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세 부사공 휘 호 문/휘 연손 암계공 관련기록

허백정 홍귀달 선생이 암계공 휘 연손 공에게 주신 시

아베베1 2013. 11. 18. 09:35

 

 

 

虛白亭文集卷之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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送崔佐郞連孫奉命湖南 
 


湖南鞍馬仙曹郞。

 

漢北人物推賢良。

 

地分九等賦上下。

 

天高八月秋中央。

 

靑山多處露下白。

 

赤雁飛邊葉飄黃。

 

南原古稱帶方郡。

 

桑梓卽是鱸魚鄕。


 
순흥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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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과(文科)

고려(高麗)

안유(安裕) : 고려 원종(元宗) 때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이 시중(侍中)에 이르렀다. 위 〈명환(名宦)〉ㆍ〈명현(名賢)〉 조목에 보인다.

안우기(安于器) : 18세에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이 찬성사(贊成事)에 이르렀다. 〈명환(名宦)〉 조목에 보인다.

안목(安牧) :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이 정당문학(政堂文學)에 이르렀다. 〈명환(名宦)〉 조목에 보인다.

안원숭(安元崇) :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이 정당문학(政堂文學)에 이르렀다. 〈명환(名宦)〉 조목에 보인다.

안석(安碩) : 과거에 급제하여 밀직(密直)에 봉해졌다. 〈명환(名宦)〉 조목에 보인다.

안축(安軸) : 원(元)나라 제과(制科)에 급제하여 벼슬이 찬성사(贊成事)에 이르렀다. 〈명환(名宦)〉ㆍ〈명현(名賢)〉 조목에 보인다.

안보(安輔) : 원(元)나라 제과(制科)에 급제하여 벼슬이 동경유수(東京留守)에 이르렀다. 〈명환(名宦)〉ㆍ〈명현(名賢)〉 조목에 보인다.

안집(安輯) :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이 보문각대제학(寶文閣大提學)에 이르렀다. 〈명환(名宦)〉 조목에 보인다.

안종원(安宗源) :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이 판문하부사(判門下府事)에 이르렀다. 〈명환(名宦)〉 조목에 보인다. 조선조에 들어와 태학사(太學士)를 지냈다.

안영부(安永孚) : 벼슬이 진현관제학(進賢館提學)에 이르렀다. 〈명환(名宦)〉 조목에 보인다.

문질(文質) : 벼슬이 정승(政丞)에 이르렀다. 〈명환(名宦)〉 조목에 보인다.

안수기(安修己) :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이 소윤(少尹)에 이르렀다. 〈명환(名宦)〉 조목에 보인다.

본조(本朝)

안원(安瑗) : 태조(太祖) 때 유후(留後)를 지냈다. 〈명환(名宦)〉 조목에 보인다.

안경공(安景恭) : 개국공신에 봉해졌다. 〈명환(名宦)〉 조목에 보인다.

안순(安純) :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이 판중추(判中樞)에 이르렀다. 〈명환(名宦)〉 조목에 보인다.

안숭선(安崇善) : 벼슬이 좌참찬(左參贊)에 이르렀다. 〈명환(名宦)〉 조목에 보인다. 예문관제학을 지냈다.

안숭효(安崇孝) : 벼슬이 대사헌에 이르렀다.

안종약(安從約) : 안원(安瑗)의 아들이다.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이 목사(牧使)에 이르렀다.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안경온(安景溫) : 집현전제학(集賢殿提學)을 지냈다.

안경량(安景良) : 벼슬이 순문사(巡問使)에 이르렀다.

안문개(安文凱) : 벼슬이 찬성사(贊成事)에 이르렀다. 〈명환(名宦)〉 조목에 보인다.

이유(李愉) : 벼슬이 관찰사(觀察使)에 이르렀다. 〈명환(名宦)〉 조목에 보인다.

이사맹(李師孟) : 벼슬이 참의(參議)에 이르렀다. 〈명환(名宦)〉 조목에 보인다.

이사증(李師曾) : 벼슬이 참의에 이르렀다. 〈명환(名宦)〉 조목에 보인다.

이사정(李師程) : 이사증(李師曾)의 아우이다. 벼슬이 목사(牧使)에 이르렀다.

최정호(崔挺豪) : 본관은 해평(海平). 벼슬이 정언(正言)에 이르렀다. 압동(鴨洞)에서 살았다.

안수산(安壽山) : 안천보(安天保)의 아들이다. 벼슬이 영상(領相)에 이르렀다.

섭천지(葉千枝) : 본관은 여주(驪州). 벼슬이 전적(典籍)에 이르렀다. 수민단(壽民丹)에서 살았다.

유당(庾璫) : 벼슬이 찬성사(贊成事)에 이르렀다. 〈명환(名宦)〉 조목에 보인다.

유구산(庾龜山) : 벼슬이 관찰사에 이르렀다. 〈명환(名宦)〉 조목에 보인다.

유오산(庾鰲山) : 벼슬이 관찰사에 이르렀다. 〈명환(名宦)〉 조목에 보인다.

문경동(文敬仝) : 본관은 감천(甘泉). 벼슬이 사성(司成)에 이르렀다.

문헌(文獻) : 본관은 감천(甘泉). 벼슬이 직강(直講)에 이르렀다. 문절공(文節公) 김담(金淡)의 장인이다.

