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지리 서원 전고 /삼각산 관련 문헌

정조대왕의 시단봉(柴丹峯)에서 붓을 달려 쓰다

아베베1 2015. 1. 16. 04:51

 

  이미지 사진은 북한산 보현봉의 모습이다 건너편 문수봉에서 바라본 모습 2015.1.21 산행시  담았다 .

 

 

북한산(北漢山) 도중에서 회(回) 자를 뽑아 읊다 임진년

 

 홍재전서 2권에 수록된  북한산 관련

 

 

북한산(北漢山) 도중에서 회(回) 자를 뽑아 읊다 임진년

 

어가 호종한 산성 길에 내 말 타고 돌아갈 제 / 扈駕山城我馬回
구불구불 좁은 비탈길 가파르기도 하여라 / 逶迤細磴正崔嵬
하늘 높이 솟은 기세는 세 봉우리 바위요 / 浮天氣勢三峯石
땅에서 빼어난 경치는 바로 두 장대로다 / 拔地形勝二將臺
깃발은 용사 같은 구름 그림자를 끌어 돌리고 / 旗掣龍蛇雲影轉
바람은 고각 같은 시냇물 소리를 전하여 오네 / 風傳鼓角㵎聲來
오늘의 느슨한 행차엔 한가한 일도 많아서 / 徐行此日多閒事
어느덧 앞 수풀에 석양볕이 쌓이었구려 / 不覺前林夕照堆

 

 

 

시단봉(柴丹峯)에서 붓을 달려 쓰다

 

견여 타고 멀리 시단봉으로부터 돌아와 / 肩輿遙自丹峯歸
중흥사에 당도하니 벌써 석양이로세 / 行到重興已夕暉
참알하는 중이 오니 속된 사람임을 알겠고 / 參謁僧來知俗樣
깃발 펄럭이며 가니 티끌이 나부낌을 보겠네 / 旖旎旗去見塵飛
숲 속엔 괴이한 새들의 울음이 그치지 않고 / 林間恠鳥啼難盡
시내 밖엔 좋은 꽃들이 흔히도 피었구려 / 溪外名花開不稀
선조 때에 이곳 임어한 것을 멀리 생각하니 / 緬憶先朝臨此地
아무 산과 아무 물이 정히 방불하여라 / 某山某水正依俙

 

 

 

 

 

중흥사(重興寺)에 들러서 농암(農巖)의 시운에 차(次)하다

 

절 가까이서 풍경 소리 가늘게 들려오는데 / 細聞淸磬近禪丘
깊고 깊은 하 많은 숲은 하늘 밖에 떠 있네 / 萬木深深天外浮
절벽으로 돌아가는 구름은 우기를 더하였고 / 苔壁歸雲增雨氣
치성에 비친 석양은 흐르는 샘으로 드는구나 / 雉城斜照入泉流
고요한 산창에선 몇 사람이나 경권을 읽는고 / 幾人經卷山窓靜
늙은 중의 한가한 지팡이는 돌길을 짚어가네 / 老釋閒筇石逕投
농암의 산수 혹애하는 벽을 문득 생각하니 / 忽憶農巖山水癖
절방에 가부좌하여 그 얼마나 머물렀던고 / 佛龕趺坐幾曾留

 

 

 

 

임금이 북한 산성에 행행하고 여러 신하들과 북한 산성의 형편을 논하다

 

 

 

