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本貫)은 경상도(慶尙道) 진주목(晉州牧)이다. 증조(曾祖) 계함(繼咸)은 증 통정대부(通政大夫) 승정원좌승지 겸 경연참찬관(承政院左承旨兼經筵參贊官)이고, 증조비(曾祖妣)는 장수 황씨(長水黃氏) 증 숙부인(淑夫人)이다. 조(祖) 은성(銀成)은 증 가선대부(嘉善大夫) 이조참판 겸 동지의금부사(吏曹參判兼同知義禁府事)이고, 조비(祖妣)는 현풍 곽씨(玄風郭氏) 증 정부인(貞夫人)이다. 고(考) 여관(汝寬)은 증 숭정대부 의정부좌찬성 겸 판의금부사(議政府左贊成兼判義禁府事)이고, 비(妣)는 합천 이씨(陜川李氏) 증 정경부인(貞敬夫人)이다. 선생의 휘는 경세(經世)이고, 자는 경임(景任)이고, 호는 우복(愚伏)이다. 9대조 택(澤)이 상주목(尙州牧)의 판사(判事)로 있다가 떠날 때 아들 하나를 상주에 남겼는데, 그 후손들이 그대로 상주에 살았다. 그로부터 5대를 내려와 수의부위(修義副尉) 휘 번(蕃)에 이르러 비로소 상주의 남쪽 율리(栗里)에 터를 잡고 살았으니, 이가 바로 선생의 고조이다. 승지공은 총명하고 기억력이 뛰어나서 이소경(離騷經)을 세 번만 읽고도 줄줄 외었으나, 명성을 떨치지 못하고 일찍 죽었다. 참판공은 해박한 유학자로 명성을 날렸고, 찬성공은 올바른 행실로 향리(鄕里)의 존경을 받았다. 고 부제학 창석(蒼石) 이공(李公 이현영(李顯英))이 그 묘지(墓誌)를 지었다. 이 부인(李夫人)은 강양군(江陽君) 요(瑤)의 후손으로 학생 공가(公軻)의 따님인데, 부덕(婦德)을 두루 갖추었다. 가정(嘉靖 명 세종(明世宗)의 연호) 계해년(1563, 명종18) 9월 14일 신시에 선생을 율리 집에서 출산하였다. 선생은 어려서부터 자질이 특이하고 총명이 뛰어나서, 7세에 《십구사략(十九史略)》을 읽고, 8세에 《소학(小學)》을 읽었는데, 절반도 채 읽기 전에 문리가 터져서, 나머지는 모두 저절로 이해되었고, 붓을 들어 글을 쓰면 모두 사람을 놀라게 할 말들이었다. 또 속학(俗學) 이외에 힘쓸 곳이 있다는 것을 알고서, 종선여등(從善如登) 시를 지어 스스로를 권면하였다. 선생의 종조 복재공(復齋公)은 평소 시문(詩文) 감정(鑑定)에 자부하였는데, 선생이 지은 시를 볼 때마다 감탄하며 말하기를, “글귀마다 마치 꽃이 핀 것 같으니, 우리 가문을 크게 일으킬 사람은 반드시 이 아이일 것이다.”라고 하였다. 서애(西厓) 유 문충공(柳文忠公)이 상주 지사(尙州知事)로 있을 때 선생이 집지(執贄)하고서 학업을 청하자, 문충공이 한 번 보고서 특이하게 여겨 학문하는 방법을 일러주니, 선생은 그 가르침을 삼가 받아들여 마음에 간직하고 종신토록 감히 잊지 않았다. 16세에 향시(鄕試)와 해시(解試) 두 과시(科試)에 선발되었고, 20세에 진사시에 합격하였고, 24세에 알성과(謁聖科)에 급제하였는데, 모두 2등으로 합격하였다. 그리고 시장(試場)에서 지은 글은 모두 세상 사람들의 입에 회자(膾炙)되었다. 승문원 권지부정자에 보임되었다. 무자년(1588, 선조21) 여름에 천거로 예문관으로 들어가서 검열이 되었다가 얼마 되지 않아 대교(待敎)로 승진하였다. 하루는 성상께서 《시전(詩傳)》을 강론하다가 ‘위항(委巷)’의 뜻을 물으시니, 모든 강관(講官)이 대답을 하지 못하였다. 선생이 나아가 “이 말은 《예기(禮記)》 단궁(檀弓)에 나오는데, 누항(陋巷)이란 말과 같습니다.”라고 하니, 성상께서는 기뻐하였다. 선생이 물러나올 때 성상께서 선생의 뒷모습을 한참 바라보다가, 저 정모(鄭某)가 누구의 아들이냐고 물으셨다. 기축년(1589) 봄에 봉교(奉敎)로 올려 홍문록(弘文錄)에 참여시키고, 사가독서(賜暇讀書)하였으니, 대체로 가장 유망한 사람을 선발한 것이었다. 얼마 뒤에 성상께서 이조에 전교하여, 홍문관 정자의 결원을 보충하도록 재촉하니, 이조가 망(望 후보자(候補者))이 갖추어지지 않았다고 아뢰자, 성상께서 특명으로 선생을 정자로 삼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문신정시(文臣庭試)에 장원하여 특별한 성은을 입으니, 당시 사람들이 모두 영광으로 여겼다. 겨울에 정여립(鄭汝立)의 옥사(獄事)가 일어나자, 선생이 일찍이 사원(史苑)에 있을 적에 역적 정여립의 생질 진길(震吉)을 잘못 천거한 죄로 서원군(西原君) 한공(韓公 한준겸(韓浚謙))과 함께 하옥되었다가, 이내 사면되어 남쪽 고향으로 돌아왔다. 경인년(1590) 여름에 찬성공의 상(喪)을 당하여 너무 슬퍼한 나머지 몸이 파리해져서 거의 지탱하지 못할 뻔하였다. 임진년(1592) 여름에 섬오랑캐가 쳐들어오는 난리가 일어나서 열진(列鎭)이 와해되니, 선생은 약간의 동지들과 향촌(鄕村)의 군대를 모아서 매복해 왜적을 무찌르다가 갑자기 대부대의 왜적을 만나 화살을 맞고 벼랑으로 떨어졌고, 이 부인(李夫人)과 선생의 아우 주부공(主簿公)도 모두 해를 당하였다. 이 일이 알려지자 조정에서는 의병을 일으켜 적을 토벌한 것을 가상하게 여겨, 직급을 높여 예조 좌랑에 제수하였다. 그러나 선생은 진정소(陳情疏)를 올려 사직하고서, 양호(兩湖)를 두루 돌아다니며 병사와 군량을 모아서 오로지 원수를 갚고 적을 토벌하기만을 생각하였는데, 공산(公山)에 이르러 마마에 걸려 거의 죽게 되었다가 살아났다. 계사년(1593) 겨울에 성상께서 본도(本道)에 전교를 내려 감사로 하여금 선생에게 “조정으로 와서 사명(辭命 국가의 중요한 문서)을 짓는 일에 참여하도록 권하라.”라고 하였으나, 또 상소하여 사양하고 가지 않았다. 갑오년(1594)에 복(服)을 벗자, 조정에서 선생을 예조와 병조의 낭관에 제수하였다가, 이내 홍문관 수찬으로 고쳐 제수하고는 교서를 내려 부르니, 서울로 가서 사은하였다. 겨울에 사간원 정언에 제수되었다가 이내 다시 수찬으로 돌아왔다. 이때는 큰 난리를 겪은 끝이라서 성상의 근심이 깊으니, 선생이 입대(入對)하여 말하기를, “옛날에 위대한 정치를 한 임금들이 치도(治道)의 근본으로 삼은 것은 학문에 불과했습니다. 이른바 학문이란 선왕의 말씀을 답습하고 경전의 해석을 통달하는 것뿐만이 아니라 모름지기 사변(思辨)의 진실과 적루(積累)의 과정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 뒤에야 학문이 이로 인해 진보되고 마음이 이로 인해 밝아집니다. 이미 이 마음이 학문으로 인해 밝아진다는 것을 알았으면 또한 이 마음이 학문을 하지 않음으로 인해 어두워진다는 것도 알아야 합니다. 마음이 밝으면 광채가 널리 사물을 비추지만, 마음이 어두우면 시비도 분변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한갓 학문의 강명(講明)만을 일삼고 경(敬)에 힘쓰지 않으면 함양(涵養)의 근본이 되는 이 마음을 유지할 수 없습니다. 지금 전하께 위대한 정치를 할 뜻이 없는 것이 아닌데도 위대한 정치를 한 효과를 볼 수 없으니, 이 어찌 학문의 공부가 순성(純誠)하지 못하여 태홀(怠忽)한 사심(私心)이 끼어들어서가 아니겠습니까. 하늘이 큰 재앙을 내려 온갖 일이 다 무너졌으나, 전하께서 학문에 힘쓰시어 치도를 밝히신다면 이로 인해 오래 전해온 나라를 유신(維新)할 수 있거니와, 학문을 강명하지 않아 치도가 난잡해지면 국세(國勢)를 떨치지 못함이 더욱 심해질 것입니다.”라고 하였는데, 말의 뜻이 적절하고 말소리가 우렁차니, 성상께서 즐거운 모습으로 경청하였다. 이때 난리가 겨우 평정되었으므로 비로소 경연을 열어 《주역(周易)》을 강독하였다. 선생이 말씀하기를, “《주역》이 진실로 성학(聖學)의 정통(正統)이기는 하지만 그 뜻이 정미하여 이해하기 어렵고, 《춘추(春秋)》는 적을 토벌하는 의리를 밝힌 글이니, 난리를 평정해야 하는 오늘에는 이 글을 강구하는 것이 가장 합당합니다.”라고 하였다. 성상께서 정전(程傳)과 본의(本義)의 차이에 대해 묻자, 선생이 대답하기를, “획괘(畫卦) 이전의 역(易)은 기수(奇數)와 우수(耦數)가 아직 드러나지 않은 것이고, 복희(伏羲)의 역은 기수와 우수가 이미 드러난 것입니다. 《주역》을 읽는 자들은 다만 64괘를 가지고 문왕(文王)의 단사(彖辭), 주공(周公)의 효사(爻辭), 공자(孔子)의 십익(十翼)만을 알 뿐이고, 복희의 선천학(先天學)이 있다는 것은 듣지도 못했습니다. 그러다가 소자(邵子 소옹(邵雍))에 이르러 목수(穆修)와 이지재(李之才)의 학통을 이어 받아, 크게 발휘한 뒤에야 세 성인의 말씀이 모두 선천의 괘획에서 나왔다는 것을 비로소 알게 되었고, 이로 말미암아 역(易)의 본원(本原)이 밝아졌습니다. 주자(朱子)의 본의는 또한 이를 밝혔을 뿐이고, 정전은 비록 선천의 괘획을 해석하지는 않았으나, 의리가 정심하여 실로 은미하고 심오한 경(經)의 뜻을 드러내 밝혔으니, 이것이 정전과 본의의 차이점입니다. 학자의 입장으로 말하면 정전이 더욱 절실하다 하겠습니다.”라고 하였다. 성상께서 또 음양(陰陽)의 승강(升降)과 선악(善惡)의 길흉(吉凶)에 대해 묻자, 선생이 대답하기를, “양이 높고 음이 낮은 것은 분수의 떳떳함이요, 음이 상승(上升)하고 양이 하강(下降)하는 것은 기운의 교접입니다. 그러나 떳떳한 것은 비(否)가 되고 미제(未濟)가 되며, 교접한 것은 태(泰)가 되고 기제(旣濟)가 되니, 임금도 반드시 위에 있으면서 아랫사람을 가까이한 뒤에야 비로소 상하가 교통(交通)되어 세도의 통태(通泰)를 이룰 수 있습니다. 치도만 그러할 뿐이 아니라 수양하는 사람이 수기(水氣)로 화기(火氣)를 다스리는 것도 이와 같습니다.”라고 하고, 또 말하기를, “쌓인 양이 많아지면 점차로 군자가 되고, 쌓인 음이 많아지면 사람의 세계를 버리고 마귀(魔鬼)의 세계로 갈 것이니, 군자와 소인으로 갈라지는 것이 모두 여기에서 연유합니다. 대체로 양이 물(物)을 내고 음이 물을 죽이는 것은 조화가 대립하는 본체로서 서로 없을 수 없는 것이지만, 그 유(類)에는 선악의 구분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인이 역(易)을 지으실 적에 서로 없을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이미 건순(健順), 인의(仁義) 등으로 밝히셨고, 소장(消長)의 즈음과 선악의 구분에 대해서도 양을 귀하게 여기고 음을 천하게 여겨, 양을 부식(扶植)하고 음을 억제하는 데 마음을 다하지 않음이 없었으니, 길흉의 응보가 오로지 이에 있을 뿐입니다.”라고 하였다. 뒤에 성상께서 또 설시법(揲蓍法)에 대해 묻자, 선생이 내시(內侍)에게 나뭇가지를 꺾어 오게 하여, 손을 펴서 그 나뭇가지를 시초(蓍草) 대용으로 손가락 사이에 끼고서 별로 마음을 쓰지 않는 것 같았으나, 내어놓고 들여놓고, 많고 적은 수(數)가 한결같이 모두 선명이향합(先命而響合)하니, 성상께서 매우 놀라며 기이하게 여기셨다. 그러자 선생은 “이는 오묘하여 알기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라고 하고서, 그렇게 되는 까닭을 이치를 미루어 자세히 설명하니, 성상께서는 더욱 격려하고 칭찬하며, 국사(國士)라고 호칭하기까지 하셨다. 백사(白沙) 이 문충공(李文忠公 이항복(李恒福))도 강연(講筵)에서 물러나올 때마다 말하기를, “정모(鄭某)는 참으로 시강(侍講)에 적합한 인재이다.”라고 하였다. 을미년(1595) 봄에 시강원 사서ㆍ지제교를 겸임하였는데, 이때부터는 비록 다른 관직으로 옮겼어도 홍문관 수찬의 직명을 그대로 띠었다. 이때 선조(宣祖)는 상란(喪亂)을 겪은 데 염증을 느껴, 왕위(王位)에 있는 것을 즐겁게 여기지 않아, 광해군(光海君)에게 섭정(攝政)하도록 명하니, 선생이 동료와 함께 차자를 올려 강력히 간쟁해서, 윤허를 받아냈다. 여름에 병으로 체직하고서 전적이 되었다가 직강으로 승진하였는데, 얼마 되지 않아 다시 수찬으로 돌아와서 시강원 문학을 겸임하였다. 가을에 교리로 승진하여, 차자를 올려 뜻을 세우고 스스로 힘쓰기를 청하였는데, 그 대략에, “1려(旅)의 군대와 10승(乘)의 수레와 2성(城)의 땅으로도 오히려 죽을힘을 다해 살길을 찾아서 망해가는 나라를 보존하였는데, 하물며 지금 믿을 만한 인력(人力)이 저보다 몇 갑절뿐이 아닌 데이겠습니까. 다만 그런 뜻이 없는 것이 한스러울 뿐입니다.”라고 하니, 성상께서 “논한 바가 지극히 옳으니 깊이 경계하고 두려워하겠다.”라는 내용의 비답(批答)을 내렸다. 10월에 진정소(陳情疏)를 올려 성묘가도록 허락하기를 청하니, 성상께서 상소문의 내용이 매우 좋으므로 휴가를 주고 나서, 이어 정원에 전교하여 한 통을 등사해 올리라고 하였다. 11월에 조정으로 돌아와서 차자를 올려 자주 경연에 거둥하기를 청하였다. 병신년(1596) 봄에 이조 좌랑에 제수되었는데, 전형(銓衡)이 공정하여 어떤 사람을 위해 균형을 잃은 적이 없었다. 어사로 영남의 방수(防戍)를 순찰하였다. 얼마 되지 않아 교리에 제수되었다. 이때 성상께서는 《주역》 강독을 시작하고서, 이조에 전교하여 반드시 역학(易學)에 정통한 사람을 강관으로 갖추라고 하니, 해조(該曹)는 선생을 추천하여 왕명에 응대하고자 하였으나, 선생이 현재 전형하는 자리에 있기 때문에 곤란하게 여겼다. 그러자 성상께서 “전조(銓曹)의 낭관이야 누가 못하겠는가. 정모(鄭某)를 도로 강직(講職)에 제수하라.”라고 전교하였다. 그러므로 교리에 제수된 것이다. 《주역》의 강연이 끝나자, 성상께서 내구마(內廐馬)와 마장(馬粧)을 하사하니, 전문(箋文)을 올려 사은하였다. 이조 정랑으로 옮겨 교서관과 승문원의 교리를 겸임하였다. 정유년(1597) 봄에 서애(西厓)가 체찰사(體察使)로 선생을 불러 종사관(從事官)으로 삼으니, 선생은 상소해 본직을 그만두고서 복수의 일에만 전력하겠다고 청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가을에 의정부 검상에 제수되었다가 관례에 따라 사인으로 승진하였는데, 얼마 되지 않아 다시 교리로 돌아와서 필선을 겸임하였다. 이때 한산(閑山)을 지키지 못하여 왜적이 다시 움직일 조짐이 있자, 중외(中外)가 흉흉하니, 선생은 동료와 함께 차자를 올려 도성을 사수하여 인심을 안정시키기를 청하였다. 도로 사인에 제수되었다가 사헌부 장령으로 고쳐 제수되었다. 어사가 되어 영서(嶺西)를 순찰하고 조정으로 돌아와서는 분의군장(奮義軍將)에 임명되었는데, 본직을 사직하고서 사예에 제수되었다가 이내 다시 교리로 돌아왔다. 또 영서로 나가서 군량 운반을 재촉하였다. 겨울에 사간원 사간에 제수되었다가 이내 통정대부 승정원 동부승지로 승급하여 왕명(王命)을 받고 영남으로 가서 양 경리(楊經理)와 마 제독(麻提督)에게 문후하였다. 무술년(1598) 봄에 누차 이동하여 좌승지에까지 올랐다. 4월에 영남 방백(方伯)의 자리가 비자, 성상께서는 탑전(榻前)에서 선생을 기리키며, “이 사람은 재주와 국량이 있으니 감사로 임명해 보낼 만하다.”라고 하니, 대신이 찬성하였다. 이때 남쪽 지방은 새로 전쟁에 해를 입어 공사(公私)의 재정이 극도로 궁핍하였는데, 밖으로는 왜적의 진지가 강변과 해변에 연달아 있고, 안으로는 중국 군대가 호남과 영남 사이에 가득하였다. 선생이 속을 태우며 깊이 생각하여 자신의 재능과 정성을 다하여, 위엄이 드러나고 사랑이 흡족하니, 병사와 백성들이 모두 기뻐하였다. 당시의 의논이 바야흐로 애상(厓相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을 공격하면서 아울러 선생까지 침범하니, 선생은 스스로 불안하게 여겨 연달아 상소하여 사면을 청하였다. 겨울에 방백에서 체직되어 부호군에 제수되었다가 이내 청송 부사(靑松府使)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경자년(1600, 선조33) 봄에 영해 부사(寧海府使)에 제수되었는데, 겨울에 벼슬을 버리고 돌아오니, 마음대로 임지를 이탈한 죄로 파직되었다. 이듬해에 특별히 서용(敍用)되어 좌승지와 예조 참의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부임하지 않았다. 이때 선생은 거의 2년 동안 벼슬하지 않고 집에서 지내면서 동지들과 상의하기를, “유마힐(維摩詰 석가(釋迦)의 제자)은 벼슬이 있는 자가 아니었으되 남의 병을 자신의 병처럼 보았는데, 사람들에게 은택을 베풀려는 뜻을 가진 우리들이 어찌 동포를 구제할 것을 생각지 않아서야 되겠는가.”라고 하고서, 드디어 각각 돈을 내어 의국(醫局)을 설치해서 향리(鄕里)의 위급한 병자를 기다리기로 하고서, ‘마음을 애물(愛物)에 두라’라는 명도(明道 정호(程顥))의 말을 취하여 존애원(存愛院)이라고 이름하였다. 이윽고 교정청 당상으로 부름을 받았는데, 탄핵을 받았다. 전에 정인홍(鄭仁弘)이 향병(鄕兵)을 일으켜 의병이라 이름하고서, 왜적이 물러간 뒤에도 여전히 병사를 거느리고서 자신을 보호하고 있었으므로 병사들을 검속하지 않는다는 소문이 파다하였다. 선생이 우연한 기회에 들은 말을 이공 귀(李公貴)에게 말하자, 이공이 상소하여 정인홍의 죄를 논하면서 선생의 말로 증거를 삼으려 하니, 정인홍이 크게 원한을 품은 일이 있었다. 그런데 이때 정인홍이 헌장(憲長)이 되어, 가당치도 않은 비방을 날조하여 선생을 탄핵하니, 이공이 상소해 변호하였다. 사태가 이러하자, 선생은 더욱 세상일에 마음이 없어, 우복산(愚伏山)의 지형을 살펴보고는 바위와 골짜기가 기이하며 시내와 소(沼)가 깨끗하고 맑은 것을 좋아하여 그곳에 집을 짓고 살면서, 좌우에 도서를 쌓아 두고 침식까지 잊어가며 정밀히 연구하고 깊이 생각하였다. 그리고 간혹 수석(水石) 사이를 배회하며 스스로 체득한 정취를 시가(詩歌)에 드러내기도 하였다. 갑진년(1604) 겨울에 서용되어 부호군에 제수되었다. 선생은 “우리나라의 도학이 정포은(鄭圃隱)에서 비롯하고, 이퇴계(李退溪)에서 집대성되었다. 그 중간에 김한훤(金寒暄), 정일두(鄭一蠹), 이회재(李晦齋) 같은 여러 선생도 모두 수백 리 안에서 서로 뒤를 이어 나왔고, 상주는 또 영남의 상유(上游)에 위치하였다.”