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세 진사공 휘 숙 등/8세 휘 호문 관련기록

전주최공 문성공 후손 전주최공 석계공 휘 명룡 제문

아베베1 2016. 1. 28. 16:04






사계전서 제5권           
                                                                      
 제문(祭文)
최여윤(崔汝允)에 대한 제문

아, 슬프다. 나는 그대와 한세상에 살면서 이상보(李祥甫) 어른의 처소에서 처음 만나 서로 마음이 통하였으니, 어쩌면 이처럼 서로 늦게 만났단 말인가. 나의 집이 연산(連山)에 있으니, 연산은 그대 집과는 미리 양식을 준비해서 길을 떠나야 할 만큼 먼 거리가 아니다. 책을 옆구리에 끼고 한 필의 말을 타고서 상종(相從)하며 오직 강독과 토론을 일삼았는데, 대개 뜻한 바는 학문이었다.
그대는 총명이 여느 사람들보다 뛰어났으며 경서를 모두 읽었고 충신(忠信)으로 스스로 몸가짐을 지키면서 날마다 옛 성현으로 마음을 삼아 성취한 바가 보통 사람보다 훨씬 뛰어났었는데, 내가 조금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잘못 나를 떠받들어 스승의 도로 높였다.
돌이켜 보면 나의 바탕은 노둔하고 학문은 거칠어서 그대가 대우하는 것에 만분의 일도 감당할 수 없었지만, 그대의 정밀한 소견과 깊은 조예의 성취를 크게 사랑하여 나이가 많고 적은 것을 잊은 채 기꺼이 서로 스승으로 삼았다.
나는 어려서부터 율곡(栗谷)과 구봉(龜峯) 두 분 선생을 모셨으나 이미 선생을 잃고 나서는 외로이 지내며 학문을 논할 사람이 없는 것을 한탄하였는데, 그대를 만난 뒤로는 얻은 바가 있는 듯하여 항상 말하기를, “이 세상에 학문에 뜻을 둔 사람을 보지 못하였는데 오늘에야 만났다.” 하고, 의심이 나면 질문하고 읽은 것은 강론하면서 서로 사이가 더욱 깊어져 가장 으뜸가는 공부를 하려고 다짐하였다. 내가 그대를 대함이 이와 같았을 뿐 아니라, 그대의 나에 대한 바람 또한 그러했을 것이다.
나는 그대보다 나이가 20세나 더 많아서 근력이 노쇠하고 지기(志氣)마저 나태해졌기에, 어느 날 문득 먼저 죽어 그대의 바라는 뜻을 저버리게 될까 항상 두려워했는데, 그대가 갑자기 나를 버리고 먼저 떠나가리라고 누가 생각이나 했겠는가.
