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금이 북한 산성에 행행(行幸)하였다. 아침 일찍 떠나 서교(西郊)를 경유하여 북한 산성에 이르렀다. 서문(西門)으로 들어가 수문(水門)을 차례로 관람하고 이어 소석가현(小釋迦峴)에 올라 성(城) 안팎을 두루 보고자 하였으나 길이 험하고 닦아지지 않았기 때문에 단지
시단봉(
柴丹峰)에만 올랐을 뿐이었다. 임금이 서문 가장자리가 가장 낮으니 중성을 쌓지 않을 수 없다며 속히 의논하여 쌓도록 명하였다. 임금이 여러 신하들을 인견하고 형편을 논하였는데, 임금이 말하기를,
“이제 이 성을 보니 과연 천험(天險)이다. 비록 조그만 흠이 있다 하나 세상에 어찌 십분 꼭 좋은 땅이 있겠는가. 양향(粮餉) 등 일은 반드시 차례로 조치(措置)하면 된다. 이전에 성 밖에 창고를 설치하자는 의논이 있었으나 나는 꼭 성 안에 들여다 쌓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였다. 김우항(金宇杭)은 말하기를,
“성역(城役)은 이미 마쳤으나, 주관(主管)할 사람이 없습니다. 양주(楊州)는 능침(陵寢)이 있어 형세로 보아 옮겨 들이기 어려우니, 차라리 적성(積城)을 혁파하여 양주에 소속시키고, 양주(楊州)부근 4, 5면(面)과 고양(高陽)의 1, 2면을 이 성(城)에 떼어 소속시켜 한 고을을 건치(建置)하되, 이름은 혹 북한 부사(北漢府使)나 중흥 부사(中興府使)로 일컬으며, 또 남한 수어사(南漢守禦使)의 예(例)에 의해 따로 수비사(守備使) 등의 명호(名號)를 정하여 통찰(統察)하게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고, 이유는 말하기를,
“이곳은 곧 도성(都城) 안이니 따로 한 고을을 설치함은 사체(事體)에 있어 부당합니다. 만일 완급(緩急)이 있다면
삼군문(三軍門)에서 마땅히 호가(扈駕)해야 할 것이니, 그대로 삼군문에 소속시켜 시임 대신(時任大臣)이 거느리게 하고 병란(兵亂)에 임하면 그대로 체찰사(體察使)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군향(軍餉)은 조지서에 중성을 쌓아 5, 60만 석의 쌀을 조치(措置)하여 해마다 10만석 씩 돌려가며
개색(改色)하되 호조(戶曹)·선혜청(宣惠廳) 및 각 군문의 새로 거둔 쌀로 바꾸어 들인다면 5, 6년 안에 모두 개색하고 저축이 저절로 넉넉하게 될 것입니다.”
하고, 이이명은 말하기를,
“이미 삼군문으로 하여금 나누어 관장(管掌)하게 하였으니 지금도 그대로 위임하여 각각 신지(信地)를 주관하게 하고, 또 북한(北漢) 모사(某司)란 명호(名號)를 설정하여 대신(大臣)을 도제조(都提調)로 삼으며, 삼군문 대장(三軍門大將)은 당상(堂上)으로 삼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는 즉각 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니,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상량(商量)하여 처리하게 하라.”
하였다.
【원전】 40 집 436 면
【분류】 *왕실-행행(行幸) / *재정-창고(倉庫) / *재정-군자(軍資) / *군사-관방(關防) / *인사-관리(管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