안공신(安公信) : 자(字)는 대부(大孚). 안종약(安從約)의 증손이다. 가정(嘉靖) 무자년(1528, 중종23)에 사마시에 합격하고, 정유년(1537, 중종32)에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병진년(1556, 명종11)에 중시(重試)에 급제하였다. 벼슬이 군수에 이르렀다. 여섯 형제의 우애가 매우 지극하여 우우정(友于亭)을 지어 놓고 살았다.

김난상(金鸞祥) : 가정(嘉靖) 정유년(1537, 중종32)에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이 대사간(大司諫)에 이르렀다. 〈명환(名宦)〉 조목에 보인다.

황사우(黃士祐) : 벼슬이 좌찬성(左贊成)에 이르렀다. 〈명환(名宦)〉 조목에 보인다.

홍언방(洪彦邦) : 함창(咸昌) 출신. 홍귀달(洪貴達)의 아들이다. 판관(判官) 문장손(文長孫)의 딸에게 장가들어 파문단(破文丹)에서 살았다.

김사문(金士文) : 자(字)는 질부(質夫). 문절공(文節公) 김담(金淡)의 증손이다. 가정(嘉靖) 무술년(1538, 중종33)에 과거에 급제하였다. 벼슬이 좌랑(佐郞)에 이르렀다. 충재(冲齋) 권공(權公 권벌(權橃))이 일찍이 일컫기를,
“공께서는 원수(元帥)의 직책을 감당하지 못할 걱정이 없었다. 당시 윤원형(尹元衡)이 권력을 쥐고 있으면서 동년의 정의로 만나보려 하였으나 사양하고 가지 않았다. 그의 지조가 이와 같았다.”
하였다.

김륵(金玏) : 김사문(金士文)의 아들이다. 만력(萬曆) 병자년(1576, 선조9)에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이 이조참의에 이르렀다. 〈명현(名賢)〉 조목에 보인다.

김택룡(金澤龍) : 자(字)는 시보(施甫). 병자년에 사마시에 합격하고, 문과에 급제하였다. 벼슬이 헌납(獻納)에 이르렀다. 퇴계(退溪) 문하에서 수학하여 문필(文筆)로 명성이 있었다. 화천(花川) 성곡(筬谷)에서 살았다.

박전(朴全) : 자(字)는 면부(勉夫), 본관은 무안(務安). 진사 박원기(朴元基)의 아들이다. 가정(嘉靖) 병오년(1546, 명종1)에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이 정랑(正郞)에 이르렀다. 호는 송파(松坡)이다.

박수서(朴守緖) : 기유년에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이 병조참의(兵曹參議)에 이르렀다. 〈명환(名宦)〉 조목에 보인다.

김구정(金九鼎) : 자(字)는 경진(景鎭), 본관은 함창(咸昌). 참봉 김희준(金希俊)의 아들이다.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이 부사(府使)에 이르렀다. 임진왜란 때 왕을 호종한 공로로 삼대에 걸쳐 벼슬이 추증되었다. 수직(壽職)으로 가선대부에 올랐다. 호가 서현(西峴)이다.

박선장(朴善長) : 만력(萬曆) 을사년(1605, 선조38)에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이 도사(都事)에 이르렀다. 〈명현(名賢)〉 조목에 보인다.

성안의(成安義) : 만력(萬曆) 신묘년(1591, 선조24)에 과거에 급제하였고, 벼슬이 승지에 이르렀다. 〈명환(名宦)〉 조목에 보인다.

이여빈(李汝馪) : 본관은 우계(羽溪). 서령(署令) 이수형(李秀亨)의 현손이다. 만력(萬曆) 신묘년(1591, 선조24)에 진사시에 합격하고, 을사년(1605, 선조38)에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이 전적(典籍)에 이르렀다. 광해군 때 이이첨(李爾瞻)이 폐모론(廢母論)을 내놓자, 공이 상중(喪中)에 은혜를 온전히 하여야 한다는 내용의 상소를 올렸는데, 승정원에서 저지되고 말았다. 드디어 산속에 자취를 감추고 나무를 이용하여 집을 만들어 살았다. 호는 취사(炊沙)이다.

박한(朴) : 자(字)는 윤보(潤甫). 박선장(朴善長)의 아들이다. 만력(萬曆) 계묘년(1603, 선조36)에 과거에 급제하였다. 여러 번 큰 고을 원을 역임하여 청렴하고 검소하다는 명성을 얻었다. 가정에서는 효성과 우애로 일컬어졌다. 벼슬이 판교(判校)에 이르렀다. 호는 회역당(悔易堂)이다.

금시조(琴是調) : 자(字)는 경평(景平), 본관은 봉화(奉化). 참봉 금복고(琴復古)의 아들이다. 만력(萬曆) 임자년(1612, 광해군4)에 생원시에 합격하고, 천계(天啓) 갑자년(1624, 인조2)에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이 부사(府使)에 이르렀다. 호는 신암(新菴)이다.

권성오(權省吾) : 자(字)는 자수(自守). 참봉 권호신(權虎臣)의 아들이다. 만력(萬曆) 임자년(1612, 광해군4)에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이 정랑(正郞)에 이르렀고, 수직(壽職)으로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올랐다. 문장이 호한(浩汗)하였으며, 더욱이 시에 능하였다. 동악(東岳) 이안눌(李安訥)과 소암(疎菴) 임숙영(任叔英)이 모두 그의 문장이 고졸하고 굳센 것에 대해 감탄하였다. 호는 동암(東巖)이다.

