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최씨 금석문 등/홍숙 최기남 신도비 (방조)

의정부영의정 겸 영경연 홍문관 예문관 춘추관 기남(起南)이요 자는 흥숙(

아베베1 2009. 12. 7. 16:51

계곡선생집(谿谷先生集) 제13권
 비명(碑銘) 9수(首)
유명조선국 증 순충적덕병의보조공신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영의정 겸 영경연 홍문관 예문관 춘추관 관상감사 세자사 완흥부원군 행 통정대부 영흥대도호부사 최공 신도비명(有明朝鮮國贈純忠積德秉義補祚功臣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領議政兼領經筵弘文館藝文館春秋館觀象監事世子師完興府院君行通政大夫永興大都護府使崔公神道碑銘) 병서


공의 휘는 기남(起南)이요 자는 흥숙(興叔)이다. 그 선조는 전주(全州) 사람으로서 상장군(上將軍) 순작(純爵)의 후예이다. 어려서부터 자질이 탁월하였으며 장성하여서는 우계(牛溪 성혼(成渾)의 호) 성 선생(成先生)에게 수학하였는데 문행(文行)으로 동료들의 추중(推重)을 받았다.
을유년 사마시(司馬試)에 입격하여 태학(太學)에서 노닐 적에, 호남의 사인(士人)이 상의 뜻에 거슬리는 말을 하다가 하옥되는 사건이 발생하자, 공이 제생(諸生)의 앞에 서서 상소하여 논했는데, 이에 선묘(宣廟)가 감동하여 깨닫고는 즉시 내보내 주었다. 그러다가 신묘사화(辛卯士禍)가 일어났을 때에는 공이 포의(布衣)의 몸으로 역시 걸려들어 정거(停擧 시험 응시 자격이 박탈되는 것)되는 벌을 받기도 하였다. 임진년에 왜란이 일어나자 늙은 어버이를 모시고 피난을 하였는데 갖은 고생을 하며 양식을 구해 봉양하느라 수염과 머리카락이 모두 하얗게 세었다.
경자년에 비로소 벼슬길에 올라 왕자의 사부(師傅)가 되었는데, 3명의 왕자를 가르치면서 사도(師道)를 엄하게 준수하여 세 왕자의 학문이 날로 발전되게 하였다.
임인년 알성시(謁聖試)에서 병과(丙科)로 급제한 뒤 성균관 전적에 임명되었다가 병조 좌랑으로 옮겨졌으며 지제교(知製敎)에 선발되었다. 이로부터 시강원 사서ㆍ문학과 형조ㆍ예조ㆍ병조의 정랑을 차례로 역임하였다.
을사년에 함경북도 평사(咸鏡北道評事)로 좌천되었다. 당시 중국의 동관(潼關)이 막 오랑캐에게 함락되었으므로 사람들이 북쪽 변방을 사지(死地)로 여긴 나머지 평사에 임명되기만 하면 번번이 핑계 대고 교묘히 빠져 나오곤 하였다. 그리하여 9차례나 다시 임명을 한 끝에 공에게 이르렀는데, 공은 말하기를,
“아무리 어려운 일이라도 사양하지 않는 것이 신하된 자의 직분이다.”
하고는 즐거운 기색으로 부임했다가 1년이 지나고 나서 체직되어 돌아왔다. 그 뒤에 다시 예조와 병조의 낭관(郞官)ㆍ문학(文學)ㆍ직강(直講)을 차례로 거쳐 무신년에 시강원 필선으로 승진하였다.
광해(光海) 초기에 사헌부 장령이 되었다가 옥당에 뽑혀 들어가 수찬과 교리를 지냈으며, 암행어사로 황해도를 염찰(廉察)하고 돌아와서는 예빈시 정(禮賓寺正)에 임명되었다. 또 필선에서 보덕으로 승진한 뒤 의정부 검상ㆍ사인과 홍문관 부응교와 사헌부 집의와 성균관 사성과 승문원 판교 등의 자리로 옮겨졌다.
임자년에 통정대부로 품계가 오르면서 영흥대도호부사(永興大都護府使)로 외방에 나갔다. 광해가 장차 대비(大妃)를 폐위(廢位)시키려 하자 적신(賊臣) 이이첨(李爾瞻)이 이를 부추겨 마침내 대옥(大獄)을 일으킨 결과 명류(名流)와 구신(舊臣)들이 모두 결박당하는 몸이 되었다. 공 역시 체포되어 하마터면 불측(不測)한 지경에 떨어질 뻔하다가 삭직(削職)된 채 한가로이 지내게 되었는데, 7년이 지난 기묘년 모월 모일에 이르러 질병으로 세상을 하직하였다. 이때가 태어난 지 꼭 60년이 되는 해였다.
공은 천품이 근후하고 효성과 우애가 독실하였다. 겨우 15살의 나이에 부친을 여의었는데도 거상(居喪) 중에 예법을 어기는 일이 없었으며, 어려서부터 외가(外家)에서 길러지면서 외할아버지 모시기를 마치 부자지간처럼 하며 정성과 예의를 다하였다.
평소에는 말을 더듬거리며 주저하는 듯하다가도 막상 관직에 나아가 임무를 수행할 때에는 자신의 있는 힘을 모두 기울여 책임을 완수하였으며 쉬운 일이건 어려운 일이건 가리지 않고 조정의 명에 응하였다.
일찍이 글을 올려 군정(軍政)에 대해서 논한 것이 수만 언(言)에 달했는데 선조가 이를 보고서 가상하게 여겼었다. 그리고 광해가 아직 그다지 난정(亂政)을 행하지 않고 있을 적에 공이 옥당에 있으면서도 6조목으로 나누어 상소하며 진달하였는데 모두가 군국(軍國)의 대계(大計)에 관한 것이었다. 그중에서도 상제(喪制)를 극진히 할 것과 우애를 돈독히 할 것과 붕당을 없앨 것과 인재를 아낄 것 등의 조목에 이르러서는 더욱 곡진하게 자신의 뜻을 개진하였는데, 말이 비록 채택되지는 않았으나, 그래도 삼년상(三年喪)의 의논이 정해진 것은 바로 공이 힘쓴 덕분이었다.
