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석문 신도비 등/증 영의정 이몽량 신도비

우참찬(議政府右參贊) 증(贈) 영의정(領議政) 이공(李公)의 신도비(펌)

아베베1 2010. 8. 8. 21:35

 

 백사 이항복은 전주최씨 결성 현감 최륜의 외손자 이다 (전주최문의 외손)

 이몽량은 백사의 선친이 되신다 ... 집안자료를 정리하다가 사실관계를 확인하는 기사를 발견 .... 

 

간이집(簡易集) 제2권

 신도비명(神道碑銘) 병서(幷序)
의정부 우참찬(議政府右參贊) 증(贈) 영의정(領議政) 이공(李公)의 신도비명


영남(嶺南) 지방에는 당초 모든 지역을 관장하는 군장(君長)이 없었다. 이알평(李謁平)이라는 분이 경주(慶州) 호암(瓠巖) 아래에서 태어나 사량부 대인(沙梁部大人)으로 있었는데, 당시에 동등한 부(部)의 대인(大人)이 모두 여섯 명이었다. 이에 이들이 서로 신이(神異)한 인물을 물색하여 임금으로 세우니, 이이가 바로 신라의 시조인 혁거세(赫居世)이다. 그리하여 이씨(李氏)가 마침내 신라의 원훈(元勳)으로서 거족(巨族)이 되었다.
그 뒤로 고려 시대에 이르기까지 대대로 대관(大官)이 배출되었는데, 그중에서도 특히 사문(斯文)에 명성을 떨쳐 지금까지 전해 오는 분이 있으니, 그분이 바로 익재 선생(益齋先生)인 문충공(文忠公) 이제현(李齊賢)이다.
국조(國朝)에 들어와서 휘 연손(延孫)이 공조 판서를 지냈는데, 공은 그분의 4세손이다. 증조고인 휘 숭수(崇壽)는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使)이고, 조고인 휘 성무(成茂)는 안동부 판관(安東府判官)이며, 고(考)인 휘 예신(禮臣)은 성균관 진사(成均館進士)이다.
진사는 은덕(隱德)의 소유자로 의취(意趣)가 또한 고아(高雅)하여 고사전(高士傳)에 들어가고도 남을 분이었다. 그런데 자신의 당대에 그 덕을 모두 보답받으려 하지 않고 후손에게 물려주었는데, 나중에 공과 그 자손이 귀하게 됨에 따라 누차 증직(贈職)된 결과 의정부 좌찬성에 이르렀다. 그리고 배필인 전주 최씨(全州崔氏) 역시 정경부인(貞敬夫人)에 이르렀으며, 위로 3세(世)까지 차등 있게 추증을 받았다.
공은 휘가 몽량(夢亮)이요, 자가 언명(彦明)으로, 홍치(弘治) 기미년(1499, 연산군5)에 태어났다. 유년기와 소년기를 거쳐 성장하면서 학문에 힘을 쏟은 결과, 가정(嘉靖) 임오년(1522, 중종17)에 생원시와 진사시에 입격하였으며, 무자년(1528, 중종23)에 형인 이몽윤(李夢尹)과 함께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교서관(校書館)에 분속(分屬)되었다.
몇 년이 지나면서 더욱 이름을 날려 예문관(藝文館)에 뽑혀 들어가 검열(檢閱)을 거친 뒤 승정원 주서(承政院注書)로 전직(轉職)되었으며 다시 관례에 따라 성균관 전적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리고 형조와 예조와 병조의 좌랑(佐郞)을 역임하고서 사간원 정언에 임명되었다가 경성부 판관(鏡城府判官)으로 나갔다.
얼마 있다가 사헌부 지평으로 부름을 받았다. 이에 언관(言官)이 ‘너무 빨리 불러올리는 것은 일단 엄선해 보내어 공을 세우도록 권면하는 뜻이 못 된다’고 하였으나, 상은 이르기를, “북로(北路)는 조정에서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에 장리(將吏)들이 대부분 법을 준수하지 않고 있다. 따라서 그 지방에서 사람을 불러다 이목지관(耳目之官)으로 기용하는 것도 북로를 중하게 하는 하나의 길이 될 것이다.” 하였다.
조정에 돌아오자마자 상(喪)을 당했다. 상복을 벗은 다음에 예조 정랑에 제수되었다. 진하사(進賀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경사(京師)에 갔다가 돌아와서 한성부 서윤(漢城府庶尹)과 승문원 판교(承文院判校)를 역임한 뒤, 사헌부 장령에 임명되었다가 집의로 승진하였으며, 또 선공감(繕工監)과 사복시(司僕寺)의 정(正)을 역임하였다.
갑진년(1544, 중종39)에 중묘(中廟)의 상을 당해 빈전도감(殯殿都監)의 도청(都廳)으로 일을 마무리하였다.
을사년에 관례에 따라 당상(堂上)으로 품계가 오른 뒤 곧이어 나주 목사(羅州牧使)로 나갔다. 명묘(明廟)가 처음 정사를 행할 때에 승정원 동부승지(承政院同副承旨)로 부름을 받고 돌아와 우부승지와 좌부승지로 승진하였으며 장례원 판결사(掌隷院判決事)를 역임하였다. 그 뒤 사간원 대사간에 임명되고 또 병조의 참지(參知)와 참의(參議)를 거치고 나서 강원도 관찰사로 나갔다.
기유년(1549, 명종4)에 동지사(冬至使)로 경사에 갔다. 신해년에 도승지에서 특별히 가선대부의 품계로 오른 뒤 경상도 관찰사로 나갔다. 계축년(1553, 명종8)에 충청도 관찰사로 나갔다가 조정에 들어와서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거쳐 한성부(漢城府)의 우윤(右尹)과 좌윤(左尹)을 역임하였다.
을묘년(1555)에 전라도가 왜구의 환란을 당해 피해가 막심하였으므로, 조정에서 방백(方伯)의 선임을 의논하게 되었다. 이때 이조 판서 윤춘년(尹春年)이 아뢰기를, “오늘날 재능으로 보나 기국(器局)으로 보나 이모(李某)보다 나은 사람이 없습니다.” 하였는데, 사실은 공을 밀어내려는 의도에서 그런 것이었다. 그런데 임당공(林塘公) 정유길(鄭惟吉)이 마침 그 당시에 이조 참판으로 있다가, 공이 몇 년 동안 계속 혼자서만 고생을 하고 있다고 난색을 표했으므로, 마침내 그 일이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이해에 다시 대사간으로 임명되었다가 판결사(判決事)로 바뀌었다. 정사년(1557)에 경기 관찰사로 나갔다. 기미년에 사헌부 대사헌에 임명되고, 병조와 예조의 참판을 역임하였다. 경신년에 다시 도승지로 임명되었으며, 신유년에 다시 예조 참판을 거쳐 특별히 자헌대부로 가자(加資)된 뒤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이 되었다. 임술년에 형조 판서와 지의금부사(知義禁府事)가 되었다.
계해년에 다시 대사헌에 임명되었으나 어떤 사건과 관련되어 파면을 당한 뒤 선영이 있는 시골로 돌아가 거처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서용되어 의정부 우참찬과 지의금부사 및 오위 도총관(五衛都摠管)을 역임하고는, 갑자년 겨울에 세상을 하직하니, 향년 66세였다.
상이 부음을 듣고는 조회(朝會)를 일시 중지하고 조문(弔問)과 제사를 의례(儀禮)대로 행하게 하였다. 을축년 봄에 포천현(抱川縣) 화산리(花山里)에 안장(安葬)하였다.
전부인(前夫人)인 함평 이씨(咸平李氏)는 참봉(參奉) 이보(李保)의 딸이다. 그 소생인 아들 이운복(李雲福)은 영평 현령(永平縣令)이고, 장녀는 충의위(忠義衛) 김익충(金益忠)에게 출가하였으며, 차녀는 진보 현감(眞寶縣監) 홍우익(洪友益)에게 출가하였다.
후부인(後夫人) 전주 최씨(全州崔氏)는 결성 현감(結城縣監) 최윤(崔崙)의 딸이다. 그 소생인 아들 이산복(李山福)은 수성금화사 별제(修城禁火司別提)이고, 이송복(李松福)은 선공감 감역관(繕工監監役官)이고, 이항복(李恒福)은 원임(原任) 의정부 영의정 오성부원군(鰲城府院君)이다. 딸은 승정원 좌승지인 민선(閔善)에게 출가하였고, 다음은 원임 호조참의 행 고성군수(行高城郡守) 유사원(柳思瑗)에게 출가하였다.
내외손(內外孫)의 남녀는 다음과 같다. 삼등 현령(三登縣令)인 이계남(李桂男)과 청단도 찰방(靑丹道察訪)인 이탁남(李擢男)과 직장 유사경(柳思璟)의 처는 영평(永平)의 소생이고, 사인(士人)인 이성남(李星男)과 이정남(李井男)은 오성부원군의 소생이고, 형조 참판 박동량(朴東亮)의 처는 승지(承旨)의 소생이고, 사인(士人)인 유부(柳薂)는 참의(參議)의 소생이다.
만력 무술년(1598, 선조31)에 공에게 영의정과 시림부원군(始林府院君)의 증직이 명해지고, 전부인과 후부인에게도 모두 정경부인(貞敬夫人)의 명이 내려졌다.
공은 마음가짐이 소탈하고 평이하였으며, 청렴과 검약으로 자신의 몸을 단속하였다. 사람들과 사적(私的)으로 이야기할 때에는 정성과 성의를 다하였으며, 일단 일에 임하였을 때에는 위엄을 갖추고 안색을 엄숙하게 하여 누구도 감히 범접할 수가 없었다.
인륜지사(人倫之事)는 한결같이 지성에서 우러나와 행하였다. 일찍이 거상(居喪)을 잘 한다는 것으로 일컬어졌으며, 먼 지방에서 형의 상을 당해 통곡할 때에는 그 애통해하는 모습이 사람들을 감동시켰다.
종족(宗族)에 대해서도 후덕스럽기 이를 데 없어, 생활이 빈한하여 살아가기 어려운 이를 만날 때에는 반드시 구휼해 주곤 하였다. 그리고 시집이나 장가를 가지 못한 사람이 있으면 반드시 자금을 대주어 때를 놓치지 않게 하였다. 그래서 친소(親疎)를 막론하고 마치 자기 집처럼 여겨 공의 집을 드나들었는가 하면, 밥상을 이어 놓고 먹는 광경이 벌어지면서 날마다 빈 자리를 찾을 수 없을 정도가 되었다.
공은 평생토록 술을 좋아하지 않았으며, 오직 심하다 할 정도로 좋아했던 것은 오직 음악뿐이었는데, 특별한 일이 없을 때에는 한 번도 옆에서 이를 떼어 놓으려고 하지를 않았으니, 그 천품(天品)이 고매한 것이 또한 이와 같았다.
공이 공무를 처리하는 솜씨로 말하면 넉넉하게 여유가 있고 또 민첩하기만 하였다. 또 공이 문서를 열람할 때에는 한꺼번에 몇 줄씩 읽어 내려가곤 하였다. 그래서 당시에 모두들 공을 따라갈 수 없다면서 추앙하였다.
영남에 있을 당시, 개인적인 상사(喪事) 때문에 해직을 청하는 상소를 올리고는 열흘 동안 관아를 비운 적이 있었는데, 그동안 처리하지 못한 부첩(簿牒)들이 계속 쌓여만 갔으므로 늙은 아전들이 걱정을 하였다. 그런데 해직을 허락받지 못하게 된 상황에서 공이 한번 일을 보기 시작하면서부터는 책상 위에 쌓인 부첩들이 한꺼번에 말끔히 처리되었으므로, 이를 보고서 탄복하지 않는 이들이 없었다.
