漢詩/도봉서원(道峯書院)에 묵으면서 세

도봉산 관련 공부자료 자료

아베베1 2013. 4. 22. 10:18

 

 

 

 

 

 

 

 

 

 


[강좌] 조선시대 선비들의 산실 '도봉서원'   원문복사 링크복사
[분야] 생활/문화일반 [작성자] 류재용 [작성일] 2009.06.21. 15:58

서울시는 서울 및 경기 일원에서 경관과 수석(水石)이 아름다운 것으로 첫 손가락에 꼽혀 왔고, 조선시대 유명한 문인과 학자들이 시나 문장을 지어 그 아름다움을 노래했던 도봉산 계곡과 계곡 내에 자리잡은 도봉서원 터, 그리고 주변 각석군이 2009년 6월 18일부로 유적들을 서울시 기념물로 지정 예고했다.

서울시 기념물로 이번에 지정 예고된 '도봉서원'은 양주목사 남언경이 조선 중종 때 신진 사림(士林) 세력을 배경으로 도학정치를 실현하고자 했던 정암 조광조(趙光祖 : 1482년~1519년)를 기리기 위해 그가 경치 감상을 위해 자주 찾던 도봉산 자락에 1573년(선조 6)~1574년(선조 7) 세운 서원이다.

1696년(숙종 22)에는 조정의 논의와 숙종의 명으로 조선 후기의 가장 대표적 성리학자인 우암 송시열(宋時烈 : 1607년~1689년)을 조광조와 함께 배향하게 되었다. 수도권 내 가장 대표적인 서원이었던 만큼 역대 왕들의 관심도 각별하여 영조는 ‘도봉서원’이라는 현판을 직접 써 내려주었고, 정조는 직접 방문한 후 제문(祭文)을 내리고, 관리를 파견해 대신 제사를 지내기도 했다.


상기의 내용중에 오류가 있는듯하다 

도봉서원 편액에는 선조 갑술 사액이라고 기록되어있다 


 국조보감의 기록에 의하연 1792년 정조15년에 

○ 승지를 보내어 문정공(文正公) 조광조(趙光祖)와 문정공(文正公) 송시열(宋時烈)을 배향한 도봉서원(道峯書院)에 사제(賜祭)하였다.


▲ 도봉서원 터 전경

한편, 도봉산 등산로를 따라 난 약 300m 길이의 계곡에는 도봉서원과 깊은 관련이 있고 당대에 명필로 이름을 날린 우암 송시열, 동춘당 송준길, 한수재 권상하 등 유학자들의 글씨와 시문이 새겨진 바위들이 아름다운 계곡, 폭포 등과 조화를 이루어 다수 분포하고 있어 전통 경관과 서예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서울시는 도봉서원이 지난 1871년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의해 훼철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사당 부분과 옛 사료상의 도봉서원 유적으로 소개된 각석군(刻石群)이 원형대로 잘 남아 있고 또한 이들을 감싸고 있는 도봉산 계곡 자체가 조선시대 각종 문헌이나 시에 등장하는 전통적 경승지(景勝地)에 해당하므로 서울시 기념물로 지정할 가치가 충분하다고 판단해 기념물로 지정했다.


▲ 도봉서원 터 내에 자리잡은 사당 모습

도봉서원과 주변 각석군은 30일간의 예고 기간을 거쳐 2009년 8월까지는 서울시 기념물로 지정할 계획이다. 도봉서원이 지정되면 서원유적으로는 서울시에서 최초로 지정되는 사례가 되며, 서울시 기념물은 총 25건으로 늘어나게 된다. 다음은 이번 기념물 지정과 관련해 공시된 '서울특별시 기념물 지정을 위한 조사 보고서'을 정리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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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원(書院)은 학덕이 높은 유학자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올리고, 지역의 인재들을 교육하던 지방의 고등교육기관이다. 오늘날 서울 지역 내에는 도봉서원(道峰書院),

 사충서원(四忠書院), 노강서원(鷺江書院), 민절서원(愍節書院), 구암서원(龜岩書院) 등 총 5개의 서원이 분포했다.

그 가운데 도봉서원은 1573년(선조 6)~1574년(선조 7) 양주목사(楊州牧使) 남언경(南彦經)이 조선 중종 때 신진 사림(士林) 세력을 배경으로 도학정치(道學政治)를 실현하고자 했던 정암(靜庵) 조광조(趙光祖:1482~1519)가 자주 찾던 도봉산 자락에 사당 등을 세워 조광조를 모시고 기린 데서 출발해 1696년(숙종 22)부터 우암(尤菴) 송시열(宋時烈:1607~1689)의 위패까지 함께 모시던 서원이다.


▲ '양주목읍지(楊州牧邑誌)'에 등장하는 도원서원

율곡(栗谷) 이이(李珥 : 1536~1584)의 「도봉서원기(道峰書院記)」에 따르면 도봉서원이 세워진 터는 원래 영국사(寧國寺)라고 하는 사찰이 있던 곳인데 어느 시기엔가 절은 폐사(廢寺)되었지만 일대가 절의 이름을 따 여전히 영국동(寧國洞)이라고 불려지고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조광조가 젊었을 때 그곳의 경치〔泉石〕를 몹시도 좋아해 자주 찾았고, 조정에 나아가서도 공무(公務)를 마치고 나면 수레를 몰아 찾아가 놀았다 한다.

이곳의 아름다운 경치는 송시열의 수제자로 도봉서원 운영에도 직접 참여한 바 있는 한수재(寒水齋) 권상하(權尙夏:1641~1721)의 「소광정기(昭曠亭記)」나 시문에 뛰어났던 월사(月沙) 이정구(李廷龜:1564~1635)의 「도봉서원기(道峰書院記)」택당(澤堂) 이식(李植:1584~1647)의 「제도봉서원(題道峰書院)」등에도 언급되어 있다.

권상하는 ‘물과 돌이 맑고 깨끗하여 본래부터 경기 일원에서 제일 이름난 곳〔水石朗潔, 素稱畿內第一名區〕’이라고 했고, 이정구는 ‘성곽을 등지고 있는 명산이라고 하면 꼭 도봉산과 삼각산을 말하게 되는데 그 계곡과 수석(水石)이 아름답기로는 영국동(寧國洞)과 중흥동(重興洞)이 가장 뛰어나다. 모두 두 산의 하류에 있다〔負郭名山, 必稱道峰三角 其溪壑水石之勝, 寧國洞重興洞爲最, 皆兩山之下流也〕’라고 썼으며, 이식은 ‘도봉서원은 본래 사찰이 자리잡고 있던 곳인데 경치가 아름답기로 경기(京畿) 안에서 으뜸으로 꼽히고 있으니 이곳에 몸을 담고서 옛 사람의 글을 읽는다면 그 즐거움이 어떠할지 알 수 있다 하겠다〔道峯本因寺基。泉石林木之勝。冠絶圻內。寓此而讀古人書。其樂可知矣。〕’라고 하였다.

남언경(南彦經)이 도봉서원을 처음 세웠을 때의 상황과 건물들의 배치 양상은 이이의 「도봉서원기(道峰書院記)」에 가장 상세히 나와 있다. 그에 따르면 1573년 양주목사 남언경이 조광조가 즐겨 찾던 골짜기를 찾아가 보고 선생의 유적을 애처롭게 생각하던 끝에 지역 선비들에게 자문하여 우러러 사모할 곳을 의논하였는데 모든 사람들의 뜻이 모아져 곧 절터에 사당을 건립하고 서원을 세웠다고 한다.

고을 사람들이 몸소 참여하고 많은 기술자들이 부지런히 힘써서 다음해(1574년) 여름 사당과 서원이 완공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목수의 일은 1574년 거의 다 완성되었지만 모든 것이 다 갖추어지지는 않은 상황에서 남언경이 질병으로 양주목사를 그만두게 되자 새로운 목사로 오게 된 이제민(李齊閔:1528~1608)과 이정암(李廷馣:1541~1600)이 그 일을 이어받아 추진해 서고(書庫)와 주방(廚房)을 차례로 완성시키니 사우 건립 착수 이후 6년만인 1579년(선조 12) 비로소 서원 전체가 완성되기에 이르렀다고 한다.

이와 같이 조성된 도봉서원은 서울 동교(東郊 : 동쪽 교외)의 대유원(大儒院)으로 발전하였는데 그 규모가 관학(官學)인 성균관(成均館)에 다음 가 서울의 선비들이 여기에 많이 몰려들었다고 한다.

처음 세워질 무렵의 도봉서원은 일반적인 서원 배치형식을 따르면서도 지형을 고려하여 건물들을 적절히 배치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서원이 처음 세워질 당시 건물의 배치양상이 잘 묘사되어 있는 이이의 「도봉서원기(道峰書院記)」를 통해 초기 배치 양상을 살펴보면 아래와 같다.

사당은 북쪽에 있었고 그 오른쪽과 왼쪽에 각각 동재(東齋)와 서재(西齋)를 두었다. 서원은 사당의 남쪽에 있었는데 중간에 강당을 설치하고, 두 개의 협실(夾室)로써 강당의 날개를 삼았다. 행랑채〔前廊〕는 계곡 가에 있고 행랑채 옆에 문을 세웠다. 이와 같이 조성된 도봉서원은 그 이후 임진왜란과 수해 등을 거치면서 몇 차례 중건(重建)되고 또 그때그때의 필요에 따라 새로운 건물이 세워지면서 아래의 겸재 정선의 <도봉서원> 등 그림에서 보여지는 것과 같은 배치형태를 이루게 되었다.


▲ 조선 후기 필자 미상 도봉서원도(왼쪽)와 겸재 정선(1676~1759)의 도봉서원도(오른쪽)

먼저, 가장 북쪽에는 조광조와 송시열의 위패가 모셔진 ‘정로사(靜老祠)’라고 하는 사당이 위치하고, 사당 오른쪽과 왼쪽으로는 유생들의 숙소인 동재〔東齋 : 습시재(習時齋)〕와 서재〔西齋 : 의인재(依仁齋)〕가 각각 자리하였다. 사당 남쪽으로는 선비들이 모여 학문을 토론하던, ‘계개당(繼開堂)’이라고 불린 강당이 있었다. 계계당 수십 걸음 앞에는 동서 양쪽으로 누각 2개가 자리하고 있었는데 동쪽의 것이 ‘침류당(枕流堂)’이고, 서쪽의 것이 ‘광풍당(光風堂)’이었다.

침류당 약간 서쪽으로는 재임(在任)들이 거처하는 편액 없는 재각(齋閣)이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침류당 남쪽 가에는 ‘영귀문(永歸門)’이 있고 조금 아래 시냇가 깎아지른 절벽 꼭대기에는 ‘무우대(舞雩臺)’가 세워져 있었다. 그리고 이들 서원 건물 남쪽 계곡 건너편에는 초가지붕으로 된 정자〔‘모정(茅亭)’이라고 한다.〕인 ‘소광정(昭曠亭)’이 자리하고 있었다. ‘존경각(尊經閣)’은 서원 담장 동쪽, 계류(溪流) 북쪽에 세워졌다.

주요 건물별 연혁과 모습에 대해 보다 자세히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먼저 사당의 경우, 오억령(吳億齡:1552~1618)의 「도봉 사우 상량문(道峯 祠宇 上梁文)」과 이경석(李景奭:1595~1671)의 「도봉서원 강당 중건상량문(道峯書院 講堂 重建 上梁文)」을 볼 때 임진왜란 때 강당과 함께 소실되어 16년 동안이나 제사를 지내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오억령의「도봉 사우 상량문」에는 강당은 그대로 둔 상태에서 사당이 먼저 재건되었던 것으로 보인다〔講堂猶虛。雖嫌制度之未備。廟宇如故。幸見神明之有憑。續十六年旣廢之祠。〕.

사당이 지어짐으로써 16년 동안 지내지 못한 제사를 다시 지내게 되었다는 것으로 판단해 보면 1608년 전후로 사당 재건이 이루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그동안 도봉서원의 사당 이름은 알려지지 않았으나 김창업(金昌業:1658~1721)이 쓴 「도봉서원(道峯書院)」이라는 시를 보면 사당의 이름이 ‘정로사(靜老祠)’였던 것을 알 수 있다. 1779년(정조 3)에 북한산, 삼각산, 도봉산을 유람한 바 있는 농은(農隱) 이엽(李燁:1729~1800)의 「북한도봉산유기(北漢道峯山遊記)」에서는 사당과 주변 모습을 아래와 같이 기록하고 있다.

“사당 곁 서쪽 바위와 바위 가에는 푸른 등나무가 서로 엉켜 있고, 고목 너댓 그루의 푸른 잎이 하늘을 가릴 정도였다. ‘의인재(依仁齋)’는 사우의 앞 왼쪽 가에 있고, 또 그 왼편에는 ‘습시재(習時齋)’가 있는데 유관(儒冠)을 쓴 두 사람과 관동(丱童) 두 사람이 그 가운데서 글을 읽고 있었다”

임진왜란 때 사당과 함께 훼손된 강당은 이경석(李景奭:1595~1671)이 쓴 「도봉서원 강당 중건 상량문」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중건 시기는 명확하지 않다. 그러나 사우 중건 때까지 강당이 폐허 상태였다는 점을 감안하면 사당이 다시 세워지는 1608년 이후, 그리고 상량문을 쓴 이경석이 세상을 떠나는 1671년(현종 12) 이전까지는 강당 중건이 이루어졌을 것이라는 사실을 우선 짐작할 수 있는데, 윤순거(尹舜擧:1596~1668)의 「도봉서원 석지기(道峯書院 石池記)」를 보면 윤순거가 경오년(庚午年)에 도봉서원을 방문하여 강당과 침류당을 본 사실이 기록되어 있는 바 경오년인 1630년(인조 8)에 강당은 이미 중건되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이엽(李燁)의 「북한도봉산유기」와 류군필(柳君弼:1732~1799)의 「유삼각산기(遊三角山記)」에 따르면 강당의 이름은 계개당(繼開堂)이었는데 강당 서쪽 처마에 현판이 걸려있었다고 한다. 계개당이라는 이름은 『대학장구서(大學章句序)』에서 ‘가신 성인을 이어서 오는 후학을 열어준다〔繼往聖開來學〕’고 한 말과 『근사록(近思錄)』의 ‘가신 성인을 위하여 끊어진 학문을 잇고 만세를 위하여 태평성대를 연다〔爲去聖繼絶學, 爲萬世開太平〕’이라는 구절에서 취한 것이다.

강당에는 ‘도봉서원(道峯書院)’이라고 크게 쓴 어필(御筆) 현판이 걸려 있었는데 영조실록을 보면 이 어필은 1759년 영조가 직접 써서 걸도록 한 것이다. 그리고 강당의 북쪽 벽에는 송시열의 「제도봉서원(題道峯書院)」이란 시가 걸려 있었다.

蒼崖削立洞門開 푸른 절벽은 깍아 세운 듯하고 동문은 열렸네
澗水潺湲幾曲回 계곡물 잔잔히 몇 굽이나 돌아왔나
堯舜君民當世志 태평성대 만들려던 당시의 뜻을
廟前空有後人來 후인들 사당 앞에 와 기리네

서원에서 서책과 목판을 보관하는 곳인 존경각(尊經閣)은 서원 초창 당시에는 재력이 부족해 세우지 못하고 조선 후기에 비로소 세워졌는데 강당의 중건 상량문을 쓴 이경석이 존경각의 상량문〔도봉서원 존경각 상량문(道峯書院 尊經閣 上梁文)〕을 함께 쓴 것을 보면 강당 중건과 거의 같은 시기에 신축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1556~1618) 등 여러 문인들이 남긴 시 속에 자주 등장하는 누각인 침류당(枕流堂)은 강당 남쪽 계곡에 인접해 세워진 누각인데 언제 처음 건립되었는지가 명확하지 않다. 다만, 월사(月沙) 이정구(李廷龜:1564~1635)의  「유도봉서원기(遊道峯書院記)」를 보면 임오년(壬午年) 가을 영국서원(寧國書院 : 도봉서원의 별칭)에서 수학하던 이정구가 30여년이 지난 을묘년(乙卯年) 가을 당시 도봉에 머물던 이항복을 찾아가 그와 함께 도봉서원을 다시 찾는 일이 기록되어 있는데 이 때 ‘침류당(枕流堂) 동루(東樓)에 돌아가 앉았다.

누(樓)는 옛날에 없었는데 지금 증축된 것이다. 밤에 침류당에서 자는데 물결 소리가 침상을 뒤흔들었다〔倦歸坐枕流堂東樓, 樓卽舊無而今增, 夜宿枕流堂, 波聲撼床〕’라고 되어 있어 침류당이 임진왜란 이전인 1582년(선조 15) 이미 건립되어 있었고, 1615년(광해군 7) 동루가 증축되었던 것을 알 수 있을 뿐이다. 침류당의 누(樓)로 많은 시 속에 등장하는 ‘제월루(霽月樓)’는 바로 동루를 말한 것으로 보인다. 이엽(李燁)이 도봉서원을 유람했을 때의 침류당은 규모는 작았지만 단청이 칠해졌던 것으로 나타난다.

강당을 중심으로 보았을 때 침류당과 대비를 이루는 방향에는 광풍당(光風堂)이 자리하고 있었다. 한수재(寒水齋) 권상하(權尙夏:1641~1721)의 「답도봉원규(答道峯院規)」에 보면 ‘광풍당은 여러 재임(在任)들이 재숙(齋宿)하는 곳이다. 유사(有司)는 서쪽 방에 거처하고 장색(掌色)은 동쪽 방에 거처해야 하나 동쪽 방이 협소하여 장색(掌色) 4명을 모두 다 수용할 수는 없으니 유사의 방과 서로 바꾸지 않을 수 없다.〔光風堂是諸齋任齋宿之所。有司處西室。掌色處東室。而東室狹小。不可容掌色四員。不可不與有司房相換〕’라고 기록되어 있어 광풍당의 주요 용도와 규모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도봉서원을 방문한 적이 있는 김노겸(金魯謙:1766~1853)의 「유도봉기(遊道峯記)」에는 ‘날이 저물어 너럭바위에서 각기 술을 한 잔씩 마시고 서원으로 돌아와 글을 읽으려고 하는데 선비들이 강사(講舍)로 몰려들어 수용하지도 못할 지경이었다. 그런데 남쪽 모퉁이에 있는 침류당은 적적하고 사람 소리가 없었다. 이에 이상히 여겨 물어보니 서원의 민생(閔生)이 말하기를 서원의 재사 가운데 광풍당은 고직(庫直)이가 사는 곳과 거리가 아주 가깝고 거처와 음식이 편리한 까닭에 선비들이 다투어 거처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침류당의 경우에는 가장 구석지고 여러 재실들과 멀리 떨어져 있어 매서운 추위에는 음식도 싸늘해서 먹기 곤란하고 더구나 건물도 높아서 찬 기운이 사람을 힘들게 하니 글을 읽는 선비들이 거처하려고 하지 않습니다.〔日已反, 會坐盤石各飮一觴還院, 將留讀書時靑衿麏集, 講舍不能容准, 南偏一閣枕流而堂寂無人聲, 余怪問之, 院儒閔生曰, 院齋中□光風堂, 距庫人處甚邇, 居處飮食便, 故士爭居, 若枕流堂則最深僻與群齋遼絶, 故隆寒飮食冷難食, 且屋宇穹崇寒氣逼人, 讀書之士不處焉〕’라고 되어 있어 광풍당이 침류당에 비해 도봉서원 유생들에게 인기가 높았던 사실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건물 자체가 언제 건립되고 어떠한 변화 과정을 거쳤는지에 대해서는 자세한 기록이 없다.

강당의 서쪽으로 100 걸음 이내 거리의 시내 위에는 무우대(舞雩臺)가 축조되었고, 대의 동쪽으로는 영귀문(咏歸門)이 있었다. 증점(曾點)이 기수(沂水)에서 목욕하고 무우(舞雩)에서 바람 쐬고 읊으며 돌아오겠다던 뜻을 취한 것이라고 한다. 한수재(寒水齋) 권상하(權尙夏:1641~1721)의 「소광정기(昭曠亭記)」에 따르면 대 남쪽 시내 건너편에는 푸른 절벽이 우뚝 서 있었는데 여기에 동춘당(同春堂) 송준길(宋浚吉:1606~1672)의 글씨 여덟 자〔‘염락정파 수사진원(濂洛正派 洙泗眞源)’을 말한다〕가 있었고, 그 아래에는 큰 바위가 시내 위에 가로로 뻗쳐 있는데 여기에는 우재(尤齋) 송시열이 회옹(晦翁)의 시 두 구〔‘제월광풍갱별전 요장현송답잔원(霽月光風更別傳, 聊將絃誦答潺湲)’을 말한다〕를 한데 써서 모아놓은 것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계사년(癸巳年 : 1653년) 여름 큰 홍수로 절벽이 갈라지고 암석이 빠져나감으로써 무우대와 영귀문은 주춧돌이 뽑히고 송준길과 송시열의 필적도 어지러이 표류하게 되었는데 권상하의 친구인 서응(瑞膺) 윤봉구(尹鳳九:1681~1767)가 주관하여 침류당 남쪽 가 빈 땅에다 영귀문을 다시 세우고, 조금 아래 시냇가 깎아지른 절벽 꼭대기를 평평하게 닦아서 무우대를 다시 세우게 되었다고 한다.

「소광정기(昭曠亭記)」를 보면 ‘무우대 아래에 두어 길쯤 되는 폭포가 있고, 폭포 밑 오목한 암석 바닥에는 물이 돌아들어 담(潭)을 이루었으며, 담 남쪽에는 울퉁불퉁한 흰 암석이 있어 오륙십 명이 앉을 만하니 맑은 경치가 이전에 건축한 곳보다 나았다. 담 북쪽에는 기수(沂水)라는 두 글자를 새겼으니 이는 무우(舞雩)와 영귀(咏歸)의 뜻이 본래 기수에서 목욕한다는 데서 나왔기 때문이다. 그리고 마침내 두 선생이 옛날에 쓴 진본 필적을 돌에 새기고 또 무우대(舞雩臺) 세 글자를 그 곁에 새겨 놓으니 이에 문(門)과 대(臺)의 필적이 한결같이 다 복구되어 사람들이 모두 새롭게 복원한 것임을 모를 정도이다.〔臺下有數仞懸瀑。瀑底石坳開函。水滙爲潭。潭之南。白石盤陀。可坐五六十人。淸致勝似前築。潭北壁刻沂水二字。以其舞雩詠歸之意。本出於浴沂也。遂摹出兩先生舊筆眞本刻于石。又刻舞雩臺三字於其傍。於是乎門臺筆蹟。一復其舊。人不知其重新。〕’라고 쓰여 있는 바 이로써 오늘날 ‘무우대(舞雩臺)’․‘염락정파 수사진원(濂洛正派 洙泗眞源)’․‘제월광풍갱별전 요장현송답잔원(霽月光風更別傳, 聊將絃誦答潺湲)’이라는 글자와 싯귀가 새겨진 바위 인근이 윤봉구에 의해 다시 세워진 무우대와 영귀문의 터임을 알 수 있다.

무우대 맞은편 층암(層巖)에는 기둥 네 개를 세운 모정(茅亭)이 세워졌는데 새로 지은 무우대의 위로 그늘을 드리워줄 소나무와 노송나무가 없어 이곳에 오르는 사람들이 이를 불평하자 윤봉구가 계곡 맞은편 층이 있는 암반 위에서 조그마한 돈대(墩臺)를 찾아내 계곡과 무대, 서원 건물, 우뚝 솟은 산봉우리들을 한 데 조망할 수 있는 모정(茅亭)을 하나 세웠다.

「소광정기(昭曠亭記)」를 보면 이 모정의 이름은 ‘소광정(昭曠亭)’인데, 윤봉구의 부탁을 받은 권상하가 ‘학자가 학문을 끝까지 힘써 연구하다가 확 트이는 경지에 이르는 것을 옛 사람들이 소광(昭曠)의 근원을 보았다고 하였는데 지금 이 동(洞)에 들어온 이들도 언덕을 지나 골짜기를 찾아서 여기에 오르고 나면 가슴이 시원하게 탁 트일 것이니 그 기상이 저 소광의 근원을 본 것과 같을 것이다’하고 ‘소광정(昭曠亭)’이라 이름 지었다 한다.

이와 같이 도봉서원은 조선 전․후기를 대표하는 두 유학자인 조광조와 송시열을 배향하고, 도성의 많은 유생들이 다투어 모여들어 학문을 익혔으며, 백사 이항복 등 저명한 시인 묵객들이 시문을 남긴 오늘날 서울 지역 내 가장 대표적인 서원이었지만 1871년(고종 8) 흥선대원군이 왕권 강화 차원에서 단행한 서원 철폐령에 의해 훼철되었다. 현재는 원래의 기단 위에 1970년 복원한 사당만이 남아 있으나 도봉서원의 터임은 도봉서원 관련 옛 사료들의 기록과 동 기록에 등장하는 바위들이 현재까지 남아 있어 충분히 확인할 수 있는 상태이다.

도봉서원 앞 계곡은 수석(水石)이 경기에서 으뜸으로 꼽힐 만큼 경치가 수려하기로 이름난 곳인데 이곳에는 이름난 유학자들이자 명필가들이기도 한 송시열(宋時烈:1607~1689), 송준길(宋浚吉:1606~1672), 권상하(權尙夏:1641~1721), 이재(李縡:1680~1746), 김수증(金壽增:1624~1701) 등의 글씨가 새겨진 바위들이 다수 분포하고 있다.

특히 류군필(柳君弼:1732~1799)의 「유삼각산기(遊三角山記)」에도 등장하고 도봉서원의 진입부를 이루는 도봉동문(道峯洞門) 바위에서부터 도봉서원 상부 복호동천(伏虎洞天) 바위까지는 14개의 글씨 또는 싯귀가 새겨진 총 11개 바위가 분포하고 있다. 이들 글씨 또는 시문이 새겨진 바위들을 각석(刻石)이라고 하는데 이들 각석들을 계곡 상류에서 하류 방향으로 정리하면 아래와 같다.

한편, 우리나라의 경우 전통적으로 경치가 특히 아름다운 곳이나 별서 정원 등에 커다란 바위가 있는 경우 이들 바위에 글씨나 그곳의 경치를 노래한 싯귀를 새겨놓는 것이 경물 처리에 있어 주요한 요소를 이루어 왔다. 도봉서원 주변 계곡에 분포하는 각석들도 경승지에 자리 잡은 도봉서원과 그곳 주변의 아름답고 빼어난 경치를 노래하거나 유학자로서 추구하는 이상 등을 새겨 넣은 것이 대부분인데 도봉서원 및 폭포, 수석 등이 있는 계곡 등과 하나의 통합된 경관을 이루고 있어 보존가치가 크다.

서울특별시는 서울특별시 문화재위원 조사(2009년 3월 20일)와 문화재위원회 심의(2009년 3월 25일, 4월 9일, 5월 14일)에서 도봉서원과 주변 각석군의 문화재적 가치가 주변 계곡과 통합된 경관을 형성하고 있으므로 서원 터와 도봉동문에서 복호동천까지의 계곡, 그리고 이들 계곡 안팎에 분포하는 각석(刻石)들을 일괄 보존할 필요가 있다고 검토결과를 보고했다. 이에 따라 서울특별시는 지적측량을 거쳐 서울특별시 기념물로 지정하고자 관련 절차를 진행하고 있다.


 
국조보감 제26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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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조조 3
12년(기묘, 1579)

○ 5월. 지중추부사 백인걸(白仁傑)이 상소하여 당시의 폐단을 말하면서 첫 머리에 "녹미(祿米)를 주시니 특별하신 성은에 늙은 신하의 마음이 감격에 차서 차마 아무 말 없이 앉아 있지 못하겠으므로 우선 조종조 이래 변을 불러들인 것 중에서 큰 변에 대해 말씀드리고 난 다음에 당금의 재변을 불러들인 이유를 언급하겠습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전하의 재기(才氣)는 보통 사람들보다 훨씬 영명(英明)하신데도 정치의 공효에 대해서는 듣지 못하였습니다. 청컨대 신은 전하께서 병통이 있게 된 근본에 대하여 말씀드리겠습니다.”
하였다. 또 아뢰기를,
“신이 전에 경연에 입시했을 적에 늙고 어두워서 성상의 물으심에 대답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런데 물러나와 같이 입시했던 사람의 말을 들어보니 성상께서 지금의 조정 형편은 어떠하냐고 물으셨다 하는데, 이것은 바로 신이 말씀드리고자 하던 것입니다. 신이 초야에 있으면서 들으니, 벼슬아치들 사이에 심의겸과 김효원이 당으로 나뉘었다는 말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당시의 대신과 근신들이 진정시킬 계책을 의논한 다음 경연에서 아뢰어 두 사람을 모두 외직으로 보임시켰으나, 조정은 조용해지지 않고 떠도는 의논이 구름처럼 일어났습니다. 그리하여 조금이라도 의겸의 무리에 가까운 자면 서인(西人)이라 지목하고 조금이라도 효원의 무리에 가까운 자면 동인(東人)이라 지목하여 조정의 인사들이 모두 지목하는 속에 들어가 있습니다. 한 사람을 논박하면 여러 사람들이 반드시 ‘아무개는 아무의 당이기 때문에 논박을 당한 것이다.’라고 하며 떠들어대고, 한 사람을 천거하여 등용하면 여러 사람들이 반드시 ‘아무개는 아무의 당이기 때문에 천거를 받은 것이다.’라고 하며 떠들어대는 등 사정(私情)으로 지목하지 않는 것이 없기 때문에 대간과 전조(銓曹)가 손발을 쓸 수가 없으며, 사류들도 비록 강개하여 논핵하고자 하지만 위에서는 서로 공격하는가 의심하고 아래서는 자기를 배척하는 것으로 의심할까 두려워하고 있으니, 동(東)ㆍ서(西)라는 두 글자는 바로 나라를 망치게 될 화근입니다. 우뚝이 드러난 선비는 세상에서 많이 볼 수가 없지만 그렇다고 용렬하고 어리석은 자를 등용할 수 없고 보면 오늘날 쓸 만한 선비들은 모두 동서의 지목 속에 들어가 있는 것입니다.
동인으로 서인을 공격해서도 안 되고 서인으로 동인을 공격해서도 안 되는데 그렇다고 동인과 서인을 모두 배척하고자 한다면 이는 전하의 조정을 텅 비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름지기 동과 서를 조화시켜 그들로 하여금 함께 공경하고 협력하게 하는 것이 군자의 논의일 것입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조광조의 공덕은 마땅히 문묘에 종사(從祀)되어야 합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변방의 방비를 신칙하고 군정을 닦으며 기계를 수선해야 합니다.”
하였다. 그리고 서북 지방의 오랑캐와 남쪽 변방의 해적에 관한 일을 논하였는데 상소의 말이 수천 마디나 되었다. 상은 후한 비답을 내리고 정원으로 하여금 한 벌을 등서하여 대내로 들여와 어람에 대비하게 하였다.
○ 김성일을 사헌부 장령으로 삼았다. 성일은 근시(近侍)로 있을 적에 귀한 사람들을 논핵하였으므로 많은 사람들이 두려워하여 전상(殿上)의 호랑이라고 일컬었다. 하원군 정(河原君珵)은 왕실의 친족으로 술에 빠져 방자하게 행동하고 여리(閭里)에 침해를 끼치고 있었는데, 성일이 그 집의 노복을 체포하여 중형으로 다스리니, 궁가(宮家)들이 원망하고 노하였으나 감히 말하지 못하였다. 상이 경연 석상에서 "근래에 염치가 아주 없어지고 있는데 무엇 때문에 그러한가?” 하고 묻자, 성일이 대답하기를,
“대신으로서 뇌물을 받은 자도 있으니 염치가 없어진 것은 괴이하게 여길 것이 없습니다.”
하였다. 이때 정승 노수신(盧守愼)이 앞 자리에 있다가 나아가 엎드리고 아뢰기를,
“성일의 말이 옳습니다. 신의 일가 사람이 북방의 변장이 되었는데 신에게 늙은 어미가 있다 하여 작은 초피 갖옷을 보내 왔기에 신이 받아서 어미에게 주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대간이 바른 말을 하고 대신이 허물을 인책하였으니 둘 다 잘 하였다고 할 만하다. 신료들이 서로 이와 같이 책려(責勵)한다면 나랏일을 잘해 갈 수 있을 것이다.”
하였다. 노수신도 성일에게 후히 사례하였고 좋지 않게 여기지 않았다.
○ 9월. 윤두수(尹斗壽)를 다시 서용하여 연안 부사(延安府使)로 삼았다. 윤두수가 하직인사를 드리던 날 상이 인견하고 위로하면서 묻기를,
“어떻게 고을을 다스리려고 하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연안군의 백성들은 송사하기를 좋아하여 사무가 너무나 많다고 하니 신은 재능이 용렬하고 명망이 가벼워서 감당하지 못할까 두렵습니다.”
하자, 상이 한참 동안 잠잠히 있다가 이르기를,
“내가 경을 대우하는 데 내직과 외직이라 하여 차이를 두지 않고 있으니, 경도 내직과 외직을 구분하지 말고 잠시 외직에 나가 있으라. 이 뒤에 다시 부를 것이다.”
하였다. 두수가 물러가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처음 생각에는 오랫동안 성상과 이별하게 되었으므로 한번 우러러 뵙고자 하였다. 그런데 상께서 정녕하게 말씀하신 바람에 감격하여 샘 솟듯이 눈물이 흘러 마침내 감히 용안을 우러러 뵙지 못했다.”
하였다. - 윤두수는 심의겸의 집과 가장 친했다. 또한 을해년(1575, 선조 3)에 김효원의 당을 지나치게 배척하자 논자들이 조정을 탁란시키는 무리라고 지목하였다. 그리고 뇌물을 탐했다는 이유로 탄핵까지 하였는데, 상만은 구신으로 대우하여 마침내 크게 등용하였다. -
○ 지중추부사 백인걸(白仁傑)이 죽었다. 인걸의 자는 사위(士偉)이고 호는 휴암(休菴)이다. 인걸이 늙어서 일을 하지 못하자 서울에 있는 사대부들이 중시하지 않았으나 마음을 쓰지 않았다. 그리고 녹봉미와 마초값[騶直]을 모두 도봉서원(道峯書院)에 보내고 왕래하고 유숙하면서 우러르는 회포를 붙였다. 이때에 이르러 병세가 위독하자 상이 문병하고 의원과 약을 내려보내 치료케 하였다. 그가 죽자 하교하기를,
“어진 재상이 죽었으니 내 마음이 놀랍고 애통하다. 부의를 더욱 후하게 하라.”
하였다. 백인걸은 고매하고 활달하며 강개한 기백과 절의가 있었고 높은 뜻은 편안함을 추구하지 않았다. 처음에 조광조를 스승으로 삼아 종신토록 한결같이 높이 사모하고 심복하였다. 을사년의 난(難) 때부터 만 번 죽음을 무릅쓰고 곧은 말로 항거하였는데 다른 사람은 감히 먼저 하지 못하였다. 그가 정직하다는 명성이 한 때에 진동하자 간사한 무리들도 무섭고 두려워서 감히 그들의 분함을 풀지 못했다. 같은 때에 죄를 얻은 자들이 서로 잇따라 귀양가고 사사(賜死)되었는데 백인걸은 중도부처(中道付處)에 그쳐 5년간 귀양살이를 하다가 고향으로 돌아왔다. 여러 해 동안 곤궁하였으나 뜻을 꺾지 않았고 만년에 등용되어서는 다시 시대와 뜻이 맞지 않았으나 충성스럽고 의로운 마음은 머리가 희도록 변치 않아 일에 따라 선을 권하고 악을 못하도록 하되 반드시 그 뜻을 극진히 하였다. 나이 팔십이 넘어서도 여전히 학문의 강론에 힘써 밤낮으로 연구를 하되, 성명(性命)에 관한 책이 아니면 읽지를 않았다. 그리고 집에 거처할 때에는 가난하고 검소하였으며 입고 먹는 것은 소략하고 거칠었는데, 먼지가 자리에 가득 쌓여도 쓸지 않았다. 상이 그의 기풍과 절의를 중히 여겨 끝끝내 변하지 않고 총애하였다.

 
국조보감 제73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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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조조 5
16년(임자, 1792)

