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최씨 시조공에 대한 기록/휘 문도 고려 평장사기록

가정선생이 최춘헌 선생에게 주신 축하시

아베베1 2015. 8. 24. 16:37

 

 

 

 

동문선 제85권 원문  원문이미지  새창띄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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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序)
설곡시서(雪谷詩序)

이제현(李齊賢)

설곡(雪谷) 정중부(鄭仲孚)는 최춘헌(崔春軒)의 사위로, 최졸옹(崔拙翁)에게 수업(受業)하였다. 졸옹은 고항(高亢)하여 사람을 허하는 일이 적고, 춘헌은 점잖아서 자기와 가까운 사람에게 아첨하지 않았는데, 매양 나를 만나면 중부의 어진 것을 칭찬하는 것이다. 나는 이로써 그 인품을 짐작하였다. 중부가 이미 벼슬길에 올라 사한(史翰)을 지냈고, 10년이 못 되어서 간의대부(諫議大夫)에 제수되어, 외직으로 나가 울주(蔚州)의 원이 되어 선정(善政)이 있었다. 그래서 떠날 때에 백성이 늙은이를 부축하고 어린애를 이끌고 나와 수레를 붙들며 눈물짓는 것을 막아낼 수가 없었다. 그후 국표(國表)를 받들고 중국에 갔는데, 승상(丞相) 별가보화(別哥普化)가 중히 여겨 장차 천자에게 추천하려 하였으나 중부가 병들어 일어나지 못했다. 아들 추(樞)가 영구를 받들고 본국으로 돌아오니, 듣는 자마다 경탄하고 애석하지 않는 이 없었다. 아, 옛날에 재주 있고 수(壽)하지 못한 자로 당(唐) 나라의 이장길(李長吉), 송(宋) 나라의 형돈(邢敦)이 있었는데, 그 두 사람 역시 백성에게 사랑을 받고, 대인(大人)에게 소중히 보인 것이 우리 중부와 같았는가. 그렇다면 동방의 선비가 중부의 불행을 두고 경탄하며 애석하는 것이 더욱 당연하다 하겠다. 저술한 시문(詩文) 약간 편을 추(樞)가 편집하여 전후집 2권을 만들었다. 얻어보고 슬프게 여겨 세 번 읽은 뒤 졸문(拙文)을 그 서두에 써서 정씨에게 돌린다. 추는 지금 도관낭중(都官郞中)으로 있는데, 실은 나의 문생(門生)이다.

 

 

 

 가정집 제16권 원문  원문이미지  새창띄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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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율시(律詩)
최춘헌(崔春軒)이 새로 전법 판서(典法判書)에 임명된 것을 축하하는 시를 지어 부치다

 


남포에서 한가로이 이십 년 세월을 보내면서 / 南浦閑居二十年
꿈속에서도 명리 쪽엔 관심을 두지 않으신 분 / 夢魂不到利名邊
판서는 제조의 중망인에게 돌아가는 직책이요 / 判書望重諸曹選
봉익은 이품의 반열에 서는 고위 관계(官階)라 / 奉翊官高二品聯
지금의 일을 어찌 가볍게 손댈 수 있으리까 / 時事豈堪輕出手
후생이 또 어깨를 감히 나란히 하게 됐나이다 / 後生聊復與齊肩
춘헌기를 어떻게 써서 부쳐야 할는지요 / 何當寫寄春軒記
출처가 지금껏 우연의 소산일 뿐이외다 / 出處從來只偶然


 

[주C-001]최춘헌(崔春軒) : 춘헌은 최문도(崔文度 : ?〜1345)의 호이다. 한국문집총간 3집에 수록된 《가정집》 권2에 〈춘헌기(春軒記)〉가 실려 있다.

