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최초의 의병 곽재우 /의병장 곽재우 장군 임진록 기록

의령의 인물 망우당 곽재우 선생 생관련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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忘憂先生文集世系年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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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世系
忘憂先生世系 a_058_497a
  


十二世祖。金吾衛校尉諱子儀。
十一世祖。檢校將軍諱赫孫。
十世祖。丞同正諱冏。王氏駙馬。
九世祖。有備倉丞諱璉玉。
八世祖。奉翊大夫工曹典書諱允賢。以上高麗。
七世祖。通訓大夫判司宰監事諱瓊。
六世祖。義盈庫使諱得宗。
五世祖。奉列大夫益山郡事諱安邦。
世祖朝靖難功臣。所歷郡縣。淸白著名。事載輿地勝覽。
夫人金海宋氏。判宗簿寺事褒之女。
058_497b高祖成均進士諱承華。
與寒暄先生同遊佔齋之門。以金,郭兩秀才稱之。寒暄師友錄云。以淸介爲士友所推知。有士林之禍。遂沈冥鄕曲間。不自表異於凡人。
配善山金氏。贈參議磾之女。
曾祖朝散大夫禮安縣監諱瑋。字㓜溫。
夫人平山申氏。生員承濬之女。
祖通訓大夫成均司成贈承旨諱之藩。字翰仲。
正德庚辰登第。歷事中宗仁宗明宗。
夫人陽川許氏。同知磷之女。
考通政大夫黃海監司贈禮曹判書諱越。字時靜。號定庵。
058_497c嘉靖丙辰登第。歷事明宗宣祖。
夫人晉州姜氏。贈牧使應斗之女。


 

 

 

忘憂先生文集世系年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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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年譜
忘憂先生年譜 a_058_497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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皇明世宗皇帝嘉靖三十一年壬子本朝明宗大王七年八月二十八日戊寅癸亥時。先生生于宜寧世干里之私第。卽先生外家也。
嘉靖三十二年癸丑
嘉靖三十三年甲寅正月二十二日。先夫人見背。
嘉靖三十四年乙卯
嘉靖三十五年丙辰
嘉靖三十六年丁巳
嘉靖三十七年戊午
058_497d嘉靖三十八年己未
嘉靖三十九年庚申
嘉靖四十年辛酉
嘉靖四十一年壬戌
嘉靖四十二年癸亥
嘉靖四十三年甲子
嘉靖四十四年乙丑。是歲先生年十四。以春秋請質於季父參議公赳。公曰。汝自能看透。豈待吾啓發。先生遂潛心硏究。先生之學。蓋本於春秋。
嘉靖四十五年丙寅
穆宗皇帝隆慶元年丁卯。是歲先生年十六。聘于昌原居萬戶金行之家。萬戶公乃商山世家。而南冥曹先生女壻也。有二058_498a女。長適金東岡宇顒。次配先生。皆南冥先生所自選擇也。
隆慶二年戊辰。本朝宣祖大王元年。
隆慶三年己巳。先生旣生長于外家。是歲作室于世干。因居焉。
隆慶四年庚午
隆慶五年辛未。先生氣宇豪邁。學文之暇。習射御書數之藝。兵家書亦皆泛濫。
隆慶六年壬申
神宗皇帝萬曆元年癸酉。宣祖大王六年。
萬曆二年甲戌。是歲先大夫牧義州。先生陪往。時先生年二十三。
萬曆三年乙亥在義州
萬曆四年丙子。先大夫遞還。先生在義州三年。一不近色。人服058_498b其操。是歲女子子生。長適靈山居牧使辛崙之孫膺。生子東望,時望。
萬曆五年丁丑九月。子瀅生。生子汝櫓,汝楫。
萬曆六年戊寅秋。先大夫以冬至使赴京。先生陪行入中朝。相者異之。以爲當名滿天下云。及壬辰倭亂。倡起義兵。名顯華夷。相者之言果驗矣。朝天之使有言皇朝發策取士。以先生爲問。通信使金世濂迴言日本國史亦載先生事蹟云。
萬曆七年己卯春。陪先大夫還自京師。
萬曆八年庚辰八月。子活生。生子汝桓,汝梓,汝樞,汝松。
萬曆九年辛巳
萬曆十年壬午。女子子生。長適昌寧居縣監成天裕之子生員以道。生子萬江,萬河。
058_498c萬曆十一年癸未
萬曆十二年甲申。是年以前。先生東堂入格者三。而年月皆不可攷。
萬曆十三年乙酉。是歲先生年三十四。中庭試第二。乃唐太宗敎射殿庭論也。語意有觸忤。命罷其榜。
萬曆十四年丙戌八月初六日。丁判書公憂。以先夫人姜氏袝。居廬于神堂三年。
萬曆十五年丁亥
萬曆十六年戊子。是歲夏。先生側室在陜川病革。願一見而死。先生曰。訃可聞也。見不可爲也。其執喪之嚴如此。
萬曆十七年己丑。服闋後遂廢擧子業。作亭于宜寧歧江上。坊名遯地。漁釣自娛。若將終身。
058_498d萬曆十八年庚寅。在遯地江亭。
萬曆十九年辛卯。在江亭。
萬曆二十年壬辰。是歲先生年四十一。夏四月。倭寇猝發。列郡瓦解。先生首起義兵於宜寧。揭號天降紅衣將軍。戰無不捷。四方響應。義旅繼起。時監司金睟托以勤王。踰嶺而走。久乃旋歸。先生奮然曰。睟以道主。一不禦賊。出境逃還。罪可斬也。遂列罪傳檄于睟。又疏聞于行朝。睟大怒。以叛逆論啓。且令其軍官金景訥等移書。目之以賊。先生方馳援晉州。倚馬而答曰。義賊之分。天地知之。是非之判。公論在焉。惟睟之黨。不得於言。求之於秉彛之良心可也。招諭使金誠一聞之。卽抵書于先生。譬喻多方而力止之。又反覆馳啓而伸救之。自上特賜溫諭。勉以討賊之義。備邊司亦移關而褒奬058_499a之。始授幽谷察訪兼刑曹正郞。先生於是雪涕勵士。兵勢益張。日擊江賊。保障江右。以爲恢復根基焉。時左道諸賊。分道入京。沿路各邑。皆有屯賊。四出摽掠。先生親率精銳。出奇設疑。攻刦多方。玄,昌,靈三邑屯賊。焚燒官倉。相繼遁去。火餘米糓。民多頼之。秋七月。自上敎諭于本道士民書有曰。聞郭再祐布置異常。殺賊尤多。而不以功自達云。予尤奇之。恨予聞名之晩也。冬十月。陞折衝將軍爲助防將。是歲副室子灘生。
萬曆二十一年癸巳夏五月。天將劉揔兵綎來駐於星州之八莒縣。先生以肄習領將。往來於唐陣。夏六月。夫人金氏卒。冬十二月。除星州牧使。
萬曆二十二年甲午。以星州牧使兼助防將。時朝議以修築058_499b山城爲急。令先生專主築城備禦之務焉。忠勇將軍金德齡聞先生名聲。先以書通。願與之協力討賊。自湖南領兵來會於宜寧。是秋棄星州牧使。副室子溟生。
萬曆二十三年乙未春。除晉州牧使。夏五月。觀察使徐渻聞先生有棄官之意。以書勸留之。是秋棄歸。
萬曆二十四年丙申。在玄風嘉泰。
萬曆二十五年丁酉。以防禦使。新築玄風之石門山城。未及完畢。賊有再動之勢。秋八月。移守昌寧之火旺山城。未幾。賊將淸正引兵大至。先生嚴部伍勅諸將。但令堅守曰。渠自知兵。豈肯輕犯。賊經一晝夜。果不戰而退。渡江而西。屠黃石陷南原。體察使李元翼以城危兵少難之。先生飛報曰。齊城七十。卽墨獨全。唐兵百萬。安市能當。列城雖罷。獨不可爲守乎。拒058_499c而不從。是月二十九日。繼母許氏病卒于城中。奉喪柩出城。權厝於玄風嘉泰里琵瑟山麓。遂避地于江原道蔚珍縣。自上特命起復者三。而皆上疏陳情不起。
萬曆二十六年戊戌。在蔚珍寓所。是歲倭賊撤歸。
萬曆二十七年己亥。在嘉泰。冬十月。爲本道左兵使。追贈三代。焚黃于家廟。
萬曆二十八年庚子。以島山城修築事。再度啓請。而朝廷不省。先生以爲有官守者不得其職則去。因上疏以見其志。棄官而歸。遂被㙜劾。靈岩郡付處。是歲副室子沐生。
萬曆二十九年辛丑。在靈岩謫所。
萬曆三十年壬寅。賜環入琵瑟山。餐松辟糓。又就靈山滄岩。新築江亭。扁以忘憂。永謝烟火。蕭然若一道人也。
058_499d萬曆三十一年癸卯。在滄岩江亭。
萬曆三十二年甲辰春。拜察理使。委以南路保障之任。先生奉命巡審道內山城形勢。修築仁同之天生山城。夏五月。除善山府使。不赴。因以病馳啓。辭察理使。秋八月。拜安東府使。不赴。冬十一月。陞授嘉善大夫龍驤衛上護軍。時先生年五十三。
萬曆三十三年乙巳春正月。以察理使有召命。二月。拜同知中樞府事。三月。又以察理使承召命上京。俄遷漢城右尹。夏四月。加贈先大夫禮曹判書。未幾。呈病南還。秋八月。除仁同縣監。蓋以曾修天生山城也。不赴。
萬曆三十四年丙午。在江亭。
萬曆三十五年丁未。在江亭。春正月二十七日。寒岡鄭先生,旅058_500a軒張先生乘舟來訪。翊日同泛龍華山下。
萬曆三十六年戊申。在江亭。春二月。宣廟昇遐。光海卽位。秋七月。拜本道左兵使。不赴。八月。被召。上疏不赴。九月又召。特令本道監司給衣馬護送。上疏乞寢召命。乃擧春秋討逆之義。請正臨海之罪。十一月又被召。上疏極斥全恩讓位之說。不赴。
萬曆三十七年己酉。在江亭。春正月。被召不赴。三月。拜三道統制使。不就。
萬曆三十八年庚戌。在江亭。閏三月。被召不赴。上中興三策疏。夏六月。承召上京。秋七月。拜副捴管。時金睟爲都捴管。謂先生曰。令公絶粒多年。何以堪荷雲劍。每自荷之。少無宿憾意。待先生甚欵。秋八月。拜漢城左尹。上疏直言。至以爲殿下之058_500b國。必亡於銀。聞者莫不悚歎。又拜咸鏡監司。上疏極論譯官遠接使等無君之罪。朝廷不能擧劾。先生慨然連上封章。備邊司入啓以爲郭再祐之疏。言言痛切。正中時病。願加體念。九月。先生以言不見用。浩然南歸。光海卽遣宣傳官。追到忠州。宣旨敦諭。先生留忠州數日。上疏而來。又特遣注書元鐸追到伽倻之海印寺。諭旨益懇。先生謝病不起。因留於海印之百鍊菴數月。答人書有曰。靑松岩畔。飢則餐葉。白雲堆裡。渇則飮泉。一時傳誦。先生之在京也。完平,漢陰諸公日相從遊。賢士大夫莫不爭趨交謁。座不能容。或爲詩文以歎美之。所至兒童走卒。亦皆奔走聚觀。塡溢街巷。
萬曆三十九年辛亥。在江亭。
萬曆四十年壬子。在江亭。正朝。先生祭先塋于神堂。大會親戚058_500c于率禮。留連五六日。極懽而罷。
萬曆四十一年癸丑。在琵瑟山照菴。數月而來。夏四月。拜全羅兵使。五月。有旨勉起。終不赴。時廷臣請殺永昌大君。人莫敢言。先生獨冒死上疏。以爲八歲之兒。必不知逆謀之爲何事。且大君之誅。慈殿必不能忍。不能忍而如或自决。則殿下將何以有辭於天下後世乎。臣恐群臣將使殿下陷於大不義也。
萬曆四十二年甲寅。在江亭。
萬曆四十三年乙卯。在江亭。時南冥先生副室子次石爲宜寧縣監。朝廷贈爵賜諡于南冥。遣禮官祭于宜寧。先生往觀焉。
萬曆四十四年丙辰。在江亭。冬十月。除掌隷院判決事。不赴。十一月。往哭許氏姊於宜寧。
058_500d萬曆四十五年丁巳。是歲春三月。先生患脹。不許鍼藥曰。死生有命矣。夏四月十日。終于江舍。是日之午。雷雨驟作。紫氣沖霄。天光下燭。俄然乘化。享年六十六。返殯於玄風嘉泰里。雖深山窮谷。莫不驚悼。以爲郭公亡矣。郭公亡矣。光海深加痛惜。亟命致賻賜祭立傳。秋八月。葬于縣南仇知山神堂之原。卽先生曾祖以下同原之岡也。明年戊午。鄕人爲之立祠。時郭㠎爲山長。。盡心營建


 

 

 

 

 망우집(忘憂集)
형태서지 | 저 자 | 가계도 | 행 력 | 편찬 및 간행 | 구성과 내용

  

 망우집(忘憂集)
형태서지 | 저 자 | 가계도 | 행 력 | 편찬 및 간행 | 구성과 내용

  형태서지
권수제  忘憂先生文集
판심제  忘憂集
간종  목판본
간행년  1629年頃刊
권책  世系, 年譜, 傳, 原集 2권, 龍蛇別錄 합 1책
행자  12행 24자
규격  23.2×18.7(㎝)
어미  上下二葉花紋魚尾
소장처  서울대학교 규장각
소장도서번호  奎1364
총간집수  한국문집총간 58
 저자
성명  곽재우(郭再祐)
생년  1552년(명종 7)
몰년  1617년(광해군 9)
 季綏
 忘憂
본관  玄風
시호  忠翼
특기사항  曺植의 門人이자 外孫壻. 李德馨과 從遊
 가계도
 郭之藩
 司成
 郭越
 黃海 監司
 晉州姜氏
 姜應斗의女
 郭再禧
 
 郭再祿
 
 郭再祐
 
 尙州金氏
 曺植의 外孫
 郭瀅
 
 郭活
 
 女
 
 辛膺
 
 女
 
 成以道
 生員
 側室
 李魯의 庶女
 郭灘
 
 郭溟
 
 郭沐
 
 女
 
 朴
 
 女
 
 許彥深
 
 金海許氏
 許瓊의 女
 郭再祉
 
 郭再祺
 
 女
 
 成天祚
 

기사전거 : 世系, 年譜, 神道碑銘(許穆 撰), 郭越神道碑銘(金世濂 撰) 등에 의함
 행력
왕력 서기 간지 연호 연령 기사
명종 7 1552 임자 嘉靖 31 1 8월 28일, 宜寧 世干里 외가에서 태어나다.
명종 9 1554 갑인 嘉靖 33 3 1월, 모친상을 당하다.
명종 20 1565 을축 嘉靖 44 14 「春秋」를 공부하다.
명종 22 1567 정묘 隆慶 1 16 尙州金氏와 혼인하다.
선조 2 1569 기사 隆慶 3 18 宜寧 世干里에 집을 짓고 살다. 학문하는 여가에 射御書數를 익히고 兵家書를 통독하다.
선조 7 1574 갑술 萬曆 2 23 義州 府使로 가는 부친을 따라가 2년간 머물다.
선조 11 1578 무인 萬曆 6 27 가을, 冬至使로 북경에 가는 부친을 따라가다.
선조 18 1585 을유 萬曆 13 34 〈唐太宗敎射殿庭論〉으로 庭試에 합격하였으나 語意의 문제로 罷榜되다.
선조 19 1586 병술 萬曆 14 35 8월, 부친상을 당하다. 新堂洞에서 여묘살이하다.
선조 22 1589 기축 萬曆 17 38 복을 마치자 과거 공부를 그만두고 宜寧의 歧江 遯地에 정자를 짓고 일생을 보내려 하다.
선조 25 1592 임진 萬曆 20 41 4월, 왜적이 침입하자 義兵을 일으켜 ‘天降紅衣將軍’이라고 揭號하다. ○ 감사 金晬가 勤王을 핑계로 달아나자 斬해야 한다는 격문을 돌리고 行朝에 상소하다. ○ 상이 특별히 유시를 내려 褒獎하고, 幽谷察訪 兼 刑曹正郞에 제수하다. ○ 10월, 折衝將軍에 올라 助防將이 되다.
선조 26 1593 계사 萬曆 21 42 4월, 星州 牧使가 되다. ○ 5월, 중국 총병 劉綎이 성주의 八莒縣에 주둔하자 肄習領將으로 왕래하다. ○ 6월, 부인 김씨의 상을 당하다.
선조 27 1594 갑오 萬曆 22 43 성주 목사로서 조방장을 겸하다. 山城의 수축에 전념하다. ○ 忠勇將軍 金德齡이 협력을 원하여 호남에서 군사를 거느리고 宜寧으로 와서 모이다. ○ 12월, 晉州 牧使가 되다.
선조 28 1595 을미 萬曆 23 44 가을, 벼슬을 그만두고 돌아가다.
선조 29 1596 병신 萬曆 24 45 玄風 嘉泰里에서 지내다.
선조 30 1597 정유 萬曆 25 46 防禦使로서 玄風의 石門山城을 새로 쌓다. ○ 8월, 昌寧의 火旺山城으로 옮겨 지키다. 적장 淸正이 왔다가 물러나다. ○ 8월, 繼母 許氏가 성 안에서 졸하자 성을 나가 玄風 嘉泰里 琵瑟山麓에 장사 지내고, 강원도 蔚珍縣으로 避地하다. ○ 상이 특명으로 起復을 명하였으나 상소하고 응하지 않다.
선조 32 1599 기해 萬曆 27 48 10월, 경상 좌병사가 되다.
선조 33 1600 경자 萬曆 28 49 2월, 島山城의 수축을 계청하다 받아들여지지 않자 상소하고 고향으로 돌아가다. 이 일로 대간의 탄핵을 받아 靈巖郡에 付處되다.
선조 35 1602 임인 萬曆 30 51 석방되어 琵瑟山으로 들어가 솔잎만 먹고 살다. ○ 靈山 滄巖에 가서 江亭을 짓고 ‘忘憂’라 편액하다.
선조 37 1604 갑진 萬曆 32 53 2월, 察理使가 되어, 仁同의 天生山城을 수축하다. ○ 5월, 善山 府使가 되었으나 나아가지 않다. ○ 병으로 察理使를 사직하다. ○ 11월, 龍驤衛 上護軍이 되다.
선조 38 1605 을사 萬曆 33 54 2월, 동지중추부사가 되다. ○ 3월, 察理使로 召命을 받고 상경하다. 곧 한성부 우윤이 되다. 얼마 후 병으로 사직하고 滄巖 江亭으로 돌아오다.
선조 39 1606 병오 萬曆 34 55 5월, 전라 병사가 되었으나 나아가지 않다.
선조 40 1607 정미 萬曆 35 56 1월, 鄭逑와 張顯光이 내방하다. ○ 5월, 道流를 창도한다는 이유로 대간의 탄핵을 받다.
선조 41 1608 무신 萬曆 36 57 7월, 경상 좌병사가 되었으나 나아가지 않다. ○ 9월, 상소하여 臨海君의 죄를 바루도록 청하다.
광해군 1 1609 기유 萬曆 37 58 3월, 경상 우수사가 되었으나 나아가지 않다.
광해군 2 1610 경술 萬曆 38 59 윤3월, 召命에 나아가지 않고 〈中興三策疏〉를 올리다. ○ 6월, 召命을 받고 상경하다. ○ 7월, 부총관이 되고, 이어 한성부 좌윤, 함경 감사가 되다. ○ 9월, 江亭으로 내려가다. 선전관이 忠州, 伽倻山 海印寺까지 내려왔으나 병을 이유로 나아가지 않다. 해인사 百鍊菴에 몇 달 머물다.
광해군 4 1612 임자 萬曆 40 61 11월, 鄭仁弘이 등용을 건의하다.
광해군 5 1613 계축 萬曆 41 62 4월, 전라 병사가 되다. 이때 조정 신하들이 永昌大君을 죽이도록 청하자 죽음을 무릅쓰고 상소하여 그 부당성을 말하다. 이 일로 사직하게 되다.
광해군 8 1616 병진 萬曆 44 65 10월, 掌隷院 判決事가 되었으나 나아가지 않다.
광해군 9 1617 정사 萬曆 45 66 4월 10일, 졸하다. 玄風 嘉泰里에 返殯하다. 광해군이 致祭하고 傳을 짓도록 명하다. ○ 8월, 玄風 仇知山 新堂洞 선영에 장사 지내다. ○ 가을, 知製敎 裵大維가 傳을 지어 史院으로 보내다.
광해군 10 1618 무오 萬曆 46 - 고을 사람들이 祠宇를 세워 ‘忠賢祠’라 하다.
인조 7 1629 기사 崇禎 2 - 從子 郭瀏, 郭瀜 등이 문집을 초간하다. (郭瀏의 跋)
현종 15 1674 갑인 康熙 13 - 玄風 縣監 柳千之가 書院을 세우다. 3년 후 ‘禮淵書院’으로 사액되다.
숙종 35 1709 기축 康熙 48 - 병조판서 겸 지의금부사에 추증되고, ‘忠翼’의 시호를 받다.
영조 27 1751 신미 乾隆 16 - 禮淵書院 앞에 神道碑를 세우다. (權愈 撰)
영조 47 1771 신묘 乾隆 36 - 후손 郭鎭南 등이 문집을 중간하다. (金思渾의 跋)

기사전거 : 年譜, 朝鮮王朝實錄 등에 의함
 편찬 및 간행
저자의 시문을 처음 정리한 것은 사위 成以道였다. 그는 유문을 수집, 편차하여 2권으로 만들었는데, 소략하고 착오가 많았다. 이것을 문제로 여겨 從子 郭瀏와 郭瀜 등이 유문을 增補하고 권수에 傳을, 권말에 祭文과 挽詞를 붙여 1629년에 2권 1책으로 편차를 마쳤다. 이는 중간본에 붙어 있는 郭瀏의 발문을 통해서 알 수 있는데, 여기에 간행에 관한 언급은 없어 이때 실제 간행이 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현전하는 2권 1책의 판본이 이 정고본을 판각, 쇄출한 것으로 추측된다. 《초간본》 현재 규장각(奎1364), 국립중앙도서관(한44-가146) 등에 소장되어 있다.
그 뒤 1636년경 저자의 외손 辛時望이 연보를 새로 만들고 趙任道의 考訂을 받았으며, 1751년에 신도비를 세웠는데 대제학 權愈가 신도비명을 썼다.
1771년에는 후손 郭鎭南 등이 초간본에 누락된 저자의 시문을 후손의 家藏, 古家의 藏書 등에서 널리 찾아 補輯하고, 朝野史나 名臣錄, 여러 文集 등에서 저자의 행적을 뽑아 舊譜와 辛時望이 만든 年譜를 참작하여 새로 연보를 만들어서 권수에 두고, 조정의 褒崇 문자와 諸賢의 詞章을 권말에 편차하여 5권 3책으로 정리하였다. 이것은 저자와 가까웠던 金命元의 후손 金思渾이 宜寧 縣監으로 나오면서 그의 도움을 받아 진행된 일이고, 결국 중간본으로 간행될 수 있었다. 《중간본》 현재 규장각(古3428-755), 장서각(4-5976), 성암고서박물관(4-632) 등에 소장되어 있다.
이 밖에 5권 4책의 중간본이 있는데, 이것은 중간본에 倡義錄 1책이 합본된 것이다. 현재 연세대학교 중앙도서관 등에 소장되어 있다.
본서의 저본은 1629년경 간행된 초간본으로 규장각장본이다.

기사전거 : 序(許穆 撰), 跋(郭瀏, 金思渾 撰) 등에 의함
 구성과 내용
본 문집은 世系, 年譜, 傳, 原集 2권, 龍蛇別錄 합 1책으로 되어 있다.
맨 앞에 세계와 연보가 실리고, 그 뒤에 왕명으로 裵大維가 지은 傳이 실려 있다.
권1은 임진년에 義兵을 일으킨 이후 1604년 察理使 재임 시까지 지은 疏, 上書, 啓辭 등이 연대순으로 편차되어 있고, 비변사의 關文, 金德齡의 書, 有旨 등이 부기되어 있다. 〈倡義時自明疏〉나 招諭使 金誠一에게 보낸 편지는 경상 감사 金晬가 勤王을 이유로 도망간 일과 관련하여 지은 글들이고, 〈答金將軍書〉는 金德齡이 연합을 제의한 데 대한 것이다. 그 외에 起復을 사양하는 疏, 島山城의 수축을 청하는 啓草, 兵使 때 사직하는 소, 察理使로서 仁同의 天生山城 수축과 관련하여 올린 狀啓 등이 실렸다.
권2는 1605년 이후 지은 疏, 論, 書, 詩이다. 1608년(무신)과 1610년(경술)에 내린 召命과 이를 사양하는 疏, 1613년 永昌大君의 죽음과 관련하여 올린 소가 실려 있다. 또 〈張浚論〉은 남송 때 金人의 침략을 물리쳐 공을 세웠던 장준에 관해 논한 글이다. 그 외에 사위 成以道를 권면하는 편지와 滄巖의 江亭을 李道純에게 물려주면서 보낸 편지가 실려 있다. 詩는 〈歸江亭〉, 〈咏懷〉 등 대부분 江亭 생활을 읊은 것으로, 오언과 칠언의 절구와 율시이다.
부록으로 李埈, 金永暉, 李德馨 등의 投贈詩 8題, 書簡 2편, 賜祭文 1편, 申之悌, 郭永禧, 安瓙 등이 지은 祭文 7편, 河惺, 成以道, 裵弘祐 등이 지은 挽詞 12편, 建祠時呈書, 都事金鑑移關이 실려 있다.
龍蛇別錄은 저자의 왜란 때 의병 활동과 일화, 왜란의 추이 등을 간략히 기록한 것으로, 1592년 4월과 7월, 1593년 4월과 6월, 1594년, 1597년의 기록이다.

필자 : 金圻彬

 

 

 

 

 

  

忘憂先生文集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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忘憂先生傳[裵大維] a_058_501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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郭先生再祐。字季綏。玄風人。黃海監司越之子。監司風度俊偉。文辭雄渾。有五子。曰再禧,曰再祿,次公,次再祉,再祺也。病革。以堂上章服屬公。 南冥曹先生孫壻也。天性孝友。器宇宏遠。識周庶務。勇奪三軍。居常處閑。恂恂然直柔耳。及至臨利害遇事變。確乎其不可拔。先大夫嘗牧義州。公在側三年。一不近色。時公年二十餘。人服其操焉。後陪先大夫入中朝。相者異之。以爲後必爲大人。名滿天下云。嘗從事文學。兼通武藝。累捷鄕解。又副庭試。以唐太宗敎射殿庭論。中第二。語有觸忤。卽命罷榜。 下帷明經。人莫之先。丁父憂。喪祭盡誠。有愛妾病革。請一見而死。公曰。訃可聞也。見不可爲也。其執禮之嚴如是。服闋。遂棄擧子業。構亭歧江上。篛笠芒鞋。漁釣自娱。爲終老計。壬辰之變。杖劍首起。以報058_501b國討賊告家廟。屛妻孥托其友。傾家財募壯士。據新反之粟。宜寧屬縣倉 取草溪之兵。軍器 逋將 公將起兵時。路遇頂玉一丈夫。乃加德僉使田應獜也。公駐馬而呼曰。편001汝行色。必是奔北之將。負國偸生。罪不可赦。彎弓欲射之。田盛氣而應曰。我之奔北。於汝何與。抗而不屈。彎弓相向。公卽以義責之曰。汝旣敗軍。吾方倡義。從我義也。抗我悖也。田舍然愧謝曰。誠若公言。敢不僇力同事。遂爲偏裨。從公討賊。竟死於戰陣。 潰卒。俱收並用。設施號令。雷厲焱飛。當是時也。人心淆亂。變將中起。公繩之以律。且諭以義。群情帖然。遠邇響從。賊將安國司聲言向全羅。直抵鼎津。公乃置壘要害。多伏强弩。萆山設疑兵。賊不濟而退。由是陸路諸賊。並趨左道矣。揭號天降紅衣將軍。日擊江賊。士未習戰。怯於赴敵。公着紅衣。以從先大夫赴京時。帝所賜紅錦爲之。 挺身先之。賊炮雖齊發。而終不能爲害。又有良馬自至。公取騎臨戰。馳驟如飛。衆以爲神助。益恃以無恐。公選驍健者數人。衣紅衣乘白馬。一如公。分遣數處曰。若等見賊來。更出迭没。以惑亂之。公臨戰。輒先出以誘之。賊悉衆而追。行數里許。公鞭馬疾馳。倏沒於山谷間。賊058_501c方驚疑。忽又見紅衣白馬者。鼓噪而閃出於數里外高峯之上。賊瞻前忽後。目眩心奪。謂公爲飛將軍。畏不敢近。 連戰皆捷。勦殺甚多。而亦不斬馘焉。咸安郡守柳崇仁以戰功陞兵使。或言公軍所殺之賊浮江而下。爲崇仁軍所斬者居多云。後因軍情論報將士之功。而必鈞得其宲。未嘗冒錄焉。 撫士卒如家人。雖最下者。盡其情。及用法。雖親貴。不少貸焉。賞罰嚴明。血誠動人。故能得其死力。都事金穎男聽公䂓畫。事方就緒。而金巡察睟稱勤王。到龍仁奔還。公諗于衆曰。方伯築怨已稔。民怒極矣。性執而苛。掣肘必矣。與其僨事於後。曷若祛患於始。將在軍中。苟利於國。可以專之。列罪傳檄。疏聞行朝。方伯怒之。以叛逆論啓。令軍官金景訥等移書。目之以賊。公方馳援晉州。倚馬而答曰。義賊之分。天地知之。是非之判。公論在焉。惟睟之黨。不得於言。求之於秉彛之良心。可也。人皆傳誦。謂其辭嚴義正。當與紹興詔草跋。相甲乙矣。招諭使金誠一。初到居昌。見檄文。錯愕疑058_501d訝。問於朴學諭思齊曰。再祐何如人也。方伯命使。安敢乃爾。答曰。生與再祐。自少同處。乃是忠孝底人。平日讀史。至世亂時危。必慷慨憤歎。或至哽塞。每言我家世受國恩。若遇事變。當捐身以之。今日之事。雖未聞知。然想其素意。只知有國事。不爲身計。監司大失人心。出境已久。今忽還來。衆情解體。事不可爲。故必有此擧也。招諭使色變。作而言曰。朝廷處置。未可知也。吾當救此危命。遂反覆馳啓。上嘉之。命賞賫疏人。特賜溫諭。李好閔付詩曰。聞道紅衣將。逐倭如逐獐。爲言終戮力。而似郭汾陽。 公雪涕厲士。遮截水陸。兵勢益張。屢勝之後。賊望風而走。江右湖南。頼以得完。爲恢復根基焉。始授幽谷察訪刑曹正郞。以領兵不赴。厥後歷典星州,晉州。政淸如水。明似神君。匹馬布衣。去來飄然。未嘗久於其任也。體察使李元翼使公治嶽堅 三嘉大坪山城 築石門。在玄風。公之新十山城也。 058_502a議欲悉衆一戰。以决勝敗。將使楊揔兵移駐嶺南。楊元時駐南原 公言今日之計。姑爲羈縻。修山城。繕器械。畜資粮。在我之勢。可以戰守。然後待時而動。此虛虛宲實之法也。虎在於山。其威自重。龍在於淵。其神不測。虎出於野。童竪逐之。龍出於陸。獱㺚笑之。天兵之在湖路。虎在山龍在淵之勢也。若來嶺南。是虎岀於野。龍岀於陸。亡乃不可乎。天兵單弱。在湖南則可爲聲援。移駐近地則賊必窺覘。反生吞噬之心故云。 君相造命。願勿自沮。以圖全勝。以壯國勢。體相謝曰。今見復書。不覺下床屈膝。有將如此。何憂之有。丁酉秋。賊大擧入寇。公以防禦使移守火旺。昌寧縣山城。築石門未畢。賊已至。故移守於此。 人人皆喜。以爲得大將。密陽,靈山,昌寧,玄風四邑入守。 公纔入城。賊遊騎已到。一指揮之間。士氣百倍。斬犯禁違令者。以勵衆心。公弟再祉有單奴。犯門禁斬之。以己之奴與之。蘖族尹生三兄弟有違令。並斬之。 積薪於舍館。以示死守。家孥所寓處積薪曰。或有不幸。當焚之。使不汚賊手。 設內城。058_502b嚴部伍。勑諸將。一軍股慄。視公如雷電鬼神。賊旣薄城。從容談笑。但令堅守曰。渠自知兵。豈肯輕犯。經一晝夜。果不戰。渡江而西。屠黃石。安陰山城也。縣監郭䞭與前郡守趙宗道皆死之。䞭二子一女亦死之。䞭號存齋。於公爲再從叔而同里閈。知己交也。 陷南原。城大兵少。天兵盡爲所殺。楊元僅以身免。 列鎭皆潰。體相命公解兵。公飛報曰。齊城七十。卽墨獨全。唐兵百萬。安市能當。列城雖罷。獨不可爲守乎。拒之不從。體相以城危兵少難之。公亦以喪去。公事親孝。繼母許氏養於公。至是隨之入城。以病卒。 軍民慷慨失望。議者以爲是擧也。賊雖交鋒。必爲公所挫。且以孤城。晏然談笑。抗方張之賊而全四邑生靈。非公忠勇。孰能之。公遂避地蔚珍。僻處杜門。不以流離。而持服惟謹。謂草土之中。不可向人有求。與子姪共造蔽陽子。貿以取資。邑人號公廬爲防禦店云。累命起復。終不應。後以察理使按南邊。又秉節蔚州。貪官驕將。皆屛息革心焉。欲繕島058_502c山城。以作必守地。朝廷不許。公謂不得其職則去。抗章棄歸。臺官洪汝諄等以瀆慢劾之。遂被謫靈岩。未幾賜環。入琵瑟山。餐松辟糓。蕭然若一道人也。聖上嗣位。暫起從仕。君臣之義。不欲廢也。上注意委任。特拜觀察閫帥。皆不至。就鷲山滄岩。爲捿息地。扁以忘憂。有筆床藥臼。一琴一船。永謝烟火。淨掃苔磯。忘機魚釣。萬事籧篨。然於時政。有懷必達。至聞邊鄙可虞。輒愀然曰。設有警急。吾當赴難。此其憂世之念。固未嘗少弛。而亭之有扁。志不忘也。卒之日。雷雨驟作。紫氣冲霄。雖深山窮谷。莫不驚悼。如失長城焉。上深加痛惜。亟命給需致賻。遣禮官祭於其廬。
贊曰。惟公。豈不誠大丈夫哉。臨亂效忠。義也。知止勇退。智也。赤松之遊。一絲之風。洒落光明。特立宇宙。意者天以全節畀公。扶058_502d我九鼎歟。誠使處之廊廟。必且身佩安危。爲社稷臣。可謂文武全才。命世鴻儒。如有尙論者。槩見倡義之迹。只認爲將。則何足以知公哉。或言南冥先生於公。擇以贅之。又訓迪之。噫。同明相照。同氣相求。得公於先生之門。不亦宜乎。
萬曆四十五年秋。侍講院輔德知製敎裵大維。撰送史院。


 

 

 

  

忘憂先生文集卷之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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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雜著]
倡義時自明䟽 a_058_503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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伏以京師陷沒。車駕播遷。北望摧心。不勝痛哭。倭賊之來。武夫健將。莫不望風奔潰。非城池不高深也。非兵革不堅利也。只由於民心離散。而有土崩之患也。夫使民心離散者。金睟也。金睟再爲此道監司。苛政甚於猛虎。聖澤壅而不下。土崩之形。已見於無事之前。及其寇來。身先退竄。使一道之守將。一未甞交兵相戰。開城門納大賊。猶恐或後。若喜夫倭寇之滅我國者然。金睟之罪。擢髮而誅之。猶不足以厭人心。故臣移檄金睟。其辭曰。慟矣哉。使我一道潰散。使我京師陷沒。使我聖上播遷。使我一國生靈肝腦塗地者。皆汝之爲也。汝之罪惡貫盈。而汝不自知則是愚人也。汝果愚人乎。非愚人而釀成禍亂。至於此058_503b極。禿天下之兎。不足以盡記汝罪。罄天下之竹。不足以盡書汝惡。人皆以刻期築城。虐民荼毒。爲汝之罪。節制乖方。使賊攔入。爲汝之罪。是不知言者也。內地築城。雖失民心。意在於禦賊則非汝之罪也。節制顚倒。雖敗軍機。而才短於應變則亦非汝之罪也。以此罪汝。何以服汝之心乎。汝罪有一曰迎倭。何謂迎倭。汝抄一道精兵勇士五六百名。以爲帶率。東萊之陷。先走密陽。密陽之敗。又遁伽倻。賊過尙州。竄身居昌。一未甞勸起將士。使之擊倭。遂令倭如入無人之境。卒陷京師於一旬之內。自知其身無所容。托以勤王。逃踰雲峯。人可欺乎。天可誣乎。汝罪有二曰喜敗。何謂喜敗。老怯曹大坤。固不足深責。以一道元帥。旣不救金海之陷。未及見倭。先棄主鎭。退陣於鼎津。鼎津距倭所在。幾百餘里。而虛驚潰散。竄入晦山書院。遂使列鎭各邑。望風奔058_503c潰。則大坤之罪。不可不誅。而汝不梟首以警軍心。汝果不知棄城敗軍之律乎。汝罪有三曰忘恩。何謂忘恩。聞汝之祖先十世朱紱。七代銀章。祿旣厚矣。寵亦重矣。義當與國同休戚共死生。苟能奮忠節之氣。發慷慨之志。身先士卒。有死之心。則凡我嶺南二百年培養之士。孰不忘身效死。以雪國恥乎。汝乃喜君父之遷。甘京師之陷。汝果不知憂君父之難者乎。汝罪有四曰不孝。何謂不孝。聞汝父雖不幸早世。眞慷慨忠義之士也。如使汝父逢今之變。必奬率義兵。以復國讐。入地英靈。想於冥冥之中痛汝所爲。憤汝不軌曰。豈意無君忘親。出於吾兒乎。汝罪有五曰欺世。何謂欺世。汝方仕朝廷也。朝廷目之以剛果耿直。按節嶺南也。嶺南稱之以聡明才藝。以剛果耿直聡明才藝之人。誠有折衝禦侮之心。則據險守固。以遏長驅。易如轉環。而袖手旁058_503d觀。曾莫能畫一策設一謀。任倭之屠戮。則前日之剛果才藝。餌好爵也。今日之若愚若怯。欲何爲耶。汝罪有六曰無恥。何謂無恥。棄嶺南委之於倭。踰雲峯入全羅。托跡於勤王之師。師到龍仁。見倭六名。棄軍器投軍粮。失金貫子而走。云是預去金貫子而混於軍中。使賊莫之知也。偸生之計。平日所定。苟活之謀。無所不至矣。汝罪有七曰不測。何謂不測。巨濟守金俊民固守其城。倭不敢犯。招以帶率。令纔離城。倭遽入陷。淸道郡守裵應褧處傳令曰。白面書生。難以守城。任意去就。使之不守。所親守令。托稱差使貟。咸率入伽倻。如居昌縣監李哲龍等是也。守城之將。使不得守。棄城之徒。咸聚麾下。將欲何爲。今將可怕。汝罪有八曰忌成。何謂忌成。汝在道內。汝無討賊之心。故民心沮喪。莫先赴敵。幸賴殿下下哀痛之敎。遣招諭之使。感發民心。鼓動058_504a義氣。使義兵四起。醜類授首。人心稍合。形勢自張。掃淸區域。奉還鑾輿。指日可待。而汝乃忘羞忍恥。擧顔再來。出號令發節制。使義兵有渙散之心。使招諭敗垂成之功。則前惡旣往。今罪罔赦。嗚呼。北天遼邈。途路阻絶。王法不行。汝首猶全。假氣遊魂。雖視息於天壤間。汝實無頭之尸也。汝若知臣子之分。則使汝軍官斬汝之首。以謝天下後世。如其不然。我將斬汝頭。以洩神人之憤也。汝其知哉云云。人或以言道主之過爲咎。當平居無事之日。則固不當非其道主。如此急難危迫之際。若皆含默。則是徒知有道主。不知有殿下也。如使慶尙一道之人。皆爲金睟之臣也則可。一道之人。莫非殿下之臣。安忍容金睟之罪。而負殿下於垂亡之時乎。宋之高宗。不聽胡銓之䟽。故爲天下後世之恨。如蒙殿下採用蒭蕘之言。則中興之功。可立而058_504b成也。宗社幸甚。臣民幸甚。臣誠駑鈍。屛迹江湖。今遇賊變。宗社危亡。自念祖先三世仕朝。神謀秘計。雖不及於子房。而復讐之心。臣誠有之。故出萬死之計。四月二十二日。募起義兵。以防倭寇。幸賴殿下威靈。以至于今日。誓士戮力。死而後已。區區寸忱。萬萬無他。伏願殿下。恕臣狂僭而察其愚衷焉。臣方在枕戈之中。心神擾攘。辭不達意。多失格例。伏地待罪。尤增惶悚。不勝瞻天戀闕之至。謹百拜昧死以聞。


 

 

 

