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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계 선생 연보

아베베1 2013. 7. 3. 17:02

 

 
 
 서계집 제22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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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록(附錄)
연보(年譜)

선생의 성은 박씨(朴氏), 휘(諱)는 세당(世堂), 자(字)는 계긍(季肯), 본관은 반남(潘南)이다. - 반남은 지금 나주(羅州)의 속향(屬鄕)이다. - 젊었을 때의 호는 잠수(潛叟)이고, 만년의 호는 서계초수(西溪樵叟)이다. - 서계는 곧 선생이 물러나 은거한 뒤로 일컬은 호인데, 선생의 자찬(自撰) 묘표(墓表)에 이르기를, “물러나 동문(東門) 밖 수락산(水落山) 서쪽 계곡에 거주하였다. 그 계곡을 석천동(石泉洞)이라 이르고 이로 인해 자칭 ‘서계초수(西溪樵叟)’라 하였다.” 하였다. -

기사 대명(大明) 숭정(崇禎) 2년(1629) 우리 인조대왕(仁祖大王) 즉위 7년
○ 8월 19일 신미 - 인시(寅時) - 에 선생은 남원부(南原府) 관아에서 태어났다. - 그 당시 충숙공(忠肅公 박정(朴炡))이 남원 부사(南原府使)였다. -

경오 숭정 3년(1630) 인조대왕 8년 선생 2세

신미 숭정 4년(1631) 인조대왕 9년 선생 3세

임신 숭정 5년(1632) 인조대왕 10년 선생 4세
○ 6월에 충숙공이 별세하였다.

계유 숭정 6년(1633) 인조대왕 11년 선생 5세

갑술 숭정 7년(1634) 인조대왕 12년 선생 6세

을해 숭정 8년(1635) 인조대왕 13년 선생 7세
○ 백씨(伯氏) 호군공(護軍公 박세규(朴世圭))이 졸하였다.

병자 숭정 9년(1636) 인조대왕 14년 선생 8세
○ 이해 겨울 병자호란(丙子胡亂)이 일어났다. 선생은 두 형 - 승지공(承旨公 박세견(朴世堅))과 처사공(處士公 박세후(朴世垕)) - 을 따라 조모 이 부인(李夫人)과 모친 윤 부인(尹夫人)을 모시고 원주(原州)와 청풍(淸風) 등지에서 병란을 피하다가 길을 돌려 안동(安東)으로 향하였다.

정축 숭정 10년(1637) 인조대왕 15년 선생 9세
○ 병란이 가라앉은 뒤 안동에서 청주(淸州)와 천안(天安) 등지로 옮겨가 우거하였다.
선생이 8, 9세 때, 어떤 노인이 밥을 구걸하자 선생은 불쌍하게 여겨 밥을 가져다 노인에게 주었다. 얼마 뒤에 어떤 젊은이가 양식을 구걸하자 선생은 꾸짖기를, “당신은 늙고 병든 것도 아닌데 왜 농사짓고 나무해서 스스로 벌어먹지 않는가?” 하고, 이어 함께 놀던 어린아이로 하여금 떠밀어 내보내게 하니, 들은 이들이 기특하게 여겼다.

무인 숭정 11년(1638) 인조대왕 16년 선생 10세

기묘 숭정 12년(1639) 인조대왕 17년 선생 11세
선생의 자찬 묘표에 이르기를, “부친을 여읜 데다 가난하여 제때에 배우지 못하다가 10여 세가 되어서야 비로소 중형(仲兄)에게 수업하였다.” 하였다.
○ 선생은 승지공을 엄부(嚴父)처럼 섬겨 몹시 우애하고 공경하였다. 혹시라도 그 뜻을 어겨 언짢은 기색이 있기라도 하면 선생은 뜰 앞으로 내려가 서서 종일토록 손을 모은 채 앉으라고 명하지 않으면 감히 올라가지 않았다. 비록 노하여 종아리를 치더라도 공손하게 받아들이기만 할 뿐 조금도 원망하는 기색이 없었다.

경진 숭정 13년(1640) 인조대왕 18년 선생 12세
○ 정헌공(貞憲公 박동선(朴東善))이 별세하였다.
충숙공이 일찍 세상을 떠난 뒤에도 정헌공은 여전히 무탈하였는데, 선생을 몹시 사랑하여 늘 품 안에 두었다. 선생은 노년이 되어서도 추모한 나머지 정헌공 얘기만 나오면 슬퍼하여 마지않았다.

신사 숭정 14년(1641) 인조대왕 19년 선생 13세

임오 숭정 15년(1642) 인조대왕 20년 선생 14세
선생은 13, 4세 무렵 고모부 정 교관(鄭敎官) 사무(思武)에게 나아가 수학하였다. 선생이 다른 사람을 위해 지은 만시(挽詩)에, “정 선생을 복종하여 섬기니, 열몇 명의 동문 제자였네.〔服事鄭先生 十數同門子〕” 하였다.
○ 선생은 성동(成童)이 되어서야 배우기 시작하였다. 여러 책들을 미처 섭렵하지도 못하였고 문리(文理)도 그다지 시원하지가 못하였으나 글 뜻을 해석할 때 이따금 다른 사람들이 생각지 못하는 것을 꿰뚫어 보았다. 이에 장로(長老)들이 경이롭게 여겨 “소년 시절의 식견이 이처럼 뛰어나니, 훗날의 성취를 짐작할 수가 없겠다.” 하였다.

계미 숭정 16년(1643) 인조대왕 21년 선생 15세

갑신 숭정 17년(1644) 이해에 대명(大明)이 멸망하였다. ○ 인조대왕 22년 선생 16세

을유(1645) 인조대왕 23년 선생 17세
○ 부인(夫人) 남씨(南氏)를 결성(結城)에서 맞이하였다.
부인은 곧 금성 현령(金城縣令) 휘 일성(一星)의 따님으로, 남공(南公)이 그 당시 결성에 거주하였다.
○ 선생이 지은 남씨 묘지명(墓誌銘)에, “숙인(淑人)은 박씨(朴氏)에게 시집왔는데, 박씨는 아버지를 잃고 집안이 가난하여 자립하지 못한 나머지 10여 년 동안 처가살이를 하다가 벼슬길에 오르고 나서야 비로소 따로 살림을 꾸렸다.” 하였다.
○ 선생은 그 당시 부인의 아우 남 상국(南相國) 구만(九萬) 및 그 숙부 남 상서(南尙書) 이성(二星)과 더불어 문의(文義)를 변론하였는데, 서로 굽히지 아니하여 밤낮을 지새우기까지 하기도 하였다. 만년에 남 상공(南相公)에게 답한 편지에, “삭거(索居)한 이래로 더 이상 석년(昔年)의 변론하던 즐거움이 없습니다. 돌이켜 그 당시를 생각해 보면 거침없이 종횡으로 담론하며 날과 밤을 지새우면서도 피곤한 줄 몰랐었지요. 비록 엉성한 제 말이 신묘한 그대의 견해와 합치하지는 못하였지만, 말을 해도 망연히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하는 다른 사람들과 비교해 보면 참으로 그대는 아양(峨洋)의 귀일 뿐만이 아니었습니다.” 하였다.

병술(1646) 인조대왕 24년 선생 18세

정해(1647) 인조대왕 25년 선생 19세
전후 몇 년 동안 윤 부인(尹夫人)이 둘째 아들 승지공을 따라 양주(楊州) 사촌(沙村)에 거주하였는데, 선생은 남씨가 사는 서울 정릉동(貞陵洞) 처가에서 모친이 계신 곳으로 왕래하였다.
○ 셋째 형 처사공(處士公)은 선생보다 2살 많았는데, 늘 함께 다녔으며 도봉서원(道峯書院)에서 글을 읽는 날들이 많았다.

무자(1648) 인조대왕 26년 선생 20세
○ 조모와 모친을 판여(板輿)에 모시고 승지공이 벼슬하는 흡곡(歙谷) 임소(任所)로 찾아갔다. - 이 길에 지은 것을 《동행습낭(東行拾囊)》이라 하였다. -
○ 첫째 아들 태유(泰維)가 태어났다. - 이분이 지평군(持平君)이다. -

기축(1649) 인조대왕 27년. 이해에 인조대왕이 승하하였다. 선생 21세
○ 두 대부인을 판여에 모시고 흡곡에서 양주 사촌으로 돌아왔다.
○ 3월에 윤 부인의 상(喪)을 당하였다.
선생은 두 형과 함께 몸소 궤전(饋奠)을 장만하고 조석으로 곡읍(哭泣)하였는데, 예제(禮制)보다 지나치게 애훼(哀毀)하여 이웃 사람들과 조문객들이 슬피 탄식하지 않은 이들이 없었다. 간장을 입에 대지 않은 채 삼년상을 마쳤는데, 처사공은 끝내 생명을 잃기에 이르렀으며, 선생은 비장과 위장이 손상되어 그대로 고질이 되었다.

경인(1650) 효종대왕 1년 선생 22세
○ 봄에 조모 이 부인을 곡하였다.
○ 겨울에 셋째 형 처사공을 곡하였다.

신묘(1651) 효종대왕 2년 선생 23세
○ 복제(服制)가 끝났다.

임진(1652) 효종대왕 3년 선생 24세
○ 유생 정시(儒生庭試)에 제3명(第三名)으로 합격하여, 명으로 회시(會試)에 달려갔다.
선생이 지은 글이 응당 수석(首席)을 차지해야 했었는데, 시관(試官)이 한 글자가 격식에 어긋난다고 오인하는 바람에 3등에 두었다.
○ 선생은 문재(文才)가 일찍부터 성하여 사람들이 모두 금방 급제하리라 기대하였는데, 승지공이 과거에 실패하였기 때문에 응시할 때마다 부지하여 과장(科場)으로 들어가 서책을 점검해 주고 글자를 대신 써 주었다. 그러다가 이때에 이르러 승지공이 일이 있어 응시하지 못하자 선생에게 혼자 응시하라고 권하였다. 몇 년 뒤 승지공이 급제하자 선생은 비로소 대과(大科)에 달려갔으니, 사람들이 어려운 일로 여겼다.

계사(1653) 효종대왕 4년 선생 25세

갑오(1654) 효종대왕 5년 선생 26세
○ 둘째 아들 태보(泰輔)가 태어났다. - 이분이 응교군(應敎君)이다. -

을미(1655) 효종대왕 6년 선생 27세

병신(1656) 효종대왕 7년 선생 28세

정유(1657) 효종대왕 8년 선생 29세
○ 승지공이 벼슬하는 청풍군(淸風郡) 임소로 갔다.
동호(東湖)에서 배를 타고 떠나 구담(龜潭)과 도담(島潭)으로 가서 유람하였는데, 이 길에 지은 것을 《동소록(東溯錄)》이라 하였다.
○ 이때 선생의 문성(文聲)이 몹시 자자하여 반학(泮學)의 선발에 누차 이름이 남들보다 앞에 올랐었는데, 번번이 성시(省試)에 떨어지고 말았다. 그러나 당시 과장에서는 선생을 추대하여 고수(高手)라 하였으며, 과명(科名)이 너무 늦는 것을 원통하다고 일컬었다.

무술(1658) 효종대왕 9년 선생 30세

기해(1659) 효종대왕 10년. 이해에 효종대왕이 승하하였다. 선생 31세

경자(1660) 현종대왕 1년 선생 32세
○ 가을에 생원(生員) 초시(初試)에 장원을 한 다음, 회시에 2등 제□명(第□名)으로 올랐으며, 겨울에 증광시(增廣試) 갑과(甲科)에 제1명(第一名)으로 뽑혔다.
이 방(榜)에서 훌륭한 인재를 가장 많이 뽑았다고 일컬었는데, 선생이 여기에서 장원을 한 것이다.
○ 11월에 격례대로 성균관 전적(成均館典籍)에 제수되었다.

신축(1661) 현종대왕 2년 선생 33세
○ 6월에 예조 좌랑(禮曹佐郞)에 배수되었으며, 윤7월에 병조 좌랑(兵曹佐郞)으로 이배(移拜)되었다. 8월에 춘추관 기사관(春秋館記事官)을 겸대하였다.

임인(1662) 현종대왕 3년 선생 34세
○ 2월에 사간원 정언(司諫院正言)에 배수되었다.
이 당시 남 상국(南相國)이 전조(銓曹)의 낭관으로 있었기 때문에 선생이 친혐(親嫌)으로 오래도록 청환(淸宦)의 선발에 막혀 있다가 이때에 와서야 비로소 뚫렸다.
○ 앞장서 김좌명(金佐明)과 이은상(李殷相)을 논핵하였다.
이 당시 공조 판서(工曹判書)가 공석이어서 상이 대신(大臣)에게 아경(亞卿)을 추천하여 의망(擬望)하도록 명하였는데, 대신이 김공 좌명(金公佐明)으로 응명(應命)하여 마침내 발탁 배수되었다. 이에 선생이 논계(論啓)하였는데 그 대략에, “국가가 인재를 가려 임용할 적에는 먼저 공정함을 보여야 하는데 왕실의 지친(至親)을 대상으로 하였으니, 원외(遠外)에서 이 소식을 들은 이들이 어찌 아래에서 천거한 바는 바로 상의 뜻에 영합한 것이고 상께서 제수한 바는 사정에 치우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겠습니까. 이 거조가 맑은 조정의 크게 공정한 도리에 누가 되고 후일의 무궁한 폐단을 열게 될까 두려우니, 속히 고침으로써 성상의 사정을 두지 않는 밝음을 드러내지 않아서는 안 됩니다. 또 대사성이란 직임은 관계된 바가 매우 중대하니, 학식이 있고 통명(通明)하며 단중(端重)하고 아정(雅正)한 인사(人士)가 아니라면 그 자리를 맡아서는 안 됩니다. 대사성 이은상이 문재(文才)가 있기는 하지만 선비들의 신망을 받지는 못합니다. 이 두 가지 일을 가지고 논계하려 하였는데 동료들의 의견이 일치하지 못하였으니, 경시당한 잘못이 드러나고 말았습니다. 청컨대 체척(遞斥)할 것을 명하소서.” 하였다.
김좌명은 끝내 환수(還收)되었으며, 이은상은 일찌감치 현달하고 문명(文名)이 있었으며 족당(族黨)이 몹시 치성하였는데 탄핵하는 글이 한번 나가자 공의(公議)는 이를 옳게 여겼지만, 선생을 시기하고 미워하는 자들이 많아졌다. 서공 필원(徐公必遠)이 선생에게 편지를 보내 “도가 쇠퇴한 세상에 이렇듯 좋은 의론이 있으리라고는 생각지 못하였습니다. 훗날 청사(靑史)에 ‘나라에 인재가 있으니, 나라를 위해 빛을 냄이 크도다.〔國有人焉 爲國生光大矣〕’라고 할 것입니다.” 하였으며, 동춘(同春) 송공(宋公 송준길(宋浚吉)) 또한 약천(藥泉 남구만(南九萬))에게 편지를 보내, “박간(朴諫)의 이번 논계로 성조(聖朝)의 기풍이 과시할 만해졌습니다.” 하였다.
○ 5월에 병조 좌랑(兵曹佐郞)에 배수되었으며, 7월에 사간원 정언에 배수되었다가 체직되어 병조 정랑(兵曹正郞)이 되었다.

계묘(1663) 현종대왕 4년 선생 35세
○ 3월에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에 배수되었으며, 도승지(都承旨) 임의백(任義伯)을 논계하였다.
계사(啓辭)의 대략에, “의백은 벼슬에만 급급하여 염치가 없으니 허물을 가리기 어려우며, 오로지 속임수에만 힘써 괴이하고 허탄한 짓을 일삼고 있습니다. 후설(喉舌)의 장관은 본래 청명한 조정의 높은 명망을 받는 자리인데, 어찌 비부(鄙夫)라고 지목받으며 남들에게 천시당하는 의백 같은 자가 함부로 차지할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 무과(武科) 감시관(監試官)에 차임되었다.
○ 인피(引避)하여 체직되었다.
선생이 계사를 올려 임의백을 논핵한 뒤 즉시 무과의 시소(試所)로 들어갔는데, 집의(執義) 김만기(金萬基)가 연계(連啓)하면서 상의하지도 않고 그 문자를 모두 고쳐 버렸다. 이 때문에 선생이 인피하면서 인하여 그를 지척하여 이르기를, “임의백이 그동안 명관(名官)을 곡진히 섬겨 이 자리에까지 이르렀으니, 그를 좋아하는 자가 또한 많을 것입니다. 따라서 동료가 이런 행동을 보인 것도 진실로 괴이할 것이 없다 하겠습니다.” 하였다. 이에 시기하고 미워하는 자들이 더욱 많아졌다.
○ 양파(陽坡) 정공(鄭公 정태화(鄭太和))이 객에게 말하기를, “박모(朴某)에게는 제 부친의 풍도(風道)가 있으니, 사람의 가문을 보지 않을 수 없다.” 하였다. 조정에서 별천(別薦)하라는 명이 내리자, 정공이 발탁해 쓰기에 적합한 인물로 공을 천거하였다. 당시 옥당에서 새로 홍문록(弘文錄)을 작성하는 일이 있었는데 공의 이름이 거기에 끼지 못하자, 여론이 술렁대면서 거실(巨室)을 탄핵했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 병조 좌랑에 배수되었다. 6월에 사헌부 지평에 배수되었다가 체직되어 도로 병조 정랑이 되었다. 8월에 춘추관 기주관(春秋館記注官)을 겸대하였다. 12월에 다시 병조 정랑에 배수되었으며, 어사(御史)로서 강화도 군저(軍儲)로 가 안찰한 뒤, 돌아와 사헌부 지평에 배수되었다.

