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세 참판공 휘 세영/휘 세영 관련

전주최공 문성공 13세손 12대조고 증 참판 휘 세영 묘표 행장 묘지명

아베베1 2014. 4. 20. 17:05

 

 
 전주최공 문성공  고려문화시중 13세  휘 세영 (12대조고)
 전주최공 문성공파 (여러종인의 자료를 수집한 자료를 근거로 ) 
 초성본을 최초로 만드신 분이시다
 
  전주최공 문성공 휘 아
 13세손으로 증 도승지공 영광군수 문과이신  휘 탁의 아드님이시다    

 그 동안 문성공 중랑장공 후손으로 사헌부감찰공으로 많이 알려져 있는 부분이고

 여러가지 사료의 자료가 많지 않아서 많이 알려지지 않고 묻혀져있는 것도 사실이다

 감찰공의 사적을 보면 여러가지의 사적들이 연구를 통하여 전해오고 있지만

 문성공 중랑장공 후손 분 조차 간과를 하는 부분이 있는 듯하다   

  여러가지의 중요한 사적을 연구를 하여야 하지만  여러가지 부족한 후손으로서 아쉬움이 남는 부분이다

 아울러 종중  집안에 잘못 전해오는 사실 , 그리고 선조님에대한 여러가지 사실을 차츰

 자료를 찾아서 정리를 하고자 하는 것이 부족한 저의 생각입니다.

 

 - 시조공 이전의 여러가지 문헌 

 -  연촌공 유사 관련부분

 -  녹동서원 관련부분  

 -  산당집 관련 부분

 -  초성관련 부분 등  여러곳에서 잘못 알려진 부분이 많이 있는 듯 하다  

 -  감찰공 사후에 여러가지  관직 문제등

 -  양정제공 미백 11 대조고 관련 사적등  (집안의 여러가지 사적이 많으나

     여러가지부분에서 족보에 올리지못한 여러가지 사유등)

     

    상기의 여러가지 부분에 대하여는 대부분 사장되어 있고 잘못 전해지고  있는 부분

     많은 듯 하다 .  

          

최세영(崔世榮)에 대하여
1613년(광해군 5)∼1686년(숙종 12). 조선 중기 문신. 자는 몽여(夢與)이다. 본관은 전주(全州)이고, 출신지는 한양(漢陽)이다. 증조는 최희수(崔稀壽)이고, 조부는 최응하(崔應夏)이다. 부친 최탁(崔琢)과 모친 채충익(蔡忠益)의 딸 평강채씨(平康蔡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부인은 서선적(徐善積)의 딸 연산서씨(連山徐氏)이다.
타고난 자질이 과묵하였으며 어려서부터 노는 것을 좋아하지 않고, 스스로 매일 과목을 정해서 공부하였다. 1650년(효종 1) 증광시 생원 2등 18위로 합격하였다. 그해 부친의 별세로 관직에 뜻을 둘 수 없었으나 3년상을 마친 후, 전생서참봉(典牲暑參奉)에 임용되어 관사축(管司畜)의 직무를 오랫동안 맡았다. 제향(祭享)은 중대한 일인데 부당하게 혼용되어 있음을 대로사(待虜使)에 건의하니, 우암(尤菴) 송시열(宋時烈)이 듣고는 사람들과 의논하여 그 부서를 별도로 관장하게 되었다.
1674년(현종 15) 산릉감조관(山陵監造官)·사포서별제(司圃署別提) 등을 거쳐 삼가현감(三嘉縣監)을 역임하였다. 향리의 유생인 권감(權鑑)의 옥사를 처리할 때 권감의 무리들이 갖은 방법으로 회유하려고 하였지만, 시종일관 올바르게 판단하고 의연하게 대처하여 조금도 동요하지 않았다. 그러자 권감의 무리들은 고지식한 현감이라며 옥사를 다른 지역으로 옮겨 처리하였다. 1682년(숙종 8)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을 거쳐 평릉찰방(平陵察訪) 등을 역임하였다. 향년 71세의 일기로 생을 마감하였다.
슬하에 3남 2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최방언(崔邦彦)·최방진(崔邦藎)·최방현(崔邦顯)이다.
묘는 충청남도 공주(公州)에 있다.

