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세 휘 덕지 등/휘 덕지 에게 보낸 서찰

연촌(煙村) 최 선생(崔先生)의 유사 발(遺事跋 (우암 송시열)

아베베1 2009. 11. 27. 11:16

 송자대전(宋子大全) 제148권
 발(跋)
연촌(煙村) 최 선생(崔先生)의 유사 발(遺事跋)


한 문공(韓文公 문은 한유(韓愈)의 시호)의 송양소윤서(送楊少尹序)에 ‘승상(丞相)이 시(詩)를 노래하니, 서울의 시를 잘하는 자가 이에 화답한다.’ 하였으니, 그때에 시가 매우 성행하였던 것으로 생각되나, 장문창(張文昌 장적(張籍))과 배 사공(裴司空 배도(裴度))의 글만이 후세에 칭도(稱道)될 뿐, 그 나머지는 모두 적료(寂寥)하다.
이제 연촌 최 선생의 유적을 본다면, 그 모든 시문(詩文)이 하나도 빠짐없이 수록되었으니, 이는 양 소윤(楊少尹 당 나라 양거원(楊巨源)을 말함)은 덕행은 있어도 어진 자손이 없었고, 선생은 두 가지를 겸한 때문이 아닌지. 이번에 선생의 8세손 세영 몽여(世榮夢與 몽여는 자임)가 그 맏형 방언(邦彦)과 함께 그 구본(舊本)의 그릇된 데를 바로잡아 중간(重刊)하여 널리 세상에 전하려 한다. 나는 선생의 상언(上言 임금께 올리는 글) 중에서 그윽이 느끼는 바가 있다. 즉 이른바 ‘손실답험(損實踏驗)’이라는 말은 《주자대전(朱子大全)》에 자주 보이는데, 이는 실로 주 부자(朱夫子)가 일찍이 마음을 기울이던 바이며, 또 이른바 ‘업거세존(業去稅存)’이라는 네 글자도 주 부자가 당시에 매우 통탄해하면서 기어이 변혁시키려 하다가 마침내 오우규(吳禹圭 장주(漳州)의 진사(進士))의 소(疏)에 의해 저지된 바이다. 그런데 어찌 5백 년 후 선생의 글 속에서 다시 볼 줄 뜻하였으랴. 택당(澤堂) 이 선생(李先生)이 선생을 정학(正學)의 인사(人士)라 칭하였던 까닭도 여기에서 그 일단(一端)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선생이 말한 ‘업거세존’은 사실 주 부자가 말한 것과 조금 다름이 있으니, 후인(後人)이 마땅히 알아야 할 점이다.
모든 서문과 발문 중에서 택로(澤老)의 것이 가장 상세하고 또 그 칭도(稱道)도 큰 비중을 차지하였다. 다만 그중에 ‘기미(機微)를 알았다.’는 택로의 말을 후인들이 잘못 이해하여 선생을 일컫기에 부족한 것처럼 여겼는데, 그렇다면 《주역》에서 어찌 ‘기미를 아는 것이 신(神)이다.’ 하였겠는가. 이는 택로에게 반드시 깊은 뜻이 있었던 것이니, 몽여(夢與)는 택로의 아들 계주(季周 이단하(李端夏))에게 물어보기 바란다.
숭정 기원 후 무오년(1678, 숙종4) 3월 일에 은진 송시열은 쓴다.


[주D-001]업거세존(業去稅存) : 본시 주희의 말인데, 여기는 가난한 백성이 쪼들리다 못해 자기의 전토(田土)를 부호(富豪)에게 매각하고 나서 도리어 부호의 소작인(小作人)이 되어 그 세(稅)를 물어야 하므로, 결국 전토는 없어지고 세만 부담하게 된 것을 말한다.
간본 아정유고 제6권
 문(文)-서(書)
이낙서(李洛瑞) 서구(書九) 에게 주는 편지

비 내리는 밤에 등불을 밝히고 양철애(楊鐵崖 철애는 명(明) 나라 시인 양유정(楊維楨)의 호)의 시를 읽으니 그 시가 힘차고 쾌활하오. 만력(萬曆 명 신종(明神宗)의 연호) 이후의 재자(才子)들이야 여기에 비교하면 참으로 모기 소리와 같소.
족하가 나에게 부탁하여 그 장서(藏書)를 나의 자필로 교정하고 평점하게 한다는 말을 듣고 너무 기뻐서 잠을 이루지 못하였소. 내가 18~19세 때에 거처하던 집의 이름을 구서재(九書齋)라 하였는데, 이는 바로 독서(讀書)ㆍ간서(看書)ㆍ장서(藏書)ㆍ초서(鈔書)ㆍ교서(校書)ㆍ평서(評書)ㆍ저서(著書)ㆍ차서(借書)ㆍ폭서(曝書)를 일컬은 것이었는데 10년 후에 족하의 명자(名字)와 상부하게 되니 우연한 일이 아니오. 일찍이 구서재에 대한 시조를 지었으나 지금은 잊어 기억하지 못하오. 심초연(沈蕉硏 초연은 심염조(沈念祖)의 호)이 일찍이 도곡상공(陶谷相公 도곡은 이의현(李宜顯)의 호)의 소장서를 손수 평점하고 또다시 나에게 교점(校點)을 부탁하니, 그 책은 바로 《이십일사(二十一史)》인데 이는 모두 고인들이 남긴 전아(典雅)한 뜻을 이어받은 것이었소. 또 새해가 되었으니 족하는 많은 기서(奇書)를 얻어 슬기로운 지식이 날로 더해지기를 바라오. 나는 한가롭고 탈없이 지내는 형편이라, 창문에 비치는 햇빛이 항상 선명하며, 밤에는 잇달아 등(燈)을 밝힐 뿐이오. 여염의 나이든 친구인 간취자(看翠子) 이수익(李壽益)이 쓴 《금강기(金剛記)》 속에 낭선군(朗善君 종실로 이름은 우(俁))을 일컬은 것이 있기 때문에 이를 보내드리오. 마침 어떤 사람이 나에게 좋은 일본 종이를 보내왔으므로 시험삼아 먹을 갈아 놓고 붓을 휘둘러 옛사람들의 좋은 일을 찾아 쓰고 싶었소. 동성(同姓)ㆍ동한(同閈 같은 마을에 사는 것)ㆍ동지(同志)들 중에 좋은 사람을 회상해 보니 족하(足下)보다 더 좋은 이가 없소. 족하가 이미 나의 변변치 못한 편지를 간직하였으니, 종이가 나비 날개 같고 자획이 모기 다리 같더라도 모두 보내 주오. 내가 뽑아 등초하여 정의를 두터이하겠소.
