漢詩/새 카테고리

가슴으로 가는 한시 밤 (夜)

아베베1 2012. 12. 2. 15:26

 가슴으로 읽는 한시가 조선일보에 연제되어서  이산해 선생의 야 夜

 읽고 아계  선생의 문집에서 여러가지 시를 발췌 하여 보았다 .   

 

              졸필로 따라서 그려 보았다....

 

 

 

아계유고 제2권

 기성록(箕城錄) ○ 시(詩)

 

 

아계 이상국 연보
 아계 이상국 연보(鵝溪李相國年譜)공의 휘는 산해(山海), 자는 여수(汝受), 호는 아계(鵝溪)이며, 본관은 한산(韓山)이다.
가정(稼亭) 문효공(文孝公) 휘 곡(穀)의 8대손이다.
목은(牧隱) 문정공(文靖公) 휘 색(穡)의 7대손이다.
황명(皇明) 세종 황제(世宗皇帝) 가정(嘉靖) 18년.


우리 중종 대왕(中宗大王) 34년 기해 윤7월 20일 오시(午時)에 한양(漢陽)의 황화방(皇華坊)에서 공이 태어났다. 전에 공의 황고(皇考)이신 성암 선생(省庵先生)과 공의 계부(季父)인 토정 선생(土亭先生)이 보령읍(保寧邑) 서쪽 고만산(高巒山) 기슭에 선영(先塋)의 자리를 잡고 이르기를, “해년(亥年)이 되면 귀한 아들이 태어날 것이다.” 하였다. 이때에 토정 선생이 창 밖에서 아이의 울음소리를 듣고 기뻐하며 이르기를, “이 아이가 우리 가문(家門)을 일으킬 것이다.” 하면서 무척 기특하게 여겼다. - 공의 모부인(母夫人) 남씨(南氏)가 절사(節祀)를 당하여 부모의 묘소에 올라가려 하였는데, 묘소는 송산읍(松山邑)의 교방(轎方)에 있었다. 가는 길에 마침 비가 조금 멈추었다. 창가에 기대어 깜박 졸았는데, 그 꿈속에서 마치 선령(先靈)이 들려주는 듯한 말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에 이르기를, “묘소 앞에다 교자(轎子)를 멈추어 놓고 두어 걸음 걸어가서 땅을 두어 자 정도 파보면 신기한 보물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하였다. 그 말대로 하여, 과연 금고리 한 쌍을 얻었다. 참으로 특이한 일이라 하겠다.


 

 

아계 이상국 연보 부록
 지문(誌文)
수충익모광국추충분의협책평난공신(輸忠翼謨光國推忠奮義協策平難功臣)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報國崇祿大夫) 의정부영의정 겸 영경연홍문관예문관춘추관관상감사 세자사(議政府領議政兼領經筵弘文館藝文館春秋館觀象監事世子師) 아성부원군(鵝城府院君) 이공(李公) 묘지명(墓誌銘)