라고 하고서, 드디어 제생(諸生)과 상의하여 낙동강 가에 큰 서원 한 채를 세워 오현(五賢)을 합사(合祀)하고서 그 이름을 도남(道南)이라 하였는데, 선생이 지은 상량문에, “후세의 학자들로 하여금 도통의 맥이 이곳에 있다는 것을 알게 한다.”라고 하였다. 정미년(1607) 봄에 대구 부사(大邱府使)에 제수되었다. 이때 한강(寒岡) 정 문목공(鄭文穆公)이 이웃 고을의 수령으로 있었는데, 매양 “대구(大丘 동춘당)의 다스림은 성실하고 순박하여 겉치레가 없으니, 관리의 모범이 될 만하다.”라고 칭찬하였다. 무신년(1608) 2월에 선묘(宣廟)가 승하하고 광해(光海)가 즉위하였다. 선생은 구언(求言)으로 인해 수만 자의 소(疏)를 올렸는데, 큰 요지는 ‘백성을 구휼하는 실제는 백성들의 노역(勞役)을 경감하고 백성들의 생활을 넉넉하게 하는 데 있고, 이 두 가지의 근본은 또 절약과 검소에 있다.’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또 대궐 안이 엄숙하지 못하고 사로(仕路)의 혼탁이 선왕 말년에 극에 달하였으니, 시작을 바르게 하는 오늘을 당하여 두려운 마음으로 밝게 살필 것을 논하고, 또 새 정치의 빠뜨린 점을 논하였는데, 그 대략에, “삼가 살피건대, 전하께서 즉위하신 처음에 이조 판서를 임명한 것이 크게 공정한 도리를 벗어난 듯합니다. 이조 판서의 선발은 바로 대신(大臣)이 의망(擬望)하는 바이니, 그 사람이 의망에 끼지 않았으면 다시 의망하도록 명하고, 그래도 끼지 않으면 또다시 의망하도록 명하여, 반드시 그 사람의 성명을 본 뒤에 비로소 낙점(落點)했어야 합니다. 그런데 전하께서 자신의 의사를 개입시켜, 마음대로 올렸다 내렸다 한 것이 이처럼 심하셨습니다. 전하께서 원로(元老)를 맞이해 정승 자리에 앉히고서 스스로 몽복(夢卜)보다 훌륭하다고 하셨으니, 그렇다면 겉모습이 아닌 성심으로 존경하고, 의심하지 말고 전권을 맡긴 뒤에야 그 사람의 능력을 다 활용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전형관을 선택하는 큰 인사(人事)에 그의 말을 사용하지 않고 전하의 뜻대로 하셨으니, 만약 마음대로 하실 생각이었다면 만기(萬機)를 혼자 운용해도 충분한데, 무엇에 쓰려고 어진 정승을 두셨습니까. 전하께서 시작을 신중히 해야 하는 날에 이미 이처럼 교활한 수단을 부리셨으니, 후일의 근심을 어찌 이루 말할 수 있겠습니까. 전하께서 전대의 역사를 널리 보시고서 공사의 구분과 치란(治亂)의 원인에 대해 깊이 살펴셨으니, 인척과 측근들이 성상의 덕에 누를 끼친다는 것을 어찌 모르시겠습니까. 그런데도 그렇게 하시는 까닭은 새로 대위(大位)에 오르시어 상하의 마음을 잘 알 수 없기 때문에, 아득히 깊은 궁궐 안에 있다가 갑자기 위태롭고 의심스러운 변고를 당하면 어쩌나 하는 근심과 두려운 마음에 드디어 친근하고 신임하는 사람들을 널리 배치하여, 급난(急難)에 사용하고자 해서가 아니겠습니까. 전하께서 만약 혹시라도 이런 생각에서 그렇게 하신 것이라면 크게 잘못 생각하신 것입니다. 천지가 광대하여 가이없고 임금이 존귀하여 대적이 없는 것은 사심이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조정의 백관 중에 누가 전하의 사체(四體)가 아니며, 삼군(三軍)과 백성 중에 누가 전하의 적자(赤子)가 아니겠습니까. 피차를 구별하지 않고 한결같이 사랑하여 그들의 마음을 얻는다면 불행하여 급난을 만난다 하더라도 어느 누가 전하를 위해 목숨을 바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이렇게 하기를 생각지 않고, 도리어 친근하고 신임하는 몇몇 사람에게 의탁하고자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친근하고 신임하는 사람은 얼마 되지 않고 나머지는 모두 소원한 사람이니, 전하의 소유가 협소하지 않겠으며 전하의 형세가 외롭지 않겠습니까.”라고 하였다. 또 “천하의 온갖 변화는 임금의 마음에서 근본하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서경(書經)》 〈우서(虞書)〉에 이른 바 ‘정일집중(精一執中)’과 공자(孔子)께서 이른 바 ‘격치성정 극기복례(格致誠正克己復禮)’와 자사(子思)ㆍ맹자(孟子)가 이른 바 ‘명선성신(明善誠身)’은 사람들에게 힘쓸 방향을 제시한 것이 간절할 뿐만이 아닙니다. 전하께서 기업(基業)을 이어받아 지키게 되셨으니, 《서경》 〈소고(召誥)〉에 말했듯이 임금의 자리는 무한한 근심이 있으므로 덕을 닦아 하늘에 국명(國命)의 장구를 비는 것도 오늘에 달렸고, 국명을 실추시키는 것도 오늘에 달렸으니, 전하께서 어찌 안일에 빠지거나 자만하거나 덕을 공경하지 않거나 해서야 되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이 소(疏)가 들어가자 광해는 크게 노하여 다 읽어 보지도 않고 태워버리라고 명하였다. 그러고는 상소문의 말이 선왕조(先王朝)를 침범하였다는 핑계로 국문하려 하였다. 그러자 대신 이항복(李恒福) 등이 그 말이 비록 지나치기는 하나, 마음속에 지극한 충성을 품은 사람이 아니고서는 할 수 없는 말이라고 하니, 단지 관직만을 삭탈하였다. 6월에 직첩(職牒)을 환급하고, 8월에 서용하여 부호군에 제수하였다. 기유년(1609, 광해군1)에 동지사(冬至使)로 연경(燕京)에 갔다. 번방(藩邦)의 사신들이 천자를 알현하는 데는 품계에 따라 그 품계에 맞는 조복을 입는다는 조항이 《대명집례(大明集禮)》에 실려 있는데도, 전후의 사신들은 현단(玄端)과 반령(盤領)을 병용하였으므로 그 잘못을 그대로 인습하니, 선생은 “반령은 후대에 생긴 것이고, 현단은 바로 재복(齋服 재계할 때 입는 옷)이니, 조하(朝賀)하는 대례에 사용할 바가 아니다.”라고 하고서, 예부(禮部)에 정문(呈文)하여 조복으로 바꾸기를 청하였다. 그리고 또 병부(兵部)에 염초(焰硝)를 연례(年例)로 정해진 수량보다 늘려 무역하도록 허락하기를 청하였다. 이듬해 봄에 칙서(勅書)를 받들고 돌아오니, 광해는 크게 기뻐하며 가자(加資)를 명하였다. 상소하여 가자를 사양하였으나 허락하지 않고, 여름에 성균관 대사성에 제수하였다. 휴가를 받아 성묘하기 위해 향리로 돌아와서, 누차 사직소를 올리니, 체직하고서 부호군에 제수하였다. 그러나 선생은 조정에 있는 것이 싫어서 외직(外職)을 요구하여, 겨울에 나주 목사(羅州牧使)에 제수되었는데, 얼마 되지 않아 승급하여 전라도 관찰사에 제수되었다. 신해년(1611) 가을에 또 탄핵을 받았다. 이전에 오선생(五先生)을 이미 문묘(文廟)에 종사(從祀)하였는데, 정인홍이 상소해 막된 말로 양현(兩賢)을 헐뜯으니, 선생이 종사집례계첩(從祀執禮契帖)에 서문을 지으면서, “어째서 성대한 의전(儀典)이 거행되자마자 사악한 말이 돌아다니는가. 저 사람인들 어찌 병이(秉彝)의 천성(天性)이 없겠는가마는 오직 편벽된 소견이 앞에서 가리고 분노의 마음이 뒤에서 치받아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남을 시기하고 미워하는 행위를 하게 된 것이니, 이야말로 불쌍한 일로 노할 가치도 없다.”라고 하였고, 또 순창벽상(淳昌壁上)에 쓰여 있는 박눌재(朴訥齋)의 시를 차운(次韻)한 시에, “사납고 편벽된 심보로 성현을 말하니, 일란이 운기 때문임을 잘 알겠네.〔狠腹偏心說聖賢 一亂極知緣運氣〕”라는 글귀가 있으니, 정인홍이 매우 노하여 그 무리를 사주하여 선생을 중상하였다. 임자년(1612) 봄에 김직재(金直哉)의 옥사가 일어났을 때 선생까지 구인하여 감옥에 가두고서, 옥리(獄吏)를 시켜 선생 집안의 글들을 수색해 올리게 하였는데, 광해는 선생 집안의 평범한 서찰에도 임금을 언급한 곳이면 반드시 별행(別行)하거나 한 자를 올려 썼고, 비록 언문 편지라도 그러한 것을 보고는 좌우에게 말하기를, “이처럼 공경하고 삼가면서 어찌 역적을 돕는 자가 있겠느냐.”라고 하였다. 이때 선생의 장남 검열공(檢閱公)도 겨우 성동(成童 15세)의 나이로 함께 체포되었는데, 광해가 직접 “네 아비가 너에게 무슨 일을 가르쳤느냐.”라고 묻자, “충효(忠孝) 두 자만을 가르치셨습니다.”라고 대답하니, 광해는 더욱 기특하게 여겼다. 얼마 되지 않아 풀려났고, 가을에 가의대부(嘉義大夫)로 승급하였다. 이전에 우리나라가 세자 책봉을 청하는 주문(奏文) 가운데 임해군(臨海君)은 병이 있다는 말이 있었는데, 명(明)나라 장수를 접대할 때 임해군이 태연한 모습으로 어가를 수종(隨從)하려 하자, 선생은 그 당시 사간으로 수종하지 못하게 하라고 계청(啓請)한 일이 있었다. 이때에 이르러 광해는 임해를 죽이고서, 선생이 기미를 알고서 미리 판단한 공로가 있다 하여, 서차(序次)를 무시하고 직급을 올려 서용하라고 명하니, 선생이 상소해 고사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선생은 항상 이를 꺼림칙하게 여기다가 반정(反正)이 일어난 초기에 마침내 사정을 진달하여 이 품질(品秩)을 사판(仕版)에서 깎아내기를 청했다. 겨울에 동지중추부사에 제수되었다. 술사(術士) 이의신(李懿信)이 상소하여 교하(交河)로 천도(遷都)하기를 청하니, 광해는 갑자기 모든 재상에게 함께 헌의(獻議)하라고 명하였다. 선생이 헌의하기를, “반경(盤庚)이 박읍(亳邑)으로 천도한 것은 경도(耿都)가 황하(黃河)에 의해 무너지는 환난이 있기 때문이었고, 성왕(成王)이 낙읍(洛邑)으로 천도한 것은 조공(朝貢)의 거리를 균등하게 하기 위해서였고, 위 문공(衛文公)이 초구(楚丘)로 천도한 것은 적(狄)에게 멸망된 때에 있었으니, 이는 모두 매우 부득이한 데서 나온 대계였습니다. 신은 오늘날 무슨 부득이한 일이 있기에 천도를 의논하는지 모르겠습니다. 나라가 하늘에 국명(國命)의 영구를 비는 것은 덕을 닦는 데 달렸고, 사람이 높은 수명을 누리는 것은 심성을 수양하는 데 달렸을 뿐이니, 어찌 지리(地理)가 끼어들어 작용할 수 있는 바이겠습니까. 똑같은 장안(長安)인데 진(秦)나라는 도읍하여 국명이 짧았고, 한(漢)나라는 도읍하여 국명이 길었으니, 이것이 바로 지리와 무관하다는 천고의 밝은 증거입니다.”라고 하니, 이 일이 드디어 중지되었다. 이때 광해의 난정(亂政)이 날로 심해지니, 선생은 외직(外職)을 청해 강릉 부사(江陵府使)에 제수되어서는 금강산(金剛山)과 경포대(鏡浦臺) 사이를 소요하였다. 또 이곳의 풍속이 순박하고 성실한 것을 사랑하여, 먼저 교육한 뒤에 형벌을 시행하고, 고을의 젊은이들을 데려다가 예서(禮書)를 가르치니, 백성들이 즐겨 따랐다. 을묘년(1615, 광해군7) 가을에 또 심경(沈憬)이 죄가 없는 사람을 죄가 있다고 무고(誣告)하여 끌어들인 일로 체포되었다. 광해는 그 정상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고의로 판결을 늦추며 속전(贖錢)을 기다렸다. 그러자 문인이 후한(後漢) 위소(魏劭)의 일을 들어 한강 선생(寒岡先生)에게 물으니, 한강은 “해로울 것 없다. 옛사람 중에도 그렇게 한 분이 있으니, 바로 산의생(散宜生)이다.”라고 하였다. 선생은 이 소문을 듣고서 한강에게 편지하기를, “이는 오늘의 일과 다르다. 군자가 사람을 사랑하는 데는 덕을 이루도록 돕는 것이다. 만약 다시 그런 말을 한다면 다시는 얼굴을 보지 않겠다.”라고 하였다. 어떤 이가 선생의 자제에게 억울함을 송사하라고 권하자, 선생은 또 통렬히 금지하며 말하기를, “죽고 사는 것은 천명이니, 인력이 작용할 수 있는 바가 아니다.”라고 하였다. 오랜 뒤에야 비로소 보방(保放)되었다. 감옥에서 두 해 겨울을 보내는 동안 성현의 글을 가져다가 더욱 연구하고 체험하며 도를 즐겨 근심을 잊었다. 소암(疎菴) 임숙영(任叔英)이 누차 찾아와 보고서, 도라지를 보내며 전한 시에, “속은 누르고 겉은 희니 문질을 겸하였고, 처음엔 쓰고 뒤엔 다니 고락을 다 겪었네.〔中黃外白兼文質 始苦終甘慣險夷〕”라는 글귀가 있다. 병진년(1616) 겨울에서야 비로소 삭탈관직(削奪官職)하고서 방면(放免)하였다. 정사년(1617) 여름에 직첩(職牒)을 환급하고, 무오년(1618) 여름에 서용을 명하였다. 계해년(1623) 3월에 인조(仁祖)가 반정(反正)하고서 친정(親政)하여, 선생을 홍문관 부제학에 제수하고 교지를 내려 불렀다. 4월에 들어가 사은하고서 상소해 사양하니, 비답하기를, “경이 올라오기를 나는 날마다 바랐는데, 노고를 무릅쓰고 멀리 와 주니 나는 매우 기쁘다.”라고 하였다. 당시 조정의 의논은 의병을 일으킨 사람들을 위해 특별히 한 차례의 과거를 실시하고자 하였는데, 선생이 입대(入對)하여 그것은 구차하게 사정(私情)을 베푸는 것이라고 논하니, 성상께서 즉시 선생의 말을 따랐다. 또 말하기를, “맑고 깨끗한 정치를 하는 시초이니, 맨 먼저 내수사를 혁파하여 백성들에게 사심이 없다는 것을 보이소서.”라고 하였으나, 성상께서 따르지 않았다. 가뭄으로 인해 차자를 올렸는데, 그 대략에, “덕이 높아지고 공업이 진전되는 것은 항상 진실을 쌓고 노력을 오래한 뒤에 있고, 교화가 이루어지고 정치가 안정되는 것은 몇 해나 몇 달로 기약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니, 전하께서 덕을 닦고 뜻을 세우는 데 게으름이 없었다고 보장할 수 있습니까. 편당의 구습이 아직 남아 있어 동료끼리 화합하는 성과가 드러나지 않고, 세금을 징수하여 군비(軍備)를 확충하는 계획이 아직 정해지지 않아 진공(進攻)의 기약이 아득하니, 전하께서 현자를 구하고 계획을 정하는 데 게으름이 없었다고 보장할 수 있습니까. 심지어 가까운 경기에서 간사한 백성들이 법을 우롱하고, 삼엄한 대궐을 계집종들이 통행하기까지 합니다. 비록 요행을 바라는 무리를 억제했다고는 하나 때때로 총애의 길을 여는 조짐이 있고, 비록 간언을 잘 따른다고는 하나 간혹 준엄한 비답을 내리시니, 이렇고 보면 후일은 말할 것도 없이 전하께서 마음을 가지심이 이미 한 철이나 한 달 사이도 순일(純一)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선현이 이른 바 ‘세상에 드문 대공(大功)을 세우기는 쉽지만 지극히 작은 본심을 보존하기는 어렵고, 중원(中原)에 들어온 오랑캐를 몰아내기는 쉽지만 내 한 몸의 사욕을 제거하기는 어렵다.’라고 하였으니, 매우 두렵습니다. 오늘이야말로 참으로 전하께서 위대한 공업을 일으킬 수 있는 기회로 놓칠 수 없는 시기이니, 삼가 바라건대 굳은 신념으로 변치 말고 힘써 덕을 지켜, 일신의 사욕으로 공도를 해치지 말고, 안일로 태홀(怠忽)을 싹틔우지 말고, 목전의 성과를 서둘지 마소서. 끊임없이 이렇게 하신다면 자연히 성상의 덕이 날로 새로워지고 정치와 교화가 날로 높아질 것이지만, 만약 구습만을 따르고 방심해 지나쳐서, 점차 안일을 탐하여 세월을 허송하는 버릇이 생긴다면 뜻은 날로 나태해지고 기운은 날로 위축되어, 세월은 유수처럼 흐르는데 만사는 아득하여, 일찍이 품었던 뜻을 하나도 이룰 수 없을 것입니다. 그리된다면 다만 신등만이 전하를 위해 애석해할 뿐만이 아니라 천년 뒤에도 반드시 전하를 위해 한탄하는 자가 있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이 차자를 본 성상께서 “내가 즉위한 이후로 한 사람도 나의 허물을 말하는 자가 없었는데, 지금 이 차자의 말을 보니 나도 모르게 존경스러워 탄복하는 마음이 생긴다.”라는 비답을 직접 써서 내렸다. 고사(故事)에 옥당의 장관은 서차에 관계없이 입시하는 규례가 있으므로 연신(筵臣)이 합계(合啓)하여, “정모(鄭某)는 글을 읽고 덕을 수양한 사람이니, 자주 인견(引見)하소서.”라고 말하니, 성상께서 이 말을 따랐다. 그러자 선생이 차자를 올려 사양하니, 성상께서 칭찬하는 내용의 비답을 내리고, 특별히 쌀과 콩을 하사하였다. 이때 성상께서는 선생을 특별히 예우하니, 선생도 지우(知遇)에 감격하여 마음과 정성을 다해 섬겼다. 선생이 차분하게 계옥(啓沃)하여 임금의 총명을 개도(開導)함에는 반드시 선(善)을 개진하여 임금의 잘못된 마음을 바로잡는 것을 우선으로 삼았다. 그러나 선생은 평소 궁중에서 매우 삼갔기 때문에 기거주(起居注)가 열에 하나도 기록하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아는 사람이 드물었다. 하루는 성상께서 《논어(論語)》의 재여주침장(宰予晝寢章)을 강독하다가 집주(集註)의 ‘스스로를 버리는 것 중에 이보다 심한 것이 어디 있겠는가.〔自棄孰甚〕’라는 대목에 이르러 이르기를, “낮잠을 잔 것이 어찌 스스로를 버리는 데에 이르는가.”라고 하니, 선생이 대답하기를, “선유(先儒)의 말에 ‘게으른 생각이 조금이라도 생기면 이것이 바로 자포자기이다.’라고 하였으니, 그렇다면 반드시 크게 악한 짓을 한 뒤에야 스스로를 버리는 것이 되는 것이 아니고, 조금이라도 게으른 생각이 있으면 스스로를 버리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이런 글을 보실 때에는 ‘어찌 이에 이르겠는가.’라고 하지 마시고 더욱 두렵게 생각하시면 매우 다행이겠습니다.”라고 하였다. 성상께서 이르기를, “재여는 성문(聖門)의 우수한 제자인데 어째서 낮잠을 잤는가?” 하니, 선생이 대답하기를, “어떤 사람이 주자에게 묻기를, ‘정 선생(程先生) 문인들이 대부분 근엄하지 않은 것은 어째서입니까?’ 하니, 답하기를, ‘정 선생은 근엄하였으나, 그 문인들이 근엄하지 않은 것이 정 선생과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라고 하였습니다. 이로써 보면 학자는 모름지기 자신이 노력해야 하고, 그렇지 않으면 비록 성인과 함께 있어도 어찌할 수 없습니다.”라고 하자, 성상께서 그 말을 옳게 여겨 받아들였다. 이어 영남에 재주와 명망이 수용하기에 합당한 사람을 물으니, 선생이 장공 현광(張公顯光)과 유공 진(柳公袗)이라고 대답하였다. 얼마 뒤에 원자 사부를 겸임하였다. 