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성공 안렴사공파/인제공 휘 현 관련 (문성공파)

인제공 휘현 선조님이 지으신 시

아베베1 2014. 12. 12. 17:33

 

 

 

 

 

 문성공 안렴사공파 휘 현 선조신님    

  스승이신 한강 정구선생을 위해 지으신  만사

  

 

 

한강연보 제4권 원문이미지 
  

 

 

 

 

또 [문인(門人) 최현(崔晛)]

 


해와 달과 강산이 정기 모아 내려서 / 日星河岳降精芒
호걸을 탄생시켜 세상 모범 만들었네 / 間出人豪作世防
단정한 비단옷은 환하게 빛이 나고 / 整勑錦衣輝掩映
움직일 제 패옥이 해맑게 울리었네 / 周旋玉佩響琳琅
올린 계책 오로지 요순의 도를 따랐고 / 陳謨不道非堯舜
예법을 좋아하되 한당 예는 멀리하여 / 好禮何須雜漢唐
나라와 사문 모두 의지할 데 있더니만 / 邦國斯文俱有賴
하늘이 없애려 하니 까닭을 모를레라 / 天之將喪奈茫茫

 

제문(祭文)
  
 제문(祭文)
또 [문하생 최현(崔晛)]

 


천지의 원기는 사시(四時)에 드러나 있고, 국가의 원기는 군자에게 의지해 있습니다. 천지가 만물에 있어서 싹을 틔워 기르고 무성하게 하며 열매를 맺게 하는 것은 원기가 온화할 때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원기는 항상 온화할 수가 없으므로 바람과 서리로 잎이 시들어 떨어지게 하고 얼음과 눈으로 가지가 얼어 죽게 만듭니다. 그리하여 만물이 거의 사라지는 상황에 이르게 됩니다만, 이 원기만은 뿌리로 돌아가고 땅속에 숨어 있으면서 다시 생명의 싹을 틔우고 길러내는 뿌리의 근간이 되어 주는 것입니다. 군자가 시대에 있어서도 그와 마찬가지라 할 수 있습니다. 그가 지닌 역량을 세상에 구현한다면 기강이 바로 서고 정치와 교화가 밝아지고 많은 인재가 다 등용되어 여러 가지 공적이 이루어집니다. 반면에 불행하여 세상에 쓰이지 않는다면 산림과 강호 사이에 평범하게 은둔하여 당대의 일에 간여하지 않으며, 혼탁한 세파가 소용돌이치는 속에서 엄숙하게 홀로 버티어 평소의 지조를 변치 않는 것입니다.
자신의 몸을 순결하게 수양하고 학문을 강론하며 예를 밝히는 일이 세도(世道)의 치란(治亂)과 무관한 것 같지만 이 또한 애당초 관련이 없지 않습니다. 무슨 말을 하지도 않고 어떤 행동도 하지 않으며 누구를 바쁘게 인도하거나 붙잡아 주지 않더라도 사람들이 자신도 모르게 그 따사로운 바람을 쏘이고 순후한 덕에 취하는 것입니다. 이를테면 슬기로운 자는 그 방향을 알게 되고, 용기 있는 자는 그 의리를 알게 되고, 어진 자는 그 도를 벗삼게 되고, 우매한 자는 경외하여 나쁜 데에 빠지지 않게 되고, 나약한 자는 부끄러워 비열한 짓을 하지 않게 되고, 어질지 못한 자는 두려워 옳지 않은 짓을 감히 행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들 가운데 마음속으로 흠모하는 무리가 나와서 그 설을 전수받아 익힘으로써 후진을 인도하는 일을 이어 갑니다. 세도(世道)가 의지하여 유지되고 인심이 금수(禽獸)가 되지 않는 것은 과연 누가 그렇게 만든 것이겠습니까. 이렇게 보면 이 원기는 조정에 있지 않을 경우에는 산림에 있고, 당대에 행해지지 않으면 후세에 행해지며, 밖으로 드러나기도 하고 혹은 숨어 있기도 하면서 영원히 끊기거나 소멸되지 않는 것인데, 이는 곧 군자에게 의지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옛날 구양공(歐陽公 구양수(歐陽脩))이 죽었을 때 소동파(蘇東坡)가 제문을 지어 애도하기를, “공이 생존 시에는 큰 내와 큰 산악이 그 움직임은 볼 수 없으나 자연에 미치는 공과 이익은 숫자로 헤아려 두루 알 수 없는 것과 같았는데, 공이 별세하고 보니 깊은 산과 큰 못에 용이 없어지고 범이 떠나가자 온갖 변괴가 일어나 미꾸라지와 드렁허리가 춤을 추고 여우와 살쾡이가 호령하는 것과 같습니다.” 하였습니다. 아, 구양공의 기운은 그의 생존에 따라 존재했다가 죽음을 따라 소멸하였으니, 소동파가 이 때문에 공적인 세도와 사적인 자기 한 개인의 슬픈 정을 위해 통곡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선생의 존망(存亡)은 그 경우와 다릅니다. 생존 시에는 세도를 붙잡아 인심을 순화시켰고 돌아가신 뒤에도 후진들이 그 학문을 익혀 또 다음의 후진에게 전해 줌으로써 인륜이 또 유지가 되고 공론이 또 의지할 데가 있게 되었습니다. 이를 비유하자면 저 하늘의 일월이 비록 그 모습을 숨겼더라도 남은 빛이 사방을 비추어 사람들이 으슥하고 어두운 속에서 올바른 길을 찾아가고 범과 표범, 여우와 살쾡이의 굴에 빠져들지 않도록 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로 볼 때 선생의 기운은 선생의 생존에 따라 존재하거나 죽음을 따라 없어지거나 하지 않으니, 공사 간에 비통한 중에서도 위안이 되고 다행스럽다는 생각이 듭니다.
선생께서 닦으신 학문이 얼마나 정밀한지, 조예가 얼마나 깊은지는 학문이 빈약한 제 이 후생이 어떻게 그려 낼 수 있는 일은 아닙니다. 하지만 선생께서 일생 동안 학문에 부단히 힘쓰고 의지를 굳게 지키신 결과 그것이 행동과 언어의 과정에 드러난 것을 가지고 대강 살펴본다면, 따뜻하여 봄바람이 일어나고 부드러워 의표가 깨끗하고 원숙하여 학문이 깊었으니, 이것이 어찌 학문을 좋아하고 예를 좋아하며 덕을 지니고 훌륭한 말을 하는 군자가 아니겠습니까. 더구나 호방한 기운을 지니고서도 그것을 예법으로 잡아 꺾었으며 뛰어난 재주를 지니고서도 그것을 소박함으로 덮어 감쌌습니다. 동강(桐江 한(漢)나라 엄자릉(嚴子陵))의 높은 의리를 흠모하고 운곡(雲谷 주희(朱熹))의 도통(道統)을 찾아서 강론하여 구하고 좋아하여 즐기면서 몸이 늙어 가는 줄을 모르셨으니, 선생께서 얻은 것이 이미 여느 사람보다 훌륭하지 않습니까.
이 때문에 사업으로 나타난 것을 돌아보면 군현(郡縣)을 다스릴 때는 백성들이 문치(文治)를 행한 교화를 즐거워하였고 대궐에서 임금을 보좌할 때는 간언을 올리는 충성을 인정받으셨으며, 한 도의 관찰사가 되어서는 수령을 승진시키고 축출하는 법을 공정히 하고 헌부의 대사헌이 되어서는 국법의 적용을 옳게 할 것을 밝히셨습니다. 이리하여 정성을 다해 소장을 올리자 임금은 요순(堯舜) 같은 자세로 너그럽게 용납하였고, 관직을 떠나 전원으로 돌아오자 조정은 의문에 관해 물어오는 예를 극진히 하였습니다. 비록 조정에 오랫동안 벼슬하지 않아 그 역량을 크게 펴지는 못했으나 나라의 안위에 관한 중책과 많은 사람의 모범이 되는 상징성은 항상 한 몸에 지니셨습니다. 나중에는 한적한 곳에서 여유를 즐기고 강변에서 자유롭게 지내면서 불만도 없고 고민도 없이 태곳적의 태평한 세월을 즐기셨으니, 하늘이 선생에게 누리도록 내린 복이 또 많지 않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제 이 소자(小子)는 선생의 도덕과 의리를 흠모해 온 지 오래되었습니다만, 문하에 들어가 가르침을 받들지 못하여 의지할 곳을 얻지 못하다가 다행히 세파에 이리저리 밀려다니던 끝에 초야로 돌아왔습니다. 그리하여 하늘이 5, 6년 동안의 한가로운 세월을 빌려 줘 사수(泗水) 가의 문하에 출입하게 되었는데, 한 번 찾아가고 두 번 찾아가고 세 번을 찾아가더라도 싫어하지 않으시어 누차 담소하시는 소리를 접하고 수시로 당부하고 가르쳐 주시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이에 지난날 흠모하고 존경하는 정성을 가지고 장차 직접 학문을 전수받고 싶던 소원을 이룰 수 있게 되었으나 불행히도 선생의 병환이 오랫동안 지속되며 아무리 좋은 약도 효험이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믿었던 것은, 정신력이 왕성하여 평소와 다름없이 사람들과의 대화를 나누시면서 매일 중단하지 않고 문인들과 예를 강론하시므로 내심 신명이 혹시 이 세상과 이 유학을 위하여 선생을 보호하는 것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런데 이승에서의 문사(文事)가 채 마무리되지 않았는데 상제(上帝)가 부르는 명이 갑자기 내려와 복 없는 이 나라 백성의 처지를 생각지 않고 세상이 싫어 영원히 떠나실 줄을 어찌 알았겠습니까.
아, 나이 78세는 장수하지 않은 것이 아닌데도 모두 태산이 무너지고 들보가 부러진 듯이 슬퍼하고, 100권에 이르는 모범이 될 말씀들은 성대하지 않은 것이 아닌데도 화재로 인해 보전할 수 없었으니, 사림의 아픔이 어찌 한량이 있겠습니까. 다행히 《심경(心經)》을 풀이한 글이 남아 있고 《예설(禮說)》의 편집이 이미 완성되었기에 옛 성현이 서로 전수한 심오한 말들을 이를 통해 탐구할 수 있고 학자들이 각기 주장한 다른 설들도 이를 통해 가닥을 잡을 수 있습니다. 선생께서는 비록 세상을 떠나셨으나 선생께서 이루어 놓으신 도는 없어지지 않아 국가의 원기가 마침내 의지할 데가 있게 되었으며, 우리 후학을 진흥시킬 힘 또한 어찌 여기에 있지 않겠습니까.
아, 지난해 10월 선생을 하직하고 돌아올 적에 석 잔 술로 전별하여 아쉽기 그지없었는데, 올봄 통곡하며 상여를 보내면서 한 잔 술을 권해 올리는 지금 이 술을 맛보시는 모습을 눈으로 볼 수가 없습니다. 아, 슬픕니다. 이 우주가 너무도 무심합니다.

 

 

 

 

 

 

 

서(書)
  
 서(書)
최계승(崔季昇) 현(晛) 에게 보냄

 


추운 날씨 속에 험난한 길을 거쳐 집으로 돌아간 그대의 근황은 좀 어떠한가? 저번에 멀리서 나를 찾아 주어 그것만으로도 매우 고마웠는데, 며칠 동안 함께 다정하게 지내게 되어 너무도 기쁘고 다행스러웠네. 하지만 작별을 하려고 하자 다시 일어나는 아쉬운 마음을 감당할 수 없을 것만 같았으니, 이 또한 늙은이 심정의 일반적인 모습인가 싶네.
이지지(李至之) 아들의 이름은 흡(潝)인데 어떤 일 때문에 지금 일선(一善 선산(善山))으로 가게 되었기에 내게 그대의 마을을 들러 가라고 하면서 나의 노복도 동행하도록 하였네. 그대는 일찍이 지지와 서로 알고 있었는가? 그는 다름 아닌 여무(汝懋 이후경(李厚慶))의 조카로서 나의 문하에서 함께 공부했던 사람이네.
《대학연의보(大學衍義補)》 속에는 정자(程子), 장자(張子), 주자(朱子)께서 예에 관해 말씀한 내용이 많이 실려 있는데, 간혹 본 문집에 없는 것들이기는 하나 채택하여 《오선생예설》에 넣을 만한 가치가 있네. 그대의 집 책장 속에 이 책이 있다는 소식을 여기저기 수소문한 끝에 들어서 알았는데도 불구하고, 상산(商山)의 《한묵(翰墨)》과 심공(沈公)의 《옥해(玉海)》와 함께 빌려 달라고 재삼 당부하는 것을 다 망각하고 있었으니, 노병(老病)으로 정신이 몽롱해진 정도가 이렇게까지 되었단 말인가. 이씨(李氏) 아이를 붙여 보낸 이유도 이 서적들을 짊어지고 오게 하기 위해서일세.


 

[주C-001]최계승(崔季昇) : 계승은 최현(崔晛)의 자이다. 호는 인재(認齋)이고, 본관은 완산(完山)이다. 작자의 문인이며 작자보다 20년 연하이다.

 

 

행장(行狀)    
 행장(行狀)
유명조선국(有明朝鮮國) 가선대부(嘉善大夫) 경상도관찰사 겸 병마수군절도사순찰사(慶尙道觀察使兼兵馬水軍節度使巡察使) 증(贈) 가의대부(嘉義大夫) 이조참판 겸 동지경연의금부춘추관성균관사 홍문관제학 예문관제학 세자좌부빈객(吏曹參判兼同知經筵義禁府春秋館成均館事弘文館提學藝文館提學世子左副賓客) 김공(金公) 행장

 


공의 휘는 성일(誠一)이고 자는 사순(士純)이며 자호는 학봉(鶴峯)으로, 향년은 56세이다. 성은 김씨이고 본관은 경상도 의성현(義城縣)이다.
증조(曾祖) 만근(萬謹)은 성균관 진사(成均館進士)로, 통훈대부(通訓大夫) 통례원 좌통례(通禮院左通禮)에 증직되었다. 비(妣)는 해주 오씨(海州吳氏)로, 숙인(淑人)에 증직되었다.
조(祖) 예범(禮範)은 통정대부(通政大夫)로, 승정원좌승지 겸 경연참찬관(承政院左承旨兼經筵參贊官)에 증직되었다. 비는 영해 신씨(寧海申氏)로, 숙부인(淑夫人)에 증직되었다.
부(父) 진(璡)은 성균관 생원(成均館生員)으로, 자헌대부(資憲大夫) 이조판서 겸 지의금부사(吏曹判書兼知義禁府事)에 증직되었다. 비는 여흥 민씨(驪興閔氏)로, 정부인(貞夫人)에 증직되었다.

