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최씨의 의병활동/나의고향에대한글

우륵 출생지는 의령군 신반리 (신문기사)

아베베1 2009. 1. 12. 02:47
“우륵 출생지는 의령군 신반리”


가야의 악성 우륵의 고향이 경남 의령군 부림면 신반리라는 주장이 제기돼 학계의 관심을 끌고 있다.

부림문화발전연구회 이사장 김승곤(전 건국대 부총장) 박사는 11일 “삼국사기 제1제사(祭祀) 악(樂) 가운데 가야금조에 우륵이 태어난 곳으로 기록된 성열현은 지금의 부림면 신반리”라고 주장했다.

우륵의 출생지 연구에 관한 학술토론회를 연 김 박사는 “신증 동국여지승람과 세종지리지, 의령현 읍지 등에 따르면 5~6세기 대가야의 한 현으로 추정되는 성열이란 지명은 신이~주오~천천~신번~신반 등으로 변천했다”고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했다.

김 박사는 또 “서기 480년깨 태어난 우륵은 510년께 대가야 가실왕의 명에 따라 가야금곡 12곡을 지었으며 가야가 쇠퇴한 540년께 신라로 망명해 음악활동을 했던 것으로 추정된다”고 말했다.

이날 발표회에는 김태식 홍익대 교수(가야사 연구)가 사회를 맡아 황병기 전 이화여대 교수와 조영제 경상대 박물관장, 이상길 경남대 교수 등이 토론을 벌인 데 이어 황 교수와 심은주 경남국악단장의 가야금 특강과 시연회가 있었다. 의령/김현태 기자manbo@hani.co.kr   한계례 신문기사

 

우륵의 고향’ 결론은 의령?
22일 학술대회 ‘성열현은 의령군 부림면’ 발표
제천·고령·거창설 등 분분…논란 끝낼지 주목
한겨레 최상원 기자기자블로그
가야금을 만든 ‘악성’ 우륵은 어디 출신일까?

<삼국사기>는 우륵을 ‘성열현 사람’으로 기록했다. 하지만 성열현이 오늘날의 어딘지는 불분명하다. 학계는 그동안 대구 동구, 충북 제천시 청풍면, 경북 고령군 고령읍, 경남 거창군 가조면, 경남 의령군 부림면 등을 거론했다. 이에 이들 지방자치단체들은 저마다 행사를 열거나 시설을 갖춰 그를 ‘우리 사람’으로 못 박으려 애써왔다.

악사 우륵의 출신지를 밝히는 학술대회가 22일 경남 의령군청 대회의실에서 열린다. 우륵문화발전연구회가 여는 이날 행사에서는 유력한 우륵 출신지를 제시할 예정이어서 눈길을 끈다. 바로 경남 의령군 부림면이다.

김태식 홍익대 교수는 미리 배포한 발표문에서 “<삼국사기> <일본서기> 등의 고서를 종합해 볼 때 성열현은 6세기 중엽 이전까지 가야 영역에 속했으나, 644년에는 백제, 647년에는 신라의 영토였던 곳으로, 후기 가야연맹에 속했던 소국인 ‘사이기국’을 가리키는 것”이라며 “사이기국이 있었던 곳이 경남 의령군 부림면이라는 학설이 가장 개연성이 높다”고 주장했다. 백승충 부산대 교수도 “사이기국은 의령군 부림면에 있었던 소국으로, 가야세력과 신라·왜 등의 다양한 문화를 수용하면서 발전했으나 6세기 전반 신라·백제의 영향력 확대로 독자성을 잃었고 결국 신라에 병합됐다”고 밝혔다.

김상철 의령박물관 학예사는 “이번 학술대회가 학문적 논쟁을 불러일으킬 가능성도 있지만 정확한 문헌기록이 남아 있지 않기 때문에 결국 가장 설득력을 얻는 학설이 정설로 인정될 것”이라며 “쉽지는 않지만 반드시 정리할 필요가 있는 분야”라고 말했다.

대가야의 악사였던 우륵은 가실왕의 명령으로 가야금과 12곡을 만들었으나, 대가야가 기울자 신라로 망명해 신라악의 뿌리를 내린 인물로 알려져 있다.

창원/최상원 기자

 

 

동사강목 제3상
신미년 신라 진흥왕 12년, 고구려 양원왕 7년, 백제 성왕 29년(북제 문선제 천보 2, 551)


춘정월 신라가 연호(年號)를 개국(開國)으로 고치었다.
○ 가야국 악사 우륵(于勒)이 신라에 망명하여 왔다.
처음에 가야왕 가실(嘉實)이 당(唐)의 악부(樂部)에 쟁(箏)이 있는 것을 보고 생각하기를, ‘여러 나라의 방언(方言)이 각각 다르니 성음(聲音)이 어찌 같을 수 있겠는가’ 하고는, 이에 쟁(箏)을 모방하여 십이현금(十二絃琴)을 만드니, 이것은 12월을 상징한 율(律)이다. 이에 악사인 성열현(省熱縣)지금은 미상 사람 우륵(于勒)을 시켜 하가야(下伽倻)ㆍ상가야(上伽倻) 등 12곡(曲)을 만들어 가야금(伽倻琴)이라 이름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우륵(于勒)이 나라가 어지러워질 것이라 하여 악기를 가지고 신라로 들어갔다. 왕이 낭성(娘城)지금의 청주부(淸州府)이다 을 순회하다가 우륵과 그의 제자 이문(尼文)이 음악을 안다는 말을 듣고, 하림궁(河臨宮)에 머물면서 음악을 연주하게 하니, 두 사람이 각각 새 노래를 지어 연주하였다. 왕은 기뻐서 그들을 국원(國原)지금의 충주부(忠州府)이다 에 두고, 대내마인 법지(法知)ㆍ계고(階古)와, 대사(大舍)인 만덕(萬德) 등 세 사람에게 그들의 음악을 배우게 하였다.
우륵은 그 사람들의 재능에 맞추어 가르쳤는데, 계고에게는 거문고[琴]를, 법지에게는 노래를, 만덕에게는 춤을 가르쳤다. 세 사람이 이미 12곡을 배우고 서로 말하기를,
“이 음악이 번거롭고 음란하니, 아악(雅樂)이 될 수 없다.”
하고 드디어 간추려서 다섯 곡조를 만들었다. 우륵이 처음에는 이 말을 듣고 노하였으나, 다섯 곡을 듣고서는 감탄하기를,
“즐거우면서도 음란한 데 흐르지 않고, 구성지면서도 슬픔에 치우치지 않으니 정악(正樂)이라 말할 수 있다.”
하였다.
수업을 마치고 이를 연주하니, 왕이 크게 기뻐하여 후한 상(賞)을 내렸다. 간신(諫臣)들이 아뢰기를,
“망한 가야의 음악은 취할 것이 못됩니다.”
하니, 왕이 말하기를,
“가야왕은 음란하여 스스로 멸망한 것이지 음악과 무슨 관계 있는가? 성인(聖人)이 음악을 제정한 것은 인정에 맞게 만든 것이니 나라의 치란(治亂)이 음조(音調)에 연유된 것은 아니다.”
하고, 마침내 이를 시행하여 대악(大樂)으로 삼았는데, 하림(河臨)과 눈죽(嫰竹) 두 곡조가 있으며, 모두 1백 85곡이다.
【안】 공자가 이르기를,
“음악이라 음악이라 말하지만, 종(鐘)과 북[鼓]을 말한 것이겠는가?”
하였고, 맹자가 이르기를,
“지금의 음악은 옛날 음악과 같은 것이다.”
하였으며, 선유들이 이르기를,
“음악은 하나의 화(和)이다.”
하였다. 이로 미루어 보건대, 화는 음악의 근본(根本)이요, 악기는 지엽(枝葉)이다. 예컨대, 정치가 이루어지고 백성들이 화평하면 파유(巴渝) 같은 시골의 것이라도 음악이 될 수 있고, 혹 정치가 문란하고 백성들이 조화되지 못하면, 함(咸 황제(黃帝)의 음악)ㆍ영(韺 제곡(帝嚳)의 음악)ㆍ소(韶 순(舜)의 음악)ㆍ호(頀 탕(湯)의 음악)라도, 마침내 백성들의 원망만 더해줄 뿐이니, 진흥왕(眞興王)의 말이 옳은 것이다. 그러나 진흥왕은 국가의 재물을 털어서 부처 받들기를 마지않았으니, 그의 정치는 알 만한 것이다.
다시 상고하건대, 악이라는 것은 천지의 화(和)한 기운이다. 사람은 천지의 기운을 받아서 태어났다. 중화(中華)와 이적(夷狄)을 물론하고 본연의 화(和)는 일찍이 그침이 없는 것이다. 대저 갓난아이가 기뻐하며 웃고, 동자(童子)들이 노래하고 읊조리는 것이 모두 악(樂)의 시초인 것이다. 국가[方隅]는 비록 다를지라도 음악은 같은 것이다. 하대(夏代)와 상대(商代)에 동이(東夷)가 악(樂)과 무(舞)를 바친 일이 있었다. 《주례(周禮)》에,
“동이(東夷)의 악(樂)은 주리(侏㒧)인데 양기(陽氣)가 통하는 곳에는 만물이 땅에서 생겨 자라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하였고, 《오경통의(五經通義)》에는,
“동이(東夷)의 악(樂)은 창[矛]을 잡고 춤을 춤으로써, 시양(時養)을 돕는다.”고 하였다. 이를 본다면 동이(東夷)에 악(樂)이 있은 지 이미 오래다. 기자(箕子)가 동(東)으로 올 때에 예악(禮樂)도 함께 왔을 것이니, 반드시 악률(樂律)도 말할 만한 것이 있었을 것이나 사서(史書)에 전하는 것이 없고, 그 백성들의 노래에도 황하(黃河)와 숭산(嵩山)의 곡(曲)이 있었는데 고증할 문헌이 없으니 애석한 일이다. 이 이후로는 중국 사서에 약간 의거할 만한 것이 있다. 《후한서(後漢書)》 고구려전(高句麗傳)에는,
“무제(武帝) 때에 고취(鼓吹)와 기인(伎人)을 하사하였으며, 그 풍속은 남녀가 떼를 지어 노래하고 춤추며 즐긴다.”
하였고, 《북사(北史)》에는,
“고구려의 악(樂)에는 오현금(五絃琴)ㆍ쟁(箏)필률(筆篥)횡취(橫吹)소고(簫鼓) 등이 있는데 갈[蘆]을 불어서 곡(曲)을 만들었다. 백제에는 고각(鼓角)ㆍ공후(箜篌)쟁우(箏竽)지적(篪笛) 등의 악(樂)과 투호(投壺)저포(樗蒲)농주(弄珠)악삭(握槊) 등의 놀이가 있다.”
하였고, 《삼국유사》에는,
“신라 사람들이 축국(蹴踘)으로 농주(弄珠)의 유희를 삼는다.”
하였고, 《남사(南史)》에는,
“고구려(高句麗)가 가무(歌舞)를 좋아하여 국중(國中)의 읍락(邑落)에서 남녀가 떼를 지어 밤마다 노래하고 즐긴다.”
하였다.
《두씨통전(杜氏通典)》과 《문헌통고(文獻通考)》에는,
“예ㆍ맥(濊貊)에서는 해마다 10월이 되면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밤낮으로 술을 마시고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는데 이것을 무천(儛天)이라 하였다. 그 악(樂)은 대략 부여와 같으나, 다만 그 쓰임이 다를 뿐이다. 삼한(三韓)은 그 풍속이 귀신을 믿어서 해마다 5월이 되면 제사를 지내고, 주야로 술을 마시면서 비파를 타며 노래하고 춤추며 땅을 밟음으로 박자를 삼는다. 10월에 농사일을 마치고는 또 이와 같이 한다. 마한국(馬韓國)에서는 항상 5월에 파종(播種)을 마치면 곧 귀신에게 제사하고, 밤낮으로 모여서 술을 마시고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며, 수십인이 땅을 밟으면서 몸을 굽혔다가 젖혔다가 하고 손발로 가락을 맞추기를 마치 탁무(鐸舞)와 같이 한다. 농사가 끝나면 또 그와 같이 한다. 부여(扶餘)는 12월에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연일 크게 모여서 먹고 마시고 노래부르며 춤추는데, 이것을 영고(迎鼓)라 한다. 행인(行人)들도 늘 노래 부르기를 즐기어 노래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고구려의 악공(樂工)은 자주빛 비단 모자에 새깃으로 꾸미고, 큰 소매로 된 누른 옷을 입고 자줏빛 비단 띠를 매고, 통이 큰 바지를 입고 붉은 가죽신을 신고, 오색(五色) 실로 땋은 선을 두른다. 춤출 적에는 4인이 한 조인데, 상투를 뒤쪽에 짜고 붉은 물감을 이마에 바르고 금당(金鐺)으로 장식한다. 4인 중 2인은 누른 치마 저고리에 붉고 누른 바지를 입으며, 2인은 붉고 누른 치마 저고리에 바지를 입으며, 소매를 길게 하고 검은 가죽신을 신고 쌍쌍이 마주서서 춤을 춘다. 악기에는, 타는 거문고[彈箏] 하나, 퉁기는 거문고[搊箏] 하나, 봉황머리 모양의 공후[鳳首箜篌]와 눕혀 놓고 타는 공후[臥箜篌] 각각 하나, 세워 놓고 타는 공후[竪箜篌] 하나, 비파(琵琶) 하나를 쓰는데 뱀의 가죽으로 바탕[槽]을 만들되 두께가 한 치 남짓하고 비늘 모양의 껍데기[鱗甲]를 붙이며, 가래나무[楸]로 앞[面]을 만들고 상아(象牙)로 채[捍撥]를 만들며, 국왕의 형상을 그렸다.
또 호선무(胡旋舞)에는 춤을 추는 자가 둥근 공[毬] 위에 서서 공을 굴리기를 바람같이 빨리하며, 오현금(五絃琴) 하나, 의취적(義觜笛) 하나, 생(笙) 하나, 호로생(胡蘆笙) 하나, 횡적(橫笛) 하나, 소(簫) 하나, 소필률(小篳篥) 하나, 대필률(大篳篥) 하나, 도피필률(桃皮篳篥) 하나, 요고(腰鼓) 하나, 제고(齊鼓) 하나, 구두고(龜頭鼓) 하나, 철판구(鐵板具) 하나, 담고(擔鼓) 하나, 패(貝) 하나 등이 있다. 수(隋)와 당(唐)의 구부악(九部樂)에 고려기(高麗技)가 있었는데, 무후(武后) 때에도 25곡(曲)이 남아 있었으나 정원(貞元) 말엽에는 겨우 1곡(曲)만이 수집되었고, 의복도 또한 점차로 쇠퇴하여 그 본래의 모습을 잃었다. 괴뢰병월조(傀儡幷越調)와 이빈곡(夷賓曲)은 이적(李勣)이 고구려를 격파하고 바친 것이다. 송(宋) 건덕(乾德) 4년에는 진주(鎭州)에서 영관(伶官) 28인을 보냈는데, 고구려의 부악(部樂)을 잘 익혔으므로 의복(衣服)과 은대(銀帶)를 하사하고 본도(本道)로 돌려보낸 일이 있다.
백제악(百濟樂)은 송(宋) 초기에 수입된 것으로서 후위(後魏)의 태무(太武)가 북연(北燕)을 멸하고 얻었으나, 잘 갖추어지지 못하였다. 주(周)의 무제(武帝)가 제(齊)를 멸하자 고구려ㆍ백제 두 나라가 각각 악(樂)을 바치니, 주(周)인이 악부(樂部)에 편입하고, 국기(國伎)라 일컬었으며, 당(唐)이 백제를 멸하고는 그 악(樂)과 악공을 모두 가져왔는데, 중종(中宗) 때에 공인(工人)들이 도망하여 흩어졌다. 개원(開元) 연간에는 기왕(岐王) 범(範)이 태상경(太常卿)이 되어 다시 건의하여 이를 두었다. 그 악기에는 쟁(箏)ㆍ적(笛)ㆍ도피필률(桃皮篳篥)ㆍ공후(箜篌)가 있었고, 그 노래에는 반섭조(般涉調)가 들어 있었다. 이것은 설인귀(薛仁貴)가 백제를 쳐서 깨뜨리고 노획(鹵獲)하여 바친 것이다. 노래는 다섯 가지가 있고, 춤은 두 사람씩 추는데, 이들은 자색(紫色)으로 된 통이 큰 치마와 저고리를 입고 장보관(章甫冠)을 쓰고 가죽신을 신었다.”
하였다. 장보(章甫)는 상(商)나라의 관(冠)인데 동이(東夷)가 이를 썼으니, 그것이 상(商)의 유제(遺制)인 듯하다. 옛사람이 이르기를,
“예(禮)가 없어지면 동이(東夷)에서 찾아라.”
하였으니, 옳은 말이다. 그 악기는 중국과 발해(渤海)를 모방한 것이 많고, 풍속은 세시(歲時) 마다 모여서 악(樂)을 즐기었는데, 먼저 노래와 춤에 익숙한 사람 몇을 시켜서 앞에 가게 하고, 사녀(士女)들이 이를 따라서 선창하면 따라 화답하면서 빙빙 도는데 이를, ‘답추(踏鎚)’라고 불렀다.
신라는 해마다 8월 15일이 되면 악(樂)을 베풀고 백관들로 하여금 활쏘기를 시켜 말[馬]과 베[布]를 상으로 주었다. 당(唐) 정관(貞觀) 연간에는 악(樂)을 잘하는 여자 둘씩을 바치었다. 송(宋)의 지도(至道) 원년에는 정주(定州)에서 보고하기를,
“신라(新羅)의 번 지키는 사람[設番人] 20명이 거란(契丹)으로부터 도망쳐 왔다.” 하므로 황제가 편전(便殿)에 나아가 만나보니, 모두 손에 큰 나팔을 들었는데 다섯 되[五升]들이 그릇만하였으며, 말하기를,
“거란(契丹)에서 11년간 머무르는 사이에 우리에게 나팔부는 것을 배운 자가 50명이나 됩니다.”
하였다. 제가 불어 보게 하니, 소리가 중탁(重濁)하고 억세어서 대략 각성(角聲)과 같았다. 그 곡을 물으니, 선우곡(單于曲)이라 하였다. 그들을 모두 군대에 편입시켰다. 동사(東史)로 말하면 고구려ㆍ백제의 것은 상고할 수 없고, 신라 악기는 대[竹]로 만든 것과, 줄[絃]로 만든 것이 각각 세 가지와, 박판대고(拍板大皷)가 있었다. 가무(歌舞)는 두 사람이 하였는데, 방주복두(放舟幞頭)에다 자주색 큰 소매, 통옷[公襴]과 붉은 가죽띠, 금칠을 한 요대(腰帶)와 검은 가죽신이었다. 삼현(三絃)은, 현금(玄琴)ㆍ가야금(伽倻琴)ㆍ비파(琵琶)이고, 삼죽(三竹)은 대함(大笒)ㆍ중함(中笒)ㆍ소함(小笒)인데, 함(笒)은 즉 피리[笛]이며 각각 곡조(曲調)가 있고, 향악(鄕樂)은 유리왕(儒理王) 때에 비롯되었다. 《삼국사기(三國史記)》 악지(樂志)에,
회악(會樂) 신열악(辛熱樂)은 유리왕(儒理王) 때에 돌아악(突阿樂)은 탈해왕 때에, 기아악(技兒樂)은 파사왕(婆娑王) 때에, 사내악(思內樂)은 내해왕(奈解王) 때에 가무(笳舞)는 내물왕(奈勿王) 때에, 우식악(憂息樂)은 눌지왕(訥祗王) 때에 만들었고, 대악(碓樂)은 자비왕(慈悲王) 때에 백결(百結) 선생이, 우인(芋引)은 지증왕(智證王) 때에 천상욱개자(川上郁皆子)가 만들었다. 미지악(美知樂)은 법흥왕(法興王) 때에, 도송가(徒頌歌)는 진흥왕(眞興王) 때에 만들었고, 날현인(捺絃引)은 진평왕(眞平王) 때에 승(僧) 담수(淡水)가, 사내기물악(思內奇物樂)은 원랑도(原郞徒)가 만들었다. 내지(內知)는 일상군(日上郡)의 악(樂)이요, 백실(白實)은 곤량군(坤梁郡)의 악이요, 덕사내(德思內)는 하서군(河西郡)의 악이요, 석남사내도(石南思內道)는 동벌군(同伐郡)의 악이요, 사중(祀中)은 북외군(北偎郡)의 악이다. 모두 지방민들이 악을 즐겨서 만든 것이며 모두 18곡이다. 성기(聲器)의 수와 가무(歌舞)의 모양은 후세에 전해지지 않았고, 악공(樂工)을 척(尺)이라 하였는데 가척(歌尺)ㆍ무척(巫尺)이 이것이다.
하였고, 최치원(崔致遠)의 시(詩)에 향악잡영(鄕樂雜詠) 다섯 수(首)가 있는데, 금환(金丸)ㆍ월전(月顚)ㆍ대면(大面)ㆍ속독(束毒)ㆍ산예(猴猊)로 모두 잡희(雜戱)를 말한 것이다.

추9월 돌궐(突厥)이 고구려를 침략하였다.
돌궐(突厥)은 흉노(凶奴)의 별종(別種)이다. 연연(蠕蠕)이 쇠약하여지매 돌궐이 다시 북막(北漠)에서 일어나더니 이때에 이르러 고구려를 공격하여 왔다. 신성(新城)을 포위하였으나 이기지 못하매, 옮기어 백암성(白岩城)을 공격하였다. 고구려에서는 장군 고흘(高訖)을 보내어 군사 1만을 거느리고 항전케 하여 이를 이기고 4천여 급(級)을 사로잡았다.
○ 신라가 고구려를 침략하여 10성(城)을 취하였다.
신라 왕이 거칠부(居漆夫)와 구진비대(仇珍比臺) 등 여덟 장수에게 명하여 백제와 합병하여 고구려를 치니, 백제가 먼저 공격하여 격파하였는데, 거칠부 등이 이긴 기회를 타서 죽령(竹領) 밖과 고현(高峴) 안의 10군을 취하였다.
○ 신라가 처음 백좌강(百座講)과 팔관회(八關會)를 설치하였다.
거칠부 등이 고구려를 공격할 때에 중 혜량(惠亮)이 무리를 거느리고 와서 도좌(道左 길 가를 말한다)에서 보고, 드디어 함께 왕을 알현(謁見)하였다. 이에 왕이 이를 승통(僧統 중 가운데 가장 높은 지위)으로 삼았고, 비로소 백좌강회(百座講會)와 팔관법(八關法)을 설치하였다. 그 법은 매해 11월[仲冬]에 궁궐의 뜰에 중을 모아놓고, 윤등(輪燈)은 좌(座)에 걸고 향등(香燈)은 사방에 별여 걸며, 채붕(彩棚) 둘을 매어 달고는 온갖 놀이와 가무(歌舞)를 하면서 복을 빌었다. 팔관(八關)이라는 것은,
“첫째 살생하지 않고, 둘째 도둑질하지 않고, 셋째 음란하지 않고, 넷째 거짓말하지 않고, 다섯째 술을 마시지 않고, 여섯째 높고 큰 상에 앉지 않고, 일곱째 사치스러운 옷을 입지 않고, 여덟째 관람을 즐기지 않는다.”
는 것이다. 관(關)은 막는다는 뜻으로 여덟 가지 죄를 금하고 막아서 범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최씨[崔溥]는 이르기를,
“이것은 일종의 고고(枯槁) 적멸(寂滅)의 계율이요, 진실로 천하와 국가를 다스리는 일에 관계되는 것은 아니다. 천하와 국가를 다스리는 자는 스스로 경계가 있는 것이다. 하늘을 공경하여 백성에게 시절(時節 농사 때)을 주는 것은 요(堯)의 경계요, 조심하고 조심하라, 하루에 만 가지 기미가 일어난다고 한 것은 순(舜)의 경계요, 색(色)에 빠지거나 사냥에 빠지거나 술을 즐기거나 집을 사치하게 꾸미는 것은 우(禹)가 자손에게 경계한 것이요, 삼풍 십건(三風十愆)은 탕(湯)이 지위에 있는 이를 경계한 것이요, 먼저 백성의 어려움을 알고 검소한 옷차림으로써 백성을 평안하게 하여 농사에 힘쓰게 하고, 놀고 사냥하기를 즐기지 말라고 한 것은 주(周)의 문왕(文王)ㆍ무왕(武王)이 후왕(後王)을 경계한 말이다. 이렇게 하여야 천명과 민심을 보전하여 나라가 오래도록 융성하는 것인데, 팔관회(八關會)의 회의는 황당무계함과 허수아비로 만든 죄 크다 할 수 있다.”
하였다.


 

[주D-001]12곡(曲) : 우륵(于勒)이 만든 곡(曲)인데, 다음과 같다. 하가라도(下加羅都)ㆍ상가라도(上加羅都)ㆍ보기(寶伎)ㆍ달기(達己)ㆍ사물(思勿)ㆍ물혜(勿慧)ㆍ하기물(下奇物)ㆍ사자기(帝子伎)ㆍ거열(居烈)ㆍ사팔혜(沙八兮)ㆍ이사(爾赦)ㆍ상기물(上奇物).
[주D-002]파유(巴渝) : 지방 이름인데, 파(巴)는 사천성(四川省) 파현(巴縣) 지방이고, 유(渝)는 호북성(湖北省) 유수(渝水)를 말한다. 《후한서》 남만전(南蠻傳)에는 “파유(巴渝)의 풍속이 노래와 춤을 좋아하였는데, 한 고조(漢高祖)가 이를 보고 ‘이것은 주 무왕(周武王)이 주(紂)를 칠 때의 노래다.’ 하고, 악인을 명하여 이를 익히니, 이것이 이른바 파유부(巴渝府)이다.” 하였다.
[주D-003]주리(侏㒧) : 서방(西方)의 악(樂)을 말한다. 원래 동서남북 사방에 대한 악(樂)이 있었는데, 동방은 말(靺), 남방은 임(任), 북방은 금(禁), 서방은 주리로 되어 있다. 《周禮 卷24 四夷之樂》
[주D-004]시양(時養) : 여름의 생성을 말하는 것으로 《주례》 사이지락(四夷之樂)에 동이(東夷)는 창을 가지고 봄[時生]을 돕고, 남이(南夷)는 활[弓]을 가지고 여름[時養]을, 서이(西夷)는 도끼[鉞]를 가지고 가을을, 북이(北夷)는 방패를 가지고 겨울[藏]을 돕는다고 하였다. 이로 보면 분명히 동이는 창[矛]을 가지고 봄을 도와야 하는데도 여름을 돕는다 라고 되어 있으니, 이것은 여름이 아니라 봄일 것이다.
[주D-005]쟁(箏) : 비파류(琵琶類)에 속하는 것으로서 당 이전에는 12현(絃)이었으나, 당 이후에는 1현이 더해져 13현이다.
[주D-006]필률(篳篥) : 젓대류[笛類]로 외부는 일곱 구멍, 내부는 한 구멍이다.
[주D-007]횡취(橫吹) : 젓대[笛]로서 서역으로부터 전래되었다.
[주D-008]소고(簫鼓) : 소(簫)는 소관(小管)을 배열하여 봉황(鳳凰)의 날개 모양으로 된 악기이다. 길이는 1척 2촌, 1척 4촌, 1척 5촌 등 세 가지이고, 관수(管數)는 13 혹은 16ㆍ17ㆍ21ㆍ23ㆍ24로서 일정하지 않다. 태고(太鼓)와 항상 같이 쓰이는 악기이다.
[주D-009]공후(箜篌) : 현악(絃樂)의 일종으로서 백제금(百濟琴)이라고도 한다. 이 공후(箜篌)에는 수공후(竪箜篌)ㆍ와공후(臥箜篌)ㆍ봉수공후(鳳首箜篌)가 있다. 수공후는 서구(西歐)의 하프와 비슷하고 와공후는 비파류이다. 《통전(通典)》에는 “그 모양은 비파와 같으며 굽었고 길고 현(絃)으로 되어 있으며, 가슴에 대고 두 손으로 탄다.” 하였다.
[주D-010]쟁우(箏竽) : 퉁소의 일종. 길이는 중국 척(尺)으로 7척 2촌, 36개의 혀[舌]가 있었으나, 후세에 와서는 9개로 줄었다. 《周禮 春官 笙師》
[주D-011]지적(篪笛) : 피리의 일종. 횡적(橫笛)의 하나. 대[竹]로 만들었는데, 긴 것은 1척 4촌, 짧은 것은 1척 2촌, 여덟 구멍 혹은 일곱 구멍으로 되어 있고, 위의 한 구멍으로 소리를 낸다. 《呂覽 仲憂》
[주D-012]투호(投壺) : 단지를 놓고 화살을 던져 넣는 놀이.
[주D-013]저포(樗蒲) : 백제 때 유희의 한 가지. 3백 60알을 3분해서 두 관(關)을 만들고, 사람이 알을 쥐고, 그 알 다섯 개만은 위가 검고 아래를 희게 해서 검은 것에 두 눈을 새기니, 이것이 독(犢)이고, 흰 것도 둘을 새기니 이를 치(雉)라 하고, 던져서 다 검은 것은 노(盧)가 된다. 그 채(采)가 16이요, 둘이 희고, 셋이 검은 것은 치(雉)니, 그 치가 14요, 둘이 검고 셋이 흰 것은 독(犢)이니, 그 채가 10이요, 다 흰 것은 백(白)이라 하니, 그 채가 8이다. 넷은 귀채(貴采)라 하고, 여섯은 잡채(雜采)라 한다.
[주D-014]농주(弄珠) : 쟁반에서 구슬돌리기.
[주D-015]악삭(握槊) : 일명 쌍륙(雙陸)이라 하는데, 장기류로서 판과 알이 있다.
[주D-016]의취적(義觜笛) : 혀가 있는 횡적(橫笛)이다. 고구려의 음악에는 탄쟁(彈箏)ㆍ추쟁(搊箏)ㆍ봉수(鳳首)ㆍ공후(箜篌)ㆍ비파(琵琶)ㆍ의취적(義觜笛) 등이 있는데, 이것은 횡적(橫笛)으로서 부리[觜]가 있으며, 이를 서량악(西凉樂)이라 한다. 《唐書 禮樂志 山裳考索》
[주D-017]생(笙) : 관악기의 한 가지. 형태는 우(竽)와 같은데 19관(管) 또는 13관이다. 옛날에는 관(管)을 박[瓠] 속에 나열해서 만들고, 적(笛)을 관(管) 끝에 끼웠는데 서서 옆으로 부는 악기이다. 《爾雅注疏 卷5 釋樂》
[주D-018]호로생(胡蘆笙) : 만이(蠻夷)가 부는 6관(管)의 악기이다.
[주D-019]횡적(橫笛) : 횡으로 부는 피리. 후한(後漢) 시대의 마융부(馬融賦)를 보면 염(剡) 위에 구멍이 다섯이 있는데, 한 구멍은 뒤까지 뚫려 있다. 지금의 척팔(尺八)과 같다. 이선위(李善爲)의 주(註)에는 일곱 구멍이 있고, 길이가 1자 3치라 하였으니, 이것이 지금의 횡적(橫笛)이다. 《夢溪筆談 樂律1》
[주D-020]요고(腰鼓) : 큰 것은 기와로 되어 있고, 작은 것은 나무로 되어 있는데, 모두 머리는 넓고 몸통이 가늘다. 《文獻通考 卷135 樂8》
[주D-021]제고(齊鼓) : 칠통(漆桶)과 같이 크고, 북 얼굴[鼓面]이 배꼽처럼 튀어나와서 마치 사향[麝]의 배꼽과 같으므로 제고(齊鼓)라고 한다. 《唐書 音樂志》
[주D-022]담고(擔鼓) : 항아리보다 좀 작은 것으로서 가죽을 씌워 칠한 것. 《文獻通考 卷136 樂9》
[주D-023]패(貝) : 큰 조개와 같은데, 약 2근(斤) 가량의 크기이다. 이것을 불어서 악을 맞춘 것으로서 남만(南蠻)에서 나온 악이라 한다. 《通典 卷144 樂四》
[주D-024]삼풍 십건(三風十愆) : 관직에 있는 자를 경계한 말. 삼풍(三風)은, 항상 춤추고 취하여 노래하는 것은 무풍(巫風), 재화와 색(色)에 빠지거나, 놀고 사냥을 즐기는 것은 음풍(淫風), 성언(聖言)을 업신여기고, 충직(忠直)하지 않고, 덕 있는 이를 멀리 하고, 사나운 자를 가까이 하는 것은 난풍(亂風)이다. 또한 이 세 가지 나쁜 풍습을 이루는 열 가지 내용이 십건(十愆)이다. 《書經 伊訓》

연려실기술 별집 제12권
 정교전교(政敎典故)
음악(音樂)


