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현(崔晛)
조선 선조(宣祖)-인조(仁祖) 때의 문신·문인. 본관은 전주(全州). 정구(鄭逑)의 문인으로,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의병을 일으켜 공을 세움. 《선조실록(宣祖實錄》편찬에 참여하고, 강원도 관찰사(江原道觀察使) 등을 지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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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정 때 재상ㆍ전조(銓曹)ㆍ삼사(三司) 및 당상 실직(堂上實職)과 당하 청직(堂下淸職)을 개정한 좌수(座首)〉 |
영의정 박승종(朴承宗)3월 14일 자살. 대(代) 이원익(李元翼)15일 정사에, 귀양중.
좌의정 박홍구(朴弘耈)3월 17일 합계로 갈렸다가 뒤에 파출. 대 정창연(鄭昌衍)23일 정사에, 파산(罷散)중.
우의정 조정(趙挺)4월 초 5일 합계로 삭직. 대 윤방(尹昉)22일 정사에, 산관이었음.
좌찬성 차출하지 않았음.
우찬성 이상의(李尙毅)4월 23일 부계(府啓)로 논박되어 갈렸음.
좌참찬 이경전(李慶全)주문사로 체직. 대 이시언(李時彦)5월 4일 정사에, 파직.
우참찬 오윤겸(吳允謙)
이조 판서 이광정(李光庭)물의가 있어 갈렸음. 대 신흠(申欽)15일 정사에, 파직중.
호조 판서 김신국(金藎國)3월 16일 평안 감사, 뒤에 나포되어 삭직. 대 이서(李曙)장단 부사로 공신, 3월 17일 정사에.
예조 판서 임취정(任就正)3월 17일 원계로 체직, 뒤에 원찬(遠竄). 대 이정귀(李廷龜)16일 정사에.
병조 판서 권진(權縉)3월 17일 원계로 체직, 뒤에 위리안치. 대 김유(金瑬)파산(罷散)으로 공신, 병조 참판에서 승직.
형조 판서 한찬남(韓纘男)복주(伏誅). 대 서성(徐渻)15일 정사에.
공조 판서 이정귀(李廷龜)호조로 천직. 대 이흥립(李興立)17일 훈련대장. 공신.
판윤 윤선(尹銑)3월 18일 원계(院啓)로 체직. 대 이괄(李适)19일 정사에. 북병사, 공신.
대사헌 남근(南謹) 3월 15일 원계로 체직, 뒤에 원찬. 대 오윤겸(吳允謙)15일에 우참찬에서.
이조 참판 이귀(李貴)14일 정사에. 파직되어 산관, 공신.
호조 참판 권분(權昐)
예조 참판 윤휘(尹暉)3월 22일 합계로 파출, 뒤에 원찬. 대 이안눌(李安訥)15일 정사에 파산중.
병조 참판 박정길(朴鼎吉)3월 13일 복주. 대 김유(金瑬)14일 정사에.
형조 참판 최응허(崔應虛)3월 18일 원계로 체직, 뒤에 정배. 대 오백령(吳百齡)19일 정사에. 파산중.
공조 참판 조집(趙濈)
좌윤 박정현(朴鼎賢)사직. 체차. 대 권희(權憘)
우윤 장사철(張士哲)3월 18일 원계로 파출, 뒤에 원찬. 대 이경함(李慶涵)19일 정사에. 산직이었음.
도승지 이덕형(李德泂)3월 15일 홍문관에서 논박되어 체직. 대 이수광(李睟光)16일 정사에. 산직이었음.
좌승지 유진증(兪晉曾)위와 같음. 대 민여임(閔汝任)17일 정사에. 산직이었음.
우승지 정입(鄭岦)사직. 체자. 대 조우인(曺友仁).
좌부승지 박홍도(朴弘道)3월 14일 복주. 대 한여직(韓汝溭)17일 정사에. 산직이었음.
우부승지 권진기(權盡己) 대 정홍익(鄭弘翼)14일 정사에. 정배중.
동부승지 민성휘(閔聖徽)경상 감사로 나갔음. 대 신응구(申應榘)
이조 참의 이정원(李挺元)3월 13일 복주. 대 홍서봉(洪瑞鳳)16일 정사에 파산, 공신.
호조 참의 김대덕(金大德)사직. 체차. 대 권첩(權帖)
예조 참의 목장흠(睦長欽)3월 23일 부계로 파직. 대 홍방(洪霶)
병조 참의 백대형(白大珩)13일 복주. 대 이상길(李尙吉)17일 정사에. 산직이었음.
병조 참지 배대유(裴大維)18일 원계로 체직, 뒤에 삭판. 대 심집(沈諿)19일 산직.
형조 참의 이위경(李偉卿)13일 복주. 대 이신의(李愼義) 17일 정사에. 정배.
공조 참의 이익엽(李益燁)15일 복주. 대 김몽호(金夢虎)피핵 파출. 대 신경진(申景禛)25일 정사에. 우후, 공신.
부제학 정조(鄭造)14일 복주. 대 정경세(鄭經世)15일 정사에. 산직.
대사간 유대건(兪大建)15일 원계로 체직, 뒤에 삭출. 대 박동선(朴東善)15일 정사에. 산직.
대사성 이대엽(李大燁)15일 자살. 대 정홍익(鄭弘翼)17일 정사에. 정배중.
판결사 심종도(沈宗道)14일 체포, 뒤에 원찬. 대 윤안국(尹安國)17일 정사에. 정배.
직제학 한희(韓暿)14일 복주.
전한 차출하지 않았음.
집의 정도(鄭道)13일 위리안치. 대 김덕함(金德諴)14일 정사에. 정배중.
사간 임건(林健)13일 위리안치. 대 이성구(李聖求)13일 정사에. 산직, 사인(舍人)으로 옮겼음.
보덕 임성지(任性之)3월 21일 원계로 체직, 뒤에 정배.
겸보덕 윤지경(尹知敬)
사인 이성구(李聖求)15일 체직.
응교 한옥(韓玉)15일 원계로 파직, 뒤에 정배. 대 윤지경(尹知敬)15일 정사에.
장령 이시정(李時禎)13일 체포, 귀양. 대 김장생(金長生)14일 정사에.
곽천호(郭天豪)13일 원계로 파직, 뒤에 정배. 대 이명준(李命俊)15일 정사중에. 정배중.
필선 차출하지 않았음.
부응교 오환(吳煥)15일 원계로 체직.
검상 유활(柳活)18일 원계로 파출, 뒤에 위리안치.
이조 정랑 이원여(李元輿)13일 체포, 위리안치.
한정국(韓定國)14일 체포 복주.
교리 이경익(李慶益)15일 원계로 파직, 뒤에 삭출. 대 이민구(李敏求)17일 정사에. 산직이었음.
김시국(金蓍國)사신으로 나가 체직.
지평 정담(鄭湛)14일 체포, 위리안치. 대 조정호(趙廷虎)15일 정사에. 파산.
한정국(韓正國) 대 유백증(兪伯曾)15일 정사에. 공신.
헌납 임기지(任器之)14일 체포, 원찬. 대 정온(鄭蘊)15일 정사에. 정배중.
문학 차출하지 않았음.
겸문학 남명우(南溟羽)
부교리 한급(韓昅)14일 체포, 복주. 대 심광세(沈光世)15일 정사에. 정배중.
최호(崔護)15일 계파, 뒤에 위리안치. 대 조성립(趙誠立)19일 정사에. 파산.
이조 좌랑 민심(閔)16일 부계로 체직, 뒤에 위리안치. 대 최명길(崔鳴吉)14일 정사에, 공신.
박종윤(朴宗胤)16일 부계로 체직, 뒤에 위리안치. 대 조익(趙翼)14일 정사에. 파직중.
수찬 오익환(吳益煥)15일 원계로 파직, 뒤에 위리안치. 대 최현(崔晛)19일 정사에. 파직.
목서흠(睦敍欽)사신으로 나가 체직. 대 조희일(趙希逸)16일 정사에.
정언 한유상(韓惟翔)13일 체포, 뒤에 귀양. 대 이목(李楘)14일 정사에. 산직이었음.
이효성(李孝誠)14일 체포, 뒤에 귀양. 대 오숙(吳䎘)15일 정사에. 산직이었음.
부수찬 이명한(李明漢)16일 이조 좌랑으로 옮겨 임명. 대 이경여(李敬輿)17일 정사에. 산직이었음.
주서 최몽량(崔夢亮)피핵 체직. 대 이계(李烓)15일 정사에. 전천(前薦).
설서 정성(鄭晟)즉시 체직, 뒤에 정배.
봉교 홍경정(洪景艇)21일 원계로 체직, 뒤에 정배. 대 장유(張維)14일 정사에. 전천, 파산, 공신.
유진정(柳震禎)26일 원계로 귀양, 뒤에 삭출.
대교 안헌징(安獻徵)17일 원계로 우매무식하여 천이. 대 신계영(辛啓榮)14일 정사에. 전천.
검열 유명립(柳命立)원찬. 대 엄성(嚴惺) 14일 정사에. 증경피적(曾經被謫).
경기 감사 박자흥(朴自興)14일 자살. 대 홍명원(洪命元)14일 정사에. 산직이었음.
평안 감사 박엽(朴曄)임소에서 효시. 대 김신국(金藎國)
충청 감사 박경신(朴慶新)17일 원계로 파직, 뇌물로 임직. 대 이덕형(李德泂)18일 정사에.
강원 감사 임석령(任錫齡)17일 원계로 파직, 뇌물로 임직. 대 정광성(鄭廣成)18일 정사에.
전라 감사 황근중(黃謹中)17일 원계로 파직, 뒤에 삭출. 대 황치경(黃致敬)18일 정사에. 산직이었음.
황해 감사 이명(李溟)잡아서 삭직. 대 임서(林壻)
경상 감사 김지남(金止男)과만(瓜滿)으로 병조 참의 임명.
함경 감사 이홍주(李弘冑)과만으로 도승지 임명.
영돈녕 한준겸(韓浚謙)15일 국구로 서평부원군에 봉함.
대제학 신흠(申欽)7일 정사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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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신년 (1608, 선조 41, 광해군 즉위년) |
정월
전 참판 정인홍(鄭仁弘)이 상소하였는데, 이러하다.
이정원(李挺元) 등이 소를 올려 동궁을 해치려 한 유영경의 죄를 다스리기를 청하니, 답하기를,
대사간 이효원(李效元) 등이 이경전(李慶全)ㆍ이이첨(李爾瞻) 등이 이런 모함하는 말을 만들어 정인홍과 통하여 그로 하여금 상소하게 했다고 논하고 모두 귀양보내기를 청하니, 곧 윤허하여 정인홍은 강계(江界)로, 이이첨은 갑산(甲山)으로, 이경전은 영해(寧海)로 귀양보냈다. 옥당에서 차자(箚子)를 올려 정인홍의 상소의 내용이 흉악하고 끔찍함을 극구 말하였다.
정온(鄭蘊)이 상소하여 정인홍을 두둔하고 유영경의 죄를 극구 말하였다.
○ 이성(李惺)이 상소하여 정인홍을 두둔하고 동궁을 모해한 유영경의 정상을 극구 말하고, 아울러 그의 뇌물을 받은 죄를 논하였다.
대사간 이효원이 이정원ㆍ이성ㆍ정조(鄭造) 등을 귀양보내기를 청하였으니, 이는 정인홍의 죄를 구호하기 위해서였다.
영남의 유생(儒生)들이 유영경을 공격하고 정인홍을 구제하려고 연판장을 올려 소란을 피우므로 잡아다가 국문하게 하였다.
2월
1일 선조의 병환이 위급하여 승지들이 창황히 차비문 밖으로 나아가니, 어의(御醫) 허준(許浚)이 나와서 말하기를,
대신 이하가 차례로 나와 거애(擧哀)하고 빈청으로 물러가니, 날이 이미 어두웠다. 촛불을 밝히고 앉아 있으니, 승전색(承傳色) 김봉(金鳳)이 대비(大妃)의 명을 전하기를,
김봉이 또 대비의 명으로 한 봉서(封書)를 가지고 와서 전하기를,
전한(典翰) 최유원(崔有源)이 당일에 즉위해야 한다는 의론을 제기하였는데 이는 왕비의 오라버니인 유희분(柳希奮)의 뜻을 받았던 것이다. 동료를 거느리고 와서 대신에게 청하였으나, 유영경이 고집하여 옳지 못하다고 하니, 재삼 청하면서 송 나라 이종(理宗)이 당일에 즉위한 말까지 끌어대었다. 대신이 《실록(實錄)》에서 조종(祖宗)의 전례를 상고하도록 하니, 오직 성종(成宗)이 당일에 즉위하였는데, 이는 예종(睿宗)의 아들 제안대군(濟安大君)이 어렸으므로 정희왕후(貞熹王后)가 어진 이를 택해서 성종을 세웠던 것이고, 성종 또한 형 월산대군(月山大君)이 있었으므로 당일에 즉위하였던 것이다. 대신이 드디어 성종의 전례에 따라 이튿날 신시(申時)에 광해(光海)가 면복(冕服)을 갖추고 서청(西廳)에서 즉위하니, 백관들이 조복을 갖추고 천세(千歲)를 부르며 춤추고 나갔다.
성복(成服)을 하자 완산군(完山君) 이축(李軸)이 소를 올려 유영경을 죄주기를 청하였다.
○ 영남 사람 김응성(金應成)ㆍ강인(姜遴) 등이 상소하여 유영경을 논죄하였다.
○ 대간이 유영경을 파면하고, 정인홍, 이이첨ㆍ이경전(李慶全) 등을 석방할 것을 청하니, 상감이 이를 윤허하였다. 상사(上使)인 연릉부원군(延陵府院君) 이호민(李好閔), 부사(副使)인 동지(同知) 오억령(吳億齡), 서장관(書狀官)인 호군(護軍) 이호의(李好義) 등을 보내어 명 나라 조정에 부음을 고하고, 표(表)를 올려 시호(諡號)를 청하고, 또 왕대비의 주본(奏本)을 갖추어서 왕위 계승을 청하였다.
이원익(李元翼)을 영의정으로, 이항복(李恒福)을 좌의정으로, 심희수(沈喜壽)를 우의정으로 삼고, 정인홍(鄭仁弘)을 판윤(判尹)으로 승격시켰다.
유영경(柳永慶)을 경흥(慶興)에 안치(安置)하고, 김대래(金大來)를 경원(慶源)으로, 이홍로(李弘老)를 대정(大靜)으로, 이효원(李效元)을 거제(巨濟)로, 성준구(成俊耈)를 남해(南海)로 귀양보냈다.
14일 장령(掌令) 윤양(尹讓), 지평(持平) 민덕남(閔德男), 헌납(獻納) 윤효선(尹孝先), 정언(正言) 이사경(李士慶)과 임장(任章)이 아뢰기를,
비망기(備忘記)에
아성부원군(鵝城府院君) 이산해(李山海), 영의정 이원익(李元翼), 영부사(領府事) 이덕형(李德馨), 좌의정 이항복(李恒福), 우의정 심희수(沈喜壽), 청평부원군((淸平府院君) 한응인(韓應寅), 판부사(判府事) 허욱(許頊)등이 아뢰기를,
양사(兩司)에서 다시 아뢰어 이진을 외딴섬으로 귀양보내기를 청하고, 고언백(高彦伯)ㆍ박명현(朴名賢)이 몰래 딴뜻을 품고 있으니, 잡아다가 국문하기를 청하니, 답하기를,
○ 옥당에서 세 번 연달아 차자(箚子)를 올려 이진을 외딴섬으로 귀양보내기를 청하니, 답하기를,
병조에서 아뢰기를,
15일 금부(禁府)에서 아뢰기를,
20일 임해군(臨海君)의 진도(珍島)로 가는 길이 이미 호서(湖西)를 지났을 때, 전교하기를,
3월
영의정 이원익(李元翼)의 사직하는 상소에,
대사헌 정구(鄭逑)의 상소에,
비망기에,
판윤(判尹) 정인홍(鄭仁弘)이 바야흐로 강계(江界) 적소(謫所)로 향하는 길에 기내(圻內)에 이르렀을 때에, 석방하고 승진한다는 새 명령을 듣고 사직하는 소를 올리니, 답하기를,
○ 정인홍(鄭仁弘)이 이내 영남으로 내려가니, 예관(禮官)을 보내어 꼭 같이 올 것을 간곡히 타일렀다.
영부사(領府事) 이덕형(李德馨)이 상소하여, 대비를 받들고 동기를 사랑하고 불쌍히 여겨 은혜를 온전히 하기 위하여 옥사를 신중히 할 것 등의 말로 간곡히 아뢰니, 답하기를,
○ 사간 조정립(趙正立)이 상소하여, 대비를 받들어 모시고 동기에 대한 은혜를 온전히 할 것 등을 아뢰니, 답하기를,
헌납 임연(任兗)의 피사(避辭) 중에 이덕형(李德馨)의 상소를 논척(論斥)하는데 여력(餘力)을 남기지 않았다.
무장(武將) 민열도(閔悅道)ㆍ박명현(朴名賢)ㆍ고언백(高彦伯) 등이 임해군과 통하였다 하여 연좌되어 죽음을 받았고, 무장 양학서(楊鶴瑞)ㆍ양집(梁諿) 또한 장형을 맞아 죽었다.
우의정 심희수(沈喜壽)가 상소하여, 순(舜) 임금이 그의 아우 상(象)에게 했던 도리를 본받아 임해군에 대한 은혜를 온전히 할 것을 아뢰니, 답하기를,
○ 정인홍(鄭仁弘)을 대사헌에 임명하였다.
집의(執義) 이경전(李慶全) 등이 아뢰기를,
○ 삼사(三司)에서 날마다 잇달아 법대로 처형할 것을 청하니, 답하기를,
고부사 겸 주청사(告訃使兼奏請使) 이호민(李好閔) 등이 북경에서 통사(通事)를 시켜 예부(禮部)의 자본(咨本)을 가지고 나오게 하였는데, 중국 조정에서는 적자(嫡子)를 버리고 차례를 뛰어넘었다 하여 본국 대신으로 하여금 군민(軍民)을 회동(會同)하여 공정하게 자세히 의논하도록 하여 만장일치로 신(神)과 사람이 서로 합치된 후에 명백히 아뢰도록 하고, 또 요동 진무관(遼東鎭撫官)으로 하여금 사람을 보내어 면질(面質)하게 하고, 임해(臨海)로 하여금 양위했다는 주본(奏本)을 올리게 한 것이다. 이에 왕대비 김씨는 문무 기로(文武耆老)ㆍ종실(宗室) 및 산반(散班)ㆍ유생ㆍ군민 등의 연명으로 올리는 장계에 의거하여 주문(奏文) 한 벌을 갖추고, 영의정 이원익(李元翼) 등이 문관직 배신(陪臣) 해평부원군(海平府院君) 윤근수(尹根壽) 등 3백 95명, 무관직 배신 지훈련(知訓鍊) 이시언(李時言) 등 4백 56명, 산반(散班) 배신 이성록(李成祿) 등 1천 2백 명, 내금위(內禁衛) 전계옥(全季玉) 등 3백 26명, 겸사복(兼司僕) 고응록(高應祿) 등 1백 16명, 성균 생원(成均生員) 신득연(申得淵) 등 9백 80명, 오부 군민(五部軍民) 고득창(高得昌) 등 1만 5천 8백 83명을 회동하여 주문(奏文) 한 벌을 갖추고, 종실 정원군 이부(定遠君李琈) 등 2백 25명이 주문 한 벌을 갖추어 배신 이필영(李必榮)으로 하여금 길을 배로 하여 빨리 달려가 황제에게 아뢰게 하였다.
무원(撫院)에서 요동 도사(遼東都事) 엄일괴(嚴一魁)ㆍ자재지주(自在知州) 만애민(萬愛民)을 우리 나라에 보내 와서 이진이 병들었는지의 여부와 온 나라 신민이 광해군을 추대한 실정을 조사하였다.
영부사(領府事) 이덕형(李德馨)의 상소에,
정언 최현(崔晛) 등이 아뢰기를,
양사(兩司)가 아뢰기를,
명 나라 조정의 차관(差官)이 들어온 뒤 접대도감 대신(接待都監大臣)이 아뢰기를,
부호군(副護軍) 최유원(崔有源)이 상소하기를,
대사헌 정인홍(鄭仁弘)이 부름을 받고 한강에 도착하여 상소하기를,
영부사(領府事) 이덕형(李德馨)ㆍ호조 판서 황신(黃愼) 등을 보내어 대비 김씨의 주문(奏文)을 가지고, 빨리 칙명을 내려서 사자(嗣子)를 책봉하여 왕위를 이어받게 하고, 국왕의 아내 유씨(柳氏)를 왕비로 삼아 주기를 청할 일로 중국 서울로 갔다.
종실(宗室) 순녕군 경검(順寧君景儉) 등 35명이 상소하여, 임해를 처형할 것을 청하니, 비답하기를,
백관(百官)이 날마다 소장을 올려 임해를 처형할 것을 청하고, 또 사신 이호민(李好閔) 등을 붙잡아 들이기를 청하였다.
대사헌 정인홍(鄭仁弘)이 상소하여, 대신들의 ‘은혜를 보전하자.’는 주장을 공박하니, 답하기를,
영의정 이원익(李元翼), 좌의정 이항복(李恒福), 우의정 심희수(沈喜壽)가 정인홍의 소 때문에 모두 인입(引入)하여 사직하였다. 아성부원군(鵝城府院君) 이산해(李山海), 판중추 윤승훈(尹承勳) 등 66명이 아뢰기를,
정인홍(鄭仁弘)을 승진시켜 좌찬성에 임명하매, 정인홍이 상소하여 사직하니, 답하기를,
비망기에,
임해를 폐하여 서인(庶人)으로 삼았다. 기유년(1609, 광해군 1)에 이진이 교동(喬桐)에서 죽었는데, 사람들 모두 현감(縣監) 이직(李稷)이 독살한 것이 아닌가 의심하였다.
