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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석정(花石亭) (사가시집 45권 )펌

아베베1 2010. 7. 13. 16:09

사가시집 제45권
 시류(詩類)
화석정(花石亭)


화석정 위의 구름은 천 년의 옛 구름이요 / 花石亭上雲千秋
화석정 아래 강물은 절로 흘러만 가는데 / 花石亭下江自流
화석정의 주인은 적선의 후예이기에 / 花石主人謫仙後
풍류와 시주가 가업을 이을 만했도다 / 風流詩酒能箕裘
주인이 어느 해에 이곳에 살 터 잡았나 / 主人何年此卜築
어쩌면 청전의 옛 별장이 아니었는지 / 無奈靑氈舊別業
여기는 이원이 살던 반곡 안은 아니요 / 不是李愿盤之中
정히 이게 바로 덕유의 평천장이로다 / 定是德裕平泉宅
주인은 일찍 청운의 길에 들어섰건만 / 主人早策靑雲勳
급류에서 용퇴하여 전원으로 돌아가선 / 急流勇退歸田園
강산풍월을 자신의 지기지우로 삼고 / 江山風月作知己
언뜻 지나친 벼슬은 뜬구름처럼 여겼네 / 過眼簪紱如浮雲
정자 안엔 네 계절마다 꽃이 만발하여 / 亭中四時花滿開
붉고 흰 찬란한 꽃이 가득 쌓인 놀 같고 / 紅白熳爛雲錦堆
정자 앞에 흐르는 물은 하염없이 흘러 / 亭前流水去悠悠
벌창한 물이 흡사 포도주같이 푸른데 / 綠漲恰似葡萄醅
때로 흥겨우면 가벼운 거룻배를 띄우고 / 有時乘興泛輕舠
난장 계도로 강의 파도를 가로질러서 / 蘭槳桂棹截江濤
중류에 둥둥 띄워 가는 대로 놓아두고 / 中流泛泛縱所如
호쾌히 담론하면 교룡도 놀라고말고 / 豪談轉雷驚龍蛟
술잔 잡고 달 대하면 달빛은 하 밝은데 / 把酒對月月色多
달은 넘어가지 않고 강물은 잔잔할 제 / 月不落兮江無波
왼편 오른편으로 황학 백구를 불러 대라 / 左招黃鶴右白鷗
하루살이 세상이 내게 무슨 상관이리오 / 蠛蠓人世於吾何
아 그대의 이 낙을 아는 사람이 없으니 / 嗟君此樂無人知
그대 같은 명철함은 고금에 드물다마다 / 如君明哲今古稀
내 또한 은거할 곳이 장단에 있건마는 / 我亦菟裘在長湍
십 년을 돌아가려면서 아직 못 돌아갔네 / 十載欲歸今未歸
어찌하면 돛단배로 큰 파도를 헤쳐 가 / 安得風帆破巨浪
만 곡의 술을 싣고 한번 서로 방문해서 / 載酒萬斛一相訪
고래처럼 들이마시고 곤드레로 취하여 / 鯨呑轟飮醉如泥
두 다리로 뱃전 치며 고성방가를 해 볼꼬 / 高謌兩脚鼓雙舫


[주C-001]화석정(花石亭) : 파주(坡州)에 있던 정자인데, 조선 초기의 문신으로 벼슬이 지돈녕부사(知敦寧府事)에 이른 이명신(李明晨)이 세우고 지내던 곳이라 한다. 이명신은 율곡(栗谷) 이이(李珥)의 5대조이다.
[주D-001]화석정(花石亭)의 …… 후예이기에 : 적선(謫仙)은 곧 이백(李白)을 가리킨 것으로, 여기서는 이명신 또한 이씨(李氏)이므로 이백의 후예라 칭한 것이다.
[주D-002]가업을 이을 만했도다 : 원문의 ‘기구(箕裘)’는 가업을 잘 계승한다는 뜻으로 《예기(禮記)》 학기(學記)에 “풀무질을 잘 하는 집 자식은 반드시 갖옷 짓는 법을 배우고, 활을 잘 만드는 집 자식은 반드시 키 만드는 법을 배운다.〔良冶之子 必學爲裘 良弓之子 必學爲箕〕”고 하였다.
[주D-003]청전(靑氈) : 푸른 담요라는 뜻이다. 진(晉)나라 왕헌지(王獻之)가 어느 날 밤 서재에 누워 있는데, 도둑이 들어와서는 다른 물건을 모조리 훔치고 또 와탑(臥榻)으로 올라가자, 왕헌지가 천천히 말하기를 “청전은 우리 집에서 대대로 전해 온 물건이니, 그것만은 놓아두어야 한다.〔靑氈我家舊物 可特置之〕”고 하니, 도둑이 놀라서 달아났다는 고사에서 온 말로, 전하여 가전(家傳)의 구물(舊物) 또는 세전지업(世傳之業)을 가리키기도 한다. 《太平御覽》
[주D-004]이원(李愿)이 살던 반곡(盤谷) : 반곡은 태항산(太行山) 남쪽에 있는 지명으로, 이곳은 골짜기가 깊고 산세가 험준하여 은자(隱者)가 살기에 알맞은 곳이라고 한다. 당(唐)나라 때 문신 이원이 일찍이 벼슬을 사직하고 물러가 이곳에 은거할 적에 한유(韓愈)가 그를 송별하는 뜻으로 송이원귀반곡서(送李愿歸盤谷序)를 지어 그곳의 경관과 부귀 공명의 무상함 등을 자세히 설파하며 그를 극구 칭찬했다.
[주D-005]정히 …… 평천장(平泉莊)이로다 : 평천장은 당 무종(唐武宗) 때의 명상(名相)인 이덕유(李德裕)의 별장 이름으로, 대사(臺榭)가 100여 곳이나 되는 데다 천하의 기화이초(奇花異草)와 진송괴석(珍松怪石)이 다 모여 마치 선경(仙境)을 방불케 했다고 한다.
[주D-006]급류(急流)에서 …… 돌아가선 : 송(宋)나라 때 한 도승(道僧)이 진단(陳摶)에게 전약수(錢若水)의 사람됨에 대해 말하기를 “그는 급류 속에서 용감히 물러날 수 있는 사람이다.〔是急流中勇退人也〕”라고 했는데, 뒤에 과연 전약수가 벼슬이 추밀부사(樞密副使)에 이르렀을 때 40세도 채 안 된 나이로 용감하게 관직에서 물러났던 데서 온 말이다. 《聞見前錄 卷7》 전하여 급류에서 용퇴한다는 것은 곧 관로(官路)가 한창 트인 때에 용감하게 은퇴하는 것을 말한다.
[주D-007]난장 계도(蘭槳桂棹)로 …… 가로질러서 : 소식(蘇軾)의 전적벽부(前赤壁賦)에 “이에 술을 마시고 즐거움이 고조에 달하여 뱃전을 두드리며 노래하기를 ‘계수나무 노와 목란 상앗대로, 맑은 물결을 치며 달빛 흐르는 강물을 거슬러 오르도다. 아득한 나의 회포여, 하늘 저 끝에 있는 미인을 그리도다.’라고 했다.〔於是飮酒樂甚 扣舷而歌之 歌曰 桂棹兮蘭槳 擊空明兮泝流光 渺渺兮余懷 望美人兮天一方〕”라고 한 데서 온 말로, 전하여 흔히 배의 미칭(美稱)으로 쓰인다.
 
신독재전서(愼獨齋全書) 제8권
 묘지(墓誌)
율곡(栗谷) 이 선생(李先生) 묘지명

율곡 선생(栗谷先生)이 세상을 떠나신 지 지금 60년하고도 10년이 되었다. 사림(士林)들은 그의 학덕을 사모하고, 조정에서는 그가 제시한 길을 생각하며, 백성들은 그의 은택을 그리워하고 있다. 그동안 세상이 한번만 변한 것도 아니어서 왜구가 쳐들어오고 오랑캐가 난리를 일으키기까지 하여 인륜과 강상이 끊어졌다. 그런데 그때마다 서로 말하기를, “그때 만약 율곡의 뜻이 조금이라도 실현되었더라면, 설마 오늘과 같은 일은 없었을 것 아닌가.” 하는 것이다. 아, 그게 어디 이익으로 유혹하고 위세로 몰아붙여서 한 말이던가. 《대학(大學)》 전(傳)에 이르기를, “훌륭한 덕과 지극한 선은 백성들이 잊지 못한다.”고 했는데, 그게 바로 선생을 두고 한 말이다.
