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최씨 조선청백리 /평도공 휘 유경 관련

완릉군(完陵君) 최한경(崔漢卿) 후량(後亮) 의 수시(壽詩) 병서

아베베1 2013. 11. 4. 16:19

 

 

 

 

 

 

 

 

최후량(崔後亮)

[생원시] 효종(孝宗) 2년(1651) 신묘(辛卯) 식년시(式年試) [생원] 3등(三等) 12위(42/100)

[인물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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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경(漢卿)
생년 병진(丙辰) 1616년(광해군 8)
합격연령 36세
본관 전주(全州)
거주지 경(京)

[관련정보]

[이력사항]

선발인원 100명
전력 유학(幼學)
생부구존 구경하(具慶下)

[가족사항]

 
[부]
[생부]
[안항:형]
성명 : 최후정(崔後定)

[안항:제]

[안항:서제]
성명 : 최이정(崔以定)    성명 : 최이원(崔以遠)

[출전]  『신묘식년사마방목(辛卯式年司馬榜目)』(국립중앙도서관[古6024-201])

 

 

 
약천집 제2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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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詩)
완릉군(完陵君) 최한경(崔漢卿) 후량(後亮) 의 수시(壽詩) 병서

을축년(1685, 숙종 11) 4월 내가 연경(燕京)에서 돌아올 적에 도중에 들으니, 조정에서는 첨지(僉知) 최 영공(崔令公)의 중자(仲子)인 부제학(副提學) 석정(錫鼎)과 계자(季子)인 정언(正言) 석항(錫恒)이 시종관(侍從官)의 반열에 올랐다 하여 공의 품계를 올려 완릉군(完陵君)에 봉(封)하였는데, 백자(伯子)인 석진(錫晉)이 호중(湖中)의 고을에 부임해 있다가 와서 뵙고는 성상의 은혜를 널리 드러내려고 손님을 초청해서 잔치를 베풀고 축수하는 잔을 올려 조정의 현자들이 다 모이니, 보고 듣는 사람들이 크게 부러워했다고 하였다. 나는 공의 부자간과 종유(從遊)한 지가 실로 오래고 또 매우 친밀하였는데, 성대한 일을 나만 홀로 보지 못하니 서운한 생각이 들었다. 조정으로 돌아온 뒤에 부학군(副學君)이 그날 자리에 있었던 여러 공(公)의 축하시를 나에게 보여주고 뒤따라 화답할 것을 청하였다. 나 또한 잔치 자리에 참여하지 못한 빚을 갚고자 뒤이어 짓는다.

덕을 쌓으니 일찍이 마을 문 높고 / 積德曾高里閈門
은혜를 미루니 대부의 수레 새로 하사하였네 / 推恩新賜大夫軒
잔치 자리에 보배로운 나무 금띠를 붙잡고 / 當筵寶樹扶金帶
축하하는 아름다운 문장 옥술잔을 권하였네 / 獻賀瓊章侑玉樽
이 일이 백 년 동안 몇 번이나 있었는가 / 此事百年能幾有
예로부터 삼달존(三達尊) 겸한 이 드물었다오 / 古來三達罕兼尊
내 성대한 모임에 참여하지 못함 서운해하지 않으니 / 身違盛會無多恨
여러분들이 취한 뒤에 쓰신 글씨 다행히 본다오 / 幸覩群公醉墨痕

[주D-001]보배로운 나무 : 훌륭한 자손을 비유한다. 이는 옛날 진(晉) 나라 사안(謝安)의 집안에 훌륭한 자제가 많았으므로, 사람들이 ‘사씨 집안의 보배로운 나무’라고 칭한 데서 유래한 것이다. 《晉書 卷79 謝安列傳》
[주D-002]삼달존(三達尊) : 누구나 공통적으로 높이는 세 가지로, 연치와 벼슬과 덕망을 이른다. 《맹자(孟子)》 공손추 하(公孫丑下)에, “천하에 공통적으로 높이는 것이 세 가지이니, 연치와 벼슬과 덕이다. 지방에서는 연치가 많은 것이 제일이고, 조정에서는 벼슬이 높은 것이 제일이고, 세상을 돕고 백성을 잘 지도함엔 덕이 제일이다.” 하였다.

 

 
청음집 제13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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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별집(雪窖別集) 118수(一百十八首) ○ 이하는 갑신년(1644, 인조 24)에 심관(瀋館)에 머무르면서 지은 것이다. ○ 오언절구(五言絶句)
수재(秀才) 최후량(崔後亮)이 간직하고 있는 문징명(文徵明)의 그림에 제하다 5수

문형산(文衡山)은 세상에서 삼절(三絶)이라고 칭하는데 이름이 천하에서 으뜸이었다. 평생토록 구차스럽게 영리(榮利)를 구하지 않으면서 초연히 강호(江湖)에 은둔하여 노년을 보냈다. 출처(出處)와 진퇴(進退)가 이와 같았으니 기예(伎藝)는 이에 여사(餘事)였는바 숭상할 만하다.

말 듣건대 무릉도원 그 속에서도 / 聞道桃源裏
신선들이 오는 봄을 금치 못했다네 / 仙家不禁春
고깃배는 본디 아무 뜻 없었건만 / 漁舟本無意
꽃을 심는 사람들만 분망하였네 / 多事種花人

물 위에는 느린 바람 살랑거리고 / 水風徐嫋嫋
푸른 산은 저편 멀어 흐릿하구나 / 山翠遠依依
강남으로 향하여서 가고 싶은데 / 欲向江南去
외로운 돛 언제 펼쳐 돌아가려나 / 孤帆何日歸

강 남쪽엔 농사짓는 노인네 살고 / 江南有野老
강 북쪽엔 약초 캐는 사람이 사네 / 江北有山人
바라봐도 서로 모습 볼 수 없는데 / 相望不相見
강가에 핀 꽃은 괜히 절로 봄이네 / 江花空自春

가을날 해 쓸쓸하게 넘어가는데 / 秋日蕭蕭晩
강 마을엔 오고 가는 인적 드무네 / 江村人跡稀
맑은 술을 이때 아니 마실 수 없어 / 淸尊不可負
낚싯배가 오길 앉아 기다리누나 / 坐待釣船歸

오래된 길 푸른 이끼 속에 묻혔고 / 古逕靑苔沒
성긴 숲엔 붉은 잎새 흩날리누나 / 疎林紅葉飛
신선 사는 집은 어느 곳에 있는가 / 仙家何處在
백운 속에 삽짝 굳게 닫혀 있다네 / 深鎖白雲扉

[주C-001]수재(秀才) …… 제하다 : 최후량(崔後亮 : 1616~1693)은 본관은 전주(全州)이고 자는 한경(漢卿)이며 호는 정수재(靜修齋)인데, 최혜길(崔惠吉)의 아들로 최명길(崔鳴吉)에게 입양되었다. 병자호란 이후 대신의 아들들이 심양에 볼모로 갈 때 잡혀갔다가 1645년에 최명길이 풀려날 때 함께 귀국하였다. 저서로는 《정수재집》이 있다. 문징명(文徵明)은 명(明)나라 사람으로 별호가 형산(衡山)인데 부모가 돌아간 뒤에 다시 과거에 응시하지 않았으며, 조정에서 한림대조(翰林待詔)로 불렀으나 나가지 않고 날마다 한묵(翰墨)으로 소일하였다. 평생 동안 외간 여인을 가까이하지 않았고 성시(城市)에 드나들지 않았으며, 권귀(權貴)한 사람들이 그의 서화(書畵)를 바라면 절대로 주지 않았으나, 민간의 소민(小民)들이 과일과 떡을 가져와서 서화를 얻으려 하면 흔쾌하게 붓을 휘둘러 그려 주었다.

 

 

 
기언 별집 제10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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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발(跋)
형산의 삼절첩(三絶帖)에 대한 발

정유년 여름에 내가 서울에 와서 시직(侍直) 최한경(崔漢卿 최후량(崔後亮)의 자가 한경이요, 호는 정수재(靜修齋))과 서화를 논하였다. 최자(崔子)가 나를 위하여 그가 소장(所藏)하고 있는 고화(古畫)를 꺼내 보여 주어 형산(衡山)의 삼절(三絶 시서화(詩書畫))을 얻어 보게 되었으니, 대개 형산 문징명(文徵明)이 천계(天啓 명 희종(明熹宗)의 연호) 연간에 만든 것이다.
나는 일찍이 고씨(顧氏)의 화보(畫譜)를 얻어서 비로소 형산의 묘한 필체(筆體)를 보았더니 그 시와 글씨와 그림이 모두 기절(奇絶)하여 볼만하였는데, 그 뒤에 난리를 겪고 잃어버린 지가 벌써 수십 년이 되었다. 형산의 그림은 대개 우리나라에 전해진 것이 많지 않아서 다시 얻어볼 수 없는 것을 한탄하고 있었는데, 지금 최자의 집에서 보게 되었다.
최자는 서화를 잘 알아서 절품(絶品)이 아니면 간직하지 않는다. 또 지금 나는 늙고 병이 많아서 세상일을 모두 관계하지 않는데, 하물며 서화를 구하는 일이야 말할 것이 있으랴. 최자를 만나지 못했다면 어디서 이런 것을 얻어 볼 수 있었겠는가.
이것으로 좋은 물건을 얻을 수도 있고 잃을 수도 있는 것을 남몰래 탄식하니, 잠깐 구경하는 것도 또한 운수인가. 대략 느낀 바를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의 오첩시(五帖詩) 아래에 쓴다.