忘憂先生文集卷之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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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雜著]
上招諭使書 a_058_504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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伏覩下帖。不勝感激之至。荒拙之辭。不能盡其心情。不審下覽否。今日乘馬將發。忽逢監司關持來驛人。問閤下所住。則與監司同會一處相議云。故未果焉。所以不赴者有說焉。請爲閤下陳之。所謂都廵察者。乃前日築城金睟乎。金睟乃我國之罪人058_504c也。人人得以誅之。閤下何不聲罪上聞。梟首境上。以起義兵。而反與之同處乎。睟再爲監司。使民離散者。旣往不說。賊變之後。可誅之罪尤多。倭到東萊。退縮密陽。節制乖方。使之陷城。賊至密陽。走渡草溪。矇矓狀啓。欺罔君父。謂鳥嶺可守。棄而委之。使嶺南之民土崩瓦解。竟爲賊窟。賊過鳥嶺。君父消息。不相聞。而偸生計急。逾遁雲峰。唐之國忠。宋之秦檜。較之金睟。厥罪猶輕。賊在數百里之外。而列陣守將。皆望風先潰。使二百年宗社。陷於賊手者。皆睟之爲也。則睟乃一賊臣也。反加都廵察之號於其身。望其收復壃域。不亦難乎。今監司關所謂勤王上京云者。所以欺民也。欺閤下也。欺天下後世也。忠如岳飛。勇如宗澤。然後可以起勤王之師也。坐視君父之亡如金睟者。其成莫大之功乎。閤下信其言而與之相議。陷於術中而不058_504d能見其肺肝。竊不取也。且兵家勝敗。未可期也。齊城七十皆降。而田單以莒卽墨復齊之墟。唐之兩京已陷。而郭子儀以孤軍續唐之祀。則今之嶺南一帶。雖陷於賊。左右列邑。尙多完全。堂堂國家。勇士如雲。爲監司者誠能一日奮忠烈之心。發慷慨之言。感動民心。則以義應之者亦必多矣。君父之讐。可不日而復也。曾莫能廵一邑畫一策。倡起義兵。逃匿他境。猶恐不及。此禽獸夷狄之所不忍爲也。僕必待閤下之上聞而斬金睟頭。竿之蒿街。然後倡率勇壯。以赴閤下之所也。人言山中隱匿之卒。聞閤下以書招我。皆于于焉下來。中途又聞監司以金忠敏爲此邑假將。旋卽逃匿云。人心聚散此亦可見。僕以爲金忠敏亦可斬也。再祐一愚氓也。目覩國家危亡廹在朝夕。收募同志。家業已破散矣。妻子已奔離矣。只欲一死。未得其所。北望摧058_505a心。殞涕如雨。伏料閤下忠義出天。終必死節。閤下若能知僕。則士爲知己者死。其將有愧於田橫之五百乎。

招諭使開諭文[金鶴峯誠一]
招諭使爲開諭事。假將自變生之初。傾財破産。首起義兵。奮不顧身。一以爲國討賊爲心。雖古烈士。何以加此。中間假將有草溪取穀之事。一道之人。皆以叛賊疑之。兵使至於下令追捕。假將之危亦急矣。當職到界之初。見廵使及都事。則獨不信喧播之言。以保假將之無他。故當職卽下帖招之。假將不以老拙爲無似。來見丹城。一揖之間。已知忘身殉國之志。曷勝歎尙。厥後提孤軍橫行洛江上。先登擊賊。前後斬馘甚多。賊不敢長驅闌入。一帶諸城。至今保存者。莫非假將之功也。義聲四馳。聞者莫不聳動。鄕兵爭起。遠近響應。滅賊之功。指日可期。假將雄風義058_505b烈。非但振輝當世。將垂諸竹帛而無愧。前日致疑於假將者。無不渙然心服。而忽聞假將移檄廵察營門。敢肆悖逆之語。方伯是何等官。假將是何等人。而敢欲爲此等事耶。方伯雖實有罪。自有朝廷處置。非道民所當下手。况方伯在道所爲。無非爲國陰雨之備而已。豈厲民以自利者耶。海賊猖獗。擧國奔潰。亦豈一廵察節制之失耶。假將執此爲辭。以成其罪。欲爲犯上之計。悖逆極矣。豈料假將生忠孝之門。擧討賊之義。大功將成。而忽逞非倫不軌之謀。以陷於殞身滅族之地耶。此必假將目擊鑾輿之播越。日夜憂憤。以致心疾。作此狂易之擧。不然以假將之義。迷不知善惡是非之辨。至此甚耶。廵察再臨之初。聞假將擧義討賊。不勝歎服。至於貽書褒美。豈有一毫疑沮之意。廵使之志。則欲與假將協心討賊。而假將反欲倒戈相攻。亦獨何058_505c心。假將其不讀史乎。唐之叛卒。簒逐主帥。以致禍敗。凡幾人耶覆車之轍。假將其欲蹈之乎。迷復之戒。大易所訓。轉禍爲福。智士所取。假將若能飜然覺悟。去逆效順。則廵使必不介意。待假將如舊。終不害爲忠勇之士。如或執迷不悟。必行己志。則不惟廵察不容。一道義戈。將回指於假將。朝廷亦必以叛民處之。赤族之禍。不日將至。雖欲悔之。得乎。從我則順而多福。不從我則逆而取禍。其機間不容髮。惟假將思之。


 

 

 

忘憂先生文集卷之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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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雜著]
答招諭使書 a_058_505c
[UCI] G001+KR03-KC.121115.D0.kc_mm_a246_av001_01_003:V1_0.S3.INULL.M01_XML   UCI복사   URL복사


今見開諭之帖。不勝感激殞淚之至。懇懇之敎。諄諄之諭。無非欲使再祐免將來之禍。成莫大之功。豈但閤下仁愛之至。視再祐猶子而然耶。抑亦爲國之心。發於至誠。使人人忘身於討賊也。雖然。下諭之辭。抑揚大過。使見之者可喜可惧。再祐則不爲058_505d之喜。亦不爲之懼。嗚呼。閤下之爲廵使謀。可謂忠矣。只恐廵使之爲閤下謀不如也。廵使亦人也。豈不自知其罪。廵使之言。閤下可使之改也。廵使之事。閤下可使之改也。未知廵使之心。閤下其能改之乎。雖閤下之至誠厚德。終莫能改廵使之心。則再祐恐莫須有之言。必發於廵使之口也。閤下憂再祐之必陷於不測之禍。再祐恐閤下之亦終不免也。以閤下之愛我。猶以非倫不軌之謀疑之。况他人乎。况廵使乎。况與再祐爭功者乎。再祐知殞身滅族之禍必至。而猶且不已者。出天之性。不可卒改。憤欝之心。未能遽回也。然而閤下君父之所遣。則閤下之敎。卽王言也。何敢執一己之見。而違閤下之敎乎。晉州告急。領兵到介金院。軍務紛急。萬不一一。惟閤下亮察之。

招諭使狀啓[鶴峯]
058_506a宜寧郭再祐起兵討賊事。曾已累次啓達。今者意外之變。出於計慮之所不到。罔知所處之宜。極爲痛慮。再祐乃故通政郭越之子。南冥曹植之孫壻。性質朴無文。居喪致哀。鄕曲以孝行稱之。自變生之初。聞兵水使相繼遁走。賊之將犯密陽也。監司金睟謂節制之帥不當在圍城中。乃退還靈山。旋向草溪。再祐奮然曰。兵使遁走而不爲行刑。今又賊出左道而退走草溪。監司可斬也。乃拔劍欲邀諸路。鄕人力禁而止。厥後右兵使曹大坤及防禦助防守令等。一皆望風奔潰。涉旬之間。賊犯京闕。再祐扼腕慷慨曰。此輩護倭入京。貽禍君父。皆可斬也。稠人廣坐之中。常常大言。一朝乃散家財以募士。其妾諫曰。奈何爲此浪死計。再祐大怒。拔劍欲斬之。妻子衣服。亦給戰士之妻。家業因此蕩盡。不免飢餓。乃托其妻子於其妹夫許彦深家。率所058_506b募壯士。聲言擊賊。鄕人聞之。皆以爲發狂。其時宜寧,草溪兩邑。皆戰敗空官。而宜寧官庫則已經焚蕩。再祐兵無見粮。乃發草溪及新反縣以餉軍。陜川郡守田見龍以賊論報。兵使下令捕之。應募者聞之。皆有散去之意。臣到界之日。卽貽書招之。軍乃再振。自是一向擊賊。不問賊之衆寡。必先登馳突。故所率戰士。勇氣百倍。無不一當百。戰時着紅綃帖裡。具堂上笠飾。自號紅衣天降將軍。馳馬掠陣。往來倐忽。賊雖齊放鐵丸。亦不能中。或於馬上。擊鼓徐行。以爲行軍節度。或令人吹笛鳴笳。或山藪中吹角鼓噪。或處處設伏。寂若無人。賊至輒射殺之。或逐倭船。臨岸追射。無日不戰。戰必獲勝。斬馘之多。最於諸將。射殪者不知其數。賊亦謂之紅衣將軍。不敢登岸作賊。宜寧,三嘉兩邑人民。皆安業力農。五穀之盛。無異平日。道內餘城。至今保存者。再祐058_506c之功居多矣。忽聞三道之師潰於水原。有似發狂之人。危言妄語。無數發說。廵察雖貽書褒美。啓聞上功。亦不回意。人或以取禍戒之。則必按劍而怒。今忽再度移檄于廵察營門。歷數其罪。聲言欲討。且通文各邑義兵將。諭以討罪之意。臣聞之驚愕。不覺矍然失席。廵察移關於臣。令宜寧官捉囚。臣窃念再祐若宲有逆心。則方握精兵。非一力士之所捕。若無逆心則一書足以開悟。卽下帖于再祐。譬曉多方。金沔亦貽書戒之。再祐飜然聽順。聞晉州危急。乃提兵馳援。初三日已爲發去矣。向前郭再祐以一介道民。欲犯道主。至於聲罪移檄。雖自謂爲國憤憤。以至於此。跡涉亂民。卽爲討除爲當。而再祐當擧國陷沒之餘。能以孤軍奮勇擊賊。道內殘民。倚爲干城。今以亂言卽加誅戮。則不惟保存餘城。禦賊無計。軍民不知其罪。一時潰散丁寧。故臣058_506d欲爲彌縫鎭定之計。再三戒勑。已爲從順。而得罪於都廵察使。恐難相容。惹起他變。臣不勝悶慮之至。臣聞乙卯年全羅監司金㴻自靈岩郡。出走他邑。前府使尹箕時以儒生。在圍城中。欲拔劍斬之。㴻不爲怒。談笑處之。論者至今稱箕之勇而多㴻之能容。今再祐之事。雖實狂妄。心宲無他。監司若能如㴻之所處。則便當帖然無事。臣貽書金睟。使之善處。則無可虞之變。而但金睟以叛逆已爲啓聞。又以他人指嗾爲言。果以此加罪。則非但渠不服罪。一道人心。恐難收拾。極爲痛迫。渠之忠義憤發之狀。奮勇擊賊之功。著於一道。兒童走卒。皆稱郭將軍。且聞其善於用兵。有將帥之才。若少寬狂妄之誅。則於臣妄料。終必有效。臣不幸受命之後。再逢此變。臣四月中。取路湖南雲峰縣。湖南之人。以廵察使李洸緩於勤王欲討之。或有密言於臣者。058_507a臣以大義折之。卽議于睟。欲通于李洸以備之。睟曰。彼以勤王之緩欲討之。可謂義士也。若誅此人則一道人心益激。李洸處不可通也。臣從其言而止。今玆再祐之事正類於彼。睟苟以處湖南之義處再祐。則事無難處者。臣及金沔戒勑再祐之書及渠答書。幷爲謄書送上。自朝廷處置云云。

備邊司關
備邊司爲褒忠奬義解棼討賊事。前後到付本道都廵察使及招諭使狀啓相考。則正郞當一道殘破之餘。肉食無謀。節鎭望風。而挺身草萊。糾合義旅。家散千金。身持一劍。言及惜財。則愛妾不饒。傳檄討賊。則烈士響應。手下死士。已集累百。橫行洛江。斬馘無數。出奇制勝。種種奇特。保存餘城。倚以爲重。實是正郞之力。而口不言功。躬冒矢石。自上嘉悅。朝廷聳聽。已授正058_507b郞爲幽谷道察訪。賞不及功。故付送史館。將大書褒美之矣。正郞以草野不羈之人。倔强太甚。不經世變。恐無以萬全濟事。今見啓下上䟽內辭緣。極爲駭愕。廵察使雖誠有罪。其處置自有朝廷。若使王人爲土民所圖。則國史書之謂將如何。金誠一開諭文備陳逆順。必已飜然覺悟。不至執迷。自上命進爲刑曹正郞。正郞家傳忠孝。身奮果毅。毋陷不測。懋樹大功。忠莫大於討賊。惡莫重於犯上。以莫大之忠。犯莫重之惡。則正郞必知去就於其間。賊勢方張。本道爲最。國家之勢。廹在朝夕。凡有血氣者。滅賊爲上。當此人心潰散之時。雖因義氣所發。見事未明。一或蹉跌。終得惡名。不但垂成大功。一朝墜盡。平生忠義。反歸虛地。若此機關。不可不慮。幷爲相考施行云云。壬辰八月二十日

 

 

忘憂先生文集卷之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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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雜著]
上招諭使書 a_058_507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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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8_507c伏覩書目回送。不勝惶悚戰慄之至。累次傳令。一未能顚倒從之。至於親書之令。且不得卽赴。罪固難赦。閤下之責。亦其宜矣。然非閤下之仁恕。孰能達其情而違軍律乎。非假將之自恃見知。亦安敢失軍期而坐待更令乎。以其事迹而論之。則雖萬死無憾。以其情宲而言之。則亦有所可寬。而至以跋扈。嚴加責罰。目不忍見。閤下初疑之以不軌之謀。今又加之以跋扈之名。閤下其眞以爲有不軌之謀乎。其眞以爲有跋扈之心乎。若眞以爲有焉。則何不斬再祐之首。徇示一道。以警有不軌之謀。跋扈之心者乎。若眞以爲跋扈不軌而不斬我首。則閤下亦將不免不忠之名於天下後世矣。廵使之以叛逆啓聞。再祐不之懼。幕下士以逆賊移檄。再祐不之屑。而閤下加之跋扈之名。不勝憤慨欝激之至。再祐本以駑鈍愚劣。自知與世相違。隱迹江湖。058_507d息交絶遊。雖於賢者之門。一未甞往來。眞我國一無用之民也。今遇賊變。深憤擧國之人。無死於忠孝。而偸生苟活之謀。無所不至。故敢出萬死之計。初以四五之卒擊賊。中以數十之軍逐賊。今以百餘之兵斬賊首。雖謂有爲國之心。復讐之志。吾誠無愧。而閤下反加跋扈之名。尤用憤歎。嗚呼。道濟之誅。非忠不至也。武穆之死。非節不高也。忠臣烈士之不得其死。亦古矣。再祐亦自知不測之禍必至。豈料閤下亦以再祐爲跋扈乎。誠欲釋去軍旅。遠投名山。休粮絶粒。控鶴御霞。而假將之募兵起軍。爲君父也。非爲閤下也。討賊復讐。爲國家也。非爲閤下也。則豈以閤下之一言。沮吾之志挫吾之氣乎。不顧利害禍福。死而後已。乃再祐之初心也。惟閤下亮察焉。

附金將軍書[金德齡]
058_508a忠勇將軍金德齡。謹再拜郭將軍。將軍壯猷。聞之已熟。將軍氣槩。仰之亦久。身作長城。控搤喉吭。使江淮以西。終始保障。當今之致力王室者。誰出此右。重恢盛業。想必第一於凌烟也。德齡以耕鑿餘生。半世蓬蒿。一自變生。效命無難。老母在堂。不敢自由。徒憾慨於胷中。今則旣喪所恃。區區至願。爲國許死耳。適潭陽府伯誤聽虛名。報本道廵察。勸起於衰絰中。因聞于朝。春宮召見駐次。賜印給馬。自大朝又遣近侍。加號撫軍。董獎逾分。寵榮猥隆。無功被遇。誰與我比。自念無狀。叨此重寄。雖蒙三錫之眷。恐負輿尸之誚。夙夜憂惧。身在春氷。將軍挺不群之才智。抱經世之韜略。自亂初至于今。備諳賊情。攻守乘便。前後交鋒。有勝而無敗。德齡之倚以濟事者。當今非將軍而誰歟。古人有言曰。附驥尾則涉千里。攀鴻翮則翔四海。此正謂鄙人058_508b之於將軍也。所祈不遐庸賤。終始協力。以雪無前之恥。則一訊之執。一醜之獲。是皆將軍之力。德齡雖萬死無餘憾。不知高明以爲如何。師期不遠。奉面有時。書不盡意。不宣。甲午正月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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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雜著]
答金將軍書 a_058_508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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兼助防將郭再祐。謹再拜復書忠勇將軍。嗚呼。時運不幸。國事至此。痛哉何言。三載天兵。勢難長留。一邦兵食。亦已告竭。當此之時。苟非天心悔禍。默佑邦家。則其誰能收合而吹噓乎。將軍以戡定之才。奮爲國之忠。擧事於板蕩之餘。而戴髮含齒者。莫不聞風抃躍。以爲賊可掃淸。國可中興。則天心之悔禍而默佑者。亶其然乎。再祐自聞將軍之威聲。喜不能寐。翹企有日。曾是不意。遠承辱書。奉讀再三。感惧交極。再祐駑鈍人也。自分無用。漁釣江湖。聊以優游於太平。豈意滔天之禍。親見於今日058_508c乎。募起鄕兵於亂初者。只岀於憤時之愚計。非有籌畫之智。弓馬之技。可以折衝而禦侮也。遇零賊一戰。有何損益於彼敵。斬零賊若干。有何利害於我國。而况上年晉城之陷。鄕邑亦不得保全。則敗績而自愧於心者。曷有其極。今者將軍有神出鬼沒之智。旋乾轉坤之力。三箭天山。不足定也。一擧興邦。分內事也。而不鄙夷庸人。至於專人致盛示。此非獨傳之於將軍者過其情也。亦是將軍好問之誠。出於尋常。不敢當不敢當。再祐旣乏智慮可以仰裨於妙計之筌蹄。又無技勇可以追隨於電擊之後塵。則其於厚望。安敢有補於萬一乎。所祝愛惜時日。命促鵬程。一掃兇醜。再造王室。而使吾東君民。更躋於壽域。則如再祐無用之身。亦得以退老於昔日之所釣遊。而一生之志願畢矣。疾病沉綿。右臂不仁者今已一月。不能趍造轅門。坐望㫌旗。058_508d死罪死罪。甲午正月日

附金將軍書[金德齡]
草野新起之將。旣乏智慮。又無驗歷。受國重寄。徒費危惧。前上一書。仰干高明者。出於因不失親之義。豈意將軍委遣褊裨。遠賜辱復。至此勤懇耶。伸紙未了。感愧交幷。德齡資械踈迂。部伍未定。尙稽踰嶺。日夜憂悶。近日待其畢治。直趍宜寧陣所。惟指揮之是從。伏乞左右留意焉。春氣向暖。賊之窃發。甚可憂矣。更願愼攝千金。以副公私之望。伏惟亮採。甲午二月日

晉牧時觀察使勸留書[徐渻]
呈告近已數月。尙未聞勿藥之喜。心之憂矣。無一刻忘于中者。宲非爲私也。卽日亢旱之餘。甘霔時霈。穀苗盛茂。農夫喜悅。想惟憂民之憂。此時必减。更坐黃紬。令人手額。傾好音。若渴思058_509a梅。區區賤望。非紙上所盡。而比聞往來者或傳令公以賊奴有撤還之期。國家做重興之業。將歸隱綿山。欲從赤松。果若斯言。令人冷笑。果是令公病心也明矣。目今事勢。欲言則長。古人所謂慕容恪尙在。憂方大矣者。竊恐不幸而近之。且中詮聞。舊業荒落。寸土不闢。今日辭還。明日必將大夫人糊口之資。轉乞親故。丐而或不足。則是令公欲得讓功美名而餓其親。以彰國家薄待勳臣之過。此惟令公必爾爲不也。適臨廵向上道。忙迫之中。敢此云云。其或留神則公私幸甚。或若賊兵渡海。片颿無影。四郊壞壘。農桑樂業。則角巾東歸。以遂浩然之志。庸何不可。渻亦隨杖屨逍遙是計。分我松葉湯如何。呵呵。乙未五月廿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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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雜著]
辭起復䟽[丁酉九月] a_058_509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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起復有旨
慶尙一道諸將。皆還湖西。中道防守之事。只以卿爲重。今聞遭058_509b喪。極爲驚慮。卿其勉從。毋避金革之典。起復察任。以副朝廷保障之責事有旨。丁酉九月六日
伏以臣罪逆深重。禍延慈母。賊變孔棘。未經一旬。而權厝於草莽之中。悲痛之情。極天罔涯。蒼黃奔避。奠祭未遑。心死形存。號泣于天。忽奉起復之旨。聖敎繾綣。臣不勝感激嗚咽之至。夫殿下付臣以中道防禦使之任者。豈非以臣討賊於壬辰之初。或有可用之才。故特下起復之命歟。臣誠有才。出而從軍。有益於國家。則當以一死圖報天恩。而臣實無用之人也。身體肥鈍。無馳突擊賊之勇。心慮短淺。無臨機制變之智。雖欲冒哀匿服。竭力於防守之事。萬無絲毫之益。而徒歸於傷倫敗俗而已。義固不可以起也。且起復。始於何代。宋之理宗。起復058_509c史嵩之。太學生諫曰。孝不行於大臣。是率天下而爲無父之國也。其後不復有禮法。賈似道,陳宜中之輩。或起復爲平章。或起復爲宰相。謝枋得有言曰。三綱四維。一朝斷絶。此生靈所以爲魚爲肉。宋之所以暴亡不可救也。起復之無益。自古然矣。我國自壬辰變亂以後。自朝廷起復者亦多矣。而竭力盡心。忠於殿下者。未聞有一人。而忘恩背德。偸生苟活者。滔滔皆是。則起復之無益。在今甚矣。非徒無益。彛倫斁敗。人將自陷於夷狄禽獸而不自知也。則其孰能爲殿下伏節死義於後日乎。良可痛心。目今各處山城。皆已罷棄軍粮器械。保守無計。賊若大至。委而去之。事至於此。雖勇如關,張。智如良,平。亦無如之何矣。况如臣之駑鈍者乎。雖欲爲殿下盡忠。不過率疲卒埋伏。勦捕零賊而已。大賊至則遁避之不暇。如此則莫如擇武夫健058_509d將而使之。何必起復微臣爲哉。雖然。臣願獻一言。以報聖恩之萬一。如以臣言爲可。則不必起臣於草土。然後爲用臣也。臣聞之國必自伐而後人伐之。秀吉雖甚强暴。在我無可乘之隙。則彼安得窮兇極惡至於此極哉。臣恐殿下或有自伐之端。而秀吉乘之也。伏願殿下痛改前愆。以收拾人心焉。人心旣固。則天意可回。而中興之業。可指日而待也。草土餘喘。心神迷亂。言甚愚妄。伏願殿下留神恕察焉。丁酉九月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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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雜著]
辭起復䟽[丁酉十二月] a_058_509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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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起復有旨]
今見監司李用淳狀啓。知卿陳䟽欲守喪制。其於私情。雖曰至矣。而當此大兵南下之時。如卿者豈可守志退伏。不念國事哉。卿其依前公事。起復從軍。協勢討賊事有旨。丁酉十二月日
伏以臣於八月喪母。九月奉起復之旨。卽爲陳情上䟽。而䟽058_510a未得達。聖旨又降。臣不勝戰懼悶迫之至。臣雖無狀。豈憚從軍。只以臣之起復。無益於國事。而三年之喪。有不得顧焉。則不孝莫大。未有不孝而能忠於國者。非徒臣之不可以起復。自朝廷亦何必起復爲也。臣請言起復之無益。頃者倭寇再發。舟師陷敗。山城亦且不守。處處潰散。無異壬辰。以强弱勝敗之勢觀之。終無以折衝而禦侮。蓋亦危矣。幸賴聖天子震怒。大發天下之兵。舟師蔽海。陸兵盈野。有太山壓卵之勢。彼蜂屯蟻聚之賊。有不足掃也。國家之存亡。社稷之安危。人民之死生。皆係於天兵。而我國之將相。宲不能爲有無於其間。况如臣之無勇力無智慮無弓馬射御之才者。有何絲毫之益乎。無一毫之益而廢三年之喪。是臣之所不忍也。伏念備邊司當此國家危急之時。無所建明。但於諸將及守令之犯律者。不058_510b察其罪之輕重。而必曰立功。此軍政之所以敗。而生靈盡爲魚肉也。諸將及守令之遭喪者。不問其人之賢否。而必曰起復。此彛倫之所以斁。而人類化爲禽獸也。生靈盡爲魚肉則誰與禦敵。人類化爲禽獸則誰與興理。臣於昔日。未甞不痛恨於此。豈意今日起復之命。又加於微臣乎。殿下誠欲用臣。用之於三年之後。猶未晩也。臣若不死於三年之內。事殿下之日亦多也。伏願殿下察臣私情之懇。俾遂服喪之願。則豈但微臣之幸。殿下孝理之化。亦自行於冥冥之中。而移孝爲忠者。必有其人也。臣再奉聖旨。愚衷自激。願獻一言。以報天恩。臣雖身在草土。心未甞忘於國事。日夜思所以中興。而中興之大本。只在於殿下之一心。伏願殿下使聖心必如仁宗大王之心焉。臣聞仁宗大王卽位未久。德化流行。市不相058_510c欺。道別男女。此非有奇政異法使之然也。不過以心感心而已。殿下誠能念祖宗二百年之社稷。悶祖宗二百年之赤子。痛悔舊愆。大改前心。心仁宗大王之心。則民心自悅。天必悔禍。國之中興。可計日而待也。嗚呼。天兵誠可恃也。秀吉誠可畏也。然國之興亡。不在於天兵。亦不在於秀吉。而只在於殿下。殿下苟能惕然悔悟。早夜以思心如仁宗大王。政如仁宗大王。發於言見於事。皆如仁宗大王。則天命維新。國自興隆。何畏於秀吉。不然。臣恐天兵有不足恃也。言雖愚妄。發於衷誠。如蒙採納。是宲用臣也。不用臣言而起復臣身。非用臣也。伏惟殿下垂察焉。丁酉十二月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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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雜著]
辭起復䟽[己亥三月] a_058_510d
[UCI] G001+KR03-KC.121115.D0.kc_mm_a246_av001_01_008:V1_0.S3.INULL.M01_XML   UCI복사   URL복사



[起復有旨]
防禦使提兵備賊。機關秘甚。故今依舊例諭書密符。差官權知訓鍊院參軍朴致綱賫送。卿其領受事有旨。己亥二月日
伏以臣服喪未終。且以避亂江原。未及永窆於先墓之側。今反故土。哀痛倍極。忽奉聖旨。所寄甚重。諭書密符。所命非常。如蚊負山。驚惧無地。且殿下不以賊退爲喜。而以防禦正緊爲憂。臣雖駑鈍。豈不欲竭股肱之力。盡心膓之慮。以補殿下善後之理。而只以三年之喪。人子之當盡。故前於起復之命敢爲陳䟽。願終喪制。况今倭賊渡海。天兵留戍。國無門庭之寇。邊寢朝夕之虞。若於此時。苟不顧天下之通喪。而含哀匿服。靦然冒就於所不堪之任。則非徒傷倫敗俗。自陷於禽獸夷狄。而大有所損於殿下孝理之化矣。况臣服闋之日。只隔數月。臣雖無狀。終喪之願。宲切於心。伏願殿下垂暇於數月之內。俾遂私情之懇焉。伏念臣不但身有大故。宲亦才無可用。而058_511a所見闊踈。與朝廷不同。就令從軍。萬無絲毫之益於國家。而徒取不孝之名於天下後世矣。朝廷以屯田鍊兵。爲防守之急務。臣愚以爲有屯田鍊兵之名。而無屯田鍊兵之宲。何以言之。壬辰年前。大築邊城。妨農害民。怨讟騰天。及其賊至也。棄而不守。獨晉州之城。初守而後陷。自是之後。軍民皆以平地之城。爲必陷必死之地。山城之設。盖岀於不得已也。初不築不守之城。而擇險固可守之地。以死守之。寇賊雖强。亦無如之何矣。惟其不量兵力而處處多設。及其賊發也。委而去之。前功盡棄。自今以後。朝廷雖命守城而民不信。邊將雖欲守城而軍不從。城守旣廢則大賊之來。將何以禦之哉。當頭迎遏。兵家所難。而彼衆我寡。彼强我弱。則其勢不得不至於退避也亦明矣。夫如是則今日之屯田積穀。不過爲彼賊之所資。今日之聚兵鍊058_511b習。不過爲貪將之所利。與其勞民動衆而無益於賊至之日。無寧以安民恤軍爲務乎。邊邑之民。或死於鋒刃。或死於飢寒。而餘存者十無二三。今聞賊退。匍匐顚沛而必返於故土者。首丘之情。出於自然。歸無所食。有不計焉。其生其死。固不可知也。限數三年任其耕稼而勿爲侵撓。庶乎有生生之計矣。臣之意以爲邊城旣不能守。則雖得豪健之將。授以防守之任。終必有臨敵退遁之患。况如臣之肥鈍無勇。年齡已衰者乎。臣决知其不得不遁避於賊至之時。而乃敢起復於母喪未終之日。不亦難乎。夫將之任難。臣之無才。固不足堪。而臨難而以遁避爲事。臣誠不願也。伏願殿下速遆臣職。擇人而授之。臣伏見密符。機關至大。且所以防意外之奸謀。則誠不可以一日置之於草土之臣。伏願殿下亟命遆差。還收密符焉。己亥三月日


 

 

 

忘憂先生文集卷之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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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雜著]
請繕島山城啓草 a_058_511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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臣於去十月十九日。到任本營。入防軍數相考。則出身軍功陸軍雜色幷四千一百九名。九百七十六名則屬於舟師。出身軍功幷一千三百七十餘名則廵察使關據自八月除防上番。步兵四百三十名亦爲除防作米。雜色軍八百二十餘名則時方抄出將屬舟師。只以元防軍及上番留防軍幷四百八十九名分四番相替。一番立防之數。或百餘名或九十餘名。本營以最先受兵之地。軍少至此。極爲可慮。前日祗受有旨書狀內。倭奴再寇之計。形象已著。愚夫愚婦。亦知其必來爲患。今日之憂。甚於往日。陸軍整齊之事。專在卿及鎭管兵馬。軍器十分整備待變事。臣伏念倭奴再寇。朝夕可虞。待變之事。日急一日。而軍兵孤寡。至於此極。防禦之事。極爲悶慮。臣之愚意。以爲禦賊莫058_511d如守城。邊城不守則賊至必潰。軍潰將走。將何以禦之乎。是以兵法有曰。先爲不可勝。以待敵之可勝。不可勝。守也。尉繚子亦曰。亡在於無所守。城之不可不守。亦明矣。而壬辰年前。大築邊城。竟不能守。變亂之後。又築山城。且不得守。晉州見陷。黃石亦敗。自是以後。軍民皆以城爲死地。論者亦以城爲不可守。謂城難守則可。謂城不可守。不亦誤乎。臣本庸愚。猥蒙重寄。如報天恩。萬死無恨。安敢懷必生之計。以守城爲危乎。臣觀島山城。淸賊役累萬之衆。築必守之城。城之堅固。固無比也。且因斷山築城極巧。眞平地之一山城也。外城周回只六百餘把。精兵二千。亦足可守。而內地之卒。不習戰鬪。道路且遠。邊警若急。聚合誠難。臨變急遽之際。驅無粮之卒。入守空城。其勢必敗。慶,蔚之軍。八年討賊。慣於力戰。精兵不爲不多。若勿論公私賤。本土流058_512a民。盡數括出。則慶,蔚兩府。可得守城軍二千餘名。以此軍永屬於守城。且於內地各邑。括出諸色雜軍六千餘名。爲守城軍奉足。一人一年各出米二十餘斗。則可以支二千名一年所食。如此則內地給粮之人。必爲樂趍。而慶,蔚立防之軍。亦無怨矣。且守城之軍。雖給一年之粮。乘其無事。相替歸農。以養其父母妻子。則親上死長之心。油然自生於仰事俯育之中。而蒼黃顚沛之際。無棄甲曳兵之患矣。臣以此計。議於兼廵察使韓俊謙。則以爲內地之軍。盡屬於舟師格軍。猶有不足之患。給保軍六千餘名括出末由云。臣之愚計。試之無路。極爲悶慮。朝廷方以舟師爲重。一國之力。盡用於舟師。彼賊之來。必欲與舟師戰而後下陸則專力於舟師之計得矣。彼賊若畏舟師。一朝乘風。卒然下陸。則臣恐舟師之不得下手。亦如前日也。然後邊境防禦。058_512b乃責於陸兵之將。則妄料禦賊計無所出。敢此啓稟。自朝廷商量處置云云。己亥十一月日


 

 

忘憂先生文集卷之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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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雜著]
辭職狀啓 a_058_512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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云云臣本庸愚。冒忝閫帥之任。此宲布衣之極。不惜一死。欲守邊城。而城守之計。大拂軍情。孑遺之民。盡屬於舟師。陸兵之將。勢將束手。無事之時。稱爲兵使。賊至之日。遁避不暇。臣宲恥之。臣年齡已暮。毛髮皆白。身且有病。氣力衰憊。脫有事變。無可奈何。臣身死生利害。有不足恤。將至於辱國。臣宲悶慮。速遆臣職。擇遣武勇之將。以備緩急云云。

庚子二月日有旨
觀卿狀啓。陸兵果爲孤弱。忠淸,江原兩道量數添防。已有公事。此外措置等事。宲在於閫帥籌畫之如何耳。且目今春汛已迫。058_512c待變方急。不可以一時微恙。輕遞主將。卿其調理察職。更加盡心事有旨

 

 

 

忘憂先生文集卷之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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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雜著]
兵使時棄官䟽 a_058_512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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伏以臣之至愚。觀今之國勢。岌岌乎殆哉。宗廟社稷。散爲飛烟。蕩爲寒灰。而人民死亡。十無二三。於是時也。而建中興之業。盖亦難矣。然賊酋秀吉罪惡貫盈。一朝身斃。是天佑東方。欲殿下之中興也。皇朝動天下之兵。驅逐倭奴。倭奴渡海之後。尙且屯兵戍邊。是聖天子軫念東方。欲殿下之中興也。殿下誠宜悔悟奮發。親賢遠奸。以啚中興。群臣亦當同心戮力。共濟國事。以贊中興。而臣聞朝廷朋黨。有東西南北。若果爾。未知殿下以某黨爲君子。以某黨爲小人耶。以某黨爲君子多而小人少。以某黨爲小人多而君子少耶。親而任之不貳者。在058_512d於某賢。遠而去之不疑者。在於某奸耶。殿下豈不欲親賢。有未能克知其賢耶。殿下豈不欲遠奸。有未能灼見其奸耶。大小群臣。分明立黨。入者進之。出者斥之。各私黨與。互爲是非。日以詆訐攻擊爲務。而國勢之危急。生靈之利害。社稷之存亡。忽焉莫念於其心。將使殿下之國。必至於危亡而後乃已。嗚呼。可爲痛哭流涕長太息也。夫可爲痛哭流涕長太息者。臣請陳其一二。而臣之可以退去者。亦不敢不達焉。臣聞論者有云城池不足恃也。城池之守。宜於古賊而不宜於今賊。逆民之心。欲爲城守。非計也。莫如相勢量力。且戰且退。以勦殺寇賊。是固懲於已然。而啚目前之利也。雖然。若使城池無益於禦賊。孟子何以曰鑿斯池也。築斯城也。韓愈何以曰相奪也。爲之城郭甲兵以守之。安市能守。高麗不亡。卽墨獨全。齊國復興。城池之守。058_513a烏可已也。今方專力於舟師。而廢棄城守。且謂廟堂之成筭。不容更議。是近於子思所謂卿大夫岀言自以爲是。而士庶人莫敢矯其非者也。夫舟師之得利於彼賊者。一舟之外。皆是死地也。而軍卒莫能遁散也。莫能遁散而皆致死力。故往往得捷焉。舟師固不可廢也。然專力於舟師。而曰遏賊使不得下陸。臣不信也。下陸之後。其將何以哉。處處潰散。將無異於壬辰。臣竊憂之。憂之而無益於國。此臣之可以退去一也。臣聞論者有云在昔宋室之亡。和議誤之也。其時主張和議者如秦檜,王倫之輩。罪通于天。千載之下。孰不欲擢髮而誅之。如使宋不誤於和議。而宗澤,岳飛之徒。得展其心力。則宋室之隆。可立而待也。惟其誤於和議。而終始不悟。故卒亡於遼金。豈不痛哉。今之倭賊。卽宋之遼金也。其不可和也决矣。此賊乃國之大讐。而百世058_513b之怨也。其有言和者。卽宋之秦檜也。是固堂堂之正論。亘萬世而不可易者也。雖然。兵法有曰兵者。詭道也。故能而示之不能。用而示之不用。近而示之遠。遠而示之近。諸葛亮亦曰。兵不厭詐。夫與敵爭勝敗啚存亡者。烏可以權詐之謀爲羞。而一行正直之道乎。鄭伯肉袒牽羊。以迎楚莊王。而卒保其國。句踐困於會稽。請爲臣妾。而卒成伯業。權時之謀。誠不可廢。而不能下人者。匹夫之剛也。夫和之爲言雖一。而所以爲和者。有不同焉。恃和而忘備者。亡也。言和而盡己者。存也。宋之亡於和者。信其和也。不信其和。何亡之有。夫羈縻敵國。莫過於和。舒忿緩禍。莫過於和。怠敵誤寇。莫過於和。休兵息民。莫過於和。和者。兵家之詭道而不可廢者也。如欲廢之。是膠柱而鼓瑟也。內堅不和之志。外發欲和之言。有何不可於義乎。而况遼金連陸。而此賊隔海。058_513c宋無大援。而我有皇朝之救。其勢有不似焉。彼賊求和。卽應之曰。皇朝許和。我豈敢不和。皇朝不許。我豈敢和。兵交使在其間。不留其使可也。而聞倭使見囚。絶不言和。臣恐挑强寇之怒。速危亡之禍。而無一人爲殿下言之。臣竊痛之。痛之而無補於國。此臣之可以退去二也。臣聞家貧思賢妻。國亂思良相。家雖貧而妻苟賢則移貧爲富。國雖亂而相苟良則轉亂爲治。賢妻之於家。良相之於國。其所關豈不大哉。夏之少康。有田一成。有衆一旅。恢復舊物。有若登天。而因一舊臣靡。能收二國之燼。纘禹之服。漢之昭烈。雖稱帝室之胄。無地可據。無民可使。興復漢室。邈乎其難。而得一諸葛亮。能成鼎足之勢。以延漢祚。國亂而不思良相則其無望也已。殿下頃者。以李元翼爲領相。一國之人。咸嘆殿下之得人。而爲相未幾。遽遆其任。臣宲058_513d未知其所以然。窃恨良相之不容於時也。夫李元翼之才。能副國人之所望。固未可知也。昔年爲體察使之時。臣得聞其言論。得見其施措。憂國愛民之心。出於至誠。公平廉謹之行。得於天性。窃以愚意度之。眞從容就死之社稷臣也。而殿下不能親之信之。使不得安於朝廷之上。李元翼進退之義。可無愧於古之人。其於國事何。臣窃悶之。悶之而無裨於國。此臣之可以退去三也。臣本庸愚。與世絶遊。變亂之前。結茅江岸。花朝月夕。漁釣自樂。每詠三公不換此江山之句。不幸遭亂。茅茨松菊。盡爲灰燼。釣石漁磯。埋沒草裡。夢想依依。能不興喟。常以爲賊若渡海。便當歸去江湖。以終餘生。猥蒙天恩。叨此重寄。追賜職帖。榮及九泉。感激之深。徒自抆淚。願守邊城。圖報涓埃。而愚計歸虛。更無可爲。束手而坐。賊至而走。臣實恥之。且臣素患痰058_514a喘。又有心熱。今則濃痰塡胸。日夜喘吐。心熱轉極。眩昏兼發。忘前失後。决難察任。與其尸位素餐。將至於僨事辱國。無寧退去。以讓於武勇之將乎。賊退無事之時。臣雖歸去。如遇變急。臣請被堅執銳。爲士卒倡。且不敢偸生苟活。以負殿下。伏願殿下視臣以漁父。勿縛以爵。勿縶以職。任其閑適於江湖焉。江湖一漁父。雖若無補於國家。其視各立朋黨。是己非人。忘國家之存亡。而只爲身謀者。亦有間矣。伏願殿下垂察焉。庚子二月日

 

 忘憂先生文集卷之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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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雜著]
招辭 a_058_514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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矣身本以庸劣。濫受重寄。天恩罔極。啚報無計。矣身愚計。以爲若守邊城。則緩急有益。庶報涓埃。願守島山城。至於啓請。而孑遺軍民。盡屬舟師。城守之計。竟歸於虛。脫有變急。軍民必058_514b潰。無事之時。稱爲兵使。臨變遁避。有愧初心。加以素患心熱。因憂轉極。痰塞胸膈。喘急吐血。眩昏又發。精神耗喪。察任不得。夙夜憂悶。徒知有官守者不得其職則去。而不知罪犯邦憲。罷遆未及。經自退歸。愚妄之罪。萬死無惜。倭賊國之大讐。而百世之怨。凡有人心者。孰不知討賊之爲義。通和之爲不可乎。只念兵不厭詐。內堅不和之志。卧薪甞膽。以措戰守之備。外爲欲和之言。羈縻强敵。以舒暴怒之禍。似近於兵謀。妄陳愚計。論以通和爲主。極爲曖昧。矣身不稱於職。憂悶日深。心思退歸。欲達其情。而宲無知識。語多愚妄。愚妄之罪。萬死無惜。


 

 

 

