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세 판관공 휘 희수 등/휘 희수 인물록

전주최공 문성파 고려문화시중 10세손 안동판관 휘 휘수묘역 시향 (봉황제)

아베베1 2012. 11. 20. 08:05

 




























 약천집 제26권
 가승(家乘)
호조 좌랑에 추증된 서공(徐公) 묘갈명


연산 서씨(連山徐氏)는 《여지승람(輿地勝覽)》에 기재되어 있는바, 관향(貫鄕)을 받은 지가 오래이며 이제 가까이 기억할 수 있는 바로는 생원 보(寶)가 있다. 이분이 교위(校尉) 의민(義敏)을 낳아 현감 종수(宗秀), 판관 연(憐), 현감 천령(千齡)에게 전하고 현감 천령이 다시 휘 주(澍)에게 전하였는데, 임진왜란에 가산(家産)을 다 털어 군량(軍糧)을 도우니, 선조(宣祖)는 가상히 여기고 사헌부 감찰을 제수하여 그 공로를 표창하였다. 그러나 공은 말하기를, “국가가 위태롭고 어려울 때를 만나 재물이 있어 군대에 바친 것이니, 어찌 감히 상을 바라겠는가.” 하고는 사양하고 사은숙배하지 않았다. 얼마 안 되어 세상을 떠났는데, 유명(遺命)으로 관직의 명칭을 쓰지 못하게 하였다. 이때 이러한 사실을 조정에 아뢴 자가 있어 특별히 통정대부 장례원 판결사에 추증하여 그 뜻을 표창하였다. 동래 정씨(東萊鄭氏)에게 장가드니, 목사 정순우(鄭純佑)의 따님으로 2남을 낳았는데, 장자는 현감으로 승지에 추증된 후적(後積)이고 막내는 바로 공이다.
공은 휘가 효적(效積)이고 자가 계진(季眞)인데, 어려서 부모를 여의었으나 경계하고 힘써서 자립하였다. 글에 있어 대의를 통달하였으며 강직하고 담론을 잘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심취하게 하였다. 집안이 대대로 영락(零落)했다 하여 과거 공부를 좋아하지 않았으며, 또 광해군의 혼란한 때를 당하여 세상에 진출하려는 뜻이 없었다. 인조가 반정하자, 반정하는 대열을 따라 원종공신 1등으로 기록되었으나 얼마 후 공이 서거하였다. 이 때문에 몸이 끝내 조정에 오르지 못하고 재주가 끝내 세상에 쓰이지 못하였다. 공이 공신에 기록됨으로 인해 선고(先考)인 판결사공(判決事公)에게 병조 참판을 추증하였고, 공은 별세한 뒤에 또한 승의랑(承議郞) 호조 좌랑에 추증되었다.
참판공의 계배(繼配)인 이 부인(李夫人)은 성품이 엄하고 법도가 있었는데, 공은 형과 함께 계모를 받들어 섬김에 뜻을 어김이 없었다. 이 부인은 4녀를 낳았는데, 형제간에 우애가 지극하여 규문(閨門) 안이 화기애애하였다. 부인은 일찍이 전실 소생의 두 아들을 자신의 소생이 아니라고 말한 적이 없으며, 누이들도 어머니가 다른 줄을 알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순수하고 돈독한 행실이 비록 옛날의 훌륭한 분에게 비교해도 모자람이 없었다.
기미년과 경신년 사이에 큰 흉년이 들자, 이리저리 떠돌아다니는 사민(士民)들은 공이 남의 위급함을 잘 구제해 준다는 것을 알고는 먹여 주기를 바랐는데 온 고을 사람들이 다 그러하였다. 이에 공은 창고의 곡식을 털어 사람들을 구휼하였으며, 곡식이 부족하자 또다시 환자곡 수십 섬을 꾸어 계속 구휼하다가 가을이 되자 환자곡을 숫자대로 다 갚았다. 이에 고을의 원인 윤보벽(尹寶璧)은 공의 행실을 의롭게 여겨 환자곡을 다시 수레에 실어 돌려보내며 말하기를, “고을의 백성들이 굶주리다가 공의 도움으로 살아나게 되었으니, 나는 이곳의 성주(城主)로서 공에게 너무나도 부끄럽다. 또 무슨 마음으로 국가에 상환하는 곡식을 받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공은 만력 기묘년(1579, 선조 12)에 출생하여 천계 병인년(1626, 인조 4)에 별세하였다.
의인(宜人) 무주 김씨(茂朱金氏)는 동지(同知) 김언유(金彦瑜)의 따님인데, 시어머니를 섬기고 남편을 받드는 것이 모두 예의와 법도에 맞았다. 공의 여동생을 시집보낼 적에 의인이 이 부인(李夫人)을 모시고 혼수를 장만하며 음식을 준비함에 있어 신중하고 정갈하게 마련하였다. 일이 끝나자 의인이 자기 집으로 돌아가겠다고 하직하자, 이 부인은 웃으며 말하기를, “내 들으니 며느님이 집에 있을 적에 손끝에서 하루에 소 한 마리가 생긴다고 하던데, 지금 내 딸을 시집보내느라 집에 돌아가지 못한 지가 여러 날이니, 내 며느님의 소를 손해 보게 한 것이 많다.” 하였다. 의인이 사양하고 하직한 다음 문을 나오는데, 갑자기 소 한 마리가 길을 막고 있으므로 괴이하게 여겨 물으니, 바로 부인이 내려 준 것이었다. 며느리가 시어머니에게 순종하고 시어머니가 며느리를 사랑함이 이와 같았다.
공이 별세하자, 의인은 소식(素食)을 하여 몸을 훼손한 것이 6년 동안에 이르렀다. 아들 필성(必成)이 다섯 번 고을 수령이 되어 고을살이하면서 봉양하였으며, 수(壽)가 구십을 넘어 온갖 영화를 다 누렸으나 의인은 오히려 부지런히 누에치고 길쌈하여 밤에도 계속하였다. 자손들이 “연세가 높으시니 부디 스스로 쉬어 자손들의 마음을 편안하게 하소서.” 하고 아뢰면 의인은 허락하지 않고 이르기를, “내 스스로 이것을 좋아서 하는 것이다.” 하였다. 공보다 46년 뒤에 별세하였다. 공은 처음 결성현(結城縣) 지석리(支石里)에 있는 선영의 아래에 장례하였는데, 풍수지리(風水地理)가 좋지 못하다 하여 다시 결성현의 은화봉(銀華峰) 아래 곤좌(坤坐)의 산에 이장하고 의인을 부장하였다.
5남을 두었는데, 장남인 부호군(副護軍) 필형(必亨)은 수직(壽職)으로 통정대부에 올랐고, 다음은 필원(必遠)과 필후(必厚)이며, 그 다음 필성(必成)은 문학을 공부하여 진사에 입격하고 내외의 관직을 맡은 지가 30여 년인데 부임하는 곳마다 명성이 있는바 현재 영천 군수(榮川郡守)로 있으며, 그 다음 필행(必行)은 통덕랑(通德郞)이다. 장녀는 구익(具翊)에게 출가하였고, 차녀는 최세영(崔世榮)에게 출가하였는데 지금 삼가 현감(三嘉縣監)이며, 그 다음은 홍완(洪完)에게 출가하였다. 내외 손과 증손, 현손의 아들딸들이 무려 수십백 명에 이르니, 후손의 번창함이 세상에 드문 바이다. 필형의 손자 인세(麟世), 필원의 아들 직(㮨), 필후의 아들 환(桓), 필행의 아들 속(梀)ㆍ박(樸), 홍완의 아들 홍일신(洪日新)은 무과에 급제하였고, 손자들 중에 행실을 닦고 문학을 익혀 장차 반드시 훌륭한 명성을 이룰 자가 또 많이 있으니, 아, 훌륭하다.
구만(九萬)의 조모는 바로 공의 둘째 매씨(妹氏)인데, 공은 구만이 태어나기 전에 별세하였다. 그러므로 미처 공의 얼굴을 뵙고 공의 가르침을 받지 못하였으나 드러나지 않은 덕과 은미한 행실을 조모에게서 얻어들은 것이 많다. 영천장(榮川丈 영천 군수 필성(必成))이 이제 산소에 비석을 세우려 하면서 구만에게 명문을 짓도록 명하니, 구만이 비록 문장을 잘하지 못하나 의리상 사양할 수가 없으므로 이에 감히 그 대략을 서술하고 명문을 붙인다.
다음과 같이 명(銘)한다.