[주D-001]형산(衡山) : 명(明)의 문징명(文徵明)의 호. 초명(初名)은 벽(璧)이요, 자가 징명이니, 자로 행세했다. 시문(詩文)ㆍ서화(書畫)에 모두 능했는데 그림이 더욱 뛰어났다. 죽은 뒤에 사시(私諡)를 정헌 선생(貞獻先生)이라 하였다. 《明史 卷287》

 

서계집 제9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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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명(誌銘) 14수(十四首)
완릉군(完陵君) 최공(崔公) 묘지명


공은 휘는 후량(後亮), 자는 한경(漢卿), 성은 최씨(崔氏)이고 자호는 정수재(靜修齋)이다. 그 선조는 완산(完山) 사람이다. 고려 대에 순작(純爵)은 관작이 상장군(上將軍)이었는데, 그 후손이 끊임없이 이어져 대대로 이름난 사람이 있다. 9대조 유경(有慶)은 국초(國初)에 참찬의정부사(參贊議政府事)였는데, 시호가 평도(平度)이다. 이분이 사강(士康)을 낳으니, 좌찬성으로 시호가 경절(敬節)이다. 고조 휘 업종(嶪終)은 빙고 별제(氷庫別提)이다. 증조 휘 수준(秀俊)은 벼슬하지 않았다. 조부 휘 기남(起南)은 어려서부터 문장과 행실로 저명하였는데, 만년에 급제하여 관각(館閣)의 직책과 의정부의 검상(檢詳)과 사인(舍人)을 역임하였다. 광해군(光海君) 때를 당하여 마지막 벼슬이 통정대부(通政大夫) 영흥 부사(永興府使)이다. 부친은 영의정 완성부원군(完城府院君) 문충공(文忠公) 휘 명길(鳴吉)이다. 본처 장 부인(張夫人)은 옥성부원군(玉城府院君) 만(晩)의 따님인데, 부인에게 아들이 없자 문충공이 아우 이조 참판 혜길(惠吉)의 아들을 취하여 후사로 삼았으니, 공이 이분이다. 공의 모친은 구원(九畹) 이공 춘원(李公春元)의 따님인데, 병진년(1616, 광해군 8) 8월 20일에 공을 낳았다.
3세에 모친을 잃었는데, 9세에 문충공이 장 부인으로 하여금 아들로 삼게 하였다. 12세에 부인이 또 졸하였다.
병자호란이 일어났을 때 공은 겨우 약관(弱冠)을 넘긴 나이였다. 그 당시 문충공이 허 부인(許夫人)을 계실(繼室)로 들였는데, 공이 모친을 모시고 강도(江都)로 피난하였다. 강도가 함락되자 성중(城中)의 사녀(士女) 중에 겁탈을 당한 이들이 많았다. 이에 공이 분연히 달려가 노장(虜將)을 만났는데, 병기를 밀치고 들어가 앞에 서니, 노장이 기이하게 여기고 이유를 물었다. 공이 대답하기를, “듣자 하니, 군중(軍中)에서 이 상국(李相國)과 최 상서(崔尙書) 집안을 침탈하지 못하도록 금령을 내렸다고 하던데, 나는 바로 최 상서의 아들로 특별히 와서 아뢰는 바이다.”라고 하였다. 노장이 어떻게 증명하냐고 묻자, 대답하기를, “나라 사람들에게 증험해 보라.”라고 하였다. 이에 노장이 그 사실을 알아본 다음 최 상서 집안을 보호하도록 명을 내렸는데, 성중 사람들이 이 덕분에 보전한 이들이 많았다. 문충공은 화의(和議)를 주장하였는데 이를 청인(淸人)이 알았으며, 이공 정귀(李公廷龜)는 화이(華夷)에까지 명망이 났다. 이 때문에 이 두 집안을 보전한 것이었다.
인조(仁祖) 20년 임오년(1642) 가을에 청인이 독보(獨步)의 일을 알아내었는데, 이 일로 인해 문충공이 심양(瀋陽)에 구류당하여 화를 예측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에 공이 밤낮으로 가슴을 치다가 역말을 타고 세 차례나 심양으로 달려가 전후의 일을 주선하여 마침내 풀려났다. 그리하여 을유년(1645)에 문충공이 비로소 동쪽으로 돌아왔는데, 어떤 객이 “공의 아들이 어린 서생인데 은연중에 큰 화를 제거하였으니, 그 재주가 이와 같다.”라고 하니, 문충공은 단지 “재주가 성심에서 나왔다.”고만 대답하였다.
정해년(1647) 5월에 이르러 문충공의 상을 당하였는데, 상제(喪祭)가 예를 어김이 없었다. 이전에 공이 심양에 있을 적에 정충(怔忡)과 안질(眼疾)을 앓았는데, 이때에 이르러 더욱 심해졌다.
신묘년(1651, 효종 2)에 병이 조금 나았으며, 생원(生員)에 합격하였다.
효종(孝宗) 갑오년(1654)에 남별전 참봉(南別殿參奉)에 보임되었으나 병 때문에 출사하지 않았다. 다시 사산 감역(四山監役)에 제수되었으나 얼마 못 가서 역시 그만두었다.
50세 이후로 구질(舊疾)이 갈수록 없어져 현종(顯宗) 병오년(1666)에 익위사 시직(翊衛司侍直)에 배수되었다가 서용되어 귀후서 별제(歸厚署別提)에 승진되었으며, 종부시 주부(宗簿寺主簿), 공조 좌랑, 충훈부 도사(忠勳府都事)로 전직되었다.
경술년(1670, 현종 11) 봄에 외직으로 나가 배천 군수(白川郡守)가 되었다. 이해 가을에 대흉이 들어 굶어 죽은 시체가 길에 쌓일 정도였다. 공은 이들을 구제하는 데 마음을 다 쏟아 가옥 50여 칸을 지어 유리걸식하는 백성들을 머물게 한 다음, 읍내의 선량한 사람을 뽑아 그들에게 일을 맡기는 한편, 서리를 신칙하여 간사한 폐단을 없애도록 하였다. 매일 아침마다 몸소 진휼소(賑恤所)로 가서 죽과 미음을 나누어 주었는데, 남녀가 섞여 앉지 못하도록 하고 아픈 사람은 반드시 봉양하도록 하였다. 토착민에게는 식구 수를 계산하여 양식을 공급해 주고 경작을 계속하도록 하였는데, 가을이 되자 크게 풍년이 들어 백성들이 고통에서 벗어났다. 공이 말하기를, “1000명을 살리는 것은 성심이 아니면 불가능하다. 내 감히 이를 소홀히 하겠는가.”라고 하였다. 얼마 뒤에 병으로 사직하였는데, 백성들이 오래도록 사모하여 마지않았다. 부로(父老)들이 서로 더불어 말하기를, “신해년에 생민이 극도로 곤궁하였는데, 그 당시 최 수령이 아니었다면 우리는 씨가 말랐을 것이다. 그대에게 자손이 있는 것은 누구의 은덕인가.”라고 하고, 이어 비석을 세워 덕을 칭송하였다.
금상(今上) 을묘년(1675, 숙종 1)에 사복시 첨정(司僕寺僉正)이 되었는데, 공은 벼슬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으므로 몇 달 만에 병으로 면직하였다. 태복(太僕)은 실속이 있는 자리로 여기에 부임하는 이들은 대부분 오래도록 머물렀는데, 공은 빨리 떠나가니 노리(老吏)들이 기이한 일로 여겼다. 뒤에 또 진산(珍山)과 면천(沔川)에 배수되었으나 모두 부임하지 않고 말하기를, “나는 노쇠한 데다 병까지 많으니, 편안하게 집에 있는 것이 낫다.”라고 하였다.
기미년(1679) 봄에 또 영천 군수(榮川郡守)에 배수되었으나, 역시 내키지 아니하였으므로 마지못해 부임하였다가 1년 만에 또 면직하고 돌아왔다.
경신년(1680)에 역적을 토벌하고 회맹(會盟)을 하였는데, 공은 훈구대신(勳舊大臣)의 아들이라 하여 통정대부(通政大夫)로 품계가 올랐다.
이듬해 봄에 청풍 부사(淸風府使)에 제수되었다. 청풍은 풍속이 순후한 명승지였는데, 휘파람을 불고 시가를 읊조리며 자적하여 배와 수레로 산수(山水) 사이를 마음껏 노닐었다. 고을도 잘 다스려졌다. 임기가 차서 돌아오니, 백성들이 송덕비를 세워 주었다.
을축년(1685)에 공은 70세였는데, 아들이 시종신이었으므로 추은되어 다시 가선대부(嘉善大夫)로 품계가 오르고, 완릉군(完陵君)에 습봉(襲封)되었다. 한성부좌윤 겸 부총관(漢城府左尹兼副摠管)에 배수되었는데, 몇 달 만에 해직하였다. 종일토록 한가하게 앉아 객과 마주하여 바둑을 두거나 꽃을 심고 약초를 가꾸는 생활을 스스로 즐기며 말하기를, “옛말에 ‘초야(草野)의 한인(閑人)이 왕공(王公)보다 낫다.’고 하였는데, 내 비록 초야에 묻힌 사람은 아니지만 한인이 되어 여생을 마칠 수 있으니,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라고 하였다.
기사년(1689)에 시사(時事)가 또 변하자, 공은 문을 닫고 사람들과 교제를 끊은 채 세사(世事)에 대해 일절 언급하지 아니하였다.
계유년(1693, 숙종 19) 12월 1일에 정침에서 졸하였으니, 향년 78세이다. 이듬해 2월에 양주(楊州) 천마산(天磨山) 아래 판곡리(板谷里) 간좌(艮坐)의 언덕에 안장하였는데, 선영을 따른 것이다. 부인은 공의 무덤에 부장하였다.
공은 타고난 자품이 영명하고 과단하며 온화하면서도 엄장하고 남을 사랑하고 베풀기를 좋아하여 사람들이 모두 경모하였다. 문충공이 몹시 믿고 의지하여 안으로 집안일이나 밖으로 나랏일에 대해 상의하여 결정하지 않음이 없었다. 심양에 있을 때 문학(文學) 정뇌경(鄭雷卿)이 정명수(鄭命守)를 죽이려고 모의하였는데, 일이 탄로 나는 바람에 화를 예측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에 공이 가련하게 여겨 시를 지어 효종(孝宗)에게 올리기를, “천하에 지금 지조 있는 협사가 없으니, 궁도의 지기 다시 누구를 의지하겠는가. 우경은 선비를 급히 살리기 위해 공자에게 귀의하였으니, 후생으로 하여금 신릉군을 한하게 하지 말지어다.〔天下卽今無節俠 窮途知己更誰憑 虞卿急士歸公子 莫使侯生恨信陵〕”라고 하니, 효종이 몹시 침울해하였다. 그 당시 효종 역시 대군(大君)의 신분으로 심양에 볼모로 잡혀 있었다. 참판공이, 정공(鄭公)이 화를 당할 것이라는 얘기를 듣고는 공이 그 모의에 연관되었을까 염려하여 몹시 걱정하였는데, 문충공이 웃으며 말하기를, “걱정하지 마라. 얘가 어찌 헛되이 죽을 아이겠는가.”라고 하였다. 서보(西報)가 이르매 공이 과연 무탈하니, 제공(諸公)들이 이를 듣고는 모두 ‘부자(父子)가 지기(知己)라 할 만하다.’고 일컬었다.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 김공(金公)과 백강(白江 이경여(李敬輿)) 이공(李公)이 문충공과 함께 심양에 구류당했었는데, 청음이 문충공에게 이르기를, “옛사람은 어진 부형이 있는 것을 즐거워하였는데, 지금 공에게는 어진 자제(子弟)가 있으니 어찌 즐겁지 않겠는가.”라고 하였으며, 백강 또한 동쪽으로 돌아온 뒤 공에 대해 언급할 때마다 찬탄하여 마지않았다.
공은 소시에 계곡(谿谷 장유(張維))을 종유(從遊)하였다. 중간에 고질에 걸리는 바람에 비록 학문에 전념하지는 못하였으나, 종일토록 피곤한 줄도 모른 채 사서(史書)를 보기를 좋아하였다. 자신을 단속함이 몹시 엄격하였다. 3년 동안 심양의 객관에 유숙하였는데 늘 홀로 거처하였으며, 관서(關西)는 기생과 풍악이 넘치는 곳으로 일컬어지는데, 왕래하고 경유하는 기간이 몇 달이나 되기도 하였으나 무덤덤하게 한 번도 가까이한 적이 없었다. 부인이 졸하자 첩을 취하지 않았으며 자제들이 곁에서 시봉하였을 뿐이다. 집안에서의 행실이 몹시 지극하였다. 아우 응교(應敎) 후상(後尙)과 우애가 몹시 돈독하여 전택(田宅)과 동복(僮僕)을 나눌 적에 반드시 좋은 전택과 동복을 골라 주었다. 서매(庶妹)에게도 넉넉하게 자급해 주고는, “선공의 혈육은 오로지 이 두 사람일 뿐이니, 어찌 그들로 하여금 궁핍하게 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응교군이 그 아내에게 “내 마음을 알아주는 벗이 세상에는 하나도 없고, 오직 형님만이 나의 지기이다.”라고 하였으며, 또 말하기를, “우리 형님이야말로 진짜 대인(大人)이다.”라고 하였다. 서제(庶弟) 후장(後章)이 일찍 고아가 되어 의지할 곳이 없었는데, 공의 집에서 양육하여 성립할 수 있도록 해 주었다. 빈궁한 친척들에 대해서는 혼례를 성사시켜 줌이 많았다. 특히 선조를 받드는 일에 공경하였다. 제전(祭田)을 장만하고 사당(祠堂)을 세우고 보첩(譜牒)을 편수하였으며, 먼 조상을 위해 묘비(墓碑)를 세웠으며, 제사(祭祀)는 문충공의 유교(遺敎)를 봉행하여 감히 과하게 하지 아니하였다.
공은 심원한 사려와 도량이 있어 선배들에게 추중을 받았는데, 이를테면 청음(淸陰), 포저(浦渚 조익(趙翼)), 계곡(谿谷), 연양(延陽 이시백(李時白)), 백강(白江)과 같은 제로(諸老)들은 몹시 장려하고 허여하였으며, 함릉군(咸陵君) 이해(李澥), 박공 황(朴公潢), 구공 봉서(具公鳳瑞)는 모두 망년지우(忘年之友)로 교분을 맺었다. 현종(顯宗) 때 당론(黨論)이 일어나 시끄럽게 다툴 당시 이를 우려하는 이가 많았는데, 공은 유독 여러 아들에게 이르기를, “지금이 오히려 태평 시대라는 것을 너희들은 나중에 의당 절로 알 것이다.”라고 하더니만, 갑인년(1674, 숙종 원년) 이후로 조정이 누차 변하는 바람에 형화(刑禍)를 당한 사대부들이 많았다. 경신년(1680)에 구인(舊人)이 다시 세상에 진용(進用)되자, 공은 “몇 년 못 가 일이 또 바뀔 것이다.”라고 하였다. 어떤 이가 “지금 아무 문제가 없다.”라고 하니, 공이 웃으며 말하기를, “세상일이란 시간이 흐르면 문제가 생기기 마련이다.”라고 하더니만, 얼마 못 가 기사환국(己巳換局)이 일어나고야 말았으니, 공의 말이 모두 증험된 것이라 하겠다. 제인(諸人)들이 인현왕후(仁顯王后) 폐위 문제를 간쟁하다가 화를 당하니, 공은 그 당시 이미 병이 깊었는데 이 소식을 듣고는 눈물을 흘리며 말하기를, “내가 세상 변고를 겪은 것이 이미 많은데, 병든 이 늙은이가 죽지도 못하고 또다시 이런 일을 보는구나.”라고 하였다.
기사년(1689)에 자급을 빼앗겨 통정대부가 되었다. 갑술년(1694)에 정국이 바뀌자 이미 세상을 떠난 공에 대해 복관(復官)하고 의식대로 치제(致祭)하였다.
부인 안씨(安氏)는 관찰사 헌징(獻徵)의 따님이다. 엄장, 후중하고 단정, 성실하며 청고, 한아하고 간이, 심원하였다. 방적(紡績)에 부지런하고 화려함을 멀리하였으며, 가난한 친족을 보살핌에 곡진하게 은정을 쏟았으며, 비복을 부림에 환심을 얻었다. 신유년(1621, 광해군 13) 9월 10에 태어나 계축년(1673, 현종 14) 4월에 졸하였으니, 향년이 겨우 53세이다.
3남 2녀를 두었는데, 맏이는 현령(縣令) 석진(錫晉)이고, 다음은 영의정 석정(錫鼎)이고, 다음은 대사간 석항(錫恒)이며, 딸은 진사 윤제명(尹濟明), 정랑 신곡(申轂)에게 출가하였다.
현령은 4남을 두었는데, 생원 창헌(昌憲), 사의(司議) 창연(昌演), 창민(昌敏), 창억(昌億)이다.
영의정은 1남을 두었는데 교리(校理) 창대(昌大)이고, 2녀를 두었는데 이성휘(李聖輝), 이경좌(李景佐)에게 출가하였다.
윤제명은 1녀를 두었는데 조명적(趙命迪)에게 출가하였다.
신곡은 5녀를 두었는데 맏딸은 이성신(李聖臣)에게 출가하고 다음은 윤경룡(尹敬龍)에게 출가하였으며, 나머지는 어리다.
창헌은 1남을 두었는데 수철(守哲)이고, 1녀를 두었는데 진사 이명복(李明復)에게 출가하였다.
창연은 2남 4녀, 창민은 2남 1녀, 창억은 1녀를 두었는데, 모두 어리다.
명은 다음과 같다.