忘憂先生文集卷之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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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雜著]
察理使時狀啓 a_058_514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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臣廵歷邊上。審察防守形勢。晉州乃嶺南之襟喉。湖南之保障。阻山帶河。城必可守。而但陷敗陵夷之餘。修築無形之址。功役058_514c未畢。器械未備。變起今年。則及時保守。有不可必。而要衝之地。終不可棄。則城守之事。不可不預爲措畫。孑遺之民。纔還蓬草之墟。遽逢築城之役。不無疑惧之心。必須先爲收悅人心。定其守城根本。然後措置節目。自可次第擧行矣。臣窃妄料晉民限十年。完其雜役。復其所耕。使入其土者。皆懷樂生之心。永無遷移之念。則雖非晉土之本民。而願耕於其野者甚衆。然後籍其民數。編爲土兵。使之守城。而晉軍之屬於舟師者。專屬本城。永减水軍之役。則軍心自悅。不以城守爲厭。而晉城之守。日漸堅固矣。且右兵使李守一。平易廉謹。得軍民懽心。久任責效。則緩急必有所賴矣。釜山則國之南門。賊路初頭。關防重鎭。不可不設。而審其形勢。則城圍甚大。四面皆平。左右高峰。俯臨城中。而軍不稱城。粟不稱軍。難守之形。愚智皆知。變起不虞。若或不守。058_514d則軍粮軍械。反資寇賊。臣窃妄料。邊上已築之城。雖不可撤。而勞民役衆。不輟營繕。民力有竭而緩急無益。所儲軍粮。移置晉州。用於築城之役。則城可易就。而難守之地。則觀勢進退。似爲無妨也。大槩晉州則可守而功役未畢。釜山則决不可守。惟此仁同天生山城。天生絶壁。四面削立。內外連城。形依勢固。內城則東南西北。皆無受敵之處。而門樓榭臺。皆已成形。倉庫軍幕。亦皆營立。兵器軍餉。時方輸入。外城則西北二隅。絶壁削立。亦如內城。只於東隅。似有受敵處。故畫其地勢。已築石城。而但城內器具。末及措置矣。一道之內。惟此一城。居中作鎭。左右控制。一夫當關。衆敵莫犯。脫有變急。定爲必守之地。而所守軍兵。與本道廵察使李時發。時方相議。推移分屬。至如宜寧軍兵。則自亂初臣帶率討賊。軍知將心。將知軍情。玆以移屬天生城。使守058_515a要害處。且令出入設伏。使賊莫敢易犯事云云。甲辰五月十日

甲辰七月日有旨
今見卿狀啓。以病辭職矣。授以察理之任。方守山城。委以南路保障。朝家期待之意。宲不偶然。雖有疾病。不可控辭。卿其從容調理。益勉職事事有旨。

乙巳正月日有旨
卿非他武將之比。前春將欲召致京師。隨時任用。而爲因汛防方急。以往來爲難。未果矣。始爲察理使。銳意察任。中間累移守令。雖因病解任。如卿之人。不可任其閑住。今以卿爲察理使。卿其斯速上來。以備緩急之用事有旨。

 

 

忘憂先生文集卷之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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戊申九月日疏 a_058_516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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戊申八月日有旨
卿在壬辰亂初。倡率義旅。扼守鼎津。遮截倭賊。累敗兇鋒。以挫其勢。使賊終不敢渡津西向。其績偉矣。且卿以戰則士卒樂爲之用。以守則隱若一長城。而及爲閫帥。番遞之卒。愛戴如親。至相語曰。只去家而已。立番與在家同。復何苦乎。當今名將。惟卿一人而已。第聞引疾入山。辟穀茹松。豈非托於此而欲離事自全耶。然君臣之義。翊扶之心。想必未嘗少弛於懷也。目今國勢岌岌。已去七八分。而老酋雄視西北。將有匪茹之志。大臣耆耇咸曰。鎖鑰西北。非卿莫可。卿於此時。雖欲爲自身謀。其可得乎。先王之待卿。可謂厚矣。時事之艱危。可謂急矣。卿可不追先王之殊遇。而思所以報效於今日耶。卿其斯速上來。以慰予058_516b拊髀之歎事有旨。
臣伏見聖旨。有曰。國勢岌岌。已去七八分。又曰。時事之艱危可謂急矣。嗚呼。自古人君。不知危亡之勢。故不任忠賢。不恤軍政。終至於亂亡而後已。殿下已知國勢時事岌岌艱危。是心足以悅人心回天命。苟能推擴是心。慄慄危懼。信任忠直。遠退回邪。慰悅人心。以祈天命。則何憂乎南寇。何懼乎北賊。國家興隆。指日可待。臣雖愚劣。感激誠深。願竭駑鈍。以補萬一。而臣之絶粒。已經八載。肌消形枯。決不堪人世之事。且做調息之功。久而不廢。今則不食而不飢。不飮而不渇。臣之愚意。以爲生可延仙可做。而斬將之勇。決勝之智。臣實無有。今若棄養生之道。而冒死官之任。强其所未能。卒僨大事。則不但獲罪於殿下。抑將貽笑058_516c於後世。與其食祿飽衣錦煖。而竟無益於緩急之際。無寧遠投名山。餐松啗栢。飮泉眠雲。以閱嵗華。伏願殿下。置臣於物外。俾成天下之一難事焉云云。
答曰。省疏具悉卿懇。但卿本非方外之士也。予之命召。意亦有在。而乃敢以仙術自高。不肯赴命。其可謂知輕重大小之義乎。昔張良辟穀。亦在於定天下安劉氏之後。試觀今日之域中。實非人臣自安佚之秋。宜遵前旨。斯速上來。

 

 

 

忘憂先生文集卷之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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戊申十月日疏 a_058_516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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下本道觀察使有旨
郭再祐處有旨齎去禁軍來言。再祐在靈山地山谷間人迹迥絶處。結廬數間。生計蕭然。其子謂禁軍曰。父承召命。切欲上去。而騎率俱乏。單衣弊盡。日寒時。勢難登途云。聞其言則再祐不無上來之意。而無衣無馬。不能自致。卿其衣服次覓給。給馬護058_516d送事有旨。戊申九月日
臣伏見聖旨再下。旨切辭嚴。臣戰慄惶懼。罔知所措。感激涕泣。不知所云。臣雖無狀。豈敢索價。臣雖至愚。豈不知天眷之重。而惜一身之死乎。只念臣本無聰明才藝。且無將略兵謀。雖於亂初。率軍討賊。獲斬零賊。是不過一時之幸耳。非有將兵之才也。不幸大臣誤聞虛名。謬薦失擧。將使殿下擇將非人。臣之萬死。固不足恤。以國與敵之戒。其可不懼乎。昔趙之趙括。不能自知其才。謂天下莫能當。卒敗趙軍。身死國亡。括不足笑。四十萬衆。見坑何辜。宋之李綱。旣能知己。又能料敵。固辭閫外之任。而時君强之。亦未免敗軍之患。是豈獨李綱之罪。亦莫非宋運之不幸也。臣若含默而濫受重任。則與括無異。臣實恥之。故臣於前058_517a疏。已略陳之。而今又盡言之。伏願殿下。察臣愚直之懇。恕臣難進之罪。永寢召命。必擇賢將而任之。則兵强國昌。社稷幸甚。若殿下以謬薦之言爲可信。强委以難堪之任。則是誠關國家興敗之運。臣實憂之。嗚呼。殿下新登寶位。念亂圖治。宵旰憂勤。任賢恤民。仁心聖德。播聞遠邇。窮村僻巷。愚夫愚婦。亦莫不願須臾無死。更覩中興之盛。況臣受恩先朝。官至宰列。今蒙恩命。至再至三。感激長吁。不能自已。而臣之難進。又有說焉。忍而不言。非臣子無隱之道也。伏願殿下垂察焉。嗚呼。逆珒全恩之說。誰作俑者。其將以喪邦乎。此之爲說。似是而非。近理而曲。臣竊惡其亂法而亂義。亂法之弊。將至於無法。亂義之患。必至於滅義。無法滅義。國能存乎。義與法。公也。恩與情。私也。私不勝公。則情不可以勝義。恩不可以勝法。義法之所在。恩情不得不屈。058_517b則國人皆曰義與法之不可犯也如此。不然。必皆曰國事惟以恩情爲重。將來之禍。其不至於喪邦乎。殿下未卽位之前。珒固兄也。殿下卽位之後。珒乃臣也。人臣無將。將而必誅。況珒逆謀之迹。昭昭難掩。國人咸曰賊珒可誅。殿下當用公義而斷私情。擧大法而割小恩。梟示國中。快悅人心。以圖上帝之默佑可也。殿下安得以賊。私謂之兄。而大違一國欲誅之心乎。昔管蔡流言。周公誅之。周公大聖也。友愛之情。豈輕於殿下。而周公之不能全恩者。何也。以罪在王室故也。而況周雖舊邦。其命維新。致治雍熙。民心皞皞。當是時也。管蔡雖存。焉能構禍。而周公之必致辟者。豈其恩情之薄耶。罪在王室。不得不誅也。其所以誅之者。若有未善。則天縱孔聖。必不以不復夢見。爲傷嘆也。今之國勢。何如也耶。人心不可謂不離。天命不可謂不去。而逆珒之罪。058_517c過於管察。則在法無赦。在義必誅。而恩不可全亦明矣。彼以全恩爲說者。是所以非周公也。非周公者。乃所以非孔聖也。夫謀弑之賊。人人得以誅之。誰非殿下之臣。而敢俑全恩之說乎。全恩之說。去義與法言之也。一人之私言也。討逆之論。合義與法言之也。天下之公言也。蓋使人心將離。天命將去者。皆珒之爲也。珒於平日。貪暴無涯。殺人無忌。且使賊陰殺朝臣。而謀奪其妾。以皐陶執瞽瞍之訓觀之。則是其罪足以死也。況又爲簒弑之謀乎。人而無欲誅之心。非人也。臣而無討賊之心。非臣也。請誅一謀逆之臣。以快人心。有何不可。而乃敢倡亂法亂義之說。是誠何心哉。臣實未知。伏願殿下。排滅義之說。從執法之論。則是國人殺之也。非殿下誅之也。珒自戕其身也。非國人殺之也。可殺而不殺。大賊乃發。可怒而不怒。奸臣乃作。人心之悅在此。058_517d天命之回在此。中興之業。反掌可建矣。天視自我民視。天聽自我民聽。天明畏自我民明畏。人心離則天命必去。人心悅則天命必回。故臣愚以爲今日圖存興理之急務。莫如用不測之刑。施不測之賞。以悅人心。以回天命。如蒙殿下不以人廢言。誅逆珒以泄神人之憤。則臣雖年齡已暮。氣力已衰。形如枯木。心若死灰。亦將有以感發奮迅。捐身於驅馳。況賢於臣者。孰不欲爲殿下死乎。不然。臣乃隱於山中。以遂初心。寧能入於亂法亂義之朝。見國家危亡之禍耶。
答曰。省疏具見忠憤之義。深用嘉焉。頃予不幸。遽遭天倫之變。禍機之動。間不容髮。倘非侍從諸臣元老大臣。炳機盡忠。摧逆節於未發。則予雖欲全恩。得乎。厥今兇徒服罪。已正常刑。一塊同氣之肉。全而貸之。是或一道。權而得中。亦何害於義也。卿宜058_518a强起。以扶王室事有旨。

 

忘憂先生文集卷之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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戊申十二月日疏 a_058_518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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伏以臣庸愚鄙陋。累被召命。天語丁寧。天威咫尺。臣驚惶感激。殞涙流涕。不俟而行。匍匐趨命。是固臣子之分義。而欲達愚衷。今又開喙。罪宜萬死。只俟天誅。臣愚以爲逆珒之誅不誅。其所係至大至重。是乃義法恩情勝負之判。宗廟社稷安危之機。一國生靈休戚之端。君子小人消長之源。誠國家隆替存亡成敗之大機關也。刑政之大。莫過於此。而殿下嗣位之初。適其始政。所以悅人心回天命。觀視臣民也。而彼哉斗筲之人。做出全恩之說。以惑殿下至仁之心。不忍加誅於逆賊之頭。使之過於仁柔。而不及於義法。其可謂得中之權乎哉。臣恐一國臣民望治之心。以此而喪矣。忠臣義士奮發之膽。以此而落矣。奸邪058_518b䜛佞欺負之徒。以此而彈冠相慶矣。貪官暴將咀啖軍民之輩。以此而益橫無忌憚矣。刑法政令委靡偸懦陵夷之漸。未必不兆於此。誠可爲痛哭流涕長太息也。臣之愚固之心。以爲殿下不誅逆珒。則臣何敢冒爵貪祿於棄義棄法之朝。見載胥及溺之患也。蓋謀逆。天下之大罪。討賊。天下之大刑。擧大刑而加大罪。其可以容私恩於其間哉。全恩之意。雖發於聖衷。猶未免傷於義也。況以臣子之口。而先倡全恩之說乎。臣子而倡是說者。無討賊之心者也。使臣子皆無討賊復讐之心。則是率人國爲戎夷。棄人類爲禽獸。孰有憚於簒弑之爲乎。爲君父於其臣子之上者。得不危且殆哉。臣深痛其說。欲力排之。而文短辭拙。無以達意於前疏。故今更爲殿下陳之。臣聞春秋。爲誅亂臣討賊子而作。其法皆周公之法。而周公孔子同一心也。同一義也。同058_518c一法也。孔子修春秋之心。誅意之義。討賊之法。皆出於周公誅管蔡之心之義之法也。其心同故其義同。其義同故其法同。趙盾不討賊。許世子止不嘗藥。春秋皆以弑書。誅意之義至嚴矣。穀伯貶而書名。滕侯降而稱子。以深絶其來朝而黨於桓也。討賊之法。至詳矣。孔子之心。以爲亂臣賊子常有。而周公不常有。故天下有篡弑之禍。思周公而傳周公心法於春秋。孔子卽周公也。周公卽孔子也。孔子易周公之地。則必誅管蔡如周公也。周公易孔子之地。則必修春秋如孔子也。周公孔子。慮亂臣賊子接迹於天下後世。故擧大義用大法。誅管蔡修春秋。而亂臣賊子懼。莫敢勸於爲惡。而篡弑之禍止矣。今之爲全恩之說者。其以周公孔子爲非聖人乎。其以誅管蔡修春秋。爲周公孔子之累乎。不若是。何敢倡全恩之說。使亂賊之徒。無所懼而肆爲058_518d惡耶。方其陪臣讓位之說。欺罔天朝。遼藩討平之奏。誣撓天聽。查考之差官未回。冊封之皇命未定也。宗社之危如以一髮引千鈞。而倡全恩之說於其間。使逆珒得保其首領。懷僥倖覬覦之望。噫。其謀之不忠極矣。其慮之不遠甚矣。嗚呼。曩時國家危急存亡之機。岌岌乎殆哉。皇朝若信讓位之說。謂逆珒以長當立而有泰伯之德。疑殿下無先王之命而受逆珒之讓。於義不可。其遣差官也。命以逆珒歸。則逆珒以重賂納於皇朝之權臣。蓋亦有年云矣。彼權臣之爲逆珒謀者。若出於不測。則國之存亡。未可知也。然則讓位之說。萌蘖於全恩。全恩之說。爲根於讓位。相爲表裏。互爲統隷。幾成喪邦之禍。發於意慮之所不及。甚可痛哉。臣前觀赦文。逆珒免爲庶人。置諸畿邑。未知其罪已宥。其身已解。而無拘攣防杜之禁耶。若果爾。彼058_519a逆珒以不奪不厭之心。其將不北走胡乎。雖其計或未岀此。安知其宿養死士之徒。不有竊負而潛逃者乎。老酋以爲奇貨。將有納國之謀。則其何以拒之哉。我國經亂之後。軍民死亡。十無二三。而加之以軍政解弛。賞罰無章。民無死長之心。軍有曳兵之計。而老酋方張之勢。士馬之强。宜不下於前日之海賊。則以我國無能之將。率我國無制之兵。其孰能折衝而禦侮哉。一敗塗地無惑也。事至於此。雖悔不用周公孔子之義法。其可及乎。然則全恩之說。必至於亡人之國而後已也。且爲是說者。果何人哉。君子耶。小人耶。雖君子也。其去聖人也亦遠矣。而所見所論。務勝於周公孔子。亦見其惑之甚也。如小人也。以忘君之心。發與賊之說。豈可以小人之言。爲輕重於國家興敗之機乎。循私情則害天下之大義。伸私恩則傷天下之大法。殿下若不能058_519b無惑於全恩之說。有所不忍於恩情之私。而不能雄斷於義法之公。則臣恐殿下厚於仁慈。不能剛克。而收拾人心。迓續天命。有未易也。臣竊憂之。伏願殿下以周公孔子之心爲心。以周公孔子之義爲義。以周公孔子之法爲法。心與義法。皆至公無私。則可以處逆珒。無愧於周公孔子也。逆珒獲罪於天地。結怨於神人。而謀危宗社。其爲罪也莫贖。無所容於天地之間。奉天討擧王法。誅之而無赦者。所以爲宗社也。非爲己也。慰天地神人也。非爲己也。是乃所以從周公孔子相傳之義法。則四方後代。其誰曰不可。殿下誠能以周公孔子之心。行周公孔子之法。不以大霈。釋當誅之賊。合人心而定罪。順天理而用刑。則王子貴戚。有所畏而罔敢驕橫。大小臣僚。有所畏而罔敢欺負。以至於百執事郡縣之吏。亦莫不大有所畏。革面而改心矣。夫然058_519c後殿下之御臣庶制軍民。投之水火。無不如意。可使制挺。以撻外寇。保民固國。猶反手也。中興之業。其有未隆乎。臣雖愚劣。言岀悃愊。若殿下覽臣之疏。行臣之言。則是殿下實能用臣於千里之外也。臣雖遠棲巖穴。逍遙物外。其實見用於殿下之庭也。不然。如臣衰耗羸尫。雖出而車載斗量。亦何益於勝敗之數乎。龍吟雲起。虎嘯風生。上有聖主。下必有賢臣。而一國以一人興。殿下誠能親賢以誠。信賢以誠。任賢以誠。求賢以誠。則朝廷之上。一國之中。豈無扶顚持危之相。豈無伏節死義之臣。豈無禦敵制勝之將。豈無斬將搴旗之士乎。殿下惟患親之信之任之求之之誠。有所未至焉耳。臣則無可用之才。而徒能休糧絶粒。自苦其身。伏願殿下。勿下召命。俾愚臣成志願焉。
答曰。省疏益見卿憂國之遠慮。深嘉赤心。此論來自方外。大義058_519d壁立千仞。不煩斧鉞。而足以寒亂賊之心。卿宜勿曰言不見行。而趁春上來。以扶彝倫事有旨。


 

 

 

 

 忘憂先生文集卷之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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戊申十二月日疏 a_058_518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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伏以臣庸愚鄙陋。累被召命。天語丁寧。天威咫尺。臣驚惶感激。殞涙流涕。不俟而行。匍匐趨命。是固臣子之分義。而欲達愚衷。今又開喙。罪宜萬死。只俟天誅。臣愚以爲逆珒之誅不誅。其所係至大至重。是乃義法恩情勝負之判。宗廟社稷安危之機。一國生靈休戚之端。君子小人消長之源。誠國家隆替存亡成敗之大機關也。刑政之大。莫過於此。而殿下嗣位之初。適其始政。所以悅人心回天命。觀視臣民也。而彼哉斗筲之人。做出全恩之說。以惑殿下至仁之心。不忍加誅於逆賊之頭。使之過於仁柔。而不及於義法。其可謂得中之權乎哉。臣恐一國臣民望治之心。以此而喪矣。忠臣義士奮發之膽。以此而落矣。奸邪058_518b䜛佞欺負之徒。以此而彈冠相慶矣。貪官暴將咀啖軍民之輩。以此而益橫無忌憚矣。刑法政令委靡偸懦陵夷之漸。未必不兆於此。誠可爲痛哭流涕長太息也。臣之愚固之心。以爲殿下不誅逆珒。則臣何敢冒爵貪祿於棄義棄法之朝。見載胥及溺之患也。蓋謀逆。天下之大罪。討賊。天下之大刑。擧大刑而加大罪。其可以容私恩於其間哉。全恩之意。雖發於聖衷。猶未免傷於義也。況以臣子之口。而先倡全恩之說乎。臣子而倡是說者。無討賊之心者也。使臣子皆無討賊復讐之心。則是率人國爲戎夷。棄人類爲禽獸。孰有憚於簒弑之爲乎。爲君父於其臣子之上者。得不危且殆哉。臣深痛其說。欲力排之。而文短辭拙。無以達意於前疏。故今更爲殿下陳之。臣聞春秋。爲誅亂臣討賊子而作。其法皆周公之法。而周公孔子同一心也。同一義也。同058_518c一法也。孔子修春秋之心。誅意之義。討賊之法。皆出於周公誅管蔡之心之義之法也。其心同故其義同。其義同故其法同。趙盾不討賊。許世子止不嘗藥。春秋皆以弑書。誅意之義至嚴矣。穀伯貶而書名。滕侯降而稱子。以深絶其來朝而黨於桓也。討賊之法。至詳矣。孔子之心。以爲亂臣賊子常有。而周公不常有。故天下有篡弑之禍。思周公而傳周公心法於春秋。孔子卽周公也。周公卽孔子也。孔子易周公之地。則必誅管蔡如周公也。周公易孔子之地。則必修春秋如孔子也。周公孔子。慮亂臣賊子接迹於天下後世。故擧大義用大法。誅管蔡修春秋。而亂臣賊子懼。莫敢勸於爲惡。而篡弑之禍止矣。今之爲全恩之說者。其以周公孔子爲非聖人乎。其以誅管蔡修春秋。爲周公孔子之累乎。不若是。何敢倡全恩之說。使亂賊之徒。無所懼而肆爲058_518d惡耶。方其陪臣讓位之說。欺罔天朝。遼藩討平之奏。誣撓天聽。查考之差官未回。冊封之皇命未定也。宗社之危如以一髮引千鈞。而倡全恩之說於其間。使逆珒得保其首領。懷僥倖覬覦之望。噫。其謀之不忠極矣。其慮之不遠甚矣。嗚呼。曩時國家危急存亡之機。岌岌乎殆哉。皇朝若信讓位之說。謂逆珒以長當立而有泰伯之德。疑殿下無先王之命而受逆珒之讓。於義不可。其遣差官也。命以逆珒歸。則逆珒以重賂納於皇朝之權臣。蓋亦有年云矣。彼權臣之爲逆珒謀者。若出於不測。則國之存亡。未可知也。然則讓位之說。萌蘖於全恩。全恩之說。爲根於讓位。相爲表裏。互爲統隷。幾成喪邦之禍。發於意慮之所不及。甚可痛哉。臣前觀赦文。逆珒免爲庶人。置諸畿邑。未知其罪已宥。其身已解。而無拘攣防杜之禁耶。若果爾。彼058_519a逆珒以不奪不厭之心。其將不北走胡乎。雖其計或未岀此。安知其宿養死士之徒。不有竊負而潛逃者乎。老酋以爲奇貨。將有納國之謀。則其何以拒之哉。我國經亂之後。軍民死亡。十無二三。而加之以軍政解弛。賞罰無章。民無死長之心。軍有曳兵之計。而老酋方張之勢。士馬之强。宜不下於前日之海賊。則以我國無能之將。率我國無制之兵。其孰能折衝而禦侮哉。一敗塗地無惑也。事至於此。雖悔不用周公孔子之義法。其可及乎。然則全恩之說。必至於亡人之國而後已也。且爲是說者。果何人哉。君子耶。小人耶。雖君子也。其去聖人也亦遠矣。而所見所論。務勝於周公孔子。亦見其惑之甚也。如小人也。以忘君之心。發與賊之說。豈可以小人之言。爲輕重於國家興敗之機乎。循私情則害天下之大義。伸私恩則傷天下之大法。殿下若不能058_519b無惑於全恩之說。有所不忍於恩情之私。而不能雄斷於義法之公。則臣恐殿下厚於仁慈。不能剛克。而收拾人心。迓續天命。有未易也。臣竊憂之。伏願殿下以周公孔子之心爲心。以周公孔子之義爲義。以周公孔子之法爲法。心與義法。皆至公無私。則可以處逆珒。無愧於周公孔子也。逆珒獲罪於天地。結怨於神人。而謀危宗社。其爲罪也莫贖。無所容於天地之間。奉天討擧王法。誅之而無赦者。所以爲宗社也。非爲己也。慰天地神人也。非爲己也。是乃所以從周公孔子相傳之義法。則四方後代。其誰曰不可。殿下誠能以周公孔子之心。行周公孔子之法。不以大霈。釋當誅之賊。合人心而定罪。順天理而用刑。則王子貴戚。有所畏而罔敢驕橫。大小臣僚。有所畏而罔敢欺負。以至於百執事郡縣之吏。亦莫不大有所畏。革面而改心矣。夫然058_519c後殿下之御臣庶制軍民。投之水火。無不如意。可使制挺。以撻外寇。保民固國。猶反手也。中興之業。其有未隆乎。臣雖愚劣。言岀悃愊。若殿下覽臣之疏。行臣之言。則是殿下實能用臣於千里之外也。臣雖遠棲巖穴。逍遙物外。其實見用於殿下之庭也。不然。如臣衰耗羸尫。雖出而車載斗量。亦何益於勝敗之數乎。龍吟雲起。虎嘯風生。上有聖主。下必有賢臣。而一國以一人興。殿下誠能親賢以誠。信賢以誠。任賢以誠。求賢以誠。則朝廷之上。一國之中。豈無扶顚持危之相。豈無伏節死義之臣。豈無禦敵制勝之將。豈無斬將搴旗之士乎。殿下惟患親之信之任之求之之誠。有所未至焉耳。臣則無可用之才。而徒能休糧絶粒。自苦其身。伏願殿下。勿下召命。俾愚臣成志願焉。
答曰。省疏益見卿憂國之遠慮。深嘉赤心。此論來自方外。大義058_519d壁立千仞。不煩斧鉞。而足以寒亂賊之心。卿宜勿曰言不見行。而趁春上來。以扶彝倫事有旨。


 

 

 

忘憂先生文集卷之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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庚戌四月日疏 a_058_519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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伏以臣所患邊頭之痛。苦歇無常。至今彌留。縷命雖存。形骸已枯。前日承召。未卽奔命。極知虧義。無所逃罪。譴誅不加。天眷益隆。聖旨繾綣。藥封兼降。臣驚惶感激。沈痾似蘇。服藥調治。則應有其效。匍匐登程。以謝天恩。臣之願也。臣蒙恩寵如此其重。欲報溳埃。萬死如毛。只恐一朝病加。奄歸泉下。則目不得瞑矣。寧無一言以效芹曝之誠乎。嗚呼。殿下之所能者天。而其所不能者人也。永慶之謀。不逞者天也。逆珒之禍。不及者天也。皇朝之冊封竟至者。亦莫非天之已定也。宗社之福。臣民之幸。爲如何哉。天之所以佑殿下者。可謂至矣。而竊怪夫群臣之所以058_520a忠於殿下者。有未盡也。伏願殿下之其所不能而勉勉留意。俾群臣咸盡其忠之其所已能而孜孜致誠。自天申佑於冥冥之中。則國家興隆。指日可冀也。臣雖愚魯。未嘗忘國家存亡之憂。極慮窮思。得中興三策。一曰主勝之道。臣聞惟天無親。佑于一德。民罔常懷。懷于有仁。伏願殿下。夙夜無怠。兢兢業業。敬之誠之。察守道心。克之復之。修明一德。祈皇天默佑。其命維新。親賢遠奸。信忠斥邪。推施大恩。擴布至澤。浹於肌膚。淪於骨髓。使軍民常懷。其心不離。則國祚延於無疆。寇敵屈於千里。上策也。二曰兵勝之謀。臣聞全勝不闘。大兵無創。先爲不可勝。以待敵之可勝。伏願殿下拔卒伍之特而將軍兵。擢山林之賢而置高位。用不測之恩。以鼓動人心。貪贜無法之吏。暴虐犯律之將。或戮而梟于州縣。或烹而徇于國中。用不測之威。以振肅刑政。則全058_520b勝在我。可勝在彼。而守則必固。戰則必勝。中策也。三曰僅保之計。臣聞迨天未雨。撤彼桑土。其亡其亡。繫于苞桑。伏願殿下料敵量己。乃明乃哲。先事而備。預患而防。積穀於必守之地。如江華等處。爲軍氓之天。俟不時之需。命世子鎭守嶺南。控制兩湖。延攬賢能。愛養黎庶。作一藩屛。成大保障。創深根之業。爲不拔之基。下策也。夫國家成敗之勢。有如奕棋然。雖敗局。未嘗無勝勢。雖勝局。未嘗無敗勢。故善奕者。轉敗爲勝。不善者。乘勝致敗。今之國勢。雖若敗棋然。豈無可勝之勢哉。用不敗之謀。行不亡之策。汲汲如救焚拯溺。然後庶乎其可也。臣聞干戚之舞。不可以解平城之圍。結繩之政。不可以治亂秦之緒。從容平常之政。恐無以濟今日危急之勢。必須用非常不測之恩威。然後可以去朝廷朋比之患。可以革貪暴侵漁之弊。可以使大小臣僚同058_520c心協力。王事靡盬。而南寇北敵。有不足憂也。臣之愚計。竊自以三策爲敗局之勝手。而言之可用與否。惟在於聖明之鑑。如蒙殿下好察。擇言及於蒭蕘。采而納之。試而用之。有所裨補於萬一。則臣雖死之日。猶生之年也。
答曰。省疏深嘉憂國之誠。予當體念焉。但卿以貫日之忠。堅臥雲之志。是予不能延攬之致。良用愧忸。卿宜勿爲遐棄。幡然上來。以副予虛席之望事有旨。


 

 

忘憂先生文集卷之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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庚戌八月日疏 a_058_520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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伏以臣猥蒙天眷。軫念窮寒。特賜以衣資表裏綿絮及司僕寺馬。臣感激涕泣。不知所云。臣是何人。得蒙恩寵。至於如此。撫躬驚惕。無地容措。但願殿下推此恩而賜邊戍戰士之無衣無馬者焉。殿下之衣與馬。固不足以遍賜一國之戰士。而殿下誠能058_520d愛民如子。視民如傷。施仁布惠。輕徭薄賦。以寬民力。以安民生。使一國人人皆有餘財。則是不賜而賜也。臣前蒙聖旨。褒臣以貫日之忠。今見聖敎。又許以盡忠之人。臣自念自度。無一可稱之事。而聖敎至此。臣仰愧俯怍。無以爲心。歷代帝王。雖有竭忠盡節之臣。未能克知灼見。故君臣不遇。而治日常少。殿下乃所臣爲忠。豈非微臣之幸乎。然而幸者。小人之所僥。而君子之小恧。臣何敢以君子之所恧。爲喜於心乎。臣本庸愚。無智慮。無膂力。而衰老已極。羸尫已甚。雖欲盡忠盡悴。以不負殿下之所知。其可得乎。思欲披肝瀝血。以報涓涘。伏願殿下垂察焉。臣嘗究古昔帝王之所以盛衰興亡者。不外乎人心之離合。天命之去就而已。人心未離。天命未去。則國無不興。人心已離。天命已去。則國無不亡。臣未知今日之人心離耶。不離耶。天命去耶。不去058_521a耶。人心雖未至於離。而殿下常以爲已離。天命雖未至於去。而殿下常以爲已去。悶人之窮。畏天之命。慄慄危懼。夙夜無怠。勵精圖治。終始無荒。德以動天。仁以保民。念兹在兹。名言在兹。允出兹在兹。則因衰爲盛。轉危爲安。猶反手也。君與民。雖有尊卑之異。而其實一而二者也。民與天。雖有上下之殊。而其實二而一者也。民安則君安。民危則君危。此非所謂一而二者乎。民悅則天悅。民怒則天怒。此非所謂二而一者乎。伏願殿下以慰悅人心。迓續天命。爲中興之大本焉。臣觀宮闕巍然。丹雘煥然。無異於平時。今日之人民。十不存二三於盛時。今日之財物。百不存五六於盛時。而營建兩闕。惟務宏麗。勞民役衆。貽弊萬端。罄財殫物。宂費不貲。民力安得以不竭。民生安得以不困。今之視民如草芥而莫之恤。此非所以悶人窮而畏天命。臣恐殿下中058_521b興之誠。有未至也。臣聞詔使徵銀無厭。得銀之數。過於五萬餘兩云。莫貴金銀。視若泥沙。取盡錙銖。以充詔使溪壑之欲。群臣之爲殿下謀者。臣竊未曉其心也。冉登之取銀。倍蓰於劉用。則安知後日之奉使者。又有甚於冉登乎。不但此也。皇朝銀貢之廢。今垂二百餘年。國之禁銀不用者。有深慮也。而太監兩使得銀無數。盈欲而歸。銀貢之復。必自殿下始。一國生靈。必斃於銀。宗廟社稷。必危於銀。殿下無窮之辱。必生於銀。寧不疾首而痛心哉。銀兩非從天降也。非從地岀也。非從鬼神來也。只出於民。而爲國。不以禮。不以義。不以廉恥。而惟欲以銀爲之。國不國矣。竭民膏血而不恤。忘國大禍而不慮。此非所以悶人窮而畏天命。臣恐殿下中興之誠。有未至也。臣聞諫者之多。表我之能好。諫者之直。示我之能賢。諫者之狂誣。明我之能恕。058_521c諫者之漏泄。彰我之能從。有一於斯。皆爲盛德。殿下卽位之後。忠言讜論者。擯斥不容。其所言。雖或有過實者。而無非出於愛君憂國之誠也。唯唯者千。而諤諤者一。其心可賞。而其言之過。有不足惡也。殿下不能優容。反加疏棄。此非所以褒忠直而開言路。親賢臣而濟艱危。臣恐殿下中興之誠。有未至也。擧一而可知其三。則殿下無中興之誠。豈但止於三事而已哉。雖然。旣往不諫。來者可追。遷善之門。飜手可闢。適治之路。擧足可登。殿下誠能奮迅悔心。痛改前愆。以民力爲重。限數十年不復興土木之役。禁絶用銀。以身先之。使國人咸不得用。以杜後日無窮之弊。親信忠賢。遠斥奸邪。從諫如流。以張公道。則民生自保。天眷用懋。而國之興隆。可立而待也。臣於頃日。伏見殿下親詣詔使所館處。請宴勤懇。終不見許。臣不勝忿忿之至。冉登宦者。058_521d宦者犬豕也。有不足道。彼以無前之辱。乃敢加之於殿下者。豈無其故哉。臣愚以爲差備通事表廷老秦禮男等。以詔使爲牟利之一窟穴。逞奸舞術。陰嗾詔使。縱無涯之求。爲分利之計。而不以辱及於殿下爲忌憚也。觀其不早探知詔使無接見之意。而豫通於政院。則其無君之心。斷可知矣。若無是心則宜其叩頭流血。竭誠極爭。雖死於詔使之怒可也。而不若是者。豈非無君之心使之然乎。求情責意。則罪不容誅矣。遠接使館伴等。旣不能防閑於通事。又不能周旋於詔使。君父羞辱。視若秦瘠。徇詔使之欲。爲利己之謀。觀其詔使賞格之請。其交相征利之迹。昭然難掩。遠接使館伴等。必與通事與詔使陰相賂遺。而人不得知其罪。亦不可赦也。伏願殿下待詔使渡江。斬通事而竄遠接使。如此則後來繼今者。有所懼而不058_522a使辱及於殿下如今日也。嗚呼。民安而後國富。國富而後兵强。兵强而後禦敵。禦敵而後中興。中興三策。臣陳於前。而臣計慮短淺。識見闊疏。安民富强之術。臣實未曉。故未達於疏中。臣到忠州。見牧使臣張世哲。世哲言於臣曰。富國强兵。豈無其術。特患不能擧而行之耳。臣問其術。則曰以宣惠之法。推演增益。使之便於民。利於國。宜於兵。則不出十年。必見富强之效。臣到京城。又聞宣惠之法試于畿甸。民咸便之。太監兩使之來也。民間之苦。亦不似前日云。臣益知世哲之策。果可行也。伏願殿下命世哲條陳其策。而與大臣謀。與賢士大夫議。斷而行之。勿撓於宦官宮妾私昵之言。夫宦官宮妾私昵之輩。以其良法美政爲不便於己。必造沮撓之言。伏願殿下察其肺肝焉。嗚呼。國家經亂之後。祖宗朝良法美典。蕩然無存。欲浪滔天。貪風振地。058_522b民怨於下。天怒於上。而危急存亡之勢。有不可忍言。況臣文短辭拙。安敢以一一枚擧哉。誠以宣惠之法。通行於一國。而申明祖宗朝贓汚軍律殺人三大法犯者勿赦。不以賄賂而低昻。則可以息民怨弭天怒。國日躋於富强之域。而南寇北敵。可以撻之以梃也。伏願殿下留意焉。臣絶粒多年。靜居山中。飢餐松而渴飮泉。友明月而伴淸風。逍遙於煙霞之中。無意於塵世之事。召命繾綣。冒死上來。非有貪戀爵祿之計。實欲一謝天恩。復歸於山。而殿下奬許旣重。恩眷亦隆。臣欲去不可。欲留則非臣本情。臣實悶焉。兹以胸中之所欲言者。悉陳無隱。以俟殿下納用與否。而爲微臣去就之決。如蒙殿下采納臣言。有少裨補於興理圖存之萬一。則臣雖棄十載修養之功。而死於輦轂之下。無悔也。不然。臣掛冠東門。納履而去。萬山松柏。鬱鬱蒼蒼。何往058_522c而不得休糧哉。臣不勝感泣。激切戰慄屛營之至。
答曰省疏具見忠讜。深用嘉歎。儐接之臣其於勅使所爲何哉。恐不可以此深罪卿宜恕之。陳戒之辭。予當體念。與廟堂議而處之。勉回遁思。共貞國事

 

 

忘憂先生文集卷之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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庚戌八月日疏 a_058_522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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伏以臣濫蒙恩眷。特命臣除咸鏡道觀察使。任之重責之大。如蚊負山。罔知攸措。第念君之於臣。計不從則退之可也。臣之於君。言不聽則去之可也。計不可從而徒授大任。則是失用舍之道也。言不見聽而虛冒重寄。則是昧進退之義也。臣敷心腹腎腸。圖效萬一。而聖批有曰。儐接之臣。不可深罪。臣竊惑焉。臣聞殿下命他譯官。遞代表廷老於平壤。而廷老等陰囑詔使。終不肯退。此非逆殿下之命乎。徒懷謀利之計。不懼逆命之罪。則058_522d其無君之心。不待辱及於殿下而後知也。遠接使等徇詔使尾閭之欲。啓國家無窮之禍。而又使羞辱及於君父。則其心之異於通事者幾希。殿下不施赫怒之威。而反加賞格之恩。是猶天之有春而無秋。有夏而無冬也。臣聞立天地之道曰陰陽。陽居春夏。以養育爲事。所以生物也。則王者以之而有賞。陰居秋冬。以肅殺爲事。所以成物也。則王者以之而有刑。賞以勸善。非私與也。刑以懲惡。非私怒也。殿下有恩而無威。用賞而廢刑。其亦有乖於天之道也。天有養育肅殺。而四時具然後歲功成焉。則人君其可徒行恩賞。不用威刑。而能成治道乎。四時失其序則其施必悖。無以統萬象矣。五刑失其用。則其權必喪。無以服萬民矣。天失其道。草木猶干犯之。而況於君乎。嗚呼。善善而不能用。惡惡而不能去者。郭公之所以亡也。善善而不能用。則無058_523a貴於知其善。惡惡而不能去。則無貴於知其惡。殿下明知通事遠接使之罪。而刑不加焉。何以懲惡。殿下雖有仁慈之德。而無以施仁慈之澤於民。體念議處之敎。亦必止於文具而已。臣恐殿下國事。日危月靡。衰替不振。竟至於不可救也。臺臣之進諫者。只以還收賞格爲言。其以通事遠接使等爲無罪乎。若果無罪則賞格之加。有何損益於國家生民。而敢瀆天聽哉。如知有罪。當以罪之大小。論罰之輕重。而諫官否焉。其可謂臺省有人乎。是必殿下不以逆耳之言求諸道。故諫官徒知有己而不知有殿下也。臣之心與郡臣異。臣之計與群臣異。臣之言與群臣異。而殿下莫之能用。臣可以去矣。臣受恩感激。死且不惜。而殿下不使臣死焉。歸歟歸歟。山有松矣。歸歟歸歟。臣不死矣。
答曰。再省疏章。益見忠讜。深激予衷。所陳實中予病。當用作藥058_523b石。目今邊憂孔棘。願賴卿奮庸。驚破西北賊膽。卿宜體予至意。勉屈遐心。克張虎豹在山之勢。痛折犬豕窺關之計。尊主庇民。孰大於此。幼學壯行。此其時也。勿爲控辭。以副予望。

 

 

忘憂先生文集卷之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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庚戌八月日疏 a_058_523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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臣伏見聖批曰。所陳實中予病。當用作藥石。又曰。幼學壯行。此其時也。嗚呼。殿下不以禮使臣。而欲留臣以言也。臣雖至愚。以何顔面。只感殿下之言。而徒冒非據之任乎。俯仰天地。愧怍不暇。克張國威。上尊下庇。非所望也。臣觀春秋許止趙盾。皆以弑書。非聖人偏疾於二人而用法之刻也。惡莫憯於志。而鏌耶爲下。故聖人以誅意之筆。爲萬世之法。後之爲人臣者。必通春秋之義。然後可以免無君之罪而杜無君之禍也。通事表廷老等。不退於殿下之命。是無殿下也。遠接使等見通使逆命。而不加058_523c罰不請罪。矇矓不使退焉。是不有殿下也。以不有殿下之心。長通事無君之漸。馴致其禍。卒至於無前之辱及於殿下。非一朝一夕之故也。通事之心。與詔使合。遠接使之心。與通使合。竭一國生靈之膏血。充詔使尾閭之欲。而詔使喜之。請賞格以報之。此臣之所以謂陰相賂遺而不使人知者也。非徒殿下不以爲罪。而諫官不知焉。群臣亦不知焉。是皆不通春秋之義也。臣腐心痛骨。仰達愚衷。而殿下不信不用。臣恐殿下無以杜將來無窮之患。而建國家中興之業也。殿下苟無意於中興。則滿朝群臣。承順聖意者。不爲不多矣。如臣羸尫。又何必側身於其間哉。臣之計窮矣。臣之心戚矣。一去之後。山益高而水益深矣。
答曰。今觀卿疏章至三。用嘉忠憤。遠接使等。勅使時在境內。058_523d從容議處。亦未晚也。予方受鍼。當調攝相接。勉回遁思。俾遂利見。卿其輟行速還事有旨。庚戌八月二十一日。追到竹山有旨。

