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세 의령공 휘 충성 ,지성 등/휘 충성 산당공 관련기록

산당공과 추강 선생이 지리산에서 만나다 라는 기사

아베베1 2014. 4. 18. 05:40

 

 

 

  산당공은 휘 충성 호 필경  문성공 7세손 17대 방조

   한훤당의 문 문화생이며  

  남추강의 문화생이다라는 기사가

 추강선생의 사우명행록에 기록이 되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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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보(年譜)
한훤당 김 선생 사우문인록(寒暄堂金先生師友門人錄)


점필재(佔畢齋) 김 선생(金先生)
○ 휘는 종직(宗直), 자는 계온(季昷), 본관은 선산(善山)이다. 선덕(宣德 명 선종(明宣宗)의 연호) 신해년(1431, 세종13)에 출생하였다. 경태(景泰 명 경제(明景帝)의 연호) 계유년(1453) - 노산(魯山) 원년 - 에 진사시에 입격하고 천순(天順 명 영종(明英宗)의 연호) 기묘년(1459) - 세조 5년 - 에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벼슬은 형조 판서에 이르렀다. 홍치(弘治 명 효종(明孝宗)의 연호) 임자년(1492, 성종23)에 죽어 향년 62세였다. 시호는 문간공(文簡公)이다.
○ 융경(隆慶 명 목종(明穆宗)의 연호) 정묘년(1567, 명종22)에 허국(許國)과 위시량(魏時亮) 두 명나라 사신이 우리나라에서 공맹(孔孟)의 심학(心學)을 전수받은 사람을 제시하라고 요구했을 때 조정에서 몇몇 사람을 써서 보여 주었는데, 거기에 “김모(金某)는 학문이 심오하고 문장이 높았다. 한 시대 유림의 종장(宗匠)이 되어 후생들을 꾸준히 가르친 결과 전후에 걸쳐 명사들이 그의 문하에서 많이 배출되었다. 세상에서 점필재 선생으로 불린다.”라는 내용이 있었다.
살펴보건대, 추강(秋江)의 《사우록(師友錄)》에는 “한훤당 선생은 점필재 문하에서 수업하였다.” 하고, 이공 적(李公勣)이 지은 행장에는 “선생의 학문은 전하지 않는 학문을 체득한 것이다.” 하였다. 이로 볼 때 점필재 문하에서 비록 일찍이 수업하고 또 《소학(小學)》을 배우기는 하였으나 덕을 이루고 도를 깨쳐 옛 성현의 학통을 이은 것은 오로지 깊이 공부하여 스스로 얻은 결과였음을 속일 수 없을 것이다.

지지당(止止堂) 김 선생(金先生)
○ 휘는 맹성(孟性), 자는 선원(善源), 본관은 해평(海平)이다. 정통(正統 명 영종(明英宗)의 연호) 정사년(1437, 세종19)에 출생하였다. 선생보다 17년 연상으로 선생이 그를 각별히 공경하였는데, 그에게 올린 여러 수의 시에서 그와 같은 사실을 알 수 있으며 또 반드시 자신을 ‘훈하(訓下)’라고 일컬었으니, 존경하는 정도가 지극하였다 할 것이다.
○ 조매계(曺梅溪 조위(曺偉))가 선생 시집의 서문을 쓰기를, “성산(星山) 가천(伽川)에 집이 있었다. 독서와 저술하는 것을 좋아하였으며 무엇보다 시를 특히 좋아하여 매일 시를 짓고 읊조릴 뿐, 가정 살림살이를 꾸리는 일은 도외시하였다. 본디 술을 마시지 못했으나 손님이 찾아오면 자신의 가난한 살림을 아랑곳하지 않고 술을 준비하여 함께 얼큰히 취하곤 하였으며, 시속의 부귀 영화에 관해서는 관심이 없었다. 선원(善源)은 명문가에서 태어났다. 고(故) 재상 정숙공(靖肅公) 안순(安純)의 외손자이자 문숙공(文肅公) 안숭선(安崇善)의 생질로 내외 친족이 조정에 가득한 처지에서 혹시 누가 벼슬하라고 권하면 하찮게 여겼다. 젊었을 적에 명망이 높아 한번 세상에 큰 뜻을 펴 보겠다는 포부를 지녔으나 과거에 여러 번 낙방하자, 가천(伽川) 가에 집을 짓고 지지(止止)라는 편액을 붙이고서 시와 술로 스스로 마음을 달래며 장차 그대로 일생을 마칠 뜻을 지녔다. 그러다가 성묘(成廟)가 즉위한 초기에 유사(有司)에게 유일(遺逸)을 천거할 것을 명하여 이때 중부 참봉(中部參奉)으로 발탁되고 그 뒤 병신년(1476, 성종7) 문과에 급제하여 사간원의 벼슬을 역임하고 시종신으로 승진하여 명예가 한층 더 크게 났다. 이윽고 어떤 사건에 연루되어 고령(高靈)으로 유배되었는데, 고령은 가천과의 거리가 10여 리 정도에 불과하였으나 3년 동안 한 번도 자기 집에 다녀오지 않았으므로 사람들이 다 어려운 일로 여겼다. 여러 해가 지난 뒤에 조정으로 돌아와 이조 정랑이 되었다. 정미년(1487, 성종18) 봄에 서울에서 죽었는데, 겨우 50여 세였다. 집이 매우 가난하여 함께 벼슬하던 벗 정자건(鄭子健 정석견(鄭碩堅))이 있는 힘껏 돌보아 준 덕으로 염습 등 초상을 치르고 상여가 고향으로 돌아왔다.” 하였다.
○ 내가 어릴 적에 한훤 김 선생이 선생께 올린 시를 보았는데, 그 밑에 친필로 ‘훈하(訓下) 김굉필 재배’라고 씌어 있었으니 그를 존경하는 뜻이 이러한 표현에서도 드러나 있었다. 세상에서는 일반적으로 한훤 선생이 그를 스승으로 섬겼다고 말하고 있으나 지금 서로 주고받은 시문으로 생각해 보면 비록 분명히 스승의 도로써 받들지는 못했다 하더라도 스승이자 벗으로 여기지 않았을까 한다. 한훤 선생과 같은 분이 스승이자 벗으로 여겼다면 선생의 위상을 또한 상상해 볼 수 있으니, 어찌 감히 존경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상 두 선생은 다 한훤 선생이 스승으로 받들던 인물이므로 감히 이름을 쓰지 못하고 호를 썼다. 벗 이하의 관계에 있어서는 호를 쓰기가 곤란하여 모두 바로 성명을 썼다.

정여창(鄭汝昌)
○ 자는 백욱(伯勗), 본관은 하동(河東)이다. 성화(成化 명 헌종(明憲宗)의 연호) 경자년(1480) - 성종 11년 - 에 성묘가 성균관에 경학에 밝고 덕행이 훌륭한 인물을 천거할 것을 명하였는데, 공이 첫째로 천거되었다. 계묘년(1483, 성종14)에 진사시에 입격하고 홍치(弘治) 경술년(1490, 성종21)에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안음 현감(安陰縣監)에 이르렀다. 융경(隆慶) 정묘년(1567, 명종22)에 허국(許國)과 위시량(魏時亮) 두 명나라 사신이 우리나라에서 심학(心學)에 조예가 깊은 사람의 성명과 행실을 알고 싶다고 청했을 때 조정에서 몇 사람을 써서 보여 주었는데, 거기에 공에 대해 “옛 도를 믿고 의리를 좋아하며 학문은 실천을 힘썼다. 김굉필과 뜻이 같고 도가 서로 부합하여 당시 사람들이 김정(金鄭)이라고 함께 불렀으며, 스스로 호를 일두(一蠹)라고 했다.” 하였다. 죽은 뒤에 우의정에 추증되고 고향 사람들이 서원을 세워 향사하고 있다.
○ 임호신(任虎臣)이 지은 행장에 말하기를, “공은 김 사문 굉필(金斯文宏弼)과 점필재 문하에서 수학하였고 날마다 도의를 강론하며 서로 절차탁마하였다.” 하고, 또 말하기를, “공은 천성이 중후하고 침착하여 남들과 사귀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으나 유독 김 선생 대유(金先生大猷)와는 지기지우로 허여하여 도를 논하고 옛글을 강론하며 일찍이 서로 헤어져 있은 적이 없었다. 언젠가 시종신이 되어 집을 떠나 있을 때는 매번 말을 보내 맞아들여 상에게 무엇을 아뢰어야 할 것인가를 물었고, 항상 고금의 고사를 인용하면서 새벽까지 토론하곤 하였다.” 하였다.

남효온(南孝溫)
○ 자는 백공(伯恭), 본관은 의령(宜寧)이며, 스스로 호를 추강거사(秋江居士)라고 하였다.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를 섬겼는데 효성이 지극하다고 소문이 났다. 인물됨이 담박하면서도 강직하고 소탈하면서도 중후하였으며 가슴속이 깨끗하여 속세의 기풍이 전혀 없었다. 일찍이 점필재에게 수학하였는데 점필재가 감히 이름을 부르지 못하고 반드시 ‘우리 추강’이라 했으니, 스승으로부터 이처럼 예우를 받았다. 김모(金某), 정모(鄭某), 김시습(金時習), 안응세(安應世) 등 제현과 서로 추앙하고 존경하여 형제 같았다. 성묘조(成廟朝) 때 상소하여 소릉(昭陵 현덕왕후(顯德王后)의 능호)을 복위할 것을 청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마침내 세상사를 단념하고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는 것을 일삼아 일반적으로 명승지라 이름난 곳은 거의 대부분 가 보았다. 경태(景泰) 갑술년(1454, 단종2)에 출생하여 홍치(弘治) 임자년(1492, 성종23)에 향년 39세로 죽었다. 연산 갑자년(1504)에 소릉의 복위를 청한 상소를 추죄(追罪)하여 화가 무덤까지 미쳤다. - 유홍(兪泓)이 쓴 《추강집(秋江集)》 발문을 참고하였다. -

이심원(李深源)
○ 추강(秋江)의 《사우록(師友錄)》에 이르기를, “자는 백연(伯淵), 호는 성광(醒狂)이며 또 묵재(默齋), 태평진일(太平眞逸)이라고도 한다. 태종(太宗)의 현손으로 나와 같은 해에 출생하였는데 달은 나보다 늦다. 경전에 밝고 행실이 뛰어났으며 의술(醫術)에도 정통하였다. 충성스럽고 효성스러운 성품으로 무술(巫術)이나 불교를 좋아하지 않았으며, 평상시에 관디(冠帶) 차림을 하고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다. 전강(殿講)에서 사서오경의 뜻을 통달하여 명선대부(明善大夫)로 승진하고 행 주계부정(行朱溪副正)의 칭호를 받았다. 25세 때 모두 다섯 차례 상서(上書)하여 나라를 다스리는 도리를 논하였는데, 어떤 것은 윤허하고 어떤 것은 윤허하지 않았다. 또 조정에서 고모부 임사홍(任士洪)의 무도하고 딴마음을 품은 죄상을 논한 일과 조부(祖父 양조부인 보성군(寶城君) 이합(李峇))의 뜻을 어긴 일로 장단(長湍)에 귀양 갔다가 뒤에 또 이천(伊川)으로 귀양 갔다. 상에게 상서(上書)하여 병중에 있는 부모를 찾아볼 수 있게 해 달라고 청하였는데, 말이 간곡하여 윤허를 얻었다. 정미년(1487, 성종18)에 종친을 대상으로 치른 시험에서 경사(經史)를 강하여 1등으로 급제함으로써 약물과 술을 하사받고 2품의 품계를 하사받았으나 군(君)에는 정식으로 봉해지지 않았는데, 이는 이전에 조부를 거역한 죄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였다.
성종이 그의 간하는 말에 감동을 받아 잘못을 깨닫고 임사홍을 지방으로 귀양 보냈다. 그 후 임사홍은 연산군의 어지러운 정사 때 공을 무함하여 그의 두 아들까지 죽였으며, 권력을 잡은 10년 동안 사림을 살육하였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공의 선견지명에 탄복하였다. 중종이 특별히 1품의 품계를 추증하고 아울러 정문을 내렸다.

신영희(辛永禧)
○ 추강의 《사우록》에 “자는 덕우(德優), 본관은 영산(靈山)으로, 재신(宰臣) 신석조(辛碩祖)의 손자이다. 뜻이 크고 기개가 있어 대의를 위해 몸을 돌보지 않는 절개가 있었으며, 과거에 응시하는 것을 달갑게 여기지 않았다. 시명(詩名)이 경향 각지에 드높았는데, 참의 성현(成俔)이 그의 시가 소식(蘇軾), 황정견(黃庭堅)과 어깨를 나란히 한다고 하였다. 계묘년(1483, 성종14)에 진사가 되었고 그 뒤로는 과거에 응시하지 않았다.” 하였다.
○ 공의 호는 안정(安亭)이다. 선생이 그와 절교하려 하였는데, 그 사실이 조 선생(曺先生)이 기록한 글에 나와 있다.

이승언(李承彦)
○ 자는 사아(士雅), 본관은 성주(星州)이다. 모년(某年)에 생원시에 장원하였으며 선생과 함께 점필재 문하에서 유학(遊學)하였다. 성품이 침착하고 도량이 컸으며 매우 씩씩하고 용감하였다. 경사(經史)를 두루 섭렵하였고 산천을 유람하기를 좋아하였다. 유일(遺逸)로 천거되어 벼슬이 한성부 겸참군(漢城府兼參軍)까지 이르렀다. 아들 장길(長吉)과 장곤(長坤)은 선생에게 수학하였고 장배(長培)는 선생의 딸에게 장가들었다.

원개(元槩)
○ 자는 - 원문 빠짐 -, 본관은 원주(原州)이다. 고상한 품행으로 천거되어 참봉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선생과 함께 점필재 문하에서 유학하였다.

이철균(李鐵均)
○ 자는 - 원문 빠짐 -, 본관은 성주이다. 경태(景泰) 경오년(1450, 세종32)에 출생하였다. 을유년(1465, 세조11)에 진사시에 입격하고 병진년(1496, 연산군2)에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은 대사성에 이르렀다. 선생과 함께 점필재 문하에서 유학하였다.

곽승화(郭承華)
○ 자는 - 원문 빠짐 -, 본관은 현풍(玄風)이다. 정유년(1477, 성종8)에 진사시에 입격하였다. 선생과 함께 점필재 문하에서 유학하였다. 청렴하고 개결하여 사우들로부터 추앙을 받았다. 장차 사림의 화가 일어날 것을 알고 시골에 묻혀 살며 스스로 일반 사람들과 다르다는 것을 드러내지 않았으므로 선생이 가끔 농담하기를, “이처럼 화를 피하는 일이 어찌 도리에 합당하겠는가.” 하였다.

주윤창(周允昌)
○ 자는 - 원문 빠짐 -, 본관은 상주(尙州)이다. 선생과 함께 유학하였다.

신정지(申挺之)
○ 선생이 함께 어울려 두류산(頭流山)을 유람했던 인물이다. 정지는 그의 자이고, 이름은 전하지 않는다.

유호인(兪好仁)
○ 자는 극기(克己), 본관은 고령(高靈)이다. 정통(正統) 을축년(1445, 세종27)에 출생하였다. 임오년(1462, 세조8)에 생원 진사에 입격하고 갑오년(1474, 성종5)에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은 합천 군수(陜川郡守)까지 지냈다. 향년 50세로 죽었다. 어득강(魚得江)이 지은 그의 묘갈명에 이르기를, “충성과 효성이 지극하고 욕심이 없어 검소하였으며 중후하고 근엄하였다. 시와 문장이 예스럽고 품격이 높았으며 필력이 강하고 힘이 있어 세상 사람들이 삼절(三絶)이라 하였다. 집안이 청빈하였으나 생업을 영위하지 않았다. 점필재공의 문장과 행실이 당시에 으뜸이었는데, 공도 그에 뒤지지 않았다. 아, 높은 덕망으로 임금의 인정을 받아 평소의 포부를 한번 펼 수 있었는데도 매번 지방 수령을 벗어나지 못했으며, 50세에 세상을 떠나 모친을 끝까지 봉양하지 못했으니, 애통하다. 임종 시에 아들 환(瑍)에게 말하기를, ‘군자는 반드시 임금을 속이지 말아야 한다. 네가 만일 벼슬한다면 꼭 내 이 말을 생각하도록 하라.’ 하였다. 뇌계(㵢溪)에 자리 잡고 살아 그 지명으로 호를 삼았다. 유고 몇 권을 남겼다.” 하였다.

조위(曺偉)
○ 선생과 같은 해에 출생하였다. 조신(曺伸)의 《소문쇄록(謏聞瑣錄)》에 “공의 자는 태허(太虛)이다. 어릴 때부터 사람들이 다 큰 업적을 이룰 것이라고 기대하였는데 벼슬길에 들어선 뒤에 성종의 인정을 크게 받아 칭찬과 사랑이 대단하였다. 어버이의 봉양을 위해 지방 수령직을 청하자 특별히 한 자급을 더해 4품으로 올려 주었다. 함양 군수(咸陽郡守)로 있을 때 상이 글을 내려 가상히 여기는 뜻으로 하유하기를, ‘그대는 문장(文章)으로 나라에 헌신하여 경연에서 시종함으로써 내가 그대를 중히 여겨 온 지 오래이다. 어버이가 늙어 사직하고 곁에서 모시기를 원하므로 고향과 가까운 고을의 수령으로 제수하여 어버이를 봉양할 수 있게 하였는데, 이는 부득이한 조치였다. 나는 그대가 이전에 시종신으로 있었기에 감사에게 하유하여 그대의 어버이에게 곡물을 약간 보내 향리(鄕里)로 하여금 그대가 뛰어난 학문으로 벼슬하여 영화가 그대의 어버이에게 미쳤다는 것을 알게 하였다. 그대는 그리 알라.’ 하였는데, 공이 전문(箋文)을 올려 사례하였다. 이전에 또 상이 언제나 연말이 되면 공이 그해에 지은 시를 모아 올리게 하였는데, 그 시가 상의 마음에 들어 공의 부모에게 쌀과 콩을 하사할 것을 명하였다. 군수의 임기가 만료될 무렵 부모상을 당하자 또 부의와 제물 명목으로 쌀과 콩을 하사하였는데, 지방관에게 부의를 내리는 조치는 일찍이 없던 일이었다. 벼슬은 참판까지 지냈다. 연산조(燕山朝)에 점필재의 시고(詩藁)를 편수한 일로 벌을 받아 의주(義州)로 귀양 갔다가 다시 순천(順天)으로 이배(移配)되었다. 홍치(弘治) 계해년(1503, 연산군9)에 병들어 죽었는데, 향년 50세였다. 교제한 사람들은 모두 당시의 명사이자 큰 인물로 서로 조정의 제도를 강론하고 문사(文史)를 절차탁마하여 조금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나중에 비록 학문에 관한 일로 파면되어 귀양 갔지만 오히려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다. 저술이 상당히 많았으며 일찍이 《매계총화(梅溪叢話)》 10여 권을 초하였으나 마무리하지 못하고 죽었다.” 하였다.

이현손(李賢孫)
○ 《사우록》에 “자는 세창(世昌)으로, 태조(太祖)의 후예이다. 벼슬은 명양부정(鳴陽副正)까지 지냈으며 나이는 나보다 13세 연하이다. 언제나 법도로써 자신을 단속하여 그 독실한 행실이 대유(大猷)의 다음으로 꼽혔다. 일찍이 관례(冠禮)를 행하려 하자 대유가 만류하였으며, 어머니의 상을 당해서는 한결같이 《가례(家禮)》의 법을 따랐다.” 하였다.

홍귀손(洪貴孫)
○ 자는 총수(寵叟), 본관은 남양(南陽)이다. 생원으로 천거되어 의금부 도사가 되었다. 벼슬은 석성 현감(石城縣監)까지 지냈다. 40세 이전에 죽었다. 선생이 공과 미원(迷原)에 자리를 잡아 함께 살자고 약속한 일이 있다.

성모(成某)
○ 생원 성박(成博)의 조부이다. 선생이 공과 미원에 자리를 잡아 함께 살자고 약속한 일이 있다.

이장길(李長吉)
○ 자는 자하(子賀)이다. 나의 중씨(仲氏 정곤수)가 퇴계 이 선생에게 묻기를, “삼가 살펴보건대 이장길은 선생(先生 김굉필)과 동문 벗인 이승언(李承彦)의 아들입니다. 대대로 창녕(昌寧)에 자리 잡고 살아온 가문으로 선생이 사는 곳과는 반나절 길에 지나지 않았으며, 그의 아우 장곤(長坤)과 제자로서의 예의를 잘 지켰습니다. 인물됨이 준수하여 재주가 많았고 젊었을 적에 학행이 있다고 소문났습니다. 추강의 《사우록》에 ‘지조가 굳고 곧아 잡스럽지 않다.’고 칭찬하기까지 하였으니, 당시에 명예가 있었다는 것을 알 만합니다. 그러나 나중에는 극도로 잘못되어 결국 무과로 벼슬길에 진출하여 연산군이 총애하는 궁녀와 교분을 맺어 추잡하고 더러운 일이 많았으며, 또 권세 있는 간신에게 빌붙어 하는 짓이 거칠고 사나웠습니다. 이 때문에 사림으로부터 배척을 받아, 처음에는 곧았으나 뒤에는 더러워졌다는 비난이 있었다고 합니다. 추강이 그를 좋게 평했던 것은 장길이 유학에 종사할 당시 추강이 《사우록》을 지었기 때문이지 별도로 다른 사람이 있는 것은 아닌가 합니다. 이 사람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하니, 이 선생이 답하기를, “이장길은 이처럼 앞뒤의 처사가 마치 두 사람 같으니, 어찌 정자(程子)의 문하에만 선생을 배반한 형서(邢恕)가 있겠는가. 한탄스럽고 두려운 일이네.” 하였다.
○ 조 선생(曺先生)이 기록한 데에도 보인다.

이적(李勣)
○ 《사우록》에 “자는 중률(仲栗)이다. 시에 능하였다. 나중에 《대학(大學)》과 《중용(中庸)》을 공부하여 그 도에 흥미를 붙인 뒤로는 시에만 치우치지 않았다. 이상이 원대하여 세속의 일상적인 일에 종사하지 않고 옛 현인들을 벗삼아 살았으며, 평소에 의관을 단정히 차려입고 담담하게 지냈다. 대유(大猷)와 백연(伯淵)을 스승으로 섬겼다.” 하였다.

최충성(崔忠成)
○ 《사우록》에, 자는 필경(弼卿)이라 하였다.

박한삼(朴漢參)
○ 본관은 순천(順天)으로, 선생 부인의 아우이다.

윤신(尹信)
○ 《사우록》에 “자는 임지(任之)이다. 파주(坡州) 지역의 명문가로 문숙공(文肅公 윤관(尹瓘))의 후손이다. 행검은 세창(世昌)과 같았으나 침착하고 관대한 면은 그보다 더하였다. 대유(大猷)를 스승으로 섬겼다.” 하였다. - 세창은 명양부정(鳴陽副正) 이현손(李賢孫)의 자이다. -

이분(李坋)
○ 《사우록》에 “자는 자야(子野)이다. 장안(長安)에 살았다. 어진 사람을 좋아하고 선을 행하는 것을 즐겼으며 권세와 이익에 욕심이 없었다. 시학(詩學)이 매우 넉넉하여 대유(大猷)가 그 품격과 체제의 수준이 높은 것에 탄복하였다.” 하였다.

노조동(盧祖同)
○ 《사우록》에 “자는 공서(公緖)이다. 《소학》 읽기를 좋아하고 등급을 건너뛰는 학문과 음풍농월하는 문장, 과거 공부를 잘하는 재주를 달갑게 여기지 않았다. 몸을 닦고 법을 지키는 것이 대체로 대유와 같았다. 부친의 상을 치를 때는 3년 동안 여막살이를 하고 《가례》의 가르침을 그대로 따랐다. 시숙(時叔)과 점필재 문하에서 함께 수학하였는데, 선생이 존경하였다.” 하였다. - 시숙은 안우(安遇)의 자이다. -
○ 김모재(金慕齋 김안국(金安國))의 〈노 처사를 찾아가 지은 시〔訪盧處士詩〕〉의 서문에 “노공은 높은 행실을 지녀 세상에 이름나는 것을 구하지 않았는데, 젊었을 적에 김 선생 굉필과 함께 공부하였다.” 하였다. 그 시는 다음과 같다.
세간의 부귀영화 그 길을 달리하고 / 人間軒冕自殊途
향촌에 은거하여 도의 참맛 깊이 알아 / 顔巷窮居味道腴
한가로운 우주를 눈에 넣어 주무르고 / 眼底牢籠閑宇宙
요순 시대 태평 세월 가슴에 간직했네 / 胸中蘊蓄一唐虞
염락 학맥 추구하여 연원이 올바르고 / 學追濂洛淵源正
증래 행실 독실하여 행검이 완전했네 / 行篤曾萊踐履俱
공 처소 찾아온 건 그만한 뜻 있어서니 / 爲訪林丘應有意
남쪽이라 온 고장 높은 기풍 선양코자 / 欲將高範表南隅
《척언(摭言)》에 “노 일사 필(盧逸士㻶)은 고성(固城) 사람이다.” 하였다. - 살펴보건대 공이 이름을 ‘필’로 고친 것은 언제 무슨 이유에서였는지 알 수 없다. -
《기묘보록(己卯補錄)》에 “유일(遺逸) 노모(盧某)는 별과(別科)의 천목(薦目)에 ‘우애가 향리에 드러났고 학식이 순수하고 올바르며 재주와 행실이 뛰어났다.’ 하였다. 과거에 낙방한 뒤에 여러 벼슬을 거쳐 경상도 도사(慶尙道都事)가 되었고 다시 정랑(正郞)으로 제수되었다. 12월에 언관(言官)이 ‘별다른 조행이 없어 처음에 곧장 참상(參上) 벼슬을 제수할 수는 없으니 자급을 낮추어야 한다.’라고 하였는데, 결국 고향으로 돌아와 죽었다.” 하였다.

허반(許磐)
○ 《사우록》에 “자는 문병(文炳)이며 계묘년(1483, 성종14)에 진사시에 입격하였다. 성리학에 뜻을 두고 벼슬길에 무관심하였다. 일마다 옛 도를 따르려 하였으며 대유(大猷)를 스승이자 벗으로 삼았는데, 대유가 그의 단정하고 고상한 기풍이 천성으로부터 우러나온 것에 탄복하였다. 음보(蔭補)로 사직서 참봉(社稷署參奉)에 조용(調用)되었다. 이 당시 좌상 홍응(洪應)이 제조로 있었는데 문병이 그를 회유하기를 ‘왕세자는 이 나라의 태자로서 장차 우리나라 만백성이 우러러 의지할 인물입니다. 그런데 지금 환관 내시와 함께 거처하여 서연(書筵)에 나와서 유신(儒臣)을 보는 시간은 드물고 내시들과 어울려 노는 시간이 많습니다. 그렇게 하지 말도록 하십시오.’ 했다.” 하였다.
○ 무오년(1498, 연산군4)에 문과에 급제하여 권지 승문원부정자(權知承文院副正字)가 되었다. 이해에 사화가 일어나 피살되었다.

민귀손(閔龜孫)
○ 《사우록》에 “자는 서경(瑞卿), 본관은 여주(驪州)이다. 고(故) 첨정(僉正) 수(粹)의 아들로 자정(子挺 안응세(安應世))의 처남이다. 일찍이 자정으로부터 시를 배워 젊었을 적에 높은 수준에 이르렀다. 또 정중(正中 이정은(李貞恩)), 정지(貞之 심정(沈貞)), 중률(仲栗 이적(李勣))과 종유하고 대유(大猷)를 스승으로 섬겼는데, 인물됨이 단아하여 하자가 없었다.” 하였다.

강흔(姜訢)
○ 《사우록》에 “자는 시가(時可), 본관은 진주(晉州)이다. 관찰사 자평(子平)의 막내아들이다. 처음에 밀양(密陽)에서 여경(餘慶 홍유손(洪裕孫))을 따라 점필재에게 두시(杜詩)를 배웠다. 그 뒤에 덕우(德優 신영희(辛永禧))에게 시를 배우고 그다음 대유에게 《소학》을 배웠으며, 그다음에는 시숙(時叔 안우(安遇))과 공서(公緖 노필(盧㻶))를 따라 유극기(兪克己 유호인(兪好仁))의 여막에서 시를 읽었다. 나중에 진사시에 입격하였다.” 하였다.

조광조(趙光祖)
○ 자는 효직(孝直)이며 스스로 호를 정암(靜庵)이라 하였다. 정덕(正德) 경오년(1510) - 중종 5년 - 에 진사시에 장원하고 을해년(1515, 중종10)에 효렴(孝廉)으로 천거되어 조지서 사지(造紙署司紙)에 제수되었다. 이해 가을에 문과에서 을과(乙科) 1등으로 급제하였고, 벼슬은 대사헌에 이르렀다. 기묘년(1519, 중종14) 11월 15일에 옥사가 일어나 능성(綾城)에 유배되었다가 12월 20일 후명(後命)이 내렸다. 인묘(仁廟) 초기에 왕명에 따라 애초의 관작으로 회복되었다. 융경(隆慶) 기사년(1569) - 금상(今上) 2년 - 에 문정공(文正公)으로 시호가 내렸다. - ‘도덕이 있고 견문이 넓은 것〔道德博文〕’을 문(文)이라 하고 ‘정도로 남을 승복시킨 것〔以正服人〕’을 정(正)이라 한다. - 융경 초기에 허국(許國)과 위시량(魏時亮) 두 명나라 사신이 우리나라에서 공맹(孔孟)의 심학(心學)을 전수받은 인물에 관해 물었을 때 조정에서 대답하기를, “공은 타고난 자질이 특이하여 동류들 중에 뛰어났다. 김굉필을 스승으로 섬겨 도를 독실히 믿고 힘써 배웠으며, 평소의 뜻이 도술을 밝히고 인심을 맑게 하려는 데에 있었으나 세상이 불행하여 그만 일찍 죽고 말았다.” 하였다.
○ 퇴계 이 선생이 지은 행장에 “공은 타고난 자질이 특이하여 동류들 중에 뛰어나 그 기상이 마치 난새와 고니처럼 우뚝하고 옥처럼 매끄럽고 황금처럼 순결하였으며, 또 난초가 향기를 풍기듯 하얀 달이 빛을 뿌리듯 하였다. 17, 8세 때 마음에 크게 느낀 바가 있어 도를 구해야겠다는 뜻을 지녔다. 이 당시 참판공(參判公 조광조의 아버지 조원강(趙元綱))이 어천도 찰방(魚川道察訪)으로 있었는데, 마침 한훤 선생이 희천(煕川)에 유배 중이었다. 공은 평소에 한훤의 학문이 연원이 깊다는 소문을 들어온 터라 아버지 슬하에 있다가 한훤 선생을 찾아가 학문하는 큰 도리를 깨달았다. 우리나라 선정(先正) 중에는 도학에 대해 문왕 같은 성군(聖君)이 없는 처지에서도 분발하여 일어난 자가 있기는 하나 결국에는 절의를 세우거나 장구와 문장만 추구하는 범주를 벗어나지 못하였다. 자기 자신을 위하는 학문을 오로지 추구하여 그저 진실한 실천으로 학문의 요체를 삼은 사람을 찾는다면 오직 한훤 선생이 그렇게 한 인물이다. 공은 어지러운 세상을 만나 위험을 무릅쓰고 한훤을 스승으로 섬겼다. 비록 그 당시에 서로 강론하고 전수했던 뜻을 지금 알 수는 없지만 공이 나중에 도를 추구하는 정성과 지향이며 업적이 그처럼 뛰어난 것을 살펴보면 그 발단이 실로 여기에 있다고 할 것이다.” 하였다.
○ 소재(穌齋) 노수신(盧守愼)이 지은 비명(碑銘)에 “무오년(1498, 연산군4) 가을 한훤 선생이 희천으로 귀양 갔을 때 선생은 아버지 슬하에 있었는데, 한훤 선생을 찾아가 종유하며 학문하는 큰 도리를 배우고 한참 만에 돌아왔다. 한훤 선생이 그를 눈빛으로 전송하며 ‘나의 도가 저 사람에게 전수되었구나.’ 하였다. 이때부터 도를 독실히 믿고 마음의 이치를 힘써 탐구하여 세상의 고루한 기풍을 말끔히 탈피하였다.” 하였다.

유우(柳藕)
○ 자는 양청(養淸), 호는 서봉(西峯)이다. 성화(成化) 계사년(1473, 성종4)에 출생하여 가정(嘉靖) 정유년(1537, 중종32)에 죽었는데, 향년 65세였다.
○ 그의 문인 동주(東洲) 성제원(成悌元)이 지은 묘표(墓表)에 “선생은 처음에 김 선생 굉필에게 수학하여 오직 학문에만 힘을 쏟았다. 연산조 때 사화가 일어나 그 피해가 김 선생에게 미치자 심상(心喪) 3년을 하였다. 이때부터 성명학(性命學)에 전심하여 육경(六經)을 깊이 탐구하고 염락(濂洛)의 연원을 거슬러 올라가 실천에 힘쓰고 헛된 이름을 피하였으므로 선생을 아는 사람이 없었다. 그 학문이 더욱 노숙해지고 덕이 더욱 높아지자 고금의 역사를 오르내리고 천지의 섭리를 노래하며 천운(天運)의 변화를 밝히고 세도(世道)의 추이를 살핌으로써 세속을 탈피하여 은둔하고 스스로 도를 즐겼다. 선생이 비록 도회지에서 생활하기는 하였으나 저 외진 산골에 묻힌 선비도 그에 미칠 수 없을 정도였다.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생활이 가난하여 남의 집을 빌려 살면서 몸소 밥을 지어 어머니를 봉양하였는데, 고생하는 기색이 없이 여유 만만하였다. 어머니가 해묵은 병을 앓았는데 의술을 궁리하여 손수 약을 조제하는 등 봉양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거처하는 집에서 후생에게 글을 가르치면서 언제나 남에게 먼저 말해 주는 일이 없고 남이 물으면 대답해 주었는데, 비록 어린아이가 글을 배우더라도 반드시 직접 구두를 짚어 가며 풀어서 가르쳤다. 선생은 덕이 순수하여 어진 사람이건 그렇지 못한 사람이건 간에 선생을 바라보면 존경할 줄 알았다. 그러나 스스로 드러내 과시하지 않고 조촐하며 장중하여 세상에 그다지 두각을 보이지 않았다. 남들의 선을 칭찬하길 좋아하고 나쁜 점은 일찍이 입 밖에 낸 적이 없었으며, 자신이 몸소 실천한 뒤에 남의 잘못을 말하였으므로 남들도 기꺼이 따랐다. 처자가 굶주림과 추위를 면치 못했으나 태연하게 대처하였으며 깨끗한 방 안에 단정히 앉아 오직 후생을 가르치는 일에만 힘썼으니, 인재를 배양한 공이 실로 많다 할 것이다. 천문(天文), 복서(卜筮), 음률(音律), 서화(書畫)에 대해서도 그 조예가 하나같이 높은 경지에 도달하였는데, 이는 학술을 수양하는 일 가운데 하나였다. 우리나라는 기자(箕子) 이후 비록 문자를 약간 알았다 하더라도 성인의 심법(心法)에 대해서는 소경처럼 앞이 깜깜하다가 고려 말에 목은(牧隱 이색(李穡))과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이 중국에 드나들며 염락(濂洛)의 학문을, 그것이 거의 다 침체된 뒤에 얻어듣고 와서 우리나라에 전파하였다. 하지만 그 문로(門路)를 얻은 자는 적었다. 더구나 그 후 200여 년 동안 스승의 도리를 다하는 사람이 없어 학문을 추구할 줄 아는 자가 드물고 혹시 학문을 추구한다 하더라도 그 전통이 어디서 내려왔는지 알지 못하였다. 오직 선생의 학문만이 그것을 김 선생으로부터 얻어 연원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선정(先正)들이 해를 당한 그해는 선생의 나이가 겨우 약관(弱冠) 무렵이었으므로 그 큰 기준과 원칙이야 비록 전수받은 것이 있다 하더라도 정밀하고 오묘한 진수는 미처 듣지 못했으리라는 것을 대강 알 수 있다. 그렇기는 하나 선생은 ‘학문을 널리 닦아 사리를 알고 예절을 잘 지켜야 한다.〔博文約禮〕’라는 공자의 가르침에 주력하여 마침내 성취한 것이 있었으니, 내심 스스로 깨달은 점이 많았다 할 수 있다.” 하였다.

