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고향 忠義 고장 宜寧/조선왕조실록 의령기록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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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베베1 2013. 6. 25. 00:00


명당 의령향교 자리

그 분이(1)[각주] 황덕유 의령 원님이 
“향교 여, 그 공자 맹자 모시는 곳에 청(마루) 밑에다 자기 아부지 해골로 파다가 묻어라.”
캤거든. [조사자 : 아 아, 남씨를 보고?] 남씨들 보고 남씨 중에 조금 거석한 사람, 출입하는 사람을 그 군(郡)에 출입하는 사람을 보고. 이 지금 의령 향교 터 저기 유명하게 좋다 쿠데. 우리는 몰라도 우리는 산서(山書)에 대해서 우리는 백지거든. 모르는데, 그래 그 자기, 그 황덕유 황군수
그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서 자기 아부지의 해골로 파다가 공자, 맹자 모시는 그 밑에다가, 밤으로 지키는 사람이 없은꺼네, 호미로 파가지고 비밀로 자기 아부지의 해골로 갖다가 묻었어.
묻어 놓고 딱 나이꺼네 저녁마장(마다) 자기 아부지가 꿈에 나타나가지고,
“야아, 나는 몬 있겄다. 날로 속히 자리를 욍기 도라(옮겨 달라). 매일 같이 나로 엎어 놓고 궁딩이를, 볼기를 해초리로 가이 뚜드리 쌓아서 나는 못 있겄다.”
그래, 그 황덕유한테 가서 이야기로 했어.
“하이꺼네 할 수 없구나! 대인들을 모시 놓은 청 그 밑에다 갖다 놓은께나 대인들이 꿈에 나타나가지고는 너거 아부지 혼령을 때리는 갑다. 할 수 없다. 그 뫼로 파 내라.”
그 뫼 파가지고 고(그) 옆에 썼다 쿠데. 그기 내나(알다 싶이) 그 뫼라 쿠데. 그래가지고 할 수 없어서 그 뫼로 파냈어. 향교 청 밑에다가 저거 아부지 묘로 써 놨다가 파냈다 쿠데. 우리 옛적 어른들이 그런 말로 해서 우리도 알제, 나가 실지 본 거는 아이지마는.



제목 황덕유 원님과 자수애
테잎연번 [의령읍 설화 58]
음성위치 T. 의령 11 뒤
채록지 중동
채록자 정상박, 김현수, 성재옥 조사
구연자 남길우
출전 한국구비문학대계 8집 10책
출전페이지 189 ~  191
설명 *[설화 57]이 끝나고, 제보자가 풍수 노릇도 한다는 것을 알고 ‘웅천 수중명당’에 관해서 이야기를 청했더니 자기가 아는 대로 구술했으나, 주인공들도 모르고 자신이 없는 구술을 했으므로 정리하지 아니했다. 이어서 의령의 풍수지리에 관한 것을 물었더니, 이 설화를 구술했다.*
본문 
아까(먼저) 이야기와 같이 황덕래씨가(1)[주]황덕유의 와전인 듯 의령 원을 부임해 가지고 산형과 지형을 보고, 이 의령 자굴산( 崛山)이 말이지 이쭉은 등더리고 지수애 사람으로 치몬 이쪽은 등이고 저쭉은 배라.


[190 쪽] 

반대쪽이 배인 때문에 물론 저쪽에 배가 돼가 아듬고 있는 데는 물이 흔전하지만(흔하지만), 이쭉은 물이 귀하나 특히 어데 요지로 잡으몬 물이 안 있겠나 하는 심정은 있었어.

있어가지고 낮우는(낮에는) 만약에 그리 하다가 허사가 되고 보몬 자기 위신도 있고 이래 밤에 나갈 작정하고 큰 호미로 하나 치았다 쿠는 기라.

큰 호미로 하나 치아가지고 직원들 모르기 밤에 살짝 갔어. 한 번 건디러 본 기라.

[호미로 땅을 파는 흉내를 내면서] 여어(여기) 지수애라고 있입니다. [조사자 : 지?] 지수애, 못 지짜(池), 물 수짜(水). [청중 : 동네 이름인가?] 아입니다. 이 [청취 불능] 대가리라요. [조사자 : 지수애?] 애라고 무싄 잔고 모리겄고. [조사자 : 어디쯤에 있어요?] 지금 한 오백 메타 올라가몬 있지. [조사자 : 어느 쪽으로 올라갑니까?] 바로 서북간으로 올라가지. [조사자 : 산등성입니까?] 아입니다. 바로 들입니다. 그것이 고 부근이 의령 상수도 수원지가 되어 있지. 거게 인자 물론 세기 쪼루몬(졸이면) 가례(嘉禮面) 동네 그만 집집 새미물이 다 떨어지삐지. 그래가지고 헤지기(헤쳐) 봤다 말이지. 참 중 머리 모양으로 폭폭 솟아 올라오는 기라.

그래서 인자 한 군데 솟는 것 보고 여게 저게 전부 다 판께 모두 다 솟아. 그래 얼안이 이삼 백 평 되지. 물 나는 자리가. 그래 인자 그거로 아무도 몰랐거든. 본 땅보다 한 일 메타 낮아 있입니다. 그거로 보고 자꾸 팠거든. 그래도 물이 솟아 올라오거든. 물이 안 솟아 나몬 그 이상 날 수가 없고, 솟아 나는 거는 그냥 파몬 나오고, 저쭉 갈래로 몬 빠져 나가서 솟거든. 더 파몬 더 날 수가 있는 기제.

그래가지고 이 어른이 밤에 남도 모르게 혼자 가서 도구로(고랑을) 쳤어. 물이 없을 것 겉으몬 되서 못 쳤을 긴데, 물이 밀고 내려 오니까 글어만 제친 기라, 양쭉을.

그래 의령, 그 때는 참 의춘이지, 칠곡(七谷)에 동헌이 소재지가 돼가 있고. 그래 인자 지방 지방 백성들이 아침에 나와 보니 없는 보(洑)가 하가


[191 쪽] 

나 생깄어. 그래 인자 요(여기) 지금 시장통 바로 울로는(위로는) 아무리 대한이라도 모를 심읍니다. [조사자 : 아 아, 지수애 때문에?] 예, 지수애 때문에.

그들이 그렇게 되기 때문에 옛날 그 재로 매긴다, 안 매긴다 쿠는 거는 일동(一洞)을, 일면(一面)을 치고도 한 군데 잘 먹인데 있으몬 재로 안 주더랍니다. [조사자 : 재가 뭐입니까?] [청중 : 농사가 잘 못 된 것을 말합니다.] 가물아 한재(旱災)를 받았다 말입니다. 재앙 재짜(災). 그래가지고 저 들이 수풍년이 없이 잘 먹는 때문에 옛날부터 의령면이라 쿠는 데는 재가 없었어. 그런 전설이 지금 내려 오고….







원님 아들과 의령 재동(才童)
테잎연번 [의령읍 설화 39]
음성위치 T. 의령 9 앞~뒤
채록지 중동
채록자 정상박, 김현수, 성재옥 조사
구연자 남길우
출전 한국구비문학대계 8집 10책
출전페이지 145 ~  147
설명 *[설화 38]이 끝나고 일동이 점심을 시켜 먹은 뒤에 제보자가 들어왔다. 남경 선생님이, 제보자가 이야기를 잘 한다는 소문을 듣고 사람을 시켜 불러온 것이다. 처음에는 허백영 선생님이 어제 구술한 ‘봉덕산과 남산’ 전설을 보충하여 이야기 하는 것을 듣고 있다가 “이야기를 조금 할 줄 안다.”고 하면서 ‘황덕유 의령 원님’을 구술하고 이어서 이 이야기를 구술했다. 청중은 유식하고 재미있는 이야기라고 하면서 흥미롭게 들었다.*
본문 
가례면(嘉禮面) 갑을리(甲乙里)라 쿠는(하는)데서 김씨네 문중에서 말이지 재동(才童)이 났다 말이 있어. 재동이 아주 참 기특한 재동이 났다.

이래 됐는데 그래 나이로 몃 살로 묵었노(먹었느냐) 하이, 여덟 살로 묵었어. 여덟 살로 묵었는데, 역시 말이제 즉시 부임한 군수의 자석아아가 여덟 살로 묵어. 나도 그런 연령이 동갑(同甲)이 되는 자식이 있으니 불러 보겠다 이래가 불렀다. 그때 애명(兒名)으로 그 재동이가 김필선이라. 그 아들 이름은 김병두고 말이제. 지금 그 아들은 살아 있읍니더. 그래서 인자 불렀다 말입니다. 그 재동이로 말이지 쾌자로 입고 왔더라 말입니다. 그래 인자, 떡 인사로, 집에서 보낼 때 물론 인사로 많이 안 시키겄입니가. 인사로 하고 이랬는데, 그래 졑에 앉아(앉혀) 놓고,

“내가 무린가(無理인가) 이건 모리지마는 네가 재동이라는 말을 듣고 내가 즉시 청했는데, 네 재동이몬 의령(宜寧) 경(景)을 두고 글 한 바리 짓겄나?”


[146 쪽] 

캤다 말이지. 여덟 살 묵는 삼척 동자가,

“예, 지이(지어) 보겄입니더.”

뭐 운짜(韻字)도 뭐도 없고, 의령 경을 두고 말이제. 그래 인자 지필로 잡으라 쿠는 기라. 그래 지필로 잡았다 말이제.

“남산은 고천척이요(南山高千尺).”

남산은 천척이나 높고,

“전계는 장만리라(前溪長萬里).”

앞 시내는 만리나 길었더라.

그래서 인자 그 다음 귀가 머신 고 하이 의령(宜寧) 함안(咸安) 경계 강에 솥바우라고 있입니다. 똑 솥겉이 생겼제.

“석정은 난작반이요(石鼎難作飯).”

돌솥은 밥을 짓기가 에럽고, 고 밑에 내려 가몬 인자 강주(江州)라고 있입니더, 강주.

“강주는 불견인이라(江廚不見烟).”

정지가(부엌이) 강이 됐으이 연기는 볼 수 없거든.

그러니까, 인자 재미가 있제. 원님 아들 여덟 살 묵는 애가 말이제, 그애도 재동인데, 원이 그 아들 실력을 몰랐는 기라. 원이 얼칙이(어처구니가) 없는 기라. 여덟 살 묵는 애가 말이지, 그래 맨들어 놓으이 말이제 탄복을 하거든.

“그래, 아버님은 그 글로 그렇기 잘 지있다고 탄복을 합니까 ? “

그런 말로 하거든.

“그래 네는 그리 짓겄나?”

“글로 그리 지으몬 가난해서 못 씝니다.”

“그라모(그러면) 글로 곤치야 되겄나?”

“그러모, 글로 곤치야 되거로요.”

곤칬다 말이제. 어찌 곤칬는고 하이,

“남산은 고천척이요(南山高千尺).”


[147 쪽] 

고냥 고대로라.

“동계는 장만리라(東溪長萬里).”

전(前)짜로 곤치서 동녁 동(東)짜로 맨들었거든. ‘석전은 난작반이요’ 한 것을,

“석정은 사작반이요(石鼎沙作飯).”

모래로 밥을 짓는다 캤다 말이제. 그래 인자 배껕짝(外句)은 ‘강주는 불견연이라.’ 한 기거든. 본대. [테이프 뒤집음]

“강주는 수여연이라(江廚水如烟).”

그런께나 인자 전계(前溪)보담도, 남산(南山)이라 캤으이 동계(東溪)가 경(景)이 안 맞십니까? 첫 귀에 인자 ‘석정은 난작반이라.’ 캤거든. 돌솥에는 밥을 짓기 에럽다 켔거든. 그거로 지을 수는 없는 기거든. 그러니까 가난해서 못 씐다. 솥에 밥을 안 지은께나 물론 가난한 건 사실 아입니까? 모래밥을 지어야, 모래도 바람에 떨어지몬 밥겉단(같단) 말입니더, 허옇이. ‘강주는 물이 연기와 같더라.’ 그러니 오로지 정지는 밥을 해야 되는 기고, 연기를 내야 되는 기고, 솥은 밥을 해야 되는 것 아입니까? 밥을 못 짓게 되고 연기가 안 나니 말이제 가난한 건 틀림없는 거 아입니까? 그래서 글로 갖다가 그리 곤칬어. 그래서 지금 그 인자 김필선씨 후예가, “우리 선친이 말이야, 그만치 내 놨길래 곤칬지 넘(남) 해 놓은 거는 고치기 안 숩나(쉽느냐)? [일동 : 웃음] 본대 안 지있으모 그리 안 된다.”

그런 말로 우리 친구찌리(끼리) 하고 있입니더.



제목 의령 강효자(姜孝子)
테잎연번 [의령읍 설화 31]
음성위치 T. 의령 4 뒤
채록지 중동
채록자 정상박, 김현수, 성재옥 조사
구연자 권대도
출전 한국구비문학대계 8집 10책
출전페이지 89 ~  90
설명 *앞 설화가 끝나고 인물에 대하여 물었더니 이 효자 전설을 이야기하였다.*
본문 
효자가 인자 그때 애릴 땐데 말이지, 애릴 땐데, 그 어마니가 병이 났어. 세간에, 유곡면(柳谷面) 세간(世干)(1)[주]慶南 宜寧郡 柳谷面 世干里이거든. 세간에 거어(거기) 의원이 좋은 의원이 있어. 있다고 인자 말을 들은 기지. 있는데 그래 그 아아(아이)땐데, 애릴 아아 땐데, 그래도 뭐 그렇지 안으이 그렇지. 그래 어마이 병 낫울라고(낫게 하려고) 약을 지이로 갔다 말이지. 그런데 그 살기가 어렵던 모양이지. 그러니꺼네 여어서 많이 그런 참 효자설이 많이 무슨 일이든지 있었길래 그렇지.

거어(거기) 간꺼네 냇물이 많이 내려왔는데 말이지, 각중에(갑자기) 비가 와가지고 많이 내려가는데, 황토물이 내려와 건너 갈 수가 없다 말이지. 그 내로(시내를) 건네야 인자 세간으로 가거든. 여기서 가몬(가면).

가는데 그래가 아아가 마 거기서 인자 마 강효자 아아가 대성통곡을 하는 기라.

“우리 오매가(어머니가) 병환이 나서 지금 가히 사곙(死境)인데, 못 낫우고, 그런께 여기 와 약을 지어 가몬 낫을끼라 카는데, 하늘이 날로(나를) 갖다가 몬(못) 가구로 하는 모양인갑다.”

고. 마 통곡을 하고 한께네 그래 냇물이 갈라져 뿠다 카네(버렸다 하네). 말랐다 카네. 냇물이 새 갈라져 뿌려. 그라고 나서 본께 냇물이 중간에 끊어져서 새 틔있어. 그래 건너갔다.

건너가 가지고 약을 지이가지고 온꺼네 또 냇물이 또 그렇더라고. 그래 그기 안자 나라에 거석이 돼가지고(2)[주]朝庭에 보고되어서 그래 그 다른 효자 거석도 돼던가 모르지만 그기 제일 큰 효자 거석이라고. 그래가지고 나중에 효자문 꺼정 세우고 마 그랬다 카는 기라.





제목 의령 북실 장자못
테잎연번 [지정면 설화 40]
음성위치 T. 지정 6 뒤
채록지 성산리 상촌
채록자 정상박, 김현수, 성재옥 조사
구연자 박연악
출전 한국구비문학대계 8집 11책
출전페이지 475 ~  477
설명 * ‘중 괄세한 이야기’를 물었더니 좌중의 사람들이 이야기를 주고 받았다. 그러던 중에 제보자가 이 대표적인 의령의 장자못 전설을 구술했다. 청중들도 잘 아는 곳인 양 참견을 많이 했다. *
본문 
옛날에 그래 저 의령 북실 들판에, 들판에 장자가 사는데, 참 도사중이 그 놈의 집 독하다 소릴 듣고 동냥하러 왔는데, 동냥 도라 쿤께(달라 하니까),

“우리가 거구하이 살아도 동냥 안 주(주워) 봤다. 머슴아, 쇠밭 거름이 나따나 한 소시랑(쇠스랑) 찍어 주라.”

쿠거든. 그래 그 소리 듣고 며느리가 물동우(동이) 안에다 쌀로 한 바가치 떠 옇어갖고(넣어서) 샘미 가 나오미 받아 가라고,

“대사님 받아 가소.”


[476 쪽] 

주었거든. 그래 참 대사가 하는 말이,

“니 살라 카거들랑 너거 집을 돌아다 보지 말고 내 따라만 오이라.”

그러 쿠고 대사가 앞에 가거든. 가는데, 그래 참 안 돌아 볼 수가 없는기라. 몬 돌아보라 하는 거로 희끗 한 번 돌아본께 말키(모두) 쏘이(沼가) 돼 갖고 저이 집이 마 전부 쏘(沼)이라.

그래 그 대사가 데리고 가다가 지금 저 함안(咸安) 맹노 우에 거게(거기) 애기당골이라고 산도 쪼만큼 낮윽한데 거게 산이 있거마는. 우리 그 산에 그 쑥 뜯으러 가몬 가 봤거든. 똑 사람매이로(처럼) 요래 탁 돌로 가 맨들어 탕(像)을 기리 놓고 돌로 가이고 똑 요래 방매이로 요래 오다(모아)놓고 고 도사중이, 그 호박도 있고 고도 있고 이 평풍매이 해 놓고 고따가 그 장자 며느리를 사람을 갖다가 돌맹이 맨들었어. 딱 이래 놓고,

“니는.”

[청중 : 돌로 사람 맨치로 맨든 기거마는.] 응, 요래 놓고.

“니는 돌아본 죄로 해서 그래 저 거석하러 몬 간다. 내 따로(따라) 그저 득천하러 몬 간께네, 요게(여기에) 요래 있다가 애기 못 놓는(낳는) 부녀 와서 공들이거던 애기나 태(태워) 주고 그래 있거라.”

쿠며 똑 사람매이로 해서 돌이 그래가 있데, 있는데, 이 손들이(사람들이) 가서 돌로 가(가지고) 돌로 찍어서 마 얄궂이 뿌사(부셔) 놓고 이렇데, 그 중년에 본께네. 참 처음에 영험 있어. [청중 : 아무라도 그 자석 몬 놓는 사람 가서 불공 드리면 아아(아이) 놓는다 쿠거든.] 불공 드리면 고마 아아 놓고, 저 함안 맹노라고, 고 애기당골이라고 탁 당골겉이 굴로 해서 이래 놨데요. 그래 이눔우 자석, 장자 자석 이기 구리(구렁이가) 돼가이고 물이 들몬 거(거기) 가는 기라.

지 안 사람(부인) 그 우해(모셔) 놓은 데 거(거기) 그래 인자 한 번 한해 물이 큰 물이 인자 턱 거꺼지 꾀 올라가도록 들어논께, 큰 구리가 누우런 놈이 한 바리 기(기어) 오더라 캐. 물로 건니 와가지고 선질로(곧장) 그 산을 올라가디 그 참 사람겉이 해 놓은 그 탕(像)을 갖다가 고마 휘휘


[477 쪽] 

감고 누우가 있더라 캐, 그 구리가. 그런데, 그 구리가 누가 그러 쿠는데, 장자 자석 죽은 구리라, 넋이라. 그라고 나서는 고마 안 가는 기라. 구리가 그 감고 나서는 아아를 못 태아 주는 기라. 부정해서 안 되는 기라.

그래 고마 지금은 마 그 돌 전부 호박돌도 빼, 그 밑에 강에다 던지 삐고 그 여자 맨들어 놓은 그 돌도 말키 때리 뿌사 삐고 마 애기당골이고 뭐이고 없다 거어. 공도 아무도 드리로 안 가고, 우리 쪼맬 적에는 거어 공 들이 쌓어. [조사자 : 그런데 그 늪이 어디 있읍니까?] 늪이 잖애 그 길 늪이 [청중:강 아래….] 강이 잖애(아니라) 그 의령 북실 들판에 있었거든. 장재 저 몸채(장자댁 큰채) 늪이 찰 말로 마 이래 내리다 부면, 마 지붕 뚜리 비매이로 시퍼렇고 통시(변소) 늪이라 쿠는 거는 좀 얖으고(얕고) 이래 뒤비지고(되바라지고) 새미 늪도 짚으고 또 행낭 그 사랑채 늪고 좀 짚으고 이런 기 늪이 마 가우 댓 채 되지. 뭐 펀득 펀득 펀득 펀득 돌아가미 이리 있는데, 이상하게 있어, 그 늪이. 그런데, 지금 그 늪 다 메아(메워)삤어. 싸악 다 메우고 경지정리 해가지고 논이 다 됐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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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음성통합상세화면]
제목 의령 왕띠가 생긴 까닭
테잎연번 [정곡면 설화 45]
음성위치 T. 정곡 8 앞
채록지 중교리 장내
채록자 류종목, 성재옥 조사
구연자 한진식
출전 한국구비문학대계 8집 11책
출전페이지 208 ~  211
설명 * 군내의 전설로서 기억되는 것이 없느냐고 묻자, ‘왕띠 이야기’를 하겠다고 하며 시작한 것이다. 통인의 딸이 학의 도움으로 왕비가 된 사연을 간직하고 있는 것으로, 의령읍의 전설이다. *
본문 
의령이, 그 저 의령읍내 지금 의령읍이라고 이래 돼가 있는데, 그래 지금 현재 그 덕실은 그 덕실 카는 데, 덕곡면(德谷面)입니다. 그라머 그 의령 그 저 배산봉 그 밑에는 그 풍등면입니다.

