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세 정랑공 휘 탁2/12세 휘 탁

최 직장(崔直長)의 묘갈명 병서(문성공파 12세손 휘 안)소윤공파

아베베1 2010. 7. 24. 11:40

택당선생 별집(澤堂先生別集) 제7권
 묘갈(墓碣)
최 직장(崔直長)의 묘갈명 병서


전주 최씨(全州崔氏)는 멀리 고려 때부터 유래하는데, 지금도 여전히 그곳에서 향족(鄕族)의 위치를 점하고 있다. 시조(始祖)인 시중(侍中) 최아(崔阿)가 최용봉(崔龍鳳)을 낳고 최용봉이 최을생(崔乙生)을 낳았는데, 모두 관위(官位)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다가 직학사(直學士) 최담(崔湛)과 소윤(少尹) 최득지(崔得之)를 거쳐 현감인 최자목(崔自睦)의 때에 이르러서 고부(古阜)로 거처를 옮겨 살게 되었다. 그 뒤에 상장군(上將軍) 최분(崔汾)과 군수 휘(諱) 명손(命孫)과 휘 희윤(希潤)과 휘 진하(鎭河)를 거쳐서, 휘 여호(汝浩)가 김약우(金若愚)의 딸인 강진 김씨(康津金氏)에게 장가들어 가정(嘉靖) 을사년(1545, 인종 1)에 공을 낳았다.
공의 휘는 안(安)이요, 자(字)는 모(某)이다. 공은 자질이 총명하였고 행동거지 또한 바르고 성실하였다. 전후에 걸쳐 어버이 상을 당했을 적에도 모두 여막(廬幕)을 짓고 살며 건강을 해칠 정도로 슬퍼하였고, 비갈(碑碣)을 세워 선인(先人)의 덕을 기리고 사우(祠宇)를 세워 돈독하게 제사 드리는 일에 대해서 집안이 빈궁하다는 이유로 조금도 게을리 한 적이 없었다.
그리고 아우인 최부(崔富), 최인(崔寅), 최용(崔容)과 더불어 40년 동안이나 동거하면서 의식(衣食)을 함께하는 가운데, 선(善)을 권면하고 잘못된 점을 경계하여 윤리(倫理)와 기강이 가지런해지게 하였다. 이는 대체로 효성과 우애에 대한 공의 정성이 천성적으로 뿌리를 내린 위에 예법에 통달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는데, 바로 그런 까닭에 사랑하면서도 외설스럽게 되지 않고 시간이 오래 흐르면 흐를수록 서로 공경할 수가 있었던 것이었다. 그래서 자제들이 받들어 일을 행할 때에도 마치 관부(官府)와 같은 엄숙한 분위기가 감돌았으므로, 고향 사람 모두가 존경하며 중히 여길 수밖에 없었는데, 설혹 가르침을 따르지 않는 자가 있다 하더라도 감히 침해하며 모욕하는 일은 하지 않았다.
공은 소싯적에 박사(博士)가 되기 위한 학업에 매진해 본 적도 있었으나 결실을 거두지 못한 채 담박한 경지를 지키면서 자신의 몸을 닦아 나갔는데, 세상에서는 이를 알아주는 이가 없었다. 그러다가 일찍이 왜란(倭亂)이 일어났을 때 고향 사람들의 앞장에 서서 군대에 대한 비용을 도와 준 공을 세워 선공감 직장(繕工監直長)의 직책을 상으로 제수받기에 이르렀다.
공은 부안 김씨(扶安金氏)에게 장가들었는데, 고려 문정공(文貞公)의 후예로 김효순(金孝純)의 딸이다. 2남을 낳았으니, 장남은 최경승(崔敬承)이고, 차남은 최경행(崔敬行)으로 참봉에 천거되었으나 출사(出仕)하지 않았다. 측실 소생으로 1남 2녀가 있으니, 아들은 최경직(崔敬直)이고, 사위는 정섬(鄭暹)과 이비응(李匪鷹)이다. 최경승은 4녀 1남을 두었으니, 아들은 최천급(崔天及)이고, 사위는 이해(李海)와 김지간(金地干)과 문홍망(文弘望)과 정동일(鄭東一)이다. 최경행은 2남 2녀를 두었으니, 아들은 최천용(崔天聳)과 최천통(崔天通)이고, 사위는 방명도(房明燾)이며, 다음은 아직 출가하지 않았다. 최천급은 아들 최유(崔裕)를 두었다. 그 밖에 내외손이 많은데 다 기재하지 못한다.
공은 만력(萬曆) 을묘년(1615, 광해군 7) 12월 19일에 죽었다. 묘지는 선영에 있는데, 군의 관아 동쪽 모곡(某谷) 묘위(卯位)의 혈(穴)에 묻혀 있다. 의인(宜人)은 공보다 31년 앞선 을해년(1575, 선조 8)에 죽어, 봉분만 달리한 채 같은 묘역에 묻혀 있다. 나는 일찍이 동향(同鄕)의 자제로 공의 행업(行業)에 대해서 상세히 들어 익히 알고 있었는데, 미처 가서 배우지는 못하였다. 이 때문에 공의 전형(典刑)을 추억하여 그 행적을 서술하고 나서 다음과 같이 명하는 바이다.

나라는 글만 화려하면 재질이 있다 하고 / 國尙詞華以爲材
선비는 청담(淸談)을 얘기하면 통달했다 일컫나니 / 士談名理以爲通
최공이 본성 지키려고 전원으로 돌아가서 / 宜乎崔公守拙田園
덕 감추고 살았던 것도 당연했다 하리로다 / 潛德以終者乎
하지만 자신의 한 몸에서 한집안으로 / 然自身而家
다시 향리까지 그 풍도(風度) 흠모하였나니 / 鄕里欽風
만약 공의 성품을 살펴본다면 / 揆厥所性
낮출 자 누구이며 높일 자 누구일까 / 孰卑孰隆
나의 이 비명(碑銘)은 결코 아첨 아니요 / 我銘非諛
공심(公心)에서 우러나온 정당한 평가로세 / 尙論之公


 

[주D-001]31년 …… 죽어 : 공이 죽은 을묘년(1615)보다 31년 앞선 해는 을축년(1565, 명종 20)인바, 기록상의 착오가 있었던 듯하다.
[주D-002]본성 …… 돌아가서 : 진(晉) 나라 도잠(陶潛)의 시에, “남쪽 들판 한끝을 개간하고서, 본성 지키려고 전원으로 돌아왔네.[開荒南野際 守拙歸田園]”라는 구절이 있다. 《陶淵明集 卷2 歸田園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