호서(湖西)에 있을 당시, 어떤 사인(士人) 하나가 절도와 약탈을 당했다면서 도적을 붙잡은 뒤 현(縣)에서 작성한 문서를 가지고 공에게 왔는데, 공이 보니 도옥(盜獄)의 성립 조건이 모두 갖추어져 있었다. 그렇지만 공이 먼저 본인의 가산(家産)과 도적이 소지한 기물(器物) 및 의복 등을 물어 본 결과, 그 사람은 바로 남의 종으로서 나중에 부자가 된 사람이고 도적으로 몰린 사람은 그저 몰락한 사인(士人)일 뿐이라는 심증을 갖게 되었다. 이에 공이 말하기를, “이는 사인(士人)이 강퍅한 종을 혼내 주려고 왔다가 거꾸로 봉변을 당하고 붙잡힌 것이 분명하다. 그런데 변변치 못한 관리가 그의 말만 듣고서 도옥(盜獄)으로 단정지은 것이다.” 하였다. 그러고는 다시 심문하여 그 실정을 알아낸 뒤 그에 따른 죄를 주니, 도 전체가 공의 신령스럽고 밝은 식견에 탄복하였다.
이에 앞서 금성(錦城 나주(羅州))에 있을 적에, 어떤 토호의 집안에서 일으킨 송사(訟事)를 처리하면서 그 송사의 내용이 도리에 어긋난다[非理]는 것을 알고는 패소시킨 적이 있었다. 그런데 은대(銀臺 승정원)에 들어와 있을 적에, 형조가 본도(本道)의 첩문(牒文)에 의거하여 계청(啓請)을 한 뒤 판결을 내린 것을 보니, 바로 예전의 비리(非理)에 해당되는 송사와 관련된 것이었다. 이에 공이 동료들에게 논의를 꺼내기를, “가령 송관(訟官)이 판결을 잘못했다고 하더라도, 감사(監司)까지 편들어 주었을 리는 만무하다.” 하자, 모두 말하기를, “문서가 제대로 갖추어져 있는데, 어찌 의심할 수가 있겠는가.” 하였다. 그러나 공이 다시 그 직인(職印)의 흔적을 살펴본 결과 간사하게 위조한 사실이 밝혀졌으므로 그 사건이 마침내 바르게 귀결되었는데, 대개 이런 종류의 일들이 매우 많았다.
재차 어사대(御史臺 사헌부)의 어른이 되었을 적에, 상신(相臣) 심통원(沈通源)의 아들인 심뇌(沈鐳)가 겨우 서른 살의 나이에 평안도 절도사(平安道節度使)로 나가는 일이 있게 되었다. 공은 심상(沈相)과 오랜 친구 사이였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느 날 대석(臺席)에서 그 일을 맨 먼저 꺼내어 말하기를, “서쪽 지방의 중진(重鎭)을 어찌 경력도 없는 연소한 사람에게 맡겨서야 되겠는가.” 하였으므로, 동료들이 모두 깜짝 놀라면서 다시 의논해 보도록 하자고 대답하였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이 사실을 심가(沈家)에 남몰래 알려 주자, 심(沈)이 간원(諫院)을 부추겨서 공이 대리시(大理寺)에 있을 때의 일을 주워 모아 탄핵을 하여 파직시키도록 하였다. 이에 조야(朝野)가 경악을 하고 통분하게 여기는 가운데, 대신(大臣)이 나서서 구해 주려고까지 하였으나, 결국에는 면할 수가 없게 되었다. 이웃에 사는 판서(判書) 김개(金鎧)가 찾아와서 공을 위로하자, 공이 웃으면서 말하기를, “심(沈)은 원래 뒤끝이 없는 사람인데, 어찌하여 이렇게까지 원한을 품게 되었는지 모르겠다.” 하였는데, 이 말을 듣고는 김(金)이 말하기를, “공은 그저 그가 억지로 웃어 주는 모습만 보았을 따름이다.” 하였다.
최 부인(崔夫人)의 외조부는 판서 눌헌(訥軒) 이사균(李思鈞)이다. 이에 앞서 눌헌이 태학생(太學生)을 대상으로 시험을 주관하고는 집에 돌아와 부인 황씨(黃氏)에게 말하기를, “내가 오늘 뛰어난 선비를 얻어보게 되었다.” 하고는 이어 말하기를, “포천(抱川) 출신의 이모(李某)라는 유생은 뒷날 국가의 중한 그릇이 될 것이 분명하다.” 하였으므로, 황 부인이 마음속에 기억하게 되었다. 그런 일이 있고 나서 10여 년이 지나 눌헌(訥軒)이 세상을 하직하였는데, 그때에는 최 부인도 이미 장성해 있었다.
그런데 그때 마침 공이 첫부인과 사별(死別)하게 되었는데, 황씨 가문의 서족(庶族)이 지나가는 말로 이 사실을 이야기하자, 황 부인이 이를 듣고는 기뻐하며 말하기를, “이 이가 바로 선부자(先夫子)께서 기특하다고 일컬었던 사람이다. 나의 손녀 역시 뛰어난 여성이니, 반드시 그의 배필이 되도록 해야 하겠다.” 하였다. 이에 일가친척이 내외(內外)를 막론하고 모두들 나이가 서로 맞지 않는다면서 반대하였으나, 황 부인은 그런 말을 귀 담아 들으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공 역시 이미 편방(偏房 첩실(妾室))을 두어 어린 자식들을 양육하는 데에 부족함이 없었으므로 재혼하여 가정을 꾸릴 의사가 전혀 없었다. 하지만 원주 목사(原州牧使)로 있던 공의 형이, 명가(名家)의 훌륭한 여성을 잃을 수는 없다고 하면서 강력히 권고한 결과, 마침내 결혼이 성사되었다.
최 부인이 일단 공에게 출가한 뒤로는 온유하고 화순한 태도로 부도(婦道)를 견지하면서 오직 공의 뜻을 따라 순종하였다. 당시에 공의 누이가 일찍 과부가 된 몸으로 아들 넷을 두었는데 집안이 가난해서 제대로 기를 수가 없었고, 족질(族姪 종형제의 아들) 몇 사람이 또 집안에서 기식(寄食)하였으며, 전 부인(前夫人) 소생의 세 자녀도 모두 미혼이었고, 부인의 소생 역시 조금씩 자라나고 있는 형편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부인이 한결같이 성의를 다하여 양육하면서 독립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는데, 집안의 친족들이 볼 때에도 털끝만큼이라도 차이를 두어 대하는 점을 부인에게서 발견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뒤에 미망인(未亡人)으로 자처하며 거하게 되었을 때에는 삼 년(三年)의 상기(喪期)가 지난 뒤에도 검소한 가운데 슬퍼하는 빛이 여전하였다. 또 오직 거친 명주 옷에만 감소(紺素)의 표리(表裏)를 대었을 뿐, 내의(內衣)와 치마는 반드시 무명과 베로 해 입었으며, 일문(一門)에 혼사나 경사가 있어 크게 모일 때에도 절대로 참석하는 일이 없었다.
자녀에 대한 교육은 무척 엄한 편이었다. 그래서 평소에 옷을 걷어올려 몸을 드러낸다거나 한쪽에 몸을 비스듬히 기댄다거나 관잠(冠簪)을 갖추지 않고 대하는 일 등은 감히 상상할 수도 없었다. 그리고 내외(內外)를 엄격히 구별하여 앉거나 밥을 먹거나 이야기를 할 때에 법도를 지키게 하였으며, 조금이라도 서로들 장난을 치면서 웃기라도 하면 그 자리에서 바로 꾸짖어 다시는 그런 잘못을 범하지 않도록 하였다. 부인의 오빠인 안음(安陰) 최정수(崔廷秀)가 부인보다 약간 위의 나이로 같은 마을에서 살고 있었다. 그래서 노년에 이르도록 누구보다도 가장 빈번하게 만나곤 하였지만, 시비(侍婢)가 있지 않으면 만난 적이 한 번도 있지 않았다.
부인이 죽어 장례를 치른 것은 융경(隆慶) 신미년(1571, 선조4) 겨울의 일이었다. 그러니 지금은 공을 장사 지낸 지 39년이 되는 해요, 부인의 장례로부터는 33년이 되는 해라고 하겠다. 그러던 어느 날, 오성(鰲城 이항복(李恒福)의 봉호임) 상공(相公)이 직접 공의 행장(行狀)을 가지고 나에게 찾아와서 말하기를, “나는 선인(先人)에게 불효가 막심한데, 분에 넘치게 너무나도 많은 은혜를 입었다. 그리고 국가가 다사다난(多事多難)하게 된 이래로 또 빈 자리를 메우며 급속도로 승진하는 등 천지(天地)보다도 더 큰 은총을 받아 인신(人臣)으로서는 더 이상 오를 수 없는 가장 높은 지위에 이르렀다. 지금 평상시처럼 예법을 모두 갖추어 사당에 모실 수는 없다 하더라도, 묘소에 비석을 세워 행적을 기록함으로써 불후하게 되시기를 도모해 보는 것이 구구한 나의 소원이다. 그러나 나는 아홉 살의 어린 나이에 선공(先公)을 여의었고, 선부인(先夫人) 역시 내 나이 겨우 열다섯 되던 해에 돌아가시고 말았다. 그래서 생전의 행적을 자세히 알 수 없었기 때문에 집안에서 들어서 기억하고 있는 것들만을 정리해 놓았을 뿐이다. 또 나 자신이 직접 글을 지을 수도 없는 만큼 문학(文學)에 노성(老成)한 이에게 부탁할 수밖에 없는 실정이다. 그런데 지금 선생이 벼슬살이에 싫증을 느껴 장차 외딴 고을에서 한가한 시간을 보내려 하고 있으니, 이런 때에 나의 일을 도와준다면 더 이상 다행한 일이 없겠다.” 하였다. 이에 내가 행장을 받들어 읽고 나서 그렇게 하겠노라고 승낙하였는데, 이와 함께 공과 관련되어 불현듯 떠오르는 일이 하나 있었다.
내가 태학(太學)에서 벼슬을 하고 있을 때, 공이 석전(釋奠)의 초헌관(初獻官)으로 임명되어 의식을 집행한 적이 있었다. 이윽고 제례(祭禮)를 다 마친 뒤에 명륜당(明倫堂)에서 음복(飮福)을 행하였는데, 당시에 정부의 백관들이 일 때문에 오지 못하고 오직 향관(享官)들만 제자리를 지키고 있었는데도, 공이 좌중을 압도하면서 행사를 진행하자 오히려 원수(員數)가 성대하다는 느낌이 들 정도였다.
그리고 음복을 끝내고 나서는 각자 자리에서 일어나 연음(燕飮)을 하였는데, 이때에도 반드시 술잔을 잡고 자리에 있는 관원에게 전해 줄 적에 공이 술잔을 들고는 항상 좌우(左右)에 읍(揖)을 하였으며, 좌우에서 술잔을 건네 주어 받게 되었을 때에도 땅에 엎드려 사례를 한 뒤에 마시곤 하였다. 이렇듯 공이 끝까지 자기 자리를 고수하면서 술을 마셨으므로 사람들 역시 함께 읍을 할 수밖에 없었는데, 그렇게 하지 말라고 공에게 권해도 공은 조금도 흐트러지는 기색이 없이, 겸허하면서도 평화스러운 분위기가 온몸에서 우러나오곤 하였다. 그런데 다른 헌관(獻官)들은 공처럼 그렇게 제대로 행하는 사람이 있지 않았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선진(先進)들이 보여 주는 행동거지에 대해서 작은 일이라도 자세히 살펴보는 버릇이 있었는데, 이런 광경을 한번 목도하여 공이 장후(長厚)한 군자라는 것을 알고는 항상 칭찬하여 마지않았다.
그 뒤에 또 듣건대, 조정에서 문형(文衡)을 맡을 인물을 추대할 적에, 정임당(鄭林塘 임당은 정유길(鄭惟吉)의 호임)과 이량(李樑)이 선발될 가능성이 가장 높은 대상으로 꼽히고 있었는데, 여러 재신(宰臣)들이 누구에게 더 권점(圈點)을 하느냐에 따라 결정될 상황에 처해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때 이량의 권세(權勢)가 비록 한 시대를 압도하고 있긴 하였지만, 문망(文望)으로 보면 정임당을 능가할 수 없었으므로, 이량이 정임당에게 윗자리를 양보하는 척하면서 오히려 자신의 명성을 높일 기회로 삼으려 하였는데, 사람들은 이런 사실을 모두 헤아려 알고 있었다.
