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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령부원군 신숙주 문충공 묘비명 병서 (高靈府院君申叔舟文忠公墓碑銘 幷書

아베베1 2013. 2. 11. 16:41

 

  
속동문선 제20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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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명(碑銘)
고령부원군 신숙주 문충공 묘비명 병서 (高靈府院君申叔舟文忠公墓碑銘 幷書

이승소(李承召)

그윽이 보건대 세상이 쇠해서 하늘이 장차 일으키려면 반드시 성스러운 임금과 어진 신하를 내서 함께 한 세상을 바로잡아 거룩한 정치의 기반에 오르게 한다. 그러므로 은(殷) 나라가 쇠해서는 때마침 부열(傅說) 같은 이가 나와서 고종(高宗)을 도와 중흥(中興)의 업을 이룩하였고, 주(周) 나라가 쇠해서는 방숙(方叔) 같은 이가 있어 선왕(宣王)을 도와 옛 땅을 회복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상고해 보면 부열은 보상(輔相)의 업은 있었으나 무공(武功)은 드날리지 못했고 방숙은 정벌의 공은 있었지만 상업(相業)은 나타내지 못했으니, 어찌 우리 문충공처럼 천부(天賦)의 오롯한 재주로 운수를 응해 나서, 성주(聖主)를 보좌하여 문모(文謨)와 무략(武略)으로 나가서는 장수가 되고 들어와서는 정승이 되어 넘어지는 나라를 붙잡아 태산처럼 편안하게 한 것만 같겠는가. 우리 동방에 나라가 생긴 이래로 인신(人臣)으로서 공덕이 장한 이는 대개 이 한 분일 것이다. 성화(成化) 11년인 을미년 여름 유월 무오일에 병으로 본댁에서 별세하여 부고를 아뢰니 주상은 크게 슬퍼하며 좌우의 손을 상실한 것같이 여겼다. 그래서 철조(撤朝)감선(減膳)하고 특별히 승지(承旨)를 보내어 주문하고 부의(賻儀)를 후히 보냈다. 이리되니 조정에서는 그 우의(羽儀 보좌와 같은 말이다.)를 잃어버리고 선비들은 종장(宗匠)을 잃어버렸으며 여러 관료(官僚)들은 자문하고 결단할 곳이 없어지고 서민들은 우러르고 힘입을 곳이 없어졌으니, 비록 아동(兒童)과 주졸(走卒)까지라도 또한 한탄하며 원통하게 여겨 눈물을 흘리지 않는 자가 없었으며, 그 문생(門生)과 고리(故吏)와 친척과 요우(僚友)들이 빈소(殯所)에 전곡(奠哭)하여 날마다 끊어지지 아니하니, 아, 공이 사람에게 이처럼 신망을 얻은 것이 어찌 언변이나 용모(容貌)로서 될 일이겠는가. 9월 26일에 양주(揚州)송산리(松山里) 동향의 벌에 장사하였는데, 돌아간 날로부터 장사에 이르도록 모든 비용을 관에서 담당하였다. 장사가 끝나매 사자(嗣子) 아무개가 공의 행장으로써 나에게 묘비명을 청하며 하는 말이, “가장 오랫동안 선군(先君)과 더불어 상종한 처지니 명(銘)을 짓지 아니하려는가.” 하므로, 나는 감히 사양을 못하였다.
삼가 생각하건대 공의 휘(諱)는 숙주(叔舟)요 자는 범옹(泛翁)이요, 호는 희현당(希賢堂)이요, 고령신씨(高靈申氏)인데, 그 권세는 본현(本縣)의 이속(吏屬)이다. 휘 성용(成用)이란 분이 있어 비로소 과거에 뽑혀 벼슬이 검교군기감(檢校軍器監)에 이르렀고, 그 후 4대[世]를 지나 휘 덕린(德麟)에 이르러는 전의판서(典儀判書)를 지냈는데 공에게 증조가 된다. 진서(眞書)ㆍ초서(草書)ㆍ예서(隸書)를 잘 썼다. 휘 포시(包翅)를 낳으니 공조참의(工曹參議)요 공에게 조부가 되고, 휘 장(檣)을 낳으니 공조 좌참판이요, 공에게 아버지가 되는데 오래도록 문형(文衡)을 맡아 일세의 유종(儒宗)이 되었다. 판서이하는 모두 공의 공훈으로써 은혜를 미루어 작(爵)을 봉하게 된 것이다. 어머니는 정씨(鄭氏)니 지성주사(知成州事) 휘 유(有)의 따님이다. 영락(永樂) 정유년 6월 정유일에 공을 낳았다.
공은 어려서부터 영민하고 준수하니 보는 자는 그가 큰 그릇이 될 것을 짐작하였으며, 장성해서는 학문을 좋아하여 천하의 서적을 보지 않은 것이 없었다. 이와 같이 축적이 풍부하기 때문에 시문을 만들게 되면 바닷물이 넘실거리듯이 크게 분방(奔放)하여 저속한 문자를 짓지 아니하니, 당시 사람들이 서로 전(傳)하여 정식(程式)으로 삼았다. 무오년에 비로소 시(詩)ㆍ부(賦)로써 진사를 뽑는데, 공이 연달아 초시(初試)ㆍ복시(覆試)에 장원하고 또 생원의 시험에 합격하였다. 이듬해 가을에 세종께서 친히 책제(策題)를 냈는데, 공은 3등으로 봅혀 전농직장(典農直長)으로 임명되었다. 이조(吏曹)에서 공을 제집사(祭執事)로 차정(差定)했는데 서리가 첩지(牒紙)를 전달하지 아니하여 사무를 궐하게 되자 헌사(憲司)에서 탄핵하니, 공은 서리가 늙었다는 말을 듣고 죄를 받아 제명(除名)이 될까 염려하여 자신이 책임을 지고 말았다. 이로 말미암아 너그럽고 후한 어른이라고 칭하였다. 집현전(集賢殿)에 뽑혀 들어가 부수찬(副修撰)이 되었는데, 매일 아침 장관을 뵙고 나면 장서각(藏書閣)으로 물러가서 평소에 보지 못한 책들을 꺼내서 쉴새없이 읽으며, 간혹 동료를 대신하여 숙직하게 되면 밤새도록 책만 보았다. 하루 밤에 삼경(三更)이 지나서 세종은 어린 내시를 보내어 엿보게 하니, 공이 바야흐로 단정히 앉아서 글을 읽고 있으므로 사경에 또 보내어 엿보게 하니 역시 그러하였다. 그래서 곧 어의(御衣)를 내려주어 권장하였다.
임술년에 훈련원(訓練院)주부(注簿)에 옮겼다. 일본국(日本國)이 사장(詞章)을 즐기므로써 매번 빙문(聘問)을 통하게 되면 반드시 문사(文士)를 가려서 서장관(書狀官)을 삼았는데, 이 때에 마침 사자를 보내고자 하여 서장관을 선택하자 물망에 오른 자가 모두 풍파가 험난함을 꺼리어 가지 않으려 하므로 마침내 공을 내정하기로 하였다. 공은 마침 오랫동안 병을 앓다가 갓 일어나니 형제나 친구들이 모두 말하기를, “저렇게 여위고 피곤한 몸으로 어찌 원행을 할 수 있겠는가.” 하고, 극력 저지하니, 공은 말하기를, “신하가 되면 평탄하건 험하건 한결같아야 하거늘 어찌 제 몸이 편할 것만 생각해서야 되겠는가.” 하고, 혼연히 승낙하였다. 세종께서 인견하고 말씀하기를, “듣자니 네가 병들었다는데 갈 수 있겠느냐.” 하니, 대해 아뢰기를, “병이 다 나았사온데 어찌 감히 사양하오리까.” 하였다. 그 나라에 당도하자 모두 공의 재명(才名)을 듣고 시를 받으러 오는 자가 마구 모여드니 공은 붓대를 멈추지 아니하며 전혀 생각하지 않는 것같이 하였으나 말이 다 사람을 놀라게 하여 지금까지 전송(傳誦)하고 있으며 매번 사신이 오게 되면 반드시 공의 안부를 물었다.
공이 바닷길에 있을 때에 항상 기후를 증험하여 비가 오고 바람이 불 것을 예측하니 비록 배부리기에 늙은 자라도 능히 따를 수 없었다. 우리 나라가 대마도(對馬島)와 더불어 해마다 선액(船額)을 정해서 보내오기로 약속하였는데 도주(島主)가 부하들의 못된 판단에 끌리어 즐겨 응종하지 아니하므로 공은 돌아오는 길에 도(島)에 들려 도주를 보고 말하기를, “이 일은 사행(使行)의 알 바 아니지만 듣고서 그윽이 의심하는 바이다. 만약 선액을 정한다면 반드시 증빙서를 가져야 우리 나라에 오게 될 것인즉, 권한이 도주에게 돌아가니 그 이익이 클 것이요, 선액을 정하지 않는다면 사람이 다 제멋대로 내왕할 것이니 무엇을 도주에게 의뢰하랴. 그 이해(利害)에 대해서는 비록 어리석은 자라도 또한 택할 바를 알 것이다.” 하니, 도주는 깨닫고 드디어 선액을 정하였다. 우리 경계에 도착하게 되자 갑자기 태풍에 막히어 미처 언덕에 대지 못하니 뭇사람이 창황하여 어쩔 줄을 모르는데 공은 신색이 여전하여 말하기를, “대장부가 당연히 사방을 멀리 구경하여 흉금을 활짝 열리게 해야 하는데, 지금 한 바다를 건너서 해돋이의 나라를 보았으니 족히 장관이라 할 수 있다. 혹시 이 바람으로 인하여 금릉(金陵)에 밀리어 중국 문물의 번성함을 실컷 보게 된다면 역시 상쾌한 일이 아니랴.” 하였다. 때에 공은 우리 나라 여자가 포로가 되어 그 쪽에 있는데 바야흐로 임신 중임을 보고 명령하여 배에 싣게 했는데, 이 일을 당하게 되자 모두 말하기를, “아기를 밴 여자는 수로(水路)에서 꺼리는 바이니 물에 던져 변괴를 예방하도록 하는 것이 옳다.” 하니, 공은 말하기를, “사람을 죽여서 자신의 살 길을 구하는 것은 덕에 상서롭지 못하니 나는 차마 못하겠다.” 하였는데, 이윽고 바람이 안정되었다.