그 두 면을 한테 합치가지고 의령읍이 됐는데. 그라머 의령 지금 군청


[209 쪽] 

소재지 그 뒤로 그 쭉 상봉면 있는 데 그리로 해서는 ‘왕뒤’라. 보통 보머 마 ‘왕 뒤, 뒤’ 칼라 카이 안 돼서, 그거 마 발음이 ‘왕띠, 왕띠’ 부르는데.

거게서 임금이 났다고 ‘왕’이 아이고, 거이 왕비가 하나 났답니다, 왕비. 부사 딸이 왕, [앞 말을 고쳐] 부사 딸이 아이고, 저 부사, 어떤 부사시대에 통인의 딸이 왕비가 됐답니다.

그라먼, 이 통인의 딸이 과년해가지고, 아주 그 어떤 관상쟁이가, 그 중이 지내감서 통인 보고 에,

“집에 따님을 잘, 그 에릴 때부터 비단옷을 입히고, 에 아주 그 잘 참 외부 출입도 말고, 참 마 우유를 가지고 목(목욕)을, 목욕을 감기고, 감기고 말이지, 이래가지고 하머, 잘 키아 내머 왕비가 될 수 있다.”

이런, 그 중한테 그 참 뭐 참 뭐 관상에 대한 그 인자 호언을 듣고, 전언을 듣고, 그 딸을 잘 키웠더랍니다, 그 통인이.

키았는데, 이 처녀가 낮으로는 도저히 안 나오고, 그 세수로 하더라도, 머리를 감고 이래 하더라도 그 저녁에 해질 무렵에 이래 하는데, 그래 참 하루는 나와서 그 세수를 하는데.

고 때 고 당시 세수할 당시에 국가에서 그 상처로 했어요. 하고, 간택을 할까 우짜꼬 이래 간택 중에 있는데, 그래 인자 국가에서는 그라머 기다리고 있지요. 마 인자 그 있는 중에, 그 저 참 말하자머 그 그 국, 국모로 갖다 지금 현재 수색하는 중인데.

그래 이 처녀는 그 날 저녁에 그 반지를 벗이(벗어) 놔 낳고(놓고) 그 세수를 했답니다. 세수를 하고 머리를 깜기(감게)됐는데, 그래 인자 반지를 갖다가, 결국 말하자머 들올 때 그 간수를 해 가 들오야 되는데, 간수를 안 하고 들왔더래. [조사자 : 놔 두 뿌고?] 놔 두 뿌고 들왔는데, 그 인자 새벽 돼서 그 반지를 기억이 나가지고 다부(도로) 찾으러 나가이 반지가

없더라 이기야.

반지 잃었뿠다고 탄식을 하고 이래 있는 중에, 한 열흘 이래 있은께,


[210 쪽] 

국가에서 통보가 왔어요. ‘그 누구 딸이거나 이 반지에, 반지 임재를 찾아…. 이 반지가….’ 그 전부 전국적으로 방이 붙었는 기라. ‘이 반지 잃어뿐 사람은 서울로 올라 오라.’ 이래 된 기라. ‘만약 처녀 겉으머 국가가 간택한다.’ 이래 된 기라.

그란께 마침내 그 의령 그 ‘왕띠’에 통인의 딸이라. 그래서 그 인자 마마 숩기(쉽게) 말해서 마 그라머 뭐 가가지고 왕비가 됐겠지.

그래 그 아바씨(아버지)가 그 딸로 보고 그래 참,

“가시거들랑.”

왕비가 돼 뭐, 뭐, 뭐 지명이 됐은께 [조사자 : 그렇지.] 참 뭐 암마(아무리) 부녀지간이지마는 말을 존경해야 안 되겠읍니까? 그래 인자,

“가시거들랑 수심(愁心)을 쪄라(띄어라).”

이리 된 기라.

“그라머 아버님, 그라머 뭣입니까? 뭣이 해결해 나갈 끼 있읍니까?”

“우리 성이, 야, 저 저 심가(沈哥) 아이가, 응? 심간데, 그 청송(靑松) 가먼 말이지 우리 고훈(?), 아, 우리 그 저, 저, 재실 말이야, 재실 앞에다가 우리 할아버, 니기에(너에게) 할아버지가 바로 그 처마 밑에 물 떨어지는 데 말이지 뫼로 썼다. 그 성봉(成封)을 몬 했다.”

이기라. 아, 그거 저, 저, 저 청송 그거 고을 그거 재실이 아이라 향굡니다. 향교 거어 막 묻었는데,

“그래서 니가 나기는 났다.(1)[주]그 先祖 山所의 정기로 네가 태어나긴 태어났다. 또 여어(여기) 왕띠에도, 여어도, 여어도 그기 참 지세도 좋고, 그래 내가 여어 와서, 내가 와서 통인을….”

통인이 그 전에 월급쟁이가 돼 놓은께네 전근이 있었던 모양이지요.

“그래 청송서 여어 여꺼지 내려와서 그래 했는데, 그래 수심을 찌먼 그 반다시 상감께서 안 묻겠나? 물을 때에 그 당신이 대답을, 그 참, 참, 마마께서 대답을 하기로, 그래 이러이러한 사정을 이약을 해라. 하면은, 하게 되면은 반다시 거어 향교 뜯어 내고 거어 성봉이 안 되겠나,


[211 쪽] 

할배 뫼로(처럼).” [웃음]

그래 참 가서 그 그 심비(沈妃)가 가가지고 수심을 찌고 이래 있었어요 말대로. 그래,

“청송에 우리 고향인데, 거어 향교 처마 물 떨어지는 데에 우리 할아버지 해골이 들어가 있읍니다. 그 향교를 욂기고, 이전을 하고, 거어 성봉을 해 주시머 어떻겠읍니까?”

그라머 그 국왕의 국명인데 뭐 뭐…. 그래 청송 심씨네들 거어 그 심비가 하나 났어, 역사에 보마. 예, 하나 났읍니다. 그 인조 후비라 카는 말도 있고. 예, 그 인조, 인조 초비(初妃)가 한, 한, 한(韓氏)인데, 한빈데(韓妃인데), 그 후비가 심비란 말도 있는데, 그 통인의 딸이라.

그래 인자 학이 물고 가서 그 배필을 맺어 줐다. 학이 그 반지를 물고 갔어. [조사자 : 아, 학이 물고 가서.] 예, 학이 물고 갔어. 녜, 그 반지 잃어뿐 거는 학이 물고 갔어.

[앞의 이야기를 다시 정리하여] 그러이 국상(國喪)이 났다. 마침 고 날 저녁에 그 참 세수로 했다. 반지로 잃어뿌고, 잊어뿌고, 잊어 묵고 들왔다. 그래 학이 인자 그 그 천우신조(天佑神助)로써 말이지, 그래 인자 궁중에다 그 반지를 떨어뜨맀어. 떨어뜨린께, 그라고 나서 임금님이 그 반지로 보고,

“이 반지 임재를 찾아가지고 내 배필이다. 그래 전국적으로 수배로 해라.”

이래 돼가지고 그래 인자 그 심비가 됐다 카는 그런 전설이 있읍니다. 그 때문에 그 인자 ‘왕띠, 왕띠’ 캅니다. 왕비가 났다고 왕띱니다. [웃음]








 G002+AKS-UR20_Q_2408_1_02A
 [음성통합상세화면]
제목 의령 한지의 발생 내력
테잎연번 [봉수면 설화 2]
음성위치 T. 봉수 1 앞
채록지 서암리 서암
채록자 류종목, 김현수 조사
구연자 강창진
출전 한국구비문학대계 8집 11책
출전페이지 589 ~  591
설명 *이 곳이 의령 한지의 발생지임을 알고 그 내력을 물으니까 이야기해 주었다. 내력은 짧게 이야기하고, 오히려 현황 위주로 구술하여 전설이라 하기에는 부족한 내용이었다. 그러나, 한지의 발생 내력을 알 수 있는 이야기이므로 일단 정리해 두기로 했다.*
본문 
[조사자: 그 한지(韓紙)가 그러머 어떻게 해서 처음에 맨들어졌읍니까?] 예, 여어(여기) 녹음할랍니까? [조사자: 예, 거기서 이야기하시소(이야기하십시오).]

그 제가 듣건대는, 그 조끔 전에 말씀을 드린, 에 대동사(大同寺)에 그 설씨(薛氏) 스님이 대동사에 계시면서 딱나무(닥나무)를 갖다가 발견을 해가지고, 그 딱(닥나무)을 갖다가 자기가 손수 벗겨서 뚜드리(두드려)가지고, 만드는 과정을 갖다가 어데 아마 여어 서암(西岩) 요오 부근 주민들한테 결국 인자 그 아마 계도가 된 모양이지요. 계도 돼가지고 결국 인자 우리 주민들이 결국 뽕나무로 심고, [말을 고쳐] 결국 아, 딱나무로 심고 이래 가지고, 지끔까지는 마 우리 농사보다도 그 한지업이 마 주업으로 돼가지고 지금까지 내려왔읍니다.

내려와가지고 마 전국에, 에 한 오십 푸로(1)[주]50%. 이상에(의) 문종이 한지를 갖다가 아마 이 곳에서 생산이 된 거 아인가? 마 이렇게 얘기 듣고 있고.

그래서 인자 지끔 와서는 이거 인자 기계화된께네, 기계화된께네…. 그전에는 인력으로 했읍니다. 인력으로 했는데, 지금은 인자 기계화되고 본께네, 그 전에 백 명 하던 것이 지끔 마 기계 한 대 가지고 마 만들어낸께네…. 마 지끔도 마 많은 양은 생산되지마는도 마 시대 변전에 따라서 옛날보다는 이 한지가 소비가 작게(적게) 되는 모양이지. 작기 된께네, 마 우리가 아는 한 이삼십 년 전보다는 지금 생산률이 영 적기(적게) 지금 생산되고 있읍니다. 이래서 우리가 얘기 듣기로는 마 남한 일대에서 이거 문종이 생산에 마 생산지는 여기였다 쿠는 얘기를 지금 듣고 있읍니다.


[591 쪽] 

지금도 역시 만들기는 만들고 있읍니까? 예, 지금 만들기로예(만들고 말고요). 저래 마 저래 하마(하면), 그래 저거로(저것을) 갖다가 요새 인자 아주머니들이 말입니다, 지금 빠꿈할 때거등,(2)[주]여가가 있을 때거든. [청중: 궁금할 때.] (3)[주]심심할 때. 즉, 여가가 많아서 심심할 때라는 뜻이다. 궁금할 때 인자 아주머니들이 가지고 나가서, 인자 한 장에 참 뭐 이백 원이니 삼백 원이니 그래 팔고 소매를 하고 결국 그렇게 됩니다.




 의령원님 남(南)떨떨이
 
 G002+AKS-UR20_Q_2354_2_02A
 [음성통합상세화면]
제목 의령원님 남(南)떨떨이
테잎연번 [의령읍 설화 36]
음성위치 T. 의령 뒤
채록지 중동
채록자 정상박, 김현수, 성재옥 조사
구연자 송판용
출전 한국구비문학대계 8집 10책
출전페이지 133 ~  138
설명 *[설화 35] 뒤에 제보자가 남해(南海)의 상사바위 이야기를 했으나 설화성이 없 어서 정리에서 제외했다. 좌중의 다른 사람들이 이야기를 하지 않으니까 다시 이야기를 시작했다. 읍지(邑誌)에 의하면 남두장(南斗長)을 두고 남떨떨이라 한 것 같다.*
본문 
남떨떨이라는 사람이 의령(宜寧)원으로 왔는데, 그 분이 임금하고 동서지간이라. 손우 동서라. 손우 동선데 사석에 앉으몬, 손우 동서라고 임금도 사석에 앉으몬…. 간딩이가 크기로 한없이 큰 사람이라. 남떨떨이가 이리 큰 사람인데 서로 니네둘이 할(1)[주]서로 너 나 하고 平語를 쓸 정도로 임금하고도 그랬다 카거든. 대담한 사람이지.

의령 고을 딱 들와가지고 가만 본꺼네, ‘의령 고을이 참 빈곤이로구나! 이렇기 못 살아 될 수 있나? 아이 낭패 났구나!’ 이래가지고….

요 밑에 내려가 것 겉으면 ‘무데미’ 라고 이전에 우리 여어(여기) 아주 젊은 시절에 여어 제방(提防)을 했는데. 이 제방하기 전에는 물이 여어 앞이, 여기가 냅니다(시내입니다). 여기 낸데, 제방을 산 밑으로 돌맀입니다. 우리 젊었을 때는 이기 내(川)가 돼가 있었입니다.

이런데 그 제방을 그 제방하기 전인데, 그때는 요 밑에 ‘마더네’ 들이라고 들이 있었는데, 그런데 거어서(거기서) 참 뭐 메기 춤(침)만 내 놔도 농사를 몬(못) 지어 묵는 데라요.(2)[주]조금만 비가 와도 농사를 짓기가 어려운 곳이라는 말이다. 물이 들어서. 자앙(늘) 물이 들어가지고 농사를 몬 짓고 이럴 땐데, 그 남떨떨이라 쿠는 이 원님은 그 나락이 쭈그리기(쭉정이) 돼가지고 그래가 먹지도 못하는 거, 이거를 짚단을 그냥 자기가 딱 쥐고서, 그래는 경상남북도가 아이고 바로 경상돈데 그때는 감사가 그 경상 감사가 대구에 있었거든. 그래 그걸 대구로 가져가 올라가가,

의령 고을은 농사를 지어도 전부 이렇십니다. 그래 세금 면제해 주이소.”

그만 그 짚단을 바로 가져 가가지고 그 세금을 면제해 주이소. 그래 그


[135 쪽] 

세금을 면제로 받고 면제로 받고 안 그랬는가? 남떨떨이가.

그런데 그 분이 왜 남떨떨이가 됐냐 할 것 겉으면 병이 걸리기로 무슨 병이 걸린 게 아이라 그 고을 원님이 앉으면 머리를 떨떨떨 떨고. 이래 떠는 때문에 호왈(號曰), 별호가 남떨떨이라 이래 됐거든.

그래 그 어른이 참, 어데라도 거석을 가몬 넘(남)한테 신망을 그래 안 잃는데, 한번 대구서 우리 경상도 전부 고을 원님들 회의를 하는데, 그 회의석상에서 술을 먹고 요샛말로 ‘파아티’ 로 하는데.

그 술로 묵으면서도 딴(다른) 고을 원님은 그리 안 하는데, 이 고을 원님은 떨떨 머리를 떨고 이래 하이끼네 밑에 사령(使令)놈이 한 놈이 그걸 쳐다보고 있다가 ‘하하’ 야고 윗어(웃어)빘단 말이라. 떨떨떨이란꺼네 윗어비맀거든. 윗으이꺼네 남떨떨이는 그냥 그대로 그날 회의 무사히 마치고 그 파아티를 무사히 딱 마치고 난 뒤에 경상 감사한테,

“경상 감사님께 하나 아뢸 말이 있입니다.”

“무슨 말인고?”

“내가 아까 그 파아티장에서 이 술을 묵고 이런꺼네 어떤 사령 한 놈이 ‘하하’ 야고 윘었지요?”

“아, 윘었지.”

“그놈 내일 아침에 내가 의령 내려갈 모양인꺼네, 내일 그놈 좀 보내주이소.”

저 남떨떨이고 사람은 임금하고 동서지간인데, 인제 사령놈 한 죽있다 싶은 마음이 든다 말이라. ‘큰 일 났다.’ 싶어서 그래서 딱 보냈는데, 보내니까,

“네가 이놈 어제 날(나를) 보고 윘었는가?”

“예, 그렇십니다.”

“저 놈을 말꼬리다가 상투를 볼끈 매가 말꼬리에 달아라. 그것 참 말이 차고 달코 하는데, 이놈 시들카(시달리게 하여) 쥑이도 쥑이야 되지. 감히 어데라고 이놈 내가 머리를 좀 흔들었다 캐서 ‘하하’ 야고 윗어.”


[136 쪽] 

그래가 말꼬리에 저놈을 달아가지고 말로 몰고 내려오는데, 얼마 아니 와서 거죽떼기를 펴 놓고 어떤 늙은이가 국궁재배를 하고 있다. [절하는 시늉을 하면서] 이래가 있다. 그래 남떨떨이가,

“무슨 백성이 여기서 국궁재배를 하고 하느냐?”

“예, 소인은 다름이 아니오라, 소인이 아뢸 말이 있어서 내가 사또님께 내가 지금 이래가지고 사또님 오시도록 기다리고 있입니다.”

“아하, 무슨 말이냐?”

“예, 다름이 아니오라 제가 이팔 청춘 젊은 시절에는 기생이옵는데, 이 남자 저 남자를 접촉하다 본꺼네 내 자식놈 성이 김간가 박간가 이간가 알 수도 없고 우짜다가(어찌 하다가) 저 자석이 하나 떨어졌읍니다(낳게되었읍니다). 자식이 하나 떨어져가지고 그래가 저놈이 애비 없이 키운 호로 자식을 하나 낳았읍니다. 호로 자식을 하나 낳았는데, 그 호로 자식인 바 지금 말꼬리에 달 리가 있는 이놈이 내 자식이올시다. 저 놈이 지금 여어 사령으로 있음서 제를 벌여서 이 늙은 날로 믹이 살린다고 그런데, 사또님 저 호로 자식을 우쨌던지 이 늙은 노파를 생각해서 살리 주이소.”

쿠움서 이리 재배를 하고 있거든. 가만히 얘기로 들어본께, 그럴 상도 싶으거든.

“그래요?”

그래가지고 남떨떨이가 그걸 살맀어. 그런데 그 묘책(妙策)은 누가 뀌밌느냐? 경상 감사가 뀌미 냈어. 이 머리가, 두뇌가 보통이 아니라. 그 그가 그 사령을 하나 살리 냈어, 경상 감사가.

일부러 가짜 그 노인을 안노인을 맨들어가지고 기생질했다니 뭘 했다니 이래가지고 그 말꼬리에 잡히 가는 거로 그래가 살맀는데.

그래가 그 의령골 원님으로 있다가 그 분이 어디로 갔는 기 아이라 저 강원도 삼척(三陟)을 갔거든. 삼척을 간 원인이 뭐이냐? 자기가 본꺼네 삼척 군민이 몬 살아서 전부 굶주리고 허매고 있다 이기라. 삼척 군민은


[137 쪽] 

내가 살리겠다고 의령 고을에 있다가 삼척을 갈 때에 제 자유자재로 갔거든. 임금하고 동서지간인꺼네 제 가고 짚은(싶은) 대로 가는 기라. 말만 하몬 아무리 어려운 고을이라도 제 자유로 갈 수가 있었어.

그래 삼척을 떡 가이꺼네 삼척 군민이 왜 몬 살았느냐? 그거는 서울 어느 정승의 삼밭이 있었어. 인삼장. 여러 수수 만 평이라. 인삼을 재배하는데. 그런데 그거는 그 인삼을 재배하는데 군민을 동원시켜서 날일곡가(日當勞賃) 주지도 않고 전부 무료 봉사라. 돌 져다가 전부 밭에다가 담을 쌓아서 판장을 하고, 인삼 내가꾸는 것도 군민이 근로 봉사로 해서 내 가까주고 이짓을 하는데. 그것 삼장 때문에 농민이 몬 살아요.

그래서 그것 자기가 그 소리를 듣고 자청해가지고 삼척을, 삼척을 인자 고을로 들어가, 원님으로 들어갔는데, 그래 가가지고,

“삼척 군민은 한 집도 빠지면 안 되이꺼네 전부 바지게 지게 딱 짊어지고 전부 오늘 다 나와야 된다. 근로 봉사 다 나와야 된다.”

고. 마 명령을 해 놓고는, 삼척 군민은 하나도 없이 다 나와라 캐 놓은꺼네, ‘이 놈의 자식, 고을 원님 오는 놈마다 이짓을 하니 우리가 우찌 농사를 짓고? 이래 가 우찌 살 거냐?’ 고 모두 속으로 욕 안 하는 사람이 없이 전부 다 나왔거든.

삼척 군민이 떡 다 나와 본꺼네 남떨떨이라 쿠는 사람이 떡 나와가지고, 나서가지고 연설로 하는데,

“여러분! 수십 년 동안 여러분이 노고가 많앴입니다. 이 인삼장으로 말미암아 여러분의 농사에 많은 지장이 왔고, 여러분이 전부 굶주리게 된 것을 오늘 이 자리에서 끌러 줄 모양이니, 이 삼장은 서울 대감의 삼장이 아이라, 여러분의 삼장이니, 오늘 이 활딱 전부 다 뜯어삐라.

뜯어삐리고 인삼을 전부 캐 가든지, 전부 같이 갈라 가져 가거라.”

이래 놓으니 삼척 군민이,

“인삼도 필요없다.”

이기라. 막 달라 들어서 그 담쳐 놓은 거로 쥐뜯고,


[138 쪽] 

“인삼 주나, 안 주나 인삼장만 없어도 삼장 이것만 없어도 우리가 살겄다.”

쿠움서 막 달라 들어서 막 삼을 막 캐서 막 가져 가는 사람도 있고 안 가아(가져) 가는 사람도 있고 이래 막 떡 이래 놨다.

이래 놓고는, 그 인삼장 그 보는 그 삼지기 있거든. 그 서울 대감한테 다 보고를 했단 말이지.

“그 요번에 남군수가 들와가지고, 어, 남사또가 들와가지고 삼장을 전부 다 뜯어삐리고 말키 다 가아 가고 없입니다.”