만력(萬曆) 기원 37년 기유(己酉) 8월 신미(辛未)에 수충익모광국추충분의협책평난공신 대광보국숭록대부 아성부원군 이공이 한양의 셋집에서 졸하였는데, 나이는 71세였다. 이보다 앞서 공의 병이 위독하자, 상이 승지를 보내 문병을 하고 내의(內醫)를 보내 진찰을 시키고 물품을 자주 하사하였다. 6개월 내내 그렇게 했는데도 공은 끝내 일어나지 못하였다.
상이 이 소식을 듣고 몹시 슬퍼하였으며 3일 동안 정무(政務)를 보지 않았다. 특별히 애도하는 뜻에서 하교를 내려 유사(有司)를 신칙하여 상사(喪事)에 필요한 물품을 제공하도록 하고 규례를 살펴서 죽음을 애도하는 은전을 빠뜨리지 않도록 하였으니, 아, 지극한 배려라 하겠다. 빈례(殯禮)를 치르고 장지(葬地)를 정하기에 앞서 사자(嗣子)인 형조 참의 경전(慶全)이 울먹이면서 자부(姊夫)인 광릉(廣陵) 이덕형(李德馨)에게 말하기를, “원컨대, 선인(先人)의 묘지(墓誌)를 부탁한다.” 하였다. 아, 차마 내가 묘지명을 지을 수 있겠는가. 또 말하기를, “공이 6, 7세부터 문장력과 글씨로 온 나라에 명성이 자자하였고 사적이 빛나고 있는데 어찌 묘지를 기다려서 전할 일이겠는가. 그러나 무덤에 묻는 글을 끝내 빠뜨릴 수는 없다. 그 분의 행실에 대하여 상세히 아는 사람은 문관(門館)에 있는 자만한 사람이 없으니, 자네가 부탁을 받는 것이 마땅하다.” 하였다. 아, 내가 차마 묘지명을 지을 수 있겠는가. 다음과 같이 서술한다.
공의 휘는 산해(山海), 자는 여수(汝受)이며, 아계(鵝溪)는 호이다. 그의 선대는 한산 이씨(韓山李氏)로부터 나왔는데, 우리나라의 망족(望族)이 되었다. 고려 말기에 문효공(文孝公) 휘 곡(穀), 호 가정(稼亭)과 문정공(文靖公) 휘 색(穡), 호 목은(牧隱) 부자(父子)가 원(元) 나라 조정에 들어가 제과(制科)에 합격하여 성랑(省郞)과 한림(翰林)에 발탁되었다가 우리나라로 돌아와서 이름난 대신이 되었으니, 빛나는 명성과 공렬이 역사에 분명하게 수록되어 있다. 목은의 막내아들인 휘 종선(種善), 시호가 양경(良景)인 분은 공의 6대조이다. 문열공(文烈公) 휘 계전(季甸), 대사성 휘 우(堣)를 거치면서 화려한 소문이 세상에 전파되었다. 대사성이 휘 장윤(長潤)을 낳았는데 봉화 현감(奉化縣監)을 지내고 이조 판서에 증직되었으며, 현감이 휘 치(穉)를 낳았는데 수원 판관(水原判官)을 지내고 의정부 좌찬성에 증직되었고, 판관이 휘 지번(之蕃)을 낳았는데 내자시 정(內資寺正)을 지내고 호는 성암(省庵)이며 의정부 영의정에 증직되었고, 배필인 의령 남씨(宜寧南氏)는 정경부인(貞敬夫人)에 증직되었는데, 우봉 현령(牛峰縣令) 휘 수(脩)의 딸이다. 삼대의 증직은 공이 높은 벼슬을 한 때문이다.
공의 증조부(曾祖父) 이하로부터는 자신에 대해서는 인색하게 하고 후손에 대해서는 넉넉하게 하였고, 게다가 성암공이 쌓아온 덕도 세상에 쓰이지 못하였는데 쌓인 선(善)과 축적된 영기(靈氣)가 막혔다가 크게 발하여서 그 수가 공에게 해당되었다. 공은 가정(嘉靖) 기해년 윤7월 을묘일 오시(午時)에 한양의 황화방(皇華坊)에서 태어났다. 계부(季父) 토정공(土亭公)이 아기의 울음소리를 듣고 기뻐하며 말하기를, “우리 가문(家門)을 일으킬 자는 바로 이 아이일 것이다.” 하였다. 태어나면서부터 자질이 특이하여 말을 하기 전에 글자를 먼저 알았다. 집에 동해옹(東海翁)의 초서(草書)가 벽에 걸려 있었는데 유모의 손을 끌어다 안아서 보여 달라고 하더니, 좋아하면서 손가락으로 글자를 따라 쓰곤 하였다. 다섯 살에 비로소 글을 배웠는데 토정공이 태극도(太極圖)에 대하여 한 마디 가르치면, 곧장 천지(天地)와 음양(陰陽)의 이치를 알아차려서 태극도를 가지고 논설할 줄 알았다. 일찍이 먹는 것도 잊고 글을 읽자, 토정공이 혹시라도 몸을 상할까 염려하여 읽던 글을 덮어두고 식사 시간을 기다리도록 하였더니, 공이 시를 짓기를,
배가 고픈 것도 민망한데 항차 마음을 주리게 하랴 / 腹飢猶悶況心飢
식사가 더딘 것도 민망한데 항차 배움을 더디 하랴 / 食遲猶悶況學遲
집이 가난해도 오히려 마음을 치료할 약이 있거니 / 家貧尙有療心藥
영대에 달이 떠오를 때까지 기다려야 하겠네 / 須待靈臺月出時
하니, 토정공이 더욱 기이하게 여겼다. 여섯 살에 큰 글자를 쓸 줄 알았는데, 붓을 잡고 비틀거리면서 휘둘러 써 놓은 글자 모양이 씩씩하고 품위가 있어서 마치 용이 서려 있는 듯, 호랑이가 덮치려는 듯한 형상이었다. 당시에 내로라 하는 인물들이 공을 불러 가거나 찾아와서 공의 글씨를 받아 가기도 하였는데, 모두가 신동(神童)이라고 일컬었다. 을사년에 죄를 입은 제현들은 모두 공과 함께 교유하던 이들이었다. 기유년에 과거에 응시하여 급제하자, 고시관이 그의 시권(試券)을 잘라내어 가지고 가서 보물로 삼기도 하였다. 무오년에 사마시에 합격하였고, 경신년에 명묘(明廟)가 실시한 알성시(謁聖試)에서 공이 장원을 하여 전시에 직부하도록 명을 받았다. 신유년에는 병과에 급제하여 승문원(承文院)에 분차(分差)되었으며, 임술년에 홍문관 정자에 제수되었다. 다음날 명묘가 인견하여 탑전에서 경복궁(景福宮)의 대액(大額)을 쓰도록 명하고 다음으로 부수찬(副修撰)에 승직시켰다. 갑자년에 병조 좌랑을 제수하였다가 다시 수찬을 제수하였다. 을축년에 사간원 정언과 이조 좌랑에 제수되었다. 정묘년에 원접사 종사관에 선발되었다. 조사(詔使)인 한림(翰林) 허공(許公)이 공의 시필(詩筆)에 대하여 감탄하더니, 중국으로 돌아간 뒤에는 편지를 보내 정성을 보이기도 하였다. 이조 정랑, 의정부 사인, 사헌부 집의, 상의원 정, 부교리를 역임하였으며, 다음으로 직제학에 승직되고 상겸지제교, 교서관 교리, 예문관 응교를 겸임하면서 사가독서를 받았다.
경오년에 승정원 동부승지에 승직되었다. 신미년에 병환이 나신 아버지를 청풍군(淸風郡)으로 찾아가서 뵙고 종남산(終南山) 아래에 있는 집으로 모시고 와서 5년 동안 극진히 모셨다. 을해년에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보령(保寧)으로 모시고 가서 장사를 치렀고 상례를 매우 엄격하게 지켰으며 너무 슬퍼한 나머지 거의 일어나지 못할 지경에까지 이르기도 하였다. 여막에서 삼년상을 마치고 정축년 가을에 조정으로 돌아와 전후하여 이조, 예조, 형조, 공조의 참의와 성균관 대사성을 역임하고 다시 승정원 도승지에 승직되었다. 매번 미원(薇垣)과 옥당(玉堂)의 장관을 맡았다. 기묘년에 특별히 사헌부 대사헌에 제수되고 경진년에 병조 참판에 제수되었으나 큰아들 상을 당한 것 때문에 병으로 체직되었다. 가을에 특별히 형조 판서에 제수되고 신사년에 이조 판서에 제수되어 정사에 극도로 신중을 기하니, 청탁할 목적으로 찾아오는 자들의 발길이 갑자기 끊어졌다. 얼마 후에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보령으로 돌아갔다가 상제(喪制)를 마치는 날 바로 특별히 의정부 우찬성에 제수되었다. 이조, 예조, 병조 삼조의 판서를 역임하고 제학, 대제학, 판의금부사, 지경연사, 지춘추관사, 지성균관사를 겸임하였다. 일찍이 이르기를, “수령이란 백성들의 생명을 담보로 하는 자이다. 그런 수령을 가려 뽑지 않는다면 이는 백성들을 해치는 행위이다. 차마 그런 짓을 할 수 있겠는가.” 하고서, 매번 빈 자리가 나면 반드시 그 자리에 적합한 사람을 찾았다. 그리하여 적합한 사람을 구하면 집안일처럼 기뻐하고 구하지 못하면 밤낮으로 생각하기도 하고 촛불을 밝혀 놓고 차기(箚記)를 살피다가 날이 밝으면 입계(入啓)를 하곤 하였기 때문에 재집(宰執)에 속한 벼슬아치들이 감히 자제를 위하여 관직을 청탁하지 못하였고, 친구들이 감히 사적으로 바라지 않았다. 그러나 초야에 한 가지라도 선량한 면이 있는 선비가 있으면 성심껏 묻고 힘을 다해 천거해서 모두 백집사(百執事)의 반열에 두지 않은 자가 없으니, 사로(仕路)가 날이 갈수록 깨끗해졌다.
대관 중에 정사의 흠점을 일삼아 찾아내는 자가 있었는데, 대관들이 모인 자리에서 제목(除目)을 열람하고 이르기를, “정사를 이렇게 한다면 무엇을 지적하여 논하겠는가?” 하였다. 오늘날 전부(銓部)에서 선발을 잘했던 사람에 대해 말할 때면, 모두가 아무아무라고 말하고 소원했던 사람도 이론을 제기하는 사람이 없었다. 선묘(宣廟)도 자주 공에 대해 일컫기를 “말은 입에서 나오지 않을 것처럼 삼가고 몸은 옷을 가누지 못할 것처럼 조심하였으며 한 덩어리 참다운 화기(和氣)가 가슴속에 충만하므로 바라만 보아도 공경하는 마음이 절로 솟곤 한다.”고 하였으며, 공의 사직 상소에 비답을 내리기를, “경이 이조 판서가 되었을 때 문 밖에다 참새 잡는 그물을 설치할 정도라는 말을 듣고 내가 장차 경에게 보답하려 하였다.” 하였다. 어떤 윤대관(輪對官)이 진계(進啓)하기를, “한 사람이 전병(銓柄)을 오랫동안 잡고 있으면 아마도 권세가 편중될까 염려됩니다.” 하니, 상이 노여워하며 이르기를, “너는 이조 판서가 나의 사직신(社稷臣)이란 말을 들어보지 못하였는가?” 하였다. 그 뒤에 공이 정사에 임하여 매번 그 사람을 의망하니, 상이 공에게 이르기를, “그 사람은 경을 해치고자 하였는데, 경은 그 사람을 등용하니 경의 아량은 미칠 수가 없구나.” 하였다. 무자년 겨울에 좌상(左相)과 우상(右相)의 자리가 비었다. 수규(首揆)인 소재(蘇齋) 노공(盧公)이 혼자서 공을 천거하여 우의정에 제수하니, 같은 반열에 있는 자들이 모두 기뻐하면서 하는 말이 그가 정승이 된 것이 시기적으로 늦었다고 하였다. 선묘(宣廟)가 공이 지나치게 사양하는 것을 염려하여 직접 하교를 내려 출사하기를 면려하고 매우 융성한 배려를 하였다. 이 해에 광국훈(光國勳)에 참록되고 상례에 따라 아성부원군(鵝城府院君)을 받았다. 기축년에 좌의정에 승직되었다가 영의정으로 전승(轉陞)되었다. 정국(庭鞫)을 열어 정여립(鄭汝立)의 역옥(逆獄)을 다루었다. 당시에 조정의 논의가 엇갈리고 역변(逆變)이 사대부(士大夫)로부터 발생하니, 한편으로 피하여 편협한 논의를 고집하던 자들이 이것을 인하여 그들과 견해를 달리하는 자들을 기회를 보아 함정에 빠뜨렸다. 상소가 빗발치듯이 올라와 공을 적의 친당이라고 배척하였다. 대간이 또 김면(金沔)과 정개청(鄭介淸) 등은 모두 공이 전관(銓官)의 자리에 있으면서 그들의 학행(學行)을 포계(褒啓)하여 수용한 자들인데 이미 연좌되어 죄를 받았으니, 공만 홀로 면할 수 없다고 하였다. 심지어 우상 정언신과 함께 번옥(翻獄)에 관한 말을 주장했다는 이유를 들어 언신을 국문해야 한다고 더욱 다그치니, 공이 교외에 나가 대명(待命)하였다. 선묘가 그 상소장을 따끔하게 물리치고 공을 불러 국옥(鞫獄)에 돌아와 참여하도록 하였다. 해를 넘기도록 계속되자, 공이 안타깝게 여기고서 매번 관사로 돌아오면 식음을 전폐하고 탄식하기도 하고 때로는 문을 닫고 앉아 눈물을 흘리기도 하였다.
경인년 봄에 상심(喪心)으로 인해 병이 악화되었는데도 오히려 자상하게 혼잣말로 이르기를, “한 사람의 죄 없는 사람을 죽이는 것도 안 될 일인데 지금 선비가 대부분 죄도 없이 죽어가고 있으니 원기(元氣)가 깎이는 것이 당연하다. 이제 국가를 어찌하면 좋단 말인가.” 하고, 누차 질병을 이유로 사직하니, 선묘가 위로하고 허락하지 않았다. 하루는 옥을 심리하는 재신과 중서성(中書省)에 모였는데 재신이 이르기를, “영남 우도에 한 가지 논의가 있어서 옥사(獄事)를 지적하여 허위라고 하니, 속히 계문(啓聞)을 올려 알려야 할 것이다.” 하니, 공이 답하기를, “나는 듣지 못하였다.” 하고, 계속 그들과 함께 변론을 한 결과 그 논의가 잠잠해졌다. 이윽고 평난공신에 녹훈되었으나 이는 공의 의도가 아니었다. 임진년 4월에 왜구가 서울로 쳐들어오자 여러 신하들의 의논이 관북 지방으로 피난을 가고자 하였다. 공은 이 적들은 본국의 적이 아니므로 상이 서쪽으로 가서 급한 상황을 알려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선묘(宣廟)가 대신들을 불러 세자 책봉(世子冊封)에 관한 문제를 의논하여 감무(監撫)하는 책임을 맡기려 하였다. 그러나 이때 중전에게 후사가 없었다. 상이 누가 적합하겠느냐고 물으니, 공이 대답하기를, “이 문제는 신하들이 감히 관여할 일이 아닙니다. 성상께서 생각하기에 달려 있을 뿐입니다. 속히 용단을 내리소서.” 하였다. 선묘가 금상(今上)의 호(號)를 거론하면서 “어떤가?” 하고 물으니, 공이 일어나 절하고 아뢰기를, “종묘 사직(宗廟社稷)과 신민(臣民)의 복입니다.” 하니 즉시 유사(有司)를 명하여 세자 책봉 의식을 거행하게 하였다. 제관(諸官)이 하례를 마치자마자, 왜적들이 벌써 조령(鳥嶺)을 넘었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다음날 새벽에 대가(大駕)가 서쪽으로 피난을 가고 저궁(儲宮)도 따라서 출발하였다. 공이 종묘 사직의 신주(神主)를 모시고 호행(扈行)하였다. 이때를 당하여 왜구의 기세가 하늘까지 치솟으니 원근 지역이 맥없이 붕괴되었다. 그러나 민심을 붙들어 맬 수 있었던 것은 경황없는 중에 큰 계획을 세울 수 있었던 힘이었다. 개성(開城)에 이르러 양사(兩司)가 공이 가장 먼저 서울을 떠나자고 주장했다는 이유로 탄핵하여 파직을 주도하였고 평양(平壤)에 당도하여 또 중벌을 내리기를 요청하여 강원도 평해군(平海郡)에 부처하도록 명하였다. 을미년에 선묘가 시신(侍臣)에게 유시하기를, “아무가 아니었더라면 내가 진(晉) 나라 회왕(懷王), 민왕(愍王)과 송(宋) 나라 휘종(徽宗), 흠종(欽宗)과 같은 임금이 된 지가 오래 되었을 것이다. 그를 방환하라.” 하였다. 영돈녕부사를 제수받고 이윽고 대제학을 겸임하였다가 사직하였다. 기해년에 다시 영의정에 제수되었다. 경자년에 어떤 재상이 권력을 탐하여 멋대로 행동하면서 공과 함께 벼슬길에 오르기를 희망하였으나 공이 참여하지 않다가 드디어 모함을 받아 파직되어 고향으로 돌아갔고 신축년에 다시 부원군(府院君)에 제수되었다. 공의 부인인 정경부인(貞敬夫人) 조씨(趙氏)는 의정부 좌참찬 정간공(貞簡公) 휘 언수(彦秀)의 딸로 영중추부사 문강공(文剛公) 휘 말생(末生)의 후손이다. 공은 대대로 청빈한 생활을 고수하면서 살림이 있고 없는 것을 따지지 않았다. 부인은 매사에 부지런하고 어른을 섬기거나 자식들을 양육하는 문제에도 최선을 다하였다. 갑진년 여름에 부인의 상을 당하고 병오년 봄에 며느리의 상을 당하였다. 무신년 가을에 손자 한림 구(久)가 위독한 병을 앓자, 공이 더욱 걱정한 나머지 그것이 누적되어 갑자기 몸이 쇠약해지더니 이듬해 3월에 병이 극도로 악화되었다. 자식들과 친척들이 모였는데 슬퍼하기도 하고 기뻐하기도 하며 손으로 가리키면서 인식만 할 뿐 입으로는 말을 하지 못하다가 끝내는 세상을 뜨고 말았다. 아, 애통한 일이다.
공의 천품(天稟)은 매우 고매(高邁)하였고 신통력이 있다 할 정도로 숙성하였다. 성암공이 그가 철저하게 자기 관리를 해서 아름다운 기국(器局)을 잘 보전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항상 겸손과 근면으로 경계하였다. 공이 가정의 교훈을 잘 받아서 조정에 나간 지 49년 동안 일찍이 재지(才智)를 가지고 남 앞에 나서는 일이 없었으며, 말도 유창하지 않고 몸놀림도 느려서 마치 무능한 사람처럼 보였다. 토정공(土亭公)이 매번 공의 아름다운 자질에 대하여 칭찬하기를, “글을 배워서 보충한다면 상지(上智)를 가진 자의 다음은 될 것이다.” 하였다. 내가 공의 집에 갔을 때는 공이 막 성암공의 상복을 벗었을 때였는데, 유적(遺蹟)을 보고도 울고, 궤장(几杖)을 보고도 울었다. 슬퍼하면서 사모하는 마음을 게을리 하지 않고 끝까지 효도하기를 이와 같이 하였다. 평소에 사람을 상대하는 태도가 매우 자상하고 신중하였다. 세심한 계획과 원대한 사려에 있어서는 난리에 임해서도 혼선을 빚지 않았으며 확실한 자기 견해를 주장할 때면 분육(賁育)과 같이 힘센 사람도 어찌하지를 못하는 점이 있었다. 임진난 후 매번 기축년의 억울한 사건을 언급할 때면 마땅히 먼저 신설(伸雪)해야 한다고 말하고 인심을 위로하고 풀어 주는 것이 가장 큰 관건이니 이 난관을 극복할 수 있는 대책은 인심을 수습하는 것말고는 다른 것이 없다고 하였다.
어려서부터 세상 물정에 대해 데면데면하였으며, 걱정스러운 일이 닥치거나 횡포한 일이 가해지더라도 그저 자신의 마음에 반성할 뿐, 어느 누구를 탓하는 일이 없었다. 그러므로 외지로 밀려났을 때에도 간혹 말 한 필에 아이 하나를 데리고 산 따라 물 따라 오가면서 다만 떠가는 구름이나 의지할 데 없는 새들을 상대할 뿐, 눈앞에 일어나는 모든 현상에 대하여 담담한 심정을 가졌다. 풍경을 대하거나 시절을 느낄 적에는 흥을 부치고 회포를 풀어 시로 형상화하였고 붓을 들면 힘을 얻어 나는 듯하여, 자득한 것이 많았다. 수묵도(水墨圖)를 잘 그렸지만 남에게 보여주지 않았으며, 옛 그림을 만나면 그림과 혼연일체가 되어 감상하였다. 글을 보면 열 줄을 한꺼번에 내리 보았지만, 일찍이 글을 읽는 것을 보지 못하였다. 하서(河西) 김 선생(金先生)이 공의 시문(詩文)에 대하여 이르기를, “비유하자면 마치 공중에 지어 놓은 누각(樓閣)과 같아서 천성에서 나오지 않은 것이 없다. 만일 착실하게 글을 읽었더라면 그저 그런 하찮은 말이 되고 말았을 것이다.” 하였다. 평소에 제술(製述)이 매우 많았으나 난리통에 모두 잃어버리고 수습한 약간의 유고(遺稿)만이 세상에 전해진다. 젊어서 시망(時望)을 지고 이른 나이에 재상의 반열에 이르렀지만 기와 한 장 덮을 집이 없었고 나무 한 그루 심을 토지가 없었다. 항상 전셋집을 얻어 살면서 황량한 생활을 피하지 않았다. 손님이 찾아와서는 말거적에 앉기도 하고 비 오는 날이면 거적으로 비를 막았으며 해진 솜옷에 거친 밥을 먹어도 편하게 여겼다. 참의(參議)가 공이 쇠약해진 몸으로 조절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것을 근심하여 집을 새로 하나 짓기를 요청하니, 말씀하시기를, “그럴 것 없다. 나의 본성을 온전히 하는 것이 진실로 마음이 편하다. 거처가 누추한 것이 어찌 병이 되겠는가.” 하였다. 겨울에는 갖옷 한 벌이 없었고 여름에는 여벌 옷이 부족하였다. 별세하신 뒤에 부조(賻助)를 받아서 염(殮)을 하고 관(棺)을 마련하였다. 아, 공은 진정으로 신선 중의 한 사람이라고 하겠다.
부인은 공의 배필이 되어 덕성에 위배되는 행위를 한 적이 없었다. 공이 정사를 맡고 있을 때 사사로이 부탁을 하여 공에게 하자가 되게 하는 일이 한 번도 없었다. 시비(侍婢)가 남의 선물을 받아 가지고 은밀히 전달하니, 부인이 화를 내며 이르기를, “내가 늙었구나. 이런 말이 어찌하여 나에게 이른단 말이냐?” 하고, 그 글을 불태워 버렸다. 집이 가난해도 남에게 주기를 좋아하여 매번 공의 봉급으로 이웃이나 친척 중에 궁핍한 자를 도와주었다. 제사가 돌아오면 반드시 직접 찬구(饌具)를 잡았다. 비록 추운 겨울이나 무더운 여름일지라도 늙어서까지 게을리 하지 않았다. 자식들이 딸이나 며느리에게 맡기고 쉬기를 청하면, “내가 찬구를 잡지 않으면 제사를 지내지 않는 것과 같다. 내가 스스로 정성을 다하는 것이니 몸을 상하지 않는다.” 하였다. 63세를 살고 졸하였다. 4남 4녀를 두었는데, 장남은 경백(慶伯)으로 경진년 알성과에 급제하여 권지 승문원부정자에 올랐으나 일찍 죽었다. 둘째는 경전(慶全)이고, 셋째는 경신(慶伸)인데 성균관 진사를 지냈으나 일찍 죽었다. 넷째는 경유(慶愈)인데 일찍 죽었다. 큰딸은 홍문관 교리 이상홍(李尙弘)에게 시집가고, 둘째는 이덕형(李德馨)에게 시집갔는데, 임진년 난리에 죽어 정려문이 있다. 셋째는 급제 유성(柳惺)에게 시집갔는데, 공보다 먼저 죽었다. 넷째는 한산 군수(韓山郡守) 안응형(安應亨)에게 시집갔다. 경전이 낳은 아들은 많이 요절하였다. 5남 1녀를 두었는데 장남 후(厚)는 계묘년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이조 좌랑을 지내고, 둘째 구(久)는 계묘년 진사시에 장원을 하고 을사년 문과에 급제하여 예문관 검열을 지냈다. 문장력이 탁월하였으나 불행히도 일찍 죽었다. 셋째는 부(阜)이다. 나머지 2남 1녀는 모두 어리다. 경신은 1녀를 낳았는데 사인(士人) 이탁(李琢)에게 시집갔다. 상홍은 2남 3녀를 낳았는데, 장남 지화(志和)는 익위사 사어(翊衛司司禦)를 지냈다. 차남은 지천(志賤)이다. 큰딸은 진사 임숙영(任叔英)에게 시집가고, 둘째는 우봉 현령(牛峰縣令) 최행(崔行)에게 시집가고, 셋째는 진사 정시망(鄭時望)에게 시집갔다. 덕형은 3남 1녀를 두었다. 장남 여규(如圭)는 아산 현감(牙山縣監)을 지내고, 둘째는 여벽(如璧)인데 전 광흥창 주부(廣興倉主簿)를 지냈고, 셋째는 여황(如璜)인데 성균관 생원을 지냈다. 딸은 사인 정기숭(鄭基崇)에게 시집갔다. 유성(柳惺)은 1남 1녀를 두었다. 아들은 정헌(廷憲)이며, 딸은 사인 배시중(裵時中)에게 시집갔다. 응형(應亨)은 3남을 두었는데 모두 어리다. 내외 증손이 수십 명인데 어려서 다 기록하지 못한다.
부인의 상을 당하여 선영의 땅이 협소해서 이곳에 장사지내지 못하고 보령(保寧) 귀두리(歸頭里)에 폄장(窆葬)을 해 두었었는데, 이때에 다시 예산(禮山) 다지동(多枝洞)에 자리를 잡고 부인의 묘소를 옮기어 공과 함께 부장(祔葬)하였다.
아, 값나가는 보물이나 탁월한 인재가 세상에 알려지는 데에는 명수(命數)가 있기 마련이다. 백세 후에 필시 이 점에 대하여 감탄할 자가 있을 것이다. 다음과 같이 명(銘)한다.
하늘에 있던 특수한 기운이 / 秀氣在天
모였으니 남과 다를 수밖에 / 鍾異于人
청렴하고도 후덕하였으니 / 淸而能厚
보통 사람보다 워낙 특출하였네 / 絶類離倫
금화의 적선이런가 / 金華謫仙
임치의 신동이런가 / 臨淄神童
어느 누가 어린 나이에 / 疇若孩提
신명을 이미 통한 사람 있나 / 神明已通
문장은 배워서 이룬 것 아니며 / 詞非學到
필력도 타고난 재능이었다네 / 筆自天得
집안의 명성을 떨친 것도 / 振揚家聲
가정과 목은에 빛이 나네 / 光于稼牧
벼슬길에 처음 오르니 / 雲衢發軔
순풍에 기러기 날 듯하여라 / 順風鴻翼
선발을 맡자 사람들이 흠복하니 / 典選服人
모개의 간결함이요 / 毛玠簡潔
정승이 되어 풍습을 진정시키니 / 作相鎭俗
양관의 검약함이어라 / 楊綰儉約
위급한 시기를 만났을 때에 / 適丁危亂
어느 누가 장구한 대책을 내었나 / 孰效長策
대중은 편중되게 격노했건만 / 衆怒偏激
임금의 은혜는 더욱 깊어라 / 主恩愈渥
귀양지에서 풀려나니 / 載錫之環
나를 노인네라고 부르네 / 呼我黃髮
목눌 같은 자질에 / 木訥之資
빙벽 같은 절개여라 / 氷蘗之節
기린각에 우유자적한 사람 / 優遊麟閣
나라에 노련한 신하가 있었네 / 國有老成
사성이 하릴없이 기다린 것은 / 嗣聖虛佇
태형이 돌아올 것을 기대한 때문 / 擬還台衡
기성(箕星)을 타고 멀리 가 버렸으니 / 騎箕而逝
몸이 백 개라도 속죄할 수 없어라 / 百身莫贖
가신 분 서럽다 하니 / 悲凉下世
남기신 묵적 흩어지누나 / 散落遺墨
저 새로운 언덕을 바라보니 / 睠彼新阡
산봉우리가 울창하여라 / 岡巒鬱蒼
무지개가 공중을 비추니 / 虹光燭空
여기가 공의 무덤이로세 / 是公幽堂
만력(萬曆) 37년 기유(己酉) 11월 19일 병신(丙申)에 사위인 대광보국 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의정부영의정 겸 영경연홍문관예문관춘추관관상감사 세자사(議政府領議政兼領經筵弘文館藝文館春秋館觀象監事世子師) 이덕형(李德馨)이 짓다.


