完山之崔氏。譜可考者曰純爵。官至檢校神虎衛上將軍。生崇。中郞將。中郞將生南敷。官至通議大夫,左右衛大將軍,知工部事。工部生諱佺。左右衛保勝郞將。郞將生諱正臣。左右衛中郞將。中郞將生諱得枰。通憲大夫,選部典書,上護軍致仕。廉正自守。人敬憚之。歷事忠烈,忠宣,忠肅三王。而忠宣尤器重之。忠宣雖內禪。而國政必與聞。故士大夫之升黜多出於忠宣。選部在臺綱紀立。在刑部刑罰淸。出守金海,尙州。民懷其惠。再按全羅。民畏其風。其量田也。副蔡宰相洪哲分理全羅州縣之田。不廢法不擾民。享年七十五。選部娶奉翊大夫,知密直司事,監察大夫,文翰學士,承旨,世子元賓郭公諱預之女。以大德癸卯四月癸酉生公。公名宰字宰之。至治元年。補東大悲院錄事。泰定甲子。入內侍。四年授散員。明年轉別將。天歷편001庚午。順興君安公文凱,深岳君李公湛同掌試。公中之。六年然後改丹陽府注簿。又四年始授中部令。階承奉郞。未幾。知瑞州事。以母憂不赴。蓋欲終制也。明年忠肅王沙汰冗官。有薦公者。王曰。吾固知其父風憲。無以易此人矣。卽授監察持平。不獲已就職。玄陵卽位。迺褫其職。及高氏之亂作。凡王所設置。悉皆更革。立都監以公爲判官。公甚不樂。稱疾不出。相府頗督之。且脅之。公徐出謂其判事宰相曰。王固失德矣。然爲臣而敭君之不美。於公安乎。王之惡。非出於王。左右逢之耳。逢之於前。敭之於後。吾實恥之。其宰相默不敢言。明陵卽位。初政授典法正郞。其年冬出知興州。凡可以便民者。靡不擧行。田籍久且爛。公修之。仍藏舊本相質。聞者歎服。印政丞當國。素忌公故替之。歲丁亥政丞王公煦,金公永暾奉聖旨整理田民詞訟。擧公爲判官。且馳驛召之。公至則二公又曰。長興府今號難治。非崔某不可。又出之。公將之任。二公又曰。崔某前爲持平有威望。盍留之再任。適外氏郭公迎俊爲大夫。法當避。遷典法正郞。歲戊子。按察慶尙道。一年再遷典客副令,資贍司使。公兼理支應內用事。羨餘盡歸之民。前弊絶矣。歲己丑。出知襄州。有使者降香。凌辱存撫使。公曰。非禮也。將及我矣。棄官而歸。執政者喜。白授監察掌令。臺綱復振矣。一年而罷。歲辛卯玄陵卽位。選臺臣復掌令。明年移開城少尹。辭歸淸州。日新之難作。歲甲午。以典法揔郞召。未幾移版圖。其秋出使福州牧。察民情守條約。去之日人如失怙恃。其所施設。至今遵之。乙未秋。以中顯大夫,監察執義,直寶文閣召至。選軍以田。其法舊矣。命公爲其都監使。一人受田。有子孫子孫傳之。無則他人代受。有罪當收其田。則人人皆欲得。於是雜然矣。公曰。是爭民施奪也可乎。於是與其當得者一人而止。訟稍簡矣。歲丙申。拜大中大夫,尙書右丞。歲丁酉。進正議大夫,判大府寺事。盖公年五十五。而志不少衰。益勤於職。旬月間府庫實矣。玄陵曰。判大府盡其職者。崔某而已。歲己亥。出爲公州牧。如在福日。歲辛丑。又出爲尙州牧。其冬國家避兵南徙。明年春。幸尙州。公盡力供辦。惟恐一毫或傷於民。故求之不得者稍短之。三月以奉翊大夫,典法判書。分司本京。公辭違。玄陵引見。溫言慰諭。歲甲辰。拜監察大夫,進賢館提學,同知春秋館事。其冬封重大匡完山君。明年移典理判書。又明年移開城尹。歲己酉。官制行。改榮祿大夫。歲辛亥。安東闕守臣。玄陵曰。安東守我已得人矣。於是批下。遣衛士督公行。慮公辭不就也。甲寅春。以老乞歸鄕。秋九月。玄陵薨。公會哭盡哀。今上拜公密直副使商議。公固辭請還鄕。封完山君。階大匡。明年春。命駕往見江陵崔密直安沼而歸。盖永訣也。秋九月有微疾。語諸子曰。吾甞夢異人謂我曰。至午死。今戊午年也。而又如此。吾必不起也。十月己巳卒。享年七十六。十二月壬寅。葬于居第之東坎麓。理命也。嗚呼。公可謂達人矣。公再娶。靈山郡夫人辛氏。奉翊大夫,判密直司事,藝文館提學致仕諱蕆之女也。務安郡夫人朴氏。軍簿正郞諱允鏐之女也。辛氏生二男。長思美奉翊大夫,禮儀判書。次德成及第中正大夫,三司左尹。朴氏生子三人。男曰有慶中正大夫,宗簿令,知典法司事。女適誠勤翊戴功臣,匡靖大夫,門下評理,上護軍禹仁烈。次適宣德郞,繕工寺丞趙寧。孫男女若干人。判書生子五人。長恕護軍。今爲全羅道按廉使。次愿中郞將。次愨別將。女適禮儀揔郞宋仁壽。次幼。左尹生子四人。男曰復昌別將。次曰世昌別將。次仕昌未仕。女幼。宗簿生子三人。士威郞將。餘皆幼。評理生子三人。男曰良善英明殿直。女皆幼。寺丞生女一人幼。左尹吾友也。倜倘使酒。居官所至有名。來請銘。銘曰。 惟公之直。惟公之淸。惟公之德。惟公之名。惟名惟德。惟世之則。胡不大用。正我王國。旣相我王。周旋廟堂。年七十六。尙爾康強。公退則决。允矣明哲。嗚呼崔公。世歆其風。
완산 최씨(完山崔氏)의 족보 중에서 상고할 만한 이로 순작(純爵)이라는 분이 있는데, 관직이 검교신호위 상장군(檢校神虎衛上將軍)에 이르렀다. 이분이 숭(崇)을 낳았으니 관직은 중랑장(中郞將)이요, 중랑장이 남부(南敷)를 낳았으니 관직이 통의대부(通議大夫) 좌우위대장군 지공부사(左右衛大將軍知工部事)에 이르렀다. 공부가 휘(諱) 전(佺)을 낳았으니 좌우위 보승 낭장(左右衛保勝郞將)이요, 낭장이 휘 정신(正臣)을 낳았으니 좌우위 중랑장(左右衛中郞將)이다. 중랑장이 휘 득평(得枰)을 낳았는데, 통헌대부(通憲大夫) 선부전서 상호군(選部典書上護軍)으로 치사(致仕)하였다. 선부(選部)는 청렴과 공정을 신조로 자신을 굳게 지켰으므로 사람들이 경외하며 어렵게 여겼다. 충렬(忠烈)ㆍ충선(忠宣)ㆍ충숙(忠肅)의 세 임금을 차례로 섬겼는데, 그중에서도 충선왕이 특히 재능을 인정하고 중히 여겼다. 당시에 충선왕이 비록 왕위를 넘겨주기는 하였지만 나라의 정사에는 반드시 참여하였기 때문에, 사대부에 대한 인사 행정이 충선왕의 손으로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았다. 선부가 대간(臺諫)을 맡으면 기강이 확립되었고, 형부(刑部)에 있으면 형벌이 공정하게 시행되었다. 김해(金海)와 상주(尙州)의 목민관으로 나갔을 때는 백성들이 그 은혜를 사모하였고, 전라도(全羅道)를 두 번 안찰(按察)하였을 때에는 백성들이 그 풍도를 두려워하였다. 양전(量田 토지 조사)을 행할 적에 재상(宰相) 채홍철(蔡洪哲)의 부관(副官)이 되어 전라도 주현(州縣)의 토지를 분담해서 처리하였는데, 법에 어긋나지 않게 하면서도 백성들이 동요되지 않게 하였다. 향년(享年)은 75세였다. 선부의 부인은 봉익대부(奉翊大夫) 지밀직사사 감찰대부 문한학사승지 세자원빈(知密直司事監察大夫文翰學士承旨世子元賓) 곽공(郭公) 휘 예(預)의 딸이다. 대덕(大德) 계묘년(1303, 충렬왕29) 4월 계유일에 공을 낳았다. 공의 이름은 재(宰)요, 자(字)는 재지(宰之)이다. 지치(至治) 원년(1321, 충숙왕8)에 동대비원 녹사(東大悲院錄事)에 보임(補任)되었다. 태정(泰定) 갑자년(1324, 충숙왕11)에 내시부(內侍府)로 들어갔다가 태정 4년에 산원(散員)에 제수되었으며, 그 이듬해에 별장(別將)으로 옮겼다. 천력(天曆) 경오년(1330, 충혜왕 즉위)에 순흥군(順興君) 안공 문개(安公文凱)와 심악군(深岳君) 이공 담(李公湛)이 공동으로 관장한 과거에서 공이 급제하였는데, 6년이 지난 뒤에 단양부 주부(丹陽府注簿)로 개임(改任)되었고, 또 4년이 지나서야 비로소 중부령(中部令)에 제수되면서 승봉랑(承奉郞)의 품계를 받았다. 얼마 뒤에 지서주사(知瑞州事)가 되었으나 모친상을 당해 부임하지 않았으니, 이는 복제(服制)를 마치기 위함이었다. 이듬해에 충숙왕이 쓸모없는 관원들을 도태시켰다. 이때 어떤 사람이 공을 천거하니, 왕이 이르기를 “내가 원래 그의 부친을 알고 있다. 풍헌관(風憲官)으로는 이 사람을 당할 자가 없을 것이다.” 하고는 즉시 감찰 지평(監察持平)을 제수하였으므로 공이 부득이 취임하였다가, 영릉(永陵 충혜왕(忠惠王))이 복위하자 이에 체직(遞職)되었다. 그러다가 고씨(高氏)의 난이 일어남에 미쳐서는, 무릇 왕이 설치해 놓은 것들을 모조리 뜯어고치려 하면서 도감(都監)을 세우고는 공을 판관(判官)으로 임명하였는데, 공이 매우 불쾌하게 생각하여 병을 칭탁하고 나가지 않았다. 이에 상부(相府)가 자못 독촉하면서 협박을 가해 오자, 공이 천천히 나가서 도감의 판사(判事)인 재상에게 말하기를 “왕이 물론 덕을 잃기는 하였다. 그러나 신하 된 입장에서 임금의 불미스러운 점을 들추어내는 것이 공의 마음에는 편안한가? 왕의 잘못은 왕에게서 나온 것이라기보다는, 좌우에 있는 신하들이 영합해서 그렇게 된 것이다. 앞에서는 영합하다가 뒤에 가서 들추어내다니, 나는 이를 실로 부끄럽게 생각한다.” 하니, 그 재상이 입을 다문 채 감히 아무 말도 하지 못하였다. 명릉(明陵 충목왕(忠穆王))이 즉위한 뒤 처음 행한 정사(政事)에서 공에게 전법 정랑(典法正郞)을 제수하였다. 그해 겨울에 흥주(興州)를 다스리러 나가서, 백성을 편안하게 할 수 있는 일이라면 거행하지 않는 것이 없었다. 또 전적(田籍)이 오래되어 낡았으므로 공이 이를 개수(改修)하였는데, 소장되어 있던 구본(舊本)과 일일이 확인하여 대조하는 작업을 벌이자 듣는 이들이 모두 탄복하였다. 인 정승(印政丞 인당(印璫))이 정권을 잡고 나서는 평소에 공을 꺼렸기 때문에 그 자리에서 교체시켰다. 정해년(1347, 충목왕3)에 정승인 왕공 후(王公煦)와 김공 영돈(金公永暾)이 성지(聖旨)를 받들고서 전민(田民)의 송사(訟事)를 정리할 적에, 공을 판관(判官)으로 천거하고는 역마(驛馬)를 치달려 불러오게 하였다. 그런데 공이 도착하자, 두 정승이 또 상의하기를 “장흥부(長興府)는 지금 다스리기 어려운 곳으로 유명하니, 최모(崔某)가 아니면 안 되겠다.” 하고는 다시 외방으로 나가게 하였다. 이에 공이 장차 부임하려고 하였는데, 두 정승이 또 상의하기를 “최모는 전에 지평(持平)으로 있을 적에 위엄과 명망을 떨쳤다. 그러니 이곳에 머물러 두어 재임(再任)시키는 것이 좋지 않겠는가.” 하였다. 그러나 때마침 외씨(外氏)인 곽공 영준(郭公迎俊)이 대부(大夫)로 있었기 때문에 법제상 상피(相避)해야 했으므로 전법 정랑(典法正郞)으로 옮겨졌다. 무자년에 경상도 안찰사(慶尙道按察使)가 되었으며, 1년 중에 전객 부령(典客副令)과 자섬사사(資贍司使)로 자리를 두 번 옮겼다. 공이 빈객을 접대하는 일과 궁중의 수요(需要)를 충당하는 일을 함께 담당하면서 남는 물품이 있으면 모두 백성들에게 돌려주었으므로 그동안의 폐단이 근절되었다. 기축년에 양주(襄州)의 목민관으로 나갔다. 원(元)나라의 사자(使者)가 향(香)을 내려 주러 와서 존무사(存撫使)를 능욕하자, 공이 말하기를 “이런 무례한 일이 장차 나에게도 닥칠 것이다.” 하고는, 관직을 버리고 돌아왔다. 이에 집정(執政)하던 자가 기뻐하며 상에게 아뢰어 감찰 장령(監察掌令)을 제수하자 대간(臺諫)의 기강이 다시 떨쳐지게 되었는데, 1년 만에 파직되고 말았다. 신묘년(1351)에 현릉(玄陵)이 즉위하자, 대신(臺臣)에 뽑혀 다시 장령(掌令)이 되었다. 