그런데 공이 종이를 앞에 두고는 한참 동안 바라보다가 권점하는 일에 끝내 참여하지를 않았었다. 대체로 보건대 공은 정임당과 평소 친하게 지내는 사이였으면서도, 일이 이렇게까지 된 상황에 대해서 어쩌면 수치스러운 생각을 느껴서 그런 것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공이 또 이렇듯 확고하고 단호한 태도를 보여 준 것에 대해서 더욱 탄복하게 되었다.
지금 우리 상공(相公)을 우러러 살펴보건대, 풍채(風采)와 신태(神態)가 중후하고 원대한 데다 아무리 어려운 일을 만나더라도 손쉽게 처리하는 솜씨를 보여 주고 있다. 상공은 낭관(郞官)과 학사(學士)로 있을 때부터 당시 동류들보다 월등하게 출중한 모습을 보여 주었고, 지극히 위태롭고 혼란한 사태를 수습해야 하는 임무를 맡았을 적에도 목소리나 안색 한번 변한 적이 없었다.
그리하여 마치 일만 마리의 소를 동원해도 어찌할 수 없어 그 나무의 무게에 머리를 돌려 버리고, 마치 일천 길 두레박 줄을 드리워야 물을 퍼올릴 수 있는 우물처럼 그 깊이를 잴 수가 없었으니, 우리 상공이 이런 그릇을 이룰 수 있었던 그 소이연(所以然)을 우리가 몰라서야 되겠는가.
과거에 공이 재혼을 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 벌어졌었고, 그리하여 눌헌(訥軒)의 선견지명이 현실로 드러나면서 우리 어진 상공이 이 세상에 태어나게 되었고 보면, 하늘이 이 사이에 당초부터 간여하지 않았다고 또 어떻게 말할 수가 있겠는가.
내가 일단 행장에 근거하여 대략 공의 본말(本末)을 서술하고 나서, 다시 말미에 나의 소견(所見)의 일단을 피력하여 붙이게 되었다. 그러고는 또 다음과 같이 명하는 바이다.

사람이 일백 가지 선행에 대해 / 人於百善
마음속으로 본받으며 노력할 순 있겠지만 / 可慕而力
도량과 절제를 겸비한 이는 / 惟量惟節
하늘이 반드시 점지하게 마련이니 / 必其天得
도량이 없으면 어찌 여유가 있겠으며 / 非量焉裕
절제 없이 어찌 탁월할 수가 있겠는가 / 非節焉卓
덕행과 정사에 드러난 일을 보더라도 / 德行政事
범속한 경지를 똑같이 초월하였나니 / 同歸拔俗
우리 공이 남긴 자취야말로 / 如公之爲
옛사람에게서나 찾아볼 수 있으리라 / 求諸古人
직위는 상서(尙書)요 나이는 겨우 육십 대 / 八座六袠
공의 당대에는 이 정도로 그쳤지만 / 而止公身
융숭한 증직과 우악한 추숭 / 寵贈優崇
남겨 놓은 물건을 되찾듯 하였나니 / 若收遺餘
이는 대개 공에게 아들이 있어 / 蓋公有子
공과 같지 않은 점이 없었기 때문이라 / 無所不如
그 아들이 과연 어느 분인고 / 有子伊何
성스러운 임금님 도와 드리는 우리 상공 / 相我聖后
공이 후세에 남긴 은택을 / 維公之澤
실제로 우리들이 받고 있도다 / 我人實受


[주D-001]검소한 …… 여전하였다 : 시종일관 정성을 다해 예법을 준수하였다는 말이다. 《논어(論語)》 팔일(八佾)에 “예를 행할 때에는 사치스럽게 하기보다는 차라리 검소하게 해야 하고, 상을 당했을 때에는 형식적으로 잘 치르기보다는 차라리 슬퍼하는 마음이 우러나와야 한다.[禮與其奢也寧儉 喪與其易也寧戚]”라는 말이 있다.
[주D-002]감소(紺素)의 표리(表裏) : 감색의 겉감과 흰색의 안감을 말한다. 《장자(莊子)》 양왕(讓王)에 “자공(子貢)이 멋진 말을 타고서, 안감은 감색 겉감은 흰색의 옷[中紺而表素]을 입은 복장으로 원헌(原憲)을 찾아 왔다.”는 말이 있다.
[주D-003]일만 마리의 …… 돌려 버리고 : 당(唐)나라 두보(杜甫)의 시에 “가령 고대광실이 기울어져 들보와 기둥이 필요하다 하더라도, 언덕이나 산처럼 무거운 이 나무를 끌고 가려면 일만 마리의 소도 고개를 돌려 버리고 말 것이다.[大廈如傾要梁棟 萬牛回首丘山重]”라는 표현이 있다. 《杜少陵詩集 卷15 古柏行》
백사집 부록
 신도비명
유명 조선국 추충분의평난충근정량갈성효절협책호성공신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영의정 겸 영경연홍문관예문관춘추관관상감사 세자사 오성부원군 이공의 신도비명(神道碑銘) 병서(幷序)

선조 대왕(宣祖大王) 25년에 일본(日本)의 추장(酋長) 수길(秀吉)이 대대적으로 군대를 일으켜 쳐들어옴으로써 경도(京都)가 함락되고 거가(車駕)가 파천하였다. 오직 이때 신하가 있어 천조(天朝)에 구원병을 요청하여 재차 종사(宗社)를 회복시켰으니, 그가 바로 백사(白沙) 이공(李公)이다. 폐주(廢主)가 즉위하여서는 동기(同氣)를 죽이고 자전(慈殿)을 폐하려고 꾀하자, 간신(奸臣) 이이첨(李爾瞻)ㆍ정조(鄭造) 등이 그 일을 더욱 종용함으로써 천상(天常)이 절멸되어 조선 삼천리 강토가 거의 요괴(妖怪)의 지역으로 빠지게 되었다. 오직 이때 신하가 있어 항거하여 말하고 바르게 고해서 이륜(彝倫)을 붙들어 세웠으니, 그가 바로 백사 이공이었다. 그래서 담론하는 이들이 말하기를, “중흥(中興)의 업적은 해동(海東)에만 입혀졌을 뿐이지만, 백성의 윤기(倫紀)를 세운 것은 곧 만세의 효순(孝順)을 수립한 것이니, 이 도리는 천하에 널리 입혀질 것이다.” 하였다. 공이 말 때문에 죄를 얻어 북쪽 변방에 유찬되었을 적에는 담론하는 이들이 말하기를, “공은 진실로 죽을 곳을 얻었으나, 나라는 어찌한단 말인가.” 하였다. 이윽고 공은 배소에서 작고하였는데, 금상(今上)이 계해년에 반정(反正)하여 공을 복관(復官)시키고 사제(賜祭)함에 이르러서는 담론하는 이들이 말하기를, “거의 잘 되어 가는구나. 나라에 교화가 있게 되었다.” 하였으니, 대체로 공의 존망(存亡)과 영췌(榮悴)로써 세운(世運)의 흥상(興喪)을 점친 것이었다. 동양(東陽) 신흠(申欽)이 온 나라의 담론하는 이들에게서 이런 사실을 듣고 말하기를, “이것이 여정(輿情)이요 이것이 공의(公議)이니, 이것이 어찌 천명(天命)에 의해 미리 정해진 것이 아니겠는가.” 하였다. 그래서 그 사업과 공렬을 차례로 엮어서 신도(神道)의 빗돌에 다음과 같이 기재하는 바이다.
공의 휘는 항복(恒福)이고, 자는 자상(子常)이며, 씨족(氏族)은 계림(鷄林)에서 나왔다. 그 처음에 사량부 대인(沙梁部大人) 알평(謁平)이란 분이 있어 신라(新羅) 시조(始祖)를 도와 종신(宗臣)이 되었는데, 그의 주손(冑孫)과 지손(支孫)이 마침내 면면히 이어져 오다가 고려(高麗)에 이르러 더욱 성해졌으니, 그 중에 드러난 이가 바로 문충공(文忠公) 이제현(李齊賢)으로, 세상에서 익재 선생(益齋先生)이라 일컫는 분이다.
본조(本朝)에 들어와서는 공조 참판(工曹參判)을 지낸 휘 연손(延孫)이 있어 이분이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숭수(崇壽)를 낳았는데, 숭수는 공에게 고조(高祖)가 된다. 증조(曾祖) 성무(成茂)는 안동 판관(安東判官)으로 이조 판서(吏曹判書)에 추증되었고, 조(祖) 예신(禮臣)은 성균 진사(成均進士)로 의정부 좌찬성(議政府左贊成)에 추증되었다. 찬성공은 은덕(隱德)이 있어 일찍이 포천(抱川)에 묘역(墓域)을 가려 정하고 말하기를, “내 뒤에 반드시 이세(二世)가 연하여 현달(顯達)할 것이다.” 하였는데, 공의 고(考) 참찬공(參贊公)이 과연 그 예언에 부응하였다. 참찬공의 휘는 몽량(夢亮)인데, 삼조(三朝)를 내리섬기면서 청검(淸儉)과 충효(忠孝)로 명성이 있었고, 영의정(領議政), 시림부원군(始林府院君)에 추증되었다. 비(妣)는 전주 최씨(全州崔氏)로 결성 현감(結成縣監) 최륜(崔崙)의 딸이며 눌헌(訥軒) 이공 사균(李公思鈞)의 외손(外孫)인데, 정경부인(貞敬夫人)에 추증되었고, 규범(閨範)이 있었다.
가정(嘉靖) 병진년에 공을 낳았는데, 공은 막 태어나서 젖을 빨지도 않고 울지도 않으므로, 가인(家人)들이 놀라 이상하게 여겼다. 그런데 마침 고사(瞽師)가 문에 이르자, 참찬공이 그에게 아이의 점을 쳐 보게 하였다. 점을 다 쳐 보고는 축하하며 말하기를, “삼공(三公)에 관한 점사(占辭)를 보니, 공보다 이급(二級)이 높습니다.” 하였다. 겨우 두어 돌이 지나서는 뛰어나게 영리하여 장난하고 노는 것이 보통 아이들과 달랐고, 조금 자라서는 마음이 침착하고 도량이 있어 행동거지가 기특하고 어묵(語黙)이 구차하지 않았으므로, 식견 있는 이들이 하늘 높이 치솟는 재목이 될 줄을 알았다. 8세 때에는 시(詩)를 지었는데, 말을 내면 사람을 놀라게 하였다. 9세 때에는 참찬공이 작고하자, 너무 슬퍼하여 몸이 쇠약해지는 것을 예(禮)와 같이 하였다.
14, 5세 때에는 이미 재물을 아끼지 않고 의리를 좋아했으며, 웅건(雄健)하여 어디에도 속박을 받지 않았다. 그리고 씨름과 공차기를 잘하여 길거리에서 용맹을 뽐내곤 하면 여러 소년들이 감히 맞설 자가 없었다. 대부인(大夫人)이 그 사실을 듣고 경계하여 이르기를, “미망인(未亡人)은 얼마 못 가서 죽을 것인데, 네가 무뢰한 자제(子弟)들과 종유를 하니, 나는 죽어도 눈을 감지 못할 것이다.” 하니, 공이 울면서 가르침을 받아 호탕한 습성을 닦아 없애고 신실한 태도를 지녔다.
신미년에 대부인이 작고하자, 죽(粥)만 마시면서 여묘살이를 하였다. 복(服)을 마치고는 민씨(閔氏)의 아내가 된 자씨(姉氏)에게 의탁해 있으면서 경서(經書)의 의리를 분석하고 학습의 취향을 변별하여 학업을 마침내 독실히 함으로써 문사(文思)가 방일하여 차츰 고인(古人)의 문사에 가까워지자, 한때의 명류(名流)들이 모두 공의 얼굴을 알기를 원하였다. 상국(相國) 권철(權轍)이 그 명성을 듣고 손녀를 공에게 시집보냈으니, 바로 도원수(都元帥) 권율(權慄)의 소생이었다. 상국이 공을 한 번 보고는 공보(公輔)의 그릇으로 기대하였다.