선생은 성이 이씨(李氏)이고 휘가 이(珥)이며 자가 숙헌(叔獻)인데, 율곡(栗谷)은 학자들이 그리 부른 것이다. 선계(先系)는 풍덕군(豐德郡) 덕수현(德水縣)에서 나왔다. 옛날에 휘 돈수(敦守)라는 이가 있어 고려조 중랑장(中郞將)이었고, 그 후 대를 이어 명망 있는 인물들이 있었다. 고조는 휘 추(抽)로 지군사(知郡事)였고, 증조 휘 의석(宜碩)은 경주 통판(慶州通判)이었으며, 조부인 휘 천(蕆)은 증 좌참찬(贈左參贊)이었다. 고위(考位) 휘 원수(元秀)는 감찰(監察)로 좌찬성(左贊成)에 추증되었는데, 진솔하고 선을 좋아하여 옛사람의 풍도가 있었다. 그리고 비위(妣位)는 평산 신씨(平山申氏)로, 기묘 명현(己卯名賢) 신명화(申命和)의 딸로 영특하고도 정숙했으며, 고금(古今)에 훤하고 서화(書畵)에도 능하였다.
가정(嘉靖) 병신년(1536) 12월 26일에 강릉(江陵) 북평리(北坪里)에서 선생을 낳았다. 신씨의 꿈에 검은 용이 바다에서 침실로 날아들었는데, 조금 후에 선생이 태어났기 때문에 어려서는 자를 현룡(見龍)이라 하였다. 선생은 우선 생긴 바탕이 보통과는 달랐고, 말을 하자마자 곧 문자(文字)를 알았다. 그리하여 나이 3세 때 석류(石榴)를 보고는 즉석에서, “쪼개면 분홍색 진주가 나온다.[碎紅珠]”는 시구를 지었다. 또 5세 때는 신 부인이 병을 심하게 앓자 가만히 사당에 들어가 빌었다. 언젠가는 누가 물을 건너다가 넘어지자 보는 사람들 모두가 손벽을 치며 웃었지만 선생은 유독 걱정스러운 얼굴로 지켜보다가 그 사람이 건너고 난 후에야 한시름을 돌렸다. 이처럼 어버이에 대한 효성과 남을 사랑하는 마음은 바로 타고난 것이었다. 7세에 진복창전(陳復昌傳)을 지었는데, 그 줄거리를 보면, “군자(君子)는 덕(德)이 자기에게 충만해 있기 때문에 항상 너그럽고 여유가 있으며, 소인(小人)은 속에 야심을 품고 있기 때문에 언제나 근심과 불만 속에 빠져있는 법이다. 그런데 지금 복창을 보면 얼굴에 근심과 불만이 떠나지 않고 있으니, 만약 저러한 사람이 어느 날 제 마음대로 하게 된다면 그 우환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다.”라는 내용이었다. 그 후 복창은 과연 사화(士禍)의 매파 역할을 하였다. 8세 때 화석정(花石亭)에다 쓴 시에 “산은 바퀴 같은 달을 뱉어 내고, 강은 만리의 바람을 머금고 있네.[山吐孤輪月 江含萬里風]”라는 구절이 있었는데, 당시 입에서 입으로 전송되기도 했다. 9세 때는 또 ‘장공예전(張公藝傳)’을 읽다가 슬픈 표정을 지으며 말하기를, “구세(九世)가 한집에 산다는 것은 혹 쉽지 않을 일일는지 모르지만, 최소한 형제 사이는 떨어져 살지 말아야지.” 하였다. 그리고 ‘형제동거 사친도(兄弟同居事親圖)’를 만들었고, 또 이어 옛분들의 충효(忠孝)에 관한 사적들을 뽑아 두고 보기도 하였다.
12세 때 찬성공이 병석에 눕자 선생은 또 사당에 가 울면서 자기를 대신 아프게 해 달라고 빌었는데, 마침내 아버지의 병이 낫기도 했다. 13세에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고부터 문장(文章)이 일취월장하여 소문이 좍 퍼졌지만, 선생은 그것을 소기(小技)라 하여 그리 탐탁히 여기지 않았다. 얼마 안 가 신 부인이 세상을 떠나자 선생은 여묘살이를 하면서 직접 제전(祭奠)을 올렸는데, 그때 옷가지를 세척이나 음식을 끓이는 일까지도 전혀 남에게 시키지 않고 손수 다 했다. 복(服)을 벗고 나서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이 갈수록 더 깊어가던 터에 하루는 우연히 불경을 보게 되었는데, 사생(死生)에 관한 이야기에 감명을 받고 또 그 학문이 청정(淸淨)하면서도 간요(簡要)한 것이 좋아 친척과 벗들에게 작별을 고하는 글월을 남겨 두고 마침내 금강산(金剛山)으로 들어갔다. 그리하여 침식(寢食)을 잃을 정도로 불도에 심취해 있다가 어느 날 그것이 옳은 길이 아님을 크게 깨닫고는 그 모두를 다 버리고 돌아와 다시 우리의 길을 찾았는데, 모든 것을 오직 성인(聖人)으로 기준 삼았고, 무오년(1558)에는 도산(陶山)으로 퇴계 이황(李滉) 선생을 찾아가 뵙고서 의리(義理)에 관해 서로 변론했는데, 그때 퇴계는 자신의 종전 견해를 버리고 선생의 말을 따른 것들이 많았다. 그리고 그 후 선생에게 보낸 서신에, ‘고도(古道)에 마음을 두고 정로(正路)를 가고 있으니, 앞으로 헤아릴 수 없는 발전이 기대된다.’고 했다.
천도책(天道策)에 대하여 답한 것을 보면, 그 내용이 매우 깊고 범위가 넓어서 비록 노사 숙유(老師宿儒)라 하더라도 다 우러러보았다. 신유년(1561)에 아버지 상을 당했고, 갑자년(1564)에는 사마시(司馬試)와 문과(文科)의 초시(初試)와 복시(覆試)에 모두 장원을 하였는데, 당시에 ‘아홉 마당에 장원한 사람[九場壯元]’이라고 불렀다. 이에 명종(明宗)이 불러 보고는 시를 지어 보라고 하여, 율시(律詩) 30운(韻)을 지어 올리자 크게 칭찬을 하였다. 호조와 예조의 좌랑(佐郞)을 거쳐 정언(正言)이 되어서는, ‘의지를 확고히 하여 학문에 힘쓰고, 정직한 사람을 가까이하고, 나라의 뿌리를 든든하게 해야 한다.’는 내용의 차자를 올렸고, 전랑(銓郞)이 되어서는 공정한 길을 걷는 것을 본인의 임무로 삼았다.
선조(宣祖)가 즉위했을 때 서장관(書狀官)으로 중국에 갔으며, 돌아와서는 옥당(玉堂)에 뽑혀 들어가게 되었다. 이때 선생은 책임이 점점 무거워짐을 느끼고는 소년 시절 불도에 심취했던 일을 들어 자신을 탄핵했는데, 이에 대해 주상은 예로부터 호걸스러운 선비치고 부처에 빠져보지 않은 사람이 별로 없다고 하면서 허락하지 않았다. 그리고 다시 전랑을 제수하자 선생은 외조모를 문안하겠다고 강릉(江陵)으로 떠났는데, 그것이 불법이라고 언자(言者)가 탄핵했으나 주상은 효성을 가상히 여겨 듣지 않았다. 기사년(1569)에 교리(校理)에 제수되자 아직 학문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사양했으며, 또 외조모가 자신을 길러 주신 은혜가 있다고 돌아가 봉양할 것을 청하자 상은 직임을 띤 채로 가서 보살피도록 특별히 명하였다.
명종의 상을 마치고 진하(陳賀)할 때 선생은 차자를 올려 ‘하(賀)’를 ‘위(慰)’로 고치기도 했다. 또 일찍이 아뢰기를, “임금의 학문은 격물(格物), 치지(致知), 성의(誠意), 정심(正心)을 체득하고 하나하나 실천 해 나가야지만 비로소 효과가 있지, 그렇지 않으면 비록 공자와 맹자가 항상 곁에 있으면서 날마다 도덕(道德)을 얘기해도 아무 도움이 없습니다.” 했는가 하면, 또 아뢰기를, “지금 선비들의 습성이 매우 야박해지고 있습니다. 옛날 맹자는 한낱 필부(匹夫)였지만 그래도 사특한 풍조를 물리치고 세상이 바른 쪽으로 돌아가도록 하여 삼성(三聖)의 뒤를 잇지 않았습니까. 임금으로서 만약 자기 책임만 다한다면, 바른길을 밝히고 사람들을 착하게 만들기가 어찌 맹자 정도뿐이겠습니까.” 하기도 하였다.
당시 재신(宰臣)으로서 기묘년(1579)의 사류(士類)들을 드러내 놓고 배척하는 자가 있었다. 이에 고봉(高峯) 기대승(奇大升)이 승지(承旨)로서 그 잘못을 따지기 위해 청대(請對)를 하자, 어느 재상이, 승지로서 청대하는 것은 근래 규정에 없는 일로서 체통이 손상될 염려가 있다고 하였다. 이에 선생이 말하기를, “말이 옳은 이상 체통이 무슨 문제이겠습니까. 대신(大臣)으로서 임금을 옳은 길로 가도록 인도는 못하고 그까짓 규정 따위에만 얽매이고 있으니, 자못 바라던 바가 아니오이다.” 하였다.