○ 2월. 우의정 박종악(朴宗岳)이 소를 올려 7개 조항을 진달하였다. 1. 성체(聖體)를 보호하고 아낄 것, 2. 원자(元子)를 보양(輔養)할 것, 3. 징토(徵討)를 엄히 할 것, 4. 언로(言路)를 열 것, 5. 탐욕스러운 풍조를 징계할 것, 6. 인재를 양성할 것, 7. 기강을 진작하여 엄숙히 할 것 등이었는데, 상이 긍정적으로 받아들였다.
○ 영릉(永陵)에 전알하였다. 파주목(坡州牧)의 전결(田結)과 묵은 재결(災結)에 대한 조세를 영원히 탕감할 것을 명하였다.
○ 3월. 가락국(駕洛國) 시조(始祖)의 능에 봄가을로 제사지내는 의식을 정하였다. 하교하기를,
“가야(伽倻) 시조는 158년 동안 나라를 향유하였으며, 위대하고 신령스러운 공적이 지금까지도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전해져 칭송되고 있다. 그 궁궐과 묘소가 김해부(金海府)에 있는데, 조정에서 사전(祀田)을 획급하고 수호군을 두었으며 돌을 세워 경계를 표시해서 백성들이 침범하거나 경작하는 것을 금지하였다. 대개 역대 능묘(陵廟)에 경의를 다하는 것은 바로 제왕의 아름다운 법이다. 앞으로 봄가을 제향 때에 향과 축문을 보내주고, 고을 수령이 전작(奠酌)할 것이며, 감(監) 1명을 이 고을에 본관을 둔 사람으로 채워넣으라.”
하였다. 또 문화(文化) 삼성사(三聖祠), 평양(平壤) 숭령전(崇靈殿), 경주(慶州) 숭덕전(崇德殿)의 예에 따라 봄가을 중삭(仲朔)에 제사를 행할 것을 명하였다. 또 각신 이만수(李晩秀)를 보내어 치제하게 하고, 돌아오는 길에 숭덕전(崇德殿)에 치제하고 신라의 여러 왕릉을 봉심하게 하였으며, 각각 묘지기 세 가구를 두었다.
○ 온릉(溫陵) 국내(局內)에 신씨(愼氏) 외손인 성씨(成氏)의 무덤들이 있었는데, 그 옆에 울창한 수목을 경기 감사로 하여금 베게 하였다. 하교하기를,
“국내의 수목은 신중히 다루어야 하지만, 사릉(思陵)에 이러한 조처를 내리고 본릉도 이렇게 하는 것은 성후(聖后)의 마음으로 내 마음을 삼고자 함이다.”
하였다.
○ 내원(內苑)에 나아가 꽃을 구경하고 고기를 낚았다. 여러 각신 및 각신의 자제로서 관례(冠禮)를 치른 자들을 불러 짝을 맞추어 활을 쏘고 시를 짓게 하다가 저녁이 다 되어서야 끝마쳤다. 일찍이 연신에게 하교하기를,
“군신(君臣) 관계이면서도 가정의 부자(父子)와 같은 의리를 겸해야만 정과 뜻이 서로 통할 수 있는 법이다.”
하였다.
○ 4월. 경외에 신칙하여 기민(飢民)이 입에 풀칠하고 몸을 보호하는 데 필요한 물품을 각별히 지급하게 하였는데, 전염병이 크게 번지고 있기 때문이었다.
○ 간성(杆城)ㆍ양양(襄陽)ㆍ고성(高城) 등 고을의 민가에 불이 났으므로 어사 홍대협(洪大協)을 보내어 위유하였다. 화재를 당한 가구는 환자곡을 견감하고 조세를 감면해주도록 명하고, 간성 백성 중에서 다시 돌아온 자나 새로 이사온 자는 10년 동안 요역(徭役)을 면제해 주게 하였다.
○ 윤4월. 영흥부(永興府) 산사(山社)의 진전(陳田)에 대한 조세를 견감하게 하고, 다시 돌아온 유민(流民)에 대해서는 공사(公私) 조세와 요역을 일정 기간 동안 면제해 줄 것을 명하였다.
○ 예조 판서 서호수(徐浩修)를 보내어 북도(北道)의 능침(陵寢)을 봉심하게 하고, 이어 함흥(咸興)과 영흥의 두 본궁 및 준원전(濬源殿)의 작헌례(酌獻禮)를 대리로 행할 것을 명하였다. 돌아오자 상이 서호수에게 이르기를,
“이번 제사는 내가 정(情)에 따라 예를 제정한 것이었다. 길이 멀어서 어쩔 수 없이 경을 보내어 대리로 행하게 하였으나, 경이 내려가던 날부터 지금까지 어디에서건 경건히 치재(致齋)하지 않은 때가 없었다. 이제 경이 복명(復命)하였으니 조심스럽던 내 마음을 조금 누그러뜨릴 수 있겠다.”
하였다.
○ 6월. 상이 승지와 각신을 불러 보았다. 하교하기를,
“오늘이 바로 원자의 생일이다. 경들은 들어와서 보라.”
하였다. 원자가 소반의 진기한 과일을 집어서 신하들에게 하사하니, 신하들이 일제히 아뢰기를,
“예자(睿姿)가 날로 우뚝해지니 성인의 기상이 실로 특출하십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우러러 큰 복을 빌고 고개 숙여 영원한 명을 기원하는 바, 기쁨을 표시하려면 함께 기뻐하는 조처가 있어야 하겠다.”
하고, 경외의 100세 이상 된 사람, 조관으로서 80세 이상 된 사람, 사서인으로서 90세 이상 된 사람에게 쌀과 고기를 하사하고, 조관과 사서인으로서 도류(徒流) 이하에 해당되는 죄를 지은 사람들의 죄명을 씻어줄 것을 명하였다. 죄인 중에 사대부를 욕보인 사람이 있었는데, 하교하기를,
“이는 중죄(重罪)가 아니지만 분의(分義)에 관계되는 것이니 그냥 두라.”
하였다.
○ 상이 입은 모시 적삼이 여러 차례 세탁하여 올이 성글어졌다. 어떤 연신이 이것에 대해서 말하자 상이 이르기를,
“내 어찌 옷 한 벌이 없겠는가. 모름지기 다 입지 않고 남겨두는 것이 있어야만 먼 후손에게까지 물려주려는 뜻에 부합될 것이다.”
하였다.
○ 8월. 내섬시 주부 김수증(金守曾)과 강릉 참봉(康陵參奉) 최규정(崔奎晶)을 불러 보았다. 김수증은 곽산인(郭山人)이고 최규정은 삭주인(朔州人)인데, 여러 세대가 함께 산다고 해서 특별히 조용(調用)할 것을 명하였다. 상이 몇 세대가 함께 사느냐고 묻자, 김수증은 6대가 함께 산다고 대답하고, 최규정은 7대가 함께 산다고 대답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여러 세대가 함께 살려면 반드시 그에 관련된 도리가 있을 것이니, 그대는 상세히 진달하라.”
하니, 최규정이 아뢰기를,
“신의 선대 때부터 옛사람이 화목하게 지내던 뜻을 본받아 왔습니다. 후손들은 그럭저럭 여풍(餘風)을 지키는 것일 뿐입니다.”
하였다.
○ 하교하기를,
“지금의 남단(南壇)은 바로 옛날 하늘에 제사지내던 원구단(圜丘壇)이다. 예(禮)에, 사서(士庶)는 오사(五祀)에 제사지내지 못하고 대부(大夫)는 사직(社稷)에 제사지내지 못하며 제후는 천지에 제사지내지 못한다고 하였다. 우리나라의 건국은 단군(檀君)에게서 시작되었는데, 역사책에 ‘하늘에서 내려왔으므로 돌을 쌓아 하늘에 제사지내는 의식을 행하였다.’고 하였다. 그 후로도 모두 그대로 따른 것은 중국의 모토(茅土)를 받지 않는 것이 크게 참람된 데에 이르지 않기 때문이었다. 우리 조정에 이르러서 혐의를 구별하고 은미함을 밝히고자 하여 원구단의 명칭을 남단으로 고쳤으니, 대개 군국(郡國)과 주현(州縣)이 제각기 풍사(風師)ㆍ우사(雨師)에게 제사지내는 제도를 쓴 것이었다. 그러나 지극히 경건하고 지극히 정결하게 하는 정성이 어찌 원구단과 남단의 명칭이 다르다고 해서 차이가 있겠는가. 그러나 문헌이 없어져서 근래에 행해지는 규정은 도리어 농잠(農蠶)이나 석채(釋菜)만도 못하게 되고 말았다. 옛날에 정1품이었던 헌관(獻官)의 작품(爵品)이 지금은 종2품이 되고 옛날에 3색(色)으로 했던 대갱(大羹)ㆍ화갱(和羹)이 지금은 새끼양과 돼지의 2색이 되어 《오례의》에 기재된 내용과 크게 어긋난다. 대신에게 의논해서 바로잡도록 하라.”
하고, 이어 남단, 우사단(雩祀壇), 선농단(先農壇), 선잠단(先蠶壇)의 헌관을 《오례의》에 정한 품계대로 차임하라고 명하였다.
○ 전조(銓曹)에 신칙하여 경술(經術)과 행실이 뛰어난 선비를 뽑아 아뢰게 하였다.
○ 서울의 쌀값이 뛰어오르자 대신(臺臣)이 유사로 하여금 금지시키게 할 것을 청하였는데, 상이 이르기를,
“무역해서 옮기는 방도에 있어서는 돈과 곡식이 모두 화천(貨泉)이다. 평준화시키는 법에 힘써서 요컨대 모든 하천이 도도히 흐르는 것처럼 해야 하겠는데, 그 방술은 근원이 되는 물을 인도하는 데 달렸을 뿐이다. 지금 금령을 설치하여 그 이익을 막는다면 이익은 막히게 될 것이다. 그러나 배와 수레에 싣고 한강을 건너온 자들이 장차 허둥지둥 배와 수레를 돌려 돌아가고 말 것이니, 이는 좋지 않은 계책이다. 그들이 폭주하도록 내버려두고 그들이 서울에 모여들게 내버려두어 온 시장의 가격이 고르게 되면 나라 안의 식량이 저절로 풍족해질 것이다. 이것이 옛사람이 방(榜)을 걸어서 쌀값을 올린 뜻이다.”
하였다.
○ 특별히 영남의 재해 입은 고을에 휼전을 시행하였다. 하교하기를,
“모든 일은 미리 대비하면 제대로 되는 법이다. 지금의 안타까워하는 마음을 가지고 반드시 거주지에 안주하여 살아갈 수 있게 할 대책을 강구해야만 백성들이 정말 믿을 곳이 있게 될 것이고 나 역시 밥을 먹으면 목구멍에 넘어가고 잠자리에 들면 눈을 붙일 수 있을 것이다.”
하였다.
○ 9월. 대신과 각신을 불러 보았다. 영돈녕부사 홍낙성(洪樂性) 등이 아뢰기를,
“탄일(誕日)의 진하는 바로 전례(典禮)에 실려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매년 권정례(權停禮)로 하시니 울적한 심정을 금하지 못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선조에는 50년 동안 매번 권정례를 명하셨고, 보령(寶齡)이 높아지신 후에야 간혹 한두 번 사람들의 뜻을 따라주셨다. 더구나 나는 매사를 거창하게 하려 하지 않는데 어찌 이날이라고 해서 진하를 받겠는가.”
하였다.
○ 광릉(光陵)에 전알(展謁)하였다. 윤음을 내려 양주(楊州)와 포천(抱川)의 백성에게 하유하고, 특별히 그해의 군향(軍餉)과 환자곡에 대한 모조(耗條)를 견감하였으며, 70세 된 조관(朝官)과 80세 된 사서인으로서 선조 병진년과 을해년의 행행을 우러러본 사람은 모두 한 자급 가자하고, 100세가 넘은 사람에게는 쌀과 고기를 더 지급하였다.
○ 연산군(燕山君)과 광해군(光海君)의 묘소에 승지를 보내어 치제하였다.
○ 승지를 보내어 문정공(文正公) 조광조(趙光祖)와 문정공(文正公) 송시열(宋時烈)을 배향한 도봉서원(道峯書院)에 사제(賜祭)하였다.
○ 10월. 처음에 고 대사헌 공서린(孔瑞麟)과 참봉 공덕일(孔德一)의 후손을 거두어 쓰라고 명하고, 이어 중국 조정에서 연성공(衍聖公)의 작위를 대대로 세습하게 한 예에 따라 두파(派)의 후예를 대대로 녹사(祿仕)하도록 명했었다. 이때에 이르러 하교하기를,
“공씨가 동쪽으로 건너와서 수원(水原) 땅에 처음 정착하였던 사실이 《읍지(邑誌)》에 실려 있기에 감사로 하여금 그 터를 그림으로 그려서 올리게 했는데, 과연 궐리(闕里)의 사당이 있고 은행나무가 있었으며 대대로 살아온 후손들이 있었다. 또 궐리에서 수십 리 떨어진 곳에 새로 세운 영당(影堂)이 있다고 하니, 감사로 하여금 옛터에다 집 한 채를 지어 성인의 초상을 봉안하게 하라.”
하고, 이어 이를 ‘궐리사(闕里祠)’라고 부르도록 하고 친필로 편액을 써 내렸으며, 봄가을로 향과 축문을 내렸다.
○ 전강(殿講)에 직접 임하였다. 특별히 공윤항(孔胤恒)에게 급제를 내리고, 이어 풍악을 하사하였다. 성균관 관원으로 하여금 인도해서 반궁(泮宮)에 이르게 한 다음에 명륜당 주위를 돌게 하였다.
○ 11월. 영남에 곡식 12만 곡, 호남에 6만 곡, 호서에 2만 곡을 획급하여 각각 본도의 진휼 밑천에 보태게 하였다.
○ 12월. 상이 태묘(太廟)의 납향(臘享)을 직접 행하였다. 서계(誓戒)를 마치고 나서 하교하기를,
“납일(臘日)이 바로 온릉(溫陵)의 기신일(忌辰日)이다. 납향은 시향(時享)과 달라서 날짜를 당기거나 물릴 수 없다. 태묘의 제5실 이상도 참으로 중요하기는 하지만, 영녕전(永寧殿)의 인종실(仁宗室)과 명종실(明宗室)에 계신 거룩한 영령들이 음악을 연주하고 희생을 바치는 제향에 놀라지 않겠는가.
태묘의 제향은, 맹춘(孟春)과 맹추(孟秋)에 지내는 제사를 제외한 여름 제사와 겨울 제사 및 납향의 경우에는 직접 제사지낼 때만 영녕전까지 아울러 거행하게 되어 있다. 지금 납향을 만약 대리로 거행한다면 자연히 하늘에 계시면서 오르내리는 두 실(室)의 효성을 우러러 몸받게 될 것이다. 더구나 효릉(孝陵)의 지극한 인륜에 비추어 볼 때 본릉을 섬기는 정성과 사랑의 독실함은 희릉(禧陵)과 차이가 없을 것이다.
태묘 제7실 이하의 제향은 제례(祭禮) 절차를 상고해보면 분명히 근거할 바가 있고, 더구나 생전에 섬겼느냐 섬기지 못했느냐 하는 데 따른 가르침이 경전에 분명히 실려 있다. 신도(神道)가 있는 곳이 바로 인정(人情)이 있는 곳이니 태실(太室)에서 행하는 것이 십분 지당할 것이다. 또 만약 태묘에서만 직접 행한다면 감히 하지 못할 단서가 두 가지 있으니, 이미 직접 제사를 올리면서 영녕전의 제향만 빼놓는 것을 감히 하지 못하겠고, 주원(廚院)에서는 소선(素膳)을 올리는데 태묘에서는 제육(祭肉)을 받는 것을 감히 하지 못하겠다. 그러나 음복주와 제육은 모두 제1실의 제물에서 받아서 그 체모가 존엄하니, 제육을 감히 받지 않을 수 없음이 이와 같다.
그렇다면 제사를 대리로 행했을 때 정리와 예절에 부족함이 있는 것은 작은 일이고, 조종의 마음으로 마음을 삼는 것은 큰 일이 된다. 태묘의 납향을 대신을 보내어 대리로 행하도록 하라.”
하였다
○ 이에 앞서 상주(尙州) 유생들이 상소하여 임진년에 절의(節義)를 다하고 죽은 세 충신 윤섬(尹暹)ㆍ이경류(李慶流)ㆍ박지(朴篪)를 서원을 건립하여 제사지내고 김준신(金俊臣)을 배향(配享)하도록 청하였는데, 상은 서원을 건립하는 것이 나라의 금령에 관계된다고 하여 곤란하게 여겼었다. 이때에 이르러 하교하기를,
“나중에 들으니, 상주의 인사들이 충성을 바친 곳에다가 단(壇)을 세워 제사지내고, 또 별도로 제단을 쌓아 장졸들을 제사지낸다고 한다. 만약 이곳에 이런 단이 있는 줄 알았다면 민충단(愍忠壇)의 고사(故事)를 따라 그 단에서 제사를 지냈을 것이다. 이 어찌 편리한 일이 아니겠는가.”
하였다. 이어 ‘충신의사단(忠臣義士壇)’이라는 칭호를 하사하고, 단 뒤에 작은 비갈을 세웠다. 또 감사 정대용(鄭大容)의 말에 따라 의사(義士) 김일(金鎰)을 배식(配食)하였다.
○ 하교하기를,
“내가 자나깨나 잊지 못하는 한 가지 생각은 영ㆍ호남의 가난한 백성들에 대한 것이다. 지금 꽁꽁 얼어붙는 매서운 추위가 몰아치고 해가 바뀔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 뒤주는 바닥이 났는데 조세 독촉에 곤욕을 치르고 있을 것을 생각하면 어느 겨를에 밥이 달겠으며, 베틀에 북은 비었는데 부세를 바치느라 초췌해 있을 것을 생각하면 어찌 감히 따뜻한 옷을 찾겠는가. 삼남(三南) 중에서도 영남이 가장 심하니, 각 고을에서 바칠 내년 봄 대동 목면을 특별히 다 돈으로 대납하도록 허락하라.”
하였다.
○ 하교하기를,
“우리 조정의 가법(家法)은 임금이 뭇 신하를 대하여 성명을 드러내어 부르는 적이 없고 기록하는 관원들도 반드시 관직을 부르는 것이다. 사관이 명을 전하는 때에 왕왕 관직이 아닌 이름을 부르는데, 이는 규례를 잘 몰라서 그러는 것이다. 새로 벼슬에 나온 연소한 자들은 잘 알아야 할 것이다.”
하였다.
○ 상이 직접 임하여 죄수를 심문하였다. 연신에게 이르기를,
“죄인을 국문할 때 함께 모의한 자와 미리 알고 있었던 자가 누구인지를 으레 묻곤 한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한 번 입에서 말이 나와버리면 임금의 권한을 가지고도 살리기를 좋아하는 덕을 베풀래야 베풀 방도가 없다. 신하들이 힘껏 청하였으나 내가 끝내 이로써 묻지 않은 데는 뜻하는 바가 있었던 것이다.”
하였다.
○ 상이 활을 10순(巡) 쏘아 49발을 명중시키고 한 발은 쏘지 않고 남겨두었다. 연신이 그 까닭을 우러러 묻자, 상이 웃으면서 하교하기를,
“진요좌(陳堯佐)는 소유기(小由基)라고 불렸는데도 사관이 ‘10발을 쏘아 8, 9발을 명중시켰다.’고 일컬었으니, 그 어려움이 이와 같다. 어찌 반드시 다 쏘아야 하겠는가.”
하였다.
○ 제주(濟州)에 기근이 들었다. 곡식 1만 곡을 옮겨 진대하고, 직접 제문을 지어 배가 출발하는 곳과 도착하는 곳의 해신(海神)에게 제사지내게 하였다.

 
국조보감 제76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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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순조조 1
3년(계해, 1803)

○ 1월. 진강(進講)에 나아갔다. 《시경(詩經)》 연연편(燕燕篇)을 진강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선군(先君)을 생각하는 마음으로 과인을 권면하도다[先君之思 以勖寡人]’라는 구절은 오늘날 군신 상하가 서로서로 힘쓸 곳이 아니겠는가.”
하니, 지사 김조순(金祖淳)이 아뢰기를,
“성상의 하교가 여기에까지 미치니 우러러 흠앙하는 마음을 금할 수 없습니다.”
하였다.
○ 2월. 하교하기를,
“봄추위가 한겨울이나 다를 바 없고 눈이 거의 매일 내리고 있으니, 우리 가난한 백성들이 어찌 땔나무와 쌀값이 폭등하는 것에 대한 탄식을 면할 수 있겠는가. 바람에 부러져 저절로 말라버린 사산(四山)의 나무는 비록 함부로 베어가도록 허락할 수 없는 것이지만, 백성이 이미 극도로 곤궁한 마당에 흩어서 널리 구제하는 것이라면 무엇인들 불가하겠는가. 각영으로 하여금 베어내게 해서 도성에 땔감이 귀한 걱정거리를 해결하도록 하라.”
하였다. 공조 참의 박명섭(朴命燮)이 상소하기를,
“도성의 사산은 교외의 수택(藪澤)을 꼴베고 나무하는 자들과 함께하는 데에 견줄 것이 아닙니다. 크게 보호해주는 은혜는 아마도 두루 미치지 못하고 벌목을 금하는 법은 반드시 이로부터 점차 해이해질 것입니다. 바라건대 성명(成命)을 거두소서.”
하니, 답하기를,
“바람에 부러진 경산(京山)의 나무를 팔도록 허락하는 것은 옛날에도 있었던 일이라는 것을 그대는 혹 모르는가? 모든 물건은 흔해지고 나면 혜택을 입는 대상이 저절로 많아지는 법이다. 그런데 어찌 반드시 이렇게 따져야 하겠는가. 그러나 그대의 말은 직분을 행하는 것이라고 하겠으므로 매우 가상하게 여기는 바이다.”
하였다.
○ 윤2월. 궁방(宮房)과 아문(衙門)에서 장토(庄土)라고 진고(陳告)하는 습속을 금하도록 명하였다. 수령으로서 암행어사의 장계에 든 자와 전최(殿最)에서 하(下)를 맞은 자는 기록하여 책자로 만들어서 열람하는 데 대비할 것을 명하고, 탐오한 관리를 폐고(廢錮)하는 법에 대하여 거듭 엄히 신칙하였다.
○ 4월. 평양부의 민가에 불이 나서 가옥 1000여 채를 불태웠다. 불탄 민호의 환자곡과 신역(身役)을 탕감하고 신역이 없는 자는 곡물을 대신 지급할 것을 명하였다. 사관 서유순(徐有恂)을 보내어 재해 입은 백성들을 위유하고, 집을 지어서 머물러 살게 할 방도로써 감사에게 신칙하였다. 얼마 있지 않아서 함흥부 민가에 불이 났다는 보고가 또 이르자 하교하기를,
“피해가 관서보다 배나 더 크고 인명의 손상이 10여 명이 넘으니,놀라운 마음에 좋은 옷과 맛있는 음식도 달갑지 않다.”
하고, 또 내국에서 진상하는 녹용을 정봉(停封)하고, 안에서 내려준 단목(丹木) 1만 근, 호초(胡椒) 2000두와 더불어 집집마다 고루 나누어주게 하였다. 가구마다 쌀 1곡을 지급하고, 불에 타 죽은 사람에 대해서는 원휼전 이외에 1곡을 더 지급하였으며, 아울러 민호의 환자곡과 신역을 탕감하였다. 또 진헌(進獻) 물선(物膳)을 정지하도록 명하고, 감사에게 신칙하여 집을 지을 재목을 갖추어 지급하게 하였다. 교리 홍석주(洪奭周)를 위유어사로 삼아 달려가서 위유하게 하였다.
○ 문묘(文廟)에 나아가 작헌례를 행하였다. 문과(文科)ㆍ무과(武科)를 설행하여 시험보이고,성균관 당상과 재임(齋任)을 시상하였다. 하교하기를,
“처음으로 석채(釋菜)를 행한 것은 나름대로 입학(入學)의 뜻을 붙인 것이다.”
하였다.
○ 좌의정 서용보(徐龍輔)가 아뢰기를,
“얼마 전 자전의 하교를 받들었습니다. 시종으로서 군함(軍啣)을 가진 사람이 능(陵)ㆍ원(園) ㆍ묘(墓)의 향관(享官)에 차임될 경우에는 호조로 하여금 도로의 원근을 헤아려 반전(盤纏)을 지급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이어 헌관(獻官)으로서 군함을 가진 사람에게도 그와 같이 하도록 명하였다.
○ 8월. 건원릉(健元陵)과 원릉(元陵)에 나아가 직접 제사지냈다. 지돈녕부사 이언식(李彦植)을 보내어 덕흥대원군(德興大院君)의 묘소에 경건히 제사지내게 하였는데, 묘소가 연로(輦路) 가까운 곳에 있기 때문이었다.
○ 예관을 보내어 도봉서원(道峯書院)과 석실서원(石室書院)에 치제하였다.
○ 고 상신 이이명(李頤命)ㆍ이건명(李健命)ㆍ조태채(趙泰采)에게 특별히 부조지전(不祧之典)을 시행하도록 명하였다.
○ 관원을 보내어 문충공(文忠公) 정몽주(鄭夢周)의 사판(祠版)에 치제하도록 명하고, 그 후손을 녹용하게 하였다.
○ 10월. 특별히 단목 3000근과 호초 300두를 심도(沁都)에 내려 진휼 밑천에 보태게 하였다.
○ 12월. 진강에 나아갔다. 상이 어제(御製) 순재 과정(純齋課程)을 내보이고, 이어 영사 서용보(徐龍輔)로 하여금 군덕편(君德篇)을 읽게 하였는데, 덕에 힘쓸 것, 어버이에게 효도할 것, 하늘을 공경할 것, 조상을 법삼을 것, 백성을 사랑할 것, 어진이를 등용할 것, 재물을 절약할 것,정사에 힘쓸 것, 공손하고 검소할 것, 작은 일에도 삼갈 것 등 모두 10개 조목이었다. 서용보가 과정의 뜻을 우러러 청하니, 상이 이르기를,
“과정으로 정해놓고 읽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근래 소대에서 《강목(綱目)》을 진강 하였는데, 격언이 있을 경우 더러 논의를 세우고 찬술한 것이다.”
하였다.
○ 어제에 군도편(君道篇)이 있었는데, 상이 스스로 경계하는 말이었다. 그 조목에 여덟 가지가 있으니, 1. 하늘을 공경할 것, 2. 백성을 사랑할 것, 3. 제사를 소중하게 여길 것, 4. 효성을 돈독히 할 것, 5. 절약하고 검소하게 생활할 것, 6. 어진이를 임용할 것, 7. 간언을 받아들일 것, 8. 형벌을 삼갈 것 등이었다. 하늘을 공경하는 조항에 이르기를,
“하늘을 공경하려면 정성보다 더 좋은 것이 없으니, 정성을 다하면 진실하게 된다. 임금이 하늘을 법삼아 다스림을 펴고자 한다면 정성을 두고 무엇으로 하겠는가. 옛사람이 말하기를, ‘하늘이 임금에게 경고하는 것은 아버지가 아들을 꾸짖는 것과도 같다.’고 하였는데, 경고하는 것은 바로 사랑하는 것이다. 영묘(英廟)께서는 임어하신 50년 동안 ‘경천(敬天)’이라는 두 글자를 마음에 새겨두셨다. 바람이 거세게 불거나 비가 많이 내리는 날 및 일기가 고르지 못한 때는 밤이라도 반드시 의관을 정제하고 반듯이 앉아 계셨고,좌우에게 이르기를, ‘혹 나에게 잘못이 있어서 이렇게 경고가 이른 것이 아닌가?’하고는 나지막이 기도하셨으니, 이는 모두 스스로 경계한 것이었다. 조용히 조섭하시는 중에도 자주 신하들을 침실 안으로 불러들여 만나셨는데, 하늘에 대해서 언급될 때마다 부축해 일으키게 해서 경건함을 다하셨으니, 나 소자가 밤낮으로 계술해야 하지 않겠는가.”
하고, 백성을 사랑하는 조항에 이르기를,
“열성께서 서로 계승해오면서 백성 사랑하는 것을 국가의 법으로 삼으셨다. 백성은 지극히 어리석으면서도 신령스러우니, 구중 궁궐 속에서 지내는 임금이 인의(仁義)를 행하여 사심(私心)이 없으면 백성들이 귀의하고, 임금의 행실이 조금이라도 미진하면 백성들이 이반(離叛)하게 된다. 이것은 물이 흐르는 것과 같아서 막을 수 없다. 임금은 하늘의 아들이고 백성은 임금의 아들이다. 어린 아들이 굶주리고 추위에 떨면 부모된 자는 배고프지 않고 춥지 않게 해줘야 한다. 사람이 반드시 환과고독(鰥寡孤獨)을 업신여기는 것은 다름이 아니라 나약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문왕(文王)은 이 네 부류의 사람들을 우선적으로 돌보아주었던 것이다. 예로부터 제왕이 백성들을 사랑하면 이 네 부류의 사람들을 가장 먼저 불쌍히 여겼으므로 그 나라가 다스려진 것이다.”
하고, 제사를 소중하게 여기는 조항에 이르기를,
“지성을 다해 제사지내면 그 선조가 반드시 흠향하는 법이다. 우리 영고(英考) 및 선조께서는 제향하는 때만 되면 비록 작은 제사라 할지라도 반드시 의관을 정제하고 단정히 앉아 계시다가 제사가 끝난 다음에야 잠자리에 드셨다. 이것은 내가 일찍이 선조에게서 우러러본 바이니, 감히 계술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고, 효성을 돈독히 하는 조항에 이르기를,
“효도는 온갖 행실의 근원이다. 세상 사람이 효도를 버리고는 사람이 될수 없는 법인데, 더구나 임금이겠는가. 우리 열성조께서는 지성스러운 효성을 지니셔서 봉양할 때는 뜻을 받들고 상을 당해서는 애통해하셨다. 영묘께서는 탄신일에 보경당(寶慶堂)에서 《시경》육아장(蓼莪章)을 읽으셨는데, 보경당은 바로 영묘께서 탄생하신 곳이다. 선조(先朝)께서는 지극한 효성으로 자전과 자궁을 섬겼고, 선원전과 경모궁의 전배는 조용히 조섭하실 때라도 폐지한 적이 없었다. 이것은 내가 눈으로 직접 보았던 일이니, 감히 우러러 몸받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고, 절약하고 검소하게 생활하는 조항에 이르기를,
“임금이 절검해야만 천하 사람들도 절검하게 된다. 사치는 중간 수준의 임금이 수치로 여기는 것이고 성스러운 군주가 배척하는 것이다. 우리 열성조께서 절검을 가법(家法)으로 삼아오셨기에 나 또한 이것을 체념(體念)하고 있다.”
하고, 어진이를 임용하는 조항에 이르기를,
“임금이 어진이를 쓰지 않으면 소인이 나오고 어진이를 쓰면 소인이 물러가는 법이니, 국가의 치란(治亂)이 여기에 달려 있는 것이다.”
하고, 간언을 받아들이는 조항에 이르기를,
“임금의 마음이 먼저 바로잡혀야 비로소 말을 들을 수 있다. 군자의 말이 임금의 마음에 거슬린다 해서 도가 아니라고 생각하고 소인의 말이 임금의 마음에 맞는다 해서 충성을 다한다고 여긴다면 어찌 애석하지 않겠는가. 간언을 받아들이는 도리는 자신을 비우는 데 있고,자신을 비우는 방도는 겸양하는 데 있다. 순 임금은 온화하고 공손했기 때문에 ‘단주(丹朱)처럼 오만하지 말라.’는 경계를 받아들여 천하를 평치(平治)할 수 있었던 것이다. 나 한 사람은 이를 계술하고자 한다.”
하고, 형벌을 삼가는 조항에 이르기를,
“형벌은 성스러운 군주가 어쩔 수 없이 사용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조심하고 조심해서 오직 형벌을 삼갈지어다.’라고 한 것이다. 우리 선조께서는 형관이 심리한 문건을 아뢸 때면 반복해서 생각하고 반드시 신중히 살피셔서 4경, 5경이 되도록 잠자리에 들지 않고 어떻게든 살릴 수 있는 방도를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죄가 가벼운 자는 용서해주는 실상이 있고 죄가 의심스러운 자는 오직 가벼운 쪽으로 처벌하는 뜻이 있으셨다.”
하였다.
○ 상은 우애가 독실하였다. 누이 숙선옹주(淑善翁主)가 결혼할 때 직접 여훈(女訓) 7편과 여계(女戒) 6장을 지어 하사하였다.
○ 진강에 나아갔다. 《시경》 빈지초연편(賓之初筵篇)을 진강하였다. 영사 이시수(李時秀)가 아뢰기를,
“이 시는 위 무공(衛武公)이 술을 마시고 후회하여 지은 것입니다.”
하였는데,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상이 이르기를,
“만약 이것이 자신의 잘못을 후회하여 지은 것이라면 실덕(失德)을 후회하는 말이 있어야 할 듯하다. 그런데 한 편 속에 스스로 반성하는 구절이 전혀 없으니, 이것은 자신의 잘못을 후회하여 지은 것이 아니라 경계하는 시이다.”
하니, 이시수가 아뢰기를,
“그렇습니다.”
하였다.
○ 인정전에 불이 났다. 하교하기를,
“보잘것없는 나 소자가 외람되게 사업을 계승하는 책임을 이어받아 항상 두려워하면서 감당하지 못할까 두려워하였다. 그런데 지금 화재의 변고가 즉위 의식을 거행했던 장소에서 발생했으니, 첫째도 내가 덕이 없어서이고 둘째도 내가 덕이 없어서이다. 놀라움에 이어 송구스럽고 부끄러운 마음이 들 뿐이다. 이렇게 비상한 재변을 어찌 감히 태연스럽게 봐 넘기면서 스스로 용서하겠는가. 5일 동안 반찬 수를 줄이고 정전(正殿)을 피하고 풍악을 거두도록 하겠다. 논사(論思)하고 간쟁하는 지위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잘못된 점을 진달하여 어리석은 나를 보필하도록 하라.”
하였다. 윤음을 내려 경외의 신민들에게 하유하고, 이듬해 봄의 진하를 정지하도록 명하였다.
○ 대왕대비전이 하교하기를,
“주상은 춘추가 장성한데다 성왕의 자질을 타고나서 덕성이 날로 진보되고 학문이 날로 정진되고 있으니, 모든 정사를 총괄하여 살피고 재결할 수 있을 것이다. 오늘부터 수렴(垂簾)을 거두겠다.”
하였다.

 
간이집 제6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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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초미록(焦尾錄)
차운하여 도봉서원(道峯書院)에 제하다. 도봉이란 이름은 옛날 이곳에 사찰(寺刹)이 처음 창건될 때부터 붙여졌다고 한다.

옛 절터에 새 서원 영욕이 서로 점철된 듯 / 榮辱新規與舊基
도봉이란 그 이름 기이한 인연을 깨닫겠네 / 道峯終覺設名奇
봉우리마다 수려한 빛 하늘을 향해 치솟았고 / 巖巖秀色當空聳
콸콸 흐르는 찬 시냇물 잠시도 쉬질 않는구나 / 活活寒流不蹔衰
선현을 모신 이곳 혼령이 오르내리나니 / 揭妥前賢森陟降
학문 닦는 후학이여 미위를 삼가 살필지라 / 藏脩後學謹微危
만정의 이적보단 정사가 더 낫고말고 / 幔亭異迹輸精舍
오늘날 우리 동방 무이정사(武夷精舍)를 보겠도다 / 今見吾東一武夷

[주C-001]도봉서원(道峯書院) : 선조(宣祖) 6년(1573)에 조광조(趙光祖)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하여 도봉산에 세워진 사액(賜額) 서원이다.
[주D-001]미위(微危) : 《서경(書經)》 대우모(大禹謨)에 나오는 바 “인심은 위태하고 도심은 은미하니, 오직 정밀하고 일관되게 하여 그 중도(中道)를 진실로 잡아야 한다.[人心惟危 道心惟微 惟精惟一 允執厥中]”라는 16자(字)를 압축해서 말한 것이다. 주희(朱熹) 등 송유(宋儒)가 이것을 요(堯)ㆍ순(舜)ㆍ우(禹) 세 성인이 서로 도통(道統)을 주고받은 십륙자심전(十六字心傳)이라고 강조한 뒤로부터, 개인의 도덕 수양과 치국(治國)의 원리로 숭상되어 왔다.
[주D-002]만정(幔亭)의 …… 낫고말고 : 만정은 무이산(武夷山)의 산신인 무이군(武夷君)이 진 시황(秦始皇) 2년에 마을 사람들을 산꼭대기로 초청하여 만정(幔亭)의 연회를 베풀고 술과 음식을 주었다는 ‘무이만정(武夷幔亭)’의 고사를 말한다. 《雲笈七籤 卷96》 정사(精舍)는 주희(朱熹)가 한탁주(韓侂冑)를 피하여 무이산으로 들어가서 문인들과 함께 강학(講學)을 하였던 무이정사(武夷精舍)를 말하는데, 여기서는 각각 절간과 서원의 비유로 사용하였다.

 
 갈암집 제17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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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書)
아들 재에게 부침 을해년(1695, 숙종21)

장마가 걷히고 서늘한 기운이 일어나는 이 즈음 대소가(大小家) 모두 무사히 지내느냐? 절서(節序)가 바뀌어 감에 따라 절로 서글프고 아득한 생각이 일어남을 견딜 수 없구나. 그러나 외로운 유배 생활을 하고 있다고 해서 전연 자포자기하여 늙어서도 이름이 없는 사람이 되는 죄를 가중시킬 수는 없는 노릇이라 그나마 《맹자(孟子)》를 몇 장씩 날마다 송독(誦讀)하여 〈고자 상(告子上)〉 편까지 이미 백 번씩 반복했으니 시작을 했으면 끝마쳐야 하는 법이지.
막내와 주생(朱生)이 혹은 《주서(朱書)》를 읽고 혹은 《대학혹문(大學或問)》을 읽는데 때로 글 뜻을 알고 깨닫는 곳이 있으니, 기쁜 일이다.
권 상서(權尙書)는 성은을 입고 양이(量移)되었다니 축하할 만하구나. 갈문(碣文)의 의심스런 곳은 이미 근정(斤正)을 받았느냐?
권 참판(權參判)은 상복을 입고 있는 중이기 때문에 남의 묘도문자(墓道文字)를 지으려 하지 않는 것이냐? 그렇지 않다면 조카 은(檼)에게 분부하여 그에게 백형(伯兄)의 지문(誌文)을 지어 달라고 부탁하는 것이 좋겠다.
확()을 때때로 가르치고 일깨워서 견식이 없고 모양이 없는 사람이 되는 데 이르지 않도록 하기를 간절히 바라 마지않는다. 권득초(權得初) 부자와 박주서(朴周瑞)가 각기 율시(律詩)를 부쳐 왔기에 이제 대략 화답해 보내니 한번 보도록 하여라.
영광(靈光) 사람 심사명(沈思溟)이 상소하여 우송(尤宋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을 도봉서원(道峯書院)에 배향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다가 이곳으로 유배 왔구나. 그 소본(疏本)을 이번에 함께 보내고 조보(朝報)에 실린 몇 조목의 말을 또한 베껴서 보낸다.

[주D-001]양이(量移) : 섬이나 변방으로 멀리 유배되었던 사람의 죄를 참량(參量)하여 내지로 배소(配所)를 옮기는 것이다.
 
국조보감 제88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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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철종조 2
6년(을묘, 1855)

○ 1월. 전 첨지 권재대(權載大)를 공조 참판에 특별히 제수하였다. 하교하기를,
“듣자하니, 권재대가 처음 벼슬에 특별히 제수된 것이 지난 을묘년이라고 하는데, 이 사람을 올해 을묘년에 다시 보게 되니 어찌 희귀한 일이 아니겠는가. 당시 정조 임금의 마음을 우러러 받들어 조정의 뜻을 보이는 조치가 없을 수 없다.”
하였다.
○ 화양서원(華陽書院)에 치제하고 경연관 송내희(宋來熙)ㆍ송달수(宋達洙)ㆍ김병준(金炳駿)을 정중히 호유하여 불렀다.
○ 상이 대신들에게 이르기를,
“인릉(仁陵)에 장례를 모신 지도 21년이 되었는데 풍수가(風水家)의 논의가 이견이 분분하니 경들은 조정에서 의논하여 보라. 내가 자성(慈聖)의 뜻을 받들건대, 수릉(綏陵)은 큰 비를 만날 때마다 실전(室前)이 범람하니 이 또한 논의해야 할 것이다. 휘경원(徽慶園) 또한 흡족하게 여기지 않는 의견이 있으니 함께 논의하도록 하라.”
하였다. 또 하교하기를,
“이 일은 지극히 신중한 일이니, 상세히 살펴보고 정밀하게 가린 다음이라야 의논이 정해질 수 있을 것이다. 경들은 예관(禮官) 및 관곽의 제작을 맡은 신하와 함께 재삼 터를 잘 살펴보아서 후회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
하였다.
이에 여러 신하들이 명을 받들고 경기도의 원근 각처를 두루 살펴보았다. 상이 또한 몸소 살펴보며 서쪽으로는 희릉(禧陵)에서부터 동북쪽으로는 광릉(光陵)에 이르기까지, 봉우리를 오르고 언덕을 내려가는 수고를 마다 않다가 드디어 길한 언덕을 찾아내었다. 이에 명하여 인릉의 천봉은 명년에 가서 결정하여 시행하도록 하고, 수릉과 휘경원은 날을 받아 천봉하도록 하였다.
○ 경모궁(景慕宮)에 작헌례를 올리고 장헌세자(莊獻世子)의 존호를 찬원헌성 계상현희(贊元憲誠啓祥顯熙)로, 혜빈(惠嬪)의 존호를 유정(裕靖)으로 추상(追上)하였다. 이어서 익정공(翼靖公) 홍봉한(洪鳳漢) 내외의 사판(祠版)에 승지를 보내어 치제하도록 명하였다.
○ 2월. 대신을 보내어 정릉(定陵)에 작헌례를 올렸다. 환조대왕(桓祖大王)이 탄생한 지 아홉 번째 회갑이 되었으므로, 삼가 정조 임금 을묘년에 추모하여 본궁(本宮)에 올렸던 성대한 의식을 따라 이러한 예를 행했던 것이다.
○ 건릉(健陵)과 현륭원(顯隆園)에 친히 제사하고 이어서 화령전(華寧殿)에 작헌례를 행하였다. 하교하기를,
“이해에 이러한 예를 행하게 되니 추모하는 사사로운 정이 새삼 어떻겠는가? 그때에 부로(父老)들을 위한 잔치를 베푸셨으니, 이는 곧 대성인(大聖人)께서 가는 세월을 애석히 여기는 효심에서 베풀어 주신 훌륭한 행사였다.”
하고, 이어서 본부(本府)에 명하여 부로로서 나이가 80세 이상인 자들에게 쌀과 고기를 내리게 하였다.
○ 남관왕묘(南關王廟)에 친히 잔을 올리고, 승지를 보내어 양녕대군(讓寧大君)의 사당을 간심(看審)하게 하였다.
○ 3월. 판중추 서준보(徐俊輔)에게 옷감 한 벌을 내리도록 명하고 이어서 조랑(曹郞)을 보내어 안부를 물었으며, 전 부사 홍석모(洪錫謨)에게 옷감과 음식을 내렸다. 서준보와 홍석모는 모두 지난 을묘년의 화성(華城) 진연(進宴)에 참석했던 자들로, 다시 이번에 을묘년을 만나게 되었으니 매우 희귀한 일이기에 노인을 우대하는 은전을 베푼 것이다.
○ 연산군(燕山君)과 광해군(光海君)의 묘에 예조 낭관을 보내어 묘역의 퇴락한 상황을 살펴보고 지방관으로 하여금 보수하게 하였다.
○ 각 도에 사직단(社稷壇)을 수축하도록 명하고 하교하기를,
“이는 하늘을 공경하고 농사를 중히 여기는 일이다.”
하였다.
○ 예조가 신릉(新陵)에서 풀을 베고 땅을 파기 시작한 뒤에 각종 전좌(殿座)나 거둥에서 음악을 사용하는 것이 합당한지의 여부에 대해 대신에게 물을 것을 청하였다. 판중추부사 이헌구(李憲球)와 영의정 김좌근(金左根)이 아뢰기를,
“기유년과 병오년 양 년에 이를 물으신 일이 있었는데, 그때 특별히 새로운 규정을 만들어서 약대를 진열은 하였으나 연주는 하지 않았습니다.”
하니, 현궁(玄宮)에서 관곽을 들어내는 날로부터 악대를 진열은 하되 연주는 하지 말도록 명하였다.
○ 4월. 단종(端宗) 임금 때의 육신(六臣)인 박팽년(朴彭年)ㆍ성삼문(成三問)ㆍ하위지(河緯地)ㆍ이개(李塏)ㆍ유성원(柳誠源)ㆍ유응부(兪應孚)의 분묘와 비갈(碑喝)을 도신으로 하여금 주의하여 보수하도록 명하였다. 이때 육신의 분묘가 황폐하고 비갈이 쓰러져서 길을 지나가는 사람들이 이를 보고 탄식하니 대신이 전말을 보고했던 것이다.
○ 우의정 조두순(趙斗淳)이 아뢰기를,
“증 이조 참판 이재형(李載亨)은 북관(北關) 사람으로서 벼슬할 생각을 안 했으며, 학문에 연원(淵源)이 있어서 의연하게 사도(斯道)로 자임하였습니다. 마운령(摩雲嶺) 이북 지역에 찬란하게 문학의 기풍이 있게 된 것은 모두 그가 이 황량한 벽지를 개척한 공로이니 그에게 추가로 증직하고 시호를 내리소서.”
하니, 상이 이에 따랐다.
○ 5월. 김좌근(金左根)이 아뢰기를,
“풍천(豐川)의 속진(屬鎭)인 초도(椒島)는 절해(絶海)의 길목에 처해 있어, 적을 억누르고 외침을 막는 책략에 있어 중대한 역할을 수행하며 위무로 명성을 떨치고 있습니다. 당해 첨사(僉使)를 변지 이력(邊地履歷)으로 만들어 주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에 따랐다.
○ 6월. 빈대(賓對)를 행하였다. 김좌근(金左根)이 아뢰기를,
“도목정사가 박두했으니 전신(銓臣)이 연석에 나오거든 수령을 신중히 가려뽑고 초사(初仕)를 잘 살펴 뽑도록 독려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매양 신칙을 하고 나면 곧 이를 도외시해 버리고 마니, 이것이 누구의 책임인가? 진실로 공평한 마음으로 분별하여 가린다면 처음 벼슬을 하는 자로부터 수령에 이르기까지 어찌 적임자가 아니라는 한탄이 있겠는가?”
하니, 김좌근이 다시 아뢰기를,
“비와 이슬을 내리고 눈과 서리를 내리는 것이 모두 하늘의 조화이니 실로 아래에 있는 사람들이 헤아릴 수 있는 바가 아닙니다. 그러나 이비(吏批)와 병비(兵批)의 6월과 12월의 세초(歲抄)는 관례에 따라 응당 행하게 되어 있는 것인데 이번엔 한 사람도 낙점을 받은 자가 없으니, 더러 이를 답답하게 여기는 한탄이 없지 않을 것입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세초를 거론하지 않는 것은 내가 전례(前例)를 몰라서 그러는 것이 아니다. 고신(告身)을 빼앗긴 자나 거중(居中) 또는 거하(居下)의 고과를 받은 자들은 행해서는 안 될 일을 행한 자들인데도, 매번 6월과 12월의 감등(減等)할 때가 되면 그 마음이 태연자약하여 부끄러움을 모르므로 한 번 경고하여 보인 것이다.”
하였다.
○ 경모궁(景慕宮)에 나아가 작헌례를 행하였다. 혜빈(惠嬪)이 탄생한 지 두 번째 회갑이기 때문이다.
○ 7월. 하교하기를,
“행행(幸行)이 마침 곡식을 거두기 전이어서 길을 닦게 되면 필시 이를 상할 염려가 있을 것이니, 절대로 일을 크게 벌이지 말고 길의 모양에 따라 넓고 좁음에 구애됨이 없이 편리한 대로 하도록 힘쓰라.”
하였다.
○ 8월. 인릉(仁陵)ㆍ장릉(長陵)ㆍ희릉(禧陵)에 나아가 친히 제사하고, 이어서 효릉(孝陵)에 나아가 전알하였다. 하교하기를,
“처음으로 선침(仙寢)을 전알하게 되니 비통한 마음과 사모의 정이 더욱 새롭다. 파원부원군(坡原府院君)의 자손 중에 이름을 물어서 희릉 참봉으로 의망하여 들이도록 하라.”
하고, 다시 하교하기를,
“효침(孝寢)을 두루 배알하니 나 소자의 추모의 정이 갑절이나 간절하다. 백세 후의 감회는 온 나라와 같은 심정일 것이다. 김문정(金文正)의 고고한 충성과 뛰어난 절개에 대해서는 이미 정조 임금 때에 표창하라는 하교가 있었으니, 오늘에 있어 어찌 감회를 표하는 조처가 없을 수 있겠는가. 증 영상 김인후(金麟厚)의 사판(祠版)에 도내의 품계가 높은 수령을 보내어 치제하게 하라.”
하였다.
○ 수릉(綏陵)을 건원릉(健元陵)의 왼쪽 등성이에 천봉(遷奉)하고, 빈전(殯殿)에 나아가 친히 향을 올렸다.
○ 9월. 증 참판 한호운(韓浩運)과 증 통제사 허항(許沆)에게 모두 정경(正卿)을 추가로 증직할 것을 명하였다. 모두 지난 임신년(1812, 순조 12)에 순절(殉節)한 자들이다.
○ 광릉(光陵)에 나아가 친히 제사하고, 승지를 보내어 연산군(燕山君) 묘소, 인평대군(麟坪大君) 묘소 및 도봉서원(道峯書院)에 치제(致祭)하도록 하였다.
○ 정문공(正文公) 김수근(金洙根)을 특별히 상상(上相)에 추증하고 각신(閣臣)을 보내어 치제하게 하였다. 하교하기를,
“내가 세상을 떠난 중신(重臣)에 대해서는 기필코 높이 등용하여 가뭄의 장마비와도 같은 중요한 보필의 책임을 맡기려고 했는데, 이제 그의 신발 소리가 그친 지도 벌써 한 해가 되어 나로 하여금 누차 조회에서 탄식을 발하게 하는구나. 시호를 내릴 때 ‘정(正)’ 자 한 자를 더한 것은 나에게 생각이 있었기 때문이니, 조정 신하들은 양해하여 주기 바란다.”
하였다.
○ 10월. 휘경원(徽慶園)을 순강원(順康園)의 오른쪽 등성이에 천봉(遷奉)하고 친히 향을 올렸다. 처음에 안락현(安樂峴)에 원을 천봉하기로 의논하여 결정을 보았으나 의견이 엇갈리자 다시 친히 살펴보고 나서 이 등성이로 정하였다.
○ 의성(義城)의 묵은 전지에 대해 백성들에게 억울하게 징수하는 것을 감면해 줄 것을 명하였다.
○ 11월. 경기(京畿) 유생 임수철(任秀喆) 등이 상소하여 《양현전심록(兩賢傳心錄)》을 간행할 것을 청하였다. 상이 비답을 내리기를,
“《전심록》은 백세(百世)가 지난 지금에도 삼가 정조 임금께서 성학(聖學)이 고명하셨고 후학으로서 양 현에 대한 감회가 명철했음을 알 수 있는 책이다. 그런데 이제야 간행을 청하는 논의가 나왔으니 어찌 그리도 늦었는가? 속히 간행을 명하고 경기 감영으로 하여금 간행 비용을 판단해서 도와 주도록 하라.”
하였다.
○ 12월. 우의정 박회수(朴晦壽)가 아뢰기를,
“수령은 백성들의 부모입니다. 그런데 부모가 자애로써 기르지 않는다면 자식이 어찌 살아날 수 있겠습니까? 훌륭한 정치를 이룩한 임금들은 누구나 수령의 선택을 중시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그렇지가 않아서 전형하여 주의(注擬)를 할 때면, 그 사람이 어떤지는 논하지 않고 문득 말하기를, ‘아무개는 가난하니 현령에 적당하고 아무개는 오랫동안 보직이 없이 지냈으니 수령에 적당하다.’고 합니다. 이것은 사람을 위해서 벼슬을 고른 것이니 언제 벼슬을 위하여 사람을 고른 적이 있었습니까? 이것은 사람을 쓰는 본래의 뜻이 아니며 백성들을 위하는 참된 정사도 아닙니다.”
하니, 상이 그렇다고 하였다.
○ 경기ㆍ충청ㆍ전라ㆍ평안ㆍ함경 5도의 포폄(褒貶)에서 거하(居下)를 받은 자가 한 사람도 없었다. 상이 하교하기를,
“주현(州縣)의 수령들이 모두 법도를 지키고 어질어 백성들을 잘 다스렸단 말인가? 한 해에 두 번 치적을 고과하는 것은 그 선악을 기록하여 출척(黜陟)을 하고자 해서이다. 그런데 지금 전최(殿最)한 것을 보건대 전(殿)을 받은 수령은 한 사람도 없으니, 이것이 어찌 세력이 있는 자들의 압력을 받거나 안면이 두터운 자들을 보아준 소치가 아니겠는가. 여러 해 전부터 누누이 신칙해도 도무지 마음에 두지를 않으니, 이것이 어찌 도리이겠는가. 5도의 도신들에 대해 우선 봉급 3등을 감봉하도록 하라.”
하였다.