갑진(1664) 현종대왕 5년 선생 36세
○ 1월에 일로 인해 피혐하여 체직되었다.
선생의 피혐하는 계사(啓辭)에 이르기를, “신이 지난번에 간관(諫官)의 직책에 있을 때 김만기(金萬基)가 허적(許積)을 논핵하려고 하였는데, 신이 실로 함께하였습니다. 만기가 탄핵을 받아 아직까지 죄적(罪籍)에 있으니, 신은 구차히 죄를 면할 수 없습니다.” 하였다.
○ 병조 정랑에 배수되었다가 다시 지평에 배수되었는데, 전의 일로 또 피혐하여 체직되었다. 2월에 병조 정랑에 배수되었으며, 옥당에 피선(被選)되어 홍문관부수찬 지제교 겸 경연검토관(弘文館副修撰知製敎兼經筵檢討官)에 배수되었다가 사간원 정언(司諫院正言)에 이배(移拜)되었는데, 피혐하여 체직된 뒤 병조 정랑에 배수되었다. 3월에 다시 병조 정랑이 되었다. 4월에 홍문관교리 겸 경연시독관(弘文館校理兼經筵侍讀官)에 배수되었다.
○ 교리 김만균(金萬均)이 청사(淸使)를 회피하고자 하여 소장을 진달하여 면직을 청하였는데, 도승지 서필원(徐必遠)이 그 소장을 퇴각시켰다. 이에 간관(諫官)이 서공을 탄핵하려고 하자 동료 가운데 이견(異見)을 세운 이가 있어 함께 인피(引避)하니, 선생이 차자를 진달하여 이견을 세운 이를 곧게 여겼다.
병정(丙丁)의 호란(胡亂)에 화를 당한 집안의 자손으로 조정에서 벼슬하는 자들이 청사가 올 때마다 번번이 소장을 진달하여 해직되었다. 그 당시 상(上)이 장차 관소(館所)로 가서 청사를 접대하려고 하였는데, 교리 김만균이 스스로 화를 당한 사람의 자손이라는 이유로 수가(隨駕)하려고 하지 않은 나머지 소장을 진달하여 면직을 청하였다. 도승지 서필원이 그 소장을 퇴각하였는데, 간관이 이 소장을 환급(還給)하는 것은 격례가 아니라고 하여 서공을 탄핵하려고 하자 동료 가운데 이견을 세운 이가 있어 함께 인피하는 바람에 처치(處置)가 옥당 몫으로 돌아왔다. 이에 선생이 차자를 올려 이견을 세운 이를 곧게 여기니, 여론이 떠들썩하고 추악한 비방이 쏟아졌으며, 회천(懷川) - 송상 시열(宋相時烈)이 거처하던 지명이다. - 은 크게 노하여 꾸짖으며 패악한 말을 하기까지 하였다.
선생은 늘 말하기를, “정축년의 항복이 더 없는 치욕이기는 하지만 종묘사직을 위한 계책을 냄은 만부득이한 일이었다. 그러므로 그 뒤로 우리나라가 북로(北虜)에 대해서 분을 참고 원통함을 머금은 채 접대하는 일을 애써 행하여 청사가 오면 상께서도 왕림하여 접대하였던 것이다. 신하 된 자가 비록 화를 당한 사람의 자손이라 할지라도 이미 자폐(自廢)하지 않고 조정에 서서 벼슬에 종사하고 있는 마당이고 보면 군상(君上)이 왕림하는데 도리어 직임을 벗어 던지고 회피하기를 도모하여 자신만을 깨끗이 하는 계책을 하고자 하는 것은 ‘군주가 치욕을 당하면 신하는 죽는다.〔主辱臣死〕’라는 의리에 대단히 어긋나는 짓이다. 그런데 회천은 도리어 이를 청의(淸議)라고 허여하였으니, 세상에 지존(至尊)만 욕되이 청사를 접대하게 하고 자신은 면하기를 도모하는 청의가 어디 있단 말인가. 일종의 시론(時論)이 청의를 빌미로 고상하게 담론하고 거창하게 말하면서 군신의 의리가 중요하고 인륜이 무너지는 것도 모르는 것이 마침내 이러한 지경에까지 이르렀으니, 몹시 개탄스러운 일이다.” 하였다. 선생의 의견이 이와 같았기 때문에 옥당이 처치할 때 곧이곧대로 자신의 견해를 편 것인데, 평소 의론할 때 누차 이러한 점을 피력하였다.
○ 윤6월에 병조 정랑에 배수되었다. 9월에 홍문관 부교리에 배수되었으며 겸직은 전과 같았다. 10월에 지평에 배수되었으며, 어사로 명을 받들어 해서(海西)를 염문(廉問)하였다.
탐묵(貪墨)만 일삼고 제대로 다스리지 못한 수령 가운데 특히 심한 몇몇 고을을 봉고계파(封庫啓罷)하였다.
○ 12월에 복명(復命)하였다. 정언(正言)에 배수되었으며, 수찬(修撰)으로 옮겼다가 체직되어 병조 정랑이 되었다.

을사(1665) 현종대왕 6년 선생 37세
○ 1월에 부교리(副校理)에 배수되었다.
선생이 등대(登對)하는 계제에, 해서(海西) 백성들의 질고를 자세히 진달하기를, “해묵은 환곡의 포흠(逋欠)과 제반 거두지 못한 신역(身役)을 이웃이나 친족에게 독촉하여 징수하는 바람에 전지와 집을 다 팔아도 환상(還償)하기 어려운 실정이니, 오늘날 백성들의 원망이 이보다 큰 것이 없습니다. 하늘에 호응하는 방도를 구하고자 하신다면 백성들을 편안히 하는 계책을 내는 것이 가장 시급합니다. 포흠 난 환곡과 거두지 못한 신역을 다과를 막론하고 일체 탕척하신다면 거의 민심을 위로하고 천재를 그치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 8월에 체직되어 성균관 직강(成均館直講)에 배수되었다. 11월에 부수찬(副修撰)에 배수되었으며, 문례관(問禮官)으로 용만(龍灣)에 다녀왔다.

병오(1666) 현종대왕 7년 선생 38세
○ 양덕방(陽德坊)에 새 거처를 정하였다.
선생은 벼슬길에 들어선 뒤로 세상과 맞지 않아 교유를 끊고 왕래를 드물게 하다가 비로소 이곳에 거처를 잡았는데, 그 외지고 고요한 것을 좋아해서였다. 제시(題詩)가 있는데 다음과 같다.
곡구로 와 거처하니 초심에 딱 맞아라 / 來居谷口愜初心
성중에 있다지만 동네가 그윽한 걸 / 縱在城中宅住深
종복 시켜 오이에 물 주고 여름 밭을 살피며 / 課僕澆瓜巡夏圃
동자 불러 낙엽을 쓸고 가을 숲을 맴도네 / 呼童掃葉遶秋林
열객 영접 드물어 머리 손질 잊어버리고 / 罕迎熱客忘韜髮
한송 소리 늘 들려와 거문고가 필요 없네 / 慣聽寒松不置琴
하물며 파직한 뒤로는 세속의 누가 없으니 / 況自罷官無俗累
게을리 졸지 않으면 한가로이 시나 읊조릴 밖에 / 只除慵睡卽閑吟
○ 1월에 입시(入侍)로 인하여 온천으로 행행하는 것을 정지하기를 청하였으며, 또 내탕(內帑)의 폐단을 논하였다.
상이 대비(大妃)를 모시고 온천으로 행행하려고 하였는데, 이때 홍변(虹變)이 있었다. 선생이 입시한 계제에 아뢰기를, “성상께서 자전의 증후를 몹시 걱정하여 목욕을 통해 효과를 보고자 하시니, 신하 된 자가 어떻게 감히 운운할 말이 있겠습니까. 다만 생각건대, 음홍(淫虹)의 변이는 예로부터 두려워할 만한 것이었으니, 경계하고 두려워해야 하는 날에 도성을 나가 수백 리 밖으로 행행하는 것이 어찌 대단히 우려할 만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한 번 더 깊이 생각해 주시옵소서.” 하였다. 또 내탕의 폐단을 논하기를, “일찍이 듣건대, 이 내수사(內需司)는 국초(國初)에는 없던 것을 중세(中世)에 창설한 것이라고 합니다. 대궐에서 소용되는 것은 따로 진배(進排)하는 물품이 있으니, 내수사가 없더라도 재물이 없음을 어찌 걱정할 것이 있겠습니까. 다만 갖가지 소용되는 것을 번거롭게 해당 관사에 요구해서는 안 되는데 대대로 뭉그적거리며 혁파하지 못하고 있으니, 참으로 한탄스럽습니다.” 하였다.
○ 3월에 온천으로 수가하였는데, 동료와 함께 차자를 올려 승여(乘輿)를 빨리 몰지 말도록 청하였다.
그 당시 승여를 빨리 몰아 시위(侍衛)하던 군졸이 대다수 쓰러져 이로 인해 죽기까지 하였으므로 옥당에서 차자를 올려 경계하도록 진달하자고 논의하였다. 교리 이단하(李端夏)는 평소 문사(文詞)에 노련하다고 일컬어졌으나 쉽사리 글을 엮지 못하였다. 누차 원고를 고치고서도 결정하지 못한 나머지 마침내 선생에게 양보하였는데, 선생은 금방 글을 엮어 올렸다. 그 대략에, “인군의 거둥은 만백성이 주시하니 천천히 다니고 느리게 몰아 화란(和鸞)을 절도에 맞게 해야 합니다. 옛날에 이른바 길행(吉行)은 하루에 50리, 사행(師行)은 하루에 30리를 간다는 것은 백성들의 눈을 의식해서 황급한 기색을 보이려 하지 않아서일 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한꺼번에 움직일 때에는 하루 동안에 갈 수 있는 힘을 다 허비해서도 안 되기 때문입니다. 삼가 보건대, 어가를 모는 속도가 조금 빨라서 시위하는 병사들이 달리다가 앞뒤로 쓰러져 숨이 끊어질 듯하였습니다. 이러한 광경을 보고 마음속으로 놀라고 슬퍼하였는데 뒤이어 2인이 죽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삼가 생각건대, 성명께서는 반드시 하루아침에 무고하게 길에서 죽은 것을 가엾게 여기실 것입니다. 얼핏 듣건대, 말이 가는 속도가 너무 느리면 여(輿)를 탄 전하께서 편안치 못하기 때문에 채찍질을 가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다만 생각건대, 성왕(聖王)은 일신이 편안하려고 많은 사람의 고생을 잊지 않는 법입니다. 병졸이 비록 미천하지만 그 목숨은 지극히 중하니, 어찌 차마 죽는 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보면서 구태(舊態)를 고칠 방도를 생각하지 않겠습니까.” 하니, 상이 가납(嘉納)하였다.
상이 노차(路次)에서 관병(觀兵)을 하려고 하자, 선생이 나아가 아뢰기를, “자전을 모시고 노차에 머무르는 것이 벌써 몹시 온당치 못한데, 오늘은 또 국기(國忌)로 재계하는 날입니다. 일상적인 공사(公事)조차도 출납(出納)해서는 안 되는데, 하물며 이러한 관병을 거행하는 것이 어찌 몹시 미안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하였는데, 상이 듣지 않았다.
○ 5월에 부인 남씨(南氏)를 곡하였다.
수락산(水落山) 서쪽 기슭 장자곡(長者谷)에 장지(葬地)를 정하였다. 선생은 그 빼어난 천석(泉石)을 사랑하여 그 동(洞)을 ‘석천(石泉)’이라 이르고, 마침내 거처를 정할 뜻을 가졌다.
○ 8월에 함경북도 병마평사(咸鏡北道兵馬評事)에 배수되어 10월에 경성(鏡城)으로 부임하였다.
기행(紀行)에 《북정록(北征錄)》이 있다.

