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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관묘갈
공의 이름은 관이요 자는 장우이다. 유씨는 본관이 문화로서 우리나라의 대성이다. 고려 개국공신 차달을 그 비조로 한다. 그 후에 공권이 있었는데 정당문학을 지냈으며, 경은 수문전 학사를 지냈다. 아조에 들어와서 영의정을 지낸 만수와 상의 중추를 지낸 원지는 훈덕을 갖추어 세상에서 명신이라 일컬었다. 두 세대를 지나 자미가 있었으니 문과에 급제하고 전중어사관을 지냈으며, 단종 때 수양산에 들어가 그 일생을 마쳤다. 후에 아들이 높은 벼슬을 하자 찬성으로 추증되었다. 아들 지를 낳았는데 성종께서 왕위에 오르는데 공이 있어 좌리공신으로 책훈되고 벼슬은 좌찬성에 올랐으니 이분이 공에게는 6대조가 된다. 고조할아버지의 이름은 영이며 증조할아버지의 이름은 중번인데 모두 벼슬을 하지 않았다. 할아버지의 이름은 주인데 사직을 지냈으며 문장을 잘 지었고 기개와 절조가 있어 친구들 사이에서 이름이 나 있었다. 광해조의 혼세를 만나 세상이 어지럽자 간신들이 어머니를 원수로 하는 논을 주장하니 공은 향인들을 거느리고 이에 반대하는 상소를 올리고 대궐문 앞에서 그 불가함을 외치니 그 뜻이 몹시 간절하여 논한 자가 많았다. 한수 권공께서 할아버지의 묘석에 묘갈을 쓰시었다. 아버지는 헌철인데, 사직공의 명으로써 족부인 항의 양자가 되어 그 후손을 이었다. 똑같이 중추공의 후손이다. 중추공의 몇 세대 후에 인선이 있어 감역을 지냈는데 동생인 대사간 지선과 더불어 효우에 극진한 행실이 있어 나라에서 이들을 정려하여 포상하였다. 후사가 없자 대간공의 둘째 아들 첩을 아들로 삼았다. 이분이 계서를 낳았으니 바로 공의 후사인 증대부이다. 어머니는 전주 이씨로 현감 탁의 딸이니 정조대왕의 후예로 예문관봉교를 지낸 원경의 현손이다. 공은 숭정 신사년(인조 19, 1641년) 11월 15일에 출생하였는데 태어날 때부터 용모가 단정하고 수려하였으며 겨우 말을 배우면서부터 부모를 사랑하고 어른을 공경하는 도리를 알았다. 6, 7세 때에 벌써 선조를 받드는 정성이 남보다 뛰어났으며 어른을 따라서 주선함이 마치 어른과 같았다. 큰아버지 참봉공은 공을 매우 사랑하였으며 이름을 지어 관이라고 하였는데 대개 선조를 배향한다는 뜻을 취한 것이다. 학문을 배움에 미쳐서는 자기 몸과 같이 학문을 사랑하여 조금도 싫증을 내지 않았고 어버이를 섬기는 예에 있어서는 반드시 일찍 일어나서 세수하고 머리를 빗고는 사랑방 문밖에서 문안 인사를 드렸다. 7살 때에 고모를 찾아뵙고 문안을 드리니 고모는 공을 사랑하여 옷감을 품속에 넣어주었는데 받지 않으려고 하였으나 사양하고 물리치기가 어려워서 상 위에 두고 나가버리니 사람들은 모두가 이를 듣고 이상하게 여겼다. 장성하여 와옹 이공의 가문에 장가들게 되었는데 와옹은 엄중하여서 사람들에게 마음을 주는 일이 드물었는데 공을 한 번 보고는 큰 인물이 될 것을 기대하였으니 마치 장전이 여대방에게 한 것과 같았다. 공은 총명하고 지혜로움이 남달리 뛰어났으며 지나가다가 글월을 보면 문득 외워 암송하였으며 글을 지음에 있어서는 붓을 잡고 선채로 문장을 완성하였으니 함께 수업하는 자들은 모두가 스스로 공에게는 미치지 못한다고 하였다. 어버이를 위하여 힘써 학문에 종사하여 선비의 가업을 이으려 하였지만 과거에 막힘이 있어 오랫동안 합격하지 못하니 공은 시대의 명을 제대로 만나지 못함을 알고 즉시 과거를 포기하고 오로지 지물지양에 뜻을 두었다. 부모를 섬김에는 잠시라도 곁을 떠나지 않았다. 항상 공경하여 정성을 다하였으며 한 번도 해이한 기색을 얼굴에 나타내 본 일이 없었다. 