내 집에 가장 좋은 물건은 다만《맹자(孟子)》7책뿐인데, 오랫동안 굶주림을 견디다 못하여 돈 2백 닢에 팔아 밥을 잔뜩 해먹고 희희낙락하며 영재(泠齋 유득공(柳得恭)의 호)에게 달려가 크게 자랑하였소. 그런데 영재의 굶주림 역시 오랜 터이라, 내 말을 듣고 즉시 《좌씨전(左氏傳)》을 팔아 그 남은 돈으로 술을 사다가 나에게 마시게 하였으니, 이는 자여씨(子輿氏 맹자(孟子)를 가리킨다)가 친히 밥을 지어 나를 먹이고 좌구생(左丘生 좌구명(左丘明)을 가리킨다)이 손수 술을 따라 나에게 권한 것과 무엇이 다르겠소. 그리하여 맹씨와 좌씨를 한없이 찬송하였으니 우리가 1년 내내 이 두 책을 읽기만 하였던들 어떻게 조금이나마 굶주림을 구제할 수 있었겠는가? 이 참으로 글을 읽어 부귀를 구하는 것이 도대체 요행을 바라는 술책이요, 당장에 팔아서 한때의 취포(醉飽)를 도모하는 것이 보다 솔직하고 가식이 없는 것이라는 것을 비로소 알았으니 서글픈 일이오. 족하는 어떻게 생각하시오?
파성(婆城)의 조경암(趙敬菴)으로부터 편지를 받았는데, 학문을 권면한 것이라 읽어 볼 만하였소. 세속 부랑자들은 《소학(小學)》 두 글자를 들으면 비평하고 나무라며, 《근사록(近思錄)》을 보면 기지개를 켜고 누우려 하니, 참으로 너무나 얄밉소. 족하는 심상한 말로 보아넘기지 않기를 바라오.
일본(日本)에서 모각(摸刻)한 역산비(嶧山碑 이사(李斯)의 글씨로 된 진(秦)의 덕을 칭송한 비)는 전가(篆家)에서 드물다고 생각하는 것이요, 화악묘비(華嶽廟碑 한(漢) 나라 때의 비로 화산(華山)에 있었다)는 예서(隸書) 중에서 오확(烏獲 진(秦) 나라의 용사)과 임비(任鄙 전국 시대 진(秦) 나라의 역사(力士))처럼 힘찬 것이라, 그것을 대하면 소름이 끼치며 떨리는 것이 마치 갑자기 쏟아지는 비에 굵은 모래가 튀는 것 같고 군데군데 부러진 칼과 활촉이 노출된 격이라 장사(將士)의 가슴을 뚫고 표한한 장수의 목구멍을 찌르는 것이 연상되오. 족하는 세밀히 살펴보시오.
내가 단 것에 대해서는 마치 성성(狌狌)이가 술을 좋아하고 원숭이가 과일을 즐기는 것과 같으므로 내 친구들은 모두 단 것을 보면 나를 생각하고 단 것이 있으면 나를 주곤 하는데 초정(楚亭 박제가(朴齊家)의 호)만은 그렇지 못하오. 그는 세 차례나 단 것을 먹게 되었는데, 나를 생각지 않고 주지 않을 뿐만 아니라 남이 나에게 먹으라고 준 것까지 수시로 훔쳐먹곤 하오. 친구의 의리에 있어 허물이 있으면 규계하는 법이니, 족하는 초정을 깊이 책망해 주기 바라오.
나는 전부터 우리나라에는 세 가지 좋은 책이 있다고 생각하는데 그것은 바로 《성학집요(聖學輯要)》ㆍ《반계수록(磻溪隨錄)》ㆍ《동의보감(東醫寶鑑)》이니, 하나는 도학(道學), 하나는 경제(經濟), 하나는 사람을 살리는 방술로 모두 유자(儒者)가 할 만한 것이오. 도학은 진실로 사람됨의 근본이 되는 일이니 말할 것 없거니와, 요즈음 세상에는 오로지 사한(詞翰)만을 숭상하며 경제를 멸시하니, 의술(醫術)이야 그 누가 밝히겠는가?
옛날부터 전해 오는 두 가지 아름다운 이야기가 있으니, 진명경(陳明卿 명경은 명(明)의 진인석(陳仁錫)의 자(字))은 청초한 문인이지만 경제에 몰두하였고, 왕자안(王子安 자안은 당(唐)의 왕발(王勃)의 자)은 경박한 재사이지만 의술에 통달하였다 하오. 나는 이 두 사람에 대하여 일찍이 기특히 여기며 사랑하였는데, 지금 족하는 침착하고 슬기로워 바탕과 재질을 갖춘데다가 나이 또한 한창이니, 사장(詞章)에만 전심하지 말고 항상 이와 같이 참다운 마음으로 물건을 사랑하는 일에 심력을 기울이시오. 그러면 이 세상을 헛되이 살았다는 탄식은 거의 없을 것이라 생각되오. 창고 속에서 누렇게 뜬 곡식과 같은 나야 말할 것도 없소. 이 두 책을 봉정(奉呈)하고 내키는 대로 세 책을 더 뽑아 보내니 이미 열람한 것은 중복해 보지 마시오.
삼가 이백시(李伯時 백시는 송(宋) 나라 이공린(李公麟)의 자)가 석탑(石榻)에 그린 선성(先聖 공자를 말한다)의 화상 및 72제자(弟子)의 화상을 보니, 자연(子淵 안연(顔淵)의 자)은 하관이 풍후하게 되어 빈요(貧夭)하지 않을 것 같고, 자공(子貢)은 얼굴이 파리하게 되어 재물을 많이 늘릴 것 같지 않고, 안쾌(顔噲)의 얼굴은 사납기가 번쾌(樊噲)와 같고, 번수(樊須)의 수염은 참으로 번수(繁鬚 텁석부리)이고, 양전(梁鱣)은 전어(鱣魚)를 들고 있으니 또한 무슨 의미요? 아마 백시(伯時)가 자기의 신통한 붓을 멋대로 내두른 것인가 보오. 그러나 관복(冠服)이 예스럽고 엄연하니, 마땅히 그것을 음미해 볼 것이지 까다롭게 그 수염에서 구해 볼 필요는 없는 것이오.
고종(高宗)이 찬(讚)을 지은, 후자리(后子里)ㆍ악자성(樂子聲)의 무리는 사적이 없는데도 억지로 그 찬을 꾸미고 보니 너무나 무미하여 도리어 붓을 휘둘러 의미를 붙인 백시의 것만 못하오. 한 위공(韓魏公 위공은 송(宋) 나라의 한기(韓琦)의 봉호)이 짓고 쓴 북악비묘(北嶽碑廟)는 은은하고 질박하며 아담하고 정제하니 참으로 대신(大臣)의 것이오. 서맥(書脈)은 노공(魯公 안진경(顔眞卿)의 봉호)을 모방하였는데, 다만 자획이 보다 비대하면서 약하오. 왕원미(王元美 원미는 명(明) 왕세정(王世貞)의 자)가 이를 보고 '칼날이 사방으로 뻗쳐 바로 볼 수 없다.'고 한 것은 옳은 평가가 아니오. 난시(亂時)의 절신(節臣 노공(魯公)을 가리킨다)과 치세(治世)의 보상(輔相 한 위공(韓魏公)을 가리킨다)을 그 필적으로 알 수 있는 것이오.