문충공에게 아들이 있으니 / 文忠有子
완릉공이 특출하다오 / 完陵挺擢
세변이 막 일어나 / 方世變初
천지가 전복되었을 때 / 天地反覆
강도가 함락되어 / 江都傾陷
온 성민이 어육이 되었는데 / 一城魚肉
창칼 숲을 밀치고 들어감에 / 刀矟如林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았으니 / 不懾不愕
오랑캐가 감동한 나머지 / 殊類動色
백성들이 목숨을 보전할 수 있었다오 / 保我邦族
문충공이 구류된 임오년의 일은 / 壬午之事
화를 더욱 예측할 수 없었는데 / 禍尤不測
세 번이나 심양으로 달려 들어가 / 三走浿瀋
온갖 어려움 속에 일을 주선하여 / 風餐露宿
문충공이 구류에서 풀려날 수 있었으니 / 連環可解
그 정성 귀신조차 놀랄 정도였네 / 神鬼震薄
동쪽으로 돌아온 뒤로는 / 及夫東還
팔짱을 끼고 자취를 거두었네 / 袖手斂迹
그 당시 별다른 공적이 없음은 / 無事可見
공이 녹사를 하였기 때문인데 / 我仕以祿
고을의 수령이 되고 나서야 / 亦縻郡紱
조금 공로를 시험하였다네 / 少試勞勣
만년에는 좌윤에 오르고 / 晩躋貳列
완릉군에 습봉되었으니 / 封爵乃續
베풂을 아끼지 않아 / 非嗇厥施
천도와 인도를 모두 얻었다오 / 天人互得
이미 장수를 누렸으며 / 旣耆旣壽
뛰어난 후사까지 두었으니 / 胤嗣赫奕
내가 광중에 넣을 명을 지어 / 載銘幽穸
무궁한 후세에 이를 고하노라 / 庸詔千億


 

[주D-001]독보(獨步)의 일 : 독보는 인조 때의 고승으로 속명은 중헐(中歇)이다. 조정에서 승려 독보를 몰래 명나라에 보내어 본국의 세력이 곤궁하여 청국의 통제를 받고 있는 이유를 갖추어 주달하였다. 이에 명나라에서 칙서를 내렸는데, 그 가운데 “이전의 허물은 거론치 않을 것이니, 함께 협공하자.”는 말이 있었다.
[주D-002]정뇌경(鄭雷卿) : 1608 〜 1639. 자는 진백(震伯), 호는 운계(雲溪), 본관은 온양(溫陽)이다. 병자호란 이듬해인 1637년에 소현세자(昭顯世子)를 수행하여 심양(瀋陽)에 갔다가 조선인 출신으로 청나라에 벼슬하여 조선에 횡포를 부리고 있던 정명수(鄭命壽)를 죽이려고 모의하였다. 그러나 그 일이 사전에 누설되어 청나라 형부(刑部)에 붙잡혀 참혹하게 죽임을 당하였다. 《顯宗實錄 11年 3月 3日》
[주D-003]우경(虞卿)은 …… 말지어다 : 우경은 전국 시대 조(趙)나라의 재상이고, 후생(侯生)은 위(魏)나라 공자 신릉군의 문객 후영(侯嬴)이다. 진(秦)나라의 재상이 된 범수(范睢)가 개인적인 원한으로 위제(魏齊)를 죽이려 하자 우경은 그를 위해 조나라의 재상 자리를 버리고 신릉군을 찾아가 도움을 청하였다. 그러나 진나라를 두려워한 신릉군은 받아들이기를 주저하였는데, 후영이 우경은 궁지에 몰린 사람을 위해 재상 자리도 버리고 다급하게 왔는데 공자는 망설이고 있느냐고 질책하였다. 이에 신릉군이 부끄러워하며 그들을 맞이하려 하였으나 신릉군이 꺼려한다는 소식을 들은 위제는 이미 자살한 뒤였다. 《史記 卷79 范睢列傳》 여기에서는 후영을 최후량 본인에 비유하여 효종에게 너무 늦지 않게 정뇌경을 도울 수 있는 조치를 취할 것을 촉구한 것이다.
[주D-004]옛사람은 …… 즐거워하였는데 : 《맹자》 이루 하에 “도(道)에 맞는 자가 도에 맞지 않는 자를 길러 주며, 재주 있는 자가 재주 없는 자를 길러 준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어진 부형(父兄)이 있는 것을 좋아하는 것이다.”라고 한 말이 보인다.