이래 캤거든. 소위 일개 군수가 대감을 따를 낀가? 그 대감한테 호출로 당해서 쫓아갔다. 대감이 호출로 했거든. 그래 떡 갔다. 그래 남떨떨이가 떡 가가지고,

“대감 뭐 할라고 불렀입니까?”

“왜 니는 남의 인삼장을 갖다가, 니가 자유로써 말키 담장을 뜯고 인삼을 전부 다 캐서 다 나눘느냐?”

“예, 내가 그리 했입니다. 대감 혼자 잘 살아야 되겄입니까? 삼척 군민이 수십 만 명인데, 그 분들이 살아야 되겠읍니까. 대감의 인삼장 때문에 삼척 군민이 몬 살게 되어서 내가 일부러 요번에 아 저 청원을 해 가지고 삼척 고을에 들어가 삼장 없앴입니다. 죄가 있거랑 날로(나에게) 죄를 주시오.”

고마 달라든다. 임금하고 동서간인데, 꼼짝이나 할 수 있나? 그래가 사표 내고 그 후론 도저히 관공서 거석은 손 뗐다 쿠거든. 의령 있다가 삼척 고을로 갔지, 그 분이 의령 있다가.



 의령을 명지로 만든 황덕래 원님
 
 G002+AKS-UR20_Q_2383_1_05A
 [음성통합상세화면]
제목 의령을 명지로 만든 황덕래 원님
테잎연번 [정곡면 설화 4]
음성위치 T. 정곡 1 앞
채록지 중교리 장내
채록자 류종목, 성재옥 조사
구연자 한진식
출전 한국구비문학대계 8집 11책
출전페이지 78 ~  82
설명 *앞의 이야기에 이어서 계속한 것이다. 제보자가 풍수에 관심이 많아서인지 풍수설과 관계되는 설화를 많이 이야기했다. 이것도 그런 종류의 하나다. 청중들은 조용히 경청하기만 했다.*
본문 
에, 의령(宜寧)이 이기(이게) 결국 아까 말한 바와 같이 그 신반(新反) 하고 말입니다, 에, 저 의춘(宜春)하고 갈라지가지고(갈라져서) 두 고을이 됐는데, 고을을 의령군이라꼬, 삼령지방(三寧地方)이라고 합치고 나서는 에


[79 쪽] 

의령 그 군명이 의령군입니다.

그라머, 의령군이라 칼(할) 겉으면 왜 의령을 지있나(지었나)? 그 말하자면은 보통 여어 이전 어른들은 삼령지방이라 캅니다, 의령, 함안(咸安), 창녕(昌寧)을 갖다가. 그라머 함안은 다 편해서 함안이다. 또, 의령은 마땅히 편ㅎ다꼬 함안(1)[주]宜寧의 잘못이다.이다. 또 창녕은 그 편한 기 아주 창성했다. 이래서 그 삼령지방이다 이래 됐는데. 그라머 인자 그에 그 준해가지고 두 고을로, 의령이 이기 두 고을로 따개진(쪼개어진) 거로 갖다가 한 고을로 합해가지고 군명을 짓기로 ‘의령’이다, 마땅히 편ㅎ다, 에 이런 기 의령이 됐읍니다.

그라머 그 당시가 언제냐 할 겉으면은 아매 임란 직후에 황덕래 군수 당실 낍니다. 예, 합치고 나서 왔었는가, 자기가 와서 합쳤는가. 그래 지끔 현재 그 의령읍내에 거어다가(거기다가) 에 그 참 군청 소재지를 만들고, 또 그 인자 만들고 보인께(보니까) 막상 그 남산(南山)이 그 너무나 그 암석이 많아가지고 험했더랍니다. 그라먼 에, 속설에 그 지리상으로(2)[주]풍수지리설로. 말하자면은 악산(惡山)이다 이리 됐어.

예, 그런데 거어 지끔 현재에 숲이 좋고 그 아주 그 참 풍치림이 되가 있는 거는 무슨 이유로서 되가 있는고 할 겉으머, 황덕래 군수가 거어 식목을 싹 다 했어요. 지끔도 거어 가먼 고목이 말이지 줄로 짝짝 지이가 있읍니다. 예, 그런데 거어 나무 수종으로 봐서는, 지끔 현재 그 딴 데 그 함양(咸陽)에 말입니다, 그 저게 뭐꼬, 상하림(3)[주]함양군 함양읍내에 있는 上林숲을 두고 하는 말이다. 그런 수종에 못지 않은 여러 수십, 아무래도 마 수십 종입니다.

이런데, 거어서 지끔 현재 내가 하나 나무 본 거는, 무슨 나무로 봤냐 할 겉으면은, 합환목(合歡木)이라 카는 기 있어요, 합환목. 그거는 에 합할 합(合)짜, 환영(4)[주]歡迎.이라고. 예, 그 합환목인데, 이 나무는 성질이 어떻냐


[80 쪽] 

할 겉으머, 우에 거어 정상에 꽃이 패고, 피고, 잎이, 그 잎이 그 저 마주 나가(나) 있읍니다. 마주 나가 있는데, 이 나무는 에 밤이 되면은 한테 오그라지 뿝니다. 나무캉 나무 우에 그 나무 같이 붙어 뿌요.(5)[주]나무와 나무끼리 윗가지가 서로 붙어 버려요. 그래 낮 되머 또 인자 벌어져요. 그런 때미레(때문에) 그거로 ‘합환목이다’ 이리 됐는데.

그라머 이 나무 그 인자 그거로 갖다가, 에 그 저, 신혼 부부끼리에 그 첫먼지(처음에) 그 교배주(6)[주]交配酒. 合歡酒를 말한다.에 말입니다 이 이파리(잎)를 따서 술로 빚어 가지고 그 인자 어 교배주로 만들 겉으면은 아주 그 부부간에 의가 좋아진다. 예, 그런 전설이 있기 때미레 ‘합환목이다’. 그 나무가 지끔은 봐서는 거어 내가 한 두어 나무는 봤는데, 그 꽃이 한 오월달에 패가지고 한 칠월달꺼정 한 두어 달꺼정 핍니다. 그 참 나무가 좋아요. 그런데, 그 인자 그 나무 이야기는 그래 끝마치고.

지끔 현재 거어 나무가 없을 겉으면은, 아주 그 의령 군청 소재지에 보머, 그 산이 아주 더럽다 싶읍니다. 이렇지마는도, 나무가 그 수종이 좋아놓으니 아매 이 근방에는 그런 산이 없어요.

에 또 그라고 뭐 솔 겉은 거 이런 것은 뭐, 일종의 나무만 있는….(7)[주]소나무 같은 것은 물론이고 여러 종류의 수종이 있다는 말을 하려다 줄인 것 같다. 아까 말한 바와 같이 거어 여러 수십 종류를 나무를 심어가지고, 저짝에(저쪽에) 그 큰 정지라 카는 데 거어 지끔 보면은, 저짜(저쪽에) 그 말하자면은 서쪽입니다, 서쪽에 거어로 보면은 또 고대로 그 땅 위토(8)[주]爲土. 땅의 됨됨이를 말한다.가 퍽 다릅니다. 이런 때미레 거게는 좀 잡목이 또 많이 있고. 그 수월사(水月寺) 올라가는 데, 절로 올라갑니다. 수월암(水月庵)이지요.

이짝(이쪽)에 또 구룡동(九龍洞)쪽에는 순수한, 또 그 잘 크는, 요새 겉어머 그 뭐 이태리뽀쁘라(9)[주]이태리 포플러.라 칼까 이런 수종이 또 심어져가 있고.


[81 쪽] 

그런데, 제일 한복판에는 솔이 좀 있었는데, 솔 근방에는 될 수 있으머 이 침목(10)[주]針葉樹를 말한다. 이기 뭐 이리, 결국 말하자면 침상(針狀), 그 피침형(披針形) 이런 수종이 많이 있고 이런데.

보통 마 그 우리 어 보면은 고마 ‘저 산에는 풍치림이 좋다. 숲이 참 좋다.’ 이래 카지마는, 그 나무 심은 자체로 봐서는 토질로 가리서(가려서) 심었다고 나는 봅니다. 예, 이런께 에, 의령의령이 그만침(그만큼) 인물도 났다. 또 황덕래 군수가 그 또 그 수세(水勢)를 잘 맞차(맞추어) 가지고 산세, 물로 둘리(돌려) 냈다. 이 지끔 현재 뚝(둑)을 갖다 그 막아가지고, 저, 자굴산(중문대사전3-4429.8442崛山)에서 내려오는 물로 갖다가 그 둘리 냈다.

이래서 그 인자 그 마주 보는 데에는 그 인자 결국 북산(北山)이라 캅니다. 남산 다음에 인자 그 남산을 갖다가 대향(對向)해 있는 기 북산인데, 북산은 의령 군청 소재지를 뒤로 짊어지고 있고, 남산은 앞으로 향해가 있고.

이런데, 그 어짠 일인지 복판에 거에 또 보면은 말입니다, 들 복판에 지끔 현재 그 겨울이라도 물이 폭폭 솟아요. 솟아요. 그 우에다가 그 지끔 의령읍 읍내에 그 저게 수도, 수도 빠이프를 대 놓고, 칠십 몇 자꺼정 내라서(내려서) 암반을 뚧어가지고(뚫어서) 거어 지끔 현재 식수로 씹니다마는도(씁니다마는), 그 물을 연유로 해서 거어다(거기다) 식수를 봤는데. 그런데, 그 그기(그게) 그래 나서 그 물 때미레, 그 지리학자(11)[주]풍수, 地官.들은 뭐냐 할 겉으면, ‘의령에 그 왕비가 많이 났다.’ 이런 전설도 있읍니다.

있고, 또 그라면 남산을 갖다 조대(朝對山)라 이래 카는데, 안대(案對)라 이래 카는데. 그라머 의령 북산이 안대가 아이고, 가례(嘉禮)에서 내려오는 그 저, [말을 바꾸어서] 가례, 가례라 칼 겉으먼 그 참 마 가례다, 가히 그 높은 사람이 앉아가 있는데 거어 예를 디린다(드린다), 이런 동넨데, 그 뒤에 산이 아주 그 자굴산 줄기로서 잘 내려왔는데, 거어서 뭐 지


[82 쪽] 

리학자들은 말하기를, 그 ‘상좌봉조헝(上坐逢朝形)이다’ ‘임금이 앉아서 그 조대를 한다.’ 그 앞에 물이 쑥쑥 쏟고, 거어서 인자 조대로, 남산이 조대로 해가 있다, 이래서 남산을 갖다가 어데서 보더라도 ‘조대산(朝對山)이다’, 이래 좋은 산이다, [청취 불능] 산이다, 이래 카고 있읍니다.

그런데, 그 밑에 지끔 현재 그 홍의장군(紅衣將軍) 그 저 뭐꼬, 에, 곽 망우당(忘憂堂)의 그 정화사업을 해가지고 그 뭐 사당이니 뭐 인자 그 기념관이니 설립하고 있읍니다.


우복집 별집 제12권

 부록(附錄)
또 [문하생(門下生) 황덕유(黃德柔)]

아름답다 우리 우복 선생이시여 / 猗歟先生
산과 강의 영기 모여 태어나셨네 / 河嶽鍾靈
엉킨 자품 빼어나고 아름다웠고 / 凝資秀朗
지닌 자질 순수하고 밝디 밝았네 / 賦質純明
일찌감치 큰 의리를 밝게 알고서 / 早炳大義
차츰차츰 학문 점차 쌓아 나갔네 / 銖寸積學
아주 깊은 이치까지 다 궁구하여 / 硏深極微
깨우치지 못한 이치 하나 없었네 / 理無不格
마음으론 오현 심법 전해 받았고 / 心傳五賢
도는 서애 선생 뒤를 이어받았네 / 道紹西厓
선배들의 도 밝히고 후생 틔워 줘 / 光前啓後
이 세상의 의표 되는 종사되었네 / 爲世宗師
성상께서 임금 자리 오른 처음에 / 迨上初服
소명 응해 서울로다 올라가셨네 / 應召入洛
온 조정의 명망 모두 매여 있으매 / 朝著係望
창생들은 절을 하며 기뻐하였네 / 蒼生手額
비록 크게 시행하진 못하였지만 / 雖未大施
온 조정이 모범 삼을 의표 되었네 / 表儀王國
경석에서 말 올리어 이끌어주어 / 納誨經席
성상의 덕 높아지게 도와주었네 / 裨益聖德
품은 뜻이 시대와는 어긋난 탓에 / 志與時違
고하고서 돌아갈 맘 간절하였네 / 告歸斯切
물러나서 고향 산에 돌아와 쉬어 / 退休故山
애당초에 먹었던 맘 끝내 이뤘네 / 得遂初志
나아가고 물러남의 어렵고 쉬움 / 難進易退
예와 의를 가지고서 결정하였네 / 以禮以義
세상 모두 태산처럼 우러러봤고 / 世皆山仰
기대어서 의지할 만하다고 했네 / 指以爲依
아 이제는 그 모든 게 끝이 났나니 / 今其已矣
통곡하며 운들 무슨 소용 있으리 / 慟哭曷追
선비들은 모범 삼을 바를 잃었고 / 士失模範
나라에는 시귀 같은 분 없어졌네 / 國無蓍龜
우리의 도 장차 누굴 의지할 건가 / 吾道何托
우리 사문 받은 화는 혹독도 하네 / 斯文禍奇
아아 내 맘 슬프고도 애통하구나 / 嗚呼哀哉
지난날에 돌아가신 선군께서는 / 昔我先君
아주 어린 시절부터 함께 놀았네 / 幼蒙提撕
서원에서 오랫동안 함께 머물며 / 久居門館
서로 학문 강마하며 기뻐하였네 / 學焉悅之
평생토록 우러르며 흠앙하기를 / 平生景仰
하늘에 뜬 북두성을 보듯이 했네 / 星斗于天
은혜로나 의리로나 친밀하기는 / 恩義之密
천륜으로 맺어진 듯 형제 같았네 / 有同天倫
그 어찌 알았으랴 하루아침에 / 那知一夕
갑작스레 먼저 먼 길 떠나가실 줄 / 奄忽先亡
그 당시에 선생께선 통곡하면서 / 先生之慟
실로 형제 잃은 듯이 애통해했네 / 實比天喪
말과 생각 옛날 일에 미치어 가매 / 言念及此
나도 몰래 목이 메어 흐느끼누나 / 不覺哽咽
아아 나는 몹시 형편없는 데다가 / 嗟余無狀
대수롭지 않은 자질 타고 났다네 / 又蒙不屑
품성 본디 어두웁고 어리석어서 / 性本昏愚
담벼락에 얼굴 대고 있는 듯했네 / 土墻當面
선생께선 그런 나를 불쌍히 여겨 / 先生矜憐
특별하게 정성 다해 돌봐 주셨네 / 特垂眷眷
한 길 정도 되게 자리 띄어 앉아서 / 函丈之間
가르침을 받은 바가 실로 많았네 / 承誨實多
이에 거의 종시토록 우러르면서 / 庶幾終始
부지런히 학문 닦을 수가 있었네 / 仰而不惰
그 어찌 뜻했으랴 오늘에 와서 / 豈意今日
대들보가 갑작스레 부러질 줄을 / 梁木遽壞
위로는 나라 위해 통곡을 하고 / 上爲國慟
아래로는 나를 위해 통곡하누나 / 下哭吾私
오장육부 도려내는 듯 아프나니 / 五內如割
비통스러운 나의 마음 누가 알리오 / 孰知余悲
선생님의 모습 길이 사모하나니 / 永慕儀刑
품은 애통 저 하늘의 끝에 닿았네 / 懷痛窮天
영전 앞에 엎드리어 곡하노라니 / 伏哭筵前
샘솟듯이 눈물 줄줄 흘러내리네 / 有淚如泉
아아 내 맘 슬프고도 애통하구나 / 嗚呼哀哉

[주D-001]오현(五賢) : 문경공(文敬公) 한훤당(寒暄堂) 김굉필(金宏弼), 문헌공(文獻公) 일두(一蠹) 정여창(鄭汝昌), 문정공(文正公) 정암(靜庵) 조광조(趙光祖), 문원공(文元公)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 문순공(文純公) 퇴계(退溪) 이황(李滉)을 가리킨다. 이 다섯 사람은 모두 문묘에 종사되었다.
[주D-002]한 …… 앉아서 : 스승으로 모시고서 공부하였다는 뜻이다. 《예기》 〈곡례 상(曲禮上)〉에, “만약 상대방이 음식 대접이나 하려고 초청한 손님이 아닐 경우에는 자리를 펼 때 자리와 자리 사이를 한 길 정도 떼어 놓는다.〔若非飮食之客 則布席 席間 函丈〕” 하였다.

蒼石先生文集卷之十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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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墓誌
贈資憲大夫,吏曹判書兼知義禁府事,五衞都摠府都摠管全公墓誌銘。 a_064_533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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余自少時。得納拜於故鄕長全公。器度靜深。言笑有節。時公之二子蔚然有文名。未嘗向人有矜誇意。及府尹君之守蔚山也。人有以不治誤達于公者。公嚴加訶責。愈久而不解。後知其妄傳。始釋然。府尹之子克恒之中064_533b司馬也。府尹大設賀筵以壽之。是時公之年已近大耋矣。余以鄕子弟侍坐。見公精神符采不減於少時。酬酢之際。禮數雍容。聲妓滿前。恬然若無覩也。心竊慕之。以爲公之前後不動色於子孫之立揚。而惟恐吏治之不善。以玷世德也如是。其素養必有異於人者。公世居沃川。幼喪母。鞠於尙之從母家。仍居焉。州去沃遠數舍許。月朔覲先公。辛卯冬。罹棘。公守制於廬。翌年夏。尙陷於倭。猶無意省家。及賊兵迫郡境。然後始藏几筵。問妻子存殁。未久。還喪次終制。時値大難。喪紀蕩然。獨纍纍持服。人以爲難。兵火之餘。舊業蕭然。流離困頓。轉寓州北村。時杖屨田畝間。課童僕力耕稼以徂伏臘。而固窮守064_533c拙。未嘗有分外之營。鄕里置酒而邀之。則輒以衰疾辭之。晚年。深於頤養。雖家人。不見有喜慍之色。府尹君以親老。常在吿不肯仕。亦任其自由。未嘗以宦途榮落爲念。終始所勉者。惟勵廉恥尙名檢而已。余嘗見世之讀五車書者。未嘗反躬而踐實。故其聞見知識有可取。而氣質之病。或終其身無改焉。若公則雖少不力學。不見有涵養邁往之功。而其天質之美自能近道。有不待矯揉者。兹豈非孔子之所謂善人。子夏之所謂吾必謂之學矣者乎。公諱汝霖。字公澤。有諱學俊。仕高麗領同正。其後七世圭組。事見世譜。今不著。高祖諱孝順。中直大夫行石城縣監。曾祖諱應卿。早卒不仕。祖諱彭祖。生員。064_533d贈通政大夫,承政院左承旨兼經筵參贊官。參判彭齡之兄也。考諱焜。贈嘉善大夫,吏曹參判兼同知義禁府事,五衛都摠府副摠管。妣貞夫人曲城廉氏。參奉正逹之女也。以嘉靖戊戌六月癸卯生。考終于萬曆庚申正月九日。以府尹君貴。累贈資憲大夫,吏曹判書兼知義禁府事,五衛都摠府都摠管。配月城李氏。參奉信之女。新羅佐命大臣阿飱謁平之後也。配郭氏。苞山著姓。以己亥十二月十一日生。旣歸未久而嬰疾。沈綿過數紀。至是先公十二日卒。實己未十二月二十七日也。贈貞夫人。合葬于尙州治東物興山坎坐之原。男長湜。登癸卯科。歷颺淸顯。今爲慶州府尹。浤。通仕郞。累擧064_534a不中。早卒。濬。禁火司别坐。二女。李宗胤,梁應緖其壻也。府尹男曰克恒。全羅都事。克恬。進士監役。女適郡守德柔。浤男曰克恢。女適士人鄭義弘,洪尙寯,邊士宗。濬二男。幼。宗胤之男曰廷喆。應緖之男曰逈。曾孫男女若干人。府尹君嘗以公之墓誌見托。埈於君有兄弟之愛。不敢以文拙辭。固已諾之於心矣。卯申役役。不得副。上年夏。府尹將朝天。臨行請愈勤。遂据其狀。參以平日所濡染於耳目者。而誌其概以還。且埈於心又有所感歎者。泛海之行。人或以計避之。而曾見君於衰邁之境。視重溟如康莊。無幾微厭憚之色。志節之偉。誠可敬矣。而亦無非公貽厥之善。天之報善人。不於其身則在其子064_534b孫者。尤可驗矣。銘曰。
厚於蓄。裕於貽。後有考。觀鑱辭。






우복집 제18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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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묘표(墓表)
증(贈) 이조 판서 전공 여림(全公汝霖)의 묘표