지난봄 그대가 나를 찾아왔었고 그후 봄과 여름이 바뀌는 계절에 서신을 주고받았는데, 그대의 죽음은 7월 보름께 있었다. 그 사이가 3개월이 채 되지 않으니, 사람 일의 변화무쌍함이 이렇게까지 급작스러운 것인가. 나는 그대와 사는 곳이 그다지 멀지 않다. 그래서 간혹 서로 만나지 못하더라도 나의 생각에는 머지않아 다시 만날 것이고 만일 우환이 있으면 서로 알려 줄 것이라고 여겨 왔다. 이런 까닭에 집안에 농사일이 많아서 때때로 서로 방문하지 못하였는데, 참으로 갑자기 떠날 줄 알았다면 어찌 지팡이를 짚고서라도 한 차례 찾아가 영결을 고하지 않았겠는가. 그대의 죽음은 조석에 갑자기 있었던 것이 아니라 여러 달 동안 병환으로 몸져누웠던 것인데, 몇십 리의 거리에서 서로 알리지 않았던 것은 무엇 때문인가? 그대가 나를 부형처럼 생각하였는데 나는 그대를 친자식처럼 생각하지 못하였으니, 슬픈 마음을 이길 수 있겠는가.
지난해 어쩌다 그대의 머리털이 갑자기 하얗게 센 것을 보고서 이상히 여겨 말하였더니, 그대가 “요사이 기력이 갑자기 쇠퇴하니 오래 살지 못할 듯합니다.” 하였고, 여느 서찰에서도 누차 이를 언급하였지만, 나는 흔히 있는 일이라 여기고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아, 슬프다. 결국 이 때문에 죽은 것인가. 그대는 자기의 기력을 증험하여 먼저 알았던 것이다. 아, 슬프다. 그대가 지금 정말 죽었단 말인가. 그대의 재주와 학문은 장차 그 성취되어 나아갈 바가 큰데 갑자기 중도에서 요절하였단 말인가. 그대처럼 어질고 능력 있는 사람이라면 마땅히 하늘의 도움을 받을 법한데 그 보답을 받지 못하였단 말인가. 어찌하여 하늘은 수명의 후박(厚薄)과 여탈(與奪)을 백성들과 전혀 달리한 것일까.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대는 살아 있을 적에 마음가짐과 행한 일이 옛사람에게 부끄러운 바 없고 온전한 몸으로 태어났다가 온전한 몸으로 돌아갔으니 그대에게야 무슨 슬픔이 있겠는가. 오직 그대의 아름다운 바탕과 해박한 학문은 벗들이 잊기 어렵고 말세에 얻기 어려운 것이었다. 머나먼 길의 이 무거운 짐을 누구와 더불어 함께할 것인가. 삼분 오전(三墳五典)의 의문나는 점을 누구와 더불어 질정할 것인가. 말하여도 듣지 못하고 불러도 대답이 없으니, 이것이 내가 길이 통곡하고 길이 그리워하는 마음을 떨치지 못하는 이유이다. 오직 옛적에 들은 것을 수습하고 경전의 가르침을 독실하게 지키면서, 노년의 공부를 다하여 그대의 바람을 저버리지 않겠다.
아, 슬프다. 예전에는 강학하고 연마하면서 서로 힘입기를 참으로 사이좋게 하였는데, 이제는 문에 들어가 길이 통곡하여도 어찌 이처럼 아득한 것인가. 웃으며 이별하였는데 통곡하며 문에 찾아왔으니, 온화한 얼굴과 헌칠한 몸을 어느 날에나 다시 볼 수 있으며 어느 날에나 잊을 수 있을까. 한 잔 술을 올리나니 그대의 넋은 아는가 모르는가.
사계전서 제6권             
                                                                      