전에 남의 책을 빌어다 읽는 사람을 보고 나는 그가 너무 부지런하다고 비웃었는데, 이제 문득 나도 그를 답습하여 눈이 어둡고 손이 부르트는 지경에 이르렀으니, 아, 참으로 사람은 자신을 요량하지 못하는 것이오. 《유계외전(留溪外傳)》 첫 권을 보내니 저녁에 한 번 읽어 보고 내일 이른 아침에는 돌려 주오. 이는 모두가 효자(孝子)ㆍ충신(忠臣)ㆍ열처(烈妻) ㆍ 기부(畸夫)에 관한 것인데 세도(世道)에 보익이 되는 글이라, 매양 갑신년 대목을 읽을 때에는 눈물이 어리고 뼈가 아프며 간담이 서늘하오.
어떤 이가 나에게 소책(素冊 지금의 공책과 같다)을 주기에 그것을 벼루 머리에 두고, 한적할 때 글을 읽고 싶은 생각이 들면 고인들의 득의한 명문(名文)을 아무것이나 뽑아 낭독하고 나서, 급히 먹을 갈아 세대를 구별하지 않고 그 글을 쓰면 마음이 몹시 즐거웠소. 이때에는 비록 좋은 술과 아름다운 꽃이라도 이 즐거움과 바꿀 수 없었소. 이제 문득 이헌길(李獻吉 헌길은 명(明) 나라 문인 이몽양(李夢陽)의 자)의 글이 생각나서 한두 수를 기록하여 보내려 하는데, 이것은 내가 7~8년 전에 읽은 것이오. 《설부(說郛)》 1권을 돌려보내오.
내가 어제 남한(南漢)에서 돌아왔는데, 물이 깊고 맑으며 하늘이 드높았소. 가을과 겨울에는 더욱 회포를 참지 못할 것이 산음(山陰) 길만 못하지 않소.
《수색집(水色集)》에 성명을 쓰지 않았으니, 전고(典故)에 익숙한 이가 아니면 그가 공신(功臣) 허적(許)임을 알 수 없고, 서문을 짓는 이도 성명을 쓰지 않았는데 이는 허균(許筠)으로 생각되오. 그 책을 찍어내어 없애지 않으려 하면서도 누구인가를 숨기니, 우리나라 사람들의 우매한 것이 이와 같소. 아는 이라야 더불어 말할 수 있을 것이오. 《산해경(山海經)》의 글을 뽑고자 하니 잠깐 빌려 주시겠소? 연선(演蟬)을 보내니 이것은 족하의 필적인 듯하오.
내가 비록 학자는 아니나 매양 《근사록(近思錄)》을 애중하여 가까이 두고 밤낮으로 3~4조목씩 보아 남몰래 경계를 삼는 터이라, 잠깐도 놓고 싶은 생각이 없소. 그러나 족하의 소청을 어떻에 따르지 않겠소. 9책을 모두 보내오. 이를 보내고 나면 내가 볼 책이 없으니, 《원문류(元文類)》나 혹은 《송시초(宋詩抄)》 두 책 가운데 하나라도 빌려 주는 것이 어떠하오.
해가 새로 바뀌고 사람은 점점 늙어가오. 군자는 밝은 덕을 높여야 할 것인데, 나는 해가 바뀐 후 남의 집 손이 되지 않으면 집에 손님이 찾아와서 한 번도 한가한 틈을 타 상봉하지 못하니 마음이 불안하오. 그러나 창문의 햇볕은 따뜻하고 벼루의 얼음이 풀리므로 전에 하던 공부를 되찾고자 하오. 《전당시(全唐詩)》를 인편에 보내 주면 좋겠으며, 윤회매(輪回梅) 2수도 돌려보내 주는 것이 어떠하겠소.
《일지록(日知錄 명말 청초(明末淸初) 고염무(顧炎武)의 저술)》을 3년 동안이나 고심하면서 구하다가 이제야 비로소 남이 비장(祕藏)해 둔 것을 얻어 읽어 보니, 육예(六藝)의 글과 백왕(百王)의 제도와 당세의 일에 그 근거를 고증한 것이 분명하였소. 아, 고영인(顧寧人 영인은 고염무(顧炎武)의 자)은 참으로 옛날의 기풍이 있는 큰 선비요. 돌아보건대, 지금 세상에 족하가 아니면 누가 이 글을 읽을 것이며 내가 아니면 누가 다시 이를 초(鈔)하겠소. 4책을 우선 보내니 잘 간수하여 보기 바라오. 전에 보내 준 조그마한 책(쓰지 않은 책을 가리킨다)은 아미 다 썼으니 족하는 계속 보내 주어 나의 초하는 일을 마치게 해주기 바라오.
세월은 덧없이 흘러 또 여름이 되었소. 족하를 따라 경사(經史)를 토론하지 못하는 것은, 내가 천 그루 도화(桃花) 속에서 미친 듯이 통음(痛飮)하거나, 아니면 문을 닫고 굶주리고 누워 빈사전(貧士傳)이나 읽으면서 오릉가 이조(於陵家李螬)의 글자 주(注) 내는 일 때문이오. 여러 운사(韻士)들의 시권(詩卷)을 보내니 한 번 보고 돌려주기 바라오.
어제 재선(在先 박제가(朴齊家)의 자)과 함께 묵계(墨溪)에 가서 용촌(龍村) 사는 임장인(林丈人 임씨의 어른이라는 뜻)과 만났는데, 장인은 소명하고 온화하며 자상한 분이었소. 이야기하는 도중에 이낙서(李洛瑞)를 칭찬하면서 세 번이나 치사하였소. 이때 모인 사람은 10인인데 시를 지은 사람은 7인이었소. 장인이 굳이 시를 지으라고 권하기에 나도 마지못해 지었소. 이제 장인이 하신 말씀을 써서 보내거니와 '과거(科擧)는 장사꾼이요, 문장은 이단이다.' 하였소. 이어 술을 마시며 즐기다가 헤어져서, 오늘은 나는 듯이 미호(渼湖)로 향하여 가고 있소. 담원팔영(澹園八詠)을 보내 주면 좋겠소. 밤중에 차[茶]를 빌려가기에 족하가 편찮은 줄 알았는데 오늘은 병환이 어떠하오?