 

 감찰(監察) 증(贈) 참판(參判) 최공(崔公) 세영(世榮) 묘표

 

광해(光海) 난정(亂政) 때 적신(賊臣) 이이첨(李爾瞻)이 앞장 서서 수모론(讎母論)을 주장하여 그 기세가 하늘을 찌를 듯하였다. 그런데 그때 태학생(太學生) 최공 탁(崔公琢) 같은 분이 있어 많은 선비들의 앞에 서서 그의 흉물스럽고 간사함을 항장(抗章)으로 곧바로 배척하여 그 명성이 당대를 진동시켰다. 그리고는 마침내 문을 닫고 전려(田廬)에 앉아 세상을 잊고 살기를 10여 년 만에, 인조(仁祖)가 반정하자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군수(郡守)를 지냈는데, 우암(尤菴) 송 선생도 그의 묘에 명(銘)을 쓰면서 그의 어짊을 극구 찬양하였다.
그에게 장부다운 아들 둘이 있었는데, 공이 맏으로 휘는 세영(世榮) 자는 몽여(夢與)였다. 만력(萬曆) 계축년(1613, 광해5) 11월 20일에 태어났는데, 타고난 바탕이 중후하여 함부로 놀거나 장난하지 않았고 어려서부터 독서를 좋아하였다. 자라서는 과거에 관한 공부를 하여 과거 마당에서 이름을 날려 경인년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였으나, 임진년에 아버지 상을 당하여 상중에 있으면서 예도를 다하였고 상을 마치고는 어머니를 모시고 아버지 묘 아래에 살면서 오로지 농사지어 봉양하기에 전력을 기울였다. 무술년에 벼슬길에 올라 전생서 참봉(典牲署參奉)이 되고 경자년에 봉사(奉事)에 올랐다. 을사년에 어머니가 세상을 뜨자 공이 그때 나이 이미 오십이 넘었는데도 아버지 상 때와 똑같이 예를 지켰다.
공이 봉사로 있던 시절 경과(慶科)를 당하여 반궁(泮宮)에서 주점(做點)을 하였는데, 대관(臺官)이 국자장(國子長 성균관 대사성)을 공이 헐뜯었다는 근거 없는 말을 만들어 공을 탄핵하고 체직시킨 일이 있었다. 그런데 그후 그 국자장이 전지(銓地)에 있으면서 그 사실이 무함인 것을 알고 공을 맨 먼저 복직시켜 영릉 참봉(寧陵參奉)을 제수하였다. 그 뒤 예에 따라 사섬시 봉사(司贍寺奉事)가 되었고, 인선대비(仁宣大妃 현종(顯宗)의 비)의 상에 산릉(山陵)의 일을 맡아 다스렸던 공로로 사포서 별제(司圃署別提)에 올랐다가 삼가 현감(三嘉縣監)으로 나갔다. 그때 그 고을 선비 권감(權鑑)이 유현(儒賢)을 존중히 여긴다는 이유로 흉한 무리들이 원수로 여기고 방백(方伯)은 그것을 죄로 만들어 옥(獄)을 꾸미려고 하였는데, 공은 끝까지 정도를 지키며 확고부동하였다. 그리하여 방백이 그에 대해 크게 화를 내었지만 감히 중상은 하지 못하였다. 그 뒤 한 세력가의 자제가 읍기(邑妓)를 데리고 살면서 횡포가 심하자 공이 그를 용서없이 물리쳤는데, 그가 앙심을 품고 수의(繡衣)를 사주하여 공을 무함한 결과 1년 넘게 옥에 갇혔으나 끝내 그러한 사실이 없어 풀려났다.