 

[주D-001]참새 잡는 그물 : 한(漢) 나라 때 적공(翟公)이 정위(廷尉)가 되었을 때는 손님이 문전에 가득하였는데, 하루아침에 그 자리에서 물러나자, 아무도 방문하는 사람이 없어서 참새들만 뜰에 날아와 먹이를 쪼아 먹는 바람에 그물을 설치해서 잡을 정도로 집안이 적막했다는 고사를 인용한 것으로, 아계(鵝溪)의 청렴함을 비유한 말이다.
[주D-002]사직신(社稷臣)이란 …… 못하였는가 : 《송사(宋史)》 태조기(太祖紀)에, 어사중승(御史中丞) 뇌덕양(雷德驤)이, 조보(趙譜)가 사람들의 집을 강제로 점거하고 재물을 거두었다고 탄핵하니, 상이 성을 내어 꾸짖기를, “정(鼎)과 당(鐺)에도 오히려 귀가 있는데, 너는 조보가 우리의 사직신(社稷臣)이란 것을 들어보지 못하였는가.” 하였다. 이후로 귀가 있는데도 못 듣는 사람처럼 엉뚱한 소리를 하는 자를 책망하는 말로 사용하였다.
[주D-003]금화(金華)의 적선(謫仙) : 중국 절강성(浙江省) 금화시(金華市) 북쪽에 있는 산을 말하는데, 이 산 위에 신선이 생활하던 석굴(石窟)이 있었다고 전해온다. 진(晉) 나라 갈홍(葛洪)이 지은 《신선전(神仙傳)》에, “양치기인 황초평(黃初平)이 도사를 따라서 금화산 석실로 가 40여 년 동안 집 생각을 잊고 신선술을 익혔다.” 하였다.
[주D-004]임치(臨淄)의 신동(神童) : 임치는 중국 산동성 치박시(淄博市)에 있는 제(齊) 나라의 옛 성으로 당시 열국 중에서 가장 번화했던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였다. 신동은 양억(楊億)을 말한 듯한데 양억도 7세부터 글을 지을 줄 알았으며 11세에는 태종(太宗)에게 불려 가서 3일 동안 시부(詩賦) 5편을 지어 올리는 등 탁월한 재능을 보이자, 그 다음날로 비서성 정자(秘書省正字)를 제수한 바 있다. 《宋史 卷305 楊億列傳》
[주D-005]가정(稼亭)과 목은(牧隱) : 가정은 공의 8대조인 문효공(文孝公) 이곡(李穀)의 호이며, 목은은 공의 7대조인 문정공(文靖公) 이색(李穡)의 호이다.
[주D-006]모개(毛玠) : 삼국 시대 위(魏) 나라 사람으로 젊어서 현리(縣吏)가 되어 공정하고 청렴하다는 평을 받은 자이다. 《三國志 魏書 本傳》
[주D-007]양관(楊綰) : 자는 공권(公權)이다. 당 나라 때 화주(華州) 화양(華陽) 사람으로 평소에 검소함을 생활하면서 생계 문제를 따지지 않았으며, 누차 청요직(淸要職)을 역임하였지만 반듯한 집 한 칸이 따로 없었다. 그나마 매월 받는 봉급마저도 친구들에게 모두 나누어 줄 정도로 검소하고 청렴하였다고 한다. 《舊唐書 卷119 楊綰列傳》
[주D-008]목눌(木訥) : 성품이 질박하고 말이 어눌한 사람을 일컫는 말로 쓰인다. 《논어(論語)》 자로편(子路篇)에 “강의(剛毅)와 목눌(木訥)은 인(仁)에 가깝다.”라고 하였다.
[주D-009]빙벽(氷蘗) : 얼음을 마시고 황벽나무를 먹는다는 뜻으로 대단히 가난한 삶을 이른말이다.
[주D-010]기성(箕星)을 …… 가 버렸으니 : 세상을 떠난 것을 말한다. 조정(趙鼎)의 명정(銘旌)에 쓰기를 “몸은 기미(箕尾)를 타고 하늘로 돌아가고, 기운은 산하(山河)가 되어 본조(本朝)를 튼튼하게 하였네.” 하였다. 《宋史 卷360 趙鼎列傳》

 

아계 이상국 연보 부록
 만사(挽詞)
만사(挽詞) [심희수(沈喜壽)]


연원 깊은 가정과 목은 큰물 되어 흐르듯 / 淵深稼牧濬洪源
상서가 피어난 신동 어른 되니 더 그렇소 / 祥發神髫長愈騫
옥새끼 은갈고리 뛰어난 재주 / 玉索銀鉤游絶藝
중천에 뜬 달마냥 묵은 말은 버렸네 / 天心月脇去陳言
거대한 사업 고희의 나이라 귀하지요 / 鴻樞事業稀年貴
기린각에 그린 모습 영원히 추존하리 / 麟閣形容永世尊
진중한 자손들 경수마냥 무성하니 / 珍重子孫瓊樹茂
문창성은 농서의 동산을 비추누나 / 文星留照隴西園

하늘이 내신 기린에 산악이 내린 정기라서 / 天挺麒麟嶽降精
뜬구름 헌면은 마음에 차지를 않더라 / 浮雲軒冕未爲盈
적선의 재주를 조화로 몸은 항상 왕성했고 / 謫仙才調身常旺
장길의 문장은 운수가 홀로 형통했네 / 長吉文章運獨亨
하룻밤 꿈에 새로 강연에 나가 추주하더니 / 一夢怳趍新講幄
고단한 충성심 어찌하여 옛 태형에서 떠났느뇨 / 孤忠奈謝舊台衡
정녕하신 은졸 신한을 반포하시니 / 丁寧隱卒頒宸翰
무덤가에 자란 송백 영원토록 우로의 축복을 받으리 / 松栢千秋雨露榮
용산에서 한번 뵙고 등선을 생각했소 / 龍山一拜憶登仙
종남산에서 사가독서하던 날도 있었지요 / 懷刺終南賜暇年
우송을 읊으며 시첩 잃은 것을 슬퍼하고 / 詠過友松悲失帖
음곡을 말하며 현인 없는 것을 한탄했더이다 / 談來陰谷悵無賢
인간이란 흩어졌다 모였다 산은 항시 그대로 / 人間離合山長在
난리 후 한망간에 달은 몇 번이나 찼던가 / 亂後閑忙月幾圓
은혜로운 바람을 장려하기 이제는 틀렸구려 / 獎拔恩風今已矣
기성 미성을 쳐다보니 생각만 아득하오 / 回瞻箕尾思茫然
우의정(右議政) 심희수(沈喜壽)
우송(友松)은 희수(喜壽)의 선조(先祖)인 찬성공(贊成公)의 호(號)이다. 선생이 일찍이 지은 시가 있었는데 병란 때 소실되었다. 노소재(盧蘇齋) 상공(相公)은 만년에 항상 음곡 노인(陰谷老人)이라고 자칭하였는데, 선생과는 서로 매우 잘 지냈다. 선생이 세상을 뜬 후에 나를 대하면 슬퍼하면서 사모하는 마음을 감추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3, 4구에 언급한 것이다. 이 주는 일송(一松)의 자주(自注)이다.


 

[주D-001]농서(隴西)의 동산 : 이씨(李氏)의 본고장이란 뜻으로, 맨 처음 농서(隴西) 성기(成紀) 사람이 이연(李淵)이 당(唐) 나라를 세우고 천하의 이씨(李氏)는 모두 농서(隴西)에서 나왔다고 하면서 노담(老聃)을 시조(始祖)로 삼은 데서 유래한 것이다. 《舊唐書 卷1 高祖本紀》
[주D-002]장길(長吉)의 문장 : 장길은 당(唐) 나라 시인(詩人) 이하(李賀)의 자이다. 그는 종실(宗室)인 정왕(鄭王)의 후예로 시가(詩歌)를 짓는 솜씨가 매우 민첩하고 문체(文體)가 독특하여 장길체(長吉體)를 창출한 사람이기도 하다. 악부사(樂府詞) 등 많은 작품을 남겼고 24세의 나이로 죽었다. 《舊唐書 卷137 李賀列傳》
[주D-003]은졸(隱卒) : 원래는 죽음을 애도한다는 말이었으나 시호(諡號)라는 뜻으로 어의(語義)가 전성되어 사용된다.

 

 

 

아계유고 제2권
 기성록(箕城錄) ○ 시(詩)

짙푸른 솔숲에 내 기운 자욱하고 / 煙靄蒼蒼松樹林
아미 같은 초승달이 서쪽으로 잠기었네 / 蛾眉新月已西沈
개 짖는 소리 잦아들매 사람 자취 끊기고 / 吠殘村犬人蹤斷
관솔 등잔 타서 다하니 토방이 그윽해라 / 爇盡松明土室深
창 아래 글 읽는 소리 고요한 밤에 들리고 / 窓下伊吾聞夜讀
화롯가엔 토란과 밤 찬 이불을 짝하였네 / 爐邊芋栗伴寒衾
아련히 회상하노니 종남산 아래 옛집에선 / 依然却憶終南舍
골육의 친지들이 모두 단란히 모였었지 / 骨肉諸郞盡盍簪

 

 

鵝溪遺稾卷之二
 箕城錄
夜 a_047_487c


煙靄蒼蒼松樹林。蛾眉新月已西沈。吠殘村犬人蹤斷。爇盡松明土室深。

 

窓下伊吾聞夜讀。 爐邊芋栗伴寒衾。依然却憶終南舍。骨肉諸郞盡盍簪。

 

아계유고 제2권
 기성록(箕城錄) ○ 시(詩)


강성이라 삼월에 비가 막 걷히니 / 江城三月雨初收
버들은 푸릇푸릇 옛 길가에 푸르구나 / 楊柳靑靑古陌頭
방초는 지리하게 사람과 함께 늙고 / 芳草支離人共老
낙화는 가벼워라 물 따라 흘러가네 / 落花輕薄水同流
동풍은 곤궁한 이내 한을 흩지 못하고 / 東風不散窮途恨
긴 해는 먼 곳 나그네 시름 몹시 보태네 / 長日偏添遠客愁
아스라이 생각노니 시촌엔 봄 흥취 많아 / 遙想枾村春興足
복어 막 올라오고 고사리 싹 보드라우리 / 河豚初上蕨芽柔


 

 

 
기성록(箕城錄) ○ 시(詩)
여름

늙은 고목 무성한 그늘이 짧은 담을 덮으니 / 老樹繁陰覆短墻
어지러이 나는 꾀꼬리 아리따이 지저귀누나 / 亂鶯嬌囀奏瑤簧
서쪽 이웃 자줏빛 대는 천 길이나 길었고 / 西鄰紫筍千尋長
남쪽 골짝 붉은 연꽃은 만 떨기 향기롭네 / 南谷紅蕖萬朶香
물가 언덕 바람 부는 다리는 누워 쉬기 좋고 / 水岸風棚宜偃息
칡 두건 부들 부채는 청광한 멋 한껏 부리네 / 葛巾蒲扇任淸狂
저물녘에 동호에 몰려온 일진 비가 / 晚來一陣東湖雨
과분하게도 송림 밖 서늘함을 보태주누나 / 添却松林分外凉

 
아계유고 제2권
 기성록(箕城錄) ○ 시(詩)
가을

물가의 기러기떼 어지러이 날고 / 汀洲羣鴈亂翩翩
강가에 가을빛은 나무에 곱게 앉았구나 / 江畔秋光着樹姸
서풍이 두려워라 짧은 머리털 가리우고 / 爲怕西風遮短鬂
가벼운 겹옷을 무거운 솜옷으로 바꾸노라 / 却將輕裌換重緜
황량한 성에 내린 이슬 오늘 밤이 슬프고 / 荒城白露悲今夕
한양 땅 국화 피던 지난해를 회상하누나 / 京國黃花憶舊年
막걸리는 얻었어도 마음은 갈피를 못 잡아 / 縱得濁醪無意緖
달 밝은데도 오히려 발을 내리고 잠드노라 / 月明猶自下簾眠
석(夕) 자는 야(夜) 자가 되어야 한다.

