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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성과 보첩(譜牒)에 대한 변증설(고전간행회본 권 33)

아베베1 2012. 12. 20. 15:27

 
분류 오주연문장전산고 인사편 1 - 인사류 2
 씨성(氏姓)
씨성과 보첩(譜牒)에 대한 변증설(고전간행회본 권 33)

하늘이 사람을 낸 지 이미 오래다. 만일 사람에게 성(姓)과 씨(氏)가 없다면 그 족(族)을 구별할 수 없다. 그러므로 으레 성과 씨를 정하여 그 족을 분별하였으니, 이는 자연의 이치이다.
무릇 성은 오제(五帝 소호(少昊)ㆍ전욱(顓頊)ㆍ제곡(帝嚳)ㆍ요(堯)ㆍ순(舜).《사기(史記)》에는 소호 대신 황제(黃帝)로 되어 있음)에서 생기고 《춘추(春秋)》에 22성(姓)이 보이는데, 전국 시대 이후로는 성을 그냥 씨로 삼고 오제 이래로 생겼던 성은 없어졌다. 무릇 주소가(注疏家)들이 인용한 성ㆍ씨는 거의《세본(世本)》에서 나왔는데, 지금에는《세본》이 없어졌으므로 자세히 상고할 수 없다. 씨는 제후(諸侯)에게서 생겼다. 《예기(禮記)》대전 정의(大傳正義)에 “제후가 경대부(卿大夫)에게 씨를 준다.” 하였다. 천자(天子)가 제후의 출생한 지명을 따라서 성을 주고 수봉(受封)된 지명을 따라서 씨를 명하였으니, 성은 그 조상의 근본을 통할하고 씨는 그 자손의 유래를 분별한다. 천자는 덕(德) 있는 이를 제후로 삼은 뒤에 그 제후의 연고지 지명을 따라 성을 주고 수봉된 지명을 따라 씨를 명하며, 제후는 신하의 왕부(王父)의 자(字)를 따라 씨를 명하고 시(諡)를 따라 족(族)을 삼도록 한다.
천자는 성과 씨를 줄 수 있고 제후는 씨는 줄 수 있으나 성은 줄 수 없으므로, 성은 천자가 아니면 주지 못하고 씨는 제후가 아니면 명하지 못한다. 또한 성을 씨로 호칭할 수 없고 씨를 성으로 호칭할 수 없으며, 성은 혼인(婚姻)의 관계를 분별하고 씨는 귀천(貴賤)의 등위(等位)를 분별한다.
그러므로 성ㆍ씨에 대해 잘못된 관례를 변론하지 않을 수 없다. 전국 시대 사람들은 그래도 씨(氏)ㆍ족(族)을 호칭하였는데, 한(漢) 나라 때 사람들은 통틀어서 성(姓)으로 호칭하였다. 예를 들면, 백우(伯禹)의 성을 사(姒), 씨를 유하(有夏)라 하고 백이(伯夷)의 성을 강(姜), 씨를 유려(有呂)라 하였다.
순(舜)이 규예(嬀汭) 가에 거주하였으므로 규(嬀)로 사성(賜姓)되었고, 순의 후손이 진(陳)에 수봉(受封)되었으므로 이내 성을 규, 씨를 진이라 하였다. 고염무(顧炎武)가 씨ㆍ족의 잘못된 관례에 대해 ‘주자(朱子)가《논어》ㆍ《맹자》를 주석하면서, 태공(太公)의 성은 강(姜), 씨는 여(呂), 이름은 상(尙)이라 한 데는 성과 씨가 매우 분명히 구별된 것이요, 자하(子夏)의 성은 복(卜), 이름은 상(商), 자금(子禽)의 성은 진(陳), 이름은 항(亢), 자공(子貢)의 성은 단목(端木), 이름은 사(賜), 자문(子文)의 성은 투(鬪), 이름은 누오도(穀於菟)라 한 유는 씨를 성으로 삼은 것이요, 제선왕(齊宣王)의 성은 전씨(田氏), 이름은 벽강(辟彊)이라 한 데는 성과 씨를 하나로 삼은 것이니, 이는 혹 옛사람들의 착오를 그대로 인습하여 미처 시정하지 못한 것이 아닌지 모르겠다.’ 하였는데, 지금 성과 씨를 합쳐서 하나로 삼고 있으니, 그 잘못임을 알지 못한 때문이다.
족(族)에서 구별, 성이 되고 성에서 구별, 망(望) 망은 곧 씨의 명칭이다. 이를테면, 중국에서는 이성(李姓)의 망이 농서(隴西)이면 농서를 망으로 삼고, 우리나라에서는 망을 본(本)이라 하는데, 이성(李姓)의 본이 전주(全州)이면 전주를 본으로 삼는다. 본은 혹 관(貫)이라고도 하는데, 곧 향관(鄕貫)이란 것으로, 세속에서는 성향(姓鄕), 또는 적(籍)이라 한다. 이 되고 망에서 구별, 방(房) 방은 곧 파(派)의 명칭인데, 장적(長嫡)을 장방(長房), 차적(次謫)을 차방(次房), 삼적(三嫡)을 삼방(三房)이라 하여 그 서차를 따라 일컫는다. 이 된다. 그러므로 성이 번다(煩多)하면 그 족이 그릇되기 쉽고, 망이 번다하면 그 성이 그릇되기 쉽고, 방이 번다하면 그 망이 그릇되기 쉬우니, 이는 그럴 수밖에 없는 형편이다.
대저 성은 황제(黃帝)에게서 나왔다고 하니, 모두가 다 그 후예인 셈이다. 그 근본을 상고하자면 모든 성ㆍ씨를 말하는 이들이 다《세본(世本)》 유향(劉向)의 찬(撰)으로 2권이라 하는데 지금은 전하지 않고, 송충(宋衷)이 찬(撰)한《세본》은 4권이다.ㆍ《공자보(公子譜)》 저자는 전하지 않는다. 두 책을 근거로 삼았고, 두 책은 모두《좌씨전(左氏傳)》을 근거로 삼았다. 그러나 거슬러올라가 보면 팔원(八元 고양씨(高陽氏)의 8재자(才子)인 창서(蒼舒)ㆍ퇴애(隤敱)ㆍ도연(檮戭)ㆍ대림(大臨)ㆍ방강(尨降)ㆍ정견(庭堅)ㆍ중용(仲容)ㆍ숙달(叔達))ㆍ팔개(八愷 고신씨(高辛氏)의 8재자인 백분(伯奮)ㆍ중감(仲堪)ㆍ숙헌(叔獻)ㆍ계중(季仲)ㆍ백호(伯虎)ㆍ중웅(仲熊)ㆍ숙표(叔豹)ㆍ계리(季貍))가 고양씨(高陽氏)와 고신씨(高辛氏)를 근본으로 하여 16족(族)이라 일컫고, 요전(堯典《서경(書經)》편명(篇名))에는 ‘구족(九族 고조(高祖)에서 현손(玄孫)까지)을 친(親)했다.’ 하였으니, 분합(分合)의 조짐이 이미 이때부터 시작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주(周)의 성세(盛世)에 이르러서는 대종(大宗)과 소종(小宗)을 정하여 종법(宗法)이 매우 밝았고 또 소사(小史 주대(周代)에 춘관(春官)에 속한 벼슬이름)를 두어서 세계(世系)를 분별, 소목(昭穆 사당에 신주를 모시는 차례로, 시조를 중앙에, 2ㆍ4ㆍ6세(世)를 좌편 소[左昭]에, 3ㆍ7ㆍ9세를 우목(右穆)에 모시는 것)을 정하게 하였고, 소종백(小宗伯 주대에 춘관에 속한 벼슬 이름)을 두어서 삼족(三族 여기서는 부(父)ㆍ자(子)ㆍ손(孫)을 말함)에 관한 구분을 맡아 그 친소(親疏)를 분별하게 하였고, 대전(大傳《예기(禮記)》편명(篇名))에는,
“위로는 조녜(祖禰)를, 옆으로는 형제를, 아래로는 자손을 바르게 한다 …… 친(親)한 이를 친하기 때문에 조상을 놓이게 되고, 조상을 높이기 때문에 종(宗)을 공경하게 되고, 종을 공경하기 때문에 족(族)을 통합하게 되고, 족을 통합하기 때문에 종묘(宗廟)가 엄격하게 된다.”
하였는데, 무도한 진대(秦代)에 와서는 종법이 크게 무너져 버렸다.
수(隋)ㆍ당(唐) 이전에는, 관서(官署)에는 부장(簿狀)이, 사가(私家)에는 보계(譜系)가 있었다 …… 역대에 모두 도보국(圖譜局)을 설치하고 관리를 두어 관장하게 하고 박식(博識)한 선비를 시켜 보(譜)를 편찬하되, 백관(百官)들 가운데 족성(族姓)에 관한 가장(家狀)이 있는 자는 관서(官署)에 제출하도록 하여 사실을 고정(考定)한 뒤에 비각(祕閣)에 간직하고 그 부본(副本)은 좌호(左戶 나라의 계장(計帳)ㆍ호적 등의 사무를 맡은 벼슬 이름)가 비치해 두게 하였다 …… 한(漢) 나라 등씨(鄧氏)에게《관보(官譜)》가, 응소(應劭)에게《씨족편(氏族篇)》이, 영천 태수(潁川太守) 요씨(聊氏)에게《만성보(萬姓譜)》가 있고, 진(晉) 나라 가필(賈弼)ㆍ왕홍(王弘)과 남제(南齊) 왕검(王儉)과 양(梁) 나라 왕승유(王僧孺) 등에게 각기《백가보(百家譜)》가, 서면(徐勉)에게《백관보(百官譜)》가 있고, 남조(南朝) 송(宋) 나라 하승천(何承天)은《성원(姓苑)》을, 당 태종(唐太宗)은 여러 선비에게 명하여《씨족지(氏族志)》1백 권을, 유충(柳冲)은《대당성계록(大唐姓系錄)》2백 권을 찬(撰)하였고, 노경순(路敬淳)에게《의관보(衣冠譜)》가, 위술(韋述)에게《개원보(開元譜)》가, 유방(柳芳)에게《운략(韻略)》이, 장구령(張九齡)에게《운보(韻譜)》가, 임보(林寶)에게《성찬(姓纂)》이, 소사(邵思)에게《성해(姓解)》가, 정초(鄭樵)에게《씨족지(氏族志)》57권이 있고, 또《씨족원(氏族源)》ㆍ《족운(族韻)》등 70권이 있다. 당(唐) 나라 때에는 사람의 성(姓)을 소중히 여겨 8대성(大姓) 이하 1백 50성이 소개되었고, 송 나라 가우(嘉祐 인종(仁宗)의 연호) 연간에《천성편(千姓編)》이 나왔고, 안문(雁門) 사람 소사(邵思)의《성해(姓解)》에는 1백 70문(門)으로 분류, 2천 5백 68씨(氏)나 소개되었고, 또《만성통보(萬姓統譜)》ㆍ《만성통보(萬姓通譜)》등과《기성통(奇姓通)》이 있다. 기타 성씨에 관한 보서(譜書)가 매우 많으나 다 기록할 수 없고 후일을 기다린다.
성씨를 다룬 글에 소개되지 않은 기성(奇姓)도 많으므로 대충 언급하려 한다.《난매유필(暖妹由筆)》에,
“천순(天順 명 영종(明英宗)의 연호) 연간에 진사(進士) 茂에게 陝이란 성을 하사하였는데, 섬()은 섬(陝)자와 같이 발음한다.”
하였고《지북우담(池北偶談)》에,
“내가 의조(儀曹 관명(官名))로 있을 때 완평(宛平) 사람  아무개가 있었는데, 관리가 잘못 벽(碧)으로 발음하자, 그 사람이 응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 까닭을 물었더니,  번(樊)자와 같이 발음한다고 하였다. 그리고 고밀(高密)에 있는 자 성은 축(閦)으로, 禚자 성은 탁(卓)으로, 제성(諸城)에 있는 자 성은 지(支)로 발음하고, 수광(壽光)에는 鱉자 성이, 하남(河南)에는 驢자 성이, 제남(濟南)에는 俳자 성이 있고, 임자년 전시(典試)에는 부방(副榜)에 든 사천(四川) 사람 度 아무개가 있었는데, 탁(拓)으로 발음한다.”
하였고, 우리나라에 있는 㫆자 성은 며로, 자 성은 왁으로, 遇자 성은 황으로 발음하고 㔛자 성은 발음이 자세하지 못하고 乁자 성은 비로, 鴌자 성은 궉으로, 㸴자 성은 소로, ●자 성은 퉁으로, 乜자 성은 로 발음하고, 복성(複性)으로 된 牆籬은 담울로 발음한다.
족보(族譜)에 대하여는 진(晉) 나라 지우(摯虞)가 맨 처음으로《족성소목기(族姓昭穆記)》를 지었고,《수서(隋書)》경적지 보계편(經籍志譜系篇)에, 익주(益州)와 기주(冀州) 등 여덟 고을의 성보(姓譜)가 소개되었으며, 송 나라 구양씨(歐陽氏 구양수(歐陽脩))와 소씨(蘇氏 소순(蘇洵))가 비로소 옛날의 소종법(小宗法)을 근거로 하여 족보를 만들었는데, 후세에 보학(譜學)을 다루는 이들이 이를 따르고 있다.
《주례(周禮)》의 소사법(小史法 소사가 맡은 소목(昭穆)을 정하는 법)이 군공(君公)에게만 적용되다가 진(晉) 나라 이후부터 사대부(士大夫)들이 점차 보첩(譜牒)을 만들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성씨의 분합(分合)에 대하여 한(漢)ㆍ위(魏) 이전에는 그 세차(世次)가 모호하고 서책(書策)이 미비하여 낱낱이 상고하려 하나, 먼 데를 보려 하는 자는 기어이 그 모습을 보았으면 하고 먼 데를 들으려 하는 자는 기어이 그 소리를 들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을 뿐이다. 구양 문충공(歐陽文忠公 문충은 송 나라 구양수(歐陽脩)의 시호)이,
“성씨가 생겨난 유래는 매우 오래다. 그러므로 상고(上古)의 것은 거의 없어져 알 수 없으니, 보도(譜圖)를 다루는 법은 알 수 있는 세대부터 시작해야 한다.”
하였으니, 이는 변동할 수 없는 의론이다.
춘추 시대에는 족성(族姓)을 가장 중하게 여기고 당 나라 사람들은 보첩을 매우 귀하게 여겼는바, 담자(郯子)는 그 조상을 설명하였으므로 칭찬을 받았고 적담(籍談)은 그 선대(先代)를 알지 못하였으므로 비웃음을 받았으니, 사람으로서 계보(系譜)에 익숙한 이야말로 조상을 높이고 종족을 화목시키는 마음이 얼마나 대단하겠는가.
통보(通譜)하는 폐습을 들어 말하자면, 옛날에서 오늘에 이르도록 윤상(倫常)을 패란(敗亂)시키고 조상을 욕되게 하는 바가 이보다 더한 것이 없으니, 이런 폐습은 진정 종법(宗法)이 엄격하지 못한 데서 나온 것이다. 두정륜(杜正倫)이 성(城) 남쪽의 두씨(杜氏)들에게 끼이기를 청하자 군자가 부끄러이 여기고, 곽숭도(郭崇鞱)가 곽자의(郭子儀)의 묘(墓)를 찾아 곡배(哭拜)하자 식자(識者)가 부끄러이 여겼으며, 고산(孤山)이란 이름을 내세우자 아들로 되어 온 자가 끊임이 없었고, 조군(趙郡) 출신이라 자칭하자 족의(族誼)를 맺은 자가 한량 없었으니 《구당서(舊唐書)》이의부전(李義府傳)에 “의부가 귀(貴)하게 된 뒤에 조군(趙郡)의 이성(李姓)이라고까지 자칭하고 드디어 다른 이성들과 소목(昭穆)의 항렬을 가림으로써 무뢰배들이 그에게 구합(苟合)하여 그의 권세를 빙자하는 한편, 그를 형(兄)이나 숙(叔)으로 받드는 자가 매우 많았다.” 하였으니, 이는 명문(名門)으로서 의부와 같은 소인에게 아부한 예이다. 소위 보첩이란 것을 장차 어디에 쓸 것인가. 희문(希文 송 나라 범중엄(范仲淹)의 자)은 어려서 주씨(朱氏)에게 개가(改嫁)한 어머니를 따라 주씨로 행세, 주학구(朱學究)라고까지 칭하였다가 이미 장성한 뒤에는 자신이 세가(世家)의 출신임을 알고 흐느끼면서 범씨(范氏)로 되돌아왔으니, 외가(外家)의 손성(孫姓)을 따라 손씨가 되어버린 등공(滕公)의 자손에 비하면 그 소견이 동떨어지고, 무양공(武襄公 송 나라 적청(狄靑)의 시호)의 조상이 바로 적양공(狄梁公 양공은 당 나라 적인걸(狄仁傑)의 봉호)이라는 데 대해 고증할 만한 고신(告身 직첩(職牒))까지 있었으나, 무양공은 한때 영귀(榮貴)한 것을 빙자하여 감히 양공(梁公)을 모독할 수 없다고 하였으니, 자의(子儀)의 묘(墓)를 찾아 곡배(哭拜)를 드렸던 곽숭도에 비하면 그 소득이 많다.
장주(長洲) 사람 여종옥(呂種玉)의《언청(言鯖)》에,
“명 태조(明太祖)가 유신(儒臣)들과 더불어 옥첩(玉牒 임금의 보첩)의 편수를 의논하면서 주문공(朱文公 문공은 송 나라 주희(朱熹)의 시호)을 시조로 삼으려 한 적이 있었는데, 어느 날 휘주(徽州) 출신 주(朱) 아무개가 전사(典史)로 있는 것을 보고, 문공의 후손이냐고 묻자, 아니라고 대답하였다. 이에 태조가 ‘한낱 전사로도 경솔히 주자(朱子)를 시조로 삼지 않는데, 우리 국가가 어찌 주자를 시조로 삼겠는가.’고 깨닫고는 이전의 의논들을 모두 퇴각시켰다.”
하였으니, 통보(通譜)하는 폐습으로 자신의 부조(父祖)를 바꾸는 자가 이를 본다면 어찌 부끄러움을 느끼고 식은땀을 흘리지 않겠는가.
우리나라의 성씨에 대하여 본국의 토성(土姓)으로는 삼한(三韓)과 삼국시대 왕공(王公)들의 후예가 많고 그 나머지는 혹 하사된 성(姓)이거나 혹 중국에서 나온 성들인데, 제 각기 보계(譜系)가 있어서, 중국의 성씨처럼 혼란스러워 상고하기 어려운 예와는 다르다. 고증할 만한 보첩을 아래에 대충 열거하려 한다.
《동국제성보(東國諸姓譜)》2권은 정시술(丁時述)이,《성원총록(姓苑叢錄)》은 임경창(任慶昌)이, 《술선록(述先錄)》에 “임경창ㆍ정시술ㆍ정서천(鄭西川)은 보학(譜學)의 대가이다.”하였다. 《씨족보(氏族譜)》53권은 박사정(朴思正)이, …… 원문 1자 빠짐 …… , 산현(□山縣) 사람 《백가보(百家譜)》10권은 허함(許涵)이,《씨족원류(氏族源流)》는 이경렬(李景說)이,《씨족원류》7권은 조종운(趙從耘)이 지었고,《벌열통고(閥閱通攷)》4권은 우리 왕고(王考)의 윤문 수보(潤文修補)를 위시하여 불초손(不肖孫)인 나도 수보하였고,《팔팔첩(八八帖)》은 벽진(碧珍) 이모(李某)가,《만성총보(萬姓叢譜)》는 유언선(兪彦䥧)이 지었고,《동교록(東喬錄)》28권은 저자(著者)가 전해지지 않는다. 진신(搢紳)들의 세보(世譜)로는 8대(代), 혹은 10대의 것을 모아 만든 것으로《문보(文譜)》ㆍ《무보(武譜)》ㆍ《음보(蔭譜)》ㆍ《사마보(司馬譜)》등이 있고,《명위보(明衛譜)》는 고려 시대 사람의 편저(編著)로 송경(松京)에 소장되어 있다고 하며,《해동성씨록(海東姓氏錄)》은 양성지(梁誠之)가 지었고,《백가보략(百家譜略)》은 저자가 전하지 않는다. 성씨에 관한 책은 이외에도 몇 종류가 더 있는지 알 수 없다.
성(姓)의 유래는 오제(五帝)에서 시작되고 오제의 성을 얻은 것은 오행(五行 금ㆍ목ㆍ수ㆍ화ㆍ토)에서 시작되었다.
오행에서 시작되었으므로 상배(相配) 상생(相生)하는 이치가 있다.《좌전(左傳)》에 “유규(有嬀)의 후예는 장차 강(姜)에서 발족될 것이다.” 하였고, 또《좌전》선공(宣公) 3년 조에 “길성(姞姓)이 희성(姬姓)의 배우가 되면 그 자손이 반드시 번창할 것이라고 했다.” 하였는데, 후세에 사람의 성을 오음(五音)에 배속시켜서 〈금성(金姓)이니, 목성(木姓)이니 하는〉설이 여기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예기(禮記)》곡례(曲禮)에 ‘동성(同姓)끼리 혼인하지 않는다.’ 하였는데, 성(姓)자에는 생(生)자의 뜻이 들어 있다.
여(女) 자와 생(生) 자가 합하여 성(姓) 자가 되므로 성(姓)에는 여(女) 자가 붙은 글자가 많다. 이를테면, 규(嬀)ㆍ희(姬)ㆍ사(姒)ㆍ길(姞)ㆍ운(妘)ㆍ주(婤)ㆍ흡(姶)ㆍ비(㚰)ㆍ구(嫪)ㆍ강(姜)ㆍ영(嬴)과 같은 유이다. 은(殷)나라는 양덕(陽德)을 받았으므로 남자를 표시할 때 자(子)자로 사용하고 주(周)나라는 음덕(陰德)을 받았으므로 여자를 표시할 때 희(姬)자로 사용하였다. 성(姓)자는 여(女)자에 의해 생겼으므로 부인(婦人)의 칭호로 되어버리기도 하였다. 이를테면, 백희(伯姬)ㆍ계희(季姬)ㆍ맹강(孟姜)ㆍ숙강(叔姜)과 같은 유이다.
《시경(詩經)》인지지(麟之趾)에,
“인후(仁厚)한 공손(公孫)들이다.”
하였는데, 천지(天地)의 화육(化育)은 혼자로는 생생(生生)하지 못하고 둘이 있어야만 생생하게 되므로 〈《좌전》희공(僖公) 23년〉에 숙첨(叔詹 정(鄭)의 어진 대부(大夫))이,
“남녀가 동성(同姓)끼리 혼인하면 그 생육(生育)이 번식하지 못한다.”
하였고, 〈《국어(國語)》정어(鄭語)에〉 사백(史伯 주(周)의 태사(太史))이 정 환공(鄭桓公)에게,
“선왕(先王)이 후비(后妃)를 이성(異姓)에게 맞이하는 것은 그 화동(和同)을 힘쓰기 위함입니다. 즉 단조(單調)로 된 음악은 들을 것이 없고 단일(單一)로 된 물건은 문채가 없는 것입니다.”
하였으니,《예기》의 동성끼리 혼인하지 않는다는 말은 그 혐의를 피하려는 것뿐 아니라 임석(衽席 부부의 동침을 말함) 사이를 경계하는 뜻이 들어 있음을 알 수 있다. 혜강(嵇康)의 논(論)에 “오행(五行)에 상생(相生)하는 이치가 있으므로 동성끼리는 혼인하지 않는다.” 하였다.
씨가 같고 성이 같지 않은 자는 혼인할 수 있고, 성이 같고 씨가 같지 않은 자는 혼인할 수 없다. 삼대(三代 하(夏)ㆍ은(殷)ㆍ주(周))시대에는 성ㆍ씨를 주는 데 있어, 그 거주한 지명(地名), 수봉(受封)된 지명, 시(諡)ㆍ관(官)ㆍ읍(邑)을 따른 5종류였는데, 후세에는 성ㆍ씨를 받은 데 32종류나 된다. 즉 정초(鄭樵)의 씨족서(氏族序)에,
“1. 국(國)으로 씨(氏)를, 2. 읍(邑)으로 씨를, 3. 향(鄕)으로 씨를, 4. 정(亭)으로 씨를, 5. 지(地)로 씨를, 6. 성(姓)으로 씨를, 7. 자(字)로 씨를, 8. 명(名)으로 씨를, 9. 차(次)로 씨를, 10. 족(族)으로 씨를, 11. 관(官)으로 씨를, 12. 작(爵)으로 씨를, 13. 흉덕(凶德)으로 씨를, 14. 길덕(吉德)으로 씨를, 15. 기(技)로 씨를, 16. 사건으로 씨를, 17. 시(諡)로 씨를 18. 작계(爵系)로 씨를, 19.국계(國系)로 씨를, 20. 족계(族系)로 씨를, 21. 명씨(名氏)로 씨를, 22. 국작(國爵)으로 씨를, 23. 읍계(邑系)로 씨를, 24. 관명(官名)으로 씨를, 25. 읍시(邑諡)로 씨를, 26. 시씨(諡氏)로 씨를, 27. 작시(爵諡)로 씨를 삼았고, 28. 대북(代北)의 복성(複姓), 29. 관서(關西)의 복성, 30. 모든 지방의 복성, 31. 대북(代北)의 삼자성(三字姓), 32. 대북의 사자성(四字姓)이다.”
하였다.
백제 때에는 8족(族)의 대성(大姓)이 있었다.《북사(北史)》에는 백제의 대성인 8족이 사(沙)ㆍ연(燕)ㆍ예(刕)ㆍ진(眞)ㆍ해(解)ㆍ국(國)ㆍ목(木)ㆍ묘(苗)로 되어 있다. 백제의 8성(姓) 중에 그 하나를 든다면, 진한(眞漢)ㆍ진우(眞祐)는 태위(太尉)ㆍ장사(長史)였고, 진흠(眞欽)은 태의령(太醫令)이었고, 진현도(眞玄菟)는 산법(算法)에 능하였다.
신라 때에는 육부(六部)에 사성(賜姓)하였다. 신라유사(新羅遺事)에 보면,
“유리왕(儒理王) 9년(32)에 육부의 이름을 고치고 이어 사성하였다. 즉, 양산촌을 급량부(及梁部)로 하여 이성(李姓)을, 고허촌(高墟村)을 사량부(沙梁部)로 하여 최성(崔姓)을, 대수촌(大樹村)을 점량부(漸梁部)로 하여 손성(孫姓)을, 우진촌(于珍村)을 본피부(本彼部)로 하여 정성(鄭姓)을, 가리촌(加利村)을 한기부(漢祇部)로 하여 배성(裵姓)을, 명활촌(明活村)을 습비부(習比部)로 하여 설성(薛姓)을 주었다.”
하였으니, 이 6성(姓)은 신라 시대의 망족(望族 명망이 있는 집안)이었다.
고려 때에 와서는 성ㆍ씨가 매우 많아졌다. 그러나 한 성으로서 1백여 가지의 씨망(氏望)이나 되므로 쉽게 상고할 수 없다. 우리나라 정조(正祖) 13년(1789)에 경조장적(京兆帳籍)에 기입된 성(姓)이 4백 7가지이고,《여지승람(輿地勝覽)》에 기재된 79성과 도곡(陶谷) 이의현(李宜顯)의 도곡총설(陶谷叢說)에 기재된 13성은 정조 13년 경조 장적에 누락된 것으로 도합 92성이 된다. 기타 기벽성(奇僻姓)도 이루 다 기재되지 못하였으니, 성이란 다 상고하기 어려운 것이다.
고인(古人)들이 성(姓)을 기록해 놓은 것 중에는 너무도 황당(荒唐)하고 맹랑한 것이 있다. 하늘이나 해와 달에도 성이 있고 천황(天皇)ㆍ지황(地皇)ㆍ인황(人皇)에게도 성이 있다 하였으니, 그 허황함을 이루 다 말할 수 없다. 즉《수서(隋書)》에,
“천존(天尊)의 성은 악(樂), 이름은 정신(靜信)이다.”
하였고,《노자역중경(老子歷中經)》에,
“해의 성은 장(張), 이름은 표(表), 자는 장사(長史)로 하늘의 사도(司徒)이고, 달의 성은 문(文), 이름은 신(申), 자는 자광(子光)으로 하늘의 사공(司空)이다.”
하였고,《통서정종(通書正宗)》에,
“해의 성은 손(孫), 이름은 개(開), 자는 자진(子眞)이고, 달의 성은 당(唐), 이름은 말(末), 자는 천현(天賢)이다.”
하였고,《광박물지(廣博物志)》에,
“천황씨의 성은 망(望), 이름은 획(獲), 자는 자윤(子潤)이고 지황씨의 성은 악(岳), 이름은 갱(鏗), 자는 자원(子元)이고, 인황씨의 성은 개(愷), 이름은 호조(胡絩), 자는 문생(文生)이다.”
하였다.
무릇 성씨에 관한 책을 편저(編著)하는 데 있어, 글자로 논한 이는 글자의 편방(偏旁 글자의 왼편 획과 오른편 획)을 주장하고, 성(聲)으로 논한 이는 글자의 사성(四聲 글자가 갖는 고저 장단(高低長短) 네 종류의 음(音))을 범례로, 지망(地望)으로 논한 이는 출신의 귀천(貴賤)을 격식으로 삼았다. 이것이 마치 다른 책들의 분문 유휘(分門類彙)한 체제와 같은데, 보학가(譜學家)는 반드시 이 점을 알아야 한다.

