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석문 신도비 등/증 영의정 이몽량 신도비

이항복의 모 최씨(?-1571) 훌륭한 자녀교육을 실천한 지혜로운 어머니

아베베1 2011. 5. 22. 12:52

이항복의 모 최씨(?-1571)     훌륭한 자녀교육을 실천한 지혜로운 어머니     글:이배용

조선시대 어머니들의 교육열과 최씨부인
훌륭한 인물 뒤에는 반드시 훌륭한 어머니가 있듯이 조선시대에도 여성들 자신이 직접 공식적인 교육의 혜택을 받지는 못했으나 어머니들의 자식에 대한 교육열은 대단하였다. 아이가 천자문을 떼고 「동몽선습(童蒙先習)」을 읽으면서 한 단계씩 올라갈 때마다 '책거리'라 하여 떡을 하고 마을잔치를 벌여 아들에 대한 학습독려를 하였다. 그것은 어머니가 아들의 학습진도를 점검하는 역할도 되었던 것이다.
자식에 대한 어머니들의 교육적 정성은 양반가문의 유지를 위해서 필수적인 것이었다. 조선왕조는 유교(성리학)를 지배이념으로 하는 양반 중심사회로서 출세의 가장 궁극적인 목표는 관직을 얻는 것이었고, 그것의 가장 중요한 기능은 과거제도였다. 즉 과거시험을 통해 관직제수를 받는 길만이 양반가문을 유지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다. 왜냐하면 대체로 양반가문이라 하면 4조(4祖: 아버지, 할아버지, 증조할아버지, 외할아버지)이내에 관직자가 있어야만 지역사회에서 인정을 받고 행세를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관직을 얻으려면 과거시험에 합격을 하여야 하고 과거시험에 합격하려면 부단히 학문을 연마해야만 가능할 수 있었던 것이다. 바로 이러한 자식에 대한 일차적인 학문의 독려는 어머니에게 책임이 돌아갔으며, 따라서 여성들은 가문의 영광을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였다. 또한 당시 어머니들의 자녀교육에 대한 열의는 자식을 올바른 사회인으로 키우는데도 각별한 관심을 기울였음에 주목하여야 할 것이다.
바로 이항복의 어머니 최씨는 누구보다도 극진한 정성과 올바른 마음가짐으로 아들을 가르쳐 조선 중기에 이항복은 명재상과 청백리로 이름을 날리게 되었다.
이항복(李恒福, 1556~1618)은 자는 자상(字常), 호는 필운(弼雲), 또는 백사(白沙)로 많이 알려져 있는데, 고려 말기의 유명한 학자 이제현의 후예로서 참찬 벼슬에 있던 아버지 몽량과 어머니 최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지금의 서울 필운동은 그가 탄생한 곳이며 그의 호를 따서 붙인 이름이다.
그림설명:오성대감으로 잘 알려진 이항복의 초상. 한음 이덕형과의 우정은 유명하다.


도덕적 수양과 근검절약 정신 가르쳐
태어날 때부터 남다른 데가 있어 이틀동안 젖을 먹지도 않고 사흘동안 지도 않아서 모두 근심한 나머지 점장이를 불렀는데, 점괘를 떼어놓고 보던 소경은

"걱정할 것 없습니다. 장차 대단히 귀하게 될 점괘입니다."
라고 하며 오히려 경하해 마지않았다 한다. 오성 이항복은 9살 때 아버지를 여의었는데 어머니 최씨는 아들을 아버지없이 키우는 데 버릇없이 자라지 않도록 엄격하게 교육시켰다. 이항복은 오성부원군에 봉군되었기 때문에 이항복이나 백사보다 오성대감으로 널리 알려졌는데, 특히 어렸을 때 성격이 호방하여 동네 개구쟁이로 소문이 나 있었으며, 죽마고우인 한음 이덕형과 기지와 장난으로 얽힌 허다한 이야기로 잘 알려져 있다. 그의 어머니는 성격이 자유분방하여 학문에 마음을 못 붙이는 아들을 독려하여 도덕적인 수양과 경제적으로 근검절약하는 정신, 그리고 위기에 대처하는 능력을 가르쳤다.
하루는 항복이 대장간에서 버린 쇳조각을 주어모아 집에 와서 그냥 뜰에 던져버린 것을 보고 부인은 아들에게

