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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사 도선의 비〔國師道詵碑〕

아베베1 2014. 7. 29. 17:19

 

 

비갈(碑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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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갈(碑碣)
국사 도선의 비〔國師道詵碑

 


영암군(靈巖郡)에 월출산(月出山)이 있는데, 산의 기이하고 빼어남은 온 도에서 최고였다. 국사 도선은 이 군 출신이다. 산에 절이 하나 있어 도갑사(道岬寺)라고 하는데, 세상에서 전하기를 도선 국사가 창건한 것이라고 한다. 대명(大明) 천순(天順) 원년인 정축년(1457, 세조3)에 신미(信眉)와 수미(守眉) 두 선사(禪師)가 중창하였는데, 예문관 제학 윤사균(尹士昀)이 기문을 썼다. 천순 정축년은 지금 임진년(1652, 효종3)으로부터 190여 년 전이다. 절에는 도선 국사의 비가 있는데, 어느 시대에 처음 세운 것인지는 알 수가 없다. 비문은 이미 마멸되었는데, 옥습(玉習)이란 중이 중각(重刻)한 것이 있으며, 백헌(白軒) 이 상국 경석(李相國景奭)이 명(銘)을 지었다. 옥습이란 중이 또 나에게 비의 음기(陰記)를 지어 달라고 청하였다.
내가 일찍이 보니 《천중기(天中記)》 가운데 구림(鳩林)에 대해 기록한 것이 있었는바, 구림에 대해 《천중기》에서 기록하였으니, 천하에 소문난 지가 오래된 것이다. 도선은 그 탄생이 이미 예사롭지 않았으며, 또 이름이 천하에 소문났다. 아주 지혜로워서 미래의 일을 미리 알아 고려 태조가 삼한을 통일하여 500년 갈 나라의 기반을 이루도록 해 주었다. 그러니 이른바 석씨(釋氏)에 통달하여 천안(天眼)을 지닌 사람이라고 할 것이다. 그러니 어찌 한 가지 술법으로만 칭해서야 되겠는가. 역시 이상한 일이다.
명은 다음과 같다.