[주D-001]귀천(貴賤)의 …… 분별 : 사람의 씨(氏)는, 그 벼슬이나 혹은 그 행적으로 정해지는 것이다. 즉 공덕(功德)에 의한 씨는 귀하게 여기고 기력(伎力)에 의한 씨는 천하게 여기는 것이므로, 그 씨를 보면 그 귀천을 알 수 있다. 《白虎通 姓名》
[주D-002]대종(大宗)과 소종(小宗) : 별자(別子 : 제후(諸侯)의 적자(適子)의 아우)의 세장자(世長子)가 별자를 계승, 그 일족(一族)의 종손(宗孫)이 되어 백세가 지나도록 체천(遞遷 : 봉사손(奉祀孫)의 대수(代數)가 다한 신주(神主)를 최장방(最長房)의 집으로 옮겨 제사를 받들게 하고 그 최장방이 죽었을 때에는 그 다음의 최장방의 집으로 옮기는 것을 말하는데, 대수가 다한 뒤에는 땅에 매안(埋安)하는 것이 보통임)하지 않는 것을 대종이라 하고, 아버지의 적자(適子)가 위로 예묘(禰廟 : 아버지의 사당)를 계승, 그 일가(一家)의 종손이 되었다가 5세(世)를 지나서 체천하는 것을 소종이라 한다.
[주D-003]담자(剡子)는 …… 받았고 : 담자는 춘추(春秋) 시대 담국(剡國)의 임금. 그가 노 소공(魯昭公) 17년에 노(魯)에 조회하러 왔을 때 숙손소자(叔孫昭子)가 “옛날 소호씨(少昊氏)가 새 이름[鳥名]으로 벼슬 이름[官名]을 지은 것은 무슨 까닭인가?”고 묻자, 그가 “그분은 바로 나의 조상이다 …… ”고 대답하므로 공자(孔子)가 듣고 그를 칭찬하였다. 《左氏傳》
[주D-004]적담(籍談)은 …… 받았으니 : 적담은 춘추 시대 진(晉)의 대부(大夫). 그가 노 소공(魯昭公) 15년에 주(周) 나라에 갔을 때 경왕(景王)이 “ …… 너는 사전(司典 : 나라의 전적(典籍) 관명(官名)인데, 여기서는 담적의 9세조 손백염(孫伯黶)을 말함)의 후예인데, 왜 그것을 잊었느냐?”고 하였으나, 그는 대답하지 못하였다. 《左氏傳》
[주D-005]두정륜(杜正倫) : 당(唐) 나라 사람. 그가 미천하였을 때 성남(城南) 두고(杜固 : 지명(地名))의 대성(大姓)인 두씨(杜氏)들에게 동보(同譜)하기를 청하였으나 이를 거절하므로 내심 괘씸하게 여기고 있다가 집정(執政)한 뒤에 두고를 파서 수로(水路)를 개통시키자, 냇물이 10일 동안 핏빛으로 변하였는데, 그 뒤부터 두고의 두씨들이 점차 미약해졌다. 《唐書 杜正倫傳》
[주D-006]곽숭도(郭崇鞱) : 오대(五代) 때의 후당(後唐) 사람. 그가 추밀사(樞密使)가 되어 용사(用事)할 때 재상(宰相) 두로혁(豆盧革) 등이 다 그에게 아부하였다. 하루는 그에게 “분양왕(汾陽王 : 당 나라 곽자의(郭子儀)의 봉호(封號))은 본시 태원(太原) 출신으로 화음(華陰)에 이주(移住)하였고, 공(公)은 대대로 안문(雁門)에 살았는데, 어떻게 분양왕의 지파(枝派)가 되는가?”고 묻자, 그는 “난리를 만나 보첩(譜牒)을 유실하였다. 선인(先人)의 말에 의하면, 본인은 분양왕의 4대손이 된다.”고 하였다. 《舊五代史 卷57》
[주D-007]외가(外家)의 …… 등공(滕公)의 자손 : 등공은 한(漢) 나라 하후영(夏侯嬰)을 말한다. 그의 증손(曾孫) 파(頗)가 부마(駙馬)가 되었는데, 공주(公主)가 그 외가의 손성(孫姓)을 따라 손공주라 하였으므로, 그의 자손이 손성으로 행세하였다. 《漢書 滕公傳》
[주D-008]고신(告身)까지 …… 없다 : 송(宋)의 적청(狄靑)이 추밀사(樞密使)로 있을 때 당(唐) 나라 적인걸(狄仁傑)의 후예 한 사람이 적인걸의 화상(畫像)과 고신 10여 통을 가지고 와서 적인걸이 그의 원조(遠祖)가 된다고 하자, 그는 “내가 어찌 한때 영귀(榮貴)한 것을 빙자하여 감히 그분의 후예라고 하겠는가.” 하고는, 그 사람을 후히 대접해서 보낼 뿐이었다. 《筆談》
[주D-009]유규(有嬀)의 …… 것이다 : 춘추 시대 노 장공(魯莊公) 22년에 진 대부(陳大夫) 의씨(懿氏)가 진경중(陳敬仲)을 사위로 맞이할 때 얻은 점사(占辭)의 한 부분인데, 그 뒤 진경중의 5세손 환자(桓子)를 이어 8세손 성자(成子)가 제(齊)에서 크게 활약하였다. 점사에 보이는 유규(有嬀)는 진(陳)의 성(姓)을, 후예는 진경중을, 강(姜)은 제(齊)의 성(姓)으로 제 나라를 말한다.
[주D-010]시(諡)ㆍ관(官)ㆍ읍(邑) : 시호를 따른 것으로는 장(莊)씨가 초 장왕(楚莊王), 강(康)씨가 위 강숙(衛康叔)에게서 생긴 유이고, 관직을 따른 것으로는 태사(太史)ㆍ사마(司馬)ㆍ사공(司空)ㆍ유(庾)ㆍ적(籍)ㆍ전(錢)씨의 유이며, 읍명(邑名)을 따른 것으로는 최(崔)ㆍ노(魯)ㆍ포(鮑)ㆍ안(晏)ㆍ장(臧)ㆍ비(費)씨의 유이다.
[주D-011]국(國)으로 씨(氏)를 : 이는 우(虞)ㆍ하(夏)ㆍ상(商)ㆍ주(周)ㆍ노(魯)ㆍ위(衛)ㆍ제(齊)ㆍ송(宋)씨의 유를 말한다.
[주D-012]향(鄕)으로 씨를 : 이는 본시 향후(鄕侯)에 수봉(受封)되었다가 향(鄕)의 이름을 씨(氏)로 삼은 배(裵)ㆍ육(陸)ㆍ방(龐)ㆍ염(閻)씨의 유를 말한다.
[주D-013]정(亭)으로 씨를 : 이는 본시 정후(亭侯)에 수봉되었다가 정(亭)의 이름을 씨로 삼은 미(麋)ㆍ채(采)ㆍ구양(歐陽)씨의 유를 말한다.
[주D-014]지(地)로 씨를 : 이는 수봉된 땅이 있는 자는 그 지명(地名)을, 그렇지 않은 자는 주거(住居)한 지명을 씨로 삼은 것을 말한다. 즉 부암(傅巖)에서 주거한 자는 부(傅)를, 혜산(嵇山)에 이주(移住)한 자는 혜(嵇)를 씨로 삼은 유이다.
[주D-015]성(姓)으로 씨를 : 이는 성이 씨로 된 예나 지(地)가 씨로 된 예가 그 처음에는 다 같이 주거한 지명을 따라 주어진 것을 말하는데, 주어진 자는 성으로, 주어지지 않은 자는 지명 그대로 행세하였다. 즉 요허(姚墟)에 주거한 자에게는 요(姚)가, 희수(姬水)에 주거한 자에게는 희(姬)가 성으로 주어진 유이다.
[주D-016]자(字)로 씨를 : 이는 제후(諸侯)의 아들은 공자(公子), 공자의 아들은 공손(公孫)이라 칭할 수 있으나, 그 아들은 다시 공손이라 칭할 수 없으므로, 그 왕부(王父)의 자(字)를 씨로 삼은 것을 말한다. 즉 정 목공(鄭穆公)의 아들 공자 비(公子騑)의 자가 자사(子駟)이므로, 그 손자 걸(乞)이 사(駟)를 씨로 삼은 유이다.
[주D-017]명(名)으로 씨를 : 이는 왕부(王父)의 자(字)가 없을 경우에는 그 이름을 씨로 삼은 것을 말한다. 즉 노 효공(魯孝公)의 아들이 공자 전(公子展)이므로, 그 손자가 전(展)을 씨로 삼은 유이다. 아버지의 자(字)를 씨로 삼은 것은, 공자 수(公子遂)의 아들 공손 귀보(公孫歸父)의 자가 자가(子家)이므로 그 후예가 자가를 씨로 삼은 유이고, 아버지의 이름을 씨로 삼은 것은 공자 아(公子牙)의 아들 공손 자(公孫玆)의 자가 대백(戴伯)이므로, 그 후예가 자(玆)를 씨로 삼은 유이다.
[주D-018]차(次)로 씨를 : 이는 장유(長幼)의 서차, 즉 백(伯)ㆍ중(仲)ㆍ숙(叔)ㆍ계(季)의 유를 말한다. 노(魯)의 삼가(三家 : 맹손(孟孫)ㆍ숙손(叔孫)ㆍ계손씨(季孫氏))가 다 서차로써 씨를 삼았는데, 이를 자(字)로 삼기도 하였다.
[주D-019]족(族)으로 씨를 : 이는 맹(孟)씨ㆍ중(仲)씨는 형제(兄弟)로써, 백(伯)씨ㆍ숙(叔)씨는 소장(少長)으로써, 정(丁)씨ㆍ계(癸)씨는 선후(先後)로써, 조(祖)씨ㆍ예(禰)씨는 상하(上下)로서, 제오(第五)씨ㆍ제팔(第八)씨는 동거(同居)로써, 남공(南公)씨ㆍ남백(南伯)씨는 동칭(同稱)으로써, 공(孔)씨ㆍ자공(子孔)씨ㆍ기(旗)씨ㆍ자기(子旗)씨는 자(字)로써, 헌(軒)씨ㆍ헌원(軒轅)씨ㆍ 웅(熊)씨ㆍ웅상(熊相)씨는 이름[名]으로써, 계(季)씨 중의 계손(季孫)씨와 중(仲)씨 중의 중손(仲孫)씨와 숙(叔)씨 중의 숙손(叔孫)씨는 적서(嫡庶)로써, 한(韓)씨 중의 한여(韓餘)씨와 부(傅)씨 중의 부여(傅餘)씨와 양(梁)씨 중의 양여(梁餘)씨는 여자(餘子 : 장자(長子) 이외의 아들)로써, 수인(遂人)의 족(族)이 넷으로 되고, 상인(商人)의 족이 일곱으로 된 것은 지분(枝分)으로써, 제(齊)의 오왕(五王)이 하나로 합하여 오왕씨가 되고 초(楚)의 열종이 하나로 합하여 열종(列宗)씨가 된 것은 동조(同條)로써 분류된 유를 말한다.
[주D-020]작(爵)으로씨를 : 이는 황왕(皇王)ㆍ공후(公侯)ㆍ공승(公乘)ㆍ공사(公士)ㆍ부경(不更)ㆍ서장(庶長)씨의 유를 말한다.
[주D-021]흉덕(凶德)으로 씨를 : 이는 한(漢)의 영포(英布)가 경형(黥刑 : 피부에 먹물로 자자(刺字)하는 형)을 당한 때문에 그 후예가 경(黥)을 씨로 삼고, 남제 무제(南齊武帝)가 제 4자(子)인 파동왕(巴東王) 소자향(蕭子響)과 동성(同姓)이 된 것을 싫어하여 소(蕭)를 소(蛸)로 고쳐 준 유를 말한다.
[주D-022]길덕(吉德)으로 씨를 : 이는 춘추 시대 진(晉)의 조쇠(趙衰)가 사람들로부터, 겨울의 햇빛[冬日]과 같다는 경애(敬愛)를 받은 때문에 그 후예가 동일(冬日)로써 씨를 삼고, 옛날에 한 현인(賢人)이 사람들로부터, 노성자(老成子)라는 호칭을 받은 때문에 그 후예가 노성(老成)을 씨로 삼은 유를 말한다.
[주D-023]기(技)로 씨를 : 이는 무자(巫者)의 후예가 무(巫)씨로, 도자(屠者)의 후예가 도(屠)씨로, 복자(卜者)의 후예가 복(卜)씨로, 장인(匠人)의 후예가 장(匠)씨로 된 유를 말한다.
[주D-024]사건으로 씨를 : 이는 하대(夏代)에 예(羿 : 유궁국(有窮國) 임금의 이름)가 반란을 일으켜 제상(帝相)을 시해하자, 제상의 후(后) 민(緡 : 유잉씨(有仍氏)의 딸)이 개구멍으로 도망쳐 나왔다가 유복자 소강(少康)을 낳았으므로 그 지손(支孫)이 두(竇)를 씨로 삼고, 한 무제(漢武帝) 때 승상(丞相) 전천추(田千秋)의 나이가 많다 하여 조서(詔書)를 내려, 소차(小車)를 타고 성중(省中)까지 들어올 수 있도록 한바, 사람들이 그를 차승상(車丞相)이라 호칭한 때문에 그 후예가 차(車)를 씨로 삼은 유를 말한다.
[주D-025]작계(爵系)로 씨를 : 이는 왕숙(王叔)씨ㆍ왕손(王孫)씨ㆍ공자(公子)씨ㆍ공손(公孫)씨의 유를 말한다. 즉 복성(複姓)은 공족(公族)이란 것을 밝히기 위함이다. 한 글자로는 한쪽은 밝힐 수 있으나 다른 한쪽은 밝힐 수 없기 때문에 한 글자를 더해야만 그 의의가 드러나게 된다.
[주D-026]국계(國系)로 씨를 : 이는 당(唐)씨가 비록 요(堯) 임금에게서 나왔으나 당손(唐孫)씨는 다시 요 임금의 별족(別族)이 되고, 등(滕)씨가 비록 숙수(叔繡)에게서 나왔으나 등숙(滕叔)씨는 다시 숙수의 별족이 되는 유를 말한다.
[주D-027]족계(族系)로 씨를 : 이는 계우(季友)의 후예로서 전가(傳家 : 가사(家事)를 자손에게 전수하는 것)한 일파는 계손(季孫), 그렇지 못한 일파는 그냥 계(季)씨라 칭하고, 숙아(叔牙)의 후예(後裔)로서 전가한 일파는 숙손(叔孫), 그렇지 못한 일파는 그냥 숙(叔)씨라 칭한 유를 말한다.
[주D-028]명씨(名氏)로 씨를 : 사계(士季)는 사람의 자(字)인데, 그 후예에 사(士)씨가 있고 또 그 별출(別出)로 사계(士季)씨가 있으며, 오참(伍參)은 사람의 이름인데, 그 후예에 오(伍)씨가 있고 또 그 별출로 오참(伍參)씨가 있으며, 한영(韓嬰)은 본시 한(韓) 나라 출신인데, 국명(國名)을 이름에 더하여 한영씨로 삼았고, 장회(臧會)는 본시 장읍(臧邑) 출신인데, 읍명(邑名)을 이름에 더하여 장회씨로 삼은 유를 말한다.
[주D-029]국작(國爵)으로 씨를 : 이는 우(禹) 임금의 후예가 하(夏)씨로 되었는데, 기간공(杞簡公)의 아우 타(佗)가 노(魯)로 망명하여 후작(侯爵)을 받았으므로 다시 하후(夏侯)씨가 생기게 되고, 진(陳) 나라의 후예가 식(息)씨로 되었는데, 식 공자(息公子) 변(邊)이 대부(大夫)의 작위를 받았으므로 다시 식부(息夫)씨가 생기게 된 유를 말한다.
[주D-030]읍계(邑系)로 씨를 : 이는 원(原)은 주읍(周邑)으로써, 신(申)은 초읍(楚邑)으로써 얻어진 씨인데, 원(原)에 백(伯) 자를 더하여 원백(原伯)씨가 되고 신(申)에 숙(叔) 자를 더하여 신숙(申叔)씨가 되어 원씨와 백씨를 분류한 유를 말한다.
[주D-031]관명(官名)으로 씨를 : 이는 사(師)씨가 본시 태사(太師)씨, 사(史)씨가 본시 태사(太史)씨인 것과, 사연(師延)의 후예가 사연(師延)씨로, 사조(史晁)의 후예가 사조(史晁)씨로 된 것은 벼슬과 이름을 씨로 삼은 유이고, 진상(秦相) 여불위(呂不韋)의 후예가 여상(呂相)씨로, 역이기(酈食其)의 자손이 이기(食其)를 씨로 삼았다가 그 증손(曾孫) 무(武)가 시중(侍中)이 되면서 시기(侍其)로 고친 것은 벼슬과 씨로 씨를 삼은 유임을 말한다.
[주D-032]읍시(邑諡)로 씨를 : 이는 읍명(邑名)에 시(諡)를 더한 것은 고 성자(苦成子)의 후예가 고성(苦成)씨로, 장 문중(臧文仲)의 후예가 장문(臧文)씨로 된 유이고, 씨에 시를 더한 것은 초 이자(楚釐子)의 후예가 이자(釐子)씨로, 정 공숙(鄭共叔)의 후예가 공숙(共叔)씨로 된 유이고, 작명(爵名)에 시를 더한 것은 위 성공(衛成公)의 후예가 성공(成公)씨로, 초 성왕(楚成王)의 후예가 성왕(成王)씨로 된 유를 말한다. 주 10)~32)는 《통지략 씨족 서(通志略氏族序)》에 의거하였다.