[주D-001]《양현전심록(兩賢傳心錄)》 : 송(宋) 나라의 주희(朱熹)와 조선의 송시열(宋時烈)의 시문선집(詩文選集). 8권 4책 인본(印本). 책머리에 정조 임금의 어제 서문이 있고, 부록으로 주희와 송시열의 전(傳)이 실려 있음.

 
농암집 별집 제3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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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록(附錄) 2○어록(語錄)
어유봉(魚有鳳)의 기록

선생이 말하기를,
“책을 읽으면서 정밀하게 생각한다면 많이 읽는 것보다 꼭 못하다고 할 수는 없다.”
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제가 옛사람들이 한 말을 보면 모두 읽기를 먼저 하고 생각을 나중에 하라고 하였는데, 이는 어째서입니까?”
하니, 말하기를,
“순경(荀卿)이 말하기를, ‘자주 읽어서 내용을 꿰고, 깊이 생각하여 뜻을 이해한다.’ 하였다. 주자(朱子)께서는 늘 이 말을 거론하며 배우는 이들을 가르치셨다. 만약 숙독하고서 또 정밀하게 생각할 수 있다면 이보다 좋은 것이 있겠는가. 내가 그처럼 말한 까닭은, 생각하지 않고 그저 읽기만 하는 것이 많이 읽지 않으면서 정밀하게 생각하는 것보다 못하다는 뜻이다. 일반적인 방법으로 말하자면, 읽는 것과 생각하는 것은 학문에 있어서 지(知)와 행(行)의 관계처럼 하나라도 없어서는 안 된다.”
하였다.

또 말하기를,
“독서할 때는 의심을 품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만약 의심을 품지 않는다면 빈틈을 발견하지 못하니, 어디에 생각을 집중하겠는가. 그러므로 독서하다가 의심스러운 부분을 만나게 되면 비록 고민스러울 듯하지만 실은 너무나도 다행한 일이다.”
하였다.

내가 질문하기를,
“《대학》의 격물(格物)을 단지 궁리(窮理)로 간주한다면, 그 뜻을 깨닫기는 어렵지 않을 듯합니다. 다만 격물이라는 말에 대해서 어떤 이는 ‘내 마음이 물리(物理)의 궁극적인 곳에 도달하는 것이다.’ 하고, 어떤 이는 ‘물리가 저절로 궁극적인 곳에 도달하는 것이다.’ 하는데, 두 가지 설명 중에 어느 것이 옳은지 모르겠습니다.”
하니, 선생이 말하기를,
“전자의 설명이 틀리다고 하는 까닭은 이러하다. 물격장(物格章)에서는 오로지 공효(功效)만을 말하였는데, 만약, ‘내 마음이 물리의 궁극적인 곳에 도달한다.’라고 한다면 공부에 관계된 듯하기 때문이다. 이를 문제 삼아 후자의 설명이 나오게 된 것인데, 후자의 설명이 뜻하는 바는 이러하다. 만약 하나의 물(物)에서 1, 2분(分)을 궁리한다면 이(理) 또한 1, 2분에 도달할 것이다. 5, 6분을 궁구한다면 이 또한 5, 6분에 도달할 것이며, 10분을 궁구한다면 이 또한 10분에 도달할 것이다. 이것이 이른바 ‘물리가 저절로 궁극적인 곳에 도달한다.’라는 것이다. 또 사람이 길을 가는 것으로 비유해 보겠다. 만약 백 리가 길의 끝인데 사람이 그 길을 가서 백 리에 도달한다면, 간 것은 사람이지만 다한 것은 다름 아닌 길이다. 이를 두고 ‘길이 다하자 발도 멈추었다.’라고 말하지 못할 까닭이 있는가.”
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이와 같이 설명한다면 의리는 통하지만 글 뜻은 그렇지 못합니다. 만약 《대학장구》에서, ‘물리가 궁극적인 곳에 도달하지 않음이 없다.[物理無不到極處]’라고 하였다면 이와 같은 뜻이 분명해지겠지만, 여기서는, ‘물리의 궁극적인 곳에 도달하지 않음이 없다.[物理之極處無不到]’라고 하였으니, 어떻게 이와 같은 뜻으로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물리의 궁극적인 곳[物理之極處]’에는 어떻게 토를 달아야 합니까? ‘이(乀)’입니까, ‘에(厂)’입니까?”
하니, 선생이 말하기를,
“이것은 깊이 따지기 어렵다. 그러므로 우재(尤齋) 선생도 일찍이 말하기를, 그 뜻은 이렇게 보아야 하지만, 《대학장구》의 ‘궁극적인 곳[極處]’의 토는 ‘에’로 읽어도 무방하다고 하였다.”
하였다. 선생은 글 뜻을 깊이 살폈기에 이렇게 말한 것이다.

질문하기를,
‘스스로 속인다.[自欺]’는 두 글자의 뜻을 이해하기 어려우니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하니, 말하기를,
“선(善)을 십분 실천해야 하고, 악(惡)을 십분 제거해야 함을 아는 것은 본심(本心)이다. 그러나 의(意)는 선을 실천하면서도 십분 다하지 못하고, 악을 제거하면서도 십분 다하지 못하니, 이것이 바로 본심이 아는 것을 속이는 것이 아니겠는가. 내가 이렇게 하고자 하면서도 내가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이것은 내가 나를 속이는 것이니, 이것이 스스로 속이는 까닭이 된다. 《대학장구》와 소주(小註)에서, 주자는 이러한 것이 스스로 속이는 것이라고 대략 말하였을 뿐, ‘자(自)’라는 글자의 뜻을 이렇게 분명히 밝히지는 않았다. 그리하여 후세의 독자들도 대부분 살피지 못하고 대략 읽고 넘어갔으니, 여기에 대해 의심을 품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나도 예전에는 거칠게 보고 넘어갔는데, 요사이 ‘자’라는 글자에 매우 깊은 뜻이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전에 인보(仁甫 홍유인(洪有人))와 이 장을 강론하였는데, 그때 인보가 의심하기를, ‘선을 실천하고 악을 제거하는 데에 미진한 것이 속이는 것인가, 미진한데도 미봉할 생각으로 마치 다한 것처럼 구차하게 덮으려 하는 것이 속이는 것인가?’ 하였습니다.”
하니, 말하기를,
“여기서 두 가지 뜻을 보았으니, 이 또한 깊이 생각하고서 한 말이다. 두 가지 설명을 아우른 뒤에야 스스로 속인다는 말의 뜻이 완전해질 것이다. 그렇지만 《대학장구》에서 이른바, ‘선을 실천하고 악을 제거할 줄은 알지만 마음이 발하는 바에 진실하지 못한 점이 있다.[知爲善以去惡而心之所發有未實]’라는 말로 보자면, 《정의(正義)》는 전자의 설명을 따른 것이지 후자의 설명을 따른 것이 아니다. 대체로 의(意)가 진실하지 못하면 미봉하고 덮으려는 생각이 항상 따라다니며 없어지지 않으니, 전혀 다른 두 가지 마음이 되는 것은 아니다. 또 이러한 생각이 반드시 생기는 까닭은 밝은 본심을 속이는 것을 불안하게 여기기 때문이다. 또 앞뒤의 생각이 모두 속이는 것이며, 속임을 당하는 것은 항상 본심이므로 ‘스스로 속인다.’라고 한 것이다.
또 한 가지 일로 비유해 보겠다. 하루에 열 이랑의 밭을 김매는 것은 주인이 바라는 바이다. 그리하여 종에게 그만큼 밭을 매게 하였는데 단지 여덟아홉 이랑의 밭만 맸다. 이것은 주인을 속인 것이다. 그렇지만 돌아와서 주인에게 말할 때에는 반드시 열 이랑을 맸다고 할 것이니, 이는 필연적인 형세이다. 여기에 이르면 속이는 방법이 더 이상 남은 것이 없다. 그러므로 나는 반드시 두 설명을 아우른 뒤에야 스스로 속인다는 말의 뜻이 완전하게 될 것이라고 한 것이다. 열 이랑의 밭을 김매라는 주인의 명령을 따르지 않고서 단지 여덟아홉 이랑의 밭만 맸을 때 이미 속인 것이고 보면, 설령 돌아와서 말을 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말을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속인 것이 아니라고 할 수는 없다. 그러므로 나는 ‘《정의》는 전자의 설명을 따른 것이지 후자의 설명을 따른 것이 아니다.’라고 말한 것이다.”
하였다.

또 말하기를,
“선을 실천하고 악을 제거하려는 뜻이 있은 다음에야 스스로 속이려는 생각이 드는 법이다. 만약, ‘선을 실천한들 무슨 도움이 되겠으며 악한 짓을 한들 무슨 해가 있겠는가.’ 하는 사람이라면 어찌 스스로를 속이는 일이 있겠는가.”
하였다.

선생이 묻기를,
“성인은 어째서 성정(誠情)이라 하지 않고 성의(誠意)라고 하였는가?”
하기에, 내가 대답하기를,
“정은 실심(實心)에서 나오는 것이니 무엇 때문에 성(誠)하게 하겠습니까.”
하였다. 선생이 말하기를,
“그렇다. 이 때문에 나는 일찍이 ‘심(心)에는 사(邪)와 정(正)이 있으나 성(性)에는 사와 정이 없다. 그러므로 성인은 정심(正心)이라 말하였지 정성(正性)이라 하지 않았다. 의(意)는 거짓일 수 있지만 정은 거짓이 허용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성인은 성의라고 말하였지 성정이라 말하지 않은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하고, 다시 묻기를,
“그렇다면 의를 성하게 한 사람은 그 정이 어떠한가?”
하기에, 내가 말하기를,
“정과 의가 합하여 하나가 됩니다.”
하였다. 선생이 말하기를,
“그렇다. 의는 정을 운용하는 것이다. 선한 정은 반드시 십분 확충하고 악한 정은 반드시 십분 제거하는 것이 이른바 성의이다. 선유(先儒)가 말하기를, ‘정에 따라 견주고 따져 본다.[緣情計較]’ 하였으니, 이 말이 참으로 옳다.”
하였다.

또 말하기를,
“이 장은 ‘스스로 속인다.’는 말만 알기 어려운 것이 아니라 ‘스스로 만족한다.[自慊]’는 말도 이해하기 쉽지 않다. ‘스스로 만족한다.’라는 것은 선을 실천하고 악을 제거할 때 반드시 마음이 시원하기를 구하는 것이다. 만약 여기에 악취가 난다면 반드시 피할 것인데, 피하고서도 조금이라도 미진한 것이 있으면 여전히 코가 시원하지 않을 것이다. 반드시 십분 완전히 피하여 코가 시원해지도록 한 다음에야 그칠 것이다. 이것은 맹자가, ‘실천하고서도 만족하지 못한다.[行有不慊]’라고 말한 뜻과는 다르다. 맹자의 말은, 실천한 일이 모두 이(理)에 합당한 다음에야 하늘을 우러러보고 땅을 굽어보아도 부끄러울 것이 없어 마음이 시원하고 만족스럽다는 뜻이다. 이것이 바로 선을 실천하고 악을 제거하는 효과이다. 두 가지 뜻이 이처럼 다른데도 소주(小註) 중에 합하여 풀이한 경우가 있으니, 이는 잘못된 것이다.

혈구(絜矩)의 글 뜻을 물으니, 말하기를,
“구(矩)로 헤아리는 것을 말한다. 《대학장구》와 《대학혹문》에서 이 뜻을 매우 명백하게 풀이하였는데 무엇 때문에 의심을 품는가?”
하기에, 내가 말하기를,
“《주자대전(朱子大全)》에, ‘혈구라는 것은 사물을 헤아려 반듯하게 만드는 것이다. 만약 구로 헤아린다고 하면 문리가 통하지 않는다.’ 하였습니다. 이 말이 옳은 듯하므로 의심하여 물은 것입니다.”
하였다. 그러자 선생이 《주자대전》의 본문과 우재의 《주서차의(朱書箚疑)》를 찾아 살펴보고 말하기를,
“이 말은 참으로 《대학장구》와 《대학혹문》과는 다르다. 그렇지만 《주서차의》에서는, ‘이것은 사물을 헤아린다는 말로 혈(絜) 자를 풀이하고, 반듯하게 만든다는 말로 구(矩) 자를 풀이한 것이다. 그러나 《대학장구》에서 이른바 구는 반듯하게 만드는 도구[矩所以爲方]라고 한 말과는 같지 않다.’ 하였다. 구는 마음을 가리키니, 의(意)를 성(誠)하게 하고 심(心)을 바르게 한 사람은 그 마음이 이미 구와 같다. 이것으로 사물을 헤아린다면 상하와 사방이 모두 반듯해질 것이라는 말이다. 《주자대전》의 설명을 따른다면 사물을 헤아리는 근본을 알 수 없으니, 《대학장구》의 설명을 따르는 것이 타당하다. 대저 사서의 장구와 혹문은 단안(斷案)이자 정설(定說)이며, 그 밖에 《주자대전》이나 《주자어류》라고 하더라도 정해지지 않은 설이 많으니, 장구나 혹문과 합치되지 않은 부분까지 모두 믿어서는 안 된다.”
하였다. 또 말하기를,
“사서의 소주(小註)에 보이는 여러 유학자들의 설은 집주나 장구와 합치되지 않는 것이 매우 많다. 만약 한결같이 높이고 믿기만 한다면 해가 없을 수 없으니, 그 사이에서 취사선택하지 않을 수 없다. 처음 배우는 사람의 경우라면 서둘러 볼 필요는 없고, 우선 집주와 장구를 읽어 자신의 소견이 조금 정해져서 같고 다름을 분별할 수 있게 되기를 기다렸다가 보아도 늦지 않을 것이다. 나는 요사이 《논어》를 보는데, 항상 소주에서 집주와 합치되지 않는 부분을 초록하고 있다.”
하였다.

《대학》 서문의 소주(小註)에서 운봉 호씨(雲峯胡氏 호병문(胡炳文))가 이르기를, “주자는 인(仁)ㆍ의(義)ㆍ예(禮)에 대해서는 모두 분명한 풀이를 남겼으나 유독 지(智) 자만 빠뜨렸다. 내가 주자의 뜻을 취해 보충하여 운운한다.” 하고, 다시 파양 심씨(番陽沈氏)의 말을 인용하여 운운하였다. 선생은 이것이 크게 틀렸다고 하며 말하기를,
“대체로 성(性)이라는 것은 이(理)일 뿐이다. 심(心)에 옳고 그름을 분별하는 이가 있으니 이것이 바로 지(智)이다. 옳은 것을 옳다 하고 그른 것을 그르다고 하는 것은 지의 용(用)이다. 주자는 일찍이 각(覺)을 지의 일이라고 하였는데, 나중에 정설을 확립하여, ‘옳은지 그른지 깨닫는 것은 심이며, 옳거나 그르다고 여기는 것은 지이다.’ 하였으니 각을 지의 용이라 여기는 것도 옳지 않은데, 지금 호씨와 심씨의 설은 오로지 신명(神明)과 지각으로 곧장 ‘지’ 자를 풀이하였으니 옳다고 할 수 있겠는가. 지라는 것은 이이다. 그런데 ‘온갖 이를 이해한다.[妙衆理]’, ‘천리를 담고 있다.[涵天理]’ 하였으니, 이것은 이로 이를 풀이하고 이가 이를 담은 것이니 말이 되지 않는다고 하겠다. 두 사람의 소견이 어찌하여 이렇게까지 잘못되었는지 모르겠다.”
하였다. - 이 문제에 대해서는 선생이 저술을 남겼으니, 여기서는 자세히 기록하지 않는다. - 또 말하기를,
“허령한 지각이 신묘하여 헤아릴 수 없는 것이 심이다. 이 심이 갖춘 이로서 정확한 준칙이 성이다. 그러므로 유자의 학문이 궁리와 격물에 급급하여 반드시 이 성을 알고자 하는 까닭이다. 이 성을 안 다음에야 사물을 응접함에 각기 정해진 방법이 있어 터럭만 한 착오도 없게 된다. 석씨(釋氏)는 성의 당연함을 알지 못하고 한갓 이 마음의 영각(靈覺)만을 귀하게 여겨 사물을 물리치고 나아갈 길을 단절하고서 밝아지기를 추구하였다. 심이라는 것은 본래 밝은 물건이니, 오랫동안 힘쓴다면 어찌 밝아지지 않겠는가마는 이것은 준칙이 없는 밝음이다. 그러므로 응접하는 경우에는 순서가 바뀌고 어지러이 뒤섞여 전혀 효과를 볼 수 없으니, 이것이 바로 유가와 석가가 서로 다른 점이다. 나는 그러므로 이르기를, ‘심과 성의 구분을 안 다음에야 유가와 석가의 차이를 분별할 수 있다.’라고 한다. 옛사람이 이르기를, ‘성인은 하늘에 근본을 두고 석씨는 마음에 근본을 둔다.[聖人本天 釋氏本心]’ 하였는데, 바로 이를 말한 것이다.”
하였다.

내가 질문하기를,
“인의예지 네 글자는 분별하기가 애매한데, 특히 의와 예는 비슷하여 나누기가 어렵습니다.”
하니, 선생이 말하기를,
“비단 의와 예만 비슷한 것이 아니라 또 ‘지’ 자와도 비슷하다. 그렇지만 한 가지 일로 비유해 보겠다. 여기에 두 명의 손님이 있는데, 그 지위가 한 사람은 높고 한 사람은 낮다고 하자. 이때 그 높고 낮음의 차이를 분별하는 것은 지이고, 행동을 취하여 높은 사람을 높이고 낮은 사람을 낮추는 것이 의(義)이고, 높은 사람을 높이고 낮은 사람을 낮출 때는 반드시 절문(節文)이 있기 마련인데 높은 사람에게는 절을 하고 낮은 사람에게 읍을 하는 따위가 곧 예(禮)이다.”
하였다.

어떤 이가 예학(禮學)에 대해 물으니 말하기를,
“이른바 예학이라는 것에 대해 나는 의심스러운 점이 있다. 예라는 것은 천리(天理)의 자연스러운 절문이다. 옛 성인들이 그 절문을 바탕으로 만들어 내었을 따름이니, 비록 지극히 자세하고 천차만별이기는 하지만, 실제로는 단지 하나의 도리(道理)일 뿐이다. 후세의 정자와 주자 같은 큰선비는 그들의 도덕과 재능으로 예악을 제정하는데 아무런 어려움이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주자는 일찍이 한 가지 예를 행하려 하였으나 스스로 믿지 못하다가, 정현(鄭玄)의 말을 본 뒤에야 비로소 결단하여 행하였다. 저 정현의 학식이 어찌 주자보다 낫겠는가. 그런데도 주자는 그의 말을 본 뒤에야 의심이 없게 되었으니, 이는 참으로 알 수 없는 일이다. 이로 말하자면 후세의 학자들 중에 혹시 의기(義起)할 만한 사람이 있어 명백히 그러하다는 것을 안다 하더라도, 옛 전범이 없다면 감히 거기에 대해 말을 하거나 손을 쓸 수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자질구레한 말단의 절목까지도 오로지 옛것만 믿고서 자신의 조화(造化)를 쓰지 못한다면 어찌 막히지 않겠는가. 이것이 바로 내가 의심하는 까닭이다.”
하였다.

또 내가 묻기를,
“이른바 학문이라는 것은 모두 일상생활의 평범한 도리입니다. 그런데 지금 사람들이 하나의 별다른 사물이라고 여기는 까닭은 무엇입니까?”
하니, 말하기를,
“학문의 중요한 단서는 충과 효일 따름이다. 그러나 한갓 충효 두 글자만 지킨다고 하여 그 도를 다할 수는 없다. 일단 효라는 한 글자만 가지고 말해 보겠다. 증원(曾元)은 어버이의 몸을 봉양할 줄은 알았지만 뜻을 봉양하는 도리에 대해서는 알지 못하였고, 증자(曾子)는 뜻을 봉양할 줄은 알았지만 회초리로 때리면 맞고 몽둥이로 때리면 도망하는 도리를 알지 못하였다. 순(舜) 임금과 같은 경지에 이르러서야 효의 도를 다한 것이라 하겠다. 그렇다면 후세에 충과 효를 행하고자 하는 사람은 이러한 따위의 도리를 강론하여 밝히지 않아서는 안 된다. 도리를 강론하여 밝히고자 한다면, 끝까지 찾고 따지며 묻는 과정에서 허다한 언어와 의론이 없을 수 없다. 이 때문에 세상 사람들이 항상 별다른 사물이라고 간주하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하는 까닭은 바로 충과 효를 행하고자 해서이니, 실로 평소 일상생활의 도리를 벗어나지 않는다.”
하였다.

또 내가 묻기를,
“토(土)의 기가 6월에 가장 왕성한 까닭은 무엇입니까?”
하니, 말하기를,
“화(火)는 토를 낳고 토는 금(金)을 낳으므로 여름과 가을 사이에 왕성하다. 이에 대해서는 옛사람이 이미 말하였는데 무엇 때문에 의문을 품는가. 내가 의문을 품는 점은 이와 다르다. 이왕 토를 충기(冲氣)라고 하였다면, 봄ㆍ여름ㆍ가을ㆍ겨울의 어느 달에나 없어서는 안 되는데, 무슨 까닭에 유독 네 계절의 끝 달에만 왕성할까 하는 것이다.”
하였다.

선생이 말하기를,
《소학(小學)》에, 《안씨가훈(顔氏家訓)》에 강동(江東)의 부녀 운운하고 업하(鄴下)의 풍속 운운하였다. 강동은 남조(南朝)를 가리키며, 업하는 바로 북제(北齊)의 수도이다. 항(恒)과 대(代)는 원위(元魏)의 탁발씨(拓跋氏)가 일어난 땅이다. 남조는 중국의 일부분이므로 부녀들이 예의를 지켰으며, 업하는 원위의 오랑캐 풍속에 익숙하여 부녀들이 바깥일을 전담하였다. 그렇지만 단정 지어 말하기가 곤란하였기 때문에 단지 ‘항과 대의 유풍일 것이다.’라고 하였으니, 풀이하는 사람들이 그 뜻을 알 수 없었다. 그래서 주석에 강동은 지명이라고만 하고 그곳이 남조임을 밝히지 못하였고, 항과 대의 유풍이라는 말에 대해서는 설명은 하였으나 연단(燕丹)의 일을 예로 들지 못하였다. 딸을 내보내어 손님을 대접하고 아내에게 문호를 유지하게 하는 것은 서로 관련된 일이 아니고, 항과 대는 업하와 풍속이 같은 곳이 아니다. 게다가 항과 대는 실제로 연 땅이 아니니, 매우 잘못된 것이다.”
하였다. - 이 한 단락은 인보(仁甫)가 들은 것이다. -

선생이 우계(牛溪)와 율곡이 이기(理氣)를 논한 편지에 대해 말하기를,
“우계는 퇴계(退溪)의 이발이기수(理發而氣隨), 기발이이승(氣發而理乘)의 설을 보고서 처음에는 그르다고 여겼다. 그러나 뒤에 가서는, ‘형기(形氣)에서 생겨나거나 성명(性命)에 근원한다.[生於形氣 原於性命]’라고 한 주자의 말을 읽고서, 주자가 이미 이렇게 양쪽으로 나누어 설명하였으니 퇴계의 호발설(互發說)이 옳은 것이 아닌가 의심하였다. 그리하여 율곡에게 물었는데, 율곡은 단지 칠정(七情)은 인심(人心)과 도심(道心)의 총칭이며, 인심과 도심은 상대하여 말할 수 있지만 사단과 칠정은 상대하여 말할 수 없다고 극력 주장하였다. 그렇지만 결국 주자의 이른바 성명과 형기 및 퇴계의 이른바 이발과 기발은 지칭하는 것이 본디 다르므로 이 말을 끌어들여 저 말을 증명할 수 없다는 뜻을 언급하지 않았으니, 실로 우계가 의심하여 물은 것에 대한 정확한 대답이 아니다. 퇴계의 이른바 이기는 심 안에 보전된 이와 기를 말한 것이며, 주자의 이른바 성명과 형기는 사람이 나면서부터 갖고 있는 성과 형을 말한 것이다. - 이(理)와 성명은 다르지 않으나 기(氣)와 형기는 전혀 다르다. 이른바 형기라는 것은 오로지 이목구비, 사지(四肢), 백체(百體) 따위를 가리킨다. - 퇴계의 이른바 이발과 기발은 사단과 칠정이 생길 때 심 안의 이에서 발하기도 하고 심 안의 기에서 발하기도 한다는 말이다. 주자가 이른바, ‘사사로운 형기에서 생기기도 하고 성명에 근원을 두기도 한다.’라고 한 말은, 심의 허령한 지각이 형기 때문에 발하기도 하고 성명 때문에 발하기도 한다는 말이다. 율곡이 이렇게 분명하게 설파하지 않았기 때문에 결국 우계의 의문을 풀어 주지 못하였다.”
하였다. 또 말하기를,
“인심과 도심에 대한 율곡의 논의는 의심스러운 부분이 없지 않다. ‘도심이 기에 가려지면 인심이 된다.’라는 말이 바로 그것이다. 추우면 옷을 입고자 하고 굶주리면 음식을 먹고자 하는 마음이 어찌 기에 가려져서 그러한 것이겠는가. 인심과 도심은 감응하는 바에 따라 발하는 것이다. 굶주림이나 추위와 같은 일에 감응하면 음식을 먹고자 하고 옷을 입고자 하는 마음이 발하니, 이를 이름하여 인심이라 한다. 어린아이가 우물에 들어가거나 먹을 것을 발로 차서 주는 일에 감응하면 측은지심(惻隱之心)과 수오지심(羞惡之心)이 발하니, 이를 이름하여 도심이라 하는 것일 뿐이다. 만약 기에 가려진 다음에야 인심이 된다고 한다면, 성현은 기질이 맑고 밝아 이를 가릴 것이 없으니, 인심이 없다고 해야 하는가.”
하였다.

내가 질문하기를,
‘무극(無極)의 진(眞)과 이오(二五 음양오행)의 정(精)이 묘합(妙合)하여 뭉치면 만물을 화생(化生)한다.’ 하였는데, 정은 나뉘지도 않고 섞이지도 않는다는 말이니, 맑고 탁하며 정밀하고 거친 구별이 없어야 마땅한데, 그것이 만물을 낳으면 인(人)과 물(物), 현(賢)과 우(愚)의 구분이 있게 되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하니, 선생이 말하기를,
“이것은 이오(二五)의 정영(精英)이 능히 만물을 화생함을 말한다. 마치 사람의 한 몸은 혈기가 충만하더라도 그 생육의 바탕은 반드시 그 정영의 기(氣)인 것과 같다.”
하였다. 또 말하기를,
“대체로 음양이 치우치지 않고 강(剛)과 유(柔)가 덕을 합한 다음에야 성인이 된다면, 태임(太任)과 같은 성인이 음기(陰氣)를 치우치게 부여받은 까닭은 무엇인지 의심스럽다.”
하니, 대답하기를,
“이뿐만이 아닙니다. 남자이면서 지극히 부드럽고 순한 사람이 있고, 여자이면서 지극히 굳세고 사나운 사람이 있으니, 이 또한 그런 것입니다.”
하였다. 선생이 말하기를,
“몸에 부여되어 남자가 되고 여자가 되는 기는, 심에 있으면서 강(剛)이 되고 유(柔)가 되는 기와는 결국 다르다.”
하기에, 말하기를,
“이 말씀이 지당합니다. 이전에 오성(五性)의 분수가 오장(五臟)의 성쇠와 관계없을 것으로 의심하였는데, 그 또한 이 말로 풀이할 수 있겠습니다.”
하였다. 선생이 말하기를,
“오장의 기는 혈육구각(血肉軀殼)의 기보다 정밀한데도 심 안에 품부받은 것과는 다르니, 앞에 한 말이 더욱 분명해진다.”
하고, 이어서 말하기를,
“그러므로 도리를 보는 데는 편협해서는 안 되니, 마음을 크게 써야 한다.”
하였다. - 인보(仁甫)가 말하기를, “그 말씀이 옳기는 하지만 두 가지 기를 지나치게 따로 떼어 놓고 논한 것 같다. 태임과 같은 성인의 경우, 바탕은 중화(中和)이며 치우친 바가 없으나, 그 유순정정(柔順貞靜)함은 반드시 곤원(坤元)과 덕을 합할 것이니, 여타 성인의 발강강의(發剛强毅)함과는 다르다. 형이 이른바 남자이면서 부드럽고 여자이면서 강한 사람은 품부받은 것이 바르지 못하여 정상이 아닌 경우이니, 이것을 가지고서 두 가지 기가 전혀 상관이 없음을 증명할 수는 없을 듯하다.” 하였다. -

선생이 묻기를,
“사람은 천지가 만물을 낳는 마음을 부여받아 마음으로 삼았으니, 그 마음을 쓰는 일이 천지와 다름이 없어야 한다. 그런데 천지는 만물을 아울러 낳아 아무런 차이가 없지만, 사람은 친족을 친애하고 나서[親親] 백성에게 자애로우며[仁民], 백성에게 자애롭고 나서 만물을 사랑하여[愛物] 사심이 없지 않은 듯하니, 이는 어째서인가?”
하기에, 내가 말하기를,
“이것은 끝내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그렇지만 대체로 천지와 사람이 모든 면에서 같지는 않을 것입니다. 사람에게는 자신과 가까운 친족인 경우가 있고 자신과 같은 부류인 경우가 있으며, 자신과 다른 부류인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베푸는 바 또한 차등이 없을 수 없습니다. 천지가 만물을 대하는 태도는 부모가 자식을 대하는 태도처럼 차이가 없어야 마땅합니다.”
하니, 선생이 말하기를,
“그렇게 말하여도 역시 통한다. 다만 천지가 만물을 낳음에 모두에게 정통 청명(正通淸明)한 기를 부여할 수 없다. 그러므로 성인도 있고 어리석은 이도 있고 금수도 있고 초목도 있는 것이다. 이것은 사람이 친족을 친애하고 백성에게 자애로우며 만물을 사랑하는 차이가 있는 것과 같다.”
하였다. - 인보가 말하기를, “하늘이 만물을 낳음에 기운이 같지 않은 것은 어쩔 수 없으므로 모두에게 정통 청명한 기를 부여하지 못한다. 그렇지만 발육하고 배양하는 마음은 사람에게 있어서나 만물에 있어서나 조금도 후하고 박한 차이가 없다. 그런데 선생께서는 부여한 것이 다른 점이 사람들이 친족을 친애하고 백성에게 자애로우며 만물을 사랑하는 차이와 다름없다고 하신 것은 과연 어떠한지 모르겠다.” 하였다. -

선생이 또 묻기를,
“사람이 친족을 친애하고 백성에게 자애로우며 만물을 사랑하는 까닭은, 천지 만물은 본디 하나의 기이지만 친족은 같은 몸이며 백성은 같은 부류이고, 만물은 다른 종류이다. 그러므로 친하고 소원한 차이가 있다. 부부(夫婦)와 군신(君臣)의 경우에는 같은 몸인 친족이 아닌데도 골육과 다름없이 사랑하는 까닭은 무엇인가?”
하기에, 내가 말하기를,
“이러한 것은 기만 가지고 말할 수는 없을 듯합니다. 도리가 이러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니, 선생이 말하기를,
“그렇다. 만약 기만 가지고 말한다면 끝내 막히는 곳이 많을 것이다.”
하였다.

선생이 말하기를,
“이기에 대한 나정암(羅整菴 나흠순(羅欽順))의 논의는 옳다. 기(氣)가 이와 같이 되는 까닭이 바로 이(理)이다. 어찌 기 위에 따로 하나의 물건이 있어 이라고 이름을 붙였겠는가.”
하고, 면전에 있는 그릇을 가리키며 말하기를,
“이를테면 이 그릇은 물을 담기 위해 만든 것이므로 아래를 막고 가운데를 움푹하게 한 것이다. 이것이 곧 이(理)이다. 이 밖에 달리 이라고 할 것이 있겠는가. 다만, 이렇게 본다면 이의 선한 곳을 보기 어려우니, 기가 악한 것도 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정암은 스스로 여기에 대해 깨달은 바가 있다고 하였는데, 끝내 알 수가 없다.”
하였다.

선생이 말하기를,
“정암은 〈태극도(太極圖)〉가 염계(濂溪)의 저작이 아니라 하였는데, 이것은 다른 것을 가지고 가려낼 수 없다. 염계 이전에 어떤 사람이 이런 말을 하였으며, 염계 이후에 정자(程子)와 장자(張子) 같은 대현(大賢)이 아니라면 누가 다시 이러한 말을 할 수 있겠는가. 선유들이 《서경(書經)》을 논하여, ‘복생(伏生)이 암송한 오고(五誥) 따위가 진짜이고, 공벽(孔壁)에서 나온 전모(典謨) 따위는 가짜이다.’ 하였는데, 이것은 무엇을 근거로 논변한 것인가. 그 문자와 의리만 보더라도 한나라 때의 선비들이 아무리 가짜로 만들고자 하였더라도 결코 그렇게 할 수 없을 것이다.”
하였다.

또 말하기를,
“정암(整菴)은 인심과 도심을 미발과 이발이라 하여 주자에 대해 이설(異說)을 세웠으나, 이는 주자의 설이 정자의 설에 대해 이설을 세운 경우처럼 한 것에 불과하니, 반드시 도(道)를 망치고 이(理)를 해친다고 비난할 것은 없다. 기고봉(奇高峯 기대승(奇大升))은, ‘만약 인심이 이발이라면 이발한 뒤에는 도가 관여할 수 없는 것이 아닌가.’ 하였는데, 이 말은 전혀 그렇지 않다. 이는 단지 정암이 이미 죽어 말을 할 수 없기 때문에 앞뒤를 가리지 않고 입에서 나오는 대로 말한 것이다. 이러한 논변으로 어찌 남을 굴복시킬 수 있겠는가. 만약 정암의 말이 잘못이라고 한다면, 역대의 성현들은 대부분 이발처(已發處)에 대해 말하였으니, 단지 자사의 ‘희로애락지미발(喜怒哀樂之未發)’ 한 구절만 남을 것이다. 그리고 요순 시절에는 이러한 의론이 없었을 듯하니, 이것도 잘못이다. 성현은 성과 정을 말할 적에 반드시 성을 먼저 하고 정을 뒤로 하였으며, 미발과 이발을 말할 적에는 반드시 미발을 먼저 하고 이발을 뒤로 하였다. 예컨대, ‘사람이 태어나 정(靜)한 것은 하늘의 성이며, 사물에 감응하여 동(動)한 것은 성의 욕이다.’라고 한 말과, ‘희로애락이 미발한 것을 중(中)이라 하며, 발하여 모두 절도에 맞는 것을 화(和)라고 한다.’ 등의 말이 이것이다. 그런데 지금 인심과 도심이라 하면 순서가 뒤바뀌었으므로 이것도 잘못이다. 또 정자가 인심을 인욕이라 하여 병통이 없을 수 없었으므로 주자는 어쩔 수 없이 이렇게 이설을 세운 것이었다. 주자의 설로 말하자면 글 뜻을 참고하여도 막힘이 없고, 도리에서 찾아보아도 잘못이 없는데, 정암은 무슨 이유로 굳이 이러한 이설을 세웠는가. 이것은 옳지 않다.”
하였다.

선생이 말하기를,
“공자의 제자들이 인에 대해 질문한 것은 마음의 덕을 온전히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질문한 것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질문에 대한 대답이 이처럼 달랐던 것이다.”
하고, 또 말하기를,
“자세히 생각해 보니, 학문을 하는 것은 인을 구하는 것에 지나지 않고, 인을 구하려 한다면 거경(居敬)과 궁리(窮理) 두 가지에 지나지 않는다.”
하였다.

선생이 묻기를,
“《대학》 성의장(誠意章)의 ‘열 눈이 보는 바이며 열 손가락이 가리키는 바이다.[十目所視 十手所指]’라는 증자의 말을 인용한 부분은 두 가지 뜻이 있다. 하나는 남모르는 곳에 홀로 있더라도 이(理)는 분명히 드러나므로 선악을 가릴 수 없는 점에 있어서는 남들이 가리키고 볼 수 있는 곳과 다름이 없으니, 《중용》에 이른바 ‘더 잘 보임이 없으며 더 잘 드러남이 없다.’라고 한 뜻과 같다. 다른 한 가지 뜻은, 남모르는 곳에 혼자 있을 때는 선하지 않은 짓을 하더라도 밖으로 나오면 열 눈이 보고 열 손가락이 가리켜서 끝내 숨길 수 없으니, 위의 글에서 말한, ‘마치 폐와 간을 보는 것 같다.’라는 뜻과 같다. 평소에는 어떻게 보았으며, 어느 것이 올바른 뜻이겠는가?”
하기에, 말하기를,
“전자의 말과 같은 경우라면 이(理)에 밝은 군자를 경계할 수는 있지만 홀로 있을 때 불선한 짓을 하는 소인에게는 절실하지 않을 듯합니다. 차라리 명백하고 절실하여 사람마다 받아들일 수 있는 후자의 말이 나은 듯합니다.”
하니, 말하기를,
“그렇다. 이 때문에 《대학장구》에서도, ‘이것을 인용하여 위 글의 뜻을 밝혔다.[引此以明上文之意]’라고 한 것이다.”
하였다. - 인보가 말하기를, “형은 후자의 말이 낫다 하고, 선생께서도 옳다고 여기셨는데, 이것이 언뜻 보면 매우 타당한 듯하다. 그러나 우연히 《대학장구》를 보니, ‘비록 홀로 있더라도 선악을 가릴 수 없음이 이와 같으니 매우 두려워할 만하다는 것을 말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 뜻은 분명히 홀로 있는 중이라도 이(理)는 분명히 드러난다는 말이니, 전자의 말과 같다. 그래서 소주(小註)에 있는 주자의 설을 살펴보니 《대학장구》와 같았고 심지어 옥계(玉溪), 운봉(雲峯), 신안(新安) 세 사람의 설도 역시 그러하였다. 후자의 말이 과연 어떠한지 모르겠다.” 하였다. -

선생이 말하기를,
“《중용(中庸)》의 ‘계신공구(戒愼恐懼)’에 대해 역대의 유자들은 모두 미발한 때의 공부라고 논하는데 이는 잘못이니, 본디 동과 정을 통틀어 말한 것이다. ‘보이지 않는 것을 조심하고, 들리지 않는 것을 두려워하라.[戒愼乎所不覩 恐懼乎所不聞]’ 한 것은, 사람의 정(情)은 동(動)할 때 조심하고 두려워하기는 쉽지만 정(靜)할 때 조심하고 두려워하기는 어렵다. 그러므로 이를 미루어 말하여,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 때 역시 조심하고 두려워해야 한다는 것이지, 단지 이러한 때에만 조심하고 두려워해야 한다고 말한 것은 아니다. 대저 보이고 들리는 때에는 조심하고 두려워하는 것이 마땅하나, 보이거나 들리지 않는 때에도 조심하고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남들은 알지 못하고 자기만 아는 곳[人所不知而己所獨知之地]’은 동(動)이 은미하고 선악이 갈리는 기미이니, 여기에 대해 더욱 삼가야 하므로 ‘신독(愼獨)’이라 말한 것이다.”
하였다. - 인보가 말하기를, “선생의 말씀에 의심스러운 점이 있다. ‘본디 동과 정을 통틀어 말한 것이다.’라는 말씀은 옳지만, ‘역대의 유자들은 모두 미발한 때의 공부라고 하였다.’라고 한 것은 잘못된 것이다. 어째서 그러한가 하면, 《중용》의 뜻은, ‘도는 떨어질 수 있는 때가 없으니, 조심하고 두려워하는 것도 비단 어떤 일을 하거나 외물과 접할 때에만 그쳐서는 안 된다. 비록 사물이 다가오지 않고 사려가 일어나지 않은 때라도 떨어질 수 없는 도가 있으니, 바로 중(中)이다. 그러니 조심하고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다.’라는 말이다. 선생께서 이른바, ‘동과 정을 통틀어 말한 것이다.’라는 말씀은 바로 이것을 말한 것이다. 그러나 그 말뜻은 비록 단지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 때에만 조심하고 삼가도록 하라는 것이 아니라도 ‘계신부도공구불문(戒愼不覩恐懼不聞)’ 8자는 결국 미발한 때의 공부를 특별히 말한 것이다. 지금 이렇게 말한 사람들을 모두 다 틀렸다고 한다면 너무 지나치지 않겠는가. 또 한 가지 의문이 있다.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 때 조심하고 두려워하도록 한 뜻은, 앞에서 말한 것처럼 사물이 다가오지 않고 사려가 일어나지 않은 때라도 떨어질 수 없는 도가 있으므로, 반드시 조심하여 감히 게을리하지 않도록 한 것에 불과하다. 《중용장구》의 이른바, ‘이것은 성정의 덕을 말하여 도와 떨어질 수 없음을 밝혔다.[此言性情之德 以明道不可離]’라고 한 말은 바로 이러한 뜻이다. 지금 선생의 말씀에, ‘사람의 정은 동할 때 조심하고 두려워하기는 쉽지만, 정할 때 조심하고 두려워하기는 어렵다. 그러므로 이를 미루어 말한 것이다.……’ 하셨으니, 이는 중용의 본뜻이 아니지 않은가.” 하였다. -

선생이 말하기를,
“주자의 이른바 ‘궁리(窮理)’는 오로지 독서를 말한 것이다. 서화담(徐花潭 서경덕(徐敬德))처럼 공중에 매달려 사색하는 방법에 대해서는 주자가 말한 적이 없다.”
하기에, 내가 말하기를,
“독서 외에 사물을 접하여 마땅하게 대처하느냐의 여부에 관한 일련의 공부도 또한 매우 긴요합니다.”
하니, 선생이 말하기를,
“사실 그렇다. 다만 사물을 접하기 전에 힘써야 할 바는 독서뿐이다. 사물이 이르기 전에 독서하여 의리를 강구한 다음에야 사물을 접하였을 때 자세히 살펴 대처할 수 있는 실제의 효과가 있게 된다. 그렇지만 후세 사람들 중에는 독서를 하고도 궁리의 효과를 얻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는 그들이 말하는 독서가 주자의 독서와 다르기 때문이다.”
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단지 책은 책이고 나는 나라는 병통이 있기 때문에 이렇게 되는 것입니까?”
하니, 선생이 말하기를,
“그렇다. 대체로 진정으로 나아지기를 구하는 마음이 없으므로 일상생활에서 효과를 얻지 못할 뿐만 아니라, 심지어 책을 펼쳤을 때는 생각이 있다가 책을 덮으면 모두 잊어버리게 된다.”
하고, 또 말하기를,
주자는 독서를 정밀하게 하는 근본이 거경(居敬)과 지지(持志)에 있다고 하였다. 지금 사람들은 이러한 요령이 없으므로 효과를 얻지 못하는 것이다.”
하였다.