 묘갈명(墓碣銘)
석계 처사(石溪處士) 최군(崔君) 명룡(命龍) 묘갈명 병서(幷序)

내가 여윤(汝允)을 잃은 이후로 실로 하늘이 나를 망하게 한 듯한 애통함이 있어 한 해가 지나도록 그 슬픔을 떨치지 못했는데, 지금 그의 무덤에 풀이 자랐다가 시든 것도 벌써 여섯 번째이다. 그의 제자들이 머지않아 묘소에 비를 세우고자 나에게 묘갈명을 청하였다. 아, 슬프다. 내 어떻게 차마 그의 묘갈명을 지을 수 있겠는가마는, 또한 어떻게 그들의 청을 사양할 수 있겠는가.
여윤(汝允)의 이름은 명룡(命龍)이며 여윤은 그의 자(字)이고, 본관은 완산(完山)이다. 시조 아(阿)는 고려 시중(侍中)이며 그 후에도 대대로 저명한 인물이 있었다. 조부 순성(順成)은 성균관 사예(成均館司藝)이고 부친 위(渭)는 단성 현감(丹城縣監)이며 모친 광주 안씨(廣州安氏)는 현감 안경우(安景佑)의 딸이다.
여윤은 나면서부터 여느 아이들보다 남달리 빼어났다. 나이 12세에 부친 단성공(丹城公)의 상을 당하였는데, 성인(成人)처럼 상례를 집행하여 고을 사람들이 그를 칭찬하고 기특하게 여겼다. 상을 마치고서는 개연(慨然)히 도(道)를 구하려는 뜻을 품고서 같은 고을에 사는 처사 이정기(李廷麒)가 학행이 있다는 말을 듣고 찾아가 스승으로 섬기기를 청하니, 이공(李公)이 그의 뜻을 기특하게 여겨 그를 오라고 하여 가르쳤다. 그곳에 머문 지 얼마 안 되어 경전과 역사를 모두 통달하였다. 이공은 언제나 공을 보면 기뻐하여 크게 웃으면서 말하기를, “내가 너를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네가 나를 가르친다.” 하였다.
여윤은 어린 나이에도 사람을 알아보는 식견이 남보다 뛰어났다. 역적의 괴수 정여립(鄭汝立)이 바야흐로 명성을 도적질하고 있을 때의 일이다. 정여립의 부친 정희증(鄭希曾)이 평소 여윤의 부친 단성공과 사이가 좋았는데, 일찍이 여윤에게 말하기를, “너는 어째서 우리 집 아이와 교유(交遊)하지 않느냐?” 하였지만, 여윤은 겸손하게 사양하고 끝까지 가지 않았다. 훗날 정여립은 대역죄인으로 주벌을 당하였다.
신광문(申廣文) 중경(重慶)은 역학(易學)에 심오하고 산수(算數)까지 통달하였는데, 여윤이 《역학계몽(易學啓蒙)》을 배우기를 청하자, 신공이 허락하지 않고서 말하기를, “처음 배우는 사람은 쉽게 읽을 수 없으니, 우선 서서히 뒤에 배우도록 하라.” 하였다. 여윤이 물러나 스스로 《역학계몽》 및 산법(算法)을 구하여 읽고서 마침내 심오한 뜻을 통달하였다.
모친 안씨의 상을 당하여 상례와 슬픔을 지극히 다하였으며 묘소 곁에 움막을 치고서 3년 동안 산 밖의 길을 밟지 않았다. 멀고 가까운 곳에서 많은 학자들이 찾아와, 예서(禮書)를 읽고 난 여가에 정성스럽게 그들을 가르치면서 많은 서적을 널리 섭렵하였지만 그 중에서도 더욱 사서(四書) 및 정자(程子), 주자(朱子) 등 여러 선생들의 학설에 정통하였다. 하루 종일 반듯하게 앉아서 머리 숙여 글을 읽고 머리 들어 생각하였다. 평상시 거처할 적에는 남들이 보지 않는 어두운 방에 있을지라도 반드시 의관을 바르게 하고 부사(父師)를 마주하듯이 엄숙히 하여 조금도 게으름을 피우지 않았다.