이장곤(李長坤)
○ 자는 희강(希剛), 호는 금헌(琴軒)이다. 을묘년(1495, 연산군1)에 생원시에 장원하고 임술년(1502, 연산군8)에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벼슬은 우찬성 겸 병조판서까지 지냈다. 본관은 성주(星州)이고 갑오년(1474, 성종5)에 출생하였다.
○ 공은 젊었을 때 형 이장길(李長吉)과 함께 선생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 《기묘보록(己卯補錄)》에 “공은 외모가 헌거롭고 문무의 재주를 겸하였다. 연산조에 홍문관 교리로 거제도(巨濟島)에 귀양 갔다가 연산군이 자기를 의심하는 것이 두려운 나머지 함흥(咸興)으로 도망하여 무자리〔水尺〕 노릇을 하며 살다가 반정(反正) 소식을 듣고 비로소 나왔다. 호기롭고 열쌔며 청렴하고 개결한 기개로 온갖 고충을 치렀고 문무의 고위직을 거치는 동안 모든 직무를 제대로 수행하였다. 기묘년(1519, 중종14) 겨울 11월 15일 저녁에 남곤(南袞)이 급히 서신을 보내 말하기를, ‘나라에 큰일이 있으니 말을 달려 대궐로 들어오시오.’ 하므로 - 이때 공이 병조 판서로 판의금부사를 겸직하고 있었으므로 장차 거사(擧事)하기 위해서는 병조 판서가 없어서는 안 되었기 때문이다. - 공이 황급히 말을 달려 당도하자, 남곤이 말하기를, ‘밀지(密旨)가 있어 홍 판서(洪判書)가 신무문(神武門) 밖에서 왕명을 기다리고 있는 중입니다.’ 하였다. - 앞서 남곤이 홍경주(洪景舟)로 하여금 은밀히 상에게 아뢰게 하기를, ‘변고에 관한 일을 아뢰려고 하는데 가까이 모시는 신하들은 모두 그의 심복입니다. 상황이 위급하니 신무문을 열어 두십시오. 야밤을 틈타 입대(入對)하겠습니다.’ 하였는데, 이는 승정원에서 모르게 하기 위해서였다. - 공은 홍경주, 김전(金詮), 고형산(高荊山)과 함께 신무문 밖에 모이고 - 남곤은 물러나 있고 들어오지 않았다. - 여러 재상이 이미 입궐하고 도총관(都摠官) 심정(沈貞)과 병조 참지 성운(成雲)도 입직하고 있던 장소에서 와 모였다. 이들이 모두 합문(閤門) 밖에 앉아 상에게 편전(便殿)으로 납시라고 청한 뒤에 홍경주가 서계(書啓)를 받들고 입대하였는데, 이는 다름 아닌 조광조(趙光祖) 등의 죄목이었다. 아울러 내고(內庫)의 무기를 대궐 뜰에 진열하도록 한 뒤에 - 이는 죄인을 잡아와 때려죽일 계획이었다. - 홍경주가 입계(入啓)하기를, ‘상황이 급하니 빨리 입직하고 있는 근시(近侍)를 잡아 가둘 것을 명하소서.’ 하였다. 이때에야 정원에서 이런 사태가 벌어진 것을 처음 알았다. 숙직하던 승지 윤자임(尹自任) 등이 합문 밖에 나와 묻기를, ‘재상들이 입궐하면서 그 사실을 정원이 모르게 한 것은 무슨 일입니까?’ 하니, 주위 사람들은 서로 쳐다볼 뿐 아무 말이 없고 공 혼자서만 앉았다 일어섰다 안절부절못하며 말을 할 듯하다가 감히 꺼내지 못했다. 이윽고 내관(內官) 신순강(申順剛)이 나와서 성운(成雲)을 부르자 성운이 칼을 차고 달려 들어갔다. 얼마 안 되어 도로 나와서는 소매 속에 간직한 쪽지를 공에게 넘겨주며 말하기를, ‘어필(御筆)입니다. 이 사람들을 빨리 하옥하십시오.’ 하였다. - 공이 판의금부사였기 때문이었다. - 공이 그 쪽지를 도사(都事) 황세헌(黃世獻)에게 주어 죄인을 잡아 옥으로 보냈는데 - 승지 윤자임과 공서린(孔瑞麟), 주서 안정(安挺), 검열 이구(李構), 응교 기준(奇遵), 수찬 심달원(沈達源)을 모두 하옥하였다. - 밤 3경이었다. 이리하여 합문 밖에 있던 재상들이 모두 입시(入侍)하여 두렵고 놀라운 일로 크게 겁을 주며 상에게 빨리 선전관(宣傳官)과 금오랑(金吾郞)으로 하여금 당인(黨人)을 체포하여 궐하(闕下)로 데려와 주륙하게 할 것을 권하였다. 공은 이때 비로소 그날 밤 당장 그들을 때려죽이자는 논의를 하고 있는 줄 알고 깜짝 놀라 나아가 아뢰기를, ‘군주는 남모르게 물건을 훔치는 도적과 같은 계책을 행해서는 안 되고 또 수상(首相)을 제쳐 놓고 국가의 대사를 행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대신과 함께 논의한 뒤에 죄를 준다 하더라도 늦지 않을 것입니다.’ 하며, 반복하여 극력 간하였다. 홍경주가 무슨 일을 - 상에게 빨리 결정을 내리라고 청하는 일 - 아뢰려고 자리에서 일어나 움직일 기세가 있자, 공이 즉시 팔을 저어 막으며 ‘공은 왜 이렇게 하려 하시오.’ 하며, 자리를 떠나 그 간사한 꾀를 자행하지 못하게 하였다. 상은 노여움이 조금 가시자 그때서야 영의정 정광필(鄭光弼)을 명초(命招)하였는데, 이로 인해 사태가 완화되었다. 영상이 죄인들을 추국(推鞫)하여 죄를 판단해 결정할 것을 청하였고, 공은 김전(金詮), 홍숙(洪淑)과 함께 대간과 승지를 합동으로 심문하자는 뜻으로 입계한 결과 시추(時推)로 조율할 것을 명하였다. - 조광조, 김정(金淨), 김식(金湜), 김구(金球) 4인은 사율(死律)을 적용하고, 윤자임(尹自任), 기준(奇遵), 박세희(朴世熹), 박훈(朴薰) 4인은 장형(杖刑)과 유형(流刑)에다 가족은 노비로 삼으며, 유인숙(柳仁淑), 공서린(孔瑞麟), 홍언필(洪彦弼), 심달원(沈達源), 안정(安挺), 이구(李構), 이자(李耔) 7인은 참의(參議) 이상의 많은 관원이 구원하여 우선 풀려났다. - 영상과 우상 안당(安瑭)이 상을 면대하여 극력 간함으로써 조광조 등에게 사형을 감하여 장(杖)을 친 뒤 귀양 보냈다. 그 후 얼마 안 되어 공은 판의금부사를 사양하여 체직되었다. 대간이 논하기를, ‘공이 전일 죄인들을 추국할 때 엄정하게 국문하지 않아 죄인이 함부로 그의 자와 이름을 부르게 하였으니 파직하소서.’ 하여, 벼슬길에서 물러나 창녕(昌寧)에서 살다 죽었다.” 하였다.

정응상(鄭應祥)
○ 자는 공서(公瑞), 본관은 청주(淸州)이다. - 나의 선조고(先祖考)이다. - 대대로 서울 호현방(好賢坊)에서 살았다. 젊었을 적에 선생에게 수학하였다. 몸가짐이 단정하고 신중하였으며 학문에 뜻을 두어 선생이 사랑한 나머지 마침내 딸을 공에게 시집보냈다.

김정국(金正國)
○ 자는 국필(國弼), 본관은 의성(義城), 호는 사재(思齋)이다. 정덕(正德) 정묘년(1507, 중종2)에 생원 진사가 되고 기사년(1509, 중종4)에 문과에 장원하였다. 벼슬은 병조 참판에 이르렀다. 가정(嘉靖) 신축년(1541, 중종36)에 향년 57세로 죽었다. 모재(慕齋) 김안국(金安國)은 공의 백씨인데, 그가 쓴 묘지(墓誌)에 “내 아우는 타고난 기품이 남다른 데다 젊었을 적에 김 선생 굉필에게 수학하여 사우(師友)의 연원이 있었다. 학문이 뛰어나 세속의 유자들과 크게 달랐고 문장 솜씨가 있어 내용이 풍부하고 논리가 통창하였으며, 만년에 배운 시가 높은 수준에 도달하여 붓대를 잡으면 금방 지어냈는데, 맑고 속되지 않았다. 무엇보다 정사를 처리하는 재주가 있어 어떤 직무를 담당하든 시의에 적합하게 대처함으로써 당대의 기대가 매우 컸다. 그가 세상을 떠나자 평소 서로 알던 사람이거나 모르던 사람이거나 간에 모두 애통해하고 안타까워하였으며, 부음이 나가자 상이 크게 놀라고 애도하였다. 내 아우는 부모에 대한 효성과 형제간의 우애가 천성으로 지극하였고 마음이 맑고 간결하며 담박하여 세상의 사물을 가슴에 두지 않았다. 충성으로 임금을 섬기고 신의로 벗을 사귀었으며, 일가 친족을 사랑하고 서로 화목하게 지내는 등 품행이 고상하고 순결하여 당시 사람들이 모두 중하게 여겼다.” 하였다.

성세창(成世昌)
○ 신축년(1481, 성종12)에 출생하였다. 자는 번중(蕃仲), 본관은 창녕(昌寧), 호는 둔재(遯齋)이며 선생의 문하에서 수업하였다. 신유년(1501, 연산군7) 사마시(司馬試)에 입격하고, 정묘년(1507, 중종2)에 문과에 급제하여 그 즉시 홍문관 정자에 제수되었으며 직제학에서 승지로 제수되었다. 이 당시에 상이 유학(儒學)을 숭상하여 명현(名賢)을 등용하자 훈구(勳舊) 대신들이 질시하며 그 헛점을 노리고 있었는데, 공은 그 낌새를 알고 걱정하였다. 일찍이 충암(冲庵 김정(金淨)), 음애(陰崖 이자(李耔))와 가장 사이좋게 지냈는데, 항상 칼끝이 너무 날카로운 것을 경계하였다. 기묘년(1519, 중종14) 봄에 파주(坡州) 별장에서 병을 조섭하고 있었던 것은 곧 그 화를 피하기 위해서였다. 경진년(1520, 중종15)에 산관(散官)으로 집안에 들어앉아 있을 때 심정(沈貞)이 속으로 공이 청류(淸流)와 노선이 다를 것으로 생각하여 공의 집에 찾아와 대사간에 주의(注擬)하겠다고 꾀자, 공은 자신의 몸이 더럽혀질까 두려워 말하기를, “용렬하고 무능한 내가 어찌 그 직책을 감당하겠습니까. 다만 전일 국가가 백면서생(白面書生)을 죄준 일은 실로 현명하지 못한 처사이고 북문으로 들어가 은밀히 아뢴 일도 매우 바르지 못합니다. 언관(言官)의 책임이 있는 자는 그 일이 비록 이미 지나간 과거사라 하더라도 마땅히 곧은 말로 간하여 그 잘못을 바로잡아야 할 것입니다.” 하니, 심정이 낯빛이 달라지며 그만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이로 인해 당시 집권한 재상들의 미움을 크게 샀다.
남곤(南袞)이 죽고 정 문익공(鄭文翼公 정광필(鄭光弼))이 다시 영상이 된 그 이듬해인 무자년(1528, 중종23)에 기묘년의 청류를 적절히 등용하자는 논의가 있어 이조 참판에 제수되었다. 그 후에 김안로(金安老)가 동궁(東宮)의 보양관(輔養官)이 되어 겉으로 심정을 견제한다고 표방하면서 사실은 그의 간교한 술책을 행사하였으나 어느 누구도 감히 그를 비난하지 못했다. 공은 부제학으로서 분연히 말하기를, “안로라는 인물을 나는 잘 안다. 지금 만일 뜻을 얻는다면 분명히 장차 나라를 그르칠 것이다.” 하고, 동료를 거느리고 탄핵하였다. 그런데 대사간 권예(權輗)와 대사헌 김근사(金謹思)가 김안로의 사주를 받고 도리어 공이 심정을 옹호한다고 무함하여 사실이 아닌 일을 얽어 엄한 벌에 처할 것을 청한 결과 상이 국문하라고 명하였다. 공은 목숨을 잃을까 무서워 결국 허위로 자백함으로써 평해(平海)로 유배되었다. 김안로가 처벌된 뒤에 소환되었다. 을사년(1545, 인종1)에 우상(右相)에 제수되어 사명을 받들고 명나라에 갔다. 이때 이기(李芑) 등이 또 공을 매우 미워하여 공이 유관(柳灌) 등과 반역을 꾀했다고 무함하여 사명을 다 마치고 미처 돌아오기 이전에 장연(長淵)에 유배되었고 얼마 뒤에 죽었다.
일찍이 귀양지에 있을 적에 음애(陰崖)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그를 못내 추모하여 시를 짓기를,
온갖 질병 시름이 한 몸에 모였건만 / 百疾千愁摠到身
생사의 느꺼움이 또다시 엄습하네 / 存亡感慨亦相因
들리나니 청운 길 신진들 그득하고 / 遙聞雲路多新輩
걸핏하면 가을 산 친구가 묻히누나 / 每見秋山葬故人
도의를 생각하는 옛 벗 이제 없거니 / 無復舊交思道義
임금께 옳은 말씀 올릴 걸 기대하랴 / 敢期前席爲敷陳
이 세상 남았댔자 무슨 소용 있으리 / 雖存人世終何益
황천 모두 돌아갔네 지난날의 친지들 / 泉路皆歸昔日親
하였다.
금상(今上) 정묘년(1567, 선조 즉위년)에 원통함을 풀어 주고 직첩을 되돌려 주었다. 손자 성자제(成子濟)는 벼슬이 사예(司藝)에까지 이르렀고 증손 성돈(成惇)도 문과에 급제하였다.
공의 행장에 “타고난 자질이 영걸스럽고 위대하여 일상 생활에 얽매이지 않았으며, 학식이 매우 뛰어나고 문장이 법도에 맞고 아름다워 사원(詞苑)에 오랫동안 재직하였고 문형(文衡)을 맡게 되어서는 사류들이 존경하여 본보기로 삼았다. 음률과 서화에도 두루 정통하고 필법에도 조예가 깊어 당시 사람들이 삼절(三絶)이라 불렀다.” 하였다.


 

[주D-001]염락(濂洛) : 북송(北宋) 이학(理學)의 양대 학파로 염계(濂溪) 주돈이(周敦頤)와 낙양(洛陽)의 정호(程顥), 정이(程頤)를 말한다.
[주D-002]증래(曾萊) : 춘추 시대 말기에 효자로 이름난 초(楚)나라의 노래자(老萊子)와 공자의 제자인 증삼(曾參)의 합칭이다.
[주D-003]척언(摭言) : 《사재척언(思齋摭言)》의 약칭이다. 중종 때 김정국(金正國)이 지은 잡록으로 2권 1책이다. 기묘사화에 대한 기록과 시화(詩話), 명유(名儒)들의 일화 등이 수록되어 있다.
[주D-004]기묘보록(己卯補錄) : 《기묘록보유(己卯錄補遺)》를 가리킨다. 안로(安璐)가 엮은 것으로 2권 1책이다. 김정국(金正國)이 엮은 《기묘당적(己卯黨籍)》에 보유를 붙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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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雜著
智異山日課 a_016_122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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丁未九月二十七日癸亥。發晉州餘沙等村。赴斷俗寺。洞口有廣濟巖門四大字。銘在石面。不知何人所書。入巖門里許。有斷俗寺。隷人之家。杮林竹樹成一村落。中有大伽藍。扁其門曰智異山斷俗寺。門前有편001然禪師碑銘。平章事李之茂撰。大金大定十二年壬辰正月日立。寺西。有神行禪師碑銘。皇唐衛尉卿金獻貞撰。元和八年九月日立。寺北。有鑑玄禪師通照之碑。爲人所拔。僧云俗徒所爲也。翰林學士金殷周撰。開寶八年甲戌七月日立。寺內東北隅。有一室。016_122c崔文昌讀書之房。寺庭。有梅花二株。前朝政堂文學姜通亭手種。梅樹去四五年前枯死。其曾孫用休先生繼種者。余讀편002然碑銘。入與住持聖空語。空乃一庵門人。待余厚。又出見西北二碑。入見用休所種梅。坐於樓上。仰讀用休種梅記。空饋余飯。又飯奴從訖。辭主人下來。至糟淵裸身入浴。水石淸漑。淵北有泉。逬出石面。淸泠異常。余掬手飮之。還出廣濟巖門。越佛嶺。過白雲洞。洞水與德川水合爲苔淵。淵之下流。卽晉州南江。過苔淵。從德川遷上行十餘里。下瞰長川。曠爽快心。行盡洞口入一村。曰壤堂。家家戶戶。鉅016_122d竹成林。杮栗掩靄。柴門鷄犬。依然如武陵朱陳然。其右有矢川洞。矢川者。晉州屬縣也。其縣吏希智異山釋敎。仕至戶長記官。則髡髮着緇。遞任則復爲人。遂成古風。官長不能改其俗。日暮。投德山寺。寺在二水交流之墳。竹木周布。其左有水。瀦而復進。편003龍淵。其右有瀑。落而爲匯。曰婦淵。其深無底。寺主道崇者曾謁匪懈堂。有名禪林。匪懈堂敗。遁跡林泉。見余談論。甚喜。饋余及奴從飯甚備。語及夜半。其徒泂裕,義文,誼化主等皆靑眼待余。是日行四十里。甲子。與道崇,泂裕等歷見左右淵。淵傍竹樹可玩。誼化主饋余飯。016_123a飯後道崇使義文從余嚮導。從婦淵而上。行紅樹中。左歷金藏,解會二庵。右歷石上,百王,兜率,內院四庵。東轉一嶺。而入叢竹中。艱難穿過。登檜房嶺而南下。入管葦田。歷盡葦田而入杻林。路甚艱澁。山行四十里入普庵。杮竹繞屋。主僧道淳摘杮子饋余。淳者曾於無字。破義不精。自謂我外無人。掇誦經念佛。坐臥嘗露陰莖。多方設計。欲聚僧徒爲禪林宗者。與余始談小合。更與語。妄說參差。固執回輪之科。夜半。祝我起寢。語言油油。乙丑。發普庵。望見東上院。過文殊,麻田。行樹底川邊。亂石無路。往往聚石爲塔。以表山路。016_123b余尋石塔行。忽失法界庵路。又逢山雨。將宿石窟下。雨霽復行。得抵香積庵。庵有一僧。名曰一冏。頗聰明。解禪指。曾於無字。纔破大義。一示余六祖檀經。頗淸靜可愛。是日行四十里。丙寅。與義文及冏師自香積登上峯。雲埋風磨。木無完枝。艸無靑葉。霜嚴地凍。天寒倍於山下。雲梯石竇。僅出一人。余等穿土。及登上峯。見所謂天王者。僧曰。此釋伽母摩倻夫人爲此山神。禍福當世。將來代生彌勒佛者。其言一何遼遠而無文據。余坐堂隅石角。微雲四卷。山海可數。全羅,慶尙二道在我脚底。堂內。有禦侮將軍鄭義門懸板記。016_123c友人金大猷等名字書在板上。夕還下香積。往返二十里。十月丁卯朔。留米一斗別一冏。發香積。登少年臺。穿綿竹度鷄足。山行三十里。抵貧鉢庵。庵下有靈神庵。庵後有伽葉殿。世俗所謂有靈驗者。余詳視之。一石頑然。余從伽葉殿後攀枝仰上一山。名曰坐高臺。有上中下三層。余止上中層。心神驚悸。不得加上。臺後有一危石高於坐高臺。余登其石。俯視臺上。亦奇玩也。義文坐臺下。恐懼不得上。是日之西面淸明。倍於曩日。西海及鷄龍諸山。歷歷可辨。須臾。還下貧鉢夕飯。時落日在庵。人寰夜黑。戊辰。發貧鉢。穿靈神。016_123d行西山頂樹木中三十里。抵義神庵。庵之西面。盡爲脩竹。杮木雜生竹間。紅實透日。舂廬溷室。亦在竹間。近日所見佳境無此比。殿內。有金佛一軀。西側室。有僧像一軀。余問此何人。僧曰。此義神祖師也。到此修道。道旣半。此山天王勸祖師移住他所。自爲鷦鷯鳥引路。師隨之。及一大岾。化爲鵰。至今名其岾曰鷦鷯鵰云。鵰又引路。至下無住基。師曰。此地幾日成道。鵰曰。三七日。師遲之。편004又至中無住基。師曰。此地幾日成道。鵰曰。一七日。師又遲之。鵰又至上無住基。不能入。曰。此地可一日成道。非女人所得入。師自入擇地。016_124a結幕精盡。改名曰無住祖師。其言甚厖。余於庵前攤飯。穿竹林中涉三大川。登內堂岾。北視鷦鷯鵰岾。南下草莽中行三十里。抵七佛寺。寺本名雲上院。新羅眞平王朝。有沙飧金恭永之子名玉寶高者。荷琴入智異山雲上院。以琴修心五十餘年。作曲三十調。日日彈之。景德王於街亭。翫月賞花。忽聞琴聲。王問樂師安長一名曰聞福。請長一名曰見福者曰。此何聲。二人曰。此非人間所聞。乃玉寶仙人彈琴聲也。王齋戒七日。玉寶至王前奏曲三十調。王大喜。使安長,請長習之。傳於樂府。更於所居寺。設大伽藍。三十七國。016_124b皆宗此寺爲願堂。有泂首坐者稍解禪法。爲山中衲子師者爲余云云。己巳。寺有溫法主者示余玉寶事跡。與泂首坐所言同。臨別。泂首坐求余詩。余留一絶。西上金輪庵。有田禪師者延入饋果。又過靑窟。泝一川流而上。迷失路者二。其初行。迷已遠而復。其終。不遠復。越一大岾。到伐艸幕。伐艸幕之上。有新幕一間。有衲子一人。曰雪根。來饋余菹菜鹽醬。是日余足生繭。艱難得步。行三十里。庚午。與雪根,義文登般若峯。俯見峯北有昏黑月落之洞。有草幕一間。雪根所居。又其北中鳳山。卽貧鉢峯之北構也。於岡斷處。有寂016_124c照,無住等庵。又其北金鳳山。有金臺庵。峯西有方丈山。山頭有萬福臺。臺東有妙峯庵。臺北有普門庵。一名黃嶺庵。峯南有姑母堂。堂南有牛翻臺。牛翻禪師道場也。峯東有仙人臺。臺東卽雙溪洞也。貧鉢峯當峯之東面。天王峯又當其東北面矣。余西下般若峯之中峯。顧瞻訖。下視牛銅水。水枯而白蟲滿井。非佳玩。是日黃雲回塞。山下所望。只南原而已。日向西。義文催還艸幕。往返二十里。辛未。留米五升別雪根。食後發伐艸幕。過淵嶺登姑母堂。挾右牛翻臺而南下。過寶月,堂窟,極倫等庵。僧云。宋仁宗皇帝愛妃薨逝。016_124d夢告於仁宗曰。妾入高麗國智異山南花嚴寺洞地獄。願爲妾作冥福。帝愴然作極倫寺。其言無文據。未足信也。是日行三十里。抵奉天寺。寺在竹林中。樓前長川。行竹底而鳴。佳刹也。是日聞皇帝陟方之奇。住老六空。辛丑年遊山時見於開城甘露寺者。接余樓上。館余禪堂。壬申。滯雨留奉天。坐樓上覓近體一首。帖在樓囱。癸酉。有首坐道敏者自稱善山金氏。見我絶糧。饋米五升。聞崔忠成弼卿,金鍵子虛等在知及庵。使人寒暄。飯後下觀黃芚寺。寺古名花嚴。名僧緣起所創。寺兩傍皆竹林。寺後有金堂。堂後有塔殿。殿016_125a最明漑。茶花,鉅竹,石榴,杮木環繞其傍。俯視大野。長川橫跨其下。爲熊淵。中庭有石塔。塔四隅。有四柱戴塔。又有婦人中立頂戴狀。僧曰。此緣起毋爲尼者也。其前有小塔。塔四隅。亦有四柱戴塔。亦有男子中立頂戴仰向於戴塔婦人狀。此緣起也。緣起者。故新羅人。從其母入此山創寺。率弟子千人。精盡話道。禪林號爲祖師。夕。弼卿,子虛訪余焉。有法主雪凝。引宿其房。饋梨杮。夜半明燈。弼卿等講論小學,近思錄。凝雖佛者。曾向兪提學鎭受中庸章句者。聞余輩語。弗拂於耳。達曙談話。甲戌。黃芚非勿禪師饋余飯。弼卿,子016_125b虛備酒饌。要余留奉天。空師更請余輩。余與弼卿輩還入奉天。夜觀近思錄。時有知及悟首坐者。聞余輩性情之論。大喜曰。持心省察之功。儒釋無異。乙亥。雪凝使其弟子齎紙。來奉天請詩。余留五字長篇爲別。又別弼卿,子虛二生。弼卿以白鑿四斗爲別。余從黃芚前大路。過求禮鼎頂村。從江邊行過熊淵遷。千山錦綉。水聒聒穿山鳴。步行三十餘里。神氣快暢。至晉州花開洞。棄熊遷泝雙溪水西邊上。左右人家。明如畫屛。自晉州,求禮地境小堠。又步行二十餘里。自西涉東。有兩地石如門。有刻雙溪石門四大字。崔文昌016_125c侯手題者也。石門內一二里許。有雙溪寺。余問僧曰。誰是靑鶴洞。義文曰。未及石門三四里。有東邊大洞。洞內有靑鶴庵。疑是古之靑鶴洞也。余惟李仁老詩杖策欲尋靑鶴洞。隔林惟聽白猿啼。樓臺縹緲三山遠。苔蘚依稀四字題。則石門內雙溪寺前。無乃是耶。雙溪寺上佛日庵下。亦有靑鶴淵。此爲靑鶴洞無疑矣。寺前。有光啓三年七月日所建眞鑑禪師碑銘。乃文昌侯奉敎撰竝書及篆額也。師名慧昭。入唐遊學。還國創此寺。祝上念佛終其身。文昌譽其道泰甚。師無乃文字禪耶。不然。文昌何推之如此耶。余讀碑畢。016_125d渡木根橋。山僧傳云。文昌手戾木根。引渡溪流。其根漸大。因爲橋。後六百年。爲野火所燒。然猶存黑榦。寺前白菊數叢。四季一樹。余坐歇花間不忍去。寺廚接筒引流。筒端水鳴。寺後有金堂。友人餘慶澄源讀書此房。房前有八詠樓故基。卽文昌侯所居室。今則但有鉅竹數十挺矣。夜宿禪堂。有客僧學乳曾從餘慶遊般若峯者。余與談禪。強要余詩。余贈一絶。丙子。泝流上將十里許。左度一峴。到佛日庵。庵乃慧昭鍊道之所。庵前有靑鶴淵。孤雲嘗遊其上。余要庵僧祖成往尋。路僻不得尋。又上普珠庵。乃普珠禪師舊居。庵016_126a因茲得名。有老釋饋余梨杮。還投佛日寓宿。祖成作詩一首贈余。詩韻圓熟。淸曠且密。曾於詩家下功者。要余次韻。余和曰。孤雲歸不駐。靑鶴返何遲。人物無今古。淸寒賈島詩。余觀成才能異常。而有儒家氣象。故云。是日雨雪。丁丑。祖成和余奉天律詩韻。爲余別。余辭成過普珠庵。登佛智嶺。下默溪洞。水石最淸奇。過鼯鼠淵,廣巖淵,龍廻淵。度碑文嶺。抵獅子庵。庵有僧海閒,戒澄迎我。閒乃余少日空門友。不見十餘年。見余靑眼。是時明月中天。鉅竹圍庵。其梢可準人長三四十矣。展談舊懷。夜深乃寢。戊寅。海閒要余強留。016_126b余留焉。食後與海閒,戒澄等下觀五臺寺。寺前有前朝國子司業權편005水精社記刻在碑石。時大宋紹興八年也。水精一名如意珠。戊子年。盲僧學悅建白奪取。藏其名洛山寺塔中。讀碑訖。入坐樓上。有僧饋余杮子。移時還上獅子庵。己卯。別海閒,戒澄。自丁丑至今朝。余及奴從五人。海閒皆辦給糧餉。過五臺。又過河府尹叔孚宅。宅背山臨流。場圃築前。竹林周布。仲長統所稱樂志篇無異也。步行四十餘里。還至餘沙等村。

지리산 일과(日課

 

정미년(1487, 성종18) 9월 27일 계해일

 

진주(晉州) 여사등촌(餘沙等村)을 출발하여 단속사(斷俗寺)로 향하였다. 동구(洞口)에 ‘광제암문(廣濟巖門)’이라는 네 개의 큰 글자가 바위 표면에 새겨져 있으나 누가 쓴 것인지는 모른다. 암문(巖門)에 들어가서 1리쯤 지점에 단속사가 있었다. 예인(隸人)의 집이 감나무 숲과 대나무에 어우러져 한 촌락을 이루었고, 그 가운데 큰 가람(伽藍)이 있었다.
그 문에 ‘지리산단속사(智異山斷俗寺)’라는 현판이 걸려 있었다. 문 앞에 탄연선사비명(坦然禪師碑銘)이 있으니, 평장사(平章事) 이지무(李之茂)가 짓고, 금나라 대정(大定) 12년 임진년(1172, 고려 명종2) 1월에 세운 것이다. 절 서쪽에 신행선사비명(神行禪師碑銘)이 있으니, 당나라 위위경(衛尉卿) 김헌정(金獻貞)이 짓고, 원화(元和) 8년(813, 신라 헌덕왕5) 9월에 세운 것이다. 절 북쪽에 감현 선사(鑑玄禪師) 통조(通照)의 비석이 사람들에 의해 뽑힌 채로 있었다. 승려가 이르기를 “세속의 무리들이 한 짓입니다.” 하였다. 한림학사(翰林學士) 김은주(金殷周)가 짓고, 개보(開寶) 8년 갑술년(974, 고려 광종25) 7월에 세운 것이다.
절 안의 동북쪽 모퉁이에 방 한 칸이 있으니, 문창후(文昌侯) 최치원(崔致遠)이 독서하던 방이다. 절 뜰에 매화 두 그루가 있으니, 전조(前朝)의 정당문학(政堂文學) 강통정(姜通亭)이 손수 심은 것인데 매화나무가 지난 4, 5년 전에 말라죽어 그 증손 용휴(用休) 선생이 다시 심었다.
나는 탄연선사비명을 읽은 뒤에 들어가서 주지 성공(聖空)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었다. 성공은 일암(一庵)의 문인으로, 나를 후하게 대접하였다. 다시 나와서 서쪽과 북쪽에 있는 두 비석을 보고, 들어가서 강용휴가 심은 매화나무를 보았다. 누각 위에 앉아서 고개를 들어 강용휴가 지은 〈종매기(種梅記)〉를 읽었다. 성공이 나에게 밥을 대접하고 또 시종에게도 밥을 내주었다. 식사가 끝난 뒤에 주인과 작별하고 아래로 내려왔다. 조연(糟淵)에 이르러 알몸으로 들어가서 목욕하니, 물과 바위가 맑고 산뜻하였다. 조연 북쪽에 샘이 있는데, 바위 표면에서 솟구쳐 나와서 유달리 맑고 시원하였다. 나는 손으로 움켜서 마셨다.
광제암문을 도로 나와서 불령(佛嶺)을 넘어 백운동(白雲洞)을 지나갔다. 백운동의 물이 덕천(德川)의 물과 합쳐져서 태연(苔淵)이 된다. 태연의 하류는 곧 진주의 남강(南江)이다. 태연을 지나 덕천의 벼랑 위를 따라 10여 리를 갔다. 긴 냇물을 내려다보니 확 트이고 시원하여 마음이 상쾌하였다. 동구를 다 지나서 양당(壤堂)이라는 한 마을에 들어갔다. 집집마다 큰 대나무가 숲을 이루고 감나무와 밤나무가 뒤덮고 있었다. 사립문이나 닭과 개들이 영락없이 무릉도원이나 주진촌(朱陳村)인 듯하였다.
그 오른쪽에 시천동(矢川洞)이 있다. 시천은 진주의 속현(屬縣)이다. 그 현의 아전들은 지리산 석교(釋敎)가 되기를 바라서 벼슬이 호장(戶長)이나 기관(記官)에 이르면 머리를 깎고 승복을 입었다가 체임(遞任)되면 다시 속인으로 돌아오니, 드디어 오랜 풍습이 되어 관장(官長)도 그 풍속을 고칠 수 없었다.
날이 저물어 덕산사(德山寺)에 이르렀다. 이 절은 두 냇물이 합류하는 언덕에 있고, 대나무가 두루 펼쳐져 있다. 그 왼쪽에 있는 냇물은 고였다가 다시 흐르는데 용연(龍淵)이라 하고, 오른쪽에 있는 폭포는 떨어졌다가 소용돌이를 이루는데 부연(婦淵)이라 한다. 그 깊이는 한량이 없다.
주지 도숭(道崇)은 일찍이 비해당(匪懈堂)을 만난 뒤에 선림(禪林)에 이름이 있었는데, 비해당이 패망하자 임천(林泉)에 자취를 감추었다. 나를 만나 담론하며 매우 기뻐하였고, 나와 시종들에게 밥을 대접함이 매우 융숭하였다. 이야기가 한밤중까지 이어졌다. 그의 무리 형유(泂裕), 의문(義文), 의화주(誼化主) 등이 모두 반가운 눈빛으로 나를 대하였다. 이날 40리를 갔다.

 

갑자일(28일)

 

도숭, 형유 등과 함께 용연과 부연을 둘러보았는데, 연못 곁의 대나무가 감상할 만하였다. 의화주가 나에게 밥을 대접하였다. 식사 뒤에 도숭이 의문으로 하여금 나를 데리고 길을 안내하게 하였다. 부연에서 위로 올라가 붉게 물든 나무숲 속을 걸어갔다. 왼쪽으로 금장암(金藏庵), 해회암(解會庵)을 지나고 오른쪽으로 석상암(石上庵), 백왕암(百王庵), 도솔암(兜率庵), 내원암(內院庵)을 지난 뒤에 동쪽으로 고개 하나를 돌아 대숲 속으로 들어가서 어렵게 뚫고 지나왔다. 회방령(檜房嶺)에 올랐다가 남쪽으로 내려와서 갈대밭으로 들어갔고, 갈대밭을 다 지나서 싸리나무 숲으로 들어가니 길이 몹시 험난했다.
산길로 40리를 가서 보암(普庵)에 들어가니 감나무와 대나무가 집을 둘러싸고 있었다. 주지승 도순(道淳)이 감을 따서 대접하였다. 도순은 무(無) 자 화두에 대해 뜻을 간파함이 정밀하지 못하여 스스로 ‘나밖에 아무도 없다.’라고 생각하고는 불경을 외거나 염불하는 것을 그만두고 앉거나 누울 때에 언제나 음경(陰莖)을 드러내 놓았고, 다방면으로 계책을 내어 승도(僧徒)를 모아 선림(禪林)의 종주(宗主)가 되려는 자였다. 나와 처음 담론할 때는 조금 합치했지만, 재차 얘기할수록 망녕된 주장이 들쭉날쭉하고 윤회의 법칙을 고집하였다. 한밤중에 나에게 기침(起寢)이나 잘 하라고 하였는데, 말씨가 부드럽고 공손하였다.