상이 하루는 말하기를, “덕행(德行)이 없이 무슨 사업을 어떻게 할 것인가. 그리고 삼대(三代) 시절 같은 것은 갑자기 되는 것이 아니지 않은가.” 하니, 선생이 아뢰기를, “덕행과 사업은 동시에 함께 닦아 나아가는 것이지, 어떻게 덕행이 아직 닦이지 않았다고 정사(政事)가 문란하거나 말거나 내버려 두겠습니까. 정자(程子)가 이르기를, ‘후세의 왕들이 춘추 대의(春秋大義)에만 밝다면 비록 순(舜)과 우(禹)와 같이 덕 있는 인물이 아니더라도 삼대의 치적을 재현할 수 있을 것이다.’고 했으니, 이것이 분명한 뒷받침을 해 주는 말입니다.” 하였다.
호당(湖堂)에서 사가독서(賜暇讀書)하고 있을 때는 왕패(王霸)와 치안(治安)의 방법에 관해 자세히 논한 글월 한 편을 지어 올렸다. 그러자 상이 한 문제(漢文帝)를 왜 자신을 포기한 사람이라고 했느냐고 묻자, 대답하기를, “한 문제가 아름다운 바탕을 갖추고도 수준이 낮은 이론만 좋아하여 옛 법을 회복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 것입니다.” 하였다. 그때 비(妃)를 간택하게 되었는데, 선생은 혼례를 바로잡는 뜻에서 여인들의 얼굴을 왕이 직접 보는 일을 하지 말아야 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우연한 기회에 상이 을사사화(乙巳士禍)에 대해 언급하자 선생이 아뢰기를, “인종(仁宗)이 승하하신 후 천명(天命)과 인심(人心)이 명종(明宗)을 두고 어디로 가겠습니까. 그런데 그때 그 간사하고 흉측한 무리들이 그것을 저들의 공로로 삼기 위해 사류(士流)들을 모조리 없애고 위훈(僞勳)을 기록했던 것입니다. 이제는 그들의 억울함을 씻어 주고 위훈은 삭제하여 국시(國是)를 바로잡아야 할 것입니다.” 했다. 그 당시 퇴계(退溪)와 고봉(高峯) 두 선생도 이 일을 어렵게 여겼는데, 선생이 전후 40여 차례나 그에 관한 절실한 차자를 올리면서 끝까지 주장하여 결국 선생의 주장대로 결정되자 세상 사람들이 쾌재를 불렀다. 또 사관(四館)에서 신진(新進)들을 괴롭히는 풍습을 미워하여 아주 뿌리 뽑을 것을 청하면서 ‘중국 사람들은 그것을 보고 오랑캐 풍속이라고 하면서 놀라고 비웃는다.’고 하니, 주상이 그대로 따랐다.
얼마 후 시골로 돌아가 이조 정랑(吏曹正郞), 검상(檢詳), 사인(舍人), 부응교(副應敎) 등에 제수되었으나, 다 응하지 않았다. 혹 교리(校理)로서 예궐(詣闕)을 했다가도 금방 돌아갔고, 그리하여 학도들과 해주(海州)의 고산(高山)에서 지냈는데, 그곳 구곡(九曲)의 풍경이 좋아 마침내 그곳에 정착했다. 신미년(1571)에는 청주 목사(淸州牧使)로 나가서 정사를 오로지 교화(敎化)를 위주로 베풀고 향약(鄕約)을 실시하기도 했는데, 얼마 못 가 병으로 그만두었다. 임신년(1572)에 또 응교(應敎), 사간(司諫), 원접사(遠接使) 종사관(從事官), 전한(典翰), 직제학(直提學) 등이 제수됐으나, 선생 자신은 학문이 넉넉하지 못하다는 이유로 벼슬에 나아가려 하지 않았다. 그런 데다가 선생은 말만 했다 하면 반드시 요순 아니면 삼대 시절을 인용했으므로, 때로는 주상으로부터 현실에 어둡다는 말을 들어야 했다. 그 때문에 더욱 힘써 물러나기를 청했는데, 삼사(三司)가 번갈아 글월을 올려가며 그대로 머무를 것을 요구해도 통하지 않았다.
계유년(1573)에 다시 직제학(直提學)에 임명되었는데, 소명(召命)이 세 번 내린 후에 들어가자 상이 접견하고는 너무 가벼이 가버린 데 대해 책망하였다. 선생은 재주가 부족하고 병이 깊어서였다고 사죄하고 이어 아뢰기를, “보통 사람도 독서를 하면 세상을 구제하고 상대에게 이로움을 주고 싶은 마음이 드는 법인데, 지금 주상께서는 타고난 바탕이 그만하시고 주위의 조건도 다 좋은 데도 어찌 스스로 분발하고 싶은 마음이 없으십니까. 전하께서 진심으로 나라가 잘 다스려지기를 원하신다면 그 원하시는 마음은 바로 관저(關雎)와 인지(麟趾)의 뜻입니다. 또 임금이 남의 말을 잘 듣고 겸허하게 받아들이면 모든 선(善)이 내 한 몸에 모이게 되어 덕업(德業)이 잘 이루어지지만, 만약 스스로 만족을 느끼면 좋은 말들이 어디에서 오겠습니까.” 하였다. 동부승지(同副承旨)로 올라서는 주상께 늘 큰 뜻을 가지고 분발하도록 권하면서 또 이르기를, “사리에 어두운 선비들은 요순의 정치를 금방이라도 실현할 수 있다고 하고, 속된 선비들은 옛날의 도(道)는 절대 시행할 수 없다고들 하는데, 모두가 다 틀린 주장들입니다. 정치는 반드시 옛것을 목표로 하되 하는 일은 현실에 맞게 점차적으로 해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하였다.
그 당시 퇴계 선생이 세상을 떠났는데, 상이 선생의 행장(行狀)이 없다는 이유로 시호 내리는 일을 불허하자, 선생이 아뢰기를, “이황(李滉)은 성리(性理)에 침잠하여 옛날 어느 명현(名賢) 못지않게 그 조예가 깊습니다. 그의 시호야 비록 몇 년 늦어지더라도 크게 해가 될 것이 없겠지만, 만약 그 일 때문에 사방의 선비들이 전하께서 선을 좋아하는 진실한 마음이 없는 분이라고 의심하게 되면 그것은 작은 문제가 아닙니다.” 하였다.
선생은 우계(牛溪) 성혼 선생(成渾先生)과는 도의(道義)로 사귀었는데, 우계가 선생에게, “선비가 자기 포부를 세상에 펴려고 하면서 임금의 잘못부터 바로잡지 아니하고 사공(事功)부터 앞세운다면, 그것은 바로 이익을 취하려는 생각이다.”고 하자, 선생이 답하기를, “주상의 마음을 갑자기 돌릴 수야 있는가. 내가 정성을 쌓아 상대가 느끼고 깨닫기를 바라야지, 그러지 않고 열흘이나 한 달 사이에 당장 효과를 나타내려다가 안 된다고 하면서 금방 떠나버리는 것은 임금을 섬기는 도리가 아니지.” 하였다.
갑술년(1574)에는 만언소(萬言疏)를 올려 당시 필요한 일들을 빠짐없이 아뢰었으나, 상이 가상하다는 답만 하고 그대로 시행하지는 못했다. 또 상이 한 문제가 왜 가의(賈誼)를 등용하지 않았느냐고 묻자, 대답하기를, “문제는 뜻이 높지 못했기 때문에 가의가 큰소리치는 것을 보고 쓰지 않았던 것입니다. 비유해 말하자면, 나는 작은 집을 지으려고 하는데 공사(工師)가 와서 큰 집을 지으려고 한다면 그대로 들어줄 리가 있겠습니까. 그와 같은 것이지요.” 했고, 이어 또 아뢰기를, “지금 백성들은 살기가 날이 갈수록 고되고 피곤해서 새로운 일대 개혁을 하지 않고는 다시 구제할 길이 없습니다.” 하니, 상은 기강(紀綱)이 부진한 것을 한탄하였다. 이에 선생은 또 아뢰기를, “기강이라는 것도 마치 호연지기(浩然之氣)와 같습니다. 이 호연지기는 정의감이 내 몸과 마음에 가득 쌓여 조금도 미진한 느낌이 없어야만 기운이 충만하여 거칠 것이 없게 되는데, 기강도 마찬가지입니다. 따라서 나 자신이 공평 정대한 마음으로 오늘 한 가지 선정(善政)을 행하고 내일 또 한 가지 선정을 행하게 되면, 기강은 자연적으로 확립되는 것입니다.” 하였다.
