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세 판관공 휘 희수 등/10세 방조 휘 득수

문성공 10세손 효자 휘 득수 영암의 문익주 등이 상소를 올려 최득수를 효자로 표창해 줄 것을 청하다

아베베1 2015. 2. 18. 21:29

 

 

 

 

 

 

 

 

 

 

 

 

 

 

 

  5세손   휘 덕지  연촌공 예문관직제학 남원부사   사위 金摠(한훤당 숙부 ) 신후경(통례)               

  6세손  호군공  휘  주          사용공     휘 창                                 생원공  휘  숙

            장    휘 대                 장 호조참의 문과        휘 대성                        ▼

            차    휘 혜  (출 생명)  차 의령현감(의령공파) 휘 지성 .............  생원공 숙 후 출계  

            삼    휘 곤                 삼 병조참의               휘 집성             

            계    휘 강                 계 산당공 휘 충성 (한훤당 문인) 산당집

                                            산당공이 한훤당의 문인이 된것도 고모부의 역할이 있었 던것으 추정되는 부분이다

                                                        

 문성공  7 세손  휘 지성  봉정감찰 의령현감,  의령공파라고 집안에서 분류 

 문성공  8 세손  휘 호문   부사공 (일두 정여창 선생의 사위 )        휘   준문   죽산군 사위

 문성공  9 세손  휘 언청  (봉사공 자 청지 생원 제용감부봉사 )      무과 만호 휘 필신 (십청선생 세필사위)  

                                                                                                                        ▼

 문성공  10세손                                       11 세손                    휘 갑수                사위 신립장군

  휘  낙수   (생원공 )                                휘 응봉, 응용

  휘  희수   (14대조고 ) 통훈대부 행 안동판관  휘 응우 , 응하 응주 -  휘 응하  휘 탁 증 도승지 - 휘

                                                                        

   휘  득수   효자정려   증 승정원 좌승지                 휘 응성  응선  응형

   휘  미수   무과         목사                                  휘 응수  응남      

   휘 기수    (출계 承霽 후)

 

 

병조참의 집성계

 

 병조참의공 휘 집성 공은  

 연산군 4년 무오(1498,홍치 11) 11월 9일  병조참의를 제수하셨다라는  (조선왕조실록)  

 

 문성공 7세손 병조참의공  휘 집성  배 경주이씨 군수 이문병 여  의령공 휘 지성의 弟되시는 분이시다 

           8세손  군수공 휘 숭조                              휘 석조        생부 봉사공 (휘 언청)9세손

                                                                                                     ▼

           9세손  휘  제   ( 윤문 출계)   당숙 에게로 출계  - 10세손  휘 기수  9세손 (재 당숙 휘 제 출계)

           9세손  증 도승지공 휘 제남                       휘 희경        11세손 휘 응원

          10세손  휘    협                                       장) 휘 곤

                                                                      차) 문과 부사 도승지 흡  

 성종 24년 계축(1493,홍치 6)  이덕숭·김무·이양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이덕숭(李德崇)을 통정 대부(通政大夫) 병조 참의(兵曹參議)로, 김무(金珷)를 통정 대부 형조 참의(刑曹參議)로, 강형(姜詗)을 조봉 대부(朝奉大夫) 행 사헌부 지평(行司憲府持平)으로, 이양(李良)을 통정 대부 행 회령 부사(行會寧府使)로, 김수손(金首孫)을 가선 대부(嘉善大夫)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로, 최집성(崔執成)을 절충 장군(折衝將軍) 만포 첨절제사(滿浦僉節制使)로, 심형(沈亨)을 절충 장군 평안도 우후(平安道虞候)로 삼았다.
【원전】 12 집 399 면
【분류】 *인사-임면(任免)
연산군 2년 병진(1496,홍치 9)
 7월21일 (병인)
평안도 관찰사 이극균이 건주위 야인 문제를 치계하다

평안도 관찰사 이극균 치계(馳啓)하기를,
“건주위(建州衛) 저 사람들의 지휘(指揮) 김우당가(金亐唐可) 등 네 사람이 만포 첨사(滿浦僉使) 최집성(崔集成)에게 와서 말하기를, ‘아우 김구가(金仇加)의 사위 조두을시(趙豆乙屎)와 그 아비 조웅야적(趙雄也赤) 등이 이르되, 김산적하(金山赤下) 등이 지난달 그믐께 조선 사람 80명을 사로잡아 왔다더라고 하므로, 그 집에 가보니, 장정(壯丁)은 다 숨고 다만 약하고 늙은이만 있으므로 면대하여 힐문하니, 그들이 「광망(狂妄)한 소년이 스스로 용맹과 힘을 믿고 자주 대국(大國)을 범하였으니, 우리들이 결코 병란(兵亂)을 만날 것인데, 화(禍)를 피할 곳이 없다.」 하므로 서로 붙잡고 울었습니다.’하고, 또 말하기를, ‘저 적(賊) 인구가 번성하지 못하여 부락(部落)이 외롭고 사는 곳이 멀지 않으니, 군사를 일으켜 토벌해야 합니다.’하므로, 집성(集成)이 다시 저 적의 내력과 부락의 많고 적은 것, 길이 돌고 바른 것, 멀고 가까운 것과, 병마(兵馬)의 강하고 약한 것을 물으니, 우당가(亐唐可)가 말하기를, ‘저 적들이 40, 50년 전에 영안도(永安道)로부터 옮겨 와서 좌위(左衛)·우위(右衛)의 사이에 붙어 살아서 따로이 80여 호로 한 부락을 이루어서 기주위(岐州衛)라 자칭하고, 1년 11명이 한 번씩 중국에 조공(朝貢)할 뿐, 농업을 일삼지 않고 도둑질을 일삼아 사로잡은 사람과 말을 먼 곳에 팔아넘기는 것을 생업으로 삼으며, 위원(渭原) 고산리(高山里)·이산(理山) 등의 진(鎭)으로부터 기주위(岐州衛)까지 모두 4일 길인데, 모두 가난하고 병마가 강하지 못하니, 토벌하기 어렵지 않습니다. 또 이 때에 위의 적(賊)이 삼(蔘)을 캐려고 온 부락이 출동하여 큰 재를 넘어 들에 퍼져서 여기에 머물러 밤을 지내니, 만약 날랜 군사로 덮치면 길에 흘린 물건을 줍는 것처럼 쉬울 것이요, 또 저 사람들이 어둠을 타서 만포(滿浦)에 와서 김우당가(金亐唐可)라고 거짓 칭하고, 진(鎭)의 사람들을 불러서 건너게 하고는 인하여 덮여 사로잡아서 폐단을 일으키니, 이 뒤에는 저 사람들이 강을 건널 때에 무기 가진 사람을 많이 배정하여 나룻터를 지키소서.’하였습니다. 만약 우당가의 말과 같다면, 이처럼 가을이 들어 삼(蔘)이 성숙할 때에는 저 적(賊)이 삼을 캐기를 탐내어 부락을 비우고 나갈 것이니, 먼저 정탐하고 날랜 군사로 덮치면 군사가 괴롭지 않고도 이길 수 있습니다.”
하니, 명하여 의정부(議政府)·육조(六曹)에 의논하게 하였다.
【원전】 13 집 127 면
【분류】 *외교-야(野) / *군사-군정(軍政)



 

연산군 2년 병진(1496,홍치 9)
 7월22일 (정묘)
신승선·어세겸 등이 건주위 야인 문제를 논의 하다

신승선·어세겸이 의논드리기를,
“김구가(金仇可)의 전일 고한 바가 이미 맞았으니, 지금 고한 바도 어찌 전혀 믿지 않겠습니까. 응변(應變)하는 일에 대하여는 변장(邊將)이 이미 방지할 것을 예비하였으니, 반드시 스스로 처리해 낼 것이요, 다만 들어가 공격한다는 계책은 불가한 것이 5 가지 있으니, 그 젊고 날랜 자가 삼(蔘)을 캐러간 것을 엿보아 가서 소굴에 있는 늙고 약한 자를 사로잡아 온다면, 이는 겁탈이 될 뿐이니, 어떻게 위엄을 보이겠습니까. 불가한 것이 하나요, 초목이 무성하고 가을 장마질 때를 당하여 출입하기 어려울 뿐 아니라, 4일 길에 병마의 소식을 저들이 만약 먼저 알고 숨어버린다면 한 놈도 발견할 수 없을 것인데, 하물며 잡아 오는 것임에리까. 불가한 것이 두 가지요, 우리 군사가 반드시 헛걸음하고 돌아오는 수고가 있을 뿐 공은 기필하지 못할 것인데, 더구나 삼 캐러 갔던 젊고 날랜 자들이 뒤에 알고 뒤따라 와서 뒤를 끊고 강에서 질러 막기라도 한다면, 우리 군사가 걱정 없기를 보증하겠습니까. 불가한 것이 세 가지요, 변방을 방비하는 자는 다 진(鎭)에 있는 주민으로서 그 수가 많지 않은데, 더구나 온 진(鎭)이 다 갈 수 없고, 모름지기 그 가운데 정예(精銳)한 자를 뽑은 뒤에 기회를 보아 달려가야 할 것이니, 그 가운데 정예가 또 얼마나 되겠습니까. 한창 농사철이므로 남도(南道)의 군사를 징집할 수 없어 군사가 외롭고 사세가 어려운데, 어찌 가벼이 거병하겠습니까. 불가한 것이 네 가지요, 작은 오랑캐를 토벌하는 데는 무찔러 없애서 겁내고 놀라게 하여, 대국의 위엄을 마치 벼락을 범할 수 없는 것처럼 보게 한 뒤에야 뒷날 엿보는 마음을 누를 수 있을 것인데, 지금 만약 틈을 타서 군사를 몰래 거느리고 가서 건드린다면, 이는 저들에게는 손실이 없고 우리의 위엄만 스스로 손상하여 저들이 더욱 가벼이 볼 것이니, 불가한 것이 다섯 가지입니다. 그러나 이 작은 오랑캐가 꺼림 없이 함부로 덤벼 타 오르고 물어 뜯는 욕은 참을 수 없는 바이니, 저들이 과연 끝내 태도를 고치지 않는다면, 얼음이 얼기를 기다려서 우리 군마(軍馬)를 조발(調發)하여 한 번 대거(大擧)하여 쳐 없애야지, 그만둘 일은 아닙니다.”
하고, 정문형·이극돈·이세좌·윤효손은 의논드리기를,
“대저 저 사람들의 보고하는 것을 다 믿지도 못할 것이며 또한 믿지 않을 수도 없는 것인데, 지금 저 사람들이, 적인(賊人)의 부락이 약하므로 공격하여 취할 수 있다고 말한 것은 믿을 수 없을 것 같고, 비록 실로 그렇다 할지라도 이 때에 가벼이 군사를 일으켜서 작은 분(忿)을 풀려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근일에 일어난 위원(渭原)의 일은 변방 장수의 허물이니, 이른바 ‘내가 재물을 잘 간직하지 못하여 도둑을 불러 들인다.’는 것이므로, 국가에서 반드시 급급히 작은 오랑캐에게 분을 풀려고 할 것이 없습니다. 신 등의 생각으로는, 군사를 일으키지 않아야 할 뿐 아니라, 또한 사람을 보내어 정탐해서도 안됩니다. 다만 저들이 말한 바, 재차 침략하거나 가을 건너올 때에 약취(掠取)한다는 등의 말은 혹 그럴 수 있으니, 변장으로 하여금 조심하여 방비를 삼가는 것이 편리하겠습니다. 더구나 이제 바야흐로 수확기여서 농민이 들에 깔려 있으므로 수호하는 따위의 일을 더욱 엄하게 하지 않을 수 없으니, 변장으로서는 내가 할 도리를 다해야 할 뿐입니다. 무릇 변장으로서 군사를 쉽게 말하는 자는 어리석지 않으면 망령된 것입니다. 지금 만포 절제사(滿浦節制使) 최집성(崔集成)이 들어가 치자는 계책을 가벼이 말하는 것은 불가합니다. 만약 저들이 죄악이 극도에 달하여 하늘이 성내고 사람이 분히 여기기를 기다려 얼음이 얼고 풀이 마를 때에 기회를 타서 문죄(問罪)한다면 자연 승산이 있을 것입니다.”
하고, 성준(成俊)·허침(許琛)·이극규(李克圭)·이계동(李季仝)·여자신(呂自新)은 의논드리기를,
“삼을 캐는 사람들이 한 곳에 모인 것이 아니므로 다 덮쳐 잡을 수 없고, 날랜 군사로 경계를 넘는 것 역시 위태로운 일이니, 덮쳐 치자는 계책은 시행하기 어려울 듯합니다. 더구나 이는 문 안에 들어온 급한 도둑도 아니요, 바야흐로 국상 중에 있으니, 급급하게 군사를 일으키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건주(建州)의 야인(野人)이 신해년(辛亥年) 이래로 해마다 침략하여 그치지 않으니, 이는 우리를 가벼이 여기는 것입니다. 근일에 위원(渭原)의 일은 욕을 당한 것이 작지 않으니, 그 형세를 봐서 문죄하는 군사를 장차 일으키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그 부락의 강하고 약한 것과 도리(道里)의 멀고 가까운 것을 미리 안 뒤에야 성공할 수 있는 것입니다. 지금 마침 김주성가(金主成可)가 와서 동청례(童淸禮)와 이산옥(李山玉)을 들여보내어 쇄한(刷還)하라 하니, 신 등의 생각으로는 이 기회로 인하여 믿을 만한 귀화인 한두 명의 통사(通事)를 선택하여 보내서 김주성가(金主成可)·박고리(朴古里) 등과 함께 만포에 이르러 반은 잡아두고 반은 귀화인으로 하여금 데리고 가서 주성가(主成可)의 말대로 각위(各衛)에 두루 타일러 인하여 형세를 살피게 하고, 만약 야인들이 그 말을 들어서 도둑질을 그친다면 또한 우리 나라의 이익이요, 만약 후일에 부득이 거병(擧兵)한다면 그들을 향도(嚮道)로 삼도록 하소서.”
하고, 성현(成俔)·조익정(趙益貞)·신종호(申從濩)·홍흥(洪興)·권경희(權景禧)·김경조(金敬祖)·유제(柳睇)·김심(金諶)·정광세(鄭光世)·이복선(李復善)은 의논드리기를,
“근일 위원의 일은 어떤 위(衛)의 사람이 한 짓인지 알지 못하니, 우당개(亐唐介)의 말로써 확실히 기주위(岐州衛)의 사람인 줄 알 수 없는 것입니다. 더구나 그 말에, 기주위가 두 위(衛)의 사이에 있다 하니, 두 위(衛)가 반드시 서로 응원을 할 것이며, 병력(兵力)이 강하지 않다는 말은 더욱 믿을 수 없습니다. 가령 길이 멀지 않고 부락이 약하여 그의 말대로 성공할 수 있다 하더라도, 지금 국가가 바야흐로 상중(喪中)에 있어 부득이 응전(應戰)할 문안에 들어온 도둑이 아닌데, 변장이 공을 바라고 일거리를 내는 말을 듣고서 가벼이 군사를 내어 변방의 공을 일삼는 것이 가하겠습니까. 더구나 그 말을 믿기 어려운 것이 위에 말한 바와 같으니, 만약 일을 그르치면 후회하여도 소용이 없을 것입니다. 대저 틈을 타서 도둑질하는 것은 오랑캐들의 평상 있는 일인데, 위원의 인구가 사로잡힌 것은 모두 변장이 방어를 잘못한 소치이니, 다만 변장에게 신칙(申勅)하여 방비를 엄하게 할 뿐이요, 어찌 이런 작은 분(忿)으로써 반드시 군사를 일으켜 보복하려 하여서야 되겠씁니까. 저 사람들이 오히려 두려워할 줄 알지 못하고, 버릇이 되어 이처럼 변방을 범한다면 부득이한 조처로써 병력을 기르고 군수(軍需)를 준비하여 천천히 만전(萬全)할 계책을 의논해야 할 것이요, 지금은 가벼이 출병할 수 없습니다.”
하고, 전임(田霖)·조숙기(曺淑沂)·이영산(李英山)은 의논드리기를,
“위원(渭原)에 와서 폐단을 일으키는 자 김우당개(金亐唐介) 등이 비록 기주의 야인이라고 하나, 신해년(辛亥年)에 고산리진(高山里鎭)에서 피살된 종락(種落)의 소위가 아닌지 알 수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보복할 마음이 사나워서 그치지 않을 것이니, 미리 방비해야 할 것이요, 가벼운 군사로 가서 치지 못할 것입니다. 우당개(亐唐介)의 말을 믿을 수 없다 하여 치지 않는다면, 저들에게 약한 것을 보일 뿐 아니라 변방 백성의 걱정이 그칠 때가 없을 것이니, 몰래 강변의 날래고 용맹한 사람을 보내어 부락들의 거리와 산천의 험한 것을 익히 살핀 뒤에 토벌할 시기를 정함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준(俊) 등의 의논을 좇았다.
【원전】 13 집 127 면
【분류】 *외교-야(野) / *군사-군정(軍政)