사신 이호민(李好閔)ㆍ오억령(吳億齡), 서장관 이호의(李好義)를 모두 파직시켰다.
좌찬성 정인홍(鄭仁弘)이, 삼공이 인퇴한 것이 자기가 올린 소 때문이라 하여, 소를 남겨 두고 영남으로 돌아갔다. 상이 예관(禮官)을 보내 간곡히 타일러 돌아오게 하였으나, 정인홍은 왕명을 받들지 않았다.
유구국(琉球國)의 중산왕(中山王)이 자문(咨文)을 보내오기를,
유영경(柳永慶)ㆍ김대래(金大來)ㆍ이홍로(李弘老) 등에게 적소에서 사형을 내렸다.
[주D-002]약맛을 보는 서열 : 임금이 병들어 약을 먹을 때 신하가 먼저 맛보는 것.
[주D-003]우돈의 장[遇遯之章] : 송(宋) 나라 주자(朱子)가 상소하려고 기초를 해 두고 점을 쳐서 돈괘(遯卦)를 만나서 그 소장을 불태워 버렸다.
[주D-004]광고한 말[狂瞽之說] : 미친 사람과 장님처럼 아무것도 모른다는 말.
[주D-005]고(高) : 송 영종(宋英宗)의 황후 고(高)씨.
[주D-006]조(曹) : 미상.
[주D-007]마(馬) : 한 명제(漢明帝)의 황후 마씨(馬氏).
[주D-008]등(鄧) : 한 명제(漢明帝)의 황후 등씨(鄧氏).
[주D-009]합단(盍旦) : 《예기(禮記)》에 상피합단(相彼盍旦)이란 주(註)에 합단은 밤에 우는 새인데, 밤이 낮이 되기를 원하는 새 이름으로 말하자면 안 될 일을 하려 한다는 뜻이다.
[주D-010]나랏일을 …… 보살피게[監撫] 하시고 : 세자(世子)가 나라를 지키고 있을 때는 감국(監國)이라 하고 진중에 나가면 무군(撫軍)이라 함.
[주D-011]원성청명(元聖請命) : 주 무왕(周武王)이 병이 위독할 때 그 동생인 주공(周公)이 하늘에 기도를 드리며 자신이 대신 목숨을 바치겠다 하였는데, 주공을 원성(元聖)이라 한다.
[주D-012]미원(彌遠) : 송(宋) 나라 간신(奸臣)으로 황태자(皇太子)를 모함하여 낮추어서 제왕(濟王)으로 봉하게 하였음.
[주D-013]청검(請劍) : 한(漢) 나라 주운(朱雲)이 상방검(尙方劍)을 빌려 간신 장우(張禹)를 베어 죽이려 했다.
[주D-014]송 고종(宋高宗) : 송 고종(宋高宗)이 재위 36년에 아들이 없어 효종(孝宗)에게 전위하고 자칭 태상황제(太上皇帝)라 하였다.
[주D-015]계은(繼恩)ㆍ창령(昌齡) : 미상.
[주D-016]장강(張綱) : 후한(後漢) 때의 사람으로 질제(質齊)를 죽인 양기(梁冀)를 탄핵하였다.
[주D-017]호전(胡詮)이 …… 혹심한 화를 입은 것 : 남송(南宋) 때에 호전(胡詮)이 금(金) 나라의 위세를 두려워하여 강화를 주장하고 많은 신하를 죽인 진회(秦檜)를 벨 것을 청하다가 귀양을 갔다.
[주D-018] 왕계(王季) : 주 태왕(周太王)에게 아들 셋이 있었는데, 막내인 왕계(王季 문왕의 아버지)에게 왕위를 전할 뜻이 있음을 알고 왕계의 두 형이 몸을 피하였다.
[주D-019]천세(千歲)를 부르며 : 황제의 나라인 중국에서는 ‘만세’를 부르지만 우리 나라 왕에게는 ‘천세’를 불렀다.
[주D-020]곤강(崑岡)에 …… 함께 타듯이 : 착한 사람이나 악한 사람이 다 같이 재앙을 당함을 비유한 말로, 《서경(書經)》에, “곤강에 불이 나면 옥이나 돌이 다 타버린다[火炎崑岡玉石俱焚].” 하였음.
[주D-021]평반(平反) : 죄를 감해 주는 것, 《한서(漢書)》〈준불의전(雋不疑傳)〉에, “매양 지방 죄수(罪囚)를 심리하고 돌아오면 그의 어머니가 묻기를, ‘평반(平反)하여 살려 준 사람이 몇이나 되느냐?’ 하였다.” 하였음
[주D-022]회남왕(淮南王) 장(長) : 한 문제(漢文帝)의 아우로, 반역을 꾀하다가 발각되어 촉중(蜀中)으로 귀양가서 죽었다.
[주D-023]광무제(光武帝)의 반측자안(反側自安) : 한 광무제(漢光武帝)가 적을 평정한 뒤에, 적과 내통했던 자들의 증거 서류를 모두 불사르면서, “반측(反側)한 무리들로 하여금 스스로 안심하게 한다.” 하였다. 여기서 반측(反側)은 모방한 것을 말한다.
[주D-024]문제(文帝)의 척포두속(尺布斗粟) : 한 문제(漢文帝) 때에 그의 동생 회남왕(淮南王)이 반역을 꾀하다가 촉중(蜀中)으로 귀양가서 굶어 죽으니 백성들이, “한 자의 베도 기울 수 있고, 한 말의 곡식도 찧어 먹을 수 있는데, 형제 두 사람은 서로 용납하지 못하네[一尺布尙可縫一斗粟尙可춘舂 兄弟二人不能相容].”라는 노래를 지어 임금 형제의 불화를 조롱하였다.
[주D-025]천심(天心)의 어질고 자애스러운 경고 : 수재나 한재 등의 재변은 하늘이 임금을 사랑하여 잘못을 고치도록 경고한다는 것이다.
[주D-026]한 명제(漢明帝)가 …… 비가 내리게 하였습니다. : 한 명제(漢明帝) 때에 초왕(楚王) 영(英)의 모반한 옥사에 연루자가 수천 명에 이르렀는데, 한낭(寒朗)이 공정하게 처리하여 무죄한 많은 사람을 풀어 주었더니, 오래 가물던 하늘에서 비가 내렸다 한다.
[주D-027]천토(天討) : 죄 있는 사람을 하늘이 죽인다는 것인데, 그 일을 임금이 대행하는 것을 말한다.
[주D-028]정선(征繕) : 정(征)은 부세(賦稅)를 받아들이는 것이요, 선(繕)은 병기(兵器)를 수선하는 것임. 《춘추 좌전(春秋左傳)》에, “정선이보유자(征繕以輔孺子)”라는 문구가 있다.
[주D-029]천작(天爵) …… 오는 법 : 《맹자(孟子)》에 “인의(仁義)와 충신(忠信)은 하늘의 벼슬[天爵]이요, 공경대부(公卿大夫)는 사람의 벼슬[人爵]이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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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 ||||
21일(임진) |
맑음. 달구리[鷄鳴]에 안보를 향하여 출발하였다. 문의 현감이 도차사원(都差使員)으로서 연풍 현감(延豐縣監) 이구(李玖)를 따라 나와서 기다렸다. 식후에 고개를 넘으니, 유곡(幽谷)의 인마(人馬)가 이미 용추(龍湫)에서 기다리고, 고개머리에 닿은 자들도 많았다. 용추에 이르니, 함창 현감(咸昌縣監) 권적(權)이 와서 기다렸다. 연원(連原)의 역졸이 난을 일으켜 함창 현감이 묶어 놓았는데, 상사가 체모를 잃었다고 말하며 종리(從吏)를 안동(安東)에 옮겨 가두게 하였다. 연원 찰방이 돌아갔다. 김천 찰방(金泉察訪) 김식(金湜)이 부마 도차사원(夫馬都差使員)으로서 선산(善山)에 이르니 선산 부사(善山府使) 맹세형(孟世衡)이 지응관(支膺官)으로 왔다. 산인(山人) 영일(靈一)이 가은(加恩)에서 보러 와서 함께 잤다. 영일은 곧 혜기(惠琦)의 사형(師兄)인데, 일찍이 송운(松雲)을 따라 일본에 갔었던 자다. 전일에 따라갔던 일을 차례차례 말하는데, 들을 만하였다. 감사(監司) 최현(崔晛)이 선산에서 글을 보내고 인하여 송별하는 시(詩)를 부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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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행록(言行錄)] | ||||
언행록(言行錄) 행장(行狀)에 나오는 것은 수록하지 않았다. |
○ 선생께서는 약관의 나이에 계씨(季氏)와 함께 서책을 싸 짊어지고 계상(溪上)으로 가서 퇴계 이 선생을 뵈었는데, 이 선생이 그의 모습과 행동을 보고 이미 마음속으로 허여하였다. 이에 일찍이 어떤 사람에게 보낸 편지에 이르기를, “이 사람은 민첩하면서도 배우기를 좋아하므로, 그와 학문을 함께 하노라면 몹시 유익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하였다. 또 그의 손자인 이안도(李安道)에게 편지를 보내어 이르기를, “요사이 보니 김성일은 지취(志趣)가 매우 좋아 이 일에 뜻을 오로지 하고 있으니, 마음을 세움에 있어서 성실하고 절실하기가 이와 같다면 무엇을 구한들 얻지 못하겠으며, 무엇을 배운들 이루지 못하겠는가.” 하였다. 또 일찍이 성현들께서 도통(道統)을 서로 전한 심법(心法)을 하나하나 서술하여 병명(屛銘)을 만든 다음, 손수 깨끗하게 베껴 써서 공에게 주었는바, 이 선생이 선생에게 기대를 건 것이 다른 제자들과는 달랐다. 또 일찍이 이르기를, “이 사람은 뒷날에 반드시 큰그릇이 되리라.” 하였다. 이 선생이 관직에서 물러나게 해 주기를 빌던 날에 주상께서 인견(引見)하여 조정의 신하와 문하의 인재에 대해 묻자, 이준경(李浚慶), 기대승(奇大升) 및 선생을 탑전(榻前)에서 천거하였다.
○ 신미년(1571, 선조 4)에 봉교(奉敎)로 승진하여 노릉(魯陵)을 봉식(封植)할 것과 사육신(死六臣)의 관작(官爵)을 회복할 것을 청하였으며, 당시의 폐단에 대해서 논하는 말 수천 마디를 올렸는데, 상소 내용이 아주 절실하였다. 이에 상소가 올라가자 사대부들이 모두 두려워 떨었다.
○ 선생은 성품이 꼿꼿하고 엄하여 곧은 소리가 조정에 떨쳐졌다. 이에 정축년(1577, 선조 10)에 서장관(書狀官)으로 차임되자, 일행 사람들이 모두 두려워 떨었다. 처음에 평양(平壤)에 이르러서 군관(軍官)이나 역관(譯官)들 가운데 참람하고 사치스러운 자들을 모두 적발하여 곤장을 친 일이 있었다. 그 다음 날 연향(宴饗)을 베푸는 자리에 나가 앉자, 정사(正使)가 말하기를, “부경(赴京)하는 군관들이 행장을 사치스럽게 꾸미는 것은 으레 그러한 것인데, 서장관이 곤장을 치는 바람에 살벌한 기운이 돌게 되었다. 그러니 벌주(罰酒)를 마시는 것이 마땅하다.” 하였는데, 아랫사람들이 두려워하면서 서로 떠들어 대기를, “서장관은 성품이 준엄하니 반드시 벌주를 마시지 않을 것이다. 이번 행차는 응당 화평한 기운이 적을 것이다.” 하였다. 그러나 선생이 그 잔을 다 마시고는 기쁜 얼굴로 종일토록 웃고 떠들자, 아랫사람들이 비로소 선생이 정직한 가운데서도 포용력이 있음에 감복하였다. - 정사는 바로 오음(梧陰) 윤두수(尹斗壽)이다.
○ 경진년(1580, 선조 13) 4월에 부친상을 당하였는데, 졸곡(卒哭) 전에는 밤에 누워서 자지 않았고 곡 소리를 그치지 않았다. 장사(葬事)를 마친 뒤에는 묘 옆에서 여묘살이를 하였는데, 비통스럽고 근심스러워 하여 일찍이 이를 드러내 보인 일이 없었고 동구 밖을 나간 일이 없었으며 집안일에 대해서 한번도 물은 적이 없었다. 상장(喪葬)의 절목(節目)은 일체 《가례(家禮)》와 《의례(儀禮)》를 따르면서 두씨(杜氏)의 《통전(通典)》과 구씨(丘氏)의 《의절(儀節)》을 참고하여 행하였는데, 비록 초상을 당한 황급한 때였지만 의문(儀文)이 구비되어 있었으며, 부녀자들도 모두 예문(禮文)에 익숙하였다.
그 뒤에는 향리 사람들이 선생의 효행(孝行)을 갖추어서 관가에 보고하였는데, 당시에 마침 고을 수령으로 있던 동강(東岡) 김우옹(金宇顒)이 감탄하기를, “효자의 집안에서 충신을 구하라는 말이 어찌 미더운 말이 아니겠는가.” 하였다. 그러나 서로 친구간이라는 혐의스러운 점으로 인해 마침내 조정에는 아뢰지 않았다.
상제(喪制) 기간인 3년 동안에는 제생(諸生)들 가운데 학문을 배우기를 청하는 자가 있으면 상을 당해 슬픔 속에 지내는 몸이라서 강학하고 토론하는 자리가 아니면 감히 머물러 있을 수가 없다고 하면서 사양하였다. 만약 성심으로 배우기를 원하는 자가 있을 경우에는 별도로 재사(齋舍)에 있게 하였으며, 문중의 자제들을 따라와 가르침을 청할 경우에는 역시 심하게 거절하지는 않았는데, 예경(禮經) 등의 서책에 이르러서는 반복하여 변론하고 분석하면서 가르치기를 아주 간절하게 하여 마음속으로 이해하도록 한 뒤에야 그만두었다.
○ 계미년(1583, 선조 16) 3월에 의정부 사인(議政府舍人)으로서 황해도 순무어사(黃海道巡撫御史)에 차임되어 나갔는데, 호령이 바람 불듯 시행되어 군사와 백성들이 모두 원통함을 풀 수가 있었으며, 탐관오리를 적발함에 있어서는 위세가 있다고 하여 용서치 않았으므로, 선생을 꺼리는 자들이 많게 되었다. 이때 마침 나주 목사(羅州牧使) 자리가 비어 있었는데, 정철(鄭澈)이 경연에서 아뢰기를, “나주는 지역이 넓고 백성들이 많아서 본디부터 다스리기 어렵다고 소문났으니, 반드시 강직한 내신(內臣)을 차임해 보내어 진압해야 할 것입니다.” 하자, 그 이튿날 특지(特旨)를 내려 선생을 나주 목사에 제수하였다. 이에 선생은 복명(復命)한 뒤 곧바로 배사(拜辭)하였다.
당시에 당화(黨禍)가 막 시작되어서 안팎에 있던 명류(名流)들이 서로 잇달아서 쫓겨났는데, 어느 날 금오랑(金吾郞)이 나주 고을 경내로 들어오자 고을 사람들이 놀라 떨면서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런데도 선생은 단정히 앉아 송사(訟事)를 심리하면서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또 장흥 부사(長興府使) 송응개(宋應漑) 역시 쫓겨나게 되었는데, 사람들이 모두 두려워 위축된 채 감히 쳐다보지도 못하였다. 그런데도 선생은 말을 타고 달려가 전별하였으며, 타고 갔던 말을 선물로 주었다.
○ 병술년(1586, 선조 19)에 임해궁(臨海宮)의 궁노(宮奴)가 민전(民田)을 빼앗아 차지하자, 선생이 즉시 체포하도록 명하고는 감사에게 형신(刑訊)하기를 청하였는데, 감사가 두려워서 감히 공문서를 보내지 못하였다. 이에 두세 차례 논보(論報)하는 즈음에 옥에 수금되어 있던 자가 죄를 모면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는 다른 사람을 사주하여 사직단(社稷壇)에 불을 놓았으므로, 묘우(廟宇)가 모두 불에 타 버렸다. 그러자 고을 사람들이 묘우를 새로 짓기를 청하였는데, 선생은 이르기를, “사직단이 불탄 것은 그 죄가 파직에 해당되는바, 그 자취를 덮어 숨겨서는 안 된다.” 하고는, 드디어 방백(方伯)에게 보고해서 파직당하였다. 이에 온 고을 사람들이 탄식하면서 분통해하였다.
○ 조정에서 통신사(通信使)를 보내 왜적의 정세를 탐지할 것을 의논하였는데, 왜적의 마음은 헤아릴 수가 없고 바닷길이 어렵고 위험하였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눈치만 보면서 가기를 회피하였다. 그러자 선생은 가인(家人)에게 이르기를, “속히 행장을 꾸리라. 내가 반드시 가게 될 것이다.” 하였다. 그런데 과연 당시의 재신(宰臣) 가운데 공을 꺼리는 자가 있어서 이 일을 인해 해치고자 하였으므로, 즉시 선생을 부사(副使)에 의망(擬望)하였다.
○ 경인년(1590, 선조 23) 봄에 상사 황윤길(黃允吉), 서장관 허성(許筬)과 함께 배사(拜辭)하고서 도성을 나가자, 조정의 친구들이 모두 한강(漢江)에 나와 전송연을 베풀었는데, 경사(卿士)들이 모두 와서 모였다. 그러자 선생은 좌우 사람들을 둘러보면서 정색을 하고는 이르기를, “이러한 때를 당하여 누가 감히 사림(士林)을 일망타진할 계책을 하는가. 사람에게 부끄럽지 않으며, 하늘이 두렵지 않은가.” 하였다. 이때 대개 정여립(鄭汝立)의 옥사(獄事)로 인하여 사류(士類)들을 함정에 몰아넣고 있는데도 조정에서는 머리를 수그리고 숨을 죽인 채 감히 말하는 자가 없었다. 선생은 맡은 자리가 언관(言官)의 자리가 아니라서 항상 개탄스러운 생각을 가슴속에 품고 있다가 출발에 임해서 언급한 것이다.
이때 사부(師傅) 권우(權宇)가 이곳에 전별하러 왔다가 이별하는 시를 지어 주었다. 선생이 그 시의 운을 차운하여 시를 지었는데, 그 시에 “손끝에 꽃 스치자 온 숲에 봄빛이네.[手拂琪花萬樹春]”라는 구절이 있었다. 그러자 권우가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이 노인네의 기상이 이와 같으니 반드시 잘 돌아올 것이다.” 하였다.
○ 신묘년(1591, 선조 24) 2월에 조정으로 돌아왔다. 선생이 통신사로 일본에 갔다가 돌아온 뒤로 조정에서는 왜적을 방비하는 일을 걱정하였다. 이에 경상도 감사에게 신칙하여 민정(民丁)을 끌어모아 곳곳에 성을 쌓았으므로, 마을마다 어수선하여 인심이 크게 무너졌다. 그러자 선생이 옥당(玉堂)에 있으면서 아뢰기를, “오늘날에 두려워할 것은 섬 오랑캐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인심에 있습니다. 만약 인심을 잃는다면 금성탕지(金城湯池)가 있고 튼튼한 갑옷과 날카로운 무기가 있더라도 장차 어디에 쓰겠습니까.” 하였다.
○ 다음해 여름 4월에 비국(備局)에서 의논하여 곤수(閫帥)를 뽑았는데, 경상 우병사(慶尙右兵使) 조대곤(曺大坤)이 노쇠하다는 이유로 체차당하게 되었다. 그러자 상께서 비망기(備忘記)를 내려서 조대곤을 체차하고 김성일을 병사에 제수하라고 하교하였다. 선생은 명을 받자마자 곧바로 출발하였는데, 조정의 어진 사대부들이 모두 안타까워하면서 탄식하였으며, 혹 길에 나와서 위로하는 자도 있었다. 이에 선생은 이르기를, “이 몸이 죽기 전에는 오히려 이 몸을 다 바쳐서 일할 때이다. 일의 성패와 이해는 말할 바가 아니다.” 하였다. 이때 선생과 동년배의 친구인 기궤자(畸危子)가 밤을 틈타 와서 전별하면서 시를 지어 주었는데, 그 시는 다음과 같다.
부절을 나눠 받고 대궐 떠나서 / 分符辭北極
칼 울리며 남쪽으로 향하여 가네 / 鳴劍向南陲
하얀 해는 붉은 절부 밝게 비추고 / 白日明朱節
맑은 바람 붉은 기에 불어 오누나 / 淸風拂赤旗
그 충성은 별과 해가 빛을 비추고 / 精誠星日照
그 충의는 귀신 또한 알고 있으리 / 忠義鬼神知
임금께서 뽑은 것 하늘 뜻이니 / 聖簡應天意
그 은혜에 보답하는 건 이때에 있네 / 酬恩在此時
○ 행조(行朝)에서 경상도가 왜적들의 근거지가 되었다고 해서 한 방면을 전담하여 맡기고자 하였으나 적임자를 구하지 못하였는데, 조정의 신하들이 선생을 천거해서 경상좌도 순찰사(慶尙左道巡察使)로 삼았다. - 윤두수(尹斗壽)와 이항복(李恒福)이 번갈아가면서 천거하였다.