나처럼 나태한 사람이 어떻게 날마다 자전각(字典閣)에 나아가 허다한 글자를 교열하겠소? 옛날에 동춘(同春 송준길(宋浚吉)의 호) 송 선생(宋先生)은 반드시 남에게 책을 빌려 주고 독서를 권하였다가, 빌려갔던 사람이 책을 돌려왔을 때 책에 보풀이 일지 않았거나 때가 묻지 않으면, 선생은 반드시 학문에 부지런하지 않았음을 책망하고 다시 빌려 주곤 하였소. 그런데 어느 악소년(惡少年)이 책을 빌어다가 읽지 않고 돌려 주면서 책망을 들을까 두려워, 그 책을 밟고 문질러 많이 읽은 것처럼 꾸민 일이 있었소. 족하는 송 선생의 중후함을 본받으면 좋겠소. 하물며 내가 악소년처럼 밟고 문지르지 아니함에랴?
고려 말년 제공(諸公) 중에서 당(唐) 나라의 문장을 이을 만한 이는 포은(圃隱) 선생이오. 그러나 화려한 것이 익재(益齋)에 비하면 약간 손색이 있고, 기이하고 웅건한 것이 목은(牧隱)에 미치지 못하오. 대개 익재는 원(元) 나라 격조요, 목은은 송(宋) 나라 문체이니, 어찌 일찍이 포은의 유연한 운치에 미치겠소? 또 명가(名家)의 글이 있거든 보내 주면 좋겠소.
옛날에는 문을 닫고 앉아 글을 읽어도 천하의 일을 알 수 있었소. 그러나 박식한 이에게 강문(講問)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니, 족하는 근본을 안다고 할 만하오. 내가 먼저 찾아갈 것이니 기다려 주기 바라오. 이공(李公)께서 구암(久菴 한백겸(韓百謙)의 호)의 《여지(輿地 《동국지리지(東國地理志)》를 말함)》를 보겠다고 하므로 내가 가져다 보여 드리려 하니, 보내 주기 바라오.
춘추 시대 1백 24개 열국에 외자로 된 국호가 많고 간혹 두 자로 된 국호가 있으니, 두 자로 된 것은 소주(小邾)ㆍ남연(南燕) 같은 것이오. 이 책에는 잇달아 써서 기본 숫자에 차지 않으니, 두 자 국호까지 분정하여 기본 숫자를 채워 보내 주기 바라오.
원(元) 나라 태정제(泰定帝)가 천하를 나누어 18로(路)를 만들었다고 하나 고증할 길이 없었는데, 다행하게도 《문헌통고(文獻通考 송(宋)의 마단림(馬端臨)의 저서)》와 《청일통지(淸一統志 화신(和珅) 등이 지은 전국의 지리서)》에서 연혁(沿革)을 상고해 내서 18로를 채워 쓰게 되었으니 지금 어렵게 생각하지 말고 보내 주기 바라오.
나의 생각에는, 중원(中原)은 원기(元氣)가 모인 곳이라 일월(日月)이 바로 비추고 수토(水土)가 그 조화를 이루어, 성현의 기지가 되고 문헌의 육성지가 되었다고 보오. 안남(安南)은 옛 교지(交趾)의 지역으로 연경(燕京)과의 거리가 1만여 리가 되나 역대의 문물이 왕성하여 볼 만하고, 유구(琉球)는 바다 가운데 조그마한 하나의 섬이나, 자손들을 중원에 입학시켜 명(明) 나라 때부터 지금까지 끊임없이 근실하므로 오랑캐의 풍속을 크게 혁신하였소. 이는 모두 내가 전적(典籍)에서 상고한 것으로 나만이 흠모할 뿐 남들은 알지 못하는 것이오.
우리 조선은 기성(箕聖)이 피난 온 곳으로 요동(遼東)과의 거리가 1천여 리밖에 되지 않고, 전장(典章)과 예악(禮樂)은 사이(四夷)의 으뜸이라, 저 교지ㆍ유구와 비교해 볼 때 그 문명이 어떠하겠소? 그리하여 전사(前史) 외이열전(外夷列傳)을 두루 읽어 보니 조선이 제일이요, 다음은 안남(安南)이요, 그 다음은 유구의 차례로 되어 있으니 이는 세력이 강한 것을 이름이 아니라 문명으로 따진 것이오. 그러므로 최치원(崔致遠)ㆍ김이어(金夷魚)ㆍ김가기(金可紀)ㆍ최승우(崔承祐)가 당(唐) 나라 조정에 과거하여 지금까지 이름을 날리고, 박인량(朴寅亮)이 송(宋) 나라에 사신가서 그 이름을 천하에 떨쳤고, 서긍(徐兢)이 《고려도경(高麗圖經)》을 저술하면서 김부식(金富軾)을 특별히 세가(世家)에 나열하였소.
호원(胡元)에 이르러서는 익재(益齋) 이공(李公)이 서천(西川)에 봉사(奉使)하고 강남(江南)에 강향(降香)하였으며, 가정(稼亭)ㆍ목은(牧隱) 부자가 제과(制科)에 올랐소. 우리 조선의 개국(開國)은 황명(皇明)과 함께 일어났는데, 사신의 왕래가 빈번하여 거의 없는 해가 없었소. 이와 같이 2백 년 동안 계속하여 그 주고 받은 의식의 성대함과 보고 느낌에 진지한 것이 참으로 지극하다고 말할 만하오. 그러나 도리어 세 조정(당(唐)ㆍ송(宋)ㆍ원(元))만큼 성대하지는 못하오.
묵장(墨莊)이 나에게 먼저 《패문시운(佩文詩韻)》을 주겠다고 하는 것을 사양하고 《운략(韻略)》을 청하였더니, 《운략》은 희귀한 책이라, 유리창(琉璃廠) 20여 서방(書坊)을 뒤져 찾은 끝에야 비로소 이 책을 얻었다 하오. 그처럼 두터운 정의에 참으로 감격하였소. 갈 길이 바빠 미처 볼 겨를이 없었는데, 족하는 먼저 그 범례를 깨달아 우리들의 운문(韻文)에 대해 모두 금쪽 같은 존재가 되었으니, 반공(潘公)이 이른바 '문운(文運)에 관계가 있다.'고 한 말이 허언이 아닌 듯싶소.
《통지(統志)》포주(蒲州)조에 이른 '기자묘(箕子墓)'는 몽현(蒙縣)에 있는 기자묘를 인증함에 불과하고, 별도로 포주에 묘가 있는 것은 아니오. 대개 기자묘가 셋이 있다고 하는데, 하나는 몽현에 있고, 하나는 평양(平壤)에 있고, 하나는 어느 곳에 있는지 알 수 없소.