월출산은 아득 높고 험하거니와 / 月出巖巖
산이 이에 신령한 분 탄생시켰네 / 惟嶽降神
신령한 분 내렸으니 어떤 분인가 / 降神伊何
신라 말기 국사였던 도선이었네 / 生師道詵
도선 국사 처음으로 탄생할 때에 / 師之始生
범인들과 달리 아주 이상했다네 / 異諸常人
어머니가 물 긷다가 오이 먹고서 / 母漂食瓜
감응하여 국사의 몸 임신하였네 / 歆而有身
태어나고 난 뒤에는 버려졌는데 / 及生棄之
비둘기가 깃을 펼쳐 품어 줬다네 / 鳩覆翼之
이를 보고 기이하게 여기어서는 / 見而異之
다시 집에 데려다가 양육하였네 / 收之育之
국사께서 태어난 건 신라 때인데 / 師生新羅
국사의 일 지금까지 전하여지네 / 事傳至今
그 암봉에 붙인 이름 국사봉이고 / 巖曰國師
그 마을에 붙인 이름 구림리라네 / 里曰鳩林
새들 와서 후직의 몸 덮어 준 거는 / 鳥覆后稷
찬 얼음의 위에다가 놔두어서네
/ 寒氷之寘
생각건대 여기 이곳 구림의 옛일 / 惟此鳩林
그 기이함 어찌 서로 다르겠는가 / 厥異何異
저 옛날에 신령스러운 중 있었거니 / 古有神僧
도선 국사 이에 그런 사람 아니랴 / 詵師非是
아름답고 아름답다 도선 국사여 / 猗歟詵師
용상 무리 가운데서 걸출한 이네 / 龍象之傑
술법 보면 통달 못한 것이 없거니 / 術無不通
청오술은 그 가운데 하나인 거네 / 靑烏其一
꿈속에서 당 황제를 감응시켜서 / 感夢唐帝
조서 내려 국사 불러오게 하였네 / 有詔來徵
국사 이에 중국 땅에 들어가서는 / 入于中國
일행에게 술법 배워 뒤를 이었네
/ 一行是承
국사께선 묘한 비결 다 터득하고 / 師得妙訣
다시금 또 동국으로 돌아왔다네 / 復還東國
이에 송악 곁에서 잘 도와주어서 / 爰相松嶽
오백 년 갈 나라 기반 닦게 하였네 / 載祀五百
국사에겐 환한 법안 있었거니와 / 師有法眼
대천세계 환하게 다 뚫어 보았네 / 洞觀大千
길흉이나 융성함과 침체함 따위 / 吉凶隆替
일어나기 전에 벌써 알아차렸네 / 知于未然
국사께서 말하기를 우리 동국은 / 師曰東國
땅의 형세 보면 마치 배와 같거니 / 地形如舟
배의 경우 진압하지 아니한다면 / 舟不有鎭
표류하지 아니할 리 어찌 있겠나 / 其無漂流
땅의 형세 또한 역시 그러하거니 / 地形亦然
진압함을 어이하여 그치겠는가 / 鎭其可已
그러고는 우리나라 동국의 국토 / 東國之土
그 길이가 수천 리도 훨씬 넘는데 / 數千餘里
먼 곳이나 가까운 곳 가리지 않고 / 無遠無邇
국사께선 곳곳마다 다 찾아갔네 / 師無不歷
그리하여 절 세우고 탑을 세워서 / 創寺建塔
큰 산이나 큰 물 모두 진압하였네 / 以鎭嶽瀆
월출산에 자리 잡은 절이 있으니 / 月出有寺
절의 이름 도갑사라 부른다 하네 / 寺名道岬
월출이라 이름 붙은 이 산은 바로 / 月出之山
국사께서 태어나신 자리였으며 / 師之所生
도갑사라 이름하는 이 절은 또한 / 道岬之寺
국사께서 몸소 지은 사찰이라네 / 師之所營
그렇거늘 국사 비록 세상 떴어도 / 師雖去矣
어찌 정이 없을 수가 있을 것이랴 / 烏得無情
도갑사에 작은 빗돌 서 있거니와 / 寺有片石
국사 행적 기록하여 놓은 돌이네 / 記師之跡
지금 이미 비석 글자 다 깨졌기에 / 今已剝落
그 문도가 있어 다시 새기었다네 / 其徒復刻
이 상국이 찬해 놓은 글이 있거니 / 相國是撰
그 글 바로 절묘호사 비문이라네 / 絶妙之辭
요청한 걸 저버리기 어렵게 여겨 / 重虛其請
뒤를 이어 비에 새길 명을 짓누나 / 續銘于碑