만력(萬曆) 경진년에는 알성 문과(謁聖文科)의 병과(丙科)로 급제하여 승문원 권지 부정자에 보임되었다. 신사년에는 예문관 검열이 되었다. 계미년에는 선묘(宣廟)가 장차 《주자강목(朱子綱目)》을 강(講)하려고 재신(才臣)을 미리 간선하여 궁중에 비장된 《주자강목》을 내려 익히게 하였는데, 이 간선에 응한 사람 5인 가운데 공이 참예되었으니, 율곡(栗谷) 이공 이(李公珥)가 실로 공을 천거했던 것이다. 율곡은 도학(道學)과 문장(文章)이 온 세상을 압도했는데, 공이 한 번 만나 보고는 일언지하(一言之下)에 계합(契合)된 바가 있었다. 그 후 이내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하고, 홍문관에 천거되어 정자, 저작, 박사를 역임하였다.
을유년 봄에는 예문관의 대교ㆍ봉교, 성균관 전적, 사간원 정언, 이조 좌랑, 지제교, 고공랑을 제수받았다. 이상의 관직을 세상에서 열관(熱官)이라 일컬었는데, 공은 이 관직을 역임하는 동안에 담박하기가 마치 한산한 관서(官署)와 같아서, 관청에는 찾아오는 사람이 없었고 좌중에는 낯선 빈객이 없었으며, 날마다 같은 마을 사람들과 종유하여 조촐하게 앉아서 서로 만나 보곤 하였다. 한 번은 두 현관(顯官)이 한때의 명망을 믿고 공에게 천거해 주기를 요구하여 공이 이미 전조(銓曹)에 들어간 뒤에는 중간에서 공을 꾀는 짓을 수없이 하였으나, 공이 그 행위를 증오하여 끝까지 응하지 않았으므로, 두 현관이 서로 공에게 앙심을 품었다. 이어 수찬, 정언, 교리, 이조 정랑, 예조 정랑을 역임하였다.
기축년 겨울에는 문사랑(問事郞)으로 정여립(鄭汝立)의 옥사(獄事)에 참국(參鞫)하였다. 이 때 선묘(宣廟)께서 친히 임어하여 죄수를 논죄하였는데, 공의 응대(應對)가 주도하고 민첩하며, 임금 앞에서 총총걸음하는 것이 절도에 맞았으며,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입으로 묻고 손으로 기록하곤 하니, 동료 관원들은 그저 수수방관하고 있을 뿐이었으므로, 이서(吏胥)들이 모두 눈여겨보고 놀라면서 공을 신(神)처럼 여겼다. 선조는 자주 공의 재주를 칭찬하고 매사를 반드시 공에게 맡겼다. 공은 연루된 죄수가 많은데다 조속히 판결을 하지 못함으로써 남의 불행을 고소하게 여기는 자들의 흉심을 발단시키게 되는 것을 민망히 여겨, 정의(亭疑)를 당해서는 힘써 평번(平反)하여 생의(生議)를 붙여 주고, 죄안(罪案)의 문서(文書)를 상세히 검토하여 혹 불분명한 사실이 있을 경우에는 반드시 당사자(當事者)에게 정밀히 조사해서 처리하였으니, 한갓 붓대를 잡고 옥안(獄案)만 작성할 뿐만이 아니었다.
경인년 여름에는 응교에서 의정부의 검상, 사인에 전임되었다. 가을에는 평난공신(平難功臣)에 책록되었는데, 이는 공이 문사랑으로 노고가 많았었기 때문에 관례대로 삼등훈(三等勳)에 책록되었던 것이다. 이어 전한에 전임되었는데, 일찍이 경연(經筵)에 입시(入侍)했을 적에 선조가 공을 앞으로 가까이 불러 놓고 공의 국옥(鞫獄) 때의 일을 말하면서 수십 마디를 연해서 고재(高才)라 칭찬하고 작질(爵秩)을 올려서 권장하였는바, 직제학으로 승진시켰다가 통정대부 승정원 동부승지를 특별히 더하였으니, 장차 공을 크게 쓰려는 것이었다.
신묘년 봄에는 호조 참의에 제수되었다. 호조의 일을 본 지 겨우 한 달 만에 조무(曹務)가 막힌 것이 없게 되고, 창고의 비축도 부족함이 없게 되자, 당시 호조 판서로 있던 상국(相國) 윤두수(尹斗壽)가 공(公)을 드러내서 존중하여 말하기를, “문한(文翰)을 다루는 선비가 다시 전곡(錢穀)도 잘 다스린단 말인가.” 하였다. 이때 얼신(孼臣) 홍여순(洪汝諄)이란 자가 온 세상 선비들을 모조리 그물질하여 장차 다 죽이려고 하는 바람에 공 또한 승지로서 그 파급(波及)을 입어 파면되었다. 이해 여름에 서용되어 다시 승지에 제수되었으나, 공을 해코지하는 자들이 아직 없어지지 않았으므로, 전에 공에게 앙심을 품었던 두 관원이 이 틈을 타서 일어나 공을 중죄(重罪)에 빠뜨리려고 꾀하였는데, 이공 원익(李公元翼)이 마침 대사헌이 되어 몸소 친히 쟁론을 벌임으로써 이 일이 무사하게 되었다.
임진년 4월에는 왜구(倭寇)가 갑자기 이르자, 공은 지신사(知申事)로서 매우 분개하여 몸소 순절(徇節)하려고 작정하였다. 그래서 적보(賊報)를 듣고부터는 퇴청하여 사제(私第)로 가서 안집과 통행을 금하고 집안 일로 자신을 혼란시키지 못하도록 경계하였으며, 측실(側室)은 한 번만이라도 대면(對面)하기를 요구했으나, 그것도 할 수가 없었다.
대가(大駕)가 서쪽으로 나갈 때에 미쳐서는 백관이 다 흩어져서 궁중(宮中)은 텅 비어 사람이 없고 비는 쏟아지고 밤은 칠흑 같았는데, 밤 4경에 중전(中殿)이 홀로 여사(女史) 10여 인을 데리고 인화문(仁和門)으로 걸어서 나갔다. 이때 공이 홀로 촛불을 잡고 앞에서 인도하니, 중전이 돌아보면서 물어 보고 위로와 면려가 갖추 지극하였다. 대가가 임진(臨津)에 다다라서는 상하(上下)가 서로 분열되었으므로, 공이 병조랑(兵曹郞)과 함께 도보(徒步)로 가면서 진창 가운데에서 도중(徒衆)을 불러모았다. 동파역(東坡驛)에 이르러서는 상이 대신(大臣) 및 윤두수를 불러 계책을 물었는데, 공이 맨 먼저 말하기를, “우리 나라의 병력(兵力)으로는 이 적을 당해 낼 수 없으니, 오직 서쪽으로 달려가서 부모(父母)의 나라에 우러러 호소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였다. 송경(松京)에 이르러서는 이조 참판 오성군에 제배하고 가선대부를 더하였다. 그리고 공에게 왕자(王子)를 호위하고 먼저 평양(平壤)으로 가게 하였다. 대가가 평양에 이르러서는 형조판서 겸 도총관을 임명하고 자헌대부를 더하였다. 그 후 얼마 안 되어 대사헌에 제수되었다.
적이 이미 경성(京城)을 크게 유린하고는 급히 양서(兩西)를 짓밟아 치면서 노략질을 하려고 할 적에 조정의 의논이 정해진 계책이 없어 허둥지둥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런데 공이 한음(漢陰) 이공 덕형(李公德馨)과 함께 계책을 협찬하여 사신을 보내어 천조(天朝)의 구원병을 요청하도록 건의하였고, 또 삼도(三道)에 조도사(調度使)를 파견하여 군흥(軍興)을 관장하도록 하였으니, 마침내 재조(再造)의 공렬을 이룬 데에는 이것이 그 조짐이 되었던 것이다. 이어 병조판서 겸 홍문관제학 지경연춘추관사 동지성균관사 세자좌부빈객에 제배되었다.
임진(臨津)이 함락되자, 혹자는 평양을 지켜야 한다고 말하고, 혹자는 함흥(咸興)이 의거할 만하다고 말하므로, 공이 좌상 윤두수와 함께 함흥으로 가는 것은 계책이 아니라는 뜻을 강력히 진술하고 영변(寧邊)으로 행행할 것을 청하였으나, 뭇 사람들의 의논은 굳이 함흥을 주장하였다. 그래서 중전과 세자빈(世子嬪)이 먼저 덕천(德川)을 향하여 함흥의 길을 취하였는데, 적들은 이미 대동강을 핍박해 왔다. 그러자 한음공이 자기가 나가서 적장(賊將) 현소(玄蘇)와 조신(調信)을 직접 만나서 군대의 진격을 늦추도록 꾀하겠다는 뜻으로 청하여 말하기를, “군대를 만일 늦추어 주지 않으면 의당 두 적장의 머리를 베어 오겠습니다.” 하니, 공이 그리 하지 못하게 말리면서 말하기를, “당당한 국가에서 어찌 도적의 행위를 할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대가가 평양을 떠난 뒤에는 공이 한음과 함께 영변으로 가서 머물 것을 거듭 청하고, 또 요동(遼東)에 가서 구원병을 요구하겠다고 자청하여 양공(兩公)이 서로 다투어 자신이 가려고 했는데, 밤중에 이르러서야 선조가 심충겸(沈忠謙)의 말을 받아들여 한음을 요동에 보내기로 하였다. 공은 한음을 남문(南門)까지 전송하고 자신이 타던 말을 한음에게 풀어 주면서 말하기를, “구원병이 나오지 않으면 그대는 의당 나를 중획(重獲)에서 찾아야 할 것이네.” 하니, 한음이 말하기를, “구원병이 나오지 않으면 나의 시체는 의당 노룡산(盧龍山)에 버려질 것이네.” 하고, 서로 눈물을 뿌리며 작별하니, 듣는 이들이 얼굴빛을 고쳤다.
적을 수비하던 여러 관군(官軍)이 또 무너지자, 선조가 밤에 여러 신하들을 불러 놓고 중국에 내부(內附)할 일을 의논하여 이르기를, “부자(父子)가 함께 압록강(鴨綠江)을 건너가 버리면 국사가 가망이 없게 되니, 세자(世子)는 의당 묘사(廟社)의 신주(神主)를 받들고 길을 나누어 가야겠다. 나는 약간의 신료(臣僚)를 대동하고 의주(義州)로 들어갈 터이니, 누가 나를 따르려는고?” 하니, 뭇 신하들이 아무도 대답을 못했는데, 공이 울면서 대답하여 따르기를 청하였다. 대가가 박천(博川)에 머무르자, 중전이 덕천(德川)으로부터 와서 서로 회합하였는데, 이어서 평양이 함락되었다는 보고가 이르렀다. 그러자 선조가 대가를 재촉하여 밤에 출발하였는데, 호종(扈從)하던 자들이 대부분 길에서 도망가 버린 가운데 비는 내리고 길은 좁고 하므로, 공이 갑작스런 변이라도 생길까 염려하여 연속(椽屬)에게 말하기를, “전군(前軍)이 매우 허술한데, 우리들은 모두 병관(兵官)이니, 앞에서 인도할 수 있다.” 하고, 말을 속히 몰아서 앞으로 나가니, 선조가 물어 보고 공인 줄을 알고는 공을 더욱 중히 여겼다. 대가가 의주에 들어서자, 공이 말하기를, “한성(漢城) 남쪽의 제도(諸道)에서는 반드시 대가가 이미 요동(遼東)으로 건너갔으리라고 여길 터이니, 급히 사자(使者)를 파견하여 호남, 영남에 유시(諭示)해서 군대를 일으켜 근왕(勤王)하도록 하고, 또 행재소(行在所)를 모두 알도록 해야겠습니다.” 하였다. 그래서 이때부터 조정의 명령이 사방에 통해져서 근왕병(勤王兵)이 일어나게 되었던 것이다.
