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세 진사공 휘 숙 등/8세 휘 호문 관련기록

17대 조고 전주 최공 문성공 부사공 휘호문 장인 일두 정여창 선생 ( 신도비문) 공부자료

아베베1 2015. 5. 25. 23:12



  전주최공 문성공     시조공  휘   아

            중랑장공     2세   휘 용봉 

            사온동정공   3세   휘 을인

            호조참의공   4세   휘  담

            연촌공       5세   휘  덕지  

            진사공       6세   휘  숙 

            의령공       7세   휘 지성

            부사공       8세   휘 호문    -------   장인 일두 정여창 선생  

            봉사공       9세   휘 언청   --------   사위 임호신 (청백리) 

            판관공      10세   휘 희수 

   


桐溪先先文集卷之四  
 碑銘
文獻公一蠹鄭先生神道碑銘 幷序 
[


惟我東方。自殷太師設敎。蔚然有變夷之風。而寥寥數千載。眞儒者罕作。在麗季。惟鄭文忠公一人而已。入我朝。聞而知之者。有若五先生焉。先生其一也。先生諱汝昌。字伯勖。其先貫河東。後徙居咸陽郡。有諱之義。判宗簿寺事。諱復周。判典農寺事。諱六乙。贈漢城府左尹。寔先生曾若祖若考三世也。母崔氏。牧使孝孫之女。以景泰元年庚午。生先生。生有異質。左075_247b尹通判義州時。先生在髫齕。華使張寧一見。知其爲非常兒。作說以名之。後左尹爲咸吉道虞侯。拒叛將李施愛死之。先生絶而復蘇。入積屍中。求遺體歸葬。時年十七矣。服除。上嘉左尹衛國功。命官其嗣。先生以父敗子榮。爲不忍。辭不受。奉養母夫人。滫㵦備至。母夫人所爲。無甚害於義。不敢違。母夫人亦知子之志。不欲傷。故母無過擧。子無曲順之失。癸卯。中進士試。母夫人欲見決科之榮。乃遊太學。每夜深。必兀然端坐。於是泮中。知其有思道之功。益尊敬之。及南歸。母夫人方在癘染中。人勸令在外候問。先生不聽075_247c徑入。未幾母夫人遘癘不起。躃踊嘔血。幾至滅性。治喪。不顧俗忌。襲斂殯奠。皆以禮。人甚危之。而癘患自熄。先生終無。人以爲孝感所致。方伯聞其行。令郡官辦葬具。先生以煩民力怨及親。爲辭不受。凡有欲助之者。皆不聽。乃移左尹墓同穴。期啜粥。三年憂。苴杖不出廬外。危坐終日。不脫絰帶。旣祥。不歸家。入頭流山。遑遑有如有求不得之狀。人勸酒肉。輒涕泣不肯。郡守曹梅溪偉。躬造勉之以爲。先王中制不敢過。於是不敢辭。寺正趙孝同,參議尹兢疏薦其學行。成廟嘉之。特授昭格署參奉。先生陳情固辭。成廟075_247d題其疏尾曰。聞汝之行。予不覺出涕。行不可掩。而今猶如此。是汝之善也。兄弟姊妹分土田臧獲。先生擇其磽薄老弱者自占。猶有不厭其心者。則復以己所得與之。成廟庚戌。登丙科。補藝文館檢閱。遷侍講院說書。輔導以正。東宮頗不悅。卽求補外。甲寅。出監安陰縣。縣素稱凋弊。先生首訪民隱。嚴立科條。櫛垢爬痒。民獲蘇醒。朞月之間。恩信周遍。吏民相戒。莫敢欺負。暇日招選鄕子弟之秀者。親自敎誨。遠近聞風多來學。坐戊午史禍。謫鍾城七年。無幾微怨悔見於色辭。府定庭燎之役。每使星入府。躬自燃火。不懈益075_248a謹。其行乎患難者如此。六鎭近胡域。無文風奮矣。先生擇其可與語者。敎誨不倦。未幾有中進士科者。斯非過化之妙歟。甲子夏四月一日。易簀于謫所。壽五十有五。輿歸咸陽。葬昇安洞艮坐坤向之原。是年秋。史禍復作。其可忍言之哉。不數年。昭雪無餘憾。褒贈祀典。愈久愈隆。郡儒建書院。特賜灆溪之號。春秋用小牢享之。自戊辰以後。館學儒生。請從祀文廟。歲以爲常。萬曆庚戌秋。始蒙允。八月。賜祭於家。於是先生道學之光。益彰於世矣。先生之學以濂,洛爲準的。讀書以窮理爲先。處心以不欺爲主。日用工夫。不075_248b出誠敬之外。至於治平之律令格例。無不究其極。求諸治縣。已見其端緖矣。與寒暄金先生俱遊佔畢金先生之門。志同道合。許以莫逆。論道講學。動必相隨。惜其微言餘論。不少傳於世。而先生平日著述。又火於戊午之禍。豈不爲後學之長痛乎。嗚呼。彼小人者。雖或螮蝀於一時。然至於公論之久長。蓋亦莫得以掩之。列聖褒崇之恩。多士景慕之誠。有如滄海之深。北斗之高。百世之下。聞其風而興起感發者。不在立懦廉頑之後。則雖使先生坐廊廟於當時。其風效之及於無窮者。夫豈或之過哉。先生娶宗室桃平君末075_248c生之女。恭靖大王之孫也。生二子四女。男長曰希稷。直長。次曰希卨。希稷嫡無嗣。只有庶子如山。希卨取堂弟希參之子彥男爲後。女長適副護軍崔浩文。子彥淸。壻任虎臣。觀察使。其次適生員趙孝溫。生子安壽。次適李賢孫。生子承壽。又其次適薛公諄。生子璿。彥男。同知。生子大民。縣監。縣監生一男一女。男曰弘緖。文科學正。女曰房元震。察訪。學正初娶贈都承旨梁士衡之女。生二男一女。曰光漢。生員。曰光淵。進士。女適李皦。後娶林眞㦂之女。有一女。適郭文院。如山有子二人。曰天壽,桂壽。天壽之子曰元禮,亨禮。075_248d桂壽之子曰興禮。元禮,興禮。以先生蔭。除參奉。嫡庶曾玄男女。凡若干人。銘曰。於皇上帝。悶玆東偏。日趨澆漓。迺降碩儒。于嶺之隅。金聲玉姿。先生之生。抱負非輕。文不在玆。泝求洛閩。窮源嚼眞。不尙文辭。潛心論討。實踐深造。要在不欺。躬于孝悌。達以詩禮。聖賢是希。晩武天庭。兆足以行。誰其泥之。鳴琴十室。化成期月。施至於斯。天生何意。天嗇何以。世道之悲。惟其耿光。沒世彌彰。躋于孔祠。灆水洋洋。昇山蒼蒼。不渴不隳。能令大名。山高水淸。不在斯碑。