대사간(大司諫) 시절에 상이 황랍(黃蠟) 5백 근을 들여오도록 명했는데, 외간에서는 그것으로 불상(佛像)을 만들려는 것이라고 여겼다. 이에 선생이 동료들을 거느리고 들어가 강력히 반대의 뜻을 아뢰자, 상은 그 말을 누구에게서 들었느냐고 따져 물었다. 이에 선생이 이르기를, “그게 만약 정당한 일이라면 쓸 곳을 분명히 밝히시면 그뿐이고, 만약 정당한 일이 과연 아니라면 빨리 고치시면 그뿐입니다. 그런데 지금 꼭 그 소문의 뿌리를 캐려고 하신다면 주 여왕(周厲王)이 무당을 시켜 자기를 헐뜯는 자를 감시하도록 한 것과 다를 게 뭐가 있겠습니까. 옛날 사마광(司馬光)이 ‘일생 동안 남에게 말 못할 일은 하지 않았다.’고 하였습니다. 지금 신은 전하께 성정(誠正)의 공부를 하시도록 바라고 있는데, 이번의 이 한가지 일만 보더라도 그렇게 숨기시고 있으니, 남이 모르는 가운데 과연 부끄러운 행동을 하시지 않았을지 누가 알겠습니까.” 하니, 상은 “감히 말의 뿌리를 숨기려고 하는 것은 숨김없이 임금을 대해야 하는 신하의 도리가 아니다.”고 하면서 조언(造言)의 죄로 다스리려고 하였다. 선생이 다시 아뢰기를, “무슨 말을 들으면 즉시 아뢰는 것이 바로 숨김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직언(直言)으로 간하는 신하를 중한 법으로 다스리려고 하시니, 이는 아마도 말 한마디로 나라를 망친다고 하는 꼴이 아니겠습니까.” 하니, 상은 황랍에 관한 명령을 마침내 철회하고 말았다.
그 일을 계기로 선생은 떠날 뜻을 더욱 굳혔는데, 상은 “귀를 씻고 인간사 듣지를 말아야지.[洗耳人間事不聞]”라는 시구를 인용하면서 이르기를, “은거 생활을 하면 그 얼마나 즐거우리.” 하였다. 선생이 아뢰기를, “옛날의 은자들은 임금과는 아무 관계가 없었기 때문에 서로 잊고 유유자적할 수가 있었지만, 지금 신은 나라의 후한 은혜를 받았으니 비록 전야에 가 묻혀있어도 마음만은 주상 곁에 있을 것입니다. 다만 하는 일 없이 먹고만 있기가 어려워서 감히 머물러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고, 마침내 파산(坡山)으로 돌아갔다. 이에 대해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그 일이 공 자신으로서는 잘된 일이겠지만, 세상일은 어찌할 것입니까?” 하자, 선생은 말하기를, “자기 처신도 제대로 못하면서 세상 구제하는 사람 있다던가.” 하였다.
황해 감사(黃海監司)를 제수하자 선생은 지방이기 때문에 어쩌면 소신대로 해 볼 수도 있으리라는 기대에서 부임을 하였다. 부임한 즉시 그 지방의 폐막(弊瘼)을 즉시 상소한 다음 오로지 교화를 숭상하고 어려운 일을 돌보아 주며 군정(軍政)을 개선하는 따위의 일에 관심을 두었다. 이듬해에 체직하고 돌아왔으나, 때마침 인순왕후(仁順王后)의 상을 당하여 다시 부제학(副提學)으로 부름을 받고 들어가 상제(喪制)에 관해 논하게 되었다. 이때 선생은 논하기를, “만약 옛날의 예법대로 하려고 하면 임금과 신하 모두가 최질(衰絰)을 갖추어야 하고 또 베로 모(帽)와 삼(衫)을 별도로 만들어 입고 정사를 보아야 하는데, 지금은 이미 시기가 지났으므로 차라리 송 효종(宋孝宗) 때의 복제대로 하는 것이 그래도 고례에 가깝습니다. 그러나 흰 갓에 검정 띠를 착용하는 것은 나점(羅點)이 만든 제도로 주자(朱子)가 그에 대해 매우 상세한 논변을 했습니다. 어찌 주자를 버리고 나점의 제도를 따라서야 되겠습니까.” 하였다. 그때 맨 먼저 그 건의를 한 사람은 민공 순(閔公純)이었는데, 박공 순(朴公淳) 및 노공 수신(盧公守愼)과 우리 할아버지 대사헌공(大司憲公) 김계휘(金繼輝)의 의견이 선생의 견해와 일치하였다. 그리하여 마침내 선생의 건의대로 옷과 갓을 모두 흰색으로 하기로 결정하였고 이어 그것을 항식(恒式)으로 정했다.
상이 선생에게 해서(海西)의 형편을 물으면서 따뜻하게 대하였는데, 선생이 아뢰기를, “듣기에 전하께서 ‘나는 학문을 하고 싶은데, 일이 많아서 겨를이 없다.’고 하신다는데, 신은 그 말을 듣고 한편으로는 기쁘면서도 한편으로는 걱정이 되었습니다. 상께서 학문에 뜻을 두고 있다는 점이 기쁘고, 학문에 관한 이치를 살피지 않으시는 것이 걱정이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른바 학문이란 일상 생활을 하면서 하는 일 하나하나가 모두 사리에 맞게 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다만 사리라는 것이 어떠한 것인지를 잘 모르기 때문에 독서(讀書)를 해서 그것을 알려는 것이지, 만약 독서만 하고 날마다 하는 일은 그와 배치된다면 그것은 학문이 아닙니다. 신의 차자에 대해 답하신 것을 신이 어제 보았는데, 그 내용에 고상한 논리가 없다고 하셨습니다. 옛날 한 문제(漢文帝)도 늘 그러한 식이었기 때문에 공렬(功烈)도 매우 낮아 본받을 것이 없게 된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사서(四書)의 소주(小註)들 가운데 맞지 않은 곳이 많다 하여 선생으로 하여금 바로잡으라고 하자, 대답하기를, “신 혼자서 맡을 수는 없고, 성혼(成渾)과 같이 해 보겠습니다. 전하께서 무엇인가 참으로 일을 해 보시고 싶은 경우에는, 성혼 같은 사람을 한직(閑職)에다 두시고 날마다 돌아가며 입시(入侍)하게 하시면 틀림없이 많은 도움이 될 것입니다.” 하였다.
그 당시에 사헌부 관리가 왕자궁(王子宮)에 들어가서 죄를 범한 궁노(宮奴)를 잡아간 일이 있었다. 이에 상이 노하여 그 관리를 치죄(治罪)하였는데, 선생이 차자를 올리기를, “전하께서 부시(婦寺)들이 한 말만 믿고 그렇게 지나친 일을 하셨습니다. 옛날 정자(程子)의 어머니는 일개 부인이었지만 자식을 가르칠 줄 알아서 늘 자식들에게 ‘남에게 굽히지 못하는 것을 걱정하고 펴지 못하는 것을 걱정하지는 말라.’고 하였답니다. 전하의 아드님이야 펴지 못할 걱정이 어디 있겠습니까. 요즘 법을 지키다가 윗사람의 뜻에 거슬리면 으레 스스로 잘난 체한다는 비난을 받게 되는데, 신은 적이 민망한 생각이 듭니다.” 하기도 하였다.
선생이 《성학집요(聖學輯要)》를 편찬해 두었다가 이때 와서 차자와 함께 올렸는데, 상이 이르기를, “이 책이 좋은 정치를 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되겠으나, 다만 나 같은 사람은 그대로 할 수가 없을 것 같다.” 하였으므로, 선생은 자리에서 일어나 대답하기를, “옛날 송 신종(宋神宗)이 ‘요순(堯舜)이 하시던 일을 짐(朕)이 어떻게 감히 하겠느냐.’고 하자, 정명도(程明道)가 서글픈 표정을 지으며 하는 말이, ‘폐하(陛下)의 이 말씀이 사직(社稷)과 신민(臣民)을 위해서 복된 일이 아닙니다.’ 하였습니다. 지금 주상의 이 말씀도 그와 비슷하지 않습니까.” 하였다. 또 언젠가는 야대(夜對) 때 아뢰기를, “천리(天理)와 인욕(人欲)이 원래는 둘로 나누어진 것이 아니어서 그 사이에는 털 하나 들어갈 틈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일단 분리가 되면 그 한계는 뚜렷하여 천리 아니면 인욕이 되는 것입니다.” 하였고, 또 이르기를, “전하께서 궁리(窮理), 거경(居敬), 역행(力行) 이 세 가지에 대해 독실한 뜻을 두신 채 노력하고 분발하여 그날그날의 언행(言行)이 모두 털끝만큼의 사사로움도 없이 하나같이 올바르게 되도록 하실 것이며, 그런 다음에 그 방법으로 신민(臣民)을 통솔하신다면, 군자는 그것을 믿고 충성을 다할 것이고 소인은 그것이 무서워서 감히 잔꾀를 부리지 못할 것입니다.” 하였다.
