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최씨 금석문 등/高麗國大匡完山君諡文眞崔公墓誌銘

최보순이 금자광록대부 참지정사 집현전대학사 동수국사 판예부사를 사양한 것에 대해 윤허하지 않는 교서

아베베1 2014. 6. 28. 08: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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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보순이 금자광록대부 참지정사 집현전대학사 동수국사 판예부사를 사양한 것에 대해 윤허하지 않는 교서[崔甫淳讓金紫光祿大夫參知政事集賢殿大學士同修國史判禮部事不允敎書]

이규보(李奎報)

운운.
대저 하늘을 대신하여 만물을 다스리고 임금을 도와 정사를 행하는 것은 재상(宰相)의 책임이라, 나라의 안위가 정승에게 달렸고 백성들의 생활 역시 정승에게 달렸다. 당 태종(唐太宗)은 위징(魏徵)을 거울로 삼아 밝음을 보유했었고, 은 고종(殷高宗)은 부열(傅說)을 배로 삼아 강물을 건넜도다. 그러니 원대한 도량이 아니면 어찌 여론(輿論)에 흡족하게 부합되겠는가. 경(卿)은 학문은 천인(天人)을 통달하고 지식은 전고(典故)에 익숙하며, 문(文)을 업으로 하되 무(武)에도 능하고 바탕은 부드럽되 강함을 겸했으며, 정신으로 절충(折衝)하면 적을 손바닥 위에서 가지고 놀고, 논의(論議)에 근거가 있어 국자(國子)를 가슴 속에 감추었도다. 절개는 단단한 소나무와 같아 춥거나 덥거나 간에 그 모습을 변하지 않았고, 품격은 좋은 옥과 같아 건조하거나 습하거나 간에 그 성질을 변하지 않았도다. 그러니 온 나라의 안위를 맡기려면 경과 같은 덕망을 가진 사람이 아니면 어느 누가 그것을 감당하겠는가. 그러므로 이제 경을 추밀(樞密)에서 발탁하여 참정(參政)에 올리고, 사신(史臣)의 직책과 집현전 학사의 자격을 겸하게 하였도다. 이번 서성(西省 중서성)의 새로운 영전으로써 앞서 남조(南曹 이조(吏曹))의 불우했음을 보상하는도다.
대개 왕자(王者)가 사람을 씀에 있어서 비록 그 사람됨을 자세히 알아보지 못하여도, 뭇 사람들이 다 좋다고 말하면 그대로 임용하여 의심하지 않는 법이다. 그런데 하물며 경과 같은 이는 옛날에 승지(承旨)로 가까이 출입할 적에 짐이 이미 몸소 겪어본 바이다. 그러니 이제 경을 논사(論思)하는 요직에 둠에 있어서 누가 다시 이의(異議)를 제기할 것인가. 겸손을 고집하여 다시 사양하지 말라. 청한 바는 윤허하지 않노라. 운운.

 崔甫淳讓金紫光祿大夫參知政事集賢殿大學士同修國史判禮部事。不允敎書。[李奎報]

 

云云。夫代天理物。貳王行政者。宰相之任也。國以之重輕。民由之肥瘠。以人爲鑒。唐宗保魏徵之明。用汝作舟。商后倚傅說之濟。如非遠量。曷副輿情。卿該通天人。諳練典故。業文而資之武。體柔而濟以剛。精神折衝。弄敵人於掌上。論議有據。藏國子於胸中。貞松不爲寒暑變其容。良玉不因燥濕渝其性。擧國安危而是託。非卿德望而孰當。是用直越鴻樞。擢登鳳閣。申峻史臣之職。兼崇書殿之資。用玆西省之新榮。雪爾南曹之舊屈。大抵王者之用人也。雖未嘗究閱其爲人。苟僉言之皆允。猶柄用而不疑。况如卿者。在昔納言密邇之時。朕已親試。置斯當軸論思之地。誰復異詞。毋執小謙。更陳牢讓。所請宜不允云云。

 ○ 3월에 상장군 김원걸(金元傑)과 예부시랑 방응교(房應喬)를 금 나라에 보내어 금주(金主)의 즉위를 하례하게 하였는데, 그 표문에, "다섯 말이 강을 건넜으니 진(晉)나라 조정에 새로 왕이 선 것을 보겠고, 여섯 용이 위(位)에 올랐으니 복희(伏羲)·역경(易經)의 대인(大人)을 본다는 말에 부합하였다.[五馬渡江 表晉朝之開新主 六龍御極 符羲易之見大人].” 하였으니, 소부감 최보순(崔甫淳)이 지은 글이다. 금주의 형제가 위(位)를 다투었으므로 그 글이 사실에 저촉된 것을 싫어하여 중서성에서 힐문하기를, “우리 성상이 제위에 오른 것은 진 나라의 오마(五馬)가 강을 건넜던 일에 비교할 것이 아닌데 어찌 이런 말을 쓰느냐.” 하였다. 보순이 이 일로 파면되었다.

고종 안효대왕 2(高宗安孝大王二)
임오 9년(1222), 송 가정 15년ㆍ금 원광(元光) 원년ㆍ몽고 태조 17년


○ 봄 정월에 의주ㆍ화주ㆍ철관에 성을 쌓아 무릇 40일 만에 마쳤다.
○ 3월에 최우가 그 집에서 3품 이상의 관원에게 잔치를 베풀고, 또 4품관에게도 잔치를 베풀었다.
○ 여름 4월에 좌승선(左承宣) 최종준(崔宗峻)이 그 아들에게 국자감(國子監)의 시험을 보게 하려고 하였으나, 정록(正錄)이 아일(衙日)이 아니라 하여 굳이 거절하였다. 종준이 그 조카 사위인 최우에게 부탁하여 정록에게 청하니, 마지못하여 그를 시험보게 하였다. 옛 제도는 국자감이 4계월(季月 사계절의 마지막달 즉 계춘ㆍ계하ㆍ계추ㆍ계동) 6아일에 의관처자(衣冠處子 사대부 가문의 자제들)들을 모아 놓고 《논어》ㆍ《효경》을 시험해서 합격자를 뽑아 이부(吏部)에 보고하면 이부가 다시 그의 세계(世系 내력(來歷))를 상고하여 비로소 초직(初職)을 주는 것인데, 종준이 세도를 믿고 법을 문란케 함이 이와 같았다.
○ 양부(梁) 등 31명에게 급제를 주었다.
○ 가을 7월에 동진군사 만여명이 정주(靜州 의주(義州) 부근)로 들어왔다. 예전에 한순ㆍ다지의 무리가 섬으로 분배(分配 귀양)되었다가 모두 사면령을 만나 고향으로 돌아갔었는데, 이에 이르러 다시 동진군사를 이끌고 정주에 들어와 드디어 의주를 침범하였다. 방수장군 수연(守延)이 맞서 싸우다가 패하였다. 인주(麟州) 사람이 적과 통하여 내응하기를 모의하였는데, 방수장군이 이를 알고 성 밖에 나와 둔을 치고 그 모의를 풀게 하며 군사를 몰아 동진군사를 엄습하여 2백여 급의 목을 베었다. 중군병마사 이적유, 우군병마사 조염경, 후군병마사 김숙룡(金叔龍)을 보내어 서경 군사를 징발하여 그들을 추격하여 잡았다.
○ 임신일에 혜성이 나타나고 8월 무인일에 혜성이 또 낮에 보이며, 태백성이 낮에 나타나 하늘에 뻗쳤다.
○ 왕태후 왕씨가 훙하였다. 태후는 신종(神宗)의 비인데 희종(熙宗)이 왕태후로 높였다. 태후는 어려서부터 여공(女功)을 힘썼고, 충헌이 신종을 폐립(廢立)할 때에 온갖 어려움을 다 거쳤으나, 삼가서 스스로를 지켰다. 시호를 선정(宣靖)이라 하였다.
○ 몽고 사자 31명이 왔다.
○ 겨울 12월에 최보순(崔甫淳)을 중서시랑 평장사 판병부사로, 사홍기와 김취려를 참지정사로, 문유필을 지문하성사로, 정통보와 한광연을 모두 추밀원사로, 송신경(宋臣卿)을 지추밀원사로, 이적을 동지추밀원사로, 공천원(貢天源)과 오수기를 모두 추밀원부사로, 유택(柳澤)을 상서우복야로 삼았다.

 


 
고종 안효대왕 2(高宗安孝大王二)
기축 16년(1229), 송 소정 2년ㆍ금 정대 6년ㆍ몽고 태종(太宗) 원년

○ 봄 정월에 평장사 최보순이 졸하였다.
○ 정상(鄭相)이란 자가 있었는데, 통보(通輔)의 아들이며, 김희제의 사위이다. 일찍이 밤에 수덕궁리(壽德宮里)에 이르니, 이문(里門)이 닫히어 있었다. 정상이 열쇠 가진 자가 더디 오는 것에 노하여, 문틈으로 활을 쏘아 그를 죽였다. 법관 대집성(大集成)ㆍ김득순(金得循)ㆍ최종번(崔宗藩)ㆍ홍사윤(洪斯胤) 등이 통보와 희제의 청탁으로 죄를 묻지 않고, 오직 낭중 이정핵(李廷翮)이 고집하였으나 되지 않아, 마침내 가벼운 죄로 논면(論免)하였다. 이때 정혁이 진양부사(晉陽副使)로 있었는데 최우가 그 법을 지킨 행동을 아름답게 여겨 자문지유(紫門指諭)를 배수하여 포상하였다.
○ 2월에 동진 사람이 함주(咸州)에 이르러 화친을 청하니, 식목녹사(式目錄事) 노연(盧演)을 보내어 가서 약속을 듣게 하였다.
○ 여름 4월에 최우가 이웃집 백여 구(區)를 점탈하여 구장(毬場)을 지으니 동서로 수백 보가 바라다 보이고, 평탄하기가 바둑판과 같았다. 매양 격구(擊毬)를 할 때면 먼지가 일므로 반드시 동네 사람을 시켜서 물을 길어다 뿌리게 하였다.
○ 5월에 노연이 동북면에서 돌아왔다. 이 때에 동계 부방장군(赴防將軍) 김중온(金仲溫)이 노연은 겁이 많고 나약하여 동진과 약속하지 못하였다고 고소하니, 최우가 노하여 노연을 가구소(街衢所)에 가두고, 전 거제현령 진용갑을 장평진장(長平鎭將)으로 삼아 동진과 약속하였다.
○ 가뭄으로 2죄(二罪) 이하에게 사면령을 내렸다.
○ 동진이 화주에 쳐들어와 우마와 사람들을 노략하자, 진용갑이 사람을 보내어 타이르니, 모두 버리고 갔다.
○ 6월에 북변(北邊) 사람 전 별장 예작(銳爵)이 변덕스럽고 속임수가 많아, 죄를 짓고 일찍이 화주로 귀양와 있으면서 스스로 말하기를, “동진 도로의 평탄하거나 험한 곳과 멀고 가까운 곳을 안다." 하니, 동북면병마사 최종재(崔宗梓)가 그 말을 믿고 예작 등 세 사람을 보내어 동진국에 들어가 소식을 정탐하고 오라 하였다. 예작이 동진에게 말하기를, “우리 나라가 동진과 화호하고자 한다." 하니, 동진이 또한 그 말을 믿고 예작 일행을 돌려 보내고 회보를 기다렸는데, 국가에서 미루고 회보하지 않자, 동진은 예작이 거짓말을 하였다고 하여 그를 죽였다.
○ 가을 7월에 양부가 최우의 집에 모여, 동진을 방비하여 막을 대책을 의논하였다.
○ 8월에 상서좌복야로 치사한 유자량(庾資諒)이 졸하였다. 자량은 장중하고 말이 적었다. 의종조(毅宗朝)에는 문신의 세력이 크게 성하였는데, 자량은 이때 나이가 16세로서 유가(儒家)의 자제와 더불어 계(契)를 맺었다. 무인 오광척(吳光陟)과 문장필(文章弼)을 이끌어 계원으로 삼으려 하니, 계원들이 모두 좋아하지 않았는데, 자량이 말하기를, “교유하는 중에 문ㆍ무가 갖추어지는 것이 옳은 일이다." 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경인년(1170)의 변이 일어나자, 같은 계원들은 모두 광척과 장필이 변명하여 구해준 덕분에 해를 면할 수 있었다. 일찍이 나이가 많으니 물러나겠다고 청하고, 기로회(耆老會)에 들어가서 부처를 매우 독실히 섬겼다.
○ 유사가, “최종재가 제멋대로 예작을 동진에 보내어 변방에 흔단(釁端)이 생겼다." 고 탄핵하니, 종재가 양주부사(梁州副使)로 좌천되었다.
○ 동진이 화주를 침범하였다.
○ 9월에 평장사로 치사한 최홍윤(崔洪胤)이 졸하였다.
○ 최우가 또 인가를 빼앗아 구장을 넓혀, 날마다 격구와 활쏘기 연습을 하게 하고 이를 구경하니, 전후로 민가를 점탈한 것이 무려 수백 호였다.
○ 겨울 10월에 최우가 그 집에서 재추에게 잔치를 베풀고, 구정에 임하여 도방(都房) 마별초(馬別抄)가 격구하고 창을 놀리며 말타고 활쏘는 것을 구경하는데, 안마와 의복ㆍ활과 화살을 서로 과시하기에 힘써 달단(韃靼)의 풍속을 앞다투어 본받으려고 하였다. 구장이 옛날에는 누(樓)가 세 간이었는데, 이때에 최우가 세 간을 더하라고 명하니, 이날 늦게 공사를 시작하여 이튿날 아침에 다 마쳤다고 고하였다. 최우가 또 기로의 재추들을 맞아 잔치하면서 격구하고 창을 놀리며 말타고 활쏘기를 구경하다가 능한 자에게는 현장에서 작과 상을 더해주니, 도하(都下)의 자제가 다투어 안마와 의복을 장만하게 되어 처가가 가난하다고 버림받는 일이 많았다.
○ 임피현령(臨陂縣令) 전승우(田承雨)가, 상장군 김현보(金鉉甫)가 전지를 넓게 불리는 것을 미워하여, 그 전조(田租)를 거둬 관아에 납입하고 또 그 밭을 백성에게 주었는데, 현보가 안찰사 최종유(崔宗裕)에게 부탁하여 그 전조를 도로 징수하려 하니, 승우가 분하고 성이 나서 은그릇을 가지고 관사에 보상하고 법사(法司)에 보고하였다. 법사가 현보와 종유를 탄핵하니, 최우가 그 탄핵장을 빼앗고 그만두게 하였다.
○ 11월에 최우가 가병ㆍ도방(都房)ㆍ마별초를 사열하는데 안마와 의복, 궁검과 병갑이 매우 사치스럽고 고왔다. 오군으로 나누어 습전(習戰)하는데 인마가 엎어지고 자빠져 죽거나 다치는 자가 많았다. 그것을 마치고 나면 사냥하는 법을 익히는데 산을 에워싸고 들에 늘어서서 순환하기가 끝이 없으니, 최우가 기뻐하여 술과 음식으로 호군하였다.
○ 12월에 최우가 아뢰기를, “올해는 크게 가물어서 곡식이 부실하니, 사자를 5도에 보내어 손실을 살펴 조사하게 하소서." 하니,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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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記)
춘헌기(春軒記)

어떤 객이 춘헌(春軒)에 와서 춘(春)이라고 이름 붙인 뜻을 물어보았으나, 주인이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자 객이 다시 앞으로 나앉으며 말하였다.
“우주 사이의 원기가 조화의 힘에 의해 퍼져서 땅에 있는 양(陽)의 기운이 위로 올라가 하늘과 막힘없이 통하게 되면, 만물의 생동하는 뜻이 발동할 뿐 아니라 사람의 마음도 덩달아 활짝 펴지게 마련이다. 그리하여 봄이 오면 온갖 꽃이 아름답게 피어나고 새들이 즐겁게 노래하니, 봄의 풍광은 사람의 기분을 마냥 들뜨게 하고 봄의 경치는 사람의 마음을 따스하게 감싸 주는 법이다. 그래서 봄 누대에 오른 듯도 하고 봄바람 속에 있었던 듯도 하다는 그 뜻을 취해서 이렇게 이름 붙인 것인가?”
주인이 아니라고 하였다. 그러자 객이 또 말하였다.
“원(元)은 천지가 만물을 내는 근본이요, 춘은 천지가 만물을 내는 시절이요, 인(仁)은 천지가 만물을 내는 마음이니, 이름은 비록 다르다고 하더라도 그 이치는 매한가지이다. 그래서 노쇠하고 병든 자들이 봉양을 받을 수 있고 곤충과 초목이 그 생활을 영위할 수 있는 것도 모두 이러한 이치 때문이라는 그 뜻을 취해서 이렇게 이름 붙인 것인가?”
이에 주인이 말하기를,
“아니다. 굳이 그 이유를 대야 한다면 온화하기 때문이라고나 할까? 여름에는 장맛비가 지겹게 내리고 겨울에는 매서운 추위가 몰아치고 가을에는 썰렁해서 몸이 으스스 떨리니, 사람에게 맞는 것은 온화한 봄이 아니겠는가. 객이 말한 것이야 내가 어떻게 감히 감당하겠는가.”
하자, 객이 웃으면서 물러갔다.
내가 그때 자리에 있다가,
“그만한 덕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그렇게 자처하지 않는 것은 오직 군자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내가 알기에 주인은 흉금이 유연(悠然)해서 자기를 단속하고 남을 대할 적에 속에 쌓였다가 밖으로 드러나는 것이 화기(和氣) 아닌 것이 없으니, 대개 기수(沂水)에 가서 목욕하고 바람 쐬며 노래하는 부류에 속하는 사람이라고 여겨진다. 그러니 주인이 취한 뜻이 어찌 온화하다고 하는 정도로 그치겠는가. 그런데 객이 어찌하여 그런 것은 물어보지 않았는지 모르겠다.”
하고는, 마침내 붓을 잡고 이 내용을 벽에다 써 붙였다.
주인은 완산 최씨(完山崔氏)로, 문정공(文定公)의 후손이요 문간공(文簡公)의 아들이다. 박학강기(博學强記)한 데다가 특히 성리(性理)의 글에 조예가 깊어서, 동방의 문사들이 질의할 것이 있으면 모두 그를 찾아가서 묻곤 한다.

[주D-001]봄 누대에 …… 하고 : 《노자(老子)》 제 20 장에 “사람들 기분이 마냥 들떠서, 흡사 진수성찬을 먹은 듯도 하고 봄 누대에 오른 듯도 하네.〔衆人熙熙 如享太牢 如登春臺〕”라는 말이 나온다.
[주D-002]봄바람 …… 하다 : 주희의 《이락연원록(伊洛淵源錄)》 권4에 “주공섬(朱公掞)이 여주(汝州)에 가서 명도(明道) 선생을 만나 보고 돌아와서는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내가 한 달 동안이나 봄바람 속에 앉아 있었다.〔某在春風中坐了一月〕’라고 했다.”는 말이 실려 있다.
[주D-003]기수(沂水)에 …… 부류 : 공자의 제자 증점(曾點)이 “늦은 봄에 봄옷이 만들어지면 관을 쓴 벗 대여섯 명과 아이들 예닐곱 명을 데리고 기수에 가서 목욕을 하고 기우제 드리는 무우에서 바람을 쏘인 뒤에 노래하며 돌아오겠다.〔暮春者 春服旣成 冠者五六人 童子六七人 浴乎沂 風乎舞雩 詠而歸〕”라고 자신의 뜻을 밝히자, 공자가 감탄하며 허여한 내용이 《논어》 선진(先進)에 나온다.
[주D-004]주인은 …… 아들이다 : 주인의 이름은 최문도(崔文度)이다. 평장사(平章事)를 지낸 문정공(文定公) 최보순(崔甫淳)의 5세손이요, 광양군(光陽君)에 봉해진 문간공(文簡公) 최성지(崔誠之)의 아들이다. 자는 희민(羲民)이고, 관직은 첨의 평리(僉議評理)에 이르렀다. 1345년(충목왕 1)에 죽었으며, 시호는 양경(良敬)이다. 아들의 이름은 사검(思儉)이다.
 
고율시(古律詩) 원문  원문이미지  새창띄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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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율시(古律詩)
모춘(暮春)에 박사 최보순(崔甫淳)과 함께 주부(注簿) 윤세유(尹世儒)를 찾아 술상을 차려놓고 동파(東坡)의 시운을 따라 각각 짓다

마주앉아 세 잔씩 마셨으나 / 對酌三杯酒
수인장은 엿볼 수 없네 / 難窺數仞墻
꽃이 지니 시 생각 어지럽고 / 落花詩思亂
해는 지는데 취한 노래 흥겹구나 / 殘日醉歌長
내 살쩍에는 처음에는 흰 털이 났고 / 我鬢初抽綠
그대는 일찍부터 명성이 알려졌네 / 君名早飮香
서로 만나 글 얘기하며 마시는데 / 相逢文字飮
이량을 연주할 게 뭐 있나 / 何必奏伊凉

[주C-001]최보순(崔甫淳) : 벼슬은 판이부사(判吏部事)에 이르렀고 시호는 문정(文定)이다.
[주C-002]윤세유(尹世儒) : 고려(高麗) 시중(侍中) 윤관(尹瓘)의 손자로, 벼슬이 예부 원외랑(禮部員外郞)에 이르렀다. 《高麗史》
[주D-001]수인장(數仞墻) : 두어 길 되는 담장으로, 인격과 도덕이 높다는 뜻이다. 《논어(論語)》 자장(子張)에 “선생님의 담장은 두어 길이 되기 때문에 그 문(門)을 찾아 들어가지 않는다면, 종묘(宗廟)의 아름다움과 백관(百官)의 훌륭함을 볼 수 없다.” 하였다.
[주D-002]이량(伊凉) : 이주(伊州)와 양주(凉州)의 두 악곡(樂曲). 《악원(樂苑)》에 “이주는 상(商)에 해당한 곡조요 양주는 궁(宮)에 해당한 곡조이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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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記)
춘헌 기(春軒記)


이곡(李穀)

객 중에 춘헌에 와서 헌(軒)이라고 이름 지은 뜻을 묻는 이가 있었는데, 주인이 대답하지 않으니, 객이 다시 나아가서 말하기를, “대기(大氣)가 큰 땅에 퍼지면 양기가 올라가서 서로 화합하여 물건의 의사가 그것으로 발생하게 되고, 사람의 마음도 따라서 펴지고 화창해지며 여러 가지 꽃이 곱고, 백 가지 새 소리가 즐거운 듯, 그 빛은 화락하고 그 풍경은 화창해진다. 그러므로 그 춘대(春臺)에 오른 것 같고 봄바람에 선 것 같다는 뜻을 취한 것이냐.” 하기에, 대답하기를, “아니다.” 하니, “원(元)이라 함은 하늘과 땅이 물건을 창조하는 처음이고, 봄이라 함은 하늘과 땅이 물건을 나오게 하는 때이고, 인(仁)이라 함은 하늘과 땅이 물건을 만드는 마음이니, 그 이름은 비록 다르지만 그 이치인즉 하나이다. 그러므로 그 피폐하고 병들고 불구된 것들도 그 기름을 얻게 되고, 곤충ㆍ풀ㆍ나무들도 그 생활을 할 수 있는 것이 모두 다 이치로 된다는 뜻이냐.” 하기에, “아니다. 기어코 말하라고 한다면, 온화하다는 것이다. 여름에는 덥고 비 오고 겨울에는 몹시 춥고 가을은 쌀쌀하고 맑으니, 사람에게 좋은 것은 봄의 온화한 것이 아니겠는가. 객이 말하는 것을 내가 어찌 감당하겠는가.” 하니, 객이 웃고 물러갔다. 내가 마침 그 자리에 있다가 말하기를, “덕이 있으면서도 있는 체하지 않는 것은 오직 군자라야 그러한 것이다. 내가 알기로는 주인의 가슴 속이 유연(悠然)하여서 모든 몸을 지키고 물건을 접하는데 마음에 쌓였다가 밖으로 드러나는 것이 화한 기운이 아님이 없으니, 이는 기수(沂水)에 목욕하고 바람쐬고 노래하며 돌아온다는 무리이다. 그 취하는 바가 어찌 온화한 데에 그칠 뿐이겠는가. 객의 물음이 어찌 그렇게 늦느냐.” 하고서 드디어 붓을 달라고 하여 그 말을 벽에 쓴다.
주인은 완산 최씨로 문정공(文定公 최보순(崔甫淳))의 후손이고, 문간공(文簡公 최성지(崔誠之))의 아들이다. 널리 배우고 잘 기억하였는데, 더욱 성리학에 깊어서 의심나는 것을 물으려는 동방의 문사들이 모두 이 사람에게 찾아간다.


 

[주D-001]기수(沂水)에 …… 돌아온다 : 공자의 제자 증점(曾點)이 한 말로, 몇몇 제자들의 소원은 모두 정치에 있었으나 그는 이렇게 한가하게 자연을 즐기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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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년 희종 5년(송 영종 가정 2, 금 동해후(東海侯) 대안(大安) 원년, 몽고 태조 4, 1209)

춘정월 금에 사신을 보내어 조제(吊祭)하였다.
왕이 금주(金主)가 조(殂)하였다는 말을 듣고, 고애사(告哀使)가 미처 오기 전에 봉위사(奉慰使)와 제전사(祭奠使)를 보냈다. 제전사 이순중(李淳中)이 금에 제기(祭器)를 청하니, 금나라 사람들이 허락하지 않으므로 순중이 말하기를,
“길이 멀어서 부음을 듣는 것이 가장 늦었으므로, 행장을 꾸려 빨리 달려오느라 미처 가지고 올 겨를이 없었다. 대국(大國)에서 어찌 사소한 일로 사람을 책망하며 인색하게 제기를 아끼는가?”
하니, 곧 허락하였다. 제사를 지내게 되자, 제전이 정결하고 풍부하매 금나라 사람들이 칭찬하였다.

2월 왕이 봉은사(奉恩寺)에 행행하여 연등(燃燈)을 관람하였다.
정월은 신종이 죽은 달이므로 다시 2월에 연등을 하기로 하였는데, 이것이 예가 되였다.

3월 왕이 최충헌의 사제로 거처를 옮겼다.
○ 금에 사신을 보내어 즉위(卽位)를 하례하였다.
소부감(少府監) 최보순(崔甫淳)이 지은 표(表)에 ‘다섯 말이 강을 건넌다[五馬渡江]’는 말이 있었는데, 이때 금주(金主)의 형제가 서로 임금이 되려고 다투었으므로 그 실정을 찔렀다고 혐의하여, 중서성에서 그 표사(表辭)가 온당치 못함을 힐책하고 파면하였다.

하4월 최충헌이 우복야(右僕射) 한기(韓琦) 등을 죽였다.
청교역(靑郊驛) 아전이 충헌의 부자를 죽일 것을 모의하고, 거짓으로 공첩(公牒)을 만들어 여러 사찰의 중들을 소집하다가 일이 누설되어 붙잡혔는데, 한 기를 거짓으로 얽어 넣어서 그의 아들 셋까지 아울러 죽였다. 또 장군 김남보(金南寶) 등 9명을 죽이고, 추종하던 자들을 먼 섬으로 나누어 유배하였다.

5월 평장사(平章事) 최선(崔詵)이 졸하였다.
최선은 문학으로 이름이 세상에 알려졌다. 염담(恬淡)하고 말이 적었으며 문벌을 가지고 자부하지 않았고, 어진 이를 예우하고 선비에게 몸을 낮추었으며, 두 번 지공거(知貢擧)가 되어 이름 있는 선비들을 많이 얻었다. 시호는 문의(文懿)이다.

6월 초하루(계해)에 일식이 있었다.
○ 평장사(平章事) 기홍수(奇洪壽)가 졸하였다.
홍수는 판이부사(判吏部事)였는데 이부는 인재의 전선(銓選)을 맡는다 하여, 충헌에게 사양하고 물러나기를 청하고는 금서(琴書)로 즐겼다.

동11월 왕이 연경궁(延慶宮)에 돌아와서 거처하였다.
○ 천구성(天狗星)이 떨어졌다.

[주D-001]‘다섯 말이 강을 건넌다[五馬渡江]’ : 동진(東晉)의 원제(元帝)가 서양왕(西陽王) 등과 함께 양자강(揚子江)을 건넌 후에 제위에 올랐다는 고사를 말한 것인데, 그때 ‘다섯 말이 강을 건너면 한 말이 왕이 된다.’는 동요가 있었다. 《晉書 卷6 中宗元帝紀》
살고 싶은 것이 소원이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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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년 희종 5년(송 영종 가정 2, 금 동해후(東海侯) 대안(大安) 원년, 몽고 태조 4, 1209)

춘정월 금에 사신을 보내어 조제(吊祭)하였다.
왕이 금주(金主)가 조(殂)하였다는 말을 듣고, 고애사(告哀使)가 미처 오기 전에 봉위사(奉慰使)와 제전사(祭奠使)를 보냈다. 제전사 이순중(李淳中)이 금에 제기(祭器)를 청하니, 금나라 사람들이 허락하지 않으므로 순중이 말하기를,
“길이 멀어서 부음을 듣는 것이 가장 늦었으므로, 행장을 꾸려 빨리 달려오느라 미처 가지고 올 겨를이 없었다. 대국(大國)에서 어찌 사소한 일로 사람을 책망하며 인색하게 제기를 아끼는가?”
하니, 곧 허락하였다. 제사를 지내게 되자, 제전이 정결하고 풍부하매 금나라 사람들이 칭찬하였다.

2월 왕이 봉은사(奉恩寺)에 행행하여 연등(燃燈)을 관람하였다.
정월은 신종이 죽은 달이므로 다시 2월에 연등을 하기로 하였는데, 이것이 예가 되였다.

3월 왕이 최충헌의 사제로 거처를 옮겼다.
○ 금에 사신을 보내어 즉위(卽位)를 하례하였다.
소부감(少府監) 최보순(崔甫淳)이 지은 표(表)에 ‘다섯 말이 강을 건넌다[五馬渡江]’는 말이 있었는데, 이때 금주(金主)의 형제가 서로 임금이 되려고 다투었으므로 그 실정을 찔렀다고 혐의하여, 중서성에서 그 표사(表辭)가 온당치 못함을 힐책하고 파면하였다.

하4월 최충헌이 우복야(右僕射) 한기(韓琦) 등을 죽였다.
청교역(靑郊驛) 아전이 충헌의 부자를 죽일 것을 모의하고, 거짓으로 공첩(公牒)을 만들어 여러 사찰의 중들을 소집하다가 일이 누설되어 붙잡혔는데, 한 기를 거짓으로 얽어 넣어서 그의 아들 셋까지 아울러 죽였다. 또 장군 김남보(金南寶) 등 9명을 죽이고, 추종하던 자들을 먼 섬으로 나누어 유배하였다.

5월 평장사(平章事) 최선(崔詵)이 졸하였다.
최선은 문학으로 이름이 세상에 알려졌다. 염담(恬淡)하고 말이 적었으며 문벌을 가지고 자부하지 않았고, 어진 이를 예우하고 선비에게 몸을 낮추었으며, 두 번 지공거(知貢擧)가 되어 이름 있는 선비들을 많이 얻었다. 시호는 문의(文懿)이다.

6월 초하루(계해)에 일식이 있었다.
○ 평장사(平章事) 기홍수(奇洪壽)가 졸하였다.
홍수는 판이부사(判吏部事)였는데 이부는 인재의 전선(銓選)을 맡는다 하여, 충헌에게 사양하고 물러나기를 청하고는 금서(琴書)로 즐겼다.

동11월 왕이 연경궁(延慶宮)에 돌아와서 거처하였다.
○ 천구성(天狗星)이 떨어졌다.

[주D-001]‘다섯 말이 강을 건넌다[五馬渡江]’ : 동진(東晉)의 원제(元帝)가 서양왕(西陽王) 등과 함께 양자강(揚子江)을 건넌 후에 제위에 올랐다는 고사를 말한 것인데, 그때 ‘다섯 말이 강을 건너면 한 말이 왕이 된다.’는 동요가 있었다. 《晉書 卷6 中宗元帝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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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오년 고종 9년(송 영종 가정 15, 금 선종 원광(元光) 원년, 몽고 태조 17, 1222)


춘정월 의주(宜州 지금의 함경남도 덕원(德元))ㆍ화주(和州 지금의 영흥(永興))ㆍ철관(鐵關)을 쌓았다.
최우가 남군(南軍)을 내어서 의주 등 요해처(要害處)에 성을 쌓아 몽고에 대비하였다. 지주사(知奏事) 김중귀(金仲龜)가 말하기를,
“근래에 주군의 백성들이 모두 유리(流離)하여 달아나 버렸는데, 이제 급변(急變)도 없으면서 별안간 또 징발한다면 나라의 근본이 튼튼하지 못할 것이니 이를 어찌하겠습니까?”
하였으나, 우는 듣지 않았다. 무릇 사순(四旬) 만에 일을 마쳤다.

추7월 혜성(彗星)이 삼태성(三台星)에 나타났다.
이윽고 서북방에 나타났다. 길이가 20척이고 낮에 나타났다.
○ 한순(韓恂)의 여당(餘黨)이 다시 배반하여 동진(東眞)의 군사를 이끌고 정주(靜州)에 입구(入寇)하였는데 변장(邊將)이 쳐서 패배시켰다.
처음에 한순ㆍ다지(多智)와 여당이 해도(海島)로 나뉘어 귀양갔다가 뒤에 사면되어 고향으로 돌아갔는데, 이때 이르러 다시 동진의 군사 1만여 명을 이끌고 정주에 들어와서 마침내 의주를 침노하니 수장(守將)이 싸워 패하였다. 인주(麟州) 사람이 성을 열어 적과 내응(內應)하려고 하자 수장이 이것을 알고 군사를 정돈하여 동진의 군사를 엄습, 수백 급(級)을 베니, 적은 마침내 물러나 달아났다. 조정에서도 병마사 이적유(李廸儒) 등을 보내어 서경(西京)의 군사를 내어 이들을 붙잡았다.

8월 태백이 경천하였다.
○ 신종(神宗)의 비(妃) 김씨(金氏)가 훙하였다.
○ 선정 태후(宣靖太后)를 진릉(眞陵)에 장사하였다.

동10월 몽고의 사신이 왔다.
저고여(著古與) 등이 와서 납관(納款 성의껏 복종함)의 실정을 살폈다. 《원사(元史)》에서 보충

12월 최보순(崔甫淳)을 중저시랑 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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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해년 고종 14년(송 이종 보경 3, 금 애종 정대 4, 몽고 태조 22, 1227)


춘정월 태자부(太子府)를 세웠다.

2월 큰 지진이 있었다.

3월 최우가 폐왕(廢王)을 교동(喬桐)으로 옮기고, 김희제를 죽였다.
이보다 먼저 술사(術士) 최산보(崔山甫)가 중이 되어 겁략(劫掠)을 일삼았는데, 현관(縣官)이 이를 붙잡으려고 하니, 성명을 바꿔 주연지(周演之)라고 하였다. 그러고는 서울에 올라와 점술(占術)로써 최우의 친신(親信)하는 바가 되었는데, 일찍이 우에게 말하기를,
“왕은 위(位)를 잃을 것이고, 공(公)은 왕후(王侯)의 상(相)이 있습니다.”
하였다. 우가 그것을 심복인 김희제에게 말하였는데, 희제가 그 말을 누설하자, 우는 그것을 언짢게 여겼었다. 마침 어떤 사람이 우에게 알리기를,
“앞서 공이 앓을 적에 희제가 장군 노지정(盧之正)ㆍ금휘(琴輝) 등과 더불어 연지의 집에서 모여 공을 해치고 전왕(前王)을 받들기로 모의하였습니다.”
하였다. 우는 그 말을 믿고 연지의 집을 적몰(籍沒)하고, 전왕이 연지에게 준 글을 얻었는데,
“천지에 맹세하고 사생(死生)을 함께 하여 아버지로 섬기겠다.”
하는 따위의 말이 있었다. 마침내 전왕을 교동으로 옮기고 희제ㆍ연지ㆍ지정ㆍ휘 등을 바다에 빠뜨리고 아울러 희제의 세 아들도 죽였다. 휘(輝)는 금의(琴儀)의 아들이다. 희제는 그때 전라도 순문사(全羅道巡間使)가 되어 나주(羅州)에 있었는데 잡으러 온 자가 이르렀는데도 두려운 빛이 조금도 없었으며 조용히 자진하여 바다에 몸을 던졌다.
희제는 군산도(群山島) 사람으로 풍채가 훌륭하고 지혜와 용기가 있었으며 서사(書史)에도 통달하였다. 처음에 충헌과 우에게 붙어 신임받게 되었는데, 우가 앓을 때 희제는 병이 낫지 않을까 걱정하여 연지의 집에 가 문복(間卜)하였다가 이로써 참소를 받아 죽으니, 그때 사람들이 그를 억울하게 여겼다.
【안】 김희제의 재지(才智)와 용략(勇略)은 가위 일세의 인재가 된다고 하겠으나, 권문에 몸을 맡기어 끝내 그 목숨을 잃은 것은 아까운 일이다. 그가 죽을 때 읊은 시를 보면,

청하의 백 가지 쏟은 은혜에 보답하고자 / 欲報淸河百注恩
동서남북으로 온통 내몸을 잊었었네 / 東西南北摠忘身
어찌타 하루아침에 하늘의 미움을 사서 / 奈何一朝逢天厭
도성의 벼슬아치가 벽해의 죄인이 된단말가 / 紫陌入爲碧海人

하였는데, 청하(淸河)는 최씨(崔氏)를 가리킨 것이다. 그 시를 읽고 그 사람을 알 수가 있는 것이니, 어찌 재주만 있고 도(道)는 듣지 못한 자가 아니겠는가? 아, 간신이 국정을 전단하여 작록(爵祿)과 권총(權寵)으로 사람을 농락할 때 그 농락에 떨어진 자는 결국 재화를 면할 수가 없는 것이다. 예로부터 어찌 간인(奸人)과 일을 함께 하고서 그 나중을 보전할 수 있는 자가 있었던가? 이런 까닭으로 군자는 몸을 의탁하여 출세하려고 할 때 그 처음을 삼가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살(殺)이라고 써서 그 죄 없음을 밝혔고, 벼슬을 쓰지 않아 그 실신(失身)한 죄를 밝혔다.

하4월 왜가 김주(金州)여 침구하였다.

5월 왜가 웅신현(熊神縣)웅신(熊神)은 지금의 웅천(熊川) 을 침구하였다.
○ 일본(日本)이 글을 보내어 수호(修好)를 청하였다.
일본은 원뇌조(源賴朝)가 전쟁을 일으킨 후로 국내에 난리가 많았으므로 해구(海寇)가 횡행하여 늘 우리 연해를 침략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글을 보내와 적선(賊船)이 변경에 침구한 것을 사죄하고, 아울러 수호와 호시(互市)를 청하였다.

6월 초하루(무신)에 일식이 있었다.

추7월 태백이 경천하였다.

9월 동진(東眞)이 장주(長州)와 정주(定州)의 두 주에 침입하자 병마사 조염경(趙廉卿), 지중군(知中軍) 김양경(金良鏡) 등을 보내어 이를 막게 하였다.

동10월 의주(宜州)에서 패적(敗績)하였다.
○ 《명종실록(明宗賓錄)》이 이루어졌다.
감수국사(監修國史) 평장사(平章事) 최보순(崔甫淳), 수찬관(修撰官) 김양경(金良鏡)ㆍ임경숙(任景肅)ㆍ유승단(兪升旦)ㆍ이규보(李奎報)ㆍ권경중(權敬中)ㆍ조문발(趙文拔) 등이 연대(年代)를 나누어 집필하였는데 완성되어 올리니 사관(史館)과 해인사(海印寺)에 간직하였다. 경중이 엮은 4년 동안의 일은 따로 재이(災異)를 모아 한 책으로 만들어서 그 감응(感應)을 밝혀 올리고, 그 말미에 말하기를,
“대저 세상이 다스려지면 천변(天變)은 없어지고, 세상이 어지러워지면 천변은 번성하여지니, 도를 깨달은 임금은 사람으로서 하늘을 다스리고, 덕이 쇠한 연후에는 하늘이 또 견책하여 알려 주는 것이다. 왕이 덕화를 펴고 정사를 잘하여 인심을 순하게 하면 재앙이 어찌 사라지지 않겠으며 복록이 어찌 이르지 않겠는가?”
하였다.

11월 김중귀(金仲龜)를 서경 유수(西京留守)로 삼았다.
중귀는 공정(公正) 충실(忠實)하고 절검(節儉)하여 가는 곳마다 명성과 치적(治績)이 있었다. 이극인(李克仁)의 사죄(死罪)에 연좌되어 백령도(白翎島)지금의 장연(長淵) 남쪽 바다에 있다 로 귀양갔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명(命)이 내리니, 조야(朝野)가 모두 기뻐하였다.
○ 일본에 사신을 보내었다.
조정에서는 왜구의 침략을 근심하였고, 또 저들이 글을 보내어 수교(修交)하기를 청하며 왔으므로, 급제(及第) 박인(朴寅)을 보내어 첩문(牒文)을 가지고 가서 역세(歷世)토록 화호(和好)하여 내침(來侵)해서는 안 된다는 뜻을 타일렀다.
○ 이해에 몽고의 철목진(鐵木眞)이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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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축년 고종 16년(송 이종 소정 2, 금 애종 정대 6, 몽고 태종(太宗) 와활대(窩闊台) 원년, 1229)

춘정월 평장사(平章事) 최보순(崔甫淳)이 졸하였다.
보순은 최균(崔均)의 아들로, 기량(器量)과 식견(識見)이 있었다. 어려서부터 학문에 힘썼으며 정치를 함에 있어 청백(淸白)을 숭상하였으므로 당시의 인망(人望)이 있었다. 시호는 문정(文定)이다.

2월 동진(東眞)에서 화친을 청하니, 이를 허락하였다.
동진 사람이 함주(咸州) 때 와서 화친을 청하니, 식목녹사(式目錄事) 노연(盧演)을 보내어 약속을 듣게 하였는데, 연은 겁이 많고 나약하여 약정를 이룰 수가 없었다. 최우는 노하여 연을 가구소(街衢所)에 가두고, 다시 사람을 보내어 약정하게 하였으나 끝내 사명을 이룩하지 못하였다. 북변(北邊) 사람으로 전 별장(別將)인 예작(銳爵)은 언행을 반복(反覆)하며 거짓이 많은 사람이었는데, 스스로 동진 도로(道路)의 험이(險夷)ㆍ원근(遠派)을 안다고 하므로 동북면 병마사(東北面兵馬使) 최종재(崔宗梓)가 이것을 믿고 작 등 세 사람을 시켜 동진에 들어가 소식을 탐지하게 하였다. 작이 동진에게 말하기를,
“우리 나라가 귀국과 화호하고자 한다.”
하니, 동진은 그 말을 믿어 작의 일행 한 사람을 돌려보내 회보를 기다렸다. 그러나 우리 나라에서는 망설이고 대답을 하지 않아 동진은 작이 거짓말을 하였다 하여 목을 베고, 얼마 후 다시 화주(和州 영흥(永興))에 입구하였다. 양부(兩府)는 최우의 집에 모여 동진을 막을 계책을 의논하였다.

추8월 좌복야로 치사(致仕)한 유자량(庾資諒)이 졸하였다.
자량은 응규(應圭)의 아우인데 장엄 정중하고, 말이 적었다. 젊었을 때 유가(儒家)의 자제들과 계(契)를 맺었는데, 자량은 무인 오광척(吳光陟)ㆍ문장필(文章弼)을 아울러 끌어들이려고 하였으나, 여러 사람들이 다 허락하지 않자, 자량은 말하기를,
“친구는 문무가 다 갖춰지는 것이 좋다. 만약 이를 거부하면 뒤에 반드시 후회가 있으리라.”
하니, 그제야 친구들이 따랐다. 얼마 안 되어 경인(庚寅)의 변이 일어났는데 계를 같이한 광척ㆍ장필 두 사람의 구함을 입어 모두 죽음을 면하였다. 자량은 수령으로 백성 다스리는 데 정통하여 온갖 부정을 귀신같이 적발하고, 내직과 외직을 역임하면서 이르는 곳마다 명성과 공적이 있었다. 그리하여 위엄을 두려워하여 복종하지 않는 자가 없었고, 은혜와 신의로 구제하였기 때문에 백성들이 편하게 여겼다.

동11월 최우가 구장(毬場)을 만들고, 그 가병(家兵)을 사열하였다.
우는 이웃집 수백여 구(區)를 빼앗아 구장을 만들었는데, 동서가 수백 보나 되고, 평탄하기가 바둑판 같았다. 날마다 도방(都房) 마별초(馬別抄)를 모아 격구(擊毬)를 하게 하였는데, 혹은 창을 던지고, 말타고 활쏘기를 더러는 5~6일까지 계속하기도 하였고, 잘하는 자는 즉석에서 작(爵)과 상을 가하였다. 그래서 도방 별초의 안마(鞍馬)ㆍ의복ㆍ궁시(弓矢)는 모두 몽고 풍속을 본받아 곱고 아름다운 것을 서로 다투어 자랑하였다.
또 군사를 오군(五軍)으로 나누어서 전쟁 연습을 할 때면, 인마가 엎드러지고 쓰러져서 사상자가 많았다. 그것을 마치면 사냥하는 법을 익히는데 산을 에워싸고 들에 늘어서서 순환하는 것이 끝이 없었는데, 우는 그것을 기쁨으로 삼았다.
○ 이해에 몽고의 와활태(窩闊台)가 즉위하였다.
철목진(鐵木眞)의 셋째아들로 이가 태종(太宗)이다.

 
전주부(全州府)

동으로 진안현(鎭安縣) 경계까지 47리, 서쪽으로 임피현(臨陂縣) 경계까지 74리, 금구현(金溝縣) 경계까지 19리, 남으로 금구현(金溝縣) 경계까지 38리, 임실현(任實縣) 경계까지 42리, 북으로 익산군(益山郡) 경계까지 37리, 여산군(礪山郡) 경계까지 61리, 고산현(高山縣) 경계까지 40리, 서울로부터는 5백 16리가 된다.
【건치연혁】 본래 백제(百濟)의 완산(完山)이며 비사벌(比斯伐), 또는 비자화(比自火)라고도 한다. 신라 진흥왕(眞興王) 16년에 완산주(完山州)를 두었다가 동왕 26년에 주를 폐지하고, 신문왕(神文王) 때 완산주(完山州)를 다시 설치하였다. 경덕왕(景德王) 15년에 지금의 이름으로 바꾸어 9주를 완비하였다. 효공왕(孝恭王) 때 견휜(甄萱)이 여기에 도읍을 세우고 후백제(後百濟)라 하였다. 고려 태조 19년에 신검(神劍)을 토벌하여 평정하고 안남도호부(安南都護府)라 하였다가 23년에 다시 전주(全州)라 하였다. 성종(成宗) 12년에 승화절도안무사(承化節度安撫使)라 하였고, 14년에 12주에 절도사를 두고 순의군(順義軍)이라 하여 강남도(江南道)에 예속시켰다. 현종(顯宗) 9년에 안남대도호부(安南大都護府)로 승격하였다가 뒤에 다시 전주목(全州牧)으로 고쳤다. 공민왕(恭愍王) 4년에 원(元) 나라 사신 야사불화(埜思不花)를 가둔 일 때문에 부곡(部曲)으로 강등하였다가 5년에 다시 완산부(完山府)라 하였다. 본조(本朝) 태조 원년에 임금의 고향이므로 완산유수부(完山留守府)로 승격시켰고, 태종(太宗) 3년에 지금의 이름으로 고쳤으며, 세조(世祖) 때에 진(鎭)을 두었다.
【속현】 옥야현(沃野縣) 전주의 서북 70리에 위치한다. 본래 백제의 소력지현(所力只縣)이었는데 신라 때 옥야현으로 고치어 금마군(金馬郡)의 영현(領縣)으로 삼았다. 고려 초에 전주에 예속시켰다. 명종(明宗) 6년에 감무(監務)를 두었고, 뒤에 다시 내속시켰다. 군창(軍倉)이 있다.
【진관】 군(郡)이 6이다. 익산(益山)ㆍ김제(金堤)ㆍ고부(古阜)ㆍ금산(錦山)ㆍ진산(珍山)ㆍ여산(礪山) , 현(縣)이 11이다. 정읍(井邑)ㆍ 흥덕(興德)ㆍ부안(扶安)ㆍ만경(萬頃)ㆍ옥구(沃溝)ㆍ임피(臨陂)ㆍ금구(金溝)ㆍ용안(龍安)ㆍ함열(咸悅)ㆍ고산(高山)ㆍ태인(泰仁).
【관원】 부윤(府尹)ㆍ판관(判官)ㆍ교수(敎授) 각 1인.
【군명】 견성(甄城)ㆍ완산(完山)ㆍ비사벌(比斯伐)ㆍ안남(安南)ㆍ승화(承化)ㆍ순의군(順義軍).
【성씨】 본부(本府) 이(李)ㆍ최(崔)ㆍ유(柳)ㆍ박(朴)ㆍ전(全)ㆍ경(庚)ㆍ한(韓)ㆍ백(白), 방(房) 내성(來姓)이다. 양(梁) 주계(朱溪). 장(張) 결성(結城). 김(金) 모평(牟平). 우주(紆州) 박(朴)ㆍ이(李)ㆍ정(鄭)ㆍ황(黃)ㆍ최(崔)ㆍ염(廉)ㆍ배(裵)ㆍ유(柳)ㆍ홍(洪). 양량(陽良) 백(白)ㆍ나(羅)ㆍ강(康)ㆍ유(劉). 이성(利城) 이(李)ㆍ백(白)ㆍ정(鄭)ㆍ손(孫)ㆍ진(陳)ㆍ최(崔). 두모촌(豆毛村) 책(冊)ㆍ최(崔)ㆍ이(李). 이성(伊城) 조(趙)ㆍ배(裵)ㆍ장(張)ㆍ구(仇)ㆍ염(廉)ㆍ고(高)ㆍ온(溫). 옥야(沃野) 임(林)ㆍ장(張)ㆍ염(廉)ㆍ구(仇)ㆍ양(梁). 경명(景明) 김(金)ㆍ임(林)ㆍ배(裵)ㆍ인(印).
【풍속】 사람들이 약삭빠르다. 주기(州記)에, “비옥한 땅과 척박한 땅이 섞여 있고 사람들이 약삭빠르다.” 하였다. 백성들이 어리석거나 완고하지 않다. 이규보(李圭報)의 기(記)에, “인물이 번성하고 가옥이 즐비하여, 옛 나라의 풍모가 있다. 그러므로 그 백성은 어리석거나 완고하지 않고 모두가 의관을 갖춘 선비와 같으며, 행동거지가 볼 만하다.” 하였다. 집을 다스리는 자는 대부분 곡식을 저축하여 흉년에 대비한다. 이경동(李瓊同)의 기(記)에 있다. 남국의 인재가 몰려 있는 곳이다. 서거정(徐居正)의 기(記)에 있다. 물건을 싣는데 수레를 사용하며, 저자는 줄을 지어 상품을 교역한다.
【형승】 국가의 풍패(豐沛)로 산천이 영수(靈秀)하다 윤곤(尹坤)의 기(記)에 있다. 주 나라의 조상이 일어난 곳이요, 일도의 으뜸이다. 모두 서거정의 기에 있다. 안팎으로 산과 개천이 있다. 성임(成任)의 시(詩)에, “안팎의 산과 강이 판적에 들어 있다.” 하였다.
【산천】 건지산(乾止山) 전주부의 북쪽 6리에 있으며, 진산(鎭山)이다. 이규보(李圭報)의 기(記)에, “전주에 건지산이 있는데 수목이 울창하여 주(州)의 웅진(雄鎭)이다.” 하였다. 완산(完山) 작은 산이다. 부의 남쪽 3리에 있다. 부의 이름은 이 산 이름에서 딴 것으로 일명 남복산(南福山)이라고도 하는데, 읍을 설치한 후로부터 나무하는 것을 금지했다. 고덕산(高德山) 부의 동남쪽 10리에 있다. 고달산(高達山)이라고도 한다. 무악산(毋岳山) 부의 서남쪽 20리에 있다. 금구현(金溝縣) 조에도 있다. 기린봉(麒麟峯) 부의 동쪽 6리에 있다. 봉우리 위에는 작은 못이 있다. 청량산(淸涼山) 부의 동북쪽 40리에 있다. 서방산(西方山) 부의 동북쪽 25리에 있다. 가련산(可連山) 부의 서쪽 10리에 있으며, 건지산(乾止山)의 산세가 여기에 와서 끊어졌는데, 사람들의 말이 이어져야 할 곳에서 끊어졌다고 하여 가련이라 이름한 것이라고 한다. 여현(礪峴) 부의 남쪽 42리에 위치한다. 웅현(熊峴) 부의 동쪽 47리, 진안현(鎭安縣) 경계에 있다. 서고산(西高山) 부의 서쪽 15리에 있다. 태실산(胎室山) 부의 남쪽 20리에 있다. 여기에 예종(睿宗)의 어태(御胎)를 안치하였다. 황화대(黃華臺) 부의 서쪽 4리에 있다. 읍인(邑人)들이 봄ㆍ가을로 올라가 제사술을 마셨다. 만경대(萬景臺) 고덕산(高德山) 북쪽 기슭에 있다. 돌 봉우리가 우뚝 솟아 마치 층운(層雲)을 이룬 듯이 보이는데, 그 위에 수십 명이 앉을 만하다. 사면으로 수목이 울창하며 석벽(石壁)은 그림같이 아름답다. 서쪽으로 군산도(群山島)를 바라보며 북쪽으로는 기준성(箕準城)과 통한다. 동남쪽으로는 태산(太山)을 지고 있는데 기상이 천태만상이다. 정몽주(鄭夢周)의 시에, “천인(千仞) 높은 산에 비낀 돌길을, 올라오니 품은 감회 이길 길이 없구나. 청산이 멀리 희미하게 보이니 부여국(扶餘國)이요, 황엽이 휘날리니 백제성(百濟城)이라. 9월 높은 바람은 나그네를 슬프게 하고, 백년 호기는 서생(書生)을 그르치게 하는구나. 하늘가로 해가 져서 푸른 구름이 모이니, 고개 들어 하염없이 옥경(玉京)을 바라보네.” 하였다. 안천(雁川) 주의 북쪽 25리에 있으니 즉 고산현(高山縣) 남천(南川)의 하류가 주계(州界)에 이르러 직연(直淵)이 되고 안천이 되며, 삼례역(參禮驛) 남쪽에 와서 추천(楸川)과 합류한다. 남천(南川) 부의 남쪽 3리에 있다. 금상 4년에 시내를 막고 돌을 쌓으니 길이가 6천 자나 되었다. 남천(南川)의 근원은 여현(礪峴)에서 나오는데 부의 동남에 이르러 성을 둘러 북으로 가련산(可連山)을 지나 추천이 되고, 무악산(毋岳山)에서 나온 물과 합해서 삼례역(參禮驛) 남쪽에 이르러 다시금 고산(高山) 웅현(熊峴)의 물과 합쳐서 서쪽으로 흘러 회포(洄浦)가 되며, 조수(潮水)가 여기까지 들어온다. 옥야(沃野) 이성(利城)을 지나서 신창진(新倉津)이 되었다. 신창진(新倉津) 부의 서쪽 70리에 있다. 김제군(金堤郡)과 만경현(萬頃縣) 조에도 있다. 덕진지(德眞池) 부의 북쪽 10리에 있다. 부의 지세는 서북방(西北方)이 비어 있어 전주의 기맥(氣脈)이 이쪽으로 새어버린다. 그러므로 서쪽으로는 가련산으로부터 동으로 건지산(乾止山)까지 큰 둑을 쌓아 기운을 멈추게 하고 이름을 덕진(德眞)이라 하였으니, 둘레가 9천 73자이다. 풍월정(風月亭)의 시에, “깊은 못을 한번 바라보니 푸른 하늘이 비쳐 있네. 옛부터 이 못을 파기에 몇 사람의 공이 들었을까. 마을 연기 멀리 끼어 가을 달이 몽롱하고, 어부의 피리 소리는 저녁 바람에 비꼈도다.” 하였다. 『신증』 유순(柳洵)의 시에, “깊고 맑은 물에 허공이 비쳐 있고, 덕을 쌓았으니 제물(濟物 사물을 구제하는 것)하는 공(功)을 갖추었네. 이곳에 참 용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세상 어느 곳에서 뇌풍(雷風)을 찾았으리오.” 하였다. 공덕지(孔德池) 부의 서쪽 60리에 있다. 판토포지(板吐浦池) 부의 북쪽 30리에 있다. 굴연(堀淵) 부의 동쪽 4리에 있다. 돌기둥 여섯 개가 있는데 녹담정(綠潭亭)의 기둥이라고 전해온다.
『신증』 발산(鉢山) 부의 동쪽 3리에 있다. 우락암(于樂巖) 옥야창(沃野倉) 북쪽 2리에 있다. 그 위에 50여 명이 앉을 수가 있다. 봉황암(鳳凰巖) 부의 서쪽 5리에 있다. 그 아래에 못이 있다. 황학대(黃鶴臺) 부의 남쪽 5리에 있다. 석봉(石峯)이 솟아 있고, 큰 시내가 끼고 돌아간다. 전하는 말에 황학(黃鶴)이 놀던 곳이라 한다.
【토산】 석류(石榴), 종이 상품(上品)이다. 생강[薑]ㆍ울금초(鬱金草)ㆍ벌꿀[蜂密]ㆍ웅어[葦魚]ㆍ옻[漆]ㆍ사기그릇[磁器].
【성곽】 읍성(邑城) 돌로 쌓았는데 둘레는 5천 3백 56척이고 높이는 8척이다. 그 안에 2백 23개의 우물이 있다.
【궁실】 경기전(慶基殿) 부성(府城)의 남문(南門) 안에 있다. 영락(永樂 명(明) 성조(成祖)의 연호이다.) 경인년에 태조(太祖) 강헌대왕(康獻大王)의 어용(御容)을 봉안(奉安)하였다. 참봉(參奉) 2명을 두었다. 유순(柳洵)의 시에, “시기에 호응하여 도록(圖錄)에 맞게 동한(東韓)을 평정하니, 도탄에 빠진 백성을 평안하게 하였도다. 성덕(聖德)을 마땅히 백세에 제사하리니, 천추에 묘모(廟貌)는 단청(丹靑)이 맑으리라.” 하였다. 실록각(實錄閣) 경기전(慶基殿)의 동쪽 담 안에 있는데 본조의 실록(實錄)이 수장되어 있다. 김길손(金吉孫)의 기(記)에, “아국(我國)은 조종(祖宗) 이래로 세대에 따라 실록을 편찬하여 안과 밖에 수장하였으니, 안에는 춘추관(春秋館)이 있고, 밖에는 충주(忠州)ㆍ성주(星州)와 같이 모두 장서각(藏書閣)이 있는데, 오직 본부(本府)만이 없었다. 을축년 겨울에 비로소 부성(府城) 안 승의사(僧義寺)에 두었다가 갑신년 가을에 진남루(鎭南樓)에 이안했다. 세조께서 본도(本道)에 명하여 장각(藏閣)을 세우도록 하였으나 연이어 흉년이 들어 공역(工役)을 중흥하지 못하고 몇 년 동안 미루어오다가, 임진년 봄에 세조와 예종(睿宗)의 양조 실록이 이루어지니, 주상께서 동지춘추관사(同知春秋館事) 양성지(梁誠之)를 파견하여 이것을 부에 봉안하도록 하였다. 그때에 상국(相國) 김지경(金之慶)은 본관(本館)의 구신(舊臣)으로서 이곳에 안찰(按察)로 나와 있으면서, 애써 장각을 세우고자 하여, 양공(梁公)과 더불어 경기전(慶基殿)의 동편에 자리를 정하고 사유(事由)를 갖추어 장계(狀啓)를 올리고, 인근 여러 포(浦)의 선군(船軍) 3백 명을 역군으로 하고, 부윤인 상국(相國) 조근(趙瑾)을 책임자로 하였으며, 순창(淳昌) 군수 김극련(金克鍊)으로 하여금 감독하도록 하여, 지난해 12월 중공(衆工)이 일을 같이하여 금년 5월을 지나 공사를 마쳤다.” 하였다.
객관(客館) 이경동(李瓊同)의 〈서헌기(西軒記)〉에, “신묘년에 우리의 좌주(座主) 조근(趙瑾) 공이 전주 부윤으로 왔는데, 관리와 백성이 모두 그 교화에 좇았다. 공은 판관(判官) 김신(金信)과 더불어 여러 사람들에게 도모하여 말하기를, ‘부의 관(館)은 대청(大廳)에 중앙에 있고 좌우에 익실(翼室)이 있는데, 동편은 높고 서쪽은 낮으며 동편은 넓고 서쪽은 좁은데, 다행히 창리고(創吏庫)에 남은 재물이 있어 서헌(西軒)을 고쳐 동헌(東軒)과 같이 하고자 하는데, 그대들의 뜻은 어떠한가.’ 하니, 이민(吏民)들이 모두 이에 찬동하였다. 이에 일 없이 노는 사람들을 고용하고 다른 백성들을 번거롭게 하지 않았으나 건물이 새로워지니, 주(州)의 남녀들이 감탄을 하면서 바라보았는데, 건물이 고쳐진 것만 볼 뿐이요, 공역(工役)이 어떻게 해서 되었는지를 알지 못하였다. 공의 뒤를 잇는 사람도 백성 사랑하기를 공과 같이 하고 관직 수행을 공과 같이 하며, 건물과 장벽(墻壁)을 늘 보수(補修)하여 임금의 세계근원(世系根元)이 길이 발상한 이 고장으로 하여금 그 기반을 공고히 함으로써, 조선(朝鮮) 억만년의 무강(無疆)한 복조와 더불어 상서(祥瑞)를 같이한다면, 어찌 우리 부의 큰 행복이 아니겠느냐.” 하였다.
【누정】 진남루(鎭南樓) 공관(公館)의 후원(後園)에 있으며 영락(永樂) 기축년에 감사(監司) 겸 부윤인 윤향(尹向)이 지은 것이다. 신유년에 부윤 한승순(韓承舜)이 중수하고 정곤(鄭坤)이 기문을 썼다. 윤향(尹向)의 시에, “백제성 중에 백척 루며 경영은 바야흐로 태평시기에 당하였네. 기린봉(麒麟峯)에 비 뿌리어 주렴(珠簾)을 흔들고, 무악산(毋岳山)에 구름 이어 그림 기둥에 떠있네. 기둥에 기대어 동남으로 몇 개 군에 임하고, 난간에 의지하여 서북으로 서울을 바라보네. 누에 오르니 3년을 지낼 손[客]이 가소롭고 호기(豪氣)는 오히려 바다 구석까지 넘쳐 있네.” 하였다. ○ 허주(許周)의 시에, “맑은 경치를 연유하여 새 누각에 의지해 섰네. 눈은 깜짝 지는 잎을 보고 가을을 깨닫도다. 수많은 민가의 저녁 연기는 어렴풋이 푸르고, 사산(四山)의 아리따운 기운은 무성하게 피어오르네. 유수(留守)의 부절을 나누니 2천 석이요, 월(鉞 군(軍)이나 지방 장관의 표시로 임금이 준 도끼)을 짚고 서서 50주를 관풍(觀風)하네. 다행히 세월은 성시(盛時)를 당했으니, 닭 울고 개 짖는 소리 궁촌에까지 들리네.” 하였다. ○ 이경동(李瓊同)의 기문에, “전주는 본래 백제 완산(完山) 땅인데, 당(唐) 나라 현경(顯慶 당 고종의 연호.) 연간에 백제가 망하고 그 땅이 신라(新羅)에 들어왔다. 경덕왕(景德王)이 처음으로 전주(全州)라 불렀는데, 신라가 기울자 견휜(甄萱)이 여기에 도읍을 정하고 나라를 세워 후백제라 하였다. 40년이 지난 뒤 고려의 태조가 이를 멸하고 안남도호부(安南都護府)를 두었다가 곧 다시 전주라 하였다. 뒤에 혹 승화(承化)라 하기도 하고, 또는 순의(順義)라고도 하여 비록 그 연혁(沿革)은 일정하지 않으나, 언제나 남방에 있어서 큰 고을이었음에는 틀림이 없다.
우리 태조께서 임금이 되자 선조(先祖)가 처음으로 터를 잡은 땅을 근원해서 주(州)를 승격하여 부로 하고, 자제(子弟)들을 뽑아서 숙위(宿衛)에 넣음으로써 총애를 유달리 하였으며, 승하하신 뒤에는 경기전(慶基殿)을 지어 수용(晬容)을 봉안하니, 전주를 중요히 여김이 이에 성대하였다. 조정에서는 언제나 재상(宰相) 중에서 위망(威望)이 있고 다스림의 대체를 알고 있는 사람을 뽑아 부윤으로 삼았다. 우리 성상께서 태묘(太廟)에 제사한 다음해에 남원(南原)의 윤효손(尹孝孫) 공이 당시 예조 참의(禮曹參議)였는데, 늙은 어버이를 모시기 위하여 사임하고 임금의 특별한 임명을 받고 전주의 부윤으로 내려왔다. 공의 덕으로 말하면 부모에게 효도하고 친구간에 신의가 있으며 뛰어난 정치를 베풀었다. 귀신을 섬기는 일이나 사람을 다스리는 일을 한결같이 지성(至誠)으로 하였으니, 봄과 가을의 석전(釋奠 공자를 모시는 제사를 말한다.)에는 반드시 몸소 나아갔으며, 수재(水災)와 한재(旱災)에는 매양 기도를 올리면 곧 감응이 있었다. 노인을 공양하는 외로운 사람을 돕는 일에 그 정성을 다하였으며, 첩소(牒訴)는 바쁜 중에도 모두 손수 써서 처리하였으며, 부역을 간소하게 하고 세금을 고르게 하며, 형벌은 가볍게 하고 정치는 맑게 하니, 백성이 마침내 기쁨으로 복종하였다.
임금이 그 정치가 뛰어남을 들으시고 을미년 여름 6월 21일에 교서를 내려서 포장(褒獎)하여 이르기를, ‘민생의 즐거움과 근심은 수령에게 달렸다. 이전에 전주 백성이 재해를 입어 식량이 거의 바닥이 났었는데, 그대가 백성을 다스리면서부터 많이 구제하여서 걸인이 목숨을 부지하고 유랑하는 자들이 제자리로 돌아갔으며, 특히 정사를 고르게 하고 소송을 다스리니, 백성은 편안히 살게 되고, 치적 또한 남다른 바가 있으니, 그 백성을 잊지 못하는 마음이 어떻다고 할 것인가. 여기에 당의(唐衣) 표리(表裏) 한 벌로 그대의 뛰어난 치적을 표창하노라.’ 하고, 곧 감사에게 명하여 포상(褒賞)하는 의의(意義)를 열읍(列邑)에 널리 알려 그 나머지 사람들을 권장하니, 아름답도다. 그 가상함이 이에 이르니 그 누가 감동되지 아니하랴. 당시의 통판(通判) 김신(金信)이 또한 엄명(嚴明)하고 청신(淸愼)하여 간활한 자들을 복종시키고 공을 보좌함에 공로가 있었다. 공이 아뢰기를, ‘신이 재주가 없는 몸으로 외람되게 직책을 맡아 주야로 바삐 잘못이 없을까 두려워하였는데, 홀연히 임금의 은명(恩命)이 내리니, 이는 비록 하늘을 속이고 임금을 속인 죄 피할 길이 없다 하겠으나, 이전 재신(宰臣) 중에도 없던 영광된 일이라 신이 어찌 감히 하늘의 은총을 탐하여 사적인 것으로 삼으리오. 마땅히 성은을 넓혀 영광을 막료들과 함께 하고자 하나이다.’ 하니, 김후(金侯 김신(金信))가 또한 감히 사양하지 못하였다. 이에 두 공(부윤과 통판)이 성상(聖上)의 돌보아 주심이 중한 것을 체득하고 계속 교화를 넓혀 게을리하지 않고 더욱더 경건하게 하여, 은혜와 위엄이 다 같이 드러나고 기강(紀綱)이 크게 행해졌으니, 전주 백성의 은혜 받음이 어떻다고 할 것인가. 부의 북쪽에 누(樓)가 있으니 이것이 바로 진남루(鎭南樓)로서 여기에 본조실록(本朝實錄)이 수장되어 있다. 정의(政議)에서 너무 소홀하다고 하여 달리 각(閣)을 세우고 실록을 옮겨 놓으니, 드디어 진남루는 예전대로 복구되었다. 하루는 공을 찾아뵈니 공이 자리를 내어주고, 이 누각의 연고를 언급하고 나에게 기문을 쓰게 하였다.
삼가 생각하건대, 완산(完山)이 주가 된 것은 양(梁 중국 육조(六朝) 중의 소연(蕭衍)이 세운 나라) 나라 때이니, 지금으로부터 천여 년 전의 일이다. 그동안 정치의 잘못과 풍속의 선악은 때에 따라 서로 오르고 내림이 있었다. 내가 어려서 책을 끼고 어른을 따라 거리에서 놀 때는, 풍속은 화려한 것을 좋아하고 검소한 것을 즐기지 아니했고, 후생들은 노는 데에만 힘쓸 뿐 책을 읽고 활쏘기와 차 모는 것을 익히는 자는 아주 적었다. 그런데 그 후에 습속이 크게 변하여, 자제들은 향학(鄕學)에서 글을 읽고 성균관(成均館)에 뽑히는 자가 시험 때마다 7ㆍ8명에 이르고, 문과와 무과에 오르는 사람이 거의 시험 때마다 빠지는 수가 없었다. 사시(四時)로 연방회(蓮榜會)를 열면 참여하는 자가 언제나 수십 명이 되었으니, 후진은 흥기하고, 상숙(庠塾)에는 글을 강론하고 배우는 소리가 높았다. 봄 가을 향사(鄕射)에는 활을 쥐고 술잔을 높이 든 자 쏘면 반드시 명중하니 간성(干城)의 재목이며, 집안을 다스리는 자 곡식을 저축하여 흉년에 대비하는 사람이 많았다. 길에서는 여자와 같이 수레를 탄 사람을 볼 수가 없으니, 옛날에 보던 바와는 크게 상반된다고 하겠다. 일찍이 《지리지(地理誌)》를 보니, ‘풍속은 교활하고 늙은 사람이 보면 창피한 일도 있다.’ 하였는데, 내가 보고 기억한 바로는 어려서 장성하기까지 수십 년에 불과하나 풍속은 많이 변하여서 기약한 일 없이 자연적으로 좋아졌으니, 다시 한번 좋아진다면 가장 이상적인 도에 이르게 되리라는 것을 누가 의심하겠는가. 이제 성상께서 바야흐로 흥운(興運)을 융성하게 하고, 윤공(尹公)이 처음으로 총명(寵命)을 받아 우리 호남(湖南) 50여 주의 열백(列伯)을 창도(唱導)하여 우리 완산(完山) 1천여 년의 구도(舊都)를 거듭 새롭게 하니 정치의 융성함과 풍속의 아름다움이 이때를 당하여 더욱 중하도다. 아, 주는 비록 오래나 천명은 새롭고, 누각은 오래나 그 이름은 처음이니, 옛날에 숨었다가 오늘에 드러남이여, 그 기대함이 있음이로다. 산하(山河)의 뛰어남과 경치의 부미(富美)함은 정사(政事)의 급한 바가 아니므로 굳이 기록하여 뒤에 전할 필요가 없으리라. 이것으로 기문을 대신하노라.’ 하였다.