임해군(臨海君)의 옥사(獄事)가 일어났을 때 공이 문사낭청(問事郞廳)이 되었다. 그런데 국옥(鞫獄)이 진행되는 동안 혐의가 없다는 것을 알고서 이에 대한 소장을 올리려 하였으나 친척들이 극력 저지하는 바람에 마침내 그만두고 병을 핑계 댄 채 출사(出仕)하지 않았다.
이때 어떤 궁녀가 총애를 믿고 내밀(內密)하게 청한 나머지 나인(內人)과 인척(姻戚) 관계가 있는 천례(賤隷)를 내수사로 이속(移屬)시키라고 광해가 명한 일이 있었다. 그러자 공이 차자(箚子)를 올려 이를 논박하였는데, 그 말이 매우 굳세고 간절하였다.
수상(首相) 이원익(李元翼)이 경기 선혜청을 설립하려고 할 때 조정에서 많이들 이견을 제시하였으나 공만은 극력 찬성하였는데 지금까지도 경기 백성들이 이를 편하게 여기고 있다. 그리고 진공(進供)하는 연지(硯紙)의 체양(體樣)이 너무도 크고 사치스러워서 선혜청이 재손(裁損)해 줄 것을 계청 하였으나 상이 허락하지 않았는데, 이에 공이 다시 상소를 하여 논하였으므로 광해가 더욱 좋아하지 않았다. 그리고 언젠가는 연석(筵席)에서 폐단을 개혁해야 하는 당위성을 극력 논하였는데, 광해가 낯빛을 바꾸면서 상신(相臣)을 돌아보고 말하기를,
“조정 신하들이 어수선하게 고치는 일을 꽤나 좋아하고 있는데 이는 아름다운 일이 못 된다. 대신이 의당 진정시켜야 할 것이다.”
하기도 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시대 상황이 크게 변하자 공이 내직(內職)에 몸담고 있는 것을 달갑게 여기지 않고서 강력하게 외직(外職)을 구하였는데, 일단 영흥(永興)으로 가게 되자 개연(慨然)히 말하기를,
“이곳이라고 해서 어찌 멋지게 해 볼 수가 없겠는가.”
하였다. 그리고는 잡다한 부세(賦稅)를 견감(蠲減)하여 백성의 급한 처지를 완화해 주고, 우수한 자제들을 선발한 뒤 무리를 지어 교습시키자 사람들 모두가 분발하여 학문에 힘쓴 결과 거문고를 타며 낭송하는 소리가 경내에 끊이지 않게 되었다. 공은 또 융사(戎事)에 더욱 관심을 기울여 속오(束伍)를 편성하고 기격(技擊)을 훈련시키는 한편 전차(戰車)를 만들어 야전(野戰)을 익히게 하였는데, 이 모두를 척씨(戚氏 병서(兵書) 《기효신서(紀效新書)》를 지은 명(明) 나라 척계광(戚繼光)임)의 병법에 의거하여 준행하였다.
그리하여 1년이 지나는 사이에 정사가 크게 펼쳐지게 되었는데, 지금까지도 영흥이 문풍(文風)의 고장으로 일컬어지고 있는 것은 바로 공의 교화 덕분이라고 할 것이다.
공이 관직 생활을 그만두고 물러나서는 가평(加平) 시냇가에 집을 짓고 살면서 만곡정사(晚谷精舍)라는 편액(扁額)을 내걸었는데, 대체로 젊었을 적에는 양암(養菴)으로 자호(自號)를 삼다가 이때부터 만옹(晚翁)으로 고쳐 불렀다고 한다.
공의 증조 명손(命孫)은 종사랑(從仕郞)이고, 조부 업(嶪)은 빙고 별제(氷庫別提)로 사헌부 집의를 증직받았다. 부친 수준(秀俊)은 승정원 좌승지에 추증되었고, 모친 의령 남씨(宜寧南氏)는 호조 참의에 증직된 상질(尙質)의 딸이다.
공은 같은 군(郡) 내의 유씨(柳氏)에게 장가들었는데, 부친은 관찰사 영립(永立)이다. 부인은 행실이 지극하고 부도(婦道)를 매우 잘 갖추어 규문(閨門) 안에서 일어나는 아주 미세한 일들도 모두 합리적으로 처리하였는데, 공보다 4년 먼저 60세의 나이로 죽었다.
아들 다섯을 두었다. 장남 몽길(夢吉)은 어린 나이에 일찍 죽었다. 다음 내길(來吉)은 한성부 좌윤이고, 다음 명길(鳴吉)은 경기 관찰사이고, 다음 혜길(惠吉)은 홍문관 부수찬인데, 이상 모두 문과(文科)를 통해 조정에 진출하였다. 다음 경길(敬吉)은 모관(某官)이다. 딸은 모관인 한필원(韓必遠)에게 출가하였다. 내외손은 남녀 모두 약간 인이다.
관찰(觀察)은 젊어서부터 명성을 떨쳤는데 중흥(中興)의 은밀한 모의에 적극 참여하여 가장 높은 공을 세웠으며 한 시대의 명신(名臣)으로 일컬어지고 있다. 형인 좌윤과 함께 정사공신(靖社功臣)에 책훈(策勳)되었으며, 부모에게 은혜가 가해진 결과 공은 지금의 관직으로 증직되었고 부인은 정경부인(貞敬夫人)의 추증을 받게 되었다.
공은 당초 모지(某地)에 안장되었으나 택조(宅兆)가 불길한 관계로 모년 모월 모일에 모지(某地) 모산(某山)으로 이장(移葬)하면서 부인을 합폄(合窆)하였다.
그러고 나서 장차 묘도(墓道)에 비석을 세우려 하면서 관찰이 직접 행장(行狀)을 지어 가지고 나에게 와 명(銘)을 부탁하였다. 생각건대, 공은 나에게 아버님의 친구가 되는 분이시고, 관찰 형제로 말하면 또 나와 벗으로 지내는 사이이니, 의리로 볼 때 사양할 수 없는 일이다.
그래서 다음과 같이 명하였다.