김씨는 본디 신라(新羅)의 종성(宗姓)으로 경순왕(敬順王) 휘 부(傅)의 후손이다. 세상에는 경순왕의 아들 휘 석(錫)이 의성군(義城君)에 봉해졌다고 전한다. 그 후손에 휘 용비(龍庇)라는 이가 있어 벼슬이 태자첨사(太子詹事)에 이르렀는데, 백성들에게 공덕이 있었다. 이에 고을 사람들이 고을의 관아에 위패를 모셔 놓고 수해와 한해가 있거나 전염병이 돌면 기도하였다. 공은 선조의 영령을 모독하는 것이라고 여겨 종당(宗黨)과 의논하여 고을 관아의 동편에 따로 사당을 세우고 진민사(鎭民祠)라고 현판을 건 다음 해마다 제사를 지냈다.
첨사는 휘 의(宜)를 낳았으니 은청광록대부(銀靑光祿大夫)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였다. 복야는 휘 서지(瑞之)를 낳았으니 조현대부(朝顯大夫) 내영고 소윤(內盈庫少尹)이었다. 소윤은 휘 태권(台權)을 낳았으니 봉익대부(奉翊大夫) 문예부 좌사윤(文睿府左司尹)이었다. 사윤은 휘 거두(居斗)를 낳았으니 봉익대부 공조 전서(工曹典書)였다. 전서는 휘 천(洊)을 낳았으니 선략장군(宣略將軍) 진례도 도만호(進禮島都萬戶)였다. 만호는 휘 영명(永命)을 낳았으니 통훈대부 신녕 현감(新寧縣監)이었다. 현감은 휘 한계(漢啓)를 낳았으니 통훈대부 부지승문원사(副知承文院事)였다. 이분이 공에게 고조가 되는데, 우리 문종(文宗)과 노산군(魯山君)을 섬겨 경연(經筵)에 출입하면서 명성이 자자하였다. 그러나 시대 상황이 크게 변하자 외직(外職)으로 나가기를 청하여 남쪽으로 돌아왔다가 병으로 인해 그만둔 뒤에 다시 벼슬하지 않았다.
김씨는 전서공(典書公) 때부터 대대로 안동부(安東府)에서 살다가 통례공(通禮公) 때에 임하현(臨河縣)으로 장가들어 그곳에다 살아갈 터를 정하였다. 3대(代)의 조상이 벼슬을 추증받은 것은 모두 공이 귀하게 됨으로 인해서였다. 판서공은 좌정승(左政丞) 문도공(文度公) 민제(閔霽)의 현손인 민세경(閔世卿)의 집에 장가들어 다섯 아들을 낳았는데, 공은 그 가운데 넷째로 가정(嘉靖) 무술년(1538, 중종33) 12월 을사일 정해시에 임하현 천전리(川前里) 본가에서 태어났다.
공은 어린아이 적부터 남달리 총명하였다. 여러 아이들과 함께 놀 때에도 우뚝하게 두각을 드러냈는데, 만약 뜻에 맞지 않는 아이가 있으면 단호히 멀리해 버리고 조금도 굽힌 적이 없었다. 판서공이 기이하게 여겨 이르기를, “이 아이는 후일에 반드시 사람들의 눈치나 보면서 세속을 따르지는 않을 것이다.” 하였다. 일찍이 여러 아이들과 높은 바위 위에서 놀다가 한 아이가 발을 잘못 디뎌 밑으로 떨어졌는데, 다른 아이들은 모두 놀라 달아났으나 공은 즉시 사람들에게 달려가 알려 목숨을 살리게 하였다. 그러자 그 말을 전해 들은 사람들이 기특하게 여기면서 송나라 사마광(司馬光)이 독을 깨뜨려 물에 빠진 아이를 살려 낸 일에 비하였다. 9세 때 모부인(母夫人)의 상(喪)을 당하였는데, 마치 어른처럼 슬퍼하고 사모하였다.
판서공의 교훈이 매우 엄격하였는데 공은 항상 회초리를 맞고도 잘못을 고치지 못하여 아버지의 마음을 거스르지나 않을까 걱정하였다. 홍원 현감(洪原縣監)으로 부임하는 백씨(伯氏) 극일(克一)을 따라 그곳에 가 있었는데, 하루는 성 안에 불이 났다. 그러자 다른 사람들은 모두 달려가서 아문(衙門)의 불을 끄고 있었는데, 공은 홀로 등에는 책 상자를 짊어지고 손에는 전패(殿牌)를 받들고 다른 곳으로 가서 불을 피하였다. 그러자 백씨가 다른 사람들에게 이르기를, “기이하다. 내 아우는 반드시 학문을 독실히 하고 나라에 충성하는 선비가 될 것이다.” 하였다.
약관(弱冠)의 나이에 유학(遊學)하여 계씨(季氏) 복일(復一)과 함께 소수서원(紹修書院)에서 글을 읽었는데, 어느 날 탄식하면서 이르기를, “사람이 세상에 태어나 과거 공부에만 힘쓰고 자신을 위하는 학문을 알지 못한다면, 이는 매우 부끄러운 일이다. 퇴계(退溪 이황(李滉)) 이 선생(李先生)은 오늘날의 유종(儒宗)이시니, 어찌 가서 가르침을 청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그러고는 드디어 판서공에게 청하니, 판서공이 기뻐하면서 허락하므로 그 즉시 계씨와 함께 서원에서부터 걸어서 이 선생을 찾아뵈었다. 선생은 그 행동거지를 보고 이미 마음속으로부터 사랑하였고 이어서 또 인심(人心)과 도심(道心)의 구분과 선기옥형(璿璣玉衡)의 제도에 대해 물어보았다. 공은 물러나와서 계씨와 함께 반복하여 연구하면서 직접 그림을 그려 만들기도 하였다. 선생이 밤중에 걸어나와 엿보니, 형제가 이마를 맞대고 쉬지 않고 강론하고 있었다.
선생은 그 성실하고 진지한 모습을 가상하게 여겨 크게 기대하였다. 일찍이 어떤 사람에게 보낸 편지에 이르기를, “김사순(金士純)이 이곳 도산(陶山)에 와 있는데, 무더위를 무릅쓰고 산을 넘어 왕래하면서 《서전(書傳)》 가운데 의심나는 뜻을 물어보고 있다. 이 사람은 영민하면서도 배우기를 좋아하여 그와 학문을 함께 하노라면 매우 유익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하였다. 그리고 또 손자 이안도(李安道)에게 보낸 편지에 이르기를, “요사이 보니 김 아무개는 지향과 취미가 매우 좋아 능히 이 일에 전념한다. 결심이 이처럼 진지하고 간절하다면 무엇을 구한들 얻지 못하겠으며, 무엇을 배운들 이루지 못하겠는가.” 하였다. 또 일찍이 성현들이 서로 전한 심법(心法)을 낱낱이 서술하여 병명(屛銘)을 만들고 이를 손수 정서(淨書)하여 공에게 주었다.
집이 가난하여 언제나 보리쌀과 나물을 식량으로 가져갔으며 때로는 그것도 미처 이어 대지 못했으나, 공은 개의치 않고 오직 학문에 힘쓰지 못할까만을 걱정하였다. 괴로움을 꾹 참고 노력하여 학문이 진보되기만을 구하였으므로 동문들이 모두 추앙하고 탄복하였다.
공은 타고난 본성이 명리(名利)에 대한 욕심이 없었다. 일찍이 과거 공부를 그만두고자 하여 퇴계 선생께 여쭈었는데, 선생이 이르기를, “부형이 계시는데 어찌 자신의 뜻대로만 해서야 되겠는가. 다만 내외(內外)와 경중(輕重)의 구분을 밝히지 않아서는 안 되네. 모름지기 ‘성현 도에 저대로 초연한 곳 있나니, 아이들과 똑같이 분망한 걸 배울쏘냐.〔箇中自有超然處 肯學兒曹一例忙〕’라는 구절을 기억하여 가장 중요한 마음가짐으로 삼아야만 될 것이네.” 하였다.
임술년(1562, 명종17)에 문정왕후(文定王后)가 요승(妖僧) 보우(普雨)의 말을 따라서 희릉(禧陵 중종의 계비 장경왕후(章敬王后)의 능호)을 천장(遷葬)하고 정릉(靖陵 중종의 능호)의 묏자리를 새로 잡으려고 하였는데, 이 당시에 윤원형(尹元衡)이 정권을 잡고 있었으므로 온 조정 사람들이 그의 뜻에만 따른 채 감히 그 부당함을 말하는 자가 없었다. 공은 의분에 차서 상소를 짓기를, “크게 불가한 점이 다섯 가지가 있습니다. 신도(神道)가 아직까지 조용한데 까닭 없이 움직여 옮기는 것이 첫째요, 자전(慈殿 문정왕후)께서 뒷날에 같은 묘혈에 묻힐 계획으로 오랫동안 배장(配葬)한 원비(元妃)로 하여금 외로운 넋이 되게 하는 것이 둘째요, 새 능의 풍토(風土)의 형세가 지맥을 끊는 금기를 범하여 절대로 지금의 자리만 못한 것이 셋째요, 비고 허한 곳을 보토(補土)하여 메우느라 토목 공사를 크게 일으켜서 백성들이 고통을 감내하지 못하게 함으로써 백성을 사랑했던 선왕(先王)의 마음을 상하게 하는 것이 넷째요, 사왕(嗣王)께서 어리시고 정사는 궁중으로부터 나오는데 한 요승의 사특한 말로 인해 경솔하게 국가의 대사를 그르치는 것이 다섯째입니다.” 하였는데, 말투가 강직하여 조금도 회피하는 것이 없었다. 하지만 결국 부형들이 극력 저지하여 올리지 못하자 근체시(近體詩) 한 수를 지어 분개하는 마음을 토로하였다.
갑자년(1564)에 셋째 형 명일(明一), 아우 복일(復一)과 함께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였다. 삼형제가 동시에 나란히 합격하였으므로 당시에 영광스러운 일이라고 칭송이 자자하였으나 공은 대장부의 사업이 과거에 합격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고 여겨, 뜻을 더욱 굳게 세우고 학문과 덕을 더욱 독실하게 닦았다. 성균관에서 공부하게 되어서는 행동거지와 말하고 침묵하는 것을 세속에 휩쓸려서 구차스럽게 함께하지 않았으며, 의론이 명쾌하고 취사가 과감하였다. 이에 벼슬에 나가기 전부터 사람들이 이미 원대한 국량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융경(隆慶) 무진년(1568, 선조1)에 별시(別試) 급제(及第)로 출신(出身)하여 권지 승문원부정자(權知承文院副正字)에 선임되었고, 기사년(1569)에 정자(正字)로 승진하였다. 경오년(1570)에 추천되어 예문관 검열(藝文館檢閱)에 제수되었고, 신미년(1571)에 대교(待敎)로 승진하였다. 임신년(1572)에 봉교(奉敎)로 승진하여서는 상소하여 노릉(魯陵 노산군(魯山君)의 능)을 봉식(封植)할 것과 사육신(死六臣)의 관작을 회복할 것을 청하였으며, 아울러 임금의 덕에 관한 일과 당시의 폐단에 대해서까지 논하였는데, 상소에 적은 글이 수천 자였다. 그 뒤에 노릉을 봉식하고 사육신의 자손이 서용된 것은 공이 처음 그 일을 거론한 데에서 말미암은 것이다.
만력 계유년(1573, 선조6)에 성균관 전적(成均館典籍)에 올랐다가 형조 좌랑(刑曹佐郞)으로 옮겼는데, 그 당시 많이 밀려 있던 옥송(獄訟)을 대부분 즉시 판결하였으므로 당상관과 여러 재신(宰臣)들이 모두 칭찬하였다. 사간원 정언(司諫院正言)에 제수되었을 때 김규(金戣)가 사간(司諫)으로 있으면서 상회례(相會禮)를 행하려고 하였다. 공이 일찍이 경연 석상에서 그 사람됨을 비루하게 여기고 있었으므로 이때에 이르러 대궐에 나아가 홀로 아뢰면서 곧바로 그를 배척하였다. 그리하여 결국 김규는 조정에서 용납되지 못했고 공도 체직되어 전적(典籍)으로 옮겨 제수되었다. 이로부터 조정의 관원들이 공을 어려워하고 공경하였다. 그러자 김공 응남(金公應南)이 편지를 보내 말하기를, “곧은 절개가 천 길 절벽처럼 특출하니 이는 30년 내에 없었던 일입니다. 철면어사(鐵面御史)의 풍채를 직접 보게 되었으니 얼마나 다행한 일입니까.” 하였다.
이해 가을 7월에 홍문관 부수찬(弘文館副修撰)에 제수되었으며, 조금 있다가 병조 좌랑(兵曹佐郞)으로 옮겨졌다. 겨울에 지제교(知製敎)를 겸임하였다. 갑술년(1574)에 홍문관 수찬에 제수되었으며, 또다시 사간원 정언에 제수되었다.
어느 날 상이 경연에 납시어 편안한 기분으로 묻기를, “경들은 나를 전대의 제왕들과 비교해 볼 때 어떤 임금과 비슷하다고 생각하는가?” 하였다. 어떤 사람이 대답하기를, “요순(堯舜) 같은 임금입니다.” 하였는데, 공은 대답하기를, “요순도 될 수가 있고, 걸주(桀紂)도 될 수가 있습니다.” 하였다. 그러자 상이 이르기를, “요순과 걸주가 그처럼 비슷한가?” 하니, 공이 대답하기를, “능히 선(善)을 생각하면 성인이 되고 선을 생각하지 않으면 미친 사람이 되는 법입니다. 전하께서는 천부적인 자질이 고명하시니 요순처럼 되기가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다만 스스로를 훌륭하다고 여겨 간하는 말을 받아들이지 않는 병통이 있습니다. 간언을 받아들이지 않은 것은 걸주가 망한 까닭이 아니겠습니까.” 하자, 상이 안색을 바꾸고 자세를 고쳐 앉으니, 경연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벌벌 떨었다. 유성룡(柳成龍)이 나아가 아뢰기를, “두 사람의 말이 다 옳습니다. 요순 같다고 대답한 것은 임금을 인도해 드리는 말이고, 걸주에 비유한 것은 경계하는 말로, 모두 다 임금을 사랑하여 한 말입니다.” 하였다. 그러자 상이 얼굴빛을 달리하고 술을 내리게 한 다음 자리를 파하였다.
을해년(1575, 선조8) 봄에 도로 병조 좌랑에 제수되었다가 어떤 일로 인해 파직되어 고향으로 내려갔다. 인순왕후(仁順王后 명종의 비)의 장례일을 당했을 때 새벽부터 뜰 아래 엎드려 날이 저물 때까지 있었는데 자제들이 방 안으로 들어갈 것을 청하자, 공이 이르기를, “오늘이 어찌 신하 된 자가 몸이 편하기를 추구할 날이겠느냐.” 하면서, 끝내 지친 기색이 없었다. 그 뒤 곧바로 서용하라는 명을 받아 병조 정랑에 올랐다.
병자년(1576)에 이조 좌랑(吏曹佐郞)에 제수되었는데, 인재를 등용하고 자신이 처신하는 데 있어 더없이 공평하고 사사로움이 없었다. 이조의 아전이 일찍이 공의 관교(官敎)를 가지고 왔는데, 사일(仕日)과 급수(級數)를 따져 보니 달수가 기준에 차지 않았다. 아전이 말하기를, “조(曹)에서 예전부터 내려오는 규칙입니다.” 하니, 공은 이르기를, “비록 예전의 규칙이라 하더라도 나는 그렇게 하지 않겠다.” 하자, 아전이 황송해하면서 사죄하고 물러갔다.
독서당(讀書堂)에 선발되어 들어갔는데, 공은 두렵게 여기면서 말하기를, “독서당을 설치한 것은 미리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 그들로 하여금 부지런히 힘써 학문을 쌓게 하자는 것이다. 퇴계 선생께서 독서당에 계실 적에는 여러 동료들은 아무 거리낌 없이 함부로 행동하였으나 공은 홀로 문을 닫고 들어앉아 글을 읽으셨다. 그런데 하물며 나 같은 후생이 어찌 힘쓰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그러고는 말미를 받을 적마다 종일토록 꿇어앉아 글을 읽었고 술자리를 벌여 마시며 노느라 공부를 폐한 적이 없었다.
이해에 조정에서 한훤당(寒暄堂 김굉필(金宏弼))과 일두(一蠹 정여창(鄭汝昌)) 두 선생에게 시호를 내렸는데, 모두 공이 명을 받들고서 내려가 반포하였으며, 예물로 받은 폐백은 모두 서원으로 보냈다. 또 명을 받들어 퇴계 선생의 시호를 내릴 때도 역시 전처럼 하였다.
정축년(1577) 봄에 사은 겸 개종계주청사(謝恩兼改宗系奏請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차임되었다. 이때 판서공의 나이가 70이 넘었는데, 부모의 나이 70세가 넘었을 경우 상소하여 외국에 사신으로 나가는 것을 면하게 해 줄 것을 청하는 예전 규례가 있었다. 즉시 판서공에게 서신을 보내 여쭈니, 판서공이 답하기를, “내가 비록 나이는 많지만 다행히 병은 없다. 너는 이미 벼슬길에 들어섰으니 의리상 사적인 일을 돌아보아서는 안 된다. 나 때문에 염려하지 말고 속히 임금의 명을 따르도록 하라.” 하니, 사람들이 그 아들에 그 아버지라고 하였다. 정사(正使) 윤두수(尹斗壽), 질정관(質正官) 최립(崔岦)과 함께 조정에 하직 인사를 하고 출발하였다.
이전에 종계(宗系)와 악명(惡名) 두 건에 대해 중국 조정에 변무(辨誣)하여 고쳐서 편찬하겠다는 허락을 받기는 받았으나, 《대명회전(大明會典)》에 옛날부터 틀리게 기록되어 있었던 내용을 그대로 따라서 편찬하고 있었다. 공은 황도(皇都)에 이르러 사은(謝恩)한 뒤에 즉시 같이 간 사람들과 함께 예부(禮部)로 가서 여러 차례 자문(咨文)을 올렸다. 그리고 처음으로 한림(翰林) 당학징(唐鶴徵)이 편찬한 책을 보게 되었는데, 내용이 소략하고 사실과 달랐다. 이에 또다시 개정해 줄 것을 청하면서 다방면으로 하소연하자, 상서(尙書) 마공(馬公)이 낭중(郞中) 심현화(沈玄華)를 시켜 고쳐서 편찬하게 하였다. 그러고는 손수 글자를 지우고 고쳤으며 몇 줄을 더 써넣기까지 하였는데, 당학징이 편찬했던 것과 비교해 볼 때 가장 분명하였다.
당시에 최립이 문장에 뛰어나다고 이름났고 해부(該部 명나라 예부)에서 진짜 문장가의 솜씨라고 칭찬하였으나, 공이 지은 글은 사람들이, 말뜻이 간절하여 장주문(章奏文)의 체제에 잘 맞는다고 하였으므로, 전후로 예부에 올린 글이 대부분 공의 손에서 나오게 되었다. 종계가 더럽혀진 원통함과 역대 임금들이 하늘에 호소한 정성을 모두 신설(伸雪)하여, 뒷날에 《대명회전》을 반포하여 내리고 사신이 황제의 칙서(勅書)를 받들고 오게 된 것은 모두 이번 사행(使行)에서 바로잡은 결과였다.
공은 풍채가 고결하고 정직하다는 소문이 조정에 파다하였으므로 공이 서장관으로 차임되자 아랫사람들이 두려워하였다. 공은 평양(平壤)에 이르러 참람하고 사치스러운 물건을 적발하고, 옥하관(玉河館)에 이르러서는 짐바리를 조사하여 일절 용서하지 않았다. 역관(譯官)들이 서로 경계하여 말하기를, “차라리 빈손으로 돌아갈지언정 삼가 조심해서 서장관에게 죄를 받지는 말라.” 하였다.
정사(正使)는 평소에 공을 공경하여 서로 교제할 때 예의를 깍듯이 하여 대하였으며, 무슨 일을 처리할 때는 반드시 먼저 공의 의향을 살폈다. 압록강(鴨綠江)을 건너간 뒤에 양가죽으로 만든 갖옷 한 벌을 공에게 주며 말하기를, “노친이 계신다고 하기에 감히 이를 선물로 드립니다.” 하니, 공은 즉시 받았다가 다음 날 아침에 도로 돌려보내면서 말하기를, “후하신 정은 매우 고맙습니다만 저에게도 이 옷이 있어 아버님께서 추위를 막을 수 있으므로 더 가질 필요가 없습니다.” 하니, 정사가 부끄러워하면서 심복하였다. 이해 겨울에 이조 정랑으로 올랐다.
무인년(1578, 선조11)에 홍문관 교리(弘文館校理)에 제수되었다. 일찍이 입시(入侍)한 자리에서 권신(權臣)이 뇌물을 받은 일에 대해 말이 미치게 되었는데, 공이 아뢰기를, “성명(聖明 선조(宣祖))의 세상에서도 이런 일이 있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하고는, 이어 탐욕을 부리는 풍습이 크게 성행하고 뇌물을 드러내 놓고 주고받는 폐단에 대해 극력 진달하니, 상께서 엄한 목소리로 그게 누구냐고 물었다. 공은 즉시 낱낱이 그 이름을 들어 아뢰자, 좌우에 있던 사람들이 목을 움츠렸다. 또 당시의 재신(宰臣) 중에 와서(瓦署)의 기와를 사적으로 판 사람이 있었는데, 공이 일찍이 그와 함께 입시한 자리에서 아뢰기를, “조종조(祖宗朝)가 와서를 설립한 뜻은 가난한 백성을 구제하기 위해서였지 권귀(權貴)들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오늘날의 유사(有司)는 자기 물건처럼 여겨 거리낌 없이 사적으로 주고 있습니다.” 하니, 그 사람이 바닥에 엎드려 사죄하였는데 땀이 흘러 등이 젖었다. 이해 겨울에 도로 이조 정랑에 제수되었다.
기묘년(1579)에 춘추관 기주관(春秋館記注官)을 겸임하였고, 곧바로 사헌부 장령(司憲府掌令)에 제수되었다. 공은 임금의 면전에서 과감하게 간하며 피하지 않고 탄핵하였으므로 사람들이 ‘전상의 호랑이〔殿上虎〕’라고 불렀다. 하원군(河原君) 이정(李珵)이 왕실의 종친으로서 주색에 빠져 멋대로 행동하여 한없이 폐단을 끼치고 있었는데, 공이 그 집 종을 잡아다가 묶어 놓고는 중형(重刑)으로 엄하게 국문하였다. 그 말을 들은 사람들이 다리를 떨었으나 공은 동요하지 않았다.
상이 경연에서 묻기를, “근래에 염치가 날로 없어지는 것은 어째서 그런가?” 하니, 공이 대답하기를, “대신으로 있는 자도 다른 사람에게서 뇌물을 받으니, 염치가 없어지는 것이 이상할 것도 없습니다.” 하였다. 이때 정승 노수신(盧守愼)이 자리에 앉아 있다가 자리를 피해 바닥에 엎드려 아뢰기를, “성일(誠一)의 말이 옳습니다. 신의 집안사람 중에 북방의 변장(邊將)이 된 자가 있는데, 신에게 노모가 있다는 이유로 작은 초피(貂皮) 갖옷을 부쳐왔기에 신이 받아서 어미에게 주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대간은 바른말을 하고 대신은 허물을 인정하니, 둘 다 잘했다고 하겠다. 조정에 있는 신하들이 이와 같이 서로 능히 타이르고 격려한다면, 나라를 다스림에 있어서 무슨 어려움이 있겠는가.” 하였다. 공은 노 정승과 본디 정분이 두터웠는데도 면전에서 질책하고 용서하지 않았다. 노 정승이 밖에 나와 사례하기를, “옛날의 도를 오늘날에 다시 보았습니다. 공이 아니면 누가 그렇게 할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의정부 검상(議政府檢詳)으로 옮겨졌다가 사인(舍人)으로 올랐으며, 도로 장령에 제수되었다가 얼마 뒤에 또 사인이 되었다. 의정부의 옛 풍습이 대범하여 자기를 잘 단속하지 않고 노래와 여색이며 익살을 즐기는 것을 숭상하였는데, 공은 몸가짐을 엄숙하게 가져 변치 않았다.
가을에 함경도 순무 어사(咸鏡道巡撫御史)에 차임되었는데, 도내의 탐관오리 중에는 공이 부임해 온다는 소문만 듣고도 인끈을 풀어놓고 지레 떠나는 자가 있었다. 당시 도망한 군인의 일족(一族)이 괴로움을 당하는 폐단이 온 도 사람들의 큰 걱정거리로, 서로 이끌고 흩어져 떠나는 탓에 열 집에 아홉 집은 비어 있었다. 공은 먼저 그 실태를 파악한 뒤에 조목별로 상소를 올려 아뢰었다. 그러자 조정에서는 일일이 그에 따라 시행하여 해묵은 폐단이 조금이나마 풀렸다. 그리하여 떠돌아다니던 백성이 다시 모여들어서는 말하기를, “어사는 우리의 부모이시다.” 하였다. 북쪽 지방은 날씨가 매우 추운 탓에 여행하기가 몹시 어려웠으나 공은 눈보라를 무릅쓰고 뛰어다니며 잠시도 쉬지 않았다. 어떤 사람이 너무 수고한다고 하자, 공은 말하기를, “수비병들이 추위에 얼어 고생하고 있으니 옷을 나누어 주는 일이 시급하다. 그런데 내가 어찌 감히 길을 지체하여 나 자신만 편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변방의 보루를 두루 돌면서 병사와 백성들을 어루만져 편안하게 하였으며, 오랑캐의 경내까지 들어가 형편을 모두 살피고 돌아왔다.
이듬해 4월에 복명(復命)하고 그다음 날 휴가를 청해 귀근(歸覲)하니, 판서공은 이미 병에 걸려 위독한 상태였다. 공은 형제들과 밤낮으로 옆에서 모시면서 직접 약을 조제하고 맛을 보아 시험하였다. 초상을 당하여서는 물 한 모금도 마시지 않고 장맛비에 온통 진흙탕이 된 마당에 쓰러져 있었으며, 졸곡(卒哭) 전까지 곡소리를 그치지 않았고 잠을 잘 때에도 자리를 펴지 않았다. 장사를 마친 뒤에는 묘 옆에 여막(廬幕)을 짓고 최질(衰絰)을 풀지 않았고 발길이 동구 밖을 나온 일도 없었으며 집안일에 대해서는 한 번도 물은 적이 없었다. 상장(喪葬)의 절차는 일체 《의례(儀禮)》와 《가례(家禮)》를 따르고 두씨(杜氏 당나라 두우(杜佑))의 《통전(通典)》과 구씨(丘氏 명나라 구준(丘濬))의 《가례의절(家禮儀節)》 등의 책을 참고하였는데, 자제와 문생들도 모두 이를 강습하여 행하였고, 부녀자들 또한 모두 예문(禮文)을 알았다. 그 뒤에 향리 사람들이 의논해 공의 효행을 갖추어서 관가에 보고하였다. 마침 공의 벗이 고을 수령으로 있었는데 오랫동안 감탄하고는 말하기를, “이런 일 따위가 어찌 공을 높이는 일이 되겠는가.” 하고, 마침내 위에 아뢰지 않았다.
임오년(1582, 선조15)에 복제(服制)를 마쳤다. 담제(禫祭)를 지낸 뒤에 중씨(仲氏) 수일(守一)과 함께 백운정(白雲亭)에서 은거하였다. 백운정은 바로 판서공이 터를 잡고 중씨가 지은 것으로, 북쪽으로는 가묘(家廟)를 마주 대하여 있고 남쪽으로는 선영을 바라볼 수 있는 곳이었는데, 상을 마친 뒤에도 집으로 곧바로 돌아가지 않은 것은 슬픔이 다 가시지 않아 그곳에다 추모하는 생각을 부쳤던 것이다. 이해에 여러 차례 사간원 사간(司諫院司諫), 성균관 사예(成均館司藝) 등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취임하지 않았고, 의정부 사인에 제수되어서는 비로소 조정에 나아가 사은하였다. 이어 사간원 사간으로 옮겨 제수되었다.
계미년(1583) 3월에 사인으로 있던 중 지방관으로 나가 황해도 순무 어사(黃海道巡撫御史)가 되었다. 당시에 군정(軍政)이 해이해져서 군적(軍籍)은 빈 장부만 남아 있었으며, 부역이 과중하여 백성들이 그 압박을 감당하지 못하고 있었다. 공은 개연히 제도를 개혁하고 병든 백성들을 살릴 뜻을 품어 조목별로 상소하여 그 폐단에 대해 극력 진술하였다. 경내에 도착한 뒤에는 호령이 바람 불듯 시행되어 군사와 백성들이 모두 원통함을 풀 수가 있었으며, 탐관오리를 적발하되 위세가 있다고 하여 용서하지 않았다.
미처 조정으로 돌아오기도 전에 나주 목사(羅州牧使)에 특별히 제수되어 복명한 뒤에 곧바로 대궐에 나아가 하직 인사를 하였다. 이에 어떤 사람이 탄식하기를, “장유(長孺)는 사직(社稷)을 지킬 그릇이다. 어찌 회양(淮陽) 관아에 누워 다스리는 자리에 합당하겠는가.” 하니, 공은 말하기를, “벼슬살이를 서울에서 하거나 지방에서 하거나 모두가 직분이니 오직 있는 자리에서 심력을 다하면 그만인 것이다.” 하였다. 임지에 도착해서는 날마다 사모 관대를 갖추고서 백성들을 대하였는데, 날씨가 아무리 춥거나 덥더라도 그 복장을 폐하지 않았다. 정사를 함에 있어서는 불쌍한 자들을 돌보고 세력이 강한 자를 억누르는 것을 우선으로 하였으며, 자신의 몸가짐을 더욱 엄하게 하였다. 나주는 정무가 매우 복잡한 고을이므로 공은 민정(民情)이 소통되지 않을까 매우 두려운 나머지 북 하나를 내걸도록 명하고는 영을 내리기를, “만약 억울한 사정을 하소연하고 싶은 자는 반드시 와서 이 북을 치라.” 하였다. 그러자 백성들이 소회가 있으면 반드시 알려 일이 막히는 법이 없어서 위아래가 서로 화합하니, 고을 백성들이 크게 기뻐하였다. 그리고 공은 간사함을 적발해 내는 것이 귀신 같아서 사람들이 감히 속이지 못하였다. 위조한 문서를 가지고 서로 다투면서 그 시비를 가려내지 못하고 있던 송사가 있었는데, 공이 물을 가져오게 하여 풀로 붙인 곳을 적셔 보니 어제 붙인 것처럼 찰기가 있었다. 이에 다시 오래된 문서를 가져다가 적셔 보니 찰기가 이미 다 없어졌으므로 수고로이 따져 묻지 않고서도 실상이 저절로 드러났다.
또 나주 고을에 나씨(羅氏)와 임씨(林氏)가 살고 있었는데, 이들은 모두 한고을의 거족(巨族)이었다. 나씨 집에서 임씨 집으로 장가들었는데, 남편이 자식이 없이 죽자, 임씨 집에서 몰래 다른 사람의 아이를 훔쳐 와 여종과 짜고 거짓으로 유복자를 잉태한 것처럼 꾸며 자신이 낳은 자식으로 만들었다. 나씨 가문에서 진위를 가려 주기를 청하면서 다른 성씨를 들여와 종족의 혈통을 어지럽혔다고 송사하였는데, 여러 차례 심문을 거치고서도 몇 년 동안 판결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공은 한번 보고서 간파하여 거짓임을 밝혀내 곧바로 판결을 내리자, 공론이 통쾌하게 여겼다. 이에 온 도내의 송사가 모두 공에게 몰려들었는데, 공은 판결을 내리기를 물 흐르듯이 하여 조금도 적체되는 일이 없었다. 공은 백성들을 어루만지고 아전을 단속하되 너그러움과 엄격함을 잘 조화시켜 행하였으며, 방치되었던 온갖 일들을 모두 추슬러 치적이 있다는 명성이 크게 떨쳐졌다. 그러자 상께서 글을 내려 이르기를, “그대가 엄격하고 분명하게 고을을 다스리고 송사를 판결하는 데 있어 흔들리지 않아 교활한 자들은 매우 조심하고 백성들은 편하게 여긴다는 것을 알았으니, 매우 가상하다. 표리(表裏) 한 벌을 하사하노라.” 하였다.
나주 고을은 본디 선비가 많다고 소문이 났으나 이들이 모여서 공부할 만한 곳이 아직 없었다. 공은 직접 성의 서쪽에 있는 금성산(錦城山) 기슭에 터를 잡아 서원(書院)을 창건하였는데, 규모와 학령(學令)은 일체 백록동서원(白鹿洞書院)의 예를 따랐다. 그리고 사우(祠宇)를 세워 한훤당(寒暄堂) 김 선생(金先生), 일두재(一蠹齋) 정 선생(鄭先生), 정암(靜庵 조광조(趙光祖)) 조 선생(趙先生), 회재(晦齋 이언적(李彥迪)) 이 선생(李先生), 퇴계(退溪) 이 선생(李先生)의 위패를 봉안(奉安)하였다. 공은 공무를 보는 여가에 혼자서 말을 타고 그곳으로 달려가 유생들과 경서의 뜻을 강론하였으며, 근태(勤怠)에 따라 점수를 매김으로써 인재를 양성하는 방도를 다하였다.
공은 자신을 봉양하는 데에는 간소히 하면서도 남을 대접하는 데는 후하게 하였다. 대소 빈객들을 모두 예로써 대접하였으며, 일가들 가운데 가난한 자들에 대해서도 모두 애처롭게 여겨 보살펴 주었다. 을유년(1585, 선조18)에 백씨의 부음(訃音)이 이르자 애통한 마음에 관아의 공무를 폐하고 장례와 제사에 쓸 물품을 심력을 다해 마련하면서 말하기를, “우리 형은 일찍이 다섯 고을로 아버지를 봉양하였는데, 나는 조정에 벼슬하면서도 홀로 녹봉으로 봉양하지 못하였다. 이제 아버지를 섬기는 마음으로 형을 섬기려고 하였는데 형이 갑자기 또 이렇게 되었으니, 내가 어떻게 마음을 가눌 수 있겠는가.” 하였다.
병술년(1586) 가을에 사직단(社稷壇)에 불이 나서 사당이 전부 타 버리자, 고을 사람들이 새로 짓기를 청하였다. 그러자 공은 말하기를, “사직단이 불탄 것은 그 죄가 수령에게 있는 것이니, 덮어 숨겨서는 안 된다.” 하고, 마침내 사유를 갖추어 조정에 아뢰어 파직당하였다. 공이 처음 부임하였을 적에 먼저 사직단에 나아갔다가 제단이 낮고 좁으며 위패도 함부로 간수하고 있는 것을 보고는 매우 불경스럽게 여겼다. 이에 예(禮)를 상고하고 지형을 살펴서 제단을 쌓고 사당을 세우되 오로지 법식대로 하였으며, 봄가을로 제향을 지내면서 몸소 깨끗이 청소하니, 아전과 백성들이 비로소 사직단이 중한 곳임을 알았다. 그런데 마침내 사직단으로 인해 관직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이 일이 간사한 자의 음모에서 나온 것임은 단연코 의심할 여지가 없어서 사람들이 모두 어떤 자를 지목하면서 분개하였으나 공은 끝내 내버려 두고 따져 묻지 않았다.
공은 고을살이를 청렴하고 신중하게 하여 절조가 있다는 명성이 원근에 널리 퍼졌다. 고향으로 돌아왔을 때는 매우 빈궁하여 방안이 텅 비었으나 즐거운 마음으로 만족해하였으며, 문을 닫고 들어앉아 글을 읽었다. 시사(時事)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고 말하지 않았으며, 찾아오는 사람이 있더라도 가벼이 응접하지 않았다. 혹시 서울에서 내려온 사람이 있을 경우에는 단지 임금의 안부만 물을 뿐, 다른 말은 일절 하지 않았다. 원근에서 글을 배우러 오는 자가 재사(齋舍)에 넘쳤는데, 종일토록 강마하면서 게으른 기색이 전혀 없었다. 이에 잠깐씩 오가며 배운 향리 사람들까지도 공의 논변을 흠모하여 감화되는 일이 많았다.
정해년(1587) 가을에 안동부(安東府)의 서쪽에 있는 청성산(靑城山)의 낙동강 가에 있는 땅을 얻었는데, 산봉우리와 계곡이 기이하고 강 물결과 못물이 맑고 푸르렀다. 그 그윽한 경치를 사랑하여 그곳에 집을 짓고는 석문정사(石門精舍)라고 편액을 달았는데, 온 방안이 환하게 밝았으며, 도서가 시렁에 가득하였다. 공은 그 안에 단정하게 앉아 처음에 먹었던 마음과 부합된 것에 기뻐하며 거기에서 생을 마감할 뜻을 지녔다. 나중에 비록 임금이 부르는 명에 못 이겨 억지로 나가 벼슬하였으나, 조정에 오랫동안 있는 것은 공의 뜻이 아니었다.
이해 겨울에 천전리(川前里)의 종가(宗家)에 불이 나 모두 타 버렸다. 공은 즉시 사당으로 달려가 곡한 뒤에 문중에 건의하여 쌀과 베를 적당히 헤아려 거둔 다음, 공사를 직접 감독하였다. 종가가 몇 개월이 안 되어 완공되었는데, 주인집에서는 간여하지 않았다. 마루와 방, 문, 창 등은 일체 예전 제도를 따라 그대로 지었으며, 대청은 조금 넓게 하여 제사를 지내는 데 편하게 하였다. 공은 일찍이 탄식하기를, “종자(宗子)에 대한 법이 무너져서 풍속이 더욱 야박해졌다. 지금 와서 비록 종법(宗法)을 갑자기 세울 수는 없지만 종가를 중시하는 의리를 알도록 해야겠다.” 하고, 문중의 길례(吉禮)와 흉례(凶禮)를 모두 종자로 하여금 주관하게 하였다.
퇴계 선생의 문집이 여러 문인(門人)들 손에 의해서 원고가 모아지기는 하였으나, 미처 탈고하지 못하고 있었다. 무자년(1588, 선조21) 여름에 공이 한두 명의 동지와 함께 다시 교정하고 헤아려 손질하였는데, 이 일을 시종 관리하는 임무는 사실 공이 주관하였다. 문인들의 질문에는 엉성하고 정밀한 정도가 간혹 서로 다르기도 하고 선생이 답한 내용에서도 상세하고 간략한 기준이 각기 달랐다. 이에 공은 반복하여 정밀하게 생각한 다음 상세한 것은 남겨 두고 번잡한 것은 삭제하였는데, 종일토록 조용히 앉아 읽으면서 감히 조금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가을에 종부시 첨정(宗簿寺僉正)에 제수되었고 얼마 안 되어 종부시 정(宗簿寺正)에 올랐다. 당시에 선비들 사이의 공론이 서로 달라서 이미 동서(東西)로 나뉘었다가 또다시 남북(南北)으로 나뉘었는데, 서인(西人)을 집중적으로 배척하는 자들을 북인(北人)이라 하고 동인과 서인을 섞어서 쓰자는 자들을 남인(南人)이라 하는 등 각자 자신들의 소견을 고집해 논의가 서로 어긋나 있었다. 그러던 차에 공이 조정으로 들어온다는 말을 듣고는 서로 말하기를, “김 아무개가 올라오면 과연 어떤 논의를 주장할지 모르겠다.” 하였는데, 공이 서울에 들어와서는 말하기를, “자기와 의론이 다른 사람이라도 반드시 다 소인은 아니고 자기와 의론이 같은 사람이라도 반드시 다 군자는 아니다. 피차를 논하지 말고 유능한 사람을 임용하고 불초한 사람은 버리는 것이 옳다.” 하였다. 공은 타고난 성품이 강직하였으나 논의가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은 것이 대체로 이와 같았다.
봉상시 정(奉常寺正)으로 옮겨졌다. 이때 북관(北關)으로 옮겨 간 백성들 가운데 도망쳐 돌아오는 자들이 날마다 많아졌으므로 공이 이들을 쇄환(刷還)하는 소임을 맡아 경기 지역에 나가 안찰(按察)하게 되었다. 이 당시 조정에서는 북쪽 변방을 충실히 하는 일을 급하게 여겨 한 사람이 도망가면 그에 연좌되어 죄에 걸려든 사람이 무수히 많았으므로 백성들의 원성이 자자하였으며 근심스럽고 참담한 기색이 도처에 가득하였다. 공은 그 폐단의 근원을 깊이 알고 부정한 행위를 자세히 조사하였으므로 아전들이 농간을 부리지 못하고 백성들 중에는 원망하는 자가 없었다. 후일 공의 처자(妻子)가 난리로 인해 떠돌아다닐 때 경기 지방을 지나가자, 이들이 앞다투어 음식을 싸들고 와 바치면서 지난날의 선정(善政)에 대해 감사해하였는데 곳곳마다 모두 그러하였고, 죄를 범하여 벌을 받았던 자들이 더욱더 정성을 보였다.
기축년(1589, 선조22)에 의정부 사인에 제수되었다가 예빈시 정(禮賓寺正)으로 옮겨졌다. 이때 마침 일본의 사자(使者) 현소(玄蘇)와 평의지(平義智) 등이 와서 우리나라에서 통신사(通信使)를 보내 줄 것을 요구하면서 오래도록 동평관(東平館)에 머물러 있었다. 이때 공이 해당 관원으로 있으면서 접대하였는데, 예에 맞게 주선하고 의리로써 유시하였으므로 그들이 비록 다른 나라 종족이었지만 공을 공경하고 복종할 줄을 알았다. 조정에서 바야흐로 통신사를 보낼 것을 의논하였는데, 사람들이 모두 가기를 회피하였다. 공은 가족에게 말하기를, “속히 행장을 꾸리라. 내가 반드시 가게 될 것이다.” 하였는데, 과연 공이 부사(副使)에 충원되었다. 친구들이 모두 와서 위로하니, 공은 말하기를, “임금의 명이라면 물이나 불도 피하지 않는 법인데, 풍파의 위험 정도야 말할 것이 무에 있겠는가. 다만 재주가 부족하여 제대로 사명을 수행할 수 있을지 두려울 뿐이다.” 하였다.
경인년(1590) 봄에 상사(上使) 황윤길(黃允吉), 서장관(書狀官) 허성(許筬)과 함께 대궐에 나아가 하직 인사를 하고 도성을 떠났다. 4월에 배를 띄워 이미 큰바다까지 나갔을 때 태풍이 불어 닥쳐 닻줄이 끊기고 돛대가 부러져서 당장 배가 전복될 위기에 처했다. 배 안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목놓아 울부짖고 바다에 익숙한 사공까지도 발을 동동 구르면서 어찌할 줄을 몰랐으나 공은 홀로 태연하여 단정히 앉아서 시를 읊었다. 바다를 건너 섬에 닿은 뒤에 어떤 사람이 묻기를, “배가 위태로운데도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었던 것은 어째서입니까?” 하니, 공이 말하기를, “죽고 사는 것은 천명이 있는 법이므로 그저 조용히 기다린 것일 뿐이다.” 하였다. 그러고는 〈천풍해도사(天風海濤辭)〉를 지어 회포를 부쳤다.
5월에 대마도(對馬島)에 도착하였는데, 왜사(倭使)가 미처 와서 영접하지 않았다. 상사가 조정이 지시한 내용에 선위사(宣慰使)가 올 때까지 머물러서 기다리라는 말이 없다는 이유로 왜사를 기다리지 않고 출발하려 하였다. 공이 말하기를, “우리 조정에서는 평소에 왜인이 왕래할 적에도 오히려 반드시 접대하는 신하를 보냈습니다. 더구나 우리는 본국의 통신사 행차인데 영접하고 호위하는 사신이 없겠습니까. 듣건대 저들도 관원을 차임하여 보내온다고 하였으니, 뱃길이 많이 막혀 중간에서 지체하고 있을 것입니다. 만약 속히 갈 생각만으로 그들이 오기를 기다리지 않고 출발한다면 우리들 스스로 처신하는 도리가 신중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저들이 장차 선위사의 유무를 대단치 않게 여길 것입니다. 앞으로 이번의 일을 전례로 삼아 선위사를 폐하고 보내지 않을지 어찌 알겠습니까.” 하였으나, 상사는 자기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그 뒤에 보니 평행장(平行長)이 과연 선위사로서 일기도(一岐島)까지 와서 바람이 불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평의지 등이 국분사(國分寺)를 유람하자고 청하여 사신 일행이 모두 갔는데, 현소가 중당(中堂)에 앉아서 영접하였으며, 평의지는 나중에 오면서 가마를 탄 채 계단을 지나서 올라왔다. 공은 그들의 무례함이 미워 그들과 예모를 차리고 싶지 않았으므로 상사에게 함께 피해 나갈 것을 청하였으나 상사가 듣지 않았다. 공이 말하기를, “오랑캐가 하는 짓을 비록 따질 것은 없겠으나 역시 상하 간의 분수는 있는 법입니다. 그런데 어찌 감히 이렇게 할 수 있단 말입니까. 만약 이대로 앉아서 술잔을 주고받으며 환담을 나눈다면 이것은 사신이 스스로 체모를 잃는 짓이며, 임금의 명을 욕되게 하는 것입니다. 나는 구차스럽게 함께할 수 없습니다.” 하고, 즉시 일어나 나와 관소(館所)로 돌아오니, 서장관도 뒤따라 나왔다. 평의지가 이상히 여겨 그 까닭을 물으니, 역관 진세운(陳世雲)이 병이 나서 나간 것이라고 고하였다. 이에 공은 왜사가 보는 자리에서 진세운에게 곤장을 치고 죄를 따지기를, “이 대마도는 대대로 우리나라의 은혜를 받아 우리나라의 동쪽 울타리가 되었다. 사신이 왕래할 적이면 몸소 그 행차를 호위하였으며 서로 만나 볼 적에는 앞으로 나와서 재배(再拜)하는 것이 그들의 분수이다. 그런데도 며칠 사이에 우리들이 지나치게 자신을 낮추는 것을 보고서는 그만 교만한 마음이 생겨 태연스럽게 능멸하기를 이런 상황에까지 이르렀다. 저들이 물으면 너는 마땅히 전례(典禮)에 의거하여 사실을 갖추어서 대답했어야 하는데도 도리어 겁을 집어먹고 입이 달라붙어서 얼버무리는 말로 저들의 환심을 사려고 하였다. 일행의 체모를 그르친 자는 바로 너이다.” 하였다. 그러자 도선주(都船主)가 이 소식을 듣고 사람을 보내서 사죄하기를, “부관(副官)이 나이가 어린 탓에 예법을 잘 몰라서 이런 실수를 하게 되었습니다. 사신께서는 용서해 주시기 바랍니다.” 하니, 공이 답하기를, “본도(本島)는 우리 조정을 신하로서 섬겨왔으니 번신(藩臣)이나 다름이 없고, 부관은 또 도주(島主)의 아들인데 그가 어찌 감히 이처럼 무례하단 말인가.” 하였다. 평의지 역시 부끄러움과 후회를 가누지 못한 나머지 가마를 메고 갔던 자에게 죄를 돌려 그의 목을 벤 뒤에 겸손한 말로 사죄하였고, 백 보 앞에서부터 하인들을 다 물리치고 걸어서 문으로 들어왔는데 그 모습이 공손하였다. 공은 우리나라에 대해 충성과 순종의 도리를 힘쓰라고 당부하고 내보냈다.
이로부터 왜인들이 공의 절의에 굴복하여 감히 조금도 해이하게 하지 못하였다. 그런데도 서장관은 공이 진세운에게 곤장을 친 것을 너무 심한 일이라고 여겼으며, 또 평의지가 종을 죽이고 사죄한 일을 전해 듣고는 더욱더 마음이 편치 않아 공에게 글을 보내 말하기를, “오랑캐를 대하는 도리는 정상적인 법을 적용할 수 없으며 옛사람도 은혜와 신의로 돌보아 주면 그뿐이라고 말했습니다. 어찌 일찍이 체모를 말한 적이 있었습니까.” 하였으며, 상사도 말하기를, “오랑캐와는 시비를 겨룰 필요가 없으며, 작은 예절은 다툴 것이 못 됩니다.” 하였다. 그러자 공은 말하기를, “옛날 공도보(孔道輔)가 요(遼)나라에 사신으로 갔을 때 요나라의 배우가 문선왕(文宣王)에 관한 내용으로 연극을 하자, 공도보가 벌떡 일어나 나와 버려 연회를 마치지 못하고 파하였습니다. 평의지가 가마를 탄 채 계단 위에 오른 것은 요나라의 배우가 문선왕을 주제로 연극한 일보다 더 심한 것입니다. 사신이 모욕당하는 것은 실로 대국의 수치입니다. 그런데 어찌 미리 스스로 두려워하여 굴욕을 달갑게 여기면서 그 잘못을 따지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서장관이 또 말하기를, “우리들이 친히 왕명을 받들어 부절(符節)을 잡고서 사신으로 온 것이 어찌 단지 체모를 높이는 한 가지만을 위해서입니까.” 하니, 공이 말하기를, “조정을 하직하던 날 임금께서 간곡하게 하신 말씀이 ‘행동함에 있어서는 반드시 예법대로 하라.’ 하였으며, 또 ‘나라의 체모를 높이고 임금의 위엄을 멀리 전파하라.’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들이 조심하고 두려워하며 깊이 생각해야 할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하찮은 오랑캐가 함부로 무례하게 구는데도 마음 편하게 받아들여 능히 스스로를 바루지 못한다면 만약 왜왕의 궁정에 들어간 뒤에 일이 이보다 더 크고 모욕이 이보다 더 심할 경우, 겁부터 내면서 어쩔 줄 모르는 것이 또 장차 어떠하겠습니까.” 하였다.
구봉(龜峯)에서 바람이 불기를 기다리고 있을 때 상사와 서장관이 진세운을 날마다 보내 출발하자고 청하는데도 평의지 등이 자신들의 방으로 들어가 버린 채 전혀 떠날 생각을 하지 않으므로 걸어서 도선주가 탄 말을 뒤따라가면서 출발하기를 애걸하기까지 하였다. 공이 말하기를, “진세운이 욕을 당하는 것은 곧 사신이 욕을 당하는 것입니다. 앞길을 인도해 줄 격왜(格倭 곁꾼의 일을 하는 왜인(倭人))가 따로 있는데, 어찌 저들의 명령을 받는 것처럼 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사행(使行)이 만약 출발한다면 저들은 뒤쫓아오기에 경황이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출발하자고 할 것이 무에 있겠습니까.” 하였다. 그러면서 반복하여 논변하였으나, 공의 말이 끝내 시행되지 않았다.
일기주(一岐州)에 이르자 선위사(宣慰使)와 국왕사(國王使)가 모두 와 머물며 기다리고 있었다. 왜인들이 식량을 가지고 와 바치는 것을 상사와 서장관이 직접 받았으나, 공은 그것이 체모를 잃은 짓임을 논하면서 관여하지 않았다. 그다음 날 상사와 서장관이 왜사와 만나 보기를 청하자, 공이 말하기를, “주인이 먼저 손님에게 청하는 것이 마땅하지, 손님이 먼저 주인에게 청하는 것은 마땅치 않습니다. 더구나 나와 서장관은 지금 모두 부모의 기일(忌日)을 당했는데, 기일은 자식 된 자의 종신의 상(喪)입니다. 오랑캐 사신과 만나 보는 것이 무에 급한 일이라고 하필 이날에 만나 본단 말입니까.” 하였다. 상사와 서장관이 공의 말을 듣지 않고 직접 청하였으나, 왜사가 허락하지 않았다.
7월에 계빈(界濱)의 인접사(引接寺)에 도착하였다. 이때 서해도(西海道)에 거주하는 왜인이 예물을 가져왔는데, 그가 보낸 글 가운데 “조선국 사신이 내조하였다.〔朝鮮國使臣來朝〕”라는 말이 있었다. 일행들이 처음에는 자세히 보지 않아 모르고 있다가 나중에 깨닫고 물어보니, 이미 물품을 다 받아서 종자(從者)들에게 나누어 준 뒤였다. 공은 즉시 상사와 서장관에게 고하기를, “왜인이 ‘내조(來朝)’라는 말을 하였으니 나라를 매우 욕되게 한 것인데, 제대로 살피지 않고 함부로 받았으니, 장차 어쩌면 좋겠습니까?” 하니, 대답하기를, “오랑캐가 한 말은 무식하여 사리를 몰라 함부로 말한 소치이니, 어찌 따질 필요가 있겠습니까.” 하자, 공이 이르기를, “오랑캐야 물론 무식하다 하더라도 사신도 무식하단 말입니까. 옛사람은 물건을 주고받을 때 털끝만 한 문제도 지나쳐 버리지 않고 오직 의리를 따랐습니다. 더구나 지금 사신으로 와서 나라를 욕되게 하는 음식을 받는다면, 의리에 있어서 어떻겠습니까. 저들이 보낸 음식을 보니 모두 저자에서 사 온 것들입니다. 지금 만약 저들이 보내온 수효대로 사다가 되돌려 주면서 ‘너희들이 보낸 예단(禮單)의 말이 잘못되었다. 이미 그것을 알았으니 그대로 받을 수가 없다. 이에 즉시 저자에서 사다가 주니, 돌아가서 너희 주인에게 그렇게 고하라.’라고 말한다면, 말이 엄중하고 의리가 정대하여 치욕을 씻을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상사와 서장관이 처음에는 매우 어렵게 여겼으나 공이 계속해서 논변하여 뭇 의논이 드디어 정해졌다. 이에 즉시 사다가 되돌려 주도록 하고는 그 사유를 모두 말해 주었다. 그러자 심부름꾼이 말하기를, “저희들은 소인이라 한자(漢字)를 모르므로 이곳에 와서 남의 손을 빌려 글을 쓴 탓에 조어(措語)가 그렇게 된 것이며, 사실 우리 주인은 모르는 일입니다. 청컨대 사신께서 직접 글을 고쳐 써서 그냥 받아 주시기 바랍니다.” 하고, 도선주도 사람을 보내와 말하기를, “저들이 이 지역의 글로 적어 와서 바치기에 제가 번역하도록 하였습니다. 그런데 저 또한 어(魚) 자와 노(魯) 자도 분간하지 못하는 탓에 말실수를 하게 되었으니, 그 죄는 실로 저에게 있습니다. 부디 저의 잘못을 용서해 주시기 바랍니다.” 하였다. 그러자 상사와 서장관이 말하기를, “심부름꾼이 사실을 실토한 것이 저렇고 도선주가 자신의 죄를 말한 것이 또 이와 같으니, 우선은 받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였다. 공은 그래도 오히려 개운치가 않았으나 그 말을 마지못해 따랐다.
왜국의 경내로 들어오면서부터 상사와 서장관은 왜인들의 가마를 타기를 좋아하였다. 그러나 공은 반드시 관디(冠帶)를 갖추어 입고 길을 갔다. 왜도(倭都)에 이르러 상사와 서장관이 평상복을 입은 채 들어가니, 공이 말하기를, “사신이 예복을 입는 것은 왕명을 공경하는 것입니다. 본국에 있으면서도 오히려 그러해야 하거늘, 하물며 다른 나라의 도성에 들어가면서도 예복을 입지 않는단 말입니까.” 하자, 상사와 서장관이 말하기를, “나라 안에서 예복을 갖추어 입는 것은 외국의 신하를 영접하기 위해서입니다. 지금 왜국에서는 영접하는 의식이 없고 관백(關白)도 외방에 나가 있습니다. 그러니 사신이 어찌 반드시 예복을 입어야 하겠습니까.” 하니, 공이 말하기를, “의관을 단정히 차려입어 우러러보게 하는 것은 바로 군자가 평소에 몸가짐을 하는 태도입니다. 더구나 지금 사명을 받들고 온 때이겠습니까. 본조에서 사명을 받든 자는 비단 외국 사신을 영접할 때만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길을 갈 적에도 예복을 입습니다. 그런데 어찌 관백이 도성에 있고 없고를 따진단 말입니까.” 하였다. 상사와 서장관이 모두 그 말을 따르지 않았으므로 공 혼자서만 예복을 입고 들어갔다. 이날 왜국 도성의 남녀들이 전부 쏟아져 나와 사신의 행차를 보았으며, 궁녀와 고관들까지도 모두 대궐 아래에 모여들었는데, 모두 부사의 앞에서는 무릎을 꿇고 두 손을 교차시켜 공경하는 예를 표했으나, 나머지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는 깔보는 듯이 쳐다보았다. 그제서야 서장관이 비로소 후회하였다.
9월에 총견원(摠見院)에 머물러 있었는데, 관백이 외방에 나가서 돌아오지 않아 오래도록 왕명을 전하지 못하고 있었다. 하루는 평의지가 와서 음악을 들려주기를 청하였다. 일행이 모두 허락하려고 하자, 공이 말하기를, “사명을 받든 신하가 다른 나라에 사신으로 와서 아직 왕명을 전하지 못한 것은 처녀가 아직 시집을 못 간 것과 같습니다. 시집도 가지 않은 처녀가 노래를 팔아서 다른 사람을 즐겁게 한다면 어찌 사람들이 천하게 여길 일이 아니겠습니까. 왕명을 풀밭에 내팽개친 채 도성 가운데서 음악을 연주하여 다른 사람들을 즐겁게 하는 것은 처녀가 노래를 파는 것과 뭐가 다르겠습니까. 더구나 일정하지 않은 것이 보통 사람들의 마음인데, 악공(樂工)이 악기를 안고 밤새도록 도성 안에 있을 경우, 어찌 걱정될 일이 일어나지 않으리라고 보장할 수 있겠습니까.” 하고, 끝내 허락하지 않았다.
공이 또 관백을 만나 보는 절차에 대해 서장관과 논하였는데, 서장관은 뜰 아래서 절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고 공은 기둥 밖에서 절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여, 며칠 동안이나 논쟁하였으나 결정이 나지 않았다. 공이 말하기를, “일본은 우리나라의 속국이고 일본을 맡아 다스리는 자는 위황(僞皇)입니다. 관백이라는 자는 위황의 대신(大臣)일 뿐인데, 그가 온 나라의 권력을 제 마음대로 하기 때문에 우리나라에서는 그 실정을 모르고 국왕이라고 하면서 우리 임금과 대등한 신분으로써 대우했던 것입니다. 이는 왕자(王者)의 존엄함을 낮추어서 아래로 이웃 나라의 신하와 대등하게 하는 것이니, 어찌 치욕스러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지금 이 나라에 들어와서 관백이 국왕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즉 비록 전례가 없더라도 예법에 의거하여 분명하게 따져 상견(相見)하는 예를 바로잡아야 합니다. 더구나 이전에 왔던 사신들이 모두 기둥 밖에서 절하는 의식을 행하였습니다. 그런데 우리들만 어찌 유독 뜰에서 절하여 나라를 욕되게 하는 죄를 저지를 수 있겠습니까.” 하니, 서장관이 말하기를, “평수길(平秀吉)은 명칭은 관백이지만 실상은 한 나라의 임금입니다. 사신이 어떻게 그가 왕이 아닌 줄을 알아서 뜰에서 절하는 예를 폐하고자 한단 말입니까.” 하였다. 이에 공이 말하기를, “관백을 감히 왕이라 일컫지 못하는 것은 《해동제국기(海東諸國記)》에 그 기록이 있습니다. ‘지금도 나라 사람들이 그가 관백인 줄 알았지 국왕이라는 것은 모르므로 그를 가리켜 관백이라 부르고 왕이라 부르지 않는다.’ 하였는데, 이는 산인(山人) 종장(宗長)의 말이고, ‘상군(相君)이 문교(文敎)를 이역 땅에 폈다.’라는 것은 주지(住持) 태수(兌叟)의 서문(序文)입니다. 그리고 ‘증(贈) 일품대상국태령(一品大相國台靈)’이라는 것은 전 관백의 위패(位牌)이고, ‘대정대신신장(大政大臣信長)’이라는 것은 전 관백의 명호(名號)입니다. 이로써 본다면 평수길은 국왕이 아니라는 것이 분명합니다. 일본 사람들이 왕이라고 하지 않는데, 다른 나라의 사신이 왕이라고 하면서 전례에 없는 예를 행하려고 하는 것은 또한 무슨 의리입니까. 이전에 온 사신들은 관백을 왕인 줄 잘못 알고서도 오히려 기둥 밖에서 절하는 예를 행하였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이미 왕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는데 도리어 뜰 아래에서 절하는 예를 행하고자 하니, 이런 이치가 어디에 있습니까.” 하니, 서장관이 말하기를, “국서에 곧장 어휘(御諱)를 쓰고 평수길을 국왕이라고 칭하였으니, 이는 우리 전하께서 대등한 신분으로 대우한 것입니다. 그런데 신하 된 자가 어찌 감히 대등한 예로 예를 행하고 아래에서 절하여 공경하는 예를 폐할 수 있단 말입니까.” 하였다.
공이 말하기를, “국서에 어휘를 쓰고 국왕이라고 칭한 것은 모두 사실을 제대로 알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국서는 비록 뒤늦게 고칠 수 없더라도 사신이 상견하는 예는 예전대로 하는 것이 마땅하지, 어찌 뜰 아래에서 절하는 예를 새로 만들어 행하여 전에 없던 치욕을 당할 수가 있겠습니까.” 하니, 서장관이 말하기를, “만약 그렇게 청하였다가 저들이 그대로 들어준다면 다행이겠지만, 혹시 저들이 ‘우리나라 사신도 이미 귀국 뜰에서 절하였는데, 귀국 사신은 어찌하여 그렇게 하지 않는가?’ 할 경우, 우리는 할 말이 없게 될 것입니다.” 하였다. 공이 말하기를, “하늘에는 두 해가 없고, 땅에는 두 임금이 없는 것이 천지의 떳떳한 법입니다. 일본의 위황(僞皇)이 이미 국왕으로 되어 있으니, 관백은 아무리 존귀하더라도 신하일 뿐입니다. 사신이 위황을 볼 적에는 뜰에서 뵙는 것이 예이지만, 관백에 대해서는 뜰에서 뵙는 것이 예가 아닙니다. 지금 관백이 만약 뜰에서 뵙는 예를 받는다면 이것은 천황으로 자처하는 것이니, 관백이 천황을 존경하는 뜻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이 의리를 가지고 간곡하게 이해시킨다면 저들도 반드시 깨달아서 굴복할 것이니, 어찌 우리의 말을 따르지 않을 염려가 있겠습니까. 그리고 군자는 처음을 잘 도모하는 것을 귀하게 여기는 법으로, 처음을 조심하지 않고서 그 뒤를 잘하는 경우는 없습니다. 지금 우리들의 행차는 100년 만에 있는 일이니, 이것도 하나의 시초입니다. 당(堂) 위에서 절하느냐, 아래에서 절하느냐 하는 그 갈림길이 모두 오늘날 어떻게 하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그러니 어찌 시초에 조심하지 않아 후일의 사신으로 하여금 분개하여 ‘뜰에서 절하는 굴욕이 아무개가 사신으로 왔을 때부터 시작되었다.’라고 하게 할 수가 있겠습니까.” 하였다.
공이 또 연회석상에서 현소에게 묻기를, “귀국의 여러 전(殿)이 관백을 뵐 때 뜰 아래에서 절을 합니까, 당 위에서 절을 합니까?” 하니, 현소가 대답하기를, “관백은 여러 전(殿)과 똑같이 천황의 신하입니다. 어찌 뜰 아래에서 절하는 일이 있겠습니까.” 하자, 공이 다시 묻기를, “전부터 우리나라 사신은 기둥 밖에서 절했는데, 이번에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니, 현소가 대답하기를, “사신께서 물으신 것이 참으로 옳습니다. 우리나라에도 접대하는 데 대한 전고(典故)가 있으니, 관백이 오면 분명히 절로 정해질 것입니다.” 하였다. 공이 또 도선주에게 유구(琉球)의 사신이 예를 행하는 일에 대해 물어보니, 당에 올라가서 한다고 하였다. 그러자 공이 말하기를, “일본의 여러 신하가 관백을 볼 때 본디 뜰 아래에서 절하는 예가 없고 유구 같은 작은 나라의 사신도 이미 당에 올라가서 절하였습니다. 그러니 그가 우리들에게만 뜰 아래에서 절하도록 하지는 않을 것임은 물어보지 않아도 알 수 있습니다.” 하였는데, 이는 현소 등이 과거에 이미 우리나라에 와서 뜰 아래에서 절을 했다 하여 혹시라도 그와 견주려고 할까 염려되었으므로 미리 슬쩍 귀띔해서 그렇게 하는 길을 막은 것이다. 이에 현소 등이 공의 뜻을 가지고 관백에게 통보하여 드디어 기둥 밖에서 절하는 것으로 결정하였다.
평수길이 도성으로 돌아온 뒤에 평의지가 사람을 보내 말하기를, “내일 일찍 관백이 천궁(天宮)에 갈 것이니 사신들은 관광하도록 하십시오.” 하니, 공이 말하기를, “이국(異國)의 광경을 참으로 구경하고 싶지만, 왕명을 아직 전달하지 못했으니 사신 된 의리에 있어서 사사로이 나다니기가 곤란합니다.” 하였다. 그러자 평의지가 직접 와서 청하니, 서장관은 승낙하였고 공은 또 앞서 한 말을 끌어 대면서 사양하니, 왜승(倭僧)이 또 와서 말하기를, “관광을 하라고 청한 것은 실은 관백의 뜻으로, 그의 의도는 단지 자기를 과시하려는 데 있습니다. 만약 따르지 않으면 언제 돌아갈지 모를 것입니다.” 하니, 일행들이 근심하고 두려워하여 반드시 제상(堤上)의 화를 입을 것이라고 하면서 서로 마주 보고 눈물을 흘리면서 울었다. 서장관이 말을 재촉하여 도성으로 들어갔다가 관백이 가지 않기로 하였다는 말을 듣고 중지하였다. 그 이튿날도 새벽밥을 먹고 서둘러 갔다가 실망한 채 헛되이 되돌아왔고, 세 번째 찾아가서야 만나 보았다. 이에 공은 글을 보내어 엄하게 꾸짖었다.
이때 평수길이 자기 나라로 돌아온 지 이미 오래되었는데도 왕명을 받지 않았고 이상한 헛소문이 떠돌았으므로 일행들이 모두 두려워하였는데, 어떤 자가 와서 말하기를, “일에는 알 수 없는 것이 있는 법이니, 그에 대한 염려를 치밀하게 하지 않아서는 안 됩니다. 어찌하여 관백의 좌우 사람들에게 환심을 사서 안전을 도모하지 않습니까? 지금 민부 경(民部卿) 법인(法印)과 산구전(山口殿) 현량(玄亮)은 바로 관백의 좌우에서 일을 주관하는 자들인데, 마침 또 그들이 사신을 접대하는 일을 맡았습니다. 만일 그들에게 예를 행하여 그들의 환심을 살 수 있다면 사신의 일을 쉽게 완수할 수 있을 것이고, 돌아갈 기일도 머지않게 될 것입니다.” 하자, 상사와 서장관이 매우 그럴듯하다고 여기고는 후하게 뇌물을 주어 일을 도모하려고 하였다. 이에 공이 말하기를, “안 됩니다. 왕명을 받들고 국경을 나와서는 한결같이 예법대로 하여 구차스럽게 하지 않아도 오히려 실수하여 왕명을 욕되게 할까 염려되는 법입니다. 그런데 하물며 그의 측근에게 뇌물을 줄 수가 있겠습니까.” 하니, 상사와 서장관이 말하기를, “이른바 예를 행한다는 것은 뇌물을 주는 것을 말한 것이 아닙니다. 손님과 주인 사이에는 반드시 예물로 바치는 폐백이 있어서 이로써 경의를 표하는 법입니다. 이 두 사람은 몇 달 동안이나 사신을 접대하느라 수고가 많았습니다. 그러니 손님 된 도리에 있어서 경의를 표하는 예물이 없어서야 되겠습니까.” 하였다.
공이 말하기를, “손님과 주인 사이에는 사실 예물로 바치는 폐백이 있는 법입니다. 그러나 주는 데에는 시기가 있는 법으로, 구차하게 해서는 안 됩니다. 왕명이 아직도 함 속에 간직되어 있는데 먼저 사적인 예를 행한다고 하니, 세상에 어찌 이런 이치가 있겠습니까.” 하니, 상사와 서장관이 말하기를, “사적인 예를 행하는 것도 왕명을 전하기 위해서인데, 무엇이 해롭겠습니까.” 하였다. 공이 말하기를, “당당한 조선국의 사신으로서 성주(聖主)의 명을 받들고 나와 위엄과 덕화를 선양하여 왜인들로 하여금 조대(朝臺) 아래에서 이마를 조아리게 하지는 못할망정 도리어 수치를 참으면서 관백의 측근에게 아첨하여 왕명을 전하기를 도모한단 말입니까. 왕명을 지체하게 된 것이 비록 사신이 못난 탓이기는 하나, 저들이 궁전이 완성되지 않았다는 것으로 핑계 대고 있으니, 잘못은 저들에게 있는 것으로 사신도 어떻게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사신 된 자로서는 단지 예의로써 거듭해서 타이르기나 할 뿐입니다. 만약 털끝만큼이라도 비굴한 일을 하게 되면 왕명을 욕되게 한 죄가 비로소 커져서 씻을 수 없을 것입니다.” 하니, 상사와 서장관이 대답하지 못하였다.