이에 앞서 요좌(遼左)에, ‘조선(朝鮮)이 왜(倭)를 인도하여 입구(入寇)하게 했다’는 유언비어가 떠돌자, 병부(兵部)에서 지휘(指揮) 황응양(黃應暘)을 보내어 은밀히 우리의 사정을 탐지하게 하였다. 그런데 공은 조정에 있을 때에 이미 이런 일이 있을 것을 우려하여 신묘년에 접수한 왜서(倭書)를 찾아 가지고 와 있다가 그것을 황응양에게 보이니, 황응양의 의심이 크게 풀리어 그가 황조(皇朝)에 돌아가 그 사실을 보고함으로써 비로소 구원병을 내보낼 일을 의결하였다. 그 후 조승훈(祖承訓), 사유(史儒) 등이 3천의 군대를 거느리고 먼저 이르자, 조야(朝野)가 모두 반드시 승첩(勝捷)을 거둘 것이라고 말하였으나, 공은 말하기를, “조 장군(祖將軍)은 경조(輕躁)하고 지모(智謀)가 적으니, 그 군대는 반드시 패할 것이다.” 하였는데, 과연 크게 패하였다. 그런데 조승훈은 황조에 돌아가서 심지어 우리 군대가 도리어 왜적을 돕는다고 속여 말하였으므로, 공이 대신(大臣)을 보내어 신변(伸辨)할 것을 청하고, 또 사신을 보내어 대군(大軍)을 보내 주도록 요구할 것을 청하였다.
겨울에는 제독(提督) 이여송(李如松)이 4만의 군대를 거느리고 강을 건너 동으로 나오자, 공이 그의 군대 지휘하는 것을 보고 상께 아뢰기를, “반드시 공을 이룰 것입니다. 그러나 다만 막하(幕下)에 정 동지(鄭同知), 조 지현(趙知縣) 두 사람이 용사(用事)를 하므로, 좌절되는 일이 있을까 염려됩니다.” 하였다. 그런데 계사년에 대첩(大捷)을 거두어 평양성(平壤城)을 탈환하였으나, 이윽고 화의(和議)에 이끌리어 다시 전쟁을 하지 않았으니, 실로 정 동지, 조 지현 두 사람이 그렇게 만든 것이었다.
경사(京師)가 수복되자 환궁(還宮)할 것을 강력히 청하여, 10월에 선조가 구도(舊都)로 돌아왔다. 행인(行人) 사헌(司憲)이 칙서(勅書)를 받들고 나왔는데, 선성(先聲)이 없었으므로, 조정에서 갑자기 그 사실을 알고 공에게 원접사(遠接使)를 맡기자, 공은 명을 받은 즉시 떠났다. 행인이 이틀 길을 하루로 줄여 급히 달려오므로, 행인이 지나는 군읍(郡邑)들이 어찌할 바를 몰랐는데, 공이 앞뒤에서 도와줌을 힘입어 관소(館所)의 접대에 흠결이 없었다. 황조(皇朝)의 칙서에, 세자에게 호관(戶官), 병관(兵官)을 대동하고 나가서 전라도(全羅道), 경상도(慶尙道)의 군무(軍務)를 다스리도록 하였으므로, 공은 병관이었기 때문에 접반사의 직임을 해면하고 세자를 모시고 남쪽으로 내려갔다.
갑오년 봄에는 호서(湖西)의 역적 송유진(宋儒眞)이 분조(分朝)에 반란을 일으키자, 여러 신하들이 세자를 받들고 대조(大朝)에 회합하여 역적을 피하려고 하므로, 공이 차자를 올려 그리 하지 못하게 하였는데, 이윽고 적이 평정되었다. 이해 가을에 소명을 받고 돌아와서는 주사대장(舟師大將)을 겸하여 주함(舟艦)을 계획하고 어염(魚鹽)을 자본 삼아 재물을 불려서 면포(綿布) 3만 필을 준비하여 호조(戶曹)로 실어 보냈다.
을미년에는 이조 판서로 홍문관 대제학, 예문관 대제학, 지춘추관성균관의금부사를 겸하였다. 병신년에는 황조에서 일본(日本)을 책봉(冊封)하는 일로 인하여 부사(副使) 양방형(楊邦亨)이 나와서 공을 자기의 접반사로 삼고자 하므로, 선조께서 이를 윤허하였다. 공이 조정에 하직을 하고 나서는 이조 판서와 대제학의 해면을 요청하여 의정부 우참찬에 임명되었다. 양방형이 공을 존경하여 말하기를, “동국(東國)에 이런 사람이 있으니, 어찌 외국(外國)이라 하여 가벼이 볼 수 있겠는가.” 하였다. 공은 정사(正使) 이종성(李宗城)을 가리켜 말하기를, “한갓 부귀한 집의 자제로 문묵(文墨)이나 다룰 뿐이니, 반드시 왕명(王命)을 욕되게 할 것이다.” 하였는데, 뒤에 과연 그러하였다. 겨울에는 양 부사를 전송하였다.
정유년 봄에는 병조 판서가 되었다. 이 때 경략(經略) 양호(楊鎬)가 대군을 거느리고 동으로 나왔는데, 적합한 접반사를 신중히 고른 끝에 공을 추천하자, 공이 사양해도 되지 않으므로, 호관(戶官), 공관(工官)을 대동하고 구련성(九連城)으로 가서 경략을 만났는바, 그때에 조목조목 열거한 문답(問答)은 모두가 찬란하게 나라를 빛낸 것들이었다.
이해 9월에 병으로 해면되었다가 11월에 다시 제수되었다. 공은 병조 판서를 모두 다섯 번, 이조 판서를 한 번 역임했는데, 마음씀이 곧고 신실하여 부정한 청탁이 미치지 못했고, 인재를 의용(擬用)하고 제탁(除擢)하는 데 있어서는 오직 그 재능만을 보아서 일체 공의(公義)를 따랐으므로, 감히 다른 길로 진취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관방(官方)이 질서가 잡히고 사도(仕道)가 이 때문에 맑아졌으니, 조정에 근근이나마 범할 수 없는 장벽이 존재하고 사대부(士大夫)들이 조금이나마 염치를 알게 된 것은 공이 전석(銓席)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병부(兵部)를 관장했을 적에는 수륙(水陸)으로 천병(天兵)이 모여드는 때를 당하여, 본병(本兵)에 관계된 일의 경우 큰 것은 맹렬한 천둥처럼 화급하였고 잗단 것은 쇠털처럼 번잡하였으나, 공은 이를 자유자재로 적절하게 처리함으로써 일이 많이 쌓여도 막힘이 없었다. 그래서 양 경략이 매양 긴요한 일을 만날 때마다 반드시 “이 상서(李尙書)와 의논하리라.” 고 말하였다. 공이 병부를 떠난 뒤에도 항용수(恒用數) 이외에 만 필(匹)의 면포(綿布)가 넘쳐 있었으므로, 부중(部中)에서는 이 상서가 비축한 것이라고 서로 전하면서 오래도록 이를 지켜 간직하였다. 근세에 유능한 병부의 장관을 일컬을 때 율곡(栗谷) 이공(李公)을 말하는데, 공은 충분히 율곡과 맞설 만하거니와, 시기의 몹시 바쁘거나 수월한 점으로 말하자면 공이 더 우월하였다.
무술년 가을에는 황조의 찬획사(贊畫使) 정응태(丁應泰)가 우리 나라에 대하여 터무니없는 사실을 날조해서 상주(上奏)하였으므로, 선조께서 크게 놀라 공을 우의정에 임명하고 대광보국숭록대부를 더하여 부원군을 봉하고 진주사(陳奏使)로 삼았다. 공이 누차 사양하였으나 윤허를 얻지 못하여 밤중에 출발해서 이틀 길을 하루에 달려가서 황제께 진주(進奏)하고, 다음으로는 날마다 내각(內閣)과 예부(禮部), 병부(兵部)에 나아가 정문(呈文)을 올려 사실을 진술하였는데, 말이 분명 적절하였고 예절에 맞는 거동이 우아하였으므로, 여러 관원(官員)들이 경의를 표하며 승낙하여 말하기를, “국가의 수치는 절로 씻어질 것이니, 공은 걱정할 것이 없습니다.” 하였다. 그래서 황제가 마침내 칙서를 내려 우리를 칭찬하고 정응태의 관직을 파면하였다. 기해년에 복명하니, 선조가 크게 기뻐하여 공에게 전토(田土)와 노비(奴婢)를 하사해서 칭찬하고 장려하였다. 그런데 당시의 의논이 정응태가 무주(誣奏)한 일을 가지고 그 죄를 정응태의 접반사였던 백유함(白惟咸)에게 돌려 그를 하옥(下獄)시키고 처벌하려 하였는데, 공이 위관(委官)이 되어 마음속으로 그의 억울함을 알고는 평의(評議)를 매우 분명하게 아뢰니, 선조가 그를 용서하였다. 얼마 안 있어 일로 인하여 관직을 해면하였다.
경자년에는 도체찰사 겸 도원수에 임명되어 남쪽 지방의 군대를 시찰하면서 백성을 편안히 할 것[安民]과 해상을 방어할 것[防海] 등 십육책(十六策)을 올렸다. 여름에 영의정에 임명되어 돌아왔다. 6월에 의인왕후(懿仁王后)가 승하하였는데, 당시 전쟁을 치른 뒤라서 의궤(儀軌)에 관한 전적(典籍)들이 남김없이 불타 없어졌으나, 공이 지시해 주고 재량한 것이 예문에 어긋나지 않았다. 재궁(梓宮)이 산릉(山陵)에 내려졌을 때 한밤중에 잘못 화재가 나서 상하(上下)가 몹시 당황하였는데, 공은 변(變)을 당하여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처리하는 데에 방도가 있어 마침내 이날 장사를 치르고 반우제(反虞祭)까지 마쳤다.
신축년에는 사직을 청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으므로, 공이 다시 나와서 경비를 절약하고[節經費], 전제를 바로잡고[正田制], 성심을 열고[開誠心], 공도를 펴고[布公道], 염치를 면려할[礪廉恥] 일로 청하니, 선조께서 가납하였다. 가을에 노추(奴酋)가 글을 보내 와서 강화(講和)를 요청하였는데, 공이 말하기를, “이 노추는 천조(天朝)로부터 관작을 받았으니, 인신(人臣)의 의리상 사사로이 사귈 수 없거니와, 또 후세의 걱정거리가 될 것이니, 청컨대 그 사자(使者)를 거절하소서.” 하였다.
임인년 봄에는 삼사(三司)가 서로 소장(疏章)을 올려 우계(牛溪) 성혼(成渾)을 논박하므로, 공이 소장을 올려 그를 구하려고 했는데, 소장을 미처 올리기 전에 어떤 사람이 권신(權臣)의 사주를 받고 지레 소장을 올려 공을 오로지 공격하였으므로, 공이 인책하여 사직하자, 공을 흔드는 자가 더욱 많아져서 끝내 이 때문에 자리를 떠났다.
갑진년 원조(元朝)에는 흰 무지개가 해를 관통하는 변이 있어 선조가 구언(求言)의 전교를 내리자, 공이 천인(天人)의 사이에 대해서 자세히 말하고, 끝에 가서 말하기를, “성심을 전하는 것은 의당 간언(諫言)을 받아들이는 데서부터 시작해야 하고, 공평함을 갖는 것은 의당 사람을 등용하는 데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하였는데, 세상에서 말을 제대로 안다고 하였다. 이해 여름에 호성공(扈聖功)을 책록하였는데, 공이 원훈(元勳)이 되자, 사양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이어 영의정에 임명되자, 또한 사직을 고하여 해면하였다.
병오년 가을에는 대마도(對馬島)의 오랑캐 의지(義智)가 임진년에 우리 능(陵)을 침범한 적이라고 거짓으로 칭하면서 두 사수(死囚)를 결박하여 바쳐 와서 강화를 요구하였다. 그러자 당시 유영경(柳永慶)이 영상으로서 자기의 공으로 삼고자 하여 장차 종묘(宗廟)에 헌부례(獻俘禮)를 행해서 자기의 공을 과시하려 하므로, 공이 그 두 사수를 부산(釜山)에서 죽여 왜사(倭使)에게 보이고자 하니, 유영경이 짐짓 잡아다가 신문하였으나 소득이 없었다.