군자의 행동 기준 / 君子之道
성실함 그것이니 / 誠愨爲基
술에다 비유하면 / 譬彼酒醴
묽지 않은 진국이리 / 寧醇毌漓
머리 회전 빠르고 약아빠진 인간들 / 便儇皎厲
기막힌 말솜씨로 아첨 떠는데 / 給辯姸辭
출세할진 모르지만 / 世所貴重
도와는 거리 멀지 / 去道遠而
아름다운 우리 최공 / 有美崔公
질박한 자세 지니고서 / 朴茂之姿
돈독한 행동으로 / 敦其質行
훌륭한 스승 모셨어라 / 服訓碩師
충의 모자에 신의 신발 신고 / 冠忠履信
시서의 옷 몸에 걸쳤나니 / 衣被書詩
현달(顯達)하기 시작한 건 뒤늦었어도 / 鴻漸雖晚
아름다운 풍모 모범이 되었지요 / 其羽可儀
어찌 험난함 없었으랴만 / 豈無夷險
오직 의로운 길 걸어가면서 / 唯義之之
남의 비밀 들추어내지도 않고 / 不激而訐
휩쓸려 뒤따라가지도 않았지요 / 不靡而隨
참되고 꾸밈없는 공의 속마음 / 肫肫悃愊
일처리할 때마다 드러났는데 / 發於事爲
몹시도 어려운 시대를 만나 / 遭時孔囏
결국은 낭패를 당하고 말았다오 / 竟躓于巇
어찌하여 그렇게도 후한 분에게 / 何蘊之厚
하늘은 인색하게 보답했을까 / 而嗇厥施
공에겐 부족하게 내려 줬어도 / 維躬之嗇
후손에게 복 주려는 의도였겠지 / 維後之貽
편안한 안식처 마련하는 일 / 宅兆安厝
효자된 도리상 당연히 할 일이라 / 玆惟孝思
점을 쳐 봐도 들어맞기에 / 旣契我龜
이곳 묘역으로 옮겨 왔다오 / 窀穸爰移
여주(驪州) 산 언덕 / 黃驪之岡
출렁이는 강물 줄기 / 其水瀰瀰
돌에 새겨 넣은 나의 이 비명(碑銘) / 我銘斯石
백대를 두고 밝게 전해지리 / 百代昭垂


연려실기술 제6권
 예종조 고사본말(睿宗朝故事本末)
민수(閔粹)의 사옥(史獄)

기축년 4월에 처음으로 《세조실록》을 편수하는데, 을해년 이후에 춘추관에 직을 가졌던 이는 모두 사초를 바치게 하였다. 민수도 또한 사초를 바쳤는데 조금 뒤에 모두 그것을 쓴 본관(本官)의 이름을 쓰게 한다는 말을 듣고 민수는 대신들이 그 바른대로 쓴 것을 보고 감정을 가질까 두려워하여 몰래 봉교 이인석(李仁錫)과 첨정 최명손(崔命孫)에게 청하여 고치고자 하니 사초를 주지 않으므로 다시 박사 강치성(康致誠)에게 요청하였더니 치성이 소매 속에 넣어다 주었다.민수가 바삐 고치느라고 미처 깨끗하게 쓰지 못하고 도로 바치었다. 검열 양수사(楊守泗)와 최철관(崔哲寬)이 민수의 사초에 글씨를 지우고 새로 고친 것이 있음을 보고, 참의 이영은(李永垠)에게 알리니 영은이 여러 당상관에게 두루 말하였다. 모두 “이것은 작은 일이 아니다.” 하고, 이에 임금께 아뢰었다. 이전에 정언 원숙강(元叔康)이 아뢰기를, “사초에 이름 쓰는 것은 옛 제도가 아니니 바른대로 쓰는 사람이 없을까 두렵습니다. 청컨대, 이름을 쓰지 말게 하옵소서.” 하니, 임금은 화를 내고 따르지 않았는데, 이때에 부정(副正) 김계창(金季昌)이 원숙강도 또한 많이 고쳐 썼다고 고하여 숙강도 민수와 함께 의금부에 갇혔다. 임금이 친히 국문하니 민수는 “신이 쓴 것은 모두 대신들의 일입니다. 그 대신들이 모두 실록각에 있으므로 신이 중상 당할까 염려하여 고치려 한 것입니다.” 하고, 큰 소리로 울면서, “신은 외아들이니 목숨이나 잇게 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하니 임금도 불쌍히 여기고, “정직하다. 내가 서연에 있을 때부터 민수의 사람된 품을 잘 안다.” 하고, 드디어 죽음을 면해 주고 곤장을 친 뒤에 제주로 보내어 관노로 만들었다. 강치성(康致誠)은 애초에 사실대로 대답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망녕되이 사인 성숙(成俶)이 실정을 안다고 끌어 넣다가 고문을 받고서야 실정을 자백하였다. 드디어 원숙강과 함께 참형을 당하였다. 최명손(崔命孫)과 이인석(李仁錫)은 사실을 알고도 고하지 않았으므로 곤장 일백 대를 치고 본관지(本貫地)에서 군역에 편입시켰다. 《점필재집(佔畢齋集)》
민수(閔粹)는 본관이 여흥(驪興)이다. 생원과에 장원하였고, 세조 기묘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이조 정랑에 이르렀다.
원숙강(元叔康)은 자는 화중(和仲)이며, 본관은 원주(原州)이다. 호(昊)의 손자이고 교검(校檢) 효렴(孝廉)의 아들이다. 세조 경진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정언에 이르렀다.
강치성(康致誠)은 본관이 신천(信川)이다. 세조 무자년에 문과에 올라 벼슬이 검열에 이르렀다.
점필재집 시집 제5권
 [시(詩)]
구흥역에서 동년 민수가 제주도로 유배되었다는 소식을 듣다[駒興驛聞閔同年粹流濟州]

