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최씨 금석문 등/高麗國大匡完山君諡文眞崔公墓誌銘

고려국 대광(大匡) 완산군(完山君) 시(諡) 문진(文眞) 최공(崔公)의 묘지명 병서(幷序)

아베베1 2013. 1. 14. 13:58


 
東文選卷之一百二十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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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墓誌
高麗國大匡完山君謚文眞崔公墓誌銘 幷序

完山之崔氏。譜可考者曰純爵。官至檢校神虎衛上將軍。生崇。中郞將。中郞將生南敷。官至通議大夫,左右衛大將軍,知工部事。工部生諱佺。左右衛保勝郞將。郞將生諱正臣。左右衛中郞將。中郞將生諱得枰。通憲大夫,選部典書,上護軍致仕。廉正自守。人敬憚之。歷事忠烈,忠宣,忠肅三王。而忠宣尤器重之。忠宣雖內禪。而國政必與聞。故士大夫之升黜多出於忠宣。選部在臺綱紀立。在刑部刑罰淸。出守金海,尙州。民懷其惠。再按全羅。民畏其風。其量田也。副蔡宰相洪哲分理全羅州縣之田。不廢法不擾民。享年七十五。選部娶奉翊大夫,知密直司事,監察大夫,文翰學士,承旨,世子元賓郭公諱預之女。以大德癸卯四月癸酉生公。公名宰字宰之。至治元年。補東大悲院錄事。泰定甲子。入內侍。四年授散員。明年轉別將。天편001庚午。順興君安公文凱,深岳君李公湛同掌試。公中之。六年然後改丹陽府注簿。又四年始授中部令。階承奉郞。未幾。知瑞州事。以母憂不赴。蓋欲終制也。明年忠肅王沙汰冗官。有薦公者。王曰。吾固知其父風憲。無以易此人矣。卽授監察持平。不獲已就職。玄陵卽位。迺褫其職。及高氏之亂作。凡王所設置。悉皆更革。立都監以公爲判官。公甚不樂。稱疾不出。相府頗督之。且脅之。公徐出謂其判事宰相曰。王固失德矣。然爲臣而敭君之不美。於公安乎。王之惡。非出於王。左右逢之耳。逢之於前。敭之於後。吾實恥之。其宰相默不敢言。明陵卽位。初政授典法正郞。其年冬出知興州。凡可以便民者。靡不擧行。田籍久且爛。公修之。仍藏舊本相質。聞者歎服。印政丞當國。素忌公故替之。歲丁亥政丞王公煦,金公永暾奉聖旨整理田民詞訟。擧公爲判官。且馳驛召之。公至則二公又曰。長興府今號難治。非崔某不可。又出之。公將之任。二公又曰。崔某前爲持平有威望。盍留之再任。適外氏郭公迎俊爲大夫。法當避。遷典法正郞。歲戊子。按察慶尙道。一年再遷典客副令,資贍司使。公兼理支應內用事。羨餘盡歸之民。前弊絶矣。歲己丑。出知襄州。有使者降香。凌辱存撫使。公曰。非禮也。將及我矣。棄官而歸。執政者喜。白授監察掌令。臺綱復振矣。一年而罷。歲辛卯玄陵卽位。選臺臣復掌令。明年移開城少尹。辭歸淸州。日新之難作。歲甲午。以典法揔郞召。未幾移版圖。其秋出使福州牧。察民情守條約。去之日人如失怙恃。其所施設。至今遵之。乙未秋。以中顯大夫,監察執義,直寶文閣召至。選軍以田。其法舊矣。命公爲其都監使。一人受田。有子孫子孫傳之。無則他人代受。有罪當收其田。則人人皆欲得。於是雜然矣。公曰。是爭民施奪也可乎。於是與其當得者一人而止。訟稍簡矣。歲丙申。拜大中大夫,尙書右丞。歲丁酉。進正議大夫,判大府寺事。盖公年五十五。而志不少衰。益勤於職。旬月間府庫實矣。玄陵曰。判大府盡其職者。崔某而已。歲己亥。出爲公州牧。如在福日。歲辛丑。又出爲尙州牧。其冬國家避兵南徙。明年春。幸尙州。公盡力供辦。惟恐一毫或傷於民。故求之不得者稍短之。三月以奉翊大夫,典法判書。分司本京。公辭違。玄陵引見。溫言慰諭。歲甲辰。拜監察大夫,進賢館提學,同知春秋館事。其冬封重大匡完山君。明年移典理判書。又明年移開城尹。歲己酉。官制行。改榮祿大夫。歲辛亥。安東闕守臣。玄陵曰。安東守我已得人矣。於是批下。遣衛士督公行。慮公辭不就也。甲寅春。以老乞歸鄕。秋九月。玄陵薨。公會哭盡哀。今上拜公密直副使商議。公固辭請還鄕。封完山君。階大匡。明年春。命駕往見江陵崔密直安沼而歸。盖永訣也。秋九月有微疾。語諸子曰。吾甞夢異人謂我曰。至午死。今戊午年也。而又如此。吾必不起也。十月己巳卒。享年七十六。十二月壬寅。葬于居第之東坎麓。理命也。嗚呼。公可謂達人矣。公再娶。靈山郡夫人辛氏。奉翊大夫,判密直司事,藝文館提學致仕諱蕆之女也。務安郡夫人朴氏。軍簿正郞諱允鏐之女也。辛氏生二男。長思美奉翊大夫,禮儀判書。次德成及第中正大夫,三司左尹。朴氏生子三人。男曰有慶中正大夫,宗簿令,知典法司事。女適誠勤翊戴功臣,匡靖大夫,門下評理,上護軍禹仁烈。次適宣德郞,繕工寺丞趙寧。孫男女若干人。判書生子五人。長恕護軍。今爲全羅道按廉使。次愿中郞將。次愨別將。女適禮儀揔郞宋仁壽。次幼。左尹生子四人。男曰復昌別將。次曰世昌別將。次仕昌未仕。女幼。宗簿生子三人。士威郞將。餘皆幼。評理生子三人。男曰良善英明殿直。女皆幼。寺丞生女一人幼。左尹吾友也。倜倘使酒。居官所至有名。來請銘。銘曰。
惟公之直。惟公之淸。惟公之德。惟公之名。惟名惟德。惟世之則。胡不大用。正我王國。旣相我王。周旋廟堂。年七十六。尙爾康強。公退則决。允矣明哲。嗚呼崔公。世歆其風。


목은문고 제15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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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명(碑銘)
고려국 대광(大匡) 완산군(完山君) 시(諡) 문진(文眞) 최공(崔公)의 묘지명 병서(幷序)

완산 최씨(完山崔氏)의 족보 중에서 상고할 만한 이로 순작(純爵)이라는 분이 있는데, 관직이 검교신호위 상장군(檢校神虎衛上將軍)에 이르렀다. 이분이 숭(崇)을 낳았으니 관직은 중랑장(中郞將)이요, 중랑장이 남부(南敷)를 낳았으니 관직이 통의대부(通議大夫) 좌우위대장군 지공부사(左右衛大將軍知工部事)에 이르렀다. 공부가 휘(諱) 전(佺)을 낳았으니 좌우위 보승 낭장(左右衛保勝郞將)이요, 낭장이 휘 정신(正臣)을 낳았으니 좌우위 중랑장(左右衛中郞將)이다. 중랑장이 휘 득평(得枰)을 낳았는데, 통헌대부(通憲大夫) 선부전서 상호군(選部典書上護軍)으로 치사(致仕)하였다.
선부(選部)는 청렴과 공정을 신조로 자신을 굳게 지켰으므로 사람들이 경외하며 어렵게 여겼다. 충렬(忠烈)ㆍ충선(忠宣)ㆍ충숙(忠肅)의 세 임금을 차례로 섬겼는데, 그중에서도 충선왕이 특히 재능을 인정하고 중히 여겼다. 당시에 충선왕이 비록 왕위를 넘겨주기는 하였지만 나라의 정사에는 반드시 참여하였기 때문에, 사대부에 대한 인사 행정이 충선왕의 손으로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았다. 선부가 대간(臺諫)을 맡으면 기강이 확립되었고, 형부(刑部)에 있으면 형벌이 공정하게 시행되었다. 김해(金海)와 상주(尙州)의 목민관으로 나갔을 때는 백성들이 그 은혜를 사모하였고, 전라도(全羅道)를 두 번 안찰(按察)하였을 때에는 백성들이 그 풍도를 두려워하였다. 양전(量田 토지 조사)을 행할 적에 재상(宰相) 채홍철(蔡洪哲)의 부관(副官)이 되어 전라도 주현(州縣)의 토지를 분담해서 처리하였는데, 법에 어긋나지 않게 하면서도 백성들이 동요되지 않게 하였다. 향년(享年)은 75세였다.
선부의 부인은 봉익대부(奉翊大夫) 지밀직사사 감찰대부 문한학사승지 세자원빈(知密直司事監察大夫文翰學士承旨世子元賓) 곽공(郭公) 휘 예(預)의 딸이다. 대덕(大德) 계묘년(1303, 충렬왕29) 4월 계유일에 공을 낳았다.
공의 이름은 재(宰)요, 자(字)는 재지(宰之)이다. 지치(至治) 원년(1321, 충숙왕8)에 동대비원 녹사(東大悲院錄事)에 보임(補任)되었다. 태정(泰定) 갑자년(1324, 충숙왕11)에 내시부(內侍府)로 들어갔다가 태정 4년에 산원(散員)에 제수되었으며, 그 이듬해에 별장(別將)으로 옮겼다. 천력(天曆) 경오년(1330, 충혜왕 즉위)에 순흥군(順興君) 안공 문개(安公文凱)와 심악군(深岳君) 이공 담(李公湛)이 공동으로 관장한 과거에서 공이 급제하였는데, 6년이 지난 뒤에 단양부 주부(丹陽府注簿)로 개임(改任)되었고, 또 4년이 지나서야 비로소 중부령(中部令)에 제수되면서 승봉랑(承奉郞)의 품계를 받았다. 얼마 뒤에 지서주사(知瑞州事)가 되었으나 모친상을 당해 부임하지 않았으니, 이는 복제(服制)를 마치기 위함이었다. 이듬해에 충숙왕이 쓸모없는 관원들을 도태시켰다. 이때 어떤 사람이 공을 천거하니, 왕이 이르기를 “내가 원래 그의 부친을 알고 있다. 풍헌관(風憲官)으로는 이 사람을 당할 자가 없을 것이다.” 하고는 즉시 감찰 지평(監察持平)을 제수하였으므로 공이 부득이 취임하였다가, 영릉(永陵 충혜왕(忠惠王))이 복위하자 이에 체직(遞職)되었다.
그러다가 고씨(高氏)의 난이 일어남에 미쳐서는, 무릇 왕이 설치해 놓은 것들을 모조리 뜯어고치려 하면서 도감(都監)을 세우고는 공을 판관(判官)으로 임명하였는데, 공이 매우 불쾌하게 생각하여 병을 칭탁하고 나가지 않았다. 이에 상부(相府)가 자못 독촉하면서 협박을 가해 오자, 공이 천천히 나가서 도감의 판사(判事)인 재상에게 말하기를 “왕이 물론 덕을 잃기는 하였다. 그러나 신하 된 입장에서 임금의 불미스러운 점을 들추어내는 것이 공의 마음에는 편안한가? 왕의 잘못은 왕에게서 나온 것이라기보다는, 좌우에 있는 신하들이 영합해서 그렇게 된 것이다. 앞에서는 영합하다가 뒤에 가서 들추어내다니, 나는 이를 실로 부끄럽게 생각한다.” 하니, 그 재상이 입을 다문 채 감히 아무 말도 하지 못하였다.
명릉(明陵 충목왕(忠穆王))이 즉위한 뒤 처음 행한 정사(政事)에서 공에게 전법 정랑(典法正郞)을 제수하였다. 그해 겨울에 흥주(興州)를 다스리러 나가서, 백성을 편안하게 할 수 있는 일이라면 거행하지 않는 것이 없었다. 또 전적(田籍)이 오래되어 낡았으므로 공이 이를 개수(改修)하였는데, 소장되어 있던 구본(舊本)과 일일이 확인하여 대조하는 작업을 벌이자 듣는 이들이 모두 탄복하였다. 인 정승(印政丞 인당(印璫))이 정권을 잡고 나서는 평소에 공을 꺼렸기 때문에 그 자리에서 교체시켰다.
정해년(1347, 충목왕3)에 정승인 왕공 후(王公煦)와 김공 영돈(金公永暾)이 성지(聖旨)를 받들고서 전민(田民)의 송사(訟事)를 정리할 적에, 공을 판관(判官)으로 천거하고는 역마(驛馬)를 치달려 불러오게 하였다. 그런데 공이 도착하자, 두 정승이 또 상의하기를 “장흥부(長興府)는 지금 다스리기 어려운 곳으로 유명하니, 최모(崔某)가 아니면 안 되겠다.” 하고는 다시 외방으로 나가게 하였다. 이에 공이 장차 부임하려고 하였는데, 두 정승이 또 상의하기를 “최모는 전에 지평(持平)으로 있을 적에 위엄과 명망을 떨쳤다. 그러니 이곳에 머물러 두어 재임(再任)시키는 것이 좋지 않겠는가.” 하였다. 그러나 때마침 외씨(外氏)인 곽공 영준(郭公迎俊)이 대부(大夫)로 있었기 때문에 법제상 상피(相避)해야 했으므로 전법 정랑(典法正郞)으로 옮겨졌다.
무자년에 경상도 안찰사(慶尙道按察使)가 되었으며, 1년 중에 전객 부령(典客副令)과 자섬사사(資贍司使)로 자리를 두 번 옮겼다. 공이 빈객을 접대하는 일과 궁중의 수요(需要)를 충당하는 일을 함께 담당하면서 남는 물품이 있으면 모두 백성들에게 돌려주었으므로 그동안의 폐단이 근절되었다. 기축년에 양주(襄州)의 목민관으로 나갔다. 원(元)나라의 사자(使者)가 향(香)을 내려 주러 와서 존무사(存撫使)를 능욕하자, 공이 말하기를 “이런 무례한 일이 장차 나에게도 닥칠 것이다.” 하고는, 관직을 버리고 돌아왔다. 이에 집정(執政)하던 자가 기뻐하며 상에게 아뢰어 감찰 장령(監察掌令)을 제수하자 대간(臺諫)의 기강이 다시 떨쳐지게 되었는데, 1년 만에 파직되고 말았다.
신묘년(1351)에 현릉(玄陵)이 즉위하자, 대신(臺臣)에 뽑혀 다시 장령(掌令)이 되었다. 이듬해에 개성 소윤(開城少尹)으로 옮겨지자 사직하고 청주(淸州)로 돌아갔는데, 이때 조일신(趙日新)의 난이 일어났다. 갑오년(1354, 공민왕3)에 전법 총랑(典法摠郞)으로 부름을 받았다가 얼마 뒤에 판도사(版圖司)로 옮겨졌다. 그해 가을에 복주 목사(福州牧使)로 나가서 민정(民政)을 살피고 조약(條約)을 지켰다. 공이 떠나던 날에 사람들이 마치 부모를 잃은 것처럼 슬퍼하였으며, 그때 공이 설치해 놓은 것들을 지금까지도 준수하고 있다. 을미년 가을에 중현대부(中顯大夫) 감찰집의 직보문각(監察執義直寶文閣)으로 조정에 불러들였다.
군사를 뽑을 때 전지(田地)를 주는 것은 예전부터의 제도였는데, 공을 명하여 그 도감사(都監使)의 일을 맡아보게 하였다. 그런데 한 사람이 전지를 받을 경우, 그에게 자손이 있으면 자손이 전해 받고, 자손이 없으면 다른 사람이 대신 받았으며, 죄를 지어야만 그 전지를 환수하게 되어 있었다. 그래서 사람들마다 전지를 얻으려고 하다 보니 자연히 시끄럽게 분란이 일어나게 되었다. 이에 공이 말하기를 “이는 바로 백성들을 다투게 하면서 빼앗는 것을 가르쳐 주는 격이니, 이대로 해서야 되겠는가.” 하고는, 전지를 받아야 할 당사자 한 사람에게만 주고 당대(當代)로 그치게 하자, 이에 관한 송사(訟事)도 차츰 줄어들게 되었다. 병신년에 대중대부(大中大夫) 상서 우승(尙書右丞)에 임명되었다. 정유년에 정의대부(正議大夫) 판대부시사(判大府寺事)로 승진하였다. 이때 공의 나이 55세였지만 뜻은 조금도 쇠하지 않아 더욱 직무에 충실한 결과 순월(旬月) 사이에 부고(府庫)가 가득 차게 되자, 현릉이 이르기를 “판대부의 직책을 극진하게 수행한 자는 최모뿐이다.” 하였다.
기해년(1359, 공민왕8)에 공주 목사(公州牧使)로 나가서 복주(福州)에 있을 때처럼 선정(善政)을 베풀었다. 신축년에 또 외방으로 나가서 상주 목사(尙州牧使)가 되었다. 그해 겨울에 조정이 병란을 피해서 남쪽으로 옮겨 갔다가 이듬해 봄에 상주로 대가(大駕)가 거둥하였다. 이때 공이 있는 힘껏 접대를 하면서도 혹시 조금이라도 백성들에게 피해를 끼치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였으므로, 무엇을 요구하다가 얻지 못한 자들로부터 차츰 비난을 받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해 3월에 봉익대부(奉翊大夫) 전법 판서(典法判書)로 본경(本京)에 가서 분사(分司)를 맡게 되었는데, 공이 하직 인사를 올리자 현릉이 인견(引見)하고는 따뜻한 말로 타이르며 위로하였다.
갑진년(1364, 공민왕13)에 감찰대부(監察大夫) 진현관제학 동지춘추관사(進賢館提學同知春秋館事)에 임명되었다. 그해 겨울에 중대광(重大匡) 완산군(完山君)에 봉해졌다. 이듬해에 전리 판서(典理判書)로 옮겼다가 이듬해에 또 개성 윤(開城尹)으로 옮겼다. 기유년(1369, 공민왕18)에 새로운 관제(官制)가 시행되자 영록대부(榮祿大夫)로 바뀌어졌다. 신해년에 안동(安東)의 수신(守臣) 자리가 비게 되자, 현릉이 이르기를 “안동을 지킬 적임자를 내가 이미 알고 있다.” 하고는, 비답(批答)을 내리면서 위사(衛士)를 보내 공의 출발을 재촉하였으니, 이는 공이 사퇴하고 취임하지 않을까 염려했기 때문이었다. 갑인년(1374, 공민왕23) 봄에 노쇠했다고 청하여 허락을 얻고 고향에 돌아왔다. 그해 9월에 현릉이 훙(薨)하자, 공이 곡(哭)하는 자리에 나아가서 애통한 심정을 극진히 하였다.
금상(今上 우왕(禑王))이 즉위하여 공을 밀직부사 상의(密直副使商議)에 임명하였으나, 공이 고사(固辭)하고 간청하여 고향으로 돌아왔다. 공에게 완산군(完山君)이 봉해지고 대광(大匡)의 품계로 올랐다. 이듬해 봄에 수레를 몰게 하여 강릉(江陵)의 밀직(密直) 최안소(崔安沼)를 방문하고 돌아왔으니, 이는 그에게 영결(永訣)을 고하려 함이었다. 그해 9월에 가벼운 질환을 앓게 되자, 여러 자제들에게 이르기를 “내가 꿈을 꾸니 이인(異人)이 나타나서 오시(午時)에 이르면 죽을 것이라고 말해 주었다. 그런데 올해가 무오년이고 또 나의 병이 이와 같으니, 내가 필시 일어나지 못할 것이다.” 하였다. 10월 기사일에 죽으니, 향년 76세였다. 12월 임인일에 살던 집의 동쪽 감좌(坎坐)의 산기슭에 장사 지냈으니, 이는 공의 유언에 따른 것이었다. 아, 그러고 보면 공이야말로 달관한 사람이라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공은 두 번 장가들었다. 영산군부인(靈山郡夫人) 신씨(辛氏)는 봉익대부(奉翊大夫) 판밀직사사 예문관제학(判密直司事藝文館提學)으로 치사(致仕)한 휘(諱) 천(蕆)의 딸이요, 무안군부인(務安郡夫人) 박씨(朴氏)는 군부 정랑(軍簿正郞) 휘 윤류(允鏐)의 딸이다. 신씨는 아들 둘을 낳았다. 장남 사미(思美)는 봉익대부 예의 판서(禮儀判書)이고, 다음 덕성(德成)은 급제(及第) 출신으로 중정대부(中正大夫) 삼사 좌윤(三司左尹)이다. 박씨는 자녀 셋을 낳았다. 아들 유경(有慶)은 중정대부 종부령 지전법사사(宗簿令知典法司事)이고, 딸은 성근익대공신(誠勤翊戴功臣) 광정대부(匡靖大夫) 문하평리 상호군(門下評理上護軍) 우인열(禹仁烈)에게 출가하였으며, 다음은 선덕랑(宣德郞) 선공시 승(繕工寺丞) 조령(趙寧)에게 출가하였다.
손자와 손녀가 약간 명 있다. 판서는 자녀 다섯을 두었다. 장남 서(恕)는 호군(護軍)을 거쳐 현재 전라도 안렴사(全羅道按廉使)이고, 다음 원(愿)은 중랑장(中郞將)이고, 다음 각(慤)은 별장(別將)이며, 장녀는 예의 총랑(禮儀摠郞) 송인수(宋仁壽)에게 출가하였고, 다음은 어리다. 좌윤은 자녀 넷을 두었다. 장남 복창(復昌)은 별장이고, 다음 세창(世昌)은 별장이고, 다음 사창(仕昌)은 아직 벼슬하지 않았으며, 딸은 어리다. 종부(宗簿)는 자녀 셋을 두었다. 아들 사위(士威)는 낭장(郞將)이고, 나머지는 모두 어리다. 평리는 자녀 셋을 두었다. 아들 양선(良善)은 영명전 직(英明殿直)이고, 딸은 모두 어리다. 시승(寺丞)은 딸 하나를 두었는데, 어리다.
좌윤은 나의 친구이다. 성격이 호탕하여 술을 마실 때마다 호기를 곧잘 부리는데, 관직 생활을 하는 동안 어디를 가나 그 일로 이름이 났다. 그가 와서 명(銘)을 청하기에 이렇게 글을 지었는데, 명은 다음과 같다.

공은 올곧았고 / 惟公之直
공은 맑았나니 / 惟公之淸
공의 덕성에 걸맞게 / 惟公之德
공의 이름 떨쳤다네 / 惟公之名
그 이름 그 덕이면 / 惟名惟德
세상의 모범이 되련마는 / 惟世之則
어찌하여 크게 쓰이는 몸이 되어 / 胡不大用
일찍이 우리 왕국 바로잡지 못했던가 / 正我王國
우리 왕을 일단 보좌하게 된 뒤로는 / 旣相我王
조정의 어려운 일 주선을 하였는데 / 周旋廟堂
일흔 하고 여섯의 나이가 되었어도 / 年七十六
건강하고 굳센 것은 여전하였다오 / 尙爾康強
물러날 때 보여 준 결단성이여 / 公退則決
이것이 바로 명철함이 아니리요 / 允矣明哲
아 우리 최공이시여 / 嗚呼崔公
세상에서 그 풍도 흠모하리라 / 世歆其風

 
동문선 제126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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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묘지(墓誌)
고려국 대광 완산군 시 문진 최공 묘지명 병서 (高麗國大匡完山君謚文眞崔公墓誌銘) 幷序

이색(李穡)

완산(完山)최씨(崔氏)의 보계(譜系)에서 상고하여 볼 만한 이로 순작(純爵)이라는 이가 있는데, 벼슬이 검교 신호위 상장군(檢校神虎衛上將軍)에 이르렀다. 그가 숭(崇)을 낳았는데 중랑장이요, 중랑장이 남부(南敷)를 낳았는데, 벼슬은 통의대부 좌우위 대장군 지공부사(通議大夫左右衛大將軍知工部事)에 이르렀고, 공부(工部)가 전(佺)을 낳았는데, 좌우위 중랑장(左右衛中郞將)이요, 중랑장이 득평(得枰)을 낳았는데, 벼슬은 통헌대부 선부전서 상호군 치사(通憲大夫選部典書上護軍致仕)로, 청렴하고 정직하게 몸을 지켜 사람들이 공경하고 두려워하였으며, 충렬ㆍ충선ㆍ충숙 등 세 임금을 내리 섬겼는데, 그 중에서도 충선왕이 더욱 그를 나라의 그릇으로 알고 중히 여겼다. 충선왕은 비록 왕위를 전해 주었으나 나라의 정사에 반드시 참여하였기 때문에, 사대부의 승진과 파면이 충선왕에게서 오는 것이 많았는데, 득평이 대직(臺職)에 있으면 기강이 섰고, 형부(刑部)에 있으면 형벌이 맑았으며, 김해(金海)와 상주(尙州)의 수령으로 고을을 다스리자 백성들이 그 은혜를 잊지 못하였고, 두 번 전라도를 안찰하자 백성들은 그의 풍의(風儀)를 두려워하였고, 전토를 측량하여 세액을 조정할 때에는 재상(宰相)채홍철(蔡洪哲)을 도와서 전라도 각 주현(州縣)의 전토를 나누어 처리하였는데, 법을 해이하게 하지도 않고 백성들을 요란하게 하지도 아니하였으며, 75세의 수명을 누렸다. 선부가 봉익대부 지밀직사사 감찰대부 문한학사 승지 세자원빈 곽예(郭預)의 딸에게 장가들어 대덕(大德) 계묘년 4월 계유일에 공을 낳았는데, 공의 이름은 재(宰)요 자는 재지(宰之)이다. 지치(至治) 원년에 동대비원 녹사(東大悲院錄事)에 보직되었고, 태정(泰定) 갑자년에 내시(內侍)로 들어갔고, 4년에 산원(散員)에 제수되었으며, 다음해에 별장으로 전직되었다. 천력(天歷) 경오년에 순흥군(順興君) 안문개(安文凱)공과 심악군(深岳君) 이담(李湛)공이 같이 고시(考試)를 관장하였는데 공은 그 과거에 급제하였으나, 6년이 지난 뒤에 단양 부주부(丹陽府注簿)로 임명되었고, 또 4년 후에 비로소 중부령(中部令)에 제수되어 승봉랑(丞奉郞) 관계(官階)를 받았다. 얼마 안 되어 지서주사(知瑞州事)가 되었으나, 모친의 상중(喪中)이라 하여 부임하지 않았으니, 이는 복제를 마치려는 것이었다. 다음해에 충숙왕이 필요 없는 관원을 도태할 때에 공을 천거하는 자가 있으니, 임금이 이르기를, “내가 본래 그 아비의 풍모와 법도가 있음을 알고 있으니, 이 사람을 가벼이 쓸 수는 없다.” 하고, 감찰지평(監察持平)에 제수하니 공은 사양하다 못하여 벼슬에 나갔으나, 공민왕(恭愍王)이 직위하자 그 관직에서 갈리었다. 고(高)씨의 난이 일어나자 무릇 임금이 설치한 것을 모두 개혁하려 하여, 도감을 설립하고 공을 판관으로 삼자, 공은 매우 즐거워하지 아니하여 병을 칭탁하고 나가지 아니하니, 상부(相府)에서 자못 독족 하고 또 협박도 하므로 공이 천천히 자리에 나아가서 그 판사(判事)의 재상에게 말하기를, “임금이 실로 덕을 잃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러나 신하로서 임금의 아름답지 못한 점을 들추어내는 것이 공의 마음에는 편하던가. 임금의 악한 일이란 임금 자신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요, 그 좌우에 있는 자들이 임금에게 아첨하여 그 악을 맞아 들여서 하도록 한 것인데, 먼저는 맞아들여 하도록 해놓고, 뒤에 다시 그 일을 들추는 것을 나는 실로 부끄러워한다.” 하니, 그 재상은 묵묵히 듣고만 있을 뿐 감히 말을 하지 못하였다. 충목왕(忠穆王)이 즉위하고 처음 정사에서 공에게 전법정랑을 제수하였고, 그 해 겨울에 지흥주(知興州)가 되어 나갔는데, 모든 백성에게 편의를 도모하는 일이라면 시행하지 않은 것이 없었으며, 전적(田籍)이 오래되고 해어져 있었으므로 공이 이것을 수정하여 구장본(舊藏本)과 서로 대질ㆍ교정하니 듣는 이들이 탄복하였다. 인정승(印政丞)이 정권을 잡게 되자, 그는 평소에 공을 꺼렸으므로 벼슬을 갈아버렸는데, 정해년에 정승 왕후(王煦)와 김영돈(金永暾)이 임금의 교지를 받들어 전민(田民)의 송사를 정리하게 되어, 공을 천거하여 판관으로 삼고 역마를 달려 보내어 급히 불렀다. 공이 이른즉 두 정승은 또 말하기를, “장흥부(長興府)는 지금 다스리기 어렵기로 이름난 곳이니, 최모가 아니면 안 된다.” 하고 다시 나가게 하였다. 공이 장차 임지로 부임하려 할 즈음에, 두 정승이 또 말하기를, “최모가 지난번 지평직에 있을 때에 위엄과 명망이 있었으니, 어찌 이런 사람을 풍헌(風憲)직에 머물어 재임하게 하지 않겠는가.” 하였다. 그러나 그때 마침 공의 외씨(外氏)인 곽영준(郭迎俊)이 그 관아의 대부로 있었으므로, 법제상 서로 피하게 되어 전법 정랑(典法正郞)으로 전임되었다. 무자년에 경상도 안찰사가 되고, 1년 만에 두 번 옮겨 전객 부령(典客副令)ㆍ자섬 사사(資贍司使)가 되어, 안팎의 비용과 물품을 공급하는 일을 겸하여 다스려서, 그것에서 남는 것을 모두 백성에게 돌려주니, 전에 있던 폐단이 근절되었다. 기축년에 지양주(知襄州)가 되어 나갔더니, 나라에서 향(香)을 내려 주는 것을 받들고 온 사자(使者)가 존무사(存撫使)를 능욕하는 것을 보고 공이 말하기를, “이는 예가 아니다. 장차 나에게도 미칠 것이다.” 하고 즉시 벼슬을 버리고 돌아갔다. 집정하던 이가 기뻐하여 임금에게 아뢰어서 감찰장령(監察掌令)을 제수하니, 대관의 강기가 다시 떨쳤으나 1년 만에 파직하고 말았다. 신묘년에 현능(玄陵 공민왕)이 즉위하고 대신(臺臣)을 선임하자 다시 장령이 되었고, 다음 해에 개성 소윤(開城少尹)으로 옮겨 갔다가 사직하고 청주(淸州)로 돌아갔다. 이때에 조일신(趙日新)의 난이 일어났던 것이다. 갑오년에 다시 불러서 전법 총랑이 되었다가 얼마 안 되어 판도(版圖)로 옮기고, 그 해 가을에는 복주 목사(福州牧使)로 나가서 민정을 살피고 약조를 지키더니, 공이 떠나던 날 백성들은 부모를 잃은 것처럼 마음 아파하였고, 그가 시설한 바를 지금까지도 그대로 따라하고 있다. 을미년 가을에 중현대부 감찰집의 직보문각(中顯大夫監察執義直寶文閣)으로 불렀는데, 그때 군사 선발을 토지에 의해 한 것은 그 법이 오랜 옛날부터 있었던 것인데, 공에게 명하여 도감사(都監使)로 삼았다. 지금까지의 법을 보면 한 사람이 전토를 받으면, 그 자손이 있으면 자손에게 전하고, 없으면 다른 사람이 대신 받게 되며 그 받은 자가 죄가 있어야만 그 전토를 회수하게 되어 있었다. 이렇게 하고 보니 사람마다 토지를 얻으려 하게 되어 번잡한 사건이 생기게 되는 것이었다. 공이 말하기를, “이것은 백성으로 하여금 재물을 서로 주고 빼앗도록 경쟁시키는 것이니, 이래서야 되겠는가.” 하고, 이에 마땅히 받을 사람 한 사람에게만 주고 그치도록 하니, 송사도 조금 간단하게 되었다. 병신년에 대중대부 상서우승(大中大夫尙書右丞)에 임명되고, 정유년에는 정의대부 판대부시사(正議大夫判大府寺事)에 승진되니, 이때 공의 나이 55세였으나 의지가 조금도 쇠하지 않고 더욱 직무에 근실하여, 한 달 사이에 창고에 곡식이 차게 되었다. 공민왕이 이르기를, “판대부(判大府)로서 그 직책을 다한 이는 최모 뿐이다.” 하였다. 기해년에 공주목(公州牧)으로 나가니, 그의 행정과 백성들의 사모함이 앞서 복주목(福州牧)에 있을 때와 같았다. 신축년에 상주 목사(尙州牧使)로 나갔는데, 그 해 겨울에 온 국가가 병란을 피하여 남쪽으로 옮겨 가고, 다음해 봄에 임금이 상주로 거둥하니, 모든 수요와 공급과 설비의 판출에 진력하면서도, 오직 털끝만치라도 백성을 상하게 하지 않을까 두려워하였으므로, 무엇을 요구하다가 얻지 못한 무리들은 이를 비방하기도 하였다. 3월에 봉익대부 전법판서(奉翊大夫典法判書)로서 본경(本京 개성)에 분사(分司)로 가게 되어 공이 하직하니, 공민왕이 인견하여 부드러운 말로 위로하고 당부하였다. 갑진년에 감찰대부 진현관제학 동지춘추관사에 임명되고, 그 해 겨울에 중대광 완산군(重大匡完山君)에 봉하였다. 다음해에 전리 판서로 옮기고, 또 다음해에 개성 윤(開城尹)으로 옮겼으며, 기유년에 새로운 관제(官制)가 시행됨으로써 영록대부(榮祿大夫)로 관제를 고쳐 받았다. 신해년에 안동(安東)의 수신(守臣)이 궐원이 되자 공민왕이 이르기를, “안동의 원은 내가 이미 그 적임을 얻었다.” 하고, 곧 비지(批旨)를 내리고는 위사(衛士)를 보내어 공의 부임을 독촉하였으니, 이는 공이 혹 사퇴하고 가지 않을까 하여 염려함이었다. 갑인년 봄에 나이 많음으로써 사퇴를 청하여 고향으로 돌아갔고, 그 해 가을 9월에 공민왕의 승하하니 공은 곡반(哭班)에 나가 곡하고 애통의 정을 다하였다. 금상(今上)이 밀직부사 상의(密直副使商議)에 임명하자 공은 굳이 사양하고 고향에 돌아가기를 청하니, 완산군(完山君)에 봉하고 계급을 대광계(大匡階)로 올렸다. 다음해 봄에 수레를 준비하도록 명하여 강릉(江陵)에 있는 밀직 최안소(崔安沼)를 가서 보고 돌아왔으니, 이는 대개 이 세상에서의 최후 결별을 하기 위함이었다. 9월에 경미한 병환이 생겼는데 여러 아들에게 말하기를, “내가 일찍이 꿈을 꾸었는데 이인(異人)이 날더러 말하기를, ‘오년(午年)에 이르면 죽는다.’고 하더라 금년이 무오년(戊午年)이고, 또 병이 이와 같으니, 내 필연코 일어나지 못할 것이다.” 하였다. 마침내 10월 기사일에 돌아가니 향년 76세였다. 12월 임인일에 그가 살던 집에서 동쪽에 있는 감방(坎方) 산기슭에 장사지냈는데, 이는 평일의 유명(遺命)을 따른 것이다. 아, 공은 가히 유속(流俗)을 벗어나고 사물에 달관한 분이라고 이를 만하다. 공은 두 번 결혼하였는데, 영산군부인(靈山郡夫人) 신(辛)씨는 봉익대부 판밀직사사 예문관제학 치사(奉翊大夫判密直司事藝文館提學致仕) 천(蕆)의 딸이요, 다음 무안군부인(務安郡夫人) 박(朴)씨는 군부 정랑(軍簿正郞) 윤류(允鏐)의 딸이다. 신씨는 2남을 낳았는데, 장남 사미(思美)는 봉익대부 예의판서(奉翊大夫禮儀判書)이며, 차남 덕성(德成)은 급제하여 중정대부 삼사좌윤(中正大夫三司左尹)이요, 박씨는 자녀 3명을 낳았는데, 아들 유경(有慶)은 중정대부 종부령 지전법사사(中正大夫宗簿令知典法司事)이며, 맏딸은 성근익대공신 광정대부 문하평리 상호군(誠勤翊戴功臣匡靖大夫門下評理上護軍) 우인열(禹仁烈)에게 시집갔고, 다음은 선덕랑 선공시승(宣德郞繕工寺丞) 조영(趙寧)에게 시집갔다. 손자에 남녀 약간 명이 있으니 판서의 자녀가 5명인데, 장남 서(恕)는 호군(護軍)으로서 지금 전라도안렴사이고, 다음은 원(原)이니 중랑장이며, 그 다음은 각(慤)이니 별장이요, 딸은 예의 총랑(禮儀摠郞) 송인수(宋仁壽)에게 출가했고 다음은 아직 어리다. 좌윤(左尹)은 자녀 4명을 두었는데, 장남 복창(復昌)은 별장이고 다음 세창(世昌)도 별장이며, 다음 사창(仕昌)은 아직 벼슬하지 않았고 딸은 어리다. 종부령은 자녀 3명을 낳았는데, 장남 사위(士威)는 낭장(郞將)이고, 그 다음은 모두 어리며, 평리(評理)는 자녀 3명을 낳았는데, 아들 양선(良善)은 영명전직(英明殿直)이고 딸은 모두 어리며, 시승(寺丞)은 딸 하나를 낳았는데 아직 어리다. 좌윤 덕성(德成)은 나의 벗이다. 성격이 쾌활하여 술도 잘하고, 관직에 있으면 가는 곳마다 명성이 있었다. 그가 와서 명(銘)을 청하는 것이다. 명하기를,

오직 공은 곧았고 / 惟公之直
또 공은 맑았다 / 惟公之淸
오직 공은 덕이 있었으며 / 惟公之德
또 공은 이름이 높았다 / 惟公之名
그 이름과 그 덕은 / 惟名惟德
이 세상의 준칙이 될 것인데 / 惟世之則
어찌 크게 쓰여져 / 胡不大用
우리 왕국을 바로잡지 못하였던가 / 正我王國
이미 우리 임금을 도와 / 旣相我王
묘당에서 주선하였고 / 周旋廟堂
76세의 고령으로 / 年七十六
아직도 강강하였건만 / 尙爾康强
공은 결단코 물러났으니 / 公退則決
진실로 밝고 슬기로웠다 / 允矣明哲
아, 최공이여 / 嗚呼崔公
온 세상이 그 풍모를 흠모하리로다 / 世歆其風

하였다.
 
계곡선생집 제13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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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명(碑銘) 9수(首)
유명조선국 증 순충적덕병의보조공신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영의정 겸 영경연 홍문관 예문관 춘추관 관상감사 세자사 완흥부원군 행 통정대부 영흥대도호부사 최공 신도비명(有明朝鮮國贈純忠積德秉義補祚功臣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領議政兼領經筵弘文館藝文館春秋館觀象監事世子師完興府院君行通政大夫永興大都護府使崔公神道碑銘) 병서

공의 휘는 기남(起南)이요 자는 흥숙(興叔)이다. 그 선조는 전주(全州) 사람으로서 상장군(上將軍) 순작(純爵)의 후예이다. 어려서부터 자질이 탁월하였으며 장성하여서는 우계(牛溪 성혼(成渾)의 호) 성 선생(成先生)에게 수학하였는데 문행(文行)으로 동료들의 추중(推重)을 받았다.
을유년 사마시(司馬試)에 입격하여 태학(太學)에서 노닐 적에, 호남의 사인(士人)이 상의 뜻에 거슬리는 말을 하다가 하옥되는 사건이 발생하자, 공이 제생(諸生)의 앞에 서서 상소하여 논했는데, 이에 선묘(宣廟)가 감동하여 깨닫고는 즉시 내보내 주었다. 그러다가 신묘사화(辛卯士禍)가 일어났을 때에는 공이 포의(布衣)의 몸으로 역시 걸려들어 정거(停擧 시험 응시 자격이 박탈되는 것)되는 벌을 받기도 하였다. 임진년에 왜란이 일어나자 늙은 어버이를 모시고 피난을 하였는데 갖은 고생을 하며 양식을 구해 봉양하느라 수염과 머리카락이 모두 하얗게 세었다.
경자년에 비로소 벼슬길에 올라 왕자의 사부(師傅)가 되었는데, 3명의 왕자를 가르치면서 사도(師道)를 엄하게 준수하여 세 왕자의 학문이 날로 발전되게 하였다.
임인년 알성시(謁聖試)에서 병과(丙科)로 급제한 뒤 성균관 전적에 임명되었다가 병조 좌랑으로 옮겨졌으며 지제교(知製敎)에 선발되었다. 이로부터 시강원 사서ㆍ문학과 형조ㆍ예조ㆍ병조의 정랑을 차례로 역임하였다.
을사년에 함경북도 평사(咸鏡北道評事)로 좌천되었다. 당시 중국의 동관(潼關)이 막 오랑캐에게 함락되었으므로 사람들이 북쪽 변방을 사지(死地)로 여긴 나머지 평사에 임명되기만 하면 번번이 핑계 대고 교묘히 빠져 나오곤 하였다. 그리하여 9차례나 다시 임명을 한 끝에 공에게 이르렀는데, 공은 말하기를,
“아무리 어려운 일이라도 사양하지 않는 것이 신하된 자의 직분이다.”
하고는 즐거운 기색으로 부임했다가 1년이 지나고 나서 체직되어 돌아왔다. 그 뒤에 다시 예조와 병조의 낭관(郞官)ㆍ문학(文學)ㆍ직강(直講)을 차례로 거쳐 무신년에 시강원 필선으로 승진하였다.
광해(光海) 초기에 사헌부 장령이 되었다가 옥당에 뽑혀 들어가 수찬과 교리를 지냈으며, 암행어사로 황해도를 염찰(廉察)하고 돌아와서는 예빈시 정(禮賓寺正)에 임명되었다. 또 필선에서 보덕으로 승진한 뒤 의정부 검상ㆍ사인과 홍문관 부응교와 사헌부 집의와 성균관 사성과 승문원 판교 등의 자리로 옮겨졌다.
임자년에 통정대부로 품계가 오르면서 영흥대도호부사(永興大都護府使)로 외방에 나갔다. 광해가 장차 대비(大妃)를 폐위(廢位)시키려 하자 적신(賊臣) 이이첨(李爾瞻)이 이를 부추겨 마침내 대옥(大獄)을 일으킨 결과 명류(名流)와 구신(舊臣)들이 모두 결박당하는 몸이 되었다. 공 역시 체포되어 하마터면 불측(不測)한 지경에 떨어질 뻔하다가 삭직(削職)된 채 한가로이 지내게 되었는데, 7년이 지난 기묘년 모월 모일에 이르러 질병으로 세상을 하직하였다. 이때가 태어난 지 꼭 60년이 되는 해였다.
공은 천품이 근후하고 효성과 우애가 독실하였다. 겨우 15살의 나이에 부친을 여의었는데도 거상(居喪) 중에 예법을 어기는 일이 없었으며, 어려서부터 외가(外家)에서 길러지면서 외할아버지 모시기를 마치 부자지간처럼 하며 정성과 예의를 다하였다.
평소에는 말을 더듬거리며 주저하는 듯하다가도 막상 관직에 나아가 임무를 수행할 때에는 자신의 있는 힘을 모두 기울여 책임을 완수하였으며 쉬운 일이건 어려운 일이건 가리지 않고 조정의 명에 응하였다.
일찍이 글을 올려 군정(軍政)에 대해서 논한 것이 수만 언(言)에 달했는데 선조가 이를 보고서 가상하게 여겼었다. 그리고 광해가 아직 그다지 난정(亂政)을 행하지 않고 있을 적에 공이 옥당에 있으면서도 6조목으로 나누어 상소하며 진달하였는데 모두가 군국(軍國)의 대계(大計)에 관한 것이었다. 그중에서도 상제(喪制)를 극진히 할 것과 우애를 돈독히 할 것과 붕당을 없앨 것과 인재를 아낄 것 등의 조목에 이르러서는 더욱 곡진하게 자신의 뜻을 개진하였는데, 말이 비록 채택되지는 않았으나, 그래도 삼년상(三年喪)의 의논이 정해진 것은 바로 공이 힘쓴 덕분이었다.
임해군(臨海君)의 옥사(獄事)가 일어났을 때 공이 문사낭청(問事郞廳)이 되었다. 그런데 국옥(鞫獄)이 진행되는 동안 혐의가 없다는 것을 알고서 이에 대한 소장을 올리려 하였으나 친척들이 극력 저지하는 바람에 마침내 그만두고 병을 핑계 댄 채 출사(出仕)하지 않았다.
이때 어떤 궁녀가 총애를 믿고 내밀(內密)하게 청한 나머지 나인(內人)과 인척(姻戚) 관계가 있는 천례(賤隷)를 내수사로 이속(移屬)시키라고 광해가 명한 일이 있었다. 그러자 공이 차자(箚子)를 올려 이를 논박하였는데, 그 말이 매우 굳세고 간절하였다.
수상(首相) 이원익(李元翼)이 경기 선혜청을 설립하려고 할 때 조정에서 많이들 이견을 제시하였으나 공만은 극력 찬성하였는데 지금까지도 경기 백성들이 이를 편하게 여기고 있다. 그리고 진공(進供)하는 연지(硯紙)의 체양(體樣)이 너무도 크고 사치스러워서 선혜청이 재손(裁損)해 줄 것을 계청 하였으나 상이 허락하지 않았는데, 이에 공이 다시 상소를 하여 논하였으므로 광해가 더욱 좋아하지 않았다. 그리고 언젠가는 연석(筵席)에서 폐단을 개혁해야 하는 당위성을 극력 논하였는데, 광해가 낯빛을 바꾸면서 상신(相臣)을 돌아보고 말하기를,
“조정 신하들이 어수선하게 고치는 일을 꽤나 좋아하고 있는데 이는 아름다운 일이 못 된다. 대신이 의당 진정시켜야 할 것이다.”
하기도 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시대 상황이 크게 변하자 공이 내직(內職)에 몸담고 있는 것을 달갑게 여기지 않고서 강력하게 외직(外職)을 구하였는데, 일단 영흥(永興)으로 가게 되자 개연(慨然)히 말하기를,
“이곳이라고 해서 어찌 멋지게 해 볼 수가 없겠는가.”
하였다. 그리고는 잡다한 부세(賦稅)를 견감(蠲減)하여 백성의 급한 처지를 완화해 주고, 우수한 자제들을 선발한 뒤 무리를 지어 교습시키자 사람들 모두가 분발하여 학문에 힘쓴 결과 거문고를 타며 낭송하는 소리가 경내에 끊이지 않게 되었다. 공은 또 융사(戎事)에 더욱 관심을 기울여 속오(束伍)를 편성하고 기격(技擊)을 훈련시키는 한편 전차(戰車)를 만들어 야전(野戰)을 익히게 하였는데, 이 모두를 척씨(戚氏 병서(兵書) 《기효신서(紀效新書)》를 지은 명(明) 나라 척계광(戚繼光)임)의 병법에 의거하여 준행하였다.
그리하여 1년이 지나는 사이에 정사가 크게 펼쳐지게 되었는데, 지금까지도 영흥이 문풍(文風)의 고장으로 일컬어지고 있는 것은 바로 공의 교화 덕분이라고 할 것이다.
공이 관직 생활을 그만두고 물러나서는 가평(加平) 시냇가에 집을 짓고 살면서 만곡정사(晚谷精舍)라는 편액(扁額)을 내걸었는데, 대체로 젊었을 적에는 양암(養菴)으로 자호(自號)를 삼다가 이때부터 만옹(晚翁)으로 고쳐 불렀다고 한다.
공의 증조 명손(命孫)은 종사랑(從仕郞)이고, 조부 업(嶪)은 빙고 별제(氷庫別提)로 사헌부 집의를 증직받았다. 부친 수준(秀俊)은 승정원 좌승지에 추증되었고, 모친 의령 남씨(宜寧南氏)는 호조 참의에 증직된 상질(尙質)의 딸이다.
공은 같은 군(郡) 내의 유씨(柳氏)에게 장가들었는데, 부친은 관찰사 영립(永立)이다. 부인은 행실이 지극하고 부도(婦道)를 매우 잘 갖추어 규문(閨門) 안에서 일어나는 아주 미세한 일들도 모두 합리적으로 처리하였는데, 공보다 4년 먼저 60세의 나이로 죽었다.
아들 다섯을 두었다. 장남 몽길(夢吉)은 어린 나이에 일찍 죽었다. 다음 내길(來吉)은 한성부 좌윤이고, 다음 명길(鳴吉)은 경기 관찰사이고, 다음 혜길(惠吉)은 홍문관 부수찬인데, 이상 모두 문과(文科)를 통해 조정에 진출하였다. 다음 경길(敬吉)은 모관(某官)이다. 딸은 모관인 한필원(韓必遠)에게 출가하였다. 내외손은 남녀 모두 약간 인이다.
관찰(觀察)은 젊어서부터 명성을 떨쳤는데 중흥(中興)의 은밀한 모의에 적극 참여하여 가장 높은 공을 세웠으며 한 시대의 명신(名臣)으로 일컬어지고 있다. 형인 좌윤과 함께 정사공신(靖社功臣)에 책훈(策勳)되었으며, 부모에게 은혜가 가해진 결과 공은 지금의 관직으로 증직되었고 부인은 정경부인(貞敬夫人)의 추증을 받게 되었다.
공은 당초 모지(某地)에 안장되었으나 택조(宅兆)가 불길한 관계로 모년 모월 모일에 모지(某地) 모산(某山)으로 이장(移葬)하면서 부인을 합폄(合窆)하였다.
그러고 나서 장차 묘도(墓道)에 비석을 세우려 하면서 관찰이 직접 행장(行狀)을 지어 가지고 나에게 와 명(銘)을 부탁하였다. 생각건대, 공은 나에게 아버님의 친구가 되는 분이시고, 관찰 형제로 말하면 또 나와 벗으로 지내는 사이이니, 의리로 볼 때 사양할 수 없는 일이다.
그래서 다음과 같이 명하였다.