평수길이 왕명을 받은 지 4일 뒤에 사람을 보내와 말하기를, “서계(書契)는 짓는 대로 뒤따라 보낼 것이니, 사신은 계빈(界濱)에 가서 기다리시오.” 하였다. 그러자 일행들은 모두 호랑이 아가리를 벗어난 것을 다행으로 여겨, 그 말을 듣는 즉시 행장을 꾸린 다음 수레를 몰아 먼저 떠났다. 공은 반대하기를, “서계를 받지 않았으니 이는 사신의 일을 아직 마치지 못한 것입니다. 예로부터 사신 중에 일을 마치지 못하고 지레 도성을 나간 사람이 있었습니까. 더구나 계빈 땅은 100리 밖에 있으니 혹시 서로 물어볼 일이 있을 경우 미처 의견을 주고받지 못한다면 장차 어떻게 할 것입니까. 그리고 내가 비록 형편없는 사람이기는 하지만, 함께 차임되어 파견된 사람입니다. 그런데 나와는 의논하지도 않았으며, 내가 그에 대해서 말하자 여지없이 거부하였습니다. 이것이 어찌 사명을 받들고 함께 일하는 의리이겠습니까.” 하면서 힘껏 주장하였으나 행차가 이미 멀리 떠나갔으므로 홀로 뒤에 남아 있을 수가 없어서 마침내 계빈으로 나갔다.
계빈에서 반 달 동안 머물러 있은 뒤에 서계가 비로소 왔는데, 그 말투가 매우 불경스럽고 오만하여 전하(殿下)를 ‘각하(閣下)’라고 하고 우리가 보낸 예물에 대해 ‘방물을 받았다.〔方物領納〕’라고 하였으며, 또 ‘한 번 뛰어 곧바로 대명국에 들어가겠다.〔一超直入大明國〕’라느니, ‘귀국은 앞장서서 입조하라.〔貴國先驅入朝〕’라는 따위의 말이 있었다. 공은 이를 보고 크게 놀라 의리에 의거하여 물리친 다음, 글을 써서 현소(玄蘇)에게 보내기를, “만약 이런 말들을 고치지 않는다면 우리 사신은 죽으면 죽었지, 의리상 감히 돌아갈 수 없습니다.” 하니, 현소가 말이 꿀려 ‘각하(閣下)’와 ‘방물영납(方物領納)’ 여섯 자는 고치겠다고 허락하였으나, ‘뛰어 대명국에 들어가겠다’.라고 한 말과 ‘앞장서서 입조하라.’라고 한 말들에 대해서는 대명국에 입조(入朝)하는 뜻이라고 핑계 대면서 끝내 고치겠다고 하지 않았다. 그러자 상사와 서장관은 모두 그의 말을 참말로 믿어 다시 요구하지 않으려고 하였으나 공은 정색하고 그 말을 꺾어 버렸다. 그리고 다시 현소에게 글을 보냈는데, 그 글을 요약하면,
“이 글을 지은 자의 뜻을 비록 쉽게 추측할 수는 없으나 말을 꾸며 일을 단정한 그 자체가 일단의 술책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을 어찌 속일 수가 있겠습니까. 앞서는 말하기를, ‘한 번 뛰어 곧바로 대명국에 들어가서 400여 개 주를 우리 풍속으로 바꾸고, 억만년토록 제도(帝都)의 정화(政化)를 시행하겠다.’ 하였으니, 이것은 귀국이 대명을 빼앗아서 일본의 정화를 시행하겠다고 한 것입니다. 그다음에는 ‘귀국이 앞잡이가 되어 입조하니 먼 생각이 있어 목전의 걱정은 없을 것이다.’ 운운하였으니, 이것은 귀국이 우리나라가 오늘날 사신을 보내온 것을 가지고 먼 생각이 있다고 말한 것입니다. 존사(尊師)께서는 과연 이 ‘조(朝)’ 자를 대명에 조회한다는 뜻이라고 여기는 것입니까. 그 밑에 또 말하기를, ‘먼 지방에서 뒤늦게 오는 무리는 허용할 수 없다.’ 하였는데, 이것은 귀국이 먼저 입조하는 자는 허용하고 후일에 오는 자는 처벌한다는 말입니다. 또 ‘내가 대명에 들어가는 날 사졸을 거느리고 군영을 바라보게 되면, 이웃 나라와의 맹약을 더욱 닦을 것이다.’ 하였는데, 이것은 귀국이 모든 나라로 하여금 군사를 있는 대로 다 거느리고 함께 출정하기를 원한다는 말입니다. 이렇듯 우리나라를 위협한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이와 같은데도 ‘조’ 자가 우리나라를 지칭한 것이 아니라고 할 수 있습니까.
우리나라는 예의를 중하게 여겨서 귀국과 교제한 지 200년이 되었으나, 일찍이 털끝만큼도 무례한 말을 한 적이 없었습니다. 이번에 통신사를 보낸 것도 귀국의 위세가 두려워서가 아니라, 실로 귀국의 신의를 가상하게 여겨서입니다. 귀국에서 포로로 잡아간 우리나라 백성을 돌려보내고 그 책임자의 머리를 베어 바치면서 옛날처럼 수교하기를 청했으니, 이것이 어찌 큰 신의가 아니겠습니까. 우리 전하께서는 이를 매우 가상하게 여기시어 특별히 통신사를 보내셨으니, 이는 실로 두 나라 사이에 전에 없던 성대한 일입니다. 그런데 귀국의 서계에는 그런 일에 대하여 감사하다는 뜻은 생략해 버리고, 도리어 귀국의 위세를 부풀려 병력을 과시함으로써 위로는 대명국을 엿보고 옆으로는 이웃 나라를 위협하기 위해 업신여기고 협박하는 말이 곧 적진에 임해서 적을 꾸짖는 격문(檄文) 같았습니다. 이것이 어찌 예로써 서로 사귀는 글이라고 하겠습니까. 비록 그렇기는 하지만, 이것이 어찌 모두 관백의 뜻이겠습니까. 아마도 글을 짓는 자가 우연히 살피지 못한 것일 것입니다. 존사께서는 관백에게 잘 아뢰어 서계를 고쳐 지은 다음 사신에게 넘겨주시기 바랍니다. 그럴 경우 두 나라 간에 우호 관계가 더욱 두터워져서 관백이 예로써 나라를 다스리는 미덕이 원근에 더욱 드러날 것이니, 이 또한 아름답지 않겠습니까.”
하였다.
현소가 공이 보낸 글을 보고 역관(譯官)에게 끊임없이 칭찬하며 그 즉시 답장을 써서 공의 말이 옳다고 하였다. 그러나 ‘입조(入朝)’니, ‘범대명(犯大明)’이니 하는 등의 말에 대해서는 시종 회피하며 속이는 말로 대답하였다. 공은 재차 글을 써서 보내 기필코 고치고야 말 작정을 하였다. 하지만 상사와 서장관은 이미 ‘방물’ 등의 말을 고치겠다고 허락한 것을 다행으로 여겼으며, 또 변고를 일으켜 무슨 일이 생길까 두려운 나머지, 현소가 보낸 답서가 이와 같으니 억지로 따질 필요는 없다고 하였다.
공은 또 상사에게 글을 보내 따지기를, “사신이 불행하여 뜻밖의 변고를 만나 얽매여 있으면서 곤욕을 당한 지가 거의 1년이나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끝내는 나라를 모욕하는 글을 받들고 돌아가게 되었으니, 무슨 말로 우리 성상께 변명한단 말입니까. ‘각하’ 등의 말에 대해서는 저들이 이미 고치겠다고 하였습니다. 그 말들을 고치기로 한다면 거만하고 무례한 말도 아울러 모두 고치는 것이 또한 옳지 않겠습니까. 명공(明公)과 서장관은 오로지 사단을 일으키는 것만을 두려워하여 한결같이 그들의 근거 없는 말을 들어주고 ‘입조’ 두 글자에 대해서조차 내버려 둔 채 따지지 않았습니다. 만약 이 말을 고치지 않는다면 우리나라가 왜놈의 속국이 되고, 온 나라의 관원들이 죄다 그들의 배신(陪臣)이 되는 것이니, 이 또한 통탄스럽지 않겠습니까. 송 고종(宋高宗)이 이미 신하로서 금(金)나라를 섬겼는데도 호담암(胡澹庵)은 금나라 사신이 ‘강남에 조유한다.〔詔諭江南〕’라는 명분으로 오자, 눈물을 뿌리면서 분개하여 말하기를, ‘차라리 바다에 빠져 죽을지언정 소국의 조정에 구차스럽게 살기를 원치 않는다.’ 하였습니다. 더구나 당당한 우리나라가 오랑캐와 이웃이 되어 송나라와 요(遼)나라와의 관계처럼 형제국이 되더라도 이미 욕이 될 판인데, 사신 된 자가 도리어 ‘입조’라는 욕을 달갑게 여기고 따지지 않는단 말입니까.” 하였다.
그러자 상사가 말하기를, “나의 소견에도 의심이 없지는 않아서 이미 반복하여 따졌고 현소의 편지도 이와 같으니, 우선은 그의 말을 믿는 것이 옳습니다.” 하니, 공이 말하기를, “이것은 현소의 말을 가지고 증거로 삼아 뒷날에 자신을 해명할 계책으로 삼으려는 것입니다. 사신께서야 비록 현소의 말을 믿는다 하더라도 우리 조정의 사대부들이 믿어 주겠습니까. 그리고 사대부 중에서 혹 믿는 자가 있다치더라도 우리 성상께서 믿으시겠습니까. 사신께서 만약 그 말이 욕된 것인 줄 알면서도 현소의 말을 빌려서 자신을 해명할 계책으로 삼는다면, 이것은 자신을 속이는 것입니다. 자신을 속여서 남을 속이고, 남을 속여서 우리 임금을 속이는 것이 옳겠습니까.” 하였다. 서장관이 또 말하기를, “서계에 비록 거만하고 공손치 못한 말이 있더라도 우리가 돌아가서 보고한 뒤에 조정에서 나름대로 조치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 이는 사신이 알 바가 아닙니다.” 하니, 공이 말하기를, “이것이 무슨 말입니까. 나라를 욕되게 하는 말은 죽음으로써 다투더라도 사신이 제 마음대로 처리한 죄가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일신의 이해(利害)만을 지나치게 염려하여 바들바들 떨며 머리를 숙인 채 치욕을 참으면서 한마디 말도 하지 못하고 고작 하는 말이 ‘돌아가서 보고한 뒤에 조정에서 나름대로 조치가 있을 것이다.’라고 하니, 이것이 무슨 말입니까. 우리들이 평소에 책을 읽고 의리를 강론하면서 자부한 정도가 과연 어떠하였습니까. 그런데 조그마한 이해에 임하여 스스로 의리를 주장하지 못하고 사사건건 나라를 욕되게 하면서도 부끄러워할 줄 모르다가 끝내는 치욕을 안고 가서 임금께 바친단 말입니까. 생각이 이에 미치니 너무도 가슴이 아파 치욕을 참으면서까지 구차스럽게 살고 싶지 않습니다.” 하였다.
공은 또 현소에게 답서를 보내 각자의 국토를 지키면서 대대로 우호를 다져 억만년토록 평화롭게 지내는 복을 함께 누리자고 있는 힘을 다해 말하였다. 또 선위사 평행장에게 답한 편지에는 “명나라는 곧 우리의 부모와 같은 나라로, 우리 전하의 하늘을 두려워하는 공경과 대국을 섬기는 정성은 시종 변함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북쪽으로 신경(神京)을 바라볼 때 천자의 위엄이 지척에 있는 듯하고 조공하는 사신의 행차가 줄을 잇고 있으니, 이는 실로 온 천하가 다 들어서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귀국이 지금 명나라와 화친 관계가 끊어졌으나 수십 년 전에는 일찍이 명나라에 들어간 사신이 있었으니, 어찌 우리나라가 명나라와 한집안 같은 사이인 줄을 모르겠습니까. 명나라와 우리 조정은 대의(大義)가 이미 정해져서 하늘과 땅이 위치를 바꿀 수 없는 것과 같은데, 어찌 감히 두 마음을 품을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지금 서계의 말이 이와 같은 것을 보고서도 잠자코 말없이 돌아간다면, 이것이 어찌 사신의 의리이겠습니까. 대체로 두 나라 사이에 오가는 국서(國書)는 조심하여 쓰지 않아서는 안 됩니다. 원망을 해소하고 분쟁을 해결하는 것이 여기에 달려 있고, 혐의를 맺고 틈이 벌어지는 것도 여기에 달려 있습니다. 그러니 법이 아닌 말과 의리를 해치는 이야기를 어찌 문자로 기록하여 이웃 나라에 말할 수 있겠습니까. 제가 생각하기에 이것은 바로 글을 짓는 과정에 혹 제대로 살피지 못해서 한 말이지, 관백의 뜻은 아닐 것으로 여겨집니다. 족하께서 이 뜻을 관백에게 전하여 알려 준다면, 이 또한 나라를 보존하고 백성을 편케 하며, 이웃 나라와의 우호 관계를 길이 온전하게 하는 한 가지 방도일 것입니다.” 하였다. 그 편지를 싸서 보내려고 하는데, 일행들이 모두 사단을 일으킬까 두려워하여 서로 선동하면서 갖은 방법으로 저지하여 전달하지 못하게 하였다.
대체로 현소는 이미 공의 말을 옳다고 여겨 약간 부끄러워하고 굽히는 뜻이 있었으나 일행의 일은 상사에게 권한이 있고 서장관 또한 그와 합세하였으므로, 공은 마침내 그 뜻을 행할 수 없었다. 이에 공은 개탄스럽고 억울하여 그 글을 바다 속에 던져 버리고 이어 시를 지었는데, 그 시 가운데 “저 물속의 어룡은 글자 응당 알아보리.〔水底魚龍應識字〕”라는 구절이 있었다.
왜승(倭僧) 종진(宗陳)이 와서 《대명일통지(大明一統志)》를 보여 주었는데, 그 책에 실려 있는 우리나라의 연혁과 풍속이 대부분 상스럽고 속되며 터무니없는 내용이었다. 이에 공은 국내에서 통행하는 예절과 풍속을 들추어 그 아래에 각각 주를 달아서 잘못된 것임을 밝히고 《조선국풍속고이(朝鮮國風俗考異)》라는 책을 한 권 만들어 그에게 주니, 종진이 감복하여 즉시 관백에게 전달해 보이겠다고 하였다.
돌아올 적에는 수놓은 비단을 전별 선물로 준 왜추(倭酋)들이 많았는데, 공은 사양하다 못해 받아서는 관소(館所)의 중들에게 나눠 주었다. 일행이 대마도에 도착하자 평의지가 잔치를 베풀어 전별하면서 보검을 꺼내어 죽 늘어놓은 다음 사신들에게 나누어 올렸는데, 출발할 때 공이 심부름하는 왜인(倭人)에게 주어 대마도주(對馬島主)에게 도로 주라고 명하였다. 공이 데리고 갔던 원역(員役)들은 위엄을 두려워하고 의리에 복종하여 전혀 왜인들과 교역하지 않아 한 가지 물품도 가져오지 않았다.
신묘년(1591, 선조24) 2월에 돌아와 부산에 도착하였는데, 행낭이 초라하여 오직 석창포(石菖蒲)와 종려나무 분재만 몇 개 있을 뿐이었다. 서울로 올라오는 도중에 안동을 지나게 되었는데, 집 앞을 그냥 지나치고 들르지 않았다. 조정에 돌아와 의정부 사인(議政府舍人)으로서 복명하였다. 특별히 통정대부에 올려 주자 상소하여 사양하였으나, 상이 허락하지 않았다.
지난해에 광국훈(光國勳)을 녹훈(錄勳)할 때 전후로 주청(奏請)한 사신과 칙지(勅旨)를 받들고 와 은전을 반포한 신하가 모두 참여되었는데, 공만 누락되었다. 그러자 당시의 역관(譯官) 가운데 글을 올려 억울함을 하소연한 자가 있었다. 이때에 이르러 공이 그 사실을 듣고는 즉시 상소하여 자신의 허물을 진술하였다. 공이 광국 공신(光國功臣) 원종(原從) 1등에 녹훈됨으로 인하여 부친의 관작은 이조 참의로 추봉(追封)되고 모친은 숙부인(淑夫人)에 봉해졌다.
기축(1589, 선조22)년의 변고 뒤에 사류(士類)들의 기운이 저상되었으며 관학(館學 성균관과 사학(四學))의 제생(諸生)들 사이에도 의론이 분분하고 갑을(甲乙)로 갈려서는 각자 기치를 세워 자신들의 의견을 주장하였다. 그런데 대사성으로 있는 자 또한 사사로이 자기 당파를 편들면서 진정시킬 뜻이 없었다. 이에 상께서는 당대의 이름난 선비를 가려 뽑아 그들을 인도하게 하려는 마음으로, 조정의 의논에 따라 특별히 공을 대사성에 제수하였다. 그러자 성향이 분명치 않았던 자들이 공이 장차 태학(太學)에 들어올 것이라는 소문을 듣고는 대부분 물러갈 생각을 하였다. 공이 조용히 타이르기를, “배우는 자의 일은 오직 글을 읽고 이치를 궁구하며, 도를 강론하고 학업을 익히는 데에 있을 뿐이다. 조정의 시비와 용인(用人)의 득실은 유생이 관여할 바가 아니다. 더구나 명륜당(明倫堂)은 사적인 싸움을 하는 곳이 아니며, 성균관이 어찌 벼슬길에 나가기를 다투는 길이겠는가. 자신의 본분을 돌아보지 않고 날마다 한담(閒談)만 일삼는다면, 몸과 마음에는 끝내 이로움이 없고 군자에게 버림을 받을 것이다. 나라에서 인재를 기르는 뜻이 어찌 그런 것이겠는가.” 하였다. 지성으로 가르치고 서로 간에 간격을 두지 않았으며 선을 장려하고 악을 경계하되 한결같이 공평하게 하였다.
또 《심경(心經)》과 《근사록(近思錄)》 등의 글을 가르쳐 성현의 학문으로 인도하였다. 이에 선비들이 마음으로 복종하여 모두 스스로 새로워지려는 뜻을 품었고, 붕당을 만들어 서로 대립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조금은 알게 되어 선비들의 습속이 아주 싹 달라질 정도였다. 그런데 공이 또 부제학(副提學)으로 옮겨서 제수되자, 중외(中外) 사람들이 모두 연석(筵席)에 적임자를 얻었다고 하였으나, 사림에서는 사유(師儒)를 갑작스럽게 체차한 것을 애석하게 여겼다. 뒷날에 공을 나국(拿鞫)하라는 명이 내렸을 때 관학의 제생들이 함께 상소하여 억울함을 호소하려고 하였는데, 마침 용서한다는 명이 내려 그만두었다.
당시에 막 정여립(鄭汝立)의 역변을 겪고 나서 권간(權奸)이 정권을 잡고는 함정을 만들어 놓고 사류를 잡아 죽였다. 처사(處士) 최영경(崔永慶)은 품행이 세상에 뛰어나 사림으로부터 추앙받았으나 죄를 얽어 붙잡아 들인 다음 옥중에서 병사하게 하였다. 그런데도 대신 이하가 주위를 둘러보며 숨을 죽인 채 감히 말하는 자가 없었다. 이때에 이르러 공이 탑전에서 그가 억울하게 무함당한 상황을 일일이 진달하였다. 상께서 이르기를, “그대는 어떻게 영경이 역모에 가담하지 않았다는 것을 아는가?” 하니, 공이 대답하기를, “신이 그의 얼굴은 모르지만 그가 먹은 마음과 행하는 일에 관해 익히 들었는데, 그는 곧 절개를 지키고 의리에 죽을 사람입니다. 그가 평소에 주장하는 말이 당당하여 회피하거나 흔들리는 일이 없었던 탓에 간사한 자에게 크게 원한을 사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간사한 자가 때를 틈타 죄를 얽어 만들었는데, 대수롭지 않게 한마디 언급한 말을 가지고 역적을 편들었다고 지목하였으며, 우연스레 형체도 없는 길삼봉(吉三峯)에 대해 떠도는 말이 있는 것을 가지고 최영경에게 뒤집어씌웠으니, 만고의 원통한 일 중에 어느 것이 이보다 더 원통하겠습니까.” 하였다. 상께서는 따져 묻기를 마지않았고 공은 더욱더 소상하게 논해 아뢰었는데, 좌우에 있던 시신(侍臣)들이 모두 공을 위하여 위태롭게 여겼으나, 공은 말투가 한결같았다.
그다음 날 상께서 최영경이 역적에게 보냈다는 편지를 조당(朝堂)에 내리니, 온 조정 사람들이 당황하고 놀라 어찌할 줄을 몰랐는데, 얼마 있다가 최영경의 직첩을 다시 돌려주라고 명하였다. 이에 사람들이 상의 노여움이 비로소 걷힌 것을 알고 마음이 아주 시원해졌다. 이로부터 상께서 총애하고 의지하는 정도가 더욱 깊어졌으므로 조야(朝野)에서 우러러 흠모하였다. 공도 나라의 안위(安危)를 자신의 책임으로 삼아, 아는 것은 말하지 않은 것이 없었고 말을 하면 유감 없이 다 말하여, 무너진 기강을 진작시킴으로써 우뚝하게 중류(中流)의 지주(砥柱)가 되었다.
공은 차자를 연이어 올려 시사(時事)에 대해 극언하였다. 그 가운데 한 차자는 대략 다음과 같다.
“더할 수 없이 인자한 것이 하늘이지만 더할 수 없이 위엄스러운 것도 하늘이며, 믿을 수 있는 것이 하늘이지만 못 믿을 것도 하늘입니다. 그러므로 임금이 비록 도를 잃은 잘못이 있더라도 재앙을 만나 몸을 닦고 반성한다면, 천심을 돌릴 수 있고 재앙을 늦출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임금이 이미 도를 잃은 잘못을 초래하고서도 몸을 닦고 반성하지 않는다면, 신명의 노여움이 더욱 심해져서 하늘이 준 복록(福祿)이 영원히 끊어집니다. 옛날의 슬기로운 임금들은 믿을 만한 하늘의 인자함을 믿지 않으면서 두려워한 것은 하늘의 위엄이었으며, 두려워할 만한 하늘의 위엄을 두려워하지 않으면서 닦은 것은 인사(人事)였습니다. 인사를 제대로 닦지 못하고서도 천심(天心)을 감동시킨 자는 예전부터 지금까지 있지 않았습니다.
신들이 삼가 보건대, 전하께서는 등극하신 이후로 정신을 가다듬어 나라를 잘 다스릴 방법을 강구하며 밤낮으로 근심하고 애쓰셨습니다. 그런데도 수십 년 이래로 장마와 가뭄이 잇따라 일어나고 기근이 거듭 닥치며, 하늘이 보이는 재이(災異)의 현상과 사물에 나타나는 변괴가 거듭 나타나고 있습니다. 올해의 경우를 두고 말하더라도, 삼원(三元)의 달에 서울에서 지진이 일어났으며, 심지어는 형혹성(熒惑星)이 한 달 동안이나 없어지지 않았고 태백성(太白星)이 날마다 하늘을 가로질렀으며, 바람과 물의 변고도 예전에 없던 현상이고 번쩍이는 번개와 우르릉대는 우레가 마치 여름철과 같았습니다. 신들은 하늘의 뜻이 어찌해서 이처럼 극심한 지경에 이르렀는지 모르겠습니다. 이런 변고가 비록 어떤 일에 대한 반응인지 모르겠습니다만, 인사에 있어서 잘못된 것은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신들은 꺼리지 않고 함부로 말한 것에 대한 주벌을 무릅쓰고 그에 대해 낱낱이 말씀드리겠습니다.
공부(貢賦)에 관한 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토질에 따라 공물을 내는 것이 선왕(先王 상고(上古)의 현명한 제왕)의 정사입니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토산품의 유무를 따지지 않고 군읍(郡邑)의 대소도 구분하지 않은 채, 똑같이 책정하여 생산되지도 않는 것을 바치게 하였으니, 그 고통이 이미 극에 달하였습니다. 요사이에는 또 규정 이외의 각종 명목으로 수시로 징수하는 일이 끝이 없는데, 가혹하게 세금을 징수하기를 살가죽을 벗기고 뼛골을 후벼내듯이 합니다. 그러면서 백성에게 중한 세금을 부과하는 자를 좋은 수령이라 하고 조세 독촉을 엄하게 하는 자를 유능한 서리라 하며, 형벌을 매우 혹독하게 쓰는 자를 일 처리에 능한 자라 하고 아랫사람의 것을 빼앗아 위에 바치는 자를 봉공(奉公)을 잘한다고 합니다. 360개 고을의 수령 중에 자상하고 사근사근한 자는 몇 안 되고 침해하고 긁어들이는 자만 널려 있습니다. 그러니 백성들이 어찌 곤궁해지지 않고 원망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공물을 거두는 번잡함이 이미 이와 같은 데다가 각 관사(官司)에서 방납(防納)하고 조등(刁蹬)하는 폐단은 나라에 있어서는 큰 좀벌레이고, 백성들에게는 큰 병이 되는 것입니다. 공안(貢案)에는 정해진 액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백성들이 바치는 것은 정해진 액수 이외에도 이른바 인정(人情)이니, 작지(作紙)니 하는 것이 있어서 원래의 액수보다 몇 갑절이나 많습니다. 방납의 경우는, 각 시(寺)의 주인(主人)들이 사실 그 이익을 독점하고 있는데 백성들이 직접 바치고자 하더라도 바칠 길이 없습니다. 그러나 조종조(祖宗朝) 때에는 법을 범한 죄에 대해서는 변방으로 내쫓아 버리기까지 하였으므로 모리배들이 제멋대로 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국가에서도 예삿일로 알아 호조(戶曹)에서 공물을 부과하거나 본사(本司)에서 징수하는 것도 고을에다가 하지 않고 그 주인(主人)에게 합니다. 그러니 주인들이 무엇에 징계되어서 두려워하는 바가 있겠습니까. 주인은 이익을 독점하여 가만히 앉아서 부자가 됩니다. 그리고 사대부 가운데 이끗을 좋아하는 자도 간혹 이를 본받아 권력이 센 자는 감사에게 편지를 보내고, 직위가 낮은 자는 사사로이 수령에게 부탁하여, 흔한 물품을 바치고서는 열 배의 값을 받아들입니다. 그리하여 양피(羊皮) 한 장 값이 면포 70필(疋)에 이르고, 표피(豹皮) 한 장 값은 수백 필에 이릅니다. 종이 10권(卷)은 지극히 미미한 것임에도 산읍(山邑)에서 목재 100여 조(條)를 받아들이고, 궁각(弓角), 갖풀 따위는 지극히 흔한 것인데도 민간에서 100여 곡(斛)의 쌀을 거두는 실정입니다. 지극히 미미하고 지극히 흔한 것도 이와 같으니, 하물며 이보다 더 중한 것이야 말할 것이 무에 있겠습니까. 잔약한 백성들이 재물을 배로 운반하고 육로로 실어 날라서는 권력 있고 지체 귀한 집에 바치는 것이 얼마나 되는지 알 수 없을 정도여서 백성들의 고혈은 이미 다 말라 버렸습니다. 아, 조세의 번거로움이 이와 같고 방납의 폐단 또한 이와 같으니, 백성들의 원망과 탄식으로 인해 화기(和氣)가 손상된 것을 어찌 이루 다 말할 수 있겠습니까.
부역(賦役)에 관한 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백성들에게 부역시키는 것을 반드시 농사가 한가할 때 하는 것은 농사를 해칠까 염려해서입니다. 그러므로 맹자(孟子)는 농사철을 빼앗지 않는 것이 왕도 정치의 근본이라고 하였으며, 《춘추(春秋)》에는 남문(南門)을 만들었다고 기록하여 때에 맞지 않는 일을 한 데 대해 비평하는 뜻을 보였으니, 이것은 민력(民力)을 중히 여긴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성을 수리하거나 하천을 준설하는 등의 모든 부역을 징발함에 있어서 시기를 가리지 않고 오직 목전의 일을 처리하는 것만 시원스럽게 여깁니다. 그리하여 밭고랑에서 일하는 백성들을 몰아다가 획일적으로 일을 시키고 독려하는데, 봄부터 겨울까지 끝날 기약이 없습니다.
토목(土木)의 역사(役事)에 이르러서는 지금 몇 해가 지났는데도 꽝꽝 찍어대는 도끼가 깊은 산에서 번쩍이고, 어영차 힘쓰는 소리는 우레같이 도성 안에 울리고 있습니다. 여기에 들어가는 천 개의 재목은 귀신이 운반하는 것이 아니라 모두 백성의 힘으로 옮기는 것이며, 부역의 대가로 지급하는 것도 하늘에서 떨어지고 땅에서 솟아난 것이 아니라 모두가 부녀자들의 베틀에서 나온 것입니다. 신들이 듣건대, 관동(關東)의 산읍(山邑)은 호구수가 많은 곳이라 해도 수백 호에 지나지 않고 적은 곳은 수십 호밖에 안 된다고 합니다. 그런데 범과 표범이 사는 굴에 들어가기도 하고 험준한 산비탈을 넘어 다니며 아름드리 재목을 운반하느라 소는 거꾸러지고 사람은 넘어져 낭떠러지에서 죽는 자가 잇따르고 있습니다. 그러니 가까스로 남아 있는 백성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모든 고을이 쓸쓸하고 촌락이 텅 비었습니다. 전하께서는 대궐 안에 깊이 앉아 계시니, 어찌 그 폐단이 이와 같다는 것을 아시겠습니까.
왕자의 저택을 짓는 일을 비록 폐할 수는 없습니다만, 드높은 집과 아로새긴 담은 정해진 한계가 없어 거리를 연해 줄지어 있는 것이 모두가 새로 지은 저택들입니다. 당(唐)나라 목요(木妖)의 변을 오늘날에 다시 보게 될 줄은 생각지도 못하였습니다. 이뿐만이 아닙니다. 재용을 함부로 낭비하고 절약하지 않아 국가의 경비가 고갈되었으므로, 포흠(逋欠)에 대한 영을 신칙하고 해유(解由)의 법을 엄하게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생업을 잃었더라도 조세(租稅)는 그대로 있어서, 이곳저곳 떠돌아다니거나 대가 끊긴 백성에 대해서도 반드시 장부를 살펴 조세를 내도록 하고 있습니다. 아, 부역의 무거움과 조세의 많음이 이와 같으니, 백성들의 원망과 탄식으로 인해 화기가 손상되는 것을 어찌 이루 다 말할 수 있겠습니까.
군정(軍政)에 관한 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군사는 정예를 추구하고 많은 것을 추구하지 말라는 것이 옛날의 훌륭한 가르침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그렇지 않아 인구수는 예전보다 줄었는데도 군사의 정원은 선조(先朝) 때보다 갑절로 불어났습니다. 그리하여 머슴이나 거지를 가리지 않고 모조리 정원에다 채워 넣으며, 정원 외에 또 남은 군정(軍丁)이 있으면 별도의 부대를 만들어 여외(旅外)라고 이름을 붙입니다. 그런데 군적(軍籍) 작성을 마치자마자 도망치는 자가 속출하므로, 일족(一族)에게 책임 지우고 이웃에게 책임 지우며, 또 그 땅을 부치는 자에게 책임 지웁니다. 한 사람이 도망하면 그 화가 열 집에 미치고, 열 집이 지탱하지 못하면 그 화가 또 백 호에 미치는 방식으로 이리저리 떠넘기는 일이 이어져 마침내는 빈 장부가 되는 데에 이르고 맙니다. 그러니 정예를 추구하는 뜻이 어디 있습니까.
지역은 멀고 가까운 차이가 있으므로 부방(赴防)하는 장소를 살펴서 하지 않아서는 안 되고, 부역은 고되고 헐한 차이가 있으므로 작업과 휴식을 고르게 시키지 않아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 지금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군정(軍政)을 모두 서리에게 내맡기기 때문에 부방하는 장소를 정함에 있어서는 거리의 원근을 따지지 않고, 군사를 배정함에 있어서는 부역의 난이도를 따지지 않으면서 오직 뇌물이 많고 적은 것에 따라서만 정합니다.
천경(踐更 번갈아 가며 교대하는 것)하는 법을 제때에 행하지 않음으로 인해 몇 년이 지났는데도 돌아오지 못하는 자가 있으며, 심한 경우에는 7, 8년이 되도록 부모와 처자식을 떠나 있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와 서캐는 칼과 냄비에까지 득실거리고 겨와 쭉정이로도 배를 채우지 못해 굶주림과 추위에 시달리면서 울분을 참고 할 말을 못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뇌물을 바치고 장수가 된 사람들의 침해가 물불보다도 더 심하여, 군민(軍民)을 닭이나 돼지로 보고 잡초처럼 여겨, 씹어 먹고 베어 없애는 행위가 끝이 없습니다. 그리고 15세에 군정이 되었다가 60세에 군역을 면제받는 것이 국법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젖먹이 아이조차 모두 군대에 편입되어 있고 70세가 넘은 노인까지도 병적에 들어 있으며, 심지어는 불구자나 병세가 위독한 자도 대부분 병역을 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아, 군정이 이와 같으니, 백성들의 원망과 탄식으로 인해 화기가 손상되는 것을 어찌 이루 다 말할 수 있겠습니까.
조정(朝廷)에 관한 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전하께서 즉위하신 처음에는 중정(中正)하고 화평한 법을 세우시어 잘 이끌었습니다. 이에 조정은 맑고 밝았으며 백관들은 서로 공경하고 협동하여 점차 대도(大道)의 세상으로 나아가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불행히도 사론(士論)이 서로 어긋나 하나는 이쪽으로 하나는 저쪽으로 갈림으로써 사정(邪正)이 서로 싸우고 시비가 정해지지 않아, 수십 년 사이에 진퇴(進退)와 소장(消長)의 기미가 강하(江河)가 밀고 밀리는 듯한 형세로 그치지 않고 찾아들었습니다. 조정의 불화가 이와 같으니, 민심이 흉악해지고 사악한 기운이 이변을 가져오는 것은 이상할 것도 없습니다.
오직 다행한 일은 성상께서 밝게 통촉하고 단호한 결단을 내리시어 한번 조처하는 사이에 승냥이 같은 자들이 두려워 엎드렸습니다만, 권간(權奸)이 정사를 어지럽힌 나머지 바르지 못한 논의가 마구 떠돌아 사류의 기풍이 꺾였으며, 뇌물이 성행하여 탐오의 풍습이 크게 일어났습니다. 배척을 받은 자는 원망이 골수에 사무쳐서 때를 틈타 제 뜻을 펴려 하고 있으며, 관직에 있는 자는 국사에는 뜻이 없고 오직 녹만 받고 몸만 보전하려고 합니다. 그리하여 의정부에는 삼지재상(三旨宰相)만 있고 대각(臺閣)에는 장마언관(仗馬言官)만 포진함으로써 전하께서는 국사를 맡길 만한 심복이 없고 의지할 만한 이목이 없어서 억조창생의 윗자리에 외롭게 계시면서 복잡다단한 정사를 처리하고 계십니다. 일에는 가부가 있는 법인데 의견을 제시하는 자가 없으며, 정사에는 득실이 있는 법인데 반론을 제기하는 자가 없습니다. 군덕(君德)을 보양(輔養)하는 자가 누가 있으며, 잘못을 바로잡는 자는 또 누가 있습니까. 치도(治道)를 논하고 나라를 경영할 만한 정승이 있습니까, 적을 막아 치욕을 당하지 않게 할 만한 장수가 있습니까. 이를 비유하자면 큰 강을 건너는 데 밧줄과 노가 없어서 중간에서 역풍을 만날 경우 반드시 전복되는 것과 같습니다.
게다가 교화는 차츰 쇠해지고 풍속은 퇴폐해져서 국가의 기강이 바로 서지 않고 염치의 도가 없어졌습니다. 이에 임금을 버리고 어버이를 뒷전으로 치부하는 의논이나 공론을 등지고 사적인 당을 위해 죽으려는 의논이 온 세상에 만연하고 있습니다. 줄곧 이렇게 나가다가는 자사(子思)가 ‘나라에 떳떳한 법이 없게 되고 말 것이다.’라고 지적했던 경우와 불행히도 비슷하게 되지 않겠습니까.
아, 조정이란 사람의 심장이나 배와 같고 사방(四方)은 사람의 사지(四肢)와 같습니다. 심장과 배가 병들었는데도 사지가 멀쩡한 경우는 없습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조정이 다스려지지 않았는데 사방이 어지럽지 않은 경우도 없는 법입니다. 이로 보면 오늘날 이변이 일어난 것이 과연 하늘의 운수 탓이겠습니까, 인사가 잘못된 탓이겠습니까.
전하께서 만약 재이(災異)가 변하여 상서가 되고 화가 바뀌어 복이 되게 하려 한다면 어찌 그 근본을 반성하지 않으십니까. 전해 오는 말에 ‘근원이 맑으면 흐르는 물도 맑고 모양이 바르면 그림자도 바르다.’ 하였으며, 동중서(董仲舒)는 말하기를, ‘마음을 바르게 하여 조정을 바르게 하고, 조정을 바르게 하여 백관을 바르게 하고, 백관을 바르게 하여 만민을 바르게 한다.’ 하였습니다. 이 말이 비록 흔한 것이기는 하나, 이렇게 하지 않고는 달리 방도가 없습니다. 이것이 곧 주희(朱熹)가 임금이 듣기 싫어하는 것을 무릅쓰고 성의(誠意)와 정심(正心)에 관한 설을 올렸던 이유입니다.
전하께서 진정 재앙을 만나 두려워하면서 성제(聖帝)와 명왕(明王)의 덕을 닦아, 전하의 한 마음이 모든 교화의 근본이 되게 하고 전하의 한 몸이 만백성의 표준이 되게 하며, 미미한 몸과 마음에서부터 출발하여 그 법이 궁궐 안에서 행해지게 하고 또 조정에까지 미치게 함으로써 모든 것이 올바른 데에서 나오게 한다면, 신들이 진달한 백성들의 고통쯤은 간단히 해결될 일일 뿐입니다. 백성들의 원망이 어디서 일어나겠으며 하늘의 재앙이 어디서 생기겠습니까.
아, 전하께서 근심하는 것은 재이입니다만 신들의 지나친 염려에는 재이 이외에 또 더 크게 우려되는 것이 있습니다. 대체로 나라에 세자(世子)를 정해 두는 것은 만백성의 마음을 단합시키고 종묘사직을 위한 계책입니다. 그런데 지금 춘궁(春宮)이 오래도록 비어 종묘의 제기(祭器)를 맡길 곳이 없어서 국가의 막중한 일을 소홀히 하는 쪽으로 방치해 두고 있습니다. 이것이 어찌 나라의 근본을 정하고 민심을 단합시키는 길이겠습니까.
전하께서는 신기한 지모와 뛰어난 계책을 말이 없는 가운데 묵묵히 운용하시어, 일반적인 정사까지도 그 깊고 정밀한 사리를 똑똑히 보아 내지 않은 것이 없으시지만, 유독 이 종묘사직의 큰 계책에 있어서는 이처럼 오래도록 시일을 끌고 계십니다. 예로부터 세자를 일찍 세우지 않았다가 위험과 혼란을 불러온 것은 역사책을 상고해 보면 분명하게 볼 수 있으니, 어찌 신들이 말씀드릴 필요가 있겠습니까.
공자(孔子)의 말씀에 ‘어려서 이루어진 것은 천성과 같으며, 습관은 절로 된 것과 같다.’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선왕(先王)이 태자를 가르침에 있어서는 뱃속에 있을 때에는 올바른 태교(胎敎)가 있었으며, 출생하여서는 대궐 앞을 지날 때 가마에서 내리는 경(敬)이 있었으며, 어릴 때에는 보(保)와 부(傅)의 관원을 두었습니다. 어릴 적부터 다 장성할 때까지 전후좌우에 올바른 사람이 아닌 이가 없었으며, 듣고 보는 것이 바른 말과 바른 일 아닌 것이 없었습니다. 대체로 이와 같이 하면 아무리 착하지 않은 일을 하고 싶더라도 누구와 함께 하겠습니까. 삼대(三代) 때에 어진 임금이 계속해서 일어나고 국운이 길었던 것은, 가르쳐서 기르는 방도가 이와 같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후세에는 그렇지가 않아 깊은 궁중에서 태어나 부인의 손에 자라는 탓에 부귀는 저절로 있는 것이고, 교만과 사치스러움도 저절로 생겨나게 되어 있습니다. 옆에는 엄한 스승의 훈계와 존경하는 벗의 충고가 없으며, 더불어 상종하는 자는 환관이나 궁첩이 아니면 가마꾼이나 종들뿐이고, 날마다 하는 일이라고는 닭싸움이나 개 달리기 경주 아니면 술이나 마시고 노래나 즐기는 것입니다. 혈기가 왕성해지고 심지가 이미 변한 뒤에 비로소 가르치고 이끌어 줄 경우에는 속에서 완강히 거부하여 가르침이 먹혀들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니 하루 쬐는 햇볕이 열흘 추운 데 무슨 도움이 있겠으며, 제(齊)나라 사람 한 명이 여러 명의 초(楚)나라 사람이 떠들어 대는 데 무슨 보탬이 있겠습니까. 아, 천 금(金)을 가진 일반 부잣집에서도 오히려 아이 가르치기를 급하게 여기는 법입니다. 종묘 사직을 맡길 세자가 얼마나 중요한데, 미리 가르쳐 기르지 않는단 말입니까. 전하께서 만약 깊은 밤 한가한 시간에 여기에 생각이 미치면 어찌 깜짝 놀라 가슴이 뜨끔하지 않겠습니까.
신들은 지위가 낮고 말이 가벼워 종묘사직의 큰 계책에는 감히 참여할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사마광(司馬光)은 통판(通判)으로 있을 적에도 오히려 태자를 세울 것을 청하였습니다. 신들이 논사(論思)하는 직책에 대죄(待罪)하고 있으면서 나라를 근심하는 간절한 정성을 어찌 감히 성상께 진달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삼가 전하께서는 저희들의 어리석은 정성을 불쌍히 여기시어 유념해 주시기 바랍니다.”
하였다.
또 차자를 올렸는데 모두 10조목이었다. 첫째 조목에 “조정을 바로잡아 백관을 바르게 해야 합니다. 조정이 바르지 않게 되는 원인에는 세 가지가 있습니다. 현사(賢邪)를 판별하지 않는 것, 청탁을 공공연히 행하는 것, 탐오(貪汚)가 풍조를 이루는 것이 그것입니다.” 하였고, 둘째 조목에 “학교를 일으켜서 교화를 밝히는 것입니다. 학교가 부흥하지 않는 원인에는 세 가지가 있습니다. 사도(師道)가 서지 않는 것, 사습(士習)이 바르지 않은 것, 과거 시험에 얽매이는 것이 그것입니다.” 하였고, 셋째 조목에 “내치(內治)를 엄하게 하여 집안의 정사를 다스리는 것입니다. 내치가 엄하지 않는 원인에는 세 가지가 있습니다. 여알(女謁 궁녀를 통해 청탁을 행하는 것)이 성행하는 것, 왕자에 대한 교육을 미리 하지 않는 것, 재화(財貨)를 가지고 이식(利殖)하는 것이 그것입니다.” 하였고, 넷째 조목에 “백성의 고통을 제거하여 나라의 근본을 단단하게 하는 것입니다. 백성의 고통이 제거되지 않는 원인에는 다섯 가지가 있습니다. 거두어들이는 것이 지나치게 많은 것, 일족(一族)과 인족(鄰族)들을 침해하는 것, 요역(徭役)이 지나치게 번다한 것, 공부(貢賦)가 고르지 않은 것, 방납(防納)이 백성을 해치는 것이 그것입니다.” 하였고, 다섯째 조목에 “군정(軍政)을 닦아서 변방을 튼튼하게 하는 것입니다. 군정이 닦이지 않는 원인에는 네 가지가 있습니다. 군율이 해이한 것, 방수(防戍)가 고르지 않은 것, 뇌물을 바치고 장수가 된 사람들이 침해하는 것, 조련(操鍊)에 법도가 없는 것이 그것입니다.” 하였고, 여섯째 조목에 “형옥(刑獄)을 심리하여 억울함을 풀어 주는 것입니다. 형옥이 제대로 심리되지 않는 원인에는 세 가지가 있습니다. 법령이 한결같지 않은 것, 관리들이 법을 왜곡하는 것, 큰 옥사가 만연하는 것이 그것입니다.” 하였고, 일곱째 조목에 “대신을 신임하여 조정을 높이는 것입니다. 대신이 중해지지 않는 이유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체모를 공경하지 않는 것, 정사가 나오는 곳이 많은 것이 그것입니다.” 하였고, 여덟째 조목에 “간쟁(諫諍)을 받아들여 언로를 여는 것입니다. 간쟁을 했다는 말이 들리지 않는 원인에는 세 가지가 있습니다. 아첨하는 자들이 뜻을 얻는 것, 사기가 좌절되는 것, 공론이 펼쳐지지 않는 것이 그것입니다.” 하였고, 아홉째 조목에 “성학(聖學)을 밝혀서 나라를 다스리는 근본을 세우는 것입니다. 성학의 요체에는 세 가지가 있습니다. 도술(道術)을 밝히는 것, 천덕(天德)을 본받는 것, 경외(敬畏)를 숭상하는 것이 그것입니다.” 하였고, 열째 조목에 “사치를 금하여 절약과 검소한 덕을 숭상하는 것입니다. 사치의 폐단에는 세 가지가 있습니다. 궁궐이 지나치게 화려한 것, 의복(衣服)이 참람한 것, 음식이 지나치게 풍성한 것이 그것입니다.” 하였다.
또 차자를 올렸는데, 대략 다음과 같다.
“백성들이 들판에서 원망하는데도 상께서는 알지 못하고, 왜곡과 거짓이 안에서 일어나는데도 군주는 듣지 못함으로써 혼란에 빠진 나머지 마침내 정치가 없는 나라가 되고 말 처지에 처했으니, 신들은 내심 가슴이 아픕니다.
무엇을 일러 백성들이 들판에서 원망한다고 하겠습니까. 성지(城池)와 갑병(甲兵)은 그야말로 외적의 침입에 미리 대비하여 요새를 설치한다는 의의가 있는 것입니다만, 옛날 삼국 시대에 내지(內地)의 군현(郡縣)에는 성지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관방(關防)과 망루(望樓)를 내지에 두루 설치하느라 나라의 근본을 뒤흔들며 백성을 병들게 하고 재력을 다 허비하였습니다. 게다가 튼튼하게 쌓지 못하여 해마다 이를 수리하느라 오랜 동안 백성의 해가 되고 있습니다.
삼가 듣건대 이 역사(役事)를 시작할 때 전지 1결(結)당 베를 많게는 17, 8필까지 냈고, 역사에 나가지 못한 대가로 보상하는 쌀이 간혹 4, 5곡(斛)에 이른다고 합니다. 그리고 활, 화살, 갑주 같은 기구에 이르러서도 그 길고 짧은 제도가 사람마다 의견이 달라 점검을 거칠 때마다 반드시 개조하게 하는데, 그 비용을 모두 백성들에게 책임 지운다고 합니다. 게다가 한 해 동안에 세금으로 바치는 것과 별도의 명목을 붙여 거두어들이는 폐단이 있어서, 한 해 내내 매질하며 다그치니 백성들이 목숨을 부지할 수가 없습니다. 이에 불쌍한 과부가 숲속의 나무에 목을 매어 죽은 경우도 있습니다. 신들은 성명(聖明)의 세상에 이런 일이 있을 줄은 생각지도 못하였습니다.
백성들이 원망하여 반란을 일으키면 괭이와 창 자루만으로도 강한 진(秦)나라의 왕업을 망하게 할 수 있는 법이고, 사람들이 화합하여 뭉치면 탄환만 한 고구려로서도 수(隋)나라나 당(唐)나라의 군사를 무찌르기에 충분한 법입니다. 지금은 백성들이 이와 같이 흩어졌으니 비록 성지(城池)가 있더라도 누구와 나라를 지키겠습니까. 신들의 생각으로는, 관방이 예부터 있던 곳은 해마다 수리하여 금성탕지(金城湯池)로 만들고, 내지(內地)에 있는 것들에 대해서는 아직 쌓지 않은 곳은 일절 정지하여 그만두고 이미 쌓은 곳은 그대로 두면 될 것으로 여깁니다. 그럴 경우에는 그래도 백성이 다 흩어지기 전에 제 살 곳을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계미년의 변란이 발생한 뒤로 국가에서 무신(武臣)을 등용하면서 갑자기 등급을 뛰어넘어 뽑아 씀으로써 인사행정이 차례가 없고 자격(資格)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재상(災傷)을 당하거나 하등(下等)을 맞거나 해유(解由)가 나오지 않은 데 대한 법과 장오(贓汚)를 범하거나 패군(敗軍)한 데 대한 율은, 참으로 변경해서는 안 되는 금석(金石)과 같은 법이며 왕법(王法)에 있어 용서할 수 없는 벌인데도 불구하고 전부 돌아보지 않고 있습니다. 금방 탄핵을 받았는데도 갑자기 다시 승진시킴으로써 상벌을 시행할 수가 없고 간사하고 탐오한 자를 징계할 수가 없게 되었으며, 어리석고 패려한 아이들이 갑자기 큰 책임을 맡기까지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형장(刑杖)을 남용하고 재물을 긁어들인 탓에 백성들이 흩어지고 재물은 탕진되어 완전한 고을이 없게 되었습니다.
내지(內地)의 큰 고을도 무사(武士)에게 내맡겨 학교가 황폐해짐으로써 거문고 소리와 글 소리가 끊어졌습니다. 옛날 송(宋)나라 때 모든 고을의 통판(通判)을 반드시 문신으로 차임해 보냈던 데는 그만한 뜻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전적으로 무사만을 임용하여 나라의 근본이 되는 백성까지 손상시키고 있습니다. 신들로서는 이 점을 실로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무엇을 일러 왜곡과 거짓이 안에서 일어난다고 하겠습니까. 신들은 삼가 보건대, 전하께서는 즉위하신 이후로 노래와 여색, 수레, 말 등을 가지고 노는 일이 없고, 잔치를 벌여 놀거나 사냥하는 등의 즐거움을 끊으셨습니다. 그러면서 궁궐 안을 엄히 다스려 집안을 바로잡는 도를 다하고, 외척들을 교화하여 정사에 간여하는 조짐을 막으셨습니다. 이에 근본을 바르게 하고 근원을 맑게 한 정치가 사방에 모범이 될 만하였습니다. 그런데 다만 신하들 가운데 간언을 올리는 아름다운 일이 없어 왜곡과 거짓의 폐단이 임금께 전해질 길이 없습니다.
왕자(王子)들은 존귀한 대궐에 들어앉아 계시는데, 미천한 하인들이 그 문하에서 농간을 부리고 있습니다. 그 다람쥐 같은 하인들은 조금이라도 궁중이나 외척 사이에 연줄이 있으면 어김없이 다른 사람을 협박하기를, ‘나는 어느 궁의 절친한 족속이다.’ 하거나 ‘나는 아무 방(房)의 종이다.’ 하면서, 권력을 부려 뇌물을 받을 계략을 꾸미고 있으며, 심지어는 대단치도 않은 옥송(獄訟)이나 미미한 관직을 제수하는 데 있어서도 모두 뇌물을 받고 처리하려고 합니다. 각종 명목의 방납(防納)이 팔도에 두루 널려 있는데, 반드시 궁지(宮旨)라고 칭하면서 값을 정해 받아들입니다. 짐승 가죽이나 어육(魚肉)을 시장에 팔면서는 말하기를, ‘이것은 대궐에서 내린 물건이다.’ 하고, 금, 은, 채단 등을 시장 상인들에게 내놓으라고 요구하면서는 말하기를, ‘이것은 대궐에서 사들이는 물건이다.’ 합니다. 이에 각 방리(坊里)의 백성들은 그 소리에 두려워 감히 대항하지 못하고 비싸게 사고 헐값으로 팔아, 그들이 요구하는 대로 다 들어줍니다. 그러고 나서는 머리를 한데 모으고 이마를 찡그리며 시장을 파하고 통곡하여 삶을 즐기는 마음을 잃었습니다.
심지어 임금이 지척에 계신 금문(禁門) 안에서까지 감히 간사한 계책을 부립니다. 품계가 낮은 수령이 하직 인사 하러 올 경우에는 차비문(差備門)으로 불러들여 술과 과일을 대접하고는 말하기를, ‘이것은 어느 궁에서 내린 것이다. 어느 분이 너희 고을에서 무슨 일을 할 것이니, 너는 성의를 다하여 처리해 주라.’ 한다고 합니다. 이런 따위의 말이 항간에 파다하게 퍼져 있는데, 곳곳마다 모두 마찬가집니다. 그러니 어느 누가 전하께서 궁궐 안을 엄하게 다스린다는 것을 알아서 성명(聖明)의 세상에 허물을 돌리지 않겠습니까. 신들은 이런 말을 들을 때 내심 가슴이 아픕니다.
왕자방(王子房) 사람들에 이르러서는, 그들이 진짜로 그 방에 소속되어 있는 사람인지 여부를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함부로 자기는 사약(司鑰)이라고 칭하면서 군현(郡縣)을 제멋대로 돌아다니고 있습니다. 여러 산에 있는 사찰을 원당(願堂)으로 삼는다고 핑계 대고서는 재물을 거두어 가고, 산택(山澤)이나 제방 등을 점령하여 제 것으로 삼고는 남의 전토를 빼앗습니다. 그리고 양갓집의 딸을 위협하여 처첩(妻妾)으로 삼고, 부근에 사는 민정(民丁)을 궁속(宮屬)이라고 하면서 수령을 억누르고 향리 사람들을 위협합니다. 또 서울 부근에 있는 산은 모조리 시장(柴場)으로 삼고, 강과 바다의 어장(漁場)과 염전을 모조리 입안(立案)하였다고 합니다. 그런가 하면 조금이라도 그들의 뜻에 순응하지 않는 자가 있을 경우, 다짜고짜 종친부(宗親府)에서 보내는 관자(關字 상관이 하관에게 보내는 공문)라고 칭탁하고는 관리로 하여금 잡아 보내게 합니다. 하지만 방(房)에 이르러 보면 어느 한 사람도 왕자의 모습을 본 사람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뇌물을 요구하고는 바깥에서 풀어 주며 말하기를, ‘이것은 왕자의 영(令)이다.’ 합니다. 도성 안에 사는 호족과 사나운 자들은 그들의 친족 중에 조금이라도 여러 방의 하인과 관계가 있는 자가 있으면 반드시 곧 그를 어느 방의 하인이라고 사칭합니다. 그러고는 옥송(獄訟)이나 싸움에 조금이라도 관련이 되면 색리(色吏)를 매질하기도 하고 남의 집을 부수기도 합니다. 그러면서 거리와 시정의 이익을 반드시 다 빼앗아 차지하고 하찮은 원한까지도 반드시 앙갚음을 합니다.
대체로 왕자들은 전하의 훈계를 받았고 타고난 부귀를 누릴 수가 있습니다. 그러니 어찌 애잔한 백성의 재산을 빼앗아 더 보탤 리가 있겠습니까. 더구나 하인들의 횡포하고 방자한 폐단에 대해서는 더더욱 왕자 자신들은 모르는 일인데 어리석은 백성들이 그런 내막은 모르고 한갓 원망과 고통스러워하는 마음만 품고 있습니다. 신들은 이런 말을 듣고 내심 통탄하였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궁궐 안을 엄하게 신칙하고 대군들을 훈계하시되, 한 가지 일이라도 이와 비슷한 일이 있을 경우에는 성지(聖旨)를 분명히 내리소서. 그리하여 중외(中外)로 하여금 이런 일은 생쥐 같은 무리들이 한 일이지, 실은 전하께서 들어본 것도 아니고 왕자들도 아는 바가 아니라는 것을 환히 알게 하소서. 그럴 경우 음습한 기운의 부정한 무지개가 일시에 얼음이 풀리듯 풀릴 것이니, 어느 누가 전하의 밝디밝은 덕에 감격하지 않겠습니까.
신하로서 임금에게 고하는 일은 반드시 먼저 아래에 있는 자로서의 도리를 바르게 하여야만 합니다. 근년 이래로 사대부들 사이에는 탐오한 것이 풍조를 이루어 뇌물이 성행하고 있는데도 유사가 조사하여 다스렸다는 말을 듣지 못했는데, 신들은 지금 이처럼 비속한 설만 전하께 늘어놓았으니, 이것이 어찌 신하로서 신하의 도리를 다하는 의리이겠습니까. 삼가 전하께서는 살펴 주시기 바랍니다.”
하였다.
차자가 하나 올라갈 적마다 말이 더욱 합당하고 기휘(忌諱)에 저촉되는 것을 피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동료들 가운데에는 간혹 몸을 사려 뒤로 물러나는 자도 있었고, 외척과 권귀(權貴)들은 공을 매우 미워하였다. 심지어는 ‘김 아무개가 조정에 있으니 우리들은 어디로 갈 것인가.’ 하면서, 대간들은 모두 피혐하여 물러나겠다고 자청하였고, 삼공(三公)은 대죄하려고까지 하였다. 세 통의 차자가 한번 나오자 사방에서는 서로 돌려가며 외우면서 이를 육지(陸贄)의 《주의(奏議)》에 견주기까지 하였다. 유상 성룡(柳相成龍)이 글을 보내 치하하기를, “곧은 말이 한번 올라가자 상께서 마음속으로 감동하였습니다. 군자가 없으면 어찌 나라를 잘 다스릴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공이 옥당(玉堂)에 있으면서 전후로 올린 차자가 이 세 통만이 아니었으나 지금은 모두 없어져서 전하지 않으니, 애석하다.
동부승지(同副承旨)로 옮겨졌다가 얼마 뒤에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로 체차되었다.
임진년(1592, 선조25) 봄에 형조 참의(刑曹參議)에 제수되었다. 본조에서는 계복(啓覆)할 중죄인을 제외한 자는 으레 속전(贖錢)을 받고 풀어 주기 때문에 타사(他司)에 관련된 죄수들 중 간사한 무리들이 모두 본조에 옮겨 갇혀서 속전을 바치고 죄를 면하고자 하였다. 이에 간사하고 교활한 짓이 날로 불어나 조심하고 두려워하는 바가 없었다. 그런데 공이 그들의 실정과 죄상을 살피고 그 경중을 조사하여 한결같이 법대로 처리하면서 조금도 용서하지 않자, 다시는 연줄을 타고 청탁할 수가 없게 되어 본조가 맑아졌고 각 관사(官司)도 따라서 맑아졌다. 공은 또 말하기를, “소는 농사의 근본이다. 이미 소를 도살하는 데 대한 금법이 있어서 상공(上供)으로 바치는 것도 올리지 않고 있다. 그런데 도성 안에서는 도살이 날로 성행하고 있다. 백성의 재산을 축내는 것 중에 이것보다 더 심한 것이 없으니, 참으로 성상의 뜻을 체득해서 백성의 생활을 풍족하게 하는 도리가 아니다.” 하였다. 그러고는 더욱더 엄하게 금하도록 하였다.
일본에 갔던 사신이 돌아온 뒤로 조정에서는 왜적을 방비하는 계책이 전적으로 성지(城池)를 수축하는 데 있다고 여겼다. 그리하여 민정(民丁)을 끌어 모아 군사로 만들고는 곳곳마다 성을 쌓았는데, 예전에 성이 없었던 내지(內地)까지도 모두 새로 성을 쌓았다. 이에 성을 개축하는 일이 여기저기서 벌어져 호령이 번잡하고 가혹하였으므로 향리가 소란스럽고 인심이 크게 무너졌다. 공이 옥당에 있으면서 아뢰기를, “오늘날에 두려워할 것은 섬 오랑캐가 아니라 인심입니다. 만약 인심을 잃는다면 금성탕지(金城湯池)와 견갑이병(堅甲利兵)이 있더라도 다 무용지물이 될 것입니다. 성 쌓는 일을 우선 중지하여 백성들의 원망을 풀고 인심을 진정시키소서.” 하였다. 그리고 차자 가운데서도 내지에 성을 쌓는 폐단에 대해 극력 진달하였다. 그러자 관찰사가 그 소식을 듣고 장계를 올리기를, “영남의 사대부가 작은 폐단을 싫어하여 국사를 돌아보지 않고 이론을 제기하면서 갖가지로 방해합니다.” 하였으며, 공을 좋아하지 않고 있던 외척들도 유언비어를 퍼뜨리면서 갖가지로 헐뜯었다. 이때에 이르러 비국(備局)에서 의논하여 곤수(閫帥)를 뽑으면서 이름난 무관을 천거하여 의망하였는데, 상이 하교하여 특별히 공을 뽑아 경상 우병사(慶尙右兵使)로 삼았다. 이에 정원에서 방계(防啓)하였으나, 상이 윤허하지 않았다.
공은 명을 받고 곧바로 출발하였는데, 조정의 어진 사대부들이 모두 탄식하고 안타까워하였으며, 길가에 나와서 위로하는 자도 있었다. 공은 말하기를, “나라에 지은 죄가 큰데 중한 직임을 받았으니 성상의 은혜가 망극하다. 이 몸이 죽지 않으면 오직 온 힘을 다할 뿐, 일의 성패는 말할 바가 아니다.” 하였다. 한강을 건너면서 시 한 수를 지었는데, 그 시에 이르기를,
절도사로 남쪽 길 행차 떠나며 / 杖鉞登南路
외론 신하 죽음을 각오하노라 / 孤臣一死輕
남산이며 한강수를 / 終南與渭水
고개 돌려 바라보니 못내 아쉬워 / 回首有餘情
하였다.
단월역(丹月驛)에 이르러 왜적들의 배가 바다를 뒤덮고 건너오는 바람에 부산(釜山)과 동래(東萊)가 잇따라 함락당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달려갔다. 의령현(宜寧縣)에 이르러서 장차 정암진(鼎巖津)을 건너 곧장 본진(本鎭)인 창원(昌原)으로 가려고 하였는데, 왜적들이 이미 낙동강 오른쪽을 점거하고 있다는 말을 듣고 휘하의 장수와 병사들이 함께 모여 말하기를, “정암진을 통해 가는 길은 적이 있는 곳과 가까우므로 곧장 나아간다면 반드시 위태로울 것이다. 진주(晉州)를 경유하여 함안(咸安)으로 나가 왜적들의 형세를 살펴보느니만 못하다. 하지만 병사(兵使)의 명이 엄한 바 사실대로 고해서는 안 되니, 우선은 배가 없다고 거짓으로 고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였다. 그러고는 공의 둘째 아들 김역(金湙)에게 부탁하여 들어가서 ‘강물이 불어났고 배가 없으니 진주로 가는 것이 편하다.’라고 고하게 하였다. 그러자 공이 군관(軍官) 김옥(金玉)을 시켜 가서 살펴보게 하였는데, 김옥도 돌아와서 배가 없어서 건널 수 없다고 고하였다. 공은 그 말을 듣지 않고 말하기를, “왕명을 받고 내려왔는데 적의 형세가 이미 급해졌으니 어찌 길을 돌아서 갈 수가 있겠는가. 내가 직접 가서 살펴보겠다.” 하니, 전 목사 오운(吳澐) 역시 곁에 있다가 다른 길을 따라서 가면 군사들의 사기가 떨어질까 우려된다고 말하였다. 공은 즉시 길을 재촉하여 앞으로 나아갔다. 정암진에 도착해서 보니 강가에 배가 있었다. 이에 즉시 김옥과 김역을 끌어내려 둘 다 처형하려고 하니, 장수들이 뜰 가득히 모여 번갈아 간하기를, “사실을 속인 죄는 사실 여러 사람의 생각에서 나온 것으로, 병사께서 곧장 적들이 있는 길로 가는 것이 애가 탔습니다. 그리하여 자제(子弟)에게 임시변통으로 꾸며서 말씀드리게 했는데 이 또한 한 가지 방도였습니다. 그리고 김옥은 장사(壯士)이니 부디 한번 죽음을 면해 주어 앞으로 공을 세우도록 하십시오.” 하고, 김옥 또한 목숨을 바쳐 속죄하겠다고 스스로 청원하므로 공이 마침내 용서해 주면서 그로 하여금 왜적을 만났을 때 앞장서서 싸우도록 하였다. 그러고는 드디어 나루를 건너라고 재촉하고 출발하였다.
미처 병영에 도착하기 전에 전 병사 조대곤(曺大坤)을 만났는데, 그는 30리를 후퇴하여 주둔하고 있다가 군병들은 모두 흩어지고 혼자 앉아 있으면서 도망치려고 하던 참이었다. 조대곤은 공을 보자 깜짝 놀란 기색으로 맞이하고 병사의 인(印)을 교부하자마자 곧바로 떠나려고 하였다. 공은 준엄한 말로 꾸짖기를, “장군은 곤수(閫帥)로서 군사들을 거느리고 있으면서도 김해(金海)가 함락당하는 것을 구원하지 못하였으니, 마땅히 군법에 회부될 것이다. 더구나 세신 노장(世臣老將)으로 이처럼 큰 변란을 당하였는데, 의리상 어찌 도망칠 수 있겠는가.” 하였다. 그때 마침 그의 비장(裨將)이 병영으로부터 와서는 말하기를, “본영(本營)이 이미 함락되었으며, 우후(虞候)도 나갔습니다.” 하니, 공은 그 말이 거짓임을 알아채고는 그를 끌어내리라고 명하고 말하기를, “너는 병사의 휘하로서 성을 지키고 있다가 한 놈의 왜적도 베지 못하고 빈손으로 도망쳤다. 게다가 허튼 소리를 지껄여 군사들을 현혹시킨단 말인가.” 하고, 곧바로 참수하여 조리돌리니, 조대곤은 그만 사색이 되어 버렸다.
이튿날 새벽에 정탐하던 군사가 왜적들이 이미 다가왔다고 급보를 올리자, 공은 느긋하게 왜적과의 거리가 몇 리나 되며 숫자는 얼마나 되느냐고 물었다. 적들이 이미 5리 앞까지 다가왔다고 보고하자, 공은 정예병을 뽑도록 명하였다. 잠시 뒤에 보니 백마를 타고 새 깃으로 만든 옷을 입고 은투구에 금가면을 쓴 왜적 두 명이 칼을 휘두르면서 앞으로 나와 100보 앞까지 다가왔다. 장수와 병사들이 적군의 공세를 처음 보고는 간담이 떨어지고 혼이 달아났다. 공은 즉시 호상(胡床)에 걸터앉아 군사들에게 감히 움직이지 말게 하였다. 적들은 아군이 움직이지 않는 것을 의아하게 여기고 말에서 내려 부채를 부치며 땅에 앉았다. 이에 공은 미리 뽑아 놓은 수십 명의 군사로 하여금 돌격하게 하였는데, 군사들이 서로 돌아보면서 머뭇거리고 감히 앞으로 나가지 못했다. 공은 당장 말을 타지 않는 자는 참수하라고 명하고 아울러 김옥을 불러 말하기를, “너보고 저번에 앞장서라고 했는데 지금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이냐?” 하였다. 김옥이 몸을 날려 말에 올라타자, 수십 명이 일시에 돌진하였다. 몇 리를 뒤쫓아가자 매복하고 있던 왜적이 사방에서 일어나 한바탕 혼전을 벌였는데, 공이 거느리고 있던 군교(軍校) 이숭인(李崇仁)이 금가면을 쓴 왜적의 우두머리를 활로 쏘아 거꾸러뜨리니, 나머지 왜적들이 모두 달아났다. 이에 아군이 승세를 타 연이어 수급 둘을 베고 건장한 말과 금안장, 보검을 노획하여 돌아왔다.
이 싸움은 난이 일어난 처음에 왜적들과 가장 먼저 접전한 싸움이었다. 군사는 1000명도 안 되었고, 무기가 하나도 없는 상황에서 갑자기 강한 왜적을 만나 그들의 예봉을 꺾었으므로, 이로부터 군사들의 사기가 조금은 진작되었다. 즉시 이숭인을 올려보내 수급을 바치면서 이 사실을 급히 장계하였는데, 장계의 첫머리에 “한 번 죽어 나라의 은혜를 갚는 것이 신의 소원입니다.”라고 적었다. 그러고는 드디어 군사들을 거두어 진을 뒤로 물린 다음 기일을 정하여 왜적들을 나아가 치기로 하였다. 하룻밤을 넘긴 뒤에 갑자기 역졸(驛卒)이 와서, 병사를 잡아다가 국문하라는 명이 이미 내렸는데 금오랑(金吾郞)이 중간에서 길이 막혀 오지 못하고 있다는 소식을 전하였다. 이때 변방에서 매일 급보가 올라오자 도성이 크게 흔들렸다. 상께서 정원에 하교하기를, “김성일이 일찍이 왜적들이 반드시 쳐들어오지 않을 것이라고 큰소리쳐 변방의 방비를 해이하게 한 탓에 왜적들이 쳐들어오는 변고가 일어나게 하였다. 내가 그를 국문하고자 하니, 의금부로 하여금 잡아오게 하라.” 하였다. 좌의정 유성룡(柳成龍)과 대관(臺官)들이 모두 김성일의 본뜻은 그렇지 않았다고 극력 진달하였는데도 상이 받아들이지 않았다. 공은 그 소식을 듣고는 잠시도 기다리지 않고 곧바로 길을 떠났다. 좌우 사람들이 말하기를, “도사가 오지 않았으니 임금의 전지가 내려졌는지를 증명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대적들이 목전에 있는데 이러한 때 곤수가 어찌 입으로 전하는 한마디 말만 믿고 섣불리 진영을 떠나서야 되겠습니까.” 하자, 공은 말하기를, “이미 임금의 명이 내렸다고 들었는데 어찌 감히 지체한단 말인가.” 하고는, 즉시 길을 떠나 샛길을 따라 급히 달려갔다. 그러자 군사들은 모두 뿔뿔이 흩어졌고 방비도 모두 풀리고 말았다. 감사 김수(金睟)가 길에서 공을 만나서는 공이 국문을 받으러 가는 것을 안타까워하자, 공은 말투가 평상시와 같았으며, 단지 말하기를, “나랏일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공께서는 노력하시기 바랍니다.” 할 뿐이었다.
