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세 정랑공 휘 탁2/12세 휘 탁

전주최공 문성공 12세손 사정 휘 탁 (저의 12대조고)

아베베1 2013. 9. 12. 16:06

 

 

 

 

 

 

 

 

 

국역 국조인물고

최충성

[ 崔忠成 ]
  • 원본글 출처

    최충성의 집발(集跋)

  • 저자

    박세채(朴世采)

  • 이명

    : 필경(弼卿)
    : 산당(山堂)

  • 원전서지

    국조인물고 권40 사자(士子)

산당 서객(山堂書客) 최공(崔公)의 휘는 충성(忠成)이요, 자는 필경(弼卿)이며 완산부(完山府) 사람이다. 연촌 선생(烟村先生) 최덕지(崔德之)의 손자이고, 한훤당 선생(寒暄堂先生, 김굉필(金宏弼)) 김공(金公)의 문인이다.

공은 성화(成化)ㆍ홍치(弘治) 때를 당하여 호남의 광주(光州)에 거주하였다. 천성이 고결하고 티가 없었으며 오직 산당(山堂)에서 독서하는 것으로 즐거움을 삼았고 낮밤으로 이었다. 그러므로 스스로의 호(號)로 하였다. 어려서부터 배워 문장이 되었고, 제자 백가(諸子百家)의 글을 거치지 않은 것이 없었다. 붓을 대면 곧 수백 천언(數百千言)을 깊고 두텁게 마음대로 구사하였으며, 아울러 박사가(博士家)의 업(業)에 종사하였다. 서울에서 김 선생을 붙쫓게 되면서 비로소 배움의 대요(大要)를 듣게 되었고, 이적(李勣)ㆍ윤신(尹信)과 명성이 같았다. 이에 성정(性情)ㆍ이기(理氣)의 심오한 뜻에 마음을 기울여 더욱 인륜(人倫)을 밝히고 이단(異端)을 물리침을 위주로 하니, 한 때의 사우(士友)가 다투어 추앙하였다. 점필재(佔畢齋) 김 선생(金先生, 김종직(金宗直))이 일찍이 호남을 순안(巡按)할 때 공이 글을 올려 불무(佛巫)의 폐단을 강력히 말하고 서둘러 물리치기를 청하니 점필재 선생이 예(禮)를 더하여 대우하였다.

공은 산당에 노닌 지 오래되어 무릇 나라 안 삼각(三角)ㆍ백악(白岳)ㆍ천마(天磨)ㆍ성거(聖居)ㆍ서석(瑞石)ㆍ두류(頭流) 등 여러 명산을 모두 도보로 발섭(跋涉)하였는데, 그 자취가 두루 몇 차례, 혹 두 서너 번에 이르기까지 하였다. 이 때문에 풍병(風病)을 얻어 신해년(辛亥年, 1491년 성종 22년)에 이르러 더욱 위독해져 곧 졸(卒)하였다. 나이 34세였으니 애석한 일이다.

처사(處士) 추강(秋江) 남효온(南孝溫)이 공과 친했으므로 뒤에 사우명행록(師友名行錄)을 짓고 이에 공의 이름을 뒤에 넣었다. 그리고 영암(靈岩)의 사자(士子)들이 또 이른바 ‘존양사(存養祠)’에 공을 배향(配享)하니, 곧 연촌 선생(烟村先生) 단독으로 향사하는 곳이었다.

나는 일찍이 공의 유고(遺稿)가 아직 있다는 것을 듣고서 사람을 놓아 보자고 하였는데, 그런지 얼마 뒤 공의 후손 모(某)가 같은 일가 최방언(崔邦彦)씨를 인연해서 그 편차(編次)를 정리하고 그 끝의 발(跋)을 청하였다. 더구나 지금 병화(兵火)를 겪은 뒤라 점필재ㆍ한훤당 사제(師弟) 사이의 일이 거의 모두 없어져 공의 한 글자, 한 마디 말이 더욱 귀중하다. 이에 감히 사양치 않고 위와 같이 쓴다.