이듬해에 개성 소윤(開城少尹)으로 옮겨지자 사직하고 청주(淸州)로 돌아갔는데, 이때 조일신(趙日新)의 난이 일어났다. 갑오년(1354, 공민왕3)에 전법 총랑(典法摠郞)으로 부름을 받았다가 얼마 뒤에 판도사(版圖司)로 옮겨졌다. 그해 가을에 복주 목사(福州牧使)로 나가서 민정(民政)을 살피고 조약(條約)을 지켰다. 공이 떠나던 날에 사람들이 마치 부모를 잃은 것처럼 슬퍼하였으며, 그때 공이 설치해 놓은 것들을 지금까지도 준수하고 있다. 을미년 가을에 중현대부(中顯大夫) 감찰집의 직보문각(監察執義直寶文閣)으로 조정에 불러들였다. 군사를 뽑을 때 전지(田地)를 주는 것은 예전부터의 제도였는데, 공을 명하여 그 도감사(都監使)의 일을 맡아보게 하였다. 그런데 한 사람이 전지를 받을 경우, 그에게 자손이 있으면 자손이 전해 받고, 자손이 없으면 다른 사람이 대신 받았으며, 죄를 지어야만 그 전지를 환수하게 되어 있었다. 그래서 사람들마다 전지를 얻으려고 하다 보니 자연히 시끄럽게 분란이 일어나게 되었다. 이에 공이 말하기를 “이는 바로 백성들을 다투게 하면서 빼앗는 것을 가르쳐 주는 격이니, 이대로 해서야 되겠는가.” 하고는, 전지를 받아야 할 당사자 한 사람에게만 주고 당대(當代)로 그치게 하자, 이에 관한 송사(訟事)도 차츰 줄어들게 되었다. 병신년에 대중대부(大中大夫) 상서 우승(尙書右丞)에 임명되었다. 정유년에 정의대부(正議大夫) 판대부시사(判大府寺事)로 승진하였다. 이때 공의 나이 55세였지만 뜻은 조금도 쇠하지 않아 더욱 직무에 충실한 결과 순월(旬月) 사이에 부고(府庫)가 가득 차게 되자, 현릉이 이르기를 “판대부의 직책을 극진하게 수행한 자는 최모뿐이다.” 하였다. 기해년(1359, 공민왕8)에 공주 목사(公州牧使)로 나가서 복주(福州)에 있을 때처럼 선정(善政)을 베풀었다. 신축년에 또 외방으로 나가서 상주 목사(尙州牧使)가 되었다. 그해 겨울에 조정이 병란을 피해서 남쪽으로 옮겨 갔다가 이듬해 봄에 상주로 대가(大駕)가 거둥하였다. 이때 공이 있는 힘껏 접대를 하면서도 혹시 조금이라도 백성들에게 피해를 끼치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였으므로, 무엇을 요구하다가 얻지 못한 자들로부터 차츰 비난을 받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해 3월에 봉익대부(奉翊大夫) 전법 판서(典法判書)로 본경(本京)에 가서 분사(分司)를 맡게 되었는데, 공이 하직 인사를 올리자 현릉이 인견(引見)하고는 따뜻한 말로 타이르며 위로하였다. 갑진년(1364, 공민왕13)에 감찰대부(監察大夫) 진현관제학 동지춘추관사(進賢館提學同知春秋館事)에 임명되었다. 그해 겨울에 중대광(重大匡) 완산군(完山君)에 봉해졌다. 이듬해에 전리 판서(典理判書)로 옮겼다가 이듬해에 또 개성 윤(開城尹)으로 옮겼다. 기유년(1369, 공민왕18)에 새로운 관제(官制)가 시행되자 영록대부(榮祿大夫)로 바뀌어졌다. 신해년에 안동(安東)의 수신(守臣) 자리가 비게 되자, 현릉이 이르기를 “안동을 지킬 적임자를 내가 이미 알고 있다.” 하고는, 비답(批答)을 내리면서 위사(衛士)를 보내 공의 출발을 재촉하였으니, 이는 공이 사퇴하고 취임하지 않을까 염려했기 때문이었다. 갑인년(1374, 공민왕23) 봄에 노쇠했다고 청하여 허락을 얻고 고향에 돌아왔다. 그해 9월에 현릉이 훙(薨)하자, 공이 곡(哭)하는 자리에 나아가서 애통한 심정을 극진히 하였다. 금상(今上 우왕(禑王))이 즉위하여 공을 밀직부사 상의(密直副使商議)에 임명하였으나, 공이 고사(固辭)하고 간청하여 고향으로 돌아왔다. 공에게 완산군(完山君)이 봉해지고 대광(大匡)의 품계로 올랐다. 이듬해 봄에 수레를 몰게 하여 강릉(江陵)의 밀직(密直) 최안소(崔安沼)를 방문하고 돌아왔으니, 이는 그에게 영결(永訣)을 고하려 함이었다. 그해 9월에 가벼운 질환을 앓게 되자, 여러 자제들에게 이르기를 “내가 꿈을 꾸니 이인(異人)이 나타나서 오시(午時)에 이르면 죽을 것이라고 말해 주었다. 그런데 올해가 무오년이고 또 나의 병이 이와 같으니, 내가 필시 일어나지 못할 것이다.” 하였다. 10월 기사일에 죽으니, 향년 76세였다. 12월 임인일에 살던 집의 동쪽 감좌(坎坐)의 산기슭에 장사 지냈으니, 이는 공의 유언에 따른 것이었다. 아, 그러고 보면 공이야말로 달관한 사람이라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공은 두 번 장가들었다. 영산군부인(靈山郡夫人) 신씨(辛氏)는 봉익대부(奉翊大夫) 판밀직사사 예문관제학(判密直司事藝文館提學)으로 치사(致仕)한 휘(諱) 천(蕆)의 딸이요, 무안군부인(務安郡夫人) 박씨(朴氏)는 군부 정랑(軍簿正郞) 휘 윤류(允鏐)의 딸이다. 신씨는 아들 둘을 낳았다. 장남 사미(思美)는 봉익대부 예의 판서(禮儀判書)이고, 다음 덕성(德成)은 급제(及第) 출신으로 중정대부(中正大夫) 삼사 좌윤(三司左尹)이다. 박씨는 자녀 셋을 낳았다. 아들 유경(有慶)은 중정대부 종부령 지전법사사(宗簿令知典法司事)이고, 딸은 성근익대공신(誠勤翊戴功臣) 광정대부(匡靖大夫) 문하평리 상호군(門下評理上護軍) 우인열(禹仁烈)에게 출가하였으며, 다음은 선덕랑(宣德郞) 선공시 승(繕工寺丞) 조령(趙寧)에게 출가하였다. 손자와 손녀가 약간 명 있다. 판서는 자녀 다섯을 두었다. 장남 서(恕)는 호군(護軍)을 거쳐 현재 전라도 안렴사(全羅道按廉使)이고, 다음 원(愿)은 중랑장(中郞將)이고, 다음 각(慤)은 별장(別將)이며, 장녀는 예의 총랑(禮儀摠郞) 송인수(宋仁壽)에게 출가하였고, 다음은 어리다. 좌윤은 자녀 넷을 두었다. 장남 복창(復昌)은 별장이고, 다음 세창(世昌)은 별장이고, 다음 사창(仕昌)은 아직 벼슬하지 않았으며, 딸은 어리다. 종부(宗簿)는 자녀 셋을 두었다. 아들 사위(士威)는 낭장(郞將)이고, 나머지는 모두 어리다. 평리는 자녀 셋을 두었다. 아들 양선(良善)은 영명전 직(英明殿直)이고, 딸은 모두 어리다. 시승(寺丞)은 딸 하나를 두었는데, 어리다. 좌윤은 나의 친구이다. 성격이 호탕하여 술을 마실 때마다 호기를 곧잘 부리는데, 관직 생활을 하는 동안 어디를 가나 그 일로 이름이 났다. 그가 와서 명(銘)을 청하기에 이렇게 글을 지었는데, 명은 다음과 같다. 공은 올곧았고 / 惟公之直 공은 맑았나니 / 惟公之淸 공의 덕성에 걸맞게 / 惟公之德 공의 이름 떨쳤다네 / 惟公之名 그 이름 그 덕이면 / 惟名惟德 세상의 모범이 되련마는 / 惟世之則 어찌하여 크게 쓰이는 몸이 되어 / 胡不大用 일찍이 우리 왕국 바로잡지 못했던가 / 正我王國 우리 왕을 일단 보좌하게 된 뒤로는 / 旣相我王 조정의 어려운 일 주선을 하였는데 / 周旋廟堂 일흔 하고 여섯의 나이가 되었어도 / 年七十六 건강하고 굳센 것은 여전하였다오 / 尙爾康強 물러날 때 보여 준 결단성이여 / 公退則決 이것이 바로 명철함이 아니리요 / 允矣明哲 아 우리 최공이시여 / 嗚呼崔公 세상에서 그 풍도 흠모하리라 / 世歆其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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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색(李穡) 완산(完山)최씨(崔氏)의 보계(譜系)에서 상고하여 볼 만한 이로 순작(純爵)이라는 이가 있는데, 벼슬이 검교 신호위 상장군(檢校神虎衛上將軍)에 이르렀다. 그가 숭(崇)을 낳았는데 중랑장이요, 중랑장이 남부(南敷)를 낳았는데, 벼슬은 통의대부 좌우위 대장군 지공부사(通議大夫左右衛大將軍知工部事)에 이르렀고, 공부(工部)가 전(佺)을 낳았는데, 좌우위 중랑장(左右衛中郞將)이요, 중랑장이 득평(得枰)을 낳았는데, 벼슬은 통헌대부 선부전서 상호군 치사(通憲大夫選部典書上護軍致仕)로, 청렴하고 정직하게 몸을 지켜 사람들이 공경하고 두려워하였으며, 충렬ㆍ충선ㆍ충숙 등 세 임금을 내리 섬겼는데, 그 중에서도 충선왕이 더욱 그를 나라의 그릇으로 알고 중히 여겼다. 충선왕은 비록 왕위를 전해 주었으나 나라의 정사에 반드시 참여하였기 때문에, 사대부의 승진과 파면이 충선왕에게서 오는 것이 많았는데, 득평이 대직(臺職)에 있으면 기강이 섰고, 형부(刑部)에 있으면 형벌이 맑았으며, 김해(金海)와 상주(尙州)의 수령으로 고을을 다스리자 백성들이 그 은혜를 잊지 못하였고, 두 번 전라도를 안찰하자 백성들은 그의 풍의(風儀)를 두려워하였고, 전토를 측량하여 세액을 조정할 때에는 재상(宰相)채홍철(蔡洪哲)을 도와서 전라도 각 주현(州縣)의 전토를 나누어 처리하였는데, 법을 해이하게 하지도 않고 백성들을 요란하게 하지도 아니하였으며, 75세의 수명을 누렸다. 선부가 봉익대부 지밀직사사 감찰대부 문한학사 승지 세자원빈 곽예(郭預)의 딸에게 장가들어 대덕(大德) 계묘년 4월 계유일에 공을 낳았는데, 공의 이름은 재(宰)요 자는 재지(宰之)이다. 지치(至治) 원년에 동대비원 녹사(東大悲院錄事)에 보직되었고, 태정(泰定) 갑자년에 내시(內侍)로 들어갔고, 4년에 산원(散員)에 제수되었으며, 다음해에 별장으로 전직되었다. 천력(天歷) 경오년에 순흥군(順興君) 안문개(安文凱)공과 심악군(深岳君) 이담(李湛)공이 같이 고시(考試)를 관장하였는데 공은 그 과거에 급제하였으나, 6년이 지난 뒤에 단양 부주부(丹陽府注簿)로 임명되었고, 또 4년 후에 비로소 중부령(中部令)에 제수되어 승봉랑(丞奉郞) 관계(官階)를 받았다. 얼마 안 되어 지서주사(知瑞州事)가 되었으나, 모친의 상중(喪中)이라 하여 부임하지 않았으니, 이는 복제를 마치려는 것이었다. 다음해에 충숙왕이 필요 없는 관원을 도태할 때에 공을 천거하는 자가 있으니, 임금이 이르기를, “내가 본래 그 아비의 풍모와 법도가 있음을 알고 있으니, 이 사람을 가벼이 쓸 수는 없다.” 하고, 감찰지평(監察持平)에 제수하니 공은 사양하다 못하여 벼슬에 나갔으나, 공민왕(恭愍王)이 직위하자 그 관직에서 갈리었다. 