 

 

연산군 2년 병진(1496,홍치 9)
 7월27일 (임신)
평안 절도사 변종인이 야인을 습격할 것을 치계하다

평안도 절도사 변종인(卞宗仁)이 치계(馳啓)하기를,
“만약 김우당개(金亐唐介)의 말을 따라서 가벼이 발병하여 협격(挾擊)하다가는 기회를 잃음이 없지 않을 것입니다. 다만 금년·명년(明年) 간에 저 사람들이 사냥하기 위하여 처자를 거느리고 많이 나와서 각진(各鎭)의 건너편에 흩어져서 막(幕)을 치고 머물 것이니, 만약 각진의 날랜 군사를 뽑아 밤을 타서 길을 나누어 몰래 건너서 새벽녘에 소리를 지르며 함께 습격한다면 남김없이 다 죽일 수 있습니다.”
하니, 명하여 영중추(領中樞) 이상과 병조 당상에게 의논하게 하매, 파평 부원군 윤필상이 의논드리기를,
“병조가 최집성(崔集成)·변종인(卞宗仁)의 계책을 가지고 좋은 계책을 좇아서 의계(議啓)한 뒤에 다시 의논함이 어떠하겠습니까?”
하고, 선성부원군(宣城府院君) 노사신은 의논드리기를,
“저 사람들이 대국을 기벼이 보고 너무 심히 발호하니, 어찌 앉아 보겠습니까. 모름지기 그 죄를 물어야 할 것이니, 병조로 하여금 방략을 깊이 생각하여 아뢰게 한 뒤에 다시 의논함이 어떠하게습니까?”
하고, 영의정 신승선은 의논드리기를,
“이미 의논하여 동청례·이산옥을 보내어 타이르게 하였으니, 변종인의 계책이 비록 그럴 듯하나, 청례 등이 돌아온 뒤에 그 말을 듣고 다시 의논하여 시행해도 늦지 않습니다.”
하고, 좌의정 어세겸은 의논드리기를,
“변종인이 계책을 내어 틈을 타서 덮치고자 하니, 이는 비록 얻는 바가 있더라도 도리어 도둑질하는 군사가 되고 왕자(王者)의 토죄(討罪)하는 거조가 못 되니, 어떻게 위엄을 보이겠습니까. 하물며 죽이고 잡는 것을 기필할 수 없음에리까. 그러나 군기(軍機)는 중한 일이므로, 억측(臆測)으로 단정할 바가 못 됩니다. 관찰사 이극균이 일찍이 그 도의 도원수가 되어 변방 사정을 익히 알고, 또 이제 감사로 있으니, 그 엄습(掩襲)하는 것의 가부와 이해를 종인(宗仁)과 상세히 의논하여 아뢰게 함이 어떠하겠습니까?”
하고, 영중추 정문형은 의논드리기를,
“삼 캐는 사람을 습격할 것과 강을 건널 적에 군사를 쓰는 것의 가부에 대하여 전일에 이미 관찰사의 장계(狀啓)로 인하여 의계(議啓)하였으니, 감히 다시 의논하지 못하겠습니다.”
하고, 병조 판서 성준·참판 허침·참의 이극규·참지 이감(李堪)은 의논드리기를,
“전일에, 저들과 약속하여 강 건너 수십 리 사이에서 와서 둔(屯)치지 못하게 하고, 만약 그것을 어기면 다 적으로 논하여 군사를 일으켜 내쫓고, 만약 몰래 덤빌 형세가 있으면 진장(鎭將)으로 하여금 기회를 타서 쳐 죽이자고 아뢴 것은 엿보는 폐단을 끊고 침략하는 걱정을 그치게 하려는 것인데, 지금 절도사의 계본(啓本)을 보니, 강 건너에서 사냥하는 야인(野人)을 몰래 습격하자는 계책이 또한 옳습니다. 그러나 지금 금하는 약속이 없는데 문득 이런 일을 한다면 저들이 할 말이 있어서 잘못이 우리에게 있게 될 것이니, 단연코 행할 수 없습니다. 또 서변(西變)의 조치할 방략을 관찰사·절도사로 하여금 같이 의논하여 아뢸 것을 이미 하유(下諭)하였으니, 우선 기다리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준 등의 의논을 좇았다.
【원전】 13 집 128 면
【분류】 *외교-야(野) / *군사-군정(軍政)


연산군 2년 병진(1496,홍치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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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5일 (기묘)
평안도 관찰사 이극균이 건주위 야인 문제를 치계하다

평안도 관찰사 이극균이 치계(馳啓)하기를,
“만포 첨절제사(滿浦僉節制使) 최집성첩정(牒呈)에, ‘7월 23일에 온하위(溫下衛) 야인(野人) 지휘 김하질다(金何叱多) 등이 와서 말하기를, ‘전해 듣건대, 건주위에 사는 심일대(沈一大)가 말하되 올라 산성(兀剌山城)에 거주하는 저 사람들이 추수하는 농민을 사로잡으려 하기도 하고, 외로운 인가를 약탈하려 하기도 하여, 장차 군사를 모아 변방을 범하려 한다.’ 하며, 또 26일에는 건주위 야인 호군(護軍) 이거우(李巨右) 등이 와서 말하기를, ‘듣건대, 기주위(岐州衛) 사람 김산적하(金山赤下)가 도둑질을 하려고 군사 1백여 명을 모아, 자피선(者皮船) 6척을 가지고 물 하류로 가서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하고, 또 말하기를, ‘전극림(田克林)은 여진(女眞) 말을 아는 사람인데, 우리 삼부자(三父子)가 후일에 다시 나오려 하니, 나에게 의복과 활과 화살을 주면 그를 데리고 저 사람들이 사는 곳에 가서 도로의 멀고 가깝고 돌고 지르는 것을 가르쳐 주어 상세히 보게 한 뒤에 도로 데리고 오겠다 합니다.’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원전】 13 집 130 면
【분류】 *외교-야(野) / *군사-군정(軍政)


 

연산군 2년 병진(1496,홍치 9)
 7월27일 (임신)
평안 절도사 변종인이 야인을 습격할 것을 치계하다

평안도 절도사 변종인(卞宗仁)이 치계(馳啓)하기를,
“만약 김우당개(金亐唐介)의 말을 따라서 가벼이 발병하여 협격(挾擊)하다가는 기회를 잃음이 없지 않을 것입니다. 다만 금년·명년(明年) 간에 저 사람들이 사냥하기 위하여 처자를 거느리고 많이 나와서 각진(各鎭)의 건너편에 흩어져서 막(幕)을 치고 머물 것이니, 만약 각진의 날랜 군사를 뽑아 밤을 타서 길을 나누어 몰래 건너서 새벽녘에 소리를 지르며 함께 습격한다면 남김없이 다 죽일 수 있습니다.”
하니, 명하여 영중추(領中樞) 이상과 병조 당상에게 의논하게 하매, 파평 부원군 윤필상이 의논드리기를,
“병조가 최집성(崔集成)·변종인(卞宗仁)의 계책을 가지고 좋은 계책을 좇아서 의계(議啓)한 뒤에 다시 의논함이 어떠하겠습니까?”
하고, 선성부원군(宣城府院君) 노사신은 의논드리기를,
“저 사람들이 대국을 기벼이 보고 너무 심히 발호하니, 어찌 앉아 보겠습니까. 모름지기 그 죄를 물어야 할 것이니, 병조로 하여금 방략을 깊이 생각하여 아뢰게 한 뒤에 다시 의논함이 어떠하게습니까?”
하고, 영의정 신승선은 의논드리기를,
“이미 의논하여 동청례·이산옥을 보내어 타이르게 하였으니, 변종인의 계책이 비록 그럴 듯하나, 청례 등이 돌아온 뒤에 그 말을 듣고 다시 의논하여 시행해도 늦지 않습니다.”
하고, 좌의정 어세겸은 의논드리기를,
“변종인이 계책을 내어 틈을 타서 덮치고자 하니, 이는 비록 얻는 바가 있더라도 도리어 도둑질하는 군사가 되고 왕자(王者)의 토죄(討罪)하는 거조가 못 되니, 어떻게 위엄을 보이겠습니까. 하물며 죽이고 잡는 것을 기필할 수 없음에리까. 그러나 군기(軍機)는 중한 일이므로, 억측(臆測)으로 단정할 바가 못 됩니다. 관찰사 이극균이 일찍이 그 도의 도원수가 되어 변방 사정을 익히 알고, 또 이제 감사로 있으니, 그 엄습(掩襲)하는 것의 가부와 이해를 종인(宗仁)과 상세히 의논하여 아뢰게 함이 어떠하겠습니까?”
하고, 영중추 정문형은 의논드리기를,
“삼 캐는 사람을 습격할 것과 강을 건널 적에 군사를 쓰는 것의 가부에 대하여 전일에 이미 관찰사의 장계(狀啓)로 인하여 의계(議啓)하였으니, 감히 다시 의논하지 못하겠습니다.”
하고, 병조 판서 성준·참판 허침·참의 이극규·참지 이감(李堪)은 의논드리기를,
“전일에, 저들과 약속하여 강 건너 수십 리 사이에서 와서 둔(屯)치지 못하게 하고, 만약 그것을 어기면 다 적으로 논하여 군사를 일으켜 내쫓고, 만약 몰래 덤빌 형세가 있으면 진장(鎭將)으로 하여금 기회를 타서 쳐 죽이자고 아뢴 것은 엿보는 폐단을 끊고 침략하는 걱정을 그치게 하려는 것인데, 지금 절도사의 계본(啓本)을 보니, 강 건너에서 사냥하는 야인(野人)을 몰래 습격하자는 계책이 또한 옳습니다. 그러나 지금 금하는 약속이 없는데 문득 이런 일을 한다면 저들이 할 말이 있어서 잘못이 우리에게 있게 될 것이니, 단연코 행할 수 없습니다. 또 서변(西變)의 조치할 방략을 관찰사·절도사로 하여금 같이 의논하여 아뢸 것을 이미 하유(下諭)하였으니, 우선 기다리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준 등의 의논을 좇았다.
【원전】 13 집 128 면
【분류】 *외교-야(野) / *군사-군정(軍政)

연산군 3년 정사(1497,홍치 10)
 3월18일 (경신)
경상우도 수사 최집성이 왜적의 양곡 약탈을 급보하다

경상 우도 수사 최집성(崔集成)이 급보로 아뢰기를,
“진주(晉州) 백성이 왜인에게 줄 양곡을 웅천(熊川)으로 실어가는 도중 왜적(倭賊)을 만나서 약탈을 당하였습니다.”
하니, 유서(諭書)를 순변사 이계동(李季仝)에게 내리기를,
“지금 경상 우도 수사의 급보로 인해 진주 사는 백성이 왜인의 급료를 빼앗긴 것을 알았다. 이것은 비록 소소한 도적이니 염려할 것이 없으나, 전일 순천(順天) 적왜가 쏜 것에 녹도(鹿島)의 표를 붙인 화살이 있었다 하니, 저들이 반드시 우리 변방 수비가 소루한 것을 익히 보고 거리낌없이 이를 얻는 데 재미를 들여서, 여러 섬을 배회 출몰하면서 장난하는 것이다. 형세가 쉽게 제어할 수 있는 일이니, 경은 이런 점을 잘 알아서 기회를 보아 조치하고 조금이라도 해이하지 말라.”
하였다.
【원전】 13 집 204 면
【분류】 *외교-왜(倭)

연산군 3년 정사(1497,홍치 10)
 4월2일 (계유)
병조에서 경상도 수군 절도사 최집성의 국문을 청하여 의논하게 하다

병조에서 아뢰기를,
“경상도 수군 절도사 최집성(崔集成)이 왜적(倭賊)을 추격 체포하지 않았으니, 청컨대 관원을 보내어 국문하옵소서.”
하였다. 승지 신수근(愼守勤)은 아뢰기를,
“진주(晉州) 연해 지방 백성이, 군량을 배로 실어가다가 적을 만나 겁탈당하는 것을 보고 달려가서 삼천진 권관(三千鎭權管)에게 보고하였으나, 육군에게 미루므로 그만 같은 마을 사람들과 함께 적을 따라갔는데 적량(赤梁)·사량(蛇梁) 지방에 이르러 병력이 적어 끝까지 쫓지 못하였습니다. 국가에서 남방에 진(鎭)을 설치한 것은 본래가 왜를 방비하기 위하여서인데 삼천진 권관이 적이 바로 문 앞에 있는데도 곧 쫓아 잡지 않았으며, 적량·사량 만호(萬戶) 역시 응원하지 않았습니다. 또 수영(水營)이 거제(巨濟)에 있어, 방비가 극히 긴요한데, 절도사 최집성이 변경 방비에는 뜻을 두지 않고 멀리 성주(星州)에 가서, 적의 절발(竊發)을 초래하였으니 다 함께 죄가 있습니다. 만일 관원만 보내어 국문한다면, 변경 장수들이 으레 있는 일로 생각하고 다시 경계함이 없을까 염려됩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의논하게 하라.”
하매, 윤필상(尹弼商)·노사신(盧思愼)이 의논드리기를,
“대저 변경에서 실수가 있으면 엄하게 다스려야 합니다. 혹시 조금이라도 해이하다면, 변이 있더라도 누가 즐겨 몸을 내놓고 위급한 일에 나가겠습니까. 의금부에 명령하여 잡아다 추국(推鞫)하여 후의 사람들을 경계하소서. 진주 백성이 같은 마을 사람들을 불러 기회를 타서 쫓아갔는데, 삼천진 권관에게 저지되어 끝내 공을 이루지는 못하였지만 그 뜻이 가상하니 상 주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고, 어세겸(魚世謙)·정문형(鄭文炯)·이극돈(李克墩)은 의논드리기를,
“신수근의 아뢴 것은 참으로 변경 장수들을 계칙(戒飭)하고 격려하자는 뜻이오나, 한 번 실수가 있다 하여 모두 다 잡아다 국문하는 것은 번거로울 것 같사오니 우선 병조에서 아뢴 대로 경차관(敬差官)으로 하여금 국문하게 하소서.”
하고, 성준(成俊)은 의논하기를,
“수근의 아뢴 대로 잡아다 국문하는 것이 마땅하옵니다. 다만 남방에 경보가 있는데 변방 진영을 오래 비어둘 수는 없으니, 〈장수를〉 경질하는 것이 편하겠습니다. 사량·적량 만호는 응원하지 않았으니 역시 죄가 있지만 어찌 그만한 연유가 없겠습니까. 경차관으로 추국한 후에 죄를 정하게 하소서.”
하니, 필상 등의 의논을 좇았다.
【원전】 13 집 209 면
【분류】 *군사-군정(軍政) / *외교-왜(倭) / *사법-탄핵(彈劾)