ⓒ 한국고전번역원 ┃ 이재수 (역) ┃ 1982

 
씨성(氏姓)
고인(古人)의 성명(姓名)에 이동(異同)이 있는 데 대한 변증설(고전간행회본 권 7)

고인의 성명 중에서, 여기는 다르나 저기는 같고 여기는 없으나 저기는 나타나서 증거하기 어려운 것들에 대하여, 여기저기에 보이는 기록을 모아 아이들에게 보일 만한 책자를 만들었으면 한다. 그러나 집에 소장된 서적들이 모두 산질(散帙)되고 또 먼 산곡(山谷)에 거처하므로 다른 좋은 방도가 없어서 이처럼 영성(零星)하니, 참으로 개탄스러운 일이다.
신농씨(神農氏)의 성은 이기(伊祈), 이름은 궤(軌)인데, 일명(一名)은 석년(石年)이다. 《사서휘고(四書彙攷)》에 보인다. 창힐(蒼頡)의 성은 후강(侯岡)이다. 고전문(古篆文) 주에 보인다. 소호(少昊)의 이름은 지(摯), 자는 청양(靑陽)이고, 제곡(帝嚳)의 이름은 준(夋)이고, 성탕(成湯)의 자는 고밀(高密)이다. 《제왕세기(帝王世紀)》에 보인다.
백이(伯夷)의 이름은 윤(允), 자는 공신(公信)인데, 일명은 원(元)이고, 숙제(叔齊)의 이름은 지(智), 자는 공달(公達)이다. 《논어(論語)》소(疏)에 보인다. 중자(中子)의 이름은 백료(伯遼)이다. 주담(周曇)의 영사시 (詠史詩)에 보인다. 《제왕세기(帝王世紀)》에는 “백료는 중료(仲遼)로 되어야 한다.” 하였다. 백이(伯夷)ㆍ숙제(叔齊)의 성은 미(墨)인데, 백이의 이름은 윤(允), 자는 공신(公信)이고, 숙제의 이름은 공달(公達)이며, 중료(仲僚)의 이름은 원(遠), 자는 공망(公望)이다. 《여씨춘추(呂氏春秋)》와 오연(吾衍)의 《한거록(閑居錄)》에 보인다. 고죽군(孤竹君)의 성은 미(墨)음은 미(眉), 이름은 이(台) 음은 이(怡)이다. 《공총자(孔叢子)》와 《사서인물고(四書人物考)》에 보인다. 고죽군의 이름은 초(初), 자는 자조(子朝)이고 용자(龍子)의 이름은 목(穆)이다. 《열자》에는 용자가 용숙(龍叔)으로 되어 있다.
중옹(仲雍)의 자는 숙재(孰哉)이고, 주(周)나라 팔사(八士 백달(伯達)ㆍ백괄(伯适) 등 여덟 형제의 현사(賢士)를 말함)의 성은 남궁(南宮)이고, 이윤(伊尹)은 역목(力牧)의 후예이고, 왕량(王良)은 조간자(趙簡子)의 아들이고, 곤(鯀)의 자는 희(熙)이고, 이루(離婁)는 맹자(孟子)의 제자이고, 임방(林放)의 자는 자구(子丘)이다. 《사서인물고》에 보인다. 왕량(王良)은 진(晉)나라 대부(大夫)로 말을 잘 다루었는데, 구방인(九方歅)의 아들이다. 《후재집(厚齋集)》에는 “일명은 우(郵)이다.” 하였다. 여황(女皇)은 곧 포와(㚿媧)로 성은 운(雲)이다. 또는 여희(女希)라고도 하는데, 태호 복희씨(太昊伏羲氏)의 여제(女弟)이다. 승광(承匡) 주에 보인다. 포(㚿)는 포(庖)와 같다. 복희씨의 성은 풍(風)이고 여와씨(女媧氏)의 성은 운(雲), 호는 여황(女皇), 이름은 와(媧)이다. 동신부(洞神部)에 보이는데, 나필(羅泌)의《노사(路史)》에도 인용되었다. 맹자의 아버지는 맹손 격공의(孟孫激公宜), 어머니의 성은 구(仇), 아내의 성은 전(田)이고 고요(皐陶)의 자는 정견(庭堅)이다. 《좌전(左傳)》주에 보인다.
초(楚)의 광인(狂人) 접여(接輿)의 성은 육(陸), 이름은 통(通)이고, 백락(伯樂)의 성은 손(孫), 이름은 양(陽)이고, 허유(許由)의 자는 중무(仲武)이다. 모두 《장자석문(莊子釋文)》에 보인다. 공안국(孔安國)의 자는 자국(子國)이다. 《공총자(孔叢子)》에 보인다. 한 고조(漢高祖)의 아버지 태공(太公)의 이름은 단(煓), 자는 집가(執嘉)이다. 황보밀(皇甫謐)의 《제왕세기(帝王世紀)》에 보이는데, 타본(他本)에는 황보밀은 “이름은 온(熅), 자는 집가이다.” 하였다. 그리고 왕세정(王世貞)은 “이름은 단(耑)이다.” 하였고, 마영경(馬永卿)은 “《당서(唐書)》재상세계표(宰相世系表)에 유씨(劉氏)의 내력을 서술하기를 ‘대량(大梁)에서 패현(沛縣)으로 이주(移住)하여 인(仁)을 출생, 호는 풍공(豊公)이고, 단(煓)을 출생, 자는 집가이다.’ 했는데, 곧 태공이다.” 하였다. 단(煓)의 음은 단(湍)이다.
한 고조의 중형(仲兄) 이름은 희(喜)이고, 조참(曹參)의 자는 경백(敬伯)이고 한(漢) 나라 신공(申公)의 이름은 배(培)이다. 《사기(史記)》에 보인다. 봉몽(逢蒙)의 아우 이름은 홍초(鴻超)이고, 양주(楊朱)의 아우 이름은 포(布)이다. 《열자(列子)》에 보인다. 정자진(鄭子眞)의 이름은 박(樸)이고, 숙손통(叔孫通)의 이름은 하(何)이다. 《초한춘추(楚漢春秋)》에 보인다.
항백(項伯)의 이름은 전(纏), 자는 백(伯)이다. 《한서(漢書)》주에 보인다. 양왕손(楊王孫)의 이름은 귀(貴)이다. 《서경잡기(西京雜記)》에 보인다. 진중자(陳仲子)의 자는 자종(子終)이다. 《고사전(高士傳)》에 보인다. 상산 사호(商山四皓)중에 원공(園公)의 성은 원(園), 이름은 병(秉), 자는 선명(宣明)이다. 《진류지(陳留志)》에 보인다. 하 황공(夏黃公)의 성은 최(崔), 이름은 확(廓), 자는 소통(少通)이다. 《최씨보(崔氏譜)》에 보인다.
기자(箕子)의 이름은 서여(胥餘)이다. 사마표(司馬彪)의 주(注)에 보인다.
역아(易牙)의 이름은 수(垂), 역아(易牙)는 자이다. 공영달(孔穎達)의《좌전(左傳)》소(疏)에 보인다. 복생(伏生)의 이름은 승(勝), 자는 자천(子賤)이고, 숙오(叔敖)의 이름은 요(饒), 자는 숙오(叔敖)이다. 모두 비(碑)에 보이는데, 한 환제(漢桓帝) 연희(延熙) 3년(160)에 세운 손숙오(孫叔敖)의 비(碑)에 “초(楚) 나라의 재상 손군(孫君)의 휘(諱)는 요(饒), 자는 숙오(叔敖)이다.” 하였고, 이치(李治)는 “《좌전(左傳)》에 보면, 숙오는 위가백영(蔿賈伯嬴 : 백영은 위가의 자)의 아들로 되어 있고, 또 위애렵(蔿艾獵)으로도 되어 있는데, 이름을 요라 한 것은, 반드시 다른 데 상고한 바가 있었을 것이다.” 하였다. 동중서(董仲舒)의 자는 관부(寬夫)이다. 《서경휘찬(書經彙纂)》제유성명(諸儒姓名)조에 보인다. 팽조(彭祖)의 성은 전(籛), 이름은 갱(鏗)이다. 《성원(姓苑)》에 보인다.
한(漢) 나라 호관 삼로(壺關三老)의 성은 영호(令孤), 이름은 무(茂)이다. 순열(荀悅)의 《한기(漢紀)》에 보인다. 개자추(介子推)의 성은 왕(王), 이름은 광(光)이고, 귀곡자(鬼谷子)의 성은 왕(王), 이름은 허(詡)이고, 계연(計然)의 성은 신(辛), 이름은 견(銒), 자는 문자(文子)이고, 달항당인(達巷黨人)의 성은 항(項), 이름은 탁(槖)이다. 대부(大夫) 종(種)의 성은 문(文)이다. 안사고(顔師古)의《한서(漢書)》주에 보인다. 서시(西施)의 성은 정(鄭), 이름은 일(日) 밑에 일(一)을 붙인 글자이고(단(旦)) 순경(荀卿)의 스승 성은 한(馯), 이른은 비(臂)인데, 중니(仲尼)와 똑같이 일컫는 자궁(子弓)이란 사람이다. 승상(丞相) 관(綰)의 성은 왕(王), 어사대부(御史大夫) 겁(劫)의 성은 풍(馮)이다. 《사기(史記)》진시황본기(秦始皇本紀)에 보인다.
한(漢) 나라 사호(四皓) 중 동원공(東園公)에 대하여, 어떤 이는 성은 국(國), 이름은 병(秉)이라 하고, 어떤 이는 성은 당(唐)이라 하고, 어떤 이는 성은 유(庾)라 하고, 어떤 이는 원공(園公)의 성은 위(韋)라 하며, 기리계(綺里季)에 대하여, 어떤 이는 성은 오(吳), 이름은 실(實), 자는 자경(子景)이라 하고, 어떤 이는 성은 주(朱), 이름은(暉), 자는 문계(文季)라 하며, 녹리선생(甪里先生)의 성은 주(周), 이름은 술(術), 자는 원도(元道)이다. 안사고(顔師古)의《한서(漢書)》주에 “사호(四皓)는 산림(山林)에 은거하여 그 씨족(氏族)을 자세히 알 수 없다. 이는 다 후세에 황보밀(皇甫謐)의 무리가 부회(附會)한 것이다.” 하였다.
일설(一說)에, 노자(老子)의 아버지 이름은 건(乾), 자는 원고(元杲)로 되어 있다. 《전량록(前凉錄)》에 보인다. 노자의 막 태어났을 때의 이름은 현록(玄祿)이다. 《현묘내편(玄妙內篇)》에 보인다. 관숙(管叔)의 이름은 도(度)이다. 《사기(史記)》주에 보인다. 역아(易牙)의 이름은 아(亞)이다. 공영달(孔穎達)의 소(疏)에 보인다. 사광(師曠)의 자는 자야(子野)이다. 《장자(莊子)》소(疏)에 보인다. 공손홍(公孫弘)의 자는 차경(次卿)이다. 추장천(鄒長倩)의 편지에 보인다. 자산(子産)의 일명(一名)은 미(美)이다. 《좌전(左傳)》주에 보인다. 맹자의 자는 자여(子輿)이다. 《한서(漢書)》와 《공총자(孔叢子)》에 보인다. 《성증론(聖證論)》에는, 자거(子居)로 되어 있다. 계연(計然)의 계(計)자는 계(峜)자로도 되었는데, 일명은 연(硏), 일명은 예(倪)이다. 문 종(文種)의 자는 자금(子禽)이다. 《오월춘추(吳越春秋)》에 보인다.
한 고조(漢高祖)의 어머니 소령후(昭靈后)의 이름은 함(含)이다. 《사기(史記)》주에 보인다. 동원공(東園公)의 성은 원(轅), 이름은 병(秉), 자는 선명(宣明)이고 녹리선생(甪里先生)의 성은 주(周), 이름은 술(述), 자는 원도(元道)이다. 모두《고사전(高士傳)》에 보인다. 차비(次非)는 일명에 형가(荊軻)라고도 한다. 《속박물지(續博物志)》에 보인다. 촉(蜀) 나라 문옹(文翁)의 이름은 당(黨), 자는 중옹(仲翁)이다. 장숭문(張崇文)의《역대소지(歷代小誌)》에 보인다. 엄군평(嚴君平)의 이름은 준(遵)이다. 《한서(漢書)》왕공양공열전(王貢兩龔列傳) 주에 보인다. 위 부인(衛夫人)의 이름은 삭(鑠), 자는 무의(茂漪)이다. 《한묵지(翰墨志)》에 보인다. 화경(花卿)의 이름은 경정(敬定)이다. 《구당서(舊唐書)》에 보인다. 중[僧] 일행(一行)의 성은 장(張), 이름은 수(璲)이다. 《속박물지(續博物志)》에 보인다.말[馬]을 잃었던 새옹(塞翁)의 성은 이(李)이다. 고곡(高瀔)의 시서(詩序)에 보인다. 묵자(墨子)의 성은 적(翟)인데, 그 어머니가 까마귀 꿈을 꾸고 나서 그를 낳았다 하여 이름을 오(烏)라 하고 묵가(墨家)를 도(道)로 창설하였으므로 지금 그의 본래 성을 이름으로, 묵을 성으로 삼고 있다. 이로 보아 노자(老子)의 성도 의당 노(老)로 삼아야 할 것이다. 사호(四皓)의 성명은《사기(史記)》유후세가 (留侯世家) 주에도 보인다.
즉 “원공(園公)의 성은 유(庾), 자는 선명(宣明)인데, 원중(園中)에서 살았으므로 호를 원공이라 하였고, 하황공(夏黃公)의 성은 최(崔), 이름은 광(廣), 자는 소통(少通)으로 제(齊) 나라 사람인데, 하리(夏里)에서 은거하였으므로 호를 하황공이라 하였고, 녹리선생(甪里先生)은 하내(河內) 지현(軹縣) 사람이요 태백(太伯 : 주 태왕(周太王)의 장자(長子))의 후예로 성은 주(周), 이름은 술(術), 자는 원도(元道)인데, 경사(京師)에서는 호를 패상선생(灞上先生)이라 했다.” 하였다. 그리고 후위(後魏) 최홍(崔鴻)의《전량록(前凉錄)》에는, “삭유(索綏)는 ‘사호(四皓)는 이미 한(漢) 나라 태자(太子)의 자리를 안정시켰다고 하는데, 어찌 다시 환산(還山)하였겠습니까. 그들의 환산 여부에 대해 신(臣)은 아직 알 수 없습니다.’ 하였고, 장중화(張重華)는 ‘사호는 장안(長安:서한(西漢)의 수도)에서 죽었다. 장안에는 지금도 그들의 무덤이 있다.’ 하였으니, 그들은 환산하지 않은 것이다.” 하였다.
태공(太公)의 이름은 연(涓), 자는 자아(子牙)이다. 나필(羅泌)의《노사(路史)》에 보인다. 노자(老子)의 어머니 이름은 무서(無壻)이다. 노자의 아버지는 건원고(乾元杲)이다. 《노사(路史)》소호기(少昊紀)에 보인다. 《한서(漢書)》주(注)에 표기된 신 찬(臣瓚)은 곧 교서랑(校書郞) 부찬(傅瓚)이다. 《양산묵담(兩山墨談)》과《연북잡지(硏北雜志)》에 보인다. 장곡강(張曲江)의 일명은 박물(博物)이다. 서호(徐浩)의 비(碑)에 보인다. 청병(靑荓)은 예양(豫讓)의 벗[友]이다. 《여씨춘추(呂氏春秋)》에 보인다. 마고(麻姑)의 성은 여(黎), 자는 경선(瓊仙)인데, 당(唐) 나라 때 방출(放出)된 궁녀(宮女)이다.《언폭여담(偃曝餘談)》에 보인다. 왕방평(王方平)과 채경(蔡經)은 한(漢) 나라 이전 사람인 듯하다. 진미공(陳眉公)의《태평청화(太平淸話)》에 보인다.
사조제(謝肇淛)의《오잡조(五雜組)》에,
“주공근(周公謹 공근은 송(宋) 나라 주밀(周密)의 자)의《계신잡지(癸辛雜識)》에 ‘선성(先聖)의 처음 이름은 병(兵)자였다가 그 뒤에 병자 아래의 두 획을 떼어버렸다.’고 했다. 그러나 이는 전혀 근거가 없는데, 주씨가 어느 서적을 참고한 것인지 모르겠다.”
하였다.
우리나라의 성명(姓名) 이동(異同)에 대하여는 아직 자세히 상고해 보지 못하였다. 이를테면 이지란(李芝蘭)의 자를 식형(式馨), 유금필(庾黔弼)의 자를 관교(官佼)라 하는 등《성원(姓苑)》에 적지 않게 보이는가 하면, 신라 때 김생(金生)의 이름을 구(玖)라 한 이는 배와(坯窩) 김상숙(金相肅)이고, 고구려 때 안시성주(安市城主)를 양만춘(楊萬春)이라 한 말은 《당서연의(唐書演義)》에 보이는데, 믿을 수 없다.
