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최씨 금석문 등/홍숙 최기남 신도비 (방조)

홍숙 휘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영의정 겸 영경연 홍문관 예문관 춘추관 관상감사 세자사 완흥부원군

아베베1 2014. 12. 18. 04:06

 

 

 

 

 

 

 

 

계곡선생집 제13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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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명(碑銘) 9수(首)
유명조선국 증 순충적덕병의보조공신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영의정 겸 영경연 홍문관 예문관 춘추관 관상감사 세자사 완흥부원군 행 통정대부 영흥대도호부사 최공 신도비명(有明朝鮮國贈純忠積德秉義補祚功臣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領議政兼領經筵弘文館藝文館春秋館觀象監事世子師完興府院君行通政大夫永興大都護府使崔公神道碑銘) 병서

 


공의 휘는 기남(起南)이요 자는 흥숙(興叔)이다. 그 선조는 전주(全州) 사람으로서 상장군(上將軍) 순작(純爵)의 후예이다. 어려서부터 자질이 탁월하였으며 장성하여서는 우계(牛溪 성혼(成渾)의 호) 성 선생(成先生)에게 수학하였는데 문행(文行)으로 동료들의 추중(推重)을 받았다.
을유년 사마시(司馬試)에 입격하여 태학(太學)에서 노닐 적에, 호남의 사인(士人)이 상의 뜻에 거슬리는 말을 하다가 하옥되는 사건이 발생하자, 공이 제생(諸生)의 앞에 서서 상소하여 논했는데, 이에 선묘(宣廟)가 감동하여 깨닫고는 즉시 내보내 주었다. 그러다가 신묘사화(辛卯士禍)가 일어났을 때에는 공이 포의(布衣)의 몸으로 역시 걸려들어 정거(停擧 시험 응시 자격이 박탈되는 것)되는 벌을 받기도 하였다. 임진년에 왜란이 일어나자 늙은 어버이를 모시고 피난을 하였는데 갖은 고생을 하며 양식을 구해 봉양하느라 수염과 머리카락이 모두 하얗게 세었다.
경자년에 비로소 벼슬길에 올라 왕자의 사부(師傅)가 되었는데, 3명의 왕자를 가르치면서 사도(師道)를 엄하게 준수하여 세 왕자의 학문이 날로 발전되게 하였다.
임인년 알성시(謁聖試)에서 병과(丙科)로 급제한 뒤 성균관 전적에 임명되었다가 병조 좌랑으로 옮겨졌으며 지제교(知製敎)에 선발되었다. 이로부터 시강원 사서ㆍ문학과 형조ㆍ예조ㆍ병조의 정랑을 차례로 역임하였다.
을사년에 함경북도 평사(咸鏡北道評事)로 좌천되었다. 당시 중국의 동관(潼關)이 막 오랑캐에게 함락되었으므로 사람들이 북쪽 변방을 사지(死地)로 여긴 나머지 평사에 임명되기만 하면 번번이 핑계 대고 교묘히 빠져 나오곤 하였다. 그리하여 9차례나 다시 임명을 한 끝에 공에게 이르렀는데, 공은 말하기를,
“아무리 어려운 일이라도 사양하지 않는 것이 신하된 자의 직분이다.”
하고는 즐거운 기색으로 부임했다가 1년이 지나고 나서 체직되어 돌아왔다. 그 뒤에 다시 예조와 병조의 낭관(郞官)ㆍ문학(文學)ㆍ직강(直講)을 차례로 거쳐 무신년에 시강원 필선으로 승진하였다.
광해(光海) 초기에 사헌부 장령이 되었다가 옥당에 뽑혀 들어가 수찬과 교리를 지냈으며, 암행어사로 황해도를 염찰(廉察)하고 돌아와서는 예빈시 정(禮賓寺正)에 임명되었다. 또 필선에서 보덕으로 승진한 뒤 의정부 검상ㆍ사인과 홍문관 부응교와 사헌부 집의와 성균관 사성과 승문원 판교 등의 자리로 옮겨졌다.
임자년에 통정대부로 품계가 오르면서 영흥대도호부사(永興大都護府使)로 외방에 나갔다. 광해가 장차 대비(大妃)를 폐위(廢位)시키려 하자 적신(賊臣) 이이첨(李爾瞻)이 이를 부추겨 마침내 대옥(大獄)을 일으킨 결과 명류(名流)와 구신(舊臣)들이 모두 결박당하는 몸이 되었다. 공 역시 체포되어 하마터면 불측(不測)한 지경에 떨어질 뻔하다가 삭직(削職)된 채 한가로이 지내게 되었는데, 7년이 지난 기묘년 모월 모일에 이르러 질병으로 세상을 하직하였다. 이때가 태어난 지 꼭 60년이 되는 해였다.
공은 천품이 근후하고 효성과 우애가 독실하였다. 겨우 15살의 나이에 부친을 여의었는데도 거상(居喪) 중에 예법을 어기는 일이 없었으며, 어려서부터 외가(外家)에서 길러지면서 외할아버지 모시기를 마치 부자지간처럼 하며 정성과 예의를 다하였다.
평소에는 말을 더듬거리며 주저하는 듯하다가도 막상 관직에 나아가 임무를 수행할 때에는 자신의 있는 힘을 모두 기울여 책임을 완수하였으며 쉬운 일이건 어려운 일이건 가리지 않고 조정의 명에 응하였다.