연산군 4년 무오(1498,홍치 11)
 11월9일 (신축)
강귀손·성세명·김수동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강귀손(姜龜孫)을 형조 판서(刑曹判書)로, 성세명(成世明)을 동지돈녕부사(同知敦寧府事)로, 김수동(金壽童)을 예조 참판(禮曹參判)으로, 김영정(金永貞)을 사헌부 대사헌(司憲府大司憲)으로, 정미수(鄭眉壽)를 승정원 도승지(承政院都承旨)로, 홍식(洪湜)을 좌승지(左承旨)로, 이세영(李世英)을 우승지(右承旨)로, 권주(權柱)를 좌부승지(左副承旨)로, 최한원(崔漢源)을 우부승지(右副承旨)로, 박원종(朴元宗)을 동부승지(同副承旨)로, 최집성(崔集成)을 병조 참의(兵曹參議)로, 최숙생(崔淑生)을 홍문관 부수찬(弘文館副修撰)으로 삼았다.
【원전】 13 집 333 면
【분류】 *인사-임면(任免)


 

성종 19년 무신(1488,홍치 1)
 6월14일 (병오)
이극배가 이화의 매부 최집성과 친하다 하여 혐의가 풀릴 때까지 벼슬길에 나오지 않겠다고 아뢰다

삼청 당상(三廳堂上) 이극배(李克培)가 와서 아뢰기를,
“이화(李譁)의 매부(妹夫) 최집성(崔集成)은 신과 담장을 사이에 두고 살면서 있고 없고 간에 서로 도와가며 절족(切族)과 다름없이 지내왔으므로, 사람들이 공사(公事)를 누설하였을 것으로 의심할 듯하니, 청컨대, 피혐(避嫌)하게 하소서.”
하니, 전교(傳敎)하기를,
“피혐(避嫌)하지 말라. 이화(李譁)는 의금부(義禁府)에 옮겨 가두고 국문(鞫問)하도록 하겠다.”
하였다.
【원전】 11 집 349 면
【분류】 *인사-관리(管理) / *사법-재판(裁判) / *사법-행형(行刑) / *사법-치안(治安)

 

 

연산군 3년 정사(1497,홍치 10)
 3월18일 (경신)
경상우도 수사 최집성이 왜적의 양곡 약탈을 급보하다

경상 우도 수사 최집성(崔集成)이 급보로 아뢰기를,
“진주(晉州) 백성이 왜인에게 줄 양곡을 웅천(熊川)으로 실어가는 도중 왜적(倭賊)을 만나서 약탈을 당하였습니다.”
하니, 유서(諭書)를 순변사 이계동(李季仝)에게 내리기를,
“지금 경상 우도 수사의 급보로 인해 진주 사는 백성이 왜인의 급료를 빼앗긴 것을 알았다. 이것은 비록 소소한 도적이니 염려할 것이 없으나, 전일 순천(順天) 적왜가 쏜 것에 녹도(鹿島)의 표를 붙인 화살이 있었다 하니, 저들이 반드시 우리 변방 수비가 소루한 것을 익히 보고 거리낌없이 이를 얻는 데 재미를 들여서, 여러 섬을 배회 출몰하면서 장난하는 것이다. 형세가 쉽게 제어할 수 있는 일이니, 경은 이런 점을 잘 알아서 기회를 보아 조치하고 조금이라도 해이하지 말라.”
하였다.
【원전】 13 집 204 면
【분류】 *외교-왜(倭)

 

연산군 3년 정사(1497,홍치 10)
 4월2일 (계유)
병조에서 경상도 수군 절도사 최집성의 국문을 청하여 의논하게 하다

병조에서 아뢰기를,
“경상도 수군 절도사 최집성(崔集成)이 왜적(倭賊)을 추격 체포하지 않았으니, 청컨대 관원을 보내어 국문하옵소서.”
하였다. 승지 신수근(愼守勤)은 아뢰기를,
“진주(晉州) 연해 지방 백성이, 군량을 배로 실어가다가 적을 만나 겁탈당하는 것을 보고 달려가서 삼천진 권관(三千鎭權管)에게 보고하였으나, 육군에게 미루므로 그만 같은 마을 사람들과 함께 적을 따라갔는데 적량(赤梁)·사량(蛇梁) 지방에 이르러 병력이 적어 끝까지 쫓지 못하였습니다. 국가에서 남방에 진(鎭)을 설치한 것은 본래가 왜를 방비하기 위하여서인데 삼천진 권관이 적이 바로 문 앞에 있는데도 곧 쫓아 잡지 않았으며, 적량·사량 만호(萬戶) 역시 응원하지 않았습니다. 또 수영(水營)이 거제(巨濟)에 있어, 방비가 극히 긴요한데, 절도사 최집성이 변경 방비에는 뜻을 두지 않고 멀리 성주(星州)에 가서, 적의 절발(竊發)을 초래하였으니 다 함께 죄가 있습니다. 만일 관원만 보내어 국문한다면, 변경 장수들이 으레 있는 일로 생각하고 다시 경계함이 없을까 염려됩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의논하게 하라.”
하매, 윤필상(尹弼商)·노사신(盧思愼)이 의논드리기를,
“대저 변경에서 실수가 있으면 엄하게 다스려야 합니다. 혹시 조금이라도 해이하다면, 변이 있더라도 누가 즐겨 몸을 내놓고 위급한 일에 나가겠습니까. 의금부에 명령하여 잡아다 추국(推鞫)하여 후의 사람들을 경계하소서. 진주 백성이 같은 마을 사람들을 불러 기회를 타서 쫓아갔는데, 삼천진 권관에게 저지되어 끝내 공을 이루지는 못하였지만 그 뜻이 가상하니 상 주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고, 어세겸(魚世謙)·정문형(鄭文炯)·이극돈(李克墩)은 의논드리기를,
“신수근의 아뢴 것은 참으로 변경 장수들을 계칙(戒飭)하고 격려하자는 뜻이오나, 한 번 실수가 있다 하여 모두 다 잡아다 국문하는 것은 번거로울 것 같사오니 우선 병조에서 아뢴 대로 경차관(敬差官)으로 하여금 국문하게 하소서.”
하고, 성준(成俊)은 의논하기를,
“수근의 아뢴 대로 잡아다 국문하는 것이 마땅하옵니다. 다만 남방에 경보가 있는데 변방 진영을 오래 비어둘 수는 없으니, 〈장수를〉 경질하는 것이 편하겠습니다. 사량·적량 만호는 응원하지 않았으니 역시 죄가 있지만 어찌 그만한 연유가 없겠습니까. 경차관으로 추국한 후에 죄를 정하게 하소서.”
하니, 필상 등의 의논을 좇았다.
【원전】 13 집 209 면
【분류】 *군사-군정(軍政) / *외교-왜(倭) / *사법-탄핵(彈劾)

 

 

    9 세손  휘 제남  (증 승지)                         휘   희 경 

                 ▼                                                ▼

 10세손  휘  협             휘  곤               휘  흡 (문과 부사 증도승지)    휘   진  

             ▼                                    

 11세손  휘 병호           휘 병호,완호 사호    휘 문호 휘 서호      


 

전주최공 의령공계 휘 지성

 

 

 

 

 

 

 

 

 

 

 

 

 

 

 

 선조 160권, 36년(1603 계묘 / 명 만력(萬曆) 31년) 3월 14일(경오) 2번째기사
영암의 문익주 등이 상소를 올려 최득수를 효자로 표창해 줄 것을 청하다

전라 감사 한준겸(韓浚謙)이 아뢰었다.
“영암(靈巖)에 사는 전 현감 문익주(文益周) 등 20여 인이 연명(連名)하여 와서 정소(呈訴)하기를 ‘군(郡)에 사는 사인(士人) 최득수(崔得壽)는 고(故) 명현(名賢) 최덕지(崔德之)의 6대손이다. 일찍이 의방(義方)을 알았고 성품 또한 지극히 효성스러워 어른의 뜻을 받들어 어기지 않았고 형제간에 우애가 매우 돈독하였다. 지난 임진년 경성(京城)에서 적변을 만나자 나이 80인 노모를 모시고 삭녕(朔寧)으로 피란하였다. 노모가 병으로 죽자 산중에 임시로 묻어 두고 1년 동안 주야로 빈소 곁을 떠나지 않았는데 마침내 적봉(賊鋒)을 면하고 다음해 가을 금천(衿川)으로 돌아가 장사지낸 다음 3년을 죽만 마시면서 여묘 밖을 나가지 않았다. 계사년·갑오년에 기근이 너무 심하여 여사(廬舍) 옆에서 사람들이 다투어 서로 잡아 먹었지만 득수는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의 애절한 통곡과 수척한 모습을 보는 자는 눈물을 흘렸다. 득수는 본군 사람으로 난 후에 와서 살았는데 그 성효(誠孝)의 돈독함을 보면 충분히 사람을 감동시킬 만하므로 순선(旬宣) 아래에 와서 진달하는 것이니 조정에 아뢰어 달라. 그리고 전쟁을 치른 뒤 의열(義烈)로 표창해 줄 사람을 드러내지 않은 것이 없는데 장려해 주는 은전을 입지 못하였으니, 인정이 모두 답답해 하는 것은 물론 장차 후인을 용동시킬 수 없다.’ 하였습니다.
득수가 과연 문익주 등이 진달한 것과 같다면 참으로 가상한 일입니다. 해조로 하여금 더욱더 순방(詢訪)하게 하여 우선 정표(旌表)하게 하소서. 그리고 나주(羅州) 생원 강위호(姜渭虎) 등 1백여 인이 와서 정소하를 ‘난 후 의병을 일으킨 사람 가운데 고경명(高敬命) 같은 이는 광주(光州)에 사당을 세워 주었고 조헌(趙憲) 같은 이는 금산(錦山)에 비석을 세워 주었는데, 김천일(金千鎰)만은 아직 표창해 주는 은전이 없어서 충신의 마을로 하여금 묻혀서 빛이 없게 만들어 수레타고 가는 사람이 경의를 표할 줄 모르고 걸어가는 사람도 존경할 줄 모르게 되었다. 그리하여 호남의 사론(士論)이 지금까지 답답해 하니 또한 조정에 알려서 충신의 공적을 표창해 주고 그 문려에 정표함으로써 후세에 권장되도록 해달라.’ 하였으니, 모두 해조로 하여금 시행하게 하소서.”
【원전】 24 집 457 면
【분류】 *정론(政論) / *인사(人事) / *군사(軍事) / *윤리(倫理)


 

 

 

全羅監司韓浚謙啓曰: “靈巖居前縣監文益周等二十餘人, 連名來呈曰: ‘郡居士人崔得壽, 故名賢德之六代孫也。 早知義方, 性又至孝, 承順無違, 兄弟之間, 友愛尤篤。 去壬辰, 在京城逢賊變, 奉年耋之母, 避亂朔寧地, 母因病卒, 權厝于山中, 晝夜不離殯側, 首尾一年, 竟免賊鋒, 明年秋, 歸葬衿川地, 啜粥三年, 不出廬外。 癸巳、甲午間, 飢饉太甚, 廬舍之側, 人爭殺食, 而得壽不畏懼, 哭泣之哀, 柴毁之狀, 見者垂涕。 得壽, 本郡人也。 亂後來居, 目見其誠孝之篤, 有足以動人, 故來陳旬宣之下。 請聞于朝。’ 且見兵戈之後, 義烈表著之人, 不爲不著, 而未蒙崇奬之典, 人情咸鬱, 將無以聳動後來。 得壽果如文益周等所陳, 則誠爲可嘉。 請令該曹, 更加詢訪, 爲先旌表。 羅州生員姜渭虎等百餘人來呈, ‘亂後起事人, 如高敬命, 立祠于光州, 趙憲, 竪碑于錦山, 獨于金千鎰, 迄未有表厥之典, 使忠臣之閭, 埋沒無光, 車者不知式, 行者不知敬, 湖南士論, 至今鬱鬱。 亦請聞于朝, 褒其忠績, 表其門閭, 以爲後勸。’ 云。 幷乞令該曹施行。”
【태백산사고본】 92책 160권 13장 A면
【영인본】 24책 457면
【분류】 *정론(政論) / *인사(人事) / *군사(軍事) / *윤리(倫理)

 

宣祖 160卷, 36年(1603 癸卯 / 명 만력(萬曆) 31年) 3月 14日(庚午) 2번째기사
영암의 문익주 등이 상소를 올려 최득수를 효자로 표창해 줄 것을 청하다

선조 22년 기축(1589,만력 17)
1월21일 (기사)
비변사에서 무인을 불차 채용한다고 하자 각 신료들이 올린 명단

비변사에게 무신(武臣)을 불차 채용(不次採用)한다고 하자, 이산해는 손인갑(孫仁甲)·성천지(成天祉)·이순신(李舜臣)·이명하(李明河)·이빈(李薲)·신할(申硈)·조경(趙儆)을, 심수경(沈守慶)은 이경(李景)·신할·이용준(李用濬)·박진(朴晉)을, 유홍(兪泓)은 이혼(李渾)·왕경조(王景祚)·이용준(李用濬)·변응성(邊應星)·유몽경(柳夢經)·유연(兪淵)을, 정언신(鄭彦信)은 손인갑(孫仁甲)·성천지·이순신·이명하(李明河)·이시언(李時言)·한인제(韓仁濟)·이언함(李彦諴)·정담(鄭湛)·김당(金鐺)을, 윤탁연(尹卓然)은 유희선(柳希先)·이종장(李宗張)·윤안성(尹安性)을, 강섬(姜暹)은 유염(柳濂)·정눌(鄭訥)·문몽헌(文夢軒)·김경로(金敬老)·정발(鄭撥)·정득렬(鄭得說)을, 변협(邊協)은 조경·신할·이복남(李福男)을, 이진(李戩)은 신할·김순(金徇)·변응성을, 최원(崔遠)은 이경(李景)·전협(田浹)을, 신입(申砬)은 최미수(崔眉壽)·변응성·변응정(邊應井)·이지시(李之詩)·정현룡(鄭見龍)·이범(李範)을 추천하였다.
【원전】 21 집 456 면
【분류】 *인사(人事)

 

휘 탁  호  사정   문과  영광군수 병조정랑 증 도승지   

 

 인조 8년 경오(1630, 숭정3)    9월 26일(임인) 흐림

 

08-09-26[07] 사관에서 현고된 사람 명단

사관(四館)에서 현고(現告)된 사람은 장희재(張熙載), 남진연(南振演), 이회보(李回寶), 윤형지(尹衡志), 최탁(崔琢), 신상(申恦), 이일상(李一相), 권령(權坽), 서상리(徐祥履), 박사성(朴思誠)이다.
- 박정현 집안의 일기에 의거함 -

  

   구봉 송익필 선생의 문인이 사계 선생 이시다 

           구봉 송익필선생의 문집중 가례주설의 일부는  11대조고 양정제공 미백 선조님이 보관 중이던 자료에서

            수정을 하여  문집에 첨부를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사계 김장생 선생의 문인록에는 기록된 문성공 후손중 사계선생은 광산인으로 예학의 거두 이시다

  석계공  휘 명룡   여윤  (석계공의 만사를 사계 선생이 직접지어서 애석함을 전해다는 기사가 있다)

  

   - 자는 여윤(汝允)이고 호는 석계(石溪)이며, 정묘년(1567, 명종22)생이다. 완산인(完山人)으로 현감 최위(崔渭)의 아들이다. 선생이 익산 군수(益山郡守)로

     있을 적에 나와서 배웠는데, 학식과 행의(行誼)가 한 시대에 출중하였다. 졸함에 미쳐서 선생은 제문(祭文)과 만시(挽詩)를 지었으며, 또 묘갈문(墓碣文)을

      찬하여서 뛰어난 재주를 가지고 일찍 죽은 데 대해 몹시 애통해하는 뜻을 붙였다. 학행(學行)이 특출하다는 이유로 집의(執義)에 추증되었으며, 저서로는

   《석계집(石溪集)》이 있다. 전주의 인봉서원(麟峯書院)에 향사되었다

 

    13대 조고 사정공 휘  탁  문과              병조정랑   행 영광군수      증  승정원도승지  

 

    12대 조고  참판공 행 사헌부 감찰       (전주최공 문성공 초성본)   증  가선대부  호조참판           

 

    11대 조고  양정제공   미백  동지중추부사   오위장     

          우리 집안의 여러가지 일에대하여 많은 역할을 하신분이다

          전주최공 문성공 초성본을  부친이신 참판공으로 부터 이어받아 완성을 하신분이기도하시고

          전해오는 연촌공의 문집을 부족한 부분을 보충하고 여러 사항을 수집하여 오늘날 전해오는  연촌공 문집을 편수 하셨다

          산당공 휘 충성 문집을 작성하는 일에도 부족한 부분등 교정을 거쳐서 완성하는데 많은 부분의 역할을 하신분이시다

           

   사계 선생의 문인중 우암  송시열 선생은

   미백 양정제공 휘 방언으로 이어지는 우리 집안과의 연관 관계가 많은 부분이다        

   미백 선조님은 우암 선생의 문인중  권상화 이희조 선생과 더불어 우암선생의 문인중 중요한 역할을 한분으로

   송자대전을 집필하시는 일에 참여를 하신분이시다

   우암선생이 수시로 간찰을 통하여 미백선조님과 중요논의 사항을 의견을 나누시고 생전에 문인들에게 문집 제작을 부탁하였다는

   기사가 사계전집에 전해오고있다 .     