고(高)씨의 난이 일어나자 무릇 임금이 설치한 것을 모두 개혁하려 하여, 도감을 설립하고 공을 판관으로 삼자, 공은 매우 즐거워하지 아니하여 병을 칭탁하고 나가지 아니하니, 상부(相府)에서 자못 독족 하고 또 협박도 하므로 공이 천천히 자리에 나아가서 그 판사(判事)의 재상에게 말하기를, “임금이 실로 덕을 잃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러나 신하로서 임금의 아름답지 못한 점을 들추어내는 것이 공의 마음에는 편하던가. 임금의 악한 일이란 임금 자신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요, 그 좌우에 있는 자들이 임금에게 아첨하여 그 악을 맞아 들여서 하도록 한 것인데, 먼저는 맞아들여 하도록 해놓고, 뒤에 다시 그 일을 들추는 것을 나는 실로 부끄러워한다.” 하니, 그 재상은 묵묵히 듣고만 있을 뿐 감히 말을 하지 못하였다. 충목왕(忠穆王)이 즉위하고 처음 정사에서 공에게 전법정랑을 제수하였고, 그 해 겨울에 지흥주(知興州)가 되어 나갔는데, 모든 백성에게 편의를 도모하는 일이라면 시행하지 않은 것이 없었으며, 전적(田籍)이 오래되고 해어져 있었으므로 공이 이것을 수정하여 구장본(舊藏本)과 서로 대질ㆍ교정하니 듣는 이들이 탄복하였다. 인정승(印政丞)이 정권을 잡게 되자, 그는 평소에 공을 꺼렸으므로 벼슬을 갈아버렸는데, 정해년에 정승 왕후(王煦)와 김영돈(金永暾)이 임금의 교지를 받들어 전민(田民)의 송사를 정리하게 되어, 공을 천거하여 판관으로 삼고 역마를 달려 보내어 급히 불렀다. 공이 이른즉 두 정승은 또 말하기를, “장흥부(長興府)는 지금 다스리기 어렵기로 이름난 곳이니, 최모가 아니면 안 된다.” 하고 다시 나가게 하였다. 공이 장차 임지로 부임하려 할 즈음에, 두 정승이 또 말하기를, “최모가 지난번 지평직에 있을 때에 위엄과 명망이 있었으니, 어찌 이런 사람을 풍헌(風憲)직에 머물어 재임하게 하지 않겠는가.” 하였다. 그러나 그때 마침 공의 외씨(外氏)인 곽영준(郭迎俊)이 그 관아의 대부로 있었으므로, 법제상 서로 피하게 되어 전법 정랑(典法正郞)으로 전임되었다. 무자년에 경상도 안찰사가 되고, 1년 만에 두 번 옮겨 전객 부령(典客副令)ㆍ자섬 사사(資贍司使)가 되어, 안팎의 비용과 물품을 공급하는 일을 겸하여 다스려서, 그것에서 남는 것을 모두 백성에게 돌려주니, 전에 있던 폐단이 근절되었다. 기축년에 지양주(知襄州)가 되어 나갔더니, 나라에서 향(香)을 내려 주는 것을 받들고 온 사자(使者)가 존무사(存撫使)를 능욕하는 것을 보고 공이 말하기를, “이는 예가 아니다. 장차 나에게도 미칠 것이다.” 하고 즉시 벼슬을 버리고 돌아갔다. 집정하던 이가 기뻐하여 임금에게 아뢰어서 감찰장령(監察掌令)을 제수하니, 대관의 강기가 다시 떨쳤으나 1년 만에 파직하고 말았다. 신묘년에 현능(玄陵 공민왕)이 즉위하고 대신(臺臣)을 선임하자 다시 장령이 되었고, 다음 해에 개성 소윤(開城少尹)으로 옮겨 갔다가 사직하고 청주(淸州)로 돌아갔다. 이때에 조일신(趙日新)의 난이 일어났던 것이다. 갑오년에 다시 불러서 전법 총랑이 되었다가 얼마 안 되어 판도(版圖)로 옮기고, 그 해 가을에는 복주 목사(福州牧使)로 나가서 민정을 살피고 약조를 지키더니, 공이 떠나던 날 백성들은 부모를 잃은 것처럼 마음 아파하였고, 그가 시설한 바를 지금까지도 그대로 따라하고 있다. 을미년 가을에 중현대부 감찰집의 직보문각(中顯大夫監察執義直寶文閣)으로 불렀는데, 그때 군사 선발을 토지에 의해 한 것은 그 법이 오랜 옛날부터 있었던 것인데, 공에게 명하여 도감사(都監使)로 삼았다. 지금까지의 법을 보면 한 사람이 전토를 받으면, 그 자손이 있으면 자손에게 전하고, 없으면 다른 사람이 대신 받게 되며 그 받은 자가 죄가 있어야만 그 전토를 회수하게 되어 있었다. 이렇게 하고 보니 사람마다 토지를 얻으려 하게 되어 번잡한 사건이 생기게 되는 것이었다. 공이 말하기를, “이것은 백성으로 하여금 재물을 서로 주고 빼앗도록 경쟁시키는 것이니, 이래서야 되겠는가.” 하고, 이에 마땅히 받을 사람 한 사람에게만 주고 그치도록 하니, 송사도 조금 간단하게 되었다. 병신년에 대중대부 상서우승(大中大夫尙書右丞)에 임명되고, 정유년에는 정의대부 판대부시사(正議大夫判大府寺事)에 승진되니, 이때 공의 나이 55세였으나 의지가 조금도 쇠하지 않고 더욱 직무에 근실하여, 한 달 사이에 창고에 곡식이 차게 되었다. 공민왕이 이르기를, “판대부(判大府)로서 그 직책을 다한 이는 최모 뿐이다.” 하였다. 기해년에 공주목(公州牧)으로 나가니, 그의 행정과 백성들의 사모함이 앞서 복주목(福州牧)에 있을 때와 같았다. 신축년에 상주 목사(尙州牧使)로 나갔는데, 그 해 겨울에 온 국가가 병란을 피하여 남쪽으로 옮겨 가고, 다음해 봄에 임금이 상주로 거둥하니, 모든 수요와 공급과 설비의 판출에 진력하면서도, 오직 털끝만치라도 백성을 상하게 하지 않을까 두려워하였으므로, 무엇을 요구하다가 얻지 못한 무리들은 이를 비방하기도 하였다. 3월에 봉익대부 전법판서(奉翊大夫典法判書)로서 본경(本京 개성)에 분사(分司)로 가게 되어 공이 하직하니, 공민왕이 인견하여 부드러운 말로 위로하고 당부하였다. 갑진년에 감찰대부 진현관제학 동지춘추관사에 임명되고, 그 해 겨울에 중대광 완산군(重大匡完山君)에 봉하였다. 다음해에 전리 판서로 옮기고, 또 다음해에 개성 윤(開城尹)으로 옮겼으며, 기유년에 새로운 관제(官制)가 시행됨으로써 영록대부(榮祿大夫)로 관제를 고쳐 받았다. 신해년에 안동(安東)의 수신(守臣)이 궐원이 되자 공민왕이 이르기를, “안동의 원은 내가 이미 그 적임을 얻었다.” 하고, 곧 비지(批旨)를 내리고는 위사(衛士)를 보내어 공의 부임을 독촉하였으니, 이는 공이 혹 사퇴하고 가지 않을까 하여 염려함이었다. 갑인년 봄에 나이 많음으로써 사퇴를 청하여 고향으로 돌아갔고, 그 해 가을 9월에 공민왕의 승하하니 공은 곡반(哭班)에 나가 곡하고 애통의 정을 다하였다. 금상(今上)이 밀직부사 상의(密直副使商議)에 임명하자 공은 굳이 사양하고 고향에 돌아가기를 청하니, 완산군(完山君)에 봉하고 계급을 대광계(大匡階)로 올렸다. 다음해 봄에 수레를 준비하도록 명하여 강릉(江陵)에 있는 밀직 최안소(崔安沼)를 가서 보고 돌아왔으니, 이는 대개 이 세상에서의 최후 결별을 하기 위함이었다. 9월에 경미한 병환이 생겼는데 여러 아들에게 말하기를, “내가 일찍이 꿈을 꾸었는데 이인(異人)이 날더러 말하기를, ‘오년(午年)에 이르면 죽는다.’고 하더라 금년이 무오년(戊午年)이고, 또 병이 이와 같으니, 내 필연코 일어나지 못할 것이다.” 하였다. 마침내 10월 기사일에 돌아가니 향년 76세였다. 12월 임인일에 그가 살던 집에서 동쪽에 있는 감방(坎方) 산기슭에 장사지냈는데, 이는 평일의 유명(遺命)을 따른 것이다. 아, 공은 가히 유속(流俗)을 벗어나고 사물에 달관한 분이라고 이를 만하다. 공은 두 번 결혼하였는데, 영산군부인(靈山郡夫人) 신(辛)씨는 봉익대부 판밀직사사 예문관제학 치사(奉翊大夫判密直司事藝文館提學致仕) 천(蕆)의 딸이요, 다음 무안군부인(務安郡夫人) 박(朴)씨는 군부 정랑(軍簿正郞) 윤류(允鏐)의 딸이다. 신씨는 2남을 낳았는데, 장남 사미(思美)는 봉익대부 예의판서(奉翊大夫禮儀判書)이며, 차남 덕성(德成)은 급제하여 중정대부 삼사좌윤(中正大夫三司左尹)이요, 박씨는 자녀 3명을 낳았는데, 아들 유경(有慶)은 중정대부 종부령 지전법사사(中正大夫宗簿令知典法司事)이며, 맏딸은 성근익대공신 광정대부 문하평리 상호군(誠勤翊戴功臣匡靖大夫門下評理上護軍) 우인열(禹仁烈)에게 시집갔고, 다음은 선덕랑 선공시승(宣德郞繕工寺丞) 조영(趙寧)에게 시집갔다. 손자에 남녀 약간 명이 있으니 판서의 자녀가 5명인데, 장남 서(恕)는 호군(護軍)으로서 지금 전라도안렴사이고, 다음은 원(原)이니 중랑장이며, 그 다음은 각(慤)이니 별장이요, 딸은 예의 총랑(禮儀摠郞) 송인수(宋仁壽)에게 출가했고 다음은 아직 어리다. 좌윤(左尹)은 자녀 4명을 두었는데, 장남 복창(復昌)은 별장이고 다음 세창(世昌)도 별장이며, 다음 사창(仕昌)은 아직 벼슬하지 않았고 딸은 어리다. 종부령은 자녀 3명을 낳았는데, 장남 사위(士威)는 낭장(郞將)이고, 그 다음은 모두 어리며, 평리(評理)는 자녀 3명을 낳았는데, 아들 양선(良善)은 영명전직(英明殿直)이고 딸은 모두 어리며, 시승(寺丞)은 딸 하나를 낳았는데 아직 어리다. 좌윤 덕성(德成)은 나의 벗이다. 성격이 쾌활하여 술도 잘하고, 관직에 있으면 가는 곳마다 명성이 있었다. 그가 와서 명(銘)을 청하는 것이다. 명하기를, 오직 공은 곧았고 / 惟公之直 또 공은 맑았다 / 惟公之淸 오직 공은 덕이 있었으며 / 惟公之德 또 공은 이름이 높았다 / 惟公之名 그 이름과 그 덕은 / 惟名惟德 이 세상의 준칙이 될 것인데 / 惟世之則 어찌 크게 쓰여져 / 胡不大用 우리 왕국을 바로잡지 못하였던가 / 正我王國 이미 우리 임금을 도와 / 旣相我王 묘당에서 주선하였고 / 周旋廟堂 76세의 고령으로 / 年七十六 아직도 강강하였건만 / 尙爾康强 공은 결단코 물러났으니 / 公退則決 진실로 밝고 슬기로웠다 / 允矣明哲 아, 최공이여 / 嗚呼崔公 온 세상이 그 풍모를 흠모하리로다 / 世歆其風 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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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의 휘는 기남(起南)이요 자는 흥숙(興叔)이다. 그 선조는 전주(全州) 사람으로서 상장군(上將軍) 순작(純爵)의 후예이다. 어려서부터 자질이 탁월하였으며 장성하여서는 우계(牛溪 성혼(成渾)의 호) 성 선생(成先生)에게 수학하였는데 문행(文行)으로 동료들의 추중(推重)을 받았다. 을유년 사마시(司馬試)에 입격하여 태학(太學)에서 노닐 적에, 호남의 사인(士人)이 상의 뜻에 거슬리는 말을 하다가 하옥되는 사건이 발생하자, 공이 제생(諸生)의 앞에 서서 상소하여 논했는데, 이에 선묘(宣廟)가 감동하여 깨닫고는 즉시 내보내 주었다. 