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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5.19. 불암산 수락산 산행

아베베1 2013. 5. 19. 23:57



















































 
사가시집 제1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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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류(辭類)
불암사(佛巖辭). 전 상인(專上人)을 위하여 짓다.

불암산은 깊고도 멀리 뻗었음이여 / 佛之山深且逶迤兮
불암산 물은 맑고도 잔물결 일렁이도다 / 佛之水淸且漣漪
구름은 한가롭고 돌은 뾰족뾰족함이여 / 雲幽幽兮石鑿鑿
백구와 맹약을 하고 황학을 불러오도다 / 盟有白鷗兮招有黃鶴
나는 속세의 일에 얽매였음이여 / 我嬰塵網兮
나는 날로 돌아가길 생각했더니 / 我日思歸
내 이미 벼슬의 얽매임 없어졌음이여 / 我旣無簪紱之累兮
또한 어찌 망설일 것이 있으리요 / 亦何事於依違也
산에 오를 수레가 있음이여 / 登山有車兮
물을 건널 배 또한 있거니 / 涉水有航
내 장차 백련사의 남긴 법칙 따르리라 / 我將從白蓮之遺則兮
어찌 실망하여 마음 아파할쏜가 / 奚怊悵而悲傷

[주D-001]내 …… 따르리라 : 백련사(白蓮社)는 동진(東晉) 때 여산(廬山) 동림사(東林寺)의 고승(高僧) 혜원법사(慧遠法師)가 당대의 명유(名儒)들을 초청하여 승속(僧俗)이 함께 염불 수행(念佛修行)을 할 목적으로 결성한 단체의 이름인데, 여기서는 또한 백련사와 같이 승속이 함께하기를 바라는 뜻에서 한 말이다.

 
사가시집 제7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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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류(詩類)
양주(楊州)의 촌서(村墅)를 생각하다.

불암산 기슭이며 풍양 고을 서쪽으로 / 佛岩山下豐壤西
두 이랑 묵정밭에 초가집이 나직하니 / 二頃荒田草屋低
긴 여름엔 어린애와 함께 순채를 취하고 / 長夏討蓴同稚子
깊은 가을엔 내처와 더불어 밤도 줍노라 / 深秋拾栗共萊妻
나는 좋은 술에다 흰 쌀밥을 좋아하는데 / 我愛綠醅兼白粲
남들은 꽃게가 누런 닭보다 낫다 하누나 / 人言紫蟹勝黃鷄
금년에도 이 흥취를 다시 저버렸는지라 / 今年此興還辜負
타향살이 구월에 생각이 더욱 헷갈리네 / 九月他鄕思轉迷

[주D-001]내처(萊妻) : 춘추 시대 초(楚) 나라의 효자(孝子)로 명성이 높었던 노래자(老萊子)의 아내를 가리킨 것으로, 그녀는 일찍이 노래자에게 출사(出仕)하지 말 것을 간절히 권하여 부부가 함께 강남(江南)에 은거했었으므로, 전하여 현처(賢妻)의 대칭(代稱)으로 쓰인다.

 
 사가시집 제28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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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류(詩類)
민 사문(閔斯文) 규(奎) 이 잉어를 보내면서 시를 부쳤으므로 그 운에 의거하여 받들어 수답하다 4수

잉어 두 마리로 서신 전한 날이요 / 雙鯉傳書日
한 달포 동안 병치레하는 때로다 / 三旬抱病時
쟁반 가득 생선회 실낱처럼 연해라 / 滿盤飛鱠縷
술 사 마시는 걸 또한 왜 의심하랴 / 沽酒亦何疑

인정은 지난날과 같지 않고요 / 人情非昔日
여론은 예전 시대와 다르구려 / 物議異前時
흰 옥벽은 화씨를 슬프게 했거니와 / 白璧悲和氏
황금은 불의에게 매우 부끄러웠지 / 黃金愧不疑

못난 재주 전배에게 부끄러워라 / 碌碌慙前輩
유유히 태평성대를 저버렸는데 / 悠悠負盛時
인심은 얼굴 생김새 같이 달라서 / 人心如面異
저자의 범 또한 의심을 사는구려 / 市虎亦成疑

시냇물은 막 벌창해진 날이요 / 溪水初肥日
농어는 한창 올라오려는 때로다 / 鱸魚欲上時
불암산 기슭에 띳집이 있거니 / 佛岩茅舍在
돌아가는 걸 또 어찌 의심하리오 / 歸去復奚疑

[주D-001]잉어 …… 날이요 : 악부(樂府) 상화가사(相和歌辭) 음마장성굴행(飮馬長城窟行)에 “손님이 원방으로부터 와서, 나에게 잉어 두 마리를 주기에, 아이 불러 잉어를 삶게 했더니, 뱃속에서 짤막한 서신이 나오네.〔客從遠方來 遺我雙鯉魚 呼兒烹鯉魚 中有尺素書〕”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주D-002]흰 …… 했거니와 : 화씨(和氏)는 옛날 초나라의 변화(卞和)란 사람을 가리킨다. 변화가 일찍이 초산(楚山)에서 옥박(玉璞)을 얻어 그것을 초나라 여왕(厲王)과 무왕(武王) 2대에 걸쳐 왕에게 바쳤으나, 그때마다 옥인(玉人)의 잘못된 감정에 의해 왕을 속였다는 죄목으로 두 발꿈치를 다 베였다. 문왕(文王)이 즉위하자 그가 이 옥박을 안고 초산에서 3일 밤낮을 운 끝에 드디어 왕명에 의해 그 옥박을 다시 조사하게 되었고 그 결과 마침내 보옥(寶玉)을 얻게 되었다는 고사에서 온 말로, 전하여 보옥을 찾아내기 어려움, 또는 재능 때문에 화를 입게 되는 등의 일에 비유된다.
[주D-003]황금은 …… 부끄러웠지 : 불의(不疑)는 한 경제(漢景帝) 때의 문신 직불의(直不疑)를 가리킨다. 한 문제(漢文帝) 때 직불의(直不疑)가 낭관(郞官)으로 있을 적에 한번은 동료 중에 고향으로 가는 자가 다른 동료의 금(金)을 잘못 가지고 떠났다. 그런데 그 금을 잃어버린 사람이 직불의를 의심하자 직불의는 두말없이 자기가 가져갔다고 사과하고 즉시 금을 사서 보상해 주었다. 그러다 고향 갔던 자가 뒤에 돌아와서는 자기가 금을 가져갔다며 금을 돌려주자, 금을 잃어버린 사람이 대단히 부끄럽게 여겼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漢書 卷46 直周張傳 直不疑》
[주D-004]저자의 …… 사는구려 : 전국 시대 위(魏)나라의 방총(龐葱)이 태자(太子)와 더불어 한단(邯鄲)에 볼모로 가면서 위왕(魏王)에게 말하기를 “지금 한 사람이 저자에 호랑이가 있다고 말하면 왕께서 믿겠습니까?” 하자 왕이 믿지 않겠다고 말하므로, 또 말하기를 “두 사람이 저자에 호랑이가 있다고 말하면 왕께서 믿겠습니까?” 하자 왕이 말하기를 “과인이 의심을 가질 것이다.”라고 하므로, 다시 말하기를 “세 사람이 저자에 호랑이가 있다고 말하면 왕께서 믿겠습니까?” 하자 왕이 말하기를 “과인이 그 말을 믿을 것이다.”라고 했다. 전하여 저자의 범이란 곧 허무맹랑한 말도 여러 번 들으면 자신도 모르게 그 말을 믿게 되는 것의 비유로 쓰인다. 《戰國策 魏策》

 
사가시집 제52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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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류(詩類)
불암산(佛巖山)

불암산 아래에 띳집 한 채가 있으니 / 佛巖山下有茅廬
문 앞에 당한 봉우리는 그림보다 좋고말고 / 當戶峯巒畫不如
오늘은 사공의 나막신을 상상하거니와 / 今日追思謝公屐
당년에 반랑의 나귀는 몇 번이나 거꾸로 탔던고 / 當年幾倒潘閬驢
지는 꽃 흐르는 물은 예가 바로 신선 집이요 / 落花流水仙家是
고목 사이 굽은 절벽은 보찰의 나머지로다 / 古木回巖寶刹餘
원숭이 학이 해마다 응당 서글피 바라보겠지 / 猿鶴年年應悵望
소매 속에는 이미 사직소를 초해 놓았노라 / 袖中已草乞骸書

[주D-001]사공의 나막신[謝公屐] : 사공(謝公)은 남조(南朝) 때의 문인으로 풍류가 뛰어났던 사영운(謝靈運)을 가리키는데, 그는 특히 깊고 험준한 명산을 오르기 좋아하여 매양 ‘밀을 칠한 나막신[蠟屐]’을 신고 등산을 했던 데서 온 말이다.
[주D-002]당년에 …… 탔던고 : 반랑(潘閬)은 송대의 시인으로, 그가 화산(華山)을 바라보며 읊은 〈망화산(望華山)〉 시에 “하늘에 치솟은 삼봉이 사랑스럽기도 해라, 나귀 거꾸로 타고 머리 쳐들어 읊으며 바라보네. 옆 사람은 깔깔 웃지만 그야 웃거나 말거나, 나는 끝내 집 옮겨서 저 위에 올라가 살련다.[高愛三峯揷太虛 昻頭吟望倒騎驢 傍人大笑從他笑 終擬移家向上居]”라고 한 데서 온 말인데, 동시대의 시인 위야(魏野)가 반랑의 이 시를 보고 그에게 준 시에 “이제부터는 저 화산의 그림 위에, 다시 반랑의 나귀 거꾸로 탄 모습이 더해지겠네.[從此華山圖籍上 更添潘閬倒騎驢]”라고 했다 한다. 소식(蘇軾)의 〈이기시승견화전편부용원운답지(李杞寺丞見和前篇復用元韻答之)〉 시에는 “도잠은 스스로 오류전을 지었거니와, 반랑의 그림은 삼봉도에 들어갔었지.[陶潛自作五柳傳 潘閬畫入三峯圖]”라고 하였다.
[주D-003]고목(古木) …… 나머지로다 : 두목(杜牧)의 〈염석유(念昔遊)〉 시에 “이백이 시를 제한 수서사에는, 고목나무 굽은 절벽에 누각 바람이로다.[李白題詩水西寺 古木回巖樓閣風]”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주D-004]원숭이 …… 바라보겠지 : 남제(南齊) 때 공치규(孔稚圭)가 〈북산이문(北山移文)〉을 지었는데, 그 내용은 일찍이 북산에 은거하다가 변절하여 벼슬길에 나간 주옹(周顒)을 몹시 책망하는 뜻을 서술했던바, 그 대략에 “혜초 장막은 텅 비어 밤 학이 원망하고, 산중 사람이 떠나가니 새벽 원숭이가 놀란다.……그러자 남산은 조롱을 보내오고, 북산은 소리 높이 비웃는다.[蕙帳空兮夜鶴怨 山人去兮曉猿驚……於是 南嶽獻嘲 北隴騰笑]”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사가시집보유 제3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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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류(詩類)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 실려 있는 시
〈수락사시(水落寺詩)〉 서(敍)

내가 젊었을 때 여러 산사(山寺)에서 글을 읽을 적에 수락산(水落山)도 두 번이나 왕래하면서 우연히 이 시를 벽상(壁上)에 남겨 두었었는데, 지금 이미 30여 년이 지났다. 그런데 일전에 일암(一庵) 전상인(專上人)이 이 시를 베껴 와서 나에게 보이며 말하기를 “장단(長湍) 백 태수(白太守)가 외우는 것을 적어 왔다.” 하면서, 나에게 잘못된 글자를 바로잡아 주기를 요청하였다. 나는 시를 지어도 짓는 족족 버리기 때문에 편언척자(片言隻字)도 상자 속에 남겨 둔 것이 없다. 더구나 방탕했던 소년 시절에는 남겨 전할 생각이 없었으니, 어찌 기록해 두려고 했겠는가. 32년 전의 일이라 아득하기가 마치 꿈속 같아서 그때 지은 시들은 기억하지도 못하는데, 또 어찌 잘못된 글자를 알 수 있겠는가. 그러나 한번 읽어 보매, 운자(韻字)를 단 것이나 글자를 놓은 것이 미진한 데가 있으니, 이는 아마도 내 유치함의 소치이거나 아니면 외워 전한 이가 잘못 전한 게 아닐까도 싶으나, 우선 그대로 두노라. 예전 일을 생각하니 느낌이 없을 수 있겠는가. 마침내 근체시(近體詩) 여섯 수를 지어서 일암 법좌하(法座下)에 기록하여 바치는 바이다. 일암이 지금 불암사(佛巖寺)에 있는데, 수락사와는 겨우 10여 리밖에 되지 않으니, 후일 서로 만나서 한번 놀게 되거든 이에 관한 말을 다하리라.

내 옛날 산중의 고사에 유학하던 시절이 / 山中古寺昔曾遊
손꼽아 헤어 보니 지금 삼십 년이 되었구나 / 屈指如今三十秋
나막신 신고 많은 시간 손과 함께 걸었고 / 步屐多時携客去
한가함 좋아해 스님과도 오래 머물렀었네 / 愛閑長日爲僧留
고운 꽃 빽빽한 대숲은 그윽한 경계 이루고 / 花濃竹細連幽境
고목나무 굽은 절벽은 누각을 옹위했었지 / 木古巖回擁小樓
다시 스님과 손잡고 한번 가 보고 싶어라 / 更欲携師一歸去
소년 시절의 옛일이 꿈같이 아득하구려 / 少年往事夢悠悠

지난 일 아득하여라 일찍이 소년 시절 / 悠悠往事少年曾
취중의 호탕한 기개에 필력이 날뛰었네 / 醉裡豪狂筆勢騰
나는 본디 벽 위에 시 쓸 마음 없었는데 / 我本無心題板壁
스님은 유독 다사하여 종이에 베껴 왔구려 / 僧偏多事寫花藤
벽사니 홍수니 함은 분에 넘쳐 부끄럽고 / 碧紗紅袖慙非分
세속에 찌든 백발은 늙음이 가증스러워라 / 白髮黃塵老可憎
다시 스님과 손잡고 한번 그곳에 가서 / 更欲携師一歸去
높은 봉우리를 유쾌히 거듭 올라 봤으면 / 有峯高處快重登

가장 높은 봉우리에 거듭 올라가고파라 / 重登準擬最高峯
정성 지나 삼성 만지면 가슴을 씻을 만하리 / 歷井捫參可盪胸
태양은 머리 위에 한 마리 새가 지나간 듯 / 白日頭邊過一鳥
푸른 산은 눈 아래 여러 용이 노는 듯하겠지 / 靑山眼底戲群龍
금은으로 장식한 불찰은 삼천대천세계요 / 金銀佛刹三千界
금수 같은 산하는 백이의 겹겹 요해거니 / 錦繡山河百二重
다시 스님과 손잡고 한번 그곳에 가서 / 更欲携師一歸去
차를 달이면서 석양까지 앉아 있어 봤으면 / 煮茶聲裡坐高舂

석양까지 차 끓는 소리 듣고 앉았노라면 / 高舂落日煮茶聲
청산은 거만하여 세정을 아랑곳 않을 텐데 / 偃蹇靑山不世情
굽어보면 조각구름은 평지에서 일어나고 / 俯視片雲平地起
쳐다보면 폭포가 반공중에 환히 쏟아지리 / 仰看飛瀑半空明
누각 가득 내린 꽃비는 옷을 다 적실 게고 / 滿樓花雨沾衣濕
베개맡의 솔바람은 뼛속까지 서늘하겠지 / 欹枕松濤徹骨淸
다시 스님과 손잡고 한번 그곳에 가서 / 更欲携師一歸去
청련사 결성하여 노년을 보내고 싶구려 / 靑蓮結社送殘生

노년의 청련사 결성은 처음 먹은 마음인데 / 殘生結社是初心
서글퍼라 연래에 비녀 가득해진 백발이 / 惆悵年來雪滿簪
소원 맺음이 미미하지 않음을 누가 알리오 / 結願誰知非淺淺
산에 듦은 마냥 깊지 못할까 염려했는걸 / 入山長恐不深深
고관대작은 연연하지 않은 지 오래거니와 / 蟬貂久矣無心戀
원숭이 학은 여전히 꿈마다 서로 찾는다오 / 猿鶴依然有夢尋
다시 스님과 손잡고 한번 가고 싶어라 / 更欲携師一歸去
불암산 밑 시골집이 총림에 가깝거니 / 佛巖村墅近叢林

총림이 가까이 불암산에 자리했는데 / 叢林近在佛巖山
불암산 밑에는 두어 칸 내 집이 있으니 / 山下吾廬屋數間
도잠의 삼경은 비록 적막할 뿐이지만 / 三徑陶潛雖寂寞
양로의 일구 집은 배회할 만하고말고 / 一區揚老可盤桓
순채 찾고 죽순 삶는 건 평범한 일이요 / 討蓴燒筍尋常事
국화 보내고 매화 맞음은 절로 한가롭지 / 送菊迎梅自在閑
다시 스님과 손잡고 한번 그곳에 가서 / 更欲携師一歸去
만년 신세를 스님과 함께 지내고 싶구려 / 暮年身世共追攀

[주D-001]고목나무 …… 옹위했었지 : 두목(杜牧)의 〈염석유(念昔遊)〉 시에 “이백이 일찍이 시를 제한 수서사에는, 고목나무 굽은 절벽에 누각 바람이로다.[李白題詩水西寺 古木回巖樓閣風]”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주D-002]벽사(碧紗)니 …… 부끄럽고 : 벽사와 홍수(紅袖)는 다음의 고사에서 온 말이다. 당(唐)나라 왕파(王播)가 일찍이 미천했을 적에 집이 몹시 가난하여 양주(揚州) 혜소사(惠昭寺)의 목란원(木蘭院)에 한동안 우거(寓居)하면서 중의 재식(齋食)을 얻어먹고 지냈는데, 나중에는 중들이 그를 싫어하여 그가 오기 전에 밥을 먹어 버리곤 했다. 그로부터 20여 년 뒤에 그가 고관(高官)이 되어 그 지방을 진무(鎭撫)하러 내려가서 옛날에 놀았던 그 절을 거듭 찾아가 보니, 자기가 옛날에 제(題)해 놓은 시들을 모두 깁으로 덮어서 보호하고 있으므로, 그가 다시 절구 2수를 지어 “당에 오르면 밥 다 먹고 동서로 각기 흩어졌기에, 스님네들 식사 후에 종 치는 게 부끄럽더니, 이십 년 동안 얼굴에 먼지 그득 분주하다가, 이제 비로소 푸른 깁에 싸인 시를 보게 되었네.[上堂已了各東西 慙愧闍黎飯後鐘 二十年來塵撲面 如今始得碧紗籠]”라고 하였다. 또 송대(宋代)의 시인 위야(魏野)가 명상(名相) 구준(寇準)을 수행하여 섬부(陝府)의 승사(僧舍)에 가 노닐면서 각각 시를 유제(留題)한 적이 있었는데, 뒤에 다시 함께 그 승사에 놀러 가서 보니, 구준의 시는 이미 푸른 깁으로 잘 싸서 보호하였으나, 위야의 시는 그대로 방치하여 벽에 가득 먼지가 끼어 있었으므로, 이때 마침 그 일행을 수행했던 총명한 한 관기(官妓)가 즉시 자기의 붉은 옷소매로 그 먼지를 닦아 내자, 위야가 천천히 말하기를 “항상 붉은 소매로 먼지를 닦을 수만 있다면, 응당 푸른 깁으로 싸 놓은 것보다 나으리.[若得常將紅袖拂 也應勝似碧紗籠]”라고 하였다.
[주D-003]정성(井星) …… 만하리 : 이백(李白)의 〈촉도난(蜀道難)〉에 “삼성 만지고 정성 지나 우러러 숨 헐떡거리고, 손으로 가슴 쓸며 앉아서 길이 탄식하네.[捫參歷井仰脅息 以手拊膺坐長歎]”라고 하였다. 《李太白集 卷2》 여기서는 단지 높은 데 오른 뜻만 취하였다.
[주D-004]금은(金銀)으로 ……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요 : 불교의 천문학(天文學)에서 수미산(須彌山)을 중심으로 하여 사방에 사대주(四大洲)가 있고, 그 밖의 주위는 철위산(鐵圍山)으로 둘러쌌다고 하는바, 이것을 하나의 세계 또는 하나의 사천하(四天下)라 하는데, 이 사천하를 천 개 합한 것이 하나의 소천세계(小千世界)요, 소천세계를 천 개 합한 것이 하나의 중천세계(中千世界)요, 중천세계를 천 개 합한 것이 하나의 대천세계(大千世界)라 한 데서 온 말로, 전하여 삼천대천세계는 천지 사방(天地四方), 즉 온 세상을 의미한다.
[주D-005]금수(錦繡) …… 요해(要害)거니 : 《사기(史記)》 권8 〈고조본기(高祖本紀)〉에 “진(秦)나라는 지세(地勢)가 뛰어난 나라로, 산하의 험고(險固)함을 띠고 천리 멀리 떨어져 있어, 제후의 창 가진 군사 백만을 대적함에 있어 진나라는 백분의 이로 당할 수 있다.[秦形勝之國 帶河山之險 縣隔千里 持戟百萬 秦得百二焉]”라는 말이 있다. 백이(百二)는 곧 100분의 2를 나타내는 말로, 전국 시대에 진나라의 지세가 매우 험고하여 진나라 군사 2만 명으로 제후의 군사 100만 명을 당해 내기에 충분하다고 한 데서 온 말이다. 또 일설에 의하면 “제후의 창 가진 군사 백만에 대하여, 진나라 지세의 험고함이 천하의 갑절이 되므로, 백만의 두 배를 얻었다는 것이다.[諸侯持戟百萬 秦地險固 一倍於天下 故云得百二焉]”라고도 한다.
[주D-006]꽃비[花雨] : 흔히 꽃 피는 계절에 내리는 비를 말한다. 또는 부처의 설법의 공덕을 찬미하여 ‘꽃을 비처럼 쏟아 내린다.[散花如雨]’라고 하는 데서, 전하여 고승(高僧)의 설법에 비유하기도 한다.
[주D-007]청련사(靑蓮社) …… 싶구려 : 동진(東晉) 때 여산(廬山) 동림사(東林寺)의 고승 혜원 법사(慧遠法師)가 일찍이 당대의 명유(名儒)인 도잠(陶潛), 육수정(陸修靜) 등을 초청하여 승속(僧俗)이 함께 염불 수행할 목적으로 백련사(白蓮社)를 결성하고 서로 왕래하며 친밀하게 지냈던 고사에 빗대서 한 말이다.
[주D-008]원숭이 …… 찾는다오 : 남제(南齊) 때 공치규(孔稚圭)가 일찍이 북산(北山)에 은거하다가 변절하여 벼슬길에 나간 주옹(周顒)을 매우 못마땅하게 여긴 나머지, 북산 신령(神靈)의 이름을 가탁하여 관청의 이문(移文)을 본떠서 〈북산이문(北山移文)〉을 지어 그로 하여금 다시는 북산에 발을 들여놓지 못하도록 하는 뜻을 서술했다. 그 대략에 “종산의 영령과 초당의 신령이 연기로 하여금 역로를 달려가서 산정에 이문을 새기게 하였다.……혜초 장막은 텅 비어 밤 학이 원망하고, 산중 사람이 떠나가니 새벽 원숭이가 놀란다.[鍾山之英 草堂之靈 馳煙驛路 勒移山庭……蕙帳空兮夜鶴怨 山人去兮曉猿驚]”라고 한 데서 온 말로, 전하여 원숭이와 학은 곧 깊은 산중의 은자의 처소를 의미한다. 《古文眞寶 後集 卷2》
[주D-009]총림(叢林) : 승려들이 함께 모여서 거처하는 곳을 말한 것으로, 승사(僧舍)를 가리킨다.
[주D-010]도잠(陶潛)의 …… 뿐이지만 : 삼경(三徑)은 세 오솔길이란 뜻으로, 본디 한(漢)나라 때 은사(隱士) 장후(蔣詡)가 자기 집 대나무 밑에 세 오솔길을 내고 구중(求仲)과 양중(羊仲) 두 사람하고만 종유했던 데서, 전하여 은자의 처소를 가리킨다. 《三輔決錄》 동진(東晉)의 처사(處士) 도잠 또한 일찍이 팽택 영(彭澤令)을 그만두고 지은 〈귀거래사(歸去來辭)〉에서 “세 오솔길은 묵었으나, 소나무와 국화는 아직 남아 있도다.[三徑就荒 松菊猶存]”라고 했던 데서 온 말이다. 《陶淵明集 卷5》
[주D-011]양로(揚老)의 일구(一區) : 양로는 한(漢)나라 양웅(揚雄)의 자이고, 일구는 주택 한 채를 지을 만한 땅을 말한다. 《한서(漢書)》 권87 〈양웅전(揚雄傳)〉에, 그가 민산(崏山)의 남쪽에 살았는데 “토지 일전이 있고, 집 일구가 있었다.[有田一廛 有宅一區]”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주D-012]순채 …… 일이요 : 순채를 찾고 죽순을 삶는다는 것은 곧 아주 평범한 야인(野人)의 생활을 뜻한다. 두보(杜甫)의 〈여이십이백동심범십은거(與李十二白同尋范十隱居)〉 시에 “종래에 귤송만 읊조려 왔거니, 누구와 함께 순챗국은 찾을거나.[向來吟橘頌 誰與討蓴羹]”라고 하였고, 소식(蘇軾)의 〈화채준낭중견요유서호(和蔡準郎中見邀遊西湖)〉 시에 “서로 이끌고 죽순 삶아 먹으러 고죽사에 가고, 다시 연꽃 물가에 내려와 연뿌리를 밟노라.[相携燒筍苦竹寺 却下踏藕荷花洲]”라고 하였다. 《杜少陵詩集 卷1》 《蘇東坡詩集 卷7》
 
 청음집 제11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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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집(雪窖集) 289수(二百八十九首)
근가십영(近家十詠) 먼 작별에 돌아가고픈 생각이 들기에 그 심정을 사(詞)에 드러내었다.

목멱산의 산 위에는 아침나절 구름 짙고 / 木覓山上朝雲濃
목멱산의 산 앞에는 저녁나절 해가 붉네 / 木覓山前夕日紅
아침 구름 저녁 해가 온갖 자태 짓고 있는 / 朝雲夕日含萬態
그 속에서 봉래궁을 정히 마주 대해 있네 / 此中正對蓬萊宮
봉래궁의 문 앞에선 앞 다투어 말 세우며 / 蓬萊宮門爭立馬
매일처럼 평안 봉화 올랐다고 보고하네 / 日日喜報平安火
우리 집의 남쪽 마루서도 그 산 보이는데 / 吾家南軒亦見此
어느 날에 돌아가서 베개 높이 베고 눕나 / 何日歸來高枕臥
이상은 목멱산(木覓山)을 읊은 것이다. - 목멱산은 남산(南山)이다. -

공극산의 둥그런 봉 천태산에 응했거니 / 拱極員峯應天台
높은 구름 못 넘으며 나는 새도 돌아가네 / 高雲不度飛鳥廻
어느 누가 우러르며 좋은 이름 붙여 줬나 / 誰其仰止配佳名
천하제일 재사이신 운강 학사 그분이네 / 雲岡學士天下才
임금 가마 가끔 가다 경회 못에 나오시면 / 龍輿時出慶會池
천암만학 앞 다투어 기이함을 바치누나 / 千巖萬壑爭效奇
나의 집은 바로 그 산 아래쪽에 있거니와 / 吾家住在此山下
그리운 곳 그곳으로 어느 날에 돌아갈꼬 / 願言思之何日歸
이상은 공극산(拱極山)을 읊은 것이다. - 공극산은 북악(北岳)이다. -

한성 주위 여러 산들 삼각산을 향하는데 / 漢都諸山祖三角
한 줄기가 뻗어내려 필운산이 되었구나 / 一支蜿蜒作右弼
산골짜기 나눠 열려 물과 돌은 맑은 데다 / 洞壑分開水石淸
산등성이 서로 달려 용과 뱀이 꿈틀대네 / 岡巒互走龍蛇活
산머리엔 항상 서린 오색구름 보이거니 / 山頭常見五色雲
좋은 기운 총총하여 금빛 대궐 향하누나 / 佳氣蔥蔥向金闕
나의 집은 이 산과 상 마주 대한 듯하거니 / 吾家對此如對案
어찌하면 돌아가서 종일토록 바라볼꼬 / 安得歸歟看終日
이상은 필운산(弼雲山)을 읊은 것이다. - 필운산은 인왕산(仁王山)이다. -

청풍계의 위에 있는 태고라는 정자 바로 / 淸風溪上太古亭
우리 집의 큰형님이 지어 놓은 것이라네 / 吾家伯氏此經營
숲과 골짝 의연히도 수묵도와 같거니와 / 林壑依然水墨圖
바위 절벽 절로 푸른 옥병풍을 이루었네 / 巖崖自成蒼玉屛
우리 부자 형제들이 한 당 안에 앉아서는 / 父子兄弟一堂席
바람과 달 금과 술로 사시사철 즐기었네 / 風月琴樽四時樂
그 좋던 일 지금 와선 다시 할 수 없거니와 / 勝事如今不可追
이러한 때 이런 정을 어떤 이가 알 것인가 / 此時此情何人識
이상은 청풍계(淸風溪)를 읊은 것이다.

필운산의 북쪽에다 공극산의 서쪽에는 / 弼雲之北拱極西
작은 동구 한쪽 면에 그윽한 길 나 있다네 / 小洞一面通幽蹊
산사람은 이미 떠나 초당 안이 텅 빈 탓에 / 山人已去草堂空
흰 구름은 주인 없고 산새들만 우짖누나 / 白雲無主山鳥啼
지난날에 봄을 찾아 빗속에서 갔을 때엔 / 憶昔尋春雨中來
떨어진 꽃 널려 있고 시내 슬피 울었었네 / 落花滿地溪水哀
우리 집은 푸른 산속 마주 보고 있거니와 / 吾家相望翠微中
젊은 시절 옛날 놀이 마치 꿈을 꾼 것 같네 / 少年舊遊如夢回
이상은 백운동(白雲洞)을 읊은 것이다.

한 번 겹쳐 돈 바위가 푸른 절벽 에워싸고 / 一疊回巖擁翠壁
맑은 시내 돌을 쳐서 슬픈 옥이 우는구나 / 淸湍激石鳴哀玉
동천 속은 적막하여 사람 자취 드물거니 / 洞天寥寥人跡稀
솔 그늘에 진 그림자 푸른 이끼 빛이구나 / 松陰落影蒼苔色
술 흥에다 시의 정이 좋은 경치 만났거니 / 酒興詩情遇佳境
외론 구름 저녁 새와 함께 돌아오는구나 / 孤雲夕鳥同還往
나의 집과 물을 격해 동쪽 서쪽 있거니와 / 吾家分住水東西
어느 날에 돌아가서 다시 찾아보려는가 / 何日歸來更相訪
이상은 대은암(大隱巖)을 읊은 것이다.

성 북쪽에 하얀 모래 깎은 듯이 평평한데 / 城陰白沙平如削
네모진 단 쌓인 것은 예로부터 그러했네 / 妥帖方壇自古昔
나라가 선 이후에는 바로 일이 있었으나 / 有國由來卽有事
일 지나고 사람 없어 텅 빈 채로 적막하네 / 事過無人空寂寞
달빛 희고 바람 맑고 좋은 벗이 찾아와서 / 月白風淸良友至
산보하고 소요하니 그 즐거움 끝없었네 / 散步逍遙樂未已
나의 집은 소 울음이 들릴 만한 데 있거니 / 吾家住在一牛鳴
어느 날에 돌아가서 느릿느릿 산보하나 / 何日歸來試杖履
이상은 회맹단(會盟壇)을 읊은 것이다.