기축년 4월에 비로소 세조실록(世祖實錄)을 수찬하는데, 지난 을해년 이후로 춘추관(春秋館)의 직무를 띠었던 사람은 모두 사초(史草)를 납부하므로, 민수 또한 사초를 납부했었다. 그런데 이윽고 들으니, 사초에다 모두 본관(本官)과 이름을 다 쓰게 하였다. 그러자 민수가 대신(大臣)이 그 직서(直書)를 보고 미워하여 앙심을 품을까 두려워한 나머지, 은밀히 봉교 이인석(李仁錫) 및 첨정 최명손(崔命孫)에게 끼어넣지 말기를 청하고, 또 박사 강치성(康致誠)에게 요구하니 강치성이 그 사초를 빼내 주었다. 그러자 민수가 그 사초를 허둥지둥 고치어 미처 정사(淨寫)도 못한 채 돌려보냈다. 그런데 검열 양수사(楊守泗)·최철관(崔哲寬)이 그 사초에 고치고 보충한 흔적이 있음을 보고는 이를 참의 이영은(李永垠)에게 보고하자, 이영은이 이 사실을 여러 당상(堂上)들에게 두루 고하니, 모두 말하기를 “미세한 일이 아니다.” 하고 이에 상(上)에게 아뢰었던 것이다.
당초에 정언 원숙강(元叔康)이 아뢰기를 “사초에 이름을 쓰는 것은 옛 제도가 아닙니다. 그렇게 하면 직필(直筆)하는 자가 없을 듯하니 이름을 쓰지 말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노하여 따르지 않았다. 그런데 이 때에 이르러 부정(副正) 김계창(金季昌)이 원숙강의 사초에도 고친 부분이 많다는 것을 고함으로써, 마침내 민수와 원숙강을 함께 의금부에 가두고 상이 그들을 친국하게 되었다. 이 때 민수가 말하기를 “신이 쓴 것은 모두 대신의 일입니다. 그 대신들이 모두 실록각(實錄閣)에 있으므로 신은 신을 중상할까 염려되기 때문에 고치려고 꾀한 것입니다.” 하고, 인하여 대성 통곡하며 말하기를 “신은 독자(獨子)이오니, 원컨대 목숨만 살려주소서.” 하니, 상이 그를 측은하게 여겨 이르기를 “정직하도다. 내가 서연(書筵)에 있을 때에 민수의 사람됨을 알았었다.” 하고는, 마침내 사죄(死罪)를 면하여, 장일백(杖一百)을 쳐서 제주(濟州)의 관노(官奴)에 소속시켰다. 강치성은 처음에 사실대로 대답하지 않았고 또 망녕되이 사인(舍人) 성숙지(成叔知)의 장(狀)을 끌어들였다가 고문을 받고서야 자복하여 마침내 원숙강과 함께 처참(處斬)되었다. 최명손·이인석은 알고도 고하지 않은 죄로 장일백을 맞고 본관(本貫)에 충군(充軍)되었다.

역사 짓는 건 인화를 부르나니 / 作史須人禍
생명을 보전함은 성상의 은혜로다 / 全生是聖恩
해산의 아름다운 곳에 살면서 / 海山佳處住
초인의 넋을 흩어버리지 말게나 / 莫散楚人魂

그대가 좋은 친구 저버리지 않은 건 / 非君負良友
하늘이 절로 밝게 알고 계시니 / 天鑑自昭融
후일에 저승엘 가더라도 / 他日重泉下
어찌 백공에게 부끄러우리오/ 何曾愧伯恭
백공은 원위(元魏) 때 고윤(高允)의 자이다.

[주D-001]초인의 넋 : 신하로서 임금에 대한 변함없는 충성을 뜻함. 초 나라 굴원(屈原)이 소인들의 참소에 의해 쫓겨났지만 임금에 대한 충성이 끝내 지극했었으므로 이른 말이다.
[주D-002]어찌 백공에게 부끄러우리오 : 원위 태무제(元魏太武帝) 때 요동공(遼東公) 적흑자(翟黑子)가 뇌물을 받은 일이 발각되자, 저작랑 고윤(高允)에게 의논하기를 “주상께서 나에게 물으시면 어떻게 대답해야겠는가?” 하자, 고윤이 “사실대로 자백하면 혹 용서를 받을 수도 있겠거니와, 거듭 주상을 속여서는 안 된다.”고 하였는데, 적흑자는 끝내 사실대로 자백하지 않았다가 처형되었다. 그런데 또 고윤은 국서(國書)를 수찬할 때 직필(直筆)한 일로 매우 위태롭게 되자, 태자(太子)가 자기 사부인 고윤을 살리려는 생각에서 그에게 주상께 약간의 거짓말을 하도록 권유하였으나, 그는 태자의 말을 듣지 않고 사실대로 자백하여 오히려 주상으로부터 정직하다는 칭찬을 받고 죽음을 면하였는데, 그는 물러나와 어떤 이에게 말하기를 “내가 태자의 지도를 따르지 않은 것은 적흑자를 저버릴까 염려해서였다.”고 한 데서 온 말이다. 《小學 善行》
해동야언 2
예종(睿宗)