이때 폐서인(廢庶人) 지(祬 광해의 아들)가 강화의 위리(圍籬)에서 땅굴을 파고 도망하니, 성상께서는 재신과 삼사로 하여금 그 처리 방법을 의론하게 하였다. 선생이 동료와 함께 차자를 갖추어 올렸는데, 그 대략에, “신등이 삼가 양사에 내리신 비답을 보니, 정녕 측은히 여기시는 간절한 말씀이 진정한 천리에서 나와서 인심이 편안히 여기는 바에 맞았고, 이해를 따지는 상정(常情)을 벗어나서 옛날 제왕들의 일에 부합하니, 이것이 바로 지선(至善)의 소재(所在)입니다.”라고 하였다. 대사헌 연평(延平) 이공(李公)이, 친족의 의리를 끊도록 건의한 양사의 요청에 대해 옥당이 동의하지 않았다 하여, 어전에서 대놓고 선생을 배척하니, 선생은 두 차례 상소하고 세 차례 고하여 체직을 청했으나 모두 허락하지 않고, 반령(盤領)과 탑호자(搭胡資)를 하사하니, 전문(箋文)을 올려 사은하였다. 얼마 되지 않아 예문관 제학을 겸직하도록 명하니, 사양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이때 바야흐로 광해가 올린 선조(宣祖)의 휘호(徽號)를 삭제하는 문제로 논의 중이었다. 선생이 진계(陳啓)하여 조(祖)까지 아울러 제거하기를 청하였는데, 그 대략에, “역대 제왕 중에 창업한 임금과 중단된 국통(國統)을 부흥시킨 임금만을 조(祖)로 칭하였습니다. 우리 선묘(宣廟)께서 비록 외적의 침입을 받기는 하였으나 즉시 수복하여, 국통이 중단된 일이 없었으니, 조로 칭하는 것은 합당하지 않습니다. 광해 초년에 조로 칭하려고 하자, 당시에 윤근수(尹根壽)가 의례(義例)가 없다는 내용의 차자를 올려 저지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뒤에 허균(許筠), 이이첨(李爾瞻) 등이 광해에게 존호(尊號)를 올리라고 청하자, 광해는 혼자 담당해 처리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겨, 다시 조로 칭할 것을 발의(發議)하였는데, 조정의 신하들이 한마디도 하지 않아서 드디어 그 일이 시행되었으니, 이는 지각이 없어 일을 함부로 처리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더구나 선(宣)이란 시호(諡號) 밑에 조(祖)를 붙여 칭하는 것은 마치 제왕가(帝王家)에서 사대(四代)를 추숭하여, 송(宋)나라에서 희(僖)ㆍ순(順)ㆍ익(翼)ㆍ선(宣)을 조로 칭하고, 우리나라에서 목(穆)ㆍ익(翼)ㆍ도(度)ㆍ환(桓)을 조로 칭한 것과 같고, 역대의 태조(太祖)나 세조(世祖)의 호칭과는 다르니, 존숭(尊崇)하는 것이 아닙니다. 공이 있는 이를 조로 칭하고 덕이 있는 이를 종(宗)으로 칭하는 것이니, 조와 종에는 애당초 높고 낮음이 없습니다. 이제 바야흐로 광해 때 올린 휘호의 삭제를 논의 중입니다. 만약 삭제한다면 사유를 갖추어 고묘(告廟)하는 예(禮)가 있어야 하니, 그때 조로 칭한 것이 의례가 없다는 뜻까지 아울러 고하고서 개정하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앞서 성상께서는 사묘(私廟)에 친제(親祭)하려 하므로 조정의 신하들이 축사(祝辭)에 호칭을 논의하였는데, 지평 박지계(朴知誡)는 사친(私親)을 받들어 예묘(禰廟)로 삼으라고 하였고, 사계(沙溪) 김 문원공(金文元公)은 정자(程子)가 한 선제(漢宣帝)와 사황손(史皇孫)을 논한 설을 이끌어, 사친을 숙(叔)으로, 성상을 질(姪)로 칭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였다. 선생은 “종통(宗統)의 대의(大義)는 진실로 엄격합니다. 그러나 주상께서 친손(親孫)으로 들어와 대통을 이으셨으니 이미 선묘(宣廟)를 고위(考位)로 여기지 않으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친을 고위로 삼는다 해도 고위가 두 분이 되는 혐의가 없으니, 고(考)라고만 칭하고 현(顯) 자를 붙이지 말고, 자(子)라고만 칭하고 효(孝) 자를 붙이지 않는 것이 마땅합니다.”라고 하였는데, 예조 판서 월사(月沙) 이공(李公)의 의논도 선생의 논의와 같았고, 수상(首相) 완평(完平) 이공(李公)과 여러 대신들도 모두 옳게 여겼으므로 조정의 의논이 드디어 결정되었다. 9월에 선생이 차자를 올려 8조(條)를 진달하였는데, 첫째는 큰 뜻을 세우는 것이고, 둘째는 성학(聖學)을 힘쓰는 것이고, 셋째는 종통(宗統)을 중시하는 것이고, 넷째는 효도와 공경을 다하는 것이고, 다섯째는 간쟁(諫諍)을 받아들이는 것이고, 여섯째는 시청(視聽)을 공평히 하는 것이고, 일곱째는 궁금(宮禁)을 엄격히 하는 것이고, 여덟째는 민심을 진정시키는 것이었다. 그중에 종통을 중시하라는 한 조항의 대략에, “남의 집에 들어가서 그 집의 후사가 된 자는 그 집의 아들이 되는 것이기 때문에 후사가 된 부모를 부모로 칭하고 그 부모가 죽으면 자최(齊衰)와 참최(斬衰)를 3년 동안 입으며, 본가의 생부모(生父母)를 백부나 숙부로 칭하고 부장기복(不杖期服)을 입으니, 이는 진실로 선대의 제사를 모시는 중책을 물려받은 의리가 매우 크고, 사물에는 근본이 둘이 있을 수 없고 집에는 존친(尊親)이 둘이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대통을 승계한 제왕으로 말하면 종묘사직의 중책을 물려받아 억조신민의 주인이 되는 것이니, 그 의리가 경사(卿士)의 집보다 천만배나 더 중대합니다. 그러므로 전대(前代)에 방계(旁系)로 들어가서 대통을 승계하고서 사친(私親)을 황제(皇帝)로 존봉(尊奉)한 제왕들이 모두 당시와 후세의 비난을 받았습니다. 송(宋)나라 영종(英宗)으로 말하면 사마광(司馬光), 범중엄(范仲淹), 여공저(呂公著) 등 제현(諸賢)의 도움으로 경전(經典)에 의거하고 정도를 지켜, 드디어 복왕(濮王 영종의 생부(生父))을 황백부(皇伯父)로 칭하였으니, 이는 예를 잘 지킨 아름다운 전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선묘(宣廟)께서 덕흥대원군(德興大院君 선조의 아버지)을 추숭할 때에도 이에 따라 시행하였으니, 이야말로 백왕(百王)이 지켜야 할 밝은 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의 사체(事體)는 이와 약간 다른 점이 있습니다. 전하께서는 선묘의 손자이니, 소(昭)와 목(穆)을 바꾸어서도 안 되고 조(祖)와 예(禰)의 호칭을 어지럽혀서도 안 됩니다. 이 때문에 조(祖)로만 칭하고 감히 고(考)로 칭하지 않은 것입니다. 전하께서 이미 선묘를 조로 칭하고 스스로 손(孫)으로 칭하였으니, 비록 생부(生父)를 고로 칭하고 스스로를 자(子)로 칭하더라도 해로울 것이 없습니다. 사마공(司馬公)은 ‘한(漢)나라 선제(宣帝)가 소제(昭帝)를 승계한 뒤에 그 생부를 높여 황고(皇考)라 하였으나, 감히 그 조부(祖父)를 높여 황조(皇祖)라고는 하지 않았다.’ 하였고, 여공저도 ‘선제는 형의 손자로 할아버지의 대통을 승계하였으므로 사황손(史皇孫)을 고(考)로 칭하여도 고가 둘이 되는 혐의가 없다.’ 하였는데, 이는 바로 오늘의 사정과 비슷하니, 밝은 전거로 삼을 만합니다. 지금은 비록 공론이 이미 정해져서 온 나라 사람이 한목소리를 내고 있지만, 후일에 성은(聖恩)을 바라고 총애를 굳히기 위하여 정자(程子)가 우려했던 것처럼 교묘하게 거짓말을 꾸며 속이는 자가 없으리라는 것을 어찌 보장할 수 있습니까. 이는 진실로 성명(聖明)의 세상에 우려할 바가 아닙니다만, 성명을 위하여 신의 우려스러운 점을 미리 말씀드리지 않을 수 없어서 이렇게 말씀드리오니, 전하께서 마음을 굳게 정하시고 밝게 살피소서.”라고 하였다. 이에 대해 성상께서는 “진열한 8조가 임금을 사랑하고 나라를 걱정한 충성이 아님이 없으니, 내 마음에 새겨 두고 스스로 살피겠다.”라는 비답을 내렸다. 이때 조정에서 바야흐로 선혜청(宣惠廳)의 설치와 호패법(號牌法) 실시가 편리한지에 대해 논의하니, 선생이 헌의하였는데, 그 대략에, “신은 항상 선혜청 공사(公事)는 절목이 번거롭고 잗달아서 간교한 무리가 용납되기 쉬우니, 장구히 시행할 수 없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신이 잘 알고 있는 상주(尙州) 한 고을을 가지고 논하더라도, 대동세(大同稅)는 1결(結)에서 거두는 것이 쌀, 콩, 인정포(人情布),쇄마가(刷馬價) 등 각종 세목을 합쳐도 1년에 대체로 포목 2필(匹) 남짓에 불과하니, 그렇다면 일부(一夫 세대주)에게 거두는 것이 대략 17필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지금 선혜청이 거두기로 한 것은 1결에 3필을 받기로 하였으니, 그렇다면 일부에게 24필을 거두는 것이어서 상년(常年)에 거두던 것에 비교하면 거의 삼분의 일이 더 많습니다. 외방(外方)의 백성들이 조정에서 백성을 이롭게 하는 정책을 강구 중이라는 말을 듣고는 모두 눈을 닦고 귀를 기울이며 날마다 혜택의 소식이 있기를 바라고 있는데, 도리어 삼분의 일이 증가된 부세를 내야 한다는 말을 듣는다면 반드시 놀라고 근심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의 생각에는 서서히 깊이 강구하여 시행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그리고 호패에 관한 한 가지 일은 반드시 시행해야 할 좋은 법이기는 하지만, 염려되는 바는 곤궁한 백성들이 아직 소생하지도 못하였는데, 갑자기 이런 영(令)이 내렸다는 말을 들으면 새와 물고기가 그물을 보고 놀라듯이 놀랄 염려가 없지 않다는 점입니다. 그러나 알아듣도록 잘 깨우쳐서 형편에 맞게 처리한다면 반드시 시행할 수 없는 데는 이르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또 병사와 농민을 구분해야 한다는 것은 논의하는 자들이 모르는 이가 없습니다. 그러나 반드시 병사와 그 처자에게 의식을 넉넉하게 지급한 뒤에야 훈련에 전념하게 할 수 있는데, 우리나라의 힘으로는 그 재정을 마련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고 힘이 미칠 수 있는 정도로만 병사를 뽑는다면 병사가 적어서 사용하기에 부족하니, 이렇게 하기도 어렵습니다. 이미 이렇게 할 수 없다면 오직 군보(軍保)를 주는 한 가지 일이 있을 뿐인데, 이 일은 전대부터 통용했던 규례입니다. 그러나 혹은 군보를 두기도 하고 혹은 없애기도 하여 군보에 결원이 생기는 즉시 보충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임진왜란(壬辰倭亂) 이후에는 그 제도가 더욱 무너져서 교련을 실시하였다는 말을 끝내 들을 수 없었으니, 우리나라의 무력이 강하지 못한 것은 전적으로 이에서 연유한 것입니다. 지금 착실히 행하고자 하면 반드시 먼저 호패법부터 시행하여 한정(閑丁 병역에 나가지 않은 장정)을 많이 찾아내어 결원을 보충한 뒤에야 병농(兵農) 분리를 논의할 수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딸을 출가시키는 일로 휴가를 청하였다. 성상께서는 본도(本道)에 명하여 혼수(婚需)를 지급하라고 하니, 선생이 사양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이때 성상께서 《대학(大學)》을 강독하려 하니, 추탄(楸灘) 오공(吳公)이 아뢰기를, “정모(鄭某)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것이 좋겠습니다. 갑자기 강론에 임하는 자와 오랫동안 마음에 두고 공부한 자와는 의미가 다릅니다.”라고 하니, 성상께서 그의 말을 따랐다. 윤10월에 조정으로 돌아왔다. 12월에 흰 햇무리〔白虹〕가 해를 뚫고 지나가는 천변(天變)이 생기자, 선생은 재변을 만났으니 경외(敬畏)하기를 청하는 차자를 올렸는데, 그 대략에, “천도(天道)는 의심할 것이 없고 재변은 헛되이 생기는 것이 아니니, 생각건대 깊은 대궐 안에 물러나 계시는 사이와 한적하게 홀로 계시며 멋대로 행동할 수 있는 곳에서 경외하는 마음이 해이해지고 안일을 탐하는 마음이 점점 자라난 것을 사람들은 모르지만 하늘은 이미 굽어살폈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옛사람의 말에 ‘한 마음이 선(善)하면 상서로운 구름이 일고 상서로운 별이 뜨지만, 한 마음이 악(惡)하면 사나운 바람이 불고 천둥이 치며 비가 쏟아진다.’라고 하였으니, 이 말로 미루어 보면 한 마음이 선하지 못하면 그것이 흰 햇무리를 부르고, 한 가지 일이 선하지 못하면 그것이 흰 햇무리를 부르는 것입니다. 비록 하늘이 인간을 꾸짖어 재변(災變)을 보인 것이 없어도 이미 두려운데, 하물며 있는 데야 더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자신을 깊이 반성하여 하늘에 대해 엄공(嚴恭)하고 외경하는 정성을 더욱 돈독히 하시어, 속에서부터 밖에까지와 은미한 일에서부터 드러난 일에까지 덕성(德性)이 항상 작용하고 물욕(物欲)이 행해지지 않도록 힘쓰시면 천지의 상서롭고 화목한 기운이 어찌 유(類)에 따라 응대하지 않겠습니까. 그리된다면 또 무엇 때문에 음기(陰氣)가 성해질 것을 걱정할 필요가 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이에 대해 성상께서 “마음속으로 스스로를 반성해 보건대 허물이 많으니, 하늘이 꾸짖음을 내리는 것은 당연하다. 차자의 말을 깊이 생각하겠다.”라는 비답을 내렸다. 이때 내수사 별제 양덕윤(梁德允)이란 자가 죄를 지어 형벌을 받게 되었는데, 성상께서 형벌을 면제하고 장(杖)을 치라고 명하자, 선생이 차자를 올려 논하였는데, 그 대략에, “형벌의 경중은 죄의 대소에 따라 저울로 물건을 달 듯이 알맞게 처리할 뿐입니다. 그러나 그 권한은 유사(有司)에게 있으므로 비록 임금이라 해도 그 사이에 사의(私意)를 개입시켜 경죄(輕罪)를 중죄(重罪)로 만들거나 중죄를 경죄로 만들도록 지시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예(禮)에 ‘임금은 허물이 없는 곳에 서는 자이다.’라고 하였으니, 오직 이와 같이 한 뒤에야 사람들을 바로잡을 수 있습니다. 모르겠습니다만 전하께서는 무엇 때문에 한 노예에게 관심을 두시어 스스로 허물이 없는 곳에 서려 하지 않으시고, 사물을 응대하는 자리에 있는 자로 하여금 성상의 사의에 구속을 받아, 왕실과 국가를 바로잡는 도리가 지극히 공평한 데서 나오지 않게 하십니까.”라고 하였다. 갑자년(1624, 인조2) 원일(元日)에 또 흰 햇무리가 해를 뚫고 지나가는 천변이 생기니, 성상께서는 죄를 자신에게 돌리고 신하들에게 직언(直言)을 구하는 수찰(手札)을 내렸다. 그러자 선생은 다시 수천 자에 달하는 차자를 올렸는데, 그 대략에, “일식(日蝕)과 월식(月蝕)이 비록 참혹하기는 하나 그래도 상도(常度)가 있지만, 무지개는 대기(大氣)가 조화를 이루지 못하여 생기는 재변으로 삽시간에 태양을 범하였으니, 하늘이 인간을 꾸짖어 재변을 보인 것이 이보다 심한 것은 없습니다. 한 번 생긴 것도 두려운데, 두세 번이나 생겼으며, 더구나 삼시(三始 세시(歲始)ㆍ월시(月始)ㆍ일시(日始))가 시작되는 때인 정월 초하룻날에 생긴 데이겠습니까. 이는 아마도 예측할 수 없는 화(禍)가 보이지 않는 곳에 잠복해 있는데도 사람들이 모르고 있기 때문에 하늘이 재변으로 성상의 마음을 크게 경동(警動)시키고자 해서인 듯합니다. 삼가 생각건대, 오늘날 민생이 새로 도탄에 빠져 초췌가 극심하여, 비교하자면 큰 병에 걸린 사람이 원기는 다 떨어지고 숨만 겨우 붙어 있는 것과 같으니, 침석에 편안히 누이고서 맛난 음식으로 봉양하여, 그 건강이 정상인처럼 완전하게 되기를 바라더라도 단시일로는 불가능한데, 더구나 그를 어지럽혀 감정을 흔들고 고통을 주어 기운을 고갈시킨다면 어찌 죽음을 면할 수 있겠습니까. 아, 하늘이 백성을 사랑하는 것이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것과 같으니, 부모의 마음은 자식이 근심하면 따라서 근심하고 자식이 기뻐하면 따라서 기뻐하는 것입니다. 오늘날의 일 가운데 백성을 괴롭히고 원망을 부를 만한 일들이 한두 가지가 아니니, 도탄에서 살아난 백성들이 성대(聖代)를 만나서 은택은 미치지 않고 힘부터 먼저 고갈되었습니다. 인정(仁政)을 바란 마음이 깊었기 때문에 원망이 돌아오는 것도 빠르니, 천상(天象)이 불안한 것이 이 때문이 아니라고 어찌 보장할 수 있겠습니까. 과거 병진년 정월에 이런 변괴가 여러 번 생겨 한 달 안에 8, 9차례 나타났을 뿐만이 아니었으니, 하늘이 경계를 고한 것이 간절히 반복해 고하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매하게 천상을 살피지 않았다가 끝내 하늘의 버림을 받았으니, 이로써 보면 천명은 틀림이 없다는 것을 더욱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지금 전하께서는 이미 하늘을 경외(敬畏)하는 마음도 있고, 또 진정으로 백성을 불쌍히 여기는 말씀도 계셨습니다. 그러나 또 반드시 인정(仁政)이 행사(行事)에 드러난 뒤에야 경외하는 마음이 실지로 시행되고 진정으로 불쌍히 여기는 말이 입으로만 은혜를 베푸는 것이 되지 않아서, 비로소 하늘이 인애(仁愛)하는 마음에 응답할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이괄(李适)이 군사를 일으켜 배반하여, 적의 예봉이 날로 급박하게 닥쳐오니, 선생은 삼사(三司)의 모든 관원으로 금중(禁中)을 숙직하며 지키게 하라고 아뢰고, 또 강도(江都)로 들어가는 것은 계책이 아니라고 논하니, 대가(大駕)가 마침내 남쪽으로 거둥하였다. 