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월당 김시습/매월당 김시습

생육신 매월당 김시습 관련 자료

아베베1 2015. 5. 9. 21:44

 

 

 

 

 

2011년 8월 8일 (월)
유자(儒者)인가 승려인가, 매월당(梅月堂) 김시습(金時習)
  우암(尤庵)은 매월당의 모습이 7,8촌(寸) 크기의 작은 화폭 안에 다 들어갔지만 매월당의 유상(遺像)이나마 다시 나타난 것은 세상에 도의(道義)를 바로 세우는 데 크게 기여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우암이 인정한 것은 여기까지이다. 우암의 지적대로, 불안정한 천재 매월당이 노년에 이르러 마지막으로 선택한 안식처는 불교였음을 그 자신이 그린 화상이 스스로 증명하고 있다.

  공자(孔子)가 전대의 성현에 대해 서열을 매겨 서술한 것이 많지만 오직 단발하고 문신한 태백(泰伯)을 천하의 삼분의 일을 차지하고서도 은(殷)나라를 섬긴 문왕(文王)과 아울러 지극한 덕이라 일컬었는데 선유(先儒)는 “그 뜻이 은미하다.” 하였다.
  우리 동방의 습속은 옛것을 좋아하여 옛 성현의 유상(遺像)을 소장하고 있는 이들은 많다. 그런데 지금 연지(延之)는 유독 매월당(梅月堂)의 진영을 모사하고 장차 공이 자주 가는 춘천(春川)의 산골에 집을 짓고 안치하려 한다. 내가 그 유상을 자세히 보았더니 수염은 비록 있었으나 관과 옷은 승려들이 착용하는 것이었다. 내가 예전에 율곡선생(栗谷先生)이 어명을 받들어 지은 매월당의 전(傳)을 살펴보았는데, 매월당은 젊어서는 유생이었고, 중간에 승려가 되었고 만년에는 머리를 길러 유가(儒家)로 돌아왔다가 임종할 때에는 다시 두타(頭陀)의 형상을 했다고 되어 있었다. 세 번 그 형상을 바꾼 셈인데 유독 이 승려의 형상을 영정으로 남기고 스스로 찬(贊)을 썼으니, 여기에는 무슨 뜻이 있지 않을까.
  매월당이 출가하여 방랑했던 것은 기실 세상에서 몸을 숨기고자 했던 것이었다. 그러나 백세(百世)의 뒤에도 이 작은 화폭에서 그 기상과 정신을 보는 사람은 이 화상(畵像)이 바로 매월당임을 알아볼 것이다.
  올 여름에 성공(成公) 삼문(三問)의 신주(神主)가 뜻밖에도 인왕산 자락 아래에서 나왔기에 경향(京鄕)의 사대부들이 홍주(洪州) 땅 노은사(魯恩祠)에 봉안하였으니, 후세의 군자 중 공자의 말씀처럼 이 두 분을 아울러 일컬을 이가 있을까. 찾아오는 이 없어 쓸쓸해지지나 않을까.
  연지는 이미 그의 조부 석실선생(石室先生)을 위해 도연명(陶淵明)의 취석(醉石)ㆍ고송(孤松)ㆍ오류(五柳) 등의 이름을 도산(陶山)에 새겼고 다시 이 일을 하였으니, 그의 감회가 깊었던 것이리라.
  아아! 매월당이 비록 살아계신다 하더라도 7척의 몸에 불과할 터인데 지금은 7,8촌(寸) 크기의 화폭 안에 다 들어갔다. 그런데도 논자(論者)들은 매월당이 세상에 다시 나타나느냐 감춰지고 마느냐가 세도(世道)에 관계된다고 하는 것은 어째서인가!
  임자년 11월 모일에 은진(恩津) 송시열(宋時烈)은 발문을 쓴다.

