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성공 안렴사공파/인제공 휘 현 관련 (문성공파)

인제공 최현 강원도 관찰사(江原道觀察使) 등을 지냄 (관련기사 스크랩)

아베베1 2010. 10. 30. 11:48

최현(崔晛)

조선 선조(宣祖)-인조(仁祖) 때의 문신·문인. 본관은 전주(全州). 정구(鄭逑)의 문인으로,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의병을 일으켜 공을 세움. 《선조실록(宣祖實錄》편찬에 참여하고, 강원도 관찰사(江原道觀察使) 등을 지냄.

 

계해정사록(癸亥靖社錄)
〈반정 때 재상ㆍ전조(銓曹)ㆍ삼사(三司) 및 당상 실직(堂上實職)과 당하 청직(堂下淸職)을 개정한 좌수(座首)〉


영의정 박승종(朴承宗)3월 14일 자살. 대(代) 이원익(李元翼)15일 정사에, 귀양중.
좌의정 박홍구(朴弘耈)3월 17일 합계로 갈렸다가 뒤에 파출. 대 정창연(鄭昌衍)23일 정사에, 파산(罷散)중.
우의정 조정(趙挺)4월 초 5일 합계로 삭직. 대 윤방(尹昉)22일 정사에, 산관이었음.
좌찬성 차출하지 않았음.
우찬성 이상의(李尙毅)4월 23일 부계(府啓)로 논박되어 갈렸음.
좌참찬 이경전(李慶全)주문사로 체직. 대 이시언(李時彦)5월 4일 정사에, 파직.
우참찬 오윤겸(吳允謙)
이조 판서 이광정(李光庭)물의가 있어 갈렸음. 대 신흠(申欽)15일 정사에, 파직중.
호조 판서 김신국(金藎國)3월 16일 평안 감사, 뒤에 나포되어 삭직. 대 이서(李曙)장단 부사로 공신, 3월 17일 정사에.
예조 판서 임취정(任就正)3월 17일 원계로 체직, 뒤에 원찬(遠竄). 대 이정귀(李廷龜)16일 정사에.
병조 판서 권진(權縉)3월 17일 원계로 체직, 뒤에 위리안치. 대 김유(金瑬)파산(罷散)으로 공신, 병조 참판에서 승직.
형조 판서 한찬남(韓纘男)복주(伏誅). 대 서성(徐渻)15일 정사에.
공조 판서 이정귀(李廷龜)호조로 천직. 대 이흥립(李興立)17일 훈련대장. 공신.
판윤 윤선(尹銑)3월 18일 원계(院啓)로 체직. 대 이괄(李适)19일 정사에. 북병사, 공신.
대사헌 남근(南謹) 3월 15일 원계로 체직, 뒤에 원찬. 대 오윤겸(吳允謙)15일에 우참찬에서.
이조 참판 이귀(李貴)14일 정사에. 파직되어 산관, 공신.
호조 참판 권분(權昐)
예조 참판 윤휘(尹暉)3월 22일 합계로 파출, 뒤에 원찬. 대 이안눌(李安訥)15일 정사에 파산중.
병조 참판 박정길(朴鼎吉)3월 13일 복주. 대 김유(金瑬)14일 정사에.
형조 참판 최응허(崔應虛)3월 18일 원계로 체직, 뒤에 정배. 대 오백령(吳百齡)19일 정사에. 파산중.
공조 참판 조집(趙濈)
좌윤 박정현(朴鼎賢)사직. 체차. 대 권희(權憘)
우윤 장사철(張士哲)3월 18일 원계로 파출, 뒤에 원찬. 대 이경함(李慶涵)19일 정사에. 산직이었음.
도승지 이덕형(李德泂)3월 15일 홍문관에서 논박되어 체직. 대 이수광(李睟光)16일 정사에. 산직이었음.
좌승지 유진증(兪晉曾)위와 같음. 대 민여임(閔汝任)17일 정사에. 산직이었음.
우승지 정입(鄭岦)사직. 체자. 대 조우인(曺友仁).
좌부승지 박홍도(朴弘道)3월 14일 복주. 대 한여직(韓汝溭)17일 정사에. 산직이었음.
우부승지 권진기(權盡己) 대 정홍익(鄭弘翼)14일 정사에. 정배중.
동부승지 민성휘(閔聖徽)경상 감사로 나갔음. 대 신응구(申應榘)
이조 참의 이정원(李挺元)3월 13일 복주. 대 홍서봉(洪瑞鳳)16일 정사에 파산, 공신.
호조 참의 김대덕(金大德)사직. 체차. 대 권첩(權帖)
예조 참의 목장흠(睦長欽)3월 23일 부계로 파직. 대 홍방(洪霶)
병조 참의 백대형(白大珩)13일 복주. 대 이상길(李尙吉)17일 정사에. 산직이었음.
병조 참지 배대유(裴大維)18일 원계로 체직, 뒤에 삭판. 대 심집(沈諿)19일 산직.
형조 참의 이위경(李偉卿)13일 복주. 대 이신의(李愼義) 17일 정사에. 정배.
공조 참의 이익엽(李益燁)15일 복주. 대 김몽호(金夢虎)피핵 파출. 대 신경진(申景禛)25일 정사에. 우후, 공신.
부제학 정조(鄭造)14일 복주. 대 정경세(鄭經世)15일 정사에. 산직.
대사간 유대건(兪大建)15일 원계로 체직, 뒤에 삭출. 대 박동선(朴東善)15일 정사에. 산직.
대사성 이대엽(李大燁)15일 자살. 대 정홍익(鄭弘翼)17일 정사에. 정배중.
판결사 심종도(沈宗道)14일 체포, 뒤에 원찬. 대 윤안국(尹安國)17일 정사에. 정배.
직제학 한희(韓暿)14일 복주.
전한 차출하지 않았음.
집의 정도(鄭道)13일 위리안치. 대 김덕함(金德諴)14일 정사에. 정배중.
사간 임건(林健)13일 위리안치. 대 이성구(李聖求)13일 정사에. 산직, 사인(舍人)으로 옮겼음.
보덕 임성지(任性之)3월 21일 원계로 체직, 뒤에 정배.
겸보덕 윤지경(尹知敬)
사인 이성구(李聖求)15일 체직.
응교 한옥(韓玉)15일 원계로 파직, 뒤에 정배. 대 윤지경(尹知敬)15일 정사에.
장령 이시정(李時禎)13일 체포, 귀양. 대 김장생(金長生)14일 정사에.
곽천호(郭天豪)13일 원계로 파직, 뒤에 정배. 대 이명준(李命俊)15일 정사중에. 정배중.
필선 차출하지 않았음.
부응교 오환(吳煥)15일 원계로 체직.
검상 유활(柳活)18일 원계로 파출, 뒤에 위리안치.
이조 정랑 이원여(李元輿)13일 체포, 위리안치.
한정국(韓定國)14일 체포 복주.
교리 이경익(李慶益)15일 원계로 파직, 뒤에 삭출. 대 이민구(李敏求)17일 정사에. 산직이었음.
김시국(金蓍國)사신으로 나가 체직.
지평 정담(鄭湛)14일 체포, 위리안치. 대 조정호(趙廷虎)15일 정사에. 파산.
한정국(韓正國) 대 유백증(兪伯曾)15일 정사에. 공신.
헌납 임기지(任器之)14일 체포, 원찬. 대 정온(鄭蘊)15일 정사에. 정배중.
문학 차출하지 않았음.
겸문학 남명우(南溟羽)
부교리 한급(韓昅)14일 체포, 복주. 대 심광세(沈光世)15일 정사에. 정배중.
최호(崔護)15일 계파, 뒤에 위리안치. 대 조성립(趙誠立)19일 정사에. 파산.
이조 좌랑 민심(閔)16일 부계로 체직, 뒤에 위리안치. 대 최명길(崔鳴吉)14일 정사에, 공신.
박종윤(朴宗胤)16일 부계로 체직, 뒤에 위리안치. 대 조익(趙翼)14일 정사에. 파직중.
수찬 오익환(吳益煥)15일 원계로 파직, 뒤에 위리안치. 대 최현(崔晛)19일 정사에. 파직.
목서흠(睦敍欽)사신으로 나가 체직. 대 조희일(趙希逸)16일 정사에.
정언 한유상(韓惟翔)13일 체포, 뒤에 귀양. 대 이목(李楘)14일 정사에. 산직이었음.
이효성(李孝誠)14일 체포, 뒤에 귀양. 대 오숙(吳䎘)15일 정사에. 산직이었음.
부수찬 이명한(李明漢)16일 이조 좌랑으로 옮겨 임명. 대 이경여(李敬輿)17일 정사에. 산직이었음.
주서 최몽량(崔夢亮)피핵 체직. 대 이계(李烓)15일 정사에. 전천(前薦).
설서 정성(鄭晟)즉시 체직, 뒤에 정배.
봉교 홍경정(洪景艇)21일 원계로 체직, 뒤에 정배. 대 장유(張維)14일 정사에. 전천, 파산, 공신.
유진정(柳震禎)26일 원계로 귀양, 뒤에 삭출.
대교 안헌징(安獻徵)17일 원계로 우매무식하여 천이. 대 신계영(辛啓榮)14일 정사에. 전천.
검열 유명립(柳命立)원찬. 대 엄성(嚴惺) 14일 정사에. 증경피적(曾經被謫).
경기 감사 박자흥(朴自興)14일 자살. 대 홍명원(洪命元)14일 정사에. 산직이었음.
평안 감사 박엽(朴曄)임소에서 효시. 대 김신국(金藎國)
충청 감사 박경신(朴慶新)17일 원계로 파직, 뇌물로 임직. 대 이덕형(李德泂)18일 정사에.
강원 감사 임석령(任錫齡)17일 원계로 파직, 뇌물로 임직. 대 정광성(鄭廣成)18일 정사에.
전라 감사 황근중(黃謹中)17일 원계로 파직, 뒤에 삭출. 대 황치경(黃致敬)18일 정사에. 산직이었음.
황해 감사 이명(李溟)잡아서 삭직. 대 임서(林壻)
경상 감사 김지남(金止男)과만(瓜滿)으로 병조 참의 임명.
함경 감사 이홍주(李弘冑)과만으로 도승지 임명.
영돈녕 한준겸(韓浚謙)15일 국구로 서평부원군에 봉함.
대제학 신흠(申欽)7일 정사에서.


 

광해조일기 1(光海朝日記一)
무신년 (1608, 선조 41, 광해군 즉위년)



정월

전 참판 정인홍(鄭仁弘)이 상소하였는데, 이러하다.
“삼가 아룁니다. 신이 멀리 남쪽 시골에서 듣자옵건대, 옥체가 평안치 못하시다가 지난봄 무렵부터는 온갖 정사를 전과 같이 재결하시어 밀리는 것이 없다 하옵기에 무망(无妄)의 병환이니 약을 쓰지 않고도 자연히 회복될 수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런데 세월이 지나 10월에 이르러서는 더욱 염려스러운 징후가 계시어 중외(中外)가 당황하고 원근이 걱정하고 있는데, 열흘이 못 되어 도로 회복되셨다 하오니, 이는 참으로 천지가 도와 주고 신명(神明)이 도와 주신 덕택이옵니다. 얼마나 종묘 사직의 다행한 일이오며, 신민(臣民)의 복됨이 어떠하겠습니까.
그러하오나, 듣자옵건대, 평일에 아직도 병환의 본증세는 여전하시다는 말씀이 계시다 하오니, 먼 데서 전해 듣자오매 지극히 민망스럽고 걱정이 되옵니다. 신은 몸이 영외(嶺外)에 있어 서울에서 천리나 떨어져 있고, 나이가 70을 넘어 안으로는 노쇠함이 심하고 밖으로는 병이 들어 시골에 움츠리고 있으면서 도무지 근력이 없어 약맛을 보는 서열에 참여하지 못하오니, 죄가 중해 몸둘 곳이 없사오며, 대궐을 바라보매 마음을 가눌 수가 없습니다. 신이 나라의 두터운 은혜를 입고도 갚을 길이 없으니, 아침 저녁 사이에 곧 죽게 되면 끝없는 한을 품게 될 것이오니, 지금은 비록 임금님 곁에서 충성을 다하지 못할지라도 어찌 몸이 거룩하고 밝은 세상을 만나 갑자기 우돈의 장[遇遯之章]을 불사르오리까.
다만 생각하옵건대, 전하의 병환이 아직 쾌차하지도 못하셨는데 경솔하게 광고한 말[狂瞽之說]로써 해와 같은신 전하의 감식력을 더럽히니, 신이 지극히 어리석으나 어찌 마음에 불안하게 여길 줄 모르겠습니까마는, 종묘 사직의 위태로운 증상이 눈앞에 있고, 나라가 흥하고 망하는 기틀이 아침 저녁에 임박하였으므로, 입을 다물고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만번 죽음을 무릅쓰고 한 말씀 올려 죽는 날에 보국(報國)하는 길로 삼으려 하옵고 고식적인 아녀자나 내시의 충성이 되지 않고자 하오며, 임금을 덕으로써 사랑하는 의리에 따르려 하오니, 굽어 살피소서.
신이 소문을 듣자오니, 지난 10월 11일에 전하께서 세자에게 전위(傳位)를 하거나 섭정(攝政)을 시키시겠다는 전교는 내리자, 영의정 유영경(柳永慶)이 원임 대신들을 속으로 꺼려서 모두 내쫓아 참여하지 못하게 하고, 누차 방계(防啓)를 올려 시임 대신들만으로 일을 같이 하였고, 중전(中殿)께서 언문(諺文)으로 된 전지(傳旨)를 내리신 데 대해서는 곧 회계(回啓)하기를 ‘오늘의 전교는 실로 뭇사람의 생각 밖이므로 감히 명을 받들 수 없다.’ 하였으며, 대간(臺諫)들에게는 이 사실을 들려주지 않고 승정원과 사관(史官)들은 그대로 성지(聖旨)를 감추어 두고 오랫동안 전출(傳出 등사하여 조보(朝報)에 냄)하지 않았으니 유영경이 어떤 음모와 흉계가 있어 이렇게까지 사람들에게 알리지 않으려 한 것이겠습니까.
아, 중전의 깊고 거룩하신 분부는 깊이 전하의 뜻을 받들어 나라를 위한 원대한 계책이어서 비록 옛날의 고(高)조(曹)마(馬)등(鄧)의 현명한 황후(皇后)라도 이보다 나을 것이 없사온데, 유영경이 거리낌없이 극구 막아서 감추어서는 안 될 성지(聖旨)를 감추고 쫓아내서는 안 될 원임 대신들을 쫓아냈으니, 경외(京外)에서 이 소식을 전해 듣고 민심이 놀라고 분격하였습니다.
아, 국사는 한 집안의 일이 아니고, 원임 대신은 참여하는 예가 있는데, 유영경이 참여하지 못하게 했던 것은 무슨 속셈인지 신은 알 수가 없습니다. 나라의 임금에게 일이 있으면 세자가 나라 일을 감독하고 처리하는 것이 고금의 통례인데, 유영경이 그것을 뭇사람의 생각 밖이라 한 것은 무엇을 가리킴인지 신은 알 수가 없습니다. 대간에게 알리지 않은 것은 국정(國政)이 아니고, 사사로운 일입니다. 승정원과 사관들까지도 함께 비밀에 붙인다면 사사로운 당파만을 알고 나라 일은 알지 못하는 것이오니, 신이 자세히 말씀드리려 하옵니다.
전하께서 종묘 사직의 중대함을 깊이 염려하고, 옥체의 병환을 생각하시어 나라 일을 세자에게 맡기고 한가하게 조리하시려는 전하의 하교는 청천 백일 같아서 신민이 마땅히 함께 들어야 하고, 만물이 다 같이 보아야 하는데, 하물며 원임 대신들까지도 참여하지 못하게 하였으니, 그 음흉하고 간사하게 감춘 정상과 멋대로 하려는 속셈이 불을 보는 듯 환하게 드러나 다시는 가릴 수가 없습니다.
아, 유영경은 본래 간사하지만, 원임 대신들도 어찌 과실이 없다 하겠습니까. 나라 정사는 함께 들어야 하는데 어찌 유영경의 방자한 그 말을 듣고 양떼처럼 묵묵히 쫓겨간단 말입니까. 모든 일이 있으면 반드시 빈청(賓廳)에서 널리 의논하게 하는 것은 권간(權奸)들의 전횡하는 근심을 막자는 것인데, 결국은 이렇게 되었으니, 장차 그런 재상들을 무엇에 쓰리까. 심지어는 ‘뭇사람의 생각 밖이라’고까지 하였으니, 이른바 ‘뭇사람의 생각이라’ 는 것은 무엇을 가리키는 것입니까. 그것이 만약 그의 사당(私黨)이 바라지 않는 것이라면 다만 몇 사람의 음모 흉계를 가지고 여러 사람의 뜻이라 지칭하여 임금의 이목을 속이는 것입니다. 만약 국민들이 원하지 않는 바라 한다면 전위(傳位)나 섭정(攝政)을 하시어 민심을 붙들어 나라의 근본을 안정시키고, 옥체를 정양하시어 빨리 완쾌의 경사를 맞도록 함이 조정 신하의 심정이고, 도성(都城) 사녀(士女)들의 심정이고, 또 한 나라 백성들의 심정입니다.
모든 혈기(血氣)가 있는 이들의 같은 심정을 뭇사람의 심정이 아니라고 하니, 이는 뚜렷이 임금을 업신여기는 마음이 있어 합단(盍旦)의 울음을 하려는 것입니다.
신이 전하의 뜻을 헤아리지는 못하오나, 여러 왕자 중에서 선택하시어 세자의 위(位)를 정하셨으니, 전하께옵서 아드님을 알아보시는 것이 아니옵니까. 세자를 의인왕후(懿仁王后)께서 친히 낳으신 아드님같이 사랑하시어 옥책(玉冊)에 올린 것이 전하의 본의가 아니십니까.
대가(大駕)가 서도(西都)로 행차하셨을 때에 대소(大小) 두 조정으로 나누어 나라 일을 감독하고 군사를 보살피게[監撫] 하시고, 백관들에게 신(臣)으로 일컫도록 하신 것이 전하의 하교가 아니었습니까. 들어와 병환을 간호하게 하시고 생각이나 말씀마다 세자를 잊지 않으신 것이 전하의 거룩하신 생각이 아니십니까. 세자가 입시한 뒤, 밤중에 울면서 밖에 서서 하늘에 빌어 원성청명(元聖請命)과 같이 한 거룩한 정성을 행한 것도 전하께서 아시는 바가 아니옵니까.
이 몇 가지 일이 모두 전하께서 충심으로 사랑하신 것이라서 하늘도 내려다보시고 국인도 다 아는 바인데, 유영경의 반대함이 이와 같으니, 이는 세자를 업신여기는 것이고, 전하를 배반하는 것입니다. 전하의 병환이 완쾌되시지는 못했으나 조금 평안하시다는 말씀을 듣는 것도 세자의 효성이 지극하신 소치입니다. 이 사실을 국민이 전해 듣고 감격해 울지 않는 사람이 없사오며, 모두 말하기를, ‘전하의 교훈이 이처럼 도리에 들어맞고 세자의 효성이 상하에 감동됨이 이와 같으며 거룩하신 아버님에 이 같은 어진 아드님이 계시니, 나라의 복이 무궁하리라.’ 하였습니다. 인심의 동향을 살펴보면, 전위나 섭정을 시키고 정양하시는 일은 온 국인이 한결같이 바라는 것이온데, 국인 이외에 또 다른 뭇사람의 심정이 있겠습니까. 유영경의 말을 가지고 그의 본심을 따진다면 훗날 그가 미원(彌遠)이 되어 우리 세자를 제왕(濟王)처럼 만들 속셈입니다. 유영경이 세자를 모함하려는 정상이 이미 드러났음을 스스로 알기 때문에 마음이 날로 심해진 것이니 그 자신을 위해서 꾀하는 데에 못 하는 짓이 없이 할 것입니다. 전하께서는 유영경이 다시 세자를 우리 임금의 아들로 보리라고 여기십니까. 그 형세가 여기에 그치지 않고 반드시 그 간특한 계략을 행하여 제 뜻에 만족하도록 하고야 말 것입니다.
가만히 생각하옵건대, 조정에는 의당 청검(請劍)하는 사람이 있을 터이온데, 10월부터 지금까지 기다렸으나 그런 사람이 전혀 없으니, 지금 요직에 있는 자들이 유영경의 당파 아닌 사람이 없어 유영경만을 알고 전하가 계심은 알지 못하여 차라리 전하를 저버릴망정 차마 유영경은 저버리지 못할 것입니다. 대간(臺諫)들이 말하지 않는 것은 유영경의 조아(爪牙 호위하는 사람)이기 때문이고, 대신들이 묵묵히 그를 따르는 것은 유영경의 우익(羽翼 보좌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며, 승정원과 사관(史官)이 성지(聖旨)를 감추어 둔 것은 유영경의 심복이기 때문입니다. 전하의 고굉(股肱 팔다리)은 대신인데 대신이 이러하고, 이목(耳目)은 대간인데 대간이 이러하며, 후설(喉舌)은 승정원과 춘추 사관(春秋史官)인데 승정원과 사관또한 이러하니, 전하께서는 위에 고립되시어 개미새끼만한 의지도 없으시어 어진 세자를 두시고도 서로 보전하지 못하실 것입니다. 신의 소견으로는, 전하의 부자(父子)를 해칠 자도 유영경이고, 전하의 종묘 사직을 망칠 자도 유영경이고, 전하의 국가와 신민에게 화를 끼칠 자도 유영경입니다.
아, 참으로 세자가 애당초 왕위를 이을 이로 간택되지 않았다면 하나의 왕자일 뿐이오니, 어찌 동요하는 것이 이 지경에 이르겠습니까. 이는 전하께서 처음에 세자로 간택하신 것이 나중에는 불측한 처지로 밀어넣게 되는 것이오니, 전하께서는 한 간흉(奸凶) 때문에 장차 어진 세자에게 화를 끼치는 일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 송 고종(宋高宗)은 말세의 평범한 임금이고, 또한 질병도 없었으나, 종자(宗子) 진안왕(晉安王)을 택하여 후사(後嗣)로 삼고는 왕위에서 물러나면서 말하기를, ‘나라 일을 부탁할 사람을 얻었으니 여한이 없다.’ 하였는데, 사관이 그것을 훌륭한 일이라고 대서 특필했으며, 군자들은 요순(堯舜)의 선위(禪位)와 같다고 일컬었습니다.
이제 세자에게 임시로 섭정케 하는 것은 가깝기로는 낳은 아들이고, 성격으로 보아서는 인효(仁孝)한 덕이 있고, 시기로 보아서는 옥체가 편치 못한 때이오니, 낳으신 인효(仁孝)한 아들에게 옥체가 편치 못하신 때에 섭정케 하고 정양하시겠다는 명이 계시면 대신으로서는 마땅히 순종하여 미치지 못할까 두려워해야 할 것인데, 도리어 화를 일으키려는 마음을 품고 사사로운 것을 공적인 일인 체하여 뭇사람의 뜻이 아니라고 하니, 이런 짓을 차마 한다면 못할 것이 무엇 있겠습니까. 하물며 왜구가 침입한 난리통에는 소조(小朝)를 남쪽으로 내려보내서 군사를 보살피고 나라 일을 감독하여 오랫동안 온 나라의 희망을 걸게 하였습니다. 대가(大駕)가 환국하신 뒤에 다시 동궁으로 돌아갔으니 전례가 이미 이루어졌고 사리가 명백하니, 이제 임시로 섭정케 하는 것은 전례에 비추어 하는 일이므로 티끌만큼도 의심할 것이 없는데, 유영경이 가로막아 대신들을 꼼짝 못하게 하고 도당을 부추겨 제 멋대로 위협하여 내쫓아 눈 깜짝할 사이에 전고에 없는 일을 하였으니, 흉악함이 김안로(金安老)보다 지나쳐 길 가는 사람까지도 곁눈질을 합니다. 차마 말할 수 없는 일이 장차 있을 것이니, 이야말로 이른바 너무 뻗어 나간 뒤에는 막기가 어렵다는 것입니다.
더구나 유영경이 이런 처사를 한 것은 전하께 잘 보여 총애를 굳히고 나라 일을 전횡할 계책을 한 것입니다. 이런 짓은 용렬하고 어두운 임금 때에는 진실로 뜻대로 할 수 있겠지만, 전하의 강건하심이 어떠한 사사로움도 이기지 못한 바 없고, 전하의 밝으심이 아무리 깊은 곳이라도 비치지 않는 데가 없는데도 감히 이렇게 하니 신은 적이 의혹됩니다. 유영경이 참으로 어리석고 망령되지 않다면 필시 믿는 데가 있어서일 것입니다. 신은 듣자오니, 《주역(周易)》에 이르기를, ‘지나치게 방비하지 않으면 끝내는 해를 입어 흉하게 된다.’ 하였습니다.
원하옵건대, 전하께서는 종묘 사직의 대계(大計)를 깊이 생각하시어 다시 전철(前轍)을 거울삼아 간흉의 정상을 살피시고 더욱 엄하게 방비하시어 혹시나 지나치게 하는 것이 아닌가 염려하시지 마옵소서. 유영경이 동궁을 동요시키고 종묘 사직을 위태롭게 한 죄를 나라의 떳떳한 법으로 한 번 바로잡으시어 계은(繼恩)ㆍ창령(昌齡)과 같은 간신이 훗날 다시 일어나지 못하도록 하시어 나라의 근본을 튼튼히 하고 종묘 사직을 안정케 하시어 억만년까지 끝이 없게 하소서. 만약 신의 말이 잘못되었다면 먼저 망언한 죄를 주시어, 간당(奸黨)의 마음을 쾌하게 하소서. 그렇게 하시면 신은 전하의 손에 죽게 되고 유영경의 흉측한 화에 죽지는 않을 것이니, 참으로 다행한 바이고 억울하게 여길 바가 아닙니다. 신은 권간에 대해 직언(直言)하는 죄가 장강(張綱)이 양기(梁冀)를 탄핵하고 호전(胡詮)이 진회(秦檜)를 벨 것을 청하다가 모두 모함에 빠져 혹심한 화를 입은 것과 같이 될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가만히 생각하오니, 옛사람들은 이웃 나라의 임금을 죽인 신하에 대해서 비록 늙어 벼슬에서 물러났을지라도 오히려 토죄(討罪)하기를 청하였는데, 하물며 본조(本朝)에 있음이리까. 임금을 배반하고 나라를 그르치는 간흉에 대해 어찌 한산한 지위에 있다 하여 입을 다물고 전하를 저버려 불충한 신하가 되어서 천지 귀신의 죽임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전하께서는 굽어살피소서.” 비답(批答) 없이 계자(啓字 : 계(啓) 자를 새긴 도장)를 찍지 않고 내렸다.
21일 영의정 유영경(柳永慶)이 상소하여 스스로를 변명하였는데 이러하였다.
“삼가 아뢰옵니다. 신이 전 참판 정인홍(鄭仁弘)의 소를 보옵건대, 사설이 낭자(狼藉)하온 중에 오로지 신이 동궁을 동요시키고 종묘 사직을 위태롭게 한다고 지목하여 악한 죄명을 씌워 못할 말이 없이 하였습니다. 인신(人臣)으로서 이런 하늘과 땅에 사무치는 원통한 일을 당하고서 사실을 전하 앞에 밝히지 않는다면 살아서는 스스로 세상에 설 수가 없고, 죽어도 지하에서 눈을 감을 수가 없습니다. 어찌 번거롭게 말씀드리는 것을 꺼려서 원통하고 절박한 정상을 다 여쭙지 않겠습니까. 전하께옵서는 굽어살피옵소서. 지난해 10월 충격을 받고 상처를 입어 전위하거나 섭정케 하시겠다는 하교를 편찮으신 뒤에 갑자기 내리시므로 신민들이 당황하여 어찌할 바를 몰랐습니다. 그때 신은 약방 제조(藥房提調)로 차비문(差備門) 안에 있었는데, 정원이 삼공(三公)을 불러들이는 하교를 전해 왔고, 이어 밀부(密符)를 내리셨으므로, 신이 좌의정 허욱(許頊)ㆍ우의정 한응인(韓應寅)과 밀부를 맞추어 본 뒤에 차비문 밖에서 명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잠시 후에 정원에서 말을 전하기를, ‘빈청으로 물러가 기다리라’ 하므로, 좌ㆍ우의정과 함께 빈청에 나아가니 원임 대신들은 이미 있지 않았습니다. 신들이 전위ㆍ섭정하신다는 하교를 받자옵고 가만히 생각하옵건대, 창황한 중에 특별히 이런 명이 계신 것은 종묘 사직의 대계를 위하여 근본을 공고히 하시려는 의도가 보통 사람의 생각보다 만 배나 뛰어난 것이었습니다. 신들이 성지(聖旨)를 순종할 줄 모르는 것이 아니옵니다만, 전하께서 정치를 친히 보살피지 못하심이 겨우 하루 이틀뿐이고, 또 우연히 얻으신 병환이오니 응당 약을 쓰지 않아도 자연히 하루 이틀이면 거의 나으실 것이다 하였으며, 간절한 신민들의 심정도 오직 이렇게 바랄 뿐이었는데, 갑자기 중전의 교지가 내리셨습니다. 그때의 회계(回啓) 중에 이른바, ‘오늘의 하교는 실로 여러 사람의 생각 밖이다.’ 한 것은 실로 그 때문에 말함이었습니다. 하물며 왕세자께서 이런 명이 계심을 듣고 걱정하고 당황하는 중에 더욱 애타고 절박한 심정이 되어 음식을 폐하고 울면서 어찌할 바를 몰랐는데, 신민들이 누군들 감읍(感泣)하지 않았겠습니까. 신들이 하교를 받들지 못하겠다는 곡절이 이와 같사온데, 정인홍의 말에, ‘원임 대신들을 물리쳐 참가하지 못하게 하고, 누차 방계(防啓)를 올렸으며, 시임 대신들과만 같이 하였다.’ 하였는데, 신들이 빈청에 이르기도 전에 원임 대신들이 이미 나갔으니, 이른바 ‘물리쳤다’는 것은 신이 참으로 알 수 없는 일입니다.
전하께서 이미 삼공을 불러들이셨고, 신들도 삼공을 불러들이는 밀부(密符)를 대조하였으니, 그때 회계하는 일은 마땅히 시임 대신에게 있으므로 신들이 상의하여 회계하였던 것이며, 그 비망기(備忘記)와 회계의 초안을 즉시 사인(舍人) 오백령(吳百齡)으로 하여금 원임 대신들이 모인 곳에 가지고 가서 보이도록 하였으니, 원임 대신이 한때 참가하지 못한 것은 사세가 그러하였던 것입니다. 그가 말하기를, ‘대간이 듣지 못하게 하고, 정원과 사관들이 성지(聖旨)를 숨기고 오랫동안 전출(傳出)하지 않았다.’하였는데, 평시에 비망기가 삼공에게 내려지면 회계한 뒤에 비망기와 회계초(回啓草)는 주서(注書)가 으레 가지고 가는 것입니다. 그 뒤에 대간들이 듣고 못 듣는 것은 대신이 알 바가 아닙니다. 왕세자께서 총명하고 인효(仁孝)함이 천성에서 온 것이오며, 동궁에서 덕을 기르신 지 17년이나 되어 신민이 감격하여 추대한 바이며, 종묘 사직이 부탁한 바이므로 왕세자의 자리가 정해지고 나라의 근본이 이미 굳어졌는데, 정인홍은 감히 전위 섭정의 일을 빙자하여 화를 꾸미려고 음모하여 사람을 시기하고 이간질함이 날로 심하다거니, 딴마음을 가짐이 이와 같다거니, 음모의 계책이 이미 드러났다거니 하였습니다. 전하의 부자를 해치려 한다는 데에 이르러서는 그 말의 흉악하고 거짓됨이 차마 말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차마 들을 수도 없는 것입니다. 정인홍이 이런 말을 한 것은 가리키는 바가 무슨 뜻인지, 말하는 바가 무슨 일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이제 성명(聖明)이 위에 계시고 어진 세자가 아래에 있어 사랑하시고 효도하시어 양궁(兩宮)이 모두 흡족하심이 비록 왕계(王季)와 문왕(文王)의 부자 사이일지라도 이보다 나을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정인홍이 감히 근거 없는 망극한 말로써 신에게 죄를 씌우려 하여 그 자신이 지극히 흉악한 죄에 빠짐을 깨닫지 못하니, 그 계책이 참혹하고 그 마음이 망령됩니다. 미원(彌遠)은 송 나라의 적신(賊臣)이온데, 정인홍이 신을 그에게 비유해서 모함하는 정상이 극도에 달했고, 제왕(濟王)의 옛일을 들어 감히 비유하지 못할 곳에 비유하였으니, 그 뜻하는 바를 더욱 알 수 없습니다.
대저 신과 정인홍 사이에는 티끌만큼도 서로 미워할 일이 없습니다. 인년(1602, 선조 35)에 잠깐 정인홍의 의론이 편협함을 탑전(榻前)에서 아뢴 적이 있사온데, 그 뒤부터 적지 않은 감정을 품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정인홍이 비록 노망했다 하더라도 어찌 이것으로 신을 모함함이 이런 극단에 이르렀겠습니까. 여기에는 반드시 까닭이 있을 터인데 신이 그 까닭을 알 수가 없습니다. 신은 변변치 못한 몸으로 외람되이 하의 과분한 은혜를 입사와 염치를 무릅쓰고 정승 자리에 있은 지 이미 7년이나 되었습니다. 오랫동안 어진이들의 승진할 길을 막은 죄가 산처럼 쌓여 전후에 비방을 받음이 한두 번이 아니었사오나, 오직 허물을 반성하고 스스로를 변명한 적이 없었는데, 이번에 당한 모함은 그 화가 신의 몸에만 미칠 뿐 아니라, 실로 종묘 사직에까지 관계됩니다. 이 상소가 있은 후로 심골(心骨)이 모두 놀라고 간담이 찢어져 거적자리를 깔고 대죄하기 이미 수일이 지났사온데, 형벌이 내리지 않으니, 신하로서 이런 누명을 쓰고 하루라도 씻지 않는다면 하루 동안 패역의 신하가 되므로 부득불 전하께 호소하옵니다.
바라옵건대, 전하께서는 신을 형조에 내려 실상을 조사하시어 신의 죄를 바로잡고 사람들의 말에 사례하여 주시면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정인홍의 상소를 보니, 지극히 흉악하여 알 수가 없소. 내가 심병(心病)이 있어 그의 말하는 뜻을 알 수 없으니, 더욱 흉악하오. 정인홍이 까닭없이 내 마음을 동요케 하고 영상까지도 모함하니, 생각컨대, 신하들 가운데 영상을 모함하려고 하는 자가 유언비어를 만들어 내어 남중(南中 영남(嶺南)에 퍼뜨린 것을 정인홍이 주워서 이런 소를 올렸을 것이오. 그의 말은 비록 계교할 것은 못 되나 아무 일도 없는데 일을 만들어 내어 지친(至親) 사이에 이로 말미암아 의혹이 생겨 사이가 벌어지지 않을 수 없게 되었으니, 조정에 혹시라도 불안한 것이 있게 되면 큰 불행이오. 스스로 반성하여 바르다면 비록 만인이 떠든다 하더라도 무슨 혐의가 있겠는가. 또 그때 전교한 일은 다만 대신에게 전하도록 한 것인데, 저 시끄럽게 구는 자는 과연 어떤 사람이오. 경은 마땅히 안심하고 직무를 보고 개의하지 마시오.” 하였다.
비망기(備忘記)에,
“정인홍이 세자로 하여금 속히 전위(傳位)를 받도록 하려는 것은 자신을 위한 모략으로, 자신은 세자에게 충성을 다했다 하지만, 실은 매우 불충한 것이다. 제후(諸侯)의 세자는 반드시 천자(天子)의 명을 받은 뒤라야 세자라고 이를 수 있는데, 이제 세자가 책명(冊命)을 받지 못하였으니 이는 천자가 허락하지 않은 것이고, 천자가 알지도 못하는 일이다. 하루아침에 갑자기 전위를 받았다가 만일 중국 조정에서 힐문(詰問)하기를, ‘너희 나라의 이른바 세자는 우리 조정에서 아직 책봉을 허락하지 않았는데 너희 왕이 사사로이 전위하였다. 너희 임금의 벼슬은 또한 천자가 내리는 벼슬로, 너희 임금이 임의로 할 것이 아니니, 세자도 어찌 감히 사사로이 받을 수 있느냐. 중간에 무슨 그럴 만한 까닭이라도 있는 것이 아니냐.’ 하고, 불측한 죄명을 세자에게 함부로 씌우고 대신을 힐문한다면 장차 어떻게 끝맺겠는가. 나는 다만 일신의 괴로움으로 말미암아 물러나려는 것이나, 대신이 국사를 위하는 계책에 있어서는 어찌 주도면밀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것이 어찌 경솔한 사람의 생각이 아니겠는가. 대신은 어찌 구군(舊君)이 물러가는 것을 차마 할 수 없다고만 생각하고 말겠는가. 이제 정인홍의 소가 올라옴으로 말미암아 내 마음이 불안하여 밤에는 잠을 자지 못하고 낮에는 음식이 목구멍으로 넘어가지 않으며, 대신과 대간들이 모두 그 자리를 불안히 여기니, 전에 없던 큰 변고라 하겠다. 정원(政阮)은 그리 알라.”
하였다.
이정원(李挺元) 등이 소를 올려 동궁을 해치려 한 유영경의 죄를 다스리기를 청하니, 답하기를,
“누가 너희들로 하여금 이런 상소를 하게 하였느냐. 태양이 위에 있으니, 숨기지 말고 아뢰라.”
하였다.
대사간 이효원(李效元) 등이 이경전(李慶全)ㆍ이이첨(李爾瞻) 등이 이런 모함하는 말을 만들어 정인홍과 통하여 그로 하여금 상소하게 했다고 논하고 모두 귀양보내기를 청하니, 곧 윤허하여 정인홍은 강계(江界)로, 이이첨은 갑산(甲山)으로, 이경전은 영해(寧海)로 귀양보냈다. 옥당에서 차자(箚子)를 올려 정인홍의 상소의 내용이 흉악하고 끔찍함을 극구 말하였다.
정온(鄭蘊)이 상소하여 정인홍을 두둔하고 유영경의 죄를 극구 말하였다.
○ 이성(李惺)이 상소하여 정인홍을 두둔하고 동궁을 모해한 유영경의 정상을 극구 말하고, 아울러 그의 뇌물을 받은 죄를 논하였다.
대사간 이효원이 이정원ㆍ이성ㆍ정조(鄭造) 등을 귀양보내기를 청하였으니, 이는 정인홍의 죄를 구호하기 위해서였다.
영남의 유생(儒生)들이 유영경을 공격하고 정인홍을 구제하려고 연판장을 올려 소란을 피우므로 잡아다가 국문하게 하였다.