備邊司回啓
云云。郭再祐來自山野。感激恩遇。目擊時弊。抗䟽陳戒。可見忠義之士愛君憂國。出於至誠。其以輕徭薄賦爲請。營建宏麗爲戒。銀弊之爲國大禍爲慮。言者之輒見疏棄爲憂。而尤復惓惓於人心離合天命去就之說。言言痛切。正中時病。惟在聖上深加體念而已。至於宣惠之法。推演增益之說。非但郭䟽如此。在朝諸臣。亦多以此爲言。蓋旣試于畿甸。而畿民便之。則通行於諸道。使一國之民。均蒙其惠。此誠今日之急務。未知張世哲所言其施措曲折果何如。此宣惠廳必已揣摩諸道利害。如以爲通行不妨。則召致世哲。俾參䂓畫之時。酌宜得便而行之。亦似058_524a爲當。此一款。令宣惠廳回啓施行。贓汚軍律殺人等三罪。在法罔赦。而一自亂離以來。法綱陵夷。到今猶甚。今世之人。皆曰紀綱不擧。雖欲爲某事。何以爲乎。紀綱之擧不擧。惟在乎公私之間而已。公則法行而紀綱擧。私則法廢而紀綱墜。此正今日時弊猛省處。郭之反覆獻䂓。意非偶然。惟在聖明留神採納。嚴飭群下。毋事文具。毋踵姑息。庶有補於聖治也。冊使差備通事等。初頭不能善自周旋。及其相隔而滋弊也。又不能以誠意導達情事。或遇利害大關之機。而秦越相視。悠漫度遣。自上到幕次之時。郭再祐見通事等安行徐答而無奔走之狀。痛惋請罪。至於累次。今此通事輩雖盡非自己造誣之罪。而一被懲戒。然後他日之爲天使差備者。必有愼勉之心。量施罪罰爲可。至以儐接諸臣論征利之跡。則大不近情。此則郭再祐以檏直之058_524b人。未詳其間曲折。而忠憤所激。自不知其言之過也。參酌情事。處之得宜。上裁何如。


 

 

 忘憂先生文集卷之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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庚戌九月日疏 a_058_524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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伏以臣愚讜癡直。忿忿於通事遠接使等有罪無罰。決意退去。徑情罪大。日俟刀鉅。聖恩如天。不惟不罪之。而召命追及。下諭繾綣。示臣以罰罪之意。款臣以接晉之旨。臣不勝感激涕泣之至。嗚呼。殿下雖於臣言。有優容之美。而顧於大罪。無必罰之威。不畏民志。其可爲國乎。殿下至仁至慈之德。卽天地生物之元也。雖然。王者之道。若天之高。不可極也。若淵之深。不可測也。故可怒而不怒。奸臣乃作。可殺而不殺。大賊乃發。威武剛克。人君所不可無也。臣聞贊畫主事丁應泰之誣䧟我國也。其差備通事尹禛死於杖下。接伴使白惟諴永不叙用。先王之所以058_524c用罰如此其嚴者。其慮深且遠矣。今表廷老之罪。浮於尹禛。遠接使之罪。不下於白惟諴。而殿下不監于先王成憲。臣恐殿下將不免於有愆也。殿下君臨萬民。富有一國。苞苴之行。萬萬無絲毫之疑。而表廷老等終免於罪。則市井瑣瑣之徒。遐遠蚩蚩之氓。必將曰通事之銀。能入乎宮禁。能行乎朝廷之上。如此則殿下至公無私之心。恐無以家諭而戶說也。諫臣只以還收賞格。塞責而止。是不以通事之罪爲罪。而以臣言爲非也。臣疏下備邊司。而備邊司諸臣。罪通事不重。救遠接使太深。是不以殿下之辱爲辱。而以臣言爲非也。昔吳王與孫武試兵也。愛姬失令。孫武斬之。而王不能禁。姬之發笑。其失小矣。而孫武之不受王命。而吳王之不罪孫武者。何也。將有事於戰伐。而兵威之不可不立也。今表廷老之罪。較於吳姬。不啻天淵。而殿下不能058_524d聽用臣言。群臣反以臣言爲非。此臣之可以去一也。臣於昔年聞北地絶遠。王化不及。貪官暴吏之虐。萬倍他道。故黎民生男棄之。生女乃養。非父母之情。獨不愛男也。以其男子生而苛政之害。甚於猛虎也。今聞北道土兵鮮少。籍其私奴。盡以爲兵。土兵之所以少者。豈其盡病死而盡餓死也。是必不能支剝割之侵。散而之四方也。或投而入於胡也。私奴爲兵而內奴獨免。則是示民以私也。王者無私。其可私之乎。臣愚以爲私奴內奴。雖盡括爲兵。而不能禁其咀啖。則是亦人也。其能獨堪其苦乎。徒爲貪暴肥己之資。而不爲國家禦敵之用矣。必也嚴贓法。重殺人。明軍律。然後紀綱立而軍民頼。兵可强而胡可防也。殿下卽位而後。專務仁慈。犯贓汚囚王獄者。無不見宥。而殺人及犯軍律者。亦莫不然。此國勢之所以日益陵夷而不可救者也。今者058_525a殿下親見無前之辱。洞知通事遠接使之罪。而猶不用刑。則況犯法於千里之外。而善事殿下之左右者乎。賞罰無章。何以勸沮。此臣之可以去二也。臣聞朝廷因咸鏡監司祕密狀啓。分遣宣傳官。發兵添戍。邊臣之請兵。非斯今也。未能的知虜情。信其傳聞。虛張以啓。是邊臣欺殿下也。備邊司諸臣。例因虛報欺以爲欺。上以貽殿下宵旰之憂。下以起軍民動搖之弊。是備邊司亦欺殿下也。臣聞倭使怒接待乖願。恐嚇多端。我國情實。彼無不知。讐倭不和則已。旣爲羈縻則姑以權宜之謀。止其暴怒之禍。未有不可也。邊城不守。舟師亦弛。賊來必潰。人人皆知。而爲殿下謀者。國家危急。不察其機。而自己利害。每較於心。是亦欺殿下也。臣聞朝廷方以號牌爲急務。刻期通行。如欲行號牌之法。必先行宣惠之制。然後民不運而國有益矣。祖宗朝臟汚058_525b殺人軍律等法。廢而不行。故軍民不保其生。不安其業。而流移遷次。豈其民情也哉。救死不贍也。如此而遽行號牌。法峻則聚而爲盗。法弛則擾而增弊。孰主張是。是亦欺殿下也。今之爲諫官者。未聞以國事之得失。生民之利害。社稷之大計。面折廷爭。以回天意。而惟以引嫌而退。爲一大規。或一月而退。或一旬而退。甚者數三日而退。以蟣蝨小事。塞其言責。是亦欺殿下也。臣聞儒生上書訟成渾之冤。臣未知成渾爲人果何如也。但聞人皆以黨奸負君詆之。士皆以謀殺處士斥之。其所以詆斥之者。必有所據。而先王洞燭情狀。已施譴罰。此實萬世公論所由立也。今者儒生稱頌其賢。欺罔孰甚焉。朝廷分朋立黨。故儒生亦分朋立黨。而指姦爲賢。是儒生亦欺殿下也。大小臣僚及儒生。莫不欺殿下。而獨臣不欲欺也。欺者之徒。必反以臣爲欺。058_525c此臣之可以去三也。臣來在京城有日矣。臣聞諸大小臣僚及閭巷士民。皆曰國事無可爲也。士民何以謂國事無可爲歟。謂貪風日起而欲浪益深歟。抑謂賦役煩重而軍民困窮歟。臣未敢知也。群臣何以謂國事無可爲歟。謂朝廷朋黨之禍甚於南北賊歟。抑謂殿下仁柔有餘而無明武之德歟。臣未敢知也。大臣何以謂國事無可爲歟。謂國家興亡係於天數。而不容人力於其間歟。抑謂殿下有偏信戚里之漸。而無敬體委任之誠乎。臣未敢知也。大臣旣以謂無可爲。則其徒取充位。食夫祿衣夫錦而無陳善責難之意。從可知矣。群臣旣以爲無可爲。則其泄泄沓沓玩愒度日而忘國家之治忽。從可知矣。士民旣以爲無可爲。則其不事其事而愁苦怨咨。亦可知矣。臣又未知殿下以今日之國事。謂可爲歟。謂無可爲歟。殿下從儐臣之計。陷通事058_525d之術。徒以銀兩充詔使之欲。而不恤生靈膏血之渴。臣恐殿下無意於中興。而亦以國事謂無可爲也。臣聞殿下將設進豐呈之宴。其費鉅萬。殿下逸豫之漸。必自此而始。涓涓不塞。將爲江河。熒熒不救。炎炎乃何。臣恐殿下無意於中興。而亦以國事謂無可爲也。山林非無肥遯之士。而殿下無旁招之誠。不能起而用之。朝廷非無社稷之臣。而殿下無勿貳之誠。不能信而任之。不有君子。其何能國。臣恐殿下無意於中興。而亦以國事謂無可爲也。閭巷士民雖謂之無可爲。而國事猶有望也。大小臣僚雖謂之無可爲。而國事猶有望也。至於殿下亦謂之無可爲。而無刻厲憤發之誠。則國事其無望也已。臣未知殿下之國事。天爲之耶。地爲之耶。鬼神爲之耶。臣亦決知國事之無可爲也。此臣之可以去四也。嗚呼。大小臣僚。知國事之無可爲。而不能058_526a退者。以其有全軀保妻子之計也。臣十載絶粒。枯槁將死。有何貪戀之心。而昧於進退之義乎。臣前後陳疏。見疾於諫臣。見疾於群臣。見疾於儒生。又見疾於宦官宮妾私昵之輩。臣不去矣。禍必及矣。臣恐臣身之不死於國事。而將死於不忠者之手。與其徒死於不忠者之手。無寧退去而枯死於山中乎。臣一去不返。伏願殿下勿復召臣焉。
答曰。省疏益見忠直。陳戒之辭。予當體念。以藥予病。議處之務。更與廟堂商確變通。但遠接使等。別無可罪之事。每見卿疏。予不能無惑。卿故爲此過激之議。以驚動華人耳目乎。卿宜平心。勉回遁思。是予所望於卿。而卿反不諒予情。望望然去之。不勝缺然。卿其體予至意。輟行速還事有旨。庚戌九月七日。宣傳官追到忠州有旨。


 

 

忘憂先生文集卷之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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庚戌九月日疏 a_058_526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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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8_526b臣伏見聖旨。以勉回遁思。丁寧下諭。嗚呼。殿下招臣以言而不以義也。臣非不欲忠於殿下也。非不欲死於國事也。義有所不可。臣末如之何矣。蜂蟻至微物也。且有君臣。人受天賦而靈於萬物。孰無愛君憂國之心乎。況臣濫蒙天眷。榮寵已極。雖欲果於忘世。其可得乎。言不見聽。計不見從。退去巖穴。臣不得已也。嗚呼。今之群臣。無主辱臣死之念。而視殿下無前之辱。忽焉不忿於其心者。臣未知其所以然也。意者經亂之後。大小臣僚。家貧祿薄。妻妾之養。不稱其意。利欲計深。廉恥道喪。故通事之銀。無處不入。群臣之心。爲銀所蔽。暗而不明。不以罪爲罪。不以辱爲辱。此臣之所以忿忿而不已者也。如臣駑劣。雖當國家無事。朝廷淸明之時。猶不可以建就功烈。況今國勢陵夷。兵威不立。南北强寇。朝夕狺然。而臣言危見疾。計迂不合。其不可爲國事058_526c也決矣。僨敗國事。罪在不赦。歸去來兮。不亦愈乎。臣所以不榮人之所榮。而能人之所不能者。不欲負殿下於後日也。臣無危行而所言皆危。言危而身不危者未之有也。臣於前疏。旣已盡言。今復何言哉。伏願殿下歸臣於山。勿使不得其死焉。
答曰。每見疏章。用嘉忠讜。曾欲引見。而予適受鍼調攝。未卽相接。蓋出於事勢之然也。卿遽拂衣還山。惟恐或追。予情未安。卿豈盡知。藥石之言。予當佩服。倚毗之重。卿宜體念。兹遣史官。冀留卿行。勉回遐心。以副予跂待之誠故諭。庚戌九月十二日。注書元鐸追到海印寺。

 

忘憂先生文集卷之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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遇遯疏草 a_058_526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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伏以臣愚癡無狀。發言皆激。群臣莫不忌疾。而獨殿下優容之。不問諸近臣。不謀諸大臣。特遣史官。敦諭繾綣。隆恩盛禮。非臣子所敢安也。所敢當也。臣無才行。且無功烈。有何恩禮之可加。058_526d而殿下之惓惓於愚臣。至於如此。臣驚惶感泣。罔知所喩。臣生無以報殿下之恩遇。竊計以爲進盡危言。折首不悔。以少悟殿下之心。則瞑目於泉下矣。嗚呼。今之國勢。日益殆矣。大臣無擔當王事之心。而有全軀保位之計。安坐廟堂。泛泛度日。而時承收議之命。或獻利國之策。則殿下不納用焉。殿下之深親篤信而言聽計從者。非大臣也。諫臣無謇謇諤諤之風。而有容容唯唯之習。美食臺府。揚揚過時。而間有敢諫之臣。或進逆耳之言。則殿下輒擯棄焉。殿下之親信而聽從者。非諫臣也。然則殿下之所親信聽從者誰耶。臣雖無狀。逍遙物外有年矣。視名利若枷杻。富貴如浮雲。何敢發不忠之言。以負殿下。而殿下全不聽納。殿下之獨信偏聽者。必有其人。臣未知殿下信宮妾婦寺耶。信巫覡盲瞽耶。信戚里私昵耶。如或信宮妾婦寺之言。則因以058_527a信巫覡盲瞽。信戚里私昵。而終至於親小人遠賢臣也的矣。嗚呼。殿下之心。以爲國家已安。人民已保。而無危急淪喪之患耶。一國之人。皆是讒佞欺負之徒。而無忠臣義士仁人君子耶。雖號爲忠臣義士仁人君子。而其心皆不可信耶。獨信妾婦巫盲戚里小人。偏聽其言。而不信忠賢者。歷代帝王。未有不亡國敗家者也。爲帝王者。孰不欲得忠臣而信之。顧其所信。或在於婦寺。或在於戚里。或在於小人。卒不免於亂亡其國者。何也。以其心之不養也。孟子曰。養心莫善於寡欲。殿下誠能以養心爲出治之大本。以寡欲爲養心之至要。寡其欲而至於人欲淨盡。養其心而至於道心常著。則虛明瑩澈。如驪珠獨耀於滄海。通靈洞照。若桂輪孤朗於碧天。淫詖遁邪之說。莫得以昡其是非。兇奸佞慝之徒。莫得以遁其情狀。君子小人。知之何難。眞忠實奸。058_527b辨之亦易。殿下信一忠臣。則忠臣皆出而不處。信一賢臣。則賢臣皆進而不退。而仁人君子。亦莫不然。拔茅彙征。濟濟盈朝。同心協力。共扶顚危。如此而人心離天命去。而國無中興之盛。請斬臣頭。以正欺君之罪。嗚呼。言不用計不施。而不能退不能去者。群臣皆然。殿下不用臣言。而欲用臣身者。是縶臣以爵。維臣以職。而使如群臣也。殿下視群臣如犬馬。而驅臣入於其中。臣雖至愚。義不可入也。榮其號利其祿。而不以國事爲憂者。群臣之所爲。而非臣之所能也。臣之言。雖愚且激。無非出於願忠之一心。殿下若於永夜之半。淸朝之早。試一省念。則亦或少補於固本寧邦之萬一矣。伏願殿下勿復虛加恩禮而奪臣志焉。

 

 

 忘憂先生文集卷之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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救永昌大君疏 擧朝庭請殺大君。人莫敢言。先生首起救之。 a_058_527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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癸丑五月日有旨
今觀慶尙道觀察使狀啓。知卿病辭。深用缺然。目今國家內外058_527c之憂俱極。濟亂之策。必資忠賢。勉起上來。以濟國事事有旨。
伏以臣年近七十。病不離身。形枯心喪。雖生如尸。前承召命。未卽奔赴。罪宜萬死。而譴誅不加。聖旨又降。憂內外之虞。思濟亂之策。至以勉起濟國事爲諭。臣不勝感激感泣之至。臣雖無濟亂之才。豈無願忠之心乎。輿疾登途。以謝天恩。臣之分也。而臣聞逆賊以推戴爲言。大君方在群臣請誅之中。嗚呼。大君何罪。群臣請誅之意。臣實未知也。臣之愚意。以爲今日之不可用法於大君。猶前日之不可全恩於逆珒也。彼逆珒者。罪惡貫盈於平日。逆謀昭著而難掩。罪在王室。不可不誅。而朝臣敢發全恩之說。今大君則年纔八歲云。八歲之兒。必不知逆謀之爲何事。豈有與知之理乎。大君無一毫可殺之罪。非但一國人民皆知058_527d之。天地鬼神亦必知之。而朝臣乃開請誅之喙。前則欲釋大罪。今則欲殺不辜。是誠何心哉。臣實未知也。臣聞備忘記有曰。先王遺命。正爲今日慮也。在天之靈。陟降于玆。安忍用法。大哉聖言。仁哉聖心。擴是心踐是言。親親而仁民。民心咸悅。則延國祚於無疆。猶反手也。滿朝群臣。不知將順聖意。導殿下於無過之地。臣實痛之。不但此也。大君之誅。慈殿必不能忍。不能忍而如或自決。則殿下將何以有辭於天下後世乎。臣恐群臣將使殿下陷於大不義也。如使大君及其長也。心如逆珒。行如逆珒。而謀爲不軌。則罪不可赦。雖誅之亦可也。且逆賊推戴之言。雖無與於大君。而如有與推戴之謀者。在於朝廷之上。而或免於刑戮。則肘腋之蜂蠆。懷袖之蛇蝎。將來之禍。有不可言。伏願殿下有罪必誅。無罪必赦。有罪而不誅。無罪而不赦。則國不國058_528a矣。臣之所言。每每與群臣不同。言不同則心不同。心不同而相容者未之有也。豈有不相容而能濟國事者乎。伏願殿下速遞臣職。放臣於煙霞之外。俾得成素志焉。
答曰。省疏良用嘉焉

 

 

忘憂先生文集卷之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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張浚論 a_058_528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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論曰。不知天下之忠臣者。不可謂之忠。不知天下之賢臣者。不可謂之賢。我旣忠則心與之同。豈不知天下之忠乎。我旣賢則道與之同。豈不知天下之賢乎。旣不能知其忠賢。又從而誣之以罪。擠之於不測之禍而無所惜焉。則其心之所存。誠可得以知也。昔宋張魏公浚。當高宗南渡之際。宣撫川陜。有補天浴日之功。知樞密院。每奏對必言讐恥之大。帝爲改容流涕。及孝宗058_528b卽位之初。都督江淮。志在恢復。命將出師。中原震動。帝見浚顔貌曰。朕倚魏公如長城。竟以讒罷。功卒不成。天下後世之人。孰不信其忠而稱其賢乎。然而其所以爲忠者。大有所未盡焉。何則李綱之入相於建炎也。以英哲勉人主。以攘夷爲己任。修軍政改弊法。分命群帥。益據形便。以爲必守中原之計。朱子所謂方成朝廷者此也。而浚劾之以十罪。嗚呼。浚獨何心。劾罷李綱於此時哉。綱以一身用舍。爲社稷安危。爲相僅七十餘日。而其忠誠義氣。凜然動乎遠邇。金人亦問其安否。使得畢力於靖康。殫慮於建炎。莫或撓之。則二帝必無北狩之辱。高宗必無南渡之患。而前則耿南仲沮之。後則張浚劾之。而國不可爲矣。噫。浚以君子之口。發小人之言。遂汪,黃陷綱之計者。獨何心哉。彼潛善,伯彦者。誤高宗者也。敗宋室者也。陷中原於夷虜者也。罪不058_528c容於誅者也。浚爲潛善之客。而劾罷李綱。使黃,汪得志。則誤高宗者。非黃,汪也。乃浚也。敗宋室者。非黃,汪也。乃浚也。陷中原於夷虜者。非黃,汪也。乃浚也。其罪豈在於黃,汪之下乎。岳飛之宣撫京湖也。數論恢復之略。帝召至寢閣。命之曰。中興之事。一以委卿。飛遂圖大擧。秦檜忌之請詔。飛詣都督張浚議事。議不克合。浚艴然怒。奏飛積慮在乎倂兵。奏牘求去。意在要君。嗚呼。浚獨何心。敢奏岳飛以要君哉。岳武穆背涅四字。奮不顧身。內平劇盗。外抗强胡。虜人畏服。不敢以名稱之。至以父呼之。且曰。撼山易。撼岳家軍難。若假飛以數年。淵聖必可歸。中原必可復。而始則張浚誣以要君。以撓寢閣之命。終則秦檜矯詔殺之。而戎虜不可復制矣。噫。浚以君子之口。發小人之言。啓秦檜殺飛之意者。獨何心哉。彼秦檜者。忘君父者也。心與虜一者也。倡主和058_528d議。卒亡宋室者也。罪不容於擢髮而誅之者也。浚誣以要君二字。萌孽秦檜莫須有之三字。則殺飛者非檜也。乃浚也。忘君父者非檜也。乃浚也。卒亡宋室者非檜也。乃浚也。其罪豈在於秦檜之下乎。吾觀狄仁傑薦張柬之有奇才。卒建反正之勳。畢士安擧寇凖有大節。終辦澶淵之功。忠臣之心。固宜如此。夫李綱,岳飛之忠誠勳烈。有非張,寇之比。而浚也非獨無狄,畢之心。陷綱同於黃,汪。誣飛無異秦檜。忠賢之用心。固如是乎哉。或者以爲知人則哲。堯舜其難之。是以諸葛孔明之明而不能知馬謖。司馬君實之賢而不能識王安石。張魏公不過無知人之明耳。何其過之深也。曰。知人之難。古今通患。然知人於未試之前者。爲難。已試之後。何知之難。靑天白日。奴隷亦知其淸明。不知李綱,岳飛之忠者。無目者也。無耳者也。浚非無目而無耳者也。蓋058_529a其心有所蔽而然也。蔽於黃,汪而不知李綱之忠節。蔽於秦檜而不知岳飛之忠烈。世之君子。將欲盡忠於王室。身無黨而心無蔽。然後庶乎其可也。嗚呼。魏公於平生。未嘗不以忠賢自期。人亦莫不以忠賢許之。而不劾黃,汪而劾李綱。不奏秦檜而奏岳飛。其故何哉。必其自許太高。自是太深。心偏而不豁。學執而不明。以天下之賢。爲皆不己若也。其心以爲雖無李綱。我可以爲李綱之業。雖無岳飛。我可以爲岳飛之勳。故乃敢陷之以十罪。誣之以要君。而不自知其僨事覆國之罪。反在於黃,汪,秦檜之上。噫。使其得君專而盡行其志。則忠勳皆斥而奸回俱進。國受其敗也歟。謹論。

 

 忘憂先生文集卷之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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贈女壻成以道書 a_058_529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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世之人。見新郞形容之美。歌舞之善。例以奴婢田地別給。而余058_529b則亂離之後。奴婢盡死於飢餓。雖有一二口餘存。而盡分於子女。無一口可別給也。田地則好田好地。處處陳荒。欲耕則無禁。不須別給也。欲以一言爲平生所用之物。雖非世俗之所給。實亦古人之攸寶。勤以讀書。愼以持身。孝以事親。忠以事君。其於行世也。萬倍於有奴婢千百口者。余之所贈。不亦大乎。請服膺而勿失之。人無與爭者。

 

 

忘憂先生文集卷之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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以江舍與李道純書 a_058_529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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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虞以天下與賢。吾以江舍與賢。所與之大小不侔。雖若天淵。其所以與之之意。堯舜與我同也。吾觀作亭於江上者。鮮有能守之者。其故何哉。以不能與賢也。今吾不私一亭。與之於君者。知君有喜好山水之心。而可以守吾亭也。君能以吾心爲心。得賢而與之。後之賢者。亦以君心爲心。傳之於可守之賢。則可以058_529c永終不墜矣。

 

歸江亭 a_058_529c
  


誤落塵埃中。三千垂白髮。秋風野菊香。策馬歸江月。

詠懷 a_058_529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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平生慕節義。今日類山僧。絶粒無飢渇。心空息自凝。


心田無草穢。性地絶塵棲。夜靜月明處。一聲山鳥啼。


儒家明性理。釋氏打頑空。不識神仙術。金丹頃刻成

 

 
 
 

 

忘憂先生文集龍蛇別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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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龍蛇別錄]
[壬辰] a_058_537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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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四月]
壬辰四月十三日。倭寇下陸。東萊先陷。列鎭瓦解。公以二十二日。率家僮十餘人。首起兵於宜寧。自號天降紅衣將軍。於是盡散家貨。開庫任取。募得勇士健丁數百人。擊鼓吹角。揮旗大呼。追逐岐江上來賊三十餘艘。以捍蔽江右。自謂家世世受國恩。宜以死報。以討賊復讐爲己任。
時草溪郡守李惟儉。自金海城中掊鎖先逃。不還于郡。郡無主吏。民亂取糧械。公新起兵。無軍器。卽馳往載軍器以來。宜寧官廩。已經焚蕩。惟新反縣倉獨全。公以爲不可空棄賊手。開封搬運。以充軍餉。臚傳飢民任其取去。又取晉州漕運稅米一船。軍勢漸振。人皆樂赴。
駐兵于砥山。列陣于沿江上下數十里。以遏江右之寇。寇不得058_537b渡江而西。賊將安國司聲言取湖南。日引兵西。前鋒已到鼎津。鼎津距公軍亡數十里。津有淖不可行。賊先使導者。擇高燥設木旗之。將以朝日渡。公詗知之。用夜半率戱下壯士。馳至其所。拔其木易置之淖中。因伏以俟。賊果至。至則陷淖中莫能脫。伏遂發。幾覆之。未幾賊大至。公度兵少非計難卒破。不破無以保鼎津。乃擇驍壯者十數以從。自衣紅衣乘白馬。從者皆如公服。騎亦如之。鼓譟出。直薄賊壘。左右馳以誘之。賊貎其爲將。空壘而追。行十餘里入山谷。失公所在。賊方驚疑。忽見前崖。又有紅衣白馬者鼓而噪。賊又大驚追之。俄傾又失之。但聞鼓角殷山。旗幟萆阿。賊愈益驚。咸以爲神且眩。不識衆寡。不敢逼。公伏强弩。徼之於弇中。從樹木叢密。射之輒殪。追覆之江岸。其設機制敵。少擊衆多類此。
058_537c招諭使金誠一至咸陽聞之。大奇之。卽貽書招之。公以赴戰冠服。往見于丹城。與語益奇之。遂相許以死。宜寧一境之人。皆屬公聽其指揮。更無所句當。咸安郡守柳崇仁匿山中。涉鼎湖潛過宜界。公知之逆出。數以棄城逃歸之罪。崇仁愧屈。仍留公陣下。後陞兵使。
於是。諸義兵爭起。本道則如金沔諸公是也。他道則高敬命起於潭陽。金千鎰起於錦城。趙憲起於公山。屢摧勍敵。名顯當世。然卒皆敗死。業不竟。獨公提孤軍。大小數十餘戰。未嘗一敗。
招諭使以前奉事尹鐸爲三嘉代將。領軍赴公。公遂領二縣兵。設大陣于鼎湖世干兩處。交馳互駐。一以拒昌原,熊川出沒咸安之賊。一以捍靈山,昌寧充斥洛江之寇。三嘉則以學諭朴思齊爲都摠。而許子大造軍器。鄭晊調軍糧。盧錞主運饋。宜寧則058_537d李雲長爲收兵將。沈大承,裵孟伸爲先鋒將。權鸞爲突擊將。鄭演爲督後將。許彦深典軍餉。姜彦龍治兵械。鄕之饒户富室。爭擊牛出米。輪日以餉軍。
尹鐸率三嘉軍駐于龍淵。沈大承率宜寧軍駐于長峴。沈紀一守鼎湖之船。譏察過涉。安起宗設伏于柳谷。李雲長管候于洛西。權鸞遮截于玉川臺。吳牧使澐收兵于白嶺。前後所得二千餘人。公軍于世干。居中而統制之。左洛江右鼎湖。沿遡上下六十里之間。偵軍森立。應報輒馳。或擊或逐。賊不得肆其衝突。餘民賴以作農。
公自初禁斬曰。人當爲國討賊。獻首要功。於義不可。貪功喜斬。必多遇害。勅諸軍毋得斬馘。李魯謂公曰。公之本意甚善。諸人從公力戰者。其孰無功名之心乎。其終必怠。其後砥山之捷。射058_538a殺無慮。始許斬首。士爭赴水。所斬七十餘級。皆不自與焉。軍官曹士男先登上船。揮劍亂斫。而終爲佯死倭所刺。公大慟曰。吾之禁斬。正爲此也。
時江左倭賊。屯據沿路官府。四出摽掠。恣行殺戮。或懸首或串屍。夾路左右。羅列十里。孑遺餘民。竄身無所。於是公自宜寧領軍來。耀兵于玄風率禮之鸛山上。使突騎直至邑底以誘之。賊設柵自衛。畏縮不出。公夜令人上琵瑟山。逶迤十餘里。人持兩炬。炬皆三頭。鼓角齊發。一時擧火。或遠或近。若將掩襲。忽焉火滅。寂若無人。俄頃之間。又復如之。賊大驚疑。過二夜。焚官倉遁去。昌寧賊望風亦遁。
公抽率精銳。銜枚疾馳。乘曉襲靈山屯賊。適會玄風兵聞之。亦來赴闘。未及申令。妄叫城外。賊覺之。空壘迎擊。放丸如雨。士卒058_538b扶公上山。爭以身蔽之。中丸斃踣於前者十二人。褊將周夢龍曰事急矣。乃揮劍躍馬。冒入賊鋒。衝突再三。賊挫銳退却。公之能得人死力如此。未幾賊遁去。
巡察使金睟協二湖兵勤王。到龍仁敗還。至山陰。移關列邑。分軍諸將。使義兵潰裂。不得有所處分。民心益拂。衆怒齊發。公乃移檄金睟。數以八罪。欲移兵討之。金景謹夜走睟營告變曰。郭某將爲不軌。欲害令公。領大軍來。宜速避之。睟駭怖罔措。欲爲自盡之計。爲軍校所止。因天未曉。退遁咸陽。牢閉城門以待之。睟自咸陽還至居昌。以叛逆論啓。招諭使貽書公及睟兩止之。遂反覆馳啓以申救之。公亦上疏行朝以自明。自上嘉之。授公刑曹正郞。
睟軍官金景訥之徒。指公爲逆賊。傳檄于陣中。且移書于列陣。058_538c三嘉進士尹彦禮,學諭朴思齊等。通文于右道各邑。其略曰。頃見巡察軍官輩送郭義士書。一則曰檄郭某黨與。一則曰檄逆賊郭某。郭某果是逆賊而有黨與者乎。郭義士當列郡奔潰之時。奮百死不顧之計。忠義激切。名正言順。蔽遮江淮。賊不敢西。人有耳目。豈待贅說。噫。忠如郭義如郭。果亦未免逆賊之名歟。義士頃者之檄。信有輕動者。而亦不過忠義憤激之過擧。彼軍官之輩。徒知有迎倭之巡察。而不知有討賊之義士。傳檄構捏。欲逞其私憾。指忠義爲逆賊。欲將此意。上達宸聽。北天遼邈。籲呼莫及。伏願諸處義兵。各出通文。使義士明白之心。不爲讒構者所陷。不勝幸甚。嗚呼。秉彝良性。人皆有之。逆順是非。自有公論。而敢將大惡不道之名。欲加忠臣義士之身。寧非可痛歟。惟僉君熟察之。
058_538d招諭使久駐居昌。賊覘知晉陽無將。昌原賊與鎭海賊相應。由固城漫澶於泗川。大擧侵晉。招諭使聞晉州急。星馳至丹城。悉起咸陽,山陰,丹城兵以赴之。督金時敏使不敢動。又勅昆陽郡守李光岳爲右翼以救之。公不待命而先走入城。軍勢頗張。賊至矗石樓下。只隔一水而不敢逼。招諭使亦繼至督戰。於是諸將益用命。合勢追擊。賊狼狽而遁。所殺傷無慮。由是晉陽獲完矣。

[七月]
七月。朝廷以招諭使爲左監司。宣傳官來傳前後有旨。始知箕城失守。大駕移幸龍灣。招諭使遂撫膺大慟曰。白髮孤臣。奉命南來。不能掃蕩寇賊。坐使鑾輿播遷。俯仰天地。跼蹐無歸。哽咽不成聲。左右皆泣。招諭使以爲我旣爲左監司。右道事今不句當。而自初主管義兵。若委以常規。目擊可虞之機。058_539a而不爲啓達。則實非人臣之義。乃申啓條陳。有曰。宜寧縣監吳應昌棄官遁走。倭寇焚蕩。萬無保全之勢。郭再祐首先起兵。宜寧一縣爲一道保障。賊不敢窺覦江西。再祐之功。實道內之所共知。新縣監金忠敏曾爲本邑築城監董官。毒痛一邑。民視之如豺虎毒藥。忽聞來爲縣監。大小人民。皆懷潰散之心。當此危難之日。順民心爲便。且係義兵之成敗。敢此越職言事。惶恐待罪。
草溪儒生李大期等三十餘人。上招諭使挽轅書。其略曰。郭義士某提劍倡義。忠憤凜凜。而第以狅簡不裁。觸忤方伯。所恃者惟我閤下。而閤下一去。勢將難爲。無郭某則無宜寧。無宜寧則三嘉以西將次第失守矣。以此觀之。閤下去留。豈不爲義兵聚散之所關。國家存亡之攸係也哉。惟閤下熟察之。
058_539b江右諸邑儒生。上請留招諭疏。陜川,草溪,三嘉,晉州,丹城則以進士朴而文爲疏頭。其略曰。郭再祐誓心白日。期洒國恥。奮起鄕曲。倡率同志。遮截遡洛之寇。自江以西六七邑。免被兵燹。爲今日之卽墨。恢復根基。因此可立。而睟負重罪。見擯物議。慚自己無可貰之效。忌他人有垂成之功。欲植私黨。以壞義旅。罔上行私。無所不至。一豺狼當途。而衆狐狸隨之。一魅魑瞰室。而百奸鬼附之。媢疾義士。百計陰中。指嗾鷹犬。務行胸臆。於是金景訥金忠敏輩爭望風旨。讐斥義兵。殆無餘力。雄唱雌和。列郡滔滔。則興衰撥亂。恐無日矣。匡復之基。在於嶺南。而重恢之責。在於誠一。誠一若奉綸命渡江而東。則邪黨張眶。義旅摧沮。今日之事。豈止於痛哭流涕而已哉。
居昌,安陰,咸陽。則以進士鄭惟明爲疏頭。其略曰。今日義兵之058_539c終始成就者。無非誠一之功也。誠一移拜左監司。恢復之功。不能無礙於垂成。用舍之道。不無緩急於左右。何以言之。郭再祐傾財破産。募兵討賊。未免爲奸人所沮。誠一與書以奬之。馳啓以救之。由是益自感激。身任江淮之保障。功爲南道之第一。誠一去則郭再祐之事慮有掣肘之患。而區區數邑。亦難保也。中興之功。不復望矣。未幾朝廷復以誠一還授右道。
湖南義兵將前府使崔慶會。領軍千餘。來見招諭于山陰。使駐于晉州之薩川倉。金海賊連釜山會昌原。其衆數萬餘。不得橫渡鼎津。合勢長驅。直擣晉陽。圍之十匝。晝夜攻之凡七日。公使先鋒將沈大承夜到州北山。列炬鼓譟。大呼曰。紅衣將軍與全羅義兵。明日當來。合軍勦滅。汝賊其知之。適湖南兵自丹城向薩川縣境。賊望見之。與公言合。卽驚駭。是日焚其屯幕。燒其積058_539d屍。顚沛而去。


 

 

 

忘憂先生文集龍蛇別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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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龍蛇別錄]
[癸巳] a_058_539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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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四月]
癸巳四月二十日。京城復。招諭使遘厲疾。以晦日卒於晉州。惟朴正郎惺,李典籍魯終始診其病。治其喪。爲來問疾。會哭者公及吳澐,李光岳,李瀞,郭䞭矣。

[六月]
六月。朝廷聞賊南下。連下旨督諸將追賊。關白平秀吉閱晉州城圖。憤年前之再敗。遣人責行長,淸正等曰。不破晉州。毋得渡海。於是賊大擧圍晉州。都元帥金命元,巡察使權慄以下官義兵皆聚於宜寧。慄狃於幸州之捷。欲渡岐江。前進逆擊。公及高彦伯曰。賊勢方盛。我軍多烏合。堪戰者少。不可輕進。他人依違而已。巡邊使李薲,從事成好善騃不曉事。責諸將逗留。與慄議合。遂過江進至咸安。諜報賊從金海大至。俄聞賊砲。人人洶懼。還渡鼎津。望見賊兵蔽野塞川。諸將各自散去。權慄,金命058_540a元,李薲皆向全羅。惟倡義使金千鎰,兵使崔慶會,忠淸兵使黃進,全羅義兵復讐將高從厚等入晉州。賊圍城百重。連亘百餘里。時劉摠兵綎在八莒。吳游擊惟忠在鳳溪。環視莫敢救。八日而城竟陷。軍民死者六萬餘人。得脫者纔若干。自有倭變以來。人死未有如此之甚者。公前此再救晉州之急。至是不往焉。其審勢料敵如此云。

 

 

忘憂先生文集龍蛇別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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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龍蛇別錄]
[甲午] a_058_540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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甲午。公以星州牧使兼助防將。治三嘉之岳堅城。是秋棄星州。以義兵大將駐兵于宜寧之嘉力。時倭兵盡撤。退屯沿海。金德齡,洪季男,李時言,諸勇將皆在公陣下。公以李光岳爲副將。以金德齡,洪季男爲左右營。舟下沿海。直抵東萊。德齡素號飛將軍。季男驍勇亦亞之。兩將齊躍駿馬。並揮長劍。較藝售技。閃忽馳突。馬若龍驤。劍如電燁。賊望見目奪膽落。且德齡所將皆湖058_540b南勇士。奇材優人。以錦衣彩服。或於平地飜身而超。或於馬上倒首而立。豎旗鳴鼓。累次挑戰。賊閉門自固。不敢出頭。公以舟師薄賊壘之下。則唯於城上齊放鐵丸。或放火砲而已。公與李光岳對坐行酒。火砲過前。大如鵝卵。穿船兩舷。落於水中。鳴沸逾時。談笑自若。神色不變。賊終始不出。不得交鋒。又糧資器械不可久留。乃整軍而還。


 

 

 

 忘憂先生文集龍蛇別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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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龍蛇別錄]
[丁酉] a_058_540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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丁酉秋。賊有再動之勢。公以防禦使。新築玄風之石門山城。乃馳啓曰。因山爲城。城不築而自高。因江爲池。池不鑿而斯深。欲爲固守計。城未及完。賊大擧入寇。公領密靈昌玄四邑兵。移守昌寧之火旺山城。公撫士卒如家人。雖最下者。皆得盡其情。用法雖親不貸。嘗戒諸弟曰。勿以親弟。妄有所恃。由是諸子弟皆斂迹不敢出。賊將淸正引大兵至城下。劍㦸耀日。旌旗蔽野。058_540c瀰漫連亘。極目無涯。將士咸惴惴無人色。公靜以鎭之。賊望見形勢斗絶。戎陣整齊。纔經一晝夜。不犯而去。公遣兵尾擊。俘斬亦多。權應銖欲爲外援。領精銳馳到城北。耀兵於高佐巖之山上。賊方引去。竟不回鋒交戰。
宣武錄功也。逾年磨勘。蹊逕甚多。微勞小功。亦皆冒錄。公不得元勳。人以李廣不侯比之
 
 
 
 

 

국조보감 제31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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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조조 8
25년(임진, 1592)