정미년 10월에 선조(宣祖)의 병환이 위독하자, 공이 명을 받고 종묘에 기도를 드렸더니, 그 이튿날에 병환이 조금 나아졌다. 그랬다가 무신년 2월 1일에 선조가 승하하였고, 2일에 폐주(廢主)가 즉위하였다. 선조는 일월(日月) 같은 밝음으로 건강(乾剛)의 덕을 간직하여 일찍부터 신기(神器)를 이끌어 오다가 폐주에게 기탁하였는데, 폐주는 17년 동안이나 동궁(東宮)에 있었다. 그런데 불행히도 선조가 여러 해를 병석에 누워 있다 보니, 남의 불행을 즐기고 공을 탐하는 자들이 남의 마음을 추측하는 술책을 가지고서 깊은 속내를 틀어막고 단서를 숨긴 채 불의를 선동하여 종횡 무진한 논변으로 사람들의 이목을 미혹시켰는데, 마침내 정인홍(鄭仁弘)의 봉소(封疏)가 들어가고 나서는 인정이 더욱 현란해져서 화(禍)의 단서가 끝없게 되었다. 그런데 맨 먼저 임해군(臨海君)을 요주의 대상으로 삼음으로써 중외(中外)가 몹시 허둥지둥하는 가운데 위사(衛士)들은 갑옷을 입고 대궐을 수비하고, 궁문(宮門)은 대낮에도 열지 않은 지가 여러 달이었다. 이때 한 간관(諫官)이 임해군의 일로 공에게 와서 묻는 자가 있자, 공이 말하기를, “복상(服喪) 중인 왕자(王子)에게 아무런 형적도 드러나지 않았는데, 무슨 근거로 처벌을 한단 말인가.” 하였다. 그 후 삼사(三司)가 ‘임해군이 모반을 꾀하니 절도(絶島)에 유찬해야 한다’고 밀고(密告)하자, 공은 사은(私恩)을 온전히 할 것을 청하였는데, 논자(論者)들이 역적을 비호한다고 공을 지목함으로써, 사은을 온전히 하라는 말이 끝내 선류(善流)들의 화근(禍根)이 되고 말았다.
4월에는 좌의정이 되어 도체찰사를 겸하고 총호사(摠護使)가 되었다. 6월에는 목릉(穆陵)의 봉분(封墳)을 마치자마자 삼사가 임해군을 죽이기를 청하고 또 상부(相府)가 정쟁(廷爭)하지 않은 것을 허물하였으며, 정인홍은 이를 이어서 사은을 온전히 하라고 한 잘못을 배척하였다. 그러자 공이 차자를 올려 두 번이나 사직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신해년에는 정인홍이 봉소(封疏)를 올려 회재(晦齋)와 퇴계(退溪) 두 선생을 문묘(文廟)에 종사(從祀)해서는 안 된다고 대단히 헐뜯었으므로, 성균관(成均館)의 유생(儒生)들이 상소하여 그것을 변명하고 정인홍을 유적(儒籍)에서 삭제하였다. 그러자 정인홍의 무리인 박여량(朴汝樑)이 그 사실을 폐주에게 고자질하여 아뢰니, 폐주가 정인홍의 삭적(削籍)에 대한 의논을 수창한 자를 조사해 내어 금고(禁錮)시키도록 하였다. 그러자 공이 경악하여 망국적인 거조라고 말하고, 밤새도록 차자를 작성하여 새벽에 올렸다. 제생(諸生)들은 이때 폐주의 명을 듣고 일제히 성균관을 비우고 나가 버렸으므로, 공이 또 차자를 올려 그 사실을 진술하였다. 그 후 인대(引對)할 때에 미쳐서는 회재에 관한 일을 네 조목으로 갖추 기록하여 올렸는데, 정인홍이 이로 말미암아 공에게 대단히 앙심을 품었다. 그래서 돌발적인 화의 조짐이 점차 일어남으로써 명경 선사(名卿善士)들이 발을 포개고 숨을 죽이는 가운데 참소가 고슴도치 털처럼 수없이 모여들어 공을 밀어내는 것을 급선무로 삼아서, 이에 체찰부(體察府)의 병권(兵權)이 너무 중하다는 말을 제창하여 기필코 공을 사지(死地)에 빠뜨리려고 하였다. 그리하여 공은 날마다 떠나기를 요청하는 것만 일삼았는데, 마침내 임자년에 이르러 김직재(金直哉)의 무옥(誣獄)이 일어나게 되었던 것이다. 폐주는 날마다 국청(鞫廳)에 나가서 털끝만한 것 이상의 일은 모두 몸소 결단하였으므로, 공이 일에 따라 억울한 사연들을 바로잡아 구원하였다. 이때 시인(詩人) 권필(權鞸)은 시(詩)로 죄를 얻어 함께 체포되어 신문을 받았는데, 공이 자리를 옮겨서 간절히 간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그리고 한 술관(術官)이 천도(遷都)의 설(說)을 올린 자가 있어, 재신(宰臣)들이 대부분 그 설에 부화뇌동하여 상의 뜻에 영합하였는데, 공이 직언(直言)으로 그 설을 거절하였다.
이해 4월에는 박응서(朴應犀)가 상변(上變)하였는데, 일을 차마 말할 수도 없는 것이 무신년의 일보다 혹렬하였다. 그 피고(被告) 가운데 무인(武人) 정협(鄭浹)이란 사람이 있었는데, 공은 평소 알지 못한 사람이었다. 다른 대신(大臣)이 그를 천거함에 따라 공이 그를 변방의 수령에 의용(擬用)했을 뿐이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사련(辭連)으로 연좌되자, 공은 조정에 나가지 않았다. 이때 삼사가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죽이기를 청하였는데, 정부(政府)에서는 정청(廷請)의 거조가 없었으므로, 재신(宰臣) 두 사람이 잇달아 밤낮으로 공의 처소에 찾아와서 화복(禍福)으로 달래었는바, 그 협박적인 말들은 사람으로 하여금 머리털이 곤두서게 하였다. 그리하여 자제(子弟)들이 울면서 서로 번갈아 간하자, 공이 수염을 쓰다듬으면서 의연히 말하기를, “나는 양조(兩朝)에서 은혜를 입어 재상 지위에 오른 지 16년이 되었는데, 어찌 거의 죽게 된 나이에 스스로 더러운 이름을 취하여 양조의 은혜를 깊이 저버릴 수 있겠느냐.” 하니, 그 재신이 공의 마음을 돌릴 수 없음을 알고 한음(漢陰)에게로 가서 또한 공에게 말한 것처럼 하였다. 후일에 공이 한음과 함께 국청(鞫廳)에 있을 적에, 대관(臺官)이, 대신(大臣)이 복합(伏閤)하지 않았다는 것으로 드러내어 배척하자, 한음이 공에게 말하기를, “자네는 장차 어떻게 하려는가?” 하니, 공이 말하기를, “나의 의논은 무신년의 의논에 있네.” 하였다. 옥사(獄事)가 날로 급해지고 화염(禍燄)이 날로 일어나서 대관 정조(鄭造), 윤인(尹訒) 등이 앞장서서 폐모론(廢母論)을 주창하자, 공이 한음에게 말하기를, “내가 죽을 곳을 얻었네.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위해서 죽는다면 용맹을 손상할 것이거니와, 모후(母后)를 위해서 죽지 않는다면 의리를 손상하게 될 것이네. 어찌 차마 우리 임금으로 하여금 정조, 윤인에게 가리운 바가 되어 천하 후세에 누(累)를 끼치게 할 수 있겠는가. 지금 사람들이 이미 《춘추(春秋)》를 속여 인용하고 있는데, 나도 《춘추》를 조금은 익혔으니, 의당 경(經)을 인용하여 의리에 의거해서 그들의 사설(邪說)을 깨뜨려야겠네. 그들이 말하는 역적에 대해서는 참으로 역적임을 보지 못했기 때문에 감히 신하를 토벌하지 못하고 임금의 어머니를 폐하려는 것이니, 그들이 참으로 역신(逆臣)일세. 혹 헌의(獻議)를 하게 되면 한 장의 차자를 올려야겠네.” 하고, 이날 저녁에는 집에 가서 조의(朝衣)도 벗지 않고 외랑(外廊)에 앉아 있었다. 그러자 자제들이 그 까닭을 물으니, 공이 말하기를, “삼강(三綱)이 절멸되었는데, 나는 불세(不世)의 지우(知遇)를 입은 대신(大臣)으로서 어찌 남은 목숨을 아끼어 이 광경을 차마 볼 수 있겠느냐. 의당 들것에 실린 시신(尸身)으로 돌아오기를 기할 뿐이다.” 하였다. 대사헌 최유원(崔有源)이 와서 공을 만나자, 공이 말하기를, “만대(萬代)에 숭앙(崇仰) 받는 일이 이번 거조에 달려 있다.” 하였는데, 최유원은 본디 공을 존경해 왔던 터라, 이에 의논을 결정하여 2, 3인의 동료와 함께 정조, 윤인과 의논을 달리하였으니, 그 즉시 모후를 폐하지 않은 것은 바로 공의 말 때문이었다. 그러나 공이 소(疏)를 작성하여 한음에게 보여서 다듬어 놓고 기다리던 중에 공이 일찍이 정협(鄭浹)을 천거했다는 이유로 탄핵을 받고 떠남으로써 일을 이미 이룰 수 없게 되었다. 폐주가 마침내 공의 상직(相職)을 체직시키고 서추(西樞)에 임명하였다.
을묘년에는 공의 장자 성남(星男)이 적노(賊奴)의 고발로 인하여 하옥(下獄)되자, 가인(家人)이 세속을 따라 뇌물을 쓰자고 청하니, 공이 정색을 하면서 그리 하지 못하게 하였는데, 옥사가 이윽고 변백(辨白)되었다. 겨울에는 정인홍이 상소하여 공의 죄가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고 말하자, 삼사가 공을 삭출(削黜)할 것을 청하였는데, 그 상소문은 궁중에 두고 내리지 않았다.
공은 동쪽 교외에 셋집을 얻어 우거하다가 망우리(忘憂里)에 조그마한 집을 짓고 그 곳으로 옮겨 가 살았는데, 얼굴에 조금도 근심스런 빛이 없이 산수(山水) 사이를 배회하였고, 거친 음식도 넉넉지 못했으나 마음 편히 지냈다. 한번은 청평(淸平)의 수석(水石)이 뛰어나다는 말을 듣고 노새[騾]를 타고 가서 완상하면서 전부 야로(田夫野老)들과 섞여 놀았는데, 아무도 공이 귀인(貴人)인 줄을 알지 못했다.
정사년 11월에는 폐모론(廢母論)이 마침내 결정되어 이이첨(李爾瞻), 김개(金闓), 허균(許筠) 등이 역적 무리들을 불러서 상소문을 들고 대궐로 들어갔는데, 외람되이 태학생(太學生)이라 칭하는 자들 또한 사주(使嗾)를 받고 모여들어 날로 그 수를 헤아릴 수가 없었다. 그래서 온 나라 안이 물끓듯 소란하고 생명을 가진 자마다 모두가 기(氣)를 잃어버렸다. 이때 공은 침식(寢食)을 모두 제대로 하지 못하면서 비분 강개해 마지않았는데, 갑자기 큰 천둥 소리가 집을 흔들자, 공이 말하기를, “하늘이 경계하여 고하는 것이다.” 하였다. 이윽고 추부랑(樞府郞)이 상지(上旨)를 가지고 와서 헌의(獻議)를 하게 하므로, 공이 한창 병을 앓던 중이라, 시자(侍者)가 붙들어 일으키니, 공이 붓을 휘둘러 다음과 같이 썼다.
“누가 전하를 위하여 이 계책을 냈는지 모르겠습니다. 요순(堯舜)의 도가 아니면 임금에게 말하지 않는다는 것은 옛날의 밝은 교훈입니다. 우순(虞舜)은 불행하여 완악한 아비와 어리석은 어미가 항상 우순을 죽이기 위해 우물을 파게 하고 창고를 수리하게 하였으니, 위태롭기가 또한 극에 달하였습니다. 그러나 우순은 부르짖어 울고 원망하면서도 사모하여 부모의 옳지 못한 점을 보지 않았습니다. 참으로 아비는 비록 인자하지 않을지라도 자식은 효도하지 않아서는 안 되기 때문에 《춘추》의 의리가 ‘자식은 어머니를 원수로 삼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더구나 《예기(禮記)》에 의하면 “공급(孔伋)의 아내가 된 사람은 분명히 공백(孔白)의 어머니이다.”라고 하였으니, 성효(誠孝)가 중한 곳에 어찌 간격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이제 효(孝)로써 국가를 다스리는 때를 당하여 온 나라 안에 장차 점차로 교화될 희망이 있는데, 이런 말이 어찌하여 전하의 귀에 들어갔단 말입니까. 지금에 하실 도리로 말씀드리자면, 우순의 덕을 본받아서 능히 효로써 화해시키고 차차로 다스려서 노여움을 돌려 인자함으로 변화시키시는 것이 어리석은 신의 바람입니다.”