안욱(安頊) : 자(字)는 근재(謹哉). 효자 안응일(安應一)의 아들이다. 만력(萬曆) 계축년(1613, 광해군5)에 사마시에 합격하고, 숭정(崇禎) 계유년(1633, 인조11)에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이 군수에 이르렀다. 천성이 효성스럽고 우애로워 상을 당하여 3년 동안 죽을 먹었다. 일찍이 가도문안사(椵島問安使)가 되었을 때 명나라 장수가 예우하며 말하기를,
“조선에 인물이 있다.”
하였다. 증손 안하필(安夏弼)이 동지중추부사에 오르자 집의(執義)에 추증되었다.

금충달(琴忠達) : 자(字)는 달지(達之). 직장(直長) 금시영(琴是詠)의 아들이다. 만력(萬曆) 병진년(1616, 광해군8)에 진사시에 합격하고, 천계(天啓) 갑자년(1624, 인조2)에 과거에 급제하였다. 벼슬은 도사(都事)를 지냈다. 호는 사계(泗溪)이다.

김경원(金慶遠) : 자(字)는 선유(善裕). 부사 김구정(金九鼎)의 아들이다. 사마시에 합격하고 문과에 급제하였다. 벼슬은 찰방을 지냈다. 호는 동고(東皐)이다.

황익청(黃益淸) : 자(字)는 응숙(應叔), 본관은 회산(檜山). 사간(司諫) 황효공(黃孝恭)의 증손이다. 천계(天啓) 갑자년(1624, 인조2)에 사마시에 합격하고, 숭정(崇禎) 경오년(1630, 인조8)에 과거에 급제하였다. 인조 때 은대내사(銀臺內史)로서 병조낭관을 역임하고 스스로 물러났다. 벼슬이 사예(司藝)에 이르렀다.

황중연(黃中衍) : 자(字)는 덕유(德裕), 본관은 평해(平海). 판서 황유정(黃有定)의 후손이다. 무자년에 과거에 갑과로 급제하여 벼슬이 좌랑(佐郞)에 이르렀다. 스스로 ‘한천거사(寒泉居士)’라 불렀다. 평소 뜻과 행실이 독실하고, 어버이를 섬김에 효성을 다하였다. 상을 당하여 예법을 극진하게 하였고, 3년 동안 여묘살이를 하였다. 그것으로 인하여 묘소 아래에 집을 짓고 이름을 ‘망영재(望塋齋)’라 하고, 아침저녁으로 성묘하며 평생을 마쳤다. 문장은 웅장하고 아름다웠다. 저술한 시문(詩文) 약간 편이 세상에 전한다. 숙종조 찬수청(纂修廳)에서 문집을 찾았는데, 관문(關文) 속에,
“좌랑 황모는 강학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佐郞黃某 講學不倦]”
라는 등의 말이 있었다.

장준남(張俊南) : 본관은 인동(仁同). 연복군(延福君) 장말손(張末孫)의 후손이다.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이 찰방에 이르렀다.

김선(金鍌) : 자(字)는 여정(汝精), 본관은 선성(宣城). 천계(天啓) 을축년(1625, 인조3)에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이 정랑(正郞)에 이르렀다. 벼슬살이를 할 때는 자상(慈詳)하였고, 몸가짐이 고결하였다. 호는 매학당(梅鶴堂)이다. 〈효자(孝子)〉 조목에 보인다.

홍익한(洪翼漢) : 인조 때 과거에 급제하여 관직이 장령에 이르렀다. 병자년(1636, 인조14)에 오달제(吳達濟)ㆍ윤집(尹集)과 더불어 강화에 반대하다 순절하였다.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고을 동쪽 원구촌(院丘村)에서 태어났다. 〈충절(忠節)〉 조목에 보인다.

성이성(成以性) : 인조 정묘년에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이 통정대부에 이르렀다. 〈명현(名賢)〉 조목에 보인다.

박안복(朴安復) : 자(字)는 중뢰(仲雷). 박한(朴)의 아들이다. 천계(天啓) 갑자년(1624, 인조2)에 생원시에 합격하고, 숭정(崇禎) 기묘년(1639, 인조17)에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이 좌랑(佐郞)에 이르렀다. 호는 초당(草堂)이다.

손회종(孫會宗) : 자는 군해(君海), 본관은 경주(慶州). 생원 손약(孫禴)의 아들이다. 인묘조(仁廟朝) 계유년(1633, 인조11)에 생원시에 합격하고, 같은 해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정랑(正郞)에 이르렀다. 효성스럽고 우애롭고 청렴하고 근신한 것으로 일컬어졌다.

황수억(黃壽嶷) : 자는 인수(仁叟), 본관은 회산(檜山). 사간 황효공(黃孝恭)의 6대손이다. 숙종조 계유년(1693, 숙종19)에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좌랑에 이르렀다. 문명이 있었다.

이징도(李徵道) : 자는 이시(以時). 서령(署令) 이수형(李秀亨)의 후손이다. 숙종 경인년(1710, 숙종36)에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찰방에 이르렀다. 문예에 뛰어나 고을에서 명성이 있었다.

김화중(金華重) : 숙종 정묘년(1687, 숙종13)에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이 현감에 이르렀다.

이지원(李枝遠) : 본관은 고성(固城). 숙종 경오년(1690, 숙종16)에 과거에 급제하였다. 벼슬은 찰방(察訪)을 지냈다.