군자의 행동 기준 / 君子之道
성실함 그것이니 / 誠愨爲基
술에다 비유하면 / 譬彼酒醴
묽지 않은 진국이리 / 寧醇毌漓
머리 회전 빠르고 약아빠진 인간들 / 便儇皎厲
기막힌 말솜씨로 아첨 떠는데 / 給辯姸辭
출세할진 모르지만 / 世所貴重
도와는 거리 멀지 / 去道遠而
아름다운 우리 최공 / 有美崔公
질박한 자세 지니고서 / 朴茂之姿
돈독한 행동으로 / 敦其質行
훌륭한 스승 모셨어라 / 服訓碩師
충의 모자에 신의 신발 신고 / 冠忠履信
시서의 옷 몸에 걸쳤나니 / 衣被書詩
현달(顯達)하기 시작한 건 뒤늦었어도 / 鴻漸雖晚
아름다운 풍모 모범이 되었지요 / 其羽可儀
어찌 험난함 없었으랴만 / 豈無夷險
오직 의로운 길 걸어가면서 / 唯義之之
남의 비밀 들추어내지도 않고 / 不激而訐
휩쓸려 뒤따라가지도 않았지요 / 不靡而隨
참되고 꾸밈없는 공의 속마음 / 肫肫悃愊
일처리할 때마다 드러났는데 / 發於事爲
몹시도 어려운 시대를 만나 / 遭時孔囏
결국은 낭패를 당하고 말았다오 / 竟躓于巇
어찌하여 그렇게도 후한 분에게 / 何蘊之厚
하늘은 인색하게 보답했을까 / 而嗇厥施
공에겐 부족하게 내려 줬어도 / 維躬之嗇
후손에게 복 주려는 의도였겠지 / 維後之貽
편안한 안식처 마련하는 일 / 宅兆安厝
효자된 도리상 당연히 할 일이라 / 玆惟孝思
점을 쳐 봐도 들어맞기에 / 旣契我龜
이곳 묘역으로 옮겨 왔다오 / 窀穸爰移
여주(驪州) 산 언덕 / 黃驪之岡
출렁이는 강물 줄기 / 其水瀰瀰
돌에 새겨 넣은 나의 이 비명(碑銘) / 我銘斯石
백대를 두고 밝게 전해지리 / 百代昭垂


谿谷先生集卷之十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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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碑銘 九首
有明朝鮮國。贈純忠積德秉義補祚功臣。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領議政兼領經筵,弘文館,藝文館,春秋館,觀象監事。世子師。完興府院君。行通政大夫。永興大都護府使崔公神道碑銘 幷序。 a_092_211d


092_212a公諱起南。字興叔。其先全州人。上將軍純爵之裔也。幼有美質。旣長。從牛溪成先生學。文行爲流輩所重。中乙酉司馬。游大學。湖南士人。以言事忤旨下獄。公倡諸生上疏論之。宣廟感悟。卽出之。辛卯士禍起。公以布衣。亦坐累停擧。壬辰倭難。奉老避兵。辛勤丐貸以供養。鬚髮爲之盡白。庚子。始仕爲王子師傅。斆三王子。師道尊嚴。三王子學日進。壬寅。擢謁聖丙科。拜成均館典籍。遷兵曹佐郞。選知製敎。自是歷官侍講院司書,文學,刑曹禮曹兵曹正郞。乙巳。左遷咸鏡北道評事。092_212b時潼關新陷虜。人視北邊爲死地。拜評事者。輒引疾巧免。九改命而後及公。公曰。事不辭難。臣職也。怡然就任。踰年遞還。又歷禮兵郞文學直講。戊申。陞侍講院弼善。光海初。爲司憲府掌令。選入玉堂。爲修撰校理。以暗行御史。廉察黃海道。還拜禮賓寺正。又自弼善陞輔德。遷議政府檢詳舍人弘文館副應敎司憲府執義成均館司成,承文院判校。壬子。陞通政階。出爲永興大都護府使。光海將廢大妃。賊臣爾瞻從臾之。遂起大獄。名流舊臣。悉被株累。公亦逮繫。幾不測。削職閑住。凡七年。092_212c己未某月日。以疾卒。去生之歲甲子一周矣。公天資謹厚。篤於孝友。甫成童而孤。居喪無違禮。少鞠於外家。服事外王父。誠禮猶父子焉。平居語吶吶若不出口。至當官任職。竭力自致。不以夷險爲趨避。嘗上書論軍政幾萬言。宣祖嘉之。光海未甚誖亂。公在玉堂。疏陳六條。皆軍國大務。其於盡喪制敦友愛。消朋黨惜人材。尤惓惓致意焉。言雖不見用。然三年喪之議。因公以定。臨海獄起。公爲問事郞。見鞫獄無事實。草疏將上。親戚力止之。遂託疾不出。時女謁用事。賤隷有戚聯內人者。光海命092_212d移屬內需司。公上箚駁之。言甚勁切。首相李元翼建設京畿宣惠廳。朝議多異同。公力贊成之。畿民至今便之。進供硯紙體樣。過於豐侈。宣惠廳啓請裁損。不許。公又疏論之。光海滋不悅。嘗於筵中。極論革弊之宜。光海作色顧謂相臣曰。朝臣多喜紛更。非美事也。大臣宜鎭靖之。居無何。時事大變。公不樂居內。力求外。旣得永興。慨然曰。是不足以有爲乎。於是蠲宂賦。以紓民急。選子弟之秀者。群而敎之。人皆感奮力學。絃誦洋洋。尤留意戎事。明束伍練技擊。造戰車習野操。悉遵戚氏之法。期年而092_213a政成。至今永以文風稱。公之敎也。公旣廢退。卜築于加平之溪上。扁曰晩谷精舍。蓋少號養菴。至是改稱晩翁云。公曾祖命孫。從仕郞。祖嶪。氷庫別提。贈司憲府執義。父秀俊。贈承政院左承旨。母宜寧南氏。贈戶曹參議尙質之女。公娶同郡柳氏。父曰觀察使永立。夫人有至行。婦道甚備。閨門之內纖微。皆得其宜。先公四歲而卒。壽六十。子男五人。長夢吉。殤而夭。次來吉。漢城府左尹。次鳴吉。京畿觀察使。次惠吉。弘文館副修撰。皆以文科進。次敬吉。某官。女適某官韓必遠。內外孫男女若干人。092_213b觀察少有盛名。贊中興密謀。功最高。爲時名臣。與兄左尹。俱策靖社勳。推恩贈公今官。贈夫人貞敬夫人。公初葬某地。爲宅兆不吉。用某年月日。改葬于某地某山。夫人祔焉。旣將樹石墓道。觀察自爲狀。屬維以銘。念公於維父友也。觀察兄弟。又辱與維游。義不可辭。銘曰。
君子之道。誠愨爲基。譬彼酒醴。寧醇毋漓。便儇皎厲。給辯姸辭。世所貴重。去道遠而。有美崔公。朴茂之姿。敦其質行。服訓碩師。冠忠履信。衣被書詩。鴻漸雖晩。其羽可儀。豈無夷險。唯義之之。不激而訐。092_213c不靡而隨。肫肫悃愊。發於事爲。遭時孔艱。竟躓于巇。何蘊之厚。而嗇厥施。維躬之嗇。維後之貽。宅兆安厝。茲惟孝思。旣契我龜。窀穸爰移。黃驪之岡。其水㳽㳽。我銘斯石。百代昭垂。




 
약천집 제21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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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묘갈명(墓碣銘)
좌윤(左尹) 최공(崔公) 묘갈명

지금 영의정으로 있는 최공 석정(崔公錫鼎)의 아우인 이조 판서 석항(錫恒)이 그 선부군(先府君) 정수재(靜修齋) 좌윤공(左尹公)의 행장을 나에게 주고 묘에 명문을 지어 줄 것을 청하였다. 아, 나는 실로 문장을 잘하지 못하니, 어찌 공의 아름다운 덕을 형용할 수 있겠는가. 내가 비록 문장을 잘하지 못하나 어찌 차마 두 자제의 효성스러운 마음을 거절할 수 있겠는가. 그리고 또 어찌 차마 공이 평소에 인정해 주신 것을 잊고서 사실을 기록하는 일을 담당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행장을 살펴보니, 완산 최씨(完山崔氏)는 고려 때 상장군(上將軍)을 지낸 순작(純爵)이 비조(鼻祖)이다. 고려조로부터 본조에 들어와 대대로 높은 벼슬을 지냈으며, 덕업을 서로 계승하였다. 좌찬성에 추증된 휘 수준(秀俊)이 있었는데, 이분이 영흥 부사(永興府使)로 영의정에 추증된 휘 기남(起南)을 낳았고, 이분이 영의정으로 완성부원군(完城府院君)에 봉해지고 시호가 문충(文忠)이며 휘가 명길(鳴吉)이고 호가 지천(遲川)인 분을 낳았다. 배위는 인동 장씨(仁東張氏)이니, 옥성부원군(玉城府院君) 만(晩)의 따님이다. 문충공은 아우가 있었으니 이조 참판으로 휘가 혜길(惠吉)이고, 그 배위는 함평 이씨(咸平李氏)로 관찰사 춘원(春元)의 따님인데, 만력(萬曆) 병진년(1616, 광해군 8)에 공을 낳았다.
공은 휘가 후량(後亮)이고 자가 한경(漢卿)이다. 문충공이 처음에 아들이 없어 공을 데려다가 양자로 삼았는데 늦게 아들을 두니, 이름이 후상(後尙)이었다. 문충공은 호문정(胡文定)을 법으로 삼아 조정에 청해서 공을 후사로 정하였다. 이때 문충공은 일등 공신으로 요직을 담당하여 매일 한가한 틈이 없으므로 집안 살림을 모두 공에게 맡겼는데, 공은 실로 가사를 잘 주관한다는 칭찬이 있었다.
정축년 공은 상신의 자제로 심양(瀋陽)에 가서 인질이 되었으며, 임오년 문충공이 오랑캐에게 붙잡혀가서 감옥에 갇히자, 공은 파발마를 타고 세 번이나 오랑캐 지방을 왕래하며 주선해서 화를 늦추었으며, 을유년 문충공을 모시고 동쪽으로 돌아왔다.
정해년 문충공이 별세하였다. 공은 심양에 머문 것이 거의 8, 9년이었으므로 몸이 수고롭고 마음이 고달파서 진작부터 가슴이 두근거리고 머리가 어지러운 증세가 있었는데 상을 당하여 더욱 심해지자 문을 닫고 병을 잘 다스려서 오랜 뒤에 다소 덜해졌다.
신묘년 생원시에 합격하고 남별전 참봉(南別殿參奉)에 제수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았으며, 사산감역(四山監役)에 제수되었다가 체직되었다. 병오년 익위사 시직(翊衛司侍直)에 제수되고 귀후서 별제(歸厚署別提)로 승진하였으며, 종부시 주부, 공조 좌랑, 충훈부 도사를 역임하였다.
경술년 배천 군수(白川郡守)에 제수되었다가 다음 해 체직되고 을묘년 사복시 첨정에 제수되었다. 이때 시국이 크게 변하니, 벼슬살이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아 병으로 사직하고, 진산 군수(珍山郡守)와 면천 군수(沔川郡守)에 연달아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기미년 영천 군수(榮川郡守)에 제수되었다가 곧바로 체직되었다.
경신년(1680, 숙종 6) 보사 공신(保社功臣)을 녹훈할 때에 정사 원훈(靖社元勳)의 큰아들로 회맹제(會盟祭)에 참여했다 하여 통정대부(通政大夫)의 품계로 승진하였으며, 신유년 청풍 부사(淸風府使)에 제수되었다가 계해년 체직되었다.
을축년 70세가 되니, 조정에서는 두 아들이 시종관(侍從官)이라 하여 은혜를 미루어 가선대부(嘉善大夫)의 품계로 올리고 세습하여 완릉군(完陵君)에 봉해졌으며, 한성부좌윤 겸 도총부부총관을 제수하였는데, 얼마 안 있다가 사양하여 체직되고 집에서 한가롭게 여생을 보냈다. 기사년(1689) 세상의 일이 또 변하여 보사 공신을 삭탈하자 이로 인하여 품계가 강등되어 통정대부가 되었다.
계유년(1693, 숙종 19) 정침에서 고종명(考終命)을 하여 양주(楊州) 천마산(天磨山) 아래 판곡리(板谷里) 간좌(艮坐)의 산에 장례하니, 선영을 따른 것이었다. 이해 여름 다시 보사 공신의 훈호(勳號)를 복구해 주어 품계와 직책을 옛날과 같이 환급하였으며, 치제하기를 의식대로 하였다.
배위 광주 안씨(廣州安氏)는 관찰사 헌징(獻徵)의 따님인데, 장엄하고 후중하며 단정하고 정성스러워 부도(婦道)를 특히 잘 닦으니 친척들이 귀의하였으며, 문충공이 더욱 사랑하고 소중히 여겼다. 신유년에 출생하고 계축년에 별세하여 공의 묘소에 부장되었다.
3남 2녀를 두었으니 장남 석진(錫晉)은 정랑인데 공보다 먼저 죽었고, 다음은 바로 의정(議政) 석정(錫鼎)이고 다음은 바로 판서 석항(錫恒)이며, 장녀는 진사 윤제명(尹濟明)에게 출가하고 차녀는 현감 신곡(申轂)에게 출가하였다. 정랑은 4남을 두었으니 생원 창헌(昌憲), 도사 창연(昌演), 봉사 창민(昌敏)과 창억(昌億)이다. 의정은 공의 아우인 응교 후상(後尙)에게 양자 갔는데 아들 창대(昌大)를 두었는바, 지금 광주 부윤(廣州府尹)으로 있다. 판서는 공의 생가 아우인 교관 후원(後遠)에게 양자 갔으며, 또 창억(昌億)을 자기의 양자로 삼았다. 손녀와 외손이 또 약간 명이다.
공은 천품이 온화하고 바르며 의표가 단정하여, 남들과 화합하면서도 휩쓸려서 함부로 행동하지 않았고 장엄하면서도 사납지 않았으며, 널리 사람을 사랑하고 현자를 친애하여 한결같이 성심에서 나오니, 사람들이 모두 믿고 사모하며 좋아하였다. 공은 침착한 사려와 원대한 식견이 있었으므로, 문충공이 깊이 믿어서 군국(軍國)의 기무를 자문하는 일이 많았다.
무인년 공은 심양(瀋陽)에 인질로 있다가 돌아와 문충공에게 아뢰기를 “대인께서 국정을 담당함에 두 가지 잘못된 일이 있으니, 김청음(金淸陰 김상헌(金尙憲))을 논박하여 배척한 것과 중을 홍 군문(洪軍門)으로 보낸 것이 이것입니다. 화의와 척화가 일은 비록 대립되나 마음은 모두 국가를 위하는 충심에서 나온 것인데, 지금에 이르러 결국 대인의 말씀이 비로소 맞았으니, 이는 사람들이 모두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남한산성에서 항복하는 맹약을 맺은 것은 다행이 아니요 실로 치욕이니, 대인에게 있어서는 굳이 나라를 보전했다 하여 훌륭함이 될 수 없으며, 청음에게 있어서는 또한 일을 그르쳤다 하여 허물될 것이 없습니다. 오직 의심과 서로 막힌 마음을 제거하고 서신을 왕래하여 청 나라와 화친하는 일이 부득이함을 깊이 밝히시고 또한 깨끗한 의론이 없을 수 없음을 장려하여, 피차간에 심사가 툭 트이게 해야 할 것입니다. 어찌 잘잘못을 거론해서 서로 반목한단 말입니까. 그리고 또 남조(南朝)와 통신(通信)하고자 하신다면 마땅히 별도로 단사(單使)를 보내어서 상주문을 가지고 항해하되 옛날 고려 때에 송 나라와 내왕했던 옛 길을 다시 찾아낸다면, 배 한 척만 있으면 중국에 도달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마침내 중에게 배를 주어서 요동(遼東)과 심양의 경계를 지나가게 하시니, 저들의 정탐이 서로 이어져서 오랑캐에게 발각되기가 쉬우며, 비록 혹 군문(軍門)에 이른다 하더라도 반드시 황제의 조정에 도달하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하자, 문충공은 크게 깨닫고 말하기를 “내 이런 방법을 알지 못했다.” 하였다.
뒤에 들으니 해변을 순라하던 오랑캐 기병들이 우리나라 배가 서쪽을 향하는 것을 바라보고 우리에게 의심을 품었는데, 홍 군문이 오랑캐에게 항복하자, 우리나라에서 보낸 편지를 찾아내어 문충공이 붙잡혀 가게 되었다. 공은 말하기를 “대인은 국가를 위하여 죽을 곳으로 가는 것을 진실로 마음에 달갑게 여기실 터이나, 자식이 아버지의 죽음을 구원하는 것으로 말하면 또한 지극함을 쓰지 않음이 없어야 한다.” 하고, 마침내 많은 돈을 가지고 심양의 관문에 들어가서 권력자를 설득하였다.
이때 청음 김공 또한 구류되어 같은 관사에 있었다. 혹자는 말하기를 “김공은 평소 성품이 방정하고 엄격하시니, 뇌물을 쓰는 것을 마음에 나쁘게 여기지 않겠는가.” 하였으나 공은 “이는 아마 그렇지 않을 것이다.” 하고는 들어가 김공에게 묻기를 “산의생(散宜生)은 어떠한 사람입니까?” 하자, 김공은 대답하기를 “옛날의 어진 사람이다.” 하였다. 공은 나와서 말씀하기를 “김공의 말씀을 들어보니 그 뜻을 알 수 있다.” 하였다. 공이 동쪽으로 돌아오게 되자 김공은 공에게 시가(詩歌)를 지어 주었으며, 또 작은 서문을 지어 공을 매우 칭찬하였다.
공은 학문에 있어 이미 가정에서 교육을 받고 또 계곡(谿谷) 장공(張公 장유(張維))과 백헌(白軒) 이공(李公 이경석(李景奭))에게 수학하여 유가(儒家)의 여러 책을 두루 읽었으나 일찍부터 고질병을 앓아 공부에 전심전력하지 못하였는데, 항상 이것을 한하였다. 평소 역사책을 두루 섭렵하여 꿰뚫지 않은 것이 없었으며, 국가가 다스려지고 혼란해지는 조짐과 현신(賢臣)과 간신이 나가고 물러가는 기미에 대하여 일찍이 깊이 마음을 쏟지 않은 적이 없었다. 그리고 인물을 품평함에 옛사람이 미처 말하지 못한 것을 많이 말하였다.
공은 시에 있어 재주가 매우 뛰어났다. 비록 중간에 환난을 겪어 힘을 다 쓰지는 못하였으나 시를 지으면 왕왕 경구(警句)가 있었다. 심양에 있을 적에 시를 지었는데 청음공이 자주 품평하고 칭찬하였으며, 말년에 문원(文苑)의 여러 공들과 창수한 것이 많이 있는데, 모두 그 격조와 운치가 보통 사람보다 뛰어나다고 칭찬하였다. 이것을 모아 약간 권을 만든 것이 집에 보관되어 있다.
공은 마음이 깨끗하고 욕망이 적으며 또 몸을 아끼고 보호하여, 여러 해 동안 볼모가 되었으나 집안 식구를 데리고 가지 않았으며, 관서 지방을 왕래할 적에 한 번도 음악과 기생을 가까이 한 적이 없었다. 감사 구봉서(具鳳瑞)가 공을 칭찬하기를 “최한경(崔漢卿)의 뛰어난 절개는 소무(蘇武)보다 더하다.” 하였다. 그리고 부인을 잃게 되자 나이가 그리 노쇠하지 않았으나 첩을 두지 않고 일생을 마쳤다.
세 고을을 맡았을 적에 모두 깨끗함과 고요함으로 고을을 다스렸으며, 배천(白川)에 있을 적에 마침 신해년 큰 흉년을 당하였는데, 굶주린 자들을 많이 살려주니, 남긴 은혜가 더욱 깊었다. 이에 고을 사람들이 비석에 새기기를 ‘만세불망(萬世不忘)’이라 하고 그 앞을 지나가는 자들이 모두 말에서 내려 경례하였다.
공은 집안에 있을 때에는 효도와 우애를 돈독히 하고, 남과 사귈 때에는 위급한 일에 달려가 구원하기를 미치지 못할 듯이 하였으며, 기개와 충절을 사모하여 비록 덫과 함정이 앞에 있더라도 피하지 않고, 나쁜 사람을 멀리하여 때가 묻지 않게 하였으니, 무릇 이러한 종류를 다 기록할 수가 없다.
아들을 가르치기를 순수하고 깊게 하여, 아들에게 잠(箴) 한 편을 지어 주었는데 다음과 같다.
“마음이 보존되면 자연 후중하고, 말이 적으면 후회와 부끄러움이 적게 된다. 벗을 취함에는 반드시 기국과 식견을 먼저 하고, 일을 당해서는 마땅히 공경하고 삼갈 것을 생각하라.〔心存則自然凝重 言寡則可無悔吝 取友必先器識 臨事宜思敬謹〕”
이 몇 마디 말은 내용이 천근하면서도 뜻이 심원하고 적은 것을 들어 큰 것을 포괄하였으니, 진실로 사람을 만드는 좋은 본보기라 할 것이다. 더구나 공은 사람을 가르칠 적에 반드시 자신이 솔선수범하였음에랴. 복을 남김이 성대하여 두 아들이 현달해서 한 시대의 유명한 공경이 된 것이 당연하니, 아 거룩하다.
다음과 같이 명한다.

우리 최공은 / 維我崔公
자식이 되어 직분을 다하였으니 / 爲子盡職
어떤 험한 것인들 구제하지 못하며 / 何險不濟
아버지가 되어 자식을 잘 가르쳤으니 / 爲父能敎
어떤 경사인들 열어놓지 않았겠는가 / 何慶不啓
자식이 자식 노릇 하고 아비가 아비 노릇 함은 / 子子父父
인도의 큰 강령이니 / 人道大體
모든 행실의 근원이요 / 百行之源
온갖 선의 뿌리라오 / 衆善之柢
이것을 명문에 새겨 밝혀서 / 銘以昭之
오는 자들을 기다리노라 / 來者是徯

[주D-001]호문정(胡文定)을 법으로 삼아 : 호문정은 북송(北宋)의 학자인 호안국(胡安國)으로 문정은 그의 시호이다. 호안국은 처음에 아들이 없어 조카인 인(寅)을 양자로 세웠는데, 뒤에 아들 굉(宏)을 낳았으나 파양(罷養)하지 않고 그대로 제사를 물려주었다.
[주D-002]중을 …… 보낸 것 : 중은 승려인 독보(獨步)를 가리키고 홍 군문(洪軍門)은 명 나라 도독(都督) 홍승주(洪承疇)를 가리킨다. 독보는 초명이 중헐(中歇)로 묘향산에서 수도하다가 병자호란에 공을 세웠으며, 홍승주의 군영에 가서 청 나라를 정탐하였는데, 홍승주가 청 나라에 항복하여 이 사실이 발각되었다. 뒤에 임경업(林慶業)의 밑에서 명 나라를 왕복하다가 명 나라가 망한 후 임경업과 함께 청 나라에 잡혀갔다.
[주D-003]남조(南朝) : 남쪽 조정이란 뜻으로 명 나라 의종(毅宗)이 이자성(李自成)에게 망한 뒤에 명 왕실의 일족이 세운 조정을 이른다. 1644년 의종이 자결하자 복왕(福王) 주유숭(朱由崧)이 남경(南京)에서 즉위하였으며, 다음해 복왕이 청 나라 군사에게 사로잡히자 당왕(唐王) 주율건(朱聿鍵)이 복주(福州)에서 황제를 칭하였고, 당왕이 또 청군에게 붙잡히자 주계왕(朱桂王) 유랑(由榔)이 조경(肇慶)에서 황제라 칭하였으나 또다시 청군에게 쫓겨 평락(平樂)으로 달아나 16년간 명맥을 유지하였다.
[주D-004]산의생(散宜生) : 주(周) 나라 문왕(文王)의 어진 신하로, 문왕이 주왕(紂王)에게 미움을 받고 옥에 갇히자 보옥(寶王)과 미인(美人)을 주왕에게 뇌물로 바쳐 석방되게 하였다.
[주D-005]소무(蘇武) : 한(漢) 나라 무제(武帝) 때의 충신으로 흉노(匈奴)에게 끌려가 온갖 고생을 하였으나 끝내 굴복하지 않고 언제나 한 나라의 깃발을 손에 잡고 있어 깃발이 모두 닳아버렸다. 그러다가 19년 만에 귀환하였는바, 주인공이 절개를 지킨 것이 소무와 같음을 말한 것이다.

 
 서계집 제9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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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명(誌銘) 14수(十四首)
완릉군(完陵君) 최공(崔公) 묘지명

공은 휘는 후량(後亮), 자는 한경(漢卿), 성은 최씨(崔氏)이고 자호는 정수재(靜修齋)이다. 그 선조는 완산(完山) 사람이다. 고려 대에 순작(純爵)은 관작이 상장군(上將軍)이었는데, 그 후손이 끊임없이 이어져 대대로 이름난 사람이 있다. 9대조 유경(有慶)은 국초(國初)에 참찬의정부사(參贊議政府事)였는데, 시호가 평도(平度)이다. 이분이 사강(士康)을 낳으니, 좌찬성으로 시호가 경절(敬節)이다. 고조 휘 업종(嶪終)은 빙고 별제(氷庫別提)이다. 증조 휘 수준(秀俊)은 벼슬하지 않았다. 조부 휘 기남(起南)은 어려서부터 문장과 행실로 저명하였는데, 만년에 급제하여 관각(館閣)의 직책과 의정부의 검상(檢詳)과 사인(舍人)을 역임하였다. 광해군(光海君) 때를 당하여 마지막 벼슬이 통정대부(通政大夫) 영흥 부사(永興府使)이다. 부친은 영의정 완성부원군(完城府院君) 문충공(文忠公) 휘 명길(鳴吉)이다. 본처 장 부인(張夫人)은 옥성부원군(玉城府院君) 만(晩)의 따님인데, 부인에게 아들이 없자 문충공이 아우 이조 참판 혜길(惠吉)의 아들을 취하여 후사로 삼았으니, 공이 이분이다. 공의 모친은 구원(九畹) 이공 춘원(李公春元)의 따님인데, 병진년(1616, 광해군 8) 8월 20일에 공을 낳았다.
3세에 모친을 잃었는데, 9세에 문충공이 장 부인으로 하여금 아들로 삼게 하였다. 12세에 부인이 또 졸하였다.
병자호란이 일어났을 때 공은 겨우 약관(弱冠)을 넘긴 나이였다. 그 당시 문충공이 허 부인(許夫人)을 계실(繼室)로 들였는데, 공이 모친을 모시고 강도(江都)로 피난하였다. 강도가 함락되자 성중(城中)의 사녀(士女) 중에 겁탈을 당한 이들이 많았다. 이에 공이 분연히 달려가 노장(虜將)을 만났는데, 병기를 밀치고 들어가 앞에 서니, 노장이 기이하게 여기고 이유를 물었다. 공이 대답하기를, “듣자 하니, 군중(軍中)에서 이 상국(李相國)과 최 상서(崔尙書) 집안을 침탈하지 못하도록 금령을 내렸다고 하던데, 나는 바로 최 상서의 아들로 특별히 와서 아뢰는 바이다.”라고 하였다. 노장이 어떻게 증명하냐고 묻자, 대답하기를, “나라 사람들에게 증험해 보라.”라고 하였다. 이에 노장이 그 사실을 알아본 다음 최 상서 집안을 보호하도록 명을 내렸는데, 성중 사람들이 이 덕분에 보전한 이들이 많았다. 문충공은 화의(和議)를 주장하였는데 이를 청인(淸人)이 알았으며, 이공 정귀(李公廷龜)는 화이(華夷)에까지 명망이 났다. 이 때문에 이 두 집안을 보전한 것이었다.
인조(仁祖) 20년 임오년(1642) 가을에 청인이 독보(獨步)의 일을 알아내었는데, 이 일로 인해 문충공이 심양(瀋陽)에 구류당하여 화를 예측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에 공이 밤낮으로 가슴을 치다가 역말을 타고 세 차례나 심양으로 달려가 전후의 일을 주선하여 마침내 풀려났다. 그리하여 을유년(1645)에 문충공이 비로소 동쪽으로 돌아왔는데, 어떤 객이 “공의 아들이 어린 서생인데 은연중에 큰 화를 제거하였으니, 그 재주가 이와 같다.”라고 하니, 문충공은 단지 “재주가 성심에서 나왔다.”고만 대답하였다.
정해년(1647) 5월에 이르러 문충공의 상을 당하였는데, 상제(喪祭)가 예를 어김이 없었다. 이전에 공이 심양에 있을 적에 정충(怔忡)과 안질(眼疾)을 앓았는데, 이때에 이르러 더욱 심해졌다.
신묘년(1651, 효종 2)에 병이 조금 나았으며, 생원(生員)에 합격하였다.
효종(孝宗) 갑오년(1654)에 남별전 참봉(南別殿參奉)에 보임되었으나 병 때문에 출사하지 않았다. 다시 사산 감역(四山監役)에 제수되었으나 얼마 못 가서 역시 그만두었다.
50세 이후로 구질(舊疾)이 갈수록 없어져 현종(顯宗) 병오년(1666)에 익위사 시직(翊衛司侍直)에 배수되었다가 서용되어 귀후서 별제(歸厚署別提)에 승진되었으며, 종부시 주부(宗簿寺主簿), 공조 좌랑, 충훈부 도사(忠勳府都事)로 전직되었다.
경술년(1670, 현종 11) 봄에 외직으로 나가 배천 군수(白川郡守)가 되었다. 이해 가을에 대흉이 들어 굶어 죽은 시체가 길에 쌓일 정도였다. 공은 이들을 구제하는 데 마음을 다 쏟아 가옥 50여 칸을 지어 유리걸식하는 백성들을 머물게 한 다음, 읍내의 선량한 사람을 뽑아 그들에게 일을 맡기는 한편, 서리를 신칙하여 간사한 폐단을 없애도록 하였다. 매일 아침마다 몸소 진휼소(賑恤所)로 가서 죽과 미음을 나누어 주었는데, 남녀가 섞여 앉지 못하도록 하고 아픈 사람은 반드시 봉양하도록 하였다. 토착민에게는 식구 수를 계산하여 양식을 공급해 주고 경작을 계속하도록 하였는데, 가을이 되자 크게 풍년이 들어 백성들이 고통에서 벗어났다. 공이 말하기를, “1000명을 살리는 것은 성심이 아니면 불가능하다. 내 감히 이를 소홀히 하겠는가.”라고 하였다. 얼마 뒤에 병으로 사직하였는데, 백성들이 오래도록 사모하여 마지않았다. 부로(父老)들이 서로 더불어 말하기를, “신해년에 생민이 극도로 곤궁하였는데, 그 당시 최 수령이 아니었다면 우리는 씨가 말랐을 것이다. 그대에게 자손이 있는 것은 누구의 은덕인가.”라고 하고, 이어 비석을 세워 덕을 칭송하였다.
금상(今上) 을묘년(1675, 숙종 1)에 사복시 첨정(司僕寺僉正)이 되었는데, 공은 벼슬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으므로 몇 달 만에 병으로 면직하였다. 태복(太僕)은 실속이 있는 자리로 여기에 부임하는 이들은 대부분 오래도록 머물렀는데, 공은 빨리 떠나가니 노리(老吏)들이 기이한 일로 여겼다. 뒤에 또 진산(珍山)과 면천(沔川)에 배수되었으나 모두 부임하지 않고 말하기를, “나는 노쇠한 데다 병까지 많으니, 편안하게 집에 있는 것이 낫다.”라고 하였다.
기미년(1679) 봄에 또 영천 군수(榮川郡守)에 배수되었으나, 역시 내키지 아니하였으므로 마지못해 부임하였다가 1년 만에 또 면직하고 돌아왔다.
경신년(1680)에 역적을 토벌하고 회맹(會盟)을 하였는데, 공은 훈구대신(勳舊大臣)의 아들이라 하여 통정대부(通政大夫)로 품계가 올랐다.
이듬해 봄에 청풍 부사(淸風府使)에 제수되었다. 청풍은 풍속이 순후한 명승지였는데, 휘파람을 불고 시가를 읊조리며 자적하여 배와 수레로 산수(山水) 사이를 마음껏 노닐었다. 고을도 잘 다스려졌다. 임기가 차서 돌아오니, 백성들이 송덕비를 세워 주었다.
을축년(1685)에 공은 70세였는데, 아들이 시종신이었으므로 추은되어 다시 가선대부(嘉善大夫)로 품계가 오르고, 완릉군(完陵君)에 습봉(襲封)되었다. 한성부좌윤 겸 부총관(漢城府左尹兼副摠管)에 배수되었는데, 몇 달 만에 해직하였다. 종일토록 한가하게 앉아 객과 마주하여 바둑을 두거나 꽃을 심고 약초를 가꾸는 생활을 스스로 즐기며 말하기를, “옛말에 ‘초야(草野)의 한인(閑人)이 왕공(王公)보다 낫다.’고 하였는데, 내 비록 초야에 묻힌 사람은 아니지만 한인이 되어 여생을 마칠 수 있으니,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라고 하였다.
기사년(1689)에 시사(時事)가 또 변하자, 공은 문을 닫고 사람들과 교제를 끊은 채 세사(世事)에 대해 일절 언급하지 아니하였다.
계유년(1693, 숙종 19) 12월 1일에 정침에서 졸하였으니, 향년 78세이다. 이듬해 2월에 양주(楊州) 천마산(天磨山) 아래 판곡리(板谷里) 간좌(艮坐)의 언덕에 안장하였는데, 선영을 따른 것이다. 부인은 공의 무덤에 부장하였다.
공은 타고난 자품이 영명하고 과단하며 온화하면서도 엄장하고 남을 사랑하고 베풀기를 좋아하여 사람들이 모두 경모하였다. 문충공이 몹시 믿고 의지하여 안으로 집안일이나 밖으로 나랏일에 대해 상의하여 결정하지 않음이 없었다. 심양에 있을 때 문학(文學) 정뇌경(鄭雷卿)이 정명수(鄭命守)를 죽이려고 모의하였는데, 일이 탄로 나는 바람에 화를 예측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에 공이 가련하게 여겨 시를 지어 효종(孝宗)에게 올리기를, “천하에 지금 지조 있는 협사가 없으니, 궁도의 지기 다시 누구를 의지하겠는가. 우경은 선비를 급히 살리기 위해 공자에게 귀의하였으니, 후생으로 하여금 신릉군을 한하게 하지 말지어다.〔天下卽今無節俠 窮途知己更誰憑 虞卿急士歸公子 莫使侯生恨信陵〕”라고 하니, 효종이 몹시 침울해하였다. 그 당시 효종 역시 대군(大君)의 신분으로 심양에 볼모로 잡혀 있었다. 참판공이, 정공(鄭公)이 화를 당할 것이라는 얘기를 듣고는 공이 그 모의에 연관되었을까 염려하여 몹시 걱정하였는데, 문충공이 웃으며 말하기를, “걱정하지 마라. 얘가 어찌 헛되이 죽을 아이겠는가.”라고 하였다. 서보(西報)가 이르매 공이 과연 무탈하니, 제공(諸公)들이 이를 듣고는 모두 ‘부자(父子)가 지기(知己)라 할 만하다.’고 일컬었다.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 김공(金公)과 백강(白江이경여(李敬輿)) 이공(李公)이 문충공과 함께 심양에 구류당했었는데, 청음이 문충공에게 이르기를, “옛사람은 어진 부형이 있는 것을 즐거워하였는데, 지금 공에게는 어진 자제(子弟)가 있으니 어찌 즐겁지 않겠는가.”라고 하였으며, 백강 또한 동쪽으로 돌아온 뒤 공에 대해 언급할 때마다 찬탄하여 마지않았다.
공은 소시에 계곡(谿谷 장유(張維))을 종유(從遊)하였다. 중간에 고질에 걸리는 바람에 비록 학문에 전념하지는 못하였으나, 종일토록 피곤한 줄도 모른 채 사서(史書)를 보기를 좋아하였다. 자신을 단속함이 몹시 엄격하였다. 3년 동안 심양의 객관에 유숙하였는데 늘 홀로 거처하였으며, 관서(關西)는 기생과 풍악이 넘치는 곳으로 일컬어지는데, 왕래하고 경유하는 기간이 몇 달이나 되기도 하였으나 무덤덤하게 한 번도 가까이한 적이 없었다. 부인이 졸하자 첩을 취하지 않았으며 자제들이 곁에서 시봉하였을 뿐이다. 집안에서의 행실이 몹시 지극하였다. 아우 응교(應敎) 후상(後尙)과 우애가 몹시 돈독하여 전택(田宅)과 동복(僮僕)을 나눌 적에 반드시 좋은 전택과 동복을 골라 주었다. 서매(庶妹)에게도 넉넉하게 자급해 주고는, “선공의 혈육은 오로지 이 두 사람일 뿐이니, 어찌 그들로 하여금 궁핍하게 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응교군이 그 아내에게 “내 마음을 알아주는 벗이 세상에는 하나도 없고, 오직 형님만이 나의 지기이다.”라고 하였으며, 또 말하기를, “우리 형님이야말로 진짜 대인(大人)이다.”라고 하였다. 서제(庶弟) 후장(後章)이 일찍 고아가 되어 의지할 곳이 없었는데, 공의 집에서 양육하여 성립할 수 있도록 해 주었다. 빈궁한 친척들에 대해서는 혼례를 성사시켜 줌이 많았다. 특히 선조를 받드는 일에 공경하였다. 제전(祭田)을 장만하고 사당(祠堂)을 세우고 보첩(譜牒)을 편수하였으며, 먼 조상을 위해 묘비(墓碑)를 세웠으며, 제사(祭祀)는 문충공의 유교(遺敎)를 봉행하여 감히 과하게 하지 아니하였다.
공은 심원한 사려와 도량이 있어 선배들에게 추중을 받았는데, 이를테면 청음(淸陰), 포저(浦渚 조익(趙翼)), 계곡(谿谷), 연양(延陽 이시백(李時白)), 백강(白江)과 같은 제로(諸老)들은 몹시 장려하고 허여하였으며, 함릉군(咸陵君) 이해(李澥), 박공 황(朴公潢), 구공 봉서(具公鳳瑞)는 모두 망년지우(忘年之友)로 교분을 맺었다. 현종(顯宗) 때 당론(黨論)이 일어나 시끄럽게 다툴 당시 이를 우려하는 이가 많았는데, 공은 유독 여러 아들에게 이르기를, “지금이 오히려 태평 시대라는 것을 너희들은 나중에 의당 절로 알 것이다.”라고 하더니만, 갑인년(1674, 숙종 원년) 이후로 조정이 누차 변하는 바람에 형화(刑禍)를 당한 사대부들이 많았다. 경신년(1680)에 구인(舊人)이 다시 세상에 진용(進用)되자, 공은 “몇 년 못 가 일이 또 바뀔 것이다.”라고 하였다. 어떤 이가 “지금 아무 문제가 없다.”라고 하니, 공이 웃으며 말하기를, “세상일이란 시간이 흐르면 문제가 생기기 마련이다.”라고 하더니만, 얼마 못 가 기사환국(己巳換局)이 일어나고야 말았으니, 공의 말이 모두 증험된 것이라 하겠다. 제인(諸人)들이 인현왕후(仁顯王后) 폐위 문제를 간쟁하다가 화를 당하니, 공은 그 당시 이미 병이 깊었는데 이 소식을 듣고는 눈물을 흘리며 말하기를, “내가 세상 변고를 겪은 것이 이미 많은데, 병든 이 늙은이가 죽지도 못하고 또다시 이런 일을 보는구나.”라고 하였다.
기사년(1689)에 자급을 빼앗겨 통정대부가 되었다. 갑술년(1694)에 정국이 바뀌자 이미 세상을 떠난 공에 대해 복관(復官)하고 의식대로 치제(致祭)하였다.
부인 안씨(安氏)는 관찰사 헌징(獻徵)의 따님이다. 엄장, 후중하고 단정, 성실하며 청고, 한아하고 간이, 심원하였다. 방적(紡績)에 부지런하고 화려함을 멀리하였으며, 가난한 친족을 보살핌에 곡진하게 은정을 쏟았으며, 비복을 부림에 환심을 얻었다. 신유년(1621, 광해군 13) 9월 10에 태어나 계축년(1673, 현종 14) 4월에 졸하였으니, 향년이 겨우 53세이다.
3남 2녀를 두었는데, 맏이는 현령(縣令) 석진(錫晉)이고, 다음은 영의정 석정(錫鼎)이고, 다음은 대사간 석항(錫恒)이며, 딸은 진사 윤제명(尹濟明), 정랑 신곡(申轂)에게 출가하였다.
현령은 4남을 두었는데, 생원 창헌(昌憲), 사의(司議) 창연(昌演), 창민(昌敏), 창억(昌億)이다.
영의정은 1남을 두었는데 교리(校理) 창대(昌大)이고, 2녀를 두었는데 이성휘(李聖輝), 이경좌(李景佐)에게 출가하였다.
윤제명은 1녀를 두었는데 조명적(趙命迪)에게 출가하였다.
신곡은 5녀를 두었는데 맏딸은 이성신(李聖臣)에게 출가하고 다음은 윤경룡(尹敬龍)에게 출가하였으며, 나머지는 어리다.
창헌은 1남을 두었는데 수철(守哲)이고, 1녀를 두었는데 진사 이명복(李明復)에게 출가하였다.
창연은 2남 4녀, 창민은 2남 1녀, 창억은 1녀를 두었는데, 모두 어리다.
명은 다음과 같다.

문충공에게 아들이 있으니 / 文忠有子
완릉공이 특출하다오 / 完陵挺擢
세변이 막 일어나 / 方世變初
천지가 전복되었을 때 / 天地反覆
강도가 함락되어 / 江都傾陷
온 성민이 어육이 되었는데 / 一城魚肉
창칼 숲을 밀치고 들어감에 / 刀矟如林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았으니 / 不懾不愕
오랑캐가 감동한 나머지 / 殊類動色
백성들이 목숨을 보전할 수 있었다오 / 保我邦族
문충공이 구류된 임오년의 일은 / 壬午之事
화를 더욱 예측할 수 없었는데 / 禍尤不測
세 번이나 심양으로 달려 들어가 / 三走浿瀋
온갖 어려움 속에 일을 주선하여 / 風餐露宿
문충공이 구류에서 풀려날 수 있었으니 / 連環可解
그 정성 귀신조차 놀랄 정도였네 / 神鬼震薄
동쪽으로 돌아온 뒤로는 / 及夫東還
팔짱을 끼고 자취를 거두었네 / 袖手斂迹
그 당시 별다른 공적이 없음은 / 無事可見
공이 녹사를 하였기 때문인데 / 我仕以祿
고을의 수령이 되고 나서야 / 亦縻郡紱
조금 공로를 시험하였다네 / 少試勞勣
만년에는 좌윤에 오르고 / 晩躋貳列
완릉군에 습봉되었으니 / 封爵乃續
베풂을 아끼지 않아 / 非嗇厥施
천도와 인도를 모두 얻었다오 / 天人互得
이미 장수를 누렸으며 / 旣耆旣壽
뛰어난 후사까지 두었으니 / 胤嗣赫奕
내가 광중에 넣을 명을 지어 / 載銘幽穸
무궁한 후세에 이를 고하노라 / 庸詔千億

[주D-001]독보(獨步)의 일 : 독보는 인조 때의 고승으로 속명은 중헐(中歇)이다. 조정에서 승려 독보를 몰래 명나라에 보내어 본국의 세력이 곤궁하여 청국의 통제를 받고 있는 이유를 갖추어 주달하였다. 이에 명나라에서 칙서를 내렸는데, 그 가운데 “이전의 허물은 거론치 않을 것이니, 함께 협공하자.”는 말이 있었다.
[주D-002]정뇌경(鄭雷卿) : 1608 〜 1639. 자는 진백(震伯), 호는 운계(雲溪), 본관은 온양(溫陽)이다. 병자호란 이듬해인 1637년에 소현세자(昭顯世子)를 수행하여 심양(瀋陽)에 갔다가 조선인 출신으로 청나라에 벼슬하여 조선에 횡포를 부리고 있던 정명수(鄭命壽)를 죽이려고 모의하였다. 그러나 그 일이 사전에 누설되어 청나라 형부(刑部)에 붙잡혀 참혹하게 죽임을 당하였다. 《顯宗實錄 11年 3月 3日》
[주D-003]우경(虞卿)은 …… 말지어다 : 우경은 전국 시대 조(趙)나라의 재상이고, 후생(侯生)은 위(魏)나라 공자 신릉군의 문객 후영(侯嬴)이다. 진(秦)나라의 재상이 된 범수(范睢)가 개인적인 원한으로 위제(魏齊)를 죽이려 하자 우경은 그를 위해 조나라의 재상 자리를 버리고 신릉군을 찾아가 도움을 청하였다. 그러나 진나라를 두려워한 신릉군은 받아들이기를 주저하였는데, 후영이 우경은 궁지에 몰린 사람을 위해 재상 자리도 버리고 다급하게 왔는데 공자는 망설이고 있느냐고 질책하였다. 이에 신릉군이 부끄러워하며 그들을 맞이하려 하였으나 신릉군이 꺼려한다는 소식을 들은 위제는 이미 자살한 뒤였다. 《史記 卷79 范睢列傳》 여기에서는 후영을 최후량 본인에 비유하여 효종에게 너무 늦지 않게 정뇌경을 도울 수 있는 조치를 취할 것을 촉구한 것이다.
[주D-004]옛사람은 …… 즐거워하였는데 : 《맹자》 이루 하에 “도(道)에 맞는 자가 도에 맞지 않는 자를 길러 주며, 재주 있는 자가 재주 없는 자를 길러 준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어진 부형(父兄)이 있는 것을 좋아하는 것이다.”라고 한 말이 보인다.
 
