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세 문성공 중랑장공 파조 관련/판사공파조 휘 용갑 자료

진사 최용갑(崔龍甲) 등을 뽑았다. 왕이 효수의 청백(淸白)을 기뻐하여 은

아베베1 2009. 12. 18. 13:11

경신년 충숙왕 7년(원 인종 연우 7, 1320) 동사강목 하

춘정월 상왕이 원에 있었다.

2월 정화공주를 장사하였다. 능호(陵號)는 사서에 빠졌다.
○ 사신을 원에 보내어 진위(陳慰)하였다.

인종(仁宗)이 붕(崩)하였기 때문이다.


3월 왕이 미행으로 교외(郊外)에서 사냥하였다.

왕이 미행으로 유렵하면서 사람을 만나면 거의 죽도록 구타하여 사람들이 두려워하였다. 또 많은 기악을 모아 매일 밤을 연락(宴樂)하였는데, 그 탐락(耽樂)함이 법도가 없고 사여(賜與)가 헤아릴 수 없이 많아 부고(府庫)가 텅 비게 되었다.

○ 사신을 원에 보내어 즉위를 하례하였다.

영종(英宗)이 즉위하였기 때문이다.


하4월 권보(權溥)를 첨의정승(僉議政丞)으로, 김이용(金利用)을 찬성사로 삼았다.
○ 왕이 밀직부사(密直副使) 윤신걸(尹莘傑)을 매 때렸다.

이때에 원의 조사(詔使)가 왔으므로 왕이 사신에게 잔치를 베풀었는데 신걸이 어떤 일로 왕의 뜻을 거스르자 왕이 취해서 매를 때렸다. 이때 왕이 유희를 매우 좋아하여 근신들과 함께 몰래 선흥사(禪興寺) 앞에서 격구(擊毬)를 하였고, 또 민천사(旻天寺)에 행행하여 밀직사 원충(元忠)에게 격구를 하게 하였다.
유씨(兪氏)는 이렇게 적었다.
대부(大夫)에게 죄가 있어도 형장을 가하지 않는 것은 염치를 면려하기 위함이다. 밀직사는 재상인데 매를 때리고 격구를 하게 하였으니 노예와 창우(倡優)로 취급한 셈인데, 재상 된 사람도 이를 달갑게 여겨 부끄러움을 몰랐으니, 임금은 임금답지 못하고 신하는 신하답지 못하다 하겠다.


6월 선비를 시험보였다. 시부를 혁파하고 책문(策問)으로 하였다.

이제현ㆍ박효수(朴孝修)가 과거를 관장하였는데, 시부를 없애고 책문으로 시험하여 진사 최용갑(崔龍甲) 등을 뽑았다. 왕이 효수의 청백(淸白)을 기뻐하여 은병(銀甁) 50개와 쌀 1백 석을 하사하여 학사연(學士宴)에 쓰도록 하였다.
고려 풍속에 시험을 주관하는 자를 학사(學士)라 하고, 문생들은 그를 은문(恩門)이라 칭하였다. 문생과 좌주(座主)의 예가 심히 중하여, 학사에게 부모와 좌주가 있으면 방방(放榜)하자마자 반드시 공복(公服)을 갖추고 가서 뵙는데, 문생들도 뒤따라가 학사는 앞에서 절하고 문생은 뒤에서 절한다. 여러 빈객들은 비록 존장이라 하더라도 모두 당(堂) 아래 뜰에 섰다가 예를 마치면 읍양(揖讓)하면서 올라가 하례한다. 그러면 학사가 그의 집으로 맞아다가 잔을 올려 축수(祝壽)한다.


추7월 김이(金怡)ㆍ조후(趙珝)를 찬성사로, 김원상(金元祥)을 삼사사(三司使)로 삼았다.

원상이 일찍이 오기(吳祁) 등과 함께 충렬왕에게 아첨하여 왕을 황음(荒淫)으로 이끌었는데, 오기 등은 곧 화를 당하였으나 원상만은 아첨으로 면하였다.


8월 원에서 사신을 보내와 동녀(童女)와 화자(火者 환관(宦官))를 구하였다.

9월 문선왕(文宣王 공자(孔子)의 시호)의 소상(塑像)을 만들었다.

왕이 은병 30개를 내어 그 비용에 보태고 재추(宰樞)들도 다 돈을 내어 보탰는데, 이는 만인(蠻人) 왕삼석(王三錫)의 청에 따른 것이다.