정미(1667) 현종대왕 8년 선생 39세
○ 4월에 수찬으로 소환되었다가 얼마 못 되어 체직되었다. 5월에 다시 수찬에 배수되었다. 한재(旱災)로 인해 구언(求言)하는 성지(聖旨)에 응하여 봉사(封事)를 올렸다.
그 당시 상이 한재를 근심하여 구언하였다. 이에 선생이 성지에 응하여 소장(疏章)을 진달하였는데, 5, 6천 자였다. 그 대략에, “이보다 앞서 재이(災異)를 만나 구언한 것이 어찌 간절하지 않았겠으며, 진언(進言)한 것을 또 어찌 이루 다 헤아릴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도 끝내 채택되어 시행된 것이 없었습니다. 신은 적이 조정이 실상이 없는 행동을 하기를 좋아해서 위로는 하늘을 속이고 아래로는 백성을 속여서 하늘이 노여워하고 백성이 원망해도 뉘우칠 줄 모름을 애석하게 여깁니다. 전하께서 과연 혁연(赫然)히 분발해서 몸과 마음을 다해 다스리기를 도모하여 재앙을 인하여 상서를 이루고 쇠퇴함을 바꾸어 성대함을 만들려 하신다면 이는 오직 성상의 뜻이 한 번 정해지는 데 달려 있을 뿐입니다.” 하였다.
또 이르기를, “국가의 정법(政法)에 대한 폐단이 진실로 많은데, 할 만한데도 하지 않는 것을 말해 본다면 조회를 보지 않는 것이 바로 여기에 해당합니다. 예로부터 국가를 소유한 이 가운데 조회를 보지 않은 임금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곧 조회하지 않는 것을 일상적인 일로 여기고 괴이하게 여기지 않고 있으니, 모든 일이 제대로 처리되지 못하는 것은 전적으로 여기에서 기인합니다. 부디 전하께서는 마음을 넓게 열고 결단하여 이러한 폐단을 고친 다음 날마다 법전(法殿)에 나아가시어 신료를 불러 접견하여 대소사를 자문하여 행하소서.
대저 대신은 국가의 일에 대해 모르는 바가 없으며, 전형(銓衡)과 대각(臺閣)의 책임을 겸하여 가지고 있습니다. 대체(大體)를 계획하고 대사(大事)를 결정하는 것으로 말하면 대신이 홀로 그 책임을 맡는데, 지금은 그렇지 못하여 어진 이와 간사한 이가 나아오고 물러가도 미리 알지 못하고서 ‘이는 전부(銓部)의 일이다.’라고 하고, 실수를 하고 오류를 범해도 바로잡지 못하고서 ‘이는 대각의 일이다.’라고 하며, 그 사체의 큰 문제에 이르러서는 ‘나의 능력으로 할 수 있는 바가 아니다.’라고 합니다. 대신들이 힘쓰는 바와 건의한 바를 상고해 보면 몹시 비루하고 자질구레한 일입니다. 이는 근래의 대신들이 일을 싫어하는 데에서 나온 폐단이니, 전하께서 스스로 분발하신 다음 역시 대신에게 그 직임을 다하도록 책망하시기를 바랍니다.
백성들이 곤란을 겪는 것 중의 가장 심한 것은 족린(族隣)들에게 침징(侵徵)하는 것입니다. 진실로 속히 명지(明旨)를 내리시어 묵은 빚을 모두 견감하고, 군역을 도피했거나 빚을 지고 달아난 자가 있더라도 족린에게 침징하도록 허락하지 마소서. 또 별도로 조례(條例)를 강구해서 군역을 경감하여 고르게 하면 달아났던 이들이 다 돌아와 민력(民力)이 크게 펴져서 재용(財用)의 수입이 필시 지금보다 배가 될 것입니다. 국가가 백성으로 하여금 원망하지 않고 각자 그 생업에 편안히 종사하게 하려고 한다면 군역을 고르게 하는 것이 최선의 방법입니다.
의당 공천(公賤)의 신역을 먼저 고르게 하되 한결같이 예전 법전대로 해서 내외의 백사(百司)로 하여금 소속 공천에게 지나치게 징수하지 못하도록 하여 피차간의 경중을 고르게 해야 합니다. 다음으로 양민(良民)의 군포(軍布)를 고르게 해서 신역의 명칭은 비록 다르더라도 징수하는 바는 한결같이 하여야 합니다. 또 국가가 비록 사대부를 우대하지만 국가에는 부리지 못하는 백성이 없습니다. 문관이나 무관 두 가지 길을 통해 스스로 벼슬에 오르지 못한 자는 백성이 되니 백성에게는 진실로 의당 용(庸)과 조(調)가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저 사대부는 평소에 천한 일을 익히지 않았으니 비록 분주한 신역을 하게 할 수는 없으나, 또 어찌 신역을 대신하는 비용을 내지 않아서야 되겠습니까. 의당 조금 수이(收移)해서 군포의 3분의 1을 줄임으로써 똑같은 백성인데 신역이 고르지 못한 문제가 없게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사천(私賤)의 경우는 또한 징수하는 수효의 많고 적음을 참작해서 일정한 제도를 만들어 잔인하고 포악한 자로 하여금 잔학함을 부릴 수 없게 해야 합니다.
병제(兵制)가 무너진 것이 오늘에 이르러 극도에 달했습니다. 오위(五衛)의 법이 좋지 못한 것은 아니지만, 시일이 오래됨에 따라 그 법이 무너졌기 때문입니다. 옛 제도는 이미 회복하기 어렵고 새 제도는 또 매우 문란하여 군병마다 통솔을 달리하고 군문(軍門)마다 정사를 달리해서 본말이 관통하지 않고 경중이 조화를 잃게 하였으니, 결코 좋은 계책이 아닙니다. 그 새로운 제도로 말한다면 어영(御營)이 가장 좋고 훈련도감(訓鍊都監)이 가장 좋지 않습니다. 훈련의 경우 보인(保人)이 된 자가 혹독하게 거두는 군포를 감당하지 못하는 것이 첫 번째 좋지 못한 점이고, 정군(正軍)이 된 자가 고향을 떠나고 친척을 등지는 근심이 있는 것이 두 번째 좋지 못한 점이고, 습관적으로 간사하고 완악한 짓을 하여 법도를 따르지 않는 것이 세 번째 좋지 못한 점이고, 늠급(廩給)을 허투루 소비하여 국가의 비용을 쓸데없이 축내는 것이 네 번째 좋지 못한 점입니다. 어영의 경우 정군과 보인이 서로 학대하는 문제가 없는 것이 첫 번째 좋은 점이고, 고향을 떠나고 친척을 등지는 근심이 없는 것이 두 번째 좋은 점이고, 번갈아 번(番)을 들고 쉬어 간사하고 완악한 습관이 없는 것이 세 번째 좋은 점이고, 휴하(休下)의 미포(米布)를 징수해서 번상(番上)의 늠급을 삼으니 재용(財用)이 여기에서 나와 공가의 비축을 소모하지 않는 것이 네 번째 좋은 점입니다.
신은 적이 다음과 같이 생각합니다. 오위의 정졸(正卒)은 명색뿐 실상이 없으니 응당 혁파해야 되고, 훈련의 포수(砲手)는 위에서 제시한 네 가지 해로움이 있으니 응당 혁파해야 합니다. 이 이군(二軍)을 혁파해서 통합하여 어영(御營)의 제도를 만들어 기존의 어영과 분립(分立)하여 좌영(左營)과 우영(右營)을 만든 다음 전체를 총괄하는 통수(統帥)를 두어 경병(京兵)의 제도를 만듦으로써 본말과 경중이 서로 어긋나지 않게 해야 합니다. 그리고 군병의 대체적인 액원을 총괄해서 3분의 1, 혹은 4분의 1을 감소시켜 정예병을 갖추는 데 힘쓰고 군병의 수가 많은 데 힘쓰지 말며, 한 가지 일에 전념하게 하여 그 힘을 여유 있게 함으로써 그들의 원망을 덜어 준다면 그들의 환심을 얻고 목숨을 요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재물을 여유 있게 하는 것은 쓰기를 아끼는 데 달려 있고 쓰기를 아끼는 것은 쓸데없는 비용을 없애는 데 달려 있습니다. 쓸데없는 비용을 없애는 것은 의당 먼저 궁중에서부터 행하여야 하니, 급하지 않은 각종 공사와 아무 하는 일 없이 녹만 축내는 유를 말합니다.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재량해 주소서. 그렇게 해 주신다면 더없는 다행이겠습니다.
외정(外廷)의 경우는 실제 일은 하지 않으면서 가만히 앉아서 공름(公廩)을 허비하는 자이니, 의당 일체 제거해야 합니다. 만약 제거할 수 없다면 또한 상록(常祿)의 3분의 2를 덜어야 합니다. 또 모쪼록 출납(出納)의 권한을 유사에게 모두 돌려주어 그 직임을 전적으로 주관하게 함으로써 후하게 함과 검소하게 함을 적절히 조절하여 모르는 사이에 줄어들고 좀먹는 문제를 없게 해야 합니다.
사복(司僕) 제사(諸司)의 경우는 각기 그 재용을 가지고 있고 내수사(內需司)는 인군(人君)의 사적인 내탕(內帑)이니 좋은 법이 결코 아닙니다. 의당 속히 내탕을 지부(地部)에 되돌려 주고 제사에서 가지고 있는 재용도 일체 혁파해야 할 것으로 생각합니다.” 하였다.
이것이 그 소장의 대략이다. 그 말이 명백하고 간절하여 당시의 병폐를 모두 통렬하게 꿰뚫었는데 채택되어 시행되지 못하였으니, 식자들이 한탄하였다.
○ 선생이 퇴휴(退休)하려 할 적에, “내가 오랫동안 시종의 반열에 있었으니, 어찌 한 마디 말도 없이 물러나서야 되겠는가.” 하고는, 마침내 이 소장을 올린 것이다.
○ 7월에 사직(社稷)으로 수가하였는데, 몸소 기우제(祈雨祭)를 행하기를 청하였다.
그 당시 상이 사직에 기우제를 지내고자 하여 이미 대가(大駕)가 막차로 들어갔었는데, 옥후(玉候)가 미령하였기 때문에 대신(大臣)에게 섭행하도록 명하였으니, 이는 밤을 무릅쓰고 제사를 지내기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그러자 대신(臺臣)이 질명(質明)에 몸소 행하기를 청하니, 선생이 나아가 아뢰기를, “오늘의 친제(親祭)는 응당 지성으로 하늘을 감격시켜야 하는 자리이니, 섭행하는 일은 실로 온당치 못합니다. 옛말에 ‘내가 제사에 참여하지 않으면 제사하지 않은 것과 같다.〔吾不與祭 如不祭〕’ 하였습니다. 연고가 있어 제사에 참여하지 못하는 것도 옛 성인(聖人)이 오히려 제사하지 않은 것과 같이 여겼는데, 하물며 지금 몸소 단하(壇下)에 오셨다가 친히 제사를 지내지 않으시면 온당치 못하지 않겠습니까. 질명에 예를 행하는 것은 주(周)나라 이래로 통행하였으니, 무슨 불가함이 있겠습니까.” 하였다.
○ 8월에 부교리에 배수되었으며, 경비를 줄여 진휼 비용에 보태기를 청하였다.
제신(諸臣)이 인대(引對)를 인하여 흉년의 재감(裁減)에 대한 일을 논의하였는데, 선생이 상방(尙方)의 염색(染色)을 파하고 태복(太僕)의 마필(馬疋)을 줄여 그 경비를 진휼 비용에 보태 쓰기를 청하였다.
○ 명을 받들어 《소학언해(小學諺解)》 및 주설(註說)을 고증하여 개정해 올렸다.
금상(今上 숙종(肅宗))이 동궁(東宮) 시절 장차 《소학》을 강하려고 할 적에, 상이 《소학언해》의 구두가 난삽하여 바르지 못한 것이 많다는 이유로 유신(儒臣)들에게 고증하여 개정하도록 명하였는데, 신료들이 아무도 감당해 내지 못하였다. 이에 선생이 마침내 상세하게 검토한 다음 언해의 착오가 대부분 주설이 본지(本旨)를 잃은 데서 연유되었다고 생각하여 주설까지 아울러 분변하여 논박하였다. 그러자 동료들이 전인의 정설(定說)을 개역하는 것을 혐의스럽게 여겼으나 선생은 끝내 뜻을 굽히지 아니하고 잘못된 부분에 대해 일체 모두 단락마다 변론하여 찌를 붙여 올렸다. 상이 양송(兩宋 송시열(宋時烈)과 송준길(宋浚吉))에게 질정(質正)하도록 명하니, 송상(宋相 송시열)이 크게 찬탄하고는 한두 조목 외에는 모두 찌의 변론을 따랐다. 지금 통행하는 신본(新本) 《소학언해》가 바로 이것이다.
○ 지평으로 이배(移配)되었다가 얼마 못 되어 도로 교리에 배수되었다. 동료들과 차자를 올려, 특명으로 전관(銓官)을 파직하고 대신(臺臣)과 유신(儒臣)을 엄하게 책망한 일에 대해 논하였다.
그 당시 상이 전조(銓曹)의 주의(注擬)가 자신의 뜻을 거스른 것에 격노하여 특명으로 판서 김수항(金壽恒)을 파직하였는데, 대간과 유신들이 연이어 환수하도록 청하였다가 이들 역시 엄한 성지(聖旨)를 받았다. 이에 선생은 “그동안 국사를 논한 이들이 견책당한 신하들을 위해 해명할 줄만 알았지 감히 성상의 허물은 언급하지 못하였다. 이 때문에 이와 같은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다.” 하고는, 마침내 스스로 차자를 초하였는데, 그 대략에, “대저 임금과 신하 사이에는 체모가 중요합니다. 옛적의 제왕들은 그 신하를 문책(問責)하더라도 또한 의사(意思)는 엄중하고 언사(言辭)는 신중하지 않은 적이 없었으니, 여항에서 모진 말로 욕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그런데 지금 전하께서는 중신을 하인처럼 다그치고 대각을 어린아이처럼 어리석게 여기시며, 또 모욕하는 말씀을 경악(經幄)의 신하들에게 하시니, 옛적의 무도(無道)한 임금이라 하더라도 언어를 삼가지 않음이 이보다 더하지는 않았을 듯합니다. 전하께서 매양 노한 음성으로 신하들의 말을 꺾는 것은 어째서입니까. 무릇 일의 가부는 이치에 달려 있을 뿐이지 음성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아랫사람이 진달한 내용이 이치에 불가한 점이 있다면 전하께서 이들을 깨우치는 수고를 아끼지 마시고, 진달한 내용이 이치에 합당하다면 또한 모쪼록 그들의 말을 따라 주어야 합니다. 그렇게 된다면 신하는 충성을 다하고 임금은 덕을 밝혀서 서로 앞다투어 공정하게 하여 화기(和氣)가 넘칠 것이니, 누가 불가하다 하겠습니까. 또 어찌 노한 음성을 먼저 부려서 스스로 위엄을 손상시킬 필요가 있겠습니까. 신등은 적이 국사가 날마다 잘못되어 가고 있는데도 바로잡을 수 없음을 애통스럽게 여깁니다.” 하였다. 동료들이 차자의 말이 완곡하지 못하고 직설적이어서 더욱 격노하게 할까 염려하여 난색을 표하였는데, 선생이 이르기를, “그렇지 않다. 명주(明主)는 이치로 설득할 수 있다.” 하고는, 마침내 이를 올리니, 상의 노여움이 조금 풀렸다.
○ 계부인(繼夫人) 정씨(鄭氏)를 맞이하였다.
부인은 휘(諱) 시무(時武)의 따님이다.

무신(1668) 현종대왕 9년 선생 40세
○ 1월에 문신월과(文臣月課)에 세 번 제술(製述)하지 않음으로 인해 파직되어 마침내 양주(楊州) 수락산(水落山) 석천동(石泉洞)으로 돌아가 거처하였다.
선생은 오래전부터 벼슬을 그만두려는 생각이 있어 누차 시구(詩句) 속에 드러내었다. 옥당에 있을 때 다른 사람에게 준 시에, “훗날 세 오솔길로 나를 찾아오면 잘 가꾼 소나무와 국화가 뜰에 가득하리라.〔他日問我三逕處 好栽松菊滿階庭〕” 하였으며, 또 일찍이 승려의 시축에 쓰기를, “응당 급류 속에서 용감히 물러나 고개를 끄덕이게 한 사람을 저버리지 않으리라.〔唯應急流退 不負點頭人〕” 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고의로 월과(月課)에 제술하지 아니하여 파직된 뒤 결심하고 돌아간 것이다. 선생의 자찬(自撰) 묘표(墓表)에 이르기를, “재주와 역량이 보잘것없어 세상에서 큰일을 하기에 부족한 데다 세상도 날로 도가 쇠해져 바로잡을 수 없다고 여기고는 마침내 관직을 벗어버리고 물러나 도성에서 30리 떨어진 동문(東門) 밖 수락산 서쪽 계곡에 거주하였으며, 그 계곡을 석천동(石泉洞)이라 일렀다.” 하였다.
○ 이 당시 회천 상공(懷川相公)이 물러나 향리에 거처하면서 조정의 의론을 좌지우지하니, 당로(當路)의 여러 사람들이 앞다투어 부화하여 당대의 인물에 대한 진퇴 여탈을 오직 회천의 의향만 보고 행하였다. 그리하여 한 마디라도 조금만 거스르면 연못에 떨어뜨릴 것처럼 하고 오로지 뜻이 투합하면 무릎 위에 올려놓을 것처럼 하였는데, 선생만 홀로 강직한 의론과 곧은 도를 견지하여 그 뜻을 따르려 하지 아니하였다. 그러나 지위와 명망, 재주와 학식을 지닌 선생을 또 쉽게 배척할 수도 없었으므로 이에 시기하는 자들이 많아졌다. 그리하여 서(徐)ㆍ김(金)의 일로 인해 선생까지 함께 비방을 받자 선생은 세상에서 큰일을 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으며, 녹(祿)만을 위해 벼슬하는 것도 그 뜻이 아니어서 마침내 이르기를, “뜻을 굽히고 몸을 욕되이 하여 그의 손아귀에 놀아나기 보다는 내가 좋아하는 것을 따라 밭이랑 사이에서 몸을 마치는 것이 나을 것이다.” 하였다. 그런데도 오히려 행행(悻悻)하게 떠나고자 하지 아니하여 법례에 따라 파직된 뒤에 마침내 전거(田居)로 돌아간 것이다.
○ 석천 골짝의 빼어난 경치는 근교의 이름난 전장도 여기에 견줄 곳이 드물 정도이니, 선생이 지은 〈석천동기(石泉洞記)〉에 운운한 말이 있다. - 원집(原集)에 보인다. -
○ 석천은 땅이 척박하여 곡식을 가꾸기에 적합하지 못한 곳이다. 선생은 몸소 농사를 지었는데, 농사철에는 농부나 야인들과 함께 어울려 종일토록 밭에서 지냈다. 자찬 묘표에 이르기를, “물가에 집을 지을 때 울타리를 치지 않고 복숭아나무, 살구나무, 배나무, 밤나무를 집 주위에 둘러 심고, 오이를 심고 밭을 개간하고 땔감을 팔아 생활하였다. 농사철에는 늘 밭에서 지냈으며, 호미를 메고 쟁기를 진 자들과 어울려 다녔다.” 하였다.
○ 2월에 교리에 제수되고, 3월에 연이어 정언(正言)과 지평(持平)에 제수되었으며, 4월에 세자시강원 문학(世子侍講院文學)에 제수되고 수찬(修撰)에 제수되었으며, 6월에 병조 정랑에 제수되고 정언에 제수되었는데, 모두 나가지 않았다. 8월에 이조좌랑 겸 문학(吏曹佐郞兼文學)에 제수되었는데, 오랫동안 조정의 명을 어긴 이유로 나추(拿推)되었다.
나간 뒤에도 배명(拜命)하지 않자, 편지를 보내 책망하는 친구도 있었으나 선생은 끝내 흔들리지 아니하였다.
○ 9월에 교리에 제수되었으며, 10월에 이조좌랑 겸 지평(吏曹佐郞兼持平)으로서 절사 서장관(節使書狀官)에 충원되어 연경으로 달려갔다.
선생은 국경을 나가 원방(遠方)에서 복역(服役)하는 것을 의리상 감히 사양하지 못할 점이 있다고 하여 나가 명에 응하였다.
○ 강을 건너는 날 몹시 엄하게 행장을 검사하였으며 대소의 짐바리를 모두 저울질하여 그 무게를 고르게 하여 밤이 되어서야 비로소 파하였다. 경유하는 산천의 도로 및 지명에 대해 이전부터 왕래하던 우리나라 사람들은 잘못 전해지는 것이 많은데도 더 이상 의심하거나 힐문하지 않았는데, 선생은 중화의 옛 사책에서 상고하고 거주하는 백성들에게 물어 의심스러운 것들을 정정(証正)한 것이 많았다. 이에 늙은 역관(譯官)들이 경복하였다.
○ 도중에 지은 것으로 《사연록(使燕錄)》 및 《연행일기(燕行日記)》가 있다.

기유(1669) 현종대왕 10년 선생 41세
○ 3월에 연경에서 환조하여 복명(復命)하였으며, 부교리 겸 세자시강원사서(副校理兼世子侍講院司書)에 배수되었다.
○ 대참(臺參)을 당하였다.
선생이 연경의 관소에 있을 때 마침 상원절(上元節)을 맞아 정사(正使)ㆍ부사(副使)와 함께 거리로 나가 관등(觀燈)을 하였는데, 돌아오자 대관(臺官) 가운데 정사에게 감정(憾情)을 품은 자가 있어 선생까지 함께 탄핵하였다.
○ 석천으로 돌아갔다. 8월에 교리에 제수되었으며, 10월에 사간원 헌납(司諫院獻納)에 제수되었는데, 모두 나아가지 않았다.

경술(1670) 현종대왕 11년 선생 42세
○ 4월에 지평에 제수되고, 5월에 헌납과 이조 좌랑에 제수되었는데, 모두 나아가지 않았다. 8월에 통진 현감(通津縣監)에 배수되어 부임하였다.
선생은 외임(外任)은 내직(內職)과는 경우가 다르다고 하여 마지못해 나아가서 부임하였다.
○ 12월에 헌납으로 이차(移差)되었는데, 대신이 잉임(仍任)시킬 것을 계청하였다.
대신이 흉년을 구실로 잉임시킬 것을 계청하였다.
○ 그 당시 대흉을 만났는데, 선생은 정성을 다해 기근을 구휼하여 향리의 장로들을 이끌어 만나 보고 민간의 질고에 대해 부지런히 물어 태만하지 않고 온 마음을 다 쏟았다. 그 당시 조정에서는 각 고을로 하여금 호적을 조사하여 토착민과 떠돌이를 구별하게 하여 떠돌이에게는 양식을 주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는데, 선생은 “오늘날 구원하는 계책은 정말이지 불에 타는 사람을 꺼내고 물에 빠진 사람을 건지는 것과 같은데, 어찌 똑같이 보아 함께 구휼하지 아니하고 구별을 할 수 있단 말인가.” 하였다. 또 강도(江都)의 곡식을 옮겨 주기를 청하여 완급에 따라 재량하여 균등하게 나누어 준 결과 온 경내에 굶어 죽은 자가 없었으니, 통진 백성들은 지금까지도 이를 공덕으로 여기고 있다.
○ 현의 청사당(聽事堂)이 예전에는 낮고 협소하여 거처하기가 불편하였는데, 구휼하는 정사를 끝낸 다음 당신의 녹봉을 털어 수리하고 백성들을 번거롭히지 아니하니, 백성들이 너도나도 기뻐하고 즐거워하였다.
○ 첫째 따님이 태어났다.
진사(進士) 이렴(李濂)에게 출가하였다.

신해(1671) 현종대왕 12년 선생 43세
○ 8월에 헌납(獻納)으로 불렀으나 나아가지 아니하고 석천으로 돌아갔다.

임자(1672) 현종대왕 13년 선생 44세
○ 2월에 수찬에 제수되었으며, 4월에 사간원 사간으로 승천되고, 홍문관부응교 겸 남학교수(弘文館副應敎兼南學敎授)에 제수되었으며, 다시 사복시 정(司僕寺正)에 제수되고, 또 세자시강원 보덕(世子侍講院輔德)에 제수되었으며, 다시 사간에 제수되었는데, 모두 나아가지 않았다.