매월정(梅月亭) 객관(客館)의 동북쪽 구석에 있다. 성화(成化 명 나라 헌종(憲宗)의 연호) 계묘년에 부윤 이봉(李封)이 세웠다. 『신증』 이숙함(李淑瑊)의 시에, “매화[梅兄]와 달[桂魄]이 다 같이 청신(淸新)하여, 높은 정자를 웃고 차지하여 주인이 되었도다. 호반(湖畔)에서 임포(林逋)의 신선된 이야기를 들었더니, 지금은 들보 위에 이백(李白)의 전신구(傳神句)를 보겠네. 찬 겨울에 처음으로 매화 향기 언덕에 퍼지고, 가을이면 둥근 달이 그림자를 비치네. 담장 구석에 대나무도 쓸쓸히 서 있으니, 바람에 말을 전하여 같이 친해보자.” 하였다. ○ 허침(許琛)의 시에, “가련하다, 매화 꽃술 달 가운데 청신하니, 냉담(冷淡)한 심기(心期)를 몇 사람이나 알아줄까. 구름이 끊어진 곳에 참 모습을 더하고, 눈이 차가운 곳에 옛 정신을 비치네. 주렴이 흔들거리니 성긴 그림자가 비끼고, 지붕 모서리에 창랑히 반달이 나왔으니, 다 같이 세간에 속물이 아닐진대, 나도 한몫 끼어 서로 친해본들 어떠리.” 하였다. ○ 신용개(申用漑)의 시에, “매화[玉蕊]와 달[金波]이 서로 청신함을 다투어, 맑은 빛 담담한 모습이 우리의 벗이로다. 달 그림자[廣寒影]가 천상에 춤추니, 고야산(姑射山)에 아가씨처럼 고운 신선이 그 아닌가. 눈이 깊으니 달 속 두꺼비는 뼛속까지 차갑고, 바람 탄 무학(舞鶴)은 날개가 바퀴처럼 크구나. 나부산(羅浮山)은 고래로 신선과 진인(眞人)이 사는 곳. 사웅(師雄)으로 하여금 하룻밤을 친하게 한들 어떠리.” 하였다.
제남정(濟南亭) 성의 남쪽 시내 위에 있다. ○ 홍여방(洪汝方)의 기문에, “계축년 봄에 이곳의 부윤으로 와서 하루는 과업을 권장하러 남문을 나섰다가, 동천(東川) 가에 누(樓)가 있고, 한쪽에 고인의 시판(詩板)이 있었는데, 또한 목은(牧隱) 선생이 남겨 놓은 시가 있는 것을 보고서 나는 이것을 다시 세울 생각을 가졌다. 놀고 있는 사람을 모집하고 재목을 모으고 있는 중 갑인년 가을에 나는 병으로 면직이 되고, 동년(同年)인 조종생(趙從生) 공이 대신 와서 나의 뜻을 이어서 경영을 하며, 규모를 넓히고 단청(丹靑)을 선명하게 하여 그 오른편에 송백(松柏)을 심어 놓으니, 실로 제향(帝鄕)의 승관(勝觀)이더라.” 하였다. ○ 노사신(盧思愼)의 시에, “교남(橋南) 교북(橋北)으로 많은 사람을 보내고 맞이하니, 날마다 수레와 말발굽이 여기를 바라고 지나가네. 높은 정자가 강가에 있으니 올라가 바라보는 이 아니 취하고 어이하리.” 하였다. 『신증』 성현(成俔)의 기에, “나의 벗 이백승(李伯勝) 후(侯)가 전주 부윤이 된 지 3년에, 진남(鎭南)ㆍ제남(濟南) 두 누각의 기문을 나에게 부탁하였다. 직접 내 발로 그곳에 가보지 못했고, 내 눈으로 그 경치를 보지 못한 터에, 후(侯)가 나에게 기문을 쓰라고 하니, 내가 후를 위해 기문을 쓴다 하면 마음과 안목(眼目)이 서로 모순이 되는 것이니, 바람을 잡고 달을 잡는 것처럼 효험 없는 일이 되지 아니하겠는가. 예전에 한창려(韓昌黎)는 등왕각(滕王閣)을 보지 않고 기문을 쓴 일이 있는데, 다만 세월만 서술하고 광경은 언급하지 아니하였다. 지금 나의 기문이 이와 비슷해야 하나. 삼가 글을 보고 말하건대, 누(樓)는 주성의 남문(南門) 밖에 있으니 어느 때 지은 것인지 모르겠다. 목은 선생이 일찍이 읊은 시가 남아 있고, 홍여방(洪汝方) 공이 중수하였는데, 연대가 오래되니 황폐한 채로 버려두고 손을 보지 않은 지 오래되었다. 안침(安琛)이 남방의 감사로 와서 이 누각을 보고 다시 고칠 뜻이 있었으나 임기가 문득 차서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이제 후가 와서 안공(安公)이 부지런히 부탁하기에, 감사에게 청하여 재목을 모으고 공인을 모집하여 그 제도(制度)를 일신하고, 문식을 더하였다. 또한 담장을 쌓아 빙 둘려서 관문(館門)에까지 닿게 하였다. 그러한 뒤에 형세는 장대하고 누의 경개(景槪)는 또 뛰어나게 되었다. 대천(大川)이 산골짜기에서 흘러나와 누각 아래로 굽이쳐 흐르고, 그 동서로는 돌을 쌓아 방죽을 이루어 물이 언덕을 깎아먹는 것을 막도록 하였다. 그 밖으로는 뭇 산이 둥글게 줄을 지어 손을 마주 잡은 것 같기도 하고 서로 읍을 하는 것 같기도 하다. 만경대(萬景臺)는 유리알 같은 물 위에 그림자를 드리우고 기린봉(麒麟峯)은 동쪽 구석에 우뚝하게 솟아 있다. 논밭은 수놓은 것 같고 촌락은 즐비하다. 아침저녁으로 연기는 수목 사이에 어렴풋하고 망망한 넓은 들은 안계(眼界)가 공활(空闊)하다. 오르는 자는 마음이 넓어지고 정신이 맑아져서 그 흥취(興趣)가 무궁하다. 대개 유락(游樂)의 적취(適趣)에는 두 가지가 있으니 깊은 것과 넓은 것이 그것이다. 만약 여러 귀빈을 초청하여 술잔을 나누며 촛불 들고 밤까지 노는데, 예로써 대접함에는 진남루(鎭南樓)의 깊은 것이 좋고, 난간에 의지하여 사방을 둘러보고 천지를 부앙(俯仰)하며 성정을 즐겁게 하고 울적함을 풀기에는 제남루(濟南樓)의 넓은 것이 좋으리라. 주의 인물은 풍성하고, 예문(禮文)은 번다하며, 소송 문서는 밀려 좌우로 지휘하며 응접할 겨를이 없다가, 하루아침 이 누각에 오르면 사람의 왕래는 무한하고, 물상이 널려 있는 것은 무궁하여 눈에 보이는 것 모두가 그 마음에 감동을 주지 않는 것이 없다. 천부(千夫)의 삼태기와 가래로 애써 농사한 자는 조세를 왕실에 먼저 바치고, 십묘(十畝)의 상자(桑柘)로 부지런히 길쌈하는 자는 비단을 귀가[閭右]에 먼저 올리며 어부는 고기를 잡아 자기가 먹지 못하고, 목자(牧者)는 말을 먹여도 자기는 타지 못한다. 짐을 지고 실어 허리 굽혀 왕래하는 자 그 누구나 다 의식(衣食)을 꾀하기 위한 것이다. 굶주린 자는 배부르게 먹이고자 하고, 추운 자는 옷을 입게 하고자 하며, 피곤한 자는 휴식시키기를 하고자 하여서 백성의 편안하지 못한 것을 보기를 자신의 몸이 아픈 것처럼 한다. 이런 마음으로 정치에 임하면 남방 백성을 구제하려 하는 마음이 공황(龔黃 공수(龔遂)와 황패(黃霸). 둘 다 한(漢) 나라 신하)의 정치와 다를 것이 없을 것이니, 그 정교(政敎)에 도움이 어찌 적다고 하랴.”라고 하였다.
공북정(拱北亭) 부(府)의 서북쪽 5리에 있다. 서거정(徐居正)의 기(記)에, “부의 북쪽 5리쯤에 정자가 있으니 공북정이라 한다. 조정에서 덕음(德音)을 펴거나 사명(使命)이 있으면 부윤이 관리들을 인솔하여 의관을 갖추고 이곳에 나와서 경례하여 맞이하며, 만약 국왕의 생일이나 국가의 큰 경사, 큰 상서를 만나면 부(府)와 주(州)가 각기 전문(箋文)을 받들어 대궐을 향하여 예를 행하고, 또한 여기에서 사신을 떠나보낸다. 그런데 집을 지은 지가 오래되어 거의 다 무너지게 되었으니, 예를 행하는 자가 들에서 일을 도모한다는 탄식이 있게 되었다. 신사년 겨울에 이언(李堰)이 부윤이 되어 개연(慨然)히 이를 다시 세울 뜻을 가지고 바야흐로 일을 경영하려 하였는데, 실행하지 못하고 전임이 되었다. 이형손(李亨孫)이 후임으로 와서 공인을 모으고 자재(資材)를 갖추어 거의 일이 되어가는 차에 부모의 상을 당하여 또 교대되어 갔다. 계속해서 부윤 이번(李蕃)과 통판(通判) 최지(崔漬)가 와서 공사를 완결시키기를 도모하고, 읍인 김사효(金思孝)를 시켜 공사를 독려하였다. 일 없이 노는 사람을 데려다 일을 시키고 농민들을 괴롭히지 아니하였으며, 수개월이 지나 완성을 보자 주의 부로(父老)들이 이 일을 자랑하고자 나에게 기문(記文)을 부탁하였다. 생각하건대 전주(全州)는 산천의 좋은 기운이 얽히고 서려 왕업의 자취를 창립하였으니, 실로 우리 조선(朝鮮)의 근본이 되는 땅으로 주(周) 나라의 태빈(邰豳)과 같은 곳이요, 목조(穆祖)가 북방으로 옮겨간 것은 마치 주의 태왕이 빈(邠)을 떠난 때이다. 태조(太祖)께서 나라를 열고, 열조의 성군이 서로 이어받아 부(府)를 설치하고 윤(尹)을 두어 한 도의 머리가 되게 하니, 대개 영광스럽게 하기 위함이었다. 전주의 부로와 자제들이 오래 선왕(先王)의 남은 교화를 입고 열성(列聖)의 깊은 은혜를 받아 풍패(豐沛)에 살면서 노래를 부르고, 시를 읊조리니 임금을 생각하는 정성 실로 만 배나 더하리라. 전후로 내려온 수령들은 모두가 조정에서 중선(重選)된 사람들이었고, 지금의 부윤과 통판(通判)이 또한 일시(一時)의 명망(名望)을 받는 이들로 정사(政事)는 왕명을 공경하고 왕사(王使)를 예로 맞는 것을 우선으로 하였으니, 이는 곧 공북(拱北)을 중시하는 까닭이다. 아, 고인이 말하기를, ‘그 경내(境內)에 들어가면 교화(敎化)를 안다.’고 하였으니, 지금으로부터 전주(全州)를 지나면서 우리의 풍속을 물으면 우리의 풍속이 어떠하며 우리의 고장이 어떠한가를 알 것이니, 춘추(春秋) 시대에 왕을 높이던 그 의(義)와 예(禮)를 깊이 체득하는 것이 반드시 이 정자(亭子) 때문일 것이다. 그러니 정자를 수리함이 미관상 아름답게 하여 노는 곳으로 만들기 위한 것이라 한다면 이는 두 분 부윤과 통판의 뜻을 모르는 말이다. 뒤에 오는 사람들이 오늘 새로 고친 거룩한 뜻에 어긋남이 없기를 바라노라.” 하였다. 『신증』 노사신(盧思愼)의 시에, “완산국(完山國)의 번영을 다 흠모하니, 성안에 가득찬 문물(文物)이 무성한 귀인[纓簪]이네. 덕음(德音 임금의 말)이 널리 퍼져 교외에까지 나아가 다투어 맞이하니, 북궐(北闕)에는 언제나 임금을 받드는 마음[捧日心]이 걸려 있더라.” 하였다. ○ 유순(柳洵)의 시에, “임금의 명령을 지니고 달려가니 스스로 공경하네. 우연히 정자 위에 오르니 귀현[華簪]들이 모였구나. 팔마(八馬 고관의 행차 앞에서 교통을 정리하며 가는 사람) 남행하는 나그네 다시 임금 생각하는 마음 간절함을 누가 알리요.” 하였다. 내사정(內射亭) 성내(城內) 남쪽에 있다. 부윤 정자제(鄭自濟)가 지었다.
쾌심정(快心亭) 제남정(濟南亭)으로부터 4리 떨어져 있다. 시내를 따라 올라가면 산이 끊어지고 물이 돌아 내려가는 낭떠러지가 있는데, 돌을 쌓아 터를 만들고 그 위에 정자를 세웠다. 노사신(盧思愼)의 시에, “강물은 길이 흘러 운잠(雲岑)을 둘렀는데, 강 위 높은 정자에는 꽃과 대[竹]가 깊구나. 붉은 난간을 서성거리며 두 눈이 맑으니 세상 그 무엇이 내 마음을 가리랴.” 하였다. 『신증』 신용개(申用漑)의 시에, “푸른 산이 우뚝 끊어진 모퉁이로 병풍처럼 푸른 물이 둘렀는데, 누가 좋은 정자를 물가에 지었는가. 잔잔한 물결에 바람이 없어 거울처럼 비치고, 우뚝우뚝 솟은 봉우리로 해가 지니 붉게 흙더미를 이루었네. 찬 하늘이 떨리니 가을이 장차 저무는데, 멀리 떠난 나그네가 등림(登臨)하여 머리를 홀로 돌리네. 또한 젓대 소리가 나를 흥기시키니, 맑은 시가 기루재(倚樓才 시를 빨리 쓰는 재주)를 빌릴 필요가 없네.” 하였다.
『신증』 청연당(淸讌堂) 객관(客館) 서쪽에 있다. 부윤 강징(姜澂)이 세웠다. 만화루(萬化樓) 향교(鄕校)에 있다. ○ 김종직(金宗直)의 시에, “학교[庠序]는 궐리당(闕里堂 지금의 산동성(山東省) 곡부현(曲阜縣)에 세운 집)에 공자(孔子)가 처음으로 교학(敎學)을 시행한 집과 비슷하고, 장수(藏修)는 모두가 초국(楚國) 재목이로다. 연어(鳶魚)는 호호(浩浩)하게 천지(天地)를 나누었고, 현송(絃誦)은 양양하게 담 밖으로 퍼지는구나. 물이 방지(方池)에 출렁이니 가슴속 생각이 깨끗하고, 바람이 문행(文杏) 나무를 흔드니 웃음 소리가 시원하도다. 학생들을 분발 흥기시킴에 내가 방책이 없으니, 누전(樓前)에 자유(子游)와 자하(子夏)의 행실을 행하는 학생들에게 부끄럽구나.” 하였다.
【학교】 향교(鄕校) 부의 서쪽 5리에 있다. ○ 서거정(徐居正)의 기(記)에, “삼가 생각하니, 우리나라는 유학(儒學)을 숭상하고 도(道)를 중시하여 학교를 세우고 스승을 세워, 비록 궁벽한 고을이라도 다 그러하거늘, 하물며 전주는 우리 조종(祖宗)의 고향 땅이며 남쪽 지방의 인재가 모인 같은 곳이니 더 말할 것이 있으랴. 그러니 교육을 제일로 삼고 고을의 자제들이 또 문헌세가(文獻世家)들이 많아 선(善)을 좋아하고 학문을 좋아하므로 일향(一鄕)의 교화가 잘되고 많은 인재가 그 중에서 배출되니, 이는 비록 지령(地靈)의 좋은 기운이 모여서 된 것이라고는 하나 또한 교육에 바탕이 있기 때문인 것이다. 부의 학[序學]이 이전에는 정청(政廳) 안에 있었는데, 신유년에 태조의 빛나는 용상(容像)을 경기전(慶基殿)에 봉안하게 되자 학교와 경기전이 너무 가까워 시서(詩書)를 외는 소리와 태만한 학생에게 매질하는 소리가 시끄러워서 성령(聖靈)을 편안히 모실 곳이 못 되었다. 마침내 성의 서쪽 6ㆍ7리 되는 곳으로 옮겼는데 무릇 성전(聖殿)과 강당(講堂) 재랑(齋廊)과 부엌이 차례로 완비되었다. 그러나 부지가 매우 넓고 시내에서 멀리 떨어져 도적이나 범의 화가 근심이 되어 담장을 두르고 자물통을 단단히 하니, 오직 단단하고 치밀한 것을 제일로 하였다. 기해년에 계림(鷄林) 이유인(李有仁) 선생이 부윤으로 와서는 먼저 선성(宣聖 공자를 말함)을 뵌 다음에는 제생을 불러들여 제사 지내는 일에 관해서 강론하고, 교화를 일으키고 어진 이를 독려함을 마음으로 삼고, 학과에 순서가 있고 공급(供給)은 넉넉하며, 수선(修繕)하는 작은 일도 여유있게 조치하였다. 이듬해 경자년 봄에 다섯 채의 새 누각을 지으니, 높고 밝아서 제반 마련이 알맞았다. 완성을 본 다음에는 선생이 제생을 인솔하고 누에 올라 술잔을 기울여 낙성식을 하였다. 선생이 여러 학생들을 돌아보며 하는 말이, ‘그대들이 이 누각에 올라오니 얻은 바가 있는가.’ 하니, 제생이 대답하기를, ‘전에 누각을 짓기 전에는 교사가 낮고 좁아서 우리가 책을 읽는 여가에 비록 답답함을 풀고 정신을 맑게 하고자 하나, 사방을 돌아보아도 쉴 자리와 놀 자리가 없어 늘 답답한 마음을 풀 길이 없었습니다. 이제 이 누각에 오르니 우리의 번거로운 마음을 씻어 주고 막힌 생각을 밝게 해서 산을 보고서는 인(仁)을 체득할 수 있고, 물을 보면 지혜를 기를 수 있으며, 솔개가 하늘을 날고, 고기가 물 속에 뛰노는 것을 보고 도체(道體)의 밝게 드러난 것을 깨닫게 되었으니, 한번 내려보고 우러러보는 것이 배우는 것이요, 한번 움직이고 고요함이 또한 배우는 것이라, 무릇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는 천지간 만물의 많은 것이 그 어느 것인들 천성을 기르는 데 도움되지 않는 것이 있겠습니까. 그 공(功)을 미루어 나가면 천지의 화육(化育)에 참여하여 천지(天地)와 그 공을 같이 할 수 있을 것이니, 선생이 우리에게 베푼 은혜는 지극함이 있습니다. 만약 유락(遊樂)에 빠져 흥청거리는 것이나 강송(講誦)을 하다 말다 하는 것은 선생이 우리에게 바라는 바가 아닐 것입니다’ 하였다. 선생이 웃으며 머리를 끄덕이니 제생이 공(公)의 주신 은혜를 빛내기 위하여 나에게 기문을 부탁하였다. 내 또한 이 고을에 적(籍)이 속해 있는 사람으로 그 뜻을 사양할 수 없노라.” 하였다.
【역원】 삼례역(參禮驛) 부의 북쪽 35리에 있다. 본도에 속한 역은 열두 개이니 반석(半石)ㆍ오원(烏原)ㆍ갈담(葛覃)ㆍ소안(蘇安)ㆍ재곡(材谷)ㆍ양재(良才)ㆍ앵곡(鸎谷)ㆍ거산(居山)ㆍ천원(川原)ㆍ영원(瀛原)ㆍ부흥(扶興)ㆍ내재(內才)가 그것이다. ○ 찰방(察訪) 1명이다. ○ 고려 현종(顯宗)이 거란 병사를 피하여 삼례역에 이르렀다. 절도사(節度使) 조용겸(趙容謙)이 들에 엎드려 어가(御駕)를 맞이하였다. 박섬(朴暹)이 상주(上奏)하기를, “전주는 옛날의 백제(百濟)인데 성조(聖祖)께서도 또한 싫어하던 곳이니, 청하건대 왕께서는 그곳에 가시지 마십시오.” 하니, 왕이 그 말을 좇았다. 반석역(半石驛) 부의 남쪽 3리에 있다. 앵곡역(鸎谷驛) 옛날에는 장곡역(長谷驛)이라 하였다. 부의 서쪽 30리에 있다. ○ 고려 현종이 이 역에 묵었다. 이날 밤에 절도사 조용겸이 왕을 이 역에 머무르게 하고, 왕을 끼고 호령을 하고자 하여 전운사(轉運使) 이재(李載), 순검사(巡檢使) 최집(崔檝), 전중소감(殿中少監) 유승건(柳僧虔)이 흰 깃대를 관(冠)에 꽂고, 북을 치고 소리치며 들어오므로 지채문(智蔡文)이 사람을 시켜 문을 닫고 굳게 지키니, 적이 감히 들어오지 못했다. 금광원(金光院) 부의 북쪽 50리에 있다. 숙점원(宿店院) 부의 서쪽 35리에 있다. 안덕원(安德院) 부의 동쪽 10리에 있다. 사대원(四大院) 부의 남쪽 5리에 있다. 허고원(虛高院) 부의 북쪽 30리에 있다. 장신원(長信院) 부의 남쪽 21리에 있다. 상관원(上館院) 부의 남쪽 40리에 있다. 추천원(楸川院) 부의 서쪽 11리에 있다. 신원(新院) 부의 동쪽 31리에 있다. 월당원(月塘院) 부의 동쪽 4리에 있다. 부윤 김정준(金廷雋)이 세우고, 재호(齋號)는 월당(月塘)을 따서 이름으로 하였다. ○ 정이오(鄭以吾)의 시에, “일은 백년이나 지나 햇수는 멀지만, 그 이름은 한 읍에 전하니 월당(月塘)의 맑음이여.” 하였다. 피계원(皮界院) 부의 남쪽 11리에 있다. 보산원(補山院) 부의 북쪽 30리에 있다. 대초원(大初院) 부의 서쪽 25리에 있다. 광제원(廣濟院) 부의 북쪽 30리에 있다. 탄현원(炭峴院) 부의 서쪽 16리에 있다. 모로원(毛老院) 부의 북쪽 17리에 있다. 남복원(南福院) 부의 남쪽 8리에 있다. 모즐지원(毛叱知院) 부의 남쪽 35리에 있다. 내현원(奈峴院) 부의 북쪽 40리에 있다.
【불우】 귀신사(歸信寺) 무악산(毋岳山)에 있다. ○ 고려 신우(辛禑) 때에 왜병(倭兵) 3백여 기(騎)가 주성(州城)을 함락하고 이 절에 주둔하였는데, 병마사 유실(柳實)이 격퇴하였다. ○ 윤진(尹珍)의 시에, “북쪽 뜰에는 산들바람 대밭에 불고, 남향 창문을 열면 넓고 아득한 만겹 산이로구나. 소나무 관문과 돌길 시내 건너 들어와서, 고승(高僧)을 대하고 앉아 잠시 한가함을 얻었도다.” 하였다. 보광사(普光寺) 고덕산(高德山)에 있다. ○ 이곡(李穀)의 기(記)에, “전주의 남쪽 고덕산에 절이 있으니, 이를 보광사(普光寺)라 한다. 실로 백제(百濟)로부터 내려오는 큰 절이다. 비구(比丘) 중향(中向)이 어려서 이 절에서 자랐는데, 그 절이 황폐해지는 것을 걱정하고 개연히 중흥시킬 뜻을 품었는데, 주(州)의 사람 중에 지금의 자정사(資政使) 고룡봉(高龍鳳) 공이 황제의 우대를 받고 성품이 또한 착한 것을 좋아한다는 말을 들었다. 그리고 원통(元統 원(元) 순제(順帝)의 연호) 갑술년에 바다를 건너 서유(西遊)하여 경사(京師)에 가서 만나보고 말하기를, ‘고공(高公 즉 고룡봉(高龍鳳))은 변지(邊地)에서 태어난 몸으로 상국(上國)에 와서 이토록 뜻을 얻으니 어찌 인과(因果)가 아니겠습니까. 공은 군상의 측근에서 주야로 반걸음도 좌우에서 떠나지를 아니하니 군상(君上)의 은택에 빛남과 여복(輿服 타는 수레와 입는 옷)의 아름다움을 고향에 있는 친척과 붕우들이 알 수가 없으니, 소위 비단옷을 입고 밤길을 가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만약 고향에 절을 지어서 위로 임금을 위해 축수(祝壽)하고, 아래로 대중들과 복을 같이하여 우뚝하게 한 자리 귀앙(歸仰)할 장소를 마련한다면, 낮에 비단옷을 입는 격[晝錦]이 되지 않겠습니까.’ 하니, 공이 흔연히 승낙하고 천민(千緡)에 상당한 지폐를 출자하여 절을 새로 단장하고 삼장(三藏 불교의 경(經)ㆍ율(律)ㆍ논(論))을 두게 했다. 그 뒤 공은 재신(宰臣)의 이간질을 당하여 남방에 출거(出居)하게 되고 중향(中向)도 또한 산으로 돌아와서 건물을 수리하고 공이 하루속히 돌아오기를 빌었다. 지정(至正 원(元) 순제(順帝)의 연호)으로 개원(改元)하기 2개월 전에 간신들을 출척하고, 정화(政化)를 다시 베풀어 바람과 우레처럼 호령을 발하고 뇌성과 비처럼 시행하자, 공은 다시 사환(賜環)되어 임금의 사랑이 더욱 새로웠다. 중향은 다시 경사에 들어갔는데 공은 전에 뜻을 다 마치지 못한 것을 서운하게 여겨 그 비용을 더해서 공사를 독려하여 완성하도록 하였다. 세시(歲時)에 전장(轉藏)하고 전후로 보시(布施)한 것을 합하니, 천에 달하는 사람이 2만 50명이요, 황금물로 칠을 해서 불상을 새롭게 한 사람이 15명이며, 백금으로 새겨서 기명(器皿)을 장식한 사람이 30명이었다. 무릇 건물의 기둥은 1백여 개나 되는데, 정축년 봄에 시작해서 계미년 겨울에 완성을 보았다. 일이 끝나는 달에는 산인(山人) 담숙(旵淑) 등이 시주를 널리 모아서 크게 화엄회(華嚴會)를 개최하여 낙성식을 하니, 그동안에 쓴 일꾼이 3천명이요, 시일은 50일이 걸렸다. 선비와 부녀자들이 부지런히 다니며 공양(供養)하고 찬탄(讚嘆)하니, 골짜기를 메우고 산등에 넘쳐 그 수를 헤아리기 어려웠다. 중향(中向)이 마땅히 본말(本末)을 기록하여 후세에 전하는 것이 옳다 하여 고공(高公)의 명으로 나에게 기문(記文)을 부탁한 것이다. 삼가 생각건대 견훤씨(甄萱氏)가 본국에 들어온 지 4백 년이 넘는다. 절은 비록 백제 때에 창건되었으나 여러 차례 병화를 입고 비(碑)나 기문도 없어 그 세월을 상고할 길이 없으나, 혹은 일으키고 혹은 폐하더니, 오늘에 이르러 반드시 고공(高公)을 기다려서 비로소 옛날의 모습을 복구하게 되었다. 공은 삼한(三韓) 땅에 태어났으니 경사(京師)로부터 5천 리인데, 인연이 닿아서 일월(日月) 같은 천제(天帝)의 빛에 의지하고 비와 이슬 같은 큰 은혜를 입었으니, 향국(鄕國)에 그 여택이 많이 미쳤다. 또한 불사(佛事)를 크게 베풀어서 복을 빌고[祝釐] 근본을 갚아서[報本] 끝없이 드리우니, 그 어찌 우연한 일이라 하겠는가.” 하였다.
서고사(西高寺) 서고산(西高山)에 있다. 남고사(南高寺) 만경대(萬景臺)의 뒤에 있다. 천룡사(天龍寺) 부의 동쪽 성 밑에 있다. ○ 이규보(李奎報)의 시에, “온 집이 푸른 산 옆에 와서 산다네. 얕은 모자 가벼운 옷으로 침상에 누웠네. 폐부가 마르니 촌 술맛이 더욱 좋고, 정신이 혼미하니 들차[野茶] 향기가 또한 좋구나. 대나무 뿌리는 지상에 흩어져 뻗으니 용이 허리를 움직이는 것 같고, 파초 잎이 창 앞에 닿으니 봉의 꼬리처럼 길구나. 삼복(三伏)이 일찍 그치고 백성의 송사가 적으니, 이때 다시 부처님을 섬김도 무방하리라.” 하였다. 경복사(景福寺) 고달산에 있다. 이절의 비래당(飛來堂)에는 보덕대사(普德大士)의 화상이 있다. ○ 이규보의 기(記)에, “보덕(普德)의 자는 지법(智法)인데 고구려 반룡산(盤龍山)의 연복사(延福寺)에 거주하였다. 어느날 홀연 제자에게 말하기를, ‘고구려는 도교(道敎)만을 숭상하고 불법을 존숭하지 않으니 이 나라는 반드시 오래가지 못하리라. 몸을 편히 피란할 곳이 어디 있겠느냐.’ 하니, 제자 명덕(明德)이 말하기를, ‘전주(全州)의 고달산(高達山)이 안주하여 움직이지 아니할 곳입니다.’ 하였다. 보장왕(寶藏王) 26년 정묘 3월 3일에 제자가 문을 열고 나가보니 집은 이미 고달산에 옮겨져 있었으니, 반룡산으로부터 1천여 리나 떨어진 곳이다. 명덕(明德)의 말이, ‘이 산이 비록 뛰어나긴 했으나 샘물이 말라 있다. 내 만약 스승께서 옮겨 오실 것을 알았다면 틀림없이 반룡산의 샘도 옮겨왔을 텐데.’ 하였다.” 한다.
임천사(臨川寺) 서산(西山)에 있다. 사대사(四大寺)ㆍ흑석사(黑石寺) 두 절 모두 고덕산(高德山)에 있다. 원암사(圓巖寺) 청량산에 있다. 봉서사(鳳棲寺) 서방산에 있다. 대원사(大圓寺) 무악산(毋岳山)에 있다. ○ 고려 박춘령(朴椿齡)의 시에, “문서 다루는 3년 생활에 몸에는 백 가지 병이라, 공사에서 물러나 때때로 옛 정이 든 벗을 찾아가네. 높고 낮은 데 수목은 빽빽하여 길이 없나 의심하고, 철 따라 꽃이 피니 달리 봄이 있도다. 골짜기는 음청(陰晴)하여 부앙(俯仰)간에 다르고, 연기와 노을은 자색과 푸른색으로 아침저녁 다르네. 원공(遠公)은 시냇물을 건너지 마소. 산인(山人)들이 스스로 보내고 맞이하네.” 하였다.
【사묘】 사직단(社稷壇) 부의 서쪽 3리에 있다. 문묘(文廟) 향교에 있다. 성황사(城隍祠) 기린봉(麒麟峯)에 있다. ○ 이규보(李奎報)의 〈몽험기(夢驗記)〉에, “나는 일찍이 완산(完山)에 장서기(掌書記) 벼슬로 있었다. 평소에 성황사에 가는 일이 없었는데, 하루는 꿈에 사당에 가서 당하에서 절하였는데 법조(法曹)의 동배자(同拜者)가 있는 듯하였다. 법왕(法王)이 사람을 시켜 말하기를, ‘기실(記室 고을 원의 비서일은 맡은 사람)은 계(階)에 오르라.’하였다. 내가 청사에 올라서 재배(再拜)하니 법왕이 베로 된 모자에 검은 빛의 유의(襦衣)를 입고 남쪽 뜰에 앉았다가 일어나 답배(答拜)하는 것이었다. 나를 이끌어 앞으로 오게 하니 홀연히 한 사람이 탁주를 들고 와서 부었는데 술과 찬이 또한 초라하였다. 한참 동안 같이 마시다가 말하기를, ‘들으니 목관(牧官)이 근자에 새로 12국사를 찍었다 하는데 그런 일이 있는가.’라고 물었다. 그렇다고 대답하니 또 말하기를, ‘어찌 나에게 주지 아니하는가. 내가 여러 아들이 있는데 읽도록 하고 싶으니 몇 책을 보내줄 수 있는가.’ 하였다. 내가 예예 하고 대답하니 또 말하기를, ‘아전의 우두머리 누구는 좋은 사람이니 보호하여 주기를 청하노라.’ 하였다. 내가 다시 승낙하고, 화복이 어떨지를 물었더니 법왕이 길 위에 달리다 축이 꺾인 수레를 가리키며 하는 말이, ‘그대의 운수가 마치 이 수레의 모양이니, 금년을 넘기지 못하고 전주를 떠나리라.’하고 곧 가죽띠 두 개를 가지고 나에게 주면서 말히기를, ‘자네는 존귀할 것이므로 이것을 준다.’하였다. 꿈을 깨니 온 몸에 땀이 흐르는 것이었다. 당시에 안렴사(按廉使) 낭장(郎將) 노공(盧公)이 목관을 시켜 12국사를 새로 찍게 한 일이 있고, 또 관리 중에 아무개가 내 뜻에 맞지 않아서 어떤 일로 인하여 내몰고자 한 일이 있었는데, 이것을 말한 것이다. 다음 낮 그 아전을 불러 12국사 두 책을 갖다가 바치게 하였고, 그 사람의 죄는 불문에 부치었다. 이 해에 과연 동료자의 고소로 파직을 당하고서 비로소 차축에 비유한 말을 깨우쳤다. 그러나 한가한 생활 7년에 한 번도 벼슬을 받지 못하여 곤란이 막심하였으므로 다시는 그 말을 믿지 아니하였다. 비록 요직을 지내고 벼슬이 3품에 오르고서도 여전히 깊이 믿지를 아니하다가 이제 상국(相國)의 지위를 제수받고서야 이에 존귀하게 되리라 하던 말이 부합되어 틀림이 없는 것을 크게 믿게 되었다. 아, 신도(神道)의 그윽한 감응도 역시 때로는 믿을 만하니 어찌 모두가 허망하다고만 하겠는가.”라고 하였다.
『신증』 관찰사 이언호(李彦浩)가 소상(塑像)을 부셔버리고 위판(位版)으로 대신하였다. 여단(厲壇) 부의 북쪽 5리에 있다.
【고적】 고토성(古土城) 부의 북쪽 5리에 있다. 터가 남아 있는데 견훤이 쌓은 것이다. 고덕산성(高德山城) 돌로 쌓았는데 둘레는 8천 9백 20척(尺), 높이가 8척이며, 그 안에 우물이 7개, 시내 하나가 있다. 우주 폐현(紆州廢縣) 우(紆)는 오(汚)로 쓰기도 한다. 주의 북쪽 50리에 있다. 본래 백제의 우소저현(于召渚縣)인데, 신라에 와서 지금의 이름으로 고치고, 금마군(金馬郡)의 영현(領縣)으로 삼았다가 고려 초에 예속시켰다. 이성 폐현(伊城廢縣) 주의 서쪽 25리에 있다. 본래 백제의 두이현(豆伊縣)인데, 왕무(往武)라고도 한다. 신라 때에는 두성(杜城)으로 고치어 예속시키고 고려에 와서 지금의 이름으로 고쳤다. 이성 폐현(利城廢縣) 주의 서쪽 75리에 있다. 본래는 백제의 내리아현(乃利阿縣)이다. 신라 때에 지금의 이름으로 고치어 김제군(金堤郡)의 영현(領縣)으로 삼았다가 고려 초에 예속시켰다. 경명향(景明鄕) 영명(榮明)이라고도 한다. 부의 북쪽 1백 20리에 있다. 양량소(陽良所) 우주(紆州)의 동북쪽, 즉 우양촌(右楊村) 철소(鐵所)에 있다. 두모촌소(豆毛村所) 이성현(利城縣)에 있다. 녹균정(綠筠亭) 청사(廳事)의 북쪽에 있다. 지정(至正) 정미년에 목사 한계상(韓系祥)이 정(亭)을 바꾸어 누(樓)로 만들었다. 이달충(李達衷)이 편액을 관풍루(觀風樓)로 고치고 기문을 적었는데 지금에 와서 폐지하였다. 효자리(孝子里) 부의 남쪽 3리에 있다. ○ 이규보(李奎報)의 시에, “돌을 세워 효자를 표창하였는데, 성씨를 아니 새겼네. 어느 때 사람이며, 효행은 어떠하였는고.” 하였다.
【명환】 신라 용원(龍元) 신문왕(神文王) 때 총관(摠管)이다. 김웅원(金雄元) 헌덕왕(憲德王) 3년 도독(都督)이 되었다. 고려 정항(鄭沆) 예종(睿宗) 조의 우정언(右正言)이며, 시사를 의논할 적에 곧게 직면하여 권신들에 거슬리어 통판(通判)으로 나갔다가 불려와 사간(司諫)이 되었다. 오연총(吳延寵) 전주 목사이며, 정사가 관대하고 공평하였으며, 가혹하지 아니하였으며, 아전과 백성을 편안하게 하였다. 뛰어난 치적이 알려져 추밀원(樞密院) 좌승선(左承宣)에 소배(召拜)되었다. 박춘령(朴椿齡) 완산(完山)의 수령이다. 조영인(趙永仁) 의종(毅宗) 때에 과거에 급제하였다. 서기(書記)에 임명되었는데 정무를 잘한다는 명성이 있었다. 이규보(李奎報) 신종(神宗) 2년 기미년에 사록(司錄) 겸 장서기(掌書記)에 임명되었다. 박원계(朴元桂) 사록(司錄) 겸 장서기였다. 경내에 호랑이 소동이 났는데 목사와 판관이 잡지를 못하고 박원계(朴元桂)에게 맡겼더니 원계가 말을 타고 좁은 지역에서 한 화살로 적중시켜 죽였다. 백득주(白得珠) 장원하여 서기(書記)가 되었다. 당시에 안렴사가 대궐로 가면서 절구 한 수를 남기었다. 백득주가 화답하기를, “사신[星使]이 임금께 돌아간 후에 유영(柳營)은 벌써 봄이네. 무정한 푸른 풀도 원망을 하거늘, 하물며 정이 있는 사람에 있어서랴.” 하였다. 안렴사가 평상에서 내려와 손을 잡고 작별했다. 곽예(郭預) 고종(高宗) 때에 사록(司錄)이 되었다. 김지대(金之垈) 고종 때 사록에 임명되었다. 고아와 과부들을 구제하고 부호와 강포한 사람들을 누르고 잘못을 귀신처럼 적발하니 아전과 백성들이 공경하고 두려워하였다. 정선(鄭僐) 원종(元宗) 말에 사록이 되었다. 한공의(韓公義) 충혜왕(忠惠王) 때 목사로 나가 은혜로운 정사를 시행하였다. 이우(李瑀) 이암(李嵒)의 아버지이다. 재간(才幹)이 있어 목사가 되어 나갔는데, 유애(遺愛)가 있었다. 정운경(鄭云敬) 공민왕(恭愍王) 때 목사이다. 처를 거느리고 집에서 사는 중이 있었는데 하루는 밖에 나갔다가 죽었다. 그 처가 관가에 고소하였으나 증거가 없어 오래 판결을 보지 못했다. 정운경이 그 처가 사통하는 자가 있는가 물었으나 없다고 대답하였다. 다만 이웃에 한 놈이 늘 희롱하기를, “노승이 죽으면 일이 좋겠다.” 하는 것이었다. 이에 그놈을 밖에 잡아 두고 먼저 그 어미를 국문하여 말하기를, “모월 모일 너의 자식이 집에 있었느냐, 아니면 나갔느냐.” 하니, 어미의 말이, “이날 밖에서 돌아와 하는 말이 친구와 술을 마셔 취하였다 하였습니다.”고 하였다. 즉시 이웃 남자에게, 같이 술마신 자가 누군가 물으니 바로 사실을 자복하였다. 김도(金濤) 공민왕 때 사록(司錄)이 되었다. 윤곤(尹坤) 부윤이 되었다.
본조 허조(許稠) 태종 때에 판관(判官)이 되었는데, 청절(淸節)을 지키고 강직하고 현명하였다. 일찍이 스스로 맹세하기를, “그릇된 법으로 일을 처단하면 황천이 벌을 내린다.[非法斷事皇天降罰]”는 여덟 글자를 작은 판에 써서 청사에 걸었다. 권담(權湛) 세종 때의 부윤이다. 홍여방(洪汝方)ㆍ김길통(金吉通) 다 같이 부윤을 지냈다. 이언(李堰) 성품이 청렴하고 강직하였으며 세조께서 교서를 내려 포상하였고,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올랐다. 이봉(李封) 부윤이 되어 잘 다스린다는 명성이 있었다. 이유인(李有仁) 부윤인데 치적이 있다. 학교를 증수(增修)하니 교생들이 그가 죽은 날에는 제사를 차렸다.
『신증』 윤효손(尹孝孫) 부윤인데, 정사는 자비롭고 어진 것을 숭상하였고 아전들과 백성이 그를 사랑하므로 포상하여 가선(嘉善)으로 품계를 올렸다. 김선(金瑄) 부윤인데, 정사를 부지런히 삼가하였다. 가선(嘉善)으로 포상하여 올려 주었다. 최자숙(崔自淑) 판관인데 아전들은 두려워하고 백성들은 그를 사랑하였다.
【인물】 고려 최균(崔均) 어려서부터 열심히 공부하여 출중하였으며, 인종(仁宗) 때에 과거에 급제하였다. 자주 벼슬이 올라 소부(少府) 주부(主簿)가 되었다. 그때의 재상(宰相) 최윤의(崔允儀)가 봉지(奉旨)하고, 문사(文士)를 택하여 예의(禮儀)를 상정(詳定)함에 있어서 최균(崔均)을 제일 먼저 뽑았다. 뒤에 최윤의가 임종할 때에 홀로 최균을 천거하여 임금은 각문지후(閣門祗侯)를 제수하였다. 명종(明宗) 때에 예부시랑으로서 병마부사(兵馬副使)를 겸임하였는데, 서경(西京)의 조위총(趙位寵)을 공격하다가 잡혀 해를 입었으며 예부상서로 추증되었다. 최척경(崔陟卿) 아전으로 과거에 급제하여 의종(毅宗) 초에 경산부(京山府) 판관(判官)이 되었다. 임기가 만료되어 서울에 돌아와서는 10여 년간 권문세가에 드나들지 아니했다. 뒤에 다시 탐라령(耽羅令)이 되었다가 자주 옮겨 감찰어사가 되고, 좌정언 지제고(左正言知制誥)에 제수되었다가, 예부시랑 비서감(禮部侍郞祕書監)까지 지냈다. 맑은 이름과 굳은 절개는 늙어서도 쇠하지를 아니했다. 애초에 박춘령(朴椿齡)이 완산(完山)을 지킬 때, 연구(聯句 몇 사람이 함께 연철(聯綴)해서 시를 완성하는 형식)로써 군동(群童)을 뽑는데, 최척경ㆍ최균(崔均)ㆍ최송년(崔松年)을 얻었다. 교체되어 돌아갈 때에 함께 데리고 가서 권하여 학문을 시켜, 뒤에 세 사람이 다 명사(名士)가 되었으니, 당시에 완산 삼최(完山三崔)라 불렀다. 이준양(李俊陽) 청백함으로 유명하고, 의종(毅宗) 때에 벼슬이 평장사(平章事)에 이르렀다. 최보순(崔甫淳) 최균(崔均)의 아들인데 벼슬은 평장사, 시호는 문정(文定)이다. 유광식(柳光植) 풍도와 모습이 매우 크고 청검하고 절약하였으며 신중하고 말이 적었다. 중외(中外)로 여러 직책을 역임하였는데 모두 치적을 올렸다. 고종(高宗) 때에 문하평장사(門下平章事)로 치사하고 소요자적(逍遙自適)하였는데, 세칭 수부쌍전(壽富雙全)하다고 하였다. 시호는 대숙(戴肅)이다. 유소(柳韶) 유광식의 아들인데 성품은 강직(剛直)하고 꿋꿋했으며 남을 인정함이 적었고, 집안 살림에 관심을 두지 아니했으며 벼슬은 평장사에 이르렀다. 최성지(崔誠之) 최보순(崔甫淳)의 4세손이며 충선왕(忠宣王) 때 사람인데, 벼슬은 첨의찬성사(僉議贊成事) 광양군(光陽君)에 이르렀다. 시호는 문간(文簡)이며 성품은 강직하고, 말을 함부로 하지 아니했고 글씨는 매우 반듯하였다. 시(詩)는 온자(溫藉)해서 좋고 음양 술수를 잘했다. 풍헌(風憲)과 어사직(御史職), 선거(選擧)와 이부직(吏部職)ㆍ성관(星官 천문관직(天文官職))ㆍ예원(藝苑 한림원직(翰林院職)) 등을 20년간 역임을 했다. 유방헌(柳邦憲) 문하평장사(門下平章事)를 지내고 시호는 정간(貞簡)이다. 최득평(崔得枰) 성품이 염정(廉靜)하고 스스로 지조를 지켜서 사람들이 모두 공경하고 두려워하였다. 벼슬은 이부(吏部)의 전서(典書)로 치사(致仕)하였는데, 충렬(忠烈)ㆍ충선(忠善)ㆍ충숙(忠肅)의 삼조(三朝)를 섬겼다. 그 중에 충선왕이 더욱 중용하였다. 최재(崔宰) 최득평(崔得枰)의 아들이다. 충숙왕(忠肅王) 때 과거에 급제하였다. 임금이 그가 자기 아버지의 풍도를 지녔다고 하여, 감찰지평(監察持平)을 제수하였다. 충혜왕(忠惠王)이 즉위한 뒤 면직되었다. 임금이 원 나라로 끌려간 뒤 임금이 설치한 것은 모두 다시 바뀌었는데, 도감(都監)을 세우고 최재(崔宰)를 판관(判官)으로 삼으니 최재는 탄식하고 말하기를, “임금의 실덕은 임금 자신이 한 것이 아니요, 좌우에서 임금의 과실을 유도하여 인도한 것이다. 앞에서 맞이하고 뒤에서 맞아 들쳐 올리니, 내가 실로 이것을 부끄러워한다.” 하고 병을 칭탁하고 나오지 아니하였다. 공민왕(恭愍王) 때에 완산군(完山君)으로 봉하고 문정(文貞)이라 시호하였다.
최용갑(崔龍甲) 1등으로 뽑혀 급제하였다. 이자을(李資乙) 1등으로 뽑혀 급제하였다. 최용갑(崔龍甲)과 함께 문명(文名)이 있었다. 이곡(李穀)의 〈완산도중시(完山途中詩)〉에, “장원(壯元)한 최(崔)ㆍ이(李)의 재명(才名)이 크고, 경계 머리[界首] 완산(完山)이 전라도에 기상이 웅장하구나. 과객은 신분이 귀한 것을 자랑하지 말라. 공경(公卿)이 이 한 고을에서 많이 나왔네.” 하였다. 최칠석(崔七夕) 장수(將帥)의 재량이 있었다. 이문정(李文挺) 지순(至順) 경자년 과시에 뽑히어 벼슬은 정당문학(政堂文學)에 이르렀다. 최부(崔府) 벼슬은 판서이며, 시호는 정간(靖簡)이다. 이백유(李伯由) 이문정(李文挺)의 손자인데 개국공신이며, 완성군(完城君)에 봉하였다. 이의손(李義孫) 과거에 급제하고 벼슬은 이조 참판이며 문명(文名)이 있다. 이사철(李思哲) 과거에 급제하고 정난공신(靖難功臣)에 들었으며 벼슬은 좌의정이다. 최경지(崔敬止) 함열(咸悅) 우거(寓居) 편에 보인다. 이경동(李瓊仝) 이문정(李文挺)의 4대손이며, 임오년 과거에 급제하였고, 중시(重試)와 발영시(拔英試) 과에도 합격하여 벼슬은 병조 참판까지 이르렀고, 문명(文名)이 높았다.
『신증』 유헌(柳軒) 과거에 급제하였고 벼슬은 대사간(大司諫)이었으며 기량(器量)이 있었다. 유숭조(柳崇祖) 과거에 급제하여 성균관(成均館) 동지(同知)를 지냈다. 경학(經學)에 정통하고 사람을 가르치는 데 부지런하였다.
【효자】 본조 박진(朴晉) 아버지가 병이 들자 벼슬을 버리고 돌아가 시중하였는데, 언제나 옆을 떠나지 아니하였고 밤에도 허리띠를 풀지 아니하였으며, 약을 달이면 꼭 먼저 맛을 보았다. 아버지는 병이 위태하자 시를 지어 박진(朴晉)에게 주어 말하기를, “나이 80에 병상[蟻床]에 누우니, 육순된 아들이 약을 먼저 맛보네. 사생(死生)은 운명이기에 끝내 피할 수 없으니, 네 어머니 묘 가까이에 수당(壽堂 생존시에 지어 두는 묘)을 세워 두라.” 하였다. 아버지가 작고하자 장례와 제사를 예로써 하고, 묘막에서 3년을 지내니 고을에서 칭송하였다. 태조 7년에 마을에 정문을 세웠으며 벼슬은 지군사(知郡事)를 지냈다. 박유성(朴有誠) 나이 50세 때에 부모가 죽자 6년간 묘막 생활을 했다. 상을 마친 뒤에는 부모의 형상을 그려 벽에 붙이고 아침저녁으로 상식을 그치지 아니했다. 성종(成宗) 6년에 이 일이 임금께 알려져 특별히 광흥창(廣興倉) 봉사(奉事)에 제수되었다. 복윤문(卜閏文) 효행이 있었다. 『신증』 오영로(吳齡老) 생원(生員)인데 계모의 상을 입고 기년(期年)에야 비로소 소식(疏食)을 시작했다. 연산(燕山) 때에 아버지가 작고했는데, 그때 단상법(短喪法)이 엄했는데도, 오영로는 오히려 예대로 상을 입었다. 금상 4년에 마을에 정문을 세웠다. 박세직(朴世直) 생원(生員) 나이 10세에 어머니를 잃고, 3년 동안 슬프게 울었으며, 아버지가 작고해서는 묘막에서 죽으로 3년상을 마치었다. 금상 23년에 상으로 벼슬을 주었다. 김천동(金千同) 사노였으며 어머니가 종기를 앓아 거의 죽게 되었는데 손가락을 잘라 약에 타서 드리니 병이 나았다. 금상 23년에 마을에 정문을 세웠다.
【열녀】 고려 임씨(林氏) 낙안군사(樂安郡事) 최극부(崔克孚)의 처이며, 왜구가 마을에 쳐들어왔는데, 임씨가 피난하여 달아나자 왜구가 쫓아와서 욕보이려 하였다. 굳게 항거하니 왜구가 한 팔을 끊었는데 그래도 따르지 아니했고, 또다시 다른 팔을 끊어도 끝내 따르지 않고 마침내 죽음을 당했다. 그 집과 마을에 정문을 세웠다. 본조 이씨(李氏) 최이원(崔以源)의 처인데 나이 19세에 남편이 죽었다. 부모가 그 뜻을 뺏고자 하니 이씨는 밤에 시부모 집으로 돌아가버렸다. 부모가 후회하고 개가시킬 것을 포기하였다. 세종 24년에 일이 임금께 알려져서 마을에 정문을 세웠다. 김씨(金氏) 박형문(朴衡文)의 처이며 남편이 죽자 3년간 머리를 빗지 아니했다. 조석으로 직접 상식을 올리고 상복을 벗은 뒤에는 시절에 따라 옷을 지어 신주(神主)에 바치었다. 금상 23년에 마을에 정문을 세웠다.
【제영】 욕방의관비왕사(欲訪衣冠悲往事) 이색(李穡)의 시에, “견성(甄城)의 경치가 오르기를 권하니, 옛 사람을 위무(慰撫)하며 유연히 웃음을 머금도다. 의관을 찾고자 하니 지나간 일들이 슬퍼지고 부질없이 도기(圖記)만을 가지고 옛 궁터를 말하네. 술은 황국(黃菊)에 맑은 서리 내린 후 맛을 다하고, 주렴(珠簾)은 청산(靑山) 낙조(落照) 사이에 걷혀 있네. 고금(古今)의 영웅이 지나가는 새와 같으니, 피곤하기를 기다리지 말고 돌아갈 줄을 알아야 하겠네.” 하였다. 견훤농병지(甄萱弄兵地) 정추(鄭樞)의 시에, “중간에 길이 산과 강을 갈라 놓으니, 남주(南州)의 물색(物色)이 구분되었네. 얽힌 소나무는 옛날 역원(驛院)을 알리고, 긴 대나무는 이전의 마을을 표시하고 있네. 말[馬] 그림자는 거치른 다리에 비치고, 까마귀 소리는 황폐한 절간의 구름 속에서 들리네. 견훤이 군병을 지휘하던 땅, 물가에 임하여 싸립문이 걸렸네.” 하였다. 천년종왕기(千年鍾王氣) 권근(權近)의 시에, “큰 고을이 남과 북을 갈라 놓으니, 완산(完山)이 가장 특기하도다. 천년의 왕기가 모여 있으니, 일대에 큰 토대를 열었구나.” 하였다. 완산거진승남양(完山巨鎭勝南陽) 설장수(偰長壽)의 시에, “완산(完山)의 거진(巨鎭)은 남양(南陽)에 뛰어나고, 성한 기운이 제향(帝鄕)에 아련하여라.” 하였다. 세마기가누근수(洗馬幾家樓近水) 석선탄(釋禪坦)의 시에, “완산의 4월 완화(浣花) 앞에, 하늘 기운은 사람을 가두어 취한 듯이 잠이 오네. 말을 씻기는 집은 몇 집인고, 누(樓)는 물가에 있는데. 모래 물가에 우는 비둘기, 비는 촉촉이 내리네.” 하였다. 남리임구제효우(南里林鳩啼曉雨) 성임(成任)의 시에, “남리(南里) 수풀 속 비둘기는 새벽비에 울고, 동풍(東風) 연기 속 버들은 봄 성(城)에 어둡다.” 하였다. 압계공업서하산(鴨鷄功業誓河山) 서거정(徐居正)의 시에, “대세(大勢)를 반드시 휼방(鷸蚌)의 고사를 참고로 해서 보아야 하네. 오리와 닭의 공업(功業)을 산하(山河)에 맹세하도다. 추풍이 한 번 견훤을 위하여 웃으니, 노발(怒髮)은 무단히 관을 들먹거리는구나.” 하였다. 완산가려고명도(浣山佳麗古名都) 이승소(李承召)의 시에, “완산은 곱고 새뜻하니 옛날의 명도(名都)로다. 용호(龍虎)가 서리고 걸터앉은 듯 울성하게 얽혀 있네. 정령(精靈)이 쌓여 지키고 도우니, 기운(氣運)도 아름다워라. 때에 발설하니 바른 부서(符瑞) 이루었네. 국조의 근원이 이곳에서 비롯되니, 대대로 맑은 덕음(德陰)이 동우(東隅)에 덮였어라. 신풍(新豐) 계견(鷄犬)을 어찌 족히 비기리요. 충후(忠厚)는 빈풍(豳風)과 다를 것이 없도다.” 하였다.

《대동지지(大東地志)》
【방면】 부동(府東) 끝이 5리이다. 부서(府西) 끝이 5리이다. 부남(府南) 끝이 10리이다. 부북(府北) 끝이 7리이다. 봉상(鳳翔) 동북쪽으로 처음이 3리, 끝이 40리이다. 귀이동(龜耳洞) 남쪽으로 처음이 30리, 끝이 50리이다. 우림곡(雨林谷) 서남쪽으로 처음이 10리, 끝이 20리이다. 조촌(助村) 북쪽으로 처음이 10리, 끝이 20리이다. 양량소(陽良所) 원래의 양량소는 북쪽에 있으며, 처음이 1백 10리이고, 끝이 1백 30리이다. 연산(連山) 남쪽이고, 진산(珍山)의 서쪽이며, 고산(高山)의 북쪽이고, 은진(恩津)의 동쪽에 있다. 초곡(草谷) 동북쪽으로 처음이 10리, 끝이 20리이다. 소양(所陽) 동쪽으로 처음이 20리, 끝이 60리이다. 완전(薍田) 남쪽으로 처음이 10리, 끝이 25리이다. 전포(田浦) 북쪽으로 처음이 20리, 끝이 25리이다. 용진(龍進) 동쪽으로 처음이 10리, 끝이 30리이다. 상관(上關) 동쪽으로 처음이 15리, 끝이 50리이다. 오백조(五百條) 북쪽으로 처음이 25리, 끝이 35리이다. 우동(紆東) 북쪽으로 처음이 30리, 끝이 50리이다. 우서(紆西) 북쪽으로 처음이 30리, 끝이 35리이다. 우북(紆北) 북쪽으로 처음이 50리, 끝이 60리이다. 위의 3면은 우주(紆州)이다. 이동(伊東) 북쪽으로 처음이 20리, 끝이 25리이다. 이남(伊南) 서남쪽으로 처음이 20리, 끝이 30리이다. 이서(伊西) 서쪽으로 처음이 30리, 끝이 35리이다. 이북(伊北) 서쪽으로 처음이 20리, 끝이 30리이다. 위의 4면은 이성(伊城) 땅이다. 이동(利東) 서쪽으로 처음이 50리, 끝이 60리이다. 이서(利西) 서쪽으로 처음이 50리, 끝이 80리이다. 이북(利北) 서쪽으로 처음이 20리, 끝이 30리이다. 위 3면은 이성(利城) 땅이다. 동일도(東一道) 서북쪽으로 처음이 30리, 끝이 50리이다. 서일도(西一道) 서북쪽으로 처음이 50리, 끝이 60리이다. 남일도 서북쪽으로 처음이 40리, 끝이 50리이다. 남이도(南二道) 서북쪽으로 처음이 50리, 끝이 70리이다. 북일도(北一道) 서북쪽으로 처음이 50리, 끝이 60리이다. 북이도(北二道) 서북쪽으로 처음이 60리, 끝이 80리이다. 위의 6면은 옥야(沃野) 땅이다. ○ 이성(利城) 3면은 동쪽으로 익산(益山)과 접하고, 남쪽으로는 김제(金堤)ㆍ만경(萬頃)과 접하며, 서쪽으로는 임피(臨陂)와 접하고, 북쪽으로는 함열(咸悅)과 접한다. ○ 옥야(沃野) 6면은 남쪽으로 사수(泗水)와 연하고, 서쪽으로는 김제(金堤)와 접한다. 낭산(朗山) 서북쪽으로 처음이 20리, 끝이 35리이다. 귀산(歸山) 서남쪽으로 처음이 20리, 끝이 40리이다. ○ 경명향(景明鄕)ㆍ북일백(北一百)ㆍ두모촌(豆毛村)은 이성(利城) 땅이다.
【창고】 창고(倉庫)가 3곳이 있다. 본읍. 고(庫)가 10곳이 있다. 감영(監營)이 성내에 있다. 옥야창(沃野倉) 서쪽으로 70리이다. 이성창(利城倉) 서쪽으로 60리이다. 우주창(紆州倉) 북쪽으로 10리이다. 봉익창(鳳翔倉) 동리쪽으로 40리이다. 외성창(外城倉) 동쪽으로 30리이다.
내성창(內城倉) 위봉산성(威鳳山城)에 있다. 양량소창(陽良所倉) 동북쪽으로 1백 20리에 있다.
【진도】 신창진(新倉津) 서쪽 70리에 있으며, 김제(金堤)와는 남쪽으로 20리 거리이다. 사천진(沙川津) 횡탄(橫灘) 아래쪽에 있다.
【토산】 대[竹]ㆍ감ㆍ붕어[鯽魚]ㆍ게[蟹].
【누정】 호경루(護慶樓) 남천(南川) 곁에 있다. 큰 시내가 누정 밑을 둘러 흐르고, 동남쪽으로는 푸른 산이 둘러 있다. 만화루(萬化樓) 위와 같다. 매월정(梅月亭) 객관(客館) 동쪽에 있다.
【궁실】 조경묘(肇慶廟) 부성(府城)의 동문(東門) 안 경기전(慶基殿) 북쪽에 있다. 영종(英宗) 47년에 세웠다. 이조(李朝)의 시조(始祖) 위판(位版)을 봉안하고 있다. 성은 이씨이고 휘는 한(翰)이며, 신라 때 벼슬은 사공(司空)이다. 배필은 김씨로 군윤(軍尹) 은의(殷義)의 딸인데, 신라 태종(太宗)의 10세 손이다. 봄과 가을에 상삭(上朔)에서 상순(上旬) 사이에 날을 택하여 제사를 지낸다. ○ 영(令) ㆍ별검(別檢)이 각 1명이다.
【사원】 화산서원(華山書院) 선조 무인년에 세우고, 효종 무술년에 사액했다. 이언적(李彦迪) 문묘(文廟) 편에 보인다. 송인수(宋麟壽) 청주(淸州) 편에 보인다.