또 말하기를,
“독서를 하는 데 있어서는 굳이 남이 알지 못하는 뜻을 아는 것을 높게 여길 필요는 없다. 다만 자기가 이내 알고 있는 뜻을 날마다 음미하며 숙독하고 또 숙독하면, 자연히 의미가 깊어지고 도리가 무궁해질 것이니, 이것이 바로 독서의 효험이다. 우리들이 알고 있는 의리로 말하자면, 선배들도 이렇게 알아낸 것에 불과하지만 그 의미를 생각하는 데 있어서는 분명 우리들과 다른 점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내가 병통으로 여기는 점은 이미 아는 부분을 숙독하기를 싫어하고 굳이 새로운 견해를 찾아내고자 하는 것이다. 이것은 큰 병통이니, 우리들은 각자 이러한 뜻으로 서로 권면해야 할 것이다.”
하였다.

선생이 묻기를,
“공손추(公孫丑)와 만장(萬章) 중에 누가 나은가?”
하기에, 대답하기를,
“대단한 우열은 없는 듯합니다.”
하니, 말하기를,
하였다. 또 묻기를,
“맹자의 문인들의 수준은 공자의 문인들에게 한참 미치지 못한다. 인재가 공자의 시대에 미치지 못하였기 때문에 그러한 것인가, 아니면 가르치는 방법이 공자와 달랐기 때문에 그러한 것인가?”
하기에, 내가 대답하기를,
“맹자 문인들은 독실하게 믿고 힘써 실천하는 데는 공자의 문인들보다 못하였고, 그저 맹자의 말만 바라보았다는 병통이 있습니다.”
하니, 선생이 말하기를,
“사실 그렇다. 다만 당시에 이단과 사설이 세상을 속이고 어지럽힌 지 오래되었기에 천하의 영재들이 모두 등을 돌리고 우리 도로 돌아오는 이가 드물었다. 아마도 하늘의 운세가 이미 그러하였던 듯하니, 사람의 힘으로 어찌할 수는 없었다. 성인의 도가 맹자에 이르러 끊어져 1500년 동안 어둡고 막히는 지경에 이르렀으니, 이것이 어찌 우연한 일이겠는가.”
하였다.

묻기를,
“맹자 이후에 우리 도에 공이 있는 사람은 순자(荀子), 동중서(董仲舒), 양웅(揚雄), 왕통(王通), 한유(韓愈) 다섯 사람입니다. 그러나 순자는 지나치게 잡박하고 양웅은 지나치게 나약하였으며, 동중서는 학문이 순정하기는 하였으나 그의 역량은 사도(斯道)를 담당할 수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사도의 책임을 졌던 사람은 왕통과 한유뿐입니다. 두 사람은 어떻습니까?”
하니, 선생이 말하기를,
“왕통이 이단을 물리치는 수법은 한유에 미치지 못하는 듯하다. 이 때문에 그 당시 제자들이 성대하게 떠받들기로는 한유보다 더하였지만, 한유가 했던 것처럼 이단을 배척하고 우리 도를 내세워 한 시대를 뒤흔들지는 못하였다. 한유의 역량은 매우 커서 실로 쉽게 얻을 수 없다. 당시에 부처의 학문이 세상에 가득하여 위로는 공경대부로부터 아래로는 필부필부에 이르기까지 한 명도 빠지지 않은 이가 없었다. 그런데 오직 한유만이 개탄하면서 물리쳤으니, 호걸다운 선비가 아니라면 이렇게 할 수 있겠는가. 정자와 주자 이후로 한유를 논하는 사람들은 정주의 논평을 답습하여 그의 잘못을 지적하기를 좋아하는데, 공평한 마음으로 생각해 보면 참으로 쉽게 논할 수 없는 점이 있다. 설 문청(薛文淸)의 말은 한유에 대한 정론으로 삼을 만하다.”
하였다.

선생이 말하기를,
“성인의 책을 읽을 때 항상 놀라 부끄러운 마음을 지녀, ‘성인은 이렇게 하였는데 나는 이렇게 하지 못하여 한갓 읽기만 하고 조금도 실행하지 못한다.’ 하면서 늘 이 마음을 지니고 물러서지 않는다면 조금씩 나아지는 점이 있을 것이다.”
하였다.

“인심과 도심이 서로 시작과 끝이 된다.[人心道心相爲終始]”라는 말에 대해 논하기를,
“도심으로 시작하였다가 인심으로 끝나는 경우는 잘못된 것이 분명하고, 인심으로 시작하였다가 도심으로 끝나는 것은 그래도 통할 수 있다. 먹고 마시는 데 있어서 올바름을 얻는 것을 인심이 도심에 합치되었다고 하여 시작과 끝으로 말하더라도 무방할 듯하다. 그러나 자세히 따져 보면 그렇지 않은 점이 있다. 배고프면 먹고 싶고 목마르면 마시고 싶은 것은 인심이 발한 것이다. 그리고 절제하고 사양하려는 생각은 따로 도심에서 나와 인심을 주재하는 것이다. 그러니 이것이 어찌 인심 속에서 이와 같은 작용을 하여 맥락이 관통하고 수미가 호응하는 것이겠는가. 나는 그러므로 항상 말하기를, ‘인심의 보폭은 매우 좁다. 예컨대 잠깐 사이에 음식을 먹고 물을 마시려는 생각이 떠오르는 것이 바로 인심이다. 이로부터 조금만 중도를 벗어나면 인욕이지 인심이 아니며, 이로부터 절제하면 도심이지 인심이 아니다.’ 하였다.”
하였다.

이어서 관대함과 강인함[弘毅]에 대해 말하기를,
“우리나라의 선비로 말하자면, 정암(靜菴)은 관대함이 강인함에 미치지 못하였고, 퇴계는 강인함이 관대함에 미치지 못하였다. 오직 율곡만이 거의 겸비하였다고 할 수 있으며, 그 외에는 사계(沙溪)만 한 분이 없다. 다만 사계는 비록 관대함과 강인함을 겸비하여 인(仁)을 자기의 임무로 삼아 죽은 뒤에야 그만두는 공부에 힘썼으나 아무래도 식견이 행동에 미치지 못하였다. 이를테면 《경서변의(經書辨疑)》와 같은 저술의 경우, 별다른 착오는 없지만 대단하게 밝힌 것도 없다.”
하였다.

질문하기를,
“우계(牛溪 성혼)가 임진년(1592, 선조25)에 어가를 호종(扈從)하지 않은 까닭은 무엇입니까?”
하니, 말하기를,
“선생이 생각하기에, 자신은 산야에 숨어 사는 사람으로서 다른 사람과 다르므로 소명이 없는데 제 발로 가서 어가를 호종해야 할 의리는 없다고 여겼다. 그러므로 이렇게 처신하였을 뿐이다. 나룻배가 끊겼다거나 왜병이 이미 길을 막았기 때문이라는 말은 사실이 아니다.”
하였다.

선생이 말하기를,
정자(程子)는 한나라 유자들이 말한 ‘상도를 어기고 의리에만 부합한다.[反經合道]’라는 설을 잘못이라 여기며, 권(權)은 단지 경(經)일 뿐이라고 하였는데, 주자는 권과 경이 구별이 있어야 한다고 여겼다. 일찍이 생각해 보았는데, 두 선생이 말한 시각이 서로 같지 않다. 성현이 일찍이 강정(講定)하여 영원토록 바꿀 수 없는 것이 경이고, 일의 변화는 끝이 없으므로 성현도 미처 말하지 못한 것이 있는데 후세에 이러한 일을 맞닥뜨린 사람이 깊이 헤아려 중도를 취하는 것이 권이다. 일상적인 일에는 정해진 방법이 있으므로 권을 일삼을 필요가 없지만, 일의 변화를 당하여 경이 행해지지 않은 다음에는 어쩔 수 없이 권을 써야 한다. 이것이 경과 권의 차이이다. 그러나 이른바 경과 권은 각기 맞닥뜨린 일에서 중도를 찾는 것에 불과하니, 실제로는 다름이 없다. 대체로 일의 관점에서 말하면 다르지만 도의 관점에서 말하면 같은 것이다.”
하고, 또 말하기를,
“이로 말미암아 생각하다가 우연히 하나의 설을 깨달았는데, 나중에 《주자어류》를 보니 주자가 이미 말한 것이었다. 경은 성인이 이미 정해 놓은 것이지만 성인이 이것을 정할 때 헤아리지 않을 수 없었으므로, 이 또한 권이라고 할 수 있다. 권은 일의 변화를 당하여 헤아리는 것을 말하니, 중도를 얻어 결정하면 이 또한 경이라고 할 수 있다. 주자가 이르기를, ‘경은 이미 정해진 권이고, 권은 아직 정해지지 않은 경이다.’ 하였다.”
하였다.

선생이 말하기를,
“인심 속에 부질없고 허황된 생각은 그 근원을 따져 보면 사욕 등의 진실한 생각에 근본을 두지 않은 경우가 없다. 만약 큰 사욕을 먼저 다스려 억제한다면 부질없고 허황된 생각도 점차 사라질 것이다.”
하였다. - 이상은 영협(永峽)을 오갈 때 기록한 것이다. -

선생이 말하기를,
“나는 갑인년(1674, 현종15)부터 경신년(1680, 숙종6)까지 과거 공부를 그만두고 독서에 전념하였는데 매우 효과가 있었다. 일생 사용한 것은 단지 그 몇 해 동안의 공부에서 나온 것이었다. 사람이 세상을 살면서 이러한 시절이 없어서는 안 된다.”
하였다.

선생이 한번은 말하기를,
“나는 평소 책을 볼 때 전일하게 마치지 못하였는데, 《한서(漢書)》와 《이정전서(二程全書)》만은 처음부터 끝까지 다 보았다.”
하고, 또 말하기를,
“나는 《시경》과 《서경》을 숙독한 뒤에 문장이 상당히 나아졌으며, 글을 간결하게 쓰는 방법을 터득하였다.”
하였다.

선생은 만년에 《연평답문(延平答問)》을 읽기를 가장 좋아하였는데, 말하기를,
“이 노인의 공부는 매우 절실하여 사욕과 병통이 있으면 반드시 그 본원을 찾아 모두 녹여 버렸으니, 이것이 바로 내면이 청아해진 까닭이다. 요사이 이 방법을 따라 한두 가지 공부를 해 보았는데, 매우 효과가 있는 것을 깨달았다.”
하였다.

선생이 말하기를,
“요사이 이 도리를 마음속에서 깨달았지만 반드시 문자를 함께 보아야 나타나니, 이것은 미처 평범한 경지를 초탈하지 못한 까닭인 듯하다.”
하였다.

선생은 만년에 거듭 소명을 받았는데 예우가 지극히 융숭하였다. 세상 사람들은 그가 한 번쯤 나오기를 바랐지만, 선생의 뜻은 바위처럼 확고하였다. 나 유봉이 한번은 조용히 말하기를,
“성상의 정성이 이와 같은데 끝내 움직이지 않으신다면 과연 어떻겠습니까. 만약 옛 성현이 이러한 상황에 처하였다면 도리가 있었을 듯합니다. 한번 소명에 사은하고 돌아오는 것도 의리에 무방하지 않겠습니까?”
하니, 선생이 말하기를,
“한번 사은하는 것도 불가하지는 않으니, 나의 뜻도 본디 이와 같다. 다만, 우리들의 처지는 산림의 유일(遺逸)과는 차이가 있으니, 감히 옛사람이 도망하여 은둔하였던 방법을 쓸 수는 없다. 하지만, 한번 발을 내딛으면 점차 심해져서 매우 난처한 지경에 이르게 될 것이니, 그때는 어떻게 수습하겠는가. 이 점은 염려하지 않을 수 없다. 한스러운 것은 당초 한직에 제수되었을 때 한번 사은하여 분수와 의리를 차렸더라면 지금 이러한 상황에서도 마음이 편안할 것인데, 애초에 잘못하였으니 이제는 어쩔 수 없다. 성현의 처사는 때를 놓치지 않는 것을 귀하게 여긴다.”
하였다.

선생은 아들을 잃은 뒤로는 전혀 시를 짓지 않았다. 만시나 증별시 따위를 짓는 일도 일절 응하지 않았다. 만년에 한번은 시에 대해 말하기를,
“내가 시를 짓지 않는 까닭은 단지 죽은 이를 애도하기 위해서만은 아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일을 줄이고자 한 것이니, 이는 노자(老子)의 ‘도를 하면 날로 줄어든다.’라는 뜻이다. 요새는 때때로 고시(古詩)를 지어 마음 가는 대로 흥취를 담고자 하는데, 이 또한 무방할 것이다.”
하기에, 내가 말하기를,
“소생들은 한 달이나 반달 만이라도 시를 짓지 않으면 생소하고 껄끄럽다는 것을 느낍니다. 연이어 두세 편을 짓고서야 필치가 조금 열립니다. 선생께서는 오랜 세월 동안 시를 짓지 않으시다가 지금 다시 짓고자 하시니, 이런 염려가 있지 않겠습니까?”
하니, 선생이 말하기를,
“그렇지 않다. 더욱 새롭고 더욱 묘해지는 이치가 있다.”
하였다.

선생은 늘 자신이 세상사에 어두우므로 관리로서의 재능은 자신의 장점이 아니라고 말하였다. 만년에 이르러 한번은 말하기를,
“만약 내가 지금 고을을 다스린다면 반드시 잘 다스리는 이치가 있을 것이다.”
하기에, 내가 말하기를,
“어찌하여 이렇게 말씀하시는지 감히 여쭙니다.”
하니, 선생이 말하기를,
“이 이치를 안 뒤로는 지난날의 정사에 소홀한 점이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예컨대 일상적인 문서를 살피지 않았던 것은 대단히 소홀한 점이었다.”
하였다.

선생은 삼주(三洲)에 상당히 크고 넓은 외헌(外軒)을 지었다. 가운데 두 칸은 방이고, 바깥의 삼면은 난간으로 막았으며, 방의 서북쪽 반 칸은 따로 잠자는 곳으로 만들었다. 선생이 일찍이 나 유봉에게 말하기를,
“나는 노자(老子)의 ‘도에 힘쓰면 날로 줄어든다.’라는 말을 매우 좋아하여, 이 협실(夾室)을 일손와(日損窩)라고 이름을 지어 볼까 하고, 또 옛적에 유응지(劉凝之)가 스스로 ‘40년 동안 청정함을 지켜 물러났다.’라고 하였는데, ‘청퇴(淸退)’로 나의 당을 이름 지어 볼까 하였다. 그래서 한번 해창도위(海昌都尉 오태주(吳泰周))에게 편액을 써 달라고 하였는데, 도위가 편지를 보내어, ‘퇴(退)라는 글자는 본디 집사의 훌륭한 절개인데 이러한 편액을 스스로 내건다면 온당하지 않은 듯하다.……’ 하였다. 이 말이 과연 어떠한가?”
하기에, 대답하기를,
“그 말이 일리가 있기는 하지만, ‘청퇴’는 이미 드러난 자취를 가리키는 것에 불과하니, 어찌 자랑하는 혐의가 있겠습니까.”
하였다. 선생은 고개를 끄덕였으나 그 뒤에 그 두 가지 편액을 거는 것을 보지 못하였다. 외헌의 동쪽 면 처마에는 큰 글씨로 쓴 ‘삼산각(三山閣)’이라는 현판을 달았으니, 조계지(趙繼之) 정서(正緖)의 필적이었다. 방의 서쪽 벽에는 작은 서루(書樓)를 만들고 ‘광명각(光明閣)’이라 하였으니, 주 부자(朱夫子)가 지은 명(銘)의, ‘혜아광명(惠我光明)’이라는 말을 취한 것이다. 또한, ‘광명각장(光明閣藏)’이라는 인장을 만들었다.

선생은 만년에 안자(顔子)와 증자(曾子)의 언행을 기록하여 하나의 책으로 만들고 《희현록(希賢錄)》이라 하고는, 여가가 있을 때마다 소리 내어 읽었다. 나 유봉도 안자의 언행을 모아 기록한 적이 있었다. 그리하여 선생이 엮은 차례를 살펴보고 말하기를,
“소생이 만든 것과 조금 다른 부분이 있습니다.”
하였다. 그러나 미처 자세히 질문하지 못하고 한 부를 베껴 두려고 하다가 결국 그렇게 하지 못하였다. 이 책이 지금도 본가에 남아 있는지 모르겠다.

선생이 묻기를,
“오늘날의 사대부들은 반드시 ‘의리가 어둡고 막혔다.’ 하는데, 이른바 어둡고 막혔다는 것은 무엇이며, 의리를 밝히려면 무엇을 먼저 해야 하는가?”
하였으나 나 유봉이 대답하지 못하였다. 선생이 말하기를,
“오늘날 밝혀야 하는 것은 주자의 도리가 가장 급하다. 주자의 도가 밝아지면 세도(世道)와 사문(斯文)은 길이 의지할 곳이 있을 것이다.”
하였다.

선생이 말하기를,
“나라를 다스리는 일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도 선비가 조정에 서면 반드시 만언소(萬言疏)부터 먼저 올린다. 또 복수설치(復讎雪恥)와 같은 것이 어찌 첫째가는 의리가 아니겠는가마는 오늘날에 와서는 그저 의례적으로 하는 좋은 말에 지나지 않으니, 이러한 것들은 모두 절실한 도리가 아닌 듯하다. 내가 생각하기로 선비가 벼슬을 하면 경연을 출입하며 도리를 개진하여 우선 군주의 마음을 바로잡는 일에 힘써야 할 것이다.”
하였다.

선생이 말하기를,
“오늘이라도 사변이 생긴다면 우리들은 어떠한 의리로 처신하여야 하겠는가?”
하기에, 대답하기를,
“마땅히 국가의 위급한 일에 달려가 한마음으로 보답해야 할 것입니다.”
하니, 선생이 말하기를,
“그것이 맞는 말이기는 하다. 다만, 난리에 달려간 뒤 한번 죽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지만 혹시 억지로라도 할 수는 있다. 그렇지만 계책을 내어 국사에 보탬이 될 만한 역량이 없는 사람이라면 나아간들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
하였다.

내가 《논어》 읽기를 마치고 선생을 찾아뵈었더니, 선생이 묻기를,
하였다. 내가 갑작스레 질문을 받고 대답하지 못하자, 선생이 웃으며 말하기를,
“나는 계자연(季子然)이 중유(仲由)와 염구(冉求)를 대신이라 일컬을 수 있는지 질문한 장을 가장 좋아한다. 처음에는 두 사람을 낮추어 계자연을 부끄럽게 하더니, 끝에 가서는 두 사람을 높여서 신하 노릇 하지 않으려는 계씨의 마음을 꺾었으니, 성인의 말씀은 낮추고 높이기를 자유롭게 하여 신묘한 변화를 헤아릴 수 없다. 명백하고 통쾌하며 올곧고 준엄한 기상이 더욱 보기에 좋다.”
하였다.

선생이 일찍이 조용히 묻기를,
“그대가 만약 조만간 과거에 급제한다면 출처(出處)를 어떻게 할 것인가?”
하기에, 대답하기를,
“어렵게 나아가고 쉽게 물러나는 것이 사대부의 일반적인 법도이기는 합니다만, 벼슬하지 않고 물러나 숨는 경우는 반드시 명백히 지켜야 할 의리가 있어야 이렇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미 과거에 급제하여 군주를 섬겼는데 아무런 이유 없이 벼슬하지 않는다면 고상한 척하면서 자기의 편의를 도모하려는 것이니, 올바른 도리가 아닌 듯합니다.”
하니, 선생이 그렇다고 하였다.

나는 기묘년(1699, 숙종25)에 과옥(科獄)이 일어난 뒤, 곧장 석실서원에 나가 독서를 하였다. 선생이 무슨 책을 읽고자 하는지 묻기에 대답하기를,
“늘상 《소학(小學)》을 숙독하고자 하였으나 세상일에 골몰하여 겨를이 없었습니다. 이제 이 책을 반복하여 익히고자 합니다.”
하니, 선생이 허락하였다. 얼마 후 나를 잡아들이라는 명이 내리자 선생은 놀라고 탄식하여 마지않았다. 내가 절하고 하직하면서,
“과거는 본디 좋아하던 바가 아니었으나 어버이를 위하여 억지로 하느라 그만두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이제 불행히 이러한 변고를 만나 포승줄에 묶이는 치욕을 당하기까지 하였으니, 이제부터는 결코 다시는 과거에 응시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니, 선생이 말하기를,
“그대의 뜻이 그렇다 하더라도 일단 남들에게 함부로 말하지 말고, 묵묵히 마음속으로 결정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정해년(1707, 숙종33) 별시(別試)의 방(榜)이 나오던 날, 나는 집을 나와 석실로 갔다. 선생에게 병환이 있어 바로 만나지 못하였기에 나는 서원에서 유숙하였다. 이튿날 아우 유귀(有龜)가 등제하였다는 기별이 전해지자, 선생이 그 말을 듣고서 즉시 나에게 침소로 들어오라 하고는 기뻐하며 축하하였다. 그리고 말하기를,
“비단 성칙(聖則 어유귀(魚有龜))을 위해서만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실로 순서(舜瑞 어유봉)에게 다행한 일이다. 그대가 과거를 그만둔 것은 어쩔 수 없어서 그리하였던 것이었기에 마음이 항상 불안하였는데, 이제부터는 즐거운 마음으로 좋아하는 일에 종사할 수 있게 되었다.”
하고, 또 말하기를,
“인가의 자제들이 많기는 하지만 어찌 모두 영달할 수 있겠는가. 우리 형제 다섯 명은 모두 충분히 시험에 합격할 수 있었지만 결국 문과에 등제한 사람은 둘뿐이었다. 이제 그대의 세 형제 가운데 한 사람이 입신(立身)하였으니, 어버이를 기쁘게 하고 문호를 유지하기에 충분할 것이다. 또 무엇을 아쉬워하겠는가.”
하였다.

내가 한번은 시권(詩卷)을 가지고 가서 선생에게 질정을 받았는데, 선생이 다 보고 말하기를,
“상당히 좋지만 법도가 없는 것이 흠이다. 시를 짓는 것이 비록 작은 도이기는 하지만 반드시 스승으로 삼는 법이 있어야 한다. 당시(唐詩)를 위주로 하거나 두시(杜詩)를 위주로 하거나 송시(宋詩)를 위주로 하여 편하게 따르는 방법으로 삼아야 볼만할 것이다.”
하였다.

선생이 한번은 제생에게 묻기를,
“명절 중에는 3월 3일, 5월 5일, 7월 7일, 9월 9일이 있으나, 2월 2일, 4월 4일, 6월 6일, 8월 8일이 없는 것은 어째서인가?”
하니, 제생이 모두 대답하지 못하였다. 그러자 선생이 웃으며 말하기를,
“제군들은 우연히 미처 생각하지 못하였는가. 이는 양(陽)을 귀하게 여기고 음(陰)을 천하게 여기는 뜻이다.”
하였다.

선생이 말하기를,
“삼복(三伏)은 반드시 경일(庚日)에 들어가는데, 경(庚)은 금(金)이다. 화(火)는 반드시 금(金)에게 복종하는데 복날이 매우 더운 것은 도대체 무슨 이치인가? 옛사람 중에는 설명한 이가 없으니 이것은 생각해 보아야겠다.”
하였다.

선생이 석곶촌(石串村)에 있을 때의 일이다. 어느 날 찾아뵈었더니,
“오늘 조용히 누워 생각하니, 기삼백(朞三百) 주(註) 전체의 수미(首尾)와 곡절(曲折)이 매우 분명해졌다.”
하였다. 그리고 정관재(靜觀齋 이단상(李端相))가 논한 신분(新分)의 잘못된 부분을 찾아내고서 얼마 후 논설을 지어 변증하였다.

하루는 노가헌(老稼軒)에서 선생을 모시고 앉아 있었는데, 어떤 손님이 찾아와 중문(中門)에 말을 매어 놓았다. 말이 달아나자 문이 무너져 땅에 쓰러지니, 손님이 깜짝 놀라며 자기 잘못이라고 사과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이것은 사람이 한 일이 아니라 사물에 운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 문을 처음 세울 때 소강절(邵康節)로 하여금 점을 치게 하였다면, 필시 오늘 어떤 손님이 말을 매었다가 무너질 것임을 알았겠지요.”
하니, 선생이 손님을 돌아보며,
“유봉의 말이 옳으니 그대는 한탄하지 말게.”
하였다.

한번은 선생의 먼 친척인 듯한 어떤 굶주린 사람이 찾아와서는 오랫동안 앉아 있다가 떠날 임시에 먹고 살아갈 재물을 달라고 청하였다. 선생이 웃으며 말하기를,
“나는 지금 도와줄 만한 물건이 없소. 그렇지만 있으면 주고 없으면 그만인데 왜 일찍 말하지 않았소.”
하였다. 그러고는 나 유봉을 돌아보며 말하기를,
“이 경우의 도리는 어떻게 해야겠는가? 남이 구걸할 때에 집에 한 되의 곡식이라도 있으면 곧장 죄다 그러모아서 줘야겠는가, 아니면 자기 집에 필요한 양을 계산하여 그 나머지를 남에게 줘야겠는가?”
하기에, 내가 대답하기를,
“그런 경우에는 그 사람의 사정이 얼마나 급한지 보아야 합니다만, 남는 것이 있은 다음에야 남에게 주는 것이 올바른 도리인 듯합니다.”
하니, 선생이 그렇다고 말하였다.

내가 한번은 《역학계몽(易學啓蒙)》의 의문나는 뜻을 물으니, 선생이 대답해 준 뒤에 말하기를,
“몇 번이나 읽었는가?”
하기에, 내가 말하기를,
“그저 훑어보기만 하였지 읽은 적은 없습니다.”
하였다. 선생이 말하기를,
“문자가 매우 좋으니 많이 읽는 것이 좋다.”
하고, 몇 구절을 읊조리더니 말하기를,
“많이 읽으면 저절로 깨닫게 된다.”
하였다. 또 한번은 〈어초문대(漁樵問對)〉의 의심스러운 뜻을 물었더니, 선생도 알기 어려운 부분이 많다고 하였다. 그러고는 또 말하기를,
“많이 읽으면 깨닫게 되지 않겠는가.”
하였다. 선생은 이치를 궁구하는 데 있어서 급하게 억지로 찾는 것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고, 반드시 여유롭게 읊조리다가 저절로 터득하고자 하였다.

《대학(大學)》 정심장(正心章)에 보이는 ‘유소(有所)’의 ‘유(有)’에 대해 후세의 선비들은 모두 ‘유착(留着 머무르다)’으로 보았으며, 《주자어류》에도 이렇게 말한 곳이 많다. 그러나 나는 《대학장구》의 풀이가 이와 전혀 다르다고 의심하였는데, 한번은 이에 대해 선생에게 나아가 묻기를,
“《대학장구》에 보이는 ‘일유(一有)’의 ‘유(有)’는 정문(正文)에 보이는 ‘유소(有所)’의 ‘유(有)’를 풀이한 것입니까?”
하니, 선생이 말하기를,
“그렇다.”
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유소(有所)’의 ‘유(有)’를 ‘유착’이라고 한다면 《장구》의 ‘유’도 이와 같이 보아야 합니까?”
하니, 선생이 말하기를,
“다르지 않을 것이다.”
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저의 소견으로는 ‘일유’의 ‘유’는 이른바 ‘유착’이라는 뜻의 ‘유’와는 말뜻에 정도의 차이가 있는 듯한데, 어떻습니까?”
하니, 선생이 말하기를,
“어찌하여 그렇게 말하는가?”
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유’라는 것은 없지 않다는 것을 말하니, 이 정이 발하여 있다는 말이고, ‘유착’이라는 것은 떠나지 않음을 이르니, 이 정이 발한 뒤에 머물러서 떠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일유’라고 한 것은 바로 위 글에서 말한 네 가지와 서로 호응하는 점이 없지 않으니, 가볍게 이야기한 것으로서 ‘유착’의 뜻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만약 ‘일유’를 ‘유착’이라 여긴다면, ‘유착’의 병통은 욕이 움직이고 정이 우세해진 다음의 일입니다. 주자가 이에 대해서 어찌 먼저 ‘유착’을 말하고 뒤에 가서야 살피지 못한 병통을 언급하였겠습니까. 이로 말하자면 ‘일유’의 뜻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말을 정문(正文)의 ‘유’ 자에 붙였으니, 이른바 ‘유소’라는 것도 이 정이 발동하여 성내고 좋아하고 걱정하고 두려워함이 있음을 말한 것뿐입니다. 성현은 말을 하거나 글자를 쓰는 데 있어서 그저 쉽게 설명할 뿐이니, ‘유’ 자를 병통으로 여기는 후세 사람들의 의론과는 같지 않은 듯합니다.”
하니, 선생이 말하기를,
“‘유’ 자가 병통이 되지 않는다면, ‘바름을 얻지 못한다.’는 말은 어떻게 설명해야 뜻이 통하겠는가?”
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심(心)의 미발(未發)은 본디 바르다고 말할 것이 없습니다. 바르지 않음이 있는 까닭은 정이 발동하였는데도 살피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성현으로 말하자면 발하더라도 모두 절도에 맞으므로 바르지 않은 경우가 없지만, 보통 사람들은 이 네 가지가 있는데도 바름을 잃지 않는 경우는 열에 한둘도 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성내거나 좋아하거나 걱정하거나 두려워하면 바름을 얻지 못한다.’라고 대략 말하여, 배우는 사람들이 여기에 대해서 경계할 바를 알고 더욱 잘 살피도록 한 것입니다. 그렇지만 만약 제대로 보지 않는다면, 사람들이 심(心)에 네 가지가 반드시 없어진 다음에야 바름을 얻을 수 있다고 여길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대학장구》에서는 반드시, ‘이 네 가지가 없을 수 없다.’라고 먼저 말하였으며, 《대학혹문》에서는 이것을 가지고 질문을 설정하여, 반드시 미발의 이전으로 근원을 미루어 극력 말하였으니, 그 뜻을 알 수 있습니다. 수신제가장(修身齊家章)의 경우, 《대학혹문》에서 ‘하나라도 향하는 바가 있으면 곧 치우치게 된다.[一有所向 便爲偏倚]’라는 뜻을 밝혀, ‘이 장의 뜻은 바로 위 장을 이은 것이니, 말을 만들고 뜻을 담은 점이 대체로 비슷하다. 자신과 사물이 접한 뒤에야 치우침이 있을 수도 있는 것이지, 한 번이라도 일과 접하면 반드시 치우치게 된다는 말이 아니다.……’ 하였습니다. 이렇게 보면 이 말과 저 말이 호응하여 이 장의 뜻이 더욱 분명해집니다. ‘심에 네 가지가 있게 된 뒤에는 올바름을 얻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라고 한 것이지, ‘이 네 가지가 있으면 반드시 올바르지 못한 데로 빠지게 된다.’라고 말한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유소’라는 글자를 병통으로 보지 않더라도 바름을 얻지 못한다는 뜻에 무슨 해가 되겠습니까?”
하니, 선생은 처음에 그렇지 않다고 여겼으나, 내가 감히 두 번 세 번 반복하자 마침내 오랫동안 깊이 생각하고는,
“자네의 말이 참으로 옳네.”
하였다. 이때 포음(圃陰 김창즙(金昌緝))도 자리에 함께 있었는데, 역시 내 말이 옳다고 여겼다. 내가 여러 해 동안 결정하지 못한 의문이 그제야 풀리게 되었다.

《대학(大學)》 정심장(正心章)의 주(註)에, “그 용(用)이 행하는 바가 혹 바름을 잃지 않을 수 없다.”라고 하였는데, 율곡은 ‘혹(或)’ 자를 의심하여, 욕(欲)이 움직이고 정(情)이 우세하면 그 용(用)은 반드시 올바름을 잃게 되니 ‘혹’ 자를 써서는 안 된다고 여겼다. 그리하여 《성학집요(聖學輯要)》의 이 장을 기록한 부분에는 ‘혹’ 자를 지워버리기까지 하였다. 선생이 말하기를,
“율곡은 너무 촉박하게 문자를 보는 잘못을 저질렀다. 주자의 뜻은 욕이 움직이고 정이 우세해진 뒤에는 그 용이 혹 올바르기도 하고 혹 올바르지 않기도 하다고 말한 것이 아니다. 주자의 뜻은, ‘이 네 가지는 사람의 마음에 원래부터 있는 것이므로 본디 바르지 않음이 없다. 그렇지만 살피지 않아서 욕이 움직이고 정이 우세해지면 혹 어쩔 수 없이 올바름을 잃을 수도 있다.’라고 말한 것일 뿐이다. 여기의 ‘혹’ 자는 바로 위 글의 ‘없을 수 없다.[所不能無]’는 말을 이어 내린 것이니, 말뜻이 매우 완곡하여 촉박하지 않다. 주자의 글은 이와 같은 곳이 매우 많은데, 지금 깊이 살피지 않고 갑자기 의심하였으니 잘못이다. 게다가 선현의 문자에 참으로 의심스러운 부분이 있다면, 소견에 근거하여 논변하는 것은 안 될 것 없지만 이미 쓰인 글을 그만 지워버리는 것은 온당치 못한 듯하다.”
하였다.

《대학(大學)》 수장(首章)의 장구(章句)에, “명명덕(明明德)과 신민(新民)을 모두 지극히 완전한 경지에 머무르고 옮겨가지 않으려 한 것이다.[明明德新民皆欲止於至善之地而不遷]” 하였는데, 선생이 말하기를,
“이 구절의 ‘지(止)’ 자는 본디 ‘지(至)’ 자인데 ‘지(止)’라고 잘못 쓴 것이다. 위 글에, ‘지(止)라는 것은 반드시 여기에 머물러 옮겨가지 않는다는 뜻이다.[止者, 必至於是而不遷之意]’라고 말한 것으로 보아 잘못된 것임을 알 수 있다.”
하고는, 웃으며 말하기를,
“황숙보(黃叔輔 황주하(黃柱河))는 지조를 지키는 데는 남보다 뛰어나지만 글 뜻에 대해서는 매우 둔하다. 일찍이 이러한 뜻을 말해 주었는데 잘 이해하지 못하였다. 그러고는 나중에 와서 말하기를, ‘근래에 와서야 비로소 예전에 잘못 알았다는 것을 퍼뜩 깨닫고서 책을 가져다가 지우고 고쳤습니다.’ 하였다. 그러나 이 또한 경솔한 행동이니, 옛사람이 의심스러운 점을 그대로 후대에 전하였던 방법을 모르는 것이다.”
하였다.

《맹자(孟子)》 사단장(四端章)의 “모두 확대하여 채울 줄 안다.[知皆擴而充之]”라는 구절에 대해 언해(諺解)에서는, “알고서 확충한다.” 하였다. 선생이 말하기를,
“언해가 다 옳은 것은 아니니, 이 풀이도 틀린 듯하다. 맹자의 의도는, ‘사단(四端)이 발할 적에 확대하여 채울 줄 알면 그 기세는 마치 불이 타오르고 샘이 흐르는 것 같아 절로 멈출 수가 없다.’라고 말하려 한 것이다. 그러므로 《맹자집주》에서, ‘모두 이에 나아가 확대하여 채울 줄 안다.[知皆卽此擴而充]’라고 하였으니, 그 뜻을 알 수 있다. 언해의 풀이대로라면, 필시 ‘여기에 나아가 살펴 모두 확충한다.[卽此察識而皆擴充]’ 운운하여, 지(知) 자를 안목(眼目)으로 꺼냈을 것이니, 주자가 정밀하게 주해하는 방법으로 보건대 이렇게 대충 말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맹자(孟子)》에, “백이(伯夷)와 태공(太公)은 문왕이 일어났다는 말을 듣고서, 일어나 ‘어찌 귀의하지 않겠는가.’ 하였다.”라는 구절에 대해, 언해에서는 ‘작흥(作興)’ 두 글자를 한 구로 보고 풀이하였다. 선생이 말하기를,
“이 풀이도 잘못이다. ‘작(作)’은 문왕이 일어난 것이고 ‘흥(興)’은 두 노인이 일어난 것이니, 두 노인이 문왕이 일어났다는 말을 듣고 일어나서 운운한 것이다. 그러므로 주석에, ‘작과 흥은 모두 일어난다는 뜻이다.[作興皆起也]’ 하였으니, ‘개(皆)’ 자를 쓴 데는 이유가 있다. 만약 한 구로 본다면 단지 ‘일어났다[起]’ 하였을 것이며 굳이 ‘모두 일어났다[皆起]’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예전에 들으니 나의 증조 청음(淸陰) 선생이 중국에 사신으로 갔을 때 중원(中原)의 인본(印本)을 보았는데, 모두 ‘작흥’ 두 글자의 사이에 점을 찍어 끊었다고 하였으니, 그 뜻이 분명해진다.”
하였다.

선생이 말하기를,
“김사직(金士直) 유(楺)가 일찍이 말하기를, ‘《예기(禮記)》 증자역책장(曾子易簀章)에서, 「증자왈호(曾子曰呼)」의 호(呼) 자를 주석에서는 탄식하는 소리라고 하였으나 이는 잘못 풀이한 것이다. 동자가 말하기를, ‘화려하고도 깨끗하도다, 대부의 대자리여.’ 하였으나, 증자는 병중이었으므로 분명히 듣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외치라고 한 것이니, 소리를 높여 말하도록 한 것이다. 그리하여 동자가 또 말하기를, ‘화려하면서도 밝도다, 대부의 대자리여.’ 하고, 그런 다음에야 증자가 말하기를, ‘계손(季孫)이 하사한 것인데, 내가 미처 바꾸지 못하였다.……’ 한 것이다. 그 위아래의 말뜻은 곡절이 이와 같다. 그렇지 않다면 ‘호’ 자가 붙을 곳이 없고, 동자가 거듭 ‘「대부의 대자리」라고 한 것도 중복되어 의미가 없다.’ 하였으니, 이 말이 참으로 옳다.”
하였다.

선생이 일찍이 묻기를,
하기에, 나는,
“제갈량이 아직 살아 있는 줄로 알았고 이미 죽은 줄 몰랐다는 말입니다.”
하니, 선생이 웃으며 말하기를,
“그렇게 보면 너무 맛이 없다. 사람들은 사마의가 이미 죽은 제갈량을 겁냈다고 비웃었는데, 사마의가, ‘그가 살아 있는 줄로 알고 그랬다.’라고 한다면 그것이 어찌 겁낸 것을 변명하는 말이겠는가. 이것은, ‘나는 살아 있는 제갈량은 헤아릴 수는 있지만 죽은 제갈량은 헤아리지 못한다.’라고 한 말이다. 이것은 그가 궤변으로 남을 속이며 자신의 지혜를 자랑하려는 뜻이다. 내가 옥당에 있을 때 상공(相公) 김사긍(金士肯 김구(金構))이 숙직하면서 학사들과 이를 논하였는데, 김공의 소견이 나와 같았다. 그러나 사람들에게 반박을 당하여 논쟁이 끝나지 않았기에 마침내 나에게 물어 왔다. 내가 이렇게 대답하니 어떤 사람은 옳다 하고 어떤 사람은 옳지 않다 하였는데, 김공은 매우 만족해하였다.”
하였다.

선생이 제생에게 앞에서 《강목(綱目)》을 읽도록 하였는데, 온공(溫公)이 지백(智伯)을 논한 부분에 이르자,
“이 말은 어떠한가?”
하니, 학생들이 각자 대답하였다. 선생이 말하기를,
“그의 논의는 병통이 있음을 면하지 못하였다. ‘정직중화(正直中和)’는 분명히 덕이다. 그렇다고 ‘총찰강의(聰察剛毅)’는 덕이 아니란 말인가? ‘총찰강의’를 재주라고 하면서, ‘재주가 덕보다 많으면 소인이 된다.’ 하였으니, ‘총찰’은 간혹 병통이 될 수도 있겠지만 ‘강의’가 지나친 사람이 어떻게 소인이 되겠는가. 재주와 덕이 모두 없는 사람은 바보라고 해도 될 것이다. 그런데 도리어, ‘소인을 얻기보다는 차라리 바보를 얻는 것이 낫다.’ 하였다. 소인은 덕이 없기는 하지만 그의 재주는 그래도 무슨 일을 할 만하다. 재주와 덕이 모두 없는 자를 어디다 쓰겠는가. 이것은 억양이 지나치게 치우친 경우이다.”
하였다.

선생이 일찍이 말하기를,
“나는 주자의 《강목(綱目)》의 강(綱)을 써서 한 책으로 만들어 보려고 하였다. 그 필법을 살펴보니 매우 좋은 데다가 그 강을 보고서 목(目)의 사실을 생각해 보면 기억하는데 도움이 되기 때문이었다.”
하였다.

선생이 일찍이 한유의 〈대우문(對禹問)〉을 읽고는 나 유봉에게 묻기를,
“이것과 맹자의 말을 비교하면 어떠한가?”
하기에, 내가 대답하기를,
“한유의 글은 지나치게 계산적이니, 성인의 마음 씀씀이가 아닌 듯합니다. 맹자는 오로지 천명을 따르고 사심이 없었으니, 성인의 마음을 진정으로 터득한 것입니다.”
하니, 선생이 매우 옳다고 여겼다.

선생이 일찍이 한유의 〈상재상서(上宰相書)〉를 읽고 말하기를,
광범(光範)의 상서(上書)가 한자(韓子)에게 누가 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지금 그 글 뜻을 보니, 비단 추위와 굶주림을 두려워하여 녹봉을 구한 것만은 아니다. 벼슬을 얻어 세상에 큰일을 하고자 하였던 것이니, 지나치게 비난할 필요는 없을 듯하다.”
하였다.

선생이 말하기를,
“나는 한유가 지은 비문을 많이 읽은 적이 없다. 다만 〈평회서비(平淮西碑)〉와 〈서언왕묘비(徐偃王廟碑)〉는 수백 번이나 읽었다.”
하였다.

선생이 《오자수언(五子粹言)》을 초록할 때 나 유봉이 묻기를,
“한자(韓子)의 〈원도(原道)〉 첫 구절은 선유(先儒)들이 병통으로 여겼는데, 지금 초록하신 까닭은 무엇입니까?”
하니, 선생이 말하기를,
“정자(程子)는 그가 정(情)을 가리켜 성(性)이라 한 잘못을 논하기는 했으나 사랑을 인(仁)이라고 하여 전체적으로는 옳으니 어찌 버릴 수 있겠는가.”
하였다.

《오자수언》이 완성되자 선생이 말하기를,
“읽어 보니 매우 좋다.”
하고, 또 말하기를,
“문중자(文中子)는 《논어》와 비슷하고 한자는 《맹자》와 비슷하다.”
하였다.

선생이 한번은 나를 위해 손수 주자의 〈재거감흥(齋居感興)〉 시를 써 주고는 이어서, “그대는 이 시의 각 편이 무슨 내용인지 이해할 수 있느냐?”라고 묻고 제4장을 가리키며 말하기를,
하기에, 내가 대답하기를,
“이것은 먼저 목왕(穆王)의 일을 논하고, 이어서 소왕(昭王) 이하 역대의 쇠퇴하고 어지러운 시대의 군주들에 대해 말한 것입니다.”
하니, 선생이 말하기를,
“그렇지 않다. 이 장은 인심이 형체의 부림을 받아 내달리면 끝이 없다는 뜻을 말하고, 목왕이 온 세상을 돌아다니고자 하였던 일로 이 점을 밝힌 것이다. ‘만약에 〈기초(祈招)〉 시가 없었더라면 서방(徐方)이 천자 자리 차지했으리.’라고 한 구절도 인심이 방종한데도 돌이키지 않으면 인욕이 그 틈을 타서 주인이 된다고 말한 것이다.”
하였다. 제10장에 이르자 또 묻기를,
“이 구절은 방훈(放勛 요(堯))의 일을 말하였는데, ‘남쪽을 향해서도 공손하였네.’라고 한 것은 어째서인가?”
하니, 내가 대답하기를,
“‘남쪽을 향해서도 공손하였네.’라고 한 것은 순(舜)을 가리킨 듯합니다. 요(堯)의 흠(欽)과 순의 공(恭)이 서로 전수한 심법(心法)이라는 것입니다.”
하니, 선생이 그렇다고 하였다.