계집 제4권원문  원문이미지  새창띄우기
확대 원래대로 축소
 비명(碑銘)
문헌공(文獻公) 일두(一蠹) 정 선생(鄭先生) 신도비명(神道碑銘) 병서(幷序)

우리 동방(東方)은 은(殷)나라 태사(太師)가 교화를 베푼 뒤로 이적(夷狄)에서 벗어나려는 움직임이 성대하게 일었으나 아득한 수천 년 동안 참다운 선비가 드물었다. 고려 말기에는 정 문충공(鄭文忠公정몽주(鄭夢周)) 한 사람뿐이었고, 우리 국조(國朝)에는 소문이 나서 알려진 분이 다섯 선생인데 선생이 그중의 한 분이다.
선생의 휘(諱)는 여창(汝昌), 자(字)는 백욱(伯勗)이며, 선대의 관향(貫鄕)은 하동(河東)인데, 뒤에 함양군(咸陽郡)으로 옮겨 가서 살았다. 휘 지의(之義)는 종부시 판사(宗簿寺判事)이고, 휘 복주(復周)는 전농시 판사(典農寺判事)이며, 휘 육을(六乙)은 한성부 좌윤(漢城府左尹)에 추증되었는데, 이들이 선생의 증조(曾祖), 조부(祖父), 선고(先考) 3세(世)이다. 모친 최씨(崔氏)는 목사(牧使) 효손(孝孫)의 딸이다. 경태(景泰) 원년 경오년(1450, 세종32)에 선생을 낳으니, 태어나면서부터 특이한 자질이 있었다.
좌윤공이 의주 통판(義州通判)으로 있을 때에 선생은 어린 나이였다. 중국 사신 장영(張寧)이 한 번 보고 선생이 비상한 아이라는 것을 알고 명설(名說)과 함께 이름을 지어 주었다. 뒤에 좌윤이 함길도 우후(咸吉道虞候)가 되어 반란을 일으킨 장수 이시애(李施愛)를 막다가 죽자, 선생이 졸도했다가 다시 깨어나서 쌓인 시체 속에 들어가 부친의 유체(遺體)를 모시고 돌아와 장례를 치렀으니, 당시에 공의 나이가 17세였다.
삼년복(三年服)을 마치자, 상이 국가를 보위하다 목숨을 바친 좌윤의 공로를 가상하게 여겨 그 아들에게 관직을 명하니, 선생이 아비의 죽음으로 자식이 영화를 누리는 것은 차마 할 수 없다 하여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 모부인(母夫人)을 봉양하여 맛있는 음식을 골고루 올려 드렸고 모부인의 하는 일이 의리에 그다지 해로운 것이 아니면 감히 어기지 않았으니, 모부인도 아들의 뜻을 알고 상심시키지 않고자 하였다. 그러므로 모부인은 지나친 거조가 없었고 아들도 무조건 순종하다 잘못을 저지르는 경우가 없었다.
계묘년(1483, 성종14)에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였는데, 모부인이 대과에 급제하는 것을 보고자 하므로 태학(太學)에 들어갔다. 깊은 밤마다 단좌(端坐)하였는데, 이에 반중(泮中)에서 선생에게 도학공부가 있음을 알고 더욱 존경하였다.
고향으로 돌아오자 모부인이 돌림병을 앓고 있었는데, 사람들이 문밖에서 안부를 묻기를 권하였으나 선생은 듣지 않고 곧장 방 안으로 들어갔다. 얼마 후에 모부인이 병으로 돌아가시자, 가슴을 치며 통곡하다 피를 토하고 거의 실성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상례(喪禮)를 치를 때에 풍속에서 꺼려하는 것을 아랑곳하지 않고 습염(襲殮)과 빈전(殯奠)을 다 예에 맞게 하니, 사람들이 매우 위태롭게 여겼다. 그러나 돌림병이 스스로 사라지고 선생도 마침내 무사하였으니, 사람들은 효성(孝誠)이 하늘을 감동시켰기 때문이라고 말하였다. 관찰사가 그의 행실에 관하여 듣고 군관(郡官)으로 하여금 장례(葬禮)에 필요한 도구를 지급하도록 하니, 선생이 백성들을 번거롭게 하여 원망이 어버이에게 미치게 한다는 이유로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 도와주겠다는 자가 있었으나 모두 듣지 않고, 이에 좌윤공과 합장(合葬)하였다. 1년 동안 죽을 마시고 3년 동안 근심하면서 지팡이를 짚고 여막 밖으로 나오지 않았으며 하루 종일 단정히 앉아서 수질(首絰)과 요대(腰帶)를 벗지 않았다. 