 牧隱文藁卷之十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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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碑銘
高麗國大匡完山君諡文眞崔公墓誌銘 幷序 a_005_133a


005_133b完山之崔氏譜可考者曰純爵。官至檢校神虎衛上將軍。生崇。中郞將。中郞將生南敷。官至通議大夫左右衛大將軍知工部事。工部生諱佺。左右衛保勝郞將。郞將生諱正臣。左右衛中郞將。中郞將生諱得枰。通憲大夫,選部典書上護軍致仕。廉正自守。人敬憚之。歷事忠烈忠宣忠肅三王。而忠宣尤器重之。忠宣雖內禪。而國政必與聞。故士大夫之升黜。多出於忠宣。選部在臺。綱紀立。在刑部。刑罰淸。出守金海,尙州。民懷其惠。再按全羅。民畏其風。其量田也。副蔡宰相洪哲。分理全羅州縣005_133c之田。不廢法。不擾民。享年七十五。選部娶奉翊大夫知密直司事,監察大夫文翰學士,承旨,世子元賓郭公諱預之女。以大德癸卯四月癸酉生公。公名宰。字宰之。至治元年。補東大悲院錄事。泰定甲子。入內侍。四年。授散員。明年。轉別將。天歷庚午。順興君安公文凱,深岳君李公湛同掌試。公中之。六年然後改丹陽府注簿。又四年。始授中部令。階承奉郞。未幾知瑞州事。以母憂不赴。蓋欲終制也。明年。忠肅王沙汰宂官。有薦公者。王曰。吾固知其父。風憲無以易此人矣。卽授監察持平。不獲已就職。玄陵卽位。迺005_133d褫其職。及高氏之亂作。凡王所設置。悉皆更革。立都監。以公爲判官。公甚不樂。稱疾不出。相府頗督之且脅之。公徐出謂其判事宰相曰。王固失德矣。然爲臣而揚君之不美。於公安乎。王之惡非出於王。左右逢之耳。逢之於前。揚之於後。吾實恥之。其宰相默不敢言。明陵卽位。初政授典法正郞。其年冬。出知興州。凡可以便民者。靡不擧行。田籍久且爛。公修之。仍藏舊本相質。聞者歎服。印政丞當國。素忌公故替之。歲丁亥。政丞王公煦,金公永暾奉聖旨整理田民詞訟。擧公爲判官。且馳驛召之。公至則二公又曰。005_134a長興府今號難治。非崔某不可。又出之。公將之任。二公又曰。崔某前爲持平。有威望。盍留之再任。適外氏郭公迎俊爲大夫。法當避。遷典法正郞。歲戊子。按察慶尙道。一年再遷典客副令,資贍司使。公兼理。支應內用事羨餘。盡歸之民。前弊絶矣。歲己丑。出知襄州。有使者降香。凌辱存撫使。公曰。非禮也。將及我矣。棄官而歸。執政者喜。白授監察掌令。臺綱復振矣。一年而罷。歲辛卯。玄陵卽位。選臺臣。復掌令。明年。移開城少尹。辭歸淸州。日新之難作。歲甲午。以典法摠郞召。未幾移版圖。其秋。出使福州牧。察民情。守條約。005_134b去之日。人如失怙恃。其所施設。至今遵之。乙未秋。以中顯大夫監察執義,直寶文閣召至。選軍以田。其法舊矣。命公爲其都監使。一人受田。有子孫。子孫傳之。無則他人代受。有罪當收其田。則人人皆欲得。於是雜然矣。公曰。是爭民施奪也。可乎。於是。與其當得者一人而止。訟稍簡矣。歲丙申。拜大中大夫尙書右丞。歲丁酉。進正議大夫判大府寺事。蓋公年五十五而志不少衰。益勤於職。旬月間。府庫實矣。玄陵曰。判大府。盡其職者崔某而已。歲己亥。出爲公州牧。如在福日。歲辛丑。又出爲尙州牧。其冬。國家避兵005_134c南徙。明年春。幸尙州。公盡力供辦。惟恐一毫或傷於民。故求之不得者稍短之。三月。以奉翊大夫典法判書。分司本京。公辭違。玄陵引見。溫言慰諭。歲甲辰。拜監察大夫進賢館提學,同知春秋館事。其冬。封重大匡完山君。明年。移典理判書。又明年。移開城尹。歲己酉。官制行。改榮祿大夫。歲辛亥。安東闕守臣。玄陵曰。安東守。我已得人矣。於是。批下遣衛士督公行。慮公辭不就也。甲寅春。以老乞歸鄕。秋九月。玄陵薨。公會哭盡哀。今上拜公密直副使,商議。公固辭。請還鄕。封完山君。階大匡。明年春。命駕往見江005_134d陵崔密直安沼而歸。蓋永訣也。秋九月。有微疾。語諸子曰。吾嘗夢異人謂我曰。至午死。今戊午年也而又如此。吾必不起也。十月己巳卒。享年七十六。十二月壬寅。葬于居第之東坎麓。理命也。嗚呼。公可謂達人矣。公再娶。靈山郡夫人辛氏。奉翊大夫判密直司事,藝文館提學致仕諱蕆之女也。務安郡夫人朴氏。軍簿正郞諱允鏐之女也。辛氏生二男。長思美。奉翊大夫禮儀判書。次德成。及第。中正大夫三司左尹。朴氏生子三人。男曰有慶。中正大夫宗簿令,知典法司事。女適誠勤翊戴功臣,匡靖大夫門下評理,上護軍禹005_135a仁烈。次適宣德郞,繕工寺丞趙寧。孫男女若干人。判書生子五人。長恕。護軍。今爲全羅道按廉使。次愿。中郞將。次愨。別將。女適禮儀摠郞宋仁壽。次幼。左尹生子四人。男曰復昌。別將。次曰世昌。別將。次仕昌。未仕。女幼。宗簿生子三人。士威。郞將。餘皆幼。評理生子三人。男曰良善。英明殿直。女皆幼。寺丞生女一人。幼。左尹。吾友也。倜倘使酒。居官所至有名。來請銘。銘曰。惟公之直。惟公之淸。惟公之德。惟公之名。惟名惟德。惟世之則。胡不大用。正我王國。旣相我王。周旋廟堂。年七十六。尙爾康強。公退則決。允矣明哲。嗚呼崔公。005_135b世歆其風。

 
逍遙齋集附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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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附錄下
墓誌銘[禮曹判書延安李肇源。撰。] a_013_045d


昔我成廟初卽位。則尙文治。日御經筵。而又設官于藝文館。分直以侍講。備顧間。掌辭命。記言動。編摩經籍。一如集賢殿故事。凡十五人者。皆極一時之選。而士比之登瀛洲焉。其後改館號爲弘文。諸學士稍稍遷更。而最久於職者。唯副提學崔公數人云。公諱淑精。完山之崔。同祖高麗文烈公純爵。九傳至密直副使諱遠。封陽川伯。子孫仍氏焉。卽公五世祖也。高祖諱澐。軍器少尹。曾祖諱雨甫。司宰監正。祖諱承洽。013_046a兵部侍郞。考諱仲生。司正。妣忠州安氏。縣監諱善福女也。公以宣德壬子生。天順壬午。以進士。登丁科第一人。補槐院。賜暇讀書湖堂。成化丙戌。擢重試及㧞英試。庚寅。拜修撰。處弘文館。前後凡七年。以使事赴京師。還爲校理。丙申。爲便養出牧驪州。丁酉。入爲副應敎。時上試文臣。連中三魁。陞資爲直提學。戊戌。承命纂東文選訖。特授副提學。己亥卒。壽四十八。葬于陽川治南竹洞負酉之原。配淑夫人慶州鄭氏。判書之智之女。卒後公三十三年。袝而雙其封。三男。長光潤。縣令。次光演。副尉。次光瀚。進士。女適典籍郭013_046b季亨。光潤子世才。生員。世功。監役。世文。庶子世淸。光演子。世憲世忠。光瀚子。世球世琳。公以詞學之臣。出入帷幄且十餘年。而不幸早歿。不能究其用。後孫罹戊午禍。遂至零替。文獻亡佚。事行之懿。無所槩見。世愈遠而不識有公者往往焉。於虖。豈不惜哉。於今所傳信。如懿敬齋壁詩笙鶴朝天之句。其他雜出於地誌,野乘,詩人裒錄之篇者讀之。皆溫澹有理致。足以想見其爲人。同時所與遊唱和。表表若姜公希孟,梁公誠之,徐公居正,金公宗直。有著述。輒屬公爲弁卷之文。以見其推重之意。則公之不唯詩也。於此亦可013_046c知也歟。今其後孫仁漸,晚漸。來請銘于余。銘曰。
觀公之世。誦公之詩。而又以友。而公可知。是賢者封。俾也母夷。

소요재집(逍遙齋集)
형태서지 | 저 자 | 가계도 | 행 력 | 편찬 및 간행 | 구성과 내용

  형태서지
권수제 逍遙齋集
판심제 逍遙齋集
간종 활자본
간행년 1813年刊
권책 目錄ㆍ本集 2권ㆍ附錄 합 1책
행자 10행 20자
규격 22.3×14(㎝)
어미 上二葉花紋魚尾
소장처 고려대학교 중앙도서관
소장도서번호 D1-A28
총간집수 한국문집총간 13
 저자
성명 최숙정(崔淑精)
생년 1432년(세종 14)
몰년 1480년(성종 11)
 國華
 逍遙齋
본관 陽川
특기사항 金宗直ㆍ姜希孟ㆍ徐居正 등과 교유
 가계도
 崔承洽
 兵部侍郞
 崔仲生
 司正
 忠州安氏
 縣監 安善福의 女
 崔淑貞
 訓導
 崔淑亨
 監司
 崔淑精
 