○ 선생은 기품이 굳세고 방정하였으며, 조행(操行)이 단아하고 단정하였다. 어려서부터 선을 행하는 데 용감하였고, 작은 성취를 기뻐하지 않았다. 퇴계 선생의 문하에 들어가서는 마음속으로 기뻐하고 성심으로 감복하여 말 한마디 행동 한 가지를 함에 있어서도 반드시 사문(師門)으로써 본보기를 삼았으며, 마음속으로 체인(體認)하여 언제라도 잊지 않았다. 게으르고 나태한 기색을 몸에 나타내지 않았으며, 비루하고 인색한 싹을 가슴속에 담아 두지 않았다. 비록 한가로이 쉬거나 혼자 있을 때에도 긴장을 풀고서 마음 내키는 대로 하지 않으면서 경계하고 반성하기를 더욱더 절실하게 하였다. 어지럽거나 요란한 때를 만났을 경우에는 구차스럽게 하거나 방과(放過)해 버리지 않고 조행을 지키기를 더욱더 굳건히 하였다.
다른 사람의 착한 행실을 들으면 반드시 귀 기울여 들으면서 탄복하였으며, 자신의 잘못을 알면 반드시 두려워하면서 즉시 고쳤다. 일찍이 배우는 자들에게 이르기를, “내가 평생에 걸쳐서 얻은 한마디 말은, ‘나의 허물을 공격하는 자는 나의 스승이고, 나의 아름다움을 말하는 자는 나를 해치는 자이다.[道吾過者 是吾師 談吾美者 是吾賊]’라는 말이다.” 하면서, 이 열네 글자로써 항상 자신을 책려하였다.
대개 자신에 대해서 엄격하였던 것은 천성에서 나온 것이며, 다른 사람을 대함에 있어서 포용력이 있었던 것은 오랜 공부를 쌓은 소치였다. 그러므로 말년에 이르러 도달한 경지는 점차 평정(平正)하여져서 어렸을 적의 굳세고 예민한 기상을 다시는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선생의 용모를 본 사람은 거칠고 사나운 습관이 근절되고, 선생의 인격을 접한 사람은 그릇되고 편벽스러운 마음이 소멸되었으므로, 모두들 가까이 교제하면서 대하기를 기뻐하였으며, 성심을 다하는 것을 좋아하였다.
또 선생은 자신이 악한 사람을 미워함이 너무 지나쳐서 모난 점이 자못 드러난 것을 알고는 ‘관홍(寬弘)’이란 두 글자를 크게 써서 벽에 붙여 놓고 때때로 보면서 반성하여 항상 명심하여 잊지 않으려고 하였다.
○ 월천(月川) 조목(趙穆)이 일찍이 선생이 띠를 묶은 것을 보고 말하기를, “그대는 모름지기 묶은 것을 조금 느슨하게 풀어라.” 하였는데, 선생이 이르기를, “공이 매번 이와 같이 경계하니 감히 가르침을 따르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고는, 즉시 풀어서 다시 매었다. 그러자 월천이 말하기를, “모든 일에 대해서 모름지기 그와 같이 하라.” 하였다.
월천은 또 선생에게 술 마시는 것을 경계하였는바, 일찍이 포갑(鮑甲)을 선생에게 보내 주면서 명(銘) 하나를 지었는데, 그 명에 이르기를,
다섯 가지 색깔이 찬란함이여 / 五色燦兮
그 광채가 현란하여 아름답도다 / 光絢爛兮
술을 비록 많이 마시지마는 / 飮雖多兮
그 모습은 어지럽지 아니하도다 / 儀不亂兮
하였다. 그러자 선생이 절하면서 받고는 가슴속에 새겨 잊지 않았다.
○ 책에 있어서는 읽지 않은 책이 없었으나, 주 부자(朱夫子)의 서(書)를 일신의 표적으로 삼아 마음을 가라앉혀 음미하면서 침식까지 잊을 정도였다. 첫닭이 울면 일어나서 반드시 한두 편을 왼 뒤에야 비로소 등불을 밝히고 책을 펼쳤는데, 일심을 가다듬고는 정밀하게 생각하고 명확하게 분변하여 추호라도 방과(放過)하는 바가 없었다. 제생(諸生)들 가운데 배움을 청하는 자가 있으면 글자마다 가르침을 찾고 구절마다 의리를 찾아 자세히 분석하여 깨우쳐 주되, 온 마음을 쏟아 간절하고 지극하게 가르쳐 주었는데, 반드시 그 본말(本末)을 자세하게 다 가르친 다음에야 그만두었다.
문장(文章)을 지음에 있어서는 명백하고 전아(典雅)하였으며, 붓을 잡으면 곧바로 글을 지었는데, 성심이 북받쳐 뜻이 곡진하였으며, 논의가 명확하고 분명하였다. 시율(詩律)을 지음에 있어서도 담박하고 순하였는데, 특히 오언 고시(五言古詩)를 잘 지어서 도연명(陶淵明)이나 소동파(蘇東坡)의 시체(詩體)를 깊이 터득하였다.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은 대범하고 묵직하여 다른 사람을 인정하는 경우가 적었는데, 매번 선생을 공경하고 중히 여겼다. 또 선생이 말년에 지은 시문을 보고는 탄복하여 마지않으면서 말하기를, “덕이 있는 사람은 반드시 말이 있는 법이란 말이 어찌 미덥지 아니한가.” 하고는, 드디어 선생을 문형(文衡)에 천거하였다.
○ 성품이 지극히 효성스러워서 미처 선부인(先夫人)을 봉양하지 못한 것을 평생의 통한으로 여겼으며, 판서공(判書公)을 봉양함에 있어서는 어떤 일도 가리지 않고 직접하였으며 뜻을 어기는 법이 없었다. 조정 반열에 나아가게 되어서는 시종신(侍從臣)으로 있어서 고을 수령으로 나가 편하게 봉양하지 못하는 것을 늘 한스러워하였다. 형제간에는 우애가 돈독하여 한 집안에서 화락하게 지냈는바, 다른 사람들이 그 사이를 이간질할 수가 없었다. 아침 저녁 상차림은 담박하기가 마치 빈한한 선비와 같았으며, 집안일에 대해서는 조금도 유의하지 않았다.
○ 제사를 지낼 적에는 반드시 목욕하고 재계하였으며, 제수 물품을 직접 살펴서 정결하게 차리기에 힘썼다. 그리고 흉하고 더러운 일에 대해서 언급하지 않았으며, 대청을 청소하고 방에 불을 밝혀서 마치 조상들이 와서 앞에 임하여 계신 듯이 하였다.
○ 선생의 생신날에 집안 사람들이 수연(壽宴)을 베풀려고 하자, 선생이 이르기를, “어찌 부모님께서 길러 주신 은혜를 생각하는 날에 잔치를 베풀고서 즐기는 일을 해서야 되겠는가.” 하였다. 매번 육아(蓼莪)의 시를 생각하면서 그리워하는 마음을 더욱 깊이 하였다.
○ 집안을 다스림에 있어서는 법도가 있었다. 자녀들을 기름에 있어서는 은혜로써 길렀고, 가르침에 있어서는 의리로써 가르쳤다. 노비들을 거느림에 있어서는 관대함으로써 거느리면서 정성스럽고 부지런히 하라고 권면하였다. 일찍이 꾸짖는 듯한 말소리나 사나운 기색을 보이지 않았으며, 내외 상하간에는 구별이 있었고, 문정(門庭) 안은 정숙하였다. 자제들이 잘못을 저질렀을 경우에는 엄준하게 꾸짖은 적이 없었고 순순하게 타일러서 그들이 스스로 허물을 알아서 고치도록 하였다. 일찍이 자제들에게 훈계하여 이르기를, “군자는 마땅히 심학(心學)을 우선으로 하여야 한다. 만약 과거 시험 공부만을 힘쓴다면, 비록 과거에 급제하더라도 그 본심이 이미 가리워져서 이욕(利欲)의 유혹에 빠져들지 않는 경우가 드무니, 두려워하지 않아서야 되겠느냐.” 하였다.
○ 선을 좋아하고 악을 미워함은 천성에서 나왔다. 어떤 사람이 편파적인 말이나 사특한 행동을 할 경우에는 반드시 그 자리에서 지적하여 숨김없이 다 말하였으므로, 세상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스스로 처신하기를 올바름으로써 하고 좋아하고 미워하기를 공정함으로써 하여 터럭만큼도 사사로운 뜻이 그 사이에 끼어 있지 않았다. 그러므로 착한 사람이나 착하지 못한 사람이나를 막론하고 모두들 두려워하고 복종하여 자신에 대한 좋지 않은 말이 공에게 들릴까 봐 두려워하였다.
○ 선생은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과 평생토록 막역한 교유를 맺었는데, 서애가 다른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내 평생의 지우(知友)로는 오직 사순(士純) 한 사람 뿐이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지금은 이미 죽었다.” 하였다. 임종할 때에 이르러서도 입에서 끊이지 않고 선생에 대해 말하였다.
○ 문생(門生)이 묻기를, “보통 사람은 처음에는 이름이 있지만 끝내는 그 실상이 없게 되는 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하니, 선생이 이르기를, “이름이 실상보다 앞서는 것은 자신의 행복이 아니다. 진실로 자신에게 실상이 있으면 이름이 나지 않는 것을 걱정하지 않는다. 선은 반드시 쌓여진 이후에 이루어지는 것이니, 한 가지 선이 있다고 하여 스스로 만족하게 여긴다면, 이는 그 선을 상실한 것이다. 악은 아무리 작더라도 두려워해야 하니, 한 가지 악에 불과하다고 해서 스스로를 용서한다면, 이는 그 악을 조장하는 것이다.” 하였다. 또 이르기를, “학식을 넓혀서 심성을 닦고 사욕을 이겨내어 사념을 다스리는 공부에는 힘쓰지 않으면서 한번에 뛰어넘어 도달하려고 하는 것이 학자들의 공통적인 폐단이다. 이를 비유해서 말하면, 곡식 싹을 가꾸는 사람은 부지런히 북돋아서 열매를 맺게 해야만 자성(粢盛)에 이바지할 수 있고, 잡초를 제거하는 사람은 아침저녁으로 김매어 그 뿌리를 없애 버려야만 곡식을 해치지 못할 것이다. 밭을 잊고 김매지 않는 사람과 곡식을 기르기 위해 곡식 싹을 뽑아 올리는 사람은 그 마음은 비록 다르지만 해치는 것은 마찬가지인 셈이다.” 하였다.
○ 평소에 집안에 있을 적에는 항상 일찍 일어나서 옷을 단정하게 갖추어 입고서 외당(外堂)에 나아가 앉아 있었다. 그러면서 오직 책을 보거나 자제들을 가르치거나 손님을 접대하는 것으로 일삼았는데, 믿음직하고 화락하였다. 일찍이 다른 사람과 차이 나는 행동이나 사나운 기색을 보인 적이 없지만, 조정에 벼슬하면서 과감하게 말하거나 일에 임하여 조처할 즈음에 이르러서는 영특한 기운이 늠름하여 당연히 해야 할 일로 여겼다. 그리하여 두려워하지 않고 곧장 행하면서 이득과 손해를 돌아보지 않았으며, 헐뜯거나 추켜올리는 데 따라 동요되지도 않았는바, 비록 옛날에 용맹으로 소문났던 맹분(孟賁)이나 하육(夏育)조차도 감히 그 기상을 빼앗지 못할 정도였다. 일찍이 이르기를, “사람이 일을 처리함에 있어서 참으로 마음에 부끄럽지 않다면 어찌 다른 사람의 말을 걱정하겠는가. 그러나 외물(外物)에 이끌리고 마음속에서 동요되면 저절로 일이 의리에 합치되지 않아, 자신의 도를 굽혀서 다른 사람을 따르게 되는 것을 면치 못하게 되는 법이다. 나는 평생 매번 도를 바르게 하여 실천하기를 생각하였으니, 비록 죽더라도 아무런 후회가 없다. 그런데도 오히려 외물에 마음이 흔들리지 않을 수가 없었으니, 이것은 나의 강단(剛斷)이 부족하여 사사로운 뜻에 미혹된 것이다.” 하였다.
○ 아, 한결같이 자신만을 믿고서 곧게 나아가다가 화를 취하는 것은 사람들이 경계로 삼는 바인데도 선생은 후회하지 않았다. 그리고 자신의 마음을 바꾸고 뜻을 억누르며 세속을 따르고 고상하게 지내는 것은 세상 사람들이 통달하였다고 하는 것인데도 선생은 개의치 않았다. 또 뒤를 돌아보고 머뭇거리면서 좋은 것을 취하고 어려운 것은 피하는 것이 세상 사람들이 지혜롭다고 하는 것인데도 선생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러니 세상 사람들이 선생을 보고 고집스럽다고 하는 것은 괴이할 것이 없다.
자기 스스로는 선생과 서로 잘 안다고 하는 자들도 지나치게 강직한 것이 선생의 병통이라고 하면서, 충신(忠信)의 실제가 마음속에 보존되어 있고, 효우(孝友)의 도가 집안에서 바탕이 되었다는 것을 모르고 있다. 그러니 이 세상에 과연 선생을 아는 자가 있는 것인가. 마음속에 보존되어 있고 집안에서 바탕이 되었다는 것을 사람들이 반드시 알지도 못하였고, 선생도 다른 사람이 알아주기를 구하지 않았다. 그러니 선생의 덕을 아는 자가 드물며, 덕을 알고서 믿는 자는 더욱 드문 것이 마땅하다.
어지럽고 무너진 막바지에 왕명을 받들게 되어서는 형세가 마치 광란의 물결이 휩쓸자 한번 무너짐에 막을 도리가 없는 그런 상황이었다. 선생은 경악(經幄)의 노숙한 유신(儒臣)으로서 군대의 일에 대해서는 일찍이 들어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도 단지 성의로써 사람들을 감동시키고 충신으로써 사람들을 감화시켜, 의로움을 흠모하는 자들은 진심을 보이게 하고, 완악하고 난폭한 자들은 순종하게 하였으며, 나약하고 게으른 자들은 격동되게 하였다. 그리하여 모두들 고무되어서 기쁜 마음으로 달려나오게 해서 함께 일하게 하였다. 그리고 도망쳤던 장수나 흩어졌던 군사들도 모두 소문을 듣고 두려워 떨면서 앞다투어 스스로를 갈고 닦아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치게 하였다.
선생은 거행하고 조처하는 것이 모두 기의(機宜)에 알맞았고, 상벌을 행하고 호령을 내리는 것이 백성들의 뜻을 크게 감복시켰다. 그러므로 함께 협력하여 모의하고 일제히 떨쳐 일어나 서로 간에 멋대로 굴지 않았으며, 각자가 자신들의 역량을 펼쳐서 모두 기이한 공을 세웠다. 그리하여 마침내 모두 불타 버린 가운데에서 기운을 불어넣어 영남 우도 일대를 보전함으로써 당시의 거묵(莒墨)이 되어 나라를 회복시킬 기반이 되게 하였다. 그러니 비록 하늘이 목숨을 빼앗아 가 큰 훈업(勳業)을 다 이루지는 못하였으나, 인륜의 기강을 부지하고 한 지방을 버틸 수 있게 한 공은 싸움터에서 싸운 것보다도 도리어 더 큰 것이다.
대개 영남(嶺南)이 오랑캐 땅으로 되지 않은 것이 비록 의사(義士)들이 의병을 일으킨 공이라고는 하지만, 의병들이 종시토록 공을 이룰 수 있었던 것은 실로 선생이 성의를 가지고 사람들을 감동시킨 데에서 말미암은 것이다. 그리고 진주성(晉州城)을 함락당하지 않고 굳게 지킬 수 있었던 것이 비록 김시민(金時敏)이 힘껏 싸운 공이라고는 하지만, 역시 선생이 지휘하고 책응(策應)하는 것을 제대로 한 데에서 말미암은 것이다. 살아 있을 적에는 온 도내 사람들이 장성(長城)처럼 의지하여 공이 떠나고 머무는 데 따라서 크게 달라졌으며, 죽은 뒤에는 대소 사민(士民)들이 눈물을 흘리면서 서로 조상하여 지금까지도 선생을 생각하면서 추모하여 마지않게 하였다.
이에 지난날에 선생을 알지 못하고 선생을 믿지 않던 자들도 모두들 칭찬하고 탄복하게 되니, 선생을 알지 못하고 선생을 믿지 않는 자들이 없어졌다. 이 세상의 군자들 가운데에는 평상시에는 도리에 대해서 떠들다가도 위태로운 경우를 당해서는 지난날에 걷던 길을 내팽개치는 자들이 허다한데, 평상시나 어려울 때나 절개를 한결같이 하고 대절(大節)에 임해서도 지조를 빼앗을 수 없다고 하는 것은 오직 선생을 두고 이른 말이다.
선생께서는 일찍이 개연히 탄식하면서 이르기를, “대장부가 이 세상에 태어나 대도(大道)에 대해 듣지 못하고서 술에 취해 꿈속을 헤매는 상태로 살다가 간다면 몹시 부끄러운 일이다. 나는 다행히도 일찌감치 의귀(依歸)할 곳을 얻었는데, 학업을 끝마치지 못하고 명리(名利)의 굴레에 얽매여 그대로 늙은 나이에 이르고 말았는바, 한 생각이 이에 미칠 적마다 두려워 등에 땀이 흘러내린다.” 하였다. 이에 석문정사(石門精舍)를 짓고는 영원토록 물러나 쉬려고 하였다. 조용한 곳에서 한가로이 지내면서 학문 공부에 뜻을 오로지 하여 선사(先師)께서 남기신 학문을 계승하려던 것이 선생의 뜻과 바람이었으니, 이 뜻을 만약 이룰 수가 있었다면 말년에 성취한 바를 어찌 헤아릴 수나 있었겠는가. 사문(斯文)을 부식(扶植)하고 후생(後生)을 계도해 줌이 여기에서 그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애석하게도 시사(時事)가 어렵고 근심스러워서 임금이 치욕을 당하고 백성들이 수심에 잠기게 되어, 일이 글러진 뒤에 힘써 일하다가 군무에 시달리는 가운데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리하여 선생이 평소에 바라던 바를 이루지 못하게 하였으니, 이것이 어찌 한갓 선생의 남은 한일 뿐이겠는가. 실로 후학(後學)들의 불행인 것이다.
이상은 문인 최현(崔晛)의 기록이다.
○ 선생께서는 품부받은 기질이 맑고 순수하였으며 마음속이 화락하고 단아하였다. 도를 들은 것이 이미 빨랐고 학문을 강론한 것은 근원이 있었으며, 덕이 혼후하면서도 강직하였고 행실은 독실하면서도 올발랐다. 다른 사람에게서 선을 취하기를 좋아하고 자신을 책망하는 데에 밝았으며, 자신의 허물을 듣기를 좋아하고 의(義)로 옮겨 가는 데에는 용감하였다.
게으르고 나태한 기색을 몸에 나타내지 않았고, 비루하고 인색한 마음을 가슴속에 가지고 있지 않았다. 의연하여 범하기 어려운 모습이 있었고, 확연하여 빼앗을 수 없는 뜻이 있었다. 그러므로 풍채를 보는 자들은 추하고 사나운 습관을 끊었고, 덕스러운 모습을 보는 자들은 그릇되고 편벽된 마음이 사그라들었다. 이에 사림(士林)에서는 태산(泰山)이나 북두(北斗)와 같이 우러러보았고, 조야(朝野)에서는 주석(柱石)의 신하처럼 의지하였다.
○ 집안을 다스림에 있어서 법도가 있었고, 남녀 간에 구별이 있었다. 매번 정초와 동지, 초하루와 보름날 및 집안 어른의 생신날에는 자제들을 당 위에 모이게 한 다음, 남자는 왼쪽에 자리하되 서쪽을 상석으로 하고, 여자는 오른쪽에 자리하되 동쪽을 상석으로 하여, 순서대로 서서 참알(參謁)하게 하였는데, 남자는 두 번 절하고 여자는 네 번 절하게 하였다. 노비들의 경우에는 오직 정초에만 순서대로 서서 한꺼번에 절하게 하였다. 이에 온 집안 사람들이 모두 어른을 섬김에 있어서 공손하게 읍하는 예를 알았다.
○ 어느 날엔가 자제들에게 검(劍)을 나누어 주면서 이르기를, “너희들은 내가 검을 나누어 주는 뜻을 알겠느냐? 모름지기 이 검으로 의(義)와 이(利)의 빗장을 깨뜨려서 취하고 버릴 것을 구별하기 바란다.” 하였다.
○ 임진년(1592, 선조 25)에 숙부(叔父)께서 우도 감사로 부임할 때 부진(府鎭)에서 나아가 길 옆에서 배사(拜辭)하였는데, 나를 돌아보며 이르기를, “속히 부진으로 돌아가서 향병(鄕兵)을 일으켜 헛되이 죽지 말라.” 하였다.
○ 숙부의 충효(忠孝)의 큰 절개는 국사에 기록되고 사람들의 입에 전해지는 것이 비록 더러 빠진 것이 있기는 하나, 천 길 높이 봉황이 날아오르고 백일(白日) 아래에서 우레처럼 치달리니, 그 누가 상서로운 세상의 표상이요 하늘까지 울릴 소리라는 것을 모르겠는가.
내가 집안에서 평소에 귀로 듣고 눈으로 본 것으로써 말한다면, 숙부의 선을 향하는 성심과 도를 믿는 독실함은 마치 물이 반드시 아래로 흐르는 것과 같고 화살이 과녁을 향하는 것과 같아서, 외지고 어두운 곳이라고 해서 혹시라도 방심하지 않았고, 자잘하고 하찮은 일이라고 해서 혹시라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의리(義利)와 공사(公私)의 구분에 있어서는 털끝만한 것이라도 살피지 아니함이 없었고, 사물을 응접할 즈음에는 정리(情理)가 각각 적당함을 얻었다. 그런 까닭에 옛것을 이어받아 지금에 미루어 나가고, 효성을 옮겨서 충성을 하며, 평상시나 험난할 때나 지조를 지켜 삶과 죽음을 한결같이 하였다. 이것은 진실로 귀신에게 물어 보아도 의심이 없을 것이다.