동11월 김이용을 첨의정승으로, 오잠(吳潛)을 찬성사로, 윤석(尹碩)을 밀직부사로 삼았다.

12월 원에서 상왕을 토번(吐蕃)의 살사결(撤思結)로 유배하였다.

임백안독고사(任伯顔禿古思)는 본국의 상서 주면(朱冕)의 가노(家奴)였는데, 스스로 거세(去勢)하고는 내시가 되어 연줄로 번저(藩邸)에 있는 원 인종(元仁宗)을 섬겨 불법을 많이 저질렀다. 그래서 상왕이 매우 미워하여 황태후에게 아뢰어 사람들에게서 빼앗은 전토(田土)와 노비(奴婢)를 본래의 주인에게 돌려주도록 하고, 그의 무례함을 들어 매를 때렸었다. 독고사가 상왕을 중상하려고 마음먹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는데, 인종이 붕하고 태후 또한 별궁으로 물러나자 독고사는 두려워하고 꺼리는 바가 없게 되어 백방으로 무함하였다.
이때 상왕은 시사(時事)가 변하리라는 것을 알고, 다시 원주(元主)에게 강남(江南)이 강향(降香)할 것을 청하여 화를 피하려 하였다. 윤주(潤州)의 금산사(金山寺)에 이르렀을 때 원주가 사자를 보내어 급히 소환하면서 기사(騎士)로 하여금 핍박하여 갔다. 시종하던 신하들은 다 도망가 숨고 박경량(朴景亮)ㆍ이연송(李連松)은 독약을 먹고 죽었는데, 이는 독고사가 궁중에서 용사(用事)하고 있어 왕이 화를 면하지 못할 것을 알아서였다.
상왕이 대도(大都)에 이르자 원주가 중서성에 명하여 본국으로 호송해서 안치(安置)하도록 하였는데, 왕이 지체하고 출발하지 않으니 형부(刑部)에 내렸다가 얼마 후에는 머리를 깎게 하고 석불사(石佛寺)에 유치(留置)하였고, 또다시 불경을 배우라는 명목으로 토번의 살사결로 유배하였다. 그곳은 경사(京師)에서 1만 5천 리나 떨어져서 수종하던 재상 최성지(崔誠之) 등은 다 도망하여 나타나지 않았고, 오직 직보문각(直寶文閣) 박인간(朴仁幹), 대호군(大護軍) 장원지(張元祉) 등 18인 만이 유배소까지 수종(隨從)하였다.
독고사의 참소가 그치지 않아 화를 예측할 수가 없게 되었는데, 승상(丞相) 배주(拜住 한복(韓復))의 영구(營救)함을 힘입어서 화를 면하였다. 이능간(李凌幹)이 상왕을 따라가 원에 있으면서 반전별감(盤纏別監)이 되었었다. 함께 일하는 자들은 다 부귀를 이루었으나 능간만은 홀로 청백하여 겨울에도 떨어진 저고리와 홑바지를 입었으며, 1전(錢)도 사사로이 하지 않았다. 상왕이 귀양을 가게 되자 금(金)을 역리(驛吏)에게 몰래 주어 보내 왕에게 바쳐, 왕과 수종하는 신하가 그것을 힘입어 궁하지 않았다.
상왕이 일찍이 사랑하던 두 희첩을 능간과 백문거(白文擧)에게 주었는데 능간은 별실에 거처시키고 가까이하지 않으니, 왕이 의롭게 여겼다.
송씨(宋氏) 시열(時烈) 는 이렇게 적었다.
고려 중엽 이후 황음(荒淫)ㆍ방탕으로 말미암아 마침내 이적(夷狄)ㆍ금수의 지경에 이르지 않음이 없었는데, 충선왕(忠宣王)ㆍ충혜왕(忠惠王) 이후부터는 또 호원(胡元)과 결친한 것을 믿고 편안하게 생각하고 자치(自治)할 뜻이 없었다. 부자가 서로 해치기를 도모하고 군신(君臣)이 서로 참소하며, 배필이 서로 원망하여 그 임금을 소송하기를 마치 표류하는 허수아비와 추위에 떠는 참새와 같이 하였으니 슬픈 일이다. 그 국맥을 이어감은 다만 정질(貞疾)에도 죽지 않는 것과 같을 뿐이다. 상왕이 토번으로 귀양간 것은 말할 수조차 없으니, 강포한 오랑캐의 사랑을 믿을 수 있겠는가.