그러다가 신묘사화(辛卯士禍)가 일어났을 때에는 공이 포의(布衣)의 몸으로 역시 걸려들어 정거(停擧 시험 응시 자격이 박탈되는 것)되는 벌을 받기도 하였다. 임진년에 왜란이 일어나자 늙은 어버이를 모시고 피난을 하였는데 갖은 고생을 하며 양식을 구해 봉양하느라 수염과 머리카락이 모두 하얗게 세었다. 경자년에 비로소 벼슬길에 올라 왕자의 사부(師傅)가 되었는데, 3명의 왕자를 가르치면서 사도(師道)를 엄하게 준수하여 세 왕자의 학문이 날로 발전되게 하였다. 임인년 알성시(謁聖試)에서 병과(丙科)로 급제한 뒤 성균관 전적에 임명되었다가 병조 좌랑으로 옮겨졌으며 지제교(知製敎)에 선발되었다. 이로부터 시강원 사서ㆍ문학과 형조ㆍ예조ㆍ병조의 정랑을 차례로 역임하였다. 을사년에 함경북도 평사(咸鏡北道評事)로 좌천되었다. 당시 중국의 동관(潼關)이 막 오랑캐에게 함락되었으므로 사람들이 북쪽 변방을 사지(死地)로 여긴 나머지 평사에 임명되기만 하면 번번이 핑계 대고 교묘히 빠져 나오곤 하였다. 그리하여 9차례나 다시 임명을 한 끝에 공에게 이르렀는데, 공은 말하기를, “아무리 어려운 일이라도 사양하지 않는 것이 신하된 자의 직분이다.” 하고는 즐거운 기색으로 부임했다가 1년이 지나고 나서 체직되어 돌아왔다. 그 뒤에 다시 예조와 병조의 낭관(郞官)ㆍ문학(文學)ㆍ직강(直講)을 차례로 거쳐 무신년에 시강원 필선으로 승진하였다.광해(光海) 초기에 사헌부 장령이 되었다가 옥당에 뽑혀 들어가 수찬과 교리를 지냈으며, 암행어사로 황해도를 염찰(廉察)하고 돌아와서는 예빈시 정(禮賓寺正)에 임명되었다. 또 필선에서 보덕으로 승진한 뒤 의정부 검상ㆍ사인과 홍문관 부응교와 사헌부 집의와 성균관 사성과 승문원 판교 등의 자리로 옮겨졌다. 임자년에 통정대부로 품계가 오르면서 영흥대도호부사(永興大都護府使)로 외방에 나갔다. 광해가 장차 대비(大妃)를 폐위(廢位)시키려 하자 적신(賊臣) 이이첨(李爾瞻)이 이를 부추겨 마침내 대옥(大獄)을 일으킨 결과 명류(名流)와 구신(舊臣)들이 모두 결박당하는 몸이 되었다. 공 역시 체포되어 하마터면 불측(不測)한 지경에 떨어질 뻔하다가 삭직(削職)된 채 한가로이 지내게 되었는데, 7년이 지난 기묘년 모월 모일에 이르러 질병으로 세상을 하직하였다. 이때가 태어난 지 꼭 60년이 되는 해였다. 공은 천품이 근후하고 효성과 우애가 독실하였다. 겨우 15살의 나이에 부친을 여의었는데도 거상(居喪) 중에 예법을 어기는 일이 없었으며, 어려서부터 외가(外家)에서 길러지면서 외할아버지 모시기를 마치 부자지간처럼 하며 정성과 예의를 다하였다. 평소에는 말을 더듬거리며 주저하는 듯하다가도 막상 관직에 나아가 임무를 수행할 때에는 자신의 있는 힘을 모두 기울여 책임을 완수하였으며 쉬운 일이건 어려운 일이건 가리지 않고 조정의 명에 응하였다. 일찍이 글을 올려 군정(軍政)에 대해서 논한 것이 수만 언(言)에 달했는데 선조가 이를 보고서 가상하게 여겼었다. 그리고 광해가 아직 그다지 난정(亂政)을 행하지 않고 있을 적에 공이 옥당에 있으면서도 6조목으로 나누어 상소하며 진달하였는데 모두가 군국(軍國)의 대계(大計)에 관한 것이었다. 그중에서도 상제(喪制)를 극진히 할 것과 우애를 돈독히 할 것과 붕당을 없앨 것과 인재를 아낄 것 등의 조목에 이르러서는 더욱 곡진하게 자신의 뜻을 개진하였는데, 말이 비록 채택되지는 않았으나, 그래도 삼년상(三年喪)의 의논이 정해진 것은 바로 공이 힘쓴 덕분이었다. 임해군(臨海君)의 옥사(獄事)가 일어났을 때 공이 문사낭청(問事郞廳)이 되었다. 그런데 국옥(鞫獄)이 진행되는 동안 혐의가 없다는 것을 알고서 이에 대한 소장을 올리려 하였으나 친척들이 극력 저지하는 바람에 마침내 그만두고 병을 핑계 댄 채 출사(出仕)하지 않았다. 이때 어떤 궁녀가 총애를 믿고 내밀(內密)하게 청한 나머지 나인(內人)과 인척(姻戚) 관계가 있는 천례(賤隷)를 내수사로 이속(移屬)시키라고 광해가 명한 일이 있었다. 그러자 공이 차자(箚子)를 올려 이를 논박하였는데, 그 말이 매우 굳세고 간절하였다. 수상(首相) 이원익(李元翼)이 경기 선혜청을 설립하려고 할 때 조정에서 많이들 이견을 제시하였으나 공만은 극력 찬성하였는데 지금까지도 경기 백성들이 이를 편하게 여기고 있다. 그리고 진공(進供)하는 연지(硯紙)의 체양(體樣)이 너무도 크고 사치스러워서 선혜청이 재손(裁損)해 줄 것을 계청 하였으나 상이 허락하지 않았는데, 이에 공이 다시 상소를 하여 논하였으므로 광해가 더욱 좋아하지 않았다. 그리고 언젠가는 연석(筵席)에서 폐단을 개혁해야 하는 당위성을 극력 논하였는데, 광해가 낯빛을 바꾸면서 상신(相臣)을 돌아보고 말하기를, “조정 신하들이 어수선하게 고치는 일을 꽤나 좋아하고 있는데 이는 아름다운 일이 못 된다. 대신이 의당 진정시켜야 할 것이다.” 하기도 하였다.얼마 지나지 않아서 시대 상황이 크게 변하자 공이 내직(內職)에 몸담고 있는 것을 달갑게 여기지 않고서 강력하게 외직(外職)을 구하였는데, 일단 영흥(永興)으로 가게 되자 개연(慨然)히 말하기를, “이곳이라고 해서 어찌 멋지게 해 볼 수가 없겠는가.” 하였다. 그리고는 잡다한 부세(賦稅)를 견감(蠲減)하여 백성의 급한 처지를 완화해 주고, 우수한 자제들을 선발한 뒤 무리를 지어 교습시키자 사람들 모두가 분발하여 학문에 힘쓴 결과 거문고를 타며 낭송하는 소리가 경내에 끊이지 않게 되었다. 공은 또 융사(戎事)에 더욱 관심을 기울여 속오(束伍)를 편성하고 기격(技擊)을 훈련시키는 한편 전차(戰車)를 만들어 야전(野戰)을 익히게 하였는데, 이 모두를 척씨(戚氏 병서(兵書) 《기효신서(紀效新書)》를 지은 명(明) 나라 척계광(戚繼光)임)의 병법에 의거하여 준행하였다.그리하여 1년이 지나는 사이에 정사가 크게 펼쳐지게 되었는데, 지금까지도 영흥이 문풍(文風)의 고장으로 일컬어지고 있는 것은 바로 공의 교화 덕분이라고 할 것이다. 공이 관직 생활을 그만두고 물러나서는 가평(加平) 시냇가에 집을 짓고 살면서 만곡정사(晚谷精舍)라는 편액(扁額)을 내걸었는데, 대체로 젊었을 적에는 양암(養菴)으로 자호(自號)를 삼다가 이때부터 만옹(晚翁)으로 고쳐 불렀다고 한다. 공의 증조 명손(命孫)은 종사랑(從仕郞)이고, 조부 업(嶪)은 빙고 별제(氷庫別提)로 사헌부 집의를 증직받았다. 부친 수준(秀俊)은 승정원 좌승지에 추증되었고, 모친 의령 남씨(宜寧南氏)는 호조 참의에 증직된 상질(尙質)의 딸이다. 공은 같은 군(郡) 내의 유씨(柳氏)에게 장가들었는데, 부친은 관찰사 영립(永立)이다. 부인은 행실이 지극하고 부도(婦道)를 매우 잘 갖추어 규문(閨門) 안에서 일어나는 아주 미세한 일들도 모두 합리적으로 처리하였는데, 공보다 4년 먼저 60세의 나이로 죽었다. 아들 다섯을 두었다. 장남 몽길(夢吉)은 어린 나이에 일찍 죽었다. 다음 내길(來吉)은 한성부 좌윤이고, 다음 명길(鳴吉)은 경기 관찰사이고, 다음 혜길(惠吉)은 홍문관 부수찬인데, 이상 모두 문과(文科)를 통해 조정에 진출하였다. 다음 경길(敬吉)은 모관(某官)이다. 딸은 모관인 한필원(韓必遠)에게 출가하였다. 내외손은 남녀 모두 약간 인이다. 관찰(觀察)은 젊어서부터 명성을 떨쳤는데 중흥(中興)의 은밀한 모의에 적극 참여하여 가장 높은 공을 세웠으며 한 시대의 명신(名臣)으로 일컬어지고 있다. 형인 좌윤과 함께 정사공신(靖社功臣)에 책훈(策勳)되었으며, 부모에게 은혜가 가해진 결과 공은 지금의 관직으로 증직되었고 부인은 정경부인(貞敬夫人)의 추증을 받게 되었다. 공은 당초 모지(某地)에 안장되었으나 택조(宅兆)가 불길한 관계로 모년 모월 모일에 모지(某地) 모산(某山)으로 이장(移葬)하면서 부인을 합폄(合窆)하였다. 그러고 나서 장차 묘도(墓道)에 비석을 세우려 하면서 관찰이 직접 행장(行狀)을 지어 가지고 나에게 와 명(銘)을 부탁하였다. 생각건대, 공은 나에게 아버님의 친구가 되는 분이시고, 관찰 형제로 말하면 또 나와 벗으로 지내는 사이이니, 의리로 볼 때 사양할 수 없는 일이다. 그래서 다음과 같이 명하였다. 군자의 행동 기준 / 君子之道 성실함 그것이니 / 誠愨爲基 술에다 비유하면 / 譬彼酒醴 묽지 않은 진국이리 / 寧醇毌漓 머리 회전 빠르고 약아빠진 인간들 / 便儇皎厲 기막힌 말솜씨로 아첨 떠는데 / 給辯姸辭 출세할진 모르지만 / 世所貴重 도와는 거리 멀지 / 去道遠而 아름다운 우리 최공 / 有美崔公 질박한 자세 지니고서 / 朴茂之姿 돈독한 행동으로 / 敦其質行 훌륭한 스승 모셨어라 / 服訓碩師 충의 모자에 신의 신발 신고 / 冠忠履信 시서의 옷 몸에 걸쳤나니 / 衣被書詩 현달(顯達)하기 시작한 건 뒤늦었어도 / 鴻漸雖晚 아름다운 풍모 모범이 되었지요 / 其羽可儀 어찌 험난함 없었으랴만 / 豈無夷險 오직 의로운 길 걸어가면서 / 唯義之之 남의 비밀 들추어내지도 않고 / 不激而訐 휩쓸려 뒤따라가지도 않았지요 / 不靡而隨 참되고 꾸밈없는 공의 속마음 / 肫肫悃愊 일처리할 때마다 드러났는데 / 發於事爲 몹시도 어려운 시대를 만나 / 遭時孔囏 결국은 낭패를 당하고 말았다오 / 竟躓于巇 어찌하여 그렇게도 후한 분에게 / 何蘊之厚 하늘은 인색하게 보답했을까 / 而嗇厥施 공에겐 부족하게 내려 줬어도 / 維躬之嗇 후손에게 복 주려는 의도였겠지 / 維後之貽 편안한 안식처 마련하는 일 / 宅兆安厝 효자된 도리상 당연히 할 일이라 / 玆惟孝思 점을 쳐 봐도 들어맞기에 / 旣契我龜 이곳 묘역으로 옮겨 왔다오 / 窀穸爰移 여주(驪州) 산 언덕 / 黃驪之岡 출렁이는 강물 줄기 / 其水瀰瀰 돌에 새겨 넣은 나의 이 비명(碑銘) / 我銘斯石 백대를 두고 밝게 전해지리 / 百代昭垂
