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訒齋崔先生續集序

아베베1 2013. 5. 13. 15:21

 

 艮翁先生文集卷之十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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訒齋崔先生續集序 a_234_400d


訒齋崔先生遺集旣梓行矣。而先生六世孫光璧氏又取先生朝天錄及詩文遺佚者若而篇。裒成續集。屬獻慶弁之以文。獻慶應之曰。朝天錄世烏可無也。我國士大夫使燕還。莫不有是錄。而莫先生詳。以之之燕。按而跡之。雖生客若熟路。行師者得之則知堅瑕險易之所在。觀風者見之則知謠俗化理之所自。234_401a又况時當皇朝季葉。左璫之弊已滋矣。賓旅之怨已興矣。蒙㺚之釁漸搆矣。遼薊之路將梗矣。愾然憂歎。思周盛時。一如曹檜之詩。惜乎。當時之不知戒而尙貽後人之明鑑。朝天錄世烏可無也。鄭桐溪交遊顚末。又有可以警人者。易曰知幾其神乎。幾者心之謂也。當仁弘以盛名誑一世也。微先生孰察其心而早與之絶。微先生孰與桐溪險塗相將。卒成樹立之卓爾耶。詩云招招舟子。人涉卬否。人涉卬否。卬須我友。人有良友之謂乎。遂感歎而爲之序

 

 

 

 

 

 인재집(訒齋集)
형태서지 | 저 자 | 가계도 | 행 력 | 편찬 및 간행 | 구성과 내용
  형태서지
권수제  訒齋先生文集
판심제  訒齋集
간종  목판본
간행년  1778年刊
권책  原集 13卷, 別集 2卷, 拾遺, 年譜, 附錄 합 9책
행자  10행 21자
규격  22×16.2(㎝)
어미  上下二葉花紋魚尾
소장처  原集ㆍ別集 : 서울대학교 규장각, 年譜ㆍ附錄 : 국립중앙도서관
소장도서번호  규장각 : 古3428-682, 국립중앙도서관 : 한46-가1149
총간집수  한국문집총간 67
 저자
성명  최현(崔晛)
생년  1563년(명종 18)
몰년  1640년(인조 18)
 季昇
 訒齋
본관  全州
시호  定簡
특기사항  金誠一, 鄭逑의 門人. 李潤雨, 盧景任과 교유
 가계도
 崔致雲
 參奉
 崔深
 