상이 입시한 재신(宰臣)들에게 묻기를, “김성일의 장계에 ‘한 번 죽어 나라의 은혜에 보답하겠습니다.’라는 말이 있는데, 김성일이 과연 한 목숨을 바쳐서 나라에 보답할 수 있겠는가?” 하자, 유성룡과 최황(崔滉)이 대답하기를, “김성일이 소견은 혹 잘못이 있을지라도 그의 평소 마음가짐은 단지 임금을 사랑하고 나라를 걱정하는 마음뿐이니, 한 번 죽어서 나라의 은혜에 보답할 것이라는 것을 신들 역시 알고 있습니다.” 하였다. 곁에서 모시고 있던 왕세자도 극력 간하였으므로, 상은 마침내 노여움을 풀었다. 공이 올라가다가 직산(稷山)에 이르렀을 때 선전관(宣傳官)이 빨리 달려 내려온다는 소식을 들었다. 따라가던 사람들이 모두 통곡하며 어찌할 줄 몰랐으나 공은 얼굴빛이 변하지 않은 채 차분하게 뒷일을 지시하였다. 그런데 선전관을 만나 보니, 용서한다는 명을 가지고 왔으며, 공을 초유사(招諭使)로 제수한 것이었다. 공은 대가(大駕)가 이미 서쪽으로 파천(播遷)하였다는 말을 듣고 북쪽을 향해 절한 다음 교지(敎旨)를 받들어 읽으면서 눈물을 흘렸다. 그러고는 장계를 손수 지어 왜적들의 기세가 창궐한 상황과 방수(防守)를 배치할 계책을 갖추어 아뢴 다음 즉시 남쪽으로 달려갔다.
5월 초에 함양(咸陽)에 도착하였다. 전 현령(縣令) 조종도(趙宗道)와 전 직장(直長) 이로(李魯)는 공의 옛 친구였는데, 이들이 약속도 하지 않았는데도 함께 모였고 마침내 막하(幕下)에 머물렀다. 이 당시에 일로(一路)가 모두 무너져서 각 고을이 이미 텅 비었고 사민(士民)들은 달아나 산골짜기를 가득 메웠으므로, 원근의 들판에는 인적이 끊겼다. 공은 즉석에서 초유문(招諭文)을 지어 온 도에 포고하였는데, 그 글에 이르기를,
“국운이 중도에 쇠락한 나머지 섬 오랑캐가 은밀히 발동하여 우리 강토를 함부로 유린하면서 동쪽과 서쪽 두 방면에서 돌진해 들어왔다. 그런데 큰 성과 큰 진에 일찍이 방어 설비를 갖추어 둔 것이 없어 열흘 사이에 이미 험한 관문과 높은 고개를 넘어 곧바로 도성을 공격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상께서는 도성을 떠나 파천하고 온 나라 사람들은 도망쳐 숨게 되었으니, 우리 동방이 생긴 이후로 오랑캐의 화가 오늘날처럼 참혹한 적은 일찍이 없었다.
여러 곤수(閫帥)들은 국가의 간성(干城)인데도 왜적들이 침입했다는 소문만 듣고서 무너진 자가 있는가 하면, 잔뜩 겁을 먹고 움츠러든 자가 있기도 하였다. 수령은 한 고을의 군장(君長)인데도 모두들 자신의 처자식을 안전한 곳에 피난시키고 무기고를 불태웠으며, 한 사람도 의분과 충성에 겨워 떨쳐 일어나 앞장서서 왜적을 친 자가 없었다. 그러니 불쌍한 우리 군사와 백성들이 누구를 믿고 의지해서 도망가고 흩어지지 않을 수가 있었겠는가. 거센 물살에 둑이 한번 무너지자 이를 막아낼 도리가 없어 성에는 창을 든 군사가 없고, 고을에는 죽기를 각오하고 싸우는 신하가 없었다. 왜적들은 이르는 곳마다 마치 무인지경에 들어가는 것처럼 쉽게 들어가 마침내 영남 한 도가 왜적의 소굴이 되어 버림으로써 나라의 형편이 토붕와해(土崩瓦解)되어 조석을 보전할 수 없게 되었다. 이것이 얼마나 큰 변고인가.
그러나 이것이 어찌 단지 변장(邊將)이나 수령들만의 잘못이겠는가. 선비와 백성들도 그 책임을 면하지는 못할 것이다. 옛날에 큰 난리를 만나서도 나라를 잘 지킬 수 있었던 것은, 윗사람은 죽기를 각오하고 싸울 뜻이 있었고, 아랫사람은 윗사람을 위해 목숨을 바칠 마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은 왜적들이 아직 이르지도 않았는데 선비와 백성들은 앞장서서 먼저 도망쳐 산속으로 숨어 들어가 구차스럽게 목숨을 부지하려는 계책을 하였다. 그리하여 수령은 백성이 없게 되고 장수는 군졸이 없게 되었으니, 장차 누구와 더불어 왜적을 막을 수 있겠는가.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옛날에 추(鄒)나라와 노(魯)나라가 전쟁을 할 적에 추나라 관리들은 전사한 자가 30여 명이나 되었는데도 백성들은 한 사람도 죽지 않았다. 이것은 관리들이 평상시에 백성들의 고통을 잘 돌보아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금 선비와 백성들이 흩어져 달아나는 변고가 있는 것이 어찌 맹자(孟子)가 말한, 너에게서 나온 것은 너에게로 되돌아간다는 것이 아니겠는가.’ 한다. 아, 이것이 무슨 말이란 말인가. 근년 이래로 조세(租稅)가 사실 가혹하였고 부역(賦役)도 사실 과중하였으니, 백성들이 사실 그 압박을 감당해 내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성을 쌓고 해자를 파고 방비하는 도구를 갖추는 것은 모두가 전쟁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한 것으로, 지금 와서 본다면 성상께서 백성들을 보호하려는 생각이 원대하였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이 어찌 백성을 학대하고 자신을 이익 되게 한 것이겠는가. 더구나 추나라와 노나라의 싸움은 비록 한쪽이 이기고 한쪽이 지기는 하였지만, 이는 다 같은 중국의 나라로서, 백성들의 처지에서는 그다지 이익 되거나 손해 될 것이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 오랑캐 무리는 우리 땅에 한번 들어오자 즉시 차지하려는 뜻을 품었다. 그리하여 우리의 부녀자들을 잡아가서 처첩으로 삼고, 우리의 장정들을 마구 죽여 씨를 남기지 않았으며, 즐비한 민가를 모두 불태워 잿더미로 만들고, 공사(公私)의 재물은 모두 빼앗아 차지하였다. 이에 독기는 사방에 가득 차고 죽은 사람의 피는 천리에 흘렀으니, 백성들이 당한 화를 어찌 차마 다 말할 수 있겠는가.
지금은 실로 지사(志士)가 창을 베개로 삼을 날이요, 충신이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칠 시기이다. 그런데 경상도 67개 고을 중에 아직까지 의(義)를 주창하여 팔뚝을 걷어붙인 사람이 없고 오히려 남들보다 혹시 나중에 도망가면 어쩌나, 깊은 산속으로 들어가지 못하면 어쩌나 하고 걱정하고 있으니, 어찌 탄식을 금할 수 있겠는가. 설령 산속으로 들어가서 왜적을 피하고 마침내 자신과 가족들의 목숨을 보전한다 하더라도, 열사(烈士)는 오히려 그렇게 하는 것을 수치스럽게 여길 것인데, 더구나 보전할 이치가 만무한데야 말해 무엇 하겠는가.
내가 그 이유를 낱낱이 말하여 사민(士民)들의 의혹을 풀어볼까 하는데 괜찮겠는가? 지금 왜적들은 서울을 침범하기에 급급하여 지체하지 않고 곧장 행군해 올라갔기 때문에 그 화가 여러 고을에 두루 미치지 않았다. 그러나 왜적이 목적을 달성한 뒤 흉악한 무리가 온 강토에 가득 차게 될 경우, 그때에도 산속이 과연 죽음을 피할 곳이 될 수 있겠는가. 이를 비유하자면, 마치 큰 물결이 하늘까지 치솟고 거센 불길이 들판을 불태우는 것과 같으니, 우리 억만창생이 다시 어디에 몸을 부칠 수 있겠는가. 산속에서 나오지 않을 경우에는 시일이 오래 지나면 식량이 떨어져 앉은 채로 굶어 죽을 것이고 나올 경우에는 부모와 처자식이 포로가 되어 욕을 당할 것이며, 양반 사족(士族)들도 모두 침해를 당할 것이니, 항복하면 영원토록 올빼미같이 사악한 족속이 될 것이고 항복하지 않으면 모두가 왜적의 칼날 아래 죽은 귀신이 될 것이다. 이것이 어찌 지혜가 있는 사람이라야만 알 수 있는 것이겠는가. 그러나 이는 단지 이해(利害)와 생사만을 가지고 말한 것이다. 아, 군신 간의 큰 의리는 천지간에 변경할 수 없는 도리로, 이른바 백성의 타고난 본성이다. 대체로 이 땅에서 숨을 쉬고 살아가는 사람으로서 임금이 피난하고 종묘사직이 넘어지며, 만백성들이 다 죽어 가는 것을 가만히 앉아 보면서도 태연하게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다면, 천지간에 변경할 수 없는 도리로 볼 때 과연 어떻겠는가. 더구나 부모가 왜적의 칼날을 맞아 죽고 형제가 서로 목숨을 지켜 주지 못하여 집안의 화가 위급한 처지인데도 자식이나 동생 된 자가 머리를 싸 쥐고 도망할 뿐, 죽을 각오를 하고 싸워 온전하게 하기를 생각지 않는다면, 자식 된 도리로 볼 때 과연 어떻겠는가.
돌아보건대 영남 지방은 본디 인재가 많이 배출되는 고장이라고 일컬어져 왔다. 1000년의 신라와 500년의 고려 및 우리 조선 200년 동안에 충신과 효자의 아름다운 명성과 절의가 청사(靑史)에 빛나는바, 아름다운 절의와 순후한 풍습은 우리 동방에서 으뜸이 되었다. 이에 대해서는 사민들이 모두 다 잘 알고 있는 바이다. 또 근래의 일을 가지고 말한다면 퇴계(退溪)와 남명(南冥) 두 선생이 한 시대에 함께 나오시어 도학을 앞장서서 강명하여 인심을 순화시키고 인륜을 부지하는 것을 자신들의 임무로 삼았다. 그리하여 그에 감화되고 분발하여 본받는 선비가 많았다. 평소에 성현들의 많은 글을 읽으면서 그 자부심이 과연 어떠하였는가. 그런데 하루아침에 변란을 만나서는 오로지 살기만을 구하고 죽기를 피하는 데 급급하여 스스로 군주를 버리고 어버이를 뒤로하는 죄악에 빠진다면, 구차스럽게 한 목숨을 부지하더라도 장차 이들과 어떻게 한하늘 밑에서 살 수 있겠으며, 이들이 죽어 지하에 들어갔을 때 또 무슨 낯으로 우리 선현들을 뵐 수 있겠는가. 의관을 갖추고 예악을 익힌 몸을 어찌 욕되게 할 수가 있겠으며, 머리를 깎고 문신을 새기는 풍습을 어찌 따를 수가 있겠는가. 200년의 종묘사직을 어찌 차마 왜적들의 손에 넘겨줄 수 있겠으며, 수천 리 조국 산하를 어찌 차마 왜적들의 소굴이 되도록 내버려 둘 수 있겠는가. 문명한 나라가 변하여 오랑캐가 되고, 인류가 변하여 금수가 되는 것을 어찌 참을 수 있겠으며, 어찌 그렇게 되도록 내버려 둘 수 있겠는가.
수공(首功)을 으뜸으로 삼는 진(秦)나라는 애당초 순전한 오랑캐가 아니었다. 그런데도 노련(魯連)은 오히려 기꺼이 바다에 빠져 죽으려 하였다. 지금 이 야만인의 풍습을 가진 섬 오랑캐들은 얼마나 추잡한 종족인가. 그런데도 우리 강토를 멋대로 훔쳐서 차지하고 우리 백성들을 함부로 죽이고 욕보이도록 내버려 둔 채, 몰아내고 죽여 버릴 것을 생각하지 않는단 말인가.
이론을 제기하는 자는 말하기를, ‘저놈들은 용기가 있고 우리는 겁이 많으며, 저놈들의 무기는 날카롭고 우리 무기는 무디다. 그러니 설령 의병을 일으키더라도 어떻게 해 볼 도리가 없다.’ 하는데, 어쩌면 이리도 생각이 모자란단 말인가. 옛날의 충신과 열사는 성공과 패배에 따라 뜻을 바꾸지 않았고, 강하고 약한 것에 따라 기운이 좌우되지 않았다. 의리로 보아 마땅히 해야 할 일이면 비록 백 번 싸워 백 번을 지더라도 오히려 맨주먹을 휘두르고 시퍼런 칼날에 맞서 싸워 만번 죽어도 후회하지 않았다. 하물며 이 왜적들은 비록 강하다고는 하지만 군사를 이끌고 깊이 들어왔으니 바로 전쟁의 금기를 범하였다. 그러니 어찌 제대로 살아서 돌아갈 수 있겠는가. 우리 군사가 비록 겁이 많다고는 하지만, 용감하고 겁을 내는 것이 어찌 일정한 것이겠는가. 충의가 북받치면 약한 자도 강해질 수 있고, 적은 군사로도 많은 군사를 대적할 수 있는 법으로, 단지 마음 한번 먹기에 달려 있는 것이다.
지금 도망병과 패잔병이 산골짜기에 깔려 있다. 이들은 처음에는 비록 도망쳐서 살려고 하였으나, 끝내 한번 죽음을 면하기가 어렵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이에 모두들 스스로 떨쳐 일어나서 나라를 위하여 온 힘을 다 바칠 것을 생각하고 있는데, 단지 앞에서 인도하는 자가 없어서 가만히 있을 뿐이다. 이런 때를 당하여 한 사람의 의사(義士)가 떨치고 일어나 큰소리로 한번 외치기만 하면, 원근에서 구름같이 모여들고 메아리처럼 호응하여 앉은자리에서 계책을 세울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성상께서 이미 애통해하는 교서(敎書)를 내리셨으며, 또 내 이 소신(小臣)을 형편없다고 여기지 않고 백성들을 불러 모아 유시하는 책임을 맡기셨다. 당(唐)나라의 무사와 거친 군졸들도 오히려 흥원(興元)의 조서를 보고 울었는데, 하물며 예의를 숭상하는 지방에 사는 선비로서 어찌 팔뚝을 걷어붙이고 의분에 넘쳐 군부(君父)의 위급함에 달려 나가지 않겠는가.
나는 진정으로 원하노니, 이 격문이 도착하는 날 수령은 온 고을에 분명하게 알리고 변장(邊將)은 사졸들을 격려하라. 그리고 문무(文武)의 조정 관원들과 부로(父老), 유생(儒生) 등 모든 사람들은 서로서로 유시하라. 그리하여 동지를 불러 모아 충의로써 서로 단결하여 방비책을 세워 스스로 막기도 하고 군사들을 이끌고 싸움을 거들기도 하라. 부자들은 유차달(柳車達)처럼 곡식을 보내 군량을 대고, 용사들은 원충갑(元沖甲)의 병사처럼 용기를 내어 적을 토벌하라.
집집마다 사람마다 각자가 싸우면서 일시에 함께 일어나면, 군사의 위세가 크게 떨쳐지고 정의의 기운이 백배하여, 괭이와 창 자루가 튼튼한 갑옷과 날카로운 무기로 변할 것이다. 그러니 왜적들이 비록 장총과 대검을 가지고 있더라도 무엇이 두렵겠는가. 일이 성공한다면 나라의 치욕을 완전히 씻을 것이고 성공하지 못하더라도 의로운 귀신이 될 것이다. 제군들은 힘쓰기 바란다.
나는 일개 썩은 선비로서 비록 전쟁하는 일을 배우지 못하였으나, 군신 간의 대의는 대충 들어서 알고 있다. 온 도가 뒤엎어진 뒤끝에 책임을 떠맡아 뜻은 초(楚)나라를 보존할 각오를 다진 신포서(申包胥)의 충성을 본받지 못하고, 사당에 통곡하고 군사를 일으킨 장순(張巡)의 충렬만 사모하고 있다. 하지만 오히려 의사(義士)들의 힘을 빌려 기울어진 국가를 다시 회복시키는 공을 이루기를 기대하고 있다. 조정에서 내리는 포상은 나중에 있을 것이니, 이 점을 아울러 알도록 하라.”
하였다. 이 초유문(招諭文)을 보고 눈물을 흘리지 않는 사람이 없었으며, 온 도 사람들이 바람에 쓸리듯 감화되어 마치 가뭄 끝에 단비를 얻은 듯이 여겼다.
공은 또 조종도(趙宗道)와 이로(李魯)에게 각 고을에 통문을 보내 사람들이 믿고 복종할 만한 명망이 있는 자를 골라 뽑아 각 고을의 소모관(召募官)으로 삼은 다음, 그들로 하여금 사람들을 격려하고 의병을 징발하게 하였다. 이때 김면(金沔)은 거창(居昌)에서 의병을 일으켰고 정인홍(鄭仁弘)은 합천(陜川)에서 의병을 일으켰으며, 그 외에 향병(鄕兵)을 규합하고서는 의기를 다지며 왜적을 치겠다는 명분을 내걸고 나선 자가 또한 많았다. 그런데 관병(官兵)과 의병이 서로 견제하고 있는 탓에 어지러워서 질서가 없었다. 이에 공은 김면과 정인홍을 의병대장으로 삼은 다음, 그들에게 의병을 규합하여 통솔하면서 협력하여 적을 방어하도록 하였다. 또 수령이 없는 군현(郡縣)에는 나라에 충성으로 봉사하며 자질이 착하고 성실한 자를 골라 가수(假守)로 삼고, 용감하고 지략이 있는 자를 뽑아 가장(假將)으로 삼은 다음, 모두 사유를 갖추어 급히 장계하였다. 이리하여 고을에는 수령이 있고 군대에는 주장(主將)이 있게 되어 원근에서 서로 호응하고 공사(公私) 간에 서로 도와줌으로써 국난을 회복할 만한 형세가 차츰 가닥이 잡히게 되었다.
의령(宜寧)의 곽재우(郭再祐)는 변란이 일어난 처음에 맨 먼저 의병을 일으켜서는 자기 집 재산을 다 털어 군사들을 먹이고, 그래도 군량을 이어 가지 못하자 혹 방치해 둔 전세미(田稅米)를 실은 배를 가져오거나 수령이 없는 고을의 창고 곡식을 가져다가 군량으로 쓰면서 날마다 왜적을 치는 것으로 일을 삼았다. 그래서 사람들이 정신이 나갔다고도 하고 미쳤다고도 하였다. 이웃 고을의 어떤 수령이 토적(土賊)이라고 관찰사에게 보고하자 관찰사 김수(金睟)가 여러 고을에 관문(關文)을 보내 그를 체포하도록 명하였으므로, 의병들의 사기가 꺾여 장차 흩어질 형편에 이르렀다. 곽재우는 어찌할 도리가 없음을 알고 모두 팽개치고 두류산(頭流山)으로 들어가려고 하였다. 공은 이 사실을 듣고 놀라 탄식하였으며, 김수가 이에 관해 물어왔을 때 곽재우를 극도로 기리는 내용으로 답하였다. 아울러 곽재우에게 편지를 보내 장려하고 인정하면서 “선대부(先大夫)에게 후손다운 후손이 있다.”라고까지 하였다. 이에 곽재우는 자신을 알아주는 데에 감격하여 다시 분발하여 일어나서는 곧바로 공의 편지를 깃대에 매달아 향리 사람들에게 두루 보였다. 그러자 사람들이 비로소 곽재우가 의거(義擧)하였다는 것을 믿게 되었고, 감사나 수령들도 모두 감히 가로막거나 흔들지 못하여 군대의 위세가 다시 떨쳐졌다.
공이 산음(山陰)에 이르렀을 때 산음의 수령인 김락(金洛)이 다반(茶盤)을 성대하게 차려 내오자, 공은 얼굴빛을 바꾸며 김락을 불러 깨우치기를, “이와 같은 성찬은 오늘날 신하 된 자가 먹을 만한 것이 아니다. 비록 먹더라도 목구멍에 넘어가지 않을 것이다.” 하였다. 그러고는 애달픈 기색으로 눈물을 흘리니, 김락이 부끄러워하면서 사과하고 상을 물렸다.
함양(咸陽), 산음(山陰), 단성(丹城) 등 몇 고을의 선비들이, 공이 이르렀다는 소식을 듣고는 앞다투어 달려 나와서 맞이하니, 공은 그들에게 간담을 피력하면서 의리에 대해 말해 주었다. 그러자 모두들 눈물을 흘리며 목숨을 바쳐 싸울 것을 생각하였다. 모두들 말하기를, “순찰사(巡察使) 김수는 근왕(勤王)한다고 핑계 대고는 혼자서 말을 타고 멀리 달아났으며, 병사 조대곤(曺大坤)은 왜적을 한 명도 보지 않고 산골짜기로 숨어 들어갔습니다. 공께서 무슨 일을 하고자 하신다면 마땅히 먼저 이 두 사람을 제거해야 할 것입니다.” 하니, 공이 말하기를, “순찰사가 본도를 버리고 가고 병사가 산골짜기로 숨어 들어간 것은 참으로 의리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공들의 말도 옳지 않다. 나는 단지 의(義)로써 일을 처리해 나갈 뿐이다.” 하였다. 제생(諸生)들이 또 ‘의’라는 한 글자를 가지고 계속해서 말하자, 공이 말하기를, “제공들의 말은 아무래도 의에는 부합되지 않다. 이 문제는 우선은 그만두자.” 하였다.
왜란이 일어난 뒤로 감사, 병사 및 여러 장수와 수령들이 모두 갑자기 왜적을 만나 화를 당하는 것을 피하고자 하여 모두 의관(衣冠)을 벗어던지고 일반 사람들 속에 섞여 있었는데, 공은 말하기를, “이처럼 어지러운 때를 당하여 어찌 우리나라의 의관 모습을 바꿀 수 있겠는가.” 하였다. 그러고는 초유사의 명을 받은 이후 여러 차례 적들이 있는 소굴로 들어가면서도 한 번도 복식을 바꾸지 않았으며, 휘하의 사람들도 다 붉은 옷에 우립(羽笠) 차림을 하고 북을 치고 나팔을 불면서 갔다. 이에 지나는 곳마다 사람들이 모여들어 그 모습을 보고는 눈물을 흘리면서 말하기를, “오늘날에 다시 예의지국의 복식을 보게 될 줄은 몰랐다.” 하였다.
단성에 이르자 곽재우가 싸우러 나가다가 관복(官服) 차림으로 와서 공을 뵈었는데, 공은 그와 더불어 말을 나누어 보고는 크게 기특하게 여겼다. 동행하여 진주(晉州)에 이르자, 전 목사 오운(吳澐)이 소모관으로서 군사 수천 명을 모집하여 곽재우를 도왔다.
이 당시 진주 목사(晉州牧使) 이경(李璥)과 판관(判官) 김시민(金時敏)은 지리산 속으로 도망가 숨어 있었다. 공이 온다는 말을 듣고는 김시민이 산을 나와서 기다렸고, 이경은 병으로 죽은 뒤였다. 공은 판관을 독려하여 군사를 모으게 해 수천 명의 군사를 얻었는데, 이들로 대오를 편성해서 성을 지키면서 성과 못을 수축하고 무기를 수선하였다. 공이 말하기를, “진양(晉陽)은 호남(湖南)의 보장(保障)이 되는 지역이다. 진양이 없으면 호남도 없고 호남이 없으면 나라가 믿을 곳이 없게 된다. 왜적이 호시탐탐 침을 흘리는 장소는 항상 이곳이었으니 방비를 느슨히 해서는 안 된다.” 하고, 죽기로 싸우고 이 성을 나가지 않을 것을 맹세하였다. 그리고 또 군(軍)에 기율이 없어서 모이고 흩어지는 것이 일정하지 않았으므로 규율을 정하여 여러 고을에 훈령하기를, “흩어져 도망가는 것이 풍조가 되어, 도망가는 자들이 스스로 생각하기를 ‘한꺼번에 많은 사람이 도망치면 일일이 군법을 시행할 수가 없을 것이다.’ 하고 항오(行伍)에 본디 통솔(統率)이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있다. 10명의 군사 가운데에서 도망자가 있을 경우에는 통장(統將)을 참수하고 통장 가운데에서 도망자가 있을 경우에는 도훈도(都訓導)를 참수하며, 전군(全軍)이 모두 도망칠 경우에는 영장(領將)을 참수하라. 그리고 도망자를 잡지 않는 자도 도망자와 같은 죄로 처벌하라.” 하였다. 군율을 신축성 있게 적용하여 은혜와 위엄을 아울러 폈으므로 군정(軍情)이 고무되고 두려워하여 감히 도망가는 자가 없었다.
공이 처음 진양에 이르렀을 때 성은 텅 비어 사람의 그림자가 보이지 않고 오직 강물만 하염없이 흐르고 있었다. 공이 배회하면서 둘러보니 눈에 보이는 것들은 모두 처참한 모습뿐이었다. 조종도(趙宗道)가 의춘(宜春)으로부터 와서는 공의 손을 잡고 말하기를, “진양은 거진(巨鎭)이고 목사는 명관(名官)인데 왜적들이 이르기도 전에 일이 이미 이렇게 되었으니, 앞으로 어찌 손을 써 볼 수 있겠습니까. 빨리 죽어서 의식이 없느니만 못합니다. 왜적의 칼날에 죽는 것보다는 차라리 이 강물에 함께 빠져 죽는 것이 더 낫지 않겠습니까.” 하고는 공을 붙잡고 강가로 가려 하였다. 공은 웃으면서 말하기를, “한번 죽는 것이야 어려운 일이 아니나, 헛되이 죽는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필부들이 하는 짓을 나는 하지 않을 것이다. 선왕(先王)께서 남기신 은택이 아직 다 없어지지 않았고 주상께서도 이미 자신을 죄책하는 교서를 내려, 하늘이 화를 내린 것을 후회하는 기미가 있다. 다행히 여러분들이 의병을 일으켜 돕는 것에 힘입어 여러 고을에서 많은 선비들이 모집에 응하고 있다는 말을 들었다. 선비들은 백성들의 본보기이니 백성들이 어찌 따르지 않겠는가. 적은 숫자의 군대로도 충분히 나라를 다시 일으킬 수 있는 법이니, 나라를 회복하는 공을 이루기가 어렵지 않을 것이다. 만약 불행히도 그러지 못할 때에는 당나라의 장순(張巡)처럼 죽음으로써 지키거나 안고경(顔杲卿)처럼 적을 꾸짖다가 죽어도 늦지 않을 것이다. 그대는 어찌하여 이처럼 서두르는가. 저 강물을 두고 맹세하건대, 나는 죽음을 두려워하는 자가 아니다.” 하였다. 그러고는 서로 마주보며 눈물을 흘리면서 헤어졌다.
의병대장 김면이 군사를 파견하여 낙동강 하류 지역의 왜적을 뒤쫓아가 토벌하고 노획한 채색 비단과 진귀한 보배 몇 바리를 공에게 실어 보냈는데, 좌우에서 행재소(行在所)로 올려보내라고 권하였다. 공은 말하기를, “관서(關西) 한 지역은 가는 길이 멀고 막혔으며, 왜적들이 전 지역에 득실거려 계첩(啓牒)도 전달하기가 어렵다. 오늘날에는 단지 충성을 다해 왜적을 토벌하여 국토 수복을 함께 도모하는 것이 마땅하다. 이 물품은 우선 여기에 남겨 두었다가 적이 막고 있는 길이 뚫릴 때까지 기다리는 것만 못하다.” 하고, 남원부(南原府)로 보내 보관하게 하였다.
공이 막하 사람들을 나누어 파견하여 각 고을의 군사들을 사열하기로 하였다. 그리하여 조종도는 단성, 산음, 함양으로 가고, 이로는 의령, 삼가(三嘉), 합천으로 갔는데, 조종도는 도중에 병이 나 글로써 보고하였으며, 이로는 돌아와서 장사(將士)들이 의분에 떨쳐 일어나 힘껏 싸운 상황을 말하였다. 공은 매우 기뻐하면서 장차 의령, 초계(草溪), 합천을 두루 돌면서 순시하고 거창으로 가려고 하였다. 그런데 도중에 수리원(愁離院)에 이르러 ‘개령(開寧), 금산(金山), 지례(知禮) 세 고을의 왜적들이 합세하여 횡행하며 우현(牛峴)을 넘으려고 하는데, 의병대장 김면의 군사가 고개 위에 진을 치고 있으나 그 형세가 혼자서는 제압할 수가 없다.’라는 소식을 듣고 공은 말하기를, “그렇다면 거창이 위험하다. 달려가지 않을 수 없다.” 하고는, 드디어 곧장 삼가현으로 갔다. 사인(士人) 박사겸(朴思謙) 등 10여 인이 앞으로 나와 말하기를, “공의 충렬에 대해서는 어리석은 사람들조차도 모두 알고 있어 공의 소문이 미치는 곳에는 사람들이 모두 감동합니다. 지금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삼면은 다 왜적들이 횡행하고 있는데, 우리 현이 그 한가운데 있습니다. 바라건대 공께서는 거창으로 가지 말고 이곳에 머물러 각 고을에 훈령을 내려 그들로 하여금 군사를 거느리고 달려가 구원하게 하거나, 아니면 용사들을 뽑아 전진(戰陣)으로 달려가서 전투를 돕게 해야 합니다. 한 나라의 흥망이 매인 몸으로 필마를 타고 맨손으로 적의 칼날을 범하여서 어떻게 하자는 것입니까?” 하면서, 번갈아 찾아와 간하고는 모두 읍하고 물러갔다. 그러자 공이 웃으면서 좌우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제생(諸生)들은 내가 직접 싸우다가 죽을 것으로 여긴단 말인가.” 하였다. 거창에 이르자 산음, 안음(安陰), 함양의 군사들이 한꺼번에 와서 모였다. 공은 뒤에 있으면서 싸움을 독려하였는데, 군사들이 모두 죽음을 각오하고 싸워 왜적들이 고개를 넘지 못하였다. 공은 드디어 김 대장을 진중(陣中)에서 만나 보고 이틀 밤을 자면서 위로하였다. 이때 비로소 옛 친구인 박성(朴惺)을 만나서 함께 일할 것을 약속하고 막하에 있게 하였다.
이정(李瀞)을 함안(咸安)으로 보내 군사를 모집하고 곡식을 거두어 모으게 하였는데, 열흘에서 한 달 사이에 1000여 명의 군사를 모았다. 이때 군수 유숭인(柳崇仁)이 두 차례나 성을 버리고 도망하였다가 처벌을 받아 백의(白衣)로 종군하면서 진주(晉州) 성문을 지키고 있었는데, 이정이 공에게 보고하기를, “고을에 군수가 없어서는 안 되고, 진영에 장수가 없어서는 안 됩니다. 유숭인을 돌려보내 주십시오.” 하니, 공이 회제(回題)하기를, “죽음을 무릅쓰고 왜적의 소굴로 들어가서 수천 명의 향병(鄕兵)을 모집하였다. 평소에 충의로운 마음으로 사람들을 감동시키지 않았다면 어떻게 이럴 수 있겠는가. 군사들을 끝까지 격려하여 흉적을 섬멸하는 것이 곧 내가 바라는 바이다.” 하고, 즉시 전령을 보내 유숭인에게 빨리 고을로 돌아가서 이정의 지휘를 받아 거창, 진해(鎭海), 칠원(漆原)의 왜적들을 막게 하였다. 그 뒤에 유숭인은 여러 차례 뛰어난 공을 세워 병사(兵使)로 승진하였다가 진주성 전투에서 전사하였다.
공은 거창에서 합천으로 돌아와 정 대장(鄭大將 정인홍(鄭仁弘))을 진중에서 만나 보았다. 그러고는 이로와 박성 등을 나누어 파견하여 각 고을에서 곡식을 모아 의병들의 군량을 도와주게 하였는데, 안음, 산음, 거창에서 얻은 것은 김 대장에게 주고, 합천, 고령(高靈)에서 얻은 것은 정 대장에게 주고, 함안에서 얻은 것은 이정에게 주고, 의령에서 얻은 것은 곽재우에게 주었다.
이때 영남은 한가운데가 나뉘어져서 강 왼쪽과는 혈맥(血脈)이 통하지 않아 군읍(郡邑)이 텅 빈 탓에 적들이 거리낄 것이 없었으므로, 각자 감사나 수령이라고 칭하면서 노략질을 자행하였다. 공은 탄식하기를, “좌도(左道)의 내지(內地) 지역은 어찌할 수 없지만, 강 건너편 세 고을을 어찌 버릴 수 있겠는가.” 하고, 영산(靈山)은 신방주(辛邦柱)를 가장(假將)으로, 봉사(奉事) 신갑(辛)을 별장(別將)으로, 생원 신방집(辛邦楫)을 소모관(召募官)으로 삼고, 창녕(昌寧)은 성천희(成天禧)를 가장으로, 조열(曺悅)을 별장으로, 정자(正字) 성안의(成安義)를 소모관으로 삼았다. 현풍(玄風)은, 사족(士族) 집안 사람들은 모두 다 가야산으로 들어가고, 남아 있는 이민(吏民)들은 왜적을 위해 부역(赴役)하여 길을 오가면서 짐을 운반하였다. 공은 그 말을 듣고는 이를 미워하여 즉시 격문을 지어 유시하였다. 훈령을 내려 전 군수 엄홍(嚴泓)을 별장으로, 곽찬(郭趲)을 소모관으로 삼은 다음, 그들에게 경내를 드나들면서 효유하게 하였는데, 그 격문에 이르기를,
“국운이 극도로 불행하여 오랑캐가 쳐들어와, 임금이 도성을 떠나 피난하고 종묘사직은 외지에 떠도는 상황에 이르렀다. 아, 사람은 다 타고난 천성을 지니고 있으니, 이 강토에 살고 있는 자라면 그 누가 의리와 충성을 다해 몸을 바치고 순국하려 하지 않겠는가. 돌아보건대, 우리 영남 지방은 본디 예의를 추구하는 고장이라고 일컬어져 왔는데, 그중에서도 포산(苞山 현풍(玄風)) 고을은 선비들이 많이 모여 사는 곳이다. 그러니 그동안 의리와 절개에 죽은 자가 어찌 한량이 있겠는가. 지금 왜적들이 성을 점거하고 있으면서 사방으로 나가 사람을 죽이고 재물을 약탈하는데, 그 해를 당한 사람은 우리의 부형이 아니면 처자식이다. 위로는 임금의 원수이니 한하늘을 함께 이고 살아갈 수 없으며, 아래로는 형제와 처자식의 원수이니 또한 어찌 갚지 않을 수 있겠는가.
나는 산골짝에 엎드려 숨어 있는 자들이 창을 베고 자고 쓸개를 핥으면서 원수를 갚고자 하는 마음을 잠시도 잊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런데도 한 사람도 의병을 일으켜 강개한 마음으로 왜적을 친 자가 있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다. 이것이 어찌 왜적들이 횡행함으로 인해 우리 백성들이 싸울 여지가 없어 그런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충의로운 선비는 죽고 사는 것으로 뜻을 바꾸지 않으며, 용감한 사람은 적은 강하고 자기는 약하다는 것으로 기가 꺾이지 않는 법이다. 간절히 바라건대, 은밀히 서로 널리 알려 의병을 일으키도록 하라. 그리하여 힘이 적을 칠 만하면 고을을 지키면서 고려 때 원충갑(元沖甲)의 군사처럼 떨쳐 일어나도 좋을 것이요, 형세가 자립할 수 없으면 군사를 이끌고 병사(兵使)의 군대로 가도 좋을 것이다. 또 나를 버릴 사람으로 여기지 않는다면 강을 건너 정의를 위해 나서더라도 무에 안 될 것이 있겠는가.
지난번에 합천(陜川)에서는 의령 군수(宜寧郡守) 정인홍이, 고령(高靈)에서는 좌랑(佐郞) 김면이 충의의 기치를 높이 들고 한번 소리치자, 각 주군(州郡)에서 그에 따라 호응하였는데, 근래에 와서는 군사의 위세가 대단하여 나라를 수복하는 공을 세울 가망이 있게 되었다. 그러니 본현의 사민(士民)들도 왜노(倭奴)들의 위협에 겁먹지 말고 더더욱 의열(義烈)의 기운을 가다듬어 한결같이 군부(君父)의 원수를 갚겠다는 생각을 하라. 그럴 경우 충분(忠憤)이 솟구치는 바에 용기가 백 배는 날 것이니, 저들이 어찌 감히 우리를 당해 내겠는가. 더구나 이 왜적들은 군사를 이끌고 멀리 들어왔다가 흉악한 칼날이 이미 꺾였다. 그리고 중국 군사 5만 명이 이미 압록강(鴨綠江)을 건너 조승훈(祖承訓), 곽몽징(郭夢徵), 왕수신(王守臣) 세 대장이 각각 정병(精兵) 수만 명을 거느리고 길을 나누어 구원하러 내려오고 있다. 그리고 수군(水軍) 10만 명이 산동(山東)에서 곧바로 왜놈의 소굴로 쳐들어가고 있다. 이에 우리의 형세가 이미 커져서 왜적이 망할 날이 얼마 안 남았다. 그러니 지금이야말로 뜻있는 선비가 소매를 떨치고 일어나 공을 세울 때인 것이다. 만약 시일을 늦추어 앉아서 기회를 놓치게 되면, 화란을 평정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장차 천하의 큰 윤리에 죄를 얻게 될 것이다. 그럴 경우 무슨 면목으로 천지간에 설 수 있겠는가.
다만 백성들 가운데 무식하여 혹여 군신 간의 의리를 알지 못하는 자에 대해서는 오직 상과 벌로써만 권장하고 징계할 수 있다. 그대들은 조정의 사목(事目)을 보지 못하였는가. 거기에 보면 ‘공천(公賤)과 사천(私賤)을 막론하고 적의 수급 하나를 벤 자는 급제(及第)를 주고, 둘을 벤 자는 6품직을 주고, 셋을 벤 자는 통정대부(通政大夫)를 주고, 왜장(倭將)을 벤 자는 녹훈(錄勳)함과 아울러 가선대부(嘉善大夫)를 준다.’ 하였다. 무부(武夫)나 용사(勇士)들은 의병이 있는 곳으로 달려나가 뜻을 가다듬어 힘껏 싸우라. 그럴 경우 위로는 높은 작위를 취할 수 있고 아래로는 훈신(勳臣)의 반열에 끼이게 되어, 자신 한 몸은 영화가 극에 이르고 후손에게까지 은택이 미칠 것이니, 이 또한 기쁜 일이 아니겠는가.
만약 그렇게 하지 않고 줄곧 숲속에 숨어 엎드려 있을 경우에는, 비록 왜노의 칼날은 면할지라도 깊은 산속에서 굶어 죽는 것을 면할 수 있겠는가. 설령 만에 하나 구차스럽게 살아난다고 하더라도 하루아침에 난리가 평정되고 나면 나라에서는 그에 따른 형벌이 있을 것이다. 그럴 경우 자신의 목숨을 보전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처자식들까지도 모두 살해당하는 형벌을 면치 못할 것이다. 그러니 힘써 싸워 큰 공을 세우고 중한 상을 받는 것과 비교해 볼 때 그 이해(利害)와 화복(禍福)이 어떻다 하겠는가. 내 말을 따르면 살아서는 열사(烈士)가 되고 죽어서는 충혼(忠魂)이 될 것이니, 그대들은 힘쓰기 바란다.”
하였다.
또 소모관으로 하여금 왜적에게 함락당한 고을에 두루 유시하게 하되 각 고을에 따라 격문의 호칭을 달리하였다. 이에 왜적에게 빌붙었던 아전과 백성들이 서로 뉘우치고 두려워하여 앞다투어 모집에 응하였다. 그리고 각 고을에 선악적(善惡籍)을 비치하여 왜적을 토벌한 자는 선적(善籍)에 적고 왜적에게 빌붙은 자는 악적(惡籍)에 적게 함으로써 권장하고 징계하는 뜻을 드러내 보이게 하였다. 그러자 왜적에게 빌붙었던 백성들이 앞다투어 왜적의 수급을 가지고 와 앞서 지은 죄를 씻어 주기를 청하였다.
공이 오랫동안 거창에 머물러 있자, 거창을 점거하고 있던 왜적들이 진주(晉州)가 무방비 상태임을 알고는 진해(鎭海)에 있는 왜적과 서로 호응하여 대거 쳐들어와 노략질하면서 고성(固城)과 사천(泗川) 사이를 횡행하였다. 공은 급보를 접하고 급히 달려가 단성(丹城)에 이르러서 함양, 산음, 단성의 군사를 모두 동원해 진주로 달려간 다음, 김시민(金時敏)에게 감히 움직이지 말 것을 지시하였다. 그리고 또 곤양 군수(昆陽郡守) 이광악(李光岳) 및 최강(崔堈), 이달(李達) 등에게 지시하여 군사를 나누어 좌익(左翼)과 우익(右翼)이 되게 하였다.
곽재우는 먼저 이미 성 안으로 들어가 군대의 위세가 상당히 대단하였으므로 왜적들이 누대(樓臺) 앞까지 와 강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으면서도 감히 가까이 다가오지 못하고 있던 차에 공이 뒤따라 이르러 싸움을 독려하였다. 이리하여 장수들이 모두 공의 명에 따라 힘을 합하여 추격하자, 왜적들이 밤을 틈타 비밀리에 도주하느라 사상자가 매우 많았다. 이에 드디어 사천, 진해, 고성 등 여러 고을을 수복하였다. 또 곽재우에게 기회를 보아 현풍, 창녕, 영산 세 고을의 왜적을 치게 하였는데, 김면과 정인홍 두 대장도 군사를 보내 무계(茂溪)와 안언(安彦)의 왜적을 치고, 초계(草溪)의 의병장 전치원(全致遠), 이대기(李大期)도 사막(沙幕)과 황강(黃江)의 왜적을 내쫓았다. 이에 세 고을에 주둔해 있던 왜적들이 모두 물러가 무계진(茂溪津)에서부터 그 아래 정암(鼎巖)에 이르기까지는 왜적들이 함부로 들어오지 못하여 낙동강의 좌우가 이로부터 소통되었다.
처음에 김수(金睟)가 산음에 있으면서 각 고을에 공문을 보내 군사를 나누고 장수를 임명하였으므로 의병들은 무너져 흩어지고 민심은 더욱 불만스러워하였다. 이에 곽재우가 뭇사람들이 노여워하는 틈을 타 격문을 보내 죄를 꾸짖고 달려가서 그의 목을 베려고 하였다. 그러자 김수는 군사를 포진하여 자신을 방비하는 한편, 곽재우를 반적(叛賊)이라고 논계(論啓)하여 일이 장차 예측할 수 없게 되었다. 공은 이를 매우 걱정하여 다시 곽재우에게 첩문(帖文)을 보내 이르기를,
“의병장은 처음 변란이 일어났을 때부터 재산을 있는 대로 다 털어서 가장 먼저 의병을 일으켰다. 그러고는 자신의 몸을 돌아보지 않고 떨치고 일어나 한결같은 마음으로 왜적을 토벌하였다. 그러니 비록 옛날의 열사(烈士)라 하더라도 어찌 이보다 더하겠는가. 내가 경내에 이르러 즉시 글을 보내 불렀을 때 의병장은 늙고 졸렬한 나를 형편없는 사람으로 여기지 않고 즉시 와서 나를 만났는데, 나는 한번 인사하는 사이에 이미 자신을 잊고 나라를 위해 죽을 뜻이 있음을 알았다.
그 뒤에 적은 군사를 이끌고 낙동강 가를 거침없이 다니며 앞장서서 왜적을 쳐 머리를 벤 것이 매우 많았으므로 왜적들이 함부로 몰아쳐 들어오지 못하여 이 일대의 여러 성들이 지금까지 보존되었다. 이에 아름다운 명성이 사방으로 퍼졌고 그 소식을 들은 자들은 모두 고무되어 원근에서 호응하였으니, 왜적을 쳐 없애는 공을 세우는 것은 날짜를 정해 기약할 수 있었다. 그 위풍과 절의는 당대에 빛날 뿐만 아니라 장차 역사에 길이 전하더라도 부끄러울 게 없을 정도였다. 지금 갑자기 듣건대, 의병장이 순찰사의 영문(營門)에 격문을 보내 패역스러운 말을 많이 하였다고 하였다. 방백(方伯)은 과연 어떤 관원이고 의병장은 또 과연 어떤 인물인가. 그런데 감히 이런 짓을 하려고 한단 말인가. 방백이 실제로 죄가 있다 하더라도 그에 대해서는 조정에서 조치가 있을 것이고 도민(道民)이 손을 쓸 일은 아니다. 의병장은 충의의 가문에서 태어나 왜적을 토벌하는 의병을 일으켜 큰 공을 장차 이룰 판인데, 스스로 자신을 죽이고 일족까지 멸망시키는 죄에 빠지는 짓을 할 줄 내가 어찌 헤아리기나 했겠는가. 당나라 때 배반한 졸개가 주수(主帥)를 쫓아냈다가 화를 당한 자가 대체로 몇 사람이나 되었던가. 옛사람이 실패한 일을 어찌 다시 되풀이하려 한단 말인가.
돌아오는 길을 잃은 것은 《주역(周易)》에서 경계한 바이며, 화를 돌이켜 복이 되게 하는 것은 뜻있는 선비가 취할 바이다. 내 말을 따르면 이치에 순하게 되어 복이 많을 것이고, 내 말을 따르지 않으면 이치를 거스르게 되어 화를 받을 것인데, 그 갈림길은 머리털 하나만큼의 사이도 없는 만큼 의병장은 잘 생각하길 바란다.”
하였다. 곽재우는 그 첩문을 보고는 느끼고 깨달아 사과하기를, “저 역시 역순(逆順)의 이치에 대해서 대충은 들어서 알고 있습니다. 어찌 감히 저의 견해만을 고집하면서 합하(閤下)의 분부를 어기겠습니까.” 하고, 즉시 달려가 포위된 진주성을 구하였다. 공은 또한 힘껏 감사를 설득하여 그로 하여금 유감을 풀고 함께 일하게 하였다. 그리고 또 조정에서 김수의 말만 듣고 곽재우의 마음은 살피지 않은 채 패역(悖逆)의 죄를 씌우지나 않을까 염려한 나머지 사유를 갖추어 급히 장계하였다. 그 내용에 이르기를,
“곽재우는 다름 아닌 고(故) 통정대부 곽월(郭越)의 아들이자 남명(南冥) 조식(曺植)의 손서(孫壻)로, 중간에 무예를 익히다가 그만두고 글을 읽었습니다. 그의 사람됨은 꾸밈이 없이 수수하고 거상(居喪)할 때 극진히 슬퍼하여 향리의 많은 사람들이 효행이 있다고 칭송하였습니다.
변란이 일어난 초기에, 병사와 수사가 서로 잇따라 도주했고 감사 김수(金睟)가 밀양(密陽)으로부터 영산(靈山)으로 물러나 있다가 도로 초계(草溪)로 향해 간다는 말을 듣고 분개하여 말하기를, ‘병사와 수사가 도망하였는데도 처형하지 않았고 지금은 또 왜적이 좌도(左道)에서 나오고 있는데도 감사가 초계로 퇴주(退走)하니, 베어 죽여야 한다.’ 하고는, 칼을 잡고 길목에서 지나가는 것을 기다리고 있다가 향리 사람들이 극력 말리므로 그만두었습니다.
그로부터 얼마 뒤에 방어사(防禦使), 조방장(助防將), 수령(守令) 등이 모두 풍문만 듣고 무너져서 달아나 열흘 사이에 왜적이 서울의 대궐을 범하였습니다. 그러자 곽재우는 주먹을 불끈 쥐고 의분에 겨워 말하기를, ‘이 무리들이 왜병을 호위하여 서울로 들어가 군부(君父)에게 화를 끼쳤으니, 모두 베어 죽여야 한다.’ 하면서, 많은 사람이 모인 자리에서 항상 큰소리치곤 하였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 하루아침에 자기 집 재산을 풀어 군사를 모집하니, 그의 첩이 어찌하여 이처럼 부질없이 죽을 꾀를 내냐며 말리자, 곽재우는 크게 노하여 칼을 빼 죽이려고까지 하였습니다. 처자식의 의복조차도 군졸의 아내들에게 다 내주었으므로 집안살림이 이로 인해 탕진되어 굶주림을 면치 못하였습니다. 이에 그의 매부(妹夫)인 허언심(許彦深)의 집에 처자식을 맡긴 다음 모집한 장사들을 거느리고 가면서 왜적을 치겠다고 큰소리치자, 향리 사람들이 듣고는 모두들 미쳤다고 하였습니다.
그때 의령과 초계 두 고을은 모두 왜적이 휩쓸고 지나가 고을은 텅 비어 있었으며, 의령의 관고(官庫)는 불타 버린 탓에 곽재우의 군사는 식량이 없었습니다. 이에 초계와 신반현(新反縣)의 관아 곡식을 풀어 군사에게 먹였는데, 합천 군수(陜川郡守) 전현룡(田見龍)이 도둑으로 몰아 병사에게 보고하니, 병사가 명을 내려 체포하게 하였습니다. 그러자 의병에 응모하였던 자들이 그 소식을 듣고 모두 뿔뿔이 흩어져 가려고 하였는데, 신이 그 지방에 도착한 즉시 그에게 편지를 보내 불러들이니, 군사들의 사기가 다시 진작되었습니다. 그로부터 곽재우는 한결같은 마음으로 왜적을 공격하였는데, 적의 수효가 많든 적든 가리지 않고 반드시 앞장서서 돌진하였기 때문에 그가 거느린 전사들이 용기백배하여 누구나 할 것 없이 일당백(一當百)의 용사가 되었습니다. 싸울 때에는 반드시 붉은 비단으로 만든 철릭(帖裏)에 당상관의 전립(氈笠) 차림을 하고 ‘홍의천강장군(紅衣天降將軍)’이라 자칭하였습니다.
말을 달려 적진을 유린하였는데, 오가는 것이 번쩍번쩍하여 왜적들이 철환(鐵丸)을 일제히 쏘아도 맞히지 못하였습니다. 혹은 말 위에서 북을 치면서 천천히 감으로써 행군하는 절도로 삼기도 하였으며, 혹은 사람을 시켜 피리 따위를 불게 하여 두려운 뜻이 없음을 보이기도 하였습니다. 또 혹은 숲속에 의병(疑兵)을 많이 배치하여 피리도 불고 북도 치고 하면서 떠들어 대는가 하면, 혹은 곳곳에 복병을 숨겨 사람이 없는 것처럼 조용히 있다가 적이 이르러 오면 갑자기 활을 쏘아 죽이기도 하고, 혹은 왜적의 배를 뒤쫓아가 강기슭에 임해 활을 쏘기도 하는 등 어느 하루도 싸우지 않은 날이 없었습니다. 싸우면 반드시 이겼으므로 왜적의 머리를 벤 것이 모든 장수 중에 가장 많았으며, 쏘아 죽인 숫자도 부지기수였습니다. 왜적들도 그를 홍의장군이라고 부르면서 감히 강기슭에 올라와 도적질을 못하였습니다. 이로 인해 의령(宜寧), 삼가(三嘉) 두 고을의 백성들은 모두 생업에 안주하고 농사에 힘씀으로써 오곡의 풍성함이 평소와 다름이 없었으며, 도내의 나머지 성들이 지금까지 보존된 데에는 곽재우의 공이 큽니다.
그런데 갑자기 삼도(三道)의 장수가 수원(水原)에서 무너졌다는 말을 듣고는 미친 사람처럼 격한 말과 망녕된 말을 수없이 해댔습니다. 순찰사가 비록 편지를 보내 찬양하고 조정에 으뜸 공을 세웠다고 계문하였으나, 역시 뜻을 돌리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이 혹 화를 당할지도 모른다고 경계하면 반드시 칼을 잡으며 노하였습니다. 이번에는 갑자기 두 차례나 순찰사의 영문(營門)에 격문을 보내 낱낱이 그 죄를 열거하고는 토벌하겠다고 공언하고 아울러 각 고을의 의병장에게 통문을 돌려 토죄(討罪)하겠다는 뜻을 말하였습니다. 신은 그 말을 듣고 크게 놀란 나머지 저도 모르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습니다. 그러던 차에 순찰사가 신에게 공문을 보내 의령 고을에 명하여 곽재우를 잡아 가두라고 하였습니다.
신은 삼가 생각건대, 곽재우가 실제로 역심(逆心)을 품었다면 현재 정병(精兵)을 거느리고 있으니 일개 역사(力士)로는 잡을 수가 없을 것이며, 만약 역심을 품지 않았다면 편지 한 장으로도 충분히 깨우칠 수 있을 것이라고 여겼습니다. 이에 즉시 첩문(帖文)을 곽재우에게 보내 여러모로 타이르고 깨우쳤으며, 김면(金沔)도 글을 보내 경계하였습니다. 그랬더니 곽재우는 곧바로 마음을 바꿔 신들의 말을 따랐습니다. 진주가 위급하다는 말을 듣고 군사를 이끌고 달려가 구원하기 위해 지난 3일에 이미 길을 떠났습니다.
곽재우는 일개 도민(道民)으로서 도주(道主)를 범하기 위해 죄를 성토하고 격서를 보내기까지 하였습니다. 비록 스스로는 나라를 위한 마음에서 분개한 나머지 취한 행동이라고는 하나, 행적이 난민(亂民)에 가깝습니다. 그러니 당장 마땅히 토죄하여 제거해서 그의 분별없이 도리에 어긋난 짓을 징계해야 합니다만, 곽재우는 온 나라가 함몰된 뒤에 능히 적은 군사로 용감히 적을 공격하였으므로 도내의 잔약한 백성들이 그를 간성(干城)처럼 의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제 망언을 했다고 하여 곧바로 주륙을 가한다면, 남아 있는 성을 보존하고 왜적을 막을 계책이 없습니다.
신은 삼가 사태를 일단 미봉하고 진정시키기는 하였습니다만, 곽재우가 도순찰사(都巡察使)에게 죄를 지어 그의 용납을 받지 못해 또 다른 변고가 야기되지나 않을까 염려스럽습니다. 신은 듣건대, 을묘년의 왜변(倭變)이 일어났을 당시 전라 감사 김주(金澍)가 영암(靈巖)에서 다른 고을로 달아났는데, 전 수원 부사(水原府使) 윤기(尹祁)가 그때 유생으로서 포위된 성 안에 있다가 칼을 빼들어 죽이려 하였습니다. 그런데도 김주는 화를 내지 않고 담소로 대처하였다고 하여, 논자(論者)들이 지금까지도 윤기의 용기에 대해 칭송함과 동시에 김주가 능히 포용한 것을 훌륭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지금 곽재우의 일이 비록 몹시 오만하고 방자하기는 하나, 그의 마음은 실로 다른 뜻이 없습니다. 그러니 감사가 만약 김주가 대처했던 것처럼 한다면 반드시 조용해져서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기에 신이 김수에게 글을 보내 선처하도록 부탁한 결과, 걱정될 만한 변은 없게 되었습니다. 다만 김수가 이미 곽재우를 반적(叛賊)이라고 계문하였고, 또 다른 사람을 사주했다고 말하였습니다. 만약 이 일로써 그를 죄준다면 그가 죄에 승복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한 도의 인심을 수습하기가 어려울 것으로 염려되어 매우 애가 탑니다.
곽재우가 충의(忠義)에 겨워 분개한 상황과 용감히 왜적을 친 공은 온 도에 널리 소문이 나서 아이들이나 군졸들까지도 모두 곽 장군(郭將軍)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그리고 듣건대 그는 용병(用兵)에 뛰어나서 장수의 자질이 있다고 합니다. 만약 오만 방자한 데 대한 처벌을 조금 관대히 해 준다면, 반드시 공을 세워 보답할 것입니다.
신은 불행하게도 명을 받든 이후에 두 번이나 이런 변을 만났습니다. 신이 4월 중에 호남(湖南) 길로 오다가 운봉현(雲峯縣)에 이르렀을 때, 호남 사람이 순찰사 이광(李洸)이 근왕(勤王 왕실을 구원하는 일)에 태만하다는 이유로 토벌할 생각이라고 신에게 은밀히 말하는 자가 있었습니다. 신은 대의(大義)를 들어 그 말을 꺾고, 곧장 김수와 상의하여 이광에게 알려 그에 대비하라고 말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랬더니 김수가 말하기를, ‘근왕을 태만히 한다는 이유로 그가 토벌하려고 하니, 의사(義士)라고 이를 만하다. 만약 이광에게 이 사실을 통보하여 그 사람을 죽인다면 한 도의 인심이 더욱 격해질 것이다. 이광에게 알려서는 안 된다.’ 하였습니다. 신은 그의 말에 따라 그만두었습니다. 지금 이 곽재우의 일이 꼭 저번의 그 일과 같습니다. 김수가 만일 호남 사람에게 대처한 의리로 곽재우를 대한다면 난처한 일이 없을 것입니다.
신과 김면이 곽재우에게 보내 경계한 편지와 곽재우의 답서를 아울러 등서(謄書)하여 올려보냅니다.”
하였다. 감사의 장계가 처음 들어가니, 조정에서 한창 그에 대처할 계책에 대해 의논하고 있다가 공이 올린 계사를 보게 되자 많은 사람의 의심이 깨끗이 풀려 마침내 무사하게 되었다. 공은 곽재우에 대해서 그를 알아주는 의리가 중했고, 그를 다시 살려 준 은혜가 깊었으며, 장려하고 책망함에 있어 치켜세우고 억누르는 일이 다 지극하여, 마침내 남쪽의 의병 가운데 선봉이 되게 하였다. 그러니 곽재우가 남다른 공을 세워 당대에 드러나게 된 것은 모두가 공이 그 환경을 조성하고 이끌어 준 힘이었다.
영천(永川) 사람인 진사 정세아(鄭世雅), 생원 조희익(曺希益), 전 현령 곽회근(郭懷瑾) 등 60여 명이 수천 자에 이르는 장문의 편지를 쓴 뒤에 사람을 시켜 낮에는 숨고 밤에만 길을 걸어가 공에게 바치게 하였다. 그 글은, 좌도(左道)의 의병들이 명령을 받을 데가 없으므로 공의 절제(節制)를 받고자 한다는 내용이었으며, 또 여러 수령과 장수들이 깊은 산속에 숨어 있다가 조금씩 나와서는 의병들을 방해하고 억눌러 의병들이 모두 흩어져 모이기 어려운 상황에 대해 진술하였다. 공은 온화한 말로 위로하며 지시하기를, “제군들이 호랑이 굴을 무릅쓰고 험난한 길을 지나서 멀리까지 와 문안하니, 충의가 마음속에서 솟구치지 않았다면 어찌 이럴 수 있겠는가. 사람으로 하여금 감격하여 눈물이 나게 한다. 나는 왕명을 받들어 적을 초유하고 있으니 의리상 피차간의 구분이 없다. 다만 길이 이처럼 막혀 공문이 통하지 않으니 어쩌겠는가. 훈련원 봉사(訓鍊院奉事) 권응수(權應銖)가 열성을 다해 의병을 모으고 여러 차례 적병을 물리쳤으니, 그를 의병대장으로 삼도록 하고 그 주위의 몇몇 고을도 모두 의병장을 정하여 권응수의 지휘를 받도록 하라.” 하였다. 이리하여 권응수는 공이 추천해 준 데 감격하여 더욱 분발하여 하양(河陽)의 의병장 신해(申海) 등과 함께 네 고을의 의병을 거느리고 영천에서 성을 점거하고 있던 왜적을 쳐 하나도 남김없이 섬멸하였다.
공이 항상 상주(尙州) 일로(一路)의 소식이 통하지 않는 것을 걱정하고 있던 중에 사인(士人) 조정(趙靖)ㆍ이홍도(李弘道) 등이 와서 이봉(李逢)이 군사를 모아 왜적을 토벌한 일에 대해 말하였다. 그러자 공은 그 즉시 이봉을 올려 의병장을 삼고, 전 한림(翰林) 정경세(鄭經世), 전 찰방(察訪) 권경호(權景虎), 사인 신담(申譚)을 각각 상주, 함창(咸昌), 문경(聞慶) 세 고을의 소모관으로 삼았다.
가을에 행조(行朝)에서는 경상 좌도가 왜적에 점거되어 이 지역을 맡아 관할할 적임자를 얻지 못하였다고 여겨 대신의 천거에 의해 공을 경상좌도관찰사 겸 순찰사(慶尙左道觀察使兼巡察使)에 제수하였다. 선전관(宣傳官) 이극신(李克新)이 교서(敎書)를 가지고 왔는데 그 내용에, “경의 강직하고 방정함은 사대부 중에 소문이 났으며, 충성스럽고 독실함은 오랑캐를 감동시켰다. 경은 본도 사람이고 게다가 특별한 공적을 세웠으니, 이제 악인들을 섬멸하여 옛 강토를 수복하자면 경을 버려 두고 누구에게 맡기겠는가. 이에 경을 경상 좌도 감사에 제수하니, 경은 그곳으로 가서 삼가 직무를 수행하도록 하라. 아, 평소에는 임금의 뜻을 거스르면서 과감하게 간하는 선비가 없었고, 난리에 임해서는 절개를 지켜 의리에 죽는 신하가 없었다. 나는 경이 훌륭한 말을 올린 것이 이미 충심에서 나온 것임을 알고 있으니, 이 때문에 경이 오늘날 공을 세울 것을 바라는 기대가 매우 각별한 것이다.” 하였다. 공은 제수하는 명을 받은 뒤에 ‘기성(箕城 평양)을 지키지 못하여 대가(大駕)가 의주(義州)로 가고 세자는 안협(安峽)에 돌아와 있다.’라는 소식을 듣고 가슴을 치고 통곡하면서 말하기를, “백발의 외로운 신하가 명을 받고 남쪽으로 내려와 사람들을 통솔하여 근왕(勤王)하지 못하였고, 또 흉적들을 소탕하지도 못한 채 구차스레 살아 지금까지도 숨이 붙어 있다. 그런데도 형벌을 내리지 않고 도리어 한 도를 책임지는 직임을 맡기셨으니, 뼈가 가루가 되고 몸이 부서진다 하더라도 어찌 그 은공을 다 보답하겠는가. 천지를 둘러보아도 내 이 몸이 위축되어 돌아갈 곳이 없다.” 하니, 좌우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눈물을 흘리면서 감히 우러러 쳐다보지 못하였다. 공은 말하기를, “이미 좌도 감사가 되었으니, 지금부터는 우도(右道)의 일을 관여하는 것이 합당하지 않다. 그러나 처음부터 의병에 관한 일을 관할하였으니, 어찌 감히 직분을 벗어난 짓이라는 혐의를 피하기 위해 목전의 염려스러운 일을 진달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고, 마침내 낱낱이 조목별로 장계를 올렸다.
그 이튿날 자리를 옮겨 초계에 머물러 있다가 낙동강 왼쪽을 향해 떠나려 하자, 우도의 사람들이 탄식하고 눈물을 흘리면서 마치 물을 잃은 물고기처럼 어찌할 줄 몰라 들떠 있었으며, 의병들은 모두 맥이 풀려 수습할 수 없는 지경이 되었다. 이에 선비들이 달려 나와 날마다 뜰 아래에 서서 공에게 머물러 있기를 청하였으며, 초계의 유생 이대기(李大期) 등 30여 명은 떠나지 말기를 청원하는 글을 올렸는데, 그 글의 대략에,
“김면과 정인홍 두 대장이 합하(閤下)의 초유(招諭)하는 격문에 호응하여 두 주먹을 불끈 쥐고 떨쳐 일어나 흩어진 의병들을 모으자, 원근에서 구름처럼 몰려들어 의기의 칼날이 상당히 예리해졌습니다. 낙동강 오른쪽의 8, 9개 군이 왜적의 침입을 면할 수 있었던 것은 실로 합하께서 잘 절제(節制)하신 데에 힘입은 것입니다.
이번에 교서가 서쪽에서 내려와 좌도로 떠나시게 되자 여정(輿情)은 맥이 풀리고 사람들은 의구심을 품어, 이미 모인 자들은 흩어져 떠날 생각을 하고 밖으로 나오려던 자들은 도로 물러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이에 전일에 숨어 있던 흉악한 자들이 그 기세를 드날린다면 두 의병대장이 또한 어찌 구차하게 공을 이루기를 바라 저들의 제지를 받으려고 하겠습니까.
곽재우는 뜻은 크지만 행동은 거칠어 방백의 뜻을 거슬렀고 믿는 바는 오직 합하뿐인데, 합하께서 가시고 나면 형세상 장차 보전하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곽재우가 없으면 의령을 지키지 못하여 삼가(三嘉) 서쪽 지역이 차례차례 함락당할 것입니다. 이로 볼 때 합하께서 떠나가고 머무는 것이 어찌 의병들이 모이느냐 흩어지느냐에 관계된 바가 아니겠으며, 국가가 보존되느냐 망하느냐가 달려 있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일의 성패와 이해가 숨 한번 들이쉬고 내쉬는 사이에 달려 있습니다. 그런데 구구하게 임금의 명에 달려나가는 틀에 박힌 관습을 지키려고 하다가 놓쳐서는 안 될 계기를 그르친다면, 합하께서 전일에 적을 초유(招諭)한 공이 허사가 되지 않겠습니까.”
하니, 공이 말하기를, “이미 임금의 명이 내려졌는데 어찌 감히 내 마음대로 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낙동강 오른쪽의 각 고을 유생들이 공을 억지로 머물게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는 앞다투어 상소하여 머물게 해 주기를 청하였는데, 합천, 초계, 삼가, 의령, 진주, 단성에서는 진사 박이문(朴而文)이 소두(疏頭)가 되고, 거창, 안음, 산음, 함양에서는 진사 정유명(鄭惟明)이 소두가 되었다. 이들은 서쪽으로 먼길을 달려 왜적들이 있는 곳을 간신히 지나 행재소에 도달해 상소를 올렸다. 박이문이 올린 상소의 대략에,
“나라를 광복(光復)하는 기반은 영남에 있고, 영남을 수복하는 책임은 김성일에게 달려 있습니다. 김성일이 없으면 의병이 없고 따라서 영남도 없을 것입니다. 지금 김성일이 삼가 왕명을 받들고 낙동강을 건너 동쪽으로 가게 되니, 간사한 무리가 눈을 부라리고 의병들은 기운이 꺾였습니다. 오늘날의 일이 어찌 통곡하고 눈물을 흘리는 데에서 그칠 뿐이겠습니까. 신들의 생각으로는, 이미 내려진 성명(成命)을 도로 거둘 수는 없더라도, 그로 하여금 좌도와 우도의 일을 겸하여 살피면서 의병들을 격려하게 하면 될 듯 싶습니다. 그렇게 한다면 이는 실로 전적으로 맡기고 책임을 중하게 하여 한 도의 일을 전부 총괄하게 하는 것으로, 전화위복의 계기가 오로지 여기에 달려 있을 것입니다.”
하였으며, 정유명이 올린 상소의 대략에,
“오늘날의 일은 모두가 의병들이 한 일인데, 의병들이 종시토록 공을 이룰 수 있었던 것은 김성일 덕분입니다. 지금 듣건대, 김성일이 좌도 감사로 옮겨 제수되었다고 하니, 국토를 수복하는 공이 다 이루어져 가는 지금 장애가 없을 수 없습니다. 어째서 그렇게 말하겠습니까. 낙동강 오른쪽 지역의 군민(軍民)들이 김성일을 자모(慈母)처럼 보고 있으며, 김성일을 장성(長城)처럼 의지하고 있습니다. 이에 필사의 계책을 도모하여 왜적들을 쓸어 버리고 한번 살아남아서 태평시대를 보기를 기약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하루아침에 이쪽에서 빼앗아다가 저쪽으로 주는 일이 전혀 뜻밖에 생겼으므로, 충신들은 실망을 하고 의병들은 맥이 풀려 있습니다. 김성일이 떠나가고 머무는 것이 어찌 유독 경상 우도 의병들의 성패에만 관계가 있겠습니까.”
하였다. 상소가 올라가자 즉시 공을 다시 경상 우도 관찰사로 삼도록 명하였다.
공이 박성(朴惺)을 경상 좌도 가도사(慶尙左道假都事)로 삼은 다음 9월 초에 함께 낙동강을 건넜다. 좌도의 백성들이 공이 온다는 말을 듣고는 기뻐 펄쩍펄쩍 뛰면서 모두 “어찌하여 이렇게 늦게 오시는가.” 하였고, 산골짜기로 도망쳐 숨어 있던 수령이나 장사(將士)들은 공이 온다는 풍문만 듣고도 넋을 잃은 채 서로 말하기를, “아무 어른이 좌도의 관찰사가 되었으니 우리들은 장차 목숨을 부지하지 못할 것이다.” 하며, 어떤 자는 머리를 깎고 중이 되려고 하였다.
청송(靑松)에 공의 외가의 선영(先塋)이 있었는데, 부사(府使)가 먼저 제전(祭奠)에 대한 일을 여쭙자 공이 노하여 말하기를, “이런 때를 당하여 왜적을 칠 일을 말하지 않고 도리어 상사(上司)를 위하여 사사로운 제향(祭享)의 일에 관해 말한단 말인가.” 하였다.
신녕(新寧)에 도착해서 도로 경상 우도 관찰사에 제수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말하기를, “도로 강을 건너가자면 반드시 우도의 군병들이 마중 나오기를 기다려야 할 것이다. 이곳에서 선영까지는 이틀이면 갈 수가 있으니, 이러한 때에 어찌 잠깐 가서 살펴보고 참배를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그러고는 곧바로 달려가 참배하고 성묘하였다. 고향에서 하루를 머문 뒤에 돌아갈 때 온 가족이 작별에 임하여 서로 붙들고 큰소리로 울었으나 공은 못 본 체하면서 평소와 다름없이 웃고 떠들었다. 세 아들이 중도에까지 따라나오자, 큰아들 집(潗)에게 이르기를, “공과 사는 구분이 있으므로 사를 돌아볼 수가 없다. 너희들은 돌아가서 너희 어미를 모시라. 홀로 되신 나의 큰형수와 둘째 형수에 대해서도 너희의 어미처럼 보아 시종 잘 섬기라. 어찌할 도리가 없는 상황에 이를 경우에는 온 가족이 동시에 죽어 황천에서 만나는 것이 옳다. 나라가 보존되면 함께 보존되고 나라가 망하면 함께 망하는 것이다. 어찌 나라가 멸망했는데 집안이 보존되는 경우가 있겠는가.” 하고, 둘째 아들 역(湙)에게 자신을 따라오게 하였다. 두 아들이 통곡하고 절하면서 하직을 하자, 곁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얼굴을 가리고 울었다. 안기도 찰방(安奇道察訪) 강영(姜霙)이 말하기를, “공은 이러한 때에 마음이 흔들리지 않습니까?” 하니, 공이 말하기를, “어찌 마음이 흔들리지 않겠는가. 다만 흔들리는 것이 무익함을 스스로 안 것일 뿐이다.” 하였다.