그때 진신(縉紳)들 사이에 심의겸(沈義謙)과 김효원(金孝元) 두 사람을 두고 시비(是非)가 서로 엇갈리고 있는 조짐을 보고 선생은 그것을 크게 걱정한 나머지 당시 재상이었던 노수신(盧守愼)에게 “그들 두 사람을 다 외지로 내보내면 진정될 수도 있지 않겠느냐.”고 하자, 노 재상이 그 말을 따랐다. 그리하여 김효원을 부령 부사(富寧府使)로 내보내려 하므로 선생이 또 아뢰기를, ‘북새(北塞)는 유신(儒臣)이 있을 곳이 못되는 데다가 김효원은 또 깊은 병이 있어서 살아 돌아오지 못할 염려가 있으니, 내지(內地)로 바꿔 발령하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하자, 상은 ‘김효원에게 편당을 하고 있다.’고 하여 듣지 않고 준엄한 비답을 내렸다. 그러나 선생은 선생대로 더 간곡히 아뢴 끝에 결국 김효원을 부령에서 삼척(三陟)으로 바꾸어 내려보내게 해 주었다. 그때 선생의 뜻은 이쪽저쪽을 다 적당히 무마하여 나랏일을 함께 잘 해 나가기를 바랐던 것이다. 그런데 혹자는 말하기를, “이 세상에 양시(兩是)와 양비(兩非)는 있을 수 없는 것인데, 공은 요즘 두 쪽을 다 좋게 만들려고 하고 있으니, 그게 도대체 무슨 뜻입니까?” 하였으므로, 선생이 이르기를, “두 사람 다 자기들 패끼리 뭉쳐 서로 반대편을 비난하고 공격하는 것은 둘 다 잘못이다. 둘 다 잘못이기는 하지만 그들 둘은 다 사류(士類)이므로 서로의 감정을 풀어 버리고 서로 협동하는 풍토를 만들자는 것이다. 이렇게 하지 않고 꼭 이쪽은 옳고 저쪽은 그르다고 한다면, 그 알력은 풀릴 때가 없을 것 아닌가.” 했다. 그러나 당시의 공론은 갈수록 더 엇갈려만 갔기 때문에 선생은 마침내 향리로 돌아가기로 마음을 굳혔다. 이에 온 조정 사람들이 다 와서 선생을 전별했는데, 선생은 그 자리에서 이르기를, “권세 있고 간사한 무리들이 세상을 어지럽게 만들고 있을 때 그래도 그들의 기를 꺾어 버리고 깨끗한 기운을 조성하여 선비들이 기를 펴고 말할 수 있게 만든 것은 심의겸의 힘이 아니었던가. 김효원이 사감(私感)을 가지고 상대를 배척하여 선배를 불평하게 만든 것은 김효원의 잘못이다. 그래서 그를 억제하는 뜻으로 외직에다 좌천시켰으면 그것으로 됐는데, 게다가 또 지나치게 그를 미워하기까지 하는 것은 선배로서 너무한 일이다. 이 문제는 아마 이렇게 판단하면 맞을 것이다.” 하였는데, 모든 이들이 선생의 이 말에 대해 너무나 공정한 논리라고 하였다. 선생이 낙향한 뒤에도 승지(承旨), 대사간(大司諫), 이조(吏曹)와 병조(兵曹)의 참의(參議), 전라 감사(全羅監司) 등이 연거푸 제수되었지만 다 불응하였다.
정축년(1577)에는 파주(坡州)에서 해주(海州)로 가 살 집을 짓고 사당(祠堂)을 세운 다음 형수인 곽씨(郭氏)를 모셔다가 사당을 맡게 하는 한편 형제와 여러 조카들을 모두 한집에 모여 살게 하여 평소 마음먹었던 소원을 풀었다. 그리고 초하루와 보름이면 정침(正寢)에 앉아서 자질(子姪)들의 절을 받고는 가범(家範)을 읽게 했으며, 종들을 뜰 아래다 세워 두고 서로 예를 행하게 하면서 그들이 알 수 있는 우리말로 계사(誡辭)를 읽히기도 하였다.
선생의 서모(庶母)가 술을 좋아했으므로 새벽이면 선생이 꼭 술을 데워 가지고 그의 침실로 가서 안부를 살폈고, 혹시라도 언짢은 표정이면 부드러운 목소리로 정성을 다해 기어이 웃는 얼굴을 보고서야 물러나오곤 했으며, 집안 내의 자질구레한 일까지도 서모의 허락을 받고서야 처리했다. 그리고 중형(仲兄)을 꼭 아버지 모시듯 하였으며, 자신이 귀해졌다 하여 마음을 바꾸는 일이 없었다.
좋은 계절이나 명절 때면 술상을 차리고 거문고를 타면서 소장(少長)들로 하여금 가락에 맞추어 노래하게 하였으되 가정의 분위기가 엄숙하면서도 화목하였으므로, 학도들도 그것을 보고는 더더욱 모여들어 앉을 자리가 없을 정도였다. 그리하여 정사(精舍)를 하나 짓고 은병(隱屛)이라 이름하고는 거기에서 거처하였다.
선생은 일찍이 이르기를, “공맹(孔孟) 이후로 여러 유자(儒者)들을 집대성한 이는 주자(朱子)뿐인데, 우리나라에서 주자의 법을 그대로 지킨 이로는 정암(靜庵) 조광조(趙光祖)와 퇴계(退溪)만한 이가 없었다.”고 하고는, 정사 북쪽에 주자를 모실 사당을 세우고는 그 두 선생을 배향하였다. 또 학규(學規)와 《격몽요결(擊蒙要訣)》을 지어 그것으로 제생들을 가르쳤으며, 사창(社倉)을 설치하여 가난한 사람들을 구제하기도 하였고, 향약(鄕約)을 실시하여 풍속을 바로잡기도 하였다.
그때 상이 자기 사묘(私廟)에 친히 제를 올렸다 하여 옥당(玉堂)이 나서서 간쟁하였다가 상을 화나게 만들었는데, 이 소식을 듣고는 선생이 이르기를, “임금도 한 가정의 구성원으로서의 예(禮)가 있다. 그러니 궁중(宮中)에서는 친속(親屬)으로 서열을 정하는 것이다. 더구나 성상의 몸을 낳아준 대원군(大院君)에 대해서는 그가 만약 세상에 살아 있다면 주상께서 사실(私室)에 들어가 절해야 할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닌가. 지금 그 사당에 들어가서 조카가 숙부에게 제사 모시는 예로 제사를 모신 것이 그게 무슨 잘못이겠는가. 시속의 유학자들은 임금이 높다는 것만 알고 사은(私恩)의 중대함은 모르고 있으니, 개탄할 일이 아닐 수 없다.” 하였다.
무인년(1578)에 공의대비(恭懿大妃)가 별세했는데, 때마침 간원(諫院)에 제수하는 명이 있어 일단 부름에 응했다가 금방 돌아왔다. 얼마 후 또 전직(前職)으로 부르자 선생은 사양하면서 말하기를, “신은 말을 잘 할 뿐입니다. 신이 한 말이 그대로 쓰여지기만 한다면, 신이 조정에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가 아니겠습니까.” 하였고, 이에 대해 상은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밀봉하여 올리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선생이 시사(時事)에 관한 문제들을 1만여 자에 달하는 글로 빼놓지 않고 써올렸는데, 그것을 우계(牛溪)가 보고는, 참으로 한 시대를 요리하고 인류의 길을 개척할 내용이라고 감탄했다. 그러나 상은 체직을 명했고, 이에 옥당(玉堂)에서 그것은 선비를 대우하는 도리가 아니라고 말했으나 통하지 않았다. 또 이어 이조 참의에 제수되었고 기묘년(1579)에는 대사간에 제수되었으나, 다 나아가지 않았다.
선생은 비록 물러나 있기는 했어도 선비들이 붕당으로 갈라지고 있는 것이 걱정되어 이 사람 저 사람에게 서신을 보내 화합과 협동을 강조했는데, 이발(李潑)이 듣지 않으면서 심의겸을 함정으로 삼았으므로 수많은 선비들이 그 사건에 연루되었다. 이에 선생은 또 소(疏)를 올려 그 사실을 분명히 밝히고 이어서 정공 철(鄭公澈) 및 우리 할아버지를 변호하였지만, 그러한 소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참찬(參贊) 백공 인걸(白公仁傑)이 시사에 관한 자기 소견을 아뢰고 싶어하자, 선생은 그의 뜻을 가상히 여겨 상소문을 대신 작성해 준 일이 있었다. 이것을 두고 상대편에서는 자신을 숨기고 남을 사주한 것이라고 탄핵하였으므로, 백공(白公)은 옛날 정자(程子)가 팽부(彭富)를 대신하여 했던 일을 들어 변명하기도 했다.