○ 2월. 대장(大將) 신립(申砬)과 이일(李鎰)을 파견하여 각 도의 병기 시설을 순시하도록 하였다. 이일은 양호(兩湖 호서(湖西)와 호남(湖南)임)로 가고, 신립은 경기(京畿)와 해서(海西)로 갔다가 한 달 뒤에 돌아왔다.
○ 4월. 14일 왜적이 크게 군사를 일으켜 침략해 와서 부산진(釜山鎭)을 함락시켰는데 첨사(僉使) 정발(鄭撥)이 전사하고, 이어 동래부(東萊府)가 함락되면서 부사 송상현(宋象賢)도 전사하였다. 평수길(平秀吉)이 우리나라가 그들에게 명 나라를 공경하는 길을 빌려주지 않는다는 이유로 마침내 여러 섬의 군사 20만을 징발하여 직접 거느리고 일기도(一歧島)까지 이르러 평수가(平秀家) 등 36명의 장수에게 나누어 거느리게 하고, 대마도주 평의지(平義智)와 평조신(平調信)ㆍ행장(行長)ㆍ현소(玄蘇)를 향도로 삼아 4~5만 척의 배로 바다를 뒤덮고 와 이달 13일 새벽 안개를 틈타 바다를 건너왔다.
부산 첨사 정발은 전선(戰船)에다 구멍을 뚫어 가라앉히게 하고 군사와 백성들을 모두 거느리고 성가퀴를 지켰다. 이튿날 새벽에 적이 성을 백겹으로 에워싸고 서쪽 성 밖의 높은 곳에 올라가 포(砲)를 비오듯 쏘아대었다. 정발이 서문(西門)을 지키면서 한참 동안 대항하여 싸웠는데, 적의 무리가 화살에 맞아 죽은 자가 매우 많았다. 그러다가 정발이 화살이 다 떨어져 적의 탄환에 맞아 전사하자 성이 마침내 함락되었다.
동래 부사 송상현은 지역 안의 주민과 군사 그리고 이웃 고을의 군사를 불러 모두 데리고 성에 들어가 나누어 지켰다. 병사 이각(李珏)도 병영(兵營)에서 달려왔으나 조금 지나서 부산이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핑계대기를 “나는 대장이니 외부에 있으면서 협공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고 즉시 나가서 소산역(蘇山驛)에 진을 쳤으므로 즉시 포위를 당하였다. 상현이 성의 남문에 올라가 전투를 독려했으나 반나절 만에 성이 함락되었다. 상현은 갑옷 위에 조복(朝服)을 입고 의자에 앉아 움직이지 않았다. 적이 마침내 모여들어 생포하려고 하자 상현이 발로 걷어차면서 항거하다가 마침내 해를 입었다.
성이 장차 함락되려고 할 때에 상현은 죽음을 면하지 못할 것을 알고 손수 부채에다 “달무리 끼고 포위당한 외로운 성에 대진의 구원병은 오지를 않네. 군신의 의리는 중하고 부자의 은혜는 가볍게 되었어라.[孤城月暈 大鎭不救 君臣義重 父子恩輕]”고 써서 집안 종에게 주어 그의 아비 복흥(復興)에게 돌아가 보고하게 하였다. 죽은 뒤에 평조신이 보고서 탄식하며 시체를 관(棺)에 넣어 성밖에 묻어주고 푯말[標]을 세워 식별하게 하였다.
갑오년(1594, 선조 27)에 병사(兵使) 김응서(金應瑞)가 울산(蔚山)에서 청정(淸正)을 만났을 때 청정이 그가 의롭게 죽은 상황을 갖추어 말하고, 또 집안 사람이 시체를 거두어 반장(返葬)하도록 허락하는 한편 경내를 벗어날 때까지 호위하여 주었다. 그 뒤 이조 참판에 추증하고 그의 아들 중 한 사람에게는 벼슬을 내리도록 명하였다. 서인(庶人)인 신여로(申汝櫓)가 상현을 따랐었는데 상현이 돌려보냈었다. 그러나 그는 도중에서 부산이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내가 난리를 당하여 은혜를 저버릴 수 없다.” 하고 도로 성으로 들어가 함께 죽었다고 한다.
○ 적에 대한 보고가 이르자 대신과 비변사가 빈청(賓廳)에 모여, 이일(李鎰)을 순변사(巡邊使)로 삼아 중로(中路)에 내려보내고, 성응길(成應吉)을 좌방어사로 삼아 좌도(左道)에 내려보내고, 조경(趙儆)을 우방어사로 삼아 서로(西路)에 내려보내고, 유극량(劉克良)을 조방장으로 삼아 죽령(竹嶺)을 지키게 하고, 변기(邊璣)를 조방장으로 삼아 조령(鳥嶺)을 지키게 하고, 전 강계 부사(江界府使) 변응성(邊應星)을 기복(起復)시켜 경주 부윤으로 삼자고 청하였다. 그러나 모두 현재 소유한 병력이 없어 단지 스스로 군관(軍官)을 뽑아 대동하도록 하였다. 이로부터 함락되고 패배하였다는 보고가 잇따라 이르니 도성의 인심이 크게 흔들렸다. 당시 사방에서 군사를 징발하였으나 아직 이르지 않으므로 이일이 장기(壯騎)와 군관 60여 인을 대동하고 길을 떠나 4천여 명의 군사를 수습하고 길을 재촉하여 달려갔다.
대간이, 대신(大臣)을 체찰사(體察使)로 삼아 여러 장수들을 단속하게 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청하였다. 이산해(李山海)가 유성룡(柳成龍)을 보낼 것을 청하니 따랐고, 김응남을 부사(副使)로 삼았다. 성룡이 신립(申砬)에게 계책을 물으니, 신립이 말하기를,
“이일이 열세한 군사를 거느리고 남쪽으로 내려갔으나 후속 병력이 없다. 체찰사가 내려간다 하더라도 전투하는 장수가 아니니 무장(武將)을 급히 먼저 보내 이일을 지원하도록 하여야 한다.”
하였다. 이에 성룡이 김응남과 뵙기를 청하여 신립을 먼저 보내기를 청하자, 상이 신립을 불러 하문하니 신립도 사양하지 않으므로 마침내 도순변사(都巡邊使)로 삼았다. 신립이 떠나려 할 때에 상이 불러 보고 보검(寶劍)을 내리면서 이르기를,
“이일 이하 명령을 따르지 않는 자는 모두 참(斬)하라.”
하였다. 당시에 상이 김여물(金汝岉)의 재능과 용맹을 아까워하여 방어해야 할 긴요한 곳에 정배(定配)시켜 공을 세워 보답하도록 명하였다. - 이에 앞서 김여물이 의주 목사로 있으면서 사건에 연루되어 체포되었었다. - 여물이 출옥(出獄)하자 성룡이 불러 계책을 의논해 보고 크게 기특하게 여겼다. 성룡이 아뢰기를,
“신이 이번에 여물을 처음 보고 병사(兵事)를 의논해 보니, 무용(武勇)과 재략(才略)이 남보다 뛰어날 뿐만이 아닙니다. 막중(幕中)에 두고 계책을 세우는데 자문하도록 하였으면 합니다.”
하니, 상이 허락하였다. 신립이 또 청하기를,
“신이 일찍이 서로(西路)의 진영을 맡았을 적에 여물을 알았는데 재능과 용맹뿐만이 아니라 충의(忠義)의 인사였습니다. 신에게 소속시켜 먼저 가게 했으면 합니다.”
하니, 상이 또 따랐다. 신립이 거느린 무리는 도성의 무사(武士)ㆍ재관(材官)과 외사(外司)의 서류(庶流)ㆍ한량인(閑良人)으로 활을 잘 쏘는 자 수십 명이었다. 조정의 관원으로 하여금 각기 전마(戰馬) 한 필씩을 내어 돕도록 하였다. 이들이 인근 고을을 순행하며 군사를 수합 하였는데 겨우 80명이었다.
○ 왜적이 상주(尙州)에 침입했는데, 이일의 군대가 패배하여 돌아왔다.
종사관(從事官)인 홍문관 교리 박지(朴篪)ㆍ윤섬(尹暹), 방어사 종사관인 병조 좌랑 이경류(李慶流), 판관 권길(權吉)이 모두 죽었다. 이일이 문경에 이르러 장계를 올려 대죄(待罪)하고, 다시 조령을 넘어 신립의 군진으로 향하였다.
○ 적병이 충주(忠州)에 침입하였는데 신립이 패하여 전사하였다. 처음에 신립이 군사를 단월역(丹月驛)에 주둔시키고 몇 사람만 데리고 조령에 달려가서 형세를 살펴보았다.
김여물이 말하기를,
“저들은 수가 많고 우리는 적으니 그 예봉과 직접 맞부딪칠 수는 없습니다. 이곳의 험준한 요새를 지키면서 방어하는 것이 적합합니다.”
하고, 또 높은 언덕을 점거하여 역습으로 공격하자고 하였으나 신립이 모두 따르지 않으면서 말하기를,
“이 지역은 기마병(騎馬兵)을 활용할 수 없으니 들판에서 한바탕 싸우는 것이 적합하다.”
하였다. 그리고는 마침내 장계를 올려 이일을 용서하여 종군(從軍)하게 해서 공로를 세우도록 청하고 드디어 군사를 인솔하여 도로 충주성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여물은 틀림없이 패할 것을 알고 종을 보내어 아들 김류(金瑬)에게 편지를 부치기를,
“삼도(三道)의 군사를 징집하였으나 한 사람도 오지 않았다. 남아(男兒)가 나라를 위하여 죽는 것은 진실로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나라의 수치를 씻지 못하고 웅대한 뜻이 재가 되고 마니 하늘을 우러러보며 탄식할 뿐이다.”
하였다. 신립이 군사를 인솔하여 탄금대(彈琴臺)에 - 충주 읍내에서 5리쯤 떨어진 곳에 있다. - 나가 주둔하여 배수진을 쳤는데, 이 달 27일에 적이 이미 조령을 넘어 단월역에 이르렀다.
이튿날 새벽에 적병이 길을 나누어 대진(大陣)은 곧바로 충주성으로 들어가고, 좌군(左軍)은 달천(達川) 강변을 따라 내려오고, 우군(右軍)은 산을 따라 동쪽으로 가서 상류를 따라 강을 건넜는데 병기가 햇빛에 번쩍이고 포성이 천지를 진동시켰다. 신립의 군사가 크게 패하였으며, 적이 벌써 사면으로 포위하므로 사람들이 다투어 물에 빠져 흘러가는 시체가 강을 덮을 정도였다.
신립이 여물과 말을 달리면서 활을 쏘아 적 수십 명을 죽인 뒤에 모두 물에 뛰어들어 죽었다.
이일은 사잇길을 따라 산으로 들어갔다가 왜적 두세 명을 만나 한 명을 쏘아 죽여 수급(首級)을 가지고 강을 건너서 치계(馳啓)하였다. 그리하여 조정에서 처음으로 신립이 패하여 죽은 것을 알았는데, 병조에서는 마침내 이일의 죄를 용서하였다.
○ 이조 판서 이원익(李元翼)을 평안도 도순찰사(都巡察使)로, 최흥원(崔興源)을 황해ㆍ경기도 도순찰사로 삼아 모두 당일에 떠나도록 하였는데, 이는 장차 상이 서쪽으로 떠날 것을 의논할 때 대비하기 위해서였다. 원익은 일찍이 안주 목사(安州牧使)를 지냈고 흥원은 황해 감사를 지냈는데, 모두 은혜를 베푸는 정치를 하여 민심이 귀의하였기 때문에 그들을 먼저 보내 어루만져 달램으로써 순행(巡幸)에 대비하려는 것이었다.
○ 이 달 29일 저녁에 상이 충주에서 패전한 보고를 듣고 동상(東廂)에 나아가 서쪽으로 떠날 계획을 의결하였다. 대신들이 아뢰기를,
“일의 형세가 여기에 이르렀으니 잠시 상께서 평양으로 가셔서 명 나라에 군사를 청해 회복을 도모해야 합니다.”
하였다. 장령 권협(權悏)이 뵙기를 청하여 경성(京城)을 지킬 것을 청했는데, 유성룡이 아뢰기를,
“권협의 말이 무척 충성스럽기는 하나 일의 형세가 어쩔 수 없습니다.”
하고, 이어 왕자를 여러 도에 나누어 보내 근왕병(勤王兵)을 불러 모아 회복을 도모하게 하고 세자는 어가를 따라가게 할 것을 청하니, 상이 허락하였다.
○ 이달 그믐에 상이 서쪽으로 떠났다. 상이 일단 서쪽으로 의논을 결정하자 대궐 안의 하리와 노복들이 떠들다가 물러가더니 조금 뒤에는 위사(衛士)들도 모두 흩어졌으며, 시각을 알리는 북소리도 끊어졌다. 밤이 깊어서야 이일(李鎰)의 장계가 비로소 도착하였는데, 적이 금명간에 도성에 이를 것이 분명하다고 하였다. 장계가 들어온 뒤 얼마쯤 있다가 상이 돈의문(敦義門)을 나가 서쪽으로 떠났는데, 사관(祠官)으로 하여금 종묘와 사직의 신주판[主版]을 받들고 앞서게 하고 세자가 그 뒤를 따랐으며 어가가 나간 뒤 왕자 신성군 후(信城君珝)와 정원군 부(定遠君琈)가 따랐다. 상은 융복(戎服)으로 말을 타고 왕비(王妃)는 걸어서 인화문(仁和門)을 나왔는데, 수십 명의 시녀가 따랐다. 도승지 이항복이 촛불을 잡고 앞을 인도하니 왕비가 성명을 물어서 알고 위로하며 권면하였다.
○ 5월. 평명(平明)에 어가가 모래재[沙峴]를 넘었다. 이날 많은 비가 내렸는데 경기 감사 권징(權徵)이 뒤따라 와서 입고 있던 우의(雨衣)를 바쳤다. 일행이 비를 맞으며 벽제역(碧蹄驛)에 이르러 윤두수(尹斗壽)를 불러 차고 있던 칼을 풀어 그에게 주면서 이르기를,
“경(卿)의 형제는 나를 떠나지 말라.”
하였다.
상이 동파관(東坡館)을 출발하였다. 이날 아침에 상이 대신 이산해와 유성룡을 불러 이르기를,
“이모(李某)야 유모(柳某)야! 일이 이렇게까지 되었으니 내가 어디로 가야 하겠는가? 꺼리거나 숨기지 말고 속에 있는 생각을 털어놓고 말하라.”
하고, 또 윤두수를 불러 앞으로 나오게 하여 그에게 하문하니, 여러 신하들이 엎드려 눈물을 흘리면서 얼른 대답을 하지 못했다. 상이 이항복을 돌아보며 이르기를,
“승지의 뜻은 어떠한가?”
하니, 대답하기를,
“어가를 의주(義州)에 머물게 했다가 만약 형세와 힘이 궁하여 팔도가 모두 함락된다면 바로 명 나라에 가서 호소할 수 있습니다.”
하자, 두수가 아뢰기를,
“북도(北道)는 군사와 말이 날래고 굳세며 함흥(咸興)과 경성(鏡城)은 모두 천연적인 요새로 믿을 만하니 재를 넘어 북쪽으로 가는 것이 좋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승지의 말이 어떠한가?”
하니, 성룡이 아뢰기를,
“안 됩니다. 어가가 우리 국토 밖으로 한 걸음만 떠나면 조선은 우리 땅이 되지 않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중국으로 가는 것이 본래 나의 뜻이다.”
하니, 성룡이 안 된다고 하였다. 항복이 아뢰기를,
“신이 말한 것은 곧장 압록강을 건너자는 것이 아니라 극단의 경우를 두고 한 말입니다.”
하고, 성룡과 반복하여 논쟁하였는데, 성룡이 말하기를,
“지금 관동과 관북 제도(諸道)가 그대로 있고 호남에서 충의로운 인사들이 곧 벌떼처럼 일어날 텐데 어떻게 이런 일을 갑자기 논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이산해는 끝내 대답하지 않았다. 성룡이 물러나와 항복을 책망하며 말하기를,
“어떻게 경솔히 나라를 버리자는 의논을 내놓는가. 자네가 비록 길가에서 임금을 따라 죽더라도 궁녀나 내시의 충성밖에 되지 못할 것이다. 이 말이 한번 퍼지면 인심이 와해(瓦解)될 것이니 누가 수습할 수 있겠는가.”
하니. 항복이 사과하였다.
상이 개성 남문루(南門樓)에 나아가 백성들을 모아 타이르고 유지를 내려 각각 마음에 품은 바를 진술하도록 하였다. 부로(父老)들이 앞으로 나와 정 정승(鄭政丞)을 부르기를 바란다고 말하였는데, 정철(鄭澈)을 가리킨 것이었다. 상이 알았다 하고 즉시 정철을 석방하도록 명하면서 전지를 내리기를,
“경(卿)의 충효 대절을 알고 있으니 속히 행재소(行在所)로 오라.”
하였다. 이로부터 기축년(1589, 선조 22)ㆍ신묘년(1591, 선조 24)에 처벌받은 사람들이 모두 석방되어 돌아와 서용(敍用)되었다.
○ 이달 3일에 왜적이 도성에 침입하자 유도대장 이양원(李陽元), 도원수 김명원(金命元)이 도망갔다. 당초 적은 동래(東萊)에서 세 길로 나누어 진격하였다. 한 길은 중도(中道)로 양산(梁山)ㆍ밀양(密陽)ㆍ청도(淸道)ㆍ대구(大丘)ㆍ인동(仁同)ㆍ선산(善山)을 경유하여 상주(尙州)에 이르러 이일(李鎰)의 군사를 패배시켰고, 한 길은 좌도(左道)로 장기(長鬐)ㆍ기장(機張)을 거쳐 좌병영(左兵營)인 울산(蔚山), 경주(慶州)ㆍ영천(永川)ㆍ신령(新寧)ㆍ의흥(義興)ㆍ군위(軍威)ㆍ비안(比安)을 함락하고 용궁(龍宮)의 하풍진(河豐津)을 건너 문경(聞慶)으로 진출해서 중로의 군사와 합류한 다음 조령(鳥嶺)을 넘어 충주(忠州)로 침입하였다. 이들은 다시 충주에서 두 갈래의 길로 나뉘었는데, 하나는 여주(驪州)로 가서 강을 건너 양근(楊根)을 경유하여 용진(龍津)을 건너 경성의 동로(東路)로 진출하였고, 하나는 죽산(竹山)과 용인(龍仁) 쪽으로 나아가 한강(漢江)에 이르렀다. 또 한 길은 김해(金海)를 경유하여 우도(右道)로 진출, 성주(星州) 무계현(茂溪縣)을 따라 강을 건너 지례(知禮)ㆍ금산(金山)을 거쳐 추풍령(秋風嶺)을 넘어서 충청도 영동현(永同縣)으로 진출, 청주(淸州)로 침입하였다가 방향을 바꾸어 경기로 향했다.
왜적의 정기(旌旗)와 검극(劍戟)은 천 리에 끊이지 않고 포성(砲聲)이 여기저기서 들렸다. 그들은 10리나 50~60리마다 험한 곳을 점령하여 진영을 설치하고 밤이면 횃불로 서로 응하였다. 적이 한강 남쪽에 이르자 도원수 김명원이 군사 1천여 명을 이끌고 제천정(濟川亭)에 주둔하였는데 적이 쏜 포환(砲丸)이 정자 위에 어지러이 떨어지자, 명원은 감히 적에게 항거하지 못하고 군기(軍器)를 모두 강에다 넣어버린 뒤에 행재소로 후퇴하여 도망하였는데, 적이 마침내 강을 건넜다.
○ 도원수 김명원에게 임진(臨津)을 지키도록 명하였다. 명원이 임진에 이르러 장계를 올려 적의 상황을 말하니, 상이 김명원에게 군사가 없었다는 것을 참작해서 그가 후퇴한 죄를 묻지 않고 다시 경기와 해서(海西)의 군사를 징발하여 임진을 지키도록 명한 것이다. 남병사(南兵使) 신할(申硈)이 막 체직(遞職)되어 돌아왔으므로 수어사(守禦使)로 삼아 함께 임진을 지키면서 서쪽으로 오는 길을 막도록 명하였는데, 유극량(劉克良)도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예속되었다.
○ 상이 자신의 잘못을 책망하는 교서를 팔도에 내리고 사신을 보내어 의병(義兵)을 불러 모으게 하였다. 상이 개성에 머문 지 이틀 만에 서로(西路)로 출발하여 금교역(金郊驛)에 머물렀다. 이날 적이 이미 도성에 침입하여 서쪽으로 향한다는 말을 듣고 상이 다급하여 재촉해서 떠났다. 당시 종묘 사직의 위패를 개성의 목청전(穆淸殿)에 봉안(奉安)했다가 그대로 묻게 하였는데, 상이 보산참(寶山站)에 이르렀을 때 윤두수가 그 사실을 듣고 속히 예조 참의를 보내어 받들고 오도록 청하였다.
○ 상이 평양(平壤)에 이르렀다. 호종한 신하들에게 직질(職秩)을 차등 있게 올리도록 명하고, 또 하교하였다.
“이조 참판 이항복은 마음이 곧고 신의가 있으며 물외(物外)에 초연한 인물이니, 위급한 상황에서는 더욱 크게 기용하는 것이 타당하다. 어떻게 자급(資級) 때문에 구애받을 수 있겠는가. 판서에 궐원이 생기면 발탁해서 보임하거나 다른 중책을 맡기는 것도 좋을 것이다. 경들은 나의 뜻을 알라.”
○ 신각(申恪)은 처음에 부원수로서 김명원(金命元)을 따라 한강에서 방어했었는데, 명원의 군사가 패하자 이양원(李陽元)을 따라 양주(楊州)에 와서 흩어진 군사들을 수습하였다. 마침 응원하러 온 함경 병사(咸鏡兵使) 이혼(李渾)을 만나 군사를 합쳐 진을 결성했는데, 여염(閭閻)에 흩어져 약탈하는 왜병을 양주의 개재[蟹嶺]에서 요격(邀擊)하여 패배시키고 70급(級)을 참수하였다. 왜적이 우리나라를 침범한 뒤로 처음 이런 승전이 있었으므로 원근에서 듣고 의기가 고무되었다. 그런데 이양원은 당시 산골짜기에 있었으므로 상황의 보고가 끊겼고, 김명원은 신각이 양원을 따른다고 핑계대고 도망쳤다는 것으로 장계를 올려 처벌할 것을 청하였다. 이에 유홍(兪泓)이 그대로 믿고서 선전관을 보내어 현장에서 베도록 청하였다. 선전관이 떠나고 난 뒤에 승리했다는 보고가 이르렀으므로 상이 뒤따라 선전관을 보내어 중지하도록 하였으나 미치지 못하였다.
○ 적이 처음 도성에 침입했을 때 궁궐은 모두 타버리고 종묘만 남아 있었으므로 왜의 대장 평수가(平秀家)가 그곳에 거처하였는데, 밤중에 괴이한 일이 많고 따르던 졸개 중에 갑자기 죽는 자도 생겼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이는 조선 종묘에 신령(神靈)이 있다.”고 하자, 평수가가 두려워하여 마침내 종묘를 태워버리고 남방(南坊)에 -바로 남별궁(南別宮)이다.- 이거(移居)하였다.
○ 성절사(聖節使) 유몽정(柳夢鼎)이 먼저 떠났다. 몽정이 성절사로 임명되어 미처 출발하기도 전에 상이 서쪽으로 떠났으므로 몽정은 단지 표문(表文)과 자문(咨文)을 가지고 역관(譯官) 등과 - 방물(方物)은 봉하지 못했다. - 어가를 따라 평양에 이르렀다. 대신들은 고급사신(告急使臣)을 보내야 한다며 성절사는 보내지 말자고 청하였다. 그런데 마침 한응인(韓應寅)이 연경(燕京)에서 돌아와 아뢰기를,
“성절사를 보내지 않으면 명 나라에서 틀림없이 의심할 것입니다.”
하였으므로 이에 다시 의논하여 보냈다. 상이 몽정을 직접 대하여 유시하기를,
“연경에 이르거든 그대가 먼저 중국으로 들어가겠다는 의사를 말하는 것이 좋겠다.”
하니, 몽정이 아뢰기를,
“중국에서는 우리나라가 적을 친하게 대한다고 의심하는데 만약 원조를 청하지 않고 들어가겠다고 먼저 청한다면 의혹만 더 불러일으킬 듯싶습니다. 모름지기 왜변(倭變)이 일어난 까닭을 낱낱이 열거하여 요동의 진에 자문(咨文)을 보내어 구원해 줄 것을 청한 다음에 들어가겠다는 말을 해야 합니다.”
하자, 상이 그렇게 여기고 자문을 갖추어 보냈다.
○ 한응인(韓應寅)을 제도순찰사(諸道巡察使)로 삼아 임진(壬辰)에 나아가 주둔하게 하였다. 적이 도성에 들어와서 며칠 동안 군사를 휴식시켰는데, 도로에 와전되기를 “왜인들이 멀리서 오느라 발이 부르트고 피곤해 쓰러져 있으니 몽둥이를 가지고도 격퇴할 수 있다.” 하였다. 행조(行朝)에서 이 말을 듣고 믿은 나머지 김명원(金命元)이 한강을 지키지 못한 것을 한스럽게 여기고 있었으므로 명원을 재촉하여 임진을 건너 나아가 싸워 도성을 회복하도록 하였으나 명원이 감히 하지 못하였다.
때마침 한응인이 주청사(奏請使)로 연경에서 돌아왔고 서계(西界)의 토병(土兵) 1천여 명도 도착했다. 그런데 이들은 모두 오랑캐들을 상대해 본 정예병(精銳兵)이었으므로 마침내 응인을 장수로 삼아 거느리고 임진에 나아가 주둔하면서 기회를 보아 진격하도록 하고, 또 명원의 통제를 받지 말도록 하였다. 그러자 응인은 전혀 의심하지 않고 파주(坡州)를 지나면서 명원을 만나지 않고 임진(臨津)의 입구에 달려가 진격할 것을 재촉하였다.
○ 신할(申硈) 등이 임진강을 건너 왜적을 공격하다가 크게 패하여 죽자 도원수 김명원과 제도순찰사 한응인 등이 임진을 버리고 달아났다.
당초 명원이 여러 장수들을 배치하여 신할ㆍ유극량(劉克良)ㆍ이빈(李薲)ㆍ이천(李薦)ㆍ변기(邊璣) 등에게 임진의 모든 여울을 지키도록 하였으므로 방비가 점차 완비되었다. 그래서 적병이 남쪽 언덕에 도착하여 서로 버틴 지 8~9일이 지나도록 건너지 못하였다. 하루는 적이 여막을 불태우고 퇴각하여 도망하는 모양을 보이며 아군을 유인하였다. 신할은 적이 실제로 퇴각하여 도망하는 줄로만 알고 강을 건너 추격하려고 하였다. 유극량은 나이가 많고 군사에 노련하였으므로 경솔하게 행동해서는 안 된다고 극력 말하자, 신할이 그를 참하려고 하니 극량이 말하기를 “내가 소싯적부터 종군(從軍)하였는데 어찌 죽음을 피할 마음이 있겠는가. 그렇게 말한 까닭은 국사(國事)를 그르칠까 싶어서이다.” 하고, 분개해서 나가 그의 소속 군사를 거느리고 먼저 건너가서 적을 만나 순라하는 기병 몇 명을 참하였다.
신할의 군사가 모두 건넜는데 적은 먼저 산 뒤에 군사를 매복시키고는 산을 의지하여 진을 정돈하고 움직이지 않았다. 이에 신할이 진에 나아가 핍박하니, 적이 일시에 모두 일어나 총과 칼로 접전을 벌이자 여러 군사가 마침내 허물어졌다. 극량이 신할을 부르며 진을 거두어 퇴각하려고 하였으나 신할이 응하지 않고 끝내 죽었다. 극량이 말에서 내려 땅에 앉아 말하기를 “여기가 내가 죽을 곳이다.” 하고 활을 당기어 적을 쏘다가 화살이 떨어지자 죽었다. 군사들이 달아나 강 언덕에 이르렀는데 적이 뒤따르면서 시살하였다. 혹 목을 빼어 칼을 받는 자도 있었으며 나머지는 모두 스스로 강물에 몸을 던졌다. 여울을 지키던 여러 군사들이 모두 흩어졌으며 명원과 응인은 물러나 행재소로 나아갔다. 마침내 적이 강을 건너 서쪽으로 향하였다.
○ 전라 수군절도사 이순신(李舜臣)이 경상도에 구원하러 가서 거제(巨濟) 앞바다에서 왜병을 크게 격파하였다. 왜병들이 바다를 건너오자 경상 우수사 원균(元均)은 대적할 수 없는 형세임을 알고 전함(戰艦)과 전구(戰具)를 모두 물에 침몰시키고 수군 1만여 명을 해산시키고 나서 혼자 옥포 만호(玉浦萬戶) 이운룡(李雲龍), 영등포 만호(永登浦萬戶) 우치적(禹致績)과 남해현(南海縣) 앞에 머물면서 육지를 찾아 적을 피하려고 하였다. 운룡이 항거하여 말하기를 “사또가 나라의 중책을 맡았으니 의리상 관할 경내에서 죽는 것이 마땅하다. 이곳은 바로 양호(兩湖)의 요해처로서 이곳을 잃게 되면 양호가 위태롭다. 지금 우리 군사가 흩어지기는 하였지만 그래도 모을 수 있으며 호남의 수군도 와서 구원하도록 청할 수 있다.” 하니. 원균이 그 계책을 따라 율포 만호(栗浦萬戶) 이영남(李英男)을 보내 순신에게 가서 청하게 하였다.
이때 이순신은 여러 포(浦)의 수군을 앞바다에 모으고 적이 이르면 싸울 준비를 하고 있었다. 영남의 말을 듣고 여러 장수들은 대부분 말하기를 “우리가 우리 지역을 지키기에도 부족한데 어느 겨를에 다른 도에 가겠는가.” 하였다. 그런데 녹도 만호(鹿島萬戶) 정운(鄭運)과 군관 송희립(宋希立)만은 강개하여 눈물을 흘리며 이순신에게 진격하기를 권하여 말하기를
“적을 토벌하는데는 우리 도(道)와 남의 도가 따로 없다. 적의 예봉을 먼저 꺾어 놓으면 본도도 보전할 수 있다.”
하니, 순신이 크게 기뻐하였다.
언양 현감(彦陽縣監) 어영담(魚永潭)이 수로(水路)의 향도가 되기를 자청하여 앞장서서 마침내 거제 앞바다에서 원균과 만났다. 원균이 운룡과 치적을 선봉으로 삼고 옥포에 이르렀는데, 왜선 30척을 만나 진격하여 크게 깨뜨리니 남은 적은 육지로 올라가 도망하였다. 이에 그들의 배를 모두 불태우고 돌아왔다. 그리고 다시 노량진(鷺梁津)에서 싸워 적선 13척을 불태우니 적이 모두 물에 빠져 죽었다. 이 전투에서 순신은 왼쪽 어깨에 탄환을 맞았는데도 종일 전투를 독려하다가 전투가 끝나고서야 비로소 사람을 시켜 칼끝으로 탄환을 파내게 하니 군중(軍中)에서는 그때에야 그 사실을 알았다.
이에 앞서 순신은 전투 장비를 크게 정비하면서 자의로 거북선을 만들었다. 이 제도는 배 위에 판목을 깔아 거북등처럼 만들고 그 위에는 우리 군사가 겨우 통행할 수 있을 만큼 십자(十字)로 좁은 길을 내고 나머지는 모두 칼ㆍ송곳 같은 것을 줄지어 꽂았다. 그리고 앞은 용의 머리를 만들어 입은 대포 구멍으로 활용하였으며 뒤에는 거북의 꼬리를 만들어 꼬리 밑에 총 구멍을 설치하였다. 좌우에도 총 구멍이 각각 여섯 개가 있었으며, 군사는 모두 그 밑에 숨어 있도록 하였다. 사면으로 포를 쏠 수 있게 하였고 전후 좌우로 이동하는 것이 나는 것처럼 빨랐다. 싸울 때에는 거적이나 풀로 덮어 송곳과 칼날이 드러나지 않게 하였는데, 적이 뛰어오르면 송곳과 칼에 찔리게 되고 덮쳐 포위하면 화총(火銃)을 일제히 쏘았다. 그리하여 적선 속을 횡행(橫行)하는데도 아군은 손상을 입지 않은 채 가는 곳마다 바람에 쏠리듯 적선을 격파하였으므로 언제나 승리하였다. 조정에서는 순신의 승리 보고를 보고 상으로 가선대부(嘉善大夫)의 품계로 올려 주었다.
○ 비변사가 요동(遼東)에 자문을 보내어 구원을 청하도록 청하였다. 당시 상하가 근심하고 두려워하며 계책을 결정하지 못했었는데, 이항복이 혼자서 극력 아뢰기를,
“지금 팔도가 무너져 수습해서 온전하기를 도모할 희망이 없습니다. 제갈공명(諸葛孔明)의 지혜로도 선주(先主) 유비(劉備)가 몸을 의탁하여 용무(用武)할 곳이 없음을 보고 손권(孫權)에게 구원을 청하여 마침내 적벽(赤壁)의 승리를 이루게 했던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다시 어떻게 할 수가 없으니 명 나라에 갖추어 아뢰어 구원병을 청하는 것보다 더 좋은 계책이 없습니다.”
하였다. 그러나 묘당(廟堂)의 의논은 모두 그렇게 여기지 않으면서 대체로 말하기를,
“명 나라에서는 틀림없이 기꺼이 와서 구원하지 않을 것이며 가령 와서 구원한다 하더라도 요ㆍ광(遼廣 요동(遼東)과 광녕(廣寧))의 병마를 출동시킬 터인데 요ㆍ광의 군사는 호달(胡達)의 종류로서 반드시 횡포를 부릴 것입니다. 지금은 평안도만이 안정되었다 하겠는데 다시 중국 군사가 공사간에 침탈한다면 필시 거덜이 나고야 말 것이니, 이 계책은 너무나 오활합니다.”
하였다. 이때 마침 이덕형이 뒤따라 왔는데 항복과 의견이 같았으므로 마침내 함께 조당(朝堂)에서 극력 논쟁하니. 비로소 그 말을 따라 논계(論啓)하였다. 이에 상이 그대로 따라 즉시 사람을 보내 요동에 자문을 보내어 급박함을 알리고 군사를 청하였다.
○ 전라도 순찰사 이광이 절도사(節度使) 최원(崔遠)으로 하여금 본도를 지키도록 하고 자신은 4만의 군사를 거느리고 임천(林川) 길을 경유해서 진격하였다. 방어사(防禦使) 곽영(郭嶸)은 2만의 군사를 거느리고 여산(礪山)의 길을 경유하여 금강(錦江)을 건넜다. 경상 순찰사 김수(金睟)는 수하 군사 수백을 거느리고, 충청 순찰사 윤국형(尹國馨)은 수만의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모였다. 이에 세 장수가 날을 정하여 진격할 것을 약속하였는데, 10만 군사라고 호칭하였다.
○ 박진(朴晉)을 경상 병마절도사로 삼았다. 박진이 병사(兵使)가 되어 남은 군사를 수습하고 여러 장수를 나누어 보내 진격도 하고 후퇴도 하며 공격하자 형세가 조금 떨쳤는데 행조(行朝)에 승리의 보고가 잇따라 이르렀다. 그러자 상이 매우 중하게 여기며 이르기를
“나는 박진이 적을 가볍게 여긴 나머지 죽을까 두려웠다. 그래서 일찍이 박진을 불러다 서도(西道)로 가게 해서 부원수로 삼아 평양을 도모하려고 했었는데 조정의 의존이 불편하게 여겨 그만 두었었다.”
하였다.
○ 조방장 원호(元豪)가 여강(驪江)에 주둔한 적을 공격하여 섬멸시켰다. 원호는 강원도 조방장으로 여강의 벽사(甓寺)에 주둔하여 나루를 건너지 못하도록 차단하였다. 그런데 강원 감사 유영길(柳永吉)이 급히 원호를 불러 본도에 돌아가게 되었는데, 원호가 떠나자 적이 비로소 강을 건너 북상하였다. 얼마 있다가 원호가 다시 와서 고을의 군사들을 불러 모으고 적이 구미포(龜尾浦)에 주둔한 것을 보고서 새벽을 틈타 습격하여 50여 급(級)을 베니 나머지는 도망하였다. 이로부터 적이 여주의 길에는 들어가지 못하였다.
○ 6월. 삼도(三道)의 군사가 용인(龍仁)에서 패하여 이광 등이 본도로 돌아갔다.
○ 이순신(李舜臣)이 잇따라 왜병을 패배시켰다. 순신이 본영에서 사량(蛇梁)으로 나아가 진을 쳤는데 당포(唐浦)에서 적선을 만났다. 적장이 큰 군함을 타고 층루(層樓)에 앉아 전투를 독려하였는데, 순신이 휘하 병력을 진격시켜 통전(筒箭)으로 집중 사격하게 하니 층루 위의 왜장이 먼저 화살에 맞아 물에 떨어졌는데, 마침내 엄습하여 크게 격파하였다. 얼마 있다가 전라 우수사 이억기(李億祺)가 휘하의 수군을 모두 데리고 와서 회동하여 마침내 함께 당항포(唐項浦)에 이르러 왜선을 만나 크게 싸웠다. 이때 또 선루(船樓)위의 적장을 쏘아 죽여 그의 수급(首級)을 취했으며, 왜선 30척을 밀어붙여 격파하니 적이 대패하여 육지로 올라 도망하였다. 또 영등포(永登浦)에서 싸워 모든 배를 나포하여 섬멸시키니 이로부터 수군의 명성이 크게 떨쳤다. 승리를 아뢰자, 상으로 순신을 자헌대부(資憲大夫)의 품계로 올려 주었다.
○ 왜장 평행장(平行長) 등이 해서(海西)의 여러 고을을 거쳐 대동강(大同江)의 남쪽 언덕에 침범하였다. 이때 이일(李鎰)이 관동(關東)의 길로 걸어서 이르렀다. 이일은 본래 명장으로 일컬어졌으므로 비록 적에게 패하여 도망하기는 하였지만 사람들이 모두 그가 온 것을 기뻐하였다. 그가 올 때 탐지한 정보에 적이 이미 봉산(鳳山)을 불태웠다고 하였으므로, 비변사가 급히 이일에게 영을 내려 대동강 하류를 지키도록 하였다. 이일이 막 도착하였을 때 적병 수백 명이 벌써 남쪽 언덕에 도착해 있었으므로 이일이 무사(武士) 10여 명으로 하여금 강 가운데 있는 조그마한 섬으로 들어가게 해서 강궁(强弓)을 쏘게 하자 적이 퇴각하였다.
○ 상이 평양을 떠나고 싶었으나 어디로 갈 것인지 결정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자 조정의 신하들이 대부분 관북으로 들어가는 것이 편리하다고 하니, 상이 따랐다. 왕비와 왕자가 먼저 떠나고 상은 평양을 떠나 영변부로 향하였다. 윤두수ㆍ김명원ㆍ이원익을 남겨 두어 평양을 지키게 하고, 대산 최흥원(崔興源)ㆍ유홍(兪泓)ㆍ정철 등은 유성룡을 수행하여 중국의 관원을 접대하기 위해 그냥 평양에 머물러 있었다. 상이 숙천(肅川)에 머물면서 이덕형을 청원사(請援使)로 삼아 요동에 거서 급박함을 알리도록 하였다. 당시 이항복과 이덕형이 야대(夜對)하여 상에게 영변에 진주(進駐)하기를 청하고, 그들이 직접 요동에 가서 구원병을 청하겠다고 하면서 서로들 다투며 가기를 자청하였다. 이에 부제학 심충겸(沈忠謙)이 “항복은 현재 병조의 직책을 맡고 있으니 파견할 수 없다.”고 하자, 마침내 덕형을 파견하였다.
○ 윤두수 등이 장수를 보내어 밤에 왜군의 진영을 공격하게 하였으나 불리하여 퇴각하였다. 왜병이 마침내 대동강을 건넜다.
윤두수 등이 지킬 수 없음을 알고 먼저 성 안의 노약자와 부녀자를 내보내고, 적이 성에 가까이 오자 병기(兵器)를 강물에 가라앉힌 뒤 군사를 인솔하여 몰래 빠져 나왔는데, 더러는 배를 타고 강서(江西)로 내려갔다.
왜장이 마침내 평양을 점거하였다.
○ 왜장 청정(淸正)이 관북(關北)에 침입하였는데, 함경 감사 유영립(柳永立)이 사로잡히고 병사 이혼(李渾)이 적민(賊民)에게 살해당하였다. 당초에 청정과 행장(行長) 등이 함께 임진강을 건너 상의 행차를 추격하면서 어가가 혹시라도 방향을 바꾸어 관북으로 갈 것을 염려하여 길을 나눠 군사를 진격시키기로 약속하였다. 청정은 용맹이 적군 가운데 으뜸이었으며 그가 거느리는 군사도 더욱 날래고 사나웠다. 곡산(谷山) 지역에서 노리현(老里峴)을 넘어 철령(鐵嶺)의 길로 나왔는데, 철령에 지키는 군사가 없었으므로 그대로 치달려 들어갔다.
감사 유영립은 산골짜기로 들어갔는데 토병들이 적병을 인도하여 습격해서 사로잡았다. 병사 이혼은 도망하여 갑산(甲山)으로 들어갔는데 배반한 백성들이 추격해 오자 밭 사이의 토굴(土窟)에 숨었으나 마침내 그들과 싸우다 죽었다. 그리고 갑산 사람들은 부사의 목을 베고 투항하였다.
임해ㆍ순화 두 왕자는 적병이 바로 뒤에 있다는 소문을 듣고 북쪽을 향해 질주하여 마천령(摩天嶺)을 넘어갔다.
○ 상이 북도로 떠날 것을 의논하자, 이항복이 다시 대신들과 극력 논쟁하기를, “의주(義州)로 진주(進駐)해야만 중국 군사와 접할 수 있고, 불행하게 될 경우 중국으로 건너가서 서서히 국토를 회복해도 실계(失計)가 아니다.” 했는데, 심충겸(沈忠謙) 역시 그 의견에 따랐다. 그날 저녁에 뵙기를 청하여 항복이 극구 말하기를,