편지를 받고 근간의 기거(起居)가 편안함을 들으니 우러러 위로되는 마음을 어떻게 다 말하겠소. 이 못난 사람은 이원(摛院)에 번들어서 날마다 1만에 가까운 많은 말을 쓰니 손가락이 마비되었고, 또 사신이 압록강을 건널 날이 한 열흘 남았는데 두목(頭目 중국 사신 중에 무역을 위해 따라온 상인)을 공궤(供饋)하기 위하여 내일은 고을로 돌아가야 되겠소. 이처럼 수고로우니 크게 탄식한들 어찌하겠소. 《기년아람(紀年兒覽)》은 지금 서 직각(徐直閣 직각은 벼슬 이름. 서영보(徐榮輔)를 말함) 댁에 있고, 기타는 모두 고을 관아에 있으므로, 《청정국지(蜻蜓國志)》2책만 보내드리오.
《지지(地志)》의 초본을 한 번 자세히 보니 참으로 물샐틈 없이 잘되었다고 할 만하나 명환인물(名宦人物)은 실로 평가하기 어려운 것이니, 이 못난 사람의 천박한 식견으로는 한결같이 《승람(勝覽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을 말함)》에 의존하여 기록하고, 또 《삼국사기(三國史記)》와 《고려사(高麗史)》에서 세밀히 간추려 《승람》에 누락된 것을 하나하나 다 보충해야 할 것이오. 또 반계(磻溪 반계는 유형원(柳馨遠)의 호)의 《지지(地志)》와 최연촌(崔煙村 연촌은 최덕지(崔德之)의 호)의 《유초(流鈔)》에 의해 수록하되, 명종조(明宗朝)로 한계를 하고, 선조(宣祖) 이후는 우선 생략하였다가 가능할 때에 처리하였으면 하오. 《승람》에 기록된 것에 지나치게 소략하거나 잘못된 부분은 신빙성이 있는 책을 참고하여 첨부할 것이며, 효자(孝子)ㆍ열녀(烈女)에 이르러서도 《명사(明史)》의 예에 의거하시오. 이미 어제 만나 의논했듯이 《여지(輿地)》도 사류(史流)에 관계되는 것이니, 십분 신중하여 주기를 바라오.
인생의 이합(離合)이 흐르는 물과 뜬구름 같아서 본래 정처가 없는 것이나, 금년 봄처럼 분장(分張)이 극심한 적은 없었소. 나는 다행히 병이 없고 지난달부터 또다시 《무예도보(武藝圖譜)》의 일을 계속하였는데, 미구에 일을 마치겠으나 곧 내각(內閣)으로 들어가 어제(御製)를 교열하게 되었소. 유료(柳寮 유득공(柳得恭)을 가리킨다)도 이 일로 여지국(輿地局)에 있지 않소. 그 부하(府下)에 사는 사인(士人) 이인섭(李仁燮)은 곧 나와 단문지친(袒免之親 삼종(三從) 또는 사종(四從)의 친족)이오. 지난번에 연동(蓮洞) 장신(將臣)이 영변 부사(寧邊府使)로 갔었는데, 인섭이 혈혈단신으로 의지할 데가 없어 곧 본부 향인의 데릴사위가 되었소. 지금 자녀를 낳았으나 영원히 먼 곳의 백성이 되었으니 이 어찌 가련한 일이 아니겠소. 곧 하인을 보내 찾아 보고 무슨 일이건 곡진히 돌봐 주며, 그로 하여금 관아에 출입하게 하여 믿고 의지할 곳이 있게 하면 매우 다행하겠소. 또한 그 사람됨이 근실하기만 하지 다른 재주는 없는지라 친근히 한다 하더라도 세도를 끼고 폐를 일으키는 일은 없을 것이므로 이처럼 간곡히 부탁하오. 더구나 나의 족질(族姪)이 귀부의 부민(部民)이 되었으니 역시 드문 일이오.
또 들으니, 길현(吉衒)이란 자가 전관(前官) 별감(別監)이었는데 사건에 연루되어 부옥(府獄)에 구금되었다고 하니, 그 어떤 사건에 연루되었는지 알 수는 없으나 그의 조부 고(故) 별제(別提) 인화(仁和)는 곧 관서(關西)의 부자(夫子 스승)였소. 향천(鄕薦)으로 관직에 임명되었다가, 신임무옥(辛壬誣獄)이 일어나자 벼슬을 내놓고 귀향하면서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겼소.
선조는 그 당시에 주서로 물러났고/先祖當年注書退
미손(微孫)은 오늘날 별제로 돌아오네/孱孫今日別提歸
성세에 어찌 감히 기미 알아 간다 하랴/敢言聖世知幾去
가을철의 살찐 노어 생각나서라네/却憶鱸魚秋正肥
선왕이 그 자손 연(衍)을 불러 보고 그 시(詩)를 읊조리며 가상히 여겨 포상하였으니 이 얼마나 훌륭한 일이오? 현(衒)의 죄가 이미 원악대대(元惡大憝 반역죄를 범하거나 크게 악한 것을 말함)가 아니라면 그 어찌 옛날을 생각하여 용서해 줄 길이 없겠소? 모름지기 영문(營門)에 논보(論報)하여 되도록이면 속히 감방(勘放)하여 현인의 손자로 하여금 그 가문을 보전하게 하는 것이 어떠하겠소?
거듭 편지를 받아 읽으니 손을 잡고 마주앉아 자세한 일까지 얘기하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소? 더구나 '요즈음은 늘 화도시(和陶詩)만 읊조리고 조굴부(吊屈賦)는 짓지 아니하며 운명에 맡겨 버린다.' 하니 흠모하오. 나는 또 운서(韻書)를 편찬하는 일을 당하여 글자를 간추리고 자획을 조사함에 털끝처럼 미세한 데까지 이르고 있는데, 날씨가 점점 따뜻해지니 심력이 쉽게 풀어지고 그 번뇌를 이겨내지 못하겠소. 자신의 잔약한 몸뚱이를 돌아보매 겨우 형체만 갖추고 있는데, 나이 50에 믿는 것이라고는 밝은 눈 하나뿐이었소. 향조(香祖 청(淸) 나라 반정균(潘庭筠)의 호)가 말하듯이 다른 사람의 눈과는 다르다고 하나, 운자(韻字)를 편집한 뒤부터는 공중을 쳐다보면 어른거리니 이는 실로 작은 일이 아니오.
근자에 영공(令公)을 양이(量移 죄수의 유배지를 가까이로 옮기는 것)한 것은 대개 《여지(輿地)》를 쉽게 성취하려는 것이니, 비와 이슬을 내리고 서리와 눈을 내리는 것이 모두가 조화 아닌 것이 없소. 편지 속의 허다한 가르침을 각중(閣中)의 여러분들과 의논하니, 대개 착수가 너무 늦어진 것을 한탄하나 내각(內閣)의 서적을 함부로 시골에 보낼 수 없다는 것이었소. 그리고 좌보(左輔)에 해당되는 지역이라 차츰 옮겨 가까워지면 몹시 편리하겠으나, 이마 적적(謫籍)에 있으니 뜻대로 될지는 기필할 수 없소. 붓과 먹과 종이는 전과 같이 보내 준다 하니 그 말이 불가한 것은 아니오. 지금 보여 준 네 가지 어려움은 영공이 말하기 전에 이미 알고 있었소. 대략 수찬(修纂)하였다가 후일에 다시 정정을 더해 완료하는 것이 일의 순서일 듯하오. 가능한 한 편리한 방법을 따라 속히 손을 써주기 바라오.