 慶州鄭氏
 判書 鄭之智의 女
 崔光潤
 縣令
 崔光演
 副尉
 崔光瀚
 進士
 女
 
 郭季亨
 典籍
 崔淑卿
 府使

기사전거 : 墓誌銘(李肇源 撰)ㆍ萬姓大同譜에 의함
 행력
왕력서기간지연호연령기사
세종141432임자宣德71태어나다.
세조81462임오天順631진사시에 합격하다. ○ 가을, 문과에 합격하여 承文院에 보임되다.
세조101464갑신天順8337월, 藝文을 겸하다.
세조111465을유成化134湖堂에 뽑혀 賜暇讀書하다.
세조121466병술成化235봄, 重試에 합격하다. ○ 여름, 拔英試에 합격하다.
성종11470경인成化639형조좌랑, 수찬이 되다. ○ 예문관 학사가 되다.
성종21471신묘成化740副校理로 「世祖實錄」 수찬에 참여하다. ○ 12월, 실록을 편찬한 공으로 加資되다.
성종31472임진成化8412월, 통훈대부에 오르고 사헌부 지평이 되다. ○ 「睿宗實錄」 수찬에 참여하다.
성종51474갑오成化1043홍문관 교리를 지내다.
성종61475을미成化1144사은사 한명회의 종사관으로 중국에 가다. 기행시를 짓다.
성종81477정유成化1346봄, 副應敎가 되다. ○ 여름, 친시에서 연이어 3번 장원하고 直提學에 오르다.
성종91478무술成化1447동생 崔淑卿과 함께 「東文選」 편찬에 참여하다. ○ 3월, 驪州牧使가 되다.
성종101479기해成化15483월, 司憲府의 탄핵으로 파직되다.
성종111480경자成化16494월, 홍문관 부제학이 되다. ○ 9월 2일, 졸하다. 陽川 竹洞에 장사 지내다.
~~~~~~-利川 雪峯(雲峯)書院에 享祀되다.
순조131813계유嘉慶18-후손 崔仁漸ㆍ崔晚漸 등이 문집을 간행하다.(徐榮輔의 序)
--1919경신---후손 崔翼南ㆍ崔亨根 등이 문집을 증보하여 간행하다.


 
遲川先生集卷之十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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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行狀 附碑誌
先祖贈吏曹判書府君墓誌 後贈議政府左贊成 a_089_572a


嗚呼。先祖之歿。蓋今六十有三年。而墓無誌刻。鳴吉與其兄來吉。追述先君之志。敍其世系子孫而埋之于墓。先祖諱秀俊。字彥甫。生於嘉靖甲午。歿於萬曆癸酉。享年四十。始祖諱。神虎衛上將軍。七代祖諱宰。藝文館提學完山君諡文貞公。六代祖諱有慶。入我朝。參贊議政諡平度公。五代祖諱士康。議政府右贊成兼吏曹判書諡敬節公。高祖諱承宗。司饔院僉正。曾祖諱孝恭。宣傳官。祖諱命孫。從仕郞。考諱嶪。氷庫別提贈大司憲。完山之崔。爲東方大姓。自文貞而下。皆以孝謹剛直。見稱於世。爵位隆顯。號爲名家。其後連四世不達。逮我先祖。含章履素。壽亦不遐。故言行事跡無傳焉。鳴吉幼時。侍先君子略聞先祖平生。慈仁敦毅。居家謹飭。友愛篤至。少而多病。不樂赴擧。蓋先089_572c祖歿時先君年尙幼。故只傳其槪如此云。故李相公元翼有兄曰元輔。於先祖爲姊夫。李相公又與先祖同里閈。故先君在世時事之甚謹。今上初李相公首被召入朝。鳴吉就拜於建德坊第。相公爲言鳴吉先世事甚悉。且言先祖莊重寡言。禮以持己。義以制事。與人恭謹。不妄交遊。而隣里宗黨莫不加敬。咸稱爲善人。李相公宿德謹重。平生不苟譽人。鳴吉於是益知先祖之有隱德也。祖妣宜寧南氏。開國功臣領議政在之後。宜城尉致元之曾孫。贈戶曹參議尙質之女。以萬曆丙申089_572d終。去先祖之歿二十四年矣。崇禎癸酉。以鳴吉陞秩一品故。推恩先祖贈資憲大夫吏曹判書兼知義禁府事五衛都摠府都摠管。祖妣贈貞夫人。子男二人。長諱起南。文科通政大夫求興府使。贈議政府領議政。卽我先考也。次起源。折衝將軍龍驤衛副護軍。女二人。長適權靜。成均生員。次適李莢。成均進士。皆無後。先考凡生四男一女。長來吉。文科工曹參判完川君。次鳴吉。次惠吉。文科禮曹參議。次晩吉。前戶曹正郞。女適承旨韓必遠。早歿。側室有一男曰正吉。護軍生二男一女。曰廷吉,089_573a獻吉。女適佐郞尹得說。側室子曰鳳吉,誼吉。內外曾玄孫摠二十餘人。嗚呼。以我先祖之德。宜得壽與祿者。而鳴吉兄弟遭遇中興。各忝勳封。褒贈之榮上及三世。子姓昆季詵詵益繁。庸非積德之效歟。祖妣初葬楊州。距先祖墓百餘里。先君欲改卜吉兆而合葬之。不幸遘疾。訖未克就。鳴吉兄弟奉先人末命。奔走經營十餘年矣。葬師曰墓地本吉。不宜遷。鳴吉兄弟相議曰。先人欲改葬先祖。懼體魄之不安耳。旣知其吉而強遷之。非先志也。遂寢不遷。墓在高陽郡西塞浦村辰坐戌向之原。089_573b先祖妣墓在楊州天磨山下板谷村後云。歲丙子杪秋謹誌。
右遲川先生文集八冊。公諱鳴吉。字子謙。完山崔氏也。生於萬曆丙戌。卒於仁祖丁亥。官至領議政。以靖社勳封完城府院君。典文衡。墓在淸州北面大栗里。


 
宋子大全卷一百九十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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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墓表
平昌郡守崔公墓表 a_114_372a


國朝故家右族。能世舊德者。有完山崔氏家平昌公。114_372b尤不失靑氈素業。兼有絶藝。自幼爲稱家兒。其墨妙入神。見賞於宣廟。恨不以爲翰林。朱詔使之蕃願與相見。見其揮灑飛動而極稱之。由是雖爲蔭仕。而名聲藉甚。平看玉堂鑾坡矣。氣度淸曠。操履嚴重。孝親友弟。夫婦如賓。其家法蓋不失風火嗃嗃之象矣。嘗渡江遇風船幾覆。整坐如常。旁舟敗沒。篙工不拯其漂浮者曰俗忌也。公疾聲大呵曰。人死敢言俗忌乎。其人竟得以活。人服其氣定而心仁也。蓋公喜讀心經近思義理諸書。其所得所養者如此。外官時。復父母仇者。當以殺人論死。公曰此義殺也。若殺此人。114_372c世敎傷矣。上官不聽。公卽棄歸。此幾於周夫子置手版風彩矣。公亦嘗好觀一雙鵝。及解官。依留犢故事。不以籠歸。亦見其標格也。百姓立鐵碑以頌之。始祖高麗神虎上將軍純爵。本朝益爲名族。平度公有慶,揚度公士儀。仍父子以廉潔載國乘。至大司諫諱鐵堅。卓犖偉人也。事載象村所撰墓碣。娶晉州鄭氏。生公。諱行。字之源。崇禎丁丑。年六十八而終焉。其官自司饔參奉。平進累轉司憲府監察。爲江東,牛峯二縣監。麻田,寧越,平昌三郡守。墓在楊州松山先塋。配沈氏。其考監司岱。李氏其考校理尙弘。皆別葬。男繼昌,繼興,繼雄。繼雄府使。女壻蓬萊君炯胤,僉樞張仲仁,李義老,安定邦,鄭時廣,府使朴敏道,李亨業,李有淓。長男及二女。沈氏出也。長房生寬。今爲大司憲。追恩贈公吏曹參議。次宣,憲。次房生實直長,定縣監。季房生寔,㝢。寔爲縣令。公好山水遊。每有超然出塵意。不屑屑於俗務。故以其才藝氣槩。終於下僚。今大憲蔚然爲盛朝名臣。豈公遺澤也耶。


 
宋子大全卷二百十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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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行狀
貞敬夫人崔氏行狀 a_115_120a


夫人系出全州。高麗神虎衛上將軍諱純爵。其上祖也。其後達官名人。累累有焉。完山府院君宰,贊成平度公有慶。最以文行顯於世。高祖任。仕止部將。曾祖漢宗。贈參議。祖誾。贈參判。兩世追爵。皆以考諱115_120b德隆同知公所貤也。同知公倜儻弛置。不事文學。力田養親。財資饒益。然自有道理。不雜以世俗役貧侵弱之事。眞所謂不窺市井。不行異邑。坐以待收。身有處士義而取給者也。又以周窮恤匱爲急。國家遭壬辰倭亂。仍以飢饉。京華士大夫及道路之餓者其至如歸。公列鼎具食。逐日供給。終無倦色焉。光海以世子撫軍南下。天將劉摠兵綎。率數萬衆經宿其村。公具兩時酒食。迎犒於路上。部分營辦。指揮而定。絶無喧譁急遽之意。兩軍將士大加稱賞。總兵曰。雖以中朝之大。如此人未易多得也。後遂白于宣祖大王。115_120c宣祖特除林川郡守。公終不敢辭。交  數月而歸。沙溪金先生嘗稱曰。吾見富人多矣。未有如此人之好義也。公娶國姓李氏。達城都正仁武女也。夫人以萬曆壬午十一月六日生。容儀婉嫕。性度靜淑。自十餘歲時。已有成人之度。行止安詳。笑語簡少。又知事親之道。父母有命。承順不怠。有疾則憂苦必形於色。處兄弟間。亦盡其歡。同知公鍾愛甚焉。未笄。俱失怙恃。哀毀過禮。服闋。以壬寅冬。年二十一而歸于贊成李公忔。贊成公上奉其考判書公及庶母。又前夫人黃氏有子女三人。而其季尙在襁褓。夫人上事尊舅115_120d及小姑。各盡其道。小姑性雖無良。終亦和愛。其撫黃氏遺孩。必親自抱持。不以委諸乳媼。或有疾病。則祈禱藥餌。極其誠心。雖便矢徧汚衣裳。絶無惡穢之意。判書公嘗曰。新婦孝慈如此。吾門可以昌大矣。未幾。判書公疾革。夫人晝夜不解衣。親調藥餌而奉之。判書公不能進則夫人亦不食。及喪。哀慕如其父母時。凡其終事。至賣簪珥。終無所缺。其事贊成公。和順而承以敬。贊成公前後五受郡寄。而夫人未嘗有出入言。又不敢取官下一物。故月俸之外。纖毫無賸資焉。己巳。贊成公飮氷朝天。海路險遠。人甚危之。夫人常115_121a置一小旗於屋上。占風之逆順。夜必露香致禱。又虔祝海神。冀其利涉。翌年夏。贊成公果沒於燕京。夫人迎柩攀擗。氣絶而復甦者數矣。及葬。率諸孤廬于墓下。朝暮哭展。奠饋之具。不以委人。雖病甚而力不懈。己亥六月寢疾。二十八日終于漢師之里第。享年七十八。其年十月。卜葬于交河水南里崔氏葬。其初四日窆焉。夫人生長富家。習於美飾。旣行則贊成公家素不溫。夫人不以異於前日有不堪之色。當昏朝時。贊成公爲權奸所忤。杜門屛跡者十餘年。只與會心親友杯酒自娛。夫人常飭庖具饌。必使賓主盡歡而115_121b後已。贊成公篤於睦姻。收養遺孩者至多。夫人承其善意。撫養以誠。衣服飮食。人不覺其異於己出。諸子旣取婦入門。同爨者數十人。而夫人軫其飢寒。均其勞逸。而任以職事。撫御之方。井井如也。雖甚愛諸子。而至其敎督則未嘗寬假。常曰出入交游之際。必謹其言行。以貽父母令名。是吾所願也。至於顯揚則非可以人力強致也。嘗從子之官。歎曰安享專城。擧家免飢。國恩罔極矣。豈可復以非義累汝。所供稍佳。則必親自包裹。以遺京中諸姪曰。獨享非樂也。賀辰所獻。卽亦頒盡不爲日後計留也。手執繭絲。老益孜孜。115_121c諸子女或進文伯之說。則亦以敬姜語答之。紡績所成。以助親黨之婚喪。諸生爲其子來。則喜而款遇。族人過者或空腹而去。則歉然不樂者累曰。隆寒制祭。雖手至皴拆。不聽諸婦代割。自以小宗之家。必獻賢于大宗。婢僕有過。溫言戒飭。不以笞扑遽加焉。故婢僕誠心感戴。不忍欺紿。至於隣里媼嫗。亦施以恩義。故宗戚莫不稱歎焉。己始得疾時。自知其不能起。時孫新娶婦。乃曰新婦亟迎以來。蓋念其不幸之後縞趨之不祥也。及將屬纊。語子女曰。死生聚散。若夜朝之常。吾又年至上壽。復何憾焉。且勉新婦以孝敬115_121d之道。諄諄若治時精神。未覺有毫髮爽也。襲斂諸具。皆用平日所自具者。蓋嘗曰。古語云。七十時制。吾不忍使子女擗踊之際急遽而爲此也。其周詳懇惻之意又如此矣。余於贊成公。契誼甚厚。又與諸子游好尤篤。獲知夫人之賢詳且舊也。記昔癸巳年間。其第三哥壽翼。得永同。迎養娛侍。吾母亦無恙。隔江相近。二母書辭往復。贈遺慇懃。痛癢憂歡。不翅相關矣。今者二家兒。俱以孤露餘生。銜恤靡依。共深不洎之痛。茲荷彼氏諸子以義要責狀文。自揣不敢。而情又不忍辭也。遂掩涕而仰書其槩如此。其內外後承則已115_122a詳於贊成公狀中。故不復第錄云。
 
宋子大全卷二百十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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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行狀
完山府夫人崔氏行狀 a_115_122a


夫人姓崔氏。系出全州。高麗壁上功臣神虎上將軍純爵。其上祖也。考諱鐵堅。司諫院大司諫。贈左贊成。妣鄭氏。晉州大姓。夫人以萬曆癸未十月初五日生。贊成公愛其端順。幼時手書女範以授之。終身誦念不已。年十七。贊成公議所宜適。歸之趙公諱昌遠。公昭敏公諱存性之長子。族大而貴。夫人入門。益自敬謹。常未明而起。起居舅姑。仍侍左右。未敢輒退私室。湯劑未嘗委人。舅姑疾未復常。則夜未嘗就寢115_122b者。雖久而無倦色。如是蓋三十年不衰也。與其娣申夫人親愛。如同氣。申夫人卽象村文貞公女也。素有女士名。常歎曰。吾生長名家。見人多矣。未有如我姒者。此當爲後世模範而福慶僕焉。趙公自少喜賓客。夫人常設酒食。使客主盡歡。不爲有無計有所靳也。公爲郡邑時。無一言以及家私。曰無以是累我公也。平生動止有常。旣老祇飭不衰。日必盥梳。衣服唯謹。女紅常不去手也。然有時商論事物。則其不合於理致者鮮矣。嘗曰。吾無可爲子孫法者。但自少至老。一言一事。未曾有傷人害物者矣。公宰礪山時。夫人有115_122c異夢。誕生聖女。仁祖十六年。遂位坤極。公由仁川府使。超一品階。封漢原府院君。夫人以淑人。從陞府夫人。大貴豐享。一朝有之。瞻聆聳動。而夫人愈自兢畏。朝夕若將有大覆墜者。姻族望其顏色。莫敢慶賀於前。以命嘗入掖庭。上稱其衣服儉素。後孝宗大王。亦軫其未有兼衣。賜以珍裘。崇禎丙戌。漢原公捐館。夫人年已踰艾。執禮愈嚴。家人交謁以成疾爲言。而終不變食。自孝宗以來。我大王大妃極享東朝之奉。所以致隆於夫人者備矣。其恩澤匪頒。少涉豐腆。則必踧踖不安。卽以分諸親族。其窮115_122d窶者。取養於家。務以不屯其惠養之膏賜。其親族皆愛戴曰。我家夫人云。而識者知其有福謙之效矣。孝宗大王賓天。夫人痛慕特甚。言及必流涕。旣三年猶然。至德之感人。固宜如此。而夫人亦可謂加於人一等矣。癸卯十月二十五日卒。訃聞。上輟朝。其終事皆自四殿致物焉。漢原公先葬楊州地。至是改卜松都之高雲山負乾原。翌年正月二十九日。擧緬而夫人祔焉。男胤錫。文科官至承旨。以毀而歿。長女歸參判申翊全。卽象村公子。次適敎官韓鼎相。我大王大妃最季也。承旨一子。泰相。五女。適具文洙,沈機。餘未行。申參判五子。晸,暹,㫤,曅,昂。長女適正言李嵇。其次選爲王子崇善君澂夫人。敎官三子。宗建,宗運。女適金鼎臣。餘皆幼。嗚呼。蜀塗莘摯尙矣。自漢以後。外戚之家鮮不酣豢豪縱。以病其國而亡其家矣。今漢原家。以故家右族。仍爲國舅。又貴富者。婦人之所常慕也。夫人能以謙德自持。當仁廟末年。妖人孼臣。表裏搆煽。及如丙戌有大刑戮。內外震慄。夫人以眇然未亡。一心淵谷。能保無他。逮我東朝。尊享聖舜之孝。則其隆榮可謂極矣。而其柔謹之實。益著於世。故上自士夫。下至廝儓。皆相與言曰。曷嘗聞漢115_123b原親族有倚橫者乎。其奴僕有凌奪者乎。更歷三朝。曷聞有出入言乎。皆相曰。未聞也。我朝家法。固正且美矣。而靡夫人淑愼之德。烏能致此哉。此所以善其終始。保有家族。而令譽無窮者哉。余於己亥歲。嘗値夫人歸自大內。斂避道側。見其輿物女從。一如柳家韓夫人之爲者。余至今歎息。以爲今世婦人皆效夫人之儉德。則奢靡之風。庶幾其少衰乎。余旣作漢原公碑文矣。今者其從子監司公龜錫。以一角封識者。使人來授曰。從兄承旨公無恙時。將復以此。請狀其先夫人而未及焉。今爲死者紹焉。余與承旨公。雖115_123c有喬茅之異勢。固嘗從游而愛慕則深矣。今則已矣。豈忍負平日之誼而孤其泉壤之心哉。謹第錄如右。以授使者而歸之。崇禎乙巳三月日。恩津宋時烈。撰。

 
壺谷集卷之十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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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墓表
淸安縣監崔公墓表陰記 a_131_408a


嗚呼。此卽吾先子執友崔使君之墓也。於其碣文之托。余何敢以不文辭。記余髫齓之年。常見先子與公131_408b比隣而居。朝夕步屧相隨。醑酤必邀。驩然昆弟若也不幸公先早世。余今又爲孤露之人。俯仰人代。均有兩家之感。則其何敢以不文辭。謹按。公諱後定。字止卿。系出全州上將軍純爵。寔公鼻祖。麗季國初。代有名人。曾祖諱秀俊。贈左贊成。祖諱起南。文科府使贈領議政,完興府院君。考諱惠吉。號柳下。吏曹參判。妣咸豐李氏。觀察使春元號九畹之女。萬曆壬子。生公。公早習擧子業。有能聲而屢屈公車。以蔭入仕。康陵參奉,繕工監奉事,尙衣院直長,司憲府監察,淸安縣監。此其履歷也。丙戌。卒于官。得年堇三十131_408c五。以曾參原從勳。例贈承政院左承旨。初葬楊州天磨山下板谷之原。逮夫人之喪。因地家言。稍移塋于庚向之地。合窆焉。公眉眼明粹。襟度淸坦。雖生長於名門乎。絶去驕矜之色。輕財好義。待人以誠。談笑之間。和氣溢發。先子少時。同里游者。非止一二。而至於心期莫逆膠膝金蘭。則必曰止卿止卿云。此皆余目覩而耳聞者也。若其居家。則孝友之行。出於天植。怡愉謹飭。無子弟纖毫過柳下。公稱以父子知己。如董氏仲父遲川公。爲世名相。號知人。亦以謝家車騎期待之。而文不成名。壽纔踰立。終使蘊抱之才。暫試131_408d百里而止。後事又極凌替。天之報施善人。一何乖舛哉。配淑夫人李氏。司禦贈判書揚休之女。貞順莊恪。得婦道甚。公在而每令賓筵有光。公歿而又能經紀家事。俾不失墜享祀豐潔。庭戶整肅。宗族隣里。咸嘖嘖稱歎焉。生於乙卯。卒於壬成。享年六十八。擧男女各一人。男錫齡。早登上庠。將若食報而遽天。人尤惜之。娶郡守洪處深女。生男女。俱不育。取從兄錫晉之子昌演爲後。女適大司諫李柙。生一男三女。男翊夏。娶判書申晸女。女爲李觀朝,金鎭華,洪重呂之妻。李生翊夏爲余之習於公也。自爲狀草。請余碑陰之131_409a文。余感宅相之猶存典刑。悲往事之不可復追。書此以副兼抒余懷云。

 
藥泉集第二十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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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墓碣銘
左尹崔公墓碣銘 a_132_310a


今領議政崔公錫鼎。其弟吏曹判書錫恒。以其先府君靜修齋左尹公之狀授余。請銘其墟。噫。余實無文。何能形容公之德美。余雖無文。何忍拒二胤之孝思。又何忍忘公平日之辱知。不效其紀實之役乎。按狀完山之崔。高麗上將軍純爵是鼻祖。自麗入本朝。奕世軒冕。德業相承。有贈左贊成諱秀俊。是生永興府使贈領議政諱起南。是生領議政完城府院君諡132_310b文忠諱鳴吉號遲川。配曰仁同張氏。玉城府院君晩女。文忠公有弟曰吏曹參判諱惠吉。其配曰咸平李氏。觀察使春元女。以萬曆丙辰生公。諱後亮字漢卿。文忠公初無子。取公子之晩。有子曰後尙。以胡文定爲法。請于朝。定公爲嗣。時文忠公以元勳當樞要。日不暇給。家務悉以委公。實有幹蠱之譽。丁丑以相臣子質瀋。壬午文忠公爲虜所囚。公乘撥馬三往來虜中。周旋紓禍。乙酉陪文忠公東還。丁亥文忠公捐館舍。公在瀋幾八九年。身勞心瘁。已有忡悸昏花之疾。居憂益甚。杜門養痾。久之稍間。辛卯中生員。除南別殿參奉不就。除四山監役遞。丙午除翊衛司侍直陞歸厚別提。遷宗簿主簿,工曹佐郞,忠勳都事。庚戌除白川郡守。明年遞。乙卯除司僕僉正。時世道嬗變。不樂在官。以病免。連除珍山,沔川守不赴。己未除榮川守旋遞。庚申錄保社勳也。以靖社元勳胄子。參會盟祭。進通政階。辛酉除淸風府使。癸亥遞。乙丑年七十。朝廷以二子官侍從。推恩進嘉善階。襲封完陵君。除漢城府左尹兼都摠府副摠管。未幾辭遞。居閒娛老。己巳時事又變。削保社勳。資降爲通政。癸酉考終于寢。葬于楊州天磨山下板谷里負艮之原。132_310d從先兆也。是年夏復保社勳。還資職如舊。致祭如儀。配廣州安氏。觀察使獻徵女。莊重端慤。婦道甚修。宗黨歸之。尤爲文忠公所愛重。降於辛酉。歿於癸丑。葬祔公。擧三男二女。男長錫晉正郞。先公卒。次卽議政。次卽判書。女。長適進士尹濟明。次適縣監申轂。正郞四男。生員昌憲,都事昌演,奉事昌敏,昌億。議政後公弟應敎後尙。有一男昌大。今爲廣州府尹。判書後公本生弟敎官後遠。又以昌億爲己後。女孫外出又如干人。公天資溫雅。風儀修整。和不流易。莊不至厲。汎愛親賢。一出誠心。人莫不信慕忻忻焉。公有沈慮132_311a遠識。文忠公深信之。軍國機務。多所咨訪。戊寅公自質瀋還白曰。大人當國。有二事差失。論斥金淸陰。送僧洪軍門是已。議和與斥和事雖角立。心皆爲國。而到今究竟大人之言始驗。此則夫人皆知之矣。雖然城下之盟。匪幸伊辱。在大人不必以存國爲多。在淸陰亦不必以誤事爲咎。唯當祛疑阻通書問。深明和事之不得已。亦獎淸議之不可無。使彼此之間。心事洞然。何可提論得失。與之相貮哉。且欲通信南朝。宜別遣單使。齎奏航海。復尋麗朝通宋舊路。一帆風可達中州。今乃資僧以船。掠過遼瀋界。候望相接。易132_311b爲虜覺。雖或得至軍門。亦難必達帝庭矣。文忠公大悟曰吾不知出此。後聞虜騎之邏海邊者。望見東船之向西。致疑於我。及洪軍門降虜得我書。文忠公見執。公曰大人爲國就死。固所甘心。至若子救父死。亦當靡極不用。遂齎貨入瀋關。說其用事者。時淸陰金公亦拘在同館。或白金公性素方嚴。無乃以行貨爲不可於意。公曰是殆不然。入問金公曰散宜生何如人。曰古之賢人。公出曰聞金公之言。其意可知。及公東還。金公爲作歌詩贈之。又爲小序稱道甚盛。公於問學。旣擩染家庭。且受業於谿谷張公白軒李公。132_311c讀徧儒家諸書。而蚤抱沈痾。不能刻苦著工。常以爲恨。平居繙閱史書。無不淹貫。至於國家治亂之漸。賢邪進退之幾。未嘗不深致意焉。其評品人物。多有前人道未到者。公於詩才分甚高。雖以中經患難。不得肆力。出語往往警絶。在瀋時有作。淸陰公亟加評賞。晩歲與文苑諸公多有酬唱。皆稱其調韻過人。集爲若干卷藏於家。公心淸欲寡。又加保嗇。爲質累年。不以室從。往來關西。未嘗一近聲伎。具監司鳳瑞稱之曰崔漢卿苦節。過於蘇武。及其喪室。年不甚衰。不置姬妾以終焉。宰三邑。皆以淸靜爲治。而其在白川。適132_311d當辛亥大侵。多活捐瘠。遺愛尤深。邑民鑱碑曰萬世不忘。過者皆下馬。公居家而篤於孝友。與人交。趨急如不及。慕氣節。雖機穽在前不避。遠匪人。不獲其滋垢。凡此類不可悉記。若其訓子純深。有示見一箴曰心存則自然凝重,言寡則可無悔吝。取友必先器識。臨事宜思敬謹。此數語辭近而旨遠。擧小而包大。誠可謂做人底樣子。矧公之爲敎。必以身先者乎。宜其委祉之盛。二胤競爽一時爲名公卿。嗚呼休哉。銘曰維我崔公。爲子盡職。何險不濟。爲父能敎。何慶不啓。子子父父。人道大體。百行之源。衆善之柢。銘以昭之。132_312a來者是徯。

 
西溪先生集卷之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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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誌銘 一四首
完陵君崔公墓誌銘 a_134_183b


公諱後亮。字漢卿。姓崔氏。自號靜修齋。其先完山人。高麗世純爵。官上將軍。其後蟬聯。代有聞人。九代祖有慶。國初。參贊議政府事。諡平度。生士康。左贊成。諡敬節。高祖諱嶪終。氷庫別提。曾祖諱秀俊。不仕。大父諱起南。少以文行著名。晩擢第。歷館閣檢舍。値光海時。卒官通政永興府使。父領議政完城府院君文忠公諱鳴吉。初配張夫人。玉城府院君晩之女。夫人無子。文忠公取弟吏曹參判惠吉子爲嗣。公是也。母九畹李公春元之女。以丙辰八月二十日生公。三歲134_183c失母。九歲而文忠公使張夫人子之。十二歲而夫人又卒。及丙子之難。公纔踰弱冠。時文忠繼娶許夫人。公奉母避兵江都。及江都陷。城中士女多被搶掠。公挺身往見虜將。排劍槊以入。立於前。虜將異而問之。公對曰。聞軍中禁不得侵撓李相國,崔尙書家。我乃崔尙書子。特來相聞。虜將問何以驗之。對曰。驗諸國人。於是虜將詢得其實。出令護崔尙書家。城中人賴以得全者衆。文忠公主和議。淸人知之。李公廷龜。名聞華夷。故爲之保全此二家。當仁祖二十年壬午秋。淸人得獨步事。文忠公被拘瀋陽。禍且不測。公日134_183d夜叩心。乘遞三赴瀋。周旋前後事。竟得解。乙酉歲。文忘公始東還。客有言者曰。公之子年少書生。能潛消大禍。其才如是。文忠唯云才出於誠。至丁亥五月。遭文忠公憂。喪祭無違禮。初公在瀋中。病怔忡及眼障。及是增劇。辛卯。疾稍間。中生員。孝宗甲午。補南別殿參奉。病不仕。復除四山監役。未久亦罷。年五十以後。舊疾益蠲。至顯宗丙午。拜翊衛司侍直。敍陞歸厚別提。遷宗簿主簿,工曹佐郞,忠勳都事。庚戌春。出爲白川郡守。是年秋大饑。餓莩載道。公殫心拯活。造屋五十餘間。以居流丐之民。擇邑中善良任之。以事134_184a飭吏胥絶奸弊。每朝。躬至賑所。分饋粥糜。男女不得雜坐。疾病必有養也。其土着者。計口給糧。無廢耕作。至秋大熟。民不病焉。公曰。活千人者。非誠不能。吾敢忽諸。未久。以疾去官。其民思之。久而不已。父老相與言曰。歲在辛亥。生民大困。向非崔侯。我無類矣。爾有子孫。誰之賜也。因立碑頌德焉。今上乙卯。爲司僕僉正。公不樂仕宦。數月病免。太僕膏腴地。居之者多濡滯。及公去之速。老吏以爲異事。後又拜珍山,沔川。皆不赴曰。吾年衰多病。不如在家之安。己未春。又除榮川郡守。亦非意所喜。勉赴一歲而又免歸。庚申歲。134_184b討逆會盟。公以勳胄進階通政。明年春。除淸風府使。地勝俗淳。嘯詠自適。扁舟藍輿。放意山水間。郡亦以治。秩滿歸。民爲立碑。乙丑。公年七十。因子列侍從推恩。復進階嘉善。襲封完陵君。拜漢城左尹兼副摠管。數月解官。淸坐終日。對客觀棋。種花蒔藥以自娛曰。古謂草澤閑人。居王公之上。吾雖非草澤。得爲閑人以終餘年。不亦樂乎。己巳。時事又變。公杜門謝客。絶不談世事。至癸酉十二月一日。卒于正寢。壽七十八。明年二月。葬于楊州天磨山下板谷負艮之原。從先兆也。夫人祔焉。公天資英果。和而能莊。愛人喜施。人134_184c皆傾慕。文忠公深倚仗。內而家政。外則邦猷。無不參定。其在瀋中。鄭文學雷卿。謀殺鄭命守。事覺。禍不測。公憐之。獻詩孝宗曰。天下卽今無節俠。窮途知己更誰憑。虞卿急士歸公子。莫使侯生恨信陵。孝宗爲之悒然。時孝宗以大君。亦質于瀋也。參判公聞鄭公將被禍。慮公與其謀。甚憂之。文忠公笑曰。毋憂也。是子豈浪死者哉。及西報至。公果無他。諸公聞之。皆稱爲父子知己。淸陰金公。白江李公。旣與文忠同拘瀋。淸陰謂文忠曰。古人樂有賢父兄。今公有子弟賢。豈不樂乎。白江東還。每語公。嘖嘖不已。公少從谿谷游。中嬰沈痾。雖不能專於學。然好觀前史。終日忘倦。其律已甚嚴。留瀋館者三年。常獨居。關西稱妓樂之盛。往來經由。或至數月。泊然一無所近。及夫人卒。不蓄姬妾。唯子弟侍側而已。內行甚備。與弟應敎後尙。友愛篤至。田宅僮僕。必擇其良以與。其資贈庶妹亦厚曰。先公血屬。唯此二人。豈可使其窮乏也。應敎君語其室曰。吾於世無心契。獨有兄爲知己。又曰。吾兄正大人。庶弟後章。早孤無依。養於家。使得成立。及諸親從之貧窮者。多經紀其嫁娶。尤謹奉先。置祭田立祠堂修譜牒。爲遠祖樹墓碑。凡祭祀。遵文忠遺敎。134_185a不敢過。公有沈慮遠度。爲前輩所賞重。如淸陰,浦渚,谿谷,延陽,白江諸老。深加奬許。李咸陵澥,朴公潢,具公鳳瑞。皆託以忘年。當顯宗世。黨議紛爭。多以爲憂。公獨語諸子曰。今日猶太平。汝輩後當自知。及甲寅以後。朝著屢變。士大夫多被刑禍。庚申。舊人復進用於時。公謂不出數年。事又當變。或言時無釁隙。公笑曰。世故推遷則釁自生矣。已而。有己巳之事。公言卒皆驗。諸人爭廢妃事被禍。公時已疾困。聞之流涕曰。吾歷世變多矣。老病不死。又見此事。己巳。奪資爲通政。甲戌。改紀。公已下世。復官致祭如儀。夫人134_185b安氏。觀察使獻徵之女。莊重端愨。淸素簡深。性勤紡績。絶去芬華。撫恤窮族。曲有恩意。撫御婢使。得其歡心焉。生以辛酉九月十日。卒以癸丑四月。壽僅五十三。擧三男二女。男長錫晉縣令。次錫鼎領議政。次錫恒大司諫。女適進士尹濟明,正郞申轂。縣令四男。昌憲生員。昌演司議。昌敏,昌億。議政一男。昌大校理。二女。適李聖輝,李景佐。尹濟眀一女。適趙命迪。申轂五女。長李聖臣。次尹敬龍。餘幼。昌憲一男守哲。一女李明復進士。昌演二男四女。昌敏二男一女。昌億一女皆幼。銘曰。
134_185c文忠有子。完陵挺擢。方世變初。天地反覆。江都傾陷。一城魚肉。刀矟如林。不懾不愕。殊類動色。保我邦族。壬午之事。禍尤不測。三走浿瀋。風餐露宿。連環可解。神鬼震薄。及夫東還。袖手斂迹。無事可見。我仕以祿。亦縻郡紱。少試勞勣。晩躋貳列。封爵乃續。非嗇厥施。天人互得。旣耆旣壽。胤嗣赫奕。載銘幽穸。庸詔千億。
134_185d西溪先生集卷之九

 
 明谷集卷之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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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序引
平度公世譜引 a_153_556d


世譜者何。志氏族也。平度公孰謂。卽吾遠祖也。遠祖者幾世乎。十一世也。舍此則無可志乎。曰有可志矣。平度以上八世。有諱官至神虎衛上將軍。是吾譜之始祖也。然則曷爲自平度志。詳於近也。平度曷不以官擧而著諡。官混而諡別也。曷爲爲之六冊。平度六子。俱有名位。故以六派分編也。譜圖曷爲五格。等而上之。舍一格而爲父祖曾高。順而下之。舍一格而爲子孫曾玄也。凡吾譜志吾宗姓。而曷爲並載女153_557a夫。女猶存吾氏。而不害爲吾姓譜也。

明谷集卷之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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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序引
崔氏先河帖敍 a_153_557a


氏族之有譜古也。自根而幹。自幹而枝。雖枝條分於千億。而本根宗於一人。其法蓋取諸易。太極生兩儀。兩儀生四象。而演之爲四千九十六卦。同一理也。今見丁上舍時述氏所著十代系。則以一人之身。推其所自生。得內外八高祖。又引而伸之。泝而上之。以及於高祖之高祖。而得姓者凡一千二十四。與譜牒相表裏。蓋因加倍之法而逆推之也。余歎其述先之篤而用心之勤也。遂倣此圖式。著吾崔氏先河帖。而道153_557b其所以著之由云。

明谷集卷之十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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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題跋
書世系錄後 a_154_080a


154_080b按麗史。崔乙義當麗末。與選部典書同時。又牧隱所撰文貞公墓銘序云。譜之可考者。曰純爵。崔均以下十二世。果是神虎祖世。則牧隱必無漏載碑文之理。百年之間。有顯官兩乙義。亦無是理。故舊刊族譜與諸家譜帖。皆以神虎府君爲始祖。此本明是傳錄之誤。甲申春。錫鼎謹志。

 明谷集卷之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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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序引
平度公世譜引 a_153_556d


世譜者何。志氏族也。平度公孰謂。卽吾遠祖也。遠祖者幾世乎。十一世也。舍此則無可志乎。曰有可志矣。平度以上八世。有諱純爵官至神虎衛上將軍。是吾譜之始祖也。然則曷爲自平度志。詳於近也。平度曷不以官擧而著諡。官混而諡別也。曷爲爲之六冊。平度六子。俱有名位。故以六派分編也。譜圖曷爲五格。等而上之。舍一格而爲父祖曾高。順而下之。舍一格而爲子孫曾玄也。凡吾譜志吾宗姓。而曷爲並載女153_557a夫。女猶存吾氏。而不害爲吾姓譜也。

明谷集卷之二十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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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墓誌
七代祖妣宜人李氏墓誌 a_154_370a


宜人全義李氏。高麗太師棹之後。簪組憚嫣。十世而有諱貞幹。中樞院使。諡孝靖。爲宜人之高祖。曾祖府尹士寬。祖贈參議仁長。考監察一仝。妣慶州李氏。參判延孫女。嫁歸崔氏。崔亦三韓大姓。始祖神號衛上將軍純爵。其後至選部典書得枰,完山君文貞公宰。勝國之季。仍父子大顯。完山君生平度公諱有慶。是生敬節公諱士康。兩世仕本朝爲名臣。宜人之舅。司饔僉正諱承宗。敬節公之季子也。宜人之配諱孝恭。以才蔭薦補宣傳官。是錫鼎之七代祖也。宣傳公早沒。葬于果川之盤浦。在漢江之南。每當節祀。宜人躬往祭之。一日遇大風舟幾覆。遺令勿涉川而葬。葬宜人于楊州檜巖里枕丁原。蓋欲移奉宣傳公合窆。形家曰。果川之兆本吉。遂不遷。擧二男。長奉孫娶參議崔漢禎女。非一崔。無子。次曰命孫從仕郞。娶鈴川君尹磻女。生一男業。氷庫別提。贈吏曹判書。娶府使申承澡女。生二男二女。男長秀英司饔院參奉。其季秀俊。卽錫鼎之高祖也。贈左贊成。歙谷縣令李元輔,龍仁縣令金昱。卽二女壻也。司饔君有二子。起祖生員。起門典簿。女三人。贊成公二男。長起南文科。官止通政永興府使。贈領議政。三世追爵。以子貴也。次起源僉知中樞。女二人早沒。李元輔六子一女。金昱三子三女。內外後孫不盡記。嗚呼。宜人當門戶中衰。早寡家甚貧。無以自守。而能奉烝嘗盡禮。訓子姓以法。昏娶皆世家大族。庶幾其似續先業。闡揚家聲。無祿。從仕公以下。歷三代不振。崔氏之緖。不絶如綫。逮我曾祖晩谷公。始克通顯。遭時之巇。飛不盡翰。王父遲川公文章勳業。冠一代。官都鼎軸。食采於完城。兄弟四154_370d人。三以文科進。官位隆顯。赫然爲大家。善有餘慶。不其徵歟。宜人之沒。近二百有餘年。而神道無誌刻。懼日月愈久而愈無徵也。謹誌之如右。從仕公葬宜人之下。司饔君又葬于其下。別提公葬宜人之右岡。而其下一塚。卽宗孫起祖之藏。其岡之背。有三塚。皆傍親云。今上六年庚申秋。七代孫弘文館典翰錫鼎謹誌。


 明谷集卷之二十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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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墓誌
先伯父淸安府君墓誌 a_154_370d


伯父諱後定。字止卿。全州之崔。爲東方大姓。自始祖神虎衛上將軍諱純爵。簪組奕世。五世而有諱得枰。154_371a選部典書。生諱宰。藝文館提學完山君。諡文貞公。生諱有慶。入我朝。參贊議政。諡平度。生諱士康。議政府右贊成。兼判吏曹。諡敬節。是爲公之八代祖也。曾祖諱秀俊。贈左贊成。祖諱起南。號晩翁。文科官土永興府使。贈領議政完興府院君。考諱惠吉。號柳下。文科吏曹參判。妣曰咸豐李氏。觀察使春元之女。觀察公號九畹。文章節行。爲世名人。以萬曆壬子二月十日生公。年二十七。以任子授康陵參奉。歷繕工監奉事尙衣院直長。序陞六品。拜司憲府監察。乙酉八月。出監淸安縣。越明年二月望日。以疾終于官舍。春秋154_371b三十五。以參原從勳。例贈通政大夫承政院左承旨。錫鼎晩生。不克逮吾伯父。而徵諸見聞。公內剛而外和。深湛有識慮。內行純備。其事親也。誠禮備至。待小母盡道。處兄弟極其友。親黨翕然稱之。公之弟僉樞公號靜修齋。是生錫鼎。與公早失所恃。情愛篤至。靜修公嘗以家難。入于瀋陽。且數歲矣。公念之不已。錫鼎之兄錫晉方在乳。輒膝置而垂涕。其交朋友也有道。所與深者。視同昆弟。周其急。無少吝嗇。其待人接物。仁而有禮。少攻擧子業。長於詞賦。戰藝屈其人。旣而婁擧不中。尤通練吏務。自一命之庳。有能名。及爲154_371c淸安。貞白自將。吏戢而民安。祖考遲川公。公之仲父也。時屛居鎭川之草坪。與淸爲隣。公下車未十日。聲聞已播。遲川公語人曰。吾嘗謂此兒有幹方才。今果見其一斑矣。公嘗無所騎。遲川公聞之。卽輟廏中賜馬以與之。公見重於一家如此。則其取許於人者。可知己。及公之沒。朋游之來哭者。如哭其親戚。每當諱日。婢僕哭之如初終。久而不衰。微公之德之孚于人。何以臻玆。噫。公之蘊諸身者旣厚。而積善無徵。不克展其才。而又無年。天將何以勸仁人也。嗚呼痛哉。公之配完山李氏。世子翊衛司司禦贈吏曹判書揚休之女。生一男一女。男錫齡賢而有文。年二十五。成進士。人皆以詘於吾伯父者。望於從兄而卒早夭。親友惜之。從兄娶郡守洪處深女。生一男一女。皆殤而不育。伯母取錫鼎之兄子昌演。爲其後。女爲大司諫李柙繼室。大諫卽判書東岳公之嗣子也。生一男曰翊夏。娶參判申晸女。三女適李觀朝,金鎭華,洪重呂。公之沒。葬于楊州天磨山先墓之側。公沒後三十餘年。公之外孫李翊夏自爲狀。屬錫鼎誌于墓。翊夏齡未弱冠。文詞蔚然。固將趾其世美。而意者吾伯父餘慶鍾於是。而俾爲寗氏之陽元也。亦足以少慰吾伯154_372a父於土中矣。是用撰次族世行蹟。列于幽堂。而抆血紀事。不能文敍而終焉。今上六年庚申九月日。從子通政大夫承政院同副承旨知製敎兼經筵參贊官春秋館修撰官錫鼎謹誌。


 
明谷集卷之二十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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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墓誌
先祖考文忠公府君墓誌 a_154_377b


昔在新羅初。有六部大人。是佐赫居世。蔚有勳伐。崔氏其一也。其後世著籍于完山。譜自神虎衛上將軍諱純爵始者爲吾祖。五世而有諱得枰。選部典書。諱宰。藝文館提學。諡文貞。兩世顯于麗季。諱有慶。參贊議政。諡平度。諱士康。右贊成。諡敬節。兩世著于王國。自是五世而有諱秀俊。隱德不仕。贈左贊成。生諱起南。文科歷敭華顯。官止通政大夫永興大都護府使。贈領議政。號養菴。游牛溪成先生之門。文行伏一世。養菴娶全州柳氏觀察使永立之女。有子曰鳴吉。154_377c是卽吾祖考也。字子謙。號遲川。以萬曆丙戌八月廿五日降。少從白沙,玄軒兩先生學。與趙浦渚,張谿谷,李延陽爲道義交。世稱四友。年二十。中司馬兩試。魁其一。仍擢文科。聲譽藉甚。旣而時事大變。屈迹郞潛。仁祖反正。贊中興密策。首佐銓曹。陞左右侍郞。柄用旣專。不歷試。錄元功演食完城。以副學。論毓慶喪服宜三年。建別廟。重忤廷議。間爲大憲。貴戚憚之。出按畿甸。甿庶歌之。歷刑兵戶三曹參判,議政府右參贊。又拜副學。以宗伯兼藝文提學。進長天官。兼兩館大提學,體察副使。秉銓主文者凡四載。以恢公杜倖154_377d崇雅黜浮爲己任。又自度支本兵京兆。再入天官。時淸兵東猘。仁祖將幸江都。先送廟社公族。駕到崇禮門。虜騎已迫。公單騎馳赴虜陣。緩其鋒。車駕入南漢。虜遂進薄。公入城扈蹕。殫心效勩。及江都陷。遂有城下之盟。俄膺大拜。定傾弘多。始丁卯之亂。公主和議。群謗大起。至是又持前說。得以紓禍。顧訾謷者棼然未已。公前後實封數萬言。極論經權。請上剛大爲心。以爲恢復之圖。戊寅。陞拜領相。時淸人徵師。將犯天朝。公以爲圍城媾和。宗社計也。今日助兵。國可亡。義不可從。遂不許。大致嘖言。公馳往請154_378a死。淸主釋不問。仁祖寢疾。宮中有巫蠱。上疑大長公主家。令公按治。公不從。上怒甚。特差節使赴瀋。無何。上旨極嚴。公在龍灣上箚。引江充李泌事。仍辭相職。又以微事坐罷。卜居城東。數年家食。壬午。復入相府。尋以北嘖。有瀋陽之役。先是公具一咨。抵明朝陳都督。歷陳小邦心事。慮未達。更具咨奏。付僧人獨步。送于洪軍門承疇。往復數次。事頗祕。淸人蓄疑憑怒。遣將覈治之。公馳傳至鳳城。淸將詰問誰主此事者。答曰。吾是國大臣。吾實主之。他無與知者。未幾。以公入瀋。幽諸北館。明年。移繫南館。粤四年。公154_378b轍始東。疏論姜庶人之獄。引易衆允悔亡。寓居湖西之鎭川。結茅溪上。爲終焉計。承召命上來。遽嬰奇疾。以丁亥五月十七日告終。享年六十有二。自疾至喪。醫問賵襚。恩禮優異。其八月十九日。葬于淸州治北大栗山坐壬之原。元配張氏。右贊成玉城府院君晩之女。無子。以公弟參判公惠吉之次子後亮爲後。官漢城左尹。襲封完陵。繼室許氏。陽川伯宣文之後。縣令嶙之女。擧二男。曰後尙。弘文館應敎。次幼亡。側出一女歸僉知具鐄。公立後而有已出。仁祖問後事。請以胡安國爲法。左尹娶觀察使安獻徵女。生三男154_378c二女。男錫晉振威縣令。次卽錫鼎。次錫恒弘文館修撰。女適進士尹濟明,學生申轂。應敎娶咸陵府院君李澥女。無子。以錫鼎爲子。弗類得於所傳聞。公之未弱冠。李白沙語人曰。崔某學問見處甚高。非老夫所可窺。初釋褐。申玄軒在銀臺。謂其僚曰。子謙雖抱羸病。精神粹鍊。如精金美玉。他日必爲名世之器。張谿谷字而稱曰。赤心殉國。不避死生。子謙眞社稷臣。又曰。子謙之南漢主和。以箕子爲心者也。又以房謀自居。而杜斷歸公云。李白江嘗曰。屈子之忠。忠而過者也。完相之忠。亦過於忠者也。李澤堂評公文曰。遲相154_378d文章。筆頭有舌。可與陸宣公奏議相上下。趙浦渚祭文曰。兄之敏銳之才。深妙之文。絶出等夷及至臨亂見危。勇於自當。辭直理正。不攝不挫。雖叔孫昭子見執於晉。何以過之。李延陽論中興人物。必以公爲稱首曰。完城是問氣。又曰。完城事業。最其大者。協贊匡復。偉績也。極論邦禮。卓識也。單騎赴敵。大勇也。冒謗言和。至忠也。力拒徵兵義也。身幽燕獄節也。不染朋比公也。處人骨肉仁也。嗚呼。先祖立朝本末。昭載國乘。弗類蒙魯甚。曷足以闡揚先德。敢用書師友諸公之言。附于誌刻而無其辭。後之篤論者曰。禮論昭揭154_379a大倫。庶幾合聖人之經。和議圖存宗國。庶幾合聖人之權。人或黜心而循迹。舍實而求名。百世之下。當有知公者。公沒之三十年後。太常議諡法。勤學好問曰文。危身奉上曰忠。大學士西河李公敏敍實撰其諡狀云。歲庚午五月日。孫男嘉善大夫前吏曹參判錫鼎謹誌。

 
明谷集卷之二十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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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墓誌
伯氏工曹正郞府君墓誌 a_154_382a


公諱錫晉。字汝明。一字汝順。本全州。始祖曰純爵。高麗神虎衛上將軍。世系詳在文忠公誌文。曾祖諱起南。文科通政大夫永興府使。贈領議政。祖諱鳴吉。號遲川。佐仁祖中興。典文衡。至領議政完城府院君。諡文忠公。父曰後亮。通政淸風府使。母曰安氏。觀察使獻徵之女。以庚辰六月二十一日生。少有文才。壬寅成進士。累鳴場屋。而竟詘一第。晩筮蔭仕。至工曹正郞。外典堤川,振威二邑。庚午四月十日卒。享年五十一。其明月甲寅。葬于楊州天磨山先塋之下。公配154_382b任氏。校理翰伯之女。有四男。昌憲,昌演,昌敏,昌億。憲生員早沒。娶郡守洪萬煕女。生一男一女。演娶別檢元夢翼女。生一女。敏娶參奉申琢女。生一男。並幼。公天性剛方易直。裏襮如一。體羸甚。言訥訥。如不出口。而臨事。介然有執守。居官。勤謹廉明。竭心奉公。所在稱治。堤民爲之立碑。爲詩多警絶。疾未革。遺令薄葬儉祭。至死。神志不亂。無甚悲之色。惟以不克終養爲恨。衰門薄祜。樑木其壞。嗚呼痛哉。將葬。其弟前參判錫鼎泣而誌。

 
 明谷集卷之二十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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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墓誌
宜人全州崔氏墓誌 a_154_388a


宜寧南子長有賢配。曰完山崔氏。始祖諱純爵。與吾同譜。其十代祖平度公有慶。九代祖敬節公士康。亦吾祖世也。高祖諱巏。判決事。曾祖男秀。祖瑾。考俊明。武科僉節制使。以就學飭行聞。妣加平李氏。兵曹參判長生之玄孫。考曰惟信。宜人生稟端莊。事舅姑事君子。咸得其宜。治家有法。使君子忘其貧。以庚午三月十三日卒。得年僅四十有七。葬于楊州水落山西154_388b麓。從南氏先兆也。擧三男。鶴增,鶴徵,鶴應。子長屬余爲誌曰。吾妻賢而年不永。不及見吾仕。可悲也。記子長冠鶴增也。余忝賓席。飮酒而旨。識其有賢助。其喪。蓋詩以哀之。又吾宗也。何可辭。子長名啓夏。藥泉南先生之族弟也。有文行。屢詘公車。爲內贍主簿。與余善。

 
明谷集卷之二十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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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墓誌
七代祖秉節校尉宣傳官府君墓誌 a_154_401d


完山之崔。肇自純爵。神虎上將。世閥赫奕。選部得枰。文貞諱宰。孝謹剛直。名載麗史。平度有慶。參贊議政。旌孝奬廉。自號竹亭。敬節士康。位躋贊成。四世傳序。遹駿厥聲。是生承宗。司饔僉正。娶于驪興。父曰閔犇。寔公考妣。內外名聞。公諱孝恭。字曰令德。薦授宣傳。武階秉節。嗟有材力。夭圽無年。配全義李。太師其先。154_402a孝靖貞幹。純行棹楔。父曰一仝。司憲監察。公葬果川。漢江之南。夫人異堋。楊州檜巖。長子奉孫。無嗣不官。其季命孫。從仕郞銜。婦翁謂誰。鈴川尹磻。一男曰嶪。凌室別提。累贈吏書。其配申氏。仲舟之後。厥考承澡。男長秀英。筮仕司饔。次曰秀俊。贈官貳公。女李元輔。金昱其壻。饔參二胤。生員起祖。無子有女。起門典簿。門承宗祀。獻吉爲後。贊成二男。長曰起南。歷敭淸顯。中舍侍講。卒官永興。貤爵上相。其次起源。陞秩僉樞。永興四子。來吉判書。鳴吉相國。靖社元功。是號遲川。卒諡文忠。惠吉亞銓。追贈吏判。晩吉樞經。女韓必遠。折衝正吉。是其側產。僉樞二男。廷吉獻吉。女尹得說。文科按察。曰鳳與誼。二人庶出。雲來以下。只錄顯官。後胤文學。龍榜魁元。後亮左尹。襲封完陵。後尙文譜。翰林臺弘。錫鼎不肖。忝登台鉉。錫恒崇政。連長兩銓。昌大銓弘。副學大成。大家餘業。累世不振。仁必有後。天道詘信。不食之報。可徵嗣人。來孫後寔。祔葬先山。厥考樞經。移厝近阡。體魄不孤。神理則安。燔土埋辭。以昭永年。