[주D-001]풍패(豐沛) : 풍패(豐沛)는 한 고조(漢高祖)의 고향이다. 여기서는 태조(太祖)의 선대가 전주 이씨(全州李氏)이기 때문이다.
[주D-002]예를……되었다 : 《좌전(左傳)》에, “정국(鄭國)에 큰일이 있으면 자피(子皮)를 싣고 들에 가서 모의한다.” 하였다.
[주D-003]태빈(邰豳) : 주(周)의 선대가 일어난 땅이다.
[주D-004]주의 태왕이……때이다 : 주 문왕(周文王)의 조부 태왕(太王)이 침략하는 적인(狄人)을 피하여 도읍지인 빈(邠)을 버리고 기산(岐山)으로 옮겨가매 백성들이 따라갔다.
[주D-005]사환(賜環) : 옛날에 신하가 임금에게 쫓겨났을 때에 구경에 가서 처분을 기다렸는데, 임금이 결(訣)을 주면 돌아오지 말라는 것이요, 환(還)을 주면 돌아오라는 뜻이다.
[주D-006]전장(轉藏) : 불교의 장경(藏經)을 독송강설(讀訟講說)하는 것이다.
[주D-007]원공(遠公)은……건너지 마소 : 동진(東晉)의 중 혜원(慧遠)이 여산(廬山)에 있으면서 손을 전송할 때에 호계(虎溪)를 넘지 않았는데 한 번은 도연명(陶淵明) 육수정(陸修靜)을 전송하면서 이야기하다가 저도 모르게 호계를 넘었다.
[주D-008]유애(遺愛) : 그 사람이 간 뒤에도 백성에게 대한 사랑이 백성의 마음에 남아 있어 잊지 않는 것이다.
[주D-009]병상[蟻床] : 진(晉) 나라 은중감(殷仲堪)의 아버지가 마음에 병이 있어, 평상 밑에 개미들 싸우는 것이 마치 소싸움[鬪牛]하는 것처럼 들렸다 한다.
[주D-010]휼방(鷸蚌)의 고사 : 휼새[鷸]가 조개[蚌]를 쪼아 먹으려고 조개의 벌린 껍질 속에 입을 넣었다가, 서로 버티는 동안에 어부(漁父)가 두 마리를 한꺼번에 잡아갔다는 것이다.
[주D-011]오리와 닭의 공업(功業) : 태봉(泰封) 말기의 참서(讖書)에, “먼저 닭을 잡고 뒤에 오리를 친다.” 하였는데, 과연 고려 태조가 계림(鷄林 신라)을 먼저 얻고 뒤에 압록강(鴨綠江)까지 국경을 개척하였다.
[주D-012]신풍([新豐) : 풍(豐)은 한 고조의 고향으로, 한(漢)의 고조가 천하를 통일한 후 성과 거리의 모양을 풍(豐) 땅과 같이 만들어 놓고 풍 땅의 백성을 이곳에 이주시키고 신풍(新豐)이라 하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제33권 원문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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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라도(全羅道)
익산군(益山郡)

동으로 여산군(礪山郡) 경계까지 10리, 북으로 여산군 경계까지 19리, 남으로 전주부(全州府) 경계까지 17리, 서쪽으로 함열현(咸悅縣) 경계까지 22리, 서울로부터 4백 68리이다.
【건치연혁】 본래 마한국(馬韓國)이다. 후조선(後朝鮮)의 임금 기준(箕準)은 기자의 41대 손인데, 위만(衛滿)의 난을 피하여 바다에 떠서 남으로 내려가, 한지(韓地)에 가서 나라를 세우고 마한(馬韓)이라 하였다. 백제의 시조 온조왕(溫祚王)이 이곳을 병합하고, 이후부터 금마저(金馬渚)라 불렀다. 신라의 신문왕(神文王)이 금마군(金馬郡)으로 고치고, 고려조에 와서 전주(全州)에 부속시켰다. 충혜왕(忠惠王) 뒤 5년에 원(元) 나라 순제(順帝)의 황후 기씨(寄氏)의 외향(外鄕)이라 하여, 승격시켜 익주(益州)라 하였는데, 본조 태종(太宗) 13년에 지금의 이름으로 고치고 군으로 만들었다.
【관원】 군수ㆍ훈도(訓導) 각 1인.
【군명】 금마(金馬)ㆍ익주(益州).
【풍속】 생민이 후박하다. 박초(朴礎)의 시에, “생민이 후박하니 마한(馬韓)의 풍속이다.” 하였다.
【성씨】 본군 김(金)ㆍ한(韓)ㆍ송(宋)ㆍ이(李)ㆍ황(黃)ㆍ임(林)ㆍ구(仇). 흑석(黑石) 이ㆍ구ㆍ김.
【산천】 건자산(乾子山) 군(郡)의 북쪽 1리에 있는데 진산(鎭山)이다. 도순산(都順山) 속칭 시다산(施茶山)이라 하는데, 군의 동쪽 5리에 있다. 당산(唐山) 군의 서쪽 10리에 있다. 산에는 밤이 산출되는데 1년에 세 번 열린다. 그러나 딴 곳에 옮겨 심으면 나지 않는다. 용화산(龍華山) 군의 북쪽 8리에 있는데, 일명 미륵산(彌勒山)이라고도 한다. 장군봉(將軍峯) 용화산 남쪽에 있다. 바위 위에 구멍이 있는데 기름 몇 십 말을 담을 수가 있어 속칭 등잔암(燈盞巖)이라 한다. 춘포(春浦) 군의 남쪽 15리에 있다. 용화산(龍華山)에서 나와 전주의 신창진(新倉津)으로 들어간다. 왕궁정(王宮井) 군의 남쪽 5리에 있다. 세상에 전하기를, “옛날 궁궐터이다.”라고 한다. 마룡지(馬龍池) 오금사(五金寺) 남쪽 백여 보(步) 되는 자리에 있다. 세상에 전하기를, “서동대왕(薯童大王)의 어머니가 축실(築室)하였던 곳이다.” 한다. 상시연(上矢淵) 군의 서쪽 17리에 있다.
【토산】 대[竹]ㆍ붕어[鯽魚]ㆍ생강[薑].
【누정】 청심루(淸心樓) 객관(客館)의 동쪽에 있다. 송을개(宋乙開)의 기문에, “금마군(金馬郡)은 옛날 무강왕(武康王)이 칭왕(稱王)한 땅이다. 산천은 그 옛날과 같고 탑과 묘(廟)가 완연하니, 천년이 지난 오늘에도 웅장한 풍도가 장열하였음을 짐작할 만하도다. 국조(國朝)에 와서 병자년에 무진(茂珍) 노상군(盧相君)이 이 고을을 지켰는데, 처음으로 누각을 객관 동쪽에 세웠다. 오랜 세월에 기울고 헐었는데, 무진년 봄에 밀양(密陽) 손후(孫侯)가 군수로 와서, 노는 사람을 불러 모으고 재목을 마련하고 기와를 구워 새로 단장을 하였다. 단청(丹靑)을 칠하고 2개월 만에 완성을 보았다. 생각하니, 어진 수령 손후여, 관에서 이 역사를 하는데 백성이 모르고, 위에서 가진 마음 아래에서 서로 도와, 재력이 관청에서 나오지 않아도 일하는 사람이 배부르며, 역사는 대중이 하지 않고도 공사가 완성되니, 이 도리를 미루어 모든 일을 펴 나가면, 무슨 일인들 인(仁)에 어긋나리요.” 하였다.
【학교】 향교(鄕校) 군의 동쪽 5리에 있다.
【사원】 흑석원(黑石院) 흑석 부곡에 있다.
【불우】 미륵사(彌勒寺) 용화산(龍華山)에 있다. 세상에 전하기를, “무강왕(武康王)이 인심을 얻어 마한국을 세우고, 하루는 선화부인(善花夫人)과 함께 사자사(獅子寺)에 가고자 산 아래 큰 못가에 이르렀는데, 세 미륵불이 못 속에서 나왔다. 부인이 임금께 아뢰어 이곳에 절을 짓기를 원하였다. 임금이 허락하고 지명법사(知命法師)에게 가서 못을 메울 방술을 물었더니, 법사가 신력으로 하룻밤 사이에 산으로 못을 메워 이에 불전을 창건하고 또 세 미륵상을 만들었다. 신라 진평왕(眞平王)이 백공(百工)을 보내어 도왔는데, 석탑(石塔)이 매우 커서 높이가 여러 길이나 되어 동방의 석탑 중에 가장 큰 것이다.” 하였다. ○ 권근(權近)의 시에, “창 밖 청산을 깎아 만든 것 같은데, 근심이 있을 때 눈을 들어 바라보니 더욱 분명하구나. 가을 바람이 날로 두건과 지팡이에 불어오니, 높은 산에 올라 서울을 바라볼까 하노라.” 하였다. 사자암 용화산 위에 있다. 두 바위가 벽처럼 솟아 있는데 내려다보면 땅이 보이지 않는다. 돌길이 갈퀴처럼 걸려 있는데, 부여잡고 올라가면 바로 지명법사가 거주하는 곳이다. 사원사(上院寺) 용화산에 있다. 오금사(五金寺) 보덕성(報德城) 남쪽에 있다. 세상에 전하기를, “서동(薯童)이 어머니를 지성으로 섬겼는데, 마를 캐던 땅에서 갑자기 오금(五金)을 얻었다. 뒤에 그는 임금이 되어 그 땅에 절을 짓고 오금사라 하였다.” 하였다.
【사묘】 사직단(社稷壇) 군의 서쪽 1리에 있다. 문묘(文廟) 향교에 있다. 성황사(城隍祠)ㆍ여단(厲壇) 모두 군의 북쪽 1리에 있다.
【고적】 쌍릉(雙陵) 오금사(五金寺) 봉우리의 서쪽 수백 보 되는 곳에 있다. 《고려사》에는 후조선(後朝鮮) 무강왕(武康王) 및 비(妃)의 능이라 하였다. 속칭 말통대왕릉(末通大王陵)이라 한다. 일설에 백제 무왕(武王)의 어릴 때 이름이 서동(薯童)인데, 말통(末通)은 즉 서동(薯童)이 변한 것이라고 한다. 금마산(金馬山) 견훤(甄萱)의 말에, “옛날에 마한(馬韓)이 먼저 일어나 대대로 발흥하였고, 진한과 변한이 뒤이어 일어났다. 이에 백제가 금마산에 개국한 지 6백여 년이 된다.” 하였다. ○ 이제 생각하건대, 온조(溫祚)가 마한을 병합한 뒤 그 땅을 금마저(金馬渚)라 부르고, 금마산(金馬山)이라 부르지는 아니했다. 또 금마군은 백제의 서울이 된 일은 없다. 견훤의 말의 근거를 알 수가 없다. 기준성(箕準城) 용화산(龍華山) 위에 있다. 세상에 전하기를 기준(箕準)이 쌓은 것이기 때문에 그 이름을 땄다고 한다. 석축 둘레는 3천 9백 자이고 높이는 8자이다. 시내와 우물이 있다. 보덕성(報德城) 군의 서쪽 1리에 있는데 유지(瀢址)가 남아 있을 뿐이다. 고구려가 당 나라에 망한 뒤, 대형(大兄) 검모잠(劍牟岑)은 고구려의 부흥을 도모하여 잔민을 모아 패강(浿江 대동강)에 이르러 당 나라의 관리를 죽이고 신라로 향하였다. 서해(西海)의 사야도(史冶島)에 이르러 종실(宗室) 안승(安勝)을 만나 그를 받들고, 한성(漢城)에 와서 임금으로 삼고 소형(小兄) 다식(多式) 등을 신라에 보내어 고하기를, “우리의 선왕 장왕(臧王)께서 실도(失道)하여 나라를 잃었으나, 이제 신 등이 나라의 귀족인 안승을 맞아 군(君)으로 삼았으니, 원컨대 신라의 울타리가 되고자 하나이다.” 하였다. 신라의 문무왕(文武王)은 안승을 금마저(金馬渚)에 거주하게 하고, 보덕왕(報德王)을 봉했으며 형의 딸을 처로 삼게 하였다. 그 뒤 신문왕(神文王)은 안승을 소판(蘇判)으로 삼았다. 그의 족자(族子) 대문(大文)이 금마저에 머물러 있었는데 모반했다가 죽임을 당하고, 나머지 무리가 관리들을 죽이고 보덕성에 근거로 또 반역하였으나, 임금은 장사(將士)를 보내어 토벌하여 죽이고 그 사람들은 남쪽의 주와 군에 옮기게 하고, 그곳을 금마군(金馬郡)으로 삼았다. 흑석부곡(黑石部曲) 군의 남쪽 15리에 있다. 석장동(石檣洞) 군의 서쪽 10리에 있다. 산기슭에 고사(古寺)의 유지(遺址)가 있고, 돌 돛대가 높이 세워 있는데, 높이가 두 길이나 된다. 속칭 그 마을을 석장동이라 한다. 전대(前代)에 주와 현에 혹 동(銅)이나 돌로 돛대의 모양을 만들어, 지기(地氣)를 누른 것이 곳곳에 있는데, 지금도 그 중에 하나이다. 사교원(蛇橋院) 군의 서쪽 19리에 있는데, 지금은 폐하고 없다.
【명환】 본조 진의귀(陳義貴) 정치를 잘하여 명망이 있었다. 노귀상(盧龜祥) 송사(訟事)를 처리하는 데에 과단성이 있었다. 최덕지(崔德之) 행실은 검소하고 절약하며 일처리는 자상하고 분명하였다.
【인물】 고려 이주(李湊) 고종(高宗) 때에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은 한림학사승지까지 지냈다. 성품이 온순하며 문장을 잘 지었고 글씨를 잘 썼다. 평생 동안 살림을 몰랐으니, 집안에는 저축이란 조금도 없었다. 이행검(李行儉) 이주의 아들인데 충렬왕(忠烈王) 때 과거에 급제하였다. 전법랑(典法郞) 벼슬을 지냈으며 정화원주(貞和院主)가 평민을 노예로 삼았다. 그 평민이 고소를 하니, 동료가 권세가의 압력을 받고 법을 굽히려 하였지만 이행검이 한사코 불가함을 주장하였다. 마침 병에 걸려 휴가중이었는데 동료들은 다행으로 여기고 일을 처결해 버렸다. 어떤 사람이 꿈을 꾸니 날카로운 칼이 하늘에서 내려와 형부(刑部)의 관리들을 죽이는 것을 보았다. 얼마 되지 않아서 형부의 관리들은 모두 폭사하거나 병사하였는데 유독 이행검만이 무고하였다. 벼슬은 국자전주(國子典酒)까지 지냈다. 이공수(李公遂) 이행검의 손자인데, 감찰규정(監察糾正)으로서 과시(科試)에 수석으로 뽑히었다. 공민왕(恭愍王) 때 익산부원군(益山府院君)에 봉작되었다. 원 나라는 임금을 폐위시키고 덕흥군(德興君)을 세웠는데, 이공수가 사신으로 원 나라에 들어가 서경(西京)에 이르러서, 태조(太祖)의 원묘(原廟 정묘(正廟) 이외에 다시 세운 묘)에 배알하고 맹세하여 말하기를, “우리 임금이 다시 복위하지 않으면, 신은 죽어도 다시 돌아가지 아니하겠습니다.” 하였다. 영도첨의(領都僉議)에 제수받고, 추충수의동덕찬화공신(推忠守義同德贊化功臣)의 호를 받았다. 별장을 덕수현(德水縣)에 마련하고 자칭 남촌선생(南村先生)이라 하였고, 공민왕묘(恭愍王廟)에 배향되었다.
【유우】 본조 권근(權近) 귀양살면서 《입학도설(入學圖說)》을 지었다.
【열녀】 본조 구씨(仇氏) 조민(曹敏)의 처인데 나이 15세에 조씨 가문에 시집갔다가 일찍 과부가 되었는데, 다시 개가하지 않기를 맹세하고 머리를 깎고 중이 되었다. 남편의 모습을 그려 벽에 걸고 의복을 늘어놓고 밤마다 애통하였으며 조석으로 상식을 올렸다. 출입할 때에는 반드시 고(告)하였고, 시식(時食)을 반드시 바쳤다. 채소와 국을 먹지 아니하였고, 좋은 옷을 입지 아니하였으며, 소복(素服)으로 일생을 마쳤다. 성종(成宗) 2년에 임금에게 알려져 쌀을 주고 정문을 세웠다. 오씨(吳氏) 지삼근(池三近)의 처인데 남편이 죽고 3년간 묘막 생활을 하였는데, 직접 조석으로 상식을 올리며 슬피 곡(哭)하니 듣는 자가 탄복하였다.
【제영】 기랑자복경무성(箕郞雌伏竟無成) 성임(成任)의 시에, “기랑(箕郞)은 움츠리고 끝내 성취 없었네. 강한 것이 약한 것을 병합함은 이치에 분명한 일. 당시 휘하의 장사 생각해보니, 그 몇 사람이 고개 돌려 서경(西京)을 생각했으랴.” 하였다. 상마사야춘(桑麻四野春) 권근(權近)의 시에, 전쟁을 하던 곳 천년 뒤 오늘, 사방에는 뽕과 삼이 봄을 맞았네.” 하였다. 마한문물구성공(馬韓文物久成空) 송을개(宋乙開)의 시에, “완부(完府)의 판도가 통일이 되니, 마한의 문물이 오래토록 공허하네.” 하였다. 백년무어련금마(百年無語憐金馬) 서거정(徐居正)의 시에, “남호(南湖)는 희고 흰데, 익산(益山)은 푸르구나. 지난 일은 희미한 한 자리의 꿈. 백제(百濟)의 유허(遺墟)에는 고목이 공적하고, 기준(箕準)의 옛 궁터엔 석양이 비꼈구나. 백년이나 말이 없으니 가련하다 금마(金馬)여, 만고에 다정(多情)하여 석양(石羊)을 기억하네. 백발되어 원유(遠遊)하니 강개가 많고, 등림(登臨)하니 신상(神傷)하지 않는 곳이 없구나.” 하였다.

《대동지지(大東地志)》
【연혁】 본래는 백제의 금마지(金馬只)인데, 무강왕(武康王) 때에 성을 쌓고, 별도(別都)를 두어 금마저(金馬渚)라 칭했다.
【방면】 군내(郡內) 동쪽으로 끝이 3리이다. 제석(帝釋) 동쪽으로 처음이 5리, 끝이 15리이다. 춘포(春浦) 남쪽으로 처음이 20리, 끝이 30리이다. 두촌(豆村)ㆍ두천(豆川)ㆍ지석(支石) 모두 서쪽으로 처음이 10리, 끝이 20리이다. 사제(蛇梯) 서쪽으로 처음이 15리, 끝이 20리이다. 율촌(栗村) 서쪽으로 처음이 20리, 끝이 25리이다. 구문천(九文川) 서북쪽으로 처음이 15리, 끝이 25리이다. 미륵(彌勒) 북쪽으로 처음이 7리, 끝이 20리이다. ○ 흑석부곡(黑石部曲) 남쪽으로 15리이다.
【교량】 상한교(上漢橋)ㆍ하한교(下漢橋) 모두 남천(南川)에 있다. 입석교(立石橋) 춘포(春浦)와 김제(金提) 길에 있다. 면천교(綿川橋) 서쪽으로 함열(咸悅)과 통하는 길에 있다.
【토산】 닥종이[楮]ㆍ게[蟹]ㆍ뱅어[白魚]ㆍ삼률(三栗).
【사원】 화산서원(華山書院) 효종 갑오년에 세웠고 현종 임인년에 사액(賜額)하였다. 김장생(金長生)ㆍ송시열 모두 문묘 편에 보인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제33권 원문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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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라도(全羅道)
김제군(金堤郡)

동으로 금구현(金溝縣)경계까지 14리, 남으로 태인현(泰仁縣) 경계까지 22리, 서쪽으로 부안현(扶安縣) 경계까지 26리, 만경현(萬頃縣)경계까지 13리, 북으로 만경현(萬頃縣) 경계까지 18리, 서울까지의 거리는 5백 41리이다.
【건치연혁】 본래 백제의 벽골군(碧骨郡)인데 신라 때에 지금의 이름으로 고쳤다. 고려 초에 전주(全州)의 속현(屬縣)이 되었다가, 인종(仁宗) 21년에는 현령을 두었다. 본조(本朝) 태종(太宗) 3년에 본현 출신인 명(明) 나라 환자(宦者) 한첩목아(韓帖木兒)의 요청으로 군(郡)으로 승격시켰다.
【관원】 군수(郡守)ㆍ훈도(訓導) 각 1인.
【군명】 벽골(碧骨).
【성씨】 본군 김(金)ㆍ장(張)ㆍ조(趙)ㆍ염(廉)ㆍ구(仇), 최(崔)ㆍ이(李)ㆍ조(趙)ㆍ신(申) 모두 내성(來姓)이다. 평고(平皐) 이(李)ㆍ곽(郭)ㆍ온(溫)ㆍ오(吳)ㆍ문(文)ㆍ여(呂), 김 속성(續姓)이다. 신(申) 모두 내성(來姓)이다. 마천(馬川) 윤(尹). 재남(才南) 이(李). 명랑(鳴良) 구(仇). 제견(堤見) 구(仇).
【풍속】 인심이 순후하고 농사일에 부지런하였다.
【산천】 명량산(鳴良山) 명량향(鳴良鄕)에 있는데, 고봉(孤峯)이 높이 솟아 있고, 그 아래로 동진강(東津江)이 흐른다. 승가산(僧伽山) 군의 동북쪽 10리에 있다. 오적죽산(吾赤竹山) 군의 서쪽 15리에 있다. 대평(大坪) 속칭 김제(金提) 만경평(萬頃坪)이라 한다. 동쪽은 전주(全州), 남쪽은 태인(泰仁), 북쪽은 신창진(新倉津), 서쪽은 동진(東津)과 접해 있다. 회연(廻淵) 군의 동쪽 30리에 있는데, 옛날 병영(兵營) 터가 있다. 장신포(長信浦) 회연(廻淵) 서쪽 5리에 있다. 신창진(新倉津) 마천소(馬川所)에 있다. 전주부(全州府) 편에 보인다. 동진(東津) 군의 서쪽 25리에 있는데 부안현(扶安縣) 편에 자세하다. 대제(大湜) 군의 서쪽 1리에 있는데, 둘레가 1만 3천 34자이다. 내소제지(乃所梯池) 군의 북쪽 5리에 있다.
【토산】 마름ㆍ가시연[芡]ㆍ연(蓮)ㆍ붕어[鯽魚]ㆍ모시[苧]ㆍ순채[蓴].
【누정】 문명루(文明樓) 바로 군의 남문루(南門樓). 『신증』 자민루(字民樓) 군의 서쪽 1리에 있다.
【학교】 향교(鄕校) 군의 북쪽 1리에 있다.
【역원】 내재역(內才驛) 군의 서남쪽 15리에 있다. 동원(東院) 군의 동쪽 2리에 있다.
【불우】 흥복사(興福寺) 승가산에 있다.
【사묘】 사직단 군의 서쪽 3리에 있다. 문묘 향교에 있다. 성황사 군의 동쪽 2리에 있다. 여단 군의 북쪽 3리에 있다.
【고적】 평고 폐현(平皐廢縣) 군의 동쪽 25리에 있다. 본래는 백제의 수동산현(首冬山縣)인데, 신라가 지금 이름으로 고치고 내속시키었다. 고려 초에 전주(全州)에 소속시켰다가 뒤에 다시 내속시켰다. 명량현(鳴良縣) 군의 서쪽 20리에 있다. 제견향(堤見鄕) 군의 남쪽 10리에 있다. ○ 윤회(尹淮)의 지지(地志) 및 전라도 관풍안(觀風案)에는 전주(全州)ㆍ태인(泰仁)ㆍ임피(臨陂)도 또한 제견향에 실려 있으니, 생각건대, 벽골제(碧骨堤)에 가까운 땅은 다 제견(堤見)이라 불렀으리라. 그러나 상고할 바가 없다. 마천소(馬川所) 군의 북쪽 20리에 있다. 재남소(才南所) 군의 동쪽 30리에 있다.
벽골제(碧骨堤) 군의 남쪽 15리에 있다. 물의 근원은 셋이 있는데, 하나는 금구현(金構縣) 무악산(毋岳山)의 남쪽에서 나오고, 하나는 무악산의 북쪽에서 나오며, 하나는 태인현(泰仁縣)의 상두산(象頭山)에서 나와 벽골제에서 같이 만나 고부군(古阜郡)의 눌제수(訥堤水)와 동진(東津)에서 합치고, 만경현(萬頃縣)의 남쪽을 경유하여 바다로 들어간다. ○ 신라 흘해왕(訖解王) 21년에 처음 둑을 쌓았는데, 길이가 1천 8백 보나 된다. 고려 시대에 와서 다시 수축하였다가 후에 폐지하였고, 본조(本朝)에서는 태종(太宗) 15년에 박희중(朴熙中)을 보내어 관찰사 박습(朴習)과 더불어 다시 중수하도록 하였는데 또한 지금은 폐지하였다. ○ 중수비(重修碑)에, “군의 남쪽 15리쯤 큰 둑이 있는데, 그 이름은 벽골(碧骨)이다. 이는 옛 사람이 김제(金堤)의 옛 이름을 들어서 이름을 붙인 것인데, 군도 역시 이 둑을 쌓게 됨으로 말미암아 지금의 이름으로 고친 것이다. 둑의 길이는 6만 8백 43자이고, 둑 안의 둘레는 7만 7천 4백 6보이다. 다섯 개의 도랑을 파서 논에 물을 대는데, 논은 무릇 9천 8백 40결(結) 95 복(卜)이라 하니, 고적(古籍)에 적혀 있다. 그 첫째 도랑을 수여거(水餘渠)라고 하는데, 한 줄기 물이 만경현(萬頃縣)의 남쪽에 이르고, 둘째 고랑을 장생거(長生渠)라고 하는데, 두 줄기 물이 만경현의 서쪽 윤부(潤富)의 근원에 이르며, 셋째 도랑을 중심거(中心渠)라고 하는데, 한 줄기의 물이 고부(古阜)의 북쪽 부령(扶寧)의 동쪽에 이르고, 넷째 도랑을 경장거(經藏渠)라 하고, 다섯째 도랑을 유통거(流通渠)라고 하는데, 둘 다 한 줄기 물이 인의현(仁義縣)의 서쪽으로 흘러 들어간다. 다섯 도랑이 물을 대는 땅은 모두가 비옥하였는데, 이 둑은 신라와 백제로부터 백성에게 이익을 주었다. 고려 현종(顯宗) 때에 와서 옛날 모습으로 보수하였고, 인종(仁宗) 21년 계해년에 와서 증수(增修)하였는데, 끝내 폐기하게 되니 아는 이들이 이를 한탄하였다.
하늘이 우리의 국조를 열어 성군이 태어나니, 힘써 다스려서 태평 세월을 성취하기를 도모하였다. 이에 대신들에게 명하여 사방을 순시하고, 제방(堤防)을 완비하며 관개(灌漑)를 잘 통하게 하였다. 을미년 봄에 판상주(判尙州) 이발(李發) 공(公)을 명하여 도안무사(都安撫使)로 삼으니, 이공이 처음으로 벽골(碧骨)에 와서 이것을 보수하고자 하였으나, 일이 번거롭고 바빠서 시작하지 못하였다. 도관찰출척사(都觀察黜陟使) 함양(咸陽) 박습(朴習) 공과 경력(經歷) 권전(權專) 군(君)과, 경차관(敬差官) 희중(凞中)이 모두 여기에 와서 공사의 어렵고 쉬운 것을 고찰하여 자세한 내용을 보고하니, 드디어 임금이 허가를 하였다. 각 군의 장정 총 1만 명과 일을 처리하는 사람 3백 명을 증발하고, 옥구진 병마사(沃溝鎭兵馬使) 김훈(金訓) 군(君)과 지김제군사(知金提郡事) 김방(金倣) 군을 시켜 감독하게 하니, 이해 9월 갑인일에 공역을 시작하여 10월 정축일에 완성하였다. 둑의 북쪽에는 대극포(大極浦)가 있는데, 조수가 몹시 격하며, 남쪽에는 양지교(楊枝橋)가 있는데, 물이 깊게 고여 있어서 공사하기가 무척 힘이 들어, 옛부터 어려운 공사였다. 이제 먼저 대극포의 조수가 치는 곳에 방축을 쌓아 그 기세를 죽이고, 다음으로는 아름드리 나무를 양지교(楊枝橋)의 물이 고여 웅덩이가 된 곳에 세워서 기둥을 만들고, 나무다리를 만들어 다섯 겹으로 목책(木柵)을 막아서 흙을 메우고, 또 제방 무너진 곳에 흙을 쌓아 편평하게 하며, 제방의 내외로는 버들을 두 줄로 심어서 그 기반을 단단하게 하였으니, 둑의 아래 넓이는 70자요, 위의 넓이는 30자이며, 높이가 17자이고, 수문은 마치 구룡(丘壟)처럼 바라보였다. 또 장생(長生)ㆍ중심(中心)ㆍ경장(經藏)의 세 수문의 옛날 돌기둥을 보수하였고, 수여(水餘)와 유통(流通)의 두 수문은 돌을 쪼개어 주춧돌로 삼고, 느티나무 기둥을 세웠다. 또 양쪽의 석주심(石柱心)이 움푹 들어간 곳에는 느티나무 판을 가로질러서, 내외로 고리와 쇠줄을 달아 나무판을 들어올리면 물이 흐르도록 하였으니, 수문의 넓이는 모두가 13자이요, 돌기둥의 높이는 15자이며, 땅속으로 5자나 들어가 있다. 또 아래의 석봉(石縫)은 쇠를 녹여 땜질을 해서 단단하게 하고, 다시 안쪽의 물을 막고 있는 언덕도 보수하였다. 수여(水餘)와 유통(流通)의 두 수문은 파도가 치는 곳은 아니지만, 만약 물이 범람하여 이곳으로 새어 흐르면 물을 막을 수가 없게 된다. 그러므로 두 수문의 양쪽에다 돌을 깎아 주춧돌로 삼아서, 그 위의 느티나무 판으로 다리를 만들어 왕래하도록 하였다. 이것이 벽골제의 대략이니 때는 영락(永樂) 13년이다.” 하였다.

용두동(龍頭洞) 군의 남쪽 2리에 있는데, 조간(趙簡)이 살던 곳이다. 전하는 말에, “조간은 태어나면서 양쪽 어깨에 용의 비늘이 있었는데 바로 벽골제의 용정(龍精)이라고 하였다. 그가 군의 낮은 관리가 되었는데 하루는 괴수(槐樹) 나무에 올라갔더니, 읍재(邑宰)가 낮잠을 자다 꿈에 나무 위에 쌍룡이 얽혀 있는 것을 보았다. 꿈을 깬 뒤 사람을 시켜 사실을 알아본 뒤에, 즉시 공부를 시켜 후에 과거시험에 1등으로 급제하게 되었는데, 그가 살던 곳을 용두동(龍頭洞)이라 한 것이다.” 한다. ○ 이곡(李穀)의 시에 “장원(壯元)이 난 고을을 우연히 향하니, 옛집 추녀 앞에 석양이 비꼈네. 매번 과장(科場)에서 군용(群龍)이 다투지만, 남다른 재명(才名) 뭇 새 중에 일악(一鶚)이네. 세상을 싫다 하던 공은 일찍 하늘로 돌아갔는데, 이웃에 자리잡은 나는 황정(黃精 약재)을 다듬고자 하네. 지령(地靈)에서 인걸 난다는 말을 믿을 만하구나, 공경(公卿)이 연이어 나는 것을 보라.” 하였다.
【명환】 본조 최덕지(崔德之)ㆍ전약충(全若衷)ㆍ최유종(崔有悰) 모두 정치의 명망이 있었다. 김륜(金崙) 청렴하고 간소하며 정치의 명성이 있었다. 김미(金楣) 법을 지키고 공사를 받들었다. 성종 갑진년에 교서(敎書)를 내려 포상하였다.
【인물】 고려 조간(趙簡) 어려서 한 사람이 시 구절을 읊기를, “벼루 위 검은 구름은 휘필(揮筆)한 뒤.”라 하니, 즉석에서 받기를, “뜰 앞의 붉은 비는 떨어진 꽃 시절.” 하였다. 충렬왕(忠烈王) 때 장원으로 급제하였고, 다음해에 임금이 시(詩)와 부(賦)로 친히 문신(文臣)들을 시험할 때 또한 1등을 하였다. 황패(黃牌)를 하사하였고 여러번 관직을 옮겨 보궐(補闕) 벼슬을 하였다. 부친상을 당하여 3년을 시묘하니, 임금이 가상히 여겨 기거경력(起居經歷) 벼슬을 주었다. 벼슬이 밀직부사찬성사(密直副使贊成事)에 이르렀고, 시호는 문량(文良)이다.
【우거】 고려 박의중(朴宜中) 자는 자허(子虛), 초명(初名)은 실(實)인데, 밀양(密陽) 사람이다. 공민왕 때에 장원에 뽑히고, 신우(辛禑) 때에 여러 번 옮겨 벼슬이 대사성 밀직제학(大司成密直提學)에 이르렀다. 사신으로 북경에 들어가 철령(鐵嶺) 이북의 땅을 돌려 달라고 요청했다. 돌아올 때 아무 것도 주지 않으니, 요동호송진무(遼東護送鎭撫) 서현(徐顯)이 베를 청구하거늘, 의중이 자루 입구를 기울여 보이고 입고 있던 모시옷을 벗어 주었다. 서현이 그의 청백함에 탄복하고 예부(禮部)에 알리니, 천자가 인견하고 예를 더하여 대접하고, 예부(禮部)에 명하여 회동관(會同館)에서 대접하도록 하였는데, 원평장원사(元平章院使)의 윗자리에 앉도록 하고 그의 요청을 허락하여 주었다. 본조에 들어와서는 검교참찬 의정부사(檢校參贊議政府事)에 배수되었다. 박의중은 천품이 명민하고 학문이 독실하였으며, 청렴하고 강개하며 편할 때나 험난할 때나 절개를 한결같이 하였고, 문장은 정심(精深)하고 전아(典雅)하였다. 본조 정곤(鄭坤)ㆍ노숭(盧崇), 안지(安止) 영중추원사(嶺中樞院事)로 마을 농막에 퇴거하였다. 호는 고은(皐隱)이다. 『신증』 【열녀】 본조 동질금(同叱今) 향리(鄕吏) 이당(李堂)의 처인데 남편이 죽자 종신토록 상복을 벗지 아니하고, 조석으로 상식(上食)을 생존할 때와 같이 올렸다. 금상 7년에 정문을 세웠다. 박씨(朴氏) 윤사임(尹師任)의 처인데 남편이 죽고 복을 벗은 뒤에도 오히려 소복으로 고기를 먹지 않고, 처음과 다름없이 애통하였다. 금상 22년에 마을에 정문을 세웠다. 마비(馬非) 서치명(徐致明)의 처인데 남편이 죽자 20여 년 동안 상을 벗지 않고 조석으로 상식을 폐하지 아니했다. 금상 23년에 마을에 정문을 세웠다.
【제영】 요곽하화최효우(繞郭荷花摧曉雨) 이발(李發)의 시에, “성곽 둘레의 연꽃은 비를 재촉하고, 들에 가득한 벼이삭은 가을 하늘에 상긋거리네.” 하였다. 수락어하국(水落魚鰕國) 김극기의 시에, “수위(水位)가 낮아지니 고기와 새우의 나라요, 산이 고요하니 호랑이와 들소의 고을이로다.” 하였다. 일로요련해(一路遙連海) 옛 사람의 시에, “한 길 아득히 바다에 이어있고, 천가(千家)는 반쯤이나 산에 가려 있구나.” 하였다.

《대동지지(大東地志)》
【방면】 읍내(邑內) 끝이 5리이다. 모촌(母村) 동쪽으로 처음이 20리, 끝이 30리이다. 월산(月山) 남쪽으로 처음이 5리, 끝이 10리이다. 입천(立川) 남쪽으로 처음이 5리, 끝이 10리이다. 부량(扶梁) 남쪽으로 처음이 20리, 끝이 30리이다. 대정(大井) 동쪽으로 처음이 10리, 끝이 15리이다. 개토(介吐) 동쪽으로 처음이 20리, 끝이 25리이다. 홍산(洪山) 서남쪽으로 처음이 15리, 끝이 20리이다. 대촌(代村) 서남쪽으로 처음이 5리, 끝이 20리이다. 반산(半山) 서쪽으로 처음이 15리, 끝이 20리이다. 식포(食浦) 서쪽으로 처음이 20리, 끝이 30리이다. 백석(白石) 북쪽으로 처음이 10리, 끝이 20리이다. 목연(木淵)ㆍ마천(馬川) 모두 북쪽으로 처음이 20리, 끝이 30리이다. 본래는 마천이었다. 연산(延山) 북쪽으로 처음이 15리, 끝이 25리이다. 공동(公洞) 북쪽으로 처음이 20리, 끝이 30리이다. 회포(廻浦) 북쪽으로 처음이 30리, 끝이 40리이다. 금굴(金堀) 위와 같다. ○ 명량향(鳴良鄕)은 서쪽으로 20리, 제견향(堤見鄕)은 남쪽으로 1리, 재남소(才南所)는 동쪽으로 30리이다.
【창고】 창(倉)이 2곳이 있다. 읍내에 있다. 두창(杜倉) 동쪽으로 20리이다. 해창(海倉) 서쪽으로 20리이다.
【진도】 동진(東津) 서쪽으로 25리, 부안(扶安) 경계의 큰 길이다. 신창진(新倉津) 북쪽으로 20리이며, 전주(全州) 땅과 통한다.
【교량】 재남교(才南橋) 동쪽으로 30리이며, 삼례(參禮)로 가는 길이다. 화교(禾橋) 서북쪽으로 15리이며 만경(萬頃) 큰 길과 통한다. 포교(浦橋) 남쪽으로 15리이다.
 
황해도(黃海道) 원문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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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해도(黃海道)
황주목(黃州牧)

동쪽은 서흥부(瑞興府) 경계까지 51리, 남쪽은 봉산군(鳳山郡) 경계까지 23리, 서쪽은 바다까지 50리, 북쪽은 평안도(平安道) 중화군(中和郡) 경계까지 39리이다. 같은 도의 상원군(祥原郡) 경계까지 39리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4백 88리이다.
【건치연혁】 원래 고구려의 동홀(冬忽)이다. 우동어홀(于冬於忽)이라고도 하였다. 신라 헌덕왕(憲德王)이 취성군(取城郡)으로 고쳤으며, 고려 초기에 지금 이름으로 고쳤다. 성종(成宗) 2년에 목(牧)을 설치하였으며 얼마 후 절도사(節度使)를 설치하고, 황주 천덕군(天德軍)이라 일컫고, 관내도에 소속시켰다. 현종(顯宗) 때에 안무사(按撫使)로 고쳤다가 또 목으로 고치고 서해도에 소속시켰다. 고종(高宗) 때에 고을 사람들이 거란의 군사를 막아내지 못하였다고 하여 지고령군사(知固寧郡事)로 강등하였다가 후에 다시 황주목으로 칭하였다. 후에 서북면(西北面)으로 옮겨 예속하였다가 얼마 안 되어 도로 서해도에 예속하였는데 본조(本朝)에서도 그대로 하였으며, 세조조에는 진(鎭)을 설치하였다.
【진관】 도호부(都護府) 2 평산(平山)ㆍ서흥(瑞興). 군(郡) 6 봉산ㆍ안악ㆍ재령(載寧)ㆍ수안ㆍ곡산ㆍ신천(信川). 현(縣) 5 신계(新溪)ㆍ토산(兎山)ㆍ우봉(牛峯)ㆍ문화(文化)ㆍ장련(長連).
【관원】 목사(牧使)ㆍ판관(判官)ㆍ교수(敎授)ㆍ역학훈도(譯學訓導) 각 1 명.
【군명】 동홀ㆍ취성ㆍ고령(固寧)ㆍ제안(齊安)ㆍ용흥(龍興)ㆍ성성(聖城)ㆍ대룡(大龍)ㆍ동울(冬鬱)ㆍ대홀(大忽)ㆍ천덕군(天德軍).
【성씨】 본주 윤ㆍ김ㆍ백ㆍ지ㆍ노(盧)ㆍ동(董)ㆍ단(段)ㆍ황(黃)ㆍ최ㆍ석(石)ㆍ황보(皇甫), 변(邊) 촌성(村姓)이다. 노(魯)ㆍ주(朱)ㆍ설(薛)ㆍ홍ㆍ위(魏)ㆍ강(康)ㆍ서 내성(來姓)이다. 철화(鐵和) 나(羅)ㆍ최ㆍ홍ㆍ이 모두 속성(續姓)이다.
【풍속】 농사짓고, 누에치기를 힘쓰며 음사(淫祀)를 숭상한다.
【형승】 나라의 금대(襟帶)이다 서거정(徐居正)의 기문(記文)에, “고을 서북쪽에 대동강(大同江)이 있고, 동남쪽에 절령(岊嶺)이 있으며, 극성(棘城)이 있는데 모두 나라의 요새지다.” 하였다.
【산천】 벽화산(碧花山) 고을 동쪽 4리에 있는데 진산(鎭山)이다. 천주산(天柱山) 고을 동쪽 15리에 있다. 칠봉산(七峯山) 고을 북쪽 40리에 있다. 여계산(餘界山) 고을 동쪽 50리에 있다. 발산(鉢山) 고을 남쪽 30리에 있다. 월라산(月羅山) 고을 남쪽 40리에 있다. 정방산(政方山) 고을 남쪽 20리에 있다. 또 봉산군에도 보인다. 삼방산(三方山) 고을 남쪽 40리에 있다. 천진산(天眞山) 고을 남쪽 15리에 있다. 봉명산(鳳鳴山)ㆍ용복산(龍伏山)ㆍ건지산(乾之山) 모두 고을 서쪽 30리에 있다. 또 봉산군에도 보인다. 독산(獨山) 고을 서쪽 30리에 있다. 금봉산(金鳳山) 고을 동쪽 25리에 있다. 구현(駒峴) 주의 북쪽 30리에 있다. 상산점(上山岾) 고을 남쪽 40리에 있다. 바다 고을 서쪽에 있다. 선도(鐥島) 고을 서남쪽 15리에 있는데 어량(魚梁)이 있다. 철도(鐵島) 고을 서쪽 25리에 있다. 옛날에는 목장이 있었는데 성종 15년에 물과 풀이 없다고 하여, 안악 저도(安岳猪島)와 풍천 초도(豐川椒島)로 옮겨서 방목하였다. 비파곶(琵琶串) 고을 서쪽 20리에 있다. 철화강(鐵和江) 철화현에 있다. ○ 공민왕(恭愍王) 8년 7월에, 강절 평장(江浙平章) 화니적(火尼赤)이 바람으로 표류하여 와서 이 강에 정박하니, 쌀과 포목을 하사하고 행성 원외(行省員外) 신인적(申仁適)의 딸을 그에게 시집보냈는데 화니적이 수정 도끼를 바쳤다. ○ 홍건적이 고을에 침입하여 여기까지 왔는데, 목사 민후(閔珝)가 싸워서 20여 명을 베고, 한 명을 사로잡았고 병기를 노획하여 헌상(獻上)하였다. 어초천(於草川) 고을 남쪽 2리에 있다. 물의 근원이 수안군 대현(大峴)에서 나와 서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 급수문(急水門) 고을 서쪽 30리 바다 어귀에 있는데, 본주 및 용강(龍岡)ㆍ안악의 물이 서로 부딪치는 곳이다. 박배포(朴排浦) 선도(鐥島)의 북쪽에 있다.
【토산】 사(絲)ㆍ숫돌[礪石] 천진산(天眞山)에서 생산된다. 지치[紫草]ㆍ적토(赤土) 고을 남쪽 2리에서 나는데 품질이 가장 아름답다. 꿀ㆍ철(鐵) 철화현(鐵和縣)에서 생산된다. 웅어[葦魚]ㆍ숭어ㆍ붕어ㆍ누치[訥魚]ㆍ쏘가리[錦鱗魚]ㆍ게.
【봉수】 천주산 봉수(天柱山烽燧) 남쪽으로 봉산군 건지산(乾之山)에 호응하고, 북쪽으로 평안도 중화군 운봉산(雲峯山)에 호응한다. 비파곶(琵琶串) 봉수 서쪽으로 안악군 월호산(月乎山)에 호응한다.
【궁실】 객관(客館) 서거정(徐居正)의 중신기(重新記)에, “황주가 서도(西道)의 요긴한 지방에 있어, 사신과 거마(車馬)들이 모여드는 곳이다. 고려 때에는 관내도에 속하였는데 토지가 기름지고, 백성이 많아서 풍부하기가 여러 고을에 제일이었으며 군(軍)을 설치하여 천덕(天德)이라 하였다. 후에 황해도에 예속하였으며 본조에 이르러서도 그대로 하였다. 고을 서북쪽에 대동강이 있고, 동남쪽에 절령(岊嶺)ㆍ극성(棘城)이 있으니, 모두 국가의 요새지로서 제어하는 일을 소홀하게 할 수 없고, 관사(館舍)도 사신과 빈객을 접대하는 곳이니 역시 엄하게 하지 않을 수 없고, 관사(館舍)도 사신과 빈객을 접대하는 곳이니 역시 엄하게 하지 않을 수 없다. 서거정이 일찍이 사명(使命)을 받들어 황주에 무릇 수십 번이나 왕복하였으나 공해(公廨)가 낮고 좁은 데다 거의 다 무너질 지경이며 한 광원루(廣遠樓)가 있기는 하지만 사면 처마가 낮게 드리워져서 시루 안에 앉은 것 같으니 올라가서 멀리 바라보며 흉금을 활짝 펴 볼 수가 없었다. 서거정이 마음속으로 말하기를, ‘황주 고을이 생긴 후로 태수(太守)가 된 이로서 어진이는 몇 명이요, 유능한 이는 몇 명이었던고. 어찌하여 한 사람도 폐지되고 무너진 것을 수리하고 일으키는 이가 없어서 이렇게까지 되었는가.’ 하였다.
병신년 봄에, 호부(戶部) 기순(祁順)과 행인(行人) 장근(張瑾)이 사신으로 왔는데, 서거정이 원접사(遠接使)로 두 사신을 인도하여 주(州)에 이르렀다. 마침 청명절(淸明節)이라 자리를 광원루에 마련하였는데, 갑자기 풍우가 누각에 들이쳐서 자리를 대청으로 옮기니 대청이 또 낮고 좁은 데다 또 앞 기둥이 없이 띠풀 덮은 처마로 보충하였다. 한창 잔치를 하는데 비가 그치지 않고 처마 물이 줄을 이은 듯하니, 일을 맡은 사람들이 옷이 젖어서 모양 없이 되었다. 이때를 당하여 서거정이 이 고을에 대한 불만을 이루 다 말할 수 있었으랴. 이듬해인 정유년 봄에 족질(族姪) 통정(通政) 권정(權侹)이 목사가 되자, 개연히 중수하여 새롭게 할 것을 감사에게 보고하여 조정에 알려서 허락을 얻고 계획을 세워 시작하려 하다가 병으로 사임하였다.
무술년 봄에, 광원군(光原君) 김가선(金嘉善) 백겸(伯謙)이 뒤이어 목사가 되고 또 통판(通判) 이효종(李孝宗)으로 보좌케 하니 정령(政令)이 잘 행하여져서 사람들은 화합하여 백성들이 관가 일에 나오기를 즐겁게 여겼다. 이에 일을 시작하게 되었는데, 돌을 뜨고 기와를 굽는 등 온갖 물력을 모두 관청 물자로 하며, 실끝 털끝만큼도 백성을 괴롭히는 일이 없으며 감사 이맹현(李孟賢)이 그 비용을 보조하여 옛터를 사용하되 그 규모를 더 크게 하여 대청 3칸을 세우고 전후에 툇마루가 있어 넓고 환하며 동서쪽으로 각각 헌(軒)이 있고 방이 있어 서늘하고, 더운 곳을 마련하였으며 행랑과 마구간과 창고도 모두 정돈되었다. 또 난간 동쪽에 못을 파고 연꽃을 심었으며, 제도를 전부 새롭게 하니 화려한 것이 한 도의 장관(壯觀)이 되었다.
그 후로 관서(關西) 지방에서 오는 이들이 모두 감사의 정사를 칭찬하고 또 관해(官廨)의 장대함을 극구 칭찬하였다. 서거정이 이 말을 듣고 가상하게 여겨 말하기를, “전일 내가 이 고을에 대한 불만이 이제 와서 전부 새롭게 되었으니, 이것이 어찌 사람을 만나야만 되는 일이 아니겠느냐.” 하였다. 얼마 후 감사가 글을 보내어 기문을 청하기에 내가 보니 이때에 수령(守令)이 된 이들이 대부분 그럭저럭 세월이나 보내며 관사를 마치 잠시 쉬어가는 여관처럼 여기며 한 목재와 한 돌이 무너져도 다시 수리하려 하지 않고 수수방관하다가 다 무너진 후에야 고치는데 무너진 다음에 고치니 그 폐단이 여러 배나 된다. 맹자(孟子)가 이르기를, “편안하게 하는 도리로 백성을 부리면 수고로워도 원망하지 않는다.” 하였다. 지금 감사가 폐지되고 무너진 것을 수백 년 후에 고쳐 이룩하되 백성 부리기를 때에 맞추어 하는 도리를 다하니 어질고 능한 것이 예전의 태수보다 뛰어남이 어찌 만배나 되지 않는가. 일찍이 증남풍(曾南豐 송 나라 증공(曾鞏))의 말을 들으니 이르기를, “무릇 고을에서 유능한 수령 만나기가 어려우며 다행히 유능한 수령을 만나더라도 일을 일으키기가 어렵고 다행히 일을 일으키더라도 다음 사람이 폐지하고 무너뜨리지 않게 되기가 또 어렵다.” 하였다. 지금 황주에서는 다행히도 유능한 수령을 만나고 또 다행히 일을 일으키게도 되었는데 다만 알지 못할 것은 감사 이맹현을 이어 오는 이가 감사의 좋은 뜻을 저버리지 않을 수 있을까 하는 것뿐이다. 대저 춘추(春秋)의 필법(筆法)에 공사를 일으킨 것은 반드시 써서 칭찬하기도 하고 폄하하기도 하는 뜻을 표시하였다. 이에 서거정도 삼가 그러한 뜻을 본받아서 그 사실을 바로 써서 훗날에 오는 사람들에게 알려 주는 것이요, 감히 감사를 위하여 지나치게 칭찬함이 아니다.” 하였다.
『신증』 서목(徐穆)의 시에, “요동(遼東) 정벌하던 장병들 해골도 많이 버려졌으니 그 혼백이 아직도 창을 휘두르는 듯. 지난 일 아득하여 흐르는 물처럼 지나갔으니 혼 부르며 애도하는 노래 차마 부르지 못하겠네.” 하였다. ○ 천금 준마를 타고 백금 갖옷을 입고서 강개하게 동정(東征)하여 봉후(封侯)하기 바랐네. 이기고 지는 것이야 병가(兵家)에서 원래 정할 수 없는 것, 남아(男兒)가 한 몸 죽어 골짜기를 메웠다네. ○ 온갖 신령 분주히 앞을 인도하는데 하늘 위의 조서(詔書)가 바다 모퉁이에 비치네. 내가 바로 옥황(玉皇)의 향안리(香案吏)라, 산귀(山鬼)들이야 감히 야유하지 못하리. ○ 판서(判書)의 깊은 계책 가는 길 멈추려는데 극성(棘城)의 옛일을 조용히 들려 주네. 귀신이 지각이 있다면 원통함이 더욱 심하리니, 전생이 태평시대에 태어나지 못한 것 한하리.
○ 당고(唐皐)의 시에, “황해(黃海)로 달리는 길 해[程日]는 아직 저물지 않았는데, 동쪽 나라 사람들 왕래하며 사신을 기다리네. 소나무 가지 길에 드리우니 말이 자주 놀라고 버드나무 수풀을 이루었으니 까마귀 자기 좋겠네. 동생(董生)의 부(賦) 잘 짓던 것 생각나니, 부질없이 한(漢) 나라 사신 신선의 떼 배[槎]인가 의심하네. 내일 평양(平壤)을 지날 때에는 끝없는 긴 강에서 저녁놀을 보내리.” 하였다.
○ 사도(史道)의 시에, “하룻밤 사이에 눈꽃[雪花]이 갈 길에 가득하니, 새벽에는 하얗게 깔린 것 놀라겠네. 토끼는 바위 골짜기 생각하나 구멍을 못 찾고, 기러기는 물가로 지나다가 갈대밭 잃었으리. 숙맥(宿麥)은 소자(蘇子)의 글귀를 지을 만도 하고, 외로운 배는 섬계도(剡溪圖) 그릴 만하네. 가는 길 계산하니 점심에 생양관(生陽館)에 이르러, 직접 대 화로[竹爐]에 차를 끓이리.” 하였다. ○ 광원루(廣遠樓) 앞에 말을 쉬었는데, 송별하는 이 자리에 또 금술잔 드는구나. 국왕은 가는 길 머물게 하려는 뜻 많으나, 사신의 임금 그리워하는 마음을 어찌하리. 등잔 아래 한 항아리 밤 술자리 마련했는데, 말 앞의 쌍깃발은 빨리 가기 재촉하네. 바삐 삼한(三韓)땅을 왕래하다가 여가를 겨우 얻어 시를 짓노라.

【누정】 광원루(廣遠樓) 객사 동쪽에 있다. ○ 고윤(高閏)의 기문에, “천순(天順) 원년 정축(세조 1년) 중하(仲夏)에 명을 받들어 조선에 오니, 국왕이 우리 태조 고황제(太祖高皇帝)의 옛법을 준수하여 호조 판서 박원형(朴元亨)을 보내서 원접사(遠接使)로 나와서 맞이하였다. 황주에 도착하니 유사(有司)가 예법에 의거하여 잔치를 역관(驛館)에서 베풀었는데 술이 다 된 다음, 같이 온 사신 한림 수찬(翰林修撰) 진즙희(陳緝熙)가 웃으면서 그 왼쪽에 있는 누각을 가리키는데 광원(廣遠)이란 현판이 걸려 있었다. 이날은 석양이 서쪽에 내렸기 때문에 서운하지만 그냥 자고 이튿날 아침 옷깃을 바로하고 단정하게 앉아 있으니 마침 판서가 들어와서 접견하고, 드디어 끌고서 함께 누각에 올라갔다. 누각은 모두 3칸인데, 단청한 기둥과 날아갈 듯한 지붕에 겹 처마와 각도(閣道), 좌우쪽에 사다리를 설치하여 난간을 붙잡고 구부리고서야 올라가게 되었다. 누각 위에는 모두 선을 두른 자리가 깔려 있는데 깨끗하여 티끌 하나 없어서 항상 객이 올라와 노는 이가 있는 것 같았다. 누각 동북쪽으로는 산이 막고, 서남쪽으로는 트였는데 붉은 흙의 들판이 평평하고 넓어서 1만 마리의 말을 세워도 어디 있는지 알지 못할 지경이었다. 솔과 칡덩굴은 산 아지랑이를 띠어 울창하게 푸르며 벼와 삼[禾麻]은 비를 만나 무럭무럭 자라니 이것은 이 누각의 넓은 것이요, 저 길이 중국에 통하여 만리로 뻗어서 1만 리의 직공(職貢)을 수행하고 경하(慶賀)를 드리는데 자칫하면 해가 바뀌어서야 돌아오게 되며 한숨 쉬며 멀리 바라다보면 기러기는 날아 보이지 않고 구름이 깊으니 이것은 그 먼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 누각의 넓고 먼 것을 알면서도 그것이 이치에 있고 형적(形迹)에 있지 않음을 알지 못한다. 대개 물(物)이라는 것은 양(量)이 있는 것보다 더한 것이 없어 양이 아니면 받아들일 수 없으니 어찌 넓을 수 있으랴. 또 잡음[執]이 있음을 귀하게 여기니 잡음이 아니면 오래 갈 수 없으니 어찌 멀 수 있으랴. 그러므로 이 누각에 올라서 터득함이 있다면 그것은 반드시 일만 가지 이치를 한 몸에 모아서 사해 팔황(四海八荒)을 모두 내 문턱 안에 오게 하여 문장(文章)으로 발현하고, 사업으로 건설하여 천백 년이 지나도 없어지지 않아야만 거의 가깝고 작은 것과는 같지 않을 것이다.
내가 붓을 들고 글을 쓰려다가 보니 북쪽 산이 푸르게 홀로 솟아 높이 나는 형세가 있고, 여러 봉우리들이 그 뒤에 읍(揖)하고 서서 사모하여도 다가갈 수 없는 것이 꼭 우리들 사람 같은 점이 있는데, 아깝게도 내가 용렬하여 여기에 크게 얻지 못하고 떠나게 되었다. 훗날, 뜻을 같이하는 선비가 뒤를 따라 오르는 이가 있다면 마땅히 지금으로부터 옛날을 생각하고 물(物)을 보아서 회포를 일으킬 것이며, 그 형적만을 구경할 것이 아니라 힘써서 그 이치를 구한다면 이른바 넓고도 멀다는 것이 또 이 누각의 전유물만이 아닐 것이다. 그래서 여기에 기록하여 둔다.” 하였다.
○ 진감(陳鑑)의 시에, “말발굽 흰 구름 무더기를 밟아 들어가니, 우뚝한 층루(層樓) 여기 있구나. 멀고 가까운 밭들엔 벼, 수수 심어 있고, 이곳엔 티끌 붙을 땅 없네. 봉우리 머리에 해가 지니 새소리 이제야 고요하고, 소나무 위에 구름 돌아왔는데 학은 아직 오지 않네. 천고에 올라와 노는 이 강개(慷慨)한 생각 같으리, 시를 지으니 이내 몸이 중선(仲宣)의 재주에 부끄럽구나.” 하였다.
○ 진가유(陳嘉猶)의 시에, “첩첩 층층한 멧부리에 온갖 초목 무성한데 한 누각이 소쇄(瀟洒)하게 산을 마주 섰네. 여덟 창은 일천 숲의 빼어남을 한껏 당겨 들이는데, 사방 자리엔 한 점의 먼지도 없구나. 뜰안 나무에 바람 일어나니 까마귀 흩어져 가고, 옅은 황색(黃色)이 달 아래 걷히니 제비가 돌아오네. 가벼운 저 구름아, 시를 재촉하는 비 보내지 말라. 나는 자건(子建)의 재주 아니네.” 하였다.
○ 장령(張寧)의 시에, “높은 누각 푸른 산빛 사이에 높이 솟았는데, 경치가 멀리 트여 나그네의 얼굴 펴게 하네. 꽃다운 풀은 석양녘 하늘 밖의 길인데, 어지러운 봉우리는 남은 눈[雪] 바다 가운데 산이네. 연기가 들빛에 엉기니 촌락이 작아지고, 바람이 변방 소리[邊勢] 전하여 사냥한 기사(騎士) 돌아오네. 문득 생각건대 중국의 서울에는 봄이 바다 같으니, 봉래궁궐(蓬萊宮闕)에 오색구름이 한가하리.” 하였다.
○ 장성(張珹)의 시에 “행차가 잠시 쉬어 황주로 향하는 객과 함께 광원루에 오르네. 푸른 공중에 황학(黃鶴)을 불러 내릴 만하고, 청산은 흰 구름 뜨는데 걸리지 않네. 단청한 난간 굽이굽이에 일찍이 취해 놀던 곳, 옅은 황색(黃色) 드리운 발 걷어올리지 말라. 경국(京國 한양(漢陽))에서 한 번 밥 먹은 것도 잊을 수 없는데, 시를 지으려니 오히려 매추(枚鄒)에 부끄럽구나.” 하였다.
○ 김식(金湜)의 시에, “여기는 동방의 제일 고을, 대부분 좋은 경치 높은 누각 위에 있네. 일천 산에 비 지나니 하늘이 넓기도 하고, 일만 골짜기에서 구름이 오니 땅이 뜨려 하네. 신선이 취하여 돌아가니 바람이 물 같고, 미인이 노래를 끝내니 달이 갈고리 같구나. 올라와 구경하며 시 짓기 어렵다 한탄을 마소, 늙은 이 몸은 예전부터 추(鄒)가 성(姓)이 아니라네.” 하였다.
○ 기순(祁順)의 시에, “새벽 하늘 처음 개고 눈[雪] 무더기 쌓이니, 사면이 병풍인데 중간에 앉았네. 찬 기운 옥우(玉宇)에 스며드니 인간 지경 아니요, 맑기가 얼음병처럼 환하여 한 점의 티끌도 없구나. 난간을 의지해 웃으며 붉은 해가 가까이 오는 것 붙잡으려 하고, 발을 걷고서 한가롭게 흰 구름 오는 것 놓아 두네. 문장(文章) 태사(太史)가 좋은 글귀 남겼으니, 평생의 탁월한 재주 부끄럽지 않구나.” 하였다. ○ 사신이 말을 몰아 황도(皇都)를 떠났는데, 지쳐서 봄빛 찾아 누각에 오르기 익숙하다네. 성긴 수풀은 눈[雪]을 띠어 구슬꽃이 떨어지고 먼 멧부리 공중에 솟아 푸른 물결 떠 있네. 일만 경치는 분명하여 화보(畫譜)에 거둘 만한데, 술상 앞에 그저 앉아 시갈퀴[詩鉤]를 저버렸네. 이 나라 신하들 만나니 글하는 이 많구나. 도리어 동한(東韓) 나라가 노(魯) 나라 추(鄒) 나라에 가까운가 의심스럽네. ○ 푸른 안개 깊은 속에 그림단청 누각 솟았는데, 끝없는 풍경이 두 눈에 들어오네. 나는 티끌 자취는 산 앞에서 끊어지고, 먼 물의 근원은 하늘가에서 흘러오네. 갈석장성(碣石長城)은 한(漢) 나라 사기에 올랐고, 낙서 현상(洛書玄象)은 기주(箕疇)에서 출발했다네. 시를 쓰니 너무 거칠고 호방하다 말라, 이 내 가슴은 원래 9주(州)를 좁게 보네. ○ 금연시절(禁煙時節 한식절)에 한 번 누각에 오르니, 선들선들 가벼운 추위가 때늦은 갖옷[裘] 엄습하네. 이별을 느끼니 어찌 큰 잔 마시기를 사양하랴, 봄을 아끼니 답청(踏靑) 놀이가 좋구나. 송추(松楸) 만리 밖에 고향 생각이요, 풍우 천산(千山)에 나그네의 길 수심이네. 괴화(槐火)와 돌샘물은 글귀로 꿈에 드는데 깨고 나니 이 신세 황주에 있음을 놀라네.
○ 장근(張瑾)의 시에, “한 누각이 흰 구름 뭉치 위에 높이 솟았는데, 창호(窓戶)가 영롱하게 사면으로 열렸네. 눈[雪]이 주렴(珠簾)에 비치니 맑은 것이 그림에 들 만하고, 바람이 옥자리에 부니 깨끗하여 먼지가 없네. 수풀 꾀꼬리는 여기저기서 봄을 즐기며 가고, 강 제비는 쌍쌍이 새끼를 데리고 오네. 올라와서 구경하는데 더구나 좋은 천기 만났으니 읊으며 쓰노라고 시 재주[詩才] 부린들 어떠리.” 하였다. ○ 가는 비 분분하게 옥루(玉樓)에 뿌리는데, 소슬한 바람 선들선들 초피(貂皮) 갖옷에 오르누나. 난초를 쥐고 수계(修禊)하며 새 즐거움 맞이하는데, 곡수 유상(曲水流觴) 좋은 놀이 모였구나. 우는 새 한두 소리에 봄은 깊어가고, 나는 꽃 한 점에 객은 수심 더하누나. 송추(松楸)의 꿈 끊어져 고향이 아득하니, 도리어 황주를 가지고 황경(皇京)을 대신할꺼나.
『신증』 예전 누각이 퇴폐되었는데 목사 최세절(崔世節)이 다시 지었다.

관심정(寬心亭) 고을 남쪽 1리 송령(松嶺) 아래에 있는데, 동쪽으로 어초천(於草川)에 다다랐다. ○ 이첨(李詹)의 시에, “작은 정자가 흐르는 물 위에 섰으니, 마음이 자연히 허명(虛明)해지는구나. 저물녘 노을에 외로운 성이 멀어지고, 봄풀에 두 언덕이 질펀하네. 달이 뜨니 물결이 그림자를 움직이고, 바람이 지나가니 물이 소리를 남기는구나. 좋은 날에 신선 손님 따라와서, 마음대로 노닐며 세상 생각 씻어버리네.” 하였다.
【학교】 향교 고을 동쪽 5리에 있다. 역학당(譯學堂) 고을 남쪽 2리에 있다.
【역원】 경천역(敬天驛) 고을 남쪽 6리에 있다. 예전에는 고을 북쪽 30리에 있었는데 절령(岊嶺)의 길이 폐지되면서 여기로 옮겼다. 『신증』 김시습(金時習)의 시에, “동부(洞府)는 선경(仙境) 같고, 사람 사는 것은 무릉도원(武陵桃源) 같구나. 예법이 다르니 술상차림이 특이하고, 산이 첩첩하니 붉은 노을이 피어오르네. 보리 이랑에 가는 바람이 불고, 차 심은 언덕엔 따스한 기운 오르네. 가다가 머리 돌려 바라보니, 절령(岊嶺)이 푸르게 우뚝우뚝 섰네.” 하였다. 고석원(高石院) 고을 동쪽 25리에 있다. 인제원(仁濟院) 고을 동쪽 50리에 있다. 제중원(濟衆院) 극성(棘城)의 북쪽 2리에 있다. 보제원(普濟院) 고을 동쪽 60리에 있다. 저복지원(貯卜只院) 고을 북쪽 20리에 있다. 대제원(大濟院) 고을 북쪽 30리에 있다.
【교량】 어초천교(於草川橋) 봄여름에 비가 와서 물이 불으면 배로 건넌다. 흑교(黑橋) 고을 북쪽 25리에 있다. 저복지교(貯卜只橋) 저복지원 곁에 있다.
【불우】 심원사(深源寺) 여계산(餘界山)에 있다. 관음사(觀音寺) 고을 서쪽 평지(平地)에 있다. 송림사(松林寺)ㆍ송방사(松房寺) 모두 건지산(乾之山)에 있다. 대흥사(大興寺) 정방산에 있다. 망일사(望日寺)ㆍ관정사(觀井寺) 모두 천주산(天柱山)에 있다. 고정사(高井寺) 칠봉산(七峯山)에 있다.
【사묘】 사직단(社稷壇) 고을 서쪽에 있다. 문묘(文廟) 향교에 있다. 성황사(城隍祠) 고을 동쪽 2리에 있다. 여단(厲壇) 고을 북쪽에 있다. 『신증』 지금은 극성단(棘城壇)으로 옮겨서 합하였다. 극성제단 고려 때에 극성이 여러 번 병란을 겪어, 백골이 들판에 드러나 있기에 하늘이 음침하고 비가 오면 귀신이 원통함을 부르짖고 모여서 여기(厲氣 전염병)가 되어 점차로 번져가서 황해도 지역에 백성들이 많이 죽었다. 이 때문에 나라에서 매년 봄가을로 향축을 내려보내어 제사 드리게 하였다. 본조 문종 때에, 경기도까지 전염되니 왕이 근심하여 친히 글을 지어 관원을 보내어 제사 드렸다.
그 제문에, “이치는 순양(純陽)이 아니고 음(陰)도 있으며, 물(物)은 장생(長生)하지 못하고 죽음이 있다. 오면 반드시 가게 되고, 신(神)이 있으면 반드시 귀(鬼)가 있는 것으로 이는 원래 물에 의지하여 벗어날 수 없는 것이니, 어찌 여기(厲氣)라고 주(主)가 없겠는가. 정(情)이 없는 것을 음양이라 하고, 정이 있는 것을 귀신이라 하는데 정이 없는 것은 더불어 말할 수 없지만 정이 있는 것은 이치로 깨닫게 할 수 있다. 내가 생각하니, 물과 불은 사람에게 필요한 것이지만 혹 때로는 사람을 죽이며, 귀신은 사람을 이롭게 하는 것이지만 혹 때로는 사람을 해친다. 그러나 사람을 죽이는 것은 물과 불이 아니라 사람의 허물이며, 사람을 해치는 것은 귀신이 아니고, 사람의 잘못이다. 그러므로 춥고, 덥고, 비오고, 개는 것과 오미(五味)의 음식은 천지가 사람을 살게 하는 것이나, 사람들이 스스로 그 조화(調和)를 잘못하여 병의 근원이 생기게 되는 것이다. 때문에 귀신의 덕이 성하여 그 이치가 천지와 하나임을 알 수 있다. 지금의 여기(厲氣)는 실로 귀신의 장난이 아니요, 역시 사람들이 스스로 지은 재앙인 것이다. 그러나 한 사람[임금]이 허물을 지음으로 하여 전염병이 널리 번져서 여러 해가 되도록 그치지 않아, 죄 없는 백성이 잘못 걸려서 생명을 잃는 이가 그 얼마인지 모르니 어찌 귀신이 지나쳐서 옥과 돌이 함께 불타는 것이 아니겠는가. 내가 부족한 덕으로 외람되게 한 나라 신(神)과 사람의 주인이 되어서, 항상 한 물건이라도 편안함을 얻지 못할까 두려워하였는데 더구나 우리 백성들이 마구 전염병에 걸리는 것을 차마 보고만 있겠느냐. 이에 유사(有司)를 명하여 각기 그 소재지에서 정결한 땅을 택하여 단을 만들게 하고 조정 신하들을 나누어 보내어서 고기ㆍ술ㆍ밥ㆍ국으로 제사 드리며 다시 간곡히 타일러 너희들로 하여금 깨닫게 하노니, 너희들 귀신은 선(善)으로 선을 이을 것을 생각하여 불평하고 분한 기운을 거두어 생생(生生)하는 덕을 베풀지어다.” 하였다.

【고적】 철화폐현(鐵和廢縣) 고려 때에 철도(鐵島) 사람들이 육지로 나와서 고을 서쪽 30리 되는 곳에 거주하였는데 충숙왕(忠肅王)이 철화(鐵和)라 칭호하고 현(縣)으로 승격하며 감무(監務)를 두었다가 그 후에 없앴다. 본조 태조 5년에 다시 감무를 두었다가 태종 8년에 다시 없애고 본주에 속하게 하였다. 극성진(棘城鎭) 고을 남쪽 25리에 있다. 민간에서 전하기를 관군(官軍)이 홍건적(紅巾賊)을 여기서 방어하던 중 모두 적에게 섬멸되었다 한다. 행성(行城) 터는 정방산(政方山) 마루에서 박배포(朴排浦)에 이르는데 길이가 4만 3천 6백 59척이며 방수군(防守軍)이 있었다. 본조 문종 2년에 고쳐 돌성으로 쌓으니 길이가 5천 30척, 높이 7척이다. ○ 장성(張城)의 시에, “극성 성위에 작은 정자가 그윽하니 객과 함께 오르자 시야가 넓기도 하네. 뾰족뾰족한 두어 봉우리는 평지에 둘러 있고, 망망한 한 물은 하늘에 닿아 흐르네. 옛날엔 진지(陣地)에 속절없이 말 돌렸다고 들었는데, 지금은 주민들 모두 소를 풀어 놓았구나. 이로부터 성조(聖朝)에서 일통(一統) 사업을 이룩했으니, 무너진 담장, 퇴폐한 성루를 무엇 때문에 수리하리.” 하였다. ○ 길가에 어떤 이가 모정(茅亭)을 지었나, 흥에 겨워 올라 보니 생각이 엉기려 하네. 바다에 임했는데 파도 없이 만경(萬頃)이 푸르고, 산을 등졌으니 풀이 비쳐 발[簾]에 가득 푸르네. 황량한 성은 무너졌으니 다시 쌓아야 하는데, 옛일은 물어보아도 들을 곳이 없네. 천고의 흥망(興亡)은 이루어진 운수에 있으니, 시를 지어 지나는 곳 기념하네.
○ 김식(金湜)의 시에 “일찍이 금산(金山) 탄해정(呑海亭)을 올랐다가 큰 글씨는 이양빙(李陽氷)을 불러온 듯. 이별한 후로 머리털 먼저 흰 것 스스로 부끄러운데, 여기 와서 누가 눈이 더욱 푸를 줄 알았으리. 암곡(巖谷)에 휘파람 부니 지나가는 범이 없고, 해천(海天)에 노래 끝내니 용이 있어 듣네. 풍진(風塵)도 시서(詩書) 읽는 나라는 업신여기지 못하는데, 과거 보이는 것 오히려 옛법 지키네.” 하였다. ○ 관풍(觀風)하는 행차 가는 곳마다 그윽한 경치 찾는데, 어찌 번화(繁華)로 나그네의 눈을 어지럽히나. 세월이 기약 있으니 사람은 북쪽으로 가고, 강하(江河)는 계책이 없는데 물만 동으로 흐르누나. 전공(田公)은 강개히 병든 말[馬]를 거두는데,병상(丙相)은 조용히 헐떡이는 소를 묻는다네. 나는 몸에 따른 한 쌍의 보검이 있으니, 어찌 공업(功業)에 있어 옛 사람들 저버리랴.
○ 최숙정(崔淑精)의 시에, “옛날의 노한 도적 국경에 침입하니 맹렬한 불길이 언덕을 태우는 듯. 계속 몰아 며칠 사이에 성 아래 이르니, 요망한 기운 자욱하게 건곤(乾坤 천지)을 덮었네. 기문(期門 임금을 호위하는 군사)은 적을 맞아 기회를 그르쳤고 남군(南軍)이 낭패하자 오랑캐 말소리[胡語]가 시끄러웠네. 수십만 명 하루아침에 섬멸되니 남은 군사 사면으로 흩어져 패해서 달아났네. 귀하고 천한 이들 다 함께 백골(白骨)이 되니, 원통한 기운이 맺혀서 음운(陰雲)이 뭉쳤네. 슬픈 바람 우수수 지금까지 부는데, 옛 성이 푸른 산부리에 처량하네. 시를 던져 장한 넋을 조상하려 하니, 붓끝으로 천고의 원한을 풀어볼꺼나.
『신증』 이세인(李世仁)의 시에, “서풍에 지친 나그네 누대에 올랐는데, 장해(瘴海) 수운(愁雲)에 하늘이 저물었네. 성곽은 무너지고 두어 치첩(雉堞)만 남았는데, 흥망은 자취 없이 몇 천 년 되었나. 마음 아파 떨어진 눈물 두 소매가 젖는데, 제사 드리고자 하나 빈 주머니엔 돈 한 푼이 없구나. 읊기를 끝내고 태평시대 만난 것을 자랑하노니 뽕밭ㆍ삼밭 여기저기 밥짓는 연기 일어나네.” 하였다.
○ 남곤(南袞)의 시에, “산세(山勢) 뻗어나가 바다 모퉁이 둘렀는데, 굶주린 까마귀는 옛 수자리[戌]에, 숲은 하늘에 닿았네. 노는 사람 성첩에 의지하여 세 장수[三帥]를 슬퍼하는데, 돌부처는 말없이 백년을 지냈구나. 풀숲 장기[茅瘴] 일어나자 구름이 먹과 같으니, 국상(國殤)을 제사하는 곳에 종이로 돈을 만들었네. 유유(悠悠)히 다함없는 흥망의 한(恨)은 들 밖에 쓸쓸하게 엷은 연기 일어나네.” 하였다.

발산행성(鉢山行城) 돌로 쌓았는데 주위가 7백 척이요, 높이 10척이다. 심원사남점행성(深源寺南岾行城) 돌로 쌓았는데 주위 2천 5백 척이요, 높이 10척이다. 여계산성(餘界山城) 주위가 3백 5보(步)인데 안에 우물ㆍ샘 다섯 군데가 있다. 사인암동성(舍人巖東城) 고을 동쪽 25리에 있다. 돌로 쌓았는데 주위가 6백 70척이요, 높이 10척이다. 서성(西城) 고을 남쪽 25리에 있다. 돌로 쌓았으며 주위 3백 30척, 높이 10척이다. 덕월산성(德月山城) 고을 동쪽 2리에 있는데 흙으로 쌓았다. 주위 5천 3백척이요, 높이 7척이다. 월라산성(月羅山城) 돌로 쌓았는데 주위 6백 50척이요, 높이 10척이다. 단림역(丹林驛) 고을 남쪽 10리에 있다. 신로역(新蘆驛) 고을 안에 있다.
옛 동선역[古洞仙驛] 지금은 봉산(鳳山)으로 옮겼다. ○ 고려조 의종왕(毅宗王) 22년에 행차를 황주 동선역에 머무르고 벽파정(碧波亭)에 잔치하며 또 배를 남계(南溪)에 띄우고, 밤이 되도록 잔치를 즐기고, 악공(樂工)과 잡희인(雜戲人)들에게 백금(白金)을 하사하였다. ○ 고종 18년에 몽고 원수 살례탑(撒禮塔)이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침입하니 왕이 3군(軍)을 보내어 막게 하였다. 동선역에 주둔하여 마침 날이 저물었는데 척후병이 보고하기를 적이 없다고 하여 3군이 안장을 풀어놓고 편히 쉬는데 몽고 군사 8천 명이 돌격하여 오자 장군 이자성(李子晟) 등이 목숨을 걸고 적을 막아 싸웠다.
○ 김극기(金克己)의 시에, “우연히 운수굴(雲水窟)을 지나다가 좋은 경치 탐내어 오래도록 머무네. 올올(兀兀)한 모습 중성(中聖)인가 의심되는데, 표표(飄飄)한 기분 신선된 것이 아닌가. 꽃이 있어 코에 향기 풍기는데, 마음 밭[心田]을 거칠게 할 가시가 없네. 발을 걷어올리고 길게 휘파람 부니, 그윽한 회포가 다시 시원해지네.” 하였다. ○ 나무와 돌은 서로 어울리고, 풍연(風煙)은 연접해 있구나. 병 속에서 일월을 찾고, 지상(地上)에서 신선을 찾네. 물은 복사나무 심은 동구[桃源]에서 나오고,구름은 살구나무 심은 밭을 봉해 있네. 혹시라도 뜰 아래 아전들이 이 세상 버리고 표연히 신선되어 갈까 의심되네.” 하였다.