2월

1일 선조의 병환이 위급하여 승지들이 창황히 차비문 밖으로 나아가니, 어의(御醫) 허준(許浚)이 나와서 말하기를,
“성상의 병환이 지극히 위독하시어 어찌할 수가 없소.”
하였다. 대신들이 모두 왔는데, 영의정 유영경은 바야흐로 자기의 정세가 불안하여 성 밖에 나갔었으므로 맨 나중에 들어왔는데, 날은 이미 저녁때였다. 안으로부터 대신들은 들어와서 유교(遺敎)를 듣게 하므로 원임 대신 이원익(李元翼)ㆍ이덕형(李德馨)ㆍ이항복(李恒福)ㆍ윤승훈(尹承勳)ㆍ기자헌(寄自獻)ㆍ심희수(沈喜壽), 시임 대신 유영경ㆍ허욱(許頊)ㆍ한응인(韓應寅), 도승지 유몽인(柳夢寅), 주서(注書) 김시양(金時讓) 등이 들어왔다. 선조는 문 안에 누웠는데 용포(龍袍)를 몸에 걸치고 그 위에 옥대(玉帶)를 얹어 놓고 있었다. 그런데 숨이 끊어진 지 이미 오래되었다. 이덕형이 말하기를,
“옛 예법에, ‘남자는 부인의 손에서 운명하지 않는다.’ 하였으니, 부인들은 물러가시오.”
하고, 또 말하기를,
“조용히 기다려야 한다.”
하였다.
대신 이하가 차례로 나와 거애(擧哀)하고 빈청으로 물러가니, 날이 이미 어두웠다. 촛불을 밝히고 앉아 있으니, 승전색(承傳色) 김봉(金鳳)이 대비(大妃)의 명을 전하기를,
“계자인(啓字印)과 어보(御寶)를 동궁에게 보내었으나 받지 않소.”
하였다. 대신이 아뢰기를,
“상감(세자)께서 슬피 곡하는 중에 있기 때문이오니, 자연히 받으시게 될 것입니다.”
하였다.
김봉이 또 대비의 명으로 한 봉서(封書)를 가지고 와서 전하기를,
“지난 겨울 위급하실 때에 받자온 글이오.”
하였는데, 겉봉에는 ‘세자에게 준다.’고 씌어 있고, 속에는 ‘동기간을 대하기를 내가 살아 있을 때처럼 하고, 사람의 참소하는 말이 있더라도 신중히 하고 듣지 말라. 이것을 부탁한다.’라고 적혀 있었다. 김봉이 다시 들어가더니, 또 봉서를 가지고 나왔는데, 겉봉에는 ‘유(柳)ㆍ한(韓)ㆍ신(申)ㆍ허(許)ㆍ박(朴)ㆍ서(徐)ㆍ한(韓)’이라고 씌어 있고, 안에는 ‘어질지 못한 내가 왕위에 앉아 신민에게 죄를 져서 깊은 못이나 골짜기에 떨어질 듯이 두려웠는데, 이제 갑자기 큰 병을 얻었으니, 목숨의 길고 짧은 것이 수(數)가 있어 낮과 밤이 반드시 있는 것 같으므로 무슨 한이 있으리오마는, 대군(大君 영창대군(永昌大君))이 어려 미처 성장함을 보지 못하는 것이 못내 잊혀지지 않을 뿐이오. 내가 죽은 후에는 인심을 헤아리기 어려우니, 만일 사설(邪說)이 있으면 제공(諸公)들은 사랑하고 보살펴 주오. 이것을 부탁하오.’ 하였다. 김봉이 곧 말하기를, ‘유는 영의정, 한은 우의정, 신은 신흠(申欽), 허는 허성(許筬), 박은 박동량(朴東亮), 서는 서성(徐渻), 한은 한준겸(韓浚謙)인데, 이것도 지난 겨울 위급하실 적에 받은 글이다.’ 하였다.
전한(典翰) 최유원(崔有源)이 당일에 즉위해야 한다는 의론을 제기하였는데 이는 왕비의 오라버니인 유희분(柳希奮)의 뜻을 받았던 것이다. 동료를 거느리고 와서 대신에게 청하였으나, 유영경이 고집하여 옳지 못하다고 하니, 재삼 청하면서 송 나라 이종(理宗)이 당일에 즉위한 말까지 끌어대었다. 대신이 《실록(實錄)》에서 조종(祖宗)의 전례를 상고하도록 하니, 오직 성종(成宗)이 당일에 즉위하였는데, 이는 예종(睿宗)의 아들 제안대군(濟安大君)이 어렸으므로 정희왕후(貞熹王后)가 어진 이를 택해서 성종을 세웠던 것이고, 성종 또한 형 월산대군(月山大君)이 있었으므로 당일에 즉위하였던 것이다. 대신이 드디어 성종의 전례에 따라 이튿날 신시(申時)에 광해(光海)가 면복(冕服)을 갖추고 서청(西廳)에서 즉위하니, 백관들이 조복을 갖추고 천세(千歲)를 부르며 춤추고 나갔다.
성복(成服)을 하자 완산군(完山君) 이축(李軸)이 소를 올려 유영경을 죄주기를 청하였다.
○ 영남 사람 김응성(金應成)ㆍ강인(姜遴) 등이 상소하여 유영경을 논죄하였다.
○ 대간이 유영경을 파면하고, 정인홍, 이이첨ㆍ이경전(李慶全) 등을 석방할 것을 청하니, 상감이 이를 윤허하였다. 상사(上使)인 연릉부원군(延陵府院君) 이호민(李好閔), 부사(副使)인 동지(同知) 오억령(吳億齡), 서장관(書狀官)인 호군(護軍) 이호의(李好義) 등을 보내어 명 나라 조정에 부음을 고하고, 표(表)를 올려 시호(諡號)를 청하고, 또 왕대비의 주본(奏本)을 갖추어서 왕위 계승을 청하였다.
이원익(李元翼)을 영의정으로, 이항복(李恒福)을 좌의정으로, 심희수(沈喜壽)를 우의정으로 삼고, 정인홍(鄭仁弘)을 판윤(判尹)으로 승격시켰다.
유영경(柳永慶)을 경흥(慶興)에 안치(安置)하고, 김대래(金大來)를 경원(慶源)으로, 이홍로(李弘老)를 대정(大靜)으로, 이효원(李效元)을 거제(巨濟)로, 성준구(成俊耈)를 남해(南海)로 귀양보냈다.
14일 장령(掌令) 윤양(尹讓), 지평(持平) 민덕남(閔德男), 헌납(獻納) 윤효선(尹孝先), 정언(正言) 이사경(李士慶)과 임장(任章)이 아뢰기를,
“임해군(臨海君) 이진(李珒)이 오랫동안 딴뜻을 품고 사사로이 군기를 감추어 두고 몰래 결사대(決死隊)를 기르더니, 지난해 10월 대행대왕(大行大王)이 편찮으실 때부터 도적의 무리들을 많이 모았을 뿐 아니라 또한 장신(將臣)들과 결탁하고 무사(武士)들을 소집하여 밤낮으로 남몰래 반역을 꾀한 것을 국민들이 모두 밝게 아는 바이며, 선왕(先王)께서 승하하시던 날에는 발상(發喪)하기 전인데도 공공연히 자기 집에 나갔다가 한참 뒤에야 비로소 달려들어왔는데, 우물쭈물하는 모습이 가병(家兵)을 지휘한 흔적이 뚜렷이 있었습니다. 지금은 대궐과 지척인 곳에 있으면서 집을 짓는다고 핑계 대고, 철퇴(鐵椎)와 환도(環刀)를 빈 섬에 싸서 많은 수량을 자기 집에 들였으니, 예측할 수 없는 환난이 조석에 임박하였습니다.
청하옵건대, 종묘 사직의 대계를 위하여 빨리 대신과 병조에 명을 내리시어 속히 처치하여 외딴섬으로 귀양보내어 전하의 우애하시는 지극한 정을 보전하게 하시고, 중외(中外)의 인심이 위태롭고 두려워하는 것을 안정시키소서.”
하니, 답하기를,
“나의 형이 어찌 그럴 리가 있겠느냐. 내가 계사(啓辭)를 보고 민읍(悶泣)함을 견딜 수 없다. 대신에게 물어서 처리하겠다.”
하였다.
비망기(備忘記)에
“나라가 불행하여 이런 공론이 있으니, 동기간으로서 어찌할 바를 몰라 스스로 통곡할 뿐이다. 선왕이 남기신 말씀이 정녕 귀에 쟁쟁하니, 나는 차마 그 말씀을 저버릴 수가 없다. 여러 대신들이 잘 상의해서 선처하여 힘써 그의 목숨을 보전하게 하면 매우 다행이겠다.”
하였다.
아성부원군(鵝城府院君) 이산해(李山海), 영의정 이원익(李元翼), 영부사(領府事) 이덕형(李德馨), 좌의정 이항복(李恒福), 우의정 심희수(沈喜壽), 청평부원군((淸平府院君) 한응인(韓應寅), 판부사(判府事) 허욱(許頊)등이 아뢰기를,
“외딴섬으로 귀양보내는 것이 목숨을 보전시키는 지극한 뜻이오니, 그렇게 속히 처결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외딴섬으로 귀양보내는 일은 차마 못하겠으나, 이미 나갔으니, 당상 무장당상(堂上武將)을 뽑아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그 집을 지켜 뜻밖의 일을 막도록 하시오.”
하였다.
양사(兩司)에서 다시 아뢰어 이진을 외딴섬으로 귀양보내기를 청하고, 고언백(高彦伯)ㆍ박명현(朴名賢)이 몰래 딴뜻을 품고 있으니, 잡아다가 국문하기를 청하니, 답하기를,
“외딴섬으로 귀양보내는 일은 윤허하지 않는다. 고언백 등을 잡아다 국문하는 일은 아뢴 대로 하라.”
하였다.
○ 옥당에서 세 번 연달아 차자(箚子)를 올려 이진을 외딴섬으로 귀양보내기를 청하니, 답하기를,
“대신에게 물어서 처리하라.”
하였다. 전한(典翰) 최유원(崔有源)이 주로 논하였다.
병조에서 아뢰기를,
“이진이 방금 옷으로 얼굴을 싸서 부인 차림을 하고 사람에게 업혀 빠져 나가는 것을 본조 낭청(郞廳)이 멀리서 보고 알아차려 급히 붙들어다가 비변사(備邊司)에 들여다 두고 장수를 정하여 지키고 있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알았다. 삼사(三司)에 말하라.”
하였다.
15일 금부(禁府)에서 아뢰기를,
“이진의 배소(配所) 정하는 일을 대신들에게 의논하게 하였더니, 이산해(李山海)는, ‘진도(珍島)가 좋지만, 지키기를 굳게 하여 민해(民害)를 없애고, 나루터를 엄히 경계하여 국인들의 의심을 진정시켜야 한다.’고 하였으며, 이덕형(李德馨)ㆍ이항복(李恒福)은, ‘교동(喬桐)도 외딴섬이니, 멀고 가까움은 관계가 없고, 또 생각하면 이진이 난폭하고 방종함은 익히 들었지만, 딴 음모를 하였다 함은 아직 그 자세한 것을 모르니, 내쫓아서 사람축에 들지 못하게 한 것은 이미 공론을 엄하게 한 것입니다. 이진을 안전하게 할 바를 생각하여 우애의 정을 펴도록 하는 것이 합당한 일이니, 만약 수토(水土)가 맞지 않고 찬 안개와 이슬을 맞아서 놀라 걱정하거나, 지키는 신하가 삼가 보호하지 못하여 약을 써도 소용이 없게 되어서 성상(聖上)의 우애하시는 정에 한없는 슬픔을 안게 한다면 어찌 유사(有司)의 죄가 아니랴. 지금 계책으로는 관가의 가까운 곳에 두고 의식을 풍족하게 하여 고생스러움을 면하게 하면 될 것이다.’ 하였고, 판부사 기자헌(奇自獻)은, ‘옷과 처첩(妻妾)을 보내어 서로 의지하고 살게 하자.’고 하였습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의논한 대로 시행하라.”
하였다.
20일 임해군(臨海君)의 진도(珍島)로 가는 길이 이미 호서(湖西)를 지났을 때, 전교하기를,
“남쪽 지방으로 귀양보내는 것은 온당치 못하니, 급히 선전관을 보내어 교동(喬桐)으로 옮기도록 하라.”
하였다.