계축(1673) 현종대왕 14년 선생 45세
○ 셋째 아들 태한(泰翰)이 태어났다.
○ 2월에 교리에 제수되었으며, 8월에 사헌부 집의(司憲府執義)에 제수되고, 다시 사간 겸 세자시강원필선(司諫兼世子侍講院弼善)에 제수되었는데, 모두 나아가지 않았다. 9월에 봉상시 정(奉常寺正)에 제수되어 영릉천장도감 도청(寧陵遷葬都監都廳)으로 명을 받아 목공(木工)을 감독하였다. 10월에 병으로 체직되었다.
이 당시 영릉이 택조(宅兆)가 불길하다는 이유로 천장하는 예가 있었는데, 선생은 목공을 감독하라는 명을 받고는 감히 사양하지 않고 즉시 능소(陵所)에서 일을 감독하였다. 모든 사역시키는 공장(工匠)과 소요되는 기용(器用)은 도청(都廳)이 모두 주관하는데, 여러 고을에서 올리는 잡다한 물건들을 하리(下吏)들이 번번이 자기 마음대로 진퇴하고 각종 공장의 복역하는 인원수 또한 모두 지나치게 하였다. 이에 선생은 올리는 물건이 비록 부합하지 않더라도 물리치지 말고 일체 모두 받아 둔 다음 소요되는 곳이 있을 때 그 대소와 장단을 헤아려 책응(策應)하도록 하였으며, 공장은 그 사역시키는 일의 대소를 헤아린 다음 참작하여 정하였다. 그러자 하리가 박절하게 하는 폐단이 없어지고 공수(工手)는 공밥 먹는 소비가 없어졌으며 일 또한 제대로 처리되었다. 몸소 먼저 일찍 일어나 종일토록 일에 종사하니, 제조(提調) 민공 유중(閔公維重)이 뒤미처 역소(役所)에 도착하여 선생에게 이르기를, “낭료(郞僚)가 된 여러 사람들은 대부분 일에 종사하지 않는데 공만 홀로 이처럼 힘을 다하니, 참으로 열복하는 바이네.” 하였다. 선생이 하루는 인산(因山)으로 걸어 올라갔는데, 갑자기 기식이 막혔다가 한참 뒤에야 소생하였다. 이에 민공에게 청하기를, “본래는 일을 끝낸 다음 복명하려 하였으나 병이 있어 억지로 하기 어렵습니다. 공께서도 직접 보셨으니, 생각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하니, 민공이 어쩔 수 없이 계청하여, 체직되었다.
○ 다시 사간에 제수되어 능소에서 도성으로 들어가 숙배한 다음, 인피(引避)하여 체직되자 즉시 석천으로 돌아갔다. 성균관 사성에 제수되고, 11월에 응교(應敎)에 제수되었으며, 12월에 사간에 제수되었는데, 모두 나아가지 않았다.

갑인(1674) 현종대왕 15년. 이해에 현종대왕이 승하하였다. 선생 46세
○ 2월에 다시 사간에 제수되었다. 왕대비(王大妃)가 승하하였으므로 곡반(哭班)에 들어가 참여하였다가 사은한 뒤 즉시 체직되어 돌아왔다. 연이어 사성(司成), 보덕(輔德), 집의(執義)에 제수되었는데, 나아가지 않았다.

을묘(1675) 숙종 1년 선생 47세
○ 연이어 응교(應敎), 집의 겸 남학교수(執義兼南學敎授)에 제수되었는데, 나아가지 않았다.
○ 둘째 따님이 태어났다.
생원 김홍석(金弘錫)에게 출가하였다.

병진(1676) 숙종 2년 선생 48세
○ 부수찬(副修撰), 사간(司諫)에 제수되었는데, 모두 나아가지 않았다.

정사(1677) 숙종 3년 선생 49세
○ 2월에 큰며느리 김씨(金氏)를 곡하였다.
○ 두 번 수찬에 제수되고, 두 번 응교에 제수되었으며, 세 번 집의에 제수되고, 세 번 사간에 제수되었으며, 중간에 교리(校理), 종부시 정(宗簿寺正)에 제수되었는데, 모두 나아가지 않았다.
○ 10월에 선천(宣川)으로 유배 가는 아들 태보(泰輔)를 전송하였다.
응교군(應敎君)이 고시관(考試官)이 되어 출제한 시제(試題)가 시휘(時諱)를 저촉하는 내용이 있었기 때문에 심리(審理)를 받고 견책을 당한 다음 선천으로 유배를 갔다.
선생이 증별시(贈別詩)를 지어 주었는데, 다음과 같다.
죄가 커 죽음을 면치 못할까 걱정하였더니 / 罪大方憂死不免
후은을 입어 지금 다행히 온전하게 되었구나 / 寬恩今幸獲生全
온 식구 분골쇄신해도 보답하기 어려우니 / 擧家糜粉難酬報
우리 함께 여생에 성상의 만수를 축원하자꾸나 / 唯共餘生祝萬年

북쪽 변방의 풍토는 서울과 다른데 / 窮邊風土異京華
날씨 춥고 길이 멀어 더욱 걱정이구나 / 況念天寒道路賒
죽기 전에 어찌 만날 날이 없겠냐마는 / 未死豈無相見日
널 보내고 홀로 귀가함을 견딜 수가 없구나 / 不堪送汝獨還家

무오(1678) 숙종 4년 선생 50세
○ 사간, 밀양 부사(密陽府使), 집의, 교리에 제수되었는데, 모두 나아가지 않았다.
○ 9월에 부인 정씨(鄭氏)를 곡하였다.

기미(1679) 숙종 5년 선생 51세
○ 집의에 제수되었는데, 나아가지 않았다.
몇 년 이래로 제자들이 조금씩 찾아오기 시작하여 시냇가에 집을 지었다. 선생이 최군(崔君 최창익(崔昌翼))과 이군(李君 이명세(李命世))에게 지어 준 시가 있는데, 다음과 같다.
묻노니 그대 집을 지어 무엇을 하려는가 / 問君結屋欲奚爲
부지런히 고생하니 그 뜻을 알 만하여라 / 勞苦辛勤意可知
애오라지 장차 서쪽 시냇가로 오가면서 / 聊且往來西澗上
십 년 동안 함께 이곳의 승경을 감상하세 / 十年同賞此中奇

학문이란 물 모으듯 쌓아야 함을 알아야 하니 / 蓄學須知如蓄水
방울방울 끊임없이 모아야 큰물을 얻는다오 / 涓涓不息得泓渟
가뭄을 당하여 한 쪽을 터놓으면 / 放開一面當天旱
시든 벼 싹 만 이랑 푸르게 됨을 볼 것이네 / 却見枯苗萬頃靑

문장을 짓는 일 비단 짜는 것과 같으니 / 攻詞也不異攻緯
천 가닥 만 가닥 올이 얽히게 하지 말아야 하네 / 萬縷千絲未要棼
아마도 천손의 베틀에서 나온 비단처럼 / 疑自天孫機畔脫
산과 용과 해와 달의 무늬가 찬란하리라 / 山龍日月爛奇紋
그 뒤로 배우기를 청하는 사람들이 해가 갈수록 점점 늘어나 늘 서재(書齋)에 가득하였다. 경사(經史)를 가르치기도 하고 제술(製述)을 권면하기도 하였는데, 문답하고 강론하며 종일토록 게을리하지 아니하였다. ‘관란정(觀瀾亭)’과 ‘괴산정(蕢山亭)’은 곧 제생들이 지은 학업을 익히는 곳으로, 모두 선생이 명명한 것이다.

경신(1680) 숙종 6년 선생 52세
○ 응교, 사간에 제수되었는데, 모두 나아가지 않았다.
○ 통정대부(通政大夫)로 승진하였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환수되었다.
역적을 토벌하고 공훈을 책록하는 회맹(會盟)을 한 뒤, 정사공신(靖社功臣)의 중자(衆子)도 함께 가자(加資)하도록 명하여 선생 또한 통정대부로 승진하였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이의를 제기한 자가 있어 환수되었다.
○ 〈고신선곡(古神仙曲)〉을 읊었다.
선생은 네 수의 절구를 읊어 시사(時事)를 풍자하였는데, 〈고신선곡〉이라 일렀다. 다음과 같다.
영서를 쪼개어 시험 삼아 한번 태우니 / 劈破靈犀試一燃
온갖 괴물들의 실체가 환히 드러났네
/ 紛紛百怪失重淵
옥황상제가 높이 통명전에 납시어 / 玉皇高御通明殿
예전대로 조화의 권세를 되찾았네 / 依舊收還造化權

홍란과 취봉이 날마다 울며 나니 / 紅鸞翠鳳日飛鳴
현포에서 동쪽으로 보매 바로 적성이로다 / 玄圃東看是赤城
귤 속의 대국을 탐닉하지 말지어다 / 莫要橘中耽對局
맑은 상계의 풍운을 길이 얻을 것이니 / 風雲長得上界淸

지초 밭에서 사슴이 노는 것도 터무니없는데 / 芝田戲鹿亦無端
공작이 푸른 여울물을 마심은 막아야 하리 / 孔雀須防飮碧湍
이는 선가의 좋은 닭이나 개와 같으니 / 同是仙家好鷄犬
그릇된 생각이 마음속에 들어갈까 근심스럽네 / 更愁非意輒相干

곤륜산에 부신 날리고 봉영에 편지 보내 / 飛符崑閬牒蓬瀛
크게 금단을 조제하여 온갖 정기를 모았네 / 大劑金丹聚百精
서둘러 화로에 넣어 구전금단을 이루니 / 急就爐中成九轉
도규로 떠내어 아래로 억만창생 구원하네 / 刀圭下救萬蒼生
오래지 않아 말이 과연 증험되었다.
○ 9월에 다시 응교에 제수되었다. 10월에 별유(別諭)를 받고 소장을 올려 사양하였는데, 또 우악한 비답을 내려 허락하지 아니하였다.
이 당시 홍문관의 직임에 제수하는 명이 있어 선생이 현(縣)과 도(道)를 통해 사본(辭本)을 올렸는데, 회비(回批)에서 허락하지 아니하고 이어 특별히 별유를 내리기를, “그대의 염퇴(恬退)하고 청고(淸苦)한 절조는 근래 보기 드문 바여서 내가 항상 가상하게 여기고 장려하면서 늘 조정에 초치하고 싶었다. 그동안 직임을 제수하매 사양하는 말을 간곡하게 하면서 명에 나아오려 하지 않아, 끝내 그대의 마음을 되돌릴 수 없는 것을 내가 더욱 한스럽게 생각하고 있었다. 이번에 새로 제수하면서 특별히 진심을 고하여 간절히 기다리는 뜻을 깊이 드러내 보이니, 그대는 고사(固辭)하지 말고 될 수 있는 대로 빨리 올라오라.” 하였다.
이에 선생은 소장을 올려 사양하였는데, 그 대략에, “신은 질병이 심해졌기 때문에 중도에 벼슬을 그만두어 양조(兩朝)의 융숭한 은혜를 저버리고 견마(犬馬)의 미천한 뜻을 저버렸으니, 이것은 신이 스스로 슬퍼하는 바이고 많은 사람들이 불쌍히 여기는 바입니다. 더구나 가난과 병은 사람에게 모두 있는 것이지 신만이 가진 것은 아닙니다. 세상에 신과 비슷한 이가 어찌 한두 사람뿐이겠습니까. 그런데 유독 신만 질병 때문에 염퇴하다는 포장을 받고 가난 때문에 청고하다는 장려를 받았으니, 이는 가난과 병이 요행히도 그 사이에 있어서 그러한 것입니다.” 하였는데, 상이 또 우악한 비답으로 회유(回諭)하였다.
○ 통정대부(通政大夫) 승정원 동부승지(承政院同副承旨)로 승진하였으며 겸직은 전례와 같았다. 소장을 올려 사양하였으나 허락하지 아니하였다. 중궁(中宮)이 승하하였으므로 도성으로 들어가 사은하였다. 11월에 체직되어 즉시 석천(石泉)으로 돌아갔다.
선생은 별유를 받고 또 승탁(陞擢)이 되자 누차 소장을 올렸으나 윤허를 받지 못하였다. 10월 26일 인경왕후(仁敬王后)가 승하하여 27일에 도성으로 들어가 사은한 다음 직임에 나아갔는데, 원중(院中)에서 늘 이불을 덮고 누워 있으니, 동료들이 웃으며 서로 이르기를, “원규(院規)가 박 영공(朴令公) 때문에 다 무너졌다.” 하였다. 11월 10일에 체직되어 이튿날 즉시 석천으로 돌아갔다. 도성으로 들어갈 때 절구 한 수를 읊었는데, 다음과 같다.
십 년 동안 산림에서 편안히 은거하였는데 / 十年林下棲蹤穩
하루아침에 허둥지둥 벼슬길에 나아가네 / 一日塵中逐影忙
우스워라 석천거사의 뜻이여 / 堪笑石泉居士意
결국은 뜻이 막히고 만 것이 아니겠는가 / 到頭無乃使荒涼
도성을 나오면서 다시 읊었는데, 다음과 같다.
세망에 몸 담았으되 끝내 빠질까 근심하였더니 / 粘身世網憂終陷
산림으로 발길 돌려 일찍 돌아가게 되었구나 / 抽跡山樊得早歸
허둥지둥 왕래한다고 기롱할 줄 내 아노니 / 來往也知譏屑屑
이문을 새김이 장차 내 집 문에 이르리라 / 勒移行亦到巖扉
이 뒤로는 마침내 다시 도성 문으로 들어가지 아니하였다. 자찬 묘표에 이르기를, “처음에는 간간이 조정의 명에 나아가기도 했지만 뒤에는 누차 불러도 일어나지 않았다.” 하였다.
○ 《대학사변록(大學思辨錄)》을 지었다.
선생은 물러난 뒤 한가하게 거처하면서 마침내 전심전력으로 경서(經書)에 공력을 쏟았다. 몇 년간을 침잠하여 융회 관통한 뒤에 비로소 그 편간(編簡)과 자구(字句) 가운데 뒤섞이고 잘못된 것을 바로잡고 그 전주(箋註)의 해설 가운데 그릇된 것을 변론한 다음 기록하여 책을 만들었다. 《통설(通說)》이라 이르기도 하고, 《사변록》이라고도 일컫는데, 사서(四書)에 대해 특히 힘을 쏟았다. 선생이 소시에 《대학》을 읽을 때, ‘첨피기욱(瞻彼淇澚)’ 및 ‘전왕불망(前王不忘)’ 두 단락에 이르러 문득 그 상하의 문의(文義)가 서로 연결되지 않음을 의심한 나머지 반복해서 궁구하고 생각하였으나 끝내 통하지 않는 점이 있어 매번 책을 덮고 중단하고 말았었는데, 《사변록》을 지을 때 이 두 단락을 제10장인 〈평천하장(平天下章)〉 뒤로 옮겨 놓았다. 양정(兩程 정호(程顥)와 정이(程頤))이 정해 놓은 《대학》을 상고해 보니, 선생과 똑같았다.

신유(1681) 숙종 7년 선생 53세
○ 2월에 충청도 관찰사(忠淸道觀察使)에 제수되고, 9월에 사간원 대사간(司諫院大司諫)에 제수되었는데, 모두 나아가지 않았다.
○ 노자(老子)의 《도덕경(道德經)》에 주해(註解)를 달았다.
선생은 《도덕경》에 주해를 달고 서문을 짓기를, “노자는 주(周)나라의 쇠퇴한 시기를 당하여 수장사(守藏史)로 늙으면서 세상에 쓰이지 않았는데, 은거하려 할 때에 이르러 오히려 책을 지어 그 지키는 도를 밝혀 자신의 뜻을 드러냈다. 그 도가 비록 성인의 법에 합치하지는 않지만 그 뜻은 역시 몸을 닦고 백성을 다스리고자 하는 것이니, 그 말은 간략하지만 그 뜻은 심원하다. 한(漢)나라 이전엔 그 도를 중시하여 썼기 때문에 위로는 임금이 공묵(恭默)의 교화를 행하였고, 아래로는 신하가 청정(淸靜)한 다스림을 행하였다. 그런데 진(晉)나라 시대에 들어와서는 광망하고 허탄한 선비들이 노자를 기탁하여 실상이 없는 현허(玄虛)한 담론과 끝 간데없는 아득한 말을 하여 그 거짓을 꾸미고 한 세상을 속이니, 천하가 흡연히 함께 쏠려 가 풍속이 크게 어지러워진 나머지 진나라 왕실이 마침내 기울어지고 말았는데, 노자의 도가 어찌 그러하겠는가. 그들이 남긴 기풍과 공렬이 대대로 이어져 아직까지 남아 있기 때문에 훗날 노자를 말하는 이들은 대부분 진나라 사람을 종주로 삼아 은미하게 말하고 미묘하게 해설을 하여 안 그래도 잘못되었는데 또 잘못 전하고 있으니, 더욱 슬픈 노릇이다. 내가 명(明)나라 진심(陳深)이 지은 《제자품절(諸子品節)》을 보니, 《도덕경》 81장을 실어 놓았다. 그 주해는 누가 달았는지 밝히지 않았는데, 아마도 이는 진심이 스스로 단 것인 듯하다. 임희일(林希逸)이 주해를 단 것으로 말하면 모두 그릇되어 열에 하나도 건질 것이 없다. 노자가 비록 성인의 도는 아니지만 그 책이 이미 세상에 행해지고 있으니, 요컨대 그 뜻을 분명하게 밝히지 아니하여 거듭 후세를 그르치게 해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문득 한가한 날에 간략하게 주해를 달았다.” 하였다.
○ 서문이 원집(原集)에는 누락되었기 때문에 지금 여기에 붙인다.

