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세 정랑공 휘 탁2/12세 휘 탁

전주최공 문성공 12세손 휘 탁 국조방목

아베베1 2015. 2. 2. 16:32

 

 

 

 

 

 

 

 

 

 

 

 

 

 

 

 

 

 

 

 

 

 

 

 

 

 

 

 

 

 

 

 

 

 

 

 

 

 

 

 

 

 

 

 

 

 

 

 

 

 

 

 

 

 

 

 

 

 

 

 

 

 

 

 

 

 

 

 

 

 

 

 

 12대 조고 증 도승지  휘 탁

 

 전주최공 증 도승지 12세 휘  탁  영광군수 공조정량  

 전주최공 증 참판공 13세 휘 세영의 부친되시는 분이시다

 산소는 충남 공주시 탄천면 가척이 봉황산 자락에 위치하고 있다  

 

 

최탁(崔琢)

[문과] 인조(仁祖) 7년(1629) 기사(己巳) 별시(別試) 병과(丙科) 6위(12/25)

[인물요약]

[이력사항]

선발인원 25명
전력 생원(生員)
관직 병조정랑(兵曹正郞)
타과 선조(宣祖) 39년(1606) 병오(丙午) 식년시(式年試) 생원(生員) 3등(三等) 47위

[가족사항]

 
[부]  성명 : 최응하(崔應夏)
[조부]  성명 : 최희수(崔希壽)
[증조부]  성명 : 최언청(崔彦淸)
[외조부]  성명 : 윤경우(尹慶祐)
[처부]  성명 : 채충익(蔡忠益)

[출전]

『국조문과방목(國朝文科榜目)』(규장각한국학연구원[奎 106])

 

 

 

 

 

 

 

 

 

 

 

 

 

 

 

 



○ 上在慶德宮。停常參·經筵。
○ 明日有晝講。
○ 傳曰, 召對爲之。
○ 合啓, 拜陵事。措語見上 答曰, 不允。
○ 兵曹, 別試殿試規矩, 片箭三矢二巡一中, 騎芻一次一中。
○ 政院啓曰, 今番別試講經之時, 四館不能公明課錄, 以致外議紛紜, 請主掌官先罷後推, 同參四館, 竝爲推考, 何如? 答曰, 竝拿推。
○ 四館現告, 張熙載·南振演·李回寶·尹衡志·崔琢·申晌[申恦]·李一相·權坽·徐祥履·朴思誠朴鼎賢家日記

 

    

 

 

인조 19년 신사(1641, 숭정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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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월 30일(갑진) 맑음
좌목
 19-05-30[05] 정사가 있었다
정사가 있었다. 이비에, 판서 남이웅(南以雄)은 나왔고, 참판 이식(李植)은 나왔고, 참의 이기조(李基祚)는 병이고, 도승지 한형길(韓亨吉)은 나왔다. 병비에, 판서 심기원(沈器遠)은 병이고, 참판 이필영(李必榮)은 지방에 있고, 참의 이후원(李厚源)은 나왔고, 참지 이유성(李惟聖)은 병이고, 좌부승지 김육(金堉)은 나왔다.
유성증(兪省曾)을 승지로, 유경집(柳景緝)을 집의로, 박경원(朴慶元)을 진해 현감(鎭海縣監)으로, 유철(兪㯙)을 예천 군수(醴泉郡守)로, 정태제(鄭泰齊)를 이조 좌랑으로, 조경진(趙景禛)을 공조 참의로, 이행우(李行遇)를 부응교로, 유경창(柳慶昌)을 부수찬으로, 이홍연(李弘淵)을 직강으로, 정두경(鄭斗卿)을 예조 정랑으로, 이천기(李天基)를 지평으로, 최탁(崔琢)을 형조 정랑으로, 김육(金堉)을 우승지로, 이성신(李省身)을 좌부승지로, 유성증(兪省曾)을 우부승지로, 심지명(沈之溟)을 남병사 겸 북청부사(南兵使兼北靑府使)로 삼았다.
목성선(睦性善)을 호군으로, 이□□(李□□)을 부사직으로, 박의(朴漪)를 부사과로, 이임(李䄒)을 사정(司正)으로, 허한(許僩)ㆍ남선(南銑)을 부호군으로, 이후여(李厚輿)를 사맹(司猛)으로 삼았다