《인물고(人物考)》는 내각에 그 책이 소장되어 있는데, 기회를 보아 각신(閣臣)에게 요청하려 하나 기필할 수는 없소. 이 일이 마치 서담포(徐憺圃)가 전리(田里)에 쫓겨나가 《일통지(一統志)》를 편찬한 것과 흡사하니 어찌 이처럼 기이하게 일치하오? 《장릉지(蔣陵志)》 역시 지금까지 끌어올 일이 아니며, 또한 다른 사람이 마음대로 개정할 일이 아닌데, 어찌하여 모(某) 태수(太守)를 두려워하겠소? 그 책이 모두 심대교(沈待敎 심염조(沈念祖))의 집에 있으니, 이는 그 배식록(配食錄)을 개수(改修)하기 때문이오. 찾아다가 교열하기 바라오. 배식록은 고증한 증거가 자세하고 명백한 것이라 없애지 못할 전적(典籍)이 되었으니, 이것으로 수정하면 본지(本志)의 힘이 덜할 것이오. 다만 초고(草藁)는 비장해 두고 내지 아니하니 어찌하겠소? 《경도지(京都志)》는 각중(閣中)에 있으니 거두어 보내겠소. 《황화여고(黃華旅稿)》는 내 마음대로 평점하여 감히 공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았소. 다시 10여년 전 일부터 계속하면 그 어찌 좋은 일이 아니겠소.
《전운(全韻)》초고 7장을 먼저 비성(祕省)에 보내어 교열한 다음에 그곳으로 보내니 반드시 상세히 보아 주(注)를 달고 만약 잘못된 곳이 있으면 쪽지를 붙여 주시오. 간명(簡明)을 기하려 하나 어떻게 진선진미하기를 바라겠소. 만약 사반공배(事半功倍)의 방법을 얻는다면 글을 다루다가 머리가 희었다는 나무람을 면할 것이니 어떻게 생각하시오. 한나절이면 충분할 것이니 하인을 보내거든 즉시 그 편에 부쳐 보내어, 여러 곳에 돌려 보여서 짧은 기일내에 완공하면 그 얼마나 시원하겠소? 결락된 곳은 대강 보충하여 뒤로 물리거나 도려내고 덧붙이는 지경이 되지 않게 하기 바라오. 돌려 보는 순서는 먼저 비성(祕省)에 보내고, 다음은 집사(執事), 다음은 유(柳 유득공(柳得恭)), 다음은 박(朴 박제가(朴齊家)), 다음은 내각(內閣), 다음은 이 영공(李令公 영공은 존칭)으로 하여 물레바퀴와 같이 잠시도 쉬지 않고 돌리려 하오. 7장을 지금 보내니 오전에 다 보아 주기 바라오.
지금 온 다섯 장에 부전이 둘만 붙었으니 좌우(左右 상대에 대한 존칭)는 피곤한가 보오. 조금 전에 내각에 불려갔었는데, 여러 곳의 지속(遲速)이 한결같지 않으니 극히 민망하오. 어제 물어 온 세 글자의 뜻은 명백하지 못하니 답답한 일이오. 난수(灤水)는 둘이 있는데, 하나는 명백하고 하나는 분명치 못하니, 요서(遼西)의 수명(水明)을 따르는 것이 좋을 것 같소. 경측(瓊畟)이 《한단순예경(邯鄲淳藝經)》을 보았는데 거기에 '― ―'라 한 것은 지금의 투(骰) 자요. 세(勢) 자의 훈(訓)은 지금 그 장이 있지 않으니 다시 상고하기 바라오. 좌우께서 하시는 교정이 정밀하여 다시 적수가 없는데, 유혜보(柳惠甫 혜보는 유득공의 자)가 그 뒤를 이어 탐구해 찾아내 좌우께서 알지 못하는 것을 잡아내니 혜보가 교서(校書)에 공부가 있어 그런 것이 아니라, 대개 교서의 묘리가 끝이 없어서인가 하오. 또 12장을 바꾸어 보내니 전의 것과 아울러 62장이라, 이틀 동안이면 마칠 수 있을 것이오. 성시도(城市圖)와 금강봉시(金剛峯詩)를 보내 드리오.
종용(慫慂)의 종(慫) 자는 권(勸 권면하는 것)자로 해석되니 글자 그대로 종용인 것이오. 지금 이 운례(韻例)에 용(慂) 자에다 권(勸)의 뜻으로 해석을 붙이고 종(慫) 자에 또 다시 경(驚 경동하는 것)의 뜻으로 해석을 붙였으니, 종 자 밑에는 거듭 권의 뜻으로 해석을 붙일 필요가 없는 것이오. 만약 종 자에 따른 해석이 없다면 거듭 권의 뜻으로 해석할 수 있는 것이오. 다른 나머지도 다 이와 다름이 없소.
흉용(洶溶)의 용(溶) 자는 과연 오서(誤書)된 것이나, 강(洚) 자는 곧 강(降) 자인데, 하내(河內)의 물이름으로 홍수(洪水)와 같은 뜻이니 참작하여 개정하시오. 옥(剭) 자의 해석을 '주(誅 목을 베는 것)라 형(刑 형벌하는 것)이라' 한 것은 바꾸어 놓아야 할 것이오. 규(葵) 자 밑에 퇴(椎 방망이)의 뜻으로만 붙여 놓은 해석은 어제 삭제하려다가 말았는데, 종규(終葵)로 해석을 붙인다 하더라도 긴밀하지 못하오. 이미 본의(本意)가 있으므로 이와 같은 해석을 덧붙이지 말아야 할 것이니, 이는 운부(韻府)에 엮어진 문자(文字)와 흡사하기 때문이오. 규(葵) 자 밑에 성(姓)이라 써야 한다고 하나, 대개 성명(姓名)의 뜻으로 해석을 붙이는 것은 성과 인명으로 발음되는 것으로 사람의 성명에 따라 특별하게 하나의 별개 음(音)이 형성되어 있기 때문이니 바로 묵기[万俟]와 이기(食其) 같은 것이오. 그러나 규(葵) 자에 대해서는 그 음이 한 가지뿐이니 특별히 성(姓)이라는 해석을 붙일 필요가 없소.