公諱起南。字興叔。其先全州人。上將軍純爵之裔也。幼有美質。旣長。從牛溪成先生學。文行爲流輩所重。中乙酉司馬。游大學。湖南士人。以言事忤旨下獄。公倡諸生上疏論之。宣廟感悟。卽出之。辛卯士禍起。公以布衣。亦坐累停擧。壬辰倭難。奉老避兵。辛勤丐貸以供養。鬚髮爲之盡白。庚子。始仕爲王子師傅。斆三王子。師道尊嚴。三王子學日進。壬寅。擢謁聖丙科。拜成均館典籍。遷兵曹佐郞。選知製敎。自是歷官侍講院司書,文學,刑曹禮曹兵曹正郞。乙巳。左遷咸鏡北道評事。時潼關新陷虜。人視北邊爲死地。拜評事者。輒引疾巧免。九改命而後及公。公曰。事不辭難。臣職也。怡然就任。踰年遞還。又歷禮兵郞文學直講。戊申。陞侍講院弼善。光海初。爲司憲府掌令。選入玉堂。爲修撰校理。以暗行御史。廉察黃海道。還拜禮賓寺正。又自弼善陞輔德。遷議政府檢詳舍人弘文館副應敎司憲府執義成均館司成,承文院判校。壬子。陞通政階。出爲永興大都護府使。光海將廢大妃。賊臣爾瞻從臾之。遂起大獄。名流舊臣。悉被株累。公亦逮繫。幾不測。削職閑住。凡七年。己未某月日。以疾卒。去生之歲甲子一周矣。公天資謹厚。篤於孝友。甫成童而孤。居喪無違禮。少鞠於外家。服事外王父。誠禮猶父子焉。平居語吶吶若不出口。至當官任職。竭力自致。不以夷險爲趨避。嘗上書論軍政幾萬言。宣祖嘉之。光海未甚誖亂。公在玉堂。疏陳六條。皆軍國大務。其於盡喪制敦友愛。消朋黨惜人材。尤惓惓致意焉。言雖不見用。然三年喪之議。因公以定。臨海獄起。公爲問事郞。見鞫獄無事實。草疏將上。親戚力止之。遂託疾不出。時女謁用事。賤隷有戚聯內人者。光海命移屬內需司。公上箚駁之。言甚勁切。首相李元翼建設京畿宣惠廳。朝議多異同。公力贊成之。畿民至今便之。進供硯紙體樣。過於豐侈。宣惠廳啓請裁損。不許。公又疏論之。光海滋不悅。嘗於筵中。極論革弊之宜。光海作色顧謂相臣曰。朝臣多喜紛更。非美事也。大臣宜鎭靖之。居無何。時事大變。公不樂居內。力求外。旣得永興。慨然曰。是不足以有爲乎。於是蠲宂賦。以紓民急。選子弟之秀者。群而敎之。人皆感奮力學。絃誦洋洋。尤留意戎事。明束伍練技擊。造戰車習野操。悉遵戚氏之法。期年而政成。至今永以文風稱。公之敎也。公旣廢退。卜築于加平之溪上。扁曰晩谷精舍。蓋少號養菴。至是改稱晩翁云。公曾祖命孫。從仕郞。祖嶪。氷庫別提。贈司憲府執義。父秀俊。贈承政院左承旨。母宜寧南氏。贈戶曹參議尙質之女。公娶同郡柳氏。父曰觀察使永立。夫人有至行。婦道甚備。閨門之內纖微。皆得其宜。先公四歲而卒。壽六十。子男五人。長夢吉。殤而夭。次來吉。漢城府左尹。次鳴吉。京畿觀察使。次惠吉。弘文館副修撰。皆以文科進。次敬吉。某官。女適某官韓必遠。內外孫男女若干人。觀察少有盛名。贊中興密謀。功最高。爲時名臣。與兄左尹。俱策靖社勳。推恩贈公今官。贈夫人貞敬夫人。公初葬某地。爲宅兆不吉。用某年月日。改葬于某地某山。夫人祔焉。旣將樹石墓道。觀察自爲狀。屬維以銘。念公於維父友也。觀察兄弟。又辱與維游。義不可辭。銘曰。 君子之道。誠愨爲基。譬彼酒醴。寧醇毋漓。便儇皎厲。給辯姸辭。世所貴重。去道遠而。有美崔公。朴茂之姿。敦其質行。服訓碩師。冠忠履信。衣被書詩。鴻漸雖晩。其羽可儀。豈無夷險。唯義之之。不激而訐。不靡而隨。肫肫悃愊。發於事爲。遭時孔艱。竟躓于巇。何蘊之厚。而嗇厥施。維躬之嗇。維後之貽。宅兆安厝。茲惟孝思。旣契我龜。窀穸爰移。黃驪之岡。其水㳽㳽。我銘斯石。百代昭垂。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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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영의정으로 있는 최공 석정(崔公錫鼎)의 아우인 이조 판서 석항(錫恒)이 그 선부군(先府君) 정수재(靜修齋) 좌윤공(左尹公)의 행장을 나에게 주고 묘에 명문을 지어 줄 것을 청하였다. 아, 나는 실로 문장을 잘하지 못하니, 어찌 공의 아름다운 덕을 형용할 수 있겠는가. 내가 비록 문장을 잘하지 못하나 어찌 차마 두 자제의 효성스러운 마음을 거절할 수 있겠는가. 그리고 또 어찌 차마 공이 평소에 인정해 주신 것을 잊고서 사실을 기록하는 일을 담당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행장을 살펴보니, 완산 최씨(完山崔氏)는 고려 때 상장군(上將軍)을 지낸 순작(純爵)이 비조(鼻祖)이다. 고려조로부터 본조에 들어와 대대로 높은 벼슬을 지냈으며, 덕업을 서로 계승하였다. 좌찬성에 추증된 휘 수준(秀俊)이 있었는데, 이분이 영흥 부사(永興府使)로 영의정에 추증된 휘 기남(起南)을 낳았고, 이분이 영의정으로 완성부원군(完城府院君)에 봉해지고 시호가 문충(文忠)이며 휘가 명길(鳴吉)이고 호가 지천(遲川)인 분을 낳았다. 배위는 인동 장씨(仁東張氏)이니, 옥성부원군(玉城府院君) 만(晩)의 따님이다. 문충공은 아우가 있었으니 이조 참판으로 휘가 혜길(惠吉)이고, 그 배위는 함평 이씨(咸平李氏)로 관찰사 춘원(春元)의 따님인데, 만력(萬曆) 병진년(1616, 광해군 8)에 공을 낳았다. 공은 휘가 후량(後亮)이고 자가 한경(漢卿)이다. 문충공이 처음에 아들이 없어 공을 데려다가 양자로 삼았는데 늦게 아들을 두니, 이름이 후상(後尙)이었다. 문충공은 호문정(胡文定)을 법으로 삼아 조정에 청해서 공을 후사로 정하였다. 이때 문충공은 일등 공신으로 요직을 담당하여 매일 한가한 틈이 없으므로 집안 살림을 모두 공에게 맡겼는데, 공은 실로 가사를 잘 주관한다는 칭찬이 있었다. 정축년 공은 상신의 자제로 심양(瀋陽)에 가서 인질이 되었으며, 임오년 문충공이 오랑캐에게 붙잡혀가서 감옥에 갇히자, 공은 파발마를 타고 세 번이나 오랑캐 지방을 왕래하며 주선해서 화를 늦추었으며, 을유년 문충공을 모시고 동쪽으로 돌아왔다. 정해년 문충공이 별세하였다. 공은 심양에 머문 것이 거의 8, 9년이었으므로 몸이 수고롭고 마음이 고달파서 진작부터 가슴이 두근거리고 머리가 어지러운 증세가 있었는데 상을 당하여 더욱 심해지자 문을 닫고 병을 잘 다스려서 오랜 뒤에 다소 덜해졌다. 신묘년 생원시에 합격하고 남별전 참봉(南別殿參奉)에 제수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았으며, 사산감역(四山監役)에 제수되었다가 체직되었다. 병오년 익위사 시직(翊衛司侍直)에 제수되고 귀후서 별제(歸厚署別提)로 승진하였으며, 종부시 주부, 공조 좌랑, 충훈부 도사를 역임하였다. 경술년 배천 군수(白川郡守)에 제수되었다가 다음 해 체직되고 을묘년 사복시 첨정에 제수되었다. 이때 시국이 크게 변하니, 벼슬살이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아 병으로 사직하고, 진산 군수(珍山郡守)와 면천 군수(沔川郡守)에 연달아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기미년 영천 군수(榮川郡守)에 제수되었다가 곧바로 체직되었다. 경신년(1680, 숙종 6) 보사 공신(保社功臣)을 녹훈할 때에 정사 원훈(靖社元勳)의 큰아들로 회맹제(會盟祭)에 참여했다 하여 통정대부(通政大夫)의 품계로 승진하였으며, 신유년 청풍 부사(淸風府使)에 제수되었다가 계해년 체직되었다. 을축년 70세가 되니, 조정에서는 두 아들이 시종관(侍從官)이라 하여 은혜를 미루어 가선대부(嘉善大夫)의 품계로 올리고 세습하여 완릉군(完陵君)에 봉해졌으며, 한성부좌윤 겸 도총부부총관을 제수하였는데, 얼마 안 있다가 사양하여 체직되고 집에서 한가롭게 여생을 보냈다. 기사년(1689) 세상의 일이 또 변하여 보사 공신을 삭탈하자 이로 인하여 품계가 강등되어 통정대부가 되었다. 계유년(1693, 숙종 19) 정침에서 고종명(考終命)을 하여 양주(楊州) 천마산(天磨山) 아래 판곡리(板谷里) 간좌(艮坐)의 산에 장례하니, 선영을 따른 것이었다. 이해 여름 다시 보사 공신의 훈호(勳號)를 복구해 주어 품계와 직책을 옛날과 같이 환급하였으며, 치제하기를 의식대로 하였다. 배위 광주 안씨(廣州安氏)는 관찰사 헌징(獻徵)의 따님인데, 장엄하고 후중하며 단정하고 정성스러워 부도(婦道)를 특히 잘 닦으니 친척들이 귀의하였으며, 문충공이 더욱 사랑하고 소중히 여겼다. 신유년에 출생하고 계축년에 별세하여 공의 묘소에 부장되었다. 3남 2녀를 두었으니 장남 석진(錫晉)은 정랑인데 공보다 먼저 죽었고, 다음은 바로 의정(議政) 석정(錫鼎)이고 다음은 바로 판서 석항(錫恒)이며, 장녀는 진사 윤제명(尹濟明)에게 출가하고 차녀는 현감 신곡(申轂)에게 출가하였다. 정랑은 4남을 두었으니 생원 창헌(昌憲), 도사 창연(昌演), 봉사 창민(昌敏)과 창억(昌億)이다. 의정은 공의 아우인 응교 후상(後尙)에게 양자 갔는데 아들 창대(昌大)를 두었는바, 지금 광주 부윤(廣州府尹)으로 있다. 판서는 공의 생가 아우인 교관 후원(後遠)에게 양자 갔으며, 또 창억(昌億)을 자기의 양자로 삼았다. 손녀와 외손이 또 약간 명이다. 공은 천품이 온화하고 바르며 의표가 단정하여, 남들과 화합하면서도 휩쓸려서 함부로 행동하지 않았고 장엄하면서도 사납지 않았으며, 널리 사람을 사랑하고 현자를 친애하여 한결같이 성심에서 나오니, 사람들이 모두 믿고 사모하며 좋아하였다. 공은 침착한 사려와 원대한 식견이 있었으므로, 문충공이 깊이 믿어서 군국(軍國)의 기무를 자문하는 일이 많았다. 무인년 공은 심양(瀋陽)에 인질로 있다가 돌아와 문충공에게 아뢰기를 “대인께서 국정을 담당함에 두 가지 잘못된 일이 있으니, 김청음(金淸陰 김상헌(金尙憲))을 논박하여 배척한 것과 중을 홍 군문(洪軍門)으로 보낸 것이 이것입니다. 화의와 척화가 일은 비록 대립되나 마음은 모두 국가를 위하는 충심에서 나온 것인데, 지금에 이르러 결국 대인의 말씀이 비로소 맞았으니, 이는 사람들이 모두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남한산성에서 항복하는 맹약을 맺은 것은 다행이 아니요 실로 치욕이니, 대인에게 있어서는 굳이 나라를 보전했다 하여 훌륭함이 될 수 없으며, 청음에게 있어서는 또한 일을 그르쳤다 하여 허물될 것이 없습니다. 오직 의심과 서로 막힌 마음을 제거하고 서신을 왕래하여 청 나라와 화친하는 일이 부득이함을 깊이 밝히시고 또한 깨끗한 의론이 없을 수 없음을 장려하여, 피차간에 심사가 툭 트이게 해야 할 것입니다. 어찌 잘잘못을 거론해서 서로 반목한단 말입니까. 그리고 또 남조(南朝)와 통신(通信)하고자 하신다면 마땅히 별도로 단사(單使)를 보내어서 상주문을 가지고 항해하되 옛날 고려 때에 송 나라와 내왕했던 옛 길을 다시 찾아낸다면, 배 한 척만 있으면 중국에 도달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마침내 중에게 배를 주어서 요동(遼東)과 심양의 경계를 지나가게 하시니, 저들의 정탐이 서로 이어져서 오랑캐에게 발각되기가 쉬우며, 비록 혹 군문(軍門)에 이른다 하더라도 반드시 황제의 조정에 도달하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하자, 문충공은 크게 깨닫고 말하기를 “내 이런 방법을 알지 못했다.” 