맛있는 음식으로 봉양하고 온정으로 대하고 크고 작은 일에는 반드시 몸소 수고를 아끼지 않았다. 30여 년을 한결같이 하게 되니 부모가 공의 몸이 상할까 근심하여 만년에는 다른 사람으로 대신하도록 하고자 하였으나 공은 그의 근력이 아직 건강함을 보이고는 끝내 그렇게 하지 않았다. 공의 아버지께서도 일찍이 맏형과 더불어 모부인을 섬김에 효성이 독실하고 지극하여 형제가 사랑하고 공경하였으니 역시 남들이 미치지 못하였다. 공의 효우는 오직 타고난 자질이 아름다웠을 뿐만 아니라 또한 이와 같은 가법의 전함에서부터 온 것도 있었다. 친척 한 사람이 있었는데 후사가 없자 공의 동생 회를 공의 아버지에게 청하여 자식으로 삼고자 하였다. 공은 차마 동생과 떨어질 수 없어 울면서 간하였으나 들어주지 않았다. 동생은 갔으나 곧 도망해 오곤 하였다. 동생을 데려다 주고 떠날 때는 반드시 눈물을 흘렸다. 마음에 품은 오랜 병은 늙도록 쇠하지 않았다. 공에게는 과부가 된 누이가 있었는데 멀리 있어도 해마다 가서 만나보았으며 보고는 문득 온갖 사랑을 다 베풀었다. 하루는 공이 누이동생을 데리고 집으로 돌아올 때 추위를 만났는데 공은 누이가 걱정되어 자기의 버선을 벗어 주어 이를 신게 하였다. 자기를 돌보지 않고 누이를 더 중요하게 여겼음이 이와 같았다. 누이가 임종하면서 울며 공에게 말하기를 “만약 내 남편의 뼈가 묻힌 선산으로 돌아가게 해주면 나는 죽어도 눈을 감을 수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공은 힘을 다하여 묘 자리를 만들고 천리나 먼 길을 관을 호위하면서 그의 선조 무덤으로 옮겨서 남편 무덤에 합장을 하고는 묘지기를 두고 묘를 지키게 하였다. 또 장가들고 시집가는 자녀들을 자기의 소생과 같이 하였다. 종제가 조상들의 협시 제사를 모시고 있었는데 가정이 몹시 궁핍하여 스스로는 도저히 살아갈 방편이 없었다. 이에 공께서 일마다 도와주어 이들의 생계를 일으키는데 있고 없고를 헤아리지 않고 온갖 정성을 다하였다. 그리고는 이 일을 깊이 스스로 감추었으니 이는 오직 남이 혹 알거나 한다면 잘한다고 칭찬할 것을 두려워해서였다. 둘째 누이의 남편이 공의 지극한 정성에 감동하여 항상 마음속으로 존경하였는데 공이 돌아가시자 제문을 짓고 통곡하며 말하기를 “아득하구나! 공의 의로움이여, 그윽하구나! 공의 어짐이여.”하였으니 이것은 대개 공께서 사람들의 마음을 감동시킨 바 있어 이를 흠모하여 한 말이다. 공께서는 조상의 묘소를 관리하는데 그 정성을 다하였고 내외 친진의 여부를 묻지 않았다. 비록 묘소를 주관하는 자가 있더라도 반드시 몸소 스스로 계획을 세워서 그 심력을 다하여 표갈 및 모든 석역에 정성을 쏟았으며 파손된 곳을 잘 수리하기도 하였으며 처음으로 묘전을 둔 것도 많았으니 옛날 현효 군자라 하더라도 이에서 더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큰아버지는『견성수묘록』을 저술하여 공의 행적을 칭찬하였다. 큰어머니의 상을 당하자 처음부터 끝까지 몸소 상사를 맡아 행하였으며 그 재물이 다할 때까지 제배와 군종들에게 아끼지 않았으며 이들을 돌봐주고 사랑함이 매우 지극하였다. 그 아들을 장가들이고 딸을 시집보내는 일에도 한결같이 바른 일을 본받아서 반드시 형편에 맞게 하였다. 미루어 일가 친척과 향리 사람들에 미치어서는 가난한 자를 도아주고 궁핍한 자를 구휼함에 역시 그 힘을 아끼는 바가 없었으니 사람들 모두가 칭송함이 한결같았다. 그러나 공은 일찍이 스스로 잘했다는 기색을 나타낸 적이 한번도 없었다. 부모 나이 모두 70세에 이르자 공 역시 50의 나이인데도 옷을 예쁘게 차려입고 춤을 추면서 어린애 같이 재롱을 떠니 그 모양은 마치 노래자와 같았다. 