明谷集卷之二十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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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墓誌
西洲先生崔公墓誌銘 a_154_415d


完山之崔。東方大姓。自高麗神虎衛上將軍純爵始者爲吾譜。有諱得枰。選部典書。生諱宰。藝文提學完山君。諡文貞。生諱有慶。參贊諡平度。入我朝。生諱士康。贊成兼吏曹判書。諡敬節。世著名德。至七代孫議政遲川公鳴吉。愈大顯。卽錫鼎先祖考也。遲川有從弟。曰西洲先生。有文章。倜儻士也。先生諱廷吉。字子相。曾祖諱嶪。別提贈吏曹判書。祖諱秀俊。贈議政府左贊成。考諱起源。僉知中樞府事。妣德水李氏。領中樞諡貞正邊之後。通德郞大基女也。以萬曆戊申十154_416a一月十七日生公。幼穎異。甫齔能屬文。往往驚人。旣長。器宇魁爽。詞藻夙詣。詩格尤高古。一世鉅公亟推奬。自十六歲。連占大小解額。輒居高等。至覆試。恒不利。以違格見黜者亦多。戊寅庭試。公作爲第一。將拆號。考官覺有一誤字。欲置之卑等。潛谷金相公曰。此文近世所罕。豈可以微眚而置之下乎。或以爲無寧拔去。俾大魁他日。竟拔之。潛谷袖其卷來唁。公恬然不以爲意。志操淸介。於芬華利名。泊如也。遲川公惜其才。擬入於薦剡。公爲書力止。辭意峻潔。士友推以爲不可及。年四十餘。不復應擧。就仁川鄕居。却掃一154_416b室。栽花灌圃。嘯詠其間以自娛。接物以誠。持論以正。鄕䣊敬服。有疑就公以決。有過畏公之知。丁卯虜釁以來。公意必再逞。預具一大舟。以備臨急之用。人或謂之迂。丙子。淸兵傳國都。士女奔波。獨公盡室浮海。親隣賴以得全。人服其先見。尤以奬誘後生爲任。頗有成就。先君侍講亦師事之。公事親有至性。皇考善病。躬操湯劑。未嘗少懈。及喪致其哀。幾滅性。丁母憂。年已踰艾。執禮一如前喪。性剛嚴。治家整肅。訓子女有法。至大耋。神力猶康健。晨必盥纚。端坐看書。或哦詩以遣興。此可見賾養保嗇之力也。以丁卯三月五154_416c日卒。壽八十。配陽川許氏。宗廟令嶙之女。婦道甚備。先公卒。遲川公後夫人。卽其妹也。初葬仁川。遷窆于砥平天谷山向丙原。有一男四女。男後徵前縣監。女適李廈,權尙友,郡守鄭道行,李常榮。側室男後述,後膺。女曹夏成,閔致良,金萬徵。縣監娶經歷李垈女。生一男七女。男錫泰進士。女適金益慶,李喜慶參軍,李衡秀承文博士,李太元,林象奎,李嵩坤,李奎漢。李廈繼子邦緯。權尙友子炅,熻,熀持平。女趙聖佐妻。有節行。鄭道行子楷持平。梓,檀並進士。女適沈尙龜進士,兪弘基,李箕獻。李常榮子漢彥夭。繼子曰漢章。女154_416d適韓命昌,崔衡基,洪夏度,金迬,鄭曄,成宗漢。內外孫曾近百人。嗚呼。公出名門。抱奇才。當中興盛際。使之並群從鶱颺。其英聲茂實。必有可觀者。而竟阨於一第。豈非命哉。然世之人。不以科名顯。率多屈意祿仕。爲身家之計。而公志皭然不累。斯非其難歟。錫鼎幼少時。先君家興仁門外。有溪山林木之趣。公與之隣比。以詩酒相樂。小子操杖陪歡。如是者殆數十年。人事貿遷。余髮已紛白矣。謹抆涕而爲銘曰。
德之充志之崇。文則富才則茂。畀旣碩命胡局。惟壽之長。惟後之昌。斯報之未艾。斯理之未昧。龍門兮畏154_417a佳。天谷兮盤回。我銘而詩之。永遠是詒。


 
谷集卷之二十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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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墓表
從祖中樞經歷府君墓表 a_154_431a


公諱敬吉。字子一。後改晩吉。系完山。始祖曰純爵。高麗神虎衛上將軍。考諱起南。永興府使。贈領議政。妣全州柳氏。觀察使永立女。以萬曆丙申生。享年五十。仁祖反正。仲氏遲川公策元功。公亦與聞密策。將勘勳籍。以履滿爲戒而辭焉。人皆多之。直拜六品。歷監察,工戶正郞等職。性簡亢潔廉。少許可。不妄與人交。篤於友睦。庚辰。以非皐謫鏡城。壬午放還。拜中樞,經歷,惠局郞。未幾以疾圽。公雖不以科第進。時望殊重。謂將格外登擢。竟厄於母望。壽亦不永。庸非命歟。以154_431b從勳贈左承旨。配豐壤趙氏。監役珉女。仁厚有婦德。性勤紡績。生與公同年。後公四年而終。男後寔郡守。女睦宗儒,李若,鄭匡周。郡守公男錫弼僉正。錫九奉事。錫文早廢科。篤志問學。錫圭進士。女李誧,李基明,李寅相。睦繼子重光。李男萬夏,萬選。鄭無子。公葬果川七世祖墓近麓。夫人祔焉。從孫領議政錫鼎述。

 
明谷集卷之二十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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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墓表
先祖贈贊成公表陰 a_154_437a


我崔大姓籍完山。鼻祖純爵上將軍。五世選部諱得枰。六世諱宰諡文貞。有慶平度號竹亭。士康敬節官贊成。麗季國初四世顯。廉孝忠勞著史傳。高祖僉正諱承宗。曾祖宣傳諱孝恭。祖諱命孫階從仕。考嶪別提贈冢宰。妣申高靈承澡女。生公秀俊字彥甫。生于154_437b甲午歿癸酉。隱德不官年不耇。梧里李相稱公云。莊重謹厚寡笑言。後以孫貴得追榮。累贈崇政左贊成。夫人姓南宜寧籍。遠祖曰在考尙質。公窆高陽大慈原。配葬楊州板谷村。男長起南負重望。歷敭淸顯贈領相。是生四子長來吉。文科判書參勳列。鳴吉元勳位上公。德業文章諡文忠。惠吉亞銓贈上卿。晩言不第官樞經。女適參判韓必遠。正吉折衝是側產。男季起源壽陞秩。是生廷吉及獻吉。女適監司尹得說。鳳吉誼吉俱庶出。文忠撰誌埋墓側。玆於表陰述槪略。玄孫原任領議政錫鼎謹識。

 
明谷集卷之二十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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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行狀
先祖領議政完城府院君文忠公行狀 a_154_450a


先祖諱鳴吉。字子謙。姓崔氏。系出全州。始號滄浪。後改號遲川云。始祖諱純爵。高麗檢校神虎衛上將軍。六世而有諱得枰。以選部典書致仕。廉直自守。人敬憚之。典書生諱宰。進賢館提學重大匡完山君。世濟其美。卒諡文貞。名蹟具載牧隱李公所撰墓誌及高麗史列傳。文貞公有三子皆貴。其季曰有慶。事我太祖。參贊議政府事。卒諡平度。事親有至行。旌其門。154_450b後選淸白吏。平度公有子六人。皆有名位。其第四曰士康。世宗朝。爲議政府右贊成。兼判吏曹事。卒諡敬節。生諱承宗。以任子仕。官止司饔院僉正。生諱孝恭。以蔭薦補宣傳官。早歿。生諱命孫。從仕郞。是爲公之高祖。曾祖諱嶪。氷庫別提。累贈資憲大夫吏曹判書。祖諱秀俊。養德不仕。累贈崇政大夫議政府左贊成。考諱起南。字興叔。號晩翁。早游牛溪先生之門。文行伏一時。晩捷文科。歷敭華顯。旣而爲群小所擠。官止通政大夫永興府使。累贈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領議政。谿谷張公實銘其神道。三代追爵。以公154_450c貴也。晩翁公娶全州柳氏。咸鏡道觀察使諱永立之女。有子四人。其達者三人。公於倫爲第二。公生於萬曆十四年丙戌八月丁亥。幼而簡嚴不戲。靜重如成人。八歲始受書。一日自言今日爲曾子。明日爲顏子。又明日爲孔子。晩翁公嘆奇之。遂授以論語。自此文義日進。雖古文簡奧難解者。輒辨析無扞格。先生長者亟稱之嘖嘖不容口。十餘歲。已能操觚著文章。而尤長於詞賦。年十四。受朱子書于家庭。兀兀晨夕講誦不輟。詞學驟長。如水之沛然。旣成童。自鄕莊來游館學。其譽藉甚。流輩以一識面爲榮。甲辰。貫增廣初試三場。遂占其明年司馬生員第一人。而進士亦中二等第三人。仍擢文科。唱第之日。玄軒申相公在銀臺。謂院僚曰。崔某雖抱羸疾。精神粹鍊。如精金美玉。他日爲世大用者。必此人也。選隷承文院。己酉。被薦史局。病不應講。序陞成均館典籍。庚戌。除司憲府監察,禮曹佐郞。皆病不拜。辛亥。轉爲工曹佐郞。改佐兵曹。壬子。陞正郞。癸丑。又入兵曹。時賊臣爾瞻輩方煽揚讎母之論。會華使在館。恐事泄被華使知。以禁軍環館垣。使內外不得通。公以騎省郞在館外。有一士人醉過館下。偶與館人相識者相勞苦。守卒執以154_451a告。公釋之。光海聞而大怒。逮繫之。事且不測。其士人曰。我若逃隱。禍必及公。吾何忍負活我之恩乎。遂自見。以故事已。猶被削黜。丙辰。丁大夫人憂。與兄弟守喪于加平莊舍。制盡之明年。又遭外艱。六年持服。以毀得疾。幾至滅性。憂旣吉。罪名亦解。顧不樂近跡城市。棲遑郊甸之間。時主昏政亂。民墜塗炭。綱常泯絶。旣夷延興。爆殺永昌。至戊午。群兇遂慫惥之。脅百僚廷請。廢仁穆大妃。絀去尊號。錮處西宮。危辱備至。而光海意猶不厭。必欲加以不測。賊臣筠等承其指。欲因儺夕作難。民間或傳大妃已遇害。聞者莫不154_451b扼腕流涕。公見時事至此。憂憤忼慨。仰屋而已。申平城景禛新拜安州牧。來見公。公勞之。平城曰。我意在扶護西宮。不欲遠赴邊塞。蓋平城先與金昇平諸公。密有撥亂之志。故其語云然。亡何。公訪李延平。慨然語及時事。遂定中興大策。謨謀區畫之際。公之所斷者甚多焉。或勸公往謁仁祖潛邸。公曰。他日策名臣事之地。義不當私謁。遂不往。識者韙之。時同事諸人。散在中外。引日持久。幾至渙散。公以爲大計不可遷就。卽自鄕居入城。自卜反正師期。於是與昇平延平諸公。奉仁祖大王。由彰義門以入。延大妃154_451c于西宮。進復位號。卽癸亥三月也。中興初政。拜吏曹佐郞。時天將往來。咨揭旁午。酬應頗患於窘速。太學士玄軒申公啓請公及浦渚趙公,谿谷張公。俾管其事。俄陞正郞。夏。特授通政階。拜吏曹參議。冬。錄勳一等。進爵嘉義。賜奮忠贊謨立紀明倫靖社功臣。封完城君。仍陞吏曹參判。兼備局有司堂上。公早負公輔之望。鼎革之初。首入銓曹。博采衆論。務恢公道。其所退黜。皆曩時點染之人。而所進用。皆宿望全節之士。除目每下。朝野爲之拭目改觀。甲子春。西帥适稱兵犯闕。仁祖狩于湖西。將出。命公爲摠督副使。赴154_451d都元帥玉城張公軍督戰。公間道馳往。宣諭聖旨。一軍莫不感勵。鞍之戰。公在元帥軍中。實多密贊云。初朝廷以西事爲憂。以适爲副元帥。出鎭寧邊。公憂其跋扈。與二三勳宰。欲先事而制。壞其機牙。適爲執政所沮。公策不得行。然朝廷預知賊情。有所賴焉。乘輿還都後。仍在亞銓。乙丑春。公上箚請變通官制。仍極論政化習俗之弊。君相以爲舊制未易猝改。公言不果行。已而辭遞。拜弘文館副提學。移拜司憲府大司憲。時王弟綾原大君殺人。公率群僚抗章論之。語甚截直。貴戚憚之。夏。拜副學。秋。上因災異。責154_452a已求助。公上箚條陳十二事。曰明心學謹辭令。嚴宮掖定大婚。親勳舊重相臣。器使人通庶孼。除免稅戒數遷。植公論崇儒學。皆指陳要務而切中時病。上嘉納焉。冬辭遞。已而還拜。仁祖之初卽位。追尊元宗爲定遠大院君。稱仁獻王后爲啓運宮。丙寅春。啓運宮薨。上命禮官定行三年喪。於是大臣三司合辭爭之。上遂下杖期之命。諸臣仍復力請降服不杖期。以綾原大君爲喪主。論議紛紜。公時在玉堂上箚。上陳降服之失禮。中論追崇之不可。末又請建別廟。箚凡萬餘言。略曰。三年之喪。自天子達於154_452b庶人。斯乃天地之常經也。然禮有隆殺。情有屈伸。考之於經。母之服應降者三。庶子爲父後。則爲所生妾母服緦。父在母喪及爲出母。服杖期是也。父之服應降者一。爲人後則爲本生服不杖期是也。儀禮斬衰條爲人後章下子夏傳曰。何以三年也。受重者必以尊服服之。何如而可爲之後。同宗則可爲之後。何如而可以爲人後。支子可也。不杖期條爲人後者爲其父母報章下子夏傳曰。何以期也。不貳斬也。何以不貳斬也。持重大宗者。降其小宗也。爲人後者孰後。後大宗也。曷爲後大宗。大宗者尊之統也。大宗者收族154_452c者也。不可以絶。故族人以支子後大宗。夫諸侯之別子爲祖。而別子之子祭別子者。謂之大宗。別子之庶子不得祭別子。而其子孫各立禰廟者。謂之小宗。然則曰大宗曰小宗者。乃兄弟分派之名。非父子之謂也。曰同宗曰族人者。乃三從以上之親。非祖孫之謂也。其或大宗無後。則取同宗支子以爲後。而其爲後者。不敢以本生父母爲父母。其服降同於伯叔父之服。斯所謂不貳斬也。斯所謂持重大宗者。降其小宗也。今之議者以親孫爲祖後者。擬之於族人之支子。後大宗之例。此臣之所未曉也。夫人有子則傳子。子154_452d死則傳孫。理之常也。不幸而無子。又無孫然後。不得已取同宗之支子以爲後。二者之相去。不啻千里。而論者強以同之何哉。且所謂不貳斬者。以其服斬於所後。故降期於所生。何則。不貳本也。非爲人後而降其父母。則是無一斬也。無一斬則無本也。豈其可乎。又曰。昔者晉蔣萬問范宣曰。適孫亡無後。次子之後。可得傳祖重否。宣曰。禮爲祖後者三年。不言適庶則通之耳。無後猶取繼。況見有孫而不承者耶。庶孫之異於適者。但父不爲之三年。祖不爲之周。而孫服父祖不得殊也。此條分明畫出今日事者也。又服制令154_453a曰。無適孫。則適孫同母弟。無同母弟。則衆長孫承重。詳此二條。則殿下乃承重者也。非出繼也。爲祖後也。非爲人後也。玆豈非灼然明甚者乎。大抵無論適孫庶孫。其爲受國於祖則一也。無論當立不當立。其爲君之父母則一也。寧有適孫承重則得以父其父。而庶孫承重則不得父其父者乎。當初禮官獻議之日。旣以稱考稱子爲請。而朝議皆以爲可。則是已知不可以爲人後論也。至於今日。反引爲人後之說。以爲降服立喪主之證。是何前後之矛盾也。又曰。喪服小記曰。庶子不以杖卽位。今綾原爲喪主。而厭於154_453b殿下。不得以杖卽位。則是殿下以庶子自處也。殿下與綾原。俱以杖卽位。則是喪有二孤也。殿下旣父大院君。而使綾原主祭。則是又以支子自處。而以宗子待綾原也。且殿下必將時有親祭之擧。其祝辭。將稱以孝子乎。將稱以介子乎。欲稱孝子則綾原已稱之矣。欲稱介子則天地易位矣。不稱孝不稱介。則又不成爲子矣。此將何以處之乎。禮曰。人道親親也。親親故尊祖。尊祖故敬宗。夫尊祖敬宗。何莫非親親之推。而議者反欲以尊祖廢親親何哉。又曰。堯授天下於舜。舜固有瞽瞍存焉。然舜不敢尊其父154_453c而君之者。天下者堯之天下。舜不得以私其父也。舜雖不得以私其父。而孝養之禮則有加焉。父其父而不敢君其父。此舜之所以爲孝也。所謂父其父而不敢君其父者何也。生則養之以父。歿則喪之以父。祭之以父。而不敢以帝王之號。加於其父之謂也。公羊云父母子之天也。子不得爵命父母。此言子之於父母。不敢加之以爵者。乃所以尊之至也。宣祖大王於大院君。蓋嘗封之爲君矣。未嘗命之爲適嗣。則程子濮議所稱先朝之封。豈陛下之敢易。爵秩之命。豈陛下之敢加云者。正謂今日道也。追崇之不可。固154_453d已章章明矣。禮又云士大夫不得祔於諸侯註云。公子公孫之爲士爲大夫者。不得祔於先君之廟。夫宗廟者。祖宗之宗廟。非後王之所得私者也。今大院君。以殿下視之。則父母之尊也。以祖宗視之。則亦一諸王子耳。殿下之私尊。豈得容於其間乎。又曰。或曰旣不得追崇入廟。則諸侯之祭。將安所施乎。曰。別立廟可也。於古有之乎。曰。宣光已行之矣。周公亦行之矣。周禮。大司樂奏夷則。歌小呂。舞大濩。以享先妃。先妃者姜嫄也。姜嫄感神靈而生后稷。是周之先母也。周立廟。以后稷爲始祖。故姜嫄無所配。特立154_454a廟而祭之。謂之閟宮。夫豈非禮而周公爲之。夫不可入廟。而又不可以無祭。則此別廟之所由設也。或曰。別廟則固可矣。其題主及祝辭。當何以稱之乎。此係變禮。未可輕議。然一以意推之。當稱皇考定遠大君。而其祝辭。稱孝子國王。且其塚墓。稱陵則上逼祖宗。稱墓則下同士庶。宜倣戾園濮園故事。稱之以園。而優置守塚人。俾無未盡之悔可矣。或曰。稱考而不加皇字。稱子而不加孝字。已爲朝廷定論。今加二字何也。曰。程子濮議言祭告。當曰姪嗣皇帝某敢昭告于皇伯父濮國大王云。今此所論。非臣之言。乃程子之言也。況諸侯之祭。殿下必自主然後。方可行之。則孝子之稱。在所不已者也。蓋公前此引父爲士子爲天子諸侯。葬以士祭以天子諸侯。及聖庶奪適等語。曾已陳箚。至是推源極論。畢伸己見。因此重忤朝議。臺臣劾公請罷職。上不許。公遂連章辭遞。丁卯春。金人入寇。連陷義,定,安,三城。列鎭皆奔潰。朝野洶駴。虜到平壤。以書求和。公在賓廳。言於諸宰曰。國小力弱。虜勢張甚。不如巽辭以緩之。李延平深然之。大臣諸宰。皆心知其可而未能決。時都體察使李元翼,左議政申欽。將陪世子南下。大臣要二公問計。154_454c二公皆以公言爲可。於是令大司成張維爲書答之。及上之幸江都也。道聞虜使爲和事且至。諸宰會議其進止。公謂兵交。使在其間。不必遽示斥絶。且宜聽其所言而處之。於是遂接虜使於鎭海樓。繼而虜降將姜弘立偕虜使劉海持書來言。自此不復踏平山以東。朝廷以爲虜前後遣使。皆以講和爲言。而蠶食深入。已薄畿甸。是謾我也。時劉海請見。朝議又難之。公陳於榻前曰。觀虜求和。似出實情。爲宗社大計。詘意一見。恐無所妨。仁祖遂召見劉海。於是和議始定。時賊屯去行朝堇百餘里。而輿衛單弱。上下154_454d危懼。雖斥和者。內實幸和議之成。而特畏浮謗。莫敢言。唯公獨冒群毀。無所顧避。竟以是彈章重發。律以竄黜。諸宰中言和者。以公爲戒。稍稍變其初論者。久而爭執。只命推考。公不安於朝。屛居江上。未幾除刑曹參判。移亞西銓。召命屢下。公上箚辭職。上答曰。自古擔當國事之人。得免人謗者幾希。卿勿嘆䘏。速出行公。公仍請告。命政院還給辭單。公又箚辭。溫批不許。秋。改葬興慶園。是爲章陵。靈轝自楊州將過都城。廷臣以爲私親之喪。不可穿都取路。議欲發民剗治東城外峻岅以行轝。公謂大院君雖未踐位。154_455a乃君之父也。避都城從間路。於理有違。且鑿山開路。應費數萬役丁。民力不已殫乎。遂上箚爭之。大臣亦悟其非。乃止。啓運宮初期已過。朝臣屢請卽吉。上不許。以素服終三年。而至如稱墓以園。祭以諸侯等事。皆用公丙寅箚中意。至戊辰旣禫之後。啓運宮神主。將合祔於私廟。公上箚以伸別建禰廟之論。請於合祔之日。削去綾原傍題。別建一廟。以奉禰祭。奏假則別制樂章。祼獻則例命廷臣。而四時薦享。勿與宗廟同日。以示差別之意。箚入。被玉堂之斥。公又上箚逐條論辨。仍乞罷免。不許。公以蹤跡臲卼。154_455b求補外。拜京畿觀察使。畿邑規制。頗頹沿襲已久。公損益時宜。條其科目。使之遵行。列邑便之。津田盡爲權貴家所占。津人失利。以此舟楫朽敗。行旅溺死者相踵。前公巡按者。皆畏憚莫敢矯。公狀聞。悉還其舊。故事道主生日。州郡備送饌需。公曰。此亦出於民。並却之。訪詢民瘼。措置有方。而尤眷眷賑飢。畿民勒碑頌德。久而追思。己巳。參判戶兵二曹。時朝臣前後輩持論緩急不同。輾轉相激。且有蜚語。左議政金瑬指少年名流五六人爲朋黨。以老西少西之說。白于上。上震怒。貶逐朴炡,兪伯曾,羅萬甲三學士于外。吏曹判書張維。亦以救護萬甲。特除羅州牧。公見朝論橫潰。心甚憂之。遂將前後輩睽阻曲折。上箚備陳。未幾。三學士並蒙恩召。張谿谷亦以刑曹判書徵還。人言公之箚。語懇意到而具載實跡。故能格回君心云。時諸道軍兵。徒擁虛簿。乙丑春。朝家欲申明軍籍。以充闕額。公與李延平相議曰。籍軍雖古制。當民生癉瘁之日。不可遽議。不如先行號牌。丁壯中有產業者充軍額。無產業者稱餘丁。歲稅綿布一匹。以補軍用。兩班中健者充武學。弱者稱保率。參酌處置。務得其當。則不待籍軍而軍額自足矣。於是定行號牌法。154_455d命公爲堂上。管其事。條法井井。行之一年。民爭趨令。後因丁卯虜警遂罷。號牌旣罷。仍行籍軍之擧。公實管之。至是事完。例陞資憲。庚午。拜議政府右參贊。椵島主將陳繼盛爲其下劉興治所殺。朝廷欲興師致討。公條六事。箚陳其不可。辛未正月。上特召靖社元勳諸宰。引見於春暉堂。東宮兩大君分侍左右。諸臣以次伏。上親擧觴以侑。而命用御盞行酒。聞公新得男子。爲致喜意。從容竟夕。搢紳傳以爲榮。夏。仁祖問追崇當否於大臣。大臣皆力爭不可。上欲奏聞天子而請之。政院及兩司爭之。二品以154_456a上。會賓廳陳啓以爭。輒下嚴敎。五月。特旨移授公副學。公三上箚辭職。不許。公又上箚乞免。仍陳朝廷議禮之失。且申論別廟之說。略曰。今玆加隆之擧。實出於聖上尊親之至情。而禮無明文。事涉義起。廷議未同。奏請居先。揆諸事體。殊未妥當。朝廷之不敢承順固也。第廷臣之意。蓋欲殿下以爲人後自處。而大院君之主。使綾原傍題而主其祭也。爲人後則不可稱考於所生。旣已稱考則不可謂之爲人後。稱考而使其弟主祭。於禮未有所據。此臣之所疑者一也。大院君之主。只書考字而不書傍題。啓運宮154_456b之主。書以顯妣而綾原爲傍題。傍題而可。則大院何爲而不書。傍題而不可。則啓運之獨書何義。此臣之所疑者二也。禮諸侯五廟。太祖及高祖以下四親是也。世室之外。親盡則遷。今大院君已稱考。故宣廟爲祖。明廟爲曾祖。仁廟爲旁親。故稱伯曾祖而不在世數。中廟爲高祖。成廟已爲五代祖。而又稱高祖。是於一廟之中。而有兩高祖焉。此臣之所疑者三也。又曰。殿下之事。與宣光自別。而乃以稱考之神主。降置閭閻而令支子奉祀。與稱叔之德興。少無差別。其於情禮。果何如也。議禮以來。于154_456c今九年。老師宿儒。旁搜廣引。而皆非今日的證。獨禮記葬以士祭以諸侯一章。最爲襯着。臣之從前所執。只此數句話耳。近見賓廳啓辭。但就此一章。拈出葬以士一款。以爲爭執之地。而至於祭以諸侯一款。則全不理會。是於聖人之訓。得其半而失其半也。又曰。別廟之制。其來已久。如周之姜嫄廟。西漢之戾悼兩園。東漢之章陵四祠。皆是也。李唐之世。只以一后配廟。而其餘繼后則祭於別廟。武昭王爲唐始祖。故別爲立廟。未聞以二廟爲譏者也。春秋之義。父不祭於支庶之宅。國朝有順懷廟。夫國君之嗣。猶不可祭154_456d於私室。況於君之父母而降祭於支庶之家。以犯春秋之義乎。又曰。成廟以聖躬觀之。則雖已五代。以宗廟觀之。則恰成四代。親盡則遷。禮之常也。變以從厚。事之權也。但非高祖而強稱高祖。則不幾於誣祖先乎。更其屬號。仍列昭穆。別爲祝辭。明告厥由。然後陟降之靈。始安於芬苾之享矣。上答曰。今之廷臣皆曰識禮。而平生讀書。以儒自處者。不知父母之不可無。朋友在喪。則無論親疏。皆往一哭。而啓運宮之喪。百官不爲會哭。君上成服於內。而臣下着吉於外。金長生稱叔之語。至今猶爲杜漸之訃。若此154_457a不已。則必至於臣不臣而子不子矣。彼昏塞好勝之徒。終無改悟之理。故欲爲奏聞天朝。以定是非。而朝廷以違經之言無據之說。逐日張皇。自以爲擧國公論。亦甚異哉。卿之疏中所謂旣已稱考。則不可謂之爲人後。稱考而使其弟主祭。於禮未有所據。此亦不過一時義起而定之者耳。義起而從厚。猶爲可疑。義起而從薄。豈無未安。一廟中兩高祖。亦爲不可等語。皆有所見。然彼務勝護短之輩。必不見此而回心也。且禮記中葬以士一款。每每拈出。以爲爭執之地。而祭祀一款。全不理會。箚中所謂得其半失其半。是154_457b也。因余不學無識。見侮於臣僚。非一非再。良可嘆也。卿之固辭。殊甚過當。速出行公。公上箚論批語有欠和平。兼陳不敢出謝意。壬申。拜禮曹判書。兼藝文館提學。仁祖下敎曰。聖人之孝。以尊親爲大。人君爲治。以孝敬爲先。考廟不可久在陋巷。禰位不可長作空室。事關天理綱常。令禮官從速議定。公詣闕回啓曰。今日之禮。經傳無可證。史籍無可據。請倣光武故事。建別廟。以從祭以諸侯之禮。上下嚴敎責之。大臣三司爭執閱月。而上竟以追崇之意。遣使奏聞。請頒誥命。於是追尊定遠大院君。爲元宗大王。154_457c啓運宮爲仁獻王后。公以大宗伯。兼追崇都監堂上。例加正憲。冬。拜吏曹判書。兼內局提調。癸酉。進爵崇政。兩館大提學缺。僉擧歸公。又兼體察副使。甲戌。仍在吏曹。公旣秉銓衡。以進賢才退不肖。破朋黨恢公道爲己任。塞奔競之路。杜僥倖之門。門無私謁。請托不行。公以爲爲國之要。在於安民。安民之本。係於守宰。預記治績著聞者。遇劇邑有缺。輒以注擬。且曰蔭官初筮仕。官雖微。他日宰百里陞郞署者。皆由此發軔。尤致愼簡。其後出爲良吏者甚多。常具一冊。子置諸几案。毋論識與不識。苟聞其有才。輒疏其名154_457d於中。次第調用。守令新授者。署經兩司後之任。乃故事也。雖曾已歷典州郡。每當新拜。輒復署經。公曰。一署足矣。遂入啓改其法。只署初授。時西北人士不許淸顯。其來蓋久。公以爲天之降材。無間彼此。用舍寧以地拘乎。於是始通淸選。乙亥春。遞吏判。夏。拜戶曹判書。冬。仁烈王后薨。丙子春。公以國葬都監堂上。胥原于畿內諸山。路中疾甚。辭遞度支及籌司之任。夏。移長兵部。病未行公。秋。拜漢城府判尹。是年春。虜遣使于我。朝廷聞其已僭號。絶和甚峻。廟堂不能鎭遏。不受虜書。接遇甚薄。虜使怒徑歸。都下兒童。爭以154_458a瓦礫歐之。公聞之曰。東土生靈。且苦兵矣。遂陳于榻前曰。虜以不受書爲釁。徑自還去。此乃渝盟之計也。兵革之端。可以灼見。今日登對。蓋欲定國家大計也。仍請預講戰守之策。至秋。廟堂議欲馳一介使。以覘虜情。臺諫論其不可。爭執浹月。竟不果發。公於上前備白不可不速宜送使狀。且曰。言官氣節。誠可尙矣。而我國之人。不解戎機。當丁卯駕幸江都也。三司以夜擊一事。露諸啓辭。誠可一笑。朝家擧措。節節如此。賊若猝然傳都。則將何以爲計。臣中夜思之。直欲痛哭。今日之事。須與腹心大臣相議。雖承旨內官。154_458b亦不當聞。反復論奏之際。臺諫以當三司爭執之日。不顧公論爲非。公曰。苟有所懷。君父之前。安敢不盡。臺諫又以與三司抗爭斥之。公遂趨出。朝廷將送別使于北。而不齎國書。報以口語。公上箚曰。虜旣跨據大漠。無所受制。肆然稱帝。誰復禁止。而必欲藉口於我國者。其心或難知。我若只以口語答之。則事跡晻昧。無可證據。臣之愚意。例答之外。別爲一書。備陳僞號之不可僭。臣節之不可易。以明大義而存國體。仍將虜書及我國所答。移咨督府。轉奏皇朝。一面下諭八方。訓飭兵馬。以待其變。使天下之人。曉然知154_458c朝廷處置之明白。然後可以折虜謀而壯士氣。書之史冊。無愧辭矣。時國事日急。而廷議日激。以戰以和。皆未決定。公又上箚曰。旣不決戰守之計。又不爲緩禍之謀。一朝虜騎長驅。不過體臣入守江都。帥臣退處正方。生靈魚肉。宗社播越。到此地頭。咎將誰任。臣之愚意。體臣帥臣。皆當開府於平安道。兵使亦宜入處於義州。約束諸將。有進無退。且移書瀋陽。備陳君臣大義。仍言秋信不送之由。一以探虜情形。一以觀彼所答。若別無他心。仍用兄弟之禮。則依胡氏所論姑守前約。內修政事。以爲後圖。務反石晉之前轍。154_458d如其不然。則固守龍灣。背城一戰。決安危於邊上。雖或計非萬全。猶愈於束手待亡。捨此不圖。一向媕婀。欲言進戰。不無疑懼之念。欲言羈縻。又恐謗議之來。彼此不及。進退無據。江氷將合。禍迫目前。所謂待汝議論定時。我已渡江者。不幸而近之矣。臺諫擧公筵中說話。彈章重發。上答曰。莫如密議云者。恐輕者妄泄大事也。若如爾等所論。則良平皆爲萬古罪人矣。此人以元勳重臣。不求虛名。專務實事。忠誠計慮。人所莫及。爾等因此數語。欲爲搆陷。其計可謂疏矣。公上箚歷陳忱悃。仍論時事。略曰。今日攻臣之論。出154_459a於若干年少之口。而擧朝靡然。環立相視。終不敢明臣心事者。無他。一開口則相隨而入於和議科臼中故也。此見主和二字。爲臣一生身累。然於臣心。尙未覺今日和事之爲非。請反覆而明之。蓋石晉高祖之起兵也。桑維翰勸令稱子稱臣於契丹。借兵以取中國。出帝卽位。景延廣建議去臣稱孫。言於契丹曰。翁怒則來孫有十萬。橫磨劍以待之。桑維翰屢請遜辭以謝。出帝不聽。其後契丹之怒。囂然未已。中國疲弊。不能自存。始乃遣使請復稱臣。契丹不許。及三年。契丹入寇而晉遂亡。桑維翰之諫。近於智矣。而導主臣154_459b虜。以基中國之難。景延廣之言。近於正矣。而輕開虜釁。以致覆亡之禍。故朱子綱目。削其官而兩貶之。且先儒胡氏之論曰。卽事而言。延廣亡晉之罪。無可贖者。卽情而論。以晉父事契丹。中外人心。皆不能平。故慨然欲一洒之。而不思輕背信好。自生釁端。一朝之忿。亡其身以及其君。如使延廣姑守前約。內修政事。則不出數年。可以得志。夫以胡氏學術之正。尊中國攘夷狄。乃其一生事業。則追議得失於百年之後。有何一分顧藉。而乃以姑守前約等語。反覆抑揚。恕其心而罪其跡。若是者何哉。蓋以人臣謀國。不存遠慮。154_459c以致亡人之國。則其事雖正而罪不可逃也。曾在宣廟朝。天朝諸將。倦於用兵。始有講和之計。令我國奏請天朝。故臣成渾首陳可許之意。及全羅監司李廷馣繼發講和之言。將被重罪。渾與時相柳成龍獨憐其忠。約於上前同辭救解。渾曰。廷馣之言。乃以伏節死義爲心者也。宣祖大怒。自此攻渾之論益急。爲渾門生者。亦致疑於渾。渾以書往復自解曰。主於是非。則見理而不見物。主於利害。則見物而不見理。然在朝廷則或有是非利害合而爲一。處朝廷利害之所在。卽是非之所在也。又曰。秦檜在前。千154_459d載之下。孰不欲剚刃其腹。是以言涉於和。衆共棄之。雖然。制事者必察其時。論人者當原其情。不可律之以一切之法。又曰。朱子云旣不枉尺而直尋。又不膠柱而鼓瑟。若使天下道理只有上一句而已。則又安用更說下一句哉。又曰。與其講和而存。無寧守義而亡。此乃人臣守節之言。宗社存亡。異於匹夫之事。又曰。韓侘胄之伐金。可謂伸大義於天下。而先儒以幾危宗社罪之。張南軒以復讎爲事業。而以金不可伐爲言。凡以此者宗社爲重。而相時度力。爲時中之義耳。凡此數款語。豈非今日廷臣之所當深思者乎。成154_460a渾旣被謗而去。柳成龍仍持和議。成龍旣敗。李德馨又持前說。我國之至今保存者。雖出於皇朝拯濟之惠。而亦由於前項數臣不避謗言。竭忠擔當之力也。今日之事。以時勢言之。則旣無石晉兵力之強盛。又無壬辰天兵之可恃。以義理言之。則初無稱子稱臣之辱。又非祖宗難忘之讎。如使朱,胡兩賢及成渾,柳成龍,李德馨,李廷馣諸臣。復生於今日。則其是非得失之所在。不難定矣。議者皆曰。丁卯之和。固不害義理。至於今日。賊已僭號。不可更與之通使。此言似矣。而實未深思者也。使奴違丁卯兄弟之盟。而迫154_460b我以非禮。則於義決不可從矣。今旣不然。而仍用隣國之禮。則彼之僭號與否。非我所當問。何可以禮義責夷狄乎。臣之爲此羈縻之言者。非敢不顧是非。徒爲利害之說。以誤君父也。酌之以時勢。裁之以義理。證之以先儒之定論。參之以祖宗之往迹。如是則害於道理。如是則合於事宜。靡不爛熟思量。信其必然。嘗竊以爲國力方竭。虜兵尙強。姑守丁卯之約。以緩數年之禍。得以其間發政施仁。收拾民心。築城儲糧。益固邊備。斂兵不動。以觀彼釁。爲我國計無出此者。旣已素定於心。又以屢言於人。入陳於榻前。出154_460c爭於大臣。焦唇乾舌。不自知止。凡若是者。豈有他哉。悶宗國之將危。而不暇計一身之利害耳。朝廷之上。苟有惻隱之心者。宜若在所哀矜。而乃反怒目相視。攻擊如不及。亦獨何心哉。箚入。群議譁然攻之。十一月。復拜吏判。十二月。虜大擧入寇。直從大路長驅。而至日行數三百里。勢如驚風驟雨。十二日。賊兵渡江之報至。十四日。車駕將幸江都。令原任大臣陪廟社及嬪宮大君先行。日未午。大駕隨發。纔到崇禮門。虜騎已迫弘濟院。而以一枝兵遮陽川江邊。以截江都之路。上御南門樓下敎曰。事急矣。將奈何。154_460d大臣諸宰慌忙罔措。不知所對。公進曰。宗社存亡。在於呼吸之頃。事無可爲者。臣請以單騎馳往虜唓。見賊將問曰。十年和好。曾無釁隙。而無端動兵。潛師深入者。抑何意歟。虜若不復聽臣而殺臣。則臣當死馬蹄下。幸而接話。則相與酬酢之際。庶可少住其鋒。近京保障之地。繕城儲糧。形勢險固。莫如南漢。請上由水溝門疾馳入山城。以觀其變。上曰。若然則何幸如之。卿冒萬死投虎狼。以緩君父之急。誠可嘉嘆。公曰。李景稷慷慨多氣節。可與共爲辭命。請以爲副。上許之。公卽辭訣馳往。上輟與禁軍二十人154_461a以從。皆鳥散。從之者李公景稷及裨將一人。公到沙峴遇虜兵。遂駐馬。詰其渝盟動兵之端。故爲拖引說話。以至日昃。於是仁祖率世子及百官。遂入南漢。是日公與李景稷還都城。齎與虜問答。走人啓達於南漢。翌日將夕。回批不來。虜大怒以爲欺己。將欲害公。其中一人曰。和事未成。遽殺此人不可。卽進兵南漢。公與李景稷入城。上召見勞之。仍命公進前。執手謂公曰。卿之精忠。人所罕匹。一心奉公。終始不懈。向使如卿者多在於朝。今日國事。豈至於此乎。因出涕嗚咽。時兵不滿萬。備禦甚疏。守堞之士。不能成154_461b列。而虜騎籠山絡野。圍城數匝。縱兵四劫。軍情危懼。莫保朝夕。而攻和之議。喧然不已。虜言若許講和。當卽撤兵。大臣持兩端。媕婀不決。公曰。今日之策。唯有和與戰兩事。而欲戰則無兵可恃。言和則咸懷畏忌。奉君父。入一片孤城。將置宗社於何地。諸宰中是公言者甚多。而皆畏謗莫敢言。孤城受圍四十餘日。諸路勤王兵。望風犇潰。外無蚍蜉蟻子之援。而軍餉且盡。幷日給食。掘木根以爲薪。撤茨蓋以爲芻。天寒大雪。凍死者相繼。虜連以飛砲撲城。殆無完堞。北門之戰。我師殲焉。群心沮喪。形勢日以危急。自是始154_461c講和事。淸陰金公尙憲於廟堂。裂和書痛哭。公笑而拾之曰。朝廷須有裂壞此書之人。而如我者亦不可無也。金淸陰以爲王若出城。則恐有靑城之行。諸臣亦以此爲憂。公以爲虜人之侵我。非愛我土地。其意正在於和。斷無意外之變。不思緩禍。徒事泄泄。則一朝城陷。上下魚肉。孰與不失此機。圖存宗社乎。蓋公灼見時勢。知其必不然也。一日三城諸卒。承體府微旨。一時齊呼露刃行殿。請出送斥和臣。景象駴慘。獨西門李延陽一軍不動。公聞之。引大義責諸城大將。以折驕卒之氣。聞者悚然。時虜要我執送斥154_461d和臣。體府擧斥和臣十數人名。與三司議。並欲執送。大諫朴潢曰。此皆一時名流。何忍盡投虎口。於是體府以二人定送。初體府邀公。欲與同鈔斥和臣。公曰。此非銓曹所可預。遂不往。旣而江都陷沒之報至。滿城惶駭錯愕。相顧失色。殆無以鎭定。遂有城下之盟。卽丁丑正月晦也。四月。拜右議政。當此之時。滿目灰燼。庶事草創。公外應機變。內修政令。散民稍集。時事粗安。公新膺大拜。慨然有匡復之志。上箚陳時務十事。語皆切實。仁祖嘉納。仁祖自出城以來。每有歉然之色。公懼王心因此少解。又上一箚。推明義154_462a理。反覆開陳。仍請改官制罷郞薦省避嫌。語多切中時宜。上下其箚于備局。令政府及原任大臣六曹三司長官會同相議。而論議參差。未果盡施。識者惜之。亂定之後。酬勞恤民等事。略已講行。獨於崇隱之典。有未暇擧者。公建白令諸道錄聞陣亡將士及忠臣烈女。以議褒美之典。至於戰場胔骼。亦令募人掩瘞。自官設祭。俘人贖還者。往往乏食。顚斃中路。公啓移關西。轉粟鴨江以西濟之。初虜許贖被俘人。貴族及市井富民。急於贖其骨肉。不復計價多少。以致虜人索價。公於是設爲禁制。隨其老少貴賤。下上其價。154_462b多者毋過百金。而踰越此數者。論以重罪。以此贖還者甚衆。秋。陞左相。自往年牛疫熾盛。耕者皆以人替牛。農人告病。公嘆曰。此甚於兵禍也。申嚴屠禁。徧飭法府及諸道。仍令州郡益鑄錢鏄鉏斸。分給貧民。以備明春耕具。兵餘孑遺困於誅求。公箚陳其弊。請改貢案之謬規。蠲潰軍之徵布。愼擇守宰。察其治而勸懲之。九月。奉使瀋陽。始城下之盟。淸人旣定金幣。仍有徵兵之請。公答以不可從。至是朝家將遣使于北。李延陽時白曰。非某莫可。公遂銜命至瀋。備將君臣分義之不忍。我國事力之不逮。反復爭論。事得寢。贖154_462c被俘者數千餘口。至捐盡行費。以贖無親戚不能贖者。還到灣上。疾甚。上遣醫救視。戊寅春。始還朝。召見慰諭。公之使北也。關西邊邑之民。亂前逋糴甚多。聞公行過。齊訴馬前。公啓聞蕩其簿。夏。因旱審理。公陳箚請宥斥和諸臣。上不從。先是朝家新定制令。在鄕人不得注擬三司。而除職者不爲下諭。朝臣之請暇下鄕者。不得帶職往來。公箚陳其不可。秋。陞領相。時淸人將犯錦州界。復徵師於我。朝廷不知所以爲計。公以爲往時出城。勢窮力竭。圖存宗社。計不得已。今日助兵之擧。國可亡。義不可從。遂拒而不許。154_462d致後師期。淸人大怒。嘖言日至。擧朝恟懼。禍且不測。公陳於榻前曰。我國大臣一二人。爲助兵事死。方可以有辭於天下後世。況此事臣實主之。臣請自當。於是遂馳往自首。將行。上親見慰諭。賜豹裘一襲。資送有加。至瀋。淸人列坐衙門。招公詰責曰。今此徵兵。乃大國重事。何人敢爲沮塞乎。公曰。我身爲首相。凡本國之事。無不主管。此事專出於我。惟願一死。公不少攝。以身自當。淸主義而釋之。以此終公在相府。一不助兵。始公之赴北也。意謂此行萬無生理。藉令免死。必有拘囚之厄。備治喪諸具及四時衣服以行。親154_463a戚送于西郊。公弟參判公臨別痛哭。公笑曰。汝無哭爲。男兒何必死兒女子手乎。己卯。仍在相府。夏。上御經筵。公進曰。祖宗朝旣有常參。又有朝晝夕講及夜對。是無日不接臣僚也。近日群臣進見甚疏。下情頗似壅滯。請數開經筵。且令臣僚不時請對。以復祖宗之制。又曰。欲法堯舜。當法祖宗。而大典之法。廢壞已久。律官隨意低昂。殊失治國之本。自今以後。令六曹漢城府堂上率其屬。各自講習。以爲修擧之地。上皆從之。其後公請對奏曰。頃日筵中臣所請數接臣僚一款。快賜允許。甚盛擧也。而其後廷臣154_463b無一人請見。臣之今日登對。蓋欲以身先之也。仍曰。世稱宰相之職。不過曰調陰陽順四時而已。故身居廊廟者。率以含默爲高致。臣則以爲不然。上輔君德。下收人才。匹夫匹婦。皆得其所。然後陰陽可調。四時可順。若一切含默。務持大體。則非大臣輔弼之道。但近日該曹所管。皆歸備局。此則專付該曹。似爲得宜。上悅。參議李楘曾以諫長言事忤旨。至是特補鍾城府使。公連章力爭。遂寢成命。時仁祖寢疾經歲。而宮中有巫蠱之變頗狼藉。上疑貞明公主家。一日使內戚宰臣傳密旨於公。命致其獄。公執不可。居154_463c數日。上果下其事。公不遵上旨。遂率群臣伏閤。請移御別宮。仍請嚴宮禁。上嚴批不許。累爭不已。上震怒。特差節使赴瀋。申平城欲箚留公行。公止之。行至關西。上下敎于玉堂。辭旨極嚴。有曰頃者有一相臣。外爲大言。內懷不直。草草治獄。終不參鞫。其意難測。其事可駭。而前後臺官。不以爲非。獨於迷劣女人。兩司齊憤。至於合啓。割鷄焉用牛刀。時有一宮人。容接女巫。引入別宮。兩司合啓請屛黜其宮女。臺諫以擬律失當引避。玉堂處置請出。而批辭如此。蓋怒臺閣之不劾公也。公旣奉使命。不敢徑自引退。154_463d又不可閔默前行。在龍灣具一箚。備陳前事。仍請罷免。有曰今此宮中詛祝之變。乃擧國臣民之所共憤。而愚臣過慮。終有忌器之嫌。求厥善後。轉覺難處。今若以暗昧難明之事。輾轉連累。使公主驚憂傷心。不得盡其天年而死。則爲今日首相者。安得辭其責。亦將何以見先王於地下。故凡臣之疑難於此事。非爲公主之婢子。所以不忍於公主也。其所以不忍於公主者。非爲公主。所以不敢負先王也。亦所以不敢負聖恩也。向使愚臣徒懷一切之念。輕起大獄。甘心於宣祖之骨肉。而曾不以爲難。則是誠難信154_464a之臣。其他日負殿下。亦猶是也。殿下亦安所用之哉。又引江充,李泌事。反覆論之。公自西行疾作。到灣上。症甚危以聞。朝廷使介將事。公遂滯留醫治。庚辰春。疾勢未已。路上封章辭遞相職。二月。來住西江未幾。因質事罷官。往寓衿川村舍。夏。蒙敍入城。又以微事坐罷。壬午八月。復入相府。兼提擧內局。辭單十二度。再遣承旨敦諭。仍陳疏乞解。而天意懇迫。遂出視事。十月。因北人嘖言。有瀋陽之役。丁丑亂定之初。公備將爲宗社詘意圖存狀。移咨陳都督弘範。冀得轉聞于皇上。而海路遼遠。書浮沈不可知。欲154_464b得一信使。更暴小邦情事而未有便也。戊寅秋。林慶業爲平安兵使。江邊邏卒得一僧。獨步其名。本以我人。丙子以事往椵島。因亂不得還。轉入中國。留洪軍門承疇幕府。爲詗東事出來者也。慶業卽報于公。公使之津遣輦下。至則招見與之語。爲人慷慨善詞令。可托以事。於是公與機密宰臣議。具奏聞附諸獨步。由水路入送中國。而別構一咨。抵洪軍門。辛巳秋。中國載還我人之被俘者。僧從軍門。齎文書出來。時公已解相務。時相申景禛。令林慶業帶僧。訪公于家曰。此是國家大事。相公雖已解職。咨揭酬答。須出公手。154_464c公撰定回咨。更送獨步。蓋獨步往來時海路。必過淸國壤界。故淸人覘知之。怒我與天朝相通。遣其將于義州。詰其事。朝廷捐萬金行計。得不究。而汗之疑終未釋也。至是兵部尙書洪承疇降于淸。備言送僧事。宣川府使李烓與漢船潛商。事覺。淸將挾昭顯世子。出駐鳳凰城。縳致烓鉤問。烓欲賣國以蘄生。盡告送僧移咨事。仍書我國宰臣及名流十餘人以與虜。公名亦在其中。而我未之知也。淸人迫令諸臣來置對。將核治之。君臣上下。莫不危懼。申平城納林慶業議。以爲雖有嘖言。旣無可證之端。不如諱之。公154_464d以爲彼旣偵知漢船往來狀而有此擧。今若不以實言。是益其疑。且天下事未可知。畢竟事發。至於難諱之境。則轉加一層。將未免禍歸於君父。誠有不可言者。不如以實言之。禍止吾與林二人之死而已。以此累爭於上前。上亦以公之獨當危禍爲難。猶預不忍決。公遂赴鳳城。將行。上親見慰諭。賜五百金以助行資。仍賜貂裘。公倍道疾驅。到龍灣。參判朴潢,査問使鄭致和,尹順之諸人並來會。明燭而語。朴公曰。林慶業則職是西閫。前後裝船送僧。皆出其手。萬無全活理。今若委於林。則患可以紓。且相公之於154_465a林。輕重懸殊。而亦非有負於林也。公曰不可。旣與人同事。欲立名義於天下。今何忍臨死生地。委人以自免乎。諸公悚然嘆服。朴公出戶外泣語人曰。觀相公言。以死自定。忠臣烈士。顧不當如是耶。明發。公渡鴨江而去。林慶業亦被淸人責送。追發至高陽。乘夜逃去。公到鳳城。淸將列坐堂上。兵衛甚盛。引公于庭。詰之曰。送僧明朝。何人主張。公曰。我爲本國首相。事之大小。皆關於我。此事我獨主張。而林慶業爲平安兵使。故使之裝船以送。旣非主上所知。諸臣亦無知者。座上漢人解文字者。書公所對。送于瀋陽。遂以154_465b兵圍守。操之日甚。淸將來昭顯館所言曰。崔閣老事事自當。可謂鐵石肝腸。遠接使李景曾,平安監司具鳳瑞備將公置對說話。具實啓聞。未幾。淸主回答至自瀋。同時被拘諸宰。並被放釋。獨以公加鎖杻入瀋中。幽諸北館。北館者淸國死囚所拘也。癸未四月。移係南館。時北使到京。都民萬餘人要歸路齊呼曰。願爲東國生靈。活一賢相。北使爲之感動。公拘幽燕獄者凡四年。危端駴機。人所難堪。公處之晏如。取中庸周易。日夜不釋手。講誦探賾。樂而忘憂。不知其身在異域。嘗曰。千古聖賢相傳之蘊。盡在於此。吾所以154_465c孜孜至此。庶幾識得聖賢微旨。不虛此生矣。時金淸陰尙憲,李白江敬輿。亦同拘一館。淸陰聞公讀書聲。每歎其衰境下工之篤。公與二公。晨夕相會。或談道義。或和詩篇。笑語琅然。亹亹不倦。其後中朝人。遇我人謂曰。爾國二閣老一尙書。以事關天朝之故。被繫瀋陽。東方節義。令人起敬云。乙酉春。淸人送還世子大君及諸卿質子。於是公與淸陰白江俱得釋自瀋東歸。秋。請暇往淸州。仍寓鎭川莊。搆草舍於臥龍溪上。將爲終老計。冬。拜御營提調。陳情乞。遞。上敦勉不許。不獲已承召上來。丙戌春。湖西土賊起。大司馬李公時白領軍南下。京中且有募兵之擧。公曰。大司馬足辦此賊。何至紛紛募兵爲。箚陳其不可。未幾賊平如公言。癈姜之獄。上遽下賜死之命。臺章論執久而未允。公上箚論之。有曰易曰衆允悔亡。今姜之罪。國人皆曰可廢。而臺諫所爭。只在賜死一節。則衆志允於廢而不允於死也。請從臺臣之請。以示聖人在物之怒。上下批責之。公自往年冬得疾。至秋益危。上令御醫視之。問所欲飮食。分御饌以賜。季冬晦。症勢卒䜪。上聞之。命入直御醫往救。公家在城外。夜深城已閉。特使宣傳官持標信開門出送。154_466a仍使不離救視。掖庭人問病者相屬。或連日或間日或日再。藥餌之賜。前後相望。至令內府給薪炭。以備湯藥之資。招視疾醫官。問公病輕重。仍下敎曰。崔相病雖力。平日精神瘉人。若得良藥治之必瘳。汝其竭心視之。若是者再。一日別遣人問之。仍使聞公所對而來。公疾已革。不能言。但感泣而已。竟以丁亥五月十七日。告終于正寢。春秋六十有二。訃聞。仁祖悼甚。爲之御素膳者五日。不視朝者三日。大殿東宮俱遣使護喪。殯斂諸需。令該司庀輸。賜御衣三襲藍紅段衾各一。發內帑粟布。別致賻檖。命長生殿賜154_466b棺材。而問諸孤曰。木若不佳。當更擇賜。以公元勳大臣。例賜一等禮葬。旣成服。別遣中使。弔諸孤勸粥。旣卜葬。又遣禮官中使弔祭。命限三年給祿。勅葬師令擇吉兆。其發靷也。兩宮各遣中使。護至葬所。是年八月十九日。安厝于淸州治之北大栗里先祖完山君墓左負坎之原。前夫人仁同張氏。議政府右贊成兼兵曹判書玉城府院君諱晩之女。在室。已有令聞。及歸于公。莊和淑哲。能執婦道。公早歲嬰疾。沈淹床席者殆十年。藥餌飮食。窮不能辦。夫人盡賣容飾以供之。嘗有一婢子偸取閣中所藏。夫人見而避之曰。154_466c婢子知我得其情。心必媿赧。置而不問。守夢鄭公曄之喪。公往弔。欲以衣服助其斂襲。送言于夫人。夫人立送新裁緋袍以襚之。弔者無不贊嘆。丁卯之亂。乘船避兵。遇大風。檣楫傾摧。舟中人驚撓罔措。夫人卽取刀斷帆繂。遂席下而舟安。恒居自奉儉約。不近華靡。以丁卯九月初五日卒。春秋四十三。無子。以公弟參判次子後亮爲之子。後夫人陽川許氏。高麗陽川伯諱文宣之後。宗廟署令諱嶙之女。自幼志行端方。姿稟異凡。早歲主饋。婦道甚備。待親懿以誠款。御僮使以恩恕。閨壼之內。和而有則。公久處機要。或有154_466d夤緣蹊徑。欲以貨款者。輒正言拒之。公之秉銓也。有一相家夫人。爲其子弟求官。以書私託。夫人答云朝廷除拜間事。非婦人所敢干。其操守謹愼類此。擧二男。長後尙。次殤而夭。夫人之初歸。嚴君以公後子。未及成童。慈愛撫養。出於至誠。及有已出。視之如一。宗戚翕然稱之。以庚辰六月二十八日卒。春秋三十二。兩夫人初葬廣州之秋峴。及公之葬。皆遷祔焉。所後子後亮。前行司僕寺僉正。娶觀察使安獻徵女。生三男二女。長曰錫晉。以蔭爲典設司別檢。次卽錫鼎文科。今爲弘文館典翰。季曰錫恒進士。女長適進士尹濟明。次適申轂。次子後尙文科。今爲司憲府執義。娶咸陵府院君李澥女。無子。取錫鼎爲之子。側室女一人。爲武科僉知具鐄妻。公天資甚高。識量弘遠。外和而內剛。度偉而行方。胸中洒然。絶無偏係意。言若不出口。體若不勝衣。而容貌凝嚴。神采動人。語音如從金石中出來。年十七八。游白沙,玄軒兩公之門。兩公許以大器。深加敬重。嘗造白沙論易。白沙服其精造。語人曰。崔某易學見處甚高。非老夫所可窺。其見重前輩如此。少與浦渚趙相國,谿谷張相國,延陽李相國結爲道義交。講磨學問。交誼無間。其在朝廷。論事154_467b是非。各執所見。不苟相合。而友道至老如一。世以四友稱之。當昏朝時。廢處田野。絶意榮塗。與谿谷延陽諸公。或棲山房。或會靜室。專用力於爲己之學。日取性理諸書。潛心講究。恣意探賾。積以歲月。以就充養之功。文章學識。爲一世所推重。中興以來。際會風雲。以爲聖君在上。賢士滿朝。誠不負所學之秋。於是以陶鑄一世爲己任。及長銓衡。一時人才。無不甄拔。人稱反正後秉銓公明者。指不得先公屈。嘗於榻前。論用人之道。公奏曰。儒者國家之元氣。培國脈敦世敎。必藉於此。如金集。蚤以行誼見稱。宜備誠禮召之。154_467c且聞金長生門人宋浚吉,宋時烈。皆以學行著名。朴知誡門人中。亦有篤行之人。宜並召用。以爲崇奬之地。仁祖嘉納焉。嚴於辭受之際。雖各邑例餽。少有逾制。輒却之。有濟州通判送駿馬于朝貴。並及於公。公不受。及爲相。嘗坐備局。見壁上有錢穀記。公曰。此有司之任。命吏去之。其爲政。務大體類如此。公謀國以義。不爲一毫苟且計。明以燭其理。斷以制其事。雖衆言叢沓。而卓守所見。不少撓沮。張谿谷嘗言國家大事。裁度便宜。我或差長於子謙。而其決疑善斷。吾所不及也。每論事榻前。或不可於上意。而公執之154_467d堅。上有時厲聲不許。則輒辨析。無所摧屈。必盡其所見。一日登對。公進前白事。反覆苦爭。得請而後已。李延陽適同侍筵中。出謂公曰。今日事。不甚緊重。公何爭之力耶。公曰。事無大小。皆有是非。豈可諉以細事而苟合人主意乎。李公退而歎曰。大臣上前爭是非者。癸亥以來。惟公一人。再入相府時。手書署諸門曰。人才取舍。或可參聞。臺閣評彈。非所敢干。能言吾過。是愛我者。有益國事。幸以敎我。公立朝二十餘年。頻遭逆境。事多不稱意者。嘗喟然發嘆曰。若使栗谷白沙在世者。某之身世。不若是孤也。蓋憂時慨世154_468a之意也。庚辰罷相之後。卜居于興仁門外。數年就閑。閉門謝客。絶口不言時事。日取經書。沈潛誦習。至夜不倦。時有自得。輒箚記冊子。燕居必儼然端坐。未嘗跛倚。嘗以慕蘧扁其居曰。五十知非。雖已過矣。六十而化。吾亦庶幾。庭前一老檜挺特可愛。公嘗勉子弟曰。此檜自寸根。至於干霄。學者之立志。當如此矣。公雅志林壑。老而不衰。顧遭時不幸。國事搶攘。旋罹西河之厄。留滯異域者。且四年矣。東還之後。初欲定居湖西。以遂棲遲之願。俄而召命遽下。公以爲數年異域。違阻天陛。一瞻威顏。退尋初志非晩也。黽俛154_468b赴召。奄嬰奇疾。易簀前。搆致仕疏而未及脫藁焉。公旣深於學問。見識卓然。每當謀國論政之際。必以義理爲主。和金之議。本之經傳。參以先儒定論。裁度時義。圖存宗社。固非專出於一時權宜之計者。奏議班班可覆視也。丁丑以後。身當鼎軸。惓惓以扶大義爲心。力阻徵師之請。以却北人。密送咨奏於天朝。必達乃已。以伸小邦情事。至於再拘燕獄。歷歲幽辱而不少挫。及其密奏上聞。獲被崇禎皇帝璽書褒美之典。公之尊周大義。可與畏天保邦之道。並行而不相悖者。又可見矣。公勇於改過。樂於從善。雖賤微154_468c之人。如有規其所失者。輒誠心開納。喜形于色。與人語。襟懷坦率。不設畦畛。及其收斂身心。靜嘿改容。則不威而嚴。治家有法度。男僕不敢入於中門之內。內外斬斬。禮防甚嚴。處兄弟盡其友。敎子弟必以正。遠近宗戚。一以誠意待之。親戚皆以公爲歸。晩翁公側室有遺腹兒。公撫恤其母子。爲之鳩材架屋。置諸比隣。分臧獲廩祿。以遂其生計。里人感歎。紀勳之初。田民第宅恩賜甚優。而不曾以產業經意。往往稱貸以給。家人或以罄絶告。公笑曰。未聞有身爲宰相而憂餓死者也。不復問其有無。平居衣服飮食。自同韋布。154_468d賜裘一襲。服之十年。終不易也。及公捐館將斂。幹喪者求屛風。家無所貯。及出其平日衣服。無一華靡。見之者皆歎曰。不料相公家乃至斯也。公旣取姪爲後。後有己出。仁祖問公後事。公對曰。昔胡文定取胡寅爲後。及生己子而不使還宗。以己子爲次子。臣亦欲以此爲准矣。上許之。公於喪祭之禮。定爲家式。墓祭不用四節。只行寒食秋夕。生日不薦獻。凡祭不用油蜜果。葬不用外棺。蓋參取朱子家禮及我東儒先所論而折衷焉。公處備局久。京外文簿。雲委山積。公一覽不復考。當其覆啓。使人拈筆口授。如誦宿搆。154_469a初若不甚經意。而一揮句斷。積案若洗。取而讀之。則區畫處置。各得其宜。辭理條暢。纖悉無餘。每一篇出。備局諸公。莫不交口嘖嘖。公於文章。才分甚高。而未嘗以詞華自誇嫮。然一時宗匠鉅公。卒讓公一頭地。論者謂公之文章。文辭贍麗而義理爲主。蓋其識見甚高。輔以學術。故發於言者如此。澤堂李公謂公奏議文字。筆頭有舌。可與陸宣公上下云。所著有詩四卷,疏箚十卷,啓辭二卷,碑狀雜著三卷。刊行于世。周易語孟記疑卦變說綱庸學管見藏于家。張谿谷每字公而稱之曰。赤心殉國。不避死生。子謙眞社稷之154_469b臣。又曰。子謙之南漢主和。以箕子爲心者也。李白江曰。當南漢將士脅君之日。國勢危疑。而賴有完城一言。不至生變。臨事剛毅。人所不可及也。又曰。屈子之忠。過於忠者也。完相之忠。亦過於忠者也。趙浦渚祭公文曰。兄之敏銳之才。深妙之文。絶出等夷。及至臨難見危。勇於自當。視身如鴻毛。辭直理正。不攝不絀。此兄所以大過人者而歲寒乃見也。雖叔孫昭子之見執於晉。何以過之。始則悶其陷不測之危。終則喜其不可奪之節。足有辭於世也。李延陽論中興人物。必以公爲稱首。嘗以爲完城事業可言者多。而撮其154_469c大者有八。癸亥反正。協贊匡復之業一也。丙寅議禮。能明父子之倫二也。丙子之亂。單騎赴敵。以緩賊鋒三也。南漢之圍。冒謗主和。以存宗社四也。戊寅徵兵。以義拒之。視死如歸五也。送僧天朝。卒踐危機。而以身自當六也。處人骨肉。務欲全恩。而不避觸忤七也。處心行事。廓然大公。而不染朋比八也。嗚呼。先祖立朝始終。槪具於此。而延相所論八條。尤詳而核。顧奚待於一二譚哉。記仁祖禮陟祔廟之日。朝廷議選從享功臣。至於六人。而公不得與焉。李延陽上箚爭論。請以公並享。而事未果施。今上之二年丙154_469d辰秋。命選顯宗室從享名臣。仍問故典追享有無。命考諸列聖實錄。得世宗朝以宜城君南誾追配太祖室故事。遂下敎曰。故相臣崔鳴吉爲國忠誠。同符古之賢臣。及丙子之亂。南漢受圍之日。獨持和議。能使三百年宗社。環東土方數千里。旣亡而復存。其遠慮善圖。孰過於此。故相臣金堉德業冠一世。爲國安民。百世可尙。斯二臣者。禮宜配享廟庭。血食千秋。而俱未與焉。予甚慨惜。今觀國朝故事。亦有追享之規。其令禮官議于大臣。未及獻議。前參議李沃上疏論故相鄭太和從享新宮及先祖追配154_470a世室之不可。諫院繼論之。再啓而命寢公追享。噫。先祖生而竭忠於王室。沒不得配食於淸廟。識者咸以爲聖朝一闕事。幸賴聖上追念勳勞。有此曠世之恩命。而群小齮齕。使明主懋績褒忠之盛意。旣發而旋格。豈不痛哉。嗚呼。先祖之沒。已過三十餘年。尙未能謀所以易名而壹惠者。非敢緩也。蓋有待也。懼日月寢遠。事蹟愈昧。謹摭族出官歷事始終而敍次如右。以俟立言君子之發揮焉。庚申八月穀朝。孫男中直大夫弘文館典翰知製敎兼經筵侍講官春秋館編修官漢學敎授錫鼎謹狀。