세종께서 여러 나라가 각기 글자를 제정하여 자기나라 언어를 기록하고 있는데, 유독 우리 나라 만이 없음으로써 자모(字母) 28자를 제정하여 이름을 언문이라 하고, 서국(書局)을 대궐 안에 설치하고 문신(文臣)을 선택해서 찬정(撰定)하게 하였다. 공이 홀로 내전에 출입하여 친히 성지(聖旨)를 받들어 그 오음(五音)청탁(淸濁)의 분별과 유자(紐字) 해성(偕聲)의 법을 정하고 여러 유사(儒士)는 수성(守成)할 따름이었다. 세종께서 또 언문 글자로써 화음(華音)을 번역하고자 하여 한림학사 황찬(黃瓚)이 죄로써 요동에 유배 되었다는 말을 듣고 공에게 명하여 조경사(朝京使)를 따라 요동에 들어가서 황찬을 보고 질문하게 하였다. 공은 말만 들으면 문득 해득하여 털끝만큼도 틀리지 아니하니 황찬은 크게 기특히 여겼으므로 이로부터 요동에 갔다온 것이 무릇 13번이었다. 정묘넌 가을에 중시(重試)에 4등으로 합격하여 집현전(集賢殿)응교(應敎)로 뛰어 올랐다. 경오년 봄에 한림시강(翰林侍講) 예겸(倪謙) 등이 조서를 싸가지고 우리 나라에 당도하자 세종은 공에게 명령하여 종유하게 하니, 대개 중국의 전고를 물어서 알고 또 운어(韻語)를 배우게 하자는 것이었다. 한림이 한 번 보고 친한 친구와 같이 여겨 서로 창수(唱酬)하며 공을 동방의 거벽(巨擘)이라 칭하였다. 한림이 설제등루부(雪霽登樓賦)를 지으니 공이 그 운자(韻字)에 따라 화답하였는데, 그가 돌아가서 시를 보내오기를, “사부(詞賦)는 일찍이 굴송(屈宋 굴원(屈原)과 송옥(宋玉)을 말함)의 단에 올랐으니, 명성을 전하여 온 조정이 알고 있네.” 하였으니, 그들이 이와 같이 공경하고 중히 여긴 것을 볼 수 있다. 주상은 공이 경세제민(經世濟民)의 재주가 있음을 알고 시험하고자 하여 특별히 사헌부(司憲府)장령(掌令)을 제수하니, 공은 여러 차례 소장을 올려 기탄없이 모두 아뢰어 옛날 쟁신(諍臣)의 기풍이 있었다. 이윽고 집의(執義)에 승진되었다. 신미년에 다시 집현전에 들어가 직제학이 되었다. 임신년 가을에 세조께서 잠저(潛邸)에 계실 적에 사은사(謝恩使)로 명 나라 서울에 들어가게 되어, 공을 천거하여 서장관(書狀官)을 만들었다. 이 때에 권간(權姦)들이 국병(國柄)을 쥐고 있어 세조께서 종친의 영결로 먼 길을 떠나게 되니 경계하는 자가 많았는데, 공은 만리 길을 달리며 성궁(聖躬)을 보호하여 일을 마치고 돌아왔다. 계유년 봄에 상호군(上護軍)으로써 지병조사(知兵曹司)를 겸하였고, 승정원 동부승지(承政院同副承旨)에 승진하고 우부승지(右副承旨)를 경유하여 우승지에 전임되었다. 겨울에 세조가 국난을 진정하였는데, 마침 공은 외직으로 나간 때였다. 그러나 공이 진작 비밀한 모의에 참여했다하여 수충 협책정난공신(輸忠協策靖難功臣)의 호를 내리고, 손수 교서를 쓰기를, “만리를 동행하며 사직을 위해 죽기로 맹서했다.” 하였다. 이윽고 좌승지로 개임시키고 드디어 승격하여 도승지를 삼았다.
을해년 여름에 세조께서 즉위하게 되자, 매번 침실로 불러들여 대사를 자문하면 공은 고금 사적을 인용하여 이익이 되고 병이 되는 점도 지적해 아뢰니, 주상은 아름답게 여겨 받아들이며 말씀하기를, “만약 다시 경과 같은 자 한 사림만 더 얻는다면 내가 무엇을 걱정하겠는가.” 하였다. 동덕좌익공신(同德佐翼功臣)의 호를 내리고 계단을 뛰어서 예문관 대제학(藝文館大提學)을 제수하고 영성군(靈城君)을 봉하였다. 표(表)를 받들고 명 나라에 가서 사은(謝恩)하고 인하여 고명(誥命)을 청하고 돌아오니 특별히 토지와 장획(臧獲 노복)을 내려 주었다. 병자년 봄에 병조판서(兵曹判書)에 천직되자 장계를 올리기를, “우리 나라가 삼방으로 도적의 침략을 받고 있사오나, 바다 도적이 가장 한악(悍惡)하여 막아내기가 더욱 어렵사오니, 한 번 그 기회를 놓치면 남방은 보수하기가 용이하지 않사옵니다.” 하니, 주상은 말씀하기를, “경이 일찍이 사명을 받들고 갔다 온 일이 있어 그들의 내정을 잘 알 것이니, 지금 응접하는 일은 모두 경에게 위임한다.” 하여, 이로부터 예조를 전담하게 되었다. 여름에 성삼문(成三問) 등의 옥사(獄事)가 일어나서 수백 명이 연루되어 옥중에 갇혀 있으므로 공에게 명하여 모두 다스리게 하니, 공은 정상을 참작해서 자상히 보고하여 온전하게 살아난 자가 많았다. 판중추원사(判中樞院事)에 승진되고 병조판서를 겸임하고, 의정부 우찬성(議政府右賛成)에 천직되고 성균관 대사성(成均館大司成)을 겸직하여 문형(文衡)을 맡게 하였다. 정축년 가을에 좌찬성(左賛成)에 개임되고 겨울에 우의정(右議政)에 승차하였다.
기묘년 여름에 오랫동안 비가 계속됨으로써 인책하고 사직하니 어서(御書)를 내려 윤허하지 아니하고 말씀하기를, “내가 경과 더불어 함께 하느님의 찬화(賛化)를 체받고 있는데 경이 만약 후퇴한다면 내가 어떻게 전진할 수있겠는가.” 하였다. 겨울에 좌의정에 승격하였다. 이에 앞서 야인들이 자주 들어와 침략하므로 주상에게 쳐서 물리치고자 하였으나, 조정의 공론이 통일되지 아니하였는데 공은 유독, “쳐야 한다.” 하고, 승산(勝算)을 마련하여 아뢰니 주상은 말씀하기를, “경의 말이 정히 내 뜻에 합당하다.” 하였다. 경신년 가을에 공을 명하여 강원(江原)ㆍ함길(咸吉) 양도 도체찰사(都體察使)를 삼아 토벌하게 하니, 공이 장병을 여러 부(部)로 나누어 여러 길로 한꺼번에 진격하여 깊숙이 굴혈(窟穴)로 들어가 풀 뽑듯이 새 잡듯이 하여 크게 이기고 돌아왔다. 오랑캐가 밤을 타서 미행(尾行)하여 공격을 개시하니 영중(營中)이 들썩이며 싸움에 응하려고 하는데, 공은 굳이 누워 일어나지 아니하고 막료(幕僚)를 불러들여 시를 짓자고 하며 절구 한 수를 부르기를, “피의 땅에 서리가 내려 변방이 쓸쓸한데, 백리를 뒤덮어 철기(鐵騎)는 오가누나. 밤 싸움 쉬지 않고 새벽이 되려는데, 누워서 별을 보니 정히도 휘황하구나.” 하니, 장병들이 그 편안하고 한가함을 보고 힘입어 동요되지 아니하였다. 그 방략을 지수(指授)하여 용기가 있는 자나 겁내는 자를 막론하고 다같이 분발하게 하며, 임기응변하여 적으로 하여금 감히 침범하지 못하게 하는 것은 비록 옛날의 명장이라도 더할 수 없었다. 개가(凱歌)를 부르고 돌아오니, 주상은 매우 기뻐하여 내려준 것이 이루 헤아릴 수 없었다. 임오년에 영의정 부사(領議政府事)에 승차하였다. 갑신년에 벼슬이 너무도 성하고 가득함을 들어 사직하니 고령군(高靈君)을 봉하였다. 정해년에 예조판서를 겸직하였다. 무자년 가을에 세조께서 승하하시고 예종(睿宗)께서 즉위하자, 유명(遺命)으로써 공을 명하여 승정원(承政院)에 들어와 서무를 참결(叅決)하게 하니 공은 지성껏 협조하여 모든 정사를 빛나게 하였다. 겨울에 남이(南怡)의 난을 평정하니 보사 병기 정난 익대공신(保社炳幾定難翊戴功臣)의 호를 내렸다.