일찍이 글을 올려 군정(軍政)에 대해서 논한 것이 수만 언(言)에 달했는데 선조가 이를 보고서 가상하게 여겼었다. 그리고 광해가 아직 그다지 난정(亂政)을 행하지 않고 있을 적에 공이 옥당에 있으면서도 6조목으로 나누어 상소하며 진달하였는데 모두가 군국(軍國)의 대계(大計)에 관한 것이었다. 그중에서도 상제(喪制)를 극진히 할 것과 우애를 돈독히 할 것과 붕당을 없앨 것과 인재를 아낄 것 등의 조목에 이르러서는 더욱 곡진하게 자신의 뜻을 개진하였는데, 말이 비록 채택되지는 않았으나, 그래도 삼년상(三年喪)의 의논이 정해진 것은 바로 공이 힘쓴 덕분이었다.
임해군(臨海君)의 옥사(獄事)가 일어났을 때 공이 문사낭청(問事郞廳)이 되었다. 그런데 국옥(鞫獄)이 진행되는 동안 혐의가 없다는 것을 알고서 이에 대한 소장을 올리려 하였으나 친척들이 극력 저지하는 바람에 마침내 그만두고 병을 핑계 댄 채 출사(出仕)하지 않았다.
이때 어떤 궁녀가 총애를 믿고 내밀(內密)하게 청한 나머지 나인(內人)과 인척(姻戚) 관계가 있는 천례(賤隷)를 내수사로 이속(移屬)시키라고 광해가 명한 일이 있었다. 그러자 공이 차자(箚子)를 올려 이를 논박하였는데, 그 말이 매우 굳세고 간절하였다.
수상(首相) 이원익(李元翼)이 경기 선혜청을 설립하려고 할 때 조정에서 많이들 이견을 제시하였으나 공만은 극력 찬성하였는데 지금까지도 경기 백성들이 이를 편하게 여기고 있다. 그리고 진공(進供)하는 연지(硯紙)의 체양(體樣)이 너무도 크고 사치스러워서 선혜청이 재손(裁損)해 줄 것을 계청 하였으나 상이 허락하지 않았는데, 이에 공이 다시 상소를 하여 논하였으므로 광해가 더욱 좋아하지 않았다. 그리고 언젠가는 연석(筵席)에서 폐단을 개혁해야 하는 당위성을 극력 논하였는데, 광해가 낯빛을 바꾸면서 상신(相臣)을 돌아보고 말하기를,
“조정 신하들이 어수선하게 고치는 일을 꽤나 좋아하고 있는데 이는 아름다운 일이 못 된다. 대신이 의당 진정시켜야 할 것이다.”
하기도 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시대 상황이 크게 변하자 공이 내직(內職)에 몸담고 있는 것을 달갑게 여기지 않고서 강력하게 외직(外職)을 구하였는데, 일단 영흥(永興)으로 가게 되자 개연(慨然)히 말하기를,
“이곳이라고 해서 어찌 멋지게 해 볼 수가 없겠는가.”
하였다. 그리고는 잡다한 부세(賦稅)를 견감(蠲減)하여 백성의 급한 처지를 완화해 주고, 우수한 자제들을 선발한 뒤 무리를 지어 교습시키자 사람들 모두가 분발하여 학문에 힘쓴 결과 거문고를 타며 낭송하는 소리가 경내에 끊이지 않게 되었다. 공은 또 융사(戎事)에 더욱 관심을 기울여 속오(束伍)를 편성하고 기격(技擊)을 훈련시키는 한편 전차(戰車)를 만들어 야전(野戰)을 익히게 하였는데, 이 모두를 척씨(戚氏 병서(兵書) 《기효신서(紀效新書)》를 지은 명(明) 나라 척계광(戚繼光)임)의 병법에 의거하여 준행하였다.
그리하여 1년이 지나는 사이에 정사가 크게 펼쳐지게 되었는데, 지금까지도 영흥이 문풍(文風)의 고장으로 일컬어지고 있는 것은 바로 공의 교화 덕분이라고 할 것이다.
공이 관직 생활을 그만두고 물러나서는 가평(加平) 시냇가에 집을 짓고 살면서 만곡정사(晚谷精舍)라는 편액(扁額)을 내걸었는데, 대체로 젊었을 적에는 양암(養菴)으로 자호(自號)를 삼다가 이때부터 만옹(晚翁)으로 고쳐 불렀다고 한다.
공의 증조 명손(命孫)은 종사랑(從仕郞)이고, 조부 업(嶪)은 빙고 별제(氷庫別提)로 사헌부 집의를 증직받았다. 부친 수준(秀俊)은 승정원 좌승지에 추증되었고, 모친 의령 남씨(宜寧南氏)는 호조 참의에 증직된 상질(尙質)의 딸이다.
공은 같은 군(郡) 내의 유씨(柳氏)에게 장가들었는데, 부친은 관찰사 영립(永立)이다. 부인은 행실이 지극하고 부도(婦道)를 매우 잘 갖추어 규문(閨門) 안에서 일어나는 아주 미세한 일들도 모두 합리적으로 처리하였는데, 공보다 4년 먼저 60세의 나이로 죽었다.
아들 다섯을 두었다. 장남 몽길(夢吉)은 어린 나이에 일찍 죽었다. 다음 내길(來吉)은 한성부 좌윤이고, 다음 명길(鳴吉)은 경기 관찰사이고, 다음 혜길(惠吉)은 홍문관 부수찬인데, 이상 모두 문과(文科)를 통해 조정에 진출하였다. 다음 경길(敬吉)은 모관(某官)이다. 딸은 모관인 한필원(韓必遠)에게 출가하였다. 내외손은 남녀 모두 약간 인이다.
관찰(觀察)은 젊어서부터 명성을 떨쳤는데 중흥(中興)의 은밀한 모의에 적극 참여하여 가장 높은 공을 세웠으며 한 시대의 명신(名臣)으로 일컬어지고 있다. 형인 좌윤과 함께 정사공신(靖社功臣)에 책훈(策勳)되었으며, 부모에게 은혜가 가해진 결과 공은 지금의 관직으로 증직되었고 부인은 정경부인(貞敬夫人)의 추증을 받게 되었다.
공은 당초 모지(某地)에 안장되었으나 택조(宅兆)가 불길한 관계로 모년 모월 모일에 모지(某地) 모산(某山)으로 이장(移葬)하면서 부인을 합폄(合窆)하였다.
그러고 나서 장차 묘도(墓道)에 비석을 세우려 하면서 관찰이 직접 행장(行狀)을 지어 가지고 나에게 와 명(銘)을 부탁하였다. 생각건대, 공은 나에게 아버님의 친구가 되는 분이시고, 관찰 형제로 말하면 또 나와 벗으로 지내는 사이이니, 의리로 볼 때 사양할 수 없는 일이다.
그래서 다음과 같이 명하였다.