공의 휘는 여림(汝霖)이고 자는 공택(公澤)이다. 성은 전씨(全氏)로 옥천군인(沃川郡人)이다. 그 선조는 고려조 때부터 크게 드러나 대대로 고관대작을 이어받았는데, 학준(學浚)이라는 분이 있어 영동 정(領同正)을 지냈고, 효격(孝格)이란 분이 있어 중윤(中允)을 지냈고, 대부(大富)란 분이 있어 형부 시랑(刑部侍郞)을 지냈고, 필(弼)이란 분이 있어 검교 사순위호군(檢校司巡衛護軍)을 지냈고, 유(侑)란 분이 있어 밀직부사(密直副使)와 민부 전서(民部典書)를 지냈고, 숙(淑)이란 분이 있어 판도 판서(版圖判書)를 지냈다.
판도공의 뒤로는 몇 대 동안 침체되어 있다가 공의 고조인 휘 효순(孝順) 때에 이르러서는 관직이 석성 현감(石城縣監)에 그쳤다. 증조는 휘가 응경(應卿)으로 일찍 세상을 떠났다. 조고는 휘가 팽조(彭祖)로 성균관 생원(成均館生員)이었으며, 통례원 좌통례(通禮院左通禮)에 추증되었다. 선고는 휘가 혼(焜)으로 선무랑(宣務郞)이었으며, 승정원좌승지 겸 경연참찬관(承政院左承旨兼經筵參贊官)에 추증되었다. 비(妣)는 곡성 염씨(曲城廉氏)로, 참봉 염정달(廉正達)의 따님인데, 숙부인(淑夫人)에 추증되었다.
공은 가정 무술년(1538, 중종33) 6월 계묘일에 군(郡)의 기사포(耆士浦)에서 출생하였다. 나이가 겨우 열 살이 되었을 적에 어머니를 잃고 종모(從母)의 손에서 길러졌는데, 이로 인해 학문할 시기를 놓쳤으며, 유학(儒學)을 배우기는 하였으나 드러나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천부적인 자질이 질박하고 독실하여 경솔하게 기쁨과 노여움을 얼굴에 드러내지 않았다. 이미 늙어서는 성품이 더욱더 관대하고 너그러워서 꾸짖거나 욕하는 말을 일찍이 종들에게조차 한 적이 없었다. 큰아들인 부윤군(府尹君)이 만년에 대과(大科)에 급제하였는데도 기뻐하는 기색을 얼굴에 드러내지 않았으며, 혼조(昏朝) 때에는 문을 닫아걸고 지내면서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았는데 또한 자신을 봉양하는 일에 대해 언급한 적이 없었다. 이는 대개 가난함을 편안하게 여기고 있는 그대로 지내는 것이 천성에서 나온 것이 이와 같았던 것이다.
공은 나이 54세 때 아버지의 상을 당하였는데, 몸이 쇠해짐이 이미 심하여 애통해하면서 몸을 손상시키는 것을 감당할 수 없었는데도 오히려 상제(喪制)를 지켜 슬픔을 다하면서 상을 마쳤다. 상을 마친 뒤에는 문을 닫아걸고 바깥출입을 하지 않았는데, 비록 향음례(鄕飮禮)나 사회(社會)와 같은 데에도 가지 않았다. 만력 경신년(1620, 광해군12) 1월 9일에 병으로 인해 정침(正寢)에서 졸하니, 향년이 83세였다. 그 뒤에 부윤군이 귀하게 됨으로 해서 여러 차례 추증되어 자헌대부(資憲大夫) 이조판서 겸 지의금부사 오위도총부도총관(吏曹判書兼知義禁府事五衛都摠府都摠管)에 이르렀다.
부인은 정부인(貞夫人)에 추증된 월성 이씨(月城李氏)로, 신라 시조(始祖)의 좌명 대신(佐命大臣)인 아찬(阿飡) 알평(謁平)의 후손이며, 참봉을 지낸 이신(李信)의 따님이다. 기해년(1539, 중종34) 12월 갑진일에 태어나 장성해서 공에게 시집왔다. 그러나 얼마 되지 않아 고질병이 있어 56년간을 신음 속에서 지내다가 공보다 한 달 먼저 죽었으니, 바로 기미년(1619, 광해군11) 12월 27일이었으며, 향년은 81세였다. 그다음 해 3월 병오일에 상주(尙州)의 치소(治所) 동쪽에 있는 단밀현(丹密縣) 물흥산(物興山) 오향(午向)의 언덕에 공과 합장(合葬)하였다.
공은 아들 셋을 두었는데, 장남 식(湜)은 바로 부윤군으로 계묘년(1603, 선조36) 문과에 급제하여 지금 경주 부윤(慶州府尹)으로 있다. 차남 굉(浤)은 통사랑(通仕郞)으로 여러 차례 과거에 응시하였으나 급제하지 못하고 일찍 죽었다. 삼남은 준(濬)으로 금화사 별좌(禁火司別坐)로 있다. 딸 둘이 있는데, 큰딸은 유학(幼學) 이종윤(李宗胤)에게 시집갔고, 둘째 딸은 훈도(訓導) 양응서(梁應緖)에게 시집갔다. 부윤은 2남 1녀를 두었는데, 아들 극항(克恒)은 예문관 봉교(藝文館奉敎)이고, 극념(克恬)은 유학(儒學)을 공부하고 있으며, 딸은 유학(幼學) 황덕유(黃德柔)에게 시집갔다. 또 서얼 자식 4남 2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극침(克忱), 극항(克㤚), 극징(克憕), 극층(克)이고, 큰딸은 강유(康鍒)에게 시집갔으며, 한 딸은 아직 어리다. 통사랑은 1남 3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극회(克恢)이고 딸은 정의홍(鄭義弘), 홍상준(洪尙寯), 변사종(邊士宗)에게 시집갔다. 별좌는 1남을 두었는데 이름이 극홍(克弘)이다. 또 서얼 자식 3남 2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극녕(克寧), 극민(克敏), 극명(克明)이고, 딸은 이원인(李元仁)에게 시집갔다. 외손은 남자와 여자가 셋이고, 증손은 남자와 여자가 또 수십 명이다.
공은 만년에 상주의 북촌(北村)으로 이사해 살았다. 내가 향자제(鄕子弟)로서 일찍이 찾아가 뵌 적이 있었는데, 초가집에 사립 대문이었으며, 당(堂)과 실(室)이 제대로 구비되어 있지 않았다. 공은 땅바닥에 자리를 펴라고 명하고는 함께 더불어 말을 나누었는데, 그 얼굴을 보니 환한 기색이 피어올라 참으로 이른바 걱정하지 않는 분이었다. 그런즉 입으로는 다섯 수레의 책을 줄줄 외면서도 안으로는 터득한 바가 없어 낮은 관직이라도 얻으면 기뻐 춤추고 가난하게 되면 불만스러워 낙담하는 이 세상 사람들과 비교해 보면 그 도량의 차이가 또 어떠하겠는가. 아, 이런 분을 어찌 공경하지 않아서야 되겠는가.





우복집 별집 제12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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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록(附錄)
또 [최현(崔晛)]

아아 내 맘 슬프고도 애통하구나 / 嗚呼哀哉
이오 기운 서로 간에 뒤섞이어서 / 二五紛錯
강 흐르고 산은 높이 솟아오르매 / 河嶽流峙
순후하고 빼어난 정기 어린 데다가 / 純粹之精
깨끗하고 맑디맑은 기운 서렸네 / 淸淑之氣
그 기운이 서로 모여 엉겨 붙어서 / 凝焉聚焉
군자다운 사람 이에 탄생시켰네 / 乃生君子
오백 년에 한 사람 날 인재 나는 건 / 間世而一
아아 그건 그리 쉬운 일이 아니네 / 嗚呼不易
우리 공이 이 세상에 살아 있을 땐 / 我公在世
상서로운 봉황에다 지초 같았네 / 瑞鳳祥芝
선비들은 모범 삼을 바가 있었고 / 士有模範
나라에는 시귀 같은 신하 있었네 / 國有蓍龜
화평스러운 다스림은 보지 못하고 / 平治未見
우리 공은 어찌하여 떠나갔는가 / 我公焉歸
덕 살피는 일은 누굴 보고서 하며 / 考德何所
학업 묻는 일은 누굴 의지해 하나 / 問業何依
미산 위에 자라 있는 푸른 초목들 / 眉山草木
마를 때가 또한 역시 어느 때인가
 / 枯亦何時
낭릉 위를 환하게 비추던 덕성 / 朗陵德星
모이는 날 기약조차 할 수가 없네
 / 聚不可期
온화하고 깨끗했던 얼굴에다가 / 和粹言貌
빼어나고 해맑았던 풍의였었네 / 秀朗風儀
순후하게 푹 익었던 학문에다가 / 醇乎之學
애연하게 피어나는 문장이었네 / 藹如之辭
뒤를 이어받을 사람 그 누구이고 / 孰承其後
끊어진 걸 이을 사람 어느 누군가 / 孰紹其絶
삼조 걸친 훌륭했던 유신이었고 / 三朝碩儒
팔준 같은 풍모에다 절개였었네 / 八俊風節
한 백년의 승침이 달려 있었고 / 百年升沈
세도의 맑고 탁함 매여 있었네 / 世道淸濁
임금 모신 경연에서 토론하였고 / 經席討論
세자 모신 춘방에서 보도하였네 / 春坊輔翼
금감을 갑작스레 잃어버리매 / 金鑑忽失
양궁께선 마음 놀라 슬퍼하누나 / 兩宮震衋
받은 은혜 전에 없이 특별하였고 / 異數無前
슬픔 영광 둘 다 모두 지극하였네 / 哀榮備極
태상시는 내릴 시호 의논을 하고 / 太常議諡
태사는 또 역사책에 대서를 하네 / 太史書特
아아 내 맘 슬프고도 애통하구나 / 嗚呼哀哉
사람들이 할 바 모두 온전했는데 / 於人已全
하늘에선 어찌하여 박하게 했나 / 在天何嗇
끼친 은택 경륜하는 데에 막혔고 / 澤閼經綸
누린 수명 오래 살지 못하였구나 / 壽慳耄耋
어진 자는 반드시 꼭 복을 받는 게 / 仁者有後
하늘 도에 있어서는 정상인 건데 / 天道之常
세 그루의 홰나무가 못 자랐으니 / 槐不成三
아아 저 푸른 하늘은 무슨 맘인가 / 嗚呼彼蒼
호연지기 빼어났던 그 한 기운은 / 浩然一氣
형신 따라 파묻히지 아니했나니 / 不隨形埋
기성 타고 하늘 위로 날아올라 가 / 騎箕天上
서애공을 응당 만나 보았을 거리 / 應見西厓
조용하게 서로 묻고 답하노라면 / 從容問酬
그 즐거움 또한 역시 끝없을 거리 / 樂亦無涯
미망인은 아직 세상 살아 있나니 / 未亡寄世
뉘와 함께 흉금 트고 얘기하리오 / 孰與開懷
지난해에 묵곡에서 그대와 만나 / 去歲墨谷
손을 잡고 이별하는 말 고했었지 / 執手告別
뒷날 다시 만나기로 기약했는데 / 後以爲期
어찌하여 영결하고 말았단 말가 / 豈是永訣
나는 병든 몸 억지로 지탱하면서 / 擬扶病躬
늦가을이 오기만을 고대하였네 / 苦俟秋末
약속 날짜 어느새 다 되어 가기에 / 盡數日夜
답답한 맘 풀 수 있을 뻔하였는데 / 庶暢湮鬱
지금 와선 그 모든 게 글러졌기에 / 今其已矣
내 가슴속 맺힌 슬픔 더 불어나네 / 增我悲結
거문고 줄 이미 뎅강 끊어졌기에 / 朱絃已斷
나는 이제 금슬 다시 타지를 않네
 / 撤我琴瑟
오래 묵은 병이 내 몸 감싸고 있어 / 宿疾沈綿
달려가서 상엿줄도 못 잡게 하네 / 阻我執紼
대신 면자 가지고 전 올리게 하니 / 綿炙代奠
어찌 나의 슬픈 정을 다 표하리오 / 詎盡哀情
영령이여 어두웁지 아니하다면 / 靈其不昧
부디 나의 작은 정성 살펴 주시게 / 鑑此微誠

[주D-001]이오(二五) : 음양(陰陽)과 오행(五行)을 가리킨다.
[주D-002]미산(眉山) …… 때인가 : 미산은 사천성(四川省)에 있는 지명으로, 이곳 출신인 송나라 때의 대문장가(大文章家) 소식(蘇軾)과 소철(蘇轍) 형제를 가리키는 말로 쓰인 듯하다. 그러나 어떤 고사(故事)를 말하는지는 분명치 않다.
[주D-003]낭릉(郞陵) …… 없네 : 상주(尙州) 부근에 살던 어진 이들이 거의 모두 죽었다는 뜻이다. 낭릉은 본래 여남군(汝南郡)에 있는 현 이름인데, 동한(東漢) 때 낭릉후상(郞陵侯相)에 봉해진 순숙(荀淑)을 가리키는 말로 쓰인다. 동한 때의 사람인 순숙에게 검(儉), 곤(緄), 정(靖), 도(燾), 왕(汪), 상(爽), 숙(肅), 전(專) 등 여덟 아들이 있었는데, 모두 이름이 나서 당시 사람들이 팔룡(八龍)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같은 시대 사람인 진식(陳寔)에게도 뛰어난 두 아들이 있었는데, 형인 진기(陳紀)는 자가 원방(元方)이었고, 동생인 진심(陳諶)은 자가 계방(季方)으로, 모두 문장의 재주가 있어서 사람들이 난형난제(難兄難弟)라고 하였다. 어느 날 진식이 자기의 아들들을 데리고 순숙을 찾아갔는데, 그날 한(漢)나라의 태사(太史)가 하늘을 쳐다보니 덕성(德星)이 한곳에 모였으므로, 이를 황제에게 보고하였다. 그러자 황제가 각 군(郡)에 조서를 내려서 영재(英才)와 현덕(賢德)들이 한곳에 모인 사실이 있는지를 물으니, 영천군(穎川郡)에서 그날 순숙의 형제와 진식의 부자가 함께 모였었다고 보고하였다. 《世說新語 德行》
[주D-004]팔준(八俊) : 같은 시대에 함께 관직에 진출한 여덟 사람의 뛰어난 인재로, 각 시대에 따라 칭하는 사람이 다르나 흔히 후한(後漢) 때의 이응(李膺)ㆍ순욱(荀彧)ㆍ두밀(杜密)ㆍ유우(劉祐)ㆍ왕창(王暢)ㆍ위랑(魏朗)ㆍ조전(趙典)ㆍ주우(朱寓)를 가리킨다. 전하여 훌륭한 신하를 가리키는 말로 쓰인다.
[주D-005]금감(金鑑) : 쇠로 만든 거울로, 풍유(諷諭)의 뜻을 담아서 다른 사람에게 올리는 문장이나 서책을 말한다.
[주D-006]양궁(兩宮) : 임금과 왕세자를 말한다.
[주D-007]세 …… 자랐으니 : 후손이 잘 성장하지 못하였다는 뜻이다. 송(宋)나라의 왕호(王祜)가 뜰에다 세 그루의 홰나무를 손수 심으면서 말하기를, “나의 자손 가운데는 반드시 삼공(三公)의 자리에 오르는 자가 있을 것이다.” 하였는데, 그 뒤에 왕호의 아들 왕단(王旦)이 과연 정승이 되었으며, 손자인 왕소(王素), 증손자인 왕공(王鞏)도 모두 훌륭한 인물이 되었다.
[주D-008]기성(箕星) …… 가 : 죽어서 신선이 되어 날아간다는 뜻이다. 《장자》 〈대종사(大宗師)〉에, “부열(傅說)이 도를 얻으면 무정(武丁)의 재상이 되어서 문득 천하를 소유할 것이며, 동유성(東維星)과 기미성(箕尾星)을 타고 올라가서 열성(列星)들 사이에 끼일 것이다.” 하였다. 부열성(傅說星)이 기성과 미성의 사이에 있는데, 이 별은 부열이 죽은 뒤에 하늘로 올라가서 별로 화한 것이라고 전한다. 후대에는 이로 인해서 사람이 죽어서 하늘로 올라가는 것을 뜻하게 되었다.
[주D-009]거문고 …… 않네 : 자신의 거문고를 들어 주던 친구가 죽어서 다시는 거문고를 타지 않는다는 뜻으로, 전하여 자신을 알아주던 친구가 죽은 것을 말한다. 《열자(列子)》 〈탕문(湯問)〉에, “백아(伯牙)는 금(琴)을 잘 탔고, 종자기(鍾子期)는 소리를 잘 들었다. 백아가 금을 타면서 뜻이 높은 산에 있으면 종자기가 말하기를, ‘좋구나, 아아(峨峨)하기 태산(泰山)과 같구나.’ 하고, 뜻이 흐르는 물에 있으면 종자기가 말하기를, ‘좋구나, 양양(洋洋)하기 강하(江河)와 같구나.’ 하였다. 그 뒤에 종자기가 죽자 백아는 다시는 금을 타지 않았다.” 하였다.
[주D-010]면자(綿炙) : 술을 적신 솜과 구운 닭고기로, 예전의 은혜를 잊지 않고서 무덤에 가 전(奠)을 올린다는 뜻이다. 후한 때 사람인 서치(徐穉)가 은혜를 입은 사람이 죽은 데 대해 조문할 때 솜에 술을 적시어 말린 다음 이를 가지고 구운 닭을 쌌다. 그러고는 무덤으로 가지고 가서 솜을 물에 적시어 술기운이 있게 하여 이를 가지고 전을 올린 다음, 상주(喪主)를 보지 않은 채 명함만 남기고 돌아왔다. 《世說新語 德行》



