 원문에는 ‘佛子’로 되어 있는데, 《경덕전등록》 권13에 의거하여 ‘拂子’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불자는 불가에서 벌레를 쫓거나 먼지를 터는 데 쓰는 도구이다.
[주D-094]임제(臨濟) 현 선사(玄禪師) : 의현(義玄)을 가리킨다. 임제종(臨濟宗)의 개조(開祖)로, 황벽 희운(黃蘗希運)의 제자이며, 임제는 그의 호이다.
[주D-095]석상(石霜) 저 선사(諸禪師) : 경저(慶諸)를 가리키며, 석상은 그의 호이다.
[주D-096]행적 선사(行寂禪師) : 문성왕(文聖王) 10년(848)에 당나라에 건너가 15년 동안 명산을 돌아다니면서 수도하였으며, 석상 경저에게서 심인(心印)을 받아 귀국하여 효공왕(孝恭王) 때 국사(國師)가 되었다. 시호는 낭공대사(朗空大師)이다.
[주D-097]동산(洞山) 개 선사(价禪師) : 조동종(曹洞宗)의 개조인 양개(良价)를 가리킨다. 동산은 그의 호이면서 동시에 강서성(江西省) 서주부(瑞州府) 고안현(高安縣)에 있는 산 이름으로, 동개가 이 산의 보리원(普利院)에서 크게 선풍(禪風)을 떨쳤다.
[주D-098]구봉(九峯) 건 선사(虔禪師) : 도건(道虔)을 가리킨다. 구봉은 균주(筠州)에 있는 산 이름이다.
[주D-099]운개(雲蓋) 원 선사(元禪師) : 지원(志元)을 가리킨다. 운개는 담주(潭州)에 있는 산 이름이다.
[주D-100]대인(大人) : 부처나 보살을 가리킨다.
[주D-101]자라장(紫羅帳) 속 : 자라장은 자색의 비단으로 된 휘장으로, 귀인이 있는 곳에 치는 장막이다. 선어(禪語)에서는 이를 가장 존귀한 곳인 제왕(帝王)의 거처를 뜻하는바, 일반 사람이 엿볼 수 없는 제왕의 거처를 상식적(常識的)인 사고가 미치지 못하는 절대적인 경지에 비유한 것이다.
[주D-102]12시 : 하루 24시간을 말한다. 예전에는 하루를 12시로 나누었다.
[주D-103]패엽(貝葉) : 불경(佛經)을 가리킨다. 패다라(貝多羅) 나무의 잎에다가 쓴 경문(經文)을 말한다.
[주D-104]동관(潼關) : 원문에는 ‘潼開’로 되어 있는데, 《경덕전등록》 권17에 의거하여 ‘潼關’으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동관은 섬서성(陝西省)에 있는 관문(關門)의 이름이다.
[주D-105]설봉(雪峯) 존 선사(存禪師) : 원문에는 ‘雲峯’으로 되어 있는데, 《경덕전등록》 권19에 의거하여 ‘雪峯’으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의존(義存)을 가리킨다. 설봉은 복주(福州)에 있다.
[주D-106]운거(雲居) 응 선사(膺禪師) : 도응(道膺)을 가리킨다. 운거는 그의 호이면서 동시에 강서성(江西省) 건창(建昌)에 있는 산 이름으로, 도응이 이곳에 주석하여 동산(洞山)의 종풍(宗風)을 크게 떨쳤다.
[주D-107]경유 선사(慶猷禪師) : 신라 말기에서 고려 초기까지 활동하였던 승려로, 시호는 법경(法鏡)이다. 진성여왕(眞聖女王) 2년(888)에 당나라에 들어가서 운거 도응의 가르침을 받고 귀국하였으며, 고려 태조는 그를 왕사(王師)로 섬겼다.
[주D-108]방(棒) : 막대로 때리는 것이다. 선가(禪家)의 종장(宗匠)이 사람을 대할 때 방으로 치거나 대갈(大喝)을 발하는데, 방은 덕산(德山)에게서 시작되고 갈(喝)은 임제(臨濟)에게서 나왔다.
[주D-109]백조(白兆) 원 선사(圓禪師) : 지원(志圓)을 가리킨다. 백조는 안주(安州)에 있는 산 이름이다.
[주D-110]장경(長慶) 능 선사(稜禪師) : 혜릉(慧稜)을 가리키며, 장경은 그의 호이다. 설봉(雪峯) 의존(義存)의 제자로 초경(招慶)과 장경(長慶) 두 곳에서 개당(開堂)하여 설법하였다.
[주D-111]홍주(洪州) 백장산(百丈山) : 강서성(江西省) 남창부 봉신현에 있는 산으로, 대웅산(大雄山)이라고도 하며, 백장대사(百丈大師)가 백장청규(百丈淸規)를 만들어서 선문(禪門)의 의식(儀式)을 제정한 곳이다.
