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고향 忠義 고장 宜寧/조선왕조실록 의령기록2

호음 정사용 선생은 의춘 정진에 살았다 라는 기사

아베베1 2013. 10. 7. 02:00

 

기언 제18권 원집 중편
 구묘문(丘墓文)
호음(湖陰)의 천장 음기(遷葬陰記)



우리나라의 문학이 융성하다는 것은 예부터 기록된 것이다. 설자(說者)가 말하기를,
“국초(國初)의 모든 저작은 옛것을 약간 변화시켜서 아담하고 화려하게 하였다. 신라 때부터 천 수백 년을 내려오는 동안에 재주가 뛰어난 최 학사(崔學士 최치원(崔致遠))ㆍ이 상국(李相國)ㆍ이목은(李牧隱)ㆍ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 같은 분들의 작품은 당송(唐宋)의 문장과 겨룰 만한데, 그중에도 이 상국이 가장 재주가 많았다.”
한다. 우리 중종(中宗)ㆍ명종(明宗) 이후로 시를 가지고 이름난 분이 백여 년 동안에 또한 많았는데, 호음(湖陰)의 시가 후세에 특히 일컬어진 것은 무엇 때문일까? 그 서문에 이르기를,
“그는 남보다 뛰어난 천재로 어려서부터 글을 읽을 줄 알아서 매일 수천 언을 기록하였다. 문장이 일찍이 성취되어 온 세상에 드러나게 되었다.”
하였고, 오 태사(吳太史)는 일컫기를,
“산수며 동물이며 식물이며 변태(變態)며 호흡이며 음률이며 요속(謠俗) 같은 것들을 한결같이 읊조리는 데에 붙였다. 풍(風)에 능하였으며, 시가 온후하고 화평하여 기괴하지만 잔재주를 부리지 않았다. 그래서 중국 사신과 수창(酬唱)한 작품이 천하에 크게 전한다.”
하였다. 지금 호음의 시로 세상에 행하는 것이 수천 편이다. 호음 당시에 재학(才學)이 많기로 일컬어지던 어숙권(魚叔權)ㆍ이붕상(李鵬翔)ㆍ임기(林芑)ㆍ노서린(盧瑞麟)ㆍ권응인(權應仁) 같은 선비들이 모두 호음의 문하에서 나와 그때에 울린 명성이 지금까지 전한다.
공은 휘가 사룡(士龍), 자가 운경(雲卿), 성이 정씨(鄭氏)이며, 호음(湖陰)은 그의 별호이다. 지금도 호음의 옛집이 의춘현(宜春縣) 정호(鼎湖) 가에 있다. 세조 때 명신 동래군(東萊君) 정난종(鄭蘭宗)의 손자요, 창원 도호(昌原都護) 정광보(鄭光輔)의 아들이며, 중종 때 정승 정광필(鄭光弼)의 종자(從子)이다. 홍치(弘治) 7년 갑인(1494, 성종25)에 출생하여 16세에 상사(上舍)에 오르고 19세에 박사과(博士科)에 뽑혔으며, 이어 문과(文科)에 장원하여 높은 벼슬로 네 왕조(중종ㆍ인종ㆍ명종ㆍ선조)를 섬기다가 선조 6년 계유(1573)에 이르러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로 세상을 마치니, 나이는 80세이다. 분묘는 양주(楊州)에 있다.
지금 3세손 정지문(鄭之問)이 곽박(郭璞)이순풍(李淳風)의 풍수설(風水說)에 통하여 그의 말대로 장사를 지내면, 자손들의 빈부(貧富)ㆍ궁달(窮達)ㆍ화복(禍福)ㆍ수요(壽夭)가 털끝만큼도 어긋나지 않았다. 그가 일찍이 영평(永平)의 용화길(龍化吉)에 장지를 잡아 두었다가 하루아침에 3대(代)의 묘소를 다 이장하니, 공의 묘소는 80여 년 만에 개장하게 된 것이라 한다.


 

[주D-001]곽박(郭璞) : 동진(東晉) 때 복술가(卜術家)로, 음양(陰陽)ㆍ오행(五行)ㆍ역산(曆算)에 능했다. 《晉書 卷72 郭璞列傳》
[주D-002]이순풍(李淳風) : 당(唐) 나라의 풍수가(風水家)로, 저서에 《법상서(法象書)》ㆍ《전장문물지(典章文物志)》ㆍ《기사지(己巳志)》가 있다. 《唐書 卷204 方枝》 《舊唐書 卷79 李淳風列傳》


 

 