선생은 영남 검찰사(嶺南檢察使)의 명을 받고는 장계를 올려 북쪽으로 도망간 장수를 용서하지 말아 군대의 기율(紀律)을 진작시킬 것과 적을 한강에서 방어할 것을 청하였다. 그리고 조령(鳥嶺)을 넘은 뒤에는 원근에 통고하여 군대를 소집하고 군량을 모았다. 얼마 되지 않아 적이 토평(討平)되니, 3월에 복명(復命)하고서, 체직을 청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하루는 연평(延平)이 차자의 초고를 가지고 와서 보여 주었는데, 대의는 왕자 공(珙 선조의 일곱째 서자(庶子) 인성군(仁城君))의 이름이 적의 공초(供招)에 나왔으니, 일찍이 도모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이를 보고서 선생이 답하기를, “적의 공초에 이름이 나온 왕자(王子)가 공뿐만이 아니니, 반드시 차례로 놀라 두려워할 것이다. 성세(聖世)에 어찌 차마 다시 전일(前日 광해조(光海朝))처럼 성상의 골육들에게 두려움을 느끼게 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양사가 공의 죄상을 논해 처리하기를 청하였으나, 선생만은 종전의 의견을 지켜 변치 않았으니, 연평이 매우 노하여 끊임없이 욕설을 하였다. 그러자 선생이 상소해 면직시켜 주기를 청했는데, 그 대략에, “이귀(李貴)가 인성군(仁城君)을 방비해 엄중히 경계하고자 하는 것이 종묘사직을 염려하는 마음에서 나온 것이니, 신이 비록 사정에 어두운 부유(腐儒)이기는 하지만 어찌 감히 이 논의를 그르다고 하겠습니까. 다만 신이 염려하는 바는 예로부터 임금이 의심을 품고 있으면 반드시 참소하는 말이 편승하여 항상 의외에서 무한한 사변이 나왔다는 점입니다. 만일 후일에 난처한 일이 생겨 끝내 인성군을 보전할 수 없게 된다면 오늘 제신(諸臣)들이 완곡하게 거론하여 사변의 대처를 깊이 생각한 뜻이 도리어 허사가 되고 말 것이니, 그리된다면 성상의 덕에 손상을 끼침이 어찌 크지 않겠습니까. 신하가 임금을 섬김에는 자신의 마음만을 다할 뿐, 마음을 어기고 맹종하여 구차히 남의 비위를 맞추어 세상에 아첨해서는 안 됩니다. 신은 평소에 마음속으로 이렇게 하는 것은 수치라고 여겼습니다.”라고 하였다. 연평이 즉시 또 차자를 올려 공격하니, 성상께서는 “경의 말은 너무 지나치다. 남과 화목하게 지내되 뇌동(雷同)하지 않는 것이 군자의 일이니, 옥당장관(玉堂長官 우복(愚伏))은 군자라고 할 수 있다. 임금을 허물이 없는 곳으로 들여보내고자 하여 남의 말에 꺾이지 않았으니, 그 뜻이 훌륭하지 않은가.”라고 하였다. 그러자 연평이 또 차자를 올려 더욱 급박하게 공격하니, 선생은 본래 그와 서로 논쟁하고자 하지 않았으나, 사태가 이에 이르자 부득이 교외(郊外)로 나가서 차자를 올려 견책을 청했다. 이에 대해 성상께서 “내가 경의 충직(忠直)을 아름답게 여긴 지가 오래이니, 이귀가 아무리 많은 말을 하더라도 내가 어찌 그의 말을 듣고서 믿을 리가 있겠는가. 조정에서도 반드시 이귀를 그르게 여기고 경을 옳게 여길 것이니, 경은 나의 뜻을 헤아리라.”라는 비답을 내렸다. 선생이 또 차자를 올려 진정(陳情)하였는데, 그 대략에, “저 인성군의 죽고 사는 것이 조정의 신하들과 무슨 관계가 있겠습니까만, 실상이 드러나기 전이므로 모든 신하가 다 죽이는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이는 바로 충심(衷心)으로 전하를 사랑하기 때문이지, 어찌 저 인성군에 대해 조금이라도 사사로운 뜻이 있어서이겠습니까. 광적으로 나라를 근심하는 이귀조차도 반드시 보전시킬 것으로 말하는 것은 그 마음도 이와 같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무엇 때문에 자기의 마음으로 다른 사람의 마음을 헤아려 다른 사람의 마음도 자기의 마음과 같다고 여기지 않고서, 공을 세우려 한다고 남을 의심한단 말입니까. 옛사람의 말에 ‘부귀로 이름을 얻기는 쉽지만 명예와 절개를 보전하기는 어렵다.’라고 하였고, 또 ‘초년(初年)의 절개를 보전하기는 쉽지만 만년(晩年)의 절개를 보전하기는 어렵다.’라고 하였으니, 신이 만약 얼굴을 들고 다시 들어가서 남의 웃음거리가 된다면 평생 지켰던 명예와 절개를 다 버리는 것이니, 어찌 슬프지 않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이에 대해 성상께서 “경은 나의 뜻을 헤아려 서로 다투지 말라.”라는 비답을 내리고서, 강연에 입시하라고 재차 불렀으나, 선생은 다 나아가지 않고서, 물러나기를 더욱 강력히 청했다. 선생을 발탁해 사헌부 대사헌에 제수하자, 선생은 누차 상소해 간절히 사양하였으나, 모두 허락하지 않았다. 선생은 또 받아들이기 어려운 이유를 자세히 진달하였는데, 그 대략에, “일찍이 주자(朱子)의 말을 듣건대 ‘사대부의 사수(辭受)와 출처(出處)는 일신(一身)의 일일 뿐만이 아니어서, 그 처신의 잘잘못이 풍속의 성쇠에 관계되니, 더욱 삼가지 않아서는 안 된다.’라고 하였는데, 신은 일찍이 폐조(廢朝 광해조)에서 보고서 이를 실증하게 되었습니다. 폐주(廢主)는 물리치고 싶지 않은 사람은 아무리 세상의 비난을 받아도 사피(辭避)를 허락하지 않고, 그 신하가 된 자도 은총을 탐하여 편안히 있으며 물러나지 않았습니다. 일부(一夫 한 사람)가 솔선하자 모든 사람이 본받아서, 눈에 익고 귀에 젖어 점점 풍습이 되어 끝내 염치는 쓸은 듯이 없어지고 이욕만이 가득하여, 나라가 의지할 곳이 없게 되었던 것입니다. 지금은 조정이 깨끗하고 관료들이 서로 사양하니, 염치를 잊고 함부로 나오는 자가 한 사람도 없는데, 전하께서 신을 일부(一夫)로 만들어 무치(無恥)의 풍습을 인도하려 하시니, 아, 전하께서 신을 대우함이 박하지 않습니까. 공자(孔子)께서 ‘삼군(三軍)의 장수는 빼앗을 수 있으나, 필부(匹夫)의 뜻은 빼앗을 수 없다.’라고 하였으니, 신은 이 직임에 끝내 감히 나아갈 수 없습니다.”라고 하니, 성상께서 비로소 체직을 허락하였다. 그러자 선생은 즉시 배 한 척을 사서 타고 남쪽으로 돌아갔다. 이날 도로 부제학에 제수하니, 두 차례 상소해 사양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내 승정원 도승지에 제수하고서 준엄한 교지(敎旨)를 내려 급히 부르니, 선생은 한결같이 거부하는 것은 신하의 도리에 온당치 못한 일이라고 여겨, 8월에 조정으로 돌아왔다. 성상께서 선생을 인견(引見)하여 위로의 말을 하고, 이어 분부하기를, “경이 사직도 하지 않은 채 떠난 것이 예에 맞는 일인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나니 나는 매우 부끄러웠다.”라고 하니, 선생이 사죄하기를, “신은 대사헌에서 이미 체직되고 아직 다른 관직에 제수되기 전에 떠났습니다. 전임관이 조정에 하직 인사를 올리는 도리가 어디에 있습니까.”라고 하고서, 이어 아뢰기를, “왕명(王命)의 출납(出納)을 성실히 하는 것이 승정원의 임무입니다. 송(宋)나라의 이항(李沆)은 ‘임금의 명에 부당한 바가 있으면 신 항은 불가하다고 하고서, 즉시 그 명을 반송하겠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지금 천년이 지난 뒤에도 그 임금과 신하가 어떠했는지를 볼 수 있으니, 성상의 전교에 만약 미진함이 있다면 신 역시 감히 반송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라고 하니, 성상께서 감동하는 기색을 보였다. 선생이 관직에서 떠난 뒤에도 성상은 더욱 계옥(啓沃)의 성과를 생각하여, 때때로 특별히 강연(講筵)으로 불러들여 토론하였다. 9월에 전교하기를, “정모(鄭某)가 일찍이 《논어》 한 질을 시강(侍講)할 적에 마음을 다해 변론하였다. 옛말에 ‘선한 말에 대해 보답하지 않음이 없다.’ 하였으니, 특별히 한 품계를 올려주라.”라고 하니, 선생은 상소하여 개정하기를 청하고, 또 말하기를, “신이 이 일로 인해 의견을 올리기를 원합니다.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천승(千乘)의 나라를 다스리되 재용(財用)을 절약하여 백성을 사랑하며, 일을 공경하여 미덥게 하며, 백성을 농한기에 사역(使役)하라.’ 하셨으니, 성인이 나라를 다스리는 도리는 그 요체가 여기에서 벗어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중간에 공경〔敬〕하라는 한 가지 일이 다섯 가지의 근본이 되니, 임금이 더욱 소홀히 할 수 없는 바입니다. 신이 생각건대, 성상께서는 경(敬)에 대해서 힘이 이르지 않은 곳이 약간 있는 듯합니다. 대체로 시행하고 호령하는 사이에 조금이라도 삼가지 않으면 경이 아니고, 반드시 방자하게 멋대로 한 뒤에야 불경(不敬)이 되는 것이 아니니, 삼가 바라건대 순일(純一)한 마음으로 공을 쌓아 궁극에까지 도달하여, 성상의 은택을 입은 온 나라의 신민들로 하여금 모두 전하의 학문의 공이 그렇게 만든 것임을 알게 한다면 경연의 말석에 참여한 신도 함께 영광이겠습니다.”라고 하였다. 성상께서 이에 대해 “소(疏) 말미에 진술한 것은 실로 격언(格言)이니, 내 마땅히 깊이 생각하겠다.”라고 비답하였다. 참봉 이의길(李義吉)이 상소하여 사친(私親)을 추숭하라고 청하니, 선생이 아뢰기를, “국가의 막중한 전례(典禮)에 대해 대신과 예관(禮官)이 참작해 옳고 그름을 가려 결정한 것이 상세하여 미진한 점이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한 종류의 다른 의논이 박지계(朴知誡)의 상소에서 처음으로 나왔습니다만 대체로 묘향(廟饗)하고자 하는 의사가 강렬하면서도 감히 공공연히 말하지는 않았는데, 지금 이의길은 직선적으로 ‘전하의 종묘는 전하의 부(父), 조(祖), 증조, 고조를 위해 설치한 것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묘침(廟寢) 낭무(廊廡)의 비유에 이르러서는 더욱더 이를 것이 없으니, 신등은 이런 망론(妄論)이 이미 결정된 뒤에 성상의 귀를 현혹시킬 수 없다는 것을 잘 압니다만, 조금은 우려스러워 감히 그의 상소를 접수하여 함부로 올릴 수 없으므로 감히 이렇게 진달합니다.”라고 하였다. 10월에 천둥이 치고 비가 내리자, 선생이 아뢰기를, “아비가 노하면 그 자식은 더욱 공경하고 더욱 효도하여 반드시 허물이 있는 사람이 되지 않고자 합니다. 자식이 효도를 지극히 하면 아비는 반드시 노하지 않습니다. 이로써 미루어 보면 하늘의 뜻이 진실로 있는 곳이 있으니, 바라건대 전하께서 하늘에 대한 공경을 더욱 돈독히 하여 삼가고 또 삼가시어, 정사를 처리하는 즈음과 명령을 내리는 사이에 조금도 방심하여 지나치는 일이 없게 하소서. 옛사람이 이른 바 ‘방심한다 해서 무엇이 해로우랴 하지 말라. 그 화(禍)가 점점 자라고 커질 것이다.’라는 말을 가슴에 새겨 잊지 마시고, 경외(敬畏)하는 마음을 조금도 게을리하지 마시어, 공구수성(恐懼修省)의 근본으로 삼으소서.”라고 하였다. 11월에 세 차례 고하여 체직을 청했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을축년(1625) 1월에 우부빈객(右副賓客)을 겸직하였다. 세자가 관례(冠禮)를 행하려 할 때 선생이 세자의 명에 따라 도식(圖式)을 만들어 올렸다. 그 공로로 예를 마친 뒤에 한 품계를 올려주었다. 이에 선생이 상소하여 사양하니, 성상께서 “경이 원자(元子) 교육을 지성으로 하는 것을 보고 나는 가상히 여겨 감탄한 지 오래이니, 사양하지 말라.”라고 비답하였다. 그러나 선생은 정2품으로 도승지(都承旨)가 되는 것은 구례(舊例)가 아니라는 이유로 체직을 청했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3월에 검열공(檢閱公 우복(愚伏)의 장자 정심(鄭杺))의 요사(夭死)로 인해 상소하여 영구(靈柩)를 호위하여 남쪽으로 돌아가기를 청하니, 성상께서 답하기를, “정심(鄭杺)이 끝내 죽었으니, 나도 매우 애석하다. 해직을 비는 경의 마음이 지극한 정에서 나왔겠지만, 자식의 상(喪)에 아비가 해직하는 것은 실로 법례가 아니니, 감정을 억제하고서 나의 기대에 부응하라.” 하였다. 세 차례 고한 뒤에야 비로소 체직을 허락하였다. 여름에 대사헌에 제수되자, 두 차례 차자를 올려 사양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오래지 않아 갈리어 지중추부사가 되었다. 7월에 조상의 무덤을 수축(修築)하기 위해 휴가를 얻어 귀향하기를 청하니, 요전상(澆奠床 무덤에 올리는 제물(祭物))을 지급하라고 명하였다. 다시 대사헌에 제수하였다가 의정부 우참찬으로 바꿔 제수하고, 9월에 형조 판서에 제수하니, 상소해 사정을 진달하고서 사직하였다. 겨울에 검열공의 장례를 마치고 조정으로 돌아오는 도중에서 대사헌에 제수되었다. 서울로 들어와서 사은숙배할 때 궁가(宮家)들이 독점하고 있는 연해 어염(魚鹽)의 이익을 혁파할 것과, 사대부들이 뇌물로 청탁하는 폐단을 엄금할 것과, 내수사 노비에게 급복(給復 호역(戶役)을 면제함)하지 말 것을 청하였다. 병인년(1626) 1월에 성상께서는 인헌왕후(仁獻王后 인조(仁祖)의 모후(母后))의 상을 당하여 삼년복을 입고, 모든 상례의 제도를 한결같이 국장(國葬)의 의식에 따라 행하고자 하니, 선생이 모든 관료를 이끌고 복합(伏閤)하여 논계(論啓)하였는데, 그 대의는, “사부가(士夫家)로 말하면 출계(出繼)라고 하고, 제왕가(帝王家)로 말하면 입승대통(入承大統)이라 합니다. 전하께서는 별파(別派 지파(支派))를 계승한 종친으로 자전(慈殿)의 명을 받고 들어와서 대통을 이어, 선조(宣祖)의 후사가 되셨으니, 그 사체의 중대함이 사부가의 출계한 사람보다 천배 만배 중대할 뿐만이 아니니, 어찌 사친(私親)에게 정을 펼 수 있겠습니까. 존조(尊祖)는 의리이고 친친(親親)은 은혜이니, 의리가 있는 곳엔 은혜는 굽히는 바가 있고, 압존(壓尊)되면 사사로운 은혜를 펼 수 없는 것입니다. 성상의 전교에 ‘능원군(綾原君인조(仁祖)의 동생)이 출계하였으니, 이 상(喪)의 상주가 될 수 없다.’라고 하신 말씀은 더욱 큰 실언으로 인심을 승복시킬 수 없습니다. 의안군(義安君 선조의 셋째 아들)의 후사가 된 능원군이 출계를 취소하고 본종(本宗)으로 돌아와서 본친(本親)의 상주가 될 수 없다면 선조대왕의 후사와 종묘사직의 주인이 되시어, 사방 만민의 추대를 받는 전하께서 도리어 상장(喪杖)을 짚고서 사친의 상차(喪次)로 가시어 상주의 일을 대신 행하셔야 하겠습니까. 과연 그렇게 하신다면 선유(先儒)의 말처럼 사친은 후대하고 종통(宗統)은 박대하는 것이어서, 당시의 비난과 후세의 비웃음을 모두 면할 수 없을 것이니, 서둘러 능원군에게 명하시어 상주 노릇을 하게 하시고, 전하께서는 스스로 부장기(不杖期)의 예제(禮制)를 행하소서. 그리고 국장으로 오해될 수 있는 모든 일도 아울러 다 정폐(停廢)하소서.”라고 하였다. 모두 30여 차례를 아뢴 글이 모두 선생의 손에서 나왔는데, 문장을 다듬지 않았으되 나올수록 더욱 신기하니, 당시 사람들이 모두 부러워하고 감탄하며, 글을 읽어 옛일을 고찰한 힘이라고 하였다. 성상은 뜻을 굽혀 장기(杖期)를 따르고 나머지는 모두 윤허하지 않았다. 그러자 선생은 말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는 이유로 인피(引避)하였는데, 얼마 되지 않아 갈리어 동지중추부사에 제수되었다. 2월에 차자를 올려 상례에 대한 6조를 진술하였는데, 그 끝에, “신이 보건대 전하께서 근년 이래로 자신의 의견을 버리고 남의 좋은 의견을 따르는 덕이 점점 처음만 못하십니다. 그런데 상을 당하신 뒤로는 또 지극한 정에 가리어 말을 듣는 사이에 드러나게 동의(同意)를 좋아하고 이의(異意)를 싫어하는 마음이 있으십니다. 임금이 높은 자리에 계시면서 맹렬한 위엄을 가지고서 동의를 좋아하고 이의를 싫어하는 마음으로 행동하신다면 하고 싶은 대로 하더라도 아랫사람이 감히 거스르지 못할 것이니, 전하의 사심(私心)에는 맞겠지만 단정한 군자는 날로 멀어지고 아첨하는 말만이 날로 나와서 끝내는 나라가 망하는 데 이르게 된다는 것은 어찌 생각지 않으십니까. 신이 진달한 천 마디 백 마디 말 중에 한 마디나 반 마디도 전하의 의견에 구차히 찬동한 것이 없으니, 진실로 전하의 마음을 즐겁게 해드리지 못하고 전하의 마음을 괴롭혔을 뿐임을 잘 압니다. 그런데도 이렇게 끊임없이 말씀드리는 것은 실로 전하의 사심(邪心)을 막고 전하의 잘못을 바로잡도록 돕기 위한 정성에서 나온 것이니, 전하께서는 마음에 거슬린다 하여 나무라지 마소서.”라고 하였다. 그러자 성상께서는 직접 써서 비답하기를, “경이 올린 차자의 말을 보건대 경(經)에 의거하고 예를 인용하여 반복해 논란하였으니, 예학(禮學)을 전공하여 강습한 바탕이 있다는 것을 충분히 알겠다. 나는 전일에 성질이 자포자기하기를 좋아하여 학문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지금 예(禮)에 관한 논쟁을 만나매 마치 얼굴을 담에 대고 있는 것 같으니, 부끄럽고 후회스럽기 그지없다. 그러나 내키지는 않지만 강쇄(降殺 등급을 낮춤)하라는 요청만은 따르겠다. 부재모상(父在母喪)의 예(禮)로 논하면 상장(喪杖)을 짚고 상차(喪次)에 나아가는 것이 무슨 잘못이 있는가. 이 밖에 논한 바에 대해서도 깊이 생각해 보겠다.” 하였다. 당초에 완성부원군(完城府院君) 최명길(崔鳴吉)이 박지계(朴知誡)의 설을 부연하여 삼년복상론(三年服喪論)을 주장하니, 선생이 편지를 보내어 그 잘못을 꾸짖고, 또 차자를 올려 단락마다 그 말의 오류를 변론하였으나, 최명길은 끝내 자신의 주장을 철회하지 않았다. 이때에 이르러 선생의 차자 중에 소루(疏漏)한 곳이 있는 한 조항을 들어, 차자를 올려 공격하니, 선생은 부득이 자책(自責)하는 차자를 올렸다. 