 

 

국역 국조인물고

최탁

[ 崔琢 ]

원본글 출처

최탁의 묘갈명(墓碣銘)

  • 저자

    송시열(宋時烈)

  • 이명

    : 사정(士精)

  • 원전서지

    국조인물고 권31 문관(文官)

  •  

     

    나의 종형 야은공(野隱公) 송시영(宋時榮)은 꼿꼿함을 지키며, 오직 최탁(崔琢)공 자(字) 사정(士精)과 사귀었다. 매양 관무(官務)의 여가에는 단정히 앉아 상대하며 종일 차마 떠나지 못했다. 야은공이 일찍이 말하기를, “사정은 그 재능과 품격ㆍ문벌(門閥)로 보아 명예 있는 지위를 넘보았다면 무슨 벼슬인들 해내지 못할까만 스스로 믿고 의심치 않으며 그 의지를 굽히지 않는다.”고 하였으니, 사람이 알아주는 바가 되지 않았음은 이러해서였으나 또한 이러함으로 해서 알아주는 이가 있었다. 그 후 공의 행적은 더욱 기구하여 퇴고(推敲)와 첨삭(添削)에 고심하며 어정거리다가 세상을 마쳤으며 야은공은 순절(殉節)하여 사망하였다. 아, 세상 사람은 끝내 공을 모르고 있으나 공을 아는 자는 오직 군자인(君子人)일 뿐이다. 어(語)에 이르기를, “그 사람을 알지 못하면 다만 그 벗을 보라.” 하였으니, 이는 실제의 말이다.

    공은 전주(全州) 사람이다. 상조(上祖) 문성공(文成公) 최아(崔阿)가 고려(高麗)에 벼슬하여 관작이 시중(侍中)에 이르렀다. 본조(本朝)의 최덕지(崔德之)는 맑은 명성과 곧은 도로써 권람(權擥)ㆍ한명회(韓明澮) 때를 맞이하여 낌새를 보고 늙음을 들어 물러났고, 증조 최언청(崔彦淸)은 벼슬이 봉사(奉事)요 어진 행실이 있었으며 여러 대가 한 집에 살았다. 조부 최희수(崔希壽)는 내리 일곱 고을을 맡았고 안동 판관(安東判官)이 되어 관장(官長)이 나이 적음을 보고 허리를 굽힐 수 없다 하여 돌아갔는데 세상에서 고고(孤高)하다 하였다. 아버지 최응화(崔應和)는 현감(縣監)을 지냈는데, 장자(長者)의 기풍이 있다고 사계(沙溪) 노선생(老先生)이 칭찬하였다. 어머니 윤씨(尹氏)는 사직(司直) 윤경우(尹慶祐)의 딸이다.

    공은 젊어서부터 농을 좋아하지 않았고 경사(經史)에 통달하였다. 나이 20세에 생원(生員)에 입격하였는데, 광해군(光海君) 때 혼란하자 과장(科場)을 사절하여 나아가려 아니하였고 동료들과 상소하여 이이첨(李爾瞻)의 간사함을 논하였다. 이어 문을 닫고 나가지 않은 지 10여 년이었는데, 인묘(仁廟)가 즉위하자 문과(文科)에 급제하였다. 동방(同榜)에 꺼리는 자가 있어 그 연유로 승문원(承文院)의 선발을 저지하였고 성균관(成均館) 학유(學諭)ㆍ박사(博士)를 지내면서 봉상시 봉사(奉常寺奉事)를 겸하였다. 혹 가주서(假注書)가 되었다가 형조 좌랑(刑曹佐郞)에 승진하였고, 춘추관 기사관(春秋館記事官)을 겸했다가 외직에 나가 황간 현감(黃澗縣監)이 되자, 조정의 관원들이 떠남을 애석히 여겼는데, 공이 말하기를, “평탄하고 험한 일을 가리지 않음은 신하의 직분이다.” 하였다.