동방(東方)에는 신라에서 고려에 이르기까지 아악(雅樂)이 없었는데, 고려 예종(睿宗) 때에 사신(使臣) 안직숭(安稷崇)이 송 나라에 갔다가 돌아올 때에 송 나라 휘종(徽宗)이 새 악기[新樂器]와 보결(譜訣)을 주었고, 예종이 악기와 곡보를 받은 답례사(答禮使)로 왕자지(王字之)와 문공미(文公美)를 보내어 치사하였더니 그 자리에서 또 대성악(大晟樂)을 주었다. 휘종(徽宗) 때에 서촉(西蜀)의 도사(道士) 위한률(魏漢律)이 우(禹) 임금의 몸이 척도가 된다는 옛글을 인용하여 휘종의 가운데 손가락의 가운데 마디를 척도(尺度)로 삼아 억지로 이론을 부연하여 악기를 만들고, 이름을 ‘대성악’이라 하였다.
○ 공민왕 때에 명 나라 태조가 악기를 보내 주므로, 조정에서는 강사찬(姜師賛)을 명 나라 서울에 보내어 명 나라 태조에게 여러 음(音)에 정통하고 기예를 겸비한 악공(樂工)을 보내 주어 전업(傳業)하게 해줄 것을 청하였더니, 명 나라 태조가 명하여 태상시(太常寺)의 악공을 서울에 보내 주어 음악을 익히게 하여 주었다.
○ 태조 4년 문묘(文廟)가 낙성되었을 때에 임금이 친히 잔을 드리어 제사하고자 하여 민안인(閔安仁)에게 고전(古典)을 밝게 익히게 하고, 악기를 수리하라고 명하였다.
○ 정종 2년에 예조에서 대송반악도(大宋頒樂圖)를 상고하기를 청하였다.
○ 태종 5년에 명 나라 예부(禮部)에 보내는 자문(咨文)에, “본국의 종묘와 사직의 악기가 옛날 것이어서 파손되었으므로 사람을 시켜 값을 보내어 명 나라 서울에 가 사서 갖추어 쓰겠다.”고 청하였더니, 명 나라 예부의 회자(回咨)에 이르기를, “성지(聖旨)를 받들어 공부(工部)에서 악기를 조성(造成)하여 내사(內史) 박린(朴麟) 등을 시켜 편종(編鐘) 16개, 편경(編磬) 16편(片), 금(琹) 4장(張), 슬(瑟) 2상(牀), 생(笙) 2찬(櫕)과 소(簫) 4관(管)을 주관케 하여 보낸다.” 하였다.임금(태종)이 명 나라 임금이 보내 준 것을 받은 다음 사신을 태평관(太平館)으로 안내하여 잔치를 베푸는 동시에 김승주(金承霔)와 이응(李膺)을 명 나라 서울로 보내어 사례하고 6년부터 비로소 종묘에 명 나라의 악기를 사용하였다.
○ 11년에 예조에서 아뢰기를, “고려조 때에 광종(光宗)이 당 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당 나라의 악기와 악공을 청하여 익힌 다음 그 자손이 대대로 그 업(業)을 지켜왔으며, 충렬왕 때에 이르러서는 김여영(金呂英)이 맡아 보았고, 충숙왕(忠肅王) 때에는 그 손자 득우(得雨)가 또 맡아 보았습니다.《송사(宋史)》에 있는 악서(樂書)에도 이르기를, ‘원풍(元豐) 연간에 고려가 악공을 보내 주기를 청하므로 보내어 가르쳤다.’ 하였으니, 우리나라의 음악은 중국으로부터 나온 것입니다. 세상에 전해 내려온 지가 오래되어 혹 와전(訛傳)이 있을까 두려우니, 바라옵건대, 관습도감(慣習都監)과 함께 상세하게 심찰(審察)하는 동시에 그 구보(舊譜)를 찾아 당(唐)ㆍ송(宋)의 유음(遺音)을 좇아서 성조(盛朝))의 정악(正樂)을 정하소서.’ 하니, 임금이 이를 좇았다.
○ 악장(樂章)에서 몽금척(夢金尺)과 수보록(受寶籙)을 삭제하라고 명하였다. 태종조 조에 상세하다.
○ 세종이 아악(雅樂)을 바로잡았다. 세종조 제작조에 상세하다.
○ 세조 4년에 임금이 이르기를, “향악(鄕樂)과 아악은 본래 별개의 것이 아니니, 따로 두 서[二署]를 두는 것은 실속이 없는 무익한 일이다.” 하여, 합하여 장악서(掌樂署)로 하였다. 장악원(掌樂院) 조에 상세하다.
○ 9년에 임금이 이르기를, “세종이 만드신 정대업(定大業)과 보태평(保太平)의 음곡과 춤과 가사(歌詞)의 구수(句數)가 많아서 잠깐 동안에 지내는 제사에는 모두 연주하기 어려우니, 그 뜻을 본받아 악장(樂章)을 만들라.” 하여, 최항(崔恒)이 그 가사를 지었다.
○ 성종 24년 계축에 성현(成俔) 등에게 명하여 《악학궤범(樂學軌範)》을 편찬케 하여 아악ㆍ당악(唐樂)ㆍ향악 3편으로 구분하였는데, 악조(樂調)와 성률(聲律)을 첫머리에 넣고 서적을 널리 인용하여 이해하기 쉽게 하였다.
○ 영녕전(永寧殿)에 쓰는 음악은 종묘에 쓰는 음악과 달랐다. 예조 판서 이파(李坡)가 아뢰기를, “신이 일찍이 세조께서 하신 말씀을 기억하옵는데, ‘오목청묘(於穆淸廟)의 글장은 문왕(文王)을 제사하는 시(詩)인데, 교(郊)의 제사에도 쓰고, 묘(廟)에도 썼으니, 우리나라의 보태평(保太平)과 정대업(定大業)의 악은 종묘와 영녕전에 통용하여도 좋다.’ 하셨습니다.신이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의 시를 보니, 한갓 태조의 공덕만을 찬술한 것이 아니고 환왕(桓王) 이상의 4조(四祖)의 공덕을 겸해 기록한 것이니, 영녕전에 쓰는 악도 세조의 하교에 의하는 것이 합당합니다.” 하니, 성종이, “그렇게 하라.” 하였다. 《명신록》
○ 명종 8년 계축에 본국의 율관(律管)이 오래되어 점차로 그 본음(本音)을 잃게 되었으므로 악관(樂官) 1명과 악사(樂師) 3명을 선출하여 하지사(賀至使) 민기(閔箕)가 명 나라 서울로 가는데 딸려 보냈더니, 명 나라 예부에서 태상시(太常寺)를 시켜 음률에 정통한 악무생(樂舞生) 2명을 선발하여 우리나라에서 보낸 악관ㆍ악사와 함께 날마다 교정하게 하였는데, 민기는 먼저 돌아오고, 악관 송림(宋琳) 등은 북경에 두 달 동안 머물고서 율관 1부(部)를 가지고 돌아왔는데, 그 범위가 좁고 형체가 기울어졌었다.이는 대개 악관이 고국에 빨리 돌아오고 싶어서 빨리 완성하기를 재촉하여 공인(工人)들이 구차하게 충당한 때문이었다. 송림 등은 또 당악의 전습(傳習)을 부지런히 하지 않고 돌아왔으므로, 예조 판서 정사룡(鄭士龍)이 힐문(詰問)하니, 송림 등이 아무런 대답을 못하였다.
율관(律管)은 영락(永樂) 3년에 명 나라 황제가 보내 준 것이다. 이에 이르러 해가 오래 되어서 율관이 파손되었다는 것으로 명 나라 예부에 자문(咨文)을 보내어 사들이기를 청하였는데, 그 대략에, “본래 쓰던 율관은 이미 오래되어 그 본래의 음에서 조금 틀리는 정도에 그치지 아니할 뿐 아니라, 더욱이 해시(該寺)의 여러 음악을 전습한 지가 이미 오래되어 와전(訛傳)이 와전을 낳아 점점 그 본래의 것을 잃게 되었습니다.음악은 종묘와 사직에 쓰고, 연례(宴禮)에도 써서 신(神)과 사람을 화합하게 하는 것이므로, 이제 악관 1명과 악사 3명을 선발하여 그 가포(價布)를 싸가지고 하지배신(賀至陪臣)의 뒤를 따라 서울로 보내오니, 청컨대 황제께 전달하여 특별히 사들이기를 허가해 주고, 태상시의 악공들과 함께 교정하게 함으로써 명 나라 조정의 율(律)ㆍ도(度)ㆍ양(量)ㆍ형(衡)의 제도와 같이 하게 하여 주기를 청합니다.” 하였다.자문 중에서 말한 ‘해시의 여러 음악’이라 한 것은 당악을 가리키는 것이니, 지금의 당비파(唐琵琶) 따위가 그것이다. 명 나라 예부에서 회자(回咨)하였는데 그 대략에, “조선은 우리나라를 섬김에 있어 공물(貢物)을 대단히 삼가서 바쳐 왔고, 우리 조정에서도 조선을 대우하는 데 은혜와 예의를 본래 후하게 하여 왔으며, 정월 삭일(朔日 초하룻날)로부터 양(量)ㆍ형(衡)에 이르기까지 꼭 같은 것을 사용하고 있다.하물며 관약(管籥)의 음률은 곧 예악(禮樂) 중에 큰 것이니, 어찌 감히 조정에 청하지 아니하고 마음대로 스스로 제작하겠는가. 마땅히 태상시에 이첩(移牒)하여 음률에 정통한 악사ㆍ악생 2명을 선발하여 보내온 악관ㆍ악사와 함께 낱낱이 교정하게 할 것이며, 그 율관에 있어서는 사들이려는 것을 응당 좇지 않을 리 없으나, 다시 특별한 은혜로써 반사(頒賜)하여 후한 예(禮)를 보이라는 성지(聖旨)를 받들어 율관을 내려줄 것이니, 이 뜻을 공경히 받들어 조회한다.율관은 음악의 근본이니 반드시 정밀하게 제조하여야만 소리와 기운이 잘 맞는 것이므로, 열흘이나 한 달 동안에 가히 정밀히 제조할 것이 못 되니, 통사 1명과 악사 3명과 종인(從人) 1명을 북경에 머물러 있게 하여 제조가 완료되는 것을 기다려서 완전히 영수(領受)하여 가지고 돌아가게 하고, 그 배신(陪臣 사신을 말한다) 등 관리는 먼저 돌아가도록 하라는 성지를 받들었다.” 하였다. 이에 논평하는 이들이, “피차간에 모두 체통을 얻었다.” 하였다. 《해동야언》
○ 인조 을축년에 장차 세자의 관례(冠禮)를 행하려 하는데, 예조 판서 이정귀(李廷龜)가 아뢰기를, “임금이 출입하실 때는 북을 치고 피리를 부는 헌가악(軒架樂)이 있고, 대소의 행행(行幸) 때에도 모두 앞뒤에 고악(鼓樂)이 있으니, 이는 이른바, 화란(和鑾)을 울리어 임금의 거둥에 절주(節奏)를 맑게 한다는 것이지, 노는 것을 즐기는 것이 아니며, 실로 위의(威儀)에 관계되므로 상례(喪禮)와 재변이 아니고는 폐지할 수 없는 것입니다.전하께서 즉위하시던 처음에 노추(奴酋)를 평정하기까지는 음악을 쓰지 말라는 하교가 있어 평상시의 거둥에는 항상 악을 사용하지 아니하니, 이것은 참으로 전례에 없는 상규(常規)를 벗어난 예(禮)입니다. 천하에 악이 없는 나라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길사(吉事) 때의 하례(賀禮)에 일찍이 악이 없는 일은 아직 없었습니다.관례에 이르러서는《의례(儀禮)》에 이르기를, ‘선비의 관례에는 악이 없다.’ 하였는데, 이는 삼가(三加 관례(冠禮) 때, 세 번 관을 갈아 씌우던 의식)하고 초례(醮禮)할 때를 말한 것입니다.《춘추전(春秋傳)》에 이르기를, ‘임금의 관례에는 금석악[金石樂]으로 연주한다.’ 하였는데, 허신(許愼)은 말하기를, ‘사부(士夫)의 관례에는 악이 없으나 임금은 밥상을 올릴 때에도 반드시 악을 연주하는데, 관례 때에 악이 없는 것은 예의 본의가 아니다.’ 하였습니다. 이로써 본다면, 임금의 관례에 악을 쓰는 것을 가히 알 수 있습니다.《오례의(五禮儀)》에 세자가 삼가(三加)하고 초례할 때에 악을 사용하는 절차는 없으나, 임금이 나와서 빈(賓)과 찬(賛)을 지명할 때에 북을 치고 피리를 부는 헌가악이 있으니, 이는 대개《의례》와《춘추전》을 참작한 것입니다. 예에 따라 주악하기를 청합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좇았다.
○ 4년 병인에 연신(筵臣) 오윤겸(吳允謙)의 아룀으로 임금이 명하기를, “세종 이후의 묘악(廟樂)을 실록에서 상고해 낸 후에 실록에 기록되어 있지 않으면 추가해 만들어서 사용하게 하라.” 하였다. 예조에서 아뢰기를, “실록 중에는 다만 익조(翼祖)에서 세종에 이르기까지 7실(室)의 악장(樂章)만이 있는데 《악학궤범》에 실려 있는 가사와 전연 같지 않습니다.《악학궤범》은 성종 말년에 완성되었는데, 문종ㆍ세조 이하의 묘악은 실려 있지 않습니다. 대개 태묘(太廟)의 악장은 비단《악학궤범》에만 실려 있을 뿐만 아니고,《오례의》에도 상세하게 실려 있는데, 인입(引入)과 인출(引出)을 제외하고, 초헌(初獻)ㆍ아헌(亞獻)ㆍ종헌(終獻)에 각각 9장(章)을 한 곡무[一曲舞]로 하여 갖추어 있고, 영녕전(永寧殿)에 있어서는 악무(樂舞)가 종묘와 꼭 같다고 하였습니다.이것으로 보면 4조(祖)를 이미 영녕전으로 조천(祧遷)해 모신 후에도 태묘에 그대로 4조의 악장을 사용하였고, 영녕전에도 역시 태조와 태종의 악장을 사용한 것이 분명합니다. 대개 각실(各室)의 악을 쓴다면 악장은 길고 잔을 드리는 것은 쉬워서, 겨우 연주하면 벌써 철상하게 되어 곡무(曲舞)를 이루지 못하므로, 한 악장을 만들어 처음에는 선대의 공덕을 찬양하고, 끝에는 열성(列聖)의 공덕을 찬양하여 통용하는 악으로 삼은 것이니, 그 뜻이 우연한 것이 아닙니다.비록 유신(儒臣)이 상고한 것으로 말씀드리더라도, 서한(西漢)은 다만 공덕이 많은 임금께만 악을 마련하였고, 송(宋)과 원(元)은 각실의 악이 있는 것 같사오나 상세한 것은 알 수 없으며, 명 나라 태조와 태종은 각각 악장이 있고, 인종 이하는 통용하고 있습니다. 《악학궤범》은 필연코 이것을 모방하여 한 것일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전교하기를, “선조묘는 당연히 따로 악장이 있어야 할 것이다.” 하였고, 대신 윤방(尹昉)과 신흠(申欽)의 의견도 모두 같아서 드디어 대제학에게 명하여 ‘중광 일장(重光一章)’을 찬술하여 초헌 정명(貞明)의 아래에 첨입(添入)하였다. 《월사남궁록(月沙南宮錄)
○ 20년 임오에 호군(護軍) 한명욱(韓明勖)이 소를 올리기를, “향사(享祀)에 음악을 폐지하는 일은, 신은 옳은 일인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난(亂)을 만나면 음악을 할 수 없다고 한다면 공자(孔子)는 진(陳) 땅에서 액(厄)을 당하였을 때, 현가(絃歌)를 폐하지 않았고, 광(匡) 땅에서 포위를 당하였을 때에도 노래하라고 명하였습니다. 성인은 난을 당하였다 하여 그 음악을 폐하지 않았습니다.” 하니, 임금이 소장(疏章)을 비변사에 내리어 의논하도록 하였다.
○ 24년에 병술에 종묘에 고하고 명년 춘향(春享)부터 음악을 사용하였다.
○ 현종 을사년에 송준길(宋浚吉)이 차자를 올리기를. “태묘(太廟) 여러 실(室)에 9장(章) 11성(聲)으로 통용하고 있사온데, 문소전(文昭殿)을 파하기 전에는 각실(各室)마다 각각 악장이 있던 것은 그 의의를 알 수 없습니다. 선조조에 예조 판서 황정욱(黃廷彧)이 태묘 1실마다 각각 1장씩을 지을 것을 청한 일이 있으며, 인조조에 오윤겸(吳允謙)도 역시 이와 같이 청한 일이 있었사오나 모두 채용되지 못하였고, 다만 선조를 위하여 따로 악장을 지었습니다.효종조에 장악정(掌樂正) 권우(權堣)가 인조의 악장을 따로 지을 것을 청하였사오나, 여러 대신이 모두 불가하다고 하였습니다. 대개 이미 선조(宣祖)를 위하여 따로 악장을 지은 것이온데, 위로 세조ㆍ성종ㆍ중종 같으신 임금께와 아래로 인조와 효종 같으신 임금께만 홀로 따로 지을 수 없다는 것입니까. 또 태묘의 악은 비록 이름은 한 가지 악을 통용한다 하나, 실제는 각실마다 1장을 연주하고 있습니다.그러하온데, 태묘는 이제 10실이 되었으니 제 10실에는 사용할 만한 음악이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마지못하여 인도해 나올 때에 연주하는 인출곡(引出曲)과 역성장(繹成章)을 쓰고 인도해 나올 때도 역시 그 악장을 중첩으로 쓰고 있습니다. 영녕전에 주악하는 것도 역시 이와 같습니다. 이 얼마나 존엄한 자리인데, 예와 악이 전도(顚倒)됨이 이 지경에 이르렀습니까. 또 그 지은 악장도 길고 짧은 것이 고르지 않아 그 매우 짧은 것은 예를 마치기도 전에 주악이 먼저 끝나므로, 악공과 광대[伶人]들이 간혹 그 악장을 두 번 연주하기도 하니, 이는 대단히 미안한 일입니다.” 하였다.
○ 숙종 원년에 예조에서 아뢰기를, “무릇 대사(大祀 종묘ㆍ영녕전ㆍ사직단ㆍ원구단(圓丘壇)의 제사)에는 졸곡(卒哭) 후에 음악을 쓴다는 것이 예문(禮文)에 명백히 기재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옛날 기우제(祈雨祭)를 친히 행할 때는 대신에게 수의(收議)한 후에 음악을 썼습니다. 이번에 친체(親祭)하시는 것은 백성을 위해 하늘에 혜택을 비는 것이오니, 옛날의 예에 따라 음악을 쓰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좇았다.
○ 남구만(南九萬)이 병자년에 올린 차자에, “종묘와 영녕전에 연주하는 악장은, 초헌(初獻)에는 보태평(保太平) 11성(聲)을 쓰는데, 인도해 들일 때에 쓰는 희문장(熙文章)과 인도해 나갈 때에 쓰는 역성장(繹成章)의 두 악장을 제하면, 그 동안에 사용하는 성음은 실제는 9장이 되는 셈입니다.아헌(亞獻)과 종헌(終獻)에는 모두 정대업(定大業) 11성을 쓰는데, 인도해 들인 때의 소무(昭武)와 인도해 나갈 때의 영관(永觀)의 두 악장을 제하면, 그 동안에 사용하는 소리 역시 9장이 됩니다. 이 밖에도 또 초헌을 하기 전에 신령(神靈)을 맞는 영신(迎神)ㆍ전폐(奠幣)ㆍ진찬(進饌)의 3장과 종헌을 마친 후에 연주하는 철변두(撤籩豆)ㆍ송신(送神) 2장이 있습니다.대개 우리나라의 예악(禮樂)이 제작된 것이 태종조에 비롯하여 세종조에 완성되고 성종조에 정하여졌습니다. 그러므로 두 악장에 그 조종(祖宗)의 공덕을 칭송한 것이 목조(穆祖)의 바다를 타고 옮긴 것에서 비롯하여 세종의 왜를 정벌한 데에서 그쳤습니다. 그 뒤에 비록 세조의 중흥(中興)한 것과 성종의 태평을 이룬 데 대하여 모두 칭송한 바가 없는 것은 진실로 악장이 이미 수(數)를 갖추어서 더 첨가할 수 없기 때문이요, 의심나는 곳이 있어 비워 두어 그런 것이 아닙니다.상(商) 나라와 주(周) 나라의 성탕(成湯), 고종(高宗) 및 후직(后稷)ㆍ문왕(文王)ㆍ무왕(武王)을 칭송하는 묘악(廟樂)이 각각 있어 그 공업(功業)을 형상한 것은, 옛날의 종묘 제도는 도궁(都宮) 안에 혹은 7위(位) 혹은 9위를 각각 그 사당을 세우고 각각 그 제사를 따로따로 지냈기 때문에, 역시 각각 그 악이 있었던 것입니다.서한(西漢)의 종묘 제도는 비록 도궁(都宮)과는 다른 점이 있으나, 각각 사당이 있고 각각 제사를 지낸 것만은 일찍이 다른 것이 없었기 때문에, 문제(文帝)와 무제(武帝)의 제사에 모두 묘악이 맞지 않는다고 말하여 소덕무(昭德舞)와 문시무(文始舞)를 따로 제작하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한 나라 명제(明帝) 이후에 이르러 태묘는 모두 한 사당 안을 사용하였으며, 서쪽을 상(上)으로 삼는 제도를 만들어 사당을 각각 세우지 아니하였으니, 음악도 역시 각각 쓸 수 없었던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우리나라 악장을 반드시 9장으로써 숫자를 갖춘 것은 《주례(周禮)》에 이르기를, ‘종묘 안에서 악을 연주하여 아홉 번 변하면 사람과 귀신이 모두 예를 이룰 수 있다.’ 한 것에서 말미암은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역성장에 이르기를, ‘악이 이미 아홉 번 변하였으니 진미 진선(盡美盡善)하였습니다.’고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당초에 악을 정하고 수를 채운 뒤에 열성(列聖)의 승부(陞祔 종묘에 부묘하는 것)하는 대로 신위마다 악장을 만들어 9장 이외에 더 첨가함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인조조에 지은 바 있는 선조조의 중광(重光) 1장은 더욱 미안한 일입니다.만일 조종(祖宗)의 공덕으로 말한다면 악을 정한 뒤에 세조ㆍ성종ㆍ중종ㆍ선조는 모두 세실(世室 영구히 제사를 받들 위패(位牌)를 모신 종묘의 신실(神室))인데도 다만 선조조에만 1장을 찬술하여 마치 세실 중에서도 취사(取舍)하는 바가 있는 것 같고, 또 첨가해서 10장이 되었으니, 주악은 반드시 아홉 번 변한다는 뜻에 현격한 차이를 가져온 것입니다.만약 반드시 변통하려고 할 것 같으면, 초헌과 아헌에는 전과 같이 보태평(保太平)과 정대업(定大業)의 9장을 쓰고, 종헌에 이르러서 전일 거듭 사용하던 정대업의 규정을 변경하여 따로 한 악을 이루어서 9장을 갖추고, 그 9장 속에서 세실 9위의 공덕을 칭송하면, 그 구악(舊樂)에 있어서도 조금도 첨가하는 두려움과 개정하는 혐의가 없을 것이요, 중광 1장도 역시 그 수에 넣어서 사용할 수 있어 약간 온당할 것 같습니다.다만 생각하옵건대, 성조(聖朝)의 역대[曆數]가 장차 한량이 없을 것인데, 현재의 세실 9위 이외에 대대로 공덕으로 미루어 보아, 또 얼마의 사당이 있을지 알지 못할 것이니, 종헌을 이미 갖춘 뒤에 다시 첨가하기 어려움이 또 반드시 오늘날과 같은 때가 있을 것입니다. 이와 같은 일에 꼭 합당한 도리를 얻기란 참으로 어려운 것입니다. 전 부제학 이봉징(李鳳徵)의 상소에, ‘신실(神室)마다 각각 1장을 더하자.’는 청이 있었고, 해조에서 또, ‘인조의 신실에만 따로 악장을 짓자.’고 청하였으나, 신의 생각으로는 모두 시행하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하였다.
○ 영종 18년에 전교하기를, “신(神)을 감동하게 하는 법이 전혀 음악에 있는 것인데, 지금의 아악은 장단(長短)과 곡조가 능히 서로 조화되지 않아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어지럽게만 하니, 이는 반드시 악률(樂律)이 잘못된 소치일 것이다.” 하고, 필선(弼善) 이연덕(李延德)이 음률에 자못 밝으므로 장악정(掌樂正)에 임명하고, 악기도감(樂器都監)을 설치하여 연덕에게 낭청을 겸하게 하여, 악기를 잘 검사하고 교정하게 하였는데, 창덕궁(昌德宮)과 경희궁(慶熙宮)의 악가(樂架)의 동경(動磬)을 보니, ‘계축(癸丑)’이라고 많이 새겨져 있었으니, 이는 곧 세종 때에 박연(朴堧)이 제조한 것이다.또 사직 악기고(樂器庫)의 쓰레기 속과 비변사의 우물 속에서 석경(石磬) 24개를 얻었는데, 무릇 ‘계축’이라고 새긴 것이 15개나 되었다. 세종이 일찍이 고종(古鐘) 2개를 못 가운데에서 얻어 곧 아악을 만들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임금이 더욱 분발하여 아악을 갱신(更新)하려는 생각이 있어 재자관(賷咨官)을 명 나라에 보내어 생황(笙簧) 제조법을 사들여 장악원 제조(掌樂院提調)에게 신칙하여 부지런히 하는 자를 권장하여 상 주고, 게을리하는 자를 징계하고 벌주게 하여 실효(實效)를 거두도록 하였다.
○ 보(補) : 고려조의 ‘황풍악(皇風樂)’이란 것은 당 나라 때의 정악(正樂)의 음률을 모방한 것으로, 왕씨(王氏)가 비로소 고려를 일으킨 공덕을 칭송한 것이다. 조선 건국 초에 세종이 정인지(鄭麟趾) 등에게 명하여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를 찬술하였다. 그 가운데에 상 7장과 하 3장이 여민락(與民樂)으로 되어 있는데, 이는 황풍악의 곡조에 노래를 맞춘 것으로, 노래는 즉 사언(四言)으로 되어 있어 옛날것과 맞는 것인데, 이것을 우리 태조(太祖)의 묘악으로 삼았다.그러나 그 가사가 야비하고 고상하지 않아서, 거의가 사저(私邸)에 있을 때, 활 쏘기와 사냥과 격구(擊毬)와 잡희(雜戲) 등의 일을 제 일의(第一義)로 삼고 있어, 반드시 후세에 기롱을 살 것이다. 역대의 왕조에서 항상 서교(西郊)로 조사(詔使)를 맞이할 때에 전폐(殿陛)에서부터 여민락 악장의 연주를 시작하면 숭례문(崇禮門) 안에 이르러 바로 이를 마치고, 다시 주악을 시작하면 모화관에 이르러 바로 마쳤다. 선조 초년에 주악의 음정(音程)이 점점 빨라져서 전폐에서 광통교(廣通橋)에 이르면 벌써 마치었다.이때 식자들이 이를 우려하더니, 얼마 안 되어 임진왜란이 있었다. 소위 헌선도(獻仙桃)ㆍ수연장(壽延長)ㆍ오양선(五羊仙)ㆍ포구락(抛毬樂)ㆍ연화대(蓮花臺)ㆍ무고(舞鼓)의 6조는 곧 고려악(高麗樂)이었는데, 국조에서도 준용하였다. 또 몽금척(夢金尺)ㆍ수보록(受寶籙)ㆍ근천정(覲天庭)ㆍ수천명(受天命)ㆍ하황은(荷皇恩)ㆍ하성명(賀聖明)ㆍ육화대(六花隊) 등의 악장은 대개 내력이 있고 고상한 제목이 많으나 기악(妓樂)의 수준을 넘지 못하였으며, 육화대와 같은 것은 아이들의 놀이가 아닌 것이 없었는데, 3백여 년을 그대로 사용하여 오면서도 변동하지 못하였다.음악이란 화평스럽고 담담한 것을 위주로 하고, 정욕을 인도하려는 것이 아닌데, 조정에 일이 있으면 팔방(八方)의 기녀(妓女)를 뽑아 올려서 얼굴에 분을 바르고 뺨에 연지를 붉게 칠하여, 넓은 뜰에서 많은 사람들이 분잡하게 놀아서, ‘춤 잘 추는 비연(飛燕) 석가세존(釋迦世尊)’이라는 등의 말은 사람들로 하여금 남부끄럽게 하였다. 세종조에 아악만을 쓰고 여악(女樂)은 쓰지 아니한 사실이 영릉(英陵)의 비문에 기재되어 있어 알 수 있다. 세상에 이를 주달하여 준행할 자가 없는 것이 한스럽다. 《성호사설》
○ 우리나라 사람이 올량합(兀良哈)의 춤을 본받아 머리를 흔들며 눈을 크게 뜨고 어깨를 으쓱거리며 팔을 굽히고 두 다리와 열 손가락을 동시에 굽혔다 폈다 하여, 혹은 활을 쏘는 형상을 하고, 혹은 개가 걷는 형상도 하고, 혹은 나무를 잡고 늘어지듯이 늘어지고, 새가 공중을 날아 다리를 쭉 뻗듯이 뻗기도 하며, 앞으로 나아가고 뒤로 물러갈 때는 휙 바람이 났다.공경대부(公卿大夫)로부터 사(士)ㆍ서인(庶人)ㆍ창우(倡優)ㆍ여자에 이르기까지 음률을 알고 몸이 민첩한 자는 하지 않는 이가 없었는데, 이것을 ‘호무(胡舞)’라 칭하였고 악기로 반주까지 하였는데, 우찬성(右贊成) 어유소(魚有沼)가 가장 잘하였다. 안응세(安應世)는 말하기를, “사람에게 아첨하는 행위와 부드럽고 모양내는 태도는 사람의 할 바가 아니다. 하물며 오랑캐는 금수(禽獸)에 비유하고 있는데, 어찌 내 몸에다가 금수의 일을 가하겠는가” 하였다. 《추강냉화》
○ 고려 초에 악관(樂官)이 당 나라 때의 협계정악(夾階正樂)의 음을 모방하여 황풍악(皇風樂)을 제작하였는데, 악장에 왕씨가 고려를 처음 일으킨 공덕을 칭송하고, 무릇 국왕의 대조회(大朝會)와 행행(行幸)할 때에는 반드시 이를 주악하였다. 국초에 이르러 문사(文詞)를 맡은 신하에게 명하여 《용비어천가》 5권을 제작하고, 상 7장과 하 3장을 취하여 ‘여민락(與民樂)’으로 삼았는데, 이 여민락은 황풍악 곡조에 맞추어 노래를 부르는 것이다.임금이 명 나라의 조칙(詔勅)을 서교(西郊)로 나가 맞이할 때에 대궐 뜰에서부터 주악하기 시작하여 숭례문(崇禮門) 안에 이르러 한 곡조가 끝났고, 또다시 주악하여 모화관(慕華館)에 이르러 임금이 연(輦)에서 내리면 마쳤었다. 선조 초년에 와서는 악이 점점 빨라져서 한 곡이 으레 광통교(廣通橋)에 이르면 이미 끝나므로 악관이 그 악의 음절이 빠른 것을 대단히 우려하더니, 얼마 안 되어서 임진왜란이 있었다. 광해 때에는 소리가 슬프고 빠르고 음란해서 거의 수습할 수 없었다. 《지소록》
○ 우리나라의 악기에 현금(玄琴)은 옛날 오현금(五絃琴)을 본떠서 1현(絃)을 더한 것이요, 가야금은 옛날의 비파를 본뜬 것으로 13현을 줄여서 만든 것이다. 속악(俗樂)에는 풍입송(風入松)ㆍ서자고(瑞鷓鴣)ㆍ수룡음(水龍吟)ㆍ오운봉서도(五雲捧瑞圖) 등의 악장이 있는데, 송 나라 휘종(徽宗)이 보내 준 대성악(大晟樂)이다. 《지소록》
○ 삼국(三國)에 각각 음률과 악기가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상세하게 알 수 없고, 오직 현금(玄琴)은 신라에서 나왔고, 가야금은 금관(金官) 김해(金海) 에서 나온 것이다. 대금(大笒)은 당적(唐笛)을 본떠서 만든 것인데, 그 소리가 가장 장엄하였고, 향비파(鄕琵琶) 역시 당비파(唐琵琶)를 본뜬 것인데, 줄을 거는 것은 현금과 같다. 전악(典樂)으로 있는 송태평(宋太平)이 잘 탔고, 그 아들 전수(田守)는 그 법을 전한 것이 더욱 기묘하여, 그 소리는 마고(麻姑) 선녀가 가려운 곳을 긁어 주는 듯, 그 가늘고 아름다운 소리는 듣는 사람이 싫어할 줄을 몰랐다.전수는 또 당비파도 잘 타서 도선길(都善吉)과 함께 이름이 있었다. 선비나 서인(庶人)이 음악을 배울 때는 반드시 먼저 비파를 배웠다. 그러나 여러 사람 중에 뛰어난 자가 없었고, 오직 김신번(金臣蕃)만이 도선길의 지법(指法)을 모두 터득하였는데, 호방(豪放)한 점은 오히려 뛰어났다. 맹인(盲人) 이반(李班)은 현금을 잘 탔으므로 세종의 은총을 입어 금중(禁中)에 출입하였으며, 김자려(金自麗)는 고금(鼓琴)을 잘 탔다. 악공 김대정(金大丁)ㆍ이마지(李亇知)ㆍ권미(權美)ㆍ장춘(張春)은 모두 같은 시대의 사람인데, 그때 논평하는 이들이, “대정(大丁)의 간엄(簡嚴)함과 마지의 요초(要抄)는 각각 그 궁극한 경지에 이르렀다.”고 하였다.그런데 대정은 일찍 주살(誅殺)되고, 장춘과 권미는 모두 평범하였으나, 오직 이마지를 사림(士林)들이 매우 중하게 여겨 성현(成俔)ㆍ안침(安琛)ㆍ채수(蔡壽) 등이 일찍이 가서 배웠으며, 마지가 죽은 후에 그 음악이 세상에 성행하여 지금 사대부 집의 여복(女僕)들도 역시 능한 자가 있다. 또 전악 김복근(金福根)과 악공 정옥경(鄭玉京)이 제일 명수였고, 기생 상림춘(上林春) 역시 근사하였다.가야금은 황귀존(黃貴存)과 김복산(金卜山)이 잘 탔고, 맹인 정범(鄭凡) 역시 능하였다. 세종조에는 허오(許吾)가 있었고, 이어 이승련(李勝連)ㆍ서익성(徐益成)이 있었는데, 이승련은 세조에게 은우(恩遇)를 받아 군직(軍職)에 임명되었었고, 서익성은 일본에 갔다가 죽었다. 김소재(金小材)는 아쟁(牙箏)을 잘 타더니 역시 일본에 갔다가 죽었다. 《용재총화》
○ 음악을 하는 데는 세 가지가 있는데, 오음 십이율(五音十二律)의 근본을 알아서 쓰는 자가 있고, 음절의 완급을 알아서 악보를 만드는 자가 있고, 손에 정숙(精熟)해서 천지 조화의 오묘한 경지에 이른 자도 있다. 황효성(黃孝誠)은 능히 쓸 줄도 알고, 악보를 많이 지었으므로 세조에게 은우(恩遇)를 받아 벼슬이 어모장군(禦侮將軍)에 이르렀으며, 지금의 박곤(朴)이란 자는 금천군(錦川君) 박강(朴薑)의 서자(庶子) 경(耕)의 아우 로서 재주가 뛰어나고 효성이 지극하여 음악을 배우는 자가 그 문하로 많이 모여들었다. 《용재총화》
○ 김일손(金馹孫)이 육현금(六絃琴) 등[背]에 쓰기를, “순(舜)은 오현(五絃)이었고, 문왕(文王)은 칠현(七絃)이다.” 하였으니, 육현은 옛 제도가 아니다. 진(晉) 나라에서 칠현금을 고구려에 보내니, 왕산악(王山岳)이 이것을 가지고 손익(損益)을 가하여 육현을 만든 것을 지금까지 쓰고 있으니, 육현금이 우리나라에 있어서는 역시 오래된 것이다. 명(銘)을 지어 이르기를,

만물은 외로운 것이 없다. 응당 짝을 만나느니라 / 物不孤當遇匹
그러나 백세(百世)를 지나도 혹은 꼭 만난다고 기필하기 어려울 수도 있다 / 曠百世或難必
아아, 이 물건이 나를 놓지않았구나 / 噫此物不我失
서로 기다리지 않았건만 누구를 위해 나왔느냐/非相待爲誰出

하였다. 《해동잡기》
○ 장악원(掌樂院)에는 음률을 잘 아는 사람을 관원으로 삼았는데, 박연(朴堧)과 정침(鄭沈)은 모두 낭료(郞僚)로부터 마침내 제조(提調)에까지 이르렀던 것이다. 박씨(朴氏) 성 가진 관인(官人)이 있었는데, 나이 늙고 직을 잃어 《율려신서(律呂新書)》를 대충 배우고는 상소하여 악관(樂官)이 되기를 청하였더니, 조정에서 속을 모르고 임용하여 드디어 주부(主簿)를 겸하였다가 첨정(僉正)에 승진(陞進)하였다. 이 사람이 항상 사람을 대하여 오음 십이율의 찌꺼기[糟粘]를 논하니, 사람들이 모두 음악을 아는 것으로 말을 했으나 실상은 하나도 몰랐었다. 《용재총화》
○ 무릇 속악(俗樂)은 으레 진풍정(進豐呈)과 같은 내연(內宴)에 모두 주악하였는데, 쌍화점(雙花店)의 한 곡도 불가하거늘, 하물며 관음찬(觀音讚)이야 더욱 주악할 수 없는 것이다. 소위 ‘관음찬’이란 것이 어느 때부터 비롯하였는지 알 수 없으나, 반드시 고려 시대에 시문에 능하고 아첨하는 자가 지었을 것이다. 구절마다 ‘아미타불(阿彌陀佛)’이라는 말이 있으며, 또 그 전편(全篇)의 뜻도 오로지 불도(佛道)를 찬송한 것인데, 지금까지 몇 해가 되어도 이를 논하여 폐지해 버리는 이가 없으니, 탄식할 일이다. 《패관잡기》
○ 악원(樂院)에 보존되어 있는 네 개의 거문고에 써 있는 것을 보면, 하나는 ‘정대(靜對)’라 하였고, 하나는 ‘풍요옥패(風搖玉珮)’라 하였고, 하나는 ‘구소명패(九霄鳴珮)’라 하였으며, 또 하나에는 ‘청고(淸古)’라 하는 네 구(句)로 된 금명(琴銘)이 있고, 송 나라 황제가 서명한 글자가 있다. 또 ‘복고전(復古殿)’이란 세 글자를 새긴 어필로 된 옥새가 찍혀 있는데, 복고전은 소흥부(紹興府)에 있는 것으로 고종(高宗)이 세운 것이다. 이것으로 보면 이 거문고는 휘종이 준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으며, 고종이 선제(先帝)가 고려를 후대한 뜻을 본받아 특별히 준 것이 아닌가 한다.
○ 신라 옛 기록에 이르기를, “처음에 진(晉) 나라 사람의 칠현금을 고구려에 보냈는데, 고구려 사람이 비록 그것이 악기인 줄은 알았으나 그 성음(聲音)과 타는 법을 알지 못하여, ‘본국 사람으로서 능히 탈 줄 아는 자는 상을 후하게 주겠다’고 널리 구하였더니, 이때에 제 이상(第二相) 왕산악(王山嶽)이 그 본래의 모양을 그대로 두고서 자못 그 법제를 조금 바꾸어 만들고, 겸하여 악곡 백여 곡을 지어 탄주(彈奏)하였다.이때 현학(玄鶴)이 날아와서 춤을 추었으므로 드디어 ‘현학금(玄鶴琴)’이라 이름하였는데, 뒤에는 다만 ‘현금(玄琴)’이라고 불렀다. 신라 사람 옥보고(玉寶高)는 지리산(智異山) 운상원(雲上院)에 들어가서 거문고를 학습한 지 50년에 스스로 신조(新調) 30곡을 지었다.
○ 가야금은 신라 옛 기록에 이르기를, “가야국(伽倻國) 가실왕(嘉實王)이 당 나라의 악기를 보고 제조하였다. 왕이 이르기를, ‘여러 나라의 방언(方言)이 각각 다른데, 성음(聲音)이 어찌 같을 수 있느냐.’ 하고, 곧 악사(樂師) 우륵(于勒)에게 명하여 12곡을 짓게 하였다. 그러나 나라가 장차 어지럽게 될 것을 미리 알고 악기를 가지고 신라 진흥왕(眞興王)에게 투항하였더니, 왕이 크게 기뻐하였다. 간신(諫臣)들이 아뢰기를, ‘가야국의 나라를 망친 음악은 취할 것이 못 됩니다.’ 하니, 왕이 이르기를, ‘가야국의 왕이 음란하여 자멸(自滅)한 것인데, 음악이 무슨 죄냐.’고 하였다.” 한다.
○ 태조 3년 갑술에 서북면(西北面) 도절제사(都節制使) 최영지(崔永沚)가 보낸 가족을 이끌고 항복해 온 사람 1명이 퉁소를 잘 불었다. 말하기를, “이것은 ‘태평소(太平簫)’이다.” 하였다. 태평소는 본래 군중(軍中)에서 사용하였는데, 지금은 정대업(定大業)의 악에 겸해 쓰고 있다.
○ 처용놀이[處容戲]는 신라 헌강왕(憲康王) 때부터 시작되었다. 이는 한 신인(神人)이 바다 가운데로부터 개운포(開雲浦)에 나타나서 왕도(王都 경주)로 들어왔는데, 그 사람됨이 기이하고 쾌활하였으며, 노래와 춤을 잘하였다. 익재(益齋) 이제현(李齊賢)의 시(詩)에 이른바,

자개 이빨 붉은 얼굴로 달밤에 노래하고 / 貝齒頳顏歌夜月
솔개 어깨 자줏빛 소매는 봄바람에 춤을 추네 / 鳶肩紫袖舞春風

한 것이 바로 이것이다. 이 처용놀이는 처음에는 한 사람이 검은 도포에 사모를 쓰고 춤을 추었는데, 그 후에 와서는 오방 처용(五方處容)이 있었다. 세종이 그 율동을 따라 가사를 고쳐 지어 이름하기를, ‘봉황취(鳳凰吹)’라 하였는데, 드디어 묘정(廟廷)의 정악(正樂)으로 삼았다. 세조가 드디어 그 제도를 보태어 크게 음악을 벌이고 연주하였는데, 처음에는 승도(僧徒)들이 염불을 하면, 여러 기생이 영산회불보살(靈山會佛菩薩)을 합창하면서 바깥 뜰로부터 사방에서 둥그렇게 원을 지으며 들어가면, 악공과 광대가 각각 악기를 잡고 있고, 한 쌍의 학으로 된 사람과 처용(處容) 5명과 가면을 쓴 10명이 모두 따라가며 소리를 낮추어 천천히 ‘봉황취’를 세 번 부르고 들어가서 자리에 나아간다.이에 소리가 점점 빨라지고 큰북[大鼓]을 치면 악공ㆍ광대ㆍ기생이 몸을 흔들며 발을 움직이다가 조금 후에 파한다. 이리하여 연화대놀이[蓮花臺戱]가 시작되는데, 이보다 먼저 향산(香山)과 지당(池塘)을 설치해 놓고 둘레에 채색꽃[彩花]을 꽂아 놓는데, 높이는 한 길[一丈]이 넘으며, 좌우에 역시 그림 그린 등롱[畫燈籠]이 있어 거기에 달린 꽃술[流蘇]이 그 사이로 어른거리며 비친다.못[池] 앞의 동ㆍ서에 큰 연꽃 봉우리를 설치하여 두고, 작은 기생이 그 가운데로 들어가면 보허자(步虛子)의 곡조를 주악한다. 쌍학이 곡조에 따라 왔다갔다 하며 날개를 펴고 춤을 추면서 연꽃을 부리로 쪼면, 작은 기생 2명이 연꽃 봉우리를 헤치고 나와서 혹은 서로 맞보기도 하고 혹은 서로 등지기도 하면서 뛰며 춤을 추는데, 이것을 ‘동동(動動)’이라 이른다.이에 이르러 쌍학이 물러가고 처용이 들어온다. 처음에 만기(縵機)를 연주하면 처용이 열을 지어 서서 때때로 소매를 꾸부리며 춤을 춘다. 다음에 중기(中機)를 연주하면 처용 5명이 각각 오방(五方)으로 나누어 서서 소매를 펄럭이며 춤을 추고, 다음에 촉기(促機)를 연주하고, 계속하여 신방곡(神房曲)을 연주하면 너울너울 어지럽게 춤을 추고, 끝으로 북전(北殿)을 연주하면 처용이 물러나서 제자리에 나란히 선다.이리하여 기생 한 사람이,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陁佛)’을 부르면, 여러 사람이 따라 화창(和唱)하고, 또 관음찬을 부르는데, 세 번, 네 번 돌고 그친다. 항상 섣달 그믐날 밤이면 새벽녘에 창경ㆍ창덕 두 궁전 뜰에 들어가서 창경궁에는 기악(妓樂)을 쓰고, 창덕궁에는 가동(歌童)을 써서, 날이 새도록 주악하며, 악공ㆍ광대ㆍ기생에게는 포물(布物)을 각각 내리어 주었다. 이는 모든 사기(邪氣)를 물리치기 위함이었다. 《용재총화》
○ 보(補)ㆍ삼국의 악부(樂府) : 백제는 중국의 제도를 모방하였는데, 나라가 멸망한 후에 곧 흩어져 잃어버렸으며, 고구려는 당 나라 무후(武后) 때에 이르기까지도 20곡이 남아 있었다. 신라는 삼죽(三竹)ㆍ삼현(三絃)이 1천 4백 51곡이며, 향악은 회소(會蘇)ㆍ신숙(辛熟)ㆍ돌아지아(突阿枝兒)ㆍ사뇌(詞惱)ㆍ우식(憂息)ㆍ미지(美知)ㆍ도령가(都領歌)ㆍ날현인(捺絃引) 등 여러 곡이 또한 많았는데, 이는 모두 태상시(太常寺)의 기록뿐이고, 지금은 하나도 남아 있는 것이 없다. 《여암고(旅菴藁)》


 

[주D-001]초례(醮禮) : 아들이 장가갈 때에 아버지가 술 한 잔을 부어 주며 훈계하고, 딸이 시집갈 때는 어머니가 술 한 잔을 부어 주며 훈계한다.