 

 

약천집 제2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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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詩)
최 청풍 한경(崔淸風漢卿)에 대한 만사 병소서 갑술년(1694, 숙종 20)


예전부터 서로 친하여 시를 주고받았으니, 별세할 때에 글이 없을 수 없었다. 이에 감히 두자미(杜子美)의 ‘준 시를 어찌 감히 실추하겠는가〔贈詩焉敢墜〕’라는 뜻으로 삼가 율시 두 수를 지어 영연(靈筵)의 아래에 멀리 받들어 올렸는데, 만가(輓歌)에 쓰기 위한 것이 아니므로 발인(發靷)할 시기가 이미 지났음을 따지지 않았다.

상국이 집안을 전함은 무후와 같았으니 / 相國傳家似武侯
공을 얻어 후사로 삼아 걱정이 없었다네 / 得公爲嗣可無憂
어진 명성 일찍 드러나니 혼정신성을 도왔고 / 賢聲早著晨昏助
고상한 법도 많이 칭찬하니 법상이 남았구려 / 雅度多稱法象留
과거 급제는 비록 못 하였으나 문장이 실로 아름답고 / 科第縱拚文實美
세습의 봉작은 비록 못 하였으나 품계가 높았다오 / 襲封雖褫秩猶優
다시 오동나무와 대나무에 머무는 난곡을 보리니 / 更看梧竹停鸞鵠
바람이 나무를 흔들어 쉬지 않음 어쩌랴 / 其柰風搖樹不休


 

[주C-001]최 청풍 한경(崔淸風漢卿) : 한경은 최후량(崔後亮 : 1616~1693)의 자인데, 청풍 부사(淸風府使)를 지냈으므로 이렇게 칭한 것이다. 호는 정수재(靜修齋), 본관은 전주(全州)로, 이조 판서 혜길(惠吉)의 아들이었는데 백부(伯父)인 명길(鳴吉)에게 입양되었으며, 그의 둘째 아들 석정(錫鼎)은 다시 숙부(叔父) 후상(後尙)에게 입양되었다.
[주D-001]두자미(杜子美)의 …… 실추하겠는가 : 두자미는 두보를 가리킨 것으로, 자미는 그의 자이다. 이 내용은 상대방이 지어준 시를 어찌 감히 잊겠느냐는 뜻인데, 두보가 지은 ‘팽주(彭州) 왕윤(王掄)의 만사(輓詞)’에 보인다.
[주D-002]상국이 …… 같았으니 : 무후(武侯)는 촉한(蜀漢)의 명재상인 제갈량(諸葛亮)의 시호이다. 제갈량은 아들이 없어 형 제갈근(諸葛瑾)의 둘째 아들인 교(喬)를 양자로 삼았는데, 뒤에 아들 첨(瞻)을 낳았다. 교는 원래 자가 중신(仲愼)이었는데, 제갈 량의 양자가 되고는 자를 백송(伯松)으로 고쳤다. 그 후 제갈근의 아들 각(恪)이 오 나라에서 전가족이 몰살당하자, 교의 아들 반(攀)이 다시 제갈근의 뒤를 이었다.
[주D-003]다시 …… 보리니 : 훌륭한 자제의 모습을 표현한 말이다. 한유(韓愈)의 전중소감마군묘명(殿中少監馬君墓銘)에, “물러나 소부(少傅)를 뵈니, 푸른 대나무와 푸른 오동나무에 난새와 고니가 우뚝이 멈추어 서 있는 듯하였으니, 능히 그 가업을 지킬 수 있는 분이었다.〔退見少傅 翠竹碧梧 鸞鵠停峙 能守其業者也〕” 하였다. 곧 난새와 고니와 같은 훌륭한 자손들이 있음을 본다는 뜻이다. 《古文眞寶 後集 卷4》
[주D-004]바람이 …… 어쩌랴 : 옛날 효자인 고어(皐魚)의 시(詩)에, “나무는 조용히 있고자 하나 바람이 멈추지 않고, 자식은 효도하고자 하나 어버이가 기다려주지 않는다.〔樹欲靜而風不止 子欲養而親不待〕” 하였으므로 이 말을 인용하여 돌아가신 부모에 대한 그리움을 주체할 수 없음을 말한 것이다.

 

 

약천집 제21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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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묘갈명(墓碣銘)
좌윤(左尹) 최공(崔公) 묘갈명