[孔子序列先世聖賢多矣, 而惟以斷髮文身之泰伯, 並稱至德於三分天下以服事殷之文王, 先儒以爲其指微矣. 東俗好古, 其藏古聖賢遺像者亦多矣. 而今延之獨摹梅月公之眞, 將結茅於公所遊春川之山谷而掛置之. 余竊諦審之, 其髭鬚雖在, 而冠服則正緇流所著也. 余嘗按栗谷先生奉敎所撰公傳, 公少爲儒生, 中爲緇流, 晩嘗長髮歸正, 臨終時更爲頭陀像. 蓋三變其形矣, 獨乃留此緇像而自贊焉者, 豈亦有意存乎其間耶! 蓋公出家放迹, 實欲藏晦其身. 然百世之下, 見其氣象精神於片幅之上者, 猶知其爲梅月公矣. 今年夏, 成公三問神主忽出於仁王山斷麓下, 京外士夫奉安於洪州地魯恩洞, 後之君子其有並稱二公如孔聖之言者耶? 其不落莫否耶? 延之旣爲其大王考石室先生刻置淵明醉石․孤松․五柳等名號於陶山, 復繼以此擧, 其所感者深矣. 嗚呼! 雖使公生存, 不過七尺之軀矣, 今乃輸在七八寸矮絹, 而論者謂其顯晦之所關在於世道者何也? 壬子十一月日, 恩津宋時烈跋.]
 김시습 영정

            ▶ 김시습 초상_충남 유형문화재 제64호_충남 부여군 무량사 소장

 

송시열 (宋時烈) <매월당화상발(梅月堂畫像跋)>《매월당집(梅月堂集)》

  매월당(梅月堂) 김시습(金時習 1435~1493)의 화상에 대해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이 쓴 발문인데, 매월당 자신이 직접 그린 자화상을 모사한 그림을 보고 쓴 것이다.

  매월당은 절의(節義)를 지킨 유자(儒者)와 불교의 고승, 두 가지 모습으로 역사에 남아 있다. 율곡(栗谷) 이이(李珥)는 왕명을 받고 지은 <김시습전(金時習傳)>에서 ‘심유적불(心儒跡佛)’로 매월당의 정체를 규정한 바 있다. 그의 사상의 본령은 유교이고 승려 생활은 살아가는 방편이었다는 뜻이다. 그런데 우암은 매월당이 스스로 그린 자기 화상의 마지막 모습이 승려의 복장을 하고 있는 것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 것이다.

  연지(延之)는 조선시대 문신이요 학자인 김수증(金壽增 1634~1701)의 자이다. 그는 호가 곡운(谷雲)이고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의 손자이다. 위 석실선생은 바로 청음을 가리킨다.

  김수증은 1670년, 강원도 화천 용담리에 농수정사(籠水精舍)를 짓고 은거하면서 주자(朱子)의 행적을 모방, 자신이 사는 지역을 곡운(谷雲)이라 명명하고 화가 조세걸(曺世傑 1635~1705)을 시켜 실경산수화로 <곡운구곡도>를 그리게 하였다. 따라서 매월당 화상도 김수증이 조세걸을 시켜서 모사했을 가능성이 크다.

  태백(泰伯)은 주(周)나라 태왕(太王)의 맏아들이다. 태왕에게 아들이 셋 있었는데 태백, 중옹(仲雍), 계력(季歷)이었다. 태왕이 은(殷)나라를 정벌할 생각이 있었는데 태백이 그 뜻을 따르지 않았다. 막내 계력은 창(昌)이라는 훌륭한 아들을 두었기에 태왕은 왕위를 계력에게 물려주어 창에게 전해지게 하려 하였다. 태백은 부친의 뜻을 알고 아우 중옹과 함께 나라를 떠나 남쪽 오랑캐의 땅인 형만(荊蠻)에 가서 단발문신(斷髮文身)하여 스스로 후사(後嗣)가 될 수 없음을 보였다. 창이 훗날 문왕(文王)이 된다. 조선의 태종이 세종에게 왕위를 전하는 과정과도 비슷하다.