홍엽(洪偞) : 본관은 남양(南陽). 벼슬은 정자(正字)를 지냈다. 생진 양시에 합격하고 문과에 급제하였다. 현감(縣監) 홍유경(洪游敬)의 아들이다.

성세욱(成世頊) : 자는 근원(謹元). 응교(應敎) 성이성(成以性)의 손자이고, 참봉(參奉) 성문하(成文夏)의 아들이다. 숙종 을미년(1715, 숙종41)에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현감에 이르렀다. 사람됨이 강직ㆍ방정하고 몸가짐이 맑고 신중하였다. 만년에 태묘령(太廟令)으로 잠시 나갔다가 바로 돌아왔다. 호는 송파(松坡)이다.

이진주(李鎭周) : 자는 문보(文輔). 서령(署令) 이수형(李秀亨)의 후손이며 진사(進士) 성간(成幹)의 증손이다. 숙종 경인년(1710, 숙종36)에 진사(進士), 경종 신축년(1721, 경종1)에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현감(縣監)에 이르렀다. 청렴한 문사였다. 금상 조정에서 입시한 신하가 아뢰기를,
“이진주는 조용히 자신을 지켜 성균관에서 공부한 10여 년 동안 재신(宰臣)과 명사(名士)가 그의 얼굴을 알지 못하였습니다.”
하니, 상이,
“수령을 선발할 때는 마땅히 조용히 자신을 지키는 자를 취해야 한다.”
하고, 곧이어 수령에 임명하였으나 얼마 안 되어 죽었다.

손이웅(孫以雄) : 자는 만부(萬夫). 정랑(正郞) 회종(會宗)의 증손이다. 숙종 무자년(1708, 숙종34)에 생원시에 합격하고, 금상 병오년(1726, 영조2)에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이 정랑(正郞)에 이르렀다. 총명하고 박식하였으며, 행실이 확고하였다. 벼슬을 구하지 않고 초야에서 여생을 마쳤다. 호는 탄서(灘西)이다.

금옥심(琴沃心) : 자는 계여(啓汝), 본관은 봉화(奉化). 현감(縣監) 상현(尙絃)의 증손이다. 숙종 갑오년(1714, 숙종40)에 생원시에 합격하고, 금상 을묘년(1735, 영조11)에 급제하여 벼슬이 정자(正字)에 이르렀다.

안택중(安宅重) : 자는 인로(仁老). 본관은 순흥. 금상 을사년(1725, 영조1)에 진사시에 합격하고 동 을묘년(1735, 영조11)에 과거에 급제하였다. 정자(正字)를 지냈다.

이경제(李景濟) : 자는 군즙(君楫). 본관은 우계(羽溪). 생원(生員)ㆍ진사(進士) 진만(鎭萬)의 아들이다. 금상 무오년(1738, 영조14)에 과거에 급제하여 좌랑(佐郞)을 지냈다.

송심기(宋心基) : 자는 덕원(德源), 본관은 야성(冶城). 금상 신유년(1741, 영조17)에 급제하여 정자(正字)를 지냈다.

현재 생존자[時存]

강윤(姜潤) : 자는 덕이(德以), 본관은 진산(晋山). 현감(縣監) 흡(恰)의 현손이고, 생원(生員) 이일(履一)의 아들이다. 금상 정묘년(1747, 영조23)에 급제하였다.

황인채(黃鱗采) : 자는 여성(汝成), 본관은 창원(昌原). 동지(同知) 도익(道翊)의 손자이다. 금상 정묘년(1747, 영조23)에 사마 양시(司馬兩試)에 합격하고, 동 갑술년(1754, 영조30)에 급제하였다.

김택려(金宅礪) : 자는 - 2자 원문 빠짐 -, 본관은 - 2자 원문 빠짐 -. 금상 계유년(1753, 영조29)에 급제하였다.

황덕윤(黃德潤) : 자는 신지(身之). 사예(司藝) 황익청(黃益淸)의 증손이다. 금상 경오년(1750, 영조26)에 급제하였다.

안치묵(安致黙) : 자는 사상(士祥). 사휴(士休)로 고쳤다. 서파공(西坡公 안리(安理))의 14대손이다. 철종 경술년(1850)에 급제하였다.

[주D-001]홍언방(洪彦邦) : 본관은 부계(缶溪)이다. 홍언방의 부친 홍귀달의 연보(年譜)에 “함창(咸昌) 양적리(羊積里)에서 태어났다.” 하였고, 그 주에 “선대는 남양홍씨(南陽洪氏)이고 고려 중엽 재상 홍란(紅鸞)이 영남의 부계(缶溪)로 이사하여 살아 본관으로 삼았다.” 하였다. 《虛白亭集 續集 虛白亭年譜》
[주D-002]폐모론(廢母論) : 조선 제14대 왕 선조의 계비(繼妃) 인목대비(仁穆大妃 1584~1632)를 폐위시키자는 논의. 인목대비의 본관은 연안(延安)이며 성은 김씨(金氏)이다. 존호는 소성정의명렬(昭聖貞懿明烈)이며 휘호(徽號)는 광숙장정(光淑莊定)이다. 영돈녕부사 제남(悌南)의 딸이며, 영창대군(永昌大君)의 어머니이다. 1602년(선조35) 왕비에 책봉되었다. 1606년에 영창대군(永昌大君)을 낳았다. 혼인할 당시 갓 19세였고 광해군은 이미 30세에 가까운 28세였다. 1608년 광해군이 즉위하자 광해군 대신 영창대군을 왕으로 추대하려던 소북(小北)의 유영경(柳永慶) 일파가 몰락하고 대북(大北)의 정인홍(鄭仁弘)ㆍ이이첨(李爾瞻) 등이 득세하였다. 1612년(광해군4) 이들의 사주를 받은 윤인(尹瑠)에 의해 살해될 뻔했으나 박승종(朴承宗)의 저지로 목숨을 보전하였다. 1613년 대북파의 모략으로 어린 영창대군이 강화도로 유배되었다가 친정아버지 김제남 등과 사사(賜死)되었고, 결국 폐모론이 일어나 1618년 서궁(西宮)에 유폐되었다.
[주D-003]중뢰(仲雷) : 원문에 ‘仲電’으로 되어 있는데 ‘仲雷’의 오기이다.