임술년에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에 제수되어 직책을 다한다는 칭송이 있었고, 가을에는 평릉 찰방(平陵察訪)에 임명되었다. 당시는 기근이 거듭 닥친 때였는데, 공이 마음을 다해 손을 써서 우졸(郵卒)도 되살아나고 마정(馬政)도 잘 되었으며, 어호(漁戶)의 징공(徵供)도 일체를 면제하여 쌓였던 폐단들이 씻은 듯 없어졌으므로 백성들 모두가 은혜로움을 느끼었다. 질(秩)이 차고 나서 몇 년을 한가히 보내며 기력도 강건하다가, 병인년 5월 20일 아무 병도 없이 세상을 떠났는데, 그때 나이 74세였다. 처음에는 교하(交河)의 강교리(綱橋里)에 장사 지냈다가 병술년에 공주(公州) 읍 서쪽 곡화천(曲火川) 자좌(子坐)의 둔덕으로 이장하였는데, 그후 맏아들이 귀하게 되어 가선대부 호조 참판에 추증되었으며, 두 배위도 모두 정부인(貞夫人)에 추증되었고, 숙인(淑人) 서씨(徐氏)가 부장되어 있다.
공은 지극히 효성스러워 있는 힘을 다하여 어버이를 섬기며 좌우로 뜻을 어김이 없었고 조상도 성경(誠敬)을 다하여 받들었다. 아우 세장(世章)과 우애가 돈독하였는데, 세장이 일찍 죽자 모든 일을 직접 하였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자기 전답까지 팔아 장례를 치렀고, 아비 잃은 조카들을 자기 자식처럼 돌보았다. 그리고 겨레붙이들에게까지도 은혜를 베풀어 그들의 환심을 얻지 않은 것이 없었으며, 그가 사귄 친구는 모두가 당대의 현인이요 군자였다. 공은 평소 조급해 하거나 폭언하는 일이 없었고 각박한 일도 한 적이 없었으며, 술도 무척 좋아했지만 관직에 있으면서는 입에 가까이하지 않았다. 자기 몸가짐은 매우 엄하게 하면서도 아랫사람은 사랑으로 대하여 그가 떠난 뒤에 백성들이 잊지 않고 그리워하면서 비를 세워 송덕하곤 하였다. 이는 대체로 청렴한 절조야말로 공을 대변할 수 있는 적절한 표현이 될 정도로 가는 곳마다 털끝만큼도 자신에게 누가되는 일을 하지 않았기 때문인데, 돌아오고 나면 온 집 안이 썰렁하였으나 자신은 태연하기만 하였다.
공은 항상 보첩(譜牒)을 분명히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주장이어서 씨족(氏族)에 관한 기록을 한데 모아 1권의 책을 만들어두고 그것을 화목을 다지는 자료로 삼았다. 전주 최씨(全州崔氏)는 고려국의 시중(侍中) 아(阿)를 시조로 하고 있다. 아조에 와서 담(霮)이라는 이는 집현전 제학(集賢殿提學)이었고, 덕지(德之)라는 이는 예문관 직제학(藝文館直提學)으로 세상에서 그를 연촌 선생(煙村先生)이라고 불렀는데 사당을 세워 제사를 모시고 있다. 