선생이 한번은 도봉서원(道峯書院)에 가서는 며칠 동안 머물렀는데 따르는 문인들이 매우 많았다. 하루는 수락산(水落山)에 있는 매월당(梅月堂)의 영당(影堂)을 방문하자, 김도이(金道以 김시좌(金時佐))가 묻기를,
“저희들이 함께 이 사람을 배알하는 것은 온당치 않은 일이 아닙니까?”
하니, 선생이 말하기를,
“그가 머리를 깎고 모습을 바꾸었다고 하여 그렇게 말하는 것인가? 그대는 한유의 글에서 ‘묵가의 이름에 선비의 행실[墨名儒行]’이라는 말을 읽지 못하였는가? 이 사람이 비록 자취는 불문(佛門)에 부쳤으나 뜻은 명교(名敎)에 있었기에 수립한 바가 탁월하였으니 어찌 배알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고, 마침내 제생들을 데리고 매우 공경히 예를 행하였다.

선생이 녹천(鹿川)의 만향정(晩香亭)에 머물러 있을 적의 일이었다. 나와 김순행(金純行)이 선생을 모시고 도봉산에 갔다가 저녁에 돌아오는 길에 말 위에서 홍인보(洪仁甫 홍유인(洪有人))가 지은 〈곡운(谷雲) 매월당(梅月堂)의 터에서〉라는 시의 내용이 무엇이냐고 묻기에, 내가 그 시를 외우기를,
매월당 유허에는 짧은 탑 기울었는데 / 梅月遺墟短塔傾
봄 산에는 아직도 푸른 고사리 돋았네 / 春山猶有綠薇生
지척이라 은거지 지나가노라니 / 幽居咫尺相經過
흐르는 물 돌아가는 구름 만고의 정이로세 / 流水歸雲萬古情
하니, 선생이 두세 번 읊조리며 매우 좋다고 하였다.

이현익(李顯益) 중겸(仲謙)이 여러 차례 문목(問目)으로 선생께 질문하여 자주 인정을 받았다. 선생께서 나 유봉에게 말하기를,
“중겸은 요사이 강론하는 것이 더욱 정밀하고 부지런하다. 한번 크게 진보할 듯하지만, 다만 그가 배운 내용을 뽑아 기록한 것이 너무 많은 것 같다.”
하였다.

선생께서 일찍이 백향산(白香山 백거이(白居易))의 고시를 초록하고 회암(晦菴)의 시를 덧붙여 한 책으로 만들었다. 이위(李瑋) 백온(伯溫)이 그것을 보고 백향산의 시는 격이 매우 낮다고 하니, 선생께서 웃으며 말하기를,
“그렇지 않다. 지극히 높은 점이 있다.”
하였다.

서원의 제생 가운데 조지(朝紙)를 보자고 청하는 이가 있으면 선생은 좋아하지 않으면서,
하였다.

선생이 말하기를,
“예로부터 성현의 출처는 두 가지 길이 있었다. 이윤(伊尹), 여상(呂尙)의 출처와 같은 경우가 있으니, 이는 이른바 ‘영달하여 천하에 행할 수 있게 된 뒤에야 움직이는 사람’이다. 그리고 공자의 출처와 같은 경우가 있으니, 이는 가축을 기르는 일을 맡은 관리나 창고의 출납을 맡은 관리가 되더라도 처한 상황에 따라 도를 다하는 사람이다. 우리나라의 선유(先儒)들 중에 성우계(成牛溪)와 송우암(宋尤菴)은 이윤과 여상의 출처와 같고, 김한훤(金寒暄)과 김사계(金沙溪)는 공자의 출처와 같다.”
하였다.

한번은 내가 석실에 가서 뵙고자 하였는데, 선생은 병을 앓고 있었기에 다음날 아침에 만나자고 전하였다. 그러고는 정리되지 않은 한 묶음의 차록(箚錄) 초고를 전해 주며, 찬찬히 읽어 보고 만나게 되거든 자세히 토론하자고 하였다. 내가 그것을 받아 살펴보니, 선생이 퇴계와 율곡의 사단칠정설을 변론한 글이었다. 선생의 생각으로는, 율곡이 이기(理氣)의 원두(原頭)에 대해서는 분명하고 투철하게 보았지만 인심과 도심 따위를 논한 부분은 조금 어긋난 부분이 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퇴계의 이기호발설은 잘못되기는 하였으나 깊이 생각하고 자세히 풀어내어 스스로 터득한 점이 많으니, 모두 배척할 수는 없다는 생각이었다. 그리하여 두 사람의 주장을 종합하였는데, 이리저리 살피고 잘잘못을 끝까지 따진 것이 거의 수십여 조목에 이르렀으며, 전현(前賢)이 드러내지 못했던 점이 많았다. 이튿날 찾아가 뵙고는 대략 여쭙고 돌아왔다. 또 유집(遺集)을 간행할 때 나는 그것을 잡지(雜識)에 엮어 넣고자 하였으나, 포음(圃陰 김창즙(金昌緝))은 논쟁을 야기할까 염려되니 일단 훗날을 기다리는 것이 낫다고 하였다. 그 초고는 참의 김제겸(金濟謙)의 집에 보관되어 있다. 내가 한 부를 베껴 두려다가 결국 그렇게 하지 못하였는데, 김언겸(金彦謙) 제군(諸君)이 혹시 따로 기록해 둔 것이 있는지 모르겠다. 만약 그러지 못하고서 큰 화란을 겪느라 모든 것이 사라지고 흩어졌을 때 원래의 초고를 보존하지 못하였다면 실로 천고의 한이 될 것이다. 그렇지만 물어볼 곳이 없기에 일단 이렇게 적어 기록해 둔다. - 이 이야기는 뒤에 오대준(吳大濬) 중심(仲深)에게서 듣고 기록한 것이다. -

[주D-001]자주 …… 이해한다 : 《순자(荀子)》 〈권학(勸學)〉에, “온전히 하고 다한 뒤에야 학자이다. 군자는 온전하지 않고 순수하지 않은 것이 아름답지 않다는 것을 안다. 그러므로 자주 읽어서 내용을 꿰고, 깊이 생각하여 뜻을 이해한다.”라는 말이 보인다.
[주D-002]스스로 속인다 : 《대학장구(大學章句)》 전 6장에 “스스로 속임이 없어야 하니, 마치 악취를 싫어하고 미인을 좋아하는 것처럼 해야 한다. 이를 스스로 만족한다고 이른다.[毋自欺也 如惡惡臭 如好好色 此之謂自謙]”라는 구절이 있다.
[주D-003]정에 …… 본다 : 이이(李珥)의 〈기대학소주의의(記大學小註疑義)〉에 보인다. 《栗谷全書 卷14, 韓國文集叢刊 44輯》
[주D-004]실천하고서도 만족하지 못한다 : 《맹자(孟子)》 〈공손추 상(公孫丑上)〉 호연지기장(浩然之氣章)에, “호연지기는 의가 축적되어 생기는 것이다. 의가 갑자기 엄습하여 취해지는 것은 아니니, 실천하고서도 마음에 만족하지 못하는 바가 있으면 굶주리게 된다.” 하였다.
[주D-005]파양 심씨(番陽沈氏) : 대본은 ‘潘陽沈氏’인데, 한국문집총간 184집에 수록된 《기원집(杞園集)》 권32 〈농암선생어록(農巖先生語錄)〉에 의거하여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06]성인은 …… 둔다 : 이는 정이(程頤)가 한 말이다. 《이정유서(二程遺書)》 권21 〈부사설후(附師說後)〉에, “《서경》에 ‘천서(天叙)’, ‘천질(天秩)’이라 하였는데, 하늘에 이러한 이(理)가 있어 성인이 그것을 따라 행한다. 성인은 하늘에 근본을 두고 석씨는 마음에 근본을 둔다.” 하였다.
[주D-007]의기(義起) : 고유한 예법이 적합하지 않을 경우 개인의 의견에 따라 새로운 예법이나 기준을 창작하는 것을 말한다.
[주D-008]회초리로 …… 도리 : 순 임금이 어버이를 모실 적에 회초리로 때리면 맞고, 몽둥이로 때리면 도망하였는데, 이는 불효가 아니라고 한 말에서 인용한 것이다. 《後漢書 卷52 崔駰列傳》
[주D-009]충기(冲氣) : 하늘과 땅 사이의 잘 조화된 기운을 말한다.
[주D-010]소학(小學)에 …… 운운하였다 : 《소학》 〈가언(嘉言)〉에 《안씨가훈》을 인용하여, “강동의 부녀는 전혀 교유가 없어 혼인한 가문이라도 십수 년 동안 알지 못하는 경우가 있었다. 오직 편지와 물건을 보내어 은근한 뜻을 전한다. 업하의 풍속은 오로지 부녀로 하여금 문호를 유지하게 하니, 옳고 그름을 따지고 남을 만나러 가거나 맞이하며, 자식 대신 관직을 구하고 남편을 위해 억울한 일을 하소연하니, 이는 항(恒)과 대(代)의 유풍일 것이다.”라는 말이 보인다.
[주D-011]연단(燕丹)의 일 : 연단은 연나라 태자 단을 말한다. 그는 후궁의 미녀들을 좋아하지 않고 선비들을 결속하였다고 한다.
[주D-012]형기(形氣)에서 …… 근원한다 : 《중용장구(中庸章句)》 서문에, “심의 허령한 지각은 하나일 따름인데 인심과 도심의 차이가 있다고 한 것은, 사사로운 형기에서 생기기도 하고 올바른 성명에 근원을 두고 있기도 하므로 지각하는 것이 같지 않아서이다.”라는 말이 보인다.
[주D-013]무극(無極)의 …… 화생(化生)한다 : 주돈이(周敦頤)가 지은 〈태극도설(太極圖說)〉에 있는 내용이다.
[주D-014]오고(五誥) : 대고(大誥), 강고(康誥), 주고(酒誥), 소고(召誥), 낙고(洛誥)를 말한다.
[주D-015]더 잘 …… 없다 : 《중용장구(中庸章句)》 제1장에, “어두운 곳보다 더 잘 보임이 없으며 작은 일보다 더 잘 드러남이 없으므로 군자는 남모르는 곳에 홀로 있을 때를 삼가는 것이다.”라는 말이 보인다.
[주D-016]마치 …… 같다 : 《대학장구(大學章句)》 전 6장에, “소인은 홀로 있을 때 선하지 않은 짓을 하되 이르지 못하는 바가 없다가 군자를 본 뒤에야 슬쩍 불선을 감추고 선을 드러내지만, 남들이 자기를 보는 것은 마치 폐와 간을 보는 듯하니,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라는 말이 보인다.
[주D-017]보이지 …… 두려워하라 : 《중용장구》 제1장에, “도라는 것은 잠시도 떨어질 수 없으니 떨어질 수 있으면 도가 아니다. 그러므로 군자는 보이지 않는 것을 조심하고 들리지 않는 것을 두려워한다.”라는 말이 보인다.
[주D-018]남들은 …… 곳 : 《중용장구》 제1장의 주에, “독(獨)은 사람들은 알지 못하고 자기만 아는 곳이다.”라는 말이 보인다.
[주D-019]주자는 …… 하였다 : 《회암집(晦菴集)》 권14 〈행궁편전주차(行宫便殿奏劄)〉에, “학문을 하는 방법은 궁리보다 앞서는 것이 없고, 궁리의 요점은 반드시 독서에 있으며, 독서의 방법은 순서에 따라 정밀하게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정밀하게 하는 근본은 거경과 지지에 있으니, 이것은 변경할 수 없는 이치이다.”라는 말이 보인다.
[주D-020]주자는 …… 않았다 : 《맹자(孟子)》 〈진심 상(盡心上)〉에, “군자가 가르치는 방법이 다섯 가지이니, 단비가 만물을 화육시키는 것과 같은 경우가 있고, 덕을 이루게 한 경우가 있고, 재주를 통달하게 한 경우가 있고, 물음에 답한 경우가 있고, 사사로이 선으로 다스린 경우가 있으니, 이 다섯 가지가 군자가 가르치는 방법이다.” 하였는데, 이 중 ‘물음에 답한 경우[有答問者]’에 대해 주석에서는, “공자와 맹자가 번지와 만장에 대해서 한 것과 같다.”라고 설명하였다.
[주D-021]설 문청(薛文淸)의 말 : 문청은 명나라 이학가(理學家)인 설선(薛瑄)의 시호이다. 자는 덕온(德溫) , 호는 경헌(敬軒)이다. 학문은 정ㆍ주(程朱)에 근본하여 복성(復性)으로 주관을 삼았다. 그는 《독서록(讀書錄)》에서, 후세의 학자들이 함부로 한유를 비판하지만, 한유에 대한 비판은 주자(周子), 정자(程子), 장자(張子), 주자(朱子)라야 할 수 있다고 하면서 한유의 공로를 극력 칭송하였다. 《讀書錄 卷3》
[주D-022]인심과 …… 된다 : 한국문집총간 44집에 수록된 《율곡전서(栗谷全書)》 권9 〈답성호원(答成浩原)〉에 보인다.
[주D-023]관대함과 강인함 : 《논어(論語)》 〈태백(泰伯)〉에, “증자가 이르기를, ‘선비는 관대하고 강인하지 않아서는 안 되니, 임무는 무겁고 길은 멀기 때문이다.’ 하였다.”라는 구절이 보인다.
[주D-024]정자(程子)는 …… 여겼다 : 《논어집주(論語集註)》 〈자한(子罕)〉 제29장의 주석에, “정자가 이르기를, ‘한나라 유자들은 상도를 어기고 의리에만 부합하는 것을 권이라 하였으므로 권변(權變), 권술(權術)의 논의가 있었으나 모두 잘못이다. 권은 경일 뿐이다. 한나라 이후로 권 자의 뜻을 아는 이가 없었다.’ 하였다. 내가 생각하기에, 선유들은 이 장을 아래 글의, ‘편기반(偏其反)’과 이어 한 장으로 삼았으므로 반경합도의 설이 있었던 것인데, 정자가 잘못이라 하였으니 그 말은 옳다. 그러나 형수가 물에 빠지면 손으로 구해 준다는 맹자의 말로 미루어 보자면 권과 경은 분별이 있어야 한다.”라는 말이 보인다.
[주D-025]경은 …… 경이다 : 《주자어류(朱子語類)》 권37에 보인다.
[주D-026]도를 …… 줄어든다 : 《노자(老子)》 제48장에, “학문을 하면 날로 더해지고, 도를 하면 날로 줄어든다.[爲學日益 爲道日損]”라는 말이 보인다.
[주D-027]40년 …… 물러났다 : 황정견(黃庭堅)의 〈유응지의 화상을 배알하며[拜劉凝之畫像]〉라는 시에, “누가 사십 년 동안 이 청정함을 지켜 물러났던가.[誰能四十年 保此淸淨退]”라는 구절이 보인다. 《山谷集 卷7》
[주D-028]혜아광명(惠我光明) : 주자의 〈장서각서주자호명(藏書閣書厨字號銘)〉에 나오는 구절이다. 《晦菴集 卷85》
[주D-029]정자(程子)가 …… 하였다 : 《논어》 〈서설(序說)〉에 보인다.
[주D-030]계자연(季子然)이 …… 장 : 《논어》 〈선진(先進)〉 22장에, 계자연이 묻기를, “중유와 염구는 대신이라 일컬을 수 있습니까?” 하는 구절이 보인다.
[주D-031]기묘년에 과옥(科獄) : 1699년(숙종25) 증광 문과 복시 때 여러 가지 부정이 발각되어 일어난 과옥으로 흔히 기묘과옥으로 불린다. 합격자 33명 중 15명이 부정으로 합격되어 전원 합격이 취소되고 시관을 비롯한 10여 명이 절도에 유배되었다.
[주D-032]정관재(靜觀齋)가 …… 변증하였다 : 정관재 이단상이 역법을 논하면서, “673분(分) 외에 또 신분(新分)을 이어 940분을 채우면 하루가 된다.”라고 한 부분에 대하여 농암이, 기영(氣盈)과 삭허(朔虛)가 분한(分限)이 같아지기 전에는 신분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변증하였다. 《靜觀齋集 卷13 答李趙兩生》 《農巖集 卷26 靜觀齋集論七閏爲一章書考證》
[주D-033]유소(有所) : 《대학장구》 전 7장에, “마음에 성내는 바가 있으면 바름을 얻지 못하고, 두려워하는 바가 있으면 바름을 얻지 못하며, 좋아하는 바가 있으면 바름을 얻지 못하고, 근심하는 바가 있으면 바름을 얻지 못한다.[心有所忿懥 則不得其正 有所恐懼 則不得其正 有所好樂 則不得其正 有所憂患 則不得其正]”라는 말이 보이는데, 이 대본에 보이는 ‘유소(有所)’를 가리킨다.
[주D-034]일유(一有) : 《대학장구》 전 7장의 주석에, “하나라도 있는데 살피지 못하면, 욕이 움직이고 정이 우세하여 그 용이 행하는 바가 올바름을 잃지 않을 수 없다.[一有之而不能察 則欲動情勝 而其用之所行 或不能不失其正矣]”라는 말이 있는데, 이 대본에 보이는 ‘일유(一有)’를 가리킨다.
[주D-035]이 네 …… 없다 : 《대학장구》 전 7장의 주석에, “이 네 가지는 모두 마음의 용이니 사람에게 없을 수 없는 것이다.[蓋是四者 皆心之用 而人所不能無者]” 하였다.
[주D-036]대학혹문에서 …… 아니다 : 《대학장구》 전 8장의 주석에, “보통 사람의 정은 향하는 대로 가고 살피지 않으니, 반드시 한쪽으로 치우쳐 몸이 닦여지지 않을 것이다.”라는 구절이 보인다. 이에 대해 《대학혹문》에서는, “이제 ‘하나라도 향하는 바가 있으면 곧 치우치게 되어 몸이 닦여지지 않는다.’라고 한다면, 반드시 사물을 접할 때 이 마음에 아무런 친소의 등급과 귀천의 구별이 없은 다음에야 치우침을 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마음이 바르게 되었으면 몸이 닦여지지 않음이 없는 것이 마땅한데, 이제 도리어 이처럼 치우친다고 하는 것은 어째서인가? 그렇지 않다. 이 장의 뜻은 바로 위 장을 이은 것이니, 말을 만들고 뜻을 담은 점이 대체로 비슷하다. 자신과 사물이 접한 뒤에야 치우침이 있을 수도 있는 것이지, 한 번이라도 일과 접하면 반드시 치우치게 된다는 말이 아니다.[今曰 一有所向 便爲偏倚 而身不脩 則是必其接物之際 此心漠然都無親疎之等貴賤之別 然後得免於偏也 且心既正矣 則宜其身之無不脩 今乃猶有若是之偏 何哉 曰不然也 此章之義 實承上章 其立文命意 大抵相似 蓋以爲身與事接 而後或有所偏 非以爲一與事接 而必有所偏]”라고 설명하였다.
[주D-037]그 용(用)이 …… 없다 : 《대학장구》 전 7장의 주석에, “이 네 가지는 모두 마음의 용이니 사람에게 없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라도 있는데 살피지 못한다면 욕이 움직이고 정이 우세하여 그 용이 행하는 바가 어쩔 수 없이 바름을 잃기도 한다.[蓋是四者 皆心之用 而人所不能無者 然一有之而不能察 則欲動情勝 而其用之所行 或不能不失其正矣]” 하였다.
[주D-038]모두 …… 안다 : 《맹자(孟子)》 〈공손추 상(公孫丑上)〉에, “나에게 있는 사단을 모두 확대해 나가서 채울 줄 알면 마치 불이 처음 타오르고 물이 처음 흐르는 것과 같다.[凡有四端於我者 知皆擴而充之矣 若火之始然 泉之始達]”라는 말이 보인다.
[주D-039]언해(諺解)에서는 …… 하였다 : 《맹자언해(孟子諺解)》에서는 ‘지개확이충지의(知皆擴而充之矣)’를, ‘지(知)하야 다 확(擴)야 充면’이라고 풀이하였다.
[주D-040]백이(伯夷)와 …… 하였다 : 《맹자》 〈진심 상(盡心上)〉에 나오는 내용이다.
[주D-041]언해에서는 …… 풀이하였다 : 《맹자언해》에서는 ‘문문왕작흥(聞文王作興)’을, ‘문왕(文王)의 작흥(作興)홈을 듣고’라고 풀이하였다.
[주D-042]나는 …… 못한다 : 제갈량이 사마의와 대치하다가 군중에서 죽자, 촉군은 철수를 시작하였는데, 사마의가 그 소식을 듣고 추격하다가 제갈량의 장수 강유(姜維)의 계책에 말려들어 후퇴하였다. 백성들이 이 일을 두고, “죽은 제갈량이 산 사마의를 달아나게 하였다.”라는 말로 사마의가 겁이 많다고 비꼬자, 그가 대답한 말이다. 《資治通鑑 卷72》
[주D-043]온공(溫公)이 …… 부분 : 지백(智伯)은 춘추 시대 진(晉)나라의 대신인데, 조양자(趙襄子)를 멸망시키려다 도리어 패하여 죽고 말았다. 사마광(司馬光)은 《자치통감》에 이 사건에 대한 논찬(論贊)을 남겼는데, “총찰강의(聰察强毅)를 재주라 하고, 정직하고 화평한 것을 덕이라 한다.……그러므로 재주와 덕이 모두 지극하면 성인이고 재주와 덕이 모두 없으면 바보이다. 덕이 재주보다 우세하면 군자이고, 재주가 덕보다 우세하면 소인이다. 사람을 취하는 방법은 성인과 군자를 얻어 함께할 수 없을 경우, 소인을 얻기 보다는 바보를 얻는 것이 낫다.”라고 하였다. 《資治通鑑 卷1》
[주D-044]광범(光範)의 상서(上書) : 《한창려집(韓昌黎集)》 권16에 실린 〈상재상서(上宰相書)〉를 가리킨다. 광범(光範)은 선정전(宣政殿) 서남쪽에서 중서성(中書省)으로 통하는 문인데, 이 글에, “삼가 광범문 아래 엎드려 재배하고 상공 합하께 글을 바칩니다.”라는 구절이 있으므로 이렇게 말한 것이다.
[주D-045]그대는 …… 것 : 주자의 〈재거감흥(齋居感興)〉 20수 중 제4수에, “그대여 목천자를 한번 보게나, 만리에 수레바퀴 돌아다닐 판, 만약에 〈기초(祈招)〉 시가 없었더라면 서방이 천자 자리 차지했으리.[君看穆天子 萬里窮轍迹 不有祈招詩 徐方御宸極]”라는 구절이 보인다. 《晦菴集 卷4》
[주D-046]남쪽을 향해서도 공손하였네 : 〈재거감흥(齋居感興)〉 20수 중 제10수에, “방훈은 처음부터 공경하였고 남쪽을 향해서도 공손하였네.[放勛始欽明 南面亦恭己]”라는 구절이 보인다.
[주D-047]묵가의 …… 행실 : 한유의 〈송부도문창서(送浮屠文暢序)〉에 보인다.
[주D-048]하루라도 …… 하리 : 제목(除目)은 관원의 인사를 기록한 문서이다. 이 시는 요합(姚合)의 〈무공현중작(武功縣中作)〉 30수 중 제8수에 보인다. 《요소감시집(姚少監詩集)》에는 ‘三年’이 ‘終年’으로 되어 있다. 《姚少監詩集 卷5》
[주D-049]영달하여 …… 사람 : 《맹자》 〈진심 상(盡心上)〉에, “천민(天民)인 자가 있으니, 영달하여 도를 천하에 행할 수 있게 된 뒤에야 움직이는 사람이다.”라는 말이 보인다.

 
 농암집 별집 제2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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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록(附錄) 1
제문 [김담(金墰)]

문인 김담(金墰)

아, 선생의 올바른 도학과 성대한 문장을 내가 어찌 감히 논할 수 있겠는가. 선생은 화변을 당한 뒤로 결국 산림에 자취를 감추고 세상에 뜻을 버렸다. 한가로이 소요하면서 나무와 바위를 이웃으로 삼고, 경전을 깊이 파고들며 후학 양성을 임무로 삼았다. 원근의 수많은 선비들이 책 상자를 지고 모여들었으니, 비록 나처럼 비할 데 없이 어리석은 이조차 제자의 반열에 들어간 지 이제 10여 년이 되었다. 선생은 형편없는 나를 불쌍히 여겨 부지런히 이끌고 가르쳤으며, 어둡고 막힌 것을 걷어 내도록 간절히 깨우쳐 주었다. 그러나 기질이 나약하고 뜻이 비속하여 과거 공부의 속박을 벗어 버리지 못한 채 그저 범범하게 지내느라 하루라도 맹렬히 힘써서 가르치신 말씀의 만에 하나라도 따랐던 적이 없다. 그리하여 스스로 생각할 때 나는 훌륭한 군자의 문하를 출입하면서도 예전 그대로 머물러 있어 내가 선생을 크게 저버렸다.
아, 슬프다. 지난해 가을에 노원(蘆原)의 처소로 찾아뵈었다가 사장(詞章)의 학문에 대해 이야기하게 되었는데, 선생은 손수 《창계집(滄溪集)》을 꺼내어 긴 편지 한 통을 직접 읽고 말하기를,
“한갓 사장만 숭상하는 세상 사람들이 어찌 여기에 미칠 수 있겠는가. 그대들은 나를 따른 지 오래되었는데 도대체 무슨 일을 이루었는가. 이곳은 조용하니 강론에 전념할 수가 있다. 또 여기서 도봉서원(道峯書院)이 10리도 되지 않으니, 만약 서원에 와서 머무른다면 아침저녁으로 오갈 수 있을 것이다. 그대는 이렇게 할 생각이 있는가?”
하였다. 그러나 나는 마침 일이 있어 결국 성의를 저버리게 되었다. 올봄에 선생을 찾아가 한참 동안 모시며 가르침을 받았는데 즐겁고 편안해 보였기에 마음속으로 기뻐하며, ‘선생의 모습이 이전보다 나아졌으니, 사람들을 대하는 데 어려움이 없을 것이다. 올가을에는 문하에 머물면서 노원에서 하신 말씀을 따라야겠다.’라고 생각하였다. 그런데 작별하고 물러난 지 한 달도 되지 않아 선생이 세상을 버릴 줄 생각이나 하였겠는가.
아, 슬프다. 선생과 같이 덕 있고 어진 이라면 마땅히 장수를 누려야 하거늘, 온갖 재앙에 얽매인 데다 수명까지 짧았으니, 하늘은 어찌 이다지도 잔인하단 말인가. 태산이 무너지고 철인(哲人)이 쓰러지니 사림은 피폐해지고 사문은 양구(陽九)의 액운을 당하였다. 어두운 길을 더듬으며 헤매도 갈 곳을 모르겠으니 애통하기 그지없구나. 이제 고택을 찾아왔으나 선생의 그 모습은 영원히 사라지고 말았다. 도서는 적막하고 정원은 황량한데 목이 메어 통곡하며 영결하니, 어둡지 않은 영령이 있다면 작은 정성을 살펴 주소서.
 
 농암집 제36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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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록(附錄)
연보 하(年譜下)


갑술년(1694, 숙종20) 선생 44세
○ 1월에 봉인사(奉印寺)에 머물렀다.
이 절은 양주(楊州)에 있다. 이때에 모친이 영평(永平)에서 양산(楊山)의 묘사(墓舍)로 나와 거처하였는데, 선생이 늘 왕래하며 문안하였다. 이후로 수년 동안은 대부분 이 절에서 독서하였다고 한다.
○ 4월에 호조 참의에 제수되었으나 상소하여 사정을 아뢰고 사직하였다.
이때에 흉악한 무리가 쫓겨나고 왕비가 복위되었으며, 상이 특명으로 의정공(議政公 김수항(金壽恒))의 관작을 회복시키고 이러한 제명(除命)을 내렸다. 그러나 선생은 상소하여 사직하였는데, 그 대략에,
“신은 천지 사이의 일개 죄인으로 그 불효한 죄가 위로 하늘까지 알려진 지가 이미 오래되었는데, 오늘에 와서 보니 속죄할 길이 없음을 더욱 잘 알겠습니다. 옛날 제영(緹縈)은 일개 여자였는데도 한 통의 편지로 임금의 마음을 감동시켜 아비를 형벌에서 구제하였고, 전횡(田橫)의 식객들은 혈육의 은정이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의기 하나로 뭉친 사이였는데도 죽기를 주저하지 않고 지하에까지 따라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신은 선신이 화를 당할 때에 나아가서는 대궐 문에 머리를 짓찧으며 아비를 살려 달라고 빌지 못하고 물러나서는 또 칼에 엎어져 함께 죽지 못하였으니, 이는 남자의 몸으로 일개 연약한 여자만도 못하고 부자간의 은정으로 도리어 의리로 뭉쳐 추종하는 식객만도 못한 것입니다.
그리고 옛날 제(齊)나라 여자가 하늘을 향해 통곡하자 궁전에 폭풍이 몰아치고 연(燕)나라 신하가 통곡하자 한여름에 된서리가 내렸습니다. 정성이 지극하면 위로 하늘에까지 사무쳐 재변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신은 외진 산골로 달아나 통한을 참고 구차히 살면서 한 번도 지성으로 분발해서 천지신명을 감동시켜 총명하신 성상께서 한번 깨달아 주시기를 바라지도 못하고 부질없이 세월만 보내며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지극히 인자하고 명철하신 전하가 아니었다면 신은 비록 늙어 죽어 시체가 골짜기에 버려지더라도 끝내 선신의 원통한 사연을 밝혀 죄인의 명부(名簿)에서 이름을 지우지 못했을 것이니, 예로부터 자식으로서 불효했던 자를 통틀어 보더라도 어찌 또 신처럼 심한 경우가 있었겠습니까.
신에게는 마음속에 더욱 통탄스러운 점이 있습니다. 선신이 조정에 섰던 40년 동안 임금을 섬기고 스스로 처신했던 법도와 나라를 근심하고 공무를 봉행했던 절개는 그 전말이 잘 알려져 있으니 다시 진술할 것이 없습니다. 다만 선신은 조심하고 삼가서 권세와 지위를 자처하지 않고 겸손과 검약으로 시종일관하였으니, 귀신의 시기와 인도(人道)의 화를 자초했을 까닭이 없습니다. 그러나 신의 형제는 한 가지 덕행과 재능도 없으면서 연줄을 타고 요행히 기회를 만나서 연달아 조정에 올라 청현직(淸顯職)을 지내고 급작스레 하대부(下大夫)의 반열에 올라 영광과 총애가 눈부시게 빛나서 세상 사람들의 지목을 받았습니다. 그런데도 신들은 ‘능력이 못 미치는 자리에 있으면 화를 부른다.’는 경계와 ‘분수에 만족하라.’는 교훈을 생각지 않고 미련하게 나아가서 높은 자리에 오르도록 물러날 줄을 몰랐습니다. 그리고는 마침내 가득 차서 기우는 재앙이 선신에게만 미치게 하고 신은 요행히 그 화를 면하였으니, 불효가 이보다 더 클 수는 없습니다. 신은 늘 생각이 이에 미칠 때마다 부끄럽고 원통하여 식은땀과 눈물이 함께 흐르지 않은 적이 없습니다. 그리하여 영원히 농부로 살다 죽을 것이지 다시는 사대부의 반열에 끼지 않으리라 맹세한 지 오랩니다. 그런데 지금 만약 일시적인 기회를 다행으로 여겨 지난날 품어 온 오랜 뜻을 잊고 금세 다시 갓끈을 날리고 인끈을 차고서 세상에 뛰어든다면 인효(仁孝)한 군자에게 거듭 죄를 얻어 지하에서 선신을 볼 면목이 없을 것입니다. 신이 아무리 미련하다 하나 어찌 차마 이런 짓을 하겠습니까.”
하니, 상이 비답하기를,
“소인배들로 인한 재앙이 어느 시대라고 없었겠는가마는 지난번만큼 참혹한 경우는 있지 않았다. 평소에 나라를 사랑한 선경(先卿)의 순수한 정성은 신명(神命)에게 물어보아도 의심의 여지가 없는데 그 심사(心事)를 드러내어 밝히지 못하고 저승에서 한(恨)을 머금게 되었으니, 조용히 생각해 보건대, 이것은 나의 허물로서 후회해도 돌이킬 수가 없다. 아, 그러나 천도(天道)가 선한 이에게 복을 내리는 이치는 어그러지지 않아 지극히 억울한 누명이 깨끗이 벗겨지고 간사한 무리가 변방으로 쫓겨났으니, 그대가 조정에 서는 데에 어찌 털끝만치라도 불안한 점이 있겠는가. 사직하지 말고 속히 올라와 직무를 살피라.”
하였다. 이때에 친척과 벗들은 대부분 아무쪼록 왕명을 받들라고 권유하고 가족들 중에도 그렇게 말하는 이가 있었다. 그러나 선생은 “나는 머리에 사모(紗帽)를 쓰지 않겠다고 결단한 지가 오래되었다.” 하고는 끝내 흔들리지 않았다.
○ 5월에 두 번 상소하여 사직하였으나 상이 윤허하지 않았다.
○ 남상 구만(南相九萬)에게 편지를 보냈다.
이때는 환국(換局 갑술환국)이 단행된 초기였는데 남공이 영의정으로 국정을 담당하면서 남몰래 사사롭고 부정한 생각을 품어 토죄(討罪)가 엄격하지 않았다. 선생이 이에 울분과 개탄을 참지 못한 나머지 편지를 보내어 할 말을 다 하였는데, 그 대략은 다음과 같다.
“제가 삼가 생각건대, 오늘날 이 국면에 대처할 계책을 세우는 사람은 마땅히 생사와 화복은 제쳐 놓고 눈앞에 오직 도리만을 단호하고 분명하게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목숨을 바쳐 일을 해 나가되 털끝만치도 눈치를 살피거나 이해를 계산하는 사심이 그 속에 끼어들지 않도록 해야 할 것이니, 그렇게 한 뒤에야 나랏일을 제대로 할 수 있고 인심(人心)을 승복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그렇지 아니하여 이른바 한 무리의 사류(士類)라는 자들이 대체로 다 혹독한 시련을 겪어서 의기가 꺾이고 풀이 죽어 넋이 나가고 생기가 없는 나머지 더 이상 바르고 곧으며 강인하고 예리한 기운이 없습니다. 게다가 훗날 정국이 뒤바뀔까 하는 염려 때문에 논의할 때에 오로지 어물거리며 간흉을 보호하는 것을 능사로 여기고 자신의 몸과 집안을 아끼는 것을 장책(長策)으로 삼고 있습니다.
대각(臺閣)에서는 구차하고 가식적인 행태가 더욱 심하여 죄를 성토하고 악을 징벌하는 모든 일을 임금께 맡겨 버리고 자신이 직접 담당하려 하지 않고 있습니다. 간혹 공론에 못 이겨 한두 사람을 논죄하여 축출할 때에도 반드시 완곡하게 감싸 주고 구차하게 대충대충 넘어가서 논의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고 죄명조차 제대로 붙이지 못하곤 합니다. 이렇게 쭈뼛쭈뼛 눈치를 보며 주저하고 겁을 내어 위축되어 있는 그들의 모습을 보면 수치스럽고 분하고 애통합니다.
아, 사람의 마음이 바르지 못하고 선비들의 의기가 저하된 것이 이러한 지경에까지 이르렀으니, 혹시 불행히 국가에 변고라도 생긴다면 어찌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칠 각오로 절개와 의리를 지킬 자가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그 근심이 비단 죄를 성토하는 것이 엄정하지 못한 데에 있을 뿐만이 아닌 것입니다.
그리고 토죄(討罪)하는 의리를 가지고 말하자면, 저 흉악한 무리가 스스로 지은 재앙은 이미 온 세상 사람들의 이목에 분명히 알려져 부녀자와 아이들, 하인들과 군졸들조차 모두 손가락질하고 온갖 욕을 하며 절대로 용서할 수 없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똑같이 분하게 여기는 자에게는 하늘의 토죄가 반드시 가해지는 법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이러한 의리에 밝지 못하여, 일체 너그럽게 용납하고 되도록 가벼운 벌을 적용하면서 겉으로는 ‘무고한 사람을 죽이기보다는 차라리 법대로 처리하지 못했다는 오점을 남기겠다.’라고 스스로 핑계를 대고 속으로는 후환을 염려하는 사심을 펴고 있습니다. 이 때문에 항간과 초야에서는 민심이 분통해하고 공론이 들끓어 막을 수 없는 지경인 반면, 간흉들은 손뼉을 치며 축하하고 남몰래 세력을 키우면서 더 이상 두려워하거나 꺼리는 마음이 없으니, 훗날의 화가 어찌 끝이 있겠습니까.
저는 합하께서 전일한 마음과 곧은 도로 꿋꿋하게 토죄를 주재하되, 사마공(司馬公 사마광(司馬光))의 이른바 ‘하늘이 만일 송(宋)나라에 복을 내린다면 결코 그런 일이 없을 것이다.’라는 뜻으로 마음을 먹고, 주 부자(朱夫子)의 ‘범 충선(范忠宣 범순인(范純仁))은 남몰래 훗날 스스로를 보전하려는 계산을 하였다.’라는 비난을 경계로 삼으시기 바랍니다. 그리하면 반드시 사대부의 기상을 진작시켜 그들이 빠져 있는 나쁜 습성을 씻어낼 수 있을 것이며, 하늘의 토죄가 행해져 간흉들이 모두 그 죄의 대가를 치러서 세도(世道)와 국사가 의지할 데가 있게 될 것입니다.”
○ 가족을 데리고 도성을 나가 양주(楊州) 금촌(金村)에 우거하였다.
모친을 문안하기에 편하였기 때문이다.
○ 승문원 부제조(承文院副提調)에 차임되었다.
○ 홍문관 부제학(弘文館副提學)으로 옮겨졌는데, 두 번 상소하여 사직하였으나 상이 윤허하지 않았다.
○ 6월에 세 번째 상소를 올려 선친의 경계를 끌어대며 완강히 사직하였다.
상소의 대략에,
“신의 망부(亡父)가 임종하는 날 유계(遺戒) 한 장을 손수 써서 신의 형제들에게 주었는데, 그 내용 중에, ‘나는 본디 재주와 덕이 없는데 다만 선대의 음덕에 의지하고 나라의 은혜를 후히 받아서 분수에 넘게 높은 자리를 차지하여 재앙을 자초하였다. 오늘의 일은 모두 높은 지위에 올라도 그칠 줄 모르다가 물러나려 해도 물러날 수 없어 이 지경에 이른 것이니, 이제 와서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내 자손들은 나와 같이 되지 않도록 경계하여 항상 겸손한 뜻을 품어, 집에서는 공손하고 검소하게 생활하고 벼슬할 때에는 현요직(顯要職)을 피함으로써 몸을 편안히 하고 집안을 보전하는 터전으로 삼는 것이 좋을 것이다.’라는 말이 있었습니다. 신의 형제들은 눈물을 흘리며 그 유훈을 받아 간직하고 감히 잊어버리지 않았습니다.
신의 아비의 뜻은, ‘가득 찬 복은 천도(天道)가 덜어 내기 마련이고, 큰 세력과 높은 지위는 사람들이 시기하기 마련이다. 더구나 책임이 중하면 거기에 부합하기 어려워 허물이 생기고, 명망이 높으면 거기에 부응하기 어려워 비방이 돌아오는 법이다. 이는 예로부터 누구나 우려해 온 것인데 자신은 불행히 이미 그 허물에 걸려들었으니, 후손들은 더 이상 위험한 처지에 들게 하고 싶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에 대해 간곡히 경계했던 것이니, 그 말이 지극히 간절하고 그 뜻이 매우 슬픕니다. 이는 후손들이 심장과 뼛속에 아로새겨 영원히 지켜나가야 할 것인데 더구나 신 자신이야 더 말할 나위가 있겠습니까.
지금 삼사(三司)의 직책이 어느 것인들 현요직이 아니겠습니까마는, 홍문관의 장관인 부제학은 더더욱 신중하게 제수해야 할 자리입니다. 신이 만일 은총 어린 녹봉이 좋아할 만하다는 것과 위엄스러운 임금의 명령이 두렵다는 것만 알고 염치 불고하고 나아가 영화로운 자리에 의기양양하게 앉는다면, 이는 죽음을 앞두고 남긴 선친의 말을 무용지물로 여기는 것입니다. 신이 어찌 차마 이런 짓을 할 수 있겠습니까.”
하니, 상이 비답하기를,
“그대가 진술한 일이 비록 선경(先卿)의 유계(遺戒)라고는 하나, 조정에서 이미 환히 알고 깨끗이 설원(雪寃)하였으니, 나와서 벼슬에 봉직하는 데에 어찌 털끝만치라도 불안할 것이 있겠는가. 그대는 사직하지 말고 속히 올라와서 직무를 살피라.”
하였다.
○ 대사간으로 옮겨졌는데, 상소하여 사직하였으나 상이 윤허하지 않았다.
○ 농암(農巖)에 들어가 청령뢰(淸泠瀨) 가에 정자를 지었다.
상량문에 “종신토록 피눈물을 닦으며 왕부(王裒)처럼 〈육아(蓼莪)〉를 외는 것을 폐하였고 거친 골짝으로 도망가 유신(庾信)처럼 갈대로 엮은 사립문을 닫았다. 지금 마침 국운이 다시 돌아온 때를 만나니 신세에 대해 더욱 많은 감회가 일어난다. 움막살이 속에서도 요행히 목숨을 보전하고픈 마음이 본디 없는데 저 금옥으로 장식한 대궐을 무슨 심정으로 다시 들어가겠는가. 우군(右軍)이 무덤 앞에서 한 맹세는 분명히 끝까지 변치 않을 것이고 소초(小草)가 산 밖으로 나간 것은 내심 매우 부끄러울 일이다.”라는 말이 있는데, 선생의 심사가 이 몇 구에 다 드러났다고 한다.
○ 8월에 동부승지에 제수되었다.
○ 9월에 우부승지로 승진되었는데, 상소하여 사직하였으나 상이 윤허하지 않았다.
이에 앞서 좌상(左相) 현석(玄石) 박공 세채(朴公世采)가 경연에서 아뢰기를, “김 아무개는 문사(文辭)가 전아하고 풍부한 데다 참화를 당한 뒤로 경전에 마음을 두어 학문의 조예가 깊고 선비들 사이에서 명망이 극히 높습니다. 이 사람이 조정에 있으면 필시 도움이 될 것입니다.” 하였고, 이때에 이르러 남상 구만(南相九萬)이 또 선생의 재주와 인망은 따를 자가 드물다고 하며 특별히 힘써 불러들이기를 청하였다. 그래서 이러한 명이 있었던 것이다. 상소가 들어가자 상은 후한 비답을 내리고 윤허하지 않았다.
○ 좌부승지로 승진되었는데, 여러 차례 사직하였으나 상이 윤허하지 않았다.
○ 10월에 세 번째 상소를 올리자 상이 체직을 윤허하였다.
상소의 대략에,
“신이 듣건대, ‘군자가 조정에 서서는 반드시 자신의 뜻을 실천하고, 충신이 임금을 섬길 때에는 목숨을 바쳐야 하니, 만일 그렇게 하지 못한다면 벼슬하지 않는 것과 다름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이리저리 눈치를 보며 지조를 굽혀 유리한 것은 따르고 불리한 것은 피해 가며 오직 구차히 녹을 받고 편안히 지내는 것으로 말하면 현명한 임금에게 버림받고 치세(治世)에 수치로 여겨지는 것이 그보다 심한 것이 없습니다.
신은 본디 대대로 국록(國祿)을 받아 온 집안의 자손으로서 이러한 의리에 대해 가르침을 받은 것이 있습니다. 신의 증조 문정공(文正公) 신(臣) 상헌(尙憲)은 정직하고 강직함으로 여러 대에 걸쳐서 임금을 섬겨 사림의 영수(領袖)가 되었는데, 무엇보다 군자와 소인, 선과 악의 구분에 가장 엄격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인묘(仁廟) 초기에 조정의 논의가 오로지 잘못을 덮어 주고 포용하는 쪽으로 쏠렸는데, 신의 증조만은 선을 드러내고 악을 배격하는 논의를 힘껏 주장하며 시종 변치 않았습니다. 그 때문에 여러 번 소인배들의 비위를 거스르게 되어 마침내 유석(柳碩), 이계(李烓) 등의 무함(誣陷)을 받았고, 심지어는 그들이 외국과 비밀히 결탁하여 모의하는 바람에 거의 죽을 뻔하다가 다행히 화를 면하기도 하였습니다.
선신(先臣) 수항(壽恒) 때에 와서도 증조가 남긴 법도를 준수하여 감히 실추시키지 않았습니다. 선신은 경신년에 환국(換局)이 단행되었을 때에 영의정에 올랐는데, 당시 사람들은 훗날 정국이 뒤바뀌었을 때의 일을 상당히 걱정하였으나 선신만은 사마광(司馬光)의 ‘하늘이 만약 송(宋)나라를 돕는다면 필시 그런 일이 없을 것이다.’라는 뜻으로 마음을 먹고 범순인(范純仁)이 내심 훗날 자신의 안전을 도모하려 했던 일을 경계로 삼아 한결같은 마음으로 나라를 위해 헌신하고 조금도 굽힘이 없었습니다. 결국 그 때문에 큰 화에 빠졌지만 또한 후회는 없었습니다.
신은 진정 나약하여 스스로 뜻을 세우고 지키지는 못했지만 가정에서 보고 들은 것이 이러했기 때문에 늘 ‘신하가 조정에 서서 임금을 섬길 때에는 오직 이러한 도리를 따라야 하니, 이해와 화복은 개의할 것이 아니다.’라고 생각해 왔습니다. 그런데 지금 조정의 논의와 사대부의 취향을 보면 이와 크게 다른 듯합니다. 신이 이러한 때에 가정에서 배운 것을 그 속에서 행하려 한다면 필시 모순되어 서로 맞지 못할 것이요, 선인의 유훈을 저버리고 한때의 관습을 따라 구차히 영합함으로써 용납되기를 바라는 것은 더욱 신이 차마 하지 못할 일입니다.
옛사람의 말에 ‘헤아려 본 뒤에 들어가는 것이지 들어간 뒤에 헤아리는 것이 아니다.’라고 하였는데, 신이 비록 못났지만 자신을 헤아리고 시대 상황을 헤아리는 것은 이미 충분히 했습니다. 그러므로 이 몸이 한번 조정에 들어가면 그 형세가 필시 걸핏하면 마찰을 빚고 수없이 혐의와 시기를 부르게 되어 나라에 실오라기만큼도 득이 되지 못할 줄을 스스로 잘 압니다. 신이 밤낮으로 심사숙고해 보았지만 정말 불초한 신의 몸을 공사(公私) 간에 아무 도움도 못 되고 진퇴에 아무 기준도 없는 사람으로 만들 수는 없으니, 필부(匹夫)의 뜻은 뺏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에게 있어 특히 나아가기 어려운 이유 중 하나인데, 전에 감히 말하지 못했던 것을 이제 마침내 전하께 말씀드리는 바입니다.”
하였다. 선생이 벼슬하지 않은 것은 비록 화를 당하여 스스로 그만둔 것이기는 하나, 시대 상황을 헤아려 보고 나아가기 어려워한 의리를 또한 볼 수 있다.