경진년(1580)에 상이 병을 앓다가 조금 낫자 선생이 보고 싶어서 간곡한 유지를 내렸다. 명을 받고 선생이 들어가 뵈오니, 상이 이르기를 “다행히 이렇게 서로 만났으니 무슨 하고 싶은 말이 있느냐”고 물었으므로 선생이 대답하기를, “전하께서 큰 병을 앓고 나신 후에 선한 마음이 싹트신 것입니다. 이 나라를 잘 다스려야 되겠다는 굳은 뜻을 가지시되 우선 자기 수양에 힘써 인재를 등용할 때도 자신을 척도로 삼으소서.” 하고, 이어 여쭙기를, “제 선왕(齊宣王)이 자기 나라가 잘 다스려지지 않은 데 대해서 대답을 하지 않았는데, 가령 전하께서 그러한 질문을 받았다면 어떻게 대답하시겠습니까?” 하자, 주상도 대답이 없었다. 물러나온 선생은 동료들과 함께 차자를 올려, ‘자기 수양을 정치의 기반으로 삼고, 사리에 밝기 위해서는 사추(私醜)부터 없애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당시 종계(宗系)의 무고(誣告)가 아직도 분명히 밝혀지지 않고 있었는데, 선생은 이 문제가 사신을 잘 골라 보내지 못한 소치라 하여 전대(專對)할 만한 인물을 골라서 보낼 것을 청했다. 이에 조정에서는 선생이 적격자라고 했는데, 대신(大臣)들이 아무는 단 하루도 조정을 떠나서는 안 된다고 하였으므로 우리 할아버지를 보내게 되었다. 이때 선생이 진주본(進奏本) 초안을 잡았는데, 주상이 그것을 보고는, “참 잘 되었다. 일이 이제 풀리겠다.” 하였다.
그로부터 얼마 후 대사헌(大司憲)으로 특진되었는데, 장령(掌令) 정인홍(鄭仁弘)이 심의겸을 몰아내려고 하기에 선생이 그렇게 하지 말라고 타일렀으나 정인홍은 듣지 않았다. 이에 선생은 부득이 그의 의견을 따르며 이르기를, “내가 만약 정인홍의 청을 듣지 않으면 그는 틀림없이 화를 내고 가버릴 것이고, 그렇게 되면 그의 도당들이 그것을 가지고 나를 공격할 것이다. 그런데 내가 만약 떠나게 되면, 다시는 양쪽을 조정할 가망이 없게 되는 것이다.” 하였다. 그 이튿날 정인홍이 심의겸을 논박하면서 그 기회에 다른 사류(士流)들에게까지 화살을 겨누었으므로 선생이 나서서 이 문제를 풀기에 마음을 다했다. 이에 정인홍은 부끄러움을 느끼고 다소 수그러들었으나 그의 도당들은 떠들고 일어나 도리어 선생을 편당을 드는 사람이라고 대드는 바람에 선생이 인피(引避)하고 말았는데, 상이 그중에서 너무 심했던 자를 골라 퇴출시킴으로써 무마시켰다. 이때 박공 순(朴公淳)이 탄식하며 이르기를, “숙헌(叔獻) 같은 이야말로 진짜 유림(儒林)의 종장(宗匠)인데도 저 무리들이 저렇게까지 배척하고 있으니, 사슴을 쫓느라고 태산(泰山)을 못 본다고 하는 말이 옳은 말이다.” 하였다.
예문관 제학(藝文館提學)과 대사간(大司諫)을 역임했는데, 그때 호조 판서의 자리가 비어 있었으므로 상이 특별히 선생을 승진시켜 맡게 하고 문형(文衡)까지 겸하여 맡게 했다. 그때 또 천재(天災)로 인하여 상이 공경(公卿)들에게 천재 구제책을 물었는데, 선생은 물음에 대해 ‘경제사(經濟司)를 신설하고 시무(時務)에 숙달한 자를 두어 그의 건백(建白)에 따라 둘 것은 두고 없앨 것은 없앤다면, 실지 효과로 나타날 것이고 천재도 멎게 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선생의 뜻은 대체로 ‘공안(貢案)을 개정하고, 감사(監司)를 구임(久任)시키면서 주현(州縣)을 아울러 관리하게 하고, 학제(學制)를 반포하고, 융병(戎兵)을 다스려야 한다.’는 것이었다. 또 교화(敎化)를 진흥시키기 위해서는 유현(儒賢)을 숭배하는 것이 필수적이라고 하면서 우리나라의 조광조(趙光祖)와 이황(李滉) 같은 이들을 성묘(聖廟)에서 제사를 받도록 함으로써 사풍(士風)을 진작시켜야 한다고 했다.
얼마 후 이조 판서로 자리를 옮기게 되어서는 여러 번 사양하였으나 허락받지 못했다. 그리하여 오로지 사로(仕路)를 맑게 하고 유폐(流弊)를 혁신하는 데 주력했으며, 그 밖의 유일(遺逸)을 추천하여 헌직(憲職)에 두게 한 일, 학행(學行)이 있는 이를 골라 사유(師儒)로 삼게 한 일, 염퇴(恬退)한 이를 치켜세워 명예와 절조를 중히 알도록 한 일, 이재(吏才)를 선발하여 고을을 맡겨 시험해 보게 한 일 등도 다 그때 선생이 건의해서 시행했던 것들이다. 참찬(參贊)을 거쳐 찬성(贊成)으로 올랐을 때 상은 선생에게 인심도심도(人心道心圖), 기선악도(幾善惡圖), 김시습전(金時習傳), 학교모범(學校模範) 등을 짓도록 명했다. 그리고 선생은 또 만언소(萬言疏)를 써서 시사(時事)를 극력 진달하여 올리기도 하였다.
중국에서 한림(翰林) 황홍헌(黃洪憲)과 급사(給事) 왕경민(王敬民)을 반경(頒慶)하기 위해 보냈는데, 그때 선생이 빈사(儐使)로서 국경까지 나아가 그들을 맞았다. 그들은 경건한 태도로 선생을 대했는데, 주위에 물어 선생임을 알고는 “아, 이 사람이 천도책(天道策)을 쓴 분이냐?”고 하였다. 선생의 겉모습이 우선 깨끗하고 수창(酬昌)에도 막힘이 없었으므로 두 사신이 다 ‘율곡 선생’이라고 불렀다. 문묘(文廟)에 와서는 선생에게 극기복례(克己復禮)에 관해 설명해 줄 것을 요청했으므로 선생이 그에 관한 학설을 써서 주었으니, 그 두 사신은 육상산(陸象山) 또는 왕양명(王陽明) 학파로서 선생이 숭상하고 주장하는 정주(程朱)의 학설을 시험해 보고자 했기 때문 이었다. 두 사신은 결국 그 학설이 매우 좋다고 하면서 중국에 가서도 그 학설을 전파해야겠다고 했다. 돌아가는 길에 강가에서 작별하면서는 차마 헤어지지 못해 눈물을 흘리기까지 하였으니, 그들이 그렇게 지극한 예경(禮敬)을 표하기는 전무후무한 일이었다.
선생이 병조 판서에 임명되었을 때 상은 ‘경이 평소 경장(更張)하고자 하는 뜻이 있었으니 이번에 소신껏 해 보라.’고 했는데, 그때 마침 북관(北關)의 경보도 있고 해서 감히 사양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6개 조문의 사항을 적어 올려 소신을 피력하면서 지금 나라의 뿌리가 흔들리고 있음을 강조하였고, 또 군병을 모집하고 군량미를 비축하기 위해서라도 서얼(庶孽)들의 길을 터주고 천례(賤隸)들을 속량하는 제도를 부활시킬 것과 제사의 예전(禮典)을 근엄히 하고 낭비를 절약함으로써 백성들의 힘을 조금이나마 펴 줄 것을 청하기도 했다. 그리하여 주상의 선생에 대한 신임이 대단했는데, 신임을 시기하는 무리들은 주상이 제도를 고치는 것을 좋아하지 않으리라고 지레 짐작 하고서 선생이 건의만 하면 번번이 방해를 하였다.
계미년(1583) 여름에 북방에 경변(警變)이 다시 일고 변보(邊報)도 날이 갈수록 급해가자 선생은 모든 생각을 다 짜내어 유사시의 대비책을 순서 있게 마련했으므로 상하(上下) 모두가 더욱 한마음이 되어 선생에 대해 큰 비중을 두고 있었다. 이때 선생은 임시 방편으로 모마(募馬) 명령을 먼저 내리는 한편 나중에 일을 계청(啓淸)했는데, 그 뒤 어느 날 부름을 받고 입궐하다가 갑자기 병이 나 들어오지 못하게 되었다. 그러자 삼사(三司)가 그 두 가지 일을 두고 ‘중대사를 마음대로 결정했고 교만하다.’고 지적했으므로, 선생은 허물을 자처하고 여러 번 소를 올려 죄를 청하였다. 이에 상이 이르기를, “일천 년 긴 세월을 두고 임금과 신하가 뜻이 서로 맞아 무엇인가 일을 해낸 경우란 어쩌다 있지 거의 없는 상태인데, 나는 지금 경의 계획과 방법을 빌어 군사들과 백성들을 편안하게 하려고 하였소.” 하였다. 그러자 선생은 마침내 궐문에 들어와 자신을 탄핵하면서 아뢰기를, “신의 죄를 좌우에게 물어 용서가 가능하다고 한다면 신이 나와서 봉직할 것이고, 만약에 죄가 있다고 한다면 귀양길도 달게 받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내가 만약 그렇게 묻는다면 그것은 털끝만큼이라도 경을 의심하는 꼴이 되는데, 내가 왜 그러한 일을 하겠는가.” 하였다. 그러나 삼사가 다시 일어나 그것은 대간(臺諫)을 없는 것으로 치고 공론을 무시한 처사라고 탄핵하면서 심지어는, ‘장차 무슨 짓을 하기 위해 그렇게 아랫사람들을 제어하고 주상을 속이는 것인가.’라고까지 말하였다. 이에 대해 상이 이르기를, “이 아무는 경망하고 부박한 무리들을 억제하려다가 시론(時論)에 거슬림을 당했다. 그래서 부박한 무리들이 지금 이 틈을 타서 공격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마음대로 권력을 휘두르고 임금을 무시하였다면 남의 신하로서 큰 죄인데, 왜 왕법(王法)으로 다스려야 한다고 하지 않고 마치 을사년의 간신(奸臣) 무리들이 선류(善流)들을 역적으로 몰아세우면서 파직시키라고 했듯이 파직만을 청하는 것인가.” 하고, 삼공(三公)과 의논한 끝에 선생을 직임에서 물러나게 하면서 ‘우선 안정을 위하여 취한 방편’이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선생은 그 길로 파주로 갔다가 이어 해주로 내려다.