고인(古人)은 성명학(姓名學)을 가장 소중하게 여겼다. 시윤장(施閏章)의《학여집(學餘集)》에 보이는 계고명이록서(稽古名異錄序)에,
“우항(禹航) 해문(海門) 손 선생(孫先生)이 손수 편저(編著)한《계고명이록》을 내보냈는데, 이는 상고(上古) 이래 사전(史傳)에 기재된 명씨(名氏)와 시호(諡號) 중에서 서로 다르거나 이중으로 된 것을 뽑아 한 책으로 만들어 고징(考徵) 자료로 삼기 위한 것이다. 전인(前人)들에게도《동명록(同名錄)》, 또는《동성명록(同姓名錄)》등이 있지만, 서로 같은 것을 종합해 놓은 데 불과하다. 이를테면 두 사람의 좌구명[二人左丘明《좌씨전(左氏傳)》을 지은 이와 고대(古代)의 한 문인(聞人)을 말함]ㆍ두 사람의 추호[二人秋胡 춘추 시대 노(魯) 나라 사람과 한(漢) 나라 때 두릉(杜陵) 사람을 말함]와 같은 유이다. 근대에 진사원 심숙(陳士元心叔 심숙은 진사원의 자)도 상고 이래의 모든 명씨(名氏)를 망라, 착오되고 모순된 것을 정리해 놓았는데, 그 중에《명의(名疑)》는 비교적 박오(博奧)하다 칭할 만하다. 해문 선생은 많은 섭렵(涉獵)과 방대한 수집(蒐集)에다가 황사(荒史)ㆍ《죽서기년(竹書紀年)》ㆍ《급총주서(汲冢周書)》ㆍ외전(外傳)ㆍ위서(緯書)ㆍ《노사(路史)》등 온갖 괴이(怪異)한 글들을 채취하여 미비된 것을 보완하였으니, 이는 전인(前人)이 다 근거로 삼아 온 글들이다. 그리고 그 중에는 누락된 사적에도 언급하여, 의심나고 착오된 유들을 변론해 놓았다. 이를테면 창힐(倉頡)이 사관(史官)이 아니라고 한 것과, 고요(臯陶)가 뇌택(雷澤)에서 고기 잡았다고 한 것과, 고수(瞽叟)가 고몽(瞽矇 주대(周代)의 관명(官名))이 되었다는 데 대해서는 ‘사람들은 고수가 완악한 줄로만 알고 열두 줄[絃]의 비파를 만든 줄은 알지 못한다.’고 변론한 것과, 주 문왕(周文王)을 유리옥(羑里獄)에서 벗어나게 한 이에 대해서는 ‘사람들은 전혀 산의생(散宜生)의 힘으로만 알고 따로 음긍(陰兢 상(商) 나라 말기 사람)이 있었음은 알지 못한다.’고 변론한 것 등이다. 이같은 유가 너무도 많아서 이루 다 셀 수 없다.”
하였다.
역대의 성명(姓名)에는 뇌동(雷同)된 것이 무척 많다. 명(明) 나라 왕기(王圻)의 동성명변(同姓名辨)이 있고, 호응린(胡應麟)의《소실산방필총(少室山房筆叢)》에도 동성명(同姓名)과 사적류(事蹟類)에 대해 언급된 것이 있으니, 참고할 만하다. 왕기의 동성명변에,
“한(漢) 나라 때 인물로 두 사람의 공수(龔遂)는 모두 태수가 되었고, 두 사람의 경방(京房)은 모두 역리(易理)와 재이(災異)에 밝았다. 또 이전에, 당요(唐堯)와 우순(虞舜)이란 사람이 있었다는 말을 들었는데,《양서(梁書)》에 ‘우순이란 사람은 그 벼슬이 태상 승(太常丞)에 이르렀다.’ 하였고, 한(漢) 나라 때 당요는 임무 장(臨武長)으로 되어 있다. 기타 경사(經史)에는, 유홍(劉弘)ㆍ왕포(王褒)가 각 열 한 사람, 장량(張良)이 아홉 사람, 장창(張敞)ㆍ왕길(王吉)이 각 여덟 사람이나 보인다.”
하였고, 호응린의《소실산방필총》과《사서점필(史書佔畢)》에,
“왕상(王商)은 모두 일곱 사람으로 한(漢) 나라 출신이 4명이고 왕길(王吉)이 모두 다섯 사람으로 한(韓) 나라 출신이 3명이다. 산 자식을 매장하기로 한 곽(郭)씨로는, 이전에 곽거(郭巨)가, 이후에 곽세통(郭世通)이 있었고, 곽세통의 사적은《남사(南史)》 효의열전(孝義列傳)에 보인다. 분신술(分身術)에 능한 갈(葛)씨로는, 이전에 갈현(葛玄)이, 이후에 갈종주(葛從周)가 있었다.갈선공(葛仙公 : 갈현의 칭호)의 사적은《신선전(神仙傳)》에, 갈종주의 사적은《청이록(淸異錄)》에 보인다. 부휴(浮休)란 호를 가진 장(張)씨로는, 이전에 장문성(張文成 문성은 장족(張族)의 자)이, 이후에 장운수(張芸叟 운수는 장순민(張舜民)의 자)가 있었고, 당 나라 장족과 송 나라 장순민의 호가 다 부휴자(浮休子)인데, 역사에 보인다. 풍모가 자지(紫芝)와 같다는 칭호를 받은 유(兪)씨로는, 이전에 유수로(兪秀老)가, 이후에 유옥오(兪玉吾 옥오는 유염(兪琰)의 자)가 있었다. 송 나라의 시인(詩人) 유수로와 원(元) 나라의 문사(文士) 유염의 칭호가 다 자지이다. 중산(中山 지명(地名))의 유(劉)씨로는, 이전에 유우석(劉禹錫)이, 이후에 유자의(劉子儀 자의는 유균(劉筠)의 자)가 있었는데, 하나는 당 나라 사람, 하나는 송 나라 사람으로 모두 유중산 (劉中山)이라 창하였고, 동래(東萊 지명)의 (呂)씨로는, 이전에 여거인(呂居仁 거인은 여본중(呂本中)의 자)이, 이후에 여백공(呂伯恭 백공은 여조겸(呂組謙)의 자)이 있었는데, 하나는 종손으로 그 문집(文集)을 모두《동래집(東萊集)》이라 하였다. 석림 거사(石林居士)라는 호를 가진 섭(葉)씨로는 상서(尙書)와 소보(少保)가 있는데, 하나는 오현(吳縣) 사람으로 지위가 집정(執政)에 《송사(宋史)》에 보인다. 하나는 송양(松陽 다른 데는 귀계(貴溪)로 되어 있음) 사람으로 지위가 상서(尙書 다른 데는 비서승(祕書丞)으로 되어 있음)에 이르렀다. 《일통지(一統志)》에 보인다. 이들은 다 이름이 몽득(夢得)이고, 다 호주(湖州)를 근본으로 하였고, 다 해박(該博)한 학식에 저서(著書)가 있다. 화예부인(花蕊夫人)으로 수봉(受封)된 서(徐)씨로는, 이전에 왕연(王衍 오대(五代) 시대에 전촉주(前蜀主) 왕건(王建)의 아들)의 어머니가, 이후에는 맹창(孟昶 오대 시대 후촉주(後蜀主))의 비(妃)가 있었는데, 다 촉(蜀) 나라 사람이었다. 낭영(郞瑛)의《칠수유고(七修類藁)》에 보인다. 부인(婦人)의 사적으로 아주 비슷하고 이상한 예가 있다. 즉, 임금을 시해(弑害)한 강(姜)씨로는, 이전에 문강(文姜 춘추(春秋) 시대 노 환공(魯桓公)의 부인(婦人)으로, 그 오라비 제 양공(齊襄公)과 간통, 환공을 시해하였음)이 있었고, 아들을 죽인 무(武)씨로는, 이전에 무조(武曌 당 고종(唐高宗)의 후(后))가, 이후에 무 혜비(武惠妃 당 현종(唐玄宗)의 후)가 있었고, 음란(淫亂)한 풍(馮)씨로는, 이전에 문명 황후(文明皇后 북위 문성제(北魏文成帝)의 후)가, 이후에 유황후(幽皇后 북위 효문제(孝文帝)이 후)가 있었다. 또 고금(古今)의 사적이 아주 비슷한 예가 있다. 즉 한(漢) 나라 때 두 사람의 엄준(嚴遵) 중에 하나의 자는 군평(君平), 하나의 자는 자릉(子陵)으로, 다 고사(高士)이고 다 성(姓)을 바꾸었고 이들은 다 장성(莊姓)이었다가 한 명제(漢明帝)의 이름 장(莊)을 휘(諱)하여 엄(嚴)으로 바꾼 것을 말한다. 본전(本傳)에 보인다. 다 두 개의 이름을 가져 군평의 일명(一名)은 존(尊), 자릉의 일명은 광(光)이다. 역시 본전에 보인다. 두 사람의 번숭(樊崇)은 다 도적의 괴수로, 하나는 적미적(赤眉賊), 하나는 우래적(尤來賊)이었다. 당(唐) 나라 때 두 사람의 이광진(李光進) 중에서 하나는 광필(光弼)의 아우, 하나는 광안(光顔)의 형으로, 다 장수가 되었고 다 형제가 전공(戰功)을 세웠다. 송(宋) 나라 때 두 사람의 이정(李定) 중에 하나는 자미(子美 소순흠(蘇舜欽의 자)를, 하나는 자첨(子瞻 소식(蘇軾)의 자)을 탄핵한바, 이들이 모해하려 한 이는 다 문사(文士)이고 다 정인(正人)이고 다 소성(蘇姓)이며, 이들은 다 하옥(下獄)되어 거의 죽게 되었었다. 세상 사람들은, 남자 풍부(馮婦)가 있는 줄은 알아도 여자 허부(許負)가 있는 줄은 알지 못하고,《삼국지(三國志)》유언열전(劉焉列傳)에 보이는 데, 한 고제(漢高帝)가 허부를 명자후(鳴雌侯)에 봉하였다. 또 부인(婦人) 왕성(王聖)이 있는 줄은 알아도 남자 맹광(孟光)이 있는 줄은 알지 못한다.” 왕성은 한 안제(漢安帝)의 유모이고 촉(蜀) 나라 맹광은《삼국지》본전(本傳)이 보인다.
하였다.
내가 상고하건대, 고금 사람들 중에 성명(姓名)ㆍ자호(字號)가 같은 이야기가 어찌 이뿐이겠는가. 이는 대충만 언급된 것이다. 나에게도 수집한 바가 있으므로 지금 몇 가지만을 기록하려한다.
이를테면 세대가 같고 성명이 같고 성명이 같은 이로는, 한(漢) 나라 때 크고 작은 관(冠)으로 자하(子夏)를 구분하였는가 하면, 한 세대에 두 사람의 진준(陳遵)이 있었는데, 하나는 진경좌(陳驚座)로 일컬어졌고, 당(唐) 나라에 두 사람의 한굉(韓翃)이 있었는데, 하나는 춘성무처불비화(春城無處不飛花)로 일컬어졌다. 온통 고인(古人)의 작호(爵號)나 성명(姓名)을 따서 명자(名字)를 지은 자로는, 한(漢) 나라에 유기자(劉箕子)ㆍ주손경(朱孫卿)ㆍ허안회(許顔回)가, 진(晉) 나라에 왕팽조(王彭組)가, 양(梁) 나라에 유안영(庾晏嬰)ㆍ유검루(庾黔婁)ㆍ조손등(組孫登) 등이 있었으니, 이는 다 고인의 성명을 그대로 사용한 것이다.
주죽타(朱竹坨 죽타는 청 나라 주이준(朱彝尊)의 호)의《폭서정집(曝書亭集)》에 수록된 당기도위이군비발(唐騎都尉李君碑跋)에,
“이군(李君)의 휘(諱)는 문(文), 자(字)는 위(緯)이다. 동한(東漢) 이후로는 자(字)를 짓는 데 으레 두 글자를 사용, 한 글자를 사용하는 자는 드물었다. 그런데《당서(唐書)》에 보이는 바로는, 방현령(房玄齡)의 자는 교(喬), 안사고(顔師古)의 자는 유(籒), 이중(李衆)의 자는 사(師), 이수(李琇)의 자는 수(琇), 장순(張巡)의 자는 순(巡), 곽요(郭曜)의 자는 요(曜), 우문심(宇文審)의 자는 심(審), 이회(李恢)의 자는 조(祚), 이조(李條)의 자는 견(堅), 두사인(竇思仁)의 자는 서(恕), 장의방(張儀方)의 자는 의(儀)이다. 이외에는 흔히 볼 수 없다.”
하였다.
내가 보건대, 고인의 자(字) 중에 이중으로 된 것이 없는데, 우리나라에는 성우계(成牛溪 우계는 성혼(成渾)의 호)의 자손 성초용(成楚容)의 자가 소소(蕭蕭)이고 유휘석(柳輝石)의 자가 암암(巖巖)이었으니, 이는 자의 별체(別體)이다. 중국에도 혹 이같은 예가 있었으나, 내가 미처 보지 못했는지도 모르겠다. 우리 왕고(王考) 형암공(炯庵公)의《앙엽기(盎葉記)》에 고인의 기벽(奇僻)한 성명ㆍ자호(字號)가 매우 자세히 기재되었고 또 중니제자명자해(仲尼弟子名字解)조도 들어 있다. 그리고 고영인(顧寧人 영인은 명 나라 고염무(顧炎武)의 자)의《일지록(日知錄)》과 주양공(周亮工)의《인수옥서영(因樹屋書影)》에도 상고할 만한 것이 있다.
주이준(朱彝尊)의《정지거시화(靜志居詩話)》에,
“고금 사람들 중에 한 글자로 자(字)를 지은 이로는, 한(漢) 나라 이후로 안지추(顔之推)의 자는 개(介), 이담(李曇)의 자는 운(雲), 유건(劉乾)의 자는 천(天), 나정(羅靖)의 자는 예(禮), 장순(張巡)의 자는 순(巡), 손성(孫晟)의 자는 봉(鳳), 서윤(徐倫)의 자는 견(堅), 모흠(毛欽)의 자는 걸(傑)이다. 이 같은 예는 이루 다 셀 수 없다.”
하였고,《필기(筆記)》에,
“전협(錢勰)의 자는 목(穆), 범조우(范祖禹)의 자는 순(淳)이다.”
하였고,《지북우담(池北偶談》에,
“원유(袁繇)와 유차(劉叉)의 자는 다 한 글자이다.”
하였다. 그리고 명(明) 나라 진호(秦鎬)의 자는 경(京), 청(淸) 나라 도징(陶澂)의 자는 계(季), 동초(董樵)의 자는 초(樵)이다. 세 글자로 자를 지은 이로는《용천별지(龍川別志)》에,
“수(隋) 나라 도사(道士) 굴돌 무위(屈突無爲)의 자는 무불위(無不爲)이다.”
하였다. 그리고 조경오(晁景迂)의 자는 백이보(伯以父), 유창(劉敞)ㆍ유반(劉攽) 형제의 자는 백원보(伯原父)ㆍ계공보(季貢父), 전량(前凉 진(晉) 나라 때 16국(國)의 하나) 장천석(張天錫)의 자는 공순하(公純嘏), 도일안(陶一安)의 자는 소만유(昭萬有), 청(淸) 나라 부산청(傅山靑)의 자는 공지타(公之佗)이다.
혹 역사에 그 이름이 탈락되어 가칭(假稱)으로 전해지는 것으로는, 후세의 장삼 이사(張三李四 장씨의 3남(男)과 이씨의 4남이란 것으로, 성명이나 신분이 뚜렷하지 못한 것을 뜻함)란 지칭과 같은 유이다. 즉《인수옥서영(因樹屋書影)》에,
“《사기(史記)》만석군전(萬石君傳)에 ‘석분(石奮)의 맏아들은 건(建), 둘째는 갑(甲), 셋째는 을(乙), 넷째는 경(慶)이다.’ 하였는데, 그 중에 갑이나 을은 이름이 아니다. 이름을 잃어버린 때문에 갑ㆍ을로써 가칭한 것이다.”
하였다.《한서(漢書)》위상전(魏相傳)에
“알자(謁者 관명(官名)) 조요(趙堯)에게 봄철의 정무(政務)를, 이순(李舜)에게 여름철의 정무를, 예탕(兒湯)에게 가을철의 정무를, 공우(貢禹)에게 겨울철의 정무를 맡도록 한다.”
하였는데, 한 세대에 네 사람이 다같이 요ㆍ순ㆍ우ㆍ탕으로 이름을 지었을 리가 없다. 아무래도 고의로 만들어낸 것 같다고 여겼는데,《급취편(急就篇)》에 조요순(祖堯舜)ㆍ악우탕(樂禹湯)이란 인물이 나오는 것을 보고는, 이 같은 유는 다 고인들이 가칭한 이름임을 확신하였다. 어떤 이는,
“한 고제(漢高帝) 때에 조요(趙堯)란 자가 있었으나 알자(謁者)는 아니다.”