"이 쇠가 귀한 것이고, 또 이렇게 적은 것이라도 송곳같은 것을 만들 수 있으며, 만일 탄환을 만들면 나라를 위해서 크게 쓸모있는 것이니 버리지 말아야 한다."
고 타일렀다. 이후 항복은 대장간 근방에서 버린 쇳조각을 계속 모아 3년만에 큰 독으로 셋이나 만들었다. 그런데 어느 날 항복이 어머니에게 여쭙기를 대장장이가 술과 도박이 심하여 밑천까지 모두 날려 버리고 불쌍하게 되었으니 저 쇳조각을 돌려주는 것이 어떠한 가를 의논하였다. 그렇지 않아도 아들이 자기가 모은 쇳조각을 어떻게 처리하는가를 살피던 차에 아들이 이렇게 물으니 대단히 기뻐하며 허락하였다. 그 후 대장장이는 감격하여 술을 끊고 일을 열심히 하였고, 이항복을 존경하게 되었다. 말년에 이항복이 정적들의 음모로 북청으로 귀양갈 때 대장장이는 이항복이 무사할 수 있도록 극진히 호위했다. 이렇게 어머니의 감화는 아들 뿐 아니라 이웃사람들에게까지도 미치게 되었던 것이다.
최씨부인의 손위 오라버니가 같은 마을에 살았는데, 부인이 그 오라버니를 뵈러갈려면 반드시 종이 옆에 있어야 만나고 그렇지 않으면 만나지 않았다. 이것은 비록 남매간이라도 남녀유별의 예를 지키고자 함이었다. 최씨부인은 일찍이 딸들에게도 특별히 훈계하였다.


“비록 남매 사이라도 함부로 지껄이며 웃고 희롱해 예절을 손상케 하지 말아라. 누울 때나 앉을 때나 말할 때도 각별히 삼가서 분별있게 하도록 하라."
고 가르쳤다.
또한 항복이 집안에서 부녀자를 상대로 하여 자라는 것이 나약하게 될까 우려하여 절간에 공부하러 보냈다. 항복은 며칠에 한 번씩 어머니께 편지를 보냈는데 최씨부인은 그 편지를 읽고 아들의 공부가 진척되는 정도를 알았다. 편지의 내용이 지나치게 어머니를 위로하고 정에 기울어지거나 또는 편지의 글씨 범절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편지 구절에 붉은 줄을 치고 고쳐서 보내기도 하였다.
또 하나의 일화는 오성이 열 두세 살 때 일이었다. 밖에 나갈 때에 새 옷을 입고 나갔는데 돌아올 때는 옷과 신을 벗어 모두 남을 주고 돌아왔다. 이것을 본 부인이 어찌 된 일이냐고 물었다.   오성은 태연하게,

"함께 놀던 옆집 아이가 좋은 옷을 심히 부러워하기에 벗어 주고 왔습니다."
하고 대답했다.   어머니가 이에 가르치기를,

"네가 한 일이 결코 잘못된 일은 아니지만 그러나 반드시 좋은 일은 아니다. 왜냐하면 그 아이가 의복이 없어 헐벗고 추위에 떨고 있다면 몰라도 남의 새옷을 탐내는 것에 옷을 벗어주면 그것이 습관이 될 수 있어 남을 도와주는 것이 잘못하면 도리어 도와주지 않는 것만 같지 못할 때도 있는 것이다."   라고 지적하였다.

어머니의 감화로 아들이 재상까지 올라
이렇게 항복은 어렸을 적부터 호방한 기질로 많은 친구들과 어울리면서 장난이 심해 어머니는 이를 크게 걱정하여 여러모로 타일렀지만 그래도 듣지 않자 하루는 집안 사당 앞에 가서 흰옷을 입고 식음을 전폐하고 머리를 풀어 조상께 칼을 앞에 놓고 엎드려 자식 잘못키운 것을 사죄하였다. 마당으로 장독으로 뛰어다니면서 놀던 항복이 이를 보고 어머니가 자결하려는 줄 알고 소스라치게 놀라 어머니 앞에 가서 땅에 엎디어 이마를 조아리고 이후부터는 절대로 한눈 팔지 않고 공부에만 전념하겠으니 제발 한 번만 용서해 달라고 빌었다.
이에 어머니가 타이르기를,

"아버지 없이 너를 기르는 동안 나 자신이 교육을 잘못한 탓이다. 자식을 잘못 기른 죄로 조상앞에 갈 면목이 없어 죽지도 못할 죄인이니 내 잘못을 이 칼로 머리를 삭발하여 조상께 사죄드리려 하는 것이다. 남자가 호탕하고 의리에 강한 것은 말할 수 없이 좋은 일이나 그 호탕함이 충분한 인격과 교양으로 받쳐지지 못하면 일개 한량으로 이름을 날릴 뿐 장래 사회에 공헌할 큰 재목이 될 수 없다."
라고 하니 항복은 이 말을 듣고 더욱 송구하고 부끄러움을 금치 못하여 자기 잘못을 크게 뉘우치고 어머니의 근심을 덜어드릴 것을 굳게 약속하였고, 이후 학문에만 전념하여 드디어 과거에 급제하고 주요 관직을 두루 거쳐 영의정까지 올라갔다. 그의 강직하고 바른 정신은 많은 사람들의 존경과 흠모를 받았다.
어머니 최씨는 항복이 16살 때 세상을 떠났지만 자라는 동안 가르친 어머니의 끊임없는 감화는 훗날 항복이 재상까지 올라 임진왜란 때 국가적 위기에서 구국에 앞장서며 많은 업적을 남기는 데 초석이 되었던 것이다.
  출처:한국역사속의 여성인물 상/ 한국여성개발원, 1998, 도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