하였다. 뒤에 들으니 해변을 순라하던 오랑캐 기병들이 우리나라 배가 서쪽을 향하는 것을 바라보고 우리에게 의심을 품었는데, 홍 군문이 오랑캐에게 항복하자, 우리나라에서 보낸 편지를 찾아내어 문충공이 붙잡혀 가게 되었다. 공은 말하기를 “대인은 국가를 위하여 죽을 곳으로 가는 것을 진실로 마음에 달갑게 여기실 터이나, 자식이 아버지의 죽음을 구원하는 것으로 말하면 또한 지극함을 쓰지 않음이 없어야 한다.” 하고, 마침내 많은 돈을 가지고 심양의 관문에 들어가서 권력자를 설득하였다. 이때 청음 김공 또한 구류되어 같은 관사에 있었다. 혹자는 말하기를 “김공은 평소 성품이 방정하고 엄격하시니, 뇌물을 쓰는 것을 마음에 나쁘게 여기지 않겠는가.” 하였으나 공은 “이는 아마 그렇지 않을 것이다.” 하고는 들어가 김공에게 묻기를 “산의생(散宜生)은 어떠한 사람입니까?” 하자, 김공은 대답하기를 “옛날의 어진 사람이다.” 하였다. 공은 나와서 말씀하기를 “김공의 말씀을 들어보니 그 뜻을 알 수 있다.” 하였다. 공이 동쪽으로 돌아오게 되자 김공은 공에게 시가(詩歌)를 지어 주었으며, 또 작은 서문을 지어 공을 매우 칭찬하였다. 공은 학문에 있어 이미 가정에서 교육을 받고 또 계곡(谿谷) 장공(張公 장유(張維))과 백헌(白軒) 이공(李公 이경석(李景奭))에게 수학하여 유가(儒家)의 여러 책을 두루 읽었으나 일찍부터 고질병을 앓아 공부에 전심전력하지 못하였는데, 항상 이것을 한하였다. 평소 역사책을 두루 섭렵하여 꿰뚫지 않은 것이 없었으며, 국가가 다스려지고 혼란해지는 조짐과 현신(賢臣)과 간신이 나가고 물러가는 기미에 대하여 일찍이 깊이 마음을 쏟지 않은 적이 없었다. 그리고 인물을 품평함에 옛사람이 미처 말하지 못한 것을 많이 말하였다. 공은 시에 있어 재주가 매우 뛰어났다. 비록 중간에 환난을 겪어 힘을 다 쓰지는 못하였으나 시를 지으면 왕왕 경구(警句)가 있었다. 심양에 있을 적에 시를 지었는데 청음공이 자주 품평하고 칭찬하였으며, 말년에 문원(文苑)의 여러 공들과 창수한 것이 많이 있는데, 모두 그 격조와 운치가 보통 사람보다 뛰어나다고 칭찬하였다. 이것을 모아 약간 권을 만든 것이 집에 보관되어 있다. 공은 마음이 깨끗하고 욕망이 적으며 또 몸을 아끼고 보호하여, 여러 해 동안 볼모가 되었으나 집안 식구를 데리고 가지 않았으며, 관서 지방을 왕래할 적에 한 번도 음악과 기생을 가까이 한 적이 없었다. 감사 구봉서(具鳳瑞)가 공을 칭찬하기를 “최한경(崔漢卿)의 뛰어난 절개는 소무(蘇武)보다 더하다.” 하였다. 그리고 부인을 잃게 되자 나이가 그리 노쇠하지 않았으나 첩을 두지 않고 일생을 마쳤다. 세 고을을 맡았을 적에 모두 깨끗함과 고요함으로 고을을 다스렸으며, 배천(白川)에 있을 적에 마침 신해년 큰 흉년을 당하였는데, 굶주린 자들을 많이 살려주니, 남긴 은혜가 더욱 깊었다. 이에 고을 사람들이 비석에 새기기를 ‘만세불망(萬世不忘)’이라 하고 그 앞을 지나가는 자들이 모두 말에서 내려 경례하였다. 공은 집안에 있을 때에는 효도와 우애를 돈독히 하고, 남과 사귈 때에는 위급한 일에 달려가 구원하기를 미치지 못할 듯이 하였으며, 기개와 충절을 사모하여 비록 덫과 함정이 앞에 있더라도 피하지 않고, 나쁜 사람을 멀리하여 때가 묻지 않게 하였으니, 무릇 이러한 종류를 다 기록할 수가 없다. 아들을 가르치기를 순수하고 깊게 하여, 아들에게 잠(箴) 한 편을 지어 주었는데 다음과 같다. “마음이 보존되면 자연 후중하고, 말이 적으면 후회와 부끄러움이 적게 된다. 벗을 취함에는 반드시 기국과 식견을 먼저 하고, 일을 당해서는 마땅히 공경하고 삼갈 것을 생각하라.〔心存則自然凝重 言寡則可無悔吝 取友必先器識 臨事宜思敬謹〕” 이 몇 마디 말은 내용이 천근하면서도 뜻이 심원하고 적은 것을 들어 큰 것을 포괄하였으니, 진실로 사람을 만드는 좋은 본보기라 할 것이다. 더구나 공은 사람을 가르칠 적에 반드시 자신이 솔선수범하였음에랴. 복을 남김이 성대하여 두 아들이 현달해서 한 시대의 유명한 공경이 된 것이 당연하니, 아 거룩하다.다음과 같이 명한다. 우리 최공은 / 維我崔公 자식이 되어 직분을 다하였으니 / 爲子盡職 어떤 험한 것인들 구제하지 못하며 / 何險不濟 아버지가 되어 자식을 잘 가르쳤으니 / 爲父能敎 어떤 경사인들 열어놓지 않았겠는가 / 何慶不啓 자식이 자식 노릇 하고 아비가 아비 노릇 함은 / 子子父父 인도의 큰 강령이니 / 人道大體 모든 행실의 근원이요 / 百行之源 온갖 선의 뿌리라오 / 衆善之柢 이것을 명문에 새겨 밝혀서 / 銘以昭之 오는 자들을 기다리노라 / 來者是徯 [주D-001]호문정(胡文定)을 법으로 삼아 : 호문정은 북송(北宋)의 학자인 호안국(胡安國)으로 문정은 그의 시호이다. 호안국은 처음에 아들이 없어 조카인 인(寅)을 양자로 세웠는데, 뒤에 아들 굉(宏)을 낳았으나 파양(罷養)하지 않고 그대로 제사를 물려주었다. [주D-002]중을 …… 보낸 것 : 중은 승려인 독보(獨步)를 가리키고 홍 군문(洪軍門)은 명 나라 도독(都督) 홍승주(洪承疇)를 가리킨다. 독보는 초명이 중헐(中歇)로 묘향산에서 수도하다가 병자호란에 공을 세웠으며, 홍승주의 군영에 가서 청 나라를 정탐하였는데, 홍승주가 청 나라에 항복하여 이 사실이 발각되었다. 뒤에 임경업(林慶業)의 밑에서 명 나라를 왕복하다가 명 나라가 망한 후 임경업과 함께 청 나라에 잡혀갔다. [주D-003]남조(南朝) : 남쪽 조정이란 뜻으로 명 나라 의종(毅宗)이 이자성(李自成)에게 망한 뒤에 명 왕실의 일족이 세운 조정을 이른다. 1644년 의종이 자결하자 복왕(福王) 주유숭(朱由崧)이 남경(南京)에서 즉위하였으며, 다음해 복왕이 청 나라 군사에게 사로잡히자 당왕(唐王) 주율건(朱聿鍵)이 복주(福州)에서 황제를 칭하였고, 당왕이 또 청군에게 붙잡히자 주계왕(朱桂王) 유랑(由榔)이 조경(肇慶)에서 황제라 칭하였으나 또다시 청군에게 쫓겨 평락(平樂)으로 달아나 16년간 명맥을 유지하였다. [주D-004]산의생(散宜生) : 주(周) 나라 문왕(文王)의 어진 신하로, 문왕이 주왕(紂王)에게 미움을 받고 옥에 갇히자 보옥(寶王)과 미인(美人)을 주왕에게 뇌물로 바쳐 석방되게 하였다. [주D-005]소무(蘇武) : 한(漢) 나라 무제(武帝) 때의 충신으로 흉노(匈奴)에게 끌려가 온갖 고생을 하였으나 끝내 굴복하지 않고 언제나 한 나라의 깃발을 손에 잡고 있어 깃발이 모두 닳아버렸다. 그러다가 19년 만에 귀환하였는바, 주인공이 절개를 지킨 것이 소무와 같음을 말한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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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은 휘는 후량(後亮), 자는 한경(漢卿), 성은 최씨(崔氏)이고 자호는 정수재(靜修齋)이다. 그 선조는 완산(完山) 사람이다. 고려 대에 순작(純爵)은 관작이 상장군(上將軍)이었는데, 그 후손이 끊임없이 이어져 대대로 이름난 사람이 있다. 9대조 유경(有慶)은 국초(國初)에 참찬의정부사(參贊議政府事)였는데, 시호가 평도(平度)이다. 이분이 사강(士康)을 낳으니, 좌찬성으로 시호가 경절(敬節)이다. 고조 휘 업종(嶪終)은 빙고 별제(氷庫別提)이다. 증조 휘 수준(秀俊)은 벼슬하지 않았다. 조부 휘 기남(起南)은 어려서부터 문장과 행실로 저명하였는데, 만년에 급제하여 관각(館閣)의 직책과 의정부의 검상(檢詳)과 사인(舍人)을 역임하였다. 광해군(光海君) 때를 당하여 마지막 벼슬이 통정대부(通政大夫) 영흥 부사(永興府使)이다. 부친은 영의정 완성부원군(完城府院君) 문충공(文忠公) 휘 명길(鳴吉)이다. 본처 장 부인(張夫人)은 옥성부원군(玉城府院君) 만(晩)의 따님인데, 부인에게 아들이 없자 문충공이 아우 이조 참판 혜길(惠吉)의 아들을 취하여 후사로 삼았으니, 공이 이분이다. 공의 모친은 구원(九畹) 이공 춘원(李公春元)의 따님인데, 병진년(1616, 광해군 8) 8월 20일에 공을 낳았다. 3세에 모친을 잃었는데, 9세에 문충공이 장 부인으로 하여금 아들로 삼게 하였다. 12세에 부인이 또 졸하였다. 병자호란이 일어났을 때 공은 겨우 약관(弱冠)을 넘긴 나이였다. 그 당시 문충공이 허 부인(許夫人)을 계실(繼室)로 들였는데, 공이 모친을 모시고 강도(江都)로 피난하였다. 강도가 함락되자 성중(城中)의 사녀(士女) 중에 겁탈을 당한 이들이 많았다. 이에 공이 분연히 달려가 노장(虜將)을 만났는데, 병기를 밀치고 들어가 앞에 서니, 노장이 기이하게 여기고 이유를 물었다. 공이 대답하기를, “듣자 하니, 군중(軍中)에서 이 상국(李相國)과 최 상서(崔尙書) 집안을 침탈하지 못하도록 금령을 내렸다고 하던데, 나는 바로 최 상서의 아들로 특별히 와서 아뢰는 바이다.”라고 하였다. 노장이 어떻게 증명하냐고 묻자, 대답하기를, “나라 사람들에게 증험해 보라.”라고 하였다. 이에 노장이 그 사실을 알아본 다음 최 상서 집안을 보호하도록 명을 내렸는데, 성중 사람들이 이 덕분에 보전한 이들이 많았다. 문충공은 화의(和議)를 주장하였는데 이를 청인(淸人)이 알았으며, 이공 정귀(李公廷龜)는 화이(華夷)에까지 명망이 났다. 이 때문에 이 두 집안을 보전한 것이었다. 인조(仁祖) 20년 임오년(1642) 가을에 청인이 독보(獨步)의 일을 알아내었는데, 이 일로 인해 문충공이 심양(瀋陽)에 구류당하여 화를 예측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에 공이 밤낮으로 가슴을 치다가 역말을 타고 세 차례나 심양으로 달려가 전후의 일을 주선하여 마침내 풀려났다. 그리하여 을유년(1645)에 문충공이 비로소 동쪽으로 돌아왔는데, 어떤 객이 “공의 아들이 어린 서생인데 은연중에 큰 화를 제거하였으니, 그 재주가 이와 같다.”라고 하니, 문충공은 단지 “재주가 성심에서 나왔다.”고만 대답하였다. 