상례(祥禮)를 다 마친 뒤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두류산(頭流山)에 들어가서 허둥지둥하며 마치 무엇인가 찾아 헤매는 듯한 모습으로 지냈다. 사람들이 술과 고기를 권하면 문득 눈물을 흘리면서 먹으려 하지 않았다. 군수인 매계(梅溪) 조위(曺偉)가 몸소 와서 권유하며 말하기를, “선왕(先王)의 중제(中制)를 감히 지나치게 해서는 안 된다.”라고 하자, 그제서야 감히 사양하지 않았다.
시정(寺正) 조효동(趙孝同)과 참의(參議) 윤긍(尹兢)이 상소하여 그의 학행(學行)을 천거하니, 성묘(成廟)가 가상하게 여기고 특별히 소격서 참봉(昭格署參奉)을 제수하였다. 그러나 선생이 진정(陳情)하는 상소를 올려 굳이 사양하니, 성묘가 그 상소의 끝에다 쓰기를, “그대의 행실을 듣고 나도 모르게 눈물을 흘렸다. 행실은 가리울 수가 없는 법인데 지금 오히려 이와 같이 하니, 이것이 바로 그대의 장점이라 하겠다.” 하였다.
형제(兄弟)와 자매(姉妹)가 전토(田土)와 하인들을 분배할 때에 선생은 척박한 땅과 노약자를 가려서 차지하였으나, 그래도 오히려 마음에 만족스러워하지 않는 자가 있으면, 다시 자기가 차지했던 것을 그들에게 주었다.
성묘(成廟) 경술년(1490)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여, 예문관 검열(藝文官檢閱)에 보임되었다가 시강원 설서(侍講院說書)로 옮겨서 올바른 도리로 보도(輔導)하였지만, 동궁(東宮)이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으므로 곧바로 외임(外任)으로 나가기를 요구하여 갑인년에 안음 현감(安陰縣監)으로 나갔다. 현이 평소에 피폐한 고을로 일컬어졌으므로 선생이 우선적으로 백성들의 고통을 찾아서 과조(科條)를 엄격하게 세우고 사소한 폐단까지 말끔히 제거하니, 백성들이 소생하게 되었다. 짧은 기간에 은택과 신뢰가 두루 미쳤으며, 관리와 백성이 서로 경계하여 감히 속이거나 저버리는 일이 없었다. 그런 여가에 고을의 자제들 중에 뛰어난 자들을 불러 모아서 친히 가르치니, 원근에서 소문을 듣고 많은 사람이 와서 배웠다.
무오년(1498, 연산군4)의 사화(士禍)에 연좌되어 종성(鍾城)에서 7년 동안 유배생활을 하였지만, 조금도 원망하거나 후회하는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종성부가 뜰에 횃불 밝히는 일을 맡기자, 사신(使臣)이 관부(官府)에 들어 올 때마다 직접 횃불을 밝히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았으니, 선생이 환난(患難) 속에서 처신한 것이 이와 같았다. 육진(六鎭)은 오랑캐 지역과 가까워서 문풍(文風)이 없어진 지가 오래되었다. 선생이 더불어 말할 만한 자를 선발하여 열심히 가르쳤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진사 시험에 합격한 자가 있었다. 이것이 바로 지나는 곳마다 감화(感化)를 입는다는 오묘한 진리가 아니겠는가.