그때 우계 선생(牛溪先生)이 부름을 받고 서울에 와 있었는데, 재상 박순(朴淳)과 함께 선생을 위해 다투다가 둘 다 양사(兩司)로부터 탄핵을 받았다. 이에 태학(太學), 호남(湖南), 해서(海西)의 유생들 800여 명이 일어나 상소를 하고 대궐 문을 지키면서 시비를 따졌다. 상이 선정전(宣政殿)에 납시어 2품(品) 이상을 모두 부르게 하고 삼사의 죄를 논의한 끝에 친히 교서(敎書)를 만들어 박근원(朴謹元), 송응개(宋應漑), 허봉(許篈)을 귀양 보내면서 이르기를, “삼사가 이 아무를 붕당이라고 하는데, 그가 군자이기만 하다면 그 붕당은 오히려 수가 많지 않은 것이 걱정 아니겠는가. 주자(朱子)가 자신도 그 당에 들기를 원했듯이 나도 주자를 본받아 그 당에 들고자 하니, 지금부터 이이와 성혼의 당이라고 부르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그로부터 얼마 안 되어 선생을 판돈녕부사로 불렀는데, 선생이 굳이 사양하자 상이 답하기를, “하늘이 아직 우리나라를 평치(平治)하고 싶지 않으신 것일까? 어찌하여 경 같은 이가 때를 못 얻었단 말인가. 아마도 하늘이 경에게 더 큰 책임을 맡기기 위해 마음을 격동시키고 참을성을 기르게 하여 발전에 발전을 더 거듭하도록 하라는 뜻이 아니겠는가.” 하였다.
선생을 또 특별히 이조 판서에 임명했으나 선생이 사양하고 오지 않자, 허락하지 않으면서 간곡한 말로 다그쳐 불렀으므로 선생은 할 수 없이 서울에 들어갔다. 이에 저자의 백성들과 위사(衛士)들이 모두 이마에다 손을 얹고, “야, 율곡이 왔다.” 하였다. 상이 인견(引見)하고 위로하며 타이르자, 선생은 사례하고 이어 귀양간 세 사람을 석방할 것과 자신도 물러가게 해 줄 것을 청했으나, 상은 그것을 다 허락하지 않았다. 선생이 우계에게 이르기를, “그 세 사람에게 죄가 있기는 하지만, 멀리 귀양살이까지 보내는 것은 지나친 일일 뿐만 아니라 간신(諫臣)이 말 때문에 죄를 받는다면 그것은 후사(後嗣)에 보여 줄 만한 일이 못 되지 않겠는가.” 하고, 둘이서 함께 주상을 대해 간곡히 청했으나 상은 끝까지 불허했다.
그때 선생 혼자서 모든 것을 위임 받아 오로지 조화(調和)를 힘쓰면서 우선 사류(士類)들을 수습하고 시사(時事)를 함께 풀어 나가는 것을 목적으로 했으나, 주위 사람들은 모두 의심을 품고 관망하면서 동조할 뜻이 없었다. 이에 선생은 탄식하면서 “저들이 내가 하는 것을 보고 오래되면 나의 본심을 알게 될 것이다.”고 했는데, 얼마 안 되어 병이 난 나머지 서울의 우사(寓舍)에서 갑신년(1584) 1월 16일에 세상을 뜨고 말았다.
그보다 이틀 전에 선생은 서익(徐益)이 북방 순찰의 명령을 받았다는 말을 듣고 그를 직접 만나 방략(方略)을 말해 주려고 하자 자제들이 굳이 만류하였다. 이에 선생이 이르기를, “그 일은 국가적으로 큰일이다. 죽고 사는 것이야 자기 명이지, 왜 꼭 그 일을 한다 하여 죽기야 하겠느냐.” 하고서 방략 6개 조항을 적어 그에게 주었는데, 그것이 선생으로서는 마지막으로 쓴 글이었다. 그리고 임종할 때에도 마치 꿈속에서 말하는 것처럼 중얼중얼하였는데, 그것은 모두 나라를 위해 한 말뿐이었다. 선생이 돌아가신 후 집에 저축이라곤 거의 없었고, 염습도 들어온 수의(襚衣)로 했으며, 주위의 아는 이들이 집을 사서 선생의 가족들을 거처하게 해 줄 정도였다.
선생이 병석에 있을 때 상은 염려가 되어 의원과 약물을 끊임없이 내려 주었고, 급기야 부음을 들은 상의 곡성이 대궐 밖에까지 들렸다. 또 상은 소찬(素饌)을 먹으며 3일 동안 정무를 보지 않았고, 예관(禮官)을 보내 조제(弔祭)한 후 연도(沿道)의 관원들에게 선생의 처자를 호송하도록 명하기도 했다. 그리고 관학(館學)의 제생들을 비롯하여 금군(禁軍)이나 아전들 할 것 없이 모두 나와서 곡하며 전(奠)을 올리고, 먼 시골 산골짜기의 사람들까지도 모두 ‘우리는 어찌한단 말인가.’ 하면서 울지 않는 자가 없었다. 선생의 운구가 떠나던 날은 대문마다 거리마다 인파로 메워졌는데, 촛불을 들고 길가에 나와 있는 사람들도 수십 리나 이어져 있었으며, 우는 소리가 산야를 진동시켰다. 그해 3월에 파주 자운산(紫雲山)의 선산 자리에 장례를 모셨다.
부인은 노씨(盧氏)이니, 관향이 곡산(谷山)으로 종부시 정(宗簿寺正) 노경린(盧慶麟)의 딸이었으며, 성품이 인자하고 온화하였다. 임진년(1592)에 선생의 신주를 안고 묘소 곁으로 갔다가 적을 만나 꾸짖던 끝에 화를 당했는데, 그 일로 인하여 국가로부터 정려(旌閭)가 내려졌다. 부인에게는 아들이 없다. 서출로 2남 1녀가 있는데, 아들은 이경림(李景臨), 이경정(李景鼎)이고 딸은 나의 첩이 되었다. 이경림의 아들은 이제(李穧), 이거(李矩), 이추(李秋), 이칭(李稱)인데 제는 참봉이다. 이경정의 아들은 이임(李稔)과 이치(李穉)이다.
아, 선생의 훌륭하신 덕에 대하여는 나 같은 말학(末學)으로서는 감히 형용할 수가 없다. 옛날 우리 선군자(先君子)께서 선생을 사사(師事)하여 그 전통을 이어받으셨는데, 선군자의 말씀을 빌리면, 선생께서는 천품이 우선 매우 높았고 영걸하기가 남보다 월등했으며, 청명하고 온화한 데다 진실하고 단아했다는 것이다. 너그러우면서도 절제가 있었고, 조화를 이루면서도 뇌동하지 않았으며, 옛것을 좋아했으나 틀에 박히지는 않았고, 시속과 어울리면서도 무작정 따르지는 않았다. 사람을 대하면 마음을 활짝 열어 간격을 두지 않았고 일을 처리할 때는 모나지 않고 아주 평탄하게 하였으며, 하루 내내 있어도 분려(忿厲)의 빛이라고는 볼 수 없이 그저 편안하고 온화하였다. 주위가 빛이 나고 겉과 속이 훤하여 그 광채가 사람에게 비칠 정도였으므로 바라보면 마치 상운(祥雲)이나 서일(瑞日)과 같았다.
