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자(儒者)인가 승려인가, 매월당(梅月堂) 김시습(金時習) |
우암(尤庵)은 매월당의 모습이 7,8촌(寸) 크기의 작은 화폭 안에 다 들어갔지만 매월당의 유상(遺像)이나마 다시 나타난 것은 세상에 도의(道義)를 바로 세우는 데 크게 기여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우암이 인정한 것은 여기까지이다. 우암의 지적대로, 불안정한 천재 매월당이 노년에 이르러 마지막으로 선택한 안식처는 불교였음을 그 자신이 그린 화상이 스스로 증명하고 있다. |
공자(孔子)가 전대의 성현에 대해 서열을 매겨 서술한 것이 많지만 오직 단발하고 문신한 태백(泰伯)을 천하의 삼분의 일을 차지하고서도 은(殷)나라를 섬긴 문왕(文王)과 아울러 지극한 덕이라 일컬었는데 선유(先儒)는 “그 뜻이 은미하다.” 하였다. 우리 동방의 습속은 옛것을 좋아하여 옛 성현의 유상(遺像)을 소장하고 있는 이들은 많다. 그런데 지금 연지(延之)는 유독 매월당(梅月堂)의 진영을 모사하고 장차 공이 자주 가는 춘천(春川)의 산골에 집을 짓고 안치하려 한다. 내가 그 유상을 자세히 보았더니 수염은 비록 있었으나 관과 옷은 승려들이 착용하는 것이었다. 내가 예전에 율곡선생(栗谷先生)이 어명을 받들어 지은 매월당의 전(傳)을 살펴보았는데, 매월당은 젊어서는 유생이었고, 중간에 승려가 되었고 만년에는 머리를 길러 유가(儒家)로 돌아왔다가 임종할 때에는 다시 두타(頭陀)의 형상을 했다고 되어 있었다. 세 번 그 형상을 바꾼 셈인데 유독 이 승려의 형상을 영정으로 남기고 스스로 찬(贊)을 썼으니, 여기에는 무슨 뜻이 있지 않을까. 매월당이 출가하여 방랑했던 것은 기실 세상에서 몸을 숨기고자 했던 것이었다. 그러나 백세(百世)의 뒤에도 이 작은 화폭에서 그 기상과 정신을 보는 사람은 이 화상(畵像)이 바로 매월당임을 알아볼 것이다. 올 여름에 성공(成公) 삼문(三問)의 신주(神主)가 뜻밖에도 인왕산 자락 아래에서 나왔기에 경향(京鄕)의 사대부들이 홍주(洪州) 땅 노은사(魯恩祠)에 봉안하였으니, 후세의 군자 중 공자의 말씀처럼 이 두 분을 아울러 일컬을 이가 있을까. 찾아오는 이 없어 쓸쓸해지지나 않을까. 연지는 이미 그의 조부 석실선생(石室先生)을 위해 도연명(陶淵明)의 취석(醉石)ㆍ고송(孤松)ㆍ오류(五柳) 등의 이름을 도산(陶山)에 새겼고 다시 이 일을 하였으니, 그의 감회가 깊었던 것이리라. 아아! 매월당이 비록 살아계신다 하더라도 7척의 몸에 불과할 터인데 지금은 7,8촌(寸) 크기의 화폭 안에 다 들어갔다. 그런데도 논자(論者)들은 매월당이 세상에 다시 나타나느냐 감춰지고 마느냐가 세도(世道)에 관계된다고 하는 것은 어째서인가! 임자년 11월 모일에 은진(恩津) 송시열(宋時烈)은 발문을 쓴다. |
[孔子序列先世聖賢多矣, 而惟以斷髮文身之泰伯, 並稱至德於三分天下以服事殷之文王, 先儒以爲其指微矣. 東俗好古, 其藏古聖賢遺像者亦多矣. 而今延之獨摹梅月公之眞, 將結茅於公所遊春川之山谷而掛置之. 余竊諦審之, 其髭鬚雖在, 而冠服則正緇流所著也. 余嘗按栗谷先生奉敎所撰公傳, 公少爲儒生, 中爲緇流, 晩嘗長髮歸正, 臨終時更爲頭陀像. 蓋三變其形矣, 獨乃留此緇像而自贊焉者, 豈亦有意存乎其間耶! 蓋公出家放迹, 實欲藏晦其身. 然百世之下, 見其氣象精神於片幅之上者, 猶知其爲梅月公矣. 今年夏, 成公三問神主忽出於仁王山斷麓下, 京外士夫奉安於洪州地魯恩洞, 後之君子其有並稱二公如孔聖之言者耶? 其不落莫否耶? 延之旣爲其大王考石室先生刻置淵明醉石․孤松․五柳等名號於陶山, 復繼以此擧, 其所感者深矣. 嗚呼! 雖使公生存, 不過七尺之軀矣, 今乃輸在七八寸矮絹, 而論者謂其顯晦之所關在於世道者何也? 壬子十一月日, 恩津宋時烈跋.] |
▶ 김시습 초상_충남 유형문화재 제64호_충남 부여군 무량사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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