 
 우복집 제15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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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序)
《허백정문집(虛白亭文集)》 서문

문(文)이 천하의 선비들을 정하기에 부족한 지 이미 오래되었다. 크고 넓다고 하여 그 사람을 믿으면 사마상여(司馬相如)를 인정하는 것과 같은 잘못을 하게 되고, 정밀하고 상세하다고 하여 그 사람을 믿으면 양자운(揚子雲)을 인정하는 것과 같은 잘못에 빠져들게 된다. 이 때문에 군자는 사람에 대해서 반드시 먼저 그 자신의 몸을 단속하는 큰 절개를 본 다음에 글에 대해서 논할 수가 있는 것이다. 맹자(孟子)가 말하기를, “그 시를 읊조리고 그 글을 읽으면서 그 사람에 대해서 잘 몰라서야 되겠는가. 이 때문에 그 당세(當世)를 논하는 것이다.” 하였다. 이는 군자가 위로 옛사람들을 벗으로 삼는 도이니, 글을 논하는 자는 취하여 법도로 삼아야 하는 것이다.
내가 고(故) 판서(判書) 허백정(虛白亭) 홍공(洪公)의 글을 보고서 이른바 ‘큰 절개’라고 하는 것을 얻었으니, 간언(諫言)을 거부하는 것에 대해 논하고 사냥하는 일에 대해 논한 두 상소가 그것이다. 바야흐로 연산군(燕山君)이 음란스럽고 포악한 짓을 하던 날에는 제멋대로 법도를 어그러뜨리고 방자하게 예법을 무너뜨려, 사람을 가지고 희롱거리로 삼고 살인으로써 장난거리로 삼으면서 논사(論思)하는 신하를 물리치고 간쟁하는 신하를 파직하였으며, 말이 혹 귀에 거슬릴 경우에는 한꺼번에 몰아다가 쳐 죽였다. 그 흉포한 위세는 감히 범할 수가 없었으니, 비유하자면 울부짖는 호랑이가 이빨을 갈고 으르렁거리면서 기세를 잔뜩 돋우고 사람을 향해 다가오는 것만 같았다. 그런데도 능히 올곧은 의론을 주장하면서 반복하여 개진해서 임금이 하고자 하는 바를 저지시키되, 마치 다스려진 조정에서 홀(笏)을 단정히 들고 서서 현명한 임금과 더불어 논하듯이 하였다. 백 년의 세월이 흐른 뒤인 지금 붓을 잡고 종이를 펴매 정신은 한가롭고 안색은 바르게 되어, 눈앞에 벌여져 있는 형구(刑具)를 보기를 마치 좋은 관직 자리를 보듯이 한 기상이 사람들의 눈앞에 있는 것만 같으니, 아, 장엄하기도 하다.
공이 포악한 임금이 마구 으르렁거리는 아래에서 죽지 않은 것은 단지 임금의 거리끼는 마음이 간간이 발했기 때문이였으며, 끝내 먼 변방에 유배되어 곤경을 당하다가 죽은 것은 이치와 형세에 있어서 필연적인 것이었다. 그런데도 이 세상 사람들 가운데에는 혼란한 시대에 임금을 따르다가 아무런 보람도 없이 괜스레 죽었다는 것으로 공에 대해 탄식을 토하는 자가 있다. 이것은 권도(權道)로 대처할 수 없는 처지에 있는 사람에게 완벽하기를 요구하는 것이다. 성묘(成廟)에게 받은 은혜는 저버릴 수가 없고, 몸을 맡긴 신하로서의 의리는 잊을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니 필부(匹夫)처럼 도망치는 짓은 할 수가 없고, 기색을 보고 미리 떠나가는 지혜는 쓸 수가 없다. 그런즉 마땅히 곧은 길을 향하여 곧장 나아가기만 할 뿐 다른 길이 없으매, 단지 하나의 사(死) 자만이 천명에 따라 자신의 몸을 편안히 하는 바탕이 되고, 보탬이 되고 보탬이 되지 않는 것은 따질 겨를이 없었던 것이다. 그러한 때를 당하여 만약 단지 죽는 것으로만 경계를 삼았다면, 구차스러운 얼굴을 하고 임금의 뜻에 영합하여 걸(桀)과 같이 사나운 임금을 도와서 포악한 짓을 하며 살아남기 위한 일이라면 못할 짓이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공이 크게 싫어하던 바이다.
아, 그 시대를 논하고 그 행적을 상고해 보매 큰 절개가 이와 같으니, 교묘한 솜씨로 아름답게 문장을 꾸며 사람들의 입에 회자(膾炙)되게 하는 것쯤이야 공에게 있어서는 여사(餘事)이며, 임금의 계책을 윤색(潤色)해 다듬어서 한 시대의 종장(宗匠)이 되는 것은 다른 사람도 할 수 있는 일이다. 공자(孔子)가 이르기를, “영무자(甯武子)의 지혜는 미칠 수가 있으나 그의 어리석음은 미칠 수가 없다.”라고 하였는데, 이 말은 어찌 평온한 세상에서 자신의 직임을 다스리는 것은 쉬우나 위태로운 시기를 당하여 자신의 절개를 다하는 것은 어렵다는 것이 아니겠는가. 나 역시 공에 대해서 일찍이 참람스럽게 평하여 말하기를, “성묘(成廟)의 이름난 재상이 되는 것은 쉬우나 폐주(廢主)의 곧은 신하가 되는 것은 어려우며, 화려한 문장을 짓기는 쉬우나 소박한 간언을 말하기는 어렵다.”라고 하였다. 백 년이 지나고 천 년이 지난 뒤에 공의 시를 읽어 보고 공의 글을 읽어 보는 자는 반드시 나의 말이 거짓이 아니라는 것을 징험할 수 있을 것이다.
공의 휘(諱)는 귀달(貴達)이고 자는 겸선(兼善)이다. 시호는 문광공(文匡公)이며, 허백정(虛白亭)은 공의 호이다. 성묘에게 인정을 받아 크게 총애하여 발탁되어 여러 차례 전관(銓官)의 자리와 문형(文衡)의 자리를 맡아 10여 년 동안이나 그 자리에 있었다. 평생토록 지은 바의 시문(詩文)이 아주 많았으나, 화(禍)를 당하던 날에 모두 산실되어 지금은 남아 있지 않다. 자손들이 여기저기 들어 있고 숨겨져 있던 것들을 모은 것이 겨우 몇 권 정도 되었는데, 미처 간행(刊行)하지는 못하고 있었다. 현재 구례 현감(求禮縣監)으로 있는 최정호(崔挺豪)는 공의 외손인데, 공의 문집을 간행하고자 자신의 녹봉을 희사해 판각(板刻)하였다. 나 역시 공과는 인척 관계이면서 마침 이 도의 관찰사(觀察使)로 있으므로 나에게 편지를 보내어 한마디 해 주기를 몹시 간절하게 요구하였다. 이에 감히 사양하지 못하고 드디어 평소에 느꼈던 바를 써서 보낸다.
만력(萬曆) 39년 8월 상완(上浣)에 가선대부(嘉善大夫) 전라도관찰사 겸 병마수군절도사(全羅道觀察使兼兵馬水軍節度使) 정경세(鄭經世)는 서(序)한다.