갑자년(1504, 연산군10) 여름 4월 1일에 유배지에서 세상을 떠나니, 향년 55세였다. 상여를 함양(咸陽)으로 모시고 돌아와 승안동(昇安洞) 간좌곤향(艮坐坤向)의 언덕에 안장하였다. 이해 가을에 사화(士禍)가 다시 일어났는데 그 상황에 대해서는 차마 말을 하지 못하겠다. 몇 년 지나지 않아 그 원통함이 남김없이 신원(伸冤)되었고 포증(褒贈)과 사전(祀典)이 갈수록 더욱 융성하였다. 고을의 유생(儒生)들이 서원(書院)을 건립하니, 남계서원(灆溪書院)으로 특별히 사액(賜額)하고 봄가을로 소뢰(小牢)를 써서 제사를 지내게 하였다. 무진년(1508, 중종3) 이후부터 관학(館學)의 유생(儒生)이 문묘(文廟)에 배향하여 해마다 제사 지내기를 요청하였는데, 만력 경술년(1610, 광해군2) 가을에 비로소 윤허를 받았으며, 8월에는 그 집에다 사제(賜祭)하였으니, 그제서야 선생의 도학(道學)이 세상에 더욱 빛나게 되었다.
선생의 학문은 염락(溓洛)을 표준으로 삼고 글을 읽을 때에는 이치를 연구하는 것으로 우선하였으며, 마음 씀씀이는 속이지 않는 것을 위주로 하고 날마다 하는 공부는 성경(誠敬) 밖을 벗어나지 않았다. 심지어 정치를 하는 율령(律令)과 격례(格例)에도 최선을 다하여 연구하지 않은 것이 없었으니, 고을을 다스렸던 데에서 찾아보면 그 단서를 확인할 수 있다. 한훤당(寒暄堂) 김 선생과 함께 점필재(佔畢齋) 김 선생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는데, 뜻이 같고 도(道)가 합하여 서로 막역(莫逆)한 사이가 되었으며, 도를 논하고 학문을 강론할 때면 언제나 서로 수행하였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하신 말씀이 세상에 조금도 전하지 않고 선생이 평소에 저술해 둔 글도 무오년의 사화에 소실되었으니, 어찌 후학(後學)들의 길고 긴 통한(痛恨)이 되지 않겠는가.
아, 저 소인배들이 설령 일시적으로 설쳐 댄다 하더라도 장구하게 지속되는 공론(公論)에서 본다면 또한 숨길 수가 없다. 따라서 열성(列聖)들이 포창하여 추대한 은전과 선비들이 크게 사모하는 마음이 바다처럼 깊고 북두성(北斗星)만큼이나 높아서 백세 후에 그 기풍(氣風)을 듣고 흥기하여 감발하는 것이 백이(伯夷)의 기풍을 듣고 탐욕스러운 자가 청렴하게 되고 나약한 자가 강한 의지를 가지게 되는 것에 못지 않으니, 비록 선생으로 하여금 당시에 낭묘(廊廟)에 있게 하였더라도 그 영향이 무궁한 데까지 미쳤을 것이라는 것이 어찌 조금이라도 과도한 말이겠는가.
선생이 종실(宗室)인 도평군(桃平君) 말생(末生)의 딸에게 장가들었는데, 공정대왕(恭靖大王)의 손녀이다. 2남 4녀를 낳았으니, 장남은 희직(希稷)인데 직장(直長)을 지냈고, 차남은 희설(希卨)이다. 희직은 적처(嫡妻)에 후사가 없고 단지 서자(庶子) 여산(如山)만 두었으며, 희설은 당제(堂弟)인 희삼(希參)의 아들 언남(彦男)을 데려다 후사로 삼았다. 장녀는 부호군 최호문(崔浩文)에게 시집갔는데 아들은 언청(彦淸)이며, 사위 임호신(任虎臣)은 관찰사이다. 2녀는 생원 조효온(趙孝溫)에게 시집가서 아들 안수(安壽)를 낳았고, 3녀는 이현손(李賢孫)에게 시집가서 아들 승수(承壽)를 낳았다. 또 4녀는 설공순(薛公諄)에게 시집가서 아들 선(璿)을 낳았다. 언남(彦男)은 동지(同知)인데, 아들 대민(大民)을 낳으니 현감이다. 현감이 1남 1녀를 낳으니, 아들은 홍서(弘緖)인데 문과(文科)로 학정(學正)이 되었으며, 딸은 방원진(房元震)에게 시집갔는데 찰방이다. 학정의 초취(初娶)는 증 도승지 양사형(梁士衡)의 딸인데 2남 1녀를 낳았으니, 광한(光漢)은 생원이고, 광연(光淵)은 진사이다. 딸은 이교(李皦)에게 시집갔다. 후취(後娶)는 임진상(林眞㦂)의 딸로 1녀를 두었는데 곽문원(郭文院)에게 시집갔다. 여산은 두 아들을 낳았는데 천수(天壽)와 계수(桂壽)이다. 천수의 아들은 원례(元禮)와 형례(亨禮)이고, 계수의 아들은 흥례(興禮)이다. 원례와 형례는 선생의 음덕으로 참봉에 제수되었다. 적서(嫡庶)의 증손 현손으로 남녀 약간 명이 있다. 명(銘)은 다음과 같다.