154_470b明谷集卷之二十九

 
損窩先生遺稿卷之十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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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墓表
七代祖秉節校尉副司果兼宣傳官府君墓表 陰記 a_169_562a


公諱孝恭。字令德。系出完山。高麗上將軍諱純爵之後。五世而至選部典書諱得枰。生進賢舘完山君諱宰。卽公之高祖也。曾祖諱有慶。入我朝。參贊議政。諡平度。祖諱士康。右贊成。諡敬節。考諱承宗。司饔院僉正。妣興閔氏。犇女。公年十九。以材蔭薦補宣傳官。早卒。不得爲世用。葬于果川霜草坪向巽之原。配全義李氏。縣監一仝女。墓在楊州檜岩。遺命葬無過169_562b 江語。在宜人誌文。擧二男。奉孫早歾無嗣。命孫從仕郞。生一男嶪。冰庫別提。贈吏曹判書。生二男。秀英參奉。秀俊贈左贊成。卽我高祖。此下詳載誌。不盡記。惟我完山之崔。以東方大姓。奕世崇顯。自僉正公以下。子姓零替。連世夭圽。不絶如縷。祖妣宜人。劬躬飭行。以維持門戶。至我曾祖晩谷公。奮起中衰。歷敭淸顯。遭時不辰。官止通政。王父遅川公昆季。際遇中興。官位隆顯。及不肖兄弟。蒙籍世蔭。致位台鉉。玆豈非祖先蔭德委祉之所及歟。從弟錫弼。篤於孝友。謹於奉先。葬其兩親於公之塋內。又移窆其祖考正郞公169_562c 於公之後麓。作兩舍于墓下。兄弟同居。脩飭丘墓。享祀不怠。下世後。諸弟能遵遺意。改竪墓碣。此可書也。畧記始末於後面。俾我後人知先懿之有自云爾。癸卯六月日。七代孫右議政錫恒。謹識。

 
損窩先生遺稿卷之十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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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行狀
生先考贈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領議政兼領經筵弘文館春秋館觀象監事世子師行嘉善大夫漢城府左尹兼五衛都편001府副편002管襲封完陵君行狀 a_169_564a


公諱後亮。字漢卿。姓崔氏。自號靜修齋。系出完山。高麗上將軍諱純爵之後也。連世顯聞。至諱宰。麗季名臣也。官藝文提學。完山君。諡文貞。麗史累書之。生諱有慶。入我朝。官至參贊議政府事。諡平度。史稱廉169_564b 直自守。人敬憚之。生諱士康。官至左贊成。諡敬節。高祖諱嶪。用先蔭。官止氷庫別提。贈吏曹判書。曾祖諱秀俊。贈左贊成。祖諱起南。號晩谷少遊牛溪成先生門以文行見重當世。宣廟朝。除王子師傅。晩擢文科。歷應敎舍人。昏朝時。出爲永興府使終焉。贈領議政完興府院君。考諱鳴吉。號遅川。策靖社元勳。官至領議政。封完城府院君。諡文忠公。事業詳諡狀中。妣張氏。玉城府院君諱晩之女。生考諱惠吉。號柳下。官至吏曹參判。柳下公편003九畹李公諱春元之女。以丙辰八月二十日生公。公生三歲失母。鞠于169_564c 外家。九歲。文忠公取而子之。丁卯。張夫人下世。零丁孤苦。備嘗艱楚。而文忠公職宰樞。値國家多難。無意私事。不加敎督。然公明達夙成。文識日進。文忠公倚以爲重。家事悉以委之。一家咸稱爲能子。丙丁亂後。虜人索公卿子爲質。公以質子赴北。在瀋舘凡三年。壬午。文忠公以通信天朝事。爲虜所詰。被幽燕獄。公乘撥馬。三赴瀋陽。凡所以紓難緩禍之圖。靡不用極。得以無他。乙酉。從文忠公東還。丁亥。遭文忠公喪。公自在瀋舘。得忡悸之疾。眼眚兼苦。憂哀之餘。病益甚。絶賓客廢科擧。處靜養痾。先後二十年。辛卯。病稍間。169_564d 中生貟。孝宗甲午。除南別殿參奉。病不仕。後除四山監役。旋遞。年五十後。病漸愈。顯宗丙午。拜翊衛司侍直。叙陞歸厚別提。遷宗簿主簿,工曹佐郞,忠勳都事。庚戌。出爲白川郡守。明年。病遞。今上乙卯。張公善徵。爲司僕提調。辟公爲僉正。未幾。呈病辭遞。後連除珍山,沔川。皆不赴曰。吾老且病。不如在家之安閑。然其微意盖有在也。己未春。又除榮川郡守。人或以不赴二郡爲言者。僶勉赴任。明年遞還。庚申。討逆錄保社勳。公以靖社元勳胄子。參會盟祭。進階通政。辛酉。拜淸風府使。癸亥。投紱而歸。乙丑。公年七169_565a 十。時仲子錫鼎。爲副提學。因大臣進言。有推恩增秩之典。公於是進階嘉善。拜漢城府左尹。兼都捴府副편004管。襲封完陵君。長子錫晉。時爲堤川縣監。邀賓設筵。侈上之賜。南壺谷龍翼。首爲詩以賀。衆賓和之。仍成鉅軸。人以爲榮。公在京兆。數月解遞。自是閒居謝事。穆然淸坐。看書賦詩。種花蒔藥。或對客觀棊以自娛。甞曰。劉靑田論人命。以草澤閑人。居王公之上。吾雖不在草澤。老於太平。作一無事閑人。以終餘年。不亦樂乎。己巳春。時事又大變。削保社勳。公降資爲通政。公自世變以來。不出戶庭。口不及時事。以癸169_565b 酉十二月一日。考終于正寢。享年七十八。甲戌二月。葬于楊州板谷里天磨山下負艮之原。從先兆也。夫人祔焉。至甲戌。又復保社勳。還授公資秩。公已下世。復官致祭如儀。公天性寬厚。風儀端重。莊而不至於厲。和而不流於易。汎愛樂善。臨事周愼。外物接人。一出於誠心。絶無虛僞矯餙之意。人無賢不肖。皆愛慕忻忻焉。然英果有斷。雖在禍難危急之中。神志不亂。丁丑之難。公年二十一。奉母夫人入江都。虜兵犯城之日。晨往府中。觀其動靜。檢察使金慶徵。與副李敏求張燭坐堂上。令偏裨持稱錘稱分火藥。公謂曰。169_565c 賊勢方急。何可較量多少。目今手下有將校數百。盍令急率軍兵。遮截甲津。以少遏其鋒乎。兩人不能用。時賊已入城。士女波沸。多被搶掠。而諸公恇撓失措。不能施一策。公知無可爲。遂退而聚家衆爲圜陣。獨身步往虜軍。辟戟而前曰。吾欲見主將。有所言。虜開陣門迎之。公立主將之前。謂曰。聞李相國,崔尙書二家。有訪問勿害之令。然否。吾是崔尙書之子。誠欲相全者。盍有以護我母。爲亂兵所掠也。譯人傳言主將曰。何以知你爲崔尙書子乎。答曰。吾父爲國大臣。朝家事。吾無不聞之。若擧以問。則吾當條答之。且今本169_565d 國宰臣。多在此城。若令偏裨。率我往問。則可知也。虜以公往尹政丞昉及諸所問之。尹相執公手揮涕曰。此是吏曹判書崔某之子也。其人回告。於是虜將爲定護行將及軍卒若干俾護之。以此上下家衆。得以安保。親舊家依託而全活者亦多。一時諸公。皆稱公臨急善處。盖月沙李公廷龜。嘗奉使燕京。名聞中華。文忠公。丁卯以後。主羈縻之論。虜人有寬免之令云。當壬午文忠公之北行也。禍且不測。公日夜焦憂。抆血叩心。然當事安閑。無忙撓滲漏之失。時公客留平壤。而具洛州鳳瑞爲關西伯。心服之。每稱於人曰。崔169_566a 漢卿之雅量。不可及云。文忠公旣被。危機甚急。公歎曰。大人之事。固出於爲國竭忠。視死如歸。而人子之爲親求全。亦當不顧死生。遂齎金銀累千入瀋。以啗其用事者。其終免於大禍。亦公之力也。或擧問於文忠公曰。某固是佳子弟。然以未經事少年。能潛銷禍難。其才乃如是耶。文忠公答曰。才出於誠。時金淸陰亦在燕獄。或曰。淸陰素方嚴。必以諸君行計緩禍爲非也。公曰。是殆不然。入見淸陰。問曰。散宜生。何如人也。淸陰曰。古之聖賢也。公出語人曰。觀金公之言。其微意可知也。文忠公知公材器。甚重之雖軍國機務。169_566b 亦時咨訪。多所裨贊。戊寅。文忠公爲首相。而公還自質子。白文忠公曰。大人當國後。有二事恐爲差失。文忠公曰。何謂也。公對曰。攻斥淸陰及水路送僧二事是已。和議與斥和。雖皆爲公。而旣相角立。國事不幸。畢竟爲講和之歸。在我之道。惟宜推奬淸議。不宜與之相激。自貽疑阻。誠以大人文章。推明義理。洞開心事。頻致書淸陰。爲言斥和固是正論。而和議亦出於存國之權。因言國危如此。如公重臣。豈宜久遯荒野。以勉其起來。則淸陰之疑怒。必自漸釋。而年少浮峻之論。自可少熄矣。送僧事。別遣單使。另具奏文。由湖169_566c 西界發船。直向南朝。則一帆風可到。且無隣敵之疑。今徑抵洪軍門。使之轉通南朝。迂廻遼遠。未保其必通。而僧行取關西海路。當掠過遼瀋壤界。事或宣露。禍必不少矣。文忠公大悟。歎曰。吾所不及也。其後抵書淸陰。待之有加。至壬午。淸人果覺送僧事來詰。遂以文忠公北去如所料。公以質在瀋也。與鄭弼善雷卿相善。鄭公以宮僚從世子赴北。憤鄭命壽挾虜恣喝。質子數人謀奔之。事泄。鄭公終被慘禍。其事泄之初。公謂鄭公曰。公何不果言於我。答曰。君必力止之。言之無益。故不以相告矣。時文忠公與柳下公169_566d 皆在本朝。柳下公聞鄭公挑禍。慮公預其謀。甚憂之。文忠公曰。毋過慮。此子豈浪死者哉。及聞西報。公果無恙。一時諸名公聞之。皆稱爲父子知己。文忠公嘗歎曰。汝能服科。則足爲望重宰相。而遭値禍難。疾病又劇。其於不能力文學何哉。前輩長者如張谿谷維,李延陽時白,李白軒景奭諸公。皆器公之爲人。屢加賞歎。金淸陰尙憲號簡伉。愛重公殊甚。甞謂文忠公曰。傳不云乎。人樂有賢父兄。大監有賢子弟。豈不樂哉。時公病眼甚。而同儕有不喜公者。言於金淸陰。崔某特一盲漢。淸陰答曰。是所謂盲於目而不盲於心者169_567a 也。及公之將還。金淸陰爲作歌詩以贈之。又爲小序。稱道公不倦。公之外妹。爲李白江敬輿子婦。公旣還。外妹甞語公曰。吾舅還自燕獄。每稱吾兄之賢。嘖嘖不已。兄何以得此於長者。盖白江亦與文忠公同拘云。一時名宰如李咸陵澥,朴都憲潢及具公鳳瑞。皆傾心相與。許以忘年之交。朴公甞語柳下公曰。吾非令公之友。乃漢卿之友也。
公有沉慮遠識。料事多懸中。丁丑亂後。都城一夜相驚。傳言有鬼啄啄。鬼男婦相聚叫呼。或放砲。或擊金鐵器。擧城奔波。人或慮有事變。朝宰皆戎服詣闕。169_567b 時公正衣冠明燭危坐。李參議。延陽子也。着戰服佩釖猝至。將上堂。見公端坐。躊踷却立。公延之座。謂曰。何爲作此伎倆。答曰。國有變亂。吾輩寧能徒死耶。公笑曰。此必大亂後民志不固之致。何變亂之有。毋遽驚動。李公雅信重公。遂留話。至夜而去。已而。果無事。後李公常謂人曰。吾於崔漢卿。輸此一着。顯宗甲寅秋。都下有虛驚。傳言海寇。鄭錦率舟師來泊京江。士女奔走避亂。都城大撓。至有埋神主者。公之伯嫂送言欲同避亂。且問當向何方。公笑答曰。此必訛言。不過明日可知。已而果然。顯庙軆常不寧。萬機169_567c 多滯。縉紳多以委靡爲憂。公獨曰。此乃太平後日。當自知之。甲寅以後。朝著累變。士大夫多被刑戮。公言果驗。今上庚申春。屛絀一番人。登進舊臣。人皆謂太平萬世之基。公獨曰。不出十年。時事必變。或言時無衅隙。何至此耶。公笑曰。世故推遷。則衅隙自生。已而。有己巳之事。人始服公先見。公鑑視甚明。往往先知人吉凶。元監司萬里。於公爲同盟世交。將赴平安監司。公就見於其第。歸語諸子曰。今日吾見元令。言語擧止。如平常。而神彩虛脫。似不見有人然。殊可慮也。未過旬日。元公卒然喪逝。甲午春。公入楓岳遊覽。169_567d 到一庵子。有辟穀僧。面壁觀心已數月。僧徒稱爲高座。甚敬之。公入與語。出謂仝遊者曰。此僧全無見識。而操心甚急。不出旬日。必發狂疾。居無何。果發狂走出。同遊者驚以爲神。甲寅。顯庙大喪。公陪祭於外庭。還家謂人曰。有一宰臣立於前列。上大下小。骨法甚不好。决非令終之相。徐問之。乃吳挺昌也。至庚申。吳果伏法。當尹편005有盛名。公亦與相善。已而。見其不韙。早自疎貳。崔淮陽碩英。居同閈。情好甚密。甞謂公曰。聞尹希仲深於禮學。閔判書鼎重之子。欲學禮於尹。書要奎瑞。公盍令二哥同往乎。奎瑞。崔公㣧也。公169_568a 曰。吾兒方鎭日課讀。文理漸進。不必更師他人。且出入名人之門。後必有難處之事。崔公大悟。亦不送其子。편006甞侯公及張公善冲。不遇。皆留刺。其明日。張公來訪謂曰。君與我有異。已出仕路。不可無一謝之義。公笑不答。終不往謝。自此與편007絶。公之愛人濟物。出於天性。其在瀋時。淸人許贖被俘人口。我人齎金贖還者相續。其中有金少未售者。公輒捐槖中金以助之。得以贖還者甚多。其人皆仰公如父。侯事不怠。公自瀋還時寒甚。路遇一凍卒僵死。公見之惻然。使人視之。猶可活。卽令壯士朴尙中。挾來於馬上。抱持之。169_568b與以湯漿。得甦。到義州。屬府尹救之而活。及守白川。値辛亥大侵。飢流載路。公竭心拯濟。節廩俸儲穀粟。且造空舍爲餘架。以接飢民。極擇忠信有鄕望者領之。日晨臨詣。親甞糜粥。吏卒不敢爲奸。糜粥精好。民賴以蘇。其土着者人。給糧種得以耕。秋果大熟。公常語諸子曰。古人云。活千人者。非誠莫可。吾所加意。只此一句而已。及遞歸。邑吏老幼。如失慈母。卽治去思碑。因朝禁未立。後二十年。追立其碑。題曰。萬世不忘。邑人過者皆下馬。長老至今相告語曰。當辛亥大飢。若非崔侯之德。吾輩死已久矣。今之生子抱孫。是誰169_568c 之賜也。其居官。以淸靜安民爲主。絶不爲矯情干譽之事。常曰欲得能吏之名。濫刑罔民。豈仁人所忍爲。又甞曰。人於平朝。空心氣乏。若被刑杖。易致病傷。吏民雖有罪。必待食後治之。榮川,淸風。俱有山水之勝。俗又淳朴少事。公退之暇。嘯咏以自適。惟束吏不令撓民。民皆樂業。牒訴稀息。其在榮川。庶弟後章。季子錫恒。同占司馬。衙設喜宴。自別堂盛陳音樂。帶月而歸。路經郡獄。時獄中只有係囚十餘人。公命吏放送曰。官長作此好事。而民係凍獄。豈無向隅之歎。榮人至今傳以爲美事。後甲子。有海寇虛驚。榮民父老議169_568d 送人京都。迎公避地。後知其浪傳而止。遺愛之入人如此。淸風民亦樹石追思。公雖謹飭自將。閔窮急難。如恐不及。其於風節氣義。尤所感奮。鄭公雷卿之被禍也。心欲濟之而無策。時孝庙以大君在瀋。公欲籍以爲力。遂謁孝庙于邸。袖進一詩曰。天下卽今無節俠。窮途知己更誰憑。虞卿急士歸公子。莫使侯生恨信陵。孝宗恤然曰。急士之窮。信陵之所難也。甲寅以後。縉紳章甫。以言事。流竄相繼。其有舊者。周給行資。如待親戚。雖無雅素。亦脫衣以與之。當己巳中宮之廢。吳判書斗寅。李參判世華及朴士元。以諫169_569a 受刑。公於是時寢疾已久。殆不省識。力起歎咜曰。吾閱歷世變多矣。老病不死。又見此事。因涕泣良久。悲痛不自勝。朴西溪世堂。士元之大人也。辭祿郊居。素淸貧。自禍慘後。家事益落。朝夕或不給。公聞而悲之。爲分俸米周之。公寡於物欲。飭身謹潔。其質瀋也。夫人病不能從。獨居累年。前後往還西關凡十餘。遭間留箕營。亦累月。地號繁華盛妓樂。公謂家國之慮如此。義不當燕樂。女色一無所近。具公鳳瑞稱於人曰。漢卿之苦節。過於蘇武。中年爲護眼病。常寢處外堂。障蔽囱牖如漆室。深居靜攝凡二十餘年。及夫人下169_569b 世。公未甚衰而不畜姬妾。終身甞語子弟曰。吾稟氣素弱。倍加愼嗇。至老無大疾患。盖得力於此。汝輩宜切戒之。又曰。莊子云。古之至人。入水不濡入火不焦。吾意指節欲者而言也。苟能節愼房色。則雖觸犯寒暑霧露。眞精內固。外患不能侵也。三居州郡。廉操愈勵。不以絲毫求益於家。周給親故。若過五斗。則輒嘆曰。吾於今日。又犯贓罪矣。俗傳守令用五斗米以上。爲贓。故云。張玉城旣喪。而張氏分田僮。公曰。吾爲勳臣子。豈至貧餓耶。遂一無所取。張氏感其義。以書冊二笥送公云。公少師谿谷,白軒。讀儒家諸書。又擩染169_569c 於家庭。早知學問路逕。而夙抱沉痾。未能刻苦加功。常以爲大恨。閒居。好觀史書。如資治綱目,宋鑑。無不淹貫。至國家治亂之際。賢邪進退之機。未甞不屢歎。甞曰。人皆爲諸葛亮之才。勝於蕭相國。吾獨以爲不然。蕭何知韓信於立談之間。薦爲大將。卒擒項羽。武侯與馬謖同處三年而不悟。竟致陳倉之敗。陳壽亞匹之論。不爲無見也。公旣以材識著聞。孝友之行。出於至性。文忠公拘幽四年。危辱多端。公奉以周旋。終始不去側。文忠公素多病。甞患胃不善飯。公躬執炊爨。以適親味。同館諸公。莫不嗟歎。及遭大故。弟應敎169_569d 公尙幼。公撫愛篤至提誨不倦。甞作書以勸學。汔有成立。及分田僮。必擇其膏腴肚宲者與之。公有庶妹一人。存恤曲備。不用俗䂓。優分田産。甞曰。先公血屬。只此兩人。豈可使窮乏也。應敎公簡直少許可。▣於公誠服。常曰。吾伯氏正大底人。又甞語其夫人曰。吾於世。無一心朋。只有伯氏。可謂知己。庶妹甞語公季子曰。先大監捐館後。令監顧復之恩。無異吾大監在世時云。尤致謹於奉先。文忠公衣履之藏。在淸州文貞公旁兆。公與諸宗人謀捐穀設契。命曰奉先稧。以每年十月之望。先設祭文貞公。次祭文忠公。李西河169_570a 敏叙爲作稧帖序以美之。先祖平度公墓。在龍仁紫鳳山。久無碑碣。無以識別。公發文諸孫。鳩材立石。吾崔譜牒甚踈畧。公博採於諸宗。累年修訂。編成一帙。諸庶之窮無依賴者。收而敎育之。經其婚편008。一家有喪病。皆有以軫恤相救。恩意融洽。由是內外親黨。凡有緩急。必以公爲歸。庶弟後章柳下公小子。早孤失學。公取養於家。與季子食則同案。寢則同被。敎育一與之。卒能成科名。及公喪後。後章。當降爲大功。而服期以報鞠養之恩。公旣病。不能力擧業。以訓子姪爲事。嚴立課程。率其勤惰。爲具餠餌。以救其飢乏。169_570b 命曰讀書餠。常曰。家道興衰。專在於此。其設敎。不徒尙文藝。必以學識爲重。嘗作箴以示仲子曰。心存則自然凝重。言寡則可無悔吝。取友必先器識。臨事宜思敬謹。公於詩文。才分甚高。雖以疾病憂患。不能肆力。出語往往警絶。其少作。淸陰諸公。亟加評賞。李公敏叙,朴公世堂,兪公㻛,趙公宗著,朴公玄石世采。與公酬唱。輒稱其調韵之過人。有私稿若干卷藏于家。夫人廣州安氏。觀察使諱獻徵之女。莊重端愨。不妄言笑。旣孝敬備至。甚得宗黨心。尤爲文忠公所眷愛。性勤紡績。未嘗安逸。衣不取華美。必潔而完。食不169_570c 尙珍貴。必精而旨。素不喜巫覡。一無所信。淸靜簡淡。絶無芬華侈美之習。至於祀享。必躬親鼎俎。盡其誠禮。待慈母甚謹。諸婦諸女。恩施必均。訓戒亦切。平居無疾言遽色。御婢使有方。咸得其懽心。夫人以辛酉九月初十日生。先公二十年癸丑四月十三日下世。壽僅五十三。擧三男二女。男長錫晉。蔭仕工曹正郞。次錫鼎。前領議政。次錫恒。今爲平安監司。女適進士尹濟明,縣監申轂。正郞四男。昌憲生貟。昌演都事。昌敏,▣▣昌億。▣▣議政爲應敎公後。一男昌大。今爲弘文校理。二女。適李聖輝,李景佐。尹濟明一女。適趙169_570d 命廸。申轂六女。適李聖臣,李蓍正,尹敬龍,朴弼載。餘幼。昌憲男守哲。女適李明復。昌演二男三女。男長守範。女適成德章。餘幼。昌敏二男二女。男長守約。餘幼。昌億爲監司後。一男一女。皆幼。▣▣男錫恒。謹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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損窩先生遺稿卷之十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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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墓表
先考贈崇政大夫議政府左贊成兼判義禁都편001管世子貳師行內侍敎官府君墓表 陰記 a_169_562c


公諱後遠。字長卿。自號竹峯。考曰吏曹參判諱惠吉。妣順興安氏。生貟溫之女。生于崇禎丁卯。歿于壬子。壽僅四十六。公文藝夙成。弱冠。捷司馬兩塲。蔚有聲望。爲士友所推服。累擧不第。晩筮仕。官止內侍敎官。169_562d 累贈崇政大夫議政府左贊成兼判義禁都편002管世子貳師。配驪州李氏。金浦郡守以省之女。仙源金相國尙容之外孫也。以崇禎戊辰降。甲申于歸。端莊靜壼。孝友篤至。宗黨稱之。戊戌。考終。享年九十有一。合窆于楊州板谷先塋負甲之原。公無嗣。取仲兄完陵公第三子錫恒爲後。卽不肖也。不肖又取伯氏正郞公季子昌億子之。夫以先君子才學之茂。百不一售。官沉下僚。壽僅中身。嗚呼。豈非命歟。然嗇於躬者。伸於後。天道然也。不肖以不才蒙恩。歷敭內外。致身崇顯。貤贈之典。上及先人。玆宲蘊德委祉之所及也。169_563a 謹識其槩。俾後人知先懿之垂裕云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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損窩先生紀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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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行狀]
行狀[崔昌億] a_169_595a


先府君姓崔氏。諱錫恒。字汝久。羅代之始。有六部大人佐之。崔其一也。後世著籍于完山。以高麗上將軍諱純爵。爲始祖。六世而至諱得枰。以選部典書致仕。生諱宰。重大匡完山君諡文貞。父子皆以廉直孝謹稱。有傳於麗史。生諱有慶。事我太祖。官參贊議政府事。諡平度。生諱士康。事世宗。官右贊成兼判吏曹。金宗瑞之開六鎭。實長兵部。參謀畫。諡敬節。寔公之九世祖也。高祖諱秀俊。累贈左贊成。曾祖諱起169_595b 南。登第有重名。歷應敎,舍人。卒官永興府使。後以仲子領議政完城府院君文忠公諱鳴吉貴。累贈領議政。完興府院君。祖吏曹參判諱惠吉。文忠公弟也。始文忠公無子。取參判公次子諱後亮爲後。官漢城左尹。襲封完陵君。卽公之生考也。有高識懿行。妣廣州安氏。觀察使獻徵之女。完陵公弟諱後遠。參判公季子也。文學名一時。累擧不中。官內侍敎官。無嗣。又取完陵公季子子之。卽公也。所後妣驪州李氏。郡守以省女。及公貴。累贈敎官公領議政。妣李氏封貞敬夫人。祖參判公左贊成。祖妣咸平李氏。順興安氏。169_595c 俱贈貞敬夫人。完陵公有三子。仲子諱錫鼎。爲領相。而亦出繼。國法。不得贈所生之親。公於是疏言臣兄弟幸蒙聖恩。俱升台鼎。而以皆出繼。封贈之典。獨不及於生親。望乞特恩。以伸人子報本之情。上特允之。於是又贈完陵公領議政。妣安氏貞敬夫人。始文忠公。爲完陵公擇婦。甞乘軒過。路中見一婢負處子行。年可十餘歲。以衣蔽面而風忽開。公瞥見而驚異之。遂跡其後。至一家。則僻巷席門。陋屋數間而已。問之則乃安司藝宅。盖觀察公時爲司藝。文忠公卽入見。定婚而歸。喜謂家人曰。吾今日得賢婦。當169_595d 多生貴子。興吾家。其後果生公兄弟云。公以顯宗甲午八月初六日酉時生。淸嬴善病。至十餘歲。猶不授書。而公內弟安公某。與公同年生。才名甚早。連登泮庠。安夫人深歎羨之。完陵公笑曰。彼雖才藝早成。氣象不過一措大。終必不達。吾兒大器也。其後安公年老窮不第。而公果貴。公晩始就學。勤苦刻厲。夜以繼日。常坐於一隅。終不起。至忘溺便。袴爲之腐。於是詞學日進。述作精工。癸丑。丁安夫人憂。制除。益自督課。以早失怙而科不逮親爲恨。親友或有先登第而來訪者。閉戶不與之語。讀書不輟。己未。中進士。完陵169_596a 公時守淸風。公省覲舟行。有詩曰。琴書行李隨緣客。雲水生涯得意鷗。文貞公見之歎曰。音韵流暢。意象無滯礙。眞達者之詩也。庚申。遂擢別試。隷承文院。壬戌。薦史局爲檢閱。例陞待敎,奉敎。移注書。復還奉敎。癸亥。陞典籍。甲子。移兵曹佐郞。遷正言。時自庚申以後。西人進用。而一隊名流。頗與宰輔。言議歧異。臺諫請鞫金煥誘脅翊戴誣告之罪。公又繼論。而朴公泰輔,吳公道一。執之愈峻。其黨大惡之。二臣皆被譴逐。公因求言應旨。疏陳數百言曰。朝廷者。四方之根本。士論者。國家之元氣也。未有士論携貳而朝著協和。169_596b 朝著不和而四方乂安者。今日士論。初豈有携貳之端。惟其論事之際。不欲苟同。自是淸朝之美事。而論議或異。則好惡生焉。好惡生而譴罰隨之。雖以一家之內。尙不能事事如意。况朝廷之上。人各異見。何可責其必同。設或苟同。不過爲衛國之大夫。何益於國事乎。今臺閣被譴之臣。要皆一代淸名之士。徒以言議之畧有異同。而遂成疑阻。一時並逐。如此而欲望士論之協和。朝著之寧靖。不已左乎。且引仁祖朝先祖文忠公箚救數三名流之斥黜。而極陳前後輩疑阻標榜之患。因其箚語。反覆論說。極其明切。上169_596c 皆嘉納。丙寅。有關西按廉之命。西路闊遠而山川峻狹。往來有人跡所不到處。自前繡衣。皆從大路而行。公盡心殫力。不避艱險。深山窮谷。無遠不到。常夜獨行。遇獵夫幾殆。公居家素脆弱。不堪勞苦。而遇國事。勇往不顧如此。十月始歸。未復命。拜持平。公曾在諫院。與同僚論吏判李翊。大臣至是非斥之。公疏辨。判府事李公尙眞入侍。有閔煕,洪宇遠酌處之言。講臣以兩司之不論劾爲斥。副校理金萬吉。又疏斥以救護欺蔽。公復拜正言。疏言一蔡確。而邢恕言之。則心在黨附。范純仁論之。則意非私護。丁卯。羅良佐仍宋169_596d 相時烈之疏。爲其師美村尹公宣擧。卞其寃。上疏被罪。公因辭職。疏陳尹宋兩家相失本末。及良佐譴罪過重。且曰。良佐之未陳疏也。大臣以勿捧爲請。欲爲鎭靖之計。及其呈疏。退却。旋又請對。遂有還入之命。至使搜覔閭閻之間。加之流竄之罪。豈有如許國體。如許事理耶。且此事雖是士林間一不幸。自朝廷觀之。不翅微事。元非關係國家。則置之可也。而遽加震怒。若治大戾。臣窃惜此處分也。若以語犯儒賢加罪。則宣擧亦一代之儒宗。頃年李景華輩極口醜詆。而未聞加以侮賢之罪。獨於良佐爲師訟寃未徹之疏。169_597a 繩以重律。尙何望鎭人心而弭國言乎。其後連拜持平。兼東學敎授。兼校書校理。己巳正月。始薦入玉堂。拜副修撰。庚午。爲養出爲陽川縣令。辛未。復爲高陽郡守。淸簡爲治。吏民愛戴。立碑以頌其蹟。癸酉冬。遭生先考完陵公憂。乙亥服闋。除輔德,副修撰,舍人。旋擢同副承旨。例轉至左副。其年冬。復求爲沃川郡守。己卯二月。入爲右副承旨。拜大司諫。公疏言臣兄方在政府。而臣又忝言議之地。其牽碍難便之端。不但爲一時盛滿之惧。乞亟改正。以安私分。上不許。於是請罷宮莊。時安州有樓盈筒。爲明禮宮所折受。而169_597b 永柔蘇湖,元堂欝億等三筒。曾屬於訓局及各衙門。本道以立番軍粮之需。啓請移屬。至是。亦爲宮家所占。公反復力爭。以爲宮家折受。本非美制。况在國家勤民之惠。備邊之道。尤不宜折給宮家。累啓蒙允。西民大賴之。六月。復拜刑曹參議。旋移大司諫。因旱應求言之旨。疏陳五事。曰立志。曰誠典學。曰克己私。曰恢聖量。曰和朝論。其克己私。畧曰。粤我宣庙朝後宮之有名號者。殆近十數。而未聞有營置第宅。王子駙馬之家。率皆樸陋淺狹。今殿下旁置數三姬侍。賜與之節。或不免過差。恩數之加。或不能中度。小則169_597c 服用之侈靡。饌品之珍奇。大則區占第宅。價踰千金。營置田莊。多占膏腴。且以近事言之。王子宮差。欲換浦於稷山之地。將掘民田數十里。本道備陳委折。該曹覆啓請停。則判付乃以詳問該宮後稟處爲敎。夫民生安保。國家榮懷。則貴爲王子。何患無田。而未及就傅之年。先占田園。已非敎義養福之道。而不顧生民之愁歎。不信道臣之啓聞。不聽有司之覆奏。只欲問於該宮。該宮亦不過憑問於宮差輩耳。彼特駔儈牟利之徒。操宮家之重。侵剝人民。利歸於身。怨歸於國。豈不痛哉。誠願夬賜明斷。特令停止。其他宮莊之169_597d 干係民隱者。亦望革罷。宮庭之間。躬率以導。以宣昭儉之化。其恢聖量。畧曰。竊覵殿下陽德過亢而有獨運輕視之意。英氣太露而少從容沉靜之味。群臣言動。或不少槪於聖心。則慢罵摧沮。無少假借。申銋之論人。以蹄齧爲事斥之。趙相愚之進言。以無識蔑禮責之。李喜茂稍失周旋於樽俎之間而加之以不敬之目。宋徵殷敷陳所懷而遽下不敢聞之敎。辭氣之間。豈不有傷於包涵之量乎。其和朝論。畧曰。東西標榜。已成百年。一隊士類。又分門戶。因微至著。積小成大。聖明懲創已事。務加鎭定。專務周容。是非不169_598a 明。此亦非破黨之道。欲望殿下澹然虛明。絶去意必之私。穆然端拱。無着偏倚之念。凡諸臣之言涉黨比者。只觀事理之當否而取舍焉。勿以雷霆之威怒而摧壓之。用人則惟其賢且才者而進之。聽言則惟其公且是者而從之。間或不祛舊習。甘心傾軋者。無論彼此。一倂退斥。明示昭旨。顯示好惡。則在庭諸臣。向風欽承。惕然改圖。孰不同歸於平蕩之域哉。上褒以忠愛而嘉納之。舘官金鎭龜。以草記請遞齋任。公疏斥以爲齋中施罰。或不無偏峻之弊。而惟當付之自中公議。本非朝家所與知。設有推上朝廷之事。169_598b 亦當委曲開諭。而未聞有摧折遞改之事。聖批乃以齋任遞改。自朝家指揮。似涉未安。更爲開諭爲敎。而擅自遞改。一任己意。堂堂大學。反爲戚臣所壞弄。庚辰冬。復入銀臺。因冬雷。與同僚陳啓。力言黨論調劑。未得其要而扶抑大偏。晉接之規。漸不如前而庶務益滯。末又論賜與之太廣。工役之漸繁。折受無節而生民日窮。陳灾不給而怨咨盈路。言多剴切。上皆嘉納。冬。拜慶尙監司。嶺南七十餘州。地大物重。素稱難治。而南接島夷。儐接應酬。尤極浩繁。文移簿書。動盈几案。雖以通才敏識素所著稱者。亦多不能裁169_598c 决。皆爲胥吏之所侵蠧。公始至。吏見其身體眇小。容貌瘦弱。咸易之。及見聽斷明審。剖析精當。老吏咸驚服。以爲百年以來所未有也。其於祛宿弊恤民隱。極加意焉。條陳其利害通變。多所狀聞。而刑獄重囚歷年所不能决者。審覈裁斷。區別其輕重而啓之。擧皆明切允當。上覽其狀而稱之曰。崔某文學。雖不及於兄。而其經濟之。才則遠過之諸道狀啓。類多糢糊。而嶺伯所陳。明白切宲。雖重獄疑讞。一見可曉。以此知其有器局也。是時。公兄文貞公。方以經術文章爲首輔。上所倚重。而公以藩任。又受上特達之知。169_598d 眷遇之意。於是益隆而有大用之意矣。公甞以爲圖籍。古有職方之掌。地形險易。道里遠近。取考於此。而公私所藏。擧皆疎畧不備。乃令褊裨之曉解經界者。掌其事。吏卒慣熟道路者。亦皆詢訪。作本道輿圖一通。嶺峽江河疆域程道。詳悉無遺。而戶口田結軍兵船艦之數。亦列於下。爲序投疏以進。壬午八月。以親病陳情。遞拜戶曹參議。旋移大司諫。癸未五月擢拜開城留守。九月。復拜平安監司。本道爲國家西北門戶。處關防之要衝。北邊闊遠。隣接絶塞。而直路當赴燕之路。商賈之所輻輳。物貨殷富。人民繁庶。一道稅169_599a 入。以備邊待客之需。例留本道。而從前莅任者。多出銀錢。貸民以取息。西藩之饒。甲於八路。利孔百出而弊亦不貲。邊郡皆武吏侵漁成習。管餉軍粮。徒有虛簿。戎伍不練。器械朽敗。公以爲官用錢穀。皆有常數。不可牟利以自潤。而猾裨奸胥。因緣乾沒。官物漸至損失而民有徵捧之苦。遂一切禁止。終公在官。不開庫門。營府無事而儲積充羨。公之爲治。以淸簡不擾爲主。而善因事通變。使不知更張而功自就。軍伍整肅。邊氓蘇息。期年之間。一路大治。乙酉瓜滿。拜大司諫。其間又拜右尹,都承旨。丙戌。拜副提學。以文貞公169_599b 在相府。兼帶史舘。法有應避之嫌。三疏辭遞。復拜同義禁,副捴管,大司成。五月拜吏曹參判,藝文提學,瓦署提調,校書提調。以籌司堂上。自丙戌至戊子三年之間。拜吏曹參判者四。大司憲者三。大司成者再。提學者一。副提學者再。其間連拜同經筵,右副賓客,戶禮兵工參判。而居亞銓者㝡久。戊子十一月。特旨授刑曹判書。公疏辭。批旨隆重而稱卿懇。卿懇。非相臣則不輒施。盖異恩也。己丑。復拜吏判。公又辭以臣兄方任元輔。而臣又忝東銓。國匀政柄。萃於一家。天道忌滿。鬼神害盈。私心危懍。已不可言。臣曾忝叨亞銓。169_599c 盖甞引斯義。累煩辭遜。今此天官之任。不比佐貳。豈可徒恃寵靈。不思歛退。乞賜改正。使免傾覆狼狽之患。三疏辭免。辭意懇至。上終不許。而勉諭益勤。批答輒稱卿懇。倚毗之眷。逈出常格。公不得已出肅。時朝論橫潰。黨習日甚。傾軋攻擊。紛然迭起。銓衡之職。尤爲猜疑指目之地。旁伺間窺。必欲斥逐而後已。前後居選部者。若不詭隨以求容。則亦多過激以取怒。公從容和衷。淸愼無私。不以愛憎好惡有所低仰於其間。其所以辨別可否。斟量輕重。隨材甄叙。莫不一循於公道。於是大爲聖明之所委信。而雖一世之169_599d 不悅公者。亦不得訾謷指斥之端。庚寅。拜刑曹判書。兼司僕提調。俄遷兵曹判書。上疏辭遞。復拜刑曹判書,左副賓客。六月。因省墓受由。歸到東郊。拜左參贊。復以病疏遞。旋除判尹。遷戶曹判書。兼濟用,繕工提調,惠廳堂上。未幾。復拜吏曹判書。兼知經筵。仍擢判義禁。上眷益隆。而忌嫉者始衆。文貞公旣屢被人言。而至是攻公者復迭起矣。顧公居官注擬。無可指議。而言者以公兄弟之在朝。或稱氣焰熏灼。或謂勢成威立。虛辭侵詆。無所不至。公雅志不欲處權要。因是屢疏力辭。上每開釋備至而痛斥言者。公不得169_600a 已承命入城。兼右賓客。復乞免。不聽。時北京報至。有海賊東搶之語。朝野惶駭。講備禦之策。上引公卿諸臣詢問。議者或以爲都城可守。北漢可保。或以爲洪福可築。紛然不一。公退而陳疏曰。諸侯有道守在四境。歷觀前史。關防所守。自有定處。如關中之崤函。荊楚之漢水。蜀都之釖閣。東吳之采石。又如我東三國鼎峙之時。各有關隘以禦外寇。高句麗以安市鴨綠爲固。百濟以炭峴白馬爲阻。新羅以竹鳥兩嶺爲重。設關屯兵。以備不虞。未聞敵兵傅都。蒼黃奔避者也。假使邊報果非虛警。此與壬丙已事。情形懸殊。盖169_600b 壬辰之亂。倭酋陰蓄射天之計。以百萬精兵。肆毒於我。丙子之變。彼有覬覦中原之志。而慮我之議其後。以大兵力。威定而歸。其不得據守都城。理勢然也。今之所虞。特一海島嘯聚之類。旣無壤地逼近之虞。又無積怨深怒之事。不過侵犯邊鄙。搶掠財貨。豈有孤軍越海直至都下之慮。莫如致力於沿海邑鎭。修繕城池。加意於津梁關隘。預設守備。殿下正宜穆然端拱。毅然持重。都城便否岩阻保守之論。更勿提起。使腹心凝固。邊圉增重。則衆情有恃。自爾安定。且言水軍多在山郡。收其番布。給代雇立。脫有緩急。將何169_600c 所恃。海邊島嶼。其數頗多。而島中居民。皆以漁採爲業。慣習波濤。善於操舟。宜命各邑各鎭。毋論公私賤。有役無役。就加團束。其田租身役。一倂蠲减。諸宮家各衙門漁箭鹽盆。並許出給以業民。庶可爲有用之兵而得力於緩急矣。此外擾民興怨之政。不可輕議。以爲鎭衆心熄奸弊之地。上皆優批嘉納。正言魚有龜疏論合啓參論人。不爲擬望。而又摭政注數事。多所臚列。盖參文貞公合啓之人。銓曹久已停擬。公入銓。以爲在私義。固不當干預於通塞。而顧身居首席。終有所不安於心。以從公銓叙之意。屢言於佐貳169_600d 及郞僚。遂有數人通擬之事。而諫臣之疏如此。憲府避辭。又謂朝廷一半之人。盡歸枳塞。趍合之類。乃遽冒通。公疏卞其事宲。且言近來搢紳之間。嫌避之路太廣。心常以爲未安。凡係恩怨。多所脫畧。人或以太無分界病之。而畢竟同歸於循私蔑公逞快私憾之科。上答以臺臣疏避一篇。精神專在於吹毛求疵擊去銓地爲敎。銓郞李縡又以新通事侵斥。公之位遇隆重。而睢盱者日益甚矣。公屢疏乞免。而皆蒙優批。至於疏三四上而得遞。辛卯。復拜判尹,刑曹判書,觀象監提調。二月。遷兵曹判書。兼軍器提調,判義禁,169_601a 左賓客。公時在墓下。因前銓曹事力辭。疏三上。上又答以前後詆斥。用意至深。世道至此。寧不慨惋。卿若因此不安。奉身而退。則不但適中其計。將至於位著殆空。寧有是哉。本兵重任。不可許改。卿其須體至意。從速上來爲敎。公又不得已入城供職。西銓掌武選。武士之求仕待補者。以千百計。因緣請託以媒進。敏於攀拊者。輒得官。其或抱材而貧殘無勢者。類多淹滯。公莅政。大革弊習。採輿誦甄材能。叙久勤振沉屈。延進武弁。問其能否與其所知有材器者。切戒以奔競苞苴。每有注擬。莫不允協公議。於是有材勇者169_601b 咸皆砥礪以待求。而干囑之俗。爲之大變。甞聞一武士長身善射。早登武擧。而貧無以求仕。三十年終不得祿。公聞之召見。遂差禁衛軍官。其人驚感。思欲報恩而無由。公甞於堂後鑿沼種蓮。朝退輒賞玩。其人家有恠石一雙。甚巧奇。卽與守奴議。置之沼側。冀公一顧。後十餘日。公偶推牎見之。問所從來。奴以宲對。公怒曰。吾以某有材而沉屈。置之幕下。乃欲以是而媚我耶。卽去其石。招入峻責而黜遣之。其人惶恐泣涕而終身以爲悔恨。此雖軍校微瑣之事。而亦足以知公爲政用人之一端矣。時議築北漢山城。公疏陳169_601c 不便之狀曰。夫山城保守之道。外險內夷。然後敵無攀緣傅近之虞。我有往來接應之便。而此則不然。內外俱險。守堞士卒。勢難周旋。此其不便者一也。山城周遭。半不及於都城。加以丘陵重複。石角槎牙。平地可居處。不及五之一。許多人民。宲無並容之勢。又况北漢當爲駐蹕之所。親兵勍卒。必將盡屬於此城。只以都民控守京城。則力分勢孤。萬無捍禦全安之理。北漢之孤絶。甚於南漢。而外城已破。獨保內城者。古未甞有也。此其不便者二也。使敵盤據都城。因糧於公私餘蓄。則此軍志所謂反客爲主之法。彼若初169_601d 不薄城。據守要害。遮截勤王之師。則我內乏粮餉之可繼。外無援兵之可恃。將何以爲計。此其不便者三也。都城士庶男女。無慮數十萬。多是朝不謀夕財利資生之類。臨急奔逬。坌集孤城。旣無自食之道。又無周給之資。不過旬日。必生變亂。此其不便者四也。且旣築城。爲他日駐駕之所。宮闕不可不建。省府不可不立。倉庫不可不置。寺刹不可不營。量其木石瓦甎。其數不億。當此國儲罄竭民生困悴之日。爲此巨役。已非細憂。矧又不可不廣置資粮。而必待糶糴斂散而後可無陳腐之患。畿邑人民。素多貧薄。而爲南漢169_602a 江都移轉之備。莫不怨苦難支。今又以北漢軍餉分給。則村閭窮窘。已無準捧之勢。石路險峻。又多顚踣之患。未及見敵。吾民先困。此爲必至之形。無窮之害。雖有智者。無以善其後矣。夫以京城咫尺。有此天險。而歷累朝數百年。終不設築者。深謀遠慮。必有所在。今日此擧。臣竊爲國家重之。時庙議已定。卒築城置餉。其後斂散之弊。果如公言。壬辰春庭試。公以藝文提學參試。司諫權疏論試場之濫雜。有試官傔從査問之擧。公與諸試官待命。而大司諫李宜顯又論出題事。至以兩提學接膝相議。非他試官所與聞爲169_602b言。時弘文提學李墪主文。因承牌還家。欲搆成其罪。而引出題事以成案。故並及於公而侵詆之。公疏卞事狀。以爲入參諸臣。卽以班次俯伏殿上。臣之坐次。居西壁之首。金宇杭,李彦綱。循次而坐。李墪坐於其下。相去頗遠。雖欲接膝。固不可得。而墪搜閱在前冊子。拈示彦綱。彦綱傳示於臣。卽龔遂拜水衡事也。臣以爲易出東作。若以王生拜水衡丞爲題。則似不蒙塵。以此稟議於命官。元無與墪商確酬酢之事。而必欲擠之罔測之地。以爲一刺並中之計。獨不念聖鑑之在上而天日之可畏耶。上優批開釋。而命勿169_602c 待罪。其後臺章持墪益急。以承牌還家之事。墪竟竄配。而諸試官亦罷職。纔經月。卽命收叙。仍差籌司惠局之任。旋拜刑曹判書,司譯提調,藝文提學。移右參贊。公引試事。屢上章力辭。復拜判義禁。時因大臣所啓。有本府罪囚問議大臣別單啓下之敎。公以爲此雖出於省約文書。以便睿覽之意。而王府體例。雖微眚薄過。必請刑推。議處照律。次第擧行。所以重事。面請依前已行之規。循次入啓。上卽從之。公於莅官。務必謹守成規。不欲輕改舊章。而於議讞之際。尤所愼重。俄兼宗簿提調,承文提調,知經筵,內資提調,169_602d 右賓客。乙未。拜京畿監司。丙申。入爲右賓客,內局提調,刑曹判書,左右參贊,吏曹判書。時上候長未寧。威怒有時非常。以藥院事。忽有嚴敎。又以政注間事未畢都政。有特罷之命。出住郊舍。八月。特除江華留守。疏批。諭以藥院下敎悔悟之意。公惶恐入城。肅謝赴任。丁酉。召拜兵曹判書。兼判義禁,知春秋,軍器,典牲提調。未幾。以親病辭職。時大夫人年踰九耋。常有疾患。章屢上辭甚懇切。而上終不許。西銓闕貟。特令次官問議差出。公又辭以佐貳事權。雖不及於長席。均是一曹之官。因下敎。臨政擬望。有何不可。169_603a 而必使就問於在家之微臣。臣心惶悚。已不暇言。揆以國體。恐不當如是。時春宮代理答批。又不許。盖倚毗之篤。禮遇之隆。敻絶百僚。雖黨人熾張。排軋異己。位著之間。殆乎幾空。而獨於公眷顧。終始無替。巧詆極訐而不得售。可見公結知之深。有非群小所能間也。戊戌。連除禮曹判書,判尹,奉常提調。八月。遭內艱。庚子服除。拜兵曹判書。時肅廟賓天。景庙新登極。公以臣子之義。不敢固辭。一疏卽出供職。參都目親政。又拜弘文提學,知春秋,判義禁,承文提調。辛丑移拜吏曹判書。掌令朴致遠劾公以用意無嚴。濁169_603b 亂朝廷。而因擧丙申都政時事。以爲先大王深惡痛斥。特下罷職之命。厥後終不復授以銓衡之任云云。都政罷職。特出於一時之敎。旋卽收叙。畀以江都之任。才及周年。又有西銓之命。前後疏批。開釋備至。柄用如故。中適居憂。不得復授東銓。而黨人爲說至此。亦可謂矯誣之甚矣。玉堂處置。遞差致遠。而獻納徐命均疏斥致遠。答以憂時進言。予用嘉尙。公屢疏乞免。時公兼帶經筵,史局,藥院,弘提。而復差出疆之任。並皆力辭。答以此等風習。予實痛惋。决不可以此引入。中其逐去之計。卿以寬大之量。不必深嫌爲敎。169_603c 是時。元老宿德。幾盡凋喪。而獨公巋然在朝。爲上下之所屬望。黨人所以憚公者。實在於此。其百計搆捏。必欲斥逐而後已。公旣以臺評峻發。固辭不出。而八月。大臣卿宰。齊會賓廳。仍爲入侍。定建儲之策。公又以情勢。不得承牌。臺論果發。以公及禮判宋相琦偃然在家。違牌不進。請罷職。公於是出城。住東郊別墅。臺論旋停。而公又再疏力辭。亦皆優批不許。後因相臣筵奏。得遞。旋除左參贊。入城參冊封賀班。執義趙聖復疏請引接臣僚之際。東宮傍坐參聽。公搆疏論其不可。以闕門已閉。不得上。十月初十日。忽下169_603d 備忘。有聽政之擧。日暮。公始聞之。卽詣闕請對。時已三更。諸臣數人隨至。上命留門引見。公進曰。臣伏見備忘記。不勝驚惶。雖已夜深。敢此請對矣。自古帝王家。或有如許處分。皆由於人主春秋遅暮。或在位日久。勞편001成疾。積年沈痼。不得已而爲之。今我殿下。以春秋則纔過三十。以在位則未滿一年。以疾病則臣待罪藥院問安。批答每以無事爲敎。若請入診則以別無大段疾患。或以時無形顯之症爲答。所謂不安之節。不過痰火引飮小便頻數而已。此豈沈痼之篤疾乎。無此三事。而卽位之元年。猝下此169_604a 敎。先大王付托之意。果安在哉。况我春宮邸下。引接宮僚。至於涕泣。冊禮纔過一旬。乃有此擧。春宮情理。安得不如此乎。且言趙聖復疏。以傍坐參聽。講確可否爲言。微末臺官。何敢發此言乎。宜施屛裔之典。聖復疏批纔下而有此備忘。莫重莫大之事。因幺麽一人之言。猝然輕擧而不以爲難。今日國事。更無可恃矣。曾在先朝乙酉冬。有傳禪之敎。其時公卿百官。伏閤苦爭。臣以大諫入侍爭執。終至回天。先大王聽納之美。至今頌之。聽政與傳禪。雖曰有間。玆豈非殿下之所當法乎。今若快回成命。則上可169_604b 以慰先王在天之靈。中可以安春宮崩迫之情。下可以解臣民抑欝之心矣。反復數百言。懇惻開陳。上敎曰。重臣之言。若是縷縷。依允。公卽起收涕曰。今承此敎。不覺感泣。死無所恨矣。退出。夜已四更四点矣。公沒後。吳光運挽公之詩。有曰。辛丑邦家隻手支。四更三点淚垂垂。乾坤震蕩排閽急。星月昭森下殿遅。時以爲實錄云。聽政還收之後。凶黨益忿恚。憲府發啓。請罪當該承旨曰。備忘之下。所當急報大臣諸宰。齊會力爭。而不此之爲。乃反受人指揮。深夜啓請。續續請對。及至大臣來到。終不啓請留門。致令彷徨169_604c 路歧云。盖彼輩聞公請對。乃始來詣。則備忘已爲還收。無可請對。而巧餙爲說。如見肺肝。其無嚴如此。右議政李健命又上箚云。朝廷體貌。至嚴且重。雖是急遽之中。不宜放忽。一重臣深夜請對。有異常䂓。而政院之遽然啓請。未免率爾。今其所言。出於匡救處分。終歸至當。而後弊所關。不可置之。當該承宣。宜加警責。持平李瑜,正言愼無逸。