    공의 나이 40세 때에 현감공(縣監公)이 몰하였다. 공은 모부인(母夫人)을 받들고 고을로 나아가 한 마음으로 봉공(奉公)하였으나, 상관에 아첨하지 않다가 마침내 파직되어 돌아왔다. 그 뒤 형조 정랑을 거쳐 인제 현감(麟蹄縣監)에 임명되었으나 어버이 병환으로 나아가지 못해 체직되었고 마침내 상(喪)을 당하였는데, 공은 이때 늙기 시작하였으나 복제(服制)의 수행에 게으름이 없었다. 복을 마치자 전적(典籍)ㆍ호조 좌랑을 거쳐 또 나가 보령 현감(保寧縣監)이 되었는데, 백성을 해하는 토호(土豪)를 형벌로 매를 쳐 죽였다가 이로 하여 파직되어 돌아왔다. 그러나 당로자(當路者)가 그 굳세고 과감함에 감복하여 곧바로 병조 정랑에 직배(直拜)하니, 대체로 청선(淸選)에 두려는 것이었으나 또 시기하는 자가 저지하였다. 영광(靈光)은 사람이 많고 업무가 많았으나 본래 암읍(巖邑, 산으로 둘러 싸인 고을)이라 일컬었는데, 공은 또 이에 차출되어 보내졌으나 얼마 아니되어 병으로 사양하고 돌아왔으며, 지난 일의 죄가 논해져 춘천(春川)에 유배되었다가 두어 달만에 풀리어 돌아왔다.

    임진년(壬辰年, 1652년 효종 3년) 정월 2일 졸하니 나이는 66세였다. 공은 어버이 섬김에 효성스러웠고 모부인을 모시게 한 종에게는 더 두터이 대우하였으며, 제사는 정결을 주로 하였다. 검소한 몸가짐으로 여유를 가질 수 있었고, 가족들은 크고 작은 일에 늘 부지런하고 힘을 다하여 자급자족하였다. 그러므로 남에게 구차스러운 일이 없었고 세상의 영리에 내닫는 자를 보면 자신이 더럽혀 질 것처럼 하였다.

    영인(令人) 채씨(蔡氏)는 선교랑(宣敎郞) 채충익(蔡忠益)의 딸이요, 고옥(古玉) 정작(鄭碏)공의 외손이다. 어려서부터 도서(圖書) 보기를 좋아하였는데, 고옥이 사랑하여 교육하며 말하기를, “네가 남자가 아닌 것이 한이다.” 하였다. 고옥이 몰(歿)하자 영인은 3년을 소식(蔬食)하며 끝까지 전(奠)을 올렸고 출가하게 되자 극히 부도(婦道)를 행하였으며, 제사에 더욱 삼갔고 시향(時享) 때에 더욱 정결히 하여 제물(祭物)에 조금이라도 흠이 있으면 종일 즐거워하지 않았다. 매양 새벽에 일어나 세수하고 빗질하고 인조 대왕(仁祖大王)의 행장(行狀)을 읽었고, 그 기일(忌日)을 당해서는 반드시 눈물을 흘렸으니 어찌 마음에 감동한 바가 있지 않고서이겠는가? 인조ㆍ효묘(孝廟)가 승하하자 오래도록 고기를 먹지 않았는데, 자녀들이 연로함을 들어 강권하면 말하기를, “여자는 유독 신자(臣子)가 아니란 말이냐?” 하였다. 만년에 우리말로 번역된 ≪여계(女誡)≫를 손수 써 자손에게 주어 길이 가훈(家訓)으로 삼게 하였다. 나이 78세에 졸(卒)하니 숭정(崇禎) 을사년(乙巳年, 1665년 현종 6년)이었고, 양주(楊州) 양정리(養正里)에 부장(祔葬)하였다.

    아들 최세영(崔世榮)은 음직(蔭職)으로 벼슬에 나아갔고, 다음 생원(生員) 최세장(崔世章)은 재능이 있었으나 나이가 짧았다. 손자에 최방언(崔邦彦)ㆍ최방신(崔邦藎)ㆍ최방현(崔邦顯)과 딸로 송이석(宋彛錫)ㆍ허평(許玶)의 처가 된 이는 맏이가 낳았고, 최방준(崔邦儁)ㆍ최방식(崔邦式)과 딸로 이중욱(李重郁)ㆍ김우화(金遇華)의 처가 된 이는 둘째가 낳았다. 증손은 모두 약간이다.