 

 

 동문선 제124권 원문  원문이미지  새창띄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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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묘지(墓誌)
광정대부 첨의참리 상호군 나공 묘지명(匡靖大夫僉議參理上護軍羅公墓誌銘)

이제현(李齊賢)

지정(至正) 4년 갑신(1344, 충혜왕 복위 5년) 8월 기축일에 광정대부 첨의 참리(匡靖大夫僉議參理) 나공(羅公)이 죽으니, 왕이 유사에게 명하여 조상하고, 양절(良節)이라는 시호를 내려주었다. 그해 11월 경인일에 예로써 송림현(松林縣) 약사원(藥師院) 북쪽 둔덕에 장사지냈다.
공의 휘는 익희(益禧)요, 본관은 나주(羅州)인데 삼한공신 대광(三韓功臣大匡) 휘 총례(聰禮)의 11대 손이다. 증조의 휘는 효전(孝全)인데 원 나라에서 증직(贈職)한 태중대부 예부상서 지도성사(太中大夫禮部尙書知都省事)이며, 조부의 휘는 득황(得璜)이며, 원 나라 벼슬로 금자 광록대부 수사공상서 좌복야 판호부사(金紫光祿大夫守司空尙書左僕射判戶部事)로 치사(致仕)하였다. 원 나라 벼슬로 회원대장군 관군상만호 봉익대부 지밀직사사 군부판서 상장군 세자원빈(懷遠大將軍管軍上萬戶奉翊大夫知密直司事軍簿判書上將軍世子元賓) 휘 유(裕)는 공의 아버지가 되고, 원 나라 벼슬로 은청광록대부 동지추밀원사 병부상서 상장군(銀靑光祿大夫同知樞密院事兵部尙書上將軍)을 지낸 조씨(趙氏) 휘 문주(文柱)의 딸 □□군부인(郡夫人)은 공의 어머니가 된다. 한림직학사 조열대부 삼중대광 판도첨의사사(翰林直學士朝列大夫三重大匡判都僉議司事)를 지낸 묵헌 선생(黙軒先生) 민지(閔漬)의 딸에게 장가들어 남녀 2명을 낳았다. 딸은 봉익대부 동지 밀직사사 상호군(奉翊大夫同知密直司事上護軍) 최문도(崔文度)에게 출가하였고, 아들은 영걸하여 지금 봉익대부 밀직부사 상호군(奉翊大夫密直副使上護軍)이다. 공은 본래 장수집 아들로서 어려서부터 무예를 익혔고 독서는 하지 않았으나, 천성이 개결하고 절의를 사모하며 남들과 다투는 일을 부끄러워하였다. 모부인(母夫人)이 가산을 나눌 적에 40명이나 되는 노비를 특별히 물려주니, 공이 사양한다면서 말하기를, “외아들로서 다섯 딸 가운데 거하여 어찌 차마 구차스럽게 많이 얻어 자식 많이 두신 부모님이 어지신 데에 누가 되게 하겠습니까.” 하니, 부인이 옳게 여겨 허락하였다. 나이 17세에 황조(皇朝)의 선명(宣命)을 받아 금부(金符)를 차고 상천호 회원(上千戶懷遠)이 되었다. 나중에 작위를 이어받아 관군 상만호(管軍上萬戶)가 되었는데, 계품은 호덕장군(虎德將軍)으로 삼주호부(三珠虎符)를 찼다. 충렬왕(忠烈王) 말년에 신호위 호군(神虎衛護軍)으로 삼아 금자어 첨의중사(金紫魚僉議中事)를 내려주었다. 덕릉이 구폐(舊弊)를 혁신하면서 조정의 신하들을 모두 파직시켜 쫓아내면서도 홀로 낭관 지위에 있는 공만은 머물러 있도록 하였다. 그때는 임금의 명이 한번 내리면 백관이 시키는 대로 거행하고 혹시라도 미치지 못할까 두려워하였는데, 공은 법을 지켜 위의 지시에 따르지 않고 봉박(封駮)하는 일이 많으니, 높은 지위에서 권세 있는 자들이 곁눈질로 밉게 여기고 혹 위태로운 말로 흔들었으나 요동하지 않았다. 이로 인하여 낙직된 지 10년만에 바야흐로 검교 상호군(檢校上護軍)이 되고, 7년만에 감문위 상호군(監門衛上護軍)으로 옮겼다가 천우위 겸중문사(千牛衛兼中門使)로 전직하고, 또 좌상시(左常侍)로 바뀌었으며, 세 번 전직하여 광정대부 상의평리(匡靖大夫商議評理)가 되었고, 금성군(錦城君)에 봉하였다. 나이 57세에 아들에게 작위를 물려주고, 한가히 집에 있은 지 또한 17년이 되었다. 항상 민생의 고락과 인재를 쓰고 버리는 일을 생각하면서, 뒷짐을 지고 찡그린 얼굴로 혼자서 정원을 다니었는데 남모르는 근심이 있는 듯하였다. 일찍이 계림(鷄林) 부윤을 한 번 지냈고, 합포진장(合浦鎭將)을 세 번 하였는데, 청렴하고 부지런하며 사랑하고 은혜로워 남쪽 지방의 사람들은 지금까지 공의 공덕을 칭찬하고 있다. 지금 임금이 이어 정사하자 다시 기용하여 첨의참리(僉議參理)로 삼으니 세상에서 말하는 5재상이다. □얼굴이 매우 야위고 귀가 자못 어두웠으나, 일에 임하면 강개하여 조금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하루는 판삼사사(判三司事) 이제현(李齊賢)에게 말하기를, “우리 임금이 어려서 정사를 재상에게 맡겼는데, 저 자격 없는 자들이 지난 날 잘못을 경계하지 못하니, 나는 책임을 지고 물러나서 함께 여러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받는 자가 되지 않으려고 하는데, 공은 어떻게 생각하오?” 하니, 제현은 말하기를, “내가 전에 두세 가지 계책으로 집정하는 자를 효유하였으나, 시행을 보지 못하여 항상 부끄러워하면서도 용단성있게 물러나지 못하였으니, 감히 공의 말에 좇지 않겠소.” 하였다. 그후 10일이 되어 공이 병으로 물러나겠다고 한다는 말을 듣고, 혼자 생각으로는 전일의 계획을 수행하려고 하는 것이라고 했는데, 아, 어찌 마침내 일어나지 못할 줄 알았는가. 급히 가서 조곡(弔哭)하고 물러나왔는데, 아들과 사위들이 잇달아 나의 집에 와서 변변치 못한 글을 청하니, 장차 돌에 새겨 광중에 넣으려 하는 것이다. 의리에 사양할 수가 없어서 부탁을 받아들여 명문을 짓고, 명일에 상서하여 관직을 사면하니, 죽고 사는 데에서 공의 말을 저버리지 않으려 함이다. 명문에,