기축년 겨울에 예증께서 또 승하하시니 중외(中外)가 황황하여 어찌 할 바를 모르는데, 공은 홀로 대왕대비(大王大妃)에게 건의하기를, “빨리 상주를 정하여 인심을 안정시켜야 하옵니다.” 하니, 대왕대비는 주상에게 명령하여 대통(大統)을 이어받게 하였다. 신묘년 여름에 순성 명량 경제 홍화 좌리 공신(純誠明亮經濟弘化左理功臣)의 호를 내리고 밀부(密符)를 주어 선소(宣召)를 미덥게 하고 기변(機變)을 방비하게 하였다. 겨울에 다시 영의정(領議政)을 제수하므로 글월을 올려 사면하니 대왕대비는 전지(傳旨)를 내려 말씀하기를, “세조께서 경을 칭찬하여 위징(魏徵)과 같다고 하셨는데 이제 와서는 잊었는가. 어찌 그리 갑작스러운가.” 하고, 주상은 또 선지(宣旨)를 내리기를, “나는 들으니 세조께서 매번 예종에게 하신 말씀이, ‘내가 숙주와 더불어 큰 벌을 정하였으니 반드시 너희 시대에 함께 태평을 누리게 될 것이다.’ 하셨는데, 지금 내가 어리거늘 경이 어찌 굳이 사양하려 하는가.” 하였다. 임진년 여름에 또 노령으로써 상소하여 결해(乞骸)를 청하고 겸하여 당면한 폐단을 진주(陳奏)하여 충섬심이 간절하니, 주상은 윤허하지 아니하고 명하여 한 통을 등사해 드리게 하여 스스로 경계하고 반성하는 자료로 삼았다. 일찍이 공에게 명하여 사국(史局)에 들어가서 세조ㆍ예종실록을 감수하게 하였는데 이제 와서 완성되니, 잔치를 베풀어 위로하고 아울러 안마(鞍馬)와 의복을 내려주었다. 갑오년 봄에 재변(災變)으로써 두 번째 상소하여 하직하니 어서(御書)로 그 말미(末尾)에 비답(批答)하여 위로하고 효유함이 간곡하고 지극하였다. 을미년 봄에 주상은 내관(內官)을 보내어 내온(內醞 궁중에서 쓰는 술)과 구마(廐馬)를 내려주고 어서로 유시하기를, “지금 정조사(正朝使)의 말을 듣고 이에 도적의 모의가 깊어 간다는 것을 알았다. 당초에 변고를 아뢸 적에 경이 으뜸으로 훌륭한 계책을 세워서 국가가 후회가 없게 되었으니 나는 심히 즐겨 여긴다.” 하였다. 이에 앞서 건주(建州)야인(野人)이 큰 소리를 치며 들어와 침략하겠다고 하니 사람들은 모두 오랑캐의 상투수단으로 여기고 족히 염려할 것이 없다고 여겼는데, 공은 홀로 건의하여 싸움을 도울 만한 장병을 나누어 보내서 각각 요해(要害)의 곳을 지키게 하니 이로 말미암아 도적이 와서 뜻을 얻지 못했다. 처음에 세조께서 우리 나라 옛 사기(史記)가 허소하고 누락함으로써 공에게 명하여 《동국통감(東國通鑑)》을 찬술하게 하였는데, 국가에 일이 많아서 미쳐 성서(成書)하지 못하였다. 이에 이르러 주상은 문신을 선택하여 공의 집에 나아가 총재(總裁)하는 것을 받들어서 일을 끝내게 하고 또 관에 명령하여 봉급을 주게 하였다. 세조는 또 명령을 내려 《오례의(五禮儀)》를 개찬(改撰)할 것을 명하였는데, 제유(諸儒)의 의논이 통일되지 아니하여 세 조정을 지나도록 성취하지 못하고 있으니, 주상은 공에게 명하여 산정(刪定)하게 하였다. 공은 고금(古今)을 참작하고 정과 예를 극진히 하여 변경 못할 법전을 만들었다. 공이 모든 나라의 음운(音韻)을 방통하여 손수 그 나라 언어를 번역하여 올리니, 어학을 배우는 자가 스승의 가르침을 의뢰하지 않고 쉽게 해득할 수 있었다. 또 일본과 여진의 산천에서 중요한 곳을 기록하여 지도를 만들어 올리니, 변방을 요리하는 자가 향도(鄕道 길 인도하는 사람)를 힘입지 않고도 눈앞에 환하여 친히 다니던 데와 같았으며, 또 해동(海東) 여러 나라에 대한 기록을 지어 국왕으로부터 추장에 이르기까지 씨족의 강성하고 약한 것과, 관할하는 군사의 많고 적은 것과 지역의 멀고 가까움과 풍속이 다르고 같음과, 사선(使船)의 왕래하는 절차와 우리 나라의 대우하는 격식이 낱낱이 갖추어 있어 유사(有司)로 하여금 상고하고 인거(引據)하여 교제하는 예를 잃지 않게 하니, 주상께서 보시고 아름답게 여겨 후한 상을 내렸다. 공이 병에 걸리게 되자 주상께서 내의(內醫)와 근시(近侍)를 보내어 문병하게 하고 어약(御藥)과 주선(廚膳)을 보내어 길에 서로 잇대었다. 병이 위독하자 승지(承旨)를 보내어 뒷일을 물으니, 공은 국가가 태평하기 때문에 변방의 방비가 소홀했다는 점을 들어 이에 북방의 방어에 대하여 급히 조치해야 한다고 아뢰었다. 그리고 유명(遺命)하기를, “장사를 박하게 하고 서적(書籍)을 함께 풀어주고 불가의 법은 쓰지 말라.” 하였다.
공이 천성이 고명(高明)하고 덕량이 연심(淵深)하며 활달한 도량은 족히 용납할 수 있고, 호탕한 재주는 족히 무엇이고 할 수 있으며, 그 학문은 장구(章句)를 벗어나서 성현의 뜻을 구하기에 힘쓰고, 그 문장은 부화(浮華)를 버리고 옛사람의 작(作)을 따르며, 평소에 사람을 대하는 것은 온화하고 친절하되 예법은 잃지 아니하고, 세무를 수용하는 것은 넉넉하여 여지가 있으되 소신은 변하지 아니하며 옳고 그름을 분석함에 있어서는 능히 변통하여 막힘이 없으되 항상 대체(大體)를 견지하고 미한 것에 구애하지 아니하였다. 세조께서 즉위하여 모든 정사를 경신할 적에 공은 오랫동안 요직을 맡아 종용(從容 )하고 승순(承順)하며 항상 풍유(諷諭)로써 그 마음을 만족하게 하고 한 번도 직언(直言)을 팔아서 자기 이름을 높이려 하지 아니하니 세조는 더욱 중히 여겼다. 중년에 국가가 다난하여 인심이 동요하므로, 공은 한두 대신과 더불어 동심협력하여 위로 성덕(聖德)을 보좌하고 아래로 어려운 시국을 바로잡으며, 정성을 다하여 지치(至治)를 올리고 백관의 장으로서 문형(文衡)을 맡아 한 몸으로 국가의 안위(安危)를 짊어진 지가 20년이었으며, 군국(軍國)의 중사(重事)가 앞에 쌓여도 좌우로 수답하여 판결을 내리되, 물 흐르듯이 하며 애쓰는 것 같지도 아니하니, 사람들이 처음에는 소홀함을 의심하다가 그 시행함을 보면 모두 사리에 적합하였다. 매번 조정에 의논이 있을 때에는 중론(衆論)이 분분하여 각기 자기 소견이 옳다고 하는데, 공은 옛일을 끌어대고 현실을 참작하여 지당하게 절충하니 사람들이 모두 굴복하였다.
공은 경연(慶筵)에서 진강(進講)할 적마다 임금의 덕에 절실하고 목전의 정사에 관계되는 것이 있으면 반드시 여러 번 되풀이하여 감오(感悟)가 있기를 기하여 일찍이 아뢰기를, “교화를 일으키는 근원은 학교를 존숭하는 데에 있사옵니다.” 하고 임금께 권해서 성균관에 거둥하여 선성(先聖)을 배알하고 경서를 펴놓고 어려운 곳을 질문하게 하며, “백성을 기르는 근본은 농상(農桑)을 힘쓰는 데에 있습니다.” 하고 임금을 도와 경적(耕籍)의 예를 행하고, 친히 선농(先農 신농씨(神農氏))에게 제사하게 하고 물러나와 삼사(三事)들과 더불어 쟁기를 들고 몸소 밭을 갈았으며, 무릇 역대 조정의 못 다한 일을 대략 거행하였고, 14차례나 장시(掌試)하는 동안에 사람을 얻은 것이 가장 성하여 경상(卿相)에 이른 자가 많았으니, 대개 조감(藻鑑)이 워낙 밝아서 사사로 속일 수 없었던 까닭이었다. 예조판서를 겸임한 수십 년에 대국을 섬기고 이웃 나라를 사귀는 것으로써 자기 책임을 삼았으며, 표전(表箋)과 사명(辭命)에 있어서도 공이 다 윤색(潤色)하여 피차간에 정과 예가 모두 극진하여, 주는 것은 후하고 받는 것은 박하여 언제나 환심을 얻었다. 일찍이 말하기를, “사람과 더불어 교제하기란 쉬운 것 같아도 실상은 어려운 것이니 오직 지극한 정성만이 남을 감동시킬 수 있다. 중부(中孚)의 믿음은 돈어(豚魚)에게도 미칠 수 있거든, 하물며 사람에게랴.” 하였다.
임금께서 사방의 객사(客使)를 인견할 때에는 공이 항상 명령을 받아 덕의(德意)를 선양하였는데, 주선하고 왕복함에 있어 용모와 의식이 보고 배움직하니 사람들이 다 경외하였고, 친구를 신(信)으로써 대하며, 사람이 한 가지 장점만 있으면 반드시 재주에 따라 뽑아 썼다. 항상 구양공(歐陽公)의, “어리석은 사람도 부려 쓸 수 있고, 나약한 사람도 부려 쓸 수 있다.” 는 말을 들어 이야기하기를, “사람이란 어질고 안 어진 것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부려 쓰느냐에 달린 것이다.” 하며 친척을 은혜로써 무마하여 비록 촌수가 먼 족속이라도 친자식이나 동생같이 보아 길흉과 질병을 친히 보살펴 주고, 조실부모하여 의지할 곳이 없는 자는 양육하고 교훈하여 자립할 수 있게 만들어 주었다.