을해년(1695) 선생 45세
○ 1월에 이조 참의(吏曹參議)에 제수되었으나 사직하여 체직되었다.
○ 3월에 농암(農巖)에 들어갔다.
선생은 이때부터 반드시 봄가을로 풍광이 좋은 날에 자제와 문생을 데리고 산에 들어가서 노닐다 돌아오곤 하였는데, 그것이 매년 정례적인 일이 되었다고 한다.
○ 4월에 부제학에 제수되었는데, 두 번 상소하여 사직하였으나 상이 윤허하지 않다가 장(狀)을 올려 사직하자 체직되었다.
○ 5월에 여주(驪州)에 갔다.
둘째 딸인 이씨 부인(李氏婦人)의 병 상태를 보기 위한 것이었다.
○ 7월에 개성부 유수(開城府留守)에 발탁되어 제수되었는데, 세 번 상소하여 사직하였으나 상이 윤허하지 않았다.
○ 8월에 비국(備局)의 품계(稟啓)로 인하여 체직되었다.
○ 형조 참판(刑曹參判)에 제수되었다.
○ 9월에 농암에 들어갔다.
○ 상소하여 사직하였으나 상이 윤허하지 않았다.
○ 10월에 상소하여 사직하고 장(狀)을 올려 사직하였으나 상이 모두 윤허하지 않았다.
○ 11월에 사헌부 대사헌(司憲府大司憲)으로 옮겨졌는데, 상소하여 사직하였으나 상이 윤허하지 않았다.
○ 석실서원(石室書院)에 머물렀다.
당시 선생은 미음(渼陰)에 우거하며 늘 서원에 왕래하였는데, 미음과 서원은 모두 양주(楊州) 땅에 있다. 이때에 이르러 서원에 머물며 강학하였는데, 원근의 선비들이 매우 많이 와서 모였다.
○ 12월에 두 번 상소하여 사직해서 체직되었다.

병자년(1696) 선생 46세
○ 2월에 창계(滄溪) 임공(林公) - 영(泳) - 의 상에 곡하였다.
선생은 젊어서부터 임공과 사이가 좋았는데, 화를 당한 뒤로는 더욱 도의로 서로 격려하였으며 뜻이 맞아 인정하기를 더욱 깊이 하였다. 이때에 와서 선생이 매우 애통해하였는데, 뒤에 만사(挽詞)와 제문을 지었고 또 그의 유집(遺集)에 서문을 썼다.
○ 3월에 예조 참판에 제수되었다.
○ 농암에 들어가서 상소하여 사직하였다.
○ 철원부(鐵原府)의 관아에 가서 몽와공(夢窩公 김창집(金昌集))을 문안하였다.
○ 4월에 미음(渼陰)으로 돌아왔다.
○ 5월에 홍문관 제학을 겸임하였다.
○ 6월에 부제학에 제수되었는데, 두 번 상소하여 사직해서 체직되었다.
○ 7월에 인천부(仁川府)에 가서 정관재(靜觀齋 이단상(李端相))의 부인을 문안하였다.
이때에 부인이, 아들 이희조(李喜朝)가 재직 중인 인천부 관아에 있었다. 그래서 가서 문안하고 돌아온 것이다.
○ 황생 주하(黃生柱河)의 상에 곡하였다.
황생은 타고난 자질이 매우 아름다운 데다 옛것을 좋아하고 학문에 힘썼다. 그런데 불행히 급작스레 죽자 선생이 애통하게 곡하고 애사를 지어 애도의 뜻을 지극히 표현하였다.
○ 8월에 농암에 들어갔다가 원주(原州)로 향하여 황생의 장례를 보고, 청평(淸平)과 한계산(寒溪山)을 유람하고 돌아왔다.
〈동정기(東征記)〉가 있다.
○ 9월에 이조 참판에 제수되었는데, 세 번 상소하여 사직해서 체직되었다.
○ 11월에 수원(水原) 만의촌(萬義村)에 가서 우재(尤齋) 선생의 개장(改葬)을 보았다.
제문(祭文)을 지어 올렸는데, 그 끝에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
“《주자대전차의(朱子大全箚疑)》를 엮으신 일은 후세에 영원토록 은덕을 끼치신 것인데, 선군자가 이미 일찍이 선생과 편지를 주고받으며 그 내용을 상의하여 바로잡았고, 어리석은 소자도 처음부터 끝까지 그 일에 참여하였습니다. 간혹 문장의 뜻과 사실에 대한 고증에 관해 살펴 질정(質正)을 구하면 늘 제 견해를 흔쾌히 받아들이고 이전의 설을 버리기를 아까워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는 물을 담아도 새지 않겠다고 칭찬하시고 스승인 당신보다 제자인 제가 낫다고 허여하셨으며, 마지막에는 또 있는 힘을 다하여 정리를 잘하라고 당부하셨습니다. 화기(禍機)가 이미 임박한 상황에서도 간곡히 당부해 마지않으시더니 제주도로 유배 가서는 황강(黃江 권상하(權尙夏))에게 편지를 보내어 부탁하시고, 오산(鼇山)에서는 또 밤에 막내아우에게 직접 명하시기를, ‘내가 죽어도 손자 주석(疇錫)이 있으니 그 아이와 힘을 합쳐 이 일을 끝내라.’ 하셨습니다.
그런데 뜻하지 않은 변고가 일어나 영손(令孫)마저 갑자기 별세할 줄을 누가 알았겠습니까. 문목(問目) 초고가 산더미같이 쌓여 있기는 하나 앞으로는 누구와 논의한단 말입니까. 여러 벗들에게 두루 물어보자니 다양한 의견을 절충하지 못할까 염려스럽고, 독단적으로 수정하자니 혹 선생의 뜻에 위배될까 두렵고, 수정하지 않고 예전 그대로 놓아두자니 또 완전하지 못하여 지난날 간곡히 당부하신 뜻을 저버리게 될까 두렵습니다. 소자는 이에 늘 유편(遺編)을 품고 장탄식하면서 황천에 가서 여쭙지 못하는 것을 슬퍼하였습니다. 아, 어쩔 수 없나 봅니다. 하늘이 사문(斯文)을 돕지 않으시니 영원히 한이 남게 되었습니다.”
송 선생이 살아 있을 적에 《주자대전차의》를 수정하는 일이 3분의 1도 끝나지 않았다. 선생은 유촉(遺囑)을 받고 나서 더욱 깊이 그 일에 마음을 두어 강구하고 수암(遂庵 권상하(權尙夏)) 권공(權公)과 편지를 주고받으며 평론하였는데, 아무리 화변을 당하여 경황이 없고 병을 앓아 고생스러운 상황이라 해도 잠시도 잊어버린 적이 없었다. 선생의 평생 정력이 모두 이 책에 담겨 있으니, 그 의미를 드러내어 밝혀서 더 이상 남겨진 뜻이 거의 없다. 그런데 무자년까지도 일을 마치지 못하였으니, 이것이 또 무궁한 한으로 남았다.

정축년(1697) 선생 47세
○ 2월에 동지경연사(同知經筵事)에 제수되었는데, 상소하여 사직하였으나 상이 윤허하지 않았다.
○ 농암(農巖)에 들어갔다.
○ 부제학에 제수되었다.
○ 3월에 미음(渼陰)으로 돌아가 상소하여 사직하였으나 상이 윤허하지 않았다.
○ 윤달에 제생(諸生)과 함께 도봉서원(道峯書院)을 찾아갔다.
사흘을 묵고 돌아왔는데, 밤에 무우단(舞雩壇)에서 술을 마시며 차례로 술을 돌리는 예를 행하고 운(韻)을 나누어 시를 지어 읊었으며 매월당(梅月堂 김시습(金時習))의 사우(祠宇)를 방문하였다.
○ 4월에 장(狀)을 올려 사직해서 체직되었다.
○ 6월에 병조 참판에 제수되었다.
○ 부제학으로 옮겨졌다.
○ 8월에 삼주(三洲)에 거처를 정하였다.
선생은 본디 농암에서 여생을 마치려 하였으나, 모친이 이때에 서울 집에 있었기 때문에 문안하고 모시기에 편리하도록 근교에 머문 것이다. 그리고 석실서원(石室書院)의 주변 산수가 깨끗하게 탁 트여 한가로이 거처하며 늘 학문에 힘쓰는 즐거움이 상당히 있었기 때문에 마침내 그곳에 거처를 정한 것이다. 몇 칸짜리 사랑채를 지어 거처하면서 삼산각(三山閣)이라는 편액을 달았으며, 앞에 모래톱 세 개가 있기 때문에 그곳을 또 삼주(三洲)라고 명명하였다.
○ 두 번 상소하여 사직해서 체직되었다.
○ 민언휘(閔彦暉) - 이승(以升) - 의 편지에 답장하였다.
《대학장구(大學章句)》 서문의 소주(小註)에 나오는 운봉 호씨(雲峯胡氏 호병문(胡炳文))의 설(說)에, “주자(朱子)가 사서(四書)의 인(仁), 의(義), 예(禮)에 대해서는 모두 확정된 풀이가 있으면서 유독 ‘지(智)’ 자에 대해서만은 분명한 풀이가 없다. 그래서 지난날 외람되이 주자의 뜻을 취하여 ‘지(智)는 심(心)의 신명(神明)으로, 온갖 이(理)를 묘합(妙合)하고 만물을 주관하는 것이다.’라고 보충하고 싶었다.” 하고, 파양 심씨(番陽沈氏 심귀보(沈貴珤))의 설에, “지(智)는 천리(天理)의 동정(動靜)의 기틀을 포함하고, 인사(人事)의 시비(是非)의 거울을 갖춘 것이다.” 하였다. 선생은 일찍이 이 두 설을 그르다고 여겨 “이 두 설은 단지 심(心)의 지각(知覺)만 말한 것으로, ‘지(智)’ 자와는 아무 상관도 없다. 그리고 지(智)는 이(理)인데 ‘온갖 이(理)를 묘합한다’느니 ‘천리를 포함한다’느니 말한다면, 이는 이(理)로써 이(理)를 묘합하고 이(理)로써 이(理)를 포함하는 꼴이니 더더욱 온당치 않은 것 같다.”라고 하였다. 민언휘가 선생의 이러한 설을 듣고 편지를 보내어 논란하였기 때문에 선생이 답한 것이다. 그 대략에,
“성(性)은 심(心)이 갖추고 있는 이(理)이고 심은 성이 담겨 있는 그릇입니다. 인(仁), 의(義), 예(禮), 지(智)가 이른바 성인데 그 체(體)는 지극히 정미하여 볼 수가 없고, 허령한 지각이 이른바 심인데 그 용(用)은 지극히 신묘하여 측량할 수가 없습니다. 성이 아니면 심에 준칙이 없고 심이 아니면 성이 운용될 수 없으니, 이것이 심과 성의 구분입니다. 두 가지는 서로 떨어질 수도 없지만 섞일 수도 없습니다. 따라서 심과 성을 말하는 자가 심에 나아가 성을 가리키는 것은 옳지만 심을 성이라고 이해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유자(儒者)가 학문할 적에 정밀히 살피고 분명히 분변해야 할 것은 이보다 더 우선인 것이 없으니, 여기에서 혹시라도 어긋나면 불가(佛家)의 견해로 떨어져 버릴 것입니다.
지(智)에 대한 운봉의 풀이가 비록 주자의 설을 모은 것이라고는 하나, 주자의 설은 본디 《대학》의 ‘치지(致知)’의 지(知)를 풀이한 것입니다. 저는 이 지(知) 자가 과연 인, 의, 예, 지의 지(智) 자와 같은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이른바 ‘신명(神明)’과 이른바 ‘묘합한다’, ‘주관한다’는 것이 과연 성의 체(體)를 가리키는 것입니까, 아니면 심의 용(用)을 가리키는 것입니까? 제 생각으로 말하면, 지(智)는 시비의 이치로 오성(五性)의 하나이고 지(知)는 허령한 지각의 묘용(妙用)으로 심의 용만을 가리킵니다. 시비의 이치가 실로 허령한 지각의 용에 발현되는 것이니, 요컨대 이 두 가지를 혼동하여 동일시해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 지금 지(知)에 대한 풀이를 가지고 지(智)의 풀이로 삼았으니 어찌 가당한 일이겠습니까.
주자는 일찍이 이천(伊川 정이(程頤))의 ‘성은 곧 이이다.[性卽理也]’라는 구절에 대해 “예로부터 이렇게 말한 분이 없었다.” 하였습니다. 그래서 오성(五性)을 풀이할 적에 반드시 이(理)를 위주로 하였는데, 《논어혹문(論語或問)》과 옥산강의(玉山講義)가 가장 상세합니다. 《혹문》에서는 ‘지(智)는 분별의 이(理)로, 그것이 발현되어 시비가 된다.’ 하고, 강의에서는 ‘지(智)는 시비를 분별하는 도리이다.’ 하였습니다. 이는 그 의미를 천명한 것이 정밀하고 정확하여 고칠 것이 없는데, 이른바 ‘심에 나아가 성을 가리킨다.’는 것이 이것입니다. 반면에 ‘심의 신명으로 온갖 이(理)를 묘합하고 만물을 주관한다.’는 말은 오로지 허령한 지각의 뜻을 형용한 것이니, 이(理)를 위주로 말하는 것과 자연 뜻이 다릅니다. 이것으로 지(智)를 풀이한다면 어찌 이른바 ‘심을 성이라고 이해한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것이 제가 운봉은 심과 성의 구분에 대해 밝지 못한 점이 있다고 의심하는 이유입니다.
파양(番陽)의 설은 비록 이와 조금 다른 듯하기는 하나, ‘천리(天理)의 동정(動靜)의 기틀을 포함한다.’는 것은 또한 이 심(心)의 영명(靈明)한 운용을 가리키는 것일 뿐이니, 운봉의 견해와 거의 같다 하겠습니다. 지(智)는 시비를 분별하는 도리인데 지금 ‘온갖 이(理)를 묘합한다’느니 ‘천리를 포함한다’느니 하고 말하였으니, 이를 두고 ‘이(理)로 이(理)를 묘합한다’, ‘이(理)로 이(理)를 포함한다’고 하지 않고 무어라 하겠습니까.
저는 이런 의심을 품어 온 지가 오래되었으나 감히 자신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주 부자(朱夫子)가 반겸지(潘謙之 반병(潘炳))에게 답한 편지에, ‘성(性)은 이(理)일 뿐이고 정(情)은 흘러나와 운용되는 부분이며 심(心)의 지각은 이 이(理)를 갖추고 이 정(情)을 행하는 것이다. 지(知)를 가지고 말해 보자면, 시비를 알게 되는 이(理)는 지(智)이니 성(性)이고, 시비를 알아서 시비하는 것은 정(情)이며, 이 이(理)를 갖추고 시비임을 깨닫는 것은 심(心)이다.’라고 한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이 말은 심과 성의 구분에 대해 극히 정미한 것으로, 세밀하고도 낱낱이 분석하여 더 이상 분석의 여지가 없으니, 아마도 만년(晩年)의 정론(定論)인 듯합니다. 기타의 같고 다른 설들은 《주자어류(朱子語類)》에 기록된 것을 막론하고 비록 당시 손수 쓰신 것이라 해도 이 말을 기준으로 절충하여 취사(取捨)를 결정해야 할 것입니다.
지금 운봉이 지(智)를 풀이한 것은 바로 이 편지의 이른바 ‘심의 지각은 시비임을 깨닫는 것이지, 시비를 아는 이(理)가 아니다.’라는 것이니, 그렇다면 그것이 심을 성으로 이해한 것임이 분명하지 않습니까. 저는 이리하여 감히 과거에 제가 품었던 의심이 근거 없는 것이 아님을 자신할 수 있었습니다.”
하였다. 민언휘는 이전의 설을 고집하여 편지를 6, 7번이나 보내왔는데, 선생은 그 과정에서 낱낱이 논파하여 철저히 드러내어 밝혔다. 상세한 것은 문집에 보인다.
○ 11월에 광주(廣州) 수종사(水鍾寺)에 머물며 의정공(議政公)의 행장을 지었다.

무인년(1698) 선생 48세
○ 7월에 대사헌에 제수되었는데, 두 번 상소하여 사직하였으나 상이 윤허하지 않았다.
○ 8월에 상이 건원릉(健元陵)을 참배할 적에 들에 나가 엎드린 채 대가(大駕)를 멀리서 바라보고 돌아왔다.
이보다 앞서 대사간 윤세기(尹世紀)가 연석(筵席)에서 아뢰기를,
“김(金) 아무개는 문학과 학식으로 조정 신료들에게 인정받는 것이 실로 그 동배(同輩)에 비할 바가 아닙니다. 게다가 십수 년 전부터 벼슬길에 뜻을 끊고 독서하며 이치를 궁구하였으니, 이런 사람을 조정에 불러들인다면 도움 되는 일이 어찌 적겠습니까. 능행(陵幸) 때에 필시 그가 길가에서 맞이하여 첨배(瞻拜)할 텐데, 상께서 특별히 불러 만나보고 대의(大義)로 권면하신다면 구구한 사사로운 분의(分義)를 어찌 감히 고집할 수 있겠습니까. 옛날에 뒷수레에 태운 일도 있었으니, 불러서 만나보고 권면하신다면 그의 마음을 돌릴 수 있을 것입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진달한 것이 절실하니 내 마땅히 유념하겠다.”
하였다. 교리(校理) 윤지인(尹趾仁)이 나아가 아뢰기를,
“김 아무개는 재주와 명망이 동배들 중에 특출하니, 조정 신료들이 그를 초치하고 싶어 하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뒷수레에 태워 오는 것은 아래에서 감히 청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니, 비유가 옳지 못하여 상당히 체모를 잃었습니다.”
하자, 승지 조태채(趙泰采)가 아뢰기를,
“독서하며 이치를 궁구하고 벼슬살이를 좋아하지 않는 김 아무개의 행적은 오늘날 세상에서 추중을 받고 있습니다. 그가 과거를 통해 출신(出身)하였기 때문에 상께서 그를 대하는 것이 보통 사람들과 똑같으십니다만, 옛 유현(儒賢)들 중에는 과거를 통해 출신한 분들도 많았습니다. 그는 옛사람에 비교해도 부끄럽지 않을 사람이니, 만약 능소(陵所)에서 불러 만나 보시고 군신간의 대의를 당부하신다면 그도 대대로 국록을 먹어 온 집안의 신하로서 어찌 한사코 떠나려고만 하겠습니까. 뒷수레에 태우는 일로 말하면 당 태종(唐太宗)도 방현령(房玄齡)을 그렇게 한 일이 있습니다만, 대사간은 꼭 이 일을 오늘날 행해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옛날에 그런 일도 있었다고 운운한 것뿐입니다. 옥당에서 이 말에 대해 심각하게 공격하는 것이 옳은 일인지 신은 모르겠습니다.”
하였다. 대신(臺臣)이 마침내 윤지인을 추고(推考)하기를 청하고 대사간도 인피(引避)하였다. 능행(陵幸)하는 날 선생은 감히 능 가까운 곳으로 나아가지도 못하고 또 집에 있는 것도 온당치 못하여 집 뒤의 들에 나가 엎드려 있다가 대가가 지나간 뒤에 즉시 돌아왔다. 돌아가는 길에 상이 주정소(晝停所)에 이르러서 사알(司謁)을 시켜 김 아무개가 근처에 와 있는지 여부를 물어보게 하였는데 오지 않았다고 승정원에서 대답하였다. 이에 지평 최중태(崔重泰)가 상소하여 그들의 모호한 태도를 비판하기를, “성상께서는 이렇게까지 간절히 생각하시는데 신하들은 그렇게 범범히 처리하였으니, 신은 내심 개탄스럽고 안타깝습니다.” 하였다.
○ 장(狀)을 올려 사직하였으나 상은 회유(回諭)를 내려 돈독히 불렀다.
전교하기를,
“‘경의 학식과 문학은 내 익히 알고 있다. 지금처럼 어려움이 많은 때에 대대로 국록을 먹어 온 경의 입장에서 나라와 고락을 함께하는 의리를 어찌 차마 나 몰라라 할 수 있겠는가. 부디 군신간의 대의를 유념하여 구구한 사사로운 의리를 끝까지 지키려고만 들지 말고 안심하고 올라와서 나의 기대에 부응하라.’고 회유하라.”
하였다.
○ 9월에 세 번째 상소를 올려 사직하였으나 상이 윤허하지 않았다.
상소의 대략은 다음과 같다.
“어제 삼가 성상의 하유를 받들고 보니 칭찬이 융숭하고 당부가 간절하여 미천한 신이 감히 받을 수 없는 것이었으니, 신은 두렵고 부끄러워 몸 둘 바를 몰랐습니다. 신은 본디 어리석고 고루하여 백에 하나도 잘하는 것이 없습니다. 학문은 경학에 밝지 못하고 식견은 일 처리를 제대로 하지 못하며 문장은 당대의 필요에 적합하지 못하니, 어느 모로 보나 일개 무능하고 용렬한 사람일 뿐입니다. 신은 지난날 오랫동안 경연에서 모시면서 졸렬함이 다 드러났으니 전하의 밝은 지혜로 어찌 모르실 리가 있겠습니까. 그런데도 오늘날 급작스레 이 분수에 넘은 분부를 내리신 것은, 어찌 얼마 전 연석(筵席)에서 여러 신하들이 지나치게 신을 칭찬하여 성상을 속이자 성상께서 못 이긴 체하고 우선 그들의 뜻을 따라 주신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성인의 한마디 칭찬은 화려한 의복을 하사받는 영광에 비할 것이 아니니, 걸맞은 점이 전혀 없는 신에게 경솔히 베푸시어 성인의 말씀의 중한 가치를 훼손해서는 결코 안 됩니다.
그리고 신은 요사이 내심 마음이 편치 못한 점이 있습니다. 며칠 전 경연에서 대사간이 진달한 말은 대의가 이미 잘못된 데다 뒷수레라는 말은 더욱 사리에 맞지 않습니다. 따라서 옥당에서 그를 비판한 것은 정말 지나치지 않은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사헌부 관원들이 뒤이어 그를 추고(推考)하도록 청함으로써 유신(儒臣)을 난처하게 하여 모양이 좋지 않게 되었으니, 이것이 신의 마음이 편치 못한 첫 번째 일입니다.
상께서 능(陵)을 참배하시던 날 신은 몸져누워 있었고 또 다른 사람들과 처지가 다른 관계로 길가에서 공경히 맞이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분수와 의리상 집 안에 태연히 있을 수도 없었기에 마침내 병을 무릅쓰고 대가를 바라볼 수 있는 야외에 가서 멀리 수레의 먼지를 바라보며 간소하나마 정성을 표하고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뒤에 삼가 들으니 돌아가시는 길에 성상께서 주정소(晝停所)에 이르러 특별히 신이 어디에 있는가를 물으셨다 하니, 신은 이것만으로도 두려움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어서 또 들으니 사헌부 관원이 승정원이 잘못 대답했다고 하며 그의 모호한 태도를 비판하였다고 합니다. 신은 애당초 사람들을 따라 지영(祗迎)한 적이 없고 다만 흰옷을 입고 밭 사이에 엎드려 있기만 하였는데 그곳은 또 한길과의 거리가 꽤 멀었으니, 그 누가 그러한 줄을 알았겠습니까. 더구나 상께서 돌아가실 때에 신은 이미 집에 돌아온 지 오래되었으니 승정원의 대답이 어찌 그렇지 않을 수 있었겠습니까. 그런데 사헌부 관원이 대뜸 비판하고 지적하여 마침내 여러 신하들이 인혐(引嫌)하여 소장을 분분히 올리는 사태를 초래하였으니, 이것이 신이 편치 못한 두 번째 일입니다.
신의 행방이 무슨 중대한 문제이기에 이 일 때문에 조정에서 논쟁이 겹겹이 일어난단 말입니까. 식견이 있는 사람이 곁에서 본다면 필시 손뼉을 치며 웃을 것이니, 신의 입장에서 황송하고 부끄러운 마음을 어찌 이루 다 형언할 수 있겠습니까. 신은 이 두 가지 편치 못한 일이 없었다 해도 염치 불고하고 나아갈 까닭이 없지만, 신의 생각을 성상께 감히 다 아뢰지 않을 수도 없기에 이렇게 아뢰는 바입니다.”
○ 네 번째 상소를 올려 본직(本職)에서 체직되었다.
○ 10월에 도봉서원(道峯書院)을 찾아갔다.
이틀을 묵고 돌아왔다.
○ 11월에 모친을 모시고 강화부(江華府)까지 갔다가 돌아왔다.
이때에 몽와공(夢窩公 김창집(金昌集))이 강도(江都)의 유수(留守)로 있었다. 그래서 선생이 가마를 모시고 간 것이다.

기묘년(1699) 선생 49세
○ 1월에 강화부에서 모친을 문안하고 돌아왔다.
○ 3월에 강화부에서 모친을 문안하였다.
○ 송도(松都)의 천마산(天磨山)을 유람하고 다시 강화로 돌아갔다.
아우 포음(圃陰 김창즙(金昌緝))과 자질(子姪)들이 함께하였다.
○ 4월에 몽와공을 모시고 보문암(普門庵)을 유람하였다.
보문암은 섬에 있는데 경치가 상당히 수려하다.
○ 삼주(三洲)로 돌아왔다.
○ 5월에 형의 아들 호겸(好謙)의 부음을 듣고 강화부에 가서 곡하고 돌아왔다.
○ 6월에 광주(廣州)에 가서 의정공(議政公 김수항(金壽恒))의 묘지석(墓誌石)을 굽는 일을 감독하였다.
○ 7월에 호조 참판에 제수되었는데, 상소하여 사직하였으나 상이 윤허하지 않았다.
○ 윤달에 이조 참판으로 옮겨졌는데, 세 번 상소하여 사직하였으나 상이 윤허하지 않았다.
○ 농암(農巖)에 들어갔다.
○ 9월에 강화부에서 모친을 문안하고 돌아왔다.
○ 10월에 부제학에 제수되었는데, 상소하여 사직해서 체직되었다.
좌의정 서문중(徐文重)과 인척으로 피혐 관계에 있고 이종형 이공 세백(李公世白)이 우의정이었는데 모두 사관(史館)의 직책을 겸임하였다. 그래서 규례를 끌어대어 사직해서 체직된 것이다.
○ 12월에 이조 참판에 제수되었는데, 두 번 상소하여 사직하였으나 상이 윤허하지 않았다.
○ 강화부에서 모친을 문안하였다.

경진년(1700) 선생 50세
○ 1월에 삼주(三洲)로 돌아왔다.
○ 네 번째 상소하여 사직해서 본직에서 체직되었다.
○ 2월에 서원의 석채(釋菜)에 참여하여 향음주례(鄕飮酒禮)를 행하였다.
○ 3월에 농암에 들어갔다.
10여 일 동안 머물다 돌아갔다. 백로주(白鷺洲), 금수정(金水亭), 창옥병(蒼玉屛) 등 여러 명승지를 두루 유람하였는데, 선생은 매번 이르기를, “이번 걸음에 유람한 경치는 전에 없이 마음에 든다.” 하였다.
○ 6월에 대사헌에 제수되었는데, 두 번 상소하여 사직하였으나 상이 윤허하지 않았다.
○ 7월에 장(狀)을 올려 사직해서 본직에서 체직되었다.
○ 셋째 딸 오씨(吳氏) 부인(婦人)을 곡하였다.
○ 9월에 광주(廣州)에 가서 오씨 부인을 장사 지냈다.
○ 10월에 아들 숭겸(崇謙)을 곡하였다.
숭겸은 지기(志氣)가 뛰어나고 재주와 행실이 탁월하여 아는 이들이 모두 원대한 사업을 이룰 것으로 기대하였으며 선생도 부자간의 지기지우(知己之友)로 인정했다. 그런데 불행히 19세의 나이로 요절하자 그 소식을 들은 이들이 모두들 서로 고하며 탄식하고 안타까워하였다. 숭겸은 또 시에 뛰어나 선생이 선창하면 번번이 화답시를 지어 올려 즐겁게 했었는데, 이때부터 선생은 마침내 종신토록 다시는 시를 읊지 않았다.

신사년(1701) 선생 51세
○ 1월에 석관촌(石串村)에 우거하였다.
동교(東郊)에 있는데, 아우 노가재(老稼齋) 창업(昌業)의 별장이다. 이때에 선생의 병이 깊어져서 의원을 대고 약을 쓰기 편하도록 우선 그곳에 머문 것이다.
○ 2월에 대사헌에 제수되었으나 사직하여 체직되었다.
○ 3월에 백부 곡운(谷雲) 선생을 곡하였다.
○ 9월에 영지동(靈芝洞)에 가서 정관재(靜觀齋 이단상(李端相)) 선생의 개장(改葬)을 지켜보았다.
제문이 있다.
○ 11월에 부제학에 제수되었는데, 전에 언급한 혐의를 끌어대어 사직해서 체직되었다.
○ 퇴계(退溪), 율곡(栗谷) 두 선생의 사단칠정설(四端七情說)에 관해 논하였다.
그 대략에,
“사단은 이(理)를 위주로 말한 것으로 기(氣)가 그 속에 들어 있고, 칠정은 기를 위주로 말한 것으로 이가 그 속에 들어 있다. 사단의 기가 곧 칠정의 기이고 칠정의 이가 곧 사단의 이인데, 다만 형언할 적에 각기 주로 삼는 것이 있을 뿐이다. 칠정은 기를 위주로 말한 것이라는 견해를 율곡(栗谷)은 그르다고 하였다. 그러나 자사(子思)가 대본(大本), 달도(達道)를 논하면서 ‘희로애락이 발한 것이 바로 천하의 달도이다.’라고 하지 않고 반드시 ‘발하여 절도에 맞는 것’을 달도라고 한 것은 바로 인심의 기(氣)의 기틀은 동할 적에 절도에 어긋나기가 쉽기 때문에 반드시 이(理)를 따라 바르게 된 뒤에야 달도라고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정자(程子 정이(程頤))도 ‘정(情)이 이미 성한데 더욱 동탕(動蕩)하게 되면 그 성(性)이 훼손된다.’ 하였다. 이천(伊川 정이)이 정(情)이 이(理)에 뿌리를 두고 있음을 모르지 않을 텐데 그 말이 이와 같은 것은 또한 기를 위주로 하여 말했기 때문이다.
‘사단은 선(善) 한 쪽만 지니고 있고 칠정은 선과 악을 겸하고 있으며, 사단은 이(理)만을 말하고 칠정은 기를 겸하여 말한다.’는 율곡의 설이 명백하지 않은 것은 아니나 나의 견해는 그와 조금 다르지 않을 수 없는데, 그것은 ‘기를 겸하여 말한다.’는 한 구절 때문이다. 칠정이 비록 이와 기를 겸하고 있기는 하나 그중에 선한 것은 기가 이를 잘 따른 것이고 그중에 선하지 않은 것은 기가 이를 따르지 않은 것이니, 애당초 기를 위주로 말해도 무방한 것이다.
퇴계는 이 부분이 극히 정미하여 형언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에 분석할 때에 번번이 두 갈래로 나누어 말하였는데, 기가 발하면 이가 타고 이가 발하면 기가 따른다는 것은 형언이 잘못된 것이다. 그러나 그 정밀하고 상세한 뜻은 후세 사람들이 살펴보지 않으면 안 된다.”
하였다. 또 율곡의 인심도심설(人心道心說) 가운데 “선은 청명한 기(氣)가 발한 것이고 악은 혼탁한 기가 발한 것이다.”라는 단락에 관해 논하였는데, 그 대략에,
“기 중에 청명한 것이 모두 선한 것은 물론이지만 선한 정(情)이 모두 청명한 기에서 나왔다고 하는 것은 옳지 않으며, 정 중에 악한 것이 혼탁한 기에서 나온 것은 물론이지만 혼탁한 기가 발하면 그 정이 모두 악하다고 하는 것은 옳지 않다. 중등(中等) 이하의 사람은 혼탁한 기가 많고 청명한 기는 적다. 그런데도 어린아이가 우물로 들어가는 것을 보면 가슴이 철렁하고 불쌍한 생각이 들지 않는 자가 없다. 이것이 어찌 모두 청명한 기가 발해서 그런 것이겠는가. 매우 완악하고 어리석어 평소의 소행이 지극히 무도한 자도 누군가 제 어버이를 해치려는 것을 갑자기 보면 반드시 불끈 성이 나서 원수 갚을 생각을 하게 되는데, 이러한 사람은 마음속에 혼탁한 기가 꽉 차 있으니 어찌 더 이상 조금이라도 청명한 기가 있겠는가. 다만 부자간의 사랑은 천성(天性) 중에도 가장 중한 것이라서 급박한 상황에 처하게 되면 자신도 모르게 참마음이 발현되어 나오는 것뿐이다. 여기에서 사람의 성(性)이 선한 것은 천리(天理)상 필연적인 것으로서, 인심이 동할 적에 이(理)가 비록 기(氣)에 올라타기는 하나 기(氣)도 이(理)에게 명령을 듣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지금 만약 선한 정과 악한 정의 원인을 한결같이 기의 청탁(淸濁)으로 돌린다면 이(理)의 실체, 곧 성(性)이 선하다는 것을 볼 수 없다.”
하였다. 끝에 또 선과 악, 청과 탁의 변화를 극론하였는데, 그 가운데 본래부터 타고난 것, 때에 따라 청명해지거나 혼탁해지는 것, 감응하는 데에 경중이 있는 것 등 세 가지의 차이를 설명한 대목이 있으니, 여러 학설을 종합하여 광범하게 미루어 가고 곡진히 의미를 꿰어 율곡이 말하지 않은 뜻을 드러내어 밝힌 것이 많다고 한다.

임오년(1702) 선생 52세
○ 2월에 동지돈녕부사(同知敦寧府事)에 제수되었는데, 상소하여 사직하였으나 상이 윤허하지 않았다.
이에 앞서 몽와공(夢窩公)이 도총관(都摠管)으로 궁중에 입직할 적에 상이 특별히 어제시(御製詩) 절구 두 수를 내리기를,
새벽 꿈에 또렷하게 상국을 만나서 / 曉夢分明遇相國
예전처럼 재촉하여 법온을 하사했네 / 催宣法醞似平昔
어제 유편 읽으면서 무척이나 슬프더니 / 昨閱遺篇多愴懷
본디부터 감응이 어긋난 적 없었네 / 元來感應不曾忒
하고, 또
진정한 나라 사랑 늙을수록 깊었으니 / 純誠體國老彌深
기사년 일 말하자면 지금껏 부끄럽네 / 忍說屠維愧至今
임금 사랑 마음만은 피 같단 말 욀 적마다 / 每誦愛君心似血
서글픈 마음에 눈물 줄줄 흐르네 / 傷神猶有涕涔淫
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선생이 상소하였는데, 그 대략에,
“엊그제 성상께서 꿈에서 본 것을 계기로 선신(先臣)을 추념하시고 특별히 시를 지어 신의 형 창집(昌集)에게 내려 주셨습니다. 이처럼 특별한 대우도 전에 없던 것인데, 더구나 그 말씀이 간곡하고 뜻이 애틋하시어 융숭한 칭찬은 썩은 해골을 빛나게 하기에 충분하고 절실한 뉘우침은 귀신을 울리기에 충분하였습니다. 그래서 원근에서 전하여 외면서 성상의 거룩한 덕을 우러러 흠모하지 않는 자가 없었으니, 신의 황공함과 감격스러움이야 어떠했겠습니까.
신은 화를 당하고 남은 목숨으로 요행히 죽지 않아서 이러한 일을 보게 되었으니 천지처럼 크신 은혜를 보답할 길이 없습니다. 오직 성상 앞에 나아가 백배하고 머리를 조아려 변변찮은 정성이나마 다소 편 다음 물러나 골짝에 쓰러져 죽는 것만이 의리에 합당할 것입니다. 그러나 신은 질병이 위독하여 생사의 문턱을 넘나든 지 벌써 두 해가 지났으니, 비록 부축을 받고 한번 나가 도성에 올라가려 한들 어떻게 그럴 수 있겠습니까. 신은 무한한 은혜를 받고도 은혜를 저버리는 것이 이렇게 심하니, 조만간 죽게 되더라도 눈을 감을 수 없을 것입니다. 자신을 돌아보며 눈물 흘릴 뿐, 더 이상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하니, 상이 비답하기를,
“선경(先卿)을 추념하는 나의 지극한 뜻을 이해하여 질병을 이유로 들어 사직하지 말고 속히 올라와 직무를 살피라.”
하였다.
○ 재차 상소하여 사직하였으나 상이 윤허하지 않았다.
이때에 좌승지 조태동(趙泰東)이 연석(筵席)에서 나아가 아뢰기를,
“동지돈녕부사 김 아무개가 지금까지 벼슬에 나오지 않는 것은 지키는 의리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갑술년(1694, 숙종20) 초에 상께서 마음을 풀어 주는 말씀을 곡진히 내리셨을 뿐만 아니라 요전번에 또 특별한 은총으로 어제시(御製詩)를 내리시되 추도하고 후회하는 뜻이 말씀에 넘쳐흘러 신하들이 모두들 감동하였으니, 더구나 그의 형제가 성은에 감격한 것이야 어떠했겠습니까. 그가 대대로 고관을 지내 나라와 운명을 같이하는 신하로서 10년 동안 은거하며 전후에 내린 제명(除命)에도 불구하고 한결같이 교지에 응하지 않은 것은 그만한 뜻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미 군부(君父)의 뉘우침이 이처럼 절실하여 글로 형용하기까지 한 것을 보았으니, 신자(臣子)의 분수와 의리상 애초에 먹었던 구구한 뜻을 결코 고집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의 문장과 학식은 당대에 비할 자가 없습니다. 게다가 그 심사가 공평하고 의론이 과격하지 않으니, 비록 중병을 앓고 있어 분주한 직무를 처리하기 어렵다 하더라도 만약 조정에 불러들여 경연 석상에 출입하게 한다면 성상의 덕을 돕고 세도(世道)에 보탬이 되는 점이 필시 적지 않을 것입니다. 인재가 고갈된 지금 같은 때에 어찌 스스로 은둔하도록 내버려 두어 초야에서 부질없이 늙어가게 해서야 되겠습니까. 각별히 하유하시어 나오지 않으면 안 되는 의리로써 당부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그래서 감히 진달하는 바입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진달한 뜻이 좋다.”
하였다. 동지경연사(同知經筵事) 조태채(趙泰采)가 아뢰기를,
“김 아무개가 갑술년(1694) 이후로 제명(除命)에 응하지 않는 것은 그만한 뜻이 있는 것입니다만, 얼마 전에 그가 노모를 만나기 위해 상경했다가 마침 어제시가 내려지자 모자, 형제가 서로 마주하여 감읍하였다고 들었습니다. 그는 비록 온몸이 다 부서진다 하더라도 성은에 보답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는 심사가 공평하고 의론이 과격하지 않으니, 이러한 때에 조정에 불러들인다면 세도(世道)에 도움 되는 것이 어찌 적겠습니까. 그러나 전후(前後)로 상께서 은근히 부르신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건만 끝내 올라오지 않았으니 범범한 상소 비답으로는 필시 불러들이기 어려울 것입니다. 각별히 그의 마음을 풀어 주는 뜻으로 유시(諭示)하시면 좋을 것입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그렇겠다.”
하였다. 선생이 재차 올린 상소의 대략은 다음과 같다.
“신의 질병이 이러하여 다른 것은 논할 겨를이 없습니다만, 신이 삼가 들으니 엊그제 경연에서 신을 거명하여 성상께 진달한 자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는, 신이 지난날 벼슬하지 않았던 것은 그만한 뜻이 있는 것이었는데 지금은 이미 상께서 뉘우치는 뜻을 깊이 보이셨으니 신의 입장에서 사사로운 의리를 고집하지 못할 것이라고 했다 합니다. 비록 전해 들은 말이 상세하지는 않으나 대의는 크게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신은 그 말을 듣고 그지없이 황공하고 놀라웠습니다. 신이 근 몇 년 동안 벼슬하지 않았던 것은 단지 화를 당한 뒤라서 다시는 영화로운 벼슬길을 밟고 싶지 않아서였지, 애당초 깊은 뜻이 있어서가 아니었습니다. 전후의 소장에도 이미 이러한 심정을 자세히 진술한 바 있으니 성상께서는 당연히 이미 헤아리셨을 줄 압니다. 지금 그 연신(筵臣)의 ‘그만한 뜻이 있었다.’는 말이 과연 무엇을 지적한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말이 분명치 않은 가운데 마치 신이 벼슬하지 않는 이유를 성상의 처분에 불만이 있어서였다고 여기는 것 같으니, 어찌 매우 온당치 못한 말이 아니겠습니까.
엊그제 성상께서 어제시를 하사하신 것이 비록 전에 없던 일이고 상례(常例)를 벗어난 은전이긴 합니다만, 선신(先臣)을 깊이 칭찬하고 마음을 간절히 열어 보이신 것은 신이 갑술년에 올린 첫 번째 소에 대한 비답부터 벌써 그러하셨습니다. 신은 참으로 감격하여 지금까지 감히 잊지 못하고 있는데, 또 어떻게 털끝만치라도 스스로 성상의 다스림을 피하여 물러날 생각을 하겠습니까. 신이 비록 형편없는 사람이기는 하나 진정 그렇게까지 못나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지금 와서 또 갑자기 평소의 뜻을 바꾸어 연신의 말처럼 나가 벼슬에 종사한다면 신이 9년 동안 제명에 응하지 않았던 것이 참으로 무슨 생각이 있어서 그랬던 것 같을 것이니, 신이 어찌 감히 그렇게 하겠습니까. 이것이 신이 연신의 말을 전혀 이해할 수 없고 마음이 편치 못한 이유입니다. 연신이 신에 대해 실상보다 지나치게 칭찬하여 성상을 크게 속인 점으로 말하면 신이 논변할 경황이 없습니다.”
○ 부제학으로 옮겨졌는데, 전에 언급한 혐의를 끌어대어 사직해서 체직되었다.
○ 7월에 예문관 제학(藝文館提學)에 제수되었는데, 상소하여 사직하였으나 상이 윤허하지 않았다.
○ 8월에 만취대(晩翠臺)를 유람하였다.
기문(記文)이 있다.
○ 부제학에 제수되었는데, 전에 언급한 혐의를 끌어대어 사직해서 체직되었다.
○ 9월에 상소하여 제학을 사직하였으나 상이 윤허하지 않았다.
○ 10월에 부제학에 제수되었는데, 전에 언급한 혐의를 끌어대어 사직해서 체직되었다.
○ 11월에 상소하여 제학을 사직하였으나 상이 윤허하지 않았다.