○ 한악(韓渥)을 선부전서(選部典書)로, 전영보(全英甫)를 밀직부사로 삼았다.

악은 한강(韓康)의 아들이다. 근신하고 기국(器局)이 있어 무슨 일이거나 세 번 생각한 후에 실행하였다. 몽고어와 한어(漢語)를 알았다. 영보는 본래 제석원(帝釋院)의 종으로 원에 들어가 굄을 받은 환관 이숙(李淑)의 처형(妻兄)인데, 일찍이 왕유소(王惟紹)의 무리에 들었다가 유배되었었다. 상왕이 즉위하자 다시 굄을 받아 차서를 뛰어 임용되었는데, 이때에 이 직을 받았으나 오직 재물을 탐내고 참소하는 것만 일삼았다.

○ 백관이 원의 중서성에 글을 올려 상왕의 원통함을 호소하였다.
○ 허부(許富)를 선부전서로, 폐신(嬖臣) 이의풍(李宜風)을 총부전서(摠部典書)로, 안규(安珪)를 대언(代言)으로 삼았다.

의풍은 원 나라 사람으로 활을 잘 쏘고 말을 잘 달려 왕의 폐신이 되었다.
규 역시 집안이 한미하고 뛰어난 기예는 없었지만 복종을 잘하는 성품으로 비위를 잘 맞추어 굄을 얻었다. 이때에 왕이 군소배를 가까이하여 그 외에도 손기(孫琦)ㆍ최안도(崔安道)ㆍ김지경(金之鏡)ㆍ이인길(李仁吉)ㆍ왕삼석(王三錫)ㆍ양재(梁載)ㆍ조경(曹卿)ㆍ최노성(崔老星)ㆍ임중연(林仲沇)ㆍ정방길(鄭方吉)ㆍ강융(姜融)ㆍ신청(申靑)의 무리는 구은(舊恩)이나 아첨, 혹은 용력(勇力)이나 뇌물ㆍ잡술(雜術)로 왕의 굄을 받아서 전주(銓注)를 담당하여 인물을 진퇴시켰는데, 이때에 사람을 뽑는 법이 크게 잘못되어 온 나라가 실망하였다.

○ 정방(政房)을 다시 두었다.

처음에 상왕이 정방을 파하였는데, 이때에 와서 다시 설치하고 대언 안규로 전주(銓注)를 맡게 하고 우상시(右常侍) 임중연, 의랑(議郞) 조광한(曹光漢), 응교(應敎) 한종유(韓宗愈) 등이 거기에 참여하였다. 왕이 한번은 중연에게 말하기를,
“경이 나의 정사를 어지럽히는 것을 남들이 지목하여 임권(林權)이라고 한다.”
하였다.
이보다 앞서 정권(鄭權)이란 자가 일찍이 전선(銓選)을 맡아 뇌물을 많이 받은 까닭에 임중연을 정권에 비유한 것이다.


 

[주D-001]대부(大夫)에게 …… 가하지 않는 것 : 《예기》 곡례상(曲禮上)에 “대부에게는 형(刑)을 가하지 않는다.” 하였는데, 여기서 말한 형은 육형(肉刑)을 말한다.
[주D-002]정질(貞疾) : 난치병(難治病)이란 뜻. 《주역》 예괘(豫卦) 육오 효사에 “정한 질이 오래도록 죽지 않는다[貞疾 恒不死].” 하였다.
淡庵先生逸集附錄卷之二
 附錄 下
史傳授輯 003_323a

歷朝榜目
忠肅王庚申九月。登秀才科。益齋李齊賢知貢擧。石齋朴孝修同知貢擧。崔龍甲爲榜首。稼亭李穀,栗亭尹澤,文敬公安輔皆同年也。上嘉其得人。賜米百碩,銀甁五十。令辦學士宴。 出歷朝榜目

權菊齋門人錄
白文寶字和父。號淡庵。嘗上疏斥佛。請講天003_323b人道德之說。以明聖學。 出權菊齋門人錄

白彝齋實記
始性理之學未及東方。夷俗未祛。士趨不正。白彝齋入中朝。得程朱全書以歸。於是朴恥庵忠佐,李益齋齊賢,李稼亭穀,李樵隱仁復,白淡庵文寶首先師受。爲群儒倡。以明道學。使學者知吾道之可尊。異端之可斥。繼開之功。實有大焉。 出白彝齋實記