이상은 조카 김용(金涌)의 기록이다.
○ 선생은 책으로 사람들을 가르침에 있어서는 의리를 깊이 연구하여 심오한 뜻을 열어 보였으며, 일찍이 한 글자도 쉽사리 지나치지 않았다. 식사를 올리면 학업을 배우는 제생들이 그만 하기를 청하는데도 오히려 허락하지 않으면서 한낮이 되어서야 강(講)을 파하기도 하였다. 다른 사람을 가르치기를 게을리 하지 않음이 대부분 이와 같았다.
○ 어느 날 선생이 당(堂) 위에 앉아 있는데, 나 장흥효(張興孝)가 들어와 뵐 적에 터벅터벅 걷자, 선생께서 꾸짖기를, “첫 번째 발자국을 떼어놓으면서는 마음이 첫 번째 발자국을 떼어놓는 데 있고, 두 번째 발자국을 떼어놓으면서는 마음이 두 번째 발자국을 떼어놓는 데 있어야 한다.” 하였다.
○ 선생께서 일찍이 사람들에게 이르기를, “사람을 알아보기는 어려우나 그 사람의 눈동자를 보면 거의 알 수가 있다.” 하였다.
○ 서애 유 선생은 선생을 일컫기를, “말채찍이라도 잡고자 하지만 할 수가 없다.” 하고, 선생은 유 선생을 일컫기를, “나의 사표(師表)이다.” 하면서, 서로 간에 자신을 낮추고 상대방을 높였다고 한다.
○ 선생께서 일찍이 유 선생과 옛절에서 만나 말을 나누었는데, 선생이 이르기를, “신하로서 나아가고 물러가는 도는 반드시 쉬운 데에서 얻을 수가 있다.” 하니, 유 선생이 이르기를, “욕심이 없으면 될 것이다.” 하자, 선생이 무릎을 치면서 감탄하였다.
○ 선생께서 일본에 사신으로 갈 때 배 안에서 태풍을 만났는데, 큰 파도가 솟구치자 배 안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허둥대면서 어찌할 줄을 몰랐는데도 선생은 꼿꼿이 앉아 책을 보았다. 귀국한 다음 사람들이 모두 선생께서 마음을 움직이지 않는 것에 감복하였는데, 선생께서는 웃으면서 이르기를, “책을 본 것도 마음을 움직인 것이 아닌가.” 하였다.
이상은 문인(門人) 장흥효(張興孝)의 기록이다.
○ 우리 유복기(柳復杞) 형제는 10세 전에 부모님을 잃고 외가에서 자랐다. 선생께서는 보살펴 주고 길러 줌에 있어서 은혜와 사랑을 지극하게 하여, 음식이나 의복, 가르치는 일 등에 있어서 한결같이 자기 자식과 똑같이 하였다. 우리들이 이미 수곡(水谷)에 자리잡고 살 적에는 모든 일을 시작하는 단계라서 뒤죽박죽 두서가 없었는데, 선생께서는 더욱더 불쌍히 여겨 돌보아 주었다. 매번 원곡(猿谷)에서 오가는 즈음에 비록 날이 저물어 황급한 가운데서도 반드시 친히 우리들의 집에 오시어 먼저 안부를 물은 다음 제사(祭祀)의 절차를 물었다. 그리고 농사짓는 데 관한 일에 대해서는 노복들을 엄하게 신칙하면서 모든 일을 지시해 주었다. 또 몸가짐을 단속하고 학문을 부지런히 닦으라는 뜻으로 면려하고 경계하여 마지않으셨다. 우리들이 대충이나마 글을 알고 땅과 가업을 지켜 올 수 있었던 것은 사소한 것까지도 모두 외삼촌의 힘이었다. 그러니 평생토록 그 은공을 사모하면서 감격의 눈물을 흘리는 것이 어찌 끝이 있겠는가.
○ 선생께서 휴가 중일 때 이웃에 한가롭게 지내는 어떤 사람이 있어서 자주 선생을 찾아와 뵈었는데, 선생께서 묻기를,
○ 집안 사람들 가운데 궁핍한 자가 있으면 온 힘을 다해 돌보아 주었다. 인근 고을의 수령이나 친구들이 철에 따라 나는 물품을 보내 주었을 경우에는, 의리에 있어 받아서는 안 되는 것은 즉각 물리치고, 의리에 있어서 받아도 되는 것은 받았다. 그리고는 한 말의 쌀이나 몇 마리의 물고기일지언정 모두 즉시 집안 사람들과 인근 사람들에게 나누어 보냈는데, 반드시 가난한 자부터 먼저 나누어 주고 부자들은 뒤로 하였다.
○ 후생들을 이끌어 줌에 있어서 매번 본분에 의거해서 착실하게 해 나가라고 권했으며, 일찍이 성명(性命)의 설에 대해서는 가벼이 말하지 않았다.
○ 집에 있을 때에는 새벽에 일어나서 세수하고 머리를 빗은 다음 의관을 단정하게 차려 입고는 대청에 나가 앉아서 집안의 여러 가지 일을 조처하였다. 그런 다음에 제생들에게 공부를 가르쳐 주었으며, 이를 마치고는 옷깃을 단정하게 여미고 앉아서 서책을 보았다. 아무런 까닭 없이 내당(內堂)으로 들어간 적이 없었으며, 재리(財利)에 대한 말은 입 밖에 낸 적이 없었다.
이상은 문인 유복기(柳復杞)의 기록이다.
○ 신묘년(1591, 선조 24) 봄에 통신사(通信使) 황윤길(黃允吉), 김성일 등이 일본에서 돌아왔다. 황윤길이 부산(釜山)에 도착해서 일본의 정세에 대해 치계(馳啓)하면서 반드시 병화(兵禍)가 있을 것이라고 하였는데, 복명(復命)한 뒤에 주상께서 인견(引見)하고 물으니, 황윤길의 대답은 앞서와 같았고, 김성일은 아뢰기를, “신은 그런 낌새를 보지 못하였습니다.” 하고, 인하여 황윤길이 인심을 동요시키는 것은 마땅치 못하다고 하였다. 이에 의논하는 자들이 혹 황윤길의 말이 옳다고 하고 혹 김성일의 말이 옳다고 하였다. 이에 내가 김성일에게 묻기를, “그대의 말이 황 상사의 말과 다른데, 만약 병란이 일어나면 장차 어찌할 것인가?” 하니, 김성일이 이르기를, “난들 어찌 왜놈들이 끝내 움직이지 않을 것이라고 기필할 수 있겠는가마는, 황윤길의 말이 너무 심하여 중외(中外)가 놀라고 있으므로, 이를 풀어준 것일 뿐이다.” 하였다.
서애 유성룡의 《징비록(懲毖錄)》에 나온다.
○ 선묘(宣廟) 갑오년(1594, 선조 27) 2월 6일의 조강(朝講)에서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 김응남(金應南)이 나아가 아뢰기를,
《당후일기(堂後日記)》에 나온다.
○ 학문에 연원이 있는 것은 능히 스승을 얻은 것이고, 행실이 가정에서 드러난 것은 어버이의 뜻을 어기지 않은 것이다. 절의(節義)가 세상을 진동시킨 것은 뛰어난 기운을 타고난 것이며, 온 정성을 다하다가 나라를 위해 죽은 것은 천성에서 나온 것이다. 문장을 짓는 일은 여사(餘事)로 하였으나 한유(韓愈)나 육지(陸贄)로부터 나왔다. 그러니 아름다운 이름이 썩지 않아 산악과 더불어 나란히 남아 있을 것이다.
송암(松巖) 이노(李魯)의 《문수지(文殊志)》에 나온다.
○ 만력(萬曆) 신사년(1581, 선조 14) 봄에 공(公 최현(崔晛)을 가리킴)이 종질(從姪)인 나 최산립(崔山立)에게 이르기를, “이 지방에 살면서 이 지방의 어진 대부(大夫)를 섬기는 것이 예이다. 학봉 선생은 오늘날의 어진 대부인데, 도(道)는 같으면서도 만나 보지 못하였으니 부끄럽다.” 하였는데, 백공 현룡(白公見龍)이 마침 그 자리에 있다가 말하기를,
인재(訒齋) 최현(崔晛)의 연보(年譜)에 나온다.
○ 원근에서 배움을 청하러 온 사람들이 집안에 그득하였는데, 종일토록 강마하면서도 끝까지 싫어하는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그러면서 의리를 분석하거나 혹 선현들의 덕행을 예로 들면서, 효제(孝悌)와 경신(敬信)의 도리로써 권면하여 사람들을 반드시 허물이 없는 자리에 세우려고 하였다. 그러므로 공을 따르면서 학업을 배우는 자들은 비록 자질이 낮더라도 능히 수립할 줄 알았다.
이하는 습유(拾遺)이다.
○ 남에게 과실이 있을 경우에는 비록 면전에서 숨김없이 곧바로 지적하였으나, 지성껏 이끌어 주어 허물을 고치게 하고자 하였으므로, 감히 깊이 원망하지는 않았다.
○ 선생을 아는 어떤 자가 선생에게 조용히 말하기를,
○ 일찍이 나주 목사(羅州牧使)로 있다가 체차되어서 돌아올 때 향사당(鄕射堂)에 들어가 묵었는데, 마침 좌수(座首)가 없었다. 선생께서 침소(寢所)를 별감(別監)의 방에다 정하도록 명하니, 여러 사람들이 청하기를, “향당에서는 좌수 방이 높은 방인데, 높은 방을 버려 두고 그 다음 방을 차지하는 것은 온당치 않습니다.” 하였다. 그러자 선생이 이르기를, “그렇지 않다. 향당은 부로(父老)들이 모이는 곳이다. 이미 주인이 없으니 편안한 마음으로 높은 자리에 처하는 것은 옳지 않다.” 하였다. 자제들이 장차 잠자리를 모시려고 하자, 선생이 돌아보면서 이르기를, “너희들은 향록(鄕錄)에 들어 있지 않으니, 이곳에서 자는 것은 온당치 않다. 다른 곳에 나가서 자고 내일 아침에 들어오라.” 하였다.
○ 선생께서 일찍이 문생(門生)들을 가르치다가 《송사(宋史)》의 부필(富弼)이 거란(契丹)에 사신으로 간 부분의 전기(傳記)에 이르자, 세 번이나 낭송하고는 무릎을 치면서 탄식하기를, “너희들은 알겠느냐? 부공(富公)이 홀로 수레를 타고서 위험하기 짝이 없는 오랑캐 궁정에 들어갔는데도 굴하지 않고 의연함을 지켜 나라의 체모를 중하게 하였다. 대장부가 변란을 만나서는 마땅히 이와 같이 하여야 한다.” 하였다.
○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선생의 처자식들이 서울을 떠나 떠돌다가 이천(利川) 경내에 도착하였는데, 어떤 사람이 와서 보호해 주면서 몹시 정성스럽게 돌봐 주었다. 그 까닭을 물어 보니, 그 사람이 말하기를, “나는 이 고을 사람입니다. 전날에 영공(令公)께서 도망쳐 온 백성들을 추쇄(推刷)할 적에 내가 좌수로 있으면서 죄를 범하여 형벌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영공께서는 일을 엄명(嚴明)하게 조처하여 한 사람도 억울하게 죄를 받은 사람이 없었으므로, 이 지방 백성들이 지금까지도 잊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내가 비록 죄를 받기는 하였지만, 감히 사사로이 원망하는 마음을 품을 수가 있겠습니까.” 하였다. 그리고 원근 사람들이 쌀을 내어서 식량을 대주거나 혹 말을 내어서 호송해 주면서 말하기를, “학봉 영공(鶴峯令公)께서는 바로 우리 동방의 지주(砥柱)이십니다.” 하였다.
○ 정랑(正郞) 박성(朴惺)이 일찍이 조용히 묻기를,
이상은 《인재록(訒齋錄)》에 나온다.
○ 신묘년(1591, 선조 24) 겨울에 공이 홍문관 부제학으로 있으면서 차자를 올려 시사(時事)에 대해 논하였는데, 말이 몹시 절실하였으며, 또 왕자(王子)들이 제궁(諸宮)에서 함부로 형신을 하고 이익을 독차지한 일 등을 곧바로 지적하였다. 이에 상께서 두려워하면서 허물을 인책하였고, 조야(朝野) 사람들이 모두들 살갗에 소름이 돋았다.
○ 공이 초유사(招諭使)에 제수되어서 남쪽으로 돌아갈 때 김수(金睟)가 근왕(勤王)한다는 핑계를 대고 거창(居昌)에서 운봉(雲峯)을 향해 가다가 공과 갑작스럽게 맞닥뜨리게 되자, 깜짝 놀라면서 무어라 핑계 댈 말이 없었다. 이에 공이 의리로써 힐책하기를, “강역을 지키던 신하가 마땅히 강역을 지키다가 죽어야지, 어찌 강역을 버려 두고 여기까지 왔단 말입니까. 온 도를 다 빼앗기게 되었는데도 구원하지 못하고서 단기(單騎)로 멀리 도망치니, 일을 해 나갈 수가 있겠습니까. 바라건대 영공께서는 속히 돌아가십시오.” 하였다. 이에 김수가 부득이하여 억지로 돌아갔다. 그러나 도내(道內)의 사민(士民)들이 모두 공을 우러르며 메아리처럼 호응하는 것을 보고는 시기하면서 불만스러워하였다. 이에 공이 성심과 믿음으로 대하니, 조금은 의심하면서 멀리하던 마음이 사그라들었다.
○ 하동 현감(河東縣監)의 문보(文報)가 올라왔는데, 창고의 곡식을 훔친 토적(土賊) 15명을 체포하여 참수하였다는 내용이었다. 이에 공이 공문서를 내리기를, “토민(土民)들이 난리를 틈타 도적이 되어 관청 창고의 곡식을 훔치기까지 하였으니, 그 죄는 참으로 참수하는 것이 합당하다. 그러나 만에 하나라도 잘못하면 죄 없는 사람까지 참수할 수가 있으니, 신중하게 하지 않아서는 안 된다.” 하였다. 그 뒤에 들으니, 하동 현감이 촌백성들을 꾀어 어둠을 틈타서 창고를 열고는 마음대로 가져가게 한 다음, 종들을 시켜 15명을 사살하고 거짓으로 보고한 것이었는데, 이는 대개 공(功)을 노려서 한 짓이었다. 이에 공이 그를 주살(誅殺)하려고 하다가 사람들의 말이 혹 지나친 것은 아닐까 하여 곤장 50대만 치고 탐학하다고 위에 아뢰어 파직시켰다.
○ 도사(都事)가 거창(居昌)에서 와서 말하기를,
이상은 《용사록(龍蛇錄)》에 나온다.
○ 공이 일찍이 문충공(文忠公)께 《상서(尙書)》를 배웠는데, 어느 날 수업을 마치고 물러나서 시립(侍立)해 있었다. 그러자 문충공께서 이르기를,
세마공(洗馬公) 김집(金潗)의 가장(家狀)에 나온다.
○ 퇴계 선생께서 동남쪽 지방에서 도학(道學)을 주창한 뒤 그의 문하에서 노니는 자들은 모두 한때의 명현(名賢)들이었는바, 예지(叡智)가 특출난 사람들이 각자 절차탁마하여, 덕성을 이루고 재주에 통달한 자들을 손가락으로 일일이 꼽을 수 없을 정도였다. 그런데도 퇴계 노선생께서는 손수 요순(堯舜) 이래 우왕(禹王), 탕왕(湯王), 문왕(文王), 무왕(武王), 주공(周公), 공자(孔子), 안자(顔子), 증자(曾子), 자사(子思), 맹자(孟子), 주자(周子), 정자(程子), 주자(朱子)가 서로 전한 심법(心法)의 요언(要言)과 지결(旨訣)을 써서 학봉(鶴峯) 김 문충공(金文忠公)에게 주었다. 그러니 퇴계 선생의 은미한 뜻이 어디에 있었는지를 잘 알 수가 있다.
이현일(李玄逸)의 《갈암집(葛庵集)》에 나온다.
[주D-002]육아(蓼莪)의 시 : 《시경(詩經)》 소아(小雅) 육아편(蓼莪篇)을 이르는 말로, 그 시에, “길고 큰 아름다운 쑥이라 여겼더니, 아름다운 쑥이 아니라 제비쑥이로다.[蓼蓼者莪 匪莪伊蔚]” 하였는데, 이 시는 돌아가신 부모를 그리워하는 시이다.
[주D-003]거묵(莒墨) : 거(莒)와 즉묵(卽墨)으로, 나라를 회복시키는 근거지가 된 곳을 가리킨다. 제(齊) 나라 민왕(湣王) 때 연(燕) 나라 군사에게 패해 모든 성이 함락되고 거와 즉묵 두 성만이 남아 있었는데, 전단(田單)이 이 두 성을 근거로 하여 제 나라 70여 성을 모두 회복하였다. 《史記 卷82 田單列傳》
[주D-004]갑오년 : 동강(東岡) 김우옹(金宇顒)의 《경연일기(經筵日記)》를 살펴보면, ‘갑오(甲午)’는 마땅히 ‘을미(乙未)’가 되어야 한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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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보(年譜) | ||||
만력 21년(1593, 선조 26) 계사. 선생 56세 |
○ 정월 초하루에 본 고을에서 올리는 세찬(歲饌)을 올리지 말게 하였다. - 그 고을 수령이 휘하 및 여러 사람들과 더불어 뵙자 선생은 추연한 모습으로 눈물을 흘리면서 이르기를, “해는 바뀌었으나 왜적들은 아직도 나라 안에 가득하고 평안도는 멀기만 하여 소식을 전할 수 없으니, 아직 죽지 않은 외로운 신하가 무슨 얼굴로 하늘의 해를 보겠는가.” 하였다. 그리고는 수령에게 세찬을 올리지 말라고 경계시켰다.
○ 2월에 거창으로 나아가 머물면서 병사 김면(金沔)과 만났다. - 이때 김면이 김시민을 대신하여 새로 병사가 되었으므로 선생이 그와 몇 잔의 술을 마시고는 손을 잡고 회포를 풀었는데, 눈물을 흘리기까지 하였으며, 동이 틀 무렵에야 자리를 파하였다. 그를 모시고 있는 아전을 불러들여 수죄(數罪)하기를, “의병장으로 있을 때는 혹 지휘에 순응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병사의 사체에 있어서는 멋대로 해서는 안 된다.” 하였다.
○ 이노(李魯)를 보내어 서로(西路)에 가서 중국 군사가 오는 것을 기다리게 하였다. 이어 체부(體府)에 첩문(牒文)을 보냈다. - 처음에 여러 차례 편비(褊裨)를 보내어 중국 군사의 소식을 알아보게 하였으나, 모두 길가는 사람의 말만 듣고 중간에서 돌아왔다. 이에 특별히 이노를 보내어 서로에 가서 기다리게 하면서 이르기를, “군사들은 지치고 군량은 다 떨어졌는데, 중국 군사가 또 나왔으며, 농사철에 씨뿌릴 종자도 급하다. 온 나라의 존망이 이번 걸음에 달려 있다.” 하였다. 그리고는 편지와 첩문을 써서 체부로 보냈는데, 이노가 ‘지금까지는 중국 군사가 오지 않고 있다.’고 치보(馳報)하였으므로, 곧바로 여러 고을로 하여금 우선은 중국 군사를 지대(支待)하는 일을 늦추게 하여 백성들이 동요하지 않게 하였다.
○ 3월 4일에 또 군교(軍校)를 보내서 전공(戰功)을 갚고 곡식을 옮겨오는 데 대한 사의(事宜)를 계청하였다. - 논상(論賞)하는 것이 미더웁지 못하다는 것과 흉년이 들어 백성들이 유망(流亡)하는 상황에 대해 극력 진달하면서 속히 공명고신첩(空名告身帖)과 허통첩(許通帖), 면천첩(免賤帖) 등을 내려보내어 상전(賞典)을 시행할 것을 청하였다. 그리고는 이어 호남에 있는 곡식 수만 섬을 일찌감치 옮겨와 굶주린 사람들을 진휼하고 군사들을 먹이고 제때에 파종함으로써 호남의 보장(保障)이 되는 지역을 보전해 나라를 회복하는 기반을 마련하기를 청하였다.
○ 유지(有旨)를 내려 특별히 호남에 있는 곡식 2만 섬을 제급(題給)하게 하였다. - 이노가 직산(稷山)에 이르러서 문충공(文忠公)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이 체부(體府)의 정승으로서 임진(臨津)에 머무르고 있다는 소리를 들었으나, 길이 막혀서 가지 못하고는 다른 사람 편을 통해 선생의 글을 보냈는데, 유 문충공이 선생이 보낸 글과 첩문을 보고는 즉시 계사(啓辭)를 작성해서 계청하였다. 그러자 상께서 가엾게 여겨 특별히 전라도 관찰사에게 명해 2만 섬을 제급하게 하였다. 그러자 선생은 종사관(從事官)을 나누어 보내 수로와 육로로 아울러 운반해 온 다음 여러 고을에 나누어 주어 제때에 씨를 뿌리게 하였다.