 
아계유고 제2권
 기성록(箕城錄) ○ 시(詩)
겨울

바닷가에 사나운 바람 철기가 치달리는 듯 / 海岸獰風鐵騎磨
송정이랑 관로에 어지러이 모래가 날리누나 / 松亭官路亂飛沙
주린 까마귀 나무 쪼니 찬 햇살이 숨어들고 / 飢烏啄樹寒暉匿
언 참새가 처마에 드니 저물녘 눈이 많아라 / 凍雀投簷暮雪多
섬계 굽이에선 생각건대 노저어 돌아가고 / 剡曲想應迴棹去
파교에선 아마도 어깨를 움츠리고 지나가리 / 灞橋知有聳肩過
상강의 오랜 나그네 지금은 늙고 병들어 / 湘江久客今衰病
조각배에 낚시랑 도롱이 손질할 맘 없어라 / 無意扁舟理釣簑

[주D-001]섬계(剡溪) 굽이에선 …… 돌아가고 : 진(晉) 나라 왕자유(王子猷)가 눈 내리는 밤에 섬계(剡溪)에 있는 대안도(戴安道)가 생각나서 작은 배를 타고 찾아갔다가 정작 그곳에 도착해서는 문 앞에서 다시 배를 돌리기에 그 까닭을 물었더니, “내가 본래 흥에 겨워 왔다가 흥이 다하여 돌아가는 것이니, 대안도를 보아 무엇하겠는가.” 하였다 한다.
[주D-002]파교(灞橋)에선 …… 지나가리 : 소동파(蘇東坡)의 증사진하수재(贈寫眞何秀才)란 시에 “또 보지 못했는가. 눈 속에 나귀를 탄 맹호연(孟浩然)이 눈썹을 찌푸리고 시를 읊으매 움츠린 어깨가 산처럼 높네.” 하였다. 이 시에서는 위의 구절과 함께 눈 속의 흥취를 말하기 위하여 용사되었다.
[주D-003]상강(湘江)의 오랜 나그네 : 초(楚) 나라의 굴원(屈原)을 지칭한 말로, 여기서는 귀양온 필자 자신을 의미하고 있다


 

아계유고 제2권
 기성록(箕城錄) ○ 시(詩)
저녁


먼 절의 성긴 종소리 푸른 산에 떨어지고 / 遠寺疎鍾下翠微
물가 정자 꽃 핀 언덕에 석양이 비꼈어라 / 水亭花塢已斜暉
발 앞에 어리는 산빛은 짙었다 다시 묽고 / 簾前山色濃還淡
들 밖에 보이는 마을 연기는 걷혔다 나누나 / 野外村煙抹更飛
풀어놓은 송아지는 절로 숲길 찾아 돌아오고 / 放犢自尋林徑返
둥지 찾는 새는 많이들 대숲 향해 돌아오네 / 栖禽多向竹園歸
어이 견딜꼬 날 저물자 슬픔 더욱 심하여 / 那堪日暮增惆悵
한없는 고향 시름에 홀로 사립을 닫았노라 / 無限鄕愁獨掩扉


 
기성록(箕城錄) ○ 시(詩)

거처하매 찾는 이 없고 나가매 나귀 없어 / 居無來問出無驢
일만 수림 빽빽한 곁 초가집 문을 닫았노라 / 萬木森邊閉草廬
화로에 물이 데워지기에 얼굴의 때를 씻고 / 爐水乍溫顔垢洗
창에 햇살 떠오를 제 흰 머리털을 빗는다 / 窓暉初上鬢霜梳
경을 볼 적엔 두꺼운 책을 싫증 없이 다 읽고 / 看經不厭重編盡
시구 얻으면 때로 큰 붓 가져오라 하여 쓴다네 / 得句時呼大筆書
안한함에 깊은 맛 있음을 비로소 알겠나니 / 始識安閑方有味
벼슬아치 행차로 향리에 으스대는 이 우스워라 / 笑他裘馬耀鄕閭

 
아계유고 제2권
 기성록(箕城錄) ○ 시(詩)
새벽

작은 창에 서리가 스며 써늘한데 / 小窓霜氣透凄凄
새벽빛 밝으려다 다시 어두워지네 / 曙色將分更却迷
처마 끝에 지는 달은 그림자가 없고 / 落月下簷還沒影
홰를 치는 닭들은 다투어 울어대누나 / 羣鷄鼓翼共爭啼
통발에 가득한 물고기 아침 찬거리이고 / 笱魚政滿宜朝饌
솥 안에 죽이 뻑뻑하매 채소를 덜어낸다 / 鼎粥初濃撥凍虀
베갯머리에 떠오른 다소의 시구들을 / 多少枕邊長短句
손가락으로 속절없이 찢어진 이불에 써보네 / 指尖空向破衾題
 
아계유고 제2권
 기성록(箕城錄) ○ 시(詩)
겨울밤

군불 끊긴 흙침상에 이불이 싸늘한데 / 土床煙斷布衾寒
산에 뜬 달 창을 엿보고 밤은 깊어가누나 / 山月窺窓夜向闌
잠자던 새들이 놀라 퍼덕여 괴이쩍었더니 / 却怪栖禽驚不定
서리가 눈처럼 하얗게 숲 가지에 내렸구려 / 繁霜如雪着林端

 
아계유고 제2권
 기성록(箕城錄) ○ 시(詩)
겨울밤

군불 끊긴 흙침상에 이불이 싸늘한데 / 土床煙斷布衾寒
산에 뜬 달 창을 엿보고 밤은 깊어가누나 / 山月窺窓夜向闌
잠자던 새들이 놀라 퍼덕여 괴이쩍었더니 / 却怪栖禽驚不定
서리가 눈처럼 하얗게 숲 가지에 내렸구려 / 繁霜如雪着林端


 

 
아계 이상국 연보 부록
 제문(祭文)
만력(萬曆) 37년 기유(己酉) 9월 기묘삭(己卯朔) 17일 을미(乙未)에 국왕(國王)이 예조 좌랑 목취선(睦取善)을 보내 아성부원군(鵝城府院君)의 영전(靈前)에 유제(諭祭)를 드리다.

혼령이시여 / 惟靈
대대로 현달한 덕이 있어서 / 世有顯德
가성이 넘치더니 / 藹蔚家聲
경의 당대에 미쳐서 / 及卿之身
훌륭하다는 명성이 더욱 빛나네 / 仍耀烈名
아주아주 어린 시절부터 / 始微有知
문장력을 떨치기도 하였고 / 則振文囿
휘두르는 필력은 용이 나는 듯 활기차고 / 筆揮龍蛇
쏟아내는 문장은 비단결처럼 고왔네 / 詞裂錦繡
일찍부터 왕정에 명성을 날리고 / 早揚王庭
청운의 꿈을 가볍게 실현했네 / 平步靑雲
전형권을 오랫동안 맡아서 / 久司銓轄
영화가 문에 있었고 / 桃李在門
문형을 잡고 나서는 / 逮秉文衡
태평한 세상으로 꾸며 놓았네 / 賁飾太平
강산이 마르고 닳도록 맹세를 했네 / 山河托誓
재상의 자리에 올라 역할을 다할 것을 / 鼎鼐調羹
두 조정으로부터 인정을 받았네 / 受知兩朝
인망이 노성에 관계되어서 / 望係老成
시국이 어려울 때에는 / 屬時艱難
벼슬길에서 잠시 은둔하고 / 亨衢暫屯
이윽고 귀양지에서 풀려났으니 / 俄蒙賜環
굽혔다가 또 펼쳤다네 / 屈而又伸
내가 직임을 맡기려 했던 것은 / 予方圖任
기갈에 그칠 뿐만이 아니었네 / 不啻飢渴
고향으로 가겠다는 경의 뜻이 간절했지만 / 乞骸雖切
나의 뜻은 이미 결정했었노라 / 予意已決
중중한 권애하는 마음 / 眷意之重
실로 속마음에서 나온 것이라 / 實出衷曲
기대하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 云乎不憖
하늘이 이다지 빨리 앗아가다니 / 天奪之速
사람이 마음대로 하기 어려운 것은 / 人之所難
지위와 연령이련만 / 曰位曰年
경은 그 복을 다 누렸네 / 卿享其福
높은 관작에 장수까지도 / 爵齒俱全
사람들의 소원이라면 / 人之所願
자식도 있고 손자도 있는 것이련만 / 有子有孫
경은 그 즐거움을 가졌네 / 卿有其樂
훌륭한 자손들 많고 많아라 / 蘭玉齊芬
경이야 무엇이 섭섭하리 / 在卿奚憾
경사란 경사 죄다 이르렀는데 / 休慶備至
내가 슬픈 것은 / 在予所慟
다 드러낼 길이 없네 / 不究厥施
경의 모습을 멀리 생각할라치면 / 緬想儀形
그 어떤 중신보다도 슬프구나 / 悲深喬木
그저 전례에 의거하여 / 聊倣舊典
사람을 보내 술잔을 올리게 하노니 / 代陳泂酌
혼령이여 몽매하지 않거든 / 靈其不昧
와서 임하기를 바라노라 / 式佇來格

 
아계 이상국 연보 부록
 제문(祭文)
만력(萬曆) 37년 기유(己酉) 10월 기유삭(己酉朔) 5일 계축(癸丑)에 보국숭록대부 해평부원군(海平府院君) 윤근수(尹根壽)는 삼가 술과 안주를 마련하여 감히 아성부원군 이공의 영전(靈前)에 고하다.


옛날 고려 말기에 / 昔在麗季
가정과 목은이 살았지요 / 稼牧蔚興
중국으로 유학가서 / 天朝北學
제과에 잇따라 올랐네 / 制科繼登
양대에 걸쳐 한림을 하니 / 兩世翰林
명성이 팔방에 전파되었네 / 名播八方
그 손자가 있어서 / 厥有聞孫
아름다운 전통을 만들어 전했네 / 嗣馥傳芳
화려한 문사는 샘물이 솟구치듯 / 麗藻泉湧
신비로운 필치는 난새가 나는 듯 / 神筆鸞翔
어릴 때부터 그랬으니 / 未齕卽然
보는 자가 다 놀랐네 / 見者盡驚
약관의 나이를 겨우 넘겼는데 / 年纔踰冠
옥관자에 이름을 드날렸네 / 片玉揚名
서청의 신망이 높더니 / 西淸望尊
전경으로 더욱 중임을 맡았네 / 尤重典經
공이 이 관직을 맡자 / 公居此職
여론이 미더워하였네 / 輿論所孚
전부에서 낭관으로 오래 지내다가 / 久郞銓部
큰 벼슬에 처음 올랐네 / 發軔雲衢
승정원과 사헌부에서는 / 靑瑣霜臺
항소도 올렸고 어사도 되었네 / 抗疏乘驄
중서성의 관료도 되니 / 中書僚屬
맑고 통창한 신분이었네 / 地分淸通
잠시 직제학을 거쳐서 / 旋由直學
승지가 되어 가까이서 모셨네 / 昵侍喉舌
대간과 도헌도 되어 / 大諫都憲
풍습과 절의를 유지했네 / 力持風節
병조 참판이 되었다가 / 亞于夏官
정경에 탁배되었네 / 擢拜正卿
사조를 두루 역임하고 / 流連四曹
이조에서 판서를 맡았네 / 吏部持衡
이미 이공의 자리에 나아갔다가 / 旣晉貳公
드디어 대감의 자리를 바로잡았네 / 遂正台席
원보가 되어 정치를 이루니 / 元輔致理
탄탄한 기획으로 가까이서 도왔네 / 密贊石畫
공이 개부에 짝할 만하니 / 疇功開府
초상화를 능연각에 걸었네 / 圖象凌煙
어수선한 시운을 만나 / 運値陽九
서울을 떠나 서쪽으로 갔네 / 去邠西遷
공이 그 책임으로 면직되고 / 公乃策免
또 섬 지방으로 귀양을 갔네 / 又謫海曲
성주의 특별한 배려로 / 聖主特念
귀양지에서 풀려나 수록하셨네 / 賜環收錄
상부에 재차 들어와서 / 再入相府
백관의 장이 되었네 / 百僚長首
성은에 힘입어 체직하고 / 恩許遞職
허물없는 휴양을 하였느니 / 養安無咎
강호의 자연 풍경은 / 江湖煙月
늘그막의 한가로운 생활 / 暮境淸閑
생계는 쓸쓸하고 / 生計蕭然
두어 칸도 못 되는 집 / 屋未數間
서울에서 의원을 찾았건만 / 尋醫京輦
공의 질병이 더욱 악화되었네 / 美疾轉增
날이면 날마다 낫기만을 바랐는데 / 日望勿藥
갑자기 부음이 닥치다니 / 流訃遽騰
무지개 타고 기성 타고 / 鞭虹馭箕
하늘나라로 가신게라 / 以還帝鄕
규벽은 채색을 감추고 / 奎璧掩彩
보좌하는 별은 광망을 거두었네 / 輔星收芒
자미원은 대두를 잃고 / 垣失大斗
산악은 교봉이 무너졌네 / 岳隕喬峰
임금님 애통해하시고 / 慟深當宁
마을에 진용을 거두셨네 / 巷輟秦舂
저 아름다운 성을 돌아보시다 / 睠彼佳城
다른 고을을 새로 마련하셨네 / 新卜他縣
하얀 깃발 길이 드날리니 / 素旐悠揚
길이 호전으로 통하였네 / 路入湖甸
만사가 이젠 끝이로세 / 萬事已矣
죽은 사람을 다시 살릴 수 없으니 / 九原不作
위대한 도량과 아량으로 / 偉度雅量
갑자기 이 세상을 뜨다니 / 遽就冥漠
아, 슬프도다 / 嗚呼哀哉
신동이 분연히 일어나서 / 神童奮起
사원에선 언제나 우승을 하였지 / 赤幟詞垣
당사를 힘써 진작하고서 / 力振唐調
본원을 깊이 탐색하더니 / 冥搜本源
국풍의 경지를 벗어나 아의 경지에 들어 / 出風入雅
단단한 채비로 따랐네 / 櫜鞬鞭弭
유포되는 글마다 / 篇章流布
물 위에 솟은 연꽃인 듯 / 芙蓉出水
어린 나이에 은혜를 입어 / 妙齡恩暇
세자사에 선발되었네 / 被掄儲養
예문관 직함까지 겸임하여 / 職兼藝文
중망을 한 몸에 받았네 / 異日重望
과연 문병을 잡아서 / 果握文柄
제 나라 맹약을 주도하였네 / 以主齊盟
훌륭한 아들과 훌륭한 손자가 / 賢器喆孫
영향을 계승하니 명성이 같아라 / 嗣響同聲
잇따라 과거에 올랐을 뿐만 아니라 / 匪直連科
삼세토록 호당을 역임했네 / 三世湖堂
우리나라에서 처음 보는 일이기에 / 我東創見
조정의 길한 징조이어라 / 朝家吉祥
옥윤이 장관을 대신하더니 / 玉潤代長
상태를 지금 두 번이나 올랐네 / 上台今再
대제학의 얼음 같은 직함 / 大提氷銜
옛날에도 일찍 띠었네 / 昔年曾帶
한 집안의 화려함을 / 一家光華
조물주가 부여해 주었지 / 造物所賚
기술할 만한 신기한 일을 / 奇事可述
백대가 되도록 자랑할 일이로다 / 夸詡百代
남기신 글이 빛나서 / 遺篇輝暎
세상에 전하여 스러지지 않으리니 / 傳世不朽
공은 눈을 감을 수 있으리 / 公目可瞑
부평 같은 인생 어찌 오래랴 / 浮生寧久
아, 슬프도다 / 嗚呼哀哉
내가 공을 본 것은 / 余之獲見
어렸을 때부터였지 / 爰自孺冠
급제한 뒤에 따라서 급제하여 / 後先擢第
조정의 한가운데 섰었네 / 鵠立朝端
전랑의 청선을 / 銓郞淸選
실지로 동료들과 함께했네 / 實同寮寀
동호에서 학업을 쌓을 적에 / 東湖績學
몇 번이나 공을 만났던가 / 幾挹丰彩
서청에서 자리를 함께하고 / 西淸聯席
자미원에서 꽃을 대하였네 / 紫薇對花
옥수가 곁에 있었기로 / 玉樹在傍
내 자신은 겸가에 비추어 보았네 / 自視蒹葭