임술(1682) 숙종 8년 선생 54세
○ 1월에 장단(長湍)으로 가서 종친들과 만나 10대조 반남(潘南 박상충(朴尙衷)) 선생의 증시례(贈諡禮)를 묘소에서 맞이하였다.
족제(族弟) 현석(玄石 박세채(朴世采))의 시에 화운(和韻)한 시가 있는데, 다음과 같다.
뜻은 세속 밖을 멀리 벗어났고 / 志蛻氛埃表
명성은 일월 곁에 높이 걸렸네 / 名懸日月傍
생전에는 곤돈하여 고통을 겪었으나 / 屯蒙曾負痛
사후에 시호를 받아 빛나게 되었도다 / 錫賚竟爲光
오래 묵은 오동은 무성한 그늘이 짙고 / 舊檟扶陰遠
새로 세운 사당엔 새 제사가 장구하리 / 新宮肇祀長
애영에 애모함이 간절하니 / 哀榮切攀慕
성은의 우로가 더욱 옷을 적시네 / 雨露益沾裳
○ 《장자(莊子)》에 주해를 달았다.
선생은 《장자》에 대한 제가(諸家)의 주해가 비록 많지만 잡다하기만 할 뿐 일치하지 않는다 하여, 마침내 수십 학자들의 주해를 모아 그 가운데 정밀하고 요긴한 것을 취하여 하나의 책으로 만들었는데, 자신의 견해를 넣어 본지(本旨)를 천명하였다.
○ 선생은 일찍이 말하기를, “노자는 패술(伯術)의 으뜸이고 장자는 왕도(王道)의 나머지이다.” 하였다. 또 “노자는 사(私)이고 장자는 공(公)이다. 《장자》 가운데 〈도척(盜跖)〉, 〈설검(說劍)〉, 〈어부(漁夫)〉 등과 같은 편은 옛사람이 진실로 일찍이 장자의 글이 아니라고 하였는데, 나의 견해로는 〈마제(馬蹄)〉와 〈거협(胠篋)〉 또한 장자의 글이 아니고 오직 〈양왕(讓王)〉 한 편만이 그 대부분이 장자의 손에서 나온 것이 아닐까 싶다. 사마천(司馬遷)이 이르기를 ‘장자가 책을 지으면서 공자(孔子)의 문도를 헐뜯었다.’ 하였는데, 전연 사실과 맞지 않는다. 말은 비록 기롱하였으나 뜻은 실로 존모한 것이다. 그리고 그 정미한 이치는 입신의 경지이니, 성(性)을 안 것으로 말하면 역시 장자만 한 이가 없을 정도이다. 이른바 ‘그 성심을 따라 그것을 스승으로 삼으면 누군들 홀로 스승이 없겠는가.〔隨其成心而師之 誰獨且無師〕’라는 것은 《중용(中庸)》의 ‘솔성(率性)’과 맹자(孟子)의 ‘성선(性善)’의 뜻에 깊이 부합하니, 순자(荀子)나 양웅(揚雄)이 비할 바가 아니다. 숨어 살면서 말을 함부로 한 이와 자못 유사하기 때문에 ‘왕도의 나머지이다.’라고 하는 것이다.
《노자》의 이른바 ‘무(無)’란 공허하다는 뜻이 아니라 겸허하다는 뜻이며, 이른바 ‘무위(無爲)’란 일을 일삼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라 조급하고 어지럽게 함부로 작위하지 말라는 뜻이다. 한대(漢代)에는 그 도를 숭상하여 능히 공묵(恭默)하고 청정(淸靜)한 다스림을 행하였는데, 진나라 사람들은 그 실제를 체득하지 못하고 한갓 허무만 숭상하였으므로 칠국(七國)의 난이 일어나는 데 이르고 말았다. 그러나 노자는 ‘그 몸을 뒷전으로 하여 몸이 앞서고, 그 몸을 바깥으로 하여 몸이 보존된다.〔後其身而身先 外其身而身存〕’ 하였고, 또 ‘자처하지 않기 때문에 떠나가지 않는다.〔夫唯不居 是以不去〕’ 하였으니, 말이 대부분 이와 같다. 그 이른바 ‘장차 빼앗고자 한다면 반드시 그것을 주어라.〔將欲奪之 必固與之〕’라는 것으로 말하면 완전히 권모(權謀)에서 나온 말이다. 무릇 의를 바로잡으면서 이익을 도모하지 않고 도를 밝히면서 공을 계교하지 않는 것이 곧 왕도(王道)이고, 공리(功利)를 계교하는 것은 곧 패술(伯術)이다. 노자의 이른바 ‘공리에 자처하지 않는다.’라는 것은 곧 공리가 자기에게 있기를 원하는 것이니, 그렇다면 그 탐욕하고 추구하는 자와 더불어 청탁(淸濁)과 지우(智愚)의 구분을 두고자 한 것일 따름이다. 그러므로 ‘패술의 으뜸이다.’라고 하는 것이다.” 하였다.
또 “장자는 단지 도리가 응당 이와 같다는 것을 말했을 뿐, 목적을 품고 말한 것이 아니다. 이 때문에 ‘공(公)이다.’라고 하는 것이며, 노자는 이렇게 해야 자신에게 이롭다고 한 것이니, 이는 곧 애초에 목적을 품고 말한 것이다. 이 때문에 ‘사(私)이다.’라고 하는 것이다.” 하였다.
○ 윤 명재(尹明齋 윤증(尹拯))가 선생이 노장(老莊)의 책에 주해를 달았다는 소리를 듣고 편지를 보내 경계하였는데, 선생이 답장에서 운운하였다. - 원집에 보인다. -
○ 글을 지어 - 원집에 보인다. - 반남(潘南) 선생 비문의 기년(紀年) 이동(異同)에 대한 의론을 변론하였다.
이 당시 반남 선생의 묘비를 세우기를 논의하였다. 사적을 서술한 뒤 응당 연월(年月)을 붙여야 하는데, 현석(玄石)은 숭정 기원후(崇禎紀元後) 모년(某年)이라 칭해야 한다고 하였다.

계해(1683) 숙종 9년 선생 55세
○ 1월에 중형 승지공(承旨公)을 곡하였다.
○ 2월에 홍문관 부제학(弘文館副提學)에 제수되었으며 겸직은 전례와 같았는데, 나아가지 않았다.

갑자(1684) 숙종 10년 선생 56세
○ 6월에 부제학에 제수되었는데, 나아가지 않았다.

을축(1685) 숙종 11년 선생 57세
○ 2월에 이조 참의(吏曹參議)에 제수되었는데, 나아가지 않았다.

병인(1686) 숙종 12년 선생 58세
○ 3월에 아들 태유(泰維)를 곡하였다.
지평군(持平君)이 계해년에 소장을 올려 시사(時事)를 말하다가 고산 찰방(高山察訪)으로 좌천되었는데, 병든 몸을 이끌고 돌아와 이달에 졸하였다.
○ 대사간(大司諫)에 제수되었는데, 나아가지 않았다.
○ 동봉사우(東峯祠宇)를 세워 영정(影幀)을 봉안하고 석채례(釋菜禮)를 행하였다.
매월당(梅月堂) 김공(金公 김시습(金時習))이 거처하던 구지(舊址)가 수락산 동봉(東峯)에 있었는데, 선생은 오래전부터 동봉의 서쪽 석림사(石林寺) 곁에 사우를 세우고자 하였다. 다만 재력이 없었으므로 모연문(募緣文) 한 통을 지어 석림사에 거처하는 승려에게 써 보내 재물과 양식을 구해 공역을 일으키도록 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완공되었다. 이어 홍산현(鴻山縣) 무량사(無量寺)에 있는 김공의 자화상(自畫像)을 옮겨 오기를 계획하여 이곳에 봉안한 뒤, 선생은 뜻을 같이하는 선비 수십 인과 함께 석채례를 행하였다. 그 뒤 경진년(1700, 숙종26)에 양주(楊州)의 선비가 소장을 올려 건의한 것으로 인해 조정에서 사액(賜額)하기를 ‘청절사(淸節祠)’라 하였다. 그 모연문에 운운하였다. - 원집에 보인다. -
○ 평안도 관찰사 신공 익상(申公翼相)이 선생이 승려를 모아 사우를 세우는 것이 상규(常規)와 다르다고 하여 편지를 보내 물었는데, 선생이 답장에서 운운하였다. - 원집에 보인다. -

정묘(1687) 숙종 13년 선생 59세
○ 《중용사변록(中庸思辨錄)》을 지었다.
선생이 일찍이 말하기를, “《중용》과 《대학》이 모두 《예기(禮記)》에서 나왔는데, 《예기》라는 책은 본래 한(漢)나라 선비가 분서(焚書)된 나머지를 주워 엮은 것이다. 따라서 착간(錯簡)이 많으니, 그렇다면 《중용》과 《대학》만 그렇지 않다고 어떻게 보장하겠는가. 이 때문에 《대학》의 착간을 지적한 사람으로 주자(朱子) 이전에는 두 정자(程子)가 있었고, 주자 이후에도 많이 있는데, 진실로 말뜻이 통창하지 못한 곳도 있고 문맥이 관통하지 못한 곳도 있음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중용》에 대해서는 선유(先儒)도 끝내 그 장간(章簡)을 바꾸지 못하였으니, 《대학》에는 강(綱)과 목(目)이 따로 있어 그 단락을 분변하기가 쉽지만 《중용》에는 이것이 없기 때문이다.” 하였다.

무진(1688) 숙종 14년 선생 60세
○ 봄에 북관(北關)의 순영(巡營)으로 가 정헌공(貞憲公)과 충숙공(忠肅公) 두 선대의 시호(諡號)를 맞이하는 예(禮)에 참여하였다.
그 당시 형의 아들 태상(泰尙)이 함경도 관찰사가 되어 순영에서 두 선대의 시호를 맞이하였는데, 선생이 가서 행례(行禮)에 참여하였다. 파주 목사(坡州牧使)로 있던 아들 태보(泰輔)가 시종하였다.
○ 풍악산(楓嶽山)을 역방하고 돌아왔다.
이 길에 지은 것으로 《후북정록(後北征錄)》이 있다.
○ 지평군(持平君)이 일찍이 고산 찰방으로 있을 때, 우헌(郵軒) 곁에 정자를 짓고 ‘망운정(望雲亭)’이라 편액하여 양공(梁公)이 태항산(太行山)에서 부친을 그리워한 마음을 담았다. 조 부학(趙副學) 지겸(持謙)이 기문(記文)을 지었다. 이때에 이르러 선생이 이곳을 지나다가 이승과 저승으로 갈린 감회를 가누지 못하여 시를 지어 슬픔을 기록하였는데, 다음과 같다.
망운정 밖으로 흰 구름이 나는데 / 望雲亭外白雲飛
이놈 가고 정자 비어 말이 아니로다 / 人去亭空事却非
애끓는 이 애비 통곡 절로 나오니 / 唯有斷腸猿自哭
감정이 있어 눈물이 옷깃을 다 적시네 / 有情應爲盡沾衣
○ 7월에 부제학에 제수되었으며, 11월에 또 제수되었는데, 모두 나아가지 않았다.
○ 《논어사변록(論語思辨錄)》을 지었다.

기사(1689) 숙종 15년 선생 61세
○ 5월에 노량촌(露梁村)에서 아들 태보(泰輔)를 곡하였다.
이 당시 요화(瑤華)의 변이 있었는데, 오 판서(吳判書) 두인(斗寅)이 70명의 산직(散職) 및 외직(外職)에 있던 이들과 함께 소장을 진달하고 궐문 앞에서 호소하였다. 응교군(應敎君)도 전함(前銜)으로 참여하였는데, 실로 그 소론(疏論)을 주관하여 소장을 짓고 이어 직접 썼다. 소장이 올라가자 상이 크게 진노한 나머지 밤중에 정국(庭鞫)을 설행하여 응교군이 심하게 형화(刑禍)를 당하였다. 선생이 소식을 듣고 도성으로 달려 들어가니, 이미 궐정(闕庭)에서 의금부로 회부된 뒤였다. 도배(島配)의 명이 내려 옥중에서 나올 때, 선생이 이르기를 “나는 네가 필시 죽는 줄 알았는데 지금 너의 신색을 보니 살아날 가망이 없지 않겠구나. 네가 보기엔 어떠하냐?” 하였다. 이어 노량으로 가서 며칠을 머물렀는데, 상처가 심해 목숨이 위태로워지자 마침내 영결하기를, “지난번엔 혹시라도 회생할까 기대하였더니 이제는 끝이로구나. 사생의 갈림길엔 모름지기 차분해야 한다.” 하였다. 그가 죽자 소거(素車)에 싣고 돌아와 석천(石泉)의 뒷산 등성이에 안장하였다.
○ 응교군이 화를 당한 것은 진실로 화를 즐기고 죽기를 원한 것이 아니니, 뼛골에 사무치도록 비통해하고 혼백이 달아나도록 놀라지 않은 이가 없었다. 그가 옥에서 나올 때 길을 메운 사람들이 눈물을 훔치며 차마 바라보지 못하였으며 오랜 친구는 울다가 목이 쉰 이도 있었는데, 선생이 그와 대면할 적에 문답이 온화하고 사기(辭氣)가 차분하여 마치 평소에 잠깐 떠났다가 반면(反面)을 등한히 한 것처럼 하니, 좌우 사람들이 망연히 서로 돌아보다가 저마다 비통한 낯빛을 고친 뒤 그제야 담소를 나누었다. 도로에서는 제때에 구료하였으며 죽을 적엔 후사(後事)를 물었다. 상을 치를 적엔 모든 일을 몸소 점검하여 때에 맞게 곡읍하고 평상시처럼 기거하여 감정대로 내맡겨 지나치게 슬퍼하는 일이 없었다. 이에 사람들이 이르기를, “정재(定齋 박태보)의 심력이야 이미 사람들이 모두 알고 있는 바이지만, 이러한 아버지가 있기 때문에 이러한 아들이 있음을 이제야 알았도다.” 하였다.
○ 이 뒤로 조명(朝命)이 오랫동안 미치지 않았다.
○ 《맹자사변록(孟子思辨錄)》을 지었다.
사서(四書) 《사변록》이 완성되자 스스로 서문을 지었다. 대략 이르기를, “육경(六經)의 글은 모두 요(堯)ㆍ순(舜) 이래 여러 성현의 말씀을 기록한 것으로 그 이치가 정밀하고 그 의리가 구비되었으며, 그 의미가 심오하고 그 지취(旨趣)가 심원하다. 그 정밀함을 논해 보면 털끝만큼도 어지럽힐 수 없고, 그 구비됨을 말해 보면 미세한 것도 빠뜨림이 없으며, 그 심오함을 측량하고자 해도 바닥을 찾을 수 없고, 그 심원함을 궁구하고자 해도 끝을 볼 수 없으니, 진실로 얕은 도량과 하찮은 식견을 지닌 세간(世間)의 비루한 선비나 꽉 막힌 유자(儒者)가 밝힐 수 있는 바가 아니다. 이 때문에 위로 진(秦)ㆍ한(漢) 시대로부터 아래로 수(隋)ㆍ당(唐) 시대에 이르기까지 문호(門戶)를 나누고 사지(四肢)를 토막 내어 결국 그 대체(大體)를 파괴시키고 만 자를 이루 다 헤아릴 수 없는 것이다. 이단(異端)에 빠진 자들은 대부분 비슷한 내용을 빌려서 자기들의 간사한 말과 회피하는 말을 꾸미고, 전대(前代)의 전적(典籍)을 고수하기만 하는 자들은 꽉 막히고 오활하고 편벽되어 평탄한 길을 전연 몰랐으니, 아, 이 어찌 성현이 온 정성을 다 쏟아 이 글을 짓고 이 말을 기록함으로써 이 법을 밝혀 천하 후세에 희망을 품은 뜻이겠는가.” 하였다.
또 이르기를, “귀머거리는 뇌정(雷霆)의 소리를 듣지 못하고 장님은 일월(日月)의 빛을 보지 못하지만, 저 귀머거리와 장님이 문제일 뿐이지 뇌정과 일월은 본래 그대로이다. 천지간 어디에나 크게 울리고 고금에 변함없이 환하게 밝아 일찍이 귀머거리나 장님 때문에 소리를 죽이고 빛을 감춘 적이 없다. 그러므로 송(宋)나라 때에 와서 정자와 주자 두 선생이 일어나 곧 일월의 거울을 닦고 뇌정의 북을 두드리자 먼 곳까지 소리가 울리고 온 사방에 빛이 환하여 육경의 뜻이 이에 다시 찬연하게 세상에 드러났다. 그러나 육경에 실린 말은 그 큰 줄기는 비록 하나이지만 가닥은 천만 갈래이니, 이것이 이른바 ‘이치는 하나이나 생각은 백 가지이며, 귀결처는 같으나 가는 길은 다르다.’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비록 절륜한 지식과 심오한 조예가 있더라도 오히려 그 지취(旨趣)를 극진하게 다하여 미세한 부분을 놓치지 않을 수 없는 경우가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반드시 여러 사람의 특장을 널리 모으고 작은 견해라도 버리지 아니한 뒤에야 심오하고 심원하며 정밀하고 구비된 육경의 대체(大體)가 비로소 온전해질 수 있는 것이다. 이 때문에 문득 참람함을 잊고 좁은 소견으로 얻은 바를 기술한 다음 이를 모아 성책(成冊)하여 《통설》이라 일렀으니, 혹여 세상을 인도하고 백성을 돕는 선유(先儒)의 뜻에 티끌만 한 도움이 없지는 않을 것이다. 따라서 굳이 이견(異見)을 내어 나의 주장을 세우기를 좋아하는 마음에서 이 책을 지은 것은 아니다. 광망하고 경솔하여 식견이 모자라는 것을 헤아리지 않은 죄로 말하면 사양하지 않고 기꺼이 받을 것이다. 후세의 이 글을 읽는 자가 혹시 그 뜻이 다른 데 있지 않다고 여겨 특별히 용서해 준다면 이 또한 다행일 것이다.” 하였다.
○ 사람들이 더러 선유의 의론에 이견을 내는 것을 온당치 못하다고 하자, 선생은 다음과 같은 시를 지었다.
육경의 추기를 뉘라서 능히 열겠는가 / 六籍誰能發鍵樞
자양 같은 전주는 고금에 없었다오 / 紫陽傳註古今無
후현들 기뻐할 줄만 알고 도울 줄 안 이 드물었으나 / 後賢知說鮮知助
어리석은 듯함이 어리석지 않다고 말할 수 있으랴
/ 可道如愚是不愚
또 다음과 같은 시를 지었다.
성인의 말씀에 기뻐하지 않음이 없던 이는 / 聖言無不說
그 당시 오직 안연뿐이었다네 / 當時一顔淵
계로는 심지어 성내기까지 하였고 / 季路至慍見
선생님은 오활하다고 한 일도 있었다오
/ 子迂亦有焉
알지 못하겠네 천만대에 / 不知千萬代
어느 누가 안회처럼 어질었는가 / 人孰如回賢
몹시 어리석은 나는 내 마음만 믿을 뿐 / 甚愚只信心
미치광이란 소리 스스로 피하지 않겠네 / 不自避狂顚
원하는 바는 경전의 뜻을 밝히고자 한 것일 뿐 / 所欲發經旨
실로 다른 뜻이 있어서가 아니라네 / 意實非他然
밝은 이들 어찌 사물의 이치를 왜곡하겠는가 / 明者豈枉物
이 일을 응당 용서할 것이리라 / 此事當恕旃
〈두어(蠧魚)〉라는 시를 읊었는데, 다음과 같다.
두어 같은 이내 몸 책 속에서 살아가니 / 蠧魚身向卷中生
글자 안 지 다년에야 눈이 조금 트였네 / 識字年多眼乍明
결국은 미물이니 뉘라서 허여하리오 / 畢竟物微誰見許
경서를 망쳤단 이름만 길이 남으리라 / 祗應長負毀經名
이 몇 수의 시에서 지아죄아(知我罪我)의 뜻을 볼 수 있겠다.