계미년(1703) 선생 53세
○ 2월에 둘째 딸 이씨(李氏) 부인(婦人)을 곡하였다.
○ 3월에 여주(驪州)에 가서 이씨 부인을 장사 지냈다.
○ 6월 22일에 모친 나 부인(羅夫人)의 상을 당하여 백씨(伯氏)의 집에서 여막살이를 하였다.
○ 8월에 나 부인을 장사 지냈는데, 의정공(議政公)의 묘를 옮겨 양주(楊州) 금촌(金村)의 언덕에 합장하였다.

갑신년(1704) 선생 54세
○ 2월에 권 수찬(權修撰) - 상유(尙游) - 의 편지에 답장하여 《사변록변(思辨錄辨)》에 대해 논하였다.
《사변록(思辨錄)》은 박세당(朴世堂)의 저술로, 주자(朱子)의 사서(四書)에 대한 《집주(集註)》와 《장구(章句)》의 정설(定說)을 비방하여 극도로 사리에 어긋났다. 성균관 유생들이 상소하여 통렬히 배척하기를 청하자, 상이 그 책을 가져다가 유신(儒臣)을 시켜 논파하게 하라고 명하였다. 권공이 그 일을 주관하여 《사변록변》의 설을 가지고 선생에게 질정하자 선생이 이르기를, “대체적인 내용은 옳으나 상세하지가 않다. 이는 사문(斯文)의 중대한 일이므로 내가 맡은 일이 아니라는 이유로 혐의하고 피해서는 안 되겠다.” 하고는 마침내 조목별로 논변하였다.
○ 이종형 우상 이공(李公) - 유(濡) - 에게 편지를 보내어 황단(皇壇)을 쌓는 일에 대해 논하였다.
편지의 대략은 다음과 같다.
“삼가 듣건대, 집사께서 며칠 전 연석(筵席)에서 황단(皇壇)의 규모를 너무 크게 해서도 안 되고 의장을 너무 성대하게 해서도 안 되는데 인부를 동원하여 공사하는 과정에 소문이 파다하게 나게 했다는 이유로 공사 감독관에게 그 허물을 돌렸다고 들었습니다만, 이는 제 생각에 매우 온당치 않습니다.
이 논의가 있은 뒤로 이 일을 진행해서는 안 된다면서 사안이 온당치 않다느니 예법상 난처한 점이 있다느니 하고 기타의 자잘한 설을 주장하는 말들이 이루 다 들을 수 없을 정도로 많았지만, 저는 이들이 모두 옳지 않고 오직 화를 염려하는 주장만이 가장 진실된 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괴이하게도 묘당(廟堂)에서 이 일을 논하는 자들은 애당초 곧바로 이 점을 지적하여 명백히 판결하지 못하고 늘 사안의 성격과 예법을 겸하여 들먹이며 모호하게 주저하는 모습이 마치 양다리를 걸친 것 같았습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해야 한다는 주장과 하지 말아야 한다는 주장 사이에서 고심하다가 제단을 쌓자는 쪽으로 결정하고 말았으니, 이것이 제가 불쾌하게 여기는 점입니다. 그러나 저의 이러한 불쾌함은 제단이 사당만 못해서가 아니며, 또한 이 한 가지 일 때문만도 아닙니다. 유감스러운 것은, 제현(諸賢)이 조정에서 이런 큰일을 처리하면서 논의하고 조처하는 모습이 이처럼 불분명하고 구차스러우니, 나라가 장차 어디에 기대겠습니까.
제단이 사당과 다르기는 하나 사안은 역시 중합니다. 명이 내려진 날에 도성의 백성들이 모두 알고 열흘이 못 되어 팔도에 소문이 퍼졌으니, 제단의 터가 한 길을 넘지 않고 인부들이 한마디도 발설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소식에 밝은 저들이 끝까지 모를 수가 있겠습니까. 그들이 모르게 하려면 제단을 쌓는 것까지 그만두어야 할 것입니다. 그만두지 않으면서 이 일을 깊이 숨겨 소문이 나지 않기를 바란다면 이는 귀를 막고 방울을 훔치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그리고 이 일은 본디 성상의 지성(至誠)과 대의(大義)에서 나온 것으로, 한결같은 충정이 위로 신명과 통하고 한마디 하교가 아래로 만대에 전해질 만하니, 어찌 거룩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집사께서는 두려움이 앞서고 화를 방지하려는 마음이 지나쳐, 일이 시작되자마자 예(禮)의 등급을 제대로 적용했는지의 문제로 감독관을 질책함으로써 한사코 공사 규모를 감소시키고 의장의 등급을 낮추려 했습니다. 그리하여 구차히 책임 때우기만 일삼으셨으니, 너무나 온당치 못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말은 한번 입 밖에 내면 주워 담을 수 없고 말을 하는 것이 아무 도움도 못 될 것 같긴 하지만 그래도 말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있기에 말씀드리는 바입니다. 집사께서는 마음을 비우고 멀리 보아 올바른 사리와 이해(利害)의 실상을 깊이 파악하시고 지나치게 꺼리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이 일에 관련된 문제를 한결같이 모두 의리에 입각하여 헤아려 조처하시고, 줄이고 간략히 하기만을 주장하지 않으신다면 그래도 온 나라 사람들의 마음을 다소 위로해 줄 수 있고 후세의 비판을 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을유년(1705) 선생 55세
○ 8월에 상복을 벗고 삼주(三洲)로 돌아왔다.
○ 9월에 한성부 좌윤에 제수되었는데, 두 번 상소하여 사직하였으나 상이 윤허하지 않았다.
비답에 “기어코 불러들이고야 말겠다는 뜻이 굳게 정해졌다.”는 하교가 있었다.
○ 세 번째 상소하여 사직하였으나 상은 소장을 도로 내주라고 명하였다.
○ 11월에 상소하여 대죄(待罪)하였다.
이때에 상의 옥후가 편치 못한 지가 이미 오래되었는데, 하루는 승정원에 하교하여 왕위를 선양(禪讓)하는 절차를 거행하게 하였다. 이에 뭇 신하들이 놀랍고 황공하여 어찌할 바를 몰라 했으며 백관이 합문에 엎드려 극력 간쟁하였다. 선생은 생각하기를, ‘몸은 비록 도성 밖에 있지만 의리상 한마디 말도 하지 않아서는 안 되겠다.’ 하고는 소장을 써 정서하고 있었는데, 마침 조정의 청이 윤허를 받았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에 즉시 상소하여 자책하기를,
“우둔하기 짝이 없는 신이 하늘처럼 끝없이 두터운 은혜를 받고도, 국가에 큰일이 있는 때에 아래로 아전과 군졸과 백성들까지 모두 한목소리로 호소하며 각기 자신의 충정을 표했는데 신만은 집 안에 들어앉아 끝내 충정을 바치지 않았으니, 이는 신하의 의리가 전혀 없는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성상께서는 불충한 신의 죄를 다스리시어 영원히 신하들의 경계로 삼으소서.”
하였다.
○ 대사간으로 옮겨졌는데, 상소하여 사직하였으나 상이 윤허하지 않았다.
○ 이조 참판으로 옮겨졌는데, 상소하여 사직하였으나 상이 윤허하지 않았다.

병술년(1706) 선생 56세
○ 1월에 재차 상소하였으나 상은 소장을 도로 내주라고 명하였다.
○ 2월에 홍문관 대제학, 예문관 대제학, 지성균관사(知成均館事)에 제수되었다.
○ 세 번째 상소하여 사직하였으나 상이 윤허하지 않았다.
○ 4월에 상이 특별 유시를 내렸다.
전교하기를, “대제학 김 아무개는 전후의 제수가 한두 번이 아니었건만 대대로 국록을 먹어 나라와 고락을 함께해야 할 신하가 번번이 유계(遺戒)를 들먹이며 한결같이 명에 응하여 공무를 수행하지 않고 있으니, 이는 온당치 못한 일이다. 게다가 군신간의 의리 역시 중한 것이니 어찌 유계를 고집스레 지키며 스스로 벼슬을 멀리해서야 되겠는가. 대제학 김 아무개에게 속히 올라오라고 특별히 하유하라.” 하였다.
○ 형조 판서에 발탁되어 제수되었는데, 상소하여 사직하였으나 상은 윤허하지 않고 연석(筵席)에서 백씨(伯氏) 의정공(議政公 김창집(金昌集))에게 선생의 출사를 권면하라고 명하였다.
상이 연석에서 하교하기를, “형조 판서 김 아무개에게 지난번에 특별 유시를 내렸고 상소의 비답에서도 올라오도록 권면하였건만, 오늘 사직소를 보니 그는 조정에 나올 뜻이 없어 보인다. 그의 본직과 겸직은 모두 긴중한 것이라 오랫동안 자리를 비워 두어서는 안 되며, 비록 뭔가 지키는 것이 있다 하더라도 끝끝내 스스로 벼슬을 멀리할 의리는 없다. 게다가 군신간의 대의도 돌아보지 않아서는 안 되는데 어찌 한결같이 사직을 고집할 수 있단 말인가. 지금 우상이 입시하였기에 이처럼 하교하는 바이니, 부디 이러한 뜻을 전달하여 속히 나오도록 권면하라.” 하였다.
○ 예조판서 겸 세자우부빈객(禮曹判書兼世子右副賓客)에 제수되었는데, 상소하여 사직하였으나 상이 윤허하지 않았다.
상소의 대략에,
“삼가 듣건대, 연석(筵席)에서 특별히 하교하시어 신의 형 창집(昌集)으로 하여금 신에게 유시를 전하여 조정에 나오도록 권면하게 하셨는데, 그 세심하고 간곡한 뜻이 한 집안에서 부자간에 귀에 대고 서로 일러 주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고 합니다. 이처럼 특별한 예우가 어찌 근래에 없었던 일이기만 하겠습니까. 과거 역사 전체에서도 드문 일입니다. 그래서 이 일을 보거나 들은 이들은 모두 감격하였는데 더구나 신은 직접 당하였으니 마음이 어떻겠습니까. 병이 들어 다 죽어 가는 중에 깜짝 놀라 일어나서 마치 위엄스러운 용안을 가까이 뵙는 듯, 옥 같은 음성을 직접 받든 듯 황홀하여 신의 몸이 멀리 초야에 있다는 사실도 잊었습니다.
형편없는 미천한 신이 이처럼 세상에 보기 드문 특별한 대우를 받았으니 비록 끓는 물이나 불속에 뛰어들라 하시더라도 사양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니 그 밖의 것이야 어찌 감히 따지겠습니까. 당연히 당장 길을 떠나서 성상 앞에 나아가 사은숙배하여 다소나마 신하로서의 분수와 의리를 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병세가 거의 죽을 지경이라 실로 스스로의 힘으로 일어날 가능성이 전혀 없는 형편입니다. 아침 이슬처럼 갑자기 죽게 되면 변변찮은 작은 정성마저 끝내 펴지 못하여 영원히 지하에서 눈을 감지 못할 한이 될까 두렵습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신은 갑술년(1694, 숙종20) 이후로 10여 년간 은혜로운 제수를 받은 것이 몇 번인지 기억할 수도 없는데 한 번도 나가서 명을 받든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지금 와서 외람되이 은혜롭게 발탁되어 상경(上卿)의 지위에 오르게 되자 관복을 입고 의기양양하게 조정의 반열에 나아간다면 이전에 질병을 이유로 물러나서 여러 차례 소를 올려 사직을 간청했던 것들은 모두 속임수가 되고 말 것이니, 주자(朱子)가 말한, 핑계 대고 속임수를 써서 벼슬을 취한다는 것이 거의 이에 가까울 것입니다. 십만 종(鍾)의 녹을 사양하고 만 종의 녹을 받는 것도 옛 군자는 옳지 않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더구나 참판은 사양하고 판서 자리에 나아간다면 신의 입이 석 자인들 어떻게 사람들의 비판에 대해 해명할 수 있겠습니까. 질병을 제외하고는 이 문제가 신이 벼슬에 나아가기 어려운 가장 큰 이유이기 때문에 감히 아울러 말씀드리는 바입니다.”
하였는데, 상이 비답하기를,
“상소를 보고 경의 간절한 심정을 잘 알았다. 그러나 지난번 연석에서의 하교를 들었으면 기어코 경을 불러들이고야 말겠다는 나의 뜻을 상상할 수 있을 텐데 연달아 소장을 올려 고집하다니 너무 지나치지 않은가. 아, 경이 일찍이 한 번도 조정에 나와 명에 응하지 않았던 것은 유계(遺戒)를 지키고자 함이지만, 내가 돈독한 소명을 빈번히 내려 군신간의 대의를 요구하는 이상 경이 사사로운 마음을 고집할 수 없는 것은 도리상 응당 그러한 것이니, 어찌 낮은 자리는 사양하고 높은 자리에 나아간다는 혐의가 있겠는가. 게다가 예조 판서로 옮겨 제수한 것은 경의 질병을 염려하여 바쁜 사무를 무리하게 시키지 않으려는 뜻에서 나왔으니, 경은 더더욱 질병을 이유로 사직해서는 안 된다. 이러한 뜻을 이해하여 즉시 길에 오르라.”
하였다. 이때에 성상의 돌보심이 더욱 융숭하여 기어코 한번 조정에 불러들이고자 하였고 심지어 몽와공이 또 면대하여 유시를 받들기까지 하였으니, 이는 관례에서 벗어난 일이었다. 그 때문에 사람들이 한번 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말하였으며 선생을 아는 사우들도 대부분 한번 분수와 의리를 펴라고 말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생은 처음 뜻을 단단히 지켜, 죄를 받는 한이 있더라도 나가지 않겠다고 하였으며, 상도 강권하기 어려움을 알고 이후로는 더 이상 부르지 않았다.
○ 5월에 재차 상소하여 사직하였으나 상이 윤허하지 않았다.
○ 6월에 세 번째 상소하여 사직하였으나 상이 소장을 도로 내주라고 명하였다.
○ 7월에 네 번째 상소하여 사직해서 체직되었다.
○ 좌부빈객(左副賓客)으로 승진되었다.
○ 8월에 대사헌에 제수되었다.
○ 지춘추관사(知春秋館事)에 제수되었는데, 두 번 상소하여 사직해서 본직에서 체직되었다.

정해년(1707) 선생 57세
○ 1월에 상소하여 겸임한 여러 직임을 사직하자 상이 빈객(賓客)을 체직하도록 윤허하였다.
○ 4월에 대제학을 사직하였으나 상이 윤허하지 않았다.
○ 5월에 지돈녕부사(知敦寧府事)에 제수되었다.
○ 장(狀)을 올려 사직해서 대제학에서 체직되었다.
○ 7월에 녹천(鹿川)으로 옮겨 가 우거하였다.
녹천은 동교(東郊)에 있는데, 상공(相公) 이유(李濡)의 별장이다.
○ 상소하여 지돈녕부사를 사직하였으나 상이 윤허하지 않았다.
○ 9월에 도봉서원(道峯書院)을 찾아갔다.
한두 문인과 밤새 소요하다가 돌아왔다.
○ 옥류동(玉流洞)을 유람하였다.
옥류동은 수락산(水落山) 기슭에 있는데, 시내와 폭포가 아름답다. 간암(艮庵) 이공 희조(李公喜朝)와 함께 가서 유람하였다.
○ 10월에 삼주(三洲)로 돌아왔다.
○ 묘적사(妙寂寺)를 유람하였다.
묘적사는 묘적산(妙寂山)에 있다.

무자년(1708) 선생 58세
○ 윤3월에 몽와공(夢窩公)을 모시고 앞 강에서 배를 타고서 물고기를 구경하였다.
이때에 몽와공은 정승에서 파직되어 금촌(金村)에 물러나 지내고 있었는데, 선생과 아침저녁으로 만났다. 이때에 이르러 관어회(觀魚會)를 가졌는데, 아우 노가재(老稼齋 김창업(金昌業)), 포음(圃陰김창즙(金昌緝))이 참여하였다.
○ 몽와공을 모시고 묘적사를 유람하였다.
○ 4월 11일에 삼주의 정침(正寢)에서 별세하였다.
선생은 거듭 상(喪)을 당하며 질병이 깊어졌는데, 지난겨울에 여러 차례 감기에 걸린 뒤로는 더욱 심하게 야위었다. 이때에 이르러 또 오한과 신열이 번갈아 나다가 허기(虛氣)를 타고 갑자기 피를 토하더니 결국 별세하는 데에 이르렀다. 부음이 전해지자 조정과 초야에서 모두들 서로 조상(弔喪)하였고, 원근의 선비들이 달려와 슬픔을 다해 곡하였으며, 문인들 중에 가마(加麻)하는 이가 6, 7십 명이나 되었다.
○ 부음이 전해지자 상이 장례 물품과 상여꾼을 지급하도록 명하였다.
상이 하교하기를, “지돈녕부사 김 아무개는 여러 차례 불러도 올라오지 않더니만, 앞으로 다시 돈독히 권면하여 기어코 불러들이려던 참에 뜻밖의 흉한 소식이 갑자기 이르렀으니 놀라움과 슬픔을 어찌 형언할 수 있겠는가.” 하고는, 해조(該曹)에 명하여 장례 용품을 넉넉히 지급하도록 하고 또 본도(本道)로 하여금 상여꾼을 정하여 보내게 하였다.
○ 6월 - 9일 - 에 석실(石室)에 있는 선영의 경좌(庚坐) 언덕에 장사 지냈다.
선생의 6대조 평양부서윤부군(平壤府庶尹府君 김번(金璠))으로부터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 선생까지 대대로 모두 같은 산에 장사 지냈는데, 선생의 묘는 그 서쪽 기슭의 수백 보 정도밖에 되지 않는 곳에 있다. 뒤에 묘표(墓表)를 세우고 묘지(墓誌)를 묻었는데, 모두 아우 삼연(三淵 김창흡(金昌翕))이 지은 것이다.
○ 7월에 성균관과 사학(四學)의 유생들이 제문을 지어 가지고 가서 제사하였다.
○ 12월에 상이 예관(禮官)을 보내어 조제(弔祭)하게 하였다.

경인년(1710)
○ 가을에 문집이 완성되었다.

신묘년(1711)
○ 연촌서원(烟村書院)에 배향하였다.
연촌서원은 영암(靈巖)에 있다. 연촌(烟村) 최공 덕지(崔公德之)와 의정공(議政公) 문곡(文谷 김수항(金壽恒)) 선생을 나란히 향사하고 연촌의 손자 산당(山堂) 최충성(崔忠成)을 배향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또 선생의 위패를 뒤미쳐 올린 것이다.

계사년(1713)
○ 가을에 석실서원(石室書院)에 배향하였다.
선원(仙源 김상용(金尙容))과 청음(淸陰) 두 선생을 주벽(主壁)으로 향사하고 문곡(文谷), 노봉(老峯 민정중(閔鼎重)), 정관재(靜觀齋)를 배향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양주(楊州) 유생 구문기(具文沂) 등의 상소로 인하여 또 선생의 위패를 뒤미쳐 올린 것이다.

계묘년(1723) 경종대왕(景宗大王) 3년
○ 여름에 석실서원의 배향을 철회하였다.
이때에 몽와공(夢窩公)이 이미 전해에 흉악한 역적의 무리에게 화를 당했는데, 사간 이세덕(李世德)이 일찍이 발계(發啓)하여 화를 당한 사람들의 아비와 형제도 아울러 관작을 추탈하고, 서원에서 향사하는 이들은 제향 대상에서 제외하기를 앞장서서 청하여 윤허를 받았다. 그러나 그때 마침 간언하는 사람이 있어 실행에 옮겨지지 않았는데, 이때에 이르러 심준(沈埈)이 다시 발계하여 흉악한 논의를 더욱 펼치고 의정공(議政公 김수항(金壽恒))과 선생 양대의 도덕을 무함하여 비방하면서 “오늘날 살아 있었다면 이들도 연좌되었을 것이다.”라고 하였으며, 윤회(尹會)가 또 그러한 주장을 이어서 펼쳤다. 이리하여 결국 의정공과 선생의 향사를 같은 날에 철회하게 된 것이다.

을사년(1725) 금상(今上) 원년

○ 봄에 석실서원의 제향을 회복하도록 명하였다.
이때에 흉악한 역적의 무리가 쫓겨나 세도(世道)가 거듭 새로워졌는데, 양주(楊州) 유생 이지항(李志沆) 등이 상소하여 심준 등이 사리에 어긋나게 무함한 실상을 논변하고, 의정공과 선생의 향사를 회복해 주기를 청하자 상이 즉시 윤허하였다. 그리하여 마침내 같은 날에 제향하게 되었다.
○ 가을에 문간공(文簡公)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이해 여름에 시독관(侍讀官) 서종섭(徐宗燮)이 주강(晝講)하는 기회에 아뢰기를,
“고(故) 판서 김 아무개는 어려서부터 학문에 뜻을 두어 식견이 명철한 까닭에 이미 많은 선배들의 인정을 받았으며, 기사년(1689, 숙종15) 이후로는 의리에 입각하여 지조를 지켜서 벼슬을 단념하고 격물(格物), 치지(致知), 성의(誠意), 정심(正心)의 학문에 전념한 결과 실로 사림(士林)이 종주로 우러르는 인물이 되었습니다. 일찍이 선조(先朝)에서는 그를 대우하는 예(禮)가 유현(儒賢)과 다름이 없었는데, 그의 겸손한 뜻 때문에 죽은 뒤에도 시호를 청하지 않았습니다. 그리하여 벌써 수십 년이 지나도록 아직도 시호를 내리지 않고 있으니 선비들이 한탄하고 안타까워하는 논의를 해 온 지 오래되었습니다. 유도(儒道)를 숭상하는 오늘날 특별히 시호를 내리심이 어떠신지요?”
하고, 시독관 이기진(李箕鎭)이 아뢰기를,
“이 사람에 대한 조정의 대우가 과거를 통해 출신했다는 이유로 산림의 유현과 달라서는 안 될 것입니다. 시장(諡狀)이 올라오기 전에 시호를 내려도 의심스러운 점이 없을 것입니다.”
하고, 동지경연사(同知經筵事) 신사철(申思喆)도 한목소리로 청하자, 상이 명하기를,
“시장이 올라오기를 기다리지 말고 특별히 시호를 하사하라.”
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문간(文簡)이라는 시호를 내렸으니, 도덕이 높고 문학이 풍부한 것을 ‘문(文)’이라 하고 덕이 한결같아 해이하지 않은 것을 ‘간(簡)’이라 한다. 이조 좌랑 이현록(李顯祿)이 와서 선시(宣諡)하였다.

[주D-001]제영(緹縈)은 …… 구제하였고 : 한 문제(漢文帝) 13년(기원전 167)에 제군(齊郡) 태창령(太倉令) 순우의(淳于意)가 죄에 연루되어 형벌을 받게 되었을 때 그의 다섯 딸 가운데 막내인 제영이 아버지를 따라 장안(長安)에 와서 천자에게 글을 올리기를, “사람이 한 번 죽으면 다시 개과천선할 기회조차 없어집니다. 더구나 첩의 아비는 청렴하다고 이름났는데 지금 죄에 걸려 형벌을 받게 되었으니, 청컨대 첩이 관비(官婢)가 되어 아비의 죄를 대신 받게 해 주소서.” 하자, 문제가 가엾게 여겨 죄를 면해 주고 일체의 육형(肉刑)을 철폐하였다. 《漢書 卷23 刑法志》
[주D-002]전횡(田橫)의 …… 들어갔습니다 : 한 고조(漢高祖) 유방(劉邦)이 천하를 통일하자, 이전에 제(齊)나라 왕으로서 그와 맞섰던 전횡이 500명의 의사(義士)를 거느리고 멀리 섬으로 들어갔는데, 유방은 후환을 염려한 나머지 그를 회유하여 낙양으로 불렀다. 전횡은 그에 응하여 부하 두 명과 함께 낙양 가까이 와서 말하기를, “지금 한왕(漢王)은 황제가 되었는데 내가 포로가 되어 그를 알현하는 것은 너무도 치욕스럽다. 황제가 나를 부른 것은 내 얼굴을 보기 위해서이니, 너희들은 내 머리를 들고 가서 보여 주도록 하라.” 하고는 자결하였다. 부하들은 그 말대로 한 뒤에 전횡의 무덤 곁에서 자결하였고, 나머지 섬에 있던 부하들도 그 소식을 듣고 모두 자결하였다. 《史記 卷94 田儋列傳》
[주D-003]제(齊)나라 …… 몰아치고 : 춘추 시대 제 경공(齊景公) 당시 자식이 없이 개가하지 않고 성실히 시어머니를 섬기던 과부가 있었는데, 시누이가 재산을 탐하여 자기 어머니를 죽이고 과부에게 누명을 씌우자, 과부가 원한이 맺혀 하늘을 향해 부르짖었다. 그러자 제 경공의 궁전에 벼락이 쳤다고 한다. 《淮南子 卷6 覽冥訓》
[주D-004]연(燕)나라 …… 내렸습니다 : 춘추 시대 연 혜왕(燕惠王) 당시에 음양가(陰陽家)인 제(齊)나라 출신 추연(鄒衍)이 연나라에 충성을 바쳤는데, 왕의 측근들이 그를 참소하자 왕이 감옥에 가두었다. 이에 추연이 억울하여 하늘을 향해 통곡하니, 한창 무더운 5월이었는데 서리가 내렸다고 한다. 《論衡 卷5 感虛篇》
[주D-005]종신토록 …… 폐하였고 : 왕부(王裒)는 진(晉)나라 사람이고 〈육아〉는 《시경(詩經)》 〈소아(小雅)〉의 편명으로, 효자가 죽은 부모의 은혜를 기리는 노래이다. 왕부가 그의 아버지 왕의(王儀)가 사마소(司馬昭)에게 억울하게 죽자, 이를 애통해한 나머지 조정에서 벼슬을 주겠다고 여러 번 불러도 응하지 않았다. 언제나 아버지의 무덤을 찾아가 절을 하고 무덤 가의 잣나무를 부여잡고 울었는데 그 눈물로 인해 나무가 말라 죽었다 한다. 그리고 《시경》을 읽다가 육아편에 이르러서는 언제나 세 번을 반복하여 읽으며 눈물을 흘렸다. 그러자 그의 문인들이 스승의 슬픔을 자아낼까봐 육아편은 폐하고 읽지 않았다 한다. 《晉書 卷88 王裒列傳》 억울하게 죽은 아버지를 애통해하는 작자의 처지가 왕부의 경우와 같으므로 인용한 것이다.
[주D-006]거친 …… 닫았다 : 유신(庾信)은 남북조(南北朝) 주(周)나라 때의 시인이다. 그가 양(梁)나라에서 동궁학관(東宮學官) 겸 건강령(建康令)으로 있을 때인 양 무제(梁武帝) 2년(548) 10월에 후경(侯景)이 반란을 일으켜 도성인 금릉(金陵)에까지 쳐들어오자, 오늘날의 호북(湖北) 형주(荊州) 지역인 강릉(江陵)으로 피신하여 은둔 생활을 하였다. 《周書 卷41 庾信傳》 유신이 지은 〈애강남부(哀江南賦)〉 첫머리에 “지난 무진년 10월에 큰 도적이 나라를 유린하여 금릉이 와해되었다. 나는 거친 골짝으로 도망하여 피신하였는데 공실(公室)과 사문(私門)이 모두 도탄에 빠졌다.” 하였는데, 거친 골짝이란 강릉을 가리킨다. 《庾子山集 卷2 哀江南賦》 기사년에 남인이 정권을 장악하자 이를 피해 시골 농암으로 들어온 작자의 처지가 유신의 그때 경우와 비슷하므로 인용한 것이다.
[주D-007]우군(右軍)이 …… 맹세 : 우군은 진(晉)나라 왕희지(王羲之)를 말한다. 그는 왕술(王述)과 평소에 사이가 좋지 않았는데, 왕술이 고관이 되어, 왕희지가 회계 군수(會稽郡守)로 재직하면서 행한 정사를 검찰하면서 잘잘못을 일부러 까다롭게 따지자, 이를 치욕스럽게 여긴 왕희지가 관직을 그만두고 부모의 무덤 앞에 가서, 앞으로 만일 뜻을 바꾸어 또 벼슬살이를 한다면 당신들의 자식이 아니라고 맹세하였다. 《晉書 卷80 王羲之傳》 작자가 아버지가 죽은 뒤에 다시는 벼슬살이를 하지 않겠다고 다짐한 일이 왕희지의 경우와 비슷하므로 인용한 것이다.
[주D-008]소초(小草)가 …… 것 : 은거하던 사람이 세상에 나가 벼슬하는 것을 뜻한다. 동진(東晉) 때 사안(謝安)이 오랫동안 동산(東山)에 은거하다가 조정의 부름을 받고 세상에 나가 당시 권력자인 환온(桓溫)의 관속이 되었는데, 마침 어떤 사람이 환온에게 바친 약초 가운데 원지(遠志)가 있었다. 환온이 사안에게 묻기를, “이 약은 소초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왜 하나의 약에 두 이름이 있는 것입니까?” 하니, 사안이 미처 대답하지 못하였다. 그러자 곁에 있던 참군(參軍) 학륭(郝隆)이 서슴없이 대답하기를, “그 답은 매우 간단합니다. 산속에 있으면 원지라 하고 산 밖에 나오면 소초라고 부릅니다.” 하자, 사안이 매우 부끄러워하는 빛이 있었다 한다. 본디 원지는 뿌리이고 소초는 원지의 싹을 말하는데, 학륭이 절개를 굽힌 사안을 일부러 조롱하기 위해 원지는 뜻을 원대하게 갖는다는 의미로, 소초는 하찮은 잡초라는 의미로 말하였다. 《世說新語 排調》 곧 작자 자신은 사안처럼 세상에 나감으로써 부끄러울 일을 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주D-009]막내아우 : 송시열의 막내아우 송시걸(宋時杰)을 말한다.
[주D-010]무자년 : 작자가 죽은 1708년(숙종34)을 말한다.
[주D-011]건원릉(健元陵) : 조선 태조(太祖)의 능으로, 당시에 작자가 거처하고 있던 양주(楊州)에 위치해 있다.
[주D-012]옛날에 뒷수레에 태운 일 : 춘추 시대 제 환공(齊桓公)이 손님을 맞이하러 교외에 나갔다가 영척(寧戚)의 노랫소리를 듣고 비범한 사람이라 여겨 뒷수레에 태우도록 명한 일을 가리킨다. 여기서는 숙종이 건원릉에 간 김에 그곳에 있는 작자를 데리고 오라는 뜻을 빗대어 말한 것이다. 《呂氏春秋 離俗覽 擧難》
[주D-013]유편(遺篇) : 김수항이 기사년(1689, 숙종15)에 유배지인 진도(珍島)에서 사약을 받고 지은 〈문후명(聞後命)〉 시를 말한다.
[주D-014]경좌(庚坐) 언덕 : 남쪽으로 약간 비낀 서쪽을 등지고 북쪽으로 약간 비낀 동쪽을 향한 언덕을 말한다.

 
 
 
 
 
 
 
 
 
 
 
 
 
 
 
 
 
 
 
 
 
 
 
 
 
 
 
 
 
 
 
 
 
 
 
 
 
 
 
 
 
 
 
 
 
 
 
 
 
 


 




 
 靜菴先生續集附錄卷之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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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上樑文
道峯書院上樑文 吳億齡 a_022_175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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道德之歸。遠近咸仰。耳目所逮。觀感尤深。旣切矜式之誠。可廢瞻依之所。恭惟靜菴先生。受天間氣。爲世宗儒。雖聖德之樂蘊於心。不假外物。022_176a然仁智之好隨所適。足頤吾神。得異處天作之區。若神物陰來以相。洞曰寧國。允矣攸寧。山名道峯。依然見道。爲一時棲息之處。作百年景慕之資。爰創搆於舊基。實祭祀之遺意。明宮齋室。次第而成。白鹿武夷。彷彿於是。遭兵火者幾載。喜榛蕪之重開。講堂猶虛。雖嫌制度之未備。廟宇如故。幸見神明之有憑。續十六年旣廢之祠。興千萬人同然之感。矧今文風寂寞之久。莫急道學尊崇之方。闢義路塞利源。微先生則誰識。淑人心變士習。在後學尤有功。欲報德兮如天。022_176b寧寓敬之無地。許草堂之規畫。于今有光。南太守之經營。自茲可繼。作新根柢。風化權輿。人謂斯何。物固有待。天其或者。道之將行。敢因匠氏之訖功。式效兒郞之贊偉。抛樑東。水落雲開初日紅。願把餘輝照長夜。大明吾道豁群蒙。抛樑西。天外三峯入眼低。要識十分深造處。白雲臺上更無梯。抛樑南。洞裏壺天萬象涵。誰道風流吹去盡。靑山如畫水如藍。抛樑北。絶壁去天無咫尺。不遇先生不得名。道峯自此生顏色。抛樑上。奎璧精鍾金玉相。若道不窮濂洛源。儒林那022_176c得長瞻仰。抛樑下。春秋香火誠非假。吾東只說竹溪祠。未必竹溪專敎化。伏願上樑之後。俗尙貴德。人知嚮方。道義藏修。爭慕程朱之學。靈仙窟宅。永爲鄒魯之鄕
 
靜菴先生文集附錄卷之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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道峯書院記 李珥 a_022_095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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書院之建。本爲藏修。而兼擧崇德報功之典。故必求鄕先生可爲後學矜式者。立祠致敬。以興起多士希賢之志焉。靜菴先生趙文正公。寔漢022_096a山人。漢山。本楊州之域。而今作都城。楊州治南三十里有山。名曰道峯山。有洞曰寧國。舊有寧國寺。寺廢而洞仍其名。先生少日。酷愛洞中泉石。往來棲息。其立朝也。亦乘公退。命駕遊焉。至今鄕老。間有能談者。萬曆癸酉之冬。牧使南侯彥經。往觀其洞。慨想遺躅。咨詢鄕士。議仰瞻慕之所。衆志克合。乃卽寺址。營建祠宇。因設書院。鄕人聳身。百工勤力。越明年甲戌之夏。祠院告功。祠宇在北。輔以東西齋。書院在南。中設講堂。翼以兩夾室。前廊枕溪。廊側有門。因地形也。木022_096b役粗完。凡百未庀。而南侯以疾去官。繼牧是州者。李公齊閔,李侯廷馣。踵其緖不替。於是。廩士之具。藏書之室。毖祀之廚。次第訖事。越六年己卯之春。始克斷手。其將落成也。院儒安昶。以多士之請。求記于珥。珥竊念。當今文衡大手。非止一二。而必欲借海濱枯槁病叟之筆。以狀儒林盛擧者。其意安在。無乃誤以珥爲受先生之恩。粗聞此學之糟粕歟。忸怩不敢當。第寧國之洞。巖淨水淸。爲一區勝境。而賢祠儒院。一時鼎新。章甫輻湊者。有年數矣。珥未克一觀。自恨嬰疾。022_096c不能致身其側。顧以綴名其間爲至榮。故忘其僭妄。贅以一說曰。我東。素稱文獻之邦。而由王氏以前。所謂學問者。不過雕琢繡繪。以爭工鬪麗而已。性理之談。蔑蔑無聞。其季也。有鄭圃隱。始號理學之祖。而言論風旨。未得其詳。後人但知以一身撑柱五百年頹壞之綱常而已。本國文風。可踵聚奎之運。而能以爲己之學名世者。亦未曾輩出。惟我靜菴先生。發端于寒暄文敬公。而篤行益力。自得益深。持身必欲作聖。立朝必欲行道。其所惓惓者。以格君心。陳王政。闢022_096d義路。塞利源爲先務。倡道未幾。士風丕變。天不祚宋。陰慝雖作於當時。澤未五世。陽光方發於今日。後之爲士者。能知親不可遺。君不可後。義不可捨。利不可征。祭當思敬。喪當致哀者。皆我先生之敎也。苟論其功。欲報之德。寧有紀極乎。南侯灼見其然。首此美事。深可尙也已。珥因此竊有感焉。先生平日誨人者。只孜孜於爲己而已。其於習時文。干祥位。固浼浼也。後學之居是院者。誠能捐去俗習。一意以居敬窮理力行。爲深造之功程。相觀而善。相責而改。日趨乎居安022_097a資深之域。則可謂能報先生之恩者矣。瞻拜廟庭。可無愧矣。若是則先生之道。雖否於前。實行於後。豈非斯文之大幸乎。如使立志不篤。舊習作祟。操觚弄墨。惟決科是希。飢食飽嬉。棄寸陰不惜。則其有負於先生。大矣。何面目能入廟門乎。如此則先生之道。旣窮於昔。又廢於今矣。豈不痛哉。嗚呼。後生。具亦克念哉。院中規令。則諸生相與稟定于副提學草堂許公曄。是役也。斯文先後輩。咸助其費。而許公實主張焉。其餘若右參贊白公仁傑,吏曹參判朴公素立之功。亦022_097b表表異衆云。是年暮春旣望。後學德水李珥。記。