 

을축일(29일)

 

보암을 출발하였다. 동상원사(東上院寺)를 바라보면서 문수암(文殊庵)의 삼밭을 지나 나무 밑의 냇가를 걸어갔다. 어지러운 돌밭에는 길이 없고, 가끔 돌을 모아 탑을 만들어 산길을 표시한 것이 있었다. 나는 돌탑을 찾아가다가 갑자기 법계암(法界庵) 길을 잃었다. 또 산비를 만나 석굴 아래서 묵으려고 하였으나 비가 개어 다시 길을 가서 향적암(香積庵)에 이르렀다.
암자에 한 명의 승려가 있었다. 이름이 일경(一冏)으로, 자못 총명하여 선지(禪指)를 깨달았고, 일찍이 무(無) 자 화두에 대해 대의를 대략 간파하였다. 일경이 나에게 《육조단경(六祖檀經)》을 보여 주었는데, 자못 청정(淸靜)하여 애호할 만하였다. 이날 40리를 갔다.

 

병인일(30일)

 

의문, 일경 선사와 함께 향적암에서 상봉(上峰)으로 올라갔다. 구름에 묻히고 바람에 깎이어 나무는 온전한 가지가 없고 풀은 푸른 잎이 없었다. 서리가 매섭고 땅이 얼어 추위가 산 아래보다 갑절이나 더하였다. 구름사다리와 석굴은 겨우 한 사람이 지나갈 정도였는데 우리들이 뚫고서 올라갔다. 상봉에 올랐을 때에 이른바 천왕(天王)이라는 것을 보았다. 승려가 말하기를 “이는 석가의 어머니 마야부인(摩倻夫人)이 이 산의 신령이 된 것으로, 당세의 화복(禍福)을 주관하다가 장래에 미륵불을 대신하여 태어날 자입니다.” 하였다. 그 말이 어찌 이리 황당하며 근거가 없단 말인가. 나는 사당 모퉁이의 바위 부리에 앉았다. 엷은 구름이 사방으로 걷히어 산과 바다를 헤아릴 수 있었고, 전라도와 경상도가 내 발 밑에 있었다. 사당 안에는 어모장군(禦侮將軍) 정의문(鄭義門)의 현판 기문이 있고, 내 벗 김대유(金大猷) 등의 이름이 현판 위에 적혀 있었다. 저녁이 되어 향적암으로 도로 내려오니, 왕복 20리 길이었다.

 

10월 초하루 정묘일

 

쌀 한 말을 남겨 두고 일경과 작별하였다. 향적암을 출발하여 소년대(少年臺)에 올랐다. 솜대를 뚫고 계족봉(雞足峰)을 지나 산길로 30리를 가서 빈발암(貧鉢庵)에 닿았다. 암자 아래에 영신암(靈神庵)이 있고 암자 뒤에 가섭전(伽葉殿)이 있으니, 세속에서 이른바 영험이 있다는 곳이다. 내가 상세히 살펴보았지만 무딘 석상만 하나 놓여 있을 뿐이었다.
내가 가섭전 뒤쪽에서 나뭇가지를 부여잡고 위를 쳐다보며 산 하나를 올라갔는데, 이름이 좌고대(坐高臺)이다. 상ㆍ중ㆍ하 3층으로 되어 있는데, 나는 중층까지 올라가서 멈추었으니, 심신(心神)이 놀라 두근거려 더는 올라갈 수 없었다. 좌고대 뒤에는 좌고대보다 더 높은 큰 바위가 하나 있는데, 그 바위에 올라 좌고대 위를 내려다보니 또한 기이한 구경거리였다. 의문(義文)이 좌고대 아래에 앉아서는 두려움 때문에 올라오지 못하였다. 이날 서쪽 방면이 전날보다 갑절이나 청명하여 서해와 계룡(鷄龍) 등의 여러 산을 뚜렷이 구분할 수 있었다. 잠깐 있다가 빈발암으로 도로 내려와서 저녁밥을 먹었다. 그 무렵에 지는 해가 암자에 걸렸는데 아래의 인간 세상은 밤처럼 어둡게 보였다.

 

무진일(2일)

 

빈발암을 출발하여 영신암을 통과하고 서쪽 산 정상의 수목 속으로 30리를 가서 의신암(義神庵)에 이르렀다. 암자 서쪽은 모두 긴 대나무이고, 감나무가 대나무 사이에 뒤섞여 나 있었다. 붉은 감이 햇빛에 투명하였다. 방앗간과 뒷간도 대나무 사이에 있었다. 근일에 구경한 아름다운 경치로는 이에 비할 것이 없었다.
전(殿) 안에는 금불(金佛) 하나가 있었다. 서쪽 방에 승상(僧像) 하나가 있어 내가 누구냐고 물었다. 승려가 말하기를 “이분은 의신조사(義神祖師)입니다. 이곳에 이르러 도를 닦다가 도가 반쯤 이루어졌을 때에 이 산의 천왕(天王)이 조사에게 다른 곳으로 옮겨 가기를 권하고 스스로 굴뚝새〔鷦鷯〕가 되어 길을 인도하므로 조사가 그 새를 따라갔습니다. 큰 고개에 이르러 굴뚝새가 수리〔鵰〕로 변하였으니, 지금도 그 고개 이름을 초료조재(鷦鷯鵰岾)라고 합니다. 수리가 또 길을 인도하여 하무주(下無住) 터에 이르렀습니다. 조사가 묻기를 ‘이곳은 며칠이면 도를 이루겠습니까?’ 하니, 수리가 말하기를 ‘삼칠일(三七日)입니다.’ 하였습니다. 조사가 더디다고 여기자, 수리가 또 중무주(中無住) 터에 이르렀습니다. 조사가 묻기를 ‘이곳은 며칠이면 도를 이루겠습니까?’ 하니, 수리가 말하기를 ‘칠일입니다.’ 하였습니다. 조사가 또 더디다고 여기자, 수리는 또 상무주(上無住) 터에 이르러 들어가지 못하고 말하기를 ‘이곳은 하루면 도를 이룰 수 있지만, 여인이 들어갈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 하였습니다. 조사가 스스로 들어가서 터를 잡아 집을 짓고 정진하며 이름을 바꾸어 무주조사(無住祖師)라 하였습니다.” 하니, 그 말이 매우 황당하였다.
암자 앞에서 도시락을 먹은 뒤에 대숲 속을 통과하여 세 개의 큰 내를 건너 내당재(內堂岾)에 올랐다. 북쪽으로 초료조재를 보며 남쪽으로 풀숲 속으로 내려가 30리를 가서 칠불사(七佛寺)에 이르렀다. 절의 본래 이름은 운상원(雲上院)이다. 신라 진평왕(眞平王) 때에 사찬(沙飧) 김공영(金恭永)의 아들로 이름이 옥보고(玉寶高)라는 사람이 있었다. 거문고를 메고 지리산 운상원에 들어가서 50여 년 동안 거문고로 마음을 닦으며 30곡을 작곡하여 매일 연주하였다. 경덕왕(景德王)이 거리의 정자에서 달을 구경하고 꽃을 감상하다가 홀연히 거문고 소리를 들었다. 왕이 일명(一名)이 문복(聞福)인 악사(樂師) 안장(安長)과 일명이 견복(見福)인 악사 청장(請長)에게 묻기를 “이것은 무슨 소리인가?” 하니, 두 사람이 말하기를 “이는 인간 세상에서 들을 수 있는 소리가 아니니, 바로 옥보선인(玉寶仙人)이 거문고를 타는 소리입니다.” 하였다. 왕이 7일 동안 재계하자, 옥보가 왕 앞에 이르러 30곡을 연주하였다. 왕이 크게 기뻐하고 안장과 청장으로 하여금 익혀서 악부(樂府)에 전하게 하였다. 또 그가 거처하던 절에 큰 가람을 세우니, 37국(國)이 모두 이 절을 으뜸으로 여겨 원당(願堂)을 삼았다. 형 수좌(泂首坐)는 선법(禪法)을 조금 알아 산중 승려들의 스승이 된 사람인데, 이상은 그가 나에게 들려준 이야기이다.

 

기사일(3일)

 

이 절의 온 법주(溫法主)가 나에게 옥보고의 사적을 보여 주었는데, 형 수좌가 말한 것과 같았다. 작별할 때에 형 수좌가 나에게 시를 청하기에 내가 절구(絶句) 한 수를 남겼다.
서쪽으로 금륜암(金輪庵)에 올랐다. 전 선사(田禪師)가 우리를 맞아들여 과일을 대접하였다. 다시 청굴(靑窟)을 지나 시내 하나를 거슬러 올라가다가 헷갈려 길을 잃은 것이 두 번이었다. 처음에는 멀리까지 헤매다가 돌아왔고 끝에는 조금 갔다가 돌아왔다. 큰 고개 하나를 넘어 벌초막(伐草幕)에 이르렀다. 벌초막의 위쪽에 새로 지은 초막 한 칸이 있었다. 설근(雪根)이라는 승려 한 사람이 살고 있었는데, 나에게 김치, 간장을 가져다주었다. 이날 내 발에 못이 박혀 간신히 걸으며 30리를 갔다.

 

경오일(4일)

 

설근, 의문과 함께 반야봉(般若峰)에 올랐다. 내려다보니 봉우리 북쪽에 혼흑동(昏黑洞)과 월락동(月落洞)이 있고 초막 한 칸이 있었으니, 설근이 사는 곳이다. 또 그 북쪽의 중봉산(中鳳山)은 곧 빈발봉(貧鉢峰)의 북쪽 줄기이다. 산등성이 끊어진 곳에 적조암(寂照庵), 무주암(無住庵) 등의 암자가 있다. 또 그 북쪽의 금봉산(金鳳山)에는 금대암(金臺庵)이 있다. 반야봉 서쪽에 방장산이 있고, 방장산 꼭대기에 만복대(萬福臺)가 있다. 만복대 동쪽에 묘봉암(妙峰庵)이 있고, 만복대 북쪽에 보문암(普門庵)이 있으니, 일명이 황령암(黃嶺庵)이다. 반야봉 남쪽에 고모당(姑母堂)이 있고, 고모당 남쪽에 우번대(牛翻臺)가 있으니, 우번 선사(牛翻禪師)의 도량(道場)이었다. 반야봉 동쪽에 선인대(仙人臺)가 있고, 선인대 동쪽이 곧 쌍계동(雙溪洞)이다. 빈발봉은 반야봉의 동쪽에 있고, 천왕봉(天王峰)은 또 그 동북쪽에 있다.
나는 서쪽으로 반야봉 중봉(中峰)을 내려갔다. 주위를 둘러본 뒤에 우동수(牛銅水)를 내려다보았다. 물이 마르고 흰 벌레만 우물에 가득하여 좋은 구경거리가 아니었다. 이날 누른 구름이 사방에 자욱하여 산 아래 보이는 곳은 남원(南原)뿐이었다. 해가 서쪽으로 기울자 의문이 초막으로 돌아가기를 재촉하였다. 왕복 20리 길이었다.

 

신미일(5일)

 

쌀 다섯 되를 남겨 두고 설근과 작별하였다. 식사 뒤에 벌초막을 출발하여 연령(淵嶺)을 지나 고모당에 올랐다. 오른쪽으로 우번대를 끼고 남쪽으로 내려와서 보월암(寶月庵), 당굴암(堂窟庵), 극륜암(極倫庵) 등의 암자를 지났다. 승려가 이르기를 “송나라 인종황제(仁宗皇帝)가 총애하던 비(妃)가 죽어 꿈속에 인종황제에게 고하기를 ‘첩은 고려국(高麗國) 지리산 남쪽 화엄사(花嚴寺) 골짜기의 지옥에 들어갔으니, 원하건대 첩을 위하여 명복을 비는 절을 지어 주소서.’ 하니, 황제가 슬퍼하며 극륜사(極倫寺)를 지었습니다.” 하였다. 그 말은 문헌상의 근거가 없어 믿을 것이 못 된다.
이날 30리를 가서 봉천사(奉天寺)에 닿았다. 절은 대숲 속에 있고, 누각 앞의 긴 시내가 대나무 밑을 지나가며 우니, 아름다운 사찰이었다. 이날 황제가 붕어했다는 기별을 들었다. 늙은 주지 육공(六空)은 신축년(1481, 성종12)에 산을 유람할 때 개성(開城)의 감로사(甘露寺)에서 보았던 사람이다. 나를 누각 위로 영접하고 선당(禪堂)에 묵게 하였다.

 

임신일(6일)

 

비에 막혀 봉천사에서 머물렀다. 누각 위에 앉아 근체시(近體詩) 한 수를 지어 누각 창에 붙였다.

 

계유일(7일)

 

수좌(首坐) 도민(道敏)이라는 사람이 스스로 선산 김씨(善山金氏)라고 일컬으며 내가 양식이 떨어진 것을 보고 쌀 다섯 되를 선사했다. 최충성 필경(崔忠成弼卿)과 김건 자허(金鍵子虛) 등이 지급암(知及庵)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사람을 보내서 안부를 물었다.
밥을 먹은 뒤에 내려와서 황둔사(黃芚寺)를 구경하였다. 절의 옛 이름은 화엄사(花嚴寺)로, 명승(名僧) 연기(緣起)가 창건한 것이다. 절의 양쪽은 모두 대나무 숲이었다. 절 뒤에 금당(金堂)이 있고, 금당 뒤에 탑전(塔殿)이 있는데, 전각이 몹시 밝고 산뜻하였다. 차 꽃과 큰 대나무와 석류나무와 감나무가 그 곁을 에워싸고 있었다. 넓은 들판을 내려다보니 긴 시내가 가로로 걸쳐 있는데, 그 아래가 웅연(熊淵)이다.
뜰 가운데에 석탑이 있었다. 탑의 네 모퉁이에 탑을 떠받치는 네 기둥이 있고, 또 부인(婦人)이 중간에 서서 정수리로 떠받치는 형상이 있다. 승려가 말하기를 “이것은 비구니가 된 연기의 어머니입니다.” 하였다. 그 앞에 또 작은 탑이 있었다. 탑의 네 모퉁이에 또한 탑을 떠받치는 네 기둥이 있고, 또한 남자가 중간에 서서 정수리로 떠받치며 탑을 떠받치고 있는 부인을 우러러 향하고 있는 형상이 있으니, 이것이 연기이다. 연기는 옛날 신라 사람으로, 그 어머니를 따라 이 산에 들어와서 절을 세웠다. 제자 천 명을 거느리고서 화두(話頭)를 정밀히 탐구하니, 선림(禪林)에서 조사(祖師)라고 불렀다.

저녁에 필경과 자허가 나를 찾아왔다. 법주(法主) 설응(雪凝)이 인도하여 그의 방에 묵게 하고 배와 감을 대접하였다. 한밤중에 등불을 밝히고 필경 등이 《소학(小學)》과 《근사록(近思錄)》을 강론하였다. 설응은 비록 불자(佛者)이지만 일찍이 제학(提學) 유진(兪鎭)에게 《중용장구(中庸章句)》를 배운 사람이라서 우리들의 말을 듣고도 거북해하지 않았다. 밤을 새우며 얘기하였다.

 

갑술일(8일)

 

황둔사 비물 선사(非勿禪師)가 나에게 밥을 대접하였다. 필경과 자허가 술과 안주를 마련하여 나에게 봉천사에서 유숙하기를 청하였다. 육공 대사가 다시 우리들을 청하므로, 내가 필경 등과 함께 도로 봉천사에 들어갔다. 밤에 《근사록》을 보았다. 그때 지급암의 오 수좌(悟首坐)가 우리들의 성정(性情)에 관한 논의를 듣고 크게 기뻐하며 말하기를 “마음을 잡거나 성찰하는 공부는 유가와 불가가 다름이 없습니다.” 하였다.

 

을해일(9일)

 

설응이 그 제자를 시켜 종이를 가지고 봉천사로 와서 시를 청하거늘 내가 오언(五言) 장편(長篇)을 남기고 작별하였다. 또 필경, 자허 두 사람과 작별하니, 필경이 흰쌀 4말을 주며 작별하였다.
나는 황둔사 앞의 큰길을 따라 구례(求禮) 정정촌(鼎頂村)을 지나갔고, 강변을 따라가다가 웅연 벼랑길을 지나갔다. 온 산은 비단으로 수 놓였고, 물은 콸콸거리며 산을 뚫고 울었다. 걸어서 30여 리를 가니 정신이 상쾌하였다. 진주(晉州) 화개동(花開洞)에 이르렀다. 웅연 벼랑길을 벗어나 쌍계천(雙溪川) 서쪽 가를 거슬러 올라갔다. 좌우의 인가(人家)가 그림 병풍처럼 환했다. 진주와 구례 경계의 소후(小堠)에서 또 20여 리를 걸어갔다. 서쪽에서 동쪽을 건너자 문처럼 생긴 양쪽의 바위가 있었다. ‘쌍계석문(雙溪石門)’이라는 네 개의 큰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문창후(文昌侯) 최치원(崔致遠)이 손수 적은 것이다. 석문 안 1, 2리쯤에 쌍계사(雙溪寺)가 있었다.
내가 승려에게 묻기를 “어디가 청학동이오?” 하니, 의문이 말하기를 “석문을 3, 4리쯤 못 미쳐 동쪽으로 큰 골짜기가 있고, 그 골짜기 안에 청학암(靑鶴庵)이 있으니, 아마 옛날의 청학동인 듯합니다.” 하였다. 내가 생각건대 이인로(李仁老)의 시에,

지팡이 짚고서 청학동 찾으려 하니 / 杖策欲尋靑鶴洞
숲 너머로 들리는 건 원숭이 울음뿐 / 隔林惟聽白猿啼
누대는 아득하고 삼신산은 저 멀리이니 / 樓臺縹緲三山遠
이끼 속에 어렴풋이 네 글자 적혀 있네 / 苔蘚依稀四字題

하였으니, 석문 안 쌍계사 앞이 여기가 아니겠는가. 쌍계사 위 불일암(佛日庵) 아래에 청학연(靑鶴淵)이 있으니, 여기가 청학동임은 의심할 것이 없다.
절 앞에 광계(光啓) 3년(887, 신라 진성여왕1) 7월 모일에 세운 진감선사비명(眞鑑禪師碑銘)이 있으니, 바로 문창후가 교서(敎書)를 받들어 짓고 글씨와 전액(篆額)도 아울러 쓴 것이다. 선사의 이름은 혜소(慧昭)이다. 당나라에 들어가 유학하였고, 고국에 돌아와서 이 절을 창건하고 임금을 위해 염불하며 일생을 마쳤다. 문창후가 그의 도를 칭찬한 것이 너무 심하니, 선사는 문자선(文字禪)을 한 사람이 아니겠는가. 그렇지 않다면 문창후가 어찌 추앙함이 이와 같단 말인가.
내가 비석을 다 읽고서 나무뿌리로 된 다리를 건넜다. 산승(山僧)이 전하기를 “문창후가 손으로 나무뿌리를 틀어잡고 시냇물을 건너자, 그 뿌리가 점점 커져 다리가 되었던 것입니다. 600년 뒤에 들불에 타게 되었으나 아직도 검은 줄기가 남아 있습니다.” 하였다.
절 앞에 흰 국화 몇 떨기와 사계화(四季花) 한 그루가 있었다. 내가 꽃 사이에 앉아 쉬면서 차마 떠나가지 못하였다. 절의 부엌은 대통을 이어서 시냇물을 끌어들이니, 대통 끝에 물소리가 울렸다. 절 뒤에 금당(金堂)이 있으니, 친구 여경(餘慶)징원(澄源)이 이 방에서 글을 읽었다. 방 앞에 팔영루(八詠樓) 옛터가 있으니, 곧 문창후가 거처하던 방이다. 지금은 큰 대나무 수십 줄기만 있을 뿐이다. 밤에 선당(禪堂)에서 묵었다. 객승 학유(學乳)가 있었다. 일찍이 여경을 따라 반야봉을 유람한 사람으로, 내가 그와 함께 선(禪)을 얘기하였다. 나에게 시를 애써 요구하기에 내가 절구 한 수를 지어 주었다.

 

병자일(10일)

 

시냇물을 10여 리쯤 거슬러 올라서 왼쪽으로 고개 하나를 넘어 불일암에 이르렀다. 이 암자는 바로 혜소가 도를 닦던 곳이다. 암자 앞에 청학연이 있으니, 고운(孤雲)이 일찍이 그 위에서 노닐었다. 내가 암자의 승려 조성(祖成)에게 찾아가 보기를 청하였으나 길이 궁벽하여 찾을 수 없었다. 또 보주암(普珠庵)에 올랐다. 바로 보주 선사(普珠禪師)의 옛 거처이니, 암자의 이름이 이로 인하여 붙여진 것이다. 어떤 노승(老僧)이 나에게 배와 감을 대접하였다.
불일암으로 돌아와서 묵었다. 조성이 시 한 수를 지어 나에게 주었는데, 시운(詩韻)이 원숙(圓熟)하며 청광(淸曠)하고 주밀(周密)한 것으로 보아 일찍이 시 짓는 데에 노력을 기울인 사람이다. 나에게 차운하기를 요구하여 내가 다음과 같이 화답하였다.

고운은 돌아가서 머물지 않고 / 孤雲歸不駐
청학은 돌아옴이 어찌 더딘가 / 靑鶴返何遲
인물은 고금에 다름이 없으니 / 人物無今古
맑고 빈한한 가도의 시일세
/ 淸寒賈島詩

내가 보기에 조성은 재능이 비상하고 유가(儒家)의 기상이 있기 때문에 운운한 것이다. 이날 눈이 내렸다.

 

정축일(11일)

 

조성이 나의 봉천사(奉天寺) 율시(律詩)에 화운(和韻)하여 나를 송별하였다. 조성과 작별하고 보주암을 지나 불지령(佛智嶺)에 올랐다가 묵계동(默溪洞)으로 내려가니, 물과 바위가 매우 맑고 기이하였다. 오서연(鼯鼠淵), 광암연(廣巖淵), 용회연(龍廻淵)을 지나고 비문령(碑文嶺)을 넘어 사자암(獅子庵)에 이르렀다.
이 암자에 있는 승려 해한(海閒)과 계징(戒澄)이 나를 맞이하였다. 해한은 바로 나의 젊은 날 불가(佛家)의 벗이다. 10여 년을 보지 못했더니, 나를 보고 반가워하였다. 이때 밝은 달이 하늘 가운데 떴고 큰 대나무가 암자를 에워싸고 있는데 가지 끝의 높이가 사람 키의 3, 4십 배 정도였다. 말을 주고받으며 오랜 회포를 풀다가 밤이 깊어서야 잠자리에 들었다.

 

무인일(12일)

 

해한이 나에게 굳이 머물기를 청하므로 그대로 머물렀다. 식사 뒤에 해한, 계징 등과 함께 내려가서 오대사(五臺寺)를 구경하였다. 절 앞에 고려 국자 사업(國子司業) 권적(權適)의 〈수정사기(水精社記)〉가 새겨진 비석이 있다. 송나라 소흥(紹興) 8년(1138, 고려 인종16)에 세워진 것이다. 수정(水精)은 일명이 여의주(如意珠)이다. 무자년에 맹승(盲僧) 학열(學悅)이 나라에 건의한 뒤에 탈취하여 그것을 낙산사(洛山寺) 탑 속에 자신의 이름과 함께 안치하였다. 비문을 다 읽고 들어가 누대 위에 앉았다. 어떤 승려가 나에게 감을 대접하였다. 한참 있다가 사자암으로 도로 올라갔다.

 

기묘일(13일)

 

해한, 계징과 작별하였다. 정축일(11일)부터 오늘 아침까지 나와 노복 다섯 사람에게 해한이 모두 식량을 마련해 주었다.
오대사를 지나 또 부윤(府尹) 하숙부(河叔孚)의 집을 들렀다. 집이 산을 등지고 물을 마주하였으며 채소밭이 앞에 일구어져 있고 대나무 숲이 두루 펼쳐졌으니, 중장통(仲長統)이 〈낙지론(樂志論)〉에서 말한 것과 다름이 없었다. 40여 리를 걸어가서 다시 여사등촌에 이르렀다.

[주D-001]탄연선사비명(坦然禪師碑銘) : 원문은 ‘皎然禪師碑銘’으로 되어 있는데, 본문의 내용을 참조하여 ‘皎’를 ‘坦’으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아래도 같다. 현존하는 이 비명의 사본(寫本)에는 ‘대감국사비문(大鑑國師碑銘)’이라 되어 있으며 현재 비는 전하지 않는다. 대감국사의 휘가 탄연이다.
[주D-002]대정(大定) : 금나라 세종(世宗)의 연호이다.
[주D-003]원화(元和) : 당나라 헌종(憲宗)의 연호이다.
[주D-004]개보(開寶) 8년 갑술년 : 개보는 송나라 태조의 연호이다. 갑술년은 개보 7년으로, 착오가 있는 듯하다.
[주D-005]강통정(姜通亭) : 강회백(姜淮伯 : 1357~1402)을 가리킨다. 통정은 호이다.
[주D-006]용휴(用休) 선생 : 강귀손(姜龜孫 : 1450~1505)을 가리킨다. 용휴는 자이다.
[주D-007]주진촌(朱陳村) : 중국 강소성(江蘇省) 풍현(豊縣)에 있는 마을 이름으로, 백거이(白居易)의 〈주진촌〉 시에 등장한다. 깊은 산속에서 외부와의 왕래 없이 자급자족하며 평화롭게 살아가는 주씨(朱氏)와 진씨(陳氏)의 마을이다.
[주D-008]용연(龍淵)이라 하고 : 원문은 ‘白龍淵’으로 되어 있는데, 초간본(初刊本)에 근거하여 ‘白’을 ‘曰’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09]비해당(匪懈堂) : 안평대군(安平大君)의 당호(堂號)이다.
[주D-010]기침(起寢) : 절에서 새벽에 일어나 종을 치고 부처에게 염불 배례하는 일을 말한다.
[주D-011]뚫고서 올라갔다 : 원문은 ‘穿土’로 되어 있는데, 초간본에 근거하여 ‘土’를 ‘上’으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12]김대유(金大猷) : 김굉필(金宏弼 : 1454~1504)을 가리킨다. 대유는 자이다.
[주D-013]수리 : 원문은 ‘師’로 되어 있는데, 문맥상 ‘鵰’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14]소후(小堠) : 역로(驛路)의 10리마다 설치하는 작은 돈대(墩臺)이다. 돈대에는 거리와 지명을 새겨 넣는다.
[주D-015]광계(光啓) : 당나라 희종(僖宗)의 연호이다.
[주D-016]문자선(文字禪) : 글을 통해 선학의 이치를 깨닫는 것을 말한다.
[주D-017]여경(餘慶) : 홍유손(洪裕孫 : 1431〜1529)의 자이다. 본관은 남양(南陽), 호는 소총(篠叢) 또는 광진자(狂眞子)이다. 남효온 등과 함께 죽림칠현으로 자처하였다.
[주D-018]징원(澄源) : 양준(楊浚)의 자이다.
[주D-019]고운(孤雲) : 최치원(崔致遠)의 호이다.
[주D-020]인물은……시일세 : 옛날의 가도(賈島)와 같은 인물의 시라는 것이다. 가도는 당나라 시인으로, 일찍이 승려가 되었다가 환속하였다. 평생토록 몸이 수척하고 몹시 곤궁하였다고 한다.
[주D-021]권적(權適) : 원문은 ‘權迪’으로 되어 있는데, 《동문선(東文選)》 권64〈지리산수정사기(智異山水精社記)〉에 근거하여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22]소흥(紹興) : 남송(南宋) 고종(高宗)의 연호이다.
[주D-023]중장통(仲長統) : 후한(後漢) 때의 사람으로, 자(字)가 공리(公理)이다. 공명에 뜻을 두지 않고 자연 속에 한가히 노니는 것으로 즐거움을 삼아 〈낙지론(樂志論)〉을 지어 자신을 뜻을 밝혔다. 《古文眞寶後集 卷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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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宏弼字大猷。受業於佔畢齋。庚子年生員。與余同庚。而日月後於余。居玄風。獨行無比。平居必冠帶。室家之外。未嘗近色。手不釋小學。人定然後就寢。鷄鳴則起。人問國家事。必曰。小學童子何知大義。嘗作詩曰。業文猶未識天機。小學書中悟昨非。佔畢齋先生批云。此乃作聖之根基。魯齋後豈無其人。其推重如此。年三十後。始讀他書。訓後進不倦。如賢孫,李長吉,李勣,崔忠成,朴漢恭,尹信皆出門下。茂材篤行如其016_137c師。年益高。道益邵。熟知世之不可回。道之不可行。韜光晦迹。然人亦知之。佔畢先生爲吏曹參判。亦無建明事。大猷上詩曰。道在冬裘夏飮氷。霽行潦止豈全能。蘭如從俗終當變。誰信牛耕馬可乘。先生和韻曰。分外官聯到伐氷。匡君救俗我何能。從敎後輩嘲迂拙。勢利區區不足乘。蓋惡之也。自是貳於畢齋。丁未年。遭父憂。饘粥哭泣之哀。絶而復穌。
安遇字時叔。孝行冠於鄕。居父喪。一從家禮。從佔畢齋受業。旣而無仕心。始貳於畢齋。嘗擧於鄕。赴京入會試。四館年少者驕傲。長老鄕生欲撻之。時叔曰。安016_137d可以父母遺體。無罪而自毀。以求名利乎。不入而去。操節可方東漢云。
權晏安東人。字和淸。年先於余二十餘歲。嘗曰。吾幸不死。垂亡之年。得遇三友。謂余及正中,克昌也。少時。以武才屬別侍衛。爲人淸如於陵仲子。喜山水。樂道眞。孝弟忠信。無能出其右者。屋毀不蔽風雨。或糧絶。其樂晏如。短褐蕭然。末路好佛。
鄭汝昌字自勖。入智異山。三年不出。明五經。窮極其蘊。知體用之源同分殊。知善惡之性同氣異。知儒釋之道同迹差。性理之學。醒狂敬之。庚子年。上下敎016_138a成均館。求經明行修儒生。館中擧自勖爲第一。知館事徐居正將進自勖而講經。自勖退。癸卯年進士。其父六乙。施愛之亂死國。是時自勖年少。居喪無闕。居母喪。典禮之數。饘粥之食。一依家禮。庚戌年。參議尹兢薦其孝與學士林無比。特召爲昭格署參奉。自勖上書請免。上下敎褒之。名益重。自勖爲人。性端重。不飮酒醴。不茹葷菜。不食牛馬肉。外爲常談。內惺惺也。少時。居館與人寢。鼾睡而不寐。人不知也。一宵見獲於崔鎭國。館中喧傳。以爲鄭某參禪不寐。
貞恩字正中。號月湖。又號嵐谷。又號雪囱。拜秀川副016_138b正。音律冠於世。幽彈慷慨。行路必泣。爲人篤厚自謙。識量聰明。爲學。先理而後文。師不勞。爲詩。先格而後辭。人不厭。爲德。先內而後外。人不知。行身。不以位尊壓人。如最貧儒生然。
李坋字子野。居長安。好賢樂善。恬於勢利。詩學甚富。大猷伏其機軸深遠。
盧祖同字公緖。好讀小學。不喜躐等之學。嘲弄之文。科擧之才。持身守法。略與大猷同。居父喪。廬墓三年。一依家禮。與時叔同學於佔畢齋之門。先生敬之。
鄭世麟字昌符。居嶺南。受業於佔畢齋之門。其學同016_138c於公緖。而詩才甚高。先生敬之。丙午年歿。年二十二。楊浚字澄源。受業於佔畢齋。深沈有大度。安貧樂道。淡如也。又局量雄深。修爲不形於色。而聰明日進。儒林最卑下之。餘慶獨知之。
金時習。江陵人。新羅之裔。先余二十歲。字悅卿。號東峯。又號碧山淸隱。又號淸寒子。世宗乙卯年生。五歲。能屬文。世宗命招承政院賦詩。大異之。召其父敎之曰。善養此兒。予將大用。乙亥年。光廟攝政。入沙門。名曰雪岑。入居水落山精舍。修道鍊形。見儒生則言必稱孔孟。絶口不道佛法。人有問修鍊事。亦不016_138d肯說。或有言金乖崖守溫坐化之事。岑曰。坐化於禮不貴。吾但知曾子之易簀。子路之結纓以死之爲貴也。不知其他。辛丑年間。食肉長髮。爲文以祭祖父曰。伏以帝敷五敎。有親居先。罪列三千。不孝爲大。凡居覆載之內。孰負養育之恩。故惡獸莫過虎狼。而微蟲無踰豺獺。能全愛親之性。又謹報本之誠。是皆天理之固然。而物欲之難蔽者也。伏念愚騃小子。似續本支。少沈滯於異端。嗟迷懵而未講。將修道可以薦拔。悟謊說莫如輪廻。壯歲因循。末路方悔。乃考禮典。搜聖經。攷定追遠之弘儀。參酌淸貧之活計。務簡而潔。016_139a在腆以誠。漢武帝七十年。始悟田丞相之說。元德公一百歲。乃化許魯齋之風。感霜露之沾濡。憂歲月之逾邁。驚惶無已。嘆訝良多。如贖舊愆。儻納堪輿之兩際。庶將面目。得拜祖宗於九原。自壬寅以後。睹世將衰。不爲人間事。爲棄人於閭閻間。日與人爭訟於掌隷院。一日。飮酒過市。見領議政鄭昌孫曰。汝奴宜休。鄭若不聞。人以此危之。其嘗與交遊者。皆絶不往來。獨與市僮狂易者。遨遊醉倒於道側。恒愚恒笑。後或入雪岳。或居春川山。出入無常。人莫知其涯涘也。其所喜者。正中,子容,子挺及余。所著詩文數萬餘篇。播016_139b遷之際。散亡殆盡。朝臣儒士。或竊取之以爲己作。
洪裕孫字餘慶。號篠叢。又號狂眞子。南陽吏順致之子。家世淸貧。僅裹身體。或不裙行。涉躐經史。放達不撿。不喜科擧。不爲免鄕計。辛丑年。南陽守蔡申甫以餘慶爲能文。放其役。卽步歸嶺南。謁佔畢齋受杜詩。先生曰。此子已見顏子所樂處。學者皆宗之。入頭流山肄業。到京。諫先生不建白時事。何空取人爵祿爲也。且當今學者莫不惡佛,老。而行己無一箇免於佛,老者。行圓而惡方者老也。行獨而不恤者佛也。先生大惡之。自是每稱餘慶譎詐。餘慶亦自晦行。衣食於016_139c朱門而已。爲人文如▒▒。詩涉山谷。材挾孔明。行如曼倩。
柳從善。晉州人。字如登。居山自晦。朋戚罕見其面。
禹善言初字德父。號楓崖。丹城君貢之子。爲人倜儻。辛丑年。南行嶺南。謁佔畢齋先生於廬幕。先生字之曰子容。
金圽字介仲。康津人。觀察使之子。端重好潔。癸卯年生員。重科第。
崔河臨字鎭國。號太虛堂。所性喜功名。庚子年進士。是年夏。妖僧學祖敎其徒雪義潛回佛像。云佛自行。016_139d致粟帛布錦。日以千數。大學生上書請誅妖僧。凡五上書。不得允。疏文大抵皆出鎭國手。丙午七月歿。年三十二。家貧不能斂葬。友人致賻而葬之。所著安宅記傳于世。
李達善字兼之。性喜善。丙午年。及第第三名。調宗簿寺直長。
權景裕字君饒。安東人。剛毅識體。不喜作爲。深嫉姜公直。以爲不近人情。晩聞實行。甚愛之。癸卯年進士。丙午年及第。調弘文館正字。
李尹宗字克昌。號此君堂。又號竹谿。工於詩文。爲人016_140a好賢。公直自勖,伯淵,和淸。其所絶喜者也。
高淳字煕之。又字太眞。又字眞眞。濟州人。爲人有聾病。人畫地成字以致意焉。戊戌年。應詔。上書論時政。得妄名。人或告之。煕之聞而喜之。自號妄人。煕之初見辛德優於諸儒中。諸儒相與語詡詡。煕之書一絶於小紙云。小閣春風靜。淸談摠有餘。聾人無一味。垂首獨看書。德優喜之。和其詩曰。世聲聒溷濁。糞壤嗟鼻餘。羨君勝房老。晝隱千卷書。自是以爲知心交。戊申年。生員。
辛永禧字德優。靈山人。宰臣碩祖之孫。倜儻不羈。磊016_140b磊多大節。不喜科名。詩名播聞中外。成參議俔。以其詩爲出入蘇黃。癸卯年進士。自後不應擧。
李宗準字仲鈞。號浮休子。又號尙友堂。又號太庭逸民。又號藏六居士。又號慵軒居士。能詩文。丁酉年進士。丙午年。及第第二名。今爲平安評事。少時。不識君饒。與余及正中。乘月翫花。到君饒家。余誣君饒曰。好賢坊杏花下。有異人吟詩。招與偕來。聞其語。倜儻不羈。見其詩。淸泠出塵。非煙火食人所道。世有仙者。無乃是耶。君饒倒屣出迎。相與坐月下。仲鈞作詩。故作淸瘦態。君饒果大服。跪曰。陋幕至僻。秀才何因我情016_140c友幸臨耶。豈非天幸也。幸望一宿。仲鈞必欲求去。君饒跪奉衣裾而請。雷談竟夜。朝明。始識於背洞 於背洞名 寓居進士李宗準也。相與拊掌大笑。仲鈞,君饒遂爲知心交。
金應箕字伯春。丁酉年及第。今爲禮曹正郞。新羅宗姓方慶之後。
金應奎字仲星。應箕之弟。慷慨有大節。父之慶鍾愛之。丁酉年。年二十。擧平安道鄕貢。連魁三科。入進士會試。死於場。時議惜之。有子一人。
摠字百源。拜茂豐副正。太宗曾孫也。琴才與正中016_140d齊。宏量過之。卜築楊花渡口。自刺漁舟。自號西湖主人。
賢孫字世昌。神堯之後。官至鳴陽副正。年後余十三歲。動以法律身。篤行亞於大猷。嘗欲行冠禮。大猷止之。丁母憂。一從家禮。
尹信字任之。坡州之世家。文肅公之後。行同世昌。而深沈和緩過之。師事大猷。
李勣字仲栗。工於詩。後攻庸學。味其道。自是不專攻詩道。志尙高遠。不事窠臼中事。尙友古人。平居冠帶。澹澹如也。師事大猷伯淵。
016_141a許磐字文炳。癸卯年。進士。志於性學。恬於進取。欲事事師古。師友大猷。大猷服其端雅出於天性。蔭補調社稷參奉。時左相洪應爲提調。文炳說之曰。王世子。國之儲君也。他日東方萬姓之所仰賴者。今與宦寺居處。進見書筵之時少。遊玩狎昵之時多。請云云。
○閔龜孫字瑞卿。驪州人。故僉正粹之子。子挺婦弟。嘗學詩於子挺。少焉卽工。又從正中,貞之仲栗遊。師事大猷。爲人端雅無累。
申用漑。高靈人。字漑之。深沈有大度。工詩能文。叔舟乃其祖也。父沔死於施愛。
016_141b李胄。固城人。字胄之。賢而能文。容軒先生之曾孫也。
○李黿字浪翁。益齋齊賢之後。朴參判彭年乃外王父也。二家賢能。萃于一人。
李繼孟字希醇。佔畢齋取其詩文。居全州。淸修出衆。
○李世則字效翁。延安君叔琦之子。慷慨好直。淸操過人。能於詩文。
張世弼字彥卿。居高陽。家貧事母。必有酒肉。少不學。僅記姓名。
崔世明字葆光。好讀書。重仕進。丁酉年。進士。
安繼宋字于胤。號薄田。爲人性癡。詩酒之外。餘無留016_141c心。人知與不知。皆稱薄田而笑之。薄田不知也。承蔭拜敦寧府直長。到今十七年不遷。恬於勢利。可知也。
○申誧字持正。號虛舟。工詩畫。家貧喜酒。嘗自號藏六。仲鈞喜其號。請以酒一편001易之。持正許焉。
丘永安。江陵人。字仲仁。號편002隱。有文名。己丑年。生員第二名。重仕重利。又陰陽,推步,風水,醫術,仙釋,乘除之法。無不涉獵。
深源字伯淵。號醒狂。又號默齋太平眞逸。太宗之玄孫。與余同年生。日月後於余。經明有行。兼通醫術。性忠孝。不喜巫佛。平居冠帶。手不釋卷。殿講。通四書016_141d五經。進階明善大夫。行朱溪副正。年二十五。凡前後五上書論治道。或允或不允。又廷論叔母夫任士洪不道異心。失意於祖父。謫長湍。又謫伊川。上書請見病父母。言語懇至。得允。丁未年宗親科試。講經史擢第一人。賜藥賜酒。賜階二品而不封。以前有忤祖父之過也。
姜應貞字公直。號中和齋。先余十餘歲。居恩津。以孝行稱。嘗母病。三年不解帶。藥必親嘗。一日夢。天神降庭謂公直云。明日來客。必醫汝母病。明朝。果有一少年名元。自云居輪王洞。請宿於公直。館之。以母病問016_142a之。少年果知醫藥者。以少年言試之。十五日病愈。後居父母喪。一從家禮。冬月裸跣。體無完肉。事聞。旌表門閭。甄家丁役。公直爲人。善誦經書。推步人命。又涉獵醫術。兼涉地理之書。少時遊大學。與長安俊士。依朱文公故事作鄕約。或月朝講論小學。其選皆一時名士。如金用石字鍊叔。申從濩字次韶。朴演字文叔。孫孝祖字無忝。鄭敬祖字孝昆。權柱字友卿。丁碩亨字嘉會。康伯珍字子韞。金允濟字子舟。此其尤也。餘不盡錄。世之不悅者喧之。或指爲小學之契。或指爲孝子之契。有夫子四聖十哲之譏。坎軻鄕曲。終老016_142b不試。癸卯年。生員。爲訓導。
安應世。竹山人。字子挺。號月囱。又號鷗鷺主人。又號煙波釣徒。又號黎藿野人。後於余一歲。爲人淸澹洒落。安貧喜分。不求名利。不學仙佛。不喜博奕。能詩。尤長於樂府。嘗曰。不義之財。補止於家。不義之食。補止五臟。尤不可犯也。子挺之操心。類如此。白玉之疵。喜酒色也。庚子年進士。是年九月歿。年二十六。知與不知莫不痛之。下止字恐誤
蔡恂字叔孚。居陽川。庚子年。進士。爲人重科擧。
韓訓字學而。淸州人。居長安。工詩。丙午年。進士。
016_142c姜訢字時可。晉州人。觀察使子平之末子。始從餘慶于密陽。受杜詩於佔畢齋。次從德優學詩。次從大猷攻小學。次從時叔,公緖。讀詩於兪克己廬幕。
趙自知。平壤人。字性之。好施好賢。好山水好遊戲。不喜功名。深沈少言語。學於餘慶。能詩。
康伯珍字子韞。
金用石字鍊叔。
李長吉
崔忠成字弼卿。
盧燮
016_142d柳房
趙元紀
趙廣臨
鄭鵬
秋江書于敬止齋