“북관(北關)은 단지 한 가닥 길만 있으니 궁하게 될 경우 오랑캐 지역 외에는 갈 만한 곳이 없으니 의주로 진주하는 것만 못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나의 뜻도 본래 중국으로 가려고 하였으니, 경의 말을 따르겠다. 다만 중전(中殿)이 이미 멀리 갔는데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
하였다. 이에 여러 신하들이 빨리 따라가서 돌아오게 하기를 청하니, 운산 군수(雲山郡守) 성대업(成大業)을 보내어 달려가게 하였다. 그런데 중전의 일행도 적이 이미 북도에 침범하였다는 소문을 들었으므로 감히 나아가지 못하고 돌아와 마침내 상을 박천(博川)에서 만났다. 상이 영변부에 머물렀을 때 요동의 진에서 또 임세록(林世祿)을 보내 자문(咨文)에 답하면서 구원병 보낼 것을 허락하였다.
○ 세자에게 종묘 사직을 받들고 분조(分朝)하도록 명하였다.
상이 이날 박천에 머물렀다. 이튿날 걸음을 재촉하여 밤 오경에 가산(嘉山)에 도착하였다. 이날 밤에 비가 내리고 길은 어두운데 한 자루의 횃불도 없었으며 따르는 신하도 정철 등 20명이 채 되지 않았다. 이항복과 박동량(朴東亮)이 병조의 관원을 앞장세워 길을 인도하게 했는데, 숱한 어려움을 겪었다.
○ 도성에서 의주(義州)에 이르기까지 환관(宦官) 수십 명과 어의(御醫) 허준(許浚), 액정원(掖庭員) 4~5인, 사복원(司僕員) 3인이 처음부터 끝까지 곁을 떠나지 않았다. 뒷날 모두 녹공(錄功)하였는데, 끝내 직무는 맡기지 아니하였다.
○ 상이 정주(定州)에 머물렀다. 사자(使者)를 의주에 보내어, 어가가 본주(本州)에 머물고 곧바로 요동으로 건너가지 않는다는 것을 효유하여 군민(軍民)들의 마음을 안정시키게 하고 응교 심희수(沈喜壽)를 보내어 행궁(行宮)을 수리하게 하였다. 그리고 잇따라 차관(差官)을 보내 자문(咨文)으로 요동의 진에 알리도록 하고, 이덕형에게 위급하고 박절한 상황을 극력 진달하도록 유시하였다.
○ 세자가 영변부(寧邊府)로 나아가 머물렀다. 상이 분조(分朝)한다는 뜻으로 안팎에 하교하였다.
그리고 호종하는 관사를 무군사(撫軍司)라 하고 편의(便宜)대로 일을 처리하도록 명하였다.
○ 요동의 유격 사유(史游), 참장 곽몽징(郭夢徵)이 군사 1천 명을 거느리고 선천의 임반관(林畔館)에 도착하였다. 상이 예복(禮服)을 갖추고 나아가 보고 재배(再拜)하며 사례하기를,
“한 나라의 존망이 대인(大人)에게 달려 있으니 오직 지휘해 주시기를 기다립니다.”
하니, 사유 등이 말하기를,
“우리들로서는 평양을 구할 수 없으니 앞으로 조 총병(祖摠兵)이 오면 서로 모여 일을 의논해야 할 것입니다.”
하고, 즉시 군사를 거느리고 의주(義州)에 주둔하였다.
○ 상이 선천(宣川)에 머물렀다. 요동 순안어사(遼東巡按御史) 이시얼(李時孽)이 지휘(指揮) 송국신(宋國臣)을 보내어 우리나라에 자문을 보냈는데 자문 내용에,
“그대 나라에서 불궤(不軌)를 도모했다.”
하고, 또,
“팔도의 관찰사는 어찌하여 한마디의 말도 없는가. 팔도의 군ㆍ현에서는 어찌하여 한 사람 도 대의(大義)를 주창하는 사람이 없는가. 어느 날에 어느 진(鎭)이 함락되고 어느 날에 어느 주(州)가 함락되었는가. 누가 절의를 지키다가 죽었고 누가 적에게 빌붙었는가. 적장(賊將)은 몇 명이며 군사는 몇 만 명인가. 적장자(嫡長子)를 후계로 세우는 것은 중국과 이적(夷狄)을 따질 것 없이 공통으로 행하는 의리인데, 귀국의 장자는 어디 갔기에 둘째 아들로 세자를 삼았는가. 하나하나 조목별로 갖추어 기록하여 보고하라. 천조(天朝)에는 개산대포(開山大砲)ㆍ대장군포(大將軍砲)ㆍ산화표창(神火標槍)이 있다. 그리고 날랜 장수와 정예병이 무척 많으니 급히 달려가면 왜병이 백만이라도 따질 것이 못 된다. 더구나 지혜 있고 용감한 문무(文武)의 인사들이 있어 간사한 모의를 환히 알고 음흉한 싹을 꺾어버릴 것이니 비록 소진(蘇秦)ㆍ장의(張儀)ㆍ상앙(商鞅)ㆍ범수(范睢)의 무리가 세상에 다시 태어난다 하더라도 어떻게 천조의 계획을 엿볼 수 있겠는가?”
하였는데, 상이 차관(差官)을 대하고 자문을 본 뒤 송연(竦然)하여 이르기를,
“이는 대체로 우리나라가 왜적과 공모했는가 의심하여 이렇게 위협적인 말을 한 것이다.”
하고, 지휘에게 말하기를,
“마땅히 여기의 신하를 파견하여 회보(回報)하겠소.”
하였다. 지휘가 나가서 역관(譯官)에게 말하기를,
“순안어사(巡按御史)가 일찍이 내가 황 천사(黃天使)를 따라 나와 직접 국왕(國王)을 뵌 일이 있었기 때문에 나를 시켜 이번에 와서 정말인지 아닌지를 알아보게 한 것이다. 자문에 말한 것은 모두 가정해서 한 말이니 두려워 말라.”
하였다.
○ 상이 의주에 이르렀다. - 이달 22일이었다. - 목사의 아사(衙舍)를 행궁(行宮)으로 삼았다.
○ 주청사(奏請使) 지돈령부사 정곤수(鄭崐壽)를 파견하여 대병이 와서 구원할 것을 청하였다. 상이 보낼 적에 면유(面諭)하기를,
“국가의 존망이 이 한번의 거사에 달려 있으니 경은 힘쓰라.”
하였다.
○ 제도(諸道)에서 의병(義兵)이 일어났다. 당시 삼도(三道)의 수신(帥臣)이 모두 인심을 잃은 데다가 군사와 식량을 징발하자 사람들이 모두 밉게 보아 적을 만나기만 하면 모두 달아났다. 그러다가 도내(道內)의 거족(巨族)과 명인(名人)이 유생(儒生) 등과 함께 조정의 명을 받들어 창의(倡義)하여 일어나자 듣는 사람들이 격동하여 원근에서 응모하였다. 크게 성취하지는 못했으나 인심과 국가의 명맥이 그들 덕분에 유지되었다. 호남(湖南)의 고경명(高敬命)ㆍ김천일(金千鎰), 영남(嶺南)의 곽재우(郭再祐)ㆍ정인홍(鄭仁弘), 호서(湖西)의 조헌(趙憲)이 가장 먼저 의병을 일으켰다.
○ 현풍인(玄風人) 곽재우(郭再祐)는 본래 유생으로 일찍 과거 공부를 그만두었고 무용(武勇)이 있었지만 스스로 감추었으며 집안도 제법 부유하였다. 왜적이 바다를 건넜다는 소식을 듣고 가산을 모두 흩어 재질이 있는 무사와 교결하였다. 그리고는 “겁탈하는 도적들은 과감하고 사납기가 보통 사람들과 다르다.”고 하여, 그 무사들을 찾아 화복(禍福)으로 그들을 달래어 먼저 수십 명을 얻었는데 점점 모인 군사가 1천여 명에 이르렀다. 적이 우도(右道)로 침입하였다. 왜장 안국사(安國司)란 자가 호남으로 향한다고 소문을 퍼뜨렸는데 재우가 강변을 왕래하면서 동서로 무찌르자 적병이 죽은 자가 많았다. 항상 붉은 옷을 입고 스스로 홍의장군(紅衣將軍)이라 일컬었는데, 적진을 드나들면서 나는 듯이 치고 달리어 적이 탄환과 화살을 일제히 쏘아댔지만 맞출 수가 없었다. 충의롭고 곧으며 과감하였으므로 군사들의 인심을 얻어 사람들이 자진하여 전투에 참여하자 임기응변에 능하였으므로 다치거나 꺾이는 군사가 없었다. 이미 의령(宜寧) 등 두어 고을을 수복하고 군사를 정진강(鼎津江) 오른쪽에 주둔시키니 하도(下道)가 편안히 농사를 지을 수 있게 되었으며 의로운 소문이 크게 드러났다.
○ 전 부사 고경명(高敬命)은 광주(光州)에 살다가 적이 도성에 침입하였다는 사실을 듣고, 학유(學諭) 유팽로(柳彭老)와 함께 군사를 일으켜 적을 토벌할 것을 도모하고 글을 지어 도내(道內)의 백성들에게 효유하기를,
“지난번 본도의 근왕병(勤王兵)이 금강(錦江)에서 돌아오던 날에 첫 번째로 패배했고 여러 군에서 군사를 초유(招諭)하던 때에 두 번째로 패하였다. 이는 대체로 수비 방법이 어긋나고 기율이 전혀 없으며 유언비어가 비등하여 군사들의 마음이 놀라고 의심했기 때문이다. 지금 흩어지고 도망한 나머지를 수습한다 하더라도 사기는 꺾였고 정예는 없어졌으니 어떻게 응급책을 세워 늦게나마 성과를 기대할 수 있겠는가. 항상 생각건대 승여(乘輿)가 피난을 떠났는데도 관수(官守)는 오래도록 달려가 문안드리는 일을 폐하였고, 종사(宗社)가 모두 타버렸는데도 왕사(王師)로서 평정시킬 시기는 아직도 지체되고 있다. 이에 대해 말을 하자니 통분함이 가슴속에 사무친다.
우리 본도는 본래부터 군사와 말이 날래고 굳세다고 일컬어져 왔다. 성조(聖祖 조선 태조를 가르킴)께서 황산(黃山)에서 왜구를 크게 무찔러 삼한(三韓)을 다시 일으킨 공로가 있으며, 선조(先朝 고려를 가리킴)의 낭주(朗州) 전투에서는 한 척의 배도 되돌아가지 못했다는 노래가 있는데, 지금까지도 빛나게 사람들의 이목(耳目)에 비춰지고 있으니 그때에 용맹을 뽐내며 적의 성벽에 먼저 오른 자는 이 도의 사람이 아니었던가. 더구나 근년 이래로 유도(儒道)가 크게 일어나 사람들이 모두 학문에 뜻을 가다듬었으니 임금 섬기는 대의(大義)를 그 누가 강독하지 않았겠는가.
그런데 유독 오늘날에 이르러 의로운 소문이 사라져버리고 두려워한 나머지 스스로 무너져버린 채 기력(氣力)을 내어 적과 교전하는 자는 한 사람도 없이 서로들 제 몸만 보전하고 처자를 보호할 계획만 하면서 혹시 뒤질세라 머리를 움켜쥐고 쥐처럼 도망하고 있다. 이는 본도의 사람으로서 국가의 은혜를 깊이 저버리는 것이 될 뿐만 아니라 또한 선조를 욕되게 하는 것이다.
지금은 적의 형세가 크게 꺾이고 왕의 영위(靈威)가 날로 확장되니 이야말로 대장부가 공명을 세울 기회이고 군부(君父)의 은혜에 보답할 때이다. 경명은 장구(章句)나 외는 오활한 선비로서 병법에는 문외한인데 이렇게 단(壇)에 올라 망령되이 대장으로 추대되니 이미 흩어진 사졸의 마음을 수습하지 못하여 여러 동지에게 수치거리가 될까 두렵다. 그러나 오직 마땅히 피를 뿌리고 진군한다면 조금이나마 임금의 은혜에 보답할 수 있을 것 같기에 금월 11일 군사를 일으키기로 하였다. 우리 도내의 모든 사람들은 아비는 그 자식을 깨우치고 형은 그 동생을 도와 의병을 규합하여 함께 일어나자. 원컨대 속히 결정하여 착한 일을 따르고 미혹된 나머지 스스로를 그르치지 말라.”
하였다. 경명은 연로(年老)한 문관이었으나 많은 사람들이 맹주(盟主)로 추대하자 개연히 사양하지 않았다. 이에 선비와 서민이 많이 응모하여 군사 6천여 명을 얻었다. 그리고 또 격문을 여러 도에 전하였는데 문사(文辭)가 격렬하고 절실하였으므로 나라 사람들이 외며 전하였다.
○ 전 장령 정인홍(鄭仁弘)이 의병을 일으켜 적을 토벌하였다. 인홍은 평소 시골의 선비와 주민들로부터 존경의 대상이었다. 좌랑 김면(金沔), 전 현감 박성(朴惺), 유생 곽준(郭浚)ㆍ곽율(郭)등과 함께 향병(鄕兵)을 모집했는데, 전 첨사 손인갑(孫仁甲)을 얻어 중군(中軍)을 삼았다. 인갑은 무용(武勇)이 뛰어났는데 군진(軍陣)을 달리하면서도 인홍의 명령을 받았다. 인갑이 먼저 무계(茂溪)에 주둔한 적을 공격하여 패배시키고 군량을 태우고 돌아왔다.
○ 중국 조정에서 호군(犒軍 군사들에게 음식을 주어 위로함)할 비용으로 은(銀) 2만 냥을 내렸다. 당시 요동 사람이 유언비어를 퍼뜨리면서 전하기를 “조선이 왜국과 함께 반역하여 거짓으로 가짜 왕을 삼아 인도하여 온다.” 하기도 하였다. 그래서 먼저 임세록(林世祿)등을 파견하여 평양에 와서 탐지하게 한 것이다. 그러다가 상이 평양을 떠남에 미쳐 연달아 요진(遼鎭)에 자문을 보내 비빈(妃嬪)ㆍ자녀ㆍ배신(陪臣)을 이끌고 중국으로 가기를 청하니, 요동 순무어사 학걸(郝杰)이 주본(奏本)을 올리기를,
“총병 동양정(佟養正)이 품보(稟報)를 받았습니다. 조선이 대국(大國)이라고 일컬으면서 대대로 동번국(東藩國) 노릇을 하여 왔는데 한번 왜적의 침입을 받자 소식만 듣고서 도망쳤습니다. 혹시라도 그 나라가 사직을 보전하지 못하고 갑자기 달려올 경우, 수신(守臣)의 입장에서 거절하자니 그들이 의지할 곳이 없게 되어 속국의 신뢰하는 마음을 잃게 될 것이고, 받아들이자니 사체가 가볍지 않아 신하로서 마음대로 처리할 수가 없습니다. 왜노(倭奴)들은 간사한 꾀가 비상하여 중국 사람도 앞잡이 노릇을 하는 자가 많습니다. 만약 간사한 생각을 품고 마구 들어온다면 해를 끼치는 것이 보통이 아닐 텐데 어떻게 처리해야 하겠습니까?”
하였다. 병부 상서 석성(石星)이 복제(覆題)하기를,
“해진(該鎭)에서 사람을 차출하여 조선으로 보내서 조정의 지극한 뜻을 선유(宣諭)하게 하소서. 그리하여 조선이 도망해 오면 나라를 회복할 기약이 없게 되어 왜적이 마침내 조선을 점거하게 될 것이고, 굳게 지키면 구원병도 기대할 수 있어 왜적이 자연 패하여 돌아가게 될 것이라는 점을 알도록 하여, 그들로 하여금 그들 지역의 요해처에서 머물며 천병(天兵)의 구원을 기다리게 하소서. 그리고 본국에 유시하여 배신(陪臣)들을 많이 파견하여 근왕병(勤王兵)을 불러 모아 옛 강토를 회복할 계책을 삼아 패몰(敗沒)하지 않도록 하고 만일 해국(該國)이 위급해서 도망해 오기를 청한다면 전적으로 거절하기는 어려우니 마땅히 칙령(勅令)을 내려 받아들이되 인원이 1백 명을 초과하지 않도록 하소서.”
하였는데, 황지(皇旨)를 받드니, 황지에,
“왜적이 조선을 함몰(陷沒)시켜 국왕이 도피하였으니, 짐(朕)은 매우 측은하게 여긴다. 구원병을 일단 파견하고 사람을 차견하여 그 나라 대신들에게 선유(宣諭)하되, 충성을 다하여 나라를 수호하고 각처의 병마(兵馬)를 속히 결집하여 성지(城池)를 굳게 지키며 요해처에 웅거하여 힘껏 회복을 도모하도록 하라. 어떻게 앉아서 망하는 것을 볼 수 있겠는가?”
하였다. 성지(聖旨)가 특별히 내렸는데도 요진(遼鎭)에서는 여전히 의심이 풀리지 않아 송국신(宋國臣)을 보내 국왕의 진위(眞僞)를 실제로 알아보게 하였다. 국신이 돌아가 확실히 진짜 임금이고 가짜 임금이 아니라고 보고하자 요진에서 비로소 믿게 되었다.
중국 조정의 의논 역시 구구했는데 석성(石星)은 구원하기로 결심하였다. 우리나라의 사신 신점(申點)이 당시 회동관(會同館)에 있었는데, 석성이 뜰로 불러서 요동에서 변고를 보고한 문서를 꺼내어 보여주자 신점이 그 자리에서 통곡을 하며 아침 저녁으로 찾아가 병부(兵部)에 정문(呈文)하여 먼저 구원병을 보내줄 것을 청하였다. 유몽정(柳夢鼎)도 그 뒤를 이어 도착했는데 통곡을 하며 병부에 호소하여 구원병을 속히 보내줄 것을 청하였다. 석성이 그 뜻에 감동하여 모두에게 답서를 보내 위로하면서 그들을 신포서(申包胥)에 비유하였다.
석성의 뜻이 더욱 굳어져 병부가 주청하여 지휘(指揮) 황응양(黃應暘)을 보내 살펴보도록 하니 상이 용만관(龍灣館)에서 맞이하여 보았다. 응양이 왜의 서신을 요구하여 증험하려 하자, 이항복이 지난 신묘년(1591, 선조 24)에 통신사(通信史)가 가지고 온 왜의 서신을 미리 가지고 있었으므로 그것을 꺼내어 보였다. 그 중에는 이미 자문(咨文)과 주문(奏文)으로 보냈던 내용도 들어 있었는데, 황응양이 가슴을 치고 눈물을 흘리며 말하기를,
“조선이 상국(上國)을 대신하여 침략을 당하였는데도 의로운 소문은 드러나지 않고 도리어 나쁜 이름만 뒤집어 썼으니, 천하에 어찌 이런 일이 있겠는가.”
하고는, 드디어 돌아가 병부에 보고하니, 석성이 크게 기뻐하여 조선을 구원하는 의논이 결정되었다.
○ 경상도를 나누어 좌우 감사를 두었다.
이는 대체로 영남의 지역이 넓은 데다가 적이 중로(中路)를 따라 진영을 연결하여 좌우도가 서로 소통이 되지 않기 때문이었다.
○ 호남 의병장 김천일(金千鎰)이 군사를 거느리고 북상하였다. 삼도(三道)의 군사가 무너진 뒤로부터 경기 안이 완전히 살륙과 노략질을 당했는데, 적에게 빌붙어 도성에 들어간 자도 많았다. 천일이 의병 수천 명을 규합하니, 상이 장례원 판결사(掌隷院判決事)에 임명하는 동시에 창의사(倡義使)라는 칭호를 내렸다. 천일의 군사가 수원(水原)에 이르러 독산고성(禿山古城)에 웅거하여 적에게 빌붙은 간민(奸民)을 찾아내어 목을 베니, 돌아와 따르는 경기의 사민(士民)이 많았다.
○ 7월. 전라 절제사 권율(權慄)이 군사를 보내어 왜적을 웅치(熊峙)에서 물리쳤는데 김제 군수 정담(鄭湛)이 전사하였다. 왜병이 또 이치(梨峙)를 침범하니 동복 현감 황진(黃進)이 패배시켰다.
이때 적이 금산(錦山)에서 웅치를 넘어 전주(全州) 지경으로 침입하려고 했는데, 나주 판관 이복남(李福男)이 황박(黃璞)ㆍ정담 등과 요해지에 웅거하여 적을 맞아 공격하였으므로 감사 이광(李洸)이 군사를 보내어 싸움을 돕게 하였다. 왜적의 선봉(先鋒) 수천 명이 총을 쏘고 칼을 휘두르며 정면으로 돌진해 왔는데, 복남 등이 죽음을 무릅쓰고 싸워 활로 쏘아 죽인 것이 헤아릴 수 없었으며 적이 패하여 물러갔다.
이튿날 새벽에 적이 병력을 총동원하여 산골짜기에 가득하였고 총포 소리가 우레처럼 났다. 복남 등이 최후까지 힘을 다하여 한바탕 싸웠으나 결국 당해내지 못하고 퇴각하였으며, 황박의 군사도 패하여 복남의 진으로 들어갔다. 정담은 처음부터 힘을 다해 싸웠는데 붉은 기 아래 백마(白馬)를 타고 있는 적장을 쏘아 죽이니 적이 와해되어 물러갔다. 조금 뒤에 나주(羅州) 군사가 퇴각하자, 정담이 고군(孤軍)으로 포위당했는데 부하 장수가 정담에게 후퇴시키기를 권하니 정담이 말하기를 “차라리 적병 한 놈을 더 죽이고 죽고 말지 차마 내 몸을 위해 도망하여 적으로 하여금 기세를 부리게 할 수는 없다.” 하고 꼿꼿이 서서 동요하지 않고 활을 쏘아 빠짐없이 적을 맞혔다. 이윽고 적병이 사방으로 포위하자 군사들이 모두 흩어져 버리고 정담 혼자서 힘이 다하여 전사하였다. 종사관 이봉(李葑)도 전사하였다. 복남이 퇴각하여 재 아래 안진원(安鎭院)에 진을 쳤는데, 적이 방비가 있음을 알고 감히 재를 넘지 못하고 그만두었다. 정담은 임금이 도성을 떠나 피난했다는 사실을 듣고부터 눈물을 흘리고 분격해 하며 반드시 죽음으로 국가의 은혜를 보답하겠다고 맹세하였다. 군사를 일으키던 날에는 희생(犧牲)을 잡아 사사(社詞)에 제사를 지내고 맹세를 고한 뒤 떠났는데, 고을 사람들이 그의 충의(忠義)에 감복하였다. 뒷날 조정에 아뢰어 관직을 추증하고 정문(旌門)을 세웠다.
왜장(倭將)이 또 대군(大君)을 출동시켜 이치(梨峙)를 침범하자 권율이 황진을 독려하여 동복현의 군사를 거느리고 편비(偏裨 부장(副將)) 위대기(魏大奇)ㆍ공시억(孔時億) 등과 함께 재를 점거하여 크게 싸웠다. 적이 낭떠러지를 타고 기어오르자 황진이 나무를 의지하여 총탄을 막으며 활을 쏘았는데 쏘는 대로 맞지 않는 것이 없었다. 종일토록 교전하여 적병을 대파하였는데, 시체가 쌓이고 피가 흘러 초목(草木)까지 피비린내가 났다. 이날 황진이 탄환에 맞아 조금 사기가 저하되자 권율이 장사들을 독려하여 계속하게 하였기 때문에 이길 수 있었다. 왜적들이 조선의 3대 전투를 일컬을 때에 이치(梨峙)의 전투를 첫째로 쳤다. 이복남ㆍ 황진은 이 전투로 이름이 드러났다. 왜적이 웅치(熊峙)의 전진(戰陣)에서 죽은 시체를 모아 길 가에 묻어 몇 개의 큰 무덤을 만들고서 그 위에 “조선의 충간의담을 위로한다.[吊朝鮮國忠肝義膽]”라고 썼다.
○ 전주(全州)의 경기전(慶基殿)에 봉안하였던 태조(太祖)의 수용(睟容)을, 당시 전주가 위급해지자 참봉(參奉) 홍여율(洪汝栗)이 어용을 받들고 적병을 피하여 해로(海路)를 경유해서 의주(義州)에 도달하니, 상이 행궁(行宮)에서 곡하며 제사지내고 묘향산(妙香山)의 절에 봉안하였다. 그리고 여율에게 상으로 6품의 직책을 주라고 명하였다.
○ 의병장 김준민(金俊民)이 왜병을 무계현(茂溪縣)에서 물리쳤으며, 곽재우(郭再祐)가 또 왜병을 현풍(玄風)과 창녕(昌寧) 사이에서 잇따라 물리치니 적이 주둔지에서 철수하여 도망하였다. 이로부터 우도(右道)의 적로(賊路)가 단절되어 적병이 대구(大丘)의 중로(中路)로 왕래하였다.
○ 이순신(李舜臣)이 왜병을 고성(固城) 견내량(見乃梁)에서 크게 격파하였다. 이때에 왜적이 수군을 크게 출동시켜 호남(湖南)으로 향하자 순신이 이억기(李億祺)와 함께 각기 거느린 군사를 재촉하여 나가다가 견내량에서 적을 만나게 되었는데, 적선이 바다를 뒤덮어 오고 있었다. 원균(元均)이 앞서의 승리에 자신하여 곧장 대적하여 격파하려 하자 순신이 말하기를 “이곳은 항구가 좁고 얕아 작전할 수가 없으니 넓은 바다로 유인해 내어 격파해야 한다.” 하였다. 그러나 원균이 듣지 않자, 순신이 말하기를 “공이 병법(兵法)을 이처럼 모른단 말인가.” 하고 여러 장수들에게 영(令)을 내려 거짓 패하여 물러나는 척하니, 적이 과연 기세를 몰아 추격하였다. 이에 한산도(閑山島) 앞바다에 이르러 군사를 돌려 급히 전투를 개시하니 포염(砲焰)이 바다를 뒤덮었고 적선 70여 척을 남김없이 격파하니 피비린내가 바다에 진동하였다. 또 안골포(安骨浦)에서 그들의 구원병을 역습하여 패배시키니 적이 해안으로 올라 도망하였는데 적의 배 40척을 불태웠다. 왜진(倭陣)에서 전해진 말에 의하면 “조선의 한산도 전투에서 죽은 왜병이 9천 명이다.”라고 하였다, 이 일을 아뢰자 순신에게 정헌대부(正憲大夫)의 품계를 상으로 내리고 글을 내려 칭찬하였다.
○ 도원수 김명원(金命元) 등에게 명하여 순안현(順安縣)에 주둔하면서 적을 막도록 하였다. 적이 처음 평양(平壤)에 들어올 때 군사가 대략 6~7천 명 정도였는데, 난민(亂民)을 초유(招誘)하고 군사를 만들어 성을 지키게 하면서 다시 나와 서로(西路)를 묻지 않았다. 이는 대체로 여러 곳에 분리 주둔하여 거느린 군사가 많지 않았기 때문에 중국 군대에게 공격당할까 두려워해서였다. 이로 말미암아 김명원이 이원익과 흩어진 군졸 및 강변의 토병(土兵)을 불러모아 다시 군용(軍容)을 갖추고서 한응인(韓應寅)과 함께 순안현으로 나아가 주둔하여 부산원(斧山院)의 현계(峴界)를 방수(防守)할 수 있게 되었다. 이로부터 순안현 이상의 여러 고을에 이민(吏民)이 되돌아와 모였다.
○ 요진(遼鎭)에서 총병(摠兵) 조승훈(祖承訓), 참장(參將) 곽몽징(郭夢徵), 유격(遊擊) 사유(史儒)ㆍ왕수신(王守臣)ㆍ대조변(戴朝弁) 등을 파견하여 기마병 3천 명을 거느리고 평양을 공격하게 하였으나 이기지 못한 채 사유와 대조변은 탄환에 맞아 죽었고 승훈은 퇴각하여 요동(遼東)으로 되돌아갔다. 그런데 승훈이 요진(遼鎭)에 가서 무고하기를 “한창 전투할 때에 조선 군사 일진(一陣)이 적진에 투항(投降)하였기 때문에 전투가 불리하였다.”고 하였으므로 상이 사신을 파견하여 분변해서 의혹을 풀게 하였다.
○ 승통(僧統)을 설치하여 승군(僧軍)을 모집하였다. 행조(行朝)에서 묘향산(妙香山)의 옛 승관(僧官) 휴정(休靜)을 불러 그로 하여금 중을 모집하여 군사를 만들도록 하였다. 휴정이 여러 절에서 불러 모아 수천여 명을 얻었는데 그의 제자 의엄(義嚴)을 총섭(摠攝)으로 삼아 그들을 거느리게 하고 원수(元帥)에게 예속시켜 성원(聲援)하게 하였다. 그리고 또 격문(檄文)을 보내어 제자인 관동(關東)의 유정(惟政)과 호남(湖南)의 처영(處英)을 장수로 삼아 각기 본도에서 군사를 일으키게 하여 수천 명을 얻었다. 유정은 담력과 지혜가 있어 여러 번 왜진(倭陣)에 사자로 갔는데 왜인들이 신복(信服)하였다. 승군(僧軍)은 제대로 접전(接戰)은 하지 못했으나 경비를 잘하고 역사를 부지런히 하며 먼저 무너져 흩어지지 않았으므로 여러 도에서 그들의 힘을 입었다.
○ 왜장 청정(淸正)이 북계(北界)로 침입하니 회령(會寧) 사람들이 반란을 일으켜 두 왕자(王子 임해군(臨海君)과 순화군(順和君))와 여러 재신(宰臣)을 잡아 적을 맞아 항복하였다. 이로써 함경 남도와 북도가 모두 적에게 함락되었다.
○ 의병장 고경명(高敬命)이 금산(錦山)의 적을 토벌하다가 패하여 전사하였다.
경명이 모집한 병사 6~7천 명을 단속해서 북상하여 여산(礪山)에 주둔하였는데 왜적이 호남 지역을 침입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에 휘하 장사들이 본도를 염려하여 먼저 도내의 적을 토벌한 뒤에 북쪽으로 정벌할 것을 다투어 청하자 경명이 여러 사람의 의논을 따라 군사를 진산(珍山)으로 옮겼는데 당시 왜적은 금산으로 퇴각하여 진을 두터이 치고 견고하게 하고 있었다. 경명이 방어사 곽영(郭嶸)과 함께 재를 넘어 험한 곳으로 들어가 곧장 금산성 밖에 육박하였는데 곽영이 먼저 날랜 장사 수백 명을 보내어 적을 시험하다가 적에게 패하여 물러나자 경명이 북을 울리며 전투를 독려하여 도로 적병을 성 밖에서 위축시키고 성 안에서는 화포를 쏘아 적이 주둔하던 관사(館舍)를 불태우니 적이 감히 나오지 못하였다.
이튿날 동틀녘에 다시 방어사와 같이 성 밖으로 군사를 진격시켜 관군은 북문을 공격하고 경명은 서문을 공격하였다. 그런데 적이 관군의 진이 약한 것을 알고 군사를 총동원하여 나와 급히 공격하니, 관군이 크게 패배하였다. 경명은 군사들에게 명령을 내려 일제히 활을 당기고서 대기하고 있었는데, 의병이 급히 부르짖기를 “방어사의 군사가 패하였다.”고 하자 대오가 무너져 흩어졌다. 경명이 말에서 떨어졌는데 말이 달아나 버리니 종사관 안영(安瑛)이 자기가 타고 있던 말을 주어 타게 하고 도보로 따라갔다. 종사관 학유(學諭) 유팽로(柳彭老)는 말이 건장해서 먼저 나가다가 그의 종에게 묻기를 “대장은 모면하였는가?” 하니, 아직 못 나왔다고 하자, 팽로가 급히 말을 채찍질하여 어지러운 군사들 속으로 되돌아 들어갔다. 이에 경명이 돌아보며 말하기를 “나는 죽음을 면하지 못할 것이니 그대는 말을 달려 빠져나가라.” 하였다. 팽로가 말하기를 “어떻게 차마 대장을 버리고 살기를 구하겠는가.” 하고 드디어 안영과 함께 경명을 보호하다가 적진에서 함께 전사하고 경명의 차자(次子) 인후(因厚)도 달려가 싸우다가 진중에서 전사하였다.
경명은 문학(文學)에 종사하여 무예를 익히지 않았으며 나이 또한 노쇠하였다. 이때에 맨 먼저 의병을 일으켰는데 충의심만으로 많은 군사들을 격려하여 위험한 곳으로 깊이 들어가 솔선하여 적과 맞서다가 전사한 것이다. 공은 성취하지 못했어도 의로운 소문이 사람을 감동시켜 계속 의병을 일으킨 자가 많았으며, 나라 사람들이 그의 충렬(忠烈)을 칭송하면서 오래도록 잊지 않았다. 처음에 상이, 경명이 의병을 일으켰다는 소문을 듣고 공조참의 겸 초토사에 제수하도록 명하고, 글을 내려 칭찬하고 위로하였다. 공조 좌랑 양산숙(梁山璹)이 행재소에서 남쪽으로 돌아올 적에 상이 직접 유시하기를 “돌아가 고경명과 김천일(金千鎰)에게 말하라. 그대들이 빨리 수복하여 나로 하여금 그대들의 얼굴을 조만간 볼 수 있게 하기를 바란다고 하라.” 하였다. 그러니 관작 제수의 명이 이르지도 않아서 경명이 패하여 전사하였는데 예조 판서에 추증하였다. 그 뒤에 광주(光州)에 사우(祠宇)를 세우고 포충사(褒忠祠)라고 편액을 하사하였다.
○ 서인(庶人) 홍계남(洪季南)이 군사를 일으켜 적을 토벌하였다. 계남은 양성현(陽城縣) 사람으로 충의위(忠義衛) 홍언수(洪彦秀)의 첩의 아들이다. 담력과 용맹이 있고 말타고 활쏘는 데에 능하여 금군(禁軍)에 소속되어 통신사를 따라 일본에 들어갔었는데, 왜인들이 그가 말타고 활쏘는 것을 구경하였으므로 그의 이름을 기억하였다. 그러자 계남이 왜진(倭陣)으로 달려들어가 그 아비의 시체를 거두어 돌아왔는데, 왜인들이 계남인 줄 알고 감히 서로 대항하지 못하였다. 계남이 아비의 군사를 거두고 높은 산꼭대기에 보루를 쌓고 양천(陽川)ㆍ안산(安山) 두어 고을의 지역을 굽어보며 군사를 주둔시키고 적의 헛점을 틈타 동서로 습격하여 많이 참살(斬殺)하였다. 그래서 적이 감히 그 지역에 들어가지 못하였으므로 경기 지역과 호서의 여러 고을이 그의 힘을 입었다. 특별히 수원판관 겸 조방장에 제수하였다.
○ 고언백(高彦伯)을 양주 목사(楊州牧使)로 삼았다. 언백은 교동(喬桐) 사람으로서 향리(鄕吏)로 무과에 올라 종군하며 모반한 호인(胡人)을 공격하여 명성이 있었다. 도원수를 따라 장령(將領)이 되어서는 적의 수급(首級)을 벤 공이 있었는데 양주(楊州)로 돌아가 군사를 모아 적군을 치겠다고 자청하니, 상이 특별히 당상관의 자급을 주어 양주 목사에 임명하고 능침(陵寢)을 보호하도록 하였다. 언백이 고향으로 돌아와 장사(壯士)를 모집하여 산꼭대기의 험한 곳에 모여 웅거하면서 가끔 나가 흩어진 적군을 습격하였다. 적이 많은 군사를 풀어 수색하였으나 언백이 기회를 엿보아 가며 잘 피하고 숨었으므로 적이 마침내 해치지 못하였다. 언백은 항상 여러 능(陵)에 군사를 잠복시켰다가 수시로 적을 쏘아 죽이곤 하였다. 적이 태릉(泰陵)을 침범한 일이 있었는데 언백이 그들을 쫓아 버렸으므로 여러 능이 온전하게 되었다. 상이 그의 공로에 상을 주고 여러 번 자급을 올려 주어 장려하였다.
○ 고경명 휘하의 사자(士子)들이 흩어진 군사 8백 명을 불러모아 화순(和順) 사람인 전 부사 최경회를 추대하여 장군으로 삼고 골(鶻) 자로 표신(標信)을 삼았다. 절의를 지키다 죽은 유팽로(柳彭老)등을 높이고 본보기로 삼아 많은 사람들을 권면하니 도내의 사민(士民)들이 많이 추종하였다.
○ 8월. 도원수 김명원(金命元)이 순찰사 이원익(李元翼)과 순변사 이빈(李薲)으로 하여금 군사를 거느리고 평양으로 진군하여 공격하게 하였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당시 이원익 등은 순안(順安)에 주둔하여 천여 명의 군사를 불러 모았는데 정예군사가 제법 많았다. 방어사 김응서(金應瑞), 별장 박명현(朴命賢) 등은 용강(龍岡)ㆍ삼화(三和)ㆍ증산(甑山)ㆍ강서(江西) 등 바닷가 여러 고을의 군사 만여 명을 거느리고 20여 둔(屯)에 배치하고 평양의 서쪽을 압박하며 때로 영세한 적을 소탕하면서 성 밖까지 이르렀으나 적은 끝내 나오지 않았다. 별장 김억추(金億秋)는 수군을 거느리고 대동강(大洞江) 입구에 웅거하였고, 중화(中和)의 별장 임중량(林仲樑)은 2천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보루를 쌓아 주둔하며 지켰다.
행조(行朝)에서는 평양의 적세(賊勢)가 쇠약해져 우리 군사가 충분히 진격하여 취할 수 있고 또 중국 군사를 기다릴 수만은 없다고 여겨 영(令)을 내려 진격하기를 재촉하였다. 이에 삼로(三路)의 군사가 함께 나가 정탐하는 적을 만나 두어 명을 쏘아 죽였는데, 얼마 안 되어 적병이 크게 이르자 관군이 놀라 강가에서 흩어져 도망하였다. 이에 용병(勇兵)이 많은 피해를 입었는데, 세 번 싸워 모두 불리하였으므로 물러나 본소(本所)에 주둔하였다.
○ 황제가 호군(犒軍)하는 비용으로 은(銀) 2만 냥을 내리고 군사를 출동시켜 구원하도록 명하였다.
조승훈(祖承訓)이 이미 패배하자 행재소에서 크게 두려워하여 요진(遼鎭)에 사신을 보내어 군사를 파견해서 구원해 주기를 계속 청하니, 병부(兵部)에서 주청하여 성지(聖旨)를 받들었는데, 그 성지에 “조선은 본래 정성을 다 바친 우리의 속국이다. 도적의 난을 당하고 있는데 어찌 앉아서 보고만 있을 수 있겠는가. 요동 진무관(遼東鎭撫官) 은 즉시 정병(精兵) 2지(枝)를 보내어 구원하도록 하고 은(銀) 2만 냥을 그 나라에 보내 호군(犒軍)하게 하고 대홍저사(大紅紵絲) 두 벌을 국왕에게 내려 위로하라.” 하였다.
이에 유격(遊擊) 장기공(張奇功)을 파견하여 은을 풀어 꼴과 양식을 사들인 뒤 의주(義州)로 운반해서 군향(軍餉)으로 사용하게 하고, 참장(參將) 낙상지(駱尙志)를 파견하여 남병(南兵)을 거느리고 북안(北岸)에 주둔하게 하였는데, 대군은 아직 나오지 않았다. 낙상지는 용력이 있어 천 근(斤)을 들었으므로 낙천근(駱千斤)이라 불리웠는데 매우 위명을 떨치었다.
○ 의병장 조헌(趙憲)이 청주성(淸州城)을 회복하였다.
조헌이 처음에 수십 명의 유생(儒生)과 뜻을 모아 의병을 일으킨 뒤 1천 6백 명을 모집하였다. 공주 목사 허욱(許頊)이 의승(義僧) 영규(靈圭)를 얻어 그로 하여금 승군(僧軍)을 거느리고 조헌을 돕게 하니, 조헌이 군사를 합쳐 곧장 청주 서문에 육박하였다. 적이 나와서 싸우다가 패하여 도로 들어가니, 조헌이 군사를 지휘하여 성에 올라갔는데, 갑자기 서북쪽에서부터 소나기가 쏟아져 내려 천지가 캄캄해지고 사졸들이 추워서 떨자 조헌이 탄식하기를 “옛 사람이 성공하고 실패하는 것은 하늘에 달려 있다고 말했는데 정말 그런 것인가?” 하고 맞은편 산봉으로 진(陣)을 퇴각시켜 성 안을 내려다 보았다.
이날 밤 적이 화톳불을 피우고 기(旗)를 세워 군사가 있는 것처럼 위장하고 진영을 비우고 달아났다.
○ 진주 판관(晉州判官) 김시민(金時敏)이 사천 현감(泗川縣監) 정득열(鄭得悅) 등과 군사를 합하여 사천ㆍ고성(固城)ㆍ진해(鎭海)의 적을 무찌르니 적병이 점점 철수하여 도망하였으므로 김시민이 연로(沿路)의 여러 고을을 수복하였다.
○ 창의사(倡義使) 김천일(金千鎰) 등이 유생 곽현(郭玄)ㆍ양산숙(梁山璹)을 보내어 바닷길을 따라 관서(關西)에 들어가 행조(行朝)에 일을 아뢰었다. 양산숙이 또 상소하여 계책을 올리니, 상이 자주 불러서 위로하고 공조 좌랑에 임명하였다. 그리고 이호민(李好閔)으로 하여금 교서(敎書) 2통(通)을 짓게 하여 양산숙에게 부쳐 보냈다. 하나는 호남에 유시하는 것이었는데, 그 대략에,
“이광(李洸)의 군사가 용인(龍仁)에서 패배하였다는 말을 듣고부터 다시 남쪽을 바라보며 구원을 기대하는 생각이 없었다. 그런데 이제 들으니 고경명과 김천일 등이 의병 수천 명을 규합하여 절도사 최원(崔遠)과 함께 수원(水原)으로 진주(進駐)했다 한다. 부덕(不德)한 내가 어떻게 이토록까지 사람들이 사력을 다하게 할 수 있었겠는가. 이제 양산숙 등을 보내어 돌아가서 알리게 하니 그대들은 나의 괴로운 뜻을 헤아리도록 하라.
내가 비록 인애(仁愛)가 백성들에게 미치지 못하고 정치에 실수한 것이 많았다 하더라도 본래의 마음은 언제나 백성을 사랑하고 어여삐 여기는 것으로 뜻을 삼지 않은 적이 없었다. 다만 살피건대 근래 변방에 흔단이 많고 군정(軍政)이 피폐하고 해이해졌으므로 중외에 신칙하여 엄중하게 방비를 더하도록 하였는데, 성을 높이 쌓을수록 국가의 형세는 날마다 낮아지고 못을 깊게 팔수록 백성의 원망이 더욱 깊어지는 것은 정말 헤아리지 못하였다. 게다가 궁중이 엄밀하지 못하여 백성들의 조그마한 이익까지도 거둬들이고 형옥(刑獄)이 중도를 상실하여 원통한 기운이 화기를 손상케 하였으며, 왕자(王子)가 이익을 독점하여 소민(小民)들이 생업을 잃게 하였으니, 백성들이 나를 허물하는 것은 당연하다. 내가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는가.