두려운 길을 다 역임하였지만 / 畏途歷盡
사귄 정은 오히려 변함없었네 / 交情猶舊
수시로 화답도 하더니 / 有時唱酬
외람하게 쓸모없는 자를 천거해 주었네 / 猥薦敝帚
세월은 덧없이 흘러 / 流光荏苒
언뜻 노년이 닥쳐왔네 / 颯焉年至
향산이다 낙사다 / 香山洛社
그 고사를 따라서 / 循厥故事
나란히 기구로 올리고 / 並躋耆舊
이들을 국로라고 하였네 / 是曰國老
불행히 반염을 하고 나니 / 不幸攀髥
조정과 시골이 슬퍼했네 / 朝野同縞
통상은 지나치다 할지라도 / 倘過通喪
공연은 설치할 만하여라 / 公讌可設
성대한 모임을 가질 때면 / 鋪張盛會
공이 붓 적시기를 기다렸네 / 待公濡筆
시편에서는 옥을 굴리듯 / 詩篇戞玉
초서에는 신기가 어린 듯 / 草字入神
하얀 바탕에 물을 들이듯 / 染之絹素
탁월한 재능 보배로워라 / 絶藝可珍
공은 어찌 길이 떠나서 / 公胡長逝
이런 흠전을 만드시나 / 致此欠典
화려한 자리를 영원히 저버렸으니 / 華筵永負
호리로 떠날 시간 전별에 있어 / 蒿里在餞
초혼사를 길게 불러라 / 大招長些
생사의 갈림길이로세 / 存沒隔矣
우의의 다정다감 / 友誼驩情
하루 아침에 끊길 줄이야 / 一朝絶矣
글을 지어 공을 곡하노니 / 文以哭公
공이 살아올 것만 같으이 / 公如生矣
아, 슬프도다 / 嗚呼哀哉
흠향하시라 / 尙饗

[주D-001]서청(西淸) : 서상(西廂)의 청정한 곳을 일컫는 말로 쓰이기도 하며, 제왕(帝王)들이 궁궐 내에서 연회하던 곳을 지칭하기도 한다.
[주D-002]개부(開府) : 권위 있는 개부의 관원을 지칭하는 말로 쓰인다. 당 나라 두보(杜甫)가 지은 ‘봄날에 이백을 생각하다’라는 시에, “청신(淸新)이라면 유개부(庾開府)요 준일(俊逸)이라면 포참군(鮑參軍)이다.” 하였다.
[주D-003]능연각(凌煙閣) : 봉건 왕조가 공신들을 표창하기 위하여 지어 놓은 공신들의 초상화를 걸어둔 집으로, 당(唐) 나라 태종이 정관(貞觀) 17년에 공신들의 초상화를 능연각에 걸었던 일이 가장 잘 알려져 있다.
[주D-004]서울을 …… 갔네 : 공의 나이 54세 되던 임진년 4월에 왜구가 쳐들어오자, 공이 다급한 사정을 중국에 알리기 쉬운 서쪽으로 피난을 가자고 주청한 뒤에 공이 묘사(廟社)의 신주(神主)를 모시고 선조(宣祖)를 호종(扈從)하여 5월 1일에 송도(松都)에 도착하고 평양(平壤)을 거쳐 의주(義州)까지 갔던 일을 말한다.
[주D-005]기성(箕星) 타고 : 세상을 떠난 것을 말한다. 조정(趙鼎)의 명정(銘旌)에 쓰기를 “몸은 기미(箕尾)를 타고 하늘로 돌아가고, 기운은 산하(山河)가 되어 본조(本朝)를 튼튼하게 하였네.”하였다. 《宋史 卷360 趙鼎列傳》
[주D-006]자미원(紫媺垣) …… 잃고 : 자미는 성좌(星座)의 명칭으로 삼원(三垣) 중의 하나이다. 15개의 자미성이 동쪽에는 8개, 서쪽에는 7개로 나뉘어 마치 북극성(北極星)을 좌우에서 호위하고 있는 듯한 모습을 하고 있기 때문에, 임금을 보좌하던 훌륭한 신하가 죽은 것을 이렇게 표현한 것이다. 《宋史 天文志 2》
[주D-007]진용(秦舂)을 거두셨네 : 죽은 자를 애도하는 말로 쓰인다. 조량(趙良)이 상앙(商鞅)에게 이르기를, “오고대부(五羖大夫)가 죽고 나자. 진(秦) 나라 백성들이 눈물을 흘렸고 방아를 찧던 자들이 절구질을 하지 않았다.” 하였다. 《史記 卷68 商君列傳》
[주D-008]제(齊) 나라 …… 주도하였네 : 춘추 시대 제 나라의 환공(桓公)이 제후를 규합하여 천하를 바로잡고 자신이 맹주가 되어 오패(五覇)의 우두머리가 되었다. 여기에서는 공이 환공이 맹주가 되었던 것처럼 문단을 전반적으로 주도했다는 뜻으로 인용하였다. 《史記 卷33 齊太公世家》
[주D-009]옥윤(玉潤) : 진(晉) 나라 때 위개(衛玠)가 총각(總角) 머리에 양(羊)이 끄는 수레를 타고 시내로 들어가니 보는 사람마다 옥인(玉人)이라고 하였다. 또 위개의 처부(妻父) 악광(樂廣)은 해내(海內)에서 중망(重望)을 받았다. 그래서 사람들이 “장인은 빙청(氷淸)이요 사위는 옥윤(玉潤)이다.”하였는데, 이후부터 옥윤이라는 말이 사위에 대한 미칭(美稱)으로 쓰이게 되었다. 《晉書 卷36 衛玠列傳》
[주D-010]서청(西淸) : 서상(西廂)의 청정한 곳을 일컫는 말로 쓰이기도 하며, 제왕(帝王)들이 궁궐 내에서 연회하던 곳을 지칭하기도 한다.
[주D-011]자미원(紫媺垣) : 자미는 성좌(星座)의 명칭으로 삼원(三垣) 중의 하나이다. 15개의 자미성이 동쪽에는 8개, 서쪽에는 7개로 나뉘어 마치 북극성(北極星)을 좌우에서 호위하고 있는 듯한 모습을 하고 있기 때문에, 임금을 보좌하던 훌륭한 신하가 죽은 것을 이렇게 표현한 것이다. 《宋史 天文志 2》
[주D-012]옥수(玉樹)가 …… 보았네 : 옥수와 겸가는 두 사람의 인격이나 수준이 서로 맞지 않는데 함께 어울리는 것을 지칭하는 말로 갈대같이 변변치 못한 인물이 옥으로 만든 나무와 같은 훌륭한 인물에게 의거함을 뜻한다. 위(魏) 나라 명제(明帝)가 모증(毛曾)이란 자로 하여금 하후현(夏候玄)과 함께 앉도록 했더니, 당시 사람들이 “겸가(蒹葭)가 옥수(玉樹)에 의지하였다.”고 말하였다 한다. 《世說新語 容止》
[주D-013]향산(香山) : 하남성(河南省) 낙양시(洛陽市) 용문산(龍門山) 동쪽에 있는 산 이름으로, 당(唐) 나라 때 백거이(白居易)가 이곳에다 석루(石樓)를 쌓고 만년에 향산의 승려 여만(如滿)과 함께 교류하면서 지냈던 곳이기도 하다. 《舊唐書 卷166 白居易列傳》
[주D-014]낙사(洛社) : 낙양사(洛陽社)의 줄임말로 퇴은(退隱)한 자가 거처하는 곳을 말한다. 진(陳) 나라 갈홍(葛洪)이 지은 《포박자(抱朴子)》의 잡응편(雜應篇)에, “동위연(董威輦)이라는 도사(道士)가 항상 낙양(洛陽)의 백사(白社)라는 곳에 머물면서 음식을 먹지 않고 지내자, 진(陳) 나라 자서(子敍)가 함께 따라서 도술을 배웠다.” 하였다.
[주D-015]반염(攀髥) : 황제가 세상을 떠난 것에 대한 애도를 나타내는 말로 쓰인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황제(黃帝)가 형산(荊山) 아래에서 솥을 주조하였다 한다. 그 솥이 완성되자, 하늘에서 용이 내려와 황제를 태우고 올라갔는데 신하들과 궁인들이 따라서 올라간 자가 70여 명이었고 나머지 용의 몸을 직접 잡지 못한 신하들이 용의 수염을 잡았더니 용의 수염이 뽑혀 떨어지면서 황제의 활도 함께 떨어졌고 백성들은 그 활과 용의 수염을 끌어안고 울부짖었다 한다. 《史記 卷28 封禪書》
[주D-016]호리(蒿里) : 본래는 중국 태산(泰山) 남쪽에 위치한 산 이름이었으나 죽은 자를 장사하는 곳으로 알려져 일반적으로 묘지(墓地)를 지칭하는 말로 사용한다. 그러나 진(晉) 나라 최표(崔豹)의 《고금주(古今注)》에는 해로(薤露)와 함께 만가(輓歌) 또는 상가(喪歌)라고 하였다.
 
 아계 이상국 연보 부록
 제문(祭文)
만력(萬曆) 37년 기유(己酉) 11월 무인삭(戊寅朔) 18일 을미(乙未)에 사위인 의정부 영의정 이덕형(李德馨)이 삼가 장인이신 아성부원군 이공의 영전과 장모이신 정경부인(貞敬夫人) 조씨(趙氏)의 영전에 맑은 술과 조촐한 안주를 올립니다.

아, 슬프옵니다 / 嗚呼哀哉
바다로 둘러싸인 우리나라에 / 環海之東
아름다운 산이 수려했더이다 / 佳山競秀
맑은 기운이 떠올라서는 / 淑氣扶輿
호우에 모였더이다 / 萃于湖右
가정과 목은을 내시니 / 篤生稼牧
명망과 덕성이 무성했지요 / 名德俱茂
명성을 중국에 떨치고 / 聲振中華
광대한 우주까지에도 / 轇輵宇宙
특이한 선질이 있어서 / 有異仙質
칠 대를 지나서 또 나시니 / 七葉而又
식견이 말보다 먼저 통하여 / 識先語通
어린 나이에 정신이 투철했고요 / 孩提神透
다섯 살에 학문을 알아서 / 五歲知學
붓이 닿으면 문장이었다지요 / 筆落章就
귀한 바는 천성적으로 타고난 것 / 所貴天得
스승의 전수에 번거롭지 않았다지요 / 不煩師授
전장의 취한 먹으로 / 顚張醉墨
용과 호랑이가 서로 겨루듯 / 龍虎交鬪
아이 때에 홀로 능하기로는 / 兒時獨能
전후를 살펴보아도 공뿐이었더이다 / 公掩前後
도가의 길다란 병풍은 / 道家長屛
밝은 대낮에 무지개가 떠 있는 듯 / 虹貫晴晝
사람들은 신동이라 칭하고 / 衆稱神童
가슴속은 비단결 같더이다 / 胸中錦繡
양씨 안씨를 따질 것이 있겠어요 / 豈數楊晏
일찍부터 새기는 것을 일삼았는데 / 早事雕鏤
과거장에 나가 명성을 날리니 / 出鳴場屋
깊은 숲에 도사리던 맹수들이 / 深叢猛獸
재주를 감추고 망설이다가 / 斂藝遲進
약관의 나이 되어 재주를 팔았지요 / 弱冠始售
옥당 금마에서는 / 玉堂金馬
문장으로 유희를 하고 / 遊戲文囿
청백과 겸손으론 자신을 검칙하고 / 淸謙自飭
성후의 은총을 한껏 받았지요 / 荷寵聖后
상경의 반열을 역임함에는 / 歷敭卿列
선발을 갑작스레 하지 않았습니다 / 簡任非驟
전형에 신중하기가 어렵건만 / 秉銓難愼
친구라고 사정을 두지 않아서 / 不私親媾
깨끗한 문정에 속객이 끊기니 / 淸關絶塵
소문과 칭찬이 날로 더했더이다 / 聞譽日富
괴정에 오른 지위 높을씨고 / 位隆槐鼎
벼슬아치들의 물망을 한 곳으로 / 望傾簪綬
국내가 온통 전쟁으로 어지러울 때 / 擊撞振撼
몸은 병들었어도 생각을 다하였지요 / 費盡虞疚
임진년하고도 여름이 되어 / 壬辰維夏
나라는 해구의 핍박을 받았지요 / 國逼海寇
어쩔거나 어쩔거나 눈물만 흘리다 / 蒼黃雪涕
임금님 모시고 피난을 가셨지요 / 扈駕西狩
미리 정한 계획이 있었건만 / 我有定筭
노기 어린 말들이 망신을 주었더이다 / 怒言偏詬
바닷가로 귀양가서는 / 謫來海濱
자연 풍경 읊은 시가 천 수라지요 / 風月千首
붓과 벼루로 오락을 삼고 / 筆硯自娛
금석 같은 소리를 이따금 연주도 하고 / 金石間奏
임금으로부터 소명이 있더니 / 自天有命
기구라는 이름으로 부르셨더이다 / 乃召耆舊
벼슬길이란 번복이 있는 탓에 / 宦途翻覆
일어나자마자 도로 넘어졌더이다 / 纔起還踣
호외에 마련한 초가집 / 草廬湖外
자연을 벗삼아 소일하였지요 / 玩情雲岫
모년에 병환이 쌓였거니 / 暮年積患
엎질러진 물을 어찌 담으리요 / 覆水何救
운수란 비색했다가 형통하는 법 / 運否而亨
인자가 장수한다는 말을 믿었더니 / 惟恃仁壽
불행하다 하리이다 / 豈謂不幸
어찌 이런 병이라니요 / 斯疾之遘
유년이 되어 과연 이리 된 것은 / 及酉果驗
사안석의 꿈이 결국 맞은 셈이구려 / 謝夢終副

만사가 뜬구름인 것을 / 萬事浮雲
길이 통곡하며 흐느끼고파 / 長慟欲仆
사위가 문관에 와서 / 余及門館
어릴 때부터 장려함을 알았지요 / 獎知自幼
삼십 년을 지내온 지금은 / 三十年來
머리가 세어 목에 드리웠답니다 / 髮白垂脰
온화한 말씀 생각해 보건만 / 追懷溫語
구원을 되돌리기 어려우이다 / 九原難復
시사의 탁월한 소리를 두고 / 詩詞絶響
세속의 조무라기들 떠들기만 하는 꼴이라니요 / 俗噪貿貿
누가 천재를 진작하여 / 孰振天才
대중의 누추함을 타매하리오 / 唾衆之陋
명성과 이끗에 분분하거나 / 紛紛聲利
서로들 화주에게 모여들거니 / 爭侈華冑
누가 외지를 맑게 하오리까 / 孰淸畏知
세분을 맡을 수가 없구려 / 世芬莫齅
시절을 쓸어안고 슬퍼하는 것은 / 撫時嗟悼
말세의 풍습이 점점 꼬이기 때문입니다 / 末俗漸謬
이 골짜기에 오고서 / 此來窮谷
한 계절이 바뀌었습니다 / 載變時候
사방 산천에 눈이 내려 가득한 만큼 / 雪滿四山
차가운 햇빛에 병들기도 쉬운데 / 寒暉易瘦
풀이 죽은 효자가 / 零丁孝子
속울음으로 옷소매를 적시더이다 / 血泣漬袖
빙모님의 무덤을 한 곳으로 모시니 / 配德遷兆
두 분 내외 기쁘시겠지요 / 雙劍歡覯
영원히 한 곳에 고이 잠드소서 / 萬歲同穴
예전 널이지만 새 관이로이다 / 舊櫬新柩
천향은 향로에 가득하고 / 天香滿椀
은사한 유자도 향기롭습니다 / 恩賜橘柚
세간의 슬픔과 영화란 / 間世哀榮
한 순간의 주마등 같습니다 / 傳遍馬走
술은 술잔에 따라 올리고 / 有酒在觴
고기는 제기에 담아 올립니다만 / 有肉在豆
불러도 불러도 들릴 리 없으니 / 千呼莫聞
눈물만 펑펑 낙숫물이 되오이다 / 淚如懸霤
어둡지 않다면 정성을 살피시리니 / 不昧監誠
시를 지어 흠향을 권하오이다 / 矢詩爲侑
아, 슬프옵니다 / 嗚呼哀哉
흠향하소서 / 尙饗