그리고 또 원호(園號)를 의론하는 차자를 올리니, 성상께서는 칭찬하는 비답을 내렸다. 이윽고 대사헌에 제수되고, 특별히 부제학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사양하여 체직되었다. 겸 지의금 동지경연에 제수되었다. 이때 황태자(皇太子)의 탄생으로 한림원 편수(翰林院編修) 강왈광(姜曰廣)과 공과급사(工科給事) 왕몽윤(王夢尹)이 조사(詔使)로 우리나라에 와서 조서를 반포하였다. 이때 선생이 찬례(贊禮)로 입시하였는데, 진퇴읍양(進退揖讓)이 예의와 법도에 맞으니, 온 조정이 모두 발돋움하고서 구경하였다. 이 임무를 맡은 것이 전후에 모두 네 번이었는데, 조사를 모시고 한강과 양화진(楊花津) 등 여러 곳에서 놀이를 하며 서로 주고받은 시가 있다. 오래지 않아 대사헌에 제수되어 수천 자의 차자를 올렸는데, 그 대략에, “삼가 생각건대, 전하께서 근심하고 괴로워하시며 다스려지기를 바란 지가 지금 4년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점점 신장되어야 할 정치에 필요한 예악법도(禮樂法度)가 날로 진보하는 것은 볼 수 없고 날로 퇴보하는 것만을 볼 수 있을 뿐입니다. 전하께서 반정(反正)하시어 옛것을 개혁하여 새롭게 만드시던 초기에 신민들이 고무되고 감동하여 전하에 대한 기대가 어떠하였으며, 전하께서 노력하고 분발하여 스스로에 대한 기대가 어떠하였습니까. 그런데 오늘에 성취하신 것이 고작 이 정도이니, 신만이 전하를 위해 애석해할 뿐만이 아닙니다. 신이 삼가 생각하기로는 전하께서도 한가로이 일 없이 계실 때나 한밤중 잠을 이루지 못하실 때에 반드시 깊이 생각하고 개탄하시며 근심하고 두려워하고 계실 줄로 압니다. 그러나 신민을 고무진작시키는 전기(轉機)는 전하의 한 마음에 달렸으므로 감히 성실이란 한마디 말을 오늘의 처방으로 삼은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대해 성상께서 “차자의 말이 모두 격언이니, 내 감히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고치기를 생각지 않겠는가. 근래 상사로 인한 슬픔과 괴로움으로 인해 어진 사대부를 접견하지 못하다 보니, 잘못이 날로 쌓이는 것이 진실로 이 때문이다.”라고 비답하였다. 대사헌에서 교체되어 부호군에 제수되었다. 분황(焚黃)으로 휴가를 받아 미처 떠나기도 전에 다시 대사헌에 제수되니, 사양하여 체직되었다. 얼마 되지 않아 부제학에서 다시 대사헌으로 돌아왔다. 이때 전시(殿試)에서 취사(取士)한 것이 매우 물의를 빚자, 선생은 파방(罷榜)하기를 청하고, 또 시험보이는 시간을 거듭 엄중히 단속하여 다시는 촉(燭)을 지급하지 말기를 청하였다. 9월에 대사헌에서 교체되어 동지중추부사에 제수되었다가 겨울에 도로 대사헌에 제수되었고, 오래지 않아 다시 대사헌에서 교체되어 부제학에 제수되었다. 병으로 사양하니, 성상께서는 내의(內醫)를 보내어 병을 간호하게 하고, 약물도 지급하였다. 세자도 궁료(宮僚 세자궁의 관료)를 보내어 문병하였다. 12월에 차자(次子) 선교공(宣敎公)이 또 요사(夭死)하였다. 정묘년(1627, 인조5) 1월에 관직을 사면하고 돌아가서 장사 지내기를 청하니, 비답하기를, “경의 소를 보고는 나도 모르게 놀라고 슬펐다. 아, 천도(天道)의 공평하지 못함이 어쩌면 이에 이르렀단 말인가. 논사(論思 경연관(經筵官))의 직임을 결코 가벼이 교체할 수 없으니, 사직하지 말고 속히 갔다가 돌아오라.” 하고서, 이어 도신(道臣)에게 명하여 장사에 필요한 물품을 지급하게 하였다. 선생은 드디어 가솔을 다 데리고 남쪽으로 돌아가기 위해 길을 떠났는데, 청주(淸州)에 당도하여 오랑캐의 침입 소식을 듣고는 도로 조정으로 돌아왔다. 적의 기세가 날로 가까워지자, 성상께서 강도(江都)로 들어가고, 선생은 여헌(旅軒) 장공(張公)과 함께 경상 호소사(慶尙號召使)의 명을 받고서, 원근에 격문(檄文)을 보내어 군대를 모집하고 군량을 조달하기 위해 차례로 길을 떠났다. 그러나 3월에 화의(和議)가 성립되자, 성상은 전교를 내려 군대를 해산하여 귀농(歸農)시키라고 하였다. 4월에 강도로 가서 복명(復命)하였다. 얼마 되지 않아 어가를 호종하여 서울로 돌아왔다. 5월에 차자를 올려 시무(時務)를 논하였는데, 그 대략에, “예로부터 비상한 변란을 만난 임금은 반드시 비상한 뜻을 세운 뒤에야 쇠한 나라를 부흥시키고 난리를 평정하여 마침내 비상한 공업을 세웠습니다. 만약 뜻을 굳게 세우지 않고 무기력하게 구습만을 따르고 스스로 노력하지 않는다면 끝내 반드시 패망만이 있을 뿐입니다. 지난번 오랑캐의 화(禍)를 어찌 차마 말할 수 있습니까. 서쪽 지방 백성들은 적의 칼날에 모두 어육(魚肉)이 되었으며, 성상께서 몽진(蒙塵 임금의 피란을 이르는 말)하고 종묘사직이 피란하기까지 하였습니다. 오늘 구도(舊都)로 돌아오기는 하였으나 연작처당(燕雀處堂)일 뿐입니다. 옛사람의 말에 ‘많은 어려움은 나라를 일으키고, 큰 근심은 성스러움을 계발한다.’ 하였습니다. 지금이야말로 전하께서 우환(憂患)에서 생존할 수 있는 기회이니, 진실로 밤낮으로 노력하고 분발하여, 마음속으로 ‘섬으로 피란갔던 수치를 어찌 씻을 수 있으며, 위협으로 맹약을 맺은 치욕을 어찌 잊을 수 있으며, 견양(犬羊) 같은 무리와 맺은 화의를 어찌 믿고서 안심할 수 있겠는가.’라고 다짐하고서, 자나깨나 일념(一念)을 오직 수치를 씻고 분을 풀겠다는 데만 두시고, 안일을 탐하는 마음을 조금도 그 사이에 섞지 마소서. 그리하신다면 비록 군대를 이끌고 깊이 쳐들어가서 오랑캐의 소굴을 소탕하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앞으로 적의 침입을 대비할 수 있어서, 전날처럼 어찌할 수 없는 지경에는 이르지 않을 것입니다. 옛날 춘추 시대(春秋時代) 때 위 문공(衛文公)은 조읍(曹邑)에서 야처(野處)한 지 몇 년 만에 마침내 혁거(革車)가 300승(乘), 새끼 딸린 암말이 3000필이 되는 데 이르러서, 적(狄)이 감히 다시 엿보지 못하였고, 월왕(越王) 구천(句踐)은 회계산(會稽山)으로 올라가서 오(吳)나라에 복종하여 신하 노릇을 하면서 10년 동안 인구를 늘리고 10년 동안 백성을 가르쳐서, 마침내 오나라의 궁궐을 헐어버리고 연못으로 만드는 공을 이루어 과거의 치욕을 씻었으니, 이들이 얼마나 정신을 쏟고 얼마나 힘을 들여 이렇게 되었겠습니까. 위 문공은 대포(大布)의 옷에 대백(大帛)으로 만든 모자를 쓰고, 구천은 앉아서는 쓸개를 핥고 길에서는 노한 개구리에게 경의(敬意)를 표한 것으로 보면, 이 두 임금은 굳은 결심으로 비상히 노력하는 마음을 잠시도 늦추지 않은 것입니다. 지난날의 일을 말해 무엇하겠습니까만 그래도 핑곗거리는 있습니다. 전하께서 몸을 굽히고 치욕을 참으신 것은 어찌 조금 굽혀서 크게 펴기를 생각하고, 잠시의 치욕으로 영원한 영광을 생각해서가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지금 쉬지 않고 부지런히 노력하여 자고 먹을 겨를도 없이 자강책(自強策)을 강구하지 않았다가 후일 적이 침입했을 때 대적할 수 없게 된다면 군신 상하가 함께 망하게 될 것입니다. 비록 요행으로 망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심한 굴욕이 아마도 오늘보다 열 배는 더할 것이고, 천하 후세에서도 모두 전하를 안일만을 탐하여 구차하게 산 임금이라고 할 것이니, 어찌 원통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니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뜻을 굳게 세워 백척간두(百尺竿頭)에 발을 붙인 듯이, 폭풍과 파도가 몰아치는 바다에 물이 새어드는 배에 몸을 의탁한 듯이 시종 마음을 늦추지 마시어, 목전의 안일을 탐하여 후일의 근심을 잊지도 말고, 형식적인 작은 예절을 인습하여 원대한 계책을 소홀히 하지도 마소서.”라고 하고, 또 내수사 및 연해(沿海)의 어염을 혁파할 것과, 둔전(屯田)을 설치하여 군량을 보충할 것을 청하고, 또 장교의 선발, 군대의 훈련, 군량의 비축, 무기의 준비에 관한 계책에 대해 수천 마디의 말을 전달하니, 성상께서 이에 대해 “차자에 진술한 일이 사리에 맞는 말과 아름다운 계책이 아님이 없으니, 내 비록 변변치 못하지만 어찌 감히 두렵게 생각하지 않겠는가.”라고 비답하였다. 이때 교리 조경(趙絅)의 상소가 들어간 지 여러 날이 되었는데 비답을 내리지 않고, 대신의 헌의(獻議)도 살피지 않으니, 선생이 차자를 올려 논하였다. 이윽고 대사헌에 제수되었다가 다시 부제학으로 돌아왔다. 6월에 또 차자를 올려 시무를 논하였는데, 그 대략에, “주상(主上)이 이미 치욕을 당하였고 종묘사직이 거의 망하게 되었으니, 이야말로 대소 신하가 힘을 다해 집에 붙은 불을 끄고 물에 빠진 사람을 건지듯이 급히 서둘러도 오히려 패망을 구제하지 못할까 두려운데, 어찌하여 일시의 기상이 평소와 조금도 다름없이 이완되어, 정탐하기 위해 온 적으로 하여금 연작처당(燕雀處堂)이란 비난을 일으키게 한단 말입니까. 아, 애통합니다. 생각건대 하늘이 우리나라를 망치려고 넋을 빼앗은 것입니까. 그렇지 않다면 어째서 온 세상 사람들이 모두 슬기를 잃고 바보가 되었단 말입니까. 신이 듣건대 천하만사가 하나도 임금의 마음에서 근본하지 않는 것이 없다고 하는데, 삼가 전하께서 덕을 닦는 것과 정사하시는 것을 보니 해마다 게을러지십니다. 막 큰 난리를 겪어 온갖 고생을 다 맛보시고도 성탕(成湯)처럼 두려워하고 불안해하지도, 주 성왕(周成王)처럼 후환을 경계하고 삼가지도, 위 문공(衛文公)처럼 돈독하고 성실하게 마음을 가지지도 않으시고, 시정(施政)과 명령을 내리는 사이에 옛 상례(常例)만을 따르실 뿐, 고통을 참아가며 분발해 다시 시작하겠다는 뜻이 없으십니다. 천하의 큰 근본인 전하의 마음이 확립되지 않음이 이와 같으니, 신하들이 나태하고 모든 일이 제대로 되지 않아, 날로 위망(危亡)의 지경으로 가고 있는 까닭을 알 만합니다. 삼가 생각건대 전하께서는 기미(羈縻)를 조금은 믿으시어 적이 오지 않기를 바라시는 듯하니, 만약 참으로 그렇게 생각하고 계신다면 어찌 천려일실(千慮一失)이 아니겠습니까. 왕회(王恢)는 흉노(匈奴)의 사정을 잘 아는 연(燕)나라 사람인데, 그의 말에 ‘흉노와 화친하면 몇 해 지나지 않아 다시 약속을 어길 것이다.’ 하였습니다. 그 밖에도 진(晉)나라와 송(宋)나라의 전철은 더욱 분명히 경계해야 할 것입니다. 주자(朱子)가 말하기를 ‘국가 회복의 대계를 가로막고 변방 수비의 상규(常規)를 무너뜨리는 것은 모두 강화(講和)를 주장하는 말이 그 주범이다.’ 하였으니, 이는 사람의 마음은 믿는 것이 있으면 자치(自治)를 느슨히 한다는 것을 이른 말입니다. 송 태조(宋太祖)는 내탕전(內帑錢)을 내어 군량에 쓰게 하며 말하기를 ‘이 돈으로 호인(胡人)의 머리와 바꾸라.’ 하였습니다. 그때 거란(契丹)이 멋대로 날뛰기는 하였지만 국사의 위급함이 오늘과는 같지 않았는데도 송 태조는 개인의 저축을 선뜻 내어 군용(軍用)으로 돌렸습니다. 이로 보면 근일의 조처는 참으로 부끄러운 점이 있으니, 전하께서 안일을 탐하고 임시 변통이나 하려는 생각이 보이지 않는 가운데서 나날이 자라고 다달이 자라서 끝내 자강(自強)할 수 없게 될까 매우 두렵습니다. 그렇다면 비록 이로 인해 나라를 망친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아, 지난날의 일을 말해 무엇하겠습니까마는 백년 동안 예의를 지켜온 나라이고 당당한 천승(千乘)의 나라로서 아래로 오랑캐와 맹약을 맺어, 이 오랑캐로 하여금 끝내 편안히 지내게 한 것도 이미 씻을 수 없는 수치인데, 더구나 저들의 욕심을 채우기 어렵고 흔단(釁端)이 생기기 쉬운 데이겠습니까. 하루 저녁을 편안히 자고 나면 저들이 또 쳐들어오는 일이 없을 것이라고 어찌 보장할 수 있겠습니까. 옛 기록에 ‘수치심이 있은 뒤에야 분함을 알고, 분함을 안 뒤에야 자강할 수 있고, 자강한 뒤에야 그에 걸맞은 정령(政令)을 행하여 국가를 보존할 수 있다.’ 하였으니,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남한산성에서의 치욕을 잊지도 마시고 복수의 마음을 늦추지도 마시고서, 각고면려하겠다는 뜻을 세워 오래도록 성실히 지키신다면 틀림없이 치욕을 씻을 날이 올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사람들의 계략이나 무력으로는 결코 다시 회복할 가망이 없고, 오직 기대할 수 있는 바는 하늘은 순한 사람을 돕는다는 점뿐입니다. 그러나 하늘은 사사로이 친애하는 사람이 없고 오직 덕이 있는 사람을 도울 뿐이니, 전하께서 힘써 덕정(德政)을 닦아 하늘의 마음을 얻는 일에 조금이라도 게으름이 있어서야 되겠습니까. 바라건대 오늘부터는 한 번 명령을 내리고 한 가지 일을 행하실 때마다 반드시 이 일이 하늘의 마음에 부합할 수 있는지부터 먼저 생각하시어, 부합한다고 여겨지면 행하고 부합하지 않는다고 여겨지면 정지하소서. 일마다 이와 같이 하고 날마다 이와 같이 하시면 저 높은 곳에서 날마다 세상을 굽어살피는 하늘이 어찌 보이지 않는 가운데서 묵묵히 돕지 않겠습니까.”라고 하였다. 그리고 또 언로(言路)를 넓히고 묘악(廟樂)을 정지하며, 흥경원(興慶苑)의 천장(遷葬)도 몇 해 뒤로 미루고서, 오로지 백성을 안정시키고 군대를 훈련시키며 분발해 설치(雪恥)하기만을 생각하기를 청하니, 성상께서는 손수 써서 내린 비답에, “나의 잘못된 마음을 바로잡고 나의 부족한 점을 보완하기 위해 누차 지론(至論)을 진술하였으니, 내 실로 아름답게 여긴다. 진술한 바가 모두 나의 절실한 병통이 아님이 없으니, 내 비록 견문이 부족하고 사리에 어둡기는 하지만 가슴에 새기고 잊지 않아 경의 지극한 정성에 부응하겠다.”라고 하였다. 얼마 되지 않아 대사헌으로 옮겼다가 도로 부제학으로 돌아왔다. 초정(椒井)의 목욕과 분황(焚黃)을 위해 휴가를 청했다. 8월에 우복(愚伏)의 옛집으로 돌아가서는 휴직하고서 오래 체류할 생각이었으나, 마침 이인거(李仁居)의 역변(逆變)이 일어났고, 또 대사헌으로 부르므로 선생은 부득이 조정으로 돌아왔는데, 올라오는 도중에 우참찬에 제수하였다가 이내 도로 부제학에 제수하니, 사양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무진년(1628, 인조6) 1월에 대사헌으로 유효립(柳孝立)의 역옥(逆獄)을 국문하는 자리에 참여하였는데, 왕자(王子) 공(珙)이 서로 호응한 정황이 분명하므로 선생은 대사간 김상헌(金尙憲) 등과 합계(合啓)하여 왕법(王法)으로 의리를 앞세워 사사로운 정의(情誼)를 단절하기를 청하였다. 고사(故事)에 국문에 참여한 관원을 훈적(勳籍)에 올리는 예(例)가 있으므로, 선생도 훈적에 오르자 굳이 사양하였다. 4월에 우참찬에 제수되어 지의금부사를 겸임하였다가 오래지 않아 다시 부제학으로 돌아왔다. 선생은 관직에 있는 몸으로 의금부의 관직을 겸임하는 것을 불편하게 여겨, 차자를 올려 직임을 줄여 달라고 청하였다. 또 “근래 경연을 오래 정폐(停廢)하시고, 내리시는 명령에는 화평하지 못한 말씀이 많았습니다. 이를테면 근거 없는 억측의 말을 한다고 대신(大臣)을 물리치고, 임금을 멸시한다고 전관(銓官)을 책망하고, 구차히 수식(修飾)한다고 대간에게 전교하신 일들은 모두 어리석은 신이 평소 성상께 바란 바가 아닙니다. 이는 아마도 깊은 궁중에 한가로이 계실 때 마음의 보존과 성품의 수양이 혹 깊지 못해서 그러신 것으로 생각되니, 신료(臣僚)의 인견(引見)을 늦추어서는 안 됩니다.”라고 하니, 성상께서 “임금을 사랑하는 경의 정성을 가상히 여긴다.”라고 비답하였다. 6월에 정헌(正憲)에 가자(加資)되었다. 7월에 차자를 올려 변방의 일을 논하였는데, 그 대략에, “전후의 국서(國書)에 ‘백성의 부모가 되어 이미 귀국의 군대가 쳐들어오던 날에 백성을 보호하지도 못했으면서, 귀국에 잡혀갔던 백성들이 목숨을 걸고 탈출해 돌아온 자들을 다시 포박해 보내는 것은 천리(天理)나 인정으로 차마 할 수 없는 바이다.’라는 간절한 내용으로 재삼 주고받았는데도 저들은 더욱 심히 으르대며 협박의 의사를 드러내니, 지금 먼저 이란(李灤)부터 참수(斬首)하여 중간에서 멋대로 승낙하여 적을 속이고 우리를 그르친 죄를 다스리고서, 다시 명백하고 간절하게 답서를 지어 보낸다면 이로 인해 저들이 으르댐을 조금 늦추지나 않을지 어찌 알겠습니까. 신이 전대의 역사를 두루 보건대, 화친을 구걸하여 치욕을 씻은 사람은 오직 구천(句踐) 한 사람밖에 없었습니다. 그 까닭이 무엇입니까. 20년을 하루같이 쓸개를 핥고 얼음을 안았기 때문이니, 이처럼 마음을 굳게 가지고 각고면려하는 것을 어찌 사람마다 할 수 있겠습니까. 시일이 멀어질수록 지난 치욕을 날마다 잊고서 구차하게 안일을 탐하는 것이 사람들의 상정(常情)입니다. 오늘의 인심으로 보건대 작년에 강도(江都)로 몽진(蒙塵)했던 치욕을 이미 다 잊었고, 성상께서 분발하여 격려하는 뜻도 지난날 곤경에 처했을 때와 같지 않은 듯하니, 이는 모두 화의(和議)가 빌미가 된 것입니다. 그러나 저들이 만약 편안히 지내며 흔단을 일으키지 않는다면 우리가 먼저 맹약을 어겨 약속을 저버렸다는 말을 들을 필요가 없습니다만, 지금 저들이 이미 방자하게 불손한 말을 하며 국경을 넘어 쳐들어오겠다는 뜻을 분명히 말하고 있으니, 이 기회에 옳고 그름을 선언하여 잘못이 저들에게 있다는 것을 밝혀 화의를 단절하고서, 안으로 자강책(自強策)을 세우는 것이 마땅한데, 무엇 때문에 진퇴를 오로지 저들에게 맡긴 채 손을 놓고서 가엾게 보아주기를 구걸하며 당장 망하지 않기만을 바라서야 되겠습니까. 어제 신이 변신(邊臣)의 치계(馳啓)를 보건대 적군이 구련성(九連城)에 주둔해 있으면서 강에 얼음이 얼어붙은 뒤에 동쪽을 공격하려 한다는 말이 있으니, 이 장계(狀啓)의 내용으로 특별히 주문(奏文)을 만들어 동지사(冬至使)가 가는 편에 명(明)나라 조정으로 보내고, 이어 산해(山海)ㆍ영원(寧遠) 등 각 군문(軍門)에 신칙하여, 상세히 정탐하여 저들이 동쪽으로 나올 때를 노려 곧장 저들의 소굴을 공격하도록 청하소서. 