오, 크신 상제님이 / 於皇上帝
동쪽에 치우친 우리나라가 / 悶玆東偏
갈수록 부박해지는 것을 근심하여 / 日趨澆漓
이에 큰 선비를 내리시니 / 迺降碩儒
영남의 한 고을이요 / 于嶺之隅
맑은 소리 옥 같은 자태로다 / 金聲玉姿
선생이 태어나심에 / 先生之生
포부가 가볍지 않았으니 / 抱負非輕
도(道)가 여기에 있지 아니한가 / 文不在玆
낙민을 거슬러 올라가 / 泝求洛閩
근원을 궁구하여 진리를 음미하고 / 窮源嚼眞
문사는 숭상하지 않았으며 / 不尙文辭
마음을 침잠하고 토론하여 / 潛心論討
실천하고 깊이 나아갔건만 / 實踐深造
요점은 속이지 않는데 있었다네 / 要在不欺
효와 제를 몸소 실천하고서 / 躬于孝悌
시와 예까지 통달하여 / 達以詩禮
성현처럼 되기를 희망하면서 / 聖賢是希
만년에 조정에 들어가서 / 晩武天庭
실행할 조짐이 충분하였으니 / 兆足以行
누가 그것을 막으랴 / 誰其泥之
작은 고을을 맡아 다스림에 / 鳴琴十室
덕화를 기월 사이에 이루었는데 / 化成期月
혜택은 이 정도에 이르고 말았네 / 施至於斯
하늘은 무슨 뜻으로 선생을 내시고서 / 天生何意
어찌하여 이렇게 인색한가 / 天嗇何以
세도를 위하여 슬퍼하노라 / 世道之悲
오로지 그 밝은 빛만이 / 惟其耿光
세상을 뜬 뒤에 더욱 빛나서 / 沒世彌彰
공묘에다 모셨다네 / 躋于孔祠
넘치는 물은 흘러서 양양하고 / 濫水洋洋
오르는 산은 높아서 푸르르니 / 昇山蒼蒼
마르지 않고 떨어지지 않으리 / 不渴不隳
선생의 크나큰 명성을 / 能令大名
산처럼 높고 물처럼 맑게 하였으니 / 山高水淸
이 비석에 있지 아니한가 / 不在斯碑