[주D-001]칠 대를 …… 나시니 : 문정공(文靖公) 목은(牧隱) 이색(李穡)으로부터 칠 대 만에 훌륭한 사람이 또 태어났는데 그 사람은 다름 아닌 아계(鵝溪)라는 뜻이다.
[주D-002]다섯 살에 …… 알아서 : 아계는 다섯 살 때부터 하나를 들으면 열을 알았으며, 특별히 스승의 가르침을 받지 않고도 많은 것을 터득하였다 한다. 아계연보 가정(嘉靖) 22년 조에 그 내용이 자세하다.
[주D-003]전장(顚張) : 전욱(顚旭) 또는 장전(張顚)이라고도 부르는데, 그의 본명은 장욱(張旭)이다. 당 나라 때 서법가(書法家)였던 그는 술을 매우 좋아하였으며, 매번 술에 잔뜩 취하여 글씨를 써 놓고 술이 깬 다음에는 스스로 신비하다고 여기곤 하였다. 특히 초서(草書)에 능하였다 한다. 《新唐書 卷302 張旭列傳》
[주D-004]괴정(槐鼎) : 삼공(三公) 또는 삼공의 지위를 비유적으로 한 말이다. 일반적으로 집정대신(執政大臣)을 지칭하기도 한다. 주(周) 나라 때 궁궐 뜰에 홰나무 세 그루가 있었는데 삼공(三公)이 천자(天子)에게 조회할 때에 그 홰나무를 향해 서서 조회하였기 때문에 그 뒤로 삼괴(三槐)를 삼공(三公)에 비유하여 사용하게 되었다. 정(鼎) 역시 국가의 중대한 기구인데 발이 셋이 있기 때문에 상징적으로 삼공에 비유한 것이다. 《周禮 秋官》
[주D-005]유년(酉年)이 …… 셈이구려 : 진(晉) 나라 때 사안석(謝安石)이 환온(桓溫)의 집정기(執政期)에, 문든 환온의 수레를 타고 16리를 가서 백계(白鷄)를 보고 멈추는 꿈을 꾸었는데, 당시에 이 꿈을 풀이하는 자가 없었다. 그 후 환온이 죽고 사안석이 대신 재상이 되어 16년이 지난 뒤에 병을 얻었다. 그제서야 사안석이 깨닫고 말하기를, “환온의 수레를 탄 것은 환온 대신 내가 재상이 된다는 뜻이고, 16리를 간 것은 16년 동안 재상을 역임한다는 뜻이며, 백계를 보고 멈춘 것은 금년 태세(太歲)가 유년(酉年)이니 유(酉)는 곧 계(鷄)가 된다. 그러므로 나의 병은 아마도 치유가 불가능할 듯싶다.” 하였는데, 며칠 후에 과연 사안석이 죽었다 한다. 여기에서 사안석의 꿈이 맞았다고 한 말은 아계가 71세 되던 기유년(己酉年)에 세상을 떠났다는 것과 결부하여 말한 것이다. 《太平御覽 卷774 引幽明錄》 《晉書 卷79 謝安列傳》
[주D-006]천향(天香) : 궁중(宮中)에서 사용하는 훈향(薰香)을 말하는데 어향(御鄕)이라고도 한다. 당 나라 피일휴(皮日休)의 시(詩)에 “조복은 천향 속에 있네”와 당 나라 황도(黃滔)의 시에 “금 장식 붉은 인끈 천향을 띠었네” 등의 구절이 있다.
 
아계 이상국 연보 부록
 제문(祭文)
만력(萬曆) 37년 기유(己酉) 10월 기유삭(己酉朔) 3일 신해(辛亥)에 보국숭록대부 해평부원군(海平府院君) 윤근수(尹根壽), 보국숭록대부 당흥부원군(唐興府院君) 홍진(洪進), 보국숭록대부 연릉부원군(延陵府院君) 이호민(李好閔), 숭정대부 무성군(茂城君) 겸 판의금부사 윤형(尹泂), 숭헌대부 순녕군(順寧君) 이경검(李景儉)이 삼가 아성부원군 이공의 영전에 고하다.

혼령이시여 / 唯靈
산천이라면 모인 정기요 / 山川間氣
구슬이라면 발하는 빛이로소이다 / 圭璧餘輝
좋은 문장과 신기한 필력으로 / 麗藻神筆
어린 나이에 명성을 드날렸지요 / 未齕聲飛
약관의 나이에 급제하여 / 弱冠登第
높은 벼슬을 두루 역임하여 / 歷職靑瑣
이조와 병조를 거쳤고 / 天曹夏官
옥당과 금마에도 있었지요 / 玉堂金馬
동호에서 휴가도 받았고 / 賜暇東湖
중서성의 청선에도 들었지요 / 淸選中書
성대한 관작에 승진에 승진을 / 茂爵陞階
빠르지도 않고 느리지도 않았지요 / 匪疾匪徐
후설직도 아경도 역임하고서 / 喉舌亞卿
사조의 장관으로 진출하였더이다 / 進長四曹
문형으로 명예를 독차지하더니 / 文衡擅譽
이공이 되어서는 더욱 높았더이다 / 貳公彌高
태사를 이미 역임하고 보니 / 旣踐台司
겸손은 더욱 극에 달하였지요 / 謙退愈劇
개부에 짝할 만한 공이기에 / 疇功開府
금석에 새겼더이다 / 勒之金石
옛날 서울을 떠날 때 / 昔在去邠
백성들이 간혹 헐뜯는 말을 하여 / 民或訛言
일종의 견책을 받았기로 / 尺一賜譴
해변에서 유배생활도 하였지요 / 海曲啣恩
국가가 중흥의 운을 만나자 / 家國中興
총뢰가 함께 이르렀더이다 / 寵賚咸逮
공이 돌아와 정승이 되었으나 / 公還入相
병 때문에 퇴직을 요구하였지요 / 以疾求退
강호로 돌아가서 / 歸老江湖
남은 여생을 즐기자니 / 以樂餘年
정축은 수고로움을 느끼지 않는 법 / 鼎軸不勞
자연 속의 풍월 가이없더이다 / 風月無邊
아들도 있고 손자도 있어 / 有子有孫
대성엘 잇따라 들어갔고 / 接武臺省
옥윤이 있어서 / 亦有玉潤
재차 은정을 맡았지요 / 再調殷鼎
지위는 대감의 지위 / 位則上台
칠순을 넘어 장수도 하고 / 遐壽踰七
남들이 곱게 칭한 바라 / 衆所艶稱
공과 짝할 사람이 없더이다 / 人莫之匹
검소한 덕과 문장이 / 儉德文章
천추만대에 밝게 빛나리 / 炳烺千世
대화를 보고 눈을 감으시니 / 觀化瞑目
영원히 가신 것 부끄럽지 않으리 / 不愧長逝
저희들은 / 等
외람되이 동맹에 의탁하여 / 猥托同盟
뒷자리를 얻어서 / 得忝後塵
바야흐로 치작을 높이려는데 / 方尊齒爵
갑자기 위인을 잃었으니 / 遽失偉人
운대의 옛 자취가 / 雲臺舊迹
이제는 한바탕 꿈결 같나이다 / 已如一夢
생사의 길이 영원히 다르니 / 永隔存沒
침통한 마음을 어찌 가누리 / 曷勝沈痛
아름다운 난초 향기로운 술로 / 畹蘭芳醑
감히 하찮은 정성을 올립니다 / 敢將微忱
공이 균천에 계시다면 / 公在勻天
한 말씀 들려주시지요 / 庶賜一語
아, 슬프옵니다 / 嗚呼哀哉
흠향하소서 / 尙饗

[주D-001]개부(開府) : 권위 있는 개부의 관원을 지칭하는 말로 쓰인다. 당 나라 두보(杜甫)가 지은 ‘봄날에 이백을 생각하다’라는 시에, “청신(淸新)이라면 유개부(庾開府)요 준일(俊逸)이라면 포참군(鮑參軍)이다.” 하였다.
[주D-002]정축(鼎軸) : 정(鼎)은 종묘(宗廟)의 제례(祭禮)에 쓰이는 귀중한 도구이므로 나라의 중책을 맡은 재신(宰臣)에 비유하고, 축(軸)은 수레바퀴의 한가운데 있는 구멍에 끼우는 긴 나무 또는 쇠를 말하는데 역시 중요한 지위를 말한다. 따라서 정축은 일반적으로 재상(宰相)을 지칭하는 말로 사용한다.
[주D-003]옥윤(玉潤) : 진(晉) 나라 때 위개(衛玠)가 총각(總角) 머리에 양(羊)이 끄는 수레를 타고 시내로 들어가니 보는 사람마다 옥인(玉人)이라고 하였다. 또 위개의 처부(妻父) 악광(樂廣)은 해내(海內)에서 중망(重望)을 받았다. 그래서 사람들이 “장인은 빙청(氷淸)이요 사위는 옥윤(玉潤)이다.”하였는데, 이후부터 옥윤이라는 말이 사위에 대한 미칭(美稱)으로 쓰이게 되었다. 《晉書 卷36 衛玠列傳》
[주D-004]은정(殷鼎) : 구정(九鼎)이라고도 한다. 맨 처음 하(夏) 나라 우(禹)가 아홉 개의 솥을 만들어 구주(九州)의 정벌을 상징적으로 표시하였던 것인데, 그 후로 국가의 정권을 나타내는 말로 쓰이곤 하였다.
[주D-005]동맹(同盟) : 나라 대 나라, 사람 대 사람이 체결하는 맹약을 지칭하는 말로 쓰이는 것이 일반적이나, 여기에서는 친밀한 벗이나 같은 당파를 일컫는 말로 인용하여 공과 함께 조정에서 벼슬살이했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표현한 말이다.
 
아계 이상국 연보 부록
 제문(祭文)
만력(萬曆) 37년 기유(己酉) 10월 기유삭(己酉朔) 4일 임자(壬子)에 보국숭록대부 해평부원군 윤근수(尹根壽), 숭록대부 완산군 이축(李軸), 숭정대부 행 지중추부사 이노(李輅), 정헌대부 지중추부사 윤승길(尹承吉)이 삼가 맑은 술과 조촐한 안주로 아성부원군 이공의 영전에 삼가 제(祭)를 올리다.

혼령이시여 / 惟靈
총명이 번득이는 자태에다 / 英發其姿
후중한 기질까지 지니셨더이다 / 厚重其質
기이한 문장 난봉이 나는 듯 / 鸞鳳奇文
빼어난 기골 산악이 버틴 듯 / 山嶽秀骨
하루에 천 리를 가자면 / 一日千里
망아지에겐 무리련만 / 作駒汗血
못물에 글씨 공부 먹으로 다 하다니 / 臨池盡墨
이갈이할 일곱 살 나이에 / 齒毁之七
강하의 황동마냥 / 江夏黃童
무수한 칭찬을 받으셨더이다 / 其譽藹蔚
약관의 나이에 내놓은 대책 / 弱冠射策
거친 바다에 파도가 일 듯 / 鯤海波濶
일찍이 난파에 올라서 / 早登鑾坡
입에는 계설을 머금었지요 / 口含雞舌
봉산에 오르기도 하고 / 翔于蓬山
금밀의 자리에도 오르셨지요 / 騫于禁密
이조의 관원이 되어서는 / 笠轂天官
낭서의 선발도 잘하셨습니다 / 郞署坌拂
미원과 백부에 계실 때에는 / 薇垣栢府
풍상같이 엄한 기운 붓을 감돌더이다 / 風霜繞筆
봉지에 청운이 감돌 듯이 / 鳳池靑雲
예원에는 밝은 해처럼 / 藝苑白日
왕을 위한 법을 맡고서는 / 掌王之制
가슴을 도려내는 듯 사람을 놀라게 하고 / 搯擢劌鉥
후설의 직임이다 / 喉舌之任
아경의 작질이다 / 亞卿之秩
나가도 적절하고 들어와도 적절하고 / 出入俱宜
처음도 신중하고 끝마침도 신중하고 / 終始密勿
치관의 어른이 되어서는 / 長于豸冠
엄격한 말을 가까이하셨지요 / 危言造膝
네 번이나 상서를 맡았거니 / 四踐尙書
이부에선 어느 누가 같으리 / 吏部誰埒
이경으로 있으며 교화를 넓혔고 / 貳卿弘化
대제학이 되어 문필을 담당하였습니다 / 文衡是斡
전후하여 전형을 담당하시니 / 前後秉銓
세상에선 선발을 잘 한다 일컬었지요 / 世稱甄拔
기린각에다 책훈을 올리니 / 策勳麟閣
훌륭한 문벌이로이다 / 有閥有閱
정축의 지위에 오르고 보니 / 進諸鼎軸
양필의 꿈이 맞았더이다 / 協夢良弼
임금의 인정을 그와 같이 얻었는데 / 得君如彼
그 공렬을 감히 말로 할 수 있으리까 / 敢言功烈
봉록과 지위는 갈수록 높았건마는 / 祿位愈高
몸가짐은 갈수록 더욱 조심하셨지요 / 操履愈屈
서퇴에는 완곡하고 / 婉于舒退
말은 마치 제대로 못 하듯이 / 言若不出
문장으로 몸을 이루었기에 / 文章致身
성대한 경술을 지니셨지요 / 蔚有經術
크고 평이한 시대의 재상으로 / 大平宰相
성명의 하자는 없었지요 / 聲名罔缺
말기적인 시운을 만나서 / 百六之會
나라의 운명이 바람 앞에 등불이라 / 國命阻絶
서울을 떠나게 된 것은 / 去邠之行
창졸간에 이루어진 것이었지요 / 出於倉卒
수상직에서 책면이라고 / 策免首相
공이 비로소 옥결을 받았지요 / 公始受玦
하늘이 돌고 땅이 구를 일이라 / 天旋地轉
대군이 중국으로 가시다니 / 鳳駕金闕
임금님 염려하시고 / 聖主垂念
예전 신하들을 빨리 부르셨지요 / 舊臣斯适
귀양살이 몇 해런가 / 瘴煙幾載
하루아침에 조복이어라 / 一朝簪笏
이윽고 상부에 들어가서 / 俄入相府
백관의 으뜸인 정승이 되셨습니다 / 百僚之崒
또한 일 때문에 면직되고서 / 又以事免
요양으로 잠시 편한 날을 보내셨지요 / 養安暫逸
훈로기신을 버려두지 않으시고 / 不遺勳耆
조정은 반열에 나오기를 청하였더이다 / 朝請就列
치장을 하사하시니 / 齒杖之賜
일흔을 넘어 여든을 바랐더이다 / 逾七望八
오십 년이란 세월 동안 / 五十餘年
명망이 한결같았더이다 / 名猶一切
연세와 관작이 다 높으시니 / 壽與爵尊
곤궁이 아니고 현달이로소이다 / 匪窮也達
문장으로 늙으심에 / 老於詞翰
그 기운 다하지 않으시고 / 厥氣不竭
고령의 나이에도 지혜는 여전터니 / 智而耄及
이런 병이 있을 줄이야 / 乃有斯疾
세월은 흘러흘러 증세가 악화되니 / 荏苒沈綿
이수란 놈을 제거하기 어려웠구려 / 二竪難刮
사안석이 꿈을 꾸었다지요 / 安石之夢
유년이 되면 죽는다고 / 及酉云沒
목가가 재앙을 예고하더니 / 木稼告灾
하늘이 어찌 갑자기 앗아가느뇨 / 天胡遽奪
전형이 어디에 있단 말입니까 / 典刑何有
노성을 이미 잃었는데 / 老成已失
깊은 궁궐 속 임금님 애통해하시고 / 九重軫痛
조정의 신하들 탄식하오이다 / 在朝嗟咄
아, 슬프옵니다 / 嗚呼哀哉
집안을 꾸려갈 아들이 있어 / 克家有子
공로와 명성 드높기도 하고 / 功名以蔚
대를 이어갈 손자까지 있어 / 傳世有孫
꽃다운 이름 사방에 발흥이요 / 蜚英也勃
게다가 옥윤까지 있어서 / 況有玉潤
재차 정승을 하였습니다 / 再和鼎實
한 집안의 상귀함을 / 一家翔貴
옛날인들 누가 알력 있게 하리요 / 在古孰軋
이제는 눈을 감으리다 / 此可以瞑
만사가 번개처럼 스러지지요 / 萬事電滅
신후와 생전의 사적을 / 身後生前
사관은 빠뜨리지 않으리다 / 史不可軼
저희들은 / 等
나이로나 벼슬로나 / 以齒以官
공에게는 끝이로소이다 / 厠公之末
기로들의 모임도 / 耆老之會
이제부턴 쓸쓸할 겁니다 / 自今蕭瑟
계분을 생각하니 / 追思契分
음용은 방불하구료 / 音容髣髴
혼매하지 않으시거들랑 / 不昧者存
이 제수를 살피소서 / 鑒此修設
아, 슬프옵니다 / 嗚呼哀哉
흠향하소서 / 尙饗