그러면 명나라 군대가 크게 승리하는 계기가 되고, 저들은 또 형세가 막혀 멋대로 우리나라를 침략하지 못하게 될 것이니, 성상께서 잘 헤아려 처리하소서.”라고 하였다. 8월에 왕명(王命)에 따라 차자를 올렸는데, 그 대략에, “신이 보건대 전하께서 반정(反正)하신 초기에는 정신을 가다듬어 잘 다스리기를 도모하셨으므로 중외(中外)의 백성들이 주목하였는데, 오늘에 이르기까지 치적이 전무하여, 민간의 풍속은 날로 야박해지고 국사는 날로 잘못되고 있습니다. 만약 당초에 정신을 가다듬으셨던 전하의 뜻이 과연 성실에서 나오고 조금의 거짓도 없었다면 겉으로 드러난 효과가 어찌 이 정도에 그쳤겠습니까. 하신 말씀이 마음속의 생각이 아니고, 시행하는 일 또한 말씀한 바와 같지 않으므로 속마음과 겉의 행동이 일치하지 않고 앞뒤가 서로 어긋나서, 진실하고 거짓이 없어야 하는 왕자(王者)의 도리가 하늘의 덕(德)에 부합하지 않은 것입니다. 이와 같고서는 사람들의 신임도 얻기 어려운데 하물며 하늘의 신임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아, 전하께서는 오늘의 사태가 망국(亡國)에 이르지 않을 것으로 여기십니까. 임금의 직무에는 백성을 편안하게 하는 것이 가장 큰 일인데, 전하께서 6년 동안 국가를 위해 우려하고 근로(勤勞)하셨으나, 백성들이 편안히 지내며 생업(生業)을 즐기는 효과는 없고, 근심과 가난으로 이미 어찌해 볼 수 없는 형세에 이르렀으니, 지금에 미쳐 조처하지 않는다면 돌이킬 수 없는 후회가 있게 될 것입니다. 전하께서 《중용(中庸)》 한 질을 이미 다 청강(聽講)하셨으니, 성(誠 진실하여 거짓이 없는 것)의 명칭과 뜻에 대해 이미 분명히 깨달아 의심이 없으실 줄로 압니다. 정 부자(程夫子)의 말에 ‘책을 읽기 전에 이 정도의 사람이 읽은 뒤에도 이 정도의 사람이라면 읽지 않은 것과 같다.’라고 하였으니, 전하께서는 두렵게 생각하소서.”라고 하였다. 이때 성상께서는 바야흐로 《서경(書經)》을 강독 중이었으므로 명에 따라 혼천의(渾天儀)를 만들어 올렸다. 기사년(1629, 인조7) 봄에 모문룡(毛文龍)이 우리나라를 침공할 뜻을 가졌다고 변신이 치계하니, 조정에서 분란을 풀기 위한 계책으로 중신을 보내려 하자, 선생은 차자를 올려 여섯 가지 불가(不可)한 점을 진술하였다. 이때 흰 햇무리가 해를 뚫고 지나가는 천변(天變)이 생기자, 선생은 차자를 올렸는데, 그 대략에, “동중서(董仲舒)의 말에 ‘하늘의 마음은 임금을 사랑하기 때문에 크게 무도한 세상이 아니면 하늘은 모두 도와서 보전시키고자 한다.’라고 하였고, 호씨(胡氏)도 ‘하늘의 경계에 대해 능히 삼가면 비록 하늘에 그런 현상이 나타나더라도 그에 상응하는 재변이 일어나지 않는다.’라고 하였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 하늘의 사랑하는 마음을 깊이 본받아 평소에 공경하고 삼가는 도리를 더욱 극진히 하여, 강건한 덕이 날로 안에 쌓이고 청명한 정치가 날로 밖에 행해지게 한다면 한때의 음(陰)이 조화되지 않아 생기는 천변의 기운이 태양 아래서 구름이 걷히고 안개가 사라지듯이 저절로 없어질 것이지만,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반드시 재앙이 닥치고 상패(傷敗)가 이를 것이니, 하늘의 사랑을 어찌 자주 바랄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이에 대해 성상께서 “‘공경하고 삼가다’는 말은 간략하지만 뜻은 극진하니, 내 감히 그 말을 띠에 쓰고 마음에 새겨 경의 지극한 정성에 부응하지 않겠는가.”라고 비답하였다. 이윽고 휴가를 청해 고향으로 가서 분황(焚黃)하였다. 4월에 조정으로 돌아와서 병으로 사직하니, 성상께서 이르기를, “견문이 부족하고 사리에 어두운 내가 경의 보도(輔導)를 힘입어 때때로 분노를 억제하고 욕심을 극복하였다. 그러나 경이 떠나자 얼마 되지 않아 나의 마음을 사욕이 가리웠다. 오늘에 이르러서 더욱 그대의 공로를 알 수 있으니, 논사(論思)의 장관은 경이 아니면 안 된다.”라고 하였다. 동궁(東宮)의 명을 받고서 구사(九思)와 구용(九容)을 써서 올렸다. 5월에 대사헌으로 옮겼다. 갑자기 오른손이 마비되는 증세가 생기니, 성상께서는 어의(御醫)를 보내어 병을 간호하게 하였다. 누차 사직하여 체직되었다. 오래지 않아 우참찬에 제수되었다가 이내 예조 판서에 제수되었다. 휴가를 청해 영천(榮川)으로 가서 초정(椒井)에 목욕하고는 고향 집으로 가서 상소하여 치사(致仕)를 청했는데, 그 대략에, “성인의 말씀에 ‘나라에 도가 있을 때 녹(祿)만 먹는 것이 수치이다.’라고 하였고, 또 ‘남의 조정에 벼슬하여 도를 행하지 않는 것이 수치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신이 비록 변변치는 못하지만 전혀 수치심이 없는 사람은 아니니, 벼슬에서 물러나지 않고 그냥 머물러 있다가 하루아침에 갑자기 죽어서, 세상의 청의(淸議)하는 자가 붓을 잡고서 ‘아무개는 아무 재능도 없이 태평성대에 벼슬만 하고 있다가 마침내 여관에서 죽었다.’라고 비평하게 한다면 일생 동안 예(禮)를 강론한 몸이 죽어서 수욕(羞辱)을 당하는 것이니 어찌 억울하지 않겠습니까. 태어나서 요(堯)와 순(舜) 같은 전하를 만났는데, 영원히 이별하고자 하는 것이 어찌 신의 평소의 마음이겠습니까마는, 운명이 몸을 따라 주지 않고 일이 마음과 어그러져서 어리석은 신의 충정(衷情)을 말로는 다 할 수 없습니다.”라고 하였으나, 은혜로운 비답을 내리며 허락하지 않았다. 또 학자에게 답한 편지에, “내가 작록(爵祿)을 탐하지는 않지만 시세(時勢)를 돌아볼 때 물러날 수 없는 형편이 있어서이다. 《시경(詩經)》 〈소아(小雅) 우무정(雨無正)〉의 시는 떠나지 않은 자가 시를 지어 떠난 자를 책망한 것이니, 그 당시에 떠난 자들은 모두 고상하고 떠나지 않은 자들은 모두 벼슬을 탐하였다고 할 수 있겠는가. 오늘날 난리와 우환은 날로 심해지고 인심은 분산되어, 임금이 바야흐로 불안과 두려움 속에 계시니, 지금이야말로 신하가 목숨을 바칠 때인데, 도리어 결연히 물러나서 일신의 편안만을 도모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이상의 소(疏)와 편지를 살펴보면 선생의 심사(心事)를 볼 수 있을 것이다. 9월에 이조 판서에 제수되었다. 두 차례 상소하여 사직을 청하였으나, 온화한 유지(諭旨)를 내려 속히 오라고 부르므로 11월에 억지로 들어가서 사은하였다. 또 홍문관 대제학과 예문관 대제학을 겸임하였다. 연달아 상소하여 누차 사직하였으나, 온화한 유지를 내려 타이르며 허락하지 않았다. 선생은 허락하는 성상의 명을 받지 못하자, 공정한 마음과 엄정한 낯빛으로 과격하지도 않고 남에게 붙좇지도 않고서 인재(人才)를 수습하고 사론(士論)을 조화시켜 알아서 대우해 주신 성은에 보답하기를 바랐다. 그러나 선생에게는 이미 병이 있었으므로 매양 물러나 쉬었으면 하는 생각으로 마음이 우울하고 기분이 좋지 않았다. 경오년(1630, 인조8) 2월에 지경연사와 지춘추관사를 겸임하고서 감시관(監試官)이 되었다. 글을 지어 제생(諸生)에게 알아듣도록 타이르고서, 시문(詩文)은 오로지 논리가 뛰어난 것을 주장으로 삼아 뽑고, 기괴하고 궁벽한 것은 모두 낙방시키니, 문체가 조금 변화하였다. 4월에 가도(椵島)에 유흥치(劉興治)가 그 주장(主將) 진계성(陳繼盛)을 죽이는 난리가 일어나자, 성상께서는 군사를 일으켜 토벌하기를 의논하니, 선생이 차자를 올려 불가함을 말하기를, “당초에 사람들의 의논은 모두 ‘이 적(賊 유흥치)이 반드시 군사를 이끌고 가서 오랑캐에게 투항하여 명조(明朝)를 배반할 것이고, 종당에는 또 오랑캐의 세력을 믿고서 우리나라를 호령할 것이니, 오직 의리를 지켜 군사를 일으켜서 명조를 위해 반역자를 토벌하는 길만이 있을 뿐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인대(引對)하는 즈음에 즉시 토벌하기로 대계(大計)를 결정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윽고 듣건대 저 유흥치가 오랑캐에게 투항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오랑캐에게 호응하였다는 말로 진계성을 무함하여 명나라 조정에 보고하고서 멋대로 그를 살해하였다고 하니, 방자하게 조정을 속인 죄는 진실로 죽여도 죄가 남지만, 오랑캐와 공모한 사실은 아직 드러나지 않았습니다. 아직은 우리가 모욕을 받을 만한 위급한 상황은 아니니, 명나라 조정의 지시를 기다려 서서히 대처해도 늦지 않습니다.”라고 하였다. 여름에 누차 차자를 올려 면직시켜 주기를 더욱 간절히 청했으나, 성상께서 모두 온화한 유지(諭旨)를 내려 타이르며 허락하지 않았다. 11월에 목릉(穆陵 선조(宣祖)의 능)을 천장(遷葬)하였는데, 명을 받들어 지문(誌文)을 고쳐 지어 올리니, 성상께서 잘 고쳤다는 전교를 내렸다. 대제학을 체직시켜 주기를 청했으나, 또 허락하지 않았다. 이때 김두남(金斗南)의 첩의 딸과 조기(趙琦)의 첩의 딸이 부정한 방법으로 궁녀(宮女)로 들어왔다. 이공 명준(李公命俊)이 상소해 논하니, 성상께서 이 상소를 보고 나서 비국(備局)에 내렸다. 비국이 회계(回啓)하자, 성상께서 크게 노하여 화를 벌컥 내며 매우 엄한 말씀을 하였다. 삼사(三司)와 정원(政院)이 간쟁하였으나 모두 뜻대로 되지 않았다. 선생이 차자를 올려 경계하기를, “이 일은 작은 일이어서 본래 전하께서 목소리를 높일 만한 일이 못 됩니다. 만약 본래부터 이런 일이 없었는데 항간(巷間)에 잘못 전해진 것이라면 성상께서 화평한 말씀으로 ‘이런 일이 없었다.’라고 대답하시고, 설령 이런 일이 있었다 하더라도 성인이 아니고서야 누가 허물이 없겠습니까. 고치는 것이 귀함이 되니 성상께서 두려운 마음으로 ‘즉시 고치겠다.’라고 대답하셨어야 합니다. 이렇게 하셨다면 성상의 마음속에 한 가지 일도 남아 있는 것이 없어서, 해맑고 깨끗하며 너그럽고 화평하여 상하 사이에 마음이 통하여 도유우불(都兪吁咈)의 기상을 오늘에 볼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애석하게도 성상의 학문이 중화(中和)의 공부에 부족함이 있어서 말씀하시는 사이에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는 기색이 있으셨던 것입니다. 하천(下賤)에게도 이런 기색을 보여서는 안 되는데, 하물며 삼사와 대신이겠습니까. 장사숙(張思叔)은 한낱 선비였으되 그 마부(馬夫)를 심한 말로 꾸짖자, 정 선생(程先生)이 ‘어찌 동심인성(動心忍性)하지 않느냐.’라고 책망하였는데, 지금 전하께서는 천승(千乘)의 임금으로 대신을 응대하는 데 이런 목소리와 낯빛을 보여서야 되겠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이치를 관찰하고 사물을 응대하는 즈음에 마음을 비우시고, 억제하기 어렵고 일어나기 쉬운 곳에 마음을 쓰시어, 분노의 기운이 구름이 사라지고 안개가 걷히듯이 없어지게 하소서. 그러고서 지난날의 일을 돌이켜 생각해 보시면 반드시 이루 말할 수 없는 후회가 있으실 것입니다.”라고 하니, 매우 온화한 비답을 내리고 성상의 화가 풀렸다. 그러자 온 조정이 서로 경하하며 그 차자를 전송(傳誦)하였다. 이때 천릉(遷陵)의 계찬(啓攢)이 동지 하례(冬至賀禮)와 서로 마주쳤다. 예관(禮官)이 곡(哭)을 끝내고 나서 하례를 거행하라고 청하자, 선생은 같은 날에 슬픈 예와 기쁜 예를 병행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여겨, 차자를 올려 하례를 임시로 정지하라고 청하니, 성상께서는 따랐다. 이때 성문에 비방하는 글을 붙인 사건이 생겼다. 선생은 돌아가기로 이미 뜻을 결정하였으나, 천릉 때문에 머뭇거리고 있었다. 천릉의 일이 끝나자 즉시 휴가를 청해 다시 돌아오지 않을 길을 떠나, 직산(稷山)에 이르러서 치계(馳啓)하여 해직(解職)을 청하자 허락하였다. 신미년(1631, 인조9) 봄에 재차 상소하여 대제학의 체직을 청하자 또 허락하였다. 대사헌으로 불렀으나 사양하였다. 4월에 훈재(勳宰)의 건의를 따라 추숭(追崇)하기를 결심하고서 사신을 보내어 명나라 조정에 요청하려 하니, 선생은 이 일을 말하지 않으면 임금의 잘못을 바로잡아야 하는 신하의 도리가 아니라고 여겨, 병을 참고 상소문을 기초(起草)하였는데, 그 대략에, “낳아 주신 부모를 추숭하여 조묘(祖廟)에 모시는 것은 부녀자들도 불가한 줄을 아는데, 하물며 총명하고 예를 좋아하시는 전하께서 어찌 모르실 리가 있겠습니까. 다만 효성으로 인해 판단력이 흐려져서 스스로 그것이 잘못임을 모르시는 것뿐입니다. 효성이 어찌 아름다운 덕이 아니겠습니까만 그 법칙을 잃으면 허물이 되는데, 법칙은 바로 이치일 뿐입니다. 옛날에 맹손씨(孟孫氏)가 효(孝)에 대해 묻자, 공자(孔子)께서 ‘무위(無違)’라고 대답하셨습니다. 무위란 것은 생존한 부모를 섬기고 사망한 부모를 장사 지내고 제사 지냄에 있어 이치를 어기지 않는 것을 이름입니다. 신은 전하의 이 일이 과연 이치에 어긋나지 않고 예에 맞는지를 모르겠습니다. 《의례(儀禮)》 〈자하전(子夏傳)〉에 ‘제후의 아들을 공자(公子)라고 칭하는데 공자는 예묘(禰廟)를 세워 선군(先君)을 제사 지낼 수 없고, 공자의 아들을 공손(公孫)이라고 칭하는데 공손은 조묘를 세워 할아버지인 제후(諸侯)를 제사 지낼 수 없다.’라고 하였습니다. 이에 의거해 보면 대원군(大院君 인조(仁祖)의 아버지)은 선왕(先王)을 예묘로 삼을 수 없고, 전하께서도 선왕을 조묘로 삼을 수 없습니다. 다만 전하께서는 난리를 평정하고 반정하신 공으로 위로 대통을 이어 종묘의 주인이 되셨을 뿐이니, 사람들이 말하는 ‘대원군은 사친(私親)이 아니고 전하는 적손(嫡孫)이어서 보위에 오른 것이 당연하다.’라는 것은 매우 근거가 없습니다. 그런데 전하께서는 무엇 때문에 낳아 준 은혜만을 알 뿐, 지극히 엄중한 조종(祖宗)의 법통은 생각지 않으십니까. 예를 제정한 뜻으로 보더라도 상하 존비(上下尊卑)의 엄격함이 이와 같은데도 꺼리지 않고 예를 어기시는 것은 마음에 가린 것이 두텁기 때문입니다. 《예기(禮記)》 〈대전(大傳)〉에 ‘복을 입는 도리에 여섯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친친(親親)이고 둘째는 존존(尊尊)이다.’ 하였는데, 친친은 은혜이고 존존은 의리입니다. 사람의 감정은 항상 은혜로 의리를 가릴 염려가 있기 때문에 《춘추전(春秋傳)》에 ‘군자는 친친으로 존존을 해치지 않는다.’ 하였는데, 지금 전하께서는 은혜가 거의 의리를 가렸습니다. 그러므로 전하의 의견에 찬동하는 자에게는 예를 안다고 허여하고 임금을 사랑한다고 총애하시며 마치 무릎 위에라도 앉힐 듯이 하시고, 반대하는 자에게는 신하로서 차마 들을 수 없는 말로 배척하시며 마치 사정없이 깊은 물로 밀어 넣듯이 하시는 것입니다. 계속 이대로 하신다면 전하의 뜻에 순종하는 아첨하는 무리만이 날로 나오는 것을 볼 수 있을 뿐이고, 바른말을 하는 단정한 선비는 전하 앞에 이르지 않을 것이니, 어찌 나라가 위태로워지지 않겠습니까. 신이 일찍이 성상의 전교를 보건대 ‘한당(漢唐) 이후로 나보다 어진 임금들도 모두 그렇게 하였는데 무엇 때문에 나만이 홀로 그렇게 하지 않겠는가.’라고 하셨습니다. 신은 전하의 이 말씀이 사불급설(駟不及舌)임을 애석히 여깁니다. 이 말씀은 제갈 무후(諸葛武侯)가 이른바 ‘함부로 자신을 과소평가하여 맞지도 않는 비유를 이끌어 충간(忠諫)의 길을 막는다.’라는 것에 불행히도 가깝습니다. 전하께서는 상지(上智)의 자질로 성현의 학문을 닦으시고도 어버이를 받드는 일에는 의리의 당연한 법도에 부합하기를 구하지 않으시고, 후세의 평범한 임금들의 일로 스스로를 한정하셨으니, 평소에 마음을 이와 같이 가지는 것은 부당할 뿐만 아니라 대원군에 대한 효도에도 도리를 다하는 것이 아닐 성싶습니다.”라고 하였다. 이 소(疏)가 들어갔으나 비답이 없었다. 수상(首相) 추탄공(楸灘公 오윤겸(吳允謙))이 이 소를 읽어 보고는 “참으로 유신(儒臣)이 임금께 고한 말이다.”라고 칭찬하였다. 6월에 오랑캐가 침입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난리에 달려가기 위해 병을 참고 길을 떠났으나 보은(報恩)에 이르자 병이 더욱 심해져서 더 이상 갈 수 없으므로 상소해 진정(陳情)하였다. 이때부터 병이 낫지 않고 증세가 더욱 위중해졌다. 8월에 동궁(東宮)이 편지를 보내어 문병하고, 전후 수십 차례에 걸쳐 약(藥)과 식물(食物)을 내렸으며, 간간이 궁관을 보내어 문병하였다. 성상도 의원을 보내어 병을 살피게 하였다. 11월에 좌참찬에 제수하니, 상소해 사양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임신년(1632, 인조10)에 선생이 만 70세가 되었으므로 옛 경전(經傳)을 이끌어 치사(致仕)를 비니, 성상께서 “지금은 선왕조의 구신(舊臣)이 사퇴할 때가 아니니 나의 성의를 생각하여 병을 조리하고서 올라오라.”라고 비답하였다. 2월에 매호(梅湖)로 거처를 옮겼다. 3월에 상소하여 본직 및 겸직의 해면을 청하니 허락하였다. 얼마 되지 않아 지중추부사에 제수되었다. 6월에 인목대비(仁穆大妃)가 승하(昇遐)하였다. 그러나 선생은 병 때문에 사망 소식을 듣고도 달려가 곡(哭)하지 못하고, 사정을 진달하는 소를 올렸다. 9월에 대사헌에 제수하니, 상소해 사양하였다. 계유년(1633, 인조11) 1월에 병세가 위중하였다가 소생하였다. 6월 정축일에 별세하였다. 임종(臨終)할 때 집안사람들에게 “나의 장송(葬送)을 반드시 예문(禮文)대로 하라.”