경오(1690) 숙종 16년 선생 62세
○ 3월에 큰형수 정씨(鄭氏)가 졸하였다. 7월에 김포에서 회장(會葬)하였다.

신미(1691) 숙종 17년 선생 63세
○ 3월에 셋째 형수 윤씨(尹氏)가 졸하였다.
처사공(處士公)이 일찍 죽었는데, 과부가 된 형수 윤씨는 곧 미촌(美村 윤선거(尹宣擧)) 선생의 따님이다. 응교군(應敎君)이 태어나자 선생은 처사공의 후사(後嗣)를 잇기를 명하였는데, 기사년(1689, 숙종15)에 응교군이 화를 당한 뒤 윤씨의 노후가 더욱 궁핍하고 곤란해져서 선생이 석천으로 모셔 왔다. 이해에 윤씨가 역질에 걸렸는데 선생은 처음부터 끝까지 약을 살폈으며, 초상이 나자 식구들과 친구들이 나가 피하라고 애타게 권하였으나 선생은 듣지 않은 채 몸소 자녀를 거느리고 손수 예서(禮書)를 잡고 염습(斂襲)을 지휘하였으며 빈(殯)을 끝내고 성복(成服)을 한 뒤에 나왔다.
○ 《상서사변록(尙書思辨錄)》이 완성되었다.
○ 9월에 동점(銅店)을 유람하였다.
동점은 양주(楊州)의 치소(治所) 북쪽 40리에 있는데, 선생이 그곳의 수석(水石)이 자못 빼어나 볼 만하다는 소리를 듣고 문생(門生) 열몇 명과 함께 가서 유람하였다.

임신(1692) 숙종 18년 선생 64세

계유(1693) 숙종 19년 선생 65세
○ 《모시사변록(毛詩思辨錄)》을 짓기 시작하였는데, 완성하지 못하였다.
이 뒤로 10년 동안 연이어 질고(疾故)가 있었기 때문에 《모시사변록》은 소아(小雅) 채록편(采綠篇)에 이르러 중지되었으며, 끝내 완성하지 못하였다.
○ 선생이 일찍이 말하기를, “누가 《서경》 해석이 《시경》보다 어렵다고 하는가. 《서경》은 비록 문장이 간결하고 뜻이 심오하긴 하지만 자세하게 궁구하면 해석이 또한 어렵지 않다. 그러나 《시경》의 시는 애초에 무슨 의도로 지었는지 드러내지 않았기 때문에 후인들이 그 내용을 미루어 주제를 파악한 것도 있고, 또 그 내용을 반복해서 궁구해도 끝내 무슨 의도로 지었는지 파악하지 못한 것도 있다. 이 때문에 해석하기가 더욱 어려운 것이다.” 하였다.

갑술(1694) 숙종 20년 선생 66세
○ 5월에 처음으로 조정에서 식물(食物)을 하사하도록 하였다.
연신(筵臣)의 말로 인해 이 명이 있게 되었다.
○ 동부승지(同副承旨)에 제수되었는데, 사양하여 체직되었다.
이 당시 곤궁(坤宮 인현왕후(仁顯王后))이 복위(復位)되었으므로 응교군의 관직을 추증하고 그 문에 정표(旌表)하기를 명하였으며 이어 사제(賜祭)하였는데, 선생이 도성으로 들어가 이를 보았다. 이날 승지에 제수되었는데, 즉시 도성을 나와 소장을 올려 사양하여 체차되었다.
○ 6월에 특지(特旨)로 가선대부(嘉善大夫) 호조 참판(戶曹參判)에 탁용되었는데, 사양하였으나 허락하지 아니하였다. 대사간(大司諫)으로 이차(移差)되었으며, 또 부제학(副提學)으로 이차되었는데, 모두 나아가지 않았다.

을해(1695) 숙종 21년 선생 67세
○ 3월에 특지로 자헌대부(資憲大夫) 공조 판서(工曹判書)에 초탁되었는데, 소장을 올려 사양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이보다 앞서 윤 상국(尹相國) 지완(趾完)이 병으로 자리에서 물러나면서 소장을 남겨 선생을 의지하여 쓸 만하다고 극찬하였다. 이 때문에 이러한 명이 있게 되었다. 선생은 소장을 올려 사양하였는데, 그 대략에, “삼가 들으니, 대신(大臣 윤지완)이 질병을 이유로 소명(召命)을 사양하면서 그때마다 신을 천거하여 전하의 귀를 어지럽혔다고 하였습니다. 대신이 신에 대해 일컬은 내용이 신의 실정과 근사하지 않아 원근이 비웃음거리로 삼고 있으니, 사람들이 신을 어떻게 생각하겠습니까. 삼가 상상컨대, 성명께서도 이미 대신의 말이 허탄하여 만분의 일도 방불한 점이 없다는 사실을 아셨을 것입니다. 다만 평소에 대신을 융숭히 예우하였기 때문에 짐짓 그 뜻을 위로하고자 이 작명(爵命)을 신에게 가벼이 내리신 것일 것입니다.” 하였다. 또 이르기를, “대신의 병세가 만약 억지로라도 나올 수 있는 상태였다면 대신의 충성으로 볼 때 어찌 저토록 소명을 굳게 사양하였겠습니까. 만약 억지로라도 나올 수 없는 상태였다면 일찍이 그 자신을 스스로 슬퍼했던 마음으로 신의 정상을 슬프게 여기지 않았단 말입니까.……” 하였다. 혹 “그 내용이 대신을 고려하지 않았다.” 하는 이도 있었는데, 선생이 이를 듣고 웃으며 말하기를, “저이의 말이 정말이지 실정에 가깝지 않으니, 내 어찌 우물쭈물 의례적으로 사양하다가 태연히 이를 받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병자(1696) 숙종 22년 선생 68세
○ 10월에 조정에서 재차 주급(周給)하라는 명을 내렸다.
○ 11월에 군직(軍職)으로 홍문관 제학(弘文館提學)을 겸대하였는데, 소장을 올려 사양하였다. 12월에 상한(傷寒)을 앓아 병이 위독해졌다.
이 뒤로 6, 7년 동안 누차 중병을 앓아 기력과 정신이 점점 예전보다 못해졌다.
○ 유서(遺書)로 자손을 경계하였다.
유계(遺戒)에, 죽은 뒤 상례(喪禮)와 제례(祭禮)의 절목은 절약을 위주로 할 것을 가장 먼저 말하였으며, 글을 읽고 학문을 하는 방도는 충신(忠信)을 근본으로 할 것을 그다음으로 언급하였으며, 형제간에 친애하는 도리는 부인의 말을 듣지 않음을 우선으로 할 것을 마지막으로 언급하였다.
그 상례와 제례에 대한 조목의 대략에, “사람이 죽었는데 3년 동안 상식(上食)하는 것은 예(禮)가 아니니, 고례(古禮)엔 이러한 예가 없다. 일찍이 듣건대, 선배 가운데 예를 좋아하는 집안이 이 일이 온당치 못하다는 사실을 깊이 깨달아 고례를 따른 이가 역시 한둘 있었다고 하니, 지금 유독 택할 바를 알지 못하겠느냐. 장례를 치르고 졸곡(卒哭)을 하고 나면 정설(正設)하는 제전(祭奠)을 물리는 법이니, 그렇다면 하실(下室)의 궤식(饋食)만 유독 어떻게 그대로 보존하여 3년씩이나 오래도록 올릴 수 있단 말이냐. 무릇 상례는 안장하기 전에는 살아 있을 때와 똑같이 대하고 안장한 뒤에는 죽은 것으로 대하는 법이다. 이것이 성현이 법을 설치하여 사생(死生)의 대변(大變)을 극진히 하여 어지러운 데 이르지 않도록 한 이유이니, 지금 이를 어지럽혀서야 되겠느냐. 훗날 내가 죽은 뒤 너희들은 의당 내 말을 깊이 생각하여 분분한 의론에 미혹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저 분분하게 떠드는 자들은 정말이지 응당 크게 괴이한 일로 여길 터이나, 고례가 이미 명백한 데다 내 뜻이 평소에 정해졌으니, 너희들은 비록 이 때문에 뭇사람들에게 죄를 얻더라도 경솔하게 내 훈계를 저버려서는 안 될 것이다. 만약 그렇게 하지 못하면 이는 나를 무시하는 것이니, 아무리 제사를 지낸다 하더라도 무슨 이로움이 있겠느냐. 내가 그런데도 귀신이 되어 너희가 주는 밥을 흠향하리라 여기느냐. 졸곡을 하면 제전을 물리고 상식도 함께 정지할 것이며, 오직 삭망(朔望)에만 은전(殷奠)을 진설하여 고례를 회복하도록 해라.” 하였다.

정축(1697) 숙종 23년 선생 69세
○ 1월에 의정부 우참찬(議政府右參贊)에 제수되고, 3월에 사헌부 대사헌(司憲府大司憲)에 제수되었으며, 4월에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에 제수되고, 5월에 우참찬으로 이차되었으며, 9월에 공조판서 겸 지경연사(工曹判書兼知經筵事)에 제수되었는데, 모두 나아가지 않았다.

무인(1698) 숙종 24년 선생 70세
○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
○ 2월에 대사헌에 제수되고, 8월에 판윤에 제수되었으며, 9월에 좌참찬에 제수되었다가 도로 대사헌으로 이차되었는데, 모두 나아가지 않았다.

기묘(1699) 숙종 25년 선생 71세
○ 5월에 숭정대부의 품계에 가자(加資)되었는데, 소장을 올려 사양하였으나 허락하지 아니하였다.
연신(筵臣)이 아무의 나이가 만 70인데 아들 태유와 태보가 모두 시종신(侍從臣)을 지낸 데다가 염퇴(恬退)하는 지절(志節)이 있다고 탑전(榻前)에서 아뢰어 마침내 이 명이 있게 되었다. 선생이 소장을 올려 사양하였는데, 그 대략에, “신이 이러한 은수(恩數)를 얻게 된 이유 중의 하나는 신의 죽은 두 자식이 시종신을 지낸 데 대한 은정을 베풀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관례에 따라 일률적으로 함께 거론되었다고는 하지만, 공조(公朝)의 사체(事體)에 있어서는 지나치게 널리까지 적용하는 잘못을 면치 못하게 되고, 개인적으로 보잘것없는 신의 심정에 있어서는 끝없이 되짚어 보게 되는 아픔만 더하게 되니, 공사(公私) 간에 모두 극진히 하는 의리가 아닐 듯합니다. 또 다른 이유는 신에게 염퇴하는 지절이 있다는 것입니다. 신의 반평생이 이렇듯 그럴싸한 자취에 의지하여 세상을 속이고 상을 기망하여 남달리 우악한 은혜를 입게 된 것이 이전에도 벌써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설령 신이 이런 이유로 여론에 추대를 받게 된 것이 다 진실이고 허망한 것이 아니라 하더라도 좌우 신하들이 이렇듯 번독하게 진언해서는 안 되며, 장려하고 허여하는 융성한 성지(聖旨)도 이렇듯 가볍게 내려져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하였다.
두 번째 소장에 “국가의 전장(典章)에 노인에게 가질(加秩)하는 경우 대부분 낮은 관직에 관계되고 재신(宰臣)의 반열에 미치는 일은 드물었으니, 그 의도가 따로 있다 하겠습니다. 황명(皇明)의 법례(法例)에, 자식 때문에 추은(推恩)하는 경우 벼슬이 없는 사람에게만 하되, 자식의 관함(官銜)을 빌려 줄 뿐 다시 따로 관직을 주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니 또 어찌 자제(子弟)의 관품(官品)이 오히려 낮은데 청근(淸近)의 직임인 시종(侍從)을 지냈다는 이유만으로 지위가 높은 부형에게 추은해서 가질해 준 경우가 있겠습니까. 사리와 국체에 있어서 이보다 심하게 도치된 경우는 없습니다. 이른바 벼슬을 사양하고 물러나는 절개가 있다는 것은 스스로 돌아보건대 신 자신은 본래 거기에 해당하는 사람이 아니니, 사람들이 이러한 명분을 신에게 더해 주어서는 안 되고 신 또한 감히 버젓이 차지해서는 안 됩니다. 이와 같고 보면 위에서 제시한 몇 가지 단서 중에 신에게는 주제넘게 차지할 만한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하였다. 선생은 스스로 이번의 초자(超資)가 근거할 만한 의리가 없다고 하여 더욱 불안하게 여겼다. 이 때문에 고사(固辭)하였는데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 5월에 예조 판서(禮曹判書)에 제수되고, 9월에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에 제수되었는데, 모두 나아가지 않았다.
선생이 이미 품계가 1품이므로 충숙공(忠肅公 박정(朴炡))을 전례대로 응당 추은하여 가증(加贈)해야 한다고 자제들이 청하였는데, 선생이 허락하지 않고 말하기를, “선자(先子)께서는 이미 공훈으로 증작(贈爵)되셨으니, 어떻게 나의 노직(老職) 때문에 또다시 작질을 가증하여 조정에서 공적을 기록해 준 광영을 가려서야 되겠느냐.” 하였다.

경진(1700) 숙종 26년 선생 72세
○ 6월에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에 제수되고, 8월에 이조 판서(吏曹判書)에 제수되었는데, 모두 나아가지 않았다.
이조 판서가 되자 사직소(辭職疏)를 여섯 번이나 올려 체직되었다.

신사(1701) 숙종 27년 선생 73세
○ 8월에 지중추부사에 제수되었는데, 나아가지 않았다. 9월에, 중궁(中宮)이 승하했을 때 궐하에 달려가 곡하지 못하였다는 이유로 소장을 진달하여 자핵(自劾)하였는데, 대죄(待罪)하지 말라고 명하였다.
8월에 인현왕후(仁顯王后)가 승하하였는데, 그 당시 선생은 병이 몹시 위독하여 궐외(闕外)의 곡반(哭班)에 나가지 못하고 병든 몸을 이끌고 본주(本州)로 나아가 성복(成服)하고 돌아왔다. 대신(臺臣)이 정 판서(鄭判書) 재희(載禧)가 도성 밖에 있으면서 달려오지 않았다는 이유로 논핵하여 파직시키자, 선생이 이르기를, “저 사람의 나이의 많고 적음과 거처의 멀고 가까운 정도가 나와 크게 다르지 않은데, 한 사람은 논죄하고 한 사람은 논죄하지 않으니, 요행히 죄를 면해서는 안 된다.” 하고, 소장을 올려 스스로 논열하였다.
○ 12월에 셋째 며느리 이씨(李氏)를 곡하였다.

임오(1702) 숙종 28년 선생 74세
○ 12월에 백헌(白軒) 이 상국(李相國 이경석(李景奭))의 비문을 찬하였다.
백헌이 일찌감치 경상(卿相)의 자리에 올랐는데, 당시 회천(懷川) 송상(宋相 송시열(宋時烈))은 아직 크게 명망이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서로 추천하며 흠모한 것이 유달리 깊었었다. 그러다가 송상의 명성과 지위가 높아지고 나서는 백헌과 조금씩 틈이 생겨 장수를 축하하는 글에 은어(隱語)로 기롱하였는데, 백헌 상국의 집안에서는 이를 미처 깨닫지 못하였다. 그 뒤 백헌이 차자를 올려 논사(論事)하자, 송상은 거기에 자신을 지척(指斥)한 것이 있다고 의심하였다. 이에 소장을 진달하여 스스로 변호하였는데, 백헌이 일찍이 삼전도(三田渡)의 비문(碑文)을 지은 일을 거론하여 손적(孫覿)에 비견하기까지 하면서 몹시 비난하고 모욕하니, 당시의 제공들이 모두 일찍이 높이고 흠모하던 이를 무단히 능욕하는 것에 대해 경악하지 않은 이가 없었다. 선생은 입조(立朝)할 때부터 이미 송상의 사람됨을 미워하였는데, 백헌의 후손이 비문을 부탁하자 선생은 사실대로 정직하게 썼으며 사의(辭義)가 엄준하였다. 그 비의 서(序)에 이르기를, “《서경》에 이르기를, ‘노성한 사람을 업신여기지 말라.’ 하였으니……” 하였으며, 명(銘)에 운운하였다. - 원집에 보인다. - 그런데 비문을 미처 탈고하기도 전에 그 내용을 시론(時論)에 부화(附和)하고 송상에게 아당(阿黨)하는 자들에게 전한 자가 있어 이에 뭇사람들의 노여움이 물 끓듯 일어나 끝내 이듬해의 화가 있게 되었다.
○ 토혈증(吐血症)이 있어 병석에 누웠다.
백헌의 비문을 짓자마자 병이 위중해졌다. 이것이 마지막 작품이다.