忍齋先生文集卷之三

 碑誌
有明朝鮮國資憲大夫戶曹判書兼五衛都摠府都摠管贈諡貞簡任公神道碑銘 幷序 



豐川任氏世有名人。當麗季。有判撫山事諱中喜。壻于柳巷先生諱脩。生縣監諱孝敦。縣監生郡守諱漢。是生工曹判書諱由謙。判書生觀察使諱樞。早負公輔之望。見忤權倖。位不稱德。娶河陽名族郡守許邃之女。生公。正德丙寅十一月初三日也。公諱虎臣。字武伯。生而資稟甚高。讀書倍文。尋究理趣。不但爲章句之陋。弱冠。入大學。學務踐履。人稱有儒者氣象。中戊子司馬試。捷辛卯丙科。權知承文院副正字。以史才見薦。入藝文館爲檢閱。序陞待敎。選爲侍講院說032_368a書。秋。觀察公如京師賀冬至。公以書狀官隨之。名流贈詩。多以鳳將雛比之。還未出上國界。遭觀察公喪。扶櫬萬里。號擗毀戚。華人見者。無不嘆服。丙申。喪畢。復拜奉敎。時權奸當國。斥逐異己無虛月。出公爲黃澗縣監。公怡然就道。無幾微見於辭色。戊戌。因親病。遞拜典籍。歷兵刑兩曹佐郞,司諫院獻納。持論平恕。無纖芥慍意於前時軋己者。坦懷接物。意絶恩怨。公之素性然也。轉弘文校理,吏曹正郞兼侍講院文學,弼善。俄遷議政府檢詳。陞舍人。値壬寅歲饑。朝廷知公有活人手段。擧爲淸洪道救荒敬差官。親齎粥032_368b餌。出入病戶。一方賴以全活。夏。移輔德。秋。授執義。糾擧務存大體。有古御史風。復爲司諫。各衙門根隨奴代立者。徵價布於本身甚濫。朝廷許令該曹。收直分給。公執之曰。此非所以養廉。其待士大夫不已薄乎。言雖不用。時論韙之。拜弘文館典翰。陞直提學。乙巳。擢拜承政院同副承旨。病遞。秋。復爲右副。循序至都承旨。丁未。上親行祔禮于太廟。加恩執事。公授嘉善階。未幾。病遞。還拜左尹兼同知春秋館。參修二聖實錄。出爲慶尙道觀察使。嶺南地廣務繁。人多不堪。公至。治尙簡易。不多敎條。文簿塡委。而事無停032_368c滯。人稱其能。官滿還朝。同知樞府。戊申。丁外艱。庚戌。釋服。判決掌隷院者至再。燭理旣明。訟直其冤。辛亥。如京師賀聖節。乙卯。特加資憲。拜戶曹判書兼都摠管。時飢饉連仍。島夷擾邊。公長度支。內殫心計。量入爲出。時裁闊狹。以適機宜。而事無不集。人以爲難也。治劇盡瘁之餘。激成脹證。自丙辰二月。引疾固辭。遞拜知敦寧。禁其家母得受祿。蓋不欲無事而食也。病遂沈綿。終于八月初八日。享年五十一。有司以聞。上悼甚輟朝曰。良宰相亡矣。朝野相弔。執友臨護。犀金滿坐。如哭私親。十月二十日。祔葬于楊州天032_368d寶山南麓觀察公墓側。太常易名曰貞簡。公爲人。學欲着實近裏。心欲平正坦夷。自少靜掃一室。以爲棲息之所。扁曰知足庵。手書先賢格言于窓壁。殆無虛紙。蓋欲寓目輒警。檃括不弛也。不肯矯情。任眞推分。如見親舊寒窘。推食解衣。略無難色。身旣貴。淡素無異布衣。門閭蕭然。不類有位者之家。深味李文靖缺陷世界之語。常語所親曰。是吾心也。達於死生之理。嘗書古人百年便作萬年計七字于左右。以爲貪生惡死者之戒。外若坦率。而內有定力。臨事毅然不撓。遇急常自靜暇。壬子。朝廷選士大夫廉謹者。奬勸砥032_369a礪。公與其弟參議輔臣。俱與其選。人以爲榮。而公愀然曰。安得無忝此二字。丙辰。東宮向學。上欲揀宰相中學行俱邁者。號爲輔養官。使之薰陶養蒙。公與安左相玹,李左相浚慶,趙參贊士秀。與焉。拯一時之選也。耿介寡欲。遠迹權要。立朝以來。屢經士林之禍。而公獨超然無與於其間。趙文貞於人。少許可。獨以公歿爲痛曰。寧復見正直平澹如武伯者。公娶部將崔浩文之女。卽贈右議政鄭汝昌外孫女。姿性端莊。善理內職。有外家風。生二男二女。長曰元。牙山縣監。次曰凱。定山縣監。俱有學守。能業其家。女長適032_369b及第鄭淑男。次適士人朴好謙。牙山娶郡守李漢之女。生一男。曰慶基。定山娶郡守尹佐之女。生一男三女。女長適幼學李惇。慶基娶都事申承緖之女。生一女。夫人自喪判書公。守慼閨閤。常恨未亡。雖連墻骨肉之家。亦未嘗往來焉。壬申九月初六日。病歿于牙山任所。以是年十二月十八日。葬同公塋。喪旣襄。諸孤謀不朽於暹曰。子知吾父。盍銘諸神道。嗚呼。暹忝與公同遊大學。又同戊子辛卯榜。又辱執友。不敢以文拙辭。拭淚而爲之銘曰。
學本窮經。公早講明。燭理惟精。玉汝于成。諫坡西淸。032_369c芝秀鳳鳴。謙虛遠名。與物無爭。內葆堅貞。多慾營營。笑彼申棖。氷檗自程。才周眷傾。佇畀邦衡。天靳其齡。儻來簪纓。若寄浮生。沒亦吾寧。瓮岩崢嶸。鬱彼佳城。配祔淑靈。考德有銘。言無過情。足後人聽。