라고 하였다. 부음(訃音)을 듣고 성상께서는 몹시 슬퍼하며 조회를 정지하고, 조상과 부의를 예의에 맞게 하고, 특별히 의정부 좌찬성에 추증하였다. 동궁이 거애(擧哀)하려 하니, 예관(禮官)이 빈객(賓客)의 상에 거애하는 규례가 없다고 아뢰었다. 그러자 성상께서는 전교하기를, “이 사람은 마음을 다해 동궁을 가르치고 일깨운 공이 있으니 거애하는 것이 마땅하다.”라고 하였다. 8월 갑신일에 함창현(咸昌縣) 검호(檢湖)가 묘향(卯向)의 언덕에 장사 지냈다. 선생은 일찍이 연꽃이 10리나 뻗쳐 있는 곳에 새로 거처를 정한 꿈을 꾼 적이 있었는데, 이때에 미쳐 과연 실제의 정경(情景)과 일치하였으니, 아, 이 꿈이 어찌 예시가 아니었겠는가. 동궁이 별도로 부의를 내리고, 궁관을 보내어 치제(致祭)하고서 그대로 머물며 장례를 보살피도록 하고는 이르기를, “정 빈객(鄭賓客)은 평소 예를 좋아하였으니, 궁관은 가서 실례함이 없도록 하라.” 하였다. 장례일에 원근에서 와서 회장(會葬)한 자가 400여 인이었다. 을해년(1635, 인조13) 겨울에 사자(士子)들이 선생을 도남서원(道南書院)에 배향(配享)하였다. 문집 약간 권이 집에 간직되어 있다. 선생이 《주자대전(朱子大全)》 중의 봉사(封事), 잡저(雜著) 등의 글을 뽑아 8권의 책으로 만든 《주문작해(朱文酌海)》가 세상에 전해지는데, 이 책은 퇴계 선생(退溪先生)이 뽑아 만든 《주자서절요(朱子書節要)》와 서로 보완(補完)이 된다. 일찍이 경전에 의심스러운 곳을 기록한 《사문록(思問錄)》이 있고, 또 고금의 상례(喪禮)를 모은 《상례참고(喪禮參攷)》가 있는데, 이 책은 미처 완성하지 못하였다. 부인은 전의 이씨(全義李氏)로 부장(部將) 해(海)의 따님인데 후사가 없었고, 후부인(後夫人)은 진보 이씨(眞寶李氏)로 학생 결(潔)의 따님이고 참판 우(堣)의 증손이며 퇴계 선생의 종손(從孫)인데, 유순하고 인자하며 정숙하고 현철(賢哲)하였다. 《내훈(內訓)》, 《열녀전(列女傳)》 등의 서책을 즐겨 읽어, 의리에 통달하였으므로 시부모를 섬기고 남편을 보좌함에 있어 예를 어김이 없었다. 서출(庶出)을 자기 자식처럼 어루만지고 가정이 엄숙하니, 선생은 일찍이 훌륭한 보좌라고 칭찬하였다. 선생이 병이 위독할 때 부인을 돌아보며 “남자는 부인의 손에서 운명하지 않고 부인은 남자의 손에서 운명하지 않는 것이다.”라고 하니, 부인은 “일찍이 익히 들었다.”라고 대답하였다. 병인년(1566, 명종21)에 출생해서 을해년(1635, 인조13)에 사망하였는데, 선생과 같은 언덕에 장사 지냈다. 2남 2녀를 낳았는데, 장남은 심(杺)으로 재주가 뛰어나 대과(大科)에 급제하여 천거로 예문관 검열(藝文館檢閱)을 지냈고, 차남은 학(㰒)으로 선교랑(宣敎郞)을 지냈는데, 지조와 덕행이 범상하지 않아 동류(同流)들의 추중(推重)을 받았으나, 형제 모두 불행하게도 단명하였다. 딸은 생원 노석명(盧碩命)과 찬선 송준길(宋浚吉)에게 출가하였다. 측실(側室)에서 아들 하나를 낳았는데, 이름은 역(櫟)으로 만호(萬戶)를 지냈다. 검열은 군수 이의활(李宜活)의 딸에게 장가들어 1남 1녀를 낳았는데, 아들은 도응(道應)으로 학문과 행검(行檢)으로 천거되어 시강원 자의(侍講院咨議)가 되었고, 딸은 참봉 조한수(趙漢叟)에게 출가하였다. 선교랑은 현감 강연(姜)의 딸에게 장가들었으나 후사가 없었다. 노석명은 1남 2녀를 낳았는데, 아들은 사영(思永)이고, 딸은 사인(士人) 전익구(全翼耈), 이송래(李松來)에게 출가하였다. 송준길은 1남 2녀를 낳았는데, 아들은 광식(光栻)으로 진사였고, 딸은 학생 나명좌(羅明佐), 사서(司書) 민유중(閔維重)에게 출가하였다. 역은 아들 하나를 두었는데 이름은 도징(道徵)이다. 시강원 자의는 지평 유진(柳袗)의 딸에게 장가들어 2남 3녀를 두었고, 조한수는 2남을 두었는데, 모두 어리다. 선생은 키가 크고 이마가 넓었으며 눈빛이 날카로워 사람을 쏘는 듯했다. 타고난 자질이 호탕하고 쾌활하며 준수한 데다가 청렴하고 엄격하여 예를 좋아하였다. 마음을 지킴에는 성실하고 후덕하며 관대하고 인자함을 주장으로 삼고, 학문의 진보에는 깊이 생각하고 실천하는 것을 근본으로 삼았다. 퇴계를 사숙(私淑)하고 고정(考亭 주자(朱子))을 소본(遡本)하여 상상하고 흠모하며 준칙으로 삼았다. 수양이 깊어진 뒤에는 아름다운 풍채가 저절로 드러나서 바라보면 너무 높고 깊어서 도저히 범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러나 사람을 대함에는 흉금을 활짝 열고 온화한 기운이 넘치니, 명성을 듣고 덕행을 본 사람들은 저도 모르게 흠모하여 진심으로 복종하였다. 선생은 집에 있을 때는 효도를 다해 어버이를 섬기고, 상중(喪中)에는 슬픔을 다하였다. 항상 어버이의 원수를 갚지 못하고 한 하늘 아래에서 그 원수와 함께 살고 있는 것을 지극한 통한으로 여겨, 일본 물건을 전혀 집안에 가까이 하지 않았다. 매일 새벽마다 일어나 가묘(家廟)를 배알하였으며, 선조의 제사를 받드는 데 정성과 공경을 다하여, 비록 나물밥도 제대로 먹지 못하였으나 제수(祭需)는 반드시 미리 준비해 두었다. 연로한 숙부를 아버지처럼 봉양하고, 빈궁한 여동생을 수족처럼 어루만지니, 집안에 예교(禮敎)가 행해져서 엄숙하고 화목하기가 마치 조정 같았다. 선생이 백성을 다스릴 때에는 예를 밝히고 교화(敎化)를 숭상하여 풍속을 변역시키는 것을 급선무로 삼아, 성심으로 곤궁한 백성들을 가엾게 여겨 은혜를 베풀고 선비를 배양하니, 선비들은 모두 스승으로 섬기고 백성들은 모두 부형처럼 사랑하였다. 중간에 도(道)가 소멸된 때를 당해서는 은거하여 학업을 닦으며 다시 세상에 뜻을 두지 않았다. 그러다가 인조(仁祖)가 반정하자 현군(賢君)을 만나 전후 거의 10년 동안 논사(論思)의 직임을 맡았다. 선생은 군덕(君德)의 보양(輔養)을 자신의 임무로 삼고서, 나아가서 임금을 대할 때마다 미리 재계하여 마음을 전일하게 하고 정성을 다해 시정(時政)의 잘잘못, 민생의 기쁨과 근심, 의리와 공사의 분변, 천인(天人)과 왕패(王霸)의 구분에 대해서 경전을 인용하고 고금을 오르내리며 사항에 따라 남김없이 다 규간(規諫)하였는데, 그 말이 온후하고 화평하며 자세하고 간곡하니, 당시 사람들은 선생을 범순부(范淳夫)에 비겼다. 인조도 마음을 비우고 주의 깊게 듣고서 선생을 스승의 예로 대우하며 하루라도 곁에 없을까 두려워하였다. 장릉(章陵 원종(元宗)으로 추존된 인조의 아버지)에 대한 의논은 실로 천고의 변례(變禮)이므로 중론(衆論)이 조정에 가득하였는데, 오직 선생의 한마디 말을 빌어 자신들의 주장을 관철하려 하였다. 그러므로 위로는 성상의 뜻을 거스르고 아래로는 당시 재상들의 미움을 사서 비방이 사방에서 이르렀으나, 선생은 스스로 정도임을 믿고 끝내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사계 선생(沙溪先生)은 매양 “우복(愚伏)은 본래 바탕이 정직한 사람으로 예학(禮學)에 해박함이 퇴계를 능가하니, 오늘날에 함께 예학을 논할 사람은 오직 이 한 사람뿐이다.”라고 칭찬하면서, 이동(異同)에 대한 강론과 질의를 시종 멈추지 않았다. 선생이 평소에 엄숙한 모습으로 단정히 앉아 홀로 광명하고 광대한 근원을 보았으며, 화락하고 평탄하며 공평하고 너그러워서 험악과 교사(巧詐)를 깊이 경계하였다. 그러나 좋은 낯빛이나 좋은 말로 남의 잘못을 용서하지도 않았으며, 겸양으로 스스로를 수양하여 자랑하는 마음이 없었다. 은원(恩怨)을 마음속에 조금도 담아 두지 않고서, 항상 은원에 대해 조금이라도 마음을 잘못 써서 남을 해치는 각박한 사람이 되지나 않을까 두려워하였다. 화복과 영욕을 운명에 일임하고서 즐거운 마음으로 자연에 순응하며 흔들리는 마음이 조금도 없었다. 항상 자제를 경계하기를, “학자가 마음을 세우는 근본은 극진한 것을 법으로 삼아야 하고, 극진하지 못한 것을 표준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 옛사람이 이른바 ‘인(仁)이 요(堯)만 못하고 효(孝)가 순(舜)만 못하고 학(學)이 공자(孔子)만 못한 것은 모두 노력하지 않고 스스로 포기해서이다.’라는 말은 참으로 후인을 깨우쳐 반성하게 한 말이다. 부귀와 공명이란 덧없이 왔다가 덧없이 가는 것이어서, 왔다고 해서 나의 가치가 올라가는 것도 아니고, 갔다고 해서 나의 가치가 떨어지는 것도 아닌데, 세상에 한 가지 기예(技藝)를 가지고 스스로 자랑하여 쓰이기를 구하는 자는 어찌 졸장부가 아니겠느냐.”라고 하고, 또 “사람은 모름지기 아는 것이 없고 능한 것이 없다는 마음을 가진 뒤에야 마침내 알지 못하는 것이 없고 능하지 못한 것이 없게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항상 세상에 인재가 없는 것을 한탄하며 “성상께서 인재를 양성함에 도가 없기 때문에 아랫사람들의 처신도 비근(卑近)을 벗어나지 못하여, 시문(詩文)이나 익히고 기송(記訟)이나 일삼아 요행으로 과거에 급제라도 하면 스스로 능사(能事)가 끝났다고 여기니, 벼슬한 사람치고 학문에 능한 자가 드물다. 이미 식견이 없는 데다가 실천마저 없으므로 조정에 들어가서는 임금에게 인의(仁義)를 진달하지 못하고, 백성을 다스림에는 사람들에게 교도(敎導)가 미치지 않으니, 세도(世道)가 더욱 낮아지고 어두워지는 것에 대해 괴이하게 여길 것이 뭐 있겠는가. 옛날에 인재를 기르던 방법으로 인재를 양성한다면 아무리 말세라 해도 반드시 특출한 인재가 나올 것이다.”라고 하였다. 선생은 평생 동안 주자(朱子)의 글을 매우 좋아하여, 항상 말하기를, “천고 이래로 언제 이와 같은 문장이 있었던가. 이 밖에 문장으로 이름난 사람들은 유배(類俳)에 가까울 뿐이다.”라고 하였다. 말년에는 건망증이 있어 일용하는 사물이나 자제들의 이름까지 모두 잊어버렸으나, 말이 주자의 글에 미치면 정신이 맑아지며 몇 줄의 글을 들어 그 뜻을 자세히 논하고야 말았다. 《예기(禮記)》에 대해서도 그러하였다. 저서(著書)하기를 즐기지 않았고, 다른 사람이 혹 새로운 설(說)을 주장하여 선유(先儒)의 설에 이의를 제기하는 것을 보면 반드시 정색하고서 준엄히 꾸짖기를, “주 선생(朱先生)께서 실행해 보고서 하신 말씀이니, 후학들은 오직 독실히 믿고 깊이 연구하는 것이 마땅할 뿐인데, 비슷한 것을 끌어다가 필설(筆舌)로 까불어댄다면 어찌 오도(吾道)의 죄인이 되지 않겠는가.”라고 하였다. 평소에 성품이 화평하고 욕심이 없어서 화려한 의복이나 장신구, 재산이나 가업 등 일체의 세상맛에 전혀 관심이 없었다. 남이 물건을 보내 주면 즉시 빈궁한 자들에게 모두 나누어 주고는 말하기를, “이렇게 한 뒤에야 마음이 즐겁고 이렇게 하지 않으면 마음이 괴롭다.”라고 하였다. 40년을 재상으로 있었으나 서울에 집이 없었고 시골에 전지가 없었다. 그러나 아름다운 산수(山水)를 지나치게 좋아하여, 마음에 드는 곳을 만나면 매양 경치를 즐기며 돌아가기를 잊었다. 우복산장(愚伏山莊)의 수석(水石)을 잊지 않고 항상 생각하며 비록 직무가 바쁠 때에도 뜻이 이곳에 있지 않은 적이 없었다. 선생이 이조 판서에 임명된 것이 늙고 병든 뒤여서 실로 정력이 미치지 못하였으나, 한 가지 일도 감히 구차히 처리하지 않았다. 한 외사촌과 한 매제(妹弟)가 벼슬을 매우 간절히 구하였으나 선생은 끝내 그들을 도와주지 않았다. 이에 대해 어떤 사람이 의심하여 물으니, 선생이 말하기를, “난들 어찌 생각하지 않겠는가만 저 두 사람이 모두 백관(百官)의 일을 감당하지 못할 사람이니, 어찌 감히 사사로운 정을 앞세워 조정의 명기(名器)를 가벼이 해서야 되겠는가.”라고 하였다. 창석공(蒼石公 이현영(李顯英))은 매양 선생의 지공무사(至公無私)한 마음은 남들이 미칠 수 없다고 감탄하였다. 선생의 문장은 육경(六經)에서 나오고 성리(性理)에 근본하였으므로 험한 말과 기이한 글자를 전혀 쓰지 않았다. 소차(疏箚)에 더욱 뛰어났는데, 문장이 혼후하고 전거(典據)가 있고 고상하며 명백하고 간절하여 임금을 감동시키기에 충분하니, 평론하는 자들이 “근세의 대가(大家)라 하는 사람들도 미칠 수 없다.” 하였다. 시를 지을 때에는 말을 적절하게 다듬어 남이 형용할 수 없는 곳을 형용해 내었다. 그러나 반드시 시를 지어야 할 경우에 한해서 시를 지었고 시 짓기를 좋아하지는 않으면서, 항상 “시는 조그마한 재주이니 어찌 쓸데없는 곳에 심력을 쓸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필법 또한 단정하고 중후하며 엄격하고 치밀하여 비록 매우 급할 때나 손바닥만 한 작은 종이의 편지라 하더라도 모두 법도가 있었고, 바쁘다 하여 휘갈겨 쓰려는 뜻이 없었다. 선생은 성품이 간소(簡素)하고 고요하며 또 겸손을 좋아하여 스승으로 자처하지 않았다. 그러나 당시의 학문과 예를 강론하는 학사대부(學士大夫)와 동남(東南)의 선비들이 모두 선생에게 와서 질정하였는데, 선생의 가르침을 받고서 학문의 방향을 안 자들이 얼마인지 모를 정도였다. 아, 선생의 학문과 재주가 이미 옛사람에 못지않았고 당시의 제우(際遇) 또한 융숭하였다. 시운이 불행하여 상란(喪亂)이 자주 일어나자, 조정의 계획을 돕기 위해 더욱 간절히 상소하여, 위난(危難)을 구제하고 수치를 씻기를 바랐다. 지금 그 상소문을 보건대 정확하기가 마치 촛불로 비추고 거북점을 친 것처럼 실증되지 않음이 없으니, 가령 이 말이 정묘년 이전에 쓰였다면 반드시 강도(江都)에서 협박을 받는 환란이 없었을 것이고, 정축년 이전에 쓰였다면 반드시 남한산성에서 실패하는 화가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용렬한 사람들의 속론(俗論)에 저지당해, 채택해 시행되지 못하여 국사와 시변(時變)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아, 두렵도다. 천하의 운수인 데야 어찌할 수 없지만 후세에 이 소(疏)를 보다가 옛날에 괴통(蒯通)이 악의(樂毅)의 글을 읽다가 책을 덮은 것처럼 책을 덮고 눈물을 흘리지 않을 자가 없을 줄을 어찌 알 것이며, 또 오늘날에 혹 조용하고 한가로울 때 읽으시다가 성상의 뜻에 들어 국가를 재건하는 일에 도움을 주게 될지를 어찌 알겠는가. 다만 하늘의 뜻이 어떠하냐에 달렸을 뿐이다. 선생은 항상 마음과 일이 서로 어그러져서 국은(國恩)을 보답하지 못한 것을 한탄하였다. 만년에는 초야로 돌아와서 바야흐로 예전에 익힌 학문을 복습하고 정리하며 끊어진 학통을 정돈 중이었는데, 하늘이 선생을 세상에 남겨 주지 않아서 대들보가 갑자기 꺾였으니, 이 또한 운명이라 하겠다. 나 준길은 약관의 나이에 선생의 가문으로 장가들었다. 내 비록 매우 어둡고 나약하여 학문에 능하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오늘의 내가 있게 된 것은 모두 선생께서 인도하여 도와주신 덕이다. 내가 만년이 되고 보니 더욱 마음속 깊이 사무치게 느껴지는 바가 있으므로 이에 귀로 듣고 눈으로 본 것을 모아서 이상과 같이 행장을 지어, 당세의 입언군자(立言君子)가 채택하여 필삭(筆削)하기를 기다린다. [주D-001]종선여등(從善如登) 시 : 우복(愚伏)이 ‘선행을 하는 것은 높은 곳을 오르는 것처럼 어렵다.’라는 내용의 시를 지은 것인 듯한데, 현재 《우복집(愚伏集)》에는 실려 있지 않다. [주D-002]홍문록(弘文錄) : 홍문관(弘文館)의 교리(校理)ㆍ수찬(修撰)을 뽑을 때 부제학(副提學) 이하 여러 관원이 각각 적당한 사람의 이름 밑에 권점(圈點)을 찍어, 그 점수에 따라 선발하던 일을 말한다. 또는 선발된 사람들의 성명을 기록한 문서의 뜻으로도 쓰인다. [주D-003]경(敬) : 마음을 전일(專一)하게 가져 잡념을 버리는 것으로, 곧 송대(宋代) 성리학(性理學)의 수양법이다. [주D-004]설시법(揲蓍法) : 시초점(蓍草占)을 칠 때 산가지를 세어 괘(卦)를 배설(排設)하는 것으로, 자세한 내용은 《주역》 수권(首卷) 서의(筮儀)에 실려 있다. [주D-005]선명이향합(先命而響合) : 명하기도 전에 꼭 들어맞았다는 말인데, 무엇을 말한 것인지 알 수 없다. 시초점을 칠 때는 먼저 점치고 싶은 일을 신령(神靈)에게 알리는 명사(命辭)를 왼 뒤에 괘(卦)를 배설하여 길흉을 점치는 것인데, 이번의 경우는 길흉을 점친 것이 아니고, 단지 설시하는 방법만을 알려 주기 위해 괘를 배설한 것뿐이니, 맞고 맞지 않는 것은 본래 논의 대상이 아니다. [주D-006]복수의 일 : 임진왜란 때 왜적에게 살해된 어머니와 아우의 복수를 이른다. [주D-007]몽복(夢卜) : 고대 은 고종(殷高宗)이 꿈에서 부열(傅說)을 만나 보고는 그의 얼굴을 그려 사방에 배포해서 부열을 찾아 정승으로 삼은 고사(故事)에서 나온 말로 임금이 어진 정승을 얻은 뜻으로 쓰이는데, 여기서는 부열을 지칭한다. [주D-008]정일집중(精一執中) : 유정유일 윤집궐중(惟精惟一允執厥中)의 준말로, 인심(人心)은 사(私)에 빠지기 쉽고 도심(道心)은 밝아지기 어려우니, 정미롭게 살펴 육체의 사욕에 빠지지 않고, 전일하게 지켜 의리의 정도에 순수하여야 일상의 모든 행위에 과불급(過不及)이 없게 되어, 중정(中正)을 지킬 수 있다는 말이다. [주D-009]격치성정 극기복례(格致誠正克己復禮) : 격치는 격물치지(格物致知)의 준말로, 사물의 이치를 끝까지 연구하여 나의 지식이 극진한 경지에 이르는 것을 말하고, 성정은 성의정심(誠意正心)의 준말로, 마음의 발로(發露)인 생각〔意〕을 진실하게 가져 스스로를 속임이 없고, 치우치기 쉬운 마음을 항상 중정(中正)의 상태로 유지하는 것을 말한다. 《大學章句 首章》 극기복례는 사욕을 극복하고 천리(天理)로 돌아가는 것을 말한다. 《論語 顔淵》 [주D-010]명선성신(明善誠身) : 불명호선 불성기신(不明乎善不誠其身)을 이른 말로, 선을 분명하게 알지 못하면 사물의 이치를 연구하여 지선(至善)의 소재(所在)를 알 수 없기 때문에 자신이 선을 실천할 수 없다는 뜻이다. 