 東萊鄭氏
 鄭熙佐의 女
 德陽奇氏
 敎導 奇遇의 女
 星山李氏
 秉節校尉 李智源의 女
 崔昕
 
 崔晛
 
 義城金氏
 府使 金復一의 女
 崔山輝
 府使
 朱應邦의 女
 
 昌寧曺氏
 
 載寧李氏
 
 女
 
 李景祿
 忠義衛

기사전거 : 行狀(李象靖 撰), 崔深墓碣銘(張顯光 撰, 旅軒集 卷12), 崔深言行錄(崔晛 撰)에 의함
 행력
왕력 서기 간지 연호 연령 기사
명종 18 1563 계해 嘉靖 42 1 6월 10일, 善山府 海平縣 松山 私第에서 태어나다.
선조 3 1570 경오 隆慶 4 8 杜谷 高應陟에게 수업하다.
선조 4 1571 신미 隆慶 5 9 8월, 모친상을 당하다.
선조 8 1575 을해 萬曆 3 13 金烏書院에서 공부하다.
선조 14 1581 신사 萬曆 9 19 봄, 臨河에서 鶴峯 金誠一을 뵙고 수업을 청하다. ○ 7월, 義城金氏와 혼인하다.
선조 20 1587 정해 萬曆 15 25 2월, 부인 金氏의 상을 당하다.
선조 21 1588 무자 萬曆 16 26 3월, 生員試에 합격하다. ○ 昌寧曺氏와 혼인하다.
선조 22 1589 기축 萬曆 17 27 6월, 부친상을 당하다.
선조 25 1592 임진 萬曆 20 30 봄, 金吾郞에 추천되다. ○ 여름, 왜란이 일어나자 義兵을 일으켜 盧景任을 義兵將으로 삼고 자신은 掌書가 되다. ○ 8월, 義城으로 피난하다. ○ 9월, 右巡察 鶴峯先生에게 편지를 올려 방어책을 논하다. ○ 12월, 부인 曺氏의 상을 당하다.
선조 26 1593 계사 萬曆 21 31 1월, 金谷에서 지내다. ○ 載寧李氏와 혼인하다. ○ 鶴峯先生을 곡하다.
선조 27 1594 갑오 萬曆 22 32 1월, 巡察 韓孝純에게 글을 올려 善山에 屯田을 설치하도록 청하다. ○ 〈琴生異聞錄〉이 완성되다.
선조 28 1595 을미 萬曆 23 33 〈友愛箴〉을 짓다.
선조 29 1596 병신 萬曆 24 34 1월, 體察使 李元翼에게 편지를 올려 三綱九目을 진달하다.
선조 30 1597 정유 萬曆 25 35 1월, 體府 從事官 金涌에게 편지를 보내 山城에 木柵을 설치할 계책을 논하다. ○ 健齋 朴遂一을 哭하고 先妣 李氏를 上林에 改葬하다.
선조 31 1598 무술 萬曆 26 36 2월, 健元陵 參奉이 되다. ○ 王子師傅에 擬望되다. ○ 南還하여 九條疏를 올리다. ○ 9월, 典牲署 參奉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다.
선조 33 1600 경자 萬曆 28 38 1월, 郭再祐에게 편지하여 방어책을 논하다.
선조 36 1603 계묘 萬曆 31 41 4월, 朝命으로 「亂中雜錄」을 撰輯하다.
선조 37 1604 갑진 萬曆 32 42 李彥迪을 伸辨하는 疏를 올리다.
선조 39 1606 병오 萬曆 34 44 9월, 文科에 丙科로 합격하다.
선조 40 1607 정미 萬曆 35 45 3월, 薦擧로 藝文館 檢閱에 제수되다. ○ 7월, 사직소를 올리고 고향으로 내려가다. ○ 10월, 「杜谷先生遺集」을 찬수하다.
선조 41 1608 무신 萬曆 36 46 2월, 待敎가 되다. ○ 3월, 說書가 되다. ○ 5월, 정언이 되다. ○ 〈九知銘〉을 짓다. ○ 8월, 冬至使 書狀官으로 중국에 가다.
광해군 1 1609 기유 萬曆 37 47 5월, 張顯光을 찾아 뵙고 「周易」과 「太極圖說」을 강하다. ○ 10월, 정언에 제수되었으나 길에서 呈狀하여 체차되다. ○ 12월, 不知巖에서 泗水로 가서 寒岡先生을 뵙고 書院入享事와 喪禮諸條를 논하다.
광해군 2 1610 경술 萬曆 38 48 2월, 지평이 되다. ○ 실록청 겸춘추가 되다. ○ 4월, 弘文錄에 들다. ○ 5월, 평안도 암행어사로 나가다. ○ 10월, 體府 從事官이 되다. ○ 12월, 舟師勾管司 從事官에 차임되다.