    내가 야은공(野隱公)을 따랐으므로 공을 안 지 오래이다. 병자년ㆍ정축년의 난 뒤에 나는 황간(黃澗)의 깊은 골짜기로 들어가 밤낮으로 붙쫓으며 세상의 변화를 말하고 의분(義奮)에 북받쳐 탄식하였는데, 하루는 벽에 쓴 글을 가리키며, “이는 선원(仙源, 김상용(金尙容)의 호) 상국(相國)이 의(義)를 택할 때의 말이다.” 하였다. 그 내용에 ‘날 저문 강 입구에 신의 힘 어쩔 수 없습니다.[日暮江頭 臣力無何]’라고 되어 있었다. 공은 눈물을 흘리며 말하기를, “인신(人臣)의 의리는 마땅히 이러해야 한다. 현재 천지는 뒤집혀 윤상(倫常)이 없어졌다. 우리들은 인간 세상에 스스로 설 수 없다.” 하였다. 이어 야은공에게 미쳐 말하기를, “당시에 자신을 지키는 것을 보고 그 수양(修養)이 있음을 알았다.” 하였다. 아, 공과 야은공은 참으로 세상에 드문 지기(知己)라 하겠다. 지금 40년이 지나 세상의 도의는 더욱 추락하여 상국의 사당(祠堂)에 오랑캐의 연호로 제를 올리게 되었으나 그 사람은 크게 한 때의 존중하는 바 되었으니, 공이 있었더라면 다시 무어라 하겠는가? 구원(九原)은 일으킬 수 없으니 아, 슬픈 일이다. 최방언은 학문과 덕행이 있는데 어버이 명으로 와서 나에게 명(銘)을 청하였다. 다음과 같이 명을 쓴다.

    저들은 빨리 달리는데 나는 중지하였으니, 그러므로 자신은 뒤에 있고 남은 앞섰네. 행적은 비록 곤궁하였으나 마음은 형통하였으니, 이점이 바로 현명함이라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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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역 국조인물고

    정작

    [ 鄭碏 ]
    • 원본글 출처

      정작의 묘표(墓表)

    • 저자

      박세채(朴世采)

    • 이명

      자 : 군경(君敬)
      호 : 고옥(古玉)

    • 원전서지

      국조인물고 권34 휴일(休逸)

    고옥 선생(古玉先生) 정공(鄭公, 정작(鄭碏))의 묘소가 양주(楊州) 치소(治所)의 동쪽 60리(里)쯤 되는 곳에 있다. 내가 일찍이 그 아래를 지나다가 배알(拜謁)하였는데, 선생의 고풍(高風)에 감탄하여 자리를 떠날 수가 없었다. 그로부터 한참 지난 뒤에 공의 외증손(外曾孫)인 최방언(崔邦彦)과 성지선(成至善) 두 군(君)이 내가 공을 대략이나마 알고 사모(思慕)한다고 여기고서 나에게 공의 비석에 새길 글을 부탁하였다. 나는 감히 감당할 수 없

    다고 사양하였으나, 가만히 생각하건대, 이제 공이 세상을 떠난 지가 점차 멀어지고 전배(前輩) 중에 생존한 사람이 없는데다가 나도 또한 몸이 몹시 노쇠해지어 마침내 감히 사양하지 못하였다.

    공(公)은 휘(諱)가 작(碏)이고, 자(字)는 군경(君敬)이며, 그 선대는 온양(溫陽) 사람으로, 고려(高麗) 때 상서(尙書)를 지낸 정보천(鄭普天)의 후예이다. 증조부[曾大夫] 정충기(鄭忠基)는 교리(校理)를 지냈고, 조부[大夫] 정탁(鄭鐸)은 헌납(獻納)을 지냈으며, 부(父) 정순붕(鄭順朋)은 일찍이 우의정(右議政)을 맡았었다. 모(母) 이씨(李氏)는 봉양수(鳳陽守) 이종남(李終南)의 딸인데, 가정(嘉靖) 12년(1533년 중종 28년) 6월 21일에 공을 낳았다.