 

연려실기술 별집 제16권
 지리전고(地理典故)
산천의 형승(形勝)


서울[漢都] 성 안에는 경치 좋은 곳이 비록 적으나 그 중에서 노닐 만한 곳은 삼청동(三淸洞)이 가장 좋고, 인왕동(仁王洞)이 그 다음이고, 쌍계동(雙溪洞)ㆍ백운동(白雲洞)ㆍ청학동(靑鶴洞)이 또 그 다음이다. 삼청동은 소격서의 동쪽에 있다.계림제(鷄林第)로부터 북쪽에 어지럽게 서 있는 소나무 사이에는 맑은 샘물이 쏟아져 나온다. 물을 따라 올라가면 산은 높고 나무는 빽빽히 섰으며 바위로 된 골짜기가 깊숙하다. 몇 리를 못 가서 바위가 끊어져 낭떠러지를 이룬 곳이 있는데, 물이 낭떠러지의 허공에 뿌려져 흰 무지개를 드리운 것 같고 흩어지는 물방울은 구슬이 뛰는 것 같다.그 아래에 물이 모여서 깊고 큰 못이 되었다. 그 곁은 평탄하고 넓어서 사람 수십 명이 앉을 만하다. 높은 소나무들이 그 위에 엉켜 덮여 있고 바위 사이에는 모두가 진달래와 단풍잎으로 봄과 가을에는 붉은 그림자가 비치어 빛이 난다. 지위가 높고 점잖은 사람으로 와서 노는 이가 많다. 그 위로 두어 걸음 올라가면 연굴(演窟)이다.
인왕동은 인왕산 아래의 구불구불하고 깊은 골짜기가 복세암(福世庵)을 에워두른 곳인데, 골짜기의 물은 합류하여 시내를 이루고 있다. 서울 사람들이 다투어 와서 활쏘기를 한다. 쌍계동은 성균관의 웃골[上谷]에 있다. 두 샘물이 산골의 실개천을 이루었는데 김뉴(金紐) 자(字)는 자고(子固)이다. 가 개천가에 초당을 짓고 복숭아를 심어 무릉도원을 모방하니 진산(晉山) 강희맹(姜希孟)이 여기에 대하여 글[賦]을 지었다. 김뉴의 문장과 풍류가 당시 세상에 드날렸으므로 호걸들이 그를 따라 노는 이가 많았다. 백운동은 장의문(藏義門) 안에 있는데 중추(中樞) 이염의(李念義)가 이곳에 살았다. 시인들이 그의 유거(幽居)를 제목으로 하여 시를 지은 것이 있으나 이염의는 글을 알지 못하였다.청학동은 남학(南學)의 남쪽 골에 있는데 골이 깊고 맑은 개천이 있어서 활쏘기 장소를 차릴 만하다. 그러나 산이 민둥민둥하여 수목이 없는 것이 유감이다.
성 밖에 놀 만한 곳은 장의사(藏義寺)의 앞 개천이 가장 좋은데 시냇물이 삼각산의 여러 골짜기에서 흘러나온다. 골짜기 안에는 여제단(厲祭壇)이 있고 그 남쪽에는 무이정사(武夷精舍)의 옛 터가 있다. 절 앞에는 겹쳐 포개진 돌들이 수십 길이나 되어 수각(水閣)을 이루었는데 절 밑 수십 보(步) 되는 곳에 차일암(遮日岩)이 있다.바위는 매우 험하고 높아 냇물을 베고 있으며 바위 위에 장막을 쳤던 구멍이 있고, 바윗돌은 층층으로 포개져서 계단과 같다. 급한 물줄기가 어지럽게 쏟아져서 맑은 하늘에 우레가 우는 듯 귀를 시끄럽게 하는데 물은 맑고 돌은 희어서 완연히 속세를 벗어난 뛰어난 경치이므로 벼슬아치들이 와서 노는 이가 끊어지지 않는다.물을 따라 몇 리를 내려가면 부처바위[佛岩]가 있는데 바위에 불상을 새겨 놓았다. 시냇물은 북쪽으로 꺾어져 곧게 서쪽으로 흐른다. 그 사이에 예전에는 물방아가 있었다는데 지금은 없다.
그 아래의 몇 리 되는 곳이 홍제원(弘濟院)이다. 홍제원의 남쪽에 작은 언덕이 있고 언덕에는 큰 소나무들이 가득한데 그 위에 예전에는 정자가 있었다. 중국 사신이 옷을 갈아 입던 곳이었는데 정자가 없어진 지 이미 오래이다.사현(沙峴)의 남쪽에서 모화관까지의 사이에는 좌ㆍ우 양쪽에 키 큰 소나무 들과 밤나무 숲이 겹겹으로 서로 뒤섞이어 덮여 있다. 서울의 활쏘기 하는 이, 전송하는 이, 영접하는 이들이 많이 여기에 모인다. 그러나 쏟아지는 계곡의 급류도 맑게 흐르는 물도 없다.목멱산(木覔山)의 남쪽 이태원(梨泰院)의 들에는 고산사(高山寺)의 동쪽에 솟아나는 샘물이 있으며 큰 소나무가 골에 가득하여 성 안의 부녀자들이 빨래하러 많이 간다. 서쪽으로 가면 진관사(津寬寺)ㆍ중흥사(中興寺)ㆍ서산사(西山寺)가 있고,골[洞]의 북쪽에는 청량사(淸涼寺)ㆍ속개사(俗開寺) 등이 있으며, 골의 동쪽에는 풍양사(豐壤寺)가 있고, 남쪽에는 안양사(安養寺) 등이 있다. 모두 높은 산과 큰 시내가 있어서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쉴 만한 곳이 한두 곳이 아니지만, 서울에서 가깝지 않기 때문에 놀러 오는 사람이 드물다.《용재총화》
○ 개성부 : 송악이 진산(鎭山)이다. 처음 이름은 부소(扶蘇)였고 또 곡령(鵠嶺)이라고도 일컬었다. 그 아래가 만월대(滿月臺)이다. 소위《송사(宋史)》에, “큰 산을 의지하고 궁전을 지었다.”고 한 것이 바로 이것이다.만월대의 뒤가 자하동(紫霞洞)이다. 동부(洞府)는 그윽하고 막혔으며 시냇물은 맑고 잔잔하여 가장 뛰어난 절경이다. 남쪽에 있는 용수산(龍首山)ㆍ진봉산(進鳳山)이 내안산(內案山)을 이루고 있다. 진봉산에는 철쭉꽃이 많이 피기 때문에 세상에서는 진봉산 철쭉이라고 한다.
○ 천마산(天磨山) : 송악의 북쪽에 있다. 모든 봉우리가 높고 험하여 하늘을 찌르는 듯한데 바라보면 푸른 기운이 서린다.
○ 면주동(綿紬洞) : 오관산(五冠山) 밑에 있으며, 골 안은 매우 넓다. 골짜기 입구에 해를 가리는 바위가 있는데 바윗돌은 넓고 평탄하여 앉을 만하다. 돌을 파서 구멍을 만들었는데 사람들은 옛사람들이 장막의 기둥을 세운 곳이라고 말한다. 《여지승람》에는 장단(長湍)에 들어 있다.
○ 산대암(山臺岩) : 송경(松京)의 숭인문(崇仁門) 밖에 있다. 백 길이나 되는 절벽의 형상이 색을 칠한 누각같다. 화담(花潭)은 영통동(靈通洞) 입구에 있다. 못가에는 그림 병풍을 펴 놓은 것 같은 푸른 절벽이 높게 서 있고 못 곁에 작은 바위가 있는데 4면이 깎은 듯하다. 여기에도 또한 장막을 쳤던 구멍이 있다.이 못에서부터 위는 산이 둘러 있어 길이 꾸불꾸불하여 시냇물을 여러 번 건너야 영통동에 이르게 된다. 영통동은 오관산 밑에 있다. 《여지승람》에는 장단에 들어 있다. ○ 화담은 경치가 뛰어나게 좋으며, 서경덕(徐敬德)이 은거하던 곳이다. 못가의 바위에 서사정(逝斯亭)이 있다.
○ 박연(朴淵) : 천마산과 성거산(聖居山) 사이에 있다. 형상이 돌로 만든 장독과 같아 넘어다보면 아주 검다. 못의 중심에 솟아나온 반석(盤石)이 있는데 섬바위라고 한다. 물이 절벽으로 흘러 사나운 폭포가 되어 아래로 떨어지는데 열 길은 될 것이며, 마치 흰 무지개가 하늘에 비치고 나는 구름이 높은 돌다리를 씻는 듯, 우레가 내닫고 번개가 치는 것 같아서 소리가 천지를 진동한다.속세에 전하기를, “예전에 박 진사(朴進士)라는 사람이 이 못 위에서 피리를 불었더니 용왕의 딸이 감동하여 박 진사를 끌어들여 남편으로 삼았다. 그래서 못 이름을 ‘박연’이라고 한다. 또는 박 진사의 어머니가 와서 울다가 못에 떨어져 죽었으므로 못 이름을 고모담(姑姆潭)이라고도 한다.” 한다. 폭포 아래에 범사정(泛槎亭)이 있다.
○ 대흥동(大興洞) : 박연에서 올라가면 산은 점점 더 높아지고 물은 더욱 맑아지며 바윗돌은 매우 험준하다. 관음굴 앞에 이르면 물이 깊어 못을 이루고 있다. 물 속에서 솟아나온 돌이 있는데 이를 구담(龜潭)이라고 한다. 또 몇 리를 올라가면 깊은 웅덩이가 있는데 물이 몹시 맑다. 4면이 모두 돌인데 어떤 것은 책상이나 평상 같고, 어떤 것은 담장이나 집과 같다.그 위는 모두가 오래된 소나무이다. 또 몇 리를 올라가면 샘물이 동쪽 벼랑에서 솟아 나오는데 여기를 보현동(普賢洞)이라고 하고 또 두어 걸음 올라가면 마담(馬潭)이라고 하는 곳이 있다. 또 몇 리를 올라가면 대흥사(大興寺)가 있다. 골짜기에 수목이 무성하여 여름에는 목련화의 향기가 코를 찌르고 가을이면 단풍과 황엽(黃葉)이 물 밑에 거꾸로 비치니 참으로 아름다운 곳이다. 모두《여지승람》에 있다.
○ 장단의 석벽 : 강물의 원류는 안변(安邊)ㆍ영풍(永豐)에서 나와 이천(伊川)ㆍ안협(安峽)을 거쳐 마전(麻田)에 이르러 대탄(大灘)과 합류하고 부동(府東)에 이르러 두기진(頭耆津)이 되는데 양쪽 언덕에 푸른 돌이 수십 리를 벽처럼 서 있어 바라보면 그림과 같다. 세상에서 전하기를, 고려 태조가 거둥하여 놀던 곳이라고 한다. 그 아래가 임진 나루터이다.
○ 여주의 청심루(淸心樓) : 객관(客館)의 북쪽에 있다. 여강의 동쪽 언덕인 봉미산(鳳尾山)에 신륵사(神勒寺)가 있는데 벽돌 탑이 있어 세상에서는 벽사(甓寺)라고 부른다. 절 옆 강변에 강월헌(江月軒)이 있는데 낭떠러지의 돌들이 아주 기묘하다. 강의 남쪽 언덕 아래에 말바위가 있는데 전설에는 바위 아래에 여룡(驪龍)이 있는 곳이 있다고 한다.
○ 영평(永平) 결(缺)
○ 충청도 청풍(淸風 청주)의 한벽루(寒碧樓) : 객관의 동쪽에 있는데 큰 강물을 굽어보고 있다.
○ 단양의 도담(島潭) : 군 북쪽 24리 되는 곳에 있다. 세 바위가 한복판에 솟아 있다. 못에서부터 물을 수백 보쯤 거슬러 올라가면 푸른 석벽이 만 길이나 되어 보이는데 황양목(黃楊木)과 측백나무가 바위틈에 거꾸로 나 있고, 바위에 구멍이 문같이 생겨 있어 바라보면 딴 세상 같다.
○ 구담(龜潭) : 양쪽 언덕의 석벽이 하늘에 높이 솟아 해를 가리었다. 왼 쪽과 오른 쪽에 강선대(降仙臺)ㆍ채운봉(彩雲峯)ㆍ옥순봉(玉笋峯)이 만 길이나 솟아 있는데 순전히 하나의 돌이다. ○ 가은암(可隱岩)ㆍ상선암(上仙巖)ㆍ중선암(中仙巖)ㆍ하선암(下仙巖)이 있다.
○ 이락루(二樂樓) : 군의 서쪽에 있다. 김일손(金馹孫)의 기문(記文)이 있다. 운암(雲巖)은 읍의 동남쪽에 있다. 서애 유성룡의 정자 터가 있다.
○ 제천의 의림지(義林池) : 못 서쪽에 후선정(候仙亭)이 있다.
○ 영춘(永春)의 성산(城山) 남쪽에 있는 석굴 : 높이가 한 길 남짓하고 넓이는 10척이 넘으며 깊게 들어가서 끝이 없다. 물이 철철 흘러나오는데 깊이는 무릎이 잠길 정도이고 얼음과 같이 맑고 싸늘하다. 고을 사람이 횃불 열 자루를 갖고 들어갔는데 굴이 아직 끝나기 전에 횃불이 다하여 돌아 나왔다 한다.
○ 소백산 결(缺)
○ 충주의 달천(達川) : 임진왜란 때 명 나라의 장수가 물맛을 보고 “중국의 여산 폭포(廬山瀑布)와 같다.”고 말하였다. 달천은 속리산에서 발원하여 금천(金遷) 앞에 이르러 청풍강(淸風江)과 합류한다. 금천은 대도시이다. 금천의 서쪽 십여리 되는 곳에 가흥창(嘉興倉) 조운창 이 있다. <팔역지(八域誌)>
○ 탄금대(彈琴臺) : 신라 때 선인(仙人) 우륵이 거문고를 타던 곳이다.
○ 보은의 속리산 : 현(縣)의 동쪽 44리 되는 곳에 있다. 아홉 봉우리가 우뚝 솟아 있는데 산 정상에 문장루대(文藏樓臺)가 있다. 천연적으로 돌이 포개져 힘차게 공중에 솟아 있는데 그 높이는 몇 길이나 되는지 알 수 없으며 그 넓이는 삼천 명은 앉을 만하다. 대(臺) 위에 가마솥 같은 구덩이가 있는데 물이 철철 넘쳐서 가뭄에도 줄지 않고 장마에도 불지 않는다.세 갈래로 나누어져서 반공(半空)으로 흘러내려가는데 동쪽으로 흐르는 것은 낙동강이 되고, 남쪽으로 흐르는 것은 금강이 되며, 서쪽으로 흘러 북쪽으로 꺾어진 것은 달천이 된다. 산 아래에는 여덟 개의 다리를 아홉 번 돈다는 팔교구요(八橋九遙)라는 이름이 있다. 한 줄기의 물이 빙 돌고 굽이마다 다리가 있는데, 법주사(法住寺)에 이르게 된다. 절의 서쪽 봉우리에 거북처럼 생긴 돌이 있는데, 자연히 생겨난 천연석이다. 《여지승람》
○ 영동(永同)의 용연(龍淵) : 현의 서쪽 16리에 있으며, 골짜기 입구의 양쪽 언덕은 깎아 세운 듯한 석벽이 2리쯤 들어가면 두 봉우리가 맞보고 있는데 바위로 된 봉우리는 높고 가파르다. 중간에 돌절구처럼 생긴 곳이 있어 못의 하류가 여기에 괴어 있는데 깊이를 헤아릴 수 없다. 세상에서는 기연(妓淵)이라고 부르는데 물이 넘쳐서 폭포가 되어 수백 척을 날아 흐른다. 그 아래에 깊은 못이 있다. 《여지승람》
○ 공주의 금강 : 강물을 내려다 보는 곳에 사송(四松)ㆍ금벽(錦壁)ㆍ독락병(獨樂屛) 등의 정자가 있다. 올라가서 조망을 즐길 만한 경치가 있다. 쌍수산성(雙樹山城)의 공북루(拱北樓)는 매우 장엄하고 화려하다.
○ 첫째 유성(儒城), 둘째 경천(敬天), 셋째 이인(利仁), 넷째 유구(維鳩)는 세상에서 말하는 살 만한 곳이다.
○ 계룡산의 서북쪽에 있는 용연(龍淵) : 물이 넘쳐서 큰 시내를 이루니 산의 남쪽과 북쪽에 경치 좋은 곳이 많다. 동쪽에는 봉림(鳳林)이 있고 북에는 갑사(岬寺)와 동학사(東學寺)가 있다.
○ 부여의 백마강 : 조룡대(釣龍臺)ㆍ낙화암ㆍ자온대(自溫臺)ㆍ고란사(皐蘭寺) 등이 있으니 백제 때의 고적이다. 암벽이 기묘하고 아름다우며 경치가 뛰어나게 좋다.
○ 덕산(德山)의 가야산 결(缺)
○ 보령(保寧)의 영보정(永保亭) : 최고의 명승지라고 일컫는다. 박은(朴誾)의 시에,
땅은 푸드덕거리며 날아가려는 날개와 같고/地如拍拍將飛翼
누각은 흔들흔들 매지 않은 배와 같다/樓似搖搖不繫篷
고 한 곳이 바로 여기이다.
○ 청라동(靑蘿洞) 결(缺)
○ 해미(海美)의 가야산 : 상왕산(象王山)과 서로 연해 있다. 동쪽 가야사(伽倻寺)가 있는 동학(洞壑)은 곧 옛날 상왕(象王)의 궁궐이 있던 터이다. 서쪽에 수렴동(水簾洞)이 있는데 산악과 폭포가 매우 기묘하다. 북쪽에 강당동(講堂洞)ㆍ무릉동이 있는데 수석이 또한 아름답다.
○ 남포(藍浦)의 성주산(聖住山) : 남ㆍ북의 두 산이 합하여 큰 골짜기가 되었다. 수구(水口)가 밝고 깨끗하다. 산 밖에서 검은 옥벼루를 생산하는데 이따금 관상(觀賞)에 쓰일 만한 돌이 난다.
○ 화계(花溪) 결(缺)
○ 홍주의 광천(廣川) 결(缺)
○ 청주의 화양동(華陽洞) : 선유산(仙游山) 칠성대(七星臺)로부터 서쪽으로 재[嶺]의 능선을 넘어가면 여기가 외선유동(外仙游洞)이다. 조금 내려가면 청주의 파곶산(葩串山)인데 동천(洞天)이 깊숙이 뚫려 있다. 큰 시냇물이 암석의 골짜기와 돌벼랑으로 쏟아져 내려와 천번 돌고 만번 굴러 흐르니 경치가 기괴하고 맑고 빼어나다. 그 아래가 화양동인데 수석(水石)이 더욱 기묘하고 뛰어나다. 그 가운데 만동묘(萬東廟)가 있다.
○ 강원도 회양(淮陽)의 단발령(斷髮嶺) : 천마산의 금성현(金城縣)의 경내에 있다. 속언에, “이 재에 올라 금강산을 본 자는 머리를 깎고 중이 되고자 하기 때문에 이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 금강산 : 또는 개골(皆骨)ㆍ열반(涅槃)ㆍ풍악(楓岳)ㆍ지달(怳怛)이라고도 부르며 모두 1만 2천 봉이다. 내산과 외산을 합하여 1백 8개소의 절이 있다. 단발령으로부터 장안사(長安寺)에 이르는 사이에 백천동(百川洞)ㆍ업경대(業鏡臺)ㆍ백화암(白華菴)ㆍ표훈사(表訓寺)를 지나게 된다. 정양사(正陽寺)에 오르면 천을대(天乙臺)ㆍ개심대(開心臺)ㆍ헐성루(歇星樓)가 있어서 가장 이 산의 참된 모습을 보여 주는데 바로 중향성(衆香城)과 마주 대하고 있어서 경치를 완상하기에 더욱 좋다.명소(名炤)와 낙월(落月)ㆍ대향로(大香爐)ㆍ소향로(小香爐)ㆍ금강대ㆍ망고대(望高臺) 등의 봉우리들이 앞뒤로 둘러 벌여 섰다. 북쪽으로 들어가면 만폭동인데 바위 위에 양사언(楊士彦)이 쓴 ‘봉래풍악 원화동천(蓬萊楓岳 元化洞天)’이라는 여덟 글자가 있다. 골짜기 안의 보덕굴(普德窟)에는 관음각(觀音閣)이 있다. 절벽을 파서 판자를 걸고 밖으로 구리쇠 기둥을 세워 그 위에 작은 집 세 칸을 만들었는데 쇠사슬로 얽어서 바윗돌에 못박아 놓았다.
물줄기의 근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여덟 개의 못이 있는데, 관음담(觀音潭)ㆍ진주담(眞珠潭)ㆍ화룡담(火龍潭)ㆍ벽하담(碧霞潭)ㆍ□ 구(龜) □이라 한다. 진주담과 벽하담이 가장 기묘하다. 수건애(手巾崖)라는 돌이 있고, 사자암이라는 봉우리가 있으며, 불지암(佛地菴)ㆍ송라암(松蘿菴)이라는 암자가 있다.가장 깊숙한 곳에 있는 것이 마하연(摩訶衍)ㆍ묘길상(妙吉祥)이다. 송라암의 동쪽 큰 골에는 무수한 폭포들이 갈라지고 나누어져서 아득하게 퍼져 흐르는 것이 마치 흰 무지개 같다. 봉우리와 암석은 솟아 있는 것은 날이 선 칼과 같고, 날카로운 것은 송곳과 같고, 우뚝 치켜 든 것은 손과 같고, 서루 마주 닿은 것은 이빨과 같고, 굽은 것은 팔꿈치 같고, 가로 뻗은 것은 팔과 같다.불지암(佛地庵)은 또한 매우 그윽하고 가장 아름답다. 만회암(萬灰庵)을 거쳐 백운대에 오르는데, 구경하는 사람들은 쇠줄을 붙잡고 올라가서 중향(衆香)ㆍ백옥(白玉)ㆍ석병(石屛)을 관람한다. 중향성은 만인봉(萬仞峯)의 정상에 있다. 모두 흰 돌인데 층계가 있어 탁자를 펴 놓은 것 같다. 탁자 위에 한 개의 서 있는 돌을 안치하였는데 불상 같으나 얼굴의 형상이 없다.좌ㆍ우의 돌 상탁 위에도 작은 석상들을 두 줄로 배열하였는데 또한 얼굴의 형상은 분명치 않다. 속언에 담무갈(曇無竭)이 여기에 머물어 살았다고 전한다. 금강산의 주봉은 비로봉(毗盧峯)이다. 정면으로 동해 바다를 굽어보고 있는데 여름이라도 오히려 춥다. 산기운과 안개가 얼룩지고 엉겨서 구름빛 같다.또 원통곡(圓通谷)ㆍ수미탑(須彌塔)ㆍ백탑동(百塔洞) 등 여러 경치 좋은 곳이 있는데 어느 것이나 기이한 경치가 아닌 것이 없다. 구룡연에 내팔담(內八潭)이 있는데 큰 폭포가 높은 산봉우리로부터 날아 내려오면서 굽이굽이에 못을 이룬 것이 여덟 층인데, 위험하여 들어가기는 어렵다.영원암(靈源庵)ㆍ마하연(摩呵衍)에서 내수참(內水站)으로 넘어가면 여기가 내금강과 외금강의 분계이며 은선대(隱仙臺)를 지나 유점사에 이른다. □ 영기연(永其淵)은 금강산의 북쪽 기슭에 있다.
○ 고성(高城)의 금강외산 : 불정암(佛頂巖)에는 구멍이 있는데 깊이가 바닥이 없다. 속언에 용녀(龍女)가 나와 불정화상(佛頂和尙)의 설법을 들었다고 전한다. 불정대(佛頂臺)에 올라 12폭포를 바라보면 푸른 언덕과 석벽들이 그림 병풍처럼 둘러섰는데 폭포가 쏟아져 내려오는 형상이 흰 무지개 같은 것이 열둘이다.유점사의 불전은 능인전(能仁殿)이라고 하는데 역대의 왕실에서 하사한 옛 기물들이 많다. 만경동(萬景洞)에는 선담(船潭)이 있다. 상원(上院)ㆍ중원(中院)ㆍ내원(內院)ㆍ만경대를 이리저리 다니면 동해의 뛰어난 경치를 시원스럽게 볼 수 있다. 성불암(成佛菴)에서 해뜨는 것을 보고 발연사(鉢淵寺)에서 중의 무리가 폭포로 달려가는 것을 볼 수 있다. 발연으로부터 비스듬히 신계사(新溪寺)로 돌아 옥류동(玉流洞)에 이르러 구룡연을 항하면 곧 내팔담(內八潭) 외에, 아홉번째로 꺾이는 곳인데 폭포가 기이하고 웅장하다. 신물(神物)이 물의 소용돌이 속에 숨어 있어서 사람의 소리가 조금만 높으면 문득 우레가 울고 비가 오는 이상한 일이 있다고 한다.
○ 만물초(萬物草) : 금강산 동북쪽의 동천(洞天)에 있다.
○ 삼일포(三日浦) : 겹쳐진 봉우리와 포개진 멧부리로 둘러쌓였는데 그 가운데에 36봉이 있다. 계곡은 맑고 그윽하며 몽천사(夢泉寺)라는 절이 있다. 호수의 중심에 작은 섬이 있는데 푸른 돌이 편편하지 않다. 거기에 사선정(四仙亭)이 있는데 옛날 영랑(永郞)ㆍ술랑(述郞)ㆍ남랑(南郞)ㆍ안상(安詳) 등 네 신선이 놀던 곳이라고 한다.호수의 남쪽 작은 봉우리에 돌로 된 감실(龕室)이 있다. 봉우리의 북쪽 낭떠러지의 돌에는, ‘영랑도남석행(永郞徒南石行)’이라고 붉게 쓴 여섯 글자가 있다. 암자 뒤 문암(門巖)에서 해뜨는 것을 볼 수 있다. 호수의 가운데에 또 매향비(埋香碑)ㆍ사자암 등 여러 좋은 경치가 있다.
○ 해산정(海山亭) : 고을의 관아 서쪽에 있다. 서쪽으로는 금강산을 쳐다보고 동쪽으로는 바다를 바라보며, 남쪽으로는 긴 시내를 굽어보고 있다.
○ 남강(南江)의 대호정(帶湖亭) 결(缺)
○ 해금강(海金剛) :《여지승람》에는 포구라고 하였다. 산에 바위가 우뚝 솟아 층층으로 포개져서 계단과 같고 위에는 백여 명이 앉을 만하다. 바다 가운데 암석이 바둑처럼 놓여 있는데 돌은 모두 흰빛이다.해안에는 석봉이 그림처럼 벌여 서 있다. 동쪽을 바라보면 5리나 되는 사이에 석봉이 병풍처럼 벌여 있고, 봉우리 아래에는 돌들이 있어서 용이 움켜잡고 호랑이가 끌어당기는 것과 같다. 물을 따라 내려가기도 하고 거슬러 올라가기도 하면서 구경하면 그 경치는 이루 말할 수 없으며 배에서 뱃사람이 전복 따는 것도 보인다.
○ 통천의 총석정(叢石亭) : 군의 북쪽 20리에 있다. 가로 뻗은 봉우리가 갑자기 바다로 뻗어 섬과 같다. 바닷가 언덕 낭떠러지에 줄지은 돌들이 빗살과 같이 정연하게 늘어섰고, 수십 개의 돌기둥이 언덕 곁에 모여 섰는데 언덕에서 10여 보(步) 떨어진 곳에는 또 네 개의 돌기둥이 따로 떨어져 물 가운데 섰다. 돌은 모두 6면으로 되어 있다.줄지어 선 돌 수백 개가 한 돌기둥을 이루었는데 기둥도 또한 6면(六面)이다. 돌기둥 위에는 다복솔[矮松]이 있는데 수명이 얼마나 오래되었는지 알 수 없다. 여기를 사선봉(四仙峯)이라고 일컫는다. 봉우리에서 조금 북쪽 해안에는 돌의 모양이 또 틀리니, 어떤 것은 길고 어떤 것은 짧으며, 어떤 것은 쌓여 있고 어떤 것은 흩어져 있으며, 어떤 것은 기대어 있고 어떤 것은 가로질러 있다. 이 돌은 모두 4면인데 혹 5면도 있으며 기괴하고 이상하게 생겼다. 총석정은 가로지른 봉우리 위에서 돌기둥을 마주 굽어보고 있다.
○ 금란굴(金幱窟) : 나무 없는 민둥 봉우리가 가운데는 높고 주위는 조금씩 낮아져서 바다를 굽어 본다. 봉우리의 낭떠러지에 굴이 있는데 넓기는 7, 8척이나 되고 깊이는 10여 보(步)쯤 된다. 물의 깊이는 헤아릴 수 없다. 굴의 네 모퉁이의 석벽은 높이가 3척이며, 돌의 무늬는 노란색인데 아롱져서 금색으로 무늬가 있는 가사(袈裟)와 같다.
○ 옹천(甕遷) : 또는 왜륜천(倭淪遷)이라고도 한다. 군의 남쪽 65리에 있다.
○ 흡곡(歙谷)의 시중대(侍中臺) : 현의 북쪽 7리에 있다. 긴 능선이 구불구불하게 동쪽에 도사리고 있다. 3면이 모두 큰 호수인데 물가는 모래섬을 굽어 둘러 있고 밖은 큰 바다가 둘러 있다.바다 가운데 일곱 개의 섬이 호수와 바다 사이에 죽 늘어섰으며 푸른 솔이 길을 끼고 있다. 시중대의 옛이름은 칠보(七寶)였는데 감사 한명회(韓明澮)가 올라와 유람할 때 그를 정승에 임명한다는 명령이 왔기 때문에 마침내 지금의 이름으로 고쳤다.
○ 간성(杆城)의 청간정(淸澗亭) : 군의 남쪽 40리에 있다. 석봉이 우뚝 솟았는데 층층마다 대(臺)와 같고 높이가 수십 길이나 된다. 위에는 용트림을 한 소나무 몇 그루가 있다. 대의 동쪽에 만경루가 있으며, 대의 아래에는 돌들이 어지럽게 울쑥불쑥 바다에 꽂혀 있다. 놀란 파도가 함부로 돌을 때리니 물방울이 눈처럼 날아 사방에 흩어진다.
○ 선유담(仙游潭) : 군의 남쪽 10리 되는 산골에 있다. 작은 봉우리가 우뚝 솟아 있는데 반은 호수의 한가운데로 들어가 있다.
○ 영랑호(永郞湖) : 군의 남쪽 55리에 있는데 둘레가 30여 리이다. 암석이 기묘하고 괴이하며, 호수의 동쪽에 작은 봉우리가 있는데 반은 호수의 가운데로 들어가 있다.
○ 화담(花潭) 결(缺)
○ 양양의 낙산사(洛山寺) : 부의 동북 쪽 15리의 오봉산(五峯山)에 있다. 일명 낙산사라고 한다. 이화정(梨花亭)ㆍ빈일료(寶日寮)가 있고 절의 동쪽 두어 마장 되는 곳에 관음굴이 있다.
○ 설악 외산(雪嶽外山) : 신흥사(神興寺)ㆍ내원암(內院庵)을 지나 방향을 바꿔 계조굴(繼祖窟)을 향하면 굴은 천후산(天吼山) 아래에 있다. 두루 식당폭포(食堂瀑布)를 구경할 수 있다.
○ 쌍성호(雙城湖) : 부(府)의 북쪽 40리 되는 간성군과의 경계에 있다. 호수의 주위가 수십 리나 되며, 뛰어난 경치가 영랑호보다 더 좋다.
○ 강릉의 경포대 : 부의 동북쪽 15리 거리에 있다. 일명 경호(鏡湖)라고도 한다. 주위는 20리인데 물은 깊지도 않고 얕지도 않으며 사면과 중앙의 깊이가 같다. 서쪽의 언덕에 산봉우리가 있고, 봉우리 위에 대(臺)가 있으며, 옆에 약(藥)을 만들던 돌절구가 있다. 갯벌의 동쪽에 판자다리가 있는데 강문교(江門橋)라고 한다.다리 밖은 죽도(竹島)이고 죽도의 북쪽은 흰 모래가 5리나 된다. 모래밭 저편에는 끝없는 바다가 있는데 해뜨는 것을 바라보는 것이 절묘한 경치이다. 호수에서는 적곡합(積穀蛤)이 난다. 보충 : 예전에는 경포대에 온방(溫房)과 양실(涼室)이 있었는데 감사 박명준(朴命俊)이 철거했다. 이는 사객(使客)들을 오래 묵지 못하게 하려고 한 것이다.《희암집(希庵集)》
○ 한송정(寒松亭) : 경포대의 남쪽 두어 마장되는 곳에 있다. 차[茶] 끓이던 샘과 돌 부엌과 돌절구가 있는데 네 신선이 놀던 곳이다.
○ 대관령 : 아흔 아홉 굽이이다. 서쪽에는 서울로 통하는 큰 길이 있다. 재의 허리에 원읍현(員泣峴)이라는 고개가 있고, 재 아래에는 구산동(丘山洞)이라는 골짜기가 있어 경치가 뛰어나게 아름답다.
○ 오대산 : 강릉부의 서쪽 1백 40리의 거리에 있다. 동쪽에는 만월봉(滿月峯), 남쪽에는 기린봉(麒麟峯), 서쪽에는 장령봉(長嶺峯), 북쪽에는 상왕봉(象王峯), 중앙에는 지로봉(智罏峯) 등 다섯 봉우리가 둘러섰는데 각 봉의 대(臺)마다 각각 한 암자가 있다. 산 아래에 월정사(月精寺)가 있고 절 곁에는 사고(史庫)가 있다.또 금강연이라는 못이 있는데 사면이 모두 반석이며, 폭포가 10척(尺)을 흘러 굽이쳐 돌아서 못이 되었다. 서대(西臺) 밑에 통을 댄 수함(水檻)이 있는데 곧게 솟아오르는 샘물은 그 빛과 맛이 보통 물과 다르다. 이것이 서쪽으로 흘러서 한강의 원류가 된다.
○ 삼척의 죽서루(竹西樓) : 절벽이 천 길이나 되는데 기이한 바위가 무더기로 늘어섰다. 그 위에 높다란 누각을 가설하여, 아래로 오십천(五十川)을 굽어본다. 냇물이 굽이쳐 돌아서 못이 되었다.
○ 태백산의 황지(黃池) : 산 위에 들이 벌여 있는데, 위에는 작약봉(芍藥峯)이 있고, 아래에는 우리나라 시조가 살던 옛터가 있다고 하나 그 곳을 알 수가 없다. 황지의 물이 남쪽으로 30여 리를 흘러가서 작은 산을 뚫고 남쪽으로 나가는데 이를 천천(穿川)이라고 한다. 이것이 낙동강의 원류가 된다.
○ 울진의 망양정(望洋亭) :《여지승람》에는 평해에 들어 있다.
○ 평해(平海)의 월송정(越松亭) : 군의 동쪽 7리에 있다. 푸른 솔이 만 그루나 있고 흰 모래는 눈과 같다. 이상의 아홉 고을을 영동 9군(嶺東九郡)이라고 한다.
○ 인제 설악의 한계폭포(寒溪瀑布) : 산 위에 성이 있고, 냇물이 성 안에서 흘러나와 폭포를 이루었다. 매달린 것 같은 물줄기가 수백 척(尺)이나 내려 쏟아지니 바라보면 하늘에서 흰 무지개 드리운 것 같다. 임진왜란 때 중국 장수가 중국의 여산폭포보다 좋다고 말하였다 한다. 원통역에서부터 동쪽은 겹친 멧부리와 높은 나무의 숲에 싸여 계곡은 깊숙하고 그윽하며, 시냇물은 가로 세로 흘러서 건너는 곳이 서른 여섯 곳이나 된다.또 남쪽 봉우리는 절벽이 천 길이나 되는데 기묘하고 괴이하여 형용할 수가 없다. 그 아래에 맑은 샘물이 바위에 부딪쳐 못을 이루었는데, 또 그 동쪽 몇 리 되는 곳에는 벼랑을 따라 작은 길이 있고 암벽의 빈 구멍은 입을 벌리고 있으며 봉우리 바위는 높게 뻗어나 용이 움켜잡고 범이 끌어당기는 것과 같고 층층대와 같이 여러 층의 돌이 무수하니 지형이 뛰어난 경치가 영서에서 제일이다.
○ 원주의 치악산 : 산 안에는 계곡이 많고 경치가 그윽하며 기이하다. 산에는 신령한 감응이 많아서 사냥꾼도 감히 짐승을 잡지 못한다.
○ 사자산(獅子山) : 치악산의 동북쪽에 있다. 30리에 걸쳐 물과 바위가 있는데 주천강(酒泉江)의 근원이다. 남쪽에는 도화동(桃花洞)ㆍ두릉동(杜陵洞)이 있는데 모두 시내와 샘물의 경치가 뛰어나게 좋다.
○ 춘천의 우두촌(牛頭村) : 소양강 위에 두 갈래 물이 합류한 삼각주(三角洲) 안에 있으며 물 부근에 돌이 있다.
○ 정선의 풍혈(風穴) : 대음산(大陰山)의 바윗돌 사이에 있다. 그 아래에 얼음을 두면 여름이 지나도록 녹지 않는다. 또 물구멍이 있는데, 남강(南江)의 물이 여기에 이르러 나뉘어져 땅 속으로 들어갔다가 모마어촌(毛麻於村)에 이르러 땅 위로 솟아 나온다.
○ 대음강(大陰江)의 하류에 용암연(龍岩淵)이 있다.
○ 철원의 북관정(北寬亭) : 결(缺)
○ 보개산(寶蓋山) : 결(缺)
○ 고석정(孤石亭) : 큰 바위가 3백 척 높이로 우뚝 솟았다. 바위를 따라 올라가면 구멍이 하나 있는데 배를 땅에 대고 들어가면 열 사람 정도가 앉을 만하다. 큰 냇물이 바위 아래에 이르러 못이 되고 서쪽으로 꺾어져 남쪽으로 흐른다. 앞뒤에 바위 멧부리가 벽처럼 서 있다.
○ 순담(筍潭) : 결(缺)
○ 평강(平康)의 정자연(亭子淵) : 큰 시냇물이 세 방면의 분수령으로부터 마을 앞에 흘러 와서 깊이가 두 배를 수용할 만하다. 석벽이 병풍같이 둘러 있고, 언덕 위에는 정자와 누대가 있다. 여기는 황씨(黃氏)가 대를 물려가며 사는 곳이다.
○ 이천(伊川)의 광복산촌(廣福山村) : 현의 북쪽 60리에 있다. 안변(安邊)ㆍ영풍(永豐)의 물이 여기에 이르러 깊어지고 고리처럼 둘렀다. 북쪽에는 고미탄(古美灘)의 깊은 물과 검산(劍山)의 막힌 데가 있다.
○ 경상도 안동의 학가산(鶴駕山) : 두 갈래의 물 사이에 있다. 산세는 오관산(五冠山)과 삼각산과 흡사하나 다만 돌로 된 봉우리가 적다. 아래에 풍산(豐山)의 들이 있다.
○ 영호루(映湖樓) : 낙동강의 원류가 태백산의 황지(黃池)에서 나와 남쪽 예안에 이르러 동쪽으로 꺾어져 서쪽으로 흐르다가 여기에 와서 비로소 커지면서 굽이쳐 돌아 호수가 된다. 무협(巫崍)이 그 왼쪽에 벌여 있고, 성산(城山)이 오른쪽에 버티고 있다. 누각의 편액은 고려 공민왕의 글씨이다. 누각의 북쪽에 신라 때의 옛 절이 있는데 절의 정전이 들 가운데 높다랗게 서 있다. 서쪽에는 관왕묘(關王廟)의 석상이 있다.
○ 귀래정(歸來亭)과 임청각(臨淸閣) : 이씨(李氏)가 대대로 전해오며 사는 곳인데 영호루와 함께 읍 중의 이름난 경치이다.
○ 하회(河回) : 서애 유성룡의 옛집이 있는 곳이다. 깊이 괴인 물이 마을을 둘러싸고 있으며 산은 학가산(鶴駕山)에서 나누어진 것이다. 석벽이 강 위를 빙 둘러 있어 그 경치가 조용하고 빼어나게 아름답다. 위에는 옥연정(玉淵亭)과 작은 승암(僧菴)이 바위 사이에 띄엄띄엄 여기저기 흩어져 있으니 진실로 뛰어난 경치이다. 하회 마을의 위와 아래에는 또 삼구정(三龜亭)ㆍ수동(繡洞)ㆍ구담(九潭)ㆍ가일(佳逸) 등 강가에 이름난 마을들이 있다.
○ 임하(臨河)의 몽선각(夢仙閣), 학봉 김성일의 옛집, 내성(奈城)의 청암정(靑岩亭) 찬성 권벌(權撥)의 옛집, 춘양(春陽)의 한수정(寒水亭) 정언 권두경(權斗經)의 세거지 은 모두 태백산 남쪽 물가에 자리잡은 이름난 마을들이다.
○ 청량산(淸涼山) : 산맥이 태백산에서 내려와 예안강(禮安江) 위에서 우뚝 솟았다. 밖에서 바라보면 다만 흙 봉우리가 두어 줄기뿐이다. 강물을 건너 골 안에 들어가면 사면의 석벽이 만 길이나 되는 높이로 빙 둘러 있어서 말로 형용할 수가 없다. 안에 난가대(爛柯臺)가 있는데 최고운(崔孤雲 최치원)이 바둑 두던 곳이라고 한다. 그 곁에 한 노파의 석상이 석굴 속에 안치되어 있다. 산에는 연대사(蓮臺寺)가 있다.
○ 문경의 새재[鳥嶺] : 결(缺)
○ 계립령(鷄立嶺) : 결(缺)
○ 병천(甁川) : 속리산의 남쪽에 환적대(幻寂臺)가 있다. 온갖 바위와 골짜기로 오솔길도 알 수가 없다. 냇물이 청화산(靑華山)을 따라 동쪽으로 흘러 용추(龍湫)에 흘러가는데 이것이 병천이다. 냇물의 남쪽에 있는 도장산(道藏山)과 청화산과 마주 보고 있다. 두 산 사이의 용추에서부터 그 위를 통틀어 용유동(龍游洞)이라고 한다.골 안의 평지는 모두 반석이다. 큰 냇물이 돌 위에 질펀하게 퍼져 흐르면서 조그마한 폭포가 되기도 하고, 작은 못이 되기도 하며 물발[水簾)이 되기도 하면서 물통[水槽] 같기도 하고 절구 같기도 하며, 짐승 같기도 하여 천태만상의 경치는 기기괴괴하다. 그 가운데 송씨(宋氏)의 정자가 있다.
○ 선유산(仙遊山) : 청화산의 동북쪽에 있다. 산정은 평탄하고 계곡이 매우 길다. 위에 칠성대(七星臺)ㆍ호소굴(虎巢窟) 진인(眞人) 최도(崔)와 도사 남궁두(南宮斗)가 도를 수련하던 곳이다. 이 있다. 시냇물이 흘러내려가 낭풍원(閬風苑)이 되고, 동쪽으로 흘러 대탄(大灘)으로 들어간다.
○ 풍기(豐基)의 욱금동(郁錦洞) : 소백산 아래에 있다. 물과 바위가 수십 리에 걸쳐 있다. 위에 비로전(毗盧殿)이 있고, 욱금동 입구에 퇴계의 서원이 있다.
○ 죽령 : 결(缺)
○ 예안의 도산 : 황지(黃池)에서 나오는 물이 여기서 큰 시내를 이룬다. 시내 위의 양쪽 산이 합하여 긴 골짜기가 되고 산기슭에는 모두 석벽이 있다. 퇴계가 거처하던 암서헌(岩棲軒)이 지금도 있다. 도산의 하류에 있는 분강(汾江)은 유수 이현보(李賢輔)의 고향이고, 그 남쪽은 좨주 우탁(禹倬)의 고향으로서 모두 경치가 좋은 곳이다.
○ 순흥(順興)의 죽계(竹溪) : 소백산에서 흘러나온다. 물과 바위가 청명하다. 위에 백운동 서원이 있다.
○ 청하(淸河)의 내연산(內延山) : 바위와 폭포의 좋은 경치가 있다. 산에 대ㆍ중ㆍ소 세 개의 돌솥이 바위 위에 벌여 있다. 사람들이 움직이는 세 개의 돌[三動石]이라고 일컫는다. 손가락으로 건드리면 약간 움직이는데 두 손으로 흔들면 움직이지 않는다.
○ 합천의 가야산 : 해인사가 있고 거기에 장경각(藏經閣)이 있다. 입구에는 홍류동(紅流洞)의 무릉교(武陵橋)가 있다. 나는 듯 쏟아지는 냇물과 반석으로 된 계곡이 수십리나 된다. 동북쪽에 만수동(萬水洞)이 있다.
○ 청송(靑松)의 주왕산(周王山) : 돌로 동부(洞府)를 만들었다. 샘과 폭포가 뛰어나게 기묘하다.
○ 대구의 팔공산(八公山) : 석봉이 가로 뻗쳐 있고 시내와 산이 자못 아름답다.
○ 비슬산(琵瑟山) : 산 속에 솟아 오르는 샘물과 천석(泉石)이 있다.
○ 청도(淸道)의 운문산(雲門山) : 이어져 있는 봉우리와 첩첩이 겹친 멧부리가 둘러 있고, 계곡은 깊숙하고 그윽하다.
○ 오산(鰲山) : 군의 남쪽 2리에 있는 진산(鎭山)이다. 동쪽에 한 골짜기가 있는데 이름을 고사동(高沙洞)이라고 한다. 날씨가 바람이 불거나 비가 오려고 하면 먼저 골짜기가 울고 구름 기운을 뿜어낸다. 구름이 고사동 안으로 들어가면 비가 오고, 고사동 밖으로 나가면 바람이 분다.
○ 의흥(義興)의 바람구멍 : 현(縣)의 동쪽 30리에 있는 화산(華山)의 기슭에 있다. 넓이는 3자 2치이고, 길이는 2자 8치이다. 바람이 구멍에서 나오는데 매우 차다. 초여름에도 반드시 얼음이 언다.
○ 의성의 얼음구멍 : 빙산(氷山)의 큰 바위 아래에 있다. 높이는 3자이고, 넓이는 4자 8치이며, 가로 들어간 것이 5자 1치인데 이것을 바람구멍이라고 한다. 또 바위 바닥에 바로 내려 뚫어진 구멍이 있는데 넓이는 1자나 되나 깊고 얕은 것은 알 수 없다.입하(立夏) 뒤에 살얼음이 얼고, 매우 더워지면 얼음이 굳어지고, 토우(䨪雨 안개가 끼고 내리는 이슬비)가 끼면 얼음이 녹는다. 봄과 가을에는 차지도 않고 뜨겁지도 않으며, 겨울이 되면 따뜻한 기운이 봄과 같다. 이것을 얼음구멍이라고 한다.
○ 진주의 지리산 : 두류산(頭流山)이라고도 한다. 산을 둘러싸고 아홉 고을이 있으며, 산의 높이와 넓이는 몇백 리나 되는지 알 수 없다. 가장 높은 봉우리는 동쪽은 천왕봉(天王峯)이라 하고, 서쪽은 반야봉(般若峯)이라 한다.서로 연결된 계곡은 깊고 커서 백 리나 되는 긴 골짜기가 많다. 산의 맨 꼭대기에 향적사(香積寺)ㆍ가섭대(迦葉臺)가 있고 내를 따라 서쪽에는 화암사(華岩寺)ㆍ연곡사(燕谷寺)가 있으며, 남쪽에는 신흥사(神興寺)ㆍ쌍계사가 있다.이 절에는 최고운(崔孤雲 최치원)의 화상이 있다. 냇가의 석벽에는 큰 글자로 ‘고운(孤雲)’이라고 새긴 것이 많다. 큰 냇물이 신흥사 앞에서 섬진강으로 흘러들어간다. 또 한 줄기 물이 향적사(香積寺) 앞에서 내려와 살천(薩川)에 이르러 진주를 돌아서 동쪽으로 흐르는데 이것을 청천강(菁川江)이라고 한다. 천왕봉에서 동쪽으로 내려가면 천불암(千佛菴)이 있고, 암자에서 조금 북쪽으로 올라가면 작은 굴이 있다.동쪽으로 바다를 굽어보며 서쪽으로 천왕봉을 등지고 있어 맑은 경치가 절묘(絶妙)하다. 이 굴을 ‘암법주굴(巖法主窟)’이라고 부른다. 또 만수동ㆍ청학동이 있는데 만수동은 지금의 구품대(九品臺)이고, 청학동을 지금은 해계(海溪)라고 한다.
○ 함양의 지리산 : 북쪽에 영원동(靈源洞)ㆍ군자사(君子寺)ㆍ유점촌(鍮店村)ㆍ벽소운동(碧霄雲洞)ㆍ추성동(楸城洞)이 있는데 모두 경치 좋은 곳이다. 산골물이 합쳐서 임천(瀶川)이 되고, 흘러 내려 가서 용유담(龍游潭)이 된다. 용유담의 양쪽에는 바윗돌이 평평하게 깔리고 겹쳐 쌓였는데 다 갈아 놓은 것 같다.가로 놓이기도 하고 옆으로 펴지기도 하였다. 어떤 것은 큰 장독을 닮았는데 그 깊이는 바닥이 없고, 어떤 것은 술단지 같기도 하여 천 가지 만 가지로 기기괴괴하다. 물 속에는 가사어(袈裟魚)라는 물고기가 있다. 물은 군(郡)의 남쪽 25리 지점에 이르러 엄천(嚴川)이 된다. 시내를 따라 올라가고 내려가면 개천과 돌의 경치가 매우 기이하다.
○ 산청의 환아정(換鵞亭)
○ 웅천(熊川)의 수락암(水落巖) : 율천현(栗川峴)의 남쪽 시냇물이 산허리의 바윗돌 사이로 흘러 들어가 수십 길의 폭포를 이루는데, 세 갈래로 나누어 아래로 쏟아진다. 그 지방 사람들이 다음해의 장마와 가뭄을 점치게 되는데 전라도가 가물려면 서쪽 갈래가 마르고, 경상도가 가물려면 동쪽 갈래가 마르며, 충청도가 가물려면 가운데 갈래가 흐르지 않는다고 한다.
○ 동래의 해운대(海雲臺) : 현(縣)의 동쪽 18리에 있다. 산기슭이 바다에 들어가서 누에고치의 머리와 같다. 그 위는 모두 동백(冬柏)과 두충(杜沖)으로 덮여 있다.
○ 순흥(順興)의 부석사(浮石寺) : 떠 있는 바위와 식사(息沙)가 있고 선비화(仙飛花) 나무가 있으며 취원루(聚遠樓)가 있다.
○ 밀양의 영남루(嶺南樓)
○ 전라도 전주의 만경대(萬景臺) : 부(府)의 동남쪽 10리 거리인 고덕산(高德山)의 북쪽 기슭에 있다. 석봉이 기이하게 빼어나고 형상이 층층으로 겹쳐진 구름과 같다. 그 위에는 수십 명이 앉을 수 있다. 사면에 숲이 울창하고, 석벽은 그림과 같다. 서쪽으로 여러 산도(山島)를 바라볼 수 있고, 북쪽으로는 기준성(箕準城)과 통하며, 동남쪽은 태산(太山)을 등지고 있어서 경치가 천태만상이다.
○ 광주의 무등산 : 서석산(瑞石山)이라고도 한다. 한가운데는 높고 주위는 차차 낮으며, 높고 크게 50여 리를 웅장하게 서려 있다. 위에는 돌 수십 개가 가지런히 서 있는데, 높이는 백 척이나 될 것 같다. 주봉사(主峯寺)가 있고, 그 곁에 세 개의 돌이 있는데 높이가 수백 척이나 된다. 이름을 삼존석(三尊石)이라고 한다. 또 십대(十臺)가 있으니 그 중의 하나가 풍혈대(風穴臺)이다. 석벽 아래에 바람구멍이 있다.
○ 영암의 월출산 : 가장 높은 봉우리를 구정봉(九井峯)이라고 한다. 바위가 우뚝 솟은 것이 있으니 높이가 두 길이 된다. 그 곁에 구멍 하나가 있는데 겨우 사람 하나가 들어갈 만하다. 그 구멍을 따라 산 정상에 올라가면 20명이 앉을 수 있다. 그 평평한 곳에 오목하게 파여서 물동이처럼 물을 담고 있는 것이 아홉 개가 있는데 비록 가물더라도 마르지 않는다.봉우리 아래에 돌 두 개가 층층으로 된 바위 위에 우뚝 따로 서 있으니 높이는 한 길이 넘고 둘레는 열 아름이나 되는데 서쪽은 산 정상에 붙었고 동쪽은 절벽을 굽어보고 있다. 그 무게는 비록 몇천, 몇백 명을 동원하더라도 움직일 것 같지 않은데도 한 사람이 흔들면 떨어질 듯하면서 떨어지지 않으니 움직이는 돌이라고 부른다. 영석산(靈石山)이라고도 한다. 북쪽에 도갑사(道岬寺)가 있고, 서쪽 기슭에는 조암(槽巖)의 물과 바위가 있다.
○ 강진의 백운동(白雲洞) : 월출산의 남쪽에 있다.
○ 장흥의 천관산(天冠山) : 돌로 생긴 산세가 기묘한 경치이다. 항상 자줏빛 구름과 흰구름이 그 위에 덮여 있다.
○ 금산(錦山)의 덕유산(德裕山).
○ 제원천(濟源川) : 냇물과 산의 경치가 뛰어나게 좋다.
○ 무주(茂朱)의 적상산(赤裳山) : 산의 사면이 벽처럼 섰는데 층층으로 끊겨져서 치마와 같다. 여기에 사고(史庫)가 있다.
○ 주계(朱溪) : 냇물과 산의 경치가 뛰어나게 좋다.
○ 용담(龍潭) : 주취산(珠崒山)에서 냇물이 흘러가 수성천(壽城川)이 되어 달계(達溪)로 들어간다.
○ 구례 : 서쪽에는 봉동(鳳洞)의 물과 바위가 있고 동쪽에는 화엄사(華嚴寺)ㆍ연곡사(燕谷寺)의 아름다운 경치가 있으며, 남쪽에는 구만(九灣)이 있다. 지리산의 서쪽 가지가 여기서 끝난다. 잔수진(潺水津)이 둘러 안고 있다.
○ 장수의 장계(長溪) 결(缺)
○ 동복(同福)의 적벽(赤壁) : 내를 따라 올라가면 물염정(勿染亭)이 있다.
○ 남원의 광한루 결(缺)
○ 부안의 변산 : 산기슭이 서해(西海) 속으로 뾰족하게 들어갔다. 산봉우리가 백여 리를 빙 둘러 여러 겹으로 겹쳤으며 깊숙하고 그윽하다.
○ 순천 조계산(曹溪山)의 송광사(松廣寺) : 물과 바위가 깨끗하고 봉만(峯巒)이 밝고 곱다.
○ 순창의 복흥(福興) : 양쪽에 산을 끼고 큰 들이 열렸다. 냇물이 동쪽으로 흐르고 있다.
○ 황해도 문화(文化)의 구월산 결(缺)
○ 해주의 부용당(芙蓉堂) 결(缺)
○ 수양산(首陽山) : 폭포가 있고 산정(山頂)에 대(臺)가 있다. 그 가운데에 석담(石潭)의 물과 바위가 있다.
○ 연안의 와룡지(臥龍池) : 세상에서 부르는 이름은 남대지(南大池)이다. 겨울에 용이 이 못의 얼음을 가[耕]는 것을 보고 다음해의 풍년과 흉년을 점친다.
○ 장연(長淵)의 백사정(白沙汀) : 남쪽에는 연지(蓮池)가 있고 북쪽에는 승선봉(勝仙峯)이 있다. 삼면이 바닷가인데, 흰 모래가 평평하게 펴져 있는데, 바람에 따라 이리저리 굴러다니며 무더기로 쌓여서 모래 언덕을 이루었다. 잔솔과 해당화가 붉은빛과 푸른빛을 서로 비친다. 또 입죽암(立竹巖)ㆍ비로봉(毗盧峯)이 있다.
○ 평산(平山)의 총수산(葱秀山) : 깎아 세운 듯한 절벽과 가파른 벼랑이 흐르는 물을 아래로 굽어보고 있다. <동월기(董越記)>
○ 멸악산(滅惡山) : 면악(綿岳)이라고도 한다. 동쪽 기슭의 화천동(花川洞)에 높은 재와 큰 무덤이 있다. 속언에 전하기를, 청(淸) 나라 사람들의 조상이 살던 땅이라고 한다. 《팔역지》
○ 황주(黃州) 결(缺)
○ 함경도 무산(茂山)의 백두산 : 바로 장백산(長白山)이다. 산이 모두 세 층으로 되어 있다. 높이는 2백 리나 되고 가로 뻗친 것이 천 리나 된다. 그 정상에 못이 있는데 주위가 80리이다. 남쪽으로 흐르는 것은 압록강이 되고, 북쪽으로 흐르는 것은 송화강과 혼동강(混同江)이 된다.동북쪽으로 흐른 것은 소하강(蘇下江)과 속평강(速平江)이 된다. 동쪽으로 흐른 것은 두만강(豆滿江)이 된다. 《대명일통지(大明一統志)》에, “동쪽으로 흐르는 것은 아야고하(阿也苦河)가 된다.”고 하였는데, 아마 속평강(速平江)을 가리킨 듯하다. 《여지승람》에는 회령부에 들어 있다.
○ 회령의 쌍개암(雙介巖) : 부(府)의 남쪽 1백 43리에 있다. 바위의 높이는 열 길이 넘는다. 가운데에 두 개의 구멍이 있는데, 물이 항상 솟아 나온다. 그 동쪽 1리 거리에 또 바위가 있는데 바다를 위압하는 기세로 대치하고 있다. 양쪽 벼랑은 천 척(尺)이다. 위에 깊은 못이 있는데, 비가 오기를 빌면 잘 감응한다.
○ 경흥의 적지(赤池)
○ 부령(富寧)의 형제암(兄弟巖) : 부(府)의 남쪽 20리에 있다. 산기슭에 두 바위가 마주 보고 섰는데, 하나는 크고 하나는 작다. 작은 시내가 그 사이를 흘러내린다.
○ 허통곡(虛通谷) : 물과 돌이 맑고 경치가 기묘하나, 찾아가는 사람이 드물다.
○ 경성(鏡城)의 명간천(明澗川)
○ 명천(明川)의 칠보산 동부(七寶山洞府) : 돌로 된 지세가 깎아지른 듯이 험하고 굴은 조각한 것 같다.
○ 귀문관(鬼門關)
○ 길주의 성진(城津)
○ 장백산
○ 마천령(磨天嶺)
○ 단천(端川)의 마운령(磨雲嶺)
○ 이성(利城)의 시중대(侍中臺)
○ 함흥의 함관령(咸關嶺)
○ 낙민루(樂民樓) : 남쪽으로 군자하(君子河)를 굽어보고 있다. 물 위에 만세교(萬歲橋)가 있는데, 다리의 길이는 5리나 된다.
○ 영흥의 용흥강(龍興江)
○ 안변(安邊) 설봉산(雪峯山)의 석왕사(釋王寺) : 산 위에 세 개의 석봉이 높이 서 있기 때문에 검봉산(劍峯山)이라고도 한다.
○ 황룡산(黃龍山) : 산 위에 용추(龍湫)가 있다. 또 골 안에 구연(九淵)이 있는데, 물과 돌이 뛰어나게 좋으며 오압산(烏鴨山)이라고도 한다. 학포(鶴浦)의 큰 호수는 주위가 30여 리이고, 사면이 모두 흰 모래이다. 언덕의 모래 가운데에 해당화가 환하게 핀다. 약한 바람이 잠깐만 불어도 가는 모래가 날려 작게는 무더기를 이루고 크게는 봉우리를 이룬다. 경치는 영동 육호(嶺東六湖)에 비길 곳이 아니다.
○ 국도(國島) : 부(府)의 동쪽 60리 바다 가운데에 있다. 흰 모래가 명주와 같다. 그 위를 산이 반원의 구슬처럼 둘러 있다. 벼랑의 돌들은 모두 모나고 바르며 벽처럼 가지런하게 늘어섰다. 언덕의 돌들은 평평하고 둥근 것이 배열되어 있는데 한 면에 한 사람씩 앉을 만하나 가지런하지는 않다.수백 보를 가면 낭떠러지의 높이가 수백 척이 되는데, 그 돌들은 흰 빛이고 모나고 바르며, 길고 짧은 것이 일치한다. 한 줄기마다 그 꼭대기에 모두 작은 돌 한 개씩을 이고 있어서 화표주(華表柱)의 머리와 같다. 작은 굴이 있는데, 배를 타고 들어가면 점점 좁아져서 배가 들어갈 수가 없어, 굴의 깊이를 헤아릴 수도 없다.굴의 좌ㆍ우쪽에 묶어 세운 듯한 돌들은 바깥면의 것과 같으나 더욱 정연하고 가지런하다. 굴의 윗면에서 아래로 드리워진 석각(石脚)들은 모두 평평하고 반듯하여 장기판이나 바둑판을 엎어 놓은 것 같으며 마치 그 하나하나를 톱으로 끊어 놓은 것과 같다. 굴 북쪽에 둥근 돌이 배열된 곳이 있는데, 천 명은 앉을 수 있다.벼랑의 곁을 동남쪽으로 수백 보 더 가면 낭떠러지의 돌모양이 조금 달라진다. 물에 닳아 조그만 원으로 길이 5, 60척 되는 돌이 네모난 철망을 만들어 담아 놓은 것 같은데, 전면이 한 가닥이 다른 한 가닥과 같아서 사람들이 철망석이라고 한다. 이곡(李穀)의 기문 사면으로 둘러선 돌기둥 가운데는 모래 흙으로 화살대를 만들었다는 말이 전해 온다.
○ 영풍(永豐)
○ 평안도 평양 : 금수산의 모란봉이 진산(鎭山)이다. 대동강이 성(城) 밖을 둘러서 남쪽으로 흐른다. 대동문(大同門)의 문루는 강을 굽어보고 동쪽을 향하고 있다.
○ 연광정(練光亭) : 덕암(德巖)의 절벽 위에 있다. 강의 남쪽에는 십 리나 되는 긴 느릅나무 숲이 있다. 연광정을 돌아 북쪽으로 가면 청류벽(淸流壁)이 있다. 벽(壁)이 끝난 곳에 부벽루가 있는데 영명사(永明寺)의 동쪽이다. 절 뒤의 금수산(錦繡山) 산 정상을 을밀대(乙密臺)라고 부른다. 누대 아래의 강가에 기린굴(麒麟窟)과 조천석(朝天石)이 있고, 강의 상류에는 백은탄(白銀灘)과 능라도(綾羅島)가 있다.
○ 성천(成川)의 강선루(降仙樓) : 비류강(沸流江)을 굽어보고 있다. 삼백 칸이나 되어 건축이 웅장하고 화려하여 8도의 누각 중에서 첫째이다. 서쪽으로 흘골산(紇骨山)을 마주보고 있는데, 12개의 기이한 봉우리가 병풍처럼 깎아 세운 듯하다.
○ 안주(安州)의 백상루(百祥樓) : 누대의 곁 성 밖에는 칠불사(七佛寺)와 칠승석상(七僧石像)이 있다.
○ 영변의 약산동대(藥山東臺)
○ 묘향산 : 태백산이라고도 한다. 밖은 흙산이나 봉우리의 허리 위는 모두 기암수석이다. 동부(洞府)는 겹겹으로 둘러져서 성곽과 같고, 큰 냇물이 그 사이에 넓게 퍼져 있다. 위에 단군이 화생(化生)하였다는 석굴이 있다.
○ 의주의 통군정(統軍亭) : 압록강 위에 있다.