3월

영의정 이원익(李元翼)의 사직하는 상소에,
“신이 외람되이 수상의 자리에 있으면서 오래도록 국문하는 자리에 참여 하지 못하오니, 신하의 처지로서 그 심정이 어떻겠습니까. 듣자옵건대, 요즘 국문을 받는 사람 중에 반역을 꾀하였다고 하는 자가 있다 하니, 비록 그 자세한 경위는 모르오나 그 말을 들으매 저도 모르게 머리털이 곤두서고 소름이 끼칩니다. 옥사(獄事)가 지친(至親)사이에서 일어났사오니, 전하의 지극하신 우애로 그 상심하고 절박하심이 지극하지 않는 바가 없을 것입니다. 은혜와 의리가 두루 극진하신 만큼 반드시 이미 정하신 심산(心算)이 계실 것이오니, 이에 대해서는 신이 감히 말씀드릴 수 없지만, 그 도당의 역모한 죄상이 현저한 자에 대해서는 마땅히 법에 비추어 처단할 것이니, 또 무슨 논의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다만 생각하옵건대, 곤강(崑岡)에 불이 나면 옥과 돌이 함께 타듯이 큰 옥사에는 원통하게 죽는 자가 반드시 많을 것입니다.
대개 죄명이 매우 크기에 엄하게 문초하니, 관련되어 잡힌 사람을 낱낱이 국문할 때에 혹 사실이 명백하지 않는 자도 있어서 추관(推官)이 비록 마음속으로는 의심하면서도 그것이 반드시 그렇지 않다고는 분명히 알 수가 없으므로 평반(平反)하기를 감히 청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만일 상께서 죄로 인해서 정상을 캐어 내고 정상에 따라 죄를 주지 않으신다면 죄 없는 사람이 죄에 빠짐을 면하지 못할 것이므로 형벌을 한 번 가하게 되면 마침내 살아날 길이 없을 것이니 어찌 측은하지 않겠습니까. 즉위 초에 한 사람의 백성이라도 애매한 죄에 걸리게 되면 장차 이것으로 말썽이 생길까 염려됩니다.”
하니, 답하기를,
“경이 올린 차자의 사연을 보고 그 정성을 매우 가상히 여기오. 내가 애통한 가운데 이런 전에 없던 변고를 당하니, 은혜와 의리의 경중에 있어 어찌할 바를 모르겠소. 이제는 단서(端緖)가 이미 나왔으니, 사건에 연루된 무리를 묻지 않을 수 없소. 그러나 마땅히 대신과 의논해서 처리할 것이니, 경은 안심하고 조리를 잘하여 차도가 있는 대로 나오시오.”
하였다. 좌의정 이항복(李恒福)의 소의 뜻도 이와 대략 같다.
대사헌 정구(鄭逑)의 상소에,
“……전하께서 막 애통중에 계신데 또 이처럼 전고에 드문 변을 당하셨는데, 비록 종묘 사직에 관계되는 일이라서 부득이한 점이 있습니다마는, 신이 생각하옵건대, 전하께서는 선왕의 간곡하신 유언이 귓속에 쟁쟁히 남아 있어 애태우고 몸둘 바를 몰라 밤낮으로 편안치 못하실 것입니다. 신이 연일 국청(鞫廳)에 참여하여 옥사의 정세를 살펴보오니, 연루자가 너무 많아서 시일이 지연되니 어느 겨를에 자세히 심리하고 공정을 기하여 전하의 밝으신 다스림을 빛낼 수 있겠습니까. 또 그 잡힌 사람 중에는 종척(宗戚)들이 많사와 형장(刑杖)을 받고 숨지는 이도 잇달아 나오고 있습니다. 만약 과연 역모에 참여한 사실이 있는데도 승복(承服)을 받아 내지 못한다면 옥사가 잘못된 것이지만, 혹 역모한 사실을 모르면서 간혹 원통하게 죽는 이가 있다면 저들은 비록 전하와 가깝고 먼 차이는 있을지라도 실로 한 핏줄을 나눈 사람이오니, 어찌 깊이 상심될 일이 아니겠습니까. 신이 항간의 의논을 가만히 듣건대, 임해군의 역모 사건은 이미 다 탄로났는데 귀양간 뒤에도 대궐 안으로부터 가끔 사람을 보내 문안하고 의식(衣食)을 내리신다 하옵는데, 그것은 지극히 인자하신 우애를 베푸심이 천만 사람보다 뛰어나기 때문입니다. 저 임해군이 스스로 천륜을 끊었는데도 전하께서는 그를 대하심이 이와 같으시니, 듣는 사람들이 분기하고 격려되어 인륜에 크게 보탬이 될 것을 어찌 헤아릴 수가 있겠습니까.
지난 중종(中宗) 때 왕자의 변으로 말미암아 불측한 옥사가 일어났는데, 인종 대왕(仁宗大王)께서는 그때 동궁에 계시면서 걱정하고 두려워하여 소를 올려 풀어 주기를 청하며, ‘하늘이 내신 부자(父子)와 동기 사이는 호흡이 서로 통하여 우애의 정이 절로 그칠 수가 없으니, 비록 비상한 변고가 뜻밖에 일어날지라도 옛사람은 오히려 은혜로 덮어 준 바가 있습니다.’ 하고, 또 맹자의 말씀을 끌어다가, ‘형제 사이에는 노여움을 간직하지 않고 원한을 품지 않는다. 형은 천자가 되고 아우는 필부(匹夫)가 되어서야 되겠습니까.’ 하였는데, 그것을 민간에서 지금까지도 전송(傳誦)하옵니다.
오늘날 전하의 처리하신 것과 꼭 같사오니, 어찌 전성(前聖)과 후성(後聖)의 법이 같아서 그런 것이 아니겠습니까. 한 문제(漢文帝) 때에 회남왕(淮南王) 장(長)의 모반한 일이 발각되어 촉중(蜀中)으로 귀양갈 적에 원앙(袁盎)이 말하기를, ‘갑자기 심한 안개와 이슬을 만나 병사하게 되면 폐하는 아우를 죽인 누명을 쓰게 됩니다.’ 하였는데, 얼마 안 되어 장이 과연 죽으니, 문제가 몹시 슬피 울었습니다. 그래서 신은 늘 문제가 일찍 원앙의 말을 듣지 않은 것을 한탄하였습니다. 전하의 동기 중에서 같은 탯줄을 타고난 분은 임해군이 있을 뿐입니다. 선빈(先嬪)께서 일찍 세상을 떠나시어 형제 두 분이 외로이 함께 자라서 잘 때나 먹을 때나 서로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신은 전하의 지극하신 회포가 더욱 차마 말하지 못할 바가 계실 줄로 아옵니다마는, 스스로 큰 잘못을 저질러 그 죄가 하늘과 땅에 사무치게 하여 전하께 걱정스럽고 슬프며 절박한 아픔을 끼쳐 드리오니, 이것이 신의 속이 썩고 간장이 찢어지려 하는 바입니다.
엎드려 생각하옵건대, 은혜와 의리를 참작하시고 변통하여 선처하실 방도가 어찌 없겠습니까. 오직 전하께서 깊이 생각하시어 공적(公的)으로 법대로 다하지 말고 중정(中正)의 덕을 더욱 밝히시어 추국하는 대신에게 명하여 공명하고 신중히 하도록 하시어 옥사는 반드시 다 규명하지 말고, 사람은 반드시 다 문초하지 말며, 죄는 반드시 다 밝히지 말고, 법은 반드시 다 시행하지 말게 하소서. 차라리 법대로 하지 않는 잘못이 그 사이에 있을지인정 임해도 죽지 않는 용서를 받아 전하의 큰 은혜에 흠뻑 젖어 여생을 마치게 한다면 광무제(光武帝)의 반측자안(反側自安)문제(文帝)의 척포두속(尺布斗粟)을 오늘에 다시 노래 부르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온 나라 신민이 전하께서 변란을 유감 없이 처리하심을 우러러보게 되어 위로는 하늘에 계신 선왕의 영을 위로하고, 또한 요즈음 천심(天心)의 어질고 자애스러운 경고에 우러러 답하는 것이 될 것이오니, 어찌 매우 다행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하니, 답하기를,
“불행히 이런 천륜(天倫)의 변을 당하여 밤낮으로 상심되어 어찌할 바를 모르겠노라. 의논하여 처리하겠으니, 굳이 사직하지 말라.”
하였다.
비망기에,
“내가 박덕하여 이런 천륜의 변을 당하였으므로 법을 굽혀 은혜를 베풀라는 말이 나와야 할 터인데, 오늘의 논의는 뒤바뀐 듯하다. 훗날의 폐단이 있을까 두려우니, 정원은 그리 알라.”
하였다. 국청(鞫廳)에서 죄인 하대겸(河大謙) 등의 자백을 받고 처형하였다. 여러 죄인들이 형을 받은 뒤 계축년(1613, 광해군 5)에 익사공신(翼社功臣)에, 등록된 자가 허성(許筬) 등 48명임.
판윤(判尹) 정인홍(鄭仁弘)이 바야흐로 강계(江界) 적소(謫所)로 향하는 길에 기내(圻內)에 이르렀을 때에, 석방하고 승진한다는 새 명령을 듣고 사직하는 소를 올리니, 답하기를,
“경이 올린 소를 살피니 충성이 지극하오. 경이 임하(林下)에서 글을 읽어 높은 풍치(風致)가 세상을 덮었으므로 선왕께서 경을 사랑하여 대접한 뜻은 이미 ‘조수(鳥獸)와 초목까지도 그 이름을 안다.’는 하교에 나타나 있으니, 전날의 일이 어찌 선왕의 본의였겠소.
다만 어둡고 용렬한 내가 외람되이 대업(大業)을 이어받고, 선왕의 뜻을 따라 구덕(舊德 선조 때의 신하)에게 책임을 맡기고자 하는데, 경이 이런 때에 어찌 차마 무심하게도 나라 일을 같이 하지 않으려 하오. 비록 병이 있을지라도 잘 조섭하여 공무를 수행하고 조정에 머물러서 우매하고 덕이 부족한 나를 돕도록 하오.”
하였다.
○ 정인홍(鄭仁弘)이 이내 영남으로 내려가니, 예관(禮官)을 보내어 꼭 같이 올 것을 간곡히 타일렀다.
영부사(領府事) 이덕형(李德馨)이 상소하여, 대비를 받들고 동기를 사랑하고 불쌍히 여겨 은혜를 온전히 하기 위하여 옥사를 신중히 할 것 등의 말로 간곡히 아뢰니, 답하기를,
“천변(天變)이 나의 부덕한 탓에 일어났으므로 조심스럽고 두려워서 몸둘 바를 모르겠소. 옥사는 나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으니, 경이 속히 출사하여 국청에 참여하여 잘 처리하도록 하오.”
하였다.
○ 사간 조정립(趙正立)이 상소하여, 대비를 받들어 모시고 동기에 대한 은혜를 온전히 할 것 등을 아뢰니, 답하기를,
“내가 잘 생각해 보겠다.”
하였다.
헌납 임연(任兗)의 피사(避辭) 중에 이덕형(李德馨)의 상소를 논척(論斥)하는데 여력(餘力)을 남기지 않았다.
무장(武將) 민열도(閔悅道)ㆍ박명현(朴名賢)ㆍ고언백(高彦伯) 등이 임해군과 통하였다 하여 연좌되어 죽음을 받았고, 무장 양학서(楊鶴瑞)ㆍ양집(梁諿) 또한 장형을 맞아 죽었다.
우의정 심희수(沈喜壽)가 상소하여, 순(舜) 임금이 그의 아우 상(象)에게 했던 도리를 본받아 임해군에 대한 은혜를 온전히 할 것을 아뢰니, 답하기를,
“내가 몹시 불행하여 이런 망극한 변을 당하니 밤낮으로 걱정하고 두려워하며 어찌할 바를 모르겠소. 아! 순 임금은 옛 성인인데, 변고에 대처하는 방도에 있어 내가 어찌 감히 그와 비길 수가 있겠소. 경들이 참작해서 선처하여 과매(寡昧)한 나로 하여금 후세에 할 말이 있게 해 주오.”
하였다.
○ 정인홍(鄭仁弘)을 대사헌에 임명하였다.
집의(執義) 이경전(李慶全) 등이 아뢰기를,
“역적 김천우(金天祐)ㆍ하대겸(河大謙) 등이 승복하여 처형되었는데, 역적의 우두머리인 이진(李珒)이 아직 처치되지 않았으니, 형벌을 집행함에 있어 잘못이 심합니다. 대의(大義)는 지극히 엄하고 국법은 지극히 중하오니, 빨리 명하여 법대로 처단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내가 일찍 어머니를 여의고 형제 두 사람이 서로 의지하여 자라면서, 마음속으로 당(唐) 나라의 송왕(宋王 현종(玄宗)의 동복 형)과 우리 나라의 월산(月山 성종의 동복)에 비겼는데, 나의 부덕한 탓으로 동기 사이의 변고가 있게 되어 비록 신하들의 청에 따라 부득이 외방(外方)으로 귀양을 보냈으나, 내 마음의 망극함이 어떠하겠는가. 비록 이런 저런 말들을 하지만, 이는 임해군의 천성이 광망(狂妄)하여 흉적들의 꾀임에 빠진 데에 불과한 것이다. 하물며 선왕의 유언이 정녕 귀에 쟁쟁한데 어찌 차마 우애를 끊겠는가. 다시는 말하지 말라.”
하였다.
○ 삼사(三司)에서 날마다 잇달아 법대로 처형할 것을 청하니, 답하기를,
“오래 적중(賊中)에 빠져 본성을 잃었고, 또 흉악한 자의 꾀임에 빠졌을 뿐이다. 대의가 비록 중하기는 하나 천륜도 소중하니, 죽음을 용서하는 것이 옳다.”
하였다.
고부사 겸 주청사(告訃使兼奏請使) 이호민(李好閔) 등이 북경에서 통사(通事)를 시켜 예부(禮部)의 자본(咨本)을 가지고 나오게 하였는데, 중국 조정에서는 적자(嫡子)를 버리고 차례를 뛰어넘었다 하여 본국 대신으로 하여금 군민(軍民)을 회동(會同)하여 공정하게 자세히 의논하도록 하여 만장일치로 신(神)과 사람이 서로 합치된 후에 명백히 아뢰도록 하고, 또 요동 진무관(遼東鎭撫官)으로 하여금 사람을 보내어 면질(面質)하게 하고, 임해(臨海)로 하여금 양위했다는 주본(奏本)을 올리게 한 것이다. 이에 왕대비 김씨는 문무 기로(文武耆老)ㆍ종실(宗室) 및 산반(散班)ㆍ유생ㆍ군민 등의 연명으로 올리는 장계에 의거하여 주문(奏文) 한 벌을 갖추고, 영의정 이원익(李元翼) 등이 문관직 배신(陪臣) 해평부원군(海平府院君) 윤근수(尹根壽) 등 3백 95명, 무관직 배신 지훈련(知訓鍊) 이시언(李時言) 등 4백 56명, 산반(散班) 배신 이성록(李成祿) 등 1천 2백 명, 내금위(內禁衛) 전계옥(全季玉) 등 3백 26명, 겸사복(兼司僕) 고응록(高應祿) 등 1백 16명, 성균 생원(成均生員) 신득연(申得淵) 등 9백 80명, 오부 군민(五部軍民) 고득창(高得昌) 등 1만 5천 8백 83명을 회동하여 주문(奏文) 한 벌을 갖추고, 종실 정원군 이부(定遠君李琈) 등 2백 25명이 주문 한 벌을 갖추어 배신 이필영(李必榮)으로 하여금 길을 배로 하여 빨리 달려가 황제에게 아뢰게 하였다.
무원(撫院)에서 요동 도사(遼東都事) 엄일괴(嚴一魁)ㆍ자재지주(自在知州) 만애민(萬愛民)을 우리 나라에 보내 와서 이진이 병들었는지의 여부와 온 나라 신민이 광해군을 추대한 실정을 조사하였다.
영부사(領府事) 이덕형(李德馨)의 상소에,
“듣자옵건대, 고부사(告訃使)의 통사가 예부의 복제(覆題)를 가지고 왔다 하옵는데, 중국 조정의 이 일을 맡아 보는 관원이 비록 복왕(福王) 때문에 그런 말을 하였겠으나, 복왕은 곧 중국 태자의 아우인데, 법에서 벗어나 적자(嫡子)의 자리를 빼앗을 징조가 있으므로 그렇게 말한 것이다. 책봉을 허락하는 뜻은 이미 정해져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임해로 하여금 양위했다는 주본(奏本)을 올리게 하고, 무진(撫鎭)에서 관원을 보내 면질(面質)하기까지 하니, 지극히 해괴하고 놀라운 일입니다. 지금 마땅히 사실을 갖추어 아뢰기를, ‘우리 선왕의 장성한 왕자로는 다만 사군(嗣君)과 형인 이진이 있을 뿐이온데, 이진은 어려서부터 성질이 패악하여 일찍이 많은 원한을 쌓았습니다. 선왕께서 종묘 사직의 부탁이 중함을 위하고 사군(嗣君)의 인효(仁孝)한 행실에 감탄하시와 일찍이 대계를 정하셨고, 국인의 마음이 쏠린 지도 오래되었습니다.
임진년 난리 때에는 선왕께서 사군(嗣君)에게 명하여 나라 일을 감독하게 하시고, 서도로 행차하시어 위급함을 중국 조정에 고하였습니다. 이때 여러 곳에서 피난하던 사람들이 그 처자를 버리고 서로 다투어 달려와서 사군(嗣君)을 호위하였으며, 군대를 돕고 군량을 대어 도적을 무찌르기를 꾀하였는데, 이진은 도적을 피하여 함경도로 들어갔습니다. 미련하고 패려(悖戾)한 성질이 난리를 만나 더욱 심해져 변방 백성들에게 포악하게 굴어서 백성들이 그 명령을 감당할 수가 없었으므로 붙잡아 도적을 맞아들여 1년 동안이나 적중(賊中)에 빠져 고생하다가 마침내 중국 천조(天朝) 장수의 힘으로 살아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아들을 알아보는 데는 아버지 만한 이가 없고, 민심을 얻는 이가 임금이 되는 법이므로 선왕의 버리고 취하심과 민심이 향하고 등지는 것을 족히 알 것입니다. 하물며 이진이 돌아온 뒤에는 실성하고 미쳐서 여자와 재물을 빼앗고 인명을 살상하기를 지푸라기같이 하여 온 나라의 늙은이나 어린이들도 모두 원수로 대하고 있습니다. 선왕이 계실 때에도 이진의 숱한 죄상은 용서하기 어려웠으나 그 병이 심함을 불쌍히 여겨 버려 두고 논하지 않았습니다. 선왕이 승하하신 뒤에는 그를 부추기는 무리들이 군중들의 원한이 터지면 죽음을 면하지 못할 것이 두려워서 몰래 병기를 들여와 구덩이에 감추어 두었다가 발각되어 붙잡혔으니, 흉악한 죄상이 명백히 드러났습니다. 여러 신하들이 대비께 아뢰어 도당들을 국문하여 법으로 다스리고, 또 법에 의하여 이진을 처단하려 하였으나, 사군의 우애가 각별하시어 곡진히 사사로운 은혜를 보전하기 위하여 이틀 길밖에 안 되는 곳에 귀양보내고 편안히 살게 하였습니다. 이진은 스스로 선왕과 대비와 또 사군과 국인에 대한 의리를 끊었지마는, 사군의 이진에 대한 처결은 지극하였습니다. 사군께서 임진년(1592, 선조 25)에 나라 일을 위임받은 뒤부터 백성들의 희망이 모두 정해질 뿐 아니라, 아무 해 아무 달 아무 날에는 선왕께서 중국 조정에 갖추 아뢰어 황제의 전칙(專勅)을 받아 전라ㆍ경상도에 진주(進駐)시켜 군사를 뽑아 싸움을 돕게 하였으므로, 전라ㆍ경상도의 백성들이 끝까지 흩어지지 않아 대군을 맞아들여 천토(天討)를 이룩하였던 것입니다. 우리 선왕께서 또 아무 해 아무 달에 배신 아무개를 보내어 세자의 책봉을 청하셨고, 또 배신 아무개를 보내어 거듭 아뢰었습니다. 황제의 칙유(勅諭)가 이처럼 명백하고, 선왕이 계책을 미리 정해 놓으심이 이러하며, 중국 조정에 자주 아뢴 사실이 이와 같고 국인이 세자를 추대한 지 이미 17년이나 되었습니다.
선왕께서 오랜 병환이 조금 나으시는가 싶더니 2월에 갑자기 중해져서 승하하셨는데, 임종 때에 왕비에게 유언하여 세자로 하여금 왕위를 잇게 하고, 달려가 중국 조정에 아뢰게 하였습니다. 그래서 안으로는 비빈(妃嬪)에서 밖으로는 신민에 이르기까지 슬픔이 망극한 중에 황제께서 평소에 우리 나라를 한집안과 같이 보시어 어여삐 여기셔서 간곡하게 보호하시고 특별한 은혜를 여러 번 내려주심을 생각하여 세자 책봉의 명이 조석간에 빨리 내려지기만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주문(奏文)의 내용에 소루함이 있고, 또 배신이 떠난 때가 이진의 난이 일어나기 전이기 때문에 우리 나라의 실정을 예부(禮部)에 명백하게 아뢰지 못한 듯합니다.
본국이 국토는 비록 작으나 남쪽에는 왜적과 이웃하고 북쪽에는 오랑캐의 경보가 있으므로, 일찍 책명을 받아 밤낮으로 정선(征繕)하더라도 오히려 이웃의 적들이 혹시 틈을 엿볼까 두려운데, 이제 전례(典禮)가 더디 내리어 점점 시일만 끌어 가니, 온 나라가 애태우는 심정을 어찌 다 주달(奏達)할 수 있으리오.
해부(該部)의 복제(覆題)를 살펴보니, 우리 나라의 일을 걱정하여 매사를 ‘신중히 하라 하기에 전후 사실을 자세히 갖추어 진달한다.’ 하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그러나 임해가 양위를 했다는 주본에 대한 일절은 말할 것도 없으니, 의논할 바가 못 되고 면질(面質)에 대해서는 질문할 만한 일도 없으니, 더욱 수상합니다. 차관(差官)이 오거든 말도 통하고 일도 아는 재신(宰臣)으로 하여금 질문에 대답을 잘하고 임해의 전후 사실을 명백히 알아 듣도록 일러 주어 왕위를 사양했다는 글을 올려야 할 까닭도 없고 면질할 만한 일도 없음을 알게 한 뒤에 책임지우면 될 것입니다. 우리 나라의 크고 작은 일을 중국 조정에서 샅샅이 알고 있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연전에 많은 중국의 장수와 사신들이 다만, 임해군의 용모나 언어가 모두 사람 같은 것만 보았고, 이렇듯 악한 일을 저지르고 원한을 쌓고 있는 줄을 모르니, 다만 풍병이 있다고만 하면 곧이듣지 않을 것이니, 말을 조심해야 할 것이요, 또 흉악한 역모의 죄상을 말하는 데도 원만하게 잘못하면, 중국 사람은 억측하기를 잘하므로 ‘반역하는 자는 반드시 여러 사람의 도움을 얻어서 반란을 일으키는 것이라’ 생각하여 만약 국인 가운데 임해를 도운 자가 있다고 의심하게 되면 온당치 못할 듯하니 이것 또한 잘 생각함이 마땅합니다.
신은 나라 일에 매우 중대한 시기를 당하여 비록 집에 물러나 숨어 있사오나, 밤낮으로 걱정이 되어 감히 얕은 소견으로 아뢰옵니다.”
하니, 대답하기를,
“나라를 근심하는 정성을 살펴보고 깊이 감탄하였소. 마땅히 의논하여 처결하겠소. 접때의 일에 경이 어찌 혐의가 있겠소. 모름지기 나라 일을 급무로 삼아 나와서 같이 처리하기 바라오.”
하였다. 사간 이이첨(李爾瞻) 등이 날마다 잇달아 아뢰어 임해를 처형할 것을 청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정언 최현(崔晛) 등이 아뢰기를,
“이호민(李好閔) 등의 장계 및 예부의 자문(咨文)을 보옵건대, 상국에서 의심을 하는 것이 천만 뜻밖의 일에서 나왔을 뿐 아니라, 사신이 대답할 때에도 실수한 언사가 많아서 일을 그르친 듯합니다. 그 사이의 경위를 먼 데서 헤아릴 수는 없사오나 장계 중에 이르되 ‘신들이 예부(禮部)에 불려 가니, 「왜 맏아들이 세자가 안 되었느냐?」’고 힐문하므로, 「맏아드님은 풍증이라.」 하였더니, 「어디에 있느냐?」고 묻기에, 「상차(喪次)를 지키고 있다.」고 하고, 또 「맏아드님은 이미 사양하고 물러났다.」 라고 하였다.’ 하오니 이것이 대답을 실수한 중에서 가장 큰 것입니다. 임해가 평생 동안에 쌓은 죄악은 한둘이 아닌데, 왜 즉석에서 지적하지 못하고 도공리(都工吏)의 맹랑한 말을 믿고 풍증이라는 것으로써 대답하였습니까. 임해군은 한낱 왕자일 뿐인데, 무슨 사양해야 할 일이 있기에 그렇게 대답하는 것입니까. 이 때문에 장낭중(張郞中)이 ‘복상중이라면 병든 것이 아닐 것이고, 다툴 뜻이 없었다면 사양하였다는 말이 있을 것이다.’ 하였으니, 명 나라의 고집하는 말과 앞으로 난처하게 될 것이 이 때문이 아니라 할 수 없습니다. 이번에 다시 아뢸 때에는 전날의 잘못 대답한 것을 명백하게 변명하지 않아서는 안 될 것입니다. 일이 극히 중대하오니, 특히 대신을 바로 북경으로 보내시어 실상을 갖추 아뢰어 큰일을 완전 해결이 되도록 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대신에게 의논하겠다. 또 이덕형(李德馨)은 나이가 젊고 기력도 좋으며 재주와 지혜도 있으니, 좌의정의 직함을 임시로 주어서 명나라로 들여보내라.”
하였다.
양사(兩司)가 아뢰기를,
“이호민(李好閔) 등은 추고(推考)만 하라 하시기에 신들은 다시 청하옵니다. 일찍이 듣자옵건대, 임금이 걱정을 하면 신하가 욕을 봐야 되고 임금이 욕을 보면 신하는 죽어야 된다고 합니다. 오늘날의 일이 어찌 다만 걱정하고 욕되는 데 그치겠습니까. 우리에게 없는 걱정을 걱정하게 하고 없는 욕을 욕되게 한 것은 중국 조정이 한 것이 아니라, 호민 등이 한 것입니다. 풍증이라는 말은 어디서 듣고 한 말이며, 상차(喪次)에 있다는 말은 또 무엇에 근거하여 대답한 것입니까. 하물며 사양하고 물러났다는 말이 그의 입에서 나왔으니, 면질(面質)하겠다는 힐문(詰問)이 오로지 여기에서 나왔는데, 호민 등이 그렇게 말한 뜻을 모르겠습니다. 어디에서 어디로 물러났으며 누구에게 무엇을 사양하였다는 말입니까. 사양하였다는 주본(奏本)을 갖추어 오라는 청이 장계에서 나왔으니, 과연 이것이 우연히 말하는 사이에서 잘못된 것에 비할 수 있겠습니까. 오늘 차관(差官)이 온다고 해서 온 나라가 분주하고, 수상이 길가에 엎드려 문안을 드리고 친히 글월을 그 말발굽 밑에서 올리니 이런 꼴을 볼 때, 나도 모르게 마음이 아픕니다. 호민 등이 나라를 그르친 죄가 이에 이르러 더욱 크니 명령하여 잡아다가 국문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윤허하지 않는다.”
하였다.
명 나라 조정의 차관(差官)이 들어온 뒤 접대도감 대신(接待都監大臣)이 아뢰기를,
“차관이 관(館)에 이른 뒤에 위에서 곧 와서 보지 않는다고 성을 내며, 또 ‘우리들이 성지(聖旨)를 받들고 왔으니, 꼭 임해군을 보아야겠다.’ 하기에, 신들이 대답하기를, ‘우리 나라의 예(禮)는 비록 평민일지라도 상복을 입은 사람은 손님을 먼저 찾아보지 않는데, 주상(主上)께서는 지금 애통중에 계시므로 나라의 예법에 구애되어 와 보지 못하는 것이오. 임해는 종묘 사직에 죄를 지어 외처(外處)에 나가 있는데 천관(天官)을 직접 만나 보는 것은 사리에 크게 미안하므로 이런 뜻을 상감께 아뢰었습니다.’ 하였더니, 차관이 끝내 고집하므로 감히 아뢰옵니다.”
하였다. 이날 저녁에 상이 관(館)에서 차관을 접견하였다.
부호군(副護軍) 최유원(崔有源)이 상소하기를,
“조정에서 역적의 괴수를 성 밖에 옮겨 온 일에 대하여 신은 마음아픔을 이길 수 없습니다. 면질(面質)이라는 말은 신하로서 차마 들을 수 없는 것인데, 차관이 비록 황제의 명이 중대하다 하나 우리로서 선처할 길이 어찌 없겠습니까. 전하를 이미 보고 또 역적의 괴수를 보게 되면 면질이라는 말을 면하기 어려우니, 대의(大義)는 여지없이 될 것입니다. 중국 조정에서 만약 이 일 때문에 문책을 한다면 신이 먼저 가서 죄를 받고 뼈를 연산(燕山)에 묻을 망정 오늘날에 이런 일이 있는 것을 보지 않겠습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소를 보고 가상히 여긴다. 의논해서 처리하겠다.”
하였다.
대사헌 정인홍(鄭仁弘)이 부름을 받고 한강에 도착하여 상소하기를,
“조보(朝報)를 보오니, 금부도사와 병조 낭관(郞官)이 전교를 듣고 갔다기에 비로소 역적의 괴수를 중도에 두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역적의 죄상이 천지에 용납될 수 없으므로 어리석은 백성들도 그 몰골을 보지 않으려 하는데, 어찌 중국 조정의 사신으로서 욕스럽게 중도에서 흉악한 물건을 접견하겠습니까. 이런 뜻으로 차관에게 회답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래도 꼭 보겠다고 한다면 대신이나 대관(臺官)들은 죽을 각오를 하고, 차관이 돌아가는 날 뒤따라 가서 의주(義州) 국경에서 황제의 명령을 기다리면 천자도 알아들을 가망이 있고, 급히 금오랑(金吾郞 금부도사)을 보내어 사신을 잡아와서 중국 사람으로 하여금 대답 잘못한 죄를 받는 줄 알게 하면 나라의 사정을 변명하지 않더라도 밝기가 하늘의 해와 같을 것입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경이 올라온다는 말을 들으니, 나라 일이 잘 될 것이오. 이제 나라를 걱정하는 정성이 병중(病中)에서도 그토록 돈독함을 보았소. 다만 이런 때에 사신을 잡아오는 것은 온당치 못하니, 아직 그대로 두고 그가 돌아오기를 기다리오. 그리고 경은 곧 들어와서 나의 기대에 부응(副應)하오.”
하였다.
영부사(領府事) 이덕형(李德馨)ㆍ호조 판서 황신(黃愼) 등을 보내어 대비 김씨의 주문(奏文)을 가지고, 빨리 칙명을 내려서 사자(嗣子)를 책봉하여 왕위를 이어받게 하고, 국왕의 아내 유씨(柳氏)를 왕비로 삼아 주기를 청할 일로 중국 서울로 갔다.
종실(宗室) 순녕군 경검(順寧君景儉) 등 35명이 상소하여, 임해를 처형할 것을 청하니, 비답하기를,
“무릇 우리 종척(宗戚)의 제경(諸卿)들은 모두 나의 말을 들으라. 나의 형제 중에서 동복(同腹)이 몇 사람인가. 우애하는 정이 실로 보통 형제간보다 갑절인데, 내가 부덕한 탓으로 이런 변이 일어났으니, 밤낮으로 부끄럽고 두려워서 사람을 대할 낯이 없다. 임해가 적중(함경도에서 왜군에게 넘겨졌던 일)에서 돌아온 뒤 실성이 더욱 심해진데다가 남의 꾀임을 받아 설사 망령된 일이 있었지마는, 그것이 어찌 본심에서 나온 것이겠는가. 조정에서 모두들 ‘죄가 종묘 사직과 관계된다.’ 하기에 내 마음대로 하지 못하고 외방으로 귀양보냈으니 국법이 이미 시행된 것이고, 마침내 죽음을 용서한 것은 나의 지극한 정을 다한 것인데, 법을 집행하라는 논의가 또 종척(宗戚) 중에서 나오니, 매우 민망스러워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 대의(大義)가 비록 엄하나 천륜(天倫)도 지극히 중하니, 경들은 천륜의 은혜를 덮어 버리라는 의논을 하지 말고 조금이라도 나의 마음을 위로해 달라.”
하였다.
백관(百官)이 날마다 소장을 올려 임해를 처형할 것을 청하고, 또 사신 이호민(李好閔) 등을 붙잡아 들이기를 청하였다.
대사헌 정인홍(鄭仁弘)이 상소하여, 대신들의 ‘은혜를 보전하자.’는 주장을 공박하니, 답하기를,
“충직함이 해와 달처럼 빛남을 잘 알았소. 사람의 마음은 그 얼굴이 같지 않음과 같아서 소견이 서로 다르지만 결국은 모두가 임금을 사랑하는 정성에서 나온 것이오. 안심하고 머물러서 끝까지 나라 일을 도우시오.”
하였다.
영의정 이원익(李元翼), 좌의정 이항복(李恒福), 우의정 심희수(沈喜壽)가 정인홍의 소 때문에 모두 인입(引入)하여 사직하였다. 아성부원군(鵝城府院君) 이산해(李山海), 판중추 윤승훈(尹承勳) 등 66명이 아뢰기를,
“죄인을 잡았는데도 처형이 아직껏 미루어지니, 종척(宗戚)ㆍ삼사(三司)에서 뭇 관원들까지도 아뢰지 않는 이가 없는데, 상감께서는 들어주지 않으십니다. 빨리 공론(公論)에 따르소서.”
하니, 답하기를,
“천륜(天倫)의 변고가 애통한 가운데 갑자기 일어났으니, 부끄럽고 마음아파 어찌할 바를 모르겠소. 이미 해읍(海邑)에 내쳤으니 법이 이미 시행된 것인데, 무슨 처형할 것이 있겠소.”
하였다.
정인홍(鄭仁弘)을 승진시켜 좌찬성에 임명하매, 정인홍이 상소하여 사직하니, 답하기를,
하였다.
비망기에,
“법을 엄정하게 지키는 것은 대간의 책임이고, 임금을 너그럽고 어진 데로 인도하는 것은 대신의 도리이다. 경들이 옥사를 공명하고 신중히 다스리고 죄인을 잡아서 은혜를 보전하라는 의론은 실로 임금을 사랑하는 정성에서 나온 것이니, 경들은 혐의할 것이 무엇 있는가. 법만 지키자는 의론에 대해서는 비록 중한 듯하나 그것도 대의를 밝히고 국법을 세우는 데 불과한 것이니, 피차가 공론이 아닌 것이 없다. 내가 이미 다 말했으니 이를 고집하여 굳이 사퇴하려는 원인으로 삼지 말라. 나의 병이 심하고 나라 일이 위급한데, 원로 대신으로서 한결같이 사퇴만 한다면 종묘 사직을 어떻게 할 것인가. 병을 참고 애써 나와서 같이 시국의 어려움을 구제하라.”
하였다. 승지 한 사람이 이것을 가지고 가서 삼공에게 간곡히 효유하였다.
임해를 폐하여 서인(庶人)으로 삼았다. 기유년(1609, 광해군 1)에 이진이 교동(喬桐)에서 죽었는데, 사람들 모두 현감(縣監) 이직(李稷)이 독살한 것이 아닌가 의심하였다.
사신 이호민(李好閔)ㆍ오억령(吳億齡), 서장관 이호의(李好義)를 모두 파직시켰다.
좌찬성 정인홍(鄭仁弘)이, 삼공이 인퇴한 것이 자기가 올린 소 때문이라 하여, 소를 남겨 두고 영남으로 돌아갔다. 상이 예관(禮官)을 보내 간곡히 타일러 돌아오게 하였으나, 정인홍은 왕명을 받들지 않았다.
유구국(琉球國)의 중산왕(中山王)이 자문(咨文)을 보내오기를,
“우리 나라가 비록 귀국과 서로 멀리 떨어져 있으나, 똑같이 중국에 대해서 신(臣)이라고 일컫는 것을 보면 모두 천지 안에 있어서 마음으로 서로 비춰 주고 정신으로 서로 오간 바로, 여러 번 후하게 주시는 은혜를 받았고 해마다 문안함이 끊이지 않으니, 우리 나라가 무엇을 잘하여 이렇게 귀국에게 훌륭한 대우를 받게 되었습니까. 우리 나라가 근년에 중국 조정에서 관복(冠服)을 나누어 주고 왕의 벼슬을 계속 봉해 주신 은덕을 입었습니다. 만약 귀국과 형제의 의를 맺게 되어 함께 중국 조정의 번병(藩屛)으로서 고굉(股肱)의 신하가 될 수 있다면 지금 이후로는 영원한 동맹을 맺어 귀국이 형이 되고 우리 나라가 아우가 되어 우러러 중국 조정을 섬기고, 화목하게 빙문(聘問)하여 천지와 더불어 영원히 변함이 없기를 바랍니다.”
하고, 이어서 각색의 베와 비단 등을 보내 왔다.
유영경(柳永慶)ㆍ김대래(金大來)ㆍ이홍로(李弘老) 등에게 적소에서 사형을 내렸다.


 

[주D-001]무망(无妄)의 병환이니 …… 회복될 수 있다 : 《역경(易經)》에 “무망(无妄)의 병이니, 약을 쓰지 않고도 낫는 기쁨이 있다[天妄之疾 勿藥有喜].”는 말이 있다. 여기서 무망은 진실하고 속임이 없다는 뜻이다.
[주D-002]약맛을 보는 서열 : 임금이 병들어 약을 먹을 때 신하가 먼저 맛보는 것.
[주D-003]우돈의 장[遇遯之章] : 송(宋) 나라 주자(朱子)가 상소하려고 기초를 해 두고 점을 쳐서 돈괘(遯卦)를 만나서 그 소장을 불태워 버렸다.
[주D-004]광고한 말[狂瞽之說] : 미친 사람과 장님처럼 아무것도 모른다는 말.
[주D-005]고(高) : 송 영종(宋英宗)의 황후 고(高)씨.
[주D-006]조(曹) : 미상.
[주D-007]마(馬) : 한 명제(漢明帝)의 황후 마씨(馬氏).
[주D-008]등(鄧) : 한 명제(漢明帝)의 황후 등씨(鄧氏).
[주D-009]합단(盍旦) : 《예기(禮記)》에 상피합단(相彼盍旦)이란 주(註)에 합단은 밤에 우는 새인데, 밤이 낮이 되기를 원하는 새 이름으로 말하자면 안 될 일을 하려 한다는 뜻이다.
[주D-010]나랏일을 …… 보살피게[監撫] 하시고 : 세자(世子)가 나라를 지키고 있을 때는 감국(監國)이라 하고 진중에 나가면 무군(撫軍)이라 함.
[주D-011]원성청명(元聖請命) : 주 무왕(周武王)이 병이 위독할 때 그 동생인 주공(周公)이 하늘에 기도를 드리며 자신이 대신 목숨을 바치겠다 하였는데, 주공을 원성(元聖)이라 한다.
[주D-012]미원(彌遠) : 송(宋) 나라 간신(奸臣)으로 황태자(皇太子)를 모함하여 낮추어서 제왕(濟王)으로 봉하게 하였음.
[주D-013]청검(請劍) : 한(漢) 나라 주운(朱雲)이 상방검(尙方劍)을 빌려 간신 장우(張禹)를 베어 죽이려 했다.
[주D-014]송 고종(宋高宗) : 송 고종(宋高宗)이 재위 36년에 아들이 없어 효종(孝宗)에게 전위하고 자칭 태상황제(太上皇帝)라 하였다.
[주D-015]계은(繼恩)ㆍ창령(昌齡) : 미상.
[주D-016]장강(張綱) : 후한(後漢) 때의 사람으로 질제(質齊)를 죽인 양기(梁冀)를 탄핵하였다.
[주D-017]호전(胡詮)이 …… 혹심한 화를 입은 것 : 남송(南宋) 때에 호전(胡詮)이 금(金) 나라의 위세를 두려워하여 강화를 주장하고 많은 신하를 죽인 진회(秦檜)를 벨 것을 청하다가 귀양을 갔다.
[주D-018] 왕계(王季) : 주 태왕(周太王)에게 아들 셋이 있었는데, 막내인 왕계(王季 문왕의 아버지)에게 왕위를 전할 뜻이 있음을 알고 왕계의 두 형이 몸을 피하였다.
[주D-019]천세(千歲)를 부르며 : 황제의 나라인 중국에서는 ‘만세’를 부르지만 우리 나라 왕에게는 ‘천세’를 불렀다.
[주D-020]곤강(崑岡)에 …… 함께 타듯이 : 착한 사람이나 악한 사람이 다 같이 재앙을 당함을 비유한 말로, 《서경(書經)》에, “곤강에 불이 나면 옥이나 돌이 다 타버린다[火炎崑岡玉石俱焚].” 하였음.
[주D-021]평반(平反) : 죄를 감해 주는 것, 《한서(漢書)》〈준불의전(雋不疑傳)〉에, “매양 지방 죄수(罪囚)를 심리하고 돌아오면 그의 어머니가 묻기를, ‘평반(平反)하여 살려 준 사람이 몇이나 되느냐?’ 하였다.” 하였음
[주D-022]회남왕(淮南王) 장(長) : 한 문제(漢文帝)의 아우로, 반역을 꾀하다가 발각되어 촉중(蜀中)으로 귀양가서 죽었다.
[주D-023]광무제(光武帝)의 반측자안(反側自安) : 한 광무제(漢光武帝)가 적을 평정한 뒤에, 적과 내통했던 자들의 증거 서류를 모두 불사르면서, “반측(反側)한 무리들로 하여금 스스로 안심하게 한다.” 하였다. 여기서 반측(反側)은 모방한 것을 말한다.
[주D-024]문제(文帝)의 척포두속(尺布斗粟) : 한 문제(漢文帝) 때에 그의 동생 회남왕(淮南王)이 반역을 꾀하다가 촉중(蜀中)으로 귀양가서 굶어 죽으니 백성들이, “한 자의 베도 기울 수 있고, 한 말의 곡식도 찧어 먹을 수 있는데, 형제 두 사람은 서로 용납하지 못하네[一尺布尙可縫一斗粟尙可춘舂 兄弟二人不能相容].”라는 노래를 지어 임금 형제의 불화를 조롱하였다.
[주D-025]천심(天心)의 어질고 자애스러운 경고 : 수재나 한재 등의 재변은 하늘이 임금을 사랑하여 잘못을 고치도록 경고한다는 것이다.
[주D-026]한 명제(漢明帝)가 …… 비가 내리게 하였습니다. : 한 명제(漢明帝) 때에 초왕(楚王) 영(英)의 모반한 옥사에 연루자가 수천 명에 이르렀는데, 한낭(寒朗)이 공정하게 처리하여 무죄한 많은 사람을 풀어 주었더니, 오래 가물던 하늘에서 비가 내렸다 한다.
[주D-027]천토(天討) : 죄 있는 사람을 하늘이 죽인다는 것인데, 그 일을 임금이 대행하는 것을 말한다.
[주D-028]정선(征繕) : 정(征)은 부세(賦稅)를 받아들이는 것이요, 선(繕)은 병기(兵器)를 수선하는 것임. 《춘추 좌전(春秋左傳)》에, “정선이보유자(征繕以輔孺子)”라는 문구가 있다.
[주D-029]천작(天爵) …… 오는 법 : 《맹자(孟子)》에 “인의(仁義)와 충신(忠信)은 하늘의 벼슬[天爵]이요, 공경대부(公卿大夫)는 사람의 벼슬[人爵]이다.” 하였다.