고조인 휘 언청(彦淸)은 봉사(奉事)로서 일두(一蠹 정여창(鄭汝昌))의 미생(彌甥 자매(姉妹)의 손자)이었는데, 사람들은 그를 소일두(小一蠹)라고 불렀다. 증조의 휘는 희수(稀壽)로 판관(判官)이고, 조부의 휘는 응하(應夏)로 현감이었다. 어머니 평강 채씨(平康蔡氏)는 선교랑(宣敎郞) 충익(忠益)의 딸인데, 우재(尤齋) 선생이 공의 아버지 군수공(郡守公)의 묘표(墓表)를 쓰면서 부인의 현덕(賢德)에 대하여 자세히 기록해 놓았다. 숙인(淑人)은 관향이 연산(連山)이고 그의 아버지는 좌랑(佐郞)에 추증된 효적(效積)이다. 부인은 성품이 정숙 명철하고 주고받음을 함부로 하지 않았으며 시부모 봉양하는 일과 제사 모시고 손님 접대하는 일을 하나같이 지성으로 하여 온 집안이 존경하고 본받았다. 나이 86세로 을해년 8월 10일 세상을 떠났는데, 슬하에 3남 2녀를 두었다.
장남 방언(邦彦)은 학술(學術)로 여러 번 별천(別薦)에 올라 몇 관직을 역임하고 지금은 노직(老職)으로 동추(同樞)가 되어 있다. 그 다음은 방신(邦藎)과 방현(邦顯)이다. 큰딸은 현감 송이석(宋彝錫)에게 시집가고 다음은 허평(許玶)에게 시집갔다. 방언은 4남을 두었으니 수강(守綱)ㆍ수기(守紀)ㆍ수경(守經)ㆍ수약(守約)인데, 수기는 방신의 양자가 되어 갔으며, 네 딸은 황준(黃鐏)ㆍ군수 이정영(李挺英)ㆍ김일정(金日井)ㆍ윤수겸(尹壽兼)에게 각각 시집갔다. 방현은 3남을 두었는데, 수손(守遜)ㆍ수도(守道)와 좌랑 수적(守迪)이고, 2녀는 안희인(安希仁)ㆍ윤간(尹侃)에게 시집갔다. 사위 송씨는 3남 4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백원(百源)ㆍ참봉 성원(性源) 그리고 만원(萬源)이고, 딸은 진사 이흥조(李興朝)ㆍ이사도(李思道)ㆍ김시서(金時叙)ㆍ조명제(趙明濟)에게 각각 시집갔다. 사위 허씨의 두 아들은 신(紳)ㆍ인(繗)이고, 딸은 아직 시집가지 않았다. 그 밖에 내외 증손과 현손들은 이루 다 기록하지 못했다.
아, 공은 이름 있는 아버지의 자식으로서 자훈(慈訓)을 잘 받아 행의(行誼)까지 겸하여 갖추었으며 문예(文藝) 또한 숙성하였으니, 일찍이 왕정(王庭)에 이름을 날리고 세상을 크게 울렸어야 옳았을 것인데, 불행히도 길이 어긋나 주묵(朱墨 하급 관리를 의미함)의 사이에서 맴돌다 말았으니, 애석한 일이었다. 내가 공과 척속(戚屬)으로서 어린 시절부터 그의 의자 밑에서 놀았기에 평소에 공을 존경하고 사모해 왔었는데, 지금 보면 장로(長老)들이 이미 다 가 버리고 없어 공에 관하여 나만큼 자세히 아는 사람도 없을 것 같다. 동추공이 부탁한 묘도 문자를 의리상 감히 사양할 수 없기에 젊은 시절 듣고 보았던 것을 엮어 대략 이상과 같이 쓴다.