아, 공은 오래도록 총리(寵利)에 거하였으나 능히 그 공을 안보하였고, 여러 번 권병(權柄)을 잡았으나 그 명성을 떨어뜨리지 아니하였으며, 이름은 중국을 진동하고 위엄은 오랑캐 지역에 떨쳤으며 공은 한 세상을 뒤덮었으나, 사람이 간언(間言)이 없었으니, 대개 그 학문과 조수(操守)의 힘이 극치에 도달한 바 있었기 때문에 사업에 나타난 것이 이와 같이 우뚝하고 광대한 것이다. 세조께서 일찍이 이르기를, “제환공(齊桓公)에게 관중(管仲)이, 한고조(漢高祖)에게 장량(張良)이, 당태종(唐太宗)에게 위징(魏徵)이 있는 것은 나에게 숙주가 있는 것과 꼭 마찬가지라.” 하였으니 그 군신간에 서로 만난 것이 하늘이 준 것이요, 사람의 힘으로 된 것이 아니다.
공은 사재부정(司宰副正) 윤경연(尹景淵)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8남(八男) 1녀(一女 )를 낳았다. 맏아들은 주(澍)인데 통례문봉례(通禮門奉禮)요, 다음은 면(㴐)인데 함길도 관찰사(咸吉道觀察使)로, 이상은 다 공보다 먼저 죽고, 다음은 찬(澯)인데 황해도 관찰사(黃海道觀察使)요, 다음은 정(瀞)인데 이조 참판(吏曹參判)으로 병술년에 문과(文科)에 합격하였고, 다음은 준(浚)인데 병조 참의(兵曹叅議)로 경인년 문과에 장원하였고, 정(瀞)과 더불어 책훈(策勳)되어 좌리공신(佐理功臣)이 되었으며, 다음은 보(溥)인데 절충장군 행사과(折衝將軍行司果)요, 다음은 형(泂)인데 사섬시 정(司贍寺正)으로 갑오년 문과에 합격하였고, 다음은 필(泌)인데 행사과(行司果)요, 딸은 사맹(司猛) 신명수(申命壽)에게 출가하였다. 주(澍)가 좌의정(左議政) 한명회(韓明澮)의 딸에게 장가를 들어 삼남(三男)을 낳았는데, 종흡(從洽)은 돈녕부 첨정(敦寧府僉正)이요, 종옥(從沃)은 전생서 참봉(典牲暑叅奉)이요, 종호(從濩)는 진사시(進士試)에 장원하였다. 면(㴐)은 사용(司勇)정호(丁湖)의 딸에게 장가들어 2남(二男) 1녀(一女)를 낳았는데, 아들은 용관(用灌) 용개(用漑)요, 딸은 사과(司果)강학손(姜鶴孫)에게 출가하였다. 찬(澯)은 동지중추(同知中樞) 윤잠(尹岑)의 딸에게 장가들어 2녀(二女)를 낳았는데, 맏딸은 승사랑(承仕郞)정유강(鄭有綱)에게 출가하고, 다음은 무공랑(武功郞) 홍태손(洪泰孫)에게 출가하였다. 정(瀞)은 후령군(厚寧君)의 딸에게 장가들어 2남(二男)을 낳았는데, 영철(永澈)은 무공랑이고, 영홍(永洪)은 통사랑(通仕郞)이다. 준(浚)은 청주판관(淸州判官) 유수창(柳守昌)의 딸에게 장가들어 1남(一男)을 낳았는데 복순(復淳)이다. 형(泂)은 상장(上將)정보(鄭溥)의 딸에게 장가들어 2남 1녀를 낳았는데 아들은 광윤(光潤)ㆍ광택(光澤)이다. 필(泌)은 고산 현감(高山縣監) 윤삼원(尹三元)의 딸에게 장가들어 3남 2녀를 낳았다. 종흡(從洽)은 파평군(坡平君) 이암(李巖)의 딸에게 장가들어 3남 2녀를 낳았고, 종옥(從沃)은 종부시정(宗簿寺正) 이수치(李壽雉)의 딸에게 장가들어 1남을 낳았다. 강학손(姜鶴孫)은 2남 1녀를 낳았는데 아들은 영수(永壽)ㆍ향수(享壽)이고, 공의 측실(側室)에서 아들ㆍ딸 각각 하나를 두었는데, 아들은 결(潔)이요, 딸은 후궁(後宮)으로 뽑혀들어갔다. 명에 이르기를,

오직 우리 대동(大東)이
바다를 끼고 나라 되었네
냇물 흐르고 산은 솟아서
얼기설기 넓고 크네
바다랑 산이 빼난 기운 모여
특이한 인물을 내었구려
특이한 인물이 누구인가
세상을 울린 신하로세
총명하고 호매(豪邁)하여
호연(浩然)의 기를 지녔도다
도량은 우주를 포괄(包括)하고
학문은 인천(人天)을 꿰었구려
문(文)에 모훈(謀訓) 무(武)에 책략
왕좌(王佐)의 재주로세
한 세상을 수작하여
유인(游刃)처럼 익숙하도다
때 만나고 임금만나니
경륜을 전포(展布)하여
내란을 평정하고
큰 기업을 부식(扶植)했네
경륜하고 찬화(賛化)하여
어려운 시대를 건졌도다
두 번이나 일곡(日轂 나라를 비유하여 말한 것)을 붙잡아서
태청(太淸)에 올려놓았네
나라 운수 비색하더니
공을 인해 형통하고
다스리는 모든 법도가
공으로 말미암아 곧아졌네
나가면 장수 들어오면 정승
한 몸에 안위(安危)를 걸었네
덕화는 백성에게 흡족하고
위엄은 오랑캐를 진압하고
세 조정을 내리 섬겨
많은 공적을 세웠도다
산하(山河)로 맹서하며
정승을 삼고 작을 내렸네
공은 한 세대를 뒤덮고
지위는 백관의 으뜸이라
오랫동안 문형(文衡)을 맡고
질종(秩宗 예조(禮曹))까지 관장하니
예가 밝고 악(樂)이 갖추어
귀신과 사람이 화평하며
교화랑 습속이 아름다워
인의에 차츰 연마되었네
우리 나라 정치가
은(殷)ㆍ주(周)와 같다면
우리 공의 업적은
이윤(李尹)ㆍ부열(傅說)의 짝이라
덕이 후히 쌓였으니
남은 경사 더욱 깊네
하늘이 아들 낳을 길조를 내려
오직 아들이 많도다
팔룡(八龍)의 자취를 따라서
그 형에 아우로세
또한 여러 손자 있어
옥처럼 윤택하고 구슬처럼 밝아
계적(桂籍)에 이름을 함께 두고
운정(雲程)을 나란히 달리도다
주의(朱衣) 입고 상홀(象笏)드니
방가(邦家)의 영화로세
아, 아들이랑 손자가
많고 또 어진 것은
공의 꽃다운 덕이
상천(上天)에 격(格)한 때문
공은 세상을 떠났지만
덕은 오직 전해오네
이렇듯 소명하니 뒷사람이
어찌 힘쓰지 아니하랴
대대로 빛나는 그 덕이여
길이 선세와 부합하리
돌을 깎아 글월을 새겨
영원한 세대에 고하노니
지나는 이 눈물을 지으며
명덕(明德)을 생각하리

[주D-001]고명(誥命) : 천자의 조정에서 제후(諸侯)에게 작위를 하사하는 조고령(詔誥令)을 고명(誥命)이라 칭한다.
[주D-002]경적(耕籍) : 제적(帝籍)을 경직하는 뜻인데, 제적은 천신을 위하여 백성의 힘을 빌려서 농사짓는 밭임. 예기(禮記)월령(月令)에, “삼공(三公)ㆍ구경(九卿)ㆍ제후(諸侯)ㆍ대부(大夫)를 거느리고 몸소 제적을 경작하는데, 천자는 삼추(三推)ㆍ삼공은 오추(五推)요, 경ㆍ제후는 구추(九推)라.” [帥三公九卿諸侯大夫 躬耕帝籍 天子三推 三公五推 卿諸侯九推] 하였음.
[주D-003]
속동문선 제20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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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명(碑銘)
고령부원군 신숙주 문충공 묘비명 병서 (高靈府院君申叔舟文忠公墓碑銘 幷書

이승소(李承召)

그윽이 보건대 세상이 쇠해서 하늘이 장차 일으키려면 반드시 성스러운 임금과 어진 신하를 내서 함께 한 세상을 바로잡아 거룩한 정치의 기반에 오르게 한다. 그러므로 은(殷) 나라가 쇠해서는 때마침 부열(傅說) 같은 이가 나와서 고종(高宗)을 도와 중흥(中興)의 업을 이룩하였고, 주(周) 나라가 쇠해서는 방숙(方叔) 같은 이가 있어 선왕(宣王)을 도와 옛 땅을 회복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상고해 보면 부열은 보상(輔相)의 업은 있었으나 무공(武功)은 드날리지 못했고 방숙은 정벌의 공은 있었지만 상업(相業)은 나타내지 못했으니, 어찌 우리 문충공처럼 천부(天賦)의 오롯한 재주로 운수를 응해 나서, 성주(聖主)를 보좌하여 문모(文謨)와 무략(武略)으로 나가서는 장수가 되고 들어와서는 정승이 되어 넘어지는 나라를 붙잡아 태산처럼 편안하게 한 것만 같겠는가. 우리 동방에 나라가 생긴 이래로 인신(人臣)으로서 공덕이 장한 이는 대개 이 한 분일 것이다. 성화(成化) 11년인 을미년 여름 유월 무오일에 병으로 본댁에서 별세하여 부고를 아뢰니 주상은 크게 슬퍼하며 좌우의 손을 상실한 것같이 여겼다. 그래서 철조(撤朝)감선(減膳)하고 특별히 승지(承旨)를 보내어 주문하고 부의(賻儀)를 후히 보냈다. 이리되니 조정에서는 그 우의(羽儀 보좌와 같은 말이다.)를 잃어버리고 선비들은 종장(宗匠)을 잃어버렸으며 여러 관료(官僚)들은 자문하고 결단할 곳이 없어지고 서민들은 우러르고 힘입을 곳이 없어졌으니, 비록 아동(兒童)과 주졸(走卒)까지라도 또한 한탄하며 원통하게 여겨 눈물을 흘리지 않는 자가 없었으며, 그 문생(門生)과 고리(故吏)와 친척과 요우(僚友)들이 빈소(殯所)에 전곡(奠哭)하여 날마다 끊어지지 아니하니, 아, 공이 사람에게 이처럼 신망을 얻은 것이 어찌 언변이나 용모(容貌)로서 될 일이겠는가. 9월 26일에 양주(揚州)송산리(松山里) 동향의 벌에 장사하였는데, 돌아간 날로부터 장사에 이르도록 모든 비용을 관에서 담당하였다. 장사가 끝나매 사자(嗣子) 아무개가 공의 행장으로써 나에게 묘비명을 청하며 하는 말이, “가장 오랫동안 선군(先君)과 더불어 상종한 처지니 명(銘)을 짓지 아니하려는가.” 하므로, 나는 감히 사양을 못하였다.