계미(1703) 숙종 29년 선생 75세

1월부터 병세가 조금 진정되었는데 원기가 다한 나머지 다시 일어나지 못하였다.
○ 4월에 관학 유생(館學儒生)들이 소장을 올려 비난하는 일을 당하여 일이 해조(該曹)에 회부되었다.
시의(時議)에 투합하는 유생들이 선생이 백헌의 비문을 지으면서 엄하게 회천을 지척하였기 때문에 소장을 진달하여 죄를 청하자는 의론을 하였는데, 원문(原文)을 입수하지 못하여 즉시 발론하지 못하였다. 그러자 획책하는 자가 있어 말하기를, “원문을 이미 입수할 수도 없고, 비록 입수하더라도 이 한 가지 일만으로는 임금을 경동시키기에 부족하다. 아무개가 일찍이 《사서집주(四書集註)》를 논변하였으니, 주자(朱子)의 장구(章句)를 개역한 일을 가지고 죄를 삼으면 증거를 잡아 말을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였다. 그런데 당시 무리들 가운데 조금 면식이 있는 이가 있어 화응하지 않았기 때문에 상소에 대한 의론이 점차 수그러들었다.
고(故) 상신 김수항(金壽恒)의 아들 창흡(昌翕)이 방외(方外)에 자취를 감추고 있으면서 조정의 일이 자기 마음에 흡족하지 않은 것이 있으면 번번이 편지를 보내 재추(宰樞)를 비난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또 선생의 문인 이덕수(李德壽)에게 장문의 편지를 보내 추악하게 선생을 비난하면서 “선생이 주자를 능멸하려고 했기 때문에 주자를 존봉(尊奉)하는 사람을 공격하였다.” 하였으니, 뜻이 몹시 음험하고 말이 몹시 패악하였다. 백헌은 곧 그의 선친 김수항이 존모하고 추중한 분인데 모욕의 말이 백헌에까지 미쳤다. 이어 제 스스로 그 편지를 호오(好惡)를 같이하는 자들에게 퍼뜨리니, 호오를 같이하는 자들이 대부분 요로(要路)에 있었으므로 이들이 유생들을 부추긴 나머지 다시 상소에 대한 의론이 일어났다. 김창협(金昌協)은 곧 창흡의 형으로 당시의 명망을 입고 있었는데 평소부터 선생을 시기하여 암암리 그 일을 주관하였으며, 김진규(金鎭圭)와 정호(鄭澔)가 조정에서 화응하여 주워들은 《사변록》의 문자를 가지고 자구(字句)를 바꾸기도 하고 없는 말을 꾸미기도 하면서 서로 더불어 소장을 구성하되, 성현(聖賢)을 모독하고 정인(正人)을 모욕한다고 지목하여 그 사람을 죄주고 그 책을 태우기를 청하였다. 양김(兩金)은 또 그 자제와 문도 및 인척의 후생들까지 모조리 보내어 그 소장에 참여시켰는데, 소장이 들어가자 상이 해조로 하여금 품처(稟處)하게 하였다.
○ 해조의 복계(覆啓)로 인하여 삭탈관작(削奪官爵)하고 문외출송(門外黜送)하도록 명하였으며, 선생은 성 밖으로 나아가 대죄(待罪)하였다.
그 당시 김진귀(金鎭龜)가 종백(宗伯)이었는데, 회계(回啓)에서 박모(朴某) 및 이경석의 후손으로 하여금 고친 주설(註說)과 비문을 정납(呈納)하도록 한 다음 다시 논처(論處)하기를 청하였다. 이에 즉시 양주(楊州)로 관문(關文)을 보내 책자를 찾아 정납하도록 하였는데, 기백(畿伯) 윤세기(尹世紀)가 본주로 공문을 보내면서 공갈을 치고 독촉을 하기를 성화(星火)보다 급하게 하였다. 책자를 정납하자, 예조가 재계(再啓)하기를, “의당 밝게 분변하고 엄하게 물리쳐야 할 것이니, 청컨대 유신(儒臣)으로 하여금 단락마다 그 주설을 변론하여 논파하도록 하고, 비문 또한 주설을 변론하여 논파하기를 기다렸다가 함께 수화(水火) 속에 던져 버리도록 하소서.” 하였다.
선생의 문인 수찬(修撰) 이탄(李坦)과 진사(進士) 이익명(李翼明) 등이 서로 이어 소장을 진달하여 말하기를, “이 무리들이 노여워하는 까닭은 단지 비문 가운데 몇 마디 말 때문일 뿐인데, 이는 신의 스승이 평소부터 지닌 견해가 본래 이와 같아서 비문을 지을 때 굽히거나 피하지 않고 사실대로 기록한 것이니, 어찌 거기에 사적인 호오(好惡)가 있었겠습니까. 경전을 변론한 것으로 말하면 개인적으로 차록(箚錄)하는 일은 전인들이 이미 행한 바인데, 지금 이 《사변록》을 엄하게 문제 삼아 저 비문에 대한 분을 풀려 하고 있습니다.” 하면서 선정신(先正臣)이 경전을 다르게 주해한 설을 일일이 거론하며 말을 하였다. 그런데 김만채(金萬埰)가 그 당시 후사(喉司 승정원)에 있으면서 그 소장을 저지하고 자신이 먼저 논척(論斥)하는 바람에 문생들의 소장이 들어갔을 때 모두 살펴보지도 않고 예조의 재계에 대해 모두 그대로 시행하라고 판부(判付)하였는데, 사지(辭旨)가 몹시 엄하였다. 이어 우선 삭출(削黜)하도록 명하였는데, 대간이 계속해서 죄를 더하라고 청하였다.
그 당시 선생은 병으로 정황을 살피지 못하다가 대계(臺啓)가 있다는 소식을 듣고 말하기를, “비록 아프지만 내 집에 편안히 누워 있을 수 없다.” 하고, 마침내 죄수복(罪囚服)을 갖추게 한 다음 동문 밖으로 나아가 명을 기다렸다.
김만채의 아비 익훈(益勳)이 일찍이 선생의 큰아들 지평군에게 멀리 귀양 보내라는 논핵을 당하였으며, 진귀(鎭龜)와 진규(鎭圭) 또한 익훈의 종손(從孫)으로, 이때에 이르러 기회를 타고 온갖 짓을 다하며 마음껏 한을 풀었다. 윤세기 역시 선대의 혐의가 있었다.
○ 멀리 귀양 보내라는 대계(臺啓)의 청을 윤허하여 옥과(玉果)에 유배하도록 하였다.
집의(執義) 유명홍(兪命弘)과 장령(掌令) 박견선(朴見善), 지평(持平) 김재(金栽)가 논핵하여 멀리 귀양 보내라고 청하였는데, 두 번 아뢰자 윤허하였다. 김진귀가 그 당시 또 판금오(判金吾)였는데, 좌이(佐貳) 가운데 호남(湖南)의 살기 좋은 곳에다 배소(配所)를 택하려고 하는 자가 있자 진귀는 고의로 그 뜻과 반대로 하여 관서(關西)로 정했다가 뒤에 마침내 옥과로 정하였다. 옥과는 비록 호남에 있긴 하지만 본래부터 살기 나쁜 곳으로 일컬어졌기 때문에 굳이 선생을 사지(死地)에다 두려고 한 것이었다.
○ 판윤(判尹) 이인엽(李寅燁)의 상소로 인해 멀리 귀양 보내라는 명을 거두어들였다.
선생이 병든 몸을 이끌고 배소로 가려고 할 때, 판윤 이인엽이 소장을 올려 이르기를, “아무개의 《사변록》은 판부(判付)에서 하교한 내용으로 살펴보건대, 참람되고 망녕된 잘못을 면하기 어렵습니다만 유배까지 보내는 것은 끝내 과당한 점이 있습니다. 아무개는 금년에 75세입니다. 거듭 기질(奇疾)을 앓아 호흡이 가물가물하여 조만간 숨이 끊어지게 될 것인데, 지금 만약 황량한 변방에 배소를 정하고 빡빡한 일정으로 다그친다면 필시 길에서 죽게 될 것입니다. 그 실낱 같은 목숨을 특별히 용서해 주어 방 안에서 목숨을 마치게 한다면 어찌 성상의 인후한 덕에 빛이 나지 않겠습니까. 아무개는 산림으로 물러나 있은 지 이미 40년이 되었습니다. 고상한 기풍과 엄준한 절조로 진세(塵世)를 떠나 홀로 지내면서 쇠락한 풍속을 진작시켜 성조(聖朝)의 포숭(褒崇)을 받고 일세(一世)의 추중을 받았는데, 한갓 상자 속의 사사로운 기록 때문에 느닷없이 영해(嶺海)의 먼 유배지로 가게 되었으니, 이는 실로 성조에 기대하는 바가 아닙니다. 게다가 아무개는 아들 둘을 모두 잃고 쓸쓸히 홀로 세상에 살고 있으며, 태보(泰輔)가 수립한 것이 저처럼 우뚝합니다. 전(傳)에 이르기를 ‘자문(子文)의 후손은 10대까지 용서할 것이다.’ 하였습니다. 백성에게 공이 있으면 자손에게 죄과가 있다 하더라도 오히려 너그럽게 용서하는데, 이제 태보의 충절로 그 아비를 보존할 수 없다면 그 민망하고 측은함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비답(批答)하기를, “아무개의 죄는 의당 먼 곳으로 내쳐야 하겠지만, 상소의 내용 가운데 거듭 기질을 얻어 장차 도로에서 죽을 것이라는 등의 말을 살펴보건대, 이는 마땅히 염려할 만하다. 우선 멀리 귀양 보내라는 명을 거두기는 하겠다만, 아무개가 사문(斯文)에 죄를 얻었는데 경(卿)은 이렇게까지 추중하고 허여하니, 참으로 이상하다.” 하였다.
○ 5월에 석천으로 돌아왔다.
대간이 복계(復啓)하여 멀리 귀양 보내는 것을 거두어들이라는 명을 거두기를 청하였는데, 오랜 뒤에야 마침내 정지되어 선생이 비로소 본가로 돌아갔다.
○ 8월 21일 갑오에 정침(正寢)에서 역책(易簀)하였다.
가을에 이르러 병이 마침내 위독해졌다. 임종하던 날에 좌우 사람들에게 이르기를, “내 응당 죽을 터인데, 왜 자리를 마련하여 기다리지 않느냐?” 하고는, 마침내 부축을 받아 청사(廳事)로 나가 졸하였다. 22일에 소렴(小斂)을 하였으며, 23일에 대렴(大斂)을 하고 입관(入棺)하였다. 유교(遺敎)를 따라 염습하는 옷과 이불에 비단을 사용하지 않았다.
○ 10월 25일 정유에 석천의 북쪽 산등성이 을좌신향(乙坐辛向)의 언덕에 안장하였다.
남 부인(南夫人)과 정 부인(鄭夫人)이 이미 이 언덕에 안장되어 있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두 묘 사이를 열고 조금 위쪽으로 물려 세 혈(穴)을 만든 다음 합봉(合封)하여 하나의 봉분으로 만들었으니, 치명(治命)을 따른 것이다. 가마(加麻)하고 회장(會葬)한 문인(門人)이 50여 명이었다. 졸곡을 한 뒤 조석상식(朝夕上食)을 중지하였으니, 이 역시 치명을 따른 것이다.
○ 숙종 32년 병술(1706) 8월에 대신(大臣)과 중신(重臣)의 진달로 인하여 선생의 관작을 회복하도록 명하였으며, 이어 사제(賜祭)하였다.

문인 가선대부(嘉善大夫) 함경도 관찰사 이탄(李坦)은 찬하노라.