사우명행록(師友名行錄)

〇 김굉필(金宏弼)은 자가 대유(大猷)이다. 점필재 김종직(金宗直)에게 수업하였고, 경자년(1480, 성종11)에 생원시(生員試)에 입격하였다. 나와 나이가 같으나 생일이 나보다 늦다. 현풍(玄風)에 살았다. 고상한 행실은 비할 데가 없어 평상시에도 반드시 의관을 갖추었고, 본부인 외에는 일찍이 여색을 가까이하지 않았다. 손에서 《소학》을 놓지 않았으며, 인정(人定)이 된 뒤라야 잠자리에 들고 닭이 울면 일어났다. 사람들이 국가의 일을 물으면, 반드시 말하기를 “《소학》을 읽는 아이가 어찌 큰 의리를 알겠는가.” 하였다. 일찍이 시를 짓기를,
학문에 종사해도 천기를 알지 못했지만 / 業文猶未識天機
《소학》의 글 속에서 어제의 잘못을 깨닫노라 / 小學書中悟昨非
하였다. 점필재 선생이 평하기를 “이것은 곧 성인이 되는 근본 터전이니, 노재(魯齋) 이후에 어찌 그러한 사람이 없다고 하겠는가.” 하였으니, 그를 추중함이 이와 같았다.
나이 30이 된 뒤에 비로소 다른 책을 읽었고, 후진을 가르치는 데에 게을리 하지 않았다. 이현손(李賢孫), 이장길(李長吉), 이적(李勣), 최충성(崔忠成), 박한공(朴漢恭), 윤신(尹信)과 같은 사람이 모두 그의 문하에서 나왔으니, 그 무성한 재질과 독실한 행실이 그 스승과 같았다.
나이가 들수록 도가 더욱 높아졌기에 세상이 만회될 수 없고 도가 행해질 수 없음을 익히 알아 빛을 감추고 자취를 숨겼다. 그러나 사람들이 또한 이러한 것을 알아주었다.
점필재 선생이 이조 참판이 되었으나 또한 국사를 건의하는 일이 없자, 대유가 시를 지어 올리기를,
도란 겨울에 갖옷 입고 여름에 얼음 마심에 있거늘 / 道在冬裘夏飮氷
비 개면 가고 비 오면 멈춤이 어찌 전능한 일일까 / 霽行潦止豈全能
난초도 만약 세속을 따른다면 마침내 변할 것이니 / 蘭如從俗終當變
소는 밭 갈고 말은 탄다는 이치를 누가 믿으리까 / 誰信牛耕馬可乘
하였다. 선생이 화답하기를,
분에 넘치게 관직이 경대부에 이르렀으나 / 分外官聯到伐氷
임금 바로잡고 세속 구제함을 내 어찌 능히 하랴 / 匡君救俗我何能
이로써 후배로 하여금 오졸함을 비웃게 했으니 / 從敎後輩嘲迂拙
구구한 권세의 벼슬길에는 나설 것이 못 되누나 / 勢利區區不足乘
하였으니, 대개 이를 싫어한 것이다. 이로부터 점필재와 사이가 나빠졌다.
정미년(1487, 성종18)에 부친상을 당해서는 죽만 마시고 슬피 곡읍하여 혼절했다가 다시 소생하였다.
〇 안우(安遇)는 자가 시숙(時叔)이다. 효행이 고을에 으뜸이었다. 아버지 상을 치르면서 한결같이 《가례(家禮)》를 따랐다. 점필재를 따라 수업했으나 얼마 뒤에 벼슬할 마음이 없어져서 비로소 점필재와 사이가 나빠졌다. 일찍이 향시(鄕試)에 뽑혀 서울로 가서 회시(會試)의 시장(試場)에 들어가려 하였다. 사관(四館)의 연소한 자들이 나이 든 지방 유생에게 교만하게 대하며 그들을 때리려 하거늘, 시숙이 말하기를 “어찌 부모께서 물려준 몸을 죄 없이 스스로 손상시켜서 명리를 구한단 말인가.” 하고는 들어가지 않고 떠나갔으니, 그 절조는 동한(東漢)의 선비에 견줄 만하다.
〇 권안(權晏)은 본관이 안동(安東)이고, 자가 화청(和淸)이다. 나이가 나보다 20여 세 위이다. 일찍이 말하기를 “내가 다행히 죽지 않아 죽음이 가까운 나이에 세 명의 벗을 얻었다.” 했으니, 나와 정중(正中)극창(克昌)을 이른 것이다. 젊었을 때에 무재(武才)가 있어 별시위(別侍衛)에 소속되었다. 사람됨이 오릉(於陵) 중자(仲子)처럼 청렴하며, 산수를 좋아하고 도(道)와 진리를 즐거워하였으며, 효제충신(孝悌忠信)에 있어 그보다 나을 사람이 없었다. 집이 허물어져 비바람을 가리지 못하거나 혹 양식이 떨어져도 그 즐거움은 여전하였고, 짧은 베옷을 입고서 쓸쓸히 지냈다. 말년에 불교를 좋아하였다.
〇 정여창(鄭汝昌)은 자가 자욱(自勖)이다. 지리산에 들어가서 3년 동안 나오지 않고 오경(五經)을 공부하여 그 깊은 뜻을 궁구하여 체(體)와 용(用)은 근원은 같으나 나뉨이 다름을 알았고, 선과 악은 성(性)은 같으나 기(氣)가 다름을 알았고, 유(儒)와 불(佛)은 도(道)는 같으나 행적이 다름을 알았다. 그의 성리학을 성광(醒狂)이 존경하였다.
경자년(1480, 성종11)에 주상이 성균관에 하교하여 경전에 밝고 행실이 닦여진 유생을 찾도록 하니, 성균관에서 자욱을 천거하여 첫 번째로 두었다. 지성균관사(知成均館事) 서거정(徐居正)이 장차 자욱을 내보내어 경전을 강론하게 하려 했으나 자욱이 스스로 물러났다.
계묘년(1483)에 진사시(進士試)에 입격하였다. 그의 아버지 육을(六乙)이 이시애(李施愛)의 난에 나라를 위하여 죽었다. 이때 자욱은 나이가 어렸으나 상을 치르는 데에 빠뜨림이 없었고, 모친상을 치를 때에도 전례(典禮)의 도수(度數)와 죽을 먹는 일을 한결같이 《가례》를 따랐다.
경술년(1490)에 참의(參議) 윤긍(尹兢)이 그의 효행과 학문이 사림 중에 비할 자가 없다고 천거하니, 특별히 불러 소격서 참봉(昭格署參奉)으로 삼았다. 자욱이 글을 올려 면직을 청하자, 주상이 하교하여 그를 포상하니 명성이 더욱 높아졌다.
자욱의 사람됨은 성품이 단아하고 중후하였다. 술을 마시지 않았고, 냄새나는 채소를 먹지 않았고, 쇠고기와 말고기를 먹지 않았다. 겉으로는 일상적인 얘기를 했으나 안으로는 마음이 또렷이 깨어 있었다. 젊은 날 성균관에 거처할 때에 남들과 함께 잠자면서 코는 골지만 잠들지는 않거늘 남들이 알지 못하였다. 어느 날 밤에 최진국(崔鎭國)에게 들킨 뒤로 성균관 안에 떠들썩하게 소문이 퍼지기를 “정 아무개가 참선하느라 자지 않는다.” 하였다.
〇 이정은(李貞恩)은 자가 정중(正中)이고, 호가 월호(月湖)이며, 또 다른 호가 남곡(嵐谷)ㆍ설창(雪窓)이다. 수천부정(秀川副正)에 제수되었다. 음률이 세상에 으뜸이어서 그윽이 강개한 곡조를 타면 길 가는 사람도 반드시 울었다.
사람됨이 돈후하고 겸손하며 식견과 도량이 있고 총명하였다. 학문함에 있어 이치를 우선하고 문장을 뒤로 하니 스승이 수고롭지 않았고, 시를 지음에 있어 격조를 우선하고 수사를 뒤로 하니 사람들이 싫어하지 않았고, 덕을 닦음에 있어 내면을 우선하고 외면을 뒤로 하니 사람들이 알지 못했고, 처신함에 있어 지위가 높다고 남을 억누르지 않기를 마치 가장 가난한 유생처럼 하였다.
〇 이분(李坋)은 자가 자야(子野)이고, 서울에 살았다. 어진 사람을 좋아하고 착한 일을 즐거워했고, 권세와 이익에 마음이 담담하였다. 시학에 조예가 깊어 대유(大猷)가 그 심원한 시론에 감복하였다.
〇 노조동(盧祖同)은 자가 공서(公緖)이다. 《소학》 읽기를 좋아하였고, 엽등(躐等)하는 학문과 조롱하는 글과 과거(科擧)의 재주를 좋아하지 않았다. 몸가짐과 법도를 지키는 것이 대략 대유와 같았다. 아버지의 상을 치르면서 3년 동안 시묘하며 한결같이 《가례》를 따랐다. 시숙(時叔)과 더불어 점필재 문하에서 함께 배우니, 선생이 그를 공경하였다.
〇 정세린(鄭世麟)은 자가 창부(昌符)이고, 영남에 살았다. 점필재 문하에서 수업하였다. 그 학문이 공서와 같았고 시재(詩才)가 매우 높으니, 선생이 그를 공경하였다. 병오년(1486, 성종17)에 죽으니, 나이가 22세였다.
〇 양준(楊浚)은 자가 징원(澄源)이다. 점필재에게 수업하였다. 깊고 침착하여 큰 도량이 있으며, 안빈낙도(安貧樂道)하여 마음이 담담하였다. 또 국량이 웅대하고 깊어서 수행하는 것이 기색에 드러나지 않았으나 총명은 날로 진보하였다. 유림이 그를 가장 낮게 보았으나 여경(餘慶)이 홀로 그를 알아주었다.
〇 김시습(金時習)은 본관이 강릉(江陵)이고 신라의 후예이다. 나보다 나이가 20세 위이다. 자가 열경(悅卿)이고, 호가 동봉(東峰)이며, 또 다른 호가 벽산청은(碧山淸隱)ㆍ청한자(淸寒子)이다. 세종 을묘년(1435, 세종17)에 태어났고, 5세에 글을 지을 줄 알았다. 세종이 승정원으로 초치(招致)하여 시를 짓게 하더니, 크게 기특하게 여기고 그 아버지를 불러 하교하기를 “이 아이를 잘 기르도록 하라. 내가 장차 크게 쓸 것이다.” 하였다.
을해년(1455, 단종3)에 세조가 섭정(攝政)하자, 불문(佛門)에 들어가서 설잠(雪岑)이라 이름하고, 수락산(水落山) 정사(精舍)에 들어가서 불도를 닦고 몸을 단련하였다. 유생을 보면 말마다 반드시 공맹(孔孟)을 일컬을 뿐 불법에 대해서는 입을 닫고 말하지 않았다. 사람들이 수련하는 것에 대해 물으면 또한 말하려 하지 않았다. 어떤 사람이 괴애(乖崖) 김수온(金守溫)이 좌화(坐化)한 일을 말하니, 설잠이 말하기를 “좌화는 예(禮)에 있어 귀하지 않은 것이다. 나는 다만 증자(曾子)가 역책(易簀)하고 죽은 일과 자로(子路)가 결영(結纓)하고 죽은 일이 귀한 것임을 알 뿐 그 밖의 것은 알지 못한다.” 하였다.
신축년(1481, 성종12) 연간에 고기를 먹고 머리카락을 길렀다. 글을 지어 조부에게 제사 지내기를,
“삼가 아룁니다. 순(舜) 임금이 오교(五敎)를 펼치면서 부자유친(父子有親)을 첫머리에 두었고, 죄목 3천 가지를 나열함에 불효가 가장 큰 것이었습니다. 무릇 하늘과 땅 안에 살면서 그 누가 길러 주신 은혜를 저버릴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악한 짐승으로는 호랑이와 이리보다 더한 것이 없고 미천한 짐승으로는 승냥이와 수달보다 더한 것이 없지만, 어버이를 사랑하는 성품을 온전히 보존하고 또 근본에 보답하는 정성을 삼갈 수 있으니, 이는 모두 천리가 본래 그러한 것이라서 물욕이 덮어 가리기 어려운 것입니다.
삼가 생각건대, 어리석은 소자는 본지(本支)를 계승하였으나 젊은 날 이단에 빠졌기 때문에 통탄스럽게도 미혹되어 보본(報本)을 강구하지 못했고, 장차 불도를 닦으면 선령(先靈)을 천도(薦度)할 수 있다고 여겼으나 윤회설처럼 황당한 것이 없음을 깨달았습니다. 장년에는 그대로 우물쭈물 지내다가 만년이 되어서야 바야흐로 후회했습니다. 이에 예전(禮典)을 상고하고 성경(聖經)을 뒤져서 조상을 추모하는 큰 의식을 고정(考定)하고 청빈한 생계를 참작하여 간소하면서도 정결하기에 힘썼고 제수를 차림에 있어 정성으로 하였습니다.
한나라 무제(武帝)는 나이 70세에 비로소 승상(丞相) 전천추(田千秋)의 말을 깨달았고, 원나라 덕공(德公)은 나이 100세에 노재(魯齋) 허형(許衡)의 풍도에 감화되었습니다. 상로(霜露)가 적시는 것을 보고 느끼며 세월이 흘러감을 근심하니, 놀랍고 황공함이 그지없고 탄식하고 의아함이 참으로 많습니다. 만약 옛날의 허물을 속죄하여 혹 하늘과 땅 사이에 용납될 수 있다면, 장차 얼굴을 들고 지하에서 조종(祖宗)을 뵈올 수 있을 듯합니다.”
하였다.
임인년(1482, 성종13) 이후로는 세상이 쇠퇴하려는 것을 보고서 인간의 일은 하지 않고 여염 간에 버려진 사람이 되어 날마다 사람들과 장례원(掌隷院)에서 쟁송(爭訟)하였다. 하루는 술을 먹고 저자를 지나다가 영의정 정창손(鄭昌孫)을 보고 말하기를 “네 놈은 의당 그만두어야 한다.” 하니, 정창손이 못 들은 척하였다. 사람들이 이를 위태롭게 여겨서 일찍이 함께 교유하던 자들이 모두 절교하고 왕래하지 않으니, 홀로 저잣거리의 미치광이 같은 자들과 즐겁게 놀다가 취하여 길가에 쓰러지기도 하였고, 언제나 바보처럼 웃고 다녔다.
뒤에 설악산에 들어가기도 하고 춘천산(春川山)에서 살기도 하여 드나듦에 일정함이 없었으니, 사람들이 그 종말을 알지 못하였다. 그가 좋아한 사람은 정중(正中), 자용(子容), 자정(子挺) 및 나였다. 저술한 시문 수만여 편이 옮겨 다니는 사이에 거의 다 산망(散亡)되었고, 조신(朝臣)과 선비들이 간혹 몰래 취하여 자기 작품으로 삼기도 한다.
〇 홍유손(洪裕孫)은 자가 여경(餘慶)이고, 호가 소총(篠叢)이며, 또 다른 호가 광진자(狂眞子)이다. 남양(南陽) 아전 홍순치(洪順致)의 아들이다. 집안이 대대로 청빈하여 옷이라곤 겨우 몸을 감싸는 정도이고 간혹 속옷도 입지 못하고 다녔다. 경서(經書)와 사서(史書)를 섭렵하였고, 성품이 방달(放達)하여 구속되지 않았다. 과거 시험을 좋아하지 않았고 향리(鄕吏)의 신분을 면할 계획도 하지 않았다. 신축년(1481, 성종12)에 남양 군수(南陽郡守) 채신보(蔡申甫)가 여경이 글을 잘한다고 하여 그의 신역(身役)을 면제해 주니, 즉시 영남으로 걸어가서 점필재를 뵙고 두시(杜詩)를 배웠다. 선생이 말하기를 “이 사람은 이미 안자(顔子)가 즐거워하던 바를 알고 있다.” 하니, 배우는 사람들이 모두 그를 으뜸으로 여겼다.
지리산에 들어가서 학업을 익혔다. 서울에 이르러 간하기를 “선생께서 시사(時事)를 건의하지 않으시니, 어찌 헛되이 남의 작록(爵祿)을 취하는 일을 하십니까. 또 지금의 학자들이 노불(老佛)을 미워하지 않는 이가 없으나, 처신에 있어서는 하나도 노불에서 벗어나는 이가 없습니다. 둥글게 행하고 모남을 싫어하는 것이 노자(老子)이고, 홀로만 행하고 남을 돌보지 않는 것이 부처입니다.” 하니, 선생이 그를 대단히 미워하여 이로부터 매양 “여경이 간사한 꾀를 부린다.” 하였다. 여경 또한 스스로 행적을 감추고 부호한 집에서 의식을 의탁할 뿐이었다.
사람됨이 문(文)은 칠원(漆園)과 같고, 시(詩)는 산곡(山谷)의 경계를 건넜고, 재질은 공명(孔明)의 재주를 지녔고, 행실은 만천(曼倩)과 같았다.
〇 유종선(柳從善)은 본관이 진주(晉州)이고, 자가 여등(如登)이다. 산에 살면서 스스로를 감추니, 친구와 친척도 그의 얼굴을 보는 일이 드물었다.
〇 우선언(禹善言)은 처음의 자가 덕보(德父)이고, 호가 풍애(楓崖)이다. 단성군(丹城君) 우공(禹貢)의 아들로, 사람됨이 기개가 드높았다. 신축년(1481, 성종12)에 남쪽으로 영남에 가서 점필재 선생을 여막에서 뵈니, 선생이 자용(子容)이라는 자를 지어 주었다.
김몰(金圽)은 자가 개중(介仲)이고, 본관이 강진(康津)으로, 관찰사 김필(金)의 아들이다. 단정하고 중후하며 깨끗함을 좋아했다. 계묘년(1483)에 생원시에 입격하였고, 과거(科擧)를 중시하였다.
〇 최하림(崔河臨)은 자가 진국(鎭國)이고, 호가 태허당(太虛堂)이다. 성품이 공명(功名)을 좋아하였고, 경자년(1480)에 진사시에 입격하였다. 이해 여름에 요망한 승려 학조(學祖)가 그의 무리 설의(雪義)로 하여금 불상을 몰래 돌리게 하고는 ‘부처가 스스로 다닌다.’고 하여 곡식ㆍ비단ㆍ베를 가져오게 하는 것이 매일 천 건으로 헤아릴 정도였다. 태학생들이 글을 올려 요망한 승려를 처벌하기를 청하며 모두 다섯 번 글을 올렸으나 윤허를 얻지 못했다. 이 상소문은 대개 모두 진국의 손에서 나온 것이다. 병오년(1486, 성종17) 7월에 세상을 떠나니, 향년 32세이다. 집이 가난하여 염습하여 장사 지낼 수 없으므로 친구들이 부의를 모아 장사 지냈다. 저술한 《안택기(安宅記)》가 세상에 전한다.
〇 이달선(李達善)은 자가 겸지(兼之)이다. 성품이 선을 좋아하였다. 병오년에 3등으로 급제하여 종부시 직장(宗簿寺直長)에 등용되었다.
〇 권경유(權景裕)는 자가 군요(君饒)이고, 본관이 안동(安東)이다. 강하고 굳세며 대체(大體)를 알았고, 작위(作爲)함을 좋아하지 않았다. 강공직(姜公直)을 매우 미워하여 인정(人情)에 가깝지 않다고 하더니, 늦게 그의 실행을 듣고는 매우 사랑하였다. 계묘년(1483)에 진사시에 입격하고, 병오년에 급제하여 홍문관 정자(弘文館正字)에 등용되었다.
〇 이윤종(李尹宗)은 자가 극창(克昌)이고, 호가 차군당(此君堂)이며, 또 다른 호가 죽계(竹磎)이다. 시문에 뛰어났고, 사람됨이 어진 이를 좋아했다. 공직(公直), 자욱(自勖), 백연(伯淵), 화청(和淸)은 그가 몹시 좋아하던 벗들이다.
〇 고순(高淳)은 자가 희지(熙之)이고, 또 다른 자가 태진(太眞)ㆍ진진(眞眞)이다. 본관이 제주(濟州)이다. 귀머거리 증세가 있어 사람들이 땅에 글자를 써서 뜻을 전하였다. 무술년(1478)에 조명(詔命)에 응하여 글을 올려 시정(時政)을 논하였다가 망녕되다는 오명을 입었다. 어떤 사람이 그에게 이를 알려 주니, 희지가 듣고 기뻐하며 망인(妄人)이라 자호하였다.
희지가 신덕우(辛德優)를 여러 선비들 속에서 처음 보았을 때에 여러 선비들은 서로 함께 큰 소리로 얘기하고 있었다. 희지가 작은 종이에 절구 한 수를 쓰기를,
조그마한 누각에 봄바람 고요한데 / 小閣春風靜
맑은 얘기들 모두 여유가 있구려 / 淸談摠有餘
귀머거리 이 사람은 아무 맛 없어 / 聾人無一味
머리 숙이고서 홀로 책을 본다오 / 垂首獨看書
하였다. 덕우가 기뻐서 그 시에 화답하기를,
세상의 소리는 떠들썩하고 혼탁하여 / 世聲聒溷濁
더러운 흙 냄새 아아 코끝에 남았소 / 糞壤嗟鼻餘
부럽구나 그대여 방로보다 나으니 / 羨君勝房老
한낮에 천 권의 책 속에 숨었구려 / 晝隱千卷書
하였다. 이로부터 마음을 알아주는 벗이 되었다. 무신년(1488, 성종19)에 생원시에 입격하였다.
〇 신영희(辛永禧)는 자가 덕우(德優)이고, 본관이 영산(靈山)으로, 재신(宰臣) 신석조(申碩祖)의 손자이다. 기개가 드높아 구속됨이 없고 고원하고 광대한 지절(志節)을 지녔으며, 과거(科擧)의 명성을 좋아하지 않았다. 시명(詩名)이 중외(中外)에 퍼졌으니, 참의(參議) 성현(成俔)이 그의 시를 두고 소동파(蘇東坡)와 황산곡(黃山谷)의 경지를 넘나든다고 하였다. 계묘년(1483)에 진사시에 입격한 뒤로는 과거에 응시하지 않았다.
〇 이종준(李宗準)은 자가 중균(仲鈞)이고, 호가 부휴자(浮休子)이며, 또 다른 호가 상우당(尙友堂)ㆍ태정일민(太庭逸民)ㆍ장륙거사(藏六居士)ㆍ용헌거사(慵軒居士)이다. 시문에 능하였다. 정유년(1477)에 진사시에 입격하고, 병오년(1486)에 2등으로 급제하여 지금 평안도 평사(平安道評事)로 나가 있다.
젊었을 때에 군요(君饒)를 알지 못하였다. 중균이 나와 정중(正中)과 더불어 달빛을 타고 꽃을 구경하며 군요의 집에 이르렀다. 내가 군요를 속여 말하기를 “호현방(好賢坊)의 살구꽃 아래에 어떤 이인(異人)이 시를 읊고 있기에 불러서 함께 왔소. 그의 말을 들어 보니 기개가 높고 구속됨이 없으며, 그의 시를 보니 맑고 시원함이 속진(俗塵)을 벗어나서 화식(火食)하는 사람이 말하는 바가 아니오. 세상에 신선이 있다면 바로 이런 사람이 아니겠소.” 하였다.
군요가 신을 거꾸로 신은 채 황급히 나와 맞이하여 서로 더불어 달 아래에 앉았다. 중균이 시를 지으면서 일부러 청수(淸瘦)한 격조의 시를 지어내니, 군요는 과연 크게 감복하여 꿇어앉아 말하기를 “누추한 오두막이 지극히 궁벽하거늘 수재(秀才)께서 어쩌다 나의 정다운 벗들로 인하여 왕림했으니, 어찌 천행이 아니겠습니까. 부디 하룻밤 유숙하기 바랍니다.” 하였다. 중균이 반드시 떠나가려 하니, 군요가 꿇어앉아 옷자락을 붙잡고 청하였다. 떠들썩하게 담소하며 밤을 지새우다가 아침이 밝아서야 비로소 어배동(於背洞)-어배는 동네 이름이다.-에 우거(寓居)하는 진사 이종준임을 알고는 서로 더불어 손뼉을 치며 크게 웃었다. 중균과 군요는 드디어 마음을 알아주는 벗이 되었다.
〇 김응기(金應箕)는 자가 백봉(伯奉)이다. 정유년(1477, 성종8)에 급제하여 지금 예조 정랑(禮曹正郞)으로 있다. 신라 종성(宗姓)인 김방경(金方慶)의 후손이다.
〇 김응규(金應奎)는 자가 중성(仲聖)으로, 김응기(金應箕)의 아우이다. 강개하면서 큰 절조가 있었다. 아버지 김지경(金之慶)이 그를 매우 사랑하였다. 정유년(1477)에 20세의 나이로 평안도의 향공(鄕貢)에 응시하여 연이어 세 시험에서 장원을 차지하였다. 진사 회시(會試)에 들어갔다가 시험장에서 죽으니, 당시의 여론이 애석하게 여겼다. 아들 하나가 있다.
〇 이총(李摠)은 자가 백원(百源)이다. 무풍부정(茂豐副正)에 제수되었고, 태종(太宗)의 증손이다. 거문고 타는 재주는 정중(正中)과 같으나 넓은 국량은 정중을 능가했다. 양화도(楊花渡) 어귀에 집을 짓고 손수 고기잡이배를 저으며 서호주인(西湖主人)이라 자호하였다.
〇 이현손(李賢孫)은 자가 세창(世昌)이다. 이신요(李神堯)의 후손으로, 벼슬이 명양부정(鳴陽副正)에 이르렀다. 나이가 나보다 13세 아래이다. 매양 법도로써 몸을 다스려서 독실한 행실이 대유(大猷)에 버금갔다. 일찍이 관례(冠禮)를 행하려 하니, 대유가 이를 만류하였다. 어머니 상을 당해서는 한결같이 《가례》를 따랐다.
〇 윤신(尹信)은 자가 임지(任之)이다. 파주(坡州)의 세가(世家)로서 문숙공(文肅公) 윤관(尹瓘)의 후손이다. 행실은 세창과 같으나 침착하고 온화함은 세창을 능가하였다. 대유를 사사(師事)하였다.
〇 이적(李勣)은 자가 중률(仲栗)이다. 시에 뛰어났으나 뒤에 《중용(中庸)》과 《대학(大學)》을 공부하여 그 도를 맛보고는 이로부터 시를 전공하지 않았다. 지향하는 바는 높고 원대하여 상투적인 일을 일삼지 않았고, 위로 옛사람을 벗하였다. 평상시에도 의관을 단정히 갖추었다. 대유와 백연(伯淵)을 사사하였다.
〇 허반(許磐)은 자가 문병(文炳)이다. 계묘년(1483)에 진사시에 입격하였다. 성리학에 뜻을 두어 출세에는 마음이 담담하였다. 모든 일에 옛것을 본받으려 하였고, 대유를 사우(師友)로 삼으니 대유가 그 천성에서 나온 단아함에 감복하였다.
음보(蔭補)로 사직서 참봉(社稷署參奉)에 등용되니, 그때 좌상 홍응(洪應)이 제조(提調)로 있었다. 문병이 그에게 말하기를 “왕세자는 나라의 저군(儲君)입니다. 뒷날 우리나라 만백성이 우러러 의지할 분이거늘 지금 내시와 더불어 거처하면서 서연(書筵)에 나아가는 날은 적고 친압(親狎)한 자들과 노니는 날은 많으니, 청하건대…….” 하였다.
〇 민귀손(閔龜孫)은 자가 서경(瑞卿)이고, 본관이 여주(驪州)이다. 고(故) 첨정(僉正) 민수(閔粹)의 아들이고, 자정(子挺)의 처남이다. 일찍이 자정에게 시를 배워서 조금 뒤에 곧잘 지었다. 또 정중(正中)ㆍ정지(貞之)ㆍ중률(仲栗)과 종유하였고, 대유를 사사하였다. 사람됨이 단아하고 속루(俗累)가 없었다.
〇 신용개(申用漑)는 본관이 고령(高靈)이고, 자가 개지(漑之)이다. 침착하고 큰 도량이 있었다. 시에 뛰어나고 문에 능하였다. 신숙주가 바로 그의 조부이다. 부친 신면(申沔)은 이시애(李施愛)의 난에 죽었다.
〇 이주(李胄)는 본관이 고성(固城)이고, 자가 주지(胄之)이다. 어질면서 문에 능하였다. 용헌(容軒) 선생 이원(李原)의 증손이다.
〇 이원(李黿)은 자가 낭옹(浪翁)이다. 익재(益齋) 이제현(李齊賢)의 후손이고, 참판 박팽년(朴彭年)이 바로 외조부다. 두 집안의 어짊과 재능이 이 한 사람에게 모였다.
〇 이계맹(李繼孟)은 자가 희순(希醇)이다. 점필재가 그의 시문을 취하였다. 전주에 살았다. 결백한 행실이 무리 중에 뛰어났다.
〇 이세칙(李世則)은 자가 효옹(效翁)이다. 연안군(延安君) 이숙기(李叔琦)의 아들이다. 강개하면서 곧은 것을 좋아하였고, 맑은 지조가 남보다 뛰어났고, 시문에 능하였다.
〇 장세필(張世弼)은 자가 언경(彦卿)이다. 고양(高陽)에 살았다. 집이 가난했으나 어머니를 섬김에 반드시 술과 고기를 마련하였다. 젊어서 배우지 못하여 겨우 성명만 쓸 줄 알았다.
〇 최세명(崔世明)은 자가 보광(葆光)이다. 글 읽기를 좋아하고 벼슬하는 것을 중시하였다. 정유년(1477, 성종8)에 진사시에 입격하였다.
〇 안계송(安繼宋)은 자가 우윤(于胤)이고, 호가 박전(薄田)이다. 그는 성품이 어리석어 시와 술 이외는 따로 마음을 두는 일이 없었다. 사람들이 그를 알든 모르든 간에 모두 박전이라 일컬으며 비웃었으나 박전은 알지 못하였다. 음보(蔭補)로 돈녕부 직장(敦寧府直長)에 제수되어 지금까지 17년이 되었으나 벼슬자리를 옮기지 않았으니, 세리(勢利)에 마음이 담담함을 알 수 있다.
〇 신포(申誧)는 자가 지정(持正)이고, 호가 허주(虛舟)이다. 시와 그림에 뛰어났고, 집이 가난했으나 술을 좋아하였다. 일찍이 장륙(藏六)이라 자호하니, 중균(仲鈞)이 그 호를 좋아하여 술 한 병과 바꾸자고 청하므로, 지정이 허락하였다.
〇 구영안(丘永安)은 본관이 강릉이고, 자가 중인(仲仁)이며, 호가 호은(壺隱)이다. 문명(文名)이 있었다. 기축년(1469, 예종1)에 2등으로 생원시에 입격하였다. 벼슬을 중시하고 이익을 중시하였다. 또 음양(陰陽), 추보(推步), 풍수(風水), 의술(醫術), 선도(仙道), 불도(佛道), 승제(乘除)의 법을 섭렵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〇 이심원(李深源)은 자가 백연(伯淵)이고, 호가 성광(醒狂)이며, 또 다른 호가 묵재(默齋)ㆍ태평진일(太平眞逸)이다. 태종의 현손이고, 나와 나이가 같으나 생일이 나보다 늦다. 경학에 밝고 덕행이 있으며 겸하여 의술에 능통하였다. 성품이 충성스럽고 효성스러우며 무당이나 불교를 좋아하지 않았다. 평상시에도 의관을 정제하였고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다.
전강(殿講)에서 사서(四書)와 오경(五經)에 통(通)을 맞아 명선대부(明善大夫)로 승급하고 행 주계부정(行朱溪副正)이 되었다.
나이 25세에 전후로 모두 다섯 번 글을 올려 다스리는 도를 논하니, 윤허되기도 하고 윤허되지 않기도 하였다. 또 조정에서 숙모부(叔母夫) 임사홍(任士洪)의 부도(不道)함과 딴마음을 품고 있음을 논박하다가 조부에게 미움을 사서 장단(長湍)으로 귀양 갔고 또 이천(伊川)으로 귀양 갔다. 임금에게 글을 올려 병든 부모를 뵙기를 청하니, 그 말이 간절하고 지극하여 윤허를 받았다.
정미년(1487, 성종18)에 종친과(宗親科) 시험에서 경사(經史)를 강(講)하여 제1등으로 뽑혔다. 약을 내리고 술을 내리며 2품의 품계도 내렸으나 군(君)에 봉하지는 않았으니, 이전에 조부를 거스른 허물이 있었기 때문이다.
〇 강응정(姜應貞)은 자가 공직(公直)이고, 호가 중화재(中和齋)이다. 나보다 10여 세 위이다. 은진(恩津)에서 살았고, 효행으로 일컬어졌다. 일찍이 어머니가 병들었을 때에 3년 동안 띠를 풀지 않았고 약은 반드시 직접 맛보았다. 하루는 꿈에 천신(天神)이 뜰에 내려와서 공직에게 이르기를 “내일 찾아오는 손님이 반드시 네 어머니의 병을 낫게 할 것이다.” 하였다. 이튿날 아침에 과연 이름이 원(元)인 한 소년이 와서 스스로 윤왕동(輪王洞)에서 산다고 하며 공직에게 유숙하기를 청하였다. 그를 머무르게 하고 어머니의 병에 대하여 물으니, 소년은 과연 의약을 아는 사람이었다. 소년의 말대로 시험하여 15일 만에 병이 나았다. 뒤에 부모의 상을 치를 때에는 한결같이 《가례》를 따랐고, 겨울에도 맨발로 다녀서 몸이 성한 곳이 없었다. 일이 조정에 알려져 정문(旌門)과 정려(旌閭)를 세워서 표창하고 집안의 정역(丁役)을 면제하였다.
공직은 경서를 잘 외우고, 사람의 운명을 추산(推算)하고, 또한 의술을 섭렵하고, 겸하여 지리서를 섭렵하였다. 젊은 날 태학에서 유학할 때에 서울의 준수한 선비들과 더불어 주 문공(朱文公)의 고사(故事)에 의거하여 향약(鄕約)을 만들고 혹 매달 초하루에 《소학》을 강론하였다. 그때 뽑힌 사람은 모두 당시의 명사들로서 김용석(金用石)은 자가 연숙(鍊叔)이고, 신종호(申從濩)는 자가 차소(次韶)이고, 박연(朴演)은 자가 문숙(文叔)이고, 손효조(孫孝祖)는 자가 무첨(无忝)이고, 정경조(鄭敬祖)는 자가 효곤(孝昆)이고, 권주(權柱)는 자가 우경(友卿)이고, 정석형(丁碩亨)은 자가 가회(嘉會)이고, 강백진(康伯珍)은 자가 자온(子韞)이고, 김윤제(金允濟)는 자가 자주(子舟)이니, 이들은 그중에 뛰어난 사람이고, 나머지는 다 기록하지 못한다. 세상에서 좋아하지 않는 자들이 시끄럽게 떠들며 혹은 소학계(小學契)라 지목하거나 혹은 효자계(孝子契)라 지목하였고, 공자(孔子), 사성(四聖), 십철(十哲)이라는 기롱도 있었다.
시골에서 불우하게 지내며 늙도록 과거를 보지 않다가 계묘년(1483, 성종14)에 생원시에 입격하여 훈도(訓導)가 되었다.
〇 안응세(安應世)는 본관이 죽산(竹山)이고, 자가 자정(子挺)이다. 호가 월창(月窓)이고, 또 다른 호가 구로주인(鷗鷺主人)ㆍ연파조도(煙波釣徒)ㆍ여곽야인(藜藿野人)이다. 나보다 한 살 아래이다.
사람됨이 청담(淸澹)하고 쇄락(洒落)하며, 가난을 편안하게 여기고 분수를 달게 여겨서 명예와 이익을 구하지 않았다. 선도와 불법을 배우지 않았고, 장기와 바둑을 좋아하지 않았다. 시에 능하였고 악부(樂府)에 더욱 뛰어났다.
일찍이 말하기를 “의롭지 못한 재물은 집안 살림을 돕는 데에 그치지만 의롭지 못한 음식은 오장을 돕는 데에 그칠 뿐이니, 더욱 범해서는 안 된다.” 하였으니, 자정의 마음가짐이 대개 이와 같았다. 백옥(白玉)의 흠이라면 주색을 좋아한 것이다. 경자년(1480, 성종11)에 진사시에 입격하였고, 이해 9월에 죽었으니 향년 26세이다. 아는 사람이든 모르는 사람이든 간에 애통해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아래의 ‘지’ 자는 잘못인 듯하다.-
〇 채순(蔡恂)은 자가 숙부(叔孚)이고, 양천(陽川)에 살았다. 경자년에 진사시에 입격하였다. 사람됨이 과거(科擧)를 중시하였다.
〇 한훈(韓訓)은 자가 학이(學而)이다. 본관이 청주(淸州)이고, 서울에 살았다. 시에 뛰어났고, 병오년(1486)에 진사시에 입격하였다.
〇 강흔(姜訢)은 자가 시가(時可)이고, 본관이 진주(晉州)이다. 관찰사 강자평(姜子平)의 막내아들이다. 처음에는 밀양에서 여경(餘慶)을 좇아 점필재에게 두시(杜詩)를 배웠고, 그 다음에는 덕우(德優)를 좇아 시를 배웠고, 그 다음에는 대유(大猷)를 좇아 《소학》을 공부했고, 그 다음에는 시숙(時叔)과 공서(公緖)를 좇아 유극기(兪克己)의 여막에서 시를 읽었다.
〇 조자지(趙自知)는 본관이 평양(平壤)이고, 자가 성지(性之)이다. 베풀기를 좋아하고 어진 이를 좋아하였으며, 산수를 좋아하고 유희(遊戱)를 좋아하였다. 공명(功名)을 좋아하지 않았고, 침착하여 말이 적었다. 여경에게 배워서 시에 능하였다.
〇 강백진(康伯珍)은 자가 자온(子韞)이다.
〇 김용석(金用石)은 자가 연숙(鍊叔)이다.
〇 이장길(李長吉)
〇 최충성(崔忠成)은 자가 필경(弼卿)이다.
〇 노섭(盧燮)
〇 유방(柳房)
〇 조원기(趙元紀)
〇 조광림(趙廣臨)
〇 정붕(鄭鵬)