만 소나무 그늘져서 서쪽 기슭 창창한데 / 西麓蒼蒼萬松陰
솔숲 사이 있는 석대 사람 맘을 맑게 하네 / 松間石臺淸人心
좋은 자리 맛있는 술 빈객들은 즐거운데 / 芳筵美酒娛賓客
다시 금과 노래 있어 마주 대해 술 따르네 / 復侑琴歌相對斟
그 원림이 난리 겪은 뒤에 적막해졌는데 / 園林寂寞喪亂後
밝은 달은 전과 같이 예와 지금 비추누나 / 明月依然照今古
우리 집은 삼대토록 같은 동리 살았거니 / 吾家三世與同里
어느 날에 돌아가서 아무 나무 가리키나 / 何日歸來指某樹
이상은 세심대(洗心臺)를 읊은 것이다.

삼청동의 골짜기는 깊숙하고 넓거니와 / 三淸之洞窈而寬
푸른 띠풀 하얀 돌 맑은 시내 굽이져 있네 / 靑莎白石淸溪灣
구름 관과 노을 패옥 비록 적막해졌지만 / 雲冠霞珮雖寂寞
시 읊는 이 술 취한 객 오래도록 서성이네 / 詞人酒客長盤桓
오래도록 서성이며 돌아갈 줄 모르면서 / 長盤桓不知去
장안에서 제일 좋은 곳이라고 말하누나 / 云是長安最佳處
나의 집은 이 산 한쪽 가장자리 있거니와 / 吾家住在山一邊
돌아갈 맘 끊임없이 일어 막을 수가 없네 / 歸思滔滔不可禦
이상은 삼청동(三淸洞)을 읊은 것이다. - 예전에 삼청동에 도관(道觀)이 있었는데 지금은 없어졌다. -

불암산의 시내와 돌 제일이라 칭하거니 / 佛巖川石稱第一
시냇물은 유리 같고 돌은 반들반들하네 / 川似琉璃石潤滑
몇 차례나 노니는 객 납극 신게 하였던가 / 幾向遊人費蠟屐
다시 서류 끌어들여 연필 시험하게 했네 / 更引書流試椽筆
술에 취해 산꽃 꺾어 한 곡조를 부르거니 / 醉折山花歌一曲
산바람은 쓸쓸하고 산 위 달은 빛 하얗네 / 山風蕭蕭山月白
나의 집은 가까워서 오고 가기 쉽거니와 / 吾家住近往來熟
어느 날에 돌아가서 예전 자취 찾아보나 / 何日歸歟尋舊跡
이상은 불암(佛巖)을 읊은 것이다.

[주D-001]공극산(拱極山) : 경복궁의 북쪽에 있는 백악(白嶽)을 가리킨다. 1537년(중종 32)에 부사(副使) 오희맹(吳希孟)과 함께 정사(正使)로 나온 명나라의 공용경(龔用卿)이 백악을 공극산(拱極山), 인왕산(仁王山)을 필운산(弼雲山)이라고 개명하였다.
[주D-002]운강 학사(雲岡學士) : 공용경을 가리킨다.
[주D-003]회맹단(會盟壇) : 신무문(神武門)의 북쪽에 있는 단이다.
[주D-004]아무 나무〔某樹〕 : 고향 땅의 나무를 뜻한다. 한유(韓愈)의 송양거원소윤서(送楊巨源少尹序)에 이르기를, “이제 돌아가서는 그 나무를 가리키면서 ‘아무 나무〔某樹〕는 나의 아버님께서 심으신 것이고, 아무 물〔某水〕과 아무 언덕〔某丘〕은 내가 어린 시절에 낚시질하고 놀던 곳이다.’ 하면, 고향 사람들이 모두들 공경할 것이다.” 하였다.
[주D-005]구름 관(冠)과 노을 패옥(珮玉) : 모두 도사(道士)나 선녀들이 착용하는 것이다.
[주D-006]몇 …… 하였던가 : 사람들로 하여금 산에 자주 오르게 했다는 뜻이다. 납극(蠟屐)은 밀랍을 발라서 광택이 나게 한 나막신이다. 남송(南宋) 때의 시인 사영운(謝靈運)이 산을 유람하기를 즐겨하였는데, 산을 오를 때에는 나막신의 앞굽을 빼고 오르고 내려올 때에는 뒷굽을 빼고 내려왔다고 한다. 《南史 卷19 謝靈運傳》
[주D-007]다시 …… 했네 : 문인들로 하여금 글을 짓게 하였다는 뜻이다. 서류(書流)는 문인들을 가리키고, 연필(椽筆)은 서까래만 한 붓이란 말로 문장이 출중함을 뜻한다. 진(晉)나라 왕순(王珣)이 어떤 사람이 서까래만 한 붓을 주는 꿈을 꾸었는데, 꿈을 깨어 말하기를, “반드시 대수필(大手筆)을 쓰는 일이 있을 것이다.” 하였다. 얼마 뒤 황제가 죽었는데, 애책문(哀冊文)과 시의(諡議)를 모두 왕순이 기초(起草)하였다. 《晉書 卷65 王珣傳》


 한수재선생문집 제32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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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묘표(墓表)
증(贈) 승지(承旨) 이공(李公) 연(堜) 묘표

이 사문 세환(李斯文世瑍)이 선친의 유언에 따라 할아버지의 사행(事行)을 적어 가지고 내게 와 울면서 청하기를 “우리 할아버지는 남다른 바탕이 있으신 분으로 당대에 부응할 만한 충분한 재주와 행실을 갖추었으며 그 이름 또한 후세에 전하기에 넉넉한데, 불행히도 일찍 돌아가셨습니다. 그런데 세상을 뜨신 지 지금 70년이 되도록 아직 묘비가 없으니, 이것이야말로 후손으로서 너무나 마음 아픈 일입니다. 당신의 말 한마디를 얻어 지하의 영령을 빛나게 했으면 합니다.” 하기에, 내가 그것을 받아 읽어 보았다. 아, 하늘이 이미 그러한 인물을 낸 것은 무엇인가 하기 위해서였을 것인데 이어서 다시 막아 버렸으니, 그 또한 불행한 일이 아닌가. 내가 비록 지식이 얕고 인품이 용렬하여 감히 입언(立言)을 한다고 자처할 수는 없지마는 그 아름다운 행실이 영원히 묻혀 버리고 전해지지 못할까 적이 마음이 저리고 또 효자의 지극한 간청에 감동이 되어 마침내 사양을 하지 못하였다.
삼가 살피건대 공의 휘는 연(堜)이고 자는 교옹(郊翁)이며 관향은 벽진(碧珍)이다. 아버지는 참지(參知)로 판서에 추증된 휘 상급(尙伋)인데 병자년 난리에 삼학사(三學士 홍익한(洪翼漢)ㆍ윤집(尹集)ㆍ오달제(吳達濟))의 논의를 주장하여 한때 명망이 높았고, 할아버지 휘 희선(喜善)은 교관(敎官)으로 찬성(贊成)에 추증되었으며, 증조부 휘 석명(碩明)은 군수로 참판에 추증되었다. 청렴한 지조로 대대로 가문을 지켜 사람들이 맑은 물에 비유하였다. 어머니는 밀양 박씨(密陽朴氏)로 정부인(貞夫人)에 추증되었는데 첨지중추부사 주(胄)의 딸이었으며, 첨지중추는 또 음애(陰崖 이자(李耔)) 이 문경공(李文敬公)의 미생(彌甥 자매의 손자)이었다.
공은 만력(萬曆) 정미년 1월 20일에 태어났는데, 어려서부터 영리하였으며 성품도 효성스럽고 조심스러워 부모의 뜻에 순응하고 어김이 없었고 얼굴 모습 또한 화기가 넘쳐 부모의 사랑을 독차지하였다. 자라서도 화사하고 사치스러운 것을 좋아하지 않고 겸손과 공순함으로 스스로를 길렀으며 말도 골라서 하였다. 친척과 친구에게 후하고 사람을 다정하게 대하여 친구들로부터 사랑을 받았고, 부정한 일은 아무리 적은 일이라도 하지 않았으며 남이 하는 경우 옳은 길로 가도록 타이르는 것을 잊지 않았다. 판서공이 일찍이 외읍(外邑)을 맡고 있었는데, 그때 공은 뜻을 간결하게 가져 문방(文房) 도구 같은 것까지도 청정(淸政)에 누를 끼치지 않도록 하였고, 무릇 자제(子弟)로서의 허물을 한 번도 저지른 일이 없었을 정도로 행동을 제어하였다.
일찍부터 독서를 좋아했고 생각하는 것이 정밀하고 전일했으며 늘그막까지 외곬으로 마음을 써 거의 먹고 자는 것도 잊을 정도였는데 어쩌다 못 다한 것이 있으면 아무리 시끄러운 소리가 좌우에서 들려와도 못 들은 체 할 만큼 입지(立志)가 확고하였다. 일찍이 별시(別試)를 통과하고 전시(殿試)를 보기 전에 정부인 상을 당하여 절도에 넘게 몸이 야위도록 상을 치르다가 점점 병이 고질화되어 드디어 죽기에 이르렀는데, 그때가 바로 숭정(崇禎) 을해년 2월 24일로서 공의 나이 겨우 29세 되던 때였다. 충주(忠州) 서쪽의 황금곡(黃金谷) 해좌(亥坐) 둔덕에 장사 지냈는데 이는 그곳이 선영이었기 때문이다. 그후 막내아들의 공훈으로 좌승지에 추증되었다.
이씨(李氏)는 대대로 알려진 인물들이 많다. 신라(新羅) 말기에 총언(悤言)이라는 이가 벽진 태수(碧珍太守)로서 여조(麗朝)의 통일 시기를 당하여 공을 세워 장군(將軍)의 호를 받았는데, 그가 이씨의 시종이다. 공의 6세(世) 조부 평정공(平靖公) 약동(約東)에 이르러 청백으로 이름이 나 세상에서 그를 노촌 선생(老村先生)이라 불렀고, 공의 중부(仲父)인 충숙공(忠肅公) 상길(尙吉)은 의로운 절개로 나라 위해 몸을 바쳤는데 공이 또 효도로 마지막을 장식했으니, 그야말로 전통적으로 풍성(風聲)을 지닌 가문으로서 대대로 주고받았다고 할 것이다.
공의 초취(初娶) 임천 조씨(林川趙氏)는 죽음공(竹陰公) 희일(希逸)의 딸로서 자태가 단정하고 성품이 총명하여 매우 시부모의 뜻에 들었는데 자식이 없이 공보다 13년 먼저 죽어 양주(楊州)의 불암산(佛巖山) 선영에 술좌(戌坐)로 장사 지냈다. 재취(再娶) 전의 이씨(全義李氏)는 도사(都事) 구준(耈俊)의 딸로서 청강공(淸江公) 제신(濟臣)이 그의 할아버지가 되며, 장중하고 엄숙하면서도 화기가 넘치고 상냥하여 매우 훌륭한 부덕(婦德)을 지녔다. 미망인이 되자 외롭고 연약한 두 아들이 잘 성취되지 못할까 염려하여 옳은 방향으로 가르치는 데 있어 할 수 있는 일을 다 하였고, 집안이 몰락할 지경이 되어도 그 사실을 모르게 숨기고 오직 날마다 스승을 찾아 학업에만 힘쓰게 하였다. 그래서 외형(外兄)인 동회(東淮 신익성(申翼聖)) 신공(申公)이 언젠가 감탄을 하면서 이씨매(李氏妹)는 참으로 여사(女士)라고 하기도 하였다. 숭정(崇禎) 후 정미년에 세상을 마쳤는데, 묘는 공의 묘 뒤에 있다.
아들이 둘이다. 맏은 지웅(志雄)으로 두 사마시(司馬試)에 모두 합격하고 한성 서윤(漢城庶尹)이 되었으며, 차남 지걸(志傑)은 사마시를 통과하여 첨지중추(僉知中樞)가 되었다. 서윤은 4남을 두었는데 목사(牧使) 세황(世璜)과 세구(世球)ㆍ세관(世瓘)ㆍ세환(世瑍)이며, 두 딸은 참봉 윤규(尹揆)ㆍ윤황(尹煌)에게 출가하였다. 첨추(僉樞)는 아들이 둘인데 세근(世瑾)은 교리(校理)이고 세진(世璡)은 별제(別提)이며, 딸 다섯은 유중영(柳重榮), 진사 어사하(魚史夏), 정만준(鄭萬準), 부사(府使) 조세망(趙世望), 유창진(柳昌晉)에게 각각 시집갔다. 세황은 아들 정상(挺相)이 진사이고, 세관은 자식이 없어 아우의 아들 정박(挺樸)을 후사로 삼았으며, 세환은 아들 정욱(挺郁)과 정박 둘 모두 진사이다. 세근은 3남을 두었는데 정주(挺柱)가 진사이고 나머지는 어리며, 세진도 3남인데 정즙(挺楫)과 어린아이들이다. 그리고 안팎으로 증손과 현손이 모두 50여 명이나 된다.
아, 공은 비록 일찍 죽어 자기가 할 바를 다 못하였지만 후사들이 번창하여 현재 세상에 이름을 날리고 있으니 그의 복록(福祿)이 끝난 것이 아니다. 공과 같은 이야말로 이른바 하늘이 그 못다 발휘한 축적을 모아 두고두고 후세에 복을 주는 그런 경우라 하겠다. 다음과 같이 명한다.

청수한 인물 오래 못 사는데 / 淸粹者難久
기품 때문에 그런 것인가 / 氣稟之然耶
후손들 경사 누리고 있으니 / 餘慶方來
믿을 수 있는 것이 하늘이런가 / 可必者天耶
오늘날 착한 일 하는 이들이여 / 凡今爲善之人
날아오르는 저 난곡을 보시게나 그려 / 盍觀鸞鵠之騰騫



 청음집 제38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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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記) 5수(五首)
유서산기(遊西山記)

한양(漢陽)의 산이 복정(覆鼎)에서부터 산줄기가 뻗어 내려와 왕도(王都)의 진산(鎭山)이 된 것을 공극(拱極)이라고 일컫는다. 이 공극에서 갈려 나와 산등성이가 불쑥 솟아나 꾸불꾸불 뻗어 내려오다가 서쪽을 끼고 돌면서 남쪽을 감싸 안고 있는 것을 필운(弼雲)이라고 한다. 나의 집은 이 두 산의 아래에 있어서 아침저녁으로 들락날락하면서 일찍이 산을 가까이에서 접하지 않은 적이 없었으며, 산 역시 다투어 내 집의 창과 실내로 들어오려 하여 친근함을 더하려는 것 같았다. 그러므로 항상 자리에 누운 채로 바라보고 즐겼다. 그러면서도 일찍이 산속의 바위며 골짜기 사이에는 오간 적이 없었다.
갑인년(1614, 광해군6) 가을에 어머님께서 눈병이 나셨다. 그런데 들리는 소문에 서산(西山)에 신통한 샘이 솟아나는데 병든 사람이 머리를 감으면 이따금 효험을 보는 경우가 있다고 하였다. 이에 마침내 날을 잡아 산에 올랐는데, 큰형님과 나와 광찬(光燦)과 광소(光熽)가 함께 따라갔다.
인왕동(仁王洞)에 들어가서 고(故) 양곡(陽谷) 소 이상(蘇貳相)이 살던 옛집을 지났는데, 이른바 청심당(淸心堂), 풍천각(風泉閣), 수운헌(水雲軒)으로 불리던 것들이 지도리는 썩고 주춧돌은 무너져 거의 알아볼 수가 없었다. 양곡은 문장(文章)으로 세상에 이름을 드러내어 이미 귀하게 된 데다가 부유하였으며, 또한 심장(心匠)이라고 칭해졌으니, 집을 지으면서 교묘함과 화려함을 극도로 하였을 것이다. 그리고 교유하였던 선비들도 모두 한때 문장으로 이름이 알려진 사람들이었으니, 그들이 읊었던 것 중에는 필시 기록되어 전해질 만한 것이 많았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 채 백 년도 못 되어서 이미 한둘도 남아 있는 것이 없다. 그러니 선비가 믿고서 후세에 베풀어 줄 수 있는 것은 여기에 있지 않은 것이다.
이곳을 지나서 더 위로 올라가니 절벽에서는 폭포가 쏟아지고 푸른 잔디로 덮인 언덕이 있어 곳곳이 다 볼만하였다. 다시 여기를 지나서 더 위로 올라가자 돌길이 아주 험하였으므로 말에서 내려 걸어갔다. 다시 한 번 쉰 다음 샘이 있는 곳에 이르니, 지세가 공극산의 절반쯤에 해당하는 곳이었다. 높이 솟은 바위가 하나 있는데 새가 날개를 편 듯이 지붕을 얹어 놓은 것 같았다. 바위 가장자리가 파여 있는 것이 처마와 같아 비나 눈이 올 때 예닐곱 명 정도는 들어가 피할 만했다. 샘은 바위 밑 조그만 틈새 가운데로부터 솟아 나왔는데, 샘 줄기가 아주 가늘었다. 한 식경쯤 앉아서 기다리자 그제야 겨우 샘 구덩이에 삼분의 일쯤 채워졌는데, 구덩이의 둘레는 겨우 맷돌 하나 크기 정도이고 깊이도 무릎에 못 미칠 정도여서 한 자 남짓 되었다. 샘물의 맛은 달짝지근했으나 톡 쏘지는 않았고 몹시 차갑지도 않았다. 샘 근처의 나무에는 여기저기 어지럽게 지전(紙錢)을 붙여 놓은 것으로 보아 많은 노파들이 와서 영험을 빌었던 곳임을 알 수 있다.
석굴의 앞에는 평평한 흙 언덕이 있었는데 동서의 너비가 겨우 수십 보쯤 되어 보였다. 비로 인해 파인 곳에 오래 묵은 기와가 나와 있는 것으로 보아 이곳이 바로 인왕사(仁王寺)의 옛 절터인 듯하였다. 어떤 이가 북쪽의 맞은편 골짜기에도 무너진 터가 있다고 한다. 그러나 옛 자취가 다 없어졌으니 분명하게 알 수는 없는 일이다. 일찍이 듣기로는 국초(國初)에 도읍을 정할 때 서산의 석벽에서 단서(丹書)를 얻었다고 하는데, 이 역시 어느 곳인지 알 수가 없었다.
산 전체가 바위 하나로 몸체가 되어 산마루부터 중턱에 이르기까지 우뚝 선 뼈대처럼 가파른 바위로 되어 있고 깎아지른 듯한 봉우리와 겹쳐진 절벽이 똑바로 서고 옆으로 늘어서 있어 우러러보매 마치 병기를 모아 놓고 갑옷을 쌓아놓은 것과 같아 그 기묘한 장관을 이루 형용하기가 어려웠다.
산줄기가 이어지면서 산등성이를 이루고 여러 산등성이가 나뉘어 골짜기가 되었다. 골짜기에는 모두 샘이 있어 맑은 물이 바위에 부딪치매 수많은 옥이 찰랑거리는 것 같았는바, 수석(水石)의 경치가 실로 서울에서 으뜸가는 곳이었다. 그러나 한스러운 것은 금령(禁令)이 해이해져 산 전체에 아름드리 큰 나무가 없다는 것이었다. 만약 소나무나 전나무 그늘이 있고 단풍나무나 녹나무가 언덕을 둘러싸고 있어 솔솔 부는 바람 소리를 들으면서 바람 맑고 달빛 밝은 저녁에 느릿느릿 서성인다면 봉호(蓬壺)나 곤랑(崑閬)도 어찌 부러워할 필요가 있겠는가.
등 뒤로는 구부러진 성이 아주 가깝게 보였다. 하인을 보내어 올라가는 길을 찾아보게 했는데, 길이 험하여 올라갈 수가 없다고 하였다. 광찬과 광소가 빠른 걸음으로 갔다가 오더니 자기들이 본 것을 잘 말해 주었는데, 사현(沙峴)으로 지나가는 사람들이 개미처럼 작게 보였으며 삼강(三江)의 돛단배들을 하나하나 자세하게 헤아릴 수가 있다고 하였다. 내 나이가 그리 많은 것도 아닌데 기력이 너무 쇠하여 가까운 거리임에도 오히려 더 걷지를 못하고 험한 길을 당하여 멈춰 서고 만 데 대해 스스로 탄식하였다. 그러니 이런 기력으로 어찌 벼슬자리에 나아가 있는 힘을 다해 일하면서 내가 젊어서 배운 것을 펼쳐 도를 행하여 남에게 미치게 할 수가 있겠는가.
큰형님과 더불어 남쪽 봉우리에 오르니, 산봉우리 아래에 술 곳간이 있었다. 두 채를 서로 마주 보게 지어 놓았는데 십여 칸 정도가 서로 이어져 있었다. 술 냄새가 퍼져 나가 새들조차 모여 들지 않으니, 모르겠다만 얼마나 많은 광약(狂藥)이 온 세상 사람들로 하여금 온통 취하게 하였던가.
앞쪽으로는 목멱산(木覓山)이 보이는데 마치 어린아이를 어루만지는 듯하였다. 남쪽으로는 성이 산허리를 감고 구불구불 이어진 것이 마치 용이 누워 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 아래에 어찌 용같이 훌륭한 인물이 누워 있겠는가. 지금 반드시 있지는 않을 것이다. 그 아래로 수많은 여염집의 기와지붕이 땅에 깔려 있어 다닥다닥 붙어 있는 것이 마치 물고기의 비늘과 같았다. 임진년(1592, 선조25)의 난리를 치른 뒤 23년이 지나 백성들의 수가 날로 불어나 집들이 많기가 이와 같이 성대하게 되었다. 그중에는 남자들의 숫자가 수십만 명을 밑돌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도 요순(堯舜)을 도와 당우(唐虞) 시대의 태평성대를 이룰 사람이 한 사람도 없어, 한갓 나라의 힘은 더욱 약해지고 백성들의 삶은 더욱 초췌해지고 변방의 방비는 더욱 위태롭게 돼 지금과 같이 쇠퇴해지는 데 이르게 하였다. 어찌하여 저 푸른 하늘은 인재를 내려 주는 것이 이렇게도 인색하단 말인가. 아니면 하늘이 인재를 내려 주긴 했는데 쓸 줄을 몰라서 그런 것인가? 어찌 이것이 어쩔 수 없는 시대의 운명 탓이 아니겠는가.
경복궁의 동산은 텅 비었고 성은 허물어지고 나무는 부러졌으며 용루(龍樓)와 봉각(鳳閣)은 무성한 잡초로 뒤덮여 있었다. 그런 가운데 단지 경회루 연못에 있는 연잎이 바람에 뒤집히면서 저녁 햇살에 번쩍이는 것만 보였다. 앞에서는 어진 인물을 막고 나라를 그릇되게 하여 전쟁을 불러들이고 온갖 고난을 겪게 하였으며, 뒤에서는 부추기고 이간질하면서 임금께 아첨을 하여 간사한 말이 행해지고 법궁(法宮)을 황폐해지게 하였으니, 간신의 죄를 어찌 이루 다 주벌할 수 있겠는가.
동궐(東闕)이 쌍으로 우뚝 솟아 있고 화려한 집들이 늘어서 있으며, 금원(禁苑)의 숲에는 소나무와 잣나무가 빽빽한 가운데, 호분(虎賁)과 용양(龍驤)은 궁궐을 깨끗이 청소하고 임금의 행차를 기다리고 있었다. 왕자(王者)의 거처가 흥하고 망하는 것은 본디 운수에 달려 있는 것이며, 임금다운 임금이 즉위하여 세상을 다스리는 것도 때가 있는 것이다.
흥인문(興仁門)의 빼어난 모습이 동쪽을 향하여 우뚝 서 있고 종로(鍾路)의 큰길이 한 줄기로 뻥 뚫려 있었다. 길 좌우에 늘어선 상점은 많은 별이 별자리에 따라 나뉘어 있는 것처럼 반듯반듯하게 차례대로 늘어서 있었다. 그 사이로 수레와 말이 오갔으며, 달리는 사람과 뛰는 사람들이 허둥지둥 분주하게 오갔는데, 그들은 모두가 이익을 도모하는 자들일 것이다. 그러니 당나라 사람의 시에 이른바 “서로 만나느라 늙는 줄도 모른다.〔相逢不知老〕”라고 한 것은 진실로 뛰어난 구절이다.
불암산(佛巖山)은 푸른빛으로 서 있는데 바라보니 손으로 움켜잡을 수 있을 것처럼 가깝게 보였다. 바위 봉우리가 빼어나게 솟은 것이 예사로운 모습이 아니었다. 만약 왕실을 가까이에서 보익하여 동쪽의 진산(鎭山)이 되어 서쪽과 남쪽과 북쪽의 세 산과 더불어 함께 우뚝 솟아 있었다면, 실로 도성의 형세를 장엄하게 했을 것이다. 그러나 멀리 서울을 수십 리 벗어난 곳에 있어 마치 거친 들판으로 달아나 있는 것처럼 보이는바, 조물주가 사물을 만든 뜻이 참으로 애석하였다.
아, 조석으로 생활하면서 아무런 생각도 없이 접하던 산을 태어난 지 45년이나 지난 오늘날에서야 비로소 한 번 올라 보았다. 천지는 잠시 머물러 가는 주막인 거려(蘧廬)이고, 희서(羲舒)는 비탈길에 굴러 가는 구슬과 같은바, 부생(浮生)의 백년 세월은 이 우주에 잠시 몸을 의탁한 것이다. 그리하여 정처 없이 떠다니는 것이 마치 바람 속의 물거품과 같아 멀리 떠가거나 가까이 있거나 흩어지거나 모이거나 하는 것을 모두 자기 마음대로 할 수가 없다. 지금부터 여생이 몇 년이나 더 될지 알 수 없다. 그러니 어머니와 형을 모시고 아들과 조카를 따르게 하여 다시 이 산에 놀러와 여기에 머물러 먼 풍경을 바라보면서 하루 종일 즐기는 것을 어찌 또다시 기약할 수 있겠는가. 인하여 느낀 바가 있어 그것을 쓰고 때를 기록해 두고자 한다.

[주D-001]복정(覆鼎) : 북한산(北漢山)의 옛 이름으로, 산의 모양이 마치 솥을 엎어 놓은 듯하므로 붙여진 이름이다. 북한산은 이 이외에도 삼각산(三角山), 북악(北嶽), 부아악(負兒嶽) 등으로도 칭해진다.
[주D-002]공극(拱極) : 경복궁(景福宮)의 주산인 백악(白嶽)을 가리키는데, 중종 때 중국 사신 공용경(龔用卿)이 백악을 공극산, 인왕산(仁旺山)을 필운산(弼雲山)이라고 개명하였다.
[주D-003]소 이상(蘇貳相) : 좌찬성과 우찬성을 지낸 소세양(蘇世讓)을 가리킨다. 소세양은 뛰어난 시재(詩才)를 가지고 있어 한때의 문풍(文風)을 주도하였다.
[주D-004]심장(心匠) : 독특한 구상이나 설계를 말한다.
[주D-005]단서(丹書) : 중요한 내용을 붉은 글씨로 써서 깊이 간직해 숨겨 둔 것을 말한다.
[주D-006]봉호(蓬壺)나 곤랑(崑閬) : 봉호는 바다 속에 있으며 신선들이 산다는 전설상의 봉래산(蓬萊山)을 말한다. 《습유기(拾遺記)》〈고신(高辛)〉에, “삼호(三壺)는 바로 바다 속에 있는 세 산으로, 첫 번째는 방호(方壺)인데 이는 방장산(方丈山)이고, 두 번째는 봉호인데 이는 봉래산이고, 세 번째는 영호(瀛壺)인데 이는 영주산(瀛洲山)으로, 모양이 술병과 같이 생겼다.” 하였다. 곤랑은 곤륜산(崑崙山) 꼭대기에 있는 낭풍원(閬風苑)으로, 역시 신선이 산다고 하는 곳이다.
[주D-007]삼강(三江) : 지금의 용산(龍山), 마포(麻浦), 양화(楊花) 일대의 강을 말한다.
[주D-008]동궐(東闕) : 창덕궁의 이칭이다. 창덕궁은 태종이 이궁(離宮)으로 세운 궁전으로, 임진왜란 때 경복궁ㆍ창경궁과 함께 불에 탔으나 1609년(광해군1)에 가장 먼저 중건하여 오랫동안 법궁(法宮)으로 사용되었다.
[주D-009]호분(虎賁)과 용양(龍驤) : 조선 시대 오위(五衛)에 소속된 군사 조직으로, 임금의 호위를 주 임무로 하였다.
[주D-010]서로……모른다 : 맹교(孟郊)의 시 〈송유순(送柳淳)〉에 나오는 구절로, 명예와 이익을 좇는 세상 사람들이 서로 분주히 만나고 다니느라 자신이 늙어 가는 줄도 모른다는 말이다.
[주D-011]희서(羲舒) : 해를 몬다고 하는 신인 희화(羲和)와 달을 몬다고 하는 신인 망서(望舒)로, 전하여 세월을 뜻하는 말로 쓰인다.
[주D-012]현옹(玄翁)의……있다 : 현옹은 신흠(申欽)의 호이고, 백사(白沙)는 이항복(李恒福)의 호이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고 23년이 지난 해는 1615년(광해군7)으로, 이때 신흠은 1613년에 일어난 계축옥사(癸丑獄事)로 인해 선조로부터 영창대군(永昌大君)의 보필을 부탁받은 유교칠신(遺敎七臣)으로 지목되어 파직된 후 김포(金浦) 근처에 있었고, 이항복은 같은 해 인재 천거를 잘못하였다는 구실로 북인(北人)들의 공격을 받고 물러나 불암산 아래에 동강정사(東岡精舍)를 새로 짓고 동강노인(東岡老人)으로 자칭하면서 지내고 있었다.