 

사계전서 제47권
  

 

부록(附錄)

 

문인록(門人錄)

 


김집(金集)
자는 사강(士剛)이고 호는 신독재(愼獨齋)이며, 갑술년(1574, 선조7)생으로 선생의 둘째 아들이다. 선생이 항상 부자간의 지기(知己)로 칭하였다. 가정에서의 학문을 잘 이어받아 잇달아 유종(儒宗)이 되었다. 선생의 문인들이 대부분 사계 선생을 섬기던 마음으로 선생을 섬겼다. 유일(遺逸)로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에 제수되었으며, 시호(諡號)는 문경공(文敬公)이다. 성균관(成均館)에 종사(從祀)되었고, 효종(孝宗)의 묘정(廟庭)에 배향(配享)되었다. 저서로는 《신독재전서(愼獨齋全書)》가 있다.

송시열(宋時烈)
자는 영보(英甫)이고 호는 우암(尤菴)이며, 정미년(1607, 선조40)생이다. 은진인(恩津人)으로 수옹(睡翁) 송갑조(宋甲祚)의 아들이다. 어려서부터 선생에게 종학(從學)하였는데, 선생이 기대하고 허여함이 몹시 중하였다. 마침내 사문(師門)에서 서적(書蹟)을 전수받음에 미쳐서는 세상의 유종이 되었다. 좌상(左相)에 제수되었으며, 문정공(文正公)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기사년(1689, 숙종15)에 화(禍)를 당하였다. 성균관에 종사되었고 효종의 묘정(廟庭)에 배향되었다. 저서로는 《송자대전(宋子大全)》이 있다.

송준길(宋浚吉)
자는 명보(明甫)이고 호는 동춘당(同春堂)이며, 병오년(1606, 선조39)생이다. 은진인(恩津人)으로 청좌와(淸坐窩) 송이창(宋爾昌)의 아들이며, 어려서부터 선생에게 종학하였다. 이에 선생이 장려하면서 말하기를, ‘이 뒷날에 반드시 예가(禮家)의 종장(宗匠)이 될 것이다.’ 하였는데, 뒤에 세상의 유종이 되었다. 유일로 좌참찬(左參贊)에 제수되었다. 시호는 문정공(文正公)이며, 성균관에 종사되었다. 저서로는 《동춘당집(同春堂集)》이 있다.

이유태(李惟泰)
자는 태지(泰之)이고 호는 초려(草廬)이며, 정미년(1607, 선조40)생이다. 경주인(慶州人)으로 봉사(奉事) 이대방(李大邦)의 손자이다. 동춘당 송준길, 우암 송시열과 더불어 어려서부터 선생에게 수학하였는데, 선생이 예의로 우대함이 몹시 두터웠다. 유일로 이조 참판을 지냈고, 시호는 문헌공(文憲公)이다. 저서로는 《초려집(草廬集)》이 있다.

강석기(姜碩期)
자는 복이(復而)이고 호는 월당(月塘)이며, 경진년(1580, 선조13)생이다. 금천인(衿川人)으로 참의(參議) 강찬(姜燦)의 아들이다. 어려서부터 선생에게 수학하여 온 마음을 다해 위기지학(爲己之學)을 닦으면서 부지런히 예서(禮書)를 강마하였다. 덕행과 학식이 뛰어나 당세의 명신(名臣)이 되었다. 진사과(進士科)와 문과(文科)에 급제하였고, 우의정(右議政)을 지냈으며, 시호는 문정공(文貞公)이다. 저서로는 《월당집(月塘集)》이 있다. 봉산(鳳山)의 문정서원(文井書院)에 향사되었다.

장유(張維)
자는 지국(持國)이고 호는 계곡(谿谷)이며, 정해년(1587, 선조20)생이다. 덕수인(德水人)으로 판서 장운익(張雲翼)의 아들이다. 어려서부터 선생에게 수학하였는데, 선생이 일찍이 총명하면서도 학문에 힘쓴다고 칭찬하였다. 문장으로 세상에 이름났으며, 진사과와 문과에 급제하였다. 우상(右相)을 지냈고, 문형(文衡)을 맡았다. 정사 공신(靖社功臣)에 녹공되어 신풍부원군(新豐府院君)에 봉해졌으며, 효종의 국구(國舅)가 되었다. 시호는 문충공(文忠公)이며, 저서로는 《계곡집(谿谷集)》이 있다. 나주(羅州)에 있는 계간사(溪澗祠)에 향사되었다.

정홍명(鄭弘溟)
자는 자용(子容)이고 호는 기암(畸菴)이며, 임오년(1582, 선조15)생이다. 영일인(迎日人)으로 송강(松江) 정철(鄭澈)의 아들이다. 어려서부터 선생에게 수학하였는데, 선생은 서로 간에 키워 주는 벗으로 허여하였다. 월당 강석기, 계곡 장유와 더불어 선진(先進)의 고제(高弟)가 되었다. 진사과와 문과에 급제하였고, 대사헌(大司憲)을 지냈으며, 문형을 맡았다. 시호는 문정공(文貞公)이고, 저서로는 《기암집(畸菴集)》이 있다. 창평(昌平)의 지곡사(智谷祠)에 향사되었다.

최명룡(崔命龍)
자는 여윤(汝允)이고 호는 석계(石溪)이며, 정묘년(1567, 명종22)생이다. 완산인(完山人)으로 현감 최위(崔渭)의 아들이다. 선생이 익산 군수(益山郡守)로 있을 적에 나와서 배웠는데, 학식과 행의(行誼)가 한 시대에 출중하였다. 졸함에 미쳐서 선생은 제문(祭文)과 만시(挽詩)를 지었으며, 또 묘갈문(墓碣文)을 찬하여서 뛰어난 재주를 가지고 일찍 죽은 데 대해 몹시 애통해하는 뜻을 붙였다. 학행(學行)이 특출하다는 이유로 집의(執義)에 추증되었으며, 저서로는 《석계집(石溪集)》이 있다. 전주의 인봉서원(麟峯書院)에 향사되었다.

김경여(金慶餘)
자는 유선(由善)이고 호는 송애(松崖)이며, 병신년(1596, 선조29)생이다. 경주인(慶州人)으로 어려서부터 선생께 수학하였다. 병자호란 때 척화(斥和)하였다. 문과에 급제하여 부제학을 지냈고, 시호는 문정공(文貞公)이다. 회덕(懷德)의 정절사(靖節祠)에 향사되었다.

이후원(李厚源)
자는 사심(士深)이고 호는 우재(迂齋)이며, 무술년(1598, 선조31)생이다. 완산인(完山人)으로 선생의 손녀서(孫女壻)이다. 선생에게 수학하자 선생이 몹시 장려하면서 허여하였다. 덕업과 문장으로 성세(聖世)의 명신(名臣)이 되었다. 문과에 급제하고 우상(右相)을 지냈으며, 정사훈(靖社勳)에 참여되어 완남부원군(完南府院君)에 봉해졌다. 시호는 충정공(忠貞公)이다. 광주(廣州)의 수곡서원(秀谷書院)에 향사되었다.

조익(趙翼)
자는 비경(飛卿)이고 호는 포저(浦渚)이며, 기묘년(1579, 선조12)생이다. 풍양인(豐壤人)으로 학행과 문장이 뛰어나 세상 사람들이 추중하였다. 문과에 급제하여 좌상을 지냈다. 시호는 문효공(文孝公)이고, 저서로는 《포저집(浦渚集)》이 있다. 개성(開城)의 숭양서원(崧陽書院)에 향사되었다.

이시직(李時稷)
자는 성유(聖兪)이고 호는 죽창(竹牕)이며, 임신년(1572, 선조5)생이다. 연안인(延安人)으로 어려서부터 선생에게 수학하였는데, 선생이 마음속으로 허여하였다. 진사과와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장령(掌令)을 지냈다. 정축년(1637, 인조15)에 강도(江都)에서 순절(殉節)하였다. 시호는 충목공(忠穆公)이다. 강도의 충렬사(忠烈祠)에 향사되었다.

윤순거(尹舜擧)
자는 노직(魯直)이고 호는 동토(童土)이며, 병신년(1596, 선조29)생이다. 파평인(坡平人)으로 팔송(八松) 윤황(尹煌)의 아들이다. 어려서부터 선생에게 수학하여 정이 마치 자제(子弟)와 같았다. 장령에 제수되었으며, 저서로는 《동토집(童土集)》이 있다. 연산(連山)의 구산서원(龜山書院)에 향사되었다.

이목(李楘)
자는 문백(文伯)이고 호는 송교(松郊)이며, 기묘년(1579, 선조12)생이다. 효령대군(孝寧大君) 이보(李補)의 후예로, 어려서부터 선생에게 수학하여 문하에 출입한 지가 가장 오래되었다. 정유재란(丁酉再亂) 때 선생을 따라서 황주(黃州)와 봉산(鳳山) 사이에서 피란하였다. 문과에 급제하여 이조 참판을 지냈다. 선생의 유사(遺事)를 찬하였으며, -이것은 잃어버렸다.- 저서로는 《송교유고(松郊遺稿)》가 있다.

윤원거(尹元擧)
자는 백분(伯奮)이고 호는 용서(龍西)이며, 경자년(1600, 선조33)생이다. 파평인(坡平人)으로 후촌(後村) 윤전(尹烇)의 아들이다. 진선(進善)에 제수되었으며, 연산의 구산서원에 향사되었다.

최명길(崔鳴吉)
자는 자겸(子謙)이고 호는 지천(遲川)이며, 병술년(1586, 선조19)생이다. 전주인(全州人)으로 부사(府使) 최기남(崔起男)의 아들이다. 문과에 급제하여 영상(領相)을 지냈고 문형(文衡)을 맡았다. 정사훈(靖社勳)에 참여되어 완성부원군(完城府院君)에 봉해졌으며, 시호는 문충공(文忠公)이다. 저서로는 《지천집(遲川集)》이 있다.

이상형(李尙馨)
자는 덕선(德先)이고 호는 천묵재(天默齋)이며, 을유년(1585, 선조18)생이다. 효령대군 이보의 후손으로 일찍이 선생에게 예(禮)를 배웠는데, 선생이 통민(通敏)하다고 칭찬하였으며, 특히 역학(易學)에 정심하였다. 문과에 급제하여 집의(執義)를 지냈으며, 이조 판서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충경공(忠景公)이다. 남원(南原)의 요계서원(蓼溪書院)에 향사되었다.

송시영(宋時榮)
자는 무선(茂先)이고 호는 야은(野隱)이며, 무자년(1588, 선조21)생이다. 은진인(恩津人)으로 어려서부터 선생께 수학하였는데, 선생께서 조정에 천거하여 관직이 사복시 주부(司僕寺主簿)에 이르렀다. 정축년(1637, 인조15)에 강도(江都)에서 순절하였다. 시호는 충현공(忠顯公)이다. 강도의 충렬사(忠烈祠)에 향사되었다.

송국택(宋國澤) -거의록(擧義錄)에 나온다.-

이덕수(李德洙)
자는 사로(師魯)이고 호는 이유당(怡愉堂)이며, 정축년(1577, 선조10)생이다. 한산인(韓山人)으로 현감 이준(李浚)의 아들이다. 문과에 급제하여 이조 참의를 지냈다. 청주(淸州)의 국계서원(菊溪書院)에 향사되었다.

이경직(李景稷)
자는 상고(尙古)이고 호는 석문(石門)이며, 정축년(1577, 선조10)생이다. 덕천군(德泉君)의 후손으로 어려서부터 선생에게 수학하였다. 문과에 급제하여 판서를 지냈다. 시호는 효민공(孝敏公)이다.

임의백(任義伯)
자는 수방(秀方)이고 호는 금시당(今是堂)이며, 을사년(1605, 선조38)생이다. 풍천인(豐川人)으로 어려서부터 선생에게 수학하였다. 문과에 급제하였고, 평안 감사(平安監司)를 지냈다.

황종해(黃宗海)
자는 대진(大進)이고 호는 후천(朽淺)이다. 평해인(平海人)으로 처음에 한강(寒岡) 정구(鄭逑)에게 수학하다가 만년에 선생을 섬기면서 예를 배웠다. 참봉(參奉)에 천거되었고, 저서로는 《후천집(朽淺集)》이 있다. 목천(木川)의 도동서원(道洞書院)에 향사되었다.

임숙영(任叔英)
자는 무숙(茂叔)이고 호는 소암(疎菴)이며, 병자년(1576, 선조9)생이다. 풍천인(豐川人)으로 죽애(竹崖) 임열(任說)의 증손이다. 어려서부터 선생에게 수학하여 도움을 받은 바가 많았다. 문과에 급제하여 지평(持平)을 지냈다. 광주(廣州)의 구암서원(龜巖書院)에 향사되었다.

황일호(黃一皓)
자는 익취(翼就)이고 호는 지소(芝所)이며, 병자년(1576, 선조9)생이다. 창원인(昌原人)으로 추포(秋浦) 황신(黃愼)의 아들이다. 문과에 급제하여 의주 부윤(義州府尹)을 지냈다. 시호는 충렬공(忠烈公)이다. 부여(扶餘)의 의열사(義烈祠)에 향사되었다.

조상우(趙相禹)
자는 하경(夏卿)이고 호는 시암(時庵)이며, 임오년(1582, 선조15)생이다. 양주인(楊州人)으로 어려서부터 선생에게 사사받으면서 예학(禮學)을 강론하였는데, 선생이 중하게 여겼다. 정묘년의 난리 때 화의(和議)를 배척하는 상소를 올렸으며, 참봉(參奉)에 천거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았다. 이조 참판에 추증되었고, 효(孝)로써 정려(旌閭)되었다. 온양(溫陽)의 정퇴서원(靜退書院)에 향사되었다.