대구(大丘)의 동화사(桐華寺)에 도착하니, 좌도 병사(左道兵使) 박진(朴晉)이 군사를 거느리고 와 마중하였다. 어느 날 밤에 군중(軍中) 사람들이 공연히 놀라서 말하기를, “왜적들이 문 앞에 당도했다.” 하자, 편비(褊裨)와 하리(下吏)들이 모두 흩어져 달아나 숲속으로 숨었으나 공만 홀로 동요하지 않았는데, 조금 있다가 도로 안정되었다. 좌도의 의병들이 박진에게 활동을 저지당하는 일이 많았으므로, 공은 박진을 만나 그래서는 안 된다고 극력 말하였다.
이보다 앞서 권응수가 영양(永陽)의 전투에서 이긴 것은 오로지 선비들이 창의(倡義)하여 앞장선 데에서 말미암은 것이었다. 동도(東都)로 옮겨 가서 토벌할 때에는 이들이 앞다투어 적진으로 달려나갔다가 생원 최인제(崔仁濟)ㆍ정의번(鄭宜藩) 등 17인이 같은 날에 해를 당하였고, 정자(正字) 유종개(柳宗介)도 분투하였는데 관동(關東)에서 고개를 넘어온 왜적들에 의해 죽었다. 공은 이런 사실을 듣고 놀라 감탄하기를, “이것은 우리나라가 200년 동안 배양해 온 교화 때문이 아니겠는가.” 하였다. 그러고는 장계를 올려 유생들의 충렬(忠烈)이 가상하다는 것과 박진이 의병들을 가로막은 사실 및 권응수에게 한쪽 방면을 맡기라는 뜻을 모두 진달하고, 아울러 아뢰기를, “본도의 감사가 따로 있습니다만, 신이 이미 은혜를 입어 좌도로부터 우도로 옮겼으므로 신이 본 바를 다 아뢰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하였다. 이에 전사한 사람들이 모두 포상의 은전(恩典)을 입었고, 권응수는 병사로 승진 제수되었으며, 의병들 역시 박진에게 흔들리지 않게 되었다.
공이 정병(精兵) 100여 명을 거느리고 100여 리를 달려가서 한밤중에 낙동강을 건넜다. 이날 새벽에 대구와 성주(星州)의 왜적이 동쪽과 서쪽에서 다 집합하여 하빈(河濱)에 모였는데, 공의 걸음이 조금만 늦었더라면 일이 예측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을 것이므로 사람들은 신명(神明)이 도와준 것이라고 하였다.
공은 관찰사의 직인을 인수받은 뒤에 거창에서 산음으로 옮겨 머물러 있었다. 공이 좌도로 건너갔을 때 우도의 의사들이 모두 흩어져 산속으로 들어갔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조종도는 함양에서 오고, 이로(李魯)와 오장(吳長)은 지리산(智異山)에서 나왔다. 사민(士民)들은 서로 경하하며 말하기를, “우리 공이 오셨으니 우리들은 이제 살아났고 국토의 수복도 기대할 수 있겠다.” 하였다. 김수가 진양은 지킬 수 없을 것이라고 여겨 김시민으로 하여금 우현(牛峴)에 있는 김면의 진영으로 가서 돕게 하였는데, 공이 이르러서는 김시민을 불러와 도로 진양을 지키게 하였다.
당시 수령 중에 결원이 많이 생겼는데도 차임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공은 편의에 따라 사람을 뽑아 제수하라는 조정의 명으로 인하여 각자의 재주와 자급에 따라서 인재를 선발해 채워 넣었다. 정기룡(鄭起龍)을 상주 판관(尙州判官)으로, 김준민(金俊民)을 거제 현령(巨濟縣令)으로, 강덕룡(姜德龍)을 함창 현감(咸昌縣監)으로, 박사제(朴思齊)를 의령 현감(宜寧縣監)으로, 박정완(朴廷琬)을 거창 현감(居昌縣監)으로, 변혼(卞渾)을 문경 현감(聞慶縣監)으로, 여대로(呂大老)를 지례 현감(知禮縣監)으로, 이정(李瀞)을 사근도 찰방(沙斤道察訪)으로, 정인홍(鄭仁弘)을 성주 목사(星州牧使)로 삼았다. 이들을 차임해 임지로 보낸 다음 일일이 조정에 계문(啓聞)하였는데, 사람을 뽑아 배치한 것이 여러 사람들의 마음에 들어맞았으므로 인심이 흡족해하였다.
공은 여러 진영에서 왜적의 머리를 베어 바치면 반드시 몸소 검사하였는데, 어떤 사람이 더러우니 가까이 접하면 안 된다고 하자, 공이 말하기를, “전쟁터에서는 으레 거짓으로 속이는 일이 많은 법이다. 잘못하여 우리나라 사람을 죽였을 경우, 그 죄는 실로 나에게 있다. 그러니 신중히 하지 않아서는 안 된다.” 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머리를 베어 바치는 자가 감히 속임수를 쓰지 못하였다. 그리고 각처에서 군사를 거느리고 있는 사람이 조그만 승리라도 거두었을 경우에는 이를 크게 과장하여 정말인지 거짓인지를 구분할 수가 없었으며, 혹 자기의 공로를 과시하거나 자제나 친구가 공을 세웠다고 기록하기도 하여, 실제로 피를 흘리면서 싸운 사람은 그 속에 들지 못하였다. 이 때문에 사람들이 분을 품고 사기가 해이해지는 것이 당시의 공통된 걱정거리였다. 이에 공은 철저하게 조사하고 자세히 살펴서 엄하게 꾸짖었다. 일찍이 대장 정인홍에게 통첩을 보내 이르기를, “공을 과장하여 상을 바라는 것은 무관(武官)이나 하는 일인데, 대장의 휘하에 어찌 이런 일이 있어서야 되겠는가. 부하 사람들을 엄하게 경계하여 거짓으로 속이는 폐단이 없게 하라.” 하였고, 또 성주(星州)를 점거하고 있던 왜적을 습격할 적에 물어보지도 않고 경솔히 움직였다가 마침내 패하여 돌아왔다는 이유로 우두머리 아장(牙將)을 잡아다가 군율로 논해 곤장을 쳤다.
공이 산음에 있다가 창원(昌原)의 왜적이 부산(釜山), 김해(金海)의 왜적과 합세해 날뛰고 있는데 그 무리가 수만 명이라는 소식을 듣고는, 이들이 반드시 진주로 향할 것임을 알고 즉시 진주 목사 김시민에게 공문을 보내어 ‘대대로 나라의 은혜를 받았으니 죽음으로써 보답하는 것이 마땅하다.’라는 뜻으로 격려하여 힘쓰게 하였다. 아울러 곤양 군수(昆陽郡守) 이광악(李光岳), 진주 판관(晉州判官) 성수경(成守璟)에게 지시하여 진주 고을 사람인 전 만호(萬戶) 최덕량(崔德良), 권관(權管) 이찬종(李纘宗)과 함께 힘을 합하여 왜적을 제압하게 하였다. 또 왜적들이 길을 나누어서 정진(鼎津)을 건널 경우에는 낙동강 오른쪽 일대와 호남으로 통하는 직로(直路)가 모두 손써 볼 도리가 없게 될까 염려하여, 드디어 말을 달려 의령으로 가 산음, 단성, 삼가, 의령 등 네 고을의 관병과 의병으로 하여금 정진 가에 진을 치게 하였는데, 초계 가수(草溪假守) 곽율(郭)도 군사를 거느리고 달려와 왜적이 나루를 건너지 못하였다.
이때 왜적은 진양을 열 겹으로 에워쌌으며, 대오가 수십 리에 걸쳐 깔려 있었다. 공은 결사대를 모집하여 활과 화살을 주고 밤중에 적진 가운데서 방비가 없는 남강(南江)을 통하여 성 안으로 들여보내 장수와 사졸들에게 반드시 성을 사수할 것을 당부하는 한편, 첩자를 많이 보내 왜적의 상황을 정탐하게 하였다. 또 고성 가수(固城假守) 조응도(趙凝道)에게 최강(崔堈), 정유경(鄭惟敬) 등과 함께 남강 가에서 군대의 위력을 과시하게 하였다. 전라도 의병장 최경회(崔慶會)와 임계영(任啓英) 역시 공이 서신을 보내 통보함으로 인하여 이보다 먼저 진주로 와서 공의 분부를 들은 다음 각각 군사 1000여 명을 거느리고 살천(薩川)에 진을 쳐 성세(聲勢)를 도왔으며, 김시민은 한결같이 공의 지휘에 따라 기병(奇兵)을 매복하고 정예병을 숨겨 놓아 호응하였다. 왜적들이 7일 밤낮을 계속하여 포위 공격하였으나 마침내 함락시키지 못한 채 많은 사상자만을 냈다. 그리하여 마침내 그들이 주둔했던 막사를 불태우고 시체더미를 태워 버린 다음 허둥지둥 서둘러 도망쳤다. 공은 합천 가장(陜川假將) 김준민(金俊民)과 정방준(鄭邦俊) 등에게 군사를 거느리고 단계(丹溪)로 달려가 왜적들을 급히 치면서 추격하게 하였다.
진양(晉陽)의 첩보가 한밤중에 이르자 공은 촛불을 밝히고 일어나 앉아서 성을 지킨 상황에 대해 자세히 묻고 막하의 여러 사람들에게 이르기를, “이 성이 함락당했더라면 성 안에 있는 수만 명의 사람들이 떼죽음을 당하였을 뿐만 아니라, 온 도의 나머지 성들도 결코 보존할 수가 없었을 것이며, 호남 지역도 당장 침입을 받았을 것이다.” 하였다. 그러고는 곧바로 아전을 불러 원근의 각 고을에 격문을 보내 인심을 안정시켰다. 휘하의 군교(軍校)들이 들어와 승전을 축하하면서 그 공을 대부분 공에게 돌리자, 공은 말하기를, “이것은 목사의 공이고 여러 장수들의 힘이다. 백발의 진부한 선비가 무슨 공이 있겠는가. 다만 바라는 것은 너희들이 뜻을 다듬어 왜적을 섬멸하기를 김시민이 한 것처럼 하는 것이다. 그럴 경우 어찌 나라를 위해서만 다행이겠는가. 실로 너희들의 영광이 될 것이다.” 하였으며, 김시민의 공을 크게 칭찬하면서 그날 즉시 급히 장계하여 병사로 승진되게 하였다.
당초에 정진(鼎津)에서 우리 군사들의 위력을 과시할 때 곽재우에게 군사를 거느리고 의령과 함안의 경내에 머물러 있게 하였는데, 곽재우는 왜적들이 만약 대거 몰려오면 배수진(背水陣)을 칠 수 없을 것이라고 여겨 공의 지휘를 따르지 않았다. 이에 공이 노하여 곽재우를 뜰 안으로 잡아오게 한 다음 장차 군율로 다스리려고 하였는데, 박성(朴惺)과 오운(吳澐)이 막하에 있다가 극력 말리므로 그만두었다. 곽재우의 벗이 곽재우에게 말하기를, “자네는 어찌해서 전과 같이 뻣뻣하게 굴지 않았는가?” 하자, 곽재우가 웃으면서 말하기를, “이분이 아니면 누가 어찌 내 목숨을 마음대로 하겠으며, 나 또한 어찌 그 제재를 받으려고 하겠는가.” 하였다. 그러나 공이 곽재우에게 명령한 것은 반드시 그로 하여금 한창 기세가 오른 왜적을 치라고 한 것이 아니라, 복병을 매복시켰다가 왜적의 후미를 치거나 돌아가는 왜적을 치라고 한 데 불과하였던 것이다. 그런데도 곽재우가 끝내 함안 경내에서 한 걸음도 나오지 않아 상처를 입고 패주하던 왜적들을 모두 무사히 돌아가게 하고 말았다. 이 때문에 당시 사람들이 공의 지휘에 대해서 승복하였으며, 곽재우가 명령대로 따르지 못한 것을 한스러워하였다.
공이 장차 진양으로 가서 장사(將士)들을 직접 위로하려 하였는데, 마침 개령(開寧)과 성주(星州)에서 왜적들에 대한 급보가 또 날아들었으므로, 도사(都事) 김영남(金穎男)을 대신 진양으로 보내고 공은 삼가로 향하였다. 개령의 왜적들이 지례를 침범하고 성주의 왜적들이 고령을 쳐들어오자 휘하의 용사들을 나누어 보내 김면과 정인홍 두 대장의 전투를 돕도록 하고 나머지 군사로 성원한 결과 왜적이 모두 패하여 되돌아갔다.
이해 겨울에 상이 승정원에 전교하기를, “경상 감사 김성일이 공을 많이 세웠으니, 마땅히 가자(加資)하여 다른 사람들을 면려시켜야 한다.” 하고, 드디어 가선대부(嘉善大夫)로 자급을 올렸다.
하루는 이정(李瀞)이 함안과 진주 경내에서 돌아오다가 전사한 군사들의 시체가 수북하게 쌓여 있는 것을 보고는 여러 진의 장수들에게 영을 내려 시체를 거두어 파묻게 하라고 청하였다. 그때는 한밤중이 다 되었을 때였는데 공은 즉시 글을 써서 보낸 다음 말하기를, “좋은 말은 하룻밤도 묵혀 두어서는 안 된다.” 하였다.
김면과 정인홍 두 대장이 일국의 큰 명망을 받고 있으면서도 다른 사람의 통제를 받는 것을 부끄러워하였으며, 곽재우 역시 고집이 세어 자기 멋대로 하면서 공의 통제에 따르지 않았는데, 공이 공문을 보내거나 명령을 전할 때 매우 엄하게 대하여 조금도 용서치 않았다. 그러자 조종도가 조용히 공에게 말하기를, “이들 두세 사람은 모두 당대의 명사(名士)로서 나라를 위해 몸을 던져 성심껏 왜적을 토벌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이처럼 억누른단 말입니까?” 하니, 공이 말하기를, “내가 이들에 대해서 어찌 다른 뜻이 있겠는가. 만약 내정(內廷)에서 함께 일하는 경우라면 체모에 비록 실수가 있더라도 굳이 서로 따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조정이 저 멀리 서쪽 변방에 있어서 임금의 명령이 통하지 않고 있다. 이러한 때에 어찌 여러 장수들이 멋대로 영을 어기는 것을 내버려 둘 수 있겠는가. 이렇게 하는 것이 내가 그들이 충성을 다하는 것을 기리는 것이고, 그들이 제 마음대로 하는 것을 막는 방편인 것이다.” 하였다.
당시에 이들 두 사람이 명성과 지위가 모두 높아 우열을 가릴 수 없었는데, 피차 휘하에 있는 군사와 문생들이 서로 시기하고 의심한 나머지 모함하고 헐뜯어 두 사람이 사이좋게 지내지 못하였다. 이에 공문을 보내는 가부에 대해서조차도 대부분 서로 어긋나서 화합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공은 두 진영에 가서 말하기를, “서로 마음을 합해 왜적을 토벌해서 함께 국난을 극복하는 것이 마땅하지, 경박한 자들이 하는 말을 듣고서 스스로 틈이 벌어져서는 안 된다. 지금부터는 양쪽 사이에서 분란을 일으켜 이간질하는 자가 있을 경우에는 내가 반드시 따져 물어 법으로 다스리고 조금도 용서치 않을 것이다.” 하였더니, 이로부터 경박한 자들이 조금 자제하고 헐뜯는 일이 점차 그쳤다.
김 대장이 일찍이 여러 고을을 순시할 적에 군대의 위세를 크게 과장하고 많은 사람들을 거느리고 다녔는데, 공이 이런 사실을 듣고는 불쾌해하면서 말하기를, “지해(志海 김면(金沔))도 이렇게 한단 말인가.” 하였다. 그 뒤에 김면이 김시민을 대신하여 병사가 되었을 때 공은 거창에서 그를 만나 큰 사발로 술을 몇 잔 마시고 손을 잡고 소회를 토로하면서 눈물을 흘리기까지 하다가 동이 틀 무렵에야 자리를 파하였다. 그다음 날 아침에 김면을 따라다니는 아전을 불러다 놓고 죄상을 열거하며 말하기를, “의병대장으로 있을 때는 혹 지휘에 순응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병사의 체모에 있어서는 결코 자기 멋대로 해서는 안 된다.” 하였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병사가 역질에 걸려 일어나지 못하였는데, 공이 그 소식을 듣고는 놀라 비통해하면서 말하기를, “장성(長城)이 무너졌으니 나랏일이 글러졌다.” 하고, 또 말하기를, “이 사람은 처첩이 10리 밖에 살고 있는데도 시종 만나 보지 않았다. 그 정충(精忠)과 의열(義烈)은 신명(神明)에게 물어봐도 이의가 없을 것이니, 어찌 우리 같은 자들이 미칠 수 있는 일이겠는가.” 하였다. 그러고는 즉시 급히 장계하기를,
“병사 김면은 본디 병이 많은 사람으로 산림(山林)에서 병을 요양하며 지낼 뿐 세상사에는 뜻이 없었는데, 변란이 일어나자마자 자신의 몸을 돌아보지 않고 떨치고 일어나 의병을 일으켰습니다. 그러고는 이 왜적들과는 한하늘 아래서 살지 않겠다고 맹세하고, 오랜 세월 혈전을 벌여 여러 차례 왜적의 예봉을 꺾었으니, 낙동강 오른쪽 일대가 지금까지 보존된 것은 대부분 그의 공이었습니다.
의병을 일으킨 뒤로는 그의 처자식이 가까운 지방에 살며 유리걸식하는데도 한 번도 만나 보지 않았습니다. 여름이나 겨울이나 이슬과 눈서리 속에 맨몸으로 지냈으므로, 사람들은 그 처자식들이 반드시 죽을 것으로 알았는데도 태연히 마음을 움직이지 않았으니, 나라를 위하는 그 정성은 단사(丹砂)처럼 붉게 빛났습니다.
나라의 은혜를 입어 병사에 제수된 뒤로는 더욱더 책임이 크고 임무가 무거움을 두렵게 여겼습니다. 그는 직접 군사들을 독려하여 금산(金山)의 경내에 진주(進駐)해 있으면서 선산(善山)에 있는 왜적들과 서로 버티고 있었습니다. 그러자 왜적들이 자못 두려워하여 그곳을 떠나 도망칠 기미가 현저히 있었는데, 피로가 쌓인 나머지 갑자기 심한 역질에 걸려 진중에서 목숨을 마쳤습니다. 장성(長城)이 한번 무너지자 삼군(三軍)이 눈물을 삼키고 있습니다. 하늘이 우리나라를 돕지 않는 것이 끝내 이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하였다.
김면은 의병장이 되었을 때부터 공의 통제에 따르기는 하였으나, 호령을 시행하는 과정에 간혹 어긋나는 일이 많았다. 공이 일찍이 김면은 성격이 원만하지 못하고 고집스럽다고 하면서 상당히 불쾌하게 여기는 뜻을 지니고 말과 안색에 여러 차례 나타냈다. 이에 사람들이 혹 두 사람이 서로 잘 지내지 못하는 것으로 의심하였다. 그런데 이때에 이르러서 김면의 죽음을 애도하면서 그의 공을 기리는 계문(啓聞)을 올린 것이 이처럼 격렬하고 간절하였다. 이에 사람들이 더욱더 공의 마음씀이 공평하고 어진 이를 좋아함이 마음속에서 우러나온 데 대해 탄복하였다.
전쟁의 재해를 치른 뒤끝에 기근마저 닥쳤으므로 도내의 떠도는 백성들이 도처에서 통곡하였는데, 공이 길을 갈 때면 길을 막아 에워쌌고 멈추어 있을 때면 뜰을 가득 메웠다. 공은 이르는 곳마다 반드시 소금과 쌀을 가지고 가서 나누어 주었다. 또 각 고을에 영을 내려 진제장(賑濟場)을 설치해 구휼하게 하였는데, 식견이 있는 사람을 따로 정해 그 일을 관장하게 하면서 성심을 다하고 형식적으로 하지 않도록 하였다. 순찰하기 위해 도착하는 날에는 간혹 불시에 그 음식을 맛보기도 하였으며, 병이 심하게 든 자의 경우에는 약을 조제해 먹여 살리기도 하였다. 진휼하는 정사를 한결같이 지성으로 하였으므로 그 일을 맡아서 하는 사람들이 감히 게을리하지 못하였다.
관문(關文)이나 통첩(通牒) 등에 대해서는 비록 소소한 것이더라도 반드시 손수 짓느라 간혹 깊은 밤이 되어서야 잠들기도 하였으므로, 피로가 쌓이고 소갈증이 들어 장차 큰 병이 될 상황이었다. 어떤 친한 벗이 자질구레한 일까지 수고한다고 말하자, 공은 한숨을 쉬면서 한참 있다가 말하기를, “조정 관리들이 안정되지 못하고 인심이 이반됨으로 인해 섬 오랑캐의 화를 초래하였으니, 우리들이 만번을 죽더라도 죄를 갚을 길이 없다. 그런데 어찌 감히 번거로이 수고하는 것을 꺼리겠는가. 그리고 큰일도 제대로 다스리지 못하면서 작은 일이라고 소홀히 한다면, 어찌 내 마음이 편하겠는가.” 하였다.
공은 중국 군사가 많이 들어왔다는 소식을 듣고 말하기를, “우리나라가 대대로 충정(忠貞)을 독실하게 행하여 지성으로 대국을 섬겼는데, 지금에 와서야 그 보람을 거두게 되었다. 중국 군사가 밀려 내려와서 왜적을 압박한다면 섬멸을 기대할 수가 있으니, 백성들에게 다행한 일이다. 다만 내년에 파종할 종자를 미리 조처하지 않는다면 왜적이 물러가더라도 백성들이 살아날 수 없을 것이다.” 하였다. 그러고는 전후로 곡식을 이송하기를 계청한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으나, 그 문서가 중간에서 지체되어 전달되지 못하거나 혹은 밖에서 가로막혀 보고되지 않았다. 공은 나라를 근심하고 백성을 근심하느라 온 마음을 다 쓰면서 밤새도록 잠을 이루지 못하였으므로 수염과 눈썹이 모두 하얗게 세어 버렸다.
계사년(1593, 선조26) 정월 초하루에 본 고을 수령이 휘하의 군사와 종사관(從事官) 등 여러 사람들과 함께 들어와 뵙자, 공은 서글픈 모습으로 눈물을 흘리면서 말하기를, “해가 바뀌었는데도 왜적들은 아직도 나라 안에 가득하고 서관(西關)은 멀기만 하여 소식을 전할 수 없다. 그런데 아직 죽지 못한 외로운 신하가 또다시 새봄을 맞이하였으니, 장차 무슨 얼굴로 임금을 뵙겠는가.” 하였다. 그러고는 수령에게 세찬(歲饌)을 올리지 말라고 경계시켰다.
공이 당초에 여러 차례 편비(褊裨)를 보내 중국군의 소식을 알아보게 하였으나, 모두 길에 떠도는 말만 듣고 중간에서 돌아오곤 하였다. 이에 특별히 이로(李魯)를 서로(西路)로 보내 살펴보게 하면서 말하기를, “군사들은 지치고 군량은 다 떨어졌는데, 중국군이 또 나왔으니 오늘날의 형세가 참으로 위급하다. 농사철이 이미 다가와 씨 뿌릴 종자 역시 급하다. 한 나라의 존망이 그대의 이번 걸음에 달려 있다.” 하고, 편지와 통첩을 써서 체찰사(體察使)에게 보냈는데, 이로가 중도에서 아직은 중국 군사가 없다고 급히 보고하였다. 그러자 공은 곧바로 각 고을에 영을 전해 우선은 중국군을 지원하는 일을 늦추게 함으로써 백성들이 동요하지 않았다. 또 군교(軍校)를 보내 급히 장계하기를,
“왜적은, 아군이 평양(平壤)을 수복하였다는 소식을 들은 뒤로 벌과 개미 떼처럼 한곳에 모여 있던 것들이 모두 도망쳐서 돌아갈 뜻을 품고 있다가 중국군이 오래도록 머물러 있고 진격하지 않자, 왜적들이 다시 기운이 났습니다. 문경(聞慶), 함창(咸昌), 상주(尙州)에 머물러 있는 왜적들은 멋대로 분탕질하기를 변란의 초기보다도 더 심하게 하고 있습니다. 전라도의 수군(水軍)이 패전한 뒤로는 웅천(熊川), 김해(金海), 창원(昌原)에 있는 왜적들도 다시 창궐하는 조짐이 있는데, 각 고을의 군량이 이미 고갈되었습니다. 곽재우의 군사 역시 굶주림으로 인해 다 흩어져서 장차 군사 없는 장수가 되게 생겼습니다. 그리고 주사(舟師)와 곁꾼(格軍)도 식량을 계속 대주지 못하므로 형세가 장차 저절로 무너질 형편이며, 병사(兵使)가 거느린 장사(將士)들도 오래 지탱할 수 없는 형편입니다. 이에 토붕와해(土崩瓦解)될 날이 코앞에 닥쳤으니, 신이 비록 만번 죽더라도 무슨 보탬이 있겠습니까.
부자 백성들이 쌓아 둔 개인의 곡식은 작년부터 다 끌어 모았는데, 처음에는 상을 줄 것이라 여겨 바치려는 자가 꽤 있었습니다. 그러나 상을 오래도록 내리지 않으므로 백성들이 믿지 않아 곡식을 바치라는 영을 전후에 걸쳐서 여러 번 내렸는데도 한 사람도 응하는 자가 없습니다. 이것이 비록 재물과 곡식이 바닥났기 때문이기는 하지만, 또한 국법이 백성들에게 믿음을 주지 못한 데에서 말미암은 것이기도 합니다.
군졸들은 여러 해 동안 비바람에 노출되어 있는데, 이들은 모두 무수한 전투 끝에 살아남은 자들입니다. 그러니 비록 군공(軍功)이 없더라도 마땅히 그 노고를 가엾게 여겨서 보살펴 주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하물며 힘써 싸워 공을 세운 자에 대해서야 더 말할 나위가 있겠습니까. 신은 이들에게 보답할 만한 물품이 없고 단지 조정에서 내리는 상을 가지고 격려하고 권장하는 소지로 삼을 뿐이므로 감히 그들의 공로를 덮어 두지 못하고 전후로 계속 계문하였던 것이니, 불경스럽기 그지없습니다. 하지만 신이 어찌 감히 다른 사람의 공을 훔치고 은혜를 팔아서 군사들에게 환심을 얻으려 그렇게 한 것이겠습니까. 대체로 민심은 이미 떠났고 국가의 형세는 이미 글러졌으므로, 이런 방법이 아니고서는 끝내 군사들의 마음을 고무시키고 인심을 모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지난해에 군사를 일으킨 뒤로 조정에서는 다행히도 신이 못났다고 하여 신의 올린 말까지 폐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리하여 의병을 일으켜 공을 세운 사람에게 두루 은상(恩賞)을 내렸기 때문에 사람마다 분발하여 일어나려는 마음이 있었으니, 신이 지금까지 죽지 않고 가까스로 한 모퉁이나마 보전하고 있는 것은 모두가 다 조정의 은혜입니다. 다만 급보(急報)가 끊임없이 왕래하고 군사 문서가 적체된 것으로 인해 해당 관아의 하리(下吏)를 미처 잘 살펴보지 못하였습니다. 이에 공이 작은데도 먼저 녹공(錄功)되거나 공이 큰데도 녹공에 빠진 경우가 있습니다. 심지어는 정병(正兵)으로서 왜적을 하나도 베지 못하였는데도 판관(判官)에 제수되는가 하면, 수문장(守門將)으로서 한번 힘써 싸웠다는 이유로 목사(牧使)로 뛰어오른 경우도 있습니다. 그리고 사노(私奴)가 왜놈 중 하나를 목베었다는 이유로 그 주인이 3품의 정직(正職)에 오르기도 하고, 장사(壯士)가 수십 명의 왜적을 베었는데도 지금까지 한 등급을 올려 주는 상도 받지 못한 경우도 있습니다. 그 밖의 온당하지 못한 사례를 낱낱이 들어 말하기조차 어렵습니다.
이 때문에 뜻있는 선비들은 답답해하고 있고, 장졸(將卒)들은 맥이 풀려 있으면서 모두들 말하기를, ‘우리들은 여러 해 동안 창을 메고서 죽음을 무릅쓰고 피 튀기는 전투를 하였는데도 녹공되지 않으니, 다시 무엇을 하겠는가.’ 하고 있습니다. 군사들의 마음이 이러하므로 장수 된 자가 비록 날마다 전투를 독려해도 전혀 명령을 따르지 않고 도망자가 줄을 잇는데, 이들을 불러모으려 하여도 계책이 없습니다. 예로부터 믿음을 잃고 상을 아끼면 비록 평상시라 하더라도 나라를 다스릴 수가 없는 법인데, 더구나 이렇게 난리가 나서 망하는 때이겠습니까. 믿는 바는 중국 군사로, 그들이 거세게 내려온다면 나라를 수복하는 것은 며칠 안 걸릴 것입니다만, 중도에서 머뭇거리고 있어 원근의 사람들이 실망하고 있습니다. 신과 같은 자는 조석 간에 죽을 사람이니 무슨 미련이 있겠습니까. 다만 조정이 언제쯤이나 편안하게 쉴 수 있을지 알 수 없으니, 생각이 이에 미치면 하늘을 향하여 호소하고 싶어도 방도가 없습니다.
본도의 기근은 예전에 없던 일로, 칼날 밑에 겨우 살아남은 백성이 얼마 안 됩니다. 그나마 요행히 죽지 않은 자들은 서로 모여서 도둑이 되어 남의 것을 빼앗아 먹고 있습니다. 이들을 비록 잡아 죽이고는 있습니다만, 또한 금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 데다가 곡식 종자가 하나도 없어서 왜적이 비록 물러간다 하더라도 농사를 지을 만한 형편이 전혀 못 되니, 도내 사람들의 목숨은 전쟁이 없더라도 반드시 저절로 다 죽고 말 것입니다. 호남 백성들의 형편은 꼴과 곡식을 실어 나르는 일에 시달리고는 있으나 창고의 곡식이 아직은 온전합니다. 만약 군량과 곡식 종자를 각각 수만 섬씩 옮겨 온다면, 신이 비록 직무를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기는 하지만, 굶주린 자를 구휼하고 왜적을 막으며, 농사도 폐하지 않게 함으로써 호남의 보루가 되는 지역을 완전하게 해 국가를 회복하는 기반이 되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신은 죽음이 있을 뿐, 다시는 손쓸 도리가 없습니다.
앞서 계하(啓下)하신 쌀과 콩 각 2000섬은 군사 1만 명의 열흘 양식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니 무슨 일을 이룰 수 있겠습니까. 조정에서 이미 중국 군사를 먹이기 위한 곡식 수만 섬을 본도에 운반하도록 허락하였기 때문에 그 쌀과 콩이 이미 운봉(雲峯)과 남원(南原) 등지에 도착하였습니다만, 중국군이 혹시 고개를 넘어오지 않을 것을 염려하여 쌓아 두고 보내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나 어느 땅인들 왕의 영토가 아니며 어느 백성인들 왕의 백성이 아니겠습니까. 설령 중국군이 넘어오지 않더라도 이것으로 굶주린 사람도 살리고 군량도 이어대는 것이 어찌 옳지 않겠습니까. 공명고신첩(空名告身帖), 허통첩(許通帖), 면천첩(免賤帖) 등의 조치도 속히 계청해서 시행하여 거꾸로 매달린 듯한 위급함을 구제한다면, 만분의 일이나마 보존할 길이 있을 듯합니다.……”
하였다. 이 장계가 3월 4일에 마지막으로 올린 장계였다.
이로(李魯)가 직산(稷山)에 이르러서 체찰사 유성룡이 임진(臨津)에 머무르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으나, 길이 막혀서 가지 못하고는 다른 사람을 통해 공의 글을 보냈는데, 체찰사가 공이 보낸 글과 첩문을 보고는 즉시 계사(啓辭)를 만들어 계청하니, 상께서 가엾게 여겨 특별히 전라 감사에게 명해 2만 섬을 제급(題給)하게 하였다. 그러자 공은 종사관(從事官)을 나누어 보내 수로와 육로로 운반해 온 다음 각 고을에 나누어 주어 제때에 씨를 뿌릴 수 있게 하였다.
공이 진양에 도착하니 굶어 죽은 시체가 즐비하였으며, 봉두난발을 한 사람들이 수백 명씩 무리를 지어 길가에서 맞이하며 울기도 하고 빌기도 하면서 공을 부모라고 불렀다. 공은 목사 서예원(徐禮元)에게 명하여 구휼하는 일을 맡아 주관하게 하고 죽을 쑤고 약을 달이면서 몸소 그들을 구호하였다. 그리고 판관 성수경(成守璟)에게는 군기(軍器)를 맡아 주관하게 하고는 성을 돌아보고 군대를 검열하면서 반드시 직접 단속하였다.
이때 역질(疫疾)이 발생하여 곳곳에 만연하였는데, 공에게 구휼해 주기를 바라는 백성들이 모두 성 안으로 몰려들어 울부짖고 신음하는 소리가 차마 들을 수 없을 정도로 참혹하였다. 공은 측은한 마음에 눈물을 흘리고 밥을 먹다가 숟가락을 놓으니,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식사를 하지 않아 병이 나면 국사(國事)는 어찌합니까?” 하자, 공은 말하기를, “어찌 다른 생각이 있겠는가. 저절로 밥이 목구멍에 넘어가지 않는다.” 하였다. 공은 날마다 어김없이 문루(門樓)에 나가 앉아 있었는데, 막하의 여러 사람들이 모두 간하기를, “시운의 기운이 어긋나 역질이 만연합니다. 깊은 방 안에 계시더라도 호령을 내릴 수 있으니, 밖으로 나와 앉아 계시지 마십시오.” 하니, 공은 거절하며 말하기를, “죽고 사는 것은 운명이다. 어찌 피하겠는가.” 하였다.
공은 명을 받은 뒤로 왜적을 쓸어내어 혼탁한 기운을 맑게 하지 못해 나라의 은혜를 저버리게 될까 두려운 나머지 밤낮 없이 근심하고 수고한 탓에 심열(心熱)이 매우 심했다. 이때에 이르러 오장육부에 병이 들고 감기까지 겹친 가운데 역질이 그 틈을 타고 파고들었다. 그리하여 마침내 4월 19일에 두통(頭痛)이 생겨 점차 위독한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어떤 늙은 의원이 와서 진찰해 보고는 말하기를, “이 병은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습니다. 목숨은 시운(時運)에 관계되는 것으로, 운명이니 어쩌겠습니까.” 하였다. 박성(朴惺)과 이로(李魯)가 곁에 있다가 약을 드실 것을 청하니, 공은 물리치면서 말하기를, “나는 약을 마시고 살아날 사람이 아니니, 그대들은 그만두라.” 하였다. 그때 아들 역(湙)도 역질에 걸려 옆방에서 앓고 있었는데, 아들의 병에 대해서는 한번도 물어보지 않고 오직 항상 박성과 이로 두 사람에게 이르기를, “중국군이 머지않아 경내에 들어올 것인데, 어떻게 먹일 것인가? 그대들은 이 일에 대해 부디 노력하라.” 하였다. 목사 오운(吳澐)이 찾아와 문병하자, 그와 함께 말하기를, “한번 병이 들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운명인 걸 어쩌겠습니까. 다만 뜻을 이루지도 못하고 먼저 죽게 된 것이 한스럽습니다.” 하면서, 비록 혼미하여 정신이 없는 상태에서도 잠꼬대처럼 당부하는 말이 모두 나라를 걱정하는 것뿐이었다. 측실 부인이 사위의 집에 와 머물러 있었는데, 마침 거리가 서로 멀지 않아 여종을 보내 문병을 하자, 공은 물리치고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달 29일에 공관(公館)에서 세상을 떠났다. 박성, 이로 등 제공이 함께 곡하고 염하는 것을 주관하여 지리산(智異山) 기슭에 임시로 매장하고는 서로 목놓아 통곡하고 돌아왔다. 성 안팎에서 살려 주기를 바라며 떠돌던 사민(士民)들이 서로 부축하고 달려와서 가슴을 치고 발을 구르며 목이 메도록 통곡하여 소리조차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그러고는 사방으로 흩어져 떠났는데, 마치 갈 곳조차 모르는 사람처럼 말하기를, “하늘은 어찌 그리도 무심하여 우리 부모를 빼앗아 갔는가. 모두 다 끝나 버렸으니 우리 목숨도 다했다.” 하였다. 부음이 전해지자 원근 사람들이 모두 놀라 통곡하기를 마치 친족의 초상이라도 당한 것처럼 하였으며, 길을 가는 나그네들조차도 모두 침통한 얼굴로 서로 조상(弔喪)하면서 말하기를, “충신이 떠나고 열사가 죽었으니, 나라는 누구를 의지하고 절의는 어디에 의탁하겠는가.” 하였다.
공이 죽은 지 겨우 두 달 만에 진주성이 함락당하였고, 조금 완전하던 낙동강 오른쪽 지역의 고을들도 모두 참화를 당하여 한 도의 요충지가 되던 지역이 모두 왜적의 소굴이 되었다. 그러자 식자들이 길게 탄식하면서 말하기를, “하늘이 만약 공을 조금만 늦게 데려갔더라면 일이 어찌 이 지경에 이르렀겠는가.” 하였다. 6월 초에 역(湙)도 세상을 떠났다.
공의 맏아들 집(潗)이 샛길을 통해 남쪽으로 와 산중에서 시묘살이를 하였다. 공의 묘소가 여러 차례 적의 기병(奇兵)에 의해 발각되었으나 끝내 침범을 당하지 않았으니, 사람들이 말하기를, “하늘이 도와서 그런 것이지, 인력으로 그런 것이 아니다.” 하였다. 이해 11월에 비로소 관을 받들고 고향으로 돌아왔는데, 지나는 고을마다 사민(士民)들이 비록 극심한 난리를 당한 뒤끝이었지만 모두 지성으로 슬퍼하고 뛰어다니며 도와주었다. 12월 경신일에 안동부(安東府) 북쪽에 있는 가수천(加壽川)의 감좌 오향(坎坐午向 남향) 언덕에 장사하였다.
공의 자질은 빼어나서 영특하고 기품은 강하고 방정하였으며, 기질은 곧으면서 꿋꿋하고 재주는 민첩하면서 호탕하였으며, 기국(器局)은 정직하면서 성실하고 식견은 고금에 뛰어났다. 어려서부터 각오가 남달라 취향이 범상하지 않았으며, 장성해서는 더욱더 강개하여 좋은 말을 들으면 힘써 행하였다. 몸가짐은 반드시 효제(孝悌)를 근본으로 삼았고, 행하는 준칙에 있어서는 반드시 충서(忠恕)를 위주로 하였다. 다른 사람의 착한 행실을 들으면 이를 칭찬하면서 흠모하였고, 다른 사람의 악함을 들으면 마치 자신에게 물들 것처럼 여겨 멀리하였다.
스승의 문하에 들어가게 되어서는 진심과 성의로 복종하여 존경하고 믿으면서 모범으로 삼았다. 이에 학문에 본말(本末)이 있음을 알아서 취하고 버리는 것이 이미 정해져 있었으며, 비록 한가하여 무엇이든 거리낌 없이 할 수 있는 때에도 감히 긴장을 풀고서 방종하지 않았다. 일찍이 말하기를, “내가 평소에 얻은 한마디 말은, ‘나의 허물을 공격하는 자는 나의 스승이고, 나의 아름다움을 말하는 자는 나를 해치는 자이다.〔攻吾過者 是吾師 談吾美者 是吾賊〕’라는 것이다.” 하였는데, 이 열네 글자로써 항상 스스로 경계하였다. 또 ‘관홍(寬弘)’ 두 글자를 벗에게 크게 써 달라고 하여 이를 벽에 붙여두고 보면서 반성하여, 옛사람이 좋은 말을 잊지 않기 위해 의복의 큰 띠에 적어두었던 의미를 부쳤다.
책이라는 책은 읽지 않은 것이 없었으나 무엇보다 퇴계 이 선생이 편집한 《주자서절요(朱子書節要)》를 좋아하여 깊이 이해하고 가슴에 새겨 두어 몸가짐의 모범으로 삼았는데, 마음을 가라앉혀 음미하여 침식까지 잊을 정도였다. 첫닭이 울면 일어나서 반드시 한두 편을 뽑아 왼 뒤에야 비로소 등불을 밝히고 세수하고 머리를 빗은 다음 종일토록 단정하게 앉아 있었다. 강독을 할 때에는 마치 선현을 직접 대한 듯이 공경한 모습을 취했고, 그 뜻을 정밀히 생각하고 분명히 가려내어 조금도 허투루 지나치는 일이 없었다. 《근사록(近思錄)》이나 《심경부주(心經附註)》 같은 책도 모두 애독하면서 손에서 놓지 않았다.
제생(諸生)들 가운데 배움을 청하는 자가 있으면 그 뜻을 분석하여 깨우쳐 주되, 성심 성의를 다하여 반드시 처음부터 끝까지 파헤쳤다. 문장(文章)을 지음에 있어서는 분명하고 우아하여 사람을 놀라게 할 만큼 험하고 기괴한 말이 애당초 없었으나, 그 평이하고 명확함은 저절로 다른 사람이 미칠 수가 없었다. 모든 저술을 함에 있어서는 붓을 들면 곧바로 문장이 이루어졌다. 시율(詩律) 또한 담박하면서도 묘리를 얻었는데, 특히 오언고시(五言古詩)를 잘 지어 도연명(陶淵明)과 소동파(蘇東坡)의 시체(詩體)를 깊이 터득하였다.
성품은 지극히 효성스러워 미처 선부인(先夫人)을 봉양하지 못한 것을 평생의 통한으로 여겼으며, 판서공(判書公)을 봉양함에 있어서는 멀리 글을 배우러 가거나 벼슬살이를 하러 가는 때를 제외하고는 판서공 곁을 떠난 적이 없었다. 봉양을 함에 있어서는 반드시 일정한 법이 없었고 뜻을 받듦에 있어서는 반드시 어김이 없기를 추구하였으며, 항상 부모를 예로써 섬겨야 한다는 선현의 가르침에 미진한 점이 있을까 두려워하였다. 조정 반열에 나아감에 미쳐서는 대부분 시종신으로 있었으므로 고을 수령으로 나가 판서공을 봉양하지 못하는 것을 한스러워하였다. 그러자 판서공이 이르기를, “네가 충성으로 임금을 섬기는 것이 나의 뜻이다. 그러니 너는 나를 봉양하는 것을 가지고 염려하지 말라.” 하였다.
형제간에 우애가 돈독하여 한집안에서 화기 애애하게 지냈는데, 가족이 공에 대해 칭찬하는 말에 어느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이 없었다. 가산을 일구기를 일삼지 않아 집에 양식이 자주 떨어져 판서공이 별도로 종을 떼어서 주자, 공이 굳이 사양하고 여러 형제들 중에 가난한 사람에게 양보하였다.
큰누이가 남편을 잃고 슬픔이 극도에 이르러 그 뒤를 따라 죽자, 고아가 된 두 어린 자식이 외가에 의지해 살았다. 공은 가르치고 기르기를 모두 지극하게 하여 한결같이 자기 자식처럼 하였다. 누이의 가업을 노비에게 맡겼다가 수습할 수 없는 지경이 되자, 역시 그 집의 가산을 잘 관리해 주어 살림이 망하지 않도록 하였다. 초상을 치르는 날에 친구들이 부의한 쌀과 베 등을 한 창고에 보관하였다가 장사 치르고 제사 지내며 비석을 세우는 등의 비용으로만 쓰고 털끝만큼도 사적으로 쓰지 못하게 하였다. 또 죽은 형과 누이의 두 묘소에 가난하여 표석을 세울 수 없을까 염려하여 쓰고 남은 돈을 모두 그 용도로 넘겨주었다.
동기간이 따로 나뉘어 사는 것을 항상 한탄하였는데, 일찍이 〈환산사조(桓山四鳥)〉 시를 지어서 자신의 심경을 달래기도 하였다. 큰형님, 둘째 형님, 셋째 형님 그리고 막내아우가 서로 뒤를 이어 모두 세상을 떠나자, 비통한 마음이 점점 심해졌는데도 장례를 시종여일하게 돌보아 주었다.
중부(仲父)께서 종기를 심하게 앓아 몹시 위독하였는데, 곁에서 간병할 만한 자제가 없었다. 이에 공은 약을 알아보고 의원을 맞이해 오는 일에 심력을 다하여 몇 달 동안의 무더위에도 조금도 게을리한 적이 없었다. 종제(從弟)가 일찍 아버지를 여의어 의탁할 곳이 없게 되자 각별히 불쌍히 여겨 돌보아 줌으로써 생업을 잃지 않게 하였다. 누이동생 하나가 가난하여 부릴 종이 없게 되자 자기 집의 여종 셋을 그에게 떼어 주었고, 서숙(庶叔)이 곤궁하여 살아갈 수가 없게 되자 또다시 여종 둘을 주었다. 이 때문에 나누어 받은 종들이 거의 다 없어졌는데도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개의치 않았다.
내외의 집안 친족들 가운데 스스로 먹고살 수 없는 사람이 있을 경우에는 모두 다 보살펴 주었다. 어쩌다가 얻은 재물이 있으면 반드시 모두 다 나누어 주되, 반드시 가난한 사람을 우선으로 하면서 온 정성을 다하였고, 또한 동향 마을사람들에게까지 나누어 주었으므로 모두들 감격하고 의지하였다.
초상을 치름에 있어서는 슬픔을 다하였고 제사를 받듦에 있어서는 정성을 다하였다. 일찍이 이르기를, “상례(喪禮)는 사람의 도리에 있어서 큰 예법이다. 사람의 자식 된 자로서는 반드시 성실하고 반드시 미덥게 해야 할 부분이다. 우리 동방에서는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 야은(冶隱 길재(吉再)) 두 선생께서 시묘살이를 하면서 상을 마친 이후 사람들이 모두 그것을 보고 감동하였으며, 문경공(文敬公 김굉필(金宏弼)), 문헌공(文獻公 정여창(鄭汝昌)) 등 여러 선생들께서도 모두 따라 행하였다. 이것이 비록 옛 예법은 아니라 하더라도 상주(喪主)가 부모의 체백(體魄)이 안장된 곳을 차마 훌쩍 떠나지 못하는 것은 실로 지극한 정에서 나온 것이다. 실당(室堂)으로 반혼(返魂)하는 것이 비록 예경(禮經)에 실려 있는 바른 예법이기는 하나, 중인(中人) 이하 사람은 날짜가 오래되어도 애통해하는 정이 해이해지지 않을 자가 드물며, 심지어는 내외간이 함께 거처하기도 하고 집안일을 돌보기도 한다. 이와 같이 하면서도 오히려 ‘시묘살이하는 것은 예가 아니고 반혼하는 것이 예경과 합치된다.’라고 말하니, 상제(喪制)의 기강이 문란해지고 세상의 도의가 글러진 것이 어찌 괴이할 것이 있겠는가.” 하였다.
제사를 지낼 적에는 반드시 목욕재계하고 제수 물품을 직접 살펴 정결하게 차리도록 하였다. 흉측하고 더러운 일에 대해서 언급하지 않았으며, 대청을 쓸고 닦으며 영위(靈位)를 마련하고 제기(祭器)를 진설함에 있어서는 마치 조상들이 와서 앞에 계신 듯이 하였다. 혹 먼 지방에서 벼슬살이를 하고 있을 경우에도 반드시 영위를 마련하고 자신이 머물고 있는 곳에서 제사를 지냈다.
일찍이 봉선(奉先)에 관한 여러 의식 및 길흉경조(吉凶慶弔)에 관한 여러 규례를 저술하였는데, 한결같이 주자(朱子)의 예법을 근본으로 삼고 선유(先儒)들의 의론을 참고하여, 예의와 습속(習俗)이 서로 맞고 정서와 형식이 모두 갖추어지게 해 일상적인 법으로 정하였다. 그런 다음 문중의 자제들로 하여금 준수해서 행하도록 하였는데, 오래 지나도 폐단이 생기지 않을 만하였다.
매번 정초와 동지, 초하루와 보름 및 집안 어른의 생신날에는 자제들을 당 위에 모아 순서대로 서서 어른을 배알하게 하였으며, 노비들은 정초에 차례대로 서서 절하게 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온 집안사람들이 모두 어른을 섬기고 읍양(揖讓)하는 예를 알게 되었다. 집안을 다스림에 법도가 있어 자녀들은 은혜로써 기르고 의리로써 가르쳤으며, 노비들은 관대함으로써 다스리고 근면과 공순함을 권면하였다. 이에 내외간에 구별이 있어 집안이 정숙하였다. 자제들이 잘못을 저질렀을 경우에는 준엄하게 꾸짖은 적이 없고 순순하게 타일러서 그들로 하여금 스스로 허물을 알아서 고치도록 하였다. 일찍이 자제들을 훈계하기를, “학문을 하는 자는 마땅히 심학(心學)을 우선으로 해야 한다. 만약 과거 공부만을 힘써서 한다면, 비록 과거에 급제하더라도 그 본심은 이미 먼저 이욕(利欲)에 빠져 있을 것이니, 어찌 두려울 일이 아니겠느냐.” 하였다. 어느 날 검을 나누어 주면서 이르기를, “너희들은 내가 검을 나누어 주는 뜻을 알겠느냐? 부디 이 검으로 의(義)와 이(利)의 연결 부분을 잘라 취하고 버릴 것을 구별하기 바란다.” 하였다.
집안에 있을 적에는 반드시 관복(冠服)을 갖추어 입고 오직 책을 보거나 자제들을 가르치거나 손님을 접대하는 것을 일삼았는데, 침착하고 단아하여 일찍이 다른 사람과 다른 점이 있다는 것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러나 조정에 벼슬하여 뒤엉켜 복잡한 일을 당했을 때는 예기가 발휘되고 야무진 기개가 더욱 굳어져 의리로써 결단하고 굽히는 일이 없었다. 그리하여 비록 저 옛날 맹분(孟賁)이나 하육(夏育) 같은 장사라도 감히 그 기개를 꺾지 못할 정도였으나, 순수한 성심만은 부드럽기 그지없었다.
만년에 이르러서는 도에 대한 조예가 더욱 깊어져 그 기상이 공평하고 따사로워서 젊은 날의 맹렬한 모습이 없었으나 사람들이 쳐다보면 저절로 공경하는 마음이 우러나서 감히 함부로 대하지 못하였다. 공의 말에 이르기를, “사람이 일을 처리할 때는 오직 마음에 부끄럽지 않게 해야 하니, 어찌 남의 말을 순종해서야 되겠는가. 나는 평소에 정도로써 일을 행하다가 비록 죽더라도 후회하지 않겠다고 늘 생각하였으나 오히려 외물(外物)에 마음이 흔들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것은 나의 강단이 부족하여 사심에 현혹된 것이다.” 하였고, 문인을 가르칠 때는 이르기를, “배우는 자가 우려할 일은 오직 뜻을 세우는 것이 진실하지 못한 데 있는 것으로, 재주가 혹 부족하더라도 그것은 우려할 일이 아니다. 재주가 없더라도 군자가 되기에 무방하고 재주가 있더라도 그만 소인이 되고 마는 것은 단지 학문을 함에 있어서 뜻을 세운 것이 어떠했느냐에 달려 있을 뿐이다.” 하였으며, 또 이르기를, “덕성을 함양하고 사욕을 이겨내는 공부에 힘을 쏟지 못하고 이름만 학자라고 하는 것이 예로부터 내려오는 공통된 걱정거리다. 이것은 곡식의 싹을 기른다고 말하면서 북돋아 주지 않는 것과 무엇이 다르며, 잡초를 제거한다고 하면서 김매기를 일삼지 않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하였고, 또 이르기를, “자신을 속이지 말라는 ‘무자기(毋自欺)’ 세 글자는 모름지기 종신토록 명심해야 하는 것이다. 선을 행하고 악을 제거함에 있어서 조금이라도 진실되지 않은 점이 있다면 이는 모두 자기를 속이는 것이다.” 하였다. 문인 가운데 어떤 사람이 어정어정 걸어 들어와 공을 뵌 자가 있었는데, 그를 보고 꾸짖기를, “옛말에 ‘첫째 발걸음을 떼어놓을 때는 마음이 첫째 발걸음에 있어야 하고, 둘째 발걸음을 떼어놓을 때는 마음이 둘째 발걸음에 있어야 한다.’ 하였으니, 이를 알지 않아서는 안 된다.” 하였다.
일찍이 이르기를, “고향 지방은 부형과 종족들이 살고 계시는 곳이니 이곳에 사는 사람들을 공경하지 않아서는 안 된다.” 하였으며, 향중(鄕中)에서 집강(執綱)을 만났을 경우에는 그가 아무리 나이가 어리더라도 반드시 예우하였다.
일찍이 어떤 재상 집의 장례에 갔었는데, 온 조정의 경상(卿相)들이 많이 모여 있었다. 방상(方相)이 굿거리를 하면서 온갖 모양새를 짓자, 그 자리에 모인 사람들이 모두 쳐다보면서 손뼉을 치는데 공만은 엄숙한 얼굴로 짐짓 못 본 체하니, 재상들이 부끄러워 굴복하였다. 또 일찍이 아는 벗의 성복(成服) 모임에 간 적이 있었다. 빈객이 매우 많았고 그중에 조정 관원이 태반이었는데, 맨 뒤에 문지기가 김 정언(金正言)이 왔다고 알리자,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바삐 자리를 피하였다. 그러자 어떤 사람이 “한 언관(言官)이 오는데 어찌하여 이렇게들 좌불안석인가?” 하니, 모두들 말하기를, “김 아무개는 담력이 세고 입이 바르니 무심코 행동하다가 그에게 흠을 잡히고 싶지 않다.” 하였다. 공이 들어와서 조문을 마치고 난 뒤에 온화한 태도로 말을 건네고 나가자, 모두 말하기를, “따사롭고 사근사근하기가 이럴 줄은 미처 몰랐다.” 하였다.
일찍이 정고(呈告)하고 고향으로 내려가다가 길가에서 말에게 꼴을 먹이고 있던 참에 밭고랑에 앉아 있는 자를 보았는데, 어떤 사람이, 저 사람은 효자라고 말하였다. 선생은 즉시 그를 오라고 청하여 만나 보니 곧 시골 마을의 미천한 사람이었으나, 마루 위에 앉도록 하고 상빈(上賓)의 예의로 대하였다. 이상하게 여겨 그 이유를 물어보는 사람에게 대답하기를, “선하지 못한 사람은 경상(卿相)에 오른 귀인이라 할지라도 사실 보잘것이 없으나, 선행이 있다면 매우 미천하더라도 어찌 존경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관북(關北) 지방을 순시할 적에 많은 호인(胡人)들에게 잔치를 베풀어 주었는데, 한 호인의 행동거지가 다른 사람들과는 다른 것을 보고는 물어보니, 효자였다. 즉시 술과 음식을 넉넉하게 주고 특별히 상을 주자, 많은 호인들이 모여들어 보고서는 모두 고무되었다.
어떤 고을 수령이 일찍이 명절에 토산물을 잔뜩 실어 서울로 올려보내면서 조그만 책자에 명사(名士)들의 집을 두루 기록하였는데, 공의 이름만은 없었다. 어떤 사람이 그 까닭을 묻자, 대답하기를, “우리 태수께서 나를 보낼 때 김 아무개가 알지 못하게 하라고 경계시켰다.” 하였다.
사류(士類)에게 빌붙으면서 공에게 잘 대해 주는 어떤 사람이 있었는데, 공 역시 그를 후하게 대해 준 지가 이미 여러 해가 되었다. 하루는 믿을 만한 벗이 그 사람은 길인(吉人)이 아니라고 말해 주자, 공은 깜짝 놀라면서 말하기를, “나는 그런 소문을 미처 듣지 못하였다.” 하고는, 드디어 그와 절교하였는데, 세 번이나 찾아왔는데도 만나 보지 않았다.
변무(辨誣)를 주청(奏請)하는 사신 행차에 대간의 신분으로 서장관(書狀官)이 되어 온 정성을 다 기울이고 갖은 수고를 다하여 비로소 선원(璿源)의 치욕을 씻었다. 이리하여 마침내 나라를 빛내는 경사를 열었으나, 나라 안에서는 그 사실을 아는 사람이 없었다. 그런데도 공은 그 공을 자랑하지 않았으며, 역사서에 전해지던 것도 병화(兵火)에 다 타버려 전해지지 않게 되었으니, 어찌 장래의 서글픈 일이 아니겠는가.
바다 바깥의 흉악한 오랑캐 나라에 사명을 받들고 갔을 적에는 그들에게 흠 잡힐 만한 빌미를 보인 일이 없어 품행이 평소부터 정해진 듯하였다. 그들이 부리는 온갖 흉악하고 교활한 작태가 변화무쌍하여 생사가 한순간에 달려 있었으나 정도를 지켜 흔들리지 않으면서 정신과 기운을 더욱 가다듬어 늠름하여 범할 수 없는 위엄이 말과 안색에 항상 깃들어 있었다. 사리는 반드시 털끝만 한 것이라도 자세히 살피고, 의리는 반드시 어렵고 위태로운 상황에서도 따짐으로써 반드시 우리나라의 위엄이 더욱 존중되어 감히 함부로 하지 못하게 하려고 하였다.
상사(上使)와 서장관(書狀官)이 간혹 위엄을 조금 줄이라고 은근히 풍자했는데도 공은 의연하게 움직이지 않았다. 그리하여 마침내 섬 오랑캐들이 감동하여 좋아하고 존경하며 탄복하게 함으로써 지금까지도 왜인들이 ‘김 아무개’라고 칭송하여, 문충공(文忠公 정몽주(鄭夢周)) 정 선생(鄭先生)과 나란히 기리고 있다.
임진년에 왜구가 해주(海州)에 들어왔을 적에는 부용당(芙蓉堂)에 걸려 있는 공의 제영(題詠)을 보고는 나머지 현판은 다 철거하면서도 공의 시만은 남겨 두고 비단으로 싸 두었다. 그리하여 관아와 민가는 다 불탔지만 부용당만은 무사하였다.
우리 동방에 옛날에 없던 변란이 통신사의 행차가 돌아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갑자기 일어났다. 공이 당초에 불안을 진정시키기 위해 한 말이 마침내 공을 화로 몰아넣는 빌미가 되어 사태가 장차 예측할 수 없게 되었을 때는 조용히 심리(審理)를 받으러 나갔고 일찍이 스스로 해명한 적이 없었다. 그리고 성상께서 그 정상을 통촉하여 위엄을 거두었을 적에는 조금도 기뻐하는 빛은 없고 그저 나라를 위하여 걱정하는 마음만 간절하였다.
한 나라가 보존되느냐 망하느냐 하는 때를 당하여서는 적을 초유(招諭)하고 정벌하라는 명을 받았다. 이때는 인심이 이미 흩어지고 시사는 이미 글러져, 마치 세찬 물결이 휩쓸고 들어오는데도 둑을 막을 도리가 없는 그런 상황으로서 한때의 높은 명망을 지닌 자라 할지라도 창졸간에 허둥지둥하여 자신의 재주를 펴지 못하고, 한 지방의 수비 임무를 전담한 병사(兵使)까지도 모두 목을 움츠린 채 뒷걸음을 쳤다. 공은 경연(經筵)의 박식한 유신(儒臣)으로서 군사(軍事)에 대해서는 일찍이 들어본 적이 없는 데다가 도내에는 조용한 지방이 없고, 수하에는 하찮은 무기 하나 없었다. 이런 처지에서 오직 성심 성의로 사기를 고무시켜 한조각 진실한 마음을 사람들의 가슴속에 넣어 주었다. 말을 할 적에는 반드시 눈물을 흘리면서 말하였고, 글을 쓸 적에는 반드시 눈물을 섞어 가며 썼다. 이에 충성과 절의를 추구하는 자들이 기뻐서 달려 나왔을 뿐만 아니라, 무지하고 사나운 자들조차도 모두들 흔쾌히 나와서 동조하였으며, 도망쳤던 장수나 흩어졌던 병졸까지도 모두 분발하여 일어나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치려고 하였다.
공은 군사를 배치하고 시행하는 일이 항상 시의에 적합하였고, 상벌을 행하고 호령을 내리는 것이 백성들의 뜻을 크게 감복시켰으며, 좌우로 응대하는 것이 정연하기가 그지없었다. 그리하여 마침내 상처를 입은 뒤에 수습하고 불타 버린 가운데에서 생기를 불어넣어 낙동강 오른쪽 일대를 보전함으로써 당시의 거묵(莒墨)이 되게 하였고, 나라를 회복시킬 기반을 만들었다. 그런데 애석하게도 장성(長星 혜성(慧星))이 지레 떨어져서 큰 업적을 다 이루지 못하였다. 그러나 인륜의 기강을 부지시키고 한 지방을 버틸 수 있게 하였으니, 그 공은 싸움터에서 상처를 입으면서 싸운 경우와는 나란히 논할 수가 없는 것이다.
대체로 영남(嶺南)이 오랑캐 땅이 되지 않은 것이 비록 의사(義士)들이 함께 의병을 일으킨 공이라고는 하지만, 이들이 시종 공을 이룰 수 있었던 것은 실로 공의 완벽한 성의로 말미암은 것이다. 그리고 진주성이 당초에 함락당하지 않은 것은 비록 김시민이 분투한 공이기는 하지만, 그 싸움을 지휘하고 계책을 세워 호응하는 일들은 전적으로 공의 계책에서 나온 것이다. 살아 있을 적에는 온 도내 사람들이 장성(長城)처럼 의지하였고, 죽은 뒤에는 대소 사민(士民)들이 눈물을 흘리면서 서로 조문하였다.
공은 죽는 날에 임해서도 집안일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고 오직 국사에 대해서만 깊이 걱정하였다. 죽은 뒤에는 조야(朝野)가 다 한마음으로 칭찬하고 탄복하면서, “난리 이후의 진실한 신하로는 마땅히 공이 첫째로 꼽힐 것이다.” 하였다. 그러니 이름과 실제가 서로 감응하는 이치는 참으로 속일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식자(識者)들은 공에 대해 “나라가 순탄할 때나 험난할 때나 행동이 일치하였고 대절(大節)에 임해서도 그 기개를 꺾을 수가 없었다.”라고 말하는데, 이 말은 실로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에게 아부하여 하는 말이 아니다.
공은 일찍이 개탄하기를, “대장부가 이 세상에 태어나 대도(大道)에 대해 듣지 못하고 술 취하거나 꿈속과 같은 상태로 살다가 죽는다면 어찌 애석한 일이 아니겠는가. 나는 다행히 일찌감치 존경하고 받들어 모실 분을 만났는데, 학업을 끝마치지 못하고 명리(名利)의 굴레에 얽매여 그대로 늙어 버리고 말았다. 생각이 이에 미칠 적마다 두려움으로 땀이 흘러내린다.” 하였다. 공은 일찍이 외진 곳에 집을 짓고 당호(堂號)를 내걸고는 노년에 벼슬을 그만두고 물러나 살 곳으로 삼으려 하였다. 그리하여 조용한 곳에서 한가로이 지내며 학문에 전념함으로써 위로는 선사(先師)께서 남긴 학문을 계승하고, 아래로는 후생들이 공부하는 길을 열어 주려고 하였다. 이는 공의 평소의 뜻으로, 잠시도 이를 잊은 적이 없었다. 그런데 시사(時事)가 어렵고 군신(君臣)의 의리가 중대하므로 마지못해 조정에 나가 거취를 자유로이 하지 못하였다. 그러다가 마침내 대란(大亂)을 만나 근심과 노고로 인해 목숨을 잃었다. 그리하여 업적은 빛나게 드러났으나 소원은 이루지 못하였으니, 이것이 어찌 공의 유감이 아니겠으며, 사도(斯道)의 불행이 아니겠는가.
을사년(1605, 선조38)에 조정에서 선무 공신(宣武功臣)을 녹훈(錄勳)하였는데, 공은 원종(原從) 1등에 녹훈되어 가의대부(嘉義大夫) 이조 참판에 추증되었으며, 부모도 아울러 관작이 추봉(追封)되었다. 논하는 자들이, “공의 공훈과 충렬이 저와 같은데도 경인년(1590)과 갑진년(1604)에 모두 녹훈되지 못하였다.” 하면서, 모두들 이상하게 여겼다. 그러나 공의 도덕과 훈업은 그대로 있는 것이어서 우주에 머물러 영구히 전해질 것이니, 녹훈이 되었느냐 안 되었느냐가 공에게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고을 사람들이 임하현(臨河縣)의 서쪽 천전리(川前里)에 서원을 짓고 사당을 세워 봄가을로 향사(享祀)하였는데, 사당의 이름은 존현사(尊賢祠)이고 서원의 이름은 임천서원(臨川書院)이다.
공이 평소에 벼슬살이하면서 자리를 옮길 때 받은 직첩(職帖)이나 조정에서 논열(論列)하거나 간쟁(諫諍)한 글, 경연에서 국사를 논한 말, 집에 있으면서 한 언행(言行)과 저술한 시문(詩文) 등 후세에 전할 만한 것들은 모두 병화에 없어졌다. 단지 유고(遺稿) 몇 권과 《해사록(海槎錄)》 3편이 집에 보관되어 있는데, 이 또한 다 흩어진 속에서 주워 모은 것으로 백분의 일만 겨우 보존된 것이다. 이른바 《해사록》 3편은 일본에 사명(使命)을 받들고 갔을 때 지은 시문인데, 난리 중에 잃어버렸다가 3년 뒤에 어떤 사람이 우연히 여관집에서 보고 얻었으니, 이 역시 기이한 일이다.
공의 부인 안동 권씨(安東權氏)는 고려 때 태사(太師)를 지낸 권행(權幸)의 후손으로, 전력부위(展力副尉) 권덕황(權德凰)의 따님인데 정부인(貞夫人)에 추봉되었다. 아들은 셋으로, 장남 집(潗)은 익위사 세마(翊衛司洗馬)이고, 역(湙)과 굉(浤)은 종사랑(從仕郞)이다. 딸은 셋으로, 장녀는 장사랑(將仕郞) 홍수약(洪守約)에게 시집갔고, 차녀는 경주 부윤(慶州府尹) 권태일(權泰一)에게 시집갔고, 삼녀는 승문원 정자(承文院正字) 김영조(金榮祖)에게 시집갔다. 측실 소생 아들은 넷인데, 잠(潛)은 훈도(訓導)이고, 그 나머지는 심(深), 침(沈), 명(溟)이며, 딸은 둘로, 장녀는 이사첨(李士瞻)에게 시집갔고, 차녀는 정연종(鄭連宗)에게 시집갔다.
집은 아들 넷을 낳았는데, 시추(是樞)는 생원이고, 시권(是權)은 진사이고, 다음은 시강(是杠)과 시절(是梲)이며, 딸은 넷으로, 장녀는 홍문관 교리(弘文館校理) 오여벌(吳汝橃)에게 시집갔고, 차녀는 권지 승문원부정자(權知承文院副正字) 김연조(金延祖)에게 시집갔고, 삼녀는 권상충(權尙忠)에게 시집갔고, 사녀는 김석중(金錫重)에게 시집갔다. 역은 딸 하나를 낳았는데, 권태정(權泰精)에게 시집갔으며, 측실 아들은 시가(是榎)이다. 굉은 아들이 없어서 형의 아들 시절을 후사로 삼았으며, 딸은 둘로, 장녀는 생원 김응조(金應祖)에게 시집갔고, 차녀는 진사 신열도(申悅道)에게 시집갔다. 내외의 손(孫)과 증손(曾孫)은 모두 90여 명이다.
나 정구(鄭逑)는 공을 알고 지낸 지가 30년이었으나 공을 저세상으로 떠나보낸 지가 지금 또 25년이 흘렀다. 청수하고 엄정한 공의 의표(儀表)와 곧아서 변치 않는 공의 지조를 항상 접하고 있는 것만 같아서 공경하는 마음이 저절로 일어난다. 공의 아들 집(潗)과 공의 문인 최현(崔晛)이 함께 최현과 공의 조카 김용(金涌)이 지은 공의 행적을 각 한 통씩 가지고 나의 집으로 찾아와 말하기를, “묘지(墓誌)에 새길 글과 묘비(墓碑)에 새길 글을 장차 구하려 하는데, 아직까지 행장이 없습니다. 이 행적에서 대략 뽑아 지어 주십시오.” 하였다. 나는 사양해 보았으나 되지 않았다. 그런데 갑자기 병에 걸려 붓을 잡았다가 도로 멈춘 지가 또 3년이 지났다. 나는 죽을 때가 다 된 몸이라서 방치해 두고 채 살펴보지 못하고 있었는데, 더욱더 부지런히 찾아오고 더욱더 간절히 청하여, 300리나 되는 먼 길을 오간 것이 10여 차례나 되었다. 가서는 반드시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왔고, 와서는 곧 몇 달을 머물면서 돌아갈 줄을 잊어버려 어버이를 드러내고자 하는 정성이 신명(神明)과 통할 만하였으니, 마땅히 공의 자식답다고 칭할 만하다. 그러니 내가 비록 온갖 생각이 다 사라진 상태이지만, 어찌 감동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억지로나마 힘을 내 예전에 잡았던 붓에 다시 먹물을 적셔 최군과 김군 두 사람이 지은 글을 대충 고치고 윤색하여 행장을 짓고 후세에 훌륭한 말을 하는 군자를 기다린다.
만력(萬曆) 정사년(1617, 광해군9) 겨울 10월 경술일에 가선대부(嘉善大夫) 행 용양위 부호군(行龍驤衛副護軍) 정구는 행장을 짓다.