지금 영의정으로 있는 최공 석정(崔公錫鼎)의 아우인 이조 판서 석항(錫恒)이 그 선부군(先府君) 정수재(靜修齋) 좌윤공(左尹公)의 행장을 나에게 주고 묘에 명문을 지어 줄 것을 청하였다. 아, 나는 실로 문장을 잘하지 못하니, 어찌 공의 아름다운 덕을 형용할 수 있겠는가. 내가 비록 문장을 잘하지 못하나 어찌 차마 두 자제의 효성스러운 마음을 거절할 수 있겠는가. 그리고 또 어찌 차마 공이 평소에 인정해 주신 것을 잊고서 사실을 기록하는 일을 담당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행장을 살펴보니, 완산 최씨(完山崔氏)는 고려 때 상장군(上將軍)을 지낸 순작(純爵)이 비조(鼻祖)이다. 고려조로부터 본조에 들어와 대대로 높은 벼슬을 지냈으며, 덕업을 서로 계승하였다. 좌찬성에 추증된 휘 수준(秀俊)이 있었는데, 이분이 영흥 부사(永興府使)로 영의정에 추증된 휘 기남(起南)을 낳았고, 이분이 영의정으로 완성부원군(完城府院君)에 봉해지고 시호가 문충(文忠)이며 휘가 명길(鳴吉)이고 호가 지천(遲川)인 분을 낳았다. 배위는 인동 장씨(仁東張氏)이니, 옥성부원군(玉城府院君) 만(晩)의 따님이다. 문충공은 아우가 있었으니 이조 참판으로 휘가 혜길(惠吉)이고, 그 배위는 함평 이씨(咸平李氏)로 관찰사 춘원(春元)의 따님인데, 만력(萬曆) 병진년(1616, 광해군 8)에 공을 낳았다.
공은 휘가 후량(後亮)이고 자가 한경(漢卿)이다. 문충공이 처음에 아들이 없어 공을 데려다가 양자로 삼았는데 늦게 아들을 두니, 이름이 후상(後尙)이었다. 문충공은 호문정(胡文定)을 법으로 삼아 조정에 청해서 공을 후사로 정하였다. 이때 문충공은 일등 공신으로 요직을 담당하여 매일 한가한 틈이 없으므로 집안 살림을 모두 공에게 맡겼는데, 공은 실로 가사를 잘 주관한다는 칭찬이 있었다.
정축년 공은 상신의 자제로 심양(瀋陽)에 가서 인질이 되었으며, 임오년 문충공이 오랑캐에게 붙잡혀가서 감옥에 갇히자, 공은 파발마를 타고 세 번이나 오랑캐 지방을 왕래하며 주선해서 화를 늦추었으며, 을유년 문충공을 모시고 동쪽으로 돌아왔다.
정해년 문충공이 별세하였다. 공은 심양에 머문 것이 거의 8, 9년이었으므로 몸이 수고롭고 마음이 고달파서 진작부터 가슴이 두근거리고 머리가 어지러운 증세가 있었는데 상을 당하여 더욱 심해지자 문을 닫고 병을 잘 다스려서 오랜 뒤에 다소 덜해졌다.
신묘년 생원시에 합격하고 남별전 참봉(南別殿參奉)에 제수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았으며, 사산감역(四山監役)에 제수되었다가 체직되었다. 병오년 익위사 시직(翊衛司侍直)에 제수되고 귀후서 별제(歸厚署別提)로 승진하였으며, 종부시 주부, 공조 좌랑, 충훈부 도사를 역임하였다.
경술년 배천 군수(白川郡守)에 제수되었다가 다음 해 체직되고 을묘년 사복시 첨정에 제수되었다. 이때 시국이 크게 변하니, 벼슬살이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아 병으로 사직하고, 진산 군수(珍山郡守)와 면천 군수(沔川郡守)에 연달아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기미년 영천 군수(榮川郡守)에 제수되었다가 곧바로 체직되었다.
경신년(1680, 숙종 6) 보사 공신(保社功臣)을 녹훈할 때에 정사 원훈(靖社元勳)의 큰아들로 회맹제(會盟祭)에 참여했다 하여 통정대부(通政大夫)의 품계로 승진하였으며, 신유년 청풍 부사(淸風府使)에 제수되었다가 계해년 체직되었다.
을축년 70세가 되니, 조정에서는 두 아들이 시종관(侍從官)이라 하여 은혜를 미루어 가선대부(嘉善大夫)의 품계로 올리고 세습하여 완릉군(完陵君)에 봉해졌으며, 한성부좌윤 겸 도총부부총관을 제수하였는데, 얼마 안 있다가 사양하여 체직되고 집에서 한가롭게 여생을 보냈다. 기사년(1689) 세상의 일이 또 변하여 보사 공신을 삭탈하자 이로 인하여 품계가 강등되어 통정대부가 되었다.
계유년(1693, 숙종 19) 정침에서 고종명(考終命)을 하여 양주(楊州) 천마산(天磨山) 아래 판곡리(板谷里) 간좌(艮坐)의 산에 장례하니, 선영을 따른 것이었다. 이해 여름 다시 보사 공신의 훈호(勳號)를 복구해 주어 품계와 직책을 옛날과 같이 환급하였으며, 치제하기를 의식대로 하였다.
배위 광주 안씨(廣州安氏)는 관찰사 헌징(獻徵)의 따님인데, 장엄하고 후중하며 단정하고 정성스러워 부도(婦道)를 특히 잘 닦으니 친척들이 귀의하였으며, 문충공이 더욱 사랑하고 소중히 여겼다. 신유년에 출생하고 계축년에 별세하여 공의 묘소에 부장되었다.
3남 2녀를 두었으니 장남 석진(錫晉)은 정랑인데 공보다 먼저 죽었고, 다음은 바로 의정(議政) 석정(錫鼎)이고 다음은 바로 판서 석항(錫恒)이며, 장녀는 진사 윤제명(尹濟明)에게 출가하고 차녀는 현감 신곡(申轂)에게 출가하였다. 정랑은 4남을 두었으니 생원 창헌(昌憲), 도사 창연(昌演), 봉사 창민(昌敏)과 창억(昌億)이다. 의정은 공의 아우인 응교 후상(後尙)에게 양자 갔는데 아들 창대(昌大)를 두었는바, 지금 광주 부윤(廣州府尹)으로 있다. 판서는 공의 생가 아우인 교관 후원(後遠)에게 양자 갔으며, 또 창억(昌億)을 자기의 양자로 삼았다. 손녀와 외손이 또 약간 명이다.
공은 천품이 온화하고 바르며 의표가 단정하여, 남들과 화합하면서도 휩쓸려서 함부로 행동하지 않았고 장엄하면서도 사납지 않았으며, 널리 사람을 사랑하고 현자를 친애하여 한결같이 성심에서 나오니, 사람들이 모두 믿고 사모하며 좋아하였다. 공은 침착한 사려와 원대한 식견이 있었으므로, 문충공이 깊이 믿어서 군국(軍國)의 기무를 자문하는 일이 많았다.
무인년 공은 심양(瀋陽)에 인질로 있다가 돌아와 문충공에게 아뢰기를 “대인께서 국정을 담당함에 두 가지 잘못된 일이 있으니, 김청음(金淸陰 김상헌(金尙憲))을 논박하여 배척한 것과 중을 홍 군문(洪軍門)으로 보낸 것이 이것입니다. 화의와 척화가 일은 비록 대립되나 마음은 모두 국가를 위하는 충심에서 나온 것인데, 지금에 이르러 결국 대인의 말씀이 비로소 맞았으니, 이는 사람들이 모두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남한산성에서 항복하는 맹약을 맺은 것은 다행이 아니요 실로 치욕이니, 대인에게 있어서는 굳이 나라를 보전했다 하여 훌륭함이 될 수 없으며, 청음에게 있어서는 또한 일을 그르쳤다 하여 허물될 것이 없습니다. 오직 의심과 서로 막힌 마음을 제거하고 서신을 왕래하여 청 나라와 화친하는 일이 부득이함을 깊이 밝히시고 또한 깨끗한 의론이 없을 수 없음을 장려하여, 피차간에 심사가 툭 트이게 해야 할 것입니다. 어찌 잘잘못을 거론해서 서로 반목한단 말입니까. 그리고 또 남조(南朝)와 통신(通信)하고자 하신다면 마땅히 별도로 단사(單使)를 보내어서 상주문을 가지고 항해하되 옛날 고려 때에 송 나라와 내왕했던 옛 길을 다시 찾아낸다면, 배 한 척만 있으면 중국에 도달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마침내 중에게 배를 주어서 요동(遼東)과 심양의 경계를 지나가게 하시니, 저들의 정탐이 서로 이어져서 오랑캐에게 발각되기가 쉬우며, 비록 혹 군문(軍門)에 이른다 하더라도 반드시 황제의 조정에 도달하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하자, 문충공은 크게 깨닫고 말하기를 “내 이런 방법을 알지 못했다.” 하였다.
뒤에 들으니 해변을 순라하던 오랑캐 기병들이 우리나라 배가 서쪽을 향하는 것을 바라보고 우리에게 의심을 품었는데, 홍 군문이 오랑캐에게 항복하자, 우리나라에서 보낸 편지를 찾아내어 문충공이 붙잡혀 가게 되었다. 공은 말하기를 “대인은 국가를 위하여 죽을 곳으로 가는 것을 진실로 마음에 달갑게 여기실 터이나, 자식이 아버지의 죽음을 구원하는 것으로 말하면 또한 지극함을 쓰지 않음이 없어야 한다.” 하고, 마침내 많은 돈을 가지고 심양의 관문에 들어가서 권력자를 설득하였다.
이때 청음 김공 또한 구류되어 같은 관사에 있었다. 혹자는 말하기를 “김공은 평소 성품이 방정하고 엄격하시니, 뇌물을 쓰는 것을 마음에 나쁘게 여기지 않겠는가.” 하였으나 공은 “이는 아마 그렇지 않을 것이다.” 하고는 들어가 김공에게 묻기를 “산의생(散宜生)은 어떠한 사람입니까?” 하자, 김공은 대답하기를 “옛날의 어진 사람이다.” 하였다. 공은 나와서 말씀하기를 “김공의 말씀을 들어보니 그 뜻을 알 수 있다.” 하였다. 공이 동쪽으로 돌아오게 되자 김공은 공에게 시가(詩歌)를 지어 주었으며, 또 작은 서문을 지어 공을 매우 칭찬하였다.
공은 학문에 있어 이미 가정에서 교육을 받고 또 계곡(谿谷) 장공(張公 장유(張維))과 백헌(白軒) 이공(李公 이경석(李景奭))에게 수학하여 유가(儒家)의 여러 책을 두루 읽었으나 일찍부터 고질병을 앓아 공부에 전심전력하지 못하였는데, 항상 이것을 한하였다. 평소 역사책을 두루 섭렵하여 꿰뚫지 않은 것이 없었으며, 국가가 다스려지고 혼란해지는 조짐과 현신(賢臣)과 간신이 나가고 물러가는 기미에 대하여 일찍이 깊이 마음을 쏟지 않은 적이 없었다. 그리고 인물을 품평함에 옛사람이 미처 말하지 못한 것을 많이 말하였다.
공은 시에 있어 재주가 매우 뛰어났다. 비록 중간에 환난을 겪어 힘을 다 쓰지는 못하였으나 시를 지으면 왕왕 경구(警句)가 있었다. 심양에 있을 적에 시를 지었는데 청음공이 자주 품평하고 칭찬하였으며, 말년에 문원(文苑)의 여러 공들과 창수한 것이 많이 있는데, 모두 그 격조와 운치가 보통 사람보다 뛰어나다고 칭찬하였다. 이것을 모아 약간 권을 만든 것이 집에 보관되어 있다.
공은 마음이 깨끗하고 욕망이 적으며 또 몸을 아끼고 보호하여, 여러 해 동안 볼모가 되었으나 집안 식구를 데리고 가지 않았으며, 관서 지방을 왕래할 적에 한 번도 음악과 기생을 가까이 한 적이 없었다. 감사 구봉서(具鳳瑞)가 공을 칭찬하기를 “최한경(崔漢卿)의 뛰어난 절개는 소무(蘇武)보다 더하다.” 하였다. 그리고 부인을 잃게 되자 나이가 그리 노쇠하지 않았으나 첩을 두지 않고 일생을 마쳤다.
세 고을을 맡았을 적에 모두 깨끗함과 고요함으로 고을을 다스렸으며, 배천(白川)에 있을 적에 마침 신해년 큰 흉년을 당하였는데, 굶주린 자들을 많이 살려주니, 남긴 은혜가 더욱 깊었다. 이에 고을 사람들이 비석에 새기기를 ‘만세불망(萬世不忘)’이라 하고 그 앞을 지나가는 자들이 모두 말에서 내려 경례하였다.
공은 집안에 있을 때에는 효도와 우애를 돈독히 하고, 남과 사귈 때에는 위급한 일에 달려가 구원하기를 미치지 못할 듯이 하였으며, 기개와 충절을 사모하여 비록 덫과 함정이 앞에 있더라도 피하지 않고, 나쁜 사람을 멀리하여 때가 묻지 않게 하였으니, 무릇 이러한 종류를 다 기록할 수가 없다.
아들을 가르치기를 순수하고 깊게 하여, 아들에게 잠(箴) 한 편을 지어 주었는데 다음과 같다.
“마음이 보존되면 자연 후중하고, 말이 적으면 후회와 부끄러움이 적게 된다. 벗을 취함에는 반드시 기국과 식견을 먼저 하고, 일을 당해서는 마땅히 공경하고 삼갈 것을 생각하라.〔心存則自然凝重 言寡則可無悔吝 取友必先器識 臨事宜思敬謹〕”
이 몇 마디 말은 내용이 천근하면서도 뜻이 심원하고 적은 것을 들어 큰 것을 포괄하였으니, 진실로 사람을 만드는 좋은 본보기라 할 것이다. 더구나 공은 사람을 가르칠 적에 반드시 자신이 솔선수범하였음에랴. 복을 남김이 성대하여 두 아들이 현달해서 한 시대의 유명한 공경이 된 것이 당연하니, 아 거룩하다.
다음과 같이 명한다.

우리 최공은 / 維我崔公
자식이 되어 직분을 다하였으니 / 爲子盡職
어떤 험한 것인들 구제하지 못하며 / 何險不濟
아버지가 되어 자식을 잘 가르쳤으니 / 爲父能敎
어떤 경사인들 열어놓지 않았겠는가 / 何慶不啓
자식이 자식 노릇 하고 아비가 아비 노릇 함은 / 子子父父
인도의 큰 강령이니 / 人道大體
모든 행실의 근원이요 / 百行之源
온갖 선의 뿌리라오 / 衆善之柢
이것을 명문에 새겨 밝혀서 / 銘以昭之
오는 자들을 기다리노라 / 來者是徯


 

[주D-001]호문정(胡文定)을 법으로 삼아 : 호문정은 북송(北宋)의 학자인 호안국(胡安國)으로 문정은 그의 시호이다. 호안국은 처음에 아들이 없어 조카인 인(寅)을 양자로 세웠는데, 뒤에 아들 굉(宏)을 낳았으나 파양(罷養)하지 않고 그대로 제사를 물려주었다.
[주D-002]중을 …… 보낸 것 : 중은 승려인 독보(獨步)를 가리키고 홍 군문(洪軍門)은 명 나라 도독(都督) 홍승주(洪承疇)를 가리킨다. 독보는 초명이 중헐(中歇)로 묘향산에서 수도하다가 병자호란에 공을 세웠으며, 홍승주의 군영에 가서 청 나라를 정탐하였는데, 홍승주가 청 나라에 항복하여 이 사실이 발각되었다. 뒤에 임경업(林慶業)의 밑에서 명 나라를 왕복하다가 명 나라가 망한 후 임경업과 함께 청 나라에 잡혀갔다.
[주D-003]남조(南朝) : 남쪽 조정이란 뜻으로 명 나라 의종(毅宗)이 이자성(李自成)에게 망한 뒤에 명 왕실의 일족이 세운 조정을 이른다. 1644년 의종이 자결하자 복왕(福王) 주유숭(朱由崧)이 남경(南京)에서 즉위하였으며, 다음해 복왕이 청 나라 군사에게 사로잡히자 당왕(唐王) 주율건(朱聿鍵)이 복주(福州)에서 황제를 칭하였고, 당왕이 또 청군에게 붙잡히자 주계왕(朱桂王) 유랑(由榔)이 조경(肇慶)에서 황제라 칭하였으나 또다시 청군에게 쫓겨 평락(平樂)으로 달아나 16년간 명맥을 유지하였다.
[주D-004]산의생(散宜生) : 주(周) 나라 문왕(文王)의 어진 신하로, 문왕이 주왕(紂王)에게 미움을 받고 옥에 갇히자 보옥(寶王)과 미인(美人)을 주왕에게 뇌물로 바쳐 석방되게 하였다.
[주D-005]소무(蘇武) : 한(漢) 나라 무제(武帝) 때의 충신으로 흉노(匈奴)에게 끌려가 온갖 고생을 하였으나 끝내 굴복하지 않고 언제나 한 나라의 깃발을 손에 잡고 있어 깃발이 모두 닳아버렸다. 그러다가 19년 만에 귀환하였는바, 주인공이 절개를 지킨 것이 소무와 같음을 말한 것이다.