 
 홍재전서 제57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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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잡저(雜著) 4
원침(園寢)을 옮긴 사실 1 기유년(1789)

원침(園寢)을 옮길 때의 계획이나 이유, 사례(事例)의 크고 작은 일은 교서나 상소문에 섞여 나와서 기록이 너무 많아, 상세히 정리할 수 없고, 의궤(儀軌)는 뒤섞여 차례가 없기에 그 요령을 얻기가 어렵다. 일에 앞서 미리 헤아려 정한 조치나 때에 당해서 구두로 내린 명령은 문적(文蹟) 이외의 것이 많아 지금 사실을 추려서 같은 유(類)대로 모으고 조목별로 나누어 원편(原編) 몇 권과 부록 몇 권을 만들었다.
원편의 목록이 다섯이니, 첫째는 정원(定園 원침을 정함)이다. 대개 신(神)이 아끼고 감춰 둔 길지(吉地)를 사람들이 알 수 없는 것은 하늘이 하기 때문이고, 그것을 알고도 쓰지 못하는 것은 시운(時運)이 있기 때문이다. 화산(花山)이 서울에서 90리 안에 있고 식견이 있는 사람들에게 발견된 지 100여 년이나 되었는데 비로소 원침을 정한 땅이 되었는바, 진실로 하늘이 정한 것이며 시운도 기다린 바가 있었던 것이니, 어찌 천재일우(千載一遇)의 기회가 아니겠는가. 형국(形局)의 아름다움을 찬양한 일과 사수(砂水)의 격(格)을 논한 것은 뜻 있는 사람들이 앞뒤에서 분명한 증거를 제시한 것이 문권을 가지고 대조하고 거북점과 시초점을 쳐서 맞추는 것과 같을 뿐만이 아니다. 이 책의 대강령(大綱領)은 곧 원침을 정하는 일이기 때문에 정원을 첫 편으로 삼았다.
둘째는 재혈(裁穴 묘혈의 위치를 재어서 정함)이다. 산을 점치는 데 있어 혈(穴)을 재는 일보다 더 신중하게 해야 할 일이 없다. 더구나 지금 봉표(封標)하는 처음에 이론(異論)을 제기하는 자가 많아 정혈(正穴)을 잃을 뻔하였다가, 끝내는 진토(眞土)가 나오고 초점(焦點)이 드러났는데 그것 역시 보통 사람의 식견으로는 알 수 없는 일이었으며, 신명(神明)이 길한 조짐을 보호하려고 일부러 먼저 고생을 시키고 나서 얻게 하려는 듯한 느낌이 있어서 재혈을 다음으로 하였다.
셋째는 상설(象設 석물(石物)을 설치함)이다. 진룡(眞龍)을 이미 점을 쳐서 찾았고 진혈(眞穴)을 찾아 살펴보고 정하였다. 참으로 천신(天神)의 도우심이 이미 진지하니, 거기에 설치할 석품(石品)을 다른 산에서 다듬는 일은 의당 인력의 경영을 기다려야 하였다. 앵봉(鶯峰)은 봉표와의 거리가 몇 개의 능선을 넘는 정도로 가깝고, 신령이 마련하여 정기가 서렸으며 뿌리가 깊어 정화(精華)를 간직하였다. 이를 발견하는 데는 귀신이 꿈에 도왔고 운반하는 데는 하늘이 비를 내려 길을 미끄럽게 하였으니, 일은 빠르고 효력은 배나 되며 물건은 좋고 의식(儀式)은 풍부하게 하여 소자(小子)가 유감없이 일을 이루고자 한 소원을 이루게 하였으니, 이는 어찌 기회가 마침 그렇게 된 것이 아니겠는가. 때문에 상설을 그다음으로 하였다.
넷째는 추일(諏日 날을 가리는 일)이다. 풍수(風水)에서 격(格)을 이루는 것은 땅에 속한 일이고, 연시(年時)가 길운을 맞춰 주는 일은 하늘에 속한 것이다. 때문에 장례를 치르는 집에서 신중하게 살피는 것은 첫째가 일진(日辰)이다. 이는 곽박(郭璞)이 말한, “일진이 살(煞)을 범하는 것이 산천의 작은 흠보다 중하다.”고 한 것이다. 새 원침을 의논하여 정한 연운(年運)이 저절로 맞았고 공사를 함에 있어 일을 마칠 때까지 오래도록 비와 눈이 방해를 하지 않아, 예양(禮襄 이장(移葬))하는 일을 겨울에 시작하였는데 길일이 물러갔다가 다시 나왔으니, 하늘이 스스로 도움을 주어서 그렇게 된 것이다. 때문에 추일을 다음으로 하였다.
다섯째는 천봉(遷奉 영구(靈柩)를 옮겨서 장사 지냄)이다. 원침을 옮길 계획을 한 지는 지금까지 16년이나 되었고, 구릉(舊陵)의 재환(災患)을 오늘날에 보았으며, 새 원침의 안길(安吉)은 해가 지나면 알 수 있을 것이다. 이에 백공(百工)이 일을 하여 대례(大禮)를 성공리에 마쳤다. 때문에 천봉하는 조목으로 매듭을 지었다. 기타 응당 해야 할 일과 처음 행한 세세한 일은 부록으로 엮었으니, 곧 건축하는 일과 능원의 경계, 보토(補土)하는 일, 나무를 심는 일, 도로를 닦는 일, 읍(邑)을 옮기는 일로서, 이것이 의례(義例)의 대략이다.

군자(君子)가 어버이를 장사 지내는 데에는 반드시 정성스럽고 성실하게 하여 후회가 있어서는 안 된다. 혹 처음에 정성과 성실을 다하지 못한 사람은 종신토록 한이 될 것이니, 후회하면서도 고치지 못한다면 어떤 불효가 이보다 심하겠는가. 그러나 길지(吉地)가 완전하게 생긴 곳은 반드시 기회와 인연의 합쳐짐이 있어야 하고, 국운이 하늘의 복을 크게 받아 번창하는 일 또한 하늘이 돕는 영응(靈應)을 기다려야 한다. 《시경(詩經)》에 이르기를, “하늘이 기산(岐山)을 만드심에 태왕(太王)께서 가꾸셨다.[天作高山 大王荒之]” 하였고, 또 이르기를, “상제(上帝)께서 권연(眷然)히 서쪽의 기산(岐山)을 돌아보시고 이곳을 주시어 거처하게 하셨다.[乃眷西顧 此維與宅]” 하였는바, 하늘이 길지를 만들고 주는 것이니, 어찌 사람의 힘으로 할 수 있는 것이겠는가. 나 소자(小子)는 하늘에 닿는 아픔을 안고 꾹 참으며 구차히 목숨을 연명하면서 스스로 보통 사람과 같이 여기지 않으려고 하였는데, 선왕의 능침이 길지가 아님을 더욱 지극히 한스럽고 원통하게 생각하여, 매양 명절(名節)에 성묘를 하고 산마루와 기슭을 두루 살피면서 두렵고 불안하여 편히 쉬지 못하였다.
그러나 만약 원침을 옮기는 일에만 급급하여 만전(萬全)의 좋은 곳을 얻지 못한다면, 장차 후회가 더욱 심하여 끝내는 나의 정성을 다하지 못할 것이다. 그리하여 나는 일찍이 지사(地師)를 사방으로 나누어 보내어 선릉(先陵) 내의 봉표(封標)와 기호(畿湖)의 여러 산을 낱낱이 살피도록 하였다. 그렇지만 혹은 역량이 모자라고 혹은 형국(形局)이 허술하여, 협곡에서 가까운 곳은 거개가 비탈진 곳이 많고 평평하고 넓은 곳은 제대로 결속된 곳이 없어, 만년토록 안길(安吉)할 택조(宅兆)가 되지 못하였다.
그런데 오직 수원(水原)의 화산(花山)은 신통한 지사가 점찍은 곳이고 이름난 석학들이 일컫는 곳이다. 기해년(1779, 정조3) 인산(因山) 때 공사를 시작하였는데, 조정의 공론이 갈려 중간에 그만두고 말았다. 그러나 고집하는 자는 사세의 어려움만을 논하였고 풍수의 결함은 말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국내(國內)의 진룡(眞龍)과 정혈(正穴)을 지금 조사하여 낱낱이 헤아려 보더라도 화산 외에는 다시 이만한 대지(大地)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나의 뜻이 먼저 정하여지고 여러 술사(術士)들도 찬양하고 경대부(卿大夫)도 이 말에 따르며, 수레를 끄는 사람이나 잡부(雜夫)들까지도 모두 뛰면서 기뻐하고 나라를 위하여 축하하니, 이것이 어찌 사람만이 좋은 길지로 여길 뿐이겠는가. 젖 먹이는 호랑이[乳虎]가 그 신령함을 나타내고 산 개구리[生蛙]가 상서로움을 알려 봉표(封標)를 옮기자 진토(眞土)가 드러났으니, 이는 땅이 감춰 둔 곳을 알리는 것이고, 거친 돌을 제거하자 옥돌이 나온 것은 신(神)이 길한 조짐을 선물하는 것이며, 운(運)과 때가 합하여 하늘에서 도와주심이 모두 이로우니 원침을 옮기는 대례(大禮)에 조금도 유감스러운 점이 없다. 이는 실로 조물주의 도우심에 힘입어 장차 하늘이 우리나라를 돌보시어 대명(大命)을 주시며 음복을 내리시려는 것이다. 불초한 나 소자가 어찌 감히 정성이 있어 상제(上帝)를 감동시켰다고 하겠는가.
기유년(1789, 정조13) 10월 기미일(己未日)에 원침을 옮기니, 그 일을 경영함에 있어 많은 사려(思慮)를 한 것과 일을 하는 도중에 영이(靈異)함이 나타난 일이라든지 의물 도수(儀物度數)에 크게 관계되는 일을 이에 차례대로 엮어 우리 후세 사람들에게 알린다. 나 소자가 왕위에 오른 지 13년째인 기유년 겨울에 쓰다.