이유겸(李有謙)
자는 수익(受益)이고 호는 만회당(晩悔堂)이며, 병술년(1586, 선조19)생이다. 우봉인(牛峯人)으로, 선생을 섬기면서 속학(俗學) 이외에 마음을 써야 할 곳이 있음을 알았다. 광해조 때 어머니를 원수로 삼는 짓을 해서는 안 된다고 극론하였으며, 인조가 반정(反正)한 뒤에는 유일(遺逸)로 천거되어 관직이 참의(參議)에 이르렀다. 고양(高陽)의 문봉서원(文峯書院)에 향사되었다.

박미(朴瀰)
자는 중심(仲深)이고 호는 분서(汾西)이며, 임진년(1592, 선조25)생이다. 나주인(羅州人)으로 선생의 문하에 출입한 햇수가 여러 해였다. 일찍이 계곡 장유(張維), 기암 정홍명(鄭弘溟)과 함께 계상(溪上)에서 선생을 찾아뵈었을 적에 신독재도 선생을 모시고 앉아 있었다. 그때 고금(古今)에 대해 논하여 논리 정연하게 설파하면서 여러 날 있다가 파하였는데, 담론한 자들이 이 세상에 드문 성회(盛會)였다고 하였다. 정안옹주(貞安翁主)에게 장가들어서 금양위(錦陽尉)를 습봉(襲封)하였으며, 시호는 문정공(文貞公)이다.

김류(金瑬)
자는 관옥(冠玉)이고 호는 북저(北渚)이며, 신미년(1571, 선조4)생이다. 순천인(順天人)으로 문과에 급제하였고, 영상(領相)을 지냈으며 문형(文衡)을 맡았다. 정사원훈(靖社元勳)에 참여되어 승평부원군(昇平府院君)에 봉해졌고, 시호는 문충공(文忠公)이다. 인조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이시백(李時白)
자는 돈시(敦詩)이고 호는 조암(釣巖)이며, 신사년(1581, 선조14)생이다. 연안인(延安人)으로 연평부원군(延平府院君) 이귀(李貴)의 아들이다. 어려서부터 선생에게 수학하였는데, 《소학(小學)》을 몸을 검속하는 방도로 삼았다. 음사(蔭仕)로 출사하여 영상을 지냈으며, 정사훈(靖社勳)에 참여되어 연양부원군(延陽府院君)에 봉해졌다. 시호는 충익공(忠翼公)이다.

신경진(申景禛)
자는 군수(君受)이고 평산인(平山人)으로 판윤(判尹) 신립(申砬)의 아들이다. 어려서부터 선생에게 수학하였다.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영상을 지냈으며, 정사원훈에 참여되어 평성부원군(平城府院君)에 봉해졌다. 시호는 충익공(忠翼公)이며, 인조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구굉(具宏)
자는 인보(仁甫)이고 호는 군산(羣山)이며, 정축년(1577, 선조10)생이다. 능성인(綾城人)으로 찬성 구사맹(具思孟)의 아들이다. 어려서부터 선생에게 수학하였는데, 선생이 몹시 중하게 여겼다. 무과에 급제하여 병조 판서를 지냈다. 정사훈에 참여되어 능성부원군(綾城府院君)에 봉해졌다. 시호는 충목공(忠穆公)이다.

조한영(曺漢英)
자는 수이(守而)이고 호는 회곡(晦谷)이며, 무신년(1608, 선조41)생이다. 창녕인(昌寧人)으로 어려서부터 선생에게 예를 배웠는데, 선생이 원대한 일을 해낼 인물로 허여하였다. 신사년(1641, 인조19)에 문정공(文正公)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과 함께 심중(瀋中)으로 잡혀가 구금되었으나 굴하지 않고 있다가 돌아왔다. 문과에 급제하여 참판을 지냈으며, 시호는 문충공(文忠公)이다.

유즙(柳楫) -거의록(擧義錄)에 나온다.-

구인후(具仁垕)
자는 중재(仲載)이고 호는 유포(柳浦)이며, 무인년(1578, 선조11)생이다. 능성인으로 군산(羣山) 구굉(具宏)의 조카이다. 어려서부터 선생에게 제자의 예를 올리고는 책을 짊어지고 와서 선생을 섬겼는데, 전심전력으로 공부하며 교육받으면서도 울연히 뛰어오르려는 뜻이 있었으므로, 선생이 항상 원대한 일을 해낼 인물로 기대하였다.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좌상을 지냈으며, 정사훈(靖社勳)에 참여되어 능천부원군(綾川府院君)에 봉해졌다. 시호는 충무공(忠武公)이다.

김원량(金元亮)
자는 명숙(明叔)이고 호는 미촌(麋村)이며, 기축년(1589, 선조22)생이다. 월성인(月城人)으로 어려서부터 선생에게 수학하였는데, 문경공(文敬公) 신독재(愼獨齋)와 함께 천거되어 지평(持平)에 제수되었다.

김정망(金廷望)
자는 숙우(叔遇)이고 호는 삼육재(三六齋)이며, 갑오년(1594, 선조27)생이고, 선생의 족친(族親)이다. 광해조 때 선생이 연산(連山)으로 물러나 살 적에 공이 가장 먼저 찾아와서 학업을 강마하니, 선생이 몹시 사랑하였다. 일찍이 효우(孝友)스러우며 근신(謹身)하다는 것으로써 천거되어 관직이 현감에 이르렀다. 연산(連山)의 충곡서원(忠谷書院)에 향사되었다.

이홍연(李弘淵)
자는 정백(靜伯)이고 호는 삼죽(三竹)이며, 갑진년(1604, 선조37)생이다. 한산인(韓山人)으로 이유당(怡愉堂) 이덕수(李德洙)의 아들이다. 문과에 급제하여 참찬을 지냈다.

나만갑(羅萬甲)
자는 몽뢰(夢賚)이고 호는 구포(鷗浦)이며, 안정인(安定人)이다. 어려서부터 무리들 가운데에서 출중하였으며, 선생을 사사(事師)함에 미쳐서는 전심전력으로 수학하였으며, 평생토록 명절(名節)로 스스로를 가다듬었다. 문과에 급제하여 참의를 지냈다.

임위(林㙔)
자는 평중(平仲)이고 호는 동리(東里)이며, 정유년(1597, 선조30)생이다. 나주인(羅州人)으로 판서 임담(林墰)의 종제(從弟)이다. 어려서부터 선생에게 수학하였는데, 선생이 애지중지하였다. 선생이 조정에 천거하여 지평(持平)에 제수되었다. -나주에 살았다.-

신민일(申敏一)
자는 공보(功甫)이고 호는 화당(化堂)이며, 평산인(平山人)이다. 어려서부터 선생에게 수학하였고,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대사성을 지냈다.

정양(鄭瀁)
자는 안숙(晏叔)이고 호는 포옹(抱翁)이며, 경자년(1600, 선조33)생이다. 영일인(迎日人)으로 송강 정철(鄭澈)의 손자이며, 태백오현(太白五賢) 가운데 한 사람이다. 진선(進善)에 제수되었다.

김현(金灦)
자는 지언(止彦)이고 갑술년(1574, 선조7)생이며, 선생의 족친(族親)이다. 어려서부터 선생에게 수학하였는데, 학문에 독실하고 실제에 힘썼으므로 선생이 매번 칭찬하면서 장려하였다. 군수를 지냈다.

김동준(金東準)
자는 이무(而武)이고 호는 봉곡(鳳谷)이며, 광산인(光山人)이다. 학문에 독실하였고 힘써 행하였으므로 종학하는 자들이 많았다. 석계(石溪) 최명룡(崔命龍), 백석(白石) 유즙(柳楫)과 계상(溪上)에서 제자의 예를 올렸다. 광해조에 폐모론(廢母論)이 일어났을 적에 이의를 제기하였으며, 반정(反正) 뒤에는 선생의 천거로 도사(都事)에 제수되었다가 현감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취임하지 않았다. 전주(全州)의 인봉서원(麟峯書院)에 향사되었다. -전주에 살았다.-

김수남(金秀南)
자는 여일(汝一)이고 호는 만치당(萬癡堂)이며, 광산인이다. 선생에게 사사하였는데, 선생이 충신(忠信)과 독행(篤行)에 대해 몹시 칭찬하였다. 광해조 때 두문불출하였으며, 반정 뒤에는 문과에 급제하여 정랑을 지냈다. 정축년(1637, 인조15) 난리 때 선원(仙源) 김상용(金尙容)과 더불어 순절(殉節)하여 충(忠)으로써 정려되었다. 문경공 신독재와 더불어 가장 먼저 은진(恩津)의 유허(遺墟)에 사당을 세울 것을 논의하였다.

조경기(趙慶起)
자는 덕휴(德休)이고 갑술년(1574, 선조7)생이다. 양주인(楊州人)으로 별제(別提) 조존신(趙存信)의 아들이다. 광해조 때 유생으로서 폐모를 주장한 자들을 참수하기를 청하였다가 이로 인하여 멀리 유배되었다. 반정 뒤에 석방되어 여산(礪山)에서 살았으며, 이어 책을 싸 들고 선생의 문하로 나왔다. 음사(蔭仕)로 벼슬하여 관직이 군수에 이르렀다.

여이징(呂爾徵)
자는 자구(子久)이고 호는 동강(東江)이며, 무자년(1588, 선조21)생이다. 함양인(咸陽人)으로 어려서부터 선생에게 수학하였다. 문과에 급제하여 참판을 지냈다. 아들은 영상을 지낸 여성제(呂聖齊)이다.

김광혁(金光爀)
자는 회경(晦卿)이고 호는 동림(東林)이며, 경인년(1590, 선조23)생이다. 안동인(安東人)으로 문정공(文正公) 김상헌(金尙憲)의 조카이다. 어려서부터 선생에게 수학하였는데, 효우스럽고 충직함으로써 세상 사람들로부터 칭찬을 받았다. 진사과와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승지(承旨)를 지냈다.

윤이지(尹履之)
자는 중소(仲素)이고 호는 추봉(秋峯)이며, 기묘년(1579, 선조12)생이다. 해평인(海平人)으로 오음(梧陰) 윤두수(尹斗壽)의 손자이다. 문과에 급제하였고 판돈녕부사(判敦寧府事)를 지냈으며, 해은군(海恩君)에 봉해졌다.

이항길(李恒吉)
자는 자구(子久)이고 호는 과암(果菴)이며, 무인년(1578, 선조11)생이다. 전의인(全義人)으로 어려서부터 선생에게 수학하였는데, 종제(從弟)인 이복길(李復吉)과 더불어 선생을 부지런히 섬겨 당시 사람들이 주문(朱門)의 이등(二滕)에 비하였다. 천거되어 참봉에 제수되었다. 연산(連山)의 휴정서원(休亭書院)에 향사되었다.

맹세형(孟世衡)
자는 여평(汝平)이고 호는 하곡(霞谷)이며, 무자년(1588, 선조21)생이다. 신창인(新昌人)으로 일찍부터 선생의 문하에서 유학하였는데, 선생이 돌아가시자 마질(麻絰)을 두르고 장례(葬禮)에 참가하여 몹시 비통하게 통곡하였다. 문과에 급제하여 부사(府使)를 지냈다.

이경석(李景奭)
자는 상보(尙輔)이고 호는 백헌(白軒)이며, 을미년(1595, 선조28)생이다. 석문(石門) 이경직(李景稷)의 동생이다. 문과에 급제하여 영상을 지냈으며, 문형(文衡)을 맡았다. 시호는 문충공(文忠公)이다.

한덕급(韓德及)
자는 득지(得之)이고 정축년(1577, 선조10)생이다. 청주인(淸州人)으로 우상 한응인(韓應寅)의 아들이며, 선생의 사위이다. 동지돈녕부사(同知敦寧府事)를 지냈고 청녕군(淸寧君)에 봉해졌다.

이정(李淀)
자는 노천(老泉)이고 무자년(1588, 선조21)생이다. 경주인(慶州人)으로 우상 이완(李浣)의 형이며, 선생의 손녀사위이다. 공은 장수(將帥)의 집안에서 생장하였으나 스스로 유학(儒學)을 공부하여 가다듬었으며, 선생의 문하에 출입함에 미쳐서는 더욱더 공경하면서 겸손해하였다. 판결사(判決事)를 지냈으며, 경림군(慶林君)에 봉해졌다.

민후건(閔後騫)
자는 효윤(孝胤)이고 여흥인(驪興人)이다. 어려서부터 선생에게 수업하였으며, 현감을 지냈다. -경성(京城)에 살았다.-

이상일(李尙逸)
자는 여휴(汝休)이고 호는 용암(龍巖)이며, 벽진인(碧珍人)이다. 문과에 급제하였고 감사(監司)를 지냈다.

이중기(李重基)
자는 자위(子威)이고 호는 석강(石江)이며, 전의인(全義人)으로 청강(淸江) 이제신(李濟臣)의 손자이다. 일찍부터 공보(公輔)의 물망(物望)을 지고 있었으나 끝내 낮은 관리로 있었으므로 식자들이 한스럽게 여겼다. 현령을 지냈다.

강흡(姜恰)
자는 정오(正吾)이고 호는 잠은(潛隱)이며, 임인년(1602, 선조35)생이다. 진주인(晉州人)으로 태백오현(太白五賢) 가운데 한 사람이다. 현감을 지냈고, 판서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정민공(貞敏公)이다.

이유택(李惟澤)
자는 택지(澤之)이고 호는 유곡(柳谷)이며, 경주인(慶州人)으로 초려(草廬) 이유태(李惟泰)의 형이다. 현감을 지냈고 효(孝)로써 정려되었으며, 금산(錦山)의 유곡사(柳谷祠)에 향사되었다.

곽현(郭鉉)
자는 공거(公擧)이고 호는 삼안당(三安堂)이며, 을해년(1575, 선조8)생이다. 선산인(善山人)으로 어렸을 적에 선생의 문하에 출입하여 일찌감치 성대한 명성이 있었으므로 이이첨(李爾瞻)이 끌어들이려고 하였으나 끝내 굴하지 않았다. 반정한 뒤에 천거되어 참봉에 제수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았다. -옥천(沃川)에 살았다.-

유식(庾軾)
자는 자경(子敬)이고 병술년(1586, 선조19)생이다. 무송인(茂松人)으로 문장에 능하였고 아울러 성력(星曆)에도 통달하였다. 현감을 지냈다. -옥천에 살았다.-

권극중(權克中)
자는 택보(擇甫)이고 호는 청하자(靑霞子)이며, 경신년(1560, 명종15)생이다. 안동인(安東人)으로 진사과에 급제하였다. 《참동계(參同契)》를 주해(註解)하였다. -김제(金堤)에 살았다.-

박정로(朴廷老)
자는 여헌(汝獻)이고 호는 나학자(懶學子)이며, 계축년(1553, 명종8)생이다. 밀양인(密陽人)으로 읍청(挹淸) 박사종(朴嗣宗)의 조카이다. 예학(禮學)에 정통하였고, 성품이 지극히 효성스러워서 선생이 매번 노우(老友)라고 칭하였다.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지냈다. -옥천에 살았다.-

유태형(柳泰亨)
자는 응운(應運)이고 문화인(文化人)이다. 찰방(察訪)을 지냈으며, 아들은 자의(諮議) 유즙(柳楫)이다. -김제에 살았다.-

조완제(趙完堤)
자는 덕근(德勤)이고 무자년(1588, 선조21)생이다. 배천인(白川人)으로 중봉(重峯) 조헌(趙憲)의 아들이며, 봉사(奉事)를 지냈다.