 

[주D-001]겨울에 …… 점친다 : 매년 겨울에 얼음이 터질 때, 세로 혹은 가로 터진다. 사람들이 이것을 용경(龍耕)이라고 하여 다음해의 풍년ㆍ흉년을 점친다. 가로 터지면 다음해 풍년이, 세로 터지면 홍수가 나고, 전연 터지지 않으면 흉년이 든다고 한다.《동국여지승람》참조.

분류 오주연문장전산고 경사편 1 - 경전류 1(속)
 악(樂)
속악(俗樂)에 대한 변증설(고전간행회본 권 19)


대저 악(樂)이란 바로 사람의 언어(言語)와 성음(聲音)이다. 어째서 그렇게 말하는 것인가 하면 이미 5음(音)ㆍ7성(聲)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악기(樂記)에 이르기를 “무릇 소리는 사람의 마음에 말미암아서 난다.” 했으니, 악이란 스스로 고금(古今)과 아속(雅俗)의 분별이 있을 뿐이다. 송나라 방서(房庶)의 저서에, 고악이 금악과 멀지 않다고 논했으니 그 말이 사리에 맞는 듯하다.
상고에는 질박하여 기구와 소리가 모두 질박했는데, 후세로 내려오면서 차츰 변하였다. 석(石)인 경(磬)이 변하여 방향(方響)이 되고, 사죽(絲竹)인 금(琴)ㆍ소(簫)가 변하여 쟁(箏)ㆍ적(篴)이 되고, 토(土)인 훈(塤)이 변하여 구(甌)가 되고, 목(木)인 축(柷)어(敔)가 꿰어져서 박판(拍板)이 되었는데 이는 세상에서 쓰기에 매우 편리하다. 그런데도 이를 알지 못하는 자는 묘악(廟樂)인 박종(鎛鐘)ㆍ편경(編磬)궁헌(宮軒)을 가리켜 정성(正聲)이라 하고, 대체로 이부(夷部)노부(鹵部) 노는 곧 노(虜)자임를 가리켜 음성(淫聲)이라고 한다.
옛날의 조두(俎豆 제향 때에 음식을 담는 목기(木器)이다)를 후세에서 배우(杯盂 대접ㆍ사발 등 그릇)로 바꾸고 점석(簟席 대자리)을 탑안(榻案 걸상)으로 바꿨으니, 성인이 다시 세상에 난다 하더라도 배우ㆍ탑안을 버리고 조두ㆍ점석으로 돌아갈 수는 없을 것이다. 8음(音)의 악기가 어찌 이것과 다르겠는가?
공자의 “정성(鄭聲)이 음란하다.”는 말이 어찌 그 기구가 옛것만 못하다 해서 한 말이겠는가? 역시 그 소리의 변함을 미워했을 뿐이다. 시험삼아 악을 아는 자로 하여금 오늘의 기구에다 옛날의 소리를 붙여서 첨체(惉滯 음조(音調)가 막혀 고르지 못함)ㆍ미만(靡曼 화미(華美)함을 말함)을 버리고 중화(中和)ㆍ아정(雅正)으로 돌아가게 한다면 사람의 마음을 감동시키고 화기를 인도할 것이니, 치세(治世)의 음률이라고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세상에서 이르는 아악이 반드시 옛것과 같다고는 못하겠지만, 교방(敎坊)에서 연주하는 것이 어찌 다 음성(淫聲)뿐이기야 하겠는가? 오제(五帝)ㆍ삼왕(三王)이 다 악을 달리했으니, 그 시대에도 고금과 아속의 분별이 있어서 그러했겠는가? 이미 대(代)가 갈리면 저마다 일대의 제도가 있기 때문에 악도 달라진 것이다.
우리나라의 토악(土樂)으로는 단군ㆍ기자의 시대에는 상고할 길이 없고 삼국 시대의 속악으로는 동경(東京)ㆍ목주(木州)ㆍ여나산(余那山)ㆍ장한성(長漢城)ㆍ이견대(利見臺)ㆍ선운산(禪雲山)ㆍ무등산(無等山)ㆍ정읍(井邑)ㆍ지리산(智異山)ㆍ내원성(來遠城)ㆍ연양(延陽)ㆍ명주(溟州) 등의 이름이 있는데 모두 사적이 있는 가사(歌詞)이다.
성호(星湖) 이익(李瀷)의 《사설(僿說)》에 “속악에 낙시조(樂時調)로 하림(河臨)ㆍ최자(嗺子)ㆍ탁목(啄木) 등 곡조가 있다. 신라사(新羅史)에 ‘왕이 가야(伽倻) 사람 우륵(于勒)을 하림궁(河臨宮)으로 불러보고 하림(河臨)ㆍ수죽(潄竹) 두 곡조를 연주하게 했다.’ 하였으니, 이것이 동방 악조(樂調)의 시초이다. 지금의 《악범(樂範《악학궤범》을 말함)》에는 일명 청풍체(淸風體)라고 하며, 탁목(啄木)을 또한 하림이라고 일컬으니, 모두 우륵의 여류(餘流)이다. 오늘날의 정과정(鄭瓜亭) 계면조(界面調)는 애상에 젖어서 사대부로서 배워 익히지 않는 이가 없다.” 하였다. 계면(界面)이라 함은 그 곡조를 듣는 자가 눈물이 흘러내려 얼굴에 경계를 이룬다 해서 하는 말이다.
동방의 가사에 대엽조(大葉調)라는 것이 있는데, 사방이 모두 마찬가지이다. 대체로 장단(長短)의 분별이 없고 그 안에 또 만(慢)ㆍ중(中)ㆍ삭(數) 세 가지 곡조가 있으니, 본디 칭호는 심방곡(心方曲)이었다. 만은 극히 느려서 사람들이 지루하여 싫어하고, 중은 조금 빠르기는 하나 역시 좋아하는 자가 드물다. 오늘날에 통용되는 것은 대엽 중의 삭조(빠른 조)이다. 그 이사(俚詞) 1편은 세 가지 조(즉, 만ㆍ중ㆍ삭)에 다 통할 수 있으나 이는 본디 비속(鄙俗)해서 족히 말할 것이 못 된다. 《악본》(樂本) 1책은 신라 김대문(金大問)이 지은 것이고, 《삼대목(三代目)》 1책은 신라 진성여왕이 각간(角干) 위홍(魏弘)과 사통하여 위홍이 항상 대내(大內)에 들어가 일을 보았는데, 홍에게 명하여 대구화상(大矩和尙)과 함께 향가(鄕歌)를 편수케 하였으니 이것이 《삼대목》이라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향악(鄕樂)으로는 현금(玄琴)ㆍ비파ㆍ가야금ㆍ대금(大笒)ㆍ장고(杖鼓)ㆍ아박(牙拍)ㆍ무득(无得)ㆍ무고(舞鼓)ㆍ해금(奚琴)ㆍ필률(觱篥)ㆍ중금(中笒)ㆍ소금(小笒)ㆍ박(拍)ㆍ사경(砂磬)이 있다. 본조(本朝)의 종실(宗室)의 영재(英才)인 수천군(秀川君)의 손자 함천군(咸川君)이 사경을 잘 쳤다. 오늘날 태악(太樂:장악원(掌樂院)을 말함)에 전해오는 사경은 공(公)에서 비롯된 것이다.
가곡(歌曲)으로는 무애(无㝵)ㆍ서경(西京)ㆍ대동강(大同江)ㆍ오관산(五冠山)ㆍ양주(楊州)ㆍ월정화(月精花)ㆍ장단(長湍)ㆍ정산(定山)ㆍ벌곡조(伐谷鳥)ㆍ원흥(元興)ㆍ금강성(金剛城)ㆍ장생포(長生浦)ㆍ총석정(叢石亭)ㆍ거사련(居士戀)ㆍ처용(處容)ㆍ사리화(沙里花)ㆍ장암(長岩)ㆍ제위보(濟危寶)ㆍ안동자청(安東紫淸)ㆍ송산(松山)ㆍ예성강(禮成江)ㆍ동백목(冬柏木)ㆍ한송정(寒松亭)ㆍ정과정(鄭瓜亭)ㆍ풍입송(風入松)ㆍ야심사(夜深詞)ㆍ한림별곡(翰林別曲)ㆍ삼장(三藏)ㆍ사룡(蛇龍)ㆍ자하동(紫霞洞)이 있는데 이는 고려의 속악이다. 본조의 악서로는 《당속악보(唐俗樂譜)》가 있다. 세종이 박연(朴堧) 등에게 명하여 《당속악보》를 만들어서 만(慢)ㆍ삭(數)의 음조(音調)를 고르게 하였다. 《악학궤범》은 성종이 유신(儒臣)ㆍ악리(樂吏)에게 명하여 악보(樂譜)ㆍ합자보(合字譜)를 찬하게 하였는데, 성현(成俔)이 악원 제조(樂院提調)가 되어 전악(典樂) 박곤(朴)ㆍ김복근(金福根) 등과 함께 《사림광기(事林廣記)》ㆍ《대성악보(大成樂譜)》 등 서적에 의거하여 종전의 규식을 준용하면서 자기의 뜻을 참작하여 만든 것이다. 지조(指爪 : 손가락을 움직이는 것)의 법과 현주(絃柱:괘(梩)임)의 차례를 가지고 여러 성자(聲字)를 합쳐서 보(譜)를 만들었는데, 그 울림을 거두어서 소리를 만들고, 그 중요한 대목을 가려 절주(節奏)를 만들고서 《현금합자보(玄琴合字譜)》라고 이름했다. 가야금ㆍ당비파(唐琵琶) 같은 모든 현(絃)이 있는 것은 다 유추(類推)하여 보(譜)를 만들어서 한데 묶고 제목을 합자보(合字譜)라고 붙여 세상에 간행(刊行)했다.
지금의 취탄(吹彈:취는 부는 것, 탄은 타는 것)은 옛날과 다르고, 또 당금(唐琴)ㆍ당비파ㆍ생황(笙簧)ㆍ양금(洋琴)이 우리나라 음(音)으로 번역된 것이 있으나, 손에서 손으로 서로 전할 뿐 자보(字譜)가 없다. 그러므로 내가 일찍이 생황ㆍ양금의 자보를 지었으나 몇 곡(曲)에 불과한데, 상자 속에 깊이 넣어 두었으므로 이를 본 사람이 없다. 생황자보(笙簧字譜)ㆍ동금자보(銅琴字譜)라고도 한다.

우리나라의 속악은 단지 7조(調)를 쓸 뿐이다. 협종ㆍ고선이 궁음(宮音)으로 되는 것은 일지(一指)가 누르는 것이고, 중려ㆍ유빈이 궁음으로 되는 것은 이지(二指)가 누르는 것이고, 임종이 궁음으로 되는 것은 삼지(三指)가 누르는 것이고, 이칙ㆍ남려가 궁음으로 되는 것은 사지(四指)가 누르는 것이고 속칭 빗가락[橫指]임 무역ㆍ응종이 궁음으로 되는 것은 오지(五指)가 누르는 것이고 속칭 우조(羽調)임 청황종(淸黃鐘)이 궁음으로 되는 것은 육지(六指)가 누르는 것이고 속칭 8조(調)임 청대려(淸大呂)ㆍ청태주(淸太簇)가 궁음으로 되는 것은 칠지(七指)가 누르는 것이다. 속칭 막조(邈調)임 무릇 속악은 소리가 높으므로 협종을 첫소리로 한다. 이것이 대체로 소(簫)ㆍ적(篴)ㆍ필률[觱]ㆍ대금[笒]의 탄주법이다.
생황에 6음(音)이 있으니, 일자관(一字管)의 음은 루(纍), 이(二)자관의 음은 로(盧), 삼(三)자관의 음은 예(芮), 사(四)자관의 음은 라(羅), 오(五)자관의 음은 예(芮), 륙(六)자관의 음은 리(里)이다. 무릇 속악은 일(一)자ㆍ이(二)자ㆍ오(五)자 세 구멍으로 상하성(上下聲)이 되는데, 이것을 또 자모성(字母聲)이라고 한다. 무릇 일(一)자ㆍ이(二)자를 누르면 반드시 오(五)자를 누르게 되는데, 사(四)와 사(四), 삼(三)과 삼(三), 오(五)와 오(五)는 모두 쌍성(雙聲)이고, 륙(六)자는 단성(單聲)이다. 무릇 소리가 짧은 것은 혹 불거나 들이마시는 데에 있어 약간 길어지기도 하나, 소리가 긴 것은 한 번 내불고 한 번 들이마시는 것이 모두 길다. 무릇 속악은 거문고ㆍ생황의 모든 소리가 노래에 반주한다. 3장(章)을 마쳤으면 노래하는 자가 조금 쉬고 악은 여성(餘聲)을 연주하여 사이를 두는데, 이것을 중여음(中餘音)이라 이른다. 4장과 5장을 다시 노래에 반주해서 5장을 마치면 노래하는 자가 또 멈추고 악이 여성을 연주해서 이를 끝내는데, 이것을 대여음(大餘音)이라 이른다. 5장 2여음을 7편(編)이라고 이르니, 이것이 1조(調)인데 속칭 계면대엽(界面大葉)이다.
그리고 농락조(弄樂調)ㆍ낙시조(樂時調)가 있는데 편악(編樂)으로 무릇 4조이니 모두 노래소리와 서로 조화되는 것이고, 영산회상(靈山會相) 1조는 금(琴)ㆍ적(笛)과 서로 조화된다. 무릇 1조에 각기 7편(編)씩 갖추어졌다. 이것이 생황을 부는 것의 대략이며, 생황은 계면ㆍ대엽, 속칭 자지라엽(紫芝羅葉)을 묘(妙)로 삼는다.

현금(玄琴)은 여섯 현(絃)에 다섯 소리[聲]이니 첫째는 문현 상(文絃商), 둘째는 유현 우(游絃羽), 셋째는 대현 궁(大絃宮), 넷째는 괘상청 각(棵上淸角) 우ㆍ궁ㆍ각 3현은 금괘(琴棵) 위에 있음 다섯째는 기괘청 치(歧棵淸徵), 여섯째는 무현(武絃)이다. 괘상(棵上)ㆍ기괘(歧棵) 두 현이 음정이 서로 맞고, 유현ㆍ괘상 두 현이 서로 맞고, 대현ㆍ괘상 두 현이 서로 맞고, 문현ㆍ대현 두 현이 서고 맞고, 무현ㆍ기괘 두 현이 서로 맞아야 하는데, 그 조현(調絃)하는 법은 오른손으로 술대를 잡아서 술대 끝이 안을 향한다. 문현에서부터 술대[匙]로써 차례로 5현을 그어서 무현에 이르러 그치는 것을 도(挑)라고 하는데, 이것이 속칭 사랭(撒冷)이며, 실지로 소리가 나는 것은 두 청[二淸:괘상청과 기괘청]뿐이다. 술대 끝이 밖을 향해서 무현에서부터 5현을 거슬러 그어서 문현에 이르러 그치는 것을 구(勾)라고 하니 속칭 다랭(多冷)이며, 실지로 소리나는 것은 두 청과 누르는 현뿐이다. 두 청이 음정이 서로 맞은 뒤에는 왼손의 장지(長指)로 제2괘(棵)의 유현을 누른 다음 모지(母指)로 뜯으며, 왼손의 식지(食指)로는 괘상청을 뜯어 유현과 음정을 서로 맞추고, 왼손의 장지로 대현 제6괘를 누른 다음 모지로 뜯으며, 왼손의 식지로 괘상청을 뜯어 대현과 맞춘다. 다음은 문현을 고르게 되는데 왼손의 장지로 먼저 제2괘 대현을 누른 다음 오른손으로 술대를 잡아 튕겨서 두 현을 서로 맞추고, 무현과 기괘청도 술대로 튕겨서 서로 맞춘다. 이것을 조현(調絃)이라 이른다.
옥보고(玉寶高) 신라 때 거문고를 잘 타던 사람 거문고 곡조에 상원(上院)ㆍ중원(中院)ㆍ하원(下院)이 있다. 신라 시대에 또 거문고의 일곱 곡(曲)을 만든 것이 있으며, 곡에는 두 조(調)가 있는데 평조(平調)ㆍ우조(羽調)라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나라 향악(鄕樂)의 고조(古調)이다. 조선조에 들어와서는 남추강(南秋江) 자는 효온(孝溫)이며 단종(端宗) 때 사람이다. 세조조(世祖朝)에 소릉(昭陵) 복위(復位)를 청한 일로 인해 화를 입었다. 이 현금(玄琴)의 장(壯)ㆍ한(閒)ㆍ화(和)ㆍ원(怨) 4조를 지었는데 그 가사가 속되기는 하나 청아(淸雅)하다. 우조(羽調) 항왕(項王)이 말을 달리매 웅검(雄劍)이 허리에서 울고 대강(大江) 서쪽에 견고한 성지(城池) 없네. 는 장(壯)하고, 만조(慢調) 금리선생(錦里先生)의 초당(草堂)에 해는 긴데, 아내가 발회(撥灰)하니 우율(芋栗)이 향기롭네 는 한(閒)하고, 평조(平調) 낙양(洛陽) 3월에 소자(邵子)가 수레를 타고 꽃밭 속에 수레가는 대로 천천히 가네 는 화(和)하고, 계면조(界面調) 영위(令威)가 나라를 떠났다가 천 년만에 돌아오니, 무덤만 총총하구나 산천은 그대로나 사람은 간데 없네 는 원(怨)이다. 《금보(琴譜)》에서 계면(界面)을 북전(北殿) 《서상기(西廂記)》의 사곡(詞曲)에 북곡(北曲)ㆍ남곡(南曲)이 있는 것과 같은 뜻이다. 이라고도 한다. 이 밖에도 속악의 가곡이 너무 많아서 이루 다 기록할 수 없다.


 

[주D-001]7성(聲) : 궁ㆍ상ㆍ각ㆍ치ㆍ우 5음에다 변치(變徵)ㆍ변궁(變宮)을 더한 것이다.
[주D-002]방향(方響) : 악기 이름. 쇠 또는 구리로 만든 쇠판을 가자(架子 : 악기를 걸어 놓는 틀)의 위아래 두 단에 각각 8장씩 16장을 걸어 놓고 각퇴(角槌)로 친다. 치수는, 길이가 보통 9촌, 넓이가 2촌이며, 모양은 위가 둥글고 밑이 모가 졌다.
[주D-003]훈(壎) : 흙으로 구워 만든 악기. 저울추 모양으로 되고 상단 취구(吹口)까지 합하여 여섯 구멍이 있는데, 이를 불어서 소리를 낸다. 우리나라는 아직도 석전(釋奠) 때면 이를 사용하고 있다.
[주D-004]구(甌) : 부(缶)의 일종임. 12개의 사발에 물을 가득 채우고 저(箸)로 두드려서 12율의 음을 내는 것이다.
[주D-005]축(柷) : 나무로 만든 악기. 사방이 2척 4촌, 길이가 1척 8촌으로 된 나무 통으로 되었는데, 밑바닥 한가운데에 구멍을 뚫어 자루[椎柄]를 집어넣고 이를 흔들어서 소리를 내는 것이다. 음악 연주를 시작하는 신호이다.
[주D-006]어(敔) : 나무로 만든 악기. 모양은 엎드린 범[伏虎] 같으며 등 위에 27개의 톱니 같은 것이 있어 견(籈)으로 긁어 소리를 낸다. 음악 연주를 그치게 할 때에 사용한다.
[주D-007]박판(拍板) : 악기의 하나. 2매 내지 10여 매의 매끄러운 목판(木板)의 한 끝을 끈으로 꿰어 손에 잡고서 음악의 박자를 맞추는 것이다.
[주D-008]묘악(廟樂) : 종묘(宗廟) 제향에 쓰는 음악.
[주D-009]편경(編磬) : 아악기(雅樂器)의 하나. 2층으로 된 걸이가 있고, 한 층에 여덟 개씩 매어단 경쇠.
[주D-010]궁헌(宮軒) : 궁현(宮縣)과 헌현(軒縣)을 말한다. 현(縣)은 즉 종(鐘)ㆍ경(磬) 등 악기를 틀에 단다는 뜻이다. 《주례》 춘관(春官) 소서(小胥)에 “악기 다는 위치를 정하는 데 있어 왕은 궁현(宮縣)이고 제후는 헌현(軒縣)이다 …… ” 하였고 정현(鄭玄)의 주에 의하면, 순거(簨簴 : 악기를 다는 틀)의 4면에 다 악기를 다는 것은 궁현이고 3면에만 다는 것은 헌현이라고 하였다.
[주D-011]이부(夷部) : 《문헌통고》 악지에 이부악(夷部樂)이 보이는데 이는 곧 동이(東夷)ㆍ서융(西戎)ㆍ남만(南蠻)ㆍ북적(北狄) 등의 악을 말한다.
[주D-012]노부(鹵部) : 서양의 음악인 듯하나 자세하지 않다.
[주D-013]8음(音)의 악기 : 옛날에는 금(金)ㆍ석(石)ㆍ토(土)ㆍ혁(革)ㆍ사(絲)ㆍ죽(竹)ㆍ포(匏)ㆍ목(木) 등 여덟 가지 물건이 악기의 재료로 쓰여졌으며, 그 재료에 따라서 소리를 각각 달리했으므로 8음이라 하였다. 《주례》 춘관 대사(大師)에 “播之以八音 金石土革絲木匏竹”이라 했으며, 주에는 ‘金 鎛鐘也 石 磬也 土 壎也 革 鼓鼗也 絲 琴瑟也 木 柷敔也 匏 笙也 竹 管簫也’라 하였다.
[주D-014]왕이 …… 연주하게 했다 : 《삼국사기》 신라본기(新羅本紀) 진흥왕(眞興王) 12년 조에 “3월에 왕이 순수하다가 낭성(娘城)에 머물러 우륵 및 그 제자 이문(尼文)이 음악을 안다는 말을 듣고 왕이 특별히 이들을 하림궁으로 불러들여 그 악을 연주하게 하자, 두 사람이 각각 새 노래를 지어서 연주했다.” 하였다.
[주D-015]7조(調) : 여기서 말하는 칠조는 한 가락[一指]에서 일곱 가락[七指]까지를 말한다. 네 가락은 빗가락[橫指], 다섯 가락은 우조(羽調), 여섯 가락은 8조(調), 일곱 가락은 막조(邈調) 등 별칭이 있다. 여기서 말하는 가락이란 기본음 또는 ‘청’을 말한다.
[주D-016]일자관(一字管) …… 리(里)이다 : 일(一)ㆍ이(二)ㆍ삼(三)ㆍ사(四)ㆍ오(五)ㆍ육(六) 등 숫자는 생황(笙簧) 보(譜)의 기보방법(記譜方法)이고, 루(纍)ㆍ로(盧)ㆍ예(芮)ㆍ라(羅)ㆍ리(里) 등은 육보(肉譜)에 속한 것인데, 이것을 입으로 외며 구음(口音)이라고 한다.
[주D-017]문현 상(文絃商) …… 기괘청 치(岐棵淸徵) : 이는 억지로 궁(宮)ㆍ상(商)ㆍ각(角)ㆍ치(徵)ㆍ우(羽)의 5음에 배비(排比)한 것이고, 실제(文絃 : 濁黃鐘, 游絃 : 仲呂, 大絃 : 無射, 棵上淸 : 林鐘, 岐棵淸 : 林鐘)와는 다른 듯하다. 또 5음을 12율에 맞추어 보면 궁은 황종, 상은 대려, 각은 고선, 치는 임종, 우는 남려이다.