병자년(1636, 인조 14)
 8월
21일(임진)


맑음. 달구리[鷄鳴]에 안보를 향하여 출발하였다. 문의 현감이 도차사원(都差使員)으로서 연풍 현감(延豐縣監) 이구(李玖)를 따라 나와서 기다렸다. 식후에 고개를 넘으니, 유곡(幽谷)의 인마(人馬)가 이미 용추(龍湫)에서 기다리고, 고개머리에 닿은 자들도 많았다. 용추에 이르니, 함창 현감(咸昌縣監) 권적(權)이 와서 기다렸다. 연원(連原)의 역졸이 난을 일으켜 함창 현감이 묶어 놓았는데, 상사가 체모를 잃었다고 말하며 종리(從吏)를 안동(安東)에 옮겨 가두게 하였다. 연원 찰방이 돌아갔다. 김천 찰방(金泉察訪) 김식(金湜)이 부마 도차사원(夫馬都差使員)으로서 선산(善山)에 이르니 선산 부사(善山府使) 맹세형(孟世衡)이 지응관(支膺官)으로 왔다. 산인(山人) 영일(靈一)이 가은(加恩)에서 보러 와서 함께 잤다. 영일은 곧 혜기(惠琦)의 사형(師兄)인데, 일찍이 송운(松雲)을 따라 일본에 갔었던 자다. 전일에 따라갔던 일을 차례차례 말하는데, 들을 만하였다. 감사(監司) 최현(崔晛)이 선산에서 글을 보내고 인하여 송별하는 시(詩)를 부쳤다.

학봉집 부록 제3권
 [언행록(言行錄)]
언행록(言行錄) 행장(行狀)에 나오는 것은 수록하지 않았다.


○ 선생께서는 약관의 나이에 계씨(季氏)와 함께 서책을 싸 짊어지고 계상(溪上)으로 가서 퇴계 이 선생을 뵈었는데, 이 선생이 그의 모습과 행동을 보고 이미 마음속으로 허여하였다. 이에 일찍이 어떤 사람에게 보낸 편지에 이르기를, “이 사람은 민첩하면서도 배우기를 좋아하므로, 그와 학문을 함께 하노라면 몹시 유익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하였다. 또 그의 손자인 이안도(李安道)에게 편지를 보내어 이르기를, “요사이 보니 김성일은 지취(志趣)가 매우 좋아 이 일에 뜻을 오로지 하고 있으니, 마음을 세움에 있어서 성실하고 절실하기가 이와 같다면 무엇을 구한들 얻지 못하겠으며, 무엇을 배운들 이루지 못하겠는가.” 하였다. 또 일찍이 성현들께서 도통(道統)을 서로 전한 심법(心法)을 하나하나 서술하여 병명(屛銘)을 만든 다음, 손수 깨끗하게 베껴 써서 공에게 주었는바, 이 선생이 선생에게 기대를 건 것이 다른 제자들과는 달랐다. 또 일찍이 이르기를, “이 사람은 뒷날에 반드시 큰그릇이 되리라.” 하였다. 이 선생이 관직에서 물러나게 해 주기를 빌던 날에 주상께서 인견(引見)하여 조정의 신하와 문하의 인재에 대해 묻자, 이준경(李浚慶), 기대승(奇大升) 및 선생을 탑전(榻前)에서 천거하였다.
○ 신미년(1571, 선조 4)에 봉교(奉敎)로 승진하여 노릉(魯陵)을 봉식(封植)할 것과 사육신(死六臣)의 관작(官爵)을 회복할 것을 청하였으며, 당시의 폐단에 대해서 논하는 말 수천 마디를 올렸는데, 상소 내용이 아주 절실하였다. 이에 상소가 올라가자 사대부들이 모두 두려워 떨었다.
○ 선생은 성품이 꼿꼿하고 엄하여 곧은 소리가 조정에 떨쳐졌다. 이에 정축년(1577, 선조 10)에 서장관(書狀官)으로 차임되자, 일행 사람들이 모두 두려워 떨었다. 처음에 평양(平壤)에 이르러서 군관(軍官)이나 역관(譯官)들 가운데 참람하고 사치스러운 자들을 모두 적발하여 곤장을 친 일이 있었다. 그 다음 날 연향(宴饗)을 베푸는 자리에 나가 앉자, 정사(正使)가 말하기를, “부경(赴京)하는 군관들이 행장을 사치스럽게 꾸미는 것은 으레 그러한 것인데, 서장관이 곤장을 치는 바람에 살벌한 기운이 돌게 되었다. 그러니 벌주(罰酒)를 마시는 것이 마땅하다.” 하였는데, 아랫사람들이 두려워하면서 서로 떠들어 대기를, “서장관은 성품이 준엄하니 반드시 벌주를 마시지 않을 것이다. 이번 행차는 응당 화평한 기운이 적을 것이다.” 하였다. 그러나 선생이 그 잔을 다 마시고는 기쁜 얼굴로 종일토록 웃고 떠들자, 아랫사람들이 비로소 선생이 정직한 가운데서도 포용력이 있음에 감복하였다. - 정사는 바로 오음(梧陰) 윤두수(尹斗壽)이다.
○ 경진년(1580, 선조 13) 4월에 부친상을 당하였는데, 졸곡(卒哭) 전에는 밤에 누워서 자지 않았고 곡 소리를 그치지 않았다. 장사(葬事)를 마친 뒤에는 묘 옆에서 여묘살이를 하였는데, 비통스럽고 근심스러워 하여 일찍이 이를 드러내 보인 일이 없었고 동구 밖을 나간 일이 없었으며 집안일에 대해서 한번도 물은 적이 없었다. 상장(喪葬)의 절목(節目)은 일체 《가례(家禮)》와 《의례(儀禮)》를 따르면서 두씨(杜氏)의 《통전(通典)》과 구씨(丘氏)의 《의절(儀節)》을 참고하여 행하였는데, 비록 초상을 당한 황급한 때였지만 의문(儀文)이 구비되어 있었으며, 부녀자들도 모두 예문(禮文)에 익숙하였다.
그 뒤에는 향리 사람들이 선생의 효행(孝行)을 갖추어서 관가에 보고하였는데, 당시에 마침 고을 수령으로 있던 동강(東岡) 김우옹(金宇顒)이 감탄하기를, “효자의 집안에서 충신을 구하라는 말이 어찌 미더운 말이 아니겠는가.” 하였다. 그러나 서로 친구간이라는 혐의스러운 점으로 인해 마침내 조정에는 아뢰지 않았다.
상제(喪制) 기간인 3년 동안에는 제생(諸生)들 가운데 학문을 배우기를 청하는 자가 있으면 상을 당해 슬픔 속에 지내는 몸이라서 강학하고 토론하는 자리가 아니면 감히 머물러 있을 수가 없다고 하면서 사양하였다. 만약 성심으로 배우기를 원하는 자가 있을 경우에는 별도로 재사(齋舍)에 있게 하였으며, 문중의 자제들을 따라와 가르침을 청할 경우에는 역시 심하게 거절하지는 않았는데, 예경(禮經) 등의 서책에 이르러서는 반복하여 변론하고 분석하면서 가르치기를 아주 간절하게 하여 마음속으로 이해하도록 한 뒤에야 그만두었다.
○ 계미년(1583, 선조 16) 3월에 의정부 사인(議政府舍人)으로서 황해도 순무어사(黃海道巡撫御史)에 차임되어 나갔는데, 호령이 바람 불듯 시행되어 군사와 백성들이 모두 원통함을 풀 수가 있었으며, 탐관오리를 적발함에 있어서는 위세가 있다고 하여 용서치 않았으므로, 선생을 꺼리는 자들이 많게 되었다. 이때 마침 나주 목사(羅州牧使) 자리가 비어 있었는데, 정철(鄭澈)이 경연에서 아뢰기를, “나주는 지역이 넓고 백성들이 많아서 본디부터 다스리기 어렵다고 소문났으니, 반드시 강직한 내신(內臣)을 차임해 보내어 진압해야 할 것입니다.” 하자, 그 이튿날 특지(特旨)를 내려 선생을 나주 목사에 제수하였다. 이에 선생은 복명(復命)한 뒤 곧바로 배사(拜辭)하였다.
당시에 당화(黨禍)가 막 시작되어서 안팎에 있던 명류(名流)들이 서로 잇달아서 쫓겨났는데, 어느 날 금오랑(金吾郞)이 나주 고을 경내로 들어오자 고을 사람들이 놀라 떨면서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런데도 선생은 단정히 앉아 송사(訟事)를 심리하면서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또 장흥 부사(長興府使) 송응개(宋應漑) 역시 쫓겨나게 되었는데, 사람들이 모두 두려워 위축된 채 감히 쳐다보지도 못하였다. 그런데도 선생은 말을 타고 달려가 전별하였으며, 타고 갔던 말을 선물로 주었다.
○ 병술년(1586, 선조 19)에 임해궁(臨海宮)의 궁노(宮奴)가 민전(民田)을 빼앗아 차지하자, 선생이 즉시 체포하도록 명하고는 감사에게 형신(刑訊)하기를 청하였는데, 감사가 두려워서 감히 공문서를 보내지 못하였다. 이에 두세 차례 논보(論報)하는 즈음에 옥에 수금되어 있던 자가 죄를 모면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는 다른 사람을 사주하여 사직단(社稷壇)에 불을 놓았으므로, 묘우(廟宇)가 모두 불에 타 버렸다. 그러자 고을 사람들이 묘우를 새로 짓기를 청하였는데, 선생은 이르기를, “사직단이 불탄 것은 그 죄가 파직에 해당되는바, 그 자취를 덮어 숨겨서는 안 된다.” 하고는, 드디어 방백(方伯)에게 보고해서 파직당하였다. 이에 온 고을 사람들이 탄식하면서 분통해하였다.
○ 조정에서 통신사(通信使)를 보내 왜적의 정세를 탐지할 것을 의논하였는데, 왜적의 마음은 헤아릴 수가 없고 바닷길이 어렵고 위험하였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눈치만 보면서 가기를 회피하였다. 그러자 선생은 가인(家人)에게 이르기를, “속히 행장을 꾸리라. 내가 반드시 가게 될 것이다.” 하였다. 그런데 과연 당시의 재신(宰臣) 가운데 공을 꺼리는 자가 있어서 이 일을 인해 해치고자 하였으므로, 즉시 선생을 부사(副使)에 의망(擬望)하였다.
○ 경인년(1590, 선조 23) 봄에 상사 황윤길(黃允吉), 서장관 허성(許筬)과 함께 배사(拜辭)하고서 도성을 나가자, 조정의 친구들이 모두 한강(漢江)에 나와 전송연을 베풀었는데, 경사(卿士)들이 모두 와서 모였다. 그러자 선생은 좌우 사람들을 둘러보면서 정색을 하고는 이르기를, “이러한 때를 당하여 누가 감히 사림(士林)을 일망타진할 계책을 하는가. 사람에게 부끄럽지 않으며, 하늘이 두렵지 않은가.” 하였다. 이때 대개 정여립(鄭汝立)의 옥사(獄事)로 인하여 사류(士類)들을 함정에 몰아넣고 있는데도 조정에서는 머리를 수그리고 숨을 죽인 채 감히 말하는 자가 없었다. 선생은 맡은 자리가 언관(言官)의 자리가 아니라서 항상 개탄스러운 생각을 가슴속에 품고 있다가 출발에 임해서 언급한 것이다.
이때 사부(師傅) 권우(權宇)가 이곳에 전별하러 왔다가 이별하는 시를 지어 주었다. 선생이 그 시의 운을 차운하여 시를 지었는데, 그 시에 “손끝에 꽃 스치자 온 숲에 봄빛이네.[拂琪花萬樹春]”라는 구절이 있었다. 그러자 권우가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이 노인네의 기상이 이와 같으니 반드시 잘 돌아올 것이다.” 하였다.
○ 신묘년(1591, 선조 24) 2월에 조정으로 돌아왔다. 선생이 통신사로 일본에 갔다가 돌아온 뒤로 조정에서는 왜적을 방비하는 일을 걱정하였다. 이에 경상도 감사에게 신칙하여 민정(民丁)을 끌어모아 곳곳에 성을 쌓았으므로, 마을마다 어수선하여 인심이 크게 무너졌다. 그러자 선생이 옥당(玉堂)에 있으면서 아뢰기를, “오늘날에 두려워할 것은 섬 오랑캐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인심에 있습니다. 만약 인심을 잃는다면 금성탕지(金城湯池)가 있고 튼튼한 갑옷과 날카로운 무기가 있더라도 장차 어디에 쓰겠습니까.” 하였다.
○ 다음해 여름 4월에 비국(備局)에서 의논하여 곤수(閫帥)를 뽑았는데, 경상 우병사(慶尙右兵使) 조대곤(曺大坤)이 노쇠하다는 이유로 체차당하게 되었다. 그러자 상께서 비망기(備忘記)를 내려서 조대곤을 체차하고 김성일을 병사에 제수하라고 하교하였다. 선생은 명을 받자마자 곧바로 출발하였는데, 조정의 어진 사대부들이 모두 안타까워하면서 탄식하였으며, 혹 길에 나와서 위로하는 자도 있었다. 이에 선생은 이르기를, “이 몸이 죽기 전에는 오히려 이 몸을 다 바쳐서 일할 때이다. 일의 성패와 이해는 말할 바가 아니다.” 하였다. 이때 선생과 동년배의 친구인 기궤자(畸危子)가 밤을 틈타 와서 전별하면서 시를 지어 주었는데, 그 시는 다음과 같다.

부절을 나눠 받고 대궐 떠나서 / 分符辭北極
칼 울리며 남쪽으로 향하여 가네 / 鳴劍向南陲
하얀 해는 붉은 절부 밝게 비추고 / 白日明朱節
맑은 바람 붉은 기에 불어 오누나 / 淸風拂赤旗
그 충성은 별과 해가 빛을 비추고 / 精誠星日照
그 충의는 귀신 또한 알고 있으리 / 忠義鬼神知
임금께서 뽑은 것 하늘 뜻이니 / 聖簡應天意
그 은혜에 보답하는 건 이때에 있네 / 酬恩在此時

○ 행조(行朝)에서 경상도가 왜적들의 근거지가 되었다고 해서 한 방면을 전담하여 맡기고자 하였으나 적임자를 구하지 못하였는데, 조정의 신하들이 선생을 천거해서 경상좌도 순찰사(慶尙左道巡察使)로 삼았다. - 윤두수(尹斗壽)와 이항복(李恒福)이 번갈아가면서 천거하였다.
○ 선생은 기품이 굳세고 방정하였으며, 조행(操行)이 단아하고 단정하였다. 어려서부터 선을 행하는 데 용감하였고, 작은 성취를 기뻐하지 않았다. 퇴계 선생의 문하에 들어가서는 마음속으로 기뻐하고 성심으로 감복하여 말 한마디 행동 한 가지를 함에 있어서도 반드시 사문(師門)으로써 본보기를 삼았으며, 마음속으로 체인(體認)하여 언제라도 잊지 않았다. 게으르고 나태한 기색을 몸에 나타내지 않았으며, 비루하고 인색한 싹을 가슴속에 담아 두지 않았다. 비록 한가로이 쉬거나 혼자 있을 때에도 긴장을 풀고서 마음 내키는 대로 하지 않으면서 경계하고 반성하기를 더욱더 절실하게 하였다. 어지럽거나 요란한 때를 만났을 경우에는 구차스럽게 하거나 방과(放過)해 버리지 않고 조행을 지키기를 더욱더 굳건히 하였다.
다른 사람의 착한 행실을 들으면 반드시 귀 기울여 들으면서 탄복하였으며, 자신의 잘못을 알면 반드시 두려워하면서 즉시 고쳤다. 일찍이 배우는 자들에게 이르기를, “내가 평생에 걸쳐서 얻은 한마디 말은, ‘나의 허물을 공격하는 자는 나의 스승이고, 나의 아름다움을 말하는 자는 나를 해치는 자이다.[道吾過者 是吾師 談吾美者 是吾賊]’라는 말이다.” 하면서, 이 열네 글자로써 항상 자신을 책려하였다.
대개 자신에 대해서 엄격하였던 것은 천성에서 나온 것이며, 다른 사람을 대함에 있어서 포용력이 있었던 것은 오랜 공부를 쌓은 소치였다. 그러므로 말년에 이르러 도달한 경지는 점차 평정(平正)하여져서 어렸을 적의 굳세고 예민한 기상을 다시는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선생의 용모를 본 사람은 거칠고 사나운 습관이 근절되고, 선생의 인격을 접한 사람은 그릇되고 편벽스러운 마음이 소멸되었으므로, 모두들 가까이 교제하면서 대하기를 기뻐하였으며, 성심을 다하는 것을 좋아하였다.
또 선생은 자신이 악한 사람을 미워함이 너무 지나쳐서 모난 점이 자못 드러난 것을 알고는 ‘관홍(寬弘)’이란 두 글자를 크게 써서 벽에 붙여 놓고 때때로 보면서 반성하여 항상 명심하여 잊지 않으려고 하였다.
○ 월천(月川) 조목(趙穆)이 일찍이 선생이 띠를 묶은 것을 보고 말하기를, “그대는 모름지기 묶은 것을 조금 느슨하게 풀어라.” 하였는데, 선생이 이르기를, “공이 매번 이와 같이 경계하니 감히 가르침을 따르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고는, 즉시 풀어서 다시 매었다. 그러자 월천이 말하기를, “모든 일에 대해서 모름지기 그와 같이 하라.” 하였다.
월천은 또 선생에게 술 마시는 것을 경계하였는바, 일찍이 포갑(鮑甲)을 선생에게 보내 주면서 명(銘) 하나를 지었는데, 그 명에 이르기를,

다섯 가지 색깔이 찬란함이여 / 五色燦兮
그 광채가 현란하여 아름답도다 / 光絢爛兮
술을 비록 많이 마시지마는 / 飮雖多兮
그 모습은 어지럽지 아니하도다 / 儀不亂兮

하였다. 그러자 선생이 절하면서 받고는 가슴속에 새겨 잊지 않았다.
○ 책에 있어서는 읽지 않은 책이 없었으나, 주 부자(朱夫子)의 서(書)를 일신의 표적으로 삼아 마음을 가라앉혀 음미하면서 침식까지 잊을 정도였다. 첫닭이 울면 일어나서 반드시 한두 편을 왼 뒤에야 비로소 등불을 밝히고 책을 펼쳤는데, 일심을 가다듬고는 정밀하게 생각하고 명확하게 분변하여 추호라도 방과(放過)하는 바가 없었다. 제생(諸生)들 가운데 배움을 청하는 자가 있으면 글자마다 가르침을 찾고 구절마다 의리를 찾아 자세히 분석하여 깨우쳐 주되, 온 마음을 쏟아 간절하고 지극하게 가르쳐 주었는데, 반드시 그 본말(本末)을 자세하게 다 가르친 다음에야 그만두었다.
문장(文章)을 지음에 있어서는 명백하고 전아(典雅)하였으며, 붓을 잡으면 곧바로 글을 지었는데, 성심이 북받쳐 뜻이 곡진하였으며, 논의가 명확하고 분명하였다. 시율(詩律)을 지음에 있어서도 담박하고 순하였는데, 특히 오언 고시(五言古詩)를 잘 지어서 도연명(陶淵明)이나 소동파(蘇東坡)의 시체(詩體)를 깊이 터득하였다.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은 대범하고 묵직하여 다른 사람을 인정하는 경우가 적었는데, 매번 선생을 공경하고 중히 여겼다. 또 선생이 말년에 지은 시문을 보고는 탄복하여 마지않으면서 말하기를, “덕이 있는 사람은 반드시 말이 있는 법이란 말이 어찌 미덥지 아니한가.” 하고는, 드디어 선생을 문형(文衡)에 천거하였다.
○ 성품이 지극히 효성스러워서 미처 선부인(先夫人)을 봉양하지 못한 것을 평생의 통한으로 여겼으며, 판서공(判書公)을 봉양함에 있어서는 어떤 일도 가리지 않고 직접하였으며 뜻을 어기는 법이 없었다. 조정 반열에 나아가게 되어서는 시종신(侍從臣)으로 있어서 고을 수령으로 나가 편하게 봉양하지 못하는 것을 늘 한스러워하였다. 형제간에는 우애가 돈독하여 한 집안에서 화락하게 지냈는바, 다른 사람들이 그 사이를 이간질할 수가 없었다. 아침 저녁 상차림은 담박하기가 마치 빈한한 선비와 같았으며, 집안일에 대해서는 조금도 유의하지 않았다.
○ 제사를 지낼 적에는 반드시 목욕하고 재계하였으며, 제수 물품을 직접 살펴서 정결하게 차리기에 힘썼다. 그리고 흉하고 더러운 일에 대해서 언급하지 않았으며, 대청을 청소하고 방에 불을 밝혀서 마치 조상들이 와서 앞에 임하여 계신 듯이 하였다.
○ 선생의 생신날에 집안 사람들이 수연(壽宴)을 베풀려고 하자, 선생이 이르기를, “어찌 부모님께서 길러 주신 은혜를 생각하는 날에 잔치를 베풀고서 즐기는 일을 해서야 되겠는가.” 하였다. 매번 육아(蓼莪)의 시를 생각하면서 그리워하는 마음을 더욱 깊이 하였다.
○ 집안을 다스림에 있어서는 법도가 있었다. 자녀들을 기름에 있어서는 은혜로써 길렀고, 가르침에 있어서는 의리로써 가르쳤다. 노비들을 거느림에 있어서는 관대함으로써 거느리면서 정성스럽고 부지런히 하라고 권면하였다. 일찍이 꾸짖는 듯한 말소리나 사나운 기색을 보이지 않았으며, 내외 상하간에는 구별이 있었고, 문정(門庭) 안은 정숙하였다. 자제들이 잘못을 저질렀을 경우에는 엄준하게 꾸짖은 적이 없었고 순순하게 타일러서 그들이 스스로 허물을 알아서 고치도록 하였다. 일찍이 자제들에게 훈계하여 이르기를, “군자는 마땅히 심학(心學)을 우선으로 하여야 한다. 만약 과거 시험 공부만을 힘쓴다면, 비록 과거에 급제하더라도 그 본심이 이미 가리워져서 이욕(利欲)의 유혹에 빠져들지 않는 경우가 드무니, 두려워하지 않아서야 되겠느냐.” 하였다.
○ 선을 좋아하고 악을 미워함은 천성에서 나왔다. 어떤 사람이 편파적인 말이나 사특한 행동을 할 경우에는 반드시 그 자리에서 지적하여 숨김없이 다 말하였으므로, 세상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스스로 처신하기를 올바름으로써 하고 좋아하고 미워하기를 공정함으로써 하여 터럭만큼도 사사로운 뜻이 그 사이에 끼어 있지 않았다. 그러므로 착한 사람이나 착하지 못한 사람이나를 막론하고 모두들 두려워하고 복종하여 자신에 대한 좋지 않은 말이 공에게 들릴까 봐 두려워하였다.
○ 선생은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과 평생토록 막역한 교유를 맺었는데, 서애가 다른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내 평생의 지우(知友)로는 오직 사순(士純) 한 사람 뿐이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지금은 이미 죽었다.” 하였다. 임종할 때에 이르러서도 입에서 끊이지 않고 선생에 대해 말하였다.
○ 문생(門生)이 묻기를, “보통 사람은 처음에는 이름이 있지만 끝내는 그 실상이 없게 되는 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하니, 선생이 이르기를, “이름이 실상보다 앞서는 것은 자신의 행복이 아니다. 진실로 자신에게 실상이 있으면 이름이 나지 않는 것을 걱정하지 않는다. 선은 반드시 쌓여진 이후에 이루어지는 것이니, 한 가지 선이 있다고 하여 스스로 만족하게 여긴다면, 이는 그 선을 상실한 것이다. 악은 아무리 작더라도 두려워해야 하니, 한 가지 악에 불과하다고 해서 스스로를 용서한다면, 이는 그 악을 조장하는 것이다.” 하였다. 또 이르기를, “학식을 넓혀서 심성을 닦고 사욕을 이겨내어 사념을 다스리는 공부에는 힘쓰지 않으면서 한번에 뛰어넘어 도달하려고 하는 것이 학자들의 공통적인 폐단이다. 이를 비유해서 말하면, 곡식 싹을 가꾸는 사람은 부지런히 북돋아서 열매를 맺게 해야만 자성(粢盛)에 이바지할 수 있고, 잡초를 제거하는 사람은 아침저녁으로 김매어 그 뿌리를 없애 버려야만 곡식을 해치지 못할 것이다. 밭을 잊고 김매지 않는 사람과 곡식을 기르기 위해 곡식 싹을 뽑아 올리는 사람은 그 마음은 비록 다르지만 해치는 것은 마찬가지인 셈이다.” 하였다.
○ 평소에 집안에 있을 적에는 항상 일찍 일어나서 옷을 단정하게 갖추어 입고서 외당(外堂)에 나아가 앉아 있었다. 그러면서 오직 책을 보거나 자제들을 가르치거나 손님을 접대하는 것으로 일삼았는데, 믿음직하고 화락하였다. 일찍이 다른 사람과 차이 나는 행동이나 사나운 기색을 보인 적이 없지만, 조정에 벼슬하면서 과감하게 말하거나 일에 임하여 조처할 즈음에 이르러서는 영특한 기운이 늠름하여 당연히 해야 할 일로 여겼다. 그리하여 두려워하지 않고 곧장 행하면서 이득과 손해를 돌아보지 않았으며, 헐뜯거나 추켜올리는 데 따라 동요되지도 않았는바, 비록 옛날에 용맹으로 소문났던 맹분(孟賁)이나 하육(夏育)조차도 감히 그 기상을 빼앗지 못할 정도였다. 일찍이 이르기를, “사람이 일을 처리함에 있어서 참으로 마음에 부끄럽지 않다면 어찌 다른 사람의 말을 걱정하겠는가. 그러나 외물(外物)에 이끌리고 마음속에서 동요되면 저절로 일이 의리에 합치되지 않아, 자신의 도를 굽혀서 다른 사람을 따르게 되는 것을 면치 못하게 되는 법이다. 나는 평생 매번 도를 바르게 하여 실천하기를 생각하였으니, 비록 죽더라도 아무런 후회가 없다. 그런데도 오히려 외물에 마음이 흔들리지 않을 수가 없었으니, 이것은 나의 강단(剛斷)이 부족하여 사사로운 뜻에 미혹된 것이다.” 하였다.
○ 아, 한결같이 자신만을 믿고서 곧게 나아가다가 화를 취하는 것은 사람들이 경계로 삼는 바인데도 선생은 후회하지 않았다. 그리고 자신의 마음을 바꾸고 뜻을 억누르며 세속을 따르고 고상하게 지내는 것은 세상 사람들이 통달하였다고 하는 것인데도 선생은 개의치 않았다. 또 뒤를 돌아보고 머뭇거리면서 좋은 것을 취하고 어려운 것은 피하는 것이 세상 사람들이 지혜롭다고 하는 것인데도 선생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러니 세상 사람들이 선생을 보고 고집스럽다고 하는 것은 괴이할 것이 없다.
자기 스스로는 선생과 서로 잘 안다고 하는 자들도 지나치게 강직한 것이 선생의 병통이라고 하면서, 충신(忠信)의 실제가 마음속에 보존되어 있고, 효우(孝友)의 도가 집안에서 바탕이 되었다는 것을 모르고 있다. 그러니 이 세상에 과연 선생을 아는 자가 있는 것인가. 마음속에 보존되어 있고 집안에서 바탕이 되었다는 것을 사람들이 반드시 알지도 못하였고, 선생도 다른 사람이 알아주기를 구하지 않았다. 그러니 선생의 덕을 아는 자가 드물며, 덕을 알고서 믿는 자는 더욱 드문 것이 마땅하다.
어지럽고 무너진 막바지에 왕명을 받들게 되어서는 형세가 마치 광란의 물결이 휩쓸자 한번 무너짐에 막을 도리가 없는 그런 상황이었다. 선생은 경악(經幄)의 노숙한 유신(儒臣)으로서 군대의 일에 대해서는 일찍이 들어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도 단지 성의로써 사람들을 감동시키고 충신으로써 사람들을 감화시켜, 의로움을 흠모하는 자들은 진심을 보이게 하고, 완악하고 난폭한 자들은 순종하게 하였으며, 나약하고 게으른 자들은 격동되게 하였다. 그리하여 모두들 고무되어서 기쁜 마음으로 달려나오게 해서 함께 일하게 하였다. 그리고 도망쳤던 장수나 흩어졌던 군사들도 모두 소문을 듣고 두려워 떨면서 앞다투어 스스로를 갈고 닦아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치게 하였다.
선생은 거행하고 조처하는 것이 모두 기의(機宜)에 알맞았고, 상벌을 행하고 호령을 내리는 것이 백성들의 뜻을 크게 감복시켰다. 그러므로 함께 협력하여 모의하고 일제히 떨쳐 일어나 서로 간에 멋대로 굴지 않았으며, 각자가 자신들의 역량을 펼쳐서 모두 기이한 공을 세웠다. 그리하여 마침내 모두 불타 버린 가운데에서 기운을 불어넣어 영남 우도 일대를 보전함으로써 당시의 거묵(莒墨)이 되어 나라를 회복시킬 기반이 되게 하였다. 그러니 비록 하늘이 목숨을 빼앗아 가 큰 훈업(勳業)을 다 이루지는 못하였으나, 인륜의 기강을 부지하고 한 지방을 버틸 수 있게 한 공은 싸움터에서 싸운 것보다도 도리어 더 큰 것이다.
대개 영남(嶺南)이 오랑캐 땅으로 되지 않은 것이 비록 의사(義士)들이 의병을 일으킨 공이라고는 하지만, 의병들이 종시토록 공을 이룰 수 있었던 것은 실로 선생이 성의를 가지고 사람들을 감동시킨 데에서 말미암은 것이다. 그리고 진주성(晉州城)을 함락당하지 않고 굳게 지킬 수 있었던 것이 비록 김시민(金時敏)이 힘껏 싸운 공이라고는 하지만, 역시 선생이 지휘하고 책응(策應)하는 것을 제대로 한 데에서 말미암은 것이다. 살아 있을 적에는 온 도내 사람들이 장성(長城)처럼 의지하여 공이 떠나고 머무는 데 따라서 크게 달라졌으며, 죽은 뒤에는 대소 사민(士民)들이 눈물을 흘리면서 서로 조상하여 지금까지도 선생을 생각하면서 추모하여 마지않게 하였다.
이에 지난날에 선생을 알지 못하고 선생을 믿지 않던 자들도 모두들 칭찬하고 탄복하게 되니, 선생을 알지 못하고 선생을 믿지 않는 자들이 없어졌다. 이 세상의 군자들 가운데에는 평상시에는 도리에 대해서 떠들다가도 위태로운 경우를 당해서는 지난날에 걷던 길을 내팽개치는 자들이 허다한데, 평상시나 어려울 때나 절개를 한결같이 하고 대절(大節)에 임해서도 지조를 빼앗을 수 없다고 하는 것은 오직 선생을 두고 이른 말이다.
선생께서는 일찍이 개연히 탄식하면서 이르기를, “대장부가 이 세상에 태어나 대도(大道)에 대해 듣지 못하고서 술에 취해 꿈속을 헤매는 상태로 살다가 간다면 몹시 부끄러운 일이다. 나는 다행히도 일찌감치 의귀(依歸)할 곳을 얻었는데, 학업을 끝마치지 못하고 명리(名利)의 굴레에 얽매여 그대로 늙은 나이에 이르고 말았는바, 한 생각이 이에 미칠 적마다 두려워 등에 땀이 흘러내린다.” 하였다. 이에 석문정사(石門精舍)를 짓고는 영원토록 물러나 쉬려고 하였다. 조용한 곳에서 한가로이 지내면서 학문 공부에 뜻을 오로지 하여 선사(先師)께서 남기신 학문을 계승하려던 것이 선생의 뜻과 바람이었으니, 이 뜻을 만약 이룰 수가 있었다면 말년에 성취한 바를 어찌 헤아릴 수나 있었겠는가. 사문(斯文)을 부식(扶植)하고 후생(後生)을 계도해 줌이 여기에서 그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애석하게도 시사(時事)가 어렵고 근심스러워서 임금이 치욕을 당하고 백성들이 수심에 잠기게 되어, 일이 글러진 뒤에 힘써 일하다가 군무에 시달리는 가운데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리하여 선생이 평소에 바라던 바를 이루지 못하게 하였으니, 이것이 어찌 한갓 선생의 남은 한일 뿐이겠는가. 실로 후학(後學)들의 불행인 것이다.
이상은 문인 최현(崔晛)의 기록이다.