양원(梁榞)
자는 군실(君實)이고 호는 임천(任天)이며, 경인년(1590, 선조23)생이다. 남원인(南原人)으로 서계(西溪) 양홍주(梁弘澍)의 아들이다. 광해조에 정인홍(鄭仁弘)이 폐모론(廢母論)에 찬동하자 상소를 올려 죄를 따졌으며, 이로 인하여 북쪽 변방으로 유배되었는데, 정인홍은 바로 그의 고모부이다. 반정(反正) 뒤에 천거되어 관직이 현감에 이르렀다.

이복길(李復吉) -거의록(擧義錄)에 나온다.-

구영(具瑩) -거의록에 나온다.-

정종명(鄭宗溟)
자는 사조(士朝)이고 영일인(迎日人)으로 송강(松江) 정철(鄭澈)의 아들이며, 부사(府使)를 지냈다.

김곤보(金坤寶)
자는 남중(南重)이고 호는 호봉당(虎峯堂)이며, 병신년(1596, 선조29)생이다. 선생의 족친(族親)으로, 어려서부터 선생에게 수학하였다. 갑자년에 이괄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 의병으로 종사하였다. 진사과에 급제하였고, 천거되어 참봉에 제수되었다.

홍백순(洪百順)
자는 사길(士吉)이고 정사년(1557, 명종12)생이다. 남양인(南陽人)으로 판서 홍경림(洪景霖)의 증손이다. 어려서부터 선생에게 수학하였는데, 행의(行誼)가 아주 독실하여 선생이 애중(愛重)하였다. 현감을 지냈으며, 효(孝)로써 정려되었다.

이엄(李㤿)
자는 사상(士尙)이고 연안인(延安人)으로 죽창(竹牕) 이시직(李時稷)의 아들이다. 어려서부터 선생에게 수학하였는데, 선생이 단아하다고 칭찬하였다. 나이 27세 때 요절하니 사우(士友)들이 모두들 아깝게 여겼다. 진사과에 급제하였다.

최유해(崔有海)
자는 대용(大容)이고 호는 묵수당(默守堂)이다. 해주인(海州人)으로 양포(楊浦) 최전(崔澱)의 아들이다. 문학(文學)으로써 사우들의 추중을 받았으며, 문과에 급제하여 승지를 지냈다.

박정(朴炡)
자는 대관(大觀)이고 호는 하석(霞石)이며, 병신년(1596, 선조29)생이다. 나주인(羅州人)으로 어려서부터 선생에게 수학하였다. 문과에 급제하였고 참판을 지냈으며, 정사훈(靖社勳)에 참여되었다. 시호는 충숙공(忠肅公)이다.

김해수(金海壽) -거의록에 나온다.-

이시진(李時振)
자는 기부(起夫)이고 임영대군(臨瀛大君) 이구(李璆)의 5세손이다. 지극한 성품과 순수한 행실이 있었는데, 선생의 풍모를 듣고는 곧바로 와서 예경(禮經)과 성리학(性理學) 등의 책을 배웠다. 광해조 때 과거 시험을 보지 않았으며, 효(孝)로써 정려되었는데, 이에 대한 사실은 《삼강행실(三綱行實)》에 실려 있다.

고경리(高敬履)
자는 이척(而惕)이고 호는 창랑(滄浪)이며, 경신년(1560, 명종15)생이다. 장흥인(長興人)으로 제봉(霽峯) 고경명(高敬命)의 종제(從弟)이다. 어려서부터 선생에게 수학하였으며, 광해조 무신년(1608, 광해군 즉위년)에 우계(牛溪) 성혼(成渾)과 송강(松江) 정철(鄭澈)의 무고를 변론하였다가 상소는 불태워지고 금고(禁錮)되었다. 생원과에 급제하였으며, 지평(持平)에 추증되었다. 광주(光州)의 운암사(雲巖祠)에 향사되었다. -광주에 살았다.-

이도(李䆃) -거의록에 나온다.-

송흥주(宋興周) -거의록에 나온다.-

조평(趙平)
자는 형중(衡仲)이고 호는 운학(雲壑)이며, 기사년(1569, 선조2)생이다. 함안인(咸安人)으로 선생의 문하에 출입한 지가 여러 해여서 모두들 장자(長者)라고 칭하였다. 찰방을 지냈으며, 임실(任實)의 학정사(鶴亭祠)에 향사되었다. -임실에 살았다.-

박추(朴簉)
자는 상지(尙之)이고 계미년(1583, 선조16)생이다. 밀양인(密陽人)으로 좌랑(佐郞) 박효남(朴孝男)의 아들이다. 어렸을 적에 선생에게 수학하였는데, 문행(文行)으로 세상에 칭해졌다. 대성(臺省)의 직을 역임하고 주목(州牧)의 수령을 맡았는데, 모두 아름다운 명성이 있었으나 불행하게도 일찍 졸하였다.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관직이 관향사(管餉使)에 이르렀다.

박정(朴筳)
자는 명지(鳴之)이고 임인년(1602, 선조35)생으로, 박추의 종제(從弟)이다. 젊은 시절에 선생에게 수학하였으며, 문과에 급제하여 승지를 지냈다.

박환(朴煥)
자는 여술(汝述)이고 호는 수우(守愚)이며, 갑신년(1584, 선조17)생이다. 나주인(羅州人)으로 정사훈(靖社勳)에 참여되었고, 여러 차례 주군(州郡)을 맡았다. 아들 박세성(朴世城)은 문과에 급제하여 승지를 지냈다.

박병(朴炳)
자는 소문(少文)이고 나주인으로, 사간(司諫) 박동현(朴東賢)의 아들이다. 젊은 시절에 선생의 문하에 출입하였으며, 광해조 때 과거 공부를 일삼지 않았으므로 선생이 몹시 칭찬하였다. 정사훈에 참여되었고, 여러 차례 주군을 맡았는데, 치적이 있었다. 목사(牧使)를 지냈다.

조완배(趙完培)
자는 덕후(德厚)이고 임진년(1592, 선조25)생이다. 배천인(白川人)으로 조완제(趙完堤)의 동생이다.

윤명은(尹鳴殷)
자는 이원(而遠)이고 호는 사정(思亭)이며, 파평인(坡平人)이다. 젊어서부터 선생에게 수학하였으며, 효로써 정려되었다. 진사과와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감사(監司)를 지냈다.

조송년(趙松年)
한양인(漢陽人)으로 정암(靜菴) 선생의 현손이다. 젊어서부터 선생의 문하에 출입하였으며, 군수(郡守)를 지냈다.

민욱(閔昱)
자는 회수(晦叟)이고 호는 석계(石溪)이며, 기미년(1559, 명종14)생이다. 여흥인(驪興人)으로 선생의 문하에 출입한 지가 여러 해였다. 진사과에 급제하였으며, 효로써 좌랑(佐郞)에 추증되었다. -영동(永同)에 살았다.-

민업(閔嶪)
자는 자앙(子昻)이고 호는 양호(楊湖)이며, 여주인(驪州人)으로 현령 민계량(閔季良)의 증손이다. 선생이 소명(召命)을 받아 서울에 들어갔을 적에 문하에 와서 배움을 청하였으며, 선생을 따라서 남쪽으로 내려와 성리학에 관한 여러 책을 사사받았다. 정축년에 화의(和議)가 성립되자 노련(魯連)처럼 바다에 빠져 죽으려는 뜻을 품었으며, 여러 차례 관직에 제수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았다.

박휘(朴輝)
나주인으로 젊어서부터 선생에게 수학하였는데, 품성이 어질고 착하였으므로 선생이 매번 장려하면서 허여하였으나, 일찍 졸하였다. -이성(尼城)에 살았다.-

홍정(洪霆)
풍산인(豐山人)으로, 지계(芝溪) 홍방(洪霶)의 동생이다. 여러 차례 주군(州郡)을 맡았는데 모두 치적이 있었다.

정계주(鄭繼冑)
자는 선초(善初)이고 병오년(1606, 선조39)생이다. 영일인(迎日人)으로 찰방 정사현(鄭士賢)의 아들이다. 서울서부터 와서 여러 해 동안 수학하였다. 진사과와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승지를 지냈다.

신희손(辛喜孫)
영월인(寧越人)으로 백록(白麓) 신응시(辛應時)의 손자이다. 젊어서부터 선생에게 수학하였는데, 정의(情誼)가 자제(子弟)와 같았다. 군수를 지냈다.

이원영(李元榮)
자는 응화(應華)이고 호는 한계(寒溪)이며, 하음인(河陰人)이다. 젊어서부터 선생에게 수학하였으며, 광해조 때 이이첨(李爾瞻)과 한찬남(韓纘男)의 무리가 잇달아 천거하여 끌어들이고자 하였으나, 끝내 응하지 않았다. 진사과와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현령을 지냈다. -이성(尼城)에 살았다.-

이문영(李文榮)
자는 경욱(景郁)이고 호는 청계(淸溪)이며, 이원영의 동생이다. 젊어서부터 선생에게 수학하였다. 한찬남과 같은 마을에 살아서 아주 절친하였으나 한찬남이 폐모론을 주장함에 미쳐서는 절교하고서 만나 보지 않았으므로 사람들이 절의(節義)가 있다고 칭하였다. 진사과에 급제하였고, 참봉을 지냈다. -이성에 살았다.-

오달주(吳達周)
해주인(海州人)으로 추탄(楸灘) 오윤겸(吳允謙)의 아들이다. 젊어서부터 선생에게 수학하였으며, 군수를 지냈다.

최신(崔愼)
자는 근보(謹甫)이고 신축년(1601, 선조34)생이다. 선생에게 여러 해 동안 수학하였으며, 우암 송시열, 동춘당 송준길, 초려 이유태와 더불어 학문을 강마하였다고 한다. -회덕(懷德)에 살았다.-

김장(金樟)
자는 용여(用汝)이고 호는 몽재(蒙齋)이며, 경인년(1590, 선조23)생으로 금릉인(金陵人)인다. 선생이 철원(鐵原)의 수령으로 있을 적에 수학하였으며, 여러 해 동안 계상(溪上)에 와서 머물렀다. 후손인 김상진(金相進)은 호가 탁계(濯溪)이다. -청산(靑山)에 살았다.-

이영인(李榮仁)
자가 시언(時彦)이고 병인년(1566, 명종21)생이다. 용인인(龍仁人)으로 정랑(正郞) 이신충(李藎忠)의 아들이다. 일찍부터 선생에게 종학(從學)하였는데, 성품이 효우(孝友)에 독실하였다. 군수를 지냈다. 증손은 참판 이교악(李喬岳)이다.

장서(張曙)
인동인(仁同人)으로 옥성부원군(玉城府院君) 장만(張晩)의 종제(從弟)이다. 여러 해 동안 책을 싸 들고 와 수학하여 정의가 자제와 같았다. 봉사(奉事)를 지냈다.

김곤(金滾)
자는 제보(濟甫)이고 호는 성곡(省谷)이며, 영산인(永山人)으로 호군(護軍) 김호덕(金好德)의 아들이다. 행의(行誼)가 순수하고 독실하였으나 일찍 졸하였다. 진사과에 급제하였고 도사(都事)를 지냈다.

황면(黃沔)
자는 종지(宗之)이고 창원인(昌原人)이며, 승지에 추증된 황중립(黃中立)의 아들이다. 일찍이 선생의 문하에서 유학하여 동료들의 추앙을 받았다. 광해조 때 과거 공부를 폐하였으며, 반정 초에 관직에 제수되어 찰방을 지냈다.

오준(吳竣)
자는 여완(汝完)이고 호는 죽남(竹南)이며, 정해년(1587, 선조20)생이다. 동복인(同福人)으로 참판 오백령(吳百齡)의 아들이다. 젊어서부터 선생의 문하에 출입하여 직접 지도를 받았다. 문과에 급제하였고, 판서를 지냈다.

유여(柳袽)
풍산인으로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의 아들인데, 젊었을 적에 선생에게 수학하였다. 관직은 -원문 빠짐-

윤홍국(尹弘國)
자는 장경(張卿)이고 병자년(1576, 선조9)생이며, 양주인(楊州人)이다. 효우스러웠으며 학문에 부지런하였다. 선생이 생질녀를 아내로 삼아 주었다. 일찌감치 과거에 급제하여 명성이 울연하였으나, 송강(松江) 정철(鄭澈)과 친한 데에 연좌되어서 벼슬길이 막혀 드러나지 못하였다. 부호군(副護軍)을 지냈다.

조행립(曺行立)
자는 백원(百源)이고 호는 태호(兌湖)이며, 창녕인(昌寧人)이다. 광해조 때 서울에 사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아 드디어 호남으로 이사해 살았다. 반정 뒤에 별제(別提)에 제수되었고, 여러 차례 주군(州郡)을 맡았다. 일찍이 선생의 문하에서 유학하였는데, 문경공(文敬公)과 아주 친하여 만년에는 항상 ‘나의 늙은 벗으로는 오직 조행립뿐이다.’라고 하였다.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지냈으며, 남평(南平)의 서호원(西湖院)에 향사되었다. -남평에 살았다.-

김헌(金巘)
여러 해 동안 선생에게 수학하여 문변(問辨)한 바가 많았다. 진사과에 급제하였다. -철원(鐵原)에 살았다.-

김백생(金伯生)
자는 여인(汝仁)이고 신사년(1581, 선조14)생이며, 선생의 종제(從弟)이다. 학문과 필법(筆法)에 있어서 사우(士友)들의 추중을 받았다. 진사과에 급제하였다.

민평(閔枰)
자는 형숙(衡叔)이고 호는 언시(言尸)이며, 여흥인(驪興人)이다. 효로써 정랑에 추증되었다.

이득지(李得志)
자는 덕보(德甫)이고 전주인(全州人)이다. 광해조 때에 폐모에 대한 의론이 일어났을 적에 항소(抗疏)하였다. 진사과에 급제하였다.

자는 사정(士精)이고 전주인이다. 군수를 지냈다. 손자는 참판 최방언(崔邦彦)이다.

김여성(金汝聲)
자는 원이(遠而)이고 광산인(光山人)이다. 광해조 때에 폐모에 대한 의논이 일어났을 적에 항소하였다. 지평에 추증되었다.

허조(許稠)
양천인(陽川人)으로 우상 허종(許琮)의 현손이다. 젊어서부터 선생에게 수학하여 정이 자제와 같았다. 별천(別薦)으로 남대(南臺)의 명망이 있었으나 일찍 졸하였다. 현감을 지냈다.

권순창(權順昌)
자는 성지(聖之)이고 안동인(安東人)으로 권순장(權順長)의 종제이다. 젊어서부터 선생에게 수학하였으며, 도정(都正)을 지냈다.

신경원(申景瑗)
평산인(平山人)으로 익위(翊衛) 신확(申確)의 아들이다. 젊었을 적에 선생에게 수학하였으며, 무과에 급제하여 부원수(副元帥)를 지냈다.

신경류(申景柳)
평산인으로 형인 신경원과 같은 때에 선생에게 수학하였다. 무과에 급제하여 병사(兵使)를 지냈다.

장차주(張次周)
자는 문재(文哉)이고 병오년(1606, 선조39)생이다. 인동인(仁同人)으로 선생의 손녀사위이다. 문과에 급제하여 수찬(修撰)을 지냈다.

이준성(李畯成)
자는 상로(祥老)이고 한산인(韓山人)으로 명곡(鳴谷) 이산보(李山甫)의 손자이다. 젊었을 적에 선생에게 수학하였으며, 참봉에 천거되었는데, 일찍 졸하였다. -보령(保寧)에 살았다.-

이엽(李曄)
자는 일화(日華)이고 종실(宗室)인 금계정(錦溪正) 이대린(李大麟)의 아들이다. 재주와 행실이 있었으며, 찰방을 지냈다.

임게(林垍)
자는 맹견(孟堅)이고 호는 월창(月牕)이며, 경진년(1580, 선조13)생으로 나주인(羅州人)이다. 젊었을 적에 선생에게 수학하였는데, 재능이 있어서 탁지(度支)를 맡을 만한 명망이 있었다. 좌랑을 지냈다.