[주C-001]도선(道詵) : 신라 말기의 중으로, 속성(俗姓)은 김씨(金氏)이다. 고려의 역대 왕은 그를 매우 높여 현종(顯宗)은 대선사(大禪師), 숙종(肅宗)은 왕사(王師), 인종(仁宗)은 선각국사(先覺國師)의 존호를 각각 주었다. 그의 음양지리학설은 중국에서 건너온 것을 고려화(高麗化)한 것이며, 우리나라 절터는 그가 정한 것이 많다. 시호(諡號)는 요공(了空)이다.
[주D-001]천중기(天中記) : 명나라 진요문(陳耀文)이 천중산 근처에 살면서 찬한 것으로, 50권 본과 60권 본 두 종류가 있는데, 여러 내용을 담고 있어서 백과사전의 성격을 띠고 있는 책이다.
[주D-002]도선은 …… 않았으며 : 전설에 의하면 신라의 최씨(崔氏) 집 채마밭에서 자란 오이의 길이가 한 자 남짓하였는데, 최씨의 딸이 이를 먹고 임신을 하였다. 그 뒤 아들을 낳아 대나무 숲에 7일 동안 버려두었는데, 비둘기와 제비가 날아와 날개로 아이를 덮어서 길렀다. 이에 기이하게 여겨 다시 데려다가 길렀는데, 자라나서 승이 되어 이름을 도선(道詵)이라 하였다. 그 뒤에 당나라로 들어가 일행 선사(一行禪師)의 지리법(地理法)을 전수받았으며, 귀국한 뒤에 그 숲을 구림(鳩林)이라 하였다고 한다. 《天中記 卷53》
[주D-003]고려 …… 주었다 : 도선은 고려 태조가 태어나기 2년 전인 875년(헌강왕1)에 “지금부터 2년 뒤 반드시 고귀한 사람이 태어나 나라를 세울 것이다.”라고 예언하였는데, 그 예언대로 송악(松嶽)에서 태조가 태어났다고 한다.
[주D-004]새들 …… 놔두어서네 : 주(周)나라의 후직(后稷)이 태어난 고사를 말한다. 후직의 어머니는 제곡(帝嚳)의 원비(元妃)인 강원(姜原)이다. 강원이 어느 날 들판에 나갔다가 거인(巨人)의 발자국을 보고 그것을 밟았는데, 곧바로 임신하여 아들을 낳았다. 강원이 이를 상서롭지 못하게 여겨 시장에 내다 버리니, 우마(牛馬)가 모두 피해 갔고, 얼음 위에 버리니 새들이 와서 덮어 주었다. 이에 강원이 신령스럽게 여겨 마침내 다시 거두어다가 키우면서 처음에는 이름을 기(棄)라고 하였다. 《史記 卷4 周本紀》
[주D-005]용상(龍象) : 물속의 용과 땅 위의 코끼리처럼 위력이 자재(自在)하다는 뜻으로, 보통 학덕이 높은 승려를 가리키는 불가(佛家)의 용어이다.
[주D-006]청오술(靑烏術) : 청오자(靑烏子)는 전설상의 술사(術士)로, 전하여 청오술은 풍수지리(風水地理)를 보는 술법을 가리킨다.
[주D-007]국사 …… 이었네 : 일행(一行)은 당나라의 승으로, 밀교(密敎)를 익혀서 지리법(地理法)에 능통했다고 한다. 일행이 죽은 해는 727년으로, 도선은 그보다 대략 200년 뒤에 활동하였으며, 당나라에는 가지 않았다. 도선이 일행으로부터 지리법을 직접 전수 받았다고 하는 것은 전설에 불과한 것이다.
[주D-008]이에 …… 도와주어서 : 고려 태조 왕건의 아버지가 송악의 남쪽에 집을 지었는데, 도선이 문밖 나무 아래에 와 쉬면서 탄식하기를 “이 땅에 마땅히 성인이 날 것이다.” 하였다. 왕건의 아버지가 그 말을 듣고는 신도 거꾸로 신은 채 따라 나가 맞이하여 그와 함께 송악산에 올랐다. 도선이 내려다보고 올려다보면서 살펴보고는 글 한 통을 지어 주면서, “공이 내년에는 반드시 귀한 아들을 얻을 것이니 자라거든 이것을 주십시오.” 하였는데, 글은 비밀에 부쳐져 세상에서 알지 못하였다. 그 뒤 태조의 나이 17세 때에 도선이 다시 와서 만나 보기를 청하고는 말하기를 “족하(足下)는 백육(百六)의 운수를 만났으니 말세의 창생을 공께서 널리 구제해 주기 바라오.” 하였으며, 곧이어 군사를 내고 진을 설치하는 데 필요한 지리(地理)와 천시(天時)의 법과 산천(山川)에 제사 지내는 데 대한 감통(感通)과 보우(保佑)의 이치를 말하여 주었다. 《高麗史節要 卷1 太祖元年》
[주D-009]오백 년 …… 하였네 : 전설에 의하면, 고려 태조가 수도를 개성(開城)으로 정하자, 도선이 고려의 국운을 800년으로 내다보았으나, 개성의 동남향에 솟아 있는 북한산(北漢山)의 산세가 예사롭지 않은 것을 보고는 “꼭 도적의 깃발처럼 삼각뿔 모양이라 400년이 흐르면 고려의 운세가 북한산으로 옮겨가겠구나.” 하였다. 그러고는 북한산의 기운이 개성까지 침투하는 것을 막고자 하여 개성에 들개 형상 75개를 만들어 두어 동남쪽을 지키게 했다. 그러나 북한산의 막강한 기운을 들개 떼가 막아낼 수가 없어서 800년 갈 고려의 수명이 475년으로 줄어들었다고 한다.
[주D-010]법안(法眼) : 날카롭고 정심한 안력(眼力)으로, 올바른 안식(眼識)을 말한다.
[주D-011]대천세계(大千世界) : 광대무변(廣大無邊)한 세계로, 불교에서는 무수히 많은 세계가 있다고 보는데, 일천 세계가 소천세계(小千世界)가 되고, 소천세계가 천 개 모여서 중천세계(中千世界)가 되고, 중천세계가 천 개 모여서 대천세계가 된다.
[주D-012]절묘호사(絶妙好辭) : 비문(碑文)을 가리킨다. 삼국 시대 때 위(魏)나라의 무제(武帝)가 양수(楊脩)와 함께 조아비(曹娥碑) 아래를 지나다가 ‘황견유부외손제구(黃絹幼婦外孫齏臼)’라는 여덟 글자가 있는 것을 보고는 양수에게 무슨 뜻인지 아느냐고 물었다. 양수가 안다고 하자, 무제가 “경은 내가 알아낼 때까지 말하지 말라.” 하였다. 30리를 더 가서 무제가 알아내었다고 하면서 양수에게 다른 종이에 그 뜻을 쓰게 하였다. 양수가 말하기를 “황견(黃絹)은 색사(色絲)로 절(絶) 자이고, 유부는 소녀(少女)로 묘(妙) 자이고, 외손은 여자(女子)로 호(好) 자이고, 제구는 수신(受辛)으로 사(辭) 자이니, 절묘호사입니다.” 하였는데, 무제가 쓴 것도 양수와 같았다. 그러자 무제가 “나의 재주가 경에게 못 미치는 것이 30리이다.” 하였다. 《世說新語 捷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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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미년 신라 내물왕 16년, 고구려 고국원왕 41년, 소수림왕(小獸林王) 원년, 백제 근초고왕 26년(진(晉) 간문제(簡文帝) 함안(咸安) 원년, 371)

