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최씨 금석문 등/홍숙 최기남 신도비 (방조)

관찰사 최공 신도비명(觀察使崔公神道碑銘) 홍숙 휘 기남 신도비병

아베베1 2013. 2. 27. 20:36

 

 

 

 

상촌선생집 제28권

 신도비명(神道碑銘) 11수
관찰사 최공 신도비명(觀察使崔公神道碑銘)


흠은 벼슬길에 오르기 전에 이미 몽은(夢隱) 최공(崔公)이 팔척 장신에다 호걸다운 용모를 지녀 속태를 벗은 혼탁한 세상의 호장부(好丈夫)라는 것을 알고 생각하기를 “공은 반드시 활기차고 씩씩하게 진보하여 묘당에 입신할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지방의 방백이 되어 만리 타향에서 공을 세울 것이지 결코 구질구질하게 서울 장안의 녹미(祿米)만 찾고 있지는 않을 것이다.” 하였다. 그 뒤에 흠은 과거에 급제하여 낭서(郞署)를 역임하고 만력 임진년에 체찰사의 막하에 차출되어 그 부관으로 호남을 순찰하였는데, 몽은공은 그때 전라 도사(全羅都事)로 있었으므로 날마다 함께 어울려 군중의 일을 같이 처결하는 과정에서 더욱 어느 한 지역을 담당할 만하다는 것을 알았으며 아울러 공의 임진년 사적을 얻어들었으니, 다음과 같다. 왜적이 전력을 다해 쳐들어올 당시에 관찰사 이광(李洸)은 10만 대군을 거느리고서 적의 꼴도 보기 전에 궤멸하고 더 이상 북상할 계획을 하지 못하자, 공은 의분에 겨워 적과 함께 살 수 없다고 맹세하고 전주 사민(士民)에게 포고하기를 “적이 경성으로 들어가 주상은 서쪽으로 파천하였고 호남 속에서도 풍패(豐沛 전주를 말함)만 온전하니, 이곳을 떠나 어디로 갈 것인가. 일이 만약 잘못된다면 나를 이 땅에 묻어달라.” 하고, 마침내 사력을 다해 전주를 지켰다. 얼마 안 되어 조정이 이광을 문책하여 권공 율(權公慄)이 그 후임이 되었다가 다시 원수로 승진하여 경기 지방으로 진군하고 이공 정암(李公廷馣)이 그 후임이 되었다. 공이 군병을 거느리고 남원을 지키고 있을 때 중국 참장 낙상지(駱尙志)가 순천(順天)에서 진주(晉州)가 함몰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남원으로 와 공과 합류하였다. 그런데 적의 기병이 주변 고을까지 접근하여 남원 사람들이 술렁거리며 밧줄을 타고 성을 빠져나가자, 어느 한 역관(譯官)이 공에게 피신할 것을 권하였으나 공은 흔들리지 않으니 낙장(駱將)이 의롭게 여겼다. 공은 낙장과 연대하여 바깥 진영을 설치하고 군병을 보내 돌아가는 적을 초멸함으로써 남원이 보존되었으며, 또 한 도내의 군량을 대대적으로 운송하여 권 원수(權元帥)의 군사에게 보급하였다. 그 사실이 조정에 보고되자 공의 벼슬을 올려 치하하였으나 공을 시기하는 자가 저해하였다. 그 후 몇 년 뒤에 흠은 또 권 원수의 막료가 되었는데 권공이 임진년에 국사에 사력을 다한 자를 거론할 때는 반드시 ‘최공, 최공’ 하였다.