 
 靜菴先生文集附錄卷之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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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年譜
[靜菴先生年譜] a_022_106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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皇明憲宗成化十八年 本朝康靖大王十三年 壬寅
八月丁亥。十日▣時 先生生于漢城府▣▣洞之第。
生而氣質淸粹。容貌端潔。人皆異之。
十九年癸卯 先生二歲
二十年甲辰 先生三歲
二十一年乙巳 先生四歲
二十二年丙午 先生五歲
022_106b遊戲擧止。已有成人儀度。尤好習禮。稍見有非違者。雖在長上。必諷止之。乃已。
二十三年丁未 先生六歲
孝宗弘治元年戊申 先生七歲
二年己酉 先生八歲
三年庚戌 先生九歲
四年辛亥 先生十歲
五年壬子 先生十一歲
六年癸丑 先生十二歲
七年甲寅 先生十三歲
022_106c八年 燕山君元年 乙卯 先生十四歲
九年丙辰 先生十五歲
十年丁巳 先生十六歲
十一年戊午 先生十七歲
始從學于寒暄堂金先生之門
先生旣長。慷慨有大志。博學力行。時史禍大作。金先生宏弼。以佔畢齋門徒謫煕川。而參判公方爲魚川察訪。先生亦從行。素聞金先生學有淵源。遂稟命。往受業焉。金先生甚愛重之。先生自是。一以聖賢之學022_106d爲己任。○其在師門也。厲志定業。堅苦篤信。不違課式。晝講必切問。夜退必近思。鄙倍惰慢之容。未嘗暫設於身。以至記誦詞章之習。亦不少經於心。人或勸治擧子業。則輒以不嫺屬文辭。○金先生嘗得一雉。爲乾之。將送大夫人所。適被貓兒偸食。金先生盛責守婢。辭氣太過。先生進曰。奉養之誠雖切。君子辭氣。不可不省察也。小子竊有疑於心。故敢請。金先生起前握手曰。吾方自悔。而汝言又如此。吾不覺愧服也。022_107a且汝乃吾師。吾非汝師也。自後益加敬重。
十二年己未 先生十八歲
娶夫人韓山李氏 僉使允泂之女○未知何歲姑附于此
十三年庚申 先生十九歲
是歲。丁參判公憂。
凡哭泣衰絰之制。飮食起居之節。一遵朱文公家禮。自初喪。至終制。不敢少違。旣廬墓側。必對墓而坐。饋奠之暇。亦必循繞展省。冽寒暑雨不廢。雖有請見者。不與笑語。未嘗以他事出外。其於謹禮致哀。篤至如022_107b此。
十四年辛酉 先生二十歲
十五年壬戌 先生二十一歲
服闋。築室於龍仁先壟下。
先生旣除喪。哀痛不盡。乃卜於壟下。搆草堂數間。爲永慕之所。又開塘築階。種蓮柏二物。以資遊息焉。○奉養慈闈。執甘旨。謹溫凊。力行之餘。不輟讀書。以小學,近思錄,四書爲主。次及於諸經,性理群書,通鑑綱目。每鷄鳴。盥櫛。肅然危坐。平心易氣。俯讀022_107c仰思。思之未得。雖竟日終夜。期於有得。絶無自畫之念。眞積力久。德器成就。然猶以母自欺。謹其獨爲勉。蓋是時。史禍方逞。人見先生之爲。或稱狂者。或稱禍胎。親舊往往相絶。先生不屑也。
十六年癸亥 先生二十二歲
十七年甲子 先生二十三歲
十月。聞金先生凶訃。
時寒暄堂已移配於順天。至是。因士禍再起。遂不免焉。
022_107d十八年乙丑 先生二十四歲
武宗正德元年恭僖大王元年 丙寅 先生二十五歲
自是。從學者甚衆。
是歲。中廟反正。盡革燕山虐政。士氣益厲。先生始以其學敎授諸生。遠近聞風。來學者甚衆。陶成振作之功。於斯爲盛。○有和終南副守昌壽詩。
二年丁卯 先生二十六歲
三年戊辰 先生二十七歲
四年己巳 先生二十八歲
022_108a五年庚午 先生二十九歲
春。中進士會試壯元。
以春賦送李存吾貶長沙監務詩占魁。考官驚賞不已。
夏。讀書于松都諸山。
五月。先生往遊天磨,聖居兩山。或遇奇絶處。輒徜徉行吟。蕭然有出塵之趣。擇其淸幽蓮社。入處靜讀。沈潛理義之奧。探賾經傳之旨。凝神端坐。兀若塑人。淡餐攻苦。與緇流共之。雖精進闍梨。皆以爲難及。凡對022_108b食如廁外。絶無閒刻。唯三更後五更前。爲脫衣就寢時也。平生用力於學。及此愈篤焉。至秋乃還。○時奇公遵往從之。先生謂曰。措大如是刻苦。不亦勞乎。蓋相長之言也。○先生嘗棲山寺。讀孟子浩然章。一月。乃得通解。
六年辛未 先生三十歲
是歲。丁母閔夫人憂。
致哀謹禮。一視前喪。
七年壬申 先生三十一歲
022_108c八年癸酉 先生三十二歲
九年甲戌 先生三十三歲
贈叔父 元紀 詩序
時文節公。方赴慶源。先生以詩贈之。勉厲甚至。
十年乙亥 先生三十四歲
春。讀書于砥平龍門寺。
先生携二三友人。結榻相討。晝夜忘倦。諸公皆自以爲不及。
夏六月。被成均館薦。
022_108d時先生名行表著。朝廷將大用。成均館有議薦之擧。文節公還書戒之。略曰。直之被薦。喜與憂騈。盛名之下。其實難副。有譽則有毀。此古今通患也。操履之愼於前。尤難。若色言狂驕。害己敗身之戒。則吾於孝直。不當警也。惟吾之所憂。則不在是也。凡人群居天地中。不可以高飛遠走。則必須小同於俗。庶免爲衆所嫉。昔杜祁公。嘗戒門人曰。切當韜晦。毀方瓦合。無露圭角。不然。無益於事。而祇足取禍爾。今吾之識。不022_109a及於杜之涯涘。而汝之知。有裕於杜之門人。則宜不以此警於汝也。然今之時與杜之時。又加邈矣。世路險巇。又加萬倍。吾之所戒。豈無所見而然耶。去秋四館之議。亦其一驗也。當時。不有一二君子沮而抑之。其能無窘於貶者之鋒耶。今聞被薦。而求免於選用。汝之心必以爲一繫名韁。恐不專所業而然也。然吾家自先祖。以廉謹自守。計不求足。而兄又早逝。汝之兄弟三人。俱業儒未成。仕不爲貧。而有時爲貧。爲貧022_109b之仕。豈非今也其時乎。以家貧親老。比不能專業。則爲有間矣。況前聖。以爵祿之辭。至比於蹈刃。凡人好事者。安知不以此爲矯情之誚耶。此吾所憂也。然則是擧。非喜也。乃所以憂之也。唯無咎無譽。眞所謂保身之道也。
銓曹啓請陞宣務郞準職
判書安瑭啓曰。趙光祖。明經術。有行義。爲成均首薦。若拘資格。不足以勸勵士林。請陞宣務郞。準主簿職。以觀其才行。從022_109c之。
除造紙署司紙
先生歎曰。吾本不以利達爲心。不料遭此意外事。必不得已。當由科擧。以通行道之階。若其用虛譽。的然於世。吾甚恥之也。
秋。中謁聖試第二名。
對孔子過化存神策
除成均館典籍。遷司憲府監察。
十一月。拜司諫院左正言。請罷李荇等職。從之。
022_109d先是。靖國之初。成希顏,朴元宗等。議廢王后愼氏。更立章敬王后尹氏。是年二月。誕元子薨。坤儀久闕。朝野疑懼。七月。潭陽府使朴祥,淳昌郡守金淨等上疏。請復愼氏。大司諫李荇等。指爲邪論。大司憲權敏手和之。請拿問。事將不測。左議政鄭光弼議啓曰。祥等。言雖不中。不可罪之。以妨言路。得止徒配。至是。先生拜正言。啓曰。言路之通塞。最關於國家。通則治安。塞則亂亡。朴祥等。當求言而進言。其言雖022_110a若過當。不用而已。何復罪之。臺諫乃復請罪。自毀言路。大失其職。臣今爲正言。豈敢與失職臺諫同事乎。不可相容。請罷荇等。復開言路。屢啓不已。上命盡遞兩司。獨出先生。直提學金安老等。更爲兩是之論。至謂光祖爲言路扶植。荇等爲宗社請罪。自是。廷議角立。互相攻斥。終爲士禍根本。
是歲。子定生。
十一年丙子 先生三十五歲
022_110b春。除戶曹佐郞。○遷禮曹佐郞,工曹佐郞。選拜弘文館副修撰兼經筵檢討官,春秋館記事官。
先生旣被擢用。銳意格君。遂以堯舜君民。興起斯文。爲己任。每當入講前夕。預加齊戒。將所講書。端坐熟讀。至曉。易服而進。及至上前。一心肅慮。如對神明。反復陳辨。冀必感動於聖聽。乃自天人性情之分。王霸義利之辨。以及修身致治之道。靡不罄竭極論。或至日昃。上亦虛心傾聽。朝022_110c野想望。以爲太平可致矣。
拜修撰。兼如故。
冬。製進戒心箴。
時上命弘文館。製進戒心箴。先生箴序曰。人於天地。稟剛柔以形。受健順以性。氣卽四時。而心乃四德也。故氣之大。浩然無所不包。心之靈。妙然無所不通。況人君一心。體天之大。天地之氣。萬物之理。皆包在吾心運用之中。一日之候。一物之性。其可不順吾度。使之乖戾邪枉耶。然人心有欲。022_110d所謂靈妙者沈焉。梏於情私。不能流通。天理晦冥。氣亦否屯。彝倫斁。而萬物不遂。況人君。聲色臭味之誘。日奏於前。而勢之高亢。又易驕歟。聖上是念是懼。命臣述戒。嗚呼至哉。遂居首。賜毛褥一坐。
十二年丁丑 先生三十六歲
正月。論弭災應天之道。
當筵。啓曰。天之示警有二義。危亡將至。迷而不悟。則天降災異。以譴告之。時事有可治之幾。而上下猶且遲疑。則亦出災異。022_111a使之警省加勉。當此之時。上下若不交修加勉。則天心無常。終必敗亡。可不懼哉。又進曰。君臣上下。須以至誠相孚。通暢無間。然後可以爲治。待大臣臺諫。當用是道也。且君相。常以保護山林爲心。使爲善者有所恃。而知其爲善。則表而用之。不使賢愚混淆。可見至治矣。
請召大臣侍從。商論祖宗舊典。
啓曰。祖宗舊章。雖不可猝改。然若有不合於今者。亦可變而通之。望於燕閒之022_111b中。不拘常例。召對大臣或侍從。論議其可否。可爲之事。則斷而行之。可也。又進曰。君子小人之辨。後世尤難。古者。人君接群臣。不啻如子弟之於父兄。故可以見事聞言。而知其人矣。今則進見有時。禮貌有規。雖不賢之人。入侍之時。修飾善言以啓。故辨之難矣。人君當更體念於此。心地旣明。則邪正不能遁其情矣。但人心操舍無常。若又以正事至言。爲拂逆而拒之。則衆君子皆引退矣。其後。雖欲正之。群邪已滿於022_111c左右。無所及焉。昔宋神宗。賢君也。以堯舜之治爲心。而擯斥司馬光。信任王安石。以致小人幷進。其後。欲斥安石而不可得。臣言實有深遠之慮矣。
二月。拜弘文館校理兼經筵侍讀官,春秋館記注官。
當筵。啓曰。人主以唐虞三代爲期。未必卽致唐虞三代之治。然立志如此。而用功於格致誠正。則漸至於堯舜之治矣。若徒騖高遠。而不下實功。則日趨浮虛之地而022_111d已。又曰。人君之德。莫大於敬。內有實踐而後。下人觀感而興起焉。制事應物。如鑑空衡平。可也。人君容色端嚴。則宦官宮妾。亦將不得而近矣。
賜暇讀書於東湖
七月。陞應敎兼經筵侍講官,春秋館編修官,承文院校勘。
八月。陳啓。請贈金宏弼爵諡。從祀文廟。不許。
先是。啓曰。今之學術甚壞。館中諸生。立022_112a志甚卑。未見人才之傑特者。士習頹靡。莫大之患也。變化之道。豈無其力。如金宏弼,鄭汝昌者。極加褒奬。則可矣。至是。館學儒生上疏。請鄭夢周,金宏弼從祀文廟。先生亦與副提學金淨等啓曰。金宏弼。性度溫毅。才識明敏。少有大志。力學聖賢。忠信篤敬。動遵禮義。學問精深。道德成立。奮乎絶學。爲世儒宗。其有功於斯文。大矣。請隆爵尊諡。從祀文廟。以明士趨。
請褒贈成三問,朴彭年及深源。
022_112b當筵。啓曰。金宏弼,鄭汝昌事。已議於大臣。成三問,朴彭年等。亦當幷議。此大公至正之意也。且朱溪副正深源。年二十餘歲。深知姑夫任士洪奸狀。乃請面陳於成宗曰。此他日敗國亡家之人。不可苟容於朝。仍痛泣流涕。厥後。成宗不能遠斥。幾致敗國之禍。其忠言直節。斷可知矣。又曰。三問等。當時。已許身於魯山。故不失其志操如此。若委質於世祖。則亦當爲其忠臣。忠臣義士。已定君臣之分。則更不他022_112c適故耳。斯人忠義。自當萬古不泯。臣等敢請褒揚於今日者。欲勵人臣之志操也。
論鄭夢周從祀
時朝廷始許鄭夢周從祀。大臣引他說以難之。先生啓曰。辛禑之爲王氏與否。當時之人。亦不明知。夢周。本非求功名富貴於辛禑者也。況冊立恭讓之後。乃爲死節。其賢。蓋可想已。昔者。狄仁傑事武后。而終復唐室。安知夢周不以狄公之心爲心乎。高麗五百年宗社。在於一人之身。其身022_112d亡。而宗社卽亡。今何可輕議此人乎。
陞典翰。兼如故。陳啓辭。且請外補。不許。
啓曰。小臣有志於學問。而不能實用其力。職任漸重。心自內愧。私語同僚曰。聖學高明。方有意治理。而如我濫廁侍從。豈可自安乎。當退而力學。學問成就。然後來仕。則必有絲毫之補矣。臣意又謂。乞補僻郡五六年。治民之暇。致意於學術。則治民治學。庶乎兩全。而小臣有意。未敢仰達。又爲典翰。人器不合。與前立志。大不同矣。不次022_113a之恩。豈可冒處乎。
十三年戊寅 先生三十七歲
正月。論經筵坐講。
啓曰。我國。君臣之分隔絶。邇來。屢敎講官平氣以坐。而群臣不知上意之誠否。故未能猝變舊習。以此觀之。習俗之難變。固矣。貞熹王后臨朝時。群臣莫敢仰視。循成此習。若成廟朝。則豈有如此事乎。廢朝。沈順門。以仰視被罪。積威之極。群臣震懾。今之俯伏。亦廢朝之餘習也。
022_113b請不時召對群臣
啓曰。學問。當及時勉勵。苟至於志氣衰暮。則無益也。今値可御經筵之日。亦云。有故而不御。未知內間別有何事乎。雖不御經筵。而不時召對。亦可也。今之接對群臣。只有經筵而已。如臣等。雖無知識。思所以竭誠裨補聖學。則豈無少益乎。殿下卽位已久。不見治效。而災變荐作。士習日頹。朝廷之上。亦無可稱之事。今若不定此習。則人心何時而可變。至治何時而022_113c得見乎。古云。靡不有初。鮮克有終。有始有終。人主之所當勉力者也。天下之勢。不進則退。若遲疑則天變人心。恐不可測也。
超拜通政大夫弘文館副提學兼經筵參贊官,春秋館修撰官。以病辭。不許。
先生會墜馬。病甚。移告。上命遣醫問疾。藥餌交道。未幾獲瘳。
進講大學誠意章。因論修己治人之道。
先生因文。啓曰。古云。至誠感神。又曰。不誠。無物。君之遇臣。臣之事君。皆以誠實。則022_113d治化。可期其成也。我國。地方褊小。人君發一言。則入道之人。一朝皆得聞知。惟當於大臣則敬之。於群臣則體之。百工則來之。庶民則子之。患吾之所以遇臣愛民者有未誠耳。不患其難化也。近來。士氣稍稍振起。民之趨向。亦漸好矣。惟願自上。日加愼獨。誠實工夫。終始不渝。則治化可臻矣。所謂三代之治。今可復致者。雖不可易言。豈全無致之之道乎。自上。先養己德。推之行事。則人皆誠服。不期化而自化矣。若022_114a吾德不修。而修飾於事爲之間。則亦何益乎。須敦厚其德。使萬化自明德中流出。則下民自然觀瞻欣感。有不能已者矣。又非但拱手以守其德而已。必以禮樂刑政。提撕警覺。布置設施。如有可爲之事。當振奮而力行也。
二月。論東漢黨錮事。因請培養士氣。
啓曰。自古。正直之流。盛行於世。則必有大禍隨其後。是故。深於自謀。周於涉世者。不敢抗志直言。以召怨怒。而低回俯仰。周旋022_114b彼此。保其身。全其妻子者。蓋多。此非委質憂國之人也。夫不顧其身。惟國是謀。當事敢爲。不計禍患者。正士之用心也。今之侍從臺諫。豈眞如古之人乎。雖有爲善之人。或慮其終被禍患。而閭閻之間。亦皆以爲大禍必生於朝夕。蓋其懲於前者。深也。今之培養。豈可少忽乎。大臣與小臣。在上前。小臣言之而非者。大臣可以折之。退而在外。言之而非者。大臣亦可以開喩也。但無私心而已。大小之臣。相和如一家。則天022_114c地交泰。而萬物生遂矣。
論義利之辨
啓曰。人主於義利公私之辨。不可不明審也。苟能知義利公私之辨。而不惑焉。則內外修而心地淸。是非好惡。皆得其正。而至於處事接物。無不當矣。
論貢物之弊
啓曰。殿下卽位十餘年。士習漸化。今則庶人。亦有以禮居喪者。士習正。則民生得遂矣。我國田稅。三十之一。而貢物則過多。022_114d以此。民生日困。經費之用。量宜裁減。然後庶可安民矣。國之法制。雖不可輕改。然學問高明。洞照事理。則與大臣同心協力。可損者。損之。可益者。益之。期致於隆平而後已。此正遵守祖宗之成憲者也。又曰。守令賢。則民受一分之惠。然不改規模。而徒責其事爲之末。則治不效矣。今觀各邑之貢。土產不均。又皆防納。一升之納。徵以一斗。一匹之納。徵以三匹。因循積弊。至於此極。朝廷豈不爲生民計也。若於民事有合。022_115a則亦可因其祖宗之法。而改其規模。如此而勵精求治。則可見治道之美矣。
論擇初入仕官
啓曰。擇士。當於入仕之初。若擇之於旣用之後。則吁亦晩矣。庶僚雖多。而無可用之才者。正坐於此弊。若於其初。審取舍。辨賢否。則仕路自趨於正矣。
請謹特旨除官
啓曰。特旨除官。固善。然好惡之發見處。幸有不合於朝議。則未可也。
022_115b請嚴賄賂之禁
啓曰。成宗朝。尙寬厚之政。至如奸贓之罪。或多寬之。賄賂之行。蓋始於是時也。在世宗朝。如萬戶等官。亦皆以廉潔相尙。士習之邪正。治道之汚隆。因此可見也。今世。此弊雖未至甚。必須隨事痛治之。少有所犯。使不得立朝。則人知可畏。而各自砥礪矣。
五月。移拜承政院同副承旨兼經筵參贊官,春秋館修撰官。
022_115c當筵。啓曰。學者。雖處靜中。用功亦難。況人主。深居九重。萬機浩繁。安能如學者處靜中。與朋友討論之功乎。今於經筵。雖得進講。君臣之間。名威隔絶。上有所言。未能盡諭於下。下有所懷。未能盡達於上。如是遷延。歲月易過。幾不可失。若聖學高明。則不必但以講問爲主。幸於思慮之間。或有未穩之事。有時召侍從之臣。論難可否。則情意可通也。但好善之心。不出於誠篤。而徒爲文具。則間亦有垂隙而窺測者022_115d矣。○右承旨金淨啓曰。趙光祖在經幄。輔益弘大。物議咸以爲稱職。承旨。喉舌之地。固當擇任。亦可入侍論難矣。然不若專主其任也。臣得同任。固幸矣。但計其輕重而啓之耳。居數日。移長玉堂。
復拜弘文館副提學。兼如故。
乞暇。省墓于龍仁。
是月十六日。上親政。忽地震三度。殿宇搖撼。先生方在鄕。驚曰。今日。沈貞必判秋曹矣。果然。時安瑭亦陞右相。上以災異。延022_116a訪宰執。禮曹參判曺繼商啓曰。此輩。不有人禍。必有天刑。蓋指右相一隊也。臺諫遂論繼商之罪。先生還朝。亦極言繼商罪。貞則已被論遞矣。
七月。上疏。請罷昭格署。從之。
時臺諫請罷昭格署。累月不允。弘文館亦逐日論啓。先生遂上疏。極陳道治一純之致。繼陳昭格訓邪之失。且曰。殿下寅畏天命。祇懼丕基。孜孜學問。虞夏皇王之道。探究體認。凡所以抑詭類。拔正道者。022_116b靡不用極。而獨此一事。唯蔽聖明。將除而復信。欲革而還疑。大失乾剛精粹之德。臣等猶恐殿下之心。其於精一之功。或有所未至也。一則直方。而守義理之正。精則粹白。而卞邪正之分。用之於身而道明。施之於事而政善。惟左惟右。罔有不一之功。苟或未盡。邪念潛藏。引類暗長。以至衆僞朋興。而側媚邪佞之徒。又因緣交締。則將來之禍。有不可勝言。臣等正爲此懼焉。因進曰。近日。官中降香外方等事。皆上022_116c所不知也。夫以格致誠正之功。推而至於治國平天下。宮中之事如此。則聖明格致誠正之功。可謂未盡矣。一心邪正。因事而著焉。如昭格署之是非昭然者。猶不分明處之。抑恐邪念潛藏。而有時或發也。一日。率同僚詣政院。謂之曰。日已暮矣。言官雖退。我輩當竭誠論列。以回天爲期。仍留不出。終夜論啓。至鷄鳴不止。上始允之。○先生於闢異端尤力。又嘗曰。奉先,奉恩二刹。緇釋之根柢。先斷其本。則其餘。可不022_116d勞而治矣。
請勿潛襲野人。從之。
時會寧府野人速古乃。潛與深處野人通謀。入甲山府界。多掠人畜。至是。因南道兵使祕啓。先諭密旨于本道。遣李之芳。往伺隙掩捕。上御宣政殿。臨遣。將相環侍。先生自外來。請對。進曰。王者之待夷狄。當實邊鄙。緩民力。使不生事。而彼若先擾我邊。不得已而應之。然當審度兵力事勢。不可輕動。況無名之擧乎。臣聞。昔成宗朝。022_117a滿浦僉使許混。擒遊獵之虜。因此數年。邊患不息。成宗誅混。以懲後人。今者。朝廷遣大將。邀虜於草莽之間。以行盜賊之謀。於事何如。臣恐重傷事體也。上卽命更議。左右爭言。兵家有奇正。詢謀已同。不可以一人之言遽改。上猶却衆議。罷遣。
八月。進講論語。
講畢。啓曰。着力於此書。則治化當自此出。若悠悠泛泛。則歲月易往。難得者時。易失者機。且不緊公事。紛紜出入。聖學恐022_117b不專一。須於深宮燕閒之時。潛心體道。然後德化出矣。
九月。論主敬工夫。
啓曰。整齊嚴肅。則自然主一無適。而應物精當。言動中禮矣。常人之不能若此者。皆不能整肅故也。此是聖學之始終。而形容之極難。必於心地惺惺。無昏雜懈弛之時。可見矣。故先儒以主一無適爲言。夫整齊嚴肅。正衣冠尊瞻視者。乃不昏惰之工夫也。因進曰。人主學問。非止澄明一心而已。022_117c當見諸施爲之際。今者。聖學已至高明。若失此機。後不可圖。須與一二大臣。參酌古今。行之以果。若徒於經筵論難。而不措諸事業。近於釋氏之學。若以措諸事業爲先。而不務自修。亦恐不可。須敬以直內。義以方外。內外交相養也。
十月。進講近思錄。因論輔養元子之道。
上御不時經筵。先生進講近思錄。講訖。上曰。此書言。操則存。舍則亡。書曰。惟聖罔念作狂。惟狂克念作聖。操存省察之功。豈022_117d不難乎。先生曰。上敎聖狂之說。甚爲要切。心是活物。若有感而動。則事爲之主。有似不亂。未接物時。常人之心。尤爲散亂。若欲着於一處。則是以敬直內。非操存之道也。所謂操存者。非必每存善念也。但矜持虛靜。敬以直內。雖非應事接物之時。而常惺惺之謂也。上曰。七情。人所共有。而發之中節。爲難也。先生曰。堯舜桀紂。俱有七情。而善惡懸殊者。以其情之發。有中有不中也。雖善人。爲氣所激。則喜怒或過中焉。022_118a今日。在座之人。孰不欲爲善哉。但能克去己私。則可學聖人矣。古人曰。希顏亦顏。要在用心剛。願上克念古昔帝王之所爲而勉力焉。上曰。欲爲善。而或有過失。改之不吝。可也。若故爲惡。而乃曰。後當改之云爾。則非也。先生曰。雖顏子。亦不能無過。但知非之後。痛自刻責。可也。若有過失。不自反求。而更爲文飾。則何事得其當乎。又曰。元子年歲稍長。知識異常。近來。未聞講學之如何。憂慮實深。雖待正位東宮。乃設022_118b僚屬。但擇賢宰相。加定輔養官。而或令承旨。或史官。或本館年少之官。時時進見。觀其遊戲而敎導之。可也。程子請以士大夫幼子侍太子。當使早歲。有親賢士大夫之心也。但不可急迫而已。
十一月。特陞嘉善大夫兼同知成均館事。○移拜司憲府大司憲。
先生每膺寵擢。惕然不自容。至是。憂懼益甚。屢形於色。○時有與先生爲同年進士者。不協於室家。意欲出之。使人來稟。先022_118c生正色。答曰。夫婦。人倫之始。萬福之原。所關至重。婦人之性。陰暗無知。雖有所失。爲君子者。當率以正。使之感化。其成家道。此是厚德也。或未盡於表率之道。而遽欲去之。不近於薄乎。聞者歎服。
兼元子輔養官
請設賢良科。從之。
時政府與禮曹合啓。請依西漢孝廉賢良科例。令京外各薦所知。以爲臨軒親試之地。上意未決。先生進曰。以上之志022_118d于治。久未見成效者。由不得人材也。若行此法。人材不患不得。遂準請。
論顏子好學。因請揭四箴於座右。
先生嘗侍經筵。論孟子好學之功曰。顏子克去己私。理不爲氣所動。故能不遷怒。不貳過。因論理氣之分曰。理爲主而氣爲所使。則可矣。顏子義理昭晳。私氣消沮。故能如此。大抵耳目口鼻。聲色臭味之欲。無非以氣而出也。使之合理則善也。因論男女之慾曰。男女。人道之大倫。而過則爲害。022_119a上自公卿。下至百僚。常失於此。終至喪其本心者。有之。若顏子之四勿。是工夫下手處也。程子四勿箴。當揭于左右。以備省覽焉。
請澄汰成均館儒生。及以未出身人。爲大司成。
啓曰。近日。學校之事。有名無實。志學之士。皆不欲居館。其寄齋者。皆非俊秀。申光漢爲大司成時。欲澄汰而未果。臣意亦然。但如臣者。不能敎誨而在其職。其可乎。祖022_119b宗朝。姜碩德。非由科擧以進。而亦得爲大司成。自上敎以非由科目者。亦兼帶學官之職者。甚當矣。
是歲。子容生。
十四年己卯 先生三十八歲
遞拜同知中樞府事。因政府啓。仍任。
時有金友曾者。以毀誣士林事庭訊。先生以臺長參鞫。不欲窮治。兩司論遞付西樞。右相安瑭啓言。臺諫請鞫。囚於殿庭。是不能引君當道也。請勿遞光祖。上從022_119c之。
二月。被抄進講性理大全諸員。
四月。復拜副提學。兼如故。
啓曰。惟大人。爲能格君心之非。苟欲有爲。宜得大賢之人。可以上安宗社。下庇生民者。置之左右。每以堯舜之道。陳于經幄。可也。臣無學術。逢此之會。反顧內愧。豈有極乎。漆雕開之言曰。吾斯之未能信。古人雖有學問之功。以一毫未盡。而不欲出仕。況如臣者耶。臣怠惰成習。公退之暇。雖欲勤022_119d學。而力未及焉。每欲退居爲學。學成然後復仕。而不敢瀆達。此非私計。亦是爲國家計也。○先生晩好羲經。手未嘗釋。
六月。還拜大司憲。
先生在憲府。執法平允。敎導兼至。習俗爲之一變。市井小民。事其父母。生養以誠。死葬以哀。衰麻三年。軍卒賤隷。亦爲居廬。祭用木主。墓必立石。遠近風動。每出。市人羅拜馬前曰。吾上典來矣。○時儒生方遭變者。人稱其罪。以父子相奸。遂具由呈憲府。022_120a先生進而敎之曰。此事之辨。在汝而已。今日之後。汝若飭躬自修。以善人聞。則今雖未辨。人必曰。前言誣耳。汝若行事。以不善人聞。則今雖得辨。人必曰。前言不虛耳。其辨與不辨。直在於汝。汝其勉之。某甲遂叩頭而出。其後。一鄕果不以相奸爲疑。論者以爲先生於此處疑之道。勸人之善。兩得之矣。
請因私服往還於濟物。許之。
先生妻父李公允泂。爲濟物萬戶。卒於任022_120b所。無長成子弟。先生啓請斂殯而來。上許焉。
論文昭殿陵寢諸祭
當筵。啓曰。今之弊習。多矣。原廟三時之奠。陵寢朔望之祭。皆非正道。而創自世宗朝。以此觀之。世宗才氣英斷。而恐於學問有所未盡也。此非敬先之道。反爲煩瀆矣。但非自下論執之事。須自上。晝思夜度。斷自聖衷。則事神之道。得矣。欲得如伊,呂之佐。與之圖治。則必先去此022_120c等事而後。可也。
論大臣臺諫相濟之義
啓曰。小臣冒忝憲長。欲與大臣相和。乃本意也。每欲相議曰。大臣所爲。無乃不可乎。臺諫所論。無乃不合乎。如是論難。乃可相濟。而若不相規。則豈相和之道乎。元祐,紹聖之時。有邪正兩存之說。由是。邪正雜進。此苟且之論也。若朝廷有是非混淆之事。則大臣當辨決而處之。若人君與大臣。徒務包容而不辨。則爲害多矣。大抵朝廷有022_120d邪議者。大臣之過也。宋時。韓琦,司馬光,呂公著。與士林皆是一心。後世大臣則不然。不能主張公論。而歸之臺諫。大臣過於包容。臺諫過於峻絶。因此有相異之弊矣。
論親行宗社大祭
啓曰。宗廟社稷之祭。所當親行。以細故不行。甚不可也。今之士大夫家。或以婦女妖說。或以世俗禁忌。不行祭者。滔滔皆是。聖學高明。必不拘此例。臣不疑焉。但深宮之中。所當益愼也。
022_121a七月。以病陳啓再辭。不許。
蓋因與一時論議不協而發。時士類雖得志。而敗症已見。識者甚憂之。先生乃與李公耔,申公鏛,權公橃等。謀欲調適其間。不至敗闕。而如權磌者。反以先生爲依違苟且。亟欲劾去之。故先生自處。不得不然也。○時奇公遵。致簡先生曰。欲棄官綬。斂身山林。無復世路之念。先生曰。亦當如是。益見其雅志所在矣。○一日。夜對。玉堂僚員啓曰。方今欲致太平。須擢相當代第一022_121b人。李延慶進曰。是謂趙光祖。光祖誠賢。然用人。必踐歷多。人望洽。然後可授以大任。先生聞之。馳見泣謝焉。
請勿出養元子於閭家。因陳預防士禍之道。
時元子避寓于閭家。先生啓曰。我國。因循俗習。王子出養于閭閻。甚不可也。須養闕內。親敎善事。且擇宰相中賢德者。使之親近薰炙。以成德性。可也。至於君子小人之進退。吉凶安危之消長。義理善022_121c惡之幾微。反復常說。則雖不能盡解。聞見習熟。自然與智俱長。隱然之中。所益甚大。且於經筵。使在座側。與聞朝廷是非。生民休戚。使自少親接朝臣。可也。乃曰。近來。祭魯山及復昭陵等事。皆前日。志士欲行而未得者。而至於聖世。侍從之臣。建白行之。且愼氏復立之議。朴祥,金淨至於上疏。亦是正論。而其時議者。欲置之大罪。此皆小人所藉口者也。士林之禍根。潛伏於此。聖上不可不知。而亦不可不言於022_121d元子也。臣每於中夜思之。感歎之餘。不無恐懼之念矣。先是。先生進曰。成宗朝。培養士氣。可謂至矣。然至於廢朝。朝臣苟容。氣節掃地。特立不撓之士。世不易得也。今國家修擧之事。皆先朝所未遑。他日。小人若假紹述之說而中之。則善類殆矣。又曰。大抵我朝。自開國以來。士林之禍不絶。若有君子。力於國事。庶幾有成。則無不敗之時。甚可懼也。小臣目覩廢朝之禍。頓無仕宦之念。第以士生斯世。不可恝然。故022_122a不得已從仕立朝矣。但其恐懼之心。人皆有之。自古邦國。雖得鞏固於一時。鮮不傾殆於後嗣。當此幾會。須振作士氣。固定邦本。預防後日之患。可矣。古人云。人之云亡。邦國殄瘁。善人之於國家。所繫豈不大耶。至是。尤致勤懇焉。
論責勉大臣之道
啓曰。政化。當自政府而出。近來。臺諫多建白政令。雖出於不得已。非其任也。政府當與六曹。論議國事。振奮修擧。大事啓稟。小022_122b事自決。臺諫則糾察闕失而已。自上勵精圖治者。不爲不至。而尙無其效者。恐綱領節目。有所未盡也。隨宜斟酌而運用之。全在政府。今者。三公贊成。皆入侍矣。豈可不勉力乎。政府統率百司。猶人之元氣也。爲三公者。以一國之事。皆置于胸懷。密勿圖之。可矣。若政府委靡。則猶無元氣也。人君雖欲有爲。其能獨運乎。
八月。率成均館儒生。詣闕講書。
入對思政殿。見元子。講小學。
022_122c先生以輔養官入侍。啓曰。今聞元子聲音。甚仁厚。臣不勝喜悅之至。今之敎養。不可過於急迫。當從容訓誨。使之浸漸成就。可也。輔養之人。須責老成厚德之人。如臣者。爲臺諫。尙不能盡職。況且大任乎。若不加輔養之名。而常使往來從遊。則臣亦有欲侍之情。豈敢辭乎。觀其德器。有若已成。誠國家之福也。
論王伯之辨
啓曰。百姓安業。則庶幾無憂矣。古人云。如022_122d保赤子。愛民誠能如愛赤子。則民之視上。亦必如父母。何患治化之不成乎。自古。人君多好伯功。鮮行王道。尙伯者。雖易致國富兵強之效。豈復有仁義之道乎。行王道。雖未見朝夕之效。終必悠久而大成矣。故孟子歷聘齊,梁。丁寧告戒者。只是勸行王道而已。
九月。請於拜陵時。從官用公服。從之。
舊例用戎服。故先生啓之。
十月。論不哭申用漑喪。
022_123a時左相申用漑卒。上欲依例擧哀。大臣禮官等議持難。不果行。先生啓曰。用漑之卒。上欲擧哀而還寢。何也。臣聞。柳寬之卒。世宗哭聲徹於外。至今聞者。莫不竦動。前日。下敎之意甚美。而大臣乃謂無別殿可爲。其不能將順。甚矣。○野言別集云。承旨親啓。此祖宗朝舊例。在中宗己卯年間。趙先生等遵而用之。先生被禍後。遂不行。○東閣雜記云。己卯。上議于大臣。八道監司。幷率眷。再朞以遞。有府022_123b尹處則兼府尹。慶尙分爲左右道。趙先生等敗。旋復舊。右二事。雖非先生所建白。而其實相關。故幷附焉。
請改正靖國功臣
先是。戊寅冬。先生啓曰。靖國時。朝臣識見不高。功臣官爵。猥濫太甚。小臣近作臺官。欲爲國事。而利源一開。莫知所救。念及於此。至欲忘身而極言之。不革此弊。則社稷將不能支持矣。至是。與兩司諸官。伏閤論啓曰。靖國功臣。已久之事也。其初。大臣若有遠慮。臺諫若持公論。則豈022_123c不改正乎。成希顏雖有大功而無學識。朴元宗亦不學者。希顏與柳子光相知。故乃以磨勘大事。委諸奸人。其後。雖有奮不顧身。欲正國事者。而猶不敢請改。恐聖學未臻高明。以爲重難故耳。利源開張。爲國家膏肓之疾。人心壹鬱。急欲論改。而事有漸次。故今始重發。今若不能痛塞。則必有不忍說之事矣。屢啓不已。
論南衮避事之罪
啓曰。禮曹判書南衮。請差英陵香使出022_123d歸。以一品之人。逢此廷議。觀望圖避。甚爲邪慝。宰相用心。豈可若是乎。
率臺諫辭職。始準改正之請。
啓曰。意與事乖。將失大機。固欲翩然引去。不復區區往來。惜時之念。愛君之誠。猶有所不忍。而累日徘徊。不卽便決。事君之道。深有愧於古人。又曰。禍在顯著者。易見。而禍在隱微者。尤可畏也。此事非如一政之失。人人但知有利。而不知有仁義。以此成俗。將無所不至。慮至於此。豈不動念乎。屢022_124a啓不止。上竟允之。蓋先生大意。只欲上格君心。下與大臣。同議國事。以正士習。變弊法。庶幾少伸其堯舜君民之志而已。若其古制美法之可行者。猶在其次。故於童丱,鄕約,齒坐之議。每示持難。至於闢異端。塞利源。實衛道圖治之大要。非此。無以爲國者。故乃因臺諫所爭。而極言之如此。
十一月乙巳。因南衮,沈貞,洪景舟等密告。下獄。安置綾城。
時諸賢被上寵擢。布列朝廷。知無不言。022_124b言無不行。而年少新進。勇於改絃。不度時宜。持議益峻。人皆側目。及侍筵中。進講文義。縱橫出入。辭語太蔓。以至朝講日晏乃罷。聖體有時疲倦。欠伸或徙坐。戛然有聲。而諸賢不覺也。南衮,沈貞,洪景舟等。曾爲士類所駁斥。及他舊臣之在散者。鼓吻旁伺。思欲甘心者。久矣。至是。揣知上意有厭諸賢色。乃使景舟。敎其女煕嬪。因小民稱道先生之說。以一國人心。盡歸趙氏。且以甘汁。寫走肖爲王四字於禁苑木葉。022_124c及被山蟲剝食。仍以上聞。有若符讖者然。又白武士等怨嫉彼輩。謀欲殺害。若朝廷不先處置。則必生大亂也。適會改正功臣。大小人情俱怒。乃於是月十五日二更。衮,貞,景舟。與金詮,高荊山,金克愊,成雲等。密開神武門以入。俄逮先生及刑曹判書金淨,承旨尹自任,朴世熹,朴薰,副提學金絿,大司成金湜,應敎奇遵等。致于闕庭。將殺之。乃傳曰。趙光祖,金淨,金湜,金絿等。交相朋比。附己者。進之。異己者。斥之。聲勢022_124d相倚。盤據權要。引誘後進。詭激成習。使國論顚倒。朝政日非。在朝之臣。畏其勢焰。莫敢開口。尹自任,奇遵,朴世熹,朴薰等。和附光祖等詭激之論。幷下義禁府。先生獨痛哭。諸公相與勉之。先生曰。從容就義。吾豈不知。但不得復見吾君耳。若見吾君。豈至如是乎。○十六日。先生供曰。士生斯世。所恃者。君心而已。妄料國家病痛。在於利源。故欲新國脈於無窮而已。頓無他意。命光祖,淨,湜,絿四人賜死。其餘安置。先生022_125a聞之。始乃裕如也。領議政鄭光弼請入對。涕泣極諫。且請召左相安瑭議。又會參議以上多官。議之。遂命先生等四人。決杖遠方安置。餘有差。門人成守琮,洪奉世等。解衣賂杖者。得輕。十七日夜三鼓。出獄還家。十八日早朝。出東小門外人家。上命還聚諸公於禁府。使成雲傳聖旨曰。汝等。俱以侍從之臣。本欲君臣同心。佇觀至治。汝等人物。亦不爲不良。但近來。凡事過誤。使不平常。朝廷日非。故不得已罪之。然022_125b予心何安。朝廷大臣。亦何有私意哉。汝等之事至此者。皆予不明。不能先防其微也。若罪以律。則必不止此。特爾等。非有私心。但爲國事。不自知其過激之過也。故末減罪之。汝等知之而去。回啓曰。他人則無所言。惟趙光祖曰。臣雖此去。君心豈不知乎。臣等所爲。果有過激矣。是夕。還宿東小門外。赴謫。聞者莫不咨嗟涕泣。往往不覺失聲痛哭焉。先生至謫所。乃撤墻北隅。坐必向闕。以紓戀主之懷。每言。臣罪當死。022_125c上恩至重。其愛君憂國之念。形於色。發於言。寢食不敢弛也。
太學生李若氷,副提學李思匀,大司憲柳雲,典翰鄭譍,校理梁彭孫。俱上疏伸救。
時太學生聞先生被逮。爭先詣闕。幾千餘人。李若氷,申命仁,朴光佑等。相繼上疏。明先生無罪。爲門者所拒。發憤闌入。闕庭號哭。哭聲徹大內。上聞之。命下獄。生員林鵬等數百餘人又上疏。伸救先生。請與若氷就獄。坊里鄕約諸人亦上疏。不知其022_125d數。先是。李公思匀,柳公雲。內有志槩。而外無拘檢。爲諸賢所斥。至是。俱長臺閣論思。乃極力伸救先生。鄭公譍上疏亦切。皆不納。
十二月乙亥。命自盡。
儒生黃李沃。初與李若氷上疏。伸救先生。至是。又上疏請斬。繼而大司憲李沆,大司諫李蘋等合辭。請加罪。竟依允。賜死于謫所。都事柳渰將命至。先生謂都事曰。主上賜臣死。合有罪名。請恭聽而死。都事022_126a無應。先生就庭下。北面再拜。跪受敎旨。問上體若何。次問三公,六卿,臺諫,侍從姓名後。修家書。無一字差誤。遺命歸葬先兆。都事有迫促之意。先生歎曰。古之人有抱詔書。伏哭傳舍者。何其異耶。遂沐浴更衣。正席就座。書所懷曰。愛君如愛父。憂國若憂家。又曰。白日臨下土。昭昭照丹衷。遂仰藥。猶不絶。府卒欲就縊之。先生曰。聖上欲保微臣首領。汝何敢如此。益飮毒酒而臥。血出七竅而終。故事。凡賜死大臣。不022_126b用御寶文字。只用王旨施行。及都事宣旨。先生以爲國家待大臣。不可若是草草。其弊將使奸人。得以擅殺所惡者。欲疏陳一言。而竟不果。○先生賜死命下。弟崇祖奔往於路傍。有老嫗自山中哀哭而來。問曰。郞君。何事而哭也。答曰。吾喪兄故哭。嫗則何哭也。曰。聞國家殺趙光祖。賢人死矣。民必不得生。故哭之。
校理梁公彭孫。殮殯先生。
時校理梁公。亦罷斥家居。遂與先生。日夕022_126c相守。每以處困不失亨交勉。先生曰。吾儕此禍。實繫時運。吾則有死而已。又曰。吾兩人從遊於此。殆不偶爾。相與切偲。以遂初志。庶無大過。梁公曰。今人情椓喪。吾儕竄逐。而天使我團聚于茲。竟究平日未卒之業。此天意亦能勝人者耶。及先生賜死之命遽至。梁公執手相訣。皆無一言。但曰。各自靖獻吾王而已。吾輩幾何不相從耶。是日。雪深尺餘。風悽日慘。人不堪其寒。梁公獨於謫廬外。終日哭泣。躬自殮殯焉。
022_126d十五年庚辰
春。返葬于先壟深谷里之原。
以牛車返櫬于龍仁。葬訖。白虹繞日。東西三匝。南北各一匝。而南北繞外。各有二條虹如垂紳者竟天。又於申未方。別有一條虹長丈餘。皆移時乃滅。成守琮與洪奉世,李忠楗等赴葬。李延慶亦來會。有祝獻以奠。相携長慟而返。
參判金世弼。因入對伸救。
時金公以賀至赴京。及還。入對。伸救先生。022_127a遂被鞫配。自是。無敢爲先生伸辨者。
夏。建祠于綾州中條山下。
學圃梁公。常語及先生事。輒慨然流涕。返柩之後。建祠于雙峯中條山下。每逢先生受命之日。必齋沐痛哭。使門人子弟。春秋享祀。
世宗嘉靖元年壬午
二十年辛丑
左贊成金安國因入對。請還給職牒。不許。
時有旱災。金公因延訪。請給職牒。明示士022_127b林。上命三公議。竟不行。
二十四年乙巳榮靖大王元年
六月。命復官爵。
時太學生朴謹等上疏。極論先生學行及被誣之由。且曰。趙光祖自少。有求道之志。受業於金宏弼。宏弼學於金宗直。宗直之學。傳於其父叔滋。叔滋之學。傳於吉再。吉再之學。得於鄭夢周之門。夢周實爲東方理學之祖。此光祖學問之淵源也。請還職牒。以正士趨。三疏。批曰。汝等居首善之地。022_127c好古而論時。疏章三上。辭懇意直。所學之正。何以如此。我先王敎育之澤。亦可想矣。然言之不從。有意存焉。太學。雖曰公論所在。是非之定。自有朝廷。汝等言是非。則得矣。期於定是非。非諸生事也。姑退而更思之。及上疾大漸。傳曰。趙光祖等復職事。予未嘗忘于懷。第以事在先朝。不敢輕改。今予疾如此。不可不爲。光祖等。其幷復職。
二十五年丙午恭憲大王元年
022_127d三十六年丁巳
十二月二十四日。遷葬于同山西偏。
是年。夫人卒。乃改卜墓西數百步許。遷窆。以夫人祔焉。
穆宗隆慶元年丁卯
二年戊辰昭敬大王元年
四月。命贈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領議政兼領經筵,弘文館,藝文館,春秋館,觀象監事。
三月。太學生洪仁憲等上疏。請以先生從022_128a祀文廟。副提學朴大立等。因請贈以高官美諡。大司諫白仁傑等。請仍列文廟從祀。領議政李浚慶等。亦相繼力請。遂贈爵。○九月。上於經筵。問判中樞李滉曰。朝議欲追贈趙光祖。其人學問行事如何。對曰。光祖。天稟秀出。早有志於性理之學。居家孝友。中廟求治如渴。將興三代之治。光祖亦以爲不世之遇。與金淨,金湜,奇遵,韓忠等。相與協力同心。設立法條。以小學爲敎人之方。且欲擧行呂氏鄕約。四方風022_128b動。若久不廢。治道不難行也。但當時年少輩。不無欲速之弊。舊臣之見擯者。失職怏怏。搆成罔極之讒。一時士類。或竄或死。餘禍蔓延至今也。又曰。己卯之禍。正由南衮之奸。而終爲中廟之累。可謂罪通於天矣。今若褒贈光祖而罪衮。則是非分明也。
三年己巳
贈諡文正公
道德博聞曰文。以正服人曰正。諡議見附錄
022_128c四年庚午
建竹樹書院於綾州
卽先生結纓之地。而因朝令。移奉中條山祠版建之文。因沙溪金先生議。配梁公學圃。○萬曆癸丑。重修書院。靈巖郡守趙纘韓著記。○院之西麓。舊有臺。庚戌。監司朴承宗。名以天日。仍著記。
神宗萬曆元年癸酉
道峯書院於楊州
卽道峯山寧國寺舊基。先生少時。愛其泉022_128d石。往來棲息。立朝之後。亦乘公退。命駕遊焉。至是。牧使南彥經創始之。
二年甲戌
典籍趙憲上疏。請先生及金宏弼,李彥迪,李滉四賢。從祀文廟。疏見附錄
四年丙子
夏。建兩賢祠於煕川。
卽寒暄金先生編配時。先生受學之所也。監司金公繼輝。倡諸生營立。祀以兩先生焉。
022_129a九年辛巳
戶曹判書李珥。因筵對。啓請先生及李滉二賢。從祀文廟。啓見附錄
三十三年乙巳
建深谷書院於先生墓下
三十八年庚戌 光海君二年
八月。遣禮官。賜祭家廟。文見附錄 九月。從祀文廟。文見附錄
熹宗天啓元年辛酉
三年癸亥仁祖大王元年
022_129b毅宗崇禎元年戊辰
二十三年庚寅孝宗大王元年
二十九年丙申
建迷源書院於楊根
先生嘗與金公湜。遊迷源。愛其山水。約與同居。有手植檜焉。至是。多士議建書院。以祀先生及金公。○此外京鄕書院之建。厥數甚繁。如海州之紹賢。羅州之景賢。礪山之竹林。永興之興賢。其最著者也。

 
靜菴先生續集附錄卷之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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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致祭文
正廟壬子道峯書院致祭文 a_022_154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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是歲壬子之重陽翌朝。爲謁光陵。路出先正文正公趙光祖,宋時烈祠前。還途。遣近侍。侑祭兩賢。其文曰。
022_154c壁立之峯。如覿靜尤。志在堯舜。意炳陽秋。地與人遭。雨賢一院。曠世之想。殽觴是蕆。


 
 蓬萊詩集卷之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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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七言絶句
道峯書院洞瀑流 a_036_419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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瀑水源流取次尋。自來天地到如今。前頭不息溶溶去。添却滄溟幾許深。

 
靜菴先生續集附錄卷之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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道峯書院 宋時烈 a_022_175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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蒼崖削立洞門開。澗水潺湲幾曲回。堯舜君民當世志。廟前空有後人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