광해군 3 1611 신해 萬曆 39 49 2월, 辭朝하고 南下하다. ○ 洗兵館에서 統制使 李慶濬과 兵事를 논하다. ○ 6월, 玉山에 이르러 晦齋先生 사당을 배알하다. ○ 11월, 鏡城 判官에 제수되었으나 곧 체직되다.
광해군 4 1612 임자 萬曆 40 50 2월, 실록청 겸춘추가 되다. ○ 3월, 舟師 從事官으로서 兩南 巡撫御史를 겸하다. ○ 10월, 수찬이 되다. ○ 11월, 鳥嶺 主屹山城 巡審御史가 되어 聞慶에 내려가 山城의 형세를 살피다. ○ 부교리가 되다. 비변사의 鳥銃廳 都廳을 겸하다.
광해군 5 1613 계축 萬曆 41 51 3월, 시강원 문학이 되다. ○ 4월, 정언이 되다. ○ 5월, 피혐하고 그날로 富平에 우거하다. ○ 7월, 고향으로 돌아오다. ○ 12월, 金溪에 있으면서 「鶴峯先生言行錄」을 찬집하다.
광해군 6 1614 갑인 萬曆 42 52 1월, 金溪에 머물면서 「鶴峯先生遺集」을 校讎하다. ○ 11월, 「冶隱先生行錄」 및 「杜谷先生遺集」을 校讎하다.
광해군 7 1615 을묘 萬曆 43 53 9월, 부인 李氏의 상을 당하다.
광해군 8 1616 병진 萬曆 44 54 1월, 尋源에 가서 머물다. ○ 9월, 還鄕하다.
광해군 10 1618 무오 萬曆 46 56 〈一善誌〉를 완성하다.
광해군 11 1619 기미 萬曆 47 57 4월, 寒岡을 뵙고 鶴峯 行狀을 考訂하다. ○ 7월, 靑松 椒井에서 無語坪으로 돌아오다.
광해군 12 1620 경신 泰昌 1 58 1월, 寒岡을 哭하다.
인조 1 1623 계해 天啓 3 61 3월, 反正이 일어난 뒤 수찬이 되다. ○ 8월, 응교가 되다. 이후 司藝, 사도시 정, 사인, 집의, 응교, 사성, 보덕을 역임하다.
인조 2 1624 갑자 天啓 4 62 1월, 體府 從事官이 되다. ○ 지제교, 춘추관 편수관이 되다. ○ 사인이 되다. ○ 督戰御史가 되다. ○ 7월, 병조 참지를 거쳐 동부승지가 되다. ○ 10월, 대사간이 되다. ○ 11월, 병조 참지가 되다. ○ 12월, 呈辭하고 還鄕하다.
인조 3 1625 을축 天啓 5 63 봄, 형조 참의를 거쳐 예조 참의, 대사성, 부제학이 되다. 八務箚를 條陳하다. ○ 대사성 겸 승문원 부제조가 되다.
인조 4 1626 병인 天啓 6 64 2월, 우부승지를 거쳐 좌부승지가 되다. ○ 延慰使가 되어 定州에 가다. ○ 8월, 강원도 관찰사가 되다.
인조 5 1627 정묘 天啓 7 65 오랑캐가 平山에 들어오자 漢江을 防守하고 道內에 檄文을 띄워 義兵을 일으키다. ○ 龍骨山城의 義兵將 鄭鳳壽에게 軍需를 보내어 돕다.
인조 6 1628 무진 崇禎 1 66 會寧에 유배되었다가 특명으로 放還되다.
인조 8 1630 경오 崇禎 3 68 겨울, 무함을 받아 감옥에 갇혔으나, 곧 특명으로 석방되다.
인조 10 1632 임신 崇禎 5 70 「東國通鑑」을 저술하다.
인조 14 1636 병자 崇禎 9 74 12월, 淸兵이 쳐들어오자 고향에서 義兵을 일으키다.
인조 15 1637 정축 崇禎 10 75 1월, 軍旅를 정돈하여 聞慶 杜谷에 진을 치다. ○ 3월, 아들 崔山輝를 哭하다. 張顯光을 곡하다.
인조 18 1640 경진 崇禎 13 78 6월 4일, 金山 鳳溪의 別墅에서 卒하다. ○ 8월, 예조 판서에 贈職되다. ○ 9월, 善山 默語坪으로 返葬되다.
숙종 33 1707 정해 康熙 46 - 4월, 鄕人이 松山에 社를 세워 位版을 봉안하다.
영조 52 1776 병신 乾隆 41 - 9월, 松山社를 昌林洞으로 移建하다. ○ 李象靖이 行狀을 짓다.
정조 2 1778 무술 乾隆 43 - 6대손 崔光璧이 三治堂에서 문집을 간행하다. (崔光璧의 後識)
정조 9 1785 을사 乾隆 50 - 6대손 崔光璧이 續集을 간행하다. (李獻慶의 續集序)