[주D-001]태자(太子)의 …… 안정시켰다 : 한 혜제(漢惠帝)가 태자로 있을 때 고조(高祖)가 태자를 갈아치우려 하므로 장량(張良)이 상산(商山)의 네 은자(隱者) 원공(東園公)ㆍ기리계(綺里季)ㆍ하황공(夏黃公)ㆍ녹리선생(甪里先生)을 초청하여 태자의 우익(羽翼)을 만든 고사. 《史記 張良世家》
[주D-002]곽거(郭巨) : 진(晉) 나라 사람으로 부부(夫婦)가 품팔이로 노모(老母)를 효양(孝養)하는데, 어린 아들이 노모의 반찬을 축내므로 이에 어린 아들을 생매장하기로 결의하고 땅을 파다가 황금(黃金)으로 된 가마솥 한 개를 발굴한바, 그 가마솥에 “효자 곽거여, 황금 가마솥을 너에게 주노라.[孝子郭巨 黃金一釜 以用賜汝].” 한 12자가 단서(丹書)로 쓰여져 있었다.《搜神記》
[주D-003]크고 작은 …… 구분 : 한(漢) 나라 때 두흠(杜欽)과 두업(杜鄴)의 자(字)가 다 자하(子夏)이므로 사람들이, 한쪽 눈이 먼 두흠을 맹자하(盲子夏)라 칭하여 두 사람을 구별하였다. 여기에 모욕감을 느낀 두흠이 조그마한 관(冠)을 만들어 쓰므로 사람들이 다시 그를 소관자하(小冠子夏), 두업을 대관자하(大冠子夏)라 칭한 고사. 《漢書 卷60》
[주D-004]진경좌(陳驚座) : 한(漢) 나라 때 진준(陳遵)이 성격이 호방하고 손[客]을 좋아하였는데, 그 당시 열후(列侯) 중에 또 하나의 진준(陳遵)이 있어 어느 집을 방문한다고 하면, 그 집에 모인 손들이 위의 진준이 오는 줄로 알고 모두 진동(震動)되곤 하므로 사람들이 아래 진 준을 ‘진경좌’라 칭하였다.《漢書 卷92》
[주D-005]춘성무처불비화(春城無處不飛花) : 당 덕종(唐德宗) 때에 지제고(知制誥 : 명(官名))가 결원(缺員)되자, 임금이 “시인(詩人) 한굉(韓翃)을 임명하라.”고 결재하였는데, 그때 강회 자사(江淮刺史)로 있던 또 하나의 한굉(韓翃)이 함께 인견(引見)되었으므로 임금이 “춘성무처불비화에게 임명하라.”고 다시 결재하였으니, 끝내 위의 명구(名句)를 읊은 시인 한굉에게 낙착된 것이다.《唐書 卷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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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씨성(氏姓)
이성(李姓)에 대한 변증설(고전간행회본 권 37)

《만성통보(萬姓統譜)》에,
“이성(李姓)은 농서(隴西)가 근본으로 치음성(徵音姓 치음은 오음(五音)중에 화음(火音)에 해당함)에 속하는데, 《자서(字書)》에 “오얏나무[李]는 열매가 많이 열리는 나무이다.” 하였고 자음(字音)에는 중국과 우리나라의 차별이 있다. 즉 중국음은 ‘레’ 우리나라 음은 ‘리’ 속음(俗音)은 ‘니’이다. 전욱(顓頊)의 증손(曾孫)인 고요(咎繇) 곧 고요(皐陶)이다.《정자통(正字通)》에 “陶의 자음(字音)은 도(挑)이니, 오지그릇을 말한다.” 하였다. 또 고도(皐陶)는 북통[鼓匡]으로도 보인다. 즉 주례《周禮》고공기(考工記)에 “운인(韠人)이 북통을 만든다.” 하였는데 운(韠)자는 본래 도()자이다. 또《정자통(正字通)》에 “陶의 자음(字音)은 요(遙)이다.” 하였다. 고요는 순(舜) 임금의 신하 이름인데, 다른 데는 고요(咎繇)로 되어 있다. 가 요 임금때 이관(理官 옥송(獄訟)을 맡은 관원)이 되었으므로, 그 자손이 관직(官職)을 따서 이(理)로써 씨(氏)를 삼았고, 은(殷) 나라 말기에 그 후손 이이정(理利貞)이 난리를 피하여 이후(伊侯)의 옛집터로 가서 나무의 열매를 따먹고 살다가 이(李)로써 성(姓)을 바꾸었다. 그 뒤 11대손은 곧 노군(老君 노자(老子))인데 노군의 자손 중에 일파(一派)는 조군(趙郡)에 살았고 일파는 농서(隴西)에 살면서 광(廣 한(漢) 나라 때 전장군(前將軍))을 낳았고 광의 후손은 연(淵 당 고조(唐高祖))을 낳았다.”
하였는데, 당 현종(唐玄綜) 천보(天寶) 2년(743)에 고요(皐陶)를 덕명황제(德明皇帝)로, 노자(老子)를 현원황제(玄元皇帝)로 추존(追尊)하였다. 창려(昌黎) 한유(韓愈)의 시집 주(詩集注)에,
“천보 원년에 황제가 친히 신묘(新廟)에 임(臨)하여 현원황제에게 제향(祭享)하고 나서, 장자(莊子)를 남화진인(南華眞人)으로, 문자(文子 노자의 제자)를 통현지인(通玄眞人)으로, 열자(列子)를 충허진인(沖虛眞人)으로, 경상자(庚桑子 주대(周代) 사람으로 이름은 초(楚))를 통허진인(洞虛眞人)으로 추존 배향(追尊配享)하게 했다.”
하였고, 또,
“처음에 태청궁(太淸宮)이 준공된자, 공인(工人)을 태백산(太白山)으로 보내어 백석(白石)을 채취, 현원황제의 상(像)을 만들어 남향(南向)으로 모시고, 현종과 숙종(肅宗 현종의 아들)의 상을 만들어 좌우(左右)에 시립(侍立)하게 했다.”
하였다. 고염무(顧炎武)의《일지록(日知錄)》에,
“씨족(氏族)에 관한 글에서, 씨족은 진(秦)ㆍ한(漢) 이후부터 시작되었다는 말은 다 믿을 수 없다. 즉《신당서(新唐書)》종실세계 상(宗室世系上)에 이씨(李氏)에 대해 서술하기를 ‘주왕(紂王) 시대에 이징(理徵)의 자는 덕령(德靈)으로 익예중오백(翼隸中吳伯)이 되었다.’ 본시 이연수(李延壽)의《북사 서전(北史序傳)》에 있는 말. 고 하였으나, 삼대(三代 하(夏)ㆍ은(殷)ㆍ주(周)) 시대에는 이같은 명자(名字)도 관작(官爵)도 없었다.”
하였고, 또 왕세정(王世貞)의《완위여편(宛委餘編)》에 보면,
“이씨는 본시 영성(嬴姓)에서 나왔다. 전욱(顓頊)의 후손 백예(柏翳 백익(柏益))는 정강성(鄭康成 강성은 후한(後漢) 정현(鄭玄)의 자)의《시보(詩譜)》에, 고요(皐陶)의 아들로 되어 있는데, 그는 우(禹) 임금을 도와서 물과 토지[水土]를 잘 다스린 공로로 영성(嬴姓)을 받았고, 그의 19세손 비자(非子)는 나라의 말[馬]을 잘 기른 공로로 주 효왕(周孝王) 갑자년에 진(秦)으로부터 수봉(受封), 부용국(附庸國) 따로 독립되지 못한 나라)이 되어 진영(秦嬴)으로 불렸다.《사기(史記)》진본기(秦本紀)에는 ‘전욱의 후손 여수(女脩 여자임)가 대업(大業)을 낳았고, 대업이 대비(大費)를 낳았으니, 이가 곧 백익(伯益)이다. 그 뒤 백익의 10세손 비렴(蜚廉)이 악래(惡來)를 낳았는데, 이들 부자(父子)가 뛰어난 재주와 힘으로 주왕(紂王)을 섬겼고 악래의 5세손은 비자(非子)이다.’ 했다.”
하였다. 진강(陳剛)이 말하기를,
“노자(老子)는 주(周) 나라 말기에 출생하였는데, 바로 지금의 하남부(河南府) 영보현(靈寶縣) 지방이 그의 출생지이다. 그 아버지의 이름은 광(廣)으로 시골의 가난한 백성이었다. 어려서부터 부자집에 고용살이하면서 나이 70이 넘도록 아내가 없었고, 그 어머니 역시 시골의 어리석은 여자로 나이 40이 넘도록 남편이 없다가 어느 날 이들은 우연히 산중에서 만나 야합(野合)한바, 천지(天地)의 영기(靈氣)을 받아 그를 밴 지 80개월이나 되어도 출산하지 않았다. 이에 주인이 상서롭지 않게 여기고 집에서 내쫓으므로 하는 수 없이 들판의 큰 오얏나무 밑을 헤매다가 미발(眉髮)이 하얀 아들 하나를 낳았다. 그녀는 광(廣)의 성(姓)이 무엇임을 알지 못하므로 오얏나무를 가리켜 그의 성을 삼고, 그의 귀[耳]가 크다 하여 이름을 이(耳)라 하였는데, 세상 사람들은 그의 머리털이 하얀 것을 보고 노자라 불렀다.
그는 장성하여 주 천자(周天子)의 장서각(藏書閣)을 맡아 낮은 벼슬아치가 되었다. 그리하여 고례(古禮)와 고사(古事)를 많이 알았으므로 공자가 그에게 예제(禮制)와 관명(官名)에 대해 물은 적이 있었고, 그 뒤 연로(年老)하여서는 주(周) 나라의 왕실(王室)이 장차 어려워질 것을 보고 청우(靑牛)을 몰아 서쪽으로 함곡관(函谷關)에 들어가다가 관(關)을 지키는 윤희(尹喜)를 만나 그 스승이 되어《도덕경(道德經)》5천 자를 짓고는, 마침내 진천(秦川) 주질현(盩厔縣)에서 사망하였는데, 여기에 그의 무덤이 있다.”
하였다.
이상은 중국 이씨의 득성(得姓)하게 된 사적인데, 그 설(說)들이 여러 가지여서 종잡을 수 없다. 그러나 그 군망(郡望)에 대하여는, 조군(趙郡)ㆍ택저(澤底)ㆍ농서(隴西) 등이 유명하다. 그리고 철령(鐵嶺)의 이성(李姓) 이성량(李成樑)의 조상은 본시 조선(朝鮮) 이산(理山) 사람인데, 영(英)이 중국으로 도망쳐 들어갔었다. 과 고려(高麗)의 이성 이정기(李正己)의 본명은 회옥(懷玉)이다.《신당서(新唐書》재상세계표(宰相世系表)에, 이회옥이 평로절도사(平虜節度使)로 보인다. 외에도 몇 개의 군망(郡望)이 더 있는지 알 수 없다.
우리나라에는 이씨의 관향(貫鄕)이 거의 1백 개나 되어서, 그 근본을 상고하기 어렵다.《삼국유사(三國遺事)》에,
“신라 초기에 6부(部)의 성(姓)이 주어졌는데, 성을 받은 조상들, 즉 6부의 우두머리는 모두 하늘에서 내려온 사람들로 각기 자제(子弟)를 거느리고 알천(閼川) 위에 모여 회의하다가 …… 혁거세(赫居世)를 왕으로 옹립하였다. …… 양산촌 장(楊山村長) 이(李)씨는 하늘에서 표암봉(瓢巖峯)으로, 고허촌 장(高墟村長) 정(鄭)씨는 형산(兄山)으로, 대수촌 장(大樹村長) 손(孫)씨는 이산(伊山)으로, 진지촌 장(珍支村長) 일본(一本)에는, 우진촌(于珍村)으로 되어 있다. 최(崔)씨는 화산(花山)으로 가리촌 장(加利村長) 배(裵)씨는 명활산(明活山)으로, 고야촌 장(高耶村長) 설(薛)씨는 금강산(金剛山)으로 내려왔다.”
하였고, 또 신라유사(新羅遺事)에 보면,
“유리왕(儒理王) 9년(32) 임진에 6부(部)의 명칭을 설정하고 성(姓)을 주었다. 즉 양산촌을 양부(梁部) 일본(一本)에는 급량부(及梁部)로 되어 있다. 로 하여 이성(李姓)을, 고허촌을 사량부(沙梁部)로 하여 최성을, 대수촌을 점량부(漸粱部) 일본에는 모량부(牟粱部)로 되어 있다. 로 하여 손성을, 우진촌(于珍村) 일본에는 진지촌(珍支村)으로 되어 있다. 을 본피부(本彼部)로 하여 정성을, 가리촌을 한기부(漢祇部) 일본에는 한기부(漢岐部)로 되어 있다. 로 하여 배성을, 명활촌 일본에는 고야촌(高耶村)으로 되어 있다. 을 습비부(習比部) 일본에는 습화부(習化部)로 되어 있다 로 하여 설성을 주었다.”
하였다.
다시 상고해 보면, 일본(日本)의 이장행(李長行)은 본시 신라 사람으로 차아 위황(嵯峨僞皇 위황은 소위 ‘천황(天皇)’을 폄(貶)해서 지칭한 말)시대에 왜국(倭國)에 들어가 거위[鵝]와 양[羊]을 기증하였었고,《삼국사기(三國史記)》에 보면, 이문진(李文眞)은 고려 영양왕(嬰陽王) 때의 박사(博士)로, 고사(古史)를 간추려서《신집(新集》5권을 만들었고,《발해고(渤海攷)》에 보면, 이광록(李匡祿)은 흥료현(興遼縣) 사람으로 영주 자사(郢州刺史)였는데, 고려 현종(顯宗) 21년(1030) 9월 병진에 발해국(渤海國) 대연림(大延琳)이 이광록을 고려로 급파시켜 지원을 요청하였다. 그런데 거란(契丹)이 뒤를 이어 천우장(千牛將) 나한노(羅漢奴)를 고려로 보내어 보고하기를, 대연림이 거란 군사에게 포위되었다가 투항(投降)했다 하므로, 이광록이 본국의 멸망을 듣고 드디어 고려에 머물러 돌아가지 않았다.
이상 세 이씨는 그 관향(貫鄕)을 알 수 없다. 이들의 자손이 과연 유전되어 온다면 그 관향은 지금 어떻게 되는지, 한 가지 궁금한 일이다. 그렇다면 지금 허다한 이성(李姓)들은 혹 기자(箕子)를 따라왔거나 위만(衛滿)을 따라왔거나, 사군(四郡) 시대에 흘러들어왔거나, 혹 소정방(蘇定方)이 백제(百濟)를 공벌(攻伐)할 때 따라들어왔다가 돌아가지 않은 것이 아닌지. 아니면 혹 농서(隴西)의 유파(流波)나, 6부(部)의 사성(賜姓)이 아닌지. 고가 대족(古家大族)을 제외한 평민으로서 이성(李姓)을 가진 자는 참으로 그 선계(先系)를 상고하기 어렵다. 이성도 이와 같은 실정이니, 다른 성은 이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왕고(王考 죽은 조부(祖父)로 이덕무(李德懋)를 말함)의《이목구심서(耳目口心書)》에 소개된 이성의 씨망(氏望)이 60여 가지나 되는데, 다른 성의 경우도 비슷하다.
내가 보건대, 경주김씨(慶州金氏)의 족망(族望)이 수십여 관향(貫鄕)이나 되는데, 그 근원을 따져 보면 다 경주에서 나왔다. 김성(金姓) 또한 한 근원에서 이처럼 분파(分派)되었으니, 본시 하나의 성(姓)으로 많은 관향(貫鄕)이 분파된 성들은 그 원류(源流)를 구별하기 어렵다. 더욱이 사대부(士大夫)나 잠영 세족(簪纓世族 대대로 높은 벼슬을 하는 겨레붙이)에게는 보첩(譜牒)이 갖춰져 있지만, 서민들의 성관(姓貫) 분파에 대하여는 신빙할 만한 문헌이 없으니, 어떻게 그 근원을 소급해서 알 수 있겠는가. 이 같은 경우는 그만 논하는 것이 옳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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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씨성(氏姓)
백씨(白氏)에 대한 변증설(고전간행회본 권 31)

《만성보(萬姓譜)》에,
“백씨는 본시 희성(姬姓)에서 나왔다. 즉 주 태왕(周太王)의 5세손 우중(虞仲)이 우(虞)에 수봉(受封)되었다가 그 후손이 진(晉)에게 멸망당하자, 우(虞)의 공족(公族) 정백 해(井伯奚 정백은 자, 해는 이름)가 백희(伯姬)를 진(秦)의 잉첩((媵妾)으로 보내고 백리(百里 읍명(邑名))에 수봉되었으며, 해의 아들은 시(視)로 자가 맹명(孟明)이고, 시의 두 아들은 첫째 서걸술(西乞術), 둘째 백걸병(白乞丙)인데, 백걸병의 자손이 백(白)으로 씨(氏)를 삼았다.”
하였으니, 이는 중국 백성(百姓)의 원류(源流)를 증거할 만한 것이다.
우리나라에는 백성에게 세 관향(貫鄕)이 있다. 즉 수원(水原)ㆍ직산(稷山)ㆍ남포(藍浦)인데, 그 중 수원의 백성이 대족(大族)으로서, 고려 때 성균진사(成均進士) 백휘(白揮)를 비조(鼻祖)로 삼고 있다. 일찍이《여산송씨 보(礪山宋氏譜)를 보건대, 해안백씨(海安白氏)가 보이는데, 이는 한 서민(庶民)이 제멋대로 관향(貫鄕)을 만들어낸 것이다.
《만성보(萬姓譜)》에 보면, 백제 시대에 백(苩) 자음(字音)은 백(白) 씨가 있었는데, 그 뒤에 백(苩)이 백(白)으로 바뀐 것인지도 모르겠다. 지금은 백씨(苩氏)가 없기 때문이다. 사첩(史牒)에 보이는 백씨(白氏)를 들면, 백여(白如)는 백제 사람인데, 일본(日本) 숭준 위황(崇峻僞皇) 원년(188)에 화사(畫師)로 왜국(倭國)에 들어 갔고, 백중학(白仲鶴)은 신라 때 간관(諫官)이었고, 백탁(白卓) 탁은 일본(一本)에 조(早)로 되었다. 은 태봉왕(泰封王) 궁예(弓裔) 때 문사(文士)였고, 백사유(白思柔)는 고려 성종(成宗) 때 한림학사(翰林學士)였고, 백가신(白可臣)은 고려 숙종(肅宗) 때 시랑(侍郞)이었고, 백광신(白光臣)은 고려 때 최당(崔讜) 등과 동시(同時)의 구로(九老)로서 비서성(秘書省)에 있었으니, 이는 백성(百姓) 중에서 사적(史籍)에 유명한 사람들이다.