삼가 생각하건대 공의 휘(諱)는 숙주(叔舟)요 자는 범옹(泛翁)이요, 호는 희현당(希賢堂)이요, 고령신씨(高靈申氏)인데, 그 권세는 본현(本縣)의 이속(吏屬)이다. 휘 성용(成用)이란 분이 있어 비로소 과거에 뽑혀 벼슬이 검교군기감(檢校軍器監)에 이르렀고, 그 후 4대[世]를 지나 휘 덕린(德麟)에 이르러는 전의판서(典儀判書)를 지냈는데 공에게 증조가 된다. 진서(眞書)ㆍ초서(草書)ㆍ예서(隸書)를 잘 썼다. 휘 포시(包翅)를 낳으니 공조참의(工曹參議)요 공에게 조부가 되고, 휘 장(檣)을 낳으니 공조 좌참판이요, 공에게 아버지가 되는데 오래도록 문형(文衡)을 맡아 일세의 유종(儒宗)이 되었다. 판서이하는 모두 공의 공훈으로써 은혜를 미루어 작(爵)을 봉하게 된 것이다. 어머니는 정씨(鄭氏)니 지성주사(知成州事) 휘 유(有)의 따님이다. 영락(永樂) 정유년 6월 정유일에 공을 낳았다.
공은 어려서부터 영민하고 준수하니 보는 자는 그가 큰 그릇이 될 것을 짐작하였으며, 장성해서는 학문을 좋아하여 천하의 서적을 보지 않은 것이 없었다. 이와 같이 축적이 풍부하기 때문에 시문을 만들게 되면 바닷물이 넘실거리듯이 크게 분방(奔放)하여 저속한 문자를 짓지 아니하니, 당시 사람들이 서로 전(傳)하여 정식(程式)으로 삼았다. 무오년에 비로소 시(詩)ㆍ부(賦)로써 진사를 뽑는데, 공이 연달아 초시(初試)ㆍ복시(覆試)에 장원하고 또 생원의 시험에 합격하였다. 이듬해 가을에 세종께서 친히 책제(策題)를 냈는데, 공은 3등으로 봅혀 전농직장(典農直長)으로 임명되었다. 이조(吏曹)에서 공을 제집사(祭執事)로 차정(差定)했는데 서리가 첩지(牒紙)를 전달하지 아니하여 사무를 궐하게 되자 헌사(憲司)에서 탄핵하니, 공은 서리가 늙었다는 말을 듣고 죄를 받아 제명(除名)이 될까 염려하여 자신이 책임을 지고 말았다. 이로 말미암아 너그럽고 후한 어른이라고 칭하였다. 집현전(集賢殿)에 뽑혀 들어가 부수찬(副修撰)이 되었는데, 매일 아침 장관을 뵙고 나면 장서각(藏書閣)으로 물러가서 평소에 보지 못한 책들을 꺼내서 쉴새없이 읽으며, 간혹 동료를 대신하여 숙직하게 되면 밤새도록 책만 보았다. 하루 밤에 삼경(三更)이 지나서 세종은 어린 내시를 보내어 엿보게 하니, 공이 바야흐로 단정히 앉아서 글을 읽고 있으므로 사경에 또 보내어 엿보게 하니 역시 그러하였다. 그래서 곧 어의(御衣)를 내려주어 권장하였다.
임술년에 훈련원(訓練院)주부(注簿)에 옮겼다. 일본국(日本國)이 사장(詞章)을 즐기므로써 매번 빙문(聘問)을 통하게 되면 반드시 문사(文士)를 가려서 서장관(書狀官)을 삼았는데, 이 때에 마침 사자를 보내고자 하여 서장관을 선택하자 물망에 오른 자가 모두 풍파가 험난함을 꺼리어 가지 않으려 하므로 마침내 공을 내정하기로 하였다. 공은 마침 오랫동안 병을 앓다가 갓 일어나니 형제나 친구들이 모두 말하기를, “저렇게 여위고 피곤한 몸으로 어찌 원행을 할 수 있겠는가.” 하고, 극력 저지하니, 공은 말하기를, “신하가 되면 평탄하건 험하건 한결같아야 하거늘 어찌 제 몸이 편할 것만 생각해서야 되겠는가.” 하고, 혼연히 승낙하였다. 세종께서 인견하고 말씀하기를, “듣자니 네가 병들었다는데 갈 수 있겠느냐.” 하니, 대해 아뢰기를, “병이 다 나았사온데 어찌 감히 사양하오리까.” 하였다. 그 나라에 당도하자 모두 공의 재명(才名)을 듣고 시를 받으러 오는 자가 마구 모여드니 공은 붓대를 멈추지 아니하며 전혀 생각하지 않는 것같이 하였으나 말이 다 사람을 놀라게 하여 지금까지 전송(傳誦)하고 있으며 매번 사신이 오게 되면 반드시 공의 안부를 물었다.
공이 바닷길에 있을 때에 항상 기후를 증험하여 비가 오고 바람이 불 것을 예측하니 비록 배부리기에 늙은 자라도 능히 따를 수 없었다. 우리 나라가 대마도(對馬島)와 더불어 해마다 선액(船額)을 정해서 보내오기로 약속하였는데 도주(島主)가 부하들의 못된 판단에 끌리어 즐겨 응종하지 아니하므로 공은 돌아오는 길에 도(島)에 들려 도주를 보고 말하기를, “이 일은 사행(使行)의 알 바 아니지만 듣고서 그윽이 의심하는 바이다. 만약 선액을 정한다면 반드시 증빙서를 가져야 우리 나라에 오게 될 것인즉, 권한이 도주에게 돌아가니 그 이익이 클 것이요, 선액을 정하지 않는다면 사람이 다 제멋대로 내왕할 것이니 무엇을 도주에게 의뢰하랴. 그 이해(利害)에 대해서는 비록 어리석은 자라도 또한 택할 바를 알 것이다.” 하니, 도주는 깨닫고 드디어 선액을 정하였다. 우리 경계에 도착하게 되자 갑자기 태풍에 막히어 미처 언덕에 대지 못하니 뭇사람이 창황하여 어쩔 줄을 모르는데 공은 신색이 여전하여 말하기를, “대장부가 당연히 사방을 멀리 구경하여 흉금을 활짝 열리게 해야 하는데, 지금 한 바다를 건너서 해돋이의 나라를 보았으니 족히 장관이라 할 수 있다. 혹시 이 바람으로 인하여 금릉(金陵)에 밀리어 중국 문물의 번성함을 실컷 보게 된다면 역시 상쾌한 일이 아니랴.” 하였다. 때에 공은 우리 나라 여자가 포로가 되어 그 쪽에 있는데 바야흐로 임신 중임을 보고 명령하여 배에 싣게 했는데, 이 일을 당하게 되자 모두 말하기를, “아기를 밴 여자는 수로(水路)에서 꺼리는 바이니 물에 던져 변괴를 예방하도록 하는 것이 옳다.” 하니, 공은 말하기를, “사람을 죽여서 자신의 살 길을 구하는 것은 덕에 상서롭지 못하니 나는 차마 못하겠다.” 하였는데, 이윽고 바람이 안정되었다.