소년 시절에 비록 이 학문 저 학문을 넘나들다가 한때 이학(異學)에 빠진 적도 있었으나, 워낙 기질이 총명했기 때문에 금방 잘못을 깨닫고 우리의 유학(儒學)으로 다시 돌아왔으니, 티 하나 없이 밝고 깨끗했던 것이다. 그로부터 선생은 더욱더 노력하고 진덕 수업(進德修業)에 전념했으며, 뜻을 가다듬어 상념에 잠기는가 하면 정밀하게 알아 실천으로 옮겼다. 의리(義理)에 대해서는 그 원리에 훤했는데, 공부 과정은 염락(濂洛)의 원 줄거리를 기본으로 하면서도 주자(朱子)를 통하여 얻은 것이 더욱 많았다. 따라서 그 문로(門路)가 바르기는 설사 옛 성인들에게 질정을 받는다 해도 의문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그리고 육경(六經)의 심오한 뜻과 백가(百家)의 학설에 대해서도 최고의 경지까지 연구하지 않은 적이 없었으므로 선생의 저술을 보면 옛분들이 미처 발명하지 못했던 것들을 들추어 말한 것이 많다.
퇴계 선생이 이기(理氣)와 성명(性命), 사단(四端)과 칠정(七情)에 관해 논하면서, “이(理)와 기(氣)는 상호 작용을 하고 사단과 칠정은 엄격히 나뉘어져 있다.”고 말했는데, 선생은 이에 대해 말하기를, “이(理)는 기(氣)의 주재자(主宰者)이고, 기는 이의 의리의 대상이다. 따라서 이가 아니면 기는 작용의 힘을 잃게 되고, 또 기가 아니면 이는 붙어 있을 곳이 없게 된다.” 하였고, 또 이르기를, “활동하는 그 자체는 기이고, 활동하게 만드는 것은 이다. 그러므로 이는 태극(太極)이고 기는 음양(陰陽)이다. 그런데 지금 ‘태극과 음양이 함께 작동한다.’고 한다면 그것은 틀린 말이 아니겠는가. 그리고 사단과 칠정에 대해 말하자면, 여러 가지 작용면으로 볼 때는 사단이 칠정만 못하고 순수한 면으로 볼 때는 칠정이 사단을 따를 수가 없다. 대개 옛날 성현들이 달리 표현을 했지만 성(性)과 정(情)의 이치는 실로 동일한 것이다.” 했다. 선생은 지극히 은미한 이치를 홀로 터득하여 자신만만하게 선유(先儒)들이 미처 말할 수 없었던 것들을 용감하게 말할 수 있었다. 그 결과 마치 생활에 필요한 도구들이 다 갖추어져서 사람들이 살아가는 수단이 모두 충족된 것처럼 되었다.
선생은 또 모든 학설을 절충한 다음 번잡한 것을 삭제하고 요점을 취하여 《소학집주(小學集註)》를 만들었는가 하면, 또 여러 경전(經傳)에서 으뜸되는 줄거리를 뽑아 내어 《성학집요(聖學輯要)》를 만들기도 했다. 그리고 처음 공부하는 사람은 우선 인간이 지켜야 할 도리부터 알아야 한다고 해서 《격몽요결(擊蒙要訣)》을 지었고, 또 학자라면 당연히 지켜야 할 법칙이 있어야 한다고 하여 ‘자경문(自警文)’을 쓰기도 했다. 그 밖에 사서(四書)와 육경(六經)에 대해서도 그 해석과 구두에 많은 손질을 가했는데, 그것은 모두 경전(經傳)의 본뜻에 부합되지 않는 것이 없었다. 대개 선생의 논설은 불분명한 내용을 지극히 명백하게 밝혀 놓았으므로 보는 이로 하여금 눈이 확 트이게 하고 마음이 시원해지게 했던 것이다.
선생은 교육에 있어서 현명하고 어리석고 가리지 않았으나 그 과정은 매우 엄격했다. 또 선생의 사기(辭氣)를 접하면 사특하고 방종한 마음이 자연 싹트지 않게 되었다. 사람을 대할 경우에는 온화하고 포용력이 있으면서도 의리 앞에서는 강했으며, 소인들은 허물에 걸리지 않도록 지도했고 군자들은 더 큰 아름다움을 이루도록 도왔기 때문에, 누구를 막론하고 모두 덕에 심취하고 혜택을 받은 나머지 너도 나도 선생을 성덕군자(盛德君子)라고 하였다. 그러나 그 만물(萬物)을 요리할 수 있는 재주, 삼재(三才)를 다 다룰 수 있는 학문, 신명(神明)이 다 아는 행실, 고금(古今)을 꿰뚫은 지식으로 언제 무슨 일을 당하더라도 털끝만큼의 착오도 없이 거뜬하게 처리할 수 있는 능력에 대하여는 한계를 알 수가 없을 정도였다.
선생은 경세 제민(經世濟民)의 포부를 가지고 백성들을 지성으로 사랑하였으되 단 한 사람이라도 자기 소망을 이루지 못한 자가 있을까를 염려했고, 20년 동안 조정에 있으면서 임금은 요순(堯舜)으로 만들고 사업은 삼대(三代)를 재현하는 것을 목표로 노력하였다. 경연(經筵)에서 강설할 때도 우선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 왕도(王道)와 패도(覇道)의 구별을 밝히는 것을 주안점으로 하였는데, 그 말이 사람을 감동시키기에 충분했기 때문에 주상도 언제나 마음을 비우고 귀담아 들었으며 혹은 해가 질 때까지 시간을 끌어도 권태를 느끼지 않았다. 그리하여 당시 사람들이 모두 선생에 대해 찬탄하면서 옷깃을 여미고 존숭하였으니, 선생은 그야말로 유림의 태두(泰斗)요 국가의 시귀(著龜)라고 할 만한 존재였다.
아, 선조(宣祖) 시대에 즈음하여 하늘이 선생을 내셨으므로 그 임금에 그 신하가 일천 년에 한 번 만난 격이었으니, 참으로 기울어진 세상을 다시 만회하고 예악(禮樂)을 막 부흥시킬 참이었다. 그런데 어찌하여 시속이 그를 몰라주고 붕당이 서로 알력을 일으킨 나머지 고도(古道)를 행하려고 하면 현실에 어둡다고 비난했고, 묵은 폐단을 없애려고 하면 자꾸 뜯어고치려고만 한다고 비난했으며, 사류(士類)들을 조화시키려고 하면 양다리 걸친다고 비난했고, 시사(時事)를 책임지고 나서면 제멋대로 하려 한다고 비난했으니, 여러 사람들이 떠들어 대고 비방하는 틈에 단 하루도 마음 편히 조정에 있을 수 없었던 것이다. 비록 포부를 펴 세상을 구제하고 싶은 마음은 간절했으나, 그렇다고 상대를 교정하기 위하여 자신의 고유의 법칙을 포기할 수는 없는 일이기 때문에, 충성을 다해 주상의 마음을 감동시켜 보다가 제대로 안 되면 물러갈 수밖에 없었고, 성의를 다해 조정의 공론을 조화시켜 보다가 의견이 맞지 않으면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이로써 선생이 조정에 있으면서 하루도 떠날 생각을 잊은 적이 없었고, 또 막상 떠나고서도 세상일을 하루도 잊은 적이 없었음을 알 수 있으니, 그러한 선생의 마음이 얼마나 착잡했겠는가.
급기야 선생에 대한 주상의 신임이 확고해지고 무엇인가 할 수 있는 기회가 왔다고 생각되었을 때, 하필이면 하늘이 선생을 그냥 두지 않아 나이도 일백에서 절반도 못 되었고 지위도 덕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으니, 하늘은 과연 무슨 뜻으로 그랬다는 말인가. 송(宋) 나라 사람의 말에 ‘백순(伯淳 정명도(程明道))이 복을 누리지 못한 것은 이 세상이 복이 없는 탓이다.’고 했다더니, 이 말은 선생을 두고 한 말인 것 같다. 다만 선생이 남긴 교훈과 밝혀 놓은 길만은 후학들이 배우고 가기에 족하고 그 풍도와 여운만은 쇠퇴해가는 시속을 용동시키기에 족하니, 선생께서 생전에 비록 그 큰 뜻을 다 펴 보이지는 못했으나 그 알찬 영향은 두고두고 끝없이 흘러갈 것임에 틀림없다. 하늘이 아마 그래서 선생을 이 세상에 내려보냈던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인조(仁祖) 초기에 특별히 영의정을 추증하고 시호를 문성(文成)으로 내렸다. 서울과 외지를 막론하고 제생들이 선생을 문묘(文廟)에 배향할 것을 누차 청했지만 아직도 의견이 일치되지 않았으니, 나의 생각에는, ‘정숙자(程叔子)가 공맹(孔孟)의 뒤를 이은 분이라는 점을 주자(朱子)가 나온 다음에야 알게 되었다.’ 하는 것이다.
명은 다음과 같다.

명도의 바탕이었고 / 明道之資
고정의 학문이었다 / 考亭之學
그것들을 세상에 행하려고 했지만 / 欲行於世
하늘이 너무 빨리 빼앗아 버렸다 / 天奪之亟
그러나 남겨 놓으신 것이 있어 / 惟其有傳
우리에게 끝없는 혜택을 주고 있다 / 惠我無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