○ 선생께서는 품부받은 기질이 맑고 순수하였으며 마음속이 화락하고 단아하였다. 도를 들은 것이 이미 빨랐고 학문을 강론한 것은 근원이 있었으며, 덕이 혼후하면서도 강직하였고 행실은 독실하면서도 올발랐다. 다른 사람에게서 선을 취하기를 좋아하고 자신을 책망하는 데에 밝았으며, 자신의 허물을 듣기를 좋아하고 의(義)로 옮겨 가는 데에는 용감하였다.
게으르고 나태한 기색을 몸에 나타내지 않았고, 비루하고 인색한 마음을 가슴속에 가지고 있지 않았다. 의연하여 범하기 어려운 모습이 있었고, 확연하여 빼앗을 수 없는 뜻이 있었다. 그러므로 풍채를 보는 자들은 추하고 사나운 습관을 끊었고, 덕스러운 모습을 보는 자들은 그릇되고 편벽된 마음이 사그라들었다. 이에 사림(士林)에서는 태산(泰山)이나 북두(北斗)와 같이 우러러보았고, 조야(朝野)에서는 주석(柱石)의 신하처럼 의지하였다.
○ 집안을 다스림에 있어서 법도가 있었고, 남녀 간에 구별이 있었다. 매번 정초와 동지, 초하루와 보름날 및 집안 어른의 생신날에는 자제들을 당 위에 모이게 한 다음, 남자는 왼쪽에 자리하되 서쪽을 상석으로 하고, 여자는 오른쪽에 자리하되 동쪽을 상석으로 하여, 순서대로 서서 참알(參謁)하게 하였는데, 남자는 두 번 절하고 여자는 네 번 절하게 하였다. 노비들의 경우에는 오직 정초에만 순서대로 서서 한꺼번에 절하게 하였다. 이에 온 집안 사람들이 모두 어른을 섬김에 있어서 공손하게 읍하는 예를 알았다.
○ 어느 날엔가 자제들에게 검(劍)을 나누어 주면서 이르기를, “너희들은 내가 검을 나누어 주는 뜻을 알겠느냐? 모름지기 이 검으로 의(義)와 이(利)의 빗장을 깨뜨려서 취하고 버릴 것을 구별하기 바란다.” 하였다.
○ 임진년(1592, 선조 25)에 숙부(叔父)께서 우도 감사로 부임할 때 부진(府鎭)에서 나아가 길 옆에서 배사(拜辭)하였는데, 나를 돌아보며 이르기를, “속히 부진으로 돌아가서 향병(鄕兵)을 일으켜 헛되이 죽지 말라.” 하였다.
○ 숙부의 충효(忠孝)의 큰 절개는 국사에 기록되고 사람들의 입에 전해지는 것이 비록 더러 빠진 것이 있기는 하나, 천 길 높이 봉황이 날아오르고 백일(白日) 아래에서 우레처럼 치달리니, 그 누가 상서로운 세상의 표상이요 하늘까지 울릴 소리라는 것을 모르겠는가.
내가 집안에서 평소에 귀로 듣고 눈으로 본 것으로써 말한다면, 숙부의 선을 향하는 성심과 도를 믿는 독실함은 마치 물이 반드시 아래로 흐르는 것과 같고 화살이 과녁을 향하는 것과 같아서, 외지고 어두운 곳이라고 해서 혹시라도 방심하지 않았고, 자잘하고 하찮은 일이라고 해서 혹시라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의리(義利)와 공사(公私)의 구분에 있어서는 털끝만한 것이라도 살피지 아니함이 없었고, 사물을 응접할 즈음에는 정리(情理)가 각각 적당함을 얻었다. 그런 까닭에 옛것을 이어받아 지금에 미루어 나가고, 효성을 옮겨서 충성을 하며, 평상시나 험난할 때나 지조를 지켜 삶과 죽음을 한결같이 하였다. 이것은 진실로 귀신에게 물어 보아도 의심이 없을 것이다.
이상은 조카 김용(金涌)의 기록이다.

○ 선생은 책으로 사람들을 가르침에 있어서는 의리를 깊이 연구하여 심오한 뜻을 열어 보였으며, 일찍이 한 글자도 쉽사리 지나치지 않았다. 식사를 올리면 학업을 배우는 제생들이 그만 하기를 청하는데도 오히려 허락하지 않으면서 한낮이 되어서야 강(講)을 파하기도 하였다. 다른 사람을 가르치기를 게을리 하지 않음이 대부분 이와 같았다.
○ 어느 날 선생이 당(堂) 위에 앉아 있는데, 나 장흥효(張興孝)가 들어와 뵐 적에 터벅터벅 걷자, 선생께서 꾸짖기를, “첫 번째 발자국을 떼어놓으면서는 마음이 첫 번째 발자국을 떼어놓는 데 있고, 두 번째 발자국을 떼어놓으면서는 마음이 두 번째 발자국을 떼어놓는 데 있어야 한다.” 하였다.
○ 선생께서 일찍이 사람들에게 이르기를, “사람을 알아보기는 어려우나 그 사람의 눈동자를 보면 거의 알 수가 있다.” 하였다.
○ 서애 유 선생은 선생을 일컫기를, “말채찍이라도 잡고자 하지만 할 수가 없다.” 하고, 선생은 유 선생을 일컫기를, “나의 사표(師表)이다.” 하면서, 서로 간에 자신을 낮추고 상대방을 높였다고 한다.
○ 선생께서 일찍이 유 선생과 옛절에서 만나 말을 나누었는데, 선생이 이르기를, “신하로서 나아가고 물러가는 도는 반드시 쉬운 데에서 얻을 수가 있다.” 하니, 유 선생이 이르기를, “욕심이 없으면 될 것이다.” 하자, 선생이 무릎을 치면서 감탄하였다.
○ 선생께서 일본에 사신으로 갈 때 배 안에서 태풍을 만났는데, 큰 파도가 솟구치자 배 안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허둥대면서 어찌할 줄을 몰랐는데도 선생은 꼿꼿이 앉아 책을 보았다. 귀국한 다음 사람들이 모두 선생께서 마음을 움직이지 않는 것에 감복하였는데, 선생께서는 웃으면서 이르기를, “책을 본 것도 마음을 움직인 것이 아닌가.” 하였다.
이상은 문인(門人) 장흥효(張興孝)의 기록이다.

○ 우리 유복기(柳復杞) 형제는 10세 전에 부모님을 잃고 외가에서 자랐다. 선생께서는 보살펴 주고 길러 줌에 있어서 은혜와 사랑을 지극하게 하여, 음식이나 의복, 가르치는 일 등에 있어서 한결같이 자기 자식과 똑같이 하였다. 우리들이 이미 수곡(水谷)에 자리잡고 살 적에는 모든 일을 시작하는 단계라서 뒤죽박죽 두서가 없었는데, 선생께서는 더욱더 불쌍히 여겨 돌보아 주었다. 매번 원곡(猿谷)에서 오가는 즈음에 비록 날이 저물어 황급한 가운데서도 반드시 친히 우리들의 집에 오시어 먼저 안부를 물은 다음 제사(祭祀)의 절차를 물었다. 그리고 농사짓는 데 관한 일에 대해서는 노복들을 엄하게 신칙하면서 모든 일을 지시해 주었다. 또 몸가짐을 단속하고 학문을 부지런히 닦으라는 뜻으로 면려하고 경계하여 마지않으셨다. 우리들이 대충이나마 글을 알고 땅과 가업을 지켜 올 수 있었던 것은 사소한 것까지도 모두 외삼촌의 힘이었다. 그러니 평생토록 그 은공을 사모하면서 감격의 눈물을 흘리는 것이 어찌 끝이 있겠는가.
○ 선생께서 휴가 중일 때 이웃에 한가롭게 지내는 어떤 사람이 있어서 자주 선생을 찾아와 뵈었는데, 선생께서 묻기를,
“자네에게는 노친이 계시는가? 어떻게 봉양하는가?”
하자, 그 사람이 말하기를,
“집이 가난하여 봉양할 길이 없습니다.”
하니, 선생께서 이르기를,
“자네는 집이 가난하더라도 밭을 갈고 물고기를 잡으라. 아침저녁으로 봉양하는 것이 바로 자식의 직분인데, 어찌하여 봉양할 길이 없다고 하는가. 나와 같은 자는 부모 곁을 떠나 벼슬살이하고 있으므로 거친 음식으로나마 봉양하는 것도 직접 할 수가 없다. 이에 비록 임금의 녹을 먹고는 있지만 즐거운 줄 모르겠다.”
하고는, 오랫동안 탄식하였다. 그러자 그 사람이 느껴서 깨닫고는 마침내 효성으로 봉양한다는 소문이 나게 되었다.
○ 집안 사람들 가운데 궁핍한 자가 있으면 온 힘을 다해 돌보아 주었다. 인근 고을의 수령이나 친구들이 철에 따라 나는 물품을 보내 주었을 경우에는, 의리에 있어 받아서는 안 되는 것은 즉각 물리치고, 의리에 있어서 받아도 되는 것은 받았다. 그리고는 한 말의 쌀이나 몇 마리의 물고기일지언정 모두 즉시 집안 사람들과 인근 사람들에게 나누어 보냈는데, 반드시 가난한 자부터 먼저 나누어 주고 부자들은 뒤로 하였다.
○ 후생들을 이끌어 줌에 있어서 매번 본분에 의거해서 착실하게 해 나가라고 권했으며, 일찍이 성명(性命)의 설에 대해서는 가벼이 말하지 않았다.
○ 집에 있을 때에는 새벽에 일어나서 세수하고 머리를 빗은 다음 의관을 단정하게 차려 입고는 대청에 나가 앉아서 집안의 여러 가지 일을 조처하였다. 그런 다음에 제생들에게 공부를 가르쳐 주었으며, 이를 마치고는 옷깃을 단정하게 여미고 앉아서 서책을 보았다. 아무런 까닭 없이 내당(內堂)으로 들어간 적이 없었으며, 재리(財利)에 대한 말은 입 밖에 낸 적이 없었다.
이상은 문인 유복기(柳復杞)의 기록이다.

○ 신묘년(1591, 선조 24) 봄에 통신사(通信使) 황윤길(黃允吉), 김성일 등이 일본에서 돌아왔다. 황윤길이 부산(釜山)에 도착해서 일본의 정세에 대해 치계(馳啓)하면서 반드시 병화(兵禍)가 있을 것이라고 하였는데, 복명(復命)한 뒤에 주상께서 인견(引見)하고 물으니, 황윤길의 대답은 앞서와 같았고, 김성일은 아뢰기를, “신은 그런 낌새를 보지 못하였습니다.” 하고, 인하여 황윤길이 인심을 동요시키는 것은 마땅치 못하다고 하였다. 이에 의논하는 자들이 혹 황윤길의 말이 옳다고 하고 혹 김성일의 말이 옳다고 하였다. 이에 내가 김성일에게 묻기를, “그대의 말이 황 상사의 말과 다른데, 만약 병란이 일어나면 장차 어찌할 것인가?” 하니, 김성일이 이르기를, “난들 어찌 왜놈들이 끝내 움직이지 않을 것이라고 기필할 수 있겠는가마는, 황윤길의 말이 너무 심하여 중외(中外)가 놀라고 있으므로, 이를 풀어준 것일 뿐이다.” 하였다.
서애 유성룡의 《징비록(懲毖錄)》에 나온다.

○ 선묘(宣廟) 갑오년(1594, 선조 27) 2월 6일의 조강(朝講)에서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 김응남(金應南)이 나아가 아뢰기를,
“김성일이 영남에서 온 마음을 다한 일에 대해서는 마땅히 추증하여야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것은 그렇다. 다만 김성일은 평수길(平秀吉)에게 속아 그를 두려워할 것이 없다고 하였다. 그런데 황윤길(黃允吉)은 두려워할 만하다고 하였으니, 이 사람이 도리어 식견이 있는 듯하다.”
하자, 이항복(李恒福)이 아뢰기를,
“당시에 신이 승지로 있으면서 김성일을 만나 일본의 일에 대해 물어 보니, 김성일은 도리어 깊이 걱정하면서도 단지 ‘남방(南方)은 방어하는 데 따른 여러 가지 일이 몹시 번거로워 민심이 소요해서 왜적이 이르기도 전에 먼저 무너지게 생겼다. 그러므로 그렇게 말하여서 인심을 진정시킨 것일 뿐이다.’ 하였습니다.”
하였다.
《당후일기(堂後日記)》에 나온다.

○ 학문에 연원이 있는 것은 능히 스승을 얻은 것이고, 행실이 가정에서 드러난 것은 어버이의 뜻을 어기지 않은 것이다. 절의(節義)가 세상을 진동시킨 것은 뛰어난 기운을 타고난 것이며, 온 정성을 다하다가 나라를 위해 죽은 것은 천성에서 나온 것이다. 문장을 짓는 일은 여사(餘事)로 하였으나 한유(韓愈)나 육지(陸贄)로부터 나왔다. 그러니 아름다운 이름이 썩지 않아 산악과 더불어 나란히 남아 있을 것이다.
송암(松巖) 이노(李魯)의 《문수지(文殊志)》에 나온다.

○ 만력(萬曆) 신사년(1581, 선조 14) 봄에 공(公 최현(崔晛)을 가리킴)이 종질(從姪)인 나 최산립(崔山立)에게 이르기를, “이 지방에 살면서 이 지방의 어진 대부(大夫)를 섬기는 것이 예이다. 학봉 선생은 오늘날의 어진 대부인데, 도(道)는 같으면서도 만나 보지 못하였으니 부끄럽다.” 하였는데, 백공 현룡(白公見龍)이 마침 그 자리에 있다가 말하기를,
“그대는 김성일을 만나 보고자 하는가. 그 사람은 나의 동문 벗이다. 현재 화산(花山)의 임하현(臨河縣)에서 여묘살이를 하고 있는데, 책을 싸 짊어지고 가서 공부하려는 선비들이 있어도 모두 거절하고 있다.”
하자, 공이 말하기를,
“어찌하면 만나 볼 수 있겠습니까?”
하니, 백공이 말하기를,
“나의 뒤만 따라오라.”
하였다. 이에 공이 백공과 함께 임하현에 이르러 여묘살이하고 있는 곳으로 찾아가 절한 다음, 옷자락을 펼치고 앞으로 나아가 말하기를,
“아무것도 모르는 소생이 의귀(依歸)할 데가 없어서 선생을 찾아왔습니다. 가르침을 내려주시기 바랍니다.”
하니, 선생이 이르기를,
“남쪽에는 어진 선비가 적지 않을 것이다. 그대는 참으로 성실하니 스승이 없을 것을 걱정할 것이 없다. 현재 여묘살이를 하고 있는 중이니, 강학하고 토론할 때가 아니다.”
하였다. 이에 공이 말하기를,
“말씀이 엄하여 감히 다시 청할 수가 없습니다. 바라건대 별재(別齋)에 머물면서 자제들과 함께 배웠으면 합니다.”
하니, 선생이 이르기를,
“어리석은 아이들이라 도움 되는 벗이 되지 못할 것이고, 재사(齋舍)가 비좁고 누추해서 먼 데서 온 사람을 머물러 있게 하기가 곤란하다. 그러니 어쩌겠는가.”
하였다. 그러자 선생의 백씨(伯氏)인 약봉 선생(藥峯先生)이 말하기를, “이 사람이 비록 어리기는 하나 이와 같은 마음으로 찾아왔으니, 우선은 머물러 있게 해서 그의 뜻을 들어주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이에 드디어 재사에 거처하면서 자제들과 함께 아침저녁으로 몇 달 동안을 곁에서 모시면서 평소에 듣지 못하였던 학설을 더욱 듣게 되었다. 이에 선생의 학문이 몸소 실천하여 사욕을 이겨내고 투철하게 탐구해서 정미한 데로 깊이 들어갔다는 것을 알았다. 선생께서는 다른 사람에 대해 물을 때에는 그 사람의 재주를 묻지 않고 행실을 물었으며, 다른 사람을 권면함에 있어서는 꾸밈이 아닌 실제를 우선으로 하게 하였다. 일찍이 공에게 이르기를,
“자질이 이미 아름답고 앞길이 또한 머니, 그대는 힘쓰라.”
하니, 공이 대답하기를,
“자질이 둔하고 재주가 부족하니, 아마도 썩은 나무와 같아 아로새기기가 어려울까 염려스럽습니다.”
하였다. 그러자 선생이 이르기를,
“사람은 오직 뜻을 세우는 데 성실하지 못한 것을 걱정해야지, 재주가 혹 부족한 것은 걱정할 바가 아니다. 재주가 있더라도 소인이 되는 경우가 있으며, 재주가 없더라도 군자가 되기에는 방해되지 않는 법이다. 이는 단지 학문을 함에 있어서 자신을 위한 학문을 하느냐, 남에게 보이기 위한 학문을 하느냐에 달려 있을 뿐이다.”
하였으며, 또 이르기를,
“자신을 속이지 말라는 ‘무자기(毋自欺)’ 세 글자는 모름지기 종신토록 명심해야 하는 것이다. 선을 행하고 악을 제거함에 있어서 한번이라도 성실하게 하지 않으면, 이는 모두가 자신을 속이는 것이다.”
하였다. 공이 또 묻기를,
“선과 악을 어떻게 하면 실제로 보아 알 수가 있습니까?”
하니, 선생이 이르기를,
“의(義)와 이(利), 공(公)과 사(私)의 구분은 엄하게 하지 않아서는 안 된다. 털끝만큼의 미묘한 차이가 끝에 가서는 천 리나 멀어지게 되니, 학문을 해서 밝히는 데 달려 있을 뿐이다.”
하였다. 공이 또 묻기를,
“학문을 함에 있어서는 어떤 것을 먼저 해야 합니까?”
하니, 선생이 이르기를,
“참 잘 물었다. 학문은 장구(章句)나 문사(文詞)의 사이에 있는 것이 아니라 단지 일용(日用) 사물(事物)의 위에서 구하는 것이니, 이것이 이른바 사물에서 배운다고 하는 것이다. 그 근본은 충신(忠信)을 위주로 하고 효제(孝悌)를 우선으로 하는 데 있으며, 그 요체는 단지 방심(放心)을 수습하는 데 있다. 쇄소응대(灑掃應對)로부터 제가(齊家), 치국(治國), 평천하(平天下)에 이르기까지 그 절목의 차례와 공부의 선후가 손바닥을 보듯이 아주 쉬우니, 순서를 따라서 점차적으로 나아가고 깊이 완미하여 실제로 체득하는 데 달려 있을 뿐이다.”
하였다.
인재(訒齋) 최현(崔晛)의 연보(年譜)에 나온다.

○ 원근에서 배움을 청하러 온 사람들이 집안에 그득하였는데, 종일토록 강마하면서도 끝까지 싫어하는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그러면서 의리를 분석하거나 혹 선현들의 덕행을 예로 들면서, 효제(孝悌)와 경신(敬信)의 도리로써 권면하여 사람들을 반드시 허물이 없는 자리에 세우려고 하였다. 그러므로 공을 따르면서 학업을 배우는 자들은 비록 자질이 낮더라도 능히 수립할 줄 알았다.
이하는 습유(拾遺)이다.

○ 남에게 과실이 있을 경우에는 비록 면전에서 숨김없이 곧바로 지적하였으나, 지성껏 이끌어 주어 허물을 고치게 하고자 하였으므로, 감히 깊이 원망하지는 않았다.
○ 선생을 아는 어떤 자가 선생에게 조용히 말하기를,
“근래에는 상하의 사람들이 서로 덮어 주면서 직언(直言)을 하는 경우가 드문데, 공은 홀로 시변(時變)을 돌아보지 않고 얼굴을 꼿꼿이 세우고서 직언하니, 이 어찌 사류(士類)들의 경사가 아니겠는가.”
하니, 선생이 이르기를,
“아, 이것이 무슨 말인가. 옛날에 임금을 섬기는 사람들은 임금을 인도하여 도(道)로 나아가게 하기를 기필하였는데, 오늘날에 임금을 섬기는 사람들은 알면서도 말하지 않고, 말하면서도 다 말하지 않는다. 나 역시도 이런 잘못이 있음을 면치 못하여 아래로는 배운 바를 저버리고, 위로는 우리 임금을 저버렸다. 그런데 그대는 어찌하여 옛날의 도로써 서로 다 말해 주지 않는가.”
하였다.
○ 일찍이 나주 목사(羅州牧使)로 있다가 체차되어서 돌아올 때 향사당(鄕射堂)에 들어가 묵었는데, 마침 좌수(座首)가 없었다. 선생께서 침소(寢所)를 별감(別監)의 방에다 정하도록 명하니, 여러 사람들이 청하기를, “향당에서는 좌수 방이 높은 방인데, 높은 방을 버려 두고 그 다음 방을 차지하는 것은 온당치 않습니다.” 하였다. 그러자 선생이 이르기를, “그렇지 않다. 향당은 부로(父老)들이 모이는 곳이다. 이미 주인이 없으니 편안한 마음으로 높은 자리에 처하는 것은 옳지 않다.” 하였다. 자제들이 장차 잠자리를 모시려고 하자, 선생이 돌아보면서 이르기를, “너희들은 향록(鄕錄)에 들어 있지 않으니, 이곳에서 자는 것은 온당치 않다. 다른 곳에 나가서 자고 내일 아침에 들어오라.” 하였다.
○ 선생께서 일찍이 문생(門生)들을 가르치다가 《송사(宋史)》의 부필(富弼)이 거란(契丹)에 사신으로 간 부분의 전기(傳記)에 이르자, 세 번이나 낭송하고는 무릎을 치면서 탄식하기를, “너희들은 알겠느냐? 부공(富公)이 홀로 수레를 타고서 위험하기 짝이 없는 오랑캐 궁정에 들어갔는데도 굴하지 않고 의연함을 지켜 나라의 체모를 중하게 하였다. 대장부가 변란을 만나서는 마땅히 이와 같이 하여야 한다.” 하였다.
○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선생의 처자식들이 서울을 떠나 떠돌다가 이천(利川) 경내에 도착하였는데, 어떤 사람이 와서 보호해 주면서 몹시 정성스럽게 돌봐 주었다. 그 까닭을 물어 보니, 그 사람이 말하기를, “나는 이 고을 사람입니다. 전날에 영공(令公)께서 도망쳐 온 백성들을 추쇄(推刷)할 적에 내가 좌수로 있으면서 죄를 범하여 형벌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영공께서는 일을 엄명(嚴明)하게 조처하여 한 사람도 억울하게 죄를 받은 사람이 없었으므로, 이 지방 백성들이 지금까지도 잊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내가 비록 죄를 받기는 하였지만, 감히 사사로이 원망하는 마음을 품을 수가 있겠습니까.” 하였다. 그리고 원근 사람들이 쌀을 내어서 식량을 대주거나 혹 말을 내어서 호송해 주면서 말하기를, “학봉 영공(鶴峯令公)께서는 바로 우리 동방의 지주(砥柱)이십니다.” 하였다.
○ 정랑(正郞) 박성(朴惺)이 일찍이 조용히 묻기를,
“선생께서는 마음을 움직이지 않았다고 할 만합니까?”
하니, 답하기를,
“어찌 쉽사리 말할 수 있겠는가. 내 평생에 마음을 움직이지 않은 것은 단지 세 번 뿐인데, 일본에 사명을 받들고 가다가 갑자기 풍랑을 만나 배가 뒤집히려고 할 때가 첫 번째이고, 평수길이 사납고 드세어서 위엄을 크게 보이면서 으르고 협박할 때가 두 번째이며, 난리가 일어난 처음에 잡혀 올라가면서 임금의 노여움이 한창 떨쳐 일을 장차 헤아릴 수 없을 때가 세 번째이다.”
하였다. 그러나 선생께서 변란을 만나거나 위태로움을 당해 죽음이 눈앞에 있는데도 의연하게 대처하면서 마음을 움직이지 않은 것은 이 세 가지에만 그치지는 않는다.
이상은 《인재록(訒齋錄)》에 나온다.

○ 신묘년(1591, 선조 24) 겨울에 공이 홍문관 부제학으로 있으면서 차자를 올려 시사(時事)에 대해 논하였는데, 말이 몹시 절실하였으며, 또 왕자(王子)들이 제궁(諸宮)에서 함부로 형신을 하고 이익을 독차지한 일 등을 곧바로 지적하였다. 이에 상께서 두려워하면서 허물을 인책하였고, 조야(朝野) 사람들이 모두들 살갗에 소름이 돋았다.
○ 공이 초유사(招諭使)에 제수되어서 남쪽으로 돌아갈 때 김수(金睟)가 근왕(勤王)한다는 핑계를 대고 거창(居昌)에서 운봉(雲峯)을 향해 가다가 공과 갑작스럽게 맞닥뜨리게 되자, 깜짝 놀라면서 무어라 핑계 댈 말이 없었다. 이에 공이 의리로써 힐책하기를, “강역을 지키던 신하가 마땅히 강역을 지키다가 죽어야지, 어찌 강역을 버려 두고 여기까지 왔단 말입니까. 온 도를 다 빼앗기게 되었는데도 구원하지 못하고서 단기(單騎)로 멀리 도망치니, 일을 해 나갈 수가 있겠습니까. 바라건대 영공께서는 속히 돌아가십시오.” 하였다. 이에 김수가 부득이하여 억지로 돌아갔다. 그러나 도내(道內)의 사민(士民)들이 모두 공을 우러르며 메아리처럼 호응하는 것을 보고는 시기하면서 불만스러워하였다. 이에 공이 성심과 믿음으로 대하니, 조금은 의심하면서 멀리하던 마음이 사그라들었다.
○ 하동 현감(河東縣監)의 문보(文報)가 올라왔는데, 창고의 곡식을 훔친 토적(土賊) 15명을 체포하여 참수하였다는 내용이었다. 이에 공이 공문서를 내리기를, “토민(土民)들이 난리를 틈타 도적이 되어 관청 창고의 곡식을 훔치기까지 하였으니, 그 죄는 참으로 참수하는 것이 합당하다. 그러나 만에 하나라도 잘못하면 죄 없는 사람까지 참수할 수가 있으니, 신중하게 하지 않아서는 안 된다.” 하였다. 그 뒤에 들으니, 하동 현감이 촌백성들을 꾀어 어둠을 틈타서 창고를 열고는 마음대로 가져가게 한 다음, 종들을 시켜 15명을 사살하고 거짓으로 보고한 것이었는데, 이는 대개 공(功)을 노려서 한 짓이었다. 이에 공이 그를 주살(誅殺)하려고 하다가 사람들의 말이 혹 지나친 것은 아닐까 하여 곤장 50대만 치고 탐학하다고 위에 아뢰어 파직시켰다.
○ 도사(都事)가 거창(居昌)에서 와서 말하기를,
“다른 도의 감사들은 동궁(東宮)에 계문(啓聞)하면서 올리는 진상(進上)을 모두 나누어서 봉진(封進)하는데, 유독 이 도에서만 하지 않고 있으니, 안 되는 것 아닙니까?”
하니, 공이 이르기를,
“두 임금이 있는 것처럼 해서는 안 된다. 만약 뒷날에 임금이 되실 분이라고 하여 미리 임금을 섬기는 예로 섬긴다면, 이는 두 임금을 섬기는 마음을 갖는 것이다.”
하였다. 그러자 도사가 말하기를,
“이런 때는 평상시와는 달라 동궁께서 현재 객지에 떠돌고 계시므로 아침저녁으로 바치는 공선(供膳) 역시 반드시 부족할 것입니다. 변경의 보고를 얻어들을 길이 없으니, 비록 권도(權道)로 하더라도 안 될 것은 없습니다.”
하니, 공이 이르기를,
“군신간의 의리는 하늘과 땅이 쪼개지더라도 바뀔 수가 없는 것으로, 권도를 쓸 곳이 아니다.”
하였다. 도사가 또 말하기를,
“반드시 계문에 따른 진상물이라고 말할 필요 없이, 철에 따라 나는 음식물을 왜적의 기별을 올리면서 편의에 따라 부쳐 보내면 무방할 것입니다.”
하니, 공이 정색하면서 이르기를,
“그대는 나에게 진상 계본(進上啓本)이라고 말하지 말고 서간(書簡)을 부쳐 보내라는 것인가? 그대는 그런 말을 하지 말라.”
하였다.
이상은 《용사록(龍蛇錄)》에 나온다.

○ 공이 일찍이 문충공(文忠公)께 《상서(尙書)》를 배웠는데, 어느 날 수업을 마치고 물러나서 시립(侍立)해 있었다. 그러자 문충공께서 이르기를,
“앉거라. 내가 너에게 황극(皇極), 건극(建極), 민이(民彛), 오복(五福)에 대해서 말해 주겠다. 상제(上帝)께서 하민(下民)들에게 충(衷)을 내려 주시니, 충은 곧 극(極)이다. 하늘이 이 백성을 낳아서 선지자(先知者)에게 후지자(後知者)를 깨우치게 하고, 선각자(先覺者)는 후각자(後覺者)를 깨우치게 하였다. 옛날의 성인은 이 백성들의 선각자이니, 곧 극을 세운 것이다. 임금과 스승이 되어 오륜(五倫)을 시행해서 서민(庶民)에게 주었으니, 오륜은 바로 민이(民彛)인 것이다. 서민들은 어버이를 사랑하고 어른을 공경할 줄 알아서 이 마음을 보존하였는바, 이는 곧 극을 보존한 것이다. 그러니 의당 수(壽), 부(富), 강녕(康寧), 유호덕(攸好德), 고종명(考終命)을 얻게 될 것이다. 이것을 일러 오복(五福)이라 한다. 몸은 혹 수(壽)하지 못하더라도 이 마음은 실제 수하고, 집은 혹 부(富)하지 못하더라도 이 마음은 실제 부하고, 비록 환난이 있더라도 이 마음은 강녕(康寧)하고, 낭패스럽고 황급한 사이에도 도를 떠나지 않으니 이것이 유호덕(攸好德)이 되고, 혹은 나라를 위하여 전쟁에 죽기도 하고 혹은 자신의 몸을 희생하여 인(仁)을 이루는 것도 고종명(考終命)인 것이다. 오복을 논하면서는 마땅히 사람의 한마음을 논해야 하니, 이 마음이 바르면 복되지 않음이 없고, 이 마음이 사특하면 화되지 않음이 없게 된다. 너는 그것을 잘 알라.”
하니, 공이 두 번 절하고서 이 말을 받아들여 종신토록 명심하여 행하였다고 한다.
세마공(洗馬公) 김집(金潗)의 가장(家狀)에 나온다.