○ 기축년 4월에 세조실록을 수찬(修撰)하기 위하여 을해년 이후 사직(史職)에 있었던 자는 모두 사초(史草)를 드리게 하였다. 그때에 민수(閔粹)도 사초를 바쳤는데, 얼마 후 그들 사초에 해당 사관의 본관 성명을 기재하게 한다는 말을 듣고, 민수는 대신들이 그의 직서(直書)를 보고 노할까 두려워서 몰래 봉교(奉敎) 이인석(李仁錫)과 첨정(僉正) 최명손(崔命孫)에게 사초를 잠깐 청하였으나, 주지 아니하였다. 또 박사 강치성(康致誠)에게 요청하였더니, 강치성은 그 사초를 소매 속에 넣어서 내어다 주었다. 민수는 허둥지둥 고치고서 미처 정서를 못하고 되돌려 주었는데, 검열(檢閱) 양수사(楊守泗)와 최철관(崔哲寬)이 그 사초 중에 있는 정승들의 이름을 지우고 다시 쓰고 한 것을 보고 참의 이영근(李水根)에게 그 사실을 알렸다. 이영근이 당상관(堂上官)들에게 두루 말하니, 모두들 작은 일이 아니라고 하며 이에 임금에게 아뢰었다. 애초에 정언 원숙강(元叔康)이 아뢰기를, “사초에 이름을 쓰는 것은 옛 일에 어긋납니다. 그것은 두려워서 직필(直筆)한 자가 없을까 하여 그러하오니, 원하건대, 이름은 쓰지 말게 하옵소서.” 하므로, 임금이 노하고 듣지 아니 하였다. 이때에 이르러서 부정(副正) 김계창(金季昌)이 원숙강의 사초도 많이 고쳐졌다고 고하여서 드디어 함께 의금부에 가두고 임금이 직접 국문하였는데, 민수는 말하기를, “신이 쓴 사초는 모두 대신의 일입니다. 그들 대신으로 말하면, 모두 실록각(實錄閣)에 있으므로, 신은 저의 사초에 의하여 제가 중상을 입을까 염려하고 고친 것입니다.”라고 말하곤 이어 대성통곡하며 다시 말하기를, “신은 독자이오니, 원하건대, 목숨이나 이어 주옵소서.” 하니, 상왕이 측은히 여겨 말하기를, “너의 말이 거짓이 없구나. 내가 일찍이 서연(書筵)에 있을 때에 민수의 사람됨을 아는 바 있다 하고서 드디어 사장(死杖)을 면하여, 제주 관노(濟州官奴)에 속하게 하고, 강치성은 처음부터 사실로써 대답을 아니 하였고, 게다가 망령되게 성숙(成俶)을 끌어넣어 정상을 안다고 하다가 고문을 당하고서야 굴복하여 원숙강과 같이 참형에 처해졌고, 손인석(孫仁錫)은 그 실정을 알고서도 고발을 아니하였다고 하여 백 대 장벌(杖罰)을 주고 본관(本貫)의 군(軍)에 보충하였다. 《점필재집》
○ 승정원(承政院)은 후설(喉舌)과 같은 중요한 직책으로 왕명을 출납하니, 그 소임이 가장 중하다. 이전부터 성문(城門)과 궁문(宮門)은 파루(罷漏)하면 열고, 인정(人定)이 되면 닫는다. 승지들은 4경(更)이 되면 궐문에 와서 궁문 열기를 기다려서 들어가고, 밤이 깊어서야 집에 돌아가는데, 남이(南怡)의 난이 있을 때에 예종(睿宗)이 궁문은 평명(平明)이 되어야 열고 어둠이 깃들면 닫도록 명하니, 사람들이 모두 좋아하고, 또한 폐되는 일이 없어서 지금도 그것을 따른다. 이전부터 승지는 1명만 입직하였는데, 세조 때 승지 이호연(李浩然)이 입직하면서 술이 취하여 누워 있는지라 세조가 공사(公事)를 하문(下問)하되, 이호연이 능히 일어나지도 못하므로 이로부터 2명이 입직하게 되었다. 《용재총화》
○ 예종이 초정(初政)부터 뜻을 예민하게 갖고 선정을 꾀하였는데, 얼마 되지 아니하여 옥체가 점차 쇠약하여졌다. 일찍이 책 뒤에 손수 예종(睿宗)이라고 쓰고 또 말하기를, “사후에 이 시호를 얻으면 족한 것이다.” 하더니, 몇 개월이 못 되어서 승하하자, 군신(群臣)이 시호를 예종이라고 올렸으니, 과연 성의(聖意)에 합당하였다. 아, 슬픈 일이다. 《필원잡기》
세조 9년 계미(1463,천순 7)
 9월27일 (계미)
동국통감의 편찬을 양성지가 맡고, 신숙주·권남이 감수하게 하다