【명환】 【고려】 이위(李瑋) 선종(宣宗)조에 부사(副使)가 되었는데, 청렴하고 근면하여 백성을 잘 보살피기로 알려졌다. 문극겸(文克謙) 의종 때에 판관이 되었다. 이지명(李知命)ㆍ최보순(崔甫淳) 모두 서기(書記)가 되었다. 함유일(咸有一) 판관이다. 안경공(安景恭) 공민왕 조에 목사가 되었는데 백성을 잘 돌보고 은혜를 베풀어 유애(遺愛)가 있었다. 본조 김길통(金吉通)ㆍ강노(姜老) 모두 목사가 되었다.
【인물】 【고려】 김정순(金正純) 천품이 용맹스럽고 활쏘고 말달리기를 잘하였다. 예종(睿宗)조에 윤관(尹瓘)을 따라 여진을 정벌하고, 인종(仁宗)조에 김부식(金富軾)을 따라 서경(西京)에서 반란을 일으킨 적을 토벌하여 모두 공이 있었다. 벼슬이 수태위 문하시랑 동중서문하평장사 상주국(守太尉門下侍郞同中書門下平章事上柱國)에 이르고 시호는 충양(忠襄)이다.
【제영】 하늘에 이어진 자라등[鰲背]은 천 길이나 솟았네 예겸(倪謙)의 망해시(望海詩)에, “물빛과 산빛이 한 번 함께 바라보이니 이 내 몸 지금 해동(海東)에 있구나. 하늘에 이어진 자라등은 천 길이나 솟았고, 땅을 가르는 고래 물결은 만 리에 통했네. 뗏목을 타고 직녀성(織女星)에 갔다고 부질없이 말하나, 모름지기 말을 타고 바람을 맞이하자. 평생에 운몽(雲夢)을 8, 9개 삼켰더니, 오늘의 흉금(胸襟)이 배나 더 웅장하네.” 하였다. 일만 집 울타리 황주를 둘렀네 앞사람의 시에, “다만 청산을 가지고 성곽을 대신하니 일만 집 울타리가 황주를 둘렀네.” 하였다. 절령(岊嶺) 서쪽, 서해(西海) 머리로세 이색의 시에, “절령의 서쪽, 서해 머리에 경계가 평양에 닿은 곳 여기가 황주라네.” 하였다. 산은 백리 성을 둘렀네 이양(李揚)의 시에, “물은 천 길 바다에 이어 있고 산은 백리 성을 둘렀네.” 하였다.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연혁】 순조(純祖)조에 황강현(黃岡縣)이라 강등시켰다가 후에 다시 승격시켰다. 고종 32년에 군으로 승격시켰다.

《대동지지(大東地志)》
【방면】 읍내 끝이 10리이다. 인제 동쪽으로 처음이 20리, 끝이 60리이다. 신교(薪橋) 동쪽으로 처음이 20리, 끝이 40리이다. 도치 동쪽으로 처음이 10리, 끝이 50리이다. 경천(敬天) 동북쪽으로 처음이 30리, 끝이 50리이다. 주남(州南) 처음이 5리, 끝이 30리이다. 심원(深源) 동남쪽으로 처음이 20리, 끝이 50리이다. 삼전적(三田赤) 서쪽으로 처음이 20리, 끝이 40리이다. 고정(高井) 북쪽으로 처음이 20리, 끝이 40리이다. 모성(慕聖) 서쪽으로 처음이 20리, 끝이 35리이다. 보리(甫里) 서북쪽으로 처음이 30리, 끝이 50리이다. 두암(斗巖) 북쪽으로 처음이 10리, 끝이 30리이다. 목곡(木谷) 북쪽으로 처음이 30리, 끝이 40리이다. 사등곡(沙等谷) 북쪽으로 처음이 10리, 끝이 20리이다. 분전(分田) 서쪽으로 처음이 10리, 끝이 30리이다. 주복 서북쪽으로 처음이 10리, 끝이 30리이다. 송림(松林) 서북쪽으로 처음이 40리, 끝이 60리이다. 청룡(靑龍) 서쪽으로 처음이 10리, 끝이 40리이다.
【성지】 읍성 둘레가 2천 8백 30보(步), 옹성(甕城)이 1, 치성이 7, 곡성(曲城)이 15, 포루(砲樓) 4, 우물이 10, 호지(壕池) 5, 해자(垓子)는 북쪽으로 꺾어져 남쪽으로 옹성 모퉁이에 이르러 족금계(簇錦溪) 가로 통한다. 정방산성(正方山城) 서쪽으로 30리 지점 봉산(鳳山) 경계이다. 밖으로는 평평하고 안으로는 험하며 뒤로는 준령(峻嶺)이 누르고, 앞으로는 큰 들판을 대하였으며, 왼쪽으로는 동선(洞仙)과 이어 있고, 오른쪽으로는 극성(棘城)을 가로질렀는데, 가장 경치가 좋은 곳을 차지하였다. 인조 14년에 쌓았고 둘레는 4천 8백 95보, 치성 7, 곡성 5, 우물 7, 호지 4, 대흥(大興)ㆍ안국(安國) 등 네 절[寺]이 있다. 수성장(守城將)은 목사(牧使)가 겸한다. 별장(別將)은 1인.
【영아】 병영 주(州)의 성내에 있다. 선조 26년에 처음으로 해주에 설치하였다가 이듬해에 본주(本州)로 옮겼으며, 30년에 다시 해주로 옮겼다가 34년에 본주로 반환하였다. 인조 14년에 영(營)을 정방산성으로 옮겼다가 19년에 본주로 반환하였다.
【관원】 황해도 병마절도사ㆍ중군(中軍) 병마우후(兵馬虞侯) ㆍ심약(審藥)이 각 1인. ○ 봉산(鳳山)ㆍ풍천ㆍ안악ㆍ곡산ㆍ평산 등 영(營)과, 정방ㆍ대현(大峴)ㆍ태백ㆍ장수(長壽)ㆍ구월(九月) 등 다섯 산성, 문성(文城)ㆍ선적(善積)ㆍ동리(東里)ㆍ산산(蒜山)ㆍ소이(所已)ㆍ위라(位羅)ㆍ문산(文山) 등 7진(鎭)을 관장한다.
【진보】 혁폐 흑교진(黑橋鎭) 북쪽 20리 지점에 있다. 숙종 4년에 설치하고, 8년에 산산진(蒜山鎭)으로 옮겨 합하였다.
【봉수】 고매치(古每峙) 동남쪽으로 15리 지점에 있다.
【창고】 고(庫) 7, 읍창ㆍ영창(營倉) 모두 성내에 있다. 외창(外倉) 황사포철(荒沙浦鐵)에 있다.
【역참】 혁폐 단림역(丹林驛) 남쪽으로 10리에 있다. 장녕역(長寧驛)ㆍ기발(騎撥) 관문참(官門站)ㆍ저복참(貯卜站).
【목장】 용양장(龍驤場) 《고려사》에 실렸다. 철도장(鐵島場) 본조 성종조 때 풍천 석도(席島)에 옮겼다.
【진도】 청룡진(靑龍津) 안악으로 통한다. 다미진(多美津) 서쪽으로 35리에 있는데 용강(龍岡)으로 통한다. 마상진(馬尙津) 강서(江西)로 통한다. 이상은 모두 작은 길이다. 오초천교(於草川橋) 가물면 다리가 되고 장마 지면 배가 된다. 흑교(黑橋) 북쪽으로 25리 지점에 있다. 위의 두 곳은 남북 대로(大路)이다.
【토산】 지황(地黃)ㆍ배ㆍ갈대ㆍ쌀새우 품질이 좋다.
【누정】 벽파정(碧波亭)ㆍ태허루(太虛樓)ㆍ월파루(月波樓)ㆍ죽루(竹樓)ㆍ태고정(太古亭).
【사원】 백록동서원(白鹿洞書院) 선조 무자년에 세우고 경종(景宗) 신축년에 사액하였다. 주자(朱子)ㆍ김굉필ㆍ이이 모두 문묘 편에 보인다.

[주D-001]음사(淫祀) : 당연히 제사 지낼 것이 아닌 것을 제사 지내는 것이니 사전(祀典)에 없는 요괴(妖怪)한 잡신(雜神)을 섬기는 것이다.
[주D-002]백성 부리기를……도리 : 《논어》에, “백성 부리기를 때로써 하라.” 하였다. 농한기에 부역을 시키라는 말이다.
[주D-003]봉후(封侯) : 장수가 전공(戰功)을 이루면 후(侯)로 봉하였다.
[주D-004]동생(董生)의 부 : 명 나라 사신 동월(董越)이 〈조선부(朝鮮賦)〉를 지었다.
[주D-005]부질없이……떼배인가 의심하네 : 한 무제(漢武帝) 때에 장건(張騫)이 대하국(大夏國)에 사신으로 갔다가 떼배를 타고 황하(黃河)의 근원으로 거슬러 올라갔다가 하늘의 은하수(銀河水)에서 직녀성(織女星)을 보고 왔다는 전설이 있다.
[주D-006]숙맥(宿麥) : 보리는 지난해 심어서 금년에 수확하기 때문에 숙맥이라 한다.
[주D-007]섬계도(剡溪圖) : 진(晉) 나라 왕자유(王子猷)가 눈 오고 달 밝은 밤에 섬계(剡溪)에 있는 대안도(戴安道)의 생각이 나서 곧 배를 타고 밤새도록 갔다.
[주D-008]중선(仲宣) : 중선은 왕찬(王粲)의 자인데, 〈등루부(登樓賦)〉를 지었다.
[주D-009]시를 재촉하는 비 : 두보(杜甫)의 시에, “머리 위에 조각 구름이 검으니 아마도 비가 시(詩) 짓기를 재촉하는 것이네.” 하였다.
[주D-010]자건(子建)의 재주 : 조조(曹操)의 둘째 아들 식(植)의 자(字)가 자건(子建)인데 문장이 뛰어났다. 진(晉) 나라 사영운(謝靈運)이 말하기를, “천하의 재주가 한 섬[一石]인데 자건이 혼자서 여덟 말[八斗]을 차지하였다.” 하였다.
[주D-011]매추(枚鄒) : 한(漢) 나라 양효왕(梁孝王)의 문하(門下)에 매승(枚乘)과 추양(鄒陽)은 문장이 뛰어났다.
[주D-012]얼음병 : 옛 시(詩)에, “맑기는 옥병에 얼음 같네.[淸如玉壺氷]” 하는 구(句)가 있다.
[주D-013]시갈퀴[詩鉤] : 소동파(蘇東坡)의 시에, “시를 낚는 갈퀴[釣詩鉤]”라는 말이 있다. 시를 짓게 만드는 좋은 경치를 말한 것이다.
[주D-014]낙서현상(洛書玄象) : 우(禹)가 낙수(洛水)에서 거북이 지고 나온 글인 낙서(洛書)을 보고 구주(九疇)를 발견하였는데 그것을 기자(箕子)가 주 무왕(周武王)에게 말해 주었다 한다. 현상은 미묘한 상(象)이다.
[주D-015]답청(踏靑) : 청명일(淸明日 4월 5일 무렵)에 들에 나가 노는 것을 답청(踏靑)이라 한다.
[주D-016]괴화(槐火) : 청명(淸明)에 백관(百官)에게 신불[新火]을 나누어 주는데 괴목(槐木) 등의 나무를 뚫어서[鑽] 불을 취하였다.
[주D-017]오미(五味) : 신 맛[酸] 짠 맛[鹹] 단 맛[甘] 매운 맛[辛] 쓴 맛[苦]을 오미(五味)라 한다.
[주D-018]옥과 돌이 함께 불타는 것 : 《서경(書經)》에, “곤강(崑崗 옥이 나는 산)에 불이 붙으면 옥과 돌이 함께 탄다.[玉石俱焚]”는 말이 있다. 이것은 좋은 것 나쁜 것이 함께 화(禍)를 당한다는 뜻이다.
[주D-019]이양빙(李陽氷) : 당 나라 때 전서(篆書)를 잘 쓰던 사람이다.
[주D-020]눈이 더욱 푸를 줄 알았으리 : 진(晉) 나라 완적(阮籍)이 눈을 희게도 뜨고 푸르게도 뜨는데 마음에 맞지 않는 사람에게는 흰 눈[白眼]으로 보고, 뜻에 맞는 사람에게는 푸른 눈[靑眼]으로 보았다.
[주D-021]관풍(觀風)하는 행차 : 왕명(王命)을 받고 지방에 순찰하는 것을 관풍(觀風)이라 한다. 그것은 풍속을 관찰한다는 뜻이다.
[주D-022]병든 말을 거두네 : 전자방(田子方)ㅣ 나갔다가 버려진 말을 보고, “부려 먹다가 늙엇다고 버리는 것은 도리가 아니다.”하고 그 마을 거두어 자기 집으로 왔다.
[주D-023]병상(丙相)은……소를 묻는다네 : 한(漢) 나라 승상(丞相) 병길(丙吉)이 밖에 나갔다가 길가에 사람들이 싸워서 죽어 있는 것을 보고도 묻지 않고 지났는데 사람이 소를 쫓는데 소가 헐떡이며 혀를 내밀고 있는 것을 보고는, “이 소가 몇 리[幾里]나 쫓겨 왔는가.” 물었다. 어느 사람이 그에게 묻기를, “사람이 싸워 죽은 것은 묻지 않고 헐떡이는 소를 묻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하니, 그는 “사람이 싸워 죽은 것은 장안령(長安令)의 소관이지마는 지금 봄철에 소가 헐떡이는 것은 그것이 계절의 기운 때문이라면 음양이 고르지 못한 것이니, 음양을 조화(調和)하는 것은 승상(丞相)의 책임이다.” 하였다.《漢書》
[주D-024]치첩(雉堞) : 성(城) 위에 구멍을 뚫어 적을 향해 쏘는 곳이다.
[주D-025]세 장수[三帥] : 안우(安祐)ㆍ김득배(金得培)ㆍ이방실(李芳實)이 홍건적(紅巾賊)을 쳐서 공을 이루었으나, 김용(金鏞)의 꾐에 빠져 원통하게 죽었다.
[주D-026]병 속에서……찾고 : 한(漢) 나라 비장방(費長房)이 여남시(汝南市) 누상(樓上)에서 보니 한 노인이 낮에는 약을 팔다가 저물면 병 속으로 뛰어 들어가는 것이 보였다. 그 노인을 찾아가서 간절히 청하여 함께 병 속에 들어가 보니, 일월이 밝고 신선이 사는 별세계였다.
[주D-027]물은……나오고 : 진(晉) 나라 때에 무릉(武陵)의 한 어부(漁父)가 배를 타고 물을 올라가 산속으로 들어갔더니, 수원(水源)이 막다른 곳에 한 구멍이 있었다. 그리로 들어간즉 안에는 복숭아 나무가 많이 심어져 있는 들이 있고 촌락이 있는데 수백 년간 세상과는 통하지 않았다고 한다.
[주D-028]구름은……봉해 있네 : 삼국 시대에 동봉(董奉)이 여산(廬山)에 숨어 살면서 남의 병을 치료하여 주고는 돈은 받지 않고 살구나무를 심어 달라 하였는데 수년 만에 십만 주(十萬株)가 되었다.
[주D-029]유애(遺愛) : 수령(守令)이 착한 정치를 하여 그가 떠난 뒤에도 백성이 잊지 않고 그리워하는 것을 유애(遺愛)라 한다.
[주D-030]자라등[鰲背] : 동해(東海) 가운데 떠다니는 산이 있었다는데 상제(上帝)가 자라를 시켜 머리로 그 산을 이고 있게 하였다 한다.
[주D-031]평생에……삼켰더니 : 사마상여(司馬相如)의 〈자허부(子虛賦)〉에, “제(齊) 나라는 동쪽에 큰 바다가 있어 가슴에 운몽(雲夢 초(楚)의 큰 못) 8, 9개를 삼켜도 걸리지도 않는다.” 하였는데 여기서는 자기의 흉금이 넓은 것을 말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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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원잡기 제1권

서거정(徐居正) 저(著)