정원(定園) 제1
경기(京畿) 수원부(水原府)의 치소(治所)는 서울과의 거리가 90리이고 치소의 북쪽 산을 화산(花山)이라고 한다. 화산의 왼쪽으로 뻗은 용(龍)이 을방(乙方)에서 엎드렸다가 건방(乾方)에서 봉우리가 솟고, 다시 계방(癸方)으로 오면서 축방(丑方)으로 내려가서 간방(艮方)에서 입수(入首)하여 계좌정향(癸坐丁向)을 하면 병자(丙子)ㆍ병오(丙午)의 분금(分金)이 되고, 건방ㆍ을방ㆍ신방(申方) 득수(得水)에 오방(午方) 파문(破門)의 형국이 된다. 산이 을방에서 엎드렸다가 건방에서 봉우리가 솟은 것은 천지정위(天地定位)의 격이 되고, 축방으로 내려가 간방에서 입수한 것은 산택통기(山澤通氣)의 격이 되며, 간맥(艮脈)이 정방(丁方)을 향하여 천시성원(天市星垣)에 응하고 정방에 세 개의 작은 언덕이 있어 바른 안대[正案]가 되니, 평면금성(平面金星)의 체(體)에 합하고 남극노인(南極老人)이 일월이 행하는 도수(度數)를 점치게 된다.
건방에서 오는 물은 탐랑수(貪狼水)에 해당되고 을방에서 오는 물은 무곡수(武曲水)에 해당되니, 또 선천(先天)과 후천(後天)이 서로 만나는 격(格)이 된다. 신방에서 오는 물은 생방수(生方水)가 되고 또 최관수(催官水)가 되니, 오방의 파문은 수화불상석(水火不相射)의 격이 된다. 외수(外水)는 병방(丙方)으로 돌아가 곤방(坤方)에 못이 있으니 율려상생(律呂相生)하는 격이 되고, 정방의 안산(案山)과 병방의 파문은 천간상생(天干相生)의 격이 된다. 이는 곧 신라 국사(新羅國師) 옥룡자(玉龍子) 도선(道詵)이 이른바 “서린 용이 구슬을 희롱하는 형국[盤龍弄珠之形]”이고, 참의(參議) 윤선도(尹善道)가 이른바 “용(龍)과 혈(穴)과 사(砂)와 수(水)가 모두 좋고 아름답다.”는 것이니, 진실로 천 리를 가도 없을 천재일우(千載一遇)의 길지(吉地)이다.
근래 방외사(方外士)가 논한 바가 있으니, 그 내룡(來龍)에 대하여 논하기를, “먼 곳은 다 말할 수 없고, 광교산(光敎山)이 용인(龍仁)ㆍ광주(廣州)ㆍ수원 세 고을의 경계에 걸터앉아 있어서 한강 남쪽 여러 산의 뇌(腦)가 되고, 분맥(分脈)의 조종산(祖宗山)이 되며, 오른쪽으로 떨어져 나간 것이 청계산(靑溪山)ㆍ관악산(冠嶽山) 등이 되어 한강 남쪽 여러 능침의 땅을 만들었다. 그리고 가운데로 떨어진 맥이 백운산(白雲山)이 되어 미륵당 고개에 이르러 낮아졌다가 다시 솟아 오봉산(五峰山)이 되고, 미맥(微脈)으로 뻗은 내룡이 다시 솟아 수리악(修理嶽)이 되니, 곧 한강 서쪽의 안인산(安仁山)ㆍ금부산(金富山) 등 여러 산의 조종산이 된다. 왼쪽으로 떨어져 나간 것은 증악산(甑嶽山)이 되는데, 증악산은 들 가운데에 우뚝 솟아 수성(水星)의 체(體)가 되어 마치 소용돌이치면서 흐르는 물결 같기도 하고, 곧은 줄기와 당기는 맥이 혹 솟기도 하고 혹 엎드리기도 하여 고금산(鼓琴山)이 되고 홍범산(洪範山)이 되어 수십 리의 행룡(行龍)이 몸을 뒤틀며 물을 거슬러 올라가 수원부의 뒷산에 솟아 형국의 본신(本身)이 되었으며, 내룡이 외백호(外白虎)가 되어 청룡(靑龍)과 백호가 삼중으로 얽히고 본룡(本龍)이 여러 갈래를 나누어 퍼져 사방으로 둘러 호위하며, 두 손을 마주 잡고 읍(揖)을 하는 듯하여 조산(朝山)과 안산(案山)이 되었으니, 광교산이 태조산(太祖山)이 되고 오봉산이 중조산(中祖山)이 되며 증악산이 소조산(小祖山)이 되어, 참으로 100여 리에 전일한 기운이 결집되어 만들어진 곳이다. 만일 세속의 지사(地師)가 증악산 이후와 수원부산(水原府山) 이전에 맥기(脈氣)가 미약한 것으로 흠을 잡는다면, 이는 진룡(眞龍)의 변화하는 모습을 모르는 것이다. 태조산 아래의 진맥이 들을 지나는 곳은 반드시 연하고 가늘어 예쁘고 아름답기 때문에 요금정(廖金精)이 말하기를, ‘늙은 용이 연한 가지를 만들어 냄에 미끄러지고 끊어짐이 많음을 싫어하지 않는다.[老龍生出嫩枝柯 跌斷不嫌多]’고 하였으니, 이는 연할수록 더욱 아름답고 끊어진 곳이 많을수록 귀하다는 말이며, 성봉(星峰)이 가끔 수려하게 빼어나고 다투어 솟았는데 이는 바로 간성법(間星法)이다. 양균송(楊筠松)이 말하기를, ‘그대가 만일 간성법을 알려거든 시골의 도처마다 가서 찾으라. 10리 사이에 한 봉우리가 높이 솟아 있으니 작은 것이 큰 산이 되고 약한 봉우리가 큰 봉우리가 된다’고 하였다. 10리에 하나의 봉우리가 솟은 것도 오히려 큰 산이 되고 큰 봉우리가 되는 묘함이 있는데, 더구나 무수한 봉우리가 솟음에야 무슨 말을 하겠는가. 호종(護從)하는 여러 산이 첩첩이 거듭 쌓여 구름이 생기고 안개가 일어나는 듯하니, 이미 지극히 귀한 기상(氣象)이다. 이뿐만이 아니고 15리의 긴 배룡(背龍)이 미륵당 고개로부터 끝없이 내려와서 큰 들에 가로로 뻗어 공허한 기운을 막아 주는바, 이는 분명 진룡이 지나는 곳에 먼저 호위(扈衛)를 베푸는 뜻이니 용 형국의 고귀함이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이다.” 하였다.
또 그 혈성(穴星 명당의 위치)에 대하여 논하기를 “감방(坎方)의 봉우리가 뇌(腦)가 되어 참된 기맥(氣脈)이 은은히 내려오다가 축방(丑方)에서 간방(艮方)으로 휘어 간방에서 입수(入首)하고, 왼쪽으로부터 오른쪽으로 안은 것이 은연중 활이 굽은 듯하면서 유방(乳房)의 모양이 되고, 유방 아래에는 평면의 작은 움집이 열린 듯이 태극의 둥근 모양을 하고, 남은 기운이 혈(穴)의 입술이 되니, 이는 이른바 양(陽)이 오면 음(陰)이 받아 조화를 이루는 묘함이다. 간혹 혈을 재는 일이 잘못되면 혈이 없는 것과 같으니, 진기(眞氣)가 와서 멈춘 곳에 혈을 재는 방법은 세 가지를 벗어나지 않는다. 세 가지를 벗어나지 않는다는 것은, 곧 높더라도 살기(煞氣)와 싸우지 않고 낮더라도 냉(冷)한 데로 범하지 않아서 조금도 혈을 벗어나지 않는다. 조금이라도 혈을 벗어나게 되면 진기의 감소가 너무 지나쳐 생기(生氣)를 타는 뜻을 잃고, 낮은 데로 범하게 되면 묘를 높이 써야 할 곳에 잘못 낮게 써서 수침(水浸)의 재난을 초래하고, 너무 높아서 살기와 싸우게 되면 용맥(龍脈)을 손상시켜 생기가 변해서 살기가 되니, 세 가지 중에 살기와 싸우는 것을 가장 꺼린다. 때문에 옛사람의 말에, ‘차라리 낮은 데로 범할지언정 높게 하여 살기와 싸우지 말라’는 경계가 있고, 범안(凡眼)으로 점칠 때는 더러 조금 높은 곳을 취하기 때문에 편안히 흐르는 물이 돌에 부딪치는 것에 비유함이 있다. 그러나 평탄한 곳에서 구슬을 대하는 것[就坦對珠]이라는 말로 이미 앞사람들의 정론이 있으니, 여러 말을 하지 않고 다만 그 체(體)만 논하겠다. 대개 혈체(穴體)의 변화는 만 가지나 되지만 네 가지의 형상을 벗어나지 않으니, 곧 와(窩 움집처럼 깊고 아늑함)ㆍ겸(鉗 평탄하고 약간 긴 듯함)ㆍ유(乳 여자의 유방처럼 생김)ㆍ돌(突 돌출한 곳)인데, 이는 노양(老陽)ㆍ노음(老陰)ㆍ소양(少陽)ㆍ소음(少陰)의 상(象)이다. 그러나 음양의 명목(名目)은 옛사람의 말이 각각 다르니, 양균송(楊筠松)은 그 용(用)을 취하여 와(窩)와 겸(鉗)을 양이라 하고 유(乳)와 돌(突)을 음이라 하였으며, 요금정(廖金精)은 그 체(體)를 취하여 유와 돌을 양이라 하고 와와 겸을 음이라 하였으니, 그 이르는 말은 다르나 뜻은 한가지다. 이 혈은 유방처럼 생긴 둔덕 아래에 와형(窩形)으로 되어 있으니, 곧 음양이 교합[交媾]하는 이치이다. 때문에 양이 옮에 음이 받아들인다고 말을 하니, 혈법의 묘함은 더 이상 말할 것이 없다. 만약 혹시라도 넓지 않고 크지 않다는 것으로 흠을 잡는다면, 유택(幽宅)과 양기(陽基 마을의 터)의 대소(大小)와 동이(同異)에 차이가 있는 이치를 알지 못하는 것이다. 양기는 위로는 도읍이 있고 중간에는 관청이 있으며 아래로는 촌락을 이루니, 많을 경우는 수만 가구, 적어도 수천 수백 가구를 배치하여 살 수 있게 한 연후에야 양기를 이루었다고 할 수 있다. 때문에 평탄하고 넓은 것을 귀하게 여기는 것은 형세가 그러한 것이다. 유택은 그렇지 않아서 천 리를 뻗은 용의 진맥(眞脈)을 접해야 하고 주변 사수(砂水)의 길기(吉氣)를 거두어 한자리의 혈구(穴口)로 집중시켜야 한다. 그러므로 다만 형국이 만들어진 세가 진짜인가 가짜인가만을 보아야 하고 형체의 대소는 관계가 없는 것이다.” 하였다.
그 사법(砂法)에 대하여 논하기를, “좌우의 청룡과 백호가 높지도 않고 얕지도 않게 쌍산(雙山)을 이루고 상대(相對)를 이루어, 산의 입구를 열어 줌이 법수(法數)에 맞고 서로 사양함이 법도에 맞아 내당(內堂)에서 문을 이루어야 하는 것이니, 이것이 청룡과 백호 안에 또 기묘하게 숨겨진 혈의 격(格)이 있는 것이다. 곧 혈맥이 감방(坎方) 뇌(腦)의 왼쪽으로부터 능선을 타고 내려오면서 미미하게 활처럼 돌아 오른쪽을 향하여 와형(窩形)을 만들었다. 때문에 감뇌(坎腦)의 오른쪽에는 작은 사(砂)가 있어 왼쪽을 향하여 내려오다가 혈의 입구에 와서 그쳤으니, 얼핏 보면 몸을 감싸 주는 사(砂)가 오른쪽은 있고 왼쪽은 없는 듯하지만, 실제로는 좌맥(左脈)의 능선과 오른쪽의 작은 사(砂)가 은연중 대대(對待)를 이루어 진실로 면밀하게 조화를 이룬 신묘한 곳이다. 제2의 청룡과 백호 밖에 또 외청룡(外靑龍)이 조산(朝山)과 안산(案山) 등 여러 산들과 함께 3중으로 겹쳐 있고, 기타 장막의 뒤에서 보필해 주는 산과 품속에서 안산을 대하는 것과 원근(遠近)과 고저(高低)의 길사(吉砂)는 이루 다 열거할 수 없다. 또 가장 좋은 격은 산성(山城)의 용이 조종산(祖宗山) 낙맥(落脈)으로부터 길을 나누어 와서 수구(水口)를 긴밀하게 지키며 혈(穴)을 돌아보는데, 산허리 이상의 봉우리는 특이하여 긴 능선의 용과 합하여 보면 큰 역량(力量)을 징험할 수 있다. - 산성(山城)이 손방(巽方)과 사방(巳方)에 있어 법가(法駕)의 기상이 있으니, 이는 윤선도(尹善道)가 놀란 것이다. -” 하였다.
또 수세(水勢)를 논하기를, “내당(內堂)은 둥글고 평평하며, 외당(外堂)은 가로로 굽어 있으며, 천관(天關)은 길고 지축(地軸)은 들리는 격이고, 국내(局內)의 물이 연모하는 뜻이 있고 용을 따르는 물이 외당의 밖에서 서로 합하니 참으로 물 가운데의 용이다. 지리에 어두운 사람은 대체(大體)를 알지 못하고 한갓 편견만 고집하면서 간혹 순수(順水)의 형국에 산과 물이 함께 돌아간다는 말을 한다. 그러나 이는 몸을 뒤트는 용이 옷깃을 정제하는 형국으로, 이것은 하자가 되지 않는다.” 하였다.
또 그 용절(龍節)의 이기(理氣)를 논하기를, “임방(壬方), 감방(坎方), 계방(癸方)의 산형(山形)은 수화불상석(水火不相射)의 격이 되고, 축방(丑方), 간방(艮方)으로 돌아 입수(入首)하는 간방의 용절과 안산을 대한 정방(丁方)의 구슬은 산택통기(山澤通氣)의 격이 된다. 백 척(尺)의 안쪽 몇 용절 사이에 이렇게 세 가지의 대격(大格)에 합치되니, 진실로 아주 귀한 용이며 얻기 어려운 법수(法數)이다. 세속의 지사(地師)가 간혹 수(水)와 토(土)가 상생(相生)하지 못하는 것으로 흠을 잡는다면, 이는 오행(五行)과 이기(理氣)의 설을 모르는 것이다. 수토(水土)는 서로 상극(相剋)이라고 하나 본래 동궁(同宮)이기 때문에 포태법(胞胎法)에서 생(生), 왕(旺), 쇠(衰), 병(病)은 모두 같은 방위가 되니, 비유하건대 사람에 있어서 기쁨과 슬픔을 함께하는 의(誼)와 같은 것으로, 이는 가깝고 화목하다고 하여도 가하다. 더구나 임계(壬癸)와 축간(丑艮)이 각각 격(格)을 이룬 데 있어서야 말할 것이 있겠는가.” 하였다.
그 수법(水法)의 이기(理氣)에 대하여 논하기를, “세속의 지사(地師)들은 외파(外破)의 수구(水口)만을 고집하고 내파(內破)의 수구는 말하지 않으며, 또 일설에는 내파만 고집하고 외파는 고집하지 않으니, 모두 잘못이 있다. 그러나 외파는 멀면서 완만하고 내파는 가까우면서 급하게 흐르니, 마땅히 먼저 내파의 격(格)을 합치시킨 뒤에 외파의 격을 합치시켜야 한다. 계방의 산과 오방(午方)의 물은 수화불상석의 격이 되고 또 정방의 안산(案山)과 병방(丙方)의 파문(破門)은 천간생성(天干生成)의 격이 되니, 윤선도의 헌의(獻議)에서 겉과 속이 모두 길격(吉格)으로 둘려 있다는 것이 이런 곳을 가리키는 말 같다.” 하였다.
○ 나는 본래 감여가(堪輿家)의 학문에 어두워 그것이 무슨 말인지 알지 못하였다. 갑오년(1774, 영조50) 능원에 성묘를 한 뒤로부터 은근히 뉘우치는 뜻이 있어 처음에는 옛사람의 지리를 논한 여러 가지 책을 취하여 전심으로 연구하여 그 종지(宗旨)를 얻은 듯하였다. 그래서 선원(先園)의 용(龍), 혈(血), 사(砂), 수(水)를 가지고 옛날 방술(方術)과 참고하여 보았더니, 하자가 많고 길격은 하나도 없었다. 그러나 오히려 자신을 갖지 못하여 세속의 지사(地師)로서 안목이 있는 자를 널리 불러 그 사람의 조예(造詣)를 시험해 본바, 그들의 언론과 지식이 옛 방술에 어긋나지 않아 곧 앞뒤로 전날 능원을 논한 것을 찾아 살펴보았더니 그들의 논한 바가 상자에 넘칠 정도였다. 산의 외형(外形)은 형국(形局)을 이루지 못한 것으로 꺼렸고, 지하(地下)는 재환(災患)이 갖추어진 것으로 염려하여, 편안하다거나 겨우 괜찮다고 한 것도 없었다. -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곡장(曲墻)의 가에서부터 연못 앞에 이르기까지 곳곳마다 나침반을 놓고 자세히 살펴보니, 해파(亥破)가 분명하고 연못도 역시 해방(亥方)에 있으며, 임방(壬方)에는 작은 언덕이 앞을 가려 원래 서로 보이지 않고 해방은 다만 임방의 모퉁이만 보이니, 당초에 파문(破門)을 고집한 것은 3길[丈]이 보이지 않는다는 말로 주장을 한 듯하다.” 하였고, 또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국세(局勢)가 좁아 대혈(大穴)을 잃어 정(情)이 없고, 곤신방(坤申方)과 인간방(寅艮方)이 낮고 허하여 바람이 화기(火氣)를 보내고 화기가 수기(水氣)를 보내어 이치에 안정하지 못하고, 임감방(壬坎方)의 행룡(行龍)이 건해방(乾亥方)과 오정방(午丁方)에서 깎여 바뀌고, 정방(丁方)의 일절(一節)이 내려와 묘방(卯方)에서 입수하여 묘좌유향(卯坐酉向)을 하고, 곤술방(坤戌方) 득수(得水)에 임해방(壬亥方)이 파문이 되며, 신묘(辛卯)ㆍ신유(辛酉)의 분금(分金)이 되고, 태기(兌氣)는 진기(震氣)를 소멸하니 진(震)은 곧 묘방(卯方)이다. 매양 태(兌)의 정사축(丁巳丑) 연월(年月)을 만나면 매우 편안하지 못하니, 소멸법(消滅法)을 참고하여 보면 알 수 있다. 묘좌(卯坐)의 목산(木山)에서 물이 임해방으로 돌아가면 장생파(長生破)가 되고 겸하여 선천(先天)과 후천(後天)이 서로 파국이 되며, 천관(天關)은 열리지 못하고 지축(地軸)이 빠져 이른바 독음국(獨陰局)이 된다.” 하였다. 만약 혈법(穴法)을 논해 보면, 길기(吉氣)를 모으려고 한다면 반드시 앞에는 관인(官人)처럼 생긴 산이 있고 뒤에는 귀면(鬼面)처럼 생긴 산의 묘함이 있어야 하는데, 전연 증거가 없으니 어느 겨를에 조산(朝山)과 조수(朝水)의 좋고 그른 것을 논할 수 있겠는가. 땅속의 일에 있어서는 모재 모재(某災某災)가 척산경(尺山經)의 묘좌 임해파(卯坐壬亥破) 조항에 자세히 실려 있으니 감히 함부로 논할 수는 없지만, 어떤 사람이 이르기를, “오른쪽에서 돌아온 정룡(丁龍)이 묘방에서 입수를 할 경우에는 갑좌경향(甲坐庚向)이고 정득 임파(丁得壬破)가 된다.” 하였고, 또 이르기를, “갑방(甲方)에서 입수를 하면 갑좌경향이고 곤신득(坤辛得) 술건파(戌乾破)가 된다.” 하였는데, 대개 입수하는 맥이 오른쪽으로 밀렸으면 을방(乙方)이 되고 왼쪽으로 밀렸으면 을진방(乙辰方)이 되는데, 혈의 뒤에 귀면(鬼面)이 없으면 공허할 듯하다. 을이나 갑을 논할 것 없이 갑을방(甲乙方)의 아래에 갑좌(甲坐)를 하면 좌와 향이 서로 공박(攻駁)함이 되니, 법수(法數)에서 향살(向煞)이라고 한다. 곤신방(坤申方)이 낮아 바람이 오고 또 신술방(辛戌方)이 낮아 계곡을 지나게 되니, 법수에 이르기를, “계곡을 지나다가 만약 바람이 부는 곳을 만나 혈을 만들면 힘이 낮은 줄을 알아야 한다.”고 하였는데, 곤방에서 주봉(主峰)이 생겨 곤방의 아래 미방(未方)에서 와서 오방(午方)으로 굴러 내려 정방(丁方)으로 바꾸면, 용법(龍法)으로 볼 때 본래 귀기(貴氣)가 없는 것이고 나무가 무성하여 득수(得水)와 파문을 자세히 살필 수 없다. 그러나 왼쪽에는 유방(酉方)의 물이 있고 오른쪽에는 신방(辛方)의 물이 있는바, 신방의 물은 염정화(廉貞火)가 되고 유수(酉水)는 파군격(破軍格)이 되니 길성(吉星)이 되지 못한다. 경향(庚向)에서의 곤수(坤水)는 황천수(黃泉水)가 되니, 비록 가는 물을 꺼리고 오는 물은 꺼리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역시 길수(吉水)는 되지 못한다. 처음에 능원을 정하고 이르기를, “정득 임파(丁得壬破)이다.” 하였는데, 임방은 갑좌의 후천(後天)이 되고 정방은 갑좌의 복음(伏吟)이 된다. 또 뒤에 이르기를, “곤신득(坤辛得)이요 건술파(乾戌破)이다.” 하였으니, 파문을 논하는 법에서 본래 2위(位)가 없으니, 건파(乾破)를 가지고 말하면 비록 갑좌의 삼합(三合)이 되더라도 괘모(卦母)에서 파하였고 또 복음(伏吟)이 되니 또한 길파(吉破)가 되지 못한다. 또 자세히 살펴보면 수세(水勢)는 건방(乾方)을 지나 해파(亥破)가 되는 듯하니, 해파는 갑좌에서 꺼리는 파문(破門)이 된다. 대개 산이 일정한 도안(圖案)이 없고 긴 계곡이 있어 상충(相衝)이 되면 옛사람이 말한 ‘기(氣)가 바람을 타면 흩어진다[氣乘風則散]’는 것이니, 곤신방(坤辛方)에서 바람이 오고 신술방(辛戌方)에서 계곡을 지나 을진방(乙辰方)에서 입수(入首)하게 되면 봉분의 속이 만안(萬安)하지 못할 듯하지만 대단한 데까지는 이르지 않는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인(寅), 신(申), 사(巳), 해(亥)는 본래 음국(陰局)이나 양국(陽局)의 대장생향(大長生向)이라, 비록 다른 국(局)이라 하더라도 이 파문을 범하면 하자가 됨이 적지 않은데, 더구나 갑묘(甲卯)의 목룡(木龍)에서 본생방(本生方)의 해파를 범한다는 것은 매우 두려운 일이다.” 하였고,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독양(獨陽)은 살지 못하며 순음(純陰)은 자라지 못한다. 목국(木局) 갑묘(甲卯)의 용이 우선(右旋)하는 것을 합당하지 못하다고 하는 것은 지가(地家)의 정론(正論)이니, 대체로 독양은 살지 못하고 순음은 자라지 못한다는 이치에서 연유한다. 그리고 주성(主星)과 혈, 좌 및 청룡과 백호가 마주 보는 안산이 모두 정격(正格)에 합당치 못함이다.” 하였으며,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안락현(安樂峴)으로부터 건술방(乾戌方)의 낙맥(落脈)이 굴러서 신술방(辛戌方)이 되고 정미방(丁未方)에서 깎여 바뀌며, 오정방(午丁方)에서 다시 굴러 용맥을 이루어 을진방(乙辰方)에서 입수하니, 대개 신술ㆍ정미ㆍ을진의 용은 이미 불길한 맥이 되고, 을진의 용 아래에서 갑좌(甲坐)는 더욱 격에 맞지 않는다. 당초에 묘좌(卯坐)는 합당한지 모르겠고, 신술방(辛戌方)의 득수(得水)와 해방(亥方)의 파문(破門)은 모두 격에 맞지 않으니, 땅속에서 재환이 있을까 두렵다.” 하였다. 또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용신(龍身)이 시작되는 곳에 정면의 봉우리가 없으면 용의 형태가 약하고 음양의 충화(沖和)한 기운이 적어, 혈을 만든다 하여도 길기(吉氣)를 모으지 못하고 뒤에도 또한 보호해 주는 사람이 없을 것이고, 국내의 물이 발원하는 곳에 구부러져 파문이 되려는 곳이 있는데, 은연중 곧게 나가면 남쪽의 화룡(火龍)이 북쪽 현무(玄武)의 너무 강한 기운을 받아 기제(旣濟)의 격에 합당치 못하니, 봉분 속이 혹 수화(水火)의 해가 있을 듯하나 심하지는 않겠다.” 하였으며,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혈성(穴星)은 정감이 있는 듯하나 입수(入首)하는 용맥이 너무 짧고 또 선익(蟬翼)이 없으며, 청룡과 백호는 비록 안은 듯하기는 하지만 기복(起伏)의 형세가 없고 백호 아래의 사(砂)는 기력이 없고 혈 뒤의 귀면(鬼面)은 무기력하니, 그 형국을 논하면 동(動)하기만 하고 정(靜)함이 없다.” 하였다. - 그 논한 바가 꼭 하나하나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또한 의심을 결단하는 하나의 단서가 되기에 충분하다.
방외사(方外士)의 말에, “포태법(胞胎法)은 좌우순역(左右順逆)의 구별이 있는데, 좌선 목국(左旋木局)은 포(胞)가 신(申)에서 시작하여 순수(順數)함에 생기방(生氣方)이 해(亥)에 있고, 우선 목국(右旋木局)은 포가 유(酉)에서 시작하여 역수(逆數)함에 생기방이 오(午)에 있다. 때문에 고방(古方)에 생방(生方)과 왕방(旺方)을 혼용한다는 말이 있고 술가(術家)에서는 혹 변통하여 쓰기도 한다. 그러나 정법(正法)이 아니므로 함부로 써서는 안 된다. 좌선(左旋)과 우선(右旋)은 산과 물의 오고 가는 것으로 국(局)을 정하니, 만약 산이 오른쪽에서 오고 물이 왼쪽을 향하여 가면 좌선수(左旋水)가 되고, 산이 왼쪽에서 오고 물이 오른쪽을 향하여 가면 우선수(右旋水)가 된다. 갑좌 해파(甲坐亥破)는 우선국(右旋局)이 되니 물이 생기방(生氣方)으로 가는 것을 꺼린다. 비록 좌선국(左旋局)보다는 조금 가벼우나 끝내 온당치 못하다.” 하였다. 또 말하기를, “건술(乾戌), 신술(辛戌), 을진(乙辰)의 용은 모두 귀맥(貴脈)이 아니다. 만약 독행(獨行)하다가 변해서 귀맥이 되는 경우는 오히려 취할 것이 있거니와, 쌍행(雙行)을 한 경우라면 지가(地家)에서 가장 꺼리는 것이다.” 하였다. 지금 입수(入首)하는 용절(龍節)이 을진방(乙辰方)이라고 말하는 것은 아마도 쌍행하는 것을 용맥이라고 한 듯한데 행용하는 법도가 전혀 격에 맞지 않다. 그리고 묘좌 해파(卯坐亥破)가 과연 법도에 조금도 어긋남이 없다고 한다면 수법(水法)에서는 또한 불리하다고 하겠다. 내가 이로부터 능원을 옮길 것을 결심하였다. 그러나 반드시 먼저 더없는 최고의 대지(大地)를 구해야 하고, 다음은 가장 좋은 길년(吉年)의 운을 만난 연후에 지극히 중대하고 공경하며 엄숙하고 신중히 해야 하는 예를 의논할 수 있으니, 이것이 내가 서둘러 구하였지만 지연되어 지금까지 오게 된 까닭이다.
수원(水原)으로 계획을 정한 지가 오래되었고, 이 밖에 열성조(列聖朝)께서 봉표(封標)한 곳이나 세상에서 대지라고 일컫는 곳을 여러 술사(術士)들의 말을 통해 그 대략을 살펴보니, 논의한 바가 일정하지 않고 산도 또한 우열이 있었다. 건원릉(健元陵)의 왼쪽 능선, 정릉(貞陵)의 화소(火巢) 바깥, 헌릉(獻陵)의 이수동(梨樹洞)ㆍ옹암동(甕巖洞)ㆍ화암동(花巖洞), 영릉(英陵)의 능 안과 소홍제동(小弘濟洞) 재실(齋室) 뒤의 능선, 장릉(長陵)의 네 번째 능선, 순릉(順陵)의 재실 뒤 두 능선, 옛 목릉(穆陵)의 오른쪽 능선, 숭릉(崇陵)의 오른쪽, 옛 영릉(寧陵)의 백호 능선 바깥과 청룡 능선 가의 유방(酉方) 기슭, 경릉(敬陵) 국내의 간방(艮方)과 묘방(卯方) 두 능선, 창릉(昌陵)의 왼쪽 능선, 홍릉(弘陵)의 오른쪽 능선, 연희궁(衍禧宮)의 간방(艮方) 기슭, 연서정(延曙亭) 터, 벌어현동(伐於峴洞)의 맞은편 국내(局內), 왕십리(往十里) 건방(乾方)의 능선, 독서당(讀書堂)의 서쪽 기슭, 양주(楊州)의 북쪽 30리 남쪽으로 향한 기슭ㆍ녹양역(綠楊驛) 터의 서쪽ㆍ청송면(靑松面) 유방(酉方)의 기슭ㆍ석우리(石隅里)의 윤씨산(尹氏山)ㆍ평구역(平丘驛) 동쪽 10리 서쪽으로 향한 기슭ㆍ불암산(佛巖山) 아래 화접동(花蝶洞), 광주(廣州)의 원적산(元積山)ㆍ향교 뒤의 기슭과, 양재(良才) 대로현(大路峴)의 북쪽에 있는 방하교(方河橋)의 서북향, 광교산(光敎山) 서쪽 기슭의 한 능선, 남양(南陽)의 객사(客舍) 뒤, 교하(交河)의 월롱산(月籠山)ㆍ와동(瓦洞)과 객사(客舍) 뒤, 고양(高陽)의 해구(海口), 영평(永平)의 근주산(近住山) 유방(酉方)의 기슭, 적성(積城) 감악산(紺嶽山) 아래 임좌(壬坐)의 기슭, 금천(衿川)의 남쪽 자하동(紫霞洞), 적성(積城)과 마전(麻田) 길의 경계가 되는 고개 건너 능선의 여러 곳 등등은 하나도 합당한 곳이 없고, 장단(長湍)의 백학산(白鶴山) 아래 세 곳은 국세(局勢)와 용맥(龍脈)이 혹 좁고 작으며 혹 조금 완만하기도 하였다. - 그 하나는 읍의 청사(廳舍) 뒤인데, 해좌사향(亥坐巳向)으로 병간손방(丙艮巽方)이 득수(得水)이고 병방(丙方)이 파문(破門)이 되는 국이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백학산(白鶴山)이 여러 산 가운데 우뚝 솟아 중심에서 나온 맥이 유혈(乳穴)을 만드니, 혈체(穴體)가 단아하며 미묘하고 명당(明堂)이 평정하니 예부터 대지(大地)라고 일컬었다.” 하였다. 또 한 곳은 읍의 객사(客舍) 뒤 신좌을향(申坐乙向)으로, 해묘방(亥卯方)이 득수(得水)이고 손방(巽方)이 파문(破門)이 되는 국이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내룡(來龍)이 요소에 모인 모양이 매우 정교하고 치밀하니, 읍의 기지(基地)와 비교할 때 더욱 좋다.” 하였다. 또 한 곳은 송씨(宋氏)가 사는 집 뒤이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내룡과 국세(局勢)가 비록 가한 듯하지만, 혈을 이룬 곳이 나약하니 의논할 곳이 못 된다.” 하였다. 방외사(方外士)들은 말하기를, “해좌(亥坐)를 하면 행룡(行龍)이 매우 생기가 있고 혈성(穴星)도 잘 서려 몸을 감싼 듯하여, 백호(白虎)가 역수를 하여 안고 외백호(外白虎)가 거듭거듭 호위하고 가리어, 몸을 감싸는 청룡(靑龍)은 없지만 주봉(主峯)으로부터 내려온 맥이 청룡이 되어 너무 넓게 벌어지지 않고 안대(案對)의 봉우리가 모두 아름다우니, 입향(立向)을 하는 데 있어 모두 마땅하다. 그리고 신좌(辛坐)를 하면 혈성(穴星)이 풍만하고 크며 청룡과 백호가 적당하고 안대(案對) 또한 좋으니, 보통 사람의 눈으로 보더라도 두 곳은 그 우열을 알지 못한다.” 하였다. - 광릉(光陵)의 왼쪽 능선 한 곳은 곧 달마동(達摩洞)이니, 문의(文義)와 함께 일컫는 지역이지만 또한 마음에 들지 않는다. 또 한 곳은 곧 절터인데, 신당(神堂)의 앞이나 불전(佛殿)의 뒤, 그리고 폐옥(廢屋)과 고묘(古廟)는 옛사람들이 꺼리던 바라 결단코 의논을 할 수가 없다. - 달마동(達摩洞)에 대해,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임감(壬坎)의 용이 해방(亥方)으로 돌아 입수(入首)하니 해좌사향(亥坐巳向)이며, 병방(丙方)이 득수(得水)가 되고 손방(巽方)이 파문(破門)이 되는 형국이다. 왼쪽에는 몸을 도와주는 사(砂)가 있고 오른쪽에는 매미의 날개처럼 생긴 사(砂)가 있으며, 사방에서 기(氣)를 모아 38장(將)이 나란히 대치하여 있고 수세(水勢)의 현묘함은 옷깃을 여민 듯하고, 축방(丑方)이 약간 낮고 외산(外山)은 우뚝하게 빼어나 조금도 흠이 될 것이 없으니, 참으로 대길(大吉)의 지형이다.” 하였다. 또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용의 뻗어 감이 정묘하고 혈성(穴星)이 풍만하며 청룡과 백호가 구불구불 서려 마음과 눈을 현혹시키기에 충분하며, 왼쪽은 계방(癸方)이 허하고 오른쪽은 신태방(辛兌方)이 낮아 어깨에 바람을 맞는 걱정은 요풍(凹風)과 같다. 임해방(壬亥方)의 용과 물이 사방(巳方)으로 돌아가니, 또한 산과 물이 한곳으로 돌아감을 모면하지 못한다.” 