 鄭雲卿十翫堂     

             
鼎津流碧玉分條。幾蘸東坡穎水標。雨後莫言泥浩蕩。本源澄澈在秋霄。
右水
靑石纍纍映白沙。有時衝齧聽風波。橫琴夜月增淸韻。不用丁寧擊磬歌。
右石
紅紫千般闔目過。數枝驚謝影橫斜。無端歲暮詩贏橐。苦被梅兄不放衙。
右梅
淇渭殘枝孰借栽。滿軒蒼玉映庭苔。短墻外護牛羊觸。強項寧容雪壓摧。
右竹
一逕寒光小五陵。蒼龍萬鬣綠層層。盤桓鶴影吟成癖。客到門前喚不應。
右松
紫玉莖肥白露滋。金幱梔貌大慈悲。騷人采采霜飛日。細和淵明五字詩。
右菊
曾於造化補玄窠。入草驚蛇不足夸。楊馬祗今同出處。玉堂收橐到天涯。
右筆
雪堂徒自解磨人。不解因渠學處身。知白似能全守黑。老君風韻見眞醇。
右墨
乾坤法器莫宜輕。寶重從今字玉卿。閑課小詩春晝永。手搖花露滴分明。
右硯
莫怨緇塵涅雪皮。儘敎文字黑離離。隨人舒卷猶存道。輕薄爲嘲蓋勿思。
右紙


 용재집 제1권 / 칠언 절구(七言絶句)

정운경(鄭雲卿)의 시에 차운하다. 당시 홍주 목사(洪州牧使)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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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별 후 서신이 드물어 자못 괴이쩍더니 / 別來頗怪信書稀
홀연히 맑은 시편 받고 옷깃을 여미었소 / 忽得淸篇爲整衣
오언 칠언 시들의 천백 가지 뜻이 / 五絶七言千百意
반은 옛날 생각이요 반은 고향 생각일세 / 半因懷舊半思歸

오마의 은광 또한 세상에 드무니 / 五馬恩光世亦稀
지금 와서 하의를 찢은 것 후회 마오 / 只今休悔裂荷衣
구중궁궐 임금을 뵙고 전석하였으니 / 九重宵旰勤前席
좋은 성적 거두고 자급 높아 돌아오리 / 政最行看增秩歸

시주의 풍류 눈에 드는 이 적더니 / 詩酒風流眼底稀
백발의 종적 선비 옷에 부끄러워라 / 白頭蹤迹愧儒衣
도리어 생각노니 풍설 치는 관서 길에서 / 却思風雪關西路
말 타고 높이 시 읊으며 반쯤 취해 돌아왔지 / 倚馬高吟半醉歸

늙으매 상념이 많아 잠이 적으니 / 老抱多端夢寐稀
한밤에 말똥말똥 옷 입은 채 누웠노라 / 中宵耿耿臥連衣
나라 은혜 갚기도 전에 몸 먼저 병드니 / 國恩未報身先病
무슨 수로 노 저어 푸른 물가로 돌아갈꼬 / 滄澤何因一棹歸
중국어(中國語)에, 옷을 벗지 않은 채 자는 것을 연의(連衣)라 한다.

문전에 오는 손님이야 드물건 말건 / 一任門前客到稀
성품 본래 소방하여 의관 차리기 귀찮아라 / 從來疏放懶冠衣
저물녘 남쪽 창에 턱 고이고 앉아 / 南牕抵暮支頤坐
추운 숲으로 돌아가는 지친 새 세어 보노라 / 數盡寒林倦鳥歸
또 절구 한 수를 지어, “취향(醉鄕)을 어찌 얻을 수 있으랴. 고향도 꿈속에서나 돌아갈 뿐일세.”라는 마지막 장(章)의 뜻에 답하다.

드문드문 샛별 스러져 가는데 / 落落晨星看漸稀
옷섶을 적시는 서리는 또 어이할꼬 / 微霜更奈霑人衣
취향이 어찌 고향만큼이야 좋으리요 / 醉鄕何似故鄕好
꿈속에 돌아갈 길 없다 말하지 마오 / 夢裏莫言無路歸
[주-D001] 정운경(鄭雲卿) : 
조선조 문신 정사룡(鄭士龍)의 자가 운경(雲卿)이다. 호는 호음(湖陰)이며 본관은 동래(東萊)이다.
[주-D002] 오마(五馬) : 
다섯 필의 말이 끄는 수레로 태수(太守)의 행차를 뜻한다.
[주-D003] 하의(荷衣)를 찢은 것 : 
하의는 연잎으로 만든 옷으로 은자(隱者)의 옷이니, 하의를 찢는다는 것은 은거하다가 세상에 나옴을 뜻한다. 남북조(南北朝) 공치규(孔稚圭)의 〈북산이문(北山移文)〉에, “마름풀로 만든 옷[芰製]을 불사르고 연잎으로 만든 옷[荷衣]을 태웠다.” 하였다. 《古文眞寶 後集》
[주-D004] 전석(前席) : 
자리를 앞당긴다는 뜻으로 임금과 신하가 의기투합함을 뜻한다. 한(漢)나라 가의(賈誼)가 좌천되어 장사왕(長沙王)의 태부(太傅)로 있다가 일 년 남짓 만에 소명(召命)을 받고 조정으로 돌아오니, 문제(文帝)가 선실(宣室)에 있다가 그에게 귀신의 본원(本源)에 대해 물었다. 이에 가의가 귀신의 유래와 변화 등을 자세히 이야기하다가 한밤에 이르자 문제가 그 이야기에 빠져서 자기도 모르게 자리를 앞으로 당겨 몸이 가의 가까이로 다가왔다고 한다. 《史記 卷84 屈原賈生列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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