○ 일찍이 상고하건대, 당요(唐堯) 원년(元年) 갑진년 으로부터 홍무(洪武 명 태조 연호) 원년 무신년까지가 총 3천 7백 85년이며, 단군(檀君) 원년 무진년으로부터 우리 태조(太祖) 원년 임신년까지가 역시 3천 7백 85년이니, 우리나라 역년(歷年)의 수가 대개 중국과 서로 같다. 제요(帝堯)가 일어나자 단군이 일어났고, 주 무왕(周武王)이 나라를 세우자 기자가 봉해졌으며, 한(漢) 나라가 천하를 평정하자, 위만(衛滿)이 평양으로 왔고, 송 태조(宋太祖)가 장차 일어날 때에 고려 태조가 이미 일어났으며, 우리 태조가 개국(開國)한 것도 명 태조 고황제(明太祖高皇帝)와 같은 시대이다.
○ 옛 기록에 이르기를, “단군이 요(堯)와 같은 날에 즉위하여 우(虞) 나라와 하(夏) 나라를 지나 상(商) 나라 무정(武丁) 8년 을미년에 이르러 아사달산(阿斯達山)에 들어가서 신(神)이 되었는데, 향년(享年)이 1천 48세이다.” 하였다. 당시의 문적(文籍)이 전하지 않아서 그 참과 거짓을 상고할 수 없으나 지금까지 그대로 전하여서 옛 기록을 적은 것이다.
나는 생각하기를, 요의 시대에는 인류 문화가 밝게 선양(宣揚)되었는데, 하(夏)ㆍ상(商)에 이르러 세상이 점점 나빠져서 임금이 왕위(王位)에 있음이 장구한 자도 40~50년에 지나지 아니하였다. 사람의 수명이 상수(上壽)는 백 년, 중수(中壽)는 60~70년, 하수(下壽)는 40~50년인데, 어찌 단군만이 1천 백 년에 가까운 수를 갖고 한 나라의 왕위에 있었으리오. 그 말이 거짓임을 알겠다.
또 이르기를, “단군이 아들 부루(扶婁)를 낳았으니, 이가 동부여왕(東扶餘王)이 되었다. 우(禹)임금이 제후(諸侯)들을 도산(塗山)에 모을 때에 이르러 단군이 부루를 보내어 조회하였다.” 하였으나, 그 말은 근거가 없다. 만약 단군이 오래도록 왕위에 있었고 부루가 도산의 모임에 갔었다면, 비록 우리나라의 문적에는 기재되지 않았다 하더라도 중국의 글에 어찌 한마디 말도 이를 기록한 것이 없었을까.
단씨(檀氏)가 서로 대를 전하여 나라를 이은 햇수가 1천 48년인 것은 의심이 없다. 문충공(文忠公) 권근(權近)의 시에 이르기를,
내가 들으니 천지가 아득한 날에 / 聞說鴻荒日
단군이 박달 나무가에 내려왔다 하네 / 檀君降樹邊
몇 대를 전하였는지는 알 수 없으나 / 世傳不知幾
지내온 햇수는 천 년이 넘네 / 歷年曾過千
하였으니, 이는 그 대를 전함과 역년(歷年)이 오래 되었음을 이른 것이다.
○ 기자(箕子)를 조선에 봉(封)한 것이 주 무왕(周武王) 기묘년이었으며, 뒤에 임금 준(準)에 이르러, 한고조(漢高祖) 병오년에 위만(衛滿)이 침입하여 배를 타고 남쪽으로 피하였는데, 기씨(箕氏)가 평양에서 도읍한 것이 8백 78년이다. 기준(箕準)이 금마군(金馬郡)에 도읍하여 이를 마한(馬韓)이라 하였다. 한사군(漢四郡)과 이도독부(二都督府)의 시대를 지나서 백제(百濟) 온조왕(溫祚王) 26년 무진년에 망하였으니, 이것이 또 1백 40여 년이다.
김부식(金富軾)의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백제왕이 마한을 습격해서 점령한 것만을 기록하였고, 기씨의 세계(世系)는 명백히 말하지 않았으니, 당시에도 필시 상고할 만한 것이 없어서일 것이다.
○ 《천운소통(天運紹統)》을 상고해 보니, 함허자(涵虛子)가 말하기를, “조선은 안동국(安東國) 동쪽에 있는데 옛 숙신씨(肅愼氏)의 땅이다. 무왕이 기자를 봉하여 제후를 삼아서 은(殷)은 뒤를 이어 중국의 번방(藩邦 속국)을 삼았는데, 주(周)가 망함으로부터 후한(後漢)까지 천여 년을 지나서 공손강(公孫康)에게 찬탈당하여 기자의 전통이 끊어졌다.” 하였다.
또, “기자가 중국의 5천 명을 거느리고 조선에 들어갈 때에, 시(詩)ㆍ서(書)ㆍ예(禮)ㆍ악(樂)ㆍ의(醫)ㆍ무(巫)ㆍ음양복서(陰陽卜筮) 등속과 온갖 공인(工人)과 기예(技藝)들이 모두 따라갔기 때문에, 반만(半萬)의 은인(殷人)들이 요수(遼水)를 건넜다 한 것이 이것이다.” 하였는데, 지금 상고해 보건대, 공손강의 찬탈이란 것은 근거가 없고, 5천의 은나라 사람들이 요수를 건너갔다는 것은 어느 글에서 나온 것인지 알지 못하겠다.
○ 함허자(涵虛子)가 또 말하기를, “기자가 조선에 이르니, 말이 통하지 아니하여 통역으로 말을 알았고, 시서(詩書)를 가르쳐서 중국의 제도를 알게 하였다. 그 결과 부자와 군신의 도리가 비로소 행해지고, 오상(五常)의 예의가 비로소 갖추어졌으며, 백공의 기예를 가르쳐서 의원ㆍ무당ㆍ음양복서의 술법이 비로소 있게 되었다. 예의와 농사짓고 누에치는 일로써 여덟 가지 법을 제정해서 백성을 교화하니, 한 해가 지나자 백성이 스스로 교화되었다. 사람을 죽인 자는 재물로써 속죄(贖罪)하고, 상해(傷害)한 자는 곡식으로 속죄하며, 도둑질한 자는 남자는 노예가 되고, 여자는 계집종이 되게 하니, 3년이 못 되어 사람들이 모두 교화되었다. 그리하여, 신의(信儀)를 숭상하고 유학(儒學)을 독실히 하여 중국의 풍속을 이룩하였으니, 성인의 교화라 이를 만하다. 병기(兵器)로써 싸우지 말기를 가르치기를, ‘하루의 난리는 10년이 지나도 안정되지 못하여 생민이 도탄(塗炭)에 빠져서 생업을 편안히 할 수 없다.’ 하였다. 이리하여 덕으로써 강포(强暴)함을 감복시키니, 이웃 나라에서 그 의(義)를 사모하고 서로 친하였으며 중국의 번방(藩邦)이 될 것을 맹세하였다. 이에 역대(歷代)로 중국을 친히 하고 신임하여 봉작(封爵)을 받고 조공(朝貢)을 끊이지 아니하였으며, 예의의 도(道)가 없어지지 않아서 의관과 제도가 모두 중국 각대(各代)의 제도와 같기 때문에, 시서예악(詩書禮樂)의 나라요, 인의(仁義)의 나라라 말하게 된 것은 기자가 창시한 것이다.” 하였다.
나는 생각하기를, 함허자의 논술이 《한서(漢書)》와 대략 같은데 우리 동국의 풍속에 세밀하였다. 역대의 여러 역사서와 국조의 《혼일지(渾一誌)》에 논술한 바는 그릇되고 근거가 없으니, 모두 잘못 들은 데에서 나온 것이다.
○ 우리나라의 분야(分野)는 옛 사람은 연도(燕都 북경)에 비겼었는데, 기사 연간에 혜성(彗星)이 연경의 분야에서 나오니, 일관(日官 천문을 보는 관리)이 아뢰기를, “이는 우리나라와 관계가 없습니다.” 하였으나, 세종께서 깊이 근심하여 이르기를, “우리나라는 연경과 분야가 같은데 어찌 관계가 없겠는가.” 하더니, 기사년 가을에 정통황제(正統皇帝)가 북정(北庭)에서 함몰되었고, 우리 세종대왕이 승하(昇遐)하였으니 연경과 분야가 같다는 말이 일리가 있을 듯하다.
○ 비류(沸流)와 온조(溫祚)가 부아악(負兒岳)에 올라서 살 만한 땅을 살펴보고, 비류는 미추홀(彌鄒忽)에 도읍하였고, 온조는 위례성(慰禮城)에 도읍하였다가 뒤에 남한산성(南漢山城)으로 옮겼으니, 곧 지금의 광주(廣州)이며, 또 북한산성(北漢山城)으로 옮겼으니 곧 지금의 한양(漢陽)인데, 그 중 명당(明堂) 터는 어느 곳인지 알지 못하겠다. 한양이 이씨(李氏)의 도읍 터가 된다는 것은 도선(道詵)의 도참(圖讖)에서 나타났는데, 이 때문에 고려에서 한양에 남경(南京)을 세우고 오얏나무[李]를 심었으며, 이성(李姓)을 가려서 부윤(府尹)을 삼고 왕도 해마다 한 번씩 순행하여 용봉장(龍鳳帳)을 묻어서 그 지기를 눌렀었다.
내 일찍이 《고려사(高麗史)》를 상고하건대, 한양 명당(漢陽明堂)은 임좌병향(壬坐丙向)의 자리라고 한 것만 쓰여 있고 그 땅은 분명히 말하지 않았는데, 지금 창덕궁(昌德宮)과 경복궁(景福宮) 두 궁궐의 정전(正殿)을 살펴보면 다 임좌병향이니, 억측하건대 고려에서 잡은 곳도 이 두 궁터에 벗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근래에 술사(術士) 최양선(崔揚善)이라는 이가 있어 승문원(承文院)의 옛 터가 바로 명당자리라 하고, 혹자는 또 종묘 낙천정(宗廟樂天亭) 자리가 대지(大地)라고 한 것은 다 식견이 얕고 근거가 없는 말이다.
○ 도선은 백제(百濟) 사람이다. 일찍이 도선의 어머니가 처녀로서 냇가에 놀다가 아름답고 큰 오이[瓜]를 얻어서 먹었는데 갑자기 아이 밴 것을 깨달았다. 아이를 낳으니 부모가 상서롭지 못하다 하여 냇가에 버렸더니 바야흐로 추울 때인데, 갈매기 떼 수천 마리가 날아와서 위아래로 싸고 덮어서 십여 일이 되어도 죽지 않으므로 부모가 이상하게 여겨서 거두어 길렀다. 장성하자 출가하여 입산수도하였는데, 하늘의 신선이 하강하여 천문ㆍ지리ㆍ음양의 비법을 전수하였다. 또 당(唐)에 들어가서 승려인 일행(一行)의 술법을 배웠으니, 세상에 전하는 도참은 모두 도선이 지은 것이다.
근간에 당본(唐本)인 《성요(星曜)》 한 질(秩)을 얻었는데, 그 책에 고려국사부(高麗國師賦)라 한 것이 있으니, 의논이 정미(精微)하여 도선이 아니면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그와 더불어 의논한 야율초재(耶律楚財)와는 시대의 거리가 너무 떨어지니, 이는 의심스러울 만하다. 어쩌면 고려국사라는 이가 도선의 술법을 비밀히 전하여 동방에는 전해 주지 아니하고 중국에 전해 주었는지도 모른다. 지금 영암현 도갑사(靈巖縣道岬寺)에 도선의 비(碑)가 있고 또 구림(鷗林 갈매기가 모였던 숲)이 있다.
○ 우리 동국의 필법(筆法)은 김생(金生)이 제일이고, 요학사 극일(姚學士克一)과 중 탄연(坦然)ㆍ영업(靈業)이 둘째가 되는데 모두 우군(右軍 왕희지(王羲之))를 본받았다. 이규보(李奎報)가 일찍이 평론하기를, 최충헌(崔忠獻)을 신품제일(神品第一)로 삼고, 탄연을 둘째로 삼고, 유신(柳紳)을 셋째로 삼았으니, 이는 권세가에게 아부한 것이요, 공정한 평론은 아니다.
원(元)으로부터 내려오면서 글씨를 배우는 이는 다 조맹부(趙孟頫)의 법을 세웠다. 선생(조맹부)의 수적(手跡)이 온 세상에 퍼져서 그 동국에 유전한 것을 내가 본 것만도 수백 본이 되었는데, 묵적(墨跡)이 새 것 같다. 그 보지 못한 것이 얼마인지 알지 못하겠으며, 온 세상에 흩어진 것이 또 얼마인지 알지 못하겠고, 조맹부로부터 지금까지의 시대가 오히려 멀며, 우리 동국은 한쪽 구석에 있으나 조맹부의 필적을 오히려 많이 얻어 볼 수 있었다. 당(唐)으로부터 진(晉)까지의 시대는 서로 멀지 않은데도 당의 문황(文皇)은 천자의 큰 힘으로써, 왕희지의 진적(眞跡)을 구할 때에 소이(蕭異)를 보내어 많은 고난을 겪은 뒤에 얻은 것은 무슨 까닭인가. 기사년 간에 학사인 예겸(倪謙)이 사신으로 와서 말하기를, “조공(趙公)의 필법을 중국에서는 보기 드물다.” 하였으니, 이는 우리나라에 많이 있는 것을 감탄한 것이다.
내가 생각하건대, 고려 충선왕(忠宣王)이 원 나라 조정에 들어가서 만권당(萬卷堂)을 짓고 날마다 당시의 명유(名儒) 6~7명과 더불어 조용히 논담(論談)하였으니, 조공도 그 중의 한 사람이었다. 우리나라 문유(文儒)로 이제현(李齊賢) 선생 같은 분도 그와 또한 많이 시종했다. 왕이 동으로 돌아올 때에 문적과 서화 만 첨(萬籤)을 싣고 왔으니, 조맹부의 수적이 동국에 많은 것은 이 때문이다. 우리 동국에서 조공의 필법과 정신을 얻은 이는 행촌(杏村) 이암(李嵒) 한 사람뿐이다.
○ 김생은 신라 원성왕(元聖王) 때 사람인데, 글씨를 잘쓰기로 유명하였다. 송(宋) 나라 숭녕(崇寧) 때에 고려의 학사 홍관(洪瓘)이 송나라에 들어갔었더니, 한림 대조(翰林待詔) 양구(楊球)와 이혁(李革)이 황제의 칙명을 받고 족자에 글씨를 쓰는데, 홍관이 김생의 행서와 초서 한 권을 보여주니, 두 사람이 크게 놀라며 말하기를, “오늘에 왕우군의 진적(眞跡)을 얻어 볼 줄은 생각지 못하였다.” 하였다. 홍관이 말하기를, “이것은 신라 사람 김생의 글씨이다.” 하니, 두 사람이 웃으며 말하기를, “천하에 왕우군을 빼놓고 어찌 이 같은 신묘한 필적이 있으리오.” 하였다. 관이 항변하였지만 끝내 듣지 않았었다.
근간에 조학사 자앙(趙學士子昻 조맹부)의 창림사비 발문(昌林寺碑跋文)을 보니 이르기를, “위의 글씨는 당 나라 때 신라의 승려 김생이 쓴 신라국의 창림사비인데 자획이 매우 법도가 있으니, 비록 당 나라 사람의 유명한 각본(刻本)이라도 이보다 크게 낫지 못할 것이다. 옛 말에, ‘어느 땅엔들 나무가 나지 않으리오.’ 하였으니, 과연 옳다.” 하였으니, 조학사의 이 발문을 보면 김생의 필법이 고금에 뛰어난 것을 알 수 있다.
○ 문창후(文昌侯) 최치원(崔致遠)이 당 나라에 들어가서 과거에 급제하고, 고병(高騈)의 종사관이 되어 황소(黃巢)를 토벌하였다. 그 격문(檄文 편지)에 이르기를, “천하의 사람이 모두 드러내어 죽이기를 원할 뿐만 아니라, 또한 땅속의 귀신들도 이미 은밀히 죽일 것을 의논한다.” 하니, 황소가 격서를 읽다가 이 대문에 이르자, 저도 모르는 사이에 평상에서 내려왔으니, 이로 인하여 이름이 세상에 드러났다. 지금 그 《계원필경(桂苑筆耕)》은 이해하지 못할 곳이 많으니, 당시의 기습(氣習)이 이 같은 것인지, 아니면 동방의 문체가 옛 법식과 같지 못해서인지 의심스럽다. 신라의 글이 지금에 전하는 것은 전혀 없고 다만 원효와 설총이 지은 한두 편이 있을 뿐이다. 내가 일찍이 신라에서 당 나라에 바친, 비단에 수놓은 오언고시(五言古詩)와 고려 을지문덕의 우중문(于仲文)에게 준 오언사구(五言四句)를 보니, 다 정묘한 경지에 이르렀다. 당시에 글이 능한 선비가 적지 않았으나 지금 만분의 일도 전하는 것이 없으니, 애석하도다.
○ 당 나라 학사 고운(顧雲)이 지은 최치원의 고향에 돌아감을 송별하는 시에
열두 살에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와서 / 十二乘舟渡海來
문장으로 중화에 이름을 떨쳤다 / 文章感動中華國
한 것이 있고, 또 어떤 사람이 준 글에,
무협 중봉의 나이(12세)에 베옷으로 중화에 들어갔다가 / 巫峽重峯之歲絲入中華
은화 열수의 나이(28세)에 비단옷으로 동국에 돌아갔다 / 銀河列宿之年錦還東國
한 것이 있으니, 이는 12살에 당에 들어갔다가 28세에 동국에 돌아갔다는 것이다.
동국에 돌아온 뒤의 이력과 행적은 상고할 바가 없다. 혹은 말하기를, “그때 마침 세상이 어지러워서 가야산 해인사에 숨어 중들과 한가롭게 놀았다.” 하였다. 공이 쌓은 영주(瀛洲) 등 삼산(三山)과 홍류동 봉하석(紅流洞鳳下石)에 그가 쓴 유적이 지금도 완연하나, 그의 세상을 마친 곳을 알지 못하겠으며, 세상에서는 신선이 되어 떠나갔다고 한다. 상고해 보면 당(唐) 희종(僖宗) 12년 을사년은 신라 헌강왕(憲康王) 11년인데, 최치원이 당 나라에서 황제의 조서를 받들고 돌아왔고, 10년이 지난 갑인년 진성왕(眞聖王) 8년에 시무(時務) 10여 조항을 올렸는데 왕이 가상하게 여겨 받아들였다.
이때는 후백제의 견훤(甄萱)이 완산(完山)에 웅거하여 반란을 일으킨 지가 이미 3년이 되는 해이다. 25년을 지나서 무인년에 고려 태조 왕건(王建)이 나라를 세웠고, 또 10년을 지나 정해년에 견훤이 신라에 들어가서 임금을 시해하였는데, 최치원의 나이 그때 70이 되어 크게 노쇠하지 않았을 것인데도 그 거취(去就)를 상고할 바가 없으니, 의심할 만한 일이다.
○ 사대(事大)의 표문(表文)과 전문(箋文)은 모름지기 정밀하고 간절하여야 한다. 고려 때에 요인(遼人)들이 압록강을 넘어 국경 삼으려 하니, 참정(參政) 박인량(朴寅亮)이 진정표(陳情表)를 지었는데, 이론과 실지가 명백 간절하였으므로 요제(遼帝)가 그 의논을 정지하였다.
명 태조(明太祖) 29년 하정(賀正)할 때에, 청성군(淸城君) 정탁(鄭擢)이 표문을 지었고, 광산군(光山君) 김약항(金若恒)이 전을 지었으며, 서성군(西城君)정총(鄭摠)과 길창군(吉昌君) 권근(權近)이 윤색하였는데, 황제가 보고 표문과 전문의 말이 모멸에 가깝다고 노여워하여 정총ㆍ김약항ㆍ권근 등을 불러 문책하였는데, 권근은 용서를 받아 돌아왔으나, 정총 등은 억류되어 돌아오지 못하였다.
고려의 지제고(知制誥) 최보순(崔甫淳)이 금 나라 황제의 등극(登極)을 하례하는 표문에 이르기를, “오마(五馬)가 강을 건너 진제(晉帝)가 새 임금이 됨을 나타내었고, 육룡(六龍)이 등극하니 주역(周易)의 대인(大人)을 봄과 부합한다.” 하였는데, 그때 금나라 군주는 형제가 나라를 다투었었으므로, 이러한 사실에 저촉된 것을 미워하여 그 칙명에, “진(晉) 원제(元帝)의 일을 인용한 것은 부당하다.” 하였다. 최보순은 이로 인하여 견책을 당하였으니, 최보순의 표사(表辭)가 묘하지 않은 것은 아니나, 요의 노여움을 일으킨 것은, 일을 인용함이 적절하지 못한 데에 말미암은 것이다.
○ 세상에 전하기를, “김부식(金富軾)이 정지상(鄭知常)의 재능(才能)을 질투하여 살해하였다.” 하나, 지금 《고려사》를 상고해 보니, 정지상이 묘청(妙淸)의 술책에 빠져서 그 우익(羽翼)이 다 제거되어 스스로 온전하기는 실로 어려웠으므로, 김부식이 사사로이 용서할 바도 아니었다. 또 본전(本傳) 및 여러 책에 한 마디도 억울하게 살해되었다는 기록이 없는데 세상에서 전하는 바가 이와 같음은 무슨 까닭인가. 근래에 김태현(金台鉉)의 《동국문감(東國文鑑)》을 상고해 보니 그 주(註)에 이르기를, “김과 정이 문자(文字) 사이에 감정이 쌓여 있었다.” 하였으니, 그렇다면 당시에 이미 이런 말이 있었던 것이다.
○ 김부식이 송나라에 들어가서 우신관(祐神館)에 가보니, 한 당(堂)에 여선상(女仙像)을 놓았는데, 관반(館伴 사신을 접대하는 사람) 왕보(王黼)가 말하기를, “이는 귀국의 신(神)인데 공 등은 아는가?” 하고 말하기를, “옛날 황제의 딸이 있었는데, 남편이 없이 아이를 배어서 사람들에게 의심을 받았다. 이에 바다를 건너가 진한(辰韓)에 이르러 아들을 낳으니, 해동의 첫 임금이 되고, 그녀는 지선(地仙)이 되어 선도산(仙桃山)에서 영생(永生)하는데, 이것이 그 여신상이다.” 하였다. 지금 상고하건대, 신라ㆍ고구려ㆍ백제의 시초에는 이런 황제의 딸이 있었다는 기록이 없고, 다만 동명왕(東明王)의 출생에 유화(柳花)의 일이 있었는데, 아마도 중국에서 잘못 알고 이런 말이 나온 것이 아닌가 한다.
○ 고려 말기에 인심이 다 우리 태조께 돌아왔으나, 목은 이색(李穡) 선생은 조금 다른 형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가 환왕(桓王 이성계의 아버지 자춘(子春) 환조로 추존됨)의 비문을 지은 것이 태조의 잠저(潛邸 왕이 되기 전) 때였는데, “주(周) 나라가 비롯 옛 나라이나, 천명이 새롭도다.”는 말을 인용하였으니, 어찌된 일인가. 도통(都統) 최영(崔瑩)이 죽을 때에, “이광평(李廣平 이인임(李仁任)의 봉호)이 항상 말하기를 ‘판삼사(判三司 태조)가 마땅히 나라의 주인이 되리라.’하더라.” 하였으니, 광평과 도통은 다 나라를 담당한 대신으로서 오히려 이런 말이 있었으니, 천명과 인심이 우리 태조에게 돌아간 것은 무진년(태조가 등극한 해)을 기다리지 않고서도 알 수 있는 일이었다.
○ 우리 태종이 경사(京師)에 갔을 적에 문황제(文皇帝)가 연왕(燕王)으로 있었는데 태종이 찾아가 방문하자 문황제가 말을 해보고 크게 기뻐하여 총애와 대우가 지극하였다. 태종이 환국함에 미쳐 우리 조정 사대부들이 태종께 묻기를, “천하가 크게 평정되겠습니까?” 하였는데, 그때는 고황제(高皇帝 태조)가 정무를 사퇴하고 건문제(建文帝)가 태자로 있을 때이다. 태종이 대답하기를, “내가 연왕을 보니 하늘의 태양 같은 의표와 용봉(龍鳳)의 자품이며 넓고 큰 도량이니, 번왕(藩王)으로 오래 있을 사람이 아니더라. 천하가 안정될 것은 알 수 없다.” 하였다. 얼마 안 되어 문황제가 연왕으로서 천자가 되니, 사람들이 모두 태종의 선견지명(先見之明)에 탄복하였다. 문황이 천자의 위에 오른 뒤에 우리 태종을 특별히 생각하고 매양 우리나라 사람을 보고 말하기를, “내가 일찍이 너희 나라의 임금을 보니 참으로 하늘이 낸 인물이더라.” 하였다.
○ 우리나라에서 명나라에 진공(進貢)하는 말을 태종이 친히 뽑아 고르는데 하열(下列)에 있는 말을 제 일등으로 하기를 명하니, 마부들이 모두 괴이하게 여겼는데, 말을 진상하자 문황이 보고 말하기를, “조선 국왕이 나를 사랑하는구나. 맨 먼저 올린 말이 참 좋은 말이다.” 하였다. 그런 뒤에야 성신(聖神)의 보는 바가 거의 같다는 것을 알았다. 태종이 근신(近臣)에게 말하기를, “준마(駿馬)를 고르는 것과 인재를 분별하는 것은 내가 옛 사람에게 양보하지 아니한다.” 하였다.
○ 세종은 천성이 학문을 좋아하여 합문(閤門)을 나가기 전에, 언제나 글을 반드시 백 번씩 읽으며, 《좌전(左傳)》과 《초사(楚詞)》는 다시 백 번을 더하였다. 일찍이 몸이 편치 못하면서도 글 읽기를 폐하지 아니하여 병이 점점 심해지니, 태종이 내시에게 명하여 갑자기 그 처소에 가서 책을 모두 거두어 오게 하였다. 이때 오직 구양수(歐陽脩)와 소동파(蘇東坡)가 손수 쓴 간찰문 한 권만이 병풍 사이에 남아 있었는데, 세종은 천 백 번을 읽었다. 왕위에 오르자 날마다 경연(經筵)에 나가서 읽지 않은 책이 없었으니, 밝고 부지런한 공이 백왕(百王)에서 뛰어나셨다. 일찍이 근신(近臣)에게 말하기를, “글을 읽는 것은 유익한 일이나 글씨 쓰고 글 짓는 것과 같은 일은 임금으로 유의할 필요가 없다.” 하였다.
만년에 노쇠하여 정무는 보지 않으면서도, 문학에 대한 일에는 더욱 마음을 두어 유신(儒臣)에게 명하여 부서를 나누어 여러 책을 편찬하게 하였으니, 《고려사(高麗史)》ㆍ《치평요람(治平要覽)》ㆍ《병요(兵要)》ㆍ《언문(諺文)》ㆍ《운서(韻書)》ㆍ《오례의(五禮儀)》ㆍ《사서오경음해(四書五經音解)》 등이 동시에 편찬되었는데, 다 왕의 재결을 거쳐서 이룩되었으며 하루 동안에 열람한 것이 수십 권에 이르렀으니, 가히 하늘의 운행과 같이 정성이 쉬지 않는다 하겠다.
○ 세종이 처음 아악(雅樂)을 제정함에 중추(中樞) 박연(朴煗)이 도와서 이룩하였다. 박연은 앉으나 누우나 매양 가슴에 손을 얹고 악기 치는 시늉을 하며, 입으로는 휘파람을 불어 음률(音律)의 소리를 내어가며 10여 년의 공을 쌓아 비로소 이룩하니, 세종이 매우 중하게 여겼다. 세종은 또 자격루(自擊漏)ㆍ간의대(簡儀臺)ㆍ흠경각(欽敬閣)ㆍ앙부일구(仰釜日晷) 등을 제작하였는데, 만든 것이 극히 정치(精緻)하였으며, 모두가 왕의 뜻에서 나온 것이었다. 비록 여러 공장(工匠)들이 있었으나 임금의 뜻을 맞추는 이가 없었는데, 오직 호군(護軍) 장영실(蔣英實)이 임금의 지혜를 받들어 기묘한 솜씨를 다하여 부합되지 않음이 없었으므로 임금이 매우 소중히 여겼다. 사람들이 모두 말하기를, “박연과 장영실은 모두 우리 세종의 훌륭한 제작을 위하여 시대에 응해서 태어난 인물이다.” 하였다.
○ 세종이 일찍이 사마온공(司馬溫公)의 《자치통감(資治通鑑)》에 유의하였는데, 그 주석이 정밀하지 못하고 구두가 명백하지 못함을 근심하여, 유신(儒臣)에게 명해서 많은 책을 널리 채집하여 일에 따라 소자쌍행(小字雙行)으로 간주(間註)를 달아서 열람하기에 편리하게 하였다. 이에 호삼성(胡三省)의 《음주(音注)》와 《원위(源委)》, 《석문(釋文)》, 《집람(集覽)》 등의 책을 의거해서 깎고 보태었으며, 미진한 곳은 다른 책을 상고하여 보충하였다. 혹 글이 이해하기 곤란한 곳은 본사(本史)의 전구(全句)를 주해하고, 혹은 글 구(句) 밑에 구자(句字)를 써서 구두에 편리하게 하였으며, 글자의 해석과 번음(飜音)에 이르러서도 상세하게 갖추어 있지 않음이 없으니, 모두가 왕의 재량으로 이룩한 것인데, 이를 《사정전훈의(思政殿訓義)》라 이름 하였다. 《강목통감(綱目通鑑)》도 그렇게 하였으니, 그 훈의(訓義)의 정밀함은 고금에 없는 바이다.
근래에 명나라에서 편찬한 《강목통감집람(綱目通鑑集覽)》을 보니, 엉성하고 빠진 부분이 자못 많고, 또 주해를 글 구(句) 밑에 넣지 아니하고 매권(每卷)의 끝에 붙여서 열람하기에 불편하였다. 나의 망령된 생각으로는, 마땅히 우리나라의 《훈의》를 제일로 쳐야 할 듯하다. 또 《훈의》가 이룩된 것은 정통(正統) 병진년 이었고, 《집람》이 이룩된 것은 근일의 일이니, 중국에서 《집람》을 편찬할 때에 우리나라의 《훈의》를 보았더라면 반드시 탄상하여 마지않았을 것이다.
○ 태종이 일찍이 주자(鑄字)를 만들었는데, 모양이 썩 좋지는 못하였다. 경자년에 세종이 이천(李蕆)에게 명하여 중국의 좋은 글자 모양으로 고쳤는데, 이전 것에 비해서 더욱 정교하였으며 이를 경자자(庚子字)라 한다. 갑인년에 세종이 명하여 좋은 음양자(陰陽字)의 모양으로 다시 주조하였는데, 극히 정교하였으며 이를 갑인자(甲寅字)라 한다. 경자자는 작고 갑인자는 컸는데 인쇄한 서책이 매우 아름답다. 세종 말년에 안평대군(安平大君) 이용(李瑢)이 쓴 글자 모양과 강희안(姜希顔)의 쓴 글자 모양으로 다시 주조하였는데, 인쇄한 서책이 점차 예전만 못하여졌다. 지금에 동자(銅字)는 다 공장(工匠)들이 훔쳐갔기 때문에 목활자(木活字)를 겸하여 사용하므로 글자의 크고 작은 것과, 새 것과 헌 것이 같지 아니하며 글줄이 고르지 못하니, 옛날 인쇄한 책에 비하여 크게 뒤떨어진다.
○ 세종은 문치(文治)에 힘씀이 만고에 뛰어나서 경자년에 처음으로 집현전(集賢殿)을 설치하여 문사(文士) 열 사람을 뽑아서 채웠으며, 뒤에 30명으로 증원하였다가, 또 20명으로 고쳐서 열 사람은 경연(經筵)의 일을 맡고, 열 사람은 서연(書筵)을 겸직하였다. 오로지 문한(文翰)을 맡아서, 고금의 일을 토론하고 아침저녁으로 연구하니, 문장 하는 선비가 성대히 배출되어 인재를 많이 얻게 되었다.
집현전 남쪽에 큰 버드나무가 있었는데 기사년과 경오년 사이에 흰 까치가 와서 집을 지었는데 새끼가 모두 흰 색이었다. 수년 사이에 요직에 있는 이는 모두 집현전에서 나왔다. 영상 정인지(鄭麟趾), 좌상 이사철(李思哲), 영상 정창손(鄭昌孫), 영중추원사(領中樞院事) 이계전(李季甸)ㆍ안지(安止), 판서 김조(金銚), 참판 김돈(金墩), 판중추부사 김균(金鈞)ㆍ김말(金末), 영상 신숙주(申叔舟), 좌상 권람(權擥), 참찬 박중손(朴仲孫), 영상 최항(崔恒), 판서 김담(金淡), 판중추부사 이석형(李石亨), 의정 윤자운(尹子雲), 판중추부사 어효첨(魚孝瞻), 참판 노숙동(盧叔仝), 판서 양성지(梁誠之)ㆍ성임(成任)ㆍ이극감(李克堪), 부윤 이명겸(李鳴謙), 판서 김예몽(金禮蒙), 영중추부사 노사신(盧思愼), 서평군(西平君) 한계희(韓繼禧), 찬성 홍응(洪應), 참찬 이승소(李承召), 참판 이파(李坡), 판서 이병(李苪), 부윤 조근(趙瑾)ㆍ강희안(姜希顔), 판서 강희맹(姜希孟), 부윤 최선복(崔善復), 참판 박첩(朴捷) 등이며, 불초하지만 나 또한 그 사이에 참여하였다. 또 박중림(朴仲林)ㆍ박팽년(朴彭年)ㆍ하위지(河緯地)ㆍ성삼문(成三問)ㆍ이개(李塏)ㆍ유성원(柳誠源) 등과 같은 이는 한때 현달하였는데, 계유년과 갑술년에 버드나무가 모두 말라 죽었으므로 어떤 이가 유성원에게 농담하기를, “화(禍)가 반드시 유(柳)로부터 시작할 것이라.” 하였는데, 유성원이 실패하였으니 그 말이 과연 들어맞았고 집현전도 얼마 후 없어지고 말았다.
○ 세종이 집현전을 설치하고 문학하는 선비를 모아서 수십 년 동안을 양성하여 인재가 많이 나왔으나, 오히려 아침에는 관청에 나가고 저녁에는 숙직하여 공부에 전념하지 못할까 염려하여, 나이가 젊고 재주와 덕행(德行)이 있는 몇 사람을 뽑아서 휴가를 주어 산에 들어가 글을 읽게 하고, 관청에서 그 비용을 공급하여 경사(經史)와 백가(百家), 천문(天文)과 지리(地理), 의약(醫藥)과 복서(卜筮) 등을 마음껏 연구하여 학문이 깊고 넓어 통하지 못하는 것이 없게 함으로써 장차 크게 쓰일 기초가 되게 하였다. 앞에는 문희공(文僖公) 신석조(辛碩祖), 승지 권채(權採), 직전(直殿) 남수문(南秀文)이 있었고, 뒤에는 문충공 신숙주가 있었으며, 그 밖의 사람도 모두 명사(名士)들이었다. 문종조(文宗朝)에는 남양군(南陽君) 홍응(洪應)과 한산군(韓山君) 이파(李坡)가 있었고, 보잘것없는 나도 여기에 선발되었으니, 참으로 일세의 거룩한 일이었다.
○ 문종이 세자가 되었을 적에, 희우정(喜雨亭)에 행차하여 동정귤(洞庭橘) 한 소반을 근신(近臣)에게 하사하고 손수 소반 위에 쓰기를
향기로운 향나무는 코에만 좋고 / 旃檀便宜鼻
기름진 고기는 입에만 맞는데 / 脂膏偏宜口
귀여울사 동정귤은 / 最愛洞庭橘
코에도 향기롭고 입에도 달도다 / 香鼻又甘口
하였는데, 자획이 용사(龍蛇)가 꿈툴 거리는 듯하고 광채가 빛났다. 내가 일찍이 그 글자를 임서(臨書)하여 간직하였는데 참으로 천하의 지보(至寶)이다.
○ 문종은 지혜가 밝고 정밀하였다. 집현전에서 일찍이 극성제문(棘城祭文 해주에 여귀(癘鬼)가 심하여 제사한 글)을 지어서 올렸더니, 문종이 보고 주묵(朱墨)으로 고치고 몇 마디 말을 썼는데 그 대략에 이르기를, “정(精)이 없는 것을 음양(陰陽)이라 이르고, 정이 있는 것을 귀신이라 이른다. 정이 없는 것은 더불어 말할 수 없으나, 정이 있는 것이면 이치로써 깨우칠 수 있다.” 하였고, 또 이르기를, “물과 불은 사람을 기르는 것이나 때로는 사람을 죽이는 일도 있으며, 귀신은 사람을 살리는 일도 있지마는 때로는 사람을 해치기도 한다.” 하여, 글이 자연적으로 이루어졌으니, 문장 하는 신하와 선비들이 미칠 바 아니었다.
○ 송(宋) 나라 인종(仁宗)이 죽으매, 영종황제(英宗皇帝)가 슬퍼하고 사모하니, 어떤 망녕된 자가 말하기를, “능히 신술(神術)을 부려서 죽은 사람을 다시 살린다.” 하므로 영종이 그 신술을 시험하기를 명하였으니, 효험이 없자 그 자가 말하기를, “태종이 인종과 함께 한가롭게 백옥루(白玉樓) 난간에 다다라서 모란꽃을 감상하시느라 인간에 다시 올 뜻이 없으십니다.” 하니, 영종이 그가 터무니없는 말을 하는 것임을 알고서도 크게 죄를 주지 않았다. 우리 세종의 초상(初喪) 때에 요망한 중이 와서 이런 술책을 아뢰므로 다른 시체에 시험하였으나 효험이 없었으니, 이치에 없는 거짓말이므로, 문종도 죄를 주지 아니하였다.
○ 세조(世祖)는 천성이 호매(豪邁)하여 평시에 의논이 개연(慨然)히 당 태종(唐太宗)을 흠모하고 한 고조(漢高祖)를 하찮게 여겼는데, 하루는 세조가 조용히 양녕대군(讓寧大君) 제(禔)와 더불어 고금의 제왕(帝王)을 의논하다가, 당 태종에게는 미칠 수 없다고 하니, 양녕이 대답하기를, “전하는 당 태종보다 크게 뛰어납니다.” 하니, 임금이 얼굴을 고쳐 말하기를, “아! 이 무슨 말씀입니까. 숙부의 말씀이 지나치십니다.” 하므로, 양녕이 말하기를, “당 태종은 한 조그만 일로 장온고(張薀古)를 죽였는데, 전하는 반드시 하지 않을 것입니다. 더구나 전하의 가법(家法)이 바른 것은 당 태종이 미칠 바가 아닙니다.” 하니, 세조가 빙긋 웃었다. 또 포주강(蒲州江)의 야인(野人)을 정벌하는 일을 언급하자 양녕이 말하기를, “옛 사람이 말하기를, ‘천균(千鈞)의 활[弩 쇠뇌]은 작은 쥐를 보고 발사하지 않는다.’ 하였으니, 원컨대 전하는 유의하옵소서.” 하였으니, 양녕의 소견이 역시 기이하였다.
○ 세조가 일찍이 조용히 나에게 말하기를, “그대는 유자(儒者)이니 예로부터 임금이 부처에게 절을 해야 하는가. 그대는 숨김 없이 말하라.” 하므로, 내가 대답하기를, “옛날 송 태조(宋太祖)가 상국사(相國寺)에 갔을 적에 불상 앞에서 향을 태우면서 마땅히 절을 해야 하는지 아닌지를 물었더니, 중 찬녕(贊寧)이 대답하기를, ‘현재 부처에게는 절하고 과거의 부처에게는 절을 아니 하는 것입니다.’ 하므로, 태조가 웃고 절을 하지 않았다 하였으니, 그렇다면 임금이 부처에게 절을 하지 않음은 정도(正道)이고, 절을 하는 것은 권도(權道)라 생각합니다.” 하니, 세조가 크게 웃었다.
내가 또 아뢰기를, “태종조(太宗朝)에 중국 환관 황엄(黃儼)이 제주에서 동불(銅佛)을 가져 왔는데, 그가 태종께 먼저 부처에게 절을 하고 뒤에 예를 행하게 하니, 태종께서 절을 하지 않으려 하였습니다. 하륜(河崙) 등이 청하기를, ‘황엄은 마음이 흉험(凶險)하여 트집하기를 좋아하니 권도를 좇아 부처에게 먼저 절을 하는 것이 마땅할까 합니다.’ 하니, 태종께서 이르기를, ‘저 부처가 만약 중국에서 왔다면 마땅히 황제의 명을 공경하여 절을 할 것이나, 지금 이 부처는 우리나라 제주에서 왔으니 어찌 절할 것이 있겠는가. 여러 신하들은 이를 말하는 사람이 없지만 내 생각에는 절을 하지 않는 것이 옳다.’ 하고, 끝내 절을 하지 않았습니다. 황엄이 굴복하고 드디어 예를 행하였으니, 거룩한 임금의 소견은 각기 같은 것입니다.” 하니, 세조가 또 웃었다.
○ 세조는 성품이 공손하고 검소하였다. 내가 일찍이 내전(內殿)에 들어가 보니, 감색(紺色) 무명에 범을 그린 갖옷을 입고 푸른 짚신을 신었으며, 갓끈은 순 무명으로 하였고 대나무 지팡이를 짚었으니, 비록 한 문제(漢文帝)가 옷을 빨아서 입었다는 일도 이와 같이 검소하지는 못할 것이다.
○ 고령군(高靈君) 신숙주는 영의정으로 있었고, 능성군(綾城君) 구치관(具致寬)은 새로 우의정이 되었는데, 세조가 두 정승을 급히 내전으로 불러들였다. 세조가 이르기를, “오늘 내가 경들에게 물을 것이 있으니 대답을 잘하면 그만이겠지만, 능히 대답하지 못하면 벌을 면치 못할 것인데, 경들의 생각은 어떠한고.” 하니, 두 정승이 공손히 대답하기를, “삼가 힘을 다하여 벌을 받지 않게 하겠습니다.” 하였다. 이윽고 세조가, “신 정승” 하고 불렀다. 신숙주가 곧 대답하였더니, 임금이 이르기를, “나는 신 정승(新政丞)을 부른 것인데, 그대는 대답을 잘못하였다.” 하고, 큰 술잔으로 벌주(罰酒) 한 잔을 주었다. 또 “구 정승” 하고 부르자, 구치관이 대답하였더니, 세조가 말하기를, “나는 구(舊) 정승을 불렀는데, 그대가 잘못 대답하였다.” 하고, 벌주 한 잔을 주었다. 임금이 또 부르기를, “구 정승” 하니, 신숙주가 대답하므로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구(具) 정승을 불렀는데 그대가 잘못 대답하였다.” 하고, 또 벌주를 주었다. 또 부르기를 “신 정승” 하니, 구치관이 대답하므로 말하기를, “내가 신(申) 정승을 불렀는데, 그대가 잘못 대답하였다.” 하고 또 벌주를 주었다. 다음에는 “신 정승” 하고 불렀더니, 신과 구가 다 대답하지 않았다. 또“구 정승” 하고 불러도 구와 신이 다 대답하지 않으므로 임금이 말하기를, “임금이 부르는데 신하가 대답하지 않는 것은 예가 아니다.” 하고 또 벌주를 주었다. 종일 이와 같이 하여 두 정승이 벌주를 먹고 극도로 취하니 세조가 크게 웃었다.
○ 판중추부사 어효첨(魚孝瞻)이 입술이 두터웠는데, 세조가 일찍이 희롱하기를, “어효첨은 순후(淳厚 순후(唇厚)와 음이 같다)하다.” 하였는데, 의정 윤사분(尹士芬)은 볼에 험이 있었기 때문에 문헌(文獻) 박원형(朴元亨)이 대답하기를, “윤사분은 시험(猜險 시험(腮險)과 음이 같다)합니다.” 하니, 세조가 크게 웃었다.
○ 세조는 음양지리의 글에도 모두 널리 통하여 그 옳고 그름을 밝게 보고 판단하였다. 일찍이 나에게 이르기를, “녹명서(祿命書 사주책)는 유학자가 궁리(窮理)하는 하나의 일인데 그대는 아는가.” 하므로, 내가 대답하기를, “일찍이 대강 보았습니다.” 하니, 세조가 이르기를, “그대가 가령서(假令書 사주책 풀이) 한 편을 지어보라.” 하므로, 내가 물러 나와서 여러 책을 모아 그 대요(大要)를 뽑아서 분류해 모으되, 범례(凡例)를 먼저하고 길흉신살(吉凶神殺)을 다음으로 하고 길흉론단(吉凶論斷)을 끝으로 하여 바쳤더니, 세조가 이르기를, “내가 녹명서를 숭상해서가 아니라, 가령서를 지어서 궁중 사람으로 하여금 가르쳐주는 수고가 없이 책을 펴보면 스스로 밝게 알도록 하고자 함이다.” 하였다.
또 나에게 이르기를, “경의 뜻에는 녹명이 어떠한가.” 하여, 내가 대답하기를, “갑년(甲年)과 기년(己年)의 정월은 병인(丙寅)이요, 갑일과 기일의 생시(生時)는 갑자(甲子)이니, 육십갑자를 가지고 추산하면 그 수(數)가 7백 20이 되니, 7백 20년을 가지고 7백 20일과 시(時)에 곱하면 사람의 사주(四柱)는 51만 8천 4백에서 다하고 다시 더할 수 없습니다. 천하의 인구가 성할 때에는 1천 5백~6백만에 이르니, 억조 중생이 어찌 51만 8천 4백에만 그치리이까. 지금 항간에서 사주는 꼭 같아도 화복(禍福)은 전연 같지 않은 자가 있으니, 직접 보고 들은 것으로 일찍이 한두 명이 있는데, 직접 보고 듣지 못한 자가 어찌 천백 명뿐이겠습니까. 또 거리가 천 리가 되면 풍(風)이 같지 아니하고 백 리가 되면 속(俗)이 같지 않은데, 사주는 중국과 사해(四海) 민족이 다름이 없으며, 중국은 공(公)ㆍ후(侯)ㆍ백(伯)ㆍ자(子)ㆍ남(男)ㆍ경(卿)ㆍ대부(大夫)ㆍ사(士)ㆍ이서(吏胥)ㆍ서인(庶人)의 구분이 있어서 작위와 품계의 높고 낮음을 일일이 다 구별할 수 있으나, 사해 민족의 풍속은 혹 금수와 같아서 귀천의 분별이 없으니, 이것이 어찌 51만 8천 4백 명의 녹명(祿命)에 매어서 그 같지 않음이 이같이 분분하겠습니까. 녹명의 글을 족히 믿을 것이 못 됩니다. 혹은 말하기를, ‘이순풍(李淳風)ㆍ이허중(李虛中)ㆍ소요부(邵堯夫)ㆍ서자평(徐子平) 등은 백발백중으로 맞았는데, 어찌 그 모두가 그르다 할 수 있겠는가.’ 하나 신의 생각으로는, 밝은 거울이 여기 있어서 물건이 와서 비추면 좋고 나쁜 것이 스스로 나타나는 것과 같이, 이순풍ㆍ소요부의 무리는 마음이 본래 허령(虛靈)해서 밝기가 거울과 같기 때문에, 사물(事物)이 그 앞에 이르면 길흉화복(吉凶禍福)이 저절로 나타나 속이지 못하니, 후세 술사들이 한갓 옛 사람의 글로써만 51만 8천 4백 명의 명수로써 천하 억조의 인명을 판단하는 것과는 같지 않습니다. 신은 녹명서는 믿을 수 없다 하겠습니다.” 하니, 세조가 웃고 이르기를, “자네 말이 옳다.” 하였다.
○ 예종(睿宗)이 처음 집정하여 대단한 각오로 훌륭한 정치를 이룩하려 하였는데, 얼마 되지 않아서 옥체(玉體)가 점점 위태하였다. 일찍이 손수 책 등에 쓰기를, 모두 예종이라 하였고, 또 이르기를, “죽어서 이 시호(諡號)를 얻으면 만족하겠다.” 하였는데, 몇 달이 못 되어서 승하하니, 군신들이 시호를 예종으로 올려 과연 성상의 뜻에 부합하였다. 아! 슬프도다.
○ 국재(菊齋) 문정공(文正公) 권부(權溥)는 임술년 임자월 기미일 기사시에 났는데, 점(占)을 치는 이가 보고, “수명이 길지 못하겠다.” 하였다. 그 아버지 문청공(文淸公) 탄(坦)이 말하기를, “만약 덕을 쌓으면 조금 연장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일찍이 천보산(天寶山)의 중에게 들었는데, 덕을 쌓는 조목이 세 가지가 있는바, 길 가운데로 다니지 말고, 흘러가는 물에 목욕하지 말고, 음식을 먹을 때 좋은 것을 가리지 않는다 하니, 너는 마땅히 힘쓸지어다.” 하였다. 국재가 종신토록 이 일에 명심하고 힘써서 잠시 동안이라도 어기지 않았는데 마침내 85세의 수(壽)를 누렸고, 지위가 일품에 이르렀으며, 한 가문(家門)에서 봉군(封君)한 이가 아홉 사람이나 되어, 복록(福祿)의 융성함이 고금에 거의 없었으니, 사람들이 모두 말하기를, “덕을 쌓은 효험이다.” 하였다. 그러나 익재(益齋) 선생이 지은 국재의 비문(碑文)을 보니, “무자(戊子)와 기미(己未)가 임사(壬巳)의 녹(祿)과 만나 서로 맞아 발복하였으니, 이는 천지조화의 묘함이다.” 하였으니, 점치는 이가 수명이 길지 못하다 한 것은 또한 무슨 이유에서인지 알 수 없다.
○ 포은(圃隱) 정문충공(鄭文忠公)은 평생에 지절(志節)이 있고 남을 이간(離間)하는 말이 없었는데, 어떤 이가 농담하기를, “자네는 세 가지 과실이 있는데 알겠는가.” 하였다. 문충공이 대답하기를, “말을 해 보라.” 하니, 말하기를, “남이 말하기를, ‘자네 친구들과 모여서 술을 먹을 적에 남보다 먼저 들어가서 맨 나중에 자리를 파하니, 술 마시는 것을 너무 오래한다.’ 하더라.” 했다. 문충공이 대답하기를, “진실로 그런 일이 있다. 젊어서 시골에 있을 적에 한 동이 술을 얻으면 친척과 친구들과 더불어 한 번 실컷 마시고 즐기고 싶었는데, 지금은 부귀(富貴)하여 자리에는 손님이 항상 가득하고 술통에는 술이 떨어지지 아니하니, 내가 어찌 조급하게 하겠는가.” 하였다. 그가 말하기를, “자네가 여색에 있어 담담하지 못하다고 남이 말을 하더라.” 하니, 문충공이 웃으며 말하기를, “여색을 좋아함은 인지상정(人之常情)이다. 공자께서도 말하기를, ‘아름다운 여색을 좋아하는 것과 같이 하라.’ 하셨으니, 공자도 여색이 좋음을 알지 못하였던 것이 아니다.” 하였다. 그가 말하기를, “자네가 중국산 물건을 무역(貿易)하는 데에 무심하지 못하다고 남이 말을 하더라.” 하니, 문충공이 낯빛을 변하여 말하기를, “내가 집이 가난하고 자녀가 많은데, 혼인의 예식에 으레 중국의 물건을 사용하니, 나도 시속을 면할 수 없다. 하물며 있고 없는 것을 교역함은 성인의 제도인데, 내가 무엇을 혐의하겠는가.” 하니, 그가 말하기를, “앞에 한 말은 농담일세.” 하였다.
○ 문충공(文忠公) 권근(權近)이 일찍이 경사(京師 남경)에 갔었는데, 길에서 비를 만나 역리(驛吏)의 삿갓을 빌렸다가 돌려주었는데도, 돌려주지 않았다고 트집하고 그 값을 요구하므로, 공이 다투지 아니하고 값을 주었다. 뒤에 어떤 역리가 전삼(氈衫)을 잃은 것을 공에게 씌워서 그 값을 요구하니, 공이 또 주려고 하였는데, 사신(使臣) 발라(孛羅)가 그 속임을 알고 우리를 국문하였다. 그제야 말하기를, “이분이 전에 다투지 아니하고 값을 주었기 때문에 감히 그렇게 한 것이요, 잃은 것이 아닙니다.” 하여, 발라가 그에게 벌을 주었다.
○ 권문충공이 일찍이 충주에 귀양가 있었는데, 계유년 봄에 태조가 계룡산에 행차하였을 적에 행재소(行在所 임금이 밖에 나갔을 때 임시로 머무는 곳)로 불려서 나갔었다. 하루는 태조가 호종하는 여러 신하들에게 은쟁반 하나를 주고 활을 쏘아 내기를 하게 하였다. 무신(武臣)들은 차례로 쏘았으나 모두 과녘을 명중시키지 못하였는데, 문충공은 평생에 한 번도 활을 잡아 보지 않았으나, 이날에는 한 화살에 명중시켜 은쟁반을 차지하였다. 사람들이 모두 말하기를, “활 쏘는 법으로써 그 덕(德)을 볼 수 있다는 것은 이를 두고 이른 것이다.” 하였다.
○ 삼봉(三峯) 정도전(鄭道傳)이 일찍이 새벽에 관아(官衙)에 나갔는데, 한 짝은 희고 한 짝은 검은 신을 신었다. 공석에 앉자 서리(胥吏)가 이를 고하였는데, 공이 내려다보며 한 번 웃고는 끝내 바꾸어 신지 않았다. 일을 마치고 말을 타고 갈 적에 웃으며 하인에게 말하기를, “너는 내 신이 한 짝은 검고 한 짝은 흰 것을 괴상하게 여기지 말아라. 왼쪽에서는 흰 것만 볼 것이요, 검은 것은 보지 못할 것이며, 오른쪽에서는 검은 것만 볼 것이고 흰 것은 보지 못할 것이니, 또한 어찌 해가 있겠느냐.” 하였으니, 그가 겉치레를 꾸미지 아니하는 것이 이러하였다.
○ 문정공(文靖公) 이색(李穡)이 경사(京師)에 갔을 적에 태조(太祖) 고황제(高皇帝)가 불러 보고 이르기를, “그대의 한어(漢語)는 나합출(納哈出)과 같구나.” 하였고, 이색의 외모가 훤출하지 못하다고 황제가 이르기를, “이 늙은이는 그림 그릴 만하구나.” 하였다. 색이 환국하게 되어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지금 황제는 속에 주장이 없는 사람이다.” 하였는데, 사람들이 모두 이색의 말을 실언이라 하였다. 지금 대명(大明)이 천하를 통치한 지 백여 년인데 여러 군주가 대(代)를 이어 나라를 지켜서 고황제가 남긴 제도를 한결같이 따르고 변경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그 규모와 제도가 한(漢)ㆍ당(唐)보다 크게 뛰어나니, 어찌 속이 없는 임금이라 할 것인가. 그러나 이색은 큰 유학자이니, 고황제의 큰 인물됨을 알지 못하였으면 어찌 지혜롭다 할 것인가.
억측하건대, 고황제는 처음 천하를 평정하고 영웅들을 통어하며 변강(邊疆)을 개척하여 대업(大業)을 창조하는 데에 정신을 두었으니, 그가 이색 같은 늙은 선비 보기를, 어린애가 곁에서 울고 웃는 것 같이 마음에 두지 않았을 것이며, 이색을 뜻도 고황제가 천자가 된 지 오래되지 않아 세상일을 알 수 없는데 외국 사람대접하기를 이와 같이 거만하고 업신여기는가 하여 이러한 말이 있었을 것이다. 한 광무(漢光武)가 마원(馬援)을 대접하듯 고황제가 이색을 대접하였다면, 반드시 이런 말이 없었을 것이다.
○ 문정공 조용(趙庸)은 학문이 정밀하고 깊었으며, 특히 성리학(性理學)에 조예가 깊었다. 성균관 대사성(大司成)으로 20여 년을 있었는데, 사람 가르치기를 게을리 아니하여 인재 양성에 공이 있었다. 대개 문장은 종이를 잡고 즉시 글을 썼는데 문장과 논리가 정밀하고 지극하였으며, 성품이 총민(聰敏)하여 한 번 보면 곧 기억하였다. 젊을 때에 한 서생(書生)이 원 나라의 책문(策問) 가려 뽑은 것을 구해 비장(祕藏)하고 있다는 것을 듣고 문정공이 보기를 청하였으나, 서생이 허락하지 않았다. 다른 날 다시 가서 청하니 서생이 사흘 동안만 빌려주었는데, 문정공이 한 번 보고 모두 기억하고는 약속한 날짜에 돌려주었다. 하루는 문정공이 그 서생과 같이 글방에 있으면서 책문(策問) 서너 편을 외웠는데 한 자의 착오도 없으니, 서생이 이를 우연히 익힌 것이라 하고, 여려 책문을 닥치는 대로 뽑아서 외우게 하여도 역시 이와 같이 하니, 서생이 말하기를, “공과 같은 분은 비록 장순(張巡)이라도 미칠 수 없다.” 하였다.
○ 문정공 맹사성(孟思誠)은 성품이 청백하고 소탈하며 단정하고 중후하여 의정부에 있으면서 대체(大體)를 지켰다. 공은 경자생(庚子生)인데 일찍이 장난으로 계묘계(癸卯契)에 들었었다. 어느 날 임금 앞에 있을 적에 임금이 공의 나이 몇인가를 물으므로 문정공이 경자생 이라고 대답하였더니, 조정에서 물러나오자 계중(契中)에서 동갑이 아니라고 제명되어 한때 웃음거리가 되었었다.
공이 천성으로 음률을 깨쳐서 항상 피리를 잡고 날마다 서너 곡조를 불고 문을 닫고 손님을 맞이하지 않았다. 공사(公事)를 아뢰러 오는 이가 있으면 사람을 시켜 문을 열고 맞이하였다. 여름에는 소나무 그늘에 앉아 있고 겨울에는 방 안 부들자리에 앉아 있었으며 좌우에는 다른 물건이 없었다. 일을 아뢰는 이가 가면 곧 문을 닫았다. 일을 아뢰러 오는 이들은 동구에 이르러서 피리 소리가 들리면 공이 반드시 있음을 알았다.
○ 문순공(文順公) 권홍(權弘)은 일찍이 문한(文翰)으로 이름이 드러났었고, 더욱 전서(篆書)와 예서(隸書)에 묘하였으며, 지위는 일품에 이르고 향년은 87세이다. 일찍이 남산 모퉁이에 집을 정하고 두개의 못을 파서 연꽃을 심었었는데, 복건(幅巾) 쓰고 여장(藜杖 명아주로 만든 지팡이)을 끌며 한가롭게 거니는 모양은 깨끗하여 신선과 같았다. 그가 해서로 쓴 헌릉비(獻陵碑)와 전서로 쓴 성균관 비의 글씨는 매우 좋다. 일찍이 세종조(世宗朝)에 상서하여 기자(箕子)의 사당에 비를 세우기를 청하였으니, 말이 자못 대체(大體)를 얻었다.
○ 정숙공(貞肅公) 박안신(朴安信)은 기국이 크고 도량이 넓은 인물이었다. 일찍이 문정공 맹사성과 대간(臺諫)에서 같이 일을 의논하다가 임금의 뜻에 거슬려서 사형을 당하게 되었는데, 문정공은 낯빛이 흙빛이 되고 경황이 없이 어쩔 줄을 몰라 하였으나, 정숙공은 낯빛이 태연자약하였다. 절구 한 수를 지었는데,
우리 임금이 간관을 죽인 이름을 얻을까 두렵 도다 / 恐君留殺諫臣名
하였다. 이 시를 종이와 붓이 없어서 사금파리로 땅에 그어서 글자를 쓰고, 눈을 부릅뜨며 옥리(獄吏)에게 말하기를, “마땅히 이 시를 상감께 아뢰라.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여귀(癘鬼)가 되어 너희들을 씨가 없게 할 것이다.” 하였더니, 태종이 듣고 노여움을 풀고 석방하였다.
그 뒤에 공이 일본에 사신으로 갔다가 돌아올 적에 해적을 만났는데, 해적이 칼을 빼어 들고 배 위로 뛰어들어서 행구(行具)를 약탈하니, 사람들은 손도 놀리지 못하였으나, 공은 걸상에 걸터앉아서 움직이지 아니하고 찬찬히 지휘하니, 해적이 두려워하여 감히 가까이 오지 못하였고 일행은 이에 힘입어 안전하였다.
○ 문정공 유관(柳寬)은 공정하고 청렴하여 비록 최상의 지위에 있었으나, 초가집 한 칸에 베옷과 짚신으로 생애가 담박하였다. 공무를 마친 여가에는 후생을 가르치기에 부지런하니, 제자들이 모여들었다. 와서 뵈려는 이가 있으면 고개만 끄덕일 뿐이요 성명은 묻지 않았다.
공의 집이 흥인문(興仁門) 밖에 있었는데, 그때 사국(史局)을 금륜사(金輪寺)에 개설하였으니, 그 절은 성 안에 있었다. 공이 역사를 편수하는 책임자가 되었는데, 일찍이 연모(軟帽)에 지팡이와 신을 갖추고 걸어서 다니며 수레와 말을 타지 아니하였다. 어떤 때는 청소년들을 데리고 시를 읊으며 오고가니, 사람들이 그 아량(雅量)에 탄복하였다. 그 절이 지금은 없어졌다. 일찍이 달이 넘도록 장마가 졌는데, 삼대처럼 집에 비가 줄줄 새었다. 공은 우산을 잡고 비를 가리며 부인을 돌아보고 말하기를, “우산이 없는 집은 어떻게 견딜꼬.” 하니, 부인이 대꾸하기를, “우산 없는 집에는 반드시 미리 방비가 있을 것입니다.” 하니 공이 껄껄 웃었다.
○ 문경공(文敬公) 성석린(成石磷)은 젊어서부터 뜻이 드높아 큰 절개가 있었다. 일찍이 양백안(楊伯顔)의 막하(幕下)가 되어 왜적을 방어하다가 군율(軍律)을 어기어 형(刑)을 당하게 되었다. 이때 공이 졸고 있었는데 꿈결에 어떤 사람이 고하기를, “공은 쑥대 관[蒿冠]을 쓸 것이니 근심할 것이 없다.” 하였다. 공이 스스로 풀이하기를, “쑥대 관은 쑥으로 머리를 싼다는 것이니 매우 상서롭지 못한 것이다.” 하였는데, 죽음을 면하고 제명(除名)되는 데 그쳤다. 그 뒤에 수상(首相)이 되어서 말하기를, “내 꿈에 호관(蒿冠)은 고관(高官)의 뜻이다.” 하였다.
소년 시절 4~5명의 동료들과 더불어 정방(政房)에 있었는데, 신돈(辛旽)이 뒷짐을 지고 곁에서 보다가 공을 가리키며 말하기를, “나중에 반드시 크게 현달할 것이니, 그 복록은 제군들이 미칠 바 아니다.” 하였는데, 마침내 그 말과 같았으니, 늙은 역적(신돈을 가리킴)도 사람을 알아보는 눈을 갖추었다 하겠다.
공의 나이가 60이었을 적에 그 어머니는 나이가 70이 넘었는데 병이 위독하여 눈을 감고 말을 못한 지가 며칠이 되었고, 약도 효험이 없어서 공이 향을 태우고 기도하며 슬피 부르짖다가 거의 기절할 지경에 이르렀는데, 조금 뒤 어머니가 깨어나 말하기를, “이게 무슨 소리냐.” 하니, 모시고 있던 사람이 놀라고 기뻐하며 대답하기를, “기도하는 소립니다.” 하니, 어머니가 말하기를, “하늘에서 사람을 보내어 궤장(几杖 안석과 지팡이)을 주며 말하기를, ‘아들의 정성이 이같이 지극하니, 이것을 붙들고 일어나라.’고 하더라.” 하고는 병이 곧 나으니, 사람들이 문경공의 효성이 지극함을 감탄하였다.
○ 양정공(襄靖公) 하경복(河敬復)은 본관이 진주다. 그 어머니가 꿈에 자라가 품속으로 들어오는 태몽을 꾸고 임신하여 그를 낳았으므로 어릴 때 이름이 왕팔(王八)이었다. 어려서부터 기운이 남보다 뛰어났었고, 갑사(甲士)로 숙위(宿衛)에 보임되어 궁문에 숙직하였는데 때마침 동짓날이었다. 상림원(上林苑 비원) 온실에서 가꾼 매화 몇 분(盆)을 궁문 곁에 옮겨 두려 할 적에, 공이 긴 가지 하나를 꺾어서 투구 위에 꽂았다. 이 책임을 맡은 이가 크게 놀라 꾸짖자, 공이 말하기를, “우리 집 울타리 가에 마소[馬牛]를 매는 것이 이 나무요, 꺾어서 땔나무도 하는 것인데 무엇이 귀할 게 있으리오.” 하고, 조금도 굽히지 않으니, 사람들이 모두 그의 거칠고 사나움을 비웃으면서도 그의 기개를 훌륭하게 여겼다. 무(武)에 능함으로써 발탁(拔擢)되어 크게 현달하였다. 일찍이 동북면(東北面)을 지킬 적에 야인(野人)이 3백 근이나 되는 강력한 활을 공에게 당겨보도록 청하는 자가 있었다. 공이 그들을 위하여 술상을 놓고 즐겁게 마시면서 또 말하기를, “이 활은 매우 잘 만들었다.” 하고는, 급히 궁수(弓手)를 불러서 그 모양과 같이 만들게 한 다음 몰래 사람을 시켜서 그 활을 불에 구워 힘이 조금 풀어지게 한 뒤에, 여유만만하게 활을 가득히 당기니, 야인들이 탄복하여 머리를 조아리며 뜰 아래로 내려가 절하였다.
○ 문숙공(文肅公) 변계량(卞季良)은 고집스러운 성품이었다. 선덕(宣德) 연간에 흰 꿩을 하례하는 표(表)에 ‘유자백치(惟玆白雉)’라는 어구가 있었는데, 문숙공이 말하기를, “자(玆)는 중행(中行 글자를 가운데 줄에 씀)으로 써야 한다.” 하니, 제공(諸公)들은, “성상(聖上)에 속(屬)한 것이 아닌데, 왜 중행이라 이르는가.” 하였으나, 문숙공은 자기 의견을 고집하였다. 제공들은 취품(取稟 임금에게 문의함)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였는데, 세종(世宗)께서는 제공(諸公)들의 의견을 옳다고 하니, 공이 다시 아뢰기를, “농사짓는 일은 남종[奴]에게 물을 것이요, 길쌈하는 일은 여종[婢]에게 물을 것입니다. 전하께서 나라를 다스릴 때에 매와 개를 데리고 사냥하는 일이라면 문효종(文孝宗)의 무리에게 묻는 것이 마땅하오나, 사명(詞命)에 이르러서는 노신(老臣)에게 위임하는 것이 마땅하오니, 다른 사람의 의견을 가볍게 따라서는 안 됩니다.” 하여, 세종이 부득이 그의 의견을 좇았다.
○ 정렬공 최윤덕(崔潤德)은 태어나자 곧 어머니가 죽고, 아버지 운해(雲海)는 변방(邊方)을 지켰기 때문에 그를 양육할 수 없었으므로 이웃에 있는 양수척(楊水尺)의 집에 부탁하여 키우게 하였다. 조금 장성하자 기운이 남보다 뛰어나고 굳센 활을 당겨서 단단한 물건을 쏘아 맞추었으며, 때로는 양수척을 따라 사냥하러 나가서 짐승을 많이 잡아오곤 하였다. 하루는 산중에서 가축을 먹이는데 큰 범이 별안간 숲 속에서 나와서 여러 짐승들이 놀라 달아났다. 공은 급히 말을 타고 활을 쏘아 한 발에 죽이고, 집에 와서 양수척에게 알리기를, “어떤 짐승이 무늬가 얼룩지고 그 크기가 엄청난 것이 있었는데, 그것이 무엇입니까. 내가 이미 쏘아 죽였습니다.” 하였다. 양수척이 가보니, 한 마리의 큰 범이었다. 이에 양수척은 그를 기이하게 여겼다.
가군(家君 필자인 사가(四佳)의 아버지 곧 서미성(徐彌性))께서 합포(合浦)를 지킬 적에 양수척이 최 공을 데리고 가서 뵙고 공을 칭찬해 마지않으니, 가군께서 이르기를, “마땅히 시험해 보겠다.” 하고, 같이 사냥하여 재주를 시험하니, 공이 좌우로 달리며 쏘아 맞히지 못하는 것이 없었다. 보는 이가 못내 칭찬하였으나, 가군께서는 웃으며 말하기를, “이 아이의 솜씨가 비록 빠르나 아직 무예(武藝)의 법을 알지 못한다. 지금 하는 것은 곧 사냥꾼의 기술이요, 무예의 좋은 재주라고는 할 수 없다.” 하시고, 곧 활을 쏘고 적을 막는 방법을 가르쳐서 마침내 명장이 되었다.
○ 익성공(翼成公) 황희(黃喜)는 도량이 넓고 커서 대신의 체통이 있었다. 정승의 자리에 30년이나 있었고, 향년(享年)이 90이었다. 국사(國事)를 의논하고 결정하는 데는 관대(寬大)하기에 힘쓰고, 평상시에 마음이 담박하여 비록 아들, 손자, 종의 자식들이 좌우에 늘어서서 울부짖고 장난을 하고 떠들어도 조금도 꾸짖어 금하지를 아니하며, 어떤 때는 수염을 잡아 뽑고 뺨을 쳐도 그대로 내버려두었다. 일찍이 보좌관을 불러 일을 의논하면서 막 책에 글씨를 쓰려 하였는데, 종의 아이가 그 위에 오줌을 누었으나, 공이 노여워하는 기색이 없이 손으로 닦아낼 뿐이었으니, 그 덕스러운 도량이 이와 같았다. 일찍이 남원(南原)에서 7년 동안을 귀양살이 하였는데, 문을 닫고 단정히 앉아서 손님을 맞이하지 아니하고, 손에는 운서(韻書 자전(字典)) 한 질(秩)을 갖고는 정신을 집중하여 볼 뿐이었다. 그 뒤에 비록 나이가 많았으나, 자서(字書)의 음과 뜻, 편방(偏傍)과 점획(點劃)에 대해서 백에 하나라도 틀리는 것이 없었다.
○ 문효공(文孝公) 하연(河演)이 한가히 있을 적에는 항상 오사모(烏紗帽)에 뿔을 뺀 것을 쓰고, 향을 피우고 고요히 앉아서 종일토록 시를 읊었는데, 시품(詩品)이 기이하고 궁벽하여 고시(古詩)에 가까웠으며, 필법(筆法)이 굳세어 서법에 부합하였다. 소년 때 춘방(春坊)에 있으면서 시를 지어서 손수 썼더니, 하호정(河浩亭 하륜(河崙))이 감탄하기를, “하문학(河文學 하연을 가리킴)이 시를 짓고 하문학이 직접 쓰니, 역시 한 세상의 보배이다.” 하였다. 문효공이 경상도안찰사(按察使)로 있을 때, 정승 남지(南智)가 아사(亞使 도사(都事))가 되었는데, 공은 매우 중히 여겨 보좌관이라 하여 낮게 대우하지 않았다. 어느 때는 진주(晉州)에 가서, 문효공이 산천과 경물의 아름다움을 감탄하니, 공의 본관이 진주였기 때문이다. 이에 남공(南公)이 낯빛을 변하며 말하기를, “산수는 비록 좋지마는, 품관(品官 안찰사를 가리킴)은 매우 못났다.” 하였으나, 문효공이 크게 웃으니, 사람들이 그 아량(雅量)에 탄복하였다. 뒤에 남공과 같이 정승에 올랐다.
○ 문경공(文敬公) 허조(許稠)는 엄숙하고 방정하며 청렴하고 근신하여 언제나 성현(聖賢)을 사모하였다. 매일 닭이 울 때에 일어나서 세수하고 머리 빗고 갓과 띠를 갖추고 단정히 앉아서, 날이 다하도록 게으른 빛이 보이지 않았으며, 항상 나라 일을 근심하고 사사로운 일은 언급하지 않았다. 국정(國政)을 논의할 적에는 자기의 신념을 스스로 지키고 남을 쫓아서 이리저리 아니하니, 당시 사람들은 어진 재상이라 칭찬하였다. 가법(家法)은 역시 엄하여 자제들에게 과실이 있으면 반드시 사당(祠堂)에 고하고 벌을 주며, 노비(奴婢)들에게 죄가 있으면 법에 의하여 다스렸다. 공이 어려서부터 몸이 야위어 비쩍 말랐으며 어깨와 등이 굽었다. 일찍이 예조 판서가 되어 상하(上下)의 복색(服色) 제도를 정하여 엄격하게 구별하니, 시정의 경박한 무리들이 심히 미워하여 이름 하기를 수응(瘦鷹 여윈 매라는 뜻) 재상이라 하였는데, 이는 매는 살찌면 날아가고 여위면 새 잡기를 생각하기 때문이었다.
○ 효양공(孝襄公) 김효성(金孝誠)은 장양공(莊襄公) 남수(南秀)의 아들이다. 장양은 그 아내 길(吉)씨와 따로 살고 있었는데, 효양공의 나이 4ㆍ5세 때에 종이 안고 뽕나무 밑에 서 있었는데, 갑자기 한 쌍의 비둘기가 날아와서 함께 앉는 것을 공이 보고 말하기를, “저 비둘기를 보니 쌍쌍이 짝을 지어 다니는데, 우리 부모는 동서(東西)에 따로 떨어져 있으니 무엇 때문인가.” 하고, 슬피 우니 종이 기이하게 여겨 길씨에게 아뢰니 이 말을 들은 길씨도 눈물을 흘렸으며, 마을 사람들이 모두 기특하게 여겼다. 공이 지극한 효성으로 어머니를 섬겼고 공의 나이가 57세에 어머니 길씨가 죽자 시묘 살이를 하고 상례와 제례를 한결같이 지성으로 하니, 칭찬하는 말이 많았다.
○ 대민공(戴敏公) 강석덕(姜碩德)은 성품이 예스러움을 좋아하여, 풍류(風流)와 문아(文雅)함은 근대에 비길 데가 없으며, 시품(詩品)이 매우 고고(高古)하고 서화도 절묘하였으니, 그 시호(諡號)를 민(敏)으로 한 것은 적당한 칭호라 할 것이다. 시법(諡法)에, “옛 것을 좋아하고 게으르지 않음을 민(敏)이라 한다.” 하였으니, 이는 원 나라 학사 조문민(趙文敏)의 민(敏)과 같은 것이다. 세상 사람이 공이 과거에 오르지 못한 것으로 그를 가볍게 여김은 아주 잘못이다. 아들 부윤(府尹) 희안(希顔)의 자(字)는 경우(景愚)인데, 그림ㆍ시ㆍ글씨 세 가지에 절묘하여 당대에 독보적인 존재였다. 시는 위응물(韋應物)ㆍ유종원(柳宗元)과 같고 그림은 유송로(劉松老)ㆍ곽희(郭熙)와 같으며 글씨는 왕희지ㆍ조맹부를 겸하여 재주와 덕을 구비하였으니, 참으로 대인군자(大人君子)이다. 그러나 그것을 크게 쓰지 못하였으니, 애석하다.
○ 판중추부사 조오(趙吾)가 합천(陜川) 수령이 되었을 적에, 여름에 농어가 많이 쌓여서 썩는 일이 있어도, 자기 집에는 조금도 맛보지 못하게 하니, 사람들이 그 청렴함에 탄복하였다. 혹은 말하기를, “그것을 썩혀서 땅에 버리는 것보다는, 차라리 집에서 조금이라도 먹게 하는 것이 낫겠는데, 이런 데서까지 청렴함을 더럽히지 않으려 하는구나.” 하였다. 조공의 집이 지극히 가난하여 그가 예조 정랑이 되었을 적에 이리저리 셋집을 전전하였으며 양식과 땔나무를 이어가지 못하였는데, 동료(同僚) 중에 쌀 3말을 주는 이가 있어도 받지 아니하였고, 뒤에 공석(公席)에서 이 일을 자랑하니, 사람들이 그 자랑하는 것을 기롱하는 이도 있었다. 그러나 평상시에 남의 청탁을 일체 들어주지 않았으며, 뒤에 늙어서 시골집에 물러 나와서도 살림살이가 아무것도 없었으나, 털끝만큼이라도 남에게 요구함이 없었으니, 참으로 청렴하고 독실한 군자라 할 것이다.
○ 안숙공(安肅公) 권준(權蹲)은 총명(聰明)함이 남보다 뛰어나서 관리의 체통을 잘 알았다. 일찍이 형조의 관리가 되어 옥사를 귀신같이 판결하였다. 어떤 두 강도가 한 가족 세 사람을 죽인 일이 있었는데, 심증은 다소 있었으나 물증이 분명하지 못하여 전후(前後) 관리가 의심하고 결단하지 못한 것이 거의 4ㆍ5년이었다. 하루는 안숙공이 두 도둑에게 말하기를 “너희들이 강도짓을 한 증거가 분명한데 감히 불복하느냐. 내가 한 마디 할 터이니 너희들은 숨기지 말아라. 너희들이 처음 일을 의논할 때는 이러이러하게 했고, 중간에 일을 꾸미기는 이러이러하게 한 것이다. 처음부터 마지막까지의 경위가 이러이러한 것인데, 너희가 감히 숨기겠느냐.” 하니, 도둑이 서로 돌아보고 혀를 빼물며 말하기를, “이분이 일찍이 도둑이 되었던 것이 아닌가. 어떻게 우리가 한 일을 이같이 자세히 아는가.” 하고, 마침내 자복하였다.
○ 갑오년 봄에, 문경공(文景公) 권제(權踶), 판서 조극관(趙克寬), 참판 권극화(權克和), 참판 김돈(金墩) 등이 모두 문과에 실패하고 수원(水原) 연정(蓮亭)에 이르렀다. 문경공이 말하기를, “우리들이 실의에 빠져 번뇌함이 이에 이르렀으니, 후일에 성공한다면 이슬비 자욱하고, 함박눈 펄펄 내리며, 밝은 달빛은 주렴으로 들어오고 연꽃 향기는 자리에 가득할 적에, 그대들과 더불어 술잔을 들고 시를 읊으면 족히 오늘의 일을 보상할 수 있을 것이다.” 하니, 제공들이 손뼉을 치며 말하기를, “비가 자욱하다면 눈이 펄펄 내리지 못할 것이고, 눈이 펄펄 내린다면 달이 밝지 못할 것이며, 또 연꽃 향기를 어찌 눈 가운데서 얻을 수 있으리오. 어찌 말이 서로 들어맞지 않는가.” 하였더니, 문경공은 응답이 없었다. 그해 가을 과거에 문경공은 장원이 되고, 제공들도 연달아 과거에 뽑혔다. 임자년에 문경공이 경기 감사(京畿監司)가 되자 제공들이 모여서 전별(餞別)하는데, 조(趙) 판서가 술잔을 들고 말하기를, “수원 눈 속의 연꽃을 이제 볼 수 있을 것이다.” 하니, 문경공이 웃으며 말하기를, “자네들과 함께 보려고 하였네.” 하였다. 몇 달이 안 되어 조공이 수원 부사(水原府使)가 되었을 때, 문경공이 그 고을에 순행하니, 조공이 예를 행하고 자리에 나갔는데 때마침 연꽃이 한창 이었으므로 서로 보고 웃었다. 문경공이 시를 지었는데,
비와 눈 흩날리는데 달빛은 밝고 / 雨雪霏霏月政明
연꽃의 맑은 향기 정자에 가득하네 / 荷香荏苒滿亭淸
당시의 이런 말 신비로워라 / 當時此說神應秘
20년 전에 이 일이 이미 이루어졌도다 / 二十年前事已成
하였다.
○ 문장공(文長公) 김균(金鈞), 문장공 김말(金末), 대사성(大司成) 김반(金泮)은 모두 경사(經史)에 널리 통하고, 더욱 성리학(性理學)에 연구가 깊어서 동시에 성균관에 제수되어 가르치기를 게을리 하지 않아 인재양성에 공이 있었으니, 사람들이 삼김(三金)이라 일컬었는데, 김반은 먼저 죽었고, 남은 두 김공은 모두 80이 넘도록 살아 벼슬은 1품에 올랐으며, 시호(諡號)를 모두 문장(文長)이라 하였다. 시호를 짓는 법에, ‘널리 듣고 많이 본 것을 문(文)이라 하고, 사람 가르치기를 게을리 아니함을 장(長)이라 한다.’ 하였으니, 이 시호를 받음이 마땅하다. 제학(提學) 윤상(尹祥)이 그때 성균관의 대사성이 되었는데, 학문이 더욱 정밀하여 제생(諸生)들이 앞을 다투어 찾아가 물으니, 공이 문리(文理)를 세밀하게 분석하고, 자상하게 가르쳐 주며 종일토록 쉬지 아니하고 지칠 줄을 몰랐다. 지금 유명한 사람들은 모두 공의 제자이니, 국조 이래로 사범(師範)의 으뜸이다.
○ 문장공 김말(金末)은 딸 하나만 있고 아들이 없었다. 일찍이 말하기를, “들으니, ‘천 사람의 눈[眼 지식을 이름]을 열어주는 이는 음덕의 보답을 받는다.’ 하였는데, 내가 벼슬한 뒤로부터 50여 년간 학관(學館)의 직책을 맡아 사람 가르치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는데도 마침내 자식이 없으니, 이는 나의 학문이 거칠고 거짓되어 남에게 은덕을 끼치지 못했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하였다. 죽을 무렵에 목욕하고 의관을 갖추고 홀(笏)을 잡고 단정하게 앉았는데, 가족들이 통곡하니 공이 울음을 그치게 하고는 “내가 벼슬이 1품에 이르렀으니 벼슬이 부족함이 없고, 나이가 80이 넘었으니 수(壽)가 높지 않음이 아니다. 나고 죽는 것은 사람의 상리(常理)이니 바름을 얻고 죽으면 어찌 다행하지 않는가.” 하고, 곧 죽었다.
○ 최만리(崔萬理) 선생이 집현전(集賢殿) 부제학(副提學)이 되고 나서 글을 올려, 환관(宦官)들의 연각건(軟脚巾)을 쓰고 오사모(烏紗帽)를 씀이 옛 제도에 맞지 않으니, 중국의 예(例)에 의해 일반 관을 쓰게 할 것을 극론하였다. 그 말에, “예로부터 역대 임금이 환관을 사랑하고 신임하여, 그 권세가 천하를 기울이는 자가 심히 많았으나, 그 갓을 바꾸지 않은 것은 환관의 무리를 사대부들과 혼동하여 사람의 이목을 놀라게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였으니, 말은 매우 적절하였으나, 여러 환관들이 눈을 흘겼기 때문에 의논이 드디어 정지되었다.
○ 유의손(柳義孫) 선생, 권채(權採) 선생, 문희공(文僖公) 신석조(辛碩祖)와 남수문(南秀文) 선생 등이, 함께 집현전에 있으면서 그 문장이 다 같이 일세에 유명하였는데, 남(南) 선생을 더욱 세상에서 중하게 추대하였다.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의 초고는 대부분 남선생의 손에서 나왔다. 제공(諸公)들이 모두 크게 현달하지 못하였으니 애석하다.
○ 기건(奇虔)공이 일찍이 연안부(延安府)에 부임하였는데, 그 고을에는 붕어가 많이 나서 공사(公私)로 청탁이 많아 폐단이 백성에게도 미쳤다. 그 전에 김씨 성을 가진 부사가 있었는데 붕어 먹기를 좋아하므로, 고을 사람들이 조롱하여 관사(館舍)의 벽에 크게 쓰기를,
6년 동안 무슨 사업을 하였는가 / 六年何事業
한 못의 고기만 다 먹었도다 / 喫盡一池魚
하였다. 기공(奇公)이 이런 평을 면하려고 6년 동안 붕어를 먹지 않았고, 또 제주 목사(濟州牧使)로 나가서는 제주의 복어(鰒魚)가 연안의 붕어와 같이 많았으나 3년을 역시 먹지 않았으니, 사람들이 그 고집은 탄복하였으나 고의로 그런 것이 아닌가 의심하였다.
○ 판서 김조(金銚)는 일찍이 문학으로 유명하였다. 세종(世宗)께서 여러 신하들과 연회를 하였는데 모두가 술이 취하였다. 세종께서, “오늘 제군(諸君)들은 각기 평소의 소원을 말하라.” 하니, 김조가 아뢰기를, “신의 소원은 백 년 동안 날마다 어탑(御搨 임금의 자리)을 모시고, 금규화(金葵花 해바라기꽃인데, 신하의 자리를 뜻함) 밑에서 진퇴부복(進退俯伏)하는 것뿐입니다.” 하니, 여러 신하들이 모두 아뢰기를, “신등의 소원도 김조와 같습니다.” 하여, 임금이 웃었다.
○ 문절공(文節公) 김담(金淡)은 성품이 온아(溫雅)하고 담박 하며 소탈하여, 기뻐하고 노여워함을 얼굴에 드러내지 아니하였으나, 도둑을 잘 다스렸다. 일찍이 충주(忠州)ㆍ안동(安東)ㆍ경주(慶州) 세 고을의 수령이 되었는데, 도둑질한 죄를 범한 증거가 있으면, 조금 의심할 만한 점이 있더라도 반드시 죽이고 용서하지 않으니, 도둑이 경내에 들어오지 못하여 백성들이 편안하였으나, 잘못 죽인 자도 많아서 공의 향년(享年)이 길지 못하였으니, 남에게 형벌을 베푸는 것은 참으로 두려울 만한 일이다.
○ 문안공(文安公) 이사철(李思哲)은 몸집이 커서 음식을 남보다 유달리 많이 먹었는데, 항상 큰 그릇의 밥 한 그릇과 찐 닭 두 마리와 술 한 병을 먹었다. 등에 종기가 나서 거의 죽게 되었는데, 의원이 불고기와 독주(毒酒)를 금해야 한다고 말하니, 공이 말하기를, “먹지 아니하고 사는 것보다 차라리 먹고 죽는 것이 낫지 않을까.” 하면서 여전히 술을 마시고 불고기를 먹어도 마침내 병이 나으니, 사람들이 말하기를, “부귀를 누리는 사람은 음식 먹는 것도 보통사람과 다르다.” 하였다.
공이 젊어서 여러 벗들과 삼각산의 절에서 놀 때에 각각 술 한 병씩을 가졌으나 술잔이 없었다. 그때 권지(權枝) 선생이 새로 만든 말 가죽신을 신었었는데, 문안공이 먼저 그 신에 술을 따라 마시니 제공(諸公)들도 차례로 마셨는데, 서로 보며 크게 웃고 말하기를, “가죽신을 술잔으로 삼은 것이 우리들로부터 고사(故事)가 되었으니, 이 또한 좋지 않은가.” 하였다. 뒤에 문안공이 귀하게 되어 권지에게 말하기를, “오늘 금 술잔의 술맛이 산놀이 할 때의 가죽신 술잔보다 못하구려.” 하였다.
○ 정절공(貞節公) 정갑손(鄭甲孫)은 성품이 청렴하고 정직하며 엄준하여, 자제들이 감히 사사로운 일로써 간청하지 못하였다. 일찍이 함길도(咸吉道) 감사가 되었을 적에, 소명(召命)을 받고 서울에 갔다가 돌아오는데, 방(榜 시험 발표)이 나왔기에 보니, 그 아들 오(烏)도 합격되었다. 공은 수염을 꼿꼿이 세우고 성을 내어 시관(試官)을 꾸짓기를, “늙은 놈이 감히 내게 여우같이 아첨하는가. 우리 아이 오(烏)는 학업이 아직 정밀하지 못한데, 어찌 요행으로 임금을 속일 수 있단 말인가.” 하고, 드디어 아들의 이름을 지워버리고, 결국 시관을 내쫓았다.
정절공이 대사헌(大司憲)이 되자 탁한 것은 물리치고 맑은 것은 드날리게 하여 조정의 기강을 크게 떨쳤다. 그러나 너그럽고 후하여 대체는 잃지 않았다. 전례(前例)에 공청(公廳)에서 모일 적이면 대간(臺諫 사헌부와 사간원)이 반드시 함께 막차(幕次)를 연접시키고, 혹 술을 마실 적에는 장막을 걷고 이름을 권장음(捲帳飮)이라 서로 붙였다. 만약 금주령(禁酒令)이 있을 적에는 대관(臺官)들은 법을 철저히 지켜 술을 마시지 않았으나, 간원(諫院)에서는 술 마시기를 예사로 하였다. 하루는 간관(諫官)이 술을 잔에 가득히 부어 가지고 장난으로 장막 틈으로 대장(臺長 사헌부의 장령과 지평)에게 보이니, 대장도 장난으로 소매로 뿌리쳤는데 술잔이 장막 틈으로 떨어져서, 대사헌인 정절공의 책상 앞에 굴러갔었다. 여러 대장(臺長)들은 두려워서 어찌할 바를 모르고 대리(臺吏)들도 서로 바라만 볼 뿐 감히 그 술잔을 치우지 못하여 이 술잔이 종일토록 대사헌의 앞에 있었다. 사헌부에서는 일이 날까 두려워하였는데, 사무를 마칠 적에 정절공이 관리에게 말하기를, “저기 거위 알 같은 것은 무엇인가. 수정(水精) 구슬이 몇 알이나 들어갈 수 있겠는가?” 하니, 아전들이 대답하기를, “백 개는 들어갈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정절공이 이르기를, “굴러 나온 틈으로 던져주라.” 하니, 자리에 있는 사람이 모두 그 아량에 탄복하였다. 간원(諫院)에서 전해 오는 술잔의 모양이 거위 알 같은 것이 있었는데, 수정 구슬이 한 되 가량 들어갈 만하였으니, 이는 금주령을 당하면 술잔을 숨기기 위하여 만든 것이다.
○ 문도공(文度公) 윤회(尹淮)와 집현전학사(集賢殿學士) 남수문(南秀文)은 모두 문장에 능하였는데, 술을 좋아하여 항상 정도에 지나쳤다. 세종께서 그 재주를 아껴서 술을 마실 적에 석 잔을 넘지 못하도록 명하였더니, 그 뒤로부터 두 공(公)은 반드시 큰 그릇으로 석 잔을 마시니, 이름은 비록 석 잔이라도 실은 다른 사람보다 곱을 마신 것이다. 세종께서 듣고 웃기를, “내가 술을 조심시킨 것이 도리어 술을 많이 먹도록 권한 것이 되고 말았구나.” 하였다.
○ 문성공(文成公) 정인지(鄭麟趾)는 천성이 호매 하고 마음이 활달하였다. 일찍이 술이 취하여 옛 사람을 평론하여 말하기를, “나 같은 사람이 만약 공자의 문하에서 놀았으면, 순수한 안자(顔子)나 독실한 증자(曾子) 같은 분에게는 진실로 미칠 수 없으나, 자유(子游)와 자하(子夏) 같은 무리와는 어떨지 모르겠다.” 하였다.
경오년에 한림 시강(翰林侍講) 예겸(倪謙)이 우리나라에 사신으로 왔었는데, 문성공이 접대관이 되어서 일을 주선하고 교제하여 빈사(儐使)의 체모를 지켰으며, 또 같이 고금을 의논하고 시를 서로 주고받았으니, 예겸이 매우 공경하고 중히 여겼다. 어느 날 밤에 같이 앉아서 시강(侍講)이 말하기를, “달이 어느 분야(分野)에 있는고.” 하니, 공이 대답하기를, “동정(東井)에 있습니다.” 하자, 시강이 탄복하였다. 작별할 적에 시강이 말하기를, “밤이 깊은데 어떻게 갈 것인가.” 하니, 공이 “이금오(李金吾)가 두렵소.” 하자, 예겸은, “왕옥여(王玉汝) 는 만나지 마시오.” 하고는, 서로 웃으며 말하기를, “천하에 대구(對句) 없는 것이 없다.” 하였다.
병인년에 소헌왕후(昭憲王后 세종비 김씨) 장례 때에 큰 비가 와서 강물이 불어 재궁(梓宮 임금이나 왕비의 관)을 건널 수가 없었기 때문에, 부득이 낙천정(樂天亭)에 임시로 모셔두었는데, 혹은 남쪽으로 머리를 두어야 한다 하고, 혹은 북쪽으로 머리를 두어야 한다 하여 의논이 결정되지 못하였다. 문성공이 뒤에 이르러서 말하기를, “예문(禮文)에, 빈소(殯所)에서 남쪽으로 머리 두는 것은 그 어버이를 죽지 않은 것으로 생각한 뜻이며, 광중(壙中)에서 북쪽으로 머리 두는 것은 죽은 것으로 하기 때문이다. 지금은 역시 빈궁(殯宮)이니 남쪽으로 머리를 두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 제공(諸公)들이 말하기를, “재상은 마땅히 독서한 사람을 써야 한다.” 하였다.
○ 시종신(侍從臣)으로서 상소하는 것은 문열공(文烈公) 이계전(李季甸)으로부터 비로소 성행하였다. 문열공이 집현전에 있을 적에 여러 번 상소하여 정사를 논하려 하니, 동렬(同列)로서 벼슬이 문열공의 위에 있는 한두 사람이 매양 말리기를, “예로부터 정사를 논하기 좋아하는 이는 마침내 화를 받는 것인데, 하물며 우리 시종들은 덕의(德義)를 강론하여 임금의 마음을 밝히고 도울 뿐이요, 간쟁(諫諍)하는 일은 그 직책이 아니니 그대는 일 만들기를 좋아하지 말게.” 하였다. 문열공이 말하기를, “사람의 마음은 각각 다름이 있으니, 국사를 논하다가 실패하는 영광이 침묵하다가 당하는 수치만 못하다.” 하고, 마침내 하관(下官)들을 거느리고 글을 올려 극간(極諫)한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으나, 상관이 끝내 여기에 서명하지 아니하였으니, 여론이 그 상관을 기롱하였다. 상소를 올릴 적마다 세종(世宗)께서 이르기를, “계전(季甸)의 상소가 또 왔구나.” 하고, 마침내 크게 쓸 뜻을 두어 곧 동부승지(同副承旨)로 뽑았다.
○ 익평공(翼平公) 권람(權擥)은 어려서 큰 뜻을 두었고 책을 널리 보고 많이 기억하여 재주와 명성이 남보다 크게 뛰어났다. 여러 번 과거에 실패하고도 태연히 처하여 가슴속에 연연하지 않았다. 내가 맹교(孟郊)의 시에,
문 밖을 나가면 곧 막힘이 있으니 / 出門卽有礙
그 누가 천지를 넓다고 했던가 / 誰謂天地寬
한 것을 외우며, “맹교가 낙방하여 슬퍼하고 곤궁한 것은 그 몸을 용납할 곳이 없어서였는데, 지금 자네가 그렇지 않은가.” 하였더니, 익평공은 웃으며, “과거에 급제하고 급제하지 못함이 어찌 운명이 아니겠는가.” 하였다. 내가 큰 그릇이 될 것을 알았는데, 뒤에 익평공이 35세에 선비로서 장원에 뽑히고, 46세에 정승에 올라 한때 원훈(元勳)의 우두머리가 되었다. 대개 과거에 실패하면 슬퍼하고 상심하는 것이 선비의 상정(常情)인데, 공의 큰 도량이 이와 같으니, 맹교의 불우(不遇)함은 어찌 국량(局量)이 작아서 그러한 것이 아니겠는가.
○ 문충공 신숙주가 일찍이 일본에 사신으로 갔다가 돌아오는데, 우리 국경에 몇 리(里) 남짓하게 왔을 때, 홀연 폭풍을 만나 배를 미처 언덕에 대지 못하였다. 여러 사람이 모두 놀라서 어쩔 줄을 몰랐으나 공은 정신과 안색이 태연자약하여 말씀하기를, “대장부는 마땅히 사방에 유람하여 흉금을 넓혀야 한다. 지금 큰 물결을 건너서 해 뜨는 나라를 보았으니, 족히 장관(壯觀)이 될 만하다. 만약 이 바람을 타고 금릉(金陵 남경)에 닿게 되어 산하(山河)의 아름다운 경치를 실컷 본다면 이 또한 하나의 장쾌한 일이다.” 하였다.
그때 왜적에게 포로가 되었던 백성을 데리고 오는 중인데 임산부가 배 안에 있었다. 여러 사람이 말하기를, “임산부는 예로부터 뱃길에는 크게 금기시하는 바이니, 마땅히 바다에 던져서 액을 막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하니, 공이 말하기를, “사람을 죽여서 살기를 구함은 덕(德)에 상서롭지 못한 일이다.” 하고, 굳이 만류하였는데 잠시 후에 바람이 진정되었다.
문충공이 처음 과거에 올라 집현전에 뽑혔는데, 하루는 당직이 되어 장서각(藏書閣)에 들어가서 평소에 보지 못한 책을 보고 있었는데 어느덧 시간이 삼경이 지났다. 세종(世宗)께서 낮은 환관을 보내어 엿보게 하였더니, 단정히 앉아서 글을 읽고 있었으며, 사경이 되었을 때 또 보내어 엿보게 하였는데, 이와 같이 하고 있었다. 이에 어의(御衣)를 주어서 장려하였다.
○ 충렬공(忠烈公) 구치관(具致寬)은 성품이 엄격하고 공정하였다. 일찍이 이조 판서가 되어 뇌물이나 청탁을 행하지 아니하였다. 그 전에는 이조 판서가 되면 관리를 제수할 적에 으레 친히 선발하는 명부를 잡고 자기 멋대로 행하였고, 참판 이하는 팔짱만 끼고 옆에서 볼 뿐이었는데, 공이 이를 분하게 여기고 그 폐단을 바로잡기 위하여, 대체로 사람을 올리고 내리는 데는 여러 사람의 의논을 널리 취하였고, 비록 작고 낮은 관직이라도 단독으로 추천하지 않았고, 사사 은혜로써 친구를 용서하지 않았으며, 남이 청탁하는 것을 미워하여 혹 청탁하는 자가 있으면 마땅히 올릴 것도 올려주지 않았다. 그때 내가 참의(參議)가 되어 하루는 정방(政房)에 있다가 마침 술이 취하여 잠이 들었는데, 공이 거친 목소리로, “참의는 내가 인물 등용을 마음대로 행한다 하여 참견하지 않으려고 하는가. 후일에 사람을 잘못 쓴 일이 있으면, 참의는 집에 있어서 알지 못하였다고 할 것인가.” 하였다.
일찍이 이름이 알려진 한 문사(文士)를 추천하여 대관(臺官)으로 삼으려 하니, 반박하는 자가 말하기를, “이 사람은 익살이 심하니 불가하다.” 하였는데, 공이 말하기를, “만약 그러면 한 무제(漢武帝)는 어찌 동방삭(東方朔) 을 취하여 썼겠는가.” 하고, 마침내 대관으로 추천하였다. 또 한 문사가 외군 교관(外郡敎官)으로 있으면서 10년 동안 승진하지 못하였다. 공이 현감(縣監)으로 추천하려 하니, 반대하는 이가 말하기를, “이 사람은 실정에 어두워서 불가하다.” 하였다. 공이 말하기를, “천도(天道)도 10년이면 변하는 법인데, 어찌 사람을 이와 같이 오래도록 굽혀둘 것인가.” 하고, 마침내 현감으로 천거하였는데, 그는 과연 훌륭한 치적이 있었다. 공이 사람을 쓰고 버릴 적에 한결같이 공정하게 함이 이와 같았다.
○ 문정공(文靖公) 최항(崔恒)은 성품이 겸손하고 단정하고 간결하여 겉치레를 아니 하며, 평생토록 남과 말할 적에는 먼저 양보함을 보이고 스스로 드러내지 않았으며 또 별다른 이론(異論)을 세우지 않았다. 글을 짓는 데에도 옛 사람의 규범을 따르지 아니하고 스스로 새로운 체제를 만들어 크게 펼쳐놓으니, 웅장하고 풍부함이 장강대하(長江大河)와 같이 물결이 뛰고 넘치고 솟구치고 구비 치듯 형세가 그치지 않았으며, 더욱 변려문(騈驪文)에 공교하여 무릇 조정에서 중국에 올리는 표문(表文)과 전문(牋文)이 다 그 손에서 나왔었다. 중국 사람이 매양 우리나라 표문(表文)이 정밀하고 적절하다고 칭찬한 것은 모두 공이 지은 것이다. 평상시에는 비록 추운 겨울이나 더운 여름이라도 의관을 정제하고 종일토록 단정히 앉아서 태만한 모습을 보이지 않았으며, 빠른 말이나 급한 표정을 하지 않았으니, 천성이 그러하였다.
○ 세조(世祖)께서 일찍이 우리나라의 학자들은 어음(語音)이 바르지 못하고, 구두(句讀)가 분명치 못하며, 비록 선유(先儒)인 권근(權近)ㆍ정몽주(鄭夢周) 등의 구결(口訣 한문의 토)이 있으나 아직도 오류가 많은데 진부한 세속의 선비들이 오류를 그대로 이어받음을 염려하였다. 그리하여 마침내 노숙한 신하와 경험 있는 유학자에게 명하여 사서 오경(四書五經)을 …… 주어 고금(古今)의 책을 고증(考證)하여 구결을 정하였고, 또 글하는 선비를 모아서 같고 다름을 강론(講論)하게하고 상감이 직접 결정하였다. 이때 문정공(최항)이 항상 좌우에 있으면서 매양 질문을 받으면 정밀하게 분석하여 민첩하게 응대하니, 상감이 듣고 싫증을 내지 않았다. 좌우에 있는 신하들에게 말하기를, “영성(寧城 최항이 뒤에 영성부원군이 됨)이 참으로 천재이다.” 하였다.
○ 문헌공(文憲公) 박원형(朴元亨)은 사체(事體)에 통달하고 전고(典故)에 익숙하였다. 중국 사신 진감(陳鑑)ㆍ고윤(高閏)ㆍ장녕(張寧)ㆍ진가유(陳嘉猶) 등이 우리나라에 왔을 때에, 공이 매번 빈관(儐官 접대관)이 되어 주선하고 교제하기를 모두 마땅하게 하였다. 사신 장녕이 일찍이 문헌공에게 말하기를, “그대 같은 재주는 춘추시대(春秋時代)에 났으면 마땅히 진(晉) 나라 숙향(叔向)이나 정(鄭) 나라 자산(子産)의 밑에는 있지 않았을 것이다.” 하였다.
○ 문헌공(文憲公) 윤자운(尹子雲)이 함길도(咸吉道) 체찰사(體察使)가 되어 안변(安邊)에 이르렀을 적에, 이시애(李施愛)가 절도사(節度使) 강효문(康孝文)과 길주 목사(吉州牧使) 설정신(薛丁新)을 죽이고는 그 고을을 점거하고 반역을 일으켜서 여러 고을에 심복을 보내어 수령들을 거의 다 죽이니 흉한 무리들이 간 곳마다 서로 합세하였다. 이 소문을 들은 공은 밤낮으로 빨리 달려 함흥(咸興)에 이르니, 그날 밤에 역적들이 또 난을 일으켜서 감사 신면(申㴐)을 죽이고는 병력을 이동하여 공의 처소에 이르러 문을 박차고 칼을 뽑아 들고 뜰에 담같이 둘러섰으나, 공은 의관을 정제하고 단정히 앉아서 웃으며 말하기를 태연하게 하니 도적들이 두려워서 물러갔다. 도적의 무리들이 제 마음대로 날뛰고 간사함을 예측할 수 없었는데, 공이 7일 동안이나 포위되어 있었지만 태연하게 대처하고 마음을 동요하지 않으니, 도적들 중에 혹 뉘우쳐서 공을 위하여 주선하고 돕는 자가 있어 마침내 무사히 돌아왔다.
○ 동원공(東原公) 함우치(咸禹治)가 일찍이 전라도 감사가 되었는데, 어떤 양반의 집 형제가 서로 큰 가마솥을 가지려고 관청에 소송하는 자가 있었다. 함공이 노하여 아전에게 명하여 급히 크고 작은 두 가마솥을 가져오게 하고 말하기를, “마땅히 깨뜨려서 고르게 …… 주겠다.” 하니, 두 형제가 복종하고 분쟁을 마침내 중지하였다.
○ 지중추(知中樞) 홍일동(洪逸童)은 인격이 우뚝하게 뛰어나고 성품이 천진(天眞)하며 겉치레를 꾸미지 아니하였다 사부(詞賦)에 능하고 술을 많이 마셨는데 정신없이 취하면 풀잎으로 피리 소리를 내었는데, 소리가 비장(悲壯)하고 위엄이 있었다. 평상시에 혼자 오래된 거문고를 어루만졌는데, 줄은 있어도 악보(樂譜)는 없었다. 말하기를, “나의 거문고는 천고(千古)에 전하지 않는 도연명(陶淵明)의 지취(志趣)를 얻었다. 옛날에 백아(伯牙)가 거문고를 타자 오직 종자기(鍾子期)만이 그 뜻을 알았는데, 나의 거문고는 도연명이 나오지 않으면 세상에서 알 사람이 없다.” 하였으니, 천지간의 기이한 남자라 할 것이다. 일찍이 상감 앞에서, 부처의 일을 논박하자 세조(世祖)가 거짓으로 성내기를, “이놈을 죽여서 부처에게 사례하겠다.” 하고, 좌우에 있는 사람에게 명하여 칼을 가져오라 하여도 홍일동은 태연하게 변론했으며, 좌우가 거짓으로 칼로 정수리를 두 번이나 문질렀지만 돌아보지 아니하고 두려운 빛이 없었다. 세조가 장하게 여겨, “네가 술을 먹겠느냐.” 하니, 일동이 대답하기를, “번쾌(樊噲)는 한(漢) 나라 무사(武士)이며, 항왕(項王 항우)은 다른 나라의 군주였는데도 항왕이 주는 한 동이 술과 돼지다리 하나를 사양치 않았는데, 하물며 성상께서 주시는 것이겠습니까.” 하였다. 은 항아리에 술을 가득히 담아 내려주었는데 그는 힘차게 마셨다. 상감이 이르기를, “죽음을 두려워하느냐.” 하니, 홍일동이 대답하기를, “죽는 것이 마땅하면 죽고, 사는 것이 마땅하면 사는 것인데, 감히 죽고 사는 것으로써 그 마음을 바꾸겠습니까.” 하니, 상감이 기뻐하여 초구(貂裘) 한 벌을 주어서 위로하였다.
홍일동이 일찍이 진관사(眞寬寺)에서 놀 적에, 떡 한 그릇, 국수 세 주발, 밥 세 바릿대, 두부 국 아홉 주발을 먹었는데, 산 밑에 이르니 대접하는 이가 있어, 또 찐 닭 두 마리, 물고기국 세 주발, 생선회 한 쟁반, 술 마흔 잔을 먹으니, 보는 이들이 대단하게 여겼다. 세조(世祖)가 듣고 홍일동을 불러 묻기를, “참으로 이와 같이 먹었느냐.” 하니, 홍일동이 그렇다고 사과하자, 상감은 장사(壯士)라고 말하였다. 그러나 평상시 출입할 적에는 다만 미숫가루와 전술[醇酒]을 먹을 뿐이요, 밥을 먹지 않았다. 뒤에 홍주(洪州)에 가서 폭음(暴飮)을 하고 곧 죽었는데, 사람들이 그가 배가 터져 죽은 것이라 의심하였다. 뜻이 있어도 시행치 못하였고 벼슬이 그 능력에 차지 못하였으니, 애석하다.
○ 당(唐) 나라 말기에 정곡(鄭谷)이 시를 잘 지어 세상에서 유명하였는데 그때 사람이 그 관직에 따라 정도관(鄭都官)이라 하였다. 송(宋) 나라 매성유(梅聖兪)가 만년(晩年)에 도관(都官)이 되었다. 어느 날 구양영숙(毆陽永叔)의 집에 모였는데, 유원보(劉元父)가 농담하기를, “매성유의 벼슬이 반드시 여기에 그칠 것이다. 예전에는 정도관(鄭都官)이 있었고 지금은 매도관(梅都官)이 있다.” 하였다. 자리에 있는 손님들이 다 놀라고 매성유도 기뻐하지 않았는데 얼마 아니 되어 매성유가 병들어 죽었다. 내가 젊어서 윤서(尹恕)와 같이 유학하였는데, 윤서가 일찍이 말하기를, “만일 과거에 올라 사간원 정언(司諫院正言)만 되면, 반드시 벼슬을 그만 두겠다. 남자가 명정(銘旌 상여 앞에 들고 가는 기) 위에 정언(正言) 두 글자를 쓰면 만족하다. 제군(諸君)들은 의심치 말라.” 하였는데, 윤서와 내가 갑자년 과거에 올라서 경오년과 신미년 사이에 비로소 정언에 임명되었다. 내가 농담하기를, “벼슬을 그만 둘만하다.” 하니, 윤서가 웃으며, “두고 보라.” 하더니, 얼마 안 되어 병들어 죽었다. 유원보가 매성유에게 농담한 것과 윤서가 스스로 기약한 말이 과연 그대로 부합하였으니, 이는 무슨 이치인가.
○ 문충공(文忠公) 권양촌(權陽村)이 일찍이 《입학도설(入學圖說)》을 지었는데, 주자(周子)의 〈태극도설(太極圖說)〉과 주자(朱子)의 《중용장구(中庸章句)》의 말에 의거하여 〈천인심성합일도(天人心性合一圖)〉를 만들었는데, 이는 내용이 광대하여 모든 이치를 포함하였으며, 정묘하고 심오하여 옛 성인이 미처 발명하지 못한 것을 확충하여 후학(後學)에게 무궁한 이치를 열어주었다. ‘군자는 마음을 닦으므로 길하고 소인은 이치를 거스르므로 흉(凶)하다.’ 한 말은, 그 대강만 들어서 배우는 사람에게 보인 것인데 그 뜻이 깊다. 그 조카인 권채(權採) 선생이 또 이 《입학도설》과 주자(朱子)의 《중용장구》와 《대학장구》 및 《혹문(或問)》의 해설에 의거하여, 천리가 유행발육(流行發育)하는 형상과, 학자(學者)가 기질을 변화하여 성인이 되는 방법을 서술하였는데, 그 덕으로 나아가는 선후의 조목은, 공자ㆍ증자ㆍ자사(子思)ㆍ맹자 등의 말을 인용하였고, 그 공부하는 방법의 깊고 얕은 의미는 정자(程子)ㆍ주자(朱子)의 논설로써 단정하였으며, 그 천인심성(天人心性)의 논설은 양촌(陽村)의 뜻을 발명하여 작성도(作聖圖)를 지었다.
근세에 일을 만들기를 좋아하는 자들이 만든 성불도(成佛圖)가 있고, 종정도(從政圖)가 있는데, 모두 투자(骰子 주사위)를 사용한다. 권채(權採) 선생이 작성도를 만들었는데, 그 종목이 열세 가지가 있으니, 도상론(圖象論)ㆍ성리론(性理論)ㆍ음양론(陰陽論)ㆍ조화론(造化論)ㆍ기질론(氣質論)ㆍ성경론(誠敬論)ㆍ자질론(資質論)ㆍ공부천심론(功夫淺深論)ㆍ용공작철론(用工作輟論)ㆍ현지론(賢智論)ㆍ우불초론(愚不肖論)ㆍ진덕선후론(進德先後論)ㆍ총론(總論) 등인데, 13논(論) 중에 또 다소의 절목(節目)이 있으며, 역시 주사위를 사용한다. 주사위 6면(面)에 성(誠)ㆍ경(敬)ㆍ사(肆)ㆍ위(僞) 4자를 썼는데, 성ㆍ경은 두 번씩 썼으며, 그 글자는 다 수(數)로 나누어서, 주사위를 던지면 그 수로써 나아가는 순서를 삼는다.
무릇 사람의 성품은 학문하기는 싫어하고 놀음하기를 좋아하니, 성불도(成佛圖)와 종정도(從政圖)와 같은 것은 역시 장기와 바둑의 한 종류이다. 한갓 시일만 허비하고 마음 쓸 바는 없는데, 선생이 이 도(圖)를 만든 것은 당초에 놀음을 위한 것이 아니라, 학문하는 이가 그것을 즐겨 하여 그 지혜의 문을 열어주기 위한 것이었다. 이를 알지 못하는 이는 주사위 쓰는 것을 장기나 바둑에 가깝다 하여 그 뜻을 깊이 연구하지 않으니, 생각지 못함이 심하다. 무릇 주사위를 쓰는 것은 뜻이 주사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성ㆍ경ㆍ사ㆍ위의 등분을 보이기 때문이다. 성ㆍ경ㆍ사ㆍ위는 곧 학자의 마음 쓰는 경지이다. 주사위로 인하여, 처음 배우는 이에게 도(道)를 지시함이 더욱 친절한 것이다. 이 도(圖)로써 성인의 도(道)를 구하면 비록 어리석고 어린이들이라도 방향을 알게 할 수 있으며, 덕에 나아가는 순서가 조리가 있고 문란하지 않아서, 성현(聖賢)의 경지에 이를 것이다. 도(圖)가 세상에 행하여지지 못하고 선생이 죽었으니, 지금 아는 이는 대개 드물다. 선생의 문장은 중부(仲父) 양촌의 풍모가 있다.
○ 문강공(文康公) 이석형(李石亨)은 일찍이 진덕수(眞德秀)의 《대학연의(大學衍義)》를 가지고 번거로운 것을 깎고 간략한 것을 취하고, 《고려사(高麗史)》에서 권선징악이 될 만한 것을 더 넣어서 책을 만들어 이름을 《대학연의집략(大學衍義輯略)》이라 하고, 경연(經筵)에 진강(進講)하기를 청하니, 상감이 기꺼이 받아들였다. 공의 뜻은, ‘경서(經書)는 바야흐로 진강하는 중이요, 고려의 일은 전해들은 것이므로 거울삼아 경계하기에 가장 간절하다.’고 여긴 것이었다. 그러므로 삭제하기도 하고 요약하기도 하고 첨가하기도 하였으니, 보기에 유익이 없지 않다. 그러나 이를 평하는 이는 이르기를, “경서는 도(道)를 실은 것이니 전부 성인의 말씀이다. 진덕수의 편찬이 모두 구차한 것이 아닌데, 지금 다 깎아버리면 의리에 온당치 못하니, 옛 《대학연의》에 《고려사》를 보태 넣으면 근사할 것이다.” 하였다.
○ 고려 문종조(文宗朝)에 예부 상서(禮部尙書) 정유산(鄭惟産)이 과거에 이름을 봉하고 선비를 뽑는 법을 세웠다. 응시하는 여러 선비들이 시권(試券 시험지) 머리에 성명ㆍ본관ㆍ부ㆍ조ㆍ증조ㆍ외조의 이름을 써서 풀로 봉하고 시험 보기 며칠 전에 시원(試院)에 올리도록 하였다. 과장(科場)을 개시하는 하루 전날 오후에, 주문관(主文官 시관(試官))이 글의 제목 몇 개를 적어 가지고 궁궐 문에 나아가 봉하여 올리면, 임금이 친히 뜯어보고 각각 글제 위에 낙점(落點)하고는 봉하여 도장을 찍어서 내어주면, 주문관이 받아서 시원(試院)에 가지고 간다. 이튿날 이른 아침에 봉함을 뜯고 글제를 내면 당직한 승선(承宣)이 금인(金印 어보(御寶))을 받들어 시원에 가서 주문관과 같이 앉아서 거자(擧子 과거 보는 사람)의 권봉(券封)에 하나하나 도장을 찍는다. 임금이 또 내시(內侍) 두 사람을 보내어 술과 과일을 주고 주문관 또한 잔치를 베풀어 위로한다.
하루가 지난 다음 당직한 승지가 시원에 이르러 권봉을 뜯고 급제자를 발표한다. 제2장(第二場)도 이와 같다. 제3장(第三場)에서는 이경(二更)에 이르러서 글제를 내고 다른 것은 같다. 이틀 사이를 두고 주문관이 각각 합격된 시권(試券)의 표면에다가 등급의 차례를 적은 황지(黃紙)를 붙이고 함에 봉하여 궁궐로 올린다. 임금이 편전(便殿)에 앉고 승선(承宣) 두 사람이 그 함을 받들어 임금 앞에서 봉함을 뜯고 문신(文臣)과 승선이 그 과거의 등급을 읽되, 상하의 등급은 모두 주문의 의망에 의하여 방(榜)을 붙인다. 그 에도 대개 이와 같이 해 왔었다.
국조(國朝)에 이르러 과거의 법이 점점 갖추어졌는데, 시권에 이름을 봉하는 것은 고려와 같고 나머지는 모두 같지 않다. 그 수권관(收卷官)ㆍ봉미관(封䌤官)ㆍ사동관(査同官)ㆍ지동관(枝同官)ㆍ역서(易書) 등의 일은 다 원(元)의 제도를 따랐고, 양쪽에 시장(試場)을 설치함은 세종조(世宗朝)에서 시작되었는데, 혹은 강경(講經)으로, 혹은 제술(製述)로 하여 때에 따라 달랐다.
○ 예전에는 무과(武科)가 없었는데, 태종조(太宗朝)에 처음으로 설치하였다. 고사(故事)에 문무과(文武科)의 방(榜)을 내는 날에는 홍패(紅牌)를 하사하고 어사화(御史花)와 어사주(御史酒)를 내렸으며 문무과 1등 3명에게는 별도로 검은 일산[皁盖]을 주었으니, 당시에 큰 영광으로 여겼다. 세조(世祖) 때에 문과는 일산을 주고 무과는 기(旗)를 주어, 유가(遊街)하는 날에는 어린아이와 어리석은 아낙네들도 모두 문과와 무과의 구별을 알게 되니, 무반(武班)들이 자못 기뻐하지 않으므로, 곧 파하고 예전 제도를 회복하였다.
○ 구례(舊例)에는, 벼슬이 정3품에 이르면 문과 시험에 나가지 아니하였고, 6품에 이르면 생원(生員) 진사과(進士科)에 나가지 않았는데, 당상관으로서 문과에 응시한 것은 화산군(花山君) 권반(權攀)에서 시작되었고, 종친(宗親)의 극품(極品 정일품)으로서 시험에 나간 것은 영순군(永順君)에서 시작되었으며, 부마(駙馬) 극품으로서 시험에 나간 것은 세조 때에 시작되었으나 이내 없어졌다.
○ 근일에 과장(科場)에서 부의 제목을 내었는데, 해동청(海東靑 매(鷹))이라 한 것이 있었다. 《운부군옥(韻府群玉)》의 주(註)에 보면 옛 사람의 시구(詩句) 중에
아름다운 글귀는 천하의 이백보다 묘하고 / 麗句妙於天下白
높은 재주는 뛰어남이 해동청과 같도다 / 高才駿似海東靑
한 것이 있는데, 어떤 과거에 온 선비가 잘못 해석하기를, “아름다운 글귀가 천하에 묘한 이는 오직 백고(白高) 한 사람이니, 그 재주의 뛰어남이 해동청과 같도다.” 하였다. 이에 온 과장이 덩달아 따라서 백고(白高)를 부(賦)의 제목으로 삼아 심지어 시를 짓기를
해동청의 보라매여 / 繫海東之爲靑
백고의 높은 재주와 같도다 / 同白高之駿才
하였는데, 시관도 이것을 모르고 선발하여 과거에 오른 이가 많았으니, 이 말을 듣는 이는 심히 목을 움츠리고 웃었다.
○ 국조 이래로 과장(科場)의 문체가 평온하였는데, 계유년과 갑술년 이후로 한두 사람의 문사(文士)가 괴이하고 까다로운 문장으로 과거에 장원으로 뽑히니, 4, 5 ,6년 사이에 문체가 모두 변하여 서곤(西崑 오대(五代) 및 송초(宋初)의 시풍)의 문체가 되고 말았다. 지금 국학(國學 성균관)과 과장에서는 구양공(歐陽公)이 유기(劉幾)를 내친 고사(故事)를 들어서, 그 중에 심한 자를 내치니, 문체가 조금씩 예전과 같아지나 완전히 변하지는 못하였다. 근래 전시 책문(殿試策文)의 기두(起頭)에 한 유생은
모래를 헤치고 금을 가려내니 큰 대장장이의 정밀함이 있고 / 披沙揀金有太冶之精
채찍을 잡고 말에 임하니 백락(말을 잘 아는 사람)의 밝음이 있도다 / 執策臨馬有伯樂之明
하였고, 한 유생은
하늘은 자시에 열리고 / 天開於子
땅은 축시에 열리고 / 地闢於丑
사람은 인시에 열린다 / 人生於寅
하였으니, 그것은 부화(浮華)하여 절실하지 못함이 이와 같다.
○ 구례(舊例)에는 여러 과거의 회시(會試)에는 매번 삼장(三場 초장ㆍ중장ㆍ종장의 세 시험)을 보는 날에 예조에서 잔치를 베풀고, 또 별도로 궁내에서 술과 과일을 내려서 여러 시관(試官)들이 즐겁게 마시는 것을 영광으로 삼았다. 제생(諸生)들에게도 묽은 죽과 청주(淸酒) 수십 동이를 주어 목마름을 풀어주었는데, 식례(式例)가 나오면서 모두 폐지되었다. 근래에 시원(試院)에서 한 참시관(參試官)이 희롱으로 한 구(句)를 지었는데
좌주(시관)는 약주 한 잔도 안 먹었는데 / 座主下飮香醪一盞
어찌하여 얼굴이 붉어지는가 / 何烘其頭
제생들은 먹물 몇 되를 달게 마시니 / 諸生甘吸墨水數升
모두 그 입술이 검어졌도다 / 皆黔其吻
하였다. 나도 한 구를 남겼는데
차주발은 오늘로부터 비로소 커지고 / 茶椀始從今日大
술잔은 지난해에 가득하였음을 기억한다 / 酒杯仍憶去年深
하였더니, 자리에 많은 사람들이 모두 웃었다.
○ 하동부원군(河東府院君) 정인지(鄭麟趾)는 갑오년 초시(初試)에서 장원하였고, 정미년 복시(覆試)에서도 장원하였으니, 국조 이후로 한 사람뿐이다. 연성부원군(延城府院君) 이석형(李石亨)은 신유년에 생원진사시에 장원하고 문과에 세 번째로 급제하였으니, 삼한(三韓) 이후로 듣지 못한 일이다. 사성(司成) 남계영(南季英)은 생원시에 장원하고 문과에 두 번째로 급제하였으니, 역시 그 다음이다.
○ 아버지와 아들이 연달아 장원한 이는 문경공(文景公) 권제(權踶)와 익평공(翼平公) 권람(權擥)이고, 형과 동생이 연달아 장원한 이는 정언(正言) 유자빈(柳自濱)과 교리(校理) 유자한(柳自漢)이다.
○ 아버지와 아들이 잇달아 정승에 오른 이는 익성공(翼成公) 황희(黃喜)와 성렬공(成烈公) 황수신(黃守身)과 영의정 심온(沈溫)과 좌의정 심회(沈澮)이다.
○ 조선조에 장원으로서 정승에 오른 이는 하동부원군 정인지(鄭麟趾)ㆍ길창(吉昌)부원군 권람(權擥)ㆍ영성(寧城)부원군 최항(崔恒)ㆍ남양(南陽)부원군 홍응(洪應)이며, 고려에 장원하고 조선조에 정승이 된 이는 유량(柳亮)과 맹사성(孟思誠)이다.
○ 갑인년 별시(別試)에 영성부원군 최항은 장원이 되었고, 창녕(昌寧)부원군 조석문(曺錫文)은 방안(榜眼 2등)이 되었고, 연성부원군 박원형(朴元亨)은 탐화(探花 3등)가 되었으며, 능성(綾城)부원군 구치관(具致寬)은 병과(兵科 3등)가 되었는데, 세조(世祖) 때에 네 사람이 잇달아 정승으로 올랐으니, 고금에 없던 일이다.
○ 갑오년(1414) 가을 친시(親試 임금이 직접 과장에 나와서 보이는 과거) 때에 독권관(讀券官) 하륜(河崙) 등이 과거 본 세 사람의 시권(試券)을 뽑아서 올리니, 태종(太宗)께서 이르기를, “마땅히 향을 피우고 기도하며 장원을 뽑던 옛 일을 따를 것이다.” 하고, 손가는 대로 뽑아보니, 곧 문경공(文景公) 권도(權蹈)였다. 임금이 기뻐하여 이르기를, “내가 일찍이 도(蹈)의 아버지 근(近)이 일찍 죽은 것을 슬퍼하였더니, 지금 그 아들이 장원이 되었으니 적이 위안이 된다.” 하고, 하륜을 돌아보며 이르기를, “이번 과거는 나의 문생(門生)이니, 경등은 자기 문생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 하였으므로, 하륜 등이 끝내 좌주(座主)의 예(禮)를 받지 않았다. 경오년 전시(殿試) 때에 독권관이 익평공(翼平公) 권람(權擥)을 제4등으로 추천하였다. 방이 나오자 문종(文宗)께서 이르기를, “권람은 몇 째가 되었는고.” 하니, 좌우에서 아뢰기를, “넷째입니다.” 하니, 임금이 좌우의 신하들로 하여금 시권을 읽어보게 하시고는 네 번 째에 이르러 “이 글이 진실로 장원이라.” 하고, 친히 제1등으로 뽑았다. 도(蹈)는 뒤에 이름을 제(踶)로 바꾸었는데, 제(踶)의 부자가 장원이 된 것은 모두 임금이 내린 것이다.