하였다. 방외사(方外士)가 말하기를, “경태방(庚兌方)에서 뻗은 용이 감방(坎方)에서 뇌(腦)를 이루고 임방(壬方)으로 돌아 해방(亥方)에서 입수(入首)하니, 해좌사향(亥坐巳向)이고 손방(巽方)이 파문(破門)이 되며 좌선(左旋)의 국(局)이 된다. 이기(理氣)로써 논하면 명당 뒤의 용절(龍節)은 금수(金水)가 상생(相生)하고 좌향과 파문(破門)은 뇌풍(雷風)이 격에 맞는데, 혈성(穴星)이 확실하지 못하고 왼쪽의 어깨가 얕고 허하니, 법수(法數)로는 길하나 대지라고 논할 수는 없다. 또 이곳은 본릉(本陵)이 모두 수구(水口)가 되니, 만일 성봉(星峯)을 다시 일으켜 거듭 문호를 정리하지 못하면, 비록 어렴풋이 국을 이루기는 하더라도 비유하건대 귀인이나 관부(官府)에서 하인이 꾸짖고 견제하는 것과 같으니, 바라보면 두려워하는 듯하나 끝내는 보호해 주지 못하고 주인으로 오인하게 된다.” 하였다. 사찰의 뒤에 대해,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용의 뻗음이 구불구불하고 형체가 여러 번 변하여 경태방(庚兌方)이 뒤편이 되고 감방으로 내려왔다가 해방에서 바꾸어, 긴 유방(乳房)의 형국에 작은 움집의 형상을 겸하고 뇌(腦)의 위와 입술의 아래에 돌이 있어 기운을 거두어 모았다. 청룡과 백호는 명당을 안고 안대(案對)는 존엄하니 임좌병향(壬坐丙向)이고, 곤방이 득수(得水)가 되며 진방이 파문(破門)이 되니 좌선룡(左旋龍)의 제일 좋은 귀격(貴格)으로 더 이상 좋을 수가 없다.” 하였으며,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국내(局內)에서 흐르는 물이 처음으로 오방에서 보이니, 만일 오방이 아니면 미방을 벗어나지 않으니 득수(得水)가 오방에 있는 것은 크게 꺼릴 것이 없으나 좌향과 파문(破門)이 격에 맞는 것으로 순길(純吉)하다고 할 수 없으니, 옛사람이 말한 ‘눈과 마음을 현혹시킨다’고 한 것이 바로 이것이다.” 하였고, 방외사(方外士)가 말하기를, “용절(龍節)과 수법(水法)이 모두 길격(吉格)에 맞아 달마동(達摩洞)과 더불어 우열이 없으나, 혈체(穴體)가 둔하여 아름다운 형태가 없다. 용(龍), 혈(血), 사(砂), 수(水) 중에 용과 혈이 중하고, 이 두 가지 중에 혈이 더욱 중하니, 혈을 살피지 못하면 다른 것은 논할 것이 못 된다.” 하였다. - 후릉(厚陵)의 국내(局內) 두 곳과 -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한 곳은 곧 송악(松嶽)의 내룡(來龍)인데, 용의 형체가 아주 귀하고 거듭거듭 기복(起伏)이 있으며 존엄한 기상을 겸하여 어병(御屛)이 좌우에 벌려 있으니, 바로 용이 서리고 범이 웅크리고 앉은 듯한 곳이다. 다만 뒤맥이 하자가 있어 혈이 뭉친 것이 분명하지 못하다. 또 한 곳은 곧 본릉(本陵)의 청룡(靑龍) 가인바, 뒤 계곡에서 돌아 들어왔는데 자좌오향(子坐午向)이고, 묘유방(卯酉方)이 득수(得水)가 되며 오방이 파문(破門)이 되는 국이니, 뒤의 용절이 격에 맞고 입구가 묶여 있어 혈을 만드는 데 단정하고 청룡과 백호가 싸고 안아 명당이 평탄하다. 하나의 귀한 맥이 소속리(小俗離)로부터 와서 밝게 안으면서 안대(案對)를 만들었으니 아주 귀한 곳이라고 할 만하다. 다만 혈이 있는 곳이 약간 높으니 이것이 흠이다.” 하였다. - 강릉(康陵)의 오른쪽 능선과 -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주성(主星)이 아름답게 솟아 ‘팔(八)’ 자의 형태로 갈라져서 긴 유방(乳房)과 같은 혈을 만들고, 임감계방(壬坎癸方)에서 내려온 용이 감방에서 입수(入首)를 하니 임좌병향(壬坐丙向)이고, 곤신방(坤申方)이 득수(得水)가 되며 진방(辰方)이 파문이 되는 국이다. 청룡과 백호가 감싸 안고 명당이 평평하고 반듯하며, 조산(朝山)과 안산(案山)이 아미산(峨眉山)처럼 아름답고 문성(文星)의 전면이 모두가 길기(吉氣)뿐이다. 다만 혈성(穴星)이 생기가 없다.” 하였다. - 청량리(淸涼里)와 - 산 모양이 평평하면서 순하고 용세(龍勢)가 기복이 없으며, 계방(癸方) 아래에서 한 번 돌아 계축방(癸丑方)에서 쌍산이 되었는데, 그중에서 계방으로 뻗은 것이 용신을 돌려 감룡(坎龍)이 되고 손곤미방(巽坤未方) 득수(得水)에 정방(丁方) 파문(破門)이 되며, 청룡의 허리가 낮아 을진방(乙辰方)의 물이 산 너머로 보여 향(向)을 정하기가 어렵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삼각산 낙맥이 안락현(安樂峴)에서 뭉치고, 임감(壬坎)의 행룡(行龍)을 자좌(子坐)나 임좌(任坐)로 하면 왼쪽은 사방(巳方)과 병방(丙方)이 득수가 되고 오른쪽은 곤방(坤方)과 신방(申方)이 득수가 되며, 국내(局內)는 정방이 파문이 되고 국외(局外)는 오방이 파문이 되니, 실로 십전지지(十全之地)의 땅에 부합된다.” 하였다. - 가평(加平) 등 -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현등산(懸燈山)이 100여 리를 뻗어 내려 아름답게 국(局)을 만들어 조산(朝山)과 안대(案對)가 아주 길한데, 정면(正面)이 없고 사방(巳方)의 파문(破門)이 흠이다.” 하였으며,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국세(局勢)에서 조산과 안대는 극히 길하나, 주혈(主穴)이 없고 천관(天關)이 너무 허하며 지축(地軸)이 또 멀리 있으니, 대지라고 하기는 애당초 근사하지도 않다.” 하였다. - 여러 곳이 비록 조금 낫다고는 하나 하자가 많다. 문의(文義)의 양성산(兩星山) 해좌(亥坐)의 언덕은 예전부터 좋다고 많이 일컬어 왔는데, 조산(祖山)과의 거리가 조금 가까워 오히려 십전지지(十全之地)는 아니다. -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속리산(俗離山)의 한 맥이 묘방(卯方)과 간방(艮方)으로부터 100여 리를 뻗어 내려 읍의 뒤에 와서 양성산(兩星山)이 되니, 기복이 웅장하고 뒤에는 귀인성(貴人星)이 있으며, 평지의 능선이 땅속을 지나 임감룡(壬坎龍)으로 뻗어 와서 유혈(乳穴)을 만드니 해좌사향(亥坐巳向)이고, 간묘손방(艮卯巽方) 득수에 정방(丁方)이 파문이 된다. 사방의 둘러 있는 산이 모두 솟아 삼길 육수(三吉六秀)로 국세를 이루었으며, 조산과 안산의 봉우리들이 모두 귀하고 명당의 국세가 평평하며 반듯하고 밝으니, 참으로 쉽게 얻지 못할 땅이다.” 하였다. 방외사(方外士)가 말하기를, “용세(龍勢)가 웅장하고 주봉(主峯)이 솟았으며 땅속을 지날 적에 산세를 긴하게 묶고 혈성(穴星)이 단정하고 묘하여 본신(本身)의 물을 거슬러 국세를 만들었다. 조산의 용이 외청룡(外靑龍)을 만들었으니 이것은 보통 사람의 눈에도 들겠지만, 조산과 멀지 않아 몸의 때를 다 벗지 못한 염려가 있고 국세가 만들어진 것이 너무 넓어 내외의 명당을 분간할 수 없으며, 겸하여 청룡과 백호가 제대로 감싸 주지 못하며 안대(案對)도 제대로 되지 못하였으니, 이것은 범인의 눈에 들지 않을 것이다.” 하였다. - 그 여러 가지의 길격(吉格)이 아울러 한 국내(局內)로 모여 고금(古今)이나 지우(智愚)를 막론하고 한마디의 말로 더없는 대지라고 일컫는 곳은 수원(水原)만 한 곳이 없고, 연운(年運)의 길한 것도 대체로 기다리는 바가 있었던 것이다.
기유년 7월 23일(정미)에 금성위(錦城尉) 박명원(朴明源)이 상소하기를, “신은 석양에 임박하여 천한 몸이 병만 깊고 만 가지의 생각이 재처럼 식어서 죽음만 기다리고 있습니다만, 오직 나라를 걱정하고 임금을 사랑하는 지극한 마음은 단(丹)처럼 붉게 빛나고 있습니다. 지리(地理)의 학설은 한진(漢晉) 시대의 술사(術士)에서 비롯되었고 당송(唐宋) 때에 성하였습니다. 세간의 화복(禍福)이 꼭 지리에 의거하는지는 알 수 없으나 그 말의 유래가 이미 오래되었으니, 만일 모두가 허위라면 어찌 사람들로 하여금 이처럼 신봉(信奉)하게 할 수가 있겠습니까. 정자(程子)는 지리의 학설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저승이 편안하다면 이승도 편안할 것이고 저승이 위태하다면 이승도 위태할 것이라는 말씀이 있었고, 또 이르기를, ‘모름지기 산이 돌아오고 물이 굽어 옷깃처럼 감싸 안아 흠이 없는 곳을 취할 것이니, 지가(地家)의 이른바 길지라는 것도 또한 이런 것을 취한 것이다’고 하였고, 주자(朱子)에 이르러서는 실제로 그 설을 깊이 연구하여 아버지를 매장(埋葬)하는 곳을 법수(法數)에 의하여 구하였고, 또 산릉(山陵)의 잘되고 잘못된 것을 자세히 논하였으니, 지금 그 대략을 추려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자손이 조고(祖考)의 유체(遺體)를 매장함에 있어 반드시 삼가 정성과 경의를 다하여 안전하고 오래가는 계책을 세워, 그 형체는 온전하고 신령은 편안하게 하면 자손이 번성하고 제사가 끊어지지 않을 것이니, 이것은 자연의 이치입니다. 주자가 어찌 허황된 말로 군부(君父)에게 고하고 천하 후세에 전하였겠습니까. 삼가 생각건대, 원침(園寢)은 그 사체(事體)가 어떠하며 관계 또한 어떠합니까? 오늘의 신하 된 자로서 만세의 대계를 생각하면 마음을 끝까지 쓰지 않을 수가 없고 의리로 보아 감히 스스로 숨길 수 없기에, 감히 만 번 죽기를 무릅쓰고 우러러 성상의 귀를 번거롭게 합니다. 신은 본래 감여(堪輿)의 학설에 어두워 귀머거리나 소경과 마찬가지이기에 다만 사람마다 쉽게 알고 볼 수 있는 것만을 가지고 논하겠습니다. 첫째는 잔디가 말라 죽는 것이고, 둘째는 청룡의 능선이 뚫린 것이며, 셋째는 뒤를 받치고 있는 수세(水勢)가 심하게 부딪히는 것이고, 넷째는 뒤쪽 용절의 석축(石築)이 자연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닌 것입니다. 이것으로 본다면 풍기(風氣)가 순조롭지 못함과 토성(土性)이 완전하지 못함과 지세(地勢)가 좋지 않다는 것을 미루어 알 수 있습니다. 이 중에서 하나만 있어도 오히려 신민들의 지극한 애통이 되는데, 더구나 뱀 등이 국내(局內)의 가까운 곳에 똬리를 틀고 무리를 이루고 있으며 심지어 정자각(丁字閣)의 기와에까지 그 틈새마다 서려 있습니다. 이는 비록 옛 장릉(長陵)의 혈도(穴道)에 침범하였던 것과는 약간의 차이가 있으나, 국내에 이미 많이 있으니 지극히 공경해야 하고 지극히 존엄한 곳에까지 침범하지 않았다고 어떻게 장담할 수 있겠습니까. 더욱 놀라 뼈에 사무치는 것입니다.
삼가 생각건대, 우리 성상께서 갑오년(1774, 영조50)에 원(園)을 처음으로 참배하신 때로부터 병신년 왕위에 오른 뒤에 이르기까지 오직 원소의 안부를 걱정하시어, 새벽에 종소리를 듣고 밤에 촛불을 대하실 때 깊은 궁중에서 뿌리신 눈물이 얼마인지를 모르며 봄비가 오고 가을 서리가 내릴 때면 조회에 임해서도 자주 탄식하셨고 쌀밥도 달지 않고 잠자리도 편하지 않으셨다는 것을, 신이 전후 등대(登對)할 때 이런 전교를 들은 적이 여러 번이었는데, 조정에 있는 신하가 어찌 듣고 알지 못하였겠습니까. 하지만 관계된 일이 막중하여 감히 쉽게 말을 꺼내지 못하는 것입니다. 신이 곁에서 들은 지 여러 해가 되었습니다만 한 사람의 신하도 전하를 위하여 말을 꺼내는 것을 보지 못하였으니, 신은 그윽이 개탄할 뿐입니다. 목숨이 조석에 달린 신이 끝내 벼슬을 떠난 사람이라는 혐의로 아는 것을 숨김없이 아뢰지 않는다면, 살아서는 불충하는 신하가 되고 죽어서는 눈을 감지 못하는 귀신이 될 것입니다. 이는 전하를 배반하는 것이고 밝은 신령에게 버림을 받을 것이니, 신이 어찌 차마 이런 일을 하겠습니까. 신은 일찍이 병신년(1776, 정조 즉위년) 초에 어떤 신하가 연석(筵席)에서 능원을 옮겨 모시는 일을 말한 적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성상께서도 아마 기억하고 계시리라 생각되오며 사람의 마음이 서로 다르지 않음을 알 수 있기에, 신은 또 구구하게 어리석은 정성으로 눈물을 흘리며 아룁니다.
아, 병오년(1786, 정조10) 5월과 9월의 변고를 어떻게 차마 말할 수 있겠습니까? 후산(緱山)의 학가(鶴駕)는 돌아오지 않고 북두성(北斗星)의 무지개 빛이 떨어졌습니다. 신은 지금 백두(白頭)가 되어서도 죽지 않아, 차마 우리 성상께서 외로이 홀로 지존의 자리에 계시면서 춘추는 점점 많아지는데 뒤를 이을 자손을 두는 일은 오히려 늦어져 만년(萬年)의 종사에 제사를 받들 사람의 자리가 오래 비어 있고 팔도의 백성들이 노래할 곳이 없는 모습을 보게 되었습니다. 신의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밤이 새도록 잠들지 못하고 심장과 간장이 다 녹아내립니다. 시험 삼아 천도(天道)로써 말하면, 우리 성상께서 상제(上帝)에게 보답하여 삼가 농민들에게 농시(農時)를 주시니, 하늘에는 일월성신(日月星辰)의 재해가 없고, 땅에는 초목이나 사람, 동물 등의 요괴(妖怪)가 없으며, 일기가 순조로워 태평세월 속에 풍년이 드니, 《서경(書經)》에 이른바 착한 일을 하여 하늘이 백 가지 상서로운 일을 내린다는 것입니다. 다시 인사(人事)로써 말하면, 우리 성상께서는 몸소 주공(周公)의 달효(達孝)를 본받으시고 문왕(文王)의 뜻과 사업을 이어 나라의 기반을 태산과 반석 위에 올려놓고 백성들을 태평성대에서 살게 하셨으니, 아, 아름답습니다. 위로는 벼슬아치로부터 아래로는 필부에 이르기까지 집집마다 천보장(天保章)을 노래하고 사람마다 화봉인(華封人)의 축사(祝辭)를 올린 지 지금 14년이나 되었습니다. 《시경(詩經)》에 이르기를, ‘화락한 군자여, 복록(福祿)이 내리는 바라[豈弟君子 福祿攸降]’ 하였으니, 신이 천도(天道)와 인사(人事)로써 반복하여 생각하여 보면 신(神)이나 사람들이 위로하는 바에 많은 경사가 있음은 역사에 이루 쓸 수가 없는데, 연전의 상변(喪變)은 어찌 이렇게 거듭되었단 말입니까. 자손의 탄생이 이처럼 지연되니 신은 진실로 그 이유를 알지 못하겠습니다. 다시 지리(地理)로써 말씀드리면, 신이 일찍이 노인들의 이야기를 듣고 술사(術士)의 의논을 참고하여 보건대, 형국의 감싸 안음과 대안(對案)의 분명함이 격에 맞지 않은 것은 아닌데 사수(砂水)의 법수로 논하면 크게 지가(地家)의 꺼리는 바라고 하니, 만일 그 말이 그릇되어 취할 것이 못 된다면 진실로 국가의 한없는 좋은 일이지만, 만의 하나라도 어렴풋이 방불한 점이 있다면 성체(聖體)에 어떠하며 종사와 국가에 어떠하겠습니까. 옛날 영종대왕 7년 신해(1731)에 장릉(長陵)을 옮길 때, 대신과 재상들이 무신년(1728, 영조4) 이후 중외(中外)에서 바라는 마음을 가지고 주자(朱子)의 혈식구원(血食久遠)이란 말을 인용하여 어전에서 다시 길지(吉地)를 골라 천장(遷葬)하여 국운을 장구하게 하기를 건의하였는데, 실로 지금까지 그 덕을 입고 있습니다. 이미 선왕조(先王朝)의 고사(故事)가 있으니, 더욱 오늘날에 천장할 수 있는 분명한 증거가 됩니다.
아, 열조(列朝)의 전한 혈맥은 오직 우리 성상이시고, 400년 종사(宗社)의 의탁도 오직 우리 성상입니다. 원소(園所)가 편안한 뒤에 성체(聖體)가 편안하고, 성체가 편안한 뒤에 본손(本孫)과 지손(支孫)들이 백대를 이어 갈 것을 예측할 수 있으니, 옛사람이 말한 종묘의 제사에 흠향하며 자손들이 보존된다는 말이 맞는 말이 아니겠습니까. 삼가 이에 목욕재계하고 상소문을 갖추어 궐문에 나가 아룁니다. 삼가 바라건대 성상께서는 깊이 생각하시어 신의 이 소장을 묘당(廟堂)에 내려 널리 조정의 신하들에게 물어보시고 널리 지사(地師)를 불러 좋고 나쁜 것을 물어서, 신도(神道)를 편하게 하고 성상의 효성을 펴서 백대 천대의 먼 대책(大策)으로 삼기를 천만번 비옵니다.” 하였는데, 비답하기를, “사리에 어둡고 미련하여 지금까지 밤낮으로 가슴속에 담아 두고 답답해하기만 하였는데, 경(卿)의 요청이 이런 때에 이르렀으니 대신(大臣)과 여러 신료들에게 물어서 결정하겠다.” 하고, 이에 대신, 각신(閣臣), 유신(儒臣), 예관(禮官), 종친(宗親), 의빈(儀賓), 문관(文官), 음관(蔭官), 무관(武官) 2품 이상을 불러 소장을 보이니, 모두 이르기를, “도위(都尉)의 상소는 실로 종묘사직을 한없이 보존하는 대계(大計)인데 감히 이의가 있겠습니까.” 하였다. 나는 말하기를, “묏자리에 따라 재앙과 복이 생긴다는 이치가 있고 없는 것을 내가 어떻게 자신있게 말할 수 있겠는가마는, 선유(先儒)가 ‘이승이 편하면 저승도 편하리라.[此安彼安]’고 한 말에서 보건대, 이런 이치가 없다고 말할 수 없다. 그러나 편벽되게 술객(術客)의 말만 믿고 경솔하게 묘를 옮기는 일은 서민들도 불가하게 여기는데, 하물며 국가의 지극히 중대한 예(禮)이겠는가. 나의 심정이 보통 사람으로 자처하려고 하지 않는 것은 경들이 아는 바이다. 나의 지극한 슬픔과 한이 아침저녁으로 가슴에 맺힌 지가 수십 년이 되었다. ‘어버이의 살이 흙에 직접 닿게 한다.[土親膚]’는 세 글자를 생각하면 차라리 무지한 사람이 되고 싶다. 어버이의 원소를 처음에는 건원릉(健元陵)의 오른쪽 능선에 가려 정하였는데, 곧 영릉(寧陵)의 옛 자리이고 지금의 원릉(元陵)이다. 나중에 배봉(拜峰) 아래의 기슭에 썼으니, 도위(都尉)의 상소문 속에 5조(條)를 논하여 열거한 것은 도위 한 사람의 말이 아니다. 지금 다행히 나의 뜻이 먼저 정해지고 여러 신료들의 의견도 같으니, 빨리 이장하는 예(禮)를 도모하는 것이 합당할 뿐이다. 먼저 이해하기 쉬운 것으로 말하면 땅속의 불안한 것은 오렴(五廉) 운운한 것을 기다려 결정할 것이 아니다.
대저 혈성(穴星)은 바로 생기(生氣)가 없는 사토(死土)이다. 지극히 말하기 어려운 근심이 있으니, 앞의 관성(官星)과 뒤의 귀성(鬼星)이 이미 격을 이루지 못하였고, 조산(朝山)과 조수(朝水)는 더욱 말할 것도 없거니와 안으로는 갑좌(甲坐)가 되고 밖에는 묘좌(卯坐)가 되며, 신방(辛方)과 술방(戌方)이 득수가 되고 해방(亥方)이 파문이 되며, 갑(甲)ㆍ묘(卯)가 모두 목(木)이다. 신방과 술방의 물은 이른바 황천득수(黃泉得水)이고 내당(內堂)에는 물이 없으니, 한쪽에 있는 물만 가지고 말할 수는 없다.
갑오년 원침에 참배한 뒤로부터 마음속에 계획한 일은 오직 이 일뿐이었다. 그러나 새로 정한 곳이 지금의 원침보다 천배 만배 더 나은 연후에야 거의 유감이 없을 것이니, 진실로 옛사람의 구안(具眼)을 거치지 않고 지금 세속 지사(地師)의 좁은 안목을 어떻게 확실히 믿고 결정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여러 대신들이 예관(禮官)과 관상감(觀象監)의 신료들과 함께 먼저 영우원(永祐園 현륭원(顯隆園)의 처음 이름)을 살펴보기를 청하여 살펴보고 돌아와서 각자의 의견을 말하였는데, 도위(都尉)의 상소문과 꼭 합치되니 이는 하늘이 묵묵히 도와주는 것과 같았다. 봉조하(奉朝賀) 조돈(趙暾)이 말하기를, “옛 원침의 국세(局勢)와 사수(砂水)는 건(件)마다 격에 어긋나서 크게 지가(地家)의 꺼리는 바가 되어 백성들도 걱정을 한 지 여러 해가 되었습니다. 신도 초야에서 근심을 견디지 못하고 한 번 상께 아뢰기를 소원하였는데, 지난번 도위가 아뢰어 청하고 조정의 의논도 함께 동의하니, 원침을 옮기는 대례(大禮)는 이제 완전히 결정되었습니다. 이는 진실로 우리 동방의 한없는 복이기에 노신(老臣)이 기뻐서 일어나 춤을 추고 싶습니다.” 하였다. 나는 말하기를, “원침을 옮기는 의논은 이미 결정되었다. 가장 좋은 대지(大地)를 구하려고 한다면 수원(水原)의 화산(花山)만 한 곳이 없다. 화산의 형국(形局)은 내가 눈으로 직접 보지는 못하였으나 몇 년 동안 경영하였으니 어찌 이해하지 못하겠는가. 배(配), 향(向), 득(得), 파(破)가 모두 아름답지 않음이 없으니, 범용한 안목으로 보더라도 진룡(眞龍), 진혈(眞穴), 진사(眞砂), 진수(眞水)임을 확실히 알 수 있다. 대저 들 가운데의 용은 서린 것이 오이 덩굴이나 등나무 덩굴과 같고, 배꼽 사이의 맥은 유혈(乳穴)에 와형(窩形)이 되고, 좌우 사(砂)의 각(角)은 새가 공중에서 날개를 편 것과 같아 완연히 둥그스레하고 자리가 요연하게 빛나며, 청룡이 4중이고 백호가 3중으로 겹쳐졌다. 그리고 당내(堂內)의 물은 유유히 굽어 돌아가는 듯하지만 가지 않고 현저히 나를 돌아보고 머물고자 하는 뜻이 있으며, 겸하여 명당 내의 작은 언덕으로 진정한 안대를 이루고 청룡 밖의 비추는 산이 길상(吉祥)의 사(砂)가 있으니, 이것이 가장 좋은 대지가 아니겠는가.
땅이 한없이 아름답고 좋으니 앞으로 신중히 해야 할 일은 혈을 짚는 데 있다. 신해년 의궤(儀軌)와 옛사람의 문자에서 보면 이미 정론이 있으니, 혈은 조금 낮게 할 것이고 향(向)은 주안(珠案)을 대하도록 하는 것이 적합하다. 주안은 곧 작은 둔덕이니, 이것은 이른바 서린 용이 구슬을 희롱하는 형국인 것이다. 천 리를 내려온 용이란 말은 옛사람이 일컫는 바이고, 이 땅은 부아현(負兒峴)으로부터 혈이 있는 곳에 이르기까지 여러 번 솟았다가 여러 번 엎드리면서 몇백 리를 지나 봉표(封票)한 곳에 올라 이곳을 에워싼 여러 봉우리가 지척 간에 있는 듯하니, 혈을 가늠하고 용을 찾는 일은 논할 것도 없다. 오늘날 지사(地師)의 말이 어찌 믿을 만하겠는가마는, 이 땅은 전하여 내려오는 문적에 충분히 믿고 증빙할 만한 점이 있다고 하니, 어찌 천만다행한 일이 아니겠는가. ‘기유년’이라는 세 글자는 이미 병신년 경연(經筵)에서의 전교에서 나왔으니, 금년에 만약 수원에 옮겨 모신다면 연운(年運)과 산운(山運)이 현재 원침의 본명운(本命運)과 맞아 길하지 않음이 없으니, 이전에 이 같은 해가 없었고 이후에도 이 같은 해는 얻기가 어려울 것이다. 금년 이후로 나의 마음은 더욱 안정되지 못하였는데 오늘에야 숙원(宿願)을 이룰 수 있게 되었다. 수원의 한 구역을 하늘과 땅이 아껴 두었다가 오늘을 기다렸으니, 어찌 인력으로 할 수 있는 일이겠는가.” 하였다.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김익(金熤)이 아뢰기를, “수원의 길조(吉兆)가 되는 것은 이미 옥룡자(玉龍子)의 신령한 감식(鑑識)이 있었다는 것이 옛사람들의 정론이고 또 국승(國乘)에도 있습니다. 길지(吉地)와 길운(吉運)이 모두 맞으니 더욱 경사스럽고 다행스럽기 그지없습니다.” 하였으며, 우의정 채제공(蔡濟恭)은 아뢰기를, “신이 옛 노인들에게 듣건대, 윤선도(尹善道)가 항상 말하기를, ‘수원 같은 길지를 나라에서 만약 능원으로 정한다면 옛사람이 말한 천 년의 대지란 말을 징험할 수 있을 것이다’고 하였다 하니, 신은 감히 이것으로 하례드립니다.” 하였다.
○ 총호사(摠護使) 김익(金熤) 등에게 명하여 수원부(水原府)의 치소(治所)에 가서 화산(花山) 계좌(癸坐)의 둔덕 산세를 살펴보게 하였는데, 김익 등이 치계(馳啓)하기를, “지사(地師)들이 모두 말하기를, ‘아주 길하고 십전 만전(十全萬全)의 대지입니다. 화산은 왼쪽으로 돌아 건방(乾方)의 봉우리가 주봉(主峯)을 이루고, 건방에서 조금 내려와서 해방으로 돌아 계방으로 오고 축방으로 바꾸어 간방에서 입수(入首)하고, 앞에는 쌍봉이 있으며 두 봉우리의 사이는 공간입니다. 안에는 작은 둔덕이 있어 그 모양이 마치 구슬과 같습니다. 계좌정향(癸坐丁向)을 하면 구슬은 턱 아래의 구슬이라고 할 수 있고 공간은 공간을 대한다는 공이 됩니다. 오른쪽으로는 건방이 득수(得水)가 되고 왼쪽으로는 을방이 득수가 되며, 또 신방(申方)의 물이 있고 오방(午方)이 파문(破門)이 되어 물의 법수가 조금도 어긋남이 없습니다. 그리고 청룡은 4중으로 되어 있고 백호는 3중으로 되어 서로 감싸 국세를 이루고, 혈이 맺힌 곳에는 요와 자리를 끼고 있어 혈의 엉긴 것이 완연합니다. 내룡(來龍)의 형세는 700리를 지나왔고 용을 호위하는 물은 모두 뒤에서 모여 현무(玄武)에서 입수함이 되니, 이는 천지와 함께 오래 전할 더할 나위 없는 대지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 13일(정유)에 김익 등이 수원에서 돌아와 말하기를, “관(棺) 만드는 일을 관장하는 여러 신하와 지사(地師)를 거느리고 위로는 주봉(主峯)으로부터 아래로는 혈(穴) 자리까지 살펴보았습니다. 먼저 위쪽에 있는 혈 자리의 약간 높은 곳에 앉아 둘러보니, 국세가 평탄하고 반듯하지 않은 것이 아니며 청룡 백호가 에워싸지 않은 것이 아니나, 평탄하고 반듯한 속에 너무 넓고 크다는 느낌이 없지 않고, 에워싼 속도 역시 견고하게 결속된 형세가 약간 모자랐으며, 안계(眼界)도 조밀하고 번잡한 듯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아래 평탄한 곳에 내려와 앉아서 둘러보니, 앞서 본 곳과는 지척(咫尺) 사이에 불과하였지만 국세가 평온하고 청룡과 백호가 긴밀하며 또 혈의 좌우에는 매미가 날개를 양쪽으로 펼친 듯한 형국이 있으며, 안계도 충분히 여유 있었습니다. 그리고 시야 속에 작은 둔덕이 혈 자리와 직선으로 대치해 있는데, 이곳이 본래부터 칭송되어 온 서린 용[盤龍]의 형상이고, 이 둔덕은 서린 용이 희롱하는 구슬[弄珠]의 형국이 됩니다. 안대(案對)는 두 개의 봉우리가 나란히 서 있는데, 만약 봉우리로 향(向)을 놓아 안산(案山)으로 삼으면 두 봉우리의 기세를 모두 끌어들이지 못할 것 같고, 두 봉우리 사이의 빈 곳으로 향을 놓으면 두 봉우리의 기운이 합쳐 온전한 하나의 안대가 될 터이니, 예로부터 이른바 ‘구슬을 안대하여 빈 곳으로 향을 놓는다.[對珠向空]’는 말이 이런 뜻입니다. 계좌정향(癸坐丁向)은 여러 지사의 말이 통일되었으니 진실로 나라의 무한한 복입니다.” 하였으며, 좌의정 이성원(李性源)이 아뢰기를, “한마디로 총괄하여 말하면, ‘하늘이 높은 산을 만들어 오늘을 기다렸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였고, 우의정 채제공(蔡濟恭)은 아뢰기를, “산세를 두루 살펴보고 신도 모르게 탄성을 질렀으니, 옛사람이 말한 공중을 향한다는 것은 바로 양쪽의 끝을 잡아서 그 중도를 쓰면 편벽되지 않고 기울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산을 답사한 여러 신료가 마음으로 기뻐하고 신복(信服)하지 않은 사람이 없습니다. 진선진미(盡善盡美)란 말은 요순(堯舜)만이 칭송을 받았는데 선인들이 이 산에 대하여 곧바로 이 네 글자를 썼으니, 극진한 뜻으로 공경하고 탄식한 것을 대략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였으며, 관상감 제조(觀象監提調) 김종수(金鍾秀)가 아뢰기를, “거듭 청룡 백호가 감싸 돌면서 정감이 있고 사방의 봉우리가 천백 개나 솟아 있어 이 형국을 위하여 교묘하게 설치한 것 같으니, 이른바 8백의 제후국이 주(周) 나라에 조회를 하는 것과 같다는 말은 잘 형용하였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였는데, 내가 이르기를, “자나 깨나 걱정이 되어 항상 마음으로 헤아려 스스로 백전 만전(百全萬全)의 땅이라고 생각하였다. 지금 여러 사람의 말을 옛사람이 논한 말과 비교하면 도리어 더 나은데, 그 이유는 무엇인가?” 하자, 김익 등이 대답하기를, “그림으로는 뜻을 다 설명할 수 없고 글로는 그 국세를 다 형용할 수 없으니, 대길(大吉)하고 극귀(極貴)한 격(格)에 대해 어떻게 감히 지나치게 미화하는 말을 하겠습니까.” 하였다.
○ 15일(기해)에 재차 대신 이하 여러 사람을 보내 산을 답사하게 하였다.
○ 16일(경자)에 세 번째로 대신 이하 여러 사람을 보내 산을 답사하게 하고 원침(園寢)을 화산에 정하였다.

