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성공 안렴사공파/인제공 휘 현 관련 (문성공파)

택리지 서문에 기록된 인제공 관련기사 내용

아베베1 2013. 12. 29. 10:30

 

 
 
다산시문집 제14권 원문  원문이미지  새창띄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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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발(跋)
택리지(擇里志)에 발함

위의 《택리지》 1권은 고 정자(正字) 이중환(李重煥)이 지은 것으로, 국내(國內) 사대부(士大夫)들의 별장이나 농장에 대한 좋고 나쁜 점을 논한 것이다. 나는 이렇게 논한다.
생활하는 방도는 마땅히 먼저 물길과 땔나뭇길을 살펴보고, 다음은 오곡(五穀), 다음은 풍속(風俗), 다음은 산천(山川)의 경치 등을 살펴야 한다. 물길과 땔나뭇길이 멀면 인력(人力)이 지치게 되고, 오곡이 갖추어지지 않으면 흉년이 잦게 되고, 풍속이 문(文)을 숭상하면 말이 많고, 무(武)를 숭상하면 싸움이 많고, 이익을 숭상하면 백성이 간사스럽고 각박해지며, 힘만을 숭상하면 고루해서 난폭해지고, 산천이 흐릿하고 험악하면 빼어난 인물이 적고 마음이 맑지 못한 것이니, 이것이 그 대체적인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별장이나 농장이 아름답기로는 오직 영남(嶺南)이 최고이다. 그러므로 사대부(士大夫)가 당시에 화액을 당한 지가 수백 년이 되었으나, 그 존귀하고 부유함은 쇠하지 않았다. 그들의 풍속은 가문(家門)마다 각각 한 조상을 추대하여 한 터전을 점유하고서 일가들이 모여 살아 흩어지지 않는데, 이 때문에 조상의 업적을 공고하게 유지하여 기반이 흔들리지 않은 것이다.
가령 진성 이씨(眞城李氏)는 퇴계(退溪)를 추대하여 도산(陶山)을 점유(占有)하였고, 풍산 유씨(豐山柳氏)는 서애(西厓)를 추대하여 하회(河回)를 점유하였고, 의성 김씨(義城金氏)는 학봉(鶴峯 김성일(金誠一)의 호)을 추대하여 내앞[川前]을 점유하였고, 안동 권씨(安東權氏)는 충재(沖齋 권벌(權橃)의 호)를 추대하여 닭실[鷄谷]을 점유하였고, 경주 김씨(慶州金氏)는 개암(開嵒 김우굉(金宇宏)의 호)을 추대하여 범들[虎坪]을 점유하였고, 풍산 김씨(豐山金氏)는 학사(鶴沙 김응조(金應祖)의 호)를 추대하여 오미(五嵋)를 점유하였고, 예안 김씨(禮安金氏)는 백암(柏巖 김륵(金玏)의 호)을 추대하여 학정(鶴亭)을 점유하였고, 재령 이씨(載寧李氏)는 존재(存齋 이휘일(李徽逸)의 호)를 추대하여 갈산(葛山)을 점유하였고, 한산 이씨(韓山李氏)는 대산(大山 이상정(李象靖)의 호)을 추대하여 소호(蘇湖)를 점유하였고, 광주 이씨(廣州李氏)는 석전(石田 호가 석전인 사람인 듯하나 미상)을 추대하여 석전(石田)을 점유하였고, 여주 이씨(驪州李氏)는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의 호)를 추대하여 옥산(玉山)을 점유하였고, 적파(嫡派)는 양자골[楊子谷]을 점유하였음. 인동 장씨(仁同張氏)는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의 호)을 추대하여 옥산(玉山)을 점유하였고, 진양 정씨(晉陽鄭氏)는 우복(愚伏 정경세(鄭經世)의 호)을 추대하여 우산(愚山)을 점유하였고, 전주 최씨(全州崔氏)는 인재(認齋 최현(崔睍)의 호)를 추대하여 해평(海平)을 점유한 것 등, 이루 다 헤아릴 수가 없다.
그 다음은 호서(湖西)가 뛰어났다. 그래서 회천 송씨(懷川宋氏)ㆍ이잠 윤씨(尼岑尹氏)ㆍ연산 김씨(連山金氏)ㆍ서산 김씨(瑞山金氏)ㆍ탄방 권씨(炭坊權氏)ㆍ부여 정씨(扶餘鄭氏)ㆍ면천 이씨(沔川李氏)ㆍ온양 이씨(溫陽李氏) 등이 모두 기반을 굳히고서 대대로 현달하였다. 그리고 호남(湖南)의 풍속은 호협한 기개만 있고 순박함이 적으므로, 오직 고씨(高氏) 제봉(霽峯)의 후손임.ㆍ기씨(奇氏) 고봉(高峯)의 후손임.ㆍ윤씨(尹氏) 고산(孤山)의 후손임. 등 몇 집 외에는 현달한 집안이 대체로 적다. 열수(洌水 한강(漢江)) 위쪽으로는 오직 여주(驪州)의 백애(白厓), 충주(忠州)의 목계(木溪)가 좋은 곳으로 일컬어진다. 그러나 북강(北江) 연변에 있는 춘천(春川)의 천포(泉浦), 양근(楊根)의 미원(迷源)도 뛰어난 곳이다.
나의 집은 초천(苕川)의 시골인데, 물은 몇 걸음만 가면 길어올 수 있으나, 땔감은 10리(里) 밖에서 해오며, 오곡(五穀)은 심는 것이 없고, 풍속은 이익만을 숭상하고 있으니, 낙원(樂園)이라고는 할 수가 없고, 취할 점은 오직 강산(江山)의 뛰어난 경치뿐이다. 그러나 사대부(士大夫)가 땅을 점유하여 대대로 전하는 것은 마치 상고(上古) 시대 제후(諸侯)가 그 나라를 소유함과 같은 것이니, 만일 옮겨 다니며 남에게 붙여 살아서 크게 떨치지 못하면 이는 나라를 잃은 자와 같은 것이다. 이것이 바로 내가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머뭇거리면서 초천을 떠나지 못하는 이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