○ 퇴계 선생께서 동남쪽 지방에서 도학(道學)을 주창한 뒤 그의 문하에서 노니는 자들은 모두 한때의 명현(名賢)들이었는바, 예지(叡智)가 특출난 사람들이 각자 절차탁마하여, 덕성을 이루고 재주에 통달한 자들을 손가락으로 일일이 꼽을 수 없을 정도였다. 그런데도 퇴계 노선생께서는 손수 요순(堯舜) 이래 우왕(禹王), 탕왕(湯王), 문왕(文王), 무왕(武王), 주공(周公), 공자(孔子), 안자(顔子), 증자(曾子), 자사(子思), 맹자(孟子), 주자(周子), 정자(程子), 주자(朱子)가 서로 전한 심법(心法)의 요언(要言)과 지결(旨訣)을 써서 학봉(鶴峯) 김 문충공(金文忠公)에게 주었다. 그러니 퇴계 선생의 은미한 뜻이 어디에 있었는지를 잘 알 수가 있다.
이현일(李玄逸)의 《갈암집(葛庵集)》에 나온다.


 

[주D-001] : 《학봉집》 제1권에는 ‘취(醉)’로 되어 있다.
[주D-002]육아(蓼莪)의 시 : 《시경(詩經)》 소아(小雅) 육아편(蓼莪篇)을 이르는 말로, 그 시에, “길고 큰 아름다운 쑥이라 여겼더니, 아름다운 쑥이 아니라 제비쑥이로다.[蓼蓼者莪 匪莪伊蔚]” 하였는데, 이 시는 돌아가신 부모를 그리워하는 시이다.
[주D-003]거묵(莒墨) : 거(莒)와 즉묵(卽墨)으로, 나라를 회복시키는 근거지가 된 곳을 가리킨다. 제(齊) 나라 민왕(湣王) 때 연(燕) 나라 군사에게 패해 모든 성이 함락되고 거와 즉묵 두 성만이 남아 있었는데, 전단(田單)이 이 두 성을 근거로 하여 제 나라 70여 성을 모두 회복하였다. 《史記 卷82 田單列傳》
[주D-004]갑오년 : 동강(東岡) 김우옹(金宇顒)의 《경연일기(經筵日記)》를 살펴보면, ‘갑오(甲午)’는 마땅히 ‘을미(乙未)’가 되어야 한다고 하였다.

학봉집 부록 제1권
 연보(年譜)
만력 21년(1593, 선조 26) 계사. 선생 56세


○ 정월 초하루에 본 고을에서 올리는 세찬(歲饌)을 올리지 말게 하였다. - 그 고을 수령이 휘하 및 여러 사람들과 더불어 뵙자 선생은 추연한 모습으로 눈물을 흘리면서 이르기를, “해는 바뀌었으나 왜적들은 아직도 나라 안에 가득하고 평안도는 멀기만 하여 소식을 전할 수 없으니, 아직 죽지 않은 외로운 신하가 무슨 얼굴로 하늘의 해를 보겠는가.” 하였다. 그리고는 수령에게 세찬을 올리지 말라고 경계시켰다.
○ 2월에 거창으로 나아가 머물면서 병사 김면(金沔)과 만났다. - 이때 김면이 김시민을 대신하여 새로 병사가 되었으므로 선생이 그와 몇 잔의 술을 마시고는 손을 잡고 회포를 풀었는데, 눈물을 흘리기까지 하였으며, 동이 틀 무렵에야 자리를 파하였다. 그를 모시고 있는 아전을 불러들여 수죄(數罪)하기를, “의병장으로 있을 때는 혹 지휘에 순응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병사의 사체에 있어서는 멋대로 해서는 안 된다.” 하였다.
○ 이노(李魯)를 보내어 서로(西路)에 가서 중국 군사가 오는 것을 기다리게 하였다. 이어 체부(體府)에 첩문(牒文)을 보냈다. - 처음에 여러 차례 편비(褊裨)를 보내어 중국 군사의 소식을 알아보게 하였으나, 모두 길가는 사람의 말만 듣고 중간에서 돌아왔다. 이에 특별히 이노를 보내어 서로에 가서 기다리게 하면서 이르기를, “군사들은 지치고 군량은 다 떨어졌는데, 중국 군사가 또 나왔으며, 농사철에 씨뿌릴 종자도 급하다. 온 나라의 존망이 이번 걸음에 달려 있다.” 하였다. 그리고는 편지와 첩문을 써서 체부로 보냈는데, 이노가 ‘지금까지는 중국 군사가 오지 않고 있다.’고 치보(馳報)하였으므로, 곧바로 여러 고을로 하여금 우선은 중국 군사를 지대(支待)하는 일을 늦추게 하여 백성들이 동요하지 않게 하였다.
○ 3월 4일에 또 군교(軍校)를 보내서 전공(戰功)을 갚고 곡식을 옮겨오는 데 대한 사의(事宜)를 계청하였다. - 논상(論賞)하는 것이 미더웁지 못하다는 것과 흉년이 들어 백성들이 유망(流亡)하는 상황에 대해 극력 진달하면서 속히 공명고신첩(空名告身帖)과 허통첩(許通帖), 면천첩(免賤帖) 등을 내려보내어 상전(賞典)을 시행할 것을 청하였다. 그리고는 이어 호남에 있는 곡식 수만 섬을 일찌감치 옮겨와 굶주린 사람들을 진휼하고 군사들을 먹이고 제때에 파종함으로써 호남의 보장(保障)이 되는 지역을 보전해 나라를 회복하는 기반을 마련하기를 청하였다.
○ 유지(有旨)를 내려 특별히 호남에 있는 곡식 2만 섬을 제급(題給)하게 하였다. - 이노가 직산(稷山)에 이르러서 문충공(文忠公)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이 체부(體府)의 정승으로서 임진(臨津)에 머무르고 있다는 소리를 들었으나, 길이 막혀서 가지 못하고는 다른 사람 편을 통해 선생의 글을 보냈는데, 유 문충공이 선생이 보낸 글과 첩문을 보고는 즉시 계사(啓辭)를 작성해서 계청하였다. 그러자 상께서 가엾게 여겨 특별히 전라도 관찰사에게 명해 2만 섬을 제급하게 하였다. 그러자 선생은 종사관(從事官)을 나누어 보내 수로와 육로로 아울러 운반해 온 다음 여러 고을에 나누어 주어 제때에 씨를 뿌리게 하였다.
○ 12일에 우도 병사 김면이 직무에 임하다가 죽었음을 치계(馳啓)하였다. - 김면은 병사에 오른 지 얼마 안 되어 병에 걸려 일어나지 못하였다. 그러자 선생은 놀라고 슬퍼하면서 이르기를, “장성(長城)이 무너졌으니 국사가 글러졌다.” 하고는, 곧바로 치계하여 그가 의병을 일으켜 왜적과는 같이 살 뜻이 없음을 맹세한 사실에 대해 극력 진달하였다. 김면은 의병장이 된 뒤에 비록 선생의 지휘를 받기는 하였으나, 선생의 명령에 대해 때로는 버티고 굽히지 않은 일이 많았다. 이에 선생은 일찍이 그의 편협하고 옹졸함을 병통으로 여겨 자못 싫어하는 말과 기색을 드러내 보였으므로, 사람들은 혹 두 사람 사이가 좋지 않은 줄로 의심하였다. 그러다가 이때에 이르러 그의 죽음을 애도하면서 포상을 청하는 장계를 올리기를 이와 같이 하였으므로, 사람들이 또다시 선생의 마음씀이 공정함에 대해 탄복하였다.
○ 4월에 진주로 돌아와 머물렀다. - 가는 곳마다 굶어 죽은 시체가 길에 널려 있고 봉두난발을 한 사람들이 울기도 하고 빌기도 하였다. 이에 선생은 목사 서예원(徐禮元)에게 진휼하는 일을 전담하게 하고, 판관 성수경(成守慶)에게는 군기(軍器)를 전담하여 관장하게 하였는데, 죽을 쑤고 약을 달이면서 몸소 구호하였으며, 성을 돌아보고 군사를 검열하면서 반드시 직접 검칙하였다. 이때 역질(疫疾)이 곳곳에 만연하였으며 굶주린 백성들이 모두 성 안으로 몰려들어 울부짖고 신음하는 소리가 차마 들을 수 없을 정도로 참혹하였다. 이에 선생은 가여운 마음에 눈물을 흘렸으며, 밥을 먹다가도 숟가락을 놓곤 하였다. 좌우에 있던 사람들이 말하기를, “식사를 하지 않아 병이 나면 국사는 어찌합니까?” 하자, 선생은 이르기를, “목구멍에 넘어가지 않는다.” 하였다. 누군가가 집에서 일을 처리하여 역질을 피할 것을 청하였더니, 선생이 사양하면서 이르기를, “다른 사람을 대신 시켜서 일을 하면 으레 뜻에 맞지 않는다. 나 자신의 몸을 아끼지 않는 것은 아니나, 죽고 사는 것은 하늘에 달려 있다. 그러니 어찌 피하겠는가.” 하였다.
○ 19일에 병에 걸렸다. - 선생은 명을 받은 이래로 밤낮으로 근심하고 노고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안으로 몸이 상하고 밖으로 감기가 들었던 차에 역질에 걸려 날로 위독하여졌는데, 늙은 의원이 와서 진찰하고는, “이 병은 도리가 없습니다.” 하였다. 그때 박성(朴惺)과 이노(李魯) 등이 옆에 있다가 약을 드실 것을 청하니, 선생은 “내 병은 약을 먹고 나을 병이 아니다. 그대들은 그만두라.” 하였다. 아들 역(湙)도 역질에 걸려 옆 방에서 앓고 있었는데, 한번도 병에 대해 물어보지 않았다. 그리고는 오직 박성과 이노 두 사람에게 이르기를, “중국 군사가 오면 어떻게 먹일 것인가. 그대들은 그 일에 대해 힘쓰라.” 하였는바, 비록 혼미하여 정신이 없는 상태에서도 가냘픈 소리로 헛소리같이 하는 말이 모두 나라를 걱정하는 것뿐이었다. 측실 부인이 근처에 와 살면서 여종을 보내어 문병을 하면, 손을 저어 내보내면서 들어오지도 못하게 하였다. ○ 이때 오운(吳澐)과 조종도(趙宗道)도 와서 문병하였는데, 오운이 말하기를, “중국 군사가 남쪽으로 몰아쳐 내려와 경성(京城)을 이미 수복하였으니, 일로(一路)에 머물러 있는 왜적들이 차례차례 도망쳐 물러갈 것입니다.” 하였다. 그러자 선생은 눈을 부릅뜨면서 이르기를, “뜻을 이루지 못하고 몸이 먼저 가니, 천명인 것을 어찌하겠나. 그리고 왜적이 도망쳐 물러가면 나라야 회복하겠지만, 조정의 붕당(朋黨)은 누가 능히 깨뜨릴 것인가.” 하였다.
○ 29일에 진주의 공관(公館)에서 졸(卒)하였다. - 박성, 이노, 조종도 및 누이의 아들 유복립(柳復立)이 처음부터 항상 군중(軍中)에 있으면서 기거를 같이 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상사(喪事)를 주관하였다. 성 안팎에서 살려 주기를 바라고 있던 사민(士民)들이 부축하고 엎어지면서 나와 가슴을 치고 발을 구르며 소리조차 내지 못하고 흐느껴 울었다. 그리고는 사방으로 흩어져 떠났는데, 마치 갈 곳조차 모르는 사람처럼 멍해져서는 말하기를, “하늘이 우리의 부모를 빼앗아 갔으니, 우리 목숨도 다했다.” 하였다. 부음이 나오자 원근 사람들이 모두 마치 골육의 초상이라도 당한 것처럼 놀라고 애통해하였으며, 길을 가는 나그네들까지도 모두 침통한 얼굴로 서로 조상(弔喪)하였다. ○ 유복립은 선생의 누이인 절부(節婦) 유씨 부인(柳氏夫人)의 소생인데, 차례로는 막내 아들로, 바로 선생이 어루만져서 기른 두 고아 중의 한 사람이다. 백조부(伯祖父)인 소재(小宰) 유윤덕(柳潤德)의 집안으로 양자를 가 경기(京畿)에 살았는데, 어려서부터 기운과 재간이 있었다. 난이 일어나자 선생을 따라 남하하여 막부의 제현(諸賢)들과 더불어 함께 일을 하였으며, 선생이 돌아간 후에도 오히려 성을 굳게 지키고 있다가 마침내 목숨을 바쳤다. 숙종조(肅宗朝)에 경기 감사가 장계를 올려 아룀으로써 이조 참판을 추증하도록 명하였다. 그가 끝까지 목숨을 바치고 떠나지 않은 것도 선생이 평소에 면려한 뜻을 저버리지 않은 것이라고 하겠다. ○ 서애(西厓) 유 선생(柳先生)은 본래부터 신중하여 남을 칭찬하는 일이 드물었다. 그런데도 매양 선생을 공경하면서 중히 여겨, 일찍이 사람들에게 이르기를, “사순(士純)은 내가 따를 수 없다.” 하였다. 선생이 노년 시절에 지은 시문(詩文)을 보고는 탄식하기를, “덕이 있는 자는 반드시 덕스러운 말이 있다는 말을 믿을 만하다.” 하고는, 드디어 문형(文衡)의 망(望)에 천거하였는데, 통정대부(通政大夫)로서 문형에 의망된 사람은 이제까지 몇 사람 안 된다. 얼마 뒤에 선생이 돌아가시자 깊이 슬퍼하면서 이르기를, “평생에 지우(知友)로는 오직 사순 한 사람뿐이었는데, 불행하게도 이제 죽고 말았구나.” 하였으며, 임종할 때에도 여전히 칭찬해 마지않았다고 한다. ○ 대간(大諫) 최현(崔晛)이 지은 언행록(言行錄)에 이르기를, “영남이 오랑캐 땅이 되지 않은 것이 비록 의사(義士)들이 의병을 일으킨 공이라고는 하지만, 의병들이 끝내 공을 이룰 수 있었던 것은 실로 선생이 조처를 적절하게 한 데에서 말미암은 것이다. 그리고 진주성을 견고하게 지켜 함락되지 않은 것이 비록 김시민이 힘껏 싸운 공이라고는 하지만, 역시 선생이 적절하게 지휘한 데에서 말미암은 것이다. 선생께서는 살아서는 온 도 사람들로 하여금 장성(長城)처럼 의지하게 하였고, 죽어서는 대소 사민들로 하여금 눈물을 흘리면서 서로 조상하게 하였다.” 하였다. 정언(正言) 이노(李魯)가 《용사사적(龍蛇事蹟)》 뒤에 제(題)하기를, “학문에 연원(淵源)이 있는 것은 능히 스승을 얻은 것이고, 절의(節義)가 세상을 흔든 것은 뛰어난 기운을 타고난 것이며, 온 정성을 다하다가 나라를 위해 죽은 것은 천성에서 나온 것이다. 문장(文章)을 짓는 일은 여사로 하였으나 한유(韓愈)나 두보(杜甫)로부터 나왔으며, 아름다운 이름이 썩지 않아 산악과 더불어 나란히 남아 있을 것이다. 그러니 후대에 논하는 자들이 모두 실제의 기록이라고 할 것이다.” 하였다. 【보(補)】 《국조보감(國朝寶鑑)》에, “경상좌도 순찰사(慶尙左道巡察使) 김성일이 졸하였다. 김성일은 죽기로써 맹세하고 왜적을 쳐서 평소에도 군복을 벗지 않았으며, 지성으로 사람들을 깨우쳐서 관군과 의병을 잘 조화시켰다. 그러니 나라의 한쪽 구석을 보전할 수 있었던 것은 모두 그가 통솔한 공이다.”라고 하였다.
○ 염습(殮襲)과 입관(入棺)을 마치고 지리산(智異山)에 임시로 묻었다. - 상여가 가다가 어떤 마을의 나무 아래에서 멈췄는데, 후세 사람들이 그 마을 이름을 ‘정구(停柩)’라 하고 그 나무를 ‘대수(大樹)’라고 하여 영원히 사모하는 뜻을 붙였다. 임시로 묻은 뒤에는 모든 사람들이 서로 더불어 목 놓아 울고 돌아왔다. 선생이 돌아가신 뒤 두 달 만에 진주성이 함락당하였고, 조금 완전하던 낙동강 오른쪽 지역도 모두 도륙당하여 한 도의 보장(保障)이 되던 지역이 모두 왜적들의 소굴이 되자, 논하는 자들이 말하기를, “만약 선생이 조금만 늦게 죽었더라면 어찌 이 지경까지 이르렀겠는가.” 하였다. ○ 한강(寒岡) 정구(鄭逑)가 찬한 행장(行狀)의 후론(後論)에 이르기를, “공은 자질이 빼어나서 영특하였고, 기품은 강하고 방정하였으며, 기질이 곧으면서 꿋꿋하였고, 재주는 민첩하면서 호탕하였다. 어려서부터 격앙되어 지취(志趣)가 범상하지 않았으며, 장성해서는 더욱더 강개하여 좋은 말을 들으면 힘써 행하였다. 몸가짐은 반드시 효제(孝悌)를 근본으로 삼았고, 행함에 있어서는 반드시 충서(忠恕)를 위주로 하였다. 스승의 문하에 들어가게 되어서는 마음으로 기뻐하고 성심으로 감복하였으며, 학문에 본말(本末)이 있음을 알아서 취하고 버리는 것이 이미 정해져 있었다. 읽지 않은 책이 없었으나 퇴계 이 선생이 찬한 《주자서절요(朱子書節要)》를 가장 애독하였는데, 마음속으로 깊이 인식하고 가슴속에 새겨 두어 몸가짐의 표적으로 삼았으며, 마음을 가라앉혀 음미하면서 침식까지 잊어버릴 정도였다. 첫닭이 울면 일어나서 반드시 한두 편을 뽑아 왼 뒤에야 등불을 밝히고 세수하고 머리를 빗었다. 그리고는 종일토록 단정하게 앉아서 정밀하게 생각하고 명확하게 분변하며 조금도 방과(放過)하지 않았다. 《근사록(近思錄)》이나 《심경부주(心經附註)》 같은 책도 모두 애독하면서 손에서 놓지 않았다. 제생(諸生)들 가운데 배움을 청하는 자가 있으면 그 뜻을 자세히 분석하여 깨우쳐 주되, 온 마음을 쏟아 간절하고 지극하게 가르쳐 주었는데, 반드시 그 양단(兩端)을 다하였다. 집에 있을 때에는 조용하게 지내면서 자신을 검칙하여 일찍이 다른 사람과 차이점이 보이지 않았다. 조정에 벼슬하여 이리 얽히고 저리 얽혀 어지러운 일을 당하였을 즈음에는 정밀함과 굳셈을 발휘하여 의리로써 결단하고 회피하는 바가 없었으니, 비록 옛날에 용맹스럽기로 소문났던 맹분(孟賁)이나 하육(夏育)조차도 빼앗지 못할 정도였으나, 정성을 다해 성심으로 하는 마음이 애연히 피어났다. 말년에 이르러서는 수양을 쌓은 바가 더욱 공평하고 발라서 젊은 날의 용감하고 엄준한 태도가 없었다. 그런데도 사람들이 쳐다보면 저절로 공경하는 마음이 우러나서 감히 함부로 대하지 못하였다. 일본에 사명을 받들고 감에 미쳐서는 낌새를 살피는 바가 없었고, 조행(操行)은 평소부터 정해진 듯하였다. 그들의 흉악함과 교활함이 이루 헤아릴 수가 없어 죽고 사는 것이 한순간에 달려 있었는데도, 바름을 지켜 흔들리지 않으면서 정신과 기운을 더욱 가다듬었다. 그리하여 사리는 반드시 털끝만한 것이라도 자세히 살피고 의리는 반드시 어렵고 위태로운 상황에서도 다투어, 반드시 우리나라의 위엄이 더욱 존중되고 감히 만홀히 하지 못하게 하고자 하였다. 온 나라가 보존되느냐 망하느냐 하는 때를 당하여서는 초유(招諭)하고 정토(征討)하라는 명을 받았는데, 민심은 이미 흩어지고 일은 이미 글러져 버린 때였으므로, 한때의 중대한 명망을 짊어지고 한 방면을 전적으로 떠맡은 자라 할지라도 창졸간에 허둥지둥하여 손을 쓰지 못하고 뒤로 물러났었다. 공은 경연(經筵)의 노숙한 유신(儒臣)으로서 군진(軍陣)의 일에 대해서는 일찍이 들어본 적이 없는 데다가, 도내에는 적의 침략을 받지 않은 성한 곳이 없었고, 수하에는 한 자 한 치의 병기도 없었다. 그런데도 오직 피를 토하는 정성으로 사기를 고무시켜서 한 조각 붉은 마음을 사람들의 마음에 심어 주었다. 말할 적에는 반드시 눈물을 흘리면서 말하였고, 글을 쓸 적에는 반드시 눈물을 섞어서 썼다. 조처하고 시행하는 것은 무엇이나 기의(機宜)에 알맞게 하였으며, 상벌을 내리고 지휘하는 것이 백성들의 뜻을 크게 감복시켰다. 그리하여 마침내 모두가 잔멸된 나머지를 수습하고 불타 버린 가운데에서 다시 소생시켜, 낙동강 오른쪽 일대를 보전해서 나라를 회복시킬 바탕을 만들었다. 애석하게도 장성(長星)이 지레 떨어져서 큰 훈업(勳業)을 다 이루지 못하였으나, 인륜의 기강을 부지시키고 한 지방을 버틸 수 있게 하였다. 그러니 그 공은 싸움터에서 상처를 입으면서 싸운 것과는 나란히 논할 수 없는 것이다. 공이 죽은 뒤에 조야(朝野)에서는 모두들 칭찬하고 탄복하면서 ‘난리 이후의 진실한 신하로는 마땅히 공이 첫째이다.’ 하였으며, 식자들은 ‘평소에나 전시에나 행동이 일치하여 대절(大節)에 임해서도 빼앗을 수가 없었다.’ 하였다. 이런 말들은 실로 좋아하는 사람에게 아부하여 하는 말이 아니다. 공은 외진 골짜기에 집을 짓고 노년에 벼슬을 그만두고 물러나 살 곳으로 삼으려 하였다. 그리하여 조용한 곳에서 한가로이 지내면서 학문에 뜻을 오로지하여, 위로는 선사(先師)께서 남기신 학문을 계승하고 아래로는 후생(後生)들이 공부하는 길을 열어 주려고 하였다. 그런데 시사가 어렵고 근심스러우며 군신의 의리가 중대하므로 조정에 억지로 나가면서 거취를 자유로이 하지 못하다가, 마침내 대란(大亂)을 만나 근심과 노고로 인해 목숨을 잃었다. 이에 훈업은 빛나게 나타났으나 지원(志願)을 펴지 못하였으니, 이것이 어찌 공의 남은 한이 아니겠으며, 사도(斯道)의 불행이 아니겠는가.” 하였는데, 오직 이 한 단락에서 선생의 온축(蘊蓄)을 다 말하였으므로 간추려서 덧붙인다.
○ 5월에 맏아들 집(潗)이 상을 당하였다는 말을 듣고 사잇길을 통해 남쪽으로 가 분상(奔喪)하였으며, 묘소 아래에서 여묘살이를 하였다. - 여러 차례 왜적의 칼날을 겪으면서도 끝내 침범당하지 않으니, 사람들이 말하기를, “하늘이 도와 주는 바가 있어서 그런 것이지, 인력으로 그런 것이 아니다.” 하였다.
○ 11월에 비로소 관을 받들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 비록 난리를 당한 뒤끝이었지만 지나는 각 고을마다 사민들이 모두 지성껏 슬퍼하였으며, 분주히 힘을 써 주었다.
○ 12월 경신일에 안동부 북쪽에 있는 가수천(嘉樹川)의 오향(午向) 언덕에 장사하였다. - 선영(先塋)이 있는 곳이다.


 

[주D-001]경상좌도 순찰사(慶尙左道巡察使) : 이 부분의 두주에, “경상좌도 순찰사는 마땅히 경상우도 순찰사로 되어야 한다.” 하였다.

택당선생 별집 제17권
 잡저(雜著) ○ 서후잡록(敍後雜錄)
상소하여 변방 고을의 수령을 청하였으나 회답을 받지 못하다.


10월 모일에 동당(東堂 문과(文科))의 시관(試官)으로서, 응교(應敎) 최현(崔晛)과 함께 며칠 동안 같은 청사 안에서 시간을 보내게 되었는데, 이때 서로(西路)의 무비(武備) 상황에 대해서 매우 자세히 들을 수가 있었다. 그리고는 마음속으로 생각하기를, ‘조정에 몸담은 지 5, 6개월 동안에 보완하고 수습하는 일은 하나도 한 것이 없이, 다만 본 것이라고는 조정의 정사가 한결같이 옛날대로 따르기만 하는 것뿐이요, 그저 내부에서 변고가 일어날까 기찰(譏察)을 일삼는 것이었을 따름이다. 그런데 서로(西路)를 지키는 병사들 모두가 원망하는 마음을 품고 있는 것이나 수신(守臣)이 제대로 수비 대책을 세우지 못하는 것이 예전보다도 심하니, 머지않아서 난리가 발생하리라는 것을 분명히 알 수가 있다.’ 하였다. 그리하여 상소문을 올려 이에 대해 극론(極論)하면서, 나 자신이 하나의 변방 요새를 맡아 노모(老母)와 함께 필사(必死)의 땅에 임함으로써 무부(武夫)의 선봉이 되겠다고 청하는 한편, 말미에다 상이 개혁을 행하는 것을 꺼리고 원대한 뜻을 세우는 데에 소홀한 잘못을 언급하였다. 이는 대개 나 자신이 먼저 하나의 계기를 조성해 보려는 시도였던 동시에, 이를 통해서 외직(外職)에 보임(補任)되기를 청하여 스스로 공을 세워 보려는 마음이 함께 들어 있었던 것이었다고 하겠다.
이 상소문이 나오자 사람들 대부분이 통쾌하다고 일컬었으며, 상도 너그럽게 답하면서 비국(備局)에 내려 의논해서 처리토록 하였다. 이에 대해서 완평(完平 이원익(李元翼))이, “이것이야말로 나의 생각과 합치되는 일이니, 해서(海西)의 고을 하나를 그에게 맡겨 시험해 보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을 내놓았으나, 제경(諸卿)은 모두 “이모(李某)는 현실을 전혀 알지 못하고서 허튼소리만 하고 있을 뿐이니, 변방의 임무를 맡기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 하고는 마침내 회계(回啓)하지 않았는데, 상도 이에 대해서 더 이상 물어보지 않았다.
이를 통해서도 위아래가 모두 나를 얼마나 경시(輕視)하였는지 알 수 있다고 하겠는데, 이런 와중에서도 이귀(李貴)가 “이 상소문을 보니 충성심과 지기(志氣) 모두 높이 평가할 만하다. 그러니 어떻게 그냥 내버려둘 수가 있겠는가.” 하고는 마침내 위에 아뢰어 비국(備局)의 낭관으로 차임(差任)하였다. 그러다가 한 해를 넘기고 나서 체차(遞差)되었는데, 그동안에도 곤란을 겪기는 마찬가지였다