정해년(1647) 5월에 이르러 문충공의 상을 당하였는데, 상제(喪祭)가 예를 어김이 없었다. 이전에 공이 심양에 있을 적에 정충(怔忡)과 안질(眼疾)을 앓았는데, 이때에 이르러 더욱 심해졌다. 신묘년(1651, 효종 2)에 병이 조금 나았으며, 생원(生員)에 합격하였다. 효종(孝宗) 갑오년(1654)에 남별전 참봉(南別殿參奉)에 보임되었으나 병 때문에 출사하지 않았다. 다시 사산 감역(四山監役)에 제수되었으나 얼마 못 가서 역시 그만두었다. 50세 이후로 구질(舊疾)이 갈수록 없어져 현종(顯宗) 병오년(1666)에 익위사 시직(翊衛司侍直)에 배수되었다가 서용되어 귀후서 별제(歸厚署別提)에 승진되었으며, 종부시 주부(宗簿寺主簿), 공조 좌랑, 충훈부 도사(忠勳府都事)로 전직되었다. 경술년(1670, 현종 11) 봄에 외직으로 나가 배천 군수(白川郡守)가 되었다. 이해 가을에 대흉이 들어 굶어 죽은 시체가 길에 쌓일 정도였다. 공은 이들을 구제하는 데 마음을 다 쏟아 가옥 50여 칸을 지어 유리걸식하는 백성들을 머물게 한 다음, 읍내의 선량한 사람을 뽑아 그들에게 일을 맡기는 한편, 서리를 신칙하여 간사한 폐단을 없애도록 하였다. 매일 아침마다 몸소 진휼소(賑恤所)로 가서 죽과 미음을 나누어 주었는데, 남녀가 섞여 앉지 못하도록 하고 아픈 사람은 반드시 봉양하도록 하였다. 토착민에게는 식구 수를 계산하여 양식을 공급해 주고 경작을 계속하도록 하였는데, 가을이 되자 크게 풍년이 들어 백성들이 고통에서 벗어났다. 공이 말하기를, “1000명을 살리는 것은 성심이 아니면 불가능하다. 내 감히 이를 소홀히 하겠는가.”라고 하였다. 얼마 뒤에 병으로 사직하였는데, 백성들이 오래도록 사모하여 마지않았다. 부로(父老)들이 서로 더불어 말하기를, “신해년에 생민이 극도로 곤궁하였는데, 그 당시 최 수령이 아니었다면 우리는 씨가 말랐을 것이다. 그대에게 자손이 있는 것은 누구의 은덕인가.”라고 하고, 이어 비석을 세워 덕을 칭송하였다. 금상(今上) 을묘년(1675, 숙종 1)에 사복시 첨정(司僕寺僉正)이 되었는데, 공은 벼슬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으므로 몇 달 만에 병으로 면직하였다. 태복(太僕)은 실속이 있는 자리로 여기에 부임하는 이들은 대부분 오래도록 머물렀는데, 공은 빨리 떠나가니 노리(老吏)들이 기이한 일로 여겼다. 뒤에 또 진산(珍山)과 면천(沔川)에 배수되었으나 모두 부임하지 않고 말하기를, “나는 노쇠한 데다 병까지 많으니, 편안하게 집에 있는 것이 낫다.”라고 하였다. 기미년(1679) 봄에 또 영천 군수(榮川郡守)에 배수되었으나, 역시 내키지 아니하였으므로 마지못해 부임하였다가 1년 만에 또 면직하고 돌아왔다. 경신년(1680)에 역적을 토벌하고 회맹(會盟)을 하였는데, 공은 훈구대신(勳舊大臣)의 아들이라 하여 통정대부(通政大夫)로 품계가 올랐다. 이듬해 봄에 청풍 부사(淸風府使)에 제수되었다. 청풍은 풍속이 순후한 명승지였는데, 휘파람을 불고 시가를 읊조리며 자적하여 배와 수레로 산수(山水) 사이를 마음껏 노닐었다. 고을도 잘 다스려졌다. 임기가 차서 돌아오니, 백성들이 송덕비를 세워 주었다. 을축년(1685)에 공은 70세였는데, 아들이 시종신이었으므로 추은되어 다시 가선대부(嘉善大夫)로 품계가 오르고, 완릉군(完陵君)에 습봉(襲封)되었다. 한성부좌윤 겸 부총관(漢城府左尹兼副摠管)에 배수되었는데, 몇 달 만에 해직하였다. 종일토록 한가하게 앉아 객과 마주하여 바둑을 두거나 꽃을 심고 약초를 가꾸는 생활을 스스로 즐기며 말하기를, “옛말에 ‘초야(草野)의 한인(閑人)이 왕공(王公)보다 낫다.’고 하였는데, 내 비록 초야에 묻힌 사람은 아니지만 한인이 되어 여생을 마칠 수 있으니,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라고 하였다. 기사년(1689)에 시사(時事)가 또 변하자, 공은 문을 닫고 사람들과 교제를 끊은 채 세사(世事)에 대해 일절 언급하지 아니하였다. 계유년(1693, 숙종 19) 12월 1일에 정침에서 졸하였으니, 향년 78세이다. 이듬해 2월에 양주(楊州) 천마산(天磨山) 아래 판곡리(板谷里) 간좌(艮坐)의 언덕에 안장하였는데, 선영을 따른 것이다. 부인은 공의 무덤에 부장하였다. 공은 타고난 자품이 영명하고 과단하며 온화하면서도 엄장하고 남을 사랑하고 베풀기를 좋아하여 사람들이 모두 경모하였다. 문충공이 몹시 믿고 의지하여 안으로 집안일이나 밖으로 나랏일에 대해 상의하여 결정하지 않음이 없었다. 심양에 있을 때 문학(文學) 정뇌경(鄭雷卿)이 정명수(鄭命守)를 죽이려고 모의하였는데, 일이 탄로 나는 바람에 화를 예측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에 공이 가련하게 여겨 시를 지어 효종(孝宗)에게 올리기를, “천하에 지금 지조 있는 협사가 없으니, 궁도의 지기 다시 누구를 의지하겠는가. 우경은 선비를 급히 살리기 위해 공자에게 귀의하였으니, 후생으로 하여금 신릉군을 한하게 하지 말지어다.〔天下卽今無節俠 窮途知己更誰憑 虞卿急士歸公子 莫使侯生恨信陵〕”라고 하니, 효종이 몹시 침울해하였다. 그 당시 효종 역시 대군(大君)의 신분으로 심양에 볼모로 잡혀 있었다. 참판공이, 정공(鄭公)이 화를 당할 것이라는 얘기를 듣고는 공이 그 모의에 연관되었을까 염려하여 몹시 걱정하였는데, 문충공이 웃으며 말하기를, “걱정하지 마라. 얘가 어찌 헛되이 죽을 아이겠는가.”라고 하였다. 서보(西報)가 이르매 공이 과연 무탈하니, 제공(諸公)들이 이를 듣고는 모두 ‘부자(父子)가 지기(知己)라 할 만하다.’고 일컬었다.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 김공(金公)과 백강(白江이경여(李敬輿)) 이공(李公)이 문충공과 함께 심양에 구류당했었는데, 청음이 문충공에게 이르기를, “옛사람은 어진 부형이 있는 것을 즐거워하였는데, 지금 공에게는 어진 자제(子弟)가 있으니 어찌 즐겁지 않겠는가.”라고 하였으며, 백강 또한 동쪽으로 돌아온 뒤 공에 대해 언급할 때마다 찬탄하여 마지않았다. 공은 소시에 계곡(谿谷 장유(張維))을 종유(從遊)하였다. 중간에 고질에 걸리는 바람에 비록 학문에 전념하지는 못하였으나, 종일토록 피곤한 줄도 모른 채 사서(史書)를 보기를 좋아하였다. 자신을 단속함이 몹시 엄격하였다. 3년 동안 심양의 객관에 유숙하였는데 늘 홀로 거처하였으며, 관서(關西)는 기생과 풍악이 넘치는 곳으로 일컬어지는데, 왕래하고 경유하는 기간이 몇 달이나 되기도 하였으나 무덤덤하게 한 번도 가까이한 적이 없었다. 부인이 졸하자 첩을 취하지 않았으며 자제들이 곁에서 시봉하였을 뿐이다. 집안에서의 행실이 몹시 지극하였다. 아우 응교(應敎) 후상(後尙)과 우애가 몹시 돈독하여 전택(田宅)과 동복(僮僕)을 나눌 적에 반드시 좋은 전택과 동복을 골라 주었다. 서매(庶妹)에게도 넉넉하게 자급해 주고는, “선공의 혈육은 오로지 이 두 사람일 뿐이니, 어찌 그들로 하여금 궁핍하게 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응교군이 그 아내에게 “내 마음을 알아주는 벗이 세상에는 하나도 없고, 오직 형님만이 나의 지기이다.”라고 하였으며, 또 말하기를, “우리 형님이야말로 진짜 대인(大人)이다.”라고 하였다. 서제(庶弟) 후장(後章)이 일찍 고아가 되어 의지할 곳이 없었는데, 공의 집에서 양육하여 성립할 수 있도록 해 주었다. 빈궁한 친척들에 대해서는 혼례를 성사시켜 줌이 많았다. 특히 선조를 받드는 일에 공경하였다. 제전(祭田)을 장만하고 사당(祠堂)을 세우고 보첩(譜牒)을 편수하였으며, 먼 조상을 위해 묘비(墓碑)를 세웠으며, 제사(祭祀)는 문충공의 유교(遺敎)를 봉행하여 감히 과하게 하지 아니하였다. 공은 심원한 사려와 도량이 있어 선배들에게 추중을 받았는데, 이를테면 청음(淸陰), 포저(浦渚 조익(趙翼)), 계곡(谿谷), 연양(延陽 이시백(李時白)), 백강(白江)과 같은 제로(諸老)들은 몹시 장려하고 허여하였으며, 함릉군(咸陵君) 이해(李澥), 박공 황(朴公潢), 구공 봉서(具公鳳瑞)는 모두 망년지우(忘年之友)로 교분을 맺었다. 현종(顯宗) 때 당론(黨論)이 일어나 시끄럽게 다툴 당시 이를 우려하는 이가 많았는데, 공은 유독 여러 아들에게 이르기를, “지금이 오히려 태평 시대라는 것을 너희들은 나중에 의당 절로 알 것이다.”라고 하더니만, 갑인년(1674, 숙종 원년) 이후로 조정이 누차 변하는 바람에 형화(刑禍)를 당한 사대부들이 많았다. 경신년(1680)에 구인(舊人)이 다시 세상에 진용(進用)되자, 공은 “몇 년 못 가 일이 또 바뀔 것이다.”라고 하였다. 어떤 이가 “지금 아무 문제가 없다.”라고 하니, 공이 웃으며 말하기를, “세상일이란 시간이 흐르면 문제가 생기기 마련이다.”라고 하더니만, 얼마 못 가 기사환국(己巳換局)이 일어나고야 말았으니, 공의 말이 모두 증험된 것이라 하겠다. 제인(諸人)들이 인현왕후(仁顯王后) 폐위 문제를 간쟁하다가 화를 당하니, 공은 그 당시 이미 병이 깊었는데 이 소식을 듣고는 눈물을 흘리며 말하기를, “내가 세상 변고를 겪은 것이 이미 많은데, 병든 이 늙은이가 죽지도 못하고 또다시 이런 일을 보는구나.”라고 하였다. 기사년(1689)에 자급을 빼앗겨 통정대부가 되었다. 갑술년(1694)에 정국이 바뀌자 이미 세상을 떠난 공에 대해 복관(復官)하고 의식대로 치제(致祭)하였다. 부인 안씨(安氏)는 관찰사 헌징(獻徵)의 따님이다. 엄장, 후중하고 단정, 성실하며 청고, 한아하고 간이, 심원하였다. 방적(紡績)에 부지런하고 화려함을 멀리하였으며, 가난한 친족을 보살핌에 곡진하게 은정을 쏟았으며, 비복을 부림에 환심을 얻었다. 신유년(1621, 광해군 13) 9월 10에 태어나 계축년(1673, 현종 14) 4월에 졸하였으니, 향년이 겨우 53세이다. 3남 2녀를 두었는데, 맏이는 현령(縣令) 석진(錫晉)이고, 다음은 영의정 석정(錫鼎)이고, 다음은 대사간 석항(錫恒)이며, 딸은 진사 윤제명(尹濟明), 정랑 신곡(申轂)에게 출가하였다. 