기사전거 : 年譜에 의함
 편찬 및 간행
저자의 시문이 편찬, 간행된 경위는 6대손 崔光璧이 적은 後識에 자세히 언급되어 있다. 이에 의하면, 유고는 家禍로 散佚되고 또 몇 권의 手稿도 화재로 소실되었다. 이에 族孫 崔象乾ㆍ崔斗南이 代를 이어 遺稿를 모았으나 책을 이루지는 못하였다. 그 후 5대손 崔壽頤 등이 여러 일가에 소장되어 있던 유고를 모아 비로소 草稿를 만들어 成編하고, 權斗寅과 權斗經의 校正을 받았다. 이어 권두인에게 墓碣銘을, 권두경에게 跋文을 받았으나 서문이 없어 간행하지 못하였다. 그 시기는 權斗經의 跋文이 지어진 1718년(숙종 44)경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후 6代孫 崔光璧을 비롯한 族人들이 재차 간행을 도모하여 財源을 마련하고, 이미 만들어진 定稿本을 바탕으로 淨寫하여 李象靖, 蔡濟恭, 丁範祖에게 질정을 받는가 하면 李象靖에게 行狀을, 蔡濟恭에게 神道碑銘과 序文을, 丁範祖에게 墓誌銘과 序文을 부탁하여 받았다. 또한 여러 族人의 집안에서 찾아낸 手本日記 등을 바탕으로 經筵講義 및 年譜를 만들고, 關西錄 1권, 逸稿 2권과 함께 李象靖과 朴孫慶에게 질정을 받았다. 그리하여 최종적으로 편차를 마쳐 原集 13권, 別集 2권, 拾遺 1권, 年譜 1권, 附錄 1권 합 18권으로 만들어 1778년(정조 2)에 三治堂에서 목판으로 開刊하고 고을 士林들의 도움을 받아 4개월 만에 완성하였다. 《초간본》 「鏤板考」에 의하면 본집의 판목이 善山의 松山書院에 소장되어 있었는데, 문집 간행이 저자의 세거지인 善山의 族人들에 의해 완료된 뒤 저자가 배향된 松山書院에 판목이 보관된 것으로 보인다. 현재 규장각(古3428-682), 국립중앙도서관(한46-가1149)에 소장되어 있는데, 규장각장본에는 年譜와 附錄이 빠져 있다.
7년 뒤인 1785년(정조 9)에는 또 崔光璧에 의해 續集이 간행되었는데, 朝天錄과 初刊에 누락되었던 詩文을 모아 7권 3책으로 만들어졌고 李獻慶이 序文을 썼다. 《속집》 권1~5는 朝天錄이고, 권6은 朝天 때의 呈文, 狀啓, 中原禁物, 書冊禁物, 中原物價, 所經路呈이며, 권7은 拾遺로 詩, 書, 序, 雜著, 祭文과 附錄이다. 이 속집은 현재 誠庵古書博物館(4-898), 계명대학교 중앙도서관(오811. 081)에 소장되어 있다.
본서의 저본은 1778년 간행된 초간본으로, 원집과 별집은 규장각장본이고 연보와 부록은 국립중앙도서관장본이다.