 

분류 오주연문장전산고 경사편 5 - 논사류 2
 인물(人物) - 한국
김생(金生)의 사실에 대한 변증설(고전간행회본 권 34)


세상에서 신라의 김생을 동국(東國) 제일의 명필로 친다.《동국통감(東國通鑑)》을 살펴보면,
“신라 소성왕(昭聖王) 원년(800)은 곧 당 덕종(唐德宗) 정원(貞元) 16년인데, 소성왕의 휘(諱)는 준옹(俊邕)이니, 휘가 경신(敬信)인 원성왕(元聖王)의 손자이고 그 부친은 인겸(仁謙)이다. 그가 당 덕종 정원 15년(799)에 즉위, 정원 16년에 승하하니 왕위에 있은 지 2년째였고, 애장왕(哀莊王) 중희(重熙)가 즉위하니 소성왕의 아들이다. 또 신경준(申景濬)의《동문휘고(同文彙考)》에 “김생의 이름은 구(玖)이다.” 하였는데, 무엇을 의거해서 한 말인지 알 수 없다. 세상에 김생이란 자가 있어 글씨에 능하고 불교를 좋아하면서 초야에 숨어 사는데, 나이 80이 넘도록 글씨에 손을 떼지 아니하여 예서(隸書)ㆍ행서(行書)ㆍ초서(草書)가 다 신묘한 경지에 이르렀다.”
하였다.
송 휘종(宋徽宗) 숭녕(崇寧) 연간에 한림대조(翰林待詔) 양구(楊球)와 이혁(李革)이 김생의 글씨를 보고,
“우군(右軍 진(晉) 나라 왕희지(王羲之)의 벼슬 이름)의 진필(眞筆)을 오늘에 다시 보게 될 줄은 생각지 못했다.”
하였고, 하동군(河東君) 정인지(鄭麟趾)의 사단(史斷)에 “송 나라 숭녕 연간에 고려의 학사 홍관(洪灌)이 진봉사(進奉使)를 따라 송 나라에 들어가 변경(汴京)에 머물러 있을 때 한림 대조 양구와 이혁이 황제의 칙명으로 그림 족자[圖簇]에 글씨를 쓰고 있었다. 이에 홍관이 김생의 행서ㆍ초서 한 권을 보였는데 두 사람이 보고 웃으며 ‘천하에서 우군을 제외하고는 어찌 이 같은 묘필(妙筆)이 있을 수 있겠느냐.’ 하므로 홍관이 누차 해명해 주었으나 끝내 믿으려 하지 않았다.” 하였다. 《여지승람(輿地勝覽)》에,
“김생은 부모가 미천하여 그 세계(世系)는 알 수 없으나 당 예종(唐睿宗) 경운(景雲) 2년(711)에 나서 당 예종 경운 2년은 곧 신라 성덕왕(聖德王) 휘(諱) 흥광(興光) 10년이다.《당서(唐書)》에는 흥광이 지성(志誠)으로 되어 있다. 두타행(頭陀行 걸식(乞食)하면서 수행하는 것)을 닦았고 충주(忠州) 신라 시대에는 국원성(國原城)에 소경(小京)을 두었다. 북진애(北津崖)에 살았으므로 그가 살던 절[寺]의 이름을 ‘김생사’라 했다.”
하였다.
원(元) 나라 조맹부(趙孟頫)는 동경서당 집고첩(東京書堂集古帖)에 쓰기를,
“당 나라 때 신라의 중 김생이 쓴 그 나라의 창림사비(昌林寺碑)는 자획(字劃)에 깊은 전형(典型)이 있어, 아무리 당 나라 사람의 명각(名刻)이라 해도 그보다 더 나을 수 없다. 옛말에 ‘어느 지역인들 인재(人材)가 나지 않겠는가’ 했는데, 그 말이 사실이다.”
하였고, 이상국(李相國) 이름은 규보(奎報) 은 서결평론 서(書訣評論序)에 쓰기를,
“우리 동국의 제일인으로 일소(逸少 왕희지의 자)와 조금도 다름이 없는 이는 바로 김생이다.”
하였으며, 세상에서는 전하기를,
“한 사람이 갑자기 김생 앞에 나타나《제석경(帝釋經)》을 써 달라고 하여, 쓰기를 마치자 그 사람이 ‘나는 제석천(帝釋天)의 사자(使者)이다.’ 하고는,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하고 또,
“안양사(安養寺)의 액자(額字)를 쓰기 시작한 지 수년 만에 그 절집이 남쪽으로 기울므로 즉시 북쪽으로 옮겨 쓰기 시작하자 절집이 도로 반듯해졌다.”
하고 또 청룡사(靑龍寺)의 액자를 썼는데, 그 주위에 구름과 안개가 늘 끼어 있다고 하니, 마땅히 김생을 신필(神筆)의 제일로 쳐야 하겠다.
《예성야록(蕊城野錄)》소재(蘇齋) 노수신(盧守愼) 지음 에,
“김생은 5세 때부터 풍월(風月) 두 글자를 배우면서 굵직한 싸리나무로 모래밭 위에다 썼었고 6~7세 적부터는 불경(佛經) 2권을 부지런히 쓰기 시작하여 20세에 서법(書法)을 대성(大成)하였다. 그때 일본(日本)의 중 혜담(惠曇)도 글씨에 능하였는데, 신라에 와서 김생의 글씨를 보고 매우 기이하게 여기면서 왕우군이 강북(江北)에 건너가 있을 때 썼던 진적(眞蹟)을 주었다. 그는 그 뒤부터서 우군의 글씨에만 전력하여 밤에는 큰 글자를 쓰고 낮에는 작은 글자를 써서 명성이 이웃나라에까지 진동하였고 또 불교를 좋아하여 재소(齋素 고기와 파ㆍ마늘 따위를 먹지 않는 것)를 지켰다. 그 수족(手足)은 가늘고 작아서 부인(婦人)의 것과 같았고 나이 90이 되어서도 눈빛이 전광(電光)과 같아 붓을 손에서 떼지 않다가 나이 97에 죽었다. 당 헌종(唐憲宗) 원화(元和) 2년(807), 즉 신라 애장왕 휘 중희 10년에 죽었다. 일찍이 창림사비를 썼는데, 조맹부가 그 탁본(拓本)을 보고 ‘한 획과 한 글자가 다 왕씨(王氏)의 서법에서 나왔으니, 당 나라 사람의 명각(名刻)도 이보다 더 나을 수 없을 것이다.’ 하였으므로 그 뒤부터 이름이 온 천하에 알려져서 원 나라 사신이 왔을 적마다 으레 그 탁본을 얻어가곤 했다.”
하였다.
《지리지(地理誌)》에,
“안동(安東)의 청량산(淸涼山)은 모두 36봉(峯)으로 태백산(太白山)에서 낙맥(落脈)되어 예안강(禮安江) 위에 이르러 우뚝 솟았다. 외부에서 바라보면 토산(土山) 몇 봉우리밖에 되지 않는 것 같으나 강을 건너 동부(洞府)에 들어가 보면 4면(面)에 석벽(石壁)이 둘러졌는데 그 둘레가 4장(丈)쯤 되고 돌들이 기괴하고 험악하여 말로는 이루 표현할 수가 없다. 그 안에는 난가대(爛柯臺)가 있는데 곧 최고운이 거기에서 바둑을 두던 곳으로 바둑판과 똑같은 돌이 있고 또 연대사(蓮臺寺)가 있는데 거기에는 신라 김생의 친필로 된 불경(佛經)이 많으며 다른 사찰(寺刹)에도 그 친필이 있다.”
하였다.
오출자(五黜子) 김백련(金百鍊)이 일찍이 용(龍)의 문(文)과 무(武)를 논하면서,
“관동(關東) 해금강(海金剛) 밑에 용이 있는데 그 용은 문한(文翰)을 숭상하였고 신라 시대에는 그 용의 아들이 김생에게 와서 서법(書法)을 배운 때문에 김생의 글씨가 그 용의 처소에 많이 있다.”
하였는데, 이 말이 비록 황당(荒唐)하기는 하나 이분의 황당한 말 가운데에는 더러 맞는 말도 있다. 하지만 어찌 꼭 믿을 수야 있겠는가. 그저 수록하여 이문(異聞)에 대비할 뿐이니, 이는 마치《수신기(搜神記)》나《유양잡조(酉陽雜俎)》와 같은 것이다.

나는 지금 충주(忠州)의 깊은 산골짜기에 살고 있다. 이에 이 지방의 옛날 유명한 인사(人士)들을 상상해보면 신라 시대에 우륵 선인(宇勒仙人)과 임강수(任强首)가 있는데, 그 중에도 김생이 가장 유명한 사람이다. 또 김생으로 인하여 생긴 지명(地名)으로는 김생면(金生面)이, 강명(江名)으로는 김생탄(金生灘)이 있어 세속에서 김곶(金串)이라 부른다.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다. 이른바 김생사(金生寺)의 옛터도 아마 이 부근일 터인데 아는 사람이 없으니 아쉬울 뿐이다.


완당전집 제9권
 시(詩)
서서차운[西澨次韻] 4수


강호라 기이한 선비 많으니 / 江湖多奇士
쌍남이 죄다 모인 석진이로세 / 席珍盡雙南
저렇듯한 서서의 손님이 있어 / 有箇西澨客
옛사람 모습에다 옛사람 마음 / 古貌又古心
문장마저 조화를 잡아돌리어 / 文章運玄宰
바다 가른 금시(金翅)를 일으켰구려 / 拈起劈海金
기림엔 모두 다 상서 꽃이요 / 琪林皆서卉
주모라 범속한 새가 아닐세 / 珠毛非俗禽瑞
평생에 밝은 달을 한아름 안고 / 平生抱明月
삼 년이나 화금을 문질렀다오 / 三載摩華衿
가정의 젓대 가락 가련도 해라 / 可憐柯亭笛
어느 뉘 찬하 소리 분별하리오 / 誰辨爨下音

오색이란 본래부터 정한 게 없어 / 五色本無定
가마귀 희어지고 백로 검다네 / 烏白而鵠黔
승척에 맞추어라 그릇과 수레 / 器車叶繩尺
뒤틀리면 숲 속에 내버리거든 / 委曲棄中林
우륵의 가락만을 찾을 뿐이지 / 但覓于勒調
운화의 거문고를 어찌 알쏜가 / 寧識雲和琴
천연에서 솟아나는 그대의 시는 / 君詩出天然
영한 소리 구림을 울려대누나 / 靈籟響球琳
외로이 간 조예를 뉘라 말리리 / 孤詣若不禁
정 깊은 그곳으로 쏠려갈 따름 / 一往情所深
때로 와서 기이한 글자 물으니 / 時來問奇字
그대는 세상 마음 아니로구려 / 知君不世心

좋은 옥은 누구나 다 쪼고픈 심정 / 良玉同琢情
누에 실은 스스로 뽑아낼 생각 / 蠶絲自抽思
어쩌길래 혼자서 애를 썩히어 / 奈何獨自苦
고요하면 마시고 동하면 뿜지 / 靜吸而動噓
큰 길이 하늘마냥 넓고 넓은데 / 大道如靑天
구절판(九折坂)의 수레를 왜 타는 건가 / 還御九折車
교환의 공교함을 따르지 않고 / 不隨巧宦巧
우곡의 우만을 달게 여기네 / 但甘愚谷愚
그런가 않은가 저 학울음소리 / 然否鳴鶴音
구고에 있어도 하늘에 들려 / 聞天在九皐

시의 증은 하수 건넌 코끼리라면 / 詩證渡河象
글씨는 하늘 가는 황곡 본떴네 / 書仿摩天鵠
다만 저 조나 회는 부끄러울 뿐 / 但媿曹與檜
병거가 나라 모양 못 이뤘거던 / 兵車不成國
여산게(廬山偈)는 예전의 꿈을 되찾고 / 廬偈覓前夢
기럭발톱 묵은 자취 거슬러가네 / 鴻泥溯舊迹
매화는 겨울 마음 그리워하고 / 梅花耿冬心
온갖 꽃은 봄빛에 드설레누나 / 百卉競春曄
소호가락 구름 뫼에 가득찼으니 / 韶頀滿雲山
성의 자연 구학이 만족하다오 / 性天足邱壑
팽성의 묘한 법이 홀로 기쁘니 / 獨喜彭城妙
일파
의 대가 되려 여기 있다오 / 還有一派竹


 

[주D-001]쌍남 : 한 쌍의 남금(南金)을 말함. 두보 시에 “袞職曾無一補 許身愧比雙南金”에서 나온 말임.
[주D-002]석진 : 유자(儒者)의 학덕을 석상(席上)의 진품(珍品)에 비유한 것. 《예기(禮記)》 유행(儒行)에 “儒有席上之珍 以待聘”이라 하였음.
[주D-003]조화[玄宰] : 진재(眞宰)와 같은 말임.
[주D-004]금시(金翅) : 고대 인도(印度)의 괴조(怪鳥)로서 범어(梵語)로는 가유라(迦留羅)인데 구역에는 금시조요 신역(新譯)에는 묘시조(妙翅鳥)이다. 천룡팔부(天龍八部)의 하나인데 그 새의 두 날개는 서로의 거리가 삼백 삼십 육만 리라 한다. 그 새가 용을 잡아먹고 살므로 용은 항상 두려워하여 열뢰(烈惱)를 품고 있는데 오직 아유달용(阿耨達龍)만 두려움이 없다 함.《法苑珠林》
[주D-005]가정의 젓대 가락 : 한 나라의 채옹(蔡邕)이 일찍이 회계(會稽) 가정(柯亭)을 지나면서 집 동쪽 십육연(十六椽)의 대를 보고서 취하여 젓대를 만들었는데 과연 기이한 소리가 났다. 그 뒤에 진(晉)나라 환이(桓伊)가 얻어 항상 자신이 보존하고 불었다고 함. 《通考》
[주D-006]찬하 소리 : 찬하는 초미금(炒尾琴)을 말함. 《후한서(後漢書)》 채옹전(蔡邕傳)에 “오(吳) 나라 사람이 오동나무로 불을 때는 자가 있었는데 채옹이 불타는 소리를 듣고 그것이 좋은 재목임을 알았다. 그래서 그에게 청하여 그것으로 거문고를 만드니 과연 아름다운 소리가 났는데 꼬리 부분에 타다 남은 흔적이 있었으며 이를 당시 사람들이 초미금이라 불렀다.” 하였음.
[주D-007]우륵 : 가야금을 만든 신라의 악사임.
[주D-008]운화 : 거문고 이름. 《주례(周禮)》 대사악(大司樂)에 “운화의 금슬(琴瑟)”이란 대문이 보이는데, 그 주석에 운화는 산 이름이라 하였음. 《통고(通考)》에는 “거문고 머리에 구름형상을 만들었으므로 그로 인하여 이름된 것이고 《주례》의 운화는 아니다.”고 하였음.
[주D-009]구림 : 아름다운 옥을 말함. 《서경(書經)》 우공(禹貢)에 “厥貢惟球琳琅玕”이란 대문이 있음.
[주D-010]기이한 글자 : 한 나라 양웅(揚雄)이 현정(玄亭)에 은거하였는데 가끔 사람들이 술을 싣고 와서 기자(奇字)를 물었다고 함.
[주D-011]구절판(九折坂) : 중국 사천성(四川省) 영경현(榮經縣) 서쪽에 있는데 산길이 아주 험하여 오르는 자는 회곡(廻曲)하여 아홉 번 접어들어야 마침내 오르게 된다고 함.
[주D-012]교환 : 벼슬하는 자가 줄을 잘 타는 것을 이름.《진서(晉書)》 반악전(潘岳傳)에 보임.
[주D-013]우곡 : 우공곡(愚公谷)을 이름.
[주D-014]구고 : 지하 구층 언덕의 밑을 말함. 《시경(詩經)》 소아(小雅) 악명(鶴鳴)에 “鶴鳴于九皐 聲聞于天”이라 하였음. 이는 실상이 있으면 아무리 숨어있어도 이름이 드러난다는 뜻임.
[주D-015]하수 건넌 코끼리 : 하수를 건너는 향상(香象)을 이름. 《열반경(涅槃經)》에 “저 급히 흘러가는 하수에 능히 코끼리가 떠가는 것 같다.[如彼駃河 能漂香象]”하였고, 《전등록(傳燈錄)》에는 “부처 곁에 함께 있어 듣고 이야기한 똑같은 법에도 증(證)한 바가 천심이 있어 비하자면 토끼ㆍ말ㆍ코끼리 세 짐승이 하수를 건너는데 토끼는 건너면 뜨고 말은 절반이 빠지고 코끼리는 철저히 흐름을 끊고 가는 것과 같다.”라 하였음. 문자를 철저히 평하는 데 인용하여 씀.
[주D-016]하늘 가는 황곡 : 운필(運筆)의 태도를 말한 것임.
[주D-017]조나 회 : 춘추 시대 제후국 중 가장 빈약한 나라들임.
[주D-018]기럭발톱 묵은 자취 : 홍니(鴻泥)는 설리홍조(雪裏鴻爪)의 약칭인데 행종(行蹤)이 정처 없이 우연히 서로 만난 것을 이름. 소식의 화자유민지회구시(和子由澠池懷舊詩)에 “人生到處知何事 應是飛鴻蹈雪泥 泥上偶然留指爪 鴻飛那復計東西”라 하였음.
[주D-019]소호 : 악(樂)의 이름인데 은탕(殷湯)의 소작임. 대호(大濩)라고도 함.
[주D-020]팽성의 …… 일파 : 소식의 말에 “吾墨竹一派 近在彭城”이라 하였음.
임하필기 제36권
 부상개황고(扶桑開荒攷)
대가야(大伽倻)

대가야국은 지금의 고령현(高靈縣) 남쪽 1리 지점에 있었는데, 궁궐터가 남아 있다. 시조는 이진아시왕(伊珍阿豉王)이며 도설지왕(道設智王)에 이르기까지 모두 16대였는데, 신라 장수 이사부(異斯夫)에게 멸망당하였다.
후량(後梁) 승성(承聖) 연간에 가실왕(嘉悉王)의 악사(樂師)인 우륵(于勒)이 진(秦)나라 쟁(箏)을 본떠서 거문고를 만들어 ‘가야금(伽倻琴)’이라 불렀다.
점필재집 시집 제16권
 [시(詩)]
사문 이 선생 윤손이 충주 목사로 부임한 지 얼마 안 되어 정사가 잘 되고 사람들이 서로 화목하게 되자, 이에 서헌을 중수하여 예전의 규모보다 훨씬 넓혀서 자못 화려하고 장대하게 꾸며 놓았다. 그래서 나는 매우 부럽게 생각해 오다가 여행 중에 이 좋은 고장을 만나게 되어, 삼가 옛 상공 안숭선의 운에 화답하여 깊이 축하하는 마음에 갈음하는 바이다[斯文李先生尹孫出牧國原未幾政通人和乃重修西軒恢拓舊規頗靚密輪奐某西笑路出名區謹和故安相公崇善韻用代賀慨]

성 안에는 발 친 창문이 종횡으로 보이는데 / 城裏簾櫳縱復橫
서헌까지 수리해 놓으니 안계가 더욱 환하구려 / 更修西閤眼增明
초루에 뿔피리 소리 울려라 서광이 움직이고 / 華譙角咽曙光動
침소에 향기 어려라 가을 기운이 생기누나 / 燕寢香凝秋意生
한강의 중랭수는 옛부터 전해 오거니와 / 漢水中冷傳古昔
우선의 옛 가락은 태평 성대에 부치었네 / 于仙舊調屬昇平
내가 와서 정화를 보니 공의 덕을 알겠는지라 / 我來觀政知公德
연하하는 마음이 부로들의 정과 같다오 / 燕賀還同父老情

[주D-001]중랭수 : 양자강(揚子江) 중랭천(中冷泉)의 물이 점다(點茶)를 하는 데 있어 천하의 으뜸이라는 고사가 있으니, 이 역시 차 끓이기에 좋은 물이라는 것을 의미한 듯하다.
[주D-002]우선 : 신라(新羅) 때에 가야금(伽倻琴)을 처음 제작한 악사(樂師) 우륵(于勒)을 높여 일컬은 말인데, 우륵은 본디 대가야국(大伽倻國) 사람이었으나, 뒤에 충주(忠州)로 옮겨 와서 살았다. 현재 충주에 있는 금휴포(琴休浦)와 탄금대(彈琴臺)는 모두 그가 생전에 가야금을 타던 곳이라 한다.
[주D-003]연하 : 남이 집 지은 것을 축하하는 말이다. 제비는 본디 사람의 집에 둥우리를 틀고 사는 새이기 때문에 사람이 집을 지으면 서로 축하하며 기뻐한다는 데서 온 말이다.
해동역사 제22권
 악지(樂志)
악제(樂制)와 악기(樂器)

○ 하(夏)나라 소강(小康) 이후로 구이(九夷)가 대대로 왕화(王化)에 복종하여 드디어 왕문(王門)에 와서는 음악과 춤을 바쳤다. 《후한서》 ○ 살펴보건대, 《죽서기년(竹書紀年)》을 보면, 하후(夏后) 발(發) 원년에 여러 오랑캐 족속들이 왕문에 와서 오랑캐들의 춤을 바쳤다.
○ 매(昧)는 동이(東夷)의 음악이고, 임(任)은 남만(南蠻)의 음악이다. 《예기(禮記) 명당위(明堂位)》
○ 춘관(春官)의 매사(韎師)는 매악(韎樂)을 가르치는 것을 주관하는데, 제사를 지낼 경우에는 그 무리들을 거느리고 춤을 추며, 큰 잔치를 베풀 때에도 역시 그와 같이 한다. 《주례》 ○ 《주례》 주(注)에, “춤을 추는데, 동이(東夷)의 춤으로 춤춘다.” 하였다.
○ 모인(旄人)은 산악(散樂)의 춤과 이악(夷樂)의 춤을 가르치는 것을 관장하는데, 무릇 사방의 야인들 가운데 춤을 잘 추어서 뽑힌 사람들이 모두 그에게 소속된다. 제사와 빈객에게 잔치를 베풀 때 연악(燕樂)을 춤춘다. 《상동》 ○ 《주례》 주에, “이악(夷樂)을 춤춘다. 사이(四夷)의 음악에도 역시 모두 성가(聲歌)와 춤이 있다.” 하였다.
○ 제루씨(鞮鞻氏)는 사이(四夷)의 악(樂)과 성가(聲歌)를 더불어 관장한다. 제사가 있을 경우에는 악기를 불면서 노래한다. 잔치가 있을 때에도 역시 그와 같이 한다. 《상동》 ○ 《주례》 주에, “사이의 악은, 동방(東方)은 매(韎)라 하고, 남방은 임(任)이라 하고, 서방은 주리(株離)라 하고, 북방은 금(禁)이라 하는데, 《시경》에서 말한 ‘아를 연주하고 남을 연주하며[以雅以南]’라고 한 것이 이것이다. 왕자(王者)는 반드시 사이의 음악을 연주하여 천하를 통일한다. ‘성가를 더불어[與其聲歌]’라고 하였으니, 악(樂)이라고 하는 것은 춤을 주로 해서 말한 것이다.” 하였다. ○ 삼가 살펴보건대, 《한시외전(韓詩外傳)》에는 고종편(鼓鍾篇) 세 번째 시의 ‘이아이남(以雅以南)’ 아래에 ‘매임주리(韎任株離)’라는 구절이 있다.
○ 동이(東夷)의 음악은 매(佅)라 하는데, 창을 잡고서 시절에 맞게 자라나는 것을 도우며, 남이(南夷)의 음악은 임(任)이라 하는데, 활을 잡고서 시절에 맞게 기르는 것을 도우며, 서이(西夷)의 음악은 주리(株離)라 하는데, 도끼를 잡고서 시절에 맞게 죽이는 것을 도우며, 북이(北夷)의 음악은 금(禁)이라 하는데, 방패를 잡고서 시절에 맞게 저장하는 것을 돕는다. 이들은 모두 사문(四門) 밖 오른쪽 벽에서 연주한다. 《효경구명결(孝經鉤命決)》
남이의 음악은 두(兜)라 하고, 서이의 음악은 금(禁)이라 하고, 북이의 음악은 매(昧)라 하고, 동이의 음악은 이(離)라 한다. -이(離)는 만물이 땅을 떠나서는 자라날 수 없음을 형상한 것이다.- 《백호통(白虎通)》
선왕(先王)의 음악은 능히 포용하여 쓰는 것이 귀중한 것이다. 사이의 음악을 다 받아들이는 것은 아름다운 덕이 미쳐가는 것이다. 동이(東夷)의 음악은 주리(侏離)라 하고, 남만(南蠻)의 음악은 임(任)이라 하고, 서융(西戎)의 음악은 금(禁)이라 하고, 북적(北狄)의 음악은 매(昧)라고 한다. 그 소리가 바르지 않은데, 이를 사문(四門)의 바깥에서 연주하게 하면서 각각 그 방위에 해당되는 병기(兵器)를 잡고서 그 성가(聲歌)를 바치게 할 뿐이다. 주(周)나라가 쇠약해지면서부터 이 예(禮)가 바로 폐지되고 말았다. 《통전》 ○ 《옥해(玉海)》에, “《우전(虞傳)》에 ‘양백(陽伯)의 음악은 주리(株離)를 춤춘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동이의 음악 역시 주리(株離)라고 이름한다.” 하였다.
진서(鎭書)가 삼가 살펴보건대, 매(韎)는 동방의 음악 이름이다. 그러므로 《주관(周官)》 매사(韎師)의 주(注)에 이르기를, “동이의 춤으로 춤춘다.”고 하였으며, 《자전(字典)》에는 “매(韎)는 매(佅)라고도 하는데, 뜻은 같다.”고 한 것이 바로 이를 말한 것이다. 그런데 오직 《백호통(白虎通)》에서만은 “동이의 음악은 이(離)라 한다.”고 하였고, 《통전(通典)》에서는 ‘주리(侏離)’라고 하였다. 그리고 진씨(陳氏)의 《악서(樂書)》에서는 “복색(服色)으로 말한다면 매(韎)가 옳고, 성음(聲音)으로 이름한다면 주리가 옳다.”고 하였는데, 어디에 근거해서 말한 것인지 모르겠다.
○ 기자(箕子)가 조선(朝鮮)으로 들어가자, 시서(詩書)와 예악(禮樂)을 하는 자들이 모두 따라서 들어갔다. 《삼재도회(三才圖會)》
살펴보건대, 《청구풍아(靑邱風雅)》를 보면 “기자가 이미 조선에 봉해져서는 백성들에게 예악을 가르쳐서 비루하였던 풍속을 교화시켰다. 이에 백성들이 그것을 생각하여 지덕가(至德歌)를 지어서 불렀는데, 그 노래는 다음과 같다.

하수가 넘실넘실댐이여 / 河水潑潑兮
어찌 그 끝이 있으리오 / 曷維其極兮
해와 달이 아름답게 빛남이여 / 日月休光兮
임금님의 아름다운 덕이로다 / 維后之懿德兮

○ 부여(夫餘)는 납월(臘月)에 하늘에 제사 지내기 위해 대회를 연다. 날마다 모여서 먹고 마시며 노래하고 춤추는데, 그를 이름하여 영고(迎鼓)라고 한다. 《후한서》
○ 예(濊)에서는 항상 10월에 하늘에 제사 지낸다. 밤낮으로 술 마시고 노래하고 춤추는데, 이를 무천(儛天)이라고 부른다. 그 음악은 부여와 대략 같으며, 단지 하는 달만 다를 뿐이다. 《문헌통고》
○ 마한(馬韓)은 해마다 5월이면 씨뿌리기를 마치고 귀신에게 제사를 지낸다. 떼를 지어 노래하고 춤추는데, 춤을 출 때면 수십 명이 한꺼번에 일어나서 앞사람의 뒤를 밟으면서 굽혔다 일어났다 한다. 손발을 가지고 장단을 맞추는데, 그 가락과 율동이 탁무(鐸舞)와 비슷하다. 《삼국지》
○ 진한(辰韓)의 풍속은 노래하고 춤추며, 술 마시고 비파 타기를 좋아한다. 《후한서》
○ 변한(弁韓)에는 비파가 있는데, 그 모양이 축(筑)과 비슷하다. 그것을 타는 데는 음곡(音曲)이 있으며, 호금(胡琴)과 비슷하다. 《문헌통고》 ○ 삼가 살펴보건대, 《삼국지》와 《통전》에는 모두 진한(辰韓)의 비파로 되어 있는데, 바로 가야금(伽倻琴)을 말하는 것이다. 신라의 악제(樂制)에 상세히 나온다.
이상은 삼한(三韓) 이전의 악제와 악기이다.

○ 한 무제(漢武帝)가 고구려를 현으로 삼고 현도군에 속하게 하였으며, 고취(鼓吹)와 기인(伎人)을 하사하였다. 《후한서》
○ 고구려는 후위(後魏)가 풍씨(馮氏)를 평정하면서부터 서역(西域)과 통하였다. 그로 인해 악공(樂工)을 얻게 되어 점차 그 소리가 번성해져 태악(太樂)과 구별되었다. 《수서》
○ 후주(後周) 건덕(建德) 6년(577)에 이미 북제(北齊)를 평정하여 위세를 해외에까지 떨쳤다. 이에 고구려, 백제 두 나라에서 그 나라의 음악을 바치니, 악부(樂部)에 끼워 넣고는 국기(國伎)라고 이름하였다. 《책부원귀》
○ 수(隋) 개황(開皇) 초에 7부(部)의 음악을 두었는데, 그 세 번째가 고려기(高麗伎)이다. 또 잡악(雜樂)에는 백제기(百濟伎), 신라기(新羅伎) 등이 있었다. 대업(大業) 연간에 이르러서 양제(煬帝)가 청악(淸樂), 서량(西凉), 구자(龜玆), 천축(天竺), 강국(康國), 소륵(疎勒), 안국(安國), 고려(高麗), 예필(禮畢)로 9부(部)를 삼았다. 악기와 악공의 의복을 처음 만들어서 이미 이루어지자, 이에 음악에 관한 제도가 여기에서 크게 갖추어졌다.
○ 고구려의 가곡(歌曲)에는 지서(芝栖)가 있고, 무곡(舞曲)에는 가지서(歌芝栖)가 있다. 악기는 탄쟁(彈筝), 와공후(臥箜篌), 수공후(豎箜篌), 비파(琵琶), 오현(五絃), 적(笛), 생(笙), 소(簫), 소필률(小篳篥), 도피필률(桃皮篳篥), 요고(腰鼓), 제고(齊鼓), 담고(擔鼓), 패(貝) 등 14종이 1부(部)가 된다. 《이상 모두 수서》 ○ 《수서》에는 또 이르기를, “고구려의 악기에는 오현(五絃), 금(琴), 쟁(筝), 필률(篳篥), 횡취(橫吹), 소(簫), 고(鼓) 등이 있으며, 갈대피리[蘆]를 불어서 곡조를 맞춘다.” 하였다.
○ 당(唐) 고조(高祖)가 즉위하여서는 수나라의 제도를 그대로 따라 9부의 악을 설치하였다. 고려기(高麗伎)에는 탄쟁(彈筝), 추쟁(搊筝), 봉수공후(鳳首箜篌), 와공후(臥箜篌), 수공후(豎箜篌), 비파(琵琶)가 있는데, 비파는 뱀가죽[蛇皮]으로 통을 만든다. -아래에 나오는 《문헌통고》 조에 상세히 나온다.- 또 오현(五絃), 의자적(義觜笛), 생(笙), 호로생(箶蘆笙), 소(簫), 소필률(小篳篥), 도피필률(桃皮篳篥), 요고(腰鼓), 제고(齊鼓), 담고(擔鼓), 귀두고(龜頭鼓), 철판(鐵版), 패(貝), 대필률(大篳篥)이 있다. 《신당서》
○ 고구려국의 악공인(樂工人)은 자줏빛 비단으로 만든 모자에 새의 깃털로 장식하며, 소매가 넓은 옷, 자줏빛 비단으로 만든 대(帶), 통이 넓은 바지, 붉은 가죽신, 오색의 끈으로 옷차림을 한다. 춤을 추는 네 사람은 머리 뒤에 추계(椎髻)를 묶고, 이마를 비단 수건으로 묶으며, 금고리로 장식한다. 그 가운데 두 사람은 누런 치마저고리에 적황색의 바지를 입고, 두 사람은 적황색의 치마저고리와 바지를 입는데, 소매를 아주 길게 하며, 검은 가죽신을 신고 서서 쌍쌍이 춤춘다. 악기는 탄쟁(彈筝) 1, 추쟁(搊筝) 1, 와공후(臥箜篌) 1, 수공후(豎箜篌) 1, 비파(琵琶) 1, 오현비파(五絃琵琶) 1, 의자적(義觜笛) 1, 생(笙) 1, 횡적(橫笛) 1, 소(簫) 1, 소필률(小篳篥) 1, 대필률(大篳篥) 1, 도피필률(桃皮篳篥) 1, 요고(腰鼓) 1, 제고(齊鼓) 1, 담고(擔鼓) 1, 패(唄) 1이 있다. 위(魏)나라 때부터 수나라 때까지는 그 악기가 모두 남아 있었으나, 상세한 제작법에 대해서는 잘 알 수가 없다. 수나라와 당나라의 9부 악에는 모두 고려기(高麗伎)가 있었다. 무후(武后) 때까지 25곡(曲)이 남아 있었는데, 정원(貞元) 말기에는 오직 한 곡만 모을 수 있었다. 의복에 관한 제도 역시 점차 없어져서 그 본래의 모양을 잃어버렸다. 《통전》 ○ 《신당서》에, “양재사(楊再思)가 명주를 잘라서 건(巾) 위에 잇댄 다음, 자포(紫袍)를 뒤집어 쓰고서 고구려의 춤을 추었다.” 하였다.
○ 고려기 가운데에 봉수공후(鳳首箜篌))가 있는데, 그 만듦새는 목이 구부러져서 봉황의 형상을 하였다.
○ 수공후(豎箜篌)는 그 만듦새가 몸체는 구부러졌으며 길다. 현(絃)은 22개이며, 가슴에 세워 안고서 두 손을 사용하여 한꺼번에 연주한다. 또한 호공후(胡箜篌)라고도 한다. 고구려에는 수공후(豎箜篌), 와공후(臥箜篌)라는 악기가 있다. 그 인(引)은 조선진(朝鮮津)의 군졸인 곽리자고(霍里子高)의 아내가 지은 것이다.
○ 고구려와 서량국(西涼國) 등의 악기 가운데는 뱀껍질[蛇皮]로 만든 비파(琵琶)가 있다. 뱀껍질을 가지고 만든 통의 두께는 1촌(寸)가량 되고, 비늘이 그대로 달려 있다. 가래나무[楸木]를 가지고 표면을 만들고, 상아(象牙)로 한발(捍撥)을 만든다. 그 나라의 왕이 말 탄 모습을 그려 넣는데, 그 모양새가 아주 정교하다. 근래에는 비파를 가지고 선궁(旋宮)을 함에 단지 곡조만을 고르게 할 뿐 청탁(淸濁)을 나누지 않으며, 현(絃)을 배로 하여 율(律)에 대응하는데, 이는 바른 소리가 아니어서 중국 음악에서는 취하지 않는 바다. 서량기와 고려기에는 오현(五絃)이 있는데, 비파와 같이 생겼고 약간 작으며, 북국(北國)에서 생산된다. 예전에는 나무로 만든 한발(捍撥)로 연주하였는데, 악공(樂工) 배신부(裵神符)가 처음에 손으로 연주하자, 후세 사람들이 그를 이어받아 추비파(搊琵琶)라고 하였다.
○ 의자적(義觜笛)은 횡적(橫笛)과 같이 생겼는데, 부리[觜]가 붙어 있다. 서량(西涼)의 악기인데, 지금은 고구려에서도 역시 이를 쓴다. ○ 일본의 《물조래집(物徂徠集)》에, “석장적(錫杖笛)은 이른바 고려적(高麗笛)이라는 것으로, 대개 소리 내기가 쉽다고 한다.” 하였다.
○ 제고(齊鼓)는 모양이 칠통(漆桶)과 같은데, 한쪽 머리가 약간 크다. 북의 표면에 배꼽을 만들어 놓았는데, 마치 사향노루의 배꼽과 같이 생겼다. 서량과 고구려의 악기이다.
○ 담고(擔鼓)는 서량과 고구려의 악기이다. 모양이 항아리와 같이 생겼는데, 항아리보다는 작다. 먼저 가죽으로 뒤집어씌우고 칠을 하는데, 이것이 만드는 방법이다.
○ 도피관(桃皮管)은 복숭아나무 껍질을 말아서 부는 것이다. 옛날에는 이를 관목(管木)이라 하였으며, 또한 도피필률(桃皮篳篥)이라고도 한다. 소리는 소(簫)와 가(笳)에 대응되며, 옆으로 분다. 남만(南蠻)과 고구려의 악기이다. 지금은 고취부(鼓吹部)에 그 악기가 있다. 《이상 모두 문헌통고》 ○ 《당서(唐書)》에, “동이(東夷)의 악기 가운데 관목(管木)이라는 것이 있는데, 도피(桃皮)가 그것이다. 복숭아나무 껍질을 말아서 필률(篳篥)을 만든다. 잎을 입에 물고서 분다. 맑고 떨리는 소리가 나는데, 귤나무와 유자나무로 만든 것이 더욱 소리가 좋다.” 하였다.
○ 원화(元和) 10년(815)에 고구려에서 악기 2부(部)를 바쳤다. 《당회요(唐會要)》
○ 13년(818) 4월에 고구려에서 악공을 바쳤다. 《책부원귀》 ○ 삼가 살펴보건대, 《당서》에, “고구려 왕 고장(高藏)의 아들 고덕무(高德武)가 무후(武后) 성력(聖曆) 2년(699)에 안동 도독(安東都督)이 되었다. 뒤에 차차 나라의 기틀이 잡혀가자, 원화(元和) 말기에 이르러서 사신을 파견하여 악공을 보내왔다.” 한 것이 이를 두고 한 말이다.
이상은 고구려의 악기와 악제이다.

○ 백제(百濟)의 음악에는 고(鼓), 각(角), 공후(箜篌), 쟁(筝), 우(竽), 지(篪), 적(笛) 등의 악기가 있고, 투호(投壺), 위기(圍棋), 저포(樗蒲), 악삭(握槊), 농주(弄珠) 등의 놀이가 있다. 송(宋)나라 조정에서 처음으로 그것을 얻었고, 후위(後魏)의 태무제(太武帝)가 북연(北燕)을 멸망시키고서 역시 그것을 얻었으나, 다 갖추어지지는 않았다. 북주(北周)의 무제(武帝)가 북제(北齊)를 멸망시켜 위세가 해외에까지 진동하자, 두 나라가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고구려와 백제이다.- 각각 그 나라의 음악을 바쳤다. 이에 북주의 사람들이 이를 악부(樂部)에다 끼워 넣고는 그것을 국기(國伎)라고 하였다. 수 문제(隋文帝)가 진(陳)나라를 평정하고는 문강기(文康伎)와 예필기(禮畢伎)를 얻었다. -《구당서》에는 “수 문제가 진나라를 평정하고서 청악(淸樂) 및 문강곡(文康曲), 예필곡(禮畢曲)을 얻어 9부의 기(伎)에다 끼워 넣었는데, 그 가운데 백제기(百濟伎)는 들어 있지 않다.” 하였다.- 당나라 정관(貞觀) 연간에 일찍이 백제국을 멸망시키고 그 나라의 음악을 모두 다 얻었다. 중종(中宗) 때에 이르러서 공인(工人)들이 도망하여 흩어졌다. 개원(開元) 연간에 기왕(岐王) 범(範)이 태상 경(太常卿)이 되어 다시 아뢰어서 백제의 음악을 설치하였다. -《구당서》에 “이 때문에 음(音)과 기(伎)가 많이 빠졌다.”고 하였다.- 백제의 악기에는 생(笙), 적(笛), 도피필률(桃皮篳篥), 공후(箜篌)가 있다. -《통전》에 “백제의 악기에는 쟁(筝), 적(笛), 도피필률, 공후 등속이 있으며, 대부분 중국의 악기와 같다.” 하였다.- 백제의 춤은 2명이 추는데, 폭이 넓은 자색(紫色)의 치마와 저고리를 입고, 장보관(章甫冠)을 쓰고, 가죽신을 신는다. 장보관은 높은 관(冠)인데, 동이(東夷)가 이를 쓰니, 어찌 물려 받은 제도가 아니겠는가. 옛사람이 일찍이 “예를 잃어버리고 오랑캐에게서 구한다.”고 한 말이 어찌 믿을 만하지 않은가. 《상동》
○ 일본(日本) 추고(推古) 20년(612, 백제 무왕13)에 백제국의 악사(樂師) 미마지(味摩之), 이중방(已中芳), 가다의(加多意) 등 3명이 와서 말하기를, “오(吳)나라에서 악기(樂伎)와 악무(樂舞)를 배웠다.”라고 하였다. 이에 그들로 하여금 동부(童部)에서 음악을 가르치게 하였다. 《일본기(日本紀)》 ○ 살펴보건대, 이것이 일본에서 음악을 쓴 시초로, 바로 수 양제(隋煬帝) 대업(大業) 연간 때이다.
이상은 백제의 악제와 악기이다.