부모의 생일이나 혹은 명절에는 반드시 술을 갖추어서 연회를 베풀었으니 모든 친척들이 찾아 모이고 향리의 노인들도 모두 이르러 술잔을 올리고 장수를 기원하니 그 환락은 절정에 달하였으며 해마다 이것을 상례로 하였다. 무릇 부모가 있는 자들은 이것을 부러워하거나 사모하지 아니함이 없었다. 계유년(숙종 19, 1693년)에 공은 전염병에 걸리자 부모님께 나아가 피할 것을 청했다. 병이 더욱 위독해져서 입으로는 능히 말할 수 없어서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눈물로 세월을 보내다가 마침내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으니 이때가 5월 19일이었다. 공은 부모를 위하여 일찍이 포천 대간공의 묘 아래에 묘자리를 보아 두었던 것이 있었는데 이런 연고로 이해 9월 12일에 공이 보아 두었던 부모의 묘자리에서 약간 떨어져 그 옆에다 장례를 모시었다. 그러나 묘소가 마땅하지 않아 23년 후인 을미년(숙종 41, 1715년) 9월 21일에 양주 북쪽 석적면 남남서쪽을 향한 언덕에 이장하였으니 바로 전중공의 묘소 옆이다. 부인은 이씨로 세종대왕의 후손이며 호조판서를 지내고 영의정에 추증된 파곡선생 성중의 증손이며 아버지는 와옹공 명시로서 동몽 교관을 지냈느데 관운 허공에게 배워 학식이 매우 뛰어나 그 당시에 현인이라고 불리었고 우암 송선생도 역시 일찍이 그의 재행을 효종께 추천하였는데 모든 조정의 공론도 선생의 재행에 대하여 의견이 일치하였다. 부인은 엄정 결백하고 자못 여사의 풍이 있어서 와옹공이 사랑으로 칭찬하면서 말하기를 “이 아이가 만약 여자가 아니고 사내였더라면 나는 반드시 장차 우리 선열의 뒤를 잇게 하였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조상을 지극한 정성으로 받들었으며 오직 삼가하고 근신하였으며 천한 말을 한다든지 나태한 기색을 보이는 일이 없었다. 친정 부모를 섬기는 마음을 옮겨서 시부모를 극진히 모셨으니 시부모가 말씀하시기를 “우리 동서들도 잘 섬겨라” 하셨다. 일이 있으면 문득 수고로움을 대신하였으며 늙어서도 조금도 게으름을 피우지 않았다. 제사를 받듦에 더욱 근면하고 신중하였으며 종가에 이르러 제사가 있으면 역시 반드시 일찍 스스로 목욕 제계하여 심신을 깨끗이 하였고 무릇 깨끗이 씻는 일, 음식을 익히는 일은 자신이 손수하지 않음이 없었다. 남을 대할 때는 친하고 소원한 격이 없었으며 아랫사람을 부릴 때는 정성을 다하여 은의를 베풀었으니 모두가 사랑하고 사모하여 기쁘게 따랐다. 공아 돌아가신지 2년이 지났는데도 아직도 살아있을 때를 생각하면서 슬픔을 억누르고 정을 가누지 못하였다. 오직 공을 생각하는 것으로써 마음의 위로를 구하였을 뿐이다. 음식을 먹을 때 그 차갑고 따뜻하게 하는 것도 한결같이 공이 살아계실 때와 같이 하였으며 조금도 더함이 없었다. 장사를 지내고 제사를 받듦에 있어서는 비록 몸은 쇠하여졌지만 몸소 스스로 맡아 하여 조금도 유감스러움이 없도록 하였다. 무인년(숙종 24, 1698년) 여름 자녀들이 천연두에 걸리자 근심하다가 심히 초췌해져서 마침내 7월 24일에 돌아가셨다. 공보다 2년 뒤에 태어나서 공보다 5년 뒤에 돌아가셨다. 그해 10월 6일에 공의 처음 무덤 조금 동쪽에 간소하게 장례를 모시었다가 공의 묘소를 옮길 때 함께 합봉하였다. 4남 3녀를 낳았는데 장남은 일찍 죽고 차남은 세무, 3남은 세화, 4남은 세만이다. 장녀는 일찍 죽고 차녀는 서명축에게 출가하였으며 그 다음은 최흥주에게 출가하였다. 차남 세무는 파평 윤상기의 딸에게 장가들어 5남 5녀를 두었는데, 5남 중 장남은 심이고, 5녀 중 장녀는 윤정에게 출가하였으며 차녀는 이장욱에게 출가하였다. 