[주D-001]이금오(李金吾) : 당 나라 두보가 이금오(李金吾)와 함께 술을 먹으며 지은 시에, “취하여 돌아갈 때 통행금지에 걸리지 않겠느냐.” 하니, 금오가, “두렵다.” 했다. 금오는 지금의 검찰청장의 직이므로 이렇게 희롱한 것이다.
[주D-002]왕옥여(王玉汝) : 왕옥여(王玉汝)는 아마도 한옥여(韓玉汝)의 잘못인 듯하다. 송나라 한진(韓縝)의 자가 옥여인데 법을 엄하게 다스리므로 당시 사람들이, “차라리 호랑이를 만날지언정 한옥여를 만나지 말라.” 한 말이 있다.
[주D-003]동방삭(東方朔) : 한(漢) 무제(武帝) 때 사람으로 조정에 미관으로 있으면서 재담과 농담을 잘하였으며 임금 앞에서 괴이한 행동을 하기로 유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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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빙지(交聘志) 3
조공(朝貢) 3 고려(高麗)

○ 진(晉)나라 고조(高祖) 천복(天福) 4년(939, 태조22) -기해- 9월 병술에 고려가 광평 시랑(廣評侍郞) 형순(邢順)을 사신으로 보내왔다. 《오대사(五代史)》
○ 소제(少帝) 천복 8년(943, 태조26) -계묘- 9월에 고려가 왕자인 태상(太相) 왕신일(王申一) 등을 사신으로 파견하여 와서 조공하였다. 《책부원귀(冊府元龜)》
○ 11월 신축에 고려가 광평 시랑 김인봉(金仁逢)을 사신으로 보내왔다. 갑인에 또 태상(太相)을 사신으로 보내왔다. 《오대사》
○ 출제(出帝) 개운(開運) 2년(945, 혜종2) -을사- 겨울 10월 정축에 고려가 광평 시랑 한현규(韓玄珪), 예빈 경(禮賓卿) 김렴(金廉) 등을 사신으로 보내왔다. 무자에 병부 경(兵部卿) 유숭관(劉崇觀), 내군 경(內軍卿) 박예언(朴藝言)을 사신으로 보내왔다. 《상동(上仝)》
○ 주(周)나라 태조(太祖) 광순(廣順) 2년(952, 광종3) -임자- 정월에 권지국사(權知國事) 왕소(王昭)가 광평 시랑 서봉(徐逢) 등 97인을 파견하여 와서 조공하였다. 7월에 고려의 승려 사태(思泰)가 방물을 바쳤다. 10월에 회남(淮南)에서 고려의 사신 진삼(陳參) 등을 보내어 대궐에 도착하여 알현하자, 칙서를 내려 주식(酒食)과 의복을 하사하였다. 《책부원귀》
○ 세종(世宗) 현덕(顯德) 원년(954, 광종5) -갑인- 10월에 -살펴보건대 《오대사》에는 2년 10월 무인으로 되어 있다.- 고려가 왕자인 태상(太相) 왕융(王融)을 파견하여 와서 방물을 조공하였다. 《상동》
○ 2년(955, 광종6) -을묘- 11월에 다시 고려가 광평 시랑 순질(荀質)을 파견하여 와서 방물을 조공하고, 등극한 것을 축하하였다. 《상동》
○ 6년(959, 광종10) -기미- 정월 임자에 고려국의 왕 왕소(王昭)가 그의 신하인 왕자 좌승(佐丞) 왕긍(王兢)과 좌윤(佐尹) 황보위광(皇甫魏光) 등을 보내와서 명마(名馬) 및 짜서 만든 옷과 바지, 활, 칼, 그릇, 갑옷 등을 바치니, 왕긍 등에게 용의(龍衣), 은대(銀帶), 기폐(器幣) 등을 차등 있게 하사하였다. -살펴보건대 《오대사》에, “이해 정월에 사신을 보내어 황동(黃銅)을 조공하였다.” 하였다.- 8월에 -살펴보건대 공제(恭帝)가 즉위한 뒤이다. 《오대사》에는 8월 임인으로 되어 있다.- 사신을 파견하여 조회하였다. 11월에 다시 사신을 파견하여 황동 5만 근, 백수정(白水精) 2000알을 조공하였다. 《상동》 ○ 《오대사》에, “이해 10월에 또 사신을 보내었다.” 하였다.
○ 송(宋)나라 태조(太祖) 건륭(建隆) 3년(962, 광종13) -임술- 11월 병자에 고려국의 왕 왕소(王昭)가 정사(正使)인 광평 시랑 이흥우(李興佑), 부사(副使)인 이여희(李勵希), 판관(判官) 이빈(李彬) 등을 파견하여 와서 조공하였다. 《송사(宋史)》
○ 4년(963, 광종14) -계해- 9월에 고려가 사신 시찬(時贊) 등을 파견하여 와서 조공하였다. 바다를 건너다가 태풍을 만나 물에 빠져 죽은 자가 70여 인이었는데, 시찬은 겨우 살아났다. 조서를 내려서 위로해 주었다. 《상동》
○ 건덕(乾德) 3년(965, 광종16) -을축- 봄 정월 을유에 고려가 사신을 파견하여 와서 조회하고 공물을 바쳤다. 《상동》
○ 개보(開寶) 5년(972, 광종23) -임신- 가을 7월 경인에 고려가 정사인 내의 시랑(內議侍郞) 서희(徐煕), 부사인 내봉 경(內奉卿) 최업(崔鄴), 판관 광평 시랑 강례(康禮), 녹사(錄事) 광평 원외랑(廣評員外郞) 유은(劉隱)을 사신으로 파견하여 와서 공물을 바쳤다. 《상동》
○ 9년(976, 경종1) -병자- 9월 경오에 권지국사(權知國事) 왕주(王伷)가 사신 조준례(趙遵禮)를 파견하여 토산물을 조공으로 바쳤다. 《상동》
○ 태종(太宗) 태평흥국(太平興國) 2년(977, 경종2) -정축- 12월 신사에 고려의 왕이 그의 아들 왕원보(王元輔)를 사신으로 파견하여 즉위한 것을 축하하고, 양마(良馬), 방물(方物), 병기(兵器)를 가지고 와 조공하였다. 《상동》
○ 3년(978, 경종3) -무인- 10월 계축 초하루에 고려가 사신을 파견하여 와서 방물과 병기를 조공하였다. 《상동》
○ 5년(980, 경종5) -경진- 6월 임오에 고려가 사신을 파견하여 와서 축하하였다. 《상동》
○ 6년(981, 경종6) -신사- 여름 4월 병술에 고려가 사신을 파견하여 와서 조공하였다. 《상동》
○ 7년(982, 성종1) -임오- 에 왕주(王伷)가 졸하였다. 그의 동생 왕치(王治)가 지국사(知國事)가 되어 사신 김전(金全)을 파견하여 와서 조공하면서 금실과 은실로 장식한 계금포(罽錦袍), 계금욕(罽錦褥), 금과 은으로 장식한 칼, 활과 화살, 명마(名馬), 향(香), 약(藥) 등을 조공하였다. 《상동》
○ 옹희(雍煕) 원년(984, 성종3) -갑신- 11월 임자에 고려가 사신 한수령(韓遂齡)을 파견하여 와서 조공하였다. 《상동》
○ 3년(986, 성종5) -병술- 겨울 10월 임자에 고려가 사신을 파견하여 와서 조공하였다. 《상동》
○ 단공(端拱) 원년(988, 성종7) -무자- 11월 갑신 초하루에 고려가 사신을 파견하여 와서 조공하였다. 《상동》
○ 2년(989, 성종8) -기축- 에 고려가 정사인 선관시랑(選官侍郞) 한인경(韓藺卿), 부사인 병관낭중(兵官郞中) 위덕유(魏德柔), 판관(判官) 소부승(少府丞) 이광(李光)을 파견하여 와서 조공하였다. 《상동》
○ 순화(淳化) 원년(990, 성종9) -경인- 10월에 고려가 사신을 파견하여 신귀수존(神龜壽尊)을 바쳤다. 《옥해(玉海)》
○ 12월 을묘에 고려가 사신을 파견하여 와서 조공하였다. 《송사》
○ 2년(991, 성종10) -신묘- 에 고려가 사신 한언공(韓彦恭)을 파견하여 와서 조공하였다. 《상동》
○ 4년(993, 성종12) -계사- 봄 정월 을미에 고려가 사신 백사유(白思柔)를 파견하여 와서 조공하고, 아울러 경전(經典) 및 어제(御製)를 하사해 준 데 대하여 사례하였다. 《상동》
○ 요(遼)나라 성종(聖宗) 통화(統和) 11년(993, 성종12) -계사- 3월에 고려국의 왕 왕치(王治)가 박양유(朴良柔)를 파견하여 표문(表文)을 받들고 죄주기를 청하였다. 《요사(遼史)》
○ 12년(994, 성종13) -갑오- 2월 기축에 고려가 와서 조공하였다. 3월 정사에 고려가 사신을 파견하여 포로로 잡아간 사람과 가축을 돌려주기를 요청하니, 조서를 내려 속환(贖還)하게 하였다. 12월 무자에 고려가 기악(妓樂)을 올렸다. 《상동》
○ 송(宋)나라 순화(淳化) 5년(994, 성종13) -갑오- 6월에 고려가 사신 원욱(元郁)을 파견하여 군사를 보내 주기를 요청하면서 거란(契丹)이 경내를 침구(侵寇)하였다고 하소연하였는데, 조정에서 허락하지 않고 단지 조서를 내려 위무하기만 하였다. 이로부터 고려가 거란의 압박을 받아 조공이 중간에 끊어졌다. 왕치(王治)가 졸하고 그의 동생 왕송(王誦)이 즉위하였다. 왕송이 일찍이 병교(兵校) 서원(徐遠)을 파견하여 조정의 덕음(德音)을 살피도록 하였는데, 서원이 오래도록 도착하지 않았다. 《송사》
○ 요나라 통화(統和) 13년(995, 성종14) -을미- 2월 갑진에 고려가 사신 주정(周楨)을 파견하여 와서 조공하였다. 5월 임자에 고려가 사신을 파견하여 매를 진상하였다. 10월 갑신에 고려가 이지백(李知白)을 보내와서 조공하였다. 《요사》
○ 14년(996, 성종15) -병신- 3월 임인에 왕치(王治)가 표문을 올려 혼인하기를 청하였다. 6월 기축에 고려가 사신을 파견하여 와서 안부를 물었다. 그 뒤로는 수시로 사신이 왔다. 《상동》
○ 15년(997, 성종16) -정유- 에 고려가 사신 한언경(韓彦敬)을 파견하여 와서 빙폐(聘幣)를 바쳤다. 《상동》
○ 송나라 진종(眞宗) 함평(咸平) 3년(1000, 목종3) -경자- 에 고려가, 신하 이부 시랑 조지린(趙之遴)이 아장(牙將) 주인소(朱仁紹)에게 명하여 등주(登州)에 와서 정탐하게 하였는데, 상이 특별히 불러서 보았다. 《송사》 ○ 세기(世紀)에 상세히 나온다.
○ 요나라 통화(統和) 20년(1002, 목종5) -임인- 2월 정축에 고려가 사신을 파견하여 와서 송나라를 쳐서 이긴 것을 축하하였다. 가을 7월 신축에 고려가 사신을 파견하여 와서 고려의 지리도(地里圖)를 조공하였다. 《요사》
○ 송나라 함평(咸平) 6년(1003, 목종6) -계묘- 에 고려가 호부 낭중(戶部郞中) 이선고(李宣告)를 사신으로 파견하여 와서 조회하고 사은하였다. 《송사》
○ 요나라 통화 23년(1005, 목종8) -을사- 5월 병인에 고려가 사신을 파견하여 와서 송나라와 화친(和親)한 것을 축하하였다. 《요사》
○ 26년(1008, 목종11) -무신- 5월에 고려가 사신을 파견하여 문화전(文化殿)과 무공전(武功殿)에 용수초지석(龍鬚草地席)을 바쳤다. 《상동》
○ 28년(1010, 현종1) -경술- 11월에 왕순(王詢)이 사신을 파견하여 표문을 올리고 조회하기를 청하니, 허락하였다. 《상동》
○ 개태(開泰) 원년(1012, 현종3) -임자- 8월에 고려가 전공지(田拱之)를 파견하여 표문을 올리니, 병을 칭탁하고 조회하지 못하겠다고 하였다. 《상동》
○ 송나라 대중상부(大中祥符) 7년(1014, 현종5) -갑인- 에 고려가 고주사(告奏使)로 어사공부 시랑(御事工部侍郞) 윤증고(尹證古)를 파견하여, 금실로 짜서 만든 용봉안(龍鳳鞍), 수를 놓아 만든 용봉안과 용봉복(龍鳳幞) 각 2폭, 세마(細馬) 2필, 산마(散馬) 20필을 가지고 와서 조공하였다.
○ 8년(1019, 현종10) -기미- 11월 계해에 고려가 어사민관 시랑(御事民官侍郞) 곽원(郭元)을 파견하여 동여진(東女眞)과 함께 와서 조공하였다. 《상동》 ○ 《연익이모록(燕翼貽謀錄)》에, “대중상부 8년에 장복(張復)이 상언(上言)하여 조공하는 여러 나라의 의관(衣冠) 모습을 그림으로 그리고 풍속(風俗)을 기록하여 사관(史官)이 기록하는 데 대비하기를 청하니, 황제가 따랐다. 이때 조회하러 온 나라는 고려(高麗), 서하(西夏), 주련(注輦), 점성(占城), 삼불제(三佛齊), 몽국(蒙國)뿐이었다.” 하였다.
○ 천희(天禧) 원년(1017, 현종8) -정사- 11월 임술에 고려가 어사형관 시랑(御事刑官侍郞) 서눌(徐訥)을 파견하여 여진(女眞)의 추령(酋領)을 거느리고 와서 표문을 올리고 방물을 바쳤다. 또 수춘왕(壽春王)을 봉건(封建)한 것에 대해서 축하하였다. 《상동》
○ 3년(1019, 현종10) -기미- 9월에 등주(登州)에서 상언하기를, “고려의 진봉사(進奉使)인 예빈 경(禮賓卿) 최원신(崔元信)이 진왕수(秦王水)의 어귀에 이르러서 풍랑을 만나 배가 뒤집히는 바람에 공물(貢物)을 잃어버렸습니다.” 하니, 조서를 내려 내신(內臣)을 파견하여 위로하였다. 11월에 최원신 등이 들어와 알현하고서 계금의(罽錦衣), 계금욕(罽錦褥), 오칠갑(烏漆甲), 금으로 장식한 장도(長刀)와 비수(匕首), 계금안마(罽錦鞍馬), 저포(紵布), 약물(藥物) 등을 조공하고, 또 중포(中布) 2000단(端)을 올렸다. 《상동》 ○ 살펴보건대 《책부원귀》를 보면, 이해에 인삼과 약물을 진공하였다.
○ 요나라 개태(開泰) 8년(1019, 현종10) -기미- 12월 신해에 고려가 사신을 파견하여 방물을 조공하기를 청하니, 조서를 내려 들이게 하였다. 《요사》
○ 송나라 천희(天禧) 5년(1021, 현종12) -신유- 에 고려가 고주사(告奏使)로 어사예부 시랑 한조(韓祚) 등 179인을 파견하여 와서 사은하였다. 또 거란(契丹)과 수호(修好)하였다고 말하였다. 《송사》
○ 요나라 태평(太平) 원년(1021, 현종12) -신유- 11월에 고려가 사신을 파견하여 와서 조공하였다. 《요사》
○ 송나라 인종(仁宗) 천성(天聖) 8년(1030, 현종21) -경오- 에 고려가 다시 어사민관 시랑 원영(元穎) 등 293인을 파견하여 표문을 받들고 들어와 조회하고, 금기(金器), 은계도검(銀罽刀劍), 안륵마(鞍勒馬), 향유(香油), 인삼(人蔘), 세포(細布), 동기(銅器), 유황(硫黃), 청서피(靑鼠皮) 등의 물품을 조공하였다. 다음 해 2월에 하직하고 돌아갔는데, 사신을 파견하여 등주(登州)까지 호송하였다. 그 뒤로는 사신이 끊어져 중국과 통하지 않은 것이 43년이다. 《송사》
○ 요나라 흥종(興宗) 중희(重煕) 7년(1038, 정종4) -무인- 2월 정축에 고려가 사신을 파견하여 와서 조공하였다. 《요사》
○ 12년(1043, 정종9) -계미- 3월 임진에 존호(尊號)를 더해 올린 일로 고려가 사신을 파견하여 와서 축하하였다. 《상동》
○ 13년(1044, 정종10) -갑신- 3월 정해에 고려가 사신을 파견하여 와서 조공하였다. 6월 병오에 고려가 사신을 파견하여 와서 조공하였다. 12월 기해에 고려가 사신을 파견하여 와서 조공하였다. 《상동》
○ 14년(1045, 정종11) -을유- 4월 신해에 고려가 사신을 파견하여 와서 조공하였다. 《상동》
○ 15년(1046, 정종12) -병술- 3월 정유에 고려가 사신을 파견하여 와서 조공하였다. 《상동》
○ 16년(1047, 문종1) -정해- 12월 임술에 고려가 사신을 파견하여 와서 조공하였다. 《상동》
○ 17년(1048, 문종2) -무자- 4월 병자에 고려가 사신을 파견하여 와서 조공하였다. 《상동》
○ 19년(1050, 문종4) -경인- 4월 갑신에 고려가 사신을 파견하여 와서 조공하였다. 6월 갑술에 고려가 사신을 파견하여 와서 서하(西夏)를 정벌하여 이긴 것을 축하하였다. 《상동》
○ 22년(1053, 문종7) -계사- 6월 계미에 고려가 사신을 파견하여 와서 조공하였다. 《상동》
○ 23년(1054, 문종8) -갑오- 4월 계묘에 고려가 사신을 파견하여 와서 조공하였다. 《상동》
○ 도종(道宗) 청녕(淸寧) 2년(1056, 문종10) -병신- 6월 계묘에 고려가 사신을 파견하여 와서 조공하였다. 《상동》
○ 3년(1057, 문종11) -정유- 11월 경자에 고려가 사신을 파견하여 와서 조공하였다. 《상동》
○ 송나라 신종(神宗) 희령(煕寧) 2년(1069, 문종23) -기유- 에 고려국의 예빈성(禮賓省)에서 복건전운사(福建轉運使) 나증(羅拯)에게 공첩(公牒)을 보내어 말하기를, “상인(商人) 황진(黃進)과 홍만(洪萬) 등에게 공장(公狀)을 부치니, 답장을 받아 보고서 즉시 예를 갖추어 조공하겠습니다.” 하였다. 나증이 이를 아뢰니, 신종이 허락하고 나증에게 명하여 뜻을 효유하게 하였다. 《송사》
○ 요나라 함옹(咸雍) 7년(1071, 문종25) -신해- 11월 병오에 고려가 사신을 파견하여 와서 조공하였다. 《요사》
○ 8년(1072, 문종26) -임자- 6월 정축에 고려가 사신을 파견하여 와서 조공하였다. 《상동》
○ 송나라 희령(煕寧) 5년(1072, 문종26) -임자- 에 고려의 왕휘(王徽)가 민관 시랑 김제(金悌) 등 100인을 파견하여 오니, 조서를 내려 하국(夏國)의 사신을 대우하는 예로 대우하게 하였다. 《송사》
살펴보건대 《고려사(高麗史)》를 보면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문종 26년 -바로 희령 5년이다.- 6월 갑술에 김제(金悌)가 송나라로부터 돌아왔는데, 송나라 황제가 칙서 5통을 보내왔다. 그 가운데 네 번째 칙서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귀국의 사신 김제가 성(省)에 와서 진봉(進奉)한 바를 살펴보았다.
어의(御衣) 2벌과 누런 모직으로 만든 난삼(襴衫) 1벌은 금박을 입힌 붉은 비단으로 만든 겹보로 싸고, 붉은 모직으로 만든 편복(便服) 1벌은 금박을 입힌 붉은 비단으로 만든 겹보로 싼 다음, 이들을 모두 은으로 조각하여 장식하고 검은 칠을 한 상자에 넣어 금은으로 도금한 자물쇠로 채우고, 이들을 다시 한데 싸서 홍매화(紅梅花)를 수놓은 비단으로 만든 겹수건으로 덮었다.
무게가 40냥쭝인 금요대(金腰帶) 1개는 수놓은 붉은 비단으로 만든 겹전대에 넣고, 은으로 조각하여 장식한 무게가 80냥쭝인 갑(匣)에 담은 다음 수놓은 붉은 비단으로 만든 겹보로 싸고, 다시 홍매화를 수놓은 비단으로 만든 겹수건으로 덮었다. 무게가 30냥쭝인 금속대(金束帶) 1개는 수놓은 붉은 비단으로 만든 전대에 넣고, 은으로 조각하여 장식한 무게가 60냥쭝인 갑에 담은 다음 수놓은 붉은 비단으로 만든 겹보로 싸고, 홍매화를 수놓은 비단으로 만든 겹수건으로 덮었다.
총 무게 60냥쭝인 금합(金合) 2벌에는 각각 모직으로 만든 늑파(勒帕) 2개와 모직으로 만든 겹대자(裌袋子) 2개씩을 담아서 금박을 입히고 홍매화를 수놓은 비단으로 만든 겹보에 싼 다음 이들을 모두 홍매화를 수놓은 비단으로 만든 겹수건으로 덮었다. 총 무게 40냥쭝인 금반잔(金盤盞) 2벌은 홍매화를 수놓은 비단 겹보로 싼 다음 이들을 모두 홍매화를 수놓은 비단으로 만든 겹수건으로 덮었다. 무게가 65냥쭝인 금주자(金注子) 1벌은 홍매화를 수놓은 비단으로 만든 겹보로 싸고 홍매화를 수놓은 비단으로 만든 겹수건으로 덮었다. 무게가 150냥쭝인 금사라(金鐁鑼) 1개는 홍매화를 수놓은 비단으로 만든 겹보로 싼 다음 홍매화를 수놓은 비단으로 만든 겹수건으로 덮었다.
붉은 모직으로 만든 안석[倚背] 6개는 홍매화를 수놓은 비단으로 만든 겹보로 싸고, 누런 모직으로 만든 안석 4개는 홍매화를 수놓은 비단으로 만든 겹보로 싸고, 붉은 모직으로 만든 요[褥] 4개는 홍매화를 수놓은 비단으로 만든 겹보로 싸고, 누런 모직으로 만든 요 4개는 홍매화를 수놓은 비단으로 만든 겹보로 싼 다음 이들을 모두 은으로 조각하여 장식하고 검은 칠을 한 상자 2개에 담아 은으로 만든 자물쇠로 잠그고서, 홍매화를 수놓은 비단으로 만든 겹수건으로 덮었다.
세궁(細弓) 4개는 모두 홍매화를 수놓은 비단으로 만든 겹전대에 담고, 효자전(哮子箭) 24개, 세족전(細鏃箭) 80개, 금으로 도금하고 은으로 장식한 병장기(兵仗器) 2벌은 붉은 비단으로 만든 겹전대에 넣고, 백은을 입혀 검은 가죽으로 장식한 병장기 1벌은 붉은 비단으로 만든 겹전대에 넣고, 금은으로 도금하고 흰 가죽으로 장식한 병장기 1벌은 붉은 비단으로 만든 겹전대에 넣은 다음 이들을 모두 홍매화를 수놓은 비단으로 만든 겹수건으로 덮었다. 은으로 장식한 장도(長刀) 20자루는 은으로 조각하여 장식하고 검은 칠을 한 칼집에 넣어 채색 비단으로 묶고, 흰 비단으로 만든 외대(外袋) 10개와 푸른 비단으로 만든 외대 10개에 싼 다음 이들을 모두 홍매화를 수놓은 비단으로 만든 겹수건으로 덮었다.
세마(細馬)는 모두 4필인데, 안장 2벌은 금으로 도금하고 은으로 장식한 안장의 부속품과 모직으로 만든 크고 작은 다래와 언치, 붉은 비단으로 만든 안장 깔개를 전부 수놓은 붉은 비단으로 만든 겹수건으로 덮었고, 안장 2벌은 은으로 조각한 안장의 부속품과 검은 가죽으로 만든 큰 다래와 붉은 비단으로 만든 작은 언치, 붉은 비단으로 만든 안장 깔개 등을 모두 수놓은 붉은 비단으로 만든 겹수건으로 덮었다.
그 이외에도 향유(香油) 20단지, 잣[松子] 2200근, 인삼(人蔘) 1000근, 생중포(生中布) 2000필, 생평포(生平布) 2000필이 들어 있었다.”
○ 요나라 함옹(咸雍) 9년(1073, 문종27) -계축- 12월 임진에 고려가 사신을 파견하여 와서 조공하였다. 《요사》
○ 10년(1074, 문종28) -갑인- 11월 무오에 고려가 사신을 파견하여 와서 조공하였다. 《상동》
○ 송나라 희령(煕寧) 7년(1074, 문종28) -갑인- 에 고려가 신하 김양감(金良鑑)을 파견하여 왔다. 《송사》
희령 7년 봄에 거란(契丹)이 사신 소희(蕭禧)를 파견하여 오자, 한 위공(韓魏公)이 상소하였다. 그 대략에, “고려가 거란에 신하로 복종하여 우리 조정에 오랫동안 조공하지 않고 있어서 상선(商船)을 보내어 유시하고 왔습니다. 고려에서 사신이 오고 안 오고는 국가에 본디 아무런 손익될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거란에서 이 사실을 알 경우에는 우리 조정이 장차 거란을 칠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니, 이는 거란의 의심을 사는 것입니다.” 하였다. 《문견전록(聞見前錄)》
○ 9년(1076, 문종30) -병진- 에 다시 고려가 최사훈(崔思訓)을 파견하여 왔는데, 황제가 총애하는 근시(近侍)에게 명하여 관소(館所)를 수리하고 아주 후하게 대우하도록 하니, 사신으로 오는 사람의 숫자가 더욱 많아졌다. 《송사》
○ 원풍(元豐) 2년(1079, 문종33) -기미- 에 고려가 유홍(柳洪)을 사신으로 보내와서 의원(醫員)을 보내 준 데 대해 사은하였다. 《상동》
○ 3년(1080, 문종34) -경신- 봄 3월 기축에 고려가 사신을 파견하여 와서 조공하였다. 《상동》
원풍 연간에 고려에서 정조(正朝)를 하례하면서 바친 예물 가운데 자하배(紫霞杯)가 있다. 《요산당외기(堯山堂外紀)》
○ 요나라 태강(太康) 7년(1081, 문종35) -신유- 11월 기해에 고려가 사신을 파견하여 와서 조공하였다. 《요사》
○ 송나라 원풍 8년(1085, 선종2) -을축- 에 고려의 국왕 왕운(王運)이 그의 동생인 승통(僧統)을 파견하여 와서 조회하고, 불법(佛法)을 배우기를 요청하였다.
○ 철종(哲宗)이 즉위하자 고려가 김상기(金上琦)를 봉위사(奉慰使)로, 임기(林曁)를 치하사(致賀使)로 파견하였으며, 그 뒤로 몇 년 동안 사신이 오지 않았다. 《이상 모두 송사》
○ 요나라 태안(太安) 2년(1086, 선종3) -병인- 11월 무인에 고려가 사신을 파견하여 책봉(冊封)해 준 데 대해 사은하였다. 《요사》
○ 3년(1087, 선종4) -정묘- 3월 을묘에 고려가 사신을 파견하여 와서 조공하였다. 《상동》
○ 4년(1088, 선종5) -무진- 3월 을축에 고려의 세공(歲貢)을 면제하였다. 《상동》
○ 5년(1089, 선종6) -기사- 봄 정월 갑오에 고려가 사신을 파견하여 와서 조공하였다. 《상동》
○ 6년(1090, 선종7) -경오- 11월 임술에 고려가 사신을 파견하여 와서 조공하였다. 《상동》
○ 송나라 철종 원우(元祐) 5년(1090, 선종7) -경오- 에 다시 고려의 사신이 들어와 조공하였다. 《송사》
○ 6년(1091, 선종8) -신미- 에 고려가 사신을 파견하여 들어와서 조공하였다. 《상동》
○ 7년(1092, 선종9) -임신- 에 고려가 황종각(黃宗慤)을 파견하여 와서 《황제침경(黃帝鍼經)》을 바쳤다. 《상동》
○ 요나라 수륭(壽隆) 원년(1095, 헌종1) -을해- 2월 계유에 고려가 사신을 파견하여 와서 조공하였다. 《요사》
○ 2년(1096, 숙종1) -병자- 겨울 10월 경진에 고려가 사신을 파견하여 와서 조공하였다. 《상동》
○ 송나라 원부(元符) 원년(1098, 숙종3) -무인- 에 고려가 사신을 파견하여 들어와서 조공하였다. 《송사》
○ 휘종(徽宗)이 즉위하니, 고려가 임각(任慤)과 왕하(王嘏)를 파견하여 와서 조문하고 축하하였다. 《상동》 ○ 살펴보건대 바로 원부 3년(1100, 숙종5)이다.
○ 요나라 수륭(壽隆) 7년(1101, 숙종6) -신사- 12월 정유에 고려가 사신을 파견하여 와서 즉위한 것을 축하하였다. 《요사》
○ 송나라 숭녕(崇寧) 연간에 고려의 조공하는 사신이 줄을 이었다. 《송사》
○ 금(金)나라 목종(穆宗) 10년(1103, 숙종8) -계미- 2월에 고려가 사신을 파견하여 와서 소해리(蕭海里)를 격파한 것을 축하하고, 비로소 통교(通交)하였다. 《금사(金史)》
○ 강종(康宗) 4년(1106, 예종1) -병술- 에 고려가 흑환방석(黑歡方石)을 사신으로 파견하여 와서 습위(襲位)한 것을 축하하였다. 《상동》
○ 요나라 천조제(天祚帝) 건통(乾統) 8년(1108, 예종3) -무자- 12월 기묘에 고려가 사신을 파견하여 와서 사은하였다. 《요사》
○ 9년(1109, 예종4) -기축- 12월 갑신에 고려가 사신을 파견하여 와서 조공하였다. 《상동》
○ 송나라 정화(政和) 2년(1112, 예종7) -임진- 에 고려의 사신이 들어와서 조공하였다. 《송사》
○ 3년(1113, 예종8) -계사- 에 고려가 사신 안직숭(安稷崇)을 파견하여 새 약(藥)을 하사해 주기를 요청하였다. 《영화기문(寧和記聞)》
○ 요나라 천경(天慶) 3년(1113, 예종8) -계사- 12월 경술에 고려가 사신을 파견하여 와서 치제(致祭)한 데 대해 사은하였다. 계해에 고려가 사신을 파견하여 기복(起復)시켜 준 데 대해 사례하였다. 《요사》
○ 송나라 정화(政和) 5년(1115, 예종10) -을미- 에 고려의 사신 왕자지(王字之)가 환국하자, 대성아악(大晟雅樂)을 하사하였다. 《영화기문》
○ 금나라 태조(太祖) 수국(收國) 2년(1116, 예종11) -병신- 정월에 고려가 사신을 파견하여 와서 요나라를 쳐서 이긴 것을 축하하고, 또 보주(保州)를 돌려주기를 요청하였다. 또다시 포마(蒲馬)를 파견하여 보주를 돌려주기를 요청하였다. 《금사(金史)》
○ 송나라 정화 6년(1116, 예종11) -병신- 에 고려의 사신이 들어와서 조공하였다. 《송사》
○ 중화(重和) 원년(1118, 예종13) -무술- 에 고려의 사신이 들어와서 조공하였다. 《상동》
○ 금나라 천보(天輔) 4년(1120, 예종15) -경자-고려가 사신을 파견하여 표문을 바치고 축하하였으며, 아울러 방물을 조공하였다. 《금사》
○ 송나라 선화(宣和) 6년(1124, 인종2) -갑진- 에 고려가 사신을 파견하여 들어와서 조공하였다. 《송사》
세남(世南)의 집에 일찍이 고려국의 사신이 보낸 서장(書狀) 몇 폭을 소장하고 있었는데, 바로 선화 6년 9월에 고려의 정사(正使)인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 검교사공 지추밀원사 상주국(檢校司空知樞密院事上柱國) 이자덕(李資德), 부사(副使)인 태중대부(太中大夫) 상서예부시랑 주국 사자금어대(尙書禮部侍郞柱國賜紫金魚袋) 김부철(金富轍)이 송나라에 이르러 사은하면서 진봉(進奉)한 것으로, 각각 중국의 문체인 사륙문(四六文)으로 지었다. 사사로이 바친 예물은 복두사(幞頭紗) 3매(枚), 백성삽화은반(白成鈒花銀盤) 1면(面) -무게는 12냥쭝이다.-, 자대문라(紫大紋羅) 2필, 백축대릉(白蹴大綾) 1필, 생화릉(生花綾) 2필, 백세저포(白細苧布) 3필, 대지(大紙) 80폭(幅), 황모필(黃毛筆) 20자루, 송연묵(松煙墨) 20정(挺), 송선(松扇) 3개, 접첩선(摺疊扇) 2개, 나전연갑(螺鈿硯匣) 1벌, 나전필갑(螺鈿筆匣) 1벌, 극사약대(剋絲藥袋) 1매, 수계요(繡繫腰) 1조(條), 복령(茯苓) 2근, 백출(白朮) 2근, 백동기(白銅器) 5벌이었다. 《유환기문(游宦記聞)》
○ 7년(1125, 인종3) -을사- 에 고려의 사신이 들어와 조공하였다. 《송사》
○ 금나라 태종(太宗) 천회(天會) 4년(1126, 인종4) -병오- 6월 병신 초하루에 왕해(王楷)가 사신을 파견하여 표문을 받들고 번방(藩邦)을 칭하였다. 10월 정미 천청절(天淸節)에 고려가 사신을 파견하여 와서 축하하였다. 《금사》
○ 5년(1127, 인종5) -정미- 정월 신묘 초하루에 고려가 사신을 파견하여 와서 축하하였다. 10월 신미 천청절에 고려가 사신을 파견하여 와서 축하하였다. 《상동》
○ 6년(1128, 인종6) -무신- 정월 병술 초하루에 고려가 사신을 파견하여 축하하였다. 10월 병인 천청절에 고려가 사신을 파견하여 와서 축하하였다. 《상동》
○ 송나라 고종(高宗) 건염(建炎) 2년(1128, 인종6) -무신- 12월에 왕해가 그의 신하 윤언순(尹彦順)을 파견하여 들어와서 조근(朝覲)하였다. 《상동》
○ 3년(1129, 인종7) -기유- 9월에 고려가 사신을 파견하여 들어와서 조공하겠다고 하니, 조서를 내려 정지하게 하였다. 《속송편년자치통감(續宋編年資治通鑑)》
○ 금나라 천회(天會) 7년(1129, 인종7) -기유- 정월 경진 초하루에 고려가 사신을 파견하여 와서 축하하였다. 10월 경인 천청절에 고려가 사신을 파견하여 와서 축하하였다. 11월 을묘에 고려가 사신을 파견하여 와서 조공하였다. 《금사》
○ 8년(1130, 인종8) -경술- 정월 갑진 초하루에 고려가 사신을 파견하여 와서 축하하였다. 10월 갑신 천청절에 고려가 사신을 파견하여 와서 축하하였다. 《상동》
○ 9년(1131, 인종9) -신해- 정월 기해 초하루에 고려가 사신을 파견하여 와서 축하하였다. 2월 을해에 고려가 사신을 파견하여 표문을 바치면서 보주(保州)로 도망쳐 들어온 요나라 변방 사람들을 색출하는 것을 면제해 주기를 청하였다. 10월 무인 천청절에 고려가 사신을 파견하여 와서 축하하였다. 《상동》
○ 10년(1132, 인종10) -임자- 정월 계사 초하루에 고려가 사신을 파견하여 와서 축하하였다. 10월 임인 천청절에 고려가 사신을 파견하여 와서 축하하였다. 《상동》
○ 송나라 소흥(紹興) 2년(1132, 인종10) -임자- 윤4월에 고려가 예부 원외랑(禮部員外郞) 최유청(崔惟淸)과 합문 지후(閤門祗候) 심기(沈起)를 파견하여 들어와 금 100냥, 은 1000냥, 능라(綾羅) 100필, 인삼(人蔘) 500근을 조공하였다. 《송사》
○ 금나라 천회 11년(1133, 인종11) -계축- 정월 정사 초하루에 고려가 사신을 파견하여 와서 축하하였다. 10월 병신 천청절에 고려가 사신을 파견하여 와서 축하하였다. 《금사》
○ 12년(1134, 인종12) -갑인- 정월 신해 초하루에 고려가 사신을 파견하여 와서 축하하였다. 10월 경인 천청절에 고려가 사신을 파견하여 와서 축하하였다. 《상동》
○ 13년(1135, 인종13) -을묘- 정월에 태종(太宗)이 붕어(崩御)하고 희종(煕宗)이 즉위하였다. 4월 무오에 고려가 사신을 파견하여 와서 즉위한 것을 축하하였다. 《상동》
○ 14년(1136, 인종14) -병진- 정월 기사 초하루에 고려가 사신을 파견하여 와서 축하하였다. 을유 만수절(萬壽節)에 고려가 사신을 파견하여 와서 축하하였다. 《상동》
○ 15년(1137, 인종15) -정사- 정월 계해 초하루에 고려가 사신을 파견하여 와서 조공하였다. 기묘 만수절에 고려가 사신을 파견하여 와서 축하하였다. 《상동》
○ 희종(煕宗) 천권(天眷) 원년(1138, 인종16) -무오- 정월 무자 초하루에 고려가 사신을 파견하여 와서 축하하였다. 갑진 만수절에 고려가 사신을 파견하여 와서 축하하였다. 12월 무술에 고려가 사신을 파견하여 와서 조공하였다. 《상동》
○ 2년(1139, 인종17) -기미- 정월 임오 초하루에 고려가 사신을 파견하여 와서 축하하였다. 무술 만수절에 고려가 사신을 파견하여 와서 축하하였다. 《상동》
○ 3년(1140, 인종18) -경신- 정월 정축 초하루에 고려가 사신을 파견하여 와서 축하하였다. 계사 만수절에 고려가 사신을 파견하여 와서 축하하였다. 《상동》
○ 황통(皇統) 원년(1141, 인종19) -신유- 정월 신축 초하루에 고려가 사신을 파견하여 와서 축하하였다. 임인에 고려가 사신을 파견하여 존호(尊號)를 올리게 해 주기를 청하였다. 정사 만수절에 고려가 사신을 파견하여 와서 축하하였다. 11월 기유에 고려가 사신을 파견하여 존호를 받은 것을 축하하였다. 《상동》
○ 2년(1142, 인종20) -임술- 정월 을미 초하루에 고려가 사신을 파견하여 와서 축하하였다. 신해 만수절에 고려가 사신을 파견하여 와서 축하하였다. 12월 기축에 고려가 사신을 파견하여 책봉해 준 데 대해 사은하였다. 《상동》
○ 3년(1143, 인종21) -계해- 정월 기축 초하루에 황태자의 상(喪)으로 인해 정전(正殿)에 임어하지 않자, 고려가 사신을 파견하여 황극전(皇極殿)에 나아가 멀리서 축하하였다. 을사 만수절에 정조(正朝)의 의식과 같이 예를 행하였다. 《상동》
○ 4년(1144, 인종22) -갑자- 정월 계축 초하루에 고려가 사신을 파견하여 와서 축하하였다. 기사 만수절에 고려가 사신을 파견하여 와서 축하하였다. 《상동》
○ 5년(1145, 인종23) -을축- 정월 정미 초하루에 고려가 사신을 파견하여 와서 축하하였다. 계해 만수절에 고려가 사신을 파견하여 와서 축하하였다. 《상동》
○ 6년(1146, 인종24) -병인- 정월 신미 초하루에 고려가 사신을 파견하여 와서 축하하였다. 정해 만수절에 고려가 사신을 파견하여 와서 축하하였다. 《상동》
○ 7년(1147, 의종1) -정묘- 정월 을축에 고려가 사신을 파견하여 와서 축하하였다. 신사 만수절에 고려가 사신을 파견하여 와서 축하하였다. 3월 임인에 고려가 사신을 파견하여 와서 조제(弔祭)하고 기복(起復)시켜준 데 대해 사은하였다. 《상동》
○ 8년(1148, 의종2) -무진- 정월 경진 초하루에 고려가 사신을 파견하여 와서 축하하였다. 병자 만수절에 고려가 사신을 파견하여 와서 축하하였다. 6월에 고려가 사신을 파견하여 책봉해 준 데 대해 사은하였다. 《상동》
○ 9년(1149, 의종3) -기사- 정월 갑신 초하루에 고려가 사신을 파견하여 와서 축하하였다. 경자 만수절에 고려가 사신을 파견하여 와서 축하하였다. 《상동》
해릉(海陵) 천덕(天德) 2년(1150, 의종4) -경오- 3월 병술에 고려가 지추밀원사(知樞密院事) 문공유(文公裕)와 전중감(殿中監) 박순중(朴純中)을 파견하여 보위에 오른 것을 축하하였다. 《상동》 ○ 살펴보건대, 《금사(金史)》 본기(本紀) 2년 6월 병오 초하루에 고려가 사신을 보내어 즉위한 것을 축하하였다고 되어 있는데, 표(表)에는 3월 병술에 문공유 등을 파견하여 보위에 오른 것을 축하하였다고 되어 있다. 반드시 1년에 두 차례 축하하였을 리는 없는바, 이것은 역사를 기록하는 자가 잘못 기록한 것이다. 지금은 표를 따른다.
○ 3년(1151, 의종5) -신미- 정월 계유 초하루에 고려가 사신을 파견하여 와서 축하하였다. 무자 생신 날에 고려가 사신을 파견하여 와서 축하하였다. 《상동》
○ 4년(1152, 의종6) -임신- 정월 정유 초하루에 고려가 사신을 파견하여 와서 축하하였다. 임자 생신 날에 고려가 사신을 파견하여 와서 축하하였다. 《상동》
○ 정원(貞元) 원년(1153, 의종7) -계유- 정월 신묘 초하루에 황제가 시조(視朝)하지 않고, 조서를 내려 유사(有司)로 하여금 고려의 공헌(貢獻)을 받게 하였다. 병오 생신 날에 고려가 사신을 파견하여 와서 축하하였다. 《상동》 ○ 살펴보건대 《금사》 열전(列傳)을 보면, 태종의 아들 연(兗)이 천덕(天德) 4년 12월 그믐날 훙하자, 다음 날인 정원(貞元) 원년 원조(元朝)에 연을 위하여 철조(輟朝)하고, 송(宋), 서하(西夏), 고려(高麗)의 하정조사(賀正朝使)가 올리는 조하(朝賀)를 받지 않았으며, 유사에게 명하여 공헌물을 받게 하였다.
○ 2년(1154, 의종8) -갑술- 정월 갑인 초하루에 상이 편찮아 시조(視朝)하지 않고, 고려의 사신이 묵고 있는 관소에 잔치를 하사하였다. 기사 생신 날에 고려가 사신을 파견하여 와서 축하하였다. 6월 기해에 고려가 사신을 파견하여 뜻밖에 하사해 준 데 대해 사은하였다. 11월에 고려가 사신을 파견하여 생일잔치를 내려 준 데 대해 사은하였다. 12월 정미에 고려가 사신을 파견하여 방물을 조공하였다. 《상동》
○ 3년(1155, 의종9) -을해- 정월 기유 초하루에 고려가 사신을 파견하여 와서 축하하였다. 갑자 생신 날에 고려가 사신을 파견하여 와서 축하하였다. 《상동》
○ 정륭(正隆) 원년(1156, 의종10) -병자- 계묘 초하루에 고려가 사신을 파견하여 와서 축하하였다. 무자 생신 날에 고려가 사신을 파견하여 와서 축하하였다. 《상동》
○ 2년(1157, 의종11) -정축- 정월 무진 초하루에 고려가 사신을 파견하여 와서 축하하였다. 계미 생신 날에 고려가 사신을 파견하여 와서 축하하였다. 3월 병인 초하루에 고려가 사신을 파견하여 존호(尊號)를 받은 것을 축하하였다. 《상동》
○ 3년(1158, 의종12) -무인- 정월 임술에 고려가 사신을 파견하여 와서 축하하였다. 정축 생신 날에 고려가 사신을 파견하여 와서 축하하였다. 《상동》
○ 4년(1159, 의종13) -기묘- 정월 병진 초하루에 고려가 사신을 파견하여 와서 축하하였다. 신미 생신 날에 고려가 사신을 파견하여 와서 축하하였다. 《상동》
○ 5년(1160, 의종14) -경진- 정월 경진 초하루에 고려가 사신을 파견하여 와서 축하하였다. 을미 생신 날에 고려가 사신을 파견하여 와서 축하하였다. 《상동》
○ 6년(1161, 의종15) -신사- 정월 갑술 초하루에 고려가 사신을 파견하여 와서 축하하였다. 기축 생신 날에 고려가 사신을 파견하여 와서 축하하였다. 《상동》
○ 세종(世宗) 대정(大定) 2년(1162, 의종16) -임오- 12월에 고려가 위위 소경(衛尉少卿) 정응기(丁應起)를 파견하여 정조를 하례하였다. 《상동》
○ 3년(1163, 의종17) -계미- 정월 임진 초하루에 고려가 사신을 파견하여 와서 축하하였다. 2월 경인에 고려가 수사공(守司空) 김영윤(金永胤)과 상서예부 시랑(尙書禮部侍郞) 김순부(金淳夫)를 진봉사(進奉使)로 파견하고, 예빈 소경(禮賓少卿) 허세수(許勢修)를 파견하여 보위에 등극한 것을 축하하고, 비서 소감(祕書少監) 김거실(金居實)을 파견하여 선위(宣慰)해 준 데 대해 사은하였다. 3월 임진 초하루에 고려가 위위 소경(衛尉少卿) 이공로(李公老)를 파견하여 만춘절(萬春節)을 축하하였다. 12월 을유에 고려가 전중 소감(殿中少監) 김존부(金存夫)를 파견하여 뜻밖에 하사해 준 데 대해 사은하였다. 《상동》
○ 4년(1164, 의종18) -갑신- 정월 정해 초하루에 고려가 예빈 소경 고처약(高處約)을 파견하여 정조(正朝)를 축하하였다. 3월 병술 초하루에 고려가 비서 소감 최효온(崔孝溫)을 진봉사로 파견하고, 조산대부(朝散大夫) 위위 소경(衛尉少卿) 정효칭(鄭孝偁)를 파견하여 만춘절을 축하하였다. 12월에 고려가 예빈 소경 김장(金莊)을 파견하여 생일잔치를 하사해 준 데 대해 사은하였다. 《상동》
○ 5년(1165, 의종19) -을유- 정월 신해 초하루에 고려가 위위 소경 고진진(高珍縉)을 파견하여 정삭(正朔)을 축하하였다. 3월 경술 초하루에 고려가 전중 소감 진역승(陳力升)을 진봉사로 파견하고, 비서 소감 원이충(元頤沖)을 파견하여 만춘절을 축하하였다. 12월에 이부 상서(吏部尙書) 이지심(李知深)과 중서 사인(中書舍人) 윤돈신(尹敦信)을 파견하여 존호를 받은 것을 하례하였으며, 위위 소경 왕보(王輔)를 파견하여 생일잔치를 하사해 준 데 대해 사은하였다. 《상동》
○ 6년(1166, 의종20) -병술- 정월 병오 초하루에 고려가 태부 소경(太府少卿) 이세의(李世儀)를 파견하여 정조를 축하하였다. 3월 갑진 초하루에 고려가 국자사업(國子司業) 조인귀(趙仁貴)를 진봉사로 파견하고, 비서 소감(祕書少監) 이복기(李復基) 등을 파견하여 만수절을 하례하였다. 12월 무술에 고려가 예부 소경 최춘(崔椿)을 파견하여 생일잔치를 하사해 준 데 대해 사은하였으며, 위위 소경 김자용(金資用)을 파견하여 뜻밖에 하사해 준 데 대해 사은하였다. 《상동》
○ 7년(1167, 의종21) -정해- 정월 경자 초하루에 고려가 사재 소경(司宰少卿) 반함유(潘咸有)를 파견하여 정조를 축하하였다. 3월 기해에 고려가 상서호부 시랑 유덕용(柳德容)을 파견하여 만춘절을 축하하였다. 12월 임술에 고려가 예빈 소경 최현(崔儇)을 파견하여 생일잔치를 하사해 준 데 대해 사은하였다. 《상동》
○ 8년(1168, 의종22) -무자- 정월 갑자 초하루에 고려가 사재 소경 김기(金起)를 파견하여 정조를 축하하였다. 3월 계해 초하루에 고려가 상서호부 시랑 김광리(金光利)를 진봉사로 파견하고, 조산대부(朝散大夫) 비서 소감 조식(趙湜)을 파견하여 만춘절을 축하하였다. 《상동》
○ 9년(1169, 의종23) -기축- 정월 무오 초하루에 고려가 사재 소경 진현광(陳玄光)과 예빈 소경 서추(徐諏) 등을 파견하여 정조를 축하하였다. 3월 정사 초하루에 고려가 비서 소감 김이성(金利誠)을 파견하여 만춘절을 축하하고, 조산대부 위위 소경 최서(崔偦)를 진봉사로 파견하였다. 12월 경술에 고려가 태부 소경(太府少卿) 배연(裵衍)을 파견하여 생일잔치를 하사해 준 데 대해 사은하고, 사재 소경 이세미(李世美)를 파견하여 뜻밖에 하사해 준 데 대해 사은하였다. 《상동》
○ 10년(1170, 의종24) -경인- 정월 병자 초하루에 고려가 예빈 소경 진승(陳升)을 파견하여 정조를 축하하였다. 3월 임자에 고려가 위위 소경 최신(崔侁)을 진봉사로 파견하고, 상서예부 시랑 최광섭(崔光涉) 등을 파견하여 만춘절을 축하하였다. 《상동》
○ 11년(1171, 명종1) -신묘- 4월 정묘에 고려의 권군국사(權軍國事) 왕호(王晧)가 표문을 올리면서 아울러 그의 형인 왕현(王晛)의 표문도 함께 올려 책봉해 주기를 요청하였다. 12월에 권군국사 왕호가 고주사(告奏使) 상서예부시랑 장익명(張翼明)을 파견하여 표문을 올려 책봉해 주기를 요청하였다. 《상동》
○ 12년(1172, 명종2) -임진- 정월 경오 초하루에 고려가 사신을 파견하여 와서 축하하였다. 3월 기사 초하루에 고려가 상서호부 시랑 김황유(金黃裕) 등을 파견하여 만춘절을 축하하고, 위위 소경 채상정(蔡祥正)을 파견하여 존호를 추가로 더 올린 것을 축하하였다. 4월 정묘에 고려가 호부 상서 이저(李著)와 국자 좨주(國子祭酒) 최포(崔誧)를 파견하여 존호를 올린 것을 축하하였다. 10월에 고려가 검교태위(檢校太尉) 김우번(金于蕃)과 태부 소경 김선(金瑄)을 파견하여 책봉해 준 데 대해 사은하였다. 《상동》
○ 13년(1173, 명종3) -계사- 정월 을축 초하루에 고려가 사재 소경 사정유(史正儒)를 파견하여 정조를 축하하였다. 3월 계사 초하루에 고려가 태부 소경 이응구(李應求)를 파견하여 만춘절을 축하하였다. 《상동》
○ 14년(1174, 명종4) -갑오- 정월 기축 초하루에 고려가 상서이부 시랑 최균(崔均) 등을 파견하여 정조를 축하하였다. 2월 병술에 고려가 상서형부 시랑 차인규(車仁揆)를 진봉사(進奉使)로 파견하였다. 3월 무자 초하루에 고려가 상서호부 시랑 김연광(金鍊光)을 파견하여 만춘절을 축하하였다. 《상동》
○ 15년(1175, 명종5) -을미- 9월 신유에 조위총(趙位寵)의 난(亂)을 평정하고 비서 소감 박소(朴紹)를 파견하여 표문을 올려 고주(告奏)하였다. 12월 병오에 조산대부 예빈 소경 조영인(趙永仁)을 파견하여 생일잔치를 하사해 준 데 대해 사은하였다. 《상동》
○ 16년(1176, 명종6) -병신- 정월 무신 초하루에 고려가 상서이부 시랑 이장(李章)을 파견하여 정조를 축하하였다. 3월 병오 초하루에 고려가 상서호부 시랑 채순희(蔡順禧)를 파견하여 만춘절을 축하하였다. 12월 경자에 고려가 예부 소경 왕규(王珪)를 파견하여 생일잔치를 하사해 준 데 대해 사은하고, 호부 상서 오광척(吳光陟)과 공부 시랑 윤숭회(尹崇誨) 등을 파견하여 조위총의 내부(內附)를 허락하지 않은 데 대해 사은하였다. 《상동》
○ 17년(1177, 명종7) -정유- 정월 임인 초하루에 고려가 상서호부 시랑 오숙부(吳淑夫)를 파견하여 정조를 축하하였다. 2월 기해에 고려가 조산대부 호부 시랑 정수필(丁守弼)을 파견하여 진봉(進奉)하였다. 3월 신축 초하루에 고려가 상서공부 시랑 최광원(崔光遠)을 파견하여 만춘절을 축하하였다. 12월 갑오에 고려가 예빈 소경 최미(崔美)를 파견하여 뜻밖에 하사해 준 데 대해 사은하였다. 《상동》
○ 18년(1178, 명종8) -무술- 정월 병신 초하루에 고려가 상서호부 시랑 손응시(孫應時)를 파견하여 정조를 축하하였다. 2월 계사에 고려가 이부 시랑 최효구(崔孝求)를 파견하여 진봉하였다. 3월 을미 초하루에 고려가 상서형부 시랑 이인성(李仁成) 등을 파견하여 만춘절을 축하하였다. 12월 무오에 고려가 예빈 소경 기세(奇世)를 파견하여 생일잔치를 하사해 준 데 대해 사은하였다. 《상동》
○ 19년(1179, 명종9) -기해- 정월 경신 초하루에 고려가 형부 시랑 김절(金節)을 파견하여 정조를 축하하였다. 2월 정사에 고려가 상서이부 시랑 유득인(柳得仁)을 파견하여 진봉하였다. 3월 기미 초하루에 고려가 상서호부 시랑 노탁유(盧卓儒)를 파견하여 만춘절을 축하하였다. 12월 임자에 고려가 조산대부 예빈 소경 유득의(柳得義)를 파견하여 생일잔치를 하사해 준 데 대해 사은하였다. 《상동》
○ 20년(1180, 명종10) -경자- 정월 갑인 초하루에 고려가 상서호부 시랑 윤동보(尹東輔)를 파견하여 정조를 축하하였다. 2월 신해에 고려가 상서이부 시랑 김현공(金鉉公)을 파견하여 진봉하였다. 3월 계축 초하루에 고려가 상서호부 시랑 손석(孫碩)을 파견하여 만춘절을 축하하였다. 12월 병오에 고려가 예빈 소경 심진승(沈晉升)을 파견하여 생일잔치를 하사해 준 데 대해 사은하고, 예빈 소경 왕탁(王度)을 파견하여 뜻밖에 하사해 준 데 대해 사은하였다. 《상동》
○ 21년(1181, 명종11) -신축- 정월 무진 초하루에 고려가 상서예부 시랑 -살펴보건대 이름은 잃어버렸다.- 을 파견하여 정조를 축하하였다. 2월 갑진에 고려가 상서이부 시랑 이덕기(李德基)를 파견하여 진봉하였다. 3월 정미 초하루에 고려가 상서호부 시랑 신보지(申寶至)를 파견하여 만춘절을 축하하였다. 《상동》
○ 22년(1182, 명종12) -임인- 3월 신미 초하루에 고려가 사신을 파견하여 와서 만춘절을 축하하였다. 《상동》
○ 23년(1183, 명종13) -계묘- 정월 정묘 초하루에 고려가 상서예부 시랑 최영유(崔永濡)를 파견하여 정조를 축하하였다. 2월 갑자에 고려가 호부 시랑 문장위(文章煒)를 파견하여 진봉하였다. 3월 병인 초하루에 고려가 호부 시랑 노효돈(盧孝敦)을 파견하여 만춘절을 축하하였다. 《상동》
○ 24년(1184, 명종14) -갑진- 정월 신묘 초하루에 고려가 사신을 파견하여 와서 축하하였다. 2월 갑술에 고려의 왕이 모상(母喪)의 졸곡(卒哭)이 끝나지 않았다는 이유로 금년의 만춘절 및 진공사를 파견하는 것을 면제해 달라고 청하자, 조서를 내려 방물진공사(方物進貢使)는 내년의 하정조사(賀正朝使)와 함께 오라고 하였다.
12월 정해에 고려의 최효저(崔孝著)가 조정에 하직 인사를 하자, 조서를 내려 왕호(王晧)에게 답하였다. 《이상 모두 상동》
○ 25년(1185, 명종15) -을사- 12월 무인에 고려가 호부 상서 양기(梁冀)와 경부소감경(京府少監卿) 최소(崔素)를 파견하여 칙서를 내리고 제사를 지내준 데 대해 사은하고, 사재 소경 강용유(康勇儒)를 파견하여 위문해 준 데 대해 사은하고, 예빈 소경 계인(桂仁)을 파견하여 기복(起復)시켜 준 데 대해 사은하였다. 《상동》
○ 26년(1186, 명종16) -병오- 정월 경진 초하루에 고려가 상서공부 시랑 최인청(崔仁請)을 파견하여 정조를 축하하였다. 2월 정축에 고려가 호부 시랑 문의혁(門義赫)을 파견하여 진봉하였다. 3월 기묘 초하루에 고려가 예부 시랑 유공권(柳公權)을 파견하여 만춘절을 축하하였다. 12월 경자에 고려가 예부 시랑 임유(任濡)를 파견하여 뜻밖에 하사해 준 데 대해 사은하고, 예빈 소경 노원(盧元)을 파견하여 생일잔치를 하사해 준 데 대해 사은하였다. 《상동》
○ 27년(1187, 명종17) -정미- 정월 계묘 초하루에 고려가 사재 소경 최광보(崔匡輔)를 파견하여 정조를 축하하였다. 2월 신축에 고려가 예빈 소경 차약송(車若松)을 파견하여 진봉하였다. 3월 계묘 초하루에 고려가 호부 시랑 이공균(李公鈞)을 파견하여 만춘절을 축하하였다. 12월 갑오에 고려가 예빈 소경 최존(崔存)을 파견하여 생일잔치를 하사해 준 데 대해 사은하였다. 《상동》
○ 28년(1188, 명종18) -무신- 정월 정유 초하루에 고려가 사재 소경 최적원(崔迪元)을 파견하여 정조를 축하하였다. 2월 을미에 고려가 예빈 소경 길인(吉仁)을 파견하여 진봉하였다. 3월 정유 초하루에 고려가 호부 시랑 이희(李禧)를 파견하여 만춘절을 축하하였다. 12월 경인에 고려가 호부 시랑 주광미(周匡美)를 파견하여 생일잔치를 하사해 준 데 대해 사은하였다. 《상동》
○ 29년(1189, 명종19) -기유- 정월 임진 초하루에 고려가 예빈 소경 이상유(李尙儒)를 파견하여 정조를 축하하러 왔다가 세종(世宗)의 병이 위독해 고려의 사신이 되돌아갔다. 계사에 세종이 붕어하자 6월에 칙서를 내려 유사(有司)로 하여금 고려에 이보(移報)하여 천수절(天壽節)을 9월 1일에 와서 축하하게 하였다. 7월 신미에 고려가 검교태위(檢校太尉) 정존실(鄭存實)과 전중감(殿中監) 임충(任沖)을 파견하여 와서 등극한 것을 축하하였다. 8월에 고려가 호부 상서 최응용(崔膺庸)을 파견하여 천수절을 축하하였다. 12월에 고려가 예부시랑 민시(閔是)를 파견하여 생일잔치를 하사해 준 데 대해 사은하고, 호부 시랑 손연(孫衍)을 파견하여 뜻밖에 하사해 준 데 대해 사은하였다. 갑인에 고려가 사신을 파견하여 와서 정조를 축하하였다. 《상동》 ○ 살펴보건대 이는 다음 해의 정조사(正朝使)인데, 본기(本紀)에는 이달에 실려 있다.
○ 장종(章宗) 명창(明昌) 원년(1190, 명종20) -경술- 8월 기유에 고려가 호부 시랑 진극수(陳克修) 및 진봉사(進奉使) 호부 시랑 정세권(鄭世鬈)을 파견하여 와서 천수절을 축하하였다. 12월 정미에 고려가 호부 시랑 노식(盧湜)을 파견하여 생일잔치를 하사해 준 데 대해 사은하였다. 《상동》
○ 2년(1191, 명종21) -신해- 정월 경술 초하루에 고려가 예빈 소경 정극온(鄭克溫)을 파견하여 정조를 축하하였다. 8월 을사에 고려가 호부 시랑 유광수(柳光壽)를 파견하여 와서 천수절을 축하하고, 호부 시랑 송홍적(宋弘迪)을 파견하여 진봉하였다. 12월 계묘에 고려가 호부 시랑 이지순(李至純)을 파견하여 생일잔치를 하사해 준 데 대해 사은하였다. 《상동》
○ 3년(1192, 명종22) -임자- 정월 을사 초하루에 고려가 예부 소경 홍효충(洪孝忠)을 파견하여 정조를 축하하였다. 8월 신축 초하루에 고려가 위위 소경 박초(朴初)를 파견하여 천수절을 축하하고, 비서 소감 사위(師威)를 파견하여 뜻밖에 하사해 준 데 대해 사은하고, 예빈 소경 석성계(石成桂)를 파견하여 진봉하였다. 12월 정묘에 고려가 호부 시랑 정광서(丁光敍)를 파견하여 생일잔치를 하사해 준 데 대해 사은하였다. 《상동》
○ 4년(1193, 명종23) -계축- 정월 기사 초하루에 고려가 사재 소경 양서절(楊漵節)을 파견하여 정조를 축하하였다. 8월 신유에 고려가 예빈 소경 소양미(蘇良美)를 파견하여 천수절을 축하하고, 이부 시랑 문후식(門侯軾)을 파견하여 진봉하였다. 9월 갑자 초하루 천수절에 황제가 대안전(大安殿)에 임어하여 고려 사신의 조하(朝賀)를 받았다. 12월 경신에 고려가 호부 시랑 진광경(陳光卿) 등을 파견하여 생일잔치를 하사해 준 데 대해 사은하였다. 《상동》
○ 5년(1194, 명종24) -갑인- 정월 계해 초하루에 고려가 위위 소경 이거정(李居正)을 파견하여 정조를 축하하였다. 8월 기축 초하루에 고려가 예빈 소경 권신(權信)을 파견하여 천수절을 축하하고, 태부 소감 유택(柳澤)을 파견하여 진봉하였다. -살펴보건대 《금사》의 본기(本紀)에서 9월 무오 초하루에 와서 축하하였다고 한 것은 축하한 날을 가지고 말한 것이고, 표(表)에서 8월 기축 초하루라고 한 것은 도착한 날을 가지고 말한 것이다.- 12월 정사 초하루에 고려가 호부 시랑 유방저(劉邦氐)를 파견하여 생일잔치를 하사해 준 데 대해 사은하였다. 《상동》
○ 6년(1195, 명종25) -을묘- 정월 정해 초하루에 고려가 호부 시랑 백존유(白存儒)를 파견하여 정조를 축하하였다. 8월 기묘에 고려가 위위 소경 주원적(周元迪)을 파견하여 뜻밖에 하사해 준 데 대해 사은하였다. 9월 임오 초하루에 고려가 예부 시랑 서해(徐諧)를 파견하여 천수절을 축하하였다. 12월 정축에 고려가 상서호부 시랑 손홍(孫弘)을 파견하여 생일잔치를 하사해 준 데 대해 사은하였다. 《상동》
○ 승안(承安) 원년(1196, 명종26) -병진- 정월 신사 초하루에 고려가 예빈 소경 송위(宋韙)를 파견하여 정조를 축하하였다. 8월 갑술에 고려가 상서예부 시랑 조충(趙沖)을 파견하여 천수절을 축하하고, 태부감 경(太府監卿) 유응거(劉應擧)를 파견하여 진봉하였다. 12월 병오 초하루에 고려가 호부 시랑 김광당(金光當)을 파견하여 생일잔치를 하사해 준 데 대해 사은하였다. 《상동》
○ 2년(1197, 명종27) -정사- 정월 을해 초하루에 고려가 예빈 소경 아응경(牙應卿)을 파견하여 정조를 축하하였다. 8월 무술에 고려가 예부 시랑 조겸(趙謙)을 파견하여 천수절을 축하하고, 호부 시랑 양원(梁元)을 파견하여 진봉하였다. 《상동》
○ 3년(1198, 신종1) -무오- 3월 병인에 왕호(王晧)가 나라를 그의 동생 왕탁(王晫)에게 양위하였다는 내용으로 예빈 소경 조통(趙通)을 파견하여 와서 아뢰고, 책봉해 주기를 요청하였다. 이해에 왕호가 훙하고 왕탁이 뒤를 이어 즉위하고는 예빈 소경 백여주(白汝舟)를 파견하여 와서 고하였다. 《상동》
○ 4년(1199, 신종2) -기미- 8월 기유에 고려가 호부 시랑 유원순(劉元順)을 파견하여 와서 천수절을 축하하고, 호부 시랑 정방보(鄭邦輔)를 파견하여 진봉하였다. 12월 을유에 고려가 지추밀원사(知樞密院事) 김척후(金陟候)와 태부 경(太府卿) 왕의(王儀)를 파견하여 책봉해 준 데 대해 사은하였다. 《상동》
○ 5년(1200, 신종3) -경신- 정월 무자 초하루에 고려가 예빈 소경 백원식(白元軾)을 파견하여 와서 정조를 축하하였다. 8월 임자에 고려가 호부 시랑 지자심(池資深)을 파견하여 천수절을 축하하고, 호부 시랑 신주석(申周錫)을 파견하여 진봉하였다. 《상동》
○ 태화(泰和) 원년(1201, 신종4) -신유- 정월 임자 초하루에 고려가 예빈 소경 이유경(李惟卿)을 파견하여 정조를 축하하였다. 8월에 고려가 호부 시랑 정공순(鄭公順)을 파견하여 천수절을 축하하고, 예빈 소경 조숙(趙淑)을 파견하여 진봉하였으며, 위위 경(衛尉卿) 진언광(秦彦匡)을 파견하여 생일잔치를 하사해 준 데 대해 사은하였다. 12월 을사에 고려가 예빈 소경 최남부(崔南敷)를 파견하여 진봉하였다. 《상동》
○ 2년(1202, 신종5) -임술- 정월 정미 초하루에 고려가 사재 소경 문효식(門孝軾)을 파견하여 정조를 축하하였다. 8월 경자에 고려가 호부 시랑 사홍우(史洪祐)를 파견하여 천수절을 축하하고, 예빈 소경 한저(韓氐)를 파견하여 생일잔치를 하사해 준 데 대해 사은하였다. 윤12월 기사에 고려가 예빈 소경 송홍렬(宋弘烈)을 파견하여 진봉하였다. 《상동》
○ 3년(1203, 신종6) -계해- 정월 신미 초하루에 고려가 호부 시랑 곽공의(郭公儀)를 파견하여 정조를 축하하였다. 8월에 고려가 예빈 소경 사공직(師公直)을 파견하여 생일잔치를 하사해 준 데 대해 사은하였다. 9월 병인 초하루 천수절에 고려가 사신을 파견하여 와서 축하하였다. 12월 계해에 고려가 예빈 소경 임덕원(林德元)을 파견하여 진봉하였다. 《상동》
○ 4년(1204, 신종7) -갑자- 정월 을축 초하루에 고려가 사재 소경 이연수(李延壽)를 파견하여 정조를 축하하였다. 8월 을축에 고려가 호부 시랑 조광수(曺光壽)를 파견하여 천수절을 축하하고, 호부 시랑 이경(李儆)을 파견하여 생일잔치를 하사해 준 데 대해 사은하였다. 12월 정사에 고려가 예빈 소경 강식재(姜植材)를 파견하여 진봉하고, 사재 소경 차부민(車富民)을 파견하여 뜻밖에 하사해 준 데 대해 사은하고, 호부 상서 김경부(金慶夫)와 예부 시랑 최극우(崔克遇)를 파견하여 칙서를 내려 제사를 지내 준 데 대해 사은하고, 위위 소경 문존(門存)을 파견하여 위문해 준 데 대해 사은하고, 예빈 소경 황효경(黃孝卿)을 파견하여 기복(起復)시켜 준 데 대해 사은하였다. 《상동》
○ 5년(1205, 희종1) -을축- 정월 기미 초하루에 고려가 사재 소경 임인석(林仁碩)을 파견하여 정조를 축하하였다. 윤8월 신사에 고려가 사재 소경 최의(崔義)를 파견하여 천수절을 축하하였다. 11월 신사에 고려가 위위 경 오응천(吳應天)을 파견하여 진봉하였다. 《상동》
○ 6년(1206, 희종2) -병인- 정월 계미 초하루에 고려가 예빈 소경 최보순(崔甫淳)을 파견하여 정조를 축하하였다. 8월 병자에 고려가 위위 소경 이통유(李通儒)를 파견하여 천수절을 축하하고, 위위 경 김승(金升)을 파견하여 생일잔치를 하사해 준 데 대해 사은하고, 예빈 경 이일(李佾)을 파견하여 기복시켜 준 데 대해 사은하고, 지추밀원사 한기(韓奇), 태부 경 이승백(李承白) 등을 파견하여 와서 책봉해 준 데 대해 사은하였다. 12월 을해에 고려가 위위 소경 경유승(慶裕升)을 파견하여 진봉하였다. 《상동》
○ 7년(1207, 희종3) -정묘- 정월 정축 초하루에 고려가 호부 시랑 사응첨(師應瞻)을 파견하여 정조를 축하하였다. 8월 임신에 고려가 위위 소경 서광(徐光)을 파견하여 천수절을 축하하고, 위위 소경 김의원(金義元)을 파견하여 생일잔치를 하사해 준 데 대해 사은하였다. 12월 임인 초하루에 고려가 호부 시랑 정광습(鄭光習)을 파견하여 진봉하였다. 《상동》
○ 8년(1208, 희종4) -무진- 정월 신미 초하루에 고려가 호부 시랑 임주재(林柱材)를 파견하여 정조를 축하하였다. 8월 을유에 고려가 예부 시랑 임영조(林永祖)를 파견하여 천수절을 축하하고, 예빈 경 지이중(池利中)을 파견하여 생일잔치를 하사해 준 데 대해 사은하였다. 겨울 10월 신사에 고려가 사신을 파견하여 와서 축하하였다. 《상동》
○ 위소왕(衛紹王) 대안(大安) 원년(1209, 희종5) -기사- 5월에 고려가 사신을 파견하여 와서 즉위한 것을 축하하였다. 《상동》
○ 3년(1211, 희종7) -신미- 정월 을유 초하루에 고려가 사신을 파견하여 와서 축하하였다. 《상동》
○ 선종(宣宗) 흥정(興定) 3년(1219, 고종6) -기묘-요동행성(遼東行省)에서 고려가 다시 표문을 받들고 조공하려는 뜻이 있다고 하자, 고려의 표장(表章)은 행성에서 받도록 하고, 조공하는 예는 뒷날에 서서히 의논하라고 하였다. 이 뒤로는 다시 통문(通問)하지 않았다. 《상동》
○ 원(元)나라 태조(太祖) 14년(1219, 고종6) -기묘- 정월에 고려가 권지합문지후(權知閤門祗候) 윤공취(尹公就)와 중서주서(中書注書) 최일(崔逸)을 파견하여 화친을 맺고 첩문(牒文)을 보내왔다. 9월에 고려가 방물을 올렸다. 《원사(元史)》
○ 15년(1220, 고종7) -경진- 9월에 고려가 방물을 올렸다. 《상동》
○ 16년(1221, 고종8) -신사- 7월에 고려가 비로소 표문을 받들고 진하(陳賀)하였다. 《상동》
○ 태종(太宗) 4년(1232, 고종19) -임진- 3월에 고려국의 왕 왕철(王㬚)이 중랑장(中郞將) 지의원(池義源), 녹사(錄事) 홍거원(洪巨源), 김겸(金謙) 등을 파견하여 국신(國贐)과 첩문(牒文)을 싸 가지고 살례탑(撒禮搭)의 둔소(屯所)에 보냈다. 4월에 고려가 장군(將軍) 조숙장(趙叔章)과 어사(御史) 설신(薛愼) 등을 파견하여 표문을 받들고 들어와서 조회하였다. 10월에 장군 김보정(金寶鼎)과 낭중(郞中) 조서장(趙瑞章)을 파견하여 표문을 받들고 실정을 진달하였다. 《상동》
○ 10년(1238, 고종25) -무술- 12월에 고려가 장군 김보정과 어사 송언기(宋彦琦) 등을 파견하여 표문을 받들고 들어와서 조회하였다. 《상동》
○ 11년(1239, 고종26) -기해- 6월에 고려가 예빈 경 노연(盧演)과 예빈 소경 김겸(金謙)을 진봉사(進奉使)의 정사와 부사에 충원해서 표문을 받들고 들어와 조회하였다. 12월에 고려가 신안공(新安公) 왕전(王佺), 김보정, 송언기 등 148인을 파견하여 표문을 받들고 들어와 조공하였다. 《상동》
○ 12년(1240, 고종27) -경자- 3월에 고려가 또 우간의대부(右諫議大夫) 조수(趙修)와 합문 지후(閤門祗候) 김성보(金成寶) 등을 파견하여 표문을 받들고 들어와 조공하였다. 12월에 고려가 예빈 소경 송언기와 시어사(侍御史) 권위(權韙)를 행리사(行李使)에 충원해서 들어와 조공하였다. 《상동》
○ 13년(1241, 고종28) -신축- 가을에 고려의 왕이 조카인 왕준(王綧)을 자신의 아들로 삼아 볼모로 들여보냈다. 정종(定宗)과 헌종(憲宗) 때를 당하여 세공(歲貢)이 들어오지 않다가 헌종 말엽에 세자 왕전(王倎)을 파견하여 들어와 조회하였다. 《상동》
○ 헌종(憲宗) 6년(1256, 고종43) -병진- 에 고려국의 왕이 와서 조근(朝覲)하였다. 《상동》
세조(世祖) 중통(中統) 원년(1260, 원종1) -경신- 6월에 고려국의 왕 왕전(王倎)이 그의 아들 영안공(永安公) 왕희(王僖)와 판사재사(判司宰事) 한즉(韓卽)을 파견하여 와서 즉위한 것을 축하하였다. 《상동》
○ 2년(1261, 원종2) -신유- 3월에 고려가 사신을 파견하여 들어와서 조공하였다. 4월에 고려의 왕이 들어와서 조회하였다. 6월에 고려가 세자 왕심(王愖)을 파견하여 표문을 받들고 들어와서 조회하였다. 9월에 고려가 시어사 장일(張鎰)을 파견하여 표문을 받들고 들어와서 사은하였다. 《상동》
○ 3년(1262, 원종3) -임술- 봄 정월 병술에 고려가 사신을 파견하여 표문을 받들고 와서 사은하니, 은혜가 두터운 조서를 내려 답하였다. 4월에 고려가 좌간의대부(左諫議大夫) 박륜(朴倫)과 낭장 신홍성(辛洪成) 등을 파견하여 표문을 받들고 들어와서 조회하였다. 6월 병신에 고려가 사신을 파견하여 와서 조공하였다. 8월에 박륜 등이 돌아갔다. 10월에 고려가 사신을 파견하여 들어와서 조공하였다. 《상동》
○ 4년(1263, 원종4) -계해- 3월 기유에 고려가 신하 주영량(朱英亮)을 파견하여 들어와서 조공하면서 표문을 올려 사은하였다. 11월에 역(驛)을 설치하고 백성들의 호적을 정리하는 등의 일을 면제해 준 데 대해 고려가 한림학사(翰林學士) 한취(韓就)를 파견하여 표문을 받들고 와서 사은하였다. 《상동》
○ 지원(至元) 원년(1264, 원종5) -갑자- 정월에 고려가 사신을 파견하여 들어와서 축하하였다. 돌아가는 고려의 사신에게 하유하여 왕으로 하여금 친히 경사(京師)에 들어와 조회하게 하였다. 여름 4월 기묘에 고려가 신하 김녹(金祿)을 파견하여 와서 조공하였다. 5월에 고려가 차국자 좨주(借國子祭酒) 장일(張鎰)을 파견하여 고을독(古乙獨) -살펴보건대 4월에 우리나라에 사신으로 온 자이다.- 을 따라 들어와 조현(朝見)하였다. 6월 무신에 고려의 왕이 와서 조회하였다. 겨울 10월 임인에 고려의 왕이 와서 조회하였다. 12월에 고려의 왕을 보내어 본국으로 돌아가게 하였다. 《상동》
○ 2년(1265, 원종6) -을축- 정월에 고려가 왕의 동생인 공(公) 왕순(王珣)을 파견하여 표문을 받들고 와서 조공하였다. 6월에 고려가 신하 영윤숙(榮胤宿)을 파견하여 표문을 받들고 와서 성탄절(聖誕節)을 축하하였다. 8월 무인에 고려가 사신을 파견하여 와서 방물을 조공하였다. 《상동》
○ 3년(1266, 원종7) -병인- 정월 을미에 고려가 사신을 파견하여 와서 축하하였다. 8월 무자에 고려가 대장군 박기(朴琪)를 파견하여 와서 성탄절을 축하하였다. 《상동》
○ 4년(1267, 원종8) -정묘- 정월에 고려가 추밀원 부사(樞密院副使) 송군비(宋君斐)와 차 예부 시랑(借禮部侍郞) 김찬(金贊) 등을 파견하여 표문을 받들고 흑적(黑的) 등을 따라 들어와서 조회하였다. -○ 살펴보건대 송군비 등은 3년 12월에 조사(詔使) 흑적 등을 인도하여 일본(日本)에 갔다가 도달하지 못하고 돌아왔다.- 8월에 고려가 비서 소감(祕書少監) 곽내필(郭來弼)을 파견하여 와서 성탄절을 축하하였다. 《상동》 ○ 《원사(元史)》에 또 이르기를, “정월 을사에 백제(百濟)가 신하 양호(梁浩)를 파견하여 와서 조회하니, 금수(錦繡)를 차등 있게 하사하였다.” 하였다. ○ 삼가 살펴보건대 원나라 때에는 백제라고 칭하는 나라가 없었으니, 여기에서 와서 조공하였다고 한 것은 상고할 수가 없다.
○ 5년(1268, 원종9) -무진- 정월에 고려의 왕이 그의 동생 왕창(王淐)을 파견하여 와서 조회하였다. 4월에 고려가 문하시랑 이장용(李藏用)을 파견하여 표문을 받들고 우야손탈(于也孫脫) 등을 따라 들어와서 조회하였다. 가을 7월에 고려의 왕이 신하 최동수(崔東秀)를 파견하여 와서 군사를 갖추고 병선을 만들었다고 말하였다. 12월에 고려가 차 예부 시랑(借禮部侍郞) 장일(張鎰)을 파견하여 표문을 받들고 탈타아(脫朶兒)를 따라 들어와 조회하였다. 《상동》 ○ 살펴보건대 탈타아는 같은 해 7월에 군대와 병선을 점검하는 일로 사신으로 나왔다.
○ 6년(1269, 원종10) -기사- 정월에 고려가 대장군 강윤소(康允紹)를 파견하여 표문을 받들고 들어와 권신(權臣) 김준(金俊) 등을 목 베었다고 아뢰었다. 3월에 고려가 신사전(申思佺)을 파견하여 표문을 받들고 흑적(黑的)을 따라 들어와 조회하였다. -살펴보건대 신사전은 5년 12월에 흑적과 함께 일본에 갔었다.- 6월 병신에 고려가 세자 왕심(王愖)을 파견하여 들어와서 조회하니, 왕에게는 옥대(玉帶) 1개를, 왕심에게는 금 50냥을, 따라온 관원들에게는 은폐(銀幣)를 차등 있게 하사하였다. 9월에 고려가 형부 상서 김방경(金方慶)을 파견하여 권국왕(權國王) 왕창(王淐)의 표문을 받들고 와서 국왕이 병에 걸려 동생인 왕창으로 하여금 임시로 국사를 다스리게 하였다고 호소하였다. 10월에 고려의 왕이 조서를 받고 복위(復位)한 다음 차 예부 시랑 박걸(朴杰)을 파견하여 흑적을 따라 들어와 조회하였다. 12월에 고려의 왕이 친히 경사(京師)에 조회하였다. 《상동》
○ 7년(1270, 원종11) -경오- 정월 신축 초하루에 고려가 사신을 파견하여 와서 축하하였다. 2월에 고려의 왕이 와서 조회하였다. 8월 경진에 고려의 세자 왕심(王愖)이 와서 성탄절을 축하하였다. 《상동》
○ 8년(1271, 원종12) -신미- 정월 을축 초하루에 고려가 비서감 박항(朴恒)과 낭장 최유엄(崔有渰)을 파견하여 와서 축하하고, 겸하여 세공(歲貢)을 바쳤다. 또 추밀사(樞密使) 김련(金鍊)을 파견하여 표문을 받들고 들어와 조현(朝見)하면서 결혼(結婚)하기를 요청하였다. 5월에 고려가 사신을 파견하여 방물을 조공하였다. 7월에 고려가 상장군(上將軍) 정자여(鄭子璵)를 파견하여 표문을 받들고 들어와 진도(珍島)를 평정한 것을 사은하였다. 고려의 세자 왕심이 상서 우승(尙書右丞) 송분(宋玢), 군기감(軍器監) 설공검(薛公儉) 등 벼슬아치들의 맏아들 28인을 거느리고 들어와서 입시하였다. 11월에 고려가 동지추밀원사 이창경(李昌慶)을 파견하여 표문을 받들고 결혼을 허락해 준 데 대해 사은하였다. 《상동》
○ 9년(1272, 원종13) -임신- 정월 경진 초하루에 고려가 예빈 경 선문열(宣文烈)을 파견하여 와서 축하하고, 겸하여 세공(歲貢)을 바쳤다. 또 별장(別將) 백거(白琚)를 파견하여 장탁(張鐸) 등 12인과 더불어 표문을 받들고 들어와 조현하였다. 2월 임진에 고려가 제안후(齊安侯) 왕숙(王淑)을 파견하여 와서 국호(國號)를 고친 것을 축하하였다. 《상동》
○ 10년(1273, 원종14) -계유- 봄 정월 을묘 초하루에 고려가 세자 왕심을 파견하여 와서 조하(朝賀)하였다. 6월에 고려가 대장군 김흔(金忻)을 파견하여 표문을 올려 제주(濟州)를 공격해 격파하였다고 아뢰었다. 가을 7월 무신에 고려가 안순공(安順公) 왕종(王悰)과 동지추밀원사 송종례(宋宗禮)를 파견하여 황후(皇后)와 황태자의 책봉례가 이루어진 것을 축하하였다. 8월 정축 성탄절에 고려가 상장군 김선(金詵)을 파견하여 와서 축하하였다. 《상동》
○ 11년(1274, 원종15) -갑술- 봄 정월 기묘 초하루에 고려가 소경(少卿) 이의손(李義孫) 등을 파견하여 와서 축하하고, 겸하여 세공(歲貢)을 바쳤다. 8월에 고려국의 왕 왕심(王愖)이 추밀사(樞密使) 박구(朴璆)를 파견하여 와서 성탄절을 축하하였다. 9월에 고려가 제안후 왕숙(王淑)을 파견하여 표문을 올려 사은하였다. 11월에 황녀(皇女)가 고려의 서울에 들어가자 고려가 다시 판합문사(判閤門事) 이신손(李信孫) 등을 파견하여 표문을 받들고 들어와 사은하였다. 《상동》
○ 12년(1275, 충렬왕1) -을해- 봄 정월 계유 초하루에 고려가 판합문사 이신손(李信孫)을 파견하여 와서 축하하고, 세폐(歲幣)를 바쳤다. 8월 병인에 고려가 추밀 부사(樞密副使) 허공(許㤨), 장군 조규(趙珪)를 파견하여 와서 성탄절을 축하하였다. 11월에 고려가 대방후(帶方侯) 왕징(王澂)을 파견하여 벼슬아치들의 자제 20인을 거느리고 들어와 입시하였다. 《상동》
○ 13년(1276, 충렬왕2) -병자- 7월에 고려가 첨의중찬(僉議中贊) 김방경(金方慶)을 파견하여 표문을 받들어서 송(宋)나라를 평정한 것을 축하하였다. 11월에 고려가 판비서시(判祕書寺) 주열(朱悅)을 파견하여 와서 왕의 이름을 왕춘(王暙)으로 고쳤다고 고하였다. 《상동》
○ 16년(1279, 충렬왕5) -기묘- 정월 기유 초하루에 고려가 첨의중찬 김방경을 파견하여 와서 축하하고, 겸하여 세폐를 바쳤다. 또 고려가 사신을 파견하여 와서 방물을 바쳤다. 《상동》
○ 17년(1280, 충렬왕6) -경진- 정월 계묘 초하루에 고려가 첨의중찬 김방경을 파견하여 와서 축하하고, 겸하여 세폐를 바쳤다. 6월 무술에 고려가 장군 박의(朴義)를 파견하여 와서 방물을 조공하였다. 8월 무술에 고려의 왕이 와서 조회하였다. 《상동》
○ 18년(1281, 충렬왕7) -신사- 정월 무술 초하루에 고려가 첨의중찬 김방경을 파견하여 와서 축하하고, 겸하여 세폐를 바쳤다. 임자에 또 고려가 사신을 파견하여 일본이 고려의 변경을 침범하였기에 천병(天兵)이 추격하였다고 말하였다. 8월에 고려가 밀직사사(密直司使) 한강(韓康)을 파견하여 와서 성탄절을 축하하였다. 5월 임자에 탐라국(耽羅國)이 금년에 조공으로 바쳐야 할 백저(白紵)를 면제해 주었다. 《이상 모두 상동》 ○ 삼가 살펴보건대 원나라 때 탐라가 이미 고려의 군현(郡縣)이 되었으니, 이는 특별히 옛 호칭을 인해서 기록한 것이다. 다음에 나오는 것들도 모두 마찬가지이다.
○ 19년(1282, 충렬왕8) -임오- 정월 임술 초하루에 고려가 대장군 김자정(金子廷)을 파견하여 와서 축하하고, 세포(細布) 400필을 조공하였다. 《상동》
○ 20년(1283, 충렬왕9) -계미- 정월 병진 초하루에 고려가 대장군 유홍신(兪洪愼)을 파견하여 와서 축하하였다. 을축에 고려가 또 올랄대(兀剌帶)를 파견하여 들어와 조공하면서 첩포(氎布)와 면주(綿紬) 400단(段)을 진공(進貢)하였다. 《상동》
○ 21년(1284, 충렬왕10) -갑신- 3월에 황제에게 존호(尊號)를 올리는 예가 이루어진 데 대해 고려가 사신을 파견하여 축하하였다. 4월 무신에 고려의 왕과 공주(公主)가 세자 왕원(王謜)을 보내어 와서 조회하였다. 《상동》
○ 22년(1285, 충렬왕11) -을유- 6월에 고려가 사신을 파견하여 와서 방물을 조공하였다. 《상동》
○ 23년(1286, 충렬왕12) -병술- 6월에 고려가 사신을 파견하여 와서 조공하였다. 9월 임진에 고려가 사신을 파견하여 일본인 포로를 바쳤다. 《상동》
○ 25년(1288, 충렬왕14) -무자- 정월 임인에 고려가 사신을 파견하여 와서 방물을 조공하였다. 5월에 고려가 사신을 파견하여 와서 방물을 조공하였다. 10월에 고려가 사신을 파견하여 와서 방물을 조공하였다. 12월에 고려가 사신을 파견하여 와서 방물을 조공하였다. 《상동》
○ 26년(1289, 충렬왕15) -기축- 정월 계묘에 고려가 사신을 파견하여 와서 방물을 조공하였다. 《상동》
○ 27년(1290, 충렬왕16) -경인- 정월 을묘에 고려가 사신을 파견하여 와서 방물을 조공하였다. 《상동》
○ 28년(1291, 충렬왕17) -신묘- 정월 계축에 고려가 사신을 파견하여 와서 방물을 조공하였다. 11월에 탐라국(耽羅國)이 사신을 파견하여 동저(東紵) 100필을 조공하였다. 《상동》
○ 30년(1293, 충렬왕19) -계사- 2월에 고려의 왕이 사신을 파견하여 들어와서 다시 이름을 왕거(王昛)로 바꾸었다고 아뢰고, 공신(功臣)의 호를 내려 주기를 요청하였다. 11월에 고려의 왕이 들어와서 조회하였다. 《상동》
○ 성종(成宗) 대덕(大德) 2년(1298, 충렬왕24) -무술- 5월에 탐라가 와서 방물을 조공하였다. 《상동》
○ 3년(1299, 충렬왕25) -기해- 정월에 고려가 사신을 파견하여 와서 조공하였다. 9월에 고려가 사신을 파견하여 들어와서 조공하고 정동행성(征東行省)을 늘려 둔 것에 대해 표문을 올려 진정(陳情)하였다. 《상동》
○ 10년(1306, 충렬왕32) -병오- 정월 임인 초하루에 고려가 사신을 파견하여 와서 방물을 바쳤다. 《상동》
○ 태정제(泰定帝) 3년(1326, 충숙왕13) -병인- 정월 병오 초하루에 고려가 사신을 파견하여 방물을 바치고, 정조를 축하하였다. 《상동》
○ 치화(致和) 원년(1328, 충숙왕15) -무진- 정월 을축 초하루에 고려가 사신을 파견하여 와서 방물을 바쳤다. 《상동》
○ 문종(文宗) 천력(天曆) 2년(1329, 충숙왕16) -기사- 정월에 고려가 사신을 파견하여 와서 조하(朝賀)하였다. 《상동》
○ 지순(至順) 3년(1332, 충혜왕2) -임신- 정월 신미 초하루에 고려국의 왕 왕정(王禎)이 그의 신하 원충(元忠)을 파견하여 표문을 받들어 축하하고, 방물을 조공하였다. 《상동》
○ 순제(順帝) 지원(至元) 3년(1337, 충숙왕 복위 6) -정축- 4월 임오에 고려의 왕이 들어와서 조하(朝賀)하였다. 《상동》
○ 명(明)나라 태조(太祖) 홍무(洪武) 2년(1369, 공민왕18) -기유- 에 고려국의 왕이 표문을 받들어 축하하고 방물을 조공하였으며, 또 책봉해 주기를 요청하였다. 가을에 고려가 총부 상서(摠部尙書) 성유득(成惟得), 천우위대장군(千牛衛大將軍) 김갑량(金甲兩)을 파견하여 감사해하는 표문을 올리고, 아울러 천수절(天壽節)을 축하하였다. 이로부터 공물을 바치는 사신이 자주 와서 원조(元朝) 및 성절(聖節)에 고려가 사신을 파견하여 조회하고 축하하는 것이 해마다의 관례로 되었다. 《명사(明史)》
○ 3년(1370, 공민왕19) -경술- 에 고려가 사신을 파견하여 감사해하는 표문을 올리고 방물을 조공하였다. 《상동》
○ 4년(1371, 공민왕20) -신해- 에 고려의 사신이 들어와서 조공하였다. 《상동》
○ 5년(1372, 공민왕21) -임자- 에 고려의 공사(貢使) 홍사범(洪師範), 정몽주(鄭夢周) 등 150여 인이 경사(京師)로 오다가 풍랑을 만나 바다에 빠져 죽은 자가 39인이었는데, 그 가운데에 홍사범도 끼어 있었다. 황제가 조서를 내려서 자주 들어와서 조공하지 말라고 유시하였다. 그런데 고려가 다시 문하 찬성사(門下贊成事) 강인유(姜仁裕)를 파견하여 말을 조공하였으며, 하정조사(賀正朝使) 김서(金湑) 등은 이미 먼저 도착해 있었다. 이에 황제가 이들을 모두 돌려보내고는 3년에 한 차례씩 조공하라고 유시하였다. 《상동》
○ 이해에 고려가 예부 상서 오계남(吳季南)과 민부 상서(民部尙書) 장자온(張子溫)을 파견하여 방물을 조공하였다. 《오학편(吾學編)》
○ 9월 성탄절에 고려가 배신(陪臣)을 파견하여 표문을 올려서 축하하고, 아울러 황태자의 천추절(千秋節)을 축하하니, 황제가 중서성(中書省)에 조서를 내려서 모두 면제하라고 유시하였다. 《속문헌통고(續文獻通考)》
○ 6년(1373, 공민왕22) -계축- 에 갑량(甲兩) -살펴보건대 바로 김갑량(金甲兩)으로, 《명사》에서 성을 기록하지 않은 것이다.- 등이 들어와서 조공하고 말 5000필을 바쳤다. 《명사》
○ 7년(1374, 공민왕23) -갑인- 에 고려가 감문호군(監門護軍) 주의(周誼)와 정비(鄭庇)를 파견하여 와서 조공하였다. 《상동》
○ 9년(1376, 우왕2) -병진- 에 고려의 사신이 들어와서 조공하였다. 《상동》
○ 10년(1377, 우왕3) -정사- 여름에 고려가 다시 주의(周誼)를 파견하여 말과 방물을 조공하니, 물리치고 받지 않았다. 겨울에 또 고려가 사신을 파견하여 다음 해의 정조(正朝)를 축하하였다. 이해에 사신이 다섯 차례 나왔는데, 사왕(嗣王)이 즉위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모두 받아들이지 않고 물리쳤다. 《상동》
○ 11년(1378, 우왕4) -무오- 4월에 고려가 다시 주의(周誼)를 파견하여 와서 축하하였다. 《상동》
○ 12년(1379, 우왕5) -기미- 겨울에 고려가 이무방(李茂芳) 등을 파견하여 와서 황금 100근, 백금 1만 냥을 조공하니, 전에 약속한 것과 같지 않다는 이유로 물리치고 받지 않았다. 《상동》
○ 13년(1380, 우왕6) -경신- 에 고려가 다시 주의(周誼)를 파견하여 들어와서 조공하자, 붙잡아 두고 돌려보내지 않았다. 《상동》
○ 16년(1383, 우왕9) -계해- 에 고려가 장백(張伯)과 최계(崔洎)를 사신으로 파견하여 와서 조공하자, 기일에 늦게 왔다는 이유로 받아들이지 않고 물리쳤다. 《오학편(吾學編)》
○ 이해에 고려가 정몽주(鄭夢周)를 파견하여 성절(聖節)을 축하하고, 시호(諡號)를 내려 줄 것과 승습(承襲)을 허락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열조시집(列朝詩集)》
○ 17년(1384, 우왕10) -갑자- 6월에 고려가 사복 정(司僕正) 최연(崔涓)과 예의 판서(禮儀判書) 김진의(金進宜)를 파견하여 말 3000필을 조공하였다. 《명사》
○ 18년(1385, 우왕11) -을축- 정월에 고려가 사신을 파견하여 들어와서 조공하니, 3년에 한 차례씩 조회하게 하였다. 《상동》
○ 이해에 말 5000필, 금 500근, 은 5만 냥, 포 5만 필을 조공하니, 21년(1388)의 정조(正朝) 때에 와서 조공하게 하였다. 《엄주별집(弇州別集)》
○ 19년(1386, 우왕12) -병인- 9월에 고려가 사신을 파견하여 표문을 올려 축하하고, 방물을 조공하였다. 《명사》
○ 이해에 흑포(黑布)와 백포(白布) 1만 필, 말 1000필을 조공하였다. 《엄주별집》
○ 20년(1387, 우왕13) -정묘- 에 고려의 사신이 들어와서 조공하였다. 《명사》
○ 이해에 말 3040필을 진공하였다.
○ 탐라(耽羅)가 말을 진공하니, 값을 치러 주게 하였다. 《엄주별집》
○ 21년(1388, 우왕14) -무진- 에 고려가 시중(侍中) 이색(李穡)과 첨서밀직사사(簽書密直司事) 이숭인(李崇仁)을 파견하여 경사(京師)에 와서 정조를 축하하고, 중국 관원이 감국(監國)하기를 요청하였다. 《열조시집》
○ 22년(1389, 창왕1) -기사- 에 상이 봉천전(奉天殿)에 임어하여 조하(朝賀)를 받았으며, 문화전(文華殿)에서 군신들에게 크게 잔치하고, 황태자가 동궁(東宮)의 관속들에게 문화전에서 잔치하였는데, 고려가 사신을 파견하여 방물을 조공하고 진하(進賀)하였다. 《속문헌통고》
○ 23년(1390, 공양왕2) -경오- 에 고려의 사신이 들어와서 조공하였다. 《명사》
○ 24년(1391, 공양왕3) -신미- 에 고려국의 왕 왕요(王瑤)가 그의 아들 왕석(王奭)을 파견하여 조하(朝賀)하였다. 《상동》
○ 8월에 고려가 판선공시(判繕工寺) 양천식(楊天植) 등을 파견하여 시장에서 산 말 1500필을 진공하고자 요동(遼東)에 이르렀다. 11월에 김지탁(金之鐸) 등을 파견하여 호시(互市)의 말 2500필을 보내고자 요동에 이르렀다. 《엄주별집》