○ 12일에 우도 병사 김면이 직무에 임하다가 죽었음을 치계(馳啓)하였다. - 김면은 병사에 오른 지 얼마 안 되어 병에 걸려 일어나지 못하였다. 그러자 선생은 놀라고 슬퍼하면서 이르기를, “장성(長城)이 무너졌으니 국사가 글러졌다.” 하고는, 곧바로 치계하여 그가 의병을 일으켜 왜적과는 같이 살 뜻이 없음을 맹세한 사실에 대해 극력 진달하였다. 김면은 의병장이 된 뒤에 비록 선생의 지휘를 받기는 하였으나, 선생의 명령에 대해 때로는 버티고 굽히지 않은 일이 많았다. 이에 선생은 일찍이 그의 편협하고 옹졸함을 병통으로 여겨 자못 싫어하는 말과 기색을 드러내 보였으므로, 사람들은 혹 두 사람 사이가 좋지 않은 줄로 의심하였다. 그러다가 이때에 이르러 그의 죽음을 애도하면서 포상을 청하는 장계를 올리기를 이와 같이 하였으므로, 사람들이 또다시 선생의 마음씀이 공정함에 대해 탄복하였다.
○ 4월에 진주로 돌아와 머물렀다. - 가는 곳마다 굶어 죽은 시체가 길에 널려 있고 봉두난발을 한 사람들이 울기도 하고 빌기도 하였다. 이에 선생은 목사 서예원(徐禮元)에게 진휼하는 일을 전담하게 하고, 판관 성수경(成守慶)에게는 군기(軍器)를 전담하여 관장하게 하였는데, 죽을 쑤고 약을 달이면서 몸소 구호하였으며, 성을 돌아보고 군사를 검열하면서 반드시 직접 검칙하였다. 이때 역질(疫疾)이 곳곳에 만연하였으며 굶주린 백성들이 모두 성 안으로 몰려들어 울부짖고 신음하는 소리가 차마 들을 수 없을 정도로 참혹하였다. 이에 선생은 가여운 마음에 눈물을 흘렸으며, 밥을 먹다가도 숟가락을 놓곤 하였다. 좌우에 있던 사람들이 말하기를, “식사를 하지 않아 병이 나면 국사는 어찌합니까?” 하자, 선생은 이르기를, “목구멍에 넘어가지 않는다.” 하였다. 누군가가 집에서 일을 처리하여 역질을 피할 것을 청하였더니, 선생이 사양하면서 이르기를, “다른 사람을 대신 시켜서 일을 하면 으레 뜻에 맞지 않는다. 나 자신의 몸을 아끼지 않는 것은 아니나, 죽고 사는 것은 하늘에 달려 있다. 그러니 어찌 피하겠는가.” 하였다.
○ 19일에 병에 걸렸다. - 선생은 명을 받은 이래로 밤낮으로 근심하고 노고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안으로 몸이 상하고 밖으로 감기가 들었던 차에 역질에 걸려 날로 위독하여졌는데, 늙은 의원이 와서 진찰하고는, “이 병은 도리가 없습니다.” 하였다. 그때 박성(朴惺)과 이노(李魯) 등이 옆에 있다가 약을 드실 것을 청하니, 선생은 “내 병은 약을 먹고 나을 병이 아니다. 그대들은 그만두라.” 하였다. 아들 역(湙)도 역질에 걸려 옆 방에서 앓고 있었는데, 한번도 병에 대해 물어보지 않았다. 그리고는 오직 박성과 이노 두 사람에게 이르기를, “중국 군사가 오면 어떻게 먹일 것인가. 그대들은 그 일에 대해 힘쓰라.” 하였는바, 비록 혼미하여 정신이 없는 상태에서도 가냘픈 소리로 헛소리같이 하는 말이 모두 나라를 걱정하는 것뿐이었다. 측실 부인이 근처에 와 살면서 여종을 보내어 문병을 하면, 손을 저어 내보내면서 들어오지도 못하게 하였다. ○ 이때 오운(吳澐)과 조종도(趙宗道)도 와서 문병하였는데, 오운이 말하기를, “중국 군사가 남쪽으로 몰아쳐 내려와 경성(京城)을 이미 수복하였으니, 일로(一路)에 머물러 있는 왜적들이 차례차례 도망쳐 물러갈 것입니다.” 하였다. 그러자 선생은 눈을 부릅뜨면서 이르기를, “뜻을 이루지 못하고 몸이 먼저 가니, 천명인 것을 어찌하겠나. 그리고 왜적이 도망쳐 물러가면 나라야 회복하겠지만, 조정의 붕당(朋黨)은 누가 능히 깨뜨릴 것인가.” 하였다.
○ 29일에 진주의 공관(公館)에서 졸(卒)하였다. - 박성, 이노, 조종도 및 누이의 아들 유복립(柳復立)이 처음부터 항상 군중(軍中)에 있으면서 기거를 같이 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상사(喪事)를 주관하였다. 성 안팎에서 살려 주기를 바라고 있던 사민(士民)들이 부축하고 엎어지면서 나와 가슴을 치고 발을 구르며 소리조차 내지 못하고 흐느껴 울었다. 그리고는 사방으로 흩어져 떠났는데, 마치 갈 곳조차 모르는 사람처럼 멍해져서는 말하기를, “하늘이 우리의 부모를 빼앗아 갔으니, 우리 목숨도 다했다.” 하였다. 부음이 나오자 원근 사람들이 모두 마치 골육의 초상이라도 당한 것처럼 놀라고 애통해하였으며, 길을 가는 나그네들까지도 모두 침통한 얼굴로 서로 조상(弔喪)하였다. ○ 유복립은 선생의 누이인 절부(節婦) 유씨 부인(柳氏夫人)의 소생인데, 차례로는 막내 아들로, 바로 선생이 어루만져서 기른 두 고아 중의 한 사람이다. 백조부(伯祖父)인 소재(小宰) 유윤덕(柳潤德)의 집안으로 양자를 가 경기(京畿)에 살았는데, 어려서부터 기운과 재간이 있었다. 난이 일어나자 선생을 따라 남하하여 막부의 제현(諸賢)들과 더불어 함께 일을 하였으며, 선생이 돌아간 후에도 오히려 성을 굳게 지키고 있다가 마침내 목숨을 바쳤다. 숙종조(肅宗朝)에 경기 감사가 장계를 올려 아룀으로써 이조 참판을 추증하도록 명하였다. 그가 끝까지 목숨을 바치고 떠나지 않은 것도 선생이 평소에 면려한 뜻을 저버리지 않은 것이라고 하겠다. ○ 서애(西厓) 유 선생(柳先生)은 본래부터 신중하여 남을 칭찬하는 일이 드물었다. 그런데도 매양 선생을 공경하면서 중히 여겨, 일찍이 사람들에게 이르기를, “사순(士純)은 내가 따를 수 없다.” 하였다. 선생이 노년 시절에 지은 시문(詩文)을 보고는 탄식하기를, “덕이 있는 자는 반드시 덕스러운 말이 있다는 말을 믿을 만하다.” 하고는, 드디어 문형(文衡)의 망(望)에 천거하였는데, 통정대부(通政大夫)로서 문형에 의망된 사람은 이제까지 몇 사람 안 된다. 얼마 뒤에 선생이 돌아가시자 깊이 슬퍼하면서 이르기를, “평생에 지우(知友)로는 오직 사순 한 사람뿐이었는데, 불행하게도 이제 죽고 말았구나.” 하였으며, 임종할 때에도 여전히 칭찬해 마지않았다고 한다. ○ 대간(大諫) 최현(崔晛)이 지은 언행록(言行錄)에 이르기를, “영남이 오랑캐 땅이 되지 않은 것이 비록 의사(義士)들이 의병을 일으킨 공이라고는 하지만, 의병들이 끝내 공을 이룰 수 있었던 것은 실로 선생이 조처를 적절하게 한 데에서 말미암은 것이다. 그리고 진주성을 견고하게 지켜 함락되지 않은 것이 비록 김시민이 힘껏 싸운 공이라고는 하지만, 역시 선생이 적절하게 지휘한 데에서 말미암은 것이다. 선생께서는 살아서는 온 도 사람들로 하여금 장성(長城)처럼 의지하게 하였고, 죽어서는 대소 사민들로 하여금 눈물을 흘리면서 서로 조상하게 하였다.” 하였다. 정언(正言) 이노(李魯)가 《용사사적(龍蛇事蹟)》 뒤에 제(題)하기를, “학문에 연원(淵源)이 있는 것은 능히 스승을 얻은 것이고, 절의(節義)가 세상을 흔든 것은 뛰어난 기운을 타고난 것이며, 온 정성을 다하다가 나라를 위해 죽은 것은 천성에서 나온 것이다. 문장(文章)을 짓는 일은 여사로 하였으나 한유(韓愈)나 두보(杜甫)로부터 나왔으며, 아름다운 이름이 썩지 않아 산악과 더불어 나란히 남아 있을 것이다. 그러니 후대에 논하는 자들이 모두 실제의 기록이라고 할 것이다.” 하였다. 【보(補)】 《국조보감(國朝寶鑑)》에, “경상좌도 순찰사(慶尙左道巡察使) 김성일이 졸하였다. 김성일은 죽기로써 맹세하고 왜적을 쳐서 평소에도 군복을 벗지 않았으며, 지성으로 사람들을 깨우쳐서 관군과 의병을 잘 조화시켰다. 그러니 나라의 한쪽 구석을 보전할 수 있었던 것은 모두 그가 통솔한 공이다.”라고 하였다.
○ 염습(殮襲)과 입관(入棺)을 마치고 지리산(智異山)에 임시로 묻었다. - 상여가 가다가 어떤 마을의 나무 아래에서 멈췄는데, 후세 사람들이 그 마을 이름을 ‘정구(停柩)’라 하고 그 나무를 ‘대수(大樹)’라고 하여 영원히 사모하는 뜻을 붙였다. 임시로 묻은 뒤에는 모든 사람들이 서로 더불어 목 놓아 울고 돌아왔다. 선생이 돌아가신 뒤 두 달 만에 진주성이 함락당하였고, 조금 완전하던 낙동강 오른쪽 지역도 모두 도륙당하여 한 도의 보장(保障)이 되던 지역이 모두 왜적들의 소굴이 되자, 논하는 자들이 말하기를, “만약 선생이 조금만 늦게 죽었더라면 어찌 이 지경까지 이르렀겠는가.” 하였다. ○ 한강(寒岡) 정구(鄭逑)가 찬한 행장(行狀)의 후론(後論)에 이르기를, “공은 자질이 빼어나서 영특하였고, 기품은 강하고 방정하였으며, 기질이 곧으면서 꿋꿋하였고, 재주는 민첩하면서 호탕하였다. 어려서부터 격앙되어 지취(志趣)가 범상하지 않았으며, 장성해서는 더욱더 강개하여 좋은 말을 들으면 힘써 행하였다. 몸가짐은 반드시 효제(孝悌)를 근본으로 삼았고, 행함에 있어서는 반드시 충서(忠恕)를 위주로 하였다. 스승의 문하에 들어가게 되어서는 마음으로 기뻐하고 성심으로 감복하였으며, 학문에 본말(本末)이 있음을 알아서 취하고 버리는 것이 이미 정해져 있었다. 읽지 않은 책이 없었으나 퇴계 이 선생이 찬한 《주자서절요(朱子書節要)》를 가장 애독하였는데, 마음속으로 깊이 인식하고 가슴속에 새겨 두어 몸가짐의 표적으로 삼았으며, 마음을 가라앉혀 음미하면서 침식까지 잊어버릴 정도였다. 첫닭이 울면 일어나서 반드시 한두 편을 뽑아 왼 뒤에야 등불을 밝히고 세수하고 머리를 빗었다. 그리고는 종일토록 단정하게 앉아서 정밀하게 생각하고 명확하게 분변하며 조금도 방과(放過)하지 않았다. 《근사록(近思錄)》이나 《심경부주(心經附註)》 같은 책도 모두 애독하면서 손에서 놓지 않았다. 제생(諸生)들 가운데 배움을 청하는 자가 있으면 그 뜻을 자세히 분석하여 깨우쳐 주되, 온 마음을 쏟아 간절하고 지극하게 가르쳐 주었는데, 반드시 그 양단(兩端)을 다하였다. 집에 있을 때에는 조용하게 지내면서 자신을 검칙하여 일찍이 다른 사람과 차이점이 보이지 않았다. 조정에 벼슬하여 이리 얽히고 저리 얽혀 어지러운 일을 당하였을 즈음에는 정밀함과 굳셈을 발휘하여 의리로써 결단하고 회피하는 바가 없었으니, 비록 옛날에 용맹스럽기로 소문났던 맹분(孟賁)이나 하육(夏育)조차도 빼앗지 못할 정도였으나, 정성을 다해 성심으로 하는 마음이 애연히 피어났다. 말년에 이르러서는 수양을 쌓은 바가 더욱 공평하고 발라서 젊은 날의 용감하고 엄준한 태도가 없었다. 그런데도 사람들이 쳐다보면 저절로 공경하는 마음이 우러나서 감히 함부로 대하지 못하였다. 일본에 사명을 받들고 감에 미쳐서는 낌새를 살피는 바가 없었고, 조행(操行)은 평소부터 정해진 듯하였다. 그들의 흉악함과 교활함이 이루 헤아릴 수가 없어 죽고 사는 것이 한순간에 달려 있었는데도, 바름을 지켜 흔들리지 않으면서 정신과 기운을 더욱 가다듬었다. 그리하여 사리는 반드시 털끝만한 것이라도 자세히 살피고 의리는 반드시 어렵고 위태로운 상황에서도 다투어, 반드시 우리나라의 위엄이 더욱 존중되고 감히 만홀히 하지 못하게 하고자 하였다. 온 나라가 보존되느냐 망하느냐 하는 때를 당하여서는 초유(招諭)하고 정토(征討)하라는 명을 받았는데, 민심은 이미 흩어지고 일은 이미 글러져 버린 때였으므로, 한때의 중대한 명망을 짊어지고 한 방면을 전적으로 떠맡은 자라 할지라도 창졸간에 허둥지둥하여 손을 쓰지 못하고 뒤로 물러났었다. 공은 경연(經筵)의 노숙한 유신(儒臣)으로서 군진(軍陣)의 일에 대해서는 일찍이 들어본 적이 없는 데다가, 도내에는 적의 침략을 받지 않은 성한 곳이 없었고, 수하에는 한 자 한 치의 병기도 없었다. 그런데도 오직 피를 토하는 정성으로 사기를 고무시켜서 한 조각 붉은 마음을 사람들의 마음에 심어 주었다. 말할 적에는 반드시 눈물을 흘리면서 말하였고, 글을 쓸 적에는 반드시 눈물을 섞어서 썼다. 조처하고 시행하는 것은 무엇이나 기의(機宜)에 알맞게 하였으며, 상벌을 내리고 지휘하는 것이 백성들의 뜻을 크게 감복시켰다. 그리하여 마침내 모두가 잔멸된 나머지를 수습하고 불타 버린 가운데에서 다시 소생시켜, 낙동강 오른쪽 일대를 보전해서 나라를 회복시킬 바탕을 만들었다. 애석하게도 장성(長星)이 지레 떨어져서 큰 훈업(勳業)을 다 이루지 못하였으나, 인륜의 기강을 부지시키고 한 지방을 버틸 수 있게 하였다. 그러니 그 공은 싸움터에서 상처를 입으면서 싸운 것과는 나란히 논할 수 없는 것이다. 공이 죽은 뒤에 조야(朝野)에서는 모두들 칭찬하고 탄복하면서 ‘난리 이후의 진실한 신하로는 마땅히 공이 첫째이다.’ 하였으며, 식자들은 ‘평소에나 전시에나 행동이 일치하여 대절(大節)에 임해서도 빼앗을 수가 없었다.’ 하였다. 이런 말들은 실로 좋아하는 사람에게 아부하여 하는 말이 아니다. 공은 외진 골짜기에 집을 짓고 노년에 벼슬을 그만두고 물러나 살 곳으로 삼으려 하였다. 그리하여 조용한 곳에서 한가로이 지내면서 학문에 뜻을 오로지하여, 위로는 선사(先師)께서 남기신 학문을 계승하고 아래로는 후생(後生)들이 공부하는 길을 열어 주려고 하였다. 그런데 시사가 어렵고 근심스러우며 군신의 의리가 중대하므로 조정에 억지로 나가면서 거취를 자유로이 하지 못하다가, 마침내 대란(大亂)을 만나 근심과 노고로 인해 목숨을 잃었다. 이에 훈업은 빛나게 나타났으나 지원(志願)을 펴지 못하였으니, 이것이 어찌 공의 남은 한이 아니겠으며, 사도(斯道)의 불행이 아니겠는가.” 하였는데, 오직 이 한 단락에서 선생의 온축(蘊蓄)을 다 말하였으므로 간추려서 덧붙인다.
○ 5월에 맏아들 집(潗)이 상을 당하였다는 말을 듣고 사잇길을 통해 남쪽으로 가 분상(奔喪)하였으며, 묘소 아래에서 여묘살이를 하였다. - 여러 차례 왜적의 칼날을 겪으면서도 끝내 침범당하지 않으니, 사람들이 말하기를, “하늘이 도와 주는 바가 있어서 그런 것이지, 인력으로 그런 것이 아니다.” 하였다.
○ 11월에 비로소 관을 받들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 비록 난리를 당한 뒤끝이었지만 지나는 각 고을마다 사민들이 모두 지성껏 슬퍼하였으며, 분주히 힘을 써 주었다.
○ 12월 경신일에 안동부 북쪽에 있는 가수천(嘉樹川)의 오향(午向) 언덕에 장사하였다. - 선영(先塋)이 있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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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저(雜著) ○ 서후잡록(敍後雜錄) | ||||
상소하여 변방 고을의 수령을 청하였으나 회답을 받지 못하다. |
10월 모일에 동당(東堂 문과(文科))의 시관(試官)으로서, 응교(應敎) 최현(崔晛)과 함께 며칠 동안 같은 청사 안에서 시간을 보내게 되었는데, 이때 서로(西路)의 무비(武備) 상황에 대해서 매우 자세히 들을 수가 있었다. 그리고는 마음속으로 생각하기를, ‘조정에 몸담은 지 5, 6개월 동안에 보완하고 수습하는 일은 하나도 한 것이 없이, 다만 본 것이라고는 조정의 정사가 한결같이 옛날대로 따르기만 하는 것뿐이요, 그저 내부에서 변고가 일어날까 기찰(譏察)을 일삼는 것이었을 따름이다. 그런데 서로(西路)를 지키는 병사들 모두가 원망하는 마음을 품고 있는 것이나 수신(守臣)이 제대로 수비 대책을 세우지 못하는 것이 예전보다도 심하니, 머지않아서 난리가 발생하리라는 것을 분명히 알 수가 있다.’ 하였다. 그리하여 상소문을 올려 이에 대해 극론(極論)하면서, 나 자신이 하나의 변방 요새를 맡아 노모(老母)와 함께 필사(必死)의 땅에 임함으로써 무부(武夫)의 선봉이 되겠다고 청하는 한편, 말미에다 상이 개혁을 행하는 것을 꺼리고 원대한 뜻을 세우는 데에 소홀한 잘못을 언급하였다. 이는 대개 나 자신이 먼저 하나의 계기를 조성해 보려는 시도였던 동시에, 이를 통해서 외직(外職)에 보임(補任)되기를 청하여 스스로 공을 세워 보려는 마음이 함께 들어 있었던 것이었다고 하겠다.
이 상소문이 나오자 사람들 대부분이 통쾌하다고 일컬었으며, 상도 너그럽게 답하면서 비국(備局)에 내려 의논해서 처리토록 하였다. 이에 대해서 완평(完平 이원익(李元翼))이, “이것이야말로 나의 생각과 합치되는 일이니, 해서(海西)의 고을 하나를 그에게 맡겨 시험해 보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을 내놓았으나, 제경(諸卿)은 모두 “이모(李某)는 현실을 전혀 알지 못하고서 허튼소리만 하고 있을 뿐이니, 변방의 임무를 맡기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 하고는 마침내 회계(回啓)하지 않았는데, 상도 이에 대해서 더 이상 물어보지 않았다.