 監察贈參判崔公 世榮 墓表 

 

光海昏亂。賊臣爾瞻倡讎母論。勢焰黨天。時則有若151_087d太學生崔公琢。倡多士抗章。直斥其兇邪。聲名震一時。遂杜門田廬。與世相忘者十餘年。仁廟改玉。擢文科官郡守。尤菴宋先生銘其墓。亟稱其賢。有丈夫子二人。公其長也。諱世榮字夢與。生於萬曆癸丑復月廿日。天資厚重。不妄游戲。自幼好讀書。及長修擧子業。有名場屋。庚寅中司馬。壬辰丁外艱。居喪盡禮。制終奉母夫人居于墓下。爲力田專養計。戊戌筮仕爲典牲參奉。庚子陞奉事。乙巳母夫人下世。公年已衰而率禮如前。公嘗爲奉事時。値慶科。做點于泮宮。臺官流言以詆訾國子長劾遞。後國子長秉銓。知151_088a其誣。首先牽復。除寧陵參奉。例遷司瞻奉事。仁宣大妃之喪。以山陵監董勞陞司圃別提。出爲三嘉縣監。時邑儒權鑑以尊尙儒賢。見仇於兇黨。方伯欲鍛鍊成獄。而公終始守正。確然不撓。方伯大加慍怒。而亦不敢中傷。有一勢家子畜邑妓橫甚。公大斥不饒。其人銜之。嗾繡衣構誣。經年逮獄。卒無事實。壬戌拜司憲府監察。有盡職稱。秋除平陵察訪。時値荐饑。盡心撫摩。郵卒穌馬政擧。漁戶徵供。一倂蠲除。積瘼如洗。衆皆懷惠。秩滿閒居數年。氣力康健。丙寅五月廿日無疾而逝。壽七十四。始葬交河綱橋里。丙戌151_088b移窆于公州治西曲火川負坎之原。後以長子貴贈嘉善大夫戶曹參判。二配俱贈貞夫人。淑人徐氏祔焉。公性至孝。竭力事親。左右無違。奉先極其誠敬。與弟世章友愛篤至。世章早歿。躬莅凡百。至鬻己田而營葬。撫視諸孤如己出。推以至於宗族。無不得其歡心。所與交皆當世賢人君子。平生無躁暴之言。峭刻之行。酒戶甚寬。而居官未嘗近口。律己甚嚴而撫下以仁。去後民追思不忘。樹石而誦之。蓋其廉節。是公之長物。所至不以一毫自累。及歸環堵蕭然。而處之晏然。常以爲譜牒不可不明。裒稡氏族之書。編151_088c成一部。以爲講睦之資。全州之崔。以高麗侍中阿爲上祖。入我朝。有曰霮。集賢殿提學。有曰德之。藝文館直提學。世號煙村先生。立祠俎豆。高祖諱彥淸。奉事。是一蠹之彌甥。人稱小一蠹。曾祖諱稀壽。判官。祖諱應夏。縣監。妣平康蔡氏。宣敎郞忠益之女。尤齋先生撰郡守公墓表。備列其賢德。淑人貫連山。其考贈佐郞效積。稟性淑哲。取與不妄。甘旨之供。蘋蘩之薦。一出於至誠。宗門式之。年八十六。歿於乙亥八月十日。擧三男二女。男長邦彥。以學術屢登別薦。歷幾官。今爲老職同樞。次邦藎,邦顯。女適宋彝錫縣監。次151_088d許玶。邦彥四男。守綱,守紀,守經,守約。守紀爲邦藎後。四女黃鐏,李挺英郡守,金日井,尹壽兼。邦顯三男。守遜,守道,守迪佐郞。二女安希仁,尹侃。宋壻三男百源,性源參奉,萬源。四女李興朝進士,李思道,金時敍,趙明濟。許壻二男紳,繗。女未行。內外曾玄不盡錄。嗚呼。公以名父之子。祇承慈訓。行誼兼備。文藝夙成。宜其早揚王庭。大鳴于世。而不幸蹉跎。棲遲朱墨之間。惜哉。余綴戚屬。自幼周旋於牀下。景仰有素矣。顧今長老零落已盡。知公之詳莫余若也。同樞公徵以墓文。義不敢辭。遂撮少日所見聞。略序如右。


 

 

