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세 문성공 중랑장공 파조 관련/판사공파조 휘 용갑 자료

최용갑(崔龍甲) 등 33명에게 급제를 주었다

아베베1 2009. 12. 18. 12:57

고려사절요 제24권 충숙왕(忠肅王) 경신 7년, 원 연우 7년

 

○ 봄 정월 초하루 신사일에 원 나라에서 와서 고하기를, “일식(日蝕)이 있을 것이니 신정 축하의 예를 중지하고, 모든 관원들이 소복 차림으로 일식이 회복될 때까지 기다리라." 하였다. 계미일에야 하례(賀禮)를 거행하였다. ○ 총부전서(摠部典書) 윤석(尹碩)을 원 나라에 보내어 천추절(千秋節)을 축하하고, 길창군(吉昌君) 권준(權準)에게는 성절(聖節)을 축하하게 하였다.
○ 2월에 낭장 옥순(玉純)이 원 나라에서 와서 황제가 붕(崩)한 것을 고하였다. 조정의 모든 관원들이 자문(紫門)에서 회곡(會哭)하고, 검교평리 진양필(陳良弼)을 원 나라에 보내어 조위(弔慰)하게 하였다.
○ 왕이 미행(微行)으로 교외에서 사냥하였다.
○ 3월에 상왕이 황태후의 전지를 받아 환자 백안독고사(伯顔禿古思) 등 6명이 탈취한 토지와 노비를 모두 찾아 내어 그 본주인에게 돌려주라고 명하였다. 백안독고사는 스스로 거세(去勢)하고 엄인(閹人)이 되어서 기회를 얻어 인종황제(仁宗皇帝) 잠저(潛邸)에서 섬기었다. 아첨하고 음험하여 불법이 많으므로, 상왕이 매우 미워하였다. 백안독고사가 그것을 알고서 중상할 생각을 하고 있었으나, 인종과 황태후가 상왕을 후대하고 있으므로 말을 내지 못하였다. 일찍이 상왕에게 무례하므로, 상왕이 태후에게 청하여 장형을 가하였더니 원한이 더욱 깊어져서 인종이 붕하고 태후도 또한 물러나와 별궁에 살게 되자, 독고사(禿古思)는 더욱 두려워하는 바가 없이 팔사길(八思吉)에게 후하게 뇌물을 주고 온갖 모략으로 상왕을 무고하고 참소하였다.
○ 평리 김정미(金廷美)를 원 나라에 보내어 황제의 등극을 축하하게 하였다.
○ 여름 4월에 권부(權溥)를 첨의정승으로, 김이용(金利用)을 찬성사로, 조운경(趙雲卿)ㆍ이광봉(李光逢)을 평리로 임명하였다. ○ 원 나라에서 예부낭중(禮部郞中) 홀라출(忽刺出)을 보내와서 즉위 조서를 반포하였다.
○ 5월에 상왕이 다시 황제에게 주청하여 강남(江南)에 향(香)을 내리게 하였다. 대체로 시사가 장차 변할 것을 알고 환(患)을 피하고자 함이었다. 금산사(金山寺)에 이르렀을 때 황제가 사자를 보내어 급히 소환하고 기사(騎士)로 하여금 다그쳐서 몰아오게 하니 시종하던 신료들은 모두 달아나 숨고, 흥례군(興禮君) 박경량(朴景亮)과 수안군(遂安君) 이연송(李連松)은 독약을 먹고 죽었다. 백안독고사(伯顔禿古思)가 권세를 부리므로, 왕이 화를 면하지 못할 것을 두려워한 것이다.
○ 6월에 대호군 윤길보(尹吉甫)를 원 나라에 보내어 매를 바치게 하였다.
○ 가을 7월에 채홍철(蔡洪哲)을 평강군(平康君)으로 봉하고, 최성지를 판민부(判民部)로, 김정미(金廷美)ㆍ조연수(趙延壽)를 찬성사로 임명하고, 원충(元忠)을 평리로, 김원상(金元祥)을 삼사사로, 윤신걸(尹莘傑)ㆍ유돈(柳墩)을 밀직사로, 이제현을 지밀직사사로, 정윤흥(鄭允興)을 밀직부사로 임명하였다.
○ 찬성사 김정미를 원 나라에 보내어 상왕께 문안드렸다.