[주D-112]명조(明照) 안 선사(安禪師) : 동산(洞山) 양개 선사(良价禪師)의 법사(法嗣)인 소산(疏山) 광인 선사(光仁禪師)의 법사를 이었다. 《경덕전등록》 권17에 그의 문답(問答)이 실려 있다.
[주D-113]영주(郢州) 파초산(芭蕉山)의 혜청 선사(慧淸禪師) : 앙산(仰山) 남탑(南塔) 광용 선사(光涌禪師)의 법사로, 《경덕전등록》 권12에 그의 문답이 실려 있다.
[주D-114]그 뒤에 …… 발각되었다 : 일설에는 김대비가 장정만(張淨滿)에게 돈을 주고 조계(曹溪)의 육조탑(六祖塔)에서 육조대사의 머리를 훔쳐 내어 해동으로 돌아와 공양하였는데, 지금의 지리산 쌍계사(雙溪寺) 탑전(塔殿)에 봉안한 육조정상탑(六祖頂相塔)이 그것이라고 한다.
[주D-115]위령선(威靈仙) : 미나리아재비과에 속하는 낙엽 활엽 만목(蔓木)으로, 여름에는 희고 큰 꽃이 피는데, 주로 인가 부근에 관상용으로 심는다. 이 위령선의 뿌리는 한의(韓醫)에서 담이나 풍(風), 습(濕) 등을 다스리는 데 쓴다.
[주D-116]도신(道侁) : 신라 말기에 활동하면서 《도선비기(道詵秘記)》를 지은 도선(道詵)을 가리킨다.
[주D-117]일행(一行)의 지리법(地理法) : 일행은 당나라의 승으로, 밀교(密敎)를 익혀서 지리법에 능통했다고 한다. 일행이 죽은 해는 727년으로, 도선은 그보다 대략 2백 년 뒤에 활동하였으며, 또한 당나라에는 가지 않았는바, 도선이 일행의 지리법을 직접 전수받은 것은 아니다.
[주D-118]법중(法衆) : 불법(佛法)을 따르는 중승(衆僧)을 가리키는바, 출가한 오중(五衆)을 모두 칭한다.
[주D-119]제관(諦觀) : 고려의 승으로 《천태사교의(天台四敎儀)》를 지었다. 《천태사교의》는 각지에 유포되어 일본에도 전해졌다. 그가 천태종의 서적을 중국에 전하여 천태교가 중국에서는 다시 유행하였으나, 그가 본국으로 돌아오지 못하여 고려 천태종의 맥은 끊기게 되었는데, 의천(義天)이 중국에 가서 천태교를 배운 다음 고려로 돌아와 천태종을 수립하였다.
[주D-120]오월왕(吳越王) 숙(俶) : 오월의 창건자인 전류(錢鏐)의 손자로, 자가 문덕(文德)이고 시호가 충의(忠懿)이다.
[주D-121]적 법사(寂法師) : 중국 천태종(天台宗)의 중흥조(中興祖)인 의적(義寂)을 가리킨다. 《송고승전(宋高僧傳)》 권7에 그의 전기(傳記)가 실려 있다.
[주D-122]나계(螺溪) : 나계 존자(螺溪尊者) 의적(義寂)을 가리킨다.
[주D-123]교관(敎觀) : 교상(敎相)과 관심(觀心)의 두 문(門)을 말한다. 교상은 이론이고 관심은 실천의 뜻이다. 교관이문(敎觀二門), 교문관문(敎門觀門)이라고도 한다.
[주D-124]인효왕(仁孝王) : 인효(仁孝)는 문종(文宗)의 시호(諡號)이다. 문종은 묘호(廟號)이다.
[주D-125]우세 승통(祐世僧統) : 우세는 “넓은 지혜로 가르침의 근본을 열고 큰 진리로 세상을 돕는다.[廣智開宗弘眞佑世]”라는 뜻의 별호이고, 승통은 승려를 다스리는 고위 직책이다.《金崙世, 東師列傳, 廣濟院, 1991, 64쪽 주》
[주D-126]원우(元祐) 초 : 《동사강목》 제7 하에는 송 신종 원풍(元豐) 8년(1085, 선종2) 4월에 왕의 아우 왕후(王煦)가 도망하여 송나라로 들어갔다고 하였다.
[주D-127]전당(錢塘)의 혜인원(惠因院) : 이때 혜인원에 정원 선사(淨源禪師)가 있었다. 송 철종이 의천에게 법을 가르칠 만한 승을 천거하게 하자, 중국 불교계에서 동경(東京) 각엄사(覺嚴寺)의 유성 선사(有誠禪師)를 천거하였는데, 유성 선사가 다시 전당 혜인원의 정원 선사를 자기 대신 천거하였다.