이 의논이 들어가자, 보는 이들이 몹시 두려워하여 심지어는 몰래 서로 눈물을 닦는 이도 있었다. 삼사가 공을 절도(絶島)에 위리안치하기를 청하여 무릇 네 번이나 배소(配所)를 바꾸어 삼수(三水)로 결정하였는데, 폐주가 명하여 북청(北靑)으로 옮기게 하였다. 무오년 정월에 배소에 도착하였다. 3월에 병을 얻었는데, 이상한 꿈을 꾸고 말하기를, “내가 오래 가지 못하겠구나.” 하였다. 또 노추(奴酋)가 요광(遼廣) 지방을 침범하므로, 황조(皇朝)에서 우리 군대를 보내 달라고 요구했는데, 조정에서 허락하지 않았다는 소식을 듣고는 눈물을 흘리면서 말하기를, “나라가 다시는 경쟁(競爭)도 할 수 없게 되었다.” 하였다. 그로부터 이틀 뒤에 작고하니, 이달 13일이었고 향년이 63세였다. 공이 일찍이 가인(家人)에게 말하기를, “나는 나라를 잘못 섬겨 이런 견책을 입었으니, 내가 죽거든 조의(朝衣)로 염(殮)을 하지 말고 입고 있는 심의(深衣)와 대대(大帶)를 사용하라.” 하였다. 7월에 포천(抱川)의 선영(先塋)으로 운구(運柩)해 두었다가 8월에 참찬공(參贊公)의 묘(墓) 왼쪽 을좌(乙坐)의 언덕에 장사 지냈다.
앞서 도하(都下)의 인민들은 공이 유배된다는 소식을 듣고 위로는 조신(朝臣)으로부터 아래로는 여러 조(曹)의 고리(故吏), 시대(廝臺), 여졸(輿卒)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뵙기를 요청하였고, 일로(一路)의 촌민(村民)이나 여염집 부인들도 서로 다투어 와서 우러러 절하였으며, 선비로 일컬어지는 이들은 공의 풍의(風儀)를 사모하여 존경해서 본보기로 삼았다.
공이 작고함에 이르러 원근에서 부음(訃音)을 듣고 회곡(會哭)한 사람들로 말하자면, 부의(賻儀)를 가지고 와서 조문한 수재(守宰), 변장(邊將)과 제문(祭文)을 지어 가지고 와서 술잔을 부어 제사한 시골 사부(士夫)들이 그 얼마였는지 알 수 없었고, 초종(初終) 때부터 문 밖에 와서 지키고 있다가 빈소(殯所)를 마련한 뒤에야 돌아간 사람들 또한 그 얼마였는지 알 수 없었으며, 영남(嶺南)의 선비 중에는 평소 공과 서로 알지 못한 처지인데도 천리 길을 와서 부의한 이가 있었다. 장사를 마친 뒤에는 손수 술 한 잔, 고기 한 접시를 갖추어 3수(首)의 시(詩)와 제문(祭文)을 가지고 묘하(墓下)에 와서 곡(哭)하고 상주(喪主)도 만나지 않은 채 떠난 이가 있었는데, 그 또한 누구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리고 북청과 포천의 제생(諸生)들은 재목을 모아서 사우(祠宇)를 건립하고 공을 향사(享祀)하였는데, 조정에서 여기에 대해 금령(禁令)까지 내렸으나 끝내 저지할 수가 없었다. 아, 공이 무엇으로 사람들에게 이런 존경을 받았던가. 의열(義烈)이 충분히 사람을 감동시킬 만하였기에 인심을 깊이 속일 수 없었던 것이다. 누가 공론(公論)이 후세에 있다고 말하였던가.
공은 풍채가 엄중하고 도량이 활달하였으며, 널찍한 이마와 우뚝한 코에 뺨은 두툼하고 살결은 희었으며, 긴 수염은 이리저리 휘날렸다. 키는 보통 사람을 넘지 못했으나 기개는 온 세상을 덮었고, 행실은 외면적인 것을 꾸미지 않았으나 동작마다 규칙이 있었다. 월등하게 세속을 초월하였고, 여유 있게 사물에 잘 대처하였으며, 광명(光明)하여 잗단 일에 얽매이지 않았고, 정대(正大)하여 특별히 뛰어났으며, 마음이 안온하여 순리대로 처신하였고, 정취가 담박하여 때가 끼지 않았다.
그리고 선영을 받듦에 있어서는 의절(儀節)이 물(物)보다 돈독했고, 꾸밈은 정성에 가리워졌다. 임금을 섬김에 있어서는 범하면서 숨김이 없었고, 꺾이어도 지조를 바꾸지 않았다. 동기간에 우애함에 있어서는 큰형 받들기를 마치 어버이 섬기듯 하였고, 중형과 숙형을 마치 한몸처럼 대우하였다. 종족들과 서로 친함에 있어서는 빈궁한 이나 현달한 이에게 각각 도리를 다하였고, 소원하거나 친근함에 서로 간격이 없었다. 향당(鄕黨)에 있어서는 친구와의 사귀는 정을 변치 않았고, 지우(智愚) 간에 모두 원만하게 대하였다. 집에 있을 때에는 깊은 방구석을 마치 번화한 대로(大路)처럼 여기고, 침실(寢室)을 마치 조정처럼 여기어 매우 근신하였다. 관직을 수행함에 있어서는 마치 포정(庖丁)이 자유자재로 쇠고기를 바르듯, 편작(扁鵲)이 담장 너머에 있는 사람을 환히 보듯, 능란한 솜씨와 밝은 안목으로 여유 있게 처리하였다. 교제(交際)를 함에 있어서는 신의(信義)를 두터이 부지하고, 승낙(承諾)하는 것을 반드시 신중하게 하였다. 남에게 물건을 주거나 취함에 있어서는 청렴하면서도 명예를 취하려 하지 않았고, 구분을 하되 이견(異見)을 세우려고 하지 않았다. 집안을 위함에 있어서는 수묘(數畝)의 토지도 없고, 바구니에 남겨 준 돈도 없었다. 남의 시비(是非)를 논함에 있어서는, 선(善)을 좋게 여기는 데는 넉넉하고 악(惡)을 증오하는 데는 부족하였다. 훼예(毁譽)의 사이에 처신함에 있어서는 고운 것이나 추한 것이 밝은 거울에 거짓 없이 제대로 비치듯 하였다. 이상과 같은 여러 가지 아름다움을 갖추고 대절(大節)로 이것을 통괄하였으므로, 벼슬을 처음 시작한 때부터 선조(宣祖)에게 알아줌을 입었던 것이다.
임진년의 난리 때에는 분골쇄신토록 충성을 다하였으니, 첫째도 공심(公心)이요 둘째도 공심으로, 중병(中兵)을 총괄해서 거느리고 참혹한 난리를 평정해 내었다. 들어와서는 사류(士流)의 으뜸이 되고, 나가서는 사방 변방의 울타리가 되어, 마침내 왕운(王運)이 거듭 밝아지게 하고, 재상의 자리에 올라서 중흥(中興)의 원공(元功)이 되었으니, 그 위대한 사업(事業)은 충분히 당(唐) 나라 초기의 명상(名相)인 방현령(房玄齡), 두여회(杜如晦)와 서로 오르내릴 만하거니와, 정사년의 한 마디 말은 천지(天地)를 지탱시키고 일성(日星)처럼 빛나서, 몸은 비록 꺾이어 패했으나 인도(人道)가 이로 말미암아 서게 되었으니, 임진년의 공에 비하면 또한 더욱 훌륭하지 않겠는가.
공이 소싯적에는 기개와 의리로써 자부하다가 늦게야 학문을 좋아하였는데, 기해년에 상직(相職)을 해면한 이후로는 세상일을 끊어 버리고 경사(經史)에만 전념하였다. 그리하여 학문을 구하는 데 있어서는 전모수사(典謨洙泗)로부터 염락관민(濂洛關閩)에 이르렀고, 문장(文章)을 하는 데 있어서는 《좌전(左傳)》과 《국어(國語)》로부터 진한(秦漢) 시대의 문장까지 연구하여, 20년 동안을 일찍이 손에서 책을 놓은 적이 없었다. 자품이 고상하기 때문에 견해 또한 고상하였고, 욕심이 적기 때문에 이치가 절로 밝아졌다. 도(道)의 오묘함으로 말하자면 밝고 광대한 근원을 홀로 깨달았고, 실천한 것을 관찰해 보면 털끝만큼의 세세한 것도 놓치지 않았다. 조복(朝服)을 입고 묘당(廟堂)에 앉아 있으면 구정 대려(九鼎大呂)와 같은 존재였고, 옷깃을 풀어 헤치고 편히 쉬던 곳은 구학 운수(丘壑雲水)의 사이였다. 인품이 매우 고상하여 세속 밖에 뛰어났으니, 칼 차고 신 신은 채로 황각(黃閣)에 오르는 영광이나 영원토록 국가의 운명과 함께하는 공신(功臣)의 책록 같은 것들은 다만 공에게는 하나의 뜬구름일 뿐이었다. 그런데 세속의 천박한 자들이야 공의 깊이를 헤아리지 못한 것은 괴이할 것이 없겠으나, 비록 공을 안다고 칭하는 자들도 또한 공을 고작 세상 따라서 명성이나 세운 사람의 반열에 놓아 버리니, 사람을 알기가 참으로 쉽지 않도다.
조정이 당파(黨派)를 만들어 서로 다툰 지 40여 년 동안에 현불초(賢不肖)를 막론하고 누구나 어느 한쪽을 표방(標榜)하지 않은 사람이 없었으나, 공은 홀로 중립(中立)하여 한쪽으로 기울지 않아서 우뚝하기가 마치 태산 교악(泰山喬岳)과 같았으므로, 사람들이 감히 공을 헐뜯지 못하였다. 그런데 임인년 이후로는 시사(時事)가 날로 어그러져서 뭇 정인(正人)들이 자취를 감춤으로 인하여 공이 비로소 조정에서 편치 못하게 되었다. 그 후 비록 재차 상위(相位)에 오르긴 하였으나, 사양하고 떠나 버렸다. 그리고 폐주(廢主)의 초정(初政) 때에 다시 중서(中書)에 들어간 것은 선조(先朝)의 구신(舊臣)인 까닭에 마지못해서 다시 나갔던 것인데, 세도(世道)는 이미 크게 어긋나 버린 뒤였으니, 이것이 어찌 국가의 불행이 아니겠는가.
공은 문장(文章)에 대해서는 본래 하기를 탐탁지 않게 여겼으나, 법을 취한 것은 고아(古雅)하여 웅건하고 뛰어나서 스스로 일가(一家)를 이루었다. 그래서 장차(章箚) 등의 글은 품격이 높아서 위로 서한(西漢), 동한(東漢)의 문장에 근접하고 간혹 강좌(江左)의 기풍도 섞였으며, 척독(尺牘)은 명쾌하여 일정한 법식을 초월하였고, 필적(筆跡)은 호방하면서도 법칙이 있었다. 그리고 노자(老子), 장자(莊子)의 현방(玄放)함과 선도(仙道), 불도(佛道)의 묘오(妙悟)에 대해서는 그 본지(本旨)를 터득하지 못한 것이 없고, 천문 지리(天文地理)의 이론과 서화 의술(書畵醫術)의 기예까지도 모두 통효(通曉)하였으나, 더 끝까지 연구하지는 않았다. 일찍이 함양명(涵養銘)과 치욕(恥辱), 서상(書床), 양야(養夜), 계주(戒晝), 경석(警夕) 등 다섯 편의 잠(箴)을 지어서 스스로 일과(日課)의 수양 공부로 삼았다. 시문(詩文) 약간권(若干卷)과 조천창수(朝天唱酬) 1권, 주의(奏議) 2권, 계사(啓辭) 2권, 《사례훈몽(四禮訓蒙)》 1권, 《노사영언(魯史零言)》 15권이 집에 소장되어 있다. 공의 소싯적의 호는 필운(弼雲)이고 혹은 청화진인(淸化眞人)이라고도 칭하였는데, 만년에는 백사(白沙)라 호칭하였고 또는 동강(東岡)이라고도 불렀다.