비(庳) 자의 해석에 대해서는 의례(義例)에 관계되는 것이니, 나타낼 만한 사람이 없으면 국명(國名)으로 해석을 붙일 뿐이오. 미(湄) 자에 대한 해석을 수초교(水草交 물과 풀이 한데 뒤엉키는 것)라 한 것이 가장 타당하니 그대로 바루어야 하겠소. 한 글자로 특별히 달리 발음되는 것은 두 가지 음으로 주(注)를 달 것이니, 항(缸) 자의 음이 강(江)과 항(降)으로 발음되는 따위오.
또 음은 같고 뜻이 다른 것과 글자의 뜻은 같고 음이 서로 다른 것에 대해서는 본주(本注) 밑에 권(圈 둥근 계선)을 치고 별도로 주를 달아야 할 것이니 권을 치지 않으면 본주와 분별할 수 없기 때문이오. 이(黟) 자 밑과 기기(庪觭) 자 밑에는 여백이 있으니 주(注)를 첨부할 것이요, 이(餌) 자 밑에 기(耆) 자를 도려내고 붙인 것은 잘못이니, 이(餌) 자는 곧 저(底) 자요. 이와 같은 곳을 귀신같이 적발하여 사람으로 하여금 등에 찬물을 끼얹듯이 써늘하게 하오. 그러나 의아한 것은 옹(翁) 자의 해석에 조경모(鳥頸毛 새의 목털)라 한 것을 고집하면서 '《설문(說文)》ㆍ《급취(急就)》에서 나온 것이라, 사람들의 눈을 놀라게 하지는 않으리라.'고까지 하니, 족하는 어찌 이처럼 답답하게도 물정을 모르시오? 조경모(鳥頸毛)가 2책에 나왔다는 그것이 곧 사람들의 눈을 놀라게 하는 것이오. 도대체 《설문》이란 무엇이며, 《급취》란 무슨 물건이오? 또한 저 새[鳥]가 우리들과 무슨 관계가 있소? 왈칵 성을 내며 홀(笏)을 이끌고 물러서지 않을 사람이 거의 없을 것이오. 또한 그 많은 글자마다 다 본의를 갖추기 위해 해석을 붙인다면 불(不) 자 밑에도 화부(花跗)란 해석을 붙여야 하고, 언(焉) 자 밑에도 황조(黃鳥)란 해석을 붙인 다음이라야 그 근원을 추구하였다고 할 것이나 누가 이를 다 알겠소? 명철한 족하가 한바탕 웃으라고 이와 같은 해담(諧談)을 하였소. 지금 교정해 온 다섯 장을 일체 개정하였으니, 분명하게 서로 일치되었다 하겠소.

[주D-001]갑신년 : 명 의종(明毅宗)이 순국(殉國)하고 여러 충신들이 절사(節死)하였던 1644년(인조 22)을 가리킨다.
[주D-002]산음(山陰) : 진(晉) 나라 왕휘지(王徽之)가 거처하던 곳으로 경치가 좋다고 한다. 어떤 사람이 왕휘지에게 산음(山陰)의 산수(山水)를 물으니, 왕휘지는 "천암(千巖)이 경수(競秀)하고 만학(萬壑)이 쟁류(爭流)한다." 하였다.
[주D-003]오릉가 이조(於陵家李螬) : 오릉(於陵) 집의 벌레먹은 오얏. 진중자(陳仲子)는 청렴한 선비이지만 3일을 굶어 듣지도 보지도 못하자 엉금엉금 기어가 우물 위에 있는 벌레먹은 오얏을 따 먹은 뒤에 의식을 회복하였다는 말이 있다.《孟子 滕文公下》
[주D-004]신임무옥(辛壬誣獄) : 경종(景宗) 원년에 왕위의 계승을 에워싸고 노론(老論)과 소론(少論) 사이에 일어난 당쟁의 화옥(禍獄). 신축년(경종 1, 1721)·임인년(경종 2, 1722) 두 해에 일어났다 하여 신임무옥 또는 신임사화(辛壬士禍)라고도 한다.
[주D-005]화도시(和陶詩) : 소동파(蘇東坡)가 도연명(陶淵明)이 지은 의고시(擬古詩)에 화답한 화도연명의고(和陶淵明擬古)를 가리킨다. 이 시는 대개 자연스럽고 한적한 정취의 뜻을 내포하고 있다.《古文眞寶 前集》
[주D-006]조굴부(弔屈賦) : 한(漢) 나라 가의(賈誼)가 굴원(屈原)을 조상하는 조굴원부(弔屈原賦)를 가리킨다. 이 부는 강개 비분한 뜻이 내포되었다.《古文眞寶 後集》
택당선생집(澤堂先生集) 제9권
 서(序)
연촌 최 선생의 집에 전하는 시문록 뒤에 쓴 글[煙村崔先生家傳詩文錄後叙]

옛날 경태(景泰 1449~1456) 연간에 아조(我朝)에 덕이 순일하고 절조(節操)가 드높았던 정학지사(正學之士)가 있었으니, 연촌(煙村) 최 선생이 바로 그분으로서 이름을 덕지(德之)라 하였다.
일찍이 금근(禁近 시종신(侍從臣)을 말함)을 거쳐 주부(州府)의 목민관으로 나갔다가, 이를 또 즐겁게 여기지 아니하여 벼슬을 그만두고 영암(靈巖) 영보촌(永保村)으로 돌아가서는, 서루(書樓)를 지어 존양(存養)이라 편액(扁額)을 내건 뒤 거기에서 생을 마칠 것처럼 지내었다.
그러다가 현릉(顯陵 문종(文宗))이 즉위하여 선생에게 소명(召命)을 내리면서 예문관 직제학(藝文館直提學)을 제수하였는데, 이듬해 겨울에 이르러 다시 늙었다는 이유로 사직을 청하고 향리로 돌아가자, 조정에 함께 있던 현경(賢卿)과 명사(名士)들이 시를 지어 떠나는 길을 전송하면서 선생의 사적(事跡)을 높이 기렸다. 그리고 이와 함께 존양루(存養樓)에 제(題)하는 글을 짓기도 하고, 또 선생의 가대인(家大人 부친)인 참의공(參議公 이름은 담(霮)임)이 장수(長壽)를 누리고 훌륭한 자손을 둔 데 대해 일시에 찬송하는 작품도 많이들 내놓았다.
이 모든 시문(詩文)가 필적(筆迹)들을 최씨의 자손들이 대대로 지키면서 그지없이 조심스럽게 보관해 왔는데, 급기야 정유왜란(丁酉倭亂)을 겪는 바람에 존양루가 소실(燒失)되면서 간편(簡編)들도 함께 산일(散逸)되고 말았다.