고의 휘는 철견(鐵堅), 자는 응구(應久)이고 몽은은 그의 호이다. 최씨의 선계는 전주에서 나왔는데 원조(遠祖) 득평(得枰)은 고려조를 보좌하였고 본조에 들어와 대대로 관직을 살았다. 고조 효기(孝基)는 증 이조 참판이고 증조 해(瀣)는 이조 참의이고 조부 희증(希曾)은 숨은 덕이 있었는데 증 형조 참의이며, 선고 역(櫟)은 증 호조 참판이고 선비 이씨는 선계가 선파(璿派)에서 나왔는데 희릉령 석(熙陵令晳)의 따님이다. 가정 무신년(1548, 명종3)에 공을 낳았다.
공은 일찍 부모를 여의고 외가에 자랐는데 능히 스스로 분발해 글을 배워 조금 컸을 때 이미 이름이 났다. 병자년에 사마시에 합격하고 을유년에 별시에 장원 급제한 뒤에 전적ㆍ감찰ㆍ형조 좌랑ㆍ사간원 정언ㆍ병조 좌랑ㆍ대동찰방(大同察訪)을 역임하였다.
경인년에 다시 병조로 들어가 정랑이 되었으며 서장관으로 연경에 갔다가 돌아와서 직강과 병조 정랑이 되었고, 지방으로 나가 전라 도사(全羅都事)가 되었는데 공로를 인정받아 승진하여 풍저창 수(豐儲倉守)를 겸임하였다.
계사년에 광주 목사(光州牧使)가 되고 정유년에 수원부사(水原府使)가 되었으며, 을해년에는 조정으로 들어와 내자시 정(內資寺正)이 되고 다시 정언ㆍ장령ㆍ필선ㆍ사간에다 보덕(輔德)을 겸임하였다. 예빈시 정(禮賓寺正)으로 체직되어서는 상소하여 시폐(時弊)를 개진하니 선묘가 가상히 여겼다. 얼마 안 되어 집의에 제수되고 동부승지로 승진하여 통정에 가자되었다가 곧 대사헌이 되었다. 신축년에 황해관찰사에 제수되고 호조 참의로 체직되었으며 갑진년에 춘천 부사(春川府使)가 되었다가 신병으로 해직되어 돌아왔다. 무신년에 선묘가 승하하셨을 때 풍수가의 말로 인해 산릉을 오래도록 잡지 못하자 공은 상소하여 그 부당함을 말함으로써 조정의 논의가 마침내 결정되었다. 만년에 신병이 들어 근 10년 동안 칩거 생활을 하다가 무오년(1618, 광해군10) 겨울에 마침내 일어나지 못했으니, 향년 71세였다. 이듬해 기미년에 양주(楊州) 송산(松山) 해좌(亥坐)의 자리에 장사지냈는데 선영이 있는 곳이다. 부인은 진주 정씨(晉州鄭氏)로 진사 윤붕(允弸)의 따님인데 공보다 7년 앞서 작고했으며 공과 합장하였다.
3남 4녀를 두어 장남은 행(行)으로 군수이고 다음은 구(衢)로 전적이고 다음은 현(衒)으로 요절하였으며, 딸은 박신(朴信)ㆍ목륭(睦霳)ㆍ심기(沈綨)ㆍ조창원(趙昌遠)에게 시집갔고 서출(庶出)로 1남 연(衍)이 있다. 내외 손자는 약간 명이 있다.
공은 담박하고 차분하여 공명을 세우는 것을 일삼지 않았고 평소에 재산을 늘리는 것을 마음에 두지 않았다. 책을 보기를 좋아하여 손에서 책이 떠나지 않았고 문장력이 매우 풍부하여 붓대를 잡으면 거침없이 수백 자를 즉시 이루어냈다. 일찍이 승지로 있을 때 선묘께서 그 문장을 기특하게 여겨 고문 중에서 어떤 것을 숭상하는가 묻기까지 하였다. 이미 재주와 기국을 갖추었으면서도 지닌 것을 다 베풀어 쓰지 못하였으니, 장차 하늘의 보답이 어찌 한량이 있겠는가. 흠의 아들 익전(翊全)은 공의 사위 조군(趙君)의 동상랑(東床郞 사위의 별칭)이 되었으므로 흠이 공에 대해서는 한 조정에 벼슬하여 우의가 두터운 정도만이 아니다. 다음과 같이 명한다.

쓰여질 것 같더니만 / 如必以施
뜻을 얻지 못했으니 / 而乃不偶
자기 당댄 막혔으나 / 嗇之于身
뒤에 결실 거뒀다네 / 而食於後
울창한 저 동녘산은 / 鬱彼東阡
공의 만년 무덤인데 / 萬年之藏
사실대로 명을 지어 / 我銘非諛
이 현당을 빛낸다오 / 賁玆玄堂