《孟子 離婁上》 [주D-011]현단(玄端)과 반령(盤領) : 현단은 검은 천으로 가장자리를 싸서 돌린 제복(祭服)으로, 제사 때면 천자에서 사대부까지 모두 입었다. 반령은 동정 부위가 원반형(圓盤型)으로 된 옷이다. [주D-012]일란이 …… 알겠네 : 천지가 생긴 이후로 일치일란(一治一亂)이 반복되는 것은 모두 천운(天運)이니, 정인홍 같은 자가 태어난 것도 하늘의 뜻이라는 말이다. [주D-013]김직재(金直哉)의 옥사 : 광해군 4년에 병조의 문서를 위조(僞造)한 죄로 체포된 김경립(金景立)의 무고(誣告)로 일어난 옥사인데, 무고한 내용은 김직재가 아들 백함(百緘)과 함께 반역(叛逆)을 모의했다는 것이었다. [주D-014]심경(沈憬)이 …… 일 : 광해군이 장차 모후(母后)를 폐위(廢位)할 것이라는 말을 발설한 죄로 체포된 심경이, 그 말의 출처(出處)를 캐어 묻는 광해에게 우복에게서 들었다고 무고한 일을 말한다. [주D-015]후한(後漢) 위소(魏劭)의 일 : 위소는 후한 때 사람으로 태수(太守) 사필(史弼)이 무함(誣陷)으로 죽게 되자, 자신의 집을 팔아 그 돈을 요로(要路)에 뇌물로 주어, 사필을 사형에서 면하게 한 고사(故事)를 이른다. 《後漢書 卷64 史弼列傳》 [주D-016]산의생(散宜生) : 은(殷)나라 때 서백(西伯 주 문왕(周文王))이 주왕(紂王)에 의해 유리(羑里)에 갇히자, 굉요(閎夭)ㆍ산의생 등이 미녀(美女)와 문마(文馬)를 주왕에게 바치고서 서백을 석방시킨 고사를 이른다. 《史記 卷4 周本紀》 [주D-017]계옥(啓沃) : 네 마음을 열어서 나의 마음에 부으라는 말인데, 신하가 성심을 다해서 임금을 보좌하는 뜻으로 쓰인다. 《書經 說命上》 [주D-018]탑호자(搭胡資) : 탑호는 저고리 위에 입는 조끼 모양의 덧저고리이고, 자는 옷감의 뜻이다. [주D-019]부장기복(不杖期服) : 상장(喪杖)을 짚지 않고 기년복(朞年服)을 입는 것으로, 부모가 생존했으면 처상(妻喪)에 상장을 짚지 않고 기년복만을 입는다. 《儀禮 喪服》 [주D-020]소(昭)와 목(穆) : 소는 왼쪽이고 목은 오른쪽으로, 종묘(宗廟)에 신주(神主)를 모시는 차례인데, 천자(天子)의 경우에는 가운데에 시조(始祖)를 모시고, 2세ㆍ4세ㆍ6세는 소에 모시고, 3세ㆍ5세ㆍ7세는 목에 모신다. 제후(諸侯)는 오묘(五廟)이고, 대부(大夫)는 삼묘(三廟)이다. [주D-021]인정포(人情布) : 포목(布木)을 바칠 때 하급 관리에게 위로비 명목으로 주는 포목인데, 사실은 관에서 강요하는 뇌물이다. [주D-022]쇄마가(刷馬價) : 각 지방에서 관용(官用)으로 쓰는 말의 삯을 주기 위해 백성들에게서 받아들이는 베나 쌀을 이른다. 지방관의 영송(迎送)이나 중국으로 보내는 방물(方物)을 수송하는 데 주로 민간의 말을 삯을 주고 사용하였다. [주D-023]군보(軍保) : 현역에 복무하지 않고 정군(正軍)이 현역에 복무하는 데 드는 비용을 부담하는 장정이다. 원래는 군역(軍役)을 면제받는 대신 정병(正兵)의 농사를 대신 지어 주던 조정(助丁)을 가리키는 말이었는데, 뒤에는 군역을 면제해 주는 대가로 삼베나 무명 등을 받아들여 군대의 비용으로 충당하였다. [주D-024]공구수성(恐懼修省) : 옛사람들은 사람에게 잘못이 있으면 하늘이 재변(災變)을 내려 경계의 뜻을 보인다고 생각했다. 그러므로 천변(天變)이 생기면 임금은 그 천변을 두려워하여, 몸을 닦고 허물을 반성하였다. 《周易 震卦 象》 [주D-025]복합(伏閤) : 나라에 중대한 일이 있으면 조신(朝臣) 또는 유생(儒生)들이 상소(上疏)하고서 그 요청이 받아들여질 때까지 대궐 앞에 엎드려 청하는 일이다. [주D-026]압존(壓尊) : 어른에 대한 존대(尊待)가 그보다 더 높은 어른 앞에서는 줄어드는 것을 말한다. [주D-027]분황(焚黃) : 관원(官員)의 조상에게 증직(贈職)의 교지(敎旨)가 내리면 황지(黃紙)에 그 교지 한 통을 복사해서 분묘(墳墓)로 가서 고유제(告由祭)를 지낸 뒤에 불사르는 것이다. [주D-028]파방(罷榜) : 과거(科擧)에 급제자(及第者)를 발표한 뒤에 부정이 탄로되면 그 발표를 취소하는 것이다. [주D-029]연작처당(燕雀處堂) : 화가 닥쳐오는 줄도 모르고 편안히 지낸다는 뜻이다. 제비와 참새가 사람의 집에 의지하여 집을 짓고 살면서 그 집에 불이 나서 타고 있는데도 어미와 새끼가 즐거워하며 화가 닥치는 줄을 모른다는 고사(故事)에서 나온 말이다. 《孔叢子 論勢》 [주D-030]많은 …… 계발한다 : 나라에 어려운 일이 많으면 임금은 그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정신을 가다듬어 치국(治國)에 전념할 것이므로 나라를 부흥시킬 수 있고, 큰 우환(憂患)을 당하면 그 우환의 원인과 대처할 방법을 깊이 생각할 것이므로 지혜가 열린다는 뜻이다. [주D-031]우환(憂患)에서 …… 기회이니 : 사람이 곤란과 우환을 겪으면 뜻이 강인해져서 어떤 역경에도 흔들리지 않고, 항상 분발하여 조심하고 반성하며 그 역경을 헤쳐나갈 방법을 생각하게 된다. 그러므로 우환은 사람을 성숙하게 만들어 생존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것이 되지만, 안락(安樂)은 반대로 사람을 사망의 구덩이로 밀어 넣는 원인이 된다. 《孟子 告子下》 [주D-032]위 문공(衛文公)은 …… 이르러서 : 적(狄)의 침입으로 위나라가 망하고 임금인 의공(懿公)이 죽자, 위나라 유민(遺民)들은 조읍(曹邑)으로 옮겨 대공(戴公)을 임금으로 세웠다. 오래지 않아 대공이 죽자, 제 환공(齊桓公)이 적을 토벌하고서 위나라를 초구(楚丘)에 봉해 주고 문공을 임금으로 세웠다. 문공은 망국(亡國)의 한을 잊지 않기 위해 상중(喪中)에나 입는 대포(大布)의 옷과 대백(大帛)의 모자를 쓰고 국가 재건에 온갖 정성을 다하였으므로, 즉위할 때 30승(乘)이었던 혁거(革車)가 말년에는 300승으로 늘어나는 부국강병(富國强兵)을 이루었다고 한다. 《春秋左傳 閔公2年》 [주D-033]월왕(越王) …… 씻었으니 : 월왕 구천(句踐)이 오왕(吳王) 부차(夫差)에게 패배하여 회계산(會稽山)으로 도망하였다가 부차의 용서를 받고 다시 월나라로 돌아와서는 백성을 어루만지고 군비(軍備)를 강화하여 마침내 오나라를 쳐서 복수한 고사(故事)를 이른다. 《史記 卷41 越王句踐世家》 오나라 궁궐을 소(沼)로 만든 일은 없는데, 다만 《춘추좌전(春秋左傳)》에 “월나라가 10년 동안 인구와 재물을 늘리고, 10년 동안 백성을 교육한다면 20년 뒤에는 오나라 궁궐이 아마도 소가 될 것이다.”라는 말이 보일 뿐이다. 《春秋左傳 哀公元年》 [주D-034]구천은 …… 표한 것 : 구천이 회계산에서 월나라로 돌아온 뒤에는 항상 쓸개를 핥으며 복수의 일념을 불태웠고, 길을 가다가 성난 개구리를 보고는 그 용기를 가상히 여겨 경의를 표하였다고 한다. 《史記 卷41 越王句踐世家》 《韓非子 內儲說》 [주D-035]기미(羈縻) : 힘으로 외적(外敵)을 굴복시킬 수 없으면 적당히 국교(國交)를 맺어 회유(懷柔)하는 것을 말한다. [주D-036]이인거(李仁居)의 역변(逆變) : 횡성(橫城) 사람 이인거가 정사공신(靖社功臣)들이 나라를 그르친다는 명분으로 무리를 규합하여 난을 일으켜 횡성 현감(橫城縣監)을 사로잡고 군기(軍器)를 빼앗아 스스로 창의중흥대장(倡義中興大將)이라 칭하고서 서울로 침입하려 했던 사건을 말한다. 《仁祖實錄 5年 10月 5日》 [주D-037]유효립(柳孝立)의 역옥(逆獄) : 인조반정으로 제천(堤川)에 유배된 유효립이 몰락한 대북(大北)의 잔당과 제휴하여 광해군을 상왕(上王)으로 모시고 선조(宣祖)의 다섯째 아들 인성군(仁城君)을 임금으로 추대하려는 음모를 꾸민 사건을 말한다. 《仁祖實錄 6年 1月 3日》 [주D-038]쓸개를 …… 때문 : 월왕 구천은 자신을 일깨우기 위하여 항상 쓸개를 핥고, 여름에는 손에 불을 쥐고 겨울에는 얼음을 품속에 넣고 있었다고 한다. 《吳越春秋 句踐歸國外傳》 [주D-039]구사(九思) : 군자(君子)가 항상 생각하는 아홉 가지 일로, 시사명(視思明), 청사총(聽思聰), 모사공(貌思恭), 언사충(言思忠), 사사경(事思敬), 의사문(疑思問), 분사난(忿思難), 견득사의(見得思義)이다. 《論語 季氏》 [주D-040]구용(九容) : 군자가 항상 지켜야 할 아홉 가지 용모로, 족용중(足容重), 수용공(手容恭), 목용단(目容端), 구용지(口容止), 성용정(聲容靜), 두용직(頭容直), 기용숙(氣容肅), 입용덕(立容德), 색용장(色容莊)이다. 《禮記 玉藻》 [주D-041]도유우불(都兪吁咈) : 도와 유는 찬성하는 말이고, 우와 불은 반대하는 말인데, 군신(君臣) 사이에 화목하게 정치를 토론하는 것을 이른다. 《書經 虞書》 [주D-042]동심인성(動心忍性) : 인의예지(仁義禮智)의 마음을 발동(發動)시키고 성색취미(聲色臭味)의 성품을 참는다는 뜻으로 어떤 고난에도 흔들리지 않고 자신을 굳게 지키는 것을 말한다. 《孟子 告子下》 [주D-043]계찬(啓攢) : 발인(發靷)하기 전에 빈전(殯殿)을 열고 재궁(梓宮)을 꺼내는 것을 말한다. [주D-044]사불급설(駟不及舌) : 실언(失言)을 애석히 여기는 말이다. 말이 한 번 입에서 나오면 그 전파가 너무 빨라 사마(駟馬)로 달려도 따라잡을 수 없다는 뜻이다. 《論語 顔淵》 [주D-045]사숙(私淑) : 존경하는 분에게 직접 가서 배우지 못하고, 다른 사람을 통해 그분의 도덕과 학문을 듣고서 본보기로 삼는 것을 말한다. 《孟子 離婁下》 [주D-046]소본(遡本) : 본원(本原)을 찾는다는 말인데, 여기서는 주자(朱子)를 근본으로 삼아 그의 학문을 탐구하였다는 뜻으로 쓰였다. [주D-047]범순부(范淳夫) : 순부는 송(宋)나라의 명신(名臣) 범조우(范祖禹)의 자이다. 순부는 평소에 남의 잘못을 말하지 않았으나, 일을 당하면 원칙을 지켜 조금도 숨기지 않고 시비(是非)를 분별하였다. 《宋史 卷337 范祖禹列傳》 [주D-048]유배(類俳) : 배문(俳文)과 같다는 말이다. 송대(宋代) 이후로 문장을 논하는 자들은 변려문(騈儷文)을 모두 배문이라 하였다. [주D-049]괴통(蒯通)이 …… 덮은 것 : 초한(楚漢) 때의 책사(策士) 괴통은 악의(樂毅)가 연왕(燕王)에게 보낸 답서(答書)를 읽을 때마다 책을 덮고 눈물을 흘리지 않은 적이 없었다고 한다. 《史記 卷80 樂毅列傳》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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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정 6년 계유년(1633, 인조11) 8월 경신삭(庚申朔) 22일 신사(辛巳)에 사위 봉직랑(奉直郞) 전(前) 동몽교관(童蒙敎官) 송준길(宋浚吉)은 삼가 술과 과일로 전(奠)을 올리면서 장인 우복 정 선생의 영연(靈筵)에 영결(永訣)을 고합니다. 아, 슬픕니다. 시귀(蓍龜)를 잃고 부모를 잃었으며, 태산이 무너지고 들보가 꺾였습니다. 조정에서 조상하는 경사대부(卿士大夫)나 길에서 탄식하는 상려서례(商旅胥隸)나 집에서 통곡하는 경생학자(經生學子)들이 모두 “국가는 누구를 의지하고 백성은 누구를 우러르며 우리 무리는 장차 누구를 본받을 것인가.”라고 하며, 비록 평소에 취향을 달리해 서로 좋아하지 않던 자들까지도 눈물을 흘리며 애석해하지 않는 이가 없었으니, 아, 이를 누가 시켜서 그런 것이겠습니까. 이는 선생의 문장(文章)이 세상에 모범이 되어 후세에 전하기에 충분하고, 정학(正學 정도(正道)에 맞는 학문)이 선현(先賢)을 계승하여 후학을 계도(啓導)하기에 충분하며, 효제(孝悌)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어 인심(仁心)을 일으켜 교화를 이루기에 충분하고, 임금을 사랑하고 백성에게 은택을 끼치려는 뜻과 나라를 걱정하고 풍속을 근심한 마음을 귀신이 증명하고 지우(智愚)가 모두 함께 우러른 바이기 때문입니다. 이해(利害)의 사심으로 인해 공덕이 당시에는 가려졌으나, 병이(秉彝)의 천성(天性)이 끝내 오늘날에 끊어져 없어지지 않았으니, 이것이 어찌 이른바 ‘사람은 하지 못하는 짓이 없으나 하늘은 거짓을 용납하지 않는다.’라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이 소자(小子)에게는 차마 말할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과거에 소자는 자질이 어리석어 학문에 방향을 몰랐습니다. 약관의 나이에 비로소 선생의 문하(門下)에 집지(執贄 폐백을 드리고 문인이 됨)하니, 선생께서는 소경이 지팡이로 땅을 더듬어 길을 찾듯이 하는 소자를 가엾게 여기시어 저에게 평탄한 큰 길을 일러주시고, 일상생활의 강설(講說)하는 즈음에 친절히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리고 연못에 연꽃이 피고 정원에 죽순(竹筍)이 돋아날 때면 지팡이를 집고 한가로이 산책하시면서 면전(面前)의 사물마다 그 이치를 정성껏 일러주셨습니다. 제가 어리석고 변변치 못하여 비록 조과발기(操戈發機)하여 가르쳐 주신 선생의 뜻에 부응하지는 못했으나, 비로소 이 학문(學問 성리학(性理學))이 있다는 것을 알고서 소인(小人)이 되는 것을 면하게 된 것이 누구의 은혜입니까. 경오년(1630, 인조8) 겨울 선생께서 벼슬을 내어놓고 돌아오신 다음 해에 소자가 달려가 뵈었더니, 선생께서는 평소보다 더욱 기뻐하고 사랑하시며, “내가 평소 주자(朱子)의 글을 매우 좋아하였으나 더불어 말할 만한 사람이 없었으니, 봄이 되어 날씨가 따뜻해지면 그대를 데리고 내산(內山)으로 들어가서 함께 검토하고 싶네. 그리고 때때로 가마를 타고서 낙수(洛水) 가의 명승을 찾아 노닐면서 여생을 마친다면 어찌 지극한 즐거움이 아니겠는가.”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얼마 되지 않아 선생께 이미 병이 생겨 전에 말씀하셨던 ‘지극한 즐거움’을 얻을 수 없게 되자, 또 저에게 “나는 이제 틀렸으니, 나의 염빈(殮殯)의 일과 앞으로 있을 모든 일을 오직 자네에게 부탁하네. 상자에 있는 유고(遺稿)를 자네가 정리하고 미성(未成)한 어린 손자를 자네가 가르치게나.”라고 하셨습니다. 간곡하게 부탁하신 그 유언이 마음속 깊이 새겨져서 잊히지 않고 있으므로 지금에 와서 생각해 보아도 가슴이 아프고 창자가 끊어집니다. 아, 슬픕니다. 지난봄 눈물을 흘리며 작별을 고할 적에 선생의 병환이 끝내 고칠 수 없는 고질임을 알았으나, 신명의 도움으로 침식(寢食)이 오히려 편안하시므로 가을에 아이들을 데리고 가서 다시 지난해처럼 단란히 앉아서 웃음을 드리겠다고 생각했는데, 뜻밖에 왕명(王命)을 받고 서울로 올라간 지 채 열흘도 되기 전에 부고(訃告)가 당도하였으니, 저 하늘은 언제나 이 같은 화(禍)를 거두려는 것입니까. 아, 염빈에 관한 일은 선생께서 부탁하신 바일 뿐만이 아니라 소자가 정성과 힘을 다 바칠 것도 바로 이 일입니다. 그러나 부고를 받고 천리 길을 달려오다 보니 시일이 늦어서 평소의 계획이 이미 어그러졌습니다. 진작에 이렇게 될 줄 알았다면 어찌 감히 하루인들 곁을 떠나 다른 곳으로 가서 선생의 뜻과 소자의 초심(初心)을 저버렸겠습니까. 끝없는 이 통한(痛恨)을 늙어 죽도록 풀기 어려울 것입니다. 아, 슬픕니다. 선생께서는 걸음걸이에 보폭이 넓고 기력이 건장하였으며, 많은 사람들의 비난 속에서도 전혀 흔들리지 않고 고고한 자세로 사람들을 굽어보았으며, 명성은 금옥(金玉)의 소리가 울려퍼지는 것처럼 원근(遠近)에 전파되고 인품(人品)은 산이 솟고 물이 고인 것처럼 굳세면서도 침착하셨으며, 흉금을 활짝 열고 맑고 아름다운 내면을 드러내시어, 마치 봉황(鳳凰)이 세상에 나타나서 모든 새들의 표준이 되듯이 사람들의 표준이 되셨습니다. 이렇고 보면 하늘이 선생을 낸 것은 장차 큰일을 하게 하기 위해서인 듯한데, 도리어 뒤흔들고 좌절시켜 세상에 나아가서는 당시에 끝까지 쓰이지 못하게 하고, 물러나서는 후학에게 행운을 전하지 못하게 한 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이것이 하늘이 정한 운명이란 말입니까, 아니란 말입니까. 아, 선생께서 조정에 계실 때는 본원(本原)이 배양되어 원기(元氣)가 완전하고 조정의 의논이 결정되어 국시(國是)가 정해졌더니, 선생이 한 번 떠나자 엄격한 제방이 대번에 무너져서 온갖 괴변이 생겨 거의 수습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고 보면, 백세 이전이나 만세 이후에 반드시 한없이 탄식하며 영원히 그리워하는 자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 이 어찌 하늘이 정한 운명이어서 그 사이에 인력(人力)을 용납할 수 없어서가 아니겠습니까. 아, 슬픕니다. 선생의 모습을 영원히 볼 수 없게 되었고 영향도 이미 희미하여, 3300조항의 예의(禮儀)와 대경대법(大經大法)의 심오한 학통이 끊어져서 아득하기만 하여 학업을 마칠 기약이 없으니, 오직 남기신 책을 가슴에 안고 남기신 가르침을 받들어 젊어서 이루지 못한 공부를 말년에 이루어 지난날의 잘못을 속죄하는 길만이 있을 뿐입니다. 만약 영령(英靈)이 계시다면 반드시 저승에서 도와 주실 것으로 믿습니다. 말은 끝이 있으나 정은 끝이 없습니다. 한 잔 술로 영원한 이별을 고하오니, 아, 슬픕니다. 흠향하소서. [주D-001]시귀(蓍龜) : 길흉을 점치는 시초(蓍草)와 거북인데, 덕이 높고 학문이 깊어 국가의 의심스러운 일을 결단하는 사람의 뜻으로 쓰인다. [주D-002]조과발기(操戈發機) : 조과는 조모입실(操矛入室)의 준말로 상대의 논리를 깊이 파고들어 그 오류를 비판하는 것이고, 발기는 기관을 발동한다는 말로 중요한 뜻을 드러내 밝히는 것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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