 

 

 

약천집 제27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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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序)
완산 최씨 족보(完山崔氏族譜) 서문 을묘년(1675, 숙종 1)


지난해에 구만이 북관(北關)에 있을 때에 도사(都事) 최한경(崔漢卿) 씨가 편지를 보내오기를, “저의 9대조이신 평도공(平度公)의 묘소가 용인현(龍仁縣)에 있는데, 옛날에 글을 쓴 표석이 있었으나 세월이 오래되어 부러지고 넘어져서 이제 다시 새 것으로 바꾸고자 합니다. 그대 또한 공의 외손이 되니, 마땅히 이 일을 도와주십시오.” 하였다. 구만은 늦게 태어나고 몽매하여 선대(先代)의 고사를 알지 못하였는데, 한경 씨가 최씨의 족보를 새로 편수했다는 말을 듣고서 청하여 살펴보았다. 구만의 고조인 승지공(承旨公)은 박씨(朴氏)의 사위가 되고, 박씨의 위 3대는 최씨(崔氏)의 사위가 되고, 최씨의 위 4대는 바로 평도공(平度公)이니, 구만에게 11대조가 된다.
아, 나의 몸은 이미 아버지와 어머니가 계시고, 아버지와 어머니의 몸은 또 모두 아버지와 어머니가 계시니, 거슬러 올라가 찾는다면 비록 연대가 더욱 멀고 계파가 더욱 많다 하더라도 모두 우리 아버지와 어머니로부터 올라가 아버지와 어머니가 되시는 분들이니, 내 성씨의 종통(宗統)이 아니라 하여 소홀히 할 수 없음이 분명하다. 지금 마침내 대단치 않게 생각하고 잊고서 내가 이 몸을 소유하게 된 유래가 있음을 알지 못하였으니, 어찌 서글프지 않겠는가. 그러나 이를 면할 수 있는 길은 보첩을 편수하는 것이다. 이제 한경 씨의 족보를 통하여 마침내 이 구만이 최씨의 외손이 됨을 알았으니, 만약 당대의 사대부 집안에서 모두 한경 씨가 족보를 편수한 것과 같이 한다면 비록 이 구만처럼 몽매한 자들이라 해도 씨족을 상고한 내용을 얻어들어서 우리 아버지와 어머니로부터 위로 올라가서 아버지와 어머니가 계심을 알게 될 것이다. 이미 이것을 안다면 먼 선조를 추모하는 마음이 저절로 그치지 않을 것이요, 이미 먼 조상을 추모한다면 친척에게 돈독히 하려는 마음이 또 그치지 않을 것이니, 먼 선조를 추모하고 친척에게 돈독히 한다면 백성들의 마음이 비록 후덕해지지 않으려 하나 될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보첩을 편수하는 자가 또 나와 같은 성씨의 후손이 아니라 하여 버려서는 안 됨이 분명하다.
이제 최씨의 보첩은 외손들을 함께 기록하여 그 번거로움을 꺼리지 않았으니, 진실로 거룩한 덕의 아름다움이 외손에게까지 미침이 또한 이와 같아 다만 본손(本孫)들이 세상에 혁혁할 뿐만이 아님을 밝힌 것이다. 또 구만과 같은 무리로 하여금 백성들의 마음이 후덕해지는 데에 면려하도록 하고자 하였으니, 사람들에게 자신이 말미암아 태어나게 된 선조를 잊지 않기를 바람이 지극하다 할 것이다. 한경 씨가 보첩을 다 편수한 다음 나에게 한마디 말을 부탁하였다. 모든 원류(源流)에서 쌓은 덕의 깊고 멂과 기재한 범례의 요체에 있어서는 족보를 보는 자가 마땅히 스스로 알 것이니 여기에 감히 다시 말할 것이 없으며, 다만 구만이 마음속에 느낀 바를 이와 같이 쓰는 바이다.


 

[주D-001]최한경(崔漢卿) : 한경은 최후량(崔後亮)의 자이다. 호는 정수재(靜修齋)이고 본관은 전주(全州)로 이조 판서 최혜길(崔惠吉)의 아들인데 영의정 최명길(崔鳴吉)에게 입양(入養)되었으며, 아들 최석정(崔錫鼎)은 약천의 제자이다.

약천집 제27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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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序)
최한경(崔漢卿)의 청주 봉선계(淸州奉先契) 서문 갑자년(1684, 숙종 10)


정수재(靜修齋) 최공(崔公)이 하루는 나에게 이르기를, “저의 선친이신 문충공(文忠公)을 청주(淸州)의 북쪽 대율리(大栗里)에 장례하였는데, 먼 선조인 전서(典書) 부군 완산군(完山君)과 부군의 족조(族祖)인 좌윤 덕성(德成)과 동족(同族)인 판서 천건(天健)의 묘소가 모두 이곳에 있습니다. 세시(歲時)의 제향을 오직 선군에게만 올리고 4대 이상은 대수가 멀어서 미치지 못하니, 저는 실로 서글프게 여깁니다. 그리하여 가까운 지역에 사는 종씨들과 약속하고는 각각 쌀과 곡식 약간을 내어서 봄에 꿔 주었다가 가을에 거두어서 그 본전과 이자의 남는 것을 가지고 매년 맹동(孟冬)에 한 번 제사하는 비용으로 삼고 이것을 일러 ‘봉선계’라 하였습니다. 그리고 또 곡식을 꿔 주었다가 거두어들이는 것이 오래가지 못할까 염려하여 남는 곡식을 팔아서 묘소 아래의 전지(田地) 약간 묘(畝)를 샀습니다. 비록 인사(人事)의 변천이 무상하나 농토에서 나오는 소출은 무궁하니, 지금 이후로 비록 백 년, 천 년이 되더라도 매년 한 번 제사 지내는 비용이 계속 충당되지 못함을 염려하지 않아도 될 것이니, 이것이 제가 전지를 산 뜻입니다. 그대는 부디 저를 위하여 서문을 써서 후인들로 하여금 이것을 보아 삼가 지키고 실추하지 않게 하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하였다.
이에 나는 공을 대면하여 감탄하며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형체를 서로 물려주고 기혈(氣血)을 서로 이어 가는 것은 예로부터 지금까지 사람과 짐승이 다를 것이 없으나 사람이 유독 동물 중에 귀한 까닭은 자신의 몸이 어디로부터 나왔는가를 알아서 옛날 뿌리를 찾고 시조를 찾아서 오래되고 먼 선조를 소홀히 하여 잊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禮)는 사당에만 제사하고 무덤에는 제사 지내지 않으며 대부(大夫)의 제사는 3대에 그치는데, 지금 제사가 먼 선조의 묘소에까지 미쳐서 무궁한 계책을 세우는 것은 너무 지나친 것이 아니겠는가.
아, 봉분의 높이가 4척이니, 이미 봉분하지 않는 것과는 달라서 묘소에 올라가 제사하는 예가 이로부터 생겨난 것이요, 매월 제물을 올리고 때로 제향하는 것을 비록 3대에 국한하였으나 기도하는 제사는 또한 이단(二壇)에까지 미쳤으니, 단에 모시는 이상의 선조는 애당초 추모하는 마음이 부족해서가 아니요, 형세가 미칠 수 없기 때문이다. 형세가 미치지 못하면 비록 성인(聖人)이라도 사람들에게 반드시 행하라고 강요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지금 마침내 묘소 아래에 전지를 장만하고 후세에 법을 남겨서 향화를 올리는 것을 백대에 끊어지지 않게 한다면 나는 성인이 다시 나온다 해도 반드시 백성들의 덕이 후한 데로 돌아감을 허락할 것이라고 믿는다.
이 일은 대략 주 문공(朱文公)의 《가례(家禮)》에 나와 있으나 세상에 행하는 자가 드물다. 그런데 이제 공이 그 남겨 준 뜻을 따라서 윤색하고 또 더 자세하게 하여 재물을 출납하는 규정과 제향을 올리는 법식을 만들었다. 그리하여 풍성하고 소략함이 법도에 맞고 의식과 예문이 실정에 걸맞아서 모두 후세에 폐해지지 않고 세상의 모범이 되게 하였다. 나는 공의 요청을 소중히 여기고 또 사람마다 이것을 듣고 흥행(興行)하며 서로 보고 좋은 풍습을 이루기를 바라면서 이에 말하노라.”