숙종 38년 임진(1712,강희 51)
 4월10일 (임술)
임금이 북한 산성에 행행하고 여러 신하들과 북한 산성의 형편을 논하다

임금이 북한 산성에 행행(行幸)하였다. 아침 일찍 떠나 서교(西郊)를 경유하여 북한 산성에 이르렀다. 서문(西門)으로 들어가 수문(水門)을 차례로 관람하고 이어 소석가현(小釋迦峴)에 올라 성(城) 안팎을 두루 보고자 하였으나 길이 험하고 닦아지지 않았기 때문에 단지 시단봉(柴丹峰)에만 올랐을 뿐이었다. 임금이 서문 가장자리가 가장 낮으니 중성을 쌓지 않을 수 없다며 속히 의논하여 쌓도록 명하였다. 임금이 여러 신하들을 인견하고 형편을 논하였는데, 임금이 말하기를,
“이제 이 성을 보니 과연 천험(天險)이다. 비록 조그만 흠이 있다 하나 세상에 어찌 십분 꼭 좋은 땅이 있겠는가. 양향(粮餉) 등 일은 반드시 차례로 조치(措置)하면 된다. 이전에 성 밖에 창고를 설치하자는 의논이 있었으나 나는 꼭 성 안에 들여다 쌓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였다. 김우항(金宇杭)은 말하기를,
“성역(城役)은 이미 마쳤으나, 주관(主管)할 사람이 없습니다. 양주(楊州)는 능침(陵寢)이 있어 형세로 보아 옮겨 들이기 어려우니, 차라리 적성(積城)을 혁파하여 양주에 소속시키고, 양주(楊州)부근 4, 5면(面)과 고양(高陽)의 1, 2면을 이 성(城)에 떼어 소속시켜 한 고을을 건치(建置)하되, 이름은 혹 북한 부사(北漢府使)나 중흥 부사(中興府使)로 일컬으며, 또 남한 수어사(南漢守禦使)의 예(例)에 의해 따로 수비사(守備使) 등의 명호(名號)를 정하여 통찰(統察)하게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고, 이유는 말하기를,
“이곳은 곧 도성(都城) 안이니 따로 한 고을을 설치함은 사체(事體)에 있어 부당합니다. 만일 완급(緩急)이 있다면 삼군문(三軍門)에서 마땅히 호가(扈駕)해야 할 것이니, 그대로 삼군문에 소속시켜 시임 대신(時任大臣)이 거느리게 하고 병란(兵亂)에 임하면 그대로 체찰사(體察使)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군향(軍餉)은 조지서에 중성을 쌓아 5, 60만 석의 쌀을 조치(措置)하여 해마다 10만석 씩 돌려가며 개색(改色)하되 호조(戶曹)·선혜청(宣惠廳) 및 각 군문의 새로 거둔 쌀로 바꾸어 들인다면 5, 6년 안에 모두 개색하고 저축이 저절로 넉넉하게 될 것입니다.”
하고, 이이명은 말하기를,
“이미 삼군문으로 하여금 나누어 관장(管掌)하게 하였으니 지금도 그대로 위임하여 각각 신지(信地)를 주관하게 하고, 또 북한(北漢) 모사(某司)란 명호(名號)를 설정하여 대신(大臣)을 도제조(都提調)로 삼으며, 삼군문 대장(三軍門大將)은 당상(堂上)으로 삼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는 즉각 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니,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상량(商量)하여 처리하게 하라.”
하였다.
【원전】 40 집 436 면
【분류】 *왕실-행행(行幸) / *재정-창고(倉庫) / *재정-군자(軍資) / *군사-관방(關防) / *인사-관리(管理)


[주D-001]삼군문(三軍門) : 훈련 도감(訓鍊都監)·금위영(禁衛營)·어영청(御營廳)의 세 군문(軍門).
[주D-002]개색(改色) : 묵은 곡식을 새 곡식으로 바꿈.

 

 

 

영조 48년 임진(1772,건륭 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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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월10일 (을해)
북한산성의 행궁에 나가 시단봉에 오르다

임금이 북한산성(北漢山城)의 행궁(行宮)에 나아가 시단봉(柴丹峰)에 올랐다가, 날이 저물어 환궁(還宮)하였다. 북한산성은 도성의 북쪽에 있는데, 산이 높고 험준하고 가파라서 성궁(城宮)을 쌓아 진양(晉陽)의 불우(不虞)에 대비하게 하였었다. 옛날 임진년 4월에 우리 숙묘(肅廟)께서 어가(御駕)를 타고 임어하여 친히 살펴보신 적이 있었는데, 이날 동가(動駕)한 것은 추모하는 뜻에서 나온 것이었다. 남해(南海)·거제(巨濟)·웅천(熊川)에 사는 백성들이 해물과 생선을 채취하여 먹고 혹 중독되어 죽기에 이른 것을 도신이 장문(狀聞)하니, 어주(御廚)에 지공(支供)하지 말고, 백성들이 채취해서 먹는 것을 금하게 하였다.
【원전】 44 집 418 면
【분류】 *왕실-행행(行幸) / *사법-법제(法制) / *보건(保健) / *수산업-어업(漁業)


[주D-001]진양(晉陽) : 국가가 위급할 때 대피할 수 있는 보장지(保障地)를 가리킴. 전국 시대 초기에 조간자(趙簡子)가 일찍이 윤탁(尹鐸)을 진양에 부임시켜 관대한 정치로 민심을 무마시켜 놓았는데, 뒤에 조간자의 아들 양자(襄子)가 지백(智伯)에게 쫓기게 되자 진양으로 들어가 회복의 터전을 삼고 결국에는 승리를 거두었음.
[주D-002]임진년 : 1712 숙종 38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