 


고구려가 백제를 침공하니 백제 왕이 패수(浿水) 위에서 패배시키었다.

겨울 백제 왕이 고구려를 침공해서 평양까지 이르렀는데 고구려 왕이 성을 나와서 싸우다가 패하여 죽으니, 백제의 군사가 곧 돌아갔다.
백제 왕이 고구려가 자주 와서 침탈(侵奪)하는 것을 분하게 여겨 태자와 같이 정병(精兵) 3만을 거느리고 나아가 쳐서 평양성까지 이르매, 고구려 왕이 군사를 출동하여 막다가 날아온 화살에 맞아 죽으니, 백제가 군사를 이끌고 돌아갔다. 이로부터 두 나라는 대대로 구적(仇敵)이 되어 전쟁이 잇달았다.
○ 고구려 태자 구부가 즉위하였다.
이가 소수림왕(小獸林王)혹은 소해송류왕(小解宋留王)이라 한다 이다. 신체가 장대하고 영웅스러운 지략(智略)이 있었다. 선왕(先王)을 고국원에 장사하였다.
○ 백제는 도읍을 남평양(南平壤)으로 옮겼다.
한산(漢山)에 도읍한 지 3백 76년 만에 옮기었다.
【안】 고구려 북한산군(北漢山郡)을 혹은 남평양이라고도 하는데, 지금의 한양(漢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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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신년 신라 지마왕 21년, 고구려 태조왕 80년, 백제 개루왕 5년(한 순제 양가(陽嘉) 원년, 132)

 


춘2월 백제가 북한산성(北漢山城)을 쌓았다.

추7월 고구려 좌보 목도루(穆度婁)가 사면하였다.
왕의 아우 수성이 왜산(倭山)지금 미상 에 사냥하며 좌우와 연회하였는데 관나우태(貫那于合) 미유(彌儒)와 환나(桓那)의 어지류(菸支留)와 비류나 조의(沸流那皂衣) 양신(陽神) 등이 수성의 심복이 되어, 가만히 수성에게 이르기를,
“처음 모본왕(慕本王)이 죽었을 때 여러 신료들이 왕자 재사(再思)를 세우고자 하였으나, 재사가 늙었다고 왕에게 사양한 것은 형이 늙으면 아우에게 미치게 하고자 한 것입니다. 지금 왕이 이미 늙었으면서도 양위할 뜻이 없으니, 그대는 계획하소서.”
하니, 수성이 말하기를,
“승습(承襲)을 적장(嫡長)으로 하는 것은 천하의 상도(常道)이다. 왕이 비록 늙었으나, 적자가 있으니, 어찌 감히 넘보겠는가?”
하였다. 미유가 말하기를,
“아우가 어질어서 형의 뒤를 이은 일은 옛날에도 있었습니다. 그대는 의심하지 마시오.”
하니, 좌보 목도루가 수성에게 다른 뜻이 있는 것을 알고, 병을 칭탁하여 벼슬하지 않았다.
【안】 목도루는 난을 겪기 전에 놀라 물러났으니, 가히 명철한 선비라고 할 만하다. 그러나 속된 세상을 도망쳐 멀리 떠나지 못하고 찬탈하는 것을 앉아서 구경하다가 마침내 역점놈의 신하가 되었으니 어째서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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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해년 신라 진흥왕 16년, 고구려 양원왕 11년, 백제 위덕왕 2년(양 경제(敬帝) 소태(紹泰) 원년, 555)

 


춘정월 신라가 비사벌주(比斯伐州)를 설치하고 하주(下州)지금의 창녕(昌寧)이다 라고 불렀다.