세종께서 여러 나라가 각기 글자를 제정하여 자기나라 언어를 기록하고 있는데, 유독 우리 나라 만이 없음으로써 자모(字母) 28자를 제정하여 이름을 언문이라 하고, 서국(書局)을 대궐 안에 설치하고 문신(文臣)을 선택해서 찬정(撰定)하게 하였다. 공이 홀로 내전에 출입하여 친히 성지(聖旨)를 받들어 그 오음(五音)청탁(淸濁)의 분별과 유자(紐字) 해성(偕聲)의 법을 정하고 여러 유사(儒士)는 수성(守成)할 따름이었다. 세종께서 또 언문 글자로써 화음(華音)을 번역하고자 하여 한림학사 황찬(黃瓚)이 죄로써 요동에 유배 되었다는 말을 듣고 공에게 명하여 조경사(朝京使)를 따라 요동에 들어가서 황찬을 보고 질문하게 하였다. 공은 말만 들으면 문득 해득하여 털끝만큼도 틀리지 아니하니 황찬은 크게 기특히 여겼으므로 이로부터 요동에 갔다온 것이 무릇 13번이었다. 정묘넌 가을에 중시(重試)에 4등으로 합격하여 집현전(集賢殿)응교(應敎)로 뛰어 올랐다. 경오년 봄에 한림시강(翰林侍講) 예겸(倪謙) 등이 조서를 싸가지고 우리 나라에 당도하자 세종은 공에게 명령하여 종유하게 하니, 대개 중국의 전고를 물어서 알고 또 운어(韻語)를 배우게 하자는 것이었다. 한림이 한 번 보고 친한 친구와 같이 여겨 서로 창수(唱酬)하며 공을 동방의 거벽(巨擘)이라 칭하였다. 한림이 설제등루부(雪霽登樓賦)를 지으니 공이 그 운자(韻字)에 따라 화답하였는데, 그가 돌아가서 시를 보내오기를, “사부(詞賦)는 일찍이 굴송(屈宋 굴원(屈原)과 송옥(宋玉)을 말함)의 단에 올랐으니, 명성을 전하여 온 조정이 알고 있네.” 하였으니, 그들이 이와 같이 공경하고 중히 여긴 것을 볼 수 있다. 주상은 공이 경세제민(經世濟民)의 재주가 있음을 알고 시험하고자 하여 특별히 사헌부(司憲府)장령(掌令)을 제수하니, 공은 여러 차례 소장을 올려 기탄없이 모두 아뢰어 옛날 쟁신(諍臣)의 기풍이 있었다. 이윽고 집의(執義)에 승진되었다. 신미년에 다시 집현전에 들어가 직제학이 되었다. 임신년 가을에 세조께서 잠저(潛邸)에 계실 적에 사은사(謝恩使)로 명 나라 서울에 들어가게 되어, 공을 천거하여 서장관(書狀官)을 만들었다. 이 때에 권간(權姦)들이 국병(國柄)을 쥐고 있어 세조께서 종친의 영결로 먼 길을 떠나게 되니 경계하는 자가 많았는데, 공은 만리 길을 달리며 성궁(聖躬)을 보호하여 일을 마치고 돌아왔다. 계유년 봄에 상호군(上護軍)으로써 지병조사(知兵曹司)를 겸하였고, 승정원 동부승지(承政院同副承旨)에 승진하고 우부승지(右副承旨)를 경유하여 우승지에 전임되었다. 겨울에 세조가 국난을 진정하였는데, 마침 공은 외직으로 나간 때였다. 그러나 공이 진작 비밀한 모의에 참여했다하여 수충 협책정난공신(輸忠協策靖難功臣)의 호를 내리고, 손수 교서를 쓰기를, “만리를 동행하며 사직을 위해 죽기로 맹서했다.” 하였다. 이윽고 좌승지로 개임시키고 드디어 승격하여 도승지를 삼았다.
을해년 여름에 세조께서 즉위하게 되자, 매번 침실로 불러들여 대사를 자문하면 공은 고금 사적을 인용하여 이익이 되고 병이 되는 점도 지적해 아뢰니, 주상은 아름답게 여겨 받아들이며 말씀하기를, “만약 다시 경과 같은 자 한 사림만 더 얻는다면 내가 무엇을 걱정하겠는가.” 하였다. 동덕좌익공신(同德佐翼功臣)의 호를 내리고 계단을 뛰어서 예문관 대제학(藝文館大提學)을 제수하고 영성군(靈城君)을 봉하였다. 표(表)를 받들고 명 나라에 가서 사은(謝恩)하고 인하여
고명(誥命)을 청하고 돌아오니 특별히 토지와 장획(臧獲 노복)을 내려 주었다. 병자년 봄에 병조판서(兵曹判書)에 천직되자 장계를 올리기를, “우리 나라가 삼방으로 도적의 침략을 받고 있사오나, 바다 도적이 가장 한악(悍惡)하여 막아내기가 더욱 어렵사오니, 한 번 그 기회를 놓치면 남방은 보수하기가 용이하지 않사옵니다.” 하니, 주상은 말씀하기를, “경이 일찍이 사명을 받들고 갔다 온 일이 있어 그들의 내정을 잘 알 것이니, 지금 응접하는 일은 모두 경에게 위임한다.” 하여, 이로부터 예조를 전담하게 되었다. 여름에 성삼문(成三問) 등의 옥사(獄事)가 일어나서 수백 명이 연루되어 옥중에 갇혀 있으므로 공에게 명하여 모두 다스리게 하니, 공은 정상을 참작해서 자상히 보고하여 온전하게 살아난 자가 많았다. 판중추원사(判中樞院事)에 승진되고 병조판서를 겸임하고, 의정부 우찬성(議政府右賛成)에 천직되고 성균관 대사성(成均館大司成)을 겸직하여 문형(文衡)을 맡게 하였다. 정축년 가을에 좌찬성(左賛成)에 개임되고 겨울에 우의정(右議政)에 승차하였다.
기묘년 여름에 오랫동안 비가 계속됨으로써 인책하고 사직하니 어서(御書)를 내려 윤허하지 아니하고 말씀하기를, “내가 경과 더불어 함께 하느님의 찬화(賛化)를 체받고 있는데 경이 만약 후퇴한다면 내가 어떻게 전진할 수있겠는가.” 하였다. 겨울에 좌의정에 승격하였다. 이에 앞서 야인들이 자주 들어와 침략하므로 주상에게 쳐서 물리치고자 하였으나, 조정의 공론이 통일되지 아니하였는데 공은 유독, “쳐야 한다.” 하고, 승산(勝算)을 마련하여 아뢰니 주상은 말씀하기를, “경의 말이 정히 내 뜻에 합당하다.” 하였다. 경신년 가을에 공을 명하여 강원(江原)ㆍ함길(咸吉) 양도 도체찰사(都體察使)를 삼아 토벌하게 하니, 공이 장병을 여러 부(部)로 나누어 여러 길로 한꺼번에 진격하여 깊숙이 굴혈(窟穴)로 들어가 풀 뽑듯이 새 잡듯이 하여 크게 이기고 돌아왔다. 오랑캐가 밤을 타서 미행(尾行)하여 공격을 개시하니 영중(營中)이 들썩이며 싸움에 응하려고 하는데, 공은 굳이 누워 일어나지 아니하고 막료(幕僚)를 불러들여 시를 짓자고 하며 절구 한 수를 부르기를, “피의 땅에 서리가 내려 변방이 쓸쓸한데, 백리를 뒤덮어 철기(鐵騎)는 오가누나. 밤 싸움 쉬지 않고 새벽이 되려는데, 누워서 별을 보니 정히도 휘황하구나.” 하니, 장병들이 그 편안하고 한가함을 보고 힘입어 동요되지 아니하였다. 그 방략을 지수(指授)하여 용기가 있는 자나 겁내는 자를 막론하고 다같이 분발하게 하며, 임기응변하여 적으로 하여금 감히 침범하지 못하게 하는 것은 비록 옛날의 명장이라도 더할 수 없었다. 개가(凱歌)를 부르고 돌아오니, 주상은 매우 기뻐하여 내려준 것이 이루 헤아릴 수 없었다. 임오년에 영의정 부사(領議政府事)에 승차하였다. 갑신년에 벼슬이 너무도 성하고 가득함을 들어 사직하니 고령군(高靈君)을 봉하였다. 정해년에 예조판서를 겸직하였다. 무자년 가을에 세조께서 승하하시고 예종(睿宗)께서 즉위하자, 유명(遺命)으로써 공을 명하여 승정원(承政院)에 들어와 서무를 참결(叅決)하게 하니 공은 지성껏 협조하여 모든 정사를 빛나게 하였다. 겨울에 남이(南怡)의 난을 평정하니 보사 병기 정난 익대공신(保社炳幾定難翊戴功臣)의 호를 내렸다.
기축년 겨울에 예증께서 또 승하하시니 중외(中外)가 황황하여 어찌 할 바를 모르는데, 공은 홀로 대왕대비(大王大妃)에게 건의하기를, “빨리 상주를 정하여 인심을 안정시켜야 하옵니다.” 하니, 대왕대비는 주상에게 명령하여 대통(大統)을 이어받게 하였다. 신묘년 여름에 순성 명량 경제 홍화 좌리 공신(純誠明亮經濟弘化左理功臣)의 호를 내리고 밀부(密符)를 주어 선소(宣召)를 미덥게 하고 기변(機變)을 방비하게 하였다. 겨울에 다시 영의정(領議政)을 제수하므로 글월을 올려 사면하니 대왕대비는 전지(傳旨)를 내려 말씀하기를, “세조께서 경을 칭찬하여 위징(魏徵)과 같다고 하셨는데 이제 와서는 잊었는가. 어찌 그리 갑작스러운가.” 하고, 주상은 또 선지(宣旨)를 내리기를, “나는 들으니 세조께서 매번 예종에게 하신 말씀이, ‘내가 숙주와 더불어 큰 벌을 정하였으니 반드시 너희 시대에 함께 태평을 누리게 될 것이다.’ 하셨는데, 지금 내가 어리거늘 경이 어찌 굳이 사양하려 하는가.” 하였다. 임진년 여름에 또 노령으로써 상소하여 결해(乞骸)를 청하고 겸하여 당면한 폐단을 진주(陳奏)하여 충섬심이 간절하니, 주상은 윤허하지 아니하고 명하여 한 통을 등사해 드리게 하여 스스로 경계하고 반성하는 자료로 삼았다. 일찍이 공에게 명하여 사국(史局)에 들어가서 세조ㆍ예종실록을 감수하게 하였는데 이제 와서 완성되니, 잔치를 베풀어 위로하고 아울러 안마(鞍馬)와 의복을 내려주었다. 갑오년 봄에 재변(災變)으로써 두 번째 상소하여 하직하니 어서(御書)로 그 말미(末尾)에 비답(批答)하여 위로하고 효유함이 간곡하고 지극하였다. 을미년 봄에 주상은 내관(內官)을 보내어 내온(內醞 궁중에서 쓰는 술)과 구마(廐馬)를 내려주고 어서로 유시하기를, “지금 정조사(正朝使)의 말을 듣고 이에 도적의 모의가 깊어 간다는 것을 알았다. 당초에 변고를 아뢸 적에 경이 으뜸으로 훌륭한 계책을 세워서 국가가 후회가 없게 되었으니 나는 심히 즐겨 여긴다.” 하였다. 이에 앞서 건주(建州)야인(野人)이 큰 소리를 치며 들어와 침략하겠다고 하니 사람들은 모두 오랑캐의 상투수단으로 여기고 족히 염려할 것이 없다고 여겼는데, 공은 홀로 건의하여 싸움을 도울 만한 장병을 나누어 보내서 각각 요해(要害)의 곳을 지키게 하니 이로 말미암아 도적이 와서 뜻을 얻지 못했다. 처음에 세조께서 우리 나라 옛 사기(史記)가 허소하고 누락함으로써 공에게 명하여 《동국통감(東國通鑑)》을 찬술하게 하였는데, 국가에 일이 많아서 미쳐 성서(成書)하지 못하였다. 이에 이르러 주상은 문신을 선택하여 공의 집에 나아가 총재(總裁)하는 것을 받들어서 일을 끝내게 하고 또 관에 명령하여 봉급을 주게 하였다. 세조는 또 명령을 내려 《오례의(五禮儀)》를 개찬(改撰)할 것을 명하였는데, 제유(諸儒)의 의논이 통일되지 아니하여 세 조정을 지나도록 성취하지 못하고 있으니, 주상은 공에게 명하여 산정(刪定)하게 하였다. 공은 고금(古今)을 참작하고 정과 예를 극진히 하여 변경 못할 법전을 만들었다. 공이 모든 나라의 음운(音韻)을 방통하여 손수 그 나라 언어를 번역하여 올리니, 어학을 배우는 자가 스승의 가르침을 의뢰하지 않고 쉽게 해득할 수 있었다. 또 일본과 여진의 산천에서 중요한 곳을 기록하여 지도를 만들어 올리니, 변방을 요리하는 자가 향도(鄕道 길 인도하는 사람)를 힘입지 않고도 눈앞에 환하여 친히 다니던 데와 같았으며, 또 해동(海東) 여러 나라에 대한 기록을 지어 국왕으로부터 추장에 이르기까지 씨족의 강성하고 약한 것과, 관할하는 군사의 많고 적은 것과 지역의 멀고 가까움과 풍속이 다르고 같음과, 사선(使船)의 왕래하는 절차와 우리 나라의 대우하는 격식이 낱낱이 갖추어 있어 유사(有司)로 하여금 상고하고 인거(引據)하여 교제하는 예를 잃지 않게 하니, 주상께서 보시고 아름답게 여겨 후한 상을 내렸다. 공이 병에 걸리게 되자 주상께서 내의(內醫)와 근시(近侍)를 보내어 문병하게 하고 어약(御藥)과 주선(廚膳)을 보내어 길에 서로 잇대었다. 병이 위독하자 승지(承旨)를 보내어 뒷일을 물으니, 공은 국가가 태평하기 때문에 변방의 방비가 소홀했다는 점을 들어 이에 북방의 방어에 대하여 급히 조치해야 한다고 아뢰었다. 그리고 유명(遺命)하기를, “장사를 박하게 하고 서적(書籍)을 함께 풀어주고 불가의 법은 쓰지 말라.” 하였다.