[주D-001]원욱(元郁) : 원문에는 ‘元都’로 되어 있는데, 중화서국(中華書局)의 신교본(新校本) 《송사》에 의거하여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02]왕송(王誦) : 고려 제7대 왕인 목종(穆宗)의 휘(諱)이다.
[주D-003]왕순(王詢) : 고려 제8대 왕인 현종(顯宗)의 휘이다.
[주D-004]어사(御事) : 원문에는 ‘御史’로 되어 있는데, 중화서국(中華書局) 신교본(新校本) 《송사》에 의거하여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05]세마(細馬) : 길들인 말을 이른다.
[주D-006]산마(散馬) : 길들이지 않은 말을 이른다.
[주D-007]서하(西夏) : 원문에는 ‘四夏’로 되어 있는데,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08]주련(注輦) : 인도의 코로만델해안에 있던 옛 나라인데, 주련은 Coromandel의 음역이다.
[주D-009]점성(占城) : 원문에는 ‘古城’으로 되어 있는데,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점성은 안남(安南)의 남쪽에 있던 참(Cham)족의 나라인 참파(Champa)를 말한다. 2세기 말엽에 건국하여 17세기 중엽에 멸망하여 청나라에 예속되었다.
[주D-010]삼불제(三佛齊) : 자바(Java)의 서쪽에 있는 나라로, 남조 때에는 간타리(干陀利)라 칭하였고, 당나라 때에는 실리불서(室利佛逝)라 칭하였고, 송나라 때에 비로소 삼불제라 칭하였다.
[주D-011]외대(外袋) : 원문에는 ‘外裝’으로 되어 있는데, 《고려사》권9 세가(世家) 문종(文宗) 3에 의거하여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12]다래와 언치 : 다래는 안장의 좌우에 드리우는 안장의 진흙받이를 말하고, 언치는 안장을 지울 때 말 등에 덮는 천을 말한다.
[주D-013]한 위공(韓魏公) : 위국공(魏國公)에 봉해진 송나라의 명신 한기(韓琦)를 가리킨다.
[주D-014]의원(醫員)을 …… 사은하였다 : 이때 문종이 병이 들어서 중국에 의원을 보내 주기를 요청하자, 중국에서 왕순봉(王舜封)을 파견하여 의원을 데리고 가서 치료하게 한 데 대해 사은한 것이다.
[주D-015]을축 : 원문에는 ‘己丑’으로 되어 있는데,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16]왕운(王運) : 고려 제13대 왕인 선종(宣宗)의 휘이다.
[주D-017]승통(僧統) : 대각 국사(大覺國師) 의천(義天)을 가리킨다. 의천은 선종의 동생이 아니라 선종의 넷째 아들이다.
[주D-018]수륭(壽隆) : 요나라 도종(道宗)의 연호는 수창(壽昌)인데, 《요사》에는 수륭(壽隆)으로 잘못 표기되어 있다.
[주D-019]사신을 …… 사례하였다 : 이때 예종(睿宗)의 어머니인 명의태후(明懿太后)가 훙(薨)하자, 요나라에서 사신을 파견하여 치제하고, 예종을 기복시켜 주었다.
[주D-020]대성아악(大晟雅樂) : 송나라의 대성부(大晟府)에서 만든 아악(雅樂)으로, 궁중의 제례의식(祭禮儀式) 때 연주하는 아악을 말한다. 등가악기(登歌樂器) 17종, 헌가악기(軒架樂器) 20종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의식의 종류에 따라서 일정한 규칙에 의하여 악기를 배치하는 악현(樂懸)은 국왕이 참석하는 경우와 국왕을 대신해 대신이 참여하는 경우에 따라 각각 다르다.《韓國學基礎資料選集 中世篇 599~602쪽》
[주D-021]보주(保州) : 요나라에서 설치한 주로, 치소(治所)가 평양(平壤)의 서북쪽에 있었다.
[주D-022]고려가 …… 축하하였으며 : 이때 금나라가 요나라의 주군(州郡)을 손에 넣은 것을 축하한 것이다.
[주D-023]세남(世南) : 송(宋)나라 때의 장세남(張世南)으로, 바로 《유환기문(遊宦記聞)》을 편찬한 사람이다.
[주D-024]을사 : 원문에는 ‘己巳’로 되어 있는데,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25]왕해(王楷) : 고려 제17대 왕인 인종(仁宗)의 휘이다.
[주D-026]만수절(萬壽節) : 금(金)나라 황제의 생일이다.
[주D-027]6월 : 원문에는 ‘六年’으로 되어 있는데,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28]해릉(海陵) : 금나라의 폐제(廢帝)인 해릉서인(海陵庶人) 완안량(完顔亮)을 가리킨다. 요왕(遼王) 종간(宗幹)의 둘째 아들로, 본명은 적고내(迪古乃)이다.
[주D-029]만춘절(萬春節) : 금나라 황제의 생일이다.
[주D-030]왕호(王晧) : 원문에는 ‘王皓’로 되어 있는데,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이하도 같다. 왕호는 고려 제19대 왕인 명종(明宗)의 휘로, 정중부(鄭仲夫)에 의하여 왕위에 올랐다.
[주D-031]왕현(王晛) : 고려 제18대 왕인 의종(毅宗)의 휘이다. 이때 정중부(鄭仲夫)의 무신난(武臣亂)으로 인해 폐위되었다.
[주D-032]조위총(趙位寵)의 난(亂) : 고려 명종 4년(1174)에 조위총이 정중부(鄭仲夫), 이의방(李義方) 등의 무신정권(武臣政權)에 반기를 들어 일으킨 난으로, 처음에는 여러 차례 관군(官軍)을 격퇴시켰으나, 형세가 불리해지자 자비령(慈悲嶺) 이북의 40여 성(城)을 들어 내부(來附)하는 조건으로 금나라에 원군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금나라에서 거부하여 뜻을 이루지 못하였으며, 명종 6년에 서경이 함락되어 반란이 실패로 돌아갔다.
[주D-033]사은하였다 : 원문에 ‘諫謝’로 되어 있는데, 뜻이 통하지 않기에 ‘陳謝’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34]12월 …… 답하였다 : 《금사》 권61 교빙표 중(交聘表中)에는 이 기사가 23년의 기사에 실려 있다.
[주D-035]계인(桂仁) : 《금사》 권61 교빙표(交聘表)에는 최인(崔仁)으로 되어 있으며, 《동사강목(東史綱目)》과 《고려사》에도 최인으로 되어 있다.
[주D-036]왕탁(王晫) : 고려 제20대 왕인 신종(神宗)의 휘로, 최충헌(崔忠獻)에 의해 옹립되었다.
[주D-037]양위하였다 : 원문에는 ‘謙’으로 되어 있는데, 뜻이 통하지 않기에 ‘讓’으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38]요동행성(遼東行省) : 금나라 때 요동 지역의 행정(行政), 군사(軍事), 일반 사무를 담당하던 특별행정군사기구이다.
[주D-039]중서주서(中書注書) : 원문에는 ‘中書住書’로 되어 있는데,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40]왕철(王㬚) : 고려 제23대 왕인 고종(高宗)의 휘이다.
[주D-041]표문을 받들고 : 원문에는 ‘奉使’로 되어 있는데, 《원사(元史)》 권208 외이열전(外夷列傳)에 의거하여 ‘奉表’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42]합문 지후(閤門祗候) : 원문에는 ‘閤門祗修’로 되어 있는데, 《원사》 권208 외이열전에 의거하여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43]왕전(王倎) : 고려 제24대 왕인 원종(元宗)의 휘이다.
[주D-044]세조(世祖) : 원문에는 ‘世宗’으로 되어 있는데,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45]왕심(王愖) : 왕심(王諶)의 잘못된 표기이다. 왕심은 충렬왕(忠烈王)의 본래 이름으로, 그 뒤에 왕춘(王暙)으로 바꾸었다가 충렬왕 19년(1293)에 다시 왕거(王昛)로 바꾸었다.
[주D-046]우야손탈(于也孫脫) : 원문에는 ‘子也孫脫’로 되어 있는데,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47]강윤소(康允紹) : 원문에는 ‘康胤玿’로 되어 있는데, 《원사》 권208 외이열전(外夷列傳)에 의거하여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48]신사전(申思佺) : 원문에는 ‘申思全’으로 되어 있는데, 《원사》 권208 외이열전에 의거하여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49]경오 : 원문에는 ‘庚子’로 되어 있는데, ‘庚午’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이하 계사년까지 원문에 신미(辛未)가 신유(辛酉)로, 임신(壬申)이 임술(壬戌)로, 계유(癸酉)가 계해(癸亥)로, 갑술(甲戌)이 갑자(甲子)로, 을해(乙亥)가 을축(乙丑)으로, 병자(丙子)가 병인(丙寅)으로, 기묘(己卯)가 기사(己巳)로, 경진(庚辰)이 경오(庚午)로, 신사(辛巳)가 신미(辛未)로, 임오(壬午)가 임신(壬申)으로, 계미(癸未)가 계유(癸酉)로, 갑신(甲申)이 갑술(甲戌)로, 을유(乙酉)가 을해(乙亥)로, 병술(丙戌)이 병자(丙子)로, 무자(戊子)가 무인(戊寅)으로, 기축(己丑)이 기묘(己卯)로, 경인(庚寅)이 경진(庚辰)으로, 신묘(辛卯)가 신사(辛巳)로, 계사(癸巳)가 계미(癸未)로 각각 잘못되어 있는 것을 바로잡아 번역하였으며, 주석은 달지 않았다.
[주D-050]진도(珍島)를 평정한 것 : 원나라의 간섭에 항거하여 삼별초(三別抄)가 진도로 들어가 대항하자, 원나라에서 흔도(忻都), 사추(史樞), 홍다구(洪茶邱)를 파견하여 대패시키고 삼별초군이 왕으로 추대하였던 승화후(承化侯) 왕온(王溫)을 목 베었다.《元史 卷208 外夷列傳》
[주D-051]허공(許㤨) : 허공(許珙)을 잘못 표기한 것이다.
[주D-052]공주(公主) : 원나라의 공주인 제국대장공주(齊國大長公主)를 말한다. 제국대장공주의 이름은 홀도로게리미실(忽都魯揭里米失)이며, 충렬왕(忠烈王)과 혼인하였다.
[주D-053]왕원(王謜) : 원문에는 ‘王’로 되어 있는데,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54]성유득(成惟得) : 《고려사》에는 성준득(成准得)으로 되어 있다.
[주D-055]김갑량(金甲兩) : 《동사강목》과 《명실록(明實錄)》에는 김갑우(金甲雨)로 되어 있다.
[주D-056]전에 …… 않았다 : 홍무(洪武) 10년에 금 100근, 은 1만 냥, 말 100필, 세포(細布) 1만필을 조공하기로 약속한 것을 말한다.
[주D-057]시호(諡號)를 …… 요청하였다 : 공민왕(恭愍王)의 시호를 요청하고 우왕(禑王)의 승습을 허락해 주기를 요청한 것이다.

 

해동잡록 4 본조(本朝) 원문  원문이미지  새창띄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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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거정(徐居正)