명종 11년 병진(1556,가정 35)
확대원래대로축소
 9월3일 (무오)
11-09-03[02]예조가 졸한 임호신을 능침 근처에 있는 선영에 묘를 쓸 수 있도록 아뢰다

예조가 아뢰기를,
“졸(卒)한 지돈녕부사 임호신(任虎臣)의 아내 최씨(崔氏)가 그 남편의 장지에 관한 일로 거가(車駕) 앞에서 답답함을 하소연하였는데, 상께서는 회암사(檜巖寺)도 역시 능침(陵寢)과 같이 내수사에서 입안(立案)을 받아 경작을 금지한 곳이라 매장하는 것을 허락할 수 없다고 판하하셨고 해조도 다시 회계하지 않았습니다만, 신들은 미안한 점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른바 능침이라고 하는 것은, 능은 능 위의 영역(塋域)안을 가리키는 것이요, 침은 정자각(丁字閣)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회암사는 유명하고 큰 사찰이어서 모든 능의 기신재(忌晨齋)를 비록 여기에서 설행(設行)하지만 능침과 동일하게 볼 수는 없습니다. 양종(兩宗)에 속한 사찰에서 5리(里) 내에는 모두 금표(禁標)를 세운 것조차 이미 미편한 일인데, 심지어 재상의 장지를 그 족장(族葬) 여부도 따지지 않고 사찰 근처에 장사지내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니, 또한 매우 부당한 일입니다.
지난 역사를 상고해 보면, 한 나라 때에는 재상이 죽은 경우 능침 근처에 묏자리를 하사한 일도 많이 있었습니다. 이것을 인용할 필요는 없지만 이제 회암사를 능침으로 논하여 재상이 그 조상의 분묘 곁에 묻힐 수 없도록 한 것은 정체(政體)를 손상시킬까 염려됩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회암사는 비록 능침으로 논할 수는 없겠으나, 선조(先祖) 때부터 내수사가 입안을 받아 금표를 세웠기 때문에 그렇게 판하한 것이다.”
하였다.
【원전】 20 집 358 면
【분류】 *사법(司法) / *풍속-예속(禮俗) / *사상-불교(佛敎)


[주D-001]양종(兩宗) : 교종(敎宗)과 선종(禪宗).


명종 11년 병진(1556,가정 35)
확대원래대로축소
 9월4일 (기미)
11-09-04[01]김귀영이 임호신을 선영에 장사지낼 수 있도록 아뢰다

상이 조강에 나아갔다. 집의 김귀영(金貴榮)이 아뢰었다.
임호신의 처 최씨가 상언하여 호신을 그 선영(先塋) 곁에 장사지낼 수 있게 해줄 것을 청하였는데, 사찰의 금표 안에 있다고 하여 그 안에 장사지내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옛사람 가운데 국가에 죄를 짓거나 조상에게 죄를 지으면 그 조상의 분묘 곁에 매장하지 못하게 하는 법이 혹 있기도 했지만, 이제 호신은 그 조상 때부터 벼슬하여 재상이 되었고 4∼5대에 걸쳐 다 이 곳에 매장되었으며, 호신도 역시 여러 조정에 계속 벼슬하여 현능한 것으로 탁용되어 지위가 2품에 이르렀는데, 하루 아침에 죽자 족장(族葬)하던 곳에 장사지낼 수 없게 되었으니, 죽은 자가 만약 앎이 있다면 어두운 지하에서 어찌 원통함이 없겠습니까? 하물며 회암사는 근래에야 특별히 금표를 세운 곳이어서 봉선사(奉先寺)·봉은사(奉恩寺)에 비교할 곳이 아닙니다. 그 일을 들은 사람들마다 모두 미안하게 생각하는 마음이 있는 것은 호신을 사사로이 생각해서 그러는 것이 아닙니다.”
【원전】 20 집 358 면
【분류】 *왕실-경연(經筵) / *풍속-예속(禮俗) / *사상-불교(佛敎)
명종 11년 병진 (1556, 가정35)
확대원래대로축소
 9월 4일(기미)
11-09-04[02]임호신의 장지로 택한 곳을 살펴 금표를 앞당겨 세우고 장사지내도록 전교하다