공이 천성이 고명(高明)하고 덕량이 연심(淵深)하며 활달한 도량은 족히 용납할 수 있고, 호탕한 재주는 족히 무엇이고 할 수 있으며, 그 학문은 장구(章句)를 벗어나서 성현의 뜻을 구하기에 힘쓰고, 그 문장은 부화(浮華)를 버리고 옛사람의 작(作)을 따르며, 평소에 사람을 대하는 것은 온화하고 친절하되 예법은 잃지 아니하고, 세무를 수용하는 것은 넉넉하여 여지가 있으되 소신은 변하지 아니하며 옳고 그름을 분석함에 있어서는 능히 변통하여 막힘이 없으되 항상 대체(大體)를 견지하고 미한 것에 구애하지 아니하였다. 세조께서 즉위하여 모든 정사를 경신할 적에 공은 오랫동안 요직을 맡아 종용(從容 )하고 승순(承順)하며 항상 풍유(諷諭)로써 그 마음을 만족하게 하고 한 번도 직언(直言)을 팔아서 자기 이름을 높이려 하지 아니하니 세조는 더욱 중히 여겼다. 중년에 국가가 다난하여 인심이 동요하므로, 공은 한두 대신과 더불어 동심협력하여 위로 성덕(聖德)을 보좌하고 아래로 어려운 시국을 바로잡으며, 정성을 다하여 지치(至治)를 올리고 백관의 장으로서 문형(文衡)을 맡아 한 몸으로 국가의 안위(安危)를 짊어진 지가 20년이었으며, 군국(軍國)의 중사(重事)가 앞에 쌓여도 좌우로 수답하여 판결을 내리되, 물 흐르듯이 하며 애쓰는 것 같지도 아니하니, 사람들이 처음에는 소홀함을 의심하다가 그 시행함을 보면 모두 사리에 적합하였다. 매번 조정에 의논이 있을 때에는 중론(衆論)이 분분하여 각기 자기 소견이 옳다고 하는데, 공은 옛일을 끌어대고 현실을 참작하여 지당하게 절충하니 사람들이 모두 굴복하였다.
공은 경연(慶筵)에서 진강(進講)할 적마다 임금의 덕에 절실하고 목전의 정사에 관계되는 것이 있으면 반드시 여러 번 되풀이하여 감오(感悟)가 있기를 기하여 일찍이 아뢰기를, “교화를 일으키는 근원은 학교를 존숭하는 데에 있사옵니다.” 하고 임금께 권해서 성균관에 거둥하여 선성(先聖)을 배알하고 경서를 펴놓고 어려운 곳을 질문하게 하며, “백성을 기르는 근본은 농상(農桑)을 힘쓰는 데에 있습니다.” 하고 임금을 도와
경적(耕籍)의 예를 행하고, 친히 선농(先農 신농씨(神農氏))에게 제사하게 하고 물러나와 삼사(三事)들과 더불어 쟁기를 들고 몸소 밭을 갈았으며, 무릇 역대 조정의 못 다한 일을 대략 거행하였고, 14차례나 장시(掌試)하는 동안에 사람을 얻은 것이 가장 성하여 경상(卿相)에 이른 자가 많았으니, 대개 조감(藻鑑)이 워낙 밝아서 사사로 속일 수 없었던 까닭이었다. 예조판서를 겸임한 수십 년에 대국을 섬기고 이웃 나라를 사귀는 것으로써 자기 책임을 삼았으며, 표전(表箋)과 사명(辭命)에 있어서도 공이 다 윤색(潤色)하여 피차간에 정과 예가 모두 극진하여, 주는 것은 후하고 받는 것은 박하여 언제나 환심을 얻었다. 일찍이 말하기를, “사람과 더불어 교제하기란 쉬운 것 같아도 실상은 어려운 것이니 오직 지극한 정성만이 남을 감동시킬 수 있다. 중부(中孚)의 믿음은 돈어(豚魚)에게도 미칠 수 있거든, 하물며 사람에게랴.” 하였다.
임금께서 사방의 객사(客使)를 인견할 때에는 공이 항상 명령을 받아 덕의(德意)를 선양하였는데, 주선하고 왕복함에 있어 용모와 의식이 보고 배움직하니 사람들이 다 경외하였고, 친구를 신(信)으로써 대하며, 사람이 한 가지 장점만 있으면 반드시 재주에 따라 뽑아 썼다. 항상 구양공(歐陽公)의, “어리석은 사람도 부려 쓸 수 있고, 나약한 사람도 부려 쓸 수 있다.” 는 말을 들어 이야기하기를, “사람이란 어질고 안 어진 것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부려 쓰느냐에 달린 것이다.” 하며 친척을 은혜로써 무마하여 비록 촌수가 먼 족속이라도 친자식이나 동생같이 보아 길흉과 질병을 친히 보살펴 주고, 조실부모하여 의지할 곳이 없는 자는 양육하고 교훈하여 자립할 수 있게 만들어 주었다.
아, 공은 오래도록 총리(寵利)에 거하였으나 능히 그 공을 안보하였고, 여러 번 권병(權柄)을 잡았으나 그 명성을 떨어뜨리지 아니하였으며, 이름은 중국을 진동하고 위엄은 오랑캐 지역에 떨쳤으며 공은 한 세상을 뒤덮었으나, 사람이 간언(間言)이 없었으니, 대개 그 학문과 조수(操守)의 힘이 극치에 도달한 바 있었기 때문에 사업에 나타난 것이 이와 같이 우뚝하고 광대한 것이다. 세조께서 일찍이 이르기를, “제환공(齊桓公)에게 관중(管仲)이, 한고조(漢高祖)에게 장량(張良)이, 당태종(唐太宗)에게 위징(魏徵)이 있는 것은 나에게 숙주가 있는 것과 꼭 마찬가지라.” 하였으니 그 군신간에 서로 만난 것이 하늘이 준 것이요, 사람의 힘으로 된 것이 아니다.