[주D-001]구로(九老) : 고려(高麗) 때 고관(高官)으로 치사(致仕 : 나이가 많아 벼슬을 사양하고 물러나는 것)하고 기로회(耆老會)를 결집하여 여생을 한가로이 즐기므로 사람들이 ‘지상선(地上仙)’으로 호칭하였던 최당(崔讜)ㆍ최선(崔詵)ㆍ장자목(張自牧)ㆍ고영중(高瑩中)ㆍ백광신(白光臣)ㆍ이준창(李俊昌)ㆍ현덕수(玄德秀)ㆍ이세장(李世長)ㆍ조통(趙通)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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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씨성(氏姓)
제갈성(諸葛姓)에 대한 변증설(고전간행회본 권 44)

세상 사람들은 제갈 무후(諸葛武侯)의 재덕(才德)이 제왕(帝王)의 스승이 될 만한 것만 알고, 그 성씨의 유래는 알지 못한다. 청(淸) 나라 수령(遂寧) 사람 장붕핵(張鵬翮)의《충무지(忠武誌)》에 보면,
“《삼국지(三國志)》오서 주(吳書注)에 ‘제갈성의 조상은 본시 갈성(葛姓)으로 낭야(瑯耶) 제현(諸縣) 사람이었다가 그 뒤에 양도(陽都)로 이거(移居)하였는데, 양도에는 이전에 갈성이 있었다. 이에 사람들이 제갈씨라 불렀으므로 그때부터 제갈로 씨를 삼았다.’ 하였고, 또 《풍속통(風俗通)》에 보면 ‘갈영(葛嬰)이 진섭(陳涉)의 장수로 전공(戰功)을 세웠다가 베임을 당하였는데, 한 문제(漢文帝)가 그의 손자를 제현후(諸縣侯)로 추봉(追封)해 주었으므로 그때부터 제갈로 씨를 삼았다.’ 하였으니, 이 두 군데의 설(說)이 서로 같지 않고 또 그 선대(先代)에 대해 상고할 만한 보첩도 없다.”
하였다. 따라서 제갈씨의 조상은 바로 갈씨로서 복성(複姓)이 아니었고, 또《풍속통》에서 말한 갈영은 바로 갈씨의 조상인 것이다. 그런데 제갈 무후의 자손이 촉중(蜀中)에 유전되어 있다면 반드시 상고할 만한 보첩이 있겠지만, 장붕행의《충무지》에 ‘그 선대를 상고할 수 없다.’ 하였으니, 그의 설을 따르는 것이 옳다. 더욱이 능적(凌迪)의《만성통보(萬姓統譜)》에도 보이지 않기 때문에 그의 설이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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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씨성(氏姓)
천성(天性)에 대한 변증설(고전간행회본 권 47)

성씨란 옛날 제왕(帝王)이 명한 것이므로 고칠 수도 바꿀 수도 없다. 그런데 후세에 와서 임의대로 고치거나 바꾸기도 하고, 혹 사사로이 지어주기도 하니, 이는 다 법(法)도 예(禮)도 아니다. 성(姓)이란 독립되어 있는 것으로, 맨 처음 성을 받을 때 누구나 다 거주하는 지명(地名)에 따라 주어질 뿐, 그 미악(美惡)을 따지지 않는 것이 마치 시법(諡法)을 다루는 것과 같기 때문에, 아무리 악성(惡姓)을 받게 되더라도 대대로 고이 가져 대대로 유전해야 한다. 악성(惡姓)이란 그 흉덕(凶德)에 의해 정해지는 것을 말한다. 이를테면 한(漢) 나라 영포(英布)가 경형(黥刑 피부에 먹물로 자자(刺字)하는 것)을 받았다 하여 경씨(黥氏)로 되고, 수(隋)나라 양현감(楊玄感)이 효수(梟首 목을 베어 높은 곳에 매달아 놓는 것)되었다 하여 효씨(梟氏)로 된 유이니, 그 자손이 아무리 길덕(吉德)의 성으로 바꾸려 해도 안 된다. 또한 이름을 성에 비교하면 이름은 성보다 덜 엄격한 것이다. 그러나《춘추좌전(春秋左傳)》환공(桓公) 6년 조에 보면 신수(申繻) 춘추 시대 노(魯)의 대부(大夫))가 말하기를,
“사람의 이름을 짓는데 다섯 가지 의의가 있으니 …… 국명(國名)ㆍ관명(官名)이나 산천(山川)ㆍ은질(隱疾)ㆍ축생(畜牲)ㆍ기폐(器幣)의 이름을 사용하지 않는다.”
하였고,《예기(禮記)》내칙(內則)에도, 아들의 이름을 짓는 법이《좌전》처럼 언급되었는데 다만,
“일월(日月)ㆍ국(國)ㆍ은질의 이름을 사용하지 않는다.”
하였고, 그 주(注)에,
“늘 쓰이는 어휘는 쉽게 언급하게 되어 기휘(忌諱)하기 어렵기 때문에 군자(君子)가 이름으로 짓지 않는다.”
하였으며, 장이공(張爾公 이공은 명 나라 장자열(張自烈)의 자)의《정자통(正字通)》에,
“송(宋) 나라 선화(宣和 휘종(徽宗)의 연호) 연간에 백성에게, 천(天)ㆍ왕(王)ㆍ군(君)ㆍ성(聖) 등의 글자로 이름을 짓지 못하도록 금했다.”
하였고, 그 자주(自注)에,
“이는 군부(君父)를 높이고 하늘을 높이기 위해서이다.”
하였다.
나는 생각건대, 이름을 짓는 데도 천(天)자를 사용하지 못하거든, 하물며 천자로 성(姓)을 삼음이랴. 천성(天姓)이 어느 시대에 생겨났는지는 알 수 없으나, 한대(漢代)에 장사 영(長社令) 천고(天高)가 있었던 것으로 보아, 그 유래는 이미 오래다. 애당초 사람의 성씨를 정하는 데는, 거주한 지명(地名), 또는 수봉(受封)된 지명에 의해 받아지거나, 자(字)ㆍ시(諡)ㆍ관(官)ㆍ 읍(邑)에 의해 받아지거나 길덕(吉德), 또는 흉덕(凶德)에 의해 받아졌다. 그럼 고인(古人)이 아무리 질직(質直)을 숭상하였지만, 성(姓)을 주는 이에게 과연 대덕(大德)이 있다면, 감히 천(天)자를 성으로 주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는 반드시 흉덕에 의해 주어진 것일 터이니, 혹 ‘천차의지(天且劓之)’의 천자가 아닌지 모르겠다.《역경(易經)》규 육삼효(睽六三爻)에,
“그 소[牛]는 앞에서 가로막고, 그 사람은 천(天)에다 의(劓)까지 당했다.”
하였고 그 주(注)에, 천은 형(刑)의 이름으로 되어 있는데, 곧 머리털을 몽땅 깎아버리는 것으로 후세의 곤형(髡刑)이란 것과 같다. 그러나 천자를 형 이름으로 사용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하늘을 공경하는 의의가 아니다.
《설문(說文)》에는, 는 구레나룻[頰毛]이라 하여 털 모양을 표현하였고,《주례(周禮)》에는, 비늘 모양을 표현하였다. 그런데 전문(篆文)의 가 자의 모양과 비슷하므로 자를 天자와 혼동하여 天자로 오기(誤記)된 것이 아닌지 모르겠다. 다만 이다음 박아 군자(博雅君子)의 질정(質正)을 받아 천고(千古)의 의오(疑誤)가 수정되기를 기다릴 뿐이다. 또《역경》규 육삼효에,
“그 사람은 천(天)에다 의(劓)까지 당했다.”
하였는데, 정전(程傳)에는,
“천(天)은 머리털을 깎는 것이다.”
하였고, 본의(本義) 아래 주자 주(朱子注)에는,
“천은 여럿이 합세하여 수염을 깎는 형벌이다. 전문(篆文)에, 天은 ●로, 而는 ●로 되어 있다.”
하였고, 평암(平庵) 항씨(項氏)는,
“천은 머리털을 깎는 형(刑)이다.”
하였다.
또 물명(物名)에 천자를 범한 것도 이루 다 셀 수 없다. 이를테면, 산에 천산(天山)이, 물에는 천수(天水)가, 나라에는 천축(天竺)ㆍ천독(天毒)ㆍ천비(天鄙)가, 관(官)에는 천관(天官)이, 작(爵)에는 천작(天爵)이, 새에는 천조(天鳥)가, 두(痘)에는 천화(天花)가, 창(瘡)에는 천포(天疱)가, 질(疾)에는 천조(天吊)가, 짐승에는 천록(天祿)이, 충(蟲)에는 천우(天牛)와 천장자(天漿子)가, 풀에는 천가(天茄)ㆍ천규(天葵)ㆍ천과(天苽)ㆍ천마(天麻)가 있는데, 이는 다 천자가 위에 있는 것들이다.
천자가 아래 있는 것으로 말하면, 지명(地名)에는 북경(北京)의 순천(順天)이, 수명(獸名)에는 형천(刑天) 《산해경(山海經)》에 “형천은 머리가 없이, 젖[乳]을 눈으로, 배꼽을 입으로 사용한다.” 하였다. 이, 초명(草名)에는 경천(景天) 《본초강목(本草綱目)》에 “경천을 지붕 위에 올려 놓으면 화재(火災)가 방어된다.” 하였다. 이, 입명(笠名)에는 천공(天公) 《본초강목》에 “떨어진 삿갓 이름을 패천공(敗天公)이라 한다.” 하였는데 지금의 폐양자(蔽陽子)이다. 이, 조명(鳥名)에는 규천(叫天) 《본초강목》과《역어유해(譯語類解)》에 보인다. 이 있는데, 지금 세속에서 종다리[從地理鳥]라 부른다. 우리나라의 지명에도 순천(順天)이 있다. 나머지는 이루 다 기록할 수 없으므로 생략하기로 한다.
고인(古人)이 천자를 물명(物名)으로 지은 것을 보면, 천자를 성(姓)으로 삼는 것도 구애됨이 없을 것 같다. 우리나라에도 천성이 있다. 조경암(趙敬庵) 이름은 연귀(衍龜)로 배천(白川) 사람이고, 남당(南塘) 한공(韓公 : 한원진(韓元震))의 문인(門人)으로 나의 왕고(王考)와 절친하였으며, 포의(布衣)로 일생을 마쳤다. 이 일찍이 말하기를,
“한 천성이 해서(海西) 황주(黃州)에 살면서 경서(經書)에 힘쓰고 있는데, 그 관향(貫鄕)은 순창(淳昌)이라 한다.”
하였고, 이후암(李厚庵) 이름은 만운(萬運). 도,
“천성의 관향은 장단(長湍)이다.”
하였다. 나의 왕고(王考) 청장공(靑莊公)이《여지승람(輿地勝覽)》 윤근수(尹根壽) 지음. 《도곡총설(陶谷叢說)》 이의현(李宜顯) 지음. 과 경조도적(京兆圖籍)에 보이는 성씨들을 뽑아 일통(一統)으로 만들어 저서《앙엽기(盎葉記)》에 수록하였는데, 천성의 관향은 연안(延安)으로 되어 있다. 천성은 기벽(奇僻)에 속하는 것으로서 세가지의 관향이 있는데, 혹 그 파계(派系)를 고증할 만한 보첩이 있는지 모르겠다. 내가 일찍이 보건대, 순조(純祖) 을미년(1835)에 실시한 승학시(陞學試 조선 시대에 성균관 유생들의 학업 진전을 시험하던 시험) 방목(榜目)에 부(賦) 삼하(三下 시문(詩文) 시험에서 아홉째 되는 등급)로 합격한 천유추(天有樞)가 있었는데, 조경암의 말에 ‘황주의한 천성이 경서(經書)에 힘쓰고 있다.’ 하였으니, 천성은 천족(賤族)이 아닌 것이다. 이후암의《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씨족류(氏族類)에도 상고할 만한 것이 있으련만, 내가 지금 먼 산곡(山谷)에 묻혀 있어 그를 열람할 길이 없으니, 마음만 답답할 뿐이다. 후인(後人)이 혹 나를 위해 이를 고증하여 본 변증설 밑에 부기하여 주지 않을는지, 그윽이 바라는 바이다.


ⓒ 한국고전번역원 ┃ 이재수 (역) ┃ 19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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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씨성(氏姓)
청제(淸帝)ㆍ왜황(倭皇) 성씨에 대한 변증설 대마도주성(對馬島主姓) 첨부(고전간행회본 권 28)

하늘이 사람을 낸 이후로 임금된 이가 그 거주한 지명에 의해 성을 주고 수봉된 지명에 의해 씨를 명하였다. 이것이 아니면, 그 족(族)을 분별할 수 없으므로 아무리 사이(四夷 중국밖의 이민족으로, 동이(東夷)ㆍ서융(西戎)ㆍ남만(南蠻)ㆍ북적(北狄))ㆍ팔만(八蠻 중국 남쪽 지방에 있었던 오랑캐 나라들로, 천축(天竺)ㆍ해수(咳首)ㆍ초요(僬僥)ㆍ파종(跛踵)ㆍ천흉(穿胸)ㆍ담이(儋耳)ㆍ구지(狗軹)ㆍ방척(旁脊))이라도 다 성이 있다. 성은 곧 근본이 되므로 대대로 서로 전수하여, 아무리 악성 흉씨(惡姓凶氏)라도 자손이 감히 고치거나 바꿀 수 없으니, 성보다 더 중차대한 것이 어디에 또 있겠는가.
세상에서 청제(淸帝)의 성씨에 대해 혹은 퉁(佟), 혹은 조(趙)라 하여 정확히 알 수 없고, 일본(日本) 위황(僞皇)의 성씨에 대해서도 혹은 서(徐), 혹은 희(姬), 혹은 왕(王)이라 하니, 이미 교린(交隣)이니 사대(事大)이니 하면서 그 성씨도 몰라서야 어디 될 말이겠는가. 심지어 성호(星湖) 이익(李瀷)의 호 같은 박식으로도 이를 분변하지 못하여, 청 성조(淸聖祖) 연호는 강희(康熙) 의 본성(本姓)을 퉁(佟)으로 썼다가 뒤에 다시 조(趙)로 고치는가 하면,《옥조신지(玉照新志)》의,
“유릉(裕陵) 송 신종(宋神宗)의 영유릉(永裕陵)을 말한다. 이 처음 대위(大位)에 올랐을 때 서쪽 사람들이 황제의 성(姓)을 알지 못하여 변방 사람들에게 ‘황제의 성이 무엇인가?’고 묻자 ‘조(趙)이다.’ 하고 ‘황후(皇后)의 성이 무엇인가?’고 묻자 상(尙) 신종의 후(后) 상(尙)씨를 말한다. 이다.’ 하고 ‘조정(朝廷) 직신(直臣)의 성이 무엇인가?’고 묻자 ‘포(包) 포증(包拯)을 말한다. 이다.’ 하였으므로, 서쪽 사람들이 제각기 신분에 의해 위의 성(姓)자를 따라, 지금도 이 성들이 많이 높은 서열에 있다.”
는 말을 억지로 인용하여,
“청제(淸帝)의 성을 조(趙)로 삼은 것도 아마 이 같은 예일 것이다.”
하였다. 《성호사설(星湖僿說)》에 보인다.
상고하건대, 청제의 성은 애신각라씨(愛新覺羅氏)이다. 즉 천녀(天女) 불고륜(佛古倫)이 신작(神鵲)이 물어 온 주과(朱果)를 삼키고 나서 아들 천남(天男)을 낳자, 성을 애신각라로, 이름을 포고리옹순(布庫哩雍順)으로 지어 주었다. 이는《성경통지(盛京通志)》와 청 고종(淸高宗)의《건륭어제전운시(乾隆御製全韻時)》주(注)에 자세히 보이는가 하면, 애신은 금(金)을, 각라는 종실(宗室)을 말하는 것으로 여진족(女眞族)의 방언(方言)이다. 즉, 금 나라 종실의 후예라는 뜻이다. 그 성씨가 사책(史策)ㆍ비패(碑牌)에 뚜렷이 게시되었는데, 우리나라 사람들이 고증할 줄을 알지 못하고 그저 퉁이니, 조이니 하니, 어찌 그다지도 노망(鹵莽 거칠고 서투른 것)한지 모르겠다.
이지봉(李芝峯) 이름은 수광(睟光) 의《지봉유설(芝峯類說)》에,
“일본(日本)의 위황(僞皇)은 주 평왕(周平王) 시대부터 옹립되기 시작, 한 성(姓)이 서로 전수하여 지금까지 끊이지 않고 있는데, 위황은 국정(國政)에 간여하지 않는다.”
하였다. 왜황(倭皇)의 성에 대해, 어떤 이는 희성(姬姓)으로 오(吳) 나라 태백(泰伯)ㆍ중옹(仲雍)의 후예라 하고, 어떤 이는 왕성(王姓)이라 하니, 어느 쪽이 옳은지 알 수 없다.
상고하건대, 일본은 신무 위황(神武僞皇)이 맨 처음 인황(人皇 임금이란 뜻)이란 것이 되었으니, 즉 주 유왕(周幽王) 시대이다. 소위 위황은 다 원성(源姓)으로 한 성(姓)이 서로 전수하였고, 관백(關白) 또한 원씨이다. 차아 위황 홍인(弘仁) 5년(814)에 소위 황자(皇子) 신(信)에게 맨 처음 원씨를 주었는바, 청화 위황(淸和僞皇)의 후예를 청화 원씨, 우다 위황(宇多僞皇)의 후예를 우다 원씨, 촌상 위황(村上僞皇)의 후예를 청화 원씨라 하는데 청화 위황의 후예가 가장 쟁쟁하였다.
왜황(倭皇)의 성을 서(徐)라 한 데 대하여는, 일본 기이주(紀伊州)에 고야산(高野山) 일명(一名)은 웅야산(熊野山) 이 있다. 일본 효령 위황(孝靈僞皇) 시대에 진(秦) 나라 사람 서불(徐巿)이 그 아들 복(福)과 더불어 배를 타고 기이주에 닿아 살면서 국인(國人)들의 존경을 받다가, 불을 바로 죽고 복은 나이 1백 80에 죽어 영이(靈異)한 일이 많았으므로 국민들이 고야산에 사당(祠堂)을 세워 권현 수신(權現守神 불보살(佛菩薩)이 중생을 제도하기 위하여 이 세상에 화현(化現)하여 수호신이 된 것을 말함)으로 삼았다 한다. 그리고 어떤 이는, 서복(徐福)은 서불(徐巿)의 개명(改名)이라 하고, 어떤 이는 서불의 자(字)라고 하며, 또는 복의 손자가 위황이 되었다 하지만, 위황의 성(姓)을 서(徐)로 보는 것은 아마 잘못인 듯하다.
상고하건대, 일본 사람들의 모든 책에,
“신무 천황(神武天皇)은 바로 오 태백(吳泰伯)이었다.”
하였는데, 이는 매우 잘못된 것이다. 또《자치통감전편(資治通鑑前編 원(元) 김이상(金履祥)지음》에,
“오(吳)가 멸망한 뒤에 그 자손이 섬[島]으로 들어가 왜국(倭國)을 세우고는 태백의 후예라 자칭했다.”
하였고,《묵담(墨談)》에,
“왜국에는 서복의 사당이 있으며, 왜황(倭皇)은 서복의 후예이다. 그러므로 중국에서는 왜국을 서왜(徐倭)라 부른다.”
하였는데, 모두 잘못된 것이다. 이는 아마 인산(仁山 김이상의 호)이《국어(國語)》오어(吳語)의,
는 몇 마디 말을 보고 그렇게 추측한 것 같으나, 사실 근거가 없는 일이다. 또 서복에 대해 모든 책에 모두,
“서복이 단주(亶州)와 이주(夷州)에 살면서 국호(國號)를 진(秦)이라 하였는데, 후세에 그냥 왜(倭)에 소속시켜버린 것이다.”
하였고, 어떤 이는,
“일본은 희씨(姬氏)의 나라인데, 소위 시조(始祖) 천조대신(天照大神 제1대 신무천황 이전에 있었다는 5대 지신(地神) 중 제2대)과 중흥주(中興主)로서 신공황후(神功皇后 제15대 중애 천황(仲哀天皇)의 후(后)로 69년 동안 나라를 다스렸음)는 다 여주(女主)로서 그 신위(神威)가 다른 조대(朝代)보다 빛났으므로 이전부터 일컬어졌다.”
하였다.
또 일본 사람 임의단(林義端)이 지은《부상명현문선(榑桑名賢文選)》과 일본 홍문학사(弘文學士) 춘재(春齋) 임서(林恕)가 지은《동국통감(東國通鑑)》서(序)에 보면,
“삼가 생각건대, 태백(泰伯)이 지극한 덕[至德]으로 우리나라의 왕적(王迹)을 이륙하고, 기자(箕子)가 삼인(三仁 미자(微子)ㆍ비간(比干)ㆍ기자)의 하나로 저쪽의 동토(東土)를 개척하였으므로, 모두 선성(先聖 공자)께서 칭찬한 바이다.”
하였는데, 이 또한 태백의 후예라 하여 의론이 갖가지이니, 믿을 수 없다.
소위 관백(關白)이한 칭호는 양성 위황(陽城僞皇) 시대부터 시작되었다. 상고하건대, 양성 위황의 아들 정순친왕(貞純親王)이 어질고 무략(武略)이 능하므로 위황이 국정(國政)을 맡겼으니, 때는 당 희종(唐僖宗) 건부(乾符) 3년(876)이요, 신라 헌강왕(憲康王) 2년이었다. 이어 정순(貞純)의 아들 경기(經基)에게 이르러서는 권세를 마음대로 휘둘러 관백이라 자칭하다가 사후에 소선(昭宣)이란 시호를 받았고, 그 후손 원뇌조(源賴朝)에게 이르러서는 안덕 위황(安德僞皇)을 축출, 위황이 헛칭호만 띠고 있은 지 지금까지 5백여 년 동안 원성(源姓)이 서로 전수해 왔다.
원성의 전수에 대하여는 지금 그 줄거리를 대충 변증하였으므로, 대마도주(對馬島主)의 성에 대해서도 변증하려 한다.
상고하건대, 대마도는 본시 신라(新羅)의 판도(版圖) 안에 들어 있었으므로 시조왕(始祖王) 혁거세(赫居世) 시대에 대마도 사람 호공(瓠公)이 신라에 와서 벼슬하였고, 그 뒤에는 이내 비워 두었었는데, 진 안제(晉安帝) 의희(義熙) 원년(405), 즉 신라 실성왕(實聖王) 4년에 왜인(倭人)이 대마도에 병영(兵營)을 설치하면서부터 대마도를 잃어버리게 되었다. 대마도주의 성은 본시 종(宗)이었다가 지금은 평(平)으로 고쳤다. 그러나 대마도에서는 종성(宗姓)으로 칭한다고 한다. 이지봉(李芝峯)의《지봉유설(芝峯類說)》에 보면,
“세상에서는 ‘대마도주 종성장(宗盛長)의 조상은 본시 본국(本國)의 송성(宋姓)으로 대마도에 들어가 도주(島主)가 된 뒤에 종성(宗姓)으로 바꾸어 전수해 왔는데, 평수길(平秀吉)이 이를 멸망시키고 평의지(平義智)를 도주로 삼았다.’고 한다. 그런데 의지(義智)의 본성(本姓)이 종이므로, 아무리 평성으로 고쳤다고 하나 종성은 그대로 있는 셈이니, 종성이 아주 멸종된 것은 아니다.”
하였다.