관장되어 은혜롭고 / 爲官惠慈
장수되어 청렴이라 / 爲將廉恥
다만 의리를 구했을 뿐 / 惟義之求
권리에 겁내지 않았도다 / 不怵勢利
타고난 자질 능하여서 / 由稟受能
배우지 않고도 잘 이루었으니 / 匪學以致
활촉 끼고 깃 달았다면 / 鏃而羽之
그 행적 여기에만 그쳤으리 / 入不此止
보잘것 없는 내가 / 顧子何人
늦게 욕되이 지기가 되었으니 / 晚辱知己
감히 언약 저버리고 / 敢負一言
공이 죽었다고 말할 것인가 / 而謂公死

하였다.

[주D-001]봉박(封駁) : 고려 시대의 내사(內史)ㆍ문하(門下) 성(省)은 왕의 조서 칙명을 심의 공포하는 일도 맡았다. 따라서 임금의 조서 칙명이라도 그 내용이 적당하지 못한 것이 있으면 그대로 공포하지 않고 다시 봉하여 임금에게로 올리는데, 이것을 봉박(封駁)이라고 하였다.

 

 

 

 가정집 제9권 원문  원문이미지  새창띄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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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序)
최 시승(崔寺丞)이 등제(登第)한 것을 축하한 시의 서문

 