○ 8월에 원 나라에서 사자를 보내어 백안독고사에게 전지와 노비를 다시 주라고 명하고, 또 동녀와 고자를 요구하였다. ○ 감시를 고쳐 거자시(擧子試)로 하였다. 우대언(右代言) 허부(許富)가 이 과시(科試)를 관장하고 정을보(鄭乙輔) 등 80여 명을 뽑았다. 부는 글자를 잘 알지 못하였으므로 오직 방두(榜頭) 한 사람만 뽑고, 그 나머지는 우열(優劣)을 가리지 않고 봉미에 쓰인 이름을 열어 보는 차례대로 이름을 쓰니, 사람들이 모두 조소하였다. ○ 왕이 미행(微行)하여 근교(近郊)에서 사냥하였다.
○ 9월에 문선왕(文宣王)의 소상(塑像)을 만들었다. 왕이 은병(銀甁) 30개를 내주어 그 비용을 보조하였다. 재신ㆍ추신들도 모두 재물을 내어 보조하였다. ○ 상왕이 대도(大都)로 돌아오니, 황제가 중서성에 명하여, “관원을 시켜서 본국에 호송하여 안치하라." 하였다. 왕이 머뭇거리며 즉시 떠나지 않았다. 최용갑(崔龍甲) 등 33명에게 급제를 주었는데 이제현ㆍ박효수(朴孝修)가 뽑은 사람들이다. 왕이 효수의 청백함을 가상하게 여겨 은병(銀甁) 50개와 백미 1백 석을 주어서 학사연(學士宴)을 마련하게 하였다.
○ 정해일에 평주(平州) 온정(溫井)에 거둥하였다. 무술일에 조정의 모든 관원이 중문(中門)에서 영알(迎謁)하였는데, 판관(判官) 조문근(趙文瑾)이 거가(車駕) 앞에서 소리를 치니 말이 놀랐다. 왕이 화가 나서, 잡으라고 명하니, 모든 관원들이 다 달아났다. 그 뒤부터는 미행(微行)하다가 사람을 만나면 모조리 매질을 하였다.
○ 겨울 10월에 단양부주부(丹陽府主簿) 안축(安軸), 장흥고사(長興庫使) 최해(崔瀣), 사헌규정(司憲糾正) 이연종(李衍宗)을 원 나라에 보내어 과거에 응시하게 하였다. 해가 드디어 제과에 합격하였다. ○ 원 나라에서 상왕을 형부(刑部)에 회부하였다가 조금 뒤에 머리를 깎고 석불사(石佛寺)에 유치하였다.
○ 11월에 김이용(金利用)을 도첨의 정승(都僉議政丞)으로, 오잠(吳潛)을 찬성사로, 윤석(尹碩)을 밀직부사로 임명하였다. ○ 대호군 정적(鄭績)을 원 나라에 보내어 동녀를 바치고, 윤석ㆍ곽유견(郭惟堅)을 시켜 상왕께 문안드리게 하였다.
○ 12월에 원 나라에서 상왕을 토번 살사결(撒思結)의 땅으로 귀양보냈다. 경사(京師)와의 거리가 1만 5천 리였다. 수종하던 재상 최성지 등은 모두 도망하여 숨어서 나타나지 않는데, 오직 직보문각(直寶文閣) 박인간(朴仁幹)과 전 대호군 장원지(張元祉) 등 18명이 호종하여 귀양간 곳에 이르렀다. 백안독고사가 끊임없이 참소하여 화(禍)를 예측할 수 없더니, 승상(丞相) 배주(拜住)의 구해(救解)에 힘입어 화를 면할 수 있었다.
○ 정승 김이용을 원 나라에 보내어 방물을 바치고, 또 장항(張沆)ㆍ윤신계(尹莘係)를 보내어 상왕에게 노자(路資)를 올리게 하였다. ○ 전영보(全英甫)를 밀직부사로 임명하였다. ○ 조정의 모든 관원이 중서성에 글을 올려 상왕의 원통하고 억울한 사정을 호소하였다. ○ 중들을 민천사에 많이 모이게 하여 상왕을 위하여 기도하였다. ○ 다시 정방(政房)을 두어 대언(代言) 안규(安珪)에게 전주(銓注)를 관장(管掌)시키게 하고, 우상시(右常侍) 임중연(林仲沇), 의랑(議郞) 조광한(曹光漢), 응교(應敎) 한종유(韓宗愈) 등을 참여하게 하였다.

