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석문 신도비 등/증 영의정 이몽량 신도비

선부군(先府君)의 갈음명(碣陰銘) 이몽량

아베베1 2013. 3. 3. 13:39


 
백사집 제3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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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묘갈(墓碣)
선부군(先府君)의 갈음명(碣陰銘)

생각건대, 우리 이씨(李氏)는 신라 때부터 비롯하여 휘 알평(謁平)이 왕가(王家)의 기반을 창립시켰다. 휘 성무(成茂)에 이르러서는 안동 판관(安東判官)을 지냈고, 성무가 휘 예신(禮臣)을 낳았는데, 예신은 진사로 마치었으나, 손자가 귀현하게 됨으로 인하여 이조 판서, 찬성에 연해서 추증되었다. 예신이 전주 최씨(全州崔氏)에게 장가들어 휘 몽량(夢亮)을 낳았다.
몽량은 기미년에 태어나서, 임오년에 생원, 진사를 하고, 무자년에 명경(明經)으로 급제하여 좌우(左右)의 사관(史官)으로 이름을 떨치고, 병조, 형조, 예조에 들어가 낭료(郞僚)에 충원되었고, 사헌부, 사간원에서는 안색을 바르게 하고 직무를 수행했으며, 경성(鏡城)과 나주(羅州)에 나가서는 선정을 베풀어 명성이 있었다. 동부승지와 병조 참지(兵曹參知)를 역임하고, 관동(關東)ㆍ호서(湖西)ㆍ영남(嶺南) 삼도(三道)의 관찰사가 되었을 적에는 백성들이 감당(甘棠)으로 송덕(頌德)하였는데, 이것이 경기 지방에까지 미쳤다. 들어와서는 도승지가 되고, 가선(嘉善)이 된 지 오랜 동안에 대사간을 두 번, 대사헌을 세 번 역임하고, 병조와 예조의 참판,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을 거쳐 형조에 들어가서 파면되었다가, 뒤에 참찬(參贊)으로 소명(召命)을 받았다. 갑자년 10월 4일에 양영(兩楹)의 꿈을 꾸고 집에서 작고하였다. 묘소는 추동(楸洞)에 있고 향년은 66세였다.
전후(前後) 두 비(妣)가 여덟 남녀를 둔 가운데 아들이 넷이다. 전비(前妣) 이씨의 소생은 현령 운복(雲福)과 김익충(金益忠), 홍우익(洪友益)에게 시집간 두 딸이다. 전주 최비(全州崔妣)의 소생은 별좌(別坐) 산복(山福)과 감역(監役) 송복(松福), 그리고 가장 막내가 나인데, 나는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배움의 기회를 잃었고, 두 딸은 민선(閔善)과 유사원(柳思瑗)의 아내가 되었다. 편방(偏房)에서 낳은 두 아들은 경복(鏡福), 다복(多福)이다.
현령 계남(桂南), 좌랑 탁남(擢男)과 유사경(柳思璟)의 아내는 운복의 소생이고, 이천준(李天駿)의 아내와 서남(庶男), 주남(宙男)은 산복의 소생이며, 현감 성남(星男), 사인(士人) 정남(井男), 윤인옥(尹仁沃)의 아내와 서제(庶弟) 규남(奎男), 기남(箕男)과 두 딸은 항복(恒福)의 소생이다. 시중(時中)과 시술(時術)은 성남과 정남의 소생이다. 선명(善明)이란 자는 홍우익의 손자이다. 박동량(朴東亮)과 주부(主簿) 부( )는 민선과 유사원의 소생이고, 인남(仁男), 의남(義男), 지남(智男)은 경복의 세 아들이다. 미(瀰), 의(漪)와 이명한(李明漢)의 아내는 동량의 소생이고, 인배(仁培)란 자는 부의 소생이다.

세계와 이력을 / 世系履歷
대략 이상과 같이 서술하고 / 略序如右
삼가 비갈의 동쪽에 기록하여 / 竊假碣背
영원히 전하기를 도모하되 / 以圖不朽
사랑하기에 이것을 기록하지만 / 愛斯錄之
어버이라고 과분한 말 하지 않았네 / 親不溢辭
공훈이나 덕업에 대해서는 / 若功若德
신도비가 세워져 있으니 / 神道有碑
상고하고자 하는 이가 있거든 / 有欲考之
여기에서 고증하기 바라노라 / 請徵於斯
은혜가 하늘처럼 끝이 없어라 / 昊天罔極
아, 슬프도다 / 嗚呼嚱噫

[주D-001]감당(甘棠)으로 송덕(頌德)하였는데 : 백성들이 시정자(施政者)의 덕을 앙모하는 것을 비유한 말로, 주(周) 나라 소공(召公)의 선정(善政)에 감격하여 백성들이 소공이 일찍이 쉬어간 자리의 감당(甘棠)나무를 소중히 여겨 노래한 《시경(詩經)》의 감당시에서 온 말이다.
[주D-002]양영(兩楹)의 꿈을 꾸고 : 사람이 곧 죽게 됨을 비유한 말로, 공자(孔子)가 이르기를, “어젯밤에 내가 두 기둥[兩楹] 사이에 앉아서 궤향(饋饗)을 받는 꿈을 꾸었으니 …… 내가 장차 죽을 것이다.”고 한 데서 온 말이다.《禮記 檀弓》