沙西先生文集附錄卷之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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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行狀
贈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左議政兼領經筵事監春秋館事世子傅行資憲大夫知中樞府事兼同知經筵春秋館事贈諡忠簡公全公行狀[黃㦿] a_067_123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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沃川之全。遠有代序。鼻祖學浚。爲麗朝領同正。仍世珪組。其著者曰太子中允孝格。刑部侍郞大富。民部典書侑。版圖判書淑。累傳而至贈吏曹參判應卿。寔公之高祖也。曾大父彭祖。國067_123b子上庠贈承政院左承旨。大父焜。贈吏曹參判。考汝霖。贈吏曹判書。三世推恩。皆用公貴。妣月城李氏。封貞夫人新羅大臣謁平之後參奉信之女。判書公宜達而窒。李夫人媲德娠賢。以嘉靖癸亥正月二十一日擧公。公諱湜。字淨遠。號沙西。少穎秀異凡兒。厚重如成人者。稍有知。得異味於外。必奉諸父母。父母貧。蔬糲不繼。悶其飢而問之。輒曰飽矣。鄕里稱全孝兒云。八歲。通文義志學。學大進。金沙潭弘敏大加歎賞。名藉甚士友間。己丑。中增廣司馬試。壬辰難067_123c作。公與進士姜霔倡義募士。伏于險阻。邀殺賊數十餘騎。或懼賊肆其毒。出首鼠語。公責以大義。終不爲動。丙申。用左相金公應南薦。調連原察訪。是時湖民新刳於兵。陲卒散亡殆盡。公招徠撫摩。克擧其職。遂令公管收稅米。方在可興倉。訛言賊鋒且至。公私震聳。倅宰劻勷。公獨勑下吏守庾庫。數日果定。丁酉。又令句湖西穀於忠州。以備軍餉。賊兵再動。體臣使焚其儲庤。毋爲寇資。公執不可。竟全萬斛。爲我軍需。其臨急不撓。能處肯綮類如此。己亥。轉禮賓寺直長。不067_123d就。癸卯。始釋褐。時論方擯異己。以公補成均館。乙巳。選入堂後。權相主尊號議。言官從臾。有嶺人不傳會者。迺疑公指敎。將齕公。公遂遯于鄕。丁未。例陞典籍。戊申。薦騎省郞。未拜。旋出爲忠淸道都事。都事管刷邊民。法久弊生。侵及無告。公據實上聞。多所剗革。按使有滯訟。請公理。公輒斷得其情。人到于今稱誦。鄭仁弘自京還。遇公于道曰。近來國事不可言。大臣亦爲邪論。公曰。相公之箚。萬世正論。而謂之邪耶。仁弘怒不復與言。己酉。拜禮曹佐郞。轉正郞。一時公議。067_124a欲薦公東銓。將先擬臺府。銓郞有戚畹子。以公不肯俯仰故尼之。銓長使其子弟往探公意。且勸訪其人。公笑而不答。由是不果引用。辛亥。除蔚山府判官。大有惠政于民。甲寅。除金郊察訪。以病不赴。又出爲全羅道都事。尋棄官還。時世事大變。倫紀幾亡。公奉親家食。絶仕宦意。與愚伏鄭公,蒼石李公杖屨相從於山水間而已。鄭仁弘過尙州。公避而不見。仁弘心銜之。其徒吳汝檼輩相與訕笑曰。家貧親老而不爲官。全某其愚人哉。己未冬。丁內艱。庚申春。又遭判書公067_124b喪。旣葬。廬于墓側。哀毀過制。壬戌。除慶尙道都事。不赴。癸亥撥反之初。收敍耆喆。拜公禮曹正郞。兼記注官選知製敎。自是遷除。常帶三字銜。秋薦玉堂。由修撰,校理。每當進講。必竭誠獻納。明析義理。上亦虛心嘉納。任學士叔英常稱經筵官。通古今鄭經世。達事理全某其人云。冬移典籍。尋拜司憲府掌令。論郞署無行者。宰臣伸救。上命罷公職。大臣白言積年林下。素有力學名。合在言地。不宜斥罷。上從之。除直講。甲子。遷司僕寺正。賊适稱兵。公扈駕067_124c行次天安。拜執義。論李貴棄師之罪。又論張晩逗遛之律。晩幕下武弁輩譁然訟曰。主將有功無罪。吾屬其去矣。公厲聲叱曰。社稷蒙塵。大駕未返。汝亦人臣耳。乃敢爾耶。遂帖息以退。遞付禮賓寺正。三月。用羈絏勞。陞通政階。拜兵曹參議。冬。拜同副承旨。上命賜金公諒通政資。繳還爭執。人以爲難。乙丑。轉左承旨。辭遞護軍。拜刑曹參議。爲朝京使。時遼路塞。涉海萬里。莫不爲規避計。公無幾微見色。遂行至皇城島之大洋。風作舟危。人皆喪精失措。公獨不爲067_124d變。乃賦詩曰。木道二千里。風餐三八蓂。曾聞達去舍。今覺沒吾寧。肯以顚危動。須從造化聽。開蓬發一笑。萬事寄冥冥。俄有兩大鰌挾舟而行。近陸乃逝。咸以爲神助云。中朝人見者。皆稱有德宰相。而登州軍門武之望。尤加敬禮焉。丙寅。復命歸鄕。丁卯。還朝。二月。虜兵闌入塞。將薄京城。大駕巡于江都。公扈從。廟堂方議和好。公上疏其略曰。胡差又來。虜書又至。要與聖明立誓。屈千乘之尊。下與夷狄之賤夫。抗禮成誓。設令因此而國家安全。生民免禍。尙有牛067_125a耳之愧。況此狡虜情態萬狀。愈久而愈見其叵測。未知前頭更有幾層話頭耶。伏乞聖明斷然奮厲。斥還來使。急檄守禦諸將。備守臨津一帶。仍令平安將士。遮截浿江西邊。或可使隻輪不返也。噫。到此危急之秋。人主一擧措。便爲興衰之機。頃日嚴斥抗言之諫官。左遷陳箚之學士。似此施爲。不但失一島人心。四方聞之。必不以前日期待仰殿下也。臣甚憂之。由禮曹參議。拜大司諫。進六條箚。其目曰。納諫諍。去偏私。修軍政。減軍官。勿恃和議。勿爲譏察。時諸勳宰067_125b各占褊裨。又橫議失時之人。日夜覘其動靜。人人惴惴莫保。而公箚論其狀甚白。士論韙之。自是年至庚午。爲禮曹參議者四。爲吏兵曹參議者再。爲大司諫者四。或以病辭。或出謝而還。蓋自以老病宜退。求外補。尹鷄林府。府故嶺之巖邑也。不大聲色而民自化。瓜滿而歸。民立石頌曰。爲政以德。視民如傷。三年惠澤。汶水流長云。甲戌。還拜大司諫論。麟坪大君婚事有不中禮者。且言婚時衣服器用。宜從儉約。以戒奢汰。上皆溫批以答。又論紀綱漸弛。宮禁不嚴。內言067_125c之出。外言之入。未必不由於此。又上疏論時政。其略曰。聖上睿智出天。英氣發露。有獨御一世之志。多輕士自信之意。訑訑聲色。或著於八九年前。臣之隱憂。蓋亦久矣。及見頃日之事。言逆于志。不求諸道。不但拒斥。從而摧折。削黜竄謫。無所顧惜。遂使朝廷索然。善言不入。至於朝紳分黨。國家大患。人主當潛消默奪。以絶其漸。不宜指成題目。形諸辭語。爲郭公惡惡之擧。仍竊伏念殿下上聖。丁曩間中否之運。明倫立紀。變亂爲治。誠所謂大寒之陽春也。屬有師旅067_125d之命。屢經播越之變。人心渙散。國體削弱。天災疊見於上。民怨漸生於下。若此以往。則幾何其不至於亂亡也。伏願聖明益溫舊學。更加新得。先正憤懥愛惡之心。務去奢侈華靡之習。言苟畜君。則芻蕘而必擇。害及生民。則貴近而不饒。視群臣猶吾四體。字庶民猶吾同胞。日復留心於九經之目。以爲治平基本。辭遞護軍。拜兵曹參議,大司諫。辭拜禮曹參議。乞暇歸鄕。丙子正月。聞仁烈王后喪。還朝謝命卽歸。拜大司諫,副提學。皆以病辭。十二月。虜兵猝犯京都。067_126a大駕入南漢城。公首倡義旅。募兵千餘人穀百斛。進屯于忠州櫓洞。丁丑正月。嶺之官軍。衂於雙嶺。義兵望見敗卒。以爲賊至。皆請移陣避鋒。公曰。毋驚怖。且毋慌言。軍中一撓。能復合乎。俄而遂定。公知懸軍深入。無益於事。乃還陣聞慶。分守要隘。圖保一面。會賊撤城圍。上出城還都。公郞奔問。業有副提學之命。肅謝請對。上面敎若曰。聞卿倡義。予甚嘉尙。所以慰諭公者良至。且曰。國家所恃惟三南。湖西則已被搶矣。湖南之民。卽嶺民之罪人。嶺軍再擧再集。誠由067_126b士大夫有識故耳。公涕泣前對曰。臣犬馬齒至。病不任事。主辱臣死。蔑效絲毫。主臣主臣。仍進言曰。國事至此。須有別樣擧措。臣入京有日。未聞一開殿坐。柰何自置於無可柰何之地也。比者十臣被罪。此輩無遠慮。徒爲大言。竟致國事顚沛。然罪之則過。豈可使天下聞此罪名也。尋拜吏曹參議。四月。特陞參判。加嘉善階。兼同知經筵春秋館事。辭不獲命。乞暇遷先墓還。戊寅。三除諫長。一拜憲長。移禮曹參判,大司成。兼帶如故。上以湖南軍犯律。命赴南漢067_126c城三月之役。公以爲正當耕種之時。特減其朔。上命巡檢使整飭三道舟師。公以爲防備不可廢。而民隱方殷。此非急先務也。又上八條箚。其目曰。調養聖躬。懋修實德。痛革侈風。廣開言路。振肅紀綱。崇奬節義。勤恤民隱。革罷內需。皆言人所難言者。己卯庚辰。又三拜諫長。三除憲長。辭不赴。時相啓言全某德望素高。而年齡已暮。宜先大用。上曰。予亦奇其爲人。公聞之。尤慊然自遜。絶意造朝矣。壬午二月。大臣李聖求啓言全某經幄重臣。年今八十。宜有優067_126d老之典。上特加資憲階。除知中樞府事。兼同知經筵春秋館事。尋拜大司憲。辭不赴。以是年十一月初七日。考終于尙州城外居第。以其明年癸未二月二日。葬于尙之治西柏田山先兆下巽坐之原。從治命也。公卒之日。亡論遠近。識與不識。皆相弔曰。賢人亡矣。邦國瘁矣。門下士數百人。會哭治喪。訃聞。上輟朝致賻。遣禮官致祭如儀。贈崇政大夫議政府左贊成兼判義禁府事世子貳師知經筵春秋館事五衛都摠府都摠管。後以子克恒原從功。加贈067_127a議政府左議政兼領經筵事監春秋館事世子傅。公天資醇美。器宇宏亮。肆慢之容。不設於體。鄙倍之言。不出於口。常有一團和氣。粹盎外貌。人望而卽之。知其爲有德君子。雖媢嫉公者。終不敢加以不善之名。蓋公早遊西厓柳先生之門。與愚伏,蒼石諸公講磨切磋。至老不衰。其爲學淵源。有所自矣。世稱嶺南多儒者。而推商社三老云。其孝友之性。出於天得。而一無修飾。有人不可跂而及者。嘗曰。事親之道。只一箇誠而已。兄弟旣樂。姻黨以和。其爲政於家者。足067_127b以風斯俗矣。居約而不渝素履。處顯而常執恬退。眞古所謂大丈夫哉。立朝四十年。歷揚中外。有令無類。名行俱全。非學力而能是乎。愚伏每歎其學識高明。處事當理。非溢語耳。嘗記不佞戶奉使嶺南。謁公于尙之里第。家四壁立。蕭然如布素。仍誦任疏菴詩誰似全都事。居窮志不窮。遙知讀書罷。高臥北牕風。有味乎其言也。公餘事爲文。本諸經書。尤精於胡氏春秋。有遺稿若干卷藏于家。公先夫人江華崔氏。大丘府使巨源之四世孫士人斯立之女。未乳早世。後夫067_127c人南陽洪氏。麗朝功臣殷說之後士人天敍之女。先公逝。有三男一女。曰克恒。文科正郞。贈都承旨。以文學著名。死於丙子之亂。曰克恬。進士前監役。曰克㤚。業儒。女適黃德柔。司憲府監察。側室三男二女。曰克忱,克憕,克。康鍒生員。柳之洙生員。克恒有嫡庶各一。男曰,崇。克恬有一男四女。曰嶨。李皬,李埰,金學基進士。餘幼。克㤚有一男。曰嶔。曰峸。爲克憕出。曰。爲克出。黃德柔有三男三女。曰霦生員。,霆。檢閱洪汝河,士人成錫夏。餘幼。康鍒有二男二女。曰后067_127d學,晩學。女幼。洪汝河有子女而幼。公之德其未艾夫。監役君述公行示余。且屬余狀。見其述。惇史也。何加焉。顧不佞戶弱冠通籍。得從下風久矣。竊嘗以爲當宣廟在宥五十年間。培植儒風。賓興多士。彬彬盛矣。其在昏亂之朝。雖敲撼擊撞。而尙有典刑。遇我九五眞主。庶幾展布其蘊。不幸丁百六之災。然所以維持至今。繄一二諸公是賴。觀公始終。亦可以知君臣矣。不佞不敢以不文辭。掇其槪槩而爲之狀。若夫著之顯刻以詔來者。當世之有德行能文章者存。
067_128a通政大夫成均館大司成昌原黃㦿。謹狀。



遲川先生集卷之十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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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啓辭 附收議
備局啓辭 a_089_516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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啓曰。大典吏典。六品以上官員仕滿九百日。方許遷官。祖宗朝謹守此法。六曹郞廳佐郞三十朔方陞五品。正郞三十朔方陞四品。故職事無曠廢之患。仕者無驟進之嫌。壬辰以後。事多苟簡。此法遂廢。然臣及仕宣廟末年。其時仕路之淆亂。豈089_516b至於今日之甚乎。臣嘗慨然於此。前月二十五日朝講時。語及戶兵曹郞廳。因擧祖宗朝正佐郞各三十朔之例。陳於榻前。上敎曰。今亦如是爲之可也。蓋臣之所陳本意。通六曹爲言。而記事者因其時有戶兵曹郞廳說話。故擧行條件。專以戶兵郞廳久任爲言者。誤也。大典本意。六曹皆爲重選。奚但戶兵曹久任而止哉。且見再昨政目。戶曹佐郞黃德柔除授本職未滿十朔。遽陞正郞。臣問諸該曹堂上。答云聞其能擧職。且陞授本曹正郞。與他遷官者不同。故如是擬望云。此亦不然。089_516c蔭官郞僚已爲極選。豈可以數朔勤仕之故。遽陞五品爲正郞乎。然旣有擧職之名。且已擬望受點。不妨仍責成效。而後日除授。該曹不可不詳察爲之也。一郞官除拜。自是該曹循例注擬之事。非臣所敢與知。但念當此之時。如欲整頓頹綱。修擧廢政。則須以修明祖宗法典爲主。榻前一言。意非偶然。而史官旣誤記於前。該曹又做錯於後。事雖微細。所關亦重。自今以後。該曹注擬。另加詳察。以副榻前下敎之意爲當。以此申明分付何如。


荷塘先生文集卷之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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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行狀
通政大夫行江界都護府使成公行狀 a_151_420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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公諱以性。字汝習。姓成氏。系出昌寧。昌寧之成。自麗朝太尉開府儀同三司松國始著。累公累卿。爲世大族。曰漢弼。門下贊成事。曰履。門下侍郞,右文館大學151_420d士。曰乙臣。門下侍中。曰元度。集賢殿大學士。曰萬庸。寶文館大學士。及本朝。冠冕亦不絶。至公高祖諱翼同,曾祖諱胤,祖考諱繢。皆不振。考諱安義。用經術顯。官至通政大夫承政院右副承旨贈資憲大夫吏曹判書兼經筵,義禁府,春秋館,成均館,兩館大提學,世子左賓客。前夫人長水黃氏。僉知謹之女。翼成公喜之後也。後夫人宣城金氏。文節公淡之玄孫。戶曹參判繼善之女也。金氏世居榮川。判書公避地。因居於榮焉。以萬曆乙未二月一日生公。生而明瑩。異凡兒。甫齔。學業日就。伯父進士公有鑑識。常曰。此151_421a兒必大吾門。年十三。從判書公往南原任所。過謁愚伏鄭先生。鄭先生奇愛之曰。生子有如此。乃翁可謂百不憂矣。時康公復誠尹全州。公從康公學易。及還。康公贈以詩曰。皐稷何曾讀古書。一番吁咈做唐虞。尋章摘句渾閑事。惟一惟精是聖謨。其期望如此。弱冠。赴居昌東堂會。考官有父執。公乃不製而出。時年十六。人異之。丙辰。捷京解大小科三場。及就覆試。寫試紙訖。有同進者一人。誤傾墨水。漬試紙。衆皆駭歎。公色不動。徐謂其人曰。甑已破矣。等棄之拙作。寧移寫君紙。其人固辭。見者兩美之。中生員。是時。光海政151_421b益亂。遂絶意進取。乃稟命判書公。不赴公車。癸亥。憲文王反正。甲子春。逆适犯京。上幸公州。公從判書公。徒步隨駕。賊平駕還。始遊大學。更理擧業。洋中舊有謬規。頗有䙝翫之習。公爲色掌卽革之。識者韙之。累擧別解。而連不第。人以抱屈稱。丁卯。始登式年科。分隷承文院。爲副正字。朝議將薦授史館。己巳。遭判書公喪。服除。陞正字。薦補承政院注書。尋拜侍講院說書。癸酉。陞典籍。移司憲府監察。俄拜司書。甲戌。除騎省佐郞兼春秋。八月。由春曹郞。拜司諫院正言。疏論元宗追崇事。略曰。今日之擧。當從容講151_421c究。務求至正之歸。然後庶幾尊親之道宗廟之禮。兩無所憾。而殿下徒爲至情所蔽。不能平心察理。每以嚴旨摧折之。一則曰附勢。一則曰流涎。一則曰濟私慾。嗚呼。立殿下之朝。言殿下之事者。觸忤則譴罰及之。將順則榮寵隨之。其爲一身之利害如何。而必去其利。就其害者。其心果在於附勢。流涎而濟私慾乎。若使庭臣果有是心。而殿下明知其然。則退之可也。黜之可也。今旣置諸其位而任使之。一朝忤旨。乃以情外之言。勒定其罪而拑其口。是豈聖王大哉之言。而其於使臣以禮之道。何如哉。又於答兪151_421d伯曾論一二人之疏曰。其罪只是迎合二字。迎合雖是二字。而其害則有不可盡言者。自古人臣之所以蠱君而誤國者。未有不自迎合始也。夫迎合者。惟其君之所欲而導之之謂也。若殿下之所欲爲者。果皆合於禮經。則所以迎合者。不亦善乎。如其不合於禮而必欲迎合。則不幾於一言而喪邦乎。今此入廟之擧。殿下之心。在於必行。故彼亦曰可行。若殿下以爲不可。則彼亦以爲必不可矣。伊尹之告太甲曰。有言。逆于汝心。必求諸道。有言。遜于汝志。必求諸非道。殿下何不以此而省察耶。嗚呼。直言久士退151_422a矣。容悅之人進矣。忠諫路塞。迎合成風。則殿下之所大欲。可以得成。而殿下之國事。終何如耶。疏奏。卽遞歸。其冬。除司書。不赴。乙亥。又以司書。還朝。六月。拜副修撰。時仁成君珙。以逆論死。幷其子。用待年延罪律。公伸救。忤時議。遂上疏言珙雖在法罔貸。放其子全恩。亦殿下至德。臣頃陳意見。重觸時議。臣不敢苟同。傷殿下之仁。惟聖上裁之。後又於筵中。反覆陳達。上感悟。珙之子終得保全。與凡逆律待年者。皆免死。然終默不言。不使逆孼之在鄕近蒙恩者知其由。自乙亥秋至丙子冬。十爲修撰校理。爲151_422b持平,正言,文學者或再焉三焉。及虜兵逼京。上入南漢時。公以修撰在家。聞變。與金忘窩榮祖,金鶴沙應祖。同赴難。到忠州。見嶺伯沈公演於行管。旣出辟公爲參謀曰。業已啓請。忘窩公曰。君方爲侍從臣。監司豈合擅辟。況此時。何路啓請。願無往。公曰。上方在圍城中。吾輩與其進不得入覲。寧奔走從事於用力之地。少展臣子分義職也。遂至行營。亡何。慶尙左右節度使軍利川之雙嶺。皆敗死。人皆恇怯無人色。監司疾馳向原州路。欲往從關伯趙廷虎。公與僚佐及諸守令。追及之。力言其不可曰。使相。旣非戰將。手151_422c下又無鬪士。爲公計。不如急還本道。收散卒。以爲後圖。奈何他往。語未及卒。有一守撫劍慍有語。監司立變色。促駕還到忠州。公謂監司曰。某嶺人也。此時何可踰嶺而南爲。請留此。以待公召兵來。監司亦義而許之。未幾。上勢窮出城。遂趨朝奔問。二月。以賑恤御史。出慶尙道。廣詢吏政民願。多以便宜條上。輒蒙施行。還朝。又爲湖西暗行御史。劾貪墨。褒異績。一道肅然。還拜持平。帶三字銜。轉獻納。極論尹昉,沈器遠,金自點,李敏求等誤國不忠罪。戊寅春。累爲獻,納校理。一爲直講而兼帶。皆如故。時柄臣有自相傾軋。乃151_422d陽爲公論。而務引一番人以爲援。欲先用公爲銓郞。公恥之。以親病辭歸。自是。雖除命沓至。僚友相責。而終不應。己卯春。始以騎省正郞赴朝。時宰又意其出彼必入此。更除修撰。將擬銓郞。旣而。聞其不助己。卽陞掌令以塞之。公之跡阻天官。蓋以此。八月。又以校理。拜司諫。俄以暗行御史。使湖南。論啓羅州牧使金光炫,具鳳瑞前後守。政治得失甚晢。時稱得使臣體。復爲司諫,執義,校理。乞養爲陝川縣監。居官王雪自將。撫民若赤子乳哺。捐捧。充前倅逋欠數百石。興學校。奉公上。一以誠信無倦。時泉司閫帥。號威暴。不禮151_423a下官。至公亦皆感悅而禮遇之。間出管儲。以助賑濟資。邑人賴之。甲申。以事罷歸。冬。由弼善。轉輔德。乙酉。以副修撰。充書狀官。赴燕。正使。乃麟坪大君。會昭顯世子凶聞至。至燕卽回。六月。復命。行橐蕭然。只有寢具一部而已。副使鄭公世規。甚敬重之。丙戌夏。爲校理,修撰者四。司諫,執義四。輔德一。而或赴或不赴。六月。爲別試參考官。坐主司。誤出題觸諱同罷。丁亥。七月。拜校理。戊子。復爲執義。轉應敎。歸覲仍遞。尋除修撰。不赴。五月。拜潭陽府使。己丑五月。仁祖賓天。以差員赴哭。庚寅。御史極陳治績上聞。上賜表裏151_423b褒諭。以校理召還。夏。由校理歸覲。尋除執義。冬。以副應敎還朝。移司諫。時嶺儒上章。論成,李兩臣不合聖廟從祀。忤時議。被館學削罰一道。不應擧。時議構捏以爲不赴慶科。是有無君心。語極狼藉。於是嶺儒又上疏辨誣。蒙優批。衆怒方盛。適有道內狂生。有擬製聖批事。時議譁然而起。謂出疏儒中。必欲傳致爲嫁禍計。人皆重足而立。公乃上疏。力辨其誣罔狀。賴上洞察及一二人周旋調護。得無士林之禍。辛卯。又以司諫兼春秋。一日。上怒。假注書李溟翼。漏泄筵中說話。遽命拿鞠。公力爭以爲史官不可加刑。且151_423c言筵中說話。宜公言之。不必諱外廷。上震怒。遂辭遞。因欲歸覲。會仁廟實錄垂成。職帶春秋者。例敍勞陞秩。史局同僚。咸勸少留。公自以言不見施。更希恩賞。爲可恥之甚。乃決歸。由此益忤上意。數年絶無除命。吏曹判書鄭世規啓曰。此臣素著淸謹。且兩朝經幄之臣。不可以一言忤旨而棄不用。上不答。至癸巳三月。始除昌原府使。蓋恩譴也。公不敢爲辭免計。卽赴任。是時。朝廷設立營將。務修軍政。戴武弁者。莫不頡頏作氣勢逞技。能繕器械。互創新制。列邑疲於造作。且有各寺奴婢推刷之擧。士庶家奴151_423d婢叛主投入者踵相接。詞訟紛紜。公極陳其弊。申使臺監司深然之。啓聞禁抑之。其弊少戢。昌原縱號海邑。獨馬浦一面。供漁採役。是歲。馬浦人誤食毒蛤。死無數。公深加矜恤。盡除丁役。至於上供海錯。亦自官貿納。休其力以來之。於是。流逋四集。二年間。稍稍復其舊焉。甲午七月。歸覲。十月。丁內憂。丙申。服闋。丁酉。除軍器正。出爲晉州牧使。晉乃病鄕。名爲遴柬而實困之。親舊咸來唁。公怡然就道。晉之庶人死。率草殯於山徑。久遠不葬。公痛禁。使其隣族。合力營葬。其尤無告不能爲力者。官給資糧。使刻期盡埋。汚俗爲之151_424a一變。戊戌春。暗行御史閔鼎重巡按軍務。以上命大餉習陣軍于晉州。因行賞罰。兵使以下。皆奔走脅息。軍餉罷。兵使謂御史將登矗石樓。要令大供具。張雜戲。以求媚悅。公執不可。御史知其由。及相對。悔謝不已。還朝上其最。上又賜表裏一襲以褒嘉之。秋。以副校理。召還。未幾。以事罷歸。己亥四月。除校理。不就。五月。孝宗昇遐。乃奔哭。差國葬都監都廳。六月。又爲司諫。尋除校理。十月。過因山。已而。以事遞歸。故事。國葬幹事官。例皆陞資。而以公代人受任於始事後旬日。獨未蒙例恩。物論稱屈。冬。復爲執義。移校理。151_424b庚子春。又爲應敎。皆未行。吏曹啓以江界民久困暴政。請極擇侍從臣負重望者注擬。遂除江界府使。蓋三司亞長例擬承宣。外爲陞擢。而實遠之也。四月。赴任。府爲西關鉅鎭。地邊胡。人民稀。其俗以採參爲業。遠近商賈湊泊。而公家亦陳椽。其間趨利甚於賈豎。西道諸使及京司各衙門。委輸布帛。與之參而責其償三倍。爲守令者亦然。以故闔境嗷嗷。公於辭朝日。極陳其弊于諸宰。欲痛革之。惟李丞相景奭稱歎力贊之。其餘皆媕婀而已。亦或有咈然不悅者焉。公至則盡除稅參。凡京外各衙門持公案貿參者。一切防151_424c塞之。民皆鼓舞感泣。是戲關西大旱。飛蝗蔽野。野無靑草。公日夜劌心。經紀賑政。無所不用其極。賴以全活者頗多。一日。吏告監營裨將持關文來到。公度其以參故來則曰。若公事也。營門當行關。軍政也。當用傳令。安有裨將袖關文來。囑守合者乎。拒不納。其人盛怒而歸。詿誤監司。監司歎曰。彼律己以直。雖上使。亦不可奈何。及歸京師。盛稱成某。乃今世一人。會滿浦僉使韓休。有土兵犯參禁。休誣引公爲自明計。於是。朝議紛紜。或陽佑而反齮之。十二月。拿命至。闔境皆奔走號泣。及就理。府民追來訟冤以爲如使君德151_424d政。自有江界以來所未有。願備納人參二百斤。以贖罪。將訴枉于廟堂。公聞之。驚以爲如是。適足以增謗。因力喩止之。時朝廷旣已奏聞。當有査勅來。江界人欲用累千金。爲行賂計。留半年。知査勅不來。然後還去。其惠澤入人深也如此。平安監司任義伯。因啓罷貪汚吏。論及採參事。極言公儉己利民狀。據此足知公無毫毛罪。然竟以此配丹陽。十一月。蒙宥。至癸卯冬。始敍用。甲辰二月四日。考終。享年七十。嗚呼痛哉。葬榮川郡東巽向之原。公安容半秀。儀度雍容。端居莊重。不設惰容。雖倉卒急遽。未嘗爲疾言遽色。自少151_425a操持甚確。其在南原衙中。多有鬼怪。公不少撓。每獨處一室。讀書自若。聲振金石。過者皆傾聽。彷徨不能去。嘗覲先大夫於濟州。遇惡風。漂蕩。舟上下出沒。篙師亦驚號失措。公安坐不爲動。舟中恃以爲安。先大夫素簡嚴於子弟。不輕許。及聞此。亦歎尙不已。及出仕塗。常杜門靜坐。簡於交遊。尤斂避貴近。麟坪大君數相問。而一番趨謝後。絶迹不往。金自點致款甚勤。累有尉薦。而終始避不近。其介潔自守類如此。平生不喜紛華。不近娼妓。未嘗爲激訏之言。崖異之行。以矜己取名。其居官也。惟以節用愛民。淸心省事。爲第151_425b一義。一遵三尺。不越繩墨。人不敢干以私。衙門整肅。內外隔絶。鄕所及官吏輩。未嘗見子弟顏面。衙屬雖一杯酒一豆羹。亦不敢私用焉。以此或有情外不近之謗。而亦不恤也。所經諸邑。皆伐石鑄銅。頌其德。公平居。閉戶養閑。絶無分表經營。惟耽閱書史而已。客至。雖卑微。皆厚遇之。和氣藹然。晩節家益旁落。所居屋不蔽風雨。亦不事營緝。有田在近邑。親舊或求作家基。或請爲墓田。皆斥與之。而不取直。處鄕邑。無甚是非。無少干預。中歲以後。尤絶公府迹。雖邑倅方伯來訪。只遣子弟回謝而已。與一弟同居隔溪。怡愉和151_425c樂。朝會至夕。夕會有時聞鷄。諸子侍側。或令陳說聞見。或與揚推古今。有酒則一杯。微醺以爲常。公爲文明白簡當。絶無浮艶之習。非近世操觚命翰者所可及。而平生不以文藝自任。鮮有述作。只有燕行錄一卷。藏于家。嗟乎。公以廊廟之具。氷蘗之操。又濟之以經術。使遇其時究其蘊。則其所樹立。豈止此而已哉。惜不爲時論所容。出入侍從三十餘年。長困於積薪之場。晩陞緋玉。棲遲邊邑。一斥不復而終。玆命也歟。抑歸譏於宰物者耶。然今上乙亥。錄公淸白吏。再賜子孫米豆。幽明榮耀極矣。亦可見公議之終不泯151_425d也。其梘世之淟涊庸碌躋崇班享厚祿。而磨滅名不稱者。相去何如也。夫人奉化琴氏。驪州牧使愷之女。有五男三女。男長甲夏。進士。次錫夏。先公沒。次得夏。出後公之弟以怕。亦先公沒。次用夏。次文夏。參奉。女黃橏,鄭基載,金漢奎。甲夏娶士人權碩忠女。生四男。世琳,世瓚,世瑜,世球。一女適朴晩華。錫夏娶郡守德柔女。生二男。世璜進士,世璟。一女適前縣監權斗寅。得夏娶士人金錫重女。生一男。世壁。一女適生員柳宗時。用夏娶經歷朴玏女。無子。以世球後。文夏娶直長李敦女。生三男。世珽,世瑨,世頊。三女適李栐,鄭151_426a游蓮生員。次未笄。黃權生四男。廷煜,廷烈,廷燾,廷黯。三女適朴齊賢,朴震甲生員,金厚昌。鄭基載無後。金漢奎生三男。樟,楷,榏。一女適金龜錫。內外曾玄孫若干人。噫。公之德行操履。忠亮貞白。俱有本末。狀公之行。非如斗寅淺弊不文者所能任也。顧無狀。忝入公門。辱公憐顧甚厚。於公立朝行事。蓋竊識之。今者參奉公屢勤委命。不敢終讓。謹摭家乘所述及平日所聞覩者。論次如右。以備當世立言者垂察而裁擇焉。謹狀。