退溪易東書院記
當麗氏之末。胡元制命。六合霧塞。天下之無道極矣。上距程朱之世。且二百年之久而後。其書始至于東。譬如積陰之下。陽德闖發而003_323c將亨。其能闡揚昭揭。使其道大行于世。責在吾儒之徒。而其見於史者。僅有白頤正等數人。 卽從遊諸公○出退溪易東書院記

戊辰史斷
忠肅朝。白文寶爲史官。掌修國史。略曰。王留燕五年。憂勞驚悸。損傷天性。及還國。常居深殿。忽忽不樂。不接朝臣。不親政事。由此小人幷進。與祖倫,安道,之鏡,申時用等。專擅權柄。賣宮鬻爵。無所不至。臺諫章疏。中沮不啓。其不遭譴責於買驢幸矣。 是年。元遣平章事買驢等來。○出戊辰史斷

己巳史斷
003_323d又曰。燮理陰陽。宰相職也。旱氣太甚。尤當敬畏。以答天譴。曾是不思。而徒責雨於巫覡。豈不謬哉。 出己巳史斷

權陽村集
白淡庵闢異端尤力焉 出權陽村集

李益齋本傳
李齊賢嘗病國史不備。與白文寶,李達衷作紀年傳志。齊賢起太祖至肅宗。文寶,達衷撰睿宗以下。文寶僅草睿,仁二朝。達衷未就稿南遷。 時皆散逸出李益齋本傳

麗史
恭愍王元年八月己未。開書筵。以典理判書白文寶,府院君李凌幹,李齋賢,金永煦,韓宋003_324a愈,印承旦,前政丞李君侅,孫琦,許伯等十五人。更日侍讀。敎曰。元老大臣大夫士。輪次入侍。進講經史法言。凡權勢所奪田宅奴婢積年之訟與夫冤滯之訟。其審治之。僉議監察。是余耳目。時政得失。民間利害。直言勿諱。 出麗史
王還都。權置廟主于彌陀寺。設還安都監。白文寶與平陽伯金敬直主其事。稽緩踰月。王怒督之。對以無典籍可稽。遣史官南永伸詣海印史庫。取三禮圖,社佑通典至。文寶倣通003_324b典。又採寢園老給事朴忠語爲儀制。 出麗史

勝覽
靈昌坊金光載以前判書事母至孝。喪盡其禮。恭愍王嘉之。命有司旌其所居里。白文寶作序以褒之曰。時喪禮蕩然軼墜。金判書能盡夫人子之至情。三年免懷之報。其道莫尙乎此。士大夫歌詠以美之。 出勝覽
忠穆王三年二月。盜入太廟。置整治都監。三月。杖殺元皇后族弟奇三萬。 三萬倚勢奪人田土。恣行不法。故先生杖之。下巡軍獄。▓兩旬而死。

麗史○東國通鑑
003_324c冬十月。元遣直省舍人僧家奴。杖整治官白文寶,申君平,全成安,河楫,南宮敏,趙臣玉,金達祥,廬仲孚,李天伯,許湜,李承閏,安克仁,鄭光度,吳璟,徐浩,田祿生。惟安軸,王煦。以聖旨原之。前判密直司事金光轍,前大護軍李元具以病免。帝仍降璽書。復置整治都監。令王煦判事。 先是判官崔純寶告三萬之事。三萬之妻訴行省理問所。囚諸公。誣加枉殺三萬之罪。至是被杖。卽姦臣康允忠,河有源之謀也。○出麗史及東國通鑑

麗史會綱
003_324d恭愍王癸丑秋九月乙巳。賜牟尼奴名禑。封江寧府院大君。命政堂文學白文寶傳之。先是王欲以牟尼奴爲嗣。以成均直講李崇仁授書。至是王命知申事權仲和。往前政堂李穡第。會文臣議改牟尼奴名禑。仍召侍中慶復興,密直提學廉興邦,政堂文學白文寶。議封禑江寧府院大君。命儒臣白文寶及田祿生,大司成鄭樞等爲師傅。 出麗史會綱