  정조 15년 신해(1791,건륭 56)
 2월21일 (병인)
장릉에 배식단을 세우고 추향할 사람을 정하다

장릉(莊陵)에 배식단(配食壇)을 세웠다. 이보다 앞서 경기도 유생 황묵(黃默) 등이 상언하여, 화의군 이영(和義君李瓔)의 충효 대절(忠孝大節)은 육신(六臣)과 다를 것이 없다고 호소하고 창절사(彰節祠)에 추향(追享)할 것을 청했는데, 전교하기를,
“화의군을 그 위치와 그 사당에 추배(追配)하는 것은 귀신의 이치로 보나 사람의 마음으로 보나 다 합당하다고 할 만하나 추배할 사람이 어찌 화의군 한 사람 뿐이겠는가. 얼마 전에 노량(露梁)을 지나다가 육신의 사당과 무덤 곁에서 한참 동안 행차를 멈추고 쳐다보면서 한숨을 쉬었고, 행전(行殿)에서 묵을 때 감회를 금치 못하여 60구의 제문을 촛불을 들여오게 하여 불러주어 쓰게 하였으니, 그처럼 깊은 감회로 그와 같은 정중한 예를 베풀었었다. 육신은 실로 혁혁하고 뛰어나 사람들의 이목에 젖어 있지만 금성 대군(錦城大君)과 화의군의 그와 같은 절의가 종실에서 나왔다는 것은 더욱 특이하고 장하지 않겠는가. 이 두 사람 이외에도 사육신에 못지 않은 사람들이 많을 것이니 이번에 추배할 때 함께 시행하는 것이 실로 절의를 권장하고 충성을 표창하는 조정의 정사에 부합할 것이다. 내각과 홍문관으로 하여금 공사간에 상고할 수 있는 문헌들을 널리 상고하여 하나로 귀결시켜 아뢰도록 하라.”
하였다. 내각이 아뢰기를,
“고 정승 신 조현명(趙顯命)이 지은 금성 대군 이유(錦城大君李瑜)의 시장(諡狀)에는 ‘단종이 영월로 손위(遜位)했을 때 공은 순흥부(順興府)에 안치되었는데, 그곳의 부사 이보흠(李甫欽)과 함께 남쪽 지방의 인사들과 몰래 결탁하여 상왕(上王)을 복위시킬 계책을 꾸몄다. 하루는 보흠을 불러 격문을 초하게 하였는데, 관노(官奴)가 벽 사이에 숨어서 몰래 엿듣고 공의 시녀와 내통하여 격문의 초고를 훔쳐서 달아났다. 그런데 기천 현감(基川縣監)이란 자가 급히 추격하여 그 격문을 빼앗아 먼저 서울에 가서 고변하였다. 그리하여 공과 보흠은 잡혀 사형을 당했다.’ 하였습니다.
고 판서 신 이기진(李箕鎭)이 지은 한남군 이어(漢南君李)의 시장에는 ‘단종이 손위한 뒤에 육신이 왕위 회복을 도모하다가 성공하지 못하고 공도 그 일에 가담하였기 때문에 함양(咸陽)에 안치되었다가 귀양지에서 죽었다. 화의군 이영(和義君李瓔), 영풍군 이전(永豊君李瑔)과 함께 가족은 노비가 되고 재산은 몰수당하는 화를 입었다. 중종 갑오년에 비로소 선계(璿系)에 다시 포함시켰고, 명종때 또 관작을 회복할 것을 명하였다. 선조(先朝) 갑인년에 종부시가 「금성 대군·화의군·한남군·영풍군의 순절은 육신과 다를 것이 없다.」 하였다.’ 하였습니다.
선정신(先正臣) 이이(李珥)가 지은 김시습전(金時習傳)에는 ‘노산군(魯山君)이 손위할 때 시습은 마침 삼각산(三角山) 속에서 글을 읽고 있었는데, 곧 문을 닫고 사흘 동안이나 밖에 나가지 않았으며 자기 책을 모두 태워버리고 절간에 자취를 의탁했다.’ 하였습니다.
고 정승 신 신흠(申欽)이 지은 산중독언(山中獨言)에는 ‘남효온(南孝溫)이 소릉(昭陵)을 복위할 것을 청하였으나 들어주지 않아 과거 공부를 그만두고 열경(悅卿)을 종유하였다. 열경이 말하기를 「공은 나와 다른데 어째서 세도(世道)를 위해 벼슬할 계책을 도모하지 않는가?」 하니, 효온이 말하기를 「소릉이 복위된 뒤에 과거를 보아도 늦지 않다.」 하였다.’ 하였습니다.
고 감사 최현(崔晛)이 지은 이맹전전(李孟專傳)에는 ‘경태(景泰) 갑술년 즈음에 시사가 크게 변하자, 소경과 귀머거리로 행세하면서 친한 벗들을 사절하고, 매월 초하루에는 항상 아침해를 향해 절을 하며 내 병이 낫기를 빈다고 말했는데, 집안 사람들도 그 속마음을 헤아리지 못했다.’ 하였습니다.
고 판서 신 이재(李縡)가 지은 조여(趙旅)의 비명에는 ‘경태 계유년에 진사가 되었는데, 하루는 여러 유생들과 작별하고 돌아가 다시는 나오지 않았다. 숙종 기묘년에 영남의 선비들이 공의 절의를 보고하니 특별히 이조 참판을 증직하였으며, 사당을 함안(咸安) 백이산(伯夷山) 밑에 세우고 김시습·원호(元昊)·이맹전(李孟專)·성담수(成聃壽)·남효온(南孝溫)과 함께 배향하였다.’ 하였습니다.
고 정승 신 최석정(崔錫鼎)이 지은 원호의 묘갈명에는 ‘단종이 영월로 손위한 뒤에 영월 서쪽에 집을 짓고 새벽과 저녁으로 바라보며 눈물을 흘렸다. 을해년에 3년 상복을 입은 뒤 고향집으로 돌아가 문밖에 나오지 않았는데, 앉을 때는 반드시 동쪽을 향해서 앉고 누울 때도 반드시 머리를 동쪽으로 두며 살다가 일생을 마쳤다. 무인년에 복위한 뒤 의리와 절개로 인해 공의 마을에 정문을 세워주었다.’ 하였습니다.
선정신 성혼(成渾)이 지은 잡저(雜著)에는 ‘성담수는 지극한 정성과 높은 식견을 지니고 아버지의 묘소 아래 숨어 살면서 일찍이 서울에 올라간 일이 없었고 벼슬을 제수하였으나 나오지 않았다.’ 하였습니다.
남효온이 지은 허후전(許詡傳)에는 ‘김종서(金宗瑞) 등이 죽임을 당했을 때 그를 불러들여 잔치에 참여시켰는데, 유독 눈물을 흘리면서 고기를 먹지 않았으며 끝내는 유배되어 죽었다.’ 하였습니다.
이정형(李廷馨)의 동각잡기(東閣雜記)에는 ‘권자신(權自愼)은 상왕(上王)의 외숙인데, 육신과 함께 복위를 도모했다가 일이 발각되어 죽었다.’ 하였습니다.
장릉지(莊陵誌)에는 ‘송석동(宋石仝)은 육신과 함께 잡혀서 법에 따라 처형되었다.’ 하였습니다.
선정신 이이가 지은 《율정난고(栗亭亂稿)》 서문에는 ‘권절(權節)은 귀머거리 노릇을 하며 병들었다 핑계하고는 문밖에 나가지 않은 채 일생을 바쳤다.’ 하였습니다.
장릉지에는 ‘정보(鄭保)는 권세 있는 간신을 대놓고 꾸짖다가 거의 모함을 받아 죽임을 당할뻔 했는데 세조가 그가 정몽주(鄭夢周)의 후손이라는 말을 듣고 용서해 줬다.’ 하였습니다.
고 부제학 임영(林泳)이 지은 조상치(曺尙治)의 묘지(墓誌)에는 ‘세조가 왕위를 물려 받자 영천(永川)에 물러가 살면서 일생 동안 서쪽을 향해 앉지 않았다. 비석에 글을 써 새기기를 「노산조 부제학 포인조상치지묘[魯山朝副提學逋人曺尙治之墓]」라 하고 자서(自序)에 이르기를 「노산조라고 쓴 것은 오늘의 신하가 아님을 밝힌 것이고 벼슬 품계를 쓰지 않은 것은 임금을 구제하지 못한 죄를 드러낸 것이고 부제학이라 쓴 것은 사실을 없애지 않기 위해서이며 포인이라 쓴 것은 망명하여 도피한 사람임을 말한 것이다.」 하였다. 그리고 아들에게 말하기를 「내가 죽거든 이 돌을 무덤앞에 세우라.」 하였다.’ 하였습니다.
삼가 생각건대, 당시 제현들이 혹은 죽기도 하고 혹은 살아 있기도 하였으나 그것은 단지 그 처한 상황이 각기 달랐기 때문이었고 순절하거나 은둔하여 선왕(先王)에게 충성을 바친 의리에 있어서는 살았건 죽었건 간에 마찬가지입니다.
금성 대군 이유는 왕실의 지친으로서 충성을 다해 의리에 죽었습니다. 후세에 논하는 자들이 종실의 친족으로는 금성 대군을 꼽고 조정의 경우는 육신을 꼽으니, 육신의 사당에 어찌 금성 대군의 제향을 빼놓을 수가 있겠습니까. 화의군·한남군·영풍군 세 사람도 각기 그 본분을 다했으니 훌륭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금성 대군에 비하면 차이가 있는 듯합니다.
그리고 김시습·남효온·이맹전·조여·원호·성담수 등 6인은 세상에서 말하는 생육신인데 혹은 방랑생활로 그 자취를 감추거나 혹은 은둔해 살면서 몸을 깨끗이 하였으니, 그 충성과 그 절개에 대해서는 사람들이 이론의 여지가 없습니다. 한 사당에다 함께 제사지내는 것을 누가 불가하다고 하겠습니까. 그런데 그 중에서도 더욱 특별히 뛰어난 자로서 김시습은 세종의 특별한 신임에 감격하여 미친 사람처럼 종적을 숨기고 절간에 몸을 의탁하였으며, 남효온은 소릉(昭陵)의 복위를 요청하고 육신의 전기를 지으면서 그 내용을 완곡하게 쓰고 자기 뜻을 고수하였으니, 그들의 고심과 아름다운 절의는 영원토록 사람들을 격려할 만합니다. 이 때문에 선정신 송시열(宋時烈)이 지은 육신사기(六臣祠記)에 ‘만약 매월당(梅月堂)과 남 추강(南秋江)을 여기에 제사지내고 또 사당 옆에 한 제단을 만들어 권자신(權自愼)·송석동(宋石仝) 등을 함께 제사지내기를 공주(公州)의 동학사(東鶴寺)에서처럼 한다면 일이 완비될 것이다.’ 하였습니다. 만약에 육신(六臣)을 한꺼번에 모두 제사지내는 것을 선뜻 논의하기 어렵다면 우선 선정이 이미 정한 논의에 따라 김시습과 남효온 두 사람을 추향(追享)하는 것이 온당할 듯합니다.
이보흠(李甫欽)과 권자신은 그 사적은 같지만 제단을 따로 설치하자는 선정의 논의로 볼 때 그 사이에 경중을 둔 것 같으며, 허후(許詡) 등 7인이 이룬 바는 비록 뛰어나다고는 하지만 이보흠과 권자신에 비교하면 차이가 없지 않습니다. 추배(追配)하는 문제는 신들이 감히 독단으로 논할 수 없습니다.”
하고, 홍문관이 아뢰기를,
“신들이 공사간의 문헌을 가져다가 절의가 가장 현저하고 사실을 증명할 만한 것들을 가려낸 결과 육신과 금성 대군·화의군 이외에도 순절하거나 은둔한 사람이 많이 있었습니다. 장릉지에 보이는 자만도 거의 1백여 인이 넘지만 이름만 있고 행적은 없어 대부분 상고하기 어렵고 단지 뚜렷이 드러난 사람에 대해서만 말씀드리겠습니다.
단묘조의 영의정 김종서, 좌의정 황보인(黃甫仁), 우의정 정분(鄭苯)은 모두 세종의 고명 대신(顧命大臣)으로 세조의 변란 때 함께 죽어 그 곧은 충성과 큰 절의가 역사책에 뚜렷이 드러나 있습니다.
문민공(文愍公) 박중림(朴仲林)은 곧 충정공(忠正公) 박팽년(朴彭年)의 아버지로서 성삼문(成三問)·하위지(河緯地) 등이 모두 스승으로 섬겼던 사람입니다. 집현전 부제학으로 일찍이 세종의 신임을 받았으며 병자년에 그의 아들과 함께 순절하였습니다. 도총관 성승(成勝)은 곧 충문공(忠文公) 성삼문의 아버지로서 역시 충문공과 함께 죽었습니다. 이상 두 집안의 부자가 이룩한 것이 이처럼 뛰어난데, 중림의 경우는 전하의 무신년에 특별히 시호를 받는 은전을 입었으나 성승은 아직도 시호를 받지 못했습니다.
안평 대군 이용(安平大君李瑢)은 변란 때 황보인·김종서 등과 결탁했다는 죄로 강화도에 유배되었다가 얼마 후에 사사(賜死)되었는데, 영종 때에 이르러 관작을 회복하고 시호를 내렸습니다.
한남군 이어(漢南君李)와 영풍군 이전(永豊君李瑔)은 장릉지를 살펴보면, 정축년 금성 대군이 상왕을 복위할 것을 모의하다가 일이 발각되었을 때 종친부에서는 어는 유(瑜)와 죄가 같으므로 혼자만 살려줄 수 없으니 안치·금고시키자고 아뢰었고, 종부시에서는 영(瓔)·어·전은 죄가 종사에 관계되므로 왕실 계보에서 삭제하자고 아뢰었습니다. 어·전의 시장(諡狀)을 살펴보면, 어·전은 모두 양빈(楊嬪)의 소생인데 양빈은 곧 단종을 젖먹여 기른 사람입니다. 단종이 손위한 뒤에 육신의 복위를 도모한 것이 성공하지 못하자, 어가 그 일에 참여하였다 하여 드디어 함양(咸陽)에 안치되었고, 정축년 금성 대군의 일이 발각되자 양빈이 내응하였다 하여 병자년에 모두 화를 당했습니다. 중종 때 명으로 왕실 계보에 다시 속하게 하였고 명종 때 관작이 회복되었으며, 숙종 때 단종을 복위하면서 시호를 내려주고 예장(禮葬)하도록 하였습니다. 영종 갑인년에 종부시에서는, 금성 대군·화의군·한남군·영풍군의 순절은 육신과 다름이 없다고 아뢰었고, 또 호남의 유생들이 상소로 청하기를 ‘저 세 신하가 모두 왕실의 지친으로서 목숨을 바치면서도 절개를 바꾸지 않은 것은 실로 육신과 같습니다. 그런데 육신은 사당을 세워 제향하고 심지어는 엄흥도(嚴興道)와 같이 미천한 자도 오히려 육신과 함께 제향을 받는데, 이 세 신하만은 그 높고 빛나는 충렬이 해와 달을 꿰뚫고 우주를 지탱할 만한데도 표창하는 은전은 도리어 엄 호장(嚴戶長)보다도 못합니다.’ 하였습니다. 신들이 이상의 문헌으로 상고해 보면 어와 전은 유와 영과 마찬가지인데, 금성 대군의 청안(淸安) 사당에 화의군만 배향하고 한남군과 영풍군을 배향하지 않은 것은 결국 결함이 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청간공(淸簡公) 김시습은 5살에 신동이라 하여 세종의 특별한 인정을 받았고 단종이 손위한 뒤에는 절간에 의탁하여 종신토록 벼슬하지 않았습니다. 선정신 이이가 말하기를 ‘절의를 높이 세우고 윤리 강상을 부식한 것은 비록 백대의 스승이라 해도 근사할 것이다.’ 하였습니다.
문정공(文貞公) 남효온(南孝溫)은 18세에 글을 올려 소릉(昭陵)의 복위를 청하고 드디어 과거 공부를 그만두었습니다. 일찍이 육신전(六臣傳)을 지으면서 말하기를 ‘내가 어찌 죽음을 아껴 대현들의 이름을 인멸시키겠는가.’ 하였습니다.
정간공(貞簡公) 원호(元昊)는 집현전 직제학으로 단종 초년에 원주에 은퇴하여 살다가 단종이 승하하시자 영월로 들어가 삼년상을 지냈으며 세조가 특별히 호조 참의를 제수하고 여러 차례 불렀으나 끝내 가지 않았습니다. 숙종 24년 무인년에 특별히 그의 마을에 정문을 세울 것을 명하였습니다.
정숙공(靖肅公) 성담수(成聃壽)는 교리 성희(成熺)의 아들입니다. 선정신 성혼(成渾)의 잡저(雜著)에 ‘희가 성삼문의 사건에 연좌되어 종신토록 벼슬하지 않았다. 그의 아들 담수는 지극한 정성과 높은 식견을 지니고 파주(坡州)에 물러가 살았는데, 그 당시 죄인의 자제들에게 으레 참봉을 제수하여 그 거취를 시험하였을 때 모두 머리를 숙이고 벼슬살이를 하였으나 유독 담수만은 끝내 벼슬하지 않았다.’ 하였습니다. 전하의 갑진년에 증직하고 시호를 내릴 것을 명하셨습니다.
정간공(靖簡公) 이맹전(李孟專)은 일찍이 우수한 성적으로 과거에 급제하여 한림으로 뽑혔으나 경태(景泰) 갑술년에 귀먹고 눈멀었다고 핑계하고 종신토록 벼슬하지 않았습니다. 전하의 신축년에 시호를 추증할 것을 명하셨습니다.
정절공(貞節公) 조여(趙旅)는 태학생(太學生)으로 단종이 손위하게 되자 여러 유생들과 하직하고 함안군(咸安郡)으로 돌아가 은둔하여 소요 자적하다가 일생을 마쳤습니다. 숙종 28년 임오년에 특별히 이조 참의를 추증하였고, 전하의 신축년에 이조 판서로 올려 추증하고 시호를 내렸습니다.
충숙공(忠肅公) 권절(權節)은 선정신 이이가 지은 《율정난고(栗亭亂稿)》 서문에 ‘세조가 왕위에 오르기 전에 여러 번 그의 집에 가서 거사하는 문제를 은밀히 말했으나 귀먹은 체하고 대답하지 않았으며, 은둔하여 한평생을 마쳤다.’ 하였습니다. 숙종 임오년에 강원도 유생들이 상소하여 육신의 사당에 사액(賜額)할 것과 권절을 함께 배향할 것을 청하자 그 마을에 정문을 세울 것을 명하였습니다. 갑신년에 양주(楊州) 유생들이 또 상소하여 사당을 건립할 것을 청하니, 증직하고 시호를 내리라는 명이 있었습니다.
고 집현전 부제학 조상치(曺尙治)는 《갱장록(羹墻錄)》 화속편(化俗篇)을 상고해 보니 ‘세조가 일찍이 박팽년 등을 논평하여 당대의 역적이고 후세의 충신이라고 했다.’ 하였고, 그 아래에 ‘부제학 조상치가 상소하여 치사를 요청하니 백관에게 명하여 도성 문 밖에서 전별하도록 하였다.’고 쓰여 있었습니다. 고 부제학 임영(林泳)이 지은 묘표에 ‘공은 성삼문·박팽년 제공과 길은 달라도 가는 곳은 같았다.’ 하였고, 그 유사(遺事)에 ‘세조가 왕위를 물려 받은 뒤에 영천(永川)에 물러가 살면서 종신토록 서쪽을 향하여 앉지 않았다. 스스로 돌에 써서 새기기를 「노산조 부제학 조상치지묘」라 하였고, 또 자규사(子規詞)를 지어 자기 뜻을 드러냈다.’ 하였습니다. 고 상신 조현명(趙顯命)이 지은 영천사당기(永川祠堂記)에 ‘육신은 죽었고 공은 죽지 않았다. 죽은 사람은 그 자취가 드러나 쉽게 보이지만, 죽지 않은 사람은 그 마음이 은미하여 알기 어렵다. 그러므로 단종을 복위한 뒤에도 육신과 함께 노량진의 사당에서 제향을 받지 못한 것은 후세의 공론을 기다린 것이다.’ 하였습니다.
고 교리 성희(成熺)는 곧 성삼문(成三問)의 종숙부(從叔父)이자, 정숙공 성담수(成聃壽)의 아버지입니다. 선정신 권상하(權尙夏)가 지은 묘표에 ‘희가 삼문과 함께 왕실을 보필하여 죽고 사는 일로 그 마음을 바꾸지 않았다. 삼문 등이 죽자 희도 역시 엄한 국문을 받고 귀양갔으며 처자는 노비가 되고 재산은 몰수당했다. 그 뒤 3년 만에 용서를 받았으나 끝내 충성과 의분에 겨워 죽고 말았다.’ 하였습니다.
정보(鄭保)는 문충공(文忠公) 정몽주(鄭夢周)의 손자입니다. 육신의 옥사가 일어났을 때 한명회(韓明澮)의 첩으로 있던 서매(庶妹)를 가서 보고 ‘공은 어디에 갔는가?’ 하고 물으니 ‘죄인을 국문하느라 궁궐에 가 있다.’ 하자, 보가 손을 저으며 말하기를 ‘만고의 죄인이 될 것이다.’ 하였습니다. 명회가 즉시 상에게 아뢰어 세조가 친국을 하고 사지를 찢어 죽이려 하다가 충신의 후손이라 하여 특별히 죽음을 감해 유배하였습니다.
영양위(寧陽尉) 정종(鄭悰)은 곧 문종의 부마입니다. 단종 을해년에 광주(光州)로 귀양갔다가 정축년 금성 대군의 복위를 도모한 일이 발각되자, 종친부가 ‘정종·송현수(宋玹壽)·어()·전(瑔)의 죄는 나라의 법으로 보아 반드시 죽여야 한다.’ 하여 결국 사약을 받았습니다. 영조 무인년에 특명으로 시호를 내렸습니다.
충장공(忠莊公) 권자신(權自愼), 충의공(忠毅公) 김문기(金文起)는 육신이 화를 당하던 날 함께 죽었는데, 영조 때에 와서 함께 시호를 주는 은전을 받았습니다.
여량 부원군(礪良府院君) 송현수는 단종의 장인으로서 복위를 도모한 일이 발각되어 금성 대군과 함께 죽었으나 아직도 시호를 내려주는 은전을 받지 못하였습니다.
창절사(彰節祠)에 추배(追配)하는 일은 그 예법이 매우 중대합니다. 세 대신의 뛰어난 절의나 박중림과 성승 부자가 보여준 특별한 절개는 마땅히 배향할 만하지만, 신주의 순위가 서로 맞지 않으므로 감히 쉽게 논의할 수 없습니다. 안평 대군 및 한남군·영풍군은 금성 대군과 같은 형제이니, 다함께 죽계(竹溪)의 사당에 추배한다면 역시 풍속과 교화를 길이 세울 수 있을 것입니다. 생육신을 사육신과 함께 제사지낸다 한들 누가 불가하다고 하겠습니까만 선정신 송시열이 지은 육신사기(六臣祠記)를 상고하건대, ‘만약 매월당과 추강을 이곳에 배향하고, 또 사당 곁에 한 제단을 만들어 권자신(權自愼)·송석동(宋石仝) 등을 함께 제사지내기를 대략 공주의 동학사(東鶴寺)처럼 한다면 일이 더욱 완비될 것이다.’ 하였습니다. 이처럼 이미 선정의 정론이 있어 다시 논의할 여지가 없지만, 나머지 네 신하의 똑같은 깨끗한 절의에 대해서는 역시 함께 배향해야 한다는 공론이 있을 수 있으며 그밖의 사람들도 모두 순절하거나 은둔하여 칭송할 만한 뛰어난 절의가 있긴 하나 이것은 사당의 규례에 관한 일이라 신들이 감히 억측으로 단정할 수 없습니다.”
하였다. 이달 경술일에 사관이 실록을 상고하고 돌아와 아뢰어 더욱 자세한 내용을 알게 되자 《어정배식록(御定配食錄)》을 편찬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전교하기를,
“육신의 일은 감히 자세히 알 수 없는 것이지만, 세조의 하교에 ‘후세의 충신이다.’ 하셨고, 영양위(寧陽尉)의 집의 일을 논하면서 ‘난신(亂臣)으로 논할 수 없다.’ 하셨다. 그 훌륭하신 훈계와 계책은 해와 별처럼 환히 빛나 임시 방편에 통달하고 원칙을 부식한 성인의 깊은 뜻을 삼가 엿볼 수 있다. 그것을 천명하고 드러내는 것이 어찌 우리 후인에게 달려 있지 않겠는가. 지난번 행차할 때 민절사(愍節祠)를 지나다가 옛날의 감회가 일어나 관원을 보내 제사지내고 이어서 금성 대군 등 여러 사람을 영월에 있는 사당에 추배하기 위해 사관에게 명산에 깊이 보관되어 있는 실록을 삼가 상고하게 하였다. 그런데 사관이 복명하던 바로 그 날 강원 감사가 자규루(子規樓)의 옛터를 찾아낸 상황을 장계로 아뢰었다. 이 두 가지 일이 공교롭게도 한꺼번에 겹쳐 마치 오늘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되었으니 이치란 속일 수 없다. 참으로 기이하고도 이상하다.
다시 생각해보건대, 세상에서 말하는 생육신이나 오종영(五宗英)의 높고 큰 충절은 모두 우열을 가릴 수 없이 추앙하는 형편이라 누구는 배향하고 누구는 배향하지 않는 것으로 쉽게 취사 선택해서는 안될 것이니, 별도로 예법에는 없지만 예법에 맞는 예를 찾아서 시행하는 것이 역시 옳지 않겠는가.
지난 숙종 무인년에 장릉(莊陵)을 복위했을 때 조정의 신하가 육신의 사당이 정자각(丁字閣)과 너무 가깝다는 말을 하자, 숙종께서 ‘무후의 사당이 길이 이웃에 가깝다[武侯祠屋長隣近]’는 두보(杜甫)의 싯귀를 인용하면서 헐어버리지 말라고 하셨으나, 의론이 서로 엇갈려 끝내는 옮겨 세우고 말았으니, 이것이 어찌 잘못된 일이 아니겠는가. 억울함을 되새기는 제사는 동학사의 실례를 취하고 제단을 만드는 제도는 달천(㺚川)의 실례를 모방하되 당시에 절의를 다한 사람들을 합쳐 하나의 사판(祠版)으로 만들어, 본릉(本陵) 홍살문 밖에 터를 잡아 매년 한식(寒食)에 함께 제사를 지내며, 고을원으로 하여금 집을 하나 지어서 사판을 보관하게 함으로써 똑같이 제사지낸다는 뜻을 보여야겠다.
아, 예법이란 인정에 의해 생기는 것으로서 신이나 인간이나 차이가 없다. 저 열렬한 영령들의 가시지 않는 울분이 길이 의지할 곳이 있게 될 뿐만 아니라, 장릉의 혼령도 오르내리면서 제물의 김과 향기가 물씬 풍길 때 반드시 기뻐하실 것이다. 이 일을 누가 근거 없는 일이라 하겠는가. 본도와 예조로 하여금 이에 따라 거행하도록 하라.”
하였다. 또 전교하기를,
“장릉에게 절의를 지킨 사람들을 배향하는 일에 대해 방금 전교를 내렸는데 내각(內閣)에 배식록이 있으니 해조로 하여금 그에 따라 거행하도록 하라. 사판은 충신 사판이라 쓰고 제물은 밥은 큰 그릇에 한 그릇, 탕은 큰 주발에 한 주발, 나물과 과일은 각각 한 접시, 술은 한 잔으로 규례를 정하고 제관은 부근의 찰방으로 하며, 예관(禮官)이 내려가기 전에 제단을 만들고 사판을 만들도록 하는 등의 일을 해도에 분부하라. 의례적으로 쓸 제문은 마땅히 지어서 내려보낼 예정인데, 이후에 본릉의 한식제에 쓸 향을 받아갈 때 함께 주어서 보낼 것이라는 것도 해도와 예조에 분부하라.”
하였다. 또 전교하기를,
“이제 장릉의 일로 인해 생각해보니, 충정공(忠正公)의 부친 박중림(朴仲林)은 시호가 있는데, 성승(成勝)은 충문공(忠文公)의 부친으로 중림과 함께 죽었으나 아직도 홀로 빠져 있다. 이 어찌 더욱 큰 결함이 아니겠는가. 본관(本館)에 신칙해서 즉시 제사를 지내기 전에 시호를 의논해 올리도록 하라. 고 충신 박계우(朴季愚)는 바로 대제학 박연(朴堧)의 아들인데, 연이 악(樂)을 제작한 것은 허 문경공(許文敬公)이 예를 제작한 공과 백중을 이루는 것이다. 문경공의 아들 허후(許詡)는 계우와 동시에 순절했으나 후는 시호가 있고 계우만 유독 빠졌으니, 혹시 벼슬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그랬는지 모르겠다. 독동(禿同)과 윤생(尹生)의 뛰어난 절의 또한 인멸시킬 수 없으니, 아울러 증직하는 은전을 베풀도록 하라.”
하였다. 상이 또 단종조의 여러 신하가 절개를 지킨 것은 다 같지만 성과에 있어서는 크고 작은 차이가 있고 순위에도 귀천의 차이가 있다 하여, 장차 별단(別壇)을 설치하는 문제를 내각으로 하여금 의논해 아뢰도록 하였다. 내각이 아뢰기를,
“대신들 가운데 원임 각신에게 물으니, 원임 제학 이복원(李福源)은 말하기를 ‘배향하는 문제는 지극히 엄중하니, 지금 이 명이 비록 묘정에 종향(從享)하는 것과는 약간 차이가 있긴 하나 벼슬과 시호를 추증하고 서원(書院)에 배향하는 것에 비하면 의미와 상황이 자연 다릅니다. 그러니 조정에 벼슬한 적이 없거나 벼슬을 받지 않은 자는 비록 뚜렷이 기록할 만한 점이 있더라도 다시 한번 생각해 보는 것이 옳을 듯합니다. 오직 엄흥도(嚴興道) 한 사람만은 육신의 반열에 나란히 세워도 조금도 손색이 없을 것입니다. 세상에 드문 은전은 간략한 것이 귀중하니, 간략하면 그 광명한 빛이 더욱 빛나고 확대하면 오히려 혹 근엄하지 못할 수 있습니다. 나머지 사람들을 위해 별도로 한 제단을 만드는 것은 표창하는 의리는 마찬가지이고 불쌍히 여기는 은혜로 인해 나온 조치이긴 하나 배식(配食)하는 것과는 차이가 있으니 인원수의 많고 적음에는 구애될 것이 없다고 봅니다.’ 하였습니다.
원임 제학 채제공은 말하기를 ‘내리신 3책 가운데 있는 배향하기에 합당한 사람을 성상께서 직접 뽑아내신 것은 마치 저울 눈금을 가늠한 것처럼 조금도 틀림이 없습니다. 이들 이외의 사람들에 대해 아래쪽에 별단을 설치하는 문제에 대해 물으신 일은 불쌍히 여기고 표창하시려는 성상의 마음을 삼가 이해할 수 있긴 하나 숫자는 많고 사적은 너무 소략하니, 만약 위의 항목에 든 뚜렷한 사람들와 똑같이 함께 제사지낸다면 혹시 예법이 번잡해질 혐의가 있을 듯합니다. 신은 일찍이 영남 지방을 왕래한 적이 있으므로 선배들의 유적을 대략 알고 있습니다. 금성 대군은 순흥(順興)에서 화를 당했기 때문에 그 당시 그 부근 고을에서는 평생동안 세상을 등지고서 북쪽 문을 막고 동쪽만 향하는 자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이제 그 자손들이 만약 조정에서 예전에 없었던 은전을 베푼다는 소리를 듣는다면, 앞으로 행차하시는 길에 글을 올리는 자들이 더한층 많아져 이루 다 베풀 수가 없을 것입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지금 여기에 뽑아 기록한 자만으로 끊어서 한계를 정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봅니다.’ 하였습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전에 우리 성조(聖祖)의 하교에 육신의 사당을 본릉(本陵) 홍살문 안에 그대로 두라고 하셨으니, 매우 훌륭한 생각이었다. 이번에 배향하는 규례를 거행하자고 논의하는 것을 가지고 삼가 그 뜻을 계승하는 일단을 스스로 구현하고자 한다. 대체로 제단에 제사지내는 것과 사당에서 제사지내는 것은 사실 차이가 있지만 함께 제사지내는 뜻은 마찬가지이다.
두 대신이 올린 의견에 혹은 ‘간편한 것이 귀중한 것이다.’ 하였고, 혹은 ‘이루 다 베풀 수 없을 것이다.’ 하였는데, 이는 모두 일을 신중하게 하려는 뜻에서 나온 말이다. 이제 취사 선택을 하는 과정에서 마땅히 절의를 지켜 죽어서 그 자취가 나라의 역사와 능지(陵誌)에 올려져 있는 것을 기준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이를테면 육종영(六宗英)·사의척(四懿戚)·삼상신(三相臣)·삼중신(三重臣)·양운검(兩雲劒) 및 육신과 육신의 아비와 자식 중에 특별한 사람과 허후(許詡)·허조(許慥)·박계우(朴季愚) 등 문경공(文敬公)·문헌공(文獻公)의 아들과 손자로서 더욱 뛰어난 사람과 순흥 부사(順興府使) 이보흠(李甫欽), 도진무(都鎭務) 정효전(鄭孝全)과 같은 사람들이다. 이상의 31인을 함께 배식할 사람으로 정하고 제사지내는 의식에는 축문이 있어야 할 것이다.
그밖에 사실이 자세하지 않은 사람과 연좌되어 죽임을 당한 자는 다시 신중히 참작해야 할 것이다. 별단을 설치하는 문제는 대신들의 말이 진실로 일리가 있으니, 충민단(忠愍壇) 등 여러 제단에 담장은 함께 하면서 제지(祭地)는 달리 한 전례가 바로 그것이다. 사적이 자세치 않은 조수량(趙遂良) 등 8인과 연좌되어 죽은 김승규(金承珪) 등 1백 90인은 별단에 제사지내야 할 것이다.
아, 죽음을 각오하고 의리를 떨쳐서 장사를 지내는 일에 힘을 다한 사람은 오직 엄 호장(嚴戶長) 한 사람인데, 어찌 순절한 사람의 반열에 끼지 않았다는 것 때문에 혼자만 배향에서 누락시킬 수 있겠는가. 김 문정(金文正)·송 문정(宋文正)이 묘정에 추배(追配)된 사례가 곧 본받을 만한 뚜렷한 근거이다. 증 참판 엄흥도는 31인의 다음 순서에 두도록 하라. 또 고 처사(處士) 김시습과 태학생 남효온은 속세를 떠나 은거하고 몸을 깨끗이 하여 변함이 없었으니, 그 맑은 기풍과 굳은 지조는 백세를 격려할 만한데도 모두 이 사당의 제사에서 빠진 것은 미처 조처하지 못한 결함이다. 두 신하를 똑같이 창절사(彰節祠)에 추가로 제향하라.”
하였다. 또 전교하기를,
“장릉에 배식하는 문제는 지금 수의한 것으로 인해 또 별도로 한 제단을 만든다는 명을 내렸다. 32인의 제단에 지내는 제사에는 마땅히 축문이 있어야 하겠고, 제물은 처음 하교한 대로 거행하라. 사판(祠版)은 ‘충신지위(忠臣之位)’라고 쓰되 감사에게 쓰도록 하라. 별단(別壇)의 경우는 사판 3개를 만들어 계유년·병자년·정축년에 죽은 사람들을 각각 쓰도록 하라. 제사를 지낼 때는 지방에다 성명을 죽 쓰되, 조사(朝士)를 한 판, 맹인·내시·군사·노비를 한 판, 여인(女人)을 한 판으로 해야 한다. 신위의 위치는 중신들의 왼쪽에 두되 조사의 경우는 약간 앞으로 나오게 하고 맹인·무당·내시·군사·노비의 자리는 약간 밑으로 내려야 한다. 제사지내는 의식에 축문을 쓰지 말고 제물은 각기 밥 한 그릇, 탕 한 그릇, 술 한 잔으로 하며, 헌관과 집사는 두 제단의 일을 겸하여 보게 해야 한다.”
하였다.
【원전】 46 집 204 면
【분류】 *왕실(王室) / *윤리(倫理)