 

[주D-001]문충공(文忠公) : 최명길(崔鳴吉)의 시호이다. 최명길은 자가 자겸(子謙)이고 호가 지천(遲川)이며, 이항복(李恒福)과 신흠(申欽)에게 수학하고 벼슬이 영의정에 이르렀다.
[주D-002]기도하는 …… 이단(二壇) : 《예기(禮記)》 제법(祭法)에 “대부는 삼묘ㆍ이단을 세우는데 …… 현고와 조고에게는 묘가 없고 기도할 일이 있으면 단을 만들어 제사 지내며 제사가 끝나면 단을 헐어 버린다.〔大夫立三廟二壇 …… 顯考祖考無廟 有禱焉 爲壇祭之 去壇爲鬼〕” 하였다

 

 

서계집 제9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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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명(誌銘) 14수(十四首)
완릉군(完陵君) 최공(崔公) 묘지명


공은 휘는 후량(後亮), 자는 한경(漢卿), 성은 최씨(崔氏)이고 자호는 정수재(靜修齋)이다. 그 선조는 완산(完山) 사람이다. 고려 대에 순작(純爵)은 관작이 상장군(上將軍)이었는데, 그 후손이 끊임없이 이어져 대대로 이름난 사람이 있다. 9대조 유경(有慶)은 국초(國初)에 참찬의정부사(參贊議政府事)였는데, 시호가 평도(平度)이다. 이분이 사강(士康)을 낳으니, 좌찬성으로 시호가 경절(敬節)이다. 고조 휘 업종(嶪終)은 빙고 별제(氷庫別提)이다. 증조 휘 수준(秀俊)은 벼슬하지 않았다. 조부 휘 기남(起南)은 어려서부터 문장과 행실로 저명하였는데, 만년에 급제하여 관각(館閣)의 직책과 의정부의 검상(檢詳)과 사인(舍人)을 역임하였다. 광해군(光海君) 때를 당하여 마지막 벼슬이 통정대부(通政大夫) 영흥 부사(永興府使)이다. 부친은 영의정 완성부원군(完城府院君) 문충공(文忠公) 휘 명길(鳴吉)이다. 본처 장 부인(張夫人)은 옥성부원군(玉城府院君) 만(晩)의 따님인데, 부인에게 아들이 없자 문충공이 아우 이조 참판 혜길(惠吉)의 아들을 취하여 후사로 삼았으니, 공이 이분이다. 공의 모친은 구원(九畹) 이공 춘원(李公春元)의 따님인데, 병진년(1616, 광해군 8) 8월 20일에 공을 낳았다.
3세에 모친을 잃었는데, 9세에 문충공이 장 부인으로 하여금 아들로 삼게 하였다. 12세에 부인이 또 졸하였다.
병자호란이 일어났을 때 공은 겨우 약관(弱冠)을 넘긴 나이였다. 그 당시 문충공이 허 부인(許夫人)을 계실(繼室)로 들였는데, 공이 모친을 모시고 강도(江都)로 피난하였다. 강도가 함락되자 성중(城中)의 사녀(士女) 중에 겁탈을 당한 이들이 많았다. 이에 공이 분연히 달려가 노장(虜將)을 만났는데, 병기를 밀치고 들어가 앞에 서니, 노장이 기이하게 여기고 이유를 물었다. 공이 대답하기를, “듣자 하니, 군중(軍中)에서 이 상국(李相國)과 최 상서(崔尙書) 집안을 침탈하지 못하도록 금령을 내렸다고 하던데, 나는 바로 최 상서의 아들로 특별히 와서 아뢰는 바이다.”라고 하였다. 노장이 어떻게 증명하냐고 묻자, 대답하기를, “나라 사람들에게 증험해 보라.”라고 하였다. 이에 노장이 그 사실을 알아본 다음 최 상서 집안을 보호하도록 명을 내렸는데, 성중 사람들이 이 덕분에 보전한 이들이 많았다. 문충공은 화의(和議)를 주장하였는데 이를 청인(淸人)이 알았으며, 이공 정귀(李公廷龜)는 화이(華夷)에까지 명망이 났다. 이 때문에 이 두 집안을 보전한 것이었다.
인조(仁祖) 20년 임오년(1642) 가을에 청인이 독보(獨步)의 일을 알아내었는데, 이 일로 인해 문충공이 심양(瀋陽)에 구류당하여 화를 예측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에 공이 밤낮으로 가슴을 치다가 역말을 타고 세 차례나 심양으로 달려가 전후의 일을 주선하여 마침내 풀려났다. 그리하여 을유년(1645)에 문충공이 비로소 동쪽으로 돌아왔는데, 어떤 객이 “공의 아들이 어린 서생인데 은연중에 큰 화를 제거하였으니, 그 재주가 이와 같다.”라고 하니, 문충공은 단지 “재주가 성심에서 나왔다.”고만 대답하였다.
정해년(1647) 5월에 이르러 문충공의 상을 당하였는데, 상제(喪祭)가 예를 어김이 없었다. 이전에 공이 심양에 있을 적에 정충(怔忡)과 안질(眼疾)을 앓았는데, 이때에 이르러 더욱 심해졌다.
신묘년(1651, 효종 2)에 병이 조금 나았으며, 생원(生員)에 합격하였다.
효종(孝宗) 갑오년(1654)에 남별전 참봉(南別殿參奉)에 보임되었으나 병 때문에 출사하지 않았다. 다시 사산 감역(四山監役)에 제수되었으나 얼마 못 가서 역시 그만두었다.
50세 이후로 구질(舊疾)이 갈수록 없어져 현종(顯宗) 병오년(1666)에 익위사 시직(翊衛司侍直)에 배수되었다가 서용되어 귀후서 별제(歸厚署別提)에 승진되었으며, 종부시 주부(宗簿寺主簿), 공조 좌랑, 충훈부 도사(忠勳府都事)로 전직되었다.
경술년(1670, 현종 11) 봄에 외직으로 나가 배천 군수(白川郡守)가 되었다. 이해 가을에 대흉이 들어 굶어 죽은 시체가 길에 쌓일 정도였다. 공은 이들을 구제하는 데 마음을 다 쏟아 가옥 50여 칸을 지어 유리걸식하는 백성들을 머물게 한 다음, 읍내의 선량한 사람을 뽑아 그들에게 일을 맡기는 한편, 서리를 신칙하여 간사한 폐단을 없애도록 하였다. 매일 아침마다 몸소 진휼소(賑恤所)로 가서 죽과 미음을 나누어 주었는데, 남녀가 섞여 앉지 못하도록 하고 아픈 사람은 반드시 봉양하도록 하였다. 토착민에게는 식구 수를 계산하여 양식을 공급해 주고 경작을 계속하도록 하였는데, 가을이 되자 크게 풍년이 들어 백성들이 고통에서 벗어났다. 공이 말하기를, “1000명을 살리는 것은 성심이 아니면 불가능하다. 내 감히 이를 소홀히 하겠는가.”라고 하였다. 얼마 뒤에 병으로 사직하였는데, 백성들이 오래도록 사모하여 마지않았다. 부로(父老)들이 서로 더불어 말하기를, “신해년에 생민이 극도로 곤궁하였는데, 그 당시 최 수령이 아니었다면 우리는 씨가 말랐을 것이다. 그대에게 자손이 있는 것은 누구의 은덕인가.”라고 하고, 이어 비석을 세워 덕을 칭송하였다.
금상(今上) 을묘년(1675, 숙종 1)에 사복시 첨정(司僕寺僉正)이 되었는데, 공은 벼슬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으므로 몇 달 만에 병으로 면직하였다. 태복(太僕)은 실속이 있는 자리로 여기에 부임하는 이들은 대부분 오래도록 머물렀는데, 공은 빨리 떠나가니 노리(老吏)들이 기이한 일로 여겼다. 뒤에 또 진산(珍山)과 면천(沔川)에 배수되었으나 모두 부임하지 않고 말하기를, “나는 노쇠한 데다 병까지 많으니, 편안하게 집에 있는 것이 낫다.”라고 하였다.
기미년(1679) 봄에 또 영천 군수(榮川郡守)에 배수되었으나, 역시 내키지 아니하였으므로 마지못해 부임하였다가 1년 만에 또 면직하고 돌아왔다.
경신년(1680)에 역적을 토벌하고 회맹(會盟)을 하였는데, 공은 훈구대신(勳舊大臣)의 아들이라 하여 통정대부(通政大夫)로 품계가 올랐다.
이듬해 봄에 청풍 부사(淸風府使)에 제수되었다. 청풍은 풍속이 순후한 명승지였는데, 휘파람을 불고 시가를 읊조리며 자적하여 배와 수레로 산수(山水) 사이를 마음껏 노닐었다. 고을도 잘 다스려졌다. 임기가 차서 돌아오니, 백성들이 송덕비를 세워 주었다.
을축년(1685)에 공은 70세였는데, 아들이 시종신이었으므로 추은되어 다시 가선대부(嘉善大夫)로 품계가 오르고, 완릉군(完陵君)에 습봉(襲封)되었다. 한성부좌윤 겸 부총관(漢城府左尹兼副摠管)에 배수되었는데, 몇 달 만에 해직하였다. 종일토록 한가하게 앉아 객과 마주하여 바둑을 두거나 꽃을 심고 약초를 가꾸는 생활을 스스로 즐기며 말하기를, “옛말에 ‘초야(草野)의 한인(閑人)이 왕공(王公)보다 낫다.’고 하였는데, 내 비록 초야에 묻힌 사람은 아니지만 한인이 되어 여생을 마칠 수 있으니,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라고 하였다.
기사년(1689)에 시사(時事)가 또 변하자, 공은 문을 닫고 사람들과 교제를 끊은 채 세사(世事)에 대해 일절 언급하지 아니하였다.
계유년(1693, 숙종 19) 12월 1일에 정침에서 졸하였으니, 향년 78세이다. 이듬해 2월에 양주(楊州) 천마산(天磨山) 아래 판곡리(板谷里) 간좌(艮坐)의 언덕에 안장하였는데, 선영을 따른 것이다. 부인은 공의 무덤에 부장하였다.
공은 타고난 자품이 영명하고 과단하며 온화하면서도 엄장하고 남을 사랑하고 베풀기를 좋아하여 사람들이 모두 경모하였다. 문충공이 몹시 믿고 의지하여 안으로 집안일이나 밖으로 나랏일에 대해 상의하여 결정하지 않음이 없었다. 심양에 있을 때 문학(文學) 정뇌경(鄭雷卿)이 정명수(鄭命守)를 죽이려고 모의하였는데, 일이 탄로 나는 바람에 화를 예측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에 공이 가련하게 여겨 시를 지어 효종(孝宗)에게 올리기를, “천하에 지금 지조 있는 협사가 없으니, 궁도의 지기 다시 누구를 의지하겠는가. 우경은 선비를 급히 살리기 위해 공자에게 귀의하였으니, 후생으로 하여금 신릉군을 한하게 하지 말지어다.〔天下卽今無節俠 窮途知己更誰憑 虞卿急士歸公子 莫使侯生恨信陵〕”라고 하니, 효종이 몹시 침울해하였다. 그 당시 효종 역시 대군(大君)의 신분으로 심양에 볼모로 잡혀 있었다. 참판공이, 정공(鄭公)이 화를 당할 것이라는 얘기를 듣고는 공이 그 모의에 연관되었을까 염려하여 몹시 걱정하였는데, 문충공이 웃으며 말하기를, “걱정하지 마라. 얘가 어찌 헛되이 죽을 아이겠는가.”라고 하였다. 서보(西報)가 이르매 공이 과연 무탈하니, 제공(諸公)들이 이를 듣고는 모두 ‘부자(父子)가 지기(知己)라 할 만하다.’고 일컬었다.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 김공(金公)과 백강(白江 이경여(李敬輿)) 이공(李公)이 문충공과 함께 심양에 구류당했었는데, 청음이 문충공에게 이르기를, “옛사람은 어진 부형이 있는 것을 즐거워하였는데, 지금 공에게는 어진 자제(子弟)가 있으니 어찌 즐겁지 않겠는가.”라고 하였으며, 백강 또한 동쪽으로 돌아온 뒤 공에 대해 언급할 때마다 찬탄하여 마지않았다.
공은 소시에 계곡(谿谷 장유(張維))을 종유(從遊)하였다. 중간에 고질에 걸리는 바람에 비록 학문에 전념하지는 못하였으나, 종일토록 피곤한 줄도 모른 채 사서(史書)를 보기를 좋아하였다. 자신을 단속함이 몹시 엄격하였다. 3년 동안 심양의 객관에 유숙하였는데 늘 홀로 거처하였으며, 관서(關西)는 기생과 풍악이 넘치는 곳으로 일컬어지는데, 왕래하고 경유하는 기간이 몇 달이나 되기도 하였으나 무덤덤하게 한 번도 가까이한 적이 없었다. 부인이 졸하자 첩을 취하지 않았으며 자제들이 곁에서 시봉하였을 뿐이다. 집안에서의 행실이 몹시 지극하였다. 아우 응교(應敎) 후상(後尙)과 우애가 몹시 돈독하여 전택(田宅)과 동복(僮僕)을 나눌 적에 반드시 좋은 전택과 동복을 골라 주었다. 서매(庶妹)에게도 넉넉하게 자급해 주고는, “선공의 혈육은 오로지 이 두 사람일 뿐이니, 어찌 그들로 하여금 궁핍하게 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응교군이 그 아내에게 “내 마음을 알아주는 벗이 세상에는 하나도 없고, 오직 형님만이 나의 지기이다.”라고 하였으며, 또 말하기를, “우리 형님이야말로 진짜 대인(大人)이다.”라고 하였다. 서제(庶弟) 후장(後章)이 일찍 고아가 되어 의지할 곳이 없었는데, 공의 집에서 양육하여 성립할 수 있도록 해 주었다. 빈궁한 친척들에 대해서는 혼례를 성사시켜 줌이 많았다. 특히 선조를 받드는 일에 공경하였다. 제전(祭田)을 장만하고 사당(祠堂)을 세우고 보첩(譜牒)을 편수하였으며, 먼 조상을 위해 묘비(墓碑)를 세웠으며, 제사(祭祀)는 문충공의 유교(遺敎)를 봉행하여 감히 과하게 하지 아니하였다.
공은 심원한 사려와 도량이 있어 선배들에게 추중을 받았는데, 이를테면 청음(淸陰), 포저(浦渚 조익(趙翼)), 계곡(谿谷), 연양(延陽 이시백(李時白)), 백강(白江)과 같은 제로(諸老)들은 몹시 장려하고 허여하였으며, 함릉군(咸陵君) 이해(李澥), 박공 황(朴公潢), 구공 봉서(具公鳳瑞)는 모두 망년지우(忘年之友)로 교분을 맺었다. 현종(顯宗) 때 당론(黨論)이 일어나 시끄럽게 다툴 당시 이를 우려하는 이가 많았는데, 공은 유독 여러 아들에게 이르기를, “지금이 오히려 태평 시대라는 것을 너희들은 나중에 의당 절로 알 것이다.”라고 하더니만, 갑인년(1674, 숙종 원년) 이후로 조정이 누차 변하는 바람에 형화(刑禍)를 당한 사대부들이 많았다. 경신년(1680)에 구인(舊人)이 다시 세상에 진용(進用)되자, 공은 “몇 년 못 가 일이 또 바뀔 것이다.”라고 하였다. 어떤 이가 “지금 아무 문제가 없다.”라고 하니, 공이 웃으며 말하기를, “세상일이란 시간이 흐르면 문제가 생기기 마련이다.”라고 하더니만, 얼마 못 가 기사환국(己巳換局)이 일어나고야 말았으니, 공의 말이 모두 증험된 것이라 하겠다. 제인(諸人)들이 인현왕후(仁顯王后) 폐위 문제를 간쟁하다가 화를 당하니, 공은 그 당시 이미 병이 깊었는데 이 소식을 듣고는 눈물을 흘리며 말하기를, “내가 세상 변고를 겪은 것이 이미 많은데, 병든 이 늙은이가 죽지도 못하고 또다시 이런 일을 보는구나.”라고 하였다.
기사년(1689)에 자급을 빼앗겨 통정대부가 되었다. 갑술년(1694)에 정국이 바뀌자 이미 세상을 떠난 공에 대해 복관(復官)하고 의식대로 치제(致祭)하였다.
부인 안씨(安氏)는 관찰사 헌징(獻徵)의 따님이다. 엄장, 후중하고 단정, 성실하며 청고, 한아하고 간이, 심원하였다. 방적(紡績)에 부지런하고 화려함을 멀리하였으며, 가난한 친족을 보살핌에 곡진하게 은정을 쏟았으며, 비복을 부림에 환심을 얻었다. 신유년(1621, 광해군 13) 9월 10에 태어나 계축년(1673, 현종 14) 4월에 졸하였으니, 향년이 겨우 53세이다.
3남 2녀를 두었는데, 맏이는 현령(縣令) 석진(錫晉)이고, 다음은 영의정 석정(錫鼎)이고, 다음은 대사간 석항(錫恒)이며, 딸은 진사 윤제명(尹濟明), 정랑 신곡(申轂)에게 출가하였다.
현령은 4남을 두었는데, 생원 창헌(昌憲), 사의(司議) 창연(昌演), 창민(昌敏), 창억(昌億)이다.
영의정은 1남을 두었는데 교리(校理) 창대(昌大)이고, 2녀를 두었는데 이성휘(李聖輝), 이경좌(李景佐)에게 출가하였다.
윤제명은 1녀를 두었는데 조명적(趙命迪)에게 출가하였다.
신곡은 5녀를 두었는데 맏딸은 이성신(李聖臣)에게 출가하고 다음은 윤경룡(尹敬龍)에게 출가하였으며, 나머지는 어리다.
창헌은 1남을 두었는데 수철(守哲)이고, 1녀를 두었는데 진사 이명복(李明復)에게 출가하였다.
창연은 2남 4녀, 창민은 2남 1녀, 창억은 1녀를 두었는데, 모두 어리다.
명은 다음과 같다.