장의사(壯義寺)에 거둥하였다가 환궁(還宮)하니, 풍정(豐呈)을 바쳤다.
길창 부원군(吉昌府院君) 권남(權擥)을 불러서 말하기를,
“중궁(中宮)이 나의 탄일(誕日)에 이 찬치를 베풀고자 하였으나, 마침 이승손(李承孫)이 졸(卒)하여 실행하지 못하였다. 금일에 베푸는 것을 내가 정지시키고자 하였으나, 진실로 지극한 정(情)에서 나오는 것이면 비록 미천(微賤)한 자일지라도 거절할 수 없는데, 하물며 중궁(中宮)이겠는가? 금일 장의사(壯義寺)에 왕래(往來)하느라고 몸이 몹시 피로하지만, 그런데도 이 잔치를 받는 것은 중궁(中宮)을 중하게 여기기 때문이다.”
하고, 효령 대군(孝寧大君)에게 이르기를,
“내가 어렸을 때 방장(方壯)한 혈기(血氣)로써 병을 이겼는데, 여러 해 전부터 질병이 끊어지지 않으니, 일찍이 온천(溫泉)에 목욕(沐浴)하자 하였습니다. 그러나, 내가 평생에 뜻을 두는 것은 내 한 몸을 위해서 백성들을 수고시키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에 끝내 이런 행차는 하지 않았습니다. 말로는 기필(期必)할 수 없지만 만약 또 심해지면 어떨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나의 뜻은 이와 같습니다.”
하였다. 우승지(右承旨) 이파(李坡)와 하성위(河城尉) 정현조(鄭顯祖) 등을 불러서 말하기를,
“《동국통감(東國通鑑)》을 수찬하는 데 반드시 많은 문신(文臣)들을 모을 것이 없다. 너희들이 신숙주(申叔舟)·권남(權擥)·최항(崔恒)에게 의논하라.”
하니, 권남이 말하기를,
“사람이 적으면 늦어질 것이고, 사람이 많으면 빨라질 것이니, 매한가지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옳지 않다. 다만 궐내(闕內)의 유생(儒生)들로 하여금 편찬하게 하라.”
하고, 이파로 하여금 그 적당한 인물을 써오게 하니, 이파가 세자 정자(世子正字) 최명손(崔命孫)·예문 봉교(藝文奉敎) 신숙정(申叔楨)·대교(待敎) 원숙강(元叔康)의 이름을 써서 바치었다. 임금이 말하기를,
“양성지(梁誠之)가 여러 유생(儒生)들을 거느리고 편찬하고, 신숙주·권남이 이를 감수(監修)하라.”
하였다. 이파가 왕명(王命)의 출납(出納)을 맡아보니, 효령 대군에게 이르기를,
“내가 이파를 아들처럼 대접하고 내 소생(所生)과 다름이 없이 합니다.”
하고, 또 이파에게 이르기를,
“나는 너의 아비와 심상(尋常)한 사이에 비할 수가 없다. 매양 너를 볼 적마다 항상 생각한다.”
하였다.
【원전】 7 집 589 면
【분류】 *왕실-행행(行幸) / *왕실-의식(儀式) / *왕실-국왕(國王) / *역사-편사(編史)
세조 13년 정해(1467,성화 3)
 10월8일 (경자)
황해도 관찰사에게 황철 등에 대한 예의를 명하고 윤필상에게 군기의 일을 명하다

승정원(承政院)에서 교지(敎旨)를 받들어 황해도 관찰사(黃海道觀察使) 정난종(鄭蘭宗)에게 치서(馳書)하기를,
“듣건대 황철(黃哲)이 올 때 안식향(安息香)을 구하였다고 하는데, 지금 10냥쭝을 보내니, 경이 사적으로 자세히 설명하고 주라. 또 경(卿)과 수령(守令)·찰방(察訪)도 물건을 주고 회봉(回奉)하되, 도자(刀子)이거든 경중(京中)에서 보낸 것이라 하고, 종이[紙]이거든 그 도(道)에서 준비한 것이라 하면서 또한 사물(私物)이라고 말하고 주어라.”
하고, 또 우참찬(右參贊) 윤필상(尹弼商)에게 치서(馳書)하기를,
“지금 오는 최명손(崔命孫)이 말한 군기(軍器)의 일은 일이 끝난 뒤에 하도(下道)에 나누어 주고 3천 명의 군사를 올려 보내는 것이 편하겠다. 만약 남는 자나 나누어 주지 못한 자가 있거든 폐단이 없이 운수(運輸)하게 해 주어라. 사복시(司僕寺)의 말[馬]이 피곤하여 능히 걸을 수 없는 놈은 머물러서 기르고, 그 나머지도 모두 올려 보내라. 경군관(京軍官)과 하도 군사(下道軍士)를 머물러 두어 방어하는 일은, 모두 불가(不可)하다. 그러나 경군사(京軍士)로서 부득이한 자는 적당히 머물러 두어라.”
하였다.
【원전】 8 집 129 면
【분류】 *외교-명(明) / *군사-군기(軍器)