아들이 두 명인데, 큰아들 성남(星男)은 음보(蔭補)로 벼슬하여 광흥창 수(廣興倉守)가 되었고, 다음 정남(井男)은 임자년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여 또한 군수(郡守)가 되었다. 딸 한 명은 윤인옥(尹仁沃)에게 시집갔다. 측실(側室)에서 낳은 아들이 두 명인데, 큰아들 규남(奎男)은 계축년 사마시에 합격하였고, 다음은 기남(箕男)이다. 딸이 두 명인데, 하나는 학관(學官) 권칙(權侙)에게 시집갔고, 하나는 어리다. 성남의 초취(初娶)는 판서 권징(權徵)의 딸로서 1녀 1남을 낳았는데, 딸은 진사(進士) 최욱(崔煜)에게 시집갔고, 아들은 시중(時中)이다. 계취(繼娶)는 판관(判官) 김계남(金季男)의 딸로서 4녀 3남을 낳았는데, 아들은 시정(時挺)이고, 나머지는 어리다. 정남은 참의(參議) 윤의(尹顗)의 딸에게 장가들어 1남 1녀를 낳았는데, 아들은 시술(時術)이고 딸은 어리다. 규남은 권대순(權大純)의 딸에게 장가들어 3남 1녀를 낳았는데, 아들은 시행(時行)이다. 기남은 박제남(朴悌男)의 딸에게 장가들어 1남을 낳았는데 어리다.
내가 소싯적에 청강(淸江)의 문하(門下)에서 공을 만났는데, 한 번 보고 즉시 망년교(忘年交)가 되었고, 그 후로 공과 한 골목에 마주하여 30년을 살았다. 생각건대, 공은 남을 쉽사리 허여하지 않았고, 나 또한 세인(世人)들과 잘 부합하지 못했는데, 공과는 형해(形骸)를 초월하여 서로 허여하여 정취와 의향이 간혹 말하지 않고도 서로 똑같을 때가 있었고, 만년에는 더욱 서로 계합(契合)하였다.
공은 매양 고금(古今)을 담론할 때마다 논의가 넘쳐나왔는데, 전인(前人)의 법칙을 답습하지 않고 스스로 가슴속에 주관을 세워서, 고명(高明)하고 투철(透徹)하면서도 처음부터 고현(古賢)에 위배된 적이 없었으니, 그 호쾌(豪快)한 자품은 근대에 보지 못한 것이었다. 나는 항상 세상에 나를 알아줄 이가 있는 것을 다행으로 여겼었는데, 공이 떠남으로써 나 혼자 외롭게 될 줄을 누가 생각이나 했겠는가. 그래서 나는 일찍이 공을 논하기를, “공이 추로(鄒魯)에서 났더라면 조만(操縵)의 무리를 벗어났을 것이고, 열국(列國) 시대에 났더라면 거의 정(鄭) 나라 동리(東里) 자산(子産)의 정사(政事)를 했을 것이다. 문정공(文靖公) 사안(謝安) 같은 인품을 지녔으나 시대와 서로 맞지 않았고, 충헌공(忠獻公) 한기(韓琦) 같은 덕량(德量)이 있었으나 화(禍)의 그물에 걸렸다. 그렇다면 공보다 뒤에 나온 사람은 또한 조석간에 좋은 시대를 만나는 이도 있을 법하다.” 하였다. 인하여 기억하건대, 공이 유배되어 갈 때에 글에 이르기를, “오늘에야 요동공(遼東公) 적흑자(翟黑子)를 저버리지 않게 되었다.” 하였는데, 이는 한음(漢陰)을 가리킨 것이었으므로, 나는 여기에서 눈물을 줄줄 흘렸다. 나의 문장은 돈사(惇史)를 지을 수 없는 게 부끄러우니, 어떻게 공의 행적을 영원히 전하도록 할 수 있겠는가. 다음과 같이 명(銘)한다.

그 옛날 우리 선조 대왕께서 / 昔我宣祖
훌륭한 덕으로 왕위에 올라 / 秉德當乾
영재를 기르고 축적하기를 / 毓才貯英
밭에서 곡식 가꾸듯이 하여 / 若苗藝田
제철에 비 내려 적시어 주고 / 時雨膏之
따스한 바람으로 잎 피우니 / 條風發之
오직 이때 뛰어난 선비들이 / 惟時髦俊
배출하여 창성한 시대 이뤘네 / 蔚乎昌期
이때에 누가 그 으뜸이었던고 / 孰爲其宗
바로 우리 이공이었다네 / 曰我李公
아, 왕께서 공에게 명을 내리되 / 繄王有命
군신 간에 우리 서로 계합하니 / 契合昭融
동관의 빛나는 저 서적들을 / 煌煌東觀
너는 모두 융회 관통할 것이요 / 汝其會通
나에게 화려한 곤룡포 있으니 / 我有華袞
네가 분미를 수놓아 꾸미어라
/ 汝其粉米
국운이 큰 재액을 만났으니 / 邦運百六
홍수를 누가 건네 줄꼬 하였네 / 滔天疇濟
그래서 공은 배와 노가 되어 / 公爲舟楫
해진 옷으로 물 샌 틈을 막으니 / 繻有衣袽
임금의 자리가 다시 안정되고 / 斗極天奠
국운이 처음같이 되었도다 / 國步如初
왕이 이르되 네가 가상하구나 / 王曰汝嘉
너는 나의 팔이요 다리로다 / 汝我股肱
무슨 직임을 너에게 줄거나 / 畀之伊何
영상의 직임을 받아라 하고 / 元輔是膺
공을 맨 뒤에까지 남겨 두어 / 遺之于後
국가의 원대한 계책 돕게 했네 / 卑贊洪圖
옛날의 인재를 이미 거두어서는 / 故劍旣收
큰 계책을 거의 펴게 되었는데 / 庶展訏謨
일이 그렇지 못한 게 있었으니 / 事有不然
세상은 창날이요 공은 방패였네 / 世矛公盾
그래서 지주가 중간에 꺾어지고 / 砥柱中摧
정승의 별이 밤중에 떨어졌도다 / 台階宵隕
그 변론한 말은 하도 당당하여 / 其說堂堂
소인들의 예봉을 꺾었거니와 / 折彼之角
그 절의는 이와 같이 우뚝하니 / 其節卓卓
참소한들 무슨 소용이 있으리요 / 何有謠諑
아, 훌륭하신 선조 대왕이여 / 於皇宣祖
선조 대왕께는 신하가 있었도다 / 宣祖有臣
금석은 혹 부스러지기도 하련만 / 金石或泐
해와 달은 영원히 새로우리라 / 日月長新
삼대를 추존하고 제사를 내리니 / 貤官賜祭
성대한 예가 이에 두루 미쳤네 / 殷禮斯溥
천도는 본디 미리 정해진 것이라 / 天固有定
은혜가 실로 특별한 대우였도다 / 恩實異數
영화가 공에게 무슨 상관이며 / 榮於公何
욕됨이 공에게 무슨 상관이리요 / 辱於公何
영화와 욕됨이 가거나 오거나 / 榮辱去來
공에게는 좋고 나쁠 게 없어라 / 公不少多
천지간에 하나의 참다운 것 / 一味眞腴
신령한 성정은 온전히 지니었고 / 靈性則全
탁세에 남은 쓸모 없는 공명은 / 濁世粃糠
섶 다 타도 불은 전하듯 할 뿐이네 / 火盡薪傳
공은 서쪽 바다로 동쪽 바다로 / 咸池扶桑
바람을 타고 훨훨 날아다니리 / 乘風飄然
후일에도 백세가 돌아올 게고 / 百世在後
이전에도 백세가 지나갔는데 / 百世在前
공은 그 사이에 있어 / 公在其間
하늘과 사람에게 부끄럽지 않도다 / 不愧不怍
내가 명을 지어 후세에 알리노니 / 我銘詔之
사리에 어두운 자들이 진작하리라 / 昧者其作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영의정 겸 영경연홍문관예문관춘추관관상감사 세자사 신흠(申欽)은 찬(撰)하다.

[주D-001]정의(亭疑) : 의법(疑法)에 대해서는 고사(故事)에 의거하여 균평하게 조정하는 것을 말한다.
[주D-002]생의(生議) : 미결수(未決囚)에 대하여 되도록 죽이지 않기 위해서 사죄(死罪) 이하로 논죄(論罪)하는 것을 가리킨다.
[주D-003]중획(重獲) : 원래의 뜻은 거듭 찾는다는 의미인데, 춘추 시대(春秋時代)에 진(晉) 나라 대부(大夫) 봉씨(逢氏)가 패전(敗戰)하여 두 아들을 전차(戰車)에 태우고 도망하다가, 두 아들이 다른 사람을 구하고자 차에서 내리려고 하므로, 봉씨가 말하기를, “내가 저 나무 밑에서 너희들의 시체를 거듭 찾으리라[重獲在木下].” 하고, 두 아들을 내려 주었는데, 과연 두 아들이 다음날 그 나무 밑에 죽어 있었다는 고사에서 온 말로, 여기서는 곧 반드시 죽겠다는 의지를 표명한 것이다. 《左傳 宣公 十二年》
[주D-004]조만(操縵)의 무리 : 조만은 거문고의 줄을 조정해서 음색(音色)을 고르게 타는 것을 이른다. 옛날 태학(太學)의 교육에서, 가령 거문고를 배울 경우에는 거문고의 줄을 조정해서 음색을 고르게 하지 못하면 거문고를 자유자재로 탈 수 없다고 하였다. 조만의 무리를 벗어난다는 말은 곧 도학(道學)의 경지가 높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禮記 學記》
[주D-005]요동공(遼東公) …… 되었다 : 위 태무제(魏太武帝) 때에 요동공 적흑자(翟黑子)가 포(布) 천 필을 뇌물로 받았는데, 그 사실이 발각되자, 적흑자가 저작랑(著作郞) 고윤(高允)에게 꾀하여 말하기를, “주상(主上)께서 물으시면 사실대로 고해야겠는가, 숨겨야겠는가?” 하니, 고윤이 말하기를, “공은 유악(帷幄)의 총신(寵臣)으로서 죄가 있으면 사실대로 고할 경우 혹 용서를 받을 수도 있겠거니와, 거듭 주상을 속여서는 안 된다.” 하였는데, 적흑자는 끝내 사실대로 고하지 않아서 죽고 말았다. 그 후 고윤이 사초(史草)에 관한 일로 최호(崔浩)와 함께 잡혀 죽게 되자, 태자(太子)가 고윤을 살리고자 하여, 고윤에게 최호에게만 덮어씌우고 자신은 관여하지 않았다고 발뺌을 하도록 권하였으나, 고윤은 임금 앞에 불려 가서 자기가 관여한 것을 사실대로 말하니, 임금이 신의 있고 정직한 사람이라 하여 죄를 용서해 주었는데, 고윤이 물러나와서 다른 사람에게 말하기를, “내가 동궁(東宮)의 지시를 따르지 않은 것은 적흑자를 저버리게 될까 두려워해서였다.” 한 데서 온 말이다.
[주D-006]돈사(惇史) : 덕행(德行) 있는 이의 언행(言行)을 기록하여 후인(後人)들의 본보기가 되게 하는 것을 말한다.
[주D-007]화려한 …… 꾸미어라 : 신하가 임금을 지성으로 보좌하는 것을 이른다. 순(舜) 임금이 우(禹)에게 이르기를, “신하는 바로 나의 팔다리요 귀와 눈이다 …… 내가 옛사람의 모습을 보아서, 해[日]와 달[月]과 별[星辰]과 산(山)과 용(龍)과 꿩[華蟲]을 무늬로 만들고, 종묘의 술그릇[宗彛]과 물풀[藻]과 불[火]과 흰쌀[粉米]과 보[黼]와 불[黻]을 수놓아 옷을 만들고자 하니, 네가 그것을 만들어다오.” 한 데서 온 말인데, 특히 흰쌀은 백성을 기르는 의미를 취한 것이라 한다. 《書經 益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