又陳所懷。以謂乘諸臣之未到。潛俟挺出。忙急登對。逆杜諸人力爭之路。要衒自家獨辦之跡。掌令朴致遠又發啓請削黜。以謂傳禪與代理。截然有異。而輒以今日代理之命。指爲乙169_604d 酉傳禪之事。以爲公罪。公之奏對說話。明白可巧。而搆捏抑勒。爲此不成說之語。盖備忘還收。旣不可以爲罪。則或以深夜求對爲斥。或以不少遅待爲詆。終至於以代理爲傳禪爲罪。始則請罷承宣。末又請削公職。黃海監司李㙫疏言前參贊崔某。獨先入對。果何罪也。所欲言者。何等大事。身旣到闕。唯當卽時呼籲。以冀反汗。沁沁墨墨。遅待它人。夫豈分義之所宜乎。苟有若是者。誠可誅責也。今反以不如是爲罪。此非常情之所可度也。無論先後。但得回天。斯爲至幸。獨辦與共辦。其暇論乎。至謂備忘未下之前。先到闕169_605a 下。雖三尺童子。其謂信之乎。十二月。兵判李晩成。特旨改差。而授公兵判。公時在郊舍。下諭敦召。以縣道上章辭職。溫批催促。未數日。命卜相。艮齋崔公及公。一時升拜左右相。公方陳疏力辭。而猝有逆䆠尙儉之變。東宮引接宮僚。至欲辭位。而大妣殿諺敎。下于賓廳。公聞之震驚。卽入城肅謝。因與大臣諸臣。請對入侍。極陳東宮慰安之道。臚列䆠寺惎間之罪。言甚懇切。上卽命宮人及兩䆠出付有司正法。公又陳箚。請先嚴鞫得情。明正典刑。上批以宮人罪狀。旣有慈聖諺敎批下之事。兩䆠罪狀。東宮169_605b 引接宮僚時所言之事。予亦洞知。更無可問之事。依傳敎擧行。於是老黨乘隙而起。以不請鞫而徑先正法爲咎。譁然攻斥。語多危怕。公上箚自引。上又答曰。今番處分。予心所爲。於卿小無所失。卿其安心勿辭。甞因入侍筵臣有發私親追報之論。下詢大臣。公對以在殿下情理。不可無追報之道。臣意則別立祠宇。祭享之需。令該司封進。立稱號以重事體。恐合情禮。更議於諸大臣。處之宜矣。司果鄭亨益上疏。指斥以三年無改繼志述事爲言。公箚卞曰。先儒之言曰。天下豈有無母之人乎。又曰。子之於母。初無絶169_605c 道。宗廟之中。不以恩掩義。閨門之內。不以義勝恩。以此觀之。生則致奉養之節。死則盡追報之誠。此固天理人情所不容已。自古人君遭變處義之道。必如是而後恩義兩盡。情禮無歉。若如亨益之言。則必使聖上絶所生之恩。然後方可快於心。天下寧有是理。生而養。必有宮室。死而祭。豈闕祠屋。旣當有祠屋。仍舊則可。新建則不可云者。又何說也。所謂立號。不過別立題主之名號而已。至若先朝處分。初未甞萌心於改易。此於三年無改繼志述事之義。有何毫分相妨也。臣謹稽璿源譜略。王子名下。禧嬪出三字。此169_605d 必當時監董之臣。仰稟於先王而刊行。頒賜臣僚。人無不見。而亨益未甞一言及此。乃於殿下嗣服之後。建號立祠。情理之所必行。而了不關涉於先朝處分之事。獨以違先志改處分。勒成罪案。使廷臣不敢開口。聖上不得措手。是誠何心哉。壬寅三月。逆獄大起。公與首相參鞠。方按問之際。罪人白望欲沮敗獄事。忽以危言引獄官。侵及於按獄大臣。公與僚相。卽出待命於金吾門外。上遣史官。諭以勿待命而安心參鞠。復陳箚子。仰暴危懇。上答以凶人侵攻之言。不足深嫌。安心勿辭。速出參鞠爲敎。而復169_606a 遣史官敦召。公不得已趍詣賓廳請對。欲陳其委折。行司直申銋急投一疏。深攻按獄之失。至謂名入賊招。不爲請拿。移鞠本府。又異常規。又曰。按獄大臣。又爲待命。其亦緊出於罪人之招。槩可知矣。一番卞正虛實。在所不已。盖銋以八十老臣。受嗾而爲此疏。其指與白望一套。公未及登對。自閤門逬退上箚。卞其事狀。且言臣受兩朝不世之恩遇。致位至此。區區寸丹。天日下燭。幺麽逆竪死中求生之言。豈足以白地誣汚。而重臣乃云虛實可以對卞而知。痛寃之極。直欲無生。上答批開釋史官。敦召不置。公念國家169_606b 多事。鞠獄嚴急。不可以情勢前却。復出視事參鞠。獄旣不懾於凶鋒之危怖而有所回避。又不撓於時議之峻激而有所浮動。從容審察。議讞允當。承欵伏法之外。其餘干連證參之類。必皆務從平恕。依法裁斷。使無連及寃濫之患。前後酌處數十人。臺啓隨發。輒復還收。或陳箚論列。或登筵稟達。非止一再。金有慶名出賊招。至於就拿。而分揀放釋。洪錫輔屢經刑訊。久因牢獄。而指導生路。啓達箚陳。竟得免死。李晩成,洪啓廸等。亦皆申救酌處。臺啓以李晩成島配爲不可。仍論訓局禁營內遷與出外之爲可疑。又言易置169_606c 之擧。出於昌集。而就章又狼籍承欵。又以有一名官於三司會坐之中。傳洪致中與晩成問答之語。請以此兩欵。添入問目。嚴鞫得情。諭啓蒙允。公箚陳罪人鞫問。必以告者之言。或以他囚所供。或拈出渠之供辭中違端。發爲問目。自是流來之䂓。今若以外人私相酬酢。添入問目。則不但古無其例。且啓日後無窮之弊。臣意宰臣問答一欵。勿入於問目中。恐合按獄之軆。上允之。又請金雲澤停刑箚曰。鞫獄按治之道。自有次第。必須詞證具備。線絡分明。然後方始請刑。此乃自前通行之例也。行藥之說。出於盛節之招。169_606d 而崇祚,仁佐,義賓,德峻等。皆以灰金腹心。無不詳知云。故屢次嚴刑。相繼杖斃。而無言及於雲澤之事。階梯已絶。更無盤詰之處。只以春澤之弟慣習惡逆之謀。徑加刑訊。則雖快於一時之輿情。不但有欠於按獄之軆。亦將啓日後無窮之弊。至於趙洽云云之說。事關先朝。非今日臣子之所敢發問於罪人者。故獨對之說。屢出於諸賊之招。而臣與參鞫諸臣相議。初不提論於議啓中矣。以此添入於問目云者。非臣始慮之所及也。上答以金雲澤請刑。誠得臺軆爲敎。至於鞫招所出外影諸人。其數甚多。公慮其蔓延。169_607a 終不請拿。喜之母諺札。陰謀昭著。而不欲以諺札成獄。力主不問之議。金一觀承服時。以推戴人之三變其名。稱兵日子之相左。不爲載錄於議啓中。器之,龍澤。請勿追戮。麟重請勿孥籍。又皆考法例。慮後弊無所低仰。公之一遵三尺。按獄公正。盖如此。李頤命,金昌集。臺啓峻發。請正邦刑。是時。兩人子姪。多已承欵伏法。而聯箚之語。又屢出於爰辭。時議益嚴。公以爲聯箚節目。罪固罔赦。而以此深論。終有投鼠忌器之嫌。故議罪之際。多從寬平。初奏以不待按問。徑先處斷。有違法例。請拿鞫後正法。而繼又上箚。言厥罪昭169_607b 著。旣無可生之道。而曾經三事之人。施以栲掠之刑。終有所不忍。况曾前後命。多及於中道。遵先朝已行之例。取盤水加釖之義。參酌處分。似或得宜。上答曰。箚辭儘好。勿施栲掠之刑。因政院啓稟。有加釖之命。公又上箚言。加釖二字。本意不過泛引古義而已。若遵先朝已行之例云者。盖指賜藥之意也。上又答曰。箚辭得宜。依施。於是群議喧譁。謂公緩於討逆。臺閣交口侵斥。公與僚相。方坐鞫廳。又逬出引罪。上箚乞免。上答曰。臺言侵斥。何足爲嫌。卿其安心勿辭。三司發趙泰采按律之論。公屢上箚救之。又169_607c 因獄囚之言。以明其不預陰秘之謀。趙聖復亦以臺啓拿鞫。公以爲此與逆獄有異。渠雖無狀。職是臺官。一向嚴刑。終至殞斃。非聖世之美事。請參酌。絶島圍籬安置。上初允之。而又因臺啓拿來。公又言聖復之罪。俱在原疏。別無鉤得隱情之事。更杖嚴問。恐違鞫廳按問之䂓。還發島棘。恐不失爲聖朝寬大之典。上又允之。其後筵臣陳達。又從臺啓。公又上箚陳論。上答曰。趙聖復訊問。誠甚得宜。到今還收。未知其可也。盖是時三司年少之論。日漸譏激。凡公於獄事議處啓達箚陳。臺閣輒隨而發啓。斥公以緩獄。169_607d 侵詆之章。陳辨之箚。日交公車。而最後持平具命奎之疏。尤極臚列。專事詬辱。有曰臺諫力而拘諸獄。大臣暫而免諸國。末又以獄囚自出爲言。盖受一鏡之嗾而爲此疏云。上答曰。侵斥大臣。略無顧籍。良可異也。公徑出城外。連上疏辭免。答批優渥。承旨史官。相繼敦諭。最後疏批。有曰。噫。今日是何等時耶。歲飢民困。國勢無可恃之形。言念及此。中夜無寐。以卿休休之量。當岌嶪之秋。豈忍袖手恝視如平常乎。須念相須之義。勿復以情勢爲辭。卽速入來。用副至望。因遣承旨。敦諭偕來。公又不得已入城。時筵臣及勳府169_608a 堂上。屢以錄勳事陳達。公引中宗朝告變人盧永孫單勳例爲對。金一鏡尤欲錄獄官之勳。盛言單勳之不成體貌。公於筵中。嚴辭峻斥。以爲渠欲自錄而不避嫌耶。又言若如此。則不如初不錄勳之爲愈。吏曹參議李眞儒請對單付。金東弼爲光州牧使。柳壽垣爲禮安縣監。朴徵賓曾已補外。而以其程道之太遠。移付近邑。時金東弼疏論一鏡敎文之引喩不當。柳壽垣疏斥領相筵奏之失。而又有飭厲右相盡心鞫事等語。方在罷職中。朴徵賓則劾尹公淳而補外。公入侍奏言。補外之䂓。隨其外窠。擬望收點。若非自169_608b 上特命。曾無作窠單付之例。刱出新䂓。果於自用。有欠謹愼之道。曾在癸亥年間。故相臣金錫胄請黜三學士而指窠遠補。公議駭歎。豈意今日以佐貳之官。反效此習。不可無䂓警之道。請遞其本職。以懲其輕銳自用之失。臺啓以犯逆罪人父子兄弟。有職名者追奪。書院者毁撤黜享。公引璿源譜略後本之吳端還書職名。故相朴淳其孽子犯逆之後。無輟享之事爲證。論其不可上皆允從。盖公不爲已甚之論。而援據古例。指陳合宜。皆此類也。公旣積困人言。事不如意。雖黽勉入城。而不欲復當獄事。每於筵對。輒陳169_608c 悃誠。以爲獄囚自出。何等罪名。而豈可以按治之無人。晏然自當。且念臣曾以此罪人等酌處之意。陳箚筵達。皆已蒙允。雖仍臺啓還收。終至參鞫。若臣本意。如前無異。今此餘囚。皆是枝葉大獄之餘。或以一二倖免。似不至失刑。而實爲聖上好生之德。又甞因禁府。設鞫命下。以迷滯之見。終難自回。難安之勢。與前無異力辭。及因春塘入侍。又言臣於前日。累陳意見。凡獄囚按問。自有格例。雖名出賊招之類。一推再推。至於面質。必待情窮理屈而方爲限死加刑。今此罪人等。或楷梯路絶。或情迹難明。一向嚴刑有乖法169_608d 意。上多允從。公之前後所酌處者。雖因臺啓還鞫。而終始爭論。全活甚多。癸卯。升左議政。兼世弟傅,奉常,司甕都提調。公時年七十。又入耆社。上素信公。倚仗甚篤。而一日入侍。忽下嚴敎。人咸恠之。公惶恐逬退。卽出城陳章待罪。上答曰。省疏具悉卿懇。因一時之火。有過當之擧。筵中旣示悔悟之端。以卿休休之量。何足掛懷。卿其安心勿辭。從速入來。以副孤望。其於再疏。又答曰。卿之情勢。雖曰難安。前旨開釋。竭盡無蘊。退處荒村。恝視國事。是何情志。須體至意。斯速入來。勉副孤望。仍遣承旨傳諭偕來。三疏之169_609a 批。又答曰。前席下敎。因一時之火。則以卿休休之量。何足介滯乎。須軆心腹之辭。安心勿辭。幡然造朝。用慰思想之懷。公惶恐不敢苦辭。復入城。前此兩相。皆在外。唯公一人居位。數年之間。獨當勞劇。公年旣耆艾。竭力殄瘁。至是而病已深矣。甲辰正月。患痢疾。已而少間。至二月復劇。引人言上章辭位。上答曰。卿之所患彌留。深用慮念。卿以世祿之臣。倚仗王室。豈可以一時人言。過自引嫌。甘陷辜恩之歸哉。須軆至意。安心勿辭。卽遣御醫診視。內隷問疾。竟於是月二十四日。考終于皇華坊聚賢洞第之正寢。享年七十169_609b 一。訃聞。上震悼。下敎曰。新喪賢德。震悼之懷。曷可云喩。棺板一部。令該署卽爲擇送。禮葬等事。亦卽擧行。祿俸限三年仍給。以表予意。東宮卽於其日。亦擧哀。因召宮僚。諭以師傅之喪。臨吊之意。因稟于大朝。遂於二十七日。乘輿幸臨。將入。下令曰。乘輿至堂前。有欠於待師傅之禮。至中門外降輿。宮臣達以儀注。旣以至堂降輿爲言。且自中門至堂前。其間稍遠。不宜步入。邸下至靈前再拜後。就坐哭畢。令遺孤陞堂。邸下離坐。就執手撫慰曰。先傅歷事兩朝。忠勤已著。爲國元老。眷遇靡替。不意今日遽爾169_609c 喪逝。非但大朝震悼罙深。今予此來。只拜靈筵。不見儀形。追念師傅之義。一倍痛悼矣。又令曰。毁不滅性。聖人所戒。强進粥飮。終始支保。是予所望矣。於是闔門感泣。其非常之數。曠絶之恩。國朝以來所稀有。惟象村,月沙與公爲三人而已。以是年某月某日。禮葬于楊州上道面先塋後麓枕艮之原。公淸羸弱小。體不勝衣。而宇量寬弘。執守貞固。平生不喜皎厲浮華之習。專務精約切實之用。而安靜詳審。識慮深長。顧退然若無能。不事交遊。故人莫有知者。旣登朝。在侍從之列。唯居官盡職。恪謹自守。而未甞與朋169_609d 儕上下追逐。談議臧否。不甚爲名論所推許。及名位漸顯。履歷漸廣。臨民處事。聲績茂著。由是衆望漸服。謂公長於幹局。練於事務。有廊廟之才。而猶未能知公之蘊也。及夫進升台鼎。猝當變故。勤勞獨賢。應酬萬端。而事有妨碍。議多齟齬。公孤立一意。不動聲色。而裁斷鎭定。各得其宜。終能使兩宮乂安。宗社鞏固。先輩有識。始推公忱誠局量。眞可謂社稷之臣矣。顧知之者寡而毁之者衆。卒之身後齮齕五十餘年。躓於世路之險巇。困於黨人之搆陷。使公心事行迹。不得暴著於世。豈不悲哉。公與艮齋崔公少相169_610a 好。推重甚深。及與之同在相位。雖出處各異而議畧同。艮齋甞於辭疏。有曰。臣與右相少同里閈。結髮從遊。今至白首。平生心期。素相諳悉。今右相在朝。盡心國事。如臣已退之蹤。何用復出爲哉。盖以范蜀公自處。而以司馬溫公期公也。贊成鄭公齊斗。亦與公相許。甞論公兄弟。謂文貞公文章德業。近世罕有。而尤稱公忠誠器局。有先祖文忠公遺風云。公居相位。與雲谷李公光佐,謙齋趙公泰億。年輩懸殊。而引與同升。與共國事。兩公常深服公。其於後輩。獨愛白下尹公淳。每與之議可否决是非。尹公亦盡心事之。其後169_610b 梧川李公宗城,靈城朴公文秀。皆慕仰欽服。循襲緖餘。立朝持論。一以爲準。盖公處辛壬之事。周旋於艱難之際。殫竭於危險之途。不計目前之顚沛。不顧日後之禍患。惟知爲聖躬討逆。以扶宗社。爲東宮保護。以安國本。其苦心血誠。有足以質神明而貫金石。若其裁制時輩峻激之論。弭息黨人參夷之禍。精審之慮。欽恤之意。一出於至公無私。又非尋常淺見之所能識也。然方其在位當事。謗讟朋興。侵斥沓至。其疏箚辨陳。殆乎無日無之。而引入乞免。未甞一月安於朝。及其身沒事過之後。黨人之所以搆罪抵169_610c 釁。罔有紀極。雖其攻斥之端各自相反。而公之生前身後。積困於多口。其報國之忠。處事之公。至今掩蔽而不章。丁未初。謙齋趙公於筵席請賜祭曰。臣於故相臣崔某事。窃有所懷。崔某平日公平忠勤。受知肅廟。爲國有誠矣。頃年臨吊。近日復官。俱出異數。羣下孰不感歎。崔某於辛丑冬。拜相職纔數日。夜聞逆儉之變。驚惶罔措。不顧廉隅。片時出肅。請對極陳。卽此而其忠誠可見。至於鞫獄。事體自別。固難容議。而外影諸人。慮其蔓延。終不請拿。臺諫欲論啓。則力挽而止。此外不爲請拿者亦多。喜之母諺札。不爲成169_610d 獄。一觀招辭。不爲載錄。觀此數事。亦可知其用心。向日合啓勒捧賊招云者。宲宲是欺天也。乕龍處置之失着。實如前日宋寅明之所達賊招勿書。與柳孝立獄事。獄官不書干犯之語。同一苦心。一毫非出於欲置闇。此則可證天日矣。頃日聖上以局量爲敎。而崔某自少以身小量大稱之。小臣所見。則局量不如古人。故當事不能周思運轉。以致失着者有之。而至其爲國苦心。向殿下保護之至誠。實爲可質神明。上卽允之。趙相文命。主蕩平之論。多毁短諸公而獨稱公。公忠善處事。欲一陳白於筵中而未果。庚169_611a 申焚案之時。宋相寅明奏曰。當時大臣。若有一毫査滓。殿下豈得有今日。上首肯曰。予已知之。丙寅追奪時。金有慶聞之愕然曰。崔相有何罪。而又爲追奪乎。乙亥追奪時。李台重又謂人曰。吾輩之所謂懲討。不過一時偏論。豈眞以爲有罪乎。今於數十年之後。又有此擧。亦太甚矣。盖雖在岐論之人。異色之類。亦時有公心之未泯者。其言如此。而一邊報復之計。詆誣之說。已成膠固。氣勢所驅。擧世靡然。後出之輩。不復考其本末。隨聲逐影。動輒以隄防爲言。謂公當時之事。眞若可以爲罪者。豈不慟哉。惟我先大王169_611b 日月之明。洞悉忠欵。眷遇特隆。臨吊之擧。已爲不世之聖恩。而登極之後。筵敎備忘。多稱道褒嘉之語。甞敎以故相身雖小而量則大。又曰。晏嬰身雖小。爲齊名相。前後絲綸。不可悉記。顧微賤之蹤。無由祥聞而備錄。以爲傳家之榮。雖因朝局變換。黨燄熾盛。屢有追削之典。而旋復復官。爵秩如故。丁未賜祭之時。下敎曰。向來合啓。架虛鑿空。情外事。吾豈不知。崔相事。常用慨然。素多局量。吾知其不爲年少臺官所廹。黃覇相業。損於治郡時。似是氣衰而然。晏嬰身雖小。爲古賢輔。如彼之人。末稍如此。心常慨然。吾之致吊169_611c 時。招致崔昌億而慰諭矣。追奪後判若待二人。每恐人謂不誠信。然今番處分。非一時換局。欲使後人知其事也。壬申復官時。備忘有曰。至於崔某同時處分。意亦在焉。拜相後處義。非予初料故也。而辛壬事。黨人之與泰耈同搆。旣與其時爲相。故無一遺。而此乃報復之義也。頃年當其末梢。與泰耈大有間焉。同時診筵。已知其心。春塘帳殿。亦有見者。于今爲此人與泰耈同爲復職。一邊必不服。以泰耈之故。此人亦不復職。一邊亦必不服。然彼此不服。有何拘乎。但以予之絃韋處之。故相崔某。特復其官。戊子。又書復官。傳169_611d 旨筵中。有世孫甚明他日必爲之之敎。而廷臣爭執。遂寢不下。及至壬辰。竟伸前命。夬雪幽寃。先大王隆恩厚德。與天無極。九泉之下。必將飮泣而含感。闔門大小。只有攢手頌祝而已。尙何言哉。公性旣恬退。處以簡靜。未甞經營於事務。馳騖於言議。常病文貞公有所作爲。其在西藩。貽書勉戒曰。處身之方。莫如不出。謀國之道。莫如不爲。觀公此言。似若守分占便。無意於斯世者。及其臨大事當大難。徑情直前。懇懇之忠。不能自已。而其所處置。又皆周詳精密。深憂遠識。卓出於衆言眩惑之表。始壬寅獄起。其所干169_612a 連。無非世室巨族公卿宰列之類。而又其憑籍疑亂之辭。極其危怖。人心莫不扼腕齊憤。而一二有知計者。或慮日後之有報復。預爲引避之謀。尹公勸公勿當獄事曰。南人之積怒於彼輩久矣。討逆治獄。必無不盡。公宜辭退勿與。袖手傍觀。徐起而論其得失是非。則置身於穩便之地。而亦可無他日之患。公歎曰。是何言歟。吾受兩朝厚恩。致位至此。國有大獄。乃欲爲便身之圖。避而不當。是豈忠臣事君之道。且時輩麁疎。不顧前後。乘憤逞快。必至於不收拾之域。將置國事於何地耶。尹公於是深服其言。每語不肖兄169_612b弟曰。大監之賢。非計較利害之說所能動也。乕龍告變之辭。語有犯於不敢言之地。公啓請勿書。李公匡德。因從兄。勸公治其凶言之罪。公答曰。少年何爲不見事而輕易妄論耶。獄事方張。鞫訊嚴急。先治告者。旣甚難處。况欲治凶言之罪。則自知必死。爲死中求生之計。何所不至。宜姑隱忍。以待他日之處置。李公怳然驚服。以爲不可及。時一鏡勢甚張。及敎文凶言事出。公付標請改。尹公又勸公上疏攻其罪。公曰。君言是也。予豈不知。今若攻之。則必多有起而救之者。他日將並與救之者而汚衊。吾不忍爲也。且彼雖有169_612c 氣勢。而名位猶未高。吾在相位。廟薦在手。若不陞擢撿擬。彼勢將自沮。亦不敢肆行臆。故公之在位。遠接伴送使前後陞卿秩者九人。終不一及於末副之擬。一鏡以是深憾。至有製疏嗾劾之擧。尹公亦嘗歎服不已。此事惟二公知之。他人未有知者。其居官也。綜達事務。曉暢物情。所居之職。事皆整理。及在廊廟當國家多事之時。雖日不暇給。而罷經理設廳料販之䂓。禁貢物年條賣買之弊。復受價剋减之數。原還穀逋負之責。凡在斂財興利之事。一皆杜絶。弛以與民。當此之時。新經大喪。勞費浩廣。客使相續。應169_612d 酬繁多。而經用有裕。民生樂業。尤能引大軆守成䂓。不輕改作。而訏謨籌畫之間。其所區處裁决。莫不曲當其宜。皆可以爲法。宋相寅明嘗語人曰。崔相公經濟之材。先輩莫及。至今備局所遵守者。皆其遺法也。其接物也。寬和有容。不責苛細。嘗在嶺營。初至視事。裨校列侍。吏卒滿前。營妓見公體小。在傍目笑之。幕裨怒而請其罪。公笑曰。我自貌寢。其笑固無足恠。何足罪乎。其在關西。甞當食啓器。有大蜈蚣偃於飯上。營中震駭無人色。公顔色不變。徐以箸攝置盤中。進飯如常。人莫測其意。及食畢。命拿食婢以入。問曰。汝169_613a 夫誰也。對曰。官廳吏也。又問汝夫有幾妻。對曰。有二妻。公復命拿其本妻以來。又問曰。汝何敢欲陷食婢而置毒耶。其女卽驚吐實。公卽曰。汝罪當死。今姑貰之。後勿爾。又拿其夫入。命待其二妻如一。於是一營大驚以爲神。公爲判書時。居憂在家。里有禁軍。適送馬遠出。而猝有習陣之令。隣盲崔姓家有馬。嘗借騎。至是。使其奴又往借之。其奴癡。至公家尋問。適日暮人散。公獨坐廳。隅見而問之。知其爲習陣借馬。卽命解廐馬牽去。其人曉乘而赴習陣。及天明。始知其非盲家馬。問其奴大駭。卽馳到公門外。伏地請罪。公召169_613b 入謂之曰。汝與吾隣居有年矣。借馬何足恠乎。且軍法至嚴。若日暮不得馬。以致後期。則汝當死。吾以是借之。衆皆服公之雅量偉度。非人之所能及也。於是人皆傳說。至流聞禁中。先大王甞屢道其事而稱其有局量。公又嘗入侍。脫耳掩置閤門外磚石。先大王時在冲年。戱持去入內。公退出尋不得。肅廟卽使掖隷取給之。先大王每於筵席。歎古宰相簡儉之風。其處身也。簡率儉約。不喜華靡。雖爵位崇顯。祿廩豐腆。而起居飮食。一如布素。田園不增。垣屋不修。家之有無。未嘗問焉。婢僕有往往不識其名者。尤169_613c 不欲以煩弊勞人。寢興之際。不須指使。嘗患痢。一夜數十起。侍者皆深睡。獨起如廁。至於顚踣。有田在湖南之靈光地。與牧場接境。牧子甞與之爭經界。公聞之曰。古人有毁家爲國者。吾今在廊庙之位。豈惜數頃之田而與民爭利耶。並割數十石地以與之。立朝四十餘年。未嘗與人爭競。標榜色目之說。不涉於口。愛憎好惡之私。不滯於胸。其於譏詆抨彈之至。不見有忿厲之色。自引之章。不以辭氣相加。只辨釋事理。明其是非而已。居官盡職。不擇劇易。公退之暇。閉戶讀書。晩節當國。又値鞫獄。按問訊治之勞。文案議啓169_613d 之煩。終日不休。有不堪其劇。而罷歸之後。夷然若無事。輒對案披書。誦讀不倦。不爲文學詞章。而經史百家。用工勤篤。奏箚明暢。辭理俱到。詩亦流麗精緻。文貞公方以文章服一世。而其子副學公有盛名。文學之士。咸趍仰之。公居其間。未嘗矜衒誇詡。而疏章之作。贐挽之篇。往往膾炙人口。文苑之望。世皆推許。再入剡薦。而適値文貞公在首席。竟以次點而不得與焉。公內行淳備。誠孝篤至。早喪安夫人。嘗以不逮養爲慽。事完陵公。左右無違。所後大夫人年踰九旬。公已位高年老。而奉養之節。躬執勞役。衣服飮食。皆169_614a 自劑量。溺溷垢汚。手親洗滌。公退之暇。非接大賓。未甞暫離。手執書帙。咿唔其側。及其遭艱。哭泣哀慕。雖隆寒大暑。不脫縗絰。人皆歎公之老而篤孝。事文貞公極其誠。待姊妹盡其愛。少妹申氏婦。常與公夫人爭分産相詰。公自外來問知。卽割而歸之無難色。徑出外舍。讀書不輟。夫人服公之襟懷夷曠。公雖和易。而居家方嚴。待子弟尤謹禮節。副學公名重而位顯。至有少過。輒呵責不置。文貞公甞戒侍妾曰。下宅大監性嚴。汝切宜恭愼。勿見過。其見憚如此。公甞自號損窩。盖取易損卦之義。居家處事。一以約損爲主。平169_614b 生所著文字。隨手散逸。未甞收錄。遺命勿刊文集。勿竪神道碑。勿請諡。盖公素志然也。夫人靈山辛氏。司甕參奉輔辟之女。判府事啓榮之曾孫。明達剛果。閨門整肅。奉舅姑友娣姒。咸有法則。恪官箴正家道。賙窮睦親。皆有內助焉。宗黨莫不歸仰。擧二男。夭。取伯兄正郞公季子▣▣爲後以蔭仕官至淸州牧使。孫男三人。長守仁氷庫別檢。次守溫,守元。皆生員。女一人。適士人申渘。守仁無子。取守元之子弘敬爲後。女適趙翰逵。早夭。守溫一子弘信。二女。長適李永源。早夭。次適權楘。守元一子弘敬。申氏婦早沒無後。嗚呼。169_614c 先祖之沒。已過五十有五年。日月寢遠。事蹟逾昧。前輩故老。皆已淪沒。家藏文字。亦多散失。大懼先祖之德業事行無可考信。謹摭家庭之所聞見。略加叙次如右。爲子孫之觀焉。
公體貌弱小。而氣像安重。其在開城。北使見之驚服。謂譯人曰。汝國宰相。在開城耳。及爲相。北使至。雲谷李公爲右相。先詣館所。李公狀貌魁偉。矜嚴有威。北使見其至。不爲動。及公至。北使不覺蹶然驚起。其後我使之燕。迎問崔相公平安。道其敬服之意。其見敬慕於異類如此。我使歸傳其語而公已下世矣。
169_614d其他如柳廣裕,沈搢,李瀗,尹慤,柳星樞,李壽民,李德峻,洪聖疇,趙洽等及內人墨世,一業。無不酌處。李健命論罪時。筵奏以封典順成。功可贖罪爲言。徐命伯則筵中陳達。不爲緣坐。其外應行之典。亦不爲之。其後先大王敎以是豈觀於渠乎。固是看予面而然也。王法不可貸。而猶且如此爲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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昆侖集卷之十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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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墓誌銘
族祖任實縣監崔公墓誌銘 a_183_317d


公諱後徵。字遠卿。我崔系出完山。以高麗神虎衛上將軍諱純爵爲始祖。其後選部典書諱得枰。完山君183_318a 諡文貞諱宰。名于麗末。參贊諡平度諱有慶。贊成諡敬節諱士康。著于國初。仍四世大顯。五世而諱秀俊。贈左贊成。於公爲曾祖。祖諱起源。僉知中樞。考諱廷吉。通德郞。號西洲。有文而不仕。吾先君議政公。實誌其墓。妣陽川許氏。宗廟令嶙之女。公爲人。長厚祥善。其心豈樂坦夷。與人不矜忮。待人一於誠信。不以親疎貴賤爲加損。急人憂患如在己。見不善。專掩蓋之若無覩。於一切外物。泊若無營。好施與。已有之無所靳固。雖無有。至或求覓以應人。平生無迫切之言。顰蹙之容。自親戚鄕里。至泛交識面。莫不忻忻愛慕。183_318b 一口稱仁厚長者。事西洲公甚善。中年奉至仁川田舍家焉。晨夕左右不懈。便身適志。視力所及。家用不贍。而親食必有味。客至必有酒。西洲公大耋無恙。神力益康茂。雖其頤嗇有方。而人輒歸公之善養也。母夫人以疫厲歿。公先得疾已數日。能自力致毁。斂肂必親。及侍西洲公側。不敢以戚容見。人稱爲難能。推以事諸姊以敬。撫恤庶弟妹以誠。鞠甥姪孤窮者。以有成立。鄕里狀公行誼于使家。屢登薦剡。不報。公少治擧子業。屢發解輒不利。乙亥。仕爲黃山道察訪。察於攻駒。勤於求瘼。歲比大饑。削廩營粟。以活驛屬萬183_318c 數。觀察使及御史。繼以褒聞。得遷淸安縣監。入仕未二期。再命而爲邑宰。蓋稀有也。驛人磨崖銘其德惠。爲淸安。專以寬恕爲治。喣撫小民如赤子。待士以禮。方伯嘗書其上考曰。仁厚爲政。吏民俱便。人以謂紀實。己卯棄歸。爲訓局郞。辛巳。出砥平縣。未幾移病歸。丁亥。復以訓局郞。拜任實縣監。兩邑爲政。一如淸安。明年病罷歸。公晩而筮仕。不汲汲趨營。足不迹貴要之門。自南邑歸。家于京城西。號其堂市隱。息交游簡出入。杜門養痾者十年。戊戌二月十日卒。享年七十二。葬于砥平天谷山抱巽之原。卽西洲公塋兆之左183_318d 麓也。配淑人李氏。江華府經歷垈之女。讓寧大君禔之後也。賢有婦道。善治家相夫子。盡孝友。性嚴正。訓子女有度。先公沒合窆。有一男七女。男錫泰進士。女適金益慶,李喜慶,李衡秀參軍。李太元文科監察。林象奎,李嵩坤,李奎漢。錫泰娶永禧殿參奉李弘蕃之女。生二男一女幼。金益慶二男三女。男漢昌,漢良。女適李喜濡,李箕輔。李喜慶二男二女。男燤,㷞。女適朴弼鉉。李衡秀男聖述。女適韓師說。李太元四男二女。男運光。女適柳端章。餘幼。林象奎三男一女。李嵩坤四男。李奎漢四女。皆幼。嗚呼。始公家興仁門外。與183_319a 吾祖並舍居。吾先君於公族姪。而長公一歲。自髫童嬉戱。翰墨游玩必同方而連業。窮達旣殊而情好益敦。先君或不安於朝。輒就公而止焉。白首相惠許。不徒睦親已也。不肖不天。奄至於大故。喪期甫終而公又下世。餘生孤露。益無所依仰。今爲公幽誌之文。不覺涕淚之滋也。謹爲銘曰。
孔子稱宗族稱孝焉。鄕黨稱弟焉。斯可謂之士。若公者。其庶幾斯言歟。在鄕恂恂。爲吏則循。天道無親。常與善人。不在其身。其在子孫歟。


 
昆侖集卷之十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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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行狀
先考議政府領議政府君行狀 a_183_346a


先府君姓崔氏。初諱錫萬。字汝時。後爲翰林。以顯宗小字嫌名。有命改之。改諱錫鼎。字汝和。初號存窩。後號明谷。羅代之始。有六部大人佐之。崔其一也。後世著籍于完山。以高麗上將軍純爵爲始祖。六世而有諱得枰。以選部典書致仕。生諱宰。重大匡完山君。諡文貞。父子皆以廉直孝謹。爲權貴所憚。麗史立傳以紀之。牧隱李公撰文貞墓誌。盛有稱道。生諱有慶。183_346b 事我太祖。官參贊議政府事。諡平度。以孝旌閭。被廉吏之選。生諱士康。事世宗。官右贊成。兼判吏曹。金宗瑞之開六鎭。實長兵部。參聞籌畫。諡敬節。公之九世祖也。高祖諱秀俊。累贈左贊成。曾祖諱起南。游牛溪成先生門。有重名歷應敎舍人。光海朝。爲羣小所擠。卒官永興大都護府使。累贈領議政。完興府院君。谿谷張文忠公。撰其墓碑。祖諱鳴吉。策靖社元勳。典文衡。領議政完城府院君。諡文忠。文章經術。學士誦之。德業載於國乘。西河李公敏叙。撰諡狀。西溪朴公世堂。銘其神道。文忠始無子。取弟吏曹參判諱183_346c 惠吉次子後亮爲後。筮仕至漢城左尹。襲封完陵君。卽公之生考也。有高識懿行。一時名公卿。咸愛慕藥泉南公九萬。撰碣銘。妣廣州安氏。觀察使獻徵之女。完陵弟諱後尙。卽文忠後夫人子也。有至性。淸高恬素。人比之黃叔度,呂與叔。官止弘文應敎。無嗣。又取公子之。所後妣咸平李氏。咸陵府院君澥之女也。公以仁祖二十四年丙戌五月二十日乙丑降生。安夫人有身。夢有朱袍象笏。端坐宅後山頂。前後從衛甚盛。旣得公。嘗曰。此貴人也。公生而明悟穎異。神采丰秀。雖幼少時。容止端重。進退有度。粹然如精金良183_346d 玉。旣識字。便曉部首之分。仍及六書篆籒之體。聰記絶倫。過目輒成誦。日夜守書榻不去。九歲。誦詩書全文。博通史書。十二歲。通易象卦爻之變。占揲之法。手畫爲圖。成一卷。綜覽百家。文義沛然。爲詩文。下筆成章。一時籍籍稱神童。名冠八才子。請業于藥泉南公。南公歎奇之。待以國士。以公器識如成人。不徒爲文詞之夙詣也。嘗作長篇贈公。有曰。文學可言子夏詩。志氣肯學樊遲農。旁通卦象及篆籒。游刃恢恢有餘地。旣而。覽性理書。欣然有會。作讀小學序。論學問本末。如宿儒老師。長老嗟異之。稍長。從玄石朴公世采。183_347a 受大學或問。朴公亦期以遠大。委禽于華谷李相公諱慶億之門。華谷愛重公殊甚。輒以立朝行己之方以及朝儀邦典。敎導不倦曰。須豫講而致用也。十七。中監試初試狀元。庠泮課製。每居首選。同進者莫敢望焉。丙午。中進士狀元生員第八。辛亥。中庭試丙科。隷承文院。壬子四月。拜說書。六月。薦拜檢閱。華谷公入相。以親嫌遞拜說書。今上在東宮。方講大學。公以謂大學書章句。先儒論說各殊。至陽明則變換聖學工夫。欲識大學歸趣者。須盡諸家同異。折衷於紫陽章句。遂取李公端相所編大學集覽。繕寫一通。作183_347b 跋文。以備胄筵參閱。癸丑四月。持安夫人服。親癠間不就直。東宮嘗問講官曰。崔說書近有何故久之不見也。蓋公久侍書筵。勸講明暢也。制除。叙待敎。陞奉敎。選玉堂南牀錄。應製夫子待賈論。御題也。居第二。賜虎皮。薦吳道一,李墪入翰苑。領相許積。嫉吳公嘗謗己。廷毁之。公上章辨之。因下吏譴罷。丙辰。陞典籍轉監察。丁巳。拜禮曹佐郞,知製敎。移兵曹佐郞。陞正郞。除全羅都事。金公錫胄爲兵判。啓留之。辟守禦從事。冬。特授弘文館修撰。轉校理。戊午夏。應旨陳疏。時南人當國。諸大臣非罪竄謫。公首陳典學修身183_347c 之道。因論時政之失曰。殿下臨御未幾。竄逐大臣。輕開荊棘之路。言事之臣。放黜聯翩。今論者以貶損君父。爲宋時烈之罪。以離間骨肉。爲金壽恒之罪。時烈。林下一寒士。蒙孝廟不世之遇。義則君臣。情則父子。其報效之誠。必萬倍恒人。加以此罪。豈不至寃。壽恒。先朝顧命之臣。上封論奏。言辭剴切。深陳諸臣誤事之咎。痛斥尹鑴悖理之言。孤忠未暴。罪網橫加。一落炎陬。屢更寒暑。匹夫之微。猶不可非罪而罪之。况孝廟禮遇之老臣。先王顧命之大臣。而不察情實。勒加覆載難容之罪。雖二臣之不足恤。獨不183_347d 重貽累於明時乎。兩司俱請遠竄。上不許。因許積筵白。命削黜。公不樂在京。攜孥寓鎭川。己未秋。特叙。庚申。拜兵曹正郞。應製十韻排律居首。賜虎皮。明日。特授副應敎。臺諫請還收。不許。四月。羣小屛黜。舊人登用。兼改修實錄郞,承文校檢,四學公都會試官。叙鞫廳問事勞。陞通政。以資格未準寢之。移司僕正。還應敎。兼漢學敎授。大臣白上曰。典翰是久虗之選。而有通經學長於文詞者。宜令差出。於是以公爲典翰。上富於春秋。勤典學。日御經筵。公每侍講。反復啓告。自天人性命之理。經國御世之謨。究極本末而183_348a 論之。諸臣皆屬目聳聽。時經幄諸公。極一時之選。多名眞學士。而博學精識。衆推公爲第一。因夏暑。例停經筵。公引范祖禹所謂陛下今日之學與不學。係他日治亂。上箚曰。國家庶政。千條萬端。而最重且急者。莫如人主之進學。古之聖王。德已成治已定。猶必惜寸陰務日新。豈以寒暑有間斷哉。上答以戒誨得宜。仍御經筵。時李師命有殊眷。驟加進用。公引韓琦論蘇軾事白上。請毋過寵以招指目。公議多之。秋。以會盟祭讀誓官。進階通政。拜兵曹參知。移同副承旨。冬。遭所後考東岡公喪。壬戌春。遭內艱。服闋。拜刑183_348b 曹參議。移右副承旨。兼承文副提調。轉左承旨。遞拜大司成。移副提學。明齋尹公譏貶懷川相。大觸其狠怒。乙丑春。四學儒生。發明齋私書。誣謂侮辱栗谷。通文聲罪。四館以發人私書罰儒生。金領相壽恒。希懷川意。右學儒。請罷四館職。公疏論其失曰。金盛大等。摘尹拯書一句。謂之辱先賢。拯。成渾之外孫也。渾與李珥。隣德不孤。同明相照。共爲百世宗師。則以拯之景慕兩賢而謂之辱李珥。此果近理乎。其書因親舊之簡問。欲明乃父之終始。有曰。今以江都事。訾病先人。卽何異於指栗谷以妄塞悲之疏而謂之自道盡183_348c 之者耶。然栗谷則不免有入山之失。先人初無必死之義。蓋以妄塞悲。卽李珥疏中語。過自引咎。可見君子之謙德。而醜正之徒。反引此疏。以爲詆毁之資。拯父宣擧江都之事。其前後辭疏。亦過自引咎。其事相類。故答書如此。不過引先賢以證之。通文之擧。士習不端。施罰糾正。自是四館之職責。構捏陷人。自作不靖。罪在盛大。而大臣反以先啓不靖。罪四館。臣實未曉也。上謂敲撼大臣。命罷職不叙。玉堂兩司。俱請還寢。金領相亦箚請。皆不納。大臣諸宰。繼言之。上曰。文學才望。予非不知。而疏語謬戾。姑施譴罰。秋。大183_348d 臣復白之。特叙授副提學。不就。由兵曹參知。還副學。兼承文副提調。十一月。特陞戶曹參判。移大司成。邊氓越境。淸人致詰罰之金。朝廷將遣使求免罰。公爲陳奏副使。丙寅。以戶參赴燕。未準請還。被劾罷。冬。叙拜右尹,副捴管。李左相端夏。請裁損廟享。以補賑荒。下諸宰議。公以爲大侵殺禮。固出禮經。而古今異宜。太廟享祀。不可隨豐歉而增减。見今浮食之耗財。不啻千百。而或漸流俗。或牽事勢。變通均節。未有以厭於人心。而先减祭享。恐難輕議。事不果行。移都承旨。丁卯。拜副學。時老少分黨相攻。而懷川相深恚183_349a 明齋父子。騰章論詆。羅良佐疏辨其師尹美村之誣。大臣以侵侮宋相爲罪。請遠竄。公陳疏直其寃。被嚴旨遞。因此忤老論。屢停銓擬。除刑曹參判。不就。又除刑參。兼副捴管,都承旨,大司成。皆不拜。冬。拜大司成。兼司饔提調。戊辰春。移副學。朝參之儀久廢。上自是歲始行之。公於朝參日。進位宁六箴。曰端本。建極。納諫。典學。勤政。恤民。並疏投進。賜虎皮以奬之。時改造渾天儀。以公曉乾象也。命管其事。工訖。命製進齊政閣記。有豹皮之賜。兼備局有司堂上。筵臣請於玉堂新錄。多得經術士。公疏論曰。館錄。是淸流極選。詳183_349b 延宏博。固其宜也。第科目之外。經明行修之士。不爲無人。而循常調叙。不足以盡取士之道。宜令廟堂。精加訪擇。別爲進用。其已仕而才學著聞者。亦處以掄選之地。則有助於治道。豈淺鮮哉。廟堂因公言。請令大臣六卿三司長官。各薦經明行修之士二人。公薦李世龜,閔以升。時後宮張氏有寵。李徵明,閔鎭周,韓聖佑等。論宮掖事見忤。久靳除授。公率館僚陳箚。以立志典學好賢納諫爲目。歷言而備論之。又曰。向來數臣言及宮掖。或加譴斥。或靳甄除。中外皆謂語涉宮禁。不蒙寬貸。無不竊歎而懷憂。彼數臣者。終得敢183_349c 言之名。而罪諫之過。歸於君父。袁盎之却坐。可謂不恭而文帝賞之。歐陽脩之諫賜帛。可謂細事而仁宗納之。今殿下於數臣者。亦何深惡。使四方窺淺深哉。兼惠局堂上宗人杭。黨於張氏。有上眷。七月。吏判朴公世采箚論杭恩數過節。上罷其職。公率諸僚爭之。命仍朴公職。領相藥泉公。與右相呂公聖齊。將又請對論之。坐賓廳。公罷對歷見。及兩相入。南公言多觸咈。上大怒。命安置兩相北邊。謂公唆囑大臣。命拿鞫嚴問。擧朝震懼。有命削職。兩司俱請還收。久之得請。公於辭疏。有曰。近來天怒震疊。朝著183_349d 惶駭。辭旨之暴發。擧措之失當。非一二數。此殆殿下涵養本源之功。有所未至而然也。君德輔導。責在經幄。而臣之忝居此任。實專且久。則其不能薰陶啓沃。資助聖德。以盡其職責審矣。此臣之罪也。請告遞。除大司成。辭遞。拜禮曹參判。移吏曹參判。己巳正月。兼弘文館提學。寫進徽陵銘旌。進階嘉義。時持平李益壽。毁破張嬪母屋轎。忤上意。公於政注連續。首擬於三司。二月。上盡黜舊臣。進用南人。以連注李益壽罪公。命補安東府使。四月。有親癠歸侍遞。安東邑大難治。在官不滿三朔。政聲翕然。南民稱頌。183_350a 庚午。拜延安府使。約己寬民。莅事勤劇。重修平遠堂。疏南大池。作君子亭于池上。東西者改觀。明年罷還。癸酉冬。遭生考靜修公喪。丙子。制除。拜禮參。移吏參。兼典牲提調。先是甲戌。上悔己巳事。用西人。首下備忘。有云舊臣可擢者。或方在喪。人謂聖意有指。至是闋服未幾。特陞漢城判尹。移大司憲。時兩司請誅張希載有年。公約三司請對。反復論之。不得請則曰。不得其言可去。辭遞兼弘文提學。拜刑曹判書。兼知經筵義禁。五月。拜吏曹判書。兼兩館大提學。前後在銓曹。政注公平。請託不售。請以儒學之士。充書筵183_350b 官。啓差李世弼等十人。請增减蔭官參外之額。稍疏仕滿而淹滯者。又請稍通庶孽。處以三曹。有曰。天之生才。貴賤非爾殊也。許多人物。豈無才雋。而枯項黃馘。騈死蓬戶。匹夫含寃。足傷天和。古人擧賢於釣屠。取才於盜庫。而先儒亦有宜取胥商之論。用人之方。如是之廣也。庶流雖不可比同士族。不猶愈於胥商乎。因請改許通之名。除納米之法。廟堂從之。冬。上宣下障子二。卽圖畵豳詩農畆之事。命公作詩題其面。公撰進。因疏陳民事曰。豳詩七月。實與無逸先知稼穡之義。相表裏而加詳。今殿下得此二幅。爲其183_350c 先聖訓詞之所寓。命加贊詠而表章之。此殆恤民務本之意。存積於淵衷。雖在燕閒翫好。自然如此。傳曰。有仁心仁聞而民不被其澤者。不行先王之政也。今田里無法而賦役不均。冗食日廣而浮費尙多。不先治本原。切切然那移裁减之爲務。欲以是足國而救饑。伏願深惟弊源。加意於制産經國之道。則今日障子之關覽。不亶爲觀聽之美。實亦有助於行仁。時年饑講賑事而有是命。公以此諷之。居數日。下敎曰。頃日吏判箚陳保民之策。如有所料量。條列以聞。公條陳時務十事曰。王政莫先正經界。而量田久未行。宜183_350d 只令守令勾檢。不須一時齊擧。察農形民事之緩急。或六七邑或十餘邑先行。明年又如是。以漸就緖。不出數年。可以完整。旣有檢核之效。且無騷擾之弊。曰諸宮免稅。偏邦謬例。宜使如法納稅。政令旣均。賦入亦廣。且合於王者無私之義。曰隣族徵布。爲今痼弊。本由於逃故之難充。良丁本自不乏。而軍門增設。兵額日廣。又有疲民避役之淵藪。奸胥罔利之囊槖。其勢不得不定兒弱而侵隣族。今宜量罷私屬。而存者定其額。明覈諸保。而剩者汰其役。軍門兵額。亦宜量减如此。則良丁有裕。逃故易充。隣族免於橫侵。且私183_351a 賤娶良。所生從母役。實不易之理。或行或罷。靡有定制。亦宜申明從母之法。俾廣良丁之路。曰海西。不行大同。民力難支。進上及支勑之需。邑各異規。輕重不倫。宜制爲一道大同。其節目事宜。惟在任事者。與廟堂相議善處。曰量入爲出。有國通規。今一年經費。至十萬石。而宗廟百官之奉。居三之一。其二爲養兵之需。脫有災荒。新舊不繼。今量减兵額。則冗食旣省。經費自紓。且貢物裁省。每就折價剋减。故所减無多而取怨深。宜就元額。量减種數。被减而怨者少。受價而喜者多。何可以一人之怨。易百人之利。乾魚一種。183_351b 價至萬餘石。餘可類知。曰敬差驗田疎略。稅入何從得實。秋後農形。可得其槩。宜自地部。就議廟堂。量其年災實。分定實結於各道。道臣以此數。隨其邑災實。又分定於各邑。則無如前奸漏。而收租多寡。可坐而知。豈不明約而有統緖哉。曰賑政設粥。其勢誠難。飢民聚則薰成疾癘。散則轉爲寇盜。司賑吏隷。又有穿穴耗費之害。前頭賑政。宜以抄民給糧。减價發賣爲主。曰賑政雖以聚穀爲主。穀非鬼輸。乃在民間。官貿民穀。弊端滋多。鑄錢則奸利日滋。賣爵則名器日紊。贖公賤則或以官穀納贖。而徒令列郡凋弊。移轉軍183_351c 餉。則積儲傾出。非謀國之遠慮。惟有官發米穀。以平市價。窮民乏食。職由米價之翔貴。米價翔貴。職由富民之錮粟。此輩深藏固守。爲乘時射利之計。縣官出賣萬餘石穀。則富民之粟。盡歸市上。市價旣平。則穀多而民易售。雖不屑屑於口吻之饘粥。而其爲賑救也大矣。曰大內修理一番。價至數千石米。此視膳羞衣襨有間。欲望安徐。以待稍稔。此外凡可酌損者。並留聖意。所减雖少。爲益實大。閭巷奢汰益甚。服飾之華靡。饌餌之珍奇。日新月盛。此由諸宮貴近。侈靡相高。民庶慕效。宜加飭戒。爲下民表準。高位崇儉德。183_351d 固美矣。荒年貶食。禮亦宜然。又曰。除免稅戒侈習。事關宮禁。似難遽革。然在易朋亡之。傳曰。禁奢侈則害於近戚。限田産則妨於貴家。如此之類。不能斷以大公。是牽於朋比也。上優答之。丁丑二月。進拜右議政。差奏請使。王世子冊封有年。請封誥燕京。不見許。遂遣公。竣事還。錫土田臧獲。薦吳道一爲大提學。臺臣兪命雄。以其嗜酒多謗。謂公議所不許。公疏辨曰。道一。才識邁倫。廉直寡合。惟其積忤於人。未免取敗於己。若其飮酒過差。特尺朽微瑕耳。未知公卿會圈之外。有何別㨾公議耶。戊寅正月。上下敎。深戒183_352a 朝臣黨習。其明日朝參。公極陳朋黨之弊。仍及己巳人罪犯差輕者。宜以漸調叙。老論皆不悅。歲荐饑。請糶于淸人。淸人專价船粟而致之。公儐于灣上。淸使致書于上。自稱眷弟。時議咎公以不能拒。兩司論罷公職。蓋不悅者操之急也。秋。寓仁川。冬。端宗復位。改封莊陵思陵。召公爲捴理使。公於辭疏。論灣書事。有曰。國家不幸。有會稽之深恥。不能一朝刷洒。則餘外受侮。有不足較量。今爲必難爭之事。重觸不可測之怒。疆事不順。厲階層生。求滅尺寸之恥。反取尋丈之辱。則國體事宜。未免交失。臣之妄意。今日183_352b 之事。止可以忿思難爲義。寧以身甘受罪謗。不欲生患於國事。抱痛藏憤。默默賫上。卒之虧奉使之職責。負人臣之極罪。上優答之。敦召不已。以往役之義。受命往來兩陵。勖率官僚。料督工徒。未閱月而役竣。仍存鄭眉壽墳墓於思陵之側。封識嚴興道墓而復其子孫。追贈金時習,元昊等官爵。皆公建白也。己卯夏。拜左相。公之將儐灣也。上於筵中。引孟子及是時。修明政刑。令大臣講究革弊便民之策。公行迫。未及悉對。行中草疏數千言。備論政弊民瘼條。職官選擧田賦軍旅四事。請加通變。如改量田罷免稅。183_352c 量减兵額。預定年分。申論丙子箚意而加詳。疏未上而譴罷。及是。具冊子投進。上優答之曰。當詢于廟堂而採施焉。未幾因事罷。秋。叙付判敦寧。時有換封科獄罷。己卯。增廣榜。議更設庭試。以配武科。公論其不可。又曰。今士習壞汚至此。正宜停簡選試。爲敦養懲礪之道。數年不設科擧。庭謁聖。只許居首直赴節日。課製施賞。稍異近規。以示防範之意。則庶幾倖心少息。偸風向正。上納之。數年無科選。有亦簡取。識者稱之。辛巳。兼內醫提調。拜領議政。儒生請文元公金長生配聖廡。下大臣議。公曰。金長生。資質渾厚。學183_352d 問篤實。且有纂輯禮書之功。允爲一代所尊仰。至於聖廡腏食。有未可輕議。以楊羅李三賢。繼程門之統。黃榦接朱門之緖。而俱未得列於從祀。今於近代儒賢。何可率爾行之。上納之。八月。仁顯王后昇遐。因有巫蠱獄。命禧嬪張氏自盡。卽春宮所生母也。時世子年十四。廷臣擧懷驚憂。公與左相李世白,右相申琓,吏曹判書李畬,兵曹判書金構,戶曹判書金昌集。卽會闕下。聯名陳箚。請寢成命。承旨尹趾仁。先請還寢。有命公卿會。議箚不入。旋設親鞫。公上箚論之曰。昔漢田叔燒梁獄辭。請無以梁事爲問。以安183_353a 太后。朱子書之綱目而先儒美之。君臣父子。並列倫常。恩義經權。互爲輕重。太后世子。雖有親屬尊卑之殊。人君慈愛之道。臣子服事之義。固無異致。而宗社大計之所關係。又如何重也。况今春宮情境。其可比論於太后之涕泣不食而已乎。夫梁王。一藩臣也。明有死罪。而特因太后愛少之情。撓法曲貸。先儒猶且許之。今禧嬪設有難赦之罪。念春宮誕育之恩。爲春宮憂傷之慮。少賜寬貸。不至於究竟暴揚。而左右不逞之徒。則依律致辟。以伸王法。如羊勝等之爲。以安春宮。恐不悖於今日處變之道也。惟我183_353b 春宮。以穉弱之年。乃於倉卒意慮之外。遽遭人倫罔極之變。震驚崩迫。當復如何。若使之摧剝隕穫。使不得自全其情性。則非但重傷殿下止慈之恩。其於宗社何。更願隨事方便。著意調護。勉盡鎭定保安之道。此老臣區區之至懇也。上不納。公又具箚袖進。有曰。殿下之有春宮。將以託宗社之重也。旣將以宗社無彊之休恤。託之一人。則其保安調護之方。宜無不用其極。今以惡逆不道。勘之於其母。行慘切之誅。而謂春宮保可安善乎。若於驚痛震薄之中。致有大段疾患。則宗社之憂。爲如何哉。又被183_353c 嚴責。不得參鞫。陳箚請罪。復申前說。有曰。今玆獄事。關係至重。在國家則爲王法無將之罪。在春宮則爲人倫罔極之變。左思右想。實甚難處。故參量理勢。折衷經權。竊以爲與其伸法屈恩。致臣子討復之義。無寧屈法伸恩。盡春宮保安之道。何者。謀國之義。宗社爲重。而禧嬪無他然後春宮乃安。春宮安然後宗社安故也。又曰。訊治逆獄。不必親鞫。而以堂堂千乘之尊。日取妖巫賤婢。親自詰問。亦豈人君之體乎。上震怒。呵責甚嚴。命中道付處。投配鎭川。時王世子冲幼。而張氏罪至不測。天怒方盛。國183_353d 言洶洶。事變不知所止。公之連章疾呼。爭以去就。蓋亦爲此。識者謂深得古大臣反復之義。而公旣譴去。滿朝臣僚。交口言調護東宮之道。衆謂公倡言之力爲多云。壬午正月。特命放釋。公仍留鎭川。地有溪山之勝。公常愛之。先已構小亭於先祖文忠公遺址。及是疏渠沼種花卉。爲終老計。學子自遠至者相踵。日與之講討經藝。評品文詞。暇則杖屨相羊于山厓水瀕間。以觴詠樂而忘世。不知身之在貶也。冬。叙付西樞。癸未二月。以領相召。累疏乞免。命史官偕來。固辭不得命。三月。進次漢南。申乞不已。諭召彌勤。四月。183_354a 赴朝。拜命之明日。有正言金普澤之疏。以辛巳三箚。爲言罔極。至目以護逆。公出江郊納命。召命還給。公連章固辭。差赴燕正使。不應命。未幾解相職。移住衿川紫霞洞。又移漢南之盤浦。棲屑東西者數年。以編纂書籍自娛。甲申六月。降別諭曰。卿之頃年一箚。本心出於過慮。斷斷無他。臺臣不諒。至以護逆勒加。卿因此難安。徑歸田園。缺然思想。愈久愈深。玆遣史官。渙然開釋。宜速就道。以副至意。公上章不就命。乙酉。兼軍器都提調。四月。復拜領相。命史官偕來。引前事固免。辭疏凡十三上得解。俄兼軍資都提調。丙戌正183_354b 月。復拜領相。累辭不獲。兼內醫都提調。有卜相之命。前冬。右相李濡以趙泰采卜相。公議所未叶。及是。公以爲大臣之職。以人事君而莫重於置相。遂削其卜。三月。有宋婺源之疏。先是甲申。築大報壇。祀神宗皇帝。至是有事於皇壇。公當攝祭。老黨以先祖文忠公嘗主和戎之議。謂公不宜將事於神宗之祀。指授儒生投疏。詆先祖以及公。公上章自引。備陳和議本末及先祖處義終始。上答曰。婺源意在敲撼大臣。詬辱大臣祖先。此紀綱解弛。朝廷不尊之致。卿之祈免。豈不有損事體耶。噫。故相臣和議。亶出於爲183_354c 宗社尊周之義。不忘乎心。蹈必死之地而靡悔。予亦稔知。豈幺麽婺源輩所敢恣意詆毁者哉。續遣史官承旨。敦諭勉出。公以辱及先。義不敢居位。連章乞免。又降溫批曰。先卿文集。予覽之熟矣。平日懃懃懇懇於章奏者。無非忠君憂國至誠中流出。而昔我聖祖嘗執先卿之手而泣曰。卿之忠誠。人所罕侶。一心奉公。終始不懈。