[주D-128]불인(佛印) : 이름은 요원(了元)이며, 자는 각로(覺老)이다. 개선(開先) 선섬(善暹)의 법을 이었으며, 소식(蘇軾)과 서로 시를 지어 화답하기도 하였다.
[주D-129]제방(諸方) : 여러 종파의 승려들을 말한다.
[주D-130]정원(淨源) : 북송의 승으로, 호는 잠수(潛叟)이고, 자는 백장(伯長)이다. 항주(杭州)의 혜인원(惠因院) 등에 있었으며, 의천(義天)에게서 금으로 쓴 《화엄경(華嚴經)》 세 가지 역본(譯本) 180권을 받아서 장경각(藏經閣)을 짓고 봉안하였다.
[주D-131]수교(首敎) : 《동사열전(東師列傳)》 권1 대각국사전(大覺國師傳)에, “표문을 올려서 현수의 가르침을 전해 주기를 청하였다.[乞傳賢首敎]” 하였는바, 중국 화엄종의 제3조인 법장(法藏), 즉 현수 법사(賢首法師)의 가르침을 말한다.
[주D-132]오월(吳越)의 충무왕(忠武王) : 오월은 오대(五代) 시대 때 10국 가운데 하나이며, 충무왕은 오월을 개국한 전류(錢鏐)를 가리킨다.
[주D-133]진수 법사(晉水法師) : 정원 선사(淨源禪師)를 말한다. 진수는 그의 호이다.
[주D-134]마명대사(馬鳴大士) : 중인도(中印度) 마갈타국 사람으로, 부처가 죽은 지 6백 년 뒤에 세상에 나온 대승(大乘)의 논사(論師)이다. 북쪽으로 월지국(月支國)에 들어가서 대승 불교(大乘佛敎)를 전하였으므로 대승 불교의 시조로 일컬어진다. 저서로는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 《대장엄론경(大莊嚴論經)》, 《불소행찬(佛所行讚)》 등이 있다.
[주D-135]종(宗)과 교(敎) : 종은 종지(宗旨), 곧 불교의 근본 취지를 의미하는 것으로 선종(禪宗)을 뜻하며, 교는 경론(經論)에 의해 표현한 언교(言敎)의 의미로 교종(敎宗)을 뜻한다.
[주D-136]오교(五敎) : 신라 불교가 한창 성하였을 때 경교(經敎)를 공부하던 불교의 다섯 가지 종파(宗派)로, 열반종(涅槃宗), 남산종(南山宗), 화엄종(華嚴宗), 법상종(法相宗), 법성종(法性宗)을 말한다.
[주D-137]고련수(苦楝樹) : 멀구슬나무로, 전단(旃檀)을 말한다.
[주D-138]천룡(天龍) 기대사(機大師) : 중기(重機)를 가리킨다. 천룡은 산 이름이며, 청원(淸原) 행사(行思)의 법손(法孫)이다.
[주D-139]청량(淸涼) 익 선사(益禪師) : 문익(文益)을 가리킨다. 청량은 건당(建唐)에 있는 절 이름이며, 법안종(法眼宗)의 개조이다.
[주D-140]보문(普門) 변 선사(辨禪師) : 원문에는 ‘普明辨禪師’로 되어 있는데, 《경덕전등록》 권26에 의거하여 ‘普門辨禪師’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희변 선사(希辨禪師)를 가리키며, 보문은 절강성(浙江省)에 있는 사찰의 이름이다.
[주D-141]육왕(育王) 심 선사(諶禪師) : 개심(介諶)을 가리킨다. 육왕은 절강성(浙江省) 영파부(寧波府)에 있는 산 이름으로, 개심이 이곳에 있는 광리사(廣利寺)에 주석하였다.
[주D-142]탄연 국사(坦然國師)가 …… 되었다 : 탄연은 고려 의종(毅宗) 때의 승으로, 사위의송(四威儀頌)과 상당어구(上堂語句)를 중국 광리사의 개심(介諶)에게 써 보냈더니 찬탄하면서 가사(袈裟)와 의발(衣鉢)을 전해 왔다. 그의 속성은 손씨(孫氏)로, 여기에서 왕위를 버리고 사문이 되었다고 한 것은 잘못 말한 것이다.
[주D-143]경장(慶長) : 원문에는 ‘長慶’으로 되어 있는데, 《동양연표(東洋年表)》에 의거하여 ‘慶長’으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144]수희(隋喜) : 남의 착한 일을 보고 따라서 기뻐하는 마음을 말하는데, 오회(五悔) 가운데 하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