 洛村文集卷之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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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附錄
家狀[李元禎] b_029_538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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府君諱道長。字泰始。姓李氏。號洛村。其先廣州人。始祖遁村先生諱集。以文學志節。鳴于麗季。與牧,圃,陶三隱。相友善。擢第判典校寺事。贈議政府左贊成。子諱之直。仕本朝。爲刑曹右參議。兼寶文閣直提學。有淸名直節。贈議政府領議政。子諱禮孫。禮曹參判。子諱克堅。通禮院左通禮。贈吏曹參議。子諱摯。承仕郞。娶于星。未及歸而歿。子孫仍家焉。子諱德符。成均進士。娶舍人信川康仲珍女。於府君爲高祖。029_538c曾祖諱遵慶。娶眞樂堂先生善山金就成女。祖諱煕復。贈承政院左承旨。娶別提淸道金崇祖女。考諱潤雨。登文科。歷敭華貫。卒官工曹參議知製敎。贈吏曹參判。號石潭。師事寒岡鄭先生。績學砥行。爲世所推。貞夫人仁川蔡氏。成均生員諱應麟之女。莊嚴齊肅。莅家有法。以萬曆癸卯五月十一日丙寅。生府君於星州八莒縣上枝里第。承旨公有弟曰光復。訓鍊院僉正。贈戶曹參議。娶監察安東權應吉女。生諱榮雨。軍資監主簿。娶忠義衛東萊鄭恕女。早歿無嗣。以府君爲後。府君生而秀異。資禀穎悟。甫踰歲。029_538d已能解字。稍長受學。記性絶類。三日而誦庸,學大全。鄭先生之講道泗上也。以童丱挾筴往拜之。先生愛其聦睿。大加稱嘆。常使朝夕于側。癸亥。遭鄭氏憂。寢苫處濕。柴毁骨立。幾殊而僅蘇。未幾。從參判公。移家于梅院。仁祖庚午。登文科。選補承文院權知。癸酉。由副正字。拜沙斤察訪。撫摩疲卒。捐供立馬。驛弊以蘇。兼正字,著作,博士。及歸。驛卒爲立淸德碑以思之。甲戌三月。薦授承政院注書。病不赴。轉輾沈痼。至閏八月。證益篤。殆不保朝夕。而參判公捐館舍。奄奄危綴之中。履禮愈嚴。哀毁踰節。親戚感其孝。無敢以愼029_539a疾爲言者。丙子。終制。由博士。復拜注書。十二月。虜警卒至。廟謨蒼黃。定以江都爲行宮。車駕臨發。而略不以捍禦爲意。府君與同僚。就問首相金瑬曰。事急矣。不分兵遮截乎。相國厲聲曰。國事至此。年少新進。遽欲指揮大臣耶。何兵可以分。何地可以遮截也。府君曰。虜勢迅疾如風雨。昨聞犯境。今日已報過開京。料虜兵。已與此報俱至矣。今不遮截。而輕動至尊。猝遇於道。則何以應之。訓局之卒。不必盡使夾輦。姑令四五哨往逆。而奉駕出城。無乃可乎。相國大悟。乃除火砲兵四百。令金淵等四人。領赴西郊。遇029_539b虜於京西城外磚石峴。虜見淵兵。要於嶺。疑我有備。相持不進。駕至崇禮門。始聞之。卽金淵傳語也。蒼黃改路。入守南漢。說者謂淵不出逆。使虜直擣。則當日事。有不忍言者。而得免者。府君一言之力云。翌日夜半。上用柄臣策。密與數三大臣。步出南門。移向江都。氷滑不能移步。還入山城。諸大臣。復請脫身獨幸。於是羣下。或疑上已出。駭遑奔走。塡咽闕外。府君進啓曰。賊到城下。兵未分堞。事機正在呼吸之間。而大臣等以其家屬在江都。故不量事勢。力請移蹕。脫有中路罔極之變。事無可爲者。請招體察029_539c以下諸將。明飭誓戒。斷自聖衷。堅定守城之計。以安羣情。上擊地曰。善哉言乎。卽起立出御廳事。使承旨李景曾。招金瑬以下諸大將。具甲胄。以次伏庭聽敎條。使不復異議。然後人心始定。後聞之。則乃賊兵在道之日也。上博訪羣策。並許卒伍以上。請對論事。謀議盈庭。辭說紛多。而府君晨夕昵侍。呵凍作字。筆翰如流。該暢纖悉。仁祖常爲之注目。擧朝咸歎其贍敏。至今稱記注才者。皆以爲莫能及。凡所料畫。亦動合機宜。故諸宰多與議決。目之以國器。淸人咎我敗盟。脅求斥和臣。尹文擧以洪翼漢等八人。029_539d訴於體相。乞自免。相國今府君列書。其姓名。府君曰。文擧廣援佗人。求免己死。則自書之可也。此豈史官所宜書乎。相國責以慢無禮。迫之不已。府君竟不從。退謂副提學李景奭曰。胡人所索。不過一二。我之所送。何至八人之多也。曰相國之意。恐其少則必殺也。府君曰。曾謂此賊以八人爲多而惜不殺乎。今日八路生靈。死鋒鏑者。奚止八人哉。李公甚然之。爲言於相國。以洪翼漢,尹集,吳達濟。三人應之。趙贇,洪瑑,李時楷,申恦,兪榥賴以得免。丁丑二月。隨駕還都。陳䟽歸覲。尋遞博士。未赴而罷。冬。拜藝文館檢閱。旋陞029_540a待敎。戊寅正月。休告辭陛。特賜御藥。二月。陞奉敎。旅邸疾作。證殊劇。上特命遣御醫。看病宣賜藥物。下僚之膺是恩者。世未嘗有也。五月。陞成均館典籍。遷兵曹佐郞。七月。拜司憲府持平。乞暇省親。尋由弘文館副修撰。移拜持平。時掌令柳碩等。論金尙憲見危棄君之罪。請安置極邊。臺啓尋停。而朝論大乖。府君以爲罪不可全貸。律不須過重。與同僚。議啓付處。上置之。冬。遞典籍。由司諫院正言。弘文館副校理。拜吏曹佐郞。南尙書以恭。時爲冢宰。延接士類。要與同事。府君僅再詣政席。病其注擬有形029_540b跡。卽引疾而出。不復預政。士論韙之。淸人初有徵兵之擧。朝議遑遑。莫知所以應。有一嶺南人言於時相曰。彼旣徵之。則我之送兵。出於不獲已。無甚害義也。至引麗朝事證之。時相然其言。意嶺之輿論。大率類此。府君愕然曰。此何等事變。而彼所云乃爾耶。廟堂方且痛切之不暇。則嶺南人情。亦可見矣。于後冢宰聞其名。將大用。爲府君所沮。己卯正月。呈告下鄕。以過限遞。選知製敎。拜副修撰。夏儤直禁中。猝患痰塞。氣絶移時。上卽下臘藥。命內局治療。是夜。遣內醫看病者再。遣掖庭人撫問者三。翌朝。傳029_540c于政院。又問證勢輕重。申命加賚藥餌。以差爲度。前後異數。逈出故常。一時稱爲盛事。以試射不進。當罷免。上特貰之。上䟽乞養。拜陜川縣監。六月。赴任。字惠小民。威制巨室。豪右屛息不出氣。律己簡潔。聽斷嚴明。遠近訟者。咸願就質。方伯見報牒。每嘆曰。眞剸煩手也。每朔望。會諸生課講。定給學校僕隷。以爲養士需。嘗於大夫人初度。設壽席。猝有宣傳之行。爲整齊舟師。助攻天朝也。卽撤席泣白大夫人曰。時事罔極。宦情永斷。此後子雖有疾。願勿以爲憂。居數日。以吏曹正郞。徵到尙州。患風痺。右邊不仁。舁還029_540d于家。庚辰冬。除校理。不赴。辛巳二月。除司諫院獻納。到咸昌呈病。就醫于龍宮。上䟽論時務闕失。略曰。古之帝王。不以時之不利。而沮其修己之功。古之人臣。不以勢之無及。而怠其引君之誠。上下各隨其分之所當爲而爲之。若夫興亡則天也。吾於天何哉。今日之所當爲者。其大綱。不過曰建皇極立大志而已。噫。私意未袪而公道不行。文具未革而費用日耗。忠讜未容而言路壅蔽。乾綱未奮而朝政解弛。連年饑饉之酷。實前古之所無也。雖一袪積弊。百度維新。猶恐不得以自存。况弊化侈風。日滋月盛乎。願從事克029_541a己之功。恢張公道。留心節用之實。痛革文具。優容臺諫。開進言之路。自强不息。體天行之健。上優批嘉納之。四月。除吏曹正郞。秋。連除校理副應敎。冬。又除副應敎。司諫院司諫。皆不赴。壬午春。移寓州之城西。甲申夏。疾復劇。十月。還梅院。以十一月十八日壬寅酉時。終于正寢。春秋僅四十二。訃聞。命別致賻儀。明年正月六日庚寅。葬于星之茶山乾坐之原。府君天姿樂易。氣宇爽塏。神采燁然。眉目如畵。旁通時務。博涉經史。應事之疑。處禮之變。片言剖析。若不加意者。而事必當理。禮有考據。雖其才敏有過人者。而家029_541b訓師敎之力。亦不可誣也。聞人之善。若己有之。見人之惡。疾之如讐。以此大人先生。皆慕與之交。而不肖者。多怨憚焉。慕親之誠。終身無間。參判公歿後。見人之具慶設宴者。輒淚下如雨。悲動傍人。奉母夫人。色養備至。凡州郡餽遺。悉以歸之。不敢私。庶弟貧。無以爲生。分臧獲以與之。家計貧約。而於祭祀。務致豊潔。備盡誠禮。非有疾病。則必躬自將事。凡所著述一揮而就。少遊禮圍。無與爭其名。吏事章奏之文。尤其所長也。自策名。最承殊眷。而痼疾連仍。無意仕宦。計前後在朝之日。未滿一年。召命累降。宗族勸之029_541c起。答曰。誤恩偏重。報答無路。惟殫竭心膂。死於職下。爲微忱自效之地。而其如病谻而力不逮何。常聚子姪。敎之曰。一體而分爲兄弟。兄弟而分爲從兄弟。其形雖殊。血氣則一也。汝曹若不愛羣從。是不愛其身也。其身之不自愛。而能享福祿。吾所未見也。歿之二十有一年甲辰。不肖孤元禎。位躋二品。推恩所生。贈府君嘉善大夫,吏曹參判,兼同知經筵,義禁府,春秋館,成均館事。弘文館提學,藝文館提學,五衛都摠府副摠管。主簿府君承政院左承旨。府君聘安東金氏。兵曹判書諱時讓之女。比安縣監贈左029_541d贊成諱仁甲之孫。錦山郡守慶州李大遂之外孫。有四男四女。男元禎。文科。兵曹參判。元祿。文科。義州府尹。次元禮元祉。參奉。察訪張銢。進士權斗望。士人郭鐫,朴明徵。其婿也。元禎。娶承旨李彦英女。生三男四女。男聃命。弘文館副校理。漢命藝文館奉敎。龜命進士。女適柳命河。進士崔恒齊。文科姜相周。一幼。元祿前娶李命龜女。生一女。適鄭錫僑。後娶安櫶女。生三男二女。男景命,基命,申命。皆幼。元禮娶縣監朴愰女。生一女。適趙宇衡。元祉娶佐郞鄭道應女。生一男顯命。生員壯元。張銢六男四女。男萬紀進士。次萬重,萬029_542a最,萬用,萬益武科。次萬成。女適進士安重鉉。士人洪相文。餘幼。權斗望三男三女。男碩亨,德亨,繼亨生員。女適士人朴文老。典籍金聖佐。餘幼。朴明徵一女。適李端標。聃命娶佐郞李碩揆女。生二子。漢命娶平雲君俅女。生二男一女。柳命河生三女。崔恒齊三男。張萬紀娶郡守黃德柔女。生三男。張萬重娶權斗章女。生二女。張萬最娶魚敬身女。張萬用娶持平柳千之女。生一女。安重鉉三男。洪相文一男一女。金聖佐一男一女皆幼。