추강거사(秋江居士)가 경지재(敬止齋)에서 쓰다.

[주D-001]인정(人定) : 야간 통행을 금지하기 위하여 밤마다 10시에 큰 종을 28번 치는 것을 말한다.
[주D-002]노재(魯齋) : 원나라 학자 허형(許衡)의 호이다. 그가 《소학》을 자득하여 이 책을 위주로 학자를 개도(開導)하였다. 일찍이 아들에게 말하기를 “《소학》과 사서(四書)는 내가 신명처럼 공경하고 믿는다.〔小學四書 吾敬信如神明〕” 하였다. 《宋元學案 卷90》
[주D-003]사관(四館) : 성균관(成均館), 예문관(藝文館), 승문원(承文院), 교서관(校書館)의 총칭이다.
[주D-004]정중(正中) : 이정은(李貞恩)의 자이다.
[주D-005]극창(克昌) : 이윤종(李尹宗)의 자이다.
[주D-006]오릉(於陵) 중자(仲子) : 오릉은 지명이고, 중자는 전국 시대 제(齊)나라 사람 진중자(陳仲子)이다. 그는 매우 청렴하여, 세가(世家)의 집안에서 태어났고 형이 합(蓋) 땅에서 받는 녹이 만종(萬鍾)이 되었으나 불의한 녹이라 하여 먹지 않고 오릉 땅에서 몸소 신을 짜고 아내가 길쌈하여 생계를 유지하였다. 《孟子 滕文公下》
[주D-007]성광(醒狂) : 이심원(李深源)의 호이다.
[주D-008]좌화(坐化) : 불교에서 앉은 자세로 입적하는 것을 말한다.
[주D-009]증자(曾子)가……일 : 증자는 공자의 제자이고, 역책(易簀)은 대자리를 바꾸는 것이다. 증자가 운명할 때에 계손(季孫)에게서 받은 대자리에 누워 있었다. 동자(童子)가 그것이 대부가 사용하는 대자리라서 신분에 맞지 않다고 지적하자, 증자가 말하기를 “내가 정도를 얻고서 죽으면 그만이다.” 하고 다른 자리로 바꾸게 한 뒤에 곧 운명하였다. 《禮記 檀弓上》 자로(子路)는 공자의 제자이고, 결영(結纓)은 갓끈을 매는 것이다. 자로가 위(衛)나라 난리에 싸우다가 적의 창에 찔려 갓끈이 끊어지자 “군자는 죽을 때에 갓을 벗지 않는다.” 하고 갓끈을 매고서 죽었다. 《春秋左氏傳 哀公16年》
[주D-010]오교(五敎) : 다섯 가지 가르침으로, 부자유친(父子有親), 군신유의(君臣有義), 부부유별(夫婦有別), 장유유서(長幼有序), 붕우유신(朋友有信)의 오륜을 말한다. 순 임금이 말하기를 “설(契)아, 백성이 친목하지 않고 오품(五品)이 순하지 않으므로 너를 사도(司徒)로 삼으니, ‘공경히 다섯 가지 가르침을 펼치되〔敬敷五敎〕’ 너그러움에 있게 하라.” 하였다. 《書經 舜典》
[주D-011]죄목……것이었습니다 : 공자가 말하기를 “오형의 종류가 3천 가지이지만 죄는 불효보다 더 큰 것이 없다.〔五刑之屬三千 而罪莫大於不孝〕” 하였다. 《孝經》
[주D-012]한나라……깨달았고 : 신선술에 미혹된 무제가 나이 70세에 전천추(田千秋)의 건의를 받아들여 방사(方士)들을 물리쳤고, 요망한 신선술에 미혹된 자신을 자탄(自歎)한 것을 말한다. 《通鑑節要 卷11 世宗孝武皇帝下》
[주D-013]상로(霜露)가……느끼며 : 절기가 바뀌는 것을 보고 부모 생각에 슬픔을 느낀다는 것이다. 《예기》〈제의(祭義)〉에 이르기를 “서리와 이슬이 이미 내리면 군자는 이를 밟고 반드시 서글픈 마음을 갖게 되니, 그 추움을 말한 것이 아니다.〔霜露旣降 君子履之 必有悽愴之心 非其寒之謂也〕” 하였다. 《小學 明倫》
[주D-014]안자(顔子)가 즐거워하던 바 : 안자는 공자의 제자 안회(顔回)에 대한 존칭이다. 안자가 ‘가난을 편안하게 여기고 도를 즐거워한 것〔安貧樂道〕’을 말한다.
[주D-015]문(文)은……같았다 : 칠원(漆園)은 장자(莊子)가 관리(官吏)로 있었던 마을로, 장자를 가리킨다. 산곡(山谷)은 송나라 시인 황정견(黃庭堅)의 호이다. 공명(孔明)은 삼국 시대 촉나라의 재상인 제갈량(諸葛亮)의 자이다. 만천(曼倩)은 한 무제 때 사람인 동방삭(東方朔)의 자로, 문사(文辭)에 뛰어나고 해학을 잘하였다고 한다.
[주D-016]김몰(金圽) : 《국조문과방목(國朝文科榜目)》에는 이름이 김물(金勿)로 나온다. 본관이 영광(靈光)으로, 아버지 이름이 김필(金㻶)로 되어 있다.
[주D-017]방로(房老) : 방씨(房氏) 늙은이란 말로, 공담(空談)을 좋아했던 당나라 방관(房琯)을 말하는 듯하나, 미상이다.
[주D-018]통(通) : 강경과(講經科)의 성적 등급 중 첫 번째이다. 그 다음은 약(略), 조(粗), 불(不)이다.
[주D-019]사성(四聖), 십철(十哲) : 사성은 복성공(復聖公) 안자(顔子), 종성공(宗聖公) 증자(曾子), 술성공(述聖公) 자사(子思), 아성공(亞聖公) 맹자(孟子)를 일컫고, 십철은 민자건(閔子騫), 염백우(冉伯牛), 중궁(仲弓), 재아(宰我), 자공(子貢), 염유(冉有), 계로(季路), 자유(子游), 자하(子夏), 자장(子張)을 일컫는다.
[주D-020]아래의……듯하다 : 내용 가운데 안응세(安應世)가 한 말인 “의롭지……안 된다.”의 원문은 “不義之財 補止於家 不義之食 補止五臟 尤不可犯也”로 되어 있는데, 아래의 ‘지(止)’ 자란 ‘補止五臟’의 ‘止’를 가리킨다. 〈냉화(冷話)〉의 안응세 관련 일화에 “의롭지 못한 재물은 집안을 돕는 데에 그치는 것이니 그 더러움은 오히려 말할 수 있지만, 의롭지 못한 음식은 오장을 돕는 것이니 부모가 주신 몸을 더욱 소홀히 할 수 없다.〔不義之財 止於補家 其醜猶可說也 不義之食 補五臟 父母遺體 尤不可謾也〕” 하였다.
[주D-021]유극기(兪克己) : 유호인(兪好仁 : 1445~1494)을 가리킨다. 극기는 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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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종(成宗)