[주D-001]허백정(虛白亭) 홍공(洪公) : 홍귀달(洪貴達, 1438~1504)로, 자가 겸선(兼善)이고 호가 허백당(虛白堂)ㆍ함허정(涵虛亭)이며, 본관은 부계(缶溪)이다. 이시애(李施愛)의 난을 평정하는 데 공을 세워 공조 정랑이 되었고, 홍문관 전한을 거쳐 춘추관 편수관으로 있으면서 《세조실록(世祖實錄)》을 찬수하였다. 연산군(燕山君)의 생모인 윤씨(尹氏)를 폐출(廢黜)하려는 것에 대해 반대하다가 투옥되었으며, 그 뒤에 사신이 되어 명(明)나라에 다녀왔다. 연산군 4년(1498) 무오사화(戊午士禍)가 일어나기 직전에 열 가지 폐단에 대해 직언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사화가 일어난 뒤에 좌천되었으며, 연산군 10년(1504)에 손녀를 궁중에 들이라는 명을 거역하여 장형(杖刑)을 받고 경원(慶源)으로 유배 가는 도중에 교살(絞殺)되었다. 문장에 뛰어나고 글씨에도 능하였으며, 성격이 강직하여 부정한 권력에 아부하지 않았다. 중종 때 신원(伸冤)되었고, 함창(咸昌)의 임호서원(臨湖書院)에 제향되었으며, 시호는 문광(文匡)이다. 저서로는 《허백정문집(虛白亭文集)》이 있다.
[주D-002]공자(孔子)가 …… 하였는데 : 영무자는 위(衛)나라의 대부인데, 현명한 임금인 문공(文公)을 섬길 때에는 지혜롭게 처신하여 자신의 재능을 드러내지 않았으며, 무도한 임금인 성공(成公)을 섬길 적에는 어리석게 처신하여 몸과 마음을 다 바쳐 충성해 마침내 자신의 몸을 보전하고 임금을 바로잡았다. 이에 대해 공자가 평하기를, “영무자는 나라에 도가 있을 때에는 지혜로웠고, 나라에 도가 없을 때에는 어리석었으니, 그 지혜는 미칠 수가 있으나 그 어리석음은 미칠 수가 없다.” 하였다. 《論語 公冶長》