 歸巖先生文集卷之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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旅軒張先生行狀 b_035_498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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玉山張氏。祖於金用。在高麗爲三重大匡神虎衛上將軍。歷十一世。有正憲府尹諱安世。嘉善左尹諱仲陽。司憲府掌令諱脩。縣監諱俁。是生諱承良。卽先生高祖也。曾祖諱俊贈承政院左承旨。祖諱繼曾贈吏曹參判。娶文化柳氏。參議仁濠之女。考諱烈贈吏曹判書。妣星山李氏。齊陵參奉彭錫之女。三世之贈。皆以先生推恩也。先生諱顯光字德晦。旅軒035_498b其號也。始判書公生一男。九歲而殤。晩而無嗣。參判公深憂之。每夜澡潔拜禱于天。先生以嘉靖甲寅正月二十二日癸亥未時。生于仁同之仁義坊南山舊第。是日紫氣滿庭。人皆異之。參判公喜曰大吾門者必此兒也。幼時岐嶷俊偉。迥出凡兒。七歲始學文。母夫人或加訓誡。則輒拱手伏地。聽訖始起。八歲遭判書公憂。已能持喪如成人。食素終三年。至九歲。母夫人泣而語曰汝旣失嚴訓。苟欲慰汝母心者。不可不學。遂令就學于善山盧上舍守諴。上舍先生姊夫也。一日鄭新堂之子愨至其家。見先生歎曰平生未嘗035_498c見如此偉器。因曰吾何以贈之。上舍戲曰苟欲相贈。雖乘馬亦可矣。鄭歸卽脫送。先生謝還之。十二三歲。日有成就之益。以母夫人無子弟侍側。且爲學惟在自力。歸家侍奉。不復就師。雞鳴盥櫛衣帶。問起居。退處書室。端跪讀書。每進食輒侍餐。夕就竈突。適冷暖之宜。昏定後復業沈潛。夜深始寐。日以爲常。瞻拜祠堂。不廢風雨。朔朢節日。凡奉先之儀。皆請於母夫人。一遵禮制。早喜性理大全。反覆玩索。有所契悟。嘗作十帖書。一曰會眞。二曰一原。三曰俯仰。四曰中立。五曰傳統。六曰載道。七曰景慕。八曰旁搜。九曰遠取。十035_498d曰反躳。書其末曰能做天下第一事業。方爲天下第一人物。名其帖曰宇宙要括。蓋渾淪無眹之原。太極動靜。二氣五行。四時造化鬼神之妙。性情道德。三綱五常。禮樂敎化之儀。堯舜禹湯文武周孔顔曾思孟。有宋羣哲相傳之統。三墳八索。九丘五經。河圖洛書。八卦九疇先天後天之學。純臣忠臣義士隱逸人傑文人之類。道法仙佛陰陽術數老莊楊墨之流。天覆地載。山高海深。和風時雨。秋月寒水。嚴霜轟䨓。生龍活虎。松柏金玉之取象。謹言敏行。日乾夕惕。靜存動察。博文約禮之要法。無不具括幷包於十帖之中。于035_499a時先生年甫十八歲。而其體段之宏博已如此。是歲與門族建議。每朔朢聚宗家。參拜七代祖畫像。會宗黨子弟。講讀課製。俾有成就。癸酉始冠。嘗赴安東都會。考官見先生儀表特出於多士。引問姓名。相與嘉歎。又赴淸道夏課。以豁開雲霧見靑天爲題。蓋指顔子具體而微也。先生製中。有見天而未到天之句。考官曰此非俗儒出口入耳語也。自踰弱冠。威儀嚴恪。又不喜言笑。專精學業。探討蘊奧。循下學上達之序。究天德王道之要。尤喜易學。至忘寢食者有年。二十三歲。以才行卓異被薦。己卯聘夫人鄭氏。西原大姓035_499b贈左參贊适之女。寒岡先生之從女也。行親迎禮。夫人旣入門。見先生親執母夫人供奉。朝夕不懈。爲之請曰甘旨之事。我當主饋。何用躳爲。先生不聽。許知樞潛嘗牧星州。問鄭先生以好學之士。曰孔門三千。惟顔子得好學之稱。此豈易得哉。近有張某。志學求道。德性純熟。異日爲吾師者。未必非此人也。辛巳中鄕解兩場。癸未中別擧。赴省試。至忠州取木道。幾不免臭載。舟中皆失魄。先生獨凝然不變。衆服其定力。乙酉鄭夫人卒。庚寅聘後夫人冶爐宋氏。忠順衛淨之女。未幾母夫人有疾。沈重半歲。不能轉側。先生035_499c與夫人扶持奉護。衣不解帶。辛卯十二月遭巨創。守制幾毁。是冬除典獄署參奉。銓曹不知先生在艱故也。先是謙庵柳先生來莅仁同。刱吳山書院。要先生爲長。凡百措爲。必與謀畫。謙庵卽西厓先生之兄也。西厓因耳熟而心悅之。屢薦筵席。其後嘗遇先生於亂離顚沛中。使其子袗從先生受論語曰。此人凝定確固。渾厚沈潛。他日必爲名世大儒矣。壬辰之亂。事機蒼黃。詣祠堂藏主。次瘞祭器。負先夫人神主以行。所持者喪服一袱易古文一部而已。畏途避竄。隨其所有。雖饘粥必奠。嘗有手錄。云人有此身。何從而得035_499d之哉。無父母則其能有此身乎。形分父子而實一身也。體分上下而實一氣也。一毛之拔。一指之傷。尙覺其痛。况可忍於其親之死乎。此聖人所以衰絰以變其衣服。饘粥以變其飮食。苫塊以變其寢處。涕泣以變其面目。號哭以變其聲音。憂哀以變其性情。喪三年而復常者也。然三年亦非所以自盡於人子之心。而禮以限之。旣終三年。則雖以虞舜曾參之孝。尙無所致其情。三年之制。其可以忽之哉。蓋先生不幸終喪於亂中。不得備禮於死亡之儀。故其痛毒如此。干戈撓攘。撼頓飢乏之苦。實有人所不堪者。而未嘗以035_500a一毫苟且之物。近之於身。隨遇自安。手不釋卷。甲午春除禮賓寺參奉。秋除齊陵參奉。皆不赴。入豐基之小白山。尋白雲洞書院。還省仁星先壠。乙未特敍六品。除報恩縣監。門人鄭四震問出處之道。先生答曰出處之義。蓋不可以執一論也。不仕無義矣。而學未優則不可出也。學已優而時不可則不可出也。時則可而禮未至則不可出也。冒進非義矣。而時雖不可。禮已至則可以出也。學雖未優。親已老則可以出也。貧無以自存則可以出也。夫冒進者不足道也。而不仕有一不可一可恥者。徒知潔身之爲高。不知君臣035_500b之大義。一切無意於仕進者。是所謂一不可者也。中無自守之實。外假自重之迹。要以耀其名高其價者。是所謂一可恥者也。大抵仕學非二道也。隨時應之。道在其中。要在不失其義而已。九月赴任。諭士民立約規。以敦孝悌厲廉恥。祛弊瘼伸冤抑。勸善懲惡。講禮勉學爲務。尤致意於奬德行樹風聲。使瘡殘餘民有所感發而興起焉。就成東洲悌元祠及大谷成先生墓。幷爲文以祭之。是歲十二月棄官歸。邑民相聚遮道而不能留。旋以擅棄有拿命。會筵臣有以待士之道。不當拿問爲言者。廵按御史李時發亦先035_500c已啓解。就理全釋。邑人立石以寓思。丙申夏。往尋永陽之立巖。地幽而勢阻。有泉石之勝。鄭四震爲先生謀卜。與士友數人。先入爲巖中主人。先生旣至。徜徉遊賞。凡杖屨所及。率皆命名。洞曰尋眞採藥招隱。臺曰戒懼鏡心尙嚴合流畫裏避世。潭曰浴鶴洗耳。峯曰吐月九仞。嶺曰產芝隔塵停雲含輝。橋曰踏苔響玉。又有釣月灘數魚淵小魯岑起予巖尙斗石休老壇惹煙林耕雲野勿羃井之號。自是往來。或終年居之。名其堂曰萬活。秋葬呂姊於星州。蓋於亂中。幷其夫與子遘癘而死矣。至是先生竭力經紀。皆還窆其035_500d故山。取幼兒育于家。後又收崔姊女骸。瘞于姊原。丁酉再亂。避地于靑松之涑谷。朴大庵惺。卽先生道義交也。先已來寓。相與往來逍遙水石閒。轉寓奉化之道心村。溪畔松蔭。盡日開卷。坐石常溫。或作歌詞寓懷羲皇。以暢居竆自樂之趣。己亥時事稍定。始還鄕閭。舊宅灰燼。無所依泊。遂從姊子校理盧景任同住。蓋其德行。爲先生所愛重也。辛丑以經書校正廳郞廳承召旨。有慮爾竆居草野。未備騎乘。令縣次給馬之敎。壬寅二月。除居昌縣監不赴。三月以經書諺解設局。有乘馹上來之命。至秋又召皆不赴。035_501a十一月除工曹佐郞兼帶校正。始赴召。參校周易。移拜刑曹佐郞。冬還鄕。修族稧定條約。其所以惇宗講睦。立訓垂戒。爲後日慮者。纖悉周備。皆可以防範世敎矣。癸卯除龍潭縣令不赴。九月拜義城縣令。始赴。一以治報恩者治之。有日省錄。題其面曰公正剛明以立威。慈詳惻怛以施惠也。曰和易近民。嚴重御吏也。縣多奸蠧。政少寬貸。纔三閱月。失文廟位版。先生以布衣就哭。報知方伯。待罪村舍。造新位版奉安。自劾而歸。士民立碑以思之。乙巳取從弟顯道之第二子應一爲後。戊申宣廟昇遐。望臨于吳山書院。035_501b光海初立。除陜川郡守。庚戌除司憲府持平。皆不赴。自是十餘年間。天彝人紀。晦塞且盡。先生泊然無復當世之念。時鄭先生連上封章。扶植綱常。重被羣小擠陷。棲遑洛泗之閒。先生從之遊。磨礲道義。有充然自得之樂。丙辰往問鄭四震之疾。執手與訣。及歿爲文以祭。深寓痛惜之意。庚申正月。哭寒岡先生喪。比葬亦臨。與門下諸賢。商確喪禮節目。秋神宗凶問至。望臨于不知巖。謂侍者曰東土之民。父父子子。得有今日者。是聖天子再造之恩也。不知巖在舊宅五里許洛江濱。先生喜其名協幽貞之義。卜爲藏修之035_501c所。鄕之士子爲營齋舍。卽進士徐錫年遺墟也。徐於赴擧之日。偶一登覽。船載妻子而來。漁釣以終。墓在後麓。先生嘗命門人曰江山如昨。故事茫然。可一酹其墓。以慰風月舊主。癸亥仁祖改玉。首訪遺逸。降旨特召。有曰聞爾學行言論。足爲士子師範。以駕轎上來。十月除持平。又特下召旨。有曰國家若不崇信儒道。何以爲國乎。予頃在潛邸。得聞爾以老成宿德。久在林。下欽思敬慕。未嘗少弛于中。予欲共議國事。以駕轎上來。先生上疏。以未有踐履之實。已到致仕之年爲辭。上優批不允。六月特拜成均司業。035_501d降旨敦勉。時朝廷爲待林下士。新設是職。八月又除持平。旋陞掌令皆辭。宣旨勉諭。亦不赴。甲子二月。又除掌令。會有逆适之變。大駕南遷公州。先生遂奔問。路聞賊魁授首。大駕還都。轉趨都下。至郊外受本職。詣闕肅謝。卽引見。天顔溫粹。喜動彩眉。敎曰聞名久矣。欲相見謀國事。日望上來。而屢召不至。反躳自責。今來造朝。予心甚喜。對曰臣累恩稽謝。負罪如山。今遭無前之變。不敢自安於家。扶病奔赴。未及行在。鑾輿已回。纔到近甸。新除荐降。一味惶殞。無地自容。上曰予之願見之誠。副提學鄭035_502a經世知之矣。對曰臣於路中。獲遇鄭經世。已悉聖意。尤極惶恐。上命起坐曰嶺南素多義士。今玆之變。義旅多奮。義穀多聚。良深嘉悅。對曰非獨今日爲然。壬辰之變。國家之得力於義旅者不貲。此實出於人心之所同然也。上咨以國事。先生對曰田野老臣。何知國家事宜。惟先定大機軸則多少節目。自是措置中所爲耳。上曰何謂大機軸也。對曰是在殿下之一心。惟奮發振作。日新其心。則必有其效。上嘉之。因語及民弊曰毛文龍需索極煩。責應雲委。不得不取給於民。故民怨由此日甚。此可慮也。對曰035_502b民雖至愚。寧不知此。但前時色目。今猶仍在。以前日橫斂之色目。責今日塗炭之餘生。此所以少來蘇之慰。有怨咨之聲也。今若蕩滌昏朝色目。則科外責應。民亦知國家之出於不獲已也。先生新從草野。昵侍威顔。周旋中禮。敷對該暢。左右諸臣。莫不拭目。旣出陳疏乞退。答曰方以得賢爲幸。爾言至此。心甚缺然。若非爾之才德。難以濟此艱虞。勿辭察職。命賜衣材米饌。旋陞執義。控疏辭謝。因乞解職。幷論時務。略曰去賊之本。在於修德。止寇之要。在於安民。修德安民之道。不在高遠。只在易簡而已。易大傳曰易簡035_502c而天下之理得矣。蓋天下之理。必易簡然後理得而事順矣。以今日言之。尙恭儉而節浮華。敦德化而省刑殺。務簡靜而止煩擾。豈非爲政之要哉。其機只在殿下之一心。躳先自新。立志以誠則一誠之中。百爲皆道。萬物皆所。其驗廣且大矣。答曰疏中所陳。無非嘉言格論。予當服膺而力行。但國事至此。爾其勿辭。體予至意。米饌之賜。欲以周急耳。肅謝後又引見。上曰人心世道。已至於此。太平不可望。若賴賢士之共濟。則可期於庶幾。而乃欲見幾而作。予甚悶然。對曰自古無不可變之人心。亦無不可回之世道。035_502d此在聖君賢相相與有爲而已。如臣者乃老病而退。實非見幾而作也。上因語中外民怨。先生對曰外方之民。困於昏朝荒殘之政而尙未甦。都城之人。新經大亂。騷屑未定。以此互相疑貳。若下惻怛之敎。以示勤恤之意則庶或定矣。上有人才難得之歎。先生對曰人才固不可易得。而自上能盡作成之方。則雖平人必爲可用之才矣。上曰卿言是矣。而作成顧非聖帝明王之事乎。先生對曰殿下臨御一世。何可推讓於古人乎。帝王事業。亦非高遠。惟能自修己德者是也。旣出。命賜酒。遣醫審疾。劑藥賜給。蓋035_503a先生屢以疾病爲辭故也。特授工曹參議。疏辭不允。以予當大用。勿辭小爵爲批。先生又上疏。略曰伏見聖批。有大用之敎。臣恐識者或以此致疑於殿下之出言不自重也。又恐眞有當大用之才德者。其亦輕誤恩而重其出也。優批不許。遂謝恩。宣醞且賜玉貫子。特命入侍晝講。元子送司鑰致語。請與相見。乃詣講學廳。元子時年十三。以賓禮待之。先生稱謝。因曰竊聞邸下方講朱文公所編小學云。此書中格訓嘉言至德善行。實惟爲人之模範。聖賢道德。帝王事業。都根柢於此。願熟讀體行之。035_503b旣出。元子送魚酒。上疏告歸。卽出國門。旣渡江。命牌追至。繼遣工曹郞官。宣諭于良才驛。先生以承命不進爲未安。上疏陳謝。上勖以好還。因送臘藥。命京畿監司給馬護送。旣還上疏乞遞。答曰頃者下去之時。予誠意淺薄。不得使爾動聽。靜言思之。有靦面目。今若解職。則是予得賢之喜。反成失賢之歎。爾其體予至意。勿爲控辭。待秋上來。以副如渴之望。八月轉吏曹參議不赴。命勿辭上來。陳疏得遞。乙丑八月。除同副承旨。又呈病。命調理上來。行至善山落傷。陳疏遞付護軍。丙寅三月。特授刑曹參判。035_503c諭令造朝。時上遭仁獻王后之喪。先生方欲趨慰。而又有恩旨。故扶曳入謝。疏請解職。優批不許。移授大司憲。先生引七十致仕之典。控疏力辭。且曰今日之來。非爲從仕計也。惟以殿下在至痛之中。而召旨遽下於此時。故不敢自頑於無動。秖思趨謝闕下。旋乞鐫改而歸。是臣之願也。答曰目今覺斯民者。非卿而誰歟。卿須幡然改圖。勉補闕失。勿爲獨樂堯舜之道。且所陳疾病。必非膏肓。足以行公。本府自有多官。卯酉赴衙。裁決庶務。予不望於卿也。再疏不允。遂詣闕肅謝。累辭而遞。禮葬畢。因告035_503d歸之疏。進建極之要。略曰臣一生抱病。今我國家。亦可謂多病矣。臣請以人身中去疾致疾之本。皆在於一心者爲說。夫心者身之君也。君者建極之謂也。凡一身內外之官大小之用。悉繫於心君。故極建而其下莫不奉承其道。極不建而其下莫不違失其職。身之否泰。於是乎決矣。所謂建心極者。方寸之中。常存敬畏。不自怠放。不爲物欲所拘。不爲邪說所惑。內不自欺。上不欺天。外不欺人。無胡思亂想。不東走西馳。氣魄凝定。精神內守。淸明光大。自有主宰者是也。如是則七情皆節。百脈俱順。視聽言動。不亂於外誘。筋035_504a骸肢體。自束於天則。眞元完實。和氣充滿。風寒暑濕不能入。魑魅魍魎不能犯。可以卻方書去藥石。無所事於療治而病自不發。永終天年。此固心極之能建也。若或心失其極。而怠肆放惰。不自收拾。昏塞本然之明。廢失主宰之道。則情不節而欲不勝。脈不順而血不調。臟不能藏其精。腑不能儲其液。耳目口鼻流蕩而不禁。筋骸手足解弛而莫檢。於是外邪乘虛。百疾交作。積而爲癥癖。發而爲癰疽。有或麻木不仁。委身牀席。雖扁鵲在傍。百藥俱儲。亦莫能爲之術矣。此則心君不君之致也。臣因此而思之。人君之君國也。035_504b亦此理也。心爲一身之君。而身之內外百體。卽爲一心之臣民。則人君爲擧國臣民之所心。而擧國臣民。卽爲人君之百體也。因心極之建與不建。而爲百體之順與不順。故觀臣民之有猷有守有爲。而可以知人君建極之克不克也。所謂建君極者。亦非別有法也。惟能盡己之性而爲表準於人也。盡性次第。其目有四。曰學之就也。行之修也。道之成也。德之純也。德以道成而純。道以行修而成。行以學就而修。則只是一理中事業也。其學卽大學之法是也。學此學而百行在其中。其道卽中庸之道是也。道此道而至德在035_504c其中。夫旣學就而行修。道成而德純。則聰明睿智。足以盡天下之理。謙恭儉勤。足以萃天下之善。寬仁誠信。足以服天下之心。剛毅簡重。足以畏天下之情。光明正大。足以通天下之志。如此則天地鬼神。尙不能違。况人與物乎。治平大業。位育極功。都在於此。此惟君極之所以建也。臣竊以爲聖人之得位也幸矣。旣居其位。則不思所以盡其位之道乎。人君德業。自有第一等道理。所謂建極之極。卽此道理也。能盡此道理者。卽二帝三王之德業也。後之人君。苟不以二帝三王之德業爲準的則豈不卑哉。心之所之謂之志。035_504d志卑則道卑。道卑則事業卑。事業卑則人心不服。人心不服則鄰國不畏。天地鬼神亦不佑矣。然則其可不致重於立志之初乎。爲治不法三代則皆苟而已矣。堯舜人倫之至也。唐虞三代。聖治之至也。誠不可捨此而求其次也。夫帝王之心法。與其德業。與其治道。無不昭載於經傳。殿下之日三接經席之儒臣。其所以講明之者。必不外此也。第未知殿下自察之則其持心也。果與帝王之持心同其法。其執德也。果與帝王之執德同其業。其爲治也。果與帝王之爲治同其道乎。今者立政機軸。無轉移之日。百僚無振035_505a勵之意。庶事無作新之驗。四方無興動之效。廉恥之風不作。而貪汙之習不除。恭儉之化不行。而奢侈之弊不革。公正之道不立。而偏私之害不去。誠信之意不孚。而傾危之俗未戢何也。臣恐殿下學有所未造。行有所未盡。道有所未至。德有所未純。而極之所以建者。猶未到於十分地頭也。夫極之爲義。惟中爲大。在心爲不偏不倚。在事爲無過無不及是也。然則偏非極也。倚非極也。過非極也。不及亦非極也。建極者須先無所偏倚於心。然後能無過不及於事矣。上特下優批曰卿以碩德高才。隱於巖穴。聲聞所及。035_505b孰不敬慕。予亦頃在閭邸。飽聞聲名。而末由聞道。今幸同朝。喜幸良深。卿不以予爲無似。以予遭哀。辛勤遠來。惓惓陳列。諄諄敎戒。卓異之論。令人拭目。予雖不敏。敢不服膺斯訓。以副卿之至意也哉。卿須暫弛歸思。少留都下。以慰予心。予將有後命。又疏陳不可留之勢。答曰視卿辭章。心甚缺然。卿意已決。旱炎漸酷。予不敢強請。明朝欲爲相見。卿須姑留今明日。以副予至意。先生黽勉出肅。卽引見。敎曰比日卿疏所陳。予旣具悉矣。此外又未有可言者歟。對曰天下之事。有大本原大綱領。所謂本原綱領者。豈非035_505c殿下之一心一身哉。心所體者天德。身所行者王道。則忠言不期集而畢集。善策不待獻而爭獻。內自朝廷。外至郡縣。各出其誠。各盡其心。各效其能。各展其才。俱收幷取而用之。何患國政之不擧。王業之不立乎。此在殿下心身上轉移之機而已。又曰小臣之所仰望於殿下者。惟不忘廢朝時閭邸中慷慨自持之心。不墜反正初奮發自立之志。則幸莫甚矣。彼時耳目所聞見。無非無理之事。殿下十餘年閔默於昏亂之中。此時之心。顧如何哉。旣撥其亂。始反于正。則其位乃列聖所居之位也。其緖乃列聖相傳之035_505d緖也。幾亡而纔存。幾絶而復續。則當時殿下之志。豈得尋常哉。其敬天也。必欲一思一念之無所欺。其任人也。必欲一善一藝之無所遺。其愛民也。必欲一弊一瘼之無所及。其發政也。必欲順天理合人情而無所違。則殿下此時之志。又如何哉。果能終始此志。則臣民之幸也。國家之福也。又曰反正之後。政令科條。似無不擧。而惟於敎化之政。一無及焉。此誠大欠闕者也。今號牌之令。已頒於國中。大小人名目。皆載簿籍。若於此時。專以軍丁之急括。賦役之豐入。爲第一件事。則非所以慰悅民心者也。又非所以政得035_506a其本也。姑緩他務。先行鄕約。使知德義之不可不尙。廉恥之不可不厲。有以興起其愛親敬長忠君報國好善惡惡之心。待其衆志稍定。生業稍遂。然後編之爲軍旅。勸之爲賦徭。則人皆知有身之不可無役。而自安於分義之當然。終無怨上之意矣。上曰卿出時須見東宮。有所誨也。將出宣賜臘藥。旣出亦有賜。因詣春宮。世子迎慰遠來之勞。先生進言曰邸下今年。卽古人志于學。期遠大之時也。旣謂之志則心一於所之。不爲他歧所惑。直以聖神自期。而必常有不爲堯舜則不敢已之意焉。區區所望於邸下035_506b者惟此也。及辭賚以衣資彩帛表裏。上又命給馬護送。先生前後入京。留滯月餘。上自薦紳。下至韋布。塡咽戶庭無虛時。先生年齡已高。而禮貌迎接。終始如一日。未嘗或有疲倦之意。丁卯命本道賜歲饌。封疏陳謝。因胡變不果進。先生與鄭愚伏。同膺嶺南號召之命。特出聖簡也。先生聞命。卽就官舍。移文列邑。激勵士民。義聲所播。莫不思奮。戊辰三月。除吏曹參判。陳疏不赴。己巳閏四月。特下召旨曰卿以宿德耆儒。志存兼濟。當此艱危。宜處朝廷。以矜式國人。而久居鄕曲。不肯上來。是予誠意淺薄。禮遇踈簡035_506c之致。予甚慙焉。卽今節序淸和。行道無艱。卿其駕轎上來。以副予如渴之望。病未就召。上章自列。兼陳居敬立誠之道。答曰卿以宿德大老。學行超倫。上古衣冠。足以丕變侈俗。故予嘗敬歎。每欲同朝而不可得。此豈非寡昧誠薄之致也。予欲以卿爲上下矜式。兼使訓誨世子。而不欲責之以職任。宜勿固辭。須速上來。以副側席之望。疏中所陳。無非格言至論。予當服膺而自警。又以沐浴陳疏。浴後猶不得趨召。上疏因進言。略曰臣之望於殿下者。不忘危不忘亂不忘亡也。望於廷臣者。能忘身能忘家能忘私035_506d也。人君有此三不忘然後。乃可以盡君道也。心豈容不誠。身豈容不敬。政豈容不公哉。人臣有此三能忘然後。乃可以盡臣道也。其愛君者豈容不忠。其輔國者豈容不職。其奉公者豈容不盡哉。答曰省疏嘉卿愛君之忠。所陳三不忘等語。無非格言至論。予雖不敏。當與臣鄰服膺而勉勵焉。且卿之上來。予日望之。卿雖有疾。不至如此之甚。須速上來。毋負前言。庚午四月。拜大司憲不赴。上疏言追崇之非禮。略曰聖上以宣廟之支孫。天錫聖武。而撥亂反正。直繼宣廟之統緖。則其閒一位之空。勢不得不然也。然035_507a而以孫繼祖。卽繼絶之常道也。以我聖上繼宣祖。豈可謂之空哉。凡以孫繼祖。勢或不得無者也。若無其事。何以有受國於祖或曾祖之文哉。受國於祖或曾祖者。其有禰位於太廟乎。嫌其爲空而必欲援入則豈道理之所順哉。答曰自古爲人後者。猶隆所生。以此觀之。今日之事。似無不可矣。壬申又拜大司憲不赴。六月聞仁穆王后喪。擧哀成服。擬赴禮葬而病不果。陳疏進慰。癸酉七月。有法宮䨓震之變。應旨進言。略曰臣嘗見易經八卦中。其有一陽在二陰之下者卽䨓象。故卦名曰震。孔子繫辭及說卦035_507b傳。有曰震動也。有曰䨓以動之也。有曰鼔之以䨓霆也。有曰動萬物者莫疾乎䨓也。據此思之。震是天地所以動萬物之常道也。仲春之月。䨓始發聲。仲秋之月。䨓始收聲。則一歲之中。三時有䨓。而䨓之行於春者。鼔動其生意也。行於夏者。鼔動其長意也。行於秋者。鼔動其成意也。此豈非造化之神功。生成之妙機乎。必有是䨓然後。鬱者開滯者作塞者通倦者振頹者奮。此無非作動之道也。然則今日殿中之䨓。乃是開何鬱也。作何滯也。通何塞也。振何倦也。奮何頹也。不于郊野山林而于法宮之中。不于外閒木石而035_507c于殿上之柱闥。則今日天地之深意。果似專在於殿下也。古人謂上天仁愛人君。必降變示警。則今日䨓變之作。亦豈非皇天仁愛殿下而然哉。然則在今日恐懼修省者。別有何道哉。只存乎心去其欲而一其理。事去其非而一其是。物去其邪而一其正而已。三者旣得陽明之道。則何患天心之不回。後禍之不防哉。又曰臣就周易六十四卦中。特取其震卦。或居下爲貞。或居上爲悔者十有八卦。別爲一冊上之。震之爲用。此焉盡矣。而實有切於今日應變之道。凡縷縷數千言。其十八卦。就各卦大象。論說䨓之爲035_507d用不同。而微辭婉意。皆有諷諭。答曰省疏嘉卿前後惓惓之意。孤自忝位以來。非不欲策勵有爲。而才識不逮。事與心違。中夜無寐。竊自愧歎。所陳訓辭。無非格言至論。敢不置諸座右。朝夕觀省。是冬特賜存問。且饋食物。甲戌正月。上疏陳謝。幷及自新新民祈天永命之道。是月特命超陞資憲階。疏辭不允。五月除工曹判書不赴。因疏陳好察邇言執端用中之道。上優批嘉納之。元宗大王將祔太廟。廷諍諸臣。相繼被譴。先生上疏。略曰臣之所憂者。不但天地之不交也。朝議之未定也。實恐殿下心氣因035_508a此大傷也。程明道定性書曰人之情。易發而難制者。惟怒爲甚。夫以天地力量。其發於䨓霆者。不過暫頃。未嘗踰時者。若久用此氣。必傷元和。此自然之理也。人君力量。雖異於恒人。久留此怒。有所偏重。其有不傷心氣之理乎。又曰殿下之於所生。所以致孝者。旣已盡矣。而人且疑其過焉。况復爲之祔入太廟。則在古無可據之禮。此正所謂无妄之行也。欲孝而反傷於孝。爲仁而反害於仁。此正是非幾微之際。而所當致精一之界分也。答曰卿念予傷心。千里封疏。其憂愛之誠。人所難及也。所陳入廟一事。其是非知035_508b之不難。何以言之。前代追崇則皆有兩考之嫌。以入廟爲未安。容或可矣。至於今日之事。則無二考之嫌。而廟闕禰位。古今天下。安有無禰位之宗廟乎。今此別廟。至於後世。則尤極難便。此亦不可不慮也。明朝明察。快降恩封。禰位亦且空虛。以天子之命入祔。少無未安矣。今日入廟則宣廟無嗣子而有嗣子。太廟無禰室而有禰室。情禮俱宜。幽明無憾。卿其勿爲泛論。更加詳察。乙亥五月。授議政府右參贊。辭以疾。十二月聞仁烈王后喪。擧哀成服。丙子夏授知中樞府事。特下諭旨曰。方今國事日就危難。眇035_508c予寡躳。慄慄憂懼。涉水無津。罔知攸濟。有懷賢德。實如飢渴。卿以一代重望。遠處田野。無以儀式百僚。卿雖年邁。必不恝國家之顚隮。玆令本道造給安轎。且給輿夫。卿其斯速上來。以副予勤企之望。先生不得不扶病登道。至咸昌病甚控疏。繼以輔養元孫之道。不由縣道。使子應一直呈于政院。疏入傳敎政院曰。招張應一問其父氣力。且問其父方在咸昌與否。政院招問。以病甚已歸入啓。自上封賜藥物。先生又上疏陳辭。因及時弊。略曰古今天下。未有朝廷不和而國家得爲國家。士論不一而敎化得爲敎化者035_508d也。蓋宇宙之間。一道一理而已。自有此道理以來。於人則善惡各爲一類。於物則邪正各爲一類。於事則是非各爲一類。未聞兩善幷立。兩正幷作。兩是幷行。而此道此理得其本然也。上優批嘉奬。十二月虜警甚急。南漢受圍。驚遑痛切。至廢寢食。以爲行朝隔遠。聲聞阻絶。倡義勤王之擧。不必待朝廷命令。急呼邑儒。文告道內以激之。又自出力以助義餉。及聞出城之報。爲文祭先壠。以告永辭之意。退休山麓。從者曰日已暮矣。先生曰聖人不曰遲遲吾行乎。今日之謂也。乃入永川之立巖。以其地濱東海。遂有終焉035_509a之志。世之聞人君子。以先生此擧。爲處變之大節云。旣至更名立巖爲立卓巖。以寓微意。七月命門人製深衣。八月十五日庚申寢疾。九月七日壬申。考終于晩勖齋。享年八十四。前夕有䨓雨山崩之異。訃聞上震悼。爲之不御朝。停市二日。下旨本道監司。經紀喪事。有曰張某賢良恭儉。有上古之風。予常敬重。今忽卒逝。心甚悲悼。是月乙未。發靷還仁同。遠近士林從柩者五百餘人。十二月特遣弘文館修撰兪㯙賜祭。是月癸酉。葬于金烏山東麓吳山之洞酉坐之原。新卜也。會葬者三百餘人。初凶訃至京之日。門035_509b生權承旨濤與都中士大夫設位哭臨。壬午歲永川儒生請于朝。配享于臨皋書院鄭文忠公廟。星州儒生又請于朝。從享于川谷書院程朱兩先生廟。蓋永是先生遺躅所在。星卽先生外鄕。而行李往還。素爲學子所瞻仰也。又幷享于金烏書院吉先生之廟。其別廟則仁同之不知巖。永川之立巖也。影幀有三。卽門人金斯文應祖嘗倅善山。令畫師寫眞傳神者也。分安于不知巖立巖及善山之元堂。孝宗乙未。因筵臣吳竣建白。特贈崇祿大夫議政府左贊成。丁酉又因筵臣吳挺緯啓請。加贈大匡輔國崇035_509c祿大夫議政府領議政兼領經筵弘文館藝文館春秋館觀象監事世子師。旋請易名之典。上曰張某德行。世所共知。雖無諡狀。可特贈。太常議諡文康。諡法道德博聞曰文。淵源流通曰康。遣吏曹佐郞金壽興宣贈。先生稟天地純粹之精。鍾扶輿淸淑之氣。性質明睿。體段夙成。局量弘大。氣像和樂。有洪鍾大鏞之重。有砥柱壁立之確。遠而望之則喬嶽之崔崔也。邇而卽之則和風之習習也。言似不足。接物之恭也。其中退然。執德之謙也。堅固策勵之志。每篤於燕申之中。鞭辟近裏之功。不弛於造次之頃。天035_509d理人慾。一劒兩段。義利得失。毫忽必辨。以至三省三貴九思九容之訓。一皆體之於身心。以一身爲道理之郛郭。蓋先生之學。不由常師。得之妙契。根柢乎四子。歸宿乎六經。不欲以一善成名。未嘗以少得自足。年益高德益卲而猶以耄倦爲戒。嘗曰天地至大也。吾人藐然也。立乎兩間。參爲三才。宇宙間事業。無非分內當爲者。何可局此身現在之地。諉此身衰落之境。不爲之用力也哉。聖賢書中。有無竆義理。無限意味。未有捨學而能自得者也。易古文庸學。周子通書太極圖說。伊川好學論。明道定性書。張子東西銘。邵035_510a子無名公傳等書。中夜默誦。循環不輟。日必有課。又將書之危微精一。易之敬直義方。中庸之戒愼恐懼。大學之克明顧諟。丹書之敬勝怠吉。義勝欲從等語。書諸壁間。以自循省。晩有意會處。輒書諸冊。目曰耄戒。有曰如山不動。不動之中。有不息之功。不動則不息者益強。如川不息。不息之際。有不動之體。不息則不動者益確也。有曰敬敵千邪。誠消百僞也。有曰眞爲萬善之宗。一爲萬數之首。虛爲萬實之府。靜爲萬化之基。貞爲萬事之幹。淸爲萬物之高。謙爲萬益之柄。儉爲萬福之原也。有曰通天地契造化。一古今貫035_510b事物。格鬼神化木石。其機都在方寸中也。有曰瑩瑩淨淨。無纖毫私累。浩浩廓廓。絶一端邪思。綜綜貫貫。萬妙無不通。條條脈脈。萬緖無不備。其於事物則不追其旣往而復有所留滯。不逆其未來而先有所期待也。有曰慈詳豈弟者。隨其所處必常有敬畏恭勤之心。隨其所觸。必自有惻怛懇切之心。此所謂吉人也。險慝冥頑者。其居常也。必敢於褻天慢神而無所憚。其有動也。必至於傷人害物而有所忍。此所謂凶人也。若夫聖人則太虛之虛也。日月之明也。四時之序也。鬼神之吉凶也。卽亦天地而已。凡此無非晩年035_510c自勖之功。蓋自志學之年。以至易簀之日。無一日而非學問。無一事之非修省也。尋一線之脈。躡千古之域。洞觀物之眼。竆造化之原。雖其資品有超詣於人者。而亦豈非探索之勤思辨之力。有以致之哉。其於易學。少而玩好。晩益沈潛。河圖洛書。多寡饒乏之不齊。先後天方圓圖之氣化形化。卦爻彖象之用。陰陽消息之理。氣機闔闢之妙。莫不曲暢旁通。作爲圖說。啓前古之秘鍵。爲後學之指南。以至數家之學。亦皆精解貫穿。推極其至。冠昏喪祭。折衷禮家諸說。一主文公家禮。而祭之日前期致齊。掛謝客牌子於門外。035_510d饌需米食之品。俱極潔精。躳自點視。不以委於家人。外家忌祀。亦必歲致物。凡遇國恤未葬。値私忌則只奠單酌。不設魚肉。三年內遇吉祭之月。則只如節薦之儀。不行三獻受胙之禮。每歲季秋行禰事。歲末祀土神。常以地偏生晩。不得遊聖人之門爲歎。凡所以景仰先聖者。終身不衰。時詣校舍。必瞻謁於神門外。先是本府校宇。地勢峻側。先生以爲病。力言於方伯。啓請移建。勅諸生刻期敦事。有時躳臨指揮。涓吉移安。不踰年而舊校因雨頹壓。縫掖之士。莫不以經營及時爲幸焉。嘗語子弟曰貽謨燕翼之道。惟在遵035_511a守義方。修飭德行而已。持己須要謙恭。待人必主忠信。容貌辭氣。貴在和平。和平二字。實衆善之所由備。諸福之所由生也。至於忮心。最所當戒。今日一起。明日又起。遇事而作。在處而作。終爲詖險不測之人。豈不懼哉。天道虧盈。人道忌滿。挾勢加人。招損必矣。其在鱞寡孤獨。尤當矜恤。此實吾心之本體也。凡其訓誡。專務實行。不以詞章導子弟。亦不以科目爲之輕重也。大司成公登第榮還。以公服見之。仍戒之曰人臣旣已許身。則自有分義。今吾雖老且病。只可往來相見。不可一於退也。古人書孰不益人。而春秋一書。035_511b明於善惡心術之辨。公於是非予奪之義。事君者不可不讀也。及其筮仕入京也。作詩訓戒。且命之酒曰詩中所言。汝宜佩服勿墜。蓋其惓惓期望之意。無非事君之義律身之方也。敎迪門徒則曰吾人自有眞實事業。入孝出悌。言忠信行篤敬。童而習之。長而行之是也。資稟雖美。不學則無以成其美。而不能自拔於科臼之中。求名謀利之習。又從而痼之。士趨之日卑。無足怪也。學者隨時隨處。當有不輟之功。若要事物斷時。賓客靜處。方欲專一攻業。事物無時可斷。賓客無處可靜。惟在篤行之如何耳。遠近士子。坌集踵035_511c門。以至松都關西之士。或數百里或千里而至。質疑問難。咸有飮河之喜。爲文章。汪洋大肆。自成一家。理達意暢。人皆易曉。游泳之暇。輒命筍輿。從以冠童五六人。往不知巖。巖畔臺上。逍遙觴詠。天和發露。氣象冲融。有上下同流意思。以定心神寡嗜慾。節飮食省思慮。爲衛生之要道。故屛去藥餌而氣貌充裕。雖在八耋之年。精華旺達。終無餒乏之色。蓄於身者旣厚。而猶欿然未肯以自大也。有而若無。實而若虛。常以鞱晦爲心。人不敢窺其涯涘。至於撰述之際。亦必屛人。雖一家子弟。不知其爲何事。練祥之後。始啓篋笥。035_511d則乃性理諸說也。趙徵君任道歎曰出入門牆。許多年矣。今日始見先生之海藏也。柳修巖袗亦嘗語人曰先生之所不可及者。其惟人之所不見乎。環堵蕭然。弊廬容膝。而固竆安分之念。自堅於中。縕袍蔽體。蔬糲登盤。而文繡膏粱之美。不入於心。厭煩擾而喜簡靜。尙恬泊而絶玩好。悠然淡然。脫略世累。惟是君德之修否。朝政之得失。一念未嘗忘。人有從都下來者。則必詢扣亹亹。凡於章奏之間。動引君心。以爲出治之本。蓋其忠愛之誠。老而彌篤。有不能自已者矣。晩際昌辰。荷聖祖不世之遇。契合之盛。可謂千載035_512a一時。而卷舒行藏。已有成算於獨見之地。逮晩年東海之遯。蓋已灰心於世務。而其不處爰立之位。至今爲朝野之所深恨。豈所謂道之將廢也命也耶。先生所纂述。有易學圖說,圖書發揮,易卦總說,經緯說,太極說,晩學要會,宇宙說及文集若干卷行于世。宇宙要括,錄疑俟質,耄戒及遺文若干卷藏于家。前夫人鄭氏。生大賢之門。閨閫制行。克稱內治。有一女適參奉朴晉慶。生五男。曰愭,曰愰擧才行累官縣監,曰悏,曰憕,曰㥠。俱有士行。三女長適任景尹。次敎官李垷,士人曺夏英。後夫人宋氏。貞儀淑愼。勤於組紃。粢盛035_512b之供。不以貧約而少懈。先先生八年卒。應一己巳文科。前成均館大司成。以直道事仁孝兩朝。觸犯䨓霆之威。重忤貴臣之意。雖以此不容於時。而士類倚以爲重。娶都事宋光廷女。生三男。長銢參奉。次鍵文科牧使。鈺業文。參奉。娶元禎先君弘文館應敎贈吏曹參判諱道長女。生六男四女。萬紀進士。娶郡守黃德柔女。生三男幼。萬重娶士人權斗章女。生一女幼。萬最娶士人魚敬身女。萬用娶縣令柳千之女。生一男。萬益,萬成幼。女適進士安重鉉。生三男。適洪相文。餘二幼。牧使娶掌令宋錫胤女。生四男。萬元娶持035_512c平李溟翼女。萬善娶士人金宗溟女。生一男幼。萬盈,萬春幼。鈺娶士人安櫶女。生一女未行。始吾先君子觀道德於先生之門素矣。念昔辛未壬申之歲。先生訪祖父石潭先生于梅院之私第者再。元禎方在垂髫。獲荷撫頂。其時所得見者。惟是鳳翔千仞之儀。春風一團之和而已。若其懿德宏業。非滅裂後學所敢形容其一二者。而得於國人之耳目則有之矣。謹參考家乘。歷敍之如右。以備惇史者採擇云。