공은 사재부정(司宰副正) 윤경연(尹景淵)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8남(八男) 1녀(一女 )를 낳았다. 맏아들은 주(澍)인데 통례문봉례(通禮門奉禮)요, 다음은 면(㴐)인데 함길도 관찰사(咸吉道觀察使)로, 이상은 다 공보다 먼저 죽고, 다음은 찬(澯)인데 황해도 관찰사(黃海道觀察使)요, 다음은 정(瀞)인데 이조 참판(吏曹參判)으로 병술년에 문과(文科)에 합격하였고, 다음은 준(浚)인데 병조 참의(兵曹叅議)로 경인년 문과에 장원하였고, 정(瀞)과 더불어 책훈(策勳)되어 좌리공신(佐理功臣)이 되었으며, 다음은 보(溥)인데 절충장군 행사과(折衝將軍行司果)요, 다음은 형(泂)인데 사섬시 정(司贍寺正)으로 갑오년 문과에 합격하였고, 다음은 필(泌)인데 행사과(行司果)요, 딸은 사맹(司猛) 신명수(申命壽)에게 출가하였다. 주(澍)가 좌의정(左議政) 한명회(韓明澮)의 딸에게 장가를 들어 삼남(三男)을 낳았는데, 종흡(從洽)은 돈녕부 첨정(敦寧府僉正)이요, 종옥(從沃)은 전생서 참봉(典牲暑叅奉)이요, 종호(從濩)는 진사시(進士試)에 장원하였다. 면(㴐)은 사용(司勇)정호(丁湖)의 딸에게 장가들어 2남(二男) 1녀(一女)를 낳았는데, 아들은 용관(用灌) 용개(用漑)요, 딸은 사과(司果)강학손(姜鶴孫)에게 출가하였다. 찬(澯)은 동지중추(同知中樞) 윤잠(尹岑)의 딸에게 장가들어 2녀(二女)를 낳았는데, 맏딸은 승사랑(承仕郞)정유강(鄭有綱)에게 출가하고, 다음은 무공랑(武功郞) 홍태손(洪泰孫)에게 출가하였다. 정(瀞)은 후령군(厚寧君)의 딸에게 장가들어 2남(二男)을 낳았는데, 영철(永澈)은 무공랑이고, 영홍(永洪)은 통사랑(通仕郞)이다. 준(浚)은 청주판관(淸州判官) 유수창(柳守昌)의 딸에게 장가들어 1남(一男)을 낳았는데 복순(復淳)이다. 형(泂)은 상장(上將)정보(鄭溥)의 딸에게 장가들어 2남 1녀를 낳았는데 아들은 광윤(光潤)ㆍ광택(光澤)이다. 필(泌)은 고산 현감(高山縣監) 윤삼원(尹三元)의 딸에게 장가들어 3남 2녀를 낳았다. 종흡(從洽)은 파평군(坡平君) 이암(李巖)의 딸에게 장가들어 3남 2녀를 낳았고, 종옥(從沃)은 종부시정(宗簿寺正) 이수치(李壽雉)의 딸에게 장가들어 1남을 낳았다. 강학손(姜鶴孫)은 2남 1녀를 낳았는데 아들은 영수(永壽)ㆍ향수(享壽)이고, 공의 측실(側室)에서 아들ㆍ딸 각각 하나를 두었는데, 아들은 결(潔)이요, 딸은 후궁(後宮)으로 뽑혀들어갔다. 명에 이르기를,

오직 우리 대동(大東)이
바다를 끼고 나라 되었네
냇물 흐르고 산은 솟아서
얼기설기 넓고 크네
바다랑 산이 빼난 기운 모여
특이한 인물을 내었구려
특이한 인물이 누구인가
세상을 울린 신하로세
총명하고 호매(豪邁)하여
호연(浩然)의 기를 지녔도다
도량은 우주를 포괄(包括)하고
학문은 인천(人天)을 꿰었구려
문(文)에 모훈(謀訓) 무(武)에 책략
왕좌(王佐)의 재주로세
한 세상을 수작하여
유인(游刃)처럼 익숙하도다
때 만나고 임금만나니
경륜을 전포(展布)하여
내란을 평정하고
큰 기업을 부식(扶植)했네
경륜하고 찬화(賛化)하여
어려운 시대를 건졌도다
두 번이나 일곡(日轂 나라를 비유하여 말한 것)을 붙잡아서
태청(太淸)에 올려놓았네
나라 운수 비색하더니
공을 인해 형통하고
다스리는 모든 법도가
공으로 말미암아 곧아졌네
나가면 장수 들어오면 정승
한 몸에 안위(安危)를 걸었네
덕화는 백성에게 흡족하고
위엄은 오랑캐를 진압하고
세 조정을 내리 섬겨
많은 공적을 세웠도다
산하(山河)로 맹서하며
정승을 삼고 작을 내렸네
공은 한 세대를 뒤덮고
지위는 백관의 으뜸이라
오랫동안 문형(文衡)을 맡고
질종(秩宗 예조(禮曹))까지 관장하니
예가 밝고 악(樂)이 갖추어
귀신과 사람이 화평하며
교화랑 습속이 아름다워
인의에 차츰 연마되었네
우리 나라 정치가
은(殷)ㆍ주(周)와 같다면
우리 공의 업적은
이윤(李尹)ㆍ부열(傅說)의 짝이라
덕이 후히 쌓였으니
남은 경사 더욱 깊네
하늘이 아들 낳을 길조를 내려
오직 아들이 많도다
팔룡(八龍)의 자취를 따라서
그 형에 아우로세
또한 여러 손자 있어
옥처럼 윤택하고 구슬처럼 밝아
계적(桂籍)에 이름을 함께 두고
운정(雲程)을 나란히 달리도다
주의(朱衣) 입고 상홀(象笏)드니
방가(邦家)의 영화로세
아, 아들이랑 손자가
많고 또 어진 것은
공의 꽃다운 덕이
상천(上天)에 격(格)한 때문
공은 세상을 떠났지만
덕은 오직 전해오네
이렇듯 소명하니 뒷사람이
어찌 힘쓰지 아니하랴
대대로 빛나는 그 덕이여
길이 선세와 부합하리
돌을 깎아 글월을 새겨
영원한 세대에 고하노니
지나는 이 눈물을 지으며
명덕(明德)을 생각하리

[주D-001]고명(誥命) : 천자의 조정에서 제후(諸侯)에게 작위를 하사하는 조고령(詔誥令)을 고명(誥命)이라 칭한다.
[주D-002]경적(耕籍) : 제적(帝籍)을 경직하는 뜻인데, 제적은 천신을 위하여 백성의 힘을 빌려서 농사짓는 밭임. 예기(禮記)월령(月令)에, “삼공(三公)ㆍ구경(九卿)ㆍ제후(諸侯)ㆍ대부(大夫)를 거느리고 몸소 제적을 경작하는데, 천자는 삼추(三推)ㆍ삼공은 오추(五推)요, 경ㆍ제후는 구추(九推)라.” [帥三公九卿諸侯大夫 躬耕帝籍 天子三推 三公五推 卿諸侯九推] 하였음.
[주D-003]삼사(三事) : 정덕(正德)ㆍ이용(利用)ㆍ후생(厚生)을 말한 것임.
[주D-004]조감(藻鑑) : 조경(藻鏡)과 같은 말인데, 선사(選士)를 밝게 관찰한다는 말임. 두보(杜甫) 상위좌상시(上韋左相詩)에 “지형유조감(持衡留藻鑑)” 이라 하였음.
[주D-005]윤색(潤色) : 《논어》 헌문(憲問)에, “동리(東里) 자산(子産)이 윤색하였다.” [東里子産 潤色之]하였는데, 본 바탕에 문채를 더한다는 뜻임.
[주D-006]중부(中孚) : 《주역》의 궤(卦) 이름인데, “하궤(下卦)는 태(台)요, 상괘(上卦)는 손(巽)으로 되어 신(信)이 중(中)에서 발하는 고로 중부라 이른다.” 하였다. 《주역》 중부 주석에 있다.
[주D-007]유인(游刃) : 《장자》 양생주(養生主)에 포정(庖丁)이 문혜군(文惠君)을 위하여 소를 잡는데 문혜군에게 말하기를, “신의 칼이 19년을 지내오는 동안에 소를 잡아 분해(分解)한 적이 수천 마리지만, 칼날이 새로 숫돌에 갈아 놓은 것 같습니다. 그 마디는 틈이 있고 이 칼날은 무디지 않으니 무디지 않은 칼로 틈이 있는 데를 찾아 들어가면 그 칼날을 놀리는데 있어 반드시 여지가 생깁니다.” 하였다. 그래서 맡은 일을 잘 처리하는 것을 유인(游刃)이라 한다.
[주D-008]팔룡(八龍) : 순숙(荀淑)은 동한(東漢) 영음인(穎陰人)으로 아들 순상(荀爽) 등 팔형제를 두어 모두 재명(才名)이 있으니 세상에서 순씨의 팔룡(八龍)이라 칭하였다.
[주D-009]계적(桂籍) : 과거(科擧)에 합격한 것을, “이름이 계적(桂籍)에 오른다.” 고 한다.

삼사(三事) :
정덕(正德)ㆍ이용(利用)ㆍ후생(厚生)을 말한 것임.
[주D-004]조감(藻鑑) : 조경(藻鏡)과 같은 말인데, 선사(選士)를 밝게 관찰한다는 말임. 두보(杜甫) 상위좌상시(上韋左相詩)에 “지형유조감(持衡留藻鑑)” 이라 하였음.
[주D-005]윤색(潤色) : 《논어》 헌문(憲問)에, “동리(東里) 자산(子産)이 윤색하였다.” [東里子産 潤色之]하였는데, 본 바탕에 문채를 더한다는 뜻임.
[주D-006]중부(中孚) : 《주역》의 궤(卦) 이름인데, “하궤(下卦)는 태(台)요, 상괘(上卦)는 손(巽)으로 되어 신(信)이 중(中)에서 발하는 고로 중부라 이른다.” 하였다. 《주역》 중부 주석에 있다.
[주D-007]유인(游刃) : 《장자》 양생주(養生主)에 포정(庖丁)이 문혜군(文惠君)을 위하여 소를 잡는데 문혜군에게 말하기를, “신의 칼이 19년을 지내오는 동안에 소를 잡아 분해(分解)한 적이 수천 마리지만, 칼날이 새로 숫돌에 갈아 놓은 것 같습니다. 그 마디는 틈이 있고 이 칼날은 무디지 않으니 무디지 않은 칼로 틈이 있는 데를 찾아 들어가면 그 칼날을 놀리는데 있어 반드시 여지가 생깁니다.” 하였다. 그래서 맡은 일을 잘 처리하는 것을 유인(游刃)이라 한다.
[주D-008]팔룡(八龍) : 순숙(荀淑)은 동한(東漢) 영음인(穎陰人)으로 아들 순상(荀爽) 등 팔형제를 두어 모두 재명(才名)이 있으니 세상에서 순씨의 팔룡(八龍)이라 칭하였다.
[주D-009]계적(桂籍) : 과거(科擧)에 합격한 것을, “이름이 계적(桂籍)에 오른다.” 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