[주D-001]못몰에 …… 다 하다니 : 글씨 공부를 열심히 했다는 말로, “물이 있는 못에 가서 수면에다 대고 글씨 연습을 하다 보니 못물이 온통 먹물로 가득하였다.[臨池學書池水盡墨]”라는 말을 축약하여 인용한 것이다. 《晉書 卷36 衛瓘列傳》
[주D-002]강하(江夏)의 황동(黃童) : 황동은 동한(東漢) 시대 강하(江夏) 안륙(安陸) 땅 사람으로, 이름은 향(香)이며 자는 문강(文彊)이다. 어려서부터 많은 책을 읽어 글에 능하자, 당시 사람들이 “천하에 둘도 없는 강하의 황동이다.”라고 칭찬하였다. 초기에 낭중(郞中)이 되었을 때 동관(東觀)으로 불려가 관(官)에서 소장하고 있는 많은 전적(典籍)을 읽은 바 있고 그 후 벼슬이 상서(尙書)에 이르렀다. 뒤에는 황동이 사관(史官)을 지칭하는 말로 쓰이기도 하였다. 여기에서 인용한 것은 아계가 황동처럼 어릴 때부터 칭찬을 받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後漢書 卷80上 文苑列傳》
[주D-003]난파(鑾坡) : 당(唐) 나라 덕종(德宗) 당시에 학사원(學士院)을 금난파(金鑾坡)라는 곳으로 옮기고 나서부터 난파를 한림원(翰林院)의 별칭으로 사용하였다. 《石林燕語 卷5》
[주D-004]계설(鷄舌) : 향(香)의 이름으로, 옛날에 상서(尙書)가 임금께 일을 주달할 때 입에다 이 향을 머금고서 아룀으로써 입내가 나지 않도록 하였다. 한(漢) 나라 때 응소(應劭)가 지은 《한관의(漢官儀)》에 “상서랑(尙書郞)이 계설향(鷄舌香)을 입에 머금고서 일을 아뢰었다.” 하였다.
[주D-005]치관(豸冠) : 해치관(獬豸冠)이라고도 한다. 어사(御史)나 법을 집행하는 관리가 쓰는 관이므로 그들을 직접 지칭하기도 한다. 해치는 시비곡직(是非曲直)을 분간할 줄 아는 신양(神羊)인데, 초왕(楚王)이 맨 처음 이 동물을 잡아서 관(冠)으로 만들었다 한다. 《後漢書 輿服志下》
[주D-006]기린각(麒麟閣) : 한(漢) 나라 때 미앙궁(未央宮) 내에 있던 누각의 이름으로, 선제(宣帝) 때 곽광(霍光) 등 11명의 공신의 초상을 그려서 이곳에 걸어 둠으로써 그들의 공적을 기렸다 한다.
[주D-007]정축(鼎軸) : 정(鼎)은 종묘(宗廟)의 제례(祭禮)에 쓰이는 귀중한 도구이므로 나라의 중책을 맡은 재신(宰臣)에 비유하고, 축(軸)은 수레바퀴의 한가운데 있는 구멍에 끼우는 긴 나무 또는 쇠를 말하는데 역시 중요한 지위를 말한다. 따라서 정축은 일반적으로 재상(宰相)을 지칭하는 말로 사용한다.
[주D-008]양필(良弼)의 꿈 : 양필은 훌륭한 재상을 말하며, 꿈은 임금이 태평성대를 이루기 위하여 훌륭한 보필자를 찾던 중 직접 꾼 것을 말한다. 《서경(書經)》 열명편(說命篇) 상(上)에, “꿈에 상제(上帝)가 나에게 양필(良弼)을 주셨으니, 내가 할 말을 대신해 줄 것이다.”하였다.
[주D-009]서울을 …… 것은 : 공의 나이 54세 되던 임진년 4월에 왜구가 쳐들어오자, 공이 다급한 사정을 중국에 알리기 쉬운 서쪽으로 피난을 가자고 주청한 뒤에 공이 묘사(廟社)의 신주(神主)를 모시고 선조(宣祖)를 호종(扈從)하여 5월 1일에 송도(松都)에 도착하고 평양(平壤)을 거쳐 의주(義州)까지 갔던 일을 말한다.
[주D-010]이수(二竪) : 두 개의 병마(病魔)라는 뜻으로 치료가 불가능한 중병을 일컫는다. 춘추 시대 진(晉) 나라 경공(景公)이 병이 들었는데 꿈속에서 두 병마가 문답을 하다가 고황(膏肓) 사이에 숨기로 하겠다는 내용을 들었다. 그 뒤에 의원이 와서 진맥을 하고는 “질병이 이수자(二竪子)가 되어 고황 사이에 숨었기 때문에 치료가 불가능하다.”고 한 데서 유래하였다. 《春秋左傳 成公10年》
[주D-011]사안석이 꿈을 꾸었다지요 : 진(晉) 나라 때 사안석(謝安石)이 환온(桓溫)의 집정기(執政期)에, 문든 환온의 수레를 타고 16리를 가서 백계(白鷄)를 보고 멈추는 꿈을 꾸었는데, 당시에 이 꿈을 풀이하는 자가 없었다. 그 후 환온이 죽고 사안석이 대신 재상이 되어 16년이 지난 뒤에 병을 얻었다. 그제서야 사안석이 깨닫고 말하기를, “환온의 수레를 탄 것은 환온 대신 내가 재상이 된다는 뜻이고, 16리를 간 것은 16년동안 재상을 역임한다는 뜻이며, 백계를 보고 멈춘 것은 금년 태세(太歲)가 유년(酉年)이니 유(酉)는 곧 계(鷄)가 된다. 그러므로 나의 병은 아마도 치유가 불가능할 듯싶다.” 하였는데, 며칠 후에 과연 사안석이 죽었다 한다. 여기에서 사안석의 꿈이 맞았다고 한 말은 아계가 71세 되던 기유년(己酉年)에 세상을 떠났다는 것과 결부하여 말한 것이다. 《太平御覽 卷774 引幽明錄》 《晉書 卷79 謝安列傳》
[주D-012]목가(木稼) : 목개(木介)라고도 한다. 극심한 추위로 나뭇가지가 얼음으로 뒤덮이는 것을 말하는데 이는 대신이나 현인의 죽음을 예고하는 재변이라 한다. 송 나라 왕안석(王安石)이 지은 한기(韓琦)의 만시(輓詩)에, “나무 고드름을 보고 달관이 겁을 내더라니 산이 무너진 양 지금은 철인이 죽었구려.” 하였다. 《石林詩話 韓琦挽詞》
[주D-013]옥윤(玉潤) : 진(晉) 나라 때 위개(衛玠)가 총각(總角) 머리에 양(羊)이 끄는 수레를 타고 시내로 들어가니 보는 사람마다 옥인(玉人)이라고 하였다. 또 위개의 처부(妻父) 악광(樂廣)은 해내(海內)에서 중망(重望)을 받았다. 그래서 사람들이 “장인은 빙청(氷淸)이요 사위는 옥윤(玉潤)이다.” 하였는데, 이후부터 옥윤이라는 말이 사위에 대한 미칭(美稱)으로 쓰이게 되었다. 《晉書 卷36 衛玠列傳》
 
 아계 이상국 연보 부록
 제문(祭文)
기유년(己酉年) 10월 기유삭(己酉朔) 5일 계축(癸丑)에 첨총(忝寵) 동지중추부사 신식(申湜), 행 평해군수(平海郡守) 신설(申渫) 등이 삼가 술과 과일로 제물을 마련하여 아계 이상국의 영전에 공경히 제를 올리다.

아, 슬프옵니다 / 嗚呼哀哉
공의 아름다운 덕과 아름다운 재주 / 惟公之德之才之美
융성한 훈업 / 勳業之隆
심오한 문장 / 文章之邃
구김 없이 활달한 그 기상 / 磊磊落落
나라엔 미더운 사록(史錄)이 있는 터 / 國有信史
어찌 좁은 안목으로 / 何容管窺
한두 마딘들 군말을 덧붙이리까 / 妄贅一二
저희 시생들에게는 / 顧惟生等
인척 관계이기도 하려니와 / 忝在姻屬
쇠퇴한 가문의 장공인데다 / 衰門仗公
교악과 같을 뿐이 아니었습니다 / 不啻喬嶽
이젠 공이 떠나셨으니 / 自公之逝
누구를 따르며 누구를 모범으로 삼지요 / 誰因誰極
공으로나 사로나 슬픈 마음 / 公私慟切
오정이 작열하오이다 / 五情如灼
약간의 제수에 정성을 담아서 / 薄奠將忱
만사로 슬픈 마음 풀어보려니 / 辭以紓悲
눈물이 말을 따라 흐릅니다 / 淚隨言瀉
아시는지 모르시는지 / 知也不知
흠향하시라 / 尙饗

 

아계 이상국 연보 부록
 만사(挽詞)
만사(挽詞) [이노(李輅)]


규성석목을 비추어 아름다운 시기를 만드니 / 奎星析木屬休期
일곱 살 어린아이가 명성이 자자했다네 / 藉藉聲名七歲兒
청렴 검소 몸에 간직하니 원수까지 감복하고 / 淸儉在身讎亦服
문장을 자식에게 전한 이 예부터 드물었네 / 文章傳子古猶稀
시귀와 같은 정책은 세 조정의 원로였고 / 蓍龜定策三朝老
주석과 같은 국가 경영 사해가 알았네 / 柱石經邦四海知
위두의 연대를 지금 다시 보겠으니 / 韋杜聯台今復見
인간의 오복이 여기에 모였어라 / 人間五福聚於斯
판부사(判府事) 이노(李輅)


 

[주D-001]규성(奎星) : 이십팔수(二十八宿) 중의 하나이다. 《효경(孝經)》 원신계(援神契)에 “규성은 문장(文章)을 주관한다.” 하였다.
[주D-002]석목(析木) : 별자리 이름이다. 이십팔수 중 기(箕), 두(斗)에 해당하고, 황도십이궁(黃道十二宮) 중 인마궁(人馬宮)에 해당하며, 십이지(十二支)의 인(寅)에 해당한다. 옛날 중국에서는 국가의 위치를 별들의 방위에 따라 배분하여 불렀는데, 우리나라와 중국 북경이 여기에 속한다 하여 이 지역을 석목지위(析木之位)라 불렀다. 《晉書 卷11 天文志上》
[주D-003]위두(韋杜) : 당 나라 때 장안성 남쪽에 위곡(韋曲)과 두곡(杜曲)이 있었는데, 그 당시의 망족(望族)이었던 위씨(韋氏)와 두씨(杜氏)가 이곳에서 대대로 살았으므로 세상에서는 이들을 위두(韋杜)라고 불렀다. 이곳은 주변 경관이 아름다워서 당시에 유람하기 좋은 곳으로 알려지기도 하였다.

아계 이상국 연보 부록
 만사(挽詞)
만사(挽詞) [김신국(金藎國)]


삼태성의 정기가 침침하여 서울이 어둡구나 / 台宿精沈日下昏
조정에는 다시 전형이 없어라 / 朝廷不復典刑存
인간의 복록으론 관과 훈과 수를 누렸고 / 人間福祿官勳壽
가세의 문장으론 조와 자와 손이 이었네 / 家世文章祖子孫
바닷가 서풍에 하얀 장막이 날리고 / 海右西風飛素帟
종남산 가을 풀에 붉은 문이 잠겼어라 / 終南秋草鎖朱門
다른 해에 숙예처럼 무덤을 찾아갔을 때 / 他年叔譽觀原處
그대 아니면 누가 정론을 잡아 돌아가리 / 微子誰歸有定論
승지(承旨) 김신국(金藎國)


 

[주D-001]숙예(叔譽)처럼 …… 때 : 조문자(趙文子)가 숙예와 함께 진(晉) 나라 경대부의 무덤이 있는 구원(九原)을 가서 보고 “죽은 사람을 만일 되살릴 수 있다면 내가 누구와 함께 가는 것이 좋겠는가?”라고 숙예에게 물은 일이 있고, 그 주에 “숙예(叔譽)는 숙향(叔向)이다.” 하였다. 《禮記 檀弓下》

 

아계 이상국 연보 부록
 만사(挽詞)
만사(挽詞) [김응성(金應成)]


일찍부터 신동이란 명예가 두루 미치니 / 早洽神童譽
사람들은 보기 드문 인재라고 일컬었네 / 人稱絶世才
필력은 동해의 수준을 넘었고 / 筆躋東海室
문장은 성당의 문체를 탈태하였네 / 文奪盛唐胎
사업은 은정을 조절하였으니 / 事業調殷鼎
훈명은 한대에다 새기겠네 / 勳名勒漢臺
저 푸른 하늘을 어찌 원망하지 않으랴 / 彼蒼胡不憖
촉 나라 부인들처럼 복머리하고 마냥 슬퍼하노라 / 蜀髽謾相哀
면천 군수(沔川郡守) 김응성(金應成)


 

[주D-001]동해(東海) : 이 책 138쪽 가정(嘉靖) 20년 조에 보면, 동해옹(東海翁)의 초서(草書)를 아계(鵝溪)의 부친이 매우 아꼈고 아계는 아주 어렸을 때부터 그 글씨를 보아 오면서 자랐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동해옹(東海翁)의 신분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 수가 없다.
[주D-002]은정(殷鼎) : 구정(九鼎)이라고도 한다. 맨 처음 하(夏) 나라 우(禹)가 아홉 개의 솥을 만들어 구주(九州)의 정벌을 상징적으로 표시하였던 것인데, 그 후로 국가의 정권을 나타내는 말로 쓰이곤 하였다.
[주D-003]촉 나라 …… 복머리하고 : 《의례(儀禮)》 사상례(士喪禮)에 “상중(喪中)에는 부인이 실내에서 복머리를 한다.” 하였고, 《촉지(蜀志)》에는 “건흥(建興) 12년 8월에 제갈공명이 54세로 전쟁터에서 죽자, 촉 나라 부인들이 애도하는 뜻으로 상중에 하던 복머리를 하였다.”고 하였다.