 

 

 

 

 인조 22년 갑신(1644, 순치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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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월 22일(병자) 맑음
좌목
 22-10-22[09] 정사가 있었다
정사가 있었다. 유철(兪㯙)을 승지로, 홍명일(洪命一)을 응교로, 민선(閔墡)을 낙안 군수(樂安郡守)로, 이이존(李以存)을 지평으로, 이두양(李斗陽)을 칠곡 부사(漆谷府使)로, 유백증(兪伯曾)을 부제학으로, 홍처량(洪處亮)을 사서로, 이시필(李時苾)을 용담 현령(龍潭縣令)으로, 임준백(任俊白)을 영동 현감(永同縣監)으로, 조칙(趙侙)을 의빈부 도사로, 이형익(李馨益)을 서부 참봉(西部參奉)으로, 윤유길(尹有吉)을 조지서 별제로, 이목(李楘)을 동지경연사로, 여이징(呂爾徵)을 대사성으로, 윤이지(尹履之)를 와서 제조(瓦署提調)로, 박서(朴遾)를 병조 참의로, 윤성(尹珹)을 예조 정랑으로, 한강(韓崗)을 예빈시 봉사로, 이덕배(李德培)를 수성 찰방(輸城察訪)으로, 최탁(崔琢)을 호조 좌랑으로, 이영현(李永賢)을 장례원 사평으로, 권집(權諿)을 삼도 해운 판관으로, 윤순지(尹順之)를 빙고 제조(氷庫提調)로, 성초객(成楚客)을 헌납으로, 김진(金振)을 이조 좌랑으로 삼았다.

 

 

 인조 22년 갑신(1644, 순치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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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월 3일(정해) 맑음

 

 

좌목

 

 

 22-11-03[05] 정사가 있었다
정사가 있었다. 이덕형(李德泂)을 예조 판서로, 송시열(宋時烈)을 지평으로, 정태화(鄭太和)를 상의원 제조로, 이시방(李時昉)을 형조 참판으로, 이종검(李從儉)을 경주 판관(慶州判官)으로, 최탁(崔琢)을 보령 현감(保寧縣監)으로, 홍무적(洪茂績)을 대사헌으로, 김시번(金始蕃)을 헌납으로, 최지위(崔地緯)를 감찰로, 이지화(李之華)를 김해 부사(金海府使)로, 이원규(李元圭)를 병조 좌랑으로, 송석윤(宋錫胤)을 영해 부사(寧海府使)로, 김익희(金益熙)를 사성으로, 이제형(李齊衡)을 전적으로, 심로(沈)를 수찬으로, 황윤후(黃胤後)를 원주 목사(原州牧使)로, 양만용(梁曼容)을 정언으로, 정척(鄭倜)을 온성 부사(穩城府使)로, 구인후(具仁垕)를 사복시 제조로, 김상복(金尙宓)을 판결사로, 임근(任慬)을 중부 주부(中部主簿)로, 김효성(金孝誠)을 공주 목사(公州牧使)로 삼았다.

 

 

 

 

 

인조 26년 무자(1648, 순치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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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월 17일(임오) 아침에 흐리고 저녁에 눈 옴
좌목
 26-02-17[03] 인동 부사 윤형 등이 하직하였다
인동 부사(仁同府使) 윤형(尹珩), 함양 군수(咸陽郡守) 이장영(李長英), 영광 군수(靈光郡守) 최탁(崔琢), 함창 현감(咸昌縣監) 이숙진(李淑鎭)이 하직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