 

[주D-001]전패(殿牌) : 각 고을의 객사(客舍)에 ‘殿’ 자를 새겨서 세워 놓은 나무패이다. 임금을 상징하는 것으로, 정월 초하루, 동지, 임금의 탄일 등의 하례 의식이 있을 때 관원들이 거기에 배례(拜禮)를 행한다.
[주D-002]성현 …… 구절 : 주희(朱熹)가 그의 문인인 임용중(林用中)이 글을 배우다가 과거에 응시하기 위해 고향으로 돌아갈 때 그에게 지어 준 칠언절구 3수 가운데 일부이다. 《朱子大全 卷6 送林擇之還鄕赴選三首》
[주D-003]철면어사(鐵面御史) : 강직하고 사심이 없는 관원을 가리킨다. 송나라 조변(趙抃)이 전중시어사(殿中侍御史)로 있으면서 권력이 있고 임금의 신임을 받는 자들에 대해서도 거침없이 탄핵하여 서울 사람들이 철면어사라고 불렀다. 《宋史 卷316 趙抃列傳》
[주D-004]관교(官敎) : 4품 이상의 벼슬을 임명할 때 주는 사령장을 말한다.
[주D-005]종계(宗系)와 악명(惡名) : 명나라 법전인 《대명회전(大明會典)》에 조선의 태조 이성계(李成桂)의 아버지가 고려 말의 소인인 이인임(李仁任)이라고 잘못 기록된 것과 이성계가 고려의 네 왕을 시해하고 왕이 되었다고 잘못 기록된 것을 가리킨다.
[주D-006]장유(長孺)는 …… 합당하겠는가 : 중앙 조정에서 큰 역할을 수행하도록 해야지 고을 수령으로 보내면 안 된다는 뜻이다. 장유는 한 무제(漢武帝) 때 양리(良吏)였던 급암(汲黯)의 자이다. 급암이 동해 태수(東海太守)가 되었을 때 병이 있어서 밖에 나가지 않고 관아에 누워서 다스렸는데도 동해가 잘 다스려졌다. 그 뒤에 회양 지방에 도적 떼가 들끓어 무제가 특별히 그곳의 태수로 보냈는데, 그곳 역시 잘 다스려졌다. 《漢書 卷50 汲黯傳》
[주D-007]공도보(孔道輔)가 …… 파하였습니다 : 공도보는 송(宋)나라 사람으로 공자(孔子)의 45대손이다. 요나라는 거란을 가리키고 문선왕은 공자의 봉호이다. 인종(仁宗) 때 공도보가 거란에 사신으로 갔는데, 거란에서 그를 위해 연회를 베풀면서 배우로 하여금 공자에 관한 놀이를 하게 하니, 공도보가 버럭 화를 내며 자리를 박차고 나왔다. 거란 측에서 다시 자리로 나오게 하여 사과하기를 요구하자, 공도보는 정색하며 말하기를, “중국과 북조(北朝)가 좋은 관계를 맺어 예의로써 서로 대해 왔는데, 지금 배우들이 선성(先聖)을 모욕하는데도 금지시키지 않았으니, 이는 북조의 잘못이다. 내가 어찌 사과하겠는가.” 하니, 거란의 군신들이 아무 말도 못했다고 한다. 《宋史 卷297 孔道輔列傳》
[주D-008]제상(堤上)의 화 : 신라 눌지왕(訥祗王) 10년(426)에 삽라군 태수(歃羅郡太守)로 있던 박제상(朴堤上)이 일본에 거짓으로 투항하여 그곳에 30년 동안 볼모로 억류되어 있던 눌지왕의 아우 미사흔(未斯欣)을 비밀히 탈출시켜 신라로 돌려보낸 뒤 자신은 일본 국왕의 회유를 뿌리치고 참혹한 죽음을 당하였다. 《三國史記 卷45 朴堤上列傳》
[주D-009]송 고종(宋高宗)이 …… 하였습니다 : 담암(澹庵)은 송나라 호전(胡銓)의 호이다. 1138년 12월에 금나라 장통고(張通古)가 조유강남사(詔諭江南使)라는 이름으로 남송(南宋)의 행재소(行在所)가 있는 항주(杭州)에 들어오자, 재상 진회(秦檜)와 고종이 무릎을 꿇고 그 조서를 받아 금나라의 신하임을 자인하였다. 이때 추밀원 편수관(樞密院編修官)으로 있던 호전이 장문의 봉사(封事)를 올려, 진회와 손근(孫近) 등 화친을 주장하는 간신을 처벌하여 효수(梟首)하고 오랑캐 사신을 억류하여 그 무례함을 문책하라고 하며, 만일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차라리 죽어 버리겠다고 하였다. 《宋史 卷374 胡銓列傳》
[주D-010]광국훈(光國勳) : 광국 공신(光國功臣)으로, 선조 23년(1590)에 명나라 《대명회전(大明會典)》에 왕실의 종계(宗系)가 잘못 기록된 것을 바로잡은 공으로 윤근수(尹根壽), 황정욱(黃廷彧), 유홍(兪泓) 등 19명에게 내린 훈호(勳號)이다.
[주D-011]기축년의 변고 : 선조 22년(1589)에 정여립(鄭汝立)의 모반 사건을 계기로 일어난 옥사를 말한다.
[주D-012]형체도 …… 뒤집어씌웠으니 : 길삼봉은 본디 충청도 천안(天安)의 사노(私奴)로, 불한당이 되어 민간에 많은 피해를 끼치다가 정여립의 모사가 되어 신병(神兵)을 이끌고 지리산과 계룡산에 웅거한다는 풍설이 떠돌아 민심이 흉흉하였다. 그 뒤 기축옥사가 일어나자, 최영경의 호가 삼봉(三峯)이었으므로 조정에서 최영경을 바로 길삼봉이라고 지목하여 처형하였다.
[주D-013]삼원(三元)의 달 : 삼원은 삼시(三始)와 같은 말로, 해와 달과 날이 처음 시작되는 정월 초하룻날을 뜻한다.
[주D-014]방납(防納) : 시골 백성들이 나라에 바쳐야 할 공물을 서울 관아의 아전이나 장사꾼이 대신 바치고 백성에게서 높은 대가를 받아 내던 일이다.
[주D-015]조등(刁蹬) : 농간을 부려 물가가 터무니없이 많이 오르게 하는 일이다.
[주D-016]인정(人情) : 곧 인정미(人情米), 또는 인정가(人情價)로 아전들이 조세를 거두면서 부당하게 덧붙여 받아 내던 쌀을 말한다.
[주D-017]작지(作紙) : 호조(戶曹)나 풍저창(豐儲倉), 광흥창(廣興倉) 따위의 수세(收稅) 창고에서 징세 사무에 필요한 종이 값을 충당하기 위하여 거두던 부가세이다. 전기에는 종이로 받았으나 중기 이후에는 종이 대신에 쌀로 받았다.
[주D-018]주인(主人) : 중앙과 지방 관아의 연락 사무를 담당하기 위하여 지방 수령이 서울에 파견하던 아전 또는 향리를 말한다.
[주D-019]목요(木妖) : 목재로 인해 나타난 이상한 현상이라는 뜻으로, 큰 저택과 궁전을 극도로 사치스럽게 짓는 것을 비난하는 말이다. 당 현종(唐玄宗) 때 안녹산(安祿山)의 난리를 치른 뒤에 국법이 해이해져 대궐 신하와 장수들이 지난날 왕족과 공신들이 했던 것처럼 있는 재력(財力)을 다 들여가며 앞다투어 정자와 저택을 짓는 풍조가 만연하였는데, 이들 두고 당시에 목요라고 불렀다 한다. 《舊唐書 卷152 馬璘列傳》
[주D-020]포흠(逋欠) : 국가에 낼 세금을 체납하는 것을 말한다.
[주D-021]해유(解由) : 벼슬아치가 물러날 때 후임자에게 사무를 넘기고 호조에 보고하여 책임을 벗어나던 일을 말한다.
[주D-022]삼지재상(三旨宰相) : 무능한 재상을 비웃는 말이다. 송 신종(宋神宗) 때 왕규(王珪)가 집정(執政)과 재상(宰相)으로 재임한 16년 동안에 무슨 계책을 건의한 것은 없고 임금의 뜻만 따랐다고 하여 당시 사람들이 그를 그렇게 불렀다 한다. 대궐에 올라가 문건을 올릴 때는 “성지(聖旨)를 정하소서.” 하고, 임금이 가부를 정하면 “성지를 알았습니다.” 하였으며, 물러나 일을 품의한 자에게 유시할 때는 “이미 성지를 얻었다.”라고 하였다. 《宋史 卷312 王珪列傳》
[주D-023]장마언관(仗馬言官) : 화를 받을까 두려워 직간하지 못하는 언관을 비웃는 말이다. 장마는 임금의 의장마(儀仗馬)이다. 당(唐)나라 때 이임보(李林甫)가 재상으로 재임한 19년 동안 권력을 독단하며 간관에게 바른말을 못하게 하였다. 처음에 보궐(補闕) 두진(杜璡)이 글을 올려 정사를 말하자, 이임보가 그를 탄핵하여 하규 영(下邽令)으로 좌천시킨 다음 나머지 간관을 협박하기를, “그대들은 입장(立仗)한 말을 보지 못하였는가. 소리를 지르기만 하면 쫓겨나는 법이다.” 하니, 그 뒤로 간관들이 입을 다물었다 한다. 《新唐書 卷223上 李林甫列傳》
[주D-024]하루 …… 있겠으며 : 《맹자》 〈고자 상(告子上)〉에, “천하에 잘 자라는 생물이 있다 하더라도 하루 동안 햇볕을 쬐고 열흘 동안 춥게 하면 제대로 자랄 수가 없다.” 한 데서 인용한 것으로, 사람의 선한 본성이 외적인 침해를 끊임없이 받을 경우 그것을 유지하기가 쉽지 않다는 뜻이다.
[주D-025]제(齊)나라 …… 있겠습니까 : 《맹자》 〈등문공 하(滕文公下)〉에, “한 명의 제나라 사람이 스승이 되어 제나라 말을 가르치는데 여러 명의 초나라 사람이 그 곁에서 떠들어 댄다면 날마다 종아리를 치면서 제나라 말을 가르치더라도 안 될 것이다.” 한 데서 인용한 것으로, 임금의 주위에 나쁜 사람이 많으면 임금이 그 영향을 받기 쉽다는 것을 비유한 말이다.
[주D-026]계미년의 변란 : 1583년(선조16) 이탕개(尼蕩介)를 중심으로 한 회령 지방의 여진족이 일으킨 반란이다.
[주D-027]육지(陸贄)의 주의(奏議) : 육지는 당 덕종(唐德宗) 때 한림학사(翰林學士)를 지내고 뒤에 중서시랑(中書侍郞)과 동평장사(同平章事)를 지내다가 배연령(裴延齡)의 참소로 파직된 인물이고, 《주의》는 《육선공주의(陸宣公奏議)》로 그가 천자에게 올린 문장을 후인이 엮어 만든 책이다. 말이 강직하고 논리가 정연하여 조선 시대 사대부들이 상소나 차자의 전범으로 삼아 즐겨 읽었다고 한다.
[주D-028]수공(首功)을 …… 하였다 : 수공은 적병의 목을 베어 오는 공을 말한다. 진나라의 법에, 전쟁에서 적병의 목을 계산하여 목 1개당 자급 1등급을 올려 주었다. 노련은 제(齊)나라의 장수 노중련(魯仲連)이다. 일찍이 조(趙)나라에 머물러 있을 적에 진나라가 조나라를 공격해 와 정세가 위급하였다. 그때 위(魏)나라에서 장군 신원연(新垣衍)을 조나라에 사신으로 보내 진나라 왕을 황제로 추대하여 군대를 철수시키게 하려고 하였다. 그러자 노중련이, 진나라는 예의를 버리고 수공(首功)을 으뜸으로 삼는 나라라고 하면서 만약 진나라가 칭제(稱帝)한다면 자신은 동해(東海)에 빠져 죽을 것이라고 하여 그 일을 중지시켰다. 《史記 卷83 魯仲連列傳》
[주D-029]당(唐)나라의 …… 울었는데 : 흥원(興元)은 당나라 덕종(德宗)의 연호이다. 덕종 때 반적(叛賊) 요영언(姚令言)과 주자(朱泚)가 황제를 자칭하고 수도 장안(長安)을 침범했을 때 덕종이 봉천(奉天)에 피난해 있으면서 흥원 1년(784) 5월에 자신을 죄책하는 조서를 반포하여 장사(將士)들을 격려하였다. 그러자 병마부원수(兵馬副元帥) 이성(李晟) 등이 그 조서를 보고 감격한 나머지 용기를 내어 적병을 격퇴하고 장안을 수복하였다. 《舊唐書 卷133 李晟列傳》
[주D-030]유차달(柳車達) : 고려 태조 때의 개국 2등 공신 12인 중의 한 사람으로, 문화 유씨(文化柳氏)의 시조이다. 태조 때 군량 수송에 공을 세워 대승(大丞)에 제수되었으며, 삼한 공신(三韓功臣)에 봉해졌다. 《高麗史 卷99 列傳12 柳公權》
[주D-031]원충갑(元沖甲) : 고려 후기의 무신이다. 향공 진사(鄕貢進士)로 원주(原州)의 별초(別抄)에 소속되어 있다가 1291년(충렬왕17)에 합단(哈丹)이 침입하여 원주성(原州城)을 포위하자, 전후 10차에 걸쳐 적을 크게 무찔러 성을 지켰다. 그 공으로 추성분용정란광국 공신(推誠奮勇定亂匡國功臣)이 되었다. 《高麗史 卷104 列傳17 元沖甲》
[주D-032]초(楚)나라를 …… 충성 : 신포서(申包胥)는 춘추 시대 초나라의 대부(大夫)로, 성은 공손(公孫)인데, 신(申) 땅에 봉작되었으므로 신포서라고 한다. 처음에 오자서(伍子胥)와 친하게 지냈는데, 오자서가 오(吳)나라로 도망치면서 신포서에게 “내가 반드시 초나라를 전복시킬 것이다.” 하자, 신포서가, “나는 반드시 보존시킬 것이다.” 하였다. 그 뒤에 오자서가 오나라의 군사를 이끌고 초나라의 수도인 영(郢)에 침입하자, 진(秦)나라에 가서 7일 밤낮을 통곡한 끝에 구원병을 청해 와서 초나라를 수복하였다. 《史記 卷66 伍子胥列傳》
[주D-033]사당에 …… 충렬 : 장순(張巡)은 당 현종(唐玄宗) 때의 충신이다. 안녹산(安祿山)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 진원 영(眞源令)으로 있었는데, 초군 태수(譙郡太守) 양만석(楊萬石)이 적에게 항복하고 그를 장사(長史)로 삼아 적군을 영접하라고 강요하자, 이를 거부하고서 관리들을 거느리고 당 태조인 현원황제(玄元皇帝)의 사당에 나아가 통곡한 다음 군사를 일으켜 적을 토벌하러 나섰다. 나중에 수양성(睢陽城)을 몇 달 동안 사수하다가 태수(太守)로 있던 허원(許遠)과 함께 장렬하게 순절하였다. 《新唐書 卷192 張巡列傳》
[주D-034]안고경(顔杲卿) : 당 현종(唐玄宗) 때 안녹산(安祿山)의 난이 일어났을 때 안녹산이 사사명(史思明)에게 상산군(常山郡)을 공격하게 하였다. 그때 성을 지키고 있던 위위경(衛尉卿) 안고경이 군사가 적어 성이 함락되면서 사사명에게 포로로 잡혔는데, 낙양(洛陽)으로 끌려가서는 항복하면 살려 주겠다는 안녹산의 말을 듣지 않고 신랄하게 꾸짖다가 사지가 찢겨 죽었다. 《新唐書 卷192 顔杲卿列傳》
[주D-035]돌아오는 …… 바 : 《주역》 〈복괘(復卦)〉에 “돌아오는 길을 잃었으니 흉하다.〔迷復 凶〕” 하였다.
[주D-036]을묘년의 왜변(倭變) : 1555년(명종10) 왜구가 전라남도 해안 일대에 침입해 약탈과 노략질을 한 사건이다. 이해 5월에 왜구가 선박 70여 척으로 일시에 침입하여 달량포(達梁浦), 어란도(於蘭島), 장흥(長興), 영암(靈巖), 강진(康津) 등 일대를 횡행하면서 약탈과 노략질을 하였다. 이때 절도사 원적(元積), 장흥 부사 한온(韓蘊) 등은 전사하고 영암 군수 이덕견(李德堅)은 포로가 되는 등 사태가 매우 긴박하게 전개되자, 조정에서 도순찰사 이준경(李浚慶), 방어사 김경석(金景錫)ㆍ남치훈(南致勳)을 보내 왜구를 토벌하였다.
[주D-037]환산사조(桓山四鳥) 시 : 생이별을 슬퍼하는 시를 말한다. 공자(孔子)가 위(衛)나라에 있을 적에 매우 슬프게 들리는 곡소리를 듣고 안회(顔回)에게 물으니, 안회가 “저 곡소리는 죽은 자 때문만은 아니고 또 생이별한 자가 있어서입니다.” 하였다. 공자가 그 까닭을 물으니, 안회가 대답하기를, “환산에 사는 새가 새끼 네 마리를 낳았는데, 새끼가 점차 자라서 사방으로 흩어져 날아가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어미 새가 슬피 울면서 보냈는데, 슬피 우는 소리가 저 소리와 비슷하였습니다.” 하였다. 《孔子家語 卷5 顔回》
[주D-038]집강(執綱) : 조선 시대 때 면(面)이나 동(洞)의 일을 맡아보던 직임으로, 지금의 면장이나 이장에 해당한다.
[주D-039]거묵(莒墨) : 거(莒)와 즉묵(卽墨)으로, 나라를 수복한 근거지가 된 곳을 가리킨다. 제(齊)나라 민왕(湣王) 때 연(燕)나라 군사에게 패해 모든 성이 함락되고 거와 즉묵 두 성만이 남아 있었는데, 장군 전단(田單)이 이 두 성을 근거지로 삼아 제나라 70여 개의 성을 모두 수복하였다. 《史記 卷82 田單列傳》
[주D-040]갑진년 : 원문은 을사(乙巳)로 되어 있으나 《학봉집(鶴峯集)》 〈연보〉 소주에 “을사는 마땅히 갑진이라 하여야 한다. 갑진년에 선무 공신(宣武功臣)을 녹훈하였으나 선생은 포함되지 않았다.”라고 한 것에 따라 고쳐 번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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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현(崔晛)과의 문답