아, 서공이여 / 嗚呼徐公
이미 풍부하나 부족하였으니 / 旣豐而嗇
부족한 것은 수명이요 / 所嗇者年
풍부한 것은 덕이었네 / 所豐者德
아, 서공이여 / 嗚呼徐公
비록 굽혔으나 펴졌으니 / 雖詘而申
펴진 것은 하늘이요 / 所申者天
굽힌 것은 사람이네 / 所詘者人
덕이 이미 온전하니 / 德之旣全
복록을 누리지 못함 어찌 서글퍼하랴 / 不贏何傷
하늘이 이미 정해지니 / 天之旣定
보답을 받음이 매우 크도다 / 食報甚長
그 덕을 알려고 하거든 / 欲知其德
그 집안을 살펴볼지어다 / 觀于厥家
공손하고 공손한 의인이여 / 婉婉宜人
자손의 경사 많도다 / 胤慶則多
아름다운 은화산에 / 樂哉銀華
노나라 예로 부장하였네 / 魯祔有藏
나의 명문 매우 아름다워 / 我銘孔好
그윽한 빛을 찬양하노라 / 用贊幽光


 

 

 

 


 























 봉황제

 

충남공주군 탄천면 가척리 안마을 에

제의 14대 조고이신 전주최공 문성공파 고려문화시중 10세손  안동판관 휘 휘수 (판공공후손)의 선산과 봉황제가 자리잡고 있다 

전주최공 문성공 후손인 

문성공 시조공             휘   아 

2세손   중랑장공         휘   용봉

3세손   사온동정공      휘   을인 

4세손   호조참의         휘   담

5세손   예문관 직제학  휘   덕지 (연촌공)

6세손   진사공            휘   숙 

7세손   의령현감         휘  지성 (의령공 )

8세손   부사공            휘  호문

9세손    봉사공           휘  언청 (묘지가 최초 동작구 상도동 소재 이장 전남 나주로 이장 )

10세손  판관공           휘  휘수 (판관공 종회 )  서울 양주에 세거지를 정하고  선산이 있었으나 

                               종인의 불찰로 인하여 충남 공주 탄천면 가척리 안마을로  이장   (봉황제)   

11세손  휘 응우         현감공 (은율현감) 

           휘  응하         감찰  (증 집의 통훈대부 사헌부감찰) 

           휘  응주         군수 (진산군수)    -  14세손 휘 광윤 (처사)                                                                                                                                            

12세    휘  탁             영광군수  병조정랑 (증 도승지 예문관직제학 )

13세손  휘 세영          사헌부감찰 (증 가선대부 호조참판)  전주최공 문성공 족보인 초성본을 만드신분

13세손  휘 세장          진사   - 선산아래 1기  

14세손  휘 방언         가선대부 동지중추부사 ( 묘지는 경기도 양주에 소재)

14세손  휘 방현 의     배위 전의이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