東國通鑑
甲寅十二月。稷山君白文寶卒。文寶善屬文。性質直。不惑異端。 出東國通鑑

海東韻玉
003_325a白文寶號淡庵。一曰動齋。恭愍正初。拜典理判書。請設十科取士。官至政堂文學。諡忠簡。出海東韻玉

麗史提綱
性廉潔正直。不惑異端。善屬文。立朝多所達白。 出麗史提綱

田埜隱同僚錄
尹紹宗挽曰。卓爾知天著踐形。踐形卽公之所著性理之說。 出田埜隱同僚錄

東儒師友錄
白淡庵文寶。字和父。稷山縣人。辛祦爲大君就學。王命公,田祿生,鄭樞爲師。官至政堂文學。封稷山君。諡忠簡。 出東儒師友錄

編年
003_325b高麗忠烈王二十九年 元大德七年 癸卯。先生生。丁巳。先生年十五。受學于菊齋權公 。著易學說。
庚申。先生年十八。秋九月。中秀才科。忠肅王二年壬戌。先生年二十。遊彝齋白公門。時彝齋公入元始得程朱書而還。先生與同門諸賢。講明旨訣。爲群儒倡。
癸亥。先生年二十一。冬十二月。喪彝齋公。戊辰。先生年二十六。拜春秋館檢閱。掌修國003_325c史。
己巳。先生年二十七。時國內大旱。大臣方議邀巫祈雨。先生止之。有燮理陰陽之說。忠惠王元年辛未。先生年二十九。春。拜翰林。忠肅王後五年丙子。先生年三十四。從毅陵如元。王作詩命和。先生製進淸平詞。王稱歎。特命賜馬。直拜正言。忠惠王後元年庚辰。先生年三十八。哭李提學達尊。 提學。益齋之子。與先生有世交。
辛巳。先生年三十九。遷右常侍。003_325d壬午。先生年四十。哭禹祭酒 有祭文。 佚不傳忠穆王元年乙酉。先生年四十三。出膺關東存撫使。
丁亥。先生年四十五。二月。盜入太廟。命先生爲整治都監。三月。杖殺元皇后族弟奇三萬。三萬倚勢恣行不法。故先生杖治之。○乞暇歸鄕。有詩云。歸來對樽酒。家家有懸忠定王元年己丑。先生年四十七。秋七月。罷整治都監。遷廣州牧。下車。嚴於律己。爲政甚003_326a廉勤。州有淸風亭而頹廢。先生損俸增修。庚寅。先生年四十八。冬十一月。召還除宗簿令。
恭愍王元年壬辰。先生年五十。上箚子論選法。請依司馬光十科取士之制。八月己未。進講經筵。與李凌幹,李齊賢,許伯等十五人。更日侍讀。是歲特陞典理判書政堂文學。
辛丑。先生年五十九。冬十一月。扈駕至福州。時紅賦陷京。車駕播越。特命先生扈從。自廣忠行至福州。先生竭忠贊畫。與左政丞洪彥003_326b博,侍中李嵒。議遣元帥鄭世雲領兵討賊。以朴椿及次子晉爲佐兵。克勦凶魁。
壬寅。先生年六十。八月。承命如京。九月。王還都。錄忠謙贊化功臣。陞重大匡門下贊成事,進賢館大提學兼知春秋館事。因召對。命和拱北樓御製詩。先生賡和以進。繼上興學疏。十二月。上時政七條箚子。
癸卯。先生年六十一。五月。上恤刑箚子。八月。上疏斥佛。因乞遞。不允。
甲辰。先生年六十二。請斬叛臣崔濡立003_326c丁未。先生年六十五。倭犯西江。人心洶懼。王執先生手曰。與卿講治道幾年。乃有今日耶。先生流涕。遣元師泛海追捕。
己酉。先生年六十七。與弟宗簿令文質。乞致仕歸田。時倭亂雖平。時事大異。先生杜門自靖。戒諸子勿復仕進。命姪子書遺戒。
庚戌。先生年六十八。哭栗亭尹公 澤。作墳廟記。
辛亥。先生年六十九。撰彝齋公行狀。春閏三月二十日。分藏獲給五子。 時長子瑄已夭003_326d癸丑。先生年七十一。秋九月。例陞世子師傅。王封辛禑江寧府院大君。命先生爲傅。先生以年老固辭。代薦門人直講李崇仁。
恭愍王二十三年甲寅。先生年七十二。冬十二月卒。訃聞。王驚悼。賜諡忠簡 一云文簡

雲山書院奉安文 參判金㙆
恭惟先生。姿挺正直。操勵廉潔。妙齡登第。聯名稼栗。學究天人。文選藝閣。試論其世。適丁麗末。竺敎懷襄。尠不迷溺。隻手障瀾。惟公不惑。引君當道。章箚剴切。取士十科。明學六籍。003_327a俾黜功利。以杜禍福。雄鳳孤雊。衆聾瞠若。王曰嘉乃。俾出胄筵。償其功載。錫之山川。觀占玩象。遐居海堧。優遊以卒。易名忠簡。世代雖邈。彝好攸同。爰謀報社。有儼明宮。亦越惺軒。克紹厥德。同堂幷享。情禮久合。玆涓吉辰。秖薦芬苾。精爽不昧。陟降在庭。啓佑後人。惠我光明。