    공은 타고난 성품이 차분하고 담박하여 욕심이 적었으며 항상 초연하게 진속(塵俗)을 벗어나려는 취향(趣向)이 있었다. 그러나 평생 동안 윤상(倫常)과 언행(言行)을 스스로 도리에 어긋나지 않게 살았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공을 공경하였다. 어렸을 때에 백씨(伯氏)인 북창 선생(北窓先生) 정염(鄭) 및 수암(守菴)
    박지화(朴枝華)를 따라 풍악 동천(楓岳洞天)에 들어가서 도가(道家)의 서적을 읽고 금단 수련(金丹修鍊)의 방법을 시험하였으며, 중년(中年)에 배필(配匹)을 여의고는 재취(再娶)하지 않고서 40년 동안이나 남녀의 욕념(欲念)을 끊었으므로, 사람들이 더욱 공을 고결하게 여기었다.

    그러나 공은 평소에 성음(聲音)과 시(詩)를 잘하였고 초서(草書)와 예서(隸書)에도 조예가 있었다. 중간에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였고, 의방(醫方)과 풍감(風鑑) 등의 여러 방술(方術)까지도 정통하였는데, 이따금 기이한 효험이 많았다. 조정에서 그 소문을 듣고 공을 동몽 교수(童蒙敎授) 겸 혜민서 교수(惠民署敎授)로 선발하였고, 이어 내자시 주부(內資寺主簿)로 승진하였으며, 임진년(壬辰年, 1592년 선조 25년)과 정유년(丁酉年, 1597년 선조 30년)의 왜란(倭亂) 뒤에는 해주 목장(海州牧場)의 감목관(監牧官)을 지냈다. 그러자 주위 사람들이 또 ‘공은 낮은 관직인데도 하찮게 여기지 않는 풍도(風度)가 있다’고 하였다.

    공은 교유 관계가 매우 넓었으되 일찍이 남의 과실(過失)에 대하여 논하지 않았다. 그중에서도 우계(牛溪) 성 선생(成先生, 성혼(成渾)), 동은(峒隱)
    이의건(李義健)과 가장 독실하게 좋아하고 유난히 흠모하였다. 만년에는 음주를 좋아하여 오로지 술을 마시는 것만을 일삼았는데, 술에 취하면 간혹 큰소리로 노래를 부르곤 하였다. 노래의 음조(音調)가 맑고 우렁찼으며, 끝까지 술 때문에 정신이 흐려지지 않았으니, 대체로 공이 술에 의탁하여 세상을 도피하려는 바가 있었다고 한다.

    만력(萬曆) 31년인 계묘년(癸卯年, 1603년 선조 36년) 7월 20일에 바닷가의 우거(寓居)하던 곳에서 병에 걸리지 않은 채로 세상을 떠났는데 향년은 71세였으니, 사람들이 그 일을 또 기이하게 여기었다. 아! 공이야말로 어질다고 하겠도다. 시고(詩稿) 1책이 있어 세상에 전해진다.

    공의 배필은 이씨(李氏)로, 용천군(龍川君) 이수한(李壽閑)의 딸인데, 또한 국성(國姓)이다. 아들은 없고 딸 하나만 낳았는데, 선교랑(宣敎郞) 채충익(蔡忠益)에게 시집가서 4남 3녀를 낳았다. 채충익의 아들 채형후(蔡亨後)는 군수(郡守)이고, 채영후(蔡榮後)는 현감(縣監)이며, 채정후(蔡鄭後)는 진사(進士)이고, 막내아들은 채홍후(蔡弘後)이다. 채정후라는 외손자는 공이 이름을 지어주었고 이어 공의 제사를 그에게 맡겼다고 한다. 이로 말미암아 공의 장지(葬地)가 금문리(金門里)의 채씨(蔡氏) 족산(族山) 옆에 있고, 부인 이씨의 묘소는 괘나리(掛蘿里)의 선영(先塋)에 있어 따로 장사를 지냈다. 공의 외후손은 모두 약간 명인데, 최방언(崔邦彦)과 성지선(成至善) 두 군(君)은 이미 힘을 합쳐서 공의 비석을 세우려고 하고 또 장차 전지를 사들여 해마다 공을 제사지내는 밑천으로 삼으려고 하니, 모두 가상한 일이다. 이 글을 고옥 선생(古玉先生) 정공(鄭公)의 묘기(墓記)로 삼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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