일찍이 문생(門生), 지우(知友)와 함께 책을 싣고서 변산(邊山) 어느 절에 들어가 10년 동안 나오지 않고서 천하의 이치를 탐구하기로 다짐을 하였는데, 때마침 임진왜란을 당하여 나오게 되었다. 그 이듬해 행조(行朝 행재소(行在所))로 달려가 우계(牛溪) 성 선생(成先生)과 더불어 이야기를 하였는데, 우계는 여윤을 보고서 감탄하기를, “우리의 도를 전할 사람이 있다.” 하였으며, 내가 금마 군수(金馬郡守)로 있을 때 여윤이 관아로 찾아왔었는데 용모와 거동이 장엄하고 엄숙하였으며 논의가 명백하여 연원(淵源)이 있었다. 나는 서로의 만남을 매우 기뻐하고서 늦게 만난 것을 한스럽게 여겼다. 그 후로 자주 오가면서 서로 더불어 의리를 강마(講磨)하였다. 나는 어려서 율곡 선생(栗谷先生)께 학문의 대강을 들었는데, 선생이 돌아가신 후로는 의지할 곳 없이 외롭게 지내 글을 읽어도 함께 의논할 사람이 없었다. 그러다가 여윤을 만난 이후로는 의심스럽고 분명하지 못한 부분을 물으면 곧바로 깨우쳐 주곤 하였다. 나는 실로 유익한 벗 얻은 것을 다행으로 여겼는데, 여윤은 나에게 지나치게 공손하다 싶을 정도로 예의를 지켰다.
여윤은 어려서부터 지나치게 공부한 나머지 몸이 수척하였는데, 신유년(1621, 광해군13)에 전주(全州) 석계리(石溪里) 본가(本家)에서 죽으니 향년 55세였다. 그해 모월 모일에 전주 땅 모향(某向) 언덕에 안장하였다.
여윤은 타고난 바탕이 매우 고상하였으며 그 몸가짐과 행동거지가 행하는 일마다 법도에 맞았다. 새벽에 일어나면 반드시 가묘(家廟)에 참배하였고, 계절 따라 새 음식이 있으면 사당에 올리기 전에는 먹지 않았으며, 시마(緦麻)와 소공(小功), 대공(大功)의 친척까지도 상복을 다 벗은 후에야 안방에 들어갔으며, 이 처사(李處士)가 죽자 심상(心喪)으로 삼년복을 입었다.
그의 학문은 지극히 해박하면서도 요약한 데로 귀결되었는데, 그러고도 여가가 있어서 음양(陰陽), 방기(方技), 노불(老佛)의 책까지도 그 뜻을 탐구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입에서 나오는 대로 읽을지라도 한 번도 막힌 적이 없었으며 문장을 지을 적에는 붓을 잡으면 곧바로 써 내려갔다. 문장의 뜻을 이야기할 적에는 전대의 전고(典故)에 분명하고 막힘이 없어 마치 강하(江河)의 물이 터진 듯하여 듣는 사람들은 기뻐하여 피곤한 줄을 몰랐다. 해평(海平) 윤 상공(尹相公)이 일찍이 그의 학문을 시험해 보고서 감탄하고 칭찬하며 따라갈 수 없다고 하였다.
그러나 여윤은 악한 이를 너무 심하게 미워하여 남들에게 선하지 못한 것이 있다는 말을 들으면 마치 자기 몸까지 더럽힐 것처럼 멀리하였고, 시세(時世)에 분개하고 사악한 이를 미워하여 항상 뜻을 함께하는 이들과 시사(時事)를 말할 적에는 그의 목소리와 얼굴빛이 준엄하여 사람들이 모두 경건하게 들었다. 일찍이 생원시(生員試)에 급제하여 정시(庭試)에 응시하였을 적에 전상(殿上)의 한 고관(考官)을 쳐다보니, 당시에 이름난 재상이었다. 그러나 여윤이 평소 그 사람됨을 미워하였기 때문에 고의로 식례(式例)를 어겨서 마침내 급제하지 못하였다. 그의 지조와 절개가 대체로 이와 같기에, 세속 사람들이 크게 시기하였다. 그러나 여윤을 알아보고 칭찬한 사람들은 모두 현인 군자였다.
덕수 이씨(德水李氏)를 부인으로 맞이하여 아들 거(勮)를 낳았고 측실(側室)이 낳은 아들은 정길(正吉)인데, 모두 문장과 행의(行誼)가 있다. 딸은 관찰사 송영구(宋英耉)의 아들에게 출가하였다.
아, 슬프다. 나는 늙고 또 죽을 때가 다가와 모든 생각이 다 사라졌지만 마음속에 잊지 못한 것은 여윤과 함께 이 일을 마치려고 생각했었는데 이제는 이미 끝나버린 일이다. 마침내 눈물을 닦고서 명을 쓰는 바이다.
그 명(銘)은 다음과 같다.