[庚申七年 元 延祐七年]

春正月,辛巳朔,元,來告日當食,停賀正禮,百官素服以待,不食,癸未,乃行賀禮。○遣摠部典書,尹碩,如元賀千秋節,吉昌君權準,賀聖節。○二月,郞將玉純,自元來報帝崩,百官會哭于紫門,遣檢校評理秦良弼,如元陳慰。○王,微行獵于郊。○三月,上王,承皇太后旨,命刷宦者伯顏禿古思等六人所奪土田臧獲,歸其本主,伯顏禿古思,自宮爲閹,因緣事仁宗皇帝藩邸,佞險多不法,上王深嫉之,伯顏禿古思知之,思有以中傷之,以仁宗及皇太后,待上王厚,不得發,嘗無禮於上王,上王,請於太后,杖之,怨恨益深,及仁宗崩,太后亦退居別宮,禿古思益無所畏,厚啗八思吉,百計誣譖之。○遣評理金廷美,如元賀登極。○夏四月,以權溥,爲僉議政丞,金利用,爲贊成事,趙雲卿,李光逢,爲評理。○元,遣禮部郞中忽剌出,來頒卽位詔。○五月,上王復請於帝,降香江南,蓋知時事將變,冀以避患也,行至金山寺,帝遣使急召,令騎士擁逼以行,侍從臣僚,皆奔竄,興禮君朴景亮,遂安君李連松,仰藥而死,蓋伯顏禿古思方用事,恐王不免也。○六月,遣大護軍尹吉甫,如元獻鷂。○秋七月,以蔡洪哲,爲平康君,崔誠之,判民部,金廷美,趙延壽,爲贊成事,元忠,爲評理,金元祥,爲三司使,尹莘傑,柳墩,爲密直使,李齊賢,知密直司事,鄭允興,爲密直副使。○遣贊成事金廷美,如元問上王起居。○八月,元,遣使命復給伯顏禿古思田民,且求童女火者。○改監試爲擧子試,右代言許富,掌是試,取鄭乙輔等八十餘人,富不解文字,唯取榜頭一人,其餘不分優劣,以坼名先後書之,人皆笑之。○王,微行,畋于近郊。○九月,塑文宣王像,王出銀甁三十,以助其費,宰樞皆出幣,助之。○上王,還至大都,帝命中書省,差官護送本國,安置,王,遲留不卽發。○賜崔龍甲等三十三人及第,李齊賢,朴孝修,所取也,王嘉孝修淸白,賜銀甁五十,米百石,令辦學士宴。○丁亥,幸平州溫井,戊戌,百官迎謁中門,判官趙文瑾,喝于駕前,馬驚,王,怒命執之,百官皆走,自後微行,見人則輒令歐之。○冬十月,遣丹陽府注簿安軸,長興庫崔瀣,司憲糾正李衍宗,應擧于元,瀣遂中制科。○元下上王于刑部,旣而祝髮,置石佛寺。○十一月,以金利用,都僉議政丞吳潛,爲贊成事,尹碩,爲密直副使。○遣大護軍鄭績,如元獻童女,尹碩,郭惟堅,問上王起居。○十二月,元,流上王于吐蕃,撒思結之地,去京師萬五千里,隨從宰相崔誠之等,皆逃匿不見,唯直寶文閣朴仁幹,前大護軍張元祉等十八人,從至流所,伯顏禿古思,讒訴不已,禍幾不測,賴丞相拜住,營救得免。○遣政丞金利用,如元進方物,又遣張沅,尹莘係,獻盤纏于上王。○以全英甫,爲密直副使。○百官,上書中書省,訟上王之冤。○大集僧徒于旻天寺,爲上王祈禱。○復置政房,以代言安珪,掌銓注,右常侍林仲沇,議郞曹光漢,應敎韓宗愈等,參之。