참의(參議) 윤선도(尹善道)는 호가 고산(孤山)인데 세상에서 ‘오늘날의 무학(無學)’이라고 부른다. 감여(堪輿)의 학문에 대하여 본래 신안(神眼)이 있었는데, 그가 화산(花山)을 논하여 이르기를, “겉과 속이 여러 겹으로 둘러 있으므로 길격(吉格)이라는 것은 여러 술관(術官)이 모두 갖추어 진달하였기에 신은 중복하여 상세하게 진달할 필요가 없습니다. 대개 그 용국(龍局)은 영릉(英陵)의 용국 다음은 가니, 주자(朱子)가 이른바, ‘종묘의 혈식(血食)이 오래 유지될 계책’이라는 말이 진실로 여기에 달려 있습니다.” - 기해헌의(己亥獻議) - 하였고, 또 이르기를, “산릉(山陵)이 법수에 합치되는 곳은 영릉이 가장 좋고 그다음은 수원만 한 데가 없으니, 먼 것을 구애하지 마시고 영릉으로 정하는 것이 제일 상책이고, 민폐(民弊)를 염려하지 마시고 수원으로 정하는 것이 그다음 계책입니다. 종묘의 혈식을 오래가게 하는 계책이오니 작은 일에 연연하여 큰 것을 잃을 수 있겠습니까. 조정에서 오히려 판단을 하지 못하여 결정을 하지 못하니, 노신(老臣)은 지붕만 쳐다보고 기가 막혀 한탄스러움을 견디지 못하겠습니다.” - 총호사(摠護使)에게 보낸 편지 - 하였으며, 또 이르기를, “국가에서 꼭 수원의 산을 쓴다면 모름지기 거기에 사는 이주민(移住民)으로 하여금 즐겁게 여기며 이주하는 괴로움을 잊도록 하여야 인심이 안정되고 음복(陰福)이 이를 것이니, 그 백성들로 하여금 즐겁게 여기며 이주하는 괴로움을 잊게 하는 방법은 어떤 것이겠습니까? 그것은 거기에 있는 토지를 기준으로 하여 보상을 해 주어 그들의 생업을 넉넉하게 하고, 또 10년 동안 복호(復戶)해 주는 일뿐입니다.” - 총호사에게 보낸 두 번째 편지 - 하였고, 또 이르기를, “성주(聖主)의 의관(衣冠)을 묻는 곳을 만일 진선진미(盡善盡美)한 곳으로 정하지 못한다면, 어찌 신자(臣子)가 전하에게 충성하고 선왕에게 보답하는 성의이겠습니까. 가는 곳마다 자세히 보아도 전혀 마음에 드는 곳이 없고, 오직 수원의 산이 눈을 들면 놀랄 지경이고 자세히 점검하고 반복해서 헤아려 보아도 처음부터 끝까지 상격(上格)이 됨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용이 크고 바람을 막으며 물을 얻는 것은 영릉에 비하여 조금 미치지 못할 뿐이고, 입수(入首)한 용절 뒤의 퇴사(退卸)는 아주 좋으며 지축(地軸)은 바깥으로 멀고 북신(北辰)이 매우 귀하니, 도선(道詵)과 무학(無學)이 다시 태어나도 이 말은 바꾸지 않을 것입니다. 윤강(尹絳), 이최만(李㝡晩)과 여러 지관(地官)들도 한 가지의 하자도 없다고 찬양하기를 마지않습니다.” - 추고(推考)할 때 문서로 답한 말이다. - 하였다. 그의 시장(諡狀)에 이르기를, “기해년의 국장(國葬)을 수원에다 정하고 혈(穴)을 가늠하는 일을 시작하니 총상(摠相) 이하 여러 신료들이 서로 길지를 얻은 것을 축하하였는데, 공이 홀로 이르기를, ‘이곳에 묘를 쓸 것이라는 것을 어떻게 기필할 수 있겠는가? 반드시 현궁(玄宮)을 내린 다음이라야 축하할 수 있다’ 하였는데, 얼마 뒤에 권력의 핵심에 있는 자들이 수원은 나라의 큰 진(鎭)이고 읍을 옮기고 거주민을 옮기는 일은 매우 중요하니 원침의 공사를 하는 것은 불가하다고 하면서 모두 일어나 다투었다. 상이 총상 이하 여러 신료들을 불러 의논하게 하자, 공이 나아가 아뢰기를, ‘수원은 거주민을 옮기는 폐단이 있다고 하더라도 단연코 쓸 만합니다’ 하니, 상이 드디어 수원에 쓸 것을 결심하였는데, 대신들이 한목소리로 고집하므로 상이 노여워하여 그들을 꾸짖었다. 그러나 말을 하는 자들이 더욱 일어나 함께 상의 앞으로 나아가 힘써 다투기를 그만두지 않으니, 상이 어쩔 수 없어 마침내 수원을 버리게 되었다.” - 홍우원(洪宇遠) 지음 - 하였다.
○ 윤강(尹絳)은 말하기를, “이 산의 국세는 매우 크며 멀고 가까운 여러 산이 감싸 안지 않음이 없어, 비록 풍수를 알지 못하는 사람으로 하여금 보게 하더라도 큰 형국임을 알아서 진선진미(盡善盡美)하다고 칭찬할 것입니다. 계좌정향(癸坐丁向)의 혈(穴)은 상하와 좌우 사이에 여러 지관의 의견이 차이가 없는 것은 아니나, 상세하게 살펴본 다음에는 한곳으로 귀결되었으니, 혈에 대한 정세는 정말로 명백합니다. 이미 살펴본 곳은 이곳과 방불한 곳이 없으니, 지난날 산을 살펴보았다고 하나 이와 비슷한 곳을 얻기는 어렵습니다.” 하였다. 윤강과 이최만(李㝡晩) 등은 풍수에 숙달하였기 때문에 윤선도가 그들을 일컬은 것이다.
선정(先正) 송시열(宋時烈)이 어떤 사람에게 보낸 편지에 이르기를, “처음에 여러 사람의 의논이 모두 한결같이 수원으로 귀결되었는데, 천신(賤臣)은 생각하기를, 이곳은 7천 병마(兵馬)가 크게 모인 곳으로 선왕께서 평소에 의지하였는데, 하루아침에 무너뜨리는 것은 기필코 선왕의 뜻이 아니기 때문에 힘써 다투었으니, 완남군(完南君 이후원(李厚源))이나 연양부원군(延陽府院君 이시백(李時白)) 같은 사람도 이어 다툴 것을 허락하였습니다. 당시에 고집하여 다투는 논쟁은 단지 거주민과 읍을 옮기는 폐단에 구애된 것이고 그 산지(山地)를 좋다고 칭하는 일은 이미 한곳으로 귀결되었으니, 어찌 경사(卿士)가 따르고 서민이 따르는 대동(大同)이 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였다.
○ 홍여박(洪汝博), 박세욱(朴世煜), 반호의(潘好義), 기중윤(奇重胤), 이필(李苾), 이원진(李元鎭), 이유필(李幼弼), 김극만(金克晩), 윤흥경(尹興耕), 이최만(李㝡晩)은 이름난 지사(地師)들이다. 그들이 기해년(1779, 정조3) 산릉을 답사한 말에서 홍여박은 말하기를, “수원부의 뒷산은 처음에 광교산(光敎山), 치악산(鴟嶽山)으로부터 흩어지고 떨어져 나가 평판(平坂)을 이루며 장막에 드나들 듯 큰 들 가운데를 빙 두르고 구불구불 돌아 다시 활기를 띠고 돌면서 굽이굽이 용을 이루었는데, 주성(主星)은 높고 정중하며 여러 산이 다투어 달려 하자를 보충하는데 미처 하지 못할까 두려워하는 듯하며, 다시 달려서 약속 없이 만나는 듯한 것이 마치 8백의 제후국이 주(周) 나라에 조회를 하는 듯하고, 혈의 모양은 차분하고 단정하며 명당(明堂)은 너그럽게 대안(對案)의 밖까지 감싸 안았고, 밖의 조산(朝山)도 매우 빼어나고 기이하며, 내당(內堂)의 물이 오고 감에 모두 법수에 맞아, 여러 가지의 귀격(貴格)이 갖추어지지 않음이 없었습니다. 간방(艮方)에서 입수(入首)하고 계좌 병파(癸坐丙破)의 형국으로 재신(宰臣) 격인 물속의 바위는 우뚝 서서 화표(華表)가 되어 여러 살(煞)을 제거하니, 나라에서 쓸 만한 대지(大地)임이 분명합니다.” 하였으며, 박세욱은 말하기를, “용이 광교산에서 나뉘어 치악산에 이르러 장막을 열고 용맥(龍脈)이 출현하여 구불구불 내려오다가, 넓은 들 가운데서 서렸다가 몸을 뒤틀어 남쪽을 향함에 주산(主山)의 형세가 웅장하고 청룡과 백호가 겹겹이 감싸며, 안대(案對)가 정감이 있고 혈도(穴道)가 풍성하며, 수구(水口)가 치밀하고 내당이 평평하면서 둥그스레하며, 조회하는 여섯 개의 빼어난 봉우리가 앞에 나열하여 두 손을 마주 잡고 읍(揖)을 하니, 귀격을 이루 다 말할 수 없습니다. 이는 진룡(眞龍)이 맺혀 만들어진 땅이니, 바로 나라에서 쓰기에 합당합니다.” 하였고, 반호의는 말하기를, “그 내려온 맥이 매우 멀어 모두 기록할 수 없지만, 우뚝 솟은 성봉(星峯)이 웅장하게 서려 조산(祖山)을 이룬 것은 바로 용인의 석성산(石城山)입니다. 이 산이 바뀌고 변하여 계곡을 지나 또 광교산(光敎山)이 생기고, 그 북쪽으로 달려간 것은 관악산(冠嶽山)과 삼각산(三角山)의 응룡(應龍)이 되었으며, 서쪽으로 달려간 것은 치악산(鴟嶽山)이 되었으니, 이것이 혈의 가까운 조산(祖山)이 됩니다. 긴 가지와 큰 잎이 좌우로 뻗어 내려 기이하게 빼어난 봉우리가 앞뒤에서 호응하여 누대(樓臺)와 전각(殿閣)을 내려옴에 기상이 깨끗하고 존귀하며 들을 뚫고 건넌 용맥은 그 자취를 알 수 없다가 허물을 벗은 용이 용골을 바꾸어 용절마다 기이하게 변하여 서쪽으로 가고 동쪽으로 가다가 큰 들 가운데서 서리고 다시 몸을 뒤틀어 남쪽을 향하여 서린 용의 형국이 되었습니다. 주성(珠星)이 앞에 있고 구름과 우레가 뒤에서 옹호하며, 사수(砂水)는 정감이 있고 내당(內堂)은 평평하고 반듯하며 외양(外陽)은 넓게 트여 만 마리의 말을 용납할 수 있으며, 재신(宰臣) 격의 영옹암(令翁巖)은 외수(外水)가 만나는 가운데 우뚝하게 서 있으니 방서(方書)에 이른바 북극성입니다. 그래서 큰 바다가 조회하러 오는 기상이 문밖의 병오방(丙午方)에서 드나들게 됩니다. 그리고 금비편(禁祕篇)에서 이른바, ‘물이 이방(离方 남방(南方))으로 돌아가니 천자(天子)가 환한 남쪽을 향하여 천하를 다스리는 형상’이니, 참으로 국가에서 써야 할 대지(大地)입니다.” 하였으며, 기중윤은 말하기를, “내룡(來龍)이 광교산을 조산으로 하여 사근현(沙斤峴)의 큰 계곡을 지나 장막을 열고 중심을 뚫은 듯 용절마다 법에 합치되고, 성봉(星峰)이 우뚝 솟아 치악산이 되었으며, 치악산 가운데서 나온 한 맥(脈)이 구불구불 내려오는 형세가 아주 끊어져 계곡을 보호하여 영접하고 전송하며 겹겹이 둘러 활동을 하는데, 서쪽에서부터 동쪽으로 넓은 들 가운데 구불구불하게 내려오다가 몸을 회전시켜 남쪽으로 향하여 요해가 맺히고 혈(穴)이 만들어졌습니다. 그런데 혈성(穴星)이 풍후(豐厚)하고 내당의 형국은 넓고 평평하며 좌우가 둘러싸이고 조안(朝案)도 정감이 있으며, 팔문(八門)이 견고하면서 치밀하고 오행(五行)이 완전히 갖추어져 기상(氣象)은 존엄(尊嚴)하고 국세(局勢)는 웅위(雄偉)합니다. 그리고 치악산, 광교산, 석성산, 부아산(負兒山) 등 여러 산이 뒤에서 호위하고, 건달산(乾達山)과 독성산(禿城山) 등 제반 길사(吉砂)가 멀리서부터 내려와 앞에서 두 손을 마주 잡고 읍을 하는 듯하며, 내당의 물은 생기방(生氣方)에서 근원하여 파문(破門)으로 흘러 근원으로 돌아가며, 앞뒤의 명당에는 만 마리의 말을 수용할 수 있을 정도이고, 재신 격인 영옹암(令翁巖)은 외수가 서로 만나는 곳을 진압하고 있으니, 이로써 관찰하면 진룡(眞龍)이 크게 결집되어 만들어진 곳이니, 바로 국가에서 쓰기에 합당합니다.” 하였고, 이필은 말하기를, “내룡(來龍)이 길고 멀어 누각(樓閣)을 내려오는 정(情)과 들을 뚫고 지나가는 기묘함은 모두 기록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입국(入局)한 데에 이르러서는 큰 들 가운데 서려서 용과 혈이 중앙을 차지하여 좌우로 정감이 있고, 안대(案對)가 서로 믿음직하며 관성(官星)이 특출하고 귀봉(鬼峰)이 등 뒤에서 버티며 문호가 서로 맺혀 있어 내당의 기운이 새어 나가지 않으며, 삼양(三陽)이 구비되고 육건(六建)이 일제히 빼어나 먼 곳의 빽빽한 산이 두 손을 마주 잡고 읍을 하지 않음이 없어 마치 여러 별이 북극성을 향하는 듯하고, 북신(北辰)의 바위는 내수(內水)가 바다로 들어가는 가운데를 진압하여 대지(大地)의 규모가 이보다 나을 수 없으니, 나라에서 쓰기에 적합합니다.” 하였으며, 이원진은 말하기를, “수원부의 큰 용은 광교산으로 조산(祖山)을 삼아 사근현(沙斤峴)을 지나 광주부곡(廣州部曲)에 이르러 크게 퇴사(退卸)를 끊고 곧 성봉(星峰)을 일으켜 수리악(修理嶽)을 나누어 보낸 뒤에 연하고 아름다운 맥이 구불구불 남쪽으로 내려와 치악산(鴟嶽山)을 이루고, 또 퇴사가 솟아 남양(南陽)의 경내에 단정한 봉우리를 이루고, 장막을 열고 날개를 펴서 거듭거듭 계곡을 지나 북쪽의 들 가운데서 몸을 회전하며 낯을 돌려 달리는 말처럼 되어 세 번 뇌(腦)를 일으키고 이어 평평한 이마를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존귀한 주성(主星)과 내려온 정맥(正脈)은 화심혈(花心穴)을 만들어 교묘함이 극진하고 사진(四眞)과 삼의(三義)는 모두 법수에 맞아, 역량이 전일(專一)하고 풍기(風氣)가 모이며, 혈도(穴道)가 바르고 수토(水土)가 깊습니다. 국세로 말하면 사방이 역시 수십 리가 넘고 사신(四神)이 온전하고 팔국(八國)이 둘러 있으며, 사법(砂法)은 뒤에 청귀(淸貴)한 귀봉(鬼峯)이 있고 앞에는 귀한 관성(官星)이 있으며, 좌우에는 귀처럼 생긴 아름다운 봉우리가 있고 수구(水口)는 독성산(禿城山)이 화표(華表)가 되어 긴밀하게 막혔고, 영공암(令公巖)은 북신(北辰)이 되어 웅장하고 기묘하며 내포(內浦)는 근천(近川)을 범하여 직접 조회하는 물이 되고, 뒤의 산세는 태조산(太祖山)이 북쪽에서 바로 감싸 안으며 먼 조산(朝山)은 호서(湖西)에서 바다로 달리는 산이 남쪽으로 나열되었으니, 참으로 동방 풍수의 요지입니다.” 하였다.
이유필은 말하기를, “용이 광교산에서 출발하여 누전(樓殿)을 내려와서 큰 들 가운데에 서렸는데, 혹 장막을 열어 계곡 속을 지나기도 하고 혹 나는 나비에 갈대 채찍을 가하는 격(格)이 되기도 하며, 혹 금성(金星), 수성(水星)의 봉우리가 되어 30여 리를 날아 또 높고 큰 봉우리를 이루어 치악산(鴟嶽山)이 되었는데, 여기서부터 가는 가지의 용이 구불구불 지나는 사이에 여러 가지의 귀성(貴星)을 띤 격은 이루 다 기록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또 가까운 조산(祖山)의 맥이 갑자기 돌아 서쪽으로부터 동쪽을 향하여 해방(亥方)에 이르러서 특별히 큰 장막을 열어 다시 두 용절을 이루고 간방(艮方)을 타고 정기를 맺어 긴 유혈(乳穴)을 이루니, 혈을 맺은 곳이 풍후하고 국세가 주밀하며 안대(案對)가 정감이 있고 명당에 기운이 크게 모이고 수구(水口)가 잠겨 있습니다. 또 독성산(禿城山)이 60리 바깥으로부터 거듭거듭 절을 하고 엎드려 물을 막고 있어 담 밖에서 손을 모으고 선 것이 마치 시신(侍臣)과 같으니, 참으로 왕후(王侯)의 땅이고 나라에서 쓰기에 적합합니다.” 하였으며, 김극만은 말하기를, “형세가 완전하고 아름다우며 내당의 국세가 평정하고 용(龍), 혈(穴), 사(砂), 수(水)가 법도에 맞지 않음이 없으니, 이것은 이른바 진룡(眞龍)의 대지입니다. 대체로 광교산이 우뚝하게 솟아 원조(遠祖)가 되고 구불구불 뻗어 수삼십여 리를 지나면서 기복(起伏)을 하다가 치악산에 이르러 갑자기 솟아 주필산(駐蹕山)이 되고, 주필산 뒤에 가는 가지의 맥을 빼내어 장막의 가장자리를 열고 한가운데로 대국(大局)을 만들어서 내외의 명당이 넓찍하고 수구가 긴밀하고 좁아 어느 방향으로 흘러가는지 알 수 없는 듯하니, 이것이 긴밀하기가 호로병의 입과 같다는 것입니다. 또 산성이 손방(巽方)에 우뚝 솟아 내수구(內水口)의 화표주(華表柱)가 되고 남쪽으로 큰 들 가운데를 향하여 갑자기 하나의 큰 둔덕을 이루어 중당(中堂)의 기운을 막습니다. 그리고 외양(外陽)에 이르러서는 재신(宰臣) 격인 신령한 바위가 해구(海口)의 50리 밖에 서서 외당(外堂)의 설기(泄氣)를 막는 북신(北辰)이 되니, 역량이 웅장하고 혼후하여 사실상 한강 남쪽의 제일가는 용이 되며, 다른 능침의 정한 곳과 비교하더라도 중등이나 하등의 땅은 되지 않습니다.” 하였고, 윤흥경은 말하기를, “광교산의 바른 줄기가 북으로 가다가 서쪽으로 가고 서쪽으로 가다가 남쪽으로 가서 수백 리의 나성(羅城)을 만들고 다시 돌고 기복하는 사이에 맥이 허리로부터 떨어졌으니, 치악산이 바로 가까운 조산(祖山)이 됩니다. 치악산의 남쪽 머리가 춤을 추듯 평지로 떨어져 내려와 크게 끊어지면서 조금 미끄러져 구불구불 용이 되어 수십 리를 가다가 동쪽으로 달려 장막을 열면서 큰 들 가운데 국(局)을 이루고, 미진한 기운이 또 50여 리를 가다가 대택(大澤)에서 그치고 허다한 가지와 발이 되어 혹 보호하는 사(砂)가 되고 혹은 수구산(水口山)이 되니, 옛사람이 이르기를, ‘대지(大地)란 허리에서 떨어져 이루어짐이 많으니, 돌면서 남은 땅이 성곽(城郭)이 된다’ 하였는데, 이런 것을 두고 말한 것입니다. 혈도(穴道)가 풍후하고 청룡과 백호가 고르며 안대(案對)가 단정하고 오묘하며 국세가 완전하고 견고하며 외양(外陽)이 넓찍하고 탁 트여, 가까이는 새나 짐승들이 문을 막고 멀리는 북신(北辰)이 설기를 막아 주니, 진실로 한강 남쪽 풍수의 큰 도회(都會)가 됩니다. 양택(陽宅)으로 쓰면 관방(關防)의 거진(巨鎭)이 될 만하고 음택(陰宅)으로 쓰면 제왕의 능침(陵寢)이 될 만하니, 바로 중등이나 하등의 산천이 아닙니다. 대개 천하의 이치는 본체와 작용이 있지 않음이 없으니, 본체가 선 다음에 작용이 행해질 수 있고 작용이 행해진 다음에 변화를 베풀 수 있습니다. 지리(地理)의 법도 역시 본체와 작용이 있으니, 이른바 형체는 바로 그 본체이고 방위는 바로 그 작용이 됩니다. 이 두 가지는 함께 행해져서 어긋나지 않으니 편벽되게 폐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고금의 술사(術士) 가운데 이 본체와 작용을 겸하여 보는 사람은 백 사람 가운데 한 사람 정도이고, 천하의 산천에도 본체와 작용을 겸비한 경우가 백 곳에 하나 정도이기 때문에, 혹 형체는 좋은데 방위가 좋지 않은 경우 형체(形體)를 숭상하는 자는 칭찬하고 방위를 숭상하는 자는 나쁘게 여겨 논의가 한결같지 않으니, 화복(禍福)의 징험이 없는 것은 이 때문인 것입니다. 이 산의 경우는 용의 기운이 기이하고 국세가 확실할 뿐만이 아니라, 형체도 적절하고 방위도 합당하기 때문에 재주의 고하(高下)와 법술의 깊고 얕음을 가릴 것 없이 여러 사람의 입으로 함께 칭찬하면서 다른 말을 하지 않으니, 이는 이른바 청천(靑天)의 해와 같아 노예(奴隸)들도 그 맑고 밝음을 아는 것과 같습니다.” 하였고, 이최만은 말하기를, “수원(水原)의 읍터는 예로부터 대지라고 일컬었습니다. 좋은 규모와 밝고 빼어난 기상은 비록 속인(俗人)의 눈으로도 아주 귀한 곳임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대체로 치악산 이하를 논하면, 좌우로 큰 들을 20여 리나 끼고 있는 사이에 능선과 가지가 문득 깃들어 있고 구불구불한 일곱 곳이 굽이마다 음맥(陰脈)이 되며, 간방(艮方)과 해방(亥方) 사이의 다섯 굽이 뒤에 곧바로 봉우리가 솟고 혈이 떨어졌으니, 바로 이곳이 호장(戶長)의 집 뒤입니다. 간맥(艮脈)은 맑고 귀하며 혈성(穴星)은 풍만하고 크니, 바로 나라에서 크게 쓰기에 적합합니다.” 하였다. - 이상은 옛사람의 말이다.
김양직(金養直)은 본부(本府) 사람이다. 대대로 화산(花山) 아래에 살면서 그의 아버지에게 감여술(堪輿術)을 배워 대략 이해하였다. 이보다 앞서 그를 불러 물었더니, 김양직이 말하기를, “산세가 용인(龍仁)의 부아산(負兒山)으로부터 시작하여 오른쪽으로 낀 것이 석성산(石城山)이 되어 앞으로 구흥(駒興)을 건너와서 크게 솟아 광교산(光敎山)이 되고 앞에 솟은 것이 백운산(白雲山)이고 가운데 떨어진 것이 오봉산(五峰山)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다시 들을 뚫고 계곡을 지나 다시 일어서서 수리악(修理嶽)이 되고, 왼쪽으로 달려서 증악산(甑嶽山)이 되었으며 서쪽으로 10여 리를 내려와서 고금산(鼓琴山)이 되고 왼쪽으로 가서 홍범산(洪範山)이 되고 또 몸을 돌려 물을 거슬러 10리를 올라가 봉표(封標)의 위쪽이 되었습니다. 내룡(來龍)이 을방(乙方)의 계곡을 지나 크게 솟아 뒤의 장막이 되어 연주맥(連珠脈)으로써 삼태성(三台星)처럼 기복(起伏)을 하고, 건방의 맥으로 주봉(主峰)을 이루어 건방에서 조금 내려와 해방(亥方)으로 돌고 계방(癸方)으로 돌아 축방(丑方)에서 홀로 행한 용이 간방(艮方)에서 입수(入首)하였습니다. 그 태기(胎氣)가 서린 곳에 3층으로 왕(王) 자 모양과 같이 긴 유형(乳形)으로 조그마한 터가 생겨, 오른쪽으로는 건방의 샘이 있고 왼쪽으로는 을방의 계곡이 있으며, 안에는 백호(白虎) 끝 자락의 물이 신방(申方)에서 보이고 그 물이 오방(午方)으로 함께 돌아가니, 좌향을 정하는 법은 잘 미루어 쓰기에 달려 있습니다. 대저 간룡(艮龍)에서 곤향(坤向)이나 오향(午向)을 하면 용향(龍向)이 혼잡스러울 뿐만 아니라 곤방(坤方)에 바른 안대(案對)가 없으며, 오방이 왼쪽으로 비껴 미향(未向)을 하게 되면 건방의 물과 을방의 물이 오방의 파문(破門)과 더불어 모두 불길하고 또 간좌(艮坐)를 하여도 수법(水法)이 불길합니다. 오직 계좌(癸坐)를 하면 건방의 물은 탐랑성(貪狼星)에 해당되고 을방의 물은 무곡성(武曲星)에 해당되며 오방의 파문은 거문성(巨門星)에 해당되니, 세 가지의 길성이 모두 갖추어지고 내룡(內龍)과 망향(望向)이 모두 좋기 때문에 지리의 묘법(妙法)에서 간룡(艮龍)에 계좌(癸坐)를 놓으면 제일 귀격이 된다고 하였는데, 이것은 저의 억측이 아니고 문서가 매우 분명하니 어찌 속이는 것이겠습니까. 또 고법(古法)에 이르기를, ‘서리와 눈이 충화(沖和)한 지역에서 먼저 녹는다’고 하였으니, 세상에서 일컫는 봉표(封標)한 곳은 비록 엄동의 큰 추위에 눈이 산처럼 쌓여도 봉표(封標) 안에는 곧 녹아 한 점도 쌓이지 않습니다. 그리고 또 안산(案山)의 전면에 하나의 둔덕 모양이 둥근 구슬과 같습니다. 사람들이 전하기를 식양(息壤)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하늘이 설치한 것이니 어찌 우연한 일이겠습니까. 때문에 계좌를 하면 주산(主山)이 모든 조화를 지는 국세(局勢)가 되고 작은 둔덕은 품속의 물건이 되며 안대의 두 봉우리는 향(向)이 그 중간에 있으니, 이는 바로 구슬을 안대하여 빈 곳으로 향을 놓는다는 의미입니다. 봉분 아래 조금 낮은 곳에는 형기(形氣)가 참으로 평평하고 둥글어 완연히 자리와 요가 구비되었으니 진실로 매우 아름답습니다. 그리고 청룡이 4중으로 되고 백호가 3중으로 되어 형체가 팔뚝 어깨와 같아 모두 몸을 감싸는 청룡 백호가 되었고, 안대(案對)가 수려한 모양은 귀인과 같고 물속에는 옥새와 같은 사(砂)가 있으며 화표(華表)는 문을 막고 창고가 문 앞에 배열되었으니, 십전대길(十全大吉)의 땅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또 부아산(負兒山)으로부터 혈이 있는 곳에 이르기까지 지나는 거리가 적어도 6, 7백 리가 되니, 천 리의 행룡(行龍)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봉표(封標)의 위에서 보면 여러 봉우리가 모두 가까이 지척(咫尺)에 있는 듯하기 때문에 돌고 도는 가운데 여러 물이 모두 바깥 명당의 수구 안에서 모이니, 이른바 진룡(眞龍)이 머무는 곳에 물이 소식을 전하는 것입니다. 산의 형세가 두루 돌아오면서 구불구불 뻗치니, 이른바 서린 용이 구슬을 희롱한다는 것이 맞는 말이 아니겠습니까. 삼반(三盤)의 아름다움과 성좌(星座) 도수(度數)의 길한 것을 모두 갖추었다면 어찌 대지가 되지 않겠습니까. 옛사람이 이르기를, ‘글로는 하고 싶은 말을 다 표현하지 못하고 그림으로는 진의를 다 그리지 못한다’고 한 것이 이런 것입니다.” 하였다.
다음으로 성몽룡(成夢龍)이란 사람을 보내어 가서 살펴보도록 하였는데, 성몽룡도 이 땅에 대하여 앞서 여러 번 살펴보았던 사람이다. 이때에 성몽룡이 말하기를, “읍터의 뒤에 하나의 대국(大局)이 있는데, 읍 뒤의 능선이 청룡이 되고 뒤맥의 행룡이 도리어 백호가 되어, 혈의 밑에서 우러러 주성(主星)을 보면, 왼쪽로 내려온 기운이 임방(壬方)과 해방(亥方)으로 내려오는데 계방(癸方)과 축방(丑方) 쪽만 깎이고 바뀌어 간방(艮方)에서 입수(入首)를 하니, 축좌미향(丑坐未向)이 봉표(封標)한 곳입니다. 좌우의 손방(巽方)과 신방(辛方)이 득수(得水)가 되고 병방(丙方)이 파문(破門)이 되니, 바로 산과 못이 기운이 통하는[山澤通氣] 격이 됩니다. 용과 향으로 말하면 간룡(艮龍)과 미향(未向)은 선천(先天)과 후천(後天)이 배합하는 것이고, 좌(坐)와 득수(得水)로 말하면 소남(少男)과 소녀(少女)가 배합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아래에 한 둔덕이 있으니 간좌곤향(艮坐坤向)을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손방과 신방이 득수가 되고 오방이 파문이 되니, 음양(陰陽)의 충화(沖和)에는 합당하기는 하지만 용과 향이 뒤섞입니다. 그리고 자좌오향(子坐午向)으로 말하면 오방의 파문은 합당하나 득수의 방위가 서로 틀립니다. 대저 혈이 생긴 곳이 풍후하고 음이 양이 있는 곳으로 와서 유혈(乳穴)이 만들어지고, 주봉의 위로 올라가 보면 빙 둘러 있는 산세는 상서로운 구름이 물결치는 듯하고 용과 혈이 국(局)을 이루어 서린 용의 모양을 하고, 명당이 평평하며 바르고 국세가 유순하며 밝고 아름다운 덕이 있습니다. 옛사람이 이르기를, ‘용을 찾기는 쉽고 혈을 점치기는 어렵다’고 하였으니, 이 산은 유혈(乳穴)이 되었는데 조금 올라가면 청룡과 백호가 눈 아래로 낮게 보이니, 진혈(眞穴)이 너무 드러나는 것이 흠입니다. 만약 조금 아래로 평탄한 곳에 내려오면 청룡과 백호가 높지도 않고 낮지도 않으며 좌우로 서로 균형이 맞는 국세가 됩니다. 그리고 혈 앞의 정방(丁方)에 한 둔덕이 있는데, 인가(人家)의 가운데이기는 하지만 이것이 이른바 구슬입니다. 수구(水口)와 화표(華表)가 문을 막고 치밀하니, 이것이 십전(十全)의 대지입니다.” 하였다.
또 방외사(方外士)를 맞이하여 결정하려고 하였는데, 그가 말하기를, “증악산(甑嶽山)으로부터 수십 리를 뻗어 온 용이 기복(起伏)하면서 돌아 다른 곳으로 달려 나가 국을 이룬 곳이 없고, 수원읍의 뒤쪽 산이 끝나고 물이 돌아온 곳에 이르렀으니 국을 만드는 데 기운을 쏟은 것을 알겠으며, 주봉(主峯)과 능선이 풍후하고 깨끗하여 큰 산의 답답한 기운이 없고, 또 야룡(野龍)의 늘어지고 흩어지려는 뜻이 없어 혈체(穴體)가 확실하고 서린 기운이 분명하니, 기운이 크게 모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청룡과 백호가 고르게 생겨 하단(下端)이 열리고 안대(案對)가 두 손을 마주 잡고 읍을 하는 듯 다정하며, 내외의 명당(明堂)이 평온하고 멀고 가까운 곳의 사(砂)와 물이 수려하며, 또 뒷산은 일자(一字)처럼 서서 병풍과 장막을 두른 듯 완전하고 두터우며 수구(水口)가 거듭되어 자물쇠로 채운 듯이 굳게 싸여 있어, 산형(山形)과 국세(局勢)는 실로 그림으로 그려도 그릴 수 없는 땅이니, 범인의 눈으로 보더라도 길하고 흠이 없는 만전의 대지입니다. 이번에 간심(看審)하는 일은 혹시라도 전에 본 일이 착오가 있을까 염려하여 흠점(欠點)을 살펴 찾는 데 주안점을 두었지만 다만 좋은 곳이라는 생각만 들고 조금도 미심쩍다는 생각이 없었습니다. 뒤의 장막이 완전하고 후하며, 보필(輔弼)하는 산봉우리와 내룡(來龍)이 길고 멀며, 호종하는 사수(砂水)의 기상이 존엄하고 역량(力量)이 큰 것에 이르러서는 전날에 본 것보다 더욱 좋았으니, 달마산(達摩山) 등 여러 곳과 같이 겉은 웅장하면서 안은 실제로 공허한 곳과는 비교할 수 없습니다. 그중에 혈체(穴體)와 입향(立向)에 대해 자세히 관찰하였는바, 혈체의 긴 유방형(乳房形) 아래에 작은 둔덕이 생겨 양(陽)이 오면 음(陰)이 받아들이는 듯하니, 교합(交合)하고 생성(生成)하는 이치로 논하면 묘함을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지리에 어두운 자가 유혈(乳穴)을 잘못 파면 매우 불가하니, 대개 생기(生氣)가 쏟아져 내려오는 형세가 끝나지 않았는데 만약 혹시라도 잘못 짚으면 마치 편안하게 흐르는 물이 돌에 부딪혀 노하여 소리를 내는 것과 같아 생기가 변하여 괴기(乖氣)가 되니, 이는 옛사람이 경계한, 용을 상하게 하고 살기(煞氣)와 다투는 격이 되는 것입니다. 마땅히 유혈(乳穴) 아래 둔덕 가운데 태극(太極)처럼 뭉친 곳에서 유맥(乳脈)을 접하여 와혈(窩穴)을 뚫고 오른쪽의 기운을 왼쪽에서 받게 하는 것이 - 기운은 오른쪽을 향하여 오고 귀는 왼쪽으로부터 받는다. - 법에 맞을 듯합니다. 입향(立向)은 계좌정향(癸坐丁向) 이외에는 다른 방향이 없습니다. 그 이유로는 작은 둔덕의 안대가 정방(丁方)에 있으니 이 용의 턱 밑에 있는 구슬을 잃지 않아야 하는 것이 첫째입니다. 그리고 내파(內破)는 오파(午破)가 되어 계좌(癸坐)와 수화불상석(水火不相射)의 격이 되니, 곧 대격(大格) 중에서 제일 좋은 격입니다. 대개 선천(先天)과 후천(後天)이 서로 교체할 때에도 방위가 바뀌지 않고 오래도록 쇠하지 않으며 부숴도 부서지지 않기 때문인 것이 둘째입니다. 입수(入首)한 간방(艮方)의 용절(龍節)은 정방(丁方)과 산택통기(山澤通氣)의 격이 되는 것이 셋째입니다. 바깥의 파문(破門)은 병방(丙方)에 있고 정방에 사(砂)가 있으니, 만약 계좌(癸坐)를 하면 천간(天干)이 생성(生成)하는 격과 합치되는 것이 넷째입니다. 내당(內堂)의 득수(得水)는 정밀하게 잡지는 못하지만 곤방(坤方)에 있는 듯하니, 만약 그렇다면 율려(律呂)의 격에 합치되는데 이것이 다섯째입니다. 정향은 본명(本命)에 있고 또 《옥룡비결(玉龍祕訣)》에서 복덕(福德)의 향(向)과 합치되니 이것이 여섯째입니다. 계좌를 하면 모든 길기(吉氣)가 집중되고 다른 좌향을 하면 이와 반대가 됩니다.” 하였다.
대체로 옥룡자(玉龍子) 이후로 고금에서 서로 전하는 말이 모두 착착 근거가 있으며, 그 형국은 범속한 사람에게 보라고 하더라도 극히 좋고 길한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혈이 있는 곳은 유두(乳頭) 아래 평탄한 곳이고, 좌향은 안대가 있는 곳의 작은 둔덕이니, 이것이 이른바 구슬을 안대하면 빈 곳으로 향을 놓는다는 것이다. 분금(分金)은 이 혈 이 좌향 이 안대로 마땅히 결정할 것이다. 대저 방외사(方外士)라는 자는 본래 안목이 있어 말을 하면 꼭 들어맞으니, 이 때문에 깊이 믿고 마음으로 인정하였다.
○ 총호사(摠護使) 김익(金熤)이 어버이를 위하여 묏자리를 찾은 지 10여 년이 되었다. 평소에 감여설(堪輿說)을 알아 매양 산에 대한 논의가 있으면 그의 말을 중요시하였고, 그가 떠날 때는 여러 지사(地師)를 거느리고 갔다. 승지 김이성(金履成)은 지리(地理)를 상당히 안다고 하여 자원하여 가서 살폈고, 용인 현령(龍仁縣令) 이지원(李祉源)도 대략은 안다는 말을 들었으며, 부사과(副司果) 박대량(朴大良)은 많은 사람들이 칭송하였고, 북관(北關)의 진사(進士) 주남술(朱南述)은 산을 보는 안목으로 세상에 이름이 났으며, 진사 채윤전(蔡潤銓)은 좌상(左相)이 그의 유능함을 추천하였다.
김이성이 말하기를, “오른쪽의 용이 동쪽에서 시작하여 수향(水鄕)으로 들어와서 수백 리를 남쪽으로 달려오니 이것이 왕성한 물의 큰 줄기인데, 치악산(雉嶽山)에 이르러 껍질을 벗고 얼굴을 바꾸어 평지로 협곡을 건너 경태(庚兌) 방향으로 돌면서 주봉(主峯)이 우뚝 솟았으니 경태는 이미 수룡이 목욕하는 형국이 됩니다. 주봉의 앞에서 이미 잉태(孕胎)할 뜻을 가지고 있으니 어찌 상생(相生)하는 아름다운 의미뿐이겠습니까. 주봉으로부터 건방(乾方)으로 떨어져 해방(亥方)으로 돌아 한 번 변하여 계룡(癸龍)이 되고 두 번 변하여 축룡(丑龍)이 되고 세 번 변하여 간룡(艮龍)이 되었습니다. 혈의 뒤에서 축간(丑艮)의 배합이 굳게 묶인 것은 무엇으로 비교할 수 없고, 또 《용결(龍訣)》에 이르기를, ‘왕수(旺水)가 간룡을 만나면 진토(眞土)로 혈을 맺는다’고 하였으니, 이것을 말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간방 입수(入首)에 정향(丁向)을 하면 한편으로는 산택(山澤)의 배합이 되고 한편으로는 율려(律呂)의 상생(相生)이 되니, 역시 이른바 제일 좋은 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혈은 와체(窩體)이지만 오른쪽에 뭉친 곳은 기울어져 쏟아지는 듯하고 왼쪽에 뭉친 곳은 단정하고 후하여 와중(窩中)에서 왼쪽을 밀치니, 곧 빈 것을 놓고 가득 찬 것을 취하는 묘를 취한 것이고 혈 속에서 물을 소비하는 예입니다. 이미 전 사람들의 정론(定論)이 있으니, 마땅히 구슬을 안대하여 빈 곳으로 향을 놓는 것으로 근거를 삼아 패철(佩鐵)을 띄워 좌우의 안대가 바르지 않거든 중앙에서 왼쪽으로 밀친 곳에 내외의 방향을 잃지 않아야 하고, 금정(金井)을 정할 때 비록 상하 좌우의 논란이 있으나 다투는 바는 척촌에 지나지 않으니, 토색(土色)으로 분변하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혈(穴) 속에 앉아 돌아보면 주봉이 단정하게 북쪽에 있으니 곧 계좌의 관록(官祿)이 있는 곳이고 수국(水局)의 제왕(帝旺) 향이니, 이 한 격이 이미 만세무강(萬世無疆)의 복을 차지합니다. 더구나 이 주성(主星)은 금기(金氣)를 머금고 수맥(水脈)을 뽑아내어 완연히 돌고 구불구불 움직여 자모(子母)가 상생(相生)하고, 수백 리를 오른쪽으로 돌아 입수(入首)하는 즈음에 몸을 뒤집어 좌선(左旋)의 정국(正局)을 만든 것은 극히 귀한 격이 아님이 없습니다. 진실로 지리(地理)가 있다면 어찌 영응(靈應)이 없겠습니까. 청룡과 백호는 좌우로 뻗은 음판(陰阪)이 고르게 거듭되어 혈의 입구를 번갈아 잠그는 듯하여 물이 흘러가는 것을 보지 못하겠고, 사방의 산은 높지도 않고 낮지도 않아 어느 면으로 보아도 정감이 있으며, 생방(生方)과 왕방(旺方)의 뭉친 기운과 천신(天神)과 태을(太乙)의 문명(文明)한 기상에 이르러서는 글이나 말로 모두 기술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수세(水勢)로 말하면 이것은 숨은 용의 형체(形體)이기 때문에 내당(內堂)에서 물을 얻는 경우 적은 것을 혐의할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크게 뭉쳤기 때문에 외당(外堂)은 용을 따른 큰 내가 주봉의 뒤에서 합수(合水)되는데, 용이 물을 따르는 것이 아니고 물이 저절로 용을 따르는 것이니, 역량이 큰 것을 여기에서 볼 수 있습니다. 대저 국세(局勢)가 지극히 단단하고 치밀하여 그것이 크다는 느낌은 들지 않으나, 《용결(龍訣)》에 이르기를, ‘장차 크게 맺힌 땅이 있으면 먼저 큰 명당을 그 밖에서 마련한다’고 하였으니, 지금 이 후평(後坪)과 세람평(細藍坪)의 열린 들이 증거가 될 만합니다.” 하였다.
이지원이 말하기를, “대개 내룡의 형세가 멀리서부터 광대하여 기맥(氣脈)이 깨끗하고 두터우며, 오성(五星)이 상생하고 팔방에서 옹호하며, 청룡은 화개(華蓋)처럼 생기고 백호는 구름이 이는 듯합니다. 진(辰), 손(巽), 사(巳), 병(丙)의 봉우리는 해와 달의 보필이며, 건(乾), 해(亥), 감(坎), 계(癸)의 봉우리는 현무(玄武)의 별자리입니다. 맨 마지막 용이 입수한 곳에 이르러서는 완만하지도 않고 급하지도 않으며 음기는 함축되고 양기는 평탄해서 치우치지도 않고 기울지도 않아 삼분(三分)과 삼합(三合)이 맞아 당국(堂局)이 치밀하니, 옛사람이 이른바 ‘혈에 오르면 완연히 하나의 건곤(乾坤)을 이룬다’는 것이 바로 이런 것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기(理氣)로써 말하면 경태(庚兌)의 행룡(行龍)은 신방(辛方)에서 포(胞)를 일으키고, 계방(癸方)과 간방(艮方)에서 많은 변화를 일으켜 간룡으로 정방(丁方)을 향하니, 이는 용과 향이 산택통기(山澤通氣)에 합하는 것입니다. 계방으로 좌(坐)를 하면 곤방의 흐르는 물이 오방으로 돌아가는데, 이는 좌와 물이 수화불상석(水火不相射)에 부합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안대(案對)로 말하면 정방과 태방에 구슬의 형체가 고르게 둥글며 두 봉우리가 밝게 솟아 구슬을 안대하여 빈 곳으로 향하게 되어 스스로 경태(庚兌)의 본상(本象)을 이루니, 이것은 바꿀 수 없는 정안(正案)입니다. 이기(理氣)와 형세(形勢)가 더없이 아름답고 좋아 한 가지의 결점도 없으니, 이는 진실로 억만년의 견고한 터입니다.” 하였고, 박대량은 말하기를, “내룡(來龍)이 멀리서 뻗어 와 현무(玄武)로 가면서 구불구불하고 오성(五星)이 위치를 얻어 광대하게 이어지며, 장막을 뚫고 가운데서 솟음에 기맥(氣脈)이 맑고 귀하고 봉우리가 솟아 유형(乳形)으로 늘어지니 혈성(穴星)은 존엄하며, 뒤가 높고 앞이 평탄하여 음양의 조화를 서로 받음이 명백하고, 사방이 두텁고 가운데가 평평하여 천륜(天輪)의 뭉친 형체가 깨끗하며, 팔방에서 첩첩이 옹호하여 형세가 범을 따르는 구름 같고, 삼문(三門)이 거듭거듭 잠겨 형체는 치아가 맞물린 듯하며, 축방(丑方)의 봉우리와 간방(艮方)의 봉우리가 서로 연결되어 산택(山澤)의 기운을 통하고, 감방의 봉우리와 이방(離方)의 봉우리가 교합하여 마침내 기제(旣濟)의 아름다움을 이루었습니다. 신방(辛方)과 태방(兌方)에서 돌아 간방에서 입수(入首)하니 정향(丁向)은 마땅함을 얻었고, 원류(源流)가 오방(午方)으로 돌아가니 계좌(癸坐)가 격에 맞습니다. 둥근 구슬이 앞에 있고 솟은 두 봉우리가 서로 응하였으니, 쌍봉의 경우 그 중간의 빈 곳을 취하여 향을 정하는 것이 옛 법에 바꿀 수 없는 정한 법입니다. 용(龍), 혈(穴), 사(砂), 수(水)가 더없이 훌륭하고 아름다우니, 참으로 만세토록 한없이 단단한 터입니다.” 하였으며, 주남술은 말하기를, “이 용세(龍勢)의 웅장하고 아름다움과 국세(局勢)의 기이함은 그림으로도 그릴 수 없을 만큼 저절로 대단합니다. 계곡의 맥으로 논하면 왕(王) 자의 모양을 이루었고 신방(辛方)의 한 줄로 된 기맥(氣脈)이 우뚝 솟아 무곡금(武曲金)의 형체가 되어 봉요(蜂腰)와 학슬(鶴膝)이 용절마다 분명하고, 수성(水星)이 길고 멀며 앞에서 간토(艮土)로 뭉쳤으니 이는 바로 뒷룡의 귀격이고, 금성(金星)이 토성을 띠고 천마(天馬)가 누웠으니 분명 이는 더 좋을 수 없는 대지(大地)의 격이 됩니다. 그리고 또다시 해방(亥方)의 낙맥(落脈)이 임수(壬水)와 태(胎)를 이루고 돌아 계맥(癸脈)을 이루어서, 왼쪽 축방으로 한 번 돌고 간방으로 세 번 돌아 용절의 완전한 기운이 위로 천시원(天市垣)의 국세(局勢)와 응하고 남극(南極)의 수성(壽星)과 배합하니, 이것이 이른바 ‘하늘에서 상(象)을 이루고 땅에서 형(形)을 이룬다.[在天成象 在地成形]’는 것입니다. 간방의 입수가 나누어져 좌우로 두 유혈(乳穴)을 이루었는데 오른쪽의 유혈은 약간 작아서 형체를 이루지 못하고, 도리어 왼쪽의 유혈을 도와 만들어 주는데 왼쪽의 유혈은 둥글고 두툼하여 간토(艮土)의 정신으로 뭉쳤으니, 이는 진실로 얻기 어려운 정혈(正穴)이고 양기(陽氣)를 받아 평탄하니 혈증(穴證)이 명백합니다. 그리고 또 사성(砂星)으로 논하면 손방(巽方)과 신방(辛方)이 서로 응하여 사문(赦文)이 높이 비추고 천병(天屛)이 우뚝하게 솟았으니, 이것이 또한 간룡(艮龍)의 귀격입니다. 수격(水格)으로 논하면 생방(生方)의 수신(水神)이 왕방(旺方)의 좌(坐)에 와서 응하고 오방(午方)으로 돌아가 세 개의 구슬이 점을 찍은 듯 산수의 성정(性情)을 껴안아 나열하였으니, 이는 실제로 용이 서린 형국이며 쉽게 만날 수 없는 대지(大地)입니다. 그리고 또 병방(丙方)과 손방(巽方)으로 논하면 20개월 뒤에 먼저 자손이 많은 경사를 축하함이 있고, 9년이 되면 청룡과 백호의 기운이 서로 응하고 비춰 순환됨이 무궁하여 일자천손(一子千孫)이 될 것이니, 만대의 무궁한 아름다운 일이 실제로 여기에서 기인할 것입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증악산(甑嶽山)에서 낙맥(落脈)을 한 뒤에 돌고 돌아 용절(龍節)마다 격에 맞고 입수(入首)한 봉우리에 이르러서는 해방(亥方)과 계방(癸方) 아래에서 잠깐 축절(丑節)로 들어왔다가 다시 간방과 계방으로 돌아 계방에서 다시 간방으로 오니, 이는 바로 대단한 길격이 됩니다. 입수의 봉우리의 뇌(腦)가 되는 곳에 해방은 자방의 기운을 싸고 있고 축방의 용절은 강렬한 빛을 띠고 있어 계판(癸坂)을 이루었습니다. 그리고 입수한 봉우리와 뇌가 되는 곳으로 말하면, 해방은 이 자미성(紫微星)의 원국(垣局)이고 간방은 천시성(天市星)의 원국이니 자미성이 천시성을 감싸서 아버지와 아들이 서로 계승하는 귀기(貴氣)가 되고, 양수(陽水)인 해수(亥水)가 자방(子方)과 축방(丑方)의 기운을 감싸서 음수(陰水)인 계수(癸水)와 배합하니 실로 부부(夫婦)가 서로 배합하는 오묘한 격이 됩니다. 청룡, 백호, 득수(得水), 파문(破門)으로 말하면, 청룡과 백호가 혈성(穴星)을 에워싼 것은 마치 자애(慈愛)로운 어머니가 자식을 껴안은 형상이고, 득수와 파문의 안팎이 합쳐진 것은 부부가 배합한 격이니, 이것으로 미루어 보면 수명(壽命)이 무한하고 일자천손의 대길지(大吉地)가 됨을 알겠고, 혈이 왼쪽에 있는 것도 의심할 것 없이 분명히 볼 수 있습니다.” 하였으며, 채윤전은 말하기를, “대개 그 내룡이 누(樓)를 벗어나 기복(起伏)을 하면서 일보일보에 웅장한 형세로 바뀌고 굴곡을 이루면서 활동하여 용절마다 내려오면서 생기가 있어 휘장 밖으로 나왔다가 또 들어가서 스스로 기세의 존엄함을 이루었고, 둥글면서 굽고 굽으면서 둥글게 되어 서로 금산(金山)과 수산(水山)의 청귀(淸貴)함을 이루었습니다. 그리고 주봉은 우뚝하게 솟은 모습이 학(鶴)이 서 있는 듯하고 혈과 봉우리는 단정하고 아담하여 형체가 신선(神仙)이 앉아 있는 듯하며, 맥(脈)은 뇌두(腦頭)를 이어 간산(艮山)의 기운이 엉기고 유혈(乳穴)이 가슴 앞에 늘어져 마침내 태택(兌澤)의 형상을 이루었습니다. 수로(水路)는 거슬러 돌아가는데 수맥은 하필 오른쪽으로 모였고 용세(龍勢)는 순하게 굴러 오는데 기운은 하필 왼쪽으로 모였습니다. 청룡과 백호가 감싸 안아 내당(內堂)의 기운을 수습하고, 여러 봉우리가 다투어 빼어나 모두 밖에서 드날리는 상서로운 기운을 바칩니다. 생방(生方)의 물은 원래의 위치로 돌아가 신임수국(辛壬水局)의 격을 이루고, 둥근 구슬이 앞에 있어 품 안으로 들어오는 안대가 되어 용, 혈, 사, 수가 더없이 좋고 아름다우니, 진실로 만세 무궁한 터전입니다.” 하였다. - 이상은 여러 지사들의 설을 붙인 것이다.
향교(鄕校)의 터는 윤선도(尹善道)의 기해헌의(己亥獻議)에 이르기를, “호장(戶長)의 집 뒷산 건너편에 또 새로 한 혈을 얻었으니, 이 또한 한 국내에 있고 사수(四獸)가 법수에 맞아 호장의 집 뒷산과 비교하면 우열은 비록 다르기는 하지만 쓸 만한 곳입니다.” 하였으니, 이로 말미암아 본다면 이 터 또한 옛사람이 논한 바가 있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 비로소 올라와 보았더니 과연 보통의 대지(大地)는 아니고 새로 잡은 원침(園寢)보다 조금 못할 뿐이다. 그러나 본집(本集)에 기록된 바는 매우 소략하니, 아마도 같은 국내(局內)에 아주 찬탄(讚歎)한 곳이 있어서 다른 곳은 자세히 논할 여유가 없어서일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향교를 헐어 버리기 전에는 간심(看審)하기가 어려워 확실하게 말할 수 없어서 그런 것인가? 요컨대 결단코 만나기 어려운 땅이니 나를 위하여 유념해서 표지(標識)해 두었기에 신해년(1791, 정조15) 봄에 나무를 심고 봉(封)하였다.
○ 옛 향교(鄕校) 터는 헌의(獻議)에 또 이르기를, “이 원국(垣局) 안에도 성취시킬 만합니다.” 하였다.
○ 어목헌(禦牧軒) 뒤에도 또 한 둔덕이 있는데, 꽤 칭찬이 자자하다.