[주D-001]아양(峨洋)의 귀 : 아양은 백아(伯牙)가 연주한 〈고산유수곡(高山流水曲)〉을 이르고, 귀는 이를 잘 알아들은 종자기(鍾子期)를 말한다. 옛날 백아가 마음속에 ‘높은 산〔高山〕’을 두고 거문고를 타면 종자기가 이를 알아듣고 감탄하기를, “높고 높음이 태산과 같다.〔峨峨兮若泰山〕” 하였으며, 백아가 마음속에 ‘흐르는 물〔流水〕’을 두고 거문고를 타면 종자기가 이를 알아듣고 감탄하기를, “너르고 너름이 강하와 같다.〔洋洋兮若江河〕” 하였다. 이를 ‘지음(知音)’이라 하여 친구 간에 서로 상대의 포부나 경륜을 알아줌을 비유하게 되었다. 《列子 湯問》
[주D-002]판여(板輿) : 노인용 가마를 뜻하는데, 주로 지방관으로 늙은 부모를 효성으로 모시는 것을 비유한다. 진(晉)나라 반악(潘岳)의 〈한거부(閑居賦)〉에 “태부인을 판여에 모시고 가벼운 수레에 오르시게 한 뒤 멀리 궁성을 유람하고 가까이 집안 뜨락을 소요하게 해 드린다.〔太夫人乃御板輿 升輕軒 遠覽王畿 近周家園〕”라는 구절이 있다.
[주D-003]흡곡(歙谷) 임소(任所) : 그 당시 박세견(朴世堅)이 흡곡 현령(歙谷縣令)으로 있었다.
[주D-004]제□명(第□名) : 원문에 한 칸이 비어 있다.
[주D-005]병정(丙丁)의 호란(胡亂) : 1636년(인조14) 청(淸)의 침입으로 일어난 병자호란을 가리킨다. 병자년에 시작하여 이듬해 정축년에 끝났으므로 이와 같이 일컬은 것이다.
[주D-006]곡구(谷口) : 지명(地名)으로 은자가 사는 곳을 뜻한다. 서한(西漢)의 정박(鄭璞)은 자가 자진(子眞)인데, 성제(成帝) 때에 외척 대신(外戚大臣) 왕봉(王鳳)이 예의를 다해 초빙해도 응하지 않고 곡구에서 살면서 호를 곡구자진(谷口子眞)이라고 하였다. 《漢書 卷72 高士傳中》
[주D-007]열객(熱客) : 더위를 무릅쓰고 염치없이 남의 집에 손으로 가는 사람을 말한다. 진(晉)나라 때 정효(程曉)의 시 〈조열객(嘲熱客)〉에, “지금 삿갓 쓴 사람이, 더위를 무릅쓰고 남의 집을 찾아가니, 주인이 손님 왔다는 말을 듣고는, 이맛살 찡그리며 이 일을 어찌할꼬 하네.〔只今褦襶子 觸熱到人家 主人聞客來 嚬蹙奈此何〕”라고 한 데서 온 말로, 전하여 권세에 아부하는 사람을 가리킨다.
[주D-008]화란(和鸞) : 화와 란은 모두 제후의 수레에 다는 방울로, 식(軾)에 있는 것을 화라고 하고 재갈에 있는 것을 란이라 한다.
[주D-009]관병(觀兵) : 군사의 위세를 검열하는 것이다.
[주D-010]내가 …… 같다 : 공자(孔子)의 말로, 《논어(論語)》 〈팔일(八佾)〉에 보인다.
[주D-011]훗날 …… 가득하리라 : 도연명(陶淵明)의 〈귀거래사(歸去來辭)〉에, “세 오솔길은 황폐해졌으나 소나무와 국화는 그대로 남아 있다.〔三徑就荒 松菊猶存〕”라고 하였는데, 이를 원용하였다.
[주D-012]급류(急流) …… 물러나 : 송(宋)나라 때 한 도승(道僧)이 진단(陳摶)에게 전약수(錢若水)의 사람됨을 말하기를, “그는 급류 속에서 용감히 물러날 수 있는 사람이다.〔是急流中勇退人也〕”라고 했었는데, 뒤에 과연 전약수는 벼슬이 추밀 부사(樞密副使)에 이르렀을 때 40세도 채 안 된 나이로 용감하게 관직에서 물러났다. 이로 인해 관로(官路)가 한창 트인 때 용감하게 은퇴하는 것을 ‘급류용퇴(急流勇退)’라 일컫는다.
[주D-013]고개를 …… 사람 : 양(梁)나라 때의 고승(高僧) 생공(生公)이 일찍이 호구사(虎丘寺)에서 돌을 모아 놓고 돌을 청중으로 삼아 불경을 강설하였는데, 돌이 모두 마치 그의 설법(說法)을 알아들은 것처럼 머리를 끄떡였다는 고사에서 온 말로, 여기서는 승려 덕장(德藏)을 가리킨다.
[주D-014]한 마디라도 …… 것처럼 : 인물의 진퇴에 애증이 극심하였다는 말이다. 《예기(禮記)》 〈단궁 하(檀弓下)〉에, “지금의 군자는 사람을 쓸 때에는 장차 그를 무릎 위에 올려놓을 것처럼 하고, 사람을 물리칠 때에는 장차 그를 연못에 떨어뜨릴 것처럼 한다.〔今之君子 進人若將加諸膝 退人若將隊諸淵〕” 하였다.
[주D-015]서(徐)ㆍ김(金)의 일 : 서는 서필원(徐必遠), 김은 김시진(金始振)과 김석주(金錫胄)를 말한다. 수찬(修撰) 김만균(金萬均)이 청사(淸使)와의 면대를 기피하자, 대사간 김시진과 헌납 김석주가 탄핵하여 파직시키고, 승지(承旨) 서필원이 또 호란(胡亂)에 화를 입은 사람의 자손들에게 기피하지 못하게 할 것을 주청(奏請)한 일을 가리킨다.
[주D-016]내가 …… 따라 : 《논어》 〈술이(述而)〉에, “부(富)를 만일 구해서 될 수 있다면 말채찍을 잡는 일이라도 내 또한 그것을 하겠다. 그러나 만일 구하여 될 수 없는 것이라면 내가 좋아하는 바를 따르겠다.〔富而可求也 雖執鞭之士 吾亦爲之 如不可求 從吾所好〕” 하였다.
[주D-017]행행(悻悻)하게 …… 아니하여 : 행행은 노여워하는 뜻이다. 《맹자(孟子)》 〈공손추 하(公孫丑下)〉에, “내 어찌 이 소장부(小丈夫)와 같이 군주에게 간하다가 받아 주지 않으면 노하여 행행하게 그 얼굴빛에 노기(怒氣)를 나타내어, 떠나면 하루 종일 갈 수 있는 힘을 다한 뒤에 유숙(留宿)하는 것처럼 하겠는가.〔予豈若是小丈夫然哉 諫於其君而不受則怒 悻悻然見於其面 去則窮日之力而後宿哉〕” 하였다.
[주D-018]천손(天孫) : 직녀성(織女星)의 이칭이다.
[주D-019]산과 …… 달 : 이는 이른바 12장(章) 가운데 하나로, 고대 임금의 상의(上衣)에 그리는 물상(物像)이다. 《서경》 〈익직(益稷)〉에, “내가 옛사람의 상을 관찰하여 해와 달과 성신과 산과 용과 화충을 그림으로 그린다.〔予欲觀古人之象 日月星辰 山龍華蟲 作會〕”라는 구절이 보인다.
[주D-020]영서(靈犀)를 …… 드러났네 : 영서는 영묘(靈妙)한 서각(犀角)으로, 이를 태우면 밝은 빛을 낸다고 한다. 진(晉)나라의 온교(溫嶠)가 여행을 하다가 무창(武昌)의 우저기(牛渚磯)에 당도하였는데, 사람들이 물속에 괴물이 산다고 하였다. 이에 온교가 무소의 뿔에 불을 붙여서 물속을 비추자 물속에 있던 기이한 모습의 괴물들이 모두 모습을 드러냈다고 한다. 《晉書 卷67 溫嶠列傳》 여기서는 임금이 지혜가 밝아 역적의 간사한 실상을 환히 알았음을 뜻한다.
[주D-021]통명전(通明殿) : 옥황(玉皇)의 궁전을 이른다.
[주D-022]홍란(紅鸞)과 …… 나니 : 홍란은 전설 속의 붉은색의 선조(仙鳥)이고, 취봉(翠鳳)은 천자가 타는 푸른 깃으로 장식한 봉황 모양의 수레이다. 여기서는 훌륭한 인물들이 조정에 나와 임금과 함께 정사를 살핌을 비유한 것이다.
[주D-023]현포(玄圃)에서 …… 적성(赤城) : 현포와 적성은 모두 신선이 산다는 전설상의 산이다.
[주D-024]귤 속의 대국 : 옛날에 파공(巴邛) 사람이 자기 귤원(橘園)에 대단히 큰 귤이 있으므로, 이를 이상하게 여겨 쪼개어 보니, 그 귤 속에 수미(鬚眉)가 하얀 두 노인이 서로 마주 앉아 바둑을 두면서 즐겁게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그중 한 노인이 말하기를, “귤 속의 즐거움은 상산(商山)에 뒤지지 않으나 다만 뿌리가 깊지 못하고 꼭지가 튼튼하지 못한 탓으로, 어리석은 사람이 따 내리게 되었다.”라고 했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주D-025]공작이 …… 하리 : 두보(杜甫)의 〈적소행(赤霄行)〉에 “공작은 소에 뿔이 있는 줄 알지 못하고, 목말라 샘물 마시다 소뿔에 받히누나. 푸른 하늘과 선경을 왕래해야 하니, 푸른 꼬리 황금 무늬로 욕을 당하는 것도 피하지 않네.〔孔雀未知牛有角 渴飮寒泉逢觝觸 赤霄玄圃須往來 翠尾金花不辭辱〕”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杜少陵詩集 卷14》
[주D-026]선가(仙家)의 …… 개 : 《신선전(神仙傳)》에 “회남왕(淮南王) 유안(劉安)이 임종할 때 먹고 남은 단약 그릇을 뜰에 놓아두었더니, 닭과 개가 핥아먹고 모두 신선이 되어 하늘로 올라갔으므로, 천상에서 닭이 울고 구름 속에서 개가 짖었다.” 하였다.
[주D-027]이문(移文)을 …… 이르리라 : 남제(南齊) 공치규(孔稚圭)가 지은 〈북산이문(北山移文)〉에 “종산의 신령과 초당의 신령이 역로를 달려 산정에 이문을 새겼다.〔鍾山之英 草堂之靈 馳煙驛路 勒移山庭〕”라고 한 구절이 보인다. 이는 주옹(周顒)이 북산에 은거하다가 뒤에 조명(詔命)에 응하여 해염 영(海鹽令)이 되었는데 나중에 다시 돌아와 숨으려고 하자 공치규는 산령의 뜻을 빌어 이문(移文)하여 못 오게 한 것이다. 이를 원용하여 여기에서는 수락산의 산령이 다시 돌아오지 못하게 막을 것이라고 한 것이다.
[주D-028]첨피기욱(瞻彼淇澚) …… 단락 : 주자(朱子)의 《대학장구(大學章句)》에는 이 두 단락이 ‘지어지선(止於至善)’을 해석한 제3장에 들어 있다.
[주D-029]공묵(恭默) : 공경하고 침묵함을 뜻한다. 《서경》 〈열명 상(說命上)〉에, “나로써 사방을 바로잡게 하시기에, 나는 덕이 선인(先人)과 같지 못할까 두려워 이 때문에 말하지 않고 공경하고 침묵하여 도를 생각하였는데, 꿈에 상제께서 나에게 어진 보필을 내려 주셨으니, 그가 나의 말을 대신할 것이다.〔以台 正于四方 台恐德弗類 玆故弗言 恭默思道 夢帝賚予良弼 其代予言〕”라고 하였다.
[주D-030]애영(哀榮) : 《논어》 〈자장(子張)〉에, “살아 계시면 영광스럽게 여기고, 돌아가시면 슬퍼한다.〔其生也榮 其死也哀〕”라는 구절이 있는데, 여기서는 곧 사후의 영예(榮譽)를 뜻한다.
[주D-031]그 …… 없겠는가 : 《장자》 〈제물론(齊物論)〉에 나오는 말로, 서계는 《남화경주해산보(南華經註解刪補)》에서, “성심은 하늘에 정해진 이치가 있어 나에게 부여된 것이다.〔成心 天有定理 所賦於我者也〕”라고 풀이하였다.
[주D-032]순자(荀子)나 양웅(揚雄) : 순자는 성악설(性惡說)을 주장하였고, 양웅은 선악혼설(善惡混說)을 주장하였다.
[주D-033]숨어 …… 이 : 우중(虞仲) 즉 중옹(仲雍)이나 이일(夷逸) 같은 일민(逸民)을 가리킨다. 《논어(論語)》 〈미자(微子)〉에, 공자가 우중과 이일을 평하기를 “숨어 살면서 말을 함부로 하였으나 몸은 깨끗함에 맞았고, 폐함은 권도(權道)에 맞았다.〔隱居放言 身中淸 廢中權〕”라고 하였다.
[주D-034]양공(梁公)이 …… 마음 : 타향에 있는 자식이 고향의 부모를 그리는 마음을 말한다. 양공은 당(唐)나라 적인걸(狄仁傑)로, 양국공(梁國公)에 봉해졌기 때문에 그렇게 부른 것이다. 그의 부모가 하양(河陽)에 살고 있었는데, 일찍이 병주(竝州)의 법조 참군(法曹參軍)이 되어 태항산(太行山)에 올랐다가 멀리 흰 구름 한 덩이가 떠가는 것을 보고 좌우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우리 부친이 저 구름 아래 계신다.” 하고는 한참을 슬프게 바라보다가 구름이 사라진 뒤에야 자리를 떠났다고 한다. 《新唐書 卷115 狄仁傑列傳》
[주D-035]감정이 있어 : 《세설신어(世說新語)》 〈상서(傷逝)〉에, “왕융(王戎)이 아들을 잃어 산간(山簡)이 조문(弔問)을 갔는데 왕융이 슬픔을 이기지 못하였다. 이에 산간이 말하기를, ‘아이는 품 안의 물건이거늘 어찌하여 이 지경에 이르도록 슬퍼한단 말인가?’ 하니, 왕융이 ‘성인은 일상적인 감정을 잊고 최하의 사람은 감정을 느끼지도 못하니, 감정은 정말이지 우리 같은 사람에게 모이는 것이다.〔聖人忘情 最下不及情 情之所鍾 正在我輩〕’ 하였다.”라고 한 말이 보이는데, 이를 원용하여 자신도 왕융처럼 평범한 사람이라 슬픈 감정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나타냈다.
[주D-036]요화(瑤華)의 변 : 요화는 원래 송(宋)나라 인종(仁宗)의 황후 곽씨(郭氏)가 거처하던 궁전 이름으로, 여이간(呂夷簡)이 황후에게 감정이 있어 폐출(廢黜)시키는 의논을 주장하였는데, 여기서는 인현왕후(仁顯王后)를 폐위시킨 일을 가리킨다.
[주D-037]소거(素車) : 상사(喪事)에 사용하는 백토(白土)를 칠한 흰 수레이다.
[주D-038]반면(反面) : 반면은 자식이 밖에 나갔다가 돌아와 부모에게 돌아왔음을 아뢰는 것으로, 《예기(禮記)》 〈곡례 상(曲禮上)〉에, “자식 된 자는 나갈 때 반드시 고하고 돌아오면 반드시 찾아뵙는다.〔爲人子者 出必告 反必面〕” 하였다.
[주D-039]이치는 …… 다르다 : 《주역(周易)》 〈계사 하(繫辭下)〉에 보이는 말로, “천하가 무엇을 생각하며 무엇을 생각하겠는가. 천하가 돌아감은 같으나 길은 다르며 이치는 하나이나 생각은 백 가지이니, 천하가 무엇을 생각하고 무엇을 생각하겠는가.〔天下何思何慮 天下同歸而殊塗 一致而百慮 天下何思何慮〕” 하였다.
[주D-040]잊고 : 대본에는 ‘妄’으로 되어 있으나, 〈서통설(序通說)〉에 의거하여 ‘忘’으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41]자양(紫陽) : 주자(朱子)의 별호로, 복건성(福建省) 숭안현(崇安縣)에 있을 때 서재를 자양서실(紫陽書室)이라 명명했던 데서 유래한다.
[주D-042]후현(後賢)들 …… 있으랴 : 주자 이후의 학자들이 주자의 설을 아무런 의심 없이 따랐으나, 안회(顔回)와 같이 묵묵히 알고 마음으로 통하여 마치 어리석은 듯한 경지라고는 할 수 없다. 따라서 서계 자신이 《사변록》을 지은 것은 곧 주자를 도운 것이라는 뜻이다. 공자(孔子)가 안회에 대해 “안회는 나를 돕는 자가 아니구나. 나의 말에 대해 기뻐하지 않는 바가 없구나.〔回也 非助我者也 於吾言 無所不說〕” 하였으며, 또 “내가 안회와 더불어 온종일 이야기를 하였으나 내 말을 어기지 않아 어리석은 사람인 듯하더니, 물러간 뒤에 그 사생활을 살펴봄에 충분히 발명(發明)하니, 안회는 어리석지 않구나.〔吾與回言終日 不違如愚 退而省其私 亦足以發 回也不愚〕” 하였다. 《論語 先進, 爲政》
[주D-043]계로(季路)는 …… 있었다오 : 계로는 자로(子路)의 또 다른 자(字)이다. 공자(孔子)가 진(陳)나라에 있을 때 양식이 떨어져 종자(從者)들이 병들어 일어나지 못하자, 자로가 성난 얼굴로 공자를 뵙고, “군자(君子)도 궁할 때가 있습니까?” 하고 물은 일이 있었으며, 위(衛)나라에 있을 때 군주 출공(出公) 첩(輒)이 자기 아버지를 아버지로 여기지 않고 자기의 할아버지를 아버지로 삼아 명분(名分)과 실상(實狀)이 문란하였는데, 자로가 “위나라 군주가 선생님을 기다려 정사를 하려고 하십니다. 선생님께서는 장차 무엇을 우선하시렵니까?” 하니, 공자가 “반드시 명분을 바로잡겠다.” 하였다. 그러자 자로는 “이러하십니다. 선생님의 오활하심이여, 어떻게 바로잡을 수 있겠습니까.〔有是哉 子之迂也 奚其正〕” 하니, 공자가 “비속(鄙俗)하구나, 유(由)여. 군자는 자기가 알지 못하는 것에는 말하지 않고 가만히 있는 것이다.” 하였다. 《論語 衛靈公, 子路》
[주D-044]두어(蠧魚) : 책이나 의복을 갉아먹는 좀이다.
[주D-045]지아죄아(知我罪我)의 뜻 : 자신을 알아주는 것도 《사변록》 때문일 것이며, 자신을 죄주는 것도 《사변록》 때문일 것이라는 말이다. 공자가 주(周)나라 왕실이 어지러워지자 《춘추(春秋)》를 지어 난신적자(亂臣賊子)를 토벌하였는데, 《춘추》는 천자(天子)가 하는 일이므로 공자가 말하기를, “나를 알아주는 것도 오직 《춘추》이며 나를 죄주는 것도 오직 《춘추》이다.〔知我者 其惟春秋乎 罪我者 其惟春秋乎〕” 하였다. 《孟子 滕文公下》
[주D-046]소아(小雅) : 대본에는 ‘大雅’로 되어 있으나, 《시경》을 의거하여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47]하실(下室) : 내당(內堂)으로, 영위(靈位)를 모신 방을 말한다.
[주D-048]3년씩이나 오래도록 : 대본에는 ‘三年之人’으로 되어 있으나, 한국문집총간 186집에 수록된 이덕수(李德壽)의 《서당사재(西堂私載)》 권7 〈서계박선생묘갈명(西溪朴先生墓碣銘)〉에 의거하여 ‘三年之久’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49]장수를 …… 기롱 : 이경석(李景奭)이 궤장(几杖)을 하사받을 적에 송시열(宋時烈)이 서문을 지으면서 “오래 살고 건강하라.” 하였는데, 이 말은 곧 금(金)나라에 항서(降書)를 쓴 손적(孫覿)을 기롱한 ‘수이강지(壽而康之)’를 빗대어 쓴 것이었다.
[주D-050]백헌이 …… 의심하였다 : 1669년(현종10)에 임금이 온천에 가면서 영부사(領府事) 이경석을 유도 대신(留都大臣)으로 삼아 정사(政事)를 맡겼다. 이때 송시열은 판부사(判府事)로서 병이 들어 고향에 내려가 있었는데 행재소에 나가지 않고 전의(全義)에서 임금의 행차를 기다렸다. 이경석이 행재소에 올린 차자에 “행재소에 달려가 문후하는 신하가 없다.”라는 글이 있었는데, 이를 송시열이 자신을 지적한 말이라 의심한 것이다.
[주D-051]백헌이 …… 비견 : 정강(靖康) 2년(1127)에 송 흠종(宋欽宗)이 금나라에 항복했을 때 그들이 요청하는 항복문(降伏文)을 손적(孫覿)이 지었는데, 지나치게 송나라를 비하(卑下)하고 오랑캐에게 아첨했다 하여 주희(朱熹)가 그 일을 기록하여 손적을 나무란 일이 있었다. 병자호란 때 청나라에 인조가 항복하자 이경석이 그 항복문인 삼전도 비문(三田渡碑文)을 찬진(撰進)하였는데, 송시열이 이것을 손적에 비유하여 비난한 것이다. 《朱子大全 卷71 雜著 記孫覿事》 《燃藜室記述 卷26 仁祖朝故事本末》
[주D-052]호오(好惡) : 대본에는 ‘好要’로 되어 있으나, 한국문집총간 169집에 수록된 최석항(崔錫恒)의 《손와유고(損窩遺稿)》 권13 〈숭정대부판중추부사겸지경연사홍문관제학박공시장(崇政大夫判中樞府事兼知經筵事弘文館提學朴公諡狀)〉에 의거하여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53]자문(子文)의 …… 것이다 : 자문은 초(楚)나라의 어진 정승 투누오도(鬪穀於菟)의 자(字)이다. 성왕(成王)을 섬겨 영윤(令尹)이 되었기 때문에 영윤 자문(令尹子文)으로도 불린다. 자문의 손자 잠윤(箴尹) 극황(克黃)이 제(齊)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돌아오다가 송(宋)나라에 이르러 초(楚)나라에 반란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러자 좌우에 있는 사람이 들어가면 멸족의 화를 입게 되니 들어가서는 안 된다고 하니, 극황이 말하기를, “임금의 명령을 버린다면 누가 나를 받아 주겠는가. 임금은 하늘과 같으니, 하늘을 피해 도망할 수 있겠는가.” 하고는, 마침내 돌아가 복명(復命)한 뒤 스스로 구속되기를 청하였다. 그러자 초왕은 자문이 초나라를 다스린 공을 생각하여 “자문에게 후손이 없다면 어떻게 선행(善行)을 권면할 수 있겠는가.” 하고, 그를 용서하고 복관(復官)시켜 주었다. 《春秋左氏傳 宣公4年》 진(晉)나라의 대부 숙향(叔向) 즉 양설힐(羊舌肹)의 동생 양설호(羊舌虎)가 범선자(范宣子)에게 죄를 얻어 죽음을 당하고 숙향도 수금(囚禁)된 일이 있었는데, 이 소식을 들은 기해(祁奚)가 범선자에게 달려가 말하기를, “국가를 위해 계모를 세우되 과오가 적고 사람들에게 교훈을 베풀되 게을리하지 않는 것은 숙향만이 그러할 수 있으니, 국가의 주석(柱石)입니다. 그러니 그 10대 자손이 죄를 지어도 용서하여 유능한 이를 권면함이 마땅한데, 지금 당대에 그 일신조차 사면하지 않고서 국가의 주석을 버리니, 이 또한 미혹된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니, 범선자가 그 말을 듣고 기뻐하여 숙향을 사면시켰다. 《春秋左氏傳 襄公21年》 여기에서는 이 두 가지 일을 원용하여 말한 듯하다.
[주D-054]치명(治命) : 어버이의 유언(遺言)은 치명과 난명(亂命)으로 구분하는데, 치명은 바른 정신이 있어서 사리 판단을 할 수 있을 때에 내린 것이고, 난명은 정신착란 상태에서 내린 것을 말한다. 위(魏)나라의 무자(武子)가 병이 들어 그의 아들 과(顆)에게 명령하기를, “내가 죽으면 내 첩들을 시집보내라.” 하더니, 병이 위독하여서는, “반드시 순장(殉葬)을 해 달라.” 하였다. 무자가 죽자, 과는 시집을 보내며 하는 말이, “병이 심하면 정신이 착란한 것이니, 나는 정신이 온전할 때의 치명을 따르겠다.” 하였다. 《春秋左氏傳 宣公15年》
[주D-055]32년 : 대본에는 ‘三十三年’으로 되어 있으나, 《숙종실록》을 의거하여 바로잡아 번역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