인재를 뽑는 제도가 시행된 지 오래되었다. 그 과목을 늘리고 줄인 것은 시대에 따라 같지 않았다고 할지라도, 인재를 빈객으로 예우하고 작록을 수여하면서 문호(文虎 문신과 무신)로 임용한 것은 일찍이 다른 적이 있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당초에는 육예(六藝)가 삼물(三物)의 하나를 차지하면서 사(射)와 어(御)도 그 속에 들어 있었던 것인데, 후세에 와서 호예(虎藝 무예)의 과가 별도로 설치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문호의 경로를 통하지 않고 들어와서 벼슬하는 자들을 이(吏)라고 하였으니, 이는 대개 고대에 도필(刀筆 문서 기록)의 임무를 맡은 사람들이었다. 이렇게 해서 벼슬하는 길이 마침내 셋으로 나뉘게 되었다.
그리고 그 뒤로는 각 시대마다 숭상하는 풍조에 따라서 경중의 차이가 있게 되었다. 그렇지만 당(唐)나라 진신(搢紳)의 경우에는 인신(人臣)으로서 최고의 지위에 이르렀다고 할지라도 진사과(進士科)의 고시를 거치지 않은 자들은 그다지 대단하게 여기지 않았으며, 송(宋)나라의 전성기에 이르러서는 이 과거 출신자들을 특히 더 중시하였다.
본국은 당나라와 송나라의 제도를 본받아 대대로 문사(文士)를 존중해 왔다. 그리하여 시종(侍從)과 헌체(獻替)의 관직이나 선거(選擧)와 전사(銓仕)의 직책 등은 실제로 문사들이 모두 독점하였고, 호반(虎班)이나 이속(吏屬) 등은 감히 이 자리를 쳐다보지도 못하였다. 그런데 더구나 지금은 성스러운 원나라가 문치를 숭상하여 과거에 대한 조칙을 거듭 내리고 있는 때인데야 더 말해 무엇 하겠는가. 그래서 글공부를 하는 선비들이 있는 힘을 모두 발휘하고 용맹심을 한껏 과시하며 서로 다투어 기예를 다투는 시험장에 나아가 실력을 겨루려 하고 있는 것이다.
지원(至元) 6년(1340, 충혜왕 복위 1) 겨울에 삼사사(三司使) 김공(金公 김영돈(金永旽))과 전법 판서(典法判書) 안공(安公 안축(安軸))이 춘관(春官 예조(禮曹))에서 인재를 선발하였는데, 이때 춘헌(春軒 최문도(崔文度)) 최공(崔公)의 아들 예경(禮卿 최사검(崔思儉))이 그 시험에 급제하였다. 최공은 손님을 좋아하기로 동방에서 제일가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축하하려고 찾아오는 사람들의 어깨가 서로 부딪칠 정도였다.
내가 춘헌에게 나아가 축하한 다음에 물러 나와 예경에게 말하기를,
“과거에 등제하려고 하는 것은 벼슬길에 오르려고 해서이다. 본국의 옛날 제도를 보건대, 관직이 일단 6품에 이른 자는 더 이상 유사에게 나아가서 시험을 보지 못하게 했다. 그대는 일찍이 낭장(郞將)을 거쳐 감찰 규정(監察糾正)을 겸임하였고 전객시 승(典客寺丞)에 전임되었으며, 나이도 한창 장년(壯年)으로서 날로 발전해 마지않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대는 근래의 규례를 원용하여 백의의 무리와 함께 과거 시험장에서 붓과 종이를 희롱하였다. 그대는 장차 녹명(鹿鳴)의 노래를 부르고는 계해(計偕 연경(燕京)의 회시(會試) 응시생들)와 함께 천자의 뜰에 나아가서 대책을 묻는 시험 문제를 쏘아 맞히려고 하는 것인가? 그대는 장차 헌체하여 우리 임금의 허물을 보완하고 아름다운 점을 받들어 따르려고 하는 것인가? 그대는 장차 전선(銓選 인사 행정)에 참여하여 사류(士流)를 품평하면서, 혹 꾸짖고도 벼슬을 주고 혹 웃고도 주지 않는 일을 하려고 하는 것인가? 아니면 호부(虎夫)가 호기를 부리며 함부로 행동하는 것을 괴롭게 여기고, 이원(吏員)이 정신없이 경쟁하며 이익을 추구하는 것에 징계된 나머지, 우리 유자(儒者)의 오활한 점에 몸을 기대고서 사림(詞林)이나 취향(醉鄕)으로 달아나 스스로 숨으려고 하는 것인가?”
하니, 예경이 말하기를,
“그렇지 않다. 임금을 섬기고 어버이를 섬기는 것에 대해서는 원래 가훈이 있다. 하지만 부귀와 이달(利達) 같은 것은 구하는 데에 방법이 있고 얻는 데에 명이 있는 것이니 내가 어떻게 하겠는가. 우리 집안은 예부공(禮部公) 휘 균(均) 이하로부터 서로 잇따라 5대에 걸쳐서 등제하였다. 그리고 예부공의 아들인 문정공(文定公) 휘 보순(甫淳)은 충헌왕(忠憲王 고종(高宗))의 명상(名相)으로서 네 차례나 예위(禮圍 과거 시험)를 관장하였고, 조부 문간공(文簡公 최성지(崔誠之))은 또 덕릉(德陵 충선왕(忠宣王))의 재상으로서 문형(文衡)을 주관하였다. 그러다가 존공(尊公 부친) 때에 와서는 어려서 국자제(國子弟 왕세자와 공경대부의 자제)를 따라 천조(天朝)에서 숙위(宿衛)하였기 때문에 과거 공부를 할 겨를이 없었다. 그래서 일찍이 조모 김씨(金氏)가 나의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이르시기를 ‘네가 과거에 급제하여 가업을 회복하는 것을 본다면 여한이 없겠다.’라고 하신 것이다. 자애로운 그 모습은 지금 뵐 수 없게 되었어도 그때 해 주신 말씀은 아직도 귀에 남아 있다. 이것이 바로 내가 구구하게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이다.”
하였다.
내가 이 말을 듣고는 의롭게 여겨지기에 술잔을 들어 권하면서 말하기를,
군자의 가르침을 보면, 옛날로 회귀하여 시조를 추모하게 하였으니, 이는 대개 자기가 태어난 근원을 잊지 않게 하려고 한 것이다. 그런데 더군다나 부지런히 배우기를 좋아하면서 기필코 가업을 이으려고 하는 자의 경우야 더 말해 무엇 하겠는가. 뒷날에 입신양명할 것을 이를 통해서 알 수가 있겠다. 사람들은 거자가 올해 주사(主司)를 제대로 만났다고 하지만, 내 생각에는 주사가 올해 거자를 제대로 얻었다고 여겨지는데, 이는 예경을 보면 충분히 그렇게 말할 수가 있다.”
하였더니, 객들도 모두 그렇다고 하고는 각자 시를 짓고 나서 나의 말을 시권(詩卷)의 첫머리에 적어 넣게 하였다.