  “그 뜻이 은미하다.”고 한 선유(先儒)는 주자(朱子)의 집주(集註)에 나오는 범씨(范氏), 즉 범준(范浚)을 가리킨다. 《논어(論語)》 <태백(泰伯)>에서 공자는 태백과 문왕 두 사람을 두고 각각 “지극한 덕이라 이를 만하다.” 하였는데, 태백과 문왕 모두 임금을 배반하지 않고 천하를 취하지 않았기 때문에 공자가 신하의 도리를 지키지 않는 자를 경계하는 뜻을 은미하게 담아서 말했다는 것이다. 이 글에서 우암은 매월당이 단종(端宗)에 대해 절의를 지켜 불사이군(不事二君)한 것을 높이기 위해 서두에 이 말을 인용하였다. 그리고 사육신(死六臣)의 성삼문(成三問) 신주와 생육신(生六臣)의 매월당 화상을 함께 말함으로써 두 사람의 절의를 아울러 치켜세웠다.

  매월당의 유교에 대한 인식은 매우 긍정적인데 불교에 대해서는 긍정과 부정, 비판과 수용의 상이한 양상을 보인다. 그래서 얼핏 보아서는 율곡의 말처럼 그의 사상 성향이 유교 쪽으로 더 쏠려 있는 것으로 판단하기 쉽다. 그런데 정작 매월당 스스로 그린 자신의 만년의 모습은 승려의 복장에 목에는 염주를 두르고 있다.

  탁월한 식견을 가진 문학가요 사상가였던 그로서는 천부의 재능을 자랑할 수 있는 문학을 버릴 수도 없었을 것이고 유자(儒者) 본연의 임무인 현실 참여를 포기할 수도 없었을 것이며, 예로부터 유자들이 통상 그러했듯이 불교에 심취했더라도 그 자신은 역사에서 유자로 평가되고 싶었을 것이다. 또한 그는 실제로 때로는 불교에 마음이 끌리기도 하고 때로는 정주(程朱)의 학설에도 귀가 솔깃했을 것이다. 끊임없는 지적 호기심, 어느 한 곳에 안정하지 못하는 충동성 등 천재가 갖기 쉬운 속성을 우리는 매월당에게서 볼 수 있다.

  매월당은 유교와 불교를 넘나들며 어느 한 쪽에 완전히 정착하지 못하는 삶을 살았다. 지금 매월당의 문집을 보면, 청산과 세속을 넘나드는 삶의 자취, 그리고 그에 상응하듯 불도(佛道)에 심취하다가 문득 스스로를 명교(名敎)의 죄인으로 자책해 놓고는 그리고 다시 입산하는 등의 불안정한 심적 변화를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경주(慶州)를 지나다가 오도(悟道)했다는 기록을 스스로 남겼지만 그는 결코 깨달음을 이룬 각자(覺者)로 자처하지도 않고 천재가 갖기 쉬운 현실과 자아와의 괴리, 그로 인해 생겨난 모순과 갈등을 농세(弄世)의 자조(自嘲)로 거침없이 표출하기도 한다. 이러한 그의 상반되고 모순되게 보이는 모습들은 바로 그의 내적 변화의 적나라한 표출이었다.

  매월당은 자신이 그린 화상(畵像)에 스스로 적기를 “네 모습은 지극히 하찮고 네 말은 지극히 어리석으니, 의당 너를 산골짜기에 두어야 하리.[爾形至藐 爾言大侗 宜爾置之 丘壑之中]” 하였으니, 세상을 아주 떠나 청산에 머물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세상에 맞추어 살아갈 수도 없는 자신을 희화한 자조의 독백일 터다.

 

 

 
이상하 글쓴이 : 이상하
  • 한국고전번역원 부설 고전번역교육원 교무처장
  • 주요저서
    • - 한주 이진상의 주리론 연구, 경인문화사
    • - 유학적 사유와 한국문화, 다운샘(2007) 등
  • 주요역서
    • - 읍취헌유고, 월사집, 용재집,아계유고, 석주집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