이를 통해서도 위아래가 모두 나를 얼마나 경시(輕視)하였는지 알 수 있다고 하겠는데, 이런 와중에서도 이귀(李貴)가 “이 상소문을 보니 충성심과 지기(志氣) 모두 높이 평가할 만하다. 그러니 어떻게 그냥 내버려둘 수가 있겠는가.” 하고는 마침내 위에 아뢰어 비국(備局)의 낭관으로 차임(差任)하였다. 그러다가 한 해를 넘기고 나서 체차(遞差)되었는데, 그동안에도 곤란을 겪기는 마찬가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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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21일 (병인) | ||||
장릉(莊陵)에 배식단(配食壇)을 세웠다. 이보다 앞서 경기도 유생 황묵(黃默) 등이 상언하여, 화의군 이영(和義君李瓔)의 충효 대절(忠孝大節)은 육신(六臣)과 다를 것이 없다고 호소하고 창절사(彰節祠)에 추향(追享)할 것을 청했는데, 전교하기를, “화의군을 그 위치와 그 사당에 추배(追配)하는 것은 귀신의 이치로 보나 사람의 마음으로 보나 다 합당하다고 할 만하나 추배할 사람이 어찌 화의군 한 사람 뿐이겠는가. 얼마 전에 노량(露梁)을 지나다가 육신의 사당과 무덤 곁에서 한참 동안 행차를 멈추고 쳐다보면서 한숨을 쉬었고, 행전(行殿)에서 묵을 때 감회를 금치 못하여 60구의 제문을 촛불을 들여오게 하여 불러주어 쓰게 하였으니, 그처럼 깊은 감회로 그와 같은 정중한 예를 베풀었었다. 육신은 실로 혁혁하고 뛰어나 사람들의 이목에 젖어 있지만 금성 대군(錦城大君)과 화의군의 그와 같은 절의가 종실에서 나왔다는 것은 더욱 특이하고 장하지 않겠는가. 이 두 사람 이외에도 사육신에 못지 않은 사람들이 많을 것이니 이번에 추배할 때 함께 시행하는 것이 실로 절의를 권장하고 충성을 표창하는 조정의 정사에 부합할 것이다. 내각과 홍문관으로 하여금 공사간에 상고할 수 있는 문헌들을 널리 상고하여 하나로 귀결시켜 아뢰도록 하라.” 하였다. 내각이 아뢰기를, “고 정승 신 조현명(趙顯命)이 지은 금성 대군 이유(錦城大君李瑜)의 시장(諡狀)에는 ‘단종이 영월로 손위(遜位)했을 때 공은 순흥부(順興府)에 안치되었는데, 그곳의 부사 이보흠(李甫欽)과 함께 남쪽 지방의 인사들과 몰래 결탁하여 상왕(上王)을 복위시킬 계책을 꾸몄다. 하루는 보흠을 불러 격문을 초하게 하였는데, 관노(官奴)가 벽 사이에 숨어서 몰래 엿듣고 공의 시녀와 내통하여 격문의 초고를 훔쳐서 달아났다. 그런데 기천 현감(基川縣監)이란 자가 급히 추격하여 그 격문을 빼앗아 먼저 서울에 가서 고변하였다. 그리하여 공과 보흠은 잡혀 사형을 당했다.’ 하였습니다. 고 판서 신 이기진(李箕鎭)이 지은 한남군 이어(漢南君李)의 시장에는 ‘단종이 손위한 뒤에 육신이 왕위 회복을 도모하다가 성공하지 못하고 공도 그 일에 가담하였기 때문에 함양(咸陽)에 안치되었다가 귀양지에서 죽었다. 화의군 이영(和義君李瓔), 영풍군 이전(永豊君李瑔)과 함께 가족은 노비가 되고 재산은 몰수당하는 화를 입었다. 중종 갑오년에 비로소 선계(璿系)에 다시 포함시켰고, 명종때 또 관작을 회복할 것을 명하였다. 선조(先朝) 갑인년에 종부시가 「금성 대군·화의군·한남군·영풍군의 순절은 육신과 다를 것이 없다.」 하였다.’ 하였습니다. 선정신(先正臣) 이이(李珥)가 지은 김시습전(金時習傳)에는 ‘노산군(魯山君)이 손위할 때 시습은 마침 삼각산(三角山) 속에서 글을 읽고 있었는데, 곧 문을 닫고 사흘 동안이나 밖에 나가지 않았으며 자기 책을 모두 태워버리고 절간에 자취를 의탁했다.’ 하였습니다. 고 정승 신 신흠(申欽)이 지은 산중독언(山中獨言)에는 ‘남효온(南孝溫)이 소릉(昭陵)을 복위할 것을 청하였으나 들어주지 않아 과거 공부를 그만두고 열경(悅卿)을 종유하였다. 열경이 말하기를 「공은 나와 다른데 어째서 세도(世道)를 위해 벼슬할 계책을 도모하지 않는가?」 하니, 효온이 말하기를 「소릉이 복위된 뒤에 과거를 보아도 늦지 않다.」 하였다.’ 하였습니다. 고 감사 최현(崔晛)이 지은 이맹전전(李孟專傳)에는 ‘경태(景泰) 갑술년 즈음에 시사가 크게 변하자, 소경과 귀머거리로 행세하면서 친한 벗들을 사절하고, 매월 초하루에는 항상 아침해를 향해 절을 하며 내 병이 낫기를 빈다고 말했는데, 집안 사람들도 그 속마음을 헤아리지 못했다.’ 하였습니다. 고 판서 신 이재(李縡)가 지은 조여(趙旅)의 비명에는 ‘경태 계유년에 진사가 되었는데, 하루는 여러 유생들과 작별하고 돌아가 다시는 나오지 않았다. 숙종 기묘년에 영남의 선비들이 공의 절의를 보고하니 특별히 이조 참판을 증직하였으며, 사당을 함안(咸安) 백이산(伯夷山) 밑에 세우고 김시습·원호(元昊)·이맹전(李孟專)·성담수(成聃壽)·남효온(南孝溫)과 함께 배향하였다.’ 하였습니다. 고 정승 신 최석정(崔錫鼎)이 지은 원호의 묘갈명에는 ‘단종이 영월로 손위한 뒤에 영월 서쪽에 집을 짓고 새벽과 저녁으로 바라보며 눈물을 흘렸다. 을해년에 3년 상복을 입은 뒤 고향집으로 돌아가 문밖에 나오지 않았는데, 앉을 때는 반드시 동쪽을 향해서 앉고 누울 때도 반드시 머리를 동쪽으로 두며 살다가 일생을 마쳤다. 무인년에 복위한 뒤 의리와 절개로 인해 공의 마을에 정문을 세워주었다.’ 하였습니다. 선정신 성혼(成渾)이 지은 잡저(雜著)에는 ‘성담수는 지극한 정성과 높은 식견을 지니고 아버지의 묘소 아래 숨어 살면서 일찍이 서울에 올라간 일이 없었고 벼슬을 제수하였으나 나오지 않았다.’ 하였습니다. 남효온이 지은 허후전(許詡傳)에는 ‘김종서(金宗瑞) 등이 죽임을 당했을 때 그를 불러들여 잔치에 참여시켰는데, 유독 눈물을 흘리면서 고기를 먹지 않았으며 끝내는 유배되어 죽었다.’ 하였습니다. 이정형(李廷馨)의 동각잡기(東閣雜記)에는 ‘권자신(權自愼)은 상왕(上王)의 외숙인데, 육신과 함께 복위를 도모했다가 일이 발각되어 죽었다.’ 하였습니다. 장릉지(莊陵誌)에는 ‘송석동(宋石仝)은 육신과 함께 잡혀서 법에 따라 처형되었다.’ 하였습니다. 선정신 이이가 지은 《율정난고(栗亭亂稿)》 서문에는 ‘권절(權節)은 귀머거리 노릇을 하며 병들었다 핑계하고는 문밖에 나가지 않은 채 일생을 바쳤다.’ 하였습니다. 장릉지에는 ‘정보(鄭保)는 권세 있는 간신을 대놓고 꾸짖다가 거의 모함을 받아 죽임을 당할뻔 했는데 세조가 그가 정몽주(鄭夢周)의 후손이라는 말을 듣고 용서해 줬다.’ 하였습니다. 고 부제학 임영(林泳)이 지은 조상치(曺尙治)의 묘지(墓誌)에는 ‘세조가 왕위를 물려 받자 영천(永川)에 물러가 살면서 일생 동안 서쪽을 향해 앉지 않았다. 비석에 글을 써 새기기를 「노산조 부제학 포인조상치지묘[魯山朝副提學逋人曺尙治之墓]」라 하고 자서(自序)에 이르기를 「노산조라고 쓴 것은 오늘의 신하가 아님을 밝힌 것이고 벼슬 품계를 쓰지 않은 것은 임금을 구제하지 못한 죄를 드러낸 것이고 부제학이라 쓴 것은 사실을 없애지 않기 위해서이며 포인이라 쓴 것은 망명하여 도피한 사람임을 말한 것이다.」 하였다. 그리고 아들에게 말하기를 「내가 죽거든 이 돌을 무덤앞에 세우라.」 하였다.’ 하였습니다. 삼가 생각건대, 당시 제현들이 혹은 죽기도 하고 혹은 살아 있기도 하였으나 그것은 단지 그 처한 상황이 각기 달랐기 때문이었고 순절하거나 은둔하여 선왕(先王)에게 충성을 바친 의리에 있어서는 살았건 죽었건 간에 마찬가지입니다. 금성 대군 이유는 왕실의 지친으로서 충성을 다해 의리에 죽었습니다. 후세에 논하는 자들이 종실의 친족으로는 금성 대군을 꼽고 조정의 경우는 육신을 꼽으니, 육신의 사당에 어찌 금성 대군의 제향을 빼놓을 수가 있겠습니까. 화의군·한남군·영풍군 세 사람도 각기 그 본분을 다했으니 훌륭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금성 대군에 비하면 차이가 있는 듯합니다. 그리고 김시습·남효온·이맹전·조여·원호·성담수 등 6인은 세상에서 말하는 생육신인데 혹은 방랑생활로 그 자취를 감추거나 혹은 은둔해 살면서 몸을 깨끗이 하였으니, 그 충성과 그 절개에 대해서는 사람들이 이론의 여지가 없습니다. 한 사당에다 함께 제사지내는 것을 누가 불가하다고 하겠습니까. 그런데 그 중에서도 더욱 특별히 뛰어난 자로서 김시습은 세종의 특별한 신임에 감격하여 미친 사람처럼 종적을 숨기고 절간에 몸을 의탁하였으며, 남효온은 소릉(昭陵)의 복위를 요청하고 육신의 전기를 지으면서 그 내용을 완곡하게 쓰고 자기 뜻을 고수하였으니, 그들의 고심과 아름다운 절의는 영원토록 사람들을 격려할 만합니다. 이 때문에 선정신 송시열(宋時烈)이 지은 육신사기(六臣祠記)에 ‘만약 매월당(梅月堂)과 남 추강(南秋江)을 여기에 제사지내고 또 사당 옆에 한 제단을 만들어 권자신(權自愼)·송석동(宋石仝) 등을 함께 제사지내기를 공주(公州)의 동학사(東鶴寺)에서처럼 한다면 일이 완비될 것이다.’ 하였습니다. 만약에 육신(六臣)을 한꺼번에 모두 제사지내는 것을 선뜻 논의하기 어렵다면 우선 선정이 이미 정한 논의에 따라 김시습과 남효온 두 사람을 추향(追享)하는 것이 온당할 듯합니다. 이보흠(李甫欽)과 권자신은 그 사적은 같지만 제단을 따로 설치하자는 선정의 논의로 볼 때 그 사이에 경중을 둔 것 같으며, 허후(許詡) 등 7인이 이룬 바는 비록 뛰어나다고는 하지만 이보흠과 권자신에 비교하면 차이가 없지 않습니다. 추배(追配)하는 문제는 신들이 감히 독단으로 논할 수 없습니다.” 하고, 홍문관이 아뢰기를, “신들이 공사간의 문헌을 가져다가 절의가 가장 현저하고 사실을 증명할 만한 것들을 가려낸 결과 육신과 금성 대군·화의군 이외에도 순절하거나 은둔한 사람이 많이 있었습니다. 장릉지에 보이는 자만도 거의 1백여 인이 넘지만 이름만 있고 행적은 없어 대부분 상고하기 어렵고 단지 뚜렷이 드러난 사람에 대해서만 말씀드리겠습니다. 단묘조의 영의정 김종서, 좌의정 황보인(黃甫仁), 우의정 정분(鄭苯)은 모두 세종의 고명 대신(顧命大臣)으로 세조의 변란 때 함께 죽어 그 곧은 충성과 큰 절의가 역사책에 뚜렷이 드러나 있습니다. 문민공(文愍公) 박중림(朴仲林)은 곧 충정공(忠正公) 박팽년(朴彭年)의 아버지로서 성삼문(成三問)·하위지(河緯地) 등이 모두 스승으로 섬겼던 사람입니다. 집현전 부제학으로 일찍이 세종의 신임을 받았으며 병자년에 그의 아들과 함께 순절하였습니다. 도총관 성승(成勝)은 곧 충문공(忠文公) 성삼문의 아버지로서 역시 충문공과 함께 죽었습니다. 이상 두 집안의 부자가 이룩한 것이 이처럼 뛰어난데, 중림의 경우는 전하의 무신년에 특별히 시호를 받는 은전을 입었으나 성승은 아직도 시호를 받지 못했습니다. 안평 대군 이용(安平大君李瑢)은 변란 때 황보인·김종서 등과 결탁했다는 죄로 강화도에 유배되었다가 얼마 후에 사사(賜死)되었는데, 영종 때에 이르러 관작을 회복하고 시호를 내렸습니다. 한남군 이어(漢南君李)와 영풍군 이전(永豊君李瑔)은 장릉지를 살펴보면, 정축년 금성 대군이 상왕을 복위할 것을 모의하다가 일이 발각되었을 때 종친부에서는 어는 유(瑜)와 죄가 같으므로 혼자만 살려줄 수 없으니 안치·금고시키자고 아뢰었고, 종부시에서는 영(瓔)·어·전은 죄가 종사에 관계되므로 왕실 계보에서 삭제하자고 아뢰었습니다. 어·전의 시장(諡狀)을 살펴보면, 어·전은 모두 양빈(楊嬪)의 소생인데 양빈은 곧 단종을 젖먹여 기른 사람입니다. 단종이 손위한 뒤에 육신의 복위를 도모한 것이 성공하지 못하자, 어가 그 일에 참여하였다 하여 드디어 함양(咸陽)에 안치되었고, 정축년 금성 대군의 일이 발각되자 양빈이 내응하였다 하여 병자년에 모두 화를 당했습니다. 중종 때 명으로 왕실 계보에 다시 속하게 하였고 명종 때 관작이 회복되었으며, 숙종 때 단종을 복위하면서 시호를 내려주고 예장(禮葬)하도록 하였습니다. 영종 갑인년에 종부시에서는, 금성 대군·화의군·한남군·영풍군의 순절은 육신과 다름이 없다고 아뢰었고, 또 호남의 유생들이 상소로 청하기를 ‘저 세 신하가 모두 왕실의 지친으로서 목숨을 바치면서도 절개를 바꾸지 않은 것은 실로 육신과 같습니다. 그런데 육신은 사당을 세워 제향하고 심지어는 엄흥도(嚴興道)와 같이 미천한 자도 오히려 육신과 함께 제향을 받는데, 이 세 신하만은 그 높고 빛나는 충렬이 해와 달을 꿰뚫고 우주를 지탱할 만한데도 표창하는 은전은 도리어 엄 호장(嚴戶長)보다도 못합니다.’ 하였습니다. 신들이 이상의 문헌으로 상고해 보면 어와 전은 유와 영과 마찬가지인데, 금성 대군의 청안(淸安) 사당에 화의군만 배향하고 한남군과 영풍군을 배향하지 않은 것은 결국 결함이 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청간공(淸簡公) 김시습은 5살에 신동이라 하여 세종의 특별한 인정을 받았고 단종이 손위한 뒤에는 절간에 의탁하여 종신토록 벼슬하지 않았습니다. 선정신 이이가 말하기를 ‘절의를 높이 세우고 윤리 강상을 부식한 것은 비록 백대의 스승이라 해도 근사할 것이다.’ 하였습니다. 문정공(文貞公) 남효온(南孝溫)은 18세에 글을 올려 소릉(昭陵)의 복위를 청하고 드디어 과거 공부를 그만두었습니다. 일찍이 육신전(六臣傳)을 지으면서 말하기를 ‘내가 어찌 죽음을 아껴 대현들의 이름을 인멸시키겠는가.’ 하였습니다. 정간공(貞簡公) 원호(元昊)는 집현전 직제학으로 단종 초년에 원주에 은퇴하여 살다가 단종이 승하하시자 영월로 들어가 삼년상을 지냈으며 세조가 특별히 호조 참의를 제수하고 여러 차례 불렀으나 끝내 가지 않았습니다. 숙종 24년 무인년에 특별히 그의 마을에 정문을 세울 것을 명하였습니다. 정숙공(靖肅公) 성담수(成聃壽)는 교리 성희(成熺)의 아들입니다. 선정신 성혼(成渾)의 잡저(雜著)에 ‘희가 성삼문의 사건에 연좌되어 종신토록 벼슬하지 않았다. 그의 아들 담수는 지극한 정성과 높은 식견을 지니고 파주(坡州)에 물러가 살았는데, 그 당시 죄인의 자제들에게 으레 참봉을 제수하여 그 거취를 시험하였을 때 모두 머리를 숙이고 벼슬살이를 하였으나 유독 담수만은 끝내 벼슬하지 않았다.’ 하였습니다. 전하의 갑진년에 증직하고 시호를 내릴 것을 명하셨습니다. 정간공(靖簡公) 이맹전(李孟專)은 일찍이 우수한 성적으로 과거에 급제하여 한림으로 뽑혔으나 경태(景泰) 갑술년에 귀먹고 눈멀었다고 핑계하고 종신토록 벼슬하지 않았습니다. 전하의 신축년에 시호를 추증할 것을 명하셨습니다. 정절공(貞節公) 조여(趙旅)는 태학생(太學生)으로 단종이 손위하게 되자 여러 유생들과 하직하고 함안군(咸安郡)으로 돌아가 은둔하여 소요 자적하다가 일생을 마쳤습니다. 숙종 28년 임오년에 특별히 이조 참의를 추증하였고, 전하의 신축년에 이조 판서로 올려 추증하고 시호를 내렸습니다. 충숙공(忠肅公) 권절(權節)은 선정신 이이가 지은 《율정난고(栗亭亂稿)》 서문에 ‘세조가 왕위에 오르기 전에 여러 번 그의 집에 가서 거사하는 문제를 은밀히 말했으나 귀먹은 체하고 대답하지 않았으며, 은둔하여 한평생을 마쳤다.’ 하였습니다. 숙종 임오년에 강원도 유생들이 상소하여 육신의 사당에 사액(賜額)할 것과 권절을 함께 배향할 것을 청하자 그 마을에 정문을 세울 것을 명하였습니다. 갑신년에 양주(楊州) 유생들이 또 상소하여 사당을 건립할 것을 청하니, 증직하고 시호를 내리라는 명이 있었습니다. 고 집현전 부제학 조상치(曺尙治)는 《갱장록(羹墻錄)》 화속편(化俗篇)을 상고해 보니 ‘세조가 일찍이 박팽년 등을 논평하여 당대의 역적이고 후세의 충신이라고 했다.’ 하였고, 그 아래에 ‘부제학 조상치가 상소하여 치사를 요청하니 백관에게 명하여 도성 문 밖에서 전별하도록 하였다.’고 쓰여 있었습니다. 고 부제학 임영(林泳)이 지은 묘표에 ‘공은 성삼문·박팽년 제공과 길은 달라도 가는 곳은 같았다.’ 하였고, 그 유사(遺事)에 ‘세조가 왕위를 물려 받은 뒤에 영천(永川)에 물러가 살면서 종신토록 서쪽을 향하여 앉지 않았다. 스스로 돌에 써서 새기기를 「노산조 부제학 조상치지묘」라 하였고, 또 자규사(子規詞)를 지어 자기 뜻을 드러냈다.’ 하였습니다. 고 상신 조현명(趙顯命)이 지은 영천사당기(永川祠堂記)에 ‘육신은 죽었고 공은 죽지 않았다. 죽은 사람은 그 자취가 드러나 쉽게 보이지만, 죽지 않은 사람은 그 마음이 은미하여 알기 어렵다. 그러므로 단종을 복위한 뒤에도 육신과 함께 노량진의 사당에서 제향을 받지 못한 것은 후세의 공론을 기다린 것이다.’ 하였습니다. 고 교리 성희(成熺)는 곧 성삼문(成三問)의 종숙부(從叔父)이자, 정숙공 성담수(成聃壽)의 아버지입니다. 선정신 권상하(權尙夏)가 지은 묘표에 ‘희가 삼문과 함께 왕실을 보필하여 죽고 사는 일로 그 마음을 바꾸지 않았다. 삼문 등이 죽자 희도 역시 엄한 국문을 받고 귀양갔으며 처자는 노비가 되고 재산은 몰수당했다. 그 뒤 3년 만에 용서를 받았으나 끝내 충성과 의분에 겨워 죽고 말았다.’ 하였습니다. 정보(鄭保)는 문충공(文忠公) 정몽주(鄭夢周)의 손자입니다. 육신의 옥사가 일어났을 때 한명회(韓明澮)의 첩으로 있던 서매(庶妹)를 가서 보고 ‘공은 어디에 갔는가?’ 하고 물으니 ‘죄인을 국문하느라 궁궐에 가 있다.’ 하자, 보가 손을 저으며 말하기를 ‘만고의 죄인이 될 것이다.’ 하였습니다. 명회가 즉시 상에게 아뢰어 세조가 친국을 하고 사지를 찢어 죽이려 하다가 충신의 후손이라 하여 특별히 죽음을 감해 유배하였습니다. 영양위(寧陽尉) 정종(鄭悰)은 곧 문종의 부마입니다. 단종 을해년에 광주(光州)로 귀양갔다가 정축년 금성 대군의 복위를 도모한 일이 발각되자, 종친부가 ‘정종·송현수(宋玹壽)·어()·전(瑔)의 죄는 나라의 법으로 보아 반드시 죽여야 한다.’ 하여 결국 사약을 받았습니다. 영조 무인년에 특명으로 시호를 내렸습니다. 충장공(忠莊公) 권자신(權自愼), 충의공(忠毅公) 김문기(金文起)는 육신이 화를 당하던 날 함께 죽었는데, 영조 때에 와서 함께 시호를 주는 은전을 받았습니다. 여량 부원군(礪良府院君) 송현수는 단종의 장인으로서 복위를 도모한 일이 발각되어 금성 대군과 함께 죽었으나 아직도 시호를 내려주는 은전을 받지 못하였습니다. 창절사(彰節祠)에 추배(追配)하는 일은 그 예법이 매우 중대합니다. 세 대신의 뛰어난 절의나 박중림과 성승 부자가 보여준 특별한 절개는 마땅히 배향할 만하지만, 신주의 순위가 서로 맞지 않으므로 감히 쉽게 논의할 수 없습니다. 안평 대군 및 한남군·영풍군은 금성 대군과 같은 형제이니, 다함께 죽계(竹溪)의 사당에 추배한다면 역시 풍속과 교화를 길이 세울 수 있을 것입니다. 생육신을 사육신과 함께 제사지낸다 한들 누가 불가하다고 하겠습니까만 선정신 송시열이 지은 육신사기(六臣祠記)를 상고하건대, ‘만약 매월당과 추강을 이곳에 배향하고, 또 사당 곁에 한 제단을 만들어 권자신(權自愼)·송석동(宋石仝) 등을 함께 제사지내기를 대략 공주의 동학사(東鶴寺)처럼 한다면 일이 더욱 완비될 것이다.’ 하였습니다. 이처럼 이미 선정의 정론이 있어 다시 논의할 여지가 없지만, 나머지 네 신하의 똑같은 깨끗한 절의에 대해서는 역시 함께 배향해야 한다는 공론이 있을 수 있으며 그밖의 사람들도 모두 순절하거나 은둔하여 칭송할 만한 뛰어난 절의가 있긴 하나 이것은 사당의 규례에 관한 일이라 신들이 감히 억측으로 단정할 수 없습니다.” 