 

[주D-001]인재를 빈객으로 예우하고 : 주(周)나라 때에 향대부(鄕大夫)가 소학(小學)에서 현능(賢能)한 인재를 천거할 적에 그들을 향음주례(鄕飮酒禮)에서 빈객으로 예우하며 국학(國學)에 올려 보낸 것을 말한다. 《주례(周禮)》 지관(地官) 대사도(大司徒)에 “향학(鄕學)의 삼물 즉 세 종류의 교법(敎法)을 가지고 만민을 교화한다. 그리고 인재가 있으면 빈객의 예로 우대하면서 천거하여 국학에 올려 보낸다. 첫째 교법은 육덕이니 지ㆍ인ㆍ성ㆍ의ㆍ충ㆍ화요, 둘째 교법은 육행이니 효ㆍ우ㆍ목ㆍ연ㆍ임ㆍ휼이요, 셋째 교법은 육예이니 예ㆍ악ㆍ사ㆍ어ㆍ서ㆍ수이다.〔以鄕三物敎萬民而賓興之 一曰六德 知仁聖義忠和 二曰六行 孝友睦婣任恤 三曰六藝 禮樂射御書數〕”라는 말이 나온다.
[주D-002]진사과(進士科) : 조선 시대의 문과(文科)와 유사한 형태의 과거 제도이다. 참고로 《고금사문유취(古今事文類聚)》 전집(前集) 권26 사진부(仕進部) 중진사과(重進士科)에 “진사과는 수나라 대업(大業) 연간에 시작되어, 당나라 정관ㆍ영휘 연간에 전성기를 맞았다. 인신(人臣)으로서 최고의 지위에 이르렀다고 할지라도 진사과의 고시를 거치지 않은 자는 그다지 대단하게 여기지 않았다. 사람들이 급제자들을 추중하여 백의 경상이라고 하였으니, 이는 백의의 신분에서 경상의 지위에 나아갈 수 있는 바탕이 되기 때문이었다.〔進士科始隋大中 盛貞觀永徽之際 縉紳雖位極人臣 不由進士者 不以爲美 其推重謂之白衣卿相 以白衣之士卽卿相之資也〕”라는 말이 나오는데, 가정이 본문에서 이 글의 일부분을 그대로 인용해서 쓰고 있다.
[주D-003]헌체(獻替) : 행해야 할 일을 진헌(進獻)하고 행해서는 안 되는 일을 폐지하도록 임금에게 건의한다는 헌가체부(獻可替否)의 준말로, 중대한 국사를 조정에서 의논하는 것을 말한다.
[주D-004]녹명(鹿鳴) : 《시경》 소아(小雅)의 편명으로, 본래는 임금이 신하를 위해 연회를 베풀며 연주하던 악가(樂歌)인데, 후대에는 군현의 장리(長吏)가 향시에 급제한 거인(擧人)들을 초치하여 향음주례(鄕飮酒禮)를 베풀어 주며 그들의 전도를 축복하는 뜻으로 이 노래를 불렀다.
[주D-005]임금의 …… 것인가 : 《효경(孝經)》 사군(事君)에 “군자가 임금을 섬김에, 나아가서는 충성을 다할 것을 생각하고 물러나서는 허물을 보완할 것을 생각하여, 임금의 아름다운 점은 받들어 따르고 임금의 잘못된 점은 바로잡아 구제한다.〔君子之事上也 進思盡忠 退思補過 將順其美 匡救其惡〕”는 공자의 말이 나온다.
[주D-006]구하는 …… 것이니 : 《맹자》 진심 상(盡心上)에 “구하는 데에 방법이 있고 얻는 데에 명이 있는데도, 이런 것을 구하려 든다면 꼭 얻는다고 할 수가 없으니, 이것은 구하는 대상이 나 자신의 밖에 있기 때문이다.〔求之有道 得之有命 是求無益於得也 求在外者也〕”라는 말이 나온다.
[주D-007]군자의 …… 것이다 : 제사를 지내는 목적에 대해서 말한 《예기》 제의(祭義)의 내용을 풀어서 인용한 것이다.