재혈(裁穴) 제2

무릇 혈을 짚는 법은 반드시 먼저 합당한 곳을 정하여 봉표(封標)를 하고, 봉표한 뒤에 옹가(瓮家)를 세워 천중철(天中鐵)을 매달고 줄을 당겨 올리거나 내려 천중철이 닿는 곳이 곧 혈구(穴口)이다. 열 번을 반복하는 가운데에 이미 봉표를 하고 옹가를 세웠으면 혈을 짚는 것은 그 속에 있는 것이다. 혈장(穴場)이 넓고 좁고 길고 짧은 것은 각기 만 가지로 다르지만, 맥의 기운이 왕래하고 교합하는 것은 단지 한 선(線)뿐이다. 털끝만큼이라도 실수하게 되면 막대한 차이가 나므로 근엄하게 함이 이와 같다. 혈을 가늠하는 오묘함은 보통의 안목을 지닌 사람에게 책임 지우기 어렵다. 그런데 신원(新園)의 혈체(穴體)가 위는 유방(乳房)이 늘어진 형상이고 아래는 손바닥을 우러러보는 형체이니, 이것은 바로 옛사람들이 혹은 위로 올라가야 한다고 하고, 혹은 아래로 내려가야 한다고 하는 의논이 있게 된 까닭이다. 자세히 살펴보면 유두(乳頭)는 물이 내려오는 기운이 중단되지 않고 와면(窩面)은 머물러 쉬려는 뜻이 있음을 알 수 있으니, 이것이 바로 높은 곳을 버려두고 평탄한 곳으로 나가는 쪽으로 정론이 내려진 까닭이다.
그러므로 방향을 살펴 찾아보면 정중(正中)의 혈이 명백하게 나타나니, 살(煞)과 싸우고 냉(冷)을 범하는 일은 처음부터 의심할 것이 아니다. 또 혈체는 왼쪽이 실(實)하고 오른쪽이 허(虛)한데, 이는 기(氣)가 왼쪽으로부터 오는 것이 분명하고 오른쪽으로부터 받는다는 증거이니 - 기운이 오른쪽으로부터 온다는 말이다. - 조금이라도 혈을 잃는 것은 더욱 논할 것이 없다. 때문에 내가 직접 살피지는 못하였더라도 믿고 의심하지 않는다. 참의(參議) 윤선도(尹善道)가 총호사(摠護使)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 그 편지에 이르기를, “감여(堪輿)의 법에 비록 진룡(眞龍)의 대지라 하더라도 혹 혈을 짚는 데 착오가 있거나 혹 좌향에 착오가 있으면 길하고 흉함이 하늘과 땅의 차이가 생기니, 옛사람이 말한 바 이는 징험한 일에 관계된다는 것이 이것입니다. 수원(水原)의 산은 큰 풍수(風水)로서, 안목을 갖춘 사람이라면 감히 흠을 잡지는 못하겠지만 다만 혈을 짚을 때 보는 바에 따라 의견의 차이가 있으니, 옛사람의 말에 이르기를, ‘산세를 바라보고 용을 찾기는 쉽고 산에 올라 혈을 짚기는 어렵다’고 한 것이 맞습니다. 또 이르기를, ‘3년을 배워 용을 찾을 수는 있으나 10년을 배워도 혈을 짚지는 못한다’ 하였으니, 이 산이 입수(入首)하는 맥은 명백하여 의심이 없으나, 맥 아래에 유두(乳頭)가 있고 유두 아래에 평탄한 곳이 있으며, 평탄한 곳 아래에 요[褥]가 있으니, 자세히 살펴보면 그 유두는 달리고 희롱하는 기세가 그치지 않고 또 둥글게 뭉친 곳이 없으며, 청룡과 백호가 점점 낮아져서 흡족하지 못하니, 혈이 맺힌 곳이 아닌 듯합니다. 그리고 평탄한 곳은 형체가 구불구불하니 여기가 진실로 둥글게 뭉친 뜻이 있고, 청룡 백호가 흡족하여 높지도 않고 낮지도 않으니 여기에 혈을 맺은 것이 분명한 듯합니다. 만약 좌향을 논한다면 구슬을 안대하여 빈 곳으로 향을 놓는 것이 바꿀 수 없는 정리(正理)입니다. 전설에 옥룡국사(玉龍國師)가 이 산을 ‘서린 용이 구슬을 희롱하는 격이 된다’고 하였는데, 이 용은 진실로 복룡(福龍)의 대지이고 국을 이룬 형세는 완연히 서린 용과 같고 하나의 둔덕은 앞에서 구슬이 되니, 이는 고격(古格)에서 말하는 품 안으로 들어온 안대(案對)이니, 전설의 말이 헛되지 않은 듯합니다. 어떤 사람은 한 둔덕은 낮고 작아 중시할 것이 못 된다고 하지만, 고격(古格)에 이르기를, ‘천 길이나 되는 높은 산이라도 평지의 한 둔덕에 미치지 못한다’고 하였으니, 낮고 작다 하여 하찮게 여길 수 있겠습니까. 더구나 물건의 형상은 이치가 있으니, 지형(地形)이 물건의 형상을 본받는 것이 아니고 물건의 형상이 천지를 본받는 것입니다. 이 둔덕은 이미 용의 턱 아래 구슬을 형상한 것이니, 하필 커야만 할 이유가 있겠습니까. 작을수록 더욱 귀한 것입니다. 고격에서 안산(案山)을 논하기를, ‘세 봉우리는 중간의 봉우리를 대하여야 하고 두 봉우리는 공간을 대하여야 한다. 공간을 대하는 이유는 요컨대, 두 봉우리를 아울러 쓰자는 것이고 좌우가 고르고 바름을 요하는 것이다. 또 공간을 대하면 공간이 당면(當面)이 되어 해로울 것이 없고, 한 봉우리만을 치우치게 대하면 공간의 바람이 혈의 속으로 침범하여 쏠 것이니 해로움이 작지 않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으로 생각해 보면, 두 봉우리에서 공간을 대하는 법이 조화의 묘법에 맞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형국은 본체가 되고 음양은 작용이 됩니다, 진실로 참된 형국과 바른 좌향을 얻는다면 스스로 천연적인 자연의 묘용(妙用)에 합하므로 음양은 구구하게 구애될 것이 없습니다. 더구나 구슬을 안대로 하고 빈 곳을 향으로 하여 좌우로 미루어 옮긴다면 어찌 음양에 맞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비록 음양에 구애된다 하더라도 120분금(分金)이 이미 많아 참된 것을 얻기가 어려운데, 더구나 360분금에서 꼭 참된 것을 얻겠습니까. 그러므로 옛사람이 말하기를, ‘산에 오르면서 반드시 나경(羅經)을 찰 필요는 없다’ 하였고, 또 말하기를, ‘다만 좋은 주인이 어진 손님을 대한다’고 하였으니, 이것이 바로 감여가(堪輿家)에 있어 대중지정(大中至正)의 긴요한 의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의 얕은 소견으로는 평탄한 곳에 구슬을 안대로 하고 빈 곳으로 향을 놓는 것이 바꿀 수 없는 이치입니다. 그러므로 유두에 혈을 짚으면 평탄한 곳에 못 미친다 하더라도 구슬을 안대로 하고 공간을 향으로 하니 오히려 가하겠지만, 평탄한 곳의 진혈(眞穴)을 잃고 또 구슬을 안대하여 빈 곳으로 향을 놓는 묘법을 잃어버린다면 대룡(大龍)의 대국(大局)이 한갓 겉치레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애당초 혈을 짚을 때에 힘써 다투려고 하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나를 믿어 주지 않아 말을 하더라도 유익함이 없고, 저 역시 이 산이 꼭 나라에 쓰일 것이라고 믿지 않았습니다. 때문에 다만 여러 번 소견을 진술하고 다투지는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어쩔 수 없이 꼭 이 산을 쓴다면 착오를 일으켜 해를 입을까 두렵습니다. 여러 술객(術客) 중에 이최만(李最晩)이 구슬을 안대로 하고 빈 곳으로 향을 놓는 것이 분명하다는 이치를 압니다. 대개 이최만은 자품과 식견이 무리에서 뛰어나고 그 아버지의 대사(大事)를 위하여 여기에 종사한 지 오래되었습니다. 그러므로 그 법술을 다 배웠고 또 큰 근본을 세워서 그 요령을 터득하는 데 이르렀습니다.” 하였다. - 그 뜻이 대략 평탄한 곳을 버려두고 유두(乳頭)를 취하며 구슬을 버리고 봉우리를 향하는 것을 염려하여, 앞뒤로 간곡하고 자세히 한 말이 위쪽이냐 아래쪽이냐 하는 것과 방위를 분변하는 데 있을 뿐이고 국(局)을 늘리고 줄이는 것이 적합함을 잃는 문제는 전혀 언급하지 않았으니, 지금 여러 사람의 의논이 하나로 돌아간 뒤에 정혈(正穴)을 짚기 쉬움은 손바닥을 가리키는 것처럼 훤할 것이다. 내가 원침(園寢)을 정할 처음에 혈증(穴證)이 분명하고 문자의 근거가 있으므로 반드시 혈은 약간 왼쪽 평탄한 곳에 정하라고 누누이 일을 감독하는 신료들에게 타일렀으니, 의당 이해하여 착오를 일으키지 않으리라고 생각하였다. 성몽룡(成夢龍)과 김양직(金養直)의 무리가 얕고 졸렬한 소견으로 감히 다투어 비교하는 말을 하여 듣는 자 중에 혹 그렇게 여기는 자가 많았다. 그래서 성몽룡 등을 불러 꾸짖기를, “이런 길지(吉地)를 얻어 이런 대례(大禮)를 거행하는 데에는 오직 옛사람의 말을 믿고 따라야 한다. 그런데 근래에 들으니 너희 두 사람은 수원의 혈이 있는 곳에 대해 성몽룡은 축좌(丑坐)의 의논을 주장하고 김양직은 계좌(癸坐)의 의논을 주장한다고 하는데, 계좌정향(癸坐丁向)은 이미 기해의궤(己亥儀軌)에 실려 있다. 그 당시에 조금 올리느냐 내리느냐가 논란의 쟁점이 되었을 뿐인데 어찌 감히 계좌니 축좌니 하며 또 다른 의견을 내는가. 계좌는 빈 곳을 향으로 하고 구슬을 안대하는 것이니, 대저 빈 곳을 향으로 한다는 뜻은 곧 왕자(王者)는 대적(對敵)할 자가 없다는 뜻이다. 비록 다른 여러 능침에 있는 바가 아니라고 하더라도 능침을 점치는 자 중에 예부터 이런 격을 말하는 자가 많았다. 더구나 축좌를 하여 한 봉우리만을 대하게 한다면 수법(水法)으로 논할 적에 더욱 미안하게 된다. 김양직의 계좌로 하고 약간 낮게 해야 한다는 말은 그의 말이 아니고 곧 옛사람의 확정된 의논인데 너희들이 감히 다른 말을 하는가. 또 계좌의 산은 내당(內堂)은 오파(午破)가 되고 외당(外堂)은 병파(丙破)가 되는데 본래 구애될 것이 없는 것이다. 더구나 조금 낮게 하면 병파에 대한 염려는 더욱 없다. 가령 성몽룡의 말과 같이 약간 올라가더라도 병파에 있어서는 불가할 것도 없다. 이 산의 원국(垣局)과 청룡, 백호는 거듭하여 문을 이루니, 내당이 오방에서 파문이 되고 외당이 병방에서 파문이 되는 것은 치우치게 폐할 수 없다. 앞으로의 응험(應驗)으로 말하면, 내파(內破)는 초운(初運)에 관계되고 외파(外破)는 다음의 운세에 관계된다. 비록 여염(閭閻)에서 이장(移葬)을 하더라도 이것은 막중하고 막대하여 매우 어렵게 여기고 삼가는 일이니, 마땅히 우선 초운이 길하고 이로움을 위주로 해야 한다. 초운이 길하고 이로우면 다음의 운세도 형통하여 잘될 것이다. 더구나 외파가 격에 맞음이 많음에 있어서야 말할 것이 있겠는가. 내당과 외당을 아울러 논하는 것은 나의 억측(臆測)에서 나온 것이 아니고, 이순풍(李淳風)의 삼분합설(三分合說)에서 근거한 것이다. 대개 용과 혈이 있으면 반드시 분수(分水)하고 합수(合水)하는 곳이 있는데, 혈 위의 물이 첫 번째 분합(分合)이 되고 내명당(內明堂)의 물이 두 번째 분합이 되며 외명당(外明堂)의 물이 세 번째 분합이 된다. 혈 위의 경계에 있는 물이 길흉의 관계가 가장 긴요하니, 지금 만약 내파(內破)를 논하지 않고 외파(外破)만을 논한다면 하나만 쓰고 둘은 버리는 탄식이 없겠는가?” 하자, 김양직이 말하기를, “약간 낮으면 계좌 오파(癸坐午破)가 분명합니다.” 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성몽룡이 계산 병파(癸山丙破)로 흠을 잡는 이유는 곧 구성론(九星論)을 치우치게 믿기 때문이다. 계좌의 산에 병방으로 흘러가는 물은 녹존(祿存)이 파멸되기 때문에 네가 논란하기는 하나, 만약 길격에 맞으면 파군(破軍)의 염정화(廉貞火)가 녹존보다 심하더라도 또한 꺼리지 않는 법이다. 더구나 여기는 계좌에 정득 병파(丁得丙破)가 있으니, 바로 하도(河圖)의 천간(天干)이 상생하여 이루는 격에 부합된다. 비록 득수(得水)가 없다 하더라도 좋은 사(砂)가 있으면 또한 이런 격에 맞는다. 약간 위로 올려야 한다는 의논은 옛사람이 이미 쓰지 않았다. 그렇다면 마땅히 낮은 곳을 써서 병파(丙破)가 스스로 오파(午破)로 돌아가게 해야 되니, 명일 평탄한 곳에 계좌정향의 오파로 놓고 살펴보아야 가하다.” 하였다. 김양직이 말하기를, “신이 60여 년 동안 혈의 아래 몇 발자국 되는 곳에서 살았으니 어찌 억측으로 우러러 대답하겠습니까. 계좌정향의 오파가 분명하고 평탄한 곳이 담요이니 곧 진혈(眞穴)입니다.” 하였는데, 내가 이르기를, “김양직의 말이 옳다.” 하였다.
○ 7월 20일(갑진)에 새 원침의 분금(分金)을 건을(乾乙)로 하고 신방(申方)의 득수에 오파(午破)로 혈을 짚어 표(標)의 중심목(中心木)을 세웠다. - 상지관(相地官)은 좌향을 써서 종이로 거듭 봉하고 도청(都廳)이 ‘신은 삼가 봉합니다[臣謹封]’라고 쓰고, 총호사(摠護使)는 인장을 찍었다. 처음에는 사기 주발로 덮고 다음에는 도기(陶器)로 덮어 구주삼초석(九柱三草席)으로 안쪽을 두르고 삼끈으로 묶었으며, 또 십이주삼뉴바자(十二柱三杻笆子)로 겉을 싸고 왕골 끈으로 묶은 뒤 도청이 또 ‘신은 삼가 봉합니다[臣謹封]’라고 쓰고, 총호사가 인장을 찍었다.
○ 봉표(封標)를 하려 할 때 총호사 김익(金熤) 등이 여러 지사(地師)를 거느리고 산 위로 가서 좌향과 득수(得水)와 파문(破門)을 살펴서 정하고 푯말을 세웠다. 어떤 사람이 계좌 오파(癸坐午破)를 꺼려 오방에 둑을 쌓아 막아서 정파(丁破)의 국세(局勢)를 만들려고 하니, 논란하는 자가 말하기를, “수법(水法)의 길상(吉相)은 하도(河圖)의 네 격(格)이 가장 좋고, 네 격 가운데에 감(坎), 리(离)가 서로 파문이 되는 것이 가장 좋다. 대개 건(乾), 곤(乾), 진(震), 손(巽), 간(艮), 태(兌)의 여섯 괘(卦)는 선천도(先天圖)에서는 서로 대(對)를 하고 후천도(後天圖)에서는 서로 어긋나 있으나, 감, 리 두 괘는 중정(中正)의 괘로서 선천도와 후천도에서 모두 상대를 잃지 않기 때문이다. 계(癸)와 자(子)는 동궁(同宮)이면서 감위(坎位)에 있으니, 이는 또한 계좌와 자좌가 모두 오파(午破)로 길함을 삼는 것이다. 그렇다면 계좌 오파는 참으로 아름답고 흠이 없으며 극히 귀하고 길한 격이니, 혹자가 운운(云云)한 것은 진실로 그 가리키는 바를 알 수 없다. 속방(俗方)에 자(子), 오(午), 묘(卯), 유(酉)는 천심(天心)의 파문(破門)이라는 말이 있는데, 혹시 이런 학설에 잘못되어 이런 말을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건곤(乾坤)이 위치를 정하여 여섯의 자녀(子女)가 태어나고 여섯의 자녀가 배합하여 만물이 화육(化育)하니, 이것으로 말한다면 무엇이 이보다 더 길하겠는가. 분금(分金)으로 견제하는 방법에 이르러서는 본래 나경(羅經)에 대한 공부가 없으니 알지 못하는 것을 억지로 말할 수는 없지만, 원래 꺼릴 만한 단서가 없으니 어찌 견제하는 방법을 구하겠는가. 더구나 매 방위마다 단지 다섯의 길로(吉路)가 있는데, 구갑(龜甲)과 기극(忌克)을 빼면 쓸 만한 것은 그리 많지 않다. 겸하여 나경(羅經)의 많은 반층(盤層)으로는 정미(精美)한 데까지 극진히 합치되게 할 수 없다. 설사 참으로 꺼릴 실마리가 있다 하더라도 진실로 조화를 마음대로 하고 뜻대로 손을 놀리는 신통(神通)한 술법을 가진 자가 아니라면 함부로 논할 수가 없는 것이다. 더구나 지금은 꺼릴 것도 없고, 그런 사람도 없지 않은가. 오방의 파문에 건산(乾山)이면 팔요(八曜)가 되고, 진산(震山)이면 파군(破軍)이 되며, 손산(巽山)이면 염정(廉貞)이 되고, 태산(兌山)이면 녹존(祿存)이 되니 모두가 불리하고, 계좌(癸坐)로 하면 하나도 꺼릴 것이 없어 대격(大格)에 맞는다.” 하였으므로, 이에 세속 지사(地師)들의 말이 비로소 중지되었다.
내가 그 말을 듣고 급히 총호사(摠護使) 등에게 하유하기를, “혈을 짚은 곳에 이미 봉표를 하였다고 하는데, 과연 왼쪽으로 밀어 약간 아래로 하라는 말을 적용하였는가? 앞으로는 혈의 깊이 한 가지만이 마음을 다해야 할 일이다. 일전에 김양직(金養直) 등에게 자세히 말하였고, 어제도 이 일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특별히 한 사람을 보냈다. 그러니 경들은 ‘영조척(營造尺) 10자는 우선 논할 것도 없고 토규(土圭) 10자 또한 너무 지나치다’는 말을 반드시 들었을 것이니, 경들은 얕게 파야 하고 깊게 파서는 안 되며, 아래로 내릴지언정 위로 올리지 말라는 뜻을 더욱 염두에 두어 조심하고 또 조심하여 미리 살펴 정하도록 하라.” 하였다.
○ 8월 30일(계미)에 봉표(封標)를 걷어치우고 겉의 흙을 제거하여 옹가(瓮家)의 기지(基址)를 헤치고서 몇 자를 파도 진토(眞土)가 나오지 않았다. 대체로 처음 봉표를 할 때에 약간 오른쪽으로 밀어야 한다는 의논이 크게 제기되었다. 내가 비록 여러 번 전교를 내리면서 옛 설을 끌어다가 지금의 상황을 규명하였지만, 지사(地師)들은 오히려 자기의 의견만을 고집하여 말로는 왼쪽으로 밀었다고 하나 그 실제로는 정혈(正穴)과의 거리가 자리 하나의 넓이 정도 떨어졌던 것이다. 내가 미처 보고받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장인(匠人)을 감독하는 신하들도 깨달아 살피지 못하였으니, 이는 오로지 혈 앞의 둔덕이 오른쪽 가에 있는 듯하였기 때문이다. 당시에 총호사는 서울에 있었으므로 도감 당상(都監堂上)이 그 상황을 대언(對言)하기를 청하기에, 내가 비로소 봉표가 오히려 오른쪽에 가까운 것을 알고 총호사 김익(金熤)과 금성위(錦城尉) 박명원(朴明源) 등에게 명하여 여러 당상관과 함께 다시 가서 살펴보고 약간 왼쪽 평탄한 곳에 가서 분금(分金)을 놓고 일을 시작하게 하였다.
○ 9월 3일(병술)에 총호사 김익과 금성위 박명원, 도감 도청(都監都廳) 이만수(李晩秀)가 치계(馳啓)하기를, “신 등이 듣건대 봉표하던 처음에 북관(北關) 사람 주남술(朱南述)이 혈이 있는 곳에 올라 위아래로 살펴 용을 찾고는 봉표가 오른쪽으로 치우쳤다고 하였는데 흙을 팔 때에 정혈이 약간 왼쪽의 조금 아래쪽임을 알았습니다. 주남술은 본래 산을 보는 안목을 갖춘 사람이고 특히 혈을 짚는 데 정밀하다고 하니, 그를 혈을 찾는 데 함께 참여하게 하소서.” 하여, 즉시 역마로 부르도록 명하였다.
○ 4일(정해)에 처음으로 정혈(正穴)을 찾았다. 총호사 김익 등이 치계하기를, “봉표 왼쪽 가에서 그대로 자리 한 닢 넓이 남짓한 곳인데, 겨우 겉의 흙을 두어 치가량 긁어내자 진토(眞土)가 나왔습니다. 빛은 순황색(純黃色)을 띠어 길한 기운이 흙에서 비쳐 오르고 토질은 가늘고 기름기가 있으며 차지니, 정말로 이른바 지방(脂肪)을 자른 듯 옥을 끊은 듯하였습니다. 그 사이에 토란(土卵) 모양과 같은 것이 있어 파기만 하면 나오는데 그 빛이 더욱 윤택하고 자황색(紫黃色)을 띠며 금색의 실 무늬가 확실하니, 이는 지가(地家)에서 말하는 상품의 토색입니다. 대저 용뇌로부터 아래로 혈순(穴脣)의 앞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이런 흙의 맥(脈)인데, 차차 파 보자 용뇌 아래의 유두(乳頭)가 아래로 늘어져 인후(咽喉)가 생기고 앞을 향하여 점점 펼쳐져 혈이 맺힌 곳에 이르러 둥근 둔덕이 완연하니, 참으로 계란이 노른자위를 싼 것과 같았습니다. 옛사람이 말한 유두 아래 평탄한 곳이란 바로 이것을 가리킨 것입니다. 지금에야 참된 정혈(正穴)을 얻었으니 감독하는 여러 신하로부터 역부(役夫)와 서민에 이르기까지 즐거워하고 기뻐하며 춤을 추지 않는 사람이 없습니다. 지척(咫尺)의 자리 한 닢 사이에서 사람들이 꿰뚫어 보지 못하고 처음에는 속된 안목으로 신중하게 여겼다가 이제야 진혈을 찾았으니, 어찌 하늘이 내려 준 바가 아니겠습니까.” 하였다.
○ 5일(무자)에 총호사 김익과 금성위 박명원 등이 주남술(朱南述), 이지원(李祉源), 박대량(朴大良), 김양직(金養直), 성몽룡(成夢龍), 채윤전(蔡潤銓) 등을 거느리고 다시 혈이 있는 곳을 살펴보고 치계(馳啓)하기를, “정혈(正穴)이 정해짐에 온 도감(都監)과 상하의 사람들이 모두 경사스럽고 다행한 일이라고 하며 하늘이 주신 것이라고 합니다. 지금은 주위가 모두 이미 의결되었으며, 상하(上下), 광협(廣狹), 곡장(曲墻), 상설(象設)은 작작하게 여유가 있으니 너무나 기이한 일입니다. 주남술과 이지원 등은 낯선 사람끼리 서로 만나 의논이 똑같이 서로 부합되었으니, 앞으로 봉표를 하고 금정(金井)을 팔 때에 서로 어긋나는 논란이 없을 것입니다. 내일은 여러 지사(地師)로 하여금 주봉으로부터 용절마다 패철을 띄워서 내맥(來脈)의 분금(分金)을 정하겠습니다.” 하였다. 이에 대신과 각신(閣臣), 경재(卿宰)를 불러 도감이 봉하여 올린 토색(土色)과 토란(土卵)을 보이면서 이르기를, “진토(眞土)를 얻은 뒤에 기뻐서 뛸 듯하였고 앉아서 아침을 기다렸다가 경들에게 꺼내어 보인다. 대저 처음에 약간 오른쪽으로 한 것은 사람이 한 일이고 하늘이 시킨 것이 아니며, 오늘 이 진혈을 얻은 것은 곧 하늘이 주신 것이고 인력으로 된 것이 아니다.” 하였다.
○ 6일(기축)에 지방관(地方官) 조심태(趙心泰)가 치계하기를, “총호사 김익과 금성위 박명원이 여러 지사들과 함께 주봉으로부터 분금(分金)을 놓아 중심의 표목에까지 이르렀고, 또 주봉과 과협(過峽)에 올라 인후(咽喉)의 용절을 찾고 30여 절을 지나서 두루 사방을 살피고, 이어 산의 사주(四柱)를 만들고 이르기를, ‘계해, 정사, 병자, 갑오다’ 하였으며, 금성위는 윤도(輪圖)를 가지고 총호사는 주남술(朱南述)과 같이 살펴 정하였는데 한결같은 말로 흡족해하며 백 가지가 순조롭게 이루어지니, 경사스럽고 기쁨을 견디지 못하겠습니다.” 하였다.
○ 7일(경인) 진시(辰時)에 처음과 같이 봉표하고 총호사 김익이 치계하기를, “신들이 금성위 및 여러 지사와 함께 다시 살피고 의논하여 계좌정향(癸坐丁向)으로 정혈(正穴)을 정한 뒤에 봉표를 하고 바자(笆子)를 쳤습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역사를 시작한 날로부터 봉표 안에 3마리의 금색 개구리가 나왔으니, 술사(術士)들이 모두 말하기를, ‘땅속에 생물이 있으니 크게 길할 조짐이다’고 합니다.” 하였다.
○ 사용(司勇) 주남술(朱南述)이 분금론(分金論)을 올렸는데, 그 의논에 이르기를, “과협(過峽)이 있는 곳으로부터 보룡법(步龍法)으로 추보(推步)해 보니, 과협이 있는 곳은 신유좌(辛酉坐)의 신묘향(辛卯向)이고 - 미방, 임방, 계방이 득수(得水)가 된다. - 묘방으로부터 행한 기운이 정유(丁酉)가 되고 정유로부터 행한 기운이 주봉에 이릅니다. 그리고 경자와 경오의 행룡은 - 갑방과 손방이 득수가 된다. - 임자와 임오의 용절에 이르러 - 묘방과 경방이 득수가 된다. - 병인에서 인후(咽喉)를 만들고, 병신의 행한 기운이 - 을방과 신방(辛方)이 득수가 된다. - 몇 굽이의 용절을 지나 경자와 경오에서 맴돌다가 신사와 신해에서 봉우리를 이룹니다. 그리고 을해와 을사의 행룡은 - 간방, 유방, 곤방이 득수가 된다. - 봉우리 밑에서 태식(胎息)을 하고, 임방의 한 용절은 임방 밑에서 계방의 한 용절과 간방의 한 용절이 되고, 간룡이 후뇌(後腦)의 금성(金星)이 되어 간방의 머리로부터 2개로 나뉘어 - 오른쪽은 곤미(坤未)의 행기(行氣)가 되고, 왼쪽은 해자(亥子)의 식기(食氣)가 된다. - 계좌의 혈이 되었습니다. 금성(金星)의 뇌두(腦頭)로부터 금국(金局)의 4ㆍ9수(數)로 재서 혈이 있는 곳에 이르러 배를 더하여 18자[尺]가 됩니다. 이 18자를 기준하여 좌청룡과 우백호가 각각 18자이니, 이 청룡과 백호 사이의 각각 18자를 합친 36자 내에 3으로 나누는 법을 쓰면 왼쪽은 양기(陽氣)의 정혈이 되기 때문에 13자로 제하고 오른쪽은 음기(陰氣)의 허국(虛局)을 9자로 제하니, 요약하면 14자가 되어 그것으로 정혈을 짚어 정하게 되었습니다. 산을 파는 일은 간중(艮中)의 신축 정기(正氣)로는 무인(戊寅)의 정간(正榦)을 꿰뚫고 혈의 중심인 곳으로 들어가며, 무인의 간기(艮氣)로 혈의 왼쪽 귀 1자 6치에 들어가게 하고, 분금(分金)은 병자ㆍ병오로 하였습니다. - 임(壬)이 3푼이고 병(丙)이 7푼이다. - 임은 정과 배합하고 병은 신과 배합하니 임3 병7 하여 합계가 3에 7을 곱해서 21이 되는데, 임의 본수(本數)를 제하면 18이 됩니다.” 하였다. 김양직(金養直), 박대량(朴大良) 등이 말하기를, “주성(主星)의 건산(乾山)이 해방에서 와서 임계방으로 돌고 축방에서 받아 무인으로 바르게 하여 간방에서 입수(入首)하였으니, 괘(卦)의 예(例)에 있어서는 지산겸(地山謙)의 오효(五爻)가 됩니다. 해방은 자손이 세상을 유지하는 격인데 감(坎)과 이(离)가 교합하고 간(艮)과 태(兌)가 배합하는 이치를 취하여, 계좌정향으로 하고 봉침(縫針)으로 분금(分金)을 병자ㆍ병오로 하였습니다. 병은 간괘(艮卦)가 되고 자(子)는 생기방을 격(隔)하였으며, 계좌의 계는 계록(癸祿)이 자방에 있다는 의미로 명궁(命宮)에 이롭고 신방과 경방이 득수(得水)가 되고 오방이 파문이 되니 병자(丙子)의 삼합(三合)이 되고 천을귀인(天乙貴人)이 자방에 있습니다. 병자는 관(管) 3도(度)에서 여(女) 1도를 쓰니 현귀(顯貴)의 땅이고, 병오는 관 3도에서 유(柳) 4도를 쓰니 문창(文昌)의 위치입니다. 분금하여 중부괘(中孚卦)를 얻었으니, 경자년에 자손이 투출(透出)하는 일은 계좌의 생방(生方)이 되기 때문입니다.” 하였다. - 생문(生門)ㆍ역마(驛馬)ㆍ귀인(貴人)ㆍ은재(隱才)는 곤궁(坤宮)에 이르고, 휴문(休門)ㆍ병기(丙奇)ㆍ문서(文書)는 이궁(离宮)에 이르며, 개문(開門)ㆍ정록(正祿)은 손궁(巽宮)에 이르고, 을기(乙奇)는 감궁(坎宮)에 이르며, 금성(金星)ㆍ수성(水星)ㆍ일(日)ㆍ월(月)의 네 길성(吉星)은 진궁(震宮)에 이르고, 정기(丁奇)ㆍ귀인(貴人)ㆍ관성(官星)은 간궁(艮宮)에 이르며, 자손(子孫)은 태궁(兌宮)에 이르니 태궁은 곧 겸괘(謙卦)로 세상를 유지하는 방위이다.
○ 8일(신묘)에 특별히 총호사와 금성위에게 유시(諭示)하기를, “형국과 음양은 서로 표리(表裏)가 되니 편벽되게 폐할 수는 없다. 그러나 두 가지에서 그 경중(輕重)을 논한다면 형국은 본체가 되고 근본이 되며 음양은 작용이 되고 끝이 되니, 어떻게 본체를 버리고 작용을 구하겠으며 근본을 버리고 끝을 잡을 수 있겠는가. 원소(園所)의 체세(體勢)는 서린 용이 구슬을 희롱하는 것으로 형국을 이루었으니, 만약 구슬을 안대(案對)로 하는 뜻을 잃지 않고 겸하여 분금(分金)의 법에 맞게 한다면 모두 진실로 좋고 아름다운 일이다. 그러나 만약 분금에만 구애하고 조금이라도 구슬의 안대에 대하여 실수를 한다면 하늘이 만든 형국을 어기게 되고 빈주(賓主)의 정의(情義)를 잃게 되는 것이니, 아무리 나경(羅經)의 묘용(妙用)을 얻는다 하더라도 무슨 이익이 되겠는가. 더구나 안대를 취하는 법은 그 안대의 정중(正中)에만 맞추려고 할 것이 아니라 좌우로 참작하여 추이(推移)하여 써야 한다. 그리고 또 매 방위 위에는 각기 5자(字)가 있는데, 만약 구슬의 중앙이 분금의 길한 도수에 맞지 않는다면 구슬의 좌우 각(角)의 길자(吉字)와 만나는 곳으로 하여 마땅히 흉한 곳을 피하고 길한 곳으로 가야 한다. 만약 구슬이 작아 다만 한 글자만 만나고 또 길한 도수에는 맞지 않는다면, 차라리 분금을 폐하더라도 구슬의 확실한 안대를 잃게 해서는 안 된다.
대저 분금의 법은 지극히 미묘하여 지금 사람들 중에 이해하는 자가 드물다. 더구나 120의 간지(干支)와 360의 도수(度數)를 어떻게 일일이 맞게 할 수 있겠는가. 진실로 그렇다면 어찌 아득하여 보기 어려운 이치를 지나치게 믿어서 분명하여 보기 쉬운 안대의 구슬을 잃게 할 수 있겠는가. 이는 십분 공경을 다하고 살피기를 다하지 않을 수 없는 부분이다.
또 혈의 깊이로 말하면, 지금 진토(眞土)를 얻은 것은 하늘이 준 것이다. 토색이나 토성으로 보더라도 더없이 좋은 품질이니, 칭찬하고 감탄하려고 하더라도 형용할 수가 없다. 그리고 또 내맥(來脈)이 그다지 넓지 않고 혈이 있는 곳에 이르러 비로소 풍만하게 뭉쳐지고 혈이 있는 곳을 지나면 또다시 작아진다. 다만 겉의 흙을 파헤치면 혈의 모양이 저절로 드러나는데 이는 달걀이 노른자위를 싸고 있는 형상이다. 단지 진토(眞土)가 엉긴 곳을 짚어 중심으로 혈을 파면 상하 좌우는 털끝만큼도 의심할 것이 없으나, 깊이에 그 적당함을 얻기가 가장 어렵다. 7자쯤을 기준 삼기로 이미 약속을 정하였지만 그때에 가서 더 파거나 덜 파는 것은 요컨대 알맞도록 할 따름이다. 만약 혹시라도 7자에 이르지 않고도 황색이 옅어지려고 하면 곧 중지하여야 하니, 대개 누런 곳을 뚫고 지나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만일 중심을 얻지 못한다면 차라리 얕게 할지언정 깊게 할 것은 없으니, 한 번 파고 뚫을 적마다 항상 이 마음을 간직하고 한 치 한 치 파 내려가면서 솜씨만 믿고 방심하지 말도록 하라. 혹 토색이나 토성이 깊게 팔수록 더욱 단단하고 단단할수록 누런빛이면 7자가 지나더라도 또한 무방하니, 이 두 가지의 말은 내 말을 기다리지 않더라도 이미 의논하여 정한 것이 있을 것이다. 지금은 금정(金井)을 파는 길일이기에 초조한 가운데 있다. 촛불을 밝히고 거듭 유시하니 경들은 마땅히 내 뜻을 잘 알아서 시행하라.” 하였다.
○ 이보다 먼저 혈(穴)의 깊이를 서운관(書雲觀)에서 10자로 정하였는데, 논란하는 자가 말하기를, “이는 오로지 성요(星曜)의 법수와 촌백(寸白)의 법수를 적용한 듯합니다. 그러나 혈의 깊이는 먼저 산 국세와 기맥(氣脈)으로 정해야 하고 다음으로 성요와 촌백의 법수로 그 길흉을 참작해야 하는데, 지세(地勢)를 버려두고 법수만을 따르는 것은 불가합니다. 지금 10자로 정한 것은 너무 깊을 우려가 없지 않습니다. 옛사람들이 깊이를 참작하여 척수(尺數)를 정하는 법이 네 가지가 있으니, 양씨(楊氏)는 가까운 계곡으로 정하였고, 유씨(劉氏)는 경내의 수위(水位)로 정하였으며, 채목당(蔡牧堂)은 사방 산세의 고하로 정하였고, 요금정(廖金精)은 성훈(星暈)으로 헤아렸는데, 음양의 법이 비록 일치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요컨대 생기(生氣)를 타는 것만은 동일합니다. 서시가(徐試可)가 말하기를, ‘양씨의 법은 가까운 과협(過峽)이 있는 농룡(隴龍)에 시행하면 합당하지만, 지룡(支龍)의 맥이 가까운 곳에 중지되거나 가까운 과협이 없는 높은 산에 이르러서는 또한 근거하기가 어렵다. 유씨의 법은 높은 산 위 험준한 형체에 사용하면 그르치게 되지만, 밭두둑처럼 작은 맥이 층층으로 나뉘고 농룡이 앉은 형체를 이룬 곳은 사용할 수 있다. 그리고 채목당의 법은 변괴가 심한 형국에는 맞지 않는 경우가 있으나, 정상의 산세에 사용하면 적당하다. 요금정의 법은 용의 입과 코가 있는 곳에 사용할 것이고, 혹시라도 경작(耕作)을 한 땅이라면 부합되기 어렵다’라고 하였습니다. 이 네 가지의 법과 서씨(徐氏)의 말을 근거로 하여 원침(園寢)의 산세와 지형에 적절하게 맞춘다면, 좌혈(坐穴)의 뒤는 곧 높은 산이고 가까운 과협이 없으며 또 밭두둑과 같은 작은 맥이나 농룡 형체가 아니므로 과협을 기준으로 정한다거나 계합(界合)을 기준으로 정하는 법은 지금 준용할 바가 아닙니다. 그리고 유맥(乳脈)은 거칠지도 않고 가늘지도 않으며 와면(窩面)은 볼록하지도 않고 오목하지도 않으며, 청룡과 백호의 높고 낮음이 극히 화평하여 서씨(徐氏)의 이른바 정세(正勢)와 반침 반부(半沈半浮)한다는 뜻에 합당하니, 마땅히 채목당의 법을 쓰고 요금정의 비결로 참작하여 깊지도 않고 얕지도 않게 중정(中正)의 혈을 파야 할 것입니다. 대저 8, 9자 이상은 깊은 데 속하고 5, 6자 이하는 얕은 데 속하니, 이것이 너무 깊게 파는 염려가 있는 까닭입니다. 대체로 마땅히 얕아야 하는데 깊게 파면 지기(地氣)가 위로 지나가고, 깊어야 하는데 얕게 파면 지기가 아래로 지나가니, 얕고 깊음을 적절하게 해야 풍수(風水)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꼭 맞는 법수를 잃고서 만약 저것이 이보다 낫다고 논하는 경우라면 차라리 얕게 하는 잘못을 범하는 편이 낫습니다.
한 가지 비유할 것이 있으니, 그릇에 물을 담아 그릇을 불 위에 두면 물은 곧 따뜻하게 됩니다. 반대로 불을 그릇 위에 두면 물은 차가울 것이니, 그 이치가 매우 분명합니다. 땅속의 기맥은 본래 살펴서 알기가 어려우니, 진실로 참되게 알고 확실히 보아 털끝만치도 틀리지 않고 한 푼 한 치를 찾아 정하는 사람이 아니면, 신중히 하고 또 신중히 하여 얕고 깊은 중간을 헤아려 취해야 ‘깊고 얕은 두 가지의 중간을 쓰면 꼭 맞지 않더라도 크게 틀리지 않는다’는 뜻을 잃지 않을 것입니다. 만일 성요(星曜)와 촌백(寸白)의 법수에 맞지 않는 것이 구애된다면 한 가지 방법이 있는바, 척수(尺數)는 기맥(氣脈)의 부침(浮沈)에 따라 헤아려 정하고 성요와 촌백은 치[寸]로 계산하여 길하게 맞출 것이니, 이것이 변통하는 활법(活法)이 됩니다.
그리고 채씨(蔡氏)의 사방으로 에워싼 산을 살피는 법은, 양혈(陽穴)은 건괘(乾卦)에 해당하는데 사방의 산이 혈의 본신과 높이가 같으니 이괘(離卦)의 형상입니다. 이괘의 중획(中畫)은 음혈(陰穴)이 되니 깊지도 않고 얕지도 않아야 합니다. 그리고 요공(廖公)의 성훈법(星暈法)은, 곧 호굴(胍窟)은 당연히 깊어야 하고 식돌(息突)은 당연히 얕아야 하는 것인데, 원침(園寢)의 혈성(穴星)은 평탄하니 얕지도 않고 깊지도 않게 해야 합니다. 이는 모두 옛사람의 지극한 법이고 중요한 의논이니, 이를 버려두고 달리 구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또한 한결같이 고집만 하여도 안 되기 때문에 토색(土色)의 변하는 것을 보고 즉시 파기를 중지해야 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러니 오직 그때에 가서 적절하게 하는 데 달려 있고 미리 척수의 한도를 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리고 겉의 흙도 지나치게 제거해서는 안 되며 풀뿌리만 제거하는 정도이면 좋을 듯합니다.” 하였다.
○ 9일(임진)에 새 원침(園寢)에 옹가(瓮家)를 만들고 봉표(封標)를 하였다. - 황토를 혈(穴)이 있는 곳에 평평하게 펴고 사면을 단단하게 쌓아, 곧게 다듬은 나무 6개를 옆으로 놓고 면포의 휘장으로 덮고 12곳을 단단히 봉하고 나서 봉표에 서사관(書寫官)이 ‘신은 삼가 봉합니다[臣謹封]’라고 쓰고, 도청(都廳)이 인장을 찍었다. 옹가(瓮家)의 춘연(春椽)이 안으로 모아진 곳에 전판(翦板) 두 끝을 매달고 전판 중앙에 둥근 고리를 붙이고 붉은 실을 세 겹으로 꼬아 가운데를 꿰어 끈의 끝에는 쇠를 달아 늘어뜨려 원침의 정중(正中)에다 봉하였다.
○ 총호사 김익(金熤)이 치계하기를, “지가(地家)가 분금(分金)을 중하게 여기는 이유는, 대체로 흉기(凶氣)를 소멸시키고 길기(吉氣)를 받아들이며 인력으로 신의 조화(造化)를 빼앗는 묘용(妙用)이 실로 여기에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지금 지사(地師)들의 얕은 지식으로 어찌 옛사람의 묘용을 꿰뚫어 알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지극히 조심스럽고 귀중한 곳의 주산과 안대를 살펴 좌향을 정할 때 이 법을 완전히 폐할 수 없기 때문에, 여러 지사들이 충분히 검토하여 윤도(輪圖)의 방위를 고찰하고 옛 책의 법례를 원용하여, 간략하게나마 공허한 곳을 피하며 길한 곳으로 나가는 뜻에 맞추어 큰 둔덕의 구슬과 쌍봉(雙峯)의 공간이 저절로 정중(正中)의 방향으로 들어오게 하는 것입니다. 이는 여러 지사들이 인력으로 돌려 옮기는 것이 아니고 실로 하늘이 좌향을 만든 것이니, 맞추려고 하지 않아도 맞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신혈(神穴)의 깊이에 대하여는 이미 전후의 연교(筵敎)를 받들었고 지금 또 이 특별한 유시(諭示)를 받들었으니, 신들은 삼가 마음을 다하여 지사들에게 신칙하여 한 번 팔 때라도 방심하여 지남이 없게 하고 한 치의 사이라도 다시 살펴 차라리 얕게 하는 실수를 저지르더라도 너무 깊게는 파지 않아 우러러 성상의 심려를 끼치는 일은 없게 할 것입니다.” 하였다.
○ 10일(계사)에 금정(金井)의 터를 다듬었다.
○ 11일(갑오)에 정광(正壙)에 금정기(金井機)를 안치하였다. - 안의 길이는 10자 6치이고, 퇴광(退壙)의 길이는 1자를 감하고, 내광(內壙)은 7자 2치 5푼이고, 나무의 넓이는 8치이고 두께는 6치인데 영조척(營造尺)을 썼다. 혈의 깊이는 주척(周尺)으로 9자이니 금정기의 아래 모퉁이를 한계로 하였다. - 총호사 김익과 금성위(錦城尉) 박명원(朴明源) 등이 치계(馳啓)하기를, “금정의 정위치 중앙에 먼저 겉의 흙 한 자를 걷어 낸 뒤에 5치가량을 파니 토성(土性)이 가늘고 윤택하고 차지며 단단한데, 토색은 순황색으로 윤기가 나고 깊이 팔수록 더욱 기이하여 지사들이 모두 처음 보았다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 12일(을미)에 금정의 바깥 4면(面)을 보토(補土)로 다듬었다.
○ 16일(기해)에 총호사 김익 등이 치계하기를, “광중을 파서 5자 8치쯤 이르니 토성(土性)이 더욱 차지고 윤기가 나며 토색은 순황색이면서 오색의 반문(斑文)을 머금고 금모래의 빛을 띠었습니다. 여러 지사들의 말이 주척으로 9자를 한계로 하고 파면 깊고 얕음이 적중하다고 하였는데, 신들이 보기에도 그렇게 여겨 혈의 깊이는 주척으로 9자로 하기로 정하였습니다.” 하였는데, 이틀 후에 김익이 서울에 올라와 등대(登對)하여 아뢰기를, “혈의 깊이도 이미 정하였고 이어 다듬는 일도 시작하였습니다. 토색은 팔수록 좋고 4자 뒤에는 토색이 2자에 비하여 더욱 좋았으며, 광중의 밑에 이르니 오색을 구비하고 정황색(正黃色)이 가장 많았습니다.” 하였다. 내가 이르기를, “구슬을 안대로 하여 빈 곳으로 향을 놓게 하니, 빈 곳으로 향을 놓은 밖에 또 몰래 읍(揖)을 하는 관성(官星)이 있다고 하던데 과연 그렇던가?” 하자, 김익이 아뢰기를, “과연 성상의 하교와 같았습니다. 또 청룡이 셋이 있고 백호가 셋이 있는데, 모두 원신(元身)에서 나왔고 거듭하여 감싸고 둘러 있으니, 이는 이미 골육(骨肉)의 청룡과 백호로, 달리 만들어진 청룡 백호의 좋은 것과는 비교가 안 됩니다.” 하였다.