明谷集卷之二十五
 墓誌
先祖考文忠公府君墓誌 a_154_377b


昔在新羅初。有六部大人。是佐赫居世。蔚有勳伐。崔氏其一也。其後世著籍于完山。譜自神虎衛上將軍諱純爵始者爲吾祖。五世而有諱得枰。選部典書。諱宰。藝文館提學。諡文貞。兩世顯于麗季。諱有慶。參贊議政。諡平度。諱士康。右贊成。諡敬節。兩世著于王國。自是五世而有諱秀俊。隱德不仕。贈左贊成。生諱起南。文科歷敭華顯。官止通政大夫永興大都護府使。贈領議政。號養菴。游牛溪成先生之門。文行伏一世。養菴娶全州柳氏觀察使永立之女。有子曰鳴吉。154_377c是卽吾祖考也。字子謙。號遲川。以萬曆丙戌八月廿五日降。少從白沙,玄軒兩先生學。與趙浦渚,張谿谷,李延陽爲道義交。世稱四友。年二十。中司馬兩試。魁其一。仍擢文科。聲譽藉甚。旣而時事大變。屈迹郞潛。仁祖反正。贊中興密策。首佐銓曹。陞左右侍郞。柄用旣專。不歷試。錄元功演食完城。以副學。論毓慶喪服宜三年。建別廟。重忤廷議。間爲大憲。貴戚憚之。出按畿甸。甿庶歌之。歷刑兵戶三曹參判,議政府右參贊。又拜副學。以宗伯兼藝文提學。進長天官。兼兩館大提學,體察副使。秉銓主文者凡四載。以恢公杜倖154_377d崇雅黜浮爲己任。又自度支本兵京兆。再入天官。時淸兵東猘。仁祖將幸江都。先送廟社公族。駕到崇禮門。虜騎已迫。公單騎馳赴虜陣。緩其鋒。車駕入南漢。虜遂進薄。公入城扈蹕。殫心效勩。及江都陷。遂有城下之盟。俄膺大拜。定傾弘多。始丁卯之亂。公主和議。群謗大起。至是又持前說。得以紓禍。顧訾謷者棼然未已。公前後實封數萬言。極論經權。請上剛大爲心。以爲恢復之圖。戊寅。陞拜領相。時淸人徵師。將犯天朝。公以爲圍城媾和。宗社計也。今日助兵。國可亡。義不可從。遂不許。大致嘖言。公馳往請154_378a死。淸主釋不問。仁祖寢疾。宮中有巫蠱。上疑大長公主家。令公按治。公不從。上怒甚。特差節使赴瀋。無何。上旨極嚴。公在龍灣上箚。引江充李泌事。仍辭相職。又以微事坐罷。卜居城東。數年家食。壬午。復入相府。尋以北嘖。有瀋陽之役。先是公具一咨。抵明朝陳都督。歷陳小邦心事。慮未達。更具咨奏。付僧人獨步。送于洪軍門承疇。往復數次。事頗祕。淸人蓄疑憑怒。遣將覈治之。公馳傳至鳳城。淸將詰問誰主此事者。答曰。吾是國大臣。吾實主之。他無與知者。未幾。以公入瀋。幽諸北館。明年。移繫南館。粤四年。公154_378b轍始東。疏論姜庶人之獄。引易衆允悔亡。寓居湖西之鎭川。結茅溪上。爲終焉計。承召命上來。遽嬰奇疾。以丁亥五月十七日告終。享年六十有二。自疾至喪。醫問賵襚。恩禮優異。其八月十九日。葬于淸州治北大栗山坐壬之原。元配張氏。右贊成玉城府院君晩之女。無子。以公弟參判公惠吉之次子後亮爲後。官漢城左尹。襲封完陵。繼室許氏。陽川伯宣文之後。縣令嶙之女。擧二男。曰後尙。弘文館應敎。次幼亡。側出一女歸僉知具鐄。公立後而有已出。仁祖問後事。請以胡安國爲法。左尹娶觀察使安獻徵女。生三男154_378c二女。男錫晉振威縣令。次卽錫鼎。次錫恒弘文館修撰。女適進士尹濟明,學生申轂。應敎娶咸陵府院君李澥女。無子。以錫鼎爲子。弗類得於所傳聞。公之未弱冠。李白沙語人曰。崔某學問見處甚高。非老夫所可窺。初釋褐。申玄軒在銀臺。謂其僚曰。子謙雖抱羸病。精神粹鍊。如精金美玉。他日必爲名世之器。張谿谷字而稱曰。赤心殉國。不避死生。子謙眞社稷臣。又曰。子謙之南漢主和。以箕子爲心者也。又以房謀自居。而杜斷歸公云。李白江嘗曰。屈子之忠。忠而過者也。完相之忠。亦過於忠者也。李澤堂評公文曰。遲相154_378d文章。筆頭有舌。可與陸宣公奏議相上下。趙浦渚祭文曰。兄之敏銳之才。深妙之文。絶出等夷及至臨亂見危。勇於自當。辭直理正。不攝不挫。雖叔孫昭子見執於晉。何以過之。李延陽論中興人物。必以公爲稱首曰。完城是問氣。又曰。完城事業。最其大者。協贊匡復。偉績也。極論邦禮。卓識也。單騎赴敵。大勇也。冒謗言和。至忠也。力拒徵兵義也。身幽燕獄節也。不染朋比公也。處人骨肉仁也。嗚呼。先祖立朝本末。昭載國乘。弗類蒙魯甚。曷足以闡揚先德。敢用書師友諸公之言。附于誌刻而無其辭。後之篤論者曰。禮論昭揭154_379a大倫。庶幾合聖人之經。和議圖存宗國。庶幾合聖人之權。人或黜心而循迹。舍實而求名。百世之下。當有知公者。公沒之三十年後。太常議諡法。勤學好問曰文。危身奉上曰忠。大學士西河李公敏敍實撰其諡狀云。歲庚午五月日。孫男嘉善大夫前吏曹參判錫鼎謹誌。