常享祝文
斥邪衛道。納約匡君。屹爲砥柱。起我後人。

雲山書堂重建上樑文
003_327b人傑鍾河岳之精。每欽聲響之不泯。地靈畜海山之勝。却歎廢興之相尋。居然築於舊疆。美哉輪於新構。恭維淡庵白先生。圭璋令質。氷檗淸標。闢佛家勝大之言。于韓表而不讓。陳聖人彝倫之敎。與陸奏而同功。正直廉淸。前史之紀載備矣。斥邪衛道。後賢之稱述炳然。亦奧惺軒白先生。名祖家肖孫。大賢門高弟。蚤承一副旨訣。敬齋箴之精要。猛著十分工夫。近思錄之親切。資麗澤於講道。鶴厓月川之門。贊戎籌於臨機。龍蛇火旺之旅。家傳003_327c緖業。有是祖而是孫。山仰輿情。匪自今而自昔。蓋此黃竹里一局。實爲紫雲山名區。十折畫圖之形。便是三十六元化之洞。一望浩淼之狀。還勝七百里靑草之湖。豈徒地勝之亶然。爰有主人之相得。惺翁之琴書有托。地不秘而天不慳。退陶之詩筆竝輝。山益高而水益洌。於是乎兩賢俎豆之典。公議足徵。同堂昭穆之倫。古禮可據。卽依庚桑子尸祝之例。謹用吳中書屛障之規。二仲登於香煙。化榛莽而顏色。四時薦於和氣。掃灰燼而光輝。俄003_327d驚百六之厄會適丁。忍見千古之靈光幷毀。玄都葵麥之感。春風助懷。白鹿荊榛之歎。夕陽增咽。諸孫益切見羹之慕。多士不忘採菽之思。乃就妥靈舊墟。新修講學遺制。取屋材於城邑。不待攻斲之煩。募役丁於村隣。益見趨赴之敏。掃舊礎而星列。依俙昔日光華。展彩屛於雲騰。怳惚當年物色。涼軒燠室。隨起居之各當。小闑大杗。任規矩之相適。夫然後尊衛之粗效。尙庶幾陟降之在玆。玆陳兒郞偉之短詞。庸助呼邪許之大役。拋樑東。滄溟003_328a旭日照心紅。先生家學元無貳。直把惺惺喚主翁。拋樑西。高臺超遞夕陽迷。隨時宴息眞功枉。更向明朝孶舜鷄。拋樑南。靑螺秀色與天涵。祥雲瑞霱從中出。產得南州幾善男。拋樑北。屓屓巨岳參雲特。時行霖雨慰三農。萬國黎元歌帝力。拋樑上。晴天萬里奎星朗。文明初載露精華。五百年今徵瑞象。拋樑下。山簇川回只曠野。不穡不能三百廛。誰是齊郊祈歲者。伏願上樑之後。山川眷騭。雲物護持。周旋戶庭。體淡翁廉潔之心法。俛仰堂牗。述003_328b惺祖講磨之眞詮。而不佚乎前光。且有俟於來哲。
崇禎紀元後五周己亥三月日。後學聞韶金道和。謹撰。

同門錄
李齊賢字仲思。號益齋。慶州人。十五登第。二十八。受性理之學於彝齋白先生。諡文忠。朴忠佐字子華。號恥庵。咸陽人。贊成判三司咸陽府院君。好讀易。諡文齊。
李穀字仲父。號稼亭。韓山人。文科贊成。右文003_328c大提學韓山伯。有性理之學。諡文孝。
白文寶字和父。號淡庵。稷山人。十八。中秀才科。官典理判書。稷山府院君。受業於彝齋先生。明性理之學。諡忠簡。
李仁復字克禮。號樵隱。星州人。檢校侍中。興安府院君。正大謹厚。以禮自守。諡文忠。

門人錄
金九容字敬之。安東人。大司成。號愓若齋。李崇仁字子安。星州人。密直司事。號陶隱。權思福字子仁。安東人。判典校福城君。003_328d李茂方字義之。光陽人。門下侍中。諡文簡。尹紹宗字憲叔。錦州人。禮部散郞。號桐軒。
淡庵先生逸集卷之四