본관은 대구(大丘) 달성(達城)으로, 자는 강중(剛仲)이며 옛 자는 자원(子元)이고 호는 사가정(四佳亭)이다. 세종 갑자년에 급제하고 세조 때에 또 중시(重試)ㆍ발영시(拔英試)ㆍ등준시(登俊試) 등 세 과에서 발탁되었다. 시문에 아주 민첩하였으며 저술이 많았다. 다섯 임금을 섬겼으며 28년 동안 대제학[文衡]을 맡았고, 경연에서 시종한 지 45년이었다. 중국 사신 기순(祈順)이 우리 나라에 왔을 때 서거정이 원접사(遠接使)로 나갔는데 기순이 그의 재능에 탄복하고 칭찬하였다. 벼슬은 찬성사(賛成事 찬성)에 이르렀으며 시호는 문충이다. 문집이 세상에 전하고 저서로는 《대동시화(大東詩話)》ㆍ《필원잡기(筆苑雜記)》ㆍ《태평한화골계전(太平閑話滑稽傳)》이 있다.
○ 서거정은 양촌(陽村) 권근(權近)의 생질(甥姪)로 어려서부터 영특하여 나이 겨우 6세에 독서하고 글을 짓자, 온 문중이 기동(奇童)이라 하였다. 조금 커서는 성균관[學官]에서 시험[校藝]이 있을 때는 언제나 전열(前列)에 끼었으므로 당시 사람들이, “양촌(권근)의 문장이 분명 그 생질에게 전해진 것이리라.” 하였다. 〈행장(行狀)〉
○ 경태(景泰 명 나라 경종(景宗)의 연호) 경오년(1450)에 한림학사 예겸(倪謙)과 급사중(給事中) 사마순(司馬恂)이 사신으로 우리 나라에 왔을 때 서거정이 당시 수찬으로 있었는데, 두 사신이 그의 저작을 보고 칭찬하여 마지않았다. 성화(成化 명 나라 헌종(憲宗)의 연호) 병신년(1496)에 기순과 장근(張瑾)이 또 왔을 때, 공이 원접사(遠接使) 겸 관반(館伴)으로 나가 매번 화답할 때면 붓이 쉬지 않으므로 두 사신이 번번이 칭찬하여 말하기를, “정말 기이한 재주이다. 우리 따위는 밤새도록 구상하여 겨우 한두 편을 얻을 뿐인데, 공(公)은 서서히 말하는 사이에도 붓만 대면 모두 주옥(珠玉) 같은 글이 되니 천하에 횡행(橫行)할 만하다.” 하였다. 그 후부터 사신이 내왕할 때면 반드시 그의 안부를 물었다. 상동
○ 사가정의 시는 한유(韓愈)ㆍ육방옹(陸放翁)의 체를 전적으로 모방하였으며, 손만 쓰면 시가 되어 아름답고 화려하여 적수가 없었다. 남이 혹 비문ㆍ기ㆍ서ㆍ시부ㆍ잡문을 요구하면 써주는 글이 유수(流水) 같아 파란(波瀾)이 넘치는 듯 신기한 글귀와 기이한 말들이 세상에 전송(傳誦)되었다. 상동
○ 하늘과 땅이 빈 곳이 없으면 많은 형체들을 수용할 수 없으며, 강과 바다가 빈틈이 없으면 많은 시냇물을 받아들일 수 없으며, 산과 수풀이 빈 곳이 없다면 뭇 나쁜 것들을 감출 수 없다. 만 가지 구멍[萬竅]이 지극히 비었기 때문에 바람이 불어 소리를 내고, 만 가지 틈이 지극히 비었기 때문에 해와 달이 거기에 빛을 들이게 된다. 〈허곡기(虛谷記)〉
○ 한 해 중에 큰 가뭄과 큰 비 큰 바람을 만나 재변(災變)이 중첩되자 시를 지어 기록하기를,
큰 비만은 그래도 괜찮으니 / 大雨尙可言
말랐던 것이 그 혜택을 입을 수 있고 / 燥者蒙其利
큰 가뭄만은 그래도 좀 나으니 / 大旱尙可言
습한 것이 그 혜택을 받고 / 濕者受其賜
큰 바람은 그래도 괜찮으니 / 大風尙可言
만물이 모두 시달리어 지칠 뿐이다 / 百物盡憔悴
어찌 한 해 중에 / 如何一年內
세 가지 재해가 겹쳐 오는가 / 三災同荐至
탄식하고 또 거듭 탄식하네 / 三嘆復三嘆
이것을 시로써 기록해 둔다 / 是用詩以誌
하였다. 본집(本集)
○ 사가(四佳)가 역대 연표를 편찬하였는데, 중국은 위로 제곡(帝嚳 중국 고대의 전설상의 제왕) 갑자년에서 아래로 명(明) 나라 성화 무술년(1478)까지이며, 우리 나라는 위로 단군(檀君) 무진년부터 아래로 조선까지 3천 8백 11년이니, 위에는 갑자를 적고 아래는 연대로 적었다. 상동
○ 사가가 어떤 사람[一甲]이 자기 직분(職分)을 넘어서 남을 비평하고 탄핵하는 것을 분(憤)하게 생각하고 수직(守職)이라는 글을 짓기를, “사물은 각기 그 맡은 직분이 있으니 소가 맡은 일은 밭갈이 하는 것이 직분이요, 말이 맡은 일은 등에 싣는 것이 직분이요, 닭은 새벽을 맡아보고, 개는 밤을 맡아 지키는 것이 직분이다. 맡은 일을 충분히 다하는 것을 수직(守職)이라 한다. 맡은 일을 다하지 않고 남의 일을 대신하는 것을 월직(越職)이라 하니, 월직은 이치에 어긋나는 것이요, 이치에 어긋나게 되면 해를 입게 마련이다.” 하였다. 상동
○ 〈철장조(鐵腸調 곡명(曲名))〉를 짓기를,
하늘이 너에게 쇠창자를 만들어주니 / 作鉄腸調帝鑄汝以鉄腸
그 쇠 백 번을 단련하면 / 百鍊其鋼
굽지도 부러지지도 않을 것이니 / 剛不可屈亦不可折
신중히 갈고 닦아 / 愼爾自修
손가락에 감기는 듯 부드럽게 하지 말라 / 毋或爲繞指之柔也
하였다. 상동
○ 사가(四佳) 〈동도십이영(東都十二詠)〉의 오산기승(鰲山奇勝)이란 시에,
바다 위 금오산은 전망이 좋고 좋아 / 海上金鰲眺望宜
풍속과 문물 이전 시대와 다르구나 / 風流文物異前時
깨어진 비에 김생의 글씨 있고 / 破碑或見金生字
오래된 절간에는 최치원의 시 남았구나 / 古寺曾留致遠詩
하였다. 상동
○ 사가의 〈죽유도(竹狖圖 대와 검은 원숭이 그림을 읊은 시)〉에,
마디는 본시 맑고 고상한데 잎은 더욱 여위었구나 / 節本淸高葉更癯
열매 맺어져서 봉(鳳)이 와 새끼 치고 울기 바쁘게 기다리니 / 子成忙待鳳鳴雛
세상에 나쁜 무리 얼마나 많았으며 / 世間鼠輩知無數
화가는 누구던고 그림 잘못 그렸구나(봉을 그려야 옳은데 원숭이를 그렸다는 뜻) / 畫手何人枉作圖
하였다. 상동
○ 서거정이 달성(達城) 뒷동산에다 못을 파고 연꽃을 심고 정자를 만들어 이름을 정정정(亭亭亭)이라 하였다. 동봉(東峯) 김시습(金時習)이 시를 지어 이르기를,
정정정(亭亭亭)이 흰 마름의 섬을 누르고 / 亭亭亭壓白蘋洲
붉은 옷 다 떨어지고 잎만 우수수 / 落盡紅衣葉葉愁
하였다. 상동
○ 고려 때의 옛 제도에 예문 응교(藝文應敎)라는 것이 있었다. 품계는 비록 낮았으나 반드시 문장으로 이름난 사람으로 후일에 문단(文壇) 맹주(盟主)가 될 수 있는 사람을 뽑아 시키니 그 인선(人選)이 지극히 중요한 것이었다. 본조에 들어와서도 여전히 이것을 따랐다. 본집
○ 일찍이 게으른 병의 시를 지어서 자신을 조소하기를,
한가하면 게을러지고, 게으르면 병이 된다 / 閑能成懶懶成癖
병들면 돌아가고 싶고 돌아가기란 역시 어려운 거다 / 病亦思歸歸亦難
문에 이끼 끼어 봄은 적적한데 / 門掩蒼苔春寂寂
책 베고 높이 누웠으니 해는 낚싯대 세 개 길이만큼 남았구나 / 枕書高臥日三竿
하였다. 정말 나태한 자의 고상한 풍치이다. 《시격(詩格)》
○ 〈백염(白髥)〉이란 절구를 지어 문답형식으로 자신을 조소하기를,
작년에 눈 같은 흰 수염이 반만 붙었더니 / 去歲白髯雪半粘
올해는 수염들이 온통 희어졌다 / 今年髯上十分添
묻노니 수염아 어찌하여 그렇게 흰고 / 問髯何事白如許
말하기를, 시를 읊을 때 괴롭게 배배틀기 때문이오 / 曰坐吟詩苦撚髯
하였다. 상동
○ 성화(成化) 임인년 윤 8월 혼자 앉아서 시를 짓기를,
큰 재목은 명당(정치하는 곳)의 기둥감이 합당한데 / 大材端合柱明堂
나와 같은 몹쓸 나무는 한 치의 장점도 못 지녔네 / 樗散如予乏寸長
스스로 비웃기를 평생에 쓰일 곳 없으니 / 自笑一生無適用
어쩌면 꼬불꼬불 하기 황양목(黃楊木) 같을꼬 / 如何縮閏似黃楊木
하였다. 상동
○ 〈야독자신(夜讀自哂)〉이란 시에,
어릴 적엔 물고기같이 눈이 크고 밝았기에 / 少日如魚眼孔明
등잔 앞에서 작은 글을 소리 높여 읽었는데 / 燈前細字讀高聲
이젠 늙고 병들어서 무슨 일을 이룰 건고 / 如今老病成何事
담 모퉁이에 무심히도 짧은 등잔 팽개치네 / 墻角無心棄短檠
하였다. 상동
○ 물재(勿齋) 손순효(孫舜孝)가 삼휴(三休 송 나라 엄삼(嚴參)의 호)와 사휴(四休 송 나라 손방(孫昉)의 호)를 합쳐 스스로 호를 칠휴자(七休子)라 하였는데, 이 일로 인하여 마침내 대사헌을 파직당하였다. 서거정이 시로 희롱하기를,
쉬는 날에 쉬는 것은 쉬기도 좋지마는 / 可休休日休方好
쉬지 않는 날 쉬는 것은 쉬는 것도 부끄럽네 / 休不休時休亦羞
삼사휴 아울러서 칠휴가 된 나그네 / 三四休幷七休客
전에도 넉넉할손 더욱 넉넉하이 / 休休今復更休休
하였다. 상동
○ 서강중(徐剛中)이 어려서 윤서(尹恕)와 같이 놀며 배웠는데 윤서가 늘 말하기를, “만일 급제하여 정언(正言)만 되면 그 뒤에는 반드시 벼슬을 그만두리라. 남자가 홍지(紅紙 급제에 합격한 증서) 위에 정언이라 쓰게 되면 만족한 것이다.” 하였다. 윤서는 서강중과 함께 과거에 급제하여 7,8년 지나서야 비로소 정언이 되었다. 서강중이, “그만둘 것인가.” 하고 희롱하니, 윤서가 웃으며, “이 다음에 보라.” 하더니 얼마 안 되어서 병으로 죽고 말았다. 《필원잡기(筆苑雜記)》
○ 국조(國朝)의 옛 제도에 이조 참의는 반드시 2품(品)을 임명하였다. 서거정이 이조 참의로서 북경(北京)에 갔다가 돌아오며 압록강에 이르렀을 때 예조 참의로 옮겨 제수되어 즉석에서 금띠를 풀고 은띠를 매게 되자 술에 취하여 한 절구(絶句)를 짓기를,
유자가 회수를 건너 북으로 가면 탱자가 된다고 들었지만 / 曾聞橘渡淮爲枳
금이 물을 건너면 은이 되는 것은 보지 못했다 / 未見金渡水爲銀
하였다. 상동
○ 조정 관리 중에 오(吳)씨 성을 가진 사람이 장오죄(臟汚罪)로 형을 받게 되자 그 처가 묘한 꾀를 부려서 한 종에게 부인복을 입히고 모자를 씌워서 옥리(獄吏)에게 뇌물을 주고 말하기를, “죄인 오모(吳某)의 첩입니다. 들으니 낭군이 분명히 주륙당할 것이라고 하니, 원컨대, 한 번 만나 영결하기를 원합니다.” 하였다. 옥리가 가엾게 여겨 허락하였더니, 한 빈터로 가서 부부가 영결하는 양 꾸몄다. 종이 미리 소매 속에 칼과 톱을 넣었다가 죄인에게 끼웠던 쇠사슬과 형틀을 끊어 자신이 이것을 둘러쓰고 죄인인 주인에게 부인복을 입혀서 문을 밀치고 옥문을 나와 미리 준비하여 두었던 준마(駿馬)를 타고 달아나게 하였다. 옥리가 들어가 보니 남아 있는 사람은 종이었다. 그래서 죄인을 추적하였으나 잡지 못하였다. 세종께서는 의리 있는 종이라 하여 용서하였다. 상동
○ 국조(國朝)에 들어와서 문체(文體)는 평이했으나 한두 문인이 괴상하고 뻣뻣한 문장으로 과거에 으뜸으로 뽑히게 되어 5,6년 사이에 문체가 모두 변하여 서곤체(西崑體)가 되어버렸다. 지금에 와서 구양수(歐陽修)가 유기(劉幾)를 물리친 옛일을 들면서 심한 것을 배척하게 되어 문체가 겨우 복구되었으나 아직도 완전히 변하지 않았다. 상동
○ 영의정 윤사분(尹士昐)은 뺨이 붉었다. 박원형(朴元亨)이, “윤사분은 시기심 많고 험하다.”하니, 세조가 크게 웃었다. 상동
○ 영중추부사 이석형(李石亨)과 판서 김예몽(金禮蒙)은 한 마을에 살았다. 하루는 둘이서 장기를 두었는데 이석형은 양마(兩馬)가 있어 세력이 강했으며 김예몽은 차 하나밖에 없어 세력이 약하였다. 당시 중추부 재상에 이름이 마승(馬勝)이란 사람이 있고 조정 관리에 이름이 차유(車有)라는 사람이 있었다. 이석형이, “내가 마승(馬勝)이다.” 하니, 김예몽이 말을 받아, “나는 차유(車有 차가 있어 지지 않는다는 뜻)가 아닌가.” 하고, 서로 웃었다. 상동
○ 문경(文景) 이종선(李種善)은 목은(牧隱 이색)의 아들이며, 총제(摠制) 권천(權踐)은 양촌(陽村)의 아들이다. 총제가 취하여 문경에게, “그대는 목은의 아들로 문장이 부족하고 나는 양촌의 아들로 문명(文名)이 없으니, 그대와 나 두 사람이 등하불명계(燈下不明契 등잔 밑이 어둡다는 계)를 맺자.” 하니, 듣는 사람이 모두 웃었다. 상동
○ 국조(國朝)의 전례에 문과ㆍ무과의 방(榜)을 붙이는 날 홍패(紅牌)와 꽃 술을 하사하고, 일등(갑과) 세 사람은 모두 검은 일산(日傘)을 내렸으니 모두 한때의 영광이었다. 세조 때에는 무과는 기(旗)를 하사하였다. 상동
○ 글짓기와 술마시는 모임[文酒會]은 유자(儒者)들의 오랜 풍속이다. 삼관(三館 홍문관ㆍ예문관ㆍ성균관)의 선비들이 큰 술잔에 술을 가득 따르고 선생이라 호칭하였는데 고관에서 낮은 관리에 이르기까지 모인 사람은 모두 그러하였다. 그러나 비록 관직이 높은 귀인이라 할지라도 홍지(紅紙) 위에 이름을 적지(급제 출신을 말함) 않았으면 선생이라 부르지 않고 ‘대인(大人)’이라 부른다. 이 풍속은 고려 때부터 시작되었다. 상동
○ 《자치통감(資治通鑑)》〈후량기(後梁紀)〉에, “고려 애꾸눈 중 궁예(躬乂)가 군중을 모아 개주(開州)를 근거로 왕이라 칭호하며 태봉(太封)이란 연호를 쓰고, 사신을 보내어 조공을 바쳐 왔다.” 하였는데, 궁예는 곧 궁예(弓裔)이며 개주는 곧 개성(開城)이고, 태봉(太封)은 태봉(泰封)이다. 상동
○ 우리 나라 분야(우리 나라에 해당하는 성좌(星座))를 옛사람들은 연(燕) 나라와 같은 줄 알았다. 정통(正統) 연간에 혜성(彗星)이 연 나라 분야에 나타났다. 일관(日官 천문을 맡은 관리)이 아뢰기를, “우리 나라와 상관없습니다.” 하였다. 세종이 몹시 걱정하시고, “우리 나라가 연 나라 와 같은 분야이니 어찌 상관이 없겠는가?” 하더니, 기사년 가을에 중국황제(명 나라 6대 황제인 영종(英宗))가 오랑캐에게 붙들려 가고 세종도 승하하였다. 상동
○ 희종(熙宗) 5년에 지제고(知製誥) 최보순(崔甫淳)이 금(金) 나라 황제가 등극한 것을 축하한 표(表)를 짓기를, “다섯 말[馬]이 강을 건너니 진(晉) 나라가 새로 황제가 됨을 나타내고 여섯 용이 극(極)에 오르니 복희(卜羲)의 주역(周易)에 대인(大人 왕자)을 본다는 말에 부합되었다.” 하였다. 당시 금 나라 군주는 형제가 다투고 있어서 그 사실이 드러나는 것을 꺼리고 있었기 때문에 조서를 내려, “진(晉) 나라 원제(元帝)의 고사를 인용한 것은 부당하다.” 하여, 최보순이 견책을 받았다. 상동
○ 송(宋) 나라 인종황제(仁宗皇帝)가 붕어(崩御)하였을 때 요술(妖術)하는 자가 나타나, “죽은 사람을 도로 살리겠다.” 하였다. 영종(英宗)이, “시험해보라.” 하였으나, 효과를 거두지 못하자 그는, “태종(太宗)이 인종(仁宗)과 연회를 베풀어서 백옥(白玉) 난간(闌干)에 기대어 모란(牧丹)을 완상하고 계셔서 인간으로 다시 돌아올 뜻이 없으십니다.” 하였다. 영종(英宗)이 허망된 소리인 줄 알았으나 죄를 주지 않았다. 우리 나라 세종의 초상(初喪)에 요사스러운 중이 와서 이 꾀를 올려, 다른 시체에 시험해 보았으나 효력 없는 쓸데없는 짓이었다. 문종(文宗) 역시 그를 처벌하지 않았다. 상동
○ 장원(壯元)으로 정승이 된 사람으로 고려조에 정승 유양(柳亮)과 정승 맹사성(孟思誠)이 있고, 조선조에 하동(河東) 정인지(鄭麟趾)ㆍ길창(吉昌) 권람(權擥)ㆍ영성(寧城) 최항(崔恒)ㆍ남양(南陽) 홍응(洪應)이 있다. 조선조에 부자가 정승이 된 사람으로, 익성(翼成) 황희(黃喜)와 아들 열성공(烈成公) 수신(守身)ㆍ영의정 심온(沈溫)과 아들 좌의정 회(澮)가 있다. 상동
○ 갑인년 별시에 최항이 장원이 되고 조석문(曹錫文)이 방안(榜眼)이 되고, 박원형(朴元亨)이 탐화(探花)가 되고, 구치관(具致寬)이 병과(丙科)에 합격하였다. 세조조에 4사람이 이어 정승이 되었는데 일방(一榜 과거에 함께 합격하는 것)에 네 사람이 정승이 되었으니 고금에 전례가 없었다. 상동
○ 이사철(李思哲)은 신체가 뚱뚱하고 컸으며 음식도 남보다 많이 먹어, 매끼에 큰 밥그릇에 밥 한 사발과 삶은 닭 두 마리와 한 주전자의 술을 먹었다. 일찍이 등창을 앓아 죽게 되었을 때 의원이, “독한 술과 삶은 고기를 먹지 마십시오.” 하니, 공이, “먹지 않고 죽는 것보다는 차라리 먹고 죽는 것이 낫다.” 하고 술 마시고 고기를 씹기를 평상시와 똑같이 하였으나 결국 병은 나았다. 사람들이 모두 말하기를, “부귀한 사람은 음식도 역시 보통 사람과는 다르다.” 하였다. 상동
○ 신라(新羅)시대에 동쪽 해변가에 두 사람이 있었으니 남자는 영오랑(迎烏郞)이라 하고, 여자는 세오녀(細烏女)라 하였다. 하루는 영오랑이 해변에서 해초를 캐다가 물에 표류하여 일본(日本)에 가서 왕이 되었다. 세오녀는 그를 찾아 건너가 왕비가 되었다. 그때 해와 달이 빛을 잃어버리게 되자 천문을 관측하던 자가 아뢰기를, “영오랑과 세오녀는 해와 달의 정기(精氣)입니다. 지금 그들이 일본으로 가버렸기 때문에 이런 변고가 생겼습니다.” 하였다. 왕이 사신을 파견하여 두 사람을 찾으니 영오랑이 세오녀가 짠 비단을 주어 보냈다. 그것으로 못에서 하늘에 제사지내니 해와 달이 다시 빛났다. 그 못을 일월지(日月池)라 하고 현(縣)을 두어 영일(迎日)이라 이름 지었다. 상동
○ 당(唐)ㆍ송(宋) 때에 임금에게 일을 아뢸 때는 모두 차자(箚子)를 썼다. 서거정(徐居正)이 사헌부 대사헌으로 있으면서 처음으로 건의하여 차자의 법을 시행하였으니, 이는 언사(言辭)가 출입하는 동안에 유실(遺失)될 염려가 있고, 또 후세 근시(近侍)나 환관들이 일을 그르칠 징조를 방지하기 위하여 시행한 것이다. 법이 처음 만들어졌을 때는 사람들이 모두 만세에 시행할 좋은 법이라고 하였다. 하지만 근래에 대간으로 있는 사람들이 그 대의는 모르고 조금이라도 과실이 있으면 심각하게 법을 적용하여 얽어매어 입을 모아 헐뜯고 있으니 차자의 법은 사람을 해치는 데 적합할 따름이다. 천하에 법을 만들어 그 폐단이 없는 것이 없다. 상동
○ 근래에 한 남자종이 꼭 여자같이 생겨서 어릴 때부터 여복을 입고 사대부의 집에 출입하다가 일이 탄로되자 대간에서 법대로 조치하도록 청하였다. 세조(世祖)가 일이 매우 애매하여 용서할까 하고, 서거정(徐居正)을 돌아보며 물었다. 서거정이 대답하기를, “신이 어려서 《강호기문(江湖記問)》을 보니 강호간에 한 비구니(比丘尼)가 자수(刺繡)를 잘 놓았습니다. 그래서 어떤 양가집에서 딸을 보내어 이것을 배우도록 하였더니 문득 임신하였습니다. 그 집 부모가 꾸짖으니, 여자가, ‘비구니와 같이 자면서 마치 성교하는 것 같은 느낌이 있더니 그만 이렇게 되었습니다.’ 하여. 양가에서 관에 고소하여 비구니를 조사하니 음도(陰道)ㆍ양도(陽道)가 모두 없어 관(官)에서 용서하려 하니, 한 늙은 홀어미가, ‘소금물을 양근(陽根)에 적시고 누렁개로 핥게 하면 양도((陽道 : 음경)가 드러날 것입니다.’ 하여, 시험해 보니 과연 그러하였습니다. 관리가, ‘남자도 아니요 여자도 아니니 인도(人道)의 올바름을 문란하게 할 것입니다.’ 하고 주살하였습니다.” 상동
○ 서거정이 어려서 몇몇 사람과 함께 산사(山寺)에 놀러가서 그림 부처 하나를 보았는데, 그 위에 써 붙이기를, “공자(孔子)가 찬(讚)을 짓고 오도자(吳道子)가 그림을 그리고 소식(蘇軾)이 글씨를 썼다.” 하였다. 어떤 사람이, “공자는 주(周) 나라 사람이고, 한(漢) 나라 명제(明帝) 때에 불교가 처음으로 중국에 들어왔는데 공자가 부처를 찬미하였다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다. 또 오도자(吳道子)는 당(唐) 나라 사람인데 어찌 오도자가 그린 부처를 공자가 찬(讚)을 지을 수 있으며, 소식은 그보다 천백 년 후에 출생한 사람인데 어찌 공자와 같은 시대이며 그의 찬을 쓸 수 있단 말인가? 반드시 후세에 일을 만들기 좋아하는 자가 한 짓일 것이다.” 하였다 .상동
○ 고려(高麗) 말엽에 술을 금한 적이 있었다. 그때 대관(臺官)은 술을 마시지 않고 간관은 여전히 술을 마셨다. 간관은 붉은 옷을 입은 하인을 앞세웠고 대관은 검은 옷을 입은 하인을 앞세웠는데, 일찍이 금주(禁酒)할 때에 붉은 옷을 입은 하인들이 크게 취하여 검은 옷을 입은 하인을 기롱하기를, “나는 날마다 심히 취하여 얼굴이 붉기 때문에 옷도 붉지마는, 너는 너희 대관이 그렇듯이 재미없이 술도 마시지 않아 얼굴이 항상 검어지기 때문에 옷 역시 검은 것이다.” 하니, 듣는 사람이 모두 웃었다. 상동
○ 서사가(徐四佳)의 〈남해조강시(南海漕舡詩)〉에,
돛대는 빽빽히 차서 삼단을 모아 둔 듯 / 帆檣織織簇如麻
조세는 남쪽이라 전보다 훨씬 많다 / 租賦南方較舊多
다만 기쁜 것은 청산만은 실어 오지 못하여 / 獨喜靑山漕不得
해마다 길이길이 들에 사는 사람들 몫이 됨이네 / 年年長屬野人家
하였다. 본집(本集)
○ 경태(景泰) 계유년(1453)에 세조가 북경(北京)에 갈 때 서거정(徐居正)이 교리로서 수행하였다. 압록강에 이르러, 이날 저녁 모친의 부음이 전해 왔으나, 세조가 비밀에 부쳤다. 이날 밤 서거정이 이상한 꿈을 꾸고 놀라 일어나 눈물을 흘렸다. 같이 잔 사람이 까닭을 물으니, 서거정이, “꿈에 달이 이상하게 하늘에 걸려 있었다. 달은 어머니를 상징한다 하는데, 우리 어머님이 집에 계시는 데 꿈이 아주 불길하기 때문에 서러워한다.” 하였다, 이 말을 임금에게 알리는 사람이 있어서 세조가 감탄하기를, “거정의 효성이 지극하여 하늘을 감동시켰다.” 하고, 사실을 이야기하고 말았다. 세조가 항상 압록강의 꿈을 칭찬하면서, “내가 그대를 취하는 것은 그대의 재주만이 아닌 것이다.” 하였다. 상동
○ 대제학을 22년 동안 맡아 과거로 선비를 뽑아 23번이나 방(榜)을 붙여 인재를 많이 얻었다. 학사 동월(董越)이 와서 우리 나라에 조서를 반포할 때 서거정을 보고 심히 존경하면서, “일찍이 학사 예겸(倪謙)의 〈요해편(遼海編)〉을 보고 또 호부(戶部) 기순(祁順)의 《황화집(皇華集)》을 보고 높은 풍도(風度)를 흠모한 지 오래되었다가, 이제 상면하니 매우 다행스럽습니다.” 하였다. 상동
○ 어사(御史)라는 직분은 그 소임이 중하고 책임이 커서 군주에게 과실이 있으면 용린(龍鱗 용의 목 아래 거꾸로 난 비늘 이를 건드리면 그 사람을 죽인다고 한다)을 거스르며 벽력(霹靂 임금의 벼락 같은 노여움이나 위엄)도 피하지 않고 부월(鈇鉞 혹독한 형벌)도 피하지 않아야 한다. 신하들에게 허물과 법을 위반한 일이 있으면 법조문에 비추어 바로잡아야 하며, 귀족과 근시에게 교만하고 못된 일이 있으면 이것을 탄핵하여야 하는 것이다. 〈헌부제기(憲府題記)〉
○ 자동선(紫洞仙)이란 기생은 재주와 용모가 뛰어났다. 종실(宗室) 영천군(永川君)이 지극히 사랑하였다. 영천군은 전에 청교류(靑郊柳)를 사랑하다가 그 사랑을 자동선에게로 옮겨 온 것이다. 마침 송도(松都)에 갔었는데 그곳에 청교역(靑郊驛) 자하동(紫霞洞)이 있었다. 서거정이 시를 보내기를,
청교의 버들은 속상하게 푸르렀고 / 靑郊楊柳傷心碧
자동에 낀 연하는 뜻을 다해 짙었구나 / 紫洞煙霞盡意濃
하였더니, 영천군이 언제나 이 시를 외면서 스스로 과시하였다. 《청파극담(靑坡劇談)》
○ 성화(成化) 연간에 병조(兵曹)에서 총을 만들어 쏘는 법식을 간행하여 연해(沿海) 각 관청에 분배하여 수시로 연습하자는 청이 있었다. 서거정이 불가하다고 생각하고 아뢰기를, “화약은 왜땅에서 나오는데 우리 국경과 저쪽이 매우 가깝습니다. 뿐만 아니라 삼포(三浦)의 왜인(倭人)들이 우리 나라 사람들과 섞여 살고 있어서 간교한 백성들이 몰래 통하여 저쪽 땅으로 흘러갈 수도 있으니, 국가를 위한 깊은 계획이 아닙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당초에 그 폐단을 깊이 생각하지 못했는데 이 말이 매우 옳다.” 하였다. 《패관》
○ 공산(公山)에 백제(百濟) 때 만든 돌 항아리가 있었다. 서사가(徐四佳)의 공산십경(公山十景)에 〈석옹창포시(石壅菖蒲詩)〉에,
백제 고물(古物)인 돌항아리 / 百濟古物惟石甕
배만 턱없이 크니 엉성하여 어디에 쓸꼬 / 腹大濩落何所用
뉘가 알리, 창포가 천지의 정기(精氣)인 줄을 / 誰知昌陽天地精
돌을 깨고 구름 열어 이곳에 옮겨 심었네 / 斲石開雲此移種
하였다.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 평해군(平海郡)에 해당안(海棠岸)이 있다. 서사가가 시를 읊기를,
금자라가 머리에 인 산은 중첩하고 / 金鰲頭戴山重重
양쪽 절벽은 비좁은데 청룡(靑龍)이 서렸구나 / 兩崖夾走盤靑龍
한밤에 광풍이 불어 간들거리니 / 一夜光風吹嫋嫋
해당화 만발하여 누리에 붉은 송이송이 / 海棠開遍紅髮鬆
하였다. 상동
○ 서달성(達城)의 〈동도십이영(東都十二詠)〉은 계림영이(鷄林靈異)ㆍ오산기승(鰲山奇勝)ㆍ포정감회(鮑亭感懷)ㆍ문천빙망(蚊川騁望)ㆍ반월고성(半月古城)ㆍ첨성노대(瞻星老臺)ㆍ분황폐사(芬皇廢寺)ㆍ영묘구찰(靈妙舊刹)ㆍ오릉비조(五陵悲弔)ㆍ남정청상(南亭淸賞)ㆍ문옥적성(聞玉篴聲)ㆍ과유신묘(過庾信墓)가 있다. 상동
○ 당진(唐津) 하류에 세고탄(洗姑灘)이 있다. 서거정의 시에,
강변에 빨래하는 아낙네 얼굴은 꽃 같은데 / 江邊洗姑顔如花
어릴 적부터 빨래로 생애를 이어가네 / 小少洸澼爲生涯
아침에 발을 씻어 희기가 백설 같고 / 朝洗白足如雪色
저녁에 팔을 씻어 희기가 서리 같다 / 暮洗白腕如霜華
아침 저녁 씻고 씻어 / 朝朝暮暮洗復洗
몸은 깨끗하고 마음은 다정하여라 / 一身自潔心自多
희게 바래어서 물에 풀린 고치보다 더 희고 / 燥白白於水繭絲
밤이면 밤마다 달 보고 쓸쓸한 북 울리누나 / 夜夜向月嗚寒梭
……하고 또,
갑자기 광풍 일어 천지가 캄캄하고 / 忽有狂風天地黑
티끌과 모래 날려 아득하여라 / 塵沙漠漠迷所之
종놈이 자빠지며 흙탕 속에 뒹굴어 / 蒼頭顚倒泥潦中
옥 같은 색이 엉망이 되어 옷이 검게 되었구나 / 玉色已誤衣復緇
작은 아기 문밖에서 시어머니 기다리니 / 小娘出門待姑歸
시어머니 빨래길이 어찌 이리 더디 올까 / 姑洗姑洗來何遲
…… 하였다. 상동
○ 촌 사람들이 평야에 흙을 쌓아 높게 만들고 그 위에 그물과 주살을 설치하여 새를 잡는 것을 초둑[草纛]이라 한다. 한 관리가 지방 장관으로 나갔는데 관청 일에는 어두워서 종일 오뚝하게 앉아 있어 마치 인형(人形)과 같았다. 백성 가운데서 관아에 송사(訟事)를 제기하고 그 원한을 신설하지 못한 자는, “이 초둑 장관은 언제나 입을 열 것인가?” 하였다. 《골계전(滑稽傳)》
○ 순흥군(順興郡)은 지방이 작고 기생들도 못생겼으며 반찬도 없는 곳이었다. 남지(南智)가 감사(監司)로 가고, 김문기(金文起)가 아사(亞使 부사(副使))로, 김호생(金虎生)이 군수로 갔다. 하루는 감사가 잔치를 베풀었는데, 관기(官妓)의 치마 빛깔은 담홍색이고 군수의 코는 아주 붉었다. 아사 김문기가 말하기를, “기생의 치마는 비록 엷지만, 주인의 코가 붉은 것이 첫째로 축하드릴 만하다.” 하였다. 주인이 술을 권하는데 큰 술잔을 잡으니 아사가 말하기를, “군(郡)은 작지만 술잔이 큰 것이 둘째로 축하할 일이다.” 하였다. 국과 밥이 들어오니 아사가 말하기를, “밥은 붉고 장은 흰 것이 셋째로 축하할 일이다.” 하였으니, 이것은 순흥(順興)의 세 가지 축하할 만한 것이다. 상동
○ 계림(雞林 경주)에 한 아름다운 창녀(娼女)가 있었다. 장안의 어떤 소년이 무척 정이 쏠려 소중하게 여겼는데, 이별할 때 몹시 우는 것을 보고 소년이 행장에 있는 물건을 모두 주니 창녀가 사양하고 말하기를, “그대의 신체를 자른 것을 얻고 싶습니다.” 하니, 소년이 앞니를 분질러서 주었다. 서울에 돌아와서 창녀는 이별하자마자 곧 딴사람한테 갔다는 말을 듣고 종을 보내어 앞니를 받아오게 하였다. 창녀가 박장대소하며, “백정더러 살생(殺生)을 금하고, 창녀더러 예법을 지키라는 것은 어리석지 않으면 망령된 사람이다.” 하였다. 어떤 사람이 시를 지어 기롱하기를,
이것더러 은정이 엷다하지 마오 / 莫言這物恩情薄
이는 빠지고 머리는 벗어졌으니 장수할 징조로다 / 齒豁頭童得壽徵
하였다. 상동
○ 한 고관이 아직 출세하지 못하였을 때 언제나 소를 타고 교외로 나갔다. 남이 이것을 기롱하기를, “왜 말을 타지 않고 소를 타오?” 하니, 답하기를, “말이란 오(午 말 오)이다. 머리를 움츠러뜨리면 오(午) 자요. 머리를 쑥 뽑으면 우(牛 소 우) 자이니 이것은 내가 머리를 드러낼 상(像)인 것이다.” 하였다. 사람들이 모두 기이하게 생각하였더니 후일 과연 높은 벼슬에 올라 두각을 나타냈다. 상동
○ 키 큰 사람이 키가 작은 사람을 희롱하여 시를 짓기를,
갓을 쓰니 갓끈이 땅에 질질 끌리고 / 着笠纓垂地
신 신으면 머리까지 파묻혀 들어가네 / 穿靴已沒頭
길가에 소발자국에 고인 물만 만나도 / 路逢牛跡水
건너가려고 지푸라기로 배를 삼나 / 欲渡芥爲舟
하니, 키 작은 사람이 그 시에 대구를 맞추기를,
이불을 덮으면 발이 나오고 / 蓋衾欲露脚
집에 들어가려면 머리 먼저 부딪히누나 / 入屋先打頭
다리를 잘라야 곽에 들어갈 수 있고 / 斬脚方入槨
발만 베어도 배를 받칠 수 있네 / 刖足可撑舟
하였다.
○ 어떤 호탕한 장군이 병이 위독하여 죽게 되자 의원을 청하여 진찰을 하였다. 그러면서도 왼쪽에는 미인들이요 바른쪽에는 거문고와 비파며 술과 고기가 앞에 널려 있었다. 의사가,“병을 고치려 하시면 먼저 이런 것들을 물리쳐야 합니다.” 하였다. 호탕한 장군은, “내가 조금이라도 연명하려는 것은 바로 이것들을 위한 것이니, 만약 이것들을 버리라 하면 백년을 사는 한이 있더라도 나는 싫소.” 하니, 의사가 웃으며 물러갔다.
○ 문인(文人) 김(金)씨와 유(柳)씨가 같은 마을의 동쪽과 서쪽에 살았다. 유씨는 동쪽에 살고 김씨는 서쪽에 살았다. 유씨가 김씨를 기롱하기를, “서쪽 마음[西心]은 악(惡)이요, 서쪽의 입[西口]은 빙긋 웃는[哂] 것이다.” 하였다.
○ 어떤 고을 원이 성질이 청렴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근실하지도 못하면서 시 읊는 것을 좋아하였다. 한 깐깐한 선비[措大 뜻을 이루지 못한 가난한 선비를 이름]가, “이게 족족새[足足鳥]요. 옛사람의 시에,
족족하며 길게 우는 새는 / 足足長鳴鳥
어찌하여 길게 족족거리는고 / 如何長足足
세상 사람은 족을 모르기에 / 世人不知足
이 때문에 길게 족족하고 사노라네 / 是以長足足
하였소” 하니 이것은 청렴하지 못한 것을 기롱한 말이다. 고을 원이, “너는 이게 하하새[呵呵鳥]인 줄 모른다. 옛사람이 시를 지어,
하하 하하새야 / 呵呵呵呵鳥
어찌하여 하하만 되풀이하는가 / 呵呵復呵呵
옛사람이 너무 우스워서 / 昔人大可笑
그 때문에 길이 하하만 하노라 / 是以長呵呵
하였다.” 한다.
○ 한 수령이 손님을 접대하는데 반찬의 등분을 상ㆍ중ㆍ하 3가지로 나누고 언제나 담당 아전과 약속하기를 후하게 대접하여야 할 손님이면 이마를 만지고, 그보다 낮은 손님이면 코를 만지고 그 다음 손님은 턱을 어루만지기로 하였다. 풍성하고 검약하게 대접하는 것을 이것으로 신호를 삼고 있었다. 한 손님이 수령이 턱을 만지는 것을 지켜보고 자리를 피하면서, “일찍부터 친한 사이인데 이마를 만지기 원하오.” 하니, 수령이 얼굴을 붉히고 반찬도 풍성하였다.
○ 근세에 주(周)씨 성을 가진 한 아전이 풍채가 매우 좋았다. 하루는 어떤 마을에 투숙하니 마침 주인집에서 딸 시집보내는 잔치가 베풀어지고 있었다. 주씨가 남은 술이나 얻어 목구멍을 적실까 하고 틈에 끼어 끝자리에 앉았다. 밤이 깊어 손님들은 모두 헤어지고 신랑은 술에 취해 있고, 주씨 혼자 손님 자리에 있으니 주인 집에서 신랑으로 잘못 알고 맞아들였다. 새벽에야 주인 영감이 이 일을 알고 쫓아버리려 하니 주씨가 나와 큰 절을 하며 말하기를, “여자의 도리란 한 번 같이하였으면 죽을 때까지 개가하지 않는 법이니 한 번 잘못을 저지르게 되면 하찮은 선비도 남편되기 꺼리는 것이오. 절개를 온전히 한 저의 여인을 빼앗아, 절개를 잃은 저 사람의 부인을 만든다면 역시 잘못이 아니겠습니까?” 하니, 영감이 혀를 깨물며 오래 생각하다가, “어찌한단 말인가?” 하더니 그를 사위로 삼고 말았다. 후일 주씨는 문호(門戶)을 세우고 자손도 번성하였다.
○ 근래 학자로 김(金)씨 성을 가진 사람이 있었는데 담소를 잘하였다. 한 번은 친구를 방문하였는데 친구가 술상을 차렸으나 안주가 채소뿐이었다. 그래서 먼저 사과하기를, “집이 빈한하고 저자도 머니 맛있는 음식이 없고 싱겁고 박한 것이 부끄럽다.” 하였다. 때마침 여러 닭들이 마당에서 모이를 쪼았다. 김(金)이 말하기를, “내 말을 잡자.” 하니, 주인이, “말을 잡으면 무엇을 타고 갈 건가?” 하니, 김이, “닭을 빌려 타고 돌아가지.” 하니, 주인이 웃으면서 닭을 잡아 대접하였다.
○ 남쪽 고을의 한 태수가 탐심이 많고 검었다. 하루는 벌금형에 처해진 백성이 있었다. 관리가 그 집 송아지를 징발하여 왔다. 태수가 꾸짖어 물리치고, “베[布]를 징발해 오너라.” 하니, 백성이 통분하여 정원에 호소하기를, “원컨대, 한 마디만 말하고 죽겠습니다.” 하였다. 태수가, “너 하고 싶은 대로 말하라.” 하니, 백성이, “베는 다리가 없으니 사또댁에까지 갈지 모르겠습니다. 네 발이 있는 것이라야 댁에까지 갈 수 있지 않겠습니까?” 하니, 태수가 대단히 부끄러워하였다.
○ 근세 진사 송극명(宋克明)이 코가 붉어 성균관에서 호를 송귤(宋橘)이라 하였다. 한 진사가 귤부(橘賦)를 짓기를,
하늘이 만든 귤이 있고 / 有天作之橘
사람이 만든 귤이 있으니 / 有人作之橘
동정호의 귤은 하늘이 만든 귤이요 / 洞庭之橘天作之橘也
극명의 귤은 사람이 만든 귤이로세 / 克明之橘人作之橘也
하였다.
○ 근위(近衛)의 군사 용순우(龍順雨)는 성질이 어리석고 정직한데 어릴 때 이름이 산호(珊瑚)였다. 정월 초하루 하례식에 백관이 줄을 섰는데 용순우 역시 창을 쥐고 마당에 섰었다. 통례관(通禮官)이, “산호(山呼 만세라는 뜻).” 하고 홀(笏)을 불렀다. 그러자 용순우가, “예.” 하고 답하였다. 통례관이 재창(再唱)으로, “산호(山呼).” 하니, 용순우가, “예예.” 하여 뜰에 가득 찬 사람들이 모두 웃었다. 산호(山呼)를 산호(珊瑚)로 오인하였던 것이다.
○ 진사 오척지(吳陟之)가 한 고을을 들렀는데 그때 훌륭한 손님들이 모두 모였다. 진사가 늦게 도착하여 말석에 앉아 있으니 행동거지가 쑥스러웠다. 주인이 귤을 쪼개어 껍질로 술잔을 만들어서 술잔이 오척지에게 돌아오자 술과 귤껍질 잔까지 먹어버리니, 온 좌석이 떠들썩하게 웃었다.
○ 유효관(柳孝寬)은 겁이 많았다. 일찍이 국자(國子)의 과시(課試) 때 북을 울리며 독촉하니 겁에 질려 초고(草稿)를 쥐고 허둥대다가 글자가 모두 찢어져 파리와 모기처럼 날아가 버려 한 자도 분별할 수 없었다.
○ 어떤 장님이 수십 명과 같이 금강산(金剛山)에 갔다가 돌아왔다. 어떤 사람이 유점사(楡岾寺)의 기둥과 지붕 형태를 물으니 답하는 사람이 없었다. 장님이 말하기를, “불전(佛殿)의 기와 골이 1백 20이다.” 하여 그 까닭을 물으니, 장님이, “처음 갔을 때 갑자기 소나기가 내려 기와 골에서 떨어진 물이 땅을 파 오목하게 되었다. 내가 더듬어 그것을 세어보아 알게 되었다.” 하였다.
○ 어떤 선비 다섯 사람이 모여서 술을 마시면서, 술 마시는 규칙을 정하기를, “한 글자에 세 가지 음이 있고, 의미(意味)가 훈훈(醺醺)하고 단 것을 말한 사람이 술을 마신다.” 하였다. 한 사람이, “행ㆍ항ㆍ행(行行行), 엿물에 사탕을 먹는다.” 하고 또 한 사람이, “설ㆍ열ㆍ세(說說說), 웅장(熊掌)에 벌꿀을 합했다.” 하고. 또 한사람이, “악ㆍ낙ㆍ요(樂樂樂), 순한 술에 우유를 섞는다.” 하고. 또 한 사람이, “중ㆍ중ㆍ중(重重重), 규수방에 운우(雲雨)가 무르녹다.” 하였다. 마지막 사람이 고심하더니, “이ㆍ기ㆍ사(已己巳), 흰 쌀을 가지고 시장에 간다.” 하였다. 넷째 사람이, “이ㆍ기ㆍ사는 한 글자가 아니고, 흰 쌀은 훈훈히 취하거나 단 것도 아니다.” 하니, 그 사람이, “석자는 획이 같고 흰쌀을 가지고 시장에 가면 사탕도 여기 있고 운우도 무르녹을 수 있으니 어찌 훈훈하고 달콤하지 않겠는가?” 하였다.
○ 어떤 두 늙은 관리가 이웃에 살면서 상종하는데, 한 사람은 흰 털을 뽑아 칠(漆)과 같이 검었고, 한 사람은 뽑지 않아 희기가 눈 같았다. 털 뽑은 사람이 말하기를, “흰털을 뽑으면 다섯 가지 이익이 있으니, 첫째는 늙은 추태를 가릴 수 있고, 둘째 얼굴이 아름답고, 셋째 소년을 따를 수 있고, 넷째 처첩(妻妾)을 기쁘게 할 수 있고, 다섯째 벼슬을 그만두지 않아도 된다.” 하니, 머리가 흰 사람이, “수염은 형체가 있으니 혹 숨길 수 있으나 형체 없는 이는 결국 피할 수 없지 않나.” 하였다.
○ 한 선비가 성격이 치우치고 급하였다. 매번 외톨 마늘을 먹었는데 그것이 둥글고 작아서 젓가락으로 집다 집다 안 되니 벌떡 일어나 밟아버렸다.
○ 서생 윤발(尹發)은 겁이 많았다. 한 번은 시험장에서 답안지[名紙] 위에다 먹을 갈고 길게 탄식하기를, “누가 윤발이 겁이 많다 하는가?” 하여 성균관에서 호를 지어 윤겁(尹㥘)이라 하였다.
○ 문사 몇 사람이 서원(西原 청주) 명기(名妓) 하양대(下陽臺)와 함께 모여 문자회(文字會)를 열었다. 양대(陽臺)의 노래와 춤이 가는 구름을 막을 정도로 훌륭하였고, 무사는 말석에 있었는데 마침 새가 처마 끝에 드는 것을 보고 무사가 총을 쏘았는데 탄환이 처마에 맞고 퉁겨 돌아와 양대의 입에 들어가 앞니가 부러져 버렸다. 어떤 선비가 시를 지어 희롱하기를,
서원 기생 하양대는 / 西原佳妓下陽臺
노래와 춤이 뛰어나 홀로 재주를 휘두르는데 / 歌舞叢中獨擅才
가장 한되는 것은 당시 문자회에 / 最恨當年文字會
무인이 마침 어디서 쫓아왔던가 / 適從何處武人來
던진 금환(금으로 만든 탄환)이 퉁겨나와 풍류 입에 들어가서 / 金丸反入風流竅
옥 같은 이빨 구멍 하나 뚫었고녀 / 玉齒飜成脾睨開
이때부터 맑은 목청 도리어 거칠어지니 / 自從繞梁聲反澁
부질없이 좌석의 손님 한을 막기 어렵게 되었네 / 空敎座客恨難裁
하였다. 《한화(閑話)》
○ 세종[英廟] 때에 과거를 일삼던 사람들이 변려문(騈儷文)만 힘쓰고 반 줄의 경서(經書)도 읽지 않았다. 경서를 강의하는 논의는 문종(文宗)께서 동궁(東宮)에 계실 때 시작되었다. 문종이 친히 강을 묻는데, 한 서생은 《서경(書經)》을 강하면서 혁상(衋傷)이라는 혁(衋)을 진(盡) 자로 읽고, 한 서생은 《시경(詩經)》을 강하면서 전히(殿屎 대아(大雅)편에 있음)의 히(屎)를 미(尾)라 하고, 한 서생은 《예기(禮記)》를 강하면서 단궁(檀弓)을 단목(檀木)의 활[弓]이라 하고, 한 서생은 《춘추(春秋)》를 강의하면서 정돌(鄭突)의 돌(突)을 돌승(突升 갑자기 어른이 된다는 뜻)이라 하였다. 유생들이 모두 욕하면서, “혁(衋)과 히(屎)는 음이 변한 것이요, 궁(弓)과 돌(突)은 이름을 바꾼 것이니, 삼장(三場 과거의 과목 (詩)ㆍ부(賦)ㆍ의(疑)를 말함)은 되지만 오경(五經)은 어렵도다.” 하였다. 상동
○ 근래 한 학장(學長)이 시를 깨끗하게 읊는 데는 상대가 없었다. 〈걸의시(乞衣詩)〉를 지어 고을 원에게 보내기를,
추우면 사체를 자라목처럼 감추고 / 寒藏四體藏頭鱉
차가우면 양미간(兩眉間)을 박쥐의 목 움츠리듯 움츠린다 / 冷縮雙眉縮頸蝙
하였다. 상동
○ 진사 유효관(柳孝寬)은 겁이 많았다. 성균관에서 시험을 치는데 북을 울려 독촉하자 유효관이 얼굴을 푸르락붉으락하였다. 당시 사람들이 청겁(靑㥘)ㆍ홍겁(紅㥘)이라고 희롱하였다. 상동
○ 이사철(李思哲)이 권기(權岐)ㆍ신평(申枰)과 함께 어려서 삼각산(三角山)에 놀러 가면서 각자 술을 한 병씩 찼으나 술잔이 없어서 권기가 신었던 말가죽 신에 한두 잔이 들어갈 수 있었다. 이사철이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이 이것으로 마셨다. 다른 사람도 따라 마셨다. 후일 훌륭하게 되어서 권기에게, “오늘 이 금술잔의 술 맛이 그때 산에 갔을 때 가죽신의 술잔보다 훨씬 못하네.” 하였다. 상동
○ 근세에 한 관리가 명을 받아 군(軍)의 정원을 책정하는 데 가혹하여 조금도 용서가 없었다. 한 사람이 지팡이를 짚고 절뚝거리면서, “오른쪽 다리가 병신이라 걸음을 걷지 못합니다.” 하니, 관리가 돌려보내니, 그 사람이 이번에는 왼발을 절면서 나갔다. 관리가 도로 잡아와, “들어올 때는 오른발을 절더니 나갈 때는 왜 왼발을 저는가?” 하니, 그 사람이 졸지에 대답하기를, “갑자기 오른쪽인 줄 잊어버리고 왼쪽을 절었습니다.” 하였다. 관리가, “너의 일이 정해졌으니 저는 것은 오른쪽을 절든지 왼쪽을 절든지 너 마음대로 하라.” 하였다. 《골계전(滑稽傳)》
○ 근래 한 서생(書生)이 과거 날짜가 가까워지면 낙(落) 자를 쓰기 싫어서, 낙타(駱駝)는 타립(駝立)이라 하고, 바다에서 잡히는 낙지(落池)를 입지(立池)라 하며, 잘못 낙(落) 자를 범하게 되면 꾸짖었다. 마침내 시험장에 들어갈 때 여러 사람 가운데서 시험 답안지를 땅에 떨어뜨리고 가거늘 옆 사람이 뒤에서, “당신 시험지가 섰소.” 하니, 그 서생이 알아듣지 못하고 잃어버리고 말았다. 상동
○ 근래 한 문사가 집례(執禮)가 되었다. 친구가 장난으로 식순(式順) 가운데 악작(樂作 주악(奏樂)하는 순서)이란 악자 위에 초두[艹]를 적어 넣었다. 그리고는 식이 시작되자 소리 지르기를 약작(藥作)하고는 소리가 미처 끝나기도 전에 다시 소리 지르기를, “초두는 떼어버리고 악작(樂作).”이라 하였다. 당시 사람들이 부르기를, “약작(藥作) 집례(執禮).”라 하였다. 상동
○ 근래 삼관(三館)의 신진들이 홍군회(紅裙會 기생을 데리고 노는 모임)를 흉내내면서 서로 의논하기를, “풍류 있고 문장 있는 사람을 참가시키면 우리 일은 다 틀려버리니 얼굴 못생긴 사람을 좌객(坐客)으로 삼자.” 하여, 김안절(金安節)ㆍ윤통(尹統)ㆍ유순도(庾順道) 세 선생을 좌객으로 하였으니. 모두 얼굴이 못생겼다. 때문에 듣는 사람이 모두 웃었다. 이로 인하여 세상에 얼굴 못난 사람을 좌객(坐客)이라 하게 된 것이다.
○ 근래 진양 태수(晉陽太守)로 나간 사람이 백성한테서 거둬들이는 것이 법도가 없어서 산림(山林)에서 나는 채소와 과일이라도 이익이 있는 것은 하나도 남겨두지 않아, 절간의 중들까지도 그 피해를 입었다. 하루는 운문사(雲門寺) 중이 와서 태수를 배알하였다. 태수가, “너의 절 폭포(瀑布)가 올해 볼 만 하겠구나?” 하니, 중이 폭포가 어떤 물건인지 모르고 또 무엇을 징수하려는 것인가 하고 두려워서 답하기를, “폭포를 올해는 멧돼지가 다 먹어버렸습니다.” 하였다. 어떤 사람이 시를 지어 조소하기를,
찬 소나무는 어느 날 호랑이가 물고 갈 것인가 / 寒松何日虎將去
폭포는 올해 멧돼지가 다 먹어버렸네 / 瀑布當年猪盡喫
하였으니, 이것은 강릉(江陵)의 한송정(寒松亭)이 있었는데 경치가 좋기로 관동(關東)에서 제일이었다. 사신(使臣)들과 손님의 내왕이 많아 수레가 몰려들었으며 그들의 접대비가 무척 많이 들어서 고을 사람들이 항상 불평하기를, “한송정은 호랑이가 어느 때 물어 갈꼬.” 하였다.
○ 한 낭관이 나이가 퍽 들어 수염이 반백이었다. 한 번은 예쁜 기생을 보고 기뻐서 희롱하였더니, 기생이, “슬프도다, 늙으셨습니다.” 하였다. 낭관이 집에 돌아와 부인더러 흰 수염을 다 뽑게 하였더니, 부인이 검은 수염을 모두 뽑아버리고 흰 것만 남겨두고, 그 후에 거짓말로 “요즈음 잘 가꾸시어 예전의 흰 수염을 한 노인이 아닙니다.” 하였다. 늙은 낭관이 대단히 기뻐하고 기생집에 가서 자랑하기를, “내 얼굴이 붉고 내 머리가 검지?” 하니, 기생이 빙그레 웃으며 거울을 병풍 사이에 놓았다. 낭관이 가까이 가 자기를 비쳐보니 하얗게 머리가 센 늙은이기에 부끄러워 돌아와 버렸다.
○ 어떤 대장(大將)은 지독한 공처가였다. 하루는 교외에다 붉은 기와 푸른 기를 세워놓고 명령하기를, “공처가는 붉은 기 쪽으로 가고 공처가 아닌 사람은 푸른 기 쪽으로 가라.” 하였다. 결국 모든 사람이 붉은 기 쪽으로 모이고 푸른 기 쪽은 한사람뿐이었다. 대장이 그 사람을 장하다 하면서, “내가 백만 대군을 이끌고 적과 마주쳐서 적을 무찌르고 싸우며, 화살과 돌이 비오듯 하여도 한 번도 꺾어 본 적이 없지만, 일단 집안에 들어오기만 하면 언제나 도리가 애정에 못 이겨 지고 마는데, 그대는 어찌하여 부인을 두려워하지 않는가?” 하니, 그 사람이, “처가 언제나 경계하기를, ‘세 남자가 모이면 반드시 여색을 이야기할 것이니 당신은 가지 말라.’ 하였습니다. 지금 붉은 깃발 아래는 사람이 많이 모였으니, 이 때문에 가지 않았습니다.” 하였다. 대장이 기뻐하며, “공처가가 이 늙은이뿐만이 아니구나.” 하였다.
○ 두 문사가 집을 나란히 하고 살고 있었다. 한 사람은 털보요, 한 사람은 대머리여서 매번 서로 조롱하였다. 대머리가 털보를 조롱하기를, “우스워라, 털보 나그네야! 온몸이 털투성이, 양 볼은 어디 있는가, 코 하나만 높이 솟았네, 푸른 입술 움직이는 것을 보지도 못하고, 때때로 흔들리는 흰 이만 보는구나.……” 하니, 털보가 대머리를 비웃기를, “대머리 늙은이는 무엇인가, 얼굴은 그 모양으로 밉게도 생겼구나. 처음 볼 적에는 추부(醜婦)인가 의심하였더니, 자세히 보아하니 흡사 요승(妖僧) 닮았구나. 내시[巷伯]와 똑같고 사당[優婆]과 적합한 벗일레라. 감로(甘露)의 변(變) 듣기라도 하게 되면, 너 따위가 제일 먼저 통렬하게 징계받지.” 하였다.
○ 세 유생이 모여 독서하는데, 어떤 사람이 쌀을 보내왔다. 한 사람은 술을 좋아하고, 한 사람은 밥을 좋아하고, 나머지 한 사람은 떡을 좋아하였다. 그래서 세 사람이 글을 지어 승부(勝負)를 가리기로 하였다. 떡을 좋아하는 사람이, “사온 술은 먹지 않고[沽酒不食], 제철에 나온 것이 아니면 먹지 않는다[不時不食].” 하였다. 밥을 좋아하는 사람이, “술은 위의(威儀)를 손상시키며, 떡은 배를 채울 수 없다.” 하였다. 술을 좋아하는 사람이 “어린애는 떡을 달라 울고, 굶주린 사람이 밥을 찾는다. 옛날 요(堯)임금은 천 사발의 술을 마셨고, 순(舜)임금은 백잔을 마셨으며, 우(禹)임금은 마시고 달다 하였고, 고종(高宗)은 단술[醴]을 만들도록 명령하였으며, 강숙(康叔 주공(周公)의 동생))은 덕이 커서 취하지 않았다. 공자는 유주무량(有酒無量)이요, 진(晉) 나라 평공(平公)은 술잔을 날렸으며, 위(魏) 나라 문제(文帝 조비(曹丕))는 벌주를 마셨으며, 백륜(伯倫 진(晉) 나라 죽림칠현의 한 사람인 유영(劉伶)의 자)은 〈주덕송(酒德頌)〉을 지었으며, 낙천(樂天 백거이(白居易))은 술의 공을 찬양하고, 초화(蕉華)는 주보(酒譜)를 지었으며, 서막(徐邈)은 성인(聖人 성(聖)은 청주 현(賢)은 탁주)을 말하였다. 뿐만 아니라 하늘에는 주성(酒聖)이 있고 땅에는 주천(酒泉 지명)이 있으며, 고을에 주향(酒鄕)이 있고, 신선에 주선(酒仙)이 있으니 예로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모두 술을 찬양하였지, 떡과 밥에 관한 말은 한 마디도 없다.” 하였다. 이래서 술을 사게 되어 좋아하니, 떡을 좋아하는 사람은 냄새만 맡고도 취하였으며, 밥을 좋아하는 사람은 잔을 잡더니 쓰러지고, 술을 좋아하는 사람은 가득 찬 술을 잔을 당겨 술기운이 오르도록 마시며 즐거워하였던 것이다.
○ 근위병(近衛兵)인 용순우(龍順雨)는 성질이 어리석고 정직하였다. 한 번은 밤길을 가다가 순찰관(巡察官)을 만나자 다리 밑에 숨었다. 이날 밤 마침 용(龍)과 호(虎)가 암호였다. 순찰관이, “용가(龍哥).” 하고 암호를 말하였더니, 용순우가 자기를 부르는 줄 알고 급히 나와서, “내가 용가입니다.” 하니, 순찰관이 웃으면서 보내 주었다. 따라서 속언에 어리석은 사람을 용가(龍哥)라 부르게 되었다.
○ 한 선비가 성질이 몹시 편협하고 조급하였다. 채소국을 먹다가 입술을 데이게 되니, 벌떡 일어나 발로 걷어차니 국물이 부인의 머리와 얼굴에 뒤집히게 되어 부인이 소매로 털면서, “내 머리와 얼굴이 입과 배[腹]가 되어 뜨거운 국 한 그릇을 다 먹어버렸다.” 하였다.
○ 한 관리가 삼가현(三嘉縣)에 도착하니 고을 원님이 주연을 베풀며 묵은 술[陳色酒]을 내어놓았다. 빛과 맛이 아주 나쁜데 심히 권하였다. 관리가 술잔을 멈추고 얼굴을 찌푸리며, “붉은 말[騮馬]이 잘 무니 어찌 마실 수 있소.” 하니, 원님이, “무슨 말씀입니까?” 물으니, 답하기를, “술빛이 누르고 붉으니 마치 유마(騮馬) 같고 그 맛이 몹시 쓰고 시어 입이 물어뜯기는 것 같소.” 하여, 모두 크게 웃고 술좌석을 끝냈다. 어떤 사람이 시를 지어 희롱하기를,
태수가 유마주(騮馬酒)를 은근하게 권하네 / 太守慇懃騮馬酒
하였다.
○ 근세에 조정 선비에 함(咸)씨 성을 가진 사람이 있었다. 권세 있는 귀족들을 가까이하지 않아 높은 관리가 되지 못하고 죽었다. 그래서 속세에서, “얼음에 얼어 죽었다.” 하고 성이 김(金)가라는 사람은 권세 있는 사람 집을 분주히 다니며 좋은 관직을 얻어서 갑자기 죽으니, 사람들이, “열(熱)을 가까이하여 타서 죽었다.” 하였다. 어떤 사람이 시를 지어 조소하기를,
불의 쥐와 얼음의 벌레 겸할 줄 모르니 / 火鼠冰虫不思兼
인간이 차고 뜨거운 것은 성질이 편벽되기 때문이네 / 人間寒熱性偏堪
염라대왕이 평화제를 만들어서 / 閻羅定作平和劑
뜨거운 김을 따가지고 찬 함가에게 보충하였네 / 殺却炎金補冷咸
하였다.
○ 서사가(徐四佳)의 〈야로송해시(野老送蟹詩 시골 늙은이가 게를 보내온 시)〉라는 절구에,
옥자라 쇠 갑옷인 내황후(게의 별명)는 맛은 / 玉鱉金甲內黃候風味
강호에서 제일류라 / 江湖第一流
창자 없이 엉금엉금 기어가니 애석하구나 / 可惜無腸空郭索
오정을 마다 않고 술자리를 가까이하였네 / 不辭五鼎近糟丘
하였다.
○ 근세에 한 높은 관리가 성질이 너무 느렸다. 한 번은 시장에서 비싼 값을 주고 말을 샀으나 3년 동안 암놈인 줄 몰랐다. 하루는 그 말을 타고 모임에 갔더니 암내를 맡고 달려드는 말이 있었다. 여러 사람이 웃으며, “최 재상의 말입니다.” 하였다. 최 재상이 천천히 말하기를, “내 말이 암말이던가? 내가 처음에는 수말인 줄 알고 사두었는데, 그 도적놈이 나를 속였구나.” 하였다.
○ 세조가 등준시(登俊試)를 시행하였다. 김수온(金守溫)이 장원이 되고, 강희맹(姜希孟)이 아원(亞元)이 되고, 서거정(徐居正)이 탐화(探花)로 합격하였다. 서거정이 강희맹에게 시를 보내기를,
탐화 3월은 좀 늦으며 / 探花三月差遲晩
가장 좋은 꽃향기는 2월이로세 / 最好芳菲二月天
하였다. 2월은 아원(亞元 2등으로 합격한 사람)이요, 3월은 탐화이다. 전시(殿試)에서 3등으로 합격한 사람이 탐화랑(探花郞)인 것이다. 《동인시화(東人詩話)》
○ 일본을 칠 때 중국 사신이 여강(驪江) 청심정(淸心亭)에서 시를 짓기를,
강이 맑아서 물속의 물을 뚫어 보고 / 江淸徹見水中水
누각이 높아 산 너머 산을 볼 수 있다 / 樓逈可觀山外山
하였거늘, 달성(達城) 서거정이, “산 너머 산이란 뜻은 좋으나, 물 속의 물이란 앞 사람들이 이런 말을 하지 않았으니, 억지로 끌어다 붙인 것이다.” 하였다.
○ 대간 이인로(李仁老)의 시에,
숲 사이 가물가물 얼마나 많은 집이며 / 林間出沒幾多屋
하늘 끝 아련하니 어디메 산이던가 / 天末有無何處山
하였고, 정승(政丞) 이혼(李混)의 시에,
높은 하늘에 가는 새는 어느 곳을 향하는고 / 長天去鳥欲何向
넓은 들에 봄바람 불어 쉬지 않네 / 大野東風吹不休
하였다. 상국(相國) 이규보(李奎報)의 시에,
역졸의 손님 접대 언제나 끝날 것이며 / 郵吏送迎何日已
사신들의 내왕 잦아 어느 때 쉴 것인가 / 使華來往幾時休
하였으니, 세 사람의 구법(句法)이 비슷하나 이규보의 말은 중첩되어 원숙(圓熟)하지 못하니 당연히 이인로와 이혼에게 항복하여야 할 것이다.
○ 당(唐) 나라 시대에 신라 사신이 바다를 건너면서 시를 짓기를,
물새는 뜨다 또 가라앉고 / 水鳥浮還沒
산에 구름은 끊어졌다 또 잇는다 / 山雲斷復連
하였으며, 낭선(浪仙) 가도(賈島)가 사공을 두고 한 연(聯)을 짓기를,
돛대는 물결 아래 달을 뚫고 / 棹穿波底月
배는 물속 하늘을 누른다 / 船壓水中天
하니, 신라 사신이 감탄하고 글을 다시 계속하지 못하였다 하였는데, 사신은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이었다.
○ 송도(松都) 천수원(天水院) 벽에 낙화(洛花)를 읊은 시에,
비 맞아 무정하게 떨어져서 / 帶雨無情墮
바람 타고 뜻 있게 빙글 돌아가네 / 乘風作意回
시내를 비치는 천만 송이 꽃봉오리 / 映溪千萬朶
너무 활짝 핀 것이 한스럽다 / 却恨十分開
하였는데, 달성(達城) 서거정이 평하기를, “뜻은 깊지만 말이 막혀 좋지 못하다.” 하였으니, 시를 좋아하는 사람은 분별해야 할 것이다.
○ 시라는 것은 말이 발로되는 것이며 기운이 충만하여야 한다. 옛날 사람들이 시를 읽으면 그 사람을 알 수 있었던 것도 그 때문이다.
○ 설매(雪梅)는 이름난 기생으로 노래와 가사를 잘 불렀다. 조준(趙浚)이 처음 정승에 오르자, 나라의 노재상(老宰相)들이 서쪽 교외에서 위로하는 연회를 베풀었는데 술이 절정에 이르기 전에 나라에서 조준(趙浚)을 불러 대궐로 들어오라는 명이 있었다. 늙은 재상들이 모두 어울려서 술 한 잔을 올리고, 설매더러 노래를 부르도록 하니,
서쪽 동산에 꽃놀이 모임이 파하지 않았는데 / 西園未罷看花會
다시 불리어 상양궁(上陽宮)에 들어가네 / 又被宣招宴上陽
라는 시구를 노래하니, 온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경탄하였다. 그 뒤에 하륜(河崙)이 서변 순찰사(西邊巡察使)가 되어 성문 밖에 장막을 치고 전송하는 잔치를 하니 고관들이 가득 모였다. 설매가 또 노래 부르기를,
그대에게 권하노니 다시 한 잔 더하시오 / 勸君更進一杯酒
서쪽으로 양관을 나서면 친구라곤 없다오 / 西出陽關無故人
라는 시구를 노래하니 온 사람들이 칭찬하여 마지않았다.
○ 이규보(李奎報)의 동도(東都) 3백 운은 시(施) 자를 두 번, 지(祗)를 두 번 압운(押韻)하였으니, 어디에서 근본한 것입니까? 달성 서거정이 말하기를, “두보(杜甫) 음중팔선가(飮中八仙歌)에 면(眠) 자 둘, 전(前) 자 셋을 압운하였으니 옛날 사람도 이러하였거늘 어찌 이규보만 괴이하게 여길 것이 있겠는가.” 하였다.
○ 옛사람들이 시를 짓는 데는 한 구(句)도 내력이 없는 것이 없다. 정승 이혼(李混)의 상부벽루시(上浮碧樓詩)에,
영명사 안에 중은 보이지 않고 / 永明寺中僧不見
영명사 아래 강물만 흘러 흘러 / 永明寺下江自流
라는 시구는 이태백(李太白)의,
봉황대 위에 봉황새 놀더니 / 鳳凰臺上凰鳳游
봉새는 가버리고 대(臺)는 비었는데 강물만 흘러흘러 / 鳳去臺空江自流
에서 나온 것이며,
빈 산에 외로운 탑만 뜰가에 서 있고 / 山空孤塔立庭除
인적 끊어진 나루터에 빈 배만 비껴 있네 / 人斷小舟橫渡頭
라는 시구는 본래 소주(蘇州) 위응물(韋應物)의,
사람 없는 나루터에 배만 홀로 비껴 있다 / 野渡無人舟自橫
에서 나온 것이며,
하늘 높이 나는 새는 어디로 향하는고 / 長天去鳥欲何向
넓은 들에 봄바람 불어 그칠 줄 몰라라 / 大野東風吹不休
는 본래 후산(後山) 진사도(陳師道)의,
하늘 높이 나는 새는 어디로 가려는고 / 度鳥欲何向
떠가는 구름은 스스로 한가로워라 / 奔雲亦自閑
에서 온 것이며,
지난 일 아득하여 물어 볼 곳도 없으니 / 往事微茫問無處
놀에 지는 해는 사람의 수심 자아낸다 / 淡煙斜日使人愁
는 본래 이태백의,
뜬구름이 해를 가리어 / 摠爲浮雲能蔽日
장안(長安)이 안보이니 사람의 수심 자아낸다 / 長安不見使人愁
에서 나온 것이니, 시구마다 내력이 있으며, 따다 꾸민 것이 묘할 뿐더러 격조가 높다.
○ 옛사람이, “대(對)가 없는 구(句)는 없다.” 하였다. 사예(司藝) 설위(薛緯)가 집정관(執政官)에게 거슬리어 관직을 빼앗기고 시구를 짓기를,
갑한테 노하고는 을에게 옮기니 / 怒於甲者移於乙
써 주면 행하고 버리면 은둔하리 / 用則行之捨則藏
하였다. 달성 서거정은 당시 동궁(東宮)에서 연구(聯句)를 지어,
나라를 다스림은 손바닥을 가리키는 것과 같다 / 治國其猶指諸掌
하니, 문정(文靖) 최항(崔恒)이,
사람에게 눈동자보다 더 좋은 것은 없다 / 存人者莫良於眸
라고 짝을 맞추었으니 진실로 천하에 대(對)가 없는 구(句)는 없다.
○ 이인로(李仁老)의 소상팔경(瀟湘八景)이란 절구는 청신(淸新)하고 아름다우며 모사(模寫)가 아주 공교롭다. 진화(陳澕)의 칠언 장구(七言長句)는 호방하고 깨끗하고 건장하고 우뚝하며 기이한 체를 얻었으니 모두 고금의 절창(絶唱)으로 후일의 작자는 쉽게 따를 수 없다.
○ 옛날 시인들은 사물에 의탁하여 비유하였는데 말이 정밀하고 절실하였다. 황산곡(黃山谷)이 다미(茶糜)를 읊은 시에,
이슬이 젖었으니 하랑에게 탕병을 시험하고 / 露濕何郞試湯餠
햇볕에 말리니 순령이 화로에 향내를 내네 / 日烘荀令炷爐香
라 한 것은 장부를 꽃에 비유한 것이고, 문정(文靖) 최항(崔恒)이 검정콩을 읊은 시에,
흰 눈은 흡사 손님을 싫어하는 뜻이요 / 白眼似嫌憎客意
검은 몸둥이는 아직도 복수할 마음이 가득하구나 / 漆身還有報仇心
한 것은 문인(文人)과 열사(烈士)를 검정콩에 비유한 것으로 인용한 것이 특히 기이하다.
○ 최충헌(崔忠獻)이 문객 40여명을 모아 겨울 모란 완상하면서 이규보(李奎報)를 초청하여 여러 사람들이 성(姓) 자로 압운(押韻)하여 시를 짓게 하였다. 옛사람들은 사람의 성 자를 따다 압운하여 지은 시가 없으니 이것은 다만 시가(詩家)들이 희롱한 것이지 시의 정체(正體)는 아니다.
○ 만취당(晩翠堂) 조선생(趙先生 조수(趙須)의 호)의 영추악시(詠秋嶽詩)에,
갈아놓은 낫이 흡사 새로 나온 달과 같다 / 磨鎌似新月
는 시구가 있는데, 달성 서거정을 보고하는 말이, “한퇴지(韓退之) 시에,
새로 나온 달이 흡사 갈아놓은 낫과 같다 / 新月似磨鎌
하였으니, 나는 이 말을 썼으나 뜻은 반대이다. 이것이 소위 번안법(翻案法)이다.” 하였다.
○ 도은(陶隱) 이숭인(李崇仁)과 삼봉(三峯) 정도전(鄭道傳)은 한때 시로 이름이 났다. 이숭인은 청신(淸新)하고 고상하였으나 웅장하지 못하였고, 정도전은 호탕하고 분방하였으나 단련이 적어 서로 장단점이 있었다. 목은(牧隱) 이색(李穡)이 매번 시를 평하면서, “이숭인이 앞이요, 정도전이 뒤이다.” 하였다.
○ 사암(思菴) 유숙(柳淑)의 〈걸퇴시(乞退詩)〉에,
큰 이름 아래서 오래 있기 어렵다 / 大名之下久居難
하였더니, 참소하던 자가 신돈(辛旽)에게 고발하여 살해되었다. 정숙(貞肅) 박안신(朴安信)이 나라 일을 말한 죄로 주살 당하게 되자, 한 절구를 읊어,
군주가 간신을 죽였다는 이름을 얻을까 두렵네 / 君得殺諫臣名
하였더니, 태조가 듣고 노여움을 풀어 살려 주었으므로 사람들이, “시가 사람을 죽이기도 하고 살리기도 한다.” 하였다.
○ 신라(新羅) 학사 박인범(朴仁範)이 경주 용삭사(經州龍朔寺)에서 시를 지어,
등은 반딧불처럼 흔들리며 새 나는 길을 밝혀주고 / 燈撼螢光明鳥道
사닥다리는 무지개같이 둘리어 바위에 빗장같이 박혔다 / 梯回虹影落岩扃
라 한 것과, 고려(高麗) 참정(參政) 박인량(朴仁亮)이 사주 구산사(泗州龜山寺)에서 지은 시에,
탑 그림자는 거꾸로 강 물결 속에서 일렁이고 / 塔影倒江翻浪底
종소리는 달을 흔들어 구름 속으로 사라진다 / 磬聲搖月落雲間
는 구절은 모두 《여지승람(輿地勝覽)》에 실려 있다.
우리 나라 사람들이 시로 중국에 이름나게 된 것은 이 군자(君子)로부터 시작되었다.
○ 고려(高麗) 혁명 때 왕씨(王氏)들을 모두 해도(海道)로 몰아 보내었다. 한 중이 어떤 왕씨(王氏)와 사이가 좋았다. 해안까지 따라가 왕씨를 이별하려 하였는데 배가 이미 떠나는 중이었다. 중이 갓을 벗어 휘둘러 보이니, 왕씨가 옷의 소매를 잘라,
부드럽게 노젓는 소리 창파 밖으로 들리니 / 一聲柔櫓蒼茫外
묻노니, 산승아 너와의 정을 어이할꼬 / 且間山僧奈爾何
라는 혈서(血書)를 적어 해변으로 던졌다. 중이 헤엄쳐 주워와 통곡하며 돌아섰다.
○ 달성(達成) 서거정(徐居正)이 이르기를, “내가 이문순(李文順 이규보)의,
옷깃을 헤치니 북녘에서 시원한 바람 불어오고 / 披衿快得風從北
안석에 기대 앉았으니 마침내 해는 서쪽으로 기운다 / 隱几終敎日向西
라는 구절을 좋아하였는데 이는 말과 글자가 순하고 안온하여 좋은 댓구가 되기 때문이었다. 그 후에 한자창(韓子蒼)의 시를 보니,
아침에 기국을 떠나니 미풍이 북에서 불더니 / 朝辭杞國風微北
저녁에 영릉(하남성(河南省)의 지명)에 쉬게 되니 달이 정히 남쪽이라 / 夜泊寧陵月正南
한 구절이 있는데, 이문순의 글자를 사용하는 법이 한자창과 꼭 닮았으니 암암리에 서로 합치되었다 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하였다.
○ 천봉 상인(千峯上人)의 한 연구(聯句)에,
회나무는 늙어 천년 빛깔이요 / 檜老千年色
종소리 차가웁게 밤중에 들리누나 / 鍾寒半夜聲
하였는데, 도은(陶隱) 이숭인(李崇仁)이 홀로 좋아하며, “이것이 소위 ‘부처의 소리와 빛깔이 모두 공(空)이다’라는 말이다.” 하였다.
○ 서도(西都)에 금수산(錦繡山)이 있는데, 그 봉우리를 모란봉(牧丹峯)이라 한다. 고려 왕이 이곳에 행차하여 친히 구(句)를 지어 노래하기를,
북두칠성 삼사점이라 / 北斗七星四點
하니, 한 진사(進士)가 짝을 맞추기를,
남산처럼 만수하니 십천추라 / 南山萬壽十千秋
하였다. 왕이 탄복하며 제일로 삼았으니 삼사(三四)가 칠(七)이 되고 십천(十千)이 만(萬)이 된다.
○ 한 중국 사신이 태평관에다 고풍(古風) 한 편을 적고 스스로 비평하기를, “정심(精深)하고 온건(溫健)하다.” 하였다. 또, 방안마(放鞍馬)라는 시를 짓기를,
한 나라 문제는 이미 천리마를 가볍게 여기고 / 漢文旣是輕千里
조적(육조(六朝) 진(晉) 나라 장수)는 무심히 한 채찍 더하네 / 祖逖無心着一鞭
하고, 또 스스로 비평하기를, “익숙하고 건아(健雅)하다.” 하였으나, 신하 된 사람이 한(漢) 나라 문제(文帝)로 자신을 비유하였으니 식자들은 비웃었다. 《동인시화(東人詩話)》
○ 서거정(徐居正)은 한 구안에 글자가 중첩되는 것을 애용하였다. 예를 들면,
눈 오는데 나가서 눈 오는 변두리를 가니 / 雲中出去雪邊行집 아래는 불어오고 집 위에는 평평하네 / 屋下吹來屋上平
겹겹이 쌓인 것이 몇 겹이며 / 積得重重那許重
조각조각 날아오니 또 얼마나 가벼운가 / 飛來片片又何輕
하는 따위다. 《소문쇄록(謏聞瑣錄)》
○ 전서(典書) 노여(魚與)가 순흥루(順興樓)에 시를 적기를,
차가운 산기운을 밀치고 중은 빗장 채우는데 / 寒推岳色僧扃戶
찬 시내 소리 밟으며 나그네는 누각에 오르누나 / 冷踏溪聲客上樓
하였고, 평장사 허백(許伯)의 〈간성루(杆城褸)〉에,
오경의 새벽빛은 빈 누각에 먼저 들고 / 五更曉色先虛閣
한 잎의 가을 소리 작은 누대에 가득하네 / 一葉秋聲滿小樓
하였으니, 누가 나은가? 서달성이, “노여의 시는 너무 공교로워 오히려 졸렬하고, 허백의 시는 속된 것 같으면서도 대단히 기이하다.” 하였다. 《동인시화(東人詩話)》
○ 우리 나라 사람들의 시에 자규(子規)를 읊은 것이 많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이견간(李堅幹)의,
창너머 두견새 소리 밤을 새워 들려오니 / 隔窓杜宇終宵聽
하였고, 윤여형(尹汝衡)의,
두견이 울고 울어 피 쏟아 핀 두견화라 / 杜鵑啼血杜鵑花
하였고, 조계방(曹係芳)의,
달 밝은 밤에 자규 와서 우네 / 子規來叫月明時
라고 한 말은 모두 맑고 처절하다. 그 중에 이견간의 시가 더욱 좋다. 상동
○ 시는 비평하지 않고서는 결점을 알 수 없으니 마치 의사는 처방을 버리고서는 병을 고칠 수 없는 것과 같다. 익재(益齋) 이제현(李齊賢)의 《패설(稗說)》과 이인로(李仁老)의 《파한집(破閑集)》같은 책이 나옴으로부터, 우리 나라 시학(詩學)의 정수(精粹)를 비로소 고찰할 수 있게 되었다. 〈동인시화서(東人詩話序)〉
○ 김부식(金富軾)과 정지상(鄭知常)은 시(詩)로 당대에 이름이 났다. 김부식의 시는 엄정하고 전실(典實)하여 정말 덕 있는 사람의 말 같고, 정지상의 시는 말과 운(韻)이 깨끗하고 아름다우며 격조가 호탕하고 빼어나서 만당(晩唐)의 시체(詩體)를 깊이 터득하였으니 두 사람은 기상이 다르다. 《동인시화(東人詩話)》
○ 강릉부(江陵府)에 운금루(雲錦樓)가 있다. 누대 남쪽에는 못이 있으며 연꽃을 심고, 못 가운데는 섬을 만들었으며, 섬 위에는 또 대나무를 심어 못물이 파랗게 넘치고 연꽃이 만발하여 붉은 향기에 푸른 그늘이 띠같이 둘렸는데, 떼지어 말쑥하게 서 있는 것과 깨끗하게 멀리 바라보이는 품은 기이한 자세와 독특한 기상이 서로 같지 않다. 〈서달성기(徐達城記)〉
○ 그대에게 권하노니,
추부를 추하다 하지 말고 / 勸君勿醜婦醜醜
그대에게 권하노니, 박주를 맛없다 하지 마라 / 勸君勿薄酒薄薄
고래로 미주는 사람의 천성을 해치는 법이고 / 古來美酒伐人性
예쁜 계집은 나라를 망치지 않았던 일 없다 / 未有哲婦不亡國
사가의 〈후박박주(後薄薄酒)〉
○ 금강(錦江) 아래 쪽에 정자(亭子) 하나가 있다. 옛날 한 안렴사(按廉使)가 정자에 올라 전망을 하다가 술이 취하여 자신도 모르게 춤을 추었다. 그래서 그 정자 이름을 안무정(按舞亭)이라 하였다. 그 후 그 고을 원이 정자를 중수하려 하였으나 감사가 못하게 하여 수리하지 못하였다. 어떤 시인(詩人)이 비웃기를,
옛날은 술 취하여 춤추던 안렴사요 / 昔有醉舞按廉
지금은 술깨어 시를 읊는 감사다 / 今有醒吟監司
하였는데, 서달성의 시에,
풍경을 죽이는 이 그 누구인가 / 殺此風景是何人
백발의 그 감사는 정말로 나쁜 손님이라 / 白頭監司眞惡客
하였다.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 〈공산십영(公山十詠)〉에, 금지함담(金池菡萏)이 있으니 서달성이 시에,
직녀가 비단을 짜서 / 天孫爲織雲錦機
푸른 것은 치마요 붉은 것은 저고리라 / 綠爲裳兮紅爲衣
바람에 좋고 비에 좋고 달빛에도 또한 좋아 / 宜風宜雨又宜月
가벼운 연기와 가는 안개에도 향기가 휘날리네 / 輕煙細霧香霏霏
하였다. 상동
○ 수령이란 곧 옛날의 제후니 백성들에게는 부모의 도리가 있고, 관리들에게는 군신의 분의(分義)가 있다. 부모의 마음으로 백성을 사랑하면 백성들이 기뻐할 것이요, 위엄과 복록의 자루를 쥐고 관리들을 부리면 관리들은 두려워할 것이다. 백성들이 기뻐하지 않는 것은 가혹하게 정치를 잘못하기 때문이요, 관리들이 두려워하지 않는 것은 태만하여 정치를 잘못하기 때문이다. 《사가정집(四佳亭集)》
○ 남곡(南谷) 이선생(李先生)의 두 손자가 있었는데, 큰 손자 종검(宗儉)과 막내 손자 종겸(宗謙)은 나이가 늙지도 않아서 모두 관직을 사직하고 집에 돌아와 정자를 짓고, 효우정(孝友亭)이라 하였다. 두 선생은 시골 복장을 하고, 흰 수염ㆍ붉은 얼굴로 날마다 그곳을 거닐며 시를 읊고 담소하니, 희희낙락하는 풍치가 고상하여 한 고을 사람들이 흠모하였다. 옛날에 찾아보면 한(漢) 나라 소광(疏廣)ㆍ소수(疏受)보다 조금도 덜하지 않다. 서달성의 〈동정기(同亭記)〉
○ 동도(東都)에 한 창부(娼婦)가 홀로 살고 있었다. 하룻밤에 큰 벼락이 치더니 갑자기 그치고 마당에 한 물건이 떨어졌는데 광채가 찬란하였다. 가까이 가 보니 둥그레한 밝은 구슬이 계란 크기만 하였다. 주워다 방에 두니 저녁마다 등촉(燈燭)같이 밝아 가는 털도 보였다. 한 소년이 속여서 가지고 가면서 거짓말로, “관청(官廳)에 납부한다.” 하였다. 조정에서 관리를 보내어 조사하였으나 결국 찾지 못하였다. 소년은 평소에 가난하더니 날로 부유하게 되니 사람들이 모두 그 구슬 덕택이라고 의심하였다. 《필원잡기(筆苑雜記)》
○ 우리 나라는 오행(五行)의 목(木)에 속하여 청색(靑色)을 숭상하여야 옳은데 백색(白色)을 숭상하고 있다. 이것은 백색은 금이기 때문에 금이 목(木)을 이기니 불가하지만 대개 양(陽) 안에 음이 있고 음(陰) 안에 양이 있으니, 청에 속하면서 백을 숭상하는 것은 음 가운데 양이 있는 때문이다. 상동
○ 연안(延安)에는 붕어[鮒魚]가 많이 나는데 매우 살쪘다. 한 원님이 찐 붕어를 몹시 좋아하여 하루에도 3ㆍ4차례 올리면 그때마다 비었다. 고을 사람들이 비웃으며 청사(廳舍) 벽에다 크게 쓰기를, “6년 동안 무슨 사업하였는가, 한 못의 고기만 다 먹었네.” 하였고, 별호를 붕어 무덤[鮒魚塚]이라 하였다. 상동
○ 제주(濟州) 땅에는 진기한 산물이 많이 난다. 귤ㆍ유자ㆍ큰 유자ㆍ감귤ㆍ아름다운 조개ㆍ곧은 노나무 등은 다른 고을에 없는 것들이다. 해물(海物)의 경우는 사람에게 자산이 되는 재화가 많다. 그래서 이익을 도모하는 상선의 왕래가 북채[梭] 드나들 듯한다. 《사가정집(四佳亭集)》 에서 나옴
○ 천지에 가득 찬 물건이 만 가지로 많으며 모두 각각 그 성질을 가지고 있다. 산은 산(山)대로의 본성이 있고, 물은 물대로의 본성이 있으니 우뚝 솟은 것을 누가 산인 줄 모르며, 줄줄 흘러가는 것을 누가 물인 줄 모르리오마는 거기에서 다른 것 같으면서 같은 것 이 있고, 같은 것 같으면서 다른 것이 있음은 변화가 일정함이 없는 묘리를 보여야 한다. 〈석가산기(石假山記)〉
○ 산의 기세가 좌우로 계속 이어져 불쑥 솟아나면 봉우리가 되고, 밋밋하게 올라간 것은 영(嶺)이요, 그윽하게 들어간 것은 골짜기요, 초목이 무성하여 산록을 형성한다. 갑자기 내려갔다가 올라갔다 하여 푸른 것이 얽히고 흰 것이 둘려서 형상이 한결같지 않다. 상동
○ 공산(公山)에 어떤 아전의 아들이 있었는데, 고을 원의 아들을 따라 독서하였다. 원의 아들은 웅장(熊掌)을 얻어 먹게 되자 아전 아들에게 물고기 대가리를 주면서, “왜 곰의 족발을 먹지 않나?” 하니, 아전 아들이, “대장부가 뜻을 세우는 것은 사람 위에 서기 위한 것이다. 물고기 머리는 먹을지언정 곰의 발은 먹지 않는다.” 하여, 세상 사람이 기이하게 생각하더니 후일 과연 높은 관리가 되었다. 《골계전(滑稽傳)》
○ 서달성(徐達城)의 연꽃 못에 수놓은 오리[蓮塘繡鴨]라는 시에,
푸른 일산 붉은 단장에 그늘진 푸른 물결 / 翠蓋紅粧蔭碧漣
한 쌍의 꽃오리는 비단으로 장식하니 / 一雙花鴨錦成鈿
세상의 주살들이 무슨 상관 있겠는가 / 江湖矰繳何曾管
한가히 맑은 모래에 기대어 평온하게 잠자누나 / 閑倚晴沙穩作眠
하였다. 본집(本集)
○ 송경을 지나며 〈회고(懷古)〉라는 시를 지으니,
한 봉오리 송악이 높이 하늘로 들어가고 / 一朶松巒高入天
황성에 해 떨어지니 찬 연기만 잠겼구나 / 荒城落日鎖寒煙
마음 아프게 전조 일들 물으려 하니 / 傷心欲問前朝事
경물이 모두 전성시대와 다르구나 / 雲物渾非全盛年
하였다. 상동


 

[주D-001]정정정(亭亭亭) : 송(宋) 나라 주돈이(周敦頤)의 〈애련설(愛蓮說)〉에, “꼿꼿하게 말끔히 서 있으니 멀리서 바라볼 수는 있지만 가까이 가지고 놀 수는 없다.” 하였다. 여기서는 정정(亭亭)이란 연꽃에 바르게 꼿꼿이 서 있는 뜻이다.
[주D-002]유자[橘]이 회수(淮水)를 …… 들었지만 : 《안자춘추 내편》에, “안자가 초(楚) 나라에 가니 초왕이 연회를 베풀었다. 거기에 관리가 도적 하나를 잡아왔는데 제(齊) 나라 사람이라 하였다. 초왕이 안자에게, ‘제(齊) 나라 사람은 도적질을 잘하는가’하고 물으니, 안자가 ‘귤(橘)은 회수(淮水) 남쪽에 나는 것인데 회수 북쪽에 오면 탱자가 됩니다. 이것은 풍토가 달라 그런 것입니다. 백성이 제 나라에서 자랄 때는 도적질을 하지 않다가 초 나라에 들어와 도적질을 한다 하니 초 나라의 풍토가 도적질하게끔 만든 것이 아닙니까?’ 하였다.” 한다.
[주D-003]서곤체(西崑體) : 시를 짓는 데 어려운 전고(典故)를 많이 써서 쉽게 알 수 없게 쓰는 문체로, 송 나라 양억(楊億)ㆍ유균(劉筠)ㆍ전유연(錢惟演) 등이 당 나라 이상은(李商隱) 등을 본 뜬 것이다.
[주D-004]윤사분은 시기심 많고 험하다 : 《논어 팔일(八侑)》에 ‘巧笑倩兮여 美目盼兮’라는 구절이 있는데, 윤사분의 이름자 중 분(昐)이 위 구절의 변(盼)자와 비슷하고 천(倩) 자가 시기한다는 시(猜) 자와 비슷하므로 농담을 한 것이다.
[주D-005]감로(甘露)의 변(變) : 당 나라 문종 태화(太和) 9년에 재상 이훈(李訓)과 왕애(王涯) 등이 환관들을 죽이려 모의하였으나 일이 발각되어 오히려 죽고 말았는데, 이 사건을 말한다.
[주D-006]이슬이 …… 시험하고 : 하랑(何郞)은 삼국시대 하안(何晏)으로 용모가 아름다웠는데 얼굴에 흰 분을 바르고는 얼굴에 손을 대지 않았다. 위 나라 명제(明帝)가 그를 시험하기 위해 무더운 여름철에 뜨거운 탕병(湯餠)을 먹게 하니 땀이 비오 듯하여 소매로 얼굴을 닦자 더욱 아름다웠다는 고사를 인용한 것이다.
[주D-007]순령(荀令) : 순령은 후한 때에 사람인 순욱(筍彧)으로 조조에게 신임을 받았다. 어느 날 민가에 앉았는데 사흘 동안 향기가 사라지지 않으니 그를 순령향(荀令香)이라 하였다

 

 
최보순(崔甫淳)이 금자광록대부 참지정사 집현전태학사 동수국사 판예부사(參知政事集賢殿太學士同修國史判禮部事)를 사양한 데 대한 불윤교서

운운. 대저 하늘을 대신하여 만물을 다스리고 임금을 보좌하여 정사해가는 것이 재상의 소임인데, 따라서 나라의 위신이 중해지거나 경해지고, 백성이 잘살거나 못살게 되는 것이다. 당태종(唐太宗)은 사람을 거울삼아, 위징(魏徵)의 총명을 싸고 돌고, 상(商) 나라 임금은 신하를 배[舟] 삼아, 부열(傅說)이 건너줌을 힘입었다. 원대한 역량있는 사람이 아니고서 어찌 여정(輿情 민심)에 맞겠는가. 경은 천ㆍ인(天人)을 해박하게 통하고 전고(典故)를 익숙하게 알며, 문장(文章)을 전업(專業)하여 무(武)를 뒷받침하고, 몸이 연약하나 강단으로 보충하되, 정신으로 대항하여 적(敵)을 손바닥 위에서 놀리고, 의논이 근거가 있어 국자감(國子監)을 가슴속에 간직했으며, 절개 있는 솔이 한서(寒暑) 때문에 그 모양을 변하지 않듯 하고, 좋은 옥이 열기나 습기 때문에 그 성질이 변하지 않듯 한다. 국가의 안위(安危)를 부탁해야 하는데, 경 같은 덕망있는 사람이 아니고 누가 하겠는가. 이래서 바로 홍추(鴻樞 추밀원)를 뛰어넘어 봉각(鳳閣 중서성)으로 발탁해 올리되, 거듭 사신(史臣)의 직(職)으로 올리고 겸해서 서전(書殿 집현전(集賢殿))의 자급(資級)으로 높이어, 이 서성(西省 중서성)의 새 영화로써 남조(南曹 이조(吏曹))에서의 전일 굴욕을 씻게 한 것이다. 대저 왕자(王者)가 인재를 임용할 때, 비록 일찍이 그의 사람됨을 파보지 못하였더라도, 진실로 여러 사람의 말이 모두 좋다고 하면, 오히려 중하게 쓰고 의심하지 않는 것인데, 더구나 경 같은 사람은 지난날 근밀(近密)한 납언(納言)으로 있을 때, 짐(朕)이 이미 친히 시험했기에 이 요로인 논사(論思)하는 자리에 두는 것인데, 누가 다시 딴 말을 하겠는가. 조그마한 겸손을 고집하여 다시 굳이 사양하는 말을 하지 말라. 소청을 마땅히 윤허하지 않겠다. 운운.

[주D-001]위징(魏徵)의 총명 : 당 태종이 신임하는 신하 위징(魏徵)이 죽자, “청동(靑銅) 거울 보고 의관을 바룰 수 있고, 옛 역사를 거울삼아 흥망을 알 수 있고, 곧은 사람으로 거울삼아 잘잘못을 알 수 있는데, 지금 위징이 죽었으니, 원감이 없어졌다.” 하였다. 《唐書 卷97》《舊唐書 卷71》
[주D-002]부열(傅說)이 건너줌 : 고종(高宗)이 꿈에 성인을 만나고서, 백공(百工)들을 시켜 수소문하여 부열을 찾아내게 되자 정승을 삼으며 말하기를 “만약 큰 내를 건너게 된다면 그대로 주즙(舟楫)을 삼겠다.” 하였다. 《書經 說命上》

 崔甫淳讓金紫光祿大夫參知政事集賢殿大學士同修國史判禮部事不允敎書

 

云云。夫代天理物。貳王行政者。宰相之任也。國以之重輕。民由之肥瘠。以人爲鑑。唐宗保魏徵之明。用汝作舟。商后倚傅說之濟。如非遠量。曷副輿情。卿該通天人。諳練典故。業文而資之虎。體柔而濟以剛。精神折衝。弄敵人於掌上。論議有據。藏國子於胸中。貞松不爲寒暑變其容。良玉不因燥濕渝其性。擧國安危而是託。非卿德002_043a望而孰當。是用直越鴻樞。擢登鳳閣。申峻史臣之職。兼崇書殿之資。用玆西省之新榮。雪爾南曹之舊屈。大抵王者之用人也。雖未嘗究閱其爲人。苟僉言之皆允。猶柄用而不疑。況如卿者。在昔納言密邇之時。朕已親試。置斯當軸論思之地。誰復異詞。毋執小謙。更陳牢讓。所請宜不允。云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