明谷集卷之二十三
 碣銘
高祖妣贈貞敬夫人宜寧南氏墓碣銘 a_154_324a


夫人姓南氏。諱某。系出宜寧。八代祖諱在。太祖朝開國功臣。領議政宜寧府院君。生景文。兵曹議郞。贈領議政。生智。左議政。生倫。觀察使。觀察生府使憬。是爲夫人之高祖。曾祖諱致元。尙成廟慶順翁主。封▦城尉。號琴軒。王父諱沂。敦寧參奉。父諱尙質。字仲繪。養德不仕。贈戶曹參議。母曰李氏。卽我穆祖兄注簿諱英襲之後。安東府使瑀之女。年若干。歸于崔154_324b氏。贈左贊成諱秀俊。其配也。崔亦三韓大姓。舅曰贈判書諱嶪。平度公有慶之後。贊成公年四十而早卒。參議公無子。只有一女。以託後事。夫人以萬曆丙申六月初二日卒。後贊成公之歿二十四年矣。夫人擧二男二女。男長曰起南。卽我曾祖。文科。官至通政永興府使。象村申相公誌其幽堂。谿谷張相公銘其顯刻。次起源。僉知中樞府事。二女皆早歿無子。曾祖有四男。長來吉。文科工曹判書完川君。其次鳴吉。文科領議政。號遲川。諡文忠。文章勳業冠一時。次惠吉。文科吏曹參判。次敬吉改名晩吉。中樞經歷。一女適參154_324c判韓必遠。側出男正吉。折衝護軍。僉樞公有二男。廷吉通德郞。獻吉宣敎郞。女適承旨尹得說。側出男二人女一人。完川君生一男後胤。魁文科。官止持平。三女適主簿李齊賢,郡守尹鴻擧,掌令李堥。議政公初娶玉城府院君張晩女。無子。以弟參判公第二子後亮爲後。卽我嚴君也。今爲忠勳府都事。繼室宗廟署令許嶙女。有二男。後尙文科。今爲弘文館副校理。次殤而夭。側出女一人。參判公生三男。長曰後定縣監。贈左承旨。其次卽嚴君後遠。敎官二女適參奉宋以鉉,進士鄭鈗。側出男三人女五人。經歷一男後寔。154_324d筮蔭仕。女三人。通德一男後徵。女四人。宣敎出爲宗叔起門後而無子。以族人之子爲後。尹得說一男三女。內外雲仍不盡記。嗚呼。完山之崔。自得姓來。世襲冠冕。逮我高祖。歷五世不達。曾祖永興公甫成童而孤。崔氏之緖。不絶而僅續。世又以淸素傳家。家事益落。殆無以復振。而夫人鞠遺孤甚劬。以底有成。子姓詵詵。皆知服詩禮之訓。簪笏聯翩。俾不墜家聲。凡我嗣人。寧可不知其所自歟。惜乎。年代旣遠。事蹟無徵。梱範徽音。十不能記其一二。豈非後承之恨哉。始高祖窆于高陽郡之西。而夫人之葬。在楊州治之東。欲154_325a改卜他山而合祔焉。臺史曰。兩山並吉。不必遷。遂寢不遷。銘曰。
維楊東板谷里。水回環山秀異。坤其面艮其背。百世之後。知其爲崔相遲川之王母。
明谷集卷之九
 
慶州羅王殿重修記 a_154_010c


慶州大尹呂侯必容以書來曰。州是新羅故都。我莊憲王十一年。立廟于州治。以祭羅王始祖。每歲春秋仲月。降香祝幣。式虔于享。殿宇東西廂。內外神門。旣正位置。簠簋豆籩罍爵之數。咸備禮儀。置位田五結。收其租以助粢盛。復良民六家。俾守護之。盛朝欽154_010d崇之典至矣。萬曆壬辰之燹。殿宇煬爲灰塵。一殿僕負位版以避。越十年辛丑。李公時發爲按使。先立祠殿。而未遑於廂序。募僧人守之。越十八年戊午。觀察朴公慶新行部展謁。仍舊貫重建。凡陶瓦鳩材。役民支調。並有指畫。擇鄕中有識士子。使之看檢。名曰守護官。行之近百年。必容忝尹玆土。閔其廟貌陊剝。議于觀察朴公權。狀聞于朝。特賜米包。降香祝。行移安祭。按使亦捐穀以助。於是召工僝事。樑桷之腐朽者易之。階砌之㩻傾者正之。丹雘鋪排。並皆一新。別建典祀廳三間。簡邑士崔國珪任堯世。董其役。甲申春154_011a始事。不數月而工告訖。以三月丁巳。還安神版。玆事也不可以無識。盍惠以一言。錫鼎發書而歎曰。長民者之職。不惟治貢賦斷詞訟而已。其重實在敍倫敦俗。使民日趨於善焉耳。今去羅祖千有八百餘歲。其民重厚多質。識君臣父子之懿。猶有先王之遺風。繄羅王之賜也。然年代夐邈。遺澤易斬。使後世民俗不忘前王。而樂於事育。興於忠敬。其必有所在矣。此大易萃渙二卦。以假廟致享。爲萃聚人心之本者也。本朝治化。莫隆於英廟。而建祠崇報。寔肇于玆時。則昔之渙者。於斯萃矣。然運有崇圮。跡有廢興。凡物之154_011b成毀弛張。相尋於無窮。而政擧於人存。道生於本立。然則起頹嗣虔之責。其不在後來官長歟。宋靜江府。故有虞帝廟。南軒張公始行府事。新其棟宇。以妥皇靈。晦庵朱夫子書其事于石。克彰虞帝盡倫明敎之化。以詔無極。今呂侯之爲政。以是爲先。其亦聞敬夫之風乎。侯旣修廟宇嚴祀典。以示化民之所自。又設法令。申護羅代諸陵。禁其偸葬與冒耕者。每歲春秋。分遣官吏。伐草修塚。以爲恒式。其志勤矣。抑余因是有所感矣。孔子嘗說夏殷之禮而杞宋無徵。猶有歎焉。況吾東海外偏邦。文獻尤無足徵者耶。然二代遺154_011c書。尙有坤乾夏時之屬。爲後人所考信。又嘗聞魯侯廟。有欹器金人。鳳翔夫子廟。有周時石鼓。未知羅王故都。亦有此等典訓及宥坐諸器否。侯可能加意訪問。以備名都故事否。錫鼎方傾耳以俟。至於修廟年月委折。略備於來書。玆不贅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