현령은 4남을 두었는데, 생원 창헌(昌憲), 사의(司議) 창연(昌演), 창민(昌敏), 창억(昌億)이다. 영의정은 1남을 두었는데 교리(校理) 창대(昌大)이고, 2녀를 두었는데 이성휘(李聖輝), 이경좌(李景佐)에게 출가하였다. 윤제명은 1녀를 두었는데 조명적(趙命迪)에게 출가하였다. 신곡은 5녀를 두었는데 맏딸은 이성신(李聖臣)에게 출가하고 다음은 윤경룡(尹敬龍)에게 출가하였으며, 나머지는 어리다. 창헌은 1남을 두었는데 수철(守哲)이고, 1녀를 두었는데 진사 이명복(李明復)에게 출가하였다. 창연은 2남 4녀, 창민은 2남 1녀, 창억은 1녀를 두었는데, 모두 어리다. 명은 다음과 같다. 문충공에게 아들이 있으니 / 文忠有子 완릉공이 특출하다오 / 完陵挺擢 세변이 막 일어나 / 方世變初 천지가 전복되었을 때 / 天地反覆 강도가 함락되어 / 江都傾陷 온 성민이 어육이 되었는데 / 一城魚肉 창칼 숲을 밀치고 들어감에 / 刀矟如林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았으니 / 不懾不愕 오랑캐가 감동한 나머지 / 殊類動色 백성들이 목숨을 보전할 수 있었다오 / 保我邦族 문충공이 구류된 임오년의 일은 / 壬午之事 화를 더욱 예측할 수 없었는데 / 禍尤不測 세 번이나 심양으로 달려 들어가 / 三走浿瀋 온갖 어려움 속에 일을 주선하여 / 風餐露宿 문충공이 구류에서 풀려날 수 있었으니 / 連環可解 그 정성 귀신조차 놀랄 정도였네 / 神鬼震薄 동쪽으로 돌아온 뒤로는 / 及夫東還 팔짱을 끼고 자취를 거두었네 / 袖手斂迹 그 당시 별다른 공적이 없음은 / 無事可見 공이 녹사를 하였기 때문인데 / 我仕以祿 고을의 수령이 되고 나서야 / 亦縻郡紱 조금 공로를 시험하였다네 / 少試勞勣 만년에는 좌윤에 오르고 / 晩躋貳列 완릉군에 습봉되었으니 / 封爵乃續 베풂을 아끼지 않아 / 非嗇厥施 천도와 인도를 모두 얻었다오 / 天人互得 이미 장수를 누렸으며 / 旣耆旣壽 뛰어난 후사까지 두었으니 / 胤嗣赫奕 내가 광중에 넣을 명을 지어 / 載銘幽穸 무궁한 후세에 이를 고하노라 / 庸詔千億 [주D-001]독보(獨步)의 일 : 독보는 인조 때의 고승으로 속명은 중헐(中歇)이다. 조정에서 승려 독보를 몰래 명나라에 보내어 본국의 세력이 곤궁하여 청국의 통제를 받고 있는 이유를 갖추어 주달하였다. 이에 명나라에서 칙서를 내렸는데, 그 가운데 “이전의 허물은 거론치 않을 것이니, 함께 협공하자.”는 말이 있었다. [주D-002]정뇌경(鄭雷卿) : 1608 〜 1639. 자는 진백(震伯), 호는 운계(雲溪), 본관은 온양(溫陽)이다. 병자호란 이듬해인 1637년에 소현세자(昭顯世子)를 수행하여 심양(瀋陽)에 갔다가 조선인 출신으로 청나라에 벼슬하여 조선에 횡포를 부리고 있던 정명수(鄭命壽)를 죽이려고 모의하였다. 그러나 그 일이 사전에 누설되어 청나라 형부(刑部)에 붙잡혀 참혹하게 죽임을 당하였다. 《顯宗實錄 11年 3月 3日》 [주D-003]우경(虞卿)은 …… 말지어다 : 우경은 전국 시대 조(趙)나라의 재상이고, 후생(侯生)은 위(魏)나라 공자 신릉군의 문객 후영(侯嬴)이다. 진(秦)나라의 재상이 된 범수(范睢)가 개인적인 원한으로 위제(魏齊)를 죽이려 하자 우경은 그를 위해 조나라의 재상 자리를 버리고 신릉군을 찾아가 도움을 청하였다. 그러나 진나라를 두려워한 신릉군은 받아들이기를 주저하였는데, 후영이 우경은 궁지에 몰린 사람을 위해 재상 자리도 버리고 다급하게 왔는데 공자는 망설이고 있느냐고 질책하였다. 이에 신릉군이 부끄러워하며 그들을 맞이하려 하였으나 신릉군이 꺼려한다는 소식을 들은 위제는 이미 자살한 뒤였다. 《史記 卷79 范睢列傳》 여기에서는 후영을 최후량 본인에 비유하여 효종에게 너무 늦지 않게 정뇌경을 도울 수 있는 조치를 취할 것을 촉구한 것이다. [주D-004]옛사람은 …… 즐거워하였는데 : 《맹자》 이루 하에 “도(道)에 맞는 자가 도에 맞지 않는 자를 길러 주며, 재주 있는 자가 재주 없는 자를 길러 준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어진 부형(父兄)이 있는 것을 좋아하는 것이다.”라고 한 말이 보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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完山之崔氏譜可考者曰純爵。官至檢校神虎衛上將軍。生崇。中郞將。中郞將生南敷。官至通議大夫左右衛大將軍知工部事。工部生諱佺。左右衛保勝郞將。郞將生諱正臣。左右衛中郞將。中郞將生諱得枰。通憲大夫,選部典書上護軍致仕。廉正自守。人敬憚之。歷事忠烈忠宣忠肅三王。而忠宣尤器重之。忠宣雖內禪。而國政必與聞。故士大夫之升黜。多出於忠宣。選部在臺。綱紀立。在刑部。刑罰淸。出守金海,尙州。民懷其惠。再按全羅。民畏其風。其量田也。副蔡宰相洪哲。分理全羅州縣之田。不廢法。不擾民。享年七十五。選部娶奉翊大夫知密直司事,監察大夫文翰學士,承旨,世子元賓郭公諱預之女。以大德癸卯四月癸酉生公。公名宰。字宰之。至治元年。補東大悲院錄事。泰定甲子。入內侍。四年。授散員。明年。轉別將。天歷庚午。順興君安公文凱,深岳君李公湛同掌試。公中之。六年然後改丹陽府注簿。又四年。始授中部令。階承奉郞。未幾知瑞州事。以母憂不赴。蓋欲終制也。明年。忠肅王沙汰宂官。有薦公者。王曰。吾固知其父。風憲無以易此人矣。卽授監察持平。不獲已就職。玄陵卽位。迺褫其職。及高氏之亂作。凡王所設置。悉皆更革。立都監。以公爲判官。公甚不樂。稱疾不出。相府頗督之且脅之。公徐出謂其判事宰相曰。王固失德矣。然爲臣而揚君之不美。於公安乎。王之惡非出於王。左右逢之耳。逢之於前。揚之於後。吾實恥之。其宰相默不敢言。明陵卽位。初政授典法正郞。其年冬。出知興州。凡可以便民者。靡不擧行。田籍久且爛。公修之。仍藏舊本相質。聞者歎服。印政丞當國。素忌公故替之。歲丁亥。政丞王公煦,金公永暾奉聖旨整理田民詞訟。擧公爲判官。且馳驛召之。公至則二公又曰。長興府今號難治。非崔某不可。又出之。公將之任。二公又曰。崔某前爲持平。有威望。盍留之再任。適外氏郭公迎俊爲大夫。法當避。遷典法正郞。歲戊子。按察慶尙道。一年再遷典客副令,資贍司使。公兼理。支應內用事羨餘。盡歸之民。前弊絶矣。歲己丑。出知襄州。有使者降香。凌辱存撫使。公曰。非禮也。將及我矣。棄官而歸。執政者喜。白授監察掌令。臺綱復振矣。一年而罷。歲辛卯。玄陵卽位。選臺臣。復掌令。明年。移開城少尹。辭歸淸州。日新之難作。歲甲午。以典法摠郞召。未幾移版圖。其秋。出使福州牧。察民情。守條約。去之日。人如失怙恃。其所施設。至今遵之。乙未秋。以中顯大夫監察執義,直寶文閣召至。選軍以田。其法舊矣。命公爲其都監使。一人受田。有子孫。子孫傳之。無則他人代受。有罪當收其田。則人人皆欲得。於是雜然矣。公曰。是爭民施奪也。可乎。於是。與其當得者一人而止。訟稍簡矣。歲丙申。拜大中大夫尙書右丞。歲丁酉。進正議大夫判大府寺事。蓋公年五十五而志不少衰。益勤於職。旬月間。府庫實矣。玄陵曰。判大府。盡其職者崔某而已。歲己亥。出爲公州牧。如在福日。歲辛丑。又出爲尙州牧。其冬。國家避兵南徙。明年春。幸尙州。公盡力供辦。惟恐一毫或傷於民。故求之不得者稍短之。三月。以奉翊大夫典法判書。分司本京。公辭違。玄陵引見。溫言慰諭。歲甲辰。拜監察大夫進賢館提學,同知春秋館事。其冬。封重大匡完山君。明年。移典理判書。又明年。移開城尹。歲己酉。官制行。改榮祿大夫。歲辛亥。安東闕守臣。玄陵曰。安東守。我已得人矣。於是。批下遣衛士督公行。慮公辭不就也。甲寅春。以老乞歸鄕。秋九月。玄陵薨。公會哭盡哀。今上拜公密直副使,商議。公固辭。請還鄕。封完山君。階大匡。明年春。命駕往見江陵崔密直安沼而歸。蓋永訣也。秋九月。有微疾。語諸子曰。吾嘗夢異人謂我曰。至午死。今戊午年也而又如此。吾必不起也。十月己巳卒。享年七十六。十二月壬寅。葬于居第之東坎麓。理命也。嗚呼。公可謂達人矣。公再娶。靈山郡夫人辛氏。奉翊大夫判密直司事,藝文館提學致仕諱蕆之女也。務安郡夫人朴氏。軍簿正郞諱允鏐之女也。辛氏生二男。長思美。奉翊大夫禮儀判書。次德成。及第。中正大夫三司左尹。朴氏生子三人。男曰有慶。中正大夫宗簿令,知典法司事。女適誠勤翊戴功臣,匡靖大夫門下評理,上護軍禹仁烈。次適宣德郞,繕工寺丞趙寧。孫男女若干人。判書生子五人。長恕。護軍。今爲全羅道按廉使。次愿。中郞將。次愨。別將。女適禮儀摠郞宋仁壽。次幼。左尹生子四人。男曰復昌。別將。次曰世昌。別將。次仕昌。未仕。女幼。宗簿生子三人。士威。郞將。餘皆幼。評理生子三人。男曰良善。英明殿直。女皆幼。寺丞生女一人。幼。左尹。吾友也。倜倘使酒。居官所至有名。來請銘。銘曰。惟公之直。惟公之淸。惟公之德。惟公之名。惟名惟德。惟世之則。胡不大用。正我王國。旣相我王。周旋廟堂。年七十六。尙爾康強。公退則決。允矣明哲。嗚呼崔公。世歆其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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昔我成廟初卽位。則尙文治。日御經筵。而又設官于藝文館。分直以侍講。備顧間。掌辭命。記言動。編摩經籍。一如集賢殿故事。凡十五人者。皆極一時之選。而士比之登瀛洲焉。其後改館號爲弘文。諸學士稍稍遷更。而最久於職者。唯副提學崔公數人云。公諱淑精。完山之崔。同祖高麗文烈公純爵。九傳至密直副使諱遠。封陽川伯。子孫仍氏焉。卽公五世祖也。高祖諱澐。軍器少尹。曾祖諱雨甫。司宰監正。祖諱承洽。兵部侍郞。考諱仲生。司正。妣忠州安氏。縣監諱善福女也。公以宣德壬子生。天順壬午。以進士。登丁科第一人。補槐院。賜暇讀書湖堂。成化丙戌。擢重試及㧞英試。庚寅。拜修撰。處弘文館。前後凡七年。以使事赴京師。還爲校理。丙申。爲便養出牧驪州。丁酉。入爲副應敎。時上試文臣。連中三魁。陞資爲直提學。戊戌。承命纂東文選訖。特授副提學。己亥卒。壽四十八。葬于陽川治南竹洞負酉之原。配淑夫人慶州鄭氏。判書之智之女。卒後公三十三年。袝而雙其封。三男。長光潤。縣令。次光演。副尉。次光瀚。進士。女適典籍郭季亨。光潤子世才。生員。世功。監役。世文。庶子世淸。光演子。世憲世忠。光瀚子。世球世琳。公以詞學之臣。出入帷幄且十餘年。而不幸早歿。不能究其用。後孫罹戊午禍。遂至零替。文獻亡佚。事行之懿。無所槩見。世愈遠而不識有公者往往焉。於虖。豈不惜哉。於今所傳信。如懿敬齋壁詩笙鶴朝天之句。其他雜出於地誌,野乘,詩人裒錄之篇者讀之。皆溫澹有理致。足以想見其爲人。同時所與遊唱和。表表若姜公希孟,梁公誠之,徐公居正,金公宗直。有著述。輒屬公爲弁卷之文。以見其推重之意。則公之不唯詩也。於此亦可知也歟。今其後孫仁漸,晚漸。來請銘于余。銘曰。 觀公之世。誦公之詩。而又以友。而公可知。是賢者封。俾也母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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