 

 

 

 

 

양촌선생문집 제35권 원문  원문이미지  새창띄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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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현사략(東賢事略)
참리(參理) 최문도(崔文度)

 


공의 자는 희민(羲民)이요 호는 춘헌(春軒)인데, 찬성사(贊成事)를 지낸 문간공(文簡公) 성지(誠之)의 아들이다. 문간공은 충선왕의 우대를 받아 기밀(機密)과 전선(銓選)을 20여년 간 맡아 성문이 자자하였으며, 공이 중조(中朝 원의 조정)에 숙위(宿衛)할 적에는 몽고(蒙古) 문자와 말을 익혀서, 고관들과 같이 거처하고 권세 있는 자들과 같이 놀았으되 일찍이 교만하지 않았고 나가서는 무예를 익히고 들어와서는 책을 읽었다. 염계(濂溪 주돈이(周敦頤))ㆍ이정(二程 정호(程顥)ㆍ정이(程頤))ㆍ회암(晦庵 주자(朱子)의 호)의 책을 모두 모아 읽었으며, 밤이 깊어서야 자고 새벽녘에 일어났다. 충선왕이 서번(西藩)으로 귀양갈 적에, 공이 문간공을 모시고 임조(臨洮)로 달려가 위문하였는데, 왕복이 만 리였지만 온화한 몸가짐에 기쁜 얼굴로 더욱 경건하였다. 지치(至治) 연간에 충숙왕이 입조하여 심왕(瀋王)과 서로 논란하여 혁장(鬩墻)의 화(禍) 로 참소가 서로 맞설 적에, 공은 몸으로는 충숙왕을 모셨고 뜻은 그 의(義)를 따라 곧고도 능히 공경하였으니, 피차(彼此)에 유감이 없었다. 어버이의 삼년상을 지내고는 가묘(家廟)를 세우고 죽은 사람 섬기기를 산 사람처럼 하였다. 밀직(密直)에서 첨의까지 올라, 온 나라의 선비들은 공이 요직에 쓰여짐을 기뻐하였으나 하늘이 수명을 주지 않아서 ……원문 빠짐…… 공은 천성이 총명하고 슬기로웠고 또 학문을 좋아하여 격물치지(格物致知)ㆍ수기(修己)ㆍ치인(治人)의 도의 묘체(妙諦)를 깨달아 몸으로 체득하여 남에게 미더움을 받았고, 집에서 행하여 나라에 미쳤으며, 성품은 봄날같이 온화하고 기품은 가을 하늘같이 청고하였으며, 노복(奴僕)들까지도 공이 갑자기 화내거나 기뻐하는 것을 보지 못하였다. 공의 출신(出身)은 유과(儒科)가 아니었으나 선비의 도에 유감이 없었다고 할 수 있다.


 

[주D-001]혁장(鬩墻)의 화(禍) : 형제간의 싸움으로 번진 화. 여기서는 충숙과 심왕의 다툼을 말한다. 《시경(詩經)》 소아(小雅)에 “형제는 집안에서는 서로 다투지만 밖에 나가서는 같이 모욕(侮辱)을 막는다.”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