○ 성종은 뜻이 학문에 독실하여 삼시(三時)로 강서(講書)를 하고, 밤이 되면 옥당(玉堂)에서 입직하는 선비들을 불러들여 그들과 강론하며, 강론이 끝나면 술을 주면서 조용히 고금치란(古今治亂)과 민간의 이해(利害)에 대해 묻곤 하였는데, 언제나 서로 평복으로 대하였으며, 각중(閣中)에는 촛불을 단지 하나만 켤 따름이었다. 신하들이 밤이 깊어서 크게 취하여 나가면 어전(御前)의 촛불을 주어 원(院)에 돌아가게 하였는데, 이는 곧 김연거(金蓮炬)의 유의(遺意)이다. 《용재총화》이하 동
○ 성묘(成廟)는 학문이 깊고 박식하며 문장을 넓고 엄숙했다. 문사(文士)에게 명하여 《동문선(東文選)》,《여지승람(輿地勝覽)》,《동국통감(東國通鑑)》을 편찬케 하고, 또 교서관(校書館)에 명하여 책을 인쇄하지 아니한 것이 없었는데, 이를테면《사기(史記)》ㆍ《좌전춘추(左傳春秋)》ㆍ《전후한서(前後漢書)》ㆍ《진서(晉書)》ㆍ《당서(唐書)》ㆍ《송사(宋史)》ㆍ《원사(元史)》, 그리고 《강목통감(綱目通鑑)》ㆍ《동국통감(東國通鑑)》ㆍ《대학연의(大學衍義)》ㆍ《고문선(古文選)》ㆍ《문한유선(文翰類選)》ㆍ《사문유취(事文類聚)》ㆍ《구소문집(歐蘇文集)》ㆍ《서경강의(書經講義)》ㆍ《천원발미(天原發微)》ㆍ《주자성서(朱子成書)》ㆍ《자경편(自警編)》ㆍ《두시(杜詩)》ㆍ《왕형공집(王荊公集)》ㆍ《진간재집(陳簡齋集)》같은 것인테, 이것음 모두 내(성현)가 기억하는 바요, 그 밖의 인쇄한 제서(諸書)가 또한 많다. 또 서강중(徐剛中)의 《사가집(四佳集》ㆍ강경순(姜景醇)의 《사숙재집(私淑齋集)》ㆍ신범옹(申泛翁)의 《보한재집(保閑齋集)》을 취집하여 간행하였는데, 다만 이윤보(李胤保)와 우리 문안공(文安公 성임(成任))의 시문(時文)은 산일(散逸)이 되어서 인쇄를 못하였으므로 한스럽다.
○ 선묘(宣廟 성종)는 학문을 좋아하는 것이 양성(兩聖 세종ㆍ세조)을 이어받았고 유림을 사랑하고 장려함이 보통 규모에서 멀리 뛰어났으므로, 당시 문장력이 걸출한 선비가 옥서(玉署 홍문관)에 찬란하게 빛났으니, 이를테면, 매계(梅溪 조위)와 삼괴당(三魁堂 신종호)이며, 뇌계(㵢溪 유호인) 그리고 나의 선대인(先大人) 김흔(金訢) 같은 이들은 더욱 많은 은총을 입어서 항상 지은 바를 매월 써서 올리게 하였다. 매계와 뇌계는 모두 부모가 늙었다 하여 외직(外職)을 청하므로, 특별히 쌀과 콩을 주어 그 부모에게 넉넉하도록 하였다. 뇌계가 외직에 가면서 한 시구를 올리기를,
북쪽을 바라보니 군신간이 멀어졌고 / 北望君臣隔
남으로 내려오니 모자가 같이 사네 / 南來子母同
라고 하였는데, 임금이 조용히 감상하며 이르기를, “호인(好人)이 몸은 비록 외방에 있으나, 마음은 군(君)을 잊지 않는구나.” 하고, 또 매계가 상사를 당하였을 때는 제사를 내려 영화롭게 하여 은총이 죽고 산 사람에게까지 미치니, 사람마다 감동해 일어났다. 인재를 고무(鼓舞)하고 사기를 진작함에 있어 진실로 천세에 드물게 볼 수 있는 성사라고 하겠다. 영상 성희안(成希顔)이 홍문관의 정자(正字)로서 상사를 만나 벼슬을 그만두었다가 복을 마치자 다시 벼슬을 주니, 전례대로 은명(恩命)을 사례하였다. 임금이 다시 불러 합문(閤門) 밖에 오게 하여 위로하고, 중관(中官)에게 명하여 매(鷹) 하나를 팔에 얹어 가지고 와서 하사하며 말하기를, “그대는 노모가 있으니, 공사에서 물러나 틈이 있으면 교외에 가서 사냥하며 자미(滋味)를 봉양하는 데 도움이 되게 하라.”고 하였다. 또 밤에 입대(入對)하니, 주과(酒果)를 하사하셨는데, 공은 소매 속에 감귤을 열두어 개나 넣고는 인하여 취해서 엎드려 인사를 가리지 못하는지라 중관이 업고 나갔는데, 소매 속에 넣은 감귤이 모두 땅에 떨어진 줄도 깨닫지 못하였다. 다음날 임금은 감귤 한 쟁반을 옥당에 보내며 이르기를, “어제 성희안이 귤을 소매에 감춘 것은 그 노친에게 드리려고 한 것이다. 그래서 이것을 하사한다.” 하였다. 공이 뼈에 새기고, “죽는 것도 마다하지 않겠다.” 하더니, 마침내 정국(靖國)의 거사로 보은하였다. 선묘(宣廟)의 선비를 대우하는 데 지성스러움과 사람을 알아보는 명철한 식견이 진실로 사람이 충성을 다하게 한 것이었으나, 공은 위태한 것을 개혁(중종반정)하여, 나라를 안정하게 하고 공훈이 사적에 오르니 역시 지우(知遇)를 저버리지 아니하였다. 《용천담적기》이하 동
○ 문성 양성(文成兩聖 문종ㆍ성종)은 해서(楷書)의 필법에 정밀하였다. 문묘(文廟)는 곧고 단단하고 생동한 진체(眞體 정자로 쓰는 것)는 진인(晉人 왕희지)의 오묘(奧妙)함을 빼앗았지만, 다만 석각(石刻)한 수본(數本)만이 있을 뿐이고, 세상에 전하는 지극한 보배는 귀신이 감추어서 진적(眞跡)은 보기 드무니 아깝도다.
○ 성묘(成廟)의 글씨는 곱고 예쁘고 단아하고 무게가 있어서 자연스레 조송설(趙松雪)의 규도(規度)에 깊이 들어갔다. 임금이 또 가끔 먹 장난에 뜻을 두고 소화(小畫)를 그렸는데, 그것은 모두 하늘이 내려주신 재능으로 별로 모습(模習)조차 아니 하여도 그 오묘함이 옛 법도에 이르렀다. 온갖 정무를 보는 여가에 청연(淸讌)의 자리가 있으면 때때로 한묵(翰墨)과 친하여 간략하게 붓을 휘두르곤 했는데, 한 치 되는 쪽지나 한 자 되는 폭도 세상에 산락(散落)되어 그것을 얻은 사람은 공경하여 애완하여 깊이 싸두는 것이 아름되는 옥에 비할 것이 아니었다. 상사생(上舍生) 박원령(朴元秢)은 글씨를 좀 잘 썼는데, 성묘가 이를 보고 가상히 여기며 그 고을에 글을 내리어 지필을 주게 하여 장려하니 영화가 향려(鄕閭)에 빛나서 경동(驚動)하지 아니하는 이가 없었다. 무릇 재예 세기(才藝細技)가 어찌 족히 임금의 기림을 움직였으리오 마는 성능(聖能)하다 하여 그것을 폐하지 아니하였으니, 권장하기를 융성히 함은 이처럼 성심에서 나왔다. 이로 말미암아 문장(文章)ㆍ서화(書畵)ㆍ공기(工技)ㆍ백술(百術)이 그 격려에 힘입어 정진하지 아니함이 없었다. 이에 성인의 고무(鼓舞) 전이(轉移)의 계기가 다만 한 번 빈소(嚬笑)하는 순간에 있음을 알았다. 만일 그 성의가 범정(凡情)에서 크게 초월한 것이 아니라면, 비록 백방으로 권칙(勸勅)하더라도 엄정한 정과(正課)를 세움에 있어 다만 소란하여 점차 쇠퇴하고 말았을 것이다. 어찌 사람의 심정을 감동하는 데 이같이 깊음이 있으리오.
○ 성묘(聖廟)는 왕대비(王大妃)를 위하여 날마다 곡연(曲宴)을 베풀고 내수비(內需婢) 5ㆍ6명을 뽑아 속악(俗樂)을 익히게 하였는데, 그중 한 명이 용모가 아름답고 재주가 뛰어났다. 그가 항시 성종에게 눈짓을 마지않는지라 성묘가 그것을 보고 그 부모에게 명하여 시집보내게 하고, 다시는 궁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더니, 이로부터 곡연도 파하게 되었다. 또 성묘는 굳이 볼 일이 없으면 하루 세 차례 경연(經筵)을 열었으며, 또 날마다 세 번 왕대비전(王大妃殿)에 문안드리곤 하였다. 또 종실(宗室)을 데리고 후원(後苑)에서 활을 쏘고 난 뒤에는 종실과 마주 대하고서 반드시 소작(小酌)을 베풀었는데, 거기에는 기악(妓樂)이 따랐으니, 이는 진실로 태평성사(太平盛事)였다. 그러나 어떤 의론하는 자는 혹 연산군(燕山君)이 연락(宴樂)을 탐한 것은 눈과 귀에 익숙해져서 그러하였다 하니, 아까운 일이다. 김흔의《전언왕행록》
○ 궁에서 나온 사람이 있었는데, 상자 속에 거두어둔 절지 찰한(截紙札翰)이 보통이 아니었다. 그에 이르기를,
깊숙한 정자에서 흐르는 물줄기 바라보니 / 幽亭瞰流水
높은 나무는 잔잔한 시냇가에 늘어졌다 / 高樹俯潺湲
화류(대추빛깔의 준마)가 푸른 풀언덕에서 우니 / 驊騮嘶靑草
봄이 푸른 아지랑이 속에 있도다 / 春在翠微間
또,
절벽은 천 길이나 되는 듯 솟았는데 / 絶壁立千仞
솔바람은 불어 마지않네 / 松風鳴未休
난간에 비기고 섰는 무한한 회포 / 憑欄無限意
약속이나 한 듯이 고향 산천에도 가을이 들었으리라 / 依約故山秋
하였다. 또,
새 외를 처음 맛보니 수정같이 산듯하다 / 新瓜初嚼水精寒
형제의 정 친한 것으로 어찌 차마 홀로 보랴 / 兄弟情親忍獨看
또,
형에게 묻노니 무엇으로 세월을 보내시오 / 問兄何事送羲娥
멀리 생각하니 양금과 위가일 것이리 / 遙想洋琴與渭歌
또,
친척과 모이기를 기약하고 / 期會親戚
아리따운 기생을 맞이했네 / 聘招佳妓
의(義)는 비록 군신이나 / 義雖君臣
은혜로 말하면 형제로세 / 恩則兄弟
라고 하였으니, 보는 자가 성묘가 평소 장난삼아 썼다가 버린 것임을 알겠다. 위에 두 절구는 반드시 그림에 쓴 시일 것인데, 누구의 소작인지 알지 못하겠고, 나머지는 모두 월산대군(月山大君)에게 준 편지 초고이다. 성묘는 매양 월산대군을 내전에 데려다가 곡연(曲宴)을 베풀고, 나가면 편지로 수창(酬唱)한 것을 보내지 않는 날이 없었으니, 대개 그 우애가 지극한 것이었다. 《소문쇄록》
○ 세종은 집현전(集賢殿)을 설치하고 유명한 문사 20명을 골라 경연(經筵)을 겸하고, 모든 문한의 일은 모두 다 위임하였다. 아침 일찍 들어와서 밤늦게 서야 파하였는데, 일관(日官)이 시간을 알린 후에야 나갔으며, 조석 식사는 내관(內官)으로 하여금 손님 대접하듯이 하니, 그 융숭하게 대접하는 뜻이 지극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다투어 가며 서로 권면하여서 뛰어난 재주 큰 선비가 많이 나와서 문원(文苑)에 유명한 자가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았다. 세조는 병자난(丙子難 사육신사건) 때에 집현전을 파하고, 문신 수십 명을 골라 예문(藝文)이라고 겸칭하며 날마다 불러들여 의논하고 생각을 하였다. 성묘가 즉위하여서는 옛날의 집현전에 의하여 다시 홍문관(弘文館)을 설치하고, 본관(本官)으로 경연을 겸하게 하며, 더욱 후하게 대우하였다. 매양 선온(宣醞)을 주고 승지를 불러 모아서 같이 마시게 하였고, 또 많은 노비를 주어 심부름하는 데 대비하도록 하였으며, 또 조예(皁隸)들로 하여금 모두 은패(銀牌)를 차게 하였다. 게다가 용산강(龍山江) 가에 별당을 짓고 관관(館官)을 분번(分番)하여 독서하도록 하였고, 또 상사(上巳 3월 3일)와 중양(重陽) 가절에는 주악(奏樂)을 주어 교외에서 유흥으로 즐기게 하였으니, 그 은총과 영광이 지극하였다. 그러나 문(文)으로 이름난 자는 세종 때의 성대함만은 못하였다. 《용재총화》이하 동
○ 신라와 고려 때는 불교를 숭상하여 오로지 불공과 반승(飯僧 중에게 밥 먹이는 것)을 상례로 하였다. 우리 태종이 비록 사사(寺社) 노비를 혁신하였다고는 하지만 그 유풍이 오히려 남아 있었다. 으레 공경(公卿)이나 선비의 집이라도 빈소(殯所)에는 중들이 모여 앉아 불경을 읽었는데, 이것을 불석(佛席)이라 하였고, 또 산사에서는 칠칠재(七七齋)를 지내는데, 부자는 다투어 호화스럽고 사치하게 하고, 가난한 집에서도 관례에 의하여 갖추어 베풀므로 물과 곡식을 소모함이 심히 컸었다. 또 친척과 붕료(朋僚)들은 포물(布物)을 가지고 와서 시주하였는데, 이를 식재(食齋)라고 하였다. 또 기일에는 중을 맞이하여 먼저 밥을 먹인 뒤에 혼을 불러 제사지냈는데, 이것을 승재(僧齋)라고 한다. 성묘는 정학(正學)을 숭상하고 이단을 배척하여 모든 불사에 대해 다 고치면서 그 폐단을 극언하였다. 이로부터 사대부의 집에서는 법과 물의를 두려워하여 비록 상사와 기일을 당하여도 다만 법에 의하여 제사를 행할 뿐이고, 중과 부처를 공양하지 않았다. 그대로 인습하고 폐하지 않는 자는 오직 무뢰한 백성들이었으니, 이들도 멋대로 하지는 못하였다. 또 도승(度僧)의 법을 엄하게 금하여, 주군(州郡)에까지 단속하여 중으로서 첩(牒)이 없는 자는 머리를 길러 속세로 돌아오게 하니, 안팎 사찰이 모두 비게 되었다. 물(物)이 성하면 쇠하는 것은 당연한 이치이다.
○ 성균관은 교훈을 전장(專掌)하였는데, 국가에서는 양현고(養賢庫)를 설치하고 관관(館官)으로 겸임하게 하여 항상 유생 2백 명을 양성하게 하였는데, 상당부원군(上黨府院君) 한명회(韓明澮)가 아뢰어 존경각(尊經閣)을 세워서 많은 경적을 인쇄하여 간직하게 하였으며, 광천군(廣川君) 이극증(李克增)이 아뢰어 전사청(典祀廳)을 짓게 하였고, 나(성현)도 아뢰어 향객청(享客廳)을 건설하게 하였다. 그 후 성전(聖殿)의 동서 행랑과 식당을 모두 짓고, 또 포목 5백 필과 쌀 3백여 석을 주며, 또 학전(學田)을 두어 관중(館中)의 모든 수요를 충당하게 하였다. 이극증이 아뢰기를, “이제 성은을 받아 많은 미포를 받았으니, 주식을 준비하고 조정의 문사 및 제생을 모이게 하여 더욱 사문(斯文 유림)의 성사(盛事)가 되게 하여 주소서.” 하니, 성묘가 윤허하는지라, 이에 문사 대회를 명륜당에서 열었는데, 찬품(饌品)이 극히 정결하였다. 승지가 선온(宣醞)과 어주(御廚)의 진미를 주었는데 계속 끊어지지 않았다. 계축년 가을에 성균관에 거둥하여 선성(先聖)과 선사(先師)에게 제사지내고 물러와 하연대(下輦臺)에 마련한 장전(帳殿)에 앉으니, 문신 재추(宰樞)가 모두 전(殿) 안으로 들어와 모시고 당하관(堂下官) 문신들은 뜰에 열지어 앉았으며, 8도 유생이 구름과 같이 서울에 모였으니, 무려 만여 명이나 되었다. 상하 할 것 없이 모두 꽃을 꽂고 잔치에 참여하였으며, 또 새로 악장(樂章)을 지어 연주하여 흥을 돕고, 각 관청에서 나누어 맡아서 주찬(酒饌)을 설비하게 하고, 임금은 자주 내신(內臣)을 보내어 감독하고 살피게 하니, 사람마다 취하고 배불렀다. 이 같은 일은 옛날부터 들어볼 수 없는 성사였다.
○ 태종이 영락(永樂 명 성조의 연호) 원년에 좌우의 신하들에게 이르기를, “무릇 정치는 반드시 전적(典籍)을 널리 보아야 하는 것인데, 우리 동방은 해외에 있으므로 중국의 서책은 드물게 이르고, 이미 있는 판각은 닳아 없어지기가 쉬우며, 또 천하의 글을 모두 판각으로 하기도 어려우므로 내가 구리로 본떠 주자(鑄字)를 만들어서 글을 얻는 데 따라 인쇄하여 이를 세상에 널리 전하면 진실로 무궁한 이익이 될 것이다.” 하고, 드디어《고주(古註)》ㆍ《시경(詩經)》ㆍ《서경(書經)》ㆍ《좌씨전(左氏傳)》의 자본(字本)으로 주자를 만드니, 이것이 주자의 시초인데, 그 이름을 ‘정해자(丁亥字)’라고 하였다. 세종이 또 경자년에, 주자가 글자가 크고 고르지 못하다고 해서 다시 개주(改鑄)하니, 그 모양이 작으면서 바른지라 이로부터 인쇄하지 않은 서책이 없었는데, 그 이름을 ‘경자자(庚子字)’라고 하였다. 또 갑인년에 위선음즐(爲善陰騭) 등서의 자(字)를 본으로 하여 주자를 만들었는데, 경자자에 비하여 좀 큰 편이나, 자체가 매우 좋았다. 또 세조에게 명하여 《강목(綱目)》의 대자(大字)를 쓰게 하고, 드디어 연(鉛)을 주조하여 주자를 만들어서 강목을 인쇄하였으니, 이것은 지금 이른바 “훈의(訓義)”라는 것이다. 임신 연간에 문종(文宗)이 경자자를 다시 녹여, 안평대군에게 명하여 쓰게 하였는데, 이것을 ‘임신자(壬申字)’라고 한다. 을해년에 세조가 임신자를 녹여 강희안(姜希顔)에게 명하여 쓰게 하고, 그 이름을 ‘을해자(乙亥字)’라고 하였는데, 지금까지 활용하고 있다. 그 후 을유년에 원각경(圓覺經)을 인쇄하고자 정난종(鄭蘭宗)에게 명하여 쓰게 하였는데, 자체가 바르지 못하였다. 그것을 ‘을유자(乙酉字)’라고 하였다. 성종 신묘년에 왕형공(王荊公)과 구양공(歐陽公)의 문집을 자본(字本)으로 한 주자를 만들었는데, 그 자체가 경자자보다 작으면서도 더욱 정밀하였다. 그것을 ‘신묘자(辛卯字)’라고 하였다. 또 중국에서 신판 《강목(綱目)》의 자본을 얻어 주조한 주자를 만들었는데, 이를 ‘계축자(癸丑字)’라고 한다.
○ 성묘가 폐비 윤씨를 사사(賜死)하면서 그 전지(傳旨)에 이르기를, “윤씨는 그 성질이 본래 흉험(凶險)하며, 인륜에 어긋난 불순한 행실이 많다. 지난번 궁중에 있을 때에 날로 포악함이 심해지고, 이미 삼전(三殿 정희왕후ㆍ소혜왕후ㆍ안순왕후)에 불순히 하였을 뿐 아니라, 방자하게 과인(寡人)의 몸에 흉처(凶處)를 내고, 노예같이 대우하는가 하면, 지나칠 때는 족적(足跡 자손인 듯)을 삭거(削去)하겠다고까지 악담을 한다. 이것은 다만 작은 일이므로 논할 것도 못 된다. 심지어는 역대모후가 어린 아들을 내세우고 정치를 마음대로 한 것을 보고 스스로 기쁨으로 여겨서 항상 독약을 지니고 다니면서 혹 품속에 품고 다니고, 어느 때는 상자에 감추어 두곤 하였는데, 그것은 오직 자기가 꺼려하는 자만 제거하자는 것이 아니라, 장차 과인의 몸에도 해를 끼치려함이다. 또 항상 스스로 말하기를, ‘내가 오래 살면 장차 할 일이 있다.’고 하니, 이는 무도한 죄이다. 종사(宗社)에 관계있는 일이지만 그래도 대의(大義)로 차마 끊지 못하고, 다만 서인(庶人)으로 폐하여 그 친정집에 있게 하였던바, 이제 외인(外人)들이 원자(元子)가 점차로 자라남을 봄으로써 전후의 분규되는 일이 대부분 이것으로 말썽이 될 것이다. 비록 당시에 있어서는 깊게 염려할 것이 못 되지만, 후일의 화는 어찌 이루 말할 수 있겠는가. 만일 흉험한 성질로써 후일 위복(威福)의 권세를 잡게 되면 원자가 현명하여도 또한 반드시 그 사이에서 훌륭한 일을 할 수 없게 될 것이고, 제멋대로 날뛰는 것이 날로 더욱 방자하여질 것이니, 한(漢)의 여후(呂后)와 당(唐)의 무후(武后)의 화를 머리 들고 기다리게 될 것이다. 내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니 매우 한심스럽다. 이제 만일 그럭저럭 세월만 보내면서 일찍 대계를 정하지 못하였다가 국사가 구하지 못할 지경에 이르면 후회한들 소용이 없어서 내가 실로 종사의 죄인이 되고 말 것이다. 옛날 구익부인(鉤弋夫人)은 죄가 없어도 한 무제(漢武帝)가 오히려 만세의 계책을 세웠는데, 항차 이같이 흉험하고 또 용서하기 어려운 죄가 있는 것이겠느냐.” 하고 이에 이달 16일에 그 사제에서 사사(賜死)하였으니, 종사대계(宗社大計)이므로 부득이한 일이었다. 《소문쇄록》이하 동
○ 임인년 10월 4일에 당양공주(唐陽公主)가 죽었는데, 예조(禮曹)에서 아뢰기를, “공주가 죽어서는 조시(朝市)를 정지하는 일이 없다.”고 하였는데, 임금이 특별히 명하여 하루의 조회를 정지하고 홍문관으로 하여금 전사(前事)를 상고하게 하였더니, 홍문관에서 말하기를, “송 나라 장공주(長公主)가 죽었을 때에 5일의 조회를 정지한 일이 있다.”고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옛날에도 이같을진대 지금이라고 어찌 그렇게 아니 하리요.” 하고, 3일간 조회를 정지하였다.
○ 성화(成化 명 나라 헌종의 연호) 계유년 5월에 경상 감사가 예조에 공문을 보냈는데, 그에 이르기를, “영해부(寧海府 지금의 경북의 영덕군)에 지화(地火)가 났는데, 낮에는 연기가 나고, 밤에는 화광이 있으며, 나무를 던지면 불이 일어난다. 길이가 8척이요, 넓이가 20척이나 된다.”고 하였는지라, 임금이 홍문관에 명하여, 고사를 상고하게 하니, “진(晉)의 혜제(惠帝) 원희(元熙) 연간에 지연(地燃)이 있었고, 조(趙)의 석호(石虎)와 후진(後秦)의 부견(苻堅) 때에, 그리고 당의 정관(貞觀) 때에 백주(白洲 지금의 황해도 배천)에서 지화가 있었고, 본조에 들어와서 세종 때에 영해(寧海)에서 이 같은 해염이 있었으며, 또 문종 때에는 상주(尙州)에서 지화가 있었다.”고 하는지라, 내신(內臣) 이효지(李孝智)에게 명하여 가서 살피게 하였더니, 불에 탄 석괴(石塊)를 가지고 왔는데, 숯같이 검으며, 불에 넣으면 불꽃이 일어났다.
○ 갑진년 9월에 봉상시(奉常寺)에서 김양경(金良璥)의 시호를 올렸는데, 공위공(恭威公)ㆍ편숙공(褊肅公) 그리고 제극공(齊克公)이라 하였다. 임금이 승정원에 물으니, 대답하기를, “김양경은 평소에 마음이 치우친 병통이 있었으므로 시호 역시 그러하나이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지난번에 김국광(金國光)과 윤계겸(尹繼謙)의 시호를 정할 때에 고치고자 하였으나, 후폐가 있을까 두려워서 고치지 못하였는데, 이제 정직한 사람이 그 붕우들의 사사 청탁을 받지 아니한다고 하여 모두 그 마음을 편급(偏急)하다고 하며, 조의(朝儀) 또한 쏠리듯 따라가니, 정직으로써 편급의 시호를 얻는 것을 어찌 옳다 하겠는가. 내가 이 시호를 고치고자 하는데, 경들은 어떠하오.” 하니, 정원에서 말하기를, “봉상시(奉常寺)에서 시호를 이미 정하였으므로, 고치는 것이 어려울 것 같습니다. 정직한 사람을 어찌 편급하다고 칭호하겠습니까. 대개 편급으로 득명한 자는 그 부당한 일을 가지고 편벽되게 고집부리고 억지로 하는 사람을 말하는 것입니다. 김양경의 편급한 병통은 생각하건대 공론이 모두 그러한 것 같으니, 이제 만일 고쳐 정하면 후폐가 있을까 염려됩니다. 다만 봉상시에서 의진(擬進)한 6자(공위ㆍ편숙ㆍ제극) 중에서 임금께서 정하시는 것이 어떠할까 하나이다.” 하였다. 공숙공(恭肅公)이라고 어필로 써서 내렸으니, 일에 공순하게 하고, 위에 봉공하는 것을 공(恭)이라 하며, 마음가짐이 결단성이 있는 것을 숙(肅)이라고 한다. 갑진년 11월에 봉상시에서 이계손(李繼孫)이 시호를 의진(擬進)하였는데, 장경공(長敬公)과 정헌공(玎憲公)이라 하였다. 사람 가르치기를 게을리 하지 아니함을 장(長)이라 하고, 뜻 이루기를 힘쓰지 아니함을 정(玎)이라고 한다. 김 문간공(金文簡公)이 마침 경연에 있다가 아뢰기를, ”이계손(李繼孫)은 영안도(永安道) 관찰사로 있으면서 학교를 일으키고 인재를 양성하여 그 중에서 과거한 자도 많습니다. 그러나 남을 부지런히 가르쳤다는 말은 그에 맞지 않습니다. 회기불권(誨人不倦)은 김구(金鉤)와 김말(金末) 같은 사람에게 타당합니다. 이계손으로 말하면, 감사로 있으면서 학문을 진흥시켰을 뿐이고, 스스로 가르치지는 않았는데, 어찌 이같은 시호를 얻을 수 있겠습니까. 이계손은 사람됨이 재상의 체모가 있어서 선인군자(善人君子)입니다만, 장(長) 자를 굳이 쓰지 않더라도, 다른 좋은 시호를 정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 술의불면(述義不勉)도 맞지 않으리라 생각됩니다. 그는 일찍이 죄를 얻어 귀양간 일이 있으므로 정(玎) 자는 불가하나이다.”하니, 임금이 드디어 경헌공(敬憲公)이라고 써서 내렸다.
○ 성화(成化 명 나라 헌종의 연호) 병오년에 직제학(直提學) 김흔(金訢)은 그의 외증조되는 성개(成慨)가 쓴 위징(魏徵)의 십점소(十漸疏)를 드리면서 아울러 규경(規警)을 삼으라는 차자(箚子)를 올렸더니, 임금은 전에 입었던 흰 비단 첩리(帖裏 속옷)와 흑서피(黑黍皮 서는 쥐와 같다.)의 신을 주고, 또 금전지(金箋紙)에 손수 쓴 글을 보냈다. 그 글에 “전번에 보내준 차자와 위징 소축(疏軸)은 깊이 아름다운 일이라고 생각한다. 위징의 이 말은 실로 만세의 시귀(蓍龜)가 된다. 일찍이 그대의 부친이 그대에게 권면하기를, 위 정승(위징)으로 자부하도록 하였고, 그대가 또 나에게 권하여 당우(唐虞)와 같은 정치를 하라고 하니, 이는 아비는 그 아들을 사랑하고, 신하는 그 임금을 사랑하는 것이라 할 만하다. 내가 비록 현숙하지 못하나, 어찌 그를 감히 잊으리오. 그대의 성의를 가상히 여겨서 상주어 표창하니, 항시 좌우에 두고 스스로 경계하라.”고 하였다. 그 글씨는 혜정(楷正)하나, 굳이 취할 바가 없었으나, 김흔은 공조 참의로, 그 아버지인 김우신(金友臣)은 단양 군수(丹陽郡守)로 삼았다.
○ 무신년 2월 6일에 세자(世子) 빈(嬪)을 납궁(納宮)하였는데, 아침부터 풍우가 심하게 이는지라, 그 빈부(嬪父)인 좌참찬(左參贊) 신승선(愼承善)에게 손수 쓴 편지를 보내어 이르기를, “세속은 혼일(婚日)에 풍우가 있는 것을 꺼린다고 하나, 무릇 바람으로써 동하게 하고, 비로써 윤택히 하여 만물이 자람에 있어 풍우의 공이 아님이 없다.”고 하였다. 전하여 듣는 것이므로 비록 다 기록하지는 못하였지만, 진실로 제왕의 말이로다. 정오부터 날씨가 개고 청명하였다. 충민공(忠敏公) 《잡기》
○ 성묘조에 물재(勿齋) 손순효(孫舜孝)는 연산군이 부하(負荷 임금의 큰 직무)를 이기지 못할 것임을 알았다. 하루는 임금을 어탑(御榻)에 가까이 가서 용상을 어루만지며 청한 것이 있었는데, 대간(臺諫)에서는 죄주기를 청하고, 또 어떤 밀계(密啓)인지 듣고자 하였지만, 임금은 “호색으로 나를 경계한 것일 뿐이다.” 하곤 끝까지 말하지 아니하였다. 《병진정사록》
○ 고려 때의 문사는 모두 《시경》과《이소경》으로 학업을 일삼더니, 오직 정포은(鄭圃隱)이 성리학(性理學)을 처음으로 제창하였고, 아조(我朝)에 이르러서 권양촌(權陽村 권근)ㆍ권매헌(權梅軒 권눌) 형제가 능히 경학에 밝고 또 문장에 능하였다. 권양촌은 사서 오경의 구결(口訣)을 정하고 또 《천견록(淺見綠)》과《입학도설(入學圖說)》을 지어서 유학에 우익(羽翼 보조)한 공이 적지 않다. 그 후임으로 스승된 자는 황현(黃絃)ㆍ윤상(尹祥)ㆍ김구(金鉤)ㆍ김말(金末)ㆍ김반(金泮)이다. 황현의 학문은 잘 들을 수 없고, 윤상은 경전이 가장 정결하며, 작문(作文)도 조금은 할 줄 알았다. 김구와 김말은 경전과 작문이 모두 정밀하였는데, 김말은 고집스러움을 면치 못하고 항시 의논이 있을 때면, 상하를 가리지 않고 다투어 마지않으며, 수업(受業)하는 자도 역시 두 가지를 갖추었다. 두 공(김구ㆍ김말)이 모두 세조의 알아주심을 얻어서 벼슬이 1품에 이르렀다. 김반은 대사성(大司成)이 되었다가 나이 늙어서 치사(致仕)하였는데, 끝내 그 고향에서 아사(餓死)하였다. 또 그 다음을 들어 말하면, 공기(孔頎)ㆍ정자영(鄭自英)ㆍ구종직(丘從直)ㆍ유희익(兪希益)ㆍ유진기(兪鎭頎)인데, 그들은 익살스럽고 말은 잘하나, 작문하는 데는 편지 같은 작은 문구도 한마디 못 지어서 남으로부터 편지를 받고도 회답을 하지 못했다. 하루는 생원 김순명(金順明)이 마침 방에 있다가 말하는 것에 따라 답장을 썼는데, 그 사어(辭語)가 심히 아름다우므로 기(頎)가 감탄하며 말하기를, “자네가 나에게서 배웠는데, 자네는 글을 잘 쓰고 나는 글을 쓰지 못하니, 진실로 청(靑)이 쪽풀에서 나왔으나, 쪽풀보다 푸르다는 말이 이를 두고 이름이다.” 하였다. 정자영(鄭自英)은 오경만 잘 알 뿐 아니라, 또한 능히 제사(諸史)를 널리 섭렵하였고, 벼슬이 판서에 이르렀다. 구종직은 용모가 매우 출중하여 세조의 발탁을 받아 벼슬이 1품에 이르렀고, 유희익은 그다지 현달하지 못하였으며, 유진기는 고집으로 사리에 불통하였다. 근자에는 노자형(盧自亨)과 이문흥(李文興)이 오랫동안 학관에 있었으므로 성종이 연로하다고 하여 우대하여 당상관으로 승진시켰는데 모두 고향에 가서 죽었다. 《용재총화》
○ 상당부원군(上黨府院君) 한명회(韓明澮)는 정자를 한수(漢水) 남쪽에 짓고 그 이름을 압구정(押鷗亭)이라고 하였다. 임금을 옹립한 공을 한 충헌공(韓忠獻公 충헌은 송 나라 명신인 한기(韓琦)의 시호)에게 견주면서 벼슬을 그만두고 물러가 명예를 얻고자 하였다. 늙었으므로 강호(江湖)로 사퇴하겠다고 말은 하면서도 작록에 미련이 남아 있어 가지 못하더니, 임금이 작별의 시를 지어주니, 조중 문사(朝中文士)가 서로 다투어 화운(和韻)을 하여 수백 편이 되었다. 그중 판사 최경지(崔敬止)의 시가 제일이었는데, 그 시에 이르기를,
세 번 불러 보심이 은근하여 두터운 총애를 받았으니 / 三接慇懃寵渥優
정자가 있어도 돌아가서 쉴 생각 없네 / 有亭無計得來遊
가슴 속에 기심(機心) 고요해지면 / 胸中自有機心靜
벼슬하는 마당에서도 백구는 친할 수 있으리 / 宦海前頭可押鷗
라고 하였더니, 한명회가 미워하여 현판 다는 데 끼워넣지 아니하였다. 《추강냉화》
○ 충정공(忠貞公) 허종(許琮)은 어릴 때부터 출중 하여 보통 아이들과 같지 아니하였다. 나이 12ㆍ3세 때에 여러 아이들과 같이 절에 가서 글을 읽고 있었는데, 어느 날 야반에 도적이 와서 아이들의 옷과 신발을 도적질해 갔다. 이튿날 여러 아이들은 겁이 나서 모두 흩어졌으나, 허종은 홀로 끄떡도 하지 아니하고 베개를높이하고 길게 누워 붓을 들고 벽에 글을 쓰기를, “내 옷은 탈취해 갈지라도, 내 신은 훔치지 않는 것이 좋았을 것인데, 옷도 신도 모두 탈취해 갔으니, 내 생각에는 도선생(盜先生)을 위하여 좋지 않게 여기노라.”라고 하여 듣는 자들이 이미 그 바탕이 비범함을 알았다. 《사재척언》
○ 양천군(陽川君) 허종은 생김새가 훤칠하고 풍채가 점잖아서 당시에 대인군자로 추중하였다. 젊어서부터 박식하고 문장을 잘 지었으며, 천문(天文)ㆍ역률(曆律)ㆍ의복(醫卜)의 기술에 이르기까지 정통하지 아니함이 없었다. 또 궁마(弓馬)에도 능하였으므로 국가에 대사가 있으면 반드시 공을 원수로 삼았다. 그러나, 가산(家産)은 돌보지 아니하여 사는 집은 겨우 바람과 햇볕을 가릴 정도이면서도 항시 공은 담담하게 여겼다. 《청파극담》
○ 홍치(弘治 명 나라 효종의 연호) 무신년에 시강(侍講) 동월(董越)과 급사(給事) 왕창(王敞)이 효종의 등극 조서를 반포하기 위하여 우리나라에 오는데, 허 충정공(許忠貞公)이 원영사(遠迎使)로 의주에 마중갔는데, 양사(兩使)는 잘난 체하며 사람을 업신여기며, 좌우의 집사(執事)가 조금만 실수하면 성내어 말하기를, “나는 너희들 나라의 환관이 아니다. 어찌 이렇게 무례하냐.” 하고 꾸짖었으니, 이는 지난날 봉사자(奉仕者)가 대부분 우리나라에서 중국에 들어가서 환관된 자이었으므로 이렇게 말한 것이다. 그러나 허종을 만나니, 공의 큰 키와 단정히 서 있는 자태며 의관이 위연(偉然)함을 보고, 양사는 깜짝 놀라며 서로 눈짓하고 말하기를, “당당한 인품이로다. 이 사람이여.”라고 하더니, 이로부터 엄하고 모난 것이 조금 누그러져서 좌우에서 혹 잘못하는 일이 있어도 모두 따지지 않았고, 매양 공을 보면 붙들고 조용히 이야기하였다. 서로 경사(經史)를 토론하면, 밤이 깊어야 파하더니, 하루는 왕 급사(王給事)가 사신으로 촉(蜀)에 간 일이 있다고 말하니, 공이 묻기를, “촉을 가려면 두 길이 있습니다. 곧 육로는 포사(褒斜)에서 들어가고, 수로는 형문(荊門)에서 들어가는데, 공은 어느 길로 들어갔습니까.” 하니, 왕 급사가 답하기를, “강을 타고 들어갔소.” 하는지라, 공이 또 묻기를, “강이 민강(岷江)에서 시작하여 기산(■山)의 동쪽 골짜기에 이르러 물이 극히 험하다가, 이릉(夷陵)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천천히 흐른다고 하였는데, 과연 그러하던가요.” 하였다. 다시 말을 이어, 강이 모모(某某)란 곳에 이르는 강 연안 위아래의 양(襄)ㆍ번(樊)ㆍ형(荊)ㆍ악(鄂) 등지의 수천 리 사이를 산천의 원근과 호구(戶口)의 다과며 고금 영웅들의 뺏고 차지하고 나누어 점령한 것에 이르기까지 일일이 들어 세니, 양사가 심복하고 공의 손을 잡으며, “만일 가슴속에 만권 서책을 갈무리하지 않고서야 어찌 이와 같겠소.”라고 말하였다. 또 공이 중국 전고(典故)를 물으면 비록 궁중에서 금하는 비결이라도 공을 위하여 모두 말하고 조금도 숨김이 없었다. 양사가 돌아가려고 강에 왔을 때에는 섭섭하여 차마 작별을 못하고 눈물을 흘리며 말하기를, “공이 빨리 조회하러 사신 와서 중국 사람으로 하여금 해외에 이런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게 하고 싶다.” 하였다. 환조하여 진신(縉紳)들에게 떠들고 찬양하며 말하기를, “천상(天上)은 알지 못하는 바이지만, 인간으로서는 짝할 이가 없다.” 하였다. 그 후에 낭중(郞中) 애복(艾璞)이 사신으로 우리나라에 왔는데, 사람됨이 거만하고 외람되어 경상(卿相) 같은 귀인을 만나도 모두 흘겨보면서 예를 하지 아니하였는데, 국경에 들어와 첫말에 공의 기거(起居)를 묻더니, 공을 본 뒤에는 얼굴빛을 고치고 기색을 화하게 하여 대하고, 영송(迎送)하는 데 자신을 낮추며 대우하는 예법이 심히 정중하였다. 《패관잡기》
○ 이음애(李陰崖 이자)가 상우당(尙友堂 허종) 시집에 발문(跋文)하여 이르기를 “국조의 명신으로 말하면 영릉(英陵 세종) 때는 황희(黃喜)ㆍ허주(許稠)요, 선릉(宣陵 성종) 때는 허공이니, 휘(諱)는 종(琮)이요, 자(字)는 종경(宗卿)이요, 호는 상우당(尙友堂)이다. 처음 벼슬할 때에 불교를 만만(謾謾)히 본다고 역정을 받아 광릉(光陵 세조)이 지나친 위엄으로 눌러서 그 뜻가짐을 시험하고서야 곧 벼슬을 승진시킬 것을 명하였는데, 조용하게 위의를 잃지 않고 있었다. 이로부터 화려한 명성이 날로 드러나서 순서를 뛰어 재상에 이르렀고, 계급을 따르지 아니하였다. 체격과 용모가 훤칠하고 풍채가 화하고도 엄숙하여, 마치 가을 하늘과 겨울 날씨 같아서, 멀리서 바라보면 엄숙한 듯하고 가까이 나아가 대하면 온화한 성품이었다. 특히 성리학(性理學)을 좋아하여 차분히 상고하고 연구하였으니, 대부분 그가 자득한 것은, 한 푼어치씩 쌓고 한 치 길이씩 덧붙여서 이목(耳目)에 칠한 정도의 자와는 비유가 되지 아니했다. 또한 모든 역사에 통달하였는데, 주문공(朱文公)의 《통감강목(通鑑綱目)》을 20일 만에 끝마치니, 그 정근(精勤)하고 준민(俊敏)함이 대체로 이와 같았다. 그러므로 나라 일을 처리한 것이 모두 본받아 법으로 삼을만했다. 선릉(宣陵)에게 지우(知遇)되어 그 덕이 원수(元首 임금)와 비등하여, 들어와서는 고요(皐陶) 기(夔) 같은 명신(名臣)이 되고, 나아가서는 방숙(方叔)과 소호(召虎) 같은 중신(重臣)이 되었다. 기뻐하고 고무되어 대유(大猷 큰 성과)를 기대하였는데, 급작스레 죽었으니, 어찌 운명이 아니겠느냐. 그의 시와 문도 그 덕망과 같아서, 깎고 다듬는 일을 일삼지 아니하여서도 혼후(渾厚)하면서 단정하고 정성스러워서 자연히 성률(聲律)에 맞았다. 덕이 있는 사람은 반드시 훌륭한 말이 있다더니, 어찌 사실이 아니겠는가.” 하였다.《병진정사록》
○ 손 판원(孫判院 손순효)은 삼휴설(三休說)과 사휴설(四休說)을 취합하여 칠휴거사(七休居士)라고 하였다. 사람됨이 순수하고 근실해서 다른 일이 없었으며, 매양 곧은 뜻으로 곧은 행실을 하였으나, 풍속과 강상(綱常)에 관한 일에는 반드시 먼저 뜻을 가다듬었으며, 취하면 호기스러운 말이 그치지 않았다. 강원도 감사로 있을 때에 마침 크게 가물어 기우제를 지내도 효과가 없자, 공이 말하기를, “비가 오지 않는 것은 다름이 아니라, 수령(守令)의 정성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만일 성심이 하늘을 감동시키면 하늘이 감동하여 반드시 응해 줄 것이다.” 하며, 드디어 재계(齋戒)하고 몸소 나가서 기우제를 지냈더니, 그 날 밤중에 빗소리가 들렸다. 기뻐하여 일어나서 말하기를, “내가 마땅히 하늘에 감사를 드리겠노라.” 하고, 관복을 입고 뜰 가운데 서서 무수히 하늘에 절하였다. 우세가 점차 급하여, 한 아전이 우산을 가져다가 받치고 있었는데, 공이 말하기를, “높으신 어른 앞에서, 어찌 우산이 필요하랴.” 하고, 명하여 가져가게 하니, 의복이 다 젖어 있었다. 또 경상 감사로 있을 때에는 효자와 열녀문을 지날 때면 반드시 말에서 내려 재배하며, 비록 비가 올지라도 피하지 아니하였는데, 그때에 도사(都事) 이집(李緝)이 도롱이를 두르고 밭에 앉아 있는지라 공이 재배를 마치고 도사에게 말하기를, “족하(足下)는 무엇을 하고 있소.” 하니, 이집이 대답하기를, ”나는 영감(令監)보다 먼저 절하였습니다.” 하므로, 좌우에서 입을 가리고 웃지 아니한 사람이 없었다. 언젠가 또 평양에 갔을 때에는, 기자묘(箕子廟)를 보고 말에서 내려 우러러 보고 절하며 말하기를,“ 동쪽 사람으로 예의(禮義)의 나라에 살게 된 것은 오로지 태사(太師)의 교훈 때문이었다.” 하였다. 또 한번은 천령(穿嶺)에서 사냥에 배행한 일이 있었는데, 맹호를 포위하자 공이 술에 취하여 나무화살을 뽑아 활에 메고 말을 달려 들어가서 쏘려고 하였다. 여러 사람이 극력 만류하여 그만두었는데, 하는 일들이 모두 이와 같았다. 항시 임금의 앞에서 충서(忠恕) 두 자를 써서 지성스럽게 진계(陳啓)하니, 성종이 충직하다고 여겨 드디어 크게 등용하였다. 공은 지위가 높을수록 마음가짐이 더욱 검약하여 매양 술상에는 흑두채(黑豆菜)나 고채(苦菜 씀바귀)가 아니면 송아(松芽) 같은 것으로 안주로 삼았고 오로지 번화한 것은 싫어하였다. 《용재총화》
○ 정포은(鄭圃隱) 문충공(文忠公)의 사당이 예전에는 영천현(永川縣)에 있었다. 손문정(孫文貞) 칠휴공(七休公)이 이 도(경상도)의 안찰사(按察使)로 순찰하여 영천(永川) 군경을 지나다가, 마상에서 술이 취하여 잠이 들어 혼혼(昏昏)히 졸면서 포은촌(圃隱村)을 지나가는데 꿈에 빈발(鬢髮)이 하얗고 의관이 점잖은 한 노인이 희미하게 나타나서 스스로 포은(圃隱)이라 하며 말하기를, “사는 집이 퇴폐하여 풍우를 가리지 못한다.” 하면서 부탁의 뜻이 있는 듯한지라, 칠휴가 놀라 깨어 이상히 여기고 옛 노인에게 물어서 그 고지(古趾)를 찾아서 군민들을 권면하여 사당을 짓게 하였다. 사당이 완성되자 제물을 갖추어 몸소 전을 드리고 낙성식을 하였으며, 스스로 큰 잔을 들어 마시고 취하여 벽에 글을 쓰기를, “문 승상(文承相 남송 말기의 충신인 문천상(文天祥))과 충의백(忠義伯 포은의 봉호가 충의백임) 두 선생은 간담(肝膽)이 서로 비치도다. 일신을 잊어버리고 인간의 기강을 세웠으니, 천만 세를 두고 경앙(景仰)하여 마지않는도다. 이(利)가 있는 곳을 찾아 고금이 분주하건만, 서리와 같이 맑고 눈같이 희며, 송백(松栢)과 같이 창창(蒼蒼)하도다. 여기에 한 칸 집을 얽어서 풍우를 가리게 하였으니, 공의 영혼이 편안할 때, 내 마음도 편안하도다.” 하였다. 가만히 생각하면, 충성된 혼과 굳센 넋은 천지간에서 애연(藹然)한 화기로 조화원기(造化元氣)와 같이 흐르나니, 어찌 구구히 사당집의 성하고 헐어진 것으로써 인간에게 청구하는 바가 있으리오마는, 생각건대 이 늙은이의 흉중이 평화하고 아름다우며 평소에 충서(忠恕)로써 마음을 삼았으므로 혹 황홀한 사이에 서로 감통(感通)할 수 었었던 것인가. 《용천담적기》
○ 칠휴가 열읍(列邑)을 안행(按行)하면서 길가에 있는 효자와 열녀의 정문을 보면, 반드시 말에서 내려 전배(展拜)하며 지나는데, 어느 날은 금오산(金烏山) 아래에 있는 길재(吉再) 선생의 고거(故居)에 나아가서 글을 지어 전드리기를, “사당 아래서 우러러 절하니, 생시의 모습이 방불하외다. 오직 오산(烏山)과 낙수(洛水)는 예 같은데, 선생을 생각함이여, 어디 계신지요. 누른 파초 열매와 붉은 여자(荔子 과일 이름)를 전드리니 영령(英靈)이여 흩어지지 않을 것을 바라나이다.” 하였다. 이 늙은이는 문자를 깎고 다듬는 데에 뜻이 없으면서도 흉중에서 나오는 바가 자연히 이와 같았으니, 그 풍개(風槩)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용천담적기》
○ 손물재(孫勿齋 손순효)가 방백(方伯)으로 있을 때에 가뭄을 만나면 매양 재계하고 정성을 들여서 비를 비는데, 문득 응하여 비가 오면 모르되, 그렇지 아니하면 노(怒)하여 신에게 말하기를, “내가 비를 너에게 빌었는데, 너는 비를 주지 아니하니, 어찌 된 것이냐.” 하였으니, 신을 노하게 하는 말은 비록 스스로 반성하는 도리는 아니나, 만일 자신이 정성스럽지 아니하였으며, 반드시 능히 이 같은 말을 하지 못할 것이다. 《병진정사록》
○ 무릇 사람이 죽으려고 할 때에는 정신이 어지럽지 아니하나, 귀화자(歸化者 죽는 자)가 정도를 지키지 않는 사람이라면, 진실로 불가능한 일이다. 이상(二相) 손순효(孫舜孝)는 항시 스스로 말하기를, “나는 고통이 없이 죽기를 원한다.” 하더니 하루는, 재상들과 밤새 술을 마시며 담화하고는, 새벽에 일어나서 그 부인에게 말하기를, “나의 기운이 불편하니 아이들을 불러오고 속히 밥을 지으라.” 하고, 이어 말하기를, “내가 어릴 때에 책을 끼고 사문(師門)에 다니던 것을 흉내내 보겠다.” 하고는 이에 한 권의 책을 끼고 계단을 두어 차례 오르내리더니, “피곤하다. 내 쉬겠다.” 하고서는, 가만히 베개에 누우니, 집안 식구는 잠들었으리라 생각하였는데 얼마 후 보니, 숨이 끊어져 있었다. 좋은 소주를 큰 병에 넣어 영석(靈石) 아래 묻어 두라고 전부터 명(命)하여서, 그같이 하였다. 《소문쇄록》
○ 참판(參判) 권경우(權景祐)는 성묘조 때에 감찰로 있으면서 서장관이 되어 중국 사신으로 간 일이 있었다. 그때 역관들이 과대하게 물화를 가져오므로 역로(馹路)가 떠들썩하였다. 그 물화를 부탁한 것은 권귀의 집안과 많이 관련되었는데, 공은 일체를 탐색하여 아뢰게 하되 한 필의 직물이라도 부탁한 자는 모두 조옥(詔獄 의금부)에서 국문하였다. 그리하여 공은 세 품계를 뛰어 승진하게 되었다. 정언이 되어서는 대간을 창도하여 임사홍(任士洪)의 축출을 청하였는데, 말이 매우 강직하였다. 임사홍이 그날 밤에 공의 집에 가서 거짓 모르는 체하고 말하기를, “누가 감히 이런 언론을 하였는가.” 하니, 공이 솔직히 대답하기를, “오직 나라야 감히 그렇게 할 수 있소.” 하니, 임사흥은 기가 막히어 감히 한 마디도 하지 못하고 물러갔다. 홍문관에 있을 때 말하기를, “폐비가 비록 죄가 있다고 하더라도 마땅히 여염(閭閻)집에 함부로 처해 있을 수는 없다.” 하니, 임금이 진노하여 이르기를, “너는 음흉하게 세자에게 붙어서 후일의 영화를 바라는 것이로구나.” 하면서, 하옥을 명하고 많이 힐책하니, 공이 조금도 막히지 아니하고 정성을 다하여 역대 임금의 폐비에 대한 일을 끌어다 증거로 진술하니, 그 말이 더욱 개절(剴切)한지라, 임금이 이에 노여움을 풀고 그의 관직만 파하였다. 《패관잡기》
○ 판서 정석견(鄭錫堅)은 시원스러워서 작은 예절에 구애하지 아니하였다. 홍문관은 본래 구사(丘史)가 없고, 다만 선노(選奴) 하나만 있었다. 그러므로 관원들이 출행할 때에는 타사(他司)에서 구사를 빌리는 것이 예(例)로 되어 있는데, 정석견은 응교(應校)가 되어서도 홀로 구사를 빌리지 아니하고, 다만 납패(蠟牌)를 든 조졸(皁卒)이 앞에서 인도하여 가운데서 말을 타고, 그 뒤에 종 하나만 따라가는지라, 길에서 보는 자들이 손가락질을 하고 비웃으며 말하기를, 산자관원(山字官員 셋만 늘어선 것이 산(山) 자와 같음을 가리킨 말)이라고 하였다. 동료가 희롱하기를, “한 번 구사를 빌리는 것이 무엇이 그렇게 대의에 어긋나기로 이같이 위엄을 잃느냐.” 하니, 정석견이 웃으며 말하기를, “구사를 빌리는 것은 남의 눈앞의 일이요, 호위하는 자의 많고 적은 것은 등 뒤의 일이다. 보이지도 않는 일을 하기 위하여 남의 앞에서 구차한 말을 하는 것은 내 맹세코 하지 않겠다. 차라리 산자관(山字官)이 될지언정, 남에게 구사를 빌리는 것은 원치 아니한다.” 하니, 듣는 자들이 모두 대소하였다. 《사재척언》
○ 청성군(淸城君) 한치형(韓致亨)이 형조 판서가 되어서 근무가 심히 성실하여 그 밑에 있는 낭관들이 아침저녁으로 견디지 못하고 매우 괴로워하였다. 그 족질인 한건(韓健)이 정랑으로 있었는데, 어느 날 틈이 있을 때에 문안차 가서 조용히 말하기를, “함종군(咸從君) 어세겸(魚世謙) 같은 이는 비록 늦게 출근하여 일찍이 파하여도 오히려 아무 일이 없는데, 존숙(尊叔)은 어찌 노고를 이렇게 많이 하시나이까.” 하니, 한 청성군이 두어 번 고개를 끄덕이고 천천히 대답하기를, “함종은 도덕과 문장이 모두 우수하여 비록 송사를 결단함에 게으르더라도 취할 바가 있지만, 나와 너는 하나도 잘하는 것이 없으니, 다만 직무에 부지런한 것이 좋지 아니하냐. 나의 뜻은 이렇다.” 하니, 한건이 부끄러워하면서 물러갔다. 《충민공잡기》
○ 강응정(姜應貞)의 자는 공직(公直)이요, 호는 중화재(中和齋)며 은진(恩津)에 살았고, 효행으로 칭찬이 있었다. 일찍이 어머니 병환에 3년 동안 띠를 풀지 아니하고 약은 반드시 친히 맛보고 드리더니, 하루는 꿈에 천신이 뜰에 내려와서 강공직에게 말하기를, “내일 손님이 올 것이니, 반드시 너의 어머니 병을 치료하리라.” 하더니, 이튿날 아침에 과연 한 소년이 와서 이름은 원의(元義)이며 윤왕동(輪王洞)에 산다면서 유숙하기를 청하는지라, 공직이 쉬게 하였다. 어머니 병을 물으니, 소년이 과연 의약을 알므로 소년의 말에 따라 시험하였더니, 15일 만에 병이 나았다. 후일 부모상에 거할 때 한결같이 《주자가례(朱子家禮)》를 따라 행하고, 겨울에도 맨발에 솜옷을 입지 아니하였다. 이것을 나라에서 알게 되자, 정문을 짓고 그 집에는 정역(丁役)을 면하게 하였다. 강공직은 사람됨이 경서를 잘 외우며, 인명(人命)에 대해 추점(推占)을 하였고 또 의술을 알았고, 겸하여 《지리서(地理書)》에도 능통하였다. 소시에 태학(太學)에서 놀며 장안의 준사(俊士)와 함께 주문공의 향약(鄕約) 고사에 따라 아침과 밤에 《소학》을 강론하였는데, 당시의 저명한 선비들이 모두 모였다. 이를테면 김용석(金用石)자는 연숙(鍊叔)ㆍ신종호(申從濩)자는 차소(次韶)ㆍ박연(朴演)자는 문숙(文叔)ㆍ손효조(孫孝祖)자는 무첨(無忝)ㆍ정경조(鄭敬祖)자는 효곤(孝昆)ㆍ권주(權柱)자는 지경(枝卿)ㆍ정석형(丁碩亨)자는 가회(嘉會)ㆍ강백진(康伯珍)자는 자온(子蘊)ㆍ김윤제(金允濟)자는 자주(子舟) 들인데, 이들은 그 우두머리요, 나머지는 다 기록하지 않았다. 세상에서 이를 기뻐하지 아니한 자들이 있어 말하되, 소학계 혹은 효자계라고 지칭하며, 부자(夫子)의 사성(四聖)과 십철(十哲)에 비기며 조롱하였다. 공은 때를 만나지 못하여 고향에서 죽을 때까지 과거를 보지 아니하였다. 《남효온 사우명행록》
○ 김굉필(金宏弼)의 자는 대유(大猷)인데, 점필재(佔畢齋) 김종직에게 수업하였고, 경자년의 생원시에 합격하였으며, 현풍(玄風)에서 살았다. 행실이 견줄 수 없을 만큼 돈독하여, 평소에도 반드시 관대(冠帶)를 하였고 인정(人定)을 친 후에야 취침하며, 닭이 울면 곧 일어났다. 그리고 정실(正室) 이외에는 여색을 가까이한 적이 없었다. 손에는 《소학》을 놓지 아니하고, 어떤 사람이 혹 국가사를 물으면 반드시 대답하기를 “소학 동자가 어찌 대의(大議)를 알겠냐.” 하였다. 일찍이 시를 지어 이르기를, “문학을 배우면서 여전히 천기(天機)를 알지 못하여도 《소학》을 읽는 중에 지난날의 잘못을 깨우친다.”라고 하였는데, 점필재 선생이 평하기를, “이 글은 성인을 배우는 근본 터전이니, 노재(魯齊 원 나라의 허형) 후에 어찌 그만한 사람이 없으리오.”하였으니, 그를 추중함이 이와 같았다. 30세 후에야 다른 글을 읽었으며, 후진들 가르치기를 게을리하지 아니하였으니, 곧 이현손(李賢孫) 명양부정(鳴陽副正) 같은 사람이다. 그리고, 이장길(李長吉)ㆍ이적(李勣)ㆍ최충성(崔忠成)ㆍ박한참(朴漢參)ㆍ윤신(尹信)이 모두 그 문하에서 나왔는데, 그들은 좋은 인재로서 독실한 행실이 또한 그 스승과 같았다. 나이가 더욱 많아지고 도가 더욱 높아지자 세상일을 돌이킬 수 없을 것과, 도가 행해지지 못할 것을 익히 알고서 빛을 감추고 자취를 숨기려 하였으나 세상 사람도 역시 알았다. 필재(畢齋) 선생이 이조 참판으로 있으면서 아무런 건의하는 일이 없으니, 김대유(金大猷)가 시를 지어 보내기를,
도가 겨울에는 가죽옷을 입고, 여름에는 얼음물을 마시는 데 있다지마는 / 道在冬裘夏飮氷
개면 행하고 비오면 그치는 것이야 어찌 마음대로 할 수 있겠소 / 霽行潦止豈專能
난초가 만약 속된 것을 따른다면 결국 변할 것이니 / 蘭如從俗終當變
누가 소만이 밭갈고 말만을 탄다고 믿으리오 / 誰信牛畊馬可乘
라고 하였다. 선생이 화답하기를,
분수 밖에 벼슬을 하여 벌빙하는 데까지 이르렀는데 / 分外官聯到伐氷
임금을 돕고 세상을 바로잡는 데 내가 어찌 능할쏜가 / 匡君救俗我何能
후배들로 하여금 나의 우졸을 조롱하게 하였으나 / 從敎後輩嘲迂拙
권세와 이익을 구차하게 바라지 아니하네 / 勢利區區不足剩
라고 하였는데, 이는 대개 그 말을 싫어해서 지은 글이다. 이로부터 점필재와 달리하게 되었다. 정미년에 부상(父喪)을 만나서는 죽을 먹고 곡읍(哭泣)하는 슬픔이 지나쳐서 기절하였다가 다시 소생하였다. 대유는 《소학》에 의하여 몸가짐을 하며, 옛 성인으로써 준칙을 삼고, 또 후학(後學)을 불러들였는데, 순순(恂恂)히 쇄소(灑掃)하는 예를 지켜 행하고 육예(六藝)의 학을 닦는 제자가 전후에 가득한지라, 비방하는 여론이 바야흐로 비등하니, 정자욱(鄭自勗 정여창)이 그만둘 것을 권하였으나, 대유는 듣지 아니하였다. 일찍이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중 행(陸行)은 선교(禪敎)를 베풀고, 제자 천여 명이 학업을 하는데, 그 벗이 만류하며 ‘화환(禍患)이 두렵다.’ 하니, 육행이 답하기를, ‘선지 선각(先知先覺)로 하여금 후지 후각자(後知後覺者)를 깨우쳐 주는 것이니, 내가 아는 것으로써 남에게 일러줄 뿐이다. 화복이 있는 것은 하늘이 하는 것이니, 내가 어찌 관여할 것이리요.’ 하였다. 육행은 비록 중이나, 어찌 취할 말이 없으리오. ” 하였으니, 그 말이 지공(至公)하다고 하겠다. 《추강냉화》
○ 김대유(金大猷)는 성리학에 연원(淵源)을 가지고 근면 독실하여 게으르지 아니하였다. 송묘조 때에 덕행으로 처음 등용되었다가 여러 번 천거되어 형조 좌랑에 추천되었다. 과거 수십 년 전에 나를 책망하기를, “군과 이미 절교를 하고자 하였으나, 인정상 차마 그러지 못하노라.” 하므로, 내가 그 이유를 물으니, 말하기를, “군이 결단할 것이 아니다.” 하므로, 다시 추궁하여 물은즉, “백공(伯恭 남효온)ㆍ백원(百源 이총)ㆍ정중(正中 이정은)ㆍ문병(文柄 허반)은 모두 진풍(晉風)이 있으니, 진(晉)은 청담(淸淡)이 누(累)가 되어 10년이 가지 않아서 화가 이들에게 있었느니라.” 하므로, 나도 그로부터 맹세하고 다시는 이들과 왕래하지 아니하였더니, 후에 모두 화를 면하지 못했다. 신영희(辛永禧)《사우언행록》
○ 정여창(鄭汝昌)의 자는 자욱(自勗)인데, 일찍이 지리산(智異山)에 들어가서 3년을 나오지 아니하고 오경(五經)을 연구하여 궁극하고 심오한 경지에까지 이르렀다. 사물의 본체와 작용이 근원은 같으나 나누어진 것이 다른 것을 알았으며, 선악이 본성은 같으나 기(氣)가 다름을 알았고, 유석(儒釋)이 도(道)는 같으나 행적(行迹)의 차가 있음을 알았다. 성리학에 잠심하여 성(性)을 깨달으니, 성한 사람이나 미친 사람들까지도 모두 공경하였다. 경자년에 왕이 성균관에 조서를 내려 경전에 밝고 덕행이 있는 유생을 구하라 하니, 관중에서 정자욱(鄭自勗)이 제일이라고 천거하였다. 지관사(知館事) 서거정(徐居正)이 장차 자욱에게 강경을 하도록 하려고 하니, 자욱이 그만 물러났다. 계묘년에 진사시에 합격하였다. 그 부친인 정육을(鄭六乙)은 이시애(李施愛)의 난으로 죽었는데, 그때 자욱의 나이가 어렸으므로 상례 치른 일은 알 수 없으나, 후에 모친의 거상에는 전례(典禮)하는 법도와 죽 먹는 것을 일체 《주자가례》에 의하여 지극히 하였다. 경술년에 참의 윤긍(尹兢)이 그의 효행과 학행이 사림에서 견줄 이가 없다고 천거하여서, 특별히 조정에서 소격서 참봉(昭格署參奉)으로 삼았는데, 자욱이 상서하여 사면하니, 임금이 교지를 내려 포상한지라 이름이 더욱 중하여졌다. 자욱은 사람됨이 성품이 단중(端重)하여, 술을 마시지 아니하였고, 훈채(葷菜)를 먹지 아니하며, 또 우마육(牛馬肉)을 먹지 아니하였다. 겉으로는 평범한 말을 하지만, 내심은 분명하였다. 젊어서 학관에 있을 때 남과 같이 잠을 자되, 코를 골면서도 잠을 자지 아니하였으나 사람들은 알지 못하였는데, 어느날 최진국(崔鎭國)에게 발견되었으므로 관중에서 정아무개가 참선(參禪)하고 잠을 안 잔다고 떠들어 대었다. 《사우언행록》
○ 정자욱 선생은 소시 때에 술을 즐겨하였는데, 하루는 벗들과 지나치게 술을 마시고 들판에 넘어져서 밤을 새고 돌아오니, 그 모부인이 꾸짖기를, “네가 이같으니 내가 누구를 믿고 의뢰하겠는가.” 하니, 선생은 깊이 자각하고 그 후로는 임금이 주는 술이나 음복주 이외엔 입에 대지 아니하였다. 《병진정사록》
○ 정 선생은 젊어서 두류산(頭流山 지리산) 기슭에 정자를 복축(卜築)하고 만년을 보낼 계획을 하고 있더니, 성묘(成廟)가 소격서 참봉을 주고 부르자 선생은 간곡히 사임하였으나, 윤허를 얻지 못하고 이에 나오게 되었다. 선생은 몸가짐이 심히 엄격하여, 종일토록 단좌하고 있으면서 비록 아주 더운 날이라도 그 처자도 살갗을 본 일이 없었다. 평소에 시짓기를 좋아하지 아니했으므로, 다만 한편의 시가 세상에 전하니, 그 시에 이르기를,
창포는 바람에 날려 가볍고 부드럽게 흔들리는데 / 風蒲獵獵弄泛柔
4월이라 화개에는 이미 보리가 가을이로세 / 四月花開麥已秋
두류산 천봉만학 다 보고서 / 看盡頭流千萬疊
한 척의 조각배로 다시 대강을 흘러 내려가네 / 孤帆又下大江流
라고 하였다. 이 시를 읊으면 흉중(胸中)이 쇄락(洒落)하고 세상의 속된 점이 하나도 없으니, 대개 이 사람의 사람됨을 알겠다. 화개(花開)고을 이름이다.
○ 포은(圃隱 정몽주) 이후에 우리나라 성리학은 실로 김대유(金大猷) 선생으로부터 시작되었는데, 동지(同志)인 정 선생 자욱(自勗)도 성리학을 연구한 사람이다. 김대유는 이(理)에 정밀하고 정자욱은 수(數)에 정밀했는데, 아깝게도 상서로운 때를 만나서 못하여 비명으로 죽었으니, 창창(蒼蒼)한 저 하늘이 그를 어찌 하겠느냐. 중묘조 때에 다 영의정을 증직하였으며, 가묘(家廟)를 세우고 치제(致祭)하게 하였다.
○ 남효온(南孝溫)의 자는 백공(伯恭)이요, 호는 추강(秋江) 또는 행우(杏雨)라고 한다. 재행(才行)이 탁월(卓越)하나 항시 의식(衣食)이 거칠고, 또 조랑말을 타고 다니므로 아동과 부녀자가 서로 따라다니며 손가락질하며 웃곤 하였다. 성질이 술을 즐기었는데, 그 모친의 꾸지람을 듣고서 지주부(止酒賦)라는 글을 짓고 10년을 마시지 아니하더니, 풍병이 나자 다시 마시었다가, 병세가 좀 가라앉자 다시 지주부를 짓고 5년을 마시지 아니하였다. 후에 병세가 위독해지자, 다시 술과 같이 생애하며 벼슬도 하지 아니하고, 그 집에서 세상을 마치었다. 폐조(廢朝)에서는 점필재 문도라고 하여 대유를 처형하였고, 또 소릉(昭陵)의 복위 상소를 하였다 하여 백공의 시체를 능지처참하였다. 옛날 범희문(范希文) 공이 말하되, “충신(忠信)한 분은 하늘이 돕는다고 하였는데, 두 사람은 하늘이 돕지 아니하였으니, 어찌된 이유일까.”《사우언행록》
○ 남추강(南秋江 남효온)은 성품이 강개(慷慨)하였는데, 일찍이 청한자(淸寒子 김시습)를 스승으로 삼고 물질 이외의 세상에 노닐면서 세속과는 아무 상관을 하지 않았다. 나이 18세에 성묘에게 상서하여 소릉의 복위를 청한 일이 있었고, 때로는 시사에 울분하면 무악산(毋岳山)에 올라가서 통곡하고 돌아왔는데, 시사를 논할 때는 위언격론(危言激論)을 가리지 아니하고, 비록 꺼리고 숨기는 일이라도 거리낌이 없는지라, 대유와 자욱이 경계하여 말렸으나, 끝내 듣지 아니하였다. 김ㆍ정 두 공은 성리학에 밝고 모든 조행은《소학》을 법으로 삼으니, 그 하는 바가 실로 남추강과 다르다. 그러나 교분에 있어서는 서로 두터워 진실로 소위 ‘지란동취(芝蘭同臭)’라고 하겠다. 《병진정사록》
○ 남효온(南孝溫)의 자는 백공(伯恭)이요, 호는 추강(秋江)이다. 성품이 기개가 있어, 남에게 얽매이지 아니하고, 학문에 독실하며, 옛것을 좋아하고 지절(志節)이 있었다. 일찍이 상서하여 소릉의 복위를 청하였다가 귀양간 일이 있으나,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아니하였다. 주계정(朱溪正) 심원(沈源)과 안응세(安應世) 자정(子挺)과 벗이 되었다. 진사 시험에 합격하고는 동문과 시험에는 나가지 아니하니, 그 자친이 권유하므로 때로는 시험에 나갔으나, 즐겨하지 아니하였으므로 끝내 급제하지 못하였다. 홍치(弘治) 임자년에 겨우 39세로 졸하였다. 성화(成化) 기해년에 내가 서울에 불려가 장차 일본에 가게 되었는데, 남백공이 나의 시축을 구경하고 나를 한강에까지 전송한 일이 있었다. 이로부터 서로 사이가 좋아서 같이 송도에서 놀며 천마산(天磨山)에 올라가기도 하였다. 집이 고양(高陽)에 있었으므로, 당나귀를 몰아서 서로 찾아 압도(鴨島)에 가서 자면서 갈대로 불을 피우고 물고기와 게를 구워 먹으면서 운자(韻字)를 불러 시 짓는 것으로 밤을 새웠다. 나의 소개로 점필재를 호남에서 보았는데, 전부터 그의 시를 사랑한다면서 고인(古人)에 비교하였다. 그가 죽고 나자 남은 아들 충서(忠恕)가 미친병이 있어서 또 비명으로 죽었다. 나머지는 모두 사위뿐이어서 문집 초고를 모으지 않았다. 《소문쇄록》
○ 한훤(寒暄 김광필) 선생은 좌랑으로 있을 때에 진사 신영희(辛永禧)씨에게 달려가서 말하기를, “오늘 나는 마땅히 그대와 절교를 하겠다. 지금 사기(士氣)를 보면 동한(東漢)의 말과 같아서 어느 때에 무슨 화가 일어날지 모르겠는데, 나는 화가 박두하여 진퇴를 어찌할 도리가 없으나, 그대들은 멀리 고향에 가서 숨어 사시오. 그렇지 아니하면 나는 곧 이 자리에서 절교하겠노라. 내 말을 잘 들어 주겠는가. 그렇지 아니하겠는가.” 하면서 다짐하는지라, 신공은 이로 인하여 직산(稷山)으로 내려가서 사산(斜山) 아래로 가서 안정(安亭)이라고 호하였다. 안정은 일찍이 남효온ㆍ홍유손(洪裕孫)과 같이 죽림(竹林) 우사(羽士 신선)를 맺은 일도 있어서 문장행의(文章行義)가 당시 영수였으므로, 남으로 지나는 자는 그 문에 예하지 아니한 사람이 없었다. 《경현록》
○ 강국오(姜菊塢) 경순(景醇)은 진산 강씨(晉山姜氏)의 세고(世稿)를 편찬하면서, 김 참판(金參判) 수령(壽寧)과 같이 그 시문을 메우고 고치고 하여 보는 사람의 마음을 유쾌하게 하였으며, 부조(父祖)의 시명을 후세에까지 떨쳤다. 사람들은 이것을 효행이라고 하지만 나는 불효라고 생각한다. 또 상사(上舍 생진과(生進科)에 합격한 사람) 신영희(辛永禧)의 집에는 그 조부 문희공(文禧公)의 시집이 있는데, 그 우인이 말하기를, “자네의 가집(家集)을 인쇄하여 세상에 전하는 것이 좋겠다.” 하니, 신영희가 대답하기를, “나의 조부는 비록 글 잘한다는 명성이 세상에 으뜸이었으나, 가집(家集)에 실려 있는 것은 하나도 전할 것이 없고, 다만 한 문생의 만장 시에 말한, ‘32세에 졸하였으니, 불행한 것 안회(顔回)와 같도다.’ 라고 한 구절 외에 아름다운 시가 없으니, 어찌 가히 간행하겠는가.” 라고 하여서 사람들은 그것을 불효라고 하지만, 나는 효행이라 생각한다. 왜냐하면, 조부(祖父)의 행예(行藝)를 바른 대로 기술하여야 비로소 효행이라고 할 것이다. 가령 공교한 말과 허식하는 붓을 빌려다가 칭예한다면 그 부모의 영혼이 있을진대, 부끄러운 마음이 명명(冥冥)한 가운데에 어찌 없을 수 있겠는가. 《추강냉화》
○ 남효온과 신영희는 모두 상사로 현달하지 못하고 일찍 죽었다. 그들은 사람됨이 옛 일을 좋아하고 기개가 있으며, 남에게 아부하지 아니하고 세속의 틀에서 벗어났다. 효온의 견흥시(遣興詩)에,
괴생이 안기(安期 예전 신선)와 벗을 삼으니 / 蒯生友安期
세상에서 뛰어난 늙은이인 줄을 알았다 / 知爲不世翁
대초를 어린아이같이 보고 / 豎兒看大楚
패공이라도 개미만하게 여겼다 / 蟻封視沛公
어찌하여 제왕에게 유세하여 / 如何說齊王
큰 공을 세우려 하였던가 / 顧欲作元功
만일 걸구의 변명이 아니었더면 / 若非桀狗辨
거의 대벽(大辟 사형)에 빠지고 말았으리 / 幾陷大辟中
또,
필부인 양왕손은 / 匹夫楊王孫
한 무제 때에 났다 / 生當漢武時
무제가 한창 서북방에서 일할 적에 / 帝方事西北
온 세상이 구치에 힘쓰건만 / 擧世務駈馳
허리띠를 늦추고 만호봉이 되었으나 / 緩帶食萬戶
다만 지리한 것 배웠어라 / 顧乃學支離
평소에 기후를 업신여기더니 / 平生殘祈侯
알몸으로 장사하기 기약대로 하였도다 / 稗葬得如期