김상(金尙)
자는 우고(友古)이고 호는 호은(壺隱)이며, 병술년(1586, 선조19)생이다. 상산인(商山人)으로, 젊어서부터 선생에게 수학하였다. 문과에 급제하였고, 감사(監司)를 지냈다.

김율(金霱)
자는 운서(雲瑞)이고 호는 매사(梅沙)이며, 상산인으로 김상의 동생이다. 문과에 급제하였고, 승지를 지냈다.

심핍(沈愊)
호는 석촌(石村)이고 청송인(靑松人)으로 청양군(靑陽君) 심의겸(沈義謙)의 조카이다. 젊었을 적에 문하에 나아가 예학(禮學)을 전수받은 것이 많았다.

권인복(權仁復)
자는 자안(子安)이고 안동인(安東人)으로 동계(桐溪) 권달수(權達手)의 후손이다. 선생의 문하에서 종학하였는데, 모두들 선사(善士)라고 칭하였다. 사는 곳이 이이첨의 집과 아주 가까웠으므로 드디어 서산(瑞山)으로 이사해 살았다.

김곤원(金坤遠)
자는 원보(遠甫)이고 정유년(1597, 선조30)생이다. 광산인(光山人)으로 김곤보(金坤寶)의 종제이다. 젊어서부터 선생에게 수학하였다. 진사과에 급제하였고, 천거되어 참봉에 제수되었다.

구인기(具仁基)
자는 백공(伯鞏)이고 능성인(綾城人)으로 충목공(忠穆公) 구굉(具宏)의 조카이다. 젊었을 때 선생에게 수학하였으며, 도정(都正)을 지냈다. 손자 구문락(具文洛)은 대장(大將)이다.

이갱생(李更生)
자는 숙향(叔向)이고 전주인(全州人)이다. 젊었을 적에 선생에게 수학하였으며, 목사(牧使)를 지냈다.

김수창(金壽昌)
자는 천휴(天休)이고 안동인으로 선원(仙源) 김상용(金尙容)의 손자이다. 젊었을 적부터 와서 종학하여 정이 자제들과 차이가 없었다. 도정(都正)을 지냈다.

김영후(金榮後)
자는 창세(昌世)이고 광산인으로 현감 김해수(金海壽)의 아들이다. 젊었을 적부터 선생에게 수학하였다. 진사과에 급제하였고, 참봉을 지냈다.

이희영(李希英)
자는 백실(伯實)이고 병오년(1606, 선조39)생이다. 전의인(全義人)으로 과암(果庵) 이항길(李恒吉)의 아들이다. 젊었을 적부터 선생에게 수학하였다. 진사과에 급제하였고, 참봉을 지냈다.

박우남(朴䨞男)
젊었을 적부터 선생에게 수학하였다. 무과에 급제하였고, 부사(府使)를 지냈다.

유면회(兪勉會)
자는 상로(尙魯)이고 기계인(杞溪人)이다. 젊어서부터 선생에게 수학하였다. 현감을 지냈다. -부여(扶餘)에 살았다.-

김자건(金自鍵)
자는 이계(而啓)이고 광산인(光山人)이다. 선생의 문하에서 종학하면서 견해가 특출난 것으로 칭찬을 받았다. 천거되어 별검(別檢)에 제수되었다.

양경우(梁慶遇)
남원인(南原人)으로, 젊어서부터 선생에게 수학하였다. 문과에 급제하였고, 첨정(僉正)을 지냈다. -순창(淳昌)에 살았다.-

양형우(梁亨遇)
남원인으로, 젊어서부터 선생에게 수학하였다. 문과에 급제하였고, 교리(校理)를 지냈다.

이영선(李榮先)
자는 극가(克家)이고 무자년(1588, 선조21)생으로, 전의인이다. 참봉을 지냈다. 아들 이상진(李尙眞)은 문과에 급제하여 우상(右相)을 지냈다.

이이성(李以省)
자는 성오(省吾)이고 신묘년(1591, 선조24)생이다. 여주인(驪州人)으로 현감 이대준(李大濬)의 아들이며, 선원(仙源) 김상용(金尙容)의 사위이다. 여러 해 동안 선생에게 수학하였으며, 군수를 지냈다.

한문두(韓文斗)
자는 사앙(士昻)이고 청주인(淸州人)으로 전한 한종주(韓宗冑)의 아들이다. 젊었을 적에 선생에게 수학하였다. 진사과에 급제하였고, 현감을 지냈다.

심관(沈慣)
청송인(靑松人)으로 판관 심제겸(沈悌謙)의 아들이다. 젊었을 적에 선생에게 수학하였으며, 현감을 지냈다.

박동립(朴東立)
자는 여범(汝泛)이고 호는 매포(梅圃)이며, 병인년(1566, 명종21)생이다. 밀양인(密陽人)으로 참봉을 지냈다. -전주(全州)에 살았다.-

이장(李槳)
전주인(全州人)으로 송교(松郊) 이목(李楘)의 동생이다. 찰방(察訪)을 지냈다.

김자빈(金自鑌)
자는 이중(而重)이고 계묘년(1603, 선조36)생이다. 광산인(光山人)으로 김자건(金自鍵)의 동생이다. 정축년의 난리 때 검천(檢川)에서 순절(殉節)하였으며, 판관(判官)에 추증되었는데, 이에 대한 사실은 《연산읍지(連山邑誌)》에 실려 있다.

김남(金欖)
자는 직여(直汝)이고 금릉인(金陵人)으로 김장(金樟)의 동생이다. 젊어서부터 선생에게 수학하였다. -청산(靑山)에 살았다.-

박종(朴琮) -거의록(擧義錄)에 나온다.-

정민구(鄭敏求) -거의록에 나온다.-

김준업(金峻業) -거의록에 나온다.-

유평(柳玶) -거의록에 나온다.-

김태립(金泰立)
자는 형숙(亨叔)이고 고령인(高靈人)으로 신독재의 사위이다. 진사과에 급제하였다.

이률(李㮚)
전주인으로 송교 이목의 동생이다. 현감을 지냈다.

송국귀(宋國龜)
자는 사원(士元)이고 은진인(恩津人)으로 판관 송희건(宋希建)의 아들이다. 군수를 지냈다.

이영원(李榮元)
자는 자선(子善)이고 호는 용계처사(龍溪處士)이며, 함평인(咸平人)으로 구원(九畹) 이춘원(李春元)의 종형이다. 선생이 욕심이 적다는 이유로 유학(儒學)에 종사할 것을 권면하자, 인하여 속세의 분란을 사절한 채 은거해 살면서 벼슬길에 나가지 않았다. 만년에 재랑(齋郞)에 제수되었다.

김습(金習)
호는 안식와(安息窩)이고 의성인(義城人)으로 김제현(金齊賢)의 아들이다. 여러 해 동안 책을 싸 들고 와서 종학하였으며, 재주와 행실이 있었다. 선생의 천거로 참봉에 제수되었다. -태인(泰仁)에 살았다.-

성이건(成以健)
자는 자강(子強)이고 창녕인(昌寧人)이다. 여러 해 동안 선생에게 수학하였다. 참봉을 지냈다. -임천(林川)에 살았다.-

정이관(鄭以觀)
자는 국빈(國賓)으로, 여러 해 동안 선생에게 수학하였다. -영동(永同)에 살았다.-

유필창(柳必昌)
자는 덕용(德用)이고 병신년(1596, 선조29)생으로 전주인이다. -함평(咸平)에 살았다.-

정원첨(鄭元瞻)
초계인(草溪人)으로 수몽(守夢) 정엽(鄭曄)의 종손(從孫)이다. 현감을 지냈다.

윤하(尹夏)
양주인(楊州人)으로 윤홍국(尹弘國)의 아들이다. 젊어서부터 선생에게 수학하였다. 진사과에 급제하였으며, 봉사(奉事)를 지냈다.

배승조(裵承祖)
자는 여술(汝述)이고 호는 농와(聾窩)이며, 무인년(1578, 선조11)생으로 성주인(星州人)이다. 감역(監役)을 지냈다.

이적(李績)
거상(居喪)함에 있어서 예법을 잘 지켰는데, 상(喪)을 이기지 못하여 요절하니, 사람들이 모두 안타까워하였다. -이성(尼城)에 살았다.-

한근(韓瑾)
청주인(淸州人)으로 서울서부터 책을 싸 들고 와서 선생에게 수학하였다. 군수를 지냈다.

이항(李恒)
참봉을 지냈다.

이함길(李咸吉)
자는 선재(善哉)이고 병술년(1586, 선조19)생이다. 전의인(全義人)으로 이항길(李恒吉)의 동생이다.

김자련(金自鍊)
자는 이정(而精)이고 광산인으로 김자건(金自鍵)의 형이다.

윤운구(尹雲衢)
자는 치형(致亨)이고 남원인(南原人)으로 사간 윤강원(尹剛元)의 손자이다. 좌랑을 지냈다.

이숭고(李崇古) -일명 이광익(李光翼)이라고도 한다.-
군수를 지냈다.

양대진(楊大振)
자는 백기(伯起)이고 호는 성곡(城谷)이며, 청주인이다. 교관(敎官)을 지냈다.

유지하(柳支廈)
자는 임지(任之)이고 경인년(1590, 선조23)생이다. 문화인(文化人)으로 김현(金灦)의 생질이다. -전주에 살았다.-

유성하(柳成廈)
자는 취지(就之)이고 병술년(1586, 선조19)생이다. 문화인으로 유지하(柳支廈)의 동생이다. 연산(連山)의 외성(外城)에 살았는데, 여러 해 동안 선생에게 수학하였으며, 언론(言論)을 잘하여 호사(豪士)라고 칭해졌다.

김경(金)
젊어서부터 선생에게 수학하였다.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장령을 지냈다.

권이급(權以汲)
여러 해 동안 선생에게 수업하여 예서(禮書)를 많이 배웠다. 찰방을 지냈다. -함창(咸昌)에 살았다.-

김인흡(金仁洽)
연안인(延安人)으로 젊어서부터 책을 싸 들고 와서 선생에게 수학하여 예경(禮經)을 많이 배웠다. 현감을 지냈다. -영광(靈光)에 살았다.-

이빙(李憑)
문학(文學)의 재주가 있었으나, 일찍 졸하였다. -연산(連山)에 살았다.-

이설(李渫)
자는 여청(汝淸)이고 호는 청계(淸溪)이며, 경자년(1600, 선조33)생이다. 가평인(加平人)으로 직장 이제(李悌)의 손자이다. 원종훈(原從勳)에 참여되었고, 장사랑(將仕郞)이었다.

민영달(閔榮達)
자는 백인(伯仁)이고 여흥인(驪興人)으로 좌랑 민척(閔惕)의 아들이다. 여러 해 동안 선생에게 수학하였다. 진사과에 급제하였다.

오국헌(吳國獻)
자는 중현(仲賢)이고 호는 어은(漁隱)이며, 해주인(海州人)이다.

김자중(金自重)
자는 여실(汝實)이고 정해년(1587, 선조20)생으로 광산인(光山人)이다. 진사과에 급제하였다.

박유동(朴惟棟)
자는 시보(時甫)이고 호는 일석(一石)이며, 충주인(忠州人)으로 중봉(重峯) 조헌(趙憲)의 생질이다. 참봉을 지냈다.

박황(朴潢)
자는 덕우(德雨)이고 호는 나헌(懦軒)으로, 나주인(羅州人)이다.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대사헌을 지냈다.

홍수일(洪壽一)
남양인(南陽人)으로 서울에서 부여(扶餘)로 이사해 살았으며, 여러 해 동안 선생에게 수학하였다. 좌랑을 지냈다.

이흘(李屹)
자는 자준(子峻)이고 호는 노파(蘆坡)이며, 무자년(1588, 선조21)생이다. 벽진인(碧珍人)으로 세마(洗馬)를 지냈다.

이이순(李以恂)
자는 희지(煕之)이고 호는 동림(東林)이다. 경주인(慶州人)으로 재사당(再思堂) 이원(李黿)의 후손이다. -남원(南原)에 살았다.-

김자남(金自南)
자는 여찬(汝贊)이고 계묘년(1603, 선조36)생이며, 광산인이다. 예빈시 정(禮賓寺正)을 지냈다.

송희진(宋希進)
자는 퇴지(退之)이고 호는 덕성(德城)이며, 경진년(1580, 선조13)생이다. 은진인(恩津人)으로 동지중추부사 송남수(宋枏壽)의 아들이다. 진사과와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장령을 지냈다. 병자년 난리 뒤에는 출사(出仕)하지 않았다.

이성신(李省身)
자는 경삼(景三)이고 호는 입암(笠巖)이며, 전의인(全義人)이다. 광해조 때 폐모(廢母)를 시행할 적에 항소(抗疏)를 올렸다. 문과에 급제하였고, 승지를 지냈다.

안응로(安應魯)
자는 몽여(夢與)이고 병술년(1586, 선조19)생이다. 광주인(廣州人)으로 정랑 안묵지(安默智)의 아들이다. 젊어서부터 선생에게 수학하였다.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지평을 지냈다. -부여(扶餘)에 살았다.-

최거(崔勮)
자는 이민(而敏)이고 무자년(1588, 선조21)생이다. 전주인으로 석계(石溪) 최명룡(崔命龍)의 아들이다.

이희창(李希昌)
전의인으로 과암(果菴) 이항길(李恒吉)의 아들이다.

김정태(金廷泰)
자는 종여(宗汝)이고 광산인으로 삼육재(三六齋) 김정망(金廷望)의 종제이다.

김정헌(金廷憲)
자는 숙도(叔度)이고 호는 야광처사(野狂處士)이며, 광산인으로 삼육재 김정망의 동생이다. 광해조 때 과거에 응시하지 않았다.

이창길(李昌吉)
전의인으로 이항길(李恒吉)의 동생이다. 첨정(僉正)을 지냈다.

이경(李絅)
자는 자문(子文)이고 갑오년(1594, 선조27)생으로, 하음인(河陰人)이다. 문과에 급제하였고, 현감을 지냈다. -이성(尼城)에 살았다.-

최필(崔泌)
자는 이헌(而獻)으로, 여러 해 동안 선생에게 수업하였다. -연산(連山)에 살았다.-

김사립(金斯立)
자는 입지(立之)이고 호는 도암(道庵)이며, 병술년(1586, 선조19)생이다. 광산인으로 군수 김현(金灦)의 조카이다. 생원과에 급제하였다. -연산에 살았다.-

전색(田穡)
자는 영숙(穎叔)이다. -석성(石城)에 살았다.-

이공회(李公誨)
자는 회지(誨之)이고 기사년(1569, 선조2)생으로, 전주인이다. 교수를 지냈다. -연산에 살았다.-

민흥기(閔興基)
자는 언립(彦立)이고 여흥인(驪興人)으로, 참봉 민개(閔愷)의 아들이다.

김계(金桂)
자는 수여(秀汝)이고 금릉인(金陵人)으로, 김남(金欖)의 동생이다. 여러 해 동안 선생에게 수학하였다.

유시발(柳時發)
자는 양숙(養叔)이고 정유년(1597, 선조30)생으로, 고창인(高敞人)이다. 시에 능한 것으로 이름이 났다. -여산(礪山)에 살았다.-

최정연(崔挺然)
자는 군립(君立)이고 신미년(1571, 선조4)생으로, 탐진인(耽津人)이다. 진사과에 급제하였다. -부여에 살았다.-

이수(李琇)
자는 백헌(伯獻)이고 고성인(固城人)이다. 여러 해 동안 선생에게 수학하였다.