문충공에게 아들이 있으니 / 文忠有子
완릉공이 특출하다오 / 完陵挺擢
세변이 막 일어나 / 方世變初
천지가 전복되었을 때 / 天地反覆
강도가 함락되어 / 江都傾陷
온 성민이 어육이 되었는데 / 一城魚肉
창칼 숲을 밀치고 들어감에 / 刀矟如林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았으니 / 不懾不愕
오랑캐가 감동한 나머지 / 殊類動色
백성들이 목숨을 보전할 수 있었다오 / 保我邦族
문충공이 구류된 임오년의 일은 / 壬午之事
화를 더욱 예측할 수 없었는데 / 禍尤不測
세 번이나 심양으로 달려 들어가 / 三走浿瀋
온갖 어려움 속에 일을 주선하여 / 風餐露宿
문충공이 구류에서 풀려날 수 있었으니 / 連環可解
그 정성 귀신조차 놀랄 정도였네 / 神鬼震薄
동쪽으로 돌아온 뒤로는 / 及夫東還
팔짱을 끼고 자취를 거두었네 / 袖手斂迹
그 당시 별다른 공적이 없음은 / 無事可見
공이 녹사를 하였기 때문인데 / 我仕以祿
고을의 수령이 되고 나서야 / 亦縻郡紱
조금 공로를 시험하였다네 / 少試勞勣
만년에는 좌윤에 오르고 / 晩躋貳列
완릉군에 습봉되었으니 / 封爵乃續
베풂을 아끼지 않아 / 非嗇厥施
천도와 인도를 모두 얻었다오 / 天人互得
이미 장수를 누렸으며 / 旣耆旣壽
뛰어난 후사까지 두었으니 / 胤嗣赫奕
내가 광중에 넣을 명을 지어 / 載銘幽穸
무궁한 후세에 이를 고하노라 / 庸詔千億


 

[주D-001]독보(獨步)의 일 : 독보는 인조 때의 고승으로 속명은 중헐(中歇)이다. 조정에서 승려 독보를 몰래 명나라에 보내어 본국의 세력이 곤궁하여 청국의 통제를 받고 있는 이유를 갖추어 주달하였다. 이에 명나라에서 칙서를 내렸는데, 그 가운데 “이전의 허물은 거론치 않을 것이니, 함께 협공하자.”는 말이 있었다.
[주D-002]정뇌경(鄭雷卿) : 1608 〜 1639. 자는 진백(震伯), 호는 운계(雲溪), 본관은 온양(溫陽)이다. 병자호란 이듬해인 1637년에 소현세자(昭顯世子)를 수행하여 심양(瀋陽)에 갔다가 조선인 출신으로 청나라에 벼슬하여 조선에 횡포를 부리고 있던 정명수(鄭命壽)를 죽이려고 모의하였다. 그러나 그 일이 사전에 누설되어 청나라 형부(刑部)에 붙잡혀 참혹하게 죽임을 당하였다. 《顯宗實錄 11年 3月 3日》
[주D-003]우경(虞卿)은 …… 말지어다 : 우경은 전국 시대 조(趙)나라의 재상이고, 후생(侯生)은 위(魏)나라 공자 신릉군의 문객 후영(侯嬴)이다. 진(秦)나라의 재상이 된 범수(范睢)가 개인적인 원한으로 위제(魏齊)를 죽이려 하자 우경은 그를 위해 조나라의 재상 자리를 버리고 신릉군을 찾아가 도움을 청하였다. 그러나 진나라를 두려워한 신릉군은 받아들이기를 주저하였는데, 후영이 우경은 궁지에 몰린 사람을 위해 재상 자리도 버리고 다급하게 왔는데 공자는 망설이고 있느냐고 질책하였다. 이에 신릉군이 부끄러워하며 그들을 맞이하려 하였으나 신릉군이 꺼려한다는 소식을 들은 위제는 이미 자살한 뒤였다. 《史記 卷79 范睢列傳》 여기에서는 후영을 최후량 본인에 비유하여 효종에게 너무 늦지 않게 정뇌경을 도울 수 있는 조치를 취할 것을 촉구한 것이다.
[주D-004]옛사람은 …… 즐거워하였는데 : 《맹자》 이루 하에 “도(道)에 맞는 자가 도에 맞지 않는 자를 길러 주며, 재주 있는 자가 재주 없는 자를 길러 준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어진 부형(父兄)이 있는 것을 좋아하는 것이다.”라고 한 말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