하였다. 이달 경술일에 사관이 실록을 상고하고 돌아와 아뢰어 더욱 자세한 내용을 알게 되자 《어정배식록(御定配食錄)》을 편찬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전교하기를, “육신의 일은 감히 자세히 알 수 없는 것이지만, 세조의 하교에 ‘후세의 충신이다.’ 하셨고, 영양위(寧陽尉)의 집의 일을 논하면서 ‘난신(亂臣)으로 논할 수 없다.’ 하셨다. 그 훌륭하신 훈계와 계책은 해와 별처럼 환히 빛나 임시 방편에 통달하고 원칙을 부식한 성인의 깊은 뜻을 삼가 엿볼 수 있다. 그것을 천명하고 드러내는 것이 어찌 우리 후인에게 달려 있지 않겠는가. 지난번 행차할 때 민절사(愍節祠)를 지나다가 옛날의 감회가 일어나 관원을 보내 제사지내고 이어서 금성 대군 등 여러 사람을 영월에 있는 사당에 추배하기 위해 사관에게 명산에 깊이 보관되어 있는 실록을 삼가 상고하게 하였다. 그런데 사관이 복명하던 바로 그 날 강원 감사가 자규루(子規樓)의 옛터를 찾아낸 상황을 장계로 아뢰었다. 이 두 가지 일이 공교롭게도 한꺼번에 겹쳐 마치 오늘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되었으니 이치란 속일 수 없다. 참으로 기이하고도 이상하다. 다시 생각해보건대, 세상에서 말하는 생육신이나 오종영(五宗英)의 높고 큰 충절은 모두 우열을 가릴 수 없이 추앙하는 형편이라 누구는 배향하고 누구는 배향하지 않는 것으로 쉽게 취사 선택해서는 안될 것이니, 별도로 예법에는 없지만 예법에 맞는 예를 찾아서 시행하는 것이 역시 옳지 않겠는가. 지난 숙종 무인년에 장릉(莊陵)을 복위했을 때 조정의 신하가 육신의 사당이 정자각(丁字閣)과 너무 가깝다는 말을 하자, 숙종께서 ‘무후의 사당이 길이 이웃에 가깝다[武侯祠屋長隣近]’는 두보(杜甫)의 싯귀를 인용하면서 헐어버리지 말라고 하셨으나, 의론이 서로 엇갈려 끝내는 옮겨 세우고 말았으니, 이것이 어찌 잘못된 일이 아니겠는가. 억울함을 되새기는 제사는 동학사의 실례를 취하고 제단을 만드는 제도는 달천(㺚川)의 실례를 모방하되 당시에 절의를 다한 사람들을 합쳐 하나의 사판(祠版)으로 만들어, 본릉(本陵) 홍살문 밖에 터를 잡아 매년 한식(寒食)에 함께 제사를 지내며, 고을원으로 하여금 집을 하나 지어서 사판을 보관하게 함으로써 똑같이 제사지낸다는 뜻을 보여야겠다. 아, 예법이란 인정에 의해 생기는 것으로서 신이나 인간이나 차이가 없다. 저 열렬한 영령들의 가시지 않는 울분이 길이 의지할 곳이 있게 될 뿐만 아니라, 장릉의 혼령도 오르내리면서 제물의 김과 향기가 물씬 풍길 때 반드시 기뻐하실 것이다. 이 일을 누가 근거 없는 일이라 하겠는가. 본도와 예조로 하여금 이에 따라 거행하도록 하라.” 하였다. 또 전교하기를, “장릉에게 절의를 지킨 사람들을 배향하는 일에 대해 방금 전교를 내렸는데 내각(內閣)에 배식록이 있으니 해조로 하여금 그에 따라 거행하도록 하라. 사판은 충신 사판이라 쓰고 제물은 밥은 큰 그릇에 한 그릇, 탕은 큰 주발에 한 주발, 나물과 과일은 각각 한 접시, 술은 한 잔으로 규례를 정하고 제관은 부근의 찰방으로 하며, 예관(禮官)이 내려가기 전에 제단을 만들고 사판을 만들도록 하는 등의 일을 해도에 분부하라. 의례적으로 쓸 제문은 마땅히 지어서 내려보낼 예정인데, 이후에 본릉의 한식제에 쓸 향을 받아갈 때 함께 주어서 보낼 것이라는 것도 해도와 예조에 분부하라.” 하였다. 또 전교하기를, “이제 장릉의 일로 인해 생각해보니, 충정공(忠正公)의 부친 박중림(朴仲林)은 시호가 있는데, 성승(成勝)은 충문공(忠文公)의 부친으로 중림과 함께 죽었으나 아직도 홀로 빠져 있다. 이 어찌 더욱 큰 결함이 아니겠는가. 본관(本館)에 신칙해서 즉시 제사를 지내기 전에 시호를 의논해 올리도록 하라. 고 충신 박계우(朴季愚)는 바로 대제학 박연(朴堧)의 아들인데, 연이 악(樂)을 제작한 것은 허 문경공(許文敬公)이 예를 제작한 공과 백중을 이루는 것이다. 문경공의 아들 허후(許詡)는 계우와 동시에 순절했으나 후는 시호가 있고 계우만 유독 빠졌으니, 혹시 벼슬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그랬는지 모르겠다. 독동(禿同)과 윤생(尹生)의 뛰어난 절의 또한 인멸시킬 수 없으니, 아울러 증직하는 은전을 베풀도록 하라.” 하였다. 상이 또 단종조의 여러 신하가 절개를 지킨 것은 다 같지만 성과에 있어서는 크고 작은 차이가 있고 순위에도 귀천의 차이가 있다 하여, 장차 별단(別壇)을 설치하는 문제를 내각으로 하여금 의논해 아뢰도록 하였다. 내각이 아뢰기를, “대신들 가운데 원임 각신에게 물으니, 원임 제학 이복원(李福源)은 말하기를 ‘배향하는 문제는 지극히 엄중하니, 지금 이 명이 비록 묘정에 종향(從享)하는 것과는 약간 차이가 있긴 하나 벼슬과 시호를 추증하고 서원(書院)에 배향하는 것에 비하면 의미와 상황이 자연 다릅니다. 그러니 조정에 벼슬한 적이 없거나 벼슬을 받지 않은 자는 비록 뚜렷이 기록할 만한 점이 있더라도 다시 한번 생각해 보는 것이 옳을 듯합니다. 오직 엄흥도(嚴興道) 한 사람만은 육신의 반열에 나란히 세워도 조금도 손색이 없을 것입니다. 세상에 드문 은전은 간략한 것이 귀중하니, 간략하면 그 광명한 빛이 더욱 빛나고 확대하면 오히려 혹 근엄하지 못할 수 있습니다. 나머지 사람들을 위해 별도로 한 제단을 만드는 것은 표창하는 의리는 마찬가지이고 불쌍히 여기는 은혜로 인해 나온 조치이긴 하나 배식(配食)하는 것과는 차이가 있으니 인원수의 많고 적음에는 구애될 것이 없다고 봅니다.’ 하였습니다. 원임 제학 채제공은 말하기를 ‘내리신 3책 가운데 있는 배향하기에 합당한 사람을 성상께서 직접 뽑아내신 것은 마치 저울 눈금을 가늠한 것처럼 조금도 틀림이 없습니다. 이들 이외의 사람들에 대해 아래쪽에 별단을 설치하는 문제에 대해 물으신 일은 불쌍히 여기고 표창하시려는 성상의 마음을 삼가 이해할 수 있긴 하나 숫자는 많고 사적은 너무 소략하니, 만약 위의 항목에 든 뚜렷한 사람들와 똑같이 함께 제사지낸다면 혹시 예법이 번잡해질 혐의가 있을 듯합니다. 신은 일찍이 영남 지방을 왕래한 적이 있으므로 선배들의 유적을 대략 알고 있습니다. 금성 대군은 순흥(順興)에서 화를 당했기 때문에 그 당시 그 부근 고을에서는 평생동안 세상을 등지고서 북쪽 문을 막고 동쪽만 향하는 자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이제 그 자손들이 만약 조정에서 예전에 없었던 은전을 베푼다는 소리를 듣는다면, 앞으로 행차하시는 길에 글을 올리는 자들이 더한층 많아져 이루 다 베풀 수가 없을 것입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지금 여기에 뽑아 기록한 자만으로 끊어서 한계를 정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봅니다.’ 하였습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전에 우리 성조(聖祖)의 하교에 육신의 사당을 본릉(本陵) 홍살문 안에 그대로 두라고 하셨으니, 매우 훌륭한 생각이었다. 이번에 배향하는 규례를 거행하자고 논의하는 것을 가지고 삼가 그 뜻을 계승하는 일단을 스스로 구현하고자 한다. 대체로 제단에 제사지내는 것과 사당에서 제사지내는 것은 사실 차이가 있지만 함께 제사지내는 뜻은 마찬가지이다. 두 대신이 올린 의견에 혹은 ‘간편한 것이 귀중한 것이다.’ 하였고, 혹은 ‘이루 다 베풀 수 없을 것이다.’ 하였는데, 이는 모두 일을 신중하게 하려는 뜻에서 나온 말이다. 이제 취사 선택을 하는 과정에서 마땅히 절의를 지켜 죽어서 그 자취가 나라의 역사와 능지(陵誌)에 올려져 있는 것을 기준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이를테면 육종영(六宗英)·사의척(四懿戚)·삼상신(三相臣)·삼중신(三重臣)·양운검(兩雲劒) 및 육신과 육신의 아비와 자식 중에 특별한 사람과 허후(許詡)·허조(許慥)·박계우(朴季愚) 등 문경공(文敬公)·문헌공(文獻公)의 아들과 손자로서 더욱 뛰어난 사람과 순흥 부사(順興府使) 이보흠(李甫欽), 도진무(都鎭務) 정효전(鄭孝全)과 같은 사람들이다. 이상의 31인을 함께 배식할 사람으로 정하고 제사지내는 의식에는 축문이 있어야 할 것이다. 그밖에 사실이 자세하지 않은 사람과 연좌되어 죽임을 당한 자는 다시 신중히 참작해야 할 것이다. 별단을 설치하는 문제는 대신들의 말이 진실로 일리가 있으니, 충민단(忠愍壇) 등 여러 제단에 담장은 함께 하면서 제지(祭地)는 달리 한 전례가 바로 그것이다. 사적이 자세치 않은 조수량(趙遂良) 등 8인과 연좌되어 죽은 김승규(金承珪) 등 1백 90인은 별단에 제사지내야 할 것이다. 아, 죽음을 각오하고 의리를 떨쳐서 장사를 지내는 일에 힘을 다한 사람은 오직 엄 호장(嚴戶長) 한 사람인데, 어찌 순절한 사람의 반열에 끼지 않았다는 것 때문에 혼자만 배향에서 누락시킬 수 있겠는가. 김 문정(金文正)·송 문정(宋文正)이 묘정에 추배(追配)된 사례가 곧 본받을 만한 뚜렷한 근거이다. 증 참판 엄흥도는 31인의 다음 순서에 두도록 하라. 또 고 처사(處士) 김시습과 태학생 남효온은 속세를 떠나 은거하고 몸을 깨끗이 하여 변함이 없었으니, 그 맑은 기풍과 굳은 지조는 백세를 격려할 만한데도 모두 이 사당의 제사에서 빠진 것은 미처 조처하지 못한 결함이다. 두 신하를 똑같이 창절사(彰節祠)에 추가로 제향하라.” 하였다. 또 전교하기를, “장릉에 배식하는 문제는 지금 수의한 것으로 인해 또 별도로 한 제단을 만든다는 명을 내렸다. 32인의 제단에 지내는 제사에는 마땅히 축문이 있어야 하겠고, 제물은 처음 하교한 대로 거행하라. 사판(祠版)은 ‘충신지위(忠臣之位)’라고 쓰되 감사에게 쓰도록 하라. 별단(別壇)의 경우는 사판 3개를 만들어 계유년·병자년·정축년에 죽은 사람들을 각각 쓰도록 하라. 제사를 지낼 때는 지방에다 성명을 죽 쓰되, 조사(朝士)를 한 판, 맹인·내시·군사·노비를 한 판, 여인(女人)을 한 판으로 해야 한다. 신위의 위치는 중신들의 왼쪽에 두되 조사의 경우는 약간 앞으로 나오게 하고 맹인·무당·내시·군사·노비의 자리는 약간 밑으로 내려야 한다. 제사지내는 의식에 축문을 쓰지 말고 제물은 각기 밥 한 그릇, 탕 한 그릇, 술 한 잔으로 하며, 헌관과 집사는 두 제단의 일을 겸하여 보게 해야 한다.” 하였다. 【원전】 46 집 204 면 【분류】 *왕실(王室) / *윤리(倫理) [주D-001]장릉(莊陵) : 단종(端宗)의 능. [주D-002]소릉(昭陵) : 문종비 현덕 왕후(顯德王后)의 능호. [주D-003]열경(悅卿) : 김시습의 자. [주D-004]경태(景泰) : 명 경제(明景帝)의 연호. [주D-005]갑술년 : 1454 단종 2년. [주D-006]계유년 : 1453 단종 1년. [주D-007]무인년 : 1698 숙종 24년. [주D-008]병자년 : 1456 세조 2년. [주D-009]무신년 : 1788 정조 12년. [주D-010]유(瑜) : 금성 대군. [주D-011]영(瓔) : 화의군(和義君). [주D-012]엄 호장(嚴戶長) : 엄흥도. [주D-013]갑술년 : 1454 단종 2년. [주D-014]갑신년 : 1704 숙종 30년. [주D-015]세 대신 : 김종서·황보인·정분. [주D-016]민절사(愍節祠) : 노량진에 있는 사육신의 사당. [주D-017]오종영(五宗英) : 안평 대군·금성 대군·한남군·영풍군·화의군 등 다섯 왕족. [주D-018]본릉(本陵) : 장릉. [주D-019]충정공(忠正公) : 박팽년. [주D-020]충문공(忠文公) : 성삼문. [주D-021]본관(本館) : 홍문관을 말함. [주D-022]허 문경공(許文敬公) : 허조(許稠). [주D-023]성조(聖祖) : 숙종을 가리킴. [주D-024]육종영(六宗英) : 안평 대군·금성 대군·화의군·한남군·영풍군·이양(李穰) 등 여섯 종실. [주D-025]사의척(四懿戚) : 송현수·권자신·정종·권완 등 네 외척. [주D-026]삼상신(三相臣) : 김종서·황보인·정분 등 세 재상. [주D-027]삼중신(三重臣) : 민신·조극관·김문기. [주D-028]양운검(兩雲劒) : 성승(成勝)·박쟁(朴崝). [주D-029]문경공(文敬公) : 허조(許稠). [주D-030]문헌공(文獻公) : 박연(朴堧). [주D-031]엄 호장(嚴戶長) : 엄흥도. [주D-032]김 문정(金文正) : 김상헌(金尙憲). [주D-033]송 문정(宋文正) : 송시열(宋時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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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29일 (갑오) | ||||
윤음(綸音)을 반포하기를, “국가가 세신(世臣)에 대해 과연 저버린 것이 무엇이기에 병신년·정유년 이래 흉역이 발꿈치를 이었고 사변(事變)이 잇따라 발생하고 있다. 그러나 진실로 원악 대대(元惡大憝)로서 간범(干犯)한 것이 지중(至重)한 경우가 아니고서는 혹 탕척(蕩滌)시켜 묻지 않기도 하고 혹 너그럽게 용서하여 목숨을 부지하게도 하여 기어코 함께 대도(大道)로 지향하도록 한 것은 내가 지나치게 늦추어 주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참으로 용사(龍蛇)같이 사나운 자들을 잘 교화하여 적자(赤子)로 만들지 못한 것은 또한 내가 부덕한 데 연유된 것이기 때문이었다. 아! 내가 세신(世臣)을 저버리지 않았는데도 세신이 나를 저버렸으며 끝내 나의 마음을 몸받아 마음을 고치는 것을 볼 수가 없었다. 묵었던 곳을 잊지 못하여 봄바람에 생기가 돌듯이 얼굴을 바꾸고 교대로 나와서 온갖 계교를 부려 시험하여 왔는데, 이번의 일에 이르러 또 극도에 달하였다. 의심해서는 안될 일을 의심하고 감히 문제삼아서는 안될 자리를 방자하게 문제삼아서 타매하는 이야기가 곤전(坤殿)에까지 언급되었으니, 이유백의 죄는 진실로 주참(誅斬)을 용서할 수가 없다. 이택징의 소장에 삽입된 두어 가지의 글귀는 비록 그것이 헤아릴 수 없는 일이기는 하지만 이유백의 것과 견주어 보면 크게 다른 점이 있다. 시기는 구언(求言)하는 때를 당하였고 일은 과궁(寡躬)에 관계가 되는 것이었으므로 특별히 알이 깨지는 것을 아끼는 뜻에서 지나치게 포용하는 마음을 두었던 것인데 여러 죄수들의 공초(供招)가 나오는 데 이르러서는 손을 잡고 이최중의 촉탁을 받았고 뇌물을 주어 이유백이 계속해서 뒤이어 일어나게 할 것을 도모했던 정적(情跡)이 죄다 드러났다. 비록 부득이 발포(發捕)하기는 했으나 옛날 우리 장릉조(長陵朝)에서 최현(崔晛)이 이인거(李仁居)의 옥사에 연루되었었으나 그가 전일의 언사자(言事者)라는 것으로 특별히 사죄(死罪)를 용서하여 준 것이 지금껏 성대한 일로 전하여 오고 있으니, 나 소자(小子)가 조종(朝宗)을 법받기 위해 이런 더위를 당하여 몸소 나아가 친문(親問)한 것은 그 의도가 이택징의 사죄를 용서해주기 위해서인 것이다. 근래 추안(推案)과 문서(文書)를 살펴보건대 작년에 있었던 호역(湖逆)을 사림(士林)의 횡액이라고 하면서 심지어 이렇게 변이 발생한 해에 산들 또한 무엇하겠느냐고까지 하였으며, 세번째의 소장을 퇴각시킨 것에 대해 연석(筵席)에서 밀교(密敎)가 있었다고 하면서 심지어 묵묵히 광경을 상상하면 도리어 한번의 웃음거리가 된다고 하였다. 기타 수십 장의 서찰에 기재된 흉패스런 언설(言說)에 대해 연석에 나온 여러 신하들이 그 누군들 통분하여 죽고 싶어하지 않겠는가? 그가 어좌(御座)를 향하여 말마다 나[我]라고 일컬었는데 나라고 한 것은 곧 자신을 일컬은 것이라고 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계속해서 불신(不臣)의 마음이 있었다고 말을 했으니, 이런 등등의 극악한 역적에 대해 내가 용서하여 주고 싶어도 될 수 있겠는가? 또 이른바 입조록(立朝錄)의 내용에 감히 ‘모년의 일[某年事]’이란 세 글자와 여섯 글자의 글은 마음이 떨리고 뼛골에 사무쳐 오직 차마 거론하여 하교할 수가 없다. 그에게 일푼이나마 신하로서 임금을 섬긴다는 마음이 있다면 어떻게 차마 이럴 수 있단 말인가? 그러나 이택징·이유백은 비미(卑微)한 부류들이니 무슨 말할 가치가 있겠는가? 이는 남의 지의(旨意)를 받들고 남의 유도 협박함을 받아 기꺼이 창귀(倀鬼)가 된 것에 불과한 것이다. 상세히 구핵(究覈)하여 통쾌한 조치(鋤治)를 시행함으로써 풀을 베고 뿌리를 제거하며 하나를 징계하여 백 명을 면려시키는 방도로 삼아야 한다는 것을 모르지 않는다. 그런데 이제 만연(蔓延)하는 우려가 있을까 우려하여 즉시 광탕(曠蕩)시키는 은전(恩典)을 가한 것은 나도 또한 고심(苦心)한 끝에 한 일이다. 아! 일국(一國)의 사람이 누군들 나의 신자(臣子)가 아니겠는가? 혹 남에게 이끌려 잘못을 저지르고 습관에 익어 미혹에 빠진 자가 있을지라도 내가 바야흐로 불쌍하고 딱하고 가슴 아프게 여겨 반드시 구덩이에서 건져내어 임석(袵席) 위에 올려 놓아 우리 군신(君臣)의 의리를 보전하려 하고 있다. 아! 그대 세록(世祿)의 신하들은 무슨 까닭으로 그대 조부(祖父)들이 몸과 마음을 바쳐 충성한 기풍을 생각하지 않고 도리어 불령(不逞)한 무리들에게 미혹되어 나의 방헌(邦憲)을 간범하고 나의 국맥(國脈)을 손상시킨단 말인가? 조용히 생각하여 보면 반드시 출연(怵然)히 감동하고 돈연(頓然)히 깨달아서 예전에 물들었던 더러움을 다 고쳐 일신(日新)의 아름다움을 이룰 수 있을 것이다. 모든 나의 신자(臣子)들은 이 마음에서 우러난 하교를 듣고 모쪼록 각각 깊이 유념하여 나의 지극한 뜻을 저버리지 말라.” 하였다. 【원전】 45 집 316 면 【분류】 *사법-행형(行刑) / *변란-정변(政變) / *왕실-비빈(妃嬪)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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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19일 (무오) | ||||