사종(嗣宗 완적(頑籍))은 망위(亡魏)를 위하여 / 嗣宗爲亡魏
문제(文帝 진 나라 사마소)를 여우같이 여겼다 / 狐媚視文帝
미친 듯이 국생을 좋아하여 / 猖狂引麴生
60일 동안 취하여 끝장보았다 / 六旬托末契
위주(僞主)의 청혼을 물리친 것은 / 却得僞主婚
그 대절이 만세에 빛나리라 / 大節昭萬世
증적(曾賊)이 무례를 꾸짖으니 / 曾賊責無禮
우습구나. 제 생각 못하는 위인 / 可笑不自計

47회나 올린 상소 / 四十七奏疏
영수(靈修 임금)의 총명을 넓히려 하였건만 / 欲廣靈修聰
마지막 사자론도 / 終然四字論
귓등에 지나는 바람만도 못하였네 / 不啻耳過風
계통의 점친 것 의뢰하여 / 賴用季通筮
말년에는 둔옹이라 호 지었네 / 末路號遯翁
한천에 한 칸 집을 세운 것은 / 寒泉一間舍
꼭 참동계(參同栔 신선되는 글) 정하기에 합당하였네 / 端合訂參同

호원이 대송을 몰아내니 / 胡元駈大宋
양경은 황진에 어두웠네 / 兩京迷黃塵
노재 허문정공은 / 魯齊許文正
피발하고 그 신하가 되었다 / 被髮爲其臣
요 순의 도를 가져다가 / 欲將堯舜道
억지로 판옥인을 교화하려 하였건만 / 强敎板屋人
방(方)과 원(圓)은 같이할 수 없는 것이 / 方圓不能周
필경에는 새 백성 이루지 못하였다 / 畢竟無新民
라 하였고 신영희의 우의시(愚意詩)에는,
남복은 뜰을 소제하고 / 男僕掃庭除
여종은 규당을 쓰네 / 女僕掃閨堂
장부는 변진을 소탕하고자 뜻하는 것 / 丈夫掃邊塵
한 집안에 있지 않다 / 志不在門楣
두옥 아래에 높이 누워 / 高臥斗屋下
내 흉중이 있는 기를 흔드노라 / 掉我胸中旗
야인은 장부가 아니다 / 野人非丈大
장부는 각자 기이하리라 / 大夫各自奇