[주D-001]과인(寡人)이 …… 안주(安住) : 이는 춘추(春秋) 시대에 월왕(越王) 구천(句踐)이 오왕(吳王) 부차(夫差)의 화친(和親) 요청을 거절하면서 한 말. 즉 용구(甬句 : 일명(一名)은 구장(句章))는 지금 절강성(浙江省) 자계현(慈谿縣)의 동쪽 바다 가운데 있기 때문에 원(元) 나라 김이상(金履祥)이 이를 일본(日本)의 지역으로 잘못 알고, 일본의 위황(僞皇)을 오태백(吳泰伯)의 후예로 간주한 것이다.

ⓒ 한국고전번역원 ┃ 이재수 (역) ┃ 19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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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씨성(氏姓)
청제(淸帝) 세계(世系)의 원류(源流)에 대한 변증설(고전간행회본 권 44)

제왕(帝王)의 세계(世系)에 대하여는 예로부터 그 설(說)을 자못 신비화하여 왔다. 이를테면 간적(簡狄)이 제비알을 삼킨 뒤에 설(契 은(殷)의 시조)을 낳고, 강원(姜嫄)이 큰 발자국을 밟은 뒤에 후직(后稷 주(周)의 시조)을 낳았다는 설들이 사책(史冊)에 보인다. 하지만 청제의 세계처럼 극도로 신비화하지는 않았다. 청 고종(淸高宗)의《건륭어제전운시(乾隆御製全韻詩)》에 보면,
“하늘이 황청(皇淸)을 내어 저 동쪽 지방에서 발상(發祥)하게 하시니, 산(山)은 장백(長白), 강(江)은 혼동(混同)으로, 높이 치솟고 가로 둘러, 복(福)과 영(靈)이 한 데 모였으며, 산꼭대기에 위치한 못은 그 이름이 도문(圖們)으로 …… ”
하였고, 그 주(注)에,
“장백산은 높이 2백여 리나 되고 가로 1천여 리나 뻗쳐, 웅장하고 험준한 곳에 온 영기(靈氣)가 한 데 모였으며, 산꼭대기에 위치한 못 도문은 둘레 80리로 근원이 깊고 흐름이 넓어, 압록(鴨綠)ㆍ혼동(混同)ㆍ소하(蘇下) 세 강(江)의 근원이 되었다.”
하였다.
장백산 동쪽에는 포고리(布庫哩)란 산이 있고 그 아래에는 포륵호리(布勒瑚里)란 못이 있다. 전설에 의하면,
“세 명의 천녀(天女) 장녀는 은고륜(恩古倫), 차녀는 정고륜(正古倫), 계녀(季女)는 불고륜(佛古倫). 가 이 못에 내려와서 목욕하곤 하였는데, 하루는 신작(神鵲)이 주과(朱果)를 물어다가 계녀(季女)의 옷속에 넣어 두었다. 이에 계녀가 그 주과를 입에 넣자마자, 주과가 갑자기 뱃속으로 흘러들어가 버렸는데, 드디어 임신하여 한 사내아이를 낳았다. 그 아이는 나면서부터 말을 잘하였고, 체모(體貌)도 기이하였으며, 아이가 장성한 뒤에 그 어미가 주과를 삼켰던 사실을 일러 주고는, 아이의 성을 애신각라(愛新覺羅), 이름을 포고리옹순(布庫哩雍順)이라 지어주고 한 척의 조각배에 태운 다음, 자신은 공중으로 솟구쳐 날아갔다. 포고리옹순, 즉 천남(天男)은 그 조각배를 타고 하류(下流)를 따라 내려가다가 장백산 동남쪽 악모휘(鄂謨輝)란 곳에 이르러 상륙하여 버드나무 가지와 쑥대를 꺾어서 좌구(坐具)를 만들어 놓고 그 위에 단정히 앉아 있었다. 마침 그곳에는 세 성[三姓]의 부족이 서로 추장(酋長)의 자리를 쟁취하기 위해 날마다 살육전을 벌이고 있었는데, 그 중 한 사람이 물가로 물을 길러 나왔다가 천남을 발견, 기이하게 여기고 돌아가서 ‘너희는 싸우지 말라. 내가 물을 길러 나갔다가 한 남자를 발견하였는데, 그 체모가 보통 사람이 아니었다. 하늘이 절대로 그 사람을 괜히 내지 않았을 것이다.’했다. 군중들이 즉시 달려가 그를 보고 모두 기이하게 여기며 그 내력을 힐문하자, 그가 ‘나는 천녀(天女)의 아들 천남이다. 하늘이 나를 내어서 너희의 싸움을 진정시키도록 했다.’ 하고는, 자신의 성명을 일러주었다. 이에 군중들이 ‘이는 하늘이 내신 성인이다. 도보로 걷게할 수 없다.’ 하고는, 서로 팔뚝을 맞잡아 들것 모양으로 만들어 그를 태워서 그를 맨 처음 발견한 사람의 집으로 맞아갔다. 이어 세 부족이 그를 추장으로 추대할 것을 결의, 그 사람의 딸 백리(白里)를 그의 아내로 삼게 하고 패륵(貝勒 만주어(滿洲語)로 부족의 장)으로 받들므로 그곳의 싸움이 비로소 진정되었고, 드디어 장백산 동쪽 악다리성(卾多哩城)에 정착, 호(號)를 만주(滿洲)로 정했다.”
하였다. 이것이 청제의 건국(建國) 시초이며, 이때부터 까치를 잡지 않았다고 한다. 국서(國書 청국(淸國)에 관해 기록된 글)를 들어 상고해 보면,
“만주(滿洲)는 본시 만주(滿珠)이다. 우리 국가가 동쪽 지방에서 기업을 이루기 시작하였으므로 서장(西藏)에서 매년 단서(丹書)를 올릴 적마다 ‘만주사리 대황제(曼珠師利大皇帝)’라 호칭한다.”
하였다. 그러나 지금 한자(漢子)로는 만주(滿洲)로 쓰이고 있는데 이는, 주(洲)자의 뜻이 지명(地名)에 가깝기 때문에 가차(假借)해서 사용하던 것이, 드디어 너도나도 그렇게 써버리게 되었지만, 실은 부족명(部族名)이지, 지명(地名)은 아니라고 한다. (장백산 동쪽부터 여기까지는《만주원류고(滿洲源流考)》 부족(部族) 조에 있는 말을 인용한 것)
전당(錢塘) 사람으로 어사(御史)인 추루(秋) 반정균(潘庭筠)이 나의 왕고(王考) 형암공(炯庵公)에게 적어 보인 글에,
“우리 국조(國朝)가 맨 처음 시작될 적에는 주과(朱果)의 신이(神異)가 있었다.”
하였고, 또,
“우리 국조의 본래 칭호는 만주(滿珠), 또는 만신(滿申)이다. 만주는 만신의 전음(轉音 글자의 본음(本音)이 달리 발음되는 것)이고, 만신은 사실 숙신(肅愼 중국 고대 북방에 살던 퉁구스족(通古斯族)의 전음이니, 바로 옛날 숙신족이었다.”
하였다.
청제의 성을 애신각라라고 한 데 대하여는 여진(女眞)의 방언(方言)에, 금(金)을 애신, 종실(宗室)을 각라라 하는데, 청제가 자칭 금의 후예라 하여, 애신각라로 성을 삼은 것이다. 또 여진 금국(女眞金國)의 본명(本名)은 주리진외국(朱里眞外國)인데, 주리진에 대하여는, 장자열(張自烈)의《정자통(正字通)》주해(注解)에 보인다. 세속에서, 청제의 성을 퉁(佟)으로 보았다가 다시 조(趙)로 고친 것은 매우 맹랑한 일이다.
내가 청제의 성에 대해 변증을 마친 뒤에 지현(知縣)인 서공 유직(徐公有稷)의《북유록(北遊錄)》을 보았는데, 거기에도 채택할 만한 것이 있다. 즉
“내가 연경(燕京)에 들어갈 때 책문(柵門 만주(滿洲) 봉황(鳳凰城)에 설치했던 변문(邊門))에 머무는 동안 어느 점포(店鋪)에 들렀더니, 늙은 호인(胡人) 하나가 구들장에 앉아 있었다. 그는 바로 세관(稅官)인데, 심양(瀋陽)에 있는 병부 낭중(兵部郞中)으로 세무(稅務)를 감독하고 있는 자이다. 이에 그의 성명을 물었더니 ‘복이가록(福爾加祿)으로, 본성(本性)은 우(虞)이다.’ 하였고, 다시 만주(滿洲) 사람들의 이름 짓는 의의에 대해 물었더니 ‘황제의 성으로 말하면 본시 각라(覺羅)이다. 각라란 금(金)의 변치 않는 의의를 취한 것인데, 모르는 이들은 아울러, 애신각라씨라고 한다. 애신은 은(銀)을 말하는데, 이미 금의 변치 않는 의의를 취하였으니, 구태여 은(銀)까지 취할 나위가 없다. 신민(臣民)들의 이름에도 제 각기 그 의의를 취해서 짓는다.’ 하였고, 황친(皇親)들이 조성(趙姓)이라 자칭하는 것은 무슨 까닭이냐고 물었더니 ‘이는 다만《백가성(百家姓)》첫머리의 조(趙)자가 송조(宋朝) 황제 [萬世爺]의 성(姓)이므로, 어떤 이가 금황제(金皇帝)의 성도 조(趙)자로 알고 있는데, 사실은 그것이 아니다.’고 했다.”
하였다.


ⓒ 한국고전번역원 ┃ 이재수 (역) ┃ 1982
 
 분류 오주연문장전산고 인사편 1 - 인사류 2
 시호(諡號)
시법(諡法)의 시말(始末)에 대한 변증설(고전간행회본 권 55)