기사전거 : 序(丁範祖, 蔡濟恭 撰), 跋(權斗經 撰), 後識(崔光璧 撰), 續集序(李獻慶 撰)에 의함
 구성과 내용
본 문집은 原集 13권, 別集 2권 拾遺, 年譜, 附錄으로 구성되어 있다.原集은 권수에 1775년에 쓴 丁範祖의 序와 1778년에 쓴 蔡濟恭의 序가 실려 있고, 이어 目錄이 있다.권1은 詩 128題와 敎文 4편이다. 詩는 크게 오언시(28), 칠언시(52), 만시(48)의 차례로 편차되어 있고, 각기 절구, 율시, 고시의 순으로 실려 있다. 여러 곳에 자세한 自序가 실려 있고, 編者註도 달려 있다. 맨 앞에 晦齋先生의 遺宅을 지나며 지은 〈澄心臺〉(1594)와 不知巖에 들러 旅軒先生을 만나 지은 〈次張旅軒韻〉(1617)을 실어 尊師의 의미를 두었다. 1608년 冬至使 書狀官 때 지은 〈過首陽山有感〉과 〈山海亭詠懷〉, 1611년 舟師 從事官으로 全州를 지나며 지은 〈威鳳寺有感〉, 1620년 西厓先生의 꿈을 꾸고 지은 〈記夢見西厓先生〉 등이 있고, 輓詩는 鄭宗溟, 鄭經世, 張顯光, 鄭逑 등에 대한 것이다. 敎文은 1610년 知製敎, 1623년 舍人, 1624년 兵曹 參知로서 지어 올린 교문들이다.권2~5는 疏, 箚子, 啓, 書啓, 狀啓이다. 疏는 1598년 고향에 물러나 있으면서 올린 〈陳時務九條疏〉 이하 15편이 연대순으로 편차되어 있고, 맨 끝에 1624년에 逆賊의 供招에서 이름이 나왔다 하여 올린 〈兵曹參知時原情疏〉가 있다. 箚子는 交河 遷都를 반대하며 올린 4편의 玉堂箚가 앞쪽에 있고, 그 뒤로 玉堂과 司諫院 시절 올린 차가 5편이 있다. 啓는 1613년 正言 시절 올린 避嫌啓부터 1626년 承旨로서 올린 계사까지 8편이 연대순으로 실려 있다. 書啓는 1608년 冬至使 書狀官으로 중국에 갔을 때 別單으로 올린 1편이다. 狀啓는 1627년 江原 監司 시절 丁卯胡亂을 당하여 올린 4편이다.권6~7 앞부분은 講義이다. 1608년(선조 41) 4월부터 5월 사이에 행한 書筵講義와 1623년(인조 1) 4월, 5월, 6월, 10월과 1624년 7월부터 9월 사이에 행한 經筵講義에 대한 일기 형식의 글이다. 이는 후손 崔光璧이 手本日記 등을 찾아 정리한 부분이다.권7~9 앞부분은 書 28편이다. 대표적인 서찰로 1592년 9월에 右巡察使 鶴峯 金誠一에게 보낸 편지와 1600년 兵使 郭再祐에게 보낸 편지가 맨 앞쪽에 편차되어 있고, 그 뒤로 다시 왜란 기간 중 金誠一, 朴晉, 韓孝純, 李元翼 등에게 보낸 편지와 1596년 이후 曺友仁, 鄭仁弘, 尹文擧, 朴惺, 金長生, 鄭經世 등에게 보낸 편지가 있다.권9~13은 雜著(18), 序(4), 記(7), 跋(5), 箴(1), 銘(1), 箋(2), 祝文(2), 祭文(26), 墓碣(4), 墓誌(6), 行錄(4)이다. 雜著는 앞쪽에 1603년 亂後 事蹟을 찬집할 때 道內에 通文한 글과 1604년 善山의 月巖書院 건립을 위해 一鄕에 통문한 글, 왜란 때 開寧의 義兵을 일으키며 지은 통문이 실려 있고, 檄文, 書, 論, 呈文, 遺書 등 다양한 글이 있다. 跋은 「寒岡集」, 「杜谷集」에 대한 跋 등이며, 祭文은 丹山과 月巖書院 奉安文과 金誠一, 鄭逑, 高應陟 등에 대한 제문이다. 行錄은 先考, 杜谷 高應陟, 鶴峯 金誠一의 言行錄 등이다.別集은 2권으로, 앞에 目錄이 있다.권1은 關西錄이다. 1610년(광해군 2) 平安道 暗行御史 시절 지은 狀啓, 書啓 등을 모아 놓은 것이다. 권2는 書啓와 狀啓이다. 원집에서 누락되었던 3편을 실어 놓았는데, 1612년 巡審御史로서 赤裳山城을 살피고 나서 올린 書啓, 1608년 冬至使 書狀官으로 갔을 때와 1624년 李适의 난을 평정하고 올린 狀啓이다.拾遺는 원집과 별집에 빠진 글들을 다시 모은 것인데, 앞에 目錄이 달려 있고 詩 3수, 書 2편, 事蹟이 실려 있다. 〈嘲鄭仁弘〉 詩와 〈答鄭仁弘書〉 등 鄭仁弘을 배척하였음을 나타내는 글과 〈三仁事蹟〉으로 籠巖 金澍, 丹溪 河緯地, 耕隱 李孟專 등 月巖書院에 봉안된 세 선생의 事蹟이다.끝에 1718년 權斗經이 지은 跋과 1778년 崔光璧이 初刊 때 지은 後識가 있다.그 뒤에 年譜와 附錄으로 李象靖이 지은 行狀(1776), 權斗寅이 지은 墓碣銘(1716), 蔡濟恭이 지은 神道碑銘(1778), 丁範祖가 지은 墓誌銘(1775), 기타 仁祖의 賜祭文, 祭文, 挽詞가 실려 있다.

필자 : 金圻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