군자의 행동 기준 / 君子之道
성실함 그것이니 / 誠愨爲基
술에다 비유하면 / 譬彼酒醴
묽지 않은 진국이리 / 寧醇毌漓
머리 회전 빠르고 약아빠진 인간들 / 便儇皎厲
기막힌 말솜씨로 아첨 떠는데 / 給辯姸辭
출세할진 모르지만 / 世所貴重
도와는 거리 멀지 / 去道遠而
아름다운 우리 최공 / 有美崔公
질박한 자세 지니고서 / 朴茂之姿
돈독한 행동으로 / 敦其質行
훌륭한 스승 모셨어라 / 服訓碩師
충의 모자에 신의 신발 신고 / 冠忠履信
시서의 옷 몸에 걸쳤나니 / 衣被書詩
현달(顯達)하기 시작한 건 뒤늦었어도 / 鴻漸雖晚
아름다운 풍모 모범이 되었지요 / 其羽可儀
어찌 험난함 없었으랴만 / 豈無夷險
오직 의로운 길 걸어가면서 / 唯義之之
남의 비밀 들추어내지도 않고 / 不激而訐
휩쓸려 뒤따라가지도 않았지요 / 不靡而隨
참되고 꾸밈없는 공의 속마음 / 肫肫悃愊
일처리할 때마다 드러났는데 / 發於事爲
몹시도 어려운 시대를 만나 / 遭時孔囏
결국은 낭패를 당하고 말았다오 / 竟躓于巇
어찌하여 그렇게도 후한 분에게 / 何蘊之厚
하늘은 인색하게 보답했을까 / 而嗇厥施
공에겐 부족하게 내려 줬어도 / 維躬之嗇
후손에게 복 주려는 의도였겠지 / 維後之貽
편안한 안식처 마련하는 일 / 宅兆安厝
효자된 도리상 당연히 할 일이라 / 玆惟孝思
점을 쳐 봐도 들어맞기에 / 旣契我龜
이곳 묘역으로 옮겨 왔다오 / 窀穸爰移
여주(驪州) 산 언덕 / 黃驪之岡
출렁이는 강물 줄기 / 其水瀰瀰
돌에 새겨 넣은 나의 이 비명(碑銘) / 我銘斯石
백대를 두고 밝게 전해지리 / 百代昭垂