헌납 이재(李縡)가 상소하기를, “전하께서 총명하고 예지(睿智)하신 자품(姿稟)으로 유정 유일(惟精惟一)의 교훈을 받들고 계시는데도, 다만 공정해야 하는 의리를 항시 치우치는 사정(私情)에 빼앗겨 버리고, 조급해지는 병폐가 매양 희노(喜怒)의 절차에서 나오게 되어, 덕을 지킴이 굳건하지 못하고 일 처리에 있어 순서가 없으시므로, 아첨하는 말이 쉽게 들어가 의혹이 많아지게 되고 착한 단서가 잠간 싹텄다가도 곧 도로 어두어지며, 억측(憶測)을 잘 하시므로 의심이 생기게 되고, 이기기 좋아하시므로 과오를 저지르게 되어 갈수록 격렬하게 괴로와져서 병폐(病弊)의 뿌리가 더욱 깊어지고 계십니다. 지금 늘어선 빈어(嬪御)들을 모두 사제(私第)를 두게 하고, 미천한 구사(丘史)들이 멋대로 청금(淸禁)에 들락거리고 있으며, 곤역(閫域)이 엄밀하지 못하고 거리낌없이 드나들 수 있으므로 외부의 말이 들어가게 되고 내부의 말이 나가게 되는 것도 이미 대부분 깊은 걱정거리인데, 액정(掖庭)의 하례(下隷)들이 항간(巷間)에 횡행하고 있고 엄시(閹寺)와 추종(騶從)이 재집(宰執)을 흉내내니, 그들의 교만 방자한 상황으로 또한 조짐이 나타났을 뿐 만이 아닙니다. 궁가(宮家)에서 모자라는 것이 어찌 좋은 밭과 화려한 집이겠습니까마는, 서울 안의 갑제(甲第)들을 잇따라 절가(折價)해 들이어 각기 몇 구역(區域)씩 점유(占有)하기를 한도가 없이 하느라, 강제로 사들인다는 비방까지 있게 되었으니, 위로 성조(聖朝)에서 절수(折受)한 것까지 조사하여 혁파하는 일을 하면 진실로 성상의 덕을 빛나게 할 것인데, 복주(覆奏)할 즈음에 곧바로 아끼어 고집하시는 바가 있었습니다. 수해와 한재로 흉년이 들어 백성이 도로에 딩굴고 있는데도 전하께서 이런 것은 생각하지 않으시고 단지 궁가(宮家)들을 부익부(富益富)하게 하는 계책만 하려고 하시니 애석한 일입니다. 전하께서 어린 아이를 보호하듯이 하는 마음으로 그 백성 사랑하는 것을 넉넉히 하려는 생각과 바꿀 수는 없으시겠습니까? 어진 임금은 사람을 쓸 적에 반드시 그의 재능(才能)을 헤아려 보아 관직 제수하기를 마치 권형(權衡)으로 물건을 1눈 1냥(兩)도 틀리지 않게 다는듯이 했습니다. 지금 전하께서는 사람을 쓰고 버리고 관원을 진퇴(進退)하실 적에 단지 한 때의 호오(好惡)에 따라서만 하고, 그 사람의 장단점과 맞는지 안맞는지는 아득하여 마치 성상께서 마음에 두지 않으시는 것 같습니다. 전하의 총명과 예지(睿智)로 장부(臧否)와 숙특(淑慝)을 마땅히 알지 못하는 것이 없으실 것인데, 오직 강(剛)한 것은 싫어하고 부드러운 것만 좋아하시고, 나약한 것을 좋아하고 정직한 것을 싫어하시며, 자신을 바로잡아 주기는 구하지 않고 뜻을 맞추어 주기만 바라고, 두려울 만한 것은 취하지 않고 기쁘게 될 것만 취하시기 때문에, 사람을 씀과 버림이 잘못되어 가고 명기(名器)가 날로 천해지고 있습니다. 이는 어찌 호오(好惡)하는 마음이 올바르게 함을 얻지 못해서가 아니겠습니까? 대저 인재는 반드시 평소에 양성해 놓아야 위급할 때에 힘을 얻게 되는 법입니다. 전하께서 오늘날 양성해 놓은 것은 누구이고, 친하여 신임할 사람은 누구이며, 1백 리(里)의 사명(使命)을 맡길 수 있고 한 지방의 임무를 담당할 수 있다고 믿을 만한 사람은 누구입니까? 만에 하나라도 국가에 근심거리가 많아지고 사방에서 경보(警報)가 있게 된다면 또한 장차 어떻게 대응(對應)해 갈 것입니까? 진실로 전하께서 마음에 맞고 안맞는 것 때문에 쓰거나 버리며 사랑하거나 싫어하는 것 때문에 진퇴(進退)시키지 마시고, 오직 인재이면 들어 쓰고 오직 현명한 사람이면 임용(任用)하시는데도 오히려 참다운 인재가 나오지 않고 관방(官方)이 맑아지지 않는다고 한다면, 신(臣)은 믿지 못하겠습니다. 전하께서 매양 붕당(朋黨)을 들어 근심하고 계시는데, 어리석은 신의 생각으로는 전하께서 또한 편당하는 논의를 면하지 못하고 계신다고 여겨집니다. 왜냐하면 옛적에 붕당을 없애려고 하는 사람은 반드시 옳은지 그른지를 밝히는 것으로 우선을 삼았습니다. 대개 옳음과 그름이 분명하면 공론이 정해지고, 공론이 정해지면 조정이 안정되는 법입니다. 지금 전하께서는 옳음과 그름의 구분에 있어서 분명하게 알거나 지키기를 확고하게 하지 못하시기에 파란 속에서 흔들리고 청자(靑紫)의 구별에서 혼동하시는 것입니다. 혹은 그것이 옳은 줄 알면서도 옳게 여기지 못하고 그것이 그른 줄 알면서도 그르게 여기지 못하시며, 한갓 탄핵하는 논은 벌이(伐異)하는 것으로만 여기고 영구(營救)하는 것이 당동(黨同)하는 것임을 깨닫지 못하시니, 마음에 진정(鎭定)해 보려고 하다가 도리어 더욱 괴열(乖裂)되게 하고 계십니다. 이것은 어찌 옳고 그름에 대한 마음이 그 올바르게 됨을 얻지 못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삼가 듣건대 전날 경연(經筵)에서 ‘노론(老論)은 완만하고 소론(少論)은 급격하다.’는 분부가 계셨다는데, 알 수 없습니다마는 사실입니까? 저 신하들 중에 동인(東人)이니 서인(西人)이니 하고 노론이니 소론이니 하는 것은 사삿집에서 하는 이야기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서, 식견이 있는 사람은 또한 말하기도 부끄러워 하는 것인데, 이를 어찌 하전(厦氈)의 우불(吁咈)하는 사이에서 마땅히 말할 바이겠습니까? 조정에 있는 백관들은 다 같은 신자(臣子)인 것인데 지금 곧 피차(彼此)를 구별하여 현저하게 좌우(左右) 색목(色目)을 가리는 말이 심지어 천어(天語)에서까지 나오게 되었으니, 전하께서는 어찌하여 사람들에게 넓지 못하심을 보이십니까? 오늘날 언로(言路)가 몹시 막혀 있습니다. 조정의 신하들이 어찌 모두 말을 할 줄 모르는 것이겠습니까? 곧 감히 말을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대개 그들의 마음에 생각하기를, ‘오늘날은 진언(進言)한 것이 비록 당시의 병폐에 꼭 맞는 것이라 하더라도 채택하여 써 주는 일을 볼 수 없으니 이는 유익할 것이 없는 일이고, 한마디 말을 하거나 한 가지 일을 논하거나 하면 한결같이 편당하는 의논으로 돌려버리니 더욱 유익할 것이 없는 일이고, 또 혹시라도 기휘(忌諱)에 저촉되는 말을 하면 뇌정(雷霆)같은 위엄을 내리기 일쑤이니, 이것은 두려워할 만하다.’고 하여 대소(大小)의 사람들이 서로 경계하여 함구(緘口)하고 결설(結舌)하게 되는데, 전하께서는 또한 오연(傲然)하게 자성(自聖)의 마음으로 신료(臣僚)들을 가볍게 여기시어 작록(爵祿)을 가지고 온 세상 사람을 구사(驅使)하려고 하시기 때문에 환실(患失)하는 무리들이 오직 함묵(含默)으로 그 자리를 보존하는가 하면 아첨하며 뜻 따르기만을 일삼고 있습니다. 그 사이에 과감하게 말을 하는 신하가 있어 한 마디라도 말을 하면 즉각 배척받게 되어, 더러는 하등 고을에서 지내야 하고 더러는 전선(銓選)의 길이 막히며, 또한 더러는 애매하게 죄적(罪籍)에 오르게 되는데도, 오래도록 견복(牽復)을 아끼므로, 바른 말을 하는 사람은 날로 소원(疏遠)해지고 용렬한 사람은 날로 친근(親近)해지게 됩니다. 오직 전하께서는 다행히도 크게 실덕(失德)한 일이 없으십니다마는, 필경에 나라를 망치게 되는 일이 혹시라도 있게 된다면 결코 하나도 과감하게 간할 사람이 없을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고(故) 신(臣) 최현(崔晛)이 역적의 옥사에 좌죄되어 형벌을 받을 적에, 인조 대왕(仁祖大王)께서 분부 내리시기를, ‘최현이 일찍이 야대(夜對)할 때에 직간(直諫)했기 때문에 내가 자못 고통스러웠는데, 그 뒤에 생각해 보니 참으로 나를 친애(親愛)한 것이었다. 지금 비록 죄가 있기는 하지만 반드시 그때의 마음을 저버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시며 특별히 사형을 감하도록 명하셨으므로 듣는 사람들이 감격한 나머지 눈물을 흘렸습니다. 시험삼아 지난해의 이동언(李東彦)의 일로 보건대, 전하께서는 여러 차례 엄격한 분부를 내리시어 극형(極刑)에 처하려고만 하셨으니, 성조(聖祖)께서 하신 일에는 부끄러움이 없을 수 있겠습니까? 진신(搢紳)들의 사이에도 명분(名分)과 지조가 하나도 없어, 재주 부리는 말이 샘물 솟아나듯하고 아첨하는 말이 날로 퍼지고 있습니다. 지난해의 존호(尊號)에 관한 의논과 요사이의 공주(公主)의 제택에 관한 계청(啓請)과 같은 일은 가장 큰 조정의 수치스러운 일입니다. 세상의 도의가 이렇게 되었으니 오히려 다시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시사(時事)가 자주 변하고 세로(世路)가 험악해지기만 하여, 아비가 자식에게 가르치고 형이 아우에게 권면하고 있는 것이 오직 세속 따라 부앙(俯仰)하는 것으로써 계교를 삼아, 다시 귀중하게 여겨야 하는 경술(經術)과 지조 지키는 일이 있음은 알지도 못하게 되었으며, 한갓 배양(培養)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또한 따라서 떨어뜨려 없애면서 모욕하고 구축(驅逐)하여 다시는 여지가 없게 하였습니다. 심지어는 소장(疏章)을 받지 말라는 명을 갑자기 대신(臺臣)이 기망(欺罔)하는 상소를 올린 다음에 내리게 되었으니, 이는 온 나라 사람들의 입을 겸제(箝制)하고 사방의 사기(士氣)를 꺾어버리려고 하는 것이어서 비록 나라를 망치게 될 근본이라고 하더라도 지나친 말은 아닐 것입니다. 저 교주(敎胄)의 장관(長官)이라는 사람이 어떻게 하는 것이 훈적(訓迪)하는 것인지를 알지도 못하고, 오직 쟁탈(爭奪)하는 마음에 쫓아다니며 간사하고 기구(崎嶇)하게 마음 쓰기를 매우 수고롭게 하다가, 사람들의 비난과 배척을 받게 되어서는 곧 말하기를, ‘내가 그러는 것이 아니라 성상께서 처분하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는 본시 책할 것도 없지만, 신(臣)이 애석하게 여기는 것은 곧 국가 체면을 손상하고 성상의 덕을 더럽히게 될까 하는 것입니다. 아! 나라를 다스리는 도리는 진실한 마음으로 진실한 행정을 하는 것보다 우선하는 것이 없는 법인데, 비국(備局)의 차대(次對)는 모두가 공담(空談)이 되어버리고 경연(經筵)의 진강(進講)은 단지 상례(常例)의 규정만 지키고 있으며, 대소(大小)의 사무를 일체 실체(實體) 밖에 두고 있어 정령(政令)이 전도(顚倒)되고 깎여 없어짐이 일정치 않으므로, 사람들이 마음으로 믿지 않게 되어 국가의 체통이 더욱 가벼워지게 되었습니다. 시험삼아 성(城)을 쌓은 일을 들어 말한다면, 북성(北城)으로부터 도성(都城)을 만들고 도성에서 또한 심도(沁都)에까지 10년 동안에 이루어 놓은 것이 어떤 일입니까? 날쌔게 나섰다가 재빠르게 물러서버리고 시작만 있지 끝맺음은 없어, 시들하게 미루고만 있으므로 이르는 바를 알 수 없습니다. 이것도 오히려 이러하고 있는데, 여타의 것을 논해서 무엇하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답하기를, “생각하고 있는 것을 상소하여 진달하였음은 대개 은휘(隱諱)하는 마음이 없이 드러낸 것이니, 내가 매우 아름답게 여긴다. 유의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 구사(丘史)들이 드나드는 짓은 이제부터는 금단하겠고, 엄시(閹寺)들의 수종(隨從)은 지나치게 범람하게 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 마땅하겠다. 아! 임금이 싫어하는 일이 당론(黨論)보다 심한 것이 없는데, 그대의 상소에 ‘전하께서도 또한 당론을 면치 못한다.’고 하여, 말의 기세가 격분한 것이 조금도 기탄이 없었으니, 임금에게 고하는 말을 어찌 감히 이렇게 할 수 있겠는가? 지극히 한심스럽다. 그 이외에도 환실(患失)이니 보위(保位)니 용록(庸碌)이니 일친(日親)이니 욕치극형(欲置極刑)이니 등의 말은 가리키는 뜻이 보통이 아니어서, 더욱 해괴(駭怪)하다.” 하였다. 이재(李縡)가 엄격하게 내린 분부 때문에 인피(引避)했는데, 뒤에 정언 서명우(徐命遇)가 처치(處置)하여 중죄인(重罪人)【곧 이동언이다.】을 영구(營救)할 때에 말이 지극히 비뚤어졌다는 이유로 체직시켰다. 【원전】 40 집 329 면 【분류】 *정론-정론(政論) / *정론-간쟁(諫諍) / *왕실-종사(宗社) / *농업-전제(田制) / *사법-치안(治安) / *인사-임면(任免) / *군사-관방(關防) [주D-001]빈어(嬪御) : 시종(侍從)하는 궁녀(宮女). [주D-002]구사(丘史) : 임금이 종친(宗親) 및 공신에게 구종(驅從)으로 하사(下賜)한 관노비(官奴婢). 품위(品位)에 따라 수가 정해져 있었음. [주D-003]청금(淸禁) : 대궐. [주D-004]액정(掖庭) : 대궐(大闕) 안. [주D-005]엄시(閹寺) : 내시(內侍). [주D-006]장부(臧否) : 현명 여부. [주D-007]숙특(淑慝) : 선악. [주D-008]하전(厦氈) : 경연청(經筵廳). [주D-009]우불(吁咈) : 아! 틀렸다고 불찬성을 나타내는 말. [주D-010]천어(天語) : 임금의 말. [주D-011]환실(患失) : 벼슬자리를 잃게 될까 근심하는 것.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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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10일 (무술) | |||||||||||||
임금이 대신(大臣)과 비국(備局)의 여러 재신(宰臣)들을 인견(引見)하였다. 허적(許積)이 아뢰기를, “윤휴(尹鑴)의 주장인 병거(兵車)의 일은 실행할 만합니다.” 하니, 임금이 여러 신하에게 물었는데, 권대운(權大運)·이정영(李正英)·장선징(張善瀓)·민희(閔熙)·유혁연(柳赫然)·김석주(金錫胄)·윤심(尹深)·신여철(申汝哲)이 모두 말하기를, “사용할 수가 없습니다.” 하였다. 유혁연이 아뢰기를, “마땅히 먼저 화차(火車)를 만들어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렇다면 화차(火車)를 만들도록 하라.” 하였다. 허적이 인구(人口)의 수(數)대로 포(布)를 거둘 적에 아약(兒弱)과 백골(白骨)에게 포를 징수(徵收)하는 일은 없앨 것을 진계하니, 권대운이 아뢰기를, “갑자기 실행하면 원망하는 자가 반드시 많을 것입니다.” 하였다. 허적이 아뢰기를, “국가에서 큰 거조(擧措)를 하려면 비록 원망하는 자가 있더라도 백성들의 부역(賦役)은 균등(均等)하게 될 것입니다. 선조(先朝) 때에 거의 실행할 뻔하였는데도 강백년(姜栢年)이 올린 소(疏) 때문에 도로 중지되었던 것입니다.” 하였다. 권대운이 아뢰기를, “이 일을 실행하지 못한다면 형세(形勢)가 장차 병역(兵役)에 다시 포를 거두어야 할 것이니, 원망만 증가시킬 뿐 아니라, 나라의 일도 또한 어찌 이와 같이 하겠습니까?” 하였다. 윤심이 아뢰기를, “유학(幼學) 이하(以下)에게만 부과(賦課)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니, 허적이 아뢰기를, “구별(區別)을 두어서는 아니됩니다. 마땅히 제상(帝相)들로부터 거두어야 하겠습니다.” 하였다. 집의(執義) 김빈(金)이 아뢰기를, “고(故) 감사(監司) 최현(崔晛)은 높고 낮음을 따지지 말고 포를 거두어들이기를 청하였으니, 비록 조그마한 폐단이 있더라도 실행함이 좋을 듯합니다.” 하였다. 권대운이 호패(戶牌)의 법을 실행하고자 하니, 허적이 청하기를, “좌상(左相)이 나올 때를 기다려 서로 의논하소서.” 하였다. 김석주가 무사(武士)를 천거 임용하는 일을 의논하니, 허적(許積)이 청하기를, “문관(文官)·음관(蔭官)·무관(武官)을 교대로 수령(守令)에 차견(差遣)하소서.” 하였다. 장선징(張善瀓)이 아뢰기를, “선조(先朝)에서 무신(武臣)을 명하여 호조(戶曹)·형조(刑曹)·공조(工曹) 3조의 낭관(郞官)을 차임(差任)하였습니다.” 하니, 허적이 청하기를, “무신으로서 3조의 낭관 각 1원(員)씩을 차임하소서.” 하였다. 김석주가 다시 청하기를, “음관(蔭官)인 감찰(監察) 2원(員)을 무과(武窠)로 개정하소서.” 하니, 임금이 모두 그대로 따랐다. 허적이 말하기를, “대궐(大闕)안에 공납(貢納)하는 것이 점점 많고 무거워져서 백성들의 원망이 이로 말미암아 일어나게 되니, 신하들을 다스림이 엄하면 이 폐단은 저절로 없어질 것입니다.” 하였다. 이때에 외간(外間)에 떠도는 말로는 ‘임금이 젊은 내시(內侍)들과 노는 것을 좋아하여 하사(下賜)하는 것이 절도(節度)가 없다.’고 하였으므로, 허적의 말이 이와 같았지마는, 감히 끝까지 말하지는 못하였다. 정언(正言) 유명현(柳命賢)이 아뢰기를, “직강(直講) 이태서(李台瑞)는 일찍이 자기 아비의 잘못을 교묘하게 신설(伸雪)하려는 생각으로 간사한 아전들과 부동(符同)하여 아비의 이름을 지우고 고쳤다가, 사적(事跡)이 탄로(綻露)되었기에 편배(編配)의 형률(刑律)을 받았으니, 어찌 처음 정사(政事)하는 청명한 날 이 직임에 갑자기 임명할 수 있겠습니까? 체차할 것을 청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하였다. 【원전】 38 집 262 면 【분류】 *왕실-국왕(國王) / *군사-군기(軍器) / *재정(財政) / *인사-임면(任免) / *사법-탄핵(彈劾) / *행정-중앙행정(中央行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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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8일 (정해) | ||||||||||||||||||||||||||||||||||||||||||||||||||||||||||||||||||||||||||||||||||||||||||||||||||||||||||||||||||||||||||||||||||||||||||||||||||||||||||||||||||||||||||||||||||||||||||||||||||||||||||||||||||||||||||||||||||||||||||||||||||||||||||||||||||||||||||||||||||||||||||||||||||||||||||||||||||||||||||||||||||||||||||||||||||||||||||||||||||||||||||||||||||||||||||||||||||||||||||||||||||||||||||||||||||||||||||||||||||||||||||||||||||||||||||||||||
전 강원 감사 최현(崔晛)이 죽었다. 최현은 영남 사람으로 문예가 있고 단아하기로 이름이 높았다. 반정(反正) 후에 청현직(淸顯職)을 두루 지내고 강원 감사로 나갔다가 이인거(李仁居)의 모반 사건에 연좌되어 폐치되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죽었다. 【원전】 35 집 95 면 【분류】 *인물(人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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