말달려 급한 언덕 내리달려 / 走馬下急坂
매를 불러 높은 구름가로 들어간다 / 呼鷹入雲際
눈이 녹은 곳 찾아 말에서 내리고 / 下馬雪消處
바위에 걸터앉아 조금 쉬자니 / 踞石時少憩
마부는 찬밥을 펼쳐놓고 / 僕夫開冷飯
불 피우고 물 끓인다 / 敲火湯沸細
집은 10리나 남았는데 / 家在十里餘
산허리에 석양이 곱게 비치었네 / 山腰夕陽麗
또,
꽃까지 꺾어 해진 갓 꽂았으나 / 花枝揷破笠
때묻은 소매 춤추는 팔 위에 펄럭인다 / 垢袂翻舞臂
하였다. 영희는 기개가 있었으나, 세상에는 뜻을 잃었다. 어느 사비(私婢)에게 장가들었다가, 그 상전에게 욕을 보고 화가 나서 세상을 떠났고, 효온도 죽은 뒤에 참화를 만났으니, 어찌 이들의 운명이 이렇게 기박할까. 《소문쇄록》
○ 김시습(金時習)은 강릉인(江陵人)이며, 신라의 후예이다. 자는 열경(悅卿)이요, 호는 동봉(東峯)ㆍ벽산청은(碧山淸隱) 또는 청한자(淸寒子)라고도 한다. 세종 을묘생인데, 5세에 능히 글을 지었으므로, 세종이 승정원에 불러서 부시를 짓게 하고, 크게 기이하게 여기어, 그 부친을 불러 이르기를, “이 아이를 잘 기르라. 내가 장차 크게 쓰리라.” 하였다. 을해년에 광묘가 섭정하자, 사문(沙門)에 들어가서 이름을 설잠(雪岑)이라 하고, 수락정사(水落精舍)에 거하면서 수도연형(修道煉形)을 하였다. 유생(儒生)을 보면, 말마다 공맹(孔孟)을 칭하고 입으로 불법은 이르지 아니하였다. 사람이 수련(修煉)의 일을 물어도 또한 즐겨 말하지 아니하였다. 또 어떤 사람이 괴애(乖崖) 김수온(金守溫)의 좌화(坐化)한 일을 말하니, 설잠이 말하기를, “예(禮)에 좌화는 귀하게 여기지 아니한다. 나는 다만 증자(曾子)의 역책(易簀)자로(子路)의 결영(結纓)을 죽음에 있어 귀하게 여긴다. 그리고, 다른 것은 알지 못한다.” 하였다. 신축 연간에는 머리를 기르고 고기를 먹으며, 글을 지어 그 조부의 제사를 지냈는데, 그 글이 이르기를, “삼가 아룁니다. 제(帝)가 오륜(五倫)을 베풀었사온데, 어버이를 섬기는 것이 먼저가 되고, 3천 가지 죄 중에서 불효가 제일 크다 합니다. 무릇 천지 사이에 살면서 누가 양육의 은혜를 저버리오리까. 그러므로 호랑(虎狼)이 같은 악수(惡獸)며, 수달(豺獺) 같은 미충(微虫)이라도 어버이를 사랑하는 성품을 온전히 할 수가 있고, 또 근본을 알며 갚은 정성을 삼가나이다. 이것은 모두 천리(天理)의 당연함 이어서 물욕(物慾)에 가려지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엎드려 생각하옵건대, 우둔한 소자는 본지(本支)를 이으려고 젊어서는 이단(異端)에 침체되어 미몽(迷懵)하여 강구하지 못하였습니다만, 장차 수도(修道)로써 발탁될 것이요, 황설(謊說)로 윤회(輪回) 같은 것이 없음을 깨달았나이다. 젊어서는 그런대로 수도하였지만, 말년에 바야흐로 뉘우쳐서 이에 예전(禮典)과 성경(聖經)을 상고하고 찾아서 추원(追遠)하는 홍의(弘儀)를 고정(攷定)하였고, 청빈한 활계(活計)로 참작(參酌)하였나이다. 그리하여 간략(簡略)하면서 조촐히 할 것을 힘쓰며, 풍부히 하며 정성스럽게 하나니, 한 무제(漢武帝)는 70세에야 비로소 전천추(田千秋)의 말을 깨달았고, 원덕공(元德公)은 백 세가 되고서야 허노재(許魯齋)의 풍화에 감화되었나이다. 상로(霜露)에 젖음을 느끼고 세월이 감을 근심하니 경황(驚惶)함을 마지아니하며, 탄아(嘆訝)마저 진실로 많습니다. 그저 죄를 속(贖)할 수 있어서 천지의 양제(兩際)에서 용납된다면 혹시나 면목을 가지고 구원(九原)에서 조종(祖宗)을 뵈려고 하나이다.” 라고 하였다. 임인년 이후부터서는 세상이 쇠하려는 것을 보고 시달려 인간의 일은 하지 아니하고 여염간(閭閻間)에 버려진 사람이 되어, 날로 남과 더불어 장례원(掌隷院)에서 다투고 송사하였다. 하루는 술을 마시고 시중을 지나가다가 영의정 정창손(鄭昌孫)을 보고, “네 놈도 그만 쉬어라.” 하고 외치니, 정창손이 들은 척도 아니하며 지나갔다. 사람들은 이런 것들을 위태롭게 여겼으며 일찍이 교유하던 자들도 모두 절교하며 왕래하지 아니하였다. 홀로 시중의 정신병자들과 같이 재미있게 놀고 때로는 술에 취하여 길가에서 거꾸러지는가 하면, 늘 헛웃음을 웃고 하더니, 후일에 설악산(雪岳山) 또는 춘천산(春川山)에 들어가 있으면서 출입이 무상하였다. 사람들은 그의 한계를 알지 못하였지만 그를 좋아하는 사람은 정중(正中 이정은)ㆍ자용(子容 우선언)ㆍ자정(子挺 안응세), 그리고 나남효온이다. 그가 시문을 지은 것이 수만 편인데, 옮겨갈 때에 흩어져서 거의 없어졌고, 간혹 조정의 신하와 유사들이 절취하여 자기 소작으로 만들었다. 《사우명행록》
○ 김시습은 유양양(柳襄陽 유자한)에게 수백 마디 편지를 보냈는데, 그 대략을 말하자면, “나는 난 지 8개월 만에 글자를 보고 알았다. 그리고 친척 할아버지 되는 최치운(崔致雲)이 나의 이름을 시습(時習)이라고 지어 주었다. 3세 때에 능히 글을 엮었는데, 거기에,
복숭아꽃은 붉고 버들잎은 푸르러 3월이 저물었는데 / 桃紅柳綠三月暮
구슬이 바늘에 꿰인 것은 솔잎에 이슬일세 / 珠貫靑針松葉露
라는 시를 지었다. 5세 때에는 《중용》과《대학》을 수찬(修撰) 이계전(李季甸)의 문하에서 읽었는데, 그때 사예(司藝) 조수(趙須)가 자설(字說)을 지어 달라고 명하여 지어준 일도 있다. 정승 허조(許惆)가 나의 집에 와서 말하기를, ‘나는 늙었으니, 노자(老字)를 운(韻)으로 시를 지어라.’ 하므로, 내가 그 소리에 응하여서
늙은 나무가 꽃이 피었으니 마음은 안 늙었네 / 老木開花心不老
라고 하였더니, 허 정승이 무릎을 치며 탄상하고, ‘이는 이른바 신동이라는 것이다.’ 하였다. 세종께서 이것을 들으시고 대언사(代言司)로 불러 지신사(知申事) 박이창(朴以昌)에게 시험하라고 명하니, 박이창은 자기 무릎 위에 앉히고 벽화 산수도를 가리키면서, ‘네가 저 벽화를 두고 시를 지을 수 있겠느냐.’ 하기로, 내가 응하기를,
작은 정자에 배가 매인 집은 누가 사는고 / 小亭舟宅何人在
하였다. 이같이 작문 작시(作文作詩)한 것이 매우 많았다. 세종이 전지(傳旨)하기를, ‘내가 친히 데려다 보고자 하나 사람들이 듣고 해괴히 여길까 두려워한다. 가리고 숨겨 키워서 나이가 들고 학업이 성취함을 기다려서 장차 크게 쓰겠노라.’ 하면서, 물건을 주시고 집에 돌아가게 하였다. 13세 때에는 대사성 김반(金泮)의 문하에 가서 《논어》ㆍ《맹자》ㆍ《시전》ㆍ《서전》, 그리고 《춘추》를 읽었으며, 또 대사성 윤상(尹祥)에게 가서 《주역》과 《예기》, 그리고 제사(諸史)를 읽었다. 좀 장성하여서는 영달을 기쁘게 여기지 아니하고, 또 친척과 이웃에서 넘치게 칭찬하는 것을 싫어하였다. 그러다가 세상과 내 마음이 서로 어긋나서 곤란하게 되는 차에, 세종과 현릉(顯陵 문종)이 연이어 승하하셨고, 세종 초기에 원로(元老)와 대가들이 모두 귀신의 명부(鬼簿)에 오르고, 다시 이교(異敎 불교)가 크게 일어나 사문(斯文 유교)을 능멸하니, 나의 뜻은 이미 거칠 대로 거칠어졌다. 드디어 중과 짝을 하고 산수를 찾아 놀았으니, 세상 사람이 나를 보고 불교를 좋아한다고 하나, 나는 이도(異道)로써 세상에 나타나지 않고자 하였으므로, 세조가 전지로 여러 차례 불렀으나 모두 나가지 아니하고 몸가짐은 더욱 거칠고 방탕해졌다. 이로부터 사람 축에도 들지 못하여 나보고 어리석다 하고, 혹은 나를 미치광이라고 하면서, 우마(牛馬)와 같이 대하나, 나는 모두 그에 응해 준다. 이제 성성(聖上)이 등극(登極)하여 어진이를 등용하고 충간(忠諫)을 잘 들으시므로 벼슬하려고도 한다. 그러나 나로 말하면 10여 년 전후에 육적(六籍 여섯 가지 경서)을 익숙하게 연구하여 점차 정밀하여졌지만, 여러 번 내 몸과 세상이 서로 어긋나서, 둥근 도끼 구멍에 모난 자루를 박는 것 같고, 옛 친구는 모두 죽고 새 사람은 낯이 익지 아니하니, 누가 나의 본뜻을 알아주리오. 그러므로, 다시 산수간에 방탕하였노라. 이것이 모두 사실이니, 공만은 알아주시오. ”하였다. 《패관잡기》
○ 매월당(梅月堂 김시습)은 평소의 그 심회(心懷)를 세상 사람이 엿볼 수 없다. 그의 시집을 보면, 미궐(薇蕨) 두 자를 잘 사용하였는데, 그 본뜻이 있는 곳은 알지 못하겠다. 어느 날 내(김정국)가 늙은 중을 만나니 많은 현묘한 이치를 들은지라 그가 배운 스승을 물으니, 그가 답하기를, “젊을 때 사미(沙彌)로 있으면서 오세(五歲 김시습의 별칭)를 모시고 섬기었는데, 오세의 저술로 세상에 전하는 것은 겨우 백에 하나나 둘이 될까 합니다.”라고 말하므로, 그 이유를 물으니 그 중이 말하기를, “노승이 중흥사(中興寺)에서 오래도록 모시고 있었는데, 매양 비온 뒤에 산물이 불으면, 백여 장의 종이를 끊어 가지고는 나에게 필연(筆硯)을 들리고 뒤따르게 하여 물결을 따라 내려가 반드시 급류를 찾아 앉아서는, 절구ㆍ율시 또는 오언 고풍(五言古風)을 침음(沈吟)하여 시를 짓되, 조각 종이에 쓰고 물에 흘려 멀리 보내고 나서는, 또다시 써서 흘려 보내고 하기를 밤새도록 하여 조각 종이가 다 없어져야 집에 돌아옵니다. 어느 때는 하루에 백여 수의 시를 지어 읊었습니다.” 하였으니, 이 또한 그의 본뜻을 엿보기 어려운 점이다. 《사재척언》
○ 동봉(東峯) 김시습은 어려서부터 시문에 능하다는 명성이 있었는데, 세상 법규를 털어버리고 머리를 깎고 중이 되고서는, 그 이름을 설잠(雪岑)이라 고쳤다. 남추강(남효혼)과 더불어 세상 밖에 놀면서 미친 듯이 읊조리며 방랑하며 한 세상을 희롱하였다. 세상을 도피하여 불문(佛門)에 들어가서도, 그 계율(戒律)을 지키지 아니하니, 세상 사람이 미친 중으로 지목하였다. 시가(市街)에 지나가면서 어느 때는 한 곳만을 눈여겨보고는 돌아가기를 잊으며, 때로는 우두커니 서서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있는가 하면, 어느 때는 가로(街路)에서 똥오줌을 누어서 여러 사람이 보는 것도 피하지 아니하며, 또 뭇 아이들이 욕하고 웃으며 다투어 기와 쪽을 조약돌을 던지면서 쫓기도 하였다. 그가 소유한 노비(奴婢)와 전택(田宅)을 남들이 가져가고 도둑질하는 대로 맡겨두고 조금도 개의하지 아니하고 있다가, 얼마 뒤에 그 사람에게 돌려줄 것을 청하니, 그 사람이 좋아하지 아니하는지라 설잠은 관청에 고발하여 면대하여 공술하고, 싸우기를 시끄럽게 하고 시정(市井)에서 싸우듯이 하며, 마침내 승소하고 증서를 받아 품 안에 품고 관문을 나오더니, 하늘을 우러러보면서 크게 웃곤, 급히 증서를 내어 찢어서 개천물에 던졌으니, 그가 사람을 조롱하고 세상을 업신여김이 이와 같았다. 세조가 일찍이 법회(法會)를 내전에서 베풀면서, 설잠도 간선되어 그 회에 참여하였다. 새벽이 되자, 문득 도망쳐 어느 곳으로 갔는지 몰라 사람을 시켜 찾아 보았더니, 가로상에 있는 똥독 속에 빠져 있고, 겨우 얼굴만 보일 정도였다. 한 사미(沙彌)가 있었는데 그 목소리가 맑고 깨끗하여, 쟁쟁(錚錚)한 소리를 내면서 낭랑히 길게 읊으면, 그 소리가 창공에 울리어 처량한 여감(餘感)이 있으므로, 달빛 환한 밤을 만날 때마다 깊은 밤에 홀로 앉아 그 사미에게 이소경(離騷經)을 한 차례 읊게 하곤, 그때마다 눈물을 흘려 옷깃을 젖게 하였다. 성질이 술을 좋아하였는데 취하면, “우리 영묘(세종)를 보지 못하는구나.” 하면서, 눈물을 흘리고, 매우 비통한 심정을 풀지 못하였다. 여러 비구(叱丘)들은 항시 신사(神師)로 추대하며, 온갖 정성을 다해 시중을 드리더니, 어느 날은 합사(合辭)하여 청하기를, “저희 제자들은 대사(大師)님을 모신 지 오래오나, 아직까지 일교(一敎)를 해 주시기를 꺼리오니, 대사님은 그 청정한 법안(法眼)을 끝내 누구에게 주시려고 하십니까. 제생들이 나아갈 방향을 헤매고 있으니 저희들의 소원은 금비(金篦)로 긁어내시는 것입니다.” 하고, 청하기를 더욱 간절히 하니, 설잠이, ‘그래라.’ 하고, 크게 법연(法筵)을 열어서 설잠이 몸에 가사와 법의를 갖추고 가부좌를 하니, 중들이 모여들어 합장하고 무릎을 꿇고 벌여 앉아서 귀를 기울이며 들으려고 한지라, 설잠이 말하기를, “소를 한 마리 끌어오라.”고 하였다. 모두들 이유를 헤아리지 못하고 소를 끌어다가 뜰 앞에 매어 두었다. 설잠이 또다시 꼴 한 뭇을 소 뒤에 두라고 하는지라, 그대로 행하니 설잠은 크게 웃으며, “너희들이 법을 듣는다는 것은 이와 같으니라.” 하니, 소란 축류(畜類) 가운데 가장 우둔한 것이니 사람의 미명(迷冥)하고 무식한 자를 시속에서 소 뒤에 꼴을 둔 것이라고 한다. 중들은 낯빛을 붉히며 물러갔다. 근대의 시승(詩僧)을 말하면 설잠이 그 영수(領袖)인데, 그 시가 법도에 맞고 중후하여 중의 티가 없다. 금오산(金鰲山)에 들어가서 저서(금오신화)를 석실(石室)에 감추고 말하기를, “후세에 반드시 설잠을 아는 이가 있으리라.” 하였다. 그 글은 대개 괴이한 것을 기술하여 우의(寓意)한 것인데, 전등신화(傳燈新話) 등을 본떠서 지은 것이다. 《용천담적기》
○ 심원(深源)의 자는 백연(伯淵)이요, 호는 성광(醒狂), 묵재(黙齊) 또는 태평진일(太平眞逸)이라고 한다. 태종의 현손이며 나(김정국)와 동년생으로 달과 날이 나보다 뒤졌다. 경서에 밝고 덕행이 있으며 겸하여 의술에 능하였다. 성품이 충성스럽고 효성스러우며 무당과 불교를 좋아하지 아니하였으며, 평소에도 갓과 띠를 두르고 손에는 책을 놓기 아니하였다. 전강(殿講)에서 사서와 오경을 통하여 명선대부(明善大夫)에 오르고, 주계부정(朱溪副正)의 행직을 받았다. 나이 25세를 전후하여 다섯 차례 치도(治道)를 상소하였는데, 어느 때는 윤허(允許)를 얻고 어느 때는 얻지 못하였다. 또 조정에서 고모부 임사홍(任士洪)의 무도하고 딴 마음이 있음을 논박한 일로 그의 조부에게 미움받아 장단(長湍)으로 귀양가고, 또 이천(伊川)으로 귀양갔었다. 병든 부모를 찾아 보아야겠다는 상소를 올렸는데, 그 글이 간곡하고 지극한지라 윤허를 얻었다. 정미년에는 종친과(宗親科) 시험에서 경사(經史)를 당하여 제1인으로 발탁되니 풍악과 술 그리고 2품을 내렸으나 군(君)에 봉하지 아니하였는데, 이는 전에 그의 조부에게 불순히 한 허물이 있었기 때문이다. 《사우명행록》
○ 주계정(朱溪正) 심원은 다만 성리학에만 능숙할 뿐 아니라, 또한 시를 잘 지었다. 비온 뒤 저녁 때 바라보고 지은 시에 이르기를,
한 보지락 봄비에 살구꽃은 지고 / 一犁春雨杏花殘
여기저기 사람들은 맑은 물 속에서 밭갈이하누나 / 處處人耕白水間
홀로 창망한 강해 위에 섰으니 / 獨立蒼茫江海上
서운함을 이기지 못하고, 삼각산만 바라보누나 / 不勝惆悵望三山
하고, 또 운계사(雲溪寺)에 가서 읊기를,
나무 그늘 얼룩지고 돌은 서려 있는데 / 樹陰濃淡石盤陀
휘돌아드는 한 줄기 길은 시냇물 지나간다 / 一逕縈回透澗阿
확확 닥치는 향풍이 코에 스치니 / 陣陣春風通鼻觀
멀리 저 숲 아래 남은 꽃송이 있음을 알겠구나 / 遙知林下有殘花
하였다. 《소문쇄록》
○ 주계군 심원은 선견지명이 있었다. 성묘조 때에 자기 고모부 되는 임사홍(任士洪)의 간사함을 알고 상소하여 힘껏 사리를 밝히어 마침내 임사홍을 멀리 귀양보내었다. 연산조 말년 임사홍이 세도를 부릴 적에 드러내어 죽였는데, 중종이 즉위하여서는 그의 충의를 가상히 여기어 작위를 주고 정문(旌門)을 세우게 하였으니, 대개 심원의 의향은, “내가 종친으로서 마땅히 나라와 흥망을 같이할 것이요, 어찌 한 사가(私家)의 고모부를 두둔하겠는가.” 한 것이었다. 상소를 읽으면 늠름한 생기가 떠오른다. 《패관잡기》
○ 정은(貞恩)의 자는 정중(正中)이요, 호는 월호(月湖), 풍곡(風谷) 또는 설창(雪牕)이라고 한다. 수천부정(秀泉副正)을 제수되었는데, 음률이 세상에 으뜸이어서 강개히 슬픈 곡조를 타면, 지나가던 행인들이 듣고 눈물을 흘렸다. 사람됨이 독후(篤厚)하고 스스로 겸손하며, 학식과 도량이 있었으며 총명하였다. 학문을 할 때에는 먼저 이(理)를 밝히고 난 후에 문(文)을 하므로 스승이 수고롭지 않았으며, 시를 지을 때에는 먼저 격(楁)에 맞추고 난 후에 문사를 꾸미므로 사람들이 싫어하지 아니한다. 또 덕(德)을 닦을 때에는 먼저 내심을 가다듬고, 후에 외형을 바르게 하므로 사람들이 알지 못하였다. 처신할 때에는 지위가 높은 것으로 사람을 억압하지 아니하여 가장 가난한 선비 같았다. 《사우명행록》
○ 종실인 수천부정 정은은 날마다 시주(詩酒)와 금파(琴琶)로 스스로의 즐거움으로 삼고, 시문과 음률이 백원(百源 이창)과 이름이 같았다. 김대유(金大猷)의 책망을 듣고 모든 구습을 버리고, 짐짓 속태(俗態)를 꾸미고 두문불출하고 과감히 친구와 왕래를 끊었더니, 과연 홀로 무사히 보존하였다. 참판 김유(金紐)는 그의 거문고 소리를 듣고 솜씨가 시냇가에 피어 있는 매화의 격(格)과 같다고 감탄하였다. 그가 지은 입춘첩시(立春帖詩)에 이르기를,
가늘게 홍전을 오려 소춘에 걸었다 / 細剪紅箋架小春
하고 또 마상(馬上)에서 구두로 시를 읊기를,
뽕나무가 마르니 소가 혀를 토한다 / 桑乾牛吐舌
고 하였으니, 그의 시 짓는 솜씨가 대개 이와 같았다. 《사우언행록》
○ 국조(國朝)의 아악(雅樂)으로 말하면, 박연(朴堧) 후에 사족(士族)으로는 칭할 만한 자가 없더니, 성화(成化) 연간에 유추(有秋)임흥(任興) 가 처음 드러나고 이어 정중(正中 이정은)과 백원(百源 이창), 그리고 국문(國聞) 정자지이 한때에 같이 일어나서 구습(舊習)을 일소하였고, 향방을 교화하는데 있어서 위에서 말한 4명이 으뜸이었다. 나(남효온)는 음률을 알지 못하나, 날마다 사자(四子)와 더불어 술을 마시며, 즐겁게 놀곤 하였다. 광대들의 논평을 들으면 대개 다음과 같으니, “유추(有秋)는 마음씨는 평화하면서 그 가락이 저하하고, 국문은 가락은 절묘한데 마음씨가 혹(酷)한 편이다. 또 백원은 웅혼(雄渾)하기는 하나 솜씨가 좀 잡되고, 정중은 곡조는 고상하나 기(氣)가 편벽된다.” 하였다. 내가 정중과 같이 송도(松都)에서 놀 때에 그가 거문고를 타면, 사인(士人)과 기녀들이 모두 눈물을 흘리지 아니한 사람이 거의 없었다. 서울에 돌아오는 날에 말에 오르기를 머뭇거리니 행인들도 서서 보았다. 백아(伯牙)가 죽은지 천 년 후인 오늘에 이 사람이 아니고 또 누가 있겠는가. 기(氣)가 편벽되다는 말은 지나치지 않다. 백원과 유추는 언제나 악기를 가지고 밤낮으로 연습하나, 정중은 집 안에 풍물(風物)이 없어 여기저기 가는 곳에서 우연히 다른 악기를 가지고도 그의 음률은 순수하였다. 나는 언제나 그 수예(手藝)가 매우 고상함에 감복한다. 그러나 음률을 아는 자는 간혹 조롱하여 말하기를, “정중의 거문고는 백아(伯牙)와 같으나, 때로는 백원에게 미치지 못한다.” 하니, 어찌 제세경략(濟世經略)의 재주가 쌓여서 적은 기술에 돌아갔으므로 나오는 것이 편벽된 것이 아니랴. 나는 흐르는 눈물을 견디지 못하였으니, 아 뜻을 펴지 못함이여. 《추강냉화》
○ 현손(賢孫)의 자는 세창(世昌)이요, 신요(神堯 태조 이성계)의 후손으로 벼슬이 명양부정(鳴陽副正)에까지 이르렀다. 예에 맞게 행동하고 몸가짐을 독실히 하였으므로, 김대유(金大猷) 다음으로 꼽는다. 일찍이 관례(冠禮)를 행하려고 하자 대유가 만류하였다. 그 모친의 상사에는 한결같이 《주자가례(朱子家禮)》에 따라 행하였다. 《사우언행록》
○ 종실(宗室) 명양부정은 성품이 조촐하여 속세에서 벗어났고, 글과 시 짓기를 좋아하였으니 그 사람됨과 같았다. 그의 견의시(遣意詩)에 이르기를,
병은 품은 채 세상 일을 멀리하고 / 懷疴謝塵事
종일토록 시편을 뒤적거린다 / 終日檢詩篇
마 넝쿨은 거친 벽을 뚫고 / 藥蔓穿疎壁
거미줄은 짧은 서까래에 쳐 있네 / 蛛絲掛短椽
술병을 기울여 남은 술을 다 마시고 / 傾壺盡餘酒
목침을 높이 베어 나는 솔개를 돌아본다 / 高枕眷飛鳶
가는 곳마다 생업이 있으리마는 / 到處生涯在
어찌 하필 성밭이 소용되리 / 何須負郭田
작은 비에 띠집이 젖었는데 / 小雨茅齋濕
새로 갠 후엔 베개와 자리가 시원하다 / 新晴枕席涼
물이끼는 주춧돌 따라 올라오고 / 水衣緣礎上
뜰풀은 담장보다 더 자라 있네 / 庭草過墻長
이슬이 외꽃을 씻어 깨끗하고 / 露浥苽花淨
바람은 혜엽(蕙葉)의 향기 머금고 있다 / 風含蕙葉香
유연히 낮잠을 깨고 나니 / 悠然午眠破
수풀 위에 석양이 아련하다 / 林杪淡夕陽
하였다. 가을 시에는,
하얀 이슬이 내린 뒤라 숲이 깨끗하고 / 白露園林淨
높은 바람에 나뭇잎이 쇠잔하다 / 高風草木衰
술잔을 엎어 죽엽(竹葉 술 이름)을 따르고 / 覆杯流竹葉
물길어 상지(桑枝 차 이름)를 달인다 / 汲井煮桑枝
지는 해에 기러기 변방에 줄지었고 / 落日雁橫塞
가을 창에는 벌레가 실을 토해낸다 / 秋窓虫吐絲
누가 병들고 가난한 사람 가련히 여기겠는가 / 誰憐貧病客
길게 초인사나 읊어보자 / 長吟楚人詞
또,
빈 소반에는 마치채(馬齒菜)가 남아 있고 / 空盤推馬齒
거친 후원에는 계장초(鷄腸草)만 늘어졌네 / 荒苑長鷄腸
수각에서는 청노(靑奴 풀 이름)가 냉냉하나 / 水閣坍奴冷
암전에서는 부비(腐婢 풀 이름)가 향긋하다 / 巖田腐婢春
이끼는 주춧돌에 두루 끼어 있고 / 苺苔侵礎遍
쑥대는 창을 둘러서 자란다 / 蓬艾繞窓長
자소의 잎은 도는 바람 따라 흔들거리고 / 紫蘇葉帶回風響
홍요의 꽃은 되비치는 햇빛에 붉었구나 / 紅蓼花含返照明
시냇가에 새는 비를 맞아 온몸이 젖었고 / 溪禽帶雨全身濕
산감은 서리 맞고 반볼이 붉었네 / 山枾經霜半臉紅
하였다. 항시 수척한 병이 있더니 30이 못 되어 죽었는데, 그가 평소에 읊은 감회시(感懷詩)를 보면, 가히 수하지 못할 징조를 볼 수 있었다. 그 시에 이르기를,
광음은 번개같이 잠깐인데 / 光陰如電瞥
세월은 나에게 빌려주지 아니하네 / 歲月不貸余
명예를 얻는 것이 비록 때가 있다지마는 / 成名雖及時
필경에는 허공이 돌아가네 / 畢竟空歸虛
형해는 나의 것이 아니니 / 形骸非我有
하루아침 다시 남음이 없으리라 / 一朝無復餘
영화를 어찌 의뢰할까 / 英華豈足賴
천지는 참으로 나그네 집이다 / 天地眞蘧盧
우습구나 저 궁도인이여 / 笑彼窮途人
통곡한들 마침내 무엇하리 / 痛哭終何如
하였다. 《소문쇄록》
○ 안응세(安應世)의 자는 자정(子挺)이요, 호는 월창(月窓)ㆍ구로주인(鷗鷺主人)ㆍ연파조도(煙波釣徒) 또는 여곽야인(藜藿野人)이라고 한다. 사람됨이 청담쇄락(淸淡洒落)하고 안빈희분(安貧喜分)하여, 공명을 구하지 아니하였고, 선불(仙佛)을 배우지 아니하며, 박혁(博奕)을 즐기지 않았다. 또 시에 능하며 특히 악부(樂府)를 잘하였다. 일찍이 말하기를, “불의의 재물은 집을 돕는 데 그칠 뿐이요, 불의의 음식은 오장을 돕는 데 그칠 뿐이니, 더욱 참견할 것이 못 된다.” 하였으니 자정의 마음가짐이 대개 이와 같았다. 백옥(白玉)에도 티가 있으니 주색을 좋아하였다. 경자년에 진사가 되었고 이해 9월에 죽으니, 나이 26세로 아는 사람이나 모르는 사람이나 모두 통탄해 마지아니않았다. 《사우언행록》이하 동
○ 안우(安遇)의 자는 시숙(時叔)인데, 효행이 지극하여 고을에서 으뜸이었으며, 그의 부친상에는 일체를 《주자가례》에 따라 행하였다. 점필재에게서 수업하였는데, 얼마 뒤 벼슬할 마음이 없어서 그때부터 점필재와 뜻이 달라졌다. 일찍이 그 고을에서 천거되어 서울에서 행하는 회시(會試)에 간 일이 있는데, 그때 사관(四館 사학(四學))에 있는 연소자들이 교만하고 방자하여 나이 많은 시골 선비들을 매로 때리려고 하니, 시숙이 이르기를, “어찌 부모의 유체(遺體)를 가지고 죄 없이 스스로 훼손하면서 명리를 구할 수 있겠느냐.” 하며 들어가지 아니하고 돌아왔다. 그 절조가 가히 동한(東漢)에 견줄 만하다고 하겠다.
○ 유종선(柳從善)은 진주인(晉州人)이며, 자는 여등(如登)인데, 산에서 살면서 스스로 세상과 인연을 끊으니, 친구나 친척이라도 그의 얼굴 보기 드물었다.
○ 우선언(禹善言)의 자는 덕보(德父)요, 호는 풍애(楓崖)이며 단성군(丹城君) 우공(禹貢)의 아들이다. 사람됨이 기개가 있고 남에게 얽매이지 아니하였다. 신축년에 남쪽으로 영남에 가서 점필재 선생을 그 여막에서 뵈니, 선생은 기뻐하여, “자를 자용(子容)이라 하라.” 하였다.
○ 최하림(崔河臨)의 자는 진국(鎭國)이요, 호는 태허당(太虛堂)이다. 성품이 공명을 좋아하여 경자년에 진사가 되었는데, 이해 여름에 요승(妖僧) 학조(學祖)가 그의 제자 설의(雪儀)로 하여금 가만히 불상을 돌려 놓게 하고서, 세상 사람에게 말하기를, ‘부처가 스스로 걷는다.’고 하니, 곡식과 비단ㆍ베를 가지고 오는 자가 날로 천의 숫자로 헤아릴 정도였다. 태학(太學)에서 상서하여 다섯 차례나 요승을 죽이라고 청하였으나, 임금의 윤허를 얻지 못하였다. 상소문은 대개 최진국의 손에 의하여 작성되었다. 병오년 7월에 죽었는데, 그때 나이가 32세였다. 집이 가난하여 염장(斂葬)할 수 없었으므로 벗들이 치전(致奠)하여 장사지냈다. 그가 지은 안택기(安宅記)가 세상에 전한다.
○ 고순(高淳)의 자는 희지(熙之)요, 또 진진(眞眞) 또는 태진(太眞)이라고 하며 제주인(濟州人)이다. 귓병이 있어 땅에 글자를 써서 서로 뜻을 통했다. 무술년에 조서에 응하여 시사(時事)를 논하는 상서를 하였는데, 그로 인하여 망령하다는 이름을 얻었다. 어떤 사람이 그에게 알리자, 고희지(高熙之)는 듣고 오히려 기쁘게 여기며 스스로 호를 망희지(妄熙之)라 하였다. 여러 선비들 사이 중에서 신덕우(辛德優)와 초면 인사를 하였는데, 선비들은 서로 주고받는 말이 떠들썩하였다. 고희지가 종이에 한 절구를 지었는데, 그에 이르기를,
소각에 봄바람이 고요하니 / 小閣春風靜
청담으로 모두 여흥이 났다 / 淸談摠有餘
귀먹은 나는 아무 재미가 없어 / 聾人無一味
홀로 머리를 숙이고 책을 본다 / 垂首獨看書,
하였는데, 신덕우는 기뻐하며 그 시에 화답하여 이르기를,
세상이 시끄럽고 혼탁하니 / 世聲聒溷濁
분양의 냄새나 다름이 없네 / 糞壤嗟鼻餘
부러워하오, 방로들보다 나은 그대를 부러워하노니 / 羡君勝房老
획 속에 천 권의 글을 숨기고 있네 / 晝隱千卷書
하고, 이후부터 지심(知心)의 벗이 되었다.
○ 고희지(高熙之)는 일찍이 귓병이 있었으나, 성품이 독실하고 학문을 좋아하였다. 하루는 시를 읊고 취침하였는데, 그의 돌아간 아버지 중추(中樞)-고수종(高守宗)-가 꿈에 나타나, 시를 주며 말하기를,
화발은 창창하여 예보다 줄었는데 / 華髮蒼蒼減昔年
외로운 몸 적적하게 산 앞을 지키고 있네 / 孤身寂寂守山前
백골이라서 지감 없다 말하지 말라 / 莫言白骨無知感
너의 읊는 소리에 나는 잠을 못하노라 / 聞汝吟詩我不眠
하였다. 내(남효온)가 그 시에 서문을 써 주었는데 그 대략에, “천지간의 한 기운은 이르면 펴지고 흩어지면 돌아가나니, 기실은 하나이다. 사람이 죽은 뒤에 그 기(氣)가 여러 자손들의 신상에 흩어져 있다가, 자손이 동하면 그 신명(神明)이 감동하는 것은 분명한 일이다. 비록 그러하나 사람은 곧고 초연하여 마치 다시 부모의 척강(陟降)하는 거동을 항시 좌우에 모시고 있는 듯이 함을 보게 될 것이니, 고희지 같은 이는 이른바 오직 맑은 자라[淸者]고 할 것이다.” 하였다. 《추강냉화》이하 동
○ 우리나라 사람들이 오랑캐의 춤을 본받아서 머리를 내두르고 눈을 까며, 어깨를 솟구고 팔을 구부리고 두 다리와 열 손가락을 한꺼번에 오므렸다 폈다 하면서, 구부리고 활을 쏘는 형상을 하기도 하고, 어느 때는 개가 네 발을 헤매고 다니는 모양을 하기도 한다. 또 곰처럼 구부리고 새처럼 펴기도 하며, 혹은 물러가서 바람 소리를 낸다. 공경대부로부터 사서인(士庶人)이며 창기나 배우 여자에 이르기까지, 음률을 이해하고 몸이 성한 자는 하지 않는 자가 별로 없었다. 그 이름을 호무(胡舞)라고 하는데, 여기에 관현(管絃)을 같이 하면서 즐겼다. 의정부 우찬성인 어유소(魚有沼)는 더욱 잘하여서, 나도 또한 풍류로 해본 일이 있는데, 망우(亡友) 안자정(安子挺)이 그 잘못을 극언하여 비난하기를, “미인(媚人)의 행동과 유만(柔嫚)의 태도는 사람으로 할 바 아니거늘, 하물며 오랑캐는 금수와도 같은데 어찌 내 몸으로 금수 같은 일을 하겠는가.” 하므로, 나는 듣고 퍽 그렇지 않게 여겼는데, 그 후 《한서(漢書)》에서 개차공(蓋次公)의 효단장경 목후사(效檀長卿沐猴辭)를 읽고 난 연후에야 안자정의 말이 정론(正論)임을 알았으며, 이로 인하여 전현(前賢)이나 후현의 법규가 서로 같음을 알았다.
○ 경징(慶徵) 군의 휘는 연(延)이요, 자는 대유(大有)이며, 청주인(淸州人)이다. 겨울에 그의 부친이 병이 나서 어회(魚膾)를 먹고자 하는지라, 군이 얼음을 뚫고 그물을 쳐도 고기를 얻지 못하자, 군이 울며 말하기를,
“옛사람은 얼음을 깨고 고기를 잡은 일이 있었는데, 나는 이제 그물을 치고도 고기를 잡지 못하니, 성감(誠感)이 부족하기 때문이리라.” 하고, 버선을 벗고 얼음 구멍에 들어가서 하룻밤을 지내고 난 후에 검은 잉어를 얻어서 공양했다. 또 시금치를 먹고자 하는지라, 군이 밭에 있는 채근(菜根)을 보고 울부짖으니, 문득 시금치가 나와 그 부친을 봉양하였고, 이어 부친의 병이 나았다. 그 후 부친이 죽자, 3년을 시묘 살면서 죽ㆍ채소ㆍ과일 먹는 것까지 《가례》에 의하였으며, 그의 모친을 섬기기를, 매일 혼정신성(昏定晨省)을 하였는데, 나이 50이 넘어서도 조금도 변함이 없었다. 모친이 죽자 그 부친의 초상 때와 같이 《가례》에 의하여 행하였다. 세조가 불렀으나 나가지 아니하였다가, 주상(성종) 9년, 부름에 응하여 사재감(司宰監) 주부(主簿)가 되었는데, 어느 날 불려서 내전에 들어가니 임금이 묻기를, “경은 집에 있을 때 얼음을 깨니 고기가 뛰었다는데, 과연 그런 일이 있는가.” 하였다. 군이 답하기를, “겨울은 고기가 없는 때라 부친은 잡지 못하리라 하였사온데, 그물을 치고서 애써 구하다가, 다행히 잡았습니다. 부친은 기뻐서 너의 효성에 감동한 까닭이라고 하며, 고을 사람들은 깊은 연유도 살피지 아니하고, 효성에 감동하였기 때문이라고 하나, 신은 실로 그와는 같지 못합니다.”라고 하였다. 또 임금이 묻기를, “경은 무슨 책을 읽었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사서》와 《이경》을 읽었습니다.” 하니, 또 묻기를, “사서와 이경 중에서 어느 말이 제일 옳던가.” 하니, “사서 이경 중 《서전》에 순(舜)의 대효를 말하였사온데, 이는 신이 하고자 하는 바이오나 능하지 못하옵고, 또 주공(周公)의 충성을 말하였사온데, 신이 하고자 하오나 능히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듣고 오래도록 감탄하였다.
○ 청주(淸州)에 양수척(楊水尺) 3형제가 살면서 소행이 어질지 못하더니, 경징(慶徵) 군이 그의 부모에게 효도한다는 말을 듣고는 감화하여, 그 나쁜 버릇을 버리고서 온화하고 공손하게 아들의 도리를 행하며, 또 혼정신성하였다. 부모의 초상 때에는 한 모금 물도 입에 대지 아니하고, 또 3년을 시묘살이 하면서 술과 과일을 먹지 아니하였다. 3년상을 마친 뒤에는 3형제가 같이 살면서 우애하는 환심이 극진하였고, 서로 경계하기를, “만일 우리가 좋지 않는 행실을 하여서, 경 생원(경징군)이 그를 들으면 그 또한 부끄럽지 않겠느냐.” 하였다.
○ 생원 유원(兪垣)은 면천인(沔川人)이다. 무신년간에 책을 끼고 궐문에 나가 배운 것 중에서 수천 가지 말을 진술하였는데, 그 말이 모두 조정의 병폐를 간절히 집어 내었다. 그런데, 사림들은 모여서 그저 웃곤 하였다. 유원은 자기가 거처하는 정자를 청풍정(淸風亭)이라 하고, 또 그 벗인 박생(朴生)은 그 재(齋)를 명월재(明月齋)라 편액하였는데, 진신(縉紳)들 사이에서 웃을 만한 일이 있으면, 반드시 유청풍ㆍ박명월 같다고 조롱하였다. 두 사람은 불우하여 과거 시험을 보지 아니하였으며, 또한 일찍 벼슬에 마음이 있는 것도 아니하었다.
○ 임인년에 개령현(開寧縣) 송방리(松坊里)에 사는 어떤 사람이 밭을 갈다가 옛 석불을 얻었는데, 이목구비가 모두 없어졌기로 그저 밭 언덕에 두었는데, 우연히 천식을 앓고 있는 어떤 사람이 와서 절하였더니, 병이 좀 나은 것 같은지라 드디어 영험이 있다 하며, 어느 사람은 무슨 빛이 비친다고 하므로, 이웃 여러 고을에서 오랜 병으로 시달리던 자며, 아들이 없는 사람과 아직 장가들지 못한 사람, 노비를 잃은 사람들, 무릇 마음속에 하려고 하는 것이 있는 사람은 기도하면 문득 징험이 있다고 하여, 남녀가 이리저리 돌아가며 미포(米布)와 지전(紙錢)이며, 향촉(香燭)ㆍ화과(花果)를 가지고 오는 사람들이 밤낮으로 끊이지 않았다. 한 중이 와서 향불 올리는 것을 주관하고 시주하는 자가 있어서, 기와집을 짓고 또 큰 절을 지으려 하니, 사족(士族) 부녀(婦女)들이 모두 친히 와서 기도 드리고, 개령 현감(開寧縣監)과 금산(金山) 고을 훈도(訓導) 같은 이들도 와서 자식의 병이 낫기를 빌었고, 혹은 후사를 이을 수 있도록 빌었다. 이때에 금산 군수 이인형(李仁亨)은 이 말을 듣고, 유생과 아전 포졸을 보내어, 그 중을 잡아오게 하고, 시주하는 사람들을 쫓아버리게 하였다. 이때 마침 김 문간공(文簡公 점필재)이 응교(應敎)의 명을 사퇴하고 금산에 있었는데, 이인형에게 하시(賀詩)를 주어 이르기를,
채전에 버려두어 몇 봄인지 모르던 것 / 抛擲菜田不記春
함부로 생긴 주먹만한 돌에 어찌 신이 있으리 / 頑然拳石有何神
애초에는 빌어먹는 목거사 같더니 / 初如求食木居土
점차 돈 모으는 토사인이 되었네 / 漸作撞錢土舍人
남녀 몇 집안이나 장차 더럽히려는가 / 男女幾家將汚染
향등은 1리나 그대로 따라 있네 / 香燈一里欲因循
우리 원님 곧은 것 그대로 빈주 원님일세 / 我侯直是邠州守
요호를 격파하고 맑은 세상 만드리라 / 擊破妖孤
하였더니, 사람들이 아름답게 여기어서, “성조(聖朝)에 영웅 있는 줄 이제야 알겠노라.”는 글귀가 있기까지 하였다. 이제 개령의 석불은 요호보다도 더욱 괴상한데도, 누가 감히 쳐서 고혹된 것을 없애지 못하였는데, 명부(明府)가 다른 고을임에도 불구하고 의연히 아전들을 보내어 요수(妖首)를 쫓아 잡아오고, 시주하는 지전(紙錢)을 태워서 우민으로 하여금 환하게 그들의 잘못된 행위를 깨닫게 하였으니, 진실로 세상에 드문 하나의 기특한 일이라 하겠다. 《소문쇄록》
○ 응교(應敎) 최보(崔溥)는 나주인(羅州人)이며, 정자(正字) 송흠(宋欽)은 영광인(靈光人)이다. 동시에 옥당(玉堂)에 있으면서 함께 말미를 받아 고향에 온 일이 있었다. 그들 본집의 거리가 겨우 15리쯤 되었는데, 하루는 송 정자가 최 응교의 집을 찾아가서 말마디 하다가, 최 응교가 묻기를, “그대는 무슨 말을 타고 왔는가.” 하니, 송 정자가 답하기를, “역마를 타고 왔습니다.”고 하니, 최 응교가 다시 말하기를, “국가에서 준 역마를 자네 집에 매어둔 것과, 자네 집에서 우리 집에 오는 것은 사사일인데, 어찌 역마를 타고 왔는가.” 하며, 최 응교가 조정에 돌아가서 이 일을 알리고 파직시키려고 생각하였다. 송 정자가 응교에게 찾아가서 사과하자, 최 응교는, “자네 같은 연소한 사람들은 앞으로 마땅히 조심하는 것이 좋다.”고 일렀으니, 조종조(祖宗朝 성종) 때에 사대부들이 법을 지키며, 벗들 사이에 선(善)으로 권려하고, 의(義)로써 심복시킴이 이 같았으니, 가히 모든 일을 상상하고도 남음이 있다. 《전언왕행록》
○ 성종이 승하하던 날에 성중에 있는 사대부며 거족으로서 혼인하는 집이 여러 집이었는데, 어떤 사람은 아침을 타서 가고, 어떤 사람은 오시(午時)가 되어서 가며, 어떤 사람은 모르는 체하고 갔었다. 그 후 이 일이 발각되어 이들 모두 벌받게 되었다. 그런데 죽성군(竹城君) 박지번(朴之蕃)은 무인으로 글자를 알지 못하는 무식한 사람이었다. 이때 하루 전날 밤에 아들의 초례를 지내게 되어서 손님과 동료들이 다 모여 있는데, 갑자기 대궐 안에서 상왕의 병환이 위독하다는 말을 듣고 박지번이 이에 말하기를, “군부(君父)의 병이 위독하니, 어찌 신하로서 차마 혼례(婚禮)를 사사로이 행하리오.” 하고, 드디어 손님들과 동료들을 사절하고 집으로 돌려보냈다. 당시에 어느 논란하는 자가 말하기를, “유림(儒林)이 오히려 무신보다 못하니, 한탄할 일이다.” 하였다. 《용재총화》


 

[주D-001]김연거(金蓮炬)의 유의(遺意) : 당 나라의 무종(武宗) 때에 한림학사를 지극하게 대접하여 밤 늦도록 만나서 이야기하다가 숙직실로 돌아갈 때에 황제 방에 있던 금련 촛대를 내시에게 들려서 앞길을 밝혀 주게 한 고사.
[주D-002]조예(皁隸) : 각 관청의 사령들은 보통 검은 옷에 검은 벙거지를 쓰게 되었으므로, 그를 조예 혹은 검은 하인이라고 말한다.
[주D-003]구익부인(鉤弋夫人) : 한 나라 무제(武帝)의 후궁인데, 무제는 장성한 아들이 없이 늦게야 구익부인이 아들을 낳았으므로 그를 후계로 정하고, 후일에 황제의 모친으로 정권에 간여할까 염려하여 사랑하는 구익부인을 사약하여 죽였다.
[주D-004]벌빙하는 데까지 이르렀는데 : 대부의 지위에 올랐다는 말. 예전 중국에서는 대부(大夫)의 지위에 있으면, 각자가 빙고(氷庫)를 묻어놓고 겨울에 얼음을 저장하였다가 여름에 쓰게 되어 있었다.
[주D-005]걸구의 변명 : 괴생은 초한 시대(楚漢時代)의 괴철(蒯徹)이라 하는 웅변가인데, 그는 그때의 한 나라의 대장인 제왕 한신(齊王韓信)을 달래어서 한 나라와 분리하여 독립하기를 권하였으나, 한신이 듣지 아니하였다. 그 후에 한신이 실각하여 한 나라 임금에게 죽음을 당한 뒤에 한신을 반역하라고 꾀었다고 괴철을 체포해다가 심문할 적에 괴철의 말이 “걸주의 개가 요 순을 보고도 짖는 것은 요순이 착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그 주인이 아니기 때문인데, 나도 내 주인이 아니라서 그랬다. 나도 내 주인인 한신을 위하여 충성할 뿐이었다.”고 답변하여 살려주게 되었다.
[주D-006]증자(曾子)의 역책(易簀) : 증자가 죽을 때에 노(魯) 나라의 정권을 잡은 계손씨(系孫氏)가 보내준 자리[簀]를 의리에 합당하지 않는다 하여 다른 자리로 바꾸어 깔고 죽었다 한다.
[주D-007]자로(子路)의 결영(結纓) : 자로는 위(衛) 나라의 내란에 싸우다가 창에 맞아 죽게 되었을 때, “군자는 죽을 때에도 갓을 버리지 못한다.” 하고, 끊어진 갓끈을 다시 매고 죽었다 한다.
[주D-008]금비(金篦) : 금으로 만든 칼. 그것으로 눈에 끼어 있는 백태를 긁어낸다고 한다.
[주D-009]초인사 : 전국 말기에 초 나라 사람 굴원(屈原)과 송옥(宋玉)이 지은 글. 그 글은 모두 원체가 비대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