어쩌면 그렇게 정결할까 / 何其貞也
옥처럼 눈처럼 희네 / 玉雪之白
어쩌면 그렇게 풍부할까 / 何其富也
운몽처럼 쌓였어라 / 雲夢之蓄
모두 거두어 안장하니 / 斂焉藏之
그 묘소 삼척이어라 / 其封三尺
그 덕을 아는 자는 / 有知德者
이곳을 지나면서 반드시 허리 굽히리라 / 過此必軾


[주D-001]운몽(雲夢) : 옛 늪의 이름이다. 한(漢)ㆍ위(魏) 이전에는 운몽의 범위를 그다지 크게 지칭하지 않았었는데, 진대(晉代) 이후의 경학가(經學家)들이 동정호(洞庭湖)까지 그 속에 포괄하여 말하였다.
沙溪先生遺稿卷六원문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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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墓碣
石溪處士崔君墓碣銘 幷序 a_057_077c



自余失汝允。實有喪予之慟。逾年而悲不解。今其墓草已六宿矣。其徒將有樹于塋域。請余銘焉。嗚呼。余何忍爲。亦何可辭。汝允名命龍。汝允其字也。完山人。鼻祖阿爲高麗侍中。其後世有顯人。祖順成。成均館司藝。考渭。丹城縣監。母廣州安氏。縣監景佑之女。汝允生。穎秀異凡兒。年十二。遘丹城公之喪。秉禮如成人。鄕閭稱異之。服闋。慨然有求道之志。聞同郡處士057_077d李廷麒有學行。往請師焉。李公奇其意。進而敎之。居無幾。悉通經史。李公每見公。輒欣然解頤曰。非我敎汝。乃汝敎我也。汝允雖童年。鑑識過人。逆魁汝立。方盗僞名。其父希曾。素與丹城公善。嘗屬汝允曰。小子盍從吾兒遊乎。汝允巽謝。終不往。後汝立以大逆誅。申廣文重慶。深於易學。兼通算數。汝允請受易學啓蒙。申公不許曰。新學未易讀。姑徐後。汝允退。自取啓蒙及算法讀之。遂通藴奧。居安氏憂。易戚備至。廬於墓側。三年不踐山外道。遠近學者多歸之。讀禮之暇。諄諄指授。博涉群書。尤精於四子及洛閩諸先生語。057_078a終日正坐。俯讀而仰思之。平居。雖處暗室。必整衣冠。肅穆如對父師。未嘗少懈也。嘗與門生知友。載書入邊山僧寺。期十年不出。以窮天下之理。會遘壬辰倭難而出。明年。赴行朝。牛溪成先生與語。歎曰。吾道有人矣。及余守金馬郡。汝允來訪郡齋。容儀莊肅。論議明白有淵源。余相得驩甚。恨相見之晚也。自是往還甚熟。相與講劘義理。余少從栗谷先生。得聞梗槪。先生旣沒。倀倀無所依歸。讀書無與共論者。及得汝允。每問疑晦。輒有開發。余實自幸得益友。而汝允執禮過恭焉。汝允少以攻苦。積羸病。歲辛酉。卒于全州057_078b石溪里舍。年五十有五。以其年某月日。葬于州地某向之原。汝允天資甚高。其飾身制行。動踐榘矱。晨起必參家廟。得時物。不薦則不以入口。緦功之戚。制盡然後復寢。李處士没。爲持心喪三年。其爲學。極博而反于約。餘力所及。陰陽方技釋老之書。無不究其旨。信口而讀。曾無聱牙。爲文詞。操筆立成。其譚說文義。前代典故。明爽條暢。沛然若決江河。聽者娓娓忘倦。海平尹相公嘗叩其學。歎賞以爲不可及。然其惡惡太甚。聞人有不善。若將浼己。憤世疾邪。每與同志。道及時事。聲色峻厲。人皆爲之竦聽。嘗得解。應庭對。057_078c仰視殿上一考官。時名相也。而汝允素惡其爲人。故違式例。竟坐不第。其志槪多類此。大爲流俗所忌嫉。然知汝允稱之者。皆所謂賢人君子也。娶德水李氏。生一男勮。側室子曰正吉。皆有文行。女適觀察使宋英耈之子。嗚呼。余老且死。百念俱盡。所不能忘于懷者。思與汝允共卒此事。今焉已矣。遂雪涕而爲之銘。其辭曰。何其貞也。玉雪之白。何其當也。雲夢之蓄。歛焉藏之。其封三尺。有知德者。過此必軾。