나머지 4남 3녀는 모두 일찍 죽었다. 3남 세화는 의령 남위의 딸에게 장가들어 1남을 두었으나 일찍 죽었고 두 번째 부인으로 양천 허만의 딸을 맞이하여 5녀를 두었으나 3녀는 일찍 죽고 나머지는 어리다. 종제 세신의 둘째 아들 잠을 양자로 하여 후사로 삼았다. 사위인 서명춘이 일찍 죽으니 형의 아들 긍수를 후손으로 삼았다. 4남 세만은 완산 이정의 딸에게 장가들어 4녀를 두었으나 모두 일찍 죽었다. 사위 최흥주는 3남을 낳았는데 모두 일찍 죽었고 또 3녀 중 2녀도 일찍 죽고 나머지는 어리다. 심은 안동 권빈의 딸에게 장가들어 3남을 두었으나 2남이 일찍 죽었고 4녀를 두었는데 3녀가 일찍 죽었다. 윤은 2남 3녀, 이는 1녀를 낳았다. 공은 학문을 좋아하여 큰아버지로부터 일찍이 옛사람들에게 자기를 위하는 학문이 있다는 것을 배워 알았다. 와옹을 배알하고는 한 시대의 선유로서 이름난 유학자의 논을 들어 더욱 이치를 깨우쳤으며 우암의 학문이 연원이 있다는 것을 듣고 자주 가서 쫓으려고 하였으나 부모의 곁을 멀리 떠나기 어려워 결단하지 못하였다. 틈을 내어 일찍이 선생이 귀양가는 길에 잠깐 길 옆에서 만났는데 어찌 이것으로써 공의 마음이 흡족하였겠는가. 돌아가시니 참으로 한스럽도다. 공의 돈독한 뜻과 학문에 힘씀이 이와 같았는데도 세상에 한 번도 시험해 보지 못하였고 또 수명도 얼마 되지 않아 이 세상을 마치었다. 이런 연고로 세상 사람들에게 그 덕업이 성취된 바를 보이지 못하였으니 가히 애석하다 아니하겠는가. 오호라! 공의 효우의 행실과 인후의 덕은 진실로 영원한 복을 누릴 수 있었으나 벼슬에 나아가 복록을 구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고 끝까지 부모를 봉양하면서 마침내 이 세상을 떠났으니 한스럽도다. 화려함을 쫓지 않았고 검소하게 생활하면서 천리를 따랐는데 일찍 돌아가시어 영화를 보지 못한 것은 어떠한 연고인가? 슬프다! 공의 자손은 모두가 세상에서 그 아름다움을 이루고 장차 그 가문을 크게 빛낼 것이니 이것은 하늘의 보시가 이에 있는 것이 아닌가? 세무는 문행이 있어 나와 더불어 친하게 지내는데 그가 행장을 가지고 와서 명을 부탁함이 심히 간절하였다. 나는 이미 늙었고 또 문사도 보잘 것 없는데 청함이 더욱 간곡하니 내 비록 공을 잘 알지는 못하나 공의 행적은 이미 들어서 높이 우러러 사모해 온지 오래되었다. 지금 비문을 짖는 일에 있어 의리로 끝내 사양할 수만은 없기에 감히 그 일의 차례를 매기고 이에 명한다. 명에 이르기를,
동안의 화려한 후손 효우로서 가문의 명성을 빛내었구나. 공이 이를 이어받아 그 명성을 천하에 날리었도다. 뜻을 닦음은 증자와 같이 하였고 즐거워하고 재롱떠는 것은 어린애와 같이 하였다. 선묘에는 지극한 정성을, 조상의 무덤에는 마음을 다하였도다. 부모의 따뜻한 보호에 은혜를 갚지 못하고 그 큰 뜻 풀지 못했으니 원통하도다. 공에게 현숙한 아내 있어 빼어난 자질에 깊은 덕성 갖추었도다. 한편으로는 집안을 화목하게 다스리고 또 한편으로는 부인으로서 규범을 세웠도다. 공께서 병들어 신음하니 더욱 정성 다하여 받들었도다. 하늘은 그 후손들에게 복을 내리었으니 이는 공의 행적에 대한 하늘의 보답이로다. 자손이 번창하니 뜰에 가득하구나. 살아 생전에 뜻 펴지 못하였다 하여 돌아가신 후에도 그럴 것인가. 만약에 내 말을 믿을 수 없다면 이 새긴 명을 수정할 것이로다.
보공장군 행 세자익위사 위솔 윤봉오가 글을 쓰고, 가선대부 동지중추부사 겸 오위장 최방언이 글을 짓다.
숭정갑신후 83년(영조 2, 1726년) 병오년 9월 일.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