정원에 전교하였다.
“내수사의 관원에게 명하여 소재관(所在官)과 같이 호신의 장지로 택한 곳을 다시 살펴 금표를 당겨서 세우고 금표 밖에 장사지내게 할 일로 승전을 받들라.”
【원전】 20 집 359 면
【분류】 *풍속-예속(禮俗)




임호신(任虎臣)중종1(1506)명종11(1556) 

 

할아버지는 공조판서 임유겸(任由謙)이며 아버지는 호조참판 임추(任樞)이고 어머니는 군수 허수(許邃)의 딸이다본관은 풍천(豊川)이고 자()는 무백(武伯)이며 호는 지족당(知足堂)이다 

중종23(1528) 유생(儒生)으로 임금 앞에서 시험을 볼 때 대학大學으로 합격하고 생원이 되었으며 중종26(1531) 식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뒤 예문관 검열대교를 거쳤다중종28(1533) 세자시강원 설서가 되었고 그해 아버지 임추가 동지사로 명나라에 갈 때 서장관으로 갔는데 사람들이 봉()이 새끼를 거느리고 왔다며 부자에게 시를 지어주었 

명나라에 다녀오는 도중에 부친상을 당했고 상을 마친 후 예문관 봉교가 되었으나 권력있는 신하가 자기와 견해가 다른 사람들을 배척하므로 황간현감으로 좌천되었다중종33(1538) 전적병조좌랑형조좌사간원 헌납(獻納), 1541년 세자시강원 필선(弼善)의정부 검사인(舍人)이 되었고 이듬 해 충청도구황종사관으로 나가 가흥창아산창의 곡식으로 기민을 진휼하는 한편 관찰사와 수령들을 독려하는 등 진휼에 진력하였다. 

1542년 집의를 거쳐 중종38(1543) 도원수 이기(李芑)의 종사관을 지내고 사간을 거쳐 황해도재상어사(災傷御使)로 나가 지방관의 탐학상을 지적하고 책임을 묻도록 하였고 1544년 보덕을 거쳐 사헌부집의(執義)가 되었으나 신병으로 사직하였다 

그해에 복직하여 군자감 정()홍문관 직제학을 거쳐 명종즉위년(1545) 우부승지에 경연참찬관을 겸하였고 1546년 우승지도승지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올랐다 

1547년 한성부 우윤경상도관찰사가 되었다가 명종5(1550) 동지중추부사로 동지춘추관사를 겸하고중종실록편찬에 참여하였으며 1551 성절사(聖節使)로 명나라에 다녀온 후 청백리에 선발되었다. 1552년 경연특진관이 되고 이듬해 한성부좌윤이 되었으며 1554년 한성부 우윤을 거친 뒤 1555년 형조판서에 제수되었으나 신병으로 사직하였다 

명종11(1556) 호조판서에 기용되어 수입을 따져 지출을 통제하였고 격무로 병이 나서 지돈녕부사로 옮겼는데 가족들에게 업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다.”고 하며 녹봉을 받지 못하게 하였다그는 사람됨이 자상하여 청렴하고 검소하며 공무에 부지런하였다시종 게으르지 아니하고 산업을 힘쓰지 아니하였고 항상 가장 높이 되는 것을 경계하니 비록 벼슬이 판서에 이르렀어도 입는 옷과 사는 집이 가난한 선비처럼 욕심이 없고 깨끗하였다시호는 정간(貞簡)이다. 

 

 임호신이 대간으로 있을 때 이무강을 탄핵한 적이 있었다뒤에 이무강이 권력을 잡았는데 이무강이 술좌석에서 임호신을 만나 묻기를 지난날 탄핵할 때에 대관 중에서 누가 그 의논을 주장하였는가?” 하자 임호신이실은 내가 주장하였다.” 고 하니 이무강이 자신도 모르게 부끄러워 식은땀을 흘렸는데 해치지는 못하였다. -?명종실록11(1556)89

** 대동장고에는 수록되어 있지 않음동생 임보신도 청백리.

** 양주시 율정동 282(회암사지 입구 근처)에 있는 임호신의 묘는 아버지묘 아래에 있으며 할아버지 묘는 인근에 있음.

[출처] 임호신|작성자 2008js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