 
縣監崔公墓誌銘 幷序 
公諱世榮。字夢與。全州人。上祖文成公阿。仕高麗。官至侍中。入本朝。有諱德之。藝文館直提學。以淸名直道。當韓明澮時。見幾退老。世稱烟村先生。歷四世170_455d 而至安東判官諱稀壽。見長官年少。不肯折腰。投紱而歸。人服其高。卽公之曾祖也。祖諱應夏。縣監。沙溪金先生。嘗稱有長者風。考諱琢。進士。値光海昏亂。倡率方外同志。䟽論爾瞻罪惡。被停擧特罰。及仁祖反正。始闡大科。官止兵曹正郞。尤齋宋先生銘其墓。亟讚其節行。妣平康蔡氏。宣敎郞忠益女。鄭古玉碏之外孫也。通經史識道理。古玉嘗愛而敎之曰。恨汝不爲男子也。古玉歿。䟽食三年。仁祖孝廟喪。亦久而不肉曰。女子獨非臣子耶。公以萬曆癸丑十一月二十日生。庚寅。中生貟。壬辰。正郞公卒。甲午制170_456a 除。戊戌。拜典牲署參奉。時宋先生在朝。公言本署之設。專爲祭享。而今兼管司畜。接待虜人。事殊未安。先生聞而是之。遂卽建白。復司畜舊署而別之。庚子。陞奉事。有媢嫉者嗾㙜官。劾公做點泮宮時。有詆訿國子長語。後㙜官知其誣。慚悔來謝。乙巳。丁內艱。丁未。憂吉。庚戌。除寧陵參奉。公嘗爲祭官。入齋。守僕房有火變。同僚以入直未久。諉之公。公不與辨。卽身自就吏。遇赦徑出。翌年。以刑官誤達。更被逮。對簿卽放。癸丑。有遷陵之禮。故事。因山畢。陵官皆陞叙。而公故不遅待。先六七日。例遷司瞻奉事。後代公者。出170_456b 六品。聞者咸歎其不可及。甲寅。爲仁宣王后山陵監造官。以勞。拜司圃別提。冬。授三嘉縣監。公時年已衰。而自望闕禮。以至聖廟焚香社壇城隍等祀。一皆躬行。祁寒盛暑。亦不廢。遇旱禱雨。無不立應。民以古崔少府比之。邑儒權鑑。曾爲宋先生。罰星州兇徒之墨削先生名於院錄者。至是方伯欲鍛鍊成獄。公終始堅執不聽。方伯恚甚。卽移其獄於金山。鑑竟被刑禍。幾死得生。時有繡衣褒公善政。而末以鑑事爲疵。故賞典不及焉。時相姪子在鄰境。挾本邑妓橫甚。公面斥不饒。其人衘公次骨。戊午。時相私人。又爲御170_456c 史廉問。遂相與媒糵。以十餘條爲罪。於是朝廷下公廷尉。問鉤覈經年。終無事實。金吾讞奏。又添入他事。必欲重究。至再行査。而亦不能得。以己未四月。見宥。盖公守正奉法。不以利害有所撓屈。故其見嫉而中毒者如此。壬戌。拜司憲府監察。府舊有直宿之䂓。久廢不擧。公排衆議獨行之。諸僚多厭憚。秋。除平陵察訪。撫摩驛卒。愛恤漁戶。專以省約爲務。衆皆感戴。丙寅二月二十日。暴得疾。卒于第。