기사전거 : 墓誌銘(李穀 撰) 및 文集에 의함
 편찬 및 간행
拙藁千百은 1354년(공민왕 3) 晉州에서 초간되어 그중의 1帙이 일본 尊經閣에 소장되어 있다. 「동문선」이 편간되던 조선 성종조만 하더라도 시문집이 전해졌다고 추측되지만 임란 이후로는 극히 희귀해진 탓인지 權文海의 「大東韻府群玉」의 인용서에서 조차 누락되어 있다.
권말의 刊記에 의하면 至正 14년(1354) 8월에 晉州에서 개판된 사실과 당시의 助役者들의 명단이 실려 있다. 이때 참여했던 刻手 및 助役者들의 신분에 대하여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安廉使 郭忠守의 지휘 아래 진주목사 崔龍生이 주관한 것으로 짐작된다. 문집의 편찬ㆍ간행과정에 있어서는 李齊賢과 閔思平 등 절친한 친구나 후진들의 역할이 컸을 것으로 보이는데 그중에서도 全州崔氏 一門의 도움이 컸던 것으로 보인다. 崔龍生의 아우인 崔龍甲은 저자보다 2년 뒤이긴하지만 元에 가서 制科에 응시했던 경력을 가지고 있고, 이들과 從姪관계가 되는 崔宰는 저자의 「東人之文四六」을 福州(安東)에서 간행한 인물이다. 저자와 친밀한 관계를 가졌던 閔思平은 崔宰에게는 바로 아들의 妻外祖父가 되고, 崔宰의 아버지인 崔得枰은 저자의 부친인 崔伯倫을 급제시킨 郭預의 사위이기도 하다.
한편 「益齋亂藁」에 의하면 鄭國徑이 전라도 安廉使로 있을때 及菴 閔思平에게 「東人之文」과 「拙藁」를 받아 이를 간행한 사실을 알 수 있다.(「益齋亂藁」 권4, 〈送金海府使鄭尙書國徑得時字〉) 급암은 益齋와 더불어 저자의 절친한 知友였고 이러한 연고로 저자가 급암의 조부인 閔宗儒의 墓誌와 父인 閔頔의 行狀을 지어 준 바도 있다. 따라서 급암의 부탁을 받은 鄭國徑이 이를 간행하였으리라고 여겨지지만 이 판본의 간행 경위에 대하여는 알려져 있지 않으며, 郭忠守 등이 간행한 현존 晉州本과의 관계도 명확하지 않다.
그 후 1930년에 日本 東京 育德財團에서 1354년 초간본을 尊經閣 총간으로 영인한 바 있으며, 현재 영인본이 고려대학교, 국립중앙도서관, 성균관대학교에 소장되어 있다.
본서의 저본은 日本 尊經閣藏本을 영인한 국립중앙도서관장본이다.

기사전거 : 고려사ㆍ益齋亂藁 등에 의함拙藁千百은 1354년(공민왕 3) 晉州에서 초간되어 그중의 1帙이 일본 尊經閣에 소장되어 있다. 「동문선」이 편간되던 조선 성종조만 하더라도 시문집이 전해졌다고 추측되지만 임란 이후로는 극히 희귀해진 탓인지 權文海의 「大東韻府群玉」의 인용서에서 조차 누락되어 있다.
권말의 刊記에 의하면 至正 14년(1354) 8월에 晉州에서 개판된 사실과 당시의 助役者들의 명단이 실려 있다. 이때 참여했던 刻手 및 助役者들의 신분에 대하여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安廉使 郭忠守의 지휘 아래 진주목사 崔龍生이 주관한 것으로 짐작된다. 문집의 편찬ㆍ간행과정에 있어서는 李齊賢과 閔思平 등 절친한 친구나 후진들의 역할이 컸을 것으로 보이는데 그중에서도 全州崔氏 一門의 도움이 컸던 것으로 보인다. 崔龍生의 아우인 崔龍甲은 저자보다 2년 뒤이긴하지만 元에 가서 制科에 응시했던 경력을 가지고 있고, 이들과 從姪관계가 되는 崔宰는 저자의 「東人之文四六」을 福州(安東)에서 간행한 인물이다. 저자와 친밀한 관계를 가졌던 閔思平은 崔宰에게는 바로 아들의 妻外祖父가 되고, 崔宰의 아버지인 崔得枰은 저자의 부친인 崔伯倫을 급제시킨 郭預의 사위이기도 하다.
한편 「益齋亂藁」에 의하면 鄭國徑이 전라도 安廉使로 있을때 及菴 閔思平에게 「東人之文」과 「拙藁」를 받아 이를 간행한 사실을 알 수 있다.(「益齋亂藁」 권4, 〈送金海府使鄭尙書國徑得時字〉) 급암은 益齋와 더불어 저자의 절친한 知友였고 이러한 연고로 저자가 급암의 조부인 閔宗儒의 墓誌와 父인 閔頔의 行狀을 지어 준 바도 있다. 따라서 급암의 부탁을 받은 鄭國徑이 이를 간행하였으리라고 여겨지지만 이 판본의 간행 경위에 대하여는 알려져 있지 않으며, 郭忠守 등이 간행한 현존 晉州本과의 관계도 명확하지 않다.
그 후 1930년에 日本 東京 育德財團에서 1354년 초간본을 尊經閣 총간으로 영인한 바 있으며, 현재 영인본이 고려대학교, 국립중앙도서관, 성균관대학교에 소장되어 있다.
본서의 저본은 日本 尊經閣藏本을 영인한 국립중앙도서관장본이다.