 


〔문〕 옛날에는 각 대(代)마다 사당이 있으므로 방친(傍親)으로서 후사가 없는 자는 그 신주를 조묘(祖廟)에 반부(班祔)하였습니다만, 지금은 각 대의 사당이 없어 부제(祔祭) 때는 조부에게 붙였다가 제사를 마치면 신주를 예묘(禰廟) 곁에 받들어 동벽(東壁)에 안치하고 있습니다. 반부할 신위가 매우 많을 경우에도 동쪽과 서쪽으로 나누어 안치해야 합니까? 만일 그렇다면 소목(昭穆)이 어지럽게 될 것이니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답〕 동쪽과 서쪽으로 나누어 안치해야 할 듯하네.

〔문〕 가장(家長)이 밖에 나가 돌아오지 못한 상황에서 상을 당하여 성복(成服)할 날짜를 넘기게 되었다면 집안에 있는 자는 제때에 성복하고 가장이 돌아오기를 기다려야 합니까? 아니면 마땅히 가장에게 부음을 알리고 분상(奔喪)할 때까지 기다렸다가 동시에 성복해야 합니까?
〔답〕 가장이 밖에서 돌아오지 못한다면 집안에 있는 자는 그야 당연히 예법에 따라 성복하여야 하네. 만일 가장이 돌아올 때까지 기다린다면 온당치 못할 듯하네. 혹시 가장이 중국에 사신으로 나가 만리타국에 있다면 그래도 그가 돌아오기를 기다렸다가 동시에 성복할 생각을 가질 수 있겠는가.