若使如卿者多在於朝。則國事豈至於此。華袞之褒。昭如日星。故相臣平生事業。卽此可知。至若丙年和議。亶出爲宗社之血誠。可質神明。尊周之義。本自炳然。則此豈婺源所可詬辱者哉。欲183_354d 大臣不安。則輒辱祖先。以爲敺逐之計。世道至此。寧不痛心。卿因此引入。傷損國體亦不少。卿何不念及於此耶。因敦召不置。會上有疾。以帶內醫院故出仕。公嘗謂有國之先務。莫急於崇儒。上箚曰。後世儒者。豈盡切於時用。使掌金穀。非必裕國計也。使治甲兵。非必壯戎政也。雖然。談經好古砥礪名行之士。多在朝廷。則官僚有所敬憚。士民有所觀傚。世道風俗。必不至大壞。其於國家。豈云少補。國家用人。只有科目一道。而一代人才。此不足以盡之。搜薦之事。所不可已。矧今末俗滔滔如水益下。士惟以科宦爲業。不183_355a 知學識行能之可貴。而貪汚躁競。敗官壞身者往往有之。其流將至於敎化陵夷。風紀頹靡。可不懼哉。今之憂國者。必曰朋黨。而臣以爲道學之衰替。其憂尤大。苟無以風動作成。稍新耳目。則亦何以捄此。請以學術行義經學才識四科爲目。令大臣及六卿三司長官。各薦二人。公箚薦尹東洙等。夏。有林溥之獄。初辛巳之獄。死囚尹順命。希載外弟也。臨當結案取招。大言曰。身之前後納供。皆聽金春澤所慫慂。春澤敎我如是納供。可無死而有利。今反殺我耶。吏卒皆聞之。按事者不錄其辭。又有流言曰。順命供辭。有云希183_355b 載在謫。投諺書。數其妻之惡曰。此女締結西人。欲殺我而謀害東宮。按鞫者惡其言。不錄于文案。人多傳說。至是。溥等上疏。謂謀害東宮。凶言也。掩匿而不錄。蓋意在禍老論也。因政院之啓。始命溥定配。老黨皆曰。設鞫究問。洞覈其虗罔。然後吾輩可以容迹於朝端。免禍於他日。至云少論若不鞫問。是敺老論於危禍也。羣情如沸。於是。持平鄭栻啓請設鞫明覈。上可之。公心知其不可成獄。而不能無動於老黨危禍之言。承命按問。歷究言根。死亡多辭。絶無可問。春澤慫慂之言。沒之獄案。旣播人耳目。謀害之云。衆亦183_355c 疑其果有而不錄。方溥疏初發。辛巳按獄諸臣。各自疏辨。李光廸則曰。順命初無片辭。金昌集則曰。順命引希載書。而其詞則不曰謀害東宮。而曰欲殺我。則於世子。亦豈好耶。及按問辛巳問事郞。則呂必重,姜履相之供。皆與昌集略同。而其詞錯出。人益疑之。公以爲毋論當初凶言之有無。以此罪辛巳諸臣。是陷人也。而謀害二字。則諸人疏供。皆曰無之。當以此爲斷。於是罪姜,呂以傳言非實。配極邊。罪溥以禍心嚴刑。配絶島。又於疏論讞奏。務稱老論之意。猶以不盡如望。不快於公。冬。上怒李潛之疏。親鞫刑治。183_355d 而有不殺林溥。繼有潛疏之敎。臺臣李德英,李邦彦。乘間投疏惎之。追論溥獄時式例間事。捃摭爲說。公出江郊疏免。上優答之。累兼扈衛大將,訓局,司譯都提調。公連章固懇。解職付西樞。丁亥正月。又拜領相。掌令李裕民上疏。稱頌上功德之盛。宜上尊號。論公不於進宴陳請。公於辭疏。有曰。此事發端有年。疏陳者非一。春宮亦上請。而聖意謙挹。讓而不居。斯可以匹美堯舜。增光簡冊。垂聲實於不朽。爲萬世之法程。臣方感歎。欽誦將順德美之不暇。建議陳請。非臣賤慮之所及也。左相金昌集。又以溥獄詆公。183_356a 至謂强成凶言之案。公連章陳辨。有曰。臣之筵奏。云若有謀害之言。豈有不書之理。至於不好等語。設有當錄而不書。此出於偶然不察。非有他意。又云。以柳之發來傳外言之後。更問順命事觀之。其心之非出於掩匿。斷然可見。据此兩條。臣之本心。可見矣。昌集又引左史李澤誤錄之筵說。抑勒爲說。公又据右史及堂后所錄以辨之。悉論按獄本末。上答曰。左相前後疏。專出疑怒。擧一邊之人而盡疑之。不但構陷按獄諸臣而已。網打善類之計。固已萌於心。形諸章牘。不覺心寒也。左相之疏出。而始覺李德英之疏用183_356b 意不正矣。公固免。疏凡十八上得解。十月。還拜領相。時有雷異。上降罪己之敎。公疏陳修省振勵之道。有曰。一念操舍。其端至微。勤於始者。或怠於終。惕於暫者。難持於久。願因善端之萌。克恢大志。毋或退轉。推諸施措。發揮事功。用人。各就其長。而才誠茂著。盡心國事者。任之專。聽言。先察其心。而出於至誠。逆于上心者。受之弘。謹守成憲而久而生弊者理之。廢而不擧者。修之。明勑法令。而害政者。革而通之。便民者斷而行之。要職必令久任。而掌刑財者。隨才擇差。以責其成。外官亦勿數遷。而按藩臬者。量宜兼牧。以著183_356c 其績。是皆當今之要務也。仍請獄訟錢穀。衙門郞官。定朔久任。上優答之。久任事。因爲挈令。戊子春。有尹世綏之疏。先是辛巳獄。追論閔黯孥戮之典。罪人雖逆。誅非承欵。則其妻子。法不隨坐。右相申琓。判義禁李畬。引常法爲言。上納左相李世白議。竟誅黯子。至是。公於筵對。論其非法。上不納。世綏乘機詆陷。目爲護逆。公又出江郊。連章乞免。五疏遞付西樞。兼司僕提調。七月。有命引見。諄諄面諭曰。卽今元輔。非卿莫可。向日事。雖失著。臺臣護逆之說。出於抑勒。卿一向祈免。不得已勉副。今特召卿面諭。榻前拜相。183_356d 親授命召。倚毗之意。可知。卽日視事。予所望也。又曰。盡誠國事。當今之世。捨卿其誰。公固讓數四。出又連章。不得命。九月。有權益平之疏。益平者。無賴子。爲金春澤所豢養。公累拜首相。恩遇益隆。老論百計去公。乙酉。益平疏詆公。至是。又極意構捏。爲言罔極。人皆知前後皆受嗾也。公出城陳章。上再遣都承旨。諭令入城。又以手書賜批曰。噫。益平之疏。專出於構捏大臣之計。而决非渠之所獨辦。世道至此。寧不痛心。然予旣燭其情狀。以示處分。則此等鬼蜮輩傾陷之言。何足挂齒。而日昨出城。已出料外。再遣喉舌之長。183_357a 諭予心腹之辭。而今又上章。入城無期。豈不有損於國體乎。目今災荒孔棘。民憂方急。夙夜憂懼。罔知攸濟。此時倚毗。亶在元輔。胡忍恝視。以孤至意耶。玆以手書勉出。卿其體諒。卽日視事。弘濟時艱。公不得已出仕。疏陳政弊四條。革隣族以除民怨曰。諸額逃故。令其統里充補。官無括丁之擾。而民無隣族之徵。矯錢弊以紓民困曰。以十二爲式。令毋得濫息。以防富民之射利。而貧者得便貸食。收校布以處閑民曰。閑民避役。皆投屬校院。本額外人。收一匹布而勿定軍役。有才者。試講製除布。制保米以寬束伍曰。緩急所183_357b 恃。爲禦敵者。惟束伍。而率皆貧劣。衣裝敝而技藝疎。各令自得保於親隣。量受保米。上答令廟堂熟講。俾有實效。建行海西詳定之法。海西賦役不均。民不堪命。公之宰延安。採訪而稔知之。嘗於丙子十條箚及之。及是累以爲請。朝議或有異同。力言而行之。擇李彦經李濟。繼爲方伯。商確便宜。量定節目。每邑量其支用多寡。按田結而收粟米。悉停諸色征斂。數年而成緖。號曰詳定。行法之初。小民便之。而守令及豪右胥興異言。公曰。一家哭何如十家哭。持議益堅。就其窒碍者通變之。行之有年。西民咸鼓舞。方伯守令183_357c 雖素不悅於公者。莫或改之。關東。多山而地瘠。墾廢不常。田政尤紊敗。公建請改量。方伯宋廷奎莅其事不終。擢授李台佐任之。酌官民便否而弛張之。事克完就。時議築都城。公啓曰。必審定其當守不當守。然後可築不可築。方可論也。傳曰。諸侯有道。守在四境。此言國治而有備。則防守之道。在於疆域。不在於國內也。使封疆之臣得其人。素講於備豫之策。則雖强寇勁敵。不至爲王都城守之慮。是則爲不必守之地也。守城之道。愈小愈堅。成敗得失。雜見於史冊軍志。四十里爲城而能守者。未之聞也。是則不可守之形183_357d 也。國俗善驚。不能持固。武略不競。人心多怯。不幸有狗吠之警。大小士民。波崩鼎沸。恐無鎭定之理。是則不可守之勢也。國有三空之厄。民有倒懸之急。而耗財勞民。改築不當守之城。非計也。已而不果築。經國大典。成於世祖朝。列朝遵用。而條目皆作橫行。又多細注。妨於看解。繼有續錄後續錄。而皆不相統屬。先是。上命取累朝增定敎條。裒爲受敎輯錄。公請通修爲一書。定爲典章。而疏橫看爲行書。變細注爲大字。類附續錄。受敎於六典。名曰典錄通考。作序文印進。輿地勝覽。成於成宗朝。增修於宣廟朝。續183_358a 東文選。成於中宗朝。爾後皆未遑續修。公請設纂修廳。擇宰臣名流。啓差堂郞。搜求八路書籍。公總其事。指授凡例。又請因採野乘小說。編成一書。以補國史之闕。修輯數年。勝覽垂成。文選史補。未及成書。而公去位。纂修廳尋罷。論者惜之。己丑正月。有承旨李觀命之疏。先是公之居憂也。讀禮書。病戴記蕪雜。積年修訂。移易章段。彙分而序目之。屢改草藁。始克成書。名曰禮記類編。庚辰。具疏投進。上命校書館印布正文。其後玉堂權尙游,尹趾仁。請下兩南。並注疏印進。學士大夫皆印藏而賞。及是。上任公益專。黨183_358b 人屢間之不得。謂禮編有異同於朱子注說。觀命上疏力詆。至目以毁經侮賢。金楺中己卯科。榜旣罷。圖所以復科。慫惥臺臣疏請。上以問諸臣。公力防之。楺深怨公。協心並力。爬櫛傳注。文致其說。公陳疏自辨。上答曰。觀命抉摘粧撰。必欲構陷之計。予固洞燭。良可寒心。於是。老黨指招京外儒生。換面迭起。章交公車。上皆痛斥之。公連章引免。上優批勉出。命史官偕來。批敎有曰。傾軋成風。必欲傾陷乃已。類編事。不過假借而已。其心所在。灼然可知。又曰。予於卿。眷待彌隆。故媢嫉之輩。齮齕不已。尤可惡也。公於183_358c 諸儒生疏詆。不與之費辭爭辨。最後就諸疏所論刺。逐條辨說。成一冊子。隨疏投進。上答曰。所陳冊子。悉陳編述本旨。而辨論極其明暢。仍下政院。使假託敲撼之輩。曉然知之。老論又令無賴子發通文。目之爲背朱子。肆加誣詆。上命有司囚治之。又命政院。毋納儒疏論類編者。勉起公益勤。公辭益力。章凡二十一上。答曰。卿之所遭。可謂寃誣。臺閣儒生。紛紜交章。託經詆辱。惟意所欲。誠世道之大變。惟當勉出爲期。而卿之巽辭。愈久愈懇。一向敦迫。似有歉於禮遇之道。本職不得已勉副。深用缺然。秋。有李鉽之獄。而183_358d 尹世紀被告。公以委官。力爲伸解。尹卽世綏之兄。雖不相悅者。服其無私。十月。又拜領相。於是公之入相。凡十度矣。上有疾。以內醫提調。直禁中。庚寅正月。上候向安。而忽下嚴旨。至引春秋不嘗藥。命三提調削黜。承旨請寢命拿鞫。三司俱請還收。皆嚴責之。尹判府趾完上箚論救。亦不納。徐左相宗泰繼而箚論。命寢削黜。而上怒猶不解。上雅重公。屢遭人齮齕。而屢拜相職。眷任彌篤。無他端。卒然有非常之譴。人咸怪之。公出住東郊。三月。兩司發合啓。請罷公職。以關東量田。海西詳定。謂爲流毒生靈。又以請釋逆183_359a 孥。僭編禮書爲目。歸重於藥院事。有曰身帶保護之任。反忽翔矧之戒。出入喪家。瘡腫所忌。而躬自薰染。旋請入診。再啓答曰。害及生靈。汩亂經旨。語涉過當。而請釋逆孥。反忽翔矧。所論得宜。依啓。初。上候頗間歇。有命輪直。而適會公有妹喪。出直日往哭。經兩宿入診。而臺啓云然。修撰權詹上疏曰。合啓前後辭語之矛盾破綻。有目皆見。有口皆言。而至以哭妹喪爲大罪。從古以來。曷嘗有以不善拘忌。論劾大臣之公議乎。輪直之日。聞同氣之喪。不一往哭。則是誠殘忍薄行之人。何有孔懷裒求之義乎。兩司仍請削黜。183_359b 一啓卽允。又因臺啓。命焚禮記類編而毁其板。鄭澔復唱加律之論。請遠竄。終不允。移住松山。辛卯五月。特放。叙付西樞。秋。有痁患。特遣御醫。不離看病。命內隷賜酪粥。冬。中宮患痘疹。進伏東城外。月餘還住渼沙。壬辰八月。遭夫人喪。十月。爲觀葬之淸州。仍住鎭川。冬。上受尊號。召以玉冊文製述官。癸巳正月。進詣畿郊。疏免以不參賀班待罪。還住渼沙。九月。上降別諭。開釋前事。有曰。旣往之事。予不曾留在胸中。則於卿更無惶恐不安之端。命史官偕來。公連章辭巽曰。人臣之獲罪於君上。雖大譴大何。旣恕察容183_359c 釋。則義不敢每存形迹。至於臺閣抨彈。小則係一身之廉隅。大則關一世之風紀。自處之義。不容放倒。當初合啓臚列。莫非人臣極罪。今何可徒感恩分。罔恤人言。章凡九上。而會上疾增劇。十二月。進伏東門外。上遣承旨趣召曰。予方日夕思想。聞卿到城外。曷勝欣喜。公又陳章不進。卽日再遣承旨曰。予當面諭。蓋異數也。明日。進伏闕下。甲午五月。命公入面諭曰。前旣開釋。而合啓措語。多不稱停。旣久之事。何必過自引嫌。所以慰藉之甚厚。命仍留京第。公連住闕下。參起居班。七月。上疾間。公參賀班。投章出郊。183_359d 上再遣史官諭召。是年春。明齋尹公卒。士林將操文奠酹。各爲文。請公裁擇。公就加修潤。有云敬義直方。中正純粹。仁心德容。晬面盎背。望而泥塑。接之陽春。昔聞程伯。今見其人。觀世之儒。虗憍忮伐。色莊爲剛。邦聞爲達。出處之義。一其初終。志蠱不事。用乾潛龍。家讐旣深。國恥未雪。非曰果忘。庶矣歸潔。豈如夫人。騖外徇名。空言不躬。高論無成。老黨謂譏懷川恚之。館學生交章詆公曰。時烈。卽孝廟同德之臣。誣毁時烈。乃所以誣毁聖祖。上不納其說。公上章自陳。上報曰。泮疏中抉摘數句。寧有近似於諸生所183_360a 云乎。此予所以竟不允兪也。誣毁聖祖。人臣之極罪。大臣受此誣。可謂寃矣。秋。上受進宴。召令入參。公陳疏不進。冬。聞上疾添劇。又進住東城外。乙未。公年七十。入耆社。七月。上疾稍間。還渼沙。卽遣史官諭召。十月。有吐血之疾。上遣醫診視。內隷問疾賜酪粥。十一月。血證復發。醫問宣賜亦如之。病革。命加送一醫。十一日。告終于寓舍。訃聞。下敎曰。崔判府事。以元老大臣。久住郊外。方欲敦勉期回遐心。何意一疾奄忽長逝耶。震悼之極。涕淚沾襟也。命擇給棺材。亟擧禮葬。給祿三年。成服日。兩宮遣官致弔。移183_360b 殯于城外。兩宮致祭如儀。有司治喪具。以丙申正月十五日。禮葬于淸州大栗里先祖文貞公兆次枕坎之原。夫人合窆。公淸明高朗。樂易英達。得之天稟者。固絶於等倫。早悅性理之言。持養有方。貌莊而氣溫。外和而內剛。平生無忿厲之容。暴慢之言。少在甥館久。華谷兄春田公諱慶徽嘗曰。崔郞如祥麟瑞鳳。希世之物也。旣登朝。慨然有當世之志。自朝章國故。以至民瘼政弊。留意講究。自在小官。奉職恪勤。赴朝必先於人。臨事不以劇易夷險爲趨避。無一毫規爲較量。在經幄。遇事必言。輒被譴罰。不少挫。及登宰輔。183_360c 欲修弊政救生民。庶幾振國勢之委靡。其區畫設施。屢發於章奏。前後累數千言。如海西之詳定。力請而斷行之。雖讒構者以是爲罪案。窮民終賴之。公之爲領相。公弟判書公在西藩。知公有意斯世。而慮及於世患。貽書勉戒曰。處身之方。莫如不出。謀國之道。莫如不爲。公歎曰。天下事不敎人做。更敎誰做。此固出於愛我而非至言也。當官恪於修擧。內外所莅。皆有紀述。翰苑騎省玉堂譯院內局及延安。皆作誌以存攷覽。書雲職廢。生徒不解曆筭。擇能筭者。講曆法分授諸生徒。課其勤慢精盬。而上下其稍廩。未數月。曉183_360d 曆筭者多。我東星緯徵應。散失無可考。令知星者崔天璧。採摭史乘。編成天東象緯考。印進。占象之器。闕而不備。稟送書雲官燕京。購得儀象志。按圖作占晷測遠之器,日影儀,半天儀以進。公旣性和易。不與人懻忮。且病黨比禍國。言論務主於和厚。前後居銓。用舍不問色目。注擬平允。雖於老黨。亦無甚乖忤。丙子。判銓寓書于李公畬。約與調劑論議。救得世道一分又請諭召金昌協。使起從仕。丙戌。重入相府。晦窩李公寅燁秉銓。卽公婦弟也。輒以公用舍通情志。交相勑戒。終公居位。朝廷得不至於橫潰崩决。顧上眷183_361a 注益深。倚毗益隆。重黨人之謀。去公益急。金普澤,尹世綏,金楺等以及益平婺源等。迭起詆陷。不得一日安於位著。使世道不得享和平之福。識者恨之。然自有雅量。前後言者。率皆巧詆深嚌。多人所不堪。公夷然不爲意。自引之章。終不見有辭氣。晩節遭罹譴罰。棲屑寓泊於荒郊草次之間。未有時月寧居。而無一分不自得。諷誦啽哢以自適。或攜筇曳屨於林水之中。逍遙偃仰。人不知爲相公。衆服其冲襟曠度焉。自少喜讀經傳。旣貴。猶不廢誦習。博通十三經。貫穿箋疏。講說若取囊中玩索。箚論至老彌勤。程朱諸賢文183_361b 字。記覽通貫無疑。嘗曰。聖賢書。君子可以沒身也。旣編定戴記。論孟。並有類編。庸學心經。並有圖節。論者謂前輩名賢經學。亦當有遜於公云。如佛老異端之說。亦究論其通蔽得失。嘗著說辨斥陽明學術之疵。平居動息。雖不規規於繩尺。所樂不外於玩心高明。自理氣源頭天人性命之際。以至宇宙世界方國輿圖。靡不根極而眇論之。學者聽之不厭。性好禮。旁考歷代禮家。凡於經曲疑變。究其節目。達其源流。居喪。取家禮書儀。諸儒先禮說。參合時宜。著四禮家式。於冠子也。講行三加之禮。又勸親知士友行之。或身與183_361c 爲賓。人多觀傚。翕然成風。一時士大夫於喪禮冠婚。有疑求問者。皆以公爲歸。未嘗考閱書冊。輒口占答之。指次明確。李公世弼深於禮學。嘗語人曰。明谷禮學極博。有牛栗以下諸賢所不及云。深斥左道雜術。不惑於拘忌之說。神怪之事。嘗曰。五行家。以年月干支筭命。干支本出於人爲。而後人以五行强分而屬之。以此占吉凶。非至數也。其中者適然耳。相術最近之。就令先知吉凶。不可以人力爲趨避。先知。無爲也。堪輿之說。爲士大夫所信惑。雖名賢大儒。亦或不免。擧世靡然。獨公痛排之。嘗著說論之。爲都憲也。啓請183_361d 禁之曰。古者。墓而不墳。後世。有封樹窆葬之制。不過爲安固體魄而已。風水之說。俑於晉魏。至于今日。流弊已極。夫窮達禍福。自有天命。地於何有。衆人不知。妄意營求。崇信堪輿。蠱壞心術。近世士大夫不遷葬者十無二三。下民效之。蠧財病民。其害可勝言哉。此在殿下明義理以黜左道。行敎化而正人心。至於偸葬不息。獄訟滋繁。職由於地師貪賂誑人之致。宜設法而禁之。仍請繩以重律。識者韙之。崇奬儒術。聞人有志學問。愛重嘉悅殊甚。與李公世龜,朴公鐔,閔公以升,鄭公齊斗。爲道義交。講討經訓。磨礲政術。往183_362a 復切磋。終始無倦色。嘗曰。士友之言。雖不盡用。意見終非俗流之比。嘗謂道術邪正。關係國家興喪。故於小小臧否。不甚數數焉。其於儒賢之黜陟。士論之得失。則必出意見。論列是非。屢遭挫揠不悔。己丑當卜相。論者或以尹明齋主上不識面。疑不當入卜。公以爲置相。唯視其德望。遂至爰立。於人汎愛。接物勤厚。見人惟恐傷之。口不言過失。雖寒生賤流。曲加恩意。以身禮下之。人有一藝一能。奬予引進。如恐不及。訓誨後進。成名者爲多。及喪。加麻四十餘人。或以宰相門庭多人客。諷公謝客。公曰。鳥獸不可與同羣。吾183_362b 非斯人之徒與而誰與。挾位棄士以爲高。閉門拒人以爲簡。吾不能也。樂聞箴規。雖子弟少年。盛氣厲色而深言之。欣然聽納無忤意。士友諸公長牋短幅。責勉劘切之不置。一切虗襟受之。每得其書。輒色喜。嘗曰。雖言者未必盡善。能言吾過者。是吾之師也。禮編之爭。諸疏多絶悖。旁人爲之氣憤。而公嘗曰。庸學數條之說。雖出於程子栗谷之言。旣有差殊於朱子。則拘謹者指爲僭妄。無怪也。如復入印者庸學及末篇或問。並宜去之。其虗心無我如此。喜施與甚。視財産如糞土。嘗曰。財産之久蓄。非天理。必隨手散去。然後183_362c 我心始快。靜修公旣老。分田産諸子女。公以爲旣有所後家。且名位顯讓。不受分。强而後受六之一。蓋愛人好施。出於天性。非勉强也。事親以悅志爲本。事靜修公。左右無違。出後未幾。荐遭內外艱。待所後諸外黨。恩意有加。救恤內外諸親。視其力所至。雖疎賤不遺。嘗誦曰。父母旣沒。雖欲孝。誰爲孝。親戚旣沒。雖欲悌。誰爲悌。疏族之孤窮者。爲之嫁娶成業甚多。爲文章。專以六經爲本。貫穿百家。中年多讀昌黎文。嘗曰。文主於氣。貴能渾厚典實而無冗雜。勿以刻雕爲工。勿以叫譟爲豪。思過半矣。譚者謂公文得於經學。爲183_362d 難及。爲詩。不務新巧。而亦以平實典厚。氣不衰餒爲主。每擧谿谷之言曰。辭足充體。氣能暢意。能是則雖不及古人。庶乎免末世寒瘦仄僻之病。吳公道一號能詩。多與公酬倡。嘗語公弟判書公曰。汝和之詩。不特同時諸公所不及。雖與前輩鉅公並驅。尠有能爭霸者。蓋心服之言也。所著有文集三十六卷。公於藝術。無不旁通。而於字學韻書。殆於天得。沉潛硏窮。味之如芻豢。博究諸家異同。辨析其得失。勘正其訛謬。嘗自笑曰。此如嗜土炭。獨知其味。擧世無可與語。惟俟後世子雲耳。著經世正韻序說,韻會箋要,六書譜。183_363a 精於筭學。發揮筭術源流。著九數略。夫人弘重淵懿有識慮。明於大義。公爲卿相數十年。未嘗以干請累公。門庭無一儈胥自通者。不以家生有無關君子。凡公恪官箴。正家道。賙窮睦親。皆有內助焉。內外宗黨。咸歸仰以爲婦則。擧一男二女。男卽不肖昌大。原任弘文館副提學。女適李聖輝,李景佐。昌大娶判書吳斗寅女。無子。取從兄子守身爲後。李景佐繼子宗垣。側室女二人。皆幼。嗚呼。先君以文章經術。博識通才。受知於聖上。粤自春坊勸講之日。前後遷擢。悉出睿簡。及至進位台鼎。隆恩異數。曠絶今古。十登相府。183_363b 前史所未聞。公自見知遇特達。感厲奮發。欲通同士流之情志。少紓黨禍。甄拔草野之才俊。稍新士風。通變政法之疵弊。以救民生。筵對疏陳。論說不置。惓惓之心。至老不少衰。而屢躓於世運之翻覆。積困於黨人之謠諑。卒之構罪於文字。抵釁於拘忌。使報主之誠。匡世之志。展布不終。百世之下。觀公本末者。其必慨然興歎。而亦足以論其世矣。不肖材下。無所識知。重之哀迷荒隕。不能道遺事之詳。謹採平日行業之大者。以備立言君子之財擇焉。
昆侖集卷之十九

 
西堂私載卷之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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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神道碑銘
領議政明谷崔公神道碑銘 a_186_328a


自古君子懷才抱術。得君而欲有所施設也。則輒有媢嫉之人。居間而沮敗之。俾不得安於朝廷之上。此世道所以常多亂而民所以不蒙善治之澤也。近世人材固不及於古。然如明谷崔相公。實希世之人物也。其得君亦不可謂不專。而每爲讒口所惎。未甞有周。人之居位。後之論其世者。詎不爲之愾然而太息乎。公之始相。在丁丑春。時王世子冊封有年。請頒誥燕中而見格。及公奏請。則竣事而186_328b 歸。上深以黨習戒朝臣。公因朝參。極言其弊。仍及己巳人罪名差輕者。宜稍調叙。時議咸不悅。歲飢。請糶於淸人。淸人船粟而致之。公儐于灤。時議又咎公不能拒無禮之書。論罷公職。及改封莊思二陵。召公捴理。公䟽論灤書曰。求滅尺寸之恥。反取尋丈之辱。國体事宜。未免交失。所以甘受罪謗。不欲生患國事。此公初拜相而初見惎也。己卯。陞左揆。陳䟽數千餘言。備論政弊民瘼。條陳職官選擧田賦軍旅四事。請行通變之政。未幾。因事罷。叙付判敦寧。時有科獄罷。己卯。增廣全榜。議更設庭試。公持不可。又言士習壞汙。宜數年不設科。以示防範之意。上納之。此公186_328c 再相而再見惎也。辛巳。拜領議政兼內局提調。舘儒䟽請以文元公金長生配聖廡。命議大臣。公曰。長生學問篤實。且有纂輯禮書之功。然楊羅李三賢。繼程門之統。黃榦接朱子之緖。而皆未得列於從祀。今於近代儒賢。何可輕議。上從公言。宮中有巫蠱獄。賜禧嬪張氏自盡。公上箚曰。昔田叔。燒梁獄辭。請無以梁事爲問。以安太后。况今春宮情境。其可比論於太后之涕泣不食而已乎。禧嬪設有難赦之罪。念春宮誕育之恩。爲春宮憂傷之慮。少賜寬貸。不至於究竟暴楊。而左右不逞之徒。則依律致辟。如羊勝等之爲。恐不悖於處變之道。上拒不納。公又具箚袖進186_328d 曰。殿下之有春宮。將以托宗社之重。今以惡逆不道。勘之於其母。行慘切之誅。而謂春宮保可安善。恐無是理。上嚴批切責。公陳箚請罪。復申前說。反復苦爭。且曰。以堂堂千乘之尊。日取妖巫賤婢。親自詰問。亦豈人君之体。上大怒。呵責甚嚴。特命中道付處。旣蒙放。以鎭川有溪山之勝。搆亭鑿沼。無北還意。此公三拜相而三見斥也。癸未。上思公。復以官召。公累䟽固辭。而上眷彌勤。公不得已赴命。正言金普澤䟽詆公。以辛巳三箚。謂之護逆。公出郊連章辭職。差赴燕正使。亦不應命。遂得遞。寓居紫霞洞盤浦等地。以編纂古書自娛。翌年。上降別諭曰。頃年一186_329a 箚。斷斷無他。臺臣不諒。勒加罪名。卿因此徑歸田園。缺然思想。愈久愈深。玆遣史官。渙然開釋。宜速就途。以副至意。公猶陳章不就命。此公四拜相而四見惎也。乙酉。兼軍器都提調。夏復召。仍命史官偕來。公引前事固辭。䟽凡十三上。遂得解。俄兼軍資都提調。此公五拜相而仍前五見惎也。丙戌。復前任。兼內局都提調。時有卜相命。公以爲大臣之職。以人事君。而莫重於置相。遂削趙泰采舊卜。是年春。有事皇壇。公當攝祭。黨人謂遅川公甞主和戎之議。公其孫也。不當將事於神宗之祀。使儒生宋婺源。䟽詆遅川。以及於公。公陳䟽備陳事始末。上答曰。婺源意186_329b 在敲撼大臣。詬辱大臣祖先。此紀綱解弛。朝廷不尊之致。卿之祈免。豈不有損事体。噫。故相和議。亶出於爲宗社。而尊周之義。不忘乎心。蹈必死之地而靡悔。予所稔知。豈幺麽婺源輩所敢恣意詆毁者哉。續遣史官承旨敦諭。會上有疾。公以帶內局。故遂出膺命。公甞謂有國先務。莫急於崇儒。乃上箚曰。後世儒者。豈盡切於時用。使掌錢穀。非必裕國計也。使治甲兵。非必壯戎政也。雖然。談經好古。砥礪名行之士。多在朝廷。則官僚有所敬憚。士民有所觀效。世道風俗。必不至大壞。其於國家。豈云少補。矧今末俗滔滔。如水益下。士惟以科宦爲業。不知學識行能之可貴。而186_329c 貪汙躁競。敗官壞身者。往往有之。今之憂國者。必曰朋黨。而臣以爲道學之衰替。其憂尤大。苟無以風動作成。稍新耳目。則亦何以救此弊。請以學術行義經學才識四科爲目。令大臣六卿及三司長官。各薦二人。公箚薦尹東洙等。有林溥者。陳䟽見竄。至是因臺啓鞫問。其言虗謊。專出於禍心。公爲委官按治。所引言根。卛多死亡辭。絶無可問。乃參酌情理。輕重施罪。時議固不快於公。及上怒李潛䟽。至親鞫。而乃有不殺林溥。繼有潛䟽之敎。於是。臺臣李德英,李邦彦乘間投䟽。追論溥獄。捃摭多端。公出江外胥命。屢兼扈衛大將訓局,司譯都提調。連章懇辭。解職付西樞。186_329d 此公六拜相而六見惎也。丁亥。上復召公。掌令李裕民穪頌上功德之盛。宜上尊號。斥公不於進宴時陳請。公䟽言此事發端有年。而聖意謙挹讓而不居。斯可以匹美堯舜。增光簡冊。臣方感歎將順之。不暇建議陳請。非臣賤慮之所及。左相金昌集。又以溥獄詆公。公陳䟽悉論按獄本末。上答曰。左相前後䟽。不但搆陷按獄諸臣而已。網打善類之計。固已萌於心。形諸章牘。左相䟽出。而始覺李德英之䟽用意不正矣。公遂力求去。䟽凡十八上。而得解。此公七拜相而七見惎也。冬。還前職。時有雷異。上降罪己敎。公䟽陳修省振勵之道曰。一念操舍。其端至微。勤186_330a 於始者。或怠於終。惕於暫者。難持於久。願因善端之萌。克恢大志。用人各就其長。聽言先察其心。謹守成憲。而久而生弊者理之。明勑法令。而害于政事者革而通之。要職必令久任。而掌刑財者。隨材擇差。外官亦勿數遷。而按藩臬者。量宜兼牧。以責其績。是皆當今之要務也。仍請獄訟錢穀衙門郞官定朔久任。因爲挈令。先是。追論閔黯罪。擧孥戮之典。凡罪人非承欵。雖逆誅。妻子不隨坐。至是公論其非法。尹世綏目之以護逆。乘機詆陷。公又出郊。祈免得遞。付西樞。兼司僕寺提調。此公八拜相而八見惎也。秋。上特命引見公曰。盡誠國事。當今之世。捨卿其誰。卽今元輔。186_330b 非卿莫可。召卿面諭。榻前拜相。親授命召。倚毗之意可知。卽日視事。予所望也。公固讓出又連章。終不得命。權益平者。無賴子也。黨人忌公恩遇益隆。百計去公。再嗾益平。投䟽搆捏。公又出城陳章。上再遣都承旨諭意。又以手書賜批。反復懇摯。公不得已出仕。䟽陳政弊四條。革隣族以除民怨曰。諸額逃故。令其統里充補。官無括丁之擾。而民無隣族之徵。矯錢弊以紓民困曰。以十二爲式。令無得濫息。以防富民之射利。而貧者得便貸食。收校布以處閑民曰。閑民避役。皆投屬校院。本額外。人收一匹布。而勿定軍役。有才者試講製。除布制保米。以寬束伍曰。緩急所恃。惟186_330c 在束伍。而卛皆貧劣。衣裝敝而技藝踈。各令自得保於親隣。量受保米。上令廟堂熟講。俾有實效。海西賦役不均。民不堪命。公請行詳定法。選李彦經,李濟。繼爲方伯。商편001便宜。每邑量其支用多寡。按結收米。悉停諸色征斂。法行之初。小民便之。而守令及豪右。胥興異言。公曰。一家哭何如十家哭。持之益堅。行有年。西民咸鼓舞。關東多山而地瘠。墾荒不常。田政尤紊。公建請改量。擢李公台佐。爲方伯。酌官民便否。而弛張之事。克有就。時議築都城。公啓言守城之道。愈小愈堅。成敗得失。雜見於史策軍志。四十里爲城而能守者未之前聞。是則不可守之刑也。國俗善驚。不186_330d 能持固。武畧不競。人心多怯。不幸有警。大小士民。波崩鼎沸。恐無鎭定之理。是則不可守之勢也。國有三空之厄。民有倒懸之急。而耗財勞民。改築不當守之城。非計也。已而不果築。甞讀禮書。病其蕪雜。積年修證。屢易草槀。姑克成書。名曰禮記類編。庚辰。具䟽投進。上命芸閣及兩南刊布。至是承旨李觀命謂其有異同於朱子註說。陳䟽力詆。以爲毁經侮賢。公陳章自辨。上答曰。觀命抉摘粧撰。必欲搆陷。予固洞燭。於是京外儒生。換面迭起。章交公車。上皆痛斥。及公連䟽丐免。復優批勉出曰。傾軋成風。必欲傾陷乃已。類編事。不過假借而已。其心所在。灼然可知。又186_331a 曰。予於卿。眷待彌隆。故媢嫉之輩。齮齕不已。尤可惡也。勉起公益勤。公辭益力。章凡二十一。上知不可强。許以勉副。而深示缺然之意。此公九拜相而九見惎也。冬。復畀前任。因上候未寧。公入直內局。庚寅正月。猝下嚴敎。引春秋不甞藥。三提調幷命削黜。承旨三司爭執者。皆遭嚴旨。最後因徐左相宗泰箚論。始命寢削黜。而怒猶不解。人莫測其故。於是合啓繼發請罷公職。上卽允其請。又命焚類編而毁其板。鄭澔復唱加律之論。請遠竄。終不允。此公十拜相而十見惎也。公於國事。知無不爲。雖屢躓屢起。而忠赤炳然。終不少變。公之弟損窩公在箕營。知公有意斯世。186_331b 而慮及於患。貽書勉戒曰。處身之方。莫如不出。謀國之道。莫如不爲。公歎曰。天下事不敎人做。更敎誰做。此固出於愛我而非至言也。盖公素志如此。嗚呼。若公其可謂鞫躬盡瘁死而後已者矣。辛卯。叙付西樞。俄降別諭。開釋前事。命史官偕來。公九䟽懇辭。適上疾劇。公進伏東門外。上遣承旨促召曰。予方日夕思想。聞卿到城外。曷勝欣喜。又連遣承旨曰。予當面諭。旣進伏闕下。卽命入見。所以慰藉者甚厚。士林操文祭尹明齋。而請公潤色。公不能拒也。館學生交章詆公曰。宋時烈卽孝廟同德之臣。誣毁時烈。乃所以誣毁孝廟。上旣不納其說。而且諭公曰。大186_331c 臣之受此誣。可謂寃矣。乙未。公年七十。入耆社。其冬。得吐血症。上遣醫診視。內隷問病。十一月十一日。告終于渼沙之寓舍。訃聞。下敎曰。崔判府事以元老大臣。久住郊外。方欲敦勉。期回遐心。何意一疾奄忽長逝。震悼之極。涕淚沾襟。命擇給棺材。亟擧禮葬。給祿三年。成服日。兩殿遣官致吊致祭。以丙申正月。葬于淸州大栗里遅川公兆次枕坎之原。夫人合窆焉。公初諱錫萬。後以嫌改諱錫鼎。字汝和。完山人。高麗上將軍純爵。其始祖也。曾祖諱起南。游成牛溪門。有重名。歷官應敎舍人。光海朝爲群小所擠。卒官永興府使。累贈領議政完興府院君。祖諱鳴吉。策靖社186_331d 元勳。官領議政完城府院君諡文忠。文忠始無子。取弟吏曹參判諱惠吉子後亮爲後。仕至漢城府左尹。襲封完綾君。娶廣州安氏。觀察使献徵女。公之所生考妣也。文忠繼娶而生子。後尙。官止弘文館應敎。無嗣。又取公爲子所後。妣咸平李氏。咸綾府院君澥之女也。公之在娠。安夫人夢朱袍象笏者。端坐舍後山頂。從衛甚盛。生而神彩丰秀。端重有度。旣識字。便曉部首之分。仍及六書篆籀之体。聡記絶倫。過目輒成誦。日夜守書榻不去。九歲。誦詩書。十二。通易象卦爻之變。占揲之法。手畫爲圖。綜覽百家。爲詩文。下筆沛然。一時藉藉稱神童。旣而閱性理書。欣然有契於心。186_332a 作小學叙。論學問始終。如宿儒老師。長老嗟異之。十七。中監試初試壯元。庠泮課製。每居首。選同進者。莫敢望。丙午。擢進士壯元。生員第八。辛亥。中庭試丙科。隷槐院。拜說書。薦授藝文館檢閱。以嫌遞。復拜說書。癸丑。持安夫人服。東宮甞問講官崔說書。何久不見。制除。叙待敎。陞奉敎。選玉堂南床錄。甞應製居第二。賜乕皮。領相許積。惡吳公道一甞謗己。廷毁史薦。公䟽辨。就理譴罷。叙陞典籍。轉監察,禮曹佐郞。移兵曹。陞正郞。選知製敎。出爲全羅都事。金公錫胄爲兵判。啓留之。辟守禦從事。特授弘文館修撰。轉校理。應旨陳䟽。首陳典學修身之道。因論時政之失曰。殿186_332b 下臨御未幾。竄逐大臣。輕開荊棘之路。匹夫之微。猶不可非罪而罪之。况孝廟禮遇之老臣。先王顧命之大臣。而不察情實。勒加覆載難容之罪。雖二臣之不足恤。獨不重貽累於明時乎。兩司俱請遠竄。上不許之。因許積言。命削黜。旣叙拜兵曹正郞。應製居首。又賜乕皮。翌日。特授副應敎。及羣小屛黜。舊人登用。兼改修實錄郞,承文校檢四學。公都會試官。叙鞠廳勞。陞通政。以資格未準。還寢。除司僕寺正。還應敎兼漢學敎授。大臣言典翰久虗。有通經學。長於文詞者。宜令居之。於是。以公爲典翰。上富於春秋。勤典學。公每侍講。反復啓告。自性命之理。經國之謨。究186_332c 極本末而論之。諸臣皆屬目聳聽。因暑例停經筵。公陳箚曰。國家庶政千條萬端。而最重且急。莫如人主之進學。古之聖王。德已成。治已定。猶必惜寸陰。務日新。豈以寒暑有間斷。上答以戒誨得宜。仍御經筵。時李師命有殊眷。驟加進用。公引韓琦論蘇軾事。請毋過寵。以招指目。以會盟祭。讀誓官。進階通政。拜兵曹參知。移同副承旨。遭所後考東岡公喪。壬戌。繼遭內艱。服闋。拜刑曹參議。移右副承旨。轉至左承旨兼承文副提調。遞拜大司成。移副提學。乙丑。四學儒生。發尹明齋私書謂之侮辱栗谷。四舘以發人私書。罰儒生。金領相壽恒右學儒。請罷四館職。公䟽論其186_332d 失。上謂敲撼大臣。命罷職不叙。玉堂兩司俱請還寢。大臣諸宰。繼以爲言。上曰。文學才望。予非不知。而䟽語謬戾。宜姑施罰。叙授副提學。不就。特陞戶曹參判。移大司成。邊氓越境。淸朝致罰。金公以陳奏副使赴燕。未準請。還被劾罷。叙拜右尹。副捴管李左相端夏。請裁損廟享。以補賑。下諸宰議。公以爲大侵殺禮。固出禮經。而古今異宜。太廟享祀。不可隨豐歉而增减。事不果行。移都承旨。羅掌令良佐䟽辭。其師尹美村被誣。大臣以侵侮宋相爲罪。請遠竄。公䟽直其寃。被嚴旨遞。除刑曹參判兼司饔提調。又移副提學。上始行朝參。公進位宁六箴。賜虎皮以奬。186_333a 改造渾天儀。以公曉乾象。命管其事。工訖。命製進齊政閣記。又有豹皮之賜。兼備局有司堂上。筵臣請於玉堂新錄。多取經術士。公言科目之外。經明行修之士。不爲無人。宜令廟堂精加訪求。別爲進用。仍薦李世龜,閔以升。時後宮張氏有寵。玉堂官以論宮掖事。見忤者數人。公率館僚陳箚言。中外皆謂語涉宮禁。不蒙寬貸。無不窃歎而懷憂。彼數臣者。終得敢言之名。而罪諫之過。敀於君父。殿下於數臣者。亦何深惡。使四方窺淺深哉。兼惠局堂上。罪宗杭黨於張氏。有上眷。朴玄石世采箚論之。上怒命罷其職。南領相九萬,呂右相聖齊。請對。語多觸咈。上大怒。186_333b 命安置兩相。疑公唆囑大臣。命拿鞫。擧朝震惧。俄改命削職。兩司幷請還收。久而得請。公於辭䟽言。近來天怒震疊。朝著惶駭。辭旨之暴發。擧措之失當。非一二數。此殆涵養本源之功。有所未至。而然君德輔導。責在經幄。臣之忝居此任。實專且久。其不能薰陶啓沃。以盡其職責審矣。此臣罪也。連除大司成,禮曹參判。移吏曹參判兼弘文館提學。以寫徽陵銘㫌。進嘉義階。持平李益壽毁張嬪母屋轎。忤上意。公連首擬三司。上旣盡黜舊臣。遂以此罪。公出補安東府使。以親癠遆。在官不滿三朔。政聲翕然。庚午。除延安府使。約己寬民。重脩平遠堂。䟽南大池。作君子亭。186_333c 於其上東西者。改觀。癸酉。遭生考喪。丙子。外除拜吏禮曹參判兼典牲署提調。未幾。擢授漢城府判尹。移大司憲。遆拜刑曹判書兼知經筵義禁府事。俄拜吏曹判書兼兩館大提學。政注公平。請托不售。請以儒學之士。充書筵官。啓差李世弼等十人。請增减蔭官參外之額。稍䟽仕滿淹滯者。又請稍通庶孼。處以三曹。以盡用才之方。上降畫豳詩二障。命公題詩。公旣撰進。而因附䟽以諷。請加意於制産經國之道。居數日。敎曰。頃日吏判箚陳保民之策。如有所料量。使條列以聞。公遂陳時務十事。皆切時之言。其終曰。除免稅戒侈習。事關宮禁。似難遽革。然在易朋亡之186_333d 傳曰。禁奢侈。則害於近戚。限田産。則妨於貴家。如此之類。不能斷以大公。是牽於朋比也。上優批褒答。翌年而遂膺大拜命。公高朗樂易。天賦旣絶異於人。而早悅性理之言。持養有方。皃莊而氣溫。外和而內剛。平生無忿厲之容。暴慢之言。旣登朝。慨然有當世之志。自朝章國故。靡不留意講究。欲脩弊政。救生民。庶幾振國勢之委靡。其區畫設施。屢發於章奏。前後累萬言。內外所莅。皆有紀述。翰苑,騎省,玉堂,譯院,內局及延安。皆作誌。以存考覽。書雲職廢。生徒鮮知曆筭。擇能算者。講曆法。分授生徒。課其精鹽。而上下其稍廩。未數月而競勸。我東星緯徵應。散失無可考。令186_334a 崔天璧採摭史乘。編成天東象緯考。印進購儀象志於燕肆。按圖作占晷測遠之器,日影儀,半天儀。以進。喜讀經傳。旣貴。猶不廢誦習。博通十三經。貫穿箋䟽。其所講說若取諸囊中。旣編定戴記論孟。幷有類編。庸學心經。幷有圖節。論者謂前輩名賢經學。亦當有遜於公云。老佛二家之說。亦究論其通蔽得失。甞著說辨陽明學術之疵。自理氣源頭天人性命之際。以至宇宙世界方國輿地。靡不根極而眇論之。學者聽之不厭。性好禮。凡經曲疑變。究其節目。達其源流。取家禮書儀諸儒先禮說。參合時宜。著四禮家式。一時士大夫於喪禮冠婚。有疑輒來質。未甞考閱書冊。造186_334b 次。皆口占以答。根据明確。龜川李公世弼。深於禮學。甞語人明谷禮學極博。有牛,栗以下諸賢所不及。深斥左道。雜術。不惑於拘忌之說。神恠之事。甞著說論地術之無稽。爲都憲時。啓請禁之曰。古者墓而不墳。後世有封樹窆葬之制。不過爲安固体魄而已。風水之說。俑於晉魏。至于今日。流弊已極。夫窮達禍福。自有天命。地於何有。衆人不知。妄意營求。蠧財病民。其害不一。此在殿下明義理以黜左道。至於偸葬不息。獄訟繁興。職由地師貪賂誑人之致。宜設法嚴禁。識者韙之。崇奬儒士。常加愛重。往復切磋。終始無倦。甞曰。士友之言。雖不盡用意見。終非流俗之比。口不186_334c 言人過失。雖寒生賤流。必以身禮下之。有一藝一能。奬予引進。猶恐不及。或以宰相門庭。多人客爲諷。公曰。鳥獸不可與同群。吾非斯人之徒與而誰與。挾位棄士以爲高。閉門拒人以爲簡。吾不能也。其於箴䂓之言。尤欣然聽納。無忤意曰。能言吾過者。是吾師也。喜施與。視財産如糞土。甞言財産之久蓄。非天理。必隨手散去。然後爲快。此皆出於天性。非勉强也。公之文章。以六經爲本。而貫穿百家。不以叫譟刻雕爲工。而渾厚典實。氣足暢其意。辭足充其体。文苑諸公。皆自以爲不如也。所著文集三十六卷。藏于家。公於藝術。無不傍通。而於字學韵書。殆於天得。沉潛硏竆。味186_334d 之如芻豢。辨其得失。勘其訛謬。甞自笑曰。此如嗜土炭。獨知其味。擧世無可與語。惟俟後世子雲耳。著經世正韵。序說韵會箋要。六書譜。又精於算學。發揮筭術源流。著九數略。夫人慶州李氏。左議政慶億女。弘重淵懿。有識慮。明於大義。公爲卿相數十年。未甞以干請。累公門庭。無一儈胥自通者。內外宗黨。歸以婦則焉。擧一男二女。男昌大副提學。女適李聖輝,李景佐。昌大娶判書吳斗寅女。無子。取從兄子守身爲後。李景佐繼子宗垣。側出二女。皆幼。守身仕至縣令。娶參判趙遠命女。生子二人。曰弘簡,弘靖。弘簡中生貟壯元。弘簡以副學公所爲狀。求爲墓道之銘。盖自186_335a 公至弘簡。已四世矣。而余備見其存沒。爲之俛仰感歎。而爲之銘曰。
玉産崐岡光氣美。琢而置之明堂器。有如相國篤天畀。神俊邁倫世之瑞。齠年耽書芻豢似。精通大易抉微旨。禮書蕪雜編以類。天高垂象坐可致。六書有譜窮籀史。穰穰百家包不遺。衆蛙皆喑響殷坻。羽儀王朝鸞鵠峙。遌事竭論譴不避。壹是謇謇聖主倚。事要人做敢怠棄。陳忠献規非一二。興壞補弊殫厥志。海原均役博哉利。尊崇經術禮儒士。相府十登躓而起。彼實狺狺勤旁伺。君子奚病安吾義。嗟公才學古罕比。用而不究豈天意。栗里之原稱吉地。祔186_335b 于名祖協神理。篆詞貞珉後人視。

[편-001]確 : 

西堂私載卷之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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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墓誌銘
淑人崔氏墓誌銘 a_186_435d


叔人完山崔氏。麗朝神虎衛上將軍純爵。其遠祖也。皇考諱起南。文科永興府使贈領議政完興府院君。王考諱來吉。策靖社勳。官工曹判書贈領議政完川府院君。考諱後胤。侍講院文學贈都承旨。妣海平尹氏。僉正贈左贊成勉之之女。淑人生三歲。而承旨公卽世。十一歲。而尹夫人繼沒。爲伯兄所育。十九而敀于郡守金公鏜。時舅掌令公沒已久。獨姑洪淑人在堂。淑人旣入門。克敬克孝。終日侍側。不命退。不敢退。婉娩承順。猶影之從形。咸陽公家。故淸貧。186_436a 而淑人則代有勳貴。饒於産業。然不敢輒以其富厚。加於舅家。凡有所得。悉以資洪淑人所用筐篋中。乃無絲毫私蓄。洪淑人始見淑人。姿相端㓗。動止有禮。固已心喜旣久。而察其所爲。乃歎曰。吾婦其賢乎。世謂早失父母者。失訓而無行。吾昔信其語。今乃知其謬也。亦唯得於天者。有善惡之別耳。洪淑人旣喪家婦。詔淑人曰。吾沒則於汝乎食。洪淑人旣沒。淑人哀慕踰禮。三年躬執饋奠。終始不怠。其遇忌。亦然。平居早起盥櫛。終日手執女工。至老不廢。常曰。婦道雖以柔順爲主。然若不濟以剛斷曉於大義。則亦不足貴矣。故其治家寬而能肅。咸陽公旣律己峻㓗。而淑人亦186_436b 以淸介合德。凡咸陽公在官。若內若外。淑人絶不營私利。以累咸陽公。其在秋曹。有訟於官者。密因女奴献白金數十兩。淑人叱而却之。後聞其貨入於僚郞家。又有里媼私饋苽果。淑人識其意。亦却不受。咸陽公家居。不以事務經心。而內外之事。細大必擧者。繄淑人是賴焉。每恨祿不逮養。或得官物。必泫然久之。訓子女以義。男則勉其篤於文行。女則戒其善事舅姑。而勿之有欺。凡有長幼之病。雖至瀕危從容。將護不改常度曰。視病者不宜以憂慮亂心。心旣亂則救護必失其道。爲害大矣。明谷,損窩兩相公。淑人之再從兄弟也。每穪淑人有女士之風。咸陽公沒。旣成服。186_436c 淑人自是日示疾。以甲午二月初四日。終焉。距咸陽公喪堇十日。壽六十八。前沒之二日。氣息已微甚。而神精了然不爽。呼姪昌瑞。執筆書遺命。定祭式。使從簡約。分資産均於子女。以至衣衾斂殯之事。纖悉無遺。以其年四月壬申。同前喪啓靷。十日辛巳。合窆于驪州蛇洞負亥之原。子女及內外諸孫。已見于咸陽公墓誌。此不復錄。銘曰。
奉親以孝。敎子以義。勤以御家。莊以治己。具是衆美。以相夫子。亦旣相之。又從而死。嗚呼淑人。不愧女士。


耳溪集卷三十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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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墓誌銘
僉知中樞府事崔公墓誌銘 幷序 a_242_037c


全州之崔。起自羅代。以神虎衛上將軍純爵爲上祖。其後有完山君宰。平度公有慶。敬節公士康。連世大顯於麗季國初。蟬嫣爲著閥。至諱廷吉。以文章行義名世。從兄文忠公鳴吉。勸之仕。不肯。隱居敎授學者。242_037d稱西洲先生。卽公曾祖也。祖諱後徵。官縣監。考諱錫泰。以文章幹局薦。授莊陵參奉。不就。配全州李氏參奉弘蕃女。以肅宗丁亥生公。公諱昌傑。字漢輔。聰穎早秀。十歲。受書數百行。讀四五過。便通誦。弱冠屢發解不利。遂棄擧業。志古人之學。師樗村沈先生。聞存心居敬之說。日必冠帶危坐。讀性理書。以太極圖主靜。爲入道之基。朱子中和第六書。爲用功之要。循循有序。動遵繩墨。名其齋曰喚醒。參奉公晩居仁川。老且病。家素貧。公弊衣草屨。力農漁以養之。每得嘉殽美酒。輒手觴以跪進。退與子弟飮。自爲歌以侑242_038a歡。參奉公和之。其樂融如也。一鄕稱其孝。以經行薦于方伯。癸酉。拜寢郞。例遷別檢,奉事,直長。仕滿。陞主簿都事。己卯。除淸河縣監。政以養民爲先。勸農爲本。躬行田野。穿渠開塍。荒壤化爲沃土。民至今賴之。嘗値大歉。單誠賙救。御史褒聞。地本濱海僻遠。士不知學。公設養老宴。親行賓主之禮。選置訓長。秋冬敎經史。春夏治功令。行之數年。文風大興。多占大小科解額。人謂之破天荒。甲申解歸。卜居南山之下。破席疏食。一如布衣。時種藥蒔花。彈棊賦詩以自娛。辛卯。復健元陵令。尋爲衿川縣監。又以善賑稱。癸巳。換授陽242_038b智縣監。暫赴旋遞。庚子。以中子守魯侍從恩。陞通政階。拜僉知中樞府事。辛丑。赴守魯康翎任所。公與夫人同年生。大耋康强。是年五月爲回巹之期。二子袍笏獻壽。遠近傳爲盛事。以六月十四日考終。返葬於仁川新峴山井里艮坐之原。夫人坡平尹氏。判尹東衡之女。早襲詩禮之訓。爲婦克敬。敎子以義。劬躬成家。六親咸宜。有古哲媛之德。後公七年歿。從公葬同穴而左祔。擧三男。長守忱。次守魯。並文科正言。季才而殤。三女歸李錫彬,柳集基,成老柱。守忱男弘運。守魯男弘迪,弘進,弘逵。內外孫曾數十人。良浩以樗村242_038c之甥。少也。見公於芝山學舍。士友稱公爲務學實不近名。芝山去仁川一舍餘。先生時或命駕。從公父子講說游泳而歸。以是知師門之倚重公也。曁在淸河。不佞守月城疆相隣也。聞公爲治用古道。心竊敬焉。未幾公兩子連歲中進士。襴幞來覲。遐土之人榮之。以爲善賑愛士之報。于時不佞馳往賀焉。賦詩志喜。同觀內淵之瀑。留連信宿而返。至今不忘于懷也。南麓之舍。又與連巷。步屧過從。便忘年焉。竊覸公德性寬和。操履純正。晩年氣象充然。有自得之容。及至耆艾。鬚眉皓白而韶華敷潤。嘗謂子弟曰。學者能從事242_038d於九容九思。則自然容貌端雅。壽福可致。每誦周茂叔光風霽月。欣然慕之。可見平日所養之深。而終享壽祿。有以也夫。今正言兄弟。次公言行。來屬誌壙之銘。感念疇昔。義不敢辭。乃銘曰。
道散學弊。循名騖外。公獨爲己。存誠直內。在家在官。無施不可。父怡于堂。民歌于野。南山之下。有梅有菊。皜髮腴顔。壽考寬樂。英英雙璧。簪花獻觴。室家靜好。孫曾繞床。匪積曷致。惟敬與儉。勒石詔後。我言弗僭。
 陽園遺集卷十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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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碑銘 附碑
完城君崔公壇享碑銘 幷序○乙巳 a_348_280d


知其葬之在是地而墓不可辨者。設壇於其傍而祭之。乃我東創行之俗。而自乾旨山肇慶壇成。遂爲時王之制。可謂處禮之變而得其正者矣。北靑治西平浦之內洞。有築土之方而隆者。寔故兵曹參判崔公墓祭之壇也。公諱信基。系出全州。以高麗完州伯文烈公諱純爵爲鼻祖。冠冕奕舃。代有聞人。八世而有諱有慶官典法判書。恭讓己巳致仕。我太宗朝擢爲左參贊。選淸白吏謚平度。後以孝㫌閭。腏享松泉348_281a書院。是於公爲高祖。曾祖諱士儀判敦寧府事謚襄度。亦選淸白吏。祖諱厚僉知中樞府事。考諱旼知淸風郡事。公登世宗朝別試文科。階至嘉善。以兵曹參判。五牌不進。左遷慶尙監司。更謫于北靑以卒。子孫遂家焉。後贈正憲大夫兵曹判書兼知經筵,義禁府,春秋館事,同知成均館事,弘文館大提學封完城君。有三子。長曰允道茂長縣監。次曰允慶以德陵參奉轉都摠府都事。次曰允生。三房之後。散居靑海者無慮數百千人。墓所僅載譜牒而不辨其原。裔孫前主事寬苾。與宗人謀設壇而祭焉。又將竪石以348_281b表之。余與寬苾舊相識。及莅咸闑。要余銘甚勤。余惟公之宦歷事實。譜乘所記。雖不過寥寥數行。無以攷論。然觀其五牌不進。至於貶謫而不悔。則其伉志直節。傑然爲一世偉人無疑也。雲仍滯在遐土。家遂不振。而墓亦失傳可慨也。然能篤於追遠如是。則天道佑善。安知不鍾生聦俊。一朝奮興。繼公之志而享公之庥耶。是可銘而竢之。銘曰。
有倬完城。秉節靡渝。遷南投北。澤吟不癯。堂斧莫辨。壇焉是享。嘉乃後昆。誠徹厚壤。公施未展。公報不食。必有餘慶。證我銘刻。