이상은 혈(穴)을 짚는 시말(始末)과 일을 감독하는 대개를 쓴 것이다. 새 원침(園寢)에 진혈(眞穴)과 진토(眞土)가 있음을 내가 어떻게 억측으로 헤아릴 수 있겠는가. 멀리는 옥룡자(玉龍子)의 유기(遺記)가 있고 가까이는 윤고산(尹孤山)의 정론(定論)이 있었으니, 옥룡자는 신통한 지사이고 윤고산은 지혜로운 안목을 지닌 사람이다. 그렇다면 이는 당(唐) 나라 일행(一行)의 상지법(相地法)에서 시작하고 채목당(蔡牧堂)의 금정을 여는 법을 빌리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그 취득함이 기이하고 다행하였기 때문에 신중을 기함이 상세하고도 주밀하여 지극한 보배를 받들듯 실추시킬까 두려워하였고, 신령한 택조(宅兆)를 엶에 부응(符應)을 징험하였으니, 세속의 지사(地師)와 일반 사람들이 지나치게 조심하여 온 조정을 놀라게 하고 여러 사람을 놀라고 미혹되게 할 줄을 어떻게 헤아렸겠는가. 불씨(佛氏)가 말한 “일시에 제천(諸天)이 모두 놀라고 의심하였다.”라는 것이 바로 그날의 광경이었다.
너무나 다행스럽게도 하늘이 나의 충정을 일깨워 굳게 고집하며 흔들리지 않게 하여 몇 발자국 사이에서 진정한 토색이 처음에는 숨겨졌다가 끝내 드러나서, 이틀 사이에 위아래 사람들이 먼저는 울다가 뒤에는 웃었으니, 이는 하늘이 한 일이다. 어찌 사람의 힘으로 이루어졌겠는가. 천천히 또 생각해 보건대, 조화가 참여하는 모든 천하의 일에는 원래 순하게 이루어지는 이치가 없다. 때문에 용광로의 쇠를 백 번 달구려면 바람과 불의 더욱 고도의 정밀함을 거쳐야 하고, 솥에 있는 단약(丹藥)을 아홉 번 달이려면 고난을 거쳐야 이루어진다. 지난번에 일을 맡은 신하들이 내가 직접 내린 뜻을 잃지 않고 처음부터 잘못 파는 일이 없었더라면, 시종 아끼고 감춰 두었다가 때를 기다려 드러내는 뜻을 어떻게 징험할 수 있었겠는가. 그 의심나고 염려됨은 악몽(噩夢)에서 깨어나지 못하는 것 같고, 기쁘고 다행스럽기는 흐린 먼지를 완전히 씻은 것과 같다. 일을 꾀함에 있어 잘하고 잘못하는 것은 사람에게 달려 있으나 또한 조물주가 그렇게 시키는 것이니, 대지(大地)의 밝은 증거에서 미루어 알 수 있다.
○ 원침에 대한 점괘의 결과를 말하기를, “산수의 성정(性情)은 온전히 만두(巒頭)에 있는바, 금성(金星)의 만두로부터 아래로 18자에 이르기까지 왼쪽도 18자이고 오른쪽도 18자이니, 모두 합하면 36자입니다. 왼쪽에서 13자를 제하고 오른쪽에서 9자를 제하면 유두(乳頭)가 엉기고 간방의 기운이 아래로 늘어져 구슬의 정기가 턱 아래에서 정방(丁方)으로 매달려, 치우치지도 않고 기울지도 않으며 급하지도 않고 느리지도 않으니, 이는 실제로 정혈(正穴)의 이치입니다. 또 36은 천도(天度)에 응하고 18은 지지(地支)에 응하여 천지의 배합과 일월의 서로 비춤과 성신(星辰)이 정기를 모아 용기(龍氣)가 자수(子水)로 관통하는데, 자(子)는 바로 9의 수치이며 9는 양(陽)의 극치여서 밖으로 나타나니, 이것으로 미루어 보면 9개월 안에 꼭 자손의 조짐이 있을 것인바 나라의 큰 경사입니다. 또 괘체(卦體)로 논하면 지산겸괘(地山謙卦)가 되는데, 겸괘의 5효는 바로 복덕(福德)으로 세상을 유지시키는 것이니, 이로 미루어 보면 나라의 경사를 반드시 불러올 것인바 실로 억만년의 끝없는 터전입니다.
또 미방(未方)의 내고(內庫)와 병방(丙方)의 손사수(巽巳水)는 비유컨대 일용의 그릇과 같으니, 하나는 노인성(老人星)이고 하나는 사문성(赦文星)입니다. 이것으로 미루어 보면 성자신손(聖子神孫)의 수명이 끝이 없고 대대로 요순(堯舜) 같은 정치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또 건방(乾方)에는 주봉이 높이 솟아 있고 손방의 봉우리가 뾰족하게 빼어나 병자(丙子)의 임기(壬氣)를 내조(內助)하니, 이것으로 미루어 보면 30개월 내에 반드시 두 번 나라의 경사가 있을 것입니다. 간룡(艮龍)이 금기(金氣)를 띠니 일자천손(一子千孫)의 땅이고, 여러 봉우리가 우뚝하게 솟았으니 수복(壽福)이 함께 온전한 격입니다. 내당(內塘)의 금양(金羊)이 계갑(癸甲)의 영기(靈氣)를 받으니 수치가 19에 이르러 꼭 자손의 경사가 있을 것이며, 청룡이 몸을 도와 손방으로부터 안으로 병자혈(丙子穴)과 응하니 해(亥), 자(子) 두 해에 반드시 경복(慶福)의 상(象)이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또 이르기를, “25일(무인)에 땅을 파는데 용이 병방과 자방에서 들어왔으니, 요금정(廖金精)의 의논에 3년에 발복(發福)한다는 말과 우연히 부합되고, 미고(未庫)의 물은 계자(癸字)와 더불어 탐랑(貪狼)과 식신(食神)이 상생(相生)하여 수성(壽星)으로 돌아가 조화의 육담(六談)을 이루었으니, 이달이 지나고 다음 달에는 자손의 경사가 있을 것입니다. 산수의 성정은 온윤(溫潤)함이 크게 뚫려 사시(四時)와 함께 봄에 양기가 생기며, 두성(斗星)에 대한 설명은 일자천손이 계속 이어 만대에 이르고, 또 청룡이 몸을 돕고 손방의 봉우리가 밖에서 호위하여, 자손이 영특하고 문장이 뛰어나며 덕이 있는 군자가 대대로 이어질 것이니, 이는 지가(地家)의 큰 경사입니다. 그리고 산의 성품과 물의 정이 음과 양으로 배합하여 하늘과 함께 기운을 돌리고 기혈(氣血)이 풍만하니, 해묘미(亥卯未)가 국(局)을 이루는 해와 신자진(申子辰)의 기(氣)가 합하는 달에 반드시 먼저 효험이 있어 복을 더하는 경사가 있을 것입니다. 혈을 만드는 괘(卦)의 예가 겸괘(謙卦)의 육오(六五)이니, 복덕(福德)으로 세상을 유지하리라는 것에 대해 평생토록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하였다.

[주D-001]사수(砂水) : 풍수지리학 용어로, 사(砂)는 묘혈(墓穴)의 전후(前後)와 좌우(左右)에 있는 산을 말하며, 수(水)는 묘혈에서 보이는 물을 이른다. 《地理人子須知 卷5上 砂法總論》
[주D-002]간방(艮方)에서 입수(入首) : 풍수지리학 용어로, 묘혈에서 보아 간방(艮方)에서 산맥(山脈)이 들어온 것을 이른다.
[주D-003]분금(分金) : 시체를 광중(壙中)에 묻을 때 위치를 똑바로 하는 일을 말한다. 지상학(地相學)에서 사용하는 용어로, 육십갑자를 오행에 분배한 뒤 다시 둘로 나누는 방식인데, 분수(分水)ㆍ분화(分火) 따위로 일컫지 않고 분금(分金)이라고 총칭하는 까닭은 금(金)이 오행의 우두머리이기 때문이다. 《葬經翼 難解24篇》
[주D-004]득수(得水) : 묘에서 보아 처음 보이는 물을 이른다.
[주D-005]파문(破門) : 묘에서 가장 나중에 보이는 물을 이른다. 득파(得破)라고도 한다.
[주D-006]요금정(廖金精) : 송(宋) 나라 때 사람으로, 자(字)는 백우(伯禹)이며, 이름은 우(瑀)이다. 나이 15세에 오경(五經)을 통달하였으므로 사람들이 그를 요오경(廖五經)이라고 하였다. 특히 풍수지리학에 정통하여 금정산(金精山)의 선지(善地)를 얻고는 스스로 금정산인(金精山人)이라 일컬었다. 저서에 《구성혈법(九星穴法)》이 있다. 《四庫提要 卷111》
[주D-007]양균송(楊筠松) : 당(唐) 나라 때 사람으로, 자(字)는 숙무(叔茂)이며, 풍수지리학에 정통하였다. 희종조(僖宗朝)에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에 이르고 영대(靈臺) 지리에 관한 사무를 맡았다가, 황소(黃巢)가 난을 일으켜 대궐에 침입하자, 삭발하고 곤륜산(崑崙山)으로 들어갔다. 뒤에 풍수지리설로 행세하였다. 저서에 《의룡경(疑龍經)》, 《감룡경(撼龍經)》 등이 있는데 감여서(堪輿書)의 종주가 된다.
[주D-008]2위(位) : 곤신(坤辛)과 건술(乾戌)을 말한다.
[주D-009]주성(主星) : 주산(主山)을 말한다.
[주D-010]5월과 9월의 변고 : 당시 왕세자인 문효세자(文孝世子)가 5월에 세상을 떠나고, 그의 생모(生母)인 의빈(宜嬪) 성씨(成氏)가 9월에 세상을 떠난 일을 가리킨다.
[주D-011]후산(緱山)의 …… 않고 : 주(周) 나라 영왕(靈王)의 태자(太子)인 진(晉)이 일찍이 백학(白鶴)을 타고 후씨산(緱氏山) 꼭대기에 머물렀던 데서 온 고사(故事)로, 태자의 거가(車駕)를 이르기도 하며, 또 죽음을 완곡하게 표현하기도 한다. 여기서는 문효세자(文孝世子)가 세상을 떠나 다시 돌아올 수 없음을 가리킨다.
[주D-012]북두성(北斗星)의 …… 떨어졌습니다 : 아름다웠던 문효세자의 생모인 의빈 성씨의 죽음을 가리킨다.
[주D-013]천보장(天保章)을 …… 축사(祝辭) : 천보는 《시경(詩經)》 소아(小雅)의 편명인데, 모서(毛序)에, 아랫사람이 윗사람에게 보답한 시라고 하였다. 화봉인의 축사는 《장자(莊子)》 천지(天地)에 나오는 내용으로, 요(堯)임금이 화(華) 땅을 지날 때 그곳의 수봉인(守封人)이 요임금을 수(壽), 부(富), 다남자(多男子)로 축원하였다는 데서 온 말이다. 위의 두 가지는 모두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위해 축원하는 내용으로, 여기에서는 백성들이 정조(正祖)를 위해 축원함을 가리킨다.
[주D-014]오렴(五廉) : 오국(五局)의 염정방(廉靜方)에서 득(得)이나 파(破)하는 것을 말한다. 오국은 금ㆍ목ㆍ수ㆍ화ㆍ토이고, 염정방은 사병방(死病方)을 이른다. 금국에는 건(乾)ㆍ해(亥)ㆍ임(壬)ㆍ자(子), 목국에는 손(巽)ㆍ사(巳)ㆍ병(丙)ㆍ오(午), 수국에는 계(癸)ㆍ축(丑)ㆍ간(艮)ㆍ인(寅), 화국에는 곤(坤)ㆍ신(申)ㆍ경(庚)ㆍ유(酉)가 염정방이고, 토국은 수국과 같다.
[주D-015]식양(息壤) : 본래는 진(秦) 나라 때의 읍명(邑名)으로, 전국(戰國) 시대 진의 무왕(武王)이 장수 감무(甘茂)로 하여금 의양(宜陽)을 정벌토록 하였는데, 이때 감무는 왕이 도중에 후회할까 염려하여 식양에서 굳게 맹세하게 하였다. 후에 왕이 정벌에 대해 회의를 느끼자, 감무가 글을 올려 “식양이 저기에 있습니다.”라고 한 데서 유래하여, 굳게 맹세한 약속의 뜻으로 쓰인다. 《戰國策 秦策》
[주D-016]금정(金井) : 묘를 쓰려고 판 구덩이, 또는 무덤의 속 구덩이를 팔 때에 그 길이와 너비를 정하는 데 쓰는 기구인 금정틀[金井機]을 가리킨다.
[주D-017]이순풍(李淳風) : 당(唐) 나라 때 사람으로, 어려서부터 많은 서적을 두루 읽어 천체(天體), 측산(測算)과 역산(曆算)에도 밝았다. 또 태종조(太宗朝)에 태사국의 관원으로 혼천의(渾天儀)를 제작하여 창락현남(昌樂縣男)에 봉하여지기도 하였다. 저서에 《법상서(法象書)》 7편, 《전장문물지(典章文物志)》, 《기사점(己巳占)》 등이 있다. 《新唐書 卷204 李淳風列傳》
[주D-018]내명당(內明堂) : 묘 앞의 평평한 곳으로, 청룡(靑龍)과 백호(白虎)가 감싸고 있는 안쪽을 이른다.
[주D-019]채목당(蔡牧堂) : 송(宋) 나라 때 사람으로, 자(字)는 신여(神與)이고 이름은 발(發)이며, 채원정(蔡元定)의 아버지이다. 만년에 호(號)를 목당노인(牧堂老人)이라고 하였다. 박학강기(博學强記)하였는데, 출입을 끊고 오로지 독서와 자녀 교육에 전념하였으며, 풍수지리학에도 정통하여 저서에 《발미론(發微論)》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