그러다가 이번에 고향 사람들이 선생을 위해 사당을 세우고서 제사를 올리게 되었고, 선생의 7대손인 전 참봉(參奉) 정(珽)이 또 타고 남은 시문(詩文)을 수습하여, 그나마 90여 수(首) 정도를 찾아낸 뒤 영원히 전할 방법을 모색하면서, 나에게 발문(跋文)을 써 달라고 요청해 왔다.
내가 삼가 살피건대, 선생은 순실(純實)한 행동이 성유(聖諭)에 드러나게 될 정도로 순덕(純德)의 소유자였고, 중년에 봉록(俸祿)을 마다하고 산해(山海)에 자취를 숨겼으니 고절(高節)의 인사라 할 만하며, 존심 양성(存心養性)의 의미를 되새기며 이를 편액(扁額)으로 내걸어 자신을 깨우쳤으니 정학지사(正學之士)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이 중에 한 가지만 있다 해도 백세(百世)의 사범(師範)이 된다고 할 것인데, 더구나 이를 모두 아울러 지니고 있는 분이야 더 말해서 무엇하겠는가.
한편 생각건대, 선생이 조정을 물러난 것은 경태(景泰) 2년인 신미년(1451, 문종 1)의 일이었다. 그런데 4년 뒤인 계유년과 7년 뒤인 병자년에 국가에 변고가 잇따라 일어나면서 진신(縉紳)들이 많이 해를 당하게 되었다. 그러고 보면 선생이 조정을 물러난 것이 그야말로 이런 기미를 미리 환하게 알아 몸을 보전하려는 계책에서 나온 것이라고 생각될 법도 하다. 그래서 이런 이유로 세상에서는 선생의 명지(明智)를 더욱 일컫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내가 고찰해 보건대, 현릉(顯陵)이 일찍 빈천(賓天 임금이 세상을 떠난 것을 말함)하여 노산(魯山 단종(端宗))이 갑자기 왕위를 내 주게 된 것은 하늘의 운수와 관계되는 일이라고 여겨진다. 그러니 선생의 지혜가 아무리 밝다 하더라도 어떻게 이렇게 될 줄이야 추측할 수가 있었겠는가. 그리고 선생은 세묘(世廟 세종(世宗))의 조정에서도 대방(帶方 남원(南原)의 옛 이름임)의 인끈을 풀었던 적이 있었는데, 그때에 또 떠나야만 할 무슨 어려운 일이 발생하기라도 했었던가.
《주역(周易)》에 이르기를, “천도는 가득 차면 무너뜨리고 겸손하면 더해 준다.[天道 虧盈而益謙]”고 하였고, 《시경(詩經)》에 이르기를, “화락한 군자는 신명이 위로해 준다.[愷悌君子 神所勞矣]”고 하였다. 선생의 급류 용퇴(急流勇退)는 그야말로 천도(天道)와 신명(神明)이 도와준 것으로서, 저절로 대란(大亂)에 떨어지지 않게 된 것이니, 어찌 눈치 빠르게 화(禍)의 기미를 살피다가 도망치는 자들과 견줄 수가 있겠는가.
지금 이 시문록(詩文錄)에 등장하는 여러 인물들을 두루 살펴보건대, 안평(安平)과 절재(節齋 김종서(金宗瑞)의 호임)에 대한 일은 차마 말할 수가 없지만, 가령 하동(河東)이나 고령(高靈) 범옹(泛翁)이나 사가(四佳)같은 제공(諸公)으로 말하면 훈명(勳名)은 비록 성대해도 정절(情節)의 측면에서는 혹 부족한 점이 있고, 성근보(成謹甫 근보는 성삼문의 자(字)임) 등 제인(諸人)으로 말하면 자정(自靖)한 점은 있지만 규족(葵足)처럼 보호하지는 못하였다. 그러니 선생의 맑은 복과 완전한 명성에 비교해 본다면, 어떻다고 해야 하겠는가.
아, 이 문집을 살펴보노라면, 그 시문들을 통해 선생의 심지(心志)가 어떠했는지를 알게 될 뿐만이 아니요, 세태(世態)를 논한 것이나 기인(其人 단종을 가리킴)을 향한 정성이 또한 선생을 능가할 수 없다는 것을 감지하게 될 것이다.
숭정(崇禎) 병자년 7월 보름에 덕수 후학 이식은 쓰다.

[주D-001]4년 뒤인 …… 되었다 : 단종(端宗)이 즉위한 계유년(1453)에 수양대군(首陽大君)이 황보인(皇甫仁), 김종서(金宗瑞) 등을 죽이고 안평대군(安平大君) 부자를 강화에 유배시킨 뒤 사사(賜死)한 일과, 세조(世祖) 2년인 병자년에 단종의 복위(復位)를 꾀하던 성삼문(成三問) 등 집현전(集賢殿) 학사들을 사형에 처했던 일을 말한다.
[주D-002]천도는 …… 더해 준다 : 겸괘(謙卦) 단사(彖辭)에 나오는 말이다.
[주D-003]화락한 …… 위로해 준다 : 대아(大雅) 한록편(旱麓篇)에 나오는 말이다.
[주D-004]급류 용퇴(急流勇退) : 한창 벼슬이 높아질 때에 물러나 명철 보신(明哲保身)하는 것을 말한다. 송(宋) 나라 전약수(錢若水)에게, 어떤 노승(老僧)이 끝내 신선은 되지 못하겠지만 벼슬에 연연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뜻으로 “是急流中勇退人”이라고 말한 데에서 유래한 것이다. 《聞見前錄 卷7》
[주D-005]하동(河東)이나 …… 사가(四佳) : 하동부원군(河東府院君) 정인지(鄭麟趾), 고령부원군(高靈府院君)이면서 호가 범옹인 신숙주(申叔舟), 호가 사가정(四佳亭)인 서거정(徐居正)을 가리킨다.
[주D-006]자정(自靖) : 각자 의리에 입각하여 자신의 뜻을 정해서 결행하는 것을 말한다. 《서경(書經)》 미자(微子)의 “스스로 뜻을 정해서 각자 선왕에게 고하라. 나는 여기를 떠나 숨지 않겠다.[自靖 人自獻于先王 我不顧行遯]”라는 말에서 나온 것이다.
[주D-007]규족(葵足)처럼 …… 못하였다 : 몸을 제대로 보전하지 못했다는 말이다. 춘추 시대 제(齊) 나라 포견(鮑牽)이 난세(亂世)에 처하여 남의 악행을 참지 못하고 고발했다가 발이 끊기는 월형(刖刑)을 당했는데, 이에 대해 공자(孔子)가 “포장자의 지혜는 해바라기보다도 못하구나. 해바라기는 그래도 잎사귀를 가지고 제 다리를 가려서 보호해 주는데.[鮑莊子之知不如葵 葵猶能衛其足]”라고 비평한 고사가 있다. 포장자는 포견을 가리킨다. 《春秋左傳 成公 17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