기사전거 : 고려사ㆍ益齋亂藁 등에 의함
 구성과 내용
저자의 저술로는 「拙藁千百」2권 외에도, 우리나라 역대 시문을 뽑아 편찬한 「東人之文」25권이 전해지고 있다. 成俔의 「慵齋叢話」에는 「農隱集」1帙이 있었다고도 하나 현재 전하지 않는다.
「拙藁千百」2권에는 저자의 詩는 실려 있지 않고, 序ㆍ記ㆍ墓誌銘 등 43편의 文만이 실려 있다. 詩는 30여 수가 「東文選」에 選入되어 전하고 있다.
체제 및 편차에 있어서 본 문집은 序ㆍ跋 및 目錄은 실려 있지 않고 대부분 저작 시대순으로 편차되어 있다. 저작 시기는 1310년대 후반부터 졸년인 1340년까지 20여 년 간의 작품이 실려 있다. 文體별로는 序 12편, 記 4편, 墓誌(銘) 15편, 策 2편, 書 3편, 贊 1편, 題 2편, 跋 1편, 行狀 1편, 祭文 1편, 傳 1편, 碑文이 1편으로, 序와 墓道文이 대부분이다. 그중에는 「東人之文」과 「東人四六」에 대한 自序와 自傳的인 〈猊山隱者傳〉을 제외하면 交遊나 對人에 관한 저작들이 많은 편이다. 권미에는 1354년 晉州開板시의 刊記가 있다.
저자의 저술로는 「拙藁千百」2권 외에도, 우리나라 역대 시문을 뽑아 편찬한 「東人之文」25권이 전해지고 있다. 成俔의 「慵齋叢話」에는 「農隱集」1帙이 있었다고도 하나 현재 전하지 않는다.
「拙藁千百」2권에는 저자의 詩는 실려 있지 않고, 序ㆍ記ㆍ墓誌銘 등 43편의 文만이 실려 있다. 詩는 30여 수가 「東文選」에 選入되어 전하고 있다.
체제 및 편차에 있어서 본 문집은 序ㆍ跋 및 目錄은 실려 있지 않고 대부분 저작 시대순으로 편차되어 있다. 저작 시기는 1310년대 후반부터 졸년인 1340년까지 20여 년 간의 작품이 실려 있다. 文體별로는 序 12편, 記 4편, 墓誌(銘) 15편, 策 2편, 書 3편, 贊 1편, 題 2편, 跋 1편, 行狀 1편, 祭文 1편, 傳 1편, 碑文이 1편으로, 序와 墓道文이 대부분이다. 그중에는 「東人之文」과 「東人四六」에 대한 自序와 自傳的인 〈猊山隱者傳〉을 제외하면 交遊나 對人에 관한 저작들이 많은 편이다. 권미에는 1354년 晉州開板시의 刊記가 있다.

필자 : 辛容南
필자 : 辛容南