 

 

아계 이상국 연보 부록
 만사(挽詞)
만사(挽詞) [정협(鄭協)]


선왕은 여태까지 훌륭한 정승만을 등용하셔서 / 先王終始登庸相
상국이 임금의 대우를 전적으로 받았지요 / 相國偏承任遇專
왕사의 문정에 훌륭한 자손이 많듯이 / 王謝門闌看豹蔚
위평의 집안에 청현직이 많듯이 / 韋平家世本蟬聯
소년이 기이타고 사람마다 말하고 / 少年奇異人爭道
절대적인 명성 능가할 이가 없었지요 / 絶代聲華衆莫先
귀신이 울고 놀랠 재주라서 뽑혔고 / 鬼泣神驚才調選
용호가 덮치는 듯한 필력을 전하였지요 / 龍拏虎攫筆精傳
문단의 모든 양반 자리를 양보하고 / 騷壇到底多回席
날아오르는 명로에 누가 선두를 달리랴 / 名路飛騰孰着鞭
기나무 잎으로 외를 싸듯 하면 응당 만나리 / 以杞包瓜應有隕
고기가 물을 얻는데 어찌 인연이 없을쏘냐 / 猶魚得水豈無緣
빈번한 예모는 삼접을 기울였고 / 便蕃禮貌傾三接
은총으로 발탁한 영예 움직이면 구천이었네 / 寵擢疏榮動九遷
인삼과 백출은 약롱으로 돌아가고 / 參朮登收歸藥籠
초야에서 뽑아다 꽃방석에 앉혔지요 / 草萊甄拔上花甎
청아는 전형을 가진 날에 모두 감화시켰고 / 菁莪化盡持衡日
난예는 정사를 맡던 해에 구분되었지요 / 蘭艾區分秉軸年
유신의 영수가 되어 장진을 계승하였고 / 領袖儒紳承獎進
진량의 세도에 선비를 길러냈지요 / 津梁世道仗陶甄
화려한 관함을 두루 역임하니 영화가 두려워지고 / 華銜歷遍榮爲懼
성은이 더욱 높으니 두려운 마음으로 권세를 피했지요 / 恩眷彌隆惕避權
감식은 행검의 뒤에도 능히 가졌고 / 鑑識能持行儉後
공명은 바로 거원의 앞에 있었지요 / 功名直在巨源前
심성은 선비에게 낮추어서 항상 자리를 매달아 두고 / 心誠下士恒懸榻
뜻은 영광을 사양하는 데 간절하여 누차 전문을 올렸지요 / 志切辭榮屢上箋
계옥으로 몇 번이나 성상의 마음을 돌렸던가 / 啓沃幾曾回睿鑑
벼슬은 이로부터 높은 데까지 역임하였지요 / 官聯從此躡台躔
조용한 계획 장기적인 대책이 있었고 / 從容婉畫存長筭
의논과 훌륭한 계획을 임금 앞에 다하였지요 / 諷議嘉猷盡細氈
기축년의 슬픈 옥사 어찌 구차하게 영합하리 / 己丑噫嗚寧苟合
임진년의 횡포에 배나 마음 졸였어라 / 壬辰橫潰倍憂煎
남쪽으로 귀양간 행색은 해기를 저촉했음이요 / 南壖行色駭機觸
서쪽 변방 놀라운 몽진은 늙은이 눈물을 매달았더이다 / 西塞驚塵老淚懸
임금님 의주 가서 멀리 바라보시더니 / 龍馭巡臨勞遠望
계서의 성한 은택으로 곧장 돌리셨네 / 雞書霈澤却回旋
뜬 이름 있건 말건 어찌 기뻐하고 슬퍼하랴 / 浮名榮落寧欣戚
관직이 좋다 마다 미련을 버렸어라 / 散秩優閑是棄捐
정충을 보호하여 처음엔 감금도 되었다가 / 調護精忠初點染
위험한 참소자를 마침내 만났더이다 / 危疑讒舌竟遭延
속마음은 태평스러운 시절을 미칠 수 없고 / 襟肝未及披堯日
산이 무너진 듯 들보가 꺾인 듯 지나친 슬픔이었지요 / 崩折悲深慟杞天
늙어서야 얼굴이 겨우 야위었더니 / 抵老容顔纔瘦損
때를 넘긴 노쇠한 병 갑자기 악화되었지요 / 經時衰疾遽沈綿
세월이 칠십이면 참으로 많다 하겠네 / 光陰七耋誠多矣
살고 죽는 삼생이여 모두가 아득하더이다 / 存沒三生儘杳然
백리해의 인성에 방아찧던 이 노랠 그치고 / 百里仁聲舂輟相
삼오에 끼친 사랑으로 시장 사람 점포를 비웠네 / 三吳遺愛市空廛
선인이 같은 시대에 함께 잘 지내시고 / 先人並世俱紆眷
만년에는 벼슬도 함께하고 어깨를 나란히 하였습니다 / 暮歲同升亦比肩
애써 지우의 감사를 보답하려 했는데 / 勠力擬酬知遇感
위태로운 몸은 결국 비방 속에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 危身終墮謗忒諞
당시의 화복은 비록 현격하였지만 / 當時禍福雖懸隔
다행스러운 것은 은혜로 죄명을 씻어 주신 것입니다 / 所幸恩波許洗湔
남 모르는 고통을 누가 기록하여 보려는지 / 隱痛未知誰看錄
미련스러운 난 아직도 생을 부지하고 있는 것이 부끄럽습니다 / 冥頑還愧尙生全
길이 변별을 기약하여 원로를 기다렸더니 / 長期辨別須元老
어찌 이 세상을 버리고 신선 되어 갈 줄 생각이나 했으리까 / 豈謂塵區隔上仙
피맺힌 마음을 길이 피력할 날이 없겠으니 / 襟血永無披瀉日
어쩌면 큰 붓을 얻어 제대로 적을 수 있으리까 / 筆尖安得借如椽
동지(同知) 정협(鄭協)


 

[주D-001]왕사(王謝)의 문정 : 왕(王)은 동진(東晉)의 왕도(王導)를 말하며, 사(謝)는 사안(謝安)의 후손을 말하는데, 그들의 가문에는 대대로 훌륭한 인재가 배출되어 명문거족(名門巨族)으로 전해 온다.
[주D-002]위평(韋平) : 서한(西漢) 시대의 위현(韋賢), 위현성(韋玄成)과 평당(平當), 평안(平晏) 부자를 아울러 지칭하는 말로 쓰인다. 이들 부자가 서로 계승하여 재상이 되었으므로 세상의 추중을 받았다. 《漢書 卷71 平當列傳》
[주D-003]기(杞)나무 …… 만나리 : 임금이 정성을 다하여 정당한 도리로 천하의 현인을 구하면 반드시 얻게 된다는 뜻이다. 《주역(周易)》구괘(姤卦)에, “구오(九五)는 기나무 잎으로 외(瓜)를 포장한 것과 같은 형상이니, 아름다움을 바탕으로 하여 정성을 다하면 하늘에서 떨어진 것처럼 반드시 현인을 얻게 될 것이다.” 하였다.
[주D-004]삼접(三接) : 하루에 세 번을 접견한다는 뜻으로 임금의 신하에 대한 극진한 예우를 지칭하는 말이다. 《주역(周易)》진괘(晉卦)에, “안정적으로 다스리는 제후에게 많은 말을 하사하고 하루에 세 번씩이나 접견한다.” 하였다.
[주D-005]구천(九遷) : 하루에 아홉 번을 옮긴다는 뜻으로 매우 빠르게 승진하는 것을 의미한다. 한(漢) 나라 초공(焦贛)이 지은 《역림(易林)》에 “한(漢) 나라 차천추(車千秋)가 하루에 아홉 번이나 그 관직을 옮겼다.” 하였다.
[주D-006]행검(行檢)의 …… 가졌고 : 배행검(裵行檢)의 자(字)는 수약(守約)이며, 강주(絳州) 문희(聞喜) 사람이다. 그는 음양(陰陽)과 산술(算術)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었으며, 사람을 알아보는 식감(識鑑)도 탁월하였다. 그가 사람을 한 번 보고 예견하면 모두 적중하여서 그가 선발한 정무정(程務挺), 장건욱(張虔勖) 등 10여 명은 모두 명장(名將)이 되었다. 자사(刺史)나 장군(將軍)이 된 자도 수십 명에 달한다. 여기에서 행검의 뒤에도 감식을 가졌다는 말은 배행검이 가졌던 그런 감식을 아계공도 가졌다는 뜻이다. 《舊唐書 卷84 裵行儉列傳》
[주D-007]거원(巨源)의 앞에 있었지요 : 거원은 산도(山濤)의 자(字)이다. 진(晉) 나라 사람인 그는 나이 40에 겨우 군주부(郡主簿)가 되었으나 뒤에 삼공의 지위까지 오르는 영광을 누렸으며, 79세로 세상을 떠나자, 황제가 조서를 내려 조복(朝服)과 전(錢), 포(布) 등을 포함한 많은 장사 지낼 물품을 하사하게 하였다. 그는 또 5형제의 아들을 두었는데 모두 훌륭하였다. 여기에서 공명이 거원의 앞에 있었다고 말한 것은 아계공(鵝溪公)의 공명이 산도보다 낫다는 뜻으로 쓴 것이다. 《晉書 卷43 山濤列傳》
[주D-008]기축년의 슬픈 옥사 : 정여립(鄭汝立)과 관련된 옥사를 말한다.
[주D-009]해기(駭機) : 돌연히 촉발한 노기(弩機)라는 뜻으로 갑자기 발생한 화난(禍難)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말이다. 《後漢書 卷71 皇甫嵩列傳》
[주D-010]계서(雞書) : 계모문서(雞毛文書)의 약어로, 급히 전달해야 하는 서신(書信)에다 닭의 깃을 꽂아서 보냄으로써 신속하게 전해야 함을 상징적으로 나타낸 것인데, 이것을 우격(羽檄)이라고도 한다. 《後漢書 卷1 光武帝紀》
[주D-011]삼생(三生) : 불교(佛敎)의 용어로 전생(前生), 금생(今生), 내생(來生)을 말한다.
[주D-012]백리해(百里奚)의 …… 그치고 : 백리해는 우(虞) 나라의 현신이었는데, 우 나라 임금을 버리고 진(秦) 나라로 가서 목공(穆公)을 섬김으로써 오고대부(五羖大夫)가 되었다. 조량(趙良)이 상앙(商鞅)에게 이르기를, “오고대부(五羖大夫)가 죽고 나자, 진(秦) 나라 백성들이 눈물을 흘렸고 방아를 찧던 자들이 절구질을 하지 않았다.” 하였다. 여기에서는 아계공을 백리해에 빗대어 말한 것이다 《史記 卷68 商君列傳》
[주D-013]삼오(三吳)에 …… 비웠네 : 삼오는 세 곳의 지명(地名)으로, 진(晉) 나라 때는 오흥(吳興), 오군(吳郡), 회계(會稽)를 말하고, 당(唐) 나라 때는 오흥(吳興), 오군(吳郡), 단양(丹陽)을 말하고, 송(宋) 나라 때는 소주(蘇州), 상주(常州), 호주(湖州)를 말한다. 《진서(晉書)》 손은전(孫恩傳)에, “천하에 군사가 일어나는 것을 보고 진(晉) 나라 국운이 다하였다고 판단하여 백성을 선동하였더니, 삼오 지방의 백성들이 많이 따라왔다.” 하였다. 삼오에 끼친 사랑이란 이것을 지적하여 말한 것인데, 아계공이 그렇다는 표현이다.

 

 

아계 이상국 연보 부록
 만사(挽詞)
만사(挽詞) [김수(金晬)]


여섯 살에 쓴 글씨가 필법도 기발하고 / 六歲能書筆法奇
시문의 원천은 드넓어서 당시에 빛났네 / 詞源浩浩耀當時
천조의 사업을 이제 누가 병행한다지 / 天曹事業今誰並
말로의 청빈함은 내가 스승으로 삼던 바라 / 末路淸貧我所師
인간사 다하니 내 일도 다하고 / 人事凋零吾事盡
가을바람에 떨어지고 새벽바람 불어불어 / 秋風搖落曉風吹
토정의 유범을 이제는 보기 어렵겠네 / 土亭遺範今難見
오직 하늘가에 밝은 달만 알리라 / 惟有天涯明月知
판부사(判府事) 김수(金晬)


 

 

아계 이상국 연보 부록
 만사(挽詞)
만사(挽詞) [김순명(金順命)]


풍채도 기골도 세상에 보기 드문 영걸 / 風骨凝然間世英
곤충과 초목까지도 죄다 그의 이름을 알았네 / 昆虫草木盡知名
한평생 이룬 훈업 세 조정에 성대했고 / 一生勳業三朝盛
일곱 살 문장이라니 사해가 놀라라 / 七歲文章四海驚
일찍부터 문기를 담당하는 것 하나만도 적은 것이 아닌데 / 早荷門基一非少
관복과 홀이 거듭 쌓이니 사람들이 다 영광으로 여겼네 / 積重袍笏衆皆榮
받은 은혜 오래지 않은데 기성 타고 가시니 / 恩霖未久騎箕逝
하늘은 상심만 더하는 성주의 정을 앗았구려 / 天奪增傷聖主情
참지(參知) 김순명(金順命)


 

[주D-001]기성 타고 가시니 : 세상을 떠난 것을 말한다. 조정(趙鼎)의 명정(銘旌)에 쓰기를 “몸은 기미(箕尾)를 타고 하늘로 돌아가고, 기운은 산하(山河)가 되어 본조(本朝)를 튼튼하게 하였네.” 하였다. 《宋史 卷三百六十 趙鼎列傳》

 

 

아계 이상국 연보 부록
 만사(挽詞)
만사(挽詞) [이호민(李好閔)]


목옹의 뒤로 문장이 으뜸인 사람 / 牧翁之後文章伯
용이 구담에서 일어났으니 대대로 장관이었네 / 龍起龜潭世聳觀
구조의 전형은 천하의 늙은이요 / 耇造典刑天下老
신동의 필력은 도가의 산이어라 / 神童筆力道家山
가이 있는 인사는 푸른 하늘에 다하고 / 有涯人事靑空盡
폐하지 않는 훈명은 푸른 비석에 새겼네 / 不廢勳名翠石刊
옛날의 문생이 지금은 백발노인 되었으니 / 舊日門生今白髮
호중에 문상하고 돌아올 길이 없어라 / 湖中無路送喪還
연릉부원군(延陵府院君) 이호민(李好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