[주D-001]장릉(莊陵) : 단종(端宗)의 능.
[주D-002]소릉(昭陵) : 문종비 현덕 왕후(顯德王后)의 능호.
[주D-003]열경(悅卿) : 김시습의 자.
[주D-004]경태(景泰) : 명 경제(明景帝)의 연호.
[주D-005]갑술년 : 1454 단종 2년.
[주D-006]계유년 : 1453 단종 1년.
[주D-007]무인년 : 1698 숙종 24년.
[주D-008]병자년 : 1456 세조 2년.
[주D-009]무신년 : 1788 정조 12년.
[주D-010]유(瑜) : 금성 대군.
[주D-011]영(瓔) : 화의군(和義君).
[주D-012]엄 호장(嚴戶長) : 엄흥도.
[주D-013]갑술년 : 1454 단종 2년.
[주D-014]갑신년 : 1704 숙종 30년.
[주D-015]세 대신 : 김종서·황보인·정분.
[주D-016]민절사(愍節祠) : 노량진에 있는 사육신의 사당.
[주D-017]오종영(五宗英) : 안평 대군·금성 대군·한남군·영풍군·화의군 등 다섯 왕족.
[주D-018]본릉(本陵) : 장릉.
[주D-019]충정공(忠正公) : 박팽년.
[주D-020]충문공(忠文公) : 성삼문.
[주D-021]본관(本館) : 홍문관을 말함.
[주D-022]허 문경공(許文敬公) : 허조(許稠).
[주D-023]성조(聖祖) : 숙종을 가리킴.
[주D-024]육종영(六宗英) : 안평 대군·금성 대군·화의군·한남군·영풍군·이양(李穰) 등 여섯 종실.
[주D-025]사의척(四懿戚) : 송현수·권자신·정종·권완 등 네 외척.
[주D-026]삼상신(三相臣) : 김종서·황보인·정분 등 세 재상.
[주D-027]삼중신(三重臣) : 민신·조극관·김문기.
[주D-028]양운검(兩雲劒) : 성승(成勝)·박쟁(朴崝).
[주D-029]문경공(文敬公) : 허조(許稠).
[주D-030]문헌공(文獻公) : 박연(朴堧).
[주D-031]엄 호장(嚴戶長) : 엄흥도.
[주D-032]김 문정(金文正) : 김상헌(金尙憲).
[주D-033]송 문정(宋文正) : 송시열(宋時烈).
정조 6년 임인(1782,건륭 47)
 6월29일 (갑오)
이유백의 흉소 사건을 마무리지은 후 반포한 윤음

윤음(綸音)을 반포하기를,
“국가가 세신(世臣)에 대해 과연 저버린 것이 무엇이기에 병신년·정유년 이래 흉역이 발꿈치를 이었고 사변(事變)이 잇따라 발생하고 있다. 그러나 진실로 원악 대대(元惡大憝)로서 간범(干犯)한 것이 지중(至重)한 경우가 아니고서는 혹 탕척(蕩滌)시켜 묻지 않기도 하고 혹 너그럽게 용서하여 목숨을 부지하게도 하여 기어코 함께 대도(大道)로 지향하도록 한 것은 내가 지나치게 늦추어 주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참으로 용사(龍蛇)같이 사나운 자들을 잘 교화하여 적자(赤子)로 만들지 못한 것은 또한 내가 부덕한 데 연유된 것이기 때문이었다. 아! 내가 세신(世臣)을 저버리지 않았는데도 세신이 나를 저버렸으며 끝내 나의 마음을 몸받아 마음을 고치는 것을 볼 수가 없었다. 묵었던 곳을 잊지 못하여 봄바람에 생기가 돌듯이 얼굴을 바꾸고 교대로 나와서 온갖 계교를 부려 시험하여 왔는데, 이번의 일에 이르러 또 극도에 달하였다.
의심해서는 안될 일을 의심하고 감히 문제삼아서는 안될 자리를 방자하게 문제삼아서 타매하는 이야기가 곤전(坤殿)에까지 언급되었으니, 이유백의 죄는 진실로 주참(誅斬)을 용서할 수가 없다. 이택징의 소장에 삽입된 두어 가지의 글귀는 비록 그것이 헤아릴 수 없는 일이기는 하지만 이유백의 것과 견주어 보면 크게 다른 점이 있다. 시기는 구언(求言)하는 때를 당하였고 일은 과궁(寡躬)에 관계가 되는 것이었으므로 특별히 알이 깨지는 것을 아끼는 뜻에서 지나치게 포용하는 마음을 두었던 것인데 여러 죄수들의 공초(供招)가 나오는 데 이르러서는 손을 잡고 이최중의 촉탁을 받았고 뇌물을 주어 이유백이 계속해서 뒤이어 일어나게 할 것을 도모했던 정적(情跡)이 죄다 드러났다.
비록 부득이 발포(發捕)하기는 했으나 옛날 우리 장릉조(長陵朝)에서 최현(崔晛)이 이인거(李仁居)의 옥사에 연루되었었으나 그가 전일의 언사자(言事者)라는 것으로 특별히 사죄(死罪)를 용서하여 준 것이 지금껏 성대한 일로 전하여 오고 있으니, 나 소자(小子)가 조종(朝宗)을 법받기 위해 이런 더위를 당하여 몸소 나아가 친문(親問)한 것은 그 의도가 이택징의 사죄를 용서해주기 위해서인 것이다. 근래 추안(推案)과 문서(文書)를 살펴보건대 작년에 있었던 호역(湖逆)을 사림(士林)의 횡액이라고 하면서 심지어 이렇게 변이 발생한 해에 산들 또한 무엇하겠느냐고까지 하였으며, 세번째의 소장을 퇴각시킨 것에 대해 연석(筵席)에서 밀교(密敎)가 있었다고 하면서 심지어 묵묵히 광경을 상상하면 도리어 한번의 웃음거리가 된다고 하였다. 기타 수십 장의 서찰에 기재된 흉패스런 언설(言說)에 대해 연석에 나온 여러 신하들이 그 누군들 통분하여 죽고 싶어하지 않겠는가? 그가 어좌(御座)를 향하여 말마다 나[我]라고 일컬었는데 나라고 한 것은 곧 자신을 일컬은 것이라고 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계속해서 불신(不臣)의 마음이 있었다고 말을 했으니, 이런 등등의 극악한 역적에 대해 내가 용서하여 주고 싶어도 될 수 있겠는가? 또 이른바 입조록(立朝錄)의 내용에 감히 ‘모년의 일[某年事]’이란 세 글자와 여섯 글자의 글은 마음이 떨리고 뼛골에 사무쳐 오직 차마 거론하여 하교할 수가 없다. 그에게 일푼이나마 신하로서 임금을 섬긴다는 마음이 있다면 어떻게 차마 이럴 수 있단 말인가? 그러나 이택징·이유백은 비미(卑微)한 부류들이니 무슨 말할 가치가 있겠는가? 이는 남의 지의(旨意)를 받들고 남의 유도 협박함을 받아 기꺼이 창귀(倀鬼)가 된 것에 불과한 것이다. 상세히 구핵(究覈)하여 통쾌한 조치(鋤治)를 시행함으로써 풀을 베고 뿌리를 제거하며 하나를 징계하여 백 명을 면려시키는 방도로 삼아야 한다는 것을 모르지 않는다. 그런데 이제 만연(蔓延)하는 우려가 있을까 우려하여 즉시 광탕(曠蕩)시키는 은전(恩典)을 가한 것은 나도 또한 고심(苦心)한 끝에 한 일이다.
아! 일국(一國)의 사람이 누군들 나의 신자(臣子)가 아니겠는가? 혹 남에게 이끌려 잘못을 저지르고 습관에 익어 미혹에 빠진 자가 있을지라도 내가 바야흐로 불쌍하고 딱하고 가슴 아프게 여겨 반드시 구덩이에서 건져내어 임석(袵席) 위에 올려 놓아 우리 군신(君臣)의 의리를 보전하려 하고 있다. 아! 그대 세록(世祿)의 신하들은 무슨 까닭으로 그대 조부(祖父)들이 몸과 마음을 바쳐 충성한 기풍을 생각하지 않고 도리어 불령(不逞)한 무리들에게 미혹되어 나의 방헌(邦憲)을 간범하고 나의 국맥(國脈)을 손상시킨단 말인가? 조용히 생각하여 보면 반드시 출연(怵然)히 감동하고 돈연(頓然)히 깨달아서 예전에 물들었던 더러움을 다 고쳐 일신(日新)의 아름다움을 이룰 수 있을 것이다. 모든 나의 신자(臣子)들은 이 마음에서 우러난 하교를 듣고 모쪼록 각각 깊이 유념하여 나의 지극한 뜻을 저버리지 말라.”
하였다.
【원전】 45 집 316 면
【분류】 *사법-행형(行刑) / *변란-정변(政變) / *왕실-비빈(妃嬪)


[주D-001]병신년 : 1776 정조 즉위년.
[주D-002]정유년 : 1777 정조 원년.
숙종 35년 기축(1709,강희 48)
 6월19일 (무오)
헌납 이재가 상소하여 편당의 논에 따른 폐단과 언로가 막힌 일 등을 논하다

헌납 이재(李縡)가 상소하기를,
“전하께서 총명하고 예지(睿智)하신 자품(姿稟)으로 유정 유일(惟精惟一)의 교훈을 받들고 계시는데도, 다만 공정해야 하는 의리를 항시 치우치는 사정(私情)에 빼앗겨 버리고, 조급해지는 병폐가 매양 희노(喜怒)의 절차에서 나오게 되어, 덕을 지킴이 굳건하지 못하고 일 처리에 있어 순서가 없으시므로, 아첨하는 말이 쉽게 들어가 의혹이 많아지게 되고 착한 단서가 잠간 싹텄다가도 곧 도로 어두어지며, 억측(憶測)을 잘 하시므로 의심이 생기게 되고, 이기기 좋아하시므로 과오를 저지르게 되어 갈수록 격렬하게 괴로와져서 병폐(病弊)의 뿌리가 더욱 깊어지고 계십니다.
지금 늘어선 빈어(嬪御)들을 모두 사제(私第)를 두게 하고, 미천한 구사(丘史)들이 멋대로 청금(淸禁)에 들락거리고 있으며, 곤역(閫域)이 엄밀하지 못하고 거리낌없이 드나들 수 있으므로 외부의 말이 들어가게 되고 내부의 말이 나가게 되는 것도 이미 대부분 깊은 걱정거리인데, 액정(掖庭)의 하례(下隷)들이 항간(巷間)에 횡행하고 있고 엄시(閹寺)와 추종(騶從)이 재집(宰執)을 흉내내니, 그들의 교만 방자한 상황으로 또한 조짐이 나타났을 뿐 만이 아닙니다.
궁가(宮家)에서 모자라는 것이 어찌 좋은 밭과 화려한 집이겠습니까마는, 서울 안의 갑제(甲第)들을 잇따라 절가(折價)해 들이어 각기 몇 구역(區域)씩 점유(占有)하기를 한도가 없이 하느라, 강제로 사들인다는 비방까지 있게 되었으니, 위로 성조(聖朝)에서 절수(折受)한 것까지 조사하여 혁파하는 일을 하면 진실로 성상의 덕을 빛나게 할 것인데, 복주(覆奏)할 즈음에 곧바로 아끼어 고집하시는 바가 있었습니다. 수해와 한재로 흉년이 들어 백성이 도로에 딩굴고 있는데도 전하께서 이런 것은 생각하지 않으시고 단지 궁가(宮家)들을 부익부(富益富)하게 하는 계책만 하려고 하시니 애석한 일입니다. 전하께서 어린 아이를 보호하듯이 하는 마음으로 그 백성 사랑하는 것을 넉넉히 하려는 생각과 바꿀 수는 없으시겠습니까?
어진 임금은 사람을 쓸 적에 반드시 그의 재능(才能)을 헤아려 보아 관직 제수하기를 마치 권형(權衡)으로 물건을 1눈 1냥(兩)도 틀리지 않게 다는듯이 했습니다. 지금 전하께서는 사람을 쓰고 버리고 관원을 진퇴(進退)하실 적에 단지 한 때의 호오(好惡)에 따라서만 하고, 그 사람의 장단점과 맞는지 안맞는지는 아득하여 마치 성상께서 마음에 두지 않으시는 것 같습니다. 전하의 총명과 예지(睿智)로 장부(臧否)숙특(淑慝)을 마땅히 알지 못하는 것이 없으실 것인데, 오직 강(剛)한 것은 싫어하고 부드러운 것만 좋아하시고, 나약한 것을 좋아하고 정직한 것을 싫어하시며, 자신을 바로잡아 주기는 구하지 않고 뜻을 맞추어 주기만 바라고, 두려울 만한 것은 취하지 않고 기쁘게 될 것만 취하시기 때문에, 사람을 씀과 버림이 잘못되어 가고 명기(名器)가 날로 천해지고 있습니다. 이는 어찌 호오(好惡)하는 마음이 올바르게 함을 얻지 못해서가 아니겠습니까?
대저 인재는 반드시 평소에 양성해 놓아야 위급할 때에 힘을 얻게 되는 법입니다. 전하께서 오늘날 양성해 놓은 것은 누구이고, 친하여 신임할 사람은 누구이며, 1백 리(里)의 사명(使命)을 맡길 수 있고 한 지방의 임무를 담당할 수 있다고 믿을 만한 사람은 누구입니까? 만에 하나라도 국가에 근심거리가 많아지고 사방에서 경보(警報)가 있게 된다면 또한 장차 어떻게 대응(對應)해 갈 것입니까? 진실로 전하께서 마음에 맞고 안맞는 것 때문에 쓰거나 버리며 사랑하거나 싫어하는 것 때문에 진퇴(進退)시키지 마시고, 오직 인재이면 들어 쓰고 오직 현명한 사람이면 임용(任用)하시는데도 오히려 참다운 인재가 나오지 않고 관방(官方)이 맑아지지 않는다고 한다면, 신(臣)은 믿지 못하겠습니다.
전하께서 매양 붕당(朋黨)을 들어 근심하고 계시는데, 어리석은 신의 생각으로는 전하께서 또한 편당하는 논의를 면하지 못하고 계신다고 여겨집니다. 왜냐하면 옛적에 붕당을 없애려고 하는 사람은 반드시 옳은지 그른지를 밝히는 것으로 우선을 삼았습니다. 대개 옳음과 그름이 분명하면 공론이 정해지고, 공론이 정해지면 조정이 안정되는 법입니다. 지금 전하께서는 옳음과 그름의 구분에 있어서 분명하게 알거나 지키기를 확고하게 하지 못하시기에 파란 속에서 흔들리고 청자(靑紫)의 구별에서 혼동하시는 것입니다. 혹은 그것이 옳은 줄 알면서도 옳게 여기지 못하고 그것이 그른 줄 알면서도 그르게 여기지 못하시며, 한갓 탄핵하는 논은 벌이(伐異)하는 것으로만 여기고 영구(營救)하는 것이 당동(黨同)하는 것임을 깨닫지 못하시니, 마음에 진정(鎭定)해 보려고 하다가 도리어 더욱 괴열(乖裂)되게 하고 계십니다. 이것은 어찌 옳고 그름에 대한 마음이 그 올바르게 됨을 얻지 못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삼가 듣건대 전날 경연(經筵)에서 ‘노론(老論)은 완만하고 소론(少論)은 급격하다.’는 분부가 계셨다는데, 알 수 없습니다마는 사실입니까? 저 신하들 중에 동인(東人)이니 서인(西人)이니 하고 노론이니 소론이니 하는 것은 사삿집에서 하는 이야기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서, 식견이 있는 사람은 또한 말하기도 부끄러워 하는 것인데, 이를 어찌 하전(厦氈)우불(吁咈)하는 사이에서 마땅히 말할 바이겠습니까? 조정에 있는 백관들은 다 같은 신자(臣子)인 것인데 지금 곧 피차(彼此)를 구별하여 현저하게 좌우(左右) 색목(色目)을 가리는 말이 심지어 천어(天語)에서까지 나오게 되었으니, 전하께서는 어찌하여 사람들에게 넓지 못하심을 보이십니까?
오늘날 언로(言路)가 몹시 막혀 있습니다. 조정의 신하들이 어찌 모두 말을 할 줄 모르는 것이겠습니까? 곧 감히 말을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대개 그들의 마음에 생각하기를, ‘오늘날은 진언(進言)한 것이 비록 당시의 병폐에 꼭 맞는 것이라 하더라도 채택하여 써 주는 일을 볼 수 없으니 이는 유익할 것이 없는 일이고, 한마디 말을 하거나 한 가지 일을 논하거나 하면 한결같이 편당하는 의논으로 돌려버리니 더욱 유익할 것이 없는 일이고, 또 혹시라도 기휘(忌諱)에 저촉되는 말을 하면 뇌정(雷霆)같은 위엄을 내리기 일쑤이니, 이것은 두려워할 만하다.’고 하여 대소(大小)의 사람들이 서로 경계하여 함구(緘口)하고 결설(結舌)하게 되는데, 전하께서는 또한 오연(傲然)하게 자성(自聖)의 마음으로 신료(臣僚)들을 가볍게 여기시어 작록(爵祿)을 가지고 온 세상 사람을 구사(驅使)하려고 하시기 때문에 환실(患失)하는 무리들이 오직 함묵(含默)으로 그 자리를 보존하는가 하면 아첨하며 뜻 따르기만을 일삼고 있습니다. 그 사이에 과감하게 말을 하는 신하가 있어 한 마디라도 말을 하면 즉각 배척받게 되어, 더러는 하등 고을에서 지내야 하고 더러는 전선(銓選)의 길이 막히며, 또한 더러는 애매하게 죄적(罪籍)에 오르게 되는데도, 오래도록 견복(牽復)을 아끼므로, 바른 말을 하는 사람은 날로 소원(疏遠)해지고 용렬한 사람은 날로 친근(親近)해지게 됩니다. 오직 전하께서는 다행히도 크게 실덕(失德)한 일이 없으십니다마는, 필경에 나라를 망치게 되는 일이 혹시라도 있게 된다면 결코 하나도 과감하게 간할 사람이 없을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고(故) 신(臣) 최현(崔晛)이 역적의 옥사에 좌죄되어 형벌을 받을 적에, 인조 대왕(仁祖大王)께서 분부 내리시기를, ‘최현이 일찍이 야대(夜對)할 때에 직간(直諫)했기 때문에 내가 자못 고통스러웠는데, 그 뒤에 생각해 보니 참으로 나를 친애(親愛)한 것이었다. 지금 비록 죄가 있기는 하지만 반드시 그때의 마음을 저버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시며 특별히 사형을 감하도록 명하셨으므로 듣는 사람들이 감격한 나머지 눈물을 흘렸습니다. 시험삼아 지난해의 이동언(李東彦)의 일로 보건대, 전하께서는 여러 차례 엄격한 분부를 내리시어 극형(極刑)에 처하려고만 하셨으니, 성조(聖祖)께서 하신 일에는 부끄러움이 없을 수 있겠습니까? 진신(搢紳)들의 사이에도 명분(名分)과 지조가 하나도 없어, 재주 부리는 말이 샘물 솟아나듯하고 아첨하는 말이 날로 퍼지고 있습니다. 지난해의 존호(尊號)에 관한 의논과 요사이의 공주(公主)의 제택에 관한 계청(啓請)과 같은 일은 가장 큰 조정의 수치스러운 일입니다. 세상의 도의가 이렇게 되었으니 오히려 다시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시사(時事)가 자주 변하고 세로(世路)가 험악해지기만 하여, 아비가 자식에게 가르치고 형이 아우에게 권면하고 있는 것이 오직 세속 따라 부앙(俯仰)하는 것으로써 계교를 삼아, 다시 귀중하게 여겨야 하는 경술(經術)과 지조 지키는 일이 있음은 알지도 못하게 되었으며, 한갓 배양(培養)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또한 따라서 떨어뜨려 없애면서 모욕하고 구축(驅逐)하여 다시는 여지가 없게 하였습니다. 심지어는 소장(疏章)을 받지 말라는 명을 갑자기 대신(臺臣)이 기망(欺罔)하는 상소를 올린 다음에 내리게 되었으니, 이는 온 나라 사람들의 입을 겸제(箝制)하고 사방의 사기(士氣)를 꺾어버리려고 하는 것이어서 비록 나라를 망치게 될 근본이라고 하더라도 지나친 말은 아닐 것입니다.
저 교주(敎胄)의 장관(長官)이라는 사람이 어떻게 하는 것이 훈적(訓迪)하는 것인지를 알지도 못하고, 오직 쟁탈(爭奪)하는 마음에 쫓아다니며 간사하고 기구(崎嶇)하게 마음 쓰기를 매우 수고롭게 하다가, 사람들의 비난과 배척을 받게 되어서는 곧 말하기를, ‘내가 그러는 것이 아니라 성상께서 처분하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는 본시 책할 것도 없지만, 신(臣)이 애석하게 여기는 것은 곧 국가 체면을 손상하고 성상의 덕을 더럽히게 될까 하는 것입니다. 아! 나라를 다스리는 도리는 진실한 마음으로 진실한 행정을 하는 것보다 우선하는 것이 없는 법인데, 비국(備局)의 차대(次對)는 모두가 공담(空談)이 되어버리고 경연(經筵)의 진강(進講)은 단지 상례(常例)의 규정만 지키고 있으며, 대소(大小)의 사무를 일체 실체(實體) 밖에 두고 있어 정령(政令)이 전도(顚倒)되고 깎여 없어짐이 일정치 않으므로, 사람들이 마음으로 믿지 않게 되어 국가의 체통이 더욱 가벼워지게 되었습니다. 시험삼아 성(城)을 쌓은 일을 들어 말한다면, 북성(北城)으로부터 도성(都城)을 만들고 도성에서 또한 심도(沁都)에까지 10년 동안에 이루어 놓은 것이 어떤 일입니까? 날쌔게 나섰다가 재빠르게 물러서버리고 시작만 있지 끝맺음은 없어, 시들하게 미루고만 있으므로 이르는 바를 알 수 없습니다. 이것도 오히려 이러하고 있는데, 여타의 것을 논해서 무엇하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답하기를,
“생각하고 있는 것을 상소하여 진달하였음은 대개 은휘(隱諱)하는 마음이 없이 드러낸 것이니, 내가 매우 아름답게 여긴다. 유의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 구사(丘史)들이 드나드는 짓은 이제부터는 금단하겠고, 엄시(閹寺)들의 수종(隨從)은 지나치게 범람하게 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 마땅하겠다. 아! 임금이 싫어하는 일이 당론(黨論)보다 심한 것이 없는데, 그대의 상소에 ‘전하께서도 또한 당론을 면치 못한다.’고 하여, 말의 기세가 격분한 것이 조금도 기탄이 없었으니, 임금에게 고하는 말을 어찌 감히 이렇게 할 수 있겠는가? 지극히 한심스럽다. 그 이외에도 환실(患失)이니 보위(保位)니 용록(庸碌)이니 일친(日親)이니 욕치극형(欲置極刑)이니 등의 말은 가리키는 뜻이 보통이 아니어서, 더욱 해괴(駭怪)하다.”
하였다. 이재(李縡)가 엄격하게 내린 분부 때문에 인피(引避)했는데, 뒤에 정언 서명우(徐命遇)가 처치(處置)하여 중죄인(重罪人)【곧 이동언이다.】을 영구(營救)할 때에 말이 지극히 비뚤어졌다는 이유로 체직시켰다.
【원전】 40 집 329 면
【분류】 *정론-정론(政論) / *정론-간쟁(諫諍) / *왕실-종사(宗社) / *농업-전제(田制) / *사법-치안(治安) / *인사-임면(任免) / *군사-관방(關防)


[주D-001]빈어(嬪御) : 시종(侍從)하는 궁녀(宮女).
[주D-002]구사(丘史) : 임금이 종친(宗親) 및 공신에게 구종(驅從)으로 하사(下賜)한 관노비(官奴婢). 품위(品位)에 따라 수가 정해져 있었음.
[주D-003]청금(淸禁) : 대궐.
[주D-004]액정(掖庭) : 대궐(大闕) 안.
[주D-005]엄시(閹寺) : 내시(內侍).
[주D-006]장부(臧否) : 현명 여부.
[주D-007]숙특(淑慝) : 선악.
[주D-008]하전(厦氈) : 경연청(經筵廳).
[주D-009]우불(吁咈) : 아! 틀렸다고 불찬성을 나타내는 말.
[주D-010]천어(天語) : 임금의 말.
[주D-011]환실(患失) : 벼슬자리를 잃게 될까 근심하는 것.
숙종 1년 을묘(1675,강희 14)
 4월10일 (무술)
대신과 비국의 당상을 인견하여 병거·화차 등과 징포의 일을 의논하다

임금이 대신(大臣)과 비국(備局)의 여러 재신(宰臣)들을 인견(引見)하였다. 허적(許積)이 아뢰기를,
“윤휴(尹鑴)의 주장인 병거(兵車)의 일은 실행할 만합니다.”
하니, 임금이 여러 신하에게 물었는데, 권대운(權大運)·이정영(李正英)·장선징(張善瀓)·민희(閔熙)·유혁연(柳赫然)·김석주(金錫胄)·윤심(尹深)·신여철(申汝哲)이 모두 말하기를,
“사용할 수가 없습니다.”
하였다. 유혁연이 아뢰기를,
“마땅히 먼저 화차(火車)를 만들어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렇다면 화차(火車)를 만들도록 하라.”
하였다. 허적이 인구(人口)의 수(數)대로 포(布)를 거둘 적에 아약(兒弱)과 백골(白骨)에게 포를 징수(徵收)하는 일은 없앨 것을 진계하니, 권대운이 아뢰기를,
“갑자기 실행하면 원망하는 자가 반드시 많을 것입니다.”
하였다. 허적이 아뢰기를,
“국가에서 큰 거조(擧措)를 하려면 비록 원망하는 자가 있더라도 백성들의 부역(賦役)은 균등(均等)하게 될 것입니다. 선조(先朝) 때에 거의 실행할 뻔하였는데도 강백년(姜栢年)이 올린 소(疏) 때문에 도로 중지되었던 것입니다.”
하였다. 권대운이 아뢰기를,
“이 일을 실행하지 못한다면 형세(形勢)가 장차 병역(兵役)에 다시 포를 거두어야 할 것이니, 원망만 증가시킬 뿐 아니라, 나라의 일도 또한 어찌 이와 같이 하겠습니까?”
하였다. 윤심이 아뢰기를,
“유학(幼學) 이하(以下)에게만 부과(賦課)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니, 허적이 아뢰기를,
“구별(區別)을 두어서는 아니됩니다. 마땅히 제상(帝相)들로부터 거두어야 하겠습니다.”
하였다. 집의(執義) 김빈(金)이 아뢰기를,
“고(故) 감사(監司) 최현(崔晛)은 높고 낮음을 따지지 말고 포를 거두어들이기를 청하였으니, 비록 조그마한 폐단이 있더라도 실행함이 좋을 듯합니다.”
하였다. 권대운이 호패(戶牌)의 법을 실행하고자 하니, 허적이 청하기를,
“좌상(左相)이 나올 때를 기다려 서로 의논하소서.”
하였다. 김석주가 무사(武士)를 천거 임용하는 일을 의논하니, 허적(許積)이 청하기를,
“문관(文官)·음관(蔭官)·무관(武官)을 교대로 수령(守令)에 차견(差遣)하소서.”
하였다. 장선징(張善瀓)이 아뢰기를,
“선조(先朝)에서 무신(武臣)을 명하여 호조(戶曹)·형조(刑曹)·공조(工曹) 3조의 낭관(郞官)을 차임(差任)하였습니다.”
하니, 허적이 청하기를,
“무신으로서 3조의 낭관 각 1원(員)씩을 차임하소서.”
하였다. 김석주가 다시 청하기를,
“음관(蔭官)인 감찰(監察) 2원(員)을 무과(武窠)로 개정하소서.”
하니, 임금이 모두 그대로 따랐다. 허적이 말하기를,
“대궐(大闕)안에 공납(貢納)하는 것이 점점 많고 무거워져서 백성들의 원망이 이로 말미암아 일어나게 되니, 신하들을 다스림이 엄하면 이 폐단은 저절로 없어질 것입니다.”
하였다. 이때에 외간(外間)에 떠도는 말로는 ‘임금이 젊은 내시(內侍)들과 노는 것을 좋아하여 하사(下賜)하는 것이 절도(節度)가 없다.’고 하였으므로, 허적의 말이 이와 같았지마는, 감히 끝까지 말하지는 못하였다. 정언(正言) 유명현(柳命賢)이 아뢰기를,
“직강(直講) 이태서(李台瑞)는 일찍이 자기 아비의 잘못을 교묘하게 신설(伸雪)하려는 생각으로 간사한 아전들과 부동(符同)하여 아비의 이름을 지우고 고쳤다가, 사적(事跡)이 탄로(綻露)되었기에 편배(編配)의 형률(刑律)을 받았으니, 어찌 처음 정사(政事)하는 청명한 날 이 직임에 갑자기 임명할 수 있겠습니까? 체차할 것을 청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하였다.
【원전】 38 집 262 면
【분류】 *왕실-국왕(國王) / *군사-군기(軍器) / *재정(財政) / *인사-임면(任免) / *사법-탄핵(彈劾) / *행정-중앙행정(中央行政)


인조 23년 을유(1645,순치 2)
 윤 6월5일 (을유)
전라 감사가 치계하여 적상 산성에 대한 이태연의 논의를 따를 것을 청하다

전라 감사 윤명은(尹鳴殷)이 치계하기를,
“조정에서 봉교(奉敎) 이태연(李泰淵)이 적상 산성(赤裳山城)을 논한 것으로 인하여 신으로 하여금 봉심(奉審)하여 시행하도록 하였습니다.
신이 상고하건대, 만력(萬曆) 경술년에 비국 당상 신경진(辛慶晋)과 어사(御史) 최현(崔晛)이 명을 받들어 순심(巡審)하고서 금산(錦山)의 안성(安城), 옥천(沃川)의 양산(陽山), 영동(永同)의 용화(龍化)를 적상 산성에 할속(割屬)시키기를 청하여, 의논이 이미 정해졌다가 일이 다시 중지되었습니다. 그리고 지난 기묘년에 순검사(巡檢使) 박황(朴潢)이 또 이 일을 말하였고, 또 안성에 거주하는 백성도 안성을 적상 산성에 소속시켜주기를 바라는 청이 있었습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안