  • 補遺篇 (慶尙道)
    • 宜寧縣邑誌
宦蹟 朴習 林載 朴允 吳碩福 金鍚 金胤弼 金思謹 吳謙 金意從 李恬 鄭湖 黃瑄 宋汝孝 申汝詢 金淸 金禧年朴源 權東美 成駿德 金世輝 丁胤祉 李大福 張應年 南應悌 李鞾 張泓 申勳 吳應昌 朴思齊 洪胤張 李希雲金銓 有善政碑 원주 權吉 趙諠 柳溫 朴潝 朴天禥 有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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政碑 원주 
黃俊元 李涵 有淸德興學碑 원주 尹耆獻 朴景范 尹性之 李文蘭 曺次石 宋垓 任徽之 金仁洽 有善政碑 원주 崔拘 洪百順 趙希進 尹之復 金慶祖 有善政碑 원주 申淯 鄭昌詩 黃德柔 有善政碑 원주 梁榞 曺昌緖 尹舜擧 有淸德興學善政碑 원주 南斗長 有善政碑 원주 李楫 李旭 南斗柄 鄭岐壽 林世喬 尹敬敎 有善政碑 원주 李熙來 朴世址李混 李舜岳 尹善得 朴來慶 有善政碑 원주 尹曼期 有善政碑 원주 尹弘績 李參徵 趙昌漢 有善政碑 원주 南得衡 李雲根 柳長培 尹世衡 李台長 具文洙 李嵩逸 有淸德愛民碑 원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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若潢 鄭夏晉 有善政碑 원주 洪受濂 趙命禎 李志奭 金㮊 有善政碑 원주 李夢曄 鄭壽崑 李廷濟 有淸德善政碑 원주洪禹翰 有善政碑 원주 李藎 金時佐 有善政碑 원주 趙鳳命 趙漢緯 安壽鼎 沈漙 朴弼莘 曺夏望 有善政碑 원주 沈沆有淸德愛民碑 원주 趙榮祐 李錫禧 有淸德善政碑 원주 柳憖 魚有成 李命祿 李綬 金俊材 有善政碑 원주 金亨大 徐命瑞 有善政碑 원주 鄭益儉 申大年 有善政碑 원주 趙潞鎭 有善政碑 원주 金斗恒 具膺 趙宗喆 李彦光 洪善輔 有善政碑 원주 洪彦爕 黃昌源 有善政碑 원주 洪善養 有淸德善政碑 원주 李敦源 南麟耉 具忠元 洪樂綏 有興學善政碑 원주 金宗善 有善政碑 원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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趙鎭順 李燨 朴宗球 李勉膺 金載琬 有善政碑 원주 趙鎭球 李謙秀 有善政碑 원주 沈毅鎭 李鳳秀 有善政碑 원주 鄭基直 尹昇烈 鄭基植 南久淳 李正履 李源膺