동10월 고구려의 왕도에 호랑이가 들어왔다.
○ 신라 왕이 북한산에 행행(行幸)하였다.
이에 앞서 북한산(北漢山)은 백제의 도읍지였는데, 뒤에 고구려에 빼앗겨서 고구려의 별도(別都)가 되어 국내성(國內城)ㆍ장안성(長安城)과 더불어 삼경(三京)으로 병칭(幷稱)되어 한성(漢城)이라 불리웠는데, 이때에 이르러 신라에 빼앗겼다. 왕이 북한산을 순행하고 국경을 척정(拓定)하였다. 돌아와서는 경유했던 주군(州郡)에 한 해의 조(租)ㆍ조(調)를 면제해 주고, 경범 죄수를 석방하여 주었다. 처음에 신라가 한산(漢山)을 빼앗아 한산 북쪽에 성을 쌓고, 한강 위에 중진(重鎭)을 설치하고는 장한성(長漢城) 그 유지는 지금 광주(廣州)의 몽촌(夢村) 위쪽 강변에 있다. 이라고 불렀다. 후에 고구려가 이를 점령하자 신라가 군사를 일으켜 되찾고, 장한성가(長漢城歌)를 지어 그 공적을 기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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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축년 신라 진흥왕 18년, 고구려 양원왕 13년, 백제 위덕왕 4년(진(陳) 고조(高祖) 영정(永定) 원년, 557)

 


하4월 고구려에서는 왕자 양성(陽成)을 태자로 삼았다.
○ 신라가 사벌주(沙伐州)를 폐하고 감문주(甘文州)를 설치하여 청주(靑州)라 불렀다.
이찬(伊飡) 기종(起宗)을 군주(軍主)로 삼았다.
○ 신라가 신주(新州)를 폐하고 북한산주(北漢山州)를 설치하였다.
○ 신라가 귀척(貴戚)의 자제와 육부(六部)의 호민(豪民)들을 국원소경(國原小京)에 옮겼다.

동10월 고구려의 환도성간(丸都城干) 주리(朱理)가 모반하여 죽임을 당하였다.
○ 이해에 진(陳)이 양(梁)을 찬탈(簒奪)하고, 주(周)가 위(魏)를 찬탈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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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해년 신라 진평왕 25년, 고구려 영양왕 14년, 백제 무왕 4년(수 문제 인수 3, 603)


고구려가 신라의 북한산성을 침략하다가 이기지 못하였다.
북한산성이 신라의 소유가 되면서부터 고구려인들이 기어코 이를 취하려고 하더니 이때에 이르러 당시 장군 고승(高勝)을 보내어 취하려 하니, 신라 왕이 군사 1만을 거느리고 한수(漢水)를 지나매, 북한산 성중에서 북을 치고 떠들면서 서로 호응하니, 고승이 중과부적(衆寡不敵)이라 이기지 못할까 두려워하여 물러갔다.
【안】 열국(列國)이 분할하여 다스릴 적에는 경계가 있게 마련인데, 그 지형이 험준한 땅[形勝]을 내가 지키게 되면 요지가 될 것이요, 적이 웅거하면 해가 될 것이니, 그러므로 나라를 가진 자는 반드시 이런 것을 다투어 차지하여 나라를 굳게 하여야 하는 것이다.
북한산성은 남쪽으로는 한강에 이르고, 북으로는 임진강(臨津江)에 미치고, 동으로는 태산과 이어지고, 서쪽으로는 큰 바다를 굽어보아 사방의 거리가 쪽 고르니, 이것은 해동 제일의 요새(要塞)이다.
그러므로 삼국 시대에는 반드시 서로 다투는 땅이 되었다. 고구려가 차지하면 신라와 백제가 싸움에 어렵고, 신라가 차지하면 고구려와 백제를 패배시키니, 진실로 지리(地理)가 좋은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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