김대기(金大器)
자는 옥성(玉成)이고 호는 만덕재(晩德齋)이며, 정사년(1557, 명종12)생으로, 광산인이다. 혼조(昏朝) 때 과거 공부를 폐하였다. 반정 뒤에 참봉에 제수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았다. 담양(潭陽)의 구산사(龜山祠)에 향사되었다. -담양에 살았다.-

강종효(姜宗孝)
자는 행원(行源)이고 신축년(1601, 선조34)생으로, 진주인(晉州人)이다. -은진(恩津)에 살았다.-

한성업(韓成業)
자는 취이(就而)이고 무자년(1588, 선조21)생으로, 청주인(淸州人)이다. -연산에 살았다.-

김덕창(金德昌)
문장에 능하고 효행이 있었으나, 일찍 졸하였다. -공주(公州)에 살았다.-

김덕상(金德尙)
김덕창의 동생이다.

최이립(崔爾立)
자는 군앙(君仰)으로, 여러 해 동안 선생에게 수학하였다. -이성에 살았다.-

나문욱(羅文郁)
자는 질부(質夫)이고 기해년(1599, 선조32)생으로, 나주인(羅州人)이다. 지평 임위(林㙔)와 같은 때에 선생에게 수학하였다. -나주에 살았다.-

변이호(卞以皓)
자는 백원(伯元)이다. -공주에 살았다.-

채몽정(蔡夢井)
인천인(仁川人)으로 대사헌 채수(蔡壽)의 후손이다. 사과(司果)를 지냈다.

유정민(柳定民)
자는 안지(安之)이고 문화인(文化人)으로, 진사과에 급제하였다. -연산에 살았다.-

이현(李峴)
자는 사첨(士瞻)이고 병오년(1606, 선조39)생으로, 종실(宗室) 옥계도정(玉溪都正) 이현동(李賢童)의 후손이다. 진사과에 급제하였다.

이후(李垕)
자는 재이(載而)이고 기축년(1589, 선조22)생으로, 전의인이다. -연산에 살았다.-

김원립(金爰立)
자는 상지(相之)이고 신축년(1601, 선조34)생으로, 광산인이다. -연산에 살았다.-

김후(金垕)
자는 사후(士厚)이다. 젊어서부터 선생에게 수학하였다. -나주에 살았다.-

이타(李柁)
자는 제숙(濟叔)이고 을사년(1605, 선조38)생이며, 전주인이다. -전주에 살았다.-

안눌(安訥)
자는 민보(敏甫)이고 계묘년(1603, 선조36)생이다. -김제(金堤)에 살았다.-

정광원(鄭廣源)
자는 성보(誠溥)이고 정미년(1607, 선조40)생이며, 광주인(光州人)이다. 신독재의 사위이다.

양진행(楊震行)
자는 보여(普汝)이고 호는 계촌(溪村)이다. 정미년(1607, 선조40)생이며, 청주인이다.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현감을 지냈다. -이성에 살았다.-

유제민(柳濟民)
자는 원지(援之)이고 계묘년(1603, 선조36)생이며, 문화인이다. 사마 양시(司馬兩試)에 급제하였다.

이대하(李大河)
현감을 지냈다.

이대숙(李大淑)
정랑을 지냈다.

임찬(林巑)
현감을 지냈다.

이희방(李希芳)
자는 시우(時遇)이고 계묘년(1603, 선조36)생이다. 전의인으로 이항길(李恒吉)의 조카이다.

양점(梁漸)
자는 회원(會源)이고 갑술년(1574, 선조7)생이며, 남원인(南原人)이다. 훈도(訓導)를 지냈다.

이정상(李廷祥)
호는 월강(月岡)이다.

김감(金鑑)
자는 자허(子虛)이고 호는 침강(枕江)이며, 임진년(1592, 선조25)생이고 개성인(開城人)이다. -영동(永同)에 살았다.-

홍사도(洪思道)
자는 공묵(恭默)이고 무술년(1598, 선조31)생이다. 남양인(南陽人)으로 현감 홍연기(洪衍期)의 아들이다. 여러 해 동안 선생에게 수업하였는데, 학문에 힘쓰면서 행실을 가다듬었다. -연산에 살았다.-

안언길(安彦吉)
서울에서 내려와서 수학하였으며, 명의(名醫)로 칭해졌다. 군수를 지냈다.

김호신(金好臣)
자는 성백(誠伯)이다. -공주에 살았다.-

박대형(朴大亨)
자는 규부(逵夫)이고 나주인이다. 여러 해 동안 선생에게 수학하였다. -금산(錦山)에 살았다.-

도호민(都皥民)
성주인(星州人)으로 현감 도응서(都應瑞)의 손자이다. 젊어서부터 선생에게 수학하였다. -연산에 살았다.-

이효원(李孝源)
숙부가 연산의 수령으로 있을 적에 와서 머물면서 선생에게 수학하였다. -수원(水原)에 살았다.-

이성원(李性源)
자는 복초(復初)이고 한산인(韓山人)으로 한흥군(韓興君) 이덕연(李德演)의 아들이다. 진사과와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지평을 지냈다. 아들 이제항(李齊沆)은 교관(敎官)이다.

김치림(金致霖)
자는 군망(君望)이고 기묘년(1579, 선조12)생이며, 순천인(順天人)이다. -은진(恩津)에 살았다.-

이탑(李塔)
전주인으로, 여러 해 동안 선생에게 수학하였다. -전주에 살았다.-

민귀달(閔貴達)
진사과에 급제하였다.

임헌(林巘)

민대윤(閔大胤)
여흥인(驪興人)이다.

이상건(李尙健) -진잠(鎭岑)에 살았다.-

오삼성(吳三省) -연산에 살았다.-

남설(南契) -일명 남설(南薛)이라고도 한다.-
자는 자앙(子仰)이다. -여산(礪山)에 살았다.-

이추(李樞) -옥구(沃溝)에 살았다.-

김적(金迪)
연안인(延安人)이다. 젊어서부터 선생에게 수학하였으며, 군수를 지냈다.

안제민(安濟民) -은진에 살았다.-

백홍규(白弘規)
자는 자원(子圓)이고 을사년(1605, 선조38)생이며, 수원인이다. -용안(龍安)에 살았다.-

송정길(宋貞吉)
은진인(恩津人)이다. -회덕(懷德)에 살았다.-

유동휘(柳東輝)
자는 사명(士明)이고 을해년(1575, 선조8)생이며, 도사(都事)를 지냈다. -고창(高敞)에 살았다.-

송국귀(宋國龜)
자는 사원(士元)이고 은진인으로 판관(判官) 송희건(宋希建)의 아들이다. 군수를 지냈다.

민응건(閔應騫)

이명(李蓂)
자는 응요(應堯)이고 무술년(1598, 선조31)생이며, 덕수인(德水人)이다. -여산(礪山)에 살았다.-

이배창(李培昌)

임대로(任大老)

김헌(金憲)

구계(具棨)

이석린(李碩鱗)

임억(林嶷)

김자회(金自晦)
자는 여휘(汝輝)이고 갑오년(1594, 선조27)생이며, 광산인으로 김자중(金自重)의 동생이다. 군수를 지냈다.

김종길(金宗吉)
자는 입보(立甫)이고 광산인이다.

정회(鄭晦)
온양인(溫陽人)으로 좌랑을 지냈다. 아들은 동명(東溟) 정두경(鄭斗卿)이다.

정운(鄭沄)
자는 달원(達源)이고 영일인(迎日人)이며, 선생의 생질이다. 현감을 지냈다.

송국시(宋國蓍)
자는 사징(士徵)이고 호는 백류헌(百柳軒)이다. 은진인으로 경자년(1600, 선조33)생이며, 판관(判官) 송희건(宋希建)의 아들이다. 병자년 난리 때 의병을 일으켰으며, 인하여 출사하지 않았다. 진사과에 급제하였으며, 승지에 추증되었다.

송국보(宋國輔)
자는 사필(士弼)이다. 은진인으로 임인년(1602, 선조35)생이며, 판관 송희건의 아들이다. 현감을 지냈다.

윤빈(尹彬)
자는 자화(子華)이고 정축년(1577, 선조10)생이다. 진사과에 급제하였다. -공주(公州)에 살았다.-

윤시용(尹是勇)
군수를 지냈다.

임뇌지(任賚之)
현감을 지냈다.

이률(李㮚)
전주인으로 송교(松郊) 이목(李楘)의 동생이다. 현감을 지냈다.

민여기(閔汝耆)
자는 인수(仁叟)이고 병술년(1586, 선조19)생으로 여흥인이다. 진사과에 급제하였다.

민여로(閔汝老)
자는 태수(台叟)이고 무술년(1598, 선조31)생으로, 여흥인이다. 진사과와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장령을 지냈다.

이정빈(李廷賓)
자는 자관(子寬)이고 호는 오헌(梧軒)이며, 병오년(1606, 선조39)생이다. 흥양인(興陽人)으로 참봉 이동영(李東榮)의 아들이다. 젊어서부터 선생에게 수학하였다. -거의록(擧義錄)의 이용빈(李用賓) 조항에 상세하게 나온다.- 담양(潭陽)의 지동사(池洞祠)에 향사되었다. -광주에 살았다.-

전석규(田錫圭)
자는 사수(士受)이고 호는 한호(閒湖)이며, 정축년(1577, 선조10)생이다. 남양인(南陽人)으로 주부(主簿) 전탄(田坦)의 아들이다. 진사과에 급제하였고, 수직(壽職)으로 가선대부에 올랐다. 석성(石城)의 봉호사(蓬湖祠)에 향사되었다. -석성에 살았다.-

정유한(鄭維翰)
자는 인보(仁輔)이고 무진년(1568, 선조1)생이며, 영일인(迎日人)이다. -금산(金山)에 살았다.-

정원승(鄭元升)
자는 여선(汝善)이고 호는 석실(石室)이며, 무술년(1598, 선조31)생이다. 영일인으로 정유한의 조카이다. 진사과에 급제하였다.

송국사(宋國士)
자는 일경(一卿)이고 임자년(1612, 광해군4)생이다. 은진인(恩津人)으로 장령 송희진(宋希進)의 아들이다. 현감을 지냈다.

송국헌(宋國憲)
자는 군식(君式)이고 호는 안소당(安素堂)이며, 을묘년(1615, 광해군7)생이다. 은진인으로 송국사의 동생이다. 병자년 난리 때 칼을 빼들고 전쟁터로 달려갔다. 찰방을 지냈으며, 이조 참판에 추증되었다. 청주의 충효사(忠孝祠)에 향사되었다.

송석규(宋錫圭)
자는 자결(子潔)이고 을유년(1585, 선조18)생이며, 은진인이다. 진사과에 급제하였다. -회덕에 살았다.-

한윤(韓贇)
자는 미숙(美叔)이고 호는 수구당(守邱堂)이다. 청주인으로 을유년(1585, 선조18)생이며, 시직(侍直) 한응록(韓應祿)의 아들이다. 정축년(1637, 인조15)에 세자(世子)가 심양(瀋陽)에 볼모로 잡혀갈 적에 따라갔으며, 돌아와서는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았다. 첨정(僉正)을 지냈다. -남원(南原)에 살았다.-

송시승(宋時昇)
자는 자유(子猷)이고 계미년(1583, 선조16)생이다. 은진인으로 현령 송계록(宋啓祿)의 아들이다. 효로써 정려(旌閭)되었으며, 지평에 추증되었다.

이봉주(李鳳柱)
무오년(1618, 광해군10)생으로 전주인이다. 참봉을 지냈다. -연산에 살았다.-

유극해(兪克諧)
금산인(金山人)이다. 손자인 유진병(兪震炳)은 천거되어 관직에 제수되었다.

정이도(鄭以道)
자는 거원(巨源)이고 호는 판곡(板谷)이며, 병신년(1596, 선조29)생이다. 초계인(草溪人)으로 동지중추부사 정흔(鄭昕)의 아들이다. 진사과에 급제하였다. -삼가(三嘉)에 살았다.-

조부(曺溥)
자는 도연(道淵)이고 호는 삼청당(三淸堂)이다. 계사년(1593, 선조26)생이며 창녕인(昌寧人)이다. 효로써 정려되었으며, 참봉을 지냈다. 창평(昌平)의 죽림사(竹林祠)에 향사되었다. -창평에 살았다.-

송시행(宋時行)
자는 자건(子健)이며, 임인년(1602, 선조35)생이다. 호는 송창(松窓)이다. 은진인으로 송시승(宋時昇)의 동생이다.

김정(金濎)
자는 여심(汝尋)이고 호는 췌세(贅世)이며, 정해년(1587, 선조20)생이다. 강진인(康津人)으로 판관 김응길(金應吉)의 아들이다. 광해조 때 과거 공부를 폐하고서 자신의 지조를 지켰다. 학행(學行)으로 승지에 추증되었다. 태인(泰仁)의 송산사(松山祠)에 향사되었다. -태인에 살았다.-

정제원(丁濟元)
자는 백인(伯仁)이고 호는 취우당(醉愚堂)이며, 경인년(1590, 선조23)생이다. 영성인(靈城人)으로 정건(鄭鍵)의 아들이다. 지평에 추증되었다. 정묘년의 오랑캐 난리 때 의병을 일으켰다. -영광(靈光)에 살았다.-

홍남립(洪南立)
자는 탁이(卓爾)이고 호는 화곡(華谷)이며, 병오년(1606, 선조39)생이다. 남양인(南陽人)이며, 문과에 급제하였고 대사간을 지냈다. 전주(全州)의 학천사(鶴川祠)에 향사되었다. -전주에 살았다.-

이만업(李萬業)
금산인(金山人)이다. 손자인 이진병(李震炳)은 천거되어 관직에 제수되었다.


[주D-001]정축년 : 원문에는 빠져 있는데, 다른 자료에 의거하여 보충하였다.
[주D-002]문충공(文忠公) : 원문에는 빠져 있는데, 다른 자료에 의거하여 보충하였다.
[주D-003]주문(朱門)의 이등(二滕) : 주자(朱子) 문하의 뛰어난 제자인 등린(滕璘)과 등공(滕珙) 형제를 가리킨다. 등린은 자가 덕수(德粹)이고 호가 계재(溪齋)이며, 저서로는 《계재유고(溪齋遺稿)》가 있다. 등공은 자가 덕장(德章)이고 호가 몽재(蒙齋)이며, 저서로는 《경제문형(經濟文衡)》이 있다. 《宋元學案 卷69》
[주D-004]임인년 : 원문에는 기묘(己卯)로 되어 있는데, 기묘년은 선조 12년(1579)으로, 박정(朴筳)이 박추(朴簉)의 형이 되어서 맞지 않으므로 《사마방목(司馬榜目)》에 의거하여 임인(壬寅)으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05]노련(魯連) : 노중련(魯仲連)으로, 제(齊)나라의 장수이다. 일찍이 조(趙)나라에 머물러 있을 적에 위(衛)나라에서 진(秦)나라 왕을 황제(皇帝)로 추대하여 군대를 철수시키게 하려고 하자, 노중련은 진나라가 무도한 나라임을 역설하면서, 진나라가 칭제(稱帝)한다면 자신은 동해(東海)에 빠져 죽을 것이라고 하여 중지시켰다. 《史記 卷83 魯仲連列傳》
[주D-006]남대(南臺) : 학행(學行)이 뛰어나 사헌부의 장령(掌令)이나 지평(持平)으로 추천된 사람을 말한다.
[주D-007]금산인(金山人)이다 …… 제수되었다 : 이 기사는 잘못되었다. 유씨(兪氏) 중에는 금산(金山)을 본관(本貫)으로 하는 데가 없으며, 유진병(兪震炳)이라는 인물은 찾을 수가 없다. 이는 아래에 나오는 이만업(李萬業)에 대한 기사를 잘못 삽입해 놓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