이제 유사(有司)로 하여금 모두 혁파하여 돌려주게 하였다. 무릇 이러한 유(類)를 내가 어찌 모두 알고 있었던 것이겠는가. 그러나 내가 몰랐던 것도 나의 잘못이다. 여기까지 생각하다 보면 후회스럽다마는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그대 사민(士民)들은 내가 잘못을 뉘우치고 새롭게 다스리려는 것을 허락하기 바란다.”
하고, 또 이르기를,
“용만(龍灣)의 한 모퉁이에서 천운이 어렵게 되었고 지운(地運)이 이미 다 되었으니 내 어디로 간단 말인가? 인정이 극도로 곤궁해지면 회복하기를 생각하는 것이 당연한 이치이다. 서늘한 가을 기운이 조금 움직이는데 변방은 벌써 추워진다. 저 장강(長江)을 보니 역시 동쪽으로 흐르는데, 돌아가려는 한 생각이 흐르는 강물처럼 왕성하다.”
하고, 또 이르기를,
“하늘이 이성(李晟 당 덕종(唐德宗) 때의 인물)을 탄생시키니 성궐(城闕)을 회복할 기약이 있었고, 날마다 장소(張所 송 고종(宋高宗) 때의 인물)를 기다리니 원릉(園陵)에 흠이 없음을 아뢰었다. 가뭄에 비를 바라듯 하는 마음에 속히 부응하여 나의 어려운 고생살이를 면하게 하라.”
하였다. 하나는 영남의 사민(士民)에게 유시하는 것이었는데 호남에 보내는 것과 같았다. 끝 부분에 이르기를,
“지난번에 듣건대, 우감사(右監司) 김수(金睟)는 용인에서 패하여 퇴각하였고 좌감사 김성일(金誠一)은 진주(晉州)에서 용사를 모집한다 하였다. 좌병사 이각(李珏)이 참수(斬首)당했으므로 박진(朴晉)이 충용하다 하여 그를 대신하게 하였으며, 우병사 조대곤(曺大坤)은 늙고 쇠약하므로 양사준(梁士俊)으로 대신하게 하고, 변응성(邊應星)을 좌도 수사로 삼았는데, 모두 각기 본도로 돌아가 힘써 주선하여 경영하는지 모르겠다. 좌도의 영해(寧海) 일대와 우도의 진주 등 약간의 고을이 아직 보존되고 있으니, 이것은 그래도 1성(成 사방 10리의 땅)이나 1려(旅 5백 명의 단위)보다는 나은 것이 아니겠는가. 본도의 백성들은 성실하고 후덕하여 본래 충성스럽고 의로운 인사가 많았다. 그대들이 진정 서로 분발하고 면려한다면 틀림없이 회복시키는 근본이 되지 않는다고 못할 것이다.
듣건대, 정인홍(鄭仁弘)ㆍ김면(金沔)ㆍ박성(朴惺)ㆍ곽율(郭)ㆍ조종도(趙宗道)ㆍ곽재우(郭再祐) 등이 의병을 일으켜 많은 무리를 규합했다 하니, 본도의 충성과 의리는 오늘날에 있어서도 오히려 없어지지 않았다 하겠다. 더구나 곽재우는 비상한 작전으로 적을 더욱 많이 죽였는데도 그 공로를 스스로 진달하지 않고 있으니 내가 더욱 기특하게 여기는 바로 그의 명성을 늦게 들은 것이 한스러울 뿐이다.
그리고 호남에도 전 부사 고경명(高敬命)ㆍ김천일(金千鎰)이 의병 수천 명을 규합하여 본도 절도사 최원(崔遠) 등과 수원(水原)으로 진군하여 주둔하면서 바야흐로 경기(京畿)를 회복하려고 도모하면서 그의 무리인 양산숙 등으로 하여금 수륙(水陸)의 험한 길을 달려와 행재(行在)에 아뢰게 하였다. 내가 아뢴 내용을 보고 눈물을 흘리면서 한편으로는 위로가 되고 한편으로는 슬픈 마음이 들었다. 양산숙 등이 돌아가는데 이 글을 부쳐서 그로 하여금 상세히 전하게 하였으니, 내가 알리는 뜻을 잘 헤아리라.
요즈음 맑은 가을철에 태백(太白)이 바야흐로 높아 군사의 위용이 갖추어진 곳에 살기(殺氣)마저 따르니, 충성과 의리가 향하는 곳에 어떤 적인들 무찌르지 못하겠는가. 그대들은 마땅히 요해처를 제어하여 구적(寇賊)들을 초멸하도록 하라. 그리고 또한 연도에 복병을 설치하고 좌우에서 협공하여 적이 마음대로 말을 달릴 수 없게 하라. 그리하여 한 지방을 안정시켜 노약자들을 불러 모은 연후에 힘을 합하여 도성을 수복하고 와서 승여(乘輿)를 영접하도록 하라. 그리하면 그대들은 살아서는 아름다운 이름을 누리게 될 것이며, 혜택이 자손들에게 전해질 것이니 위대한 일이 아니겠는가. 이에 정인홍을 제용감 정으로, 김면을 합천 군수(陜川郡守)로, 박성을 공조 좌랑으로, 곽재우를 유곡 찰방(幽谷察訪)에 임명하여 표창하고 면려한다.”
하였다.
교서(敎書)가 길이 막혀 몇 개월 만에야 도착하였는데 사민(士民)들이 임금의 교서 내용을 듣고 감격하여 울지 않는 이가 없었다.
○ 판관 김시민(金時敏)을 발탁하여 진주 목사(晉州牧使)로 삼았다. 김시민이 진주의 주민을 안정시키면서 출전(出戰)하여 누차 승첩을 거뒀으므로 금산(金山) 이하에 머물며 주둔하던 적이 모두 도망하였다. 이에 김시민이 도로 진주에 주둔하면서 굳게 지킬 계책을 세웠다.
○ 별장 권응수(權應銖)가 영천(永川)의 적을 격파하고 그 성을 회복하였다.
안동 이하에 주둔한 적이 모두 철수하여 상주(尙州)로 향하였으므로 경상좌도의 수십 고을이 안전하게 되었다.
권응수는 용맹스러운 장수로 과감히 싸우는 것을 여러 장수들이 따르지 못하였다. 이 일이 알려지자, 상으로 통정대부(通政大夫)의 품계로 올려 방어사를 삼았다.
○ 의병장 조헌과 의승(義僧) 영규가 금산(錦山)의 적을 공격했으나 이기지 못하고 전사하였다.
조헌은 외로운 군사를 이끌고 홀로 진군하여 곧장 금산의 적을 공격하려 하였다. 이에 전라 감사 권율(權慄)과 충청 감사 허욱(許頊)이 모두 만류하면서 동시에 군사를 크게 일으킬 것을 청하고 기일을 약속하였다. 그러나 또 기일이 연기되자 조헌은 그들이 머뭇거리는 것을 분하게 여긴 나머지 7백여 명만을 이끌고 재를 넘으려 하였다. 영규가 간곡한 말로 만류하기를 “반드시 관군이 뒤에서 지원을 해 주어야만 들어갈 수 있다.” 하였으나, 조헌은 울면서 말하기를 “군부(君父)가 어디에 계신가. 군주가 치욕을 당하면 신하는 목숨을 버려야 하니, 그때가 바로 지금이다. 성패와 이해 관계를 어떻게 돌아볼 수 있겠는가.” 하고 북을 치며 행군하였다. 영규도 “조공(趙公)을 혼자 죽게 할 수는 없다.” 하고, 이에 거느린 승려 수백 명과 진(陣)을 합하여 함께 떠나면서 문첩(文牒)을 계속 보내 관군이 이어 진군하도록 재촉하였다.
조헌의 군사가 곧장 금산성 밖 10리 되는 곳에 이르러 진을 치고 관군을 기다리는데, 적이 후속부대가 없다는 것을 알고는 군사를 잠복시켜 후면을 끊은 뒤 군사를 총동원하여 나와 싸웠다. 조헌이 영(令)을 내리기를 “오늘은 한번 죽음이 있을 뿐이니 하나의 의(義) 자에 부끄러움이 없도록 하라.” 하니, 군사들이 모두 응락하였다. 한참 동안 힘을 다하여 싸웠는데 적이 세 번 진격했다가 세 번 패하였다. 그러나 조헌의 군사는 이미 화살이 다 떨어진 상태였다. 조헌은 장막 가운데 움직이지 않고 앉아 있었는데, 좌우에서 빠져나가기를 청하자, 조헌이 말하기를 “대장부가 죽었으면 죽었지 구차스럽게 살 수는 없다.”하고, 북을 울리며 더욱 급하게 전투를 독려하였다. 군사들은 맨 주먹으로 육박전을 벌였는데, 한 사람도 자리를 떠나는 자가 없이 모두 조헌과 함께 전사하였으며, 영규도 전사하였다. 적의 무리는 죽은 자가 더 많아 시체를 운반하여 성으로 들어가면서 우는 소리가 연이어졌다.
이튿날 동생 조범(趙範)이 몰래 전쟁터에 들어가서 시체를 거두었는데, 조헌은 깃발 아래에서 죽었고 장수와 군사들이 모두 곁에 빙둘러 죽어 있었다. 4일 만에 빈(殯)하였는데 낯빛이 살았을 적과 같았으며 눈을 부릅뜨고 수염이 움직여 사람들은 그가 죽은 지 이미 오래되었음을 깨닫지 못하였다. 적이 퇴각한 뒤에 제자들이 가서 7백 명의 시체를 거두어 무덤 하나를 만들고 칠백의사총(七百義士塚)이라고 표시하였다. 조헌의 아들 완기(完基)는 신체가 장대하고 성품과 도량 역시 뛰어났다. 군사가 패하게 되자 일부러 관복(冠服)을 화려하게 입었으니 그의 아버지를 대신하여 죽고자 한 것이다. 이에 적이 그를 주장(主將)으로 오인하고 그 시체를 찢었다.
함께 전사한 자로 드러난 자는 다음과 같다. 참봉 이광륜(李光輪)은 효성스럽고 우애와 절개가 있었다. 처음에 향병(鄕兵) 수백 명을 모집하여 처음부터 끝까지 계획에 참여하였다. 봉사 임정식(任廷式)은 성품이 질박하고 곧았으며 무재(武才)가 있었는데, 척후(斥候)로 진(陣)밖에 있다가 조헌의 위급함을 보고 말에 채찍질하며 돌격하여 전사하였다. 사인(士人) 이려(李礪)는 이탁(李鐸)의 손자로 학문과 덕행이 있었고, 사인 김절(金節)은 맨 먼저 군사를 모집하여 전투에 참여하면서 역전(力戰)하였다. 만호 변계온(邊繼溫), 현감 양응춘(楊應春), 봉사 곽자방(郭自防), 무인(武人) 김헌(金獻)ㆍ김인남(金仁男)ㆍ이양립(李養立)ㆍ정원복(鄭元福)ㆍ강인서(姜仁恕)ㆍ박봉서(朴鳳瑞)ㆍ김희철(金希哲)ㆍ이인현(李仁賢)ㆍ황삼양(黃三讓)ㆍ박춘년(朴春年)ㆍ한기(韓琦)ㆍ박찬(朴贊)은 모두 편비(褊裨)로 혈전을 벌이다 전사하였다. 사인(士人) 박사진(朴士振)ㆍ김선복(金善復)ㆍ복응길(卜應吉)ㆍ신경일(申慶一)ㆍ서응시(徐應時)ㆍ윤여익(尹汝翼)ㆍ김성원(金聲遠)ㆍ박혼(朴渾)ㆍ조경남(趙敬男)ㆍ고명원(高明遠)ㆍ강몽조(姜夢祖)는 모두 문인(門人)으로 종군하다가 전사하였다. 일이 알려지자 조헌에게는 이조 참판이 추증되고 그의 아들 완도(完堵)를 녹용(錄用)하였으며 그 집에 월름(月廩)을 지급하였다. 이광륜은 사헌부 집의에 추증되었다.
○ 해남 현감(海南縣監) 변응정(邊應井)이 처음에 조헌과 함께 금산(錦山)을 공격할 것을 약속하였는데, 이윽고 관군과 함께 모두 기일을 늦추었다. 조헌이 패하여 전사하였다는 말을 듣고 탄식하기를 “어찌하여 의병장과 약속을 하고서 위배하여 함께 죽지 못했단 말인가.” 하고 즉시 군사를 이끌고 단독으로 진군하여 성 아래에 이르러 격투(格鬪)하다가 전사하였다.
○ 금산(錦山)에 주둔했던 적이 밤에 도망하였다. 적이 비록 조헌 등의 군사를 패배시키기는 하였지만 죽거나 다친 군사가 매우 많았고 관군이 잇따라 이르러 피폐한 때를 이용하여 공격할까 의심하고서 무주(茂朱)와 옥천(沃川)에 주둔했던 군사들을 거두어 군영을 태워버리고 밤에 도망하였다. 그리하여 호남이 다시 완전하게 되었는데, 사람들은 조헌 등의 공이 장수양(張睢陽 당 나라의 장순(張巡))에 비교할 만하다고 하였다.
○ 이때 이순신(李舜臣)은 수군을 거느리고 서해(西海)의 입구에 웅거하였으며, 김성일(金誠一) 등은 진주(晉州)의 관요(關要)를 지키고 있었다. 적이 금산(錦山)의 길을 경유하여 호남에 침입했으나 여러 번 좌절당하였으므로 도로 종래의 길로 퇴각하여 돌아가니 호서 또한 함락되는 것을 면하였다. 국가가 이 두 도를 의지하여 군수 물자를 공급할 수 있었으니, 한때의 장사들이 방수(防守)한 공이 또한 많았다고 하겠다.
○ 9월. 중국 조정에서 왜의 진영에 사자로 보낸 유격(遊擊) 심유경(沈惟敬)이 돌아왔다. 당초 조승훈(組承訓)이 패하고 나자 적이 더욱 교만해져 우리 군대에 글을 보내어 장차 서쪽으로 올라가겠다고 큰소리치므로 행조(行朝)에서 두려워하였다. 심유경은 본래 절강성(浙江省) 사람으로 평소 왜국의 실정에 익숙하였으므로 병부 상서 석성(石星)이 유격이란 칭호를 붙여 주면서 그로 하여금 적의 사정을 정탐하게 하였다. 순안(順安)에 이르러 먼저 한 사람의 가정(家丁)을 왜군의 진영에 보내어 황제의 칙지로 책망하기를 “조선이 일본에 무엇을 잘못했기에 일본이 어찌 마음대로 군사를 일으켰는가?” 하니, 행장(行長)이 글을 보고는 직접 만나 일을 의논하자고 회보하였다. 심유경이 즉시 3~4명을 거느리고 가니, 행장 등이 군사를 매우 엄하게 진열하고 성 북쪽의 산 위로 나와서 만났다. 행장이 구봉(求封)과 통공(通貢)에 대한 일을 말하자, 심유경이 행장 등에게 말하기를,
“이곳은 바로 중국 조정의 지방이니 그대들은 물러나 주둔하면서 중국 조정의 다음 명령을 기다려야 한다.”
하니, 행장이 지도(地圖)를 보이면서 말하기를,
“이곳은 분명히 조선 지역이다.”
하였다. 심유경이 말하기를,
“평상시에 여기서 조서(詔書)를 영접하는 까닭에 많은 궁실(宮室)들이 있다. 비록 여기가 조선 지역이라 하더라도 바로 중국의 지경이니 여기에 머물 수는 없다.”
하니, 행장이 다시 회보할 때까지 기다릴 것을 청하고 물러갔다. 심유경이 갔다가 돌아오는 기간을 50일로 정한 뒤, 그동안에는 왜군의 무리가 평양의 서북쪽 10리 밖을 나오지 못하고 조선의 군사도 10리 안에는 들어가지 못하게 하고는 나무를 세워 금표(禁標)를 하고 돌아왔다.
○ 전 사성(司成) 우성전(禹性傳)이 의병을 일으켜 의(義)자로 군호(軍號)를 삼았는데, 경기 안의 사민(士民) 중 따르는 자가 많아 군사가 수천 명이나 되었다. 얼마 있다가 강화(江華)로 들어가 김천일(金千鎰)과 군사를 연합하였다.
○ 중국 황제가 행인사 행인(行人司行人) 설번(薛藩)을 파견하여 조칙을 내리고 위로하며 유시하기를,
“그대 나라는 대대로 동번(東藩)을 지키며 평소 공손히 순종하였고, 의관 문물(衣冠文物)이 성해 살기 좋은 곳이라고 불려졌다. 그런데 요즈음 듣건대 왜노가 창궐하여 대거 침입해서 왕성(王城)을 함락시키고 평양을 점거하여 생민들은 도탄에 빠져 원근이 소란하며 국왕은 서쪽의 바닷가로 피신하여 초야에 있다고 하니, 그렇게 결딴난 모습을 생각하면 짐(朕)의 마음이 서글퍼진다. 엊그제 급박함을 고하는 소식을 받고 이미 변신(邊臣)에게 조칙을 내려 군사를 일으켜 구원하도록 하였다. 이제 또 행인(行人)을 차송하여 그대 국왕에게 알리는 것이니 마땅히 그대 조종(祖宗)이 대대로 전한 기업을 생각하도록 하라. 어떻게 차마 하루아침에 가벼이 버리겠는가. 급히 치욕을 씻고 흉적을 제거해야 할 것이니 힘써 바로잡고 회복할 것을 도모하라. 그리고 다시 그대 나라의 문무 신민에게 잇따라 유시하여 각기 군주에게 보답하는 마음을 견고히 하고 원수를 갚는 의리를 크게 분발하도록 해야 할 것이다.
짐이 지금 문무 대신(大臣) 2원(員)에게 명하여 요양(遼陽)의 정병(精兵) 10만 명을 통솔하고 가서 도와 적을 토벌하도록 하였다. 기필코 그대 나라의 병마(兵馬)와 함께 전후에서 협공하여 흉적을 모조리 죽여 하나도 남기지 말도록 해야 할 것이다. 짐이 하늘의 명명(明命)을 받아 화이(華夷)의 군주가 되어 지금 만국이 모두 편안하고 사해가 안정되어 있는데 어리석은 소추(小醜 왜적을 가리킴)가 감히 횡행하므로 다시 동남변해(東南邊海)의 여러 진(鎭)에 조칙을 내리고 아울러 유구(琉球)ㆍ섬라(暹羅) 등의 나라에 선유(宣諭)하여 군사 10만 명을 모집해서 동쪽으로 일본(日本)을 정벌하여 경예(鯨鯢 악인을 가리킴)를 주살하고 사해를 안정시키게 하였다. 그렇게 되면 작위(爵位)를 주고 포상하는 성대한 전례를 짐이 어찌 아끼겠는가.
대체로 선세(先世)의 강토를 회복하는 것은 곧 대효(大孝)이며 군부(君父)의 환난에 급히 달려가는 것은 곧 지극한 충성이다. 그대 나라의 군신들은 평소 예의를 알고 있으니 틀림없이 짐의 마음을 잘 체득할 것이다. 옛날의 문물을 회복시켜 국왕으로 하여금 개가를 올리며 도성으로 돌아가 종묘와 사직을 굳건히 지키며 번병(藩屛)의 임무를 길이 보전하게 하라. 그리하여 먼 곳을 보살피고 작은 나라를 사랑하는 짐의 뜻을 위로하게 될 것이다. 부디 신중히 할지어다. 그러므로 유시하노라.”
하였다.
○ 박진(朴晉)이 경주를 수복하였다. 박진이 안강현(安康縣)에 주둔하다가 밤에 몰래 군사를 다시 진격시켜 성 밖에서 비격진천뢰(飛擊震天雷)를 성 안으로 발사하여 진 안에 떨어뜨렸다. 적이 그 제도를 몰랐으므로 다투어 구경하면서 서로 밀고 당기며 만져 보는 중에 조금 있다가 포(砲)가 그 속에서 터지니 소리가 천지를 진동하고 쇳조각이 별처럼 부서져 나갔다. 이에 맞아 즉사한 자가 20여 명이었는데, 온 진중이 놀라고 두려워하면서 신비스럽게 여기다가 이튿날 드디어 성을 버리고 서생포(西生浦)로 도망하였다. 박진이 드디어 경주에 들어가 남은 곡식 만여 석을 얻었다. 일이 알려지자, 가선대부로 승진시켰다. - 비격진천뢰의 제도는 옛날에 없었는데, 화포장(火砲匠) 이장손(李長孫)이 처음으로 만들었다. 진천뢰(震天雷)를 대완포구(大碗砲口)로 발사하면 5~6백 보를 날아가 떨어지는데, 얼마 있다가 화약이 안에서 폭발하므로 진을 함락시키는 데는 가장 좋은 무기였으나 그 뒤에는 활용하는 사람이 없었다. -
○ 황제의 조칙을 팔방(八方)에 선포하고 관군과 의병에게 힘을 합하여 적을 토벌하도록 유시하였다. 또 적의 계략에 빠졌던 사민(士民)들을 용서하여 귀순해서 스스로 충성을 다하도록 하고 공을 세운 자는 상을 주게 하였다.
○ 적을 토벌한 자에 대해 포상하는 규정을 중외에 반포하였다.
○ 여러 도의 감사에게 명하여 궐원인 지방관에 대해서는 모두 적임자를 가려 임시로 지키게 하고 계문하여 정식으로 임명하도록 하였다.
○ 전라 순찰사 권율이 군사를 거느리고 도성으로 향하였다. 권율이 한번 호령을 새롭게 하자 호남의 인심이 조금 안정되었다. 이때에 이르러 군사 2만 명을 징발하여 북쪽으로 올라왔다.
○ 왜적이 연안성(延安城)을 공격하니, 초토사 이정암(李廷馣)이 그들을 격퇴시켰다. 적장 갑비수(甲斐守)ㆍ풍신장정(豐臣長政) 등은 연안성을 굳게 지키고 떠나지 않는다 하여 해주(海州)ㆍ평산(平山)의 여러 주현(州縣)에 주둔하고 있는 군사를 모두 징발하여 대거 침입해 왔다.
이에 성 안에서는 모두 기가 질려 말하기를 “초토사는 성을 지키라는 명령을 받은 것이 아니니 이 예봉(銳鋒)을 피하여 뒷날에 거사를 도모하는 것이 합당하다.”고 말하니, 이정암이 울면서 달래기를 “내가 경악(經幄)에 있던 늙은 신하로 말고삐를 잡고 행재를 수행하지 못했다. 이제 왕세자의 초토하라는 명을 받았고 보면 빨리 한 성의 수비라도 맡아서 목숨을 바치는 것이 마땅하니, 어떻게 차마 구차하게 살겠는가. 그리고 주민을 이끌어 성으로 들어오게 하였다가 적이 왔다고 해서 버리는 짓을 내가 어찌 차마 하겠는가.” 하고, 명령을 내리기를 “함께 죽고 싶지 않은 자는 마음대로 빠져 나가라.” 하였다. 그리고는 노복을 시켜 섶을 쌓고 횃불을 가지고 기다리게 하면서 경계시키기를 “적이 만약 성에 오르거든 나는 여기에 앉아 있을 것이니 너는 즉시 태워서 적의 손에 내가 더럽게 죽지 않도록 하라.” 하고, 의견을 달리하는 인사는 타일러서 보내니 종사관 우준민(禹俊民)이 나가서 군중에게 거듭 약속을 밝히고 마음과 힘을 합하기로 맹세하자 군중이 감동하고 분격해서 일제히 외치기를 “대장이 죽기로 결단하는 판에 우리들이 어찌 살기를 도모하랴.” 하였다.
적이 드디어 성을 포위하였다. 한 장수가 흰 기를 등에 지고 백마를 타고는 성을 돌며 두루 살피던 중에 기가 갑자기 바람에 넘어졌다. 무사 장응기(張應祺)가 그것을 보고 화살 한 대를 쏘아 가슴을 꿰뚫어 죽였다. 이정암이 좌우를 가리키며 말하기를 “이것은 적이 패할 징조이다.” 하였다. 적이 밤낮으로 공격하며 수천 개의 조총(鳥銃)으로 일제히 사격하니 연기가 자욱하고 탄환이 비오듯 하였다, 그러나 이정암은 태연자약한 모습으로 성가퀴를 지키는 자에게 명하여 경솔히 활을 쏘지 말고 적이 성에 기어 오르거든 반드시 쏘아 죽이도록 하였다. 그리고 문짝ㆍ다락 등을 뜯어 방패(防牌)로 삼고 쌓아둔 풀을 묶어 횃불을 만들고 가마솥을 벌여 두고 물을 끓이면서 늙은이ㆍ어린이ㆍ부녀자 할 것 없이 모두 그 일에 달려들도록 하였다.
적이 시초를 참호에 채우고 올라오면 횃불을 던져 태우고, 적이 긴 사다리로 성에 오르거나 판자를 지고 성을 훼손시키면 나무와 돌로 부수고 끓는 물을 퍼붓게 하니 죽지 않는 자가 없었다. 적이 남산에다 높은 다락을 세워 판자 벽에 구멍을 내고 내려다보며 총을 쏘니, 성 안에서도 이에 대응하여 흙담을 쌓아 막았다. 적이 밤 안개를 틈타 몰래 서쪽 성으로 기어 오르는 것을 성가퀴를 지키는 군사가 횃불로 에워싸 40여 명을 태워 죽였다. 포위당한 지 4일 동안 밤낮으로 크게 싸웠는데 적도 탄환이 떨어져 소리만 지를 뿐이었다. 성 안에서는 또한 승리한 기세를 틈타 환호하며 쇠북을 치자 그 소리가 땅을 진동하였다. 적이 이에 시체를 모아 불을 지르고 퇴각하니, 즉시 군사를 출동시켜 추격하여 수급을 베고 노획한 것이 매우 많았다.
이정암이 승리의 보고를 하면서 단지 어느 날에 성이 포위당하고 어느 날에 풀고 떠났다고만 하였을 뿐 다른 말이 없었다. 조정에서 모두 말하기를 “전쟁에 이기는 것도 쉽지 않지만 공을 자랑하지 않는 것은 더욱 어렵다.” 하고 상으로 가선대부 동지중추부사를 더하고, 함께 지킨 장사로 공이 있는 장응기ㆍ조종남(趙宗男)ㆍ조서룡(趙瑞龍)ㆍ봉요신(奉堯臣) 등에게는 차등 있게 관직으로 포상하였다.
○ 함경북도 평사 정문부(鄭文孚)가 군사를 일으켜 경성(鏡城)을 수복하였다.
당시 북계(北界)의 수장(守將)들이 모두 토인(土人)에게 잡혀 왜장에게 넘겨졌는데, 도망하여 나온 자는 10명에 1~2명도 안 되었다. 평사 정문부는 교생(校生)들에게 글을 가르쳤기 때문에 변란이 일어난 뒤에 제자 몇 사람이 비호하여 빠져나올 수 있었다. 교생들과 식견이 있는 무사들이 정문부가 있는 곳을 알고 모두 그에게 찾아가 정문부를 추대하여 의병장으로 삼고 토병과 장사 수백 명을 모았는데, 경성 사람인 전 만호 강문우(姜文佑)가 선두에서 거느리고 즉시 부(府)의 성에 이르렀다.
이때 국세필(鞠世弼)이 예백(禮伯)이라고 일컬으며 병사(兵使)의 인(印)을 가지고 일을 보면서 태연히 부(府)를 다스리고 있었는데, 갑자기 군사가 왔다는 소식을 듣고는 성문을 닫고 성에 올라가 항거하였다. 이에 강문우 등이 화복(禍福)을 들어 위협하니 국세필이 대적하지 못할 것을 알고는 성문을 열어 맞아들이고 병사의 인을 반납하였다. 정문부가 명령을 내리기를 “대소의 병민(兵民)이 예전에 범한 죄는 문책하지 말라.” 하고, 그대로 국세필에게 그전처럼 군사를 거느리게 하였다.
그리고는 마침내 남북의 주보(州堡)에 격문을 전하여 병사 3천 명을 합하고 그 중에서 날래고 용맹스러운 기마병을 뽑아 선봉으로 삼았다. 길주(吉州)의 왜적이 이 소식을 듣고 군사 백여 명을 보내어 성 서쪽에 와서 탐지하게 하였는데, 강문우 등이 성문을 열고 나가 공격하여 수십 명의 머리를 베니 남은 적들이 도망갔다.
○ 10월. 부산 등지에 주둔했던 적이 군사를 합쳐 대대적으로 진주(晉州)를 포위하였다. 목사 김시민이 적병을 크게 격파하여 진주가 포위에서 풀렸다. 당초 왜장이 군사 수만 명을 모두 동원하여 진주성을 포위하였는데 성 안의 군사는 3천여 명이었다. 김시민이 여러 성첩을 나누어 지키게 하면서 조용히 기다리도록 하니 성 안이 고요하였다. 적이 기치(旗幟)와 개삽(蓋翣)을 많이 설치하고 금으로 꾸민 가면에 의복을 이상하게 차려 입어 햇빛에 번쩍이고 바람에 펄럭이니 온갖 형상이 눈이 부시고 정신이 어지러울 지경이었다. 왜장 6명이 진(陣)을 나누어 전투를 독려하였는데 총수(銃手) 수천 명이 항상 산 위에서 성 안을 향해 일제히 쏘아대니 그 형세가 번개가 치고 우박이 내리는 듯하였으며, 부르짖는 소리가 천지를 진동시켰다. 그러나 김시민은 군사들로 하여금 움직이지 말고 적들의 소리가 약해지기를 기다려 즉시 포(砲)를 쏘고 북을 울리며 응전하게 하였다.
적이 대나무와 소나무 가지를 많이 베어 엮어서 막이를 만들고 흙으로 그 속을 채워 우리 군사가 모르게 하고 대나무 사다리 수천 개를 만들었는데 한 칸 너비쯤 되는 것으로 그 위에 망석(網席)을 덮어 많은 군사가 동시에 일제히 올라갈 수 있게 만들었으며, 3층의 산대(山臺)를 만들어 성첩을 내려다보게 하였다. 김시민은 화구(火具)를 미리 준비하고 화약(火藥)을 종이에 싸서 다발로 묶은 풀 속에 넣어두고 성 위에는 대포(大砲) 및 대석(大石)을 나누어 설치하게 하였으며, 여장(女墻) 안에는 가마솥을 비치하고 물을 끓여 대기하도록 하였다.
적이 공격할 장비를 모두 갖추고 사면으로 육박하자, 성 안에서 현자총(玄字銃)을 쏘아 산대의 적을 맞춰 떨어뜨리고, 화약과 풀로 송장(松障)을 태웠으며, 대포로 대나무로 엮은 긴 사다리를 부수고, 끓인 물을 퍼붓기도 하고 큰 돌을 던지기도 하여 여러 가지의 공격용 장비를 격파하였다. 9월 10일 밤중에 적병이 거짓 물러가는 체하다가 몰래 되돌아와 적의 대장이 직접 전투를 독려하였다. 여러 왜적이 모두 방패로 가리고 머리를 감싸고 처음에는 동문(東門)을 공격하였는데, 앞에서 한꺼번에 올라가게 하고 뒤에서는 천 개의 총으로 일제히 사격하여 성 위에 사람이 설 수 없게 하였다. 그러나 김시민은 무리를 지휘하여 활과 쇠뇌와 포를 쏘고 돌을 굴려 내리니, 적병이 오는 족족 죽어 넘어져 쓰러진 시체가 삼대처럼 즐비하게 모두 다 패하였다.
바야흐로 전투가 무르익을 무렵 또 하나의 대진(大陣)이 동문의 경우처럼 갑자기 북성(北城)을 공격하였다. 이에 만호 최덕량(崔德良) 등이 죽기를 무릅쓰고 대항해 싸우며 일사불란하게 막아 내었는데, 동녘이 밝아오자 조금 뜸해졌다. 성안의 나무와 돌, 기와, 띠풀 등이 거의 없어졌으며 김시민도 탄환에 맞아 누워 있었다. 이때 곤양 군수(昆陽郡守) 이광악(李光岳)이 왜장을 쏘아 죽이니 한낮이 되어서야 적진이 비로소 퇴각하며 시체를 태우고 포위를 풀고 흩어졌다. 성이 포위당한 10여 일 동안 4~5차례 큰 전투를 벌이면서 안팎에서 힘껏 싸웠으므로 적이 먼저 도망하였다.
○ 복수(復讐)할 사람을 불러 모아 군사를 일으켰다. 처음에 고경명(高敬命)이 패한 뒤 그의 아들 전 현령 고종후(高從厚)가 상복을 입고 종군하여 부친의 남은 병사를 거두어 별군(別軍)을 만들었다. 이때에 이르러 체찰사 정철(鄭澈)이 조정의 뜻을 선포하며 권유하자 홍계남(洪季男)이 맨 먼저 여러 도에 편지를 보내니, 조헌의 아들 조완도(趙完堵) 등이 호응하였다. 또 고종후로 하여금 사노(寺奴)를 뽑아 군사를 삼도록 하였다.
○ 유격(遊擊) 갈봉하(葛逢夏)가 마병(馬兵) 2천 명을 거느리고 사대수(査大受)와 함께 행조를 호위하며 오랫동안 의주(義州)에 머물렀다.
○ 북도 평사(北道評事) 정문부(鄭文孚)가 길주(吉州)에서 적병(賊兵)을 크게 패배시키고 성을 포위하였다.
정문부가 백성을 안집(安集)시켜 안정이 되자 군사들의 마음이 모두 적을 공격하여 충성을 바치고자 하였다. 이에 출동할 날짜를 가려 출발하려 할 즈음에 장사들이 일제히 요청하기를 “앞으로 왜적을 토벌하려 하는데 국가에 반역한 적이 아직도 진중(陣中)에 있으니 먼저 토벌하지 않을 수 없다.” 하였다. 그래서 마침내 국세필(鞠世弼) 등 13명을 잡아 목을 베어 여러 사람들에게 조리돌리고 말하기를 “당초에 앞장선 사람은 이 무리들뿐이며 이 밖에는 참여한 자가 없으니 부인(府人)은 의심하지 말라.” 하니, 많은 사람들이 모두 기뻐하였는데, 이것은 정문부의 본래의 계획이었다.
그리고 다시 육진에 격문을 보내어 맨 먼저 반란에 앞장선 자를 처벌하게 하니, 회령(會寧)의 유생 신세준(申世俊)이 군사를 일으켜 국경인(鞠景仁)의 목을 베었으며, 남은 진도 모두 수복되고 반민(叛民)들은 주벌되기도 하고 도망하기도 하였다. 정문부가 군사를 고참역(古站驛)으로 진출시키고 군사를 보내어 명천(明川)의 반적(叛賊) 정말수(鄭末守)를 주벌하고 성울 수복하였다. 그러자 길주의 적이 마침내 사방으로 나와 분탕질을 쳤는데, 일지군(一枝軍)은 명천의 해창(海倉)을 노략질하였다. 정문부가 군사를 길주의 남촌(南村)에 진출시켜 돌아가는 길에서 요격하여 적병을 크게 깨뜨리고 6백 명의 수급을 베었다. 적의 한 부대가 마천령(摩天嶺) 아래 영동관 책성(嶺東館柵城)에 주둔하고 있었는데, 임명촌(臨溟村)을 불태우고 노략질하므로, 정문부가 군사를 돌려 공격하였다. 쌍포(雙浦)에서 전투하였는데 적병이 패주하였으므로 60명의 수급을 베었다. 이로부터 두 곳에 주둔한 적이 모두 굳게 지키고 나오지 않으므로 정문부가 군사를 나누어 포위하였다.
○ 11월. 정곤수(鄭崑壽)가 북경에서 돌아왔다. 중국 조정이 대병(大兵)을 출동시켜 구원할 것을 허락하고 먼저 은(銀) 3천 냥을 내려 주었다. 정곤수가 처음에 연경에 도착하여 주문(奏文)을 올리자 황제가 즉시 병부(兵部)에 내려 복의(覆議)하게 하였다. 정곤수가 병부에 글을 올려 거듭 간곡하고 절박하게 청원하고, 또 상서(尙書) 석성(石星)에게 나아가 통곡하며 애절하게 호소하는데 슬픔을 스스로 감당하지 못하니 석성도 감동하여 눈물을 흘렸다. 당시 중국 조정에서도 이의(異議)가 분분하여 어떤 이는 말하기를 “중국 지역만 방어하면 되지 병마(兵馬)를 많이 징발하여 중국을 먼저 피폐하게 할 필요는 없다.”고 하였지만, 석성만은 군사를 내자는 의논을 극력 주장하며 복제(覆題)하여 격동시키는 한편 자신이 동쪽의 정벌에 나서겠다고 주청하였다. 황제가 즉시 윤허하여 병부 시랑(兵部侍郞) 송응창(宋應昌)을 경략(經略)으로 삼아 먼저 2만의 군사를 출발시키고 곧 이어 대군(大軍)을 조발하고 장수를 정하여 잇따라 파견하게 하였다. 그리고 마가은(馬價銀) - 마가은은 바로 중국 조정의 변방 오랑캐 방어용 자금이다. -3천 냥을 내려 궁각(弓角)과 화약을 사서 보냈다. 정곤수가 무더운 때에 갔다가 추위를 무릅쓰고 돌아왔는데, 길에서 머물지 않고 주청하여 성사시켰으므로 상이 가상히 여기고 기뻐하며 후하게 위로하였다.
○ 호남의 사민(士民)이 의곡(義穀)을 모아 해로(海路)를 따라 의주(義州)에 수송하였다.
○ 군공청(軍功廳)을 설치하여 군공을 조사하여 감정하게 하였다.
○ 전 동지사(同知事) 성혼(成渾)이 행재에 이르자 우참찬으로 승진 임명하였는데 대신의 의논을 따른 것이었다. 성혼이 아뢰기를,
“신이 국란 초기에 대궐에 달려가려 하였으니 조정에서 바야흐로 당인(黨人)의 지목이 있어 감히 스스로 반행(班行)에 나아가지 못하였습니다. 그리고 승여가 임진강을 건너는 때를 당해서는 일이 갑작스러웠고 집이 15리 밖에 있어 미처 듣지 못했기 때문에 달려와 문안하지 못하였으니, 신하로서의 도리를 전혀 지키지 못하였습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동궁(東宮)이 하교하여 이정형(李廷馨)의 군중(軍中)에 나아가 군사(軍事)를 함께 맡도록 명하였습니다. 신이 병으로 폐인이 되었으니 어떻게 말을 몰아 달리는 것을 감당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러나 부축을 받고 군대 있는 곳에 이르러 감히 죽기를 사양하지 못했습니다. 이어 동궁이 불러서 분조(分朝)로 달려갔는데, 머무른 지 열흘 만에 대조(大朝)로 들어가기를 청했습니다. 그리하여 지난달 말에 성천(成川)을 출발했는데, 겨울철 극심한 추위로 신은 몸이 점점 쇠약해져 한질(寒疾)이 다시 도져 도로에서 지체하느라 뒤처져 늦어진 바람에 평소의 마음을 스스로 아뢸 길이 없었으니 황공하고 두려워 죽어도 죄가 남는다 하겠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갖은 고생을 하며 여기에 도착하였으니 참으로 가상하며 기쁘다. 국가가 장차 경(卿)을 의지하여 회복될 것이니 대죄(待罪)하지 말라.”
하였다. 성혼이 또 새로 승진된 직명(職名)을 사양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재삼 사양하였으나 모두 윤허하지 않았다.
○ 문소전(文昭殿)의 위판(位版)을 처음에 전내(殿內)에 묻었는데, 김천일(金千鎰)이 사람을 모집하여 성에 들어가 몰래 가져오게 해서 강화(江華)에 봉안(奉安)하였다. 이때 응모한 사람에게도 상을 주도록 명하였다.
○ 12월. 전라 순찰사 권율(權慄)이 수원의 독성(禿城)으로 군사를 진출시켰다. 권율이 직산(稷山)에 이르자 체찰사 정철이 경솔하게 진격하지 말도록 경계하므로 권율이 그대로 군사를 머물게 하면서 보고하였다. 조정이 전지를 내려 정철을 책망하고 권율을 재촉하여 도성으로 진출하여 도모하도록 청하였다. 권율이 지난날 평야의 전투에서 군사가 패한 것을 징계하여 독성으로 진출하여 머물렀다. 상이 차고 있던 칼을 풀어 달려가 내려주게 하면서 “여러 장수들 중에 명을 따르지 않는 자가 있거든 이 칼로 처단하라.”고 하였다. 도성의 적이 진을 나누어 군사를 출동시켜 왕래하면서 도전(挑戰)하였으나 권율은 성곽을 튼튼히 지키고 응하지 않으니 적이 군영을 태우고 퇴각하였다. 권율이 가끔 날랜 군사를 출동시켜 낙후한 적을 습격하자 기내(畿內)에 주둔했던 적이 모두 도성으로 들어갔다. 이로부터 서로(西路)에 행인이 다닐 수 있게 되어 여러 의병들이 차례로 경기 지역에 진출하여 주둔하면서 중국 군사를 기다렸다.
황제가 대병(大兵)을 파견하여 와서 구원하게 하였다. 제독(提督) 이여송(李如松)이 먼저 압록강을 건넜다. 황제가 우리의 주청을 허락하고 병부 시랑(兵部侍郞) 송응창(宋應昌)을 경략군문(經略軍門)으로, 도독동지(都督同知) 이여송(李如松)을 제독군무(提督軍務)로 삼았다. 그리고 부총병(副摠兵) 양원(楊元)을 좌협대장(左協大將)으로 삼아 부총병 왕유익(王有翼), 부총병 왕유정(王維禎), 참장(參將) 이여매(李如梅), 참장 이여오(李如梧), 참장 양소선(楊紹先), 선봉 부총병 사대수(査大受), 부총병 손수렴(孫守廉), 참장 이영(李寧), 유격 갈봉하(葛逢夏) 등을 모두 양원이 통솔하게 하였다. 총병 이여백(李如栢)을 중협대장(中協大將)으로 삼아 부총병 임자강(任自强), 참장 이방춘(李芳春), 유격 고책(高策), 유격 전세정(錢世禎), 유격 척금(戚金), 유격 주홍모(周弘謨), 유격 방시휘(方時輝), 유격 고승(高昇), 유격 왕동(王洞) 등을 모두 이여백이 통솔하게 하였다. 부총병 장세작(張世爵)을 우협대장(右協大將)으로 삼아 부총병 조승훈(祖承訓), 부총병 오유충(吳惟忠), 부총병 왕필적(王必迪), 참장 조지목(趙之牧), 참장 장응충(張應忠), 참장 낙상지(駱尙志), 참장 진방철(陳邦哲), 유격 곡수(谷燧), 유격 양심(梁心) 등을 모두 장세작이 통솔하게 하였다. 참장 방시춘(方時春)을 중군 비어(中軍備禦)로, 한종공(韓宗功)을 기고관(旗鼓官)으로, 병부 원외랑(兵部員外郞) 유황상(劉黃裳), 병부 주사(兵部主事) 원황(袁黃)을 찬획(贊畫)으로, 호부 주사(戶部主事) 애유신(艾維新)을 독향(督餉)으로 삼았다. 군사는 도합 4만 3천여 명이었으며 잇따라 나온 자가 8천 명이었다. 이때 평양에 주둔한 적은 1만 수천 명 정도였는데, 우리 백성들까지 군사로 삼아 군세(軍勢)를 펼쳤다. 경략이 세 갑절의 군사로 공격할 계획을 하였다.