○ 신라(新羅)는 매년 8월 15일이면 음악을 연주하며 술 마시고 잔치하는데, 여러 신하들은 뜰에서 활을 쏜다.
○ 정관(貞觀) 5년(631)에 사신을 파견하여 여악(女樂) 2명을 바쳤다. 《이상 모두 구당서》
신라금(新羅琴)은 신라국으로부터 건너왔다. 12현(絃)이 있는데, 각현(各絃)을 갑, 을, 병, 정, 무, 기, 경, 신, 임, 계, 천(天), 지(地)로 이름한다. 예전에는 신라금 3장(張), 공후(箜篌) 2장이 전해져 왔는데, 지금 쓰고 있는 것은 쟁(筝)뿐, 금(琴)과 공후에 대해서는 아는 자가 없다. 《화한삼재도회(和漢三才圖會)》 ○ 《일본서기》에, “윤공(允恭) 42년(453, 신라 눌지왕37)에 신라에서 각종 악인(樂人) 80명과 악기를 바쳤다.” 하였다.
살펴보건대, 신라금은 바로 우륵(于勒)이 만들어 전한 가야금(加耶琴)이다. 모두 12현인데, 그 가운데 무현(武絃)이 조금 크다. 5단음(短音)에 이르러서는 점차 가늘어지며, 주(柱) 역시 점차 낮아진다.
○ 만만파파식적(萬萬波波息笛)은, 신라 신문왕(神文王) 때 동해(東海) 바다 가운데에 물에 떠다니는 작은 산이 있어서 파도를 따라 왔다갔다 하였다. 왕이 이를 이상하게 여겨 바다를 건너서 그 산으로 올라가니, 산 위에 대나무 한 그루가 있었는데, 이것으로 적(笛)을 만들라고 명하였다. 이 적을 불면 적병이 물러가고 병이 나으며, 가물 때에는 비가 오고 장마 때에는 비가 개며, 바람이 잔잔해지고 바다가 고요해졌다. 이에 만파식적(萬波息笛)이라고 불렀으며, 대대로 보물로 여겼다. 효소왕(孝昭王) 때에 이르러서 만만파파식적(萬萬波波息笛)이라고 호칭을 덧붙였는데, 지금은 없어졌다. 《삼재도회》 ○ 삼가 살펴보건대, 이것은 바로 《여지승람(輿地勝覽)》의 본문에 나오는 글이다.
○ 조선국에 옥적(玉笛)이 있는데, 길이가 1장 9촌이며, 소리가 맑고 밝다고 한다. 해동(海東)의 용(龍)이 바친 것이다. 《조선지(朝鮮志)》
살펴보건대, 옥적(玉笛)은 신라 때의 적(笛)으로 지금 경주부(慶州府)에 있다. 세속에서 전하기를 “북쪽으로 조령(鳥嶺)을 넘어가면 소리가 나지 않는다.”고 한다. 내가 남쪽을 유람할 때 그것을 보니, 길이가 과연 1장 9촌이었으며, 위는 말라 죽었고 아래는 살아 있었으며, 대나무의 색깔 그대로였다. 임진년 병란 때 왜인(倭人)들이 이를 부수었는데, 쇠로 부서진 부분을 때웠다. 훼손을 당한 뒤로는 그 소리가 맑거나 밝지 않다고 한다.
이상은 신라의 악제와 악기이다.

○ 발해국의 풍속은 매년 세시(歲時)에 모여서 음악을 연주한다. 먼저 노래와 춤을 잘하는 몇 명에게 앞서 가도록 명하고, 사녀(士女)들이 그에 따라서 다시 창화(唱和)하면서 빙글빙글 도는데, 이를 답추(踏鎚)라고 부른다. 《문헌통고》 ○ 《금사(金史)》에, “태화(泰和) 초에 유사(有司)가 ‘태상시(太常寺)에 있는 공인(工人)의 숫자가 적으니, 발해 교방(渤海敎坊)의 악인(樂人)들에게 겸하여 음악을 익히게 해 쓰임에 대비하소서.’라고 아뢰었다. 승안(承安) 4년에 발해 교방의 장행(長行) 30명을 없앴다.” 하였다.
이상은 발해의 악제와 악기이다.

○ 송(宋) 천성(天聖 1023~1031) 연간에 고려에서 일찍이 영관(伶官) 10여 명을 바치면서 말하기를, “오랑캐의 음악이라 보잘것은 없지만, 단지 국사(國史)를 빛나게 하기 위해서 음악을 바칩니다.” 하였다. 《송사》 ○ 《문헌통고》에, “건덕(建德) 4년(575)에 진주(鎭州)에서 영관을 올렸는데, 고려부(高麗部)의 음악을 잘 익혔다. 이에 의복과 은대(銀帶)를 하사하고는 본도(本道)로 돌아가게 하였다.” 하였다. ○ 《요사》에, “통화(統和) 12년(994, 성종13)에 고려에서 기악(伎樂)을 올리자, 이를 물리쳤다.” 하였다.
○ 희령(煕寧 1068~1077) 연간에 악공에게 명하여 고려에서 음악을 채집하게 하였다. 《초학집(初學集)》
○ 원풍(元豐 1078~1085) 연간에 고려에서 사신이 나와서 중국의 악공을 파견하여 음악을 가르쳐 줄 것을 요청하였다. 지금의 고려 음악은 대부분 중국의 악제(樂制)에 따른 것이다. 중국에서 사신이 가면 가악(家樂)을 내어 술잔치를 열어 준다. 《문헌통고》
○ 정화(政和) 3년(1113, 예종8)에 고려에서 사신 안직숭(安稷崇)을 파견하여 새로운 음악을 내려 줄 것을 요청하였다. 이에 조서를 내려서 철방향(鐵方響) 5가(架), 방향(方響) 5가, 비파(琵琶) 4면, 오현(五絃) 2면, 쌍현(雙絃) 4면, 쟁(筝) 4면, 공후(箜篌) 4좌(座), 필률(篳篥) 20관(管), 적(笛) 12관, 지(篪) 20관, 소(簫) 10면(面), 포생(匏笙) 10찬(攢), 훈(壎) 40매(枚), 대고(大鼓) 1면, 장고(杖鼓) 20면, 박판(拍板) 2곶(串) 및 곡보(曲譜) 10책(册), 지결도(指訣圖) 10책을 하사하였다.
○ 5년(1115, 예종10)에 고려의 사신 왕자지(王字之)가 돌아가자, 대성아악(大晟雅樂)을 하사하였다. 《이상 모두 영화기문(寧和記聞)》
《고려사》 악지(樂志)에 나오는 가사(歌辭)는 대부분 송 유릉(宋裕陵)이 하사한 대성부(大晟府)의 악보(樂譜)에 뿌리를 두고 있다. 《폭서정집(曝書亭集)》
살펴보건대, 《고려사》를 보면, 예종(睿宗) 11년(1116) 6월에 왕자지가 송나라에서 돌아왔는데, 황제가 조서를 내려서 대성악(大晟樂)을 하사하였으며, 동(冬) 10월 무진에 건덕전(乾德殿)에서 대성악을 열람하였고, 계축에는 태묘에 친히 강신제(降神祭)를 지내면서 대성악을 올리고, 아울러 새로 만든 9실(室)의 등가(登歌)를 올렸다. 이것이 바로 악지(樂志)의 가사가 대부분 대성아악의 악보에 뿌리를 둔 것이라는 것이다.
○ 고려의 음악은 소리가 아주 낮아 금석(金石)으로 만든 악기의 소리가 없다. 음악을 하사하자, 이에 좌부(左部)와 우부(右部)로 나누었는데, 좌부는 당악(唐樂)으로서 중국의 음을 말하고, 우부는 향악(鄕樂)으로서 그 나라의 습속에 따른 음악을 말한다. 《송사》
대악(大樂)은 천지와 더불어 함께 조화를 이루는바, 오성(五聲)의 발생은 오행(五行)에 근원을 두었으며, 팔음(八音)의 구별은 팔풍(八風)에서 생겨난다. 청탁(淸濁)과 고하(高下)는 다 같은 기운에서 나오며, 손과 발이 흥겹게 움직이며 춤추는 것은 그렇게 하려 하지 않는데도 그렇게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궤부(蕢桴)토고(土鼓)로도 모두 충분히 그 소리를 깃들이고 조화를 토해 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갈천씨(葛天氏) 때부터 우미가(牛尾歌)가 이미 문헌에 보이게 된 것이다.
후세에 성인(聖人)이 음악을 만들어 덕을 숭상하면서, 금(金), 석(石), 토(土), 혁(革), 포(匏), 목(木), 사(絲), 죽(竹) 등의 재료를 가지고 종(鍾), 경(磬), 도(鞉), 고(鼓), 훈(塤), 지(篪), 생(笙), 우(竽), 축(柷), 어(敔), 금(琴), 슬(瑟), 관(管), 적(笛) 등의 악기를 제작하였다. 그리하여 이를 가지고 연주를 시작하고 연주를 멈추었으며, 이를 가지고 읊조리기도 하고 쉬기도 하여, 천지의 조화에 맞추어서 천지의 신령과 조상의 영혼을 강림하게 하였다. 만이(蠻夷)와 융적(戎狄)의 음악에서도 역시 합주(合奏)를 하는데, 매사(韎師)가 있어 음악을 관장하고, 모인(旄人)이 있어 춤을 펼쳐 보이고, 제루씨(鞮鞻氏)가 있어 가취(歌吹)를 맞춘다. 무릇 백성들과 함께 음악을 즐겨서 천하를 즐기므로 처음부터 중국과 오랑캐의 구별이 없다. 그러므로 모두 받아들이고 널리 채택하는 것은 우리 덕이 널리 퍼져 나감을 보여 주는 것이다.
《시경(詩經)》에 이르기를, “아(雅)를 연주하고, 남(南)을 연주하며, 약(籥)을 춤에 어지럽지 않도다.”라고 하였는데, 설명하는 자가 “아는 중국의 음악이고, 남은 오랑캐의 음악이다.”고 하였다. 이 두 가지 음악을 합주해서 조화를 이루어 천지의 중성(中聲)에 맞춘 다음이라야 음악을 갖춘 것이 된다.
그러나 사방의 이역(異域)에서는 음식이 조화를 달리하고, 의복이 제도를 달리하고, 기용(器用)이 마땅함을 달리하는바, 음악 역시 같을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동방의 음악을 ‘매(靺)’라 하고, 남방의 음악을 ‘임(任)’이라 하고, 서방의 음악을 ‘주리(侏離)’라 하고, 북방의 음악을 ‘금(禁)’이라 하며, 또 각각 그 나름의 뜻을 지니고 있어 뒤섞을 수 없는 것이다. 고려인의 경우는 동이(東夷)의 나라이므로 그 음악은 ‘매(靺)’에 근본을 둔 것이다. 또 삼대(三代) 시대의 제도는 상(商)나라의 음악을 대호(大濩)라 하고, 주(周)나라의 음악을 대무(大武)라 한다.
기자(箕子)는 상(商)나라의 후예로서 주나라로부터 조선에 봉작(封爵)을 받았으니, 그곳 조선의 비루한 매악(靺樂)을 고쳤을 것인바, 틀림없이 대호와 대무의 유음(遺音)이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제작(制作)을 차례로 이어받아 지금까지 천 년이 지났으니, 성음이 조화되고 악률이 맞아서, 마땅히 취할 만한 것이 있을 것이다.
희령(煕寧) 연간에 왕휘(王徽)가 일찍이 악공을 보내 달라고 주청하자, 이에 조서(詔書)를 내려서 악공을 그 나라로 가게 하였는데, 수년 후에야 돌아온 사실이 있다. 그 후에도 중국으로 사신이 나올 때면 반드시 재물을 싸 가지고 와서 악공을 스승으로 삼았으므로, 악공이 그들의 관소로 가서 가르쳐 준 일이 많이 있다. 근년에 조공을 바치러 들어와서는 또 대성아악(大晟雅樂)을 내려 줄 것을 요청하였고, 다시 연악(燕樂)을 내려 주기를 요청하였는데, 조서를 내려서 그 청을 다 들어주었다. 그러므로 악무(樂舞)가 더욱 성대해져 보고 들을 만하게 되었다.
지금 고려의 음악에는 2부(部)가 있다. 좌부(左部)는 당악(唐樂)이니 중국의 음악이요, 우부(右部)는 향악(鄕樂)이니 고려의 음악이다. 중국 음악은 악기가 다 중국 제도 그대로이다. 향악에는 고(鼓), 판(板), 생(笙), 우(竽), 필률, 공후(箜篌), 오현금(五絃琴), 비파(琵琶), 쟁(筝), 적(笛)이 있어 그 모양과 만듦새가 약간씩 다르다. 그리고 슬(瑟)의 기러기발은 고정되어 있고 움직이지 않는다. 또 소(簫)가 있는데, 관(管)의 길이가 2척 남짓되며, 이를 호금(胡琴)이라고 부른다. 이 악기로 몸체를 구부려 먼저 불어서 여러 악기의 연주를 시작하게 한다.
여기(女伎)는 ‘하악(下樂)’이라고 하는데, 모두 세 등급이 있다. 대악사(大樂司)는 2백 60명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왕이 늘 사용하는 것이다. 다음은 관현방(管絃坊)으로 1백 70명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그다음은 경시사(京市司)로서 3백여 명으로 구성되어 있다. 또 석지(柘枝)포구(抛毬)의 기예(技藝)도 있다. 그들의 백희(百戱)는 수백 명의 사람이 하는데, 모두 대단히 민첩하다고 한다. 그러나 마침 왕우(王俁)의 상기(喪期)가 끝나지 않았기 때문에, 악공들이 악기를 잡고만 있고 연주는 하지 않아서 성률의 절도를 알아볼 수 없었다. 《고려도경》
○ 고려 행고(行鼓)의 모양은 아악(雅樂)에서 쓰는 박부(搏拊)와 대략 비슷한데, 가운데 불룩한 부분이 조금 길고 구리 고리로 장식하였으며, 보라색 띠를 꿰어 허리 아래에 맨다. 군대가 행진하면 앞에 가면서 금뇨(金鐃)와 사이를 두고 치는데, 그 음절이 자못 느리다. 금뇨의 모양은 중국의 만듦새와 다르지 않다.
○ 호가(胡笳)의 만듦새는 위가 날카롭고 아래는 굵으며, 그 모양이 약간 짧다. 사신이 군산도(群山島)에 처음 이르렀을 때, 순위장(巡尉將)이 주졸(舟卒)을 맞아 푸른 옷을 입고 이것을 부는데, 그 소리가 오열하는 듯하여 곡조를 제대로 이루지 못하고 많은 사람이 시끄럽게 떠들어 대는 것처럼 왱왱거리기만 하였다. 조서를 맞을 때는 앞에서 행진하며, 수십 보를 갈 때마다 조금 물러나서 조서를 실은 여(輿)쪽으로 얼굴을 돌려서 불며, 울리는 소리가 그쳐야만 행진을 한다. 그런 뒤에야 징과 북을 쳐서 박자를 맞춘다. 《이상 모두 상동》
○ 원우(元祐) 초에 양강공(楊康功)이 고려에 사신으로 가게 되었는데, 채원도(蔡元度)가 말하기를, “고려의 경(磬)이 소리가 몹시 좋다고 하니, 돌아올 때 번거롭겠지만 꼭 한 개를 가져다주기 바란다.” 하였다. 양강공이 돌아올 때 경을 채원도에게 가져다주었다. 《휘주록(揮麈錄)》
살펴보건대, 《국조보감(國朝寶鑑)》 세종조(世宗朝)를 보면, 남양(南陽)에서 경석(磬石)이 나오고 해주(海州)에서 거서(秬黍)가 나오자, 이것으로 악제(樂制)를 정하였다. 그러자 사람들이 성스러운 세상에 상서로운 징조가 나타난 것이라고 하였다. 송나라 때 고려의 경(磬)은 어디에서 나왔는지 모르겠다.
이상은 고려의 악제와 악기이다.

○ 명(明)나라 홍무(洪武) 연간에 조선국왕에게 묘사(廟社)의 악기를 하사하였다. 영락(永樂) 연간에 또 편종(編鐘)과 편경(編磬) 각 16개, 슬(瑟)과 생(笙) 각 2개, 금(琴)과 소(簫)는 그 곱절을 하사하였다. 《대명회전(大明會典)》 ○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영락 3년(1405, 태종5)의 일이다.
○ 영락 연간에 전내(殿內)에서 식사를 할 때 연주하는 음악을 정하였다. 무안사이지무(撫安四夷之舞)를 연주하는데, 고려무(高麗舞)를 추는 4명은 모두 입자(笠子)와 청라소금흉배오자(靑羅銷金胸背襖子), 동대(銅帶), 조화(皀鞾)를 착용한다. 《명사》
○ 가정(嘉靖) 6년(1527, 중종22)에 태묘(太廟)의 무안사이지무를 정하였다.
동이(東夷)의 악공 4명은 연화모(蓮花帽)를 쓰고, 여러 가지 색의 세습오자(細褶襖子), 백소금오고(白銷金汚袴), 홍초금연(紅綃金緣), 홍록견속요(紅綠絹束腰), 홍라옹항(紅羅擁項), 홍결자(紅結子) 차림을 하고, 화화(花靴)를 신는다. 악기(樂器)는 요고(腰鼓), 비파(琵琶), 호금(胡琴), 공후(箜篌), 두관(頭管), 강적(羌笛), 수잔(水盞), 박판(拍板)이 있다. 무사(舞士) 4명은 뒤로 북상투를 틀고 홍초금두승(紅綃金頭繩)과 홍라소금말액(紅羅銷金抹額)을 잡아매며, 중간에 도금박산(塗金博山)을 달고, 양 가에는 도금건환(塗金巾環)과 명금이환(明金耳環)을 단다. 청라생색화화대수삼(靑羅生色畫花大袖衫), 홍생색영수(紅生色領袖), 홍라소금군(紅羅銷金裙)과 연(緣), 홍생견친삼(紅生絹襯衫), 금령(錦領), 도금속대(塗金束帶) 차림을 하고, 오피화(烏皮靴)를 신는다. 매번 연회(宴會) 때마다 이악(夷樂)이 연주되면, 무사(舞師)가 무사(舞士)를 거느리고 춤추는 자리로 나온다. 춤이 끝나면 음악을 그치고 깃발을 눕혀 놓는다. 《속문헌통고(續文獻通考)》
○ 31년(1552, 명종7)에 조선에서 홍무(洪武), 영락(永樂) 연간에 하사받은 악기가 부서졌다는 이유로 율관(律管)을 보내 달라고 아뢰었으며, 다시 악관을 중국의 서울로 보내어 음악 교습을 요청하였는데, 허락하였다. 《명사》
가정(嘉靖) 연간에 조선에서 악률(樂律)에 관한 책을 구매하는 일과 태상시(太常寺)에서 악률을 교정하는 일에 대해 주청하니, 어용감(御用監)으로 하여금 12관(管)을 만들어서 주게 하였다. 《대명회전(大明會典)》
○ 조선인의 행렬에서는 나발(喇叭), 동각(銅角), 태평소(太平簫) 등을 불면서 앞에서 인도해 간다. 《일본기(日本紀)》
이상은 본조(本朝)의 악제와 악기이다.

[주D-001]소강(小康) : 하 왕조의 6대왕으로, 기원전 2118~2058년까지 즉위하였다.
[주D-002]산악(散樂) : 아악(雅樂)에 속하지 않은 잡악(雜樂)으로, 야인(野人) 가운데 음악을 잘 하는 자의 음악을 말하며, 후한 때의 황문창(黃門倡)과 같은 것이다.
[주D-003]아를 …… 연주하며 : 《시경》 권13 고종편(鼓鍾篇)에 나오는 구절로, 아는 대아(大雅)와 소아(小雅)를 가리키며, 남은 주남(周南)과 소남(召南)을 가리킨다.
[주D-004]우전(虞傳) : 《상서대전(尙書大傳)》을 말한다. 《상서대전》 권1에 이 내용이 나온다.
[주D-005]양백(陽伯) : 춘백(春伯), 곧 춘관(春官)을 말하며, 백이(伯夷)가 관장하였다.
[주D-006]진씨(陳氏)의 악서(樂書) : 진씨는 송(宋)나라 진양(陳暘)을 말하며, 《악서》는 그가 지은 음악에 관한 책으로, 각 경전에 나오는 음악에 관한 내용을 뽑아서 만들었으며, 모두 2백 권으로 이루어져 있다.
[주D-007]청구풍아(靑邱風雅) : 삼국, 고려 이래의 명시들을 뽑아서 비평과 주석을 단 책이다. 조선 성종 때 김종직(金宗直)이 편찬하였으며, 1권으로 되어 있다.
[주D-008]납월(臘月) : 음력 12월을 말한다. 《삼국지》 위서(魏書) 동이전(東夷傳)에는 은정월(殷正月)에 하는 것으로 되어 있는데, 은정월은 음력 12월이다.
[주D-009]영고(迎鼓) : 부여에서 음력 12월에 행한 일종의 추수 감사제이다. 고구려의 동맹(東盟), 동예의 무천(舞天), 삼한의 시월제(十月祭) 등이 모두 추수가 끝나는 음력 10월에 행해졌으나, 부여에서만 12월에 행해진 것은 아마도 원시 시대 수렵 사회의 전통을 이어 온 때문인 듯하다.《韓國學基礎資料選集 古代篇, 정신문화연구원, 1987, 261쪽 주》 양주동(梁柱東)은 영고의 뜻에 대해, 영(迎)의 훈독(訓讀)은 ‘마지’이고, 고(鼓)는 ‘굿’의 음과 뜻을 차용한 것이라고 하면서 ‘마지굿’의 음차(音借)로 해석하였다.
[주D-010]무천(儛天) : 동예에서 매년 10월에 행하던 제천 행사로, 추수 감사제와 부락제(部落祭)의 성격을 가졌다. 무천(舞天)이라고도 한다.
[주D-011]탁무(鐸舞) : 이 부분이 원문에는 ‘鐸聲’으로 되어 있다. 《삼국지》 위서 권30에 의거하여 ‘鐸舞’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탁(鐸)은 춤을 출 때 쥐고 추는 큰 방울을 말하며, 탁무는 중국의 잡무(雜舞) 이름이다. 《고금악록(古今樂錄)》에는 “탁무란 목탁(木鐸)을 잡았다는 뜻으로, 목탁은 대중들을 깨우칠 때 사용하는 것이니, 법제(法制)를 제정하여 천하를 호령한다는 뜻에서 이름을 취한 것이다.” 하였다.
[주D-012]태악(太樂) : 이 부분이 원문에는 ‘大樂’으로 되어 있다. 《수서》 권15에 의거하여 ‘太樂’으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태악은 수나라 때 태상시(太常寺)에 속한 관명(官名)이다.
[주D-013]7부(部)의 음악 : 수나라 개황 초년에 정한 음악 제도로, 첫 번째는 국기(國伎), 두 번째는 청상기(淸商伎), 세 번째는 고려기(高麗伎), 네 번째는 천축기(天竺伎), 다섯 번째는 안국기(安國伎), 여섯 번째는 구자기(龜玆伎), 일곱 번째는 문강기(文康伎)이다.
[주D-014]구자(龜玆) : 중국의 신강성(新疆省) 고차(庫車)와 사아(沙雅) 두 현의 사이에 있던 나라로, 왕도(王都)는 연성(延城)이다.
[주D-015]강국(康國) : 대완(大宛)의 서북쪽에 있었던 강거(康居)의 후예로, 왕의 성씨는 온씨(溫氏)이며, 기련산(祁連山) 북쪽의 소무성(昭武城)에 있다가 흉노에게 쫓기어 서쪽으로 가 총령(蔥嶺)을 넘어가 나라를 세워 살보수(薩寶水) 가의 아록적성(阿祿迪城)에 도읍하였다.
[주D-016]소륵(疎勒) : 한나라 때 중국과 통한 나라로, 황하가 발원되는 곳에 있었으며, 도읍은 소륵성(疎勒城)이다. 장안(長安)에서 서쪽으로 9천 3백 리 떨어져 있었다.
[주D-017]안국(安國) : 강국(康國)의 주위에 있었던 나라이다.
[주D-018]예필(禮畢) : 악명(樂名)으로, 진(晉)나라 유량(庾亮)의 집안에서 나왔다. 유량이 죽자, 그의 기(伎)들이 유량을 사모하여 유량의 얼굴 모습을 만들어 놓고 춤을 춘 음악인데, 유량의 시호(諡號)가 문강(文康)이었으므로 문강곡(文康曲)이라고도 이름한다. 구부(九部)의 음악을 연주하면서 맨 끝에 연주하므로 예필(禮畢)이라고 이름하였다.
[주D-019]지서(芝栖) : 이 부분이 원문에는 ‘芝酒’로 되어 있다. 《수서》 권15 악지(樂志)에 의거하여 ‘芝栖’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책부원귀》 권570에는 ‘歌芝栖’로 되어 있다.
[주D-020]가지서(歌芝栖) : 《책부원귀》 권570에는 ‘舞芝栖’로 되어 있다.
[주D-021]탄쟁(彈筝) : 수나라 구부기(九部伎)의 고려기(高麗伎)에서 쓰인 현악기의 일종으로서, 서역 계통의 악기이다.《韓國學基礎資料選集 古代篇, 1098쪽 주》
[주D-022]와공후(臥箜篌) : 고려기(高麗伎)에서 쓰인 현악기의 하나로, 공후(箜篌)의 일종이다. 일본 학자들에 의하여 현금(玄琴)으로 추정되었으나, 재고를 요한다.《韓國學基礎資料選集 古代篇, 1098쪽 주》
[주D-023]수공후(豎箜篌) : 아시리아의 하프처럼 생긴 현악기의 일종이다. 본래는 서역 계통의 악기인데 고구려에 수용된 것이다.《韓國學基礎資料選集 古代篇, 1098쪽 주》
[주D-024]비파(琵琶) : 당비파(唐琵琶)처럼 굽은 목과 4현으로 된 현악기로, 사현비파(四絃琵琶)라고도 한다. 본래 서역 계통의 악기가 고구려에 수용된 것이다.《韓國學基礎資料選集 古代篇, 1098쪽 주》
[주D-025]오현(五絃) : 고구려악(高句麗樂)에서 사용된 현악기의 일종이다. 향비파(鄕琵琶)처럼 생긴 오현은 서역 계통의 현악기로 고구려에 5세기경에 수용되었다.《李海浪, 韓國音樂史, 예술원, 1985, 49~50쪽》
[주D-026]적(笛) : 가로로 잡고 부는 고구려의 횡취(橫吹) 또는 횡적(橫笛)으로 해석된다.《韓國學基礎資料選集 古代篇, 1098쪽 주》
[주D-027]생(笙) : 관악기의 일종이다.
[주D-028]소(簫) : 현재의 퉁소(洞簫)처럼 생긴, 세로로 잡고 부는 관악기의 일종으로, 소관(簫管), 척팔(尺八), 수적(竪笛)이라고도 한다. 서역에서 전래된 고구려의 장소(長簫)는 4세기경에 이미 수용되었음이 안악 제3호 고분에서 확인되었다.《韓國學基礎資料選集 古代篇, 1098쪽 주》
[주D-029]소필률(小篳篥) : 고구려 필률(篳篥)의 일종으로, 대필률(大篳篥)보다 한 옥타브 높은 소리를 내는 피리였으리라 추정된다.《韓國學基礎資料選集 古代篇, 1099쪽 주》
[주D-030]도피필률(桃皮篳篥) : 복숭아나무 껍질이나 앵도나무 껍질로 싸서 만든 피리이다.
[주D-031]요고(腰鼓) : 작은 장구처럼 생긴 북의 일종이다. 몸통은 나무나 흙으로 만들었다.《韓國學基礎資料選集 古代篇, 1099쪽 주》
[주D-032]제고(齊鼓) : 큰북의 일종이다.
[주D-033]담고(擔鼓) : 큰북의 일종이다.
[주D-034]패(貝) : 나각(螺角), 즉 소라 껍질 종류에 속하는 관악기의 일종이다.《韓國學基礎資料選集 古代篇, 1099쪽 주》
[주D-035]금(琴) : 문자상으로는 중국의 칠현금(七絃琴)이지만, 문맥상 고구려의 현금(玄琴)으로 해석되어야 옳을 듯싶다. 현금은 4세기경에 왕산악(王山岳)에 의해 개작된 뒤 고구려 음악 활동에 중추적인 역할을 하였다.《韓國學基礎資料選集 古代篇, 1098쪽 주》
[주D-036]쟁(筝) : 중국 고대 현악기의 하나로, 진시황 때 슬(瑟)을 개조하여 만들었다. 12 내지 13줄로 되어 있으며, 가야금이나 일본의 고도[筝]처럼 생겼다.《韓國學基礎資料選集 古代篇, 1098쪽 주》
[주D-037]필률(篳篥) : 고구려악에서 쓰인 관악기의 하나. 본래 서역 계통의 악기인 필률은 천산북로(天山北路)를 거쳐서 5세기경에 고구려에 수용되었으리라 추정된다.《韓國學基礎資料選集 古代篇, 1098쪽 주》
[주D-038]횡취(橫吹) : 젓대처럼 가로로 잡고 부는 관악기의 일종으로, 일명 적(笛)이라고도 한다. 필률처럼 5세기경에 서역에서 수용되었으리라 추정된다.《韓國學基礎資料選集 古代篇, 1098쪽 주》
[주D-039]고(鼓) : 북 종류의 타악기이다. 고구려의 고는 많은 고고학적 자료에서 보이는 요고(腰鼓)로 해석되어야 옳을 듯하다.《韓國學基礎資料選集 古代篇, 1098쪽 주》
[주D-040]의자적(義觜笛) : 지(篪)처럼 특수한 주둥이를 지닌 횡적(橫笛)의 일종이다.
[주D-041]소필률(小篳篥) : 이 부분이 원문에는 ‘小觱栗’로 되어 있다. 《신당서》 권22 예지(禮志) 11에 의거하여 ‘小篳篥’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42]도피필률(桃皮篳篥) : 이 부분이 원문에는 ‘桃皮觱栗’로 되어 있다. 《신당서》 권22 예지 11에 의거하여 ‘桃皮篳篥’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43]대필률(大篳篥) : 이 부분이 원문에는 ‘大觱栗’로 되어 있다. 《신당서》 권22 예지 11에 의거하여 ‘大篳篥’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44]추계(椎髻) : 아무렇게나 머리를 모아올려서 묶은 북상투를 말한다.
[주D-045]인(引) : 인은 노래 곡조로, 바로 공후인(箜篌引)을 말하는데, 그 가사에, “님아 그 물을 건너지 마소, 끝내 그 물을 건너셨구려. 강물에 휩쓸려 돌아가시니, 우리 님 어이할꼬.[公無渡河 公竟渡河 墮河而死 將奈公何]” 하였다.
[주D-046]한발(捍撥) : 현악기를 켜는 채를 말한다.
[주D-047]선궁(旋宮) : 고대에 12율(律)을 7음(音)에 배치시킬 때 선상(旋相)이 궁(宮)이 되는데, 이를 선궁이라고 한다.
[주D-048]고장(高藏) : 고구려 제28대 왕인 보장왕(寶藏王)의 이름이다. 고보장(高寶藏)으로 표기하기도 한다.
[주D-049]공후(箜篌) : 아시리아의 하프처럼 생긴 현악기의 일종이다.《韓國學基礎資料選集 古代篇, 1102쪽 주》
[주D-050]우(竽) : 생(笙)처럼 생긴 관악기의 일종이다.
[주D-051]지(篪) : 고구려의 의자적(義觜笛)처럼 생긴 관악기의 일종이다.
[주D-052]투호(投壺) : 잔치를 베풀어 술을 마실 때, 화살을 잡아 항아리에 던져 넣어 승부를 가리는 놀이로, 재예(才藝)를 강론하고 손님을 즐겁게 하는 아취(雅趣) 있는 놀이이다.
[주D-053]위기(圍棋) : 바둑을 말한다. 바둑의 유래는 은(殷)나라 걸왕(桀王)이 석주(舄胄)에게 명하여 만들었다고도 하고, 요 임금이 아들 단주(丹朱)가 지나치게 아둔하여 지혜를 계발시켜 주기 위하여 만들었다고도 한다. 우리나라의 위기(圍棋)에 대한 중국의 기록으로는, 《구당서》 권199 동이열전(東夷列傳) 고려조(高麗條)에 “위기, 투호의 놀이를 좋아한다.” 하였고, 《주서》 권49 열전 백제조에는 “투호, 저포 등의 잡희(雜戱)가 있으나 장기와 바둑을 좋아한다.” 하였고, 《북사》 권94 열전 백제조에 “투호, 위기, 저포, 농주, 악삭 등의 잡희가 있는데, 장기와 바둑을 더욱 좋아한다.” 하였고, 《수서》 권81 열전 백제조에 “투호, 위기, 저포, 악삭 등의 놀이가 있다.” 하였으며, 우리나라 기록으로는 《삼국사기》 권25 개로왕(蓋鹵王) 21년 조에 “백제 왕 근개루(近蓋婁)가 바둑을 좋아하였는데, 도림(道琳)이 대궐 문에 나아가 고하기를, ‘신은 어려서 바둑을 배워 자못 묘경(妙境)에 들어갔는데, 왕께 알려 드리고자 합니다.’ 하였다. 그러자 왕이 불러들여 바둑을 두어 보니 과연 국수(國手)였다.” 하였고, 《삼국유사》 권5에 “효성왕(孝成王)이 잠저(潛邸)에 있을 때 현사(賢士) 신충(信忠)과 궁정의 잣나무 아래에서 바둑을 두었다.” 하였다.
[주D-054]저포(樗蒲) : 옛날에 저(樗)와 포(蒲)의 열매로 주사위를 만들었으므로 저포라 하는데, 이 놀이는 윷놀이와 같은 놀이로 보는 견해가 있는가 하면 다른 놀이로 보는 견해도 있다. 《지봉유설(芝峯類說)》에서는 윷놀이를 저포라 하였고,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 사희변증설(柶戱辨證說)에서는 윷놀이와 가까운 다른 놀이라고 하였다.《韓國學基礎資料選集 中世篇,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1, 1167쪽 주》
[주D-055]악삭(握槊) : 쌍륙(雙六)이라고도 하는데, 장기와 비슷한 놀이로 판과 알이 있다.
[주D-056]농주(弄珠) : 쟁반 위에 구슬을 굴리면서 노는 놀이이다.
[주D-057]태상 경(太常卿) : 종묘(宗廟)의 의식(儀式)을 관장하는 관명이다.
[주D-058]장보관(章甫冠) : 은(殷)나라 때의 관의 이름. 공자가 이 관을 썼다 하여 유자(儒者)의 관을 지칭하기도 한다.
[주D-059]8월 15일 : 신라 제3대 유리이사금(儒理尼師今) 9년에 시작된 가배(嘉俳), 즉 한가위의 명절을 말하는 듯하다.
[주D-060]신라금(新羅琴) : 가야금을 말한다.
[주D-061]주(柱) : 현악기의 현(絃)을 받치는 기러기발을 말한다. 안주(雁柱)라고도 한다.
[주D-062]답추(踏鎚) : 부녀자들이 서로 창화(唱和)하는 것이다. 《사물이명록(事物異名錄)》의 완희잡희조(玩戱雜戱條)에 “《요사》에 ‘사녀들이 서로 창화하는 것을 답추라 한다.’ 하였다.” 하였다.
[주D-063]발해 교방(渤海敎坊) : 교방(敎坊)은 당 현종(玄宗) 때 여인들에게 노래와 춤을 가르치던 곳이다. 발해의 멸망 이후 금나라에서 발해의 후예들에 의해 발해의 춤이 연구되었을 것 같다.《한국고대음악사연구, 일지사, 1985, 39~53쪽》
[주D-064]장행(長行) : 고대 박희(博戱)의 일종이다. 장행국(長行局)이라고도 한다. 여기서는 악공(樂工)의 뜻으로 쓰였다.
[주D-065]영관(伶官) : 악공을 말한다.
[주D-066]철방향(鐵方響) : 고려 예종 9년(1114)에 소개된 송나라 신악기(新樂器)의 하나로 타악기의 일종이다.《韓國學基礎資料選集 中世篇, 594쪽 주》
[주D-067]방향(方響) : 《고려사》 권70에는 ‘石方響’으로 되어 있다. 예종 9년(1114)에 소개된 송나라 신악기로, 돌의 일종인 옥으로 만든 타악기인 듯하다.《韓國學基礎資料選集 中世篇, 594쪽 주》
[주D-068]비파(琵琶) : 예종 9년(1114)에 소개된 송나라 신악기의 하나로, 현악기의 일종인 송나라의 비파는 4현의 당비파(唐琵琶)로 해석된다.《韓國學基礎資料選集 中世篇, 594쪽 주》
[주D-069]오현(五絃) : 예종 9년(1114)에 소개된 송나라 신악기의 하나로, 어떤 종류의 현악기인지는 분명치 않으나, 송대의 오현쟁(五絃筝)이나 추비파(搊琵琶) 가운데 하나인 듯하다.《韓國學基礎資料選集 中世篇, 594쪽 주》
[주D-070]쌍현(雙絃) : 예종 9년(1114)에 소개된 송나라 신악기의 하나로, 두 줄로 된 현악기인지는 분명치 않다.《韓國學基礎資料選集 中世篇, 594쪽 주》
[주D-071]지(篪) : 예종 9년(1114)에 소개된 송나라 신악기의 하나로 관악기의 일종인데, 송대의 속악기(俗樂器)인 상아지(霜兒篪)나 취지(吹篪) 가운데 하나인 듯하다.《韓國學基礎資料選集 中世篇, 595쪽 주》
[주D-072]포생(匏笙) : 예종 9년(1114)에 소개된 송나라 신악기의 하나로 관악기의 일종인데, 송대의 속악기인 우생(竽笙)이나 봉익생(鳳翼笙), 운화생(雲和笙)의 일종인 듯하다.《韓國學基礎資料選集 中世篇, 595쪽 주》
[주D-073]훈(壎) : 예종 9년(1114)에 소개된 송나라 신악기의 하나로 관악기의 일종인데, 송대의 속악기인 칠공훈(七孔壎)이나 팔공훈(八孔壎)의 일종인 듯하다.《韓國學基礎資料選集 中世篇, 595쪽 주》
[주D-074]대고(大鼓) : 예종 9년(1114)에 소개된 송나라 신악기의 하나로 관악기인데, 교방고(敎坊鼓)의 일종으로 추정된다.《韓國學基礎資料選集 中世篇, 595쪽 주》
[주D-075]박판(拍板) : 예종 9년(1114)에 소개된 송나라 신악기의 하나로 관악기인데, 박(拍)의 일종인 듯하다.《韓國學基礎資料選集 中世篇, 595쪽 주》
[주D-076]대성아악(大晟雅樂) : 송나라의 대성부(大晟府)에서 만든 아악(雅樂)으로, 궁중의 제례 의식 때 연주하는 아악(雅樂)을 말한다. 고려에는 예종 11년(1116)에 왕자지(王字之)와 문공미(文公美)가 중국에 사신으로 가서 받아 가지고 와 전해졌다. 등가악기(登歌樂器) 17종, 헌가악기(軒架樂器) 20종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의식의 종류에 따라서 일정한 규칙에 의하여 악기를 배치하는 악현(樂懸)은 국왕이 참석하는 경우와 국왕을 대신해 대신이 참여하는 경우에 따라 각각 다르다.《韓國學基礎資料選集 中世篇, 599~602쪽》
[주D-077]송 유릉(宋裕陵) : 이 부분은 오자(誤字)가 있는 듯하다. 송나라 황제의 능 가운데 유릉(裕陵)이라는 능은 없다. 대성아악이 고려에 전해진 것은 휘종(徽宗) 때로, 휘종의 능인 영우릉(永祐陵)의 오기(誤記)인 듯하다.
[주D-078]등가(登歌) : 제사를 지낼 때 당상(堂上)에 올라가서 부르는 노래를 말한다.
[주D-079]좌부(左部)와 우부(右部) : 고려의 왕립 음악 기관인 대악서(大樂署)와 관현방(管絃房)의 좌부와 우부를 총칭하는 것이다. 고려 때 우부는 향악을 관장하였고, 좌부는 당악을 관장하였다.《韓國學基礎資料選集 中世篇, 581쪽 주》
[주D-080]당악(唐樂) : 고려 때의 당악은 우리나라에 소개된 당나라 음악과 송나라 음악을 두루 포괄한다.《韓國學基礎資料選集 中世篇, 581쪽 주》
[주D-081]대악(大樂) : 훌륭한 음악이란 뜻이다.
[주D-082]오성(五聲) : 궁(宮), 상(商), 각(角), 치(徵), 우(羽)의 다섯 소리를 말한다.
[주D-083]팔음(八音) : 금(金), 석(石), 사(絲), 죽(竹), 포(匏), 토(土), 혁(革), 목(木) 등 여덟 종의 악기에서 나는 소리를 말한다.
[주D-084]팔풍(八風) : 여덟 방위의 바람을 말한다. 《여람(呂覽)》의 유시(有始)에는 동북풍을 염풍(炎風), 동풍을 도풍(滔風), 동남풍을 훈풍(熏風), 남풍을 거풍(巨風), 서남풍을 처풍(凄風), 서풍을 요풍(飂風), 서북풍을 여풍(厲風), 북풍을 한풍(寒風)이라 하였다.
[주D-085]궤부(蕢桴) : 흙으로 틀을 만들고 가죽으로 표면을 만든, 악기를 치는 채를 말한다.
[주D-086]토고(土鼓) : 흙을 구워 틀을 만들고 가죽으로 표면을 한 악기를 말한다.
[주D-087]갈천씨(葛天氏) …… 우미가(牛尾歌) : 갈천씨는 중국 상고 시대의 전설상의 제왕이며, 우미가는 팔결곡(八闋曲)을 말한다. 갈천씨 때에 세 사람이 소의 꼬리를 잡고 발을 내차면서 팔결곡을 불렀다고 하는데, 팔결곡은 재민(載民), 현조(玄鳥), 수초목(遂草木), 분오곡(奮五穀), 경천제(敬天帝), 건제공(建帝功), 의지덕(依地德), 총금수지극(總禽獸之極)이다.
[주D-088]도(鞉) : 흔들어서 소리가 나게 만든 북을 말한다.
[주D-089]훈(塤) : 흙을 구워서 만든 소형의 취악기(吹樂器)를 말한다.
[주D-090]축(柷) : 나무 상자 같이 만든 통에 자루를 넣어 휘저어 좌우에 부딪쳐서 소리를 내는 악기이다. 합주(合奏)를 시작하는 신호로 사용한다.
[주D-091]어(敔) : 범 모양의 목재 악기로, 등에 톱니가 27개가 있어서 나무 막대로 그 톱니를 타서 소리를 내는 악기이다. 합주를 그치는 신호로 사용한다.
[주D-092]슬(瑟) : 중국 고대 현악기의 하나인데, 몸통은 직사각형이고, 가야금의 기러기발처럼 움직이는 주(柱) 위에 현(絃) 23~25개가 얹혀 있다. 예로부터 금(琴)과 함께 한 쌍으로 연주되었다.
[주D-093]매사(韎師) : 《주례(周禮)》 춘관(春官)에 나오는 관원으로, 오랑캐의 음악을 교습시키는 일을 관장하였다.
[주D-094]모인(旄人) : 《주례》 춘관에 나오는 관원으로, 산악(散樂)과 이악(夷樂)에 맞추어서 춤을 교습시키는 일을 관장하였다.
[주D-095]제루씨(鞮鞻氏) : 《주례》 춘관에 나오는 관원으로, 사이(四夷)의 음악과 노래를 관장하였다.
[주D-096]아(雅)를 …… 않도다 : 《시경》 소아(小雅) 고종편(鼓鍾篇)에 나오는 시로, 아는 대아(大雅)와 소아(小雅)를 가리키고, 남은 주남(周南)과 소남(召南)을 가리키고, 약(籥)은 약무(籥舞)을 가리킨다.
[주D-097]중성(中聲) : 천지의 조화에 맞는 소리를 말한다.
[주D-098]대호(大濩) : 은(殷)나라 탕(湯) 임금이 이윤(伊尹)에게 명하여 지은 음악을 말한다. 대호(大頀), 대루(大鞻)라고도 한다.
[주D-099]대무(大武) : 주(周)나라 무왕(武王)이 은(殷)나라 주(紂)를 토벌하고 지은 음악이다.
[주D-100]왕휘(王徽) : 문종(文宗)의 이름이다.
[주D-101]대성아악(大晟雅樂) : 송나라의 대성부(大晟府)에서 만든 아악(雅樂)으로, 궁중의 제례 의식 때 연주하는 아악(雅樂)을 말한다. 고려에는 예종 11년(1116)에 왕자지(王字之)와 문공미(文公美)가 중국에 사신으로 가서 받아 가지고 와 전해졌다. 등가악기(登歌樂器) 17종, 헌가악기(軒架樂器) 20종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의식의 종류에 따라서 일정한 규칙에 의하여 악기를 배치하는 악현(樂懸)은 국왕이 참석하는 경우와 국왕을 대신해 대신이 참여하는 경우에 따라 각각 다르다.《韓國學基礎資料選集 中世篇, 599~602쪽》
[주D-102]대악사(大樂司) : 이 부분이 원문에는 ‘大樂用’으로 되어 있다. 송징강본(宋澂江本) 《고려도경》 권40에 의거하여 ‘大樂司’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대악사는 서긍(徐兢)이 대악서(大樂署)를 잘못 기록한 것으로, 대악서는 목종(穆宗) 이후 충렬왕 때까지 존속된 고려의 왕립 음악 기관이다. 대악서에 소속된 악공은 2백 60명으로, 이들은 왕의 전용이었다. 대악서는 공민왕 21년(1372)에 전악서(典樂署)로 개칭되어 조선에 전승되었다.
[주D-103]다음은 관현방(管絃房) : 이 부분이 원문에는 ‘吹管絃房’으로 되어 있다. 송징강본 《고려도경》 권40에 의거하여 ‘次管絃房’으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관현방은 문종 30년(1076)에 설립된 고려의 왕립 음악 기관으로, 당악(唐樂)과 향악(鄕樂)을 연주하는 악사(樂師)와 악공을 거느렸다.
[주D-104]석지(柘枝) : 송나라에서 고려에 전해진 교방 가무(敎坊歌舞) 가운데 하나이다. 서역(西域)에 있는 석국(石國)에서 유래된 석지무는 당나라 때 성행하였고, 송나라 때에도 성행한 가무희(歌舞戱)의 일종으로, 바로 《고려사》 악지(樂志)에 전하는 연화대(蓮花臺)이다.《韓國學基礎資料選集 中世篇, 611쪽 주》
[주D-105]포구(抛毬) : 송나라에서 고려에 전해진 교방 가무 가운데 하나이다. 문종 27년(1073)에 교방의 여제자 초영(楚英)에 의해서 처음으로 소개된 포구락은 여기(女妓)가 두 편으로 나누어 공을 포구문(抛毬門)에 던져 넣으며 노는 줄거리의 춤이다.《韓國學基礎資料選集 中世篇, 611쪽 주》
[주D-106]왕우(王俁) : 예종(睿宗)의 이름이다.
[주D-107]행고(行鼓) : 행진할 때 치는 북을 말한다.
[주D-108]박부(搏拊) : 옛 중국 아악기(雅樂器)의 하나로, 가죽 속에 쌀겨를 채운 북이다. 북을 목에다 걸고 좌우의 두 손으로 쳐서 박자를 맞춘다. 우리나라에서는 고려 때 등가악(登歌樂)에 쓰였다.
[주D-109]금뇨(金鐃) : 이 부분이 원문에는 ‘金饒’로 되어 있다. 송징강본 《고려도경》 권13에 의거하여 ‘金鐃’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금뇨는 군중(軍中)에서 행진할 때 쓰는 작은 징을 말한다.
[주D-110]남양(南陽)에서 …… 정하였다 : 《국조보감》 권6 15년 조에 “고려 예종 때 휘종(徽宗)이 하사한 제악(祭樂)이 홍건적(紅巾賊)의 난에 모두 산실되고, 어떤 늙은 영인(伶人)이 연못 속에 던져 넣었던 종(鍾)과 경(磬) 2개만 남아 있었다. 명나라 태조 고황제(太祖高皇帝)와 태종 문황제(太宗文皇帝)가 모두 악기를 하사하였으나 소리가 맞지 않았다. 을사년에 거서(秬黍)가 해주(海州)에서 나오고 경석(磬石)이 남양에서 나오자, 박연(朴堧)에게 명하여 편경(編磬)을 만들도록 명하였다. 이에 박연이 해주의 거서를 가져다가 채워 넣어서 옛 설(說)에 의거해 황종(黃鍾) 한 관(管)을 만들어 불었는데, 그 소리가 중국의 황종보다 조금 높았다.” 하였다. 거서는 검은빛이 나는 기장을 말한다.
[주D-111]청라소금흉배오자(靑羅銷金胸背襖子) : 이 부분이 원문에는 ‘靑羅金胸背襖子’로 되어 있다. 《명사》 권67에 의거하여 ‘靑羅銷金胸背襖子’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112]홍라소금군(紅羅銷金裙)과 연(緣) : 《명사》 권67 협률랑악무생관복조(協律郞樂舞生冠服條)에는 ‘홍라소금군(紅羅銷金裙)과 청소금군연(靑銷金裙緣)’으로 되어 있다.
[주D-113]율관(律管) : 율려(律呂)를 정하는 관(管)을 말한다. 율려는 옛날에 악률(樂律)을 정하는 기구이다. 중국 황제(黃帝) 시대 때 영륜(伶倫)이 대나무를 잘라 통을 만들어서, 통의 길이를 가지고 성음(聲音)의 청탁(淸濁)과 고하(高下)를 구분하였는데, 악기의 음은 이것에 의하여 기준을 삼는다. 음양(陰陽)을 각각 여섯으로 나누어, 양(陽)이 율(律)이 되고 음(陰)이 여(呂)가 되며, 이를 합해 12음이 된다.
[주D-114]동각(銅角) : 구리로 만든 악기의 일종이다. 길이가 2척가량 되며, 소뿔 모양처럼 생겼다.
[주D-115]태평소(太平簫) : 국악(國樂) 관악기(管樂器)의 하나로, 단단한 나무로 만든 관에 여덟 개의 구멍을 뚫었는데, 그 가운데 두 번째 구멍은 뒷면에 있으며, 아랫부분에는 깔대기 모양의 구리를 달고, 윗부분에 구리를 씌워 갈대로 만든 겹혀를 끼워, 그곳에 입을 대고 분다. 호적(胡笛), 대평소(大平簫), 날라리, 철적(鐵笛)이라고도 한다.