〔문〕 개장(改葬) 때 시마복(緦麻服)을 입는다고 한 것은 달수로 말한 것입니까, 복제(服制)로 말한 것입니까? 개장을 진행할 때 언제 처음 복을 입고 언제 탈복을 해야 합니까?
〔답〕 개장 때 성복하는 것은 복제로 말한 것이나 달수도 그 속에 포함된 것이네. 마땅히 옛 무덤을 발굴할 당시에 복을 입고 개장이 끝나 우제(虞祭)를 행한 뒤에 탈복해야 하며, 그 상복을 그대로 보관하고 있다가 3개월이 되어서야 없애는 것이네.

〔문〕 조례(弔禮)에 “상주(喪主)가 서쪽을 향하고 재배(再拜)하면 빈객은 동쪽을 향하고 답배하며 위로의 말을 한 뒤에 주인은 또 재배하고 빈객이 또 답배한다.”라고 하였는데, 주(註)에는 빈객이 답배하지 않는 것을 예라고 하였습니다. 어느 설을 따라야 합니까?
〔답〕 빈객이 답배하지 않는 것은 옛 예법이네.

〔문〕 중복(重服)을 입고 있으면 경복(輕服)을 입을 수 없습니다만, 복제는 가벼우면서도 정의(情義)가 중한 경우도 있습니다. 예를 들면 개장할 때 시마복을 입는 것은 어버이를 위한 복이므로 이를 경복으로 볼 수 없습니다. 만일 자최(齊衰) 기년상(朞年喪)을 만나 미처 장례를 치르기 전에 부모를 개장한다면 기년복을 벗고 시마복을 입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럴 경우 개장한 뒤에 시마복을 입고 3개월을 마쳐야 합니까, 아니면 개장할 때 잠시 입었다가 개장을 마친 뒤에 시마복을 벗고 기년복으로 돌아가야 합니까?
〔답〕 개장할 때는 마땅히 시마복을 입고 장례를 마치면 그 즉시 기년복으로 돌아가야 하네.


 

[주C-001]최현(崔晛) : 자는 계승(季昇)이고, 호는 인재(認齋)이며, 본관은 완산(完山)이다. 최심(崔深)의 아들로 1606년(선조39)에 문과에 급제한 뒤에 강원도 관찰사를 지냈다. 작자의 문인이며 작자보다 20년 연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