享年七十四。公天資沉重。自幼不妄游戱。事父母。承顔盡歡。左右無違。侍正郞公之疾。藥必先嘗。衣不解帶。歷數歲。如一日。170_456d 及創巨。雖甚窮空。送終諸具。皆極無憾。其丁內艱也。執禮一如前喪。與弟世章。友愛甚篤。逮其喪。至鬻己田而葬之。視諸姪。如己出。推以及於內外親族。靡不各盡其道。與人交。必厚而敬之。平生無粗暴之言。峭刻之行。客至。不問貴賤大小。輒開心見誠。人無不愛慕欣欣焉。性喜飮酒。多而不亂。然當官則絶不近口。其莅民一以仁愛爲先。興利除害。如恐不及。律己嚴而接下寬。故吏民俱安。久益追思。至樹石以頌。居家不事産業。每自官歸。槖中如洗。僦屋蕭然。䟽糲不繼。其廉節可知也。公嘗謂人家譜牒不明。往往知父而170_457a 不知祖。此豈爲人之道乎。遂裒聚諸宗家乘而編摩之。積以歲月。久乃成書。豈亦有得於程夫子所謂明譜系厚風俗者耶。公娶連山徐氏。贈戶曹佐郞效積女。婦德甚高。非其義也。一介不取於人。隨公之官。亦未嘗以毫髮累公。以庚戌十月二十四日生。壽八十六。而歿於乙亥八月十日。始與公同葬於交河網橋里。後改卜于公州治西曲火川面佳佐里子坐午向之原。以丙戌十月日。合窆焉。擧三男。長邦彦。以學行被剡薦。歷幾官。今爲老職僉樞。次邦藎,邦顯。二女長適宋彛錫。縣監。次適許玶。僉樞四男。守綱,守紀,守170_457b 經,守約。四女。適黃鐏,李挺英。郡守。金日井,尹守兼。邦藎無子。以守紀爲後。邦顯三男。守遜,守道,守迪。佐郞。二女適安希仁,尹侃。宋縣監三男。百源,性源。奉事。萬源。四女適李興朝。進士。李思道,金時叙,趙明濟。許玶二男。紳,繗。普明,普翼,普天,普昌,辛聖憲,趙光臣妻。守綱出。普成。守紀出。普淵,趙重彬,金相鼎妻。守經出。普元,李燧妻。守遜出。普哲。守道出。普協,普悅,普,趙宅彦妻。守迪出。李郡守男。相華。進士。金日井男。普演。餘不能盡錄。竊惟公內承名父賢母之訓。外交一時賢人君子。薰染將就。行誼甚備。孝悌行於家。而淸白著170_457c 于官。斯已無愧於先徽。况有賢子。依歸大賢之門。士友莫不推重。豈不亦于前有光哉。余於僉樞公。平日蒙幸不淺。今以公幽誌見屬。義有不敢辭者。謹據家狀。剟錄其一二。系之以銘。銘曰。
嗚呼烟村。間世名賢。公實後承。典刑猶存。恢弘之度。厚重之質。人推國器。謂當必達。乃困祿仕。白首棲屑。一縣一郵。用亦未卒。德非不高。才豈不多。命也奈何。識者興嗟。公山之原。體魄所藏。我銘納竁。百世永寧。