 

[주D-001]신포서(申包胥)에 비유 : 오(吳) 나라가 초(楚) 나라를 침략하자 초 나라 신하 신포서가 진(秦) 나라에 구원병을 청하러 가 뜰에서 7일 동안 울었더니 진 나라에서 그의 충성심에 감동되어 출병했던 고사. 《史記 卷66 伍子胥列傳》


보감 제31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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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조조 8
26년(계사, 1593)


○ 1월. 제독(提督) 이여송(李如松)이 양원(楊元)ㆍ장세작(張世爵)ㆍ이여백(李如栢) 등 세 협장(協將)을 거느리고 진군하여 평양에 접근하였는데, 도원수(都元帥)도 제진(諸陣)의 군사를 합쳐 거느리고 그 뒤를 따라 군사를 나누어 에워싸고 주둔하였다.
8일에 제독이 세 영에 명령을 전하여 일시에 군사를 전진시키고 성을 둘러 진을 치게 하였다. 우리 군사는 남쪽 성에 육박하고 절강(浙江)의 군사는 서쪽 성을 공격하였는데, 제독은 말을 달려 오가며 전투를 독려하였다. 온갖 포를 일제히 발사하니, 소리가 천지를 진동하였다. 제독이 겁을 먹고 후퇴하는 한 사람을 손수 베어 돌려 보이고 크게 소리치기를, “먼저 성에 오르는 자는 은(銀) 50냥을 상으로 주겠다.”고 하였다. 그러자 낙상지(駱尙志)가 긴 창을 휘두르며 먼저 오르고 절강의 군사가 함성을 지르며 뒤따라 올라가 적의 기를 뽑아 버리고 명 나라 기를 세웠다. 적이 저항을 할 수 없게 되자 후퇴하여 토굴로 들어갔다. 우리 군사도 잇따라 올라갔다.
제독이 장세작(張世爵) 등과 함께 칠성문(七星門)을 공격, 대포로 문을 부수고 군사를 정돈하여 들어갔다. 이에 이여백(李如栢)은 함구문(含毬門)을, 양원(楊元)은 보통문(普通門)을 통해 승세를 타고 앞을 다투어 들어갔다. 그리하여 1천 2백 80여 명을 참획(斬獲)하고 불태워 죽인 수도 절반이 넘었는데, 왜적에게 투항했던 절강인(浙江人) 장대선(張大膳)도 사로잡았다.
행장(行長)이 도망해 연광정(練光亭) 토굴로 들어가 의거하였는데, 여러 왜장이 연달아 여러 굴에 의거하여 모두 비오듯 탄환을 발사하니 명 나라 군사가 공격하다가 부상자가 많이 발생하였다. 제독이 진영에 머물면서 장대선을 시켜 행장에게 회유하기를,
“차마 인명을 다 죽일 수 없어 너희의 살 길을 열어주겠으니, 속히 여러 장수를 거느리고 와서 약속을 들어라.”
하니, 행장이 대답하기를,
“우리들이 퇴군할 것이니 뒷길을 차단하지 말아달라.”
하였다. 제독이 궁지에 빠진 적이 결사 항전할까 염려하여 행장의 청을 허락하고는 우리 군사에게 영을 전하여 일로의 복병(伏兵)을 철수하게 하였다. 밤중에 행장이 남은 적을 거느리고 얼음이 언 강을 건너 탈출했는데, 중화(中和)와 황주(黃州)에 주둔해 있던 적은 이미 먼저 철수한 뒤였다.
역(驛)을 통하여 승리한 것을 황제에게 아뢰었는데 독부(督府)와 함께 상주하였다. 주문(奏文)에,
“황제의 위엄에 힘입어 평양을 수복하고 승리한 것을 급히 보고드리는 일입니다. 만력(萬曆) 21년(1593, 선조 26) 1월 9일에 배신(陪臣) 제도 도체찰사(諸道都體察使) 유성룡(柳成龍)이 치계(馳啓)하기를 ‘제도 도순찰사(諸道都巡察使) 김명원(金命元)의 정문(程文)과 평안도 순찰사 이원익(李元翼)의 신보(申報)를 받았다. 이에 의하면「이달 6일에 흠차제독계요보정산동등처방해어왜군무총병관도독동지(欽差提督薊遼保定山東等處防海禦倭軍務總兵官都督同知) 이여송이 세력이 막강한 관군을 거느리고 곧장 평양성 밖에 도달하여 여러 장수를 나누어 본성(本城)을 포위하였다. 왜적 2천여 명이 성 북쪽의 모란봉(牧丹峯)에 올라가 청ㆍ백기(靑白旗)를 세우고 함성을 지르며 총포를 쏘았다. 또 왜적 1만여 명이 성 위에 벌여 서서 앞에 녹각책자(鹿角柵子)를 세우고는 방패로 가리고 칼을 휘둘렀는데, 그 기세가 매우 강성하였다. 또 왜적 4~5천 명이 대장기를 앞세워 북을 울리고 나팔을 불며 성 안을 순시하여 여러 적들을 지휘하였다. 본성 안팎에 장애물을 설치하여 형세상 갑자기 공격하기가 어려웠으므로 총병은 군사를 거두어 진영으로 돌아왔다. 이날 한밤중에 왜적 3천여 명이 함매(銜枚 소리를 내지 못하게 입에 막대를 물림)하고 몰래 나와 도독(都督) 양원(楊元), 도독 이여백(李如栢), 도지휘(都指揮) 장세작(張世爵) 등의 진영을 습격하였다가 본관들이 거느린 군사들에 의해 격퇴당하였다. 7일 밤에도 왜적 약 8백여 명이 다시 도독 이여백의 진영을 습격했다가 또 본관에 의해 격퇴당하였다. 8일 동틀 무렵에 총병이 향을 피우고 날을 점쳐서 길조(吉兆)를 얻었다. 아침밥을 먹고 나서 세 영의 장관들과 더불어 각 해당 장령(將領) 및 관군(官軍)을 나누어 거느리고 칠성문(七星門)ㆍ함구문(含毬門)ㆍ보통문(普通門) 밖에 진을 친 다음, 총병이 친병(親兵) 2백여 기(騎)를 거느리고 왔다갔다 하면서 지휘하니, 장수와 사졸들은 사기가 올라 모두 힘을 다할 것을 생각하였다. 진시(辰時)에 여러 군사를 나누어 차례로 전진하며, 각종 화기를 일시에 발사하니, 소리가 천지를 진동하고 온 들판이 캄캄하였다. 화전(火箭) 하나가 밀덕(密德) 토굴에 떨어지자 조금 뒤에 붉은 불꽃이 하늘로 치솟았으며, 불길이 번져 거의 다 태웠다. 성 위에서 왜적이 총을 난사하고 끓는 물과 돌덩이를 사용하여 죽기로써 항거하며 긴 창과 큰 칼을 밖으로 일제히 내미니, 마치 고슴도치의 털처럼 빽빽하였다. 총병이 겁내는 자 한 명을 손수 베어서 호령하며 진중에 보이니, 모든 군사가 북을 울리고 함성을 지르며 성에 접근하였다. 등에는 마패(麻牌)를 지고 손에는 창을 가지고서 일제히 돌진하며 활과 대포를 쏘기도 하고 성을 지키는 적을 올려 찌르기도 하니, 적이 지탱하지 못하고 조금 물러났다. 총병이 몸을 솟구쳐 먼저 올라가서 여러 장수를 독려하여 진입하였다. 명 나라 군사의 1진은 본국의 관군과 더불어 함구문으로 들어가고, 1진은 보통문으로 들어가고, 1진은 밀덕(密德)의 동쪽성에 올라갔다. 기병과 보병이 구름처럼 모여서 사면으로 공격하여 쳐죽이니 적들이 무너졌다. 명 나라 군사가 당시 전투에서 참획한 수급(首級)이 1천 2백 85과(顆)였는데, 조사해 보니 그 속에는 적추(賊酋) 평수충(平秀忠)ㆍ평진신(平鎭信)ㆍ종일(宗逸) 등 25인의 수급도 들어 있었다. 왜적 2명과 통사(通事) 장대선을 사로잡고, 말 2천 9백 85필과 왜적의 기물 4백 52건을 노획하였으며, 본국에서 사로잡혀간 남녀 1천 15명을 구출하였다. 명 나라 군사가 승세를 타고 불을 놓아 건물을 모두 불태우니, 많은 왜적이 숨어 들었다가 타죽은 자가 약 1만여 명이나 되어 그 냄새가 10여 리에 풍겼다. 잔적이 풍월루(風月樓)의 작은 성으로 숨어 들어갔는데, 총병이 시초(柴草)를 가져오게 해서 사면에 쌓아놓고 화전(火箭)을 쏘니, 일시에 타버려 모두 재가 되었다. 또 남은 적이 성을 뛰어넘어 강을 건너다가 얼음이 꺼져 빠져 죽은 자는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었다. 칠성문ㆍ보통문ㆍ모란봉 등지에 있던 여러 왜적들은 그대로 토굴에 의거하고 있었으므로 견고하여 공략할 수 없었다. 총병은 군사를 철수하여 밥을 먹이면서 말하기를『적은 필시 밤에 도망할 것이다.』하고 즉시 부총병(副總兵)ㆍ참장(參將) 등의 관원을 보냈다. 이영(李寧)ㆍ조승훈(祖承訓)ㆍ갈봉하(葛逢夏) 등은 군사를 거느리고 매복하였고, 총병은 양원(揚元)ㆍ이여백(李如栢)ㆍ장세작(張世爵) 등 세 부장(副將)과 함께 큰 길로 추격해 갔는데, 왜적들은 사방으로 도망하다가 이영 등의 매복에 걸려 요격을 당하였다. 이때 수급 3백 59과를 참획하고, 왜적 3명을 생포하였다. 남은 적들은 병기를 버리고 황급히 도망하였으니, 절령(岊嶺 황해도 서흥군에 있는 재. 자비령(慈悲嶺)) 이서(以西)가 모두 평정되었다.」하였다. 신은 생각하건대, 평양부(平壤府)는 실로 본국의 옛 도읍으로서 성지(城池)가 험고한데 흉악한 적이 저돌적으로 침입하여 점거하고는 소굴로 만들었다. 즉일로 명 나라 군사가 진격하여 북소리 한번에 소탕하니, 흉악한 잔적은 도망갈 곳이 없게 되었다. 본국이 재조(再造)되는 기미가 실로 여기에 있게 되었다. 신은 이원익 등과 각처의 마초 및 군량을 독려 운반하여 본성에 들여보내어 독부에서 쓰도록 하였다. 승첩의 사유를 이렇게 갖추 아뢴다.” 하였습니다.
신이 이 치계를 받고 자세히 살펴보건대, 저희 나라는 군병이 약하여 날이 갈수록 국토가 깎이고 평양은 성이 험고하여 쉽게 수복할 수 없었으므로 밤낮 근심하며 죽을 곳을 알지 못하였는데, 성명(聖明)의 천지 부모와 같은 은혜를 입게 되었습니다. 선왕조의 옛일을 곡진히 생각하시어 신의 잘못을 죄주지 않고 남북의 정병(精兵)을 동원하여 도탄에 빠진 소방을 구제하도록 명하시었습니다. 군량이 부족할까 염려하시어 먼저 은냥(銀兩)을 하사하시고, 군량과 마초가 모자랄까 걱정하시어 계속해서 군수품을 수송해 주셨습니다. 사졸들이 들판에서 노숙하고 노새와 나귀가 길에서 나뒹구는 등 신의 허물로 말미암아 이토록까지 천조(天朝)에 근심을 끼쳐드렸으니 신은 감격하고 두려워서 어찌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삼가 살피건대, 왕사(王師)가 정벌함에 천리(天吏) 앞에는 대적할 자가 없는 법입니다. 금년 정월 8일 평양에 진격하여 하루아침도 못 되어 성을 깨뜨렸는데, 타 죽고 빠져 죽고 참살당한 자는 말할 것도 없고 나머지 적들도 혼이 빠져 도망갔으니, 그 군위(軍威)의 성대함과 전승(戰勝)의 신속함은 옛 역사에도 없었던 일입니다. 신과 대소 배신(陪臣)들은 처음 승리의 소식을 듣고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마구 눈물이 흘러내렸습니다.
이는 대개 성천자(聖天子)의 성덕(盛德)이 널리 퍼지고 신무(神武)가 멀리 뻗친 데다 명공(名公)들이 계책을 잘 돕고, 병부(兵部)에서 전략을 잘 세웠기 때문입니다. 시랑(侍郞) 송응창(宋應昌)은 기무(機務)에 전심하여 방략을 지시함에 있어 계책이 부합하여 특별한 공을 이루었습니다. 총병(總兵) 이여송(李如松)은 군사들에 대한 맹세가 강개하고 그 의기(義氣)가 사람들을 감동시켰으며, 군사들이 지나는 곳마다 털끝만큼도 침범하는 일이 없었고 전장(戰場)에 임해선 독전하여 여러 장교에 솔선하였습니다. 심지어는 말이 총탄에 맞고 불길이 몸을 에워싸도 두려운 기색이 없이 더욱 기운을 가다듬었습니다. 성을 함락시키던 날 기자(箕子)에게 제사를 지내고 먼저 그 무덤을 봉(封)했으며, 부상자를 어루만지고 전사자의 영혼을 두루 위로하는 한편, 덕의(德意)를 선포하고 환과고독(鰥寡孤獨)들을 위문했으니, 비록 배도(裵度)가 회서(淮西)를 평정했던 일이나 조빈(曹彬)이 강남(江南)을 함락시켰을 때의 일도 이보다 더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부장(副將)ㆍ참장(參將)ㆍ유격(遊擊)ㆍ도사(都司) 이하 각 장령(將領)들도 용감하기가 마치 범이 포효하는 듯 신(神)이 도와주는 듯하였습니다. 심지어는 큰 돌이 쏟아져 내려오는데도 이를 무릅쓰고 성 위로 올라간 자도 있고, 가슴에 탄환을 맞고서도 계속 왜적을 죽인 자도 있었습니다. 우리나라 장졸(將卒)들은 팔짱만 끼고 놀라 움츠린 채 감히 그 사이에 돕지도 못하고 그저 철기(鐵騎)의 발굽에 들판 가득 먼지가 날리고 화전(火箭)에 맞아 붉은 불꽃이 하늘을 찌르는 것만을 바라볼 뿐이었습니다. 포로 방책을 쏘아 맞히니 깃털이 날리듯 산산조각이 났고 창으로 적을 찌르는데 민첩하기가 마치 나는 송골매와 같았습니다. 비린내나는 연기는 공중에 가득하고 흐르는 피는 강물을 이루었으며, 천지는 갈라지고 산과 물이 뒤바뀌었습니다. 조총을 쏘고 끓는 물을 퍼부으며 돌멩이를 날리는 적들은 정말 버마재비가 수레바퀴를 막는 것과 같아서 감히 상대가 되지 못하였습니다.
신이 생각하건대, 평양성은 실로 정예로운 군사와 기계가 있는 곳이었기 때문에 신이 한 도의 힘을 다 기울였으나 해가 지나도록 도모하지도 못했었는데, 승전하여 수복한 뒤에 그들의 수비 시설에 대해 들어보니 저희 나라의 병력으로는 결코 쳐서 함락시킬 수 있는 바가 아니었습니다. 천자의 위엄이 한번 떨쳐지자 여러 적들이 소문만 듣고도 달아나 이미 파죽지세가 되었으므로 황해도 동쪽은 싸우지도 않고 퇴각하였으니, 구도(舊都)를 머지않아 수복하여 종묘 사직을 차례로 청소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신은 선조의 영혼이 지하에서 감격할 것과 남은 백성들이 소생될 희망을 생각하니 슬픔과 기쁨이 가슴에 교차하여 어리둥절할 뿐입니다. 비록 되살려 주신 은혜를 보답하려 해도 실로 도모할 길이 없습니다.
신이 매우 한스러운 것은, 저 조무라기들이 제멋대로 날뛰어 게딱지만한 섬나라에서 스스로 잘난 체하면서 하늘의 위력을 모른 채 여러 번 미친 소리를 한 것이었습니다. 신은 가슴이 아팠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추악한 무리들이 본색을 드러내다가 천벌을 자초하여 온 섬 나라가 공포에 질린 채 벌벌 떨며 감히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거의 살아남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어찌 저희 나라의 수치만 씻는 것이겠습니까. 실로 역대 제왕들의 공렬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신은 또 듣건대, 소원이 있을 때 곡진하게 이루어주는 것이 천지의 큰 덕이고 호소할 것이 있을 때 반드시 진달하는 것은 신하된 자의 지극한 정이라 하였습니다. 신은 생각하건대 지금 흉악한 적이 소탕된 것은 오로지 왕사(王師)가 출동했기 때문이니 소방은 털끝만큼도 한 일이 없습니다. 따라서 저들은 천장(天將)이 회군(回軍)하여 저희 나라가 외롭고 미약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재차 침략할 흉계를 꾸며낼 텐데 그때에 가서는 재난이 더욱 심해져 막기가 훨씬 어려울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다시 성상께서 동방을 돌보는 걱정을 하시게 되고 신은 왜적 방어를 잘못한 죄를 거듭 지게 될까 두렵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성상께서는 해동의 잔약한 백성을 불쌍히 여기고 천조(天朝)의 은혜로운 인정을 끝까지 베풀어 주소서. 그리하여 제독부(提督府)로 하여금 강서(江西)와 절강(浙江)의 포수 5천 명을 뽑은 뒤 한두 장수에게 소속시켜 연해의 요해처인 부산 등지에 몇 달 동안 나누어 주둔케 하면서 한편으로는 저희 나라의 군민(軍民)을 가르치고 한편으로는 흉악한 적들의 음모를 소멸시키게 하소서. 그렇게 하신다면 신은 길이 하늘의 위엄에 의지하여 수습을 해서 후일을 대비할 수 있겠습니다. 신이 이미 국토를 수복하고서도 또 마무리를 잘 해 주시도록 바라기까지 하니 지극히 참람하여 죄를 용서받기 어렵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천조(天朝)에서 저희 나라를 구휼하심이 이미 내국보다 더함이 있는데, 저희 나라가 천조에 하소연하는 일을 어찌 감히 외국으로 자처하겠습니까. 신은 더욱 황공스럽습니다.
신은 인력과 가축을 징발하여 군량과 마초의 운반을 독려하는 한편, 병사와 말을 조달하여 왕사와 협동해서 도성을 탈환할 계획인데, 이와 함께 함경도에서 서쪽으로 향하는 적에도 대비할 것입니다. 신은 수복이 끝나는 대로 도성으로 돌아가서 관군(官軍)을 위로한 다음 곧 이어 전후로 은혜받은 사실을 갖춰 별도로 사은을 행할까 생각하고 있습니다. 우러러 황제의 위엄에 의지하여 평양을 수복한 승첩의 사유를 속히 보고드려야 하겠기에 삼가 갖추 적어서 주문(奏聞)합니다.”
하였다. 제독(提督)이 거느린 남군(南軍)과 북군(北軍)이 공을 다투었는데, 제독은 북군을 편들면서 우리나라로 하여금 잘못되지 않게 주문(奏文)하도록 하였다. 상이 이호민(李好閔)에게 주문을 짓게 하니 이호민이 야간에 초안을 작성하였는데, 양편 군사의 공로에 대하여 골고루 빠짐없이 기술하였으므로 남ㆍ북군의 장수들이 모두 기뻐하였다.
○ 송 경략(宋經略)은 안주(安州)에 진주(進住)하고 제독 이여송은 파주(坡州)에 진군하여 벽제역(碧蹄驛)에서 싸우다가 불리하자 후퇴하여 개성(開城)에 주둔하였다.
○ 함경도 길주(吉州)에 주둔했던 적이 성을 비워놓고 도망하였다.
정문부가 경성으로 돌아와서 의병(義兵)을 해산시킨 뒤 북쪽으로 육진(六鎭)을 순행하며 반민(叛民)을 찾아내 베고 번호(藩胡)를 어루만져 안정시켰으며, 모든 보(堡)를 수복하여 장령(將領)을 파견해 두었다. 북변이 복구된 것은 모두 문부의 힘이었다.
○ 관원을 보내어 평양에서 전사한 명 나라 군사를 제사지내게 하고 그들의 시체를 거두어 묻었다.
상이 의주(義州)를 출발하여 다시 정주(定州)에 머물렀다. 세자가 성천(成川)에서 묘사(廟社)의 신주를 받들고 행재소(行在所)에 왔다.
○ 2월. 군병에게 조총(鳥銃)을 배워 익히게 하고 과거(科擧)에서도 조총에 대한 기술이 있는 자를 뽑도록 하는 한편 자초(煮硝)하는 법에 대해 널리 의논하도록 명하였다.
○ 제독 이여송이 도로 평양에 머물렀다.
제독이 오래도록 개성에 머물면서 군량이 떨어져 가는데도 전진할 생각은 없이 자주 사람을 경략(經略)에게 보냈는데, 이는 대개 전일의 화의(和議)를 계속해 보려는 것이었다. 때마침 유언비어가 떠돌아 “적장 청정이 장차 안변에서 서쪽으로 평양을 침범하려 한다.” 하자 제독은 이로 인하여 큰소리치기를,
“돌아가 평양을 구제하려 한다.”
하고는 드디어 군사를 인솔하여 서쪽으로 돌아가고 왕필적(王必迪)을 개성에 남겨 두었다.
○ 전라도 순찰사 권율이 적병을 행주에서 격파하였다.
당시 경성에는 적들이 연합하여 둔을 치고 있었으므로 그 기세가 등등하였는데 권율은 명 나라 군사와 연락하여 도성을 탈환하려고 군사를 머물려 두고 있었다. 그리고는 선거이(宣居怡)로 하여금 전군을 거느리고 금천(衿川)의 광교산(光敎山)에 주둔케 하고, 권율 자신은 정병(精兵) 4천 명을 뽑아 양천(陽川)에서 강을 건너 행주산 위에 진을 치고는 책(柵)을 설치하여 방비를 하였다. 적은 외로운 군사가 깊이 들어간 것을 보고 수만 명의 대군을 출동시켜 새벽에 책을 포위하였다. 그들이 울려대는 징소리ㆍ북소리가 땅을 진동하니 온 책 안이 두려움에 사로잡혔는데, 권율은 거듭 영을 내려 진정시켰다.
적은 군사를 나누어 교대로 진격해 왔는데 묘시(卯時)에서 유시(酉時)에 이르기까지 안팎이 모두 사력을 다해 싸웠다. 우리 군사가 점령한 지역은 높고 험준한 데다가 뒤로는 강벽(江壁)에 막혀 달아날 길이 없었으므로 모두 죽을 각오를 하였다. 적은 올려다 보고 공격하는 처지가 되어 탄환도 자연 맞지 않는 데 반해 호남의 씩씩한 군사들은 모두 활을 잘 쏘아 쏘는 대로 적중시켰다. 화살을 비오듯 퍼부을 때마다 적의 기세가 문득 꺾이곤 하였다. 왜적이 각자 짚단을 가지고 와 책(柵)에 불을 놓아 태우자 책 안에서는 물을 길어 불을 껐다. 적이 서북쪽의 책 한 간을 허물자 지키고 있던 승군(僧軍)이 조금 물러나니 권율이 직접 칼을 빼어 물러난 자 몇 사람을 베고, 다시 책을 세워 방어하였다. 화살이 거의 떨어지려 할 때 수사(水使) 이빈(李薲)이 배로 수만 개의 화살을 실어다 대주었다. 적이 결국 패해 후퇴하면서 시체를 네 무더기로 쌓아 놓고 풀로 덮고 태웠는데, 그 냄새가 몇 리 밖까지 풍겼다. 우리 군사가 나머지 시체를 거두어 참획한 것만도 1백 30급이나 되었다.
다음 날 사대수(査大受)가 접전한 곳을 와서 보고 말하기를,
“외국에 진짜 장군이 있다.”
하였다. 송 경략(宋經略)이 우리나라에 자문(咨文)을 보내 위로하고 추장(推獎)하는 한편 비단과 은(銀)을 상으로 주고 황제에게 주문(奏聞)하였다. 황제가 홍로시(鴻臚寺)의 관원을 보내 우리나라에 선유(宣諭)하기를,
“조선은 본디 강국으로 일컬어졌는데, 지금 보건대 권율이 참획한 것이 매우 많으니 그대 나라의 인민이 그래도 진작될 수 있겠다. 내가 매우 가상하게 여긴다.”
하였다. 권율이 파주의 대흥산성(大興山城)으로 옮겨 진을 치자 적병이 또 침입해 왔으나 모두 싸우지 않고 물러갔다. 제독이 이 소식을 듣고는 갑작스레 회군(回軍)한 것을 자못 후회하면서 장세작으로 하여금 이덕형(李德馨)과 함께 도로 개성에 가서 군량을 비축해 놓고 기다리게 하였다.
권율의 품계를 자헌(資憲)으로 올려 주도록 명하였다.
○ 상이 정주(定州)를 출발하여 숙천부(肅川府)로 진주하면서 세자와 중궁(中宮)은 그대로 남아 있게 하고 숙천부에서 다시 영유현(永柔縣)으로 이주하였다.
당시 대신과 여러 재신(宰臣)들이, 상이 내지에 진주하여 군량 운반을 감독하고 백성들의 신망을 유지하도록 연달아 청하였으나 상이 주저하며 따르지 않았다. 대신이 사기(事機)가 매우 위급하다고 하며 연달아 청해 마지않으니, 상이 답하기를,
“나의 생각에는 경략(經略)이 뒤에 있어 차견하는 관원이 연락부절하니 접응하는 일이 긴요하겠고, 왜적이 아직 북로(北路)에 주둔하고 있어 서쪽을 침범할까 우려된다. 또 여기에서 한 걸음만 떠나도 호령이 해이해져 중국 식량을 운반하는 일도 많이 지체될 것이다. 그 때문에 쾌히 따를 수 없다. 그만둘 수 없다면 세자와 중궁을 그대로 정주에 머물게 하고 나는 약간의 수행 관원을 거느리고 단기(單騎)로 평양에 달려가 대군의 뒤를 따르며, 모든 일을 지휘하는 것이 옳지 않겠는가.”
하였다. 이에 대신들이 아뢰기를,
“이는 바로 신들이 원하는 바입니다. 속히 결행하시기만을 오직 바랄 뿐입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숙천부에 잠깐 머물렀는데 직로(直路)이므로 수라를 제공하는 데 폐단이 있어서 영유현으로 이주하였다.
○ 4월, 경략(經略)이 심유경(沈惟敬)을 보내 왜영(倭營)에 들어가서 강화를 논의하게 하였다.
대장 수가(秀家) 등이 날짜를 언약하고 돌아갔다. 제독이 이 소식을 듣고 다시 군사를 이끌고 개성에 이르렀다.
○ 병부(兵部)가 내고(內庫)의 은(銀) 3천 냥을 조선에 주어 국내의 유공자 및 국사에 죽은 원역(員役)에게 반급하도록 청하였다.
○ 황제가 산동(山東)의 군량 10만 석을 내려 주어 배로 운송하여 군량을 보충하게 하였다. - 이때 바닷길을 통행하지 않은 지 이미 2백 년이나 되었으므로 무관(武官) 오정방(吳定邦)을 여순(旅順)의 어구에 보내어 인도해 왔다. -
○ 경기 감사 성영(成泳)이 선릉(宣陵)ㆍ정릉(靖陵) 두 능의 변고에 대하여 장계를 올렸다. 왜적이 물러간 후에 김천일(金千鎰)이 먼저 능의 변고를 살펴보고 군사로 호위하였는데, 성영이 이를 들어 계문한 것이다.
○ 예부(禮部)가 평양ㆍ개성ㆍ벽제ㆍ서울에 단(壇)을 설치하여 전사한 관군에게 위령제를 지낼 것을 황제에게 청하였는데, 성지(聖旨)를 받드니,
“단의 명호를 민충(愍忠)이라 하라.”
하고, 인하여 관은(官銀)을 내려 제수(祭需)를 마련하도록 하였다.
○ 경상좌도 순찰사 김성일(金誠一)이 죽었다.
성일은 일본에 봉명 사신으로 가서 적정(敵情)을 잘못 주달하였으므로 거의 죄벽(罪辟)에 빠질 뻔하였다. 그러다가 용서하는 왕명을 받고서는 더욱 감격하여 사력을 다해 적을 칠 것을 맹세하였다. 평소 군려(軍旅)에 대한 일은 알지 못했으나 지성으로 군중을 효유하고 관군과 의병 등 모든 군사를 잘 조화시켰는데, 한 지역을 1년 넘게 보전시킬 수 있었던 것은 모두 그가 통솔한 효과였다.
○ 5월. 경략(經略)이 왜적이 도성을 버리고 떠났다는 소식을 듣고 비로소 패(牌)를 내어, 제독을 재촉해 추격케 하였으나 적이 떠난 지 이미 수십 일이 지난 뒤였다. 제독은 길에서 천천히 행군하는가 하면 혹은 머물러 날짜를 지연시키기도 하면서 겨우 새재를 넘어갔다가 되돌아왔다.
적이 물러가고 나서는 군사를 나누어 해변에 주둔하였다. 울산(蔚山)ㆍ서생포(西生浦)에서부터 동래(東萊)ㆍ김해(金海)ㆍ웅천(熊川)ㆍ거제(巨濟)에 이르기까지 수미가 서로 연하였는데, 16 둔진(屯陳)이 모두 산과 바다를 의거하여 성을 쌓고 참호(塹濠)를 파서 오래 머물 계획을 하였다.
명 나라 조정에서 사천 총병(四川總兵) 유정(劉綎)을 연달아 파견했는데 복건(福建)ㆍ서촉(西蜀)ㆍ남만(南蠻) 등처의 소모병(召募兵) 5천 명을 거느리고 성주(星州)에 둔을 쳤으며, 절강(浙江)의 장수 오유충(吳惟忠)은 선산(善山)에, 이영(李寧)ㆍ조승훈(祖承訓)ㆍ갈봉하(葛逢夏)는 거창(居昌)에, 낙상지(駱尙志)ㆍ왕필적(王必迪)은 경주(慶州)에 둔을 쳤다. 이들은 사면을 빙 둘러서 서로 대치하였다.
○ 도원수 김명원(金命元), 순변사 이빈(李薲), 전라 병사 선거이(宣居怡)는 적을 추격하여 영남에 내려가고, 충청 병사 황진(黃進)과 전라 방어사 이복남(李福男)은 각각 그들의 군사를 인솔하고 모였으며, 권율(權慄)은 신병(新兵)을 거느리고 운봉(雲峯)을 넘어 영남으로 달려갔다. 모두 창녕(昌寧)ㆍ의령(宜寧) 등 읍에 벌여 둔을 치고 적경(賊境)에 임하였다.
○ 6월. 청정(淸正)이 우리 두 왕자(王子)와 재신(宰臣)들을 돌려보냈다.
○ 왜적이 진주를 함락하였다.
창의사 김천일이 그 아들 상건(象乾) 및 경상 병사 최경회, 복수장(復讎將) 고종후, 좌랑 양산숙 등과 함께 북쪽을 향하여 두 번 절하고 강에 몸을 던져 죽었다. 이종인은 이곳저곳에서 싸우다가 남강(南江)에 이르렀는데, 양팔로 두 명의 적을 끼고는 크게 소리치기를,
“김해 부사 이종인이 여기에서 죽는다.”
하며, 강에 몸을 던졌다. 진사 문홍헌(文弘獻), 정자(正字) 오차(吳玼), 참봉(參奉) 고경형(高敬兄) 등이 모두 따라 죽었다. 성이 일단 함락되자 적이 대대적으로 도륙하였다. 거제 현령 김준민(金俊民)은 단독으로 말을 달리며 거리에서 싸웠는데, 좌우로 돌격할 때마다 적의 무리가 물 갈라지듯 흩어졌다. 왜적이 종일 그를 쫓아다녔으나 탄환과 칼이 모두 명중되지 않았는데, 끝내 그가 어디에서 죽었는지 알지 못했다. 성 안의 사녀(士女)들도 앞을 다퉈 강에 이르러 투신 자살하여 흐르는 시체가 강을 메웠다. 대략 죽은 자가 6~7만이나 되었는데, 장사(壯士) 중에 벗어난 자는 수삼 인에 불과했다. 적이 성곽을 헐고 가옥을 불태웠으므로 성이 온통 폐허가 되었다. 성이 포위를 당한 9일 동안 주야로 벌인 크고 작은 전투가 1백여 차례나 되었으며, 적의 죽은 자도 상당하였다. 그러나 중과부적인 데다가 외부에서 구원병이 이르지 않았으므로 여러 장수들이 힘이 다하여 죽었다. 왜변(倭變)이 있은 이래 참혹하게 무너지고 의열(義烈)이 장엄하게 드러난 것으로 진주성 같은 예가 없었다. 천일에게는 좌찬성을, 경회에게는 좌찬성을, 종인에게는 병조 판서를, 준민에게는 형조 판서를 추증(追贈)하고, 그 나머지도 차등 있게 관작을 추증하였다.
○ 7월. 전라 좌수사(全羅左水使) 이순신이 군영을 한산도(閑山島)로 옮기기를 청하니, 따랐다.
한산도는 거제(巨濟)의 남쪽 30리 지점에 있는데, 산세가 빙 둘러쳐져 배를 숨기기에 편리하였고 왜선(倭船)이 호남을 침범하려면 반드시 이 길을 경유해야만 하였다. 이순신은 본진(本鎭)이 좌측에 치우쳐 있어 방어하기 어렵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이렇게 청한 것이었다.
○ 제독(提督) 이여송이 군사를 철수해 돌아갔다. 상이 강서(江西)로부터 황주(黃州)에 가서 영송(迎送)하고 인하여 황주로부터 나아가 해주(海州)에 머물렀다. 왕비와 세자가 강서로부터 와서 모였고, 임해(臨海)ㆍ순화(順和) 두 왕자도 이르렀다.
○ 심유경(沈惟敬)이 왜영(倭營)에서 돌아왔는데, 수길(秀吉)의 화친을 청하는 표문(表文)을 가지고 오면서 왜관(倭官) 소서비(小西飛)를 데리고 왔다.
○ 이순신을 삼도 수군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에 겸임시키고 본직(本職)은 그대로 두었다. 조정의 의논에서 삼도 수사(三道水使)가 서로 통제할 수 없다고 하여 특별히 통제사를 두어 주관케 하였다. 이순신이 육지는 군수 물자에 고달프다는 점을 들어 체부(體府)에 청하기를,
“다만 일면의 해포(海浦)를 부여해 주면 양식과 기계를 자족시킬 수 있게 하겠습니다.”
하였는데, 이때에 와서 소금을 구워 판매하여 곡식 몇만 석을 비축하였으며, 영사(營舍)와 기구(器具)가 완비되었다. 백성을 모집하여 완취(完聚)시키니, 하나의 거진(巨鎭)이 되었다.
○ 9월. 경략 송응창과 제독 이여송이 도로 압록강을 건너 돌아왔다. 오직 유정과 오유충(吳惟忠) 등 보병(步兵) 1만여 명만을 머물러두게 하였다. 또 왕세자가 전라도와 경상도 지방을 경리(經理)하도록 주청한 결과 성지(聖旨)와 칙서(勅書)가 내려왔는데, 왕세자로 하여금 임시로 절제(節制)를 총괄하게 하였다.
○ 이여송은 용모가 걸출하고 국량(局量)이 넓고 컸다. 군사를 움직이고 진을 칠 때 군사를 온당하게 검속하였으므로 그가 지나는 곳마다 모두 편하게 여겼다. 그의 아버지 영원백(寧遠伯) 이성량(李成樑)이 추후에 글을 주기를,
“조선은 바로 우리 선조의 고향이니, 너는 힘쓰라.”
하였는데, 이여송이 언젠가 그 글을 사적으로 접반사(接伴使)에게 보이기를,
“아버님이 이처럼 분부하셨는데, 감히 귀국을 위해 힘을 다하지 않겠는가.”
하였다. 어떤 이는 말하기를,
“그의 선조는 바로 우리나라 이산군(理山郡) 출신인데 우리나라 사람들은 자세히 알지 못한다.”
하였다. 이여송이 30여 세의 나이로 처음 우리나라에 왔을 때에는 안빈(顔鬢)이 매우 청수하였는데, 영남에서 돌아왔을 때에는 흰 수염이 섞여 있었다. 그가 우리나라 사람에게 말하기를,
“그대 나라를 위하다 보니 이처럼 반백(斑白)이 되었다.”
하였다. 뒤에 상이 명하여 평양에 사당을 세운 뒤 석성(石星)과 이여송을 제사지내고 이여백(李如栢)ㆍ장세작(張世爵)ㆍ양원(楊元)을 배향케 하고는 ‘무열(武烈)’이라고 사액하였다.
○ 상이 환도하려 할 때에 왕비는 머물러 두었으며, 세자는 종묘 사직을 받들고 해주(海州)에 머물러 있었다. 상이 임진강의 전쟁터를 지날 때 즉시 행주(行廚 임금의 거둥 때 어선(御膳)을 담당한 임시 주방)에 명하여 전사한 군인에게 제사를 지내도록 하였다.
○ 10월. 상이 경사(京師)로 돌아와서 - 4일 - 정릉동(貞陵洞)에 있는 고(故) 월산대군(月山大君)의 집을 행궁(行宮)으로 삼았다.
○ 중앙과 지방에 교서(敎書)를 반포하고, 사신을 보내 산천(山川)에 향을 내렸으며, 택일하여 종묘의 터에 곡읍(哭泣)하였다.
벽제(碧蹄)의 전투에서 죽은 명 나라 군사를 제사지내도록 명하였다.
○ 예조 판서 이증(李增)을 보내어 유생들을 거느리고 문묘의 터에 곡읍하게 하였다.
○ 승려를 모집하여 도성의 안팎에 있는 시체를 거두어 매장하도록 명하였다.
○ 청(廳)을 설치하여 기민(飢民)을 구휼하도록 명하였다.
이때 병란을 겪어서 도성 안이 크게 굶주려 쓰러진 시체가 즐비하였다. 5장(場)을 설치하여 미죽(糜粥)을 끓여 나누어 구휼하도록 명하고, 상이 친히 임하여 면대해서 지급하기도 하였다.
○ 선릉(先陵)에 배알할 날짜를 택일하도록 명하였다.
○ 윤 11월. 황제가 행인사 행인(行人司行人) 사헌(司憲)을 파견하여 칙서를 가지고 와서 선포하게 하였다. 황제는 상이 나라를 회복하고 환도(還都)했다 하여 칙서를 내려 위로하고 동시에 은폐(銀幣)를 하사하였다. 칙서의 대략에,
“저번에 왕이 대군을 몰아 왜적을 변경으로 쫓아내고 옛 강토를 수복한 다음 표문(表文)을 보내와 사례하니, 내 마음이 매우 기쁘다. 생각건대 나라를 회복한 중대한 일은 심상하게 보아 넘길 수 없는 보고이므로 지금 특별히 사신을 보내어, 옛사람의 와신상담하던 뜻으로 유시하여 권면한다. 조정에서 속국을 대우하는 은의(恩義)는 이 정도에서 그칠 것이니, 혹시 다른 변이 발생한다 해도 나는 왕을 위하여 계획을 세워 줄 수가 없을 것이다.”
하였다.
○ 12월. 광주(光州) 유생 김덕령(金德齡)이 의병을 일으켰다.
김덕령은 신력(神力)의 소유자로서 비호처럼 용건(勇健)하고 자못 기절(氣節)이 있었으며 집에서 유업(儒業)을 익혀 겸손한 태도로 남에게 자신을 낮추었으므로 그의 역량을 아는 자가 없었다. 전란이 있은 뒤로 그는 거상(居喪)을 하며 집에 있었다. 이때 관군(官軍)과 의병(義兵)이 무려 수백 둔(屯)이나 되었지만 적을 보고는 곧 무너졌다. 그의 자부(姉夫)인 김응회(金應會)는 강개(慷慨)한 선비였다. 그가 누차 김덕령에게 군사를 일으켜 적을 치도록 권하였으나 김덕령은 머뭇거리며 결단을 내리지 못하였다. 그런데 이때 마침 담양 부사(潭陽府使) 이경린(李景麟)과 장성 현감(長城縣監) 이귀(李貴)가 상소하여 대장의 임무를 맡길 만하다고 김덕령을 추천하였고 당시 무군사(撫軍司)가 남하하여 또 세자의 유시를 가지고 효유하였다.
이에 김덕령이 친구인 장사(壯士) 최담령(崔聃齡) 등 수십 명과 함께 군사를 일으켰는데, 전택(田宅)을 팔아 무기를 마련하고 격문(檄文)을 띄워 군사를 모집하니, 응모자가 운집하였으므로 장정 5천여 명을 확보하였다. 김덕령이 손수 지획(指畫)하여 행진(行陣)을 가르쳤다.


 

[주D-001]배도(裵度)가 …… 것입니다. : 평정이 신속하게 이루어진 것을 비유함. 배도는 당 헌종(唐憲宗) 때의 재상. 당시 회서 지방의 채주 자사(蔡州刺史) 오원제(吳元濟)가 반란을 일으켜 3년이 되도록 평정되지 않자, 조정에서 배도를 회서 초토사(淮西招討使)로 삼아 토벌케 하였는데, 절도사(節度使)인 이소(李愬)가 오원제를 사로잡아 난이 평정되었다. 《新唐書 裵度傳》 조빈은 오대(五代) 말기 사람으로 후주(後周)에 벼슬하다가 조송(趙宋)에 귀부(歸附)하였는데, 960년(건륭 1) 강남을 토벌하여 이듬해 11월 이욱(李煜)의 오(吳)를 항복받았다. 《宋史 曹彬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