 

시(詩) - 귀전시초(歸田詩草)

사월 십오일에 백씨를 모시고 고기잡이하는 집의 조그마한 배를 타고 충주로 향해 가면서 전기의 강행 절구시를 본받아 짓다[四月十五日陪伯氏乘漁家小艓向忠州 效錢起江行絶句]


사월이라 황효의 물이요 / 四月黃驍水
새로 막 갠 철마산이로세 / 新晴鐵馬山
여기서부터 삼백 리의 물길은 / 自玆三百里
길이 백구의 사이에 있구려 / 長在白鷗間

모두들 어선이 좋다고 하는데 / 摠道漁船好
가벼이 나가서 잠시도 안 멎는다네 / 輕划不蹔停
서늘한 시렁은 일산처럼 떠 있어라 / 涼棚浮似蓋
바람 장막 둘러서 정자를 만들었네 / 風幔繞爲亭

미로는 서화 상자가 무거웠고 / 米老書函重
이재는 필첩이 진기로웠네 / 彝齋筆帖珍
눈에는 두 조각 안경이 있어 / 眼中雙靉靆
여행길이 티없이 환히 맑구려 / 行色淨無塵

둑 위에는 세 그루 버드나무요 / 埭上三株柳
울타리 밑에는 명사가 십리인데 / 籬根十里沙
그 안에 정사들이 좋기도 해라 / 中藏好亭榭
돌아보니 여기가 우리 집일세 / 還看是吾家

백 이랑 물결 사라담의 어귀가 / 百頃䤬鑼口
멀리 두자의 넓은 물결 이었는데 / 遙承枓子洪
유쾌하기도 해라 옷소매 속으로 / 愉哉衣褒裏
푸른 물결 바람이 가득 불어 오누나 / 吹滿綠漪風

남자주 앞의 저 돌을 보니 / 藍子洲前石
젊어서 고기 잡던 일 생각나는데 / 丁年憶打魚
그 당시에 하고많던 그 어부들이 / 當時衆漁子
이제는 두어 사람만 남았네그려 / 唯有數人餘

아스라이 보이는 저 수종사엔 / 縹緲水鍾院
뜬 남기에 낙숫물 홈통이 분간되네 / 浮嵐辨瓦溝
호남에 사백 군데의 절이 있지만 / 湖南四百寺
끝내 이 높은 누각보다는 못하리 / 終少此飛樓

산수와 습수가 합쳐 흐르는 곳에 / 汕濕交流處
그 마을 이름이 바로 이수두인데 / 村名二水頭
마을 앞의 한 전방 늙은이가 / 當門一店叟
가만히 앉아 가는 배를 보내누나 / 堅坐送行舟

소슬하고 짙푸른 골짝의 물이 / 瑟碧谿潭水
바람을 받아 거울 조각 깨지듯 하는데 / 衝風破鏡天
붉은 산이 꼼짝 않고 있어라 / 紫山凝不動
알건대 이것이 나무 파는 배로세 / 知是販樵船

바위 밑에 떠 있는 일엽편주는 / 巖根一葉船
흡사 가죽신만큼 조그마한데 / 只似皮鞵小
배 꼬리에 고기를 감추었어라 / 船尾却藏魚
버들가지에 줄줄이 꿰놓았구려 / 纍纍穿柳杪

한 번 번쩍 나타난 용문산의 빛이 / 一閃龍門色
가로로 날아 나그네 배에 왔는데 / 橫飛到客船
문득 마치 새로 등장한 배우가 / 忽如新戲子
몸단장하고 자리에 나온 것 같네 / 裝拺出當筵

적막하기도 해라 사천의 마을에는 / 寂寞沙川塢
예로부터 지방 호족이 없었는데 / 由來乏土豪
밭 사이에 만 그루 나무가 있어 / 田間萬株樹
때가 되면 앵두를 위에 바친다오 / 時至貢櫻桃

소나무와 참나무 수려한 곳에다 / 松櫪濃姸處
잠목의 물굽이를 감아 돌아라 / 紆回梣木灣
아름답기가 막 빗은 머리털 같아 / 美如新櫛髮
이 여씨 집의 산을 사랑한다오 / 愛是呂家山

백사장 언덕 땋아 내린 버들 아래 / 沙岸百辮柳
의관 갖춘 사람 팔구 명이 있는데 / 衣冠八九人
다만 내기 활쏘기로 술을 마셔라 / 秪應賭射飮
남쪽 언덕에 과녁을 새로 걸었네 / 南垞挂帿新

들 언덕에 외로이 가는 나그네 / 野岸孤征客
따스한 날에 말의 걸음 더디어라 / 暄天一馬遲
장막친 정자가 이렇게 좋은데 / 幔亭如此好
아, 그대는 홀로 어디를 가느뇨 / 嗟爾獨何之

기운 언덕이 꺼진 비탈에 연하여라 / 側阪連崩磴
온 무더기가 벌창할 때의 모래로세 / 全堆舊漲沙
뉘 집의 두어 두둑 보리 잎새는 / 誰家數畦麥
잔디같이 초췌하게 서 있네그려 / 憔悴立如莎

순전히 푸르기만 한 먼 산빛은 / 純碧遠山色
물들이는 공인을 부끄럽게 하여라 / 如羞點染工
응당 초목이 없지는 않으련마는 / 未應無草木
공중에 쌓인 안개 때문이로세 / 秖是積空濛

높은 절벽은 맑은 골짝 임해 있는데 / 峭壁俯淸壑
검은 두건은 가면서 절로 기우네 / 烏巾行自斜
바위 틈에 붉은 철쭉들이 끼여 나서 / 石縫紅躑躅
모두 거꾸로 드리운 꽃이 되었구려 / 皆作倒垂花

손목의 글에서 말한 예에 따르면 / 孫穆書中例
한탄강이 바로 대탄강이 되는데 / 韓灘是大灘
나의 배는 지푸라기처럼 가벼워 / 吾舟輕似芥
여기에 와서는 오히려 험난하구려 / 到此尙艱難

고려 때에 공교로이 깎아 놓은데다 / 麗代風斤斲
광릉이 나무로 방죽을 둘러치니 / 光陵木楗圍
물길이 사방의 강으로 통하여라 / 漕渠貫四瀆
자잘한 돌도 이젠 낚시터가 되었네 / 拳石至今磯

깊은 못은 꼭 여울물을 쏟아 내고 / 潭渟必瀉湍
골짝은 좁아야만 들이 열리는 건데 / 峽束方開野
치란이 항상 이 이치와 같거니와 / 治亂恒如斯
궁하고 통함도 그러함이 있다오 / 窮通有然者

은사가 깊이 숨어 사는 곳이 / 隱者深棲地
분명히 저 사이에 있으리로다 / 分明在彼間
돌더렁에 화전 일군 곳도 많은데 / 石田多熂爈
이곳이 바로 백병산이라 하네 / 云是白屛山

매양 상앗대 잠길 물만 만나면 / 每得沈篙水
이내 뱃전 두드리며 노래하는데 / 纔成扣枻歌
풀 모래톱 개었다 다시 어둑해지니 / 草汀晴更沒
동쪽 골짝에 비가 응당 많이 내리리 / 東峽雨應多

물 언덕에 누운 풀 무성도 해라 / 水岸芊眠草
고운 풀에 상앗대 꽂기 아깝구려 / 濃姸惜刺篙
어미소는 꼼짝 않고 누워 있는데 / 牸牛堅不動
송아지만 절로 가벼이 뛰노누나 / 黃犢自輕跳

양근의 황폐한 작은 마을은 / 楊根小墟落
아직도 처음 이사할 때 같구려 / 猶似始遷時
누가 등공을 위해 장사를 지내며 / 誰爲滕公葬
공자의 사당 옮기기를 꾀할런고 / 謀移孔子祠

저 멀리 보는 수양버들 속으로 / 遠遠垂楊裏
술 파는 배가 날듯이 달리어라 / 飛奔賣酒船
처음에는 인정으로 손을 권하여 / 始來情勸客
전혀 돈을 따지지 않은 것 같네 / 渾似不論錢

편평하고 둥글한 설암의 꼭대기에 / 平圓雪巖頂
그 당시 이름난 정자를 세웠었지 / 當日立名亭
아직도 두 그루 은행나무가 있어 / 猶有雙平仲
맑은 그늘이 석양 물가를 덮어 주네 / 淸陰覆晩汀

공교로이 산 끊어진 곳 당하여 / 巧當山斷處
석양이 징 모양으로 걸려 있네 / 落日挂銅鉦
하필이면 저기 저 금사사에 올라 / 何必金沙寺
서쪽으로 지평선을 물을 것 있나 / 西臨問地平

서쪽 물결은 성난 사자 어금니 같고 / 西灩獅牙怒
소용돌이는 가로지른 범의 눈 같은데 / 盤渦虎眼橫
한가하여라 저 고기잡이하는 배는 / 悠哉彼漁艇
그물 치고서 깊은 물에 떠 있네그려 / 施罟汎澄泓

앙덕 마을은 국내가 조그마한데 / 仰德村容小
어부의 집이 물 마주해 환하여라 / 漁家對水明
이곳 지명이 널리 알려진 것은 / 地名轟萬口
이완평이 은거했기 때문이라오 / 曾臥李完平

산수가 서남쪽으로 아름다운데 / 林壑西南美
서글프게 녹문을 마주하노니 / 怊怊對鹿門
오히려 취송의 시구가 생각나서 / 猶思醉松句
한 구원을 경영하고 싶네그려 / 經濟一丘園

해가 지매 별들은 모습을 드러내고 / 日沒星生角
바람이 자니 물은 모서리가 펴지네 / 風微水展稜
노 젓는 소리는 밤에도 멎지 않고 / 艫聲宵未已
깊은 물결을 헤치고 지나가누나 / 穿過一泓澄

구미포의 전선 저장했던 곳에는 / 龜尾藏船處
임진란 때의 수군영이 높직한데 / 壬辰水砦高
시험 삼아 강가의 노인에게 물어보니 / 試逢江叟語
원호란 사람을 전혀 알지 못하네 / 無復識元豪

밤에 물가의 말뚝에 배를 매노니 / 沙碕夜繫杙
산집엔 개 짖는 소리 그윽하여라 / 山屋犬聲幽
시험삼아 다스운 와상에 누우니 / 試就煖床臥
흔들흔들하는 게 마치 배와 같구려 / 搖搖猶似舟

물가의 새벽에 강바람 일어나니 / 渚曉水風起
배의 창문이 가을처럼 썰렁하여라 / 船窓冷似秋
그래서 본디 배 타고 노는 이들은 / 由來萍泛者
한여름에도 솜옷을 준비한다오 / 朱夏蓄棉裘

작은 상자에는 고추장이 있고 / 小盒茄椒醬
여행길 주방엔 장작불 연기로세 / 行廚榾柮煙
인간에 가장 좋은 고량진미가 / 人間梁肉味
모두 이 강에 뜬 배에 있구려 / 都只在江船

괴나무 그늘 밑은 다 술집이요 / 蔭槐皆酒店
버들 뒤쪽은 필시 서재일 텐데 / 隱柳必書齋
맑은 강빛이 있음을 힘입어 / 賴有淸江色
마을 터가 어디나 다 아름답구려 / 村墟無不佳

우뚝이 선 부래산 한 점이 / 浮來山一點
이공 사당을 비스듬히 마주했어라 / 斜對李公祠
격렬하게 중을 배척했던 필법이 / 激烈誅僧筆
천추에 그 기운 쇠하지 않누나 / 千秋氣不衰

물가가 따스하니 모래 바닥 현란하고 / 汀暄沙氣亂
둑이 넓으니 풀 위의 바람 가벼워라 / 隄衍草風輕
놓아 먹이는 말은 뉘 집의 말인고 / 放牧誰家馬
쓸쓸히 나그네를 향해서 우는구나 / 蕭蕭向客鳴

그늘진 골짝은 연기 안개를 머금고 / 陰洞含煙霧
정자와 대사는 흰 물가를 차지했네 / 亭臺綰白厓
그대는 택리지를 보았던가 / 君看擇里志
사는 도리를 가장 아름답게 말했지 / 生理最稱佳

물 북쪽에 자리잡은 파사보는 / 水北婆娑堡
당시에 가장 강대한 웅진이었는데 / 當時控禦雄
왜적들이 돌아가 버린 이후로는 / 自從倭寇返
다시 엄공을 기억하는 이 없구려 / 無復記嚴公

백사장을 돌아서 또 한 마을엔 / 沙廻又一村
나무 끝에서 사람 소리 나는데 / 木末生人語
먼 포구가 편평한 호수 같아서 / 浦遠似平湖
배가 갈 곳이 없는 듯하구려 / 疑無船去處

산천 경계가 선릉에 가까워지니 / 氣色仙陵近
무성히도 초목들이 살찌었어라 / 蓊然草木肥
부드러운 버들 잎새 깊은 곳에서 / 嫩黃深葉裏
가장 먼저 누런 꾀꼬리가 나누나 / 先有栗留飛

새파랗게 우거진 팔대수에는 / 蔥蒨八大藪
진흙 버섯이 물풀과 섞이었는데 / 泥茸雜水芽
깊은 봄에는 마를 제공하고요 / 春深供薯蕷
가을이 되면 갈대를 채취한다오 / 秋至採蒹葭

명도가 가까이 있는 줄을 알괘라 / 知有名都近
기녀 실은 배 강에 떠 있네그려 / 江浮載妓船
배에 가득한 경박한 무리들은 / 滿船輕薄子
뾰족한 상투에 삼현금을 퉁기누나 / 尖髻擊三絃

색채 화려한 저 황려 고을은 / 縟麗黃驪郡
긴 장대 일자로 가로지른 듯한데 / 長干一字橫
단청한 누각이 푸른 물 임해 있으니 / 朱樓面綠水
경기 내에서 이 관직이 청관이구려 / 畿內此官淸

우림 위는 게 잡는 불을 설치하고 / 羽林張蟹火
기병들은 고기잡이 배를 거느렸네 / 騎士領漁船
어가 멈추던 일 역력하기도 해라 / 歷歷停鑾事
잠깐 사이에 사십 년이 지났네그려 / 回頭四十年

강 서쪽에 자리잡은 청학동은 / 江西靑鶴洞
깊고 그윽함이 또한 명원이거늘 / 窈窕亦名園
애석한 것은 경과하는 곳마다 / 可惜經過地
모두 여관처럼 옮겨 가는 거로세 / 都如逆旅傳

신륵사는 다시 수리한 사찰로 / 神勒重修刹
동대의 탑이 완연히 서 있는데 / 東臺塔宛然
지금도 굶어 죽은 귀신이 있어 / 至今飢死鬼
밥 먹는 어선을 보고 우는구나 / 猶泣飯魚船

동대에서 다시 동쪽으로 돌아가면 / 東臺復東轉
가파른 절벽이 깊은 못을 둘렀는데 / 陗壁列幽潭
저도 모르게 젓던 노를 멈추어라 / 不覺停搖櫓
뱃사공이 여기 와서 어리석어지누나 / 艄工到此憨

자색 청색 비둘기가 서로 연달아 / 紫鴿連靑鴿
돌 틈 주위를 어지러이 날아라 / 紛飛石罅邊
높은 둥지가 침해를 피할 수 있어 / 危巢能遠害
부여잡을 길을 영원히 끊어 버렸네 / 終古絶攀緣

붉은 절벽엔 놀의 표지가 높다랗고 / 赤石霞標峻
넓은 강엔 맑은 물이 깊기도 한데 / 滄浪鏡水深
이미 신령한 말의 자취는 없으니 / 已無神馬迹
숨은 용이나 신음하고 있을는지 / 疑有蟄龍吟

때론 백사장가의 닻줄에 배를 매고 / 時繫依沙纜
자주 여울 내려가는 배를 만나기도 / 頻逢下瀨船
지휘는 한 늙은 사공을 따르는데 / 指揮須一老
배 꽁무니에 홀로 우뚝 서 있네 / 船尾立軒然

잠깐 양화진 넓은 물결을 지나 / 稍過楊花蕩
멀리 대추나무 물굽이를 돌아라 / 遙循棗木灣
매양 멋대로 노닐고 난 뒤에는 / 每當游衍後
때로 다시 험난한 곳을 만난다오 / 時復作崎艱

갈매기 한 쌍은 평화로이 서 있고 / 恬雅雙鷗立
한 꿩은 숨바꼭질하며 우는데 / 迷藏一雉鳴
먹이 구하는 뜻을 잊지 못한 건 / 未忘求食志
도시 자웅의 정에 매인 거로세 / 都係合歡情

넘실거리는 저 동천의 물은 / 瀰漫東川水
동으로 흐르는 게 문득 기이하여라 / 東流事却奇
살구꽃 핀 주점을 지날 때마다 / 每過紅杏店
길이 계연의 시가 생각나는구려 / 長憶季淵詩

언덕의 연기는 어둔 빛을 띠었고 / 墟煙帶暝色
높은 버들은 삼 층 위에 솟았는데 / 高柳聳三層
다시 배 잡아매는 저녁을 만나 / 復値維舟夕
이웃 배의 고기 구럭이 부럽구려 / 隣舟羨載罾

달 나오자 고기들 마구 뛰어오르니 / 月出衆魚沸
금빛 물결 수없이 반짝이어라 / 金粼萬片熒
강가에 임해 있는 작은 모점이 / 臨江小茅店
평양의 연광정에 내리지 않겠네 / 不讓練光亭

수사는 서울의 풍을 들여와서 / 水榭移京樣
높은 대문에 두 곁채가 널찍한데 / 高門翼兩廊
강천의 옛 주인 간 곳을 물으니 / 罡川問舊主
산 아래 작은 띳집이라 하누나 / 山下小茅堂

뱃길은 사탕수수 씹기와 같아서 / 船行似噉蔗
깊이 들수록 맛이 더욱 좋아라 / 深入味彌佳
섬포의 어귀를 경유하지 않고서 / 不經蟾浦口
어떻게 이 붉은 절벽을 얻을쏜가 / 何得此丹厓

하늘이 이 절벽을 만들던 날에 / 天造石壁日
누구를 시켜 도끼 자귀를 썼던고 / 敎誰用斧斤
다만 조각이 워낙 질박한 때문에 / 只緣雕大朴
수시로 놀란 물결을 일으키누나 / 時復作驚紋

돌 틈에 섰는 한 그루 소나무는 / 石罅一拳松
뿌리를 어이 그리 구차하게 의탁했나 / 託根何太苟
공연히 만 길 높은 마음만 품은 채 / 空懷萬丈心
이미 천 년의 수를 누렸네그려 / 已享天齡壽

노 멈추고 맑은 계곡에 떠 있노니 / 停橈泛淸壑
먼데 생각에 가는 길을 중지하고파 / 意遠欲無行
누가 예우를 일으켜 이곳에 와서 / 誰起倪迂至
호묘의 풍류를 한번 듣게 해 줄꼬
/ 一聞湖泖情

홍원포에 있는 옛 창고 건물은 / 古廥興元浦
가로지른 서까래 일자로 연했어라 / 橫橑一字連
봄철 조운을 이미 다 마쳤는데도 / 春漕已調了
또 호탄전을 강요하여 받아 내누나 / 猶索護灘錢

물굽이는 폭을 연한 장막 같고 / 水曲連顋帳
바위 밑은 다리 잘린 솥 같아라 / 巖根折脚鐺
비록 낙생과 함께 읊는다 해도 / 洛生雖共詠
역시 끝내 시의 명성은 적으리라 / 終亦少詩名

청명하던 때 작은 초가집 다락엔 / 淸時小草閣
일찍이 한림 학사가 앉았었는데 / 曾坐玉堂仙
시의 명성 높은 건 차치하고서 / 且置詩名重
견고한 바른 지조를 보아야 하리 / 須看雅操堅

골이 후미지니 새벽 산이 멀찍하고 / 洞僻曉山遠
강이 편평하니 봄물이 하 많아라 / 江平春水多
옛날엔 말 타고 여기를 들어왔는데 / 昔年騎馬入
오늘은 배를 타고 지나네그려 / 今日汎舟過

명릉 시대의 선비들 중에는 / 儒者明陵世
우담이 가장 훌륭했음을 알겠구려 / 愚潭覺最賢
그릇된 예론을 따르지 아니하고 / 不因論禮誤
제주로 가는 배를 선뜻 전송하였네 / 輕送濟州船

골짝이 험하니 여울 더욱 급하고 / 峽險灘愈駛
시내가 넓으니 돌다리 또한 긴데 / 溪通磴更長
백사장 머리 조그마한 모점에만 / 沙頭小茅店
석양빛이 유독 비치는구려 / 偏獨映斜陽

몹시도 급한 돈어 여울에서는 / 急急豚魚瀨
바가지로 물 푸는 소리가 나는데 / 葫蘆吐水聲
역참 배는 대숲처럼 빽빽이 떠 있고 / 站船叢似竹
사당 아래서는 희생을 잡는구려 / 祠下宰犧牲

세 갈래로 흩어진 물 삼묘호 같은데 / 沱散疑三泖
물굽이 돌아가니 또 한 물굽이로세 / 碕廻又一灣
푸른 장미산이 멀리 솟아 있으니 / 薔薇靑遠出
알건대 이것이 예주의 산이로다 / 知是蕊州山

높고 널찍한 저 삼연옥이여 / 庨豁三椽屋
아직도 허씨의 별장이 남았는데 / 猶殘許氏莊
누가 어여삐 여기랴, 은거하던 날 / 誰憐凭几日
가을 물에 배 타고 노니던 일을 / 秋水駕輕航

백회칠한 담장은 띠처럼 둘러 있고 / 粉白牆如帶
감청색 기와는 용마루에 보이는데 / 紺靑屋見甍
막희라는 이름의 여울이 있어 / 有灘名莫喜
이곳을 향해 가기가 어렵구려 / 難向此中行

수양버들 늘어진 두 갈래 내 어귀에 / 垂柳雙汊口
훌륭한 동산이 목계를 가로질렀네 / 名園枕鶩溪
옛 친구 중에는 그 누가 남아 있어 / 舊人誰得在
노쇠한 백발로 암석 사이에 사는고 / 衰髮石間棲

우륵이 신선놀이 하던 곳에는 / 于勒仙游處
탄금대의 온 국내가 푸르러라
/ 琴臺一抹靑
알건대 분암이 멀지 않은지라 / 墳菴知不遠
사휴정이 나는 듯이 나타나누나 / 飛出四休亭


[주D-001]미로(米老)는 …… 무거웠고 : 미로는 송(宋) 나라 때의 서화가인 미불(米芾)을 말하는데, 그는 특히 고서화(古書畫)를 매우 좋아하여 고서화를 대단히 많이 수집하였으므로, 그를 미가서화선(米家書畫船)이라고 일컬었던 데서 온 말이다.
[주D-002]이재(彝齋) : 송 나라 말기의 은사(隱士) 조맹견(趙孟堅)의 호. 그는 송 나라 말기에 한림 학사 승지(翰林學士承旨)를 지냈고, 서화와 시문에도 뛰어났으며, 특히 지절(志節)이 높기로 유명하였다.
[주D-003]손목(孫穆) : 누구를 가리키는지 자세하지 않다.
[주D-004]광릉(光陵) : 조선의 세조 대왕을 이름. 광릉은 그의 능호이다.
[주D-005]등공(滕公)을 …… 지내며 : 등공은 한 고조(漢高祖)의 명신인 하후영(夏侯嬰)의 봉호. 등공이 일찍이 말을 타고 동도문(東都門)에 이르렀을 때 말이 가지 않고 발로 땅을 허비적거리므로, 그곳을 파 본 결과 석곽(石椁) 하나가 나오자, 이를 깨끗이 씻어서 보니, “답답하던 가성(佳城 묘지를 뜻함)이 삼천 년 만에 태양을 보았도다. 아, 등공이 이곳에 거처하리라.[佳城鬱鬱 三千年見白日 吁嗟滕公居此室]”라는 명문(銘文)이 새겨져 있었다. 그리하여 등공의 유명(遺命)에 의해서 등공이 죽은 뒤에 그곳에 장사지냈던 고사에서 온 말이다.
[주D-006]이완평(李完平) : 조선 중기의 명상(名相)으로 완평부원군(完平府院君)에 봉해진 이원익(李元翼)을 가리킨다.
[주D-007]취송(醉松)의 시구 : 송(宋) 나라 소식(蘇軾)이 서 사군(徐使君)과 함께 금당하(金堂河)에 배를 띄우고 노닐면서 장난삼아 지은 시에 “취하여 소나무 밑 바위에 누웠다가 서로 붙들고 강가의 나루로 돌아가네.[醉臥松下石 扶歸江上津]” 한 데서 온 말이다. 《蘇東坡詩集 卷44》
[주D-008]원호(元豪) : 조선 중기의 무신으로 일찍이 경원 부사(慶源府使)로 있을 때는 니탕개(尼湯介)의 침입을 격퇴시켰고, 또 이어 전라우도 수군절도사를 역임했으며,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에는 강원도 조방장(助防將)으로 의병을 규합하여 여주의 신륵사(神勒寺)에서 적병을 크게 무찌르고, 이어 패주하는 왜적들을 구미포(龜尾浦)에서 섬멸했었다.
[주D-009]이공(李公) : 고려 말기에 척불론(斥佛論)을 가장 강경하게 제창했던 이색(李穡)을 가리킨 듯하나 자세하지 않다.
[주D-010]엄공(嚴公) : 조선 선조(宣祖) 25년에 승장(僧將) 의엄(義嚴)이 여주(驪州)의 서북쪽에 위치한 파사성(婆娑城)을 대대적으로 수축(修築)한 일이 있으므로, 여기서는 바로 그 승장 의엄을 가리킨 듯하다. 《新增東國輿地勝覽 卷7》
[주D-011]선릉(仙陵) : 여기서는 바로 여주에 있는 세종 대왕(世宗大王)의 능(陵)을 가리킨다.
[주D-012]팔대수(八大藪) : 여주 북쪽에 위치한 늪으로, 옛 이름은 패다수(貝多藪)였다고 한다.
[주D-013]붉은 …… 높다랗고 : 진(晉) 나라 때의 문장가인 손작(孫綽)의 〈유천태산(遊天台山)〉 부에 “적성산엔 놀이 일어나 표지를 세웠다.[赤城霞起而建標]” 한 데서 온 말이다.
[주D-014]계연(季淵) : 누구를 가리키는지 자세하지 않다.
[주D-015]예우(倪迂)를 …… 줄꼬 : 예우는 원(元) 나라 때의 문인화가인 예찬(倪瓚)의 호이고, 호묘(湖泖)는 강소성(江蘇省)에 있는 삼묘호(三泖湖)를 가리킨 것으로, 예찬이 평소에 삼묘호를 왕래하면서 풍류를 즐겼기 때문에 한 말이다.
[주D-016]낙생(洛生) : 낙하서생(洛下書生)의 준말인데, 동진(東晉) 때의 명사들이 옛날 낙하서생이 음영(吟詠)하던 성조(聲調)를 매우 좋아하여 따라 지었다 한다.
[주D-017]명릉(明陵) : 조선 숙종(肅宗)을 이름. 명릉은 그의 능호.
[주D-018]우담(愚潭) : 정시한(丁時翰)의 호. 정시한은 일찍이 원주(原州)에 은거하다가 숙종 때에 천거를 받아 진선(進善)이 되었는데, 그는 남인(南人)에 속했음에도 기사환국(己巳換局) 때 폐위된 인현왕후(仁顯王后 숙종의 계비 민씨)를 복위시킬 것을 상소로 극력 진술한 바 있다.
[주D-019]제주(濟州)로 가는 배 : 숙종 15년이 1689년 기사환국 때 서인(西人)의 영수인 송시열(宋時烈)이 세자 책봉을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남인들의 거센 배척을 받고 실각되어 제주도에 위리안치되었던 사실에 관한 말인 듯하나 자세하지 않다.
[주D-020]허씨(許氏)의 별장 : 허씨는 누구를 가리키는지 자세하지 않다.
[주D-021]우륵(于勒)이 …… 푸르러라 : 우륵은 가야금(伽倻琴)을 맨 처음 만들어 낸 신라 때의 악사(樂師)로 지금의 충주(忠州)에 살았는데, 지금 충주에 있는 탄금대(彈琴臺)와 금휴포(琴休浦)는 바로 그가 가야금을 타던 곳이라 한다.
[주D-022]분암(墳菴) : 분묘(墳墓)를 수호하는 자의 암실(菴室)을 이름.

 

 

 

기언 제32권 원집 외편
 동사(東事)
《기언(記言)》 동사(東事) 서(序)


신시(神市)ㆍ단군(檀君)의 시대는 중국 제곡(帝嚳)ㆍ요(堯)ㆍ순(舜)의 시대에 해당한다. 군신(君臣)의 제도가 비로소 있었으나, 인민이 희소하고 세상이 적막하여 문자로 기술(記述)할 만한 것이 없었다. 기자(箕子)가 조선(朝鮮)을 다스림에 이르러서 처음으로 조두(俎豆)를 사용하는 예속(禮俗)의 정치가 있었으나, 위만(衛滿)으로부터 삼한(三韓 마한(馬韓)ㆍ진한(辰韓)ㆍ변한(弁韓)을 가리킴) 시대로 내려오면서 끊임없는 전쟁으로 없어진 것이 많았으며, 사적(史籍)마저 갖추어지지 않아 문헌상으로 증거할 만한 것이 없다. 후세에 전기(傳記)에 섞여 나온 것들이 많으나 부루(扶婁)ㆍ주몽(朱蒙)ㆍ혁거세(赫居世)ㆍ온조(溫祚) 등의 세대는 고사(古事)를 전하는 것뿐이다.
위로는 단군 시대로부터 아래로는 신라 말엽에 이르기까지, 큰 나라가 여섯이었고, 부용국(附庸國)이었던 작은 나라가 열아홉이었다. 당초에는 군장이 없다가 신시 때부터 처음으로 생민(生民)의 정치를 가르쳤으며 단군 때에 와서 나라를 세우고 국호(國號)를 정하였다. 그러므로 ‘단군세가’를 지었다. 기자는 조선을 다스리면서 여덟 가지 교화를 세웠으므로 ‘기자세가’를 지었다.
숙신씨(肅愼氏)는, 주공(周公) 단(旦)이 성왕(成王)을 보필할 때에 고시(楛矢)와 석노(石砮)를 조공하였다. 그러므로 ‘숙신열전’을 지었다.
위만(衛滿)은, 본래 망명해 온 사람인데, 조선을 점령하고 옛 진 나라 운장(雲障) 땅을 병합하여 군사력과 재물을 가지고 땅을 개척한 것이 1천여 리였다. 그러므로 ‘위만세가’를 지었다.
부여(扶餘)는 본래 해부루(解扶婁)의 땅인데, 좋은 말과 초피(貂皮 담비의 가죽)와 놜피(豽皮 삵의 가죽)와 아름다운 구슬을 내어 진(晉)에 입공(入貢)하였다. 그러므로 ‘부여열전’을 지었다.
왕(王) 준(準)은 위만에게 쫓겨나 마한(馬韓)을 세우고, 50여 부족국을 병합하여 2백 년을 전승하였고, 진한(秦韓)과 변한(弁韓)도 각각 군장이 있었다. 삼한은 속국이 78국이었다. 그러므로 ‘삼한열전’을 지었다.
신라(新羅)는 박(朴)ㆍ석(昔)ㆍ김(金) 3성(姓)이 1천여 년을 계승하며 덕 있는 정치를 하였다. 그러므로 ‘신라세가’를 지었다.
고구려(高句麗)는 국경이 중국과 맞닿아 강대한 정치로 7백여 년을 전승하였다. 그러므로 ‘구려세가’를 지었다.
백제(百濟)는 마한(馬韓)을 병합하였으며 나라가 부강하여 6, 7백 년을 전승하였다. 그러므로 ‘백제세가’를 지었다.
예맥(穢貊)은 바다 모퉁이 산택 간의 나라인데, 나라를 세운 것이 가장 오래되었다. 말갈(靺鞨)은 강대해지자 뒤에 발해(渤海)라 일컫고, 거란(契丹)에게 망하여 동거란(東契丹)이 되었다. 그러므로 ‘예맥열전’과 ‘말갈열전’을 지었다.
가락(駕洛)은 신명(神明)스런 정치를 하였고, 대가야(大伽倻)는 십이현금(十二絃琴 우륵(于勒)의 가야금(伽倻琴))을 만들었다. 그러므로 ‘가락열전’과 ‘대가야열전’을 지었다.
탁라(乇羅)는 남해(南海) 가운데에 있는 작은 나라로 좋은 말과 진주[蠙珠]와 대모(玳瑁)가 나는데, 처음으로 신라(新羅)와 통교하고 국호를 탐라(耽羅)라 하였다. 그러므로 신라 다음에 붙였다.