 
定齋先生文集卷之二十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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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墓碣銘
通訓大夫成均館司成南嶽先生金公墓碣銘 幷序 a_298_032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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南嶽先生金公諱復一。字季純。義城人。羅王子錫。爲鼻祖。在麗有太子詹事龍庇。我恭順王時。有諱漢啓。選集賢學士。三世有諱璡。生員贈吏曹判書。號靑溪。寔公皇考。妣驪興閔氏。諱世卿女。文度公霽五298_033a世孫也。公以嘉靖辛丑。生安東臨河縣之川前里第。幼負氣多奇節。六歲。喪母夫人。食舍海藻曰。恐混魚蟹中。甲子。補上舍生。庚午。釋褐。有擠之者。仕成均。爲學諭博士典籍。移爲諸曹郞者三。還授典籍。壬午。除咸鏡都事。不赴。癸未。由戶曹。出檢畿內災傷。擧奏留相怙勢病民狀。秋拜湖南繡衣。啓斥戚里驕倨者。甲申。由刑曹。佐關東幕。乙酉。除蔚山郡守。治爲一道最。歲餘。陞昌原府使。時有海警。公促兵登船。節度使恇㥘後至。公責之曰。主將未見一倭。先自撓㥘。國家可足賴乎。節度使大慚恚。方伯承戚里意指。侵298_033b奪齊民。事關公。公持不可曰。割原憲之貧。資季氏之富。非所能也。二帥齊怒。竟坐落職。久之。左遷慶州敎授。庚寅。除丹陽郡。不赴。入爲成均司藝。陞司成。出爲豐基郡。卧閤三月。引疾歸。翼年辛卯終。葬醴泉郡北龍門山艮坐之原。享年五十一。公剛嚴淸愼。常言士君子處心行己。宜正大光明。如有一毫枉己徇人之私。立身一敗。萬事瓦裂。不可苟也。舊故入要路。恥與往還。在京有名流至者。輒引席避不見。觀其志。寧可以勢利拘之哉。故常棲遲下僚。未嘗爲慽。其爲敎授。人咸惜其屈。公怡然就職。樂與士子相勸導。每爲298_033c州。率先以禮。以冰蘗自厲。守法罔撓。威制豪猾。至其愍勞凋瘵。喣之如子。故所居政淸。民以得職。去則咸奔走號訴以留之。至基木數月之化。亦使民勒石寓思。至有抱而泣者。始公幼時。才少魯。性氣又亢厲。不肯俯首就學。一日奮曰。丈夫爲志。聖賢可做。因折節劬書數年。文辭驟進。與四兄鶴峯先生。請業于退溪李先生。篤志力學。日取洛閩諸書。沈潛服膺。矯揉積幾年。剛厲者漸就和平。家居篤恩愛。謹禮敎。父喪。廬墓致毁曰。與其在家而忘哀營生。寧違古而猶得自盡也。中歲居醴之琴谷。議立黨庠以訓後輩。俗以儒298_033d雅在州郡。亦必以興學爲先。其得之己而推於人者。又如此。判書公厚德不施。毓慶諸子。咸登溪門。俱有德業。鶴峯先生卒得師傳。爲百世師。公風裁志節。特類之云。肅廟十一年。士林立景德祠。以公五兄弟。配食判書公。後襄陽人士。又享公于鳳山院。配淑人醴泉權氏。贈參議祉之女。葬堤洞。距公墓十里。後配淑人安東權氏。縣監審言之女。葬公墓之左麓。男潪宣敎郞。次潚有俊才蚤夭。女適監司崔晛,正言挺豪。皆前淑人出也。宣敎男曰是振參奉。曰是桷。監司男山輝府使。正言男忠望,忠亮。參奉男,▼(賓-八/灬),▼(貞-八/灬),魯。298_034a是桷以▼(賓-八/灬)後。文科參判。寔贈公宗簿寺正。公九世孫玄壽。韻士也。托致明以顯刻之役。致明屢辭不獲命。因竊惟念吾先祖母節婦金氏。卽公姊也。雖遠猶得備彌甥。是不敢終辭。銘曰。
於戲南嶽嶽降姿。出入資承早得師。治心平直凜自持。特立挺然那得麾。志與時違棲枳棘。曠不屑以樂職職。長孺之戇文禮樂。高風百世凜如昨。

 