《백호통(白虎通)》에,
“죽은 이에게 시호(諡號)가 있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그 존비(尊卑)를 구별하고 덕(德)을 드러내기 위함이다. 시(諡)자는 인(引) 자의 뜻으로, 생시(生時)의 행적을 열거하는 것이니, 사람으로 하여금 성덕(成德)에 정진하여 예절을 힘쓰도록 하자는 것이다. 천자(天子)가 죽으면 대신이 남쪽 교외에 나아가 천명(天命)을 일컬어 시호를 올리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이는 신하된 도리에 있어 누구나 다 그 임금을 찬양하여 악(惡)을 가리고 선(善)을 드러내려는 의의이다. 그러므로 남쪽 교외에 나아가는 것은 하늘을 속이지 않음을 밝히기 위함이다. 시호에 있어 혹은 한 글자로, 혹은 두 글자로 된 것은 무슨 까닭인가. 문(文)을 위주한 이는 한 글자로, 질(質)을 위주한 이는 두 글자로 시를 정한다. 그러므로 탕(湯) 임금이 죽은 뒤에 그를 ‘성탕(成湯)’이라 칭한 것은 두 글자로써 정함이다.”
하였다. 이 설(說)과 같다면, 시호 제도는 은(殷) 나라 이전부터 있었던 것이다.
《예기(禮記)》교특생(郊特牲)에,
“누구에게나 사후(死後)에 시호를 주는 것은 금세(今世)의 변칙이다. 옛날에는 생전에 작(爵 대부(大夫) 이상을 말함)이 없으면 사후에 시호도 없었다.”
하였고, 그 주(注)에,
“옛날이란 은(殷) 나라 이전을 말한다.”
하였다. 그런데 안사고(顔師古)는 우(禹)나 탕(湯)을 다 자(字)로 단언하였으니, 이 주는 잘못된 것이다.
《예기》단궁(檀弓)에,
“사람이 난 지 8개월에 이름을, 나이 약관(弱冠 20세)에 자(字)를 사용하다가 50세가 되면 백중(伯仲 즉 첫째, 둘째)으로써 구별하고 사후에는 시호를 사용하는 것은 주대(周代)의 제도이다.”
하였고 그 주에,
“ …… 이는 다 주대의 제도이다 …… 은대(殷代) 이상에는 생시에 사용했던 별호(別號)를 사후에까지 불렀고 시호가 따로 없었으니, 요(堯)ㆍ순(舜)ㆍ우(禹)ㆍ탕(湯)과 같은 유이다. 그런데 주대에 와서는 사후에 시호를 따로 정했다.”
하였다. 이 설(說)과 같다면, 교특생의 주는 저절로 잘못된 것이다.
《예기》표기(表記)에 공자가,
“선왕(先王)이 시호로 그 명예를 높이되, 그 중에 큰 혜(惠)만을 절취(節取)해서 시를 정하는 것은, 그 명예가 사실보다 지나친 것을 부끄러이 여겨서이다.”
하였고, 그 주에,
“혜는 선(善) 자의 뜻이다. 즉 선행(善行)이 아무리 많아서 열거하기 어렵더라도 그 큰 선행만을 절취하여 그 선행을 온전히 한다.”
하였으며,《시법(諡法)》에 보면,
“생시의 행(行)으로써 사후의 시호를 정하는 것이 마치 성(姓)을 받는 자가 길덕(吉德)이 있으면 길성(吉姓)을, 흉덕(凶德)이 있으면 흉성(凶姓)을 받게 되는 것과 같이 엄정(嚴正)하여 일호의 사(私)도 있을 수 없다.”
하였다.
《주례(周禮)》춘관 하(春官下)에,
“태사(大師)가 대상(大喪 국상(國喪))을 만나면 고몽(瞽矇 악가(樂歌)를 맡은 관명(官名))을 거느려 왕(王)의 행적을 흠(廞)한 뒤에 널[匶] 앞에서 시호를 짓는다.”
하였고, 그 주에,
“흠(廞)은 흥(興)자의 뜻으로 죽은 왕(王)의 행적을 선언하는 것이다. 즉, 왕의 공로를 읊은 시(詩)를 노래하고 생시(生時)의 행적을 열거하여 시호를 짓는 것을 말한다.”
하였으며,《주례》춘관 하에,
“소상(小喪)을 만나면 태사(太史)가 시호를 전한다.”
하였고 그 주에,
“소상(小喪)은 경대부(卿大夫)의 상(喪)을 말한다. 경대부의 시호는 임금이 손수 제정, 태사(太史)를 보내어 전하게 하는데, 그날이 되면 소사(小史)가 따라가서 읽어준다.”
하였으니, 시호를 주는 제도는 사실 주대(周代)에서 시작된 것이다.
《노사(路史)》에,
“진수(秦秀)가 말하기를 ‘옛날에 주공(周公 희단(姬旦))이 이계(二季 하(夏)ㆍ은(殷) 두 나라를 말함)가 쇠퇴하고 대도(大道)가 행해지지 않았음을 애석하게 여긴 나머지 시호법을 제정하여 그 사후(死後)를 기록하게 한 것이지, 예부터 있었던 것이 아니다.’ 하였고, 곡량적(穀梁赤)이 말하기를 ‘주 무왕(周武王)이 죽은 뒤에 주공(周公)이 시호법을 제정한바, 대행(大行)이 있는 이는 대명(大名 명은 시호를 말함)을, 소행(小行)이 있는 이는 소명(小名)을 받게 되었다.’ 하였다. 그런데 세상에 유행되고 있는 시호법에는 으레 요ㆍ순ㆍ우ㆍ탕ㆍ걸(桀)ㆍ주(紂)까지 시호로 혼입(混入)시켜 놓았으니 이는 아마 백호관(白虎觀) 제유(諸儒)의 손에서 시작된 것으로, 가장 허황되다.”
하였다. 이는《노사(路史)》서소순시법후(書蘇洵諡法後)와《정자통(正字通)》에 보이니, 일차 상고하여 전칙(典則)을 삼을 만하다.
한(漢) 나라 사마천(司馬遷)의《사기(史記)》에,
“주공 단(周公旦)과 태공 망(太公望)이 무왕(武王)을 도와 왕업(王業)을 이룩하고 목야(牧野 지명(地名))에서 싸워 대공(大功)을 세웠으며, 무왕을 장사(葬事)지낼 때에 시호법을 제정, 드디어 시법해(諡法解)를 서술하였는데, 시(諡)는 행(行)의 자취[迹], 호(號)는 공(功)의 표시[表], 거복(車服 옛날 임금이 공신(功臣)에게 내리던 물건)은 위(位)의 문채이다. 그러므로 대행(大行)에는 대명(大名)이, 세행(細行)에는 세명(細名)이 받아지게 되는데, 행(行)은 자신에게서 나오고 명(名 시호를 말함)은 남에게서 이루어진다.”
하고는, 시호법을 열거해 놓았다.
또 정초(鄭樵)의《통지략(通志略)》시략서론(諡略序論)에,
“ …… 주공(周公)의 시호법과《춘추(春秋)》의 시호법이 있고,《광시(廣諡)》ㆍ《금문상서(今文尙書)》ㆍ《대대례기(大戴禮記)》ㆍ《세본(世本)》ㆍ《독단(獨斷)》의 것이 있고, 유희(劉熙)ㆍ내오(來奧)ㆍ심약(沈約)ㆍ하침(賀琛)ㆍ왕언위(王彦威)ㆍ소면(蘇冕)ㆍ호몽(扈蒙)ㆍ소순(蘇洵) 등의 글이 있는데, 실은 모두 한(漢)ㆍ위(魏) 이래 유생(儒生)들이 고인(古人)의 시호를 채취, 자기의 말로 풀이하여 하나의 전칙(典則)으로 만들어 놓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소씨(蘇氏)의 말에 ‘주공의 법에 도리어 하침(賀琛)의 신법(新法)을 채취 기입하였으니, 세상에 유행되는 시호법으로서 그 명칭이 옛것일수록 더욱 고법(古法)이 아님을 알 수 있다.’ 하였는데, 지금 주공의 법을 상고해보면 과연 후인의 말을 인용한 것이 너무 많아서 별로 취할 바가 없습니다.
오직 심약(沈約)의 글만이 고금의 것이 널리 채택되고 조사(措辭)에 차례가 있으나 역시 분명한 바가 없었다가 소씨(蘇氏)가 조명(詔命)을 받들어 육가(六家)의 시호법을 편정(編定), 즉 주공ㆍ《춘추》ㆍ《광시》의 것과 심약ㆍ하침ㆍ호몽의 글을 가져 단호히 거취(去取)한 바가 있습니다 …… 황(皇)ㆍ제(帝)ㆍ왕(王)ㆍ공(公)ㆍ후(侯)ㆍ군(君)ㆍ사(師)ㆍ장(長)ㆍ서(胥)는 사실 존비(尊卑)와 상하(上下)의 칭호인데, 생시에 작위(爵位)가 있으면 사후에 시호를 받게 된다 하여, 황ㆍ제ㆍ왕ㆍ공ㆍ등의 글자를 시호로 삼는다는 것은 감히 인정할 수 없습니다. 만약 제ㆍ왕 등의 글자를 시호로 삼을 수 있다면 …… 부(父)ㆍ형(兄) 등의 글자로도 시호를 삼을 수 있다는 셈이 됩니다. 사리에 맞지 않는 말이 이보다 더한 것이 없었는데, 몇백 년이 지난 뒤에야 소씨가 이를 배격한 것입니다.
또한 요(堯) 자는 흙이 쌓인 모양을, 순(舜) 자는 꽃이 짙은 모양을, 우(禹) 자는 짐승의 모양을, 탕(湯) 자는 물의 모양을, 걸(桀) 자는 높다란 나무의 모양을, 주(紂) 자는 연결된 실[絲]의 모양을 따서 명명(命名)한 것입니다. 이는 자신의 마음대로 고칠 바가 아니라 반드시 부형이 명명한 바인데, 생시에 작위가 있으면 사후에 시호를 받게 된다 하여 요ㆍ순 등의 글자를 시호로 삼는다는 것도 감히 인정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소씨가 미처 여기에 언급하지 못한 바를 신(臣)이 감히 덧붙일 수 없으므로, 삼가 사용할 만한 시호법 2백 10자를 열거하여 상ㆍ중ㆍ하 3시(諡)로 분류해 놓았습니다 …….”
하였으니, 이것이 시호법 연혁(沿革)의 대충이다.
대저 시호법은 태상박사(太常博士)의 소관으로서, 나같은 초야(草野)의 한사(寒士)가 거론할 바 아니므로 이만 생략하기로 하고, 다만 고금(古今)의 색달랐던 것만을 골라 기록하려 한다. 송(宋) 나라 유창(劉敞)이 시호법 50자를 정리해 놓고는, 이다음 덕(德) 있는 군자(君子)의 질정을 기다린다 하였다. 아무튼 시호란 사망한 이를 위해서 마련된 것인데, 춘추 시대에 생시에 시호를 준 예가 있었으니, 한 가지 이상한 일이다. 이백사(李白沙 백사는 이 항복(李恒福)의 호)의《노사영언(魯史零言)》에,
“노 소공(魯昭公) 20년 윤8월 무진에 선강(宣姜 위 영공(衛靈公)의 적모(嫡母))을 죽였다. 공자 조(公子朝)와 더불어 간통 모반(謀叛)한 때문이다. 이어 위후(衛侯)가 북궁희(北宮喜)에게 정자(貞子)라는 시호를, 제표(齊豹) : 위(衛)의 사구(司寇))를 멸망시킨 때문이다. 석주서(析朱鉏)에게 성자(成子)라는 시호를 내리고 밤중에 위후(衛侯)를 호종한 때문이다. 제표(齊豹)의 묘전(墓田)을 주었다.”
하였으니, 이들은 다 죽기 이전에 시호와 묘전을 받은 것이다.
또한 시호법에는《춘추》의 포폄(褒貶)하는 권한이 매어 있으므로 의당 엄정(嚴正)히 시행되어야 한다. 후주(後周) 우문태(宇文泰 문제(文帝)) 시대에도 시호법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주이준(朱彝尊)의《폭서정집(曝書亭集)》에 보이는 후주두로은비발(後周豆盧恩碑跋)에,
“우문씨가 건국(建國)한 뒤에 소작(蘇綽)ㆍ노변(盧辯)의 무리를 등용, 의례(儀禮)를 논의하고 시호법을 경솔히 사용하지 아니하여, 아무리 종자 번왕(宗子藩王)이라도 그 악덕(惡德)을 숨기지 않았다. 즉 진공(晉公) 호(護)에게 탕(蕩), 제왕(齊王) 헌(憲)에게 양(煬), 위왕(衛王) 직(直)ㆍ필왕(畢王) 현(賢)에게 자(刺), 조왕(趙王) 초(招)에게 참(僭), 진왕(陳王) 순(純)에게 혹(惑), 월왕(越王) 성(盛)에게 야(野), 대왕(代王) 달(達)에게 혁(奰), 기왕(紀王) 강(康)에게 여(厲)라는 시호가 주어졌는데, 두로은(豆盧恩) 형제(兄弟)에게는 시호를 소(昭)로, 또는 경(敬)으로 고쳐 주었으니, 참으로 두터운 은총이었다.”
하였다. 본조(本朝) 초기에도 시호법이 엄격하였다. 그러므로 태조 때 봉상시(奉常寺)에서 계림군(鷄林君) 정희계(鄭熙啓)의 시호에 대해 안양(安煬)ㆍ안황(安荒)ㆍ안혹(安惑) 세 가지로 의진(擬進)하므로 임금이 해당 관원을 불러들여 시호를 결정하려 하였는데, 봉상시 박사(博士) 최견(崔蠲)이,
“원훈(元勳) 정희계의 시호를 내리는 데 그의 과오만 논하고 공로를 논하지 않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고 따지고, 해당 관원을 의금부(義禁府)에 하옥 국문하게 하므로 시호를 다시 양경(良景)으로 고치게 되었다. 서거정(徐居正)의《필원잡기(筆苑雜記)》에,
“중추(中樞) 이숭지(李崇之)의 시호는 태상시(太常寺)에서 맥려(麥厲)로 정하였는데, 시호법에 맥(麥)자가 없으니, 이는 반드시 과(夸)자의 착오이다. 이같은 유가 하도 많아서 이루 다 기록할 수 없다.”
하였다.
성종(成宗) 15년(1484)에 봉상시(奉常寺)에서 이계손(李繼孫)의 시호에 대해 장경(長敬)ㆍ정헌(玎憲) 두 가지로 의진(擬進)하였는데, 시호법에 “그 의의(意義)를 진술하지 못하는 것을 정(玎)이라 한다.” 하였다. 임금이 드디어 경헌(敬憲)으로 결정하였다. 김수동(金壽童)이 말하기를,
“하성부원군(河城府院君) 정현조(鄭顯祖)는 편정공(褊玎公), 여산군(礪山君) 송익손(宋益孫)은 양묵공(襄墨公), 고려 때 시중(侍中) 이인임(李仁任)은 황무공(荒繆公)이다.”
하였고, 옛날에도 정(玎) 자 시호가 있었다. 즉《설문(說文)》에,
“제 태공(齊太公)의 아들 급(伋)의 시호는 정공(玎公)이다.”
하였다.
본조(本朝) 선현(先賢) 중에 정암(靜庵) 조광조(趙光祖)ㆍ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ㆍ박공 상충(朴公尙衷)ㆍ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ㆍ팔송(八松) 윤황(尹煌)의 시호는 다 문정(文正)이고, 송당(松堂) 박영(朴英)은 무제(武宰) 출신으로 문목(文穆)이란 시호를 받았는데, 무과(武科) 출신에게 문(文) 자 시호가 주어진 것은 다 폄시(貶諡)이다. 후암(厚菴) 이만운(李萬運)의《시호고(諡號考)》에 보면,
“조손(祖孫)이 다같이 문정(文正)이란 시호를 받은 이는 고려 때 평장사(平章事) 허백(許伯)과 전리판서(典理判書) 허금(許錦)이고, 부자(父子)가 다같이 문안(文安) 시호를 받은 이는 고려 때 좌복야(左僕射) 정목(鄭穆)과 지추밀사(知樞密事) 정항(鄭沆)이고, 문경(文敬) 시호를 받은 이는 고려 때 정당문학(政堂文學) 안석(安碩)과 정당문학 안보(安輔)이고, 문영(文英) 시호를 받은 이는 고려 때 제양백(濟陽伯) 고경(高慶)과 간의동지(諫議同知) 고용현(高用賢)이고, 문도(文度) 시호를 받은 이는 고려 때 여흥군(驪興君) 민변(閔忭)과 본조(本朝) 좌의정(左議政) 민제(閔霽)이고, 형제(兄弟)가 다같이 안도(安悼) 시호를 받은 이는 본조 수춘군(壽春君) 현(玹)과 형해군(寧海君) 당(瑭)이고, 이안(夷安) 시호를 받은 이는 본조 서원군(瑞原君) 친(亲)과 낙안군(樂安君) 영(寧)이고, 정희(靖僖) 시호를 받은 이는 본조 해안군(海安君) 희(㟓)와 덕양군(德陽君) 기(岐)이고, 호이(胡夷) 시호를 받은 이는 판윤(判尹) 신균(辛均) 형제이다.”
하였는데, 나머지는 다 기록할 수 없다.
고염무(顧炎武)의《일지록(日知錄)》에,
“고인(古人)의 시호에는 2~3자를 사용하였고, 후인들도 이를 서로 인습해 왔다. 그런데 1자만을 들어 일컬어진 이는 위 예성무공(衛叡聖武公)이 무공(武公)으로, 정혜문자(貞惠文子)가 공숙문자(公叔文子)로, 진 조헌문자(晉趙獻文子)가 문자(文子)로, 위 혜성왕(魏惠成王)이 혜왕(惠王)으로 된 유이다.”
는 등 13명이나 열거되어 있는데, 너무 번거로워 다 기록할 수 없다. 두우(杜佑)《통전(通典)》의 황후시급부인시의(皇后諡及夫人諡議) 조와 태자무시의(太子無諡議) 조와 제후경대부시의(諸侯卿大夫諡議) 조도 상고할 만하다. 진수(秦秀)의《문선(文選)》에 보이는 진태재하증시의(晉太宰何曾諡議)에,
“ …… 하증은 비록 세족(世族)으로 태어났으나 젊어서 고량(高亮)한 풍절(風節)과 엄격한 조행(操行)으로 왕조(王朝)에 올랐습니다 …… 할 터인데도 교사(驕奢)가 과도하고, 명성이 구주(九州)에 알려졌는데도 …… 보상(輔相)의 도리를 상실하였을 뿐 아니라 …… 인륜(人倫)의 가르침을 무너뜨렸습니다 …… 재상 대신(宰相大臣)은 만인(萬人)의 의표(儀表)인데, 만약 생전에 욕심을 다하고 사후에 폄책(貶責)이 없다면, 이는 제실(帝室)에 정법(正法)이 없어지게 됩니다 …… 삼가 시호법을 상고해보면 ‘명실(名實)이 서로 맞지 않는 것을 무(繆), 혼란한 기회를 이용하여 멋대로 행동하는 것을 추(醜)이다.’ 하였으니, 당연히 무추(繆醜)로 시호를 정해야 합니다.”
하였고, 또 진가충시의(晉賈充諡議)에,
“가충(賈充)은 아들 여민(黎民)이 요절(夭折)한 뒤에 종족(宗族)을 제쳐 놓고 외손(外孫) 한 밀(韓謐)을 여민의 후사(後嗣)로 삼았으니, 이는 예법을 위배하고 사정(私情)에만 치우친 처사입니다. 옛날 증(鄫 나라 이름)에서 외손 거 공자(莒公子 거(莒) 나라의 공자)를 길러 후사로 삼았는데,《춘추》에서 ‘거(莒) 사람이 증을 멸망시켰다.’고 썼습니다 …… 시호법에 의하면 ‘법도를 혼란시키는 것을 황(荒)이다.’ 하였으니, 황으로 시호를 정하기 바랍니다.”
하였다.
사시(私諡)에 대하여는 명(明) 나라 송경렴(宋景濂 경렴은 송염(宋濂)의 자)의 연영오선생사시의(淵穎吳先生私諡議)에,
“ …… 《춘추좌전(春秋左傳)》에 ‘만물(萬物)이 생겨난 뒤에야 상(象 귀(龜)는 사람에게 상(象)으로써 보임)이 있고 상이 있은 뒤에야 성장(成長)이 있고 성장이 있은 뒤에야 수(數 서(筮)는 사람에게 수로써 알림)가 있다.’ 하였는데, 수가 있은 뒤에야 문(文)이 있게 마련이다. 문이란 다른 것이 아니다. 다만 도(道)일 뿐이다. 그러므로 성인이 문을 기재해 놓은 것이 바로 이 경(經)이니, 성인을 배우는 이는 반드시 경을 본받아 문을 다루어야 한다. 그런데 사관(史官)이 없어진 뒤로부터 훈고학(訓詁學)을 유림(儒林)에 끼워 넣고 사장학(詞章學)을 문원(文苑)에 써 넣어 고의(古義)와의 거리가 더욱 멀어졌다. 그러나 장향 서원(長薌書院) 산장(山長 서원의 장(長)) 오공 선생(吳公先生 원(元)의 오내(吳萊))은 고명한 풍치(風致)와 원만한 재성(才性)으로,《시경(詩經)》ㆍ《서경(書經)》에는 맥락(脈絡)을 분류하여 요긴한 것을 표지하고,《춘추경(春秋經)》에는 삼전(三傳 좌씨전(左氏傳)ㆍ공양전(公羊傳)ㆍ곡량전(穀梁傳))을 요약하여 심오(深奧)한 것을 발휘하고, 제자서(諸子書)에는 진위(眞僞)를 색출하여 정명(精明)을 다하고, 삼사(三史《사기(史記)》ㆍ《한서(漢書)》ㆍ《후한서(後漢書)》)에는 의례(義例)를 분석하여 논평이 엄격하다. 그 조회(藻繪 채색(彩色)과 회화(繪畫))가 미치는 곳에 모두가 다 화려해졌으므로, 문생 학자(門生學子)가 저마다 ‘경의(經義)에 깊었으니 연(淵)이 아니고 무엇이며, 문사(文辭)에 능했으니 영(穎)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하였다. 그래서 선생의 사시(私諡)를 연영으로 정하는 바이다.”
하였다.
우리나라에는 신라 법흥왕(法興王 휘(諱)는 원종(原宗))이 양 무제(梁武帝) 천감(天監) 13년(514)에 즉위, 원년에 비로소 시호법을 제정하였고 백제 성왕(聖王 휘는 농(襛))이 양 무제 보통(普通) 4년(523)에 즉위, 곧 신라 법흥왕 10년. 원년에 비로소 시호법을 제정하였다. 행주 기씨(幸州奇氏)와 청주 한씨(淸州韓氏)의 보첩(譜牒)을 보면, 기자(箕子)를 태조 문성왕(太祖文聖王)이라 칭하여 41대 애왕(哀王) 준(準)에 이르기까지 모두 시호가 기재되어 있으니, 그 시대에 이미 시호를 올리는 제도가 있어서인지, 아니면 시호법이 주공(周公)에 의해 비로소 제정되었으므로 기자(箕子)의 후대 사왕(嗣王)이 주(周) 나라의 시호 올리는 제도를 본받았기 때문에 대대로 시호가 기재되어 있음인지, 아니면 혹 후인(後人)들의 장난인지도 모를 일이다. 명 나라 손능부(孫能傅)가《시법찬(諡法纂)》을 지었다.

[주D-001]백호관(白虎觀) : 한 장제(漢章帝) 때 박사(博士)ㆍ의랑(議郞)ㆍ낭관(郞官)과 모든 유생(儒生)이 모여서 오경(五經)의 동이점(同異點)을 강론하여 백호의주(白虎議奏 : 《백호통의(白虎通義)》)를 지었던 곳.
[주D-002]문경(文敬) …… 안석(安碩)과 : 이 부분은 오류로 보여진다. 《근재집(謹齋集)》 卷4 〈묘지명(墓誌銘)〉에 “아버지 안석은 급제하였으나 은거하여 벼슬하지 않았다.[考碩 及第 遂隱不仕]”라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