직방(職方)ㆍ지원(地員)ㆍ화식(貨殖)의 체제를 따라 ‘지승(地乘)’ 2천 언(言)을 지었다.

흑치(黑齒)는 동해(東海) 가운데에 있는 만이(蠻夷)의 강국인데, 7도(道), 61주(州), 611현(縣)이다. 그러므로 ‘흑치열전’을 지었다.
상(上 현종(顯宗)을 가리킴) 14년 계축(1673) 6월에 공암(孔巖) 허목(許穆)은 서(序)한다.


 

[주D-001]신시(神市) : 여기서 신시는 환웅을 가리킨다. 《삼국유사(三國遺事)》에 “환웅(桓雄)이 무리 3천을 이끌고 태백산정(太白山頂) 신단수(神檀樹) 아래로 내려왔다. 이를 신시라 하고 환웅 천왕이라 한다.” 하였다.
[주D-002]주공(周公) 단(旦) : 주공은 작호(爵號), 단(旦)은 이름이다. 주 문왕(周文王)의 아들이며 무왕(武王)의 아우로, 노(魯) 나라의 시조(始祖)이다. 그는 무왕을 도우면서 예(禮)와 악(樂)을 제작(制作)하였고, 무왕이 죽자 성왕(成王)을 도와 섭정(攝政)하였다.
[주D-003]고시(楛矢)와 석노(石砮) : 고시는 싸리나무로 만든 화살이며, 석노는 돌로 만든 화살촉인데, 둘 다 숙신 지방에서 생산되는 유명한 무기이다.

 

 

기언 제33권 원집 외편
 동사(東事)
신라세가(新羅世家) 중


지증왕(智證王)이 즉위하여 국호(國號)를 정하여 ‘신라(新羅)’라 하고, 처음으로 왕이라 칭하였다. 상복(喪服)의 제도를 정하고 순장(殉葬)을 폐지하였다.

주(州)ㆍ군(郡)ㆍ현(縣)을 정하고 유사(有司)에게 명하여 때에 맞추어 얼음을 저장하게 하고, 백성에게 소를 부려 밭갈이하는 법을 가르치게 하였으며 배를 만들게 하였다. 우산국(于山國)이 항복하고 토산물을 바쳤다. 우산(于山)ㆍ실직곡(悉直谷)은 동해 가운데의 작은 나라인데 ‘울릉(鬱陵)’이라 이름지었다. 왕이 졸하고 태자(太子) 원종(原宗)이 즉위하니, 이가 법흥왕(法興王)이다.

법흥왕이 즉위하여 처음으로 병부령(兵部令)을 두고 율령(律令)을 반포하였으며, 관의 제도[官制]를 세워 복색(服色)을 7등으로 정하니, 각간(角干)ㆍ대아찬(大阿飡)은 자의(紫衣), 아찬(阿飡)ㆍ급찬(級飡)은 비의(緋衣)에 모두 아홀(牙笏)을 쥐며 청의(靑衣)ㆍ황의(黃衣)ㆍ금관(錦冠)ㆍ비관(緋冠)ㆍ영조(纓組) 등의 차등을 두었다. 그리고 양(梁) 보통(普通) 원년(520, 법흥왕7)에 사신을 보내어 양(梁)과 통교하였다.
이때에 불법(佛法)이 처음으로 행하여졌는데 군신(君臣)들이 모두 말하기를,
“부도(浮屠)는 그 말이 궤이(詭異)하여, 그 법을 따르게 되면 후회하게 될까 걱정됩니다.”
하였으나, 왕이 듣지 않고 곧 영을 내려 도살(屠殺)을 금지하였다. 가락국(駕洛國) 임금 구형(仇衡)이 항복하니 가락이 망하였다. 그때 천하가 분열(分裂)되었는데, 비로소 연호(年號)를 ‘건원(建元)’이라 칭하였다. 왕이 훙(薨)하고 아우 입종(立宗)의 아들 다맥종(多麥宗)이 즉위하니 이가 진흥왕(眞興王)인데, 겨우 일곱 살이어서 모태후(母太后)가 청정(聽政)하였으며 연호를 고쳐 ‘개국(開國)’이라 하였다.

남자 아이로 어질고 착한 자를 선발하여서, 효제 충신(孝弟忠信)을 가르쳤다. 이사부(異斯夫)를 병부령으로 삼아 군사의 일을 다스리게 하고, 거칠부(居漆夫)를 보내어 고구려(高句麗)를 쳐서 10군(郡)을 빼앗았다. 그리고 부도(浮屠) 1백 좌(座)를 만들어 강회(講會)하고 팔관법(八關法)을 세웠다.
백제(百濟)가 신라(新羅)와 고구려 정벌을 모의하였으나 왕이 들어주지 않으니 고구려에서는 그것을 덕으로 여겨, 신라와 연화(連和)를 맺었다. 그러자, 백제 왕 명농(明禯 성왕(聖王))이 친히 군사를 거느리고 신라의 관산(管山)을 공격하니 군주(軍主) 김무력(金武力)이 반격하여 백제 왕을 죽이고, 좌평(佐平) 4인(人)과 졸개 2만 9천 6백 명을 목 베니, 사졸(士卒)로 살아 돌아간 자가 없었다. 이사부(異斯夫)가 대가야(大伽倻)를 멸망시켰다.
이에 앞서 가야국(伽倻國)의 정치가 혼란하여 악사(樂師) 우륵(于勒)이 악기(樂器)를 가지고 도망해 왔는데, 국원(國原 충북 충주시(忠州市))에다 관사를 정해 주고 지법계(知法階)ㆍ고만덕(古萬德) 등에게 명하여 가야(伽倻)의 12곡(曲)을 전수받게 하니, 우륵이 십이현금(十二絃琴 가야금)을 만들고, 또 현금(玄琴 거문고)을 만들었다. 귀척 대성(貴戚大姓)과 육부(六部) 호걸(豪傑)들을 국원에 옮기고 ‘소경(小京)’이라 하였다. 백성들에게 중 되는 것[度僧]을 허락해 주고 널리 불사(佛寺)를 일으켜 황룡사(皇龍寺)를 지었으며, 종을 주조(鑄造)하였는데, 무게가 3만 5천 근이었다. 연호를 ‘홍제(弘濟)’라 고쳤다. 이사부(異斯夫)가 왕에게 주언(奏言)하니 왕이 대아찬(大阿飡) 거칠부(居漆夫)에게 명하여 문학자(文學者)들을 불러 국사(國史)를 지으라 하였다.

왕산악(王山岳)이 칠현금(七絃琴)을 얻어서, 그 만드는 제도를 변경시켜 이름을 현금(玄琴 거문고)이라 하였다.
옥보고(玉寶高)가 20곡(曲)을 만들어 속명득(續命得)에게 전하니, 속명득은 귀금(貴金)에게, 귀금은 안장(安長)에게, 안장은 아들 극종(克宗)에게 전하고, 극종이 또 7곡을 지었다. 극종의 뒤로 우조(羽調)ㆍ평조(平調) 등 합하여 187곡이 전해진다. 향비파(鄕琵琶)를 만들어, 그 소리로 궁조(宮調)ㆍ칠현조(七賢調)ㆍ봉황조(鳳凰調) 등 합하여 212곡을 지었다.
왕이 어려서 즉위하여 극진히 부도(浮屠)를 믿더니, 즉위한 지 37년 만에 머리를 깎고 중이 되어 호(號)를 ‘법운(法雲)’이라 하였으며 왕비도 여승이 되었다. 아들 금륜(金輪)을 세우니, 이가 진지왕(眞智王)이다. 왕이 훙하고 고(故) 태자(太子) 동륜(銅輪)의 아들 백정(伯淨)이 즉위하니, 이가 진평왕(眞平王)이다. 연호를 ‘건복(建福)’이라 고쳤다.

왕이 사냥을 좋아하므로, 이찬(伊飡) 후직(后稷)이 간(諫)했으나 왕이 듣지 않았다. 후직이 죽을 때 아들에게 유언하기를,
“나를 왕이 사냥 다니는 길목에 장사 지내다오. 왕의 마음을 깨닫게 하련다.”
하였다. 그 뒤에 왕이 그의 무덤에서 흐느껴 우는 소리를 듣고,
“살아서는 간하고 죽어서도 임금을 잊지 않으니, 충신(忠臣)의 의(義)이다.”
하고, 평생 다시는 사냥에 나가지 않았다.

예부령(禮部令)을 두어 예식(禮式)을, 조부령(調府令)을 두어 공부(貢賦)를, 승부령(乘府令)을 두어 거승(車乘)을 각각 맡게 하였다.

큰물이 나서 민호(民戶) 3만 360채가 물에 잠겼다. 곡식을 내어 기민을 먹였다.

수(隋) 나라 개황(開皇) 14년(594, 진평왕16)에 왕을 책봉하여 낙랑군공 신라왕(樂浪郡公新羅王)을 삼았다. 당(唐) 나라 무덕(武德) 원년(618, 진평왕40)에 사신을 보내어 당에 입공(入貢)하니, 당제(唐帝)가 사자에게 위로하며 안부를 묻고, 사신을 보내 와 보빙(報聘)하게 하고 새서(璽書)와 채금(彩錦) 3백 순(純)을 하사하였으며, 왕을 책봉하여 신라왕으로 삼았다. 백제가 서쪽 변방을 침공하여 두 성(城)을 함락하고 크게 출병(出兵)하여 웅진(熊津)에 주둔하니, 사신을 보내어 당 나라에 가서 구원을 애걸했는데 때마침 백제의 사신도 왔으므로, 제(帝)가 새서(璽書)로써 책유(責諭)하여 서로 침범하지 말라 하니, 백제가 곧 침공을 중지하였다. 그러나 서로 원수로 여기기는 그전과 마찬가지였다.

왕이 말리(末利)인 김서현(金舒玄)을 보내어 고구려를 치게 하였는데, 전세가 불리하였다. 김서현의 아들 김유신(金庾信)이 정병(精兵)을 거느려 고구려 군사를 쳐부수고 낭비성(狼臂城 충북(忠北) 청주(淸州))을 함락시켰다.

정관(貞觀) 6년(632, 선덕여왕1)에 왕이 훙(薨)하니, 아들이 없어서 나라 사람들이 그의 장녀(長女) 덕만(德曼)을 세웠는데, 이가 선덕왕(善德王)이다. 연호를 ‘인평(仁平)’으로 고치고, 나라 안의 환과고독들을 위문하였다. 당 나라에서 여주(女主 선덕여왕을 가리킴)를 책명(冊命)하여 주국 낙랑군공 신라왕(柱國樂浪郡公新羅王)으로 삼았다. 왕궁(王宮)의 서쪽 옥문지(玉門池)에 두꺼비가 많이 모인 적이 있었는데, 여주가,
“두꺼비는 군사의 형상이다. 남변골[南邊谷] 옥문(玉門)에 적병이 있을 듯하니, 군사를 보내어 쳐라.”
하였다. 과연 백제의 잠복한 군사가 있어 변읍(邊邑)을 습격하려 하므로 급히 쳐서 다 죽였다. 칠중(七重 경기 연천군(漣川郡))의 남쪽에서 큰 돌이 저절로 옮겨졌다. 자제(子弟)들을 보내어 당(唐) 나라에 들어가 학문을 배우게 하였다.

백제 왕 의자(義慈)가 몸소 군사를 거느리고 선후(獮猴) 등 40여 성을 쳐서 점령하고, 또 고구려와 당항(党項)을 점령하여 당 나라와 교통하는 길을 끊으니, 여주(女主)가 당 나라에 급함을 알리고 백제를 치기 위하여 이찬(伊飡) 김춘추(金春秋)를 고구려에 보내어 군사 원조를 청하였다. 앞서 대야(大野)의 싸움에서 품석(品釋)이 전사했을 때, 그 아내도 따라 죽었는데 그는 김춘추의 딸이었다. 김춘추가 떠날 때 김유신(金庾信)과 맹세하기를,
“60일 안에 돌아오지 않으면 왕에게 청하여 고구려를 치시오.”
하고, 고구려에 갔는데 고구려에서는 군사를 출동시킬 생각은 하지도 않고 겨우 하는 말이,
두 영[二嶺] 땅은 본래 우리 땅이오. 그 땅을 돌려주지 않으면 군사를 출동시키지 않겠소.”
하므로, 김춘추가,
“백제가 무도(無道)하므로, 과군(寡君)께서 대국(大國)의 위엄에 의지하여 죄 있는 자를 치려고 신(臣)을 시켜 하집사(下執事)에게 명을 올리게 하였는데, 출병할 뜻은 없으시고 사람을 겁박하여 땅을 돌려 달라 하시니, 신은 죽음만이 있을 뿐입니다.”
하니, 왕이 노하여 그를 가두었다. 김춘추가 떠난 지 60일이 되었어도 돌아오지 않자 김유신이 왕에게 청하고 전사(戰士) 3천을 모집하여 고구려를 치려는 참이었는데 고구려에서 그 소문을 듣고 김춘추에게 두터운 예우(禮遇)를 하여 돌려보냈다.
또한 신라의 사자가 당 나라에 이르니, 태종(太宗)도 이미 동벌(東伐)할 뜻이 있었던 터이므로, 이때에 와서 태종은 친히 고구려 정벌길에 나서게 되었다. 여주(女主)는 3만의 무리를 징발하여 그를 도와 고구려를 공격하였다. 백제에서는 신라가 나라를 비워 두고 왕사(王師)를 도울 것이라 여기고 서쪽 변방 7성(城)을 습격하여 탈취하니 김유신을 보내어 백제를 치게 하였는데, 마침 귀신(貴臣) 비담(毗曇)과 염종(廉宗)이 군사를 들어 여주를 폐하려 하므로, 김유신이 돌아와 쳐서 그들을 참하였다.

첨성대(瞻星臺)를 만들었다. 주(主)가 훙(薨)하자, 그의 모제(母弟) 국반(國飯)의 딸 승만(勝曼)을 세우니 이가 진덕왕(眞德王)인데, 키가 7척이었으며 팔을 늘어뜨리면 무릎을 지나쳤다.

여주(女主)가 김유신을 보내어 백제를 쳐서 12성(城)을 함락시켜 머리 2만 급(級)을 베고 9천 인을 생포하였으며, 또 9성을 도륙하여 머리 9천 급을 베었고 포로 6백 인을 잡았는데, 그것은 대야의 싸움을 보복한 것이라 한다.
백제가 품석(品釋)과 품석 아내의 해골(骸骨)을 신라에 돌려보냈다. 여주가 이찬(伊飡) 김춘추를 보내어 당 나라에 가게 하였는데, 태종은 김춘추의 상모가 위엄 있음을 보고 예로 접대하기를 매우 두텁게 하면서 조용히,
“하고 싶은 말이 있는가?”
하고 물었다. 김춘추가 대답하기를,
“백제가 강함을 믿고 우리나라 수십 성을 침략하여 조공의 길을 끊어 놓았습니다. 폐하께서 천위(天威)를 빌려 주지 않으신다면 우리나라는 술직(述職)할 길이 없습니다.”
하니, 태종이 장군 소정방(蘇定方)에게 명하여 20만 인을 출병시켜 백제를 정벌케 하였다. 김춘추가 태학(太學)을 관람하고 장복(章服)을 요청하여 돌아와서 영휘(永徽)란 당 나라의 연호를 사용하고 백관(百官)의 관복(冠服)을 제정하였다.

여주가 태평송(太平頌)을 지어 비단에 짜서 바쳤다.

영휘(永徽) 5년(654, 무열왕1)에 여주가 훙하자, 군신(群臣)들이 김춘추를 맞아 세우니, 이가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이며 진지(眞智)의 손자이다.


[주D-001]복색(服色)을 …… 두었다 : 《삼국사기(三國史記)》 잡지(雜志) 색복(色服)에 “법흥왕이 명하여 대각간부터 대아찬까지는 자의(紫衣)를, 대내마는 청의(靑衣)를, 대사부터 저지까지는 황의(黃衣)를, 이찬과 잡찬은 금관(錦冠)을, 상당대내마와 적의대사는 영조(纓組)를 입으라.” 하였다.
[주D-002]팔관법(八關法) : 불가(佛家)의 말인데 여덟 가지 악(惡)을 금지한 법으로 팔관은 팔계(八戒)와 같은 말이다. 《十善戒經》
[주D-003]새서(璽書) : 천자(天子)가 조서(詔書)를 써서 봉함하고 어인(御印)을 눌러 내린 문서를 말한다.
[주D-004]선후(獮猴) : 《삼국사기》 백제본기6에는 의자왕 2년에 ‘신라를 침략하여 미후(彌猴) 등 40여 성을 항복시켰다.’라고 되어 있다.
[주D-005]두 영[二嶺] : 마목현(麻木峴)과 죽령(竹嶺)을 말한다. 《三國史記 卷41 金庾信傳》
[주D-006]장복(章服) : 보(黼)와 불(黻) 등의 수놓은 비단으로 만든 옷을 말한다.

 

 

기언 제33권 원집 외편
 동사(東事)
대가야(大伽倻)


대가야(大伽倻)는 이진아치(伊珍阿致)로부터 9세(世)에 이뇌(異腦)가 있고, 이뇌의 7세(世) 도설지(道設智) 때에 와서 신라에게 멸망하니, 모두 16세(世) 527년을 전하였다. 이진아치의 세대가 5백 년간을 부강하게 지냈다. 어떤 사람이 전하기를, 가실(嘉悉) 시대에 영인(伶人 악공) 우륵(于勒)이란 자가 진(秦) 나라 쟁(箏)을 본떠서 십이현금(十二絃琴)을 만들었다고도 한다.

성호사설 제4권
 만물문(萬物門)
가야금(伽倻琴)


신라 진흥왕 때에 가야국왕(伽倻國王) 가실(嘉悉)이 당(唐) 나라 악부(樂部)의 쟁(箏)을 본받아 12현(絃) 거문고를 만들었는데, 이는 12개월을 상징한 것이다. 그의 악사(樂師) 우륵(于勒)은 나라가 장차 어지러워질 줄 알고 악기를 가지고 신라로 투항하여 그 거문고 이름을 가야금이라 하였다.
이규보(李奎報)는, “가야금은 대개 옛날 진쟁(秦箏) 따위인데, 다만 줄[絃] 하나가 없을 뿐이다.”라고 하였다.
《급취장(急就章)》 주에 상고하니, “쟁(箏)은 슬(瑟) 따위로서 본래는 12현이던 것이 지금은 13현으로 되어 있다. 이는 대개 진 나라에서 만든 것인 까닭에 이름을 진쟁(秦箏)이라 하며, 또는 진 나라 풍속이 각박하고 악독하여 부자간에 슬(瑟)을 서로 가지려고 다투는 자가 있어 각기 반절씩 쪼개어 갖게 되었던 까닭에, 그 당시 쟁이란 명칭을 붙이게 되었다. 슬이 본디 25현이었다면, 12현 혹은 13현 따위는 슬에 비해 반절밖에 되지 않는데, 쟁이란 이름은 변하지 않았다.” 하였으니, 이로 본다면 가야금이란 것이 진쟁과 뭐 다르겠는가? 이규보는 이런 것을 상고하지 않은 듯하다.
또 한 무제 본기(漢武帝本紀)를 상고한즉, “태제(泰帝)가 소녀(素女)에게 50현의 슬을 타도록 했는데, 곡조가 너무 구슬펐다. 태제는 차마 들을 수 없어 금지시켰으나 금지되지 않았다. 그래서 그 슬을 깨뜨려 25현으로 만들었다.” 하였으니, 태제는 바로 황제(黃帝)이다. 그런즉, 슬은 처음 50현이던 것이 그 반인 25현으로 되었고, 또 그 반인 〈13현의〉 쟁으로 되었으니, 쟁과 가야금이란 처음부터 다를 것이 없다.
그러나 이의산(李義山)의 시에,


하였으니, 옛날 슬도 일찍이 없어지지 않았다. 다만 명칭을 금슬로 바꾸어 구별했을 뿐이었다.


[주C-001]가야금(伽倻琴) : 《類選》 卷5下 人事篇 器用門. 《芝峯》 卷18 技藝部 音樂.
[주D-001]〈급취장(急就章)〉 : 〈급취편(急就篇)〉을 말함, 원문은 즉 한 나라 사유(史游)가 찬하고, 주는 당 나라 안사고(顔師古)가 달았는데, 물명(物名)ㆍ인명(人名) 따위가 수록되었음.
[주D-002]소녀(素女) : 선녀(仙女)와 같음. 《회남자(淮南子)》에 의하면 황제(黃帝) 때 술수 부리던 여자라 함.
[주D-003]황제(黃帝) : 황제헌원씨(黃帝軒轅氏).
[주D-004]이의산(李義山) : 의산은 당 나라 이상은(李商隱)의 호.
[주D-005]금슬은 무단히 오십 현으로 되었구나 : 이 시구는 금슬시(琴瑟詩)로서 “一絃一柱思華年”의 대구임.

성호사설 제4권
 만물문(萬物門)
가야금(伽倻琴)


신라 진흥왕 때에 가야국왕(伽倻國王) 가실(嘉悉)이 당(唐) 나라 악부(樂部)의 쟁(箏)을 본받아 12현(絃) 거문고를 만들었는데, 이는 12개월을 상징한 것이다. 그의 악사(樂師) 우륵(于勒)은 나라가 장차 어지러워질 줄 알고 악기를 가지고 신라로 투항하여 그 거문고 이름을 가야금이라 하였다.
이규보(李奎報)는, “가야금은 대개 옛날 진쟁(秦箏) 따위인데, 다만 줄[絃] 하나가 없을 뿐이다.”라고 하였다.
《급취장(急就章)》 주에 상고하니, “쟁(箏)은 슬(瑟) 따위로서 본래는 12현이던 것이 지금은 13현으로 되어 있다. 이는 대개 진 나라에서 만든 것인 까닭에 이름을 진쟁(秦箏)이라 하며, 또는 진 나라 풍속이 각박하고 악독하여 부자간에 슬(瑟)을 서로 가지려고 다투는 자가 있어 각기 반절씩 쪼개어 갖게 되었던 까닭에, 그 당시 쟁이란 명칭을 붙이게 되었다. 슬이 본디 25현이었다면, 12현 혹은 13현 따위는 슬에 비해 반절밖에 되지 않는데, 쟁이란 이름은 변하지 않았다.” 하였으니, 이로 본다면 가야금이란 것이 진쟁과 뭐 다르겠는가? 이규보는 이런 것을 상고하지 않은 듯하다.
또 한 무제 본기(漢武帝本紀)를 상고한즉, “태제(泰帝)가 소녀(素女)에게 50현의 슬을 타도록 했는데, 곡조가 너무 구슬펐다. 태제는 차마 들을 수 없어 금지시켰으나 금지되지 않았다. 그래서 그 슬을 깨뜨려 25현으로 만들었다.” 하였으니, 태제는 바로 황제(黃帝)이다. 그런즉, 슬은 처음 50현이던 것이 그 반인 25현으로 되었고, 또 그 반인 〈13현의〉 쟁으로 되었으니, 쟁과 가야금이란 처음부터 다를 것이 없다.
그러나 이의산(李義山)의 시에,


하였으니, 옛날 슬도 일찍이 없어지지 않았다. 다만 명칭을 금슬로 바꾸어 구별했을 뿐이었다.


[주C-001]가야금(伽倻琴) : 《類選》 卷5下 人事篇 器用門. 《芝峯》 卷18 技藝部 音樂.
[주D-001]〈급취장(急就章)〉 : 〈급취편(急就篇)〉을 말함, 원문은 즉 한 나라 사유(史游)가 찬하고, 주는 당 나라 안사고(顔師古)가 달았는데, 물명(物名)ㆍ인명(人名) 따위가 수록되었음.
[주D-002]소녀(素女) : 선녀(仙女)와 같음. 《회남자(淮南子)》에 의하면 황제(黃帝) 때 술수 부리던 여자라 함.
[주D-003]황제(黃帝) : 황제헌원씨(黃帝軒轅氏).
[주D-004]이의산(李義山) : 의산은 당 나라 이상은(李商隱)의 호.
[주D-005]금슬은 무단히 오십 현으로 되었구나 : 이 시구는 금슬시(琴瑟詩)로서 “一絃一柱思華年”의 대구임.

성호사설 제4권
 만물문(萬物門)
가야금(伽倻琴)


신라 진흥왕 때에 가야국왕(伽倻國王) 가실(嘉悉)이 당(唐) 나라 악부(樂部)의 쟁(箏)을 본받아 12현(絃) 거문고를 만들었는데, 이는 12개월을 상징한 것이다. 그의 악사(樂師) 우륵(于勒)은 나라가 장차 어지러워질 줄 알고 악기를 가지고 신라로 투항하여 그 거문고 이름을 가야금이라 하였다.
이규보(李奎報)는, “가야금은 대개 옛날 진쟁(秦箏) 따위인데, 다만 줄[絃] 하나가 없을 뿐이다.”라고 하였다.
《급취장(急就章)》 주에 상고하니, “쟁(箏)은 슬(瑟) 따위로서 본래는 12현이던 것이 지금은 13현으로 되어 있다. 이는 대개 진 나라에서 만든 것인 까닭에 이름을 진쟁(秦箏)이라 하며, 또는 진 나라 풍속이 각박하고 악독하여 부자간에 슬(瑟)을 서로 가지려고 다투는 자가 있어 각기 반절씩 쪼개어 갖게 되었던 까닭에, 그 당시 쟁이란 명칭을 붙이게 되었다. 슬이 본디 25현이었다면, 12현 혹은 13현 따위는 슬에 비해 반절밖에 되지 않는데, 쟁이란 이름은 변하지 않았다.” 하였으니, 이로 본다면 가야금이란 것이 진쟁과 뭐 다르겠는가? 이규보는 이런 것을 상고하지 않은 듯하다.
또 한 무제 본기(漢武帝本紀)를 상고한즉, “태제(泰帝)가 소녀(素女)에게 50현의 슬을 타도록 했는데, 곡조가 너무 구슬펐다. 태제는 차마 들을 수 없어 금지시켰으나 금지되지 않았다. 그래서 그 슬을 깨뜨려 25현으로 만들었다.” 하였으니, 태제는 바로 황제(黃帝)이다. 그런즉, 슬은 처음 50현이던 것이 그 반인 25현으로 되었고, 또 그 반인 〈13현의〉 쟁으로 되었으니, 쟁과 가야금이란 처음부터 다를 것이 없다.
그러나 이의산(李義山)의 시에,


하였으니, 옛날 슬도 일찍이 없어지지 않았다. 다만 명칭을 금슬로 바꾸어 구별했을 뿐이었다.


[주C-001]가야금(伽倻琴) : 《類選》 卷5下 人事篇 器用門. 《芝峯》 卷18 技藝部 音樂.
[주D-001]〈급취장(急就章)〉 : 〈급취편(急就篇)〉을 말함, 원문은 즉 한 나라 사유(史游)가 찬하고, 주는 당 나라 안사고(顔師古)가 달았는데, 물명(物名)ㆍ인명(人名) 따위가 수록되었음.
[주D-002]소녀(素女) : 선녀(仙女)와 같음. 《회남자(淮南子)》에 의하면 황제(黃帝) 때 술수 부리던 여자라 함.
[주D-003]황제(黃帝) : 황제헌원씨(黃帝軒轅氏).
[주D-004]이의산(李義山) : 의산은 당 나라 이상은(李商隱)의 호.
[주D-005]금슬은 무단히 오십 현으로 되었구나 : 이 시구는 금슬시(琴瑟詩)로서 “一絃一柱思華年”의 대구임.
성호사설 제5권
 만물문(萬物門)
속악(俗樂)

속악(俗樂)에는 낙시조(樂時調)ㆍ하림(河臨)ㆍ최자(嗺子)ㆍ탁목(啄木) 등 곡조가 있다. 신라사(新羅史)에 상고하니, “왕(王)이 가야국(伽倻國) 사람 우륵(于勒)을 하림궁(河臨宮)으로 불러들여 하림ㆍ눈죽(嫩竹)이란 두 곡조를 부르도록 했는데, 이것이 우리나라 악조(樂調)의 시초였다.” 하였으니, 추측컨대 이 이름이 지금까지 전해 오는 듯하다.
지금 《악학궤범》에는 이를 청풍체(淸風體)라 했으며 탁목도 역시 하림이라 했으니, 이 청풍체와 탁목조는 모두 우륵이 남긴 풍류이다.

[주C-001]속악(俗樂) : 《類選》 卷4下 人事篇 治道門. 《五洲》 卷19 俗樂辨證說.
[주D-001]낙시조(樂時調) : 가사(歌詞)의 한 가지.
[주D-002]왕(王) : 여기서는 신라 제24대의 진흥왕(眞興王).

성호사설 제26권
 경사문(經史門)
하림(河臨)


상고하건대, 동사(東史) 신라 진흥왕(眞興王) 12년에, “이에 앞서 가야국왕(伽倻國王) 가실(嘉悉)이 당(唐) 나라 악부(樂部)의 쟁(箏)을 법 받아 열두 줄의 거문고를 만들어 열두 달을 상징하고는, 악공(樂工) 우륵(于勒)에게 명하여 열다섯 곡(曲)을 만들게 하였는데, 우륵은 나라가 장차 어지러울 것을 알고서 악기를 가지고 신라로 들어갔다.”고 하였다. 이것이 이른바 낭성의 곡[娘城之曲]인데 신라 사람들은 망국의 음[亡國之音]이라고 일렀으니, 가실은 바로 멸망 직전의 임금이기 때문이다.
처음에 신라왕이 낭성에 가서 우륵을 하림궁(河臨宮)으로 불러 보았으므로 그때의 곡조를 하림조(河臨調)라고도 이르는데, 하림은 바로 낭성으로서 지금도 그대로 쓰고 있다. 그 곡조가 과연 사연(師涓)의 미미(靡靡)한 풍류 등속이라면 어떻게 오래까지 전해 오면서 흥쇠(興衰)의 운(運)에 관계되지 않았단 말인가?
지금 과정(瓜亭 정서(鄭叙)의 호)의 계면조(界面調) 역시 애상(哀傷)하고 유면(流湎)하여 상간(桑間)의 음악과 마찬가지인데, 사대부(士大夫)들이 배우고 익히지 않는 자가 없어 더욱 오래갈수록 폐해지지 아니하니, 진흥왕의, “가야국은 음란해서 스스로 멸망한 것이지, 풍악에 무슨 허물이 있단 말이냐?”는 말과 같은 것인지, 아니면 그렇게 되는 이치가 있는 것인지, 대개 일률적으로 논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주D-001]사연(師涓) : 은(殷) 나라 때 악관(樂官). 《태평어람(太平御覽)》에, 그가 주왕(紂王)을 위하여 망국(亡國)의 풍류를 만들어 놓고는 주 무왕(周武王)이 주왕을 치자 동쪽으로 도망쳐 복수(濮水)에 빠져 죽었다고 보인다.
[주D-002]상간(桑間) : 《시경》 용풍(鄘風)의 상중(桑中) 편을 이름.

 

 

【산천】 대림산(大林山) 주(州) 남쪽 10리에 있는데, 진산(鎭山)이다. 말흘산(末訖山) 주 북쪽 30리에 있다. 심항산(心項山) 주 동북쪽 9리에 있다. 마산(馬山) 주 서쪽 30리에 있다. 망이산(望夷山) 주 서쪽 91리에 있다. 월악산(月岳山) 주 동쪽 45리에 있다. 또 청풍군(淸風郡) 조에 보인다. ○ 이숭인(李崇仁)의 시에, “저 월악(月岳)을 보니 중원(中原)에 비껴 있는데, 한강의 물이 처음 발원했네.” 하였다. 천룡산(天龍山) 주 서쪽 50리에 있다. 정토산(淨土山) 혹은 개천산(開天山)이라고도 한다. 주 북쪽 33리에 있다. 견문산(犬門山) 주 서쪽 8리에 있다. 그 아래에 큰 내가 있는데, 금휴포(琴休浦)라 한다. 풍류산(風流山) 주 남쪽 23리에 있다. 가섭산(迦葉山) 주 서쪽 45리에 있다. 국망산(國望山) 주 서쪽 51리에 있다. 장미산(薔薇山) 주 서쪽 28리에 있는데, 옛 석성(石城)이 있다. 천등산(天燈山) 주 북쪽 40리에 있다. 개천사비(開天寺碑)가 있는데, 세속에서 전하기를, “당(唐) 나라 개원(開元) 연간에 세웠다.” 한다. 비문은 닳아서 읽을 수가 없다. 오동산(梧桐山) 주 동쪽 7리에 있다. 금봉산(金鳳山) 주 동쪽 5리에 있다. 종당산(宗堂山) 주 북쪽 13리에 있다. 이상한 돌이 생산되는데 세밀하여 비갈(碑碣)을 만들 만하다. 악현(惡峴) 주 서쪽 음성현(陰城縣) 경계에 있다. ○ 이승소(李承召)의 시에, “돌 길에 서성이니 하늘에 오르는 것 같은데, 게으른 종 입 벌리며 헐떡여 김 연기를 토한다. 올라 가서 머리 들고 바라보니 삼산(三山)이 오색 구름 가에 희미하게 보이는 것 기쁘기도 하네.” 하였다. 연주현(連珠峴) 주 남쪽 5리에 있다. 속담에 전하기를, “연주의 선녀가 풍류산(風流山)에 놀고 혹은 이 고개에서 놀았다.” 한다. 그 골목의 이름을 지금까지 비선동(飛仙洞)이라고 일컫는다. 북진(北津) 주 북쪽 10리에 있다. 근원이 강릉부(江陵府) 오대산(五臺山)에서 나온다. 금천(金遷) 주 서쪽 10리에 있는데, 바로 북진(北津)의 하류이다. 월락탄(月落灘) 주 서쪽 15리에 있는데, 바로 지금의 금천(金遷) 월탄(月灘)으로 우륵(于勒)이 놀던 곳이다. ○ 안숭선(安崇善)의 시에, “금휴포(琴休浦) 어구에는 외로운 돛이 멀고, 월락탄(月落灘) 머리에는 흰 물결이 평평하다.” 하였다. 달천(達川) 혹은 덕천(德川)이라 이름하고, 혹은 달천(獺川)이라 이름하는데, 주 서쪽 8리에 있다. 근원이 보은현(報恩縣) 속리산(俗離山) 꼭대기에서 나와서 그 물이 세 갈래로 나뉘는데, 그 하나가 서쪽으로 흘러 달천이 되었다. 배를 띄우고 겨울에는 다리를 놓는다. ○ 본조(本朝)의 이행(李行)이 능히 물맛을 변별하는데, 달천 물을 제일이라 하여 마시기를 좋아하였다. ○ 고려 고종(高宗) 때에 주의 노군(奴軍)이 난을 일으키자 이자성(李子晟) 등을 보내 삼군(三軍)을 거느리고서 토벌하게 하였다. 삼군이 달천에 이르러 물이 깊어 건너지 못하고 한참 다리를 만들고 있는데, 적이 말하기를, “반역의 괴수를 베어 나와서 항복하려 한다.” 하니, 자성(子晟)이 말하기를, “그렇게 한다면 너희들을 반드시 다 죽이지는 않겠다.” 하자, 적이 괴수인 중 우목(牛木)의 머리를 베어 가지고 오니, 관군(官軍)이 드디어 남은 무리를 사로잡아 모두 베었다. 진포(辰浦) 곧 북진(北津)의 상류인데, 주 동쪽 15리에 있다. 맑고 깊어 바닥을 알 수 없는데, 세속에서 용못[龍淵]이라고 전한다. 하늘이 가물 때에 범의 두골(頭骨)을 던져넣으면 징험이 있다. 혹은 전회강(澶洄江)이라고도 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제29권
 경상도(慶尙道)
고령현(高靈縣)


 

[주D-001]등자(鐙子)가 끊겼고 : 예전에 지방의 원님으로 민치를 잘한 사람은, 갈려가는 날에 백성들이 가지 말고 우리 고을에 더 있어 달라고 떼로 모여와서 붙잡는다. 그때에 수레에도 매달리고 말에도 매달려서 말등자가 끊긴다는 말이다.
[주D-002]순리(循吏) : 순리는 원 노릇을 잘하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다. 옛날 한 나라 때부터 있는 말인데, 한 나라 역사 한서(漢書)에는 순리전(循吏傳)이 따로 있다.
[주D-003]황패(黃霸)와……없을 것이다 : 황패는 영천 태수로 선치하였다 하여 중앙으로 소환되어 정승이 되었고, 탁무(卓茂)는 밀현(密縣)의 현령으로 선치하였다 하여 불러서 태부(太傅)라는 높은 벼슬에 발탁하고 포덕후(褒德侯)라는 후작에 봉하였었다. 여기에 한 말은 이 고령에서 선치하는 신청경(申淸卿)이란 사람도 황패나 탁무같이 정승이나 태부에 발탁될 것이라는 뜻이다.
[주D-004]배에……출정하였는데 : 원 나라가 일본을 정벌한 것을 말한다.
[주D-005]흰 발[白足] : 남북조 시대 북위(北魏)의 중 담시(曇始)라는 사람이 발이 희어서 아무리 맨발로 더러운 흙길에 다녀도 그대로 희므로, 백족화상(白足和尙)이란 이름이 있었다. 여기에 한 말은 푸른 눈[蒼雪]과 흰 발[白足]을 대신 쓰느라고 한 말인데, 이곳이 절이므로 대체로 중을 가리킨 말이다.
[주D-006]요홍(姚紅) : 당 나라 시대에 모란을 매우 좋아하여 많이 심었었다. 그때에 낙양에 있는 요씨가 황색 모란의 신품종을 만들어 냈으므로 요황(姚黃 요씨의 누런 모란)이라고 이름 지었는데, 여기 요홍(姚紅)이라 함은 잘못된 것이다.
[주D-007]기수(淇水)의 푸름인 양 : 기수(淇水)는 중국 하북성에 있는 강 이름이다. 그 땅이 춘추 시대에는 위(魏) 나라였는데, 그때에 그 기수 언덕에 푸른 대가 매우 성하였다는 말이 《시전(詩傳)》에 있다.
[주D-008]차군(此君) : 옛날 진(晉) 나라의 왕휘지(王徽之)라는 사람이 대를 가리켜 차군(此君)이라 하여서, 그 후부터는 차군(此君)이라 하면 대의 대명사가 되었다.

 

 

  • 진서(晉書)
  • 晉書 卷一百五 載記 第五
    • 秦州 休屠王羌叛于勒, 刺史臨深遣司馬管光帥州軍討之,
秦州 休屠王羌叛于勒, 刺史臨深遣司馬管光帥州軍討之,
秦州 休屠王羌叛于, 刺史臨深遣司馬管光帥州軍討之, 爲所敗, 右大擾, 悉叛. 石生進據隴城. 王羌兄子有仇, 乃賂, 與掎擊之. 敗, 奔涼州. 徙秦州夷豪五千餘戶于雍州.
 下書曰: 「自今諸有處法, 悉依科令. 吾所忿戮·怒發中旨者, 若德位已高, 不宜訓罰, 或服勤死事之孤, 邂逅罹譴, 門下皆各列奏之, 吾當思擇而行也.」 堂陽陳豬妻一産三男, 賜其衣帛廩食, 乳婢一口, 復三歲勿事. 時高句麗·肅愼致其楛矢, 宇文屋孤並獻名馬于. 涼州張駿遣長史馬詵奉圖送高昌·于窴·鄯善·大宛使, 獻其方物. 荊州陶侃遣兼長史王敷聘于, 致南之珍寶奇獸. 秦州送白獸·白鹿, 荊州送白雉·白兔, 濟陰木連理, 甘露降苑鄕. 以休瑞並臻, 遐方慕義, 赦三歲刑已下, 均百姓去年逋調, 特赦涼州殊死, 涼州計吏皆拜郎中, 賜絹十匹, 綿十斤. 南郊, 有白氣自壇屬天, 大悅, 還宮, 赦四歲刑. 遣使封張駿 武威郡公, 食涼州諸郡. 親耕藉田, 還宮, 赦五歲刑, 賜其公卿已下金帛有差. 以日蝕, 避正殿三日, 令群公卿士各上封事. 禁州郡諸祠堂非正典者皆除之, 其能興雲致雨, 有益於百姓者, 郡縣更爲立祠堂, 殖嘉樹, 準嶽瀆已下爲差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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