 

 監察崔公行狀

 

 

公諱世榮字夢與。全州人。高麗侍中文成公河之後。167_138c 再傳而入我朝有諱霮。官至檢校。戶曹參議集賢殿提學。是生諱德之號烟村。早擢文科。以淸名直道。爲世所重。文廟時以藝文直提學。引年告退。朝廷惜其去。六臣諸賢皆贈詩以送。比之二䟽云。歷三世而爲濟用監副奉事諱彦淸。卽公之高祖。以一蠧鄭先生彌甥。有所肖似。謝官守靜而終。曾祖諱稀壽。安東判官。本作擢司馬典七邑有聲績 祖諱應夏監鎭岑縣。以長德見稱於沙溪金先生。考諱琢 一作有昏朝時三字 以上庠生。倡多士論斥爾瞻。仁廟改玉。闡文科。所與交盡一時名賢。而以無要路跡。蹭蹬半世。官止兵曹正郞。尤菴167_138d 宋先生銘其墓。妣平康蔡氏。贈司僕寺正忠益之女。外祖曰古玉鄭先生。稱其賢淑。壼範可知。以萬曆癸丑十一月二十日生公。天姿厚重。弱不好弄。自課讀書。中庚寅司馬。正郞公遘疾淹歲。公晝夜扶護。衣不解帶者如一日。逮創巨雖甚貧空。竭誠盡禮。送終得無憾。服闋拜典牲署參奉。時兼管司畜之任久矣。公以謂祭享重事。不當混倂於待虜使。尤菴聞而然之。遂卽入告。而別其署。司畜之復舊。盖由於此。未幾陞本署奉事。公以親志不廢擧業。値慶科做點於泮宮。爲媢嫉者所搆以詆訿國子長。橫遭白簡。人多寃167_139a 之。厥後㙜官慚悔來謝。國子長亦知其誣而釋然。及其東銓。擧爲寧陵參奉。陵寢適有無妄之災。同僚不欲自當。推諉於公。公與之就理者再。終無幾微色。聞者以爲難。當弘濟洞遷封時。例當用勞陞出。而選部有可通之便。人多勸公一言。而公以蔭路序進。自有常典。不當以遅速爲意。終不聽。竟以常格遷司贍署奉事。其恬於宦情如此。甲寅夏以山陵監造官超敍司圃署別提。出爲三嘉縣監。視事無何。有邑儒權鑑之獄。權與儕流曾爲尤菴先生見仇於星州之兇黨。方伯必欲鍛鍊。而公終始秉正。毅然不少撓。167_139b 方伯大加慍恚。遂移其獄。及御史至。將列其善狀。又慫慂使不得純褒。時公年近七耋。而望闕禮及聖廟焚香。以至社稷城隍等祀必躬行。不以寒暑而少怠。遇旱走群望虔禱。雨輒立應。衆皆稱之曰雖古之崔少府。亦無以過也。邑下曠野植以松杉甚衆。人未喩其意。及至旱炎。人多賴之。其爲民慮遠類如此。有一時相子姓曾畜一妓而居在鄰壤者。橫恣無顧忌。公特惡而 一有面字 斥之。其人含之次骨。適會繡衣。乃其時相私人。相與媒糵而中之。遂下廷尉問。人皆代怖。公對簿甚晳。而掇拾猶未已。究覈經年。卒無絲毫實167_139c 乃已。使其時有萬一近似則必不免禍罟云。壬戌拜司憲府監察。本府直宿之䂓。廢却盖久矣。公獨行之。諸寮或厭苦。而亦不敢崖異焉已。除平陵察訪。時値荐飢。驛路凋弊。公盡心撫摩。郵卒以蘇。馬政亦擧。所有支供漁戶。在前率皆侵剝。以充苞苴者多矣。公務從省約。使不失所。衆皆懷惠。至今歌詠。秩滿閑居。以丙寅五月二十日暴病卒。享年七十 一有有字 四。公事親承顔盡歡。左右無違。前後喪皆率禮罔愆。享先極其誠愨而猶若歉然。與季氏友愛篤至。日夕相守怡怡如也。及喪自鬻其田而完葬。撫視諸孤如己出。睦167_139d 婣親族。以至接人一以悃愊爲主。客至不問貴賤小大。必與之從容談笑。坦然開懷。人莫不愛慕。平生無强暴之言峭刻之行。雖於家人子弟。見有不及。亦未甞形於聲色。一作其恢弘如此 喜飮酒。至居官絶不近口。莅民以如傷爲心。興利除害。如己嗜慾。律己甚嚴而接下以寬。故吏民俱安。庶事自理。去後民追思碑之。年久而猶誦其遺愛也。居家不事産業。罷官歸槖如洗。僦屋蕭然。簞瓢屢空。處之晏如也。常謂人家譜牒不明。幾於知父而不知祖。間有承訛襲謬。而甚至移宗冒族者亦多。此豈爲人之道乎。遂裒稡諸宗家乘而167_140a 編摩之。積勞淹歲。始克成書。其明譜係正倫理之意。可謂篤矣。配連山徐氏。贈戶曹佐郞效 一作善 積之女。姿 一作稟 質慈惠。致謹於滫瀡蘋藻。又處貧以泰。隨公之官。不以一縷凂其治。宗黨歸其仁。後公十年而沒。始從葬于交河某洞。以丙戌十月日。移葬公州某向之原。有三男二女。男長邦彦。由薦入仕。今爲老職僉樞。次邦藎早死。邦顯。一有女長宋彛錫縣監次許坪通德郞 其餘曾孫某某。昌翕以里中小兒。甞挾冊趍隅。蒙公誘掖之勤矣。甞記其德宇鴻厖。藹然和氣之薰人。所聞於維楊鄕黨則稱公長德之懿。與操執堅確。非衰世人物。167_140b 惜乎其晩仕多枳。未及有所施爲。窃所嗟惋矣。今僉樞公以昌翕有親炙之素。屬以狀述。意甚切至。誼不敢以不文辭。謹就行錄。略加詮次。以俟立言者之財擇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