鶴沙先生文集卷之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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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行狀
成均館司成南嶽金公行狀 a_091_189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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公諱復一。字季純。自號南嶽。新羅敬順王之子錫。封義城君。子孫仍居焉。遂爲義城金氏。有諱龍庇。高麗太子詹事。至今血食縣祠。高祖諱漢啓。副知承文院事。魯山禪。不復仕。曾祖諱萬謹。贈左通禮。祖諱禮範。贈左承旨。考諱091_189b璡。贈吏曹判書。妣贈貞夫人驪興閔氏。諱世卿之女。文度公霽之後。以嘉靖辛丑。生公于安東臨河縣之川前里第。甫六歲。母夫人卒。判書公憐其早失所恃。敎而不督。稍長。始發憤讀書。功力兼人。數年間。詞華蔚然。中甲子司馬。隆慶庚午文科。聲望藉甚。有媢嫉者擠之。分成均館。乙亥。補學諭。赴朝作詩曰。定省歸何晩。經綸計已乖。乃棄官歸。己卯。陞博士典籍。庚辰。遷刑曹佐郞。四月。判書公卒。服闋。荐拜工戶曹佐郞。移典籍。公以累次稽謝。於義不安。強疾就職。爲咸鏡都事。不赴。癸未。除戶曹正郞。吏懾而職擧。秋。拜京畿道災傷敬差官。又除全羅道御史。直聲著聞。汚091_189c吏有望風解印去者。甲申。由刑曹。出爲江原道都事。監司鄭公崑壽深加敬重。每有大事。必咨決焉。丁亥。除蔚山郡守。治爲一道最。繡衣馳啓。命陞秩爲昌原府使。府近節鎭。弊端滋蔓。公至。守正不撓。凡有民瘼。一切痛掃除。終忤方伯罷歸。秋。授慶州敎授。公歎曰。朝廷雖授我以邊將。猶當盡心。況師儒乎。引諸生敎導以經學。勸勉以道義。多士風勵。庚寅。拜丹陽郡守。病不赴。除成均館司藝。陞司成。旋除豐基郡守。臥閤三月。闔境大治。遂引疾歸。以辛卯八月十七日。終于正寢。享年五十一。同年月日。葬于醴泉郡北龍門山艮坐之原。嗚呼。公性孝。髫齔遭前喪。郤海藻不食091_189d曰。恐其曾混藏於海魚中也。逮丁判書公憂。廬墓三年。一不下家。哀毀成疾。幾危而僅甦。遂爲平生之患。自少立志不凡。年十九。與鶴峯先生讀書白雲洞。仍徒步立雪于退陶門下。得聞旨訣。遂自刻勵爲學。平居。衣帶必飭。對案看書。如朱書節要,大學衍義,心經,近思錄等書。手不釋卷。用工積久。所造益深。鶴峯先生祭公文曰。克治心性。矯揉氣質。昔焉剛厲。今乃和平。始焉鈍魯。終乃敏明。其得力於學如此。嘗寓居醴泉之金谷。其俗以貨財相尙。不屑學業。公爲文勸諭父老。共立書堂於德進洞。爲多士講學之所。後移於鼎山爲書院。自是絃誦遍於一境。而金谷尤盛。髦士091_190a輩出。遂爲嶺底名村。興學明敎。其功偉矣。安東建廬江書院。廟享退溪先生。士林將請額。呈文于本府。推公製文。累千百言。覽者皆以爲非知道者不能如此形容盛德。淸修苦節。遠近所敬服。有悖行人搆亭于路傍。極其奢麗。聞公將過亭下。卽毀撤之。權草溪▣▣枕衾華美。嘗與公同寢。見公布被弊枕。心愧終不敢自設寢具焉。及其不容於朝而棲遲於下邑。則又不鄙夷其民。日具冠帶以莅事。爲治。專尙文敎。而先彝倫後文藝。至誠開導。孜孜不倦。以至經紀庶務。綜理微密。不朞年。治化旁達。士勤學武勤藝民勤耕。擧一境之民。無敢佚遊惰慢。而士學知方。武藝成才。民091_190b有餘粟而頌聲作焉。撫摩民庶。不啻赤子。然其有罪過。略不容貸。而民自心悅誠服。神明敬而父母愛焉。方其遞蔚而移昌也。一郡老少驚遑。攀轅臥轍。至於驅逐昌原吏卒。及其見黜於昌也。士子則懷疏叫閽而攻方伯。民庶則齊進巡營而歸怨毒。雖被囚受刑而終不悔。以至基城數月之政。民有抱碑而泣者。實今古所未聞。非其德政有以大過人而大感人。能如是乎。若其自奉如寒士。氷蘗之聲。聳動遐邇。沒世而猶見稱。特其餘事。豈可以此求多于公哉。惟其素性。剛直簡亢。不能俯仰流俗。儕流入要路。絶不與過從。嘗與鶴峯先生同邸舍。一時名流輻輳其門。而引避091_190c不見焉。奉命畿甸之日。江華伯以重臣被黜。按事湖南。則全州府尹。以貴戚見斥。聞者吐舌。其在蔚山。有海警。公領兵船先登。兵使後至。公抗義責之。兵使大慙。嘗出待巡使于境上。巡使到處荒酗。庵期不至。公徑歸曰。吾不忍重困田民也。方伯又以貴戚關節。橫暴小民。公報曰。奪原憲之貧。資季氏之富。方伯慙而止。有自稱監營裨將者至府。勒徵祭需。公怒而囚之。具由報巡營。監司勉從而心怒。至追還。殿最狀啓。改最爲殿。其直道不撓。多此類也。世之不知公者。固不足道。知公者。亦慮其過剛難容。畢竟與世抹摋而齟齬。窮末年北節之議擬。亦非所以待公者。而公已病091_190d矣。嗟呼。豈非天哉。完平李相國元翼。寒岡鄭先生逑。嘗稱公節行之高。今世無其人。豈阿好言耶。公前配淑人醴泉權氏。贈參議祉之女。後配安東權氏。縣監審言之女。先淑人。生二男二女。男長潪。宣敎郞。次潚。有俊才早夭。女長適監司崔晛。追封完城君。次適正言崔挺豪。宣敎生二男。曰是振。永興殿參奉。曰是桷。女適金,左通禮朴景賢,李晊,朴時華。監司生一男。曰山輝。靑松府使。追封完海君。正言生二男。曰忠望,忠亮。三女。適琴養中,南磁,生員金礪。內外曾玄孫男女若干人。後淑人。無子女。嗚呼。公之沒。于今六十有七年。而墓道無顯刻。公之曾孫進士。袖其先人091_191a所撰行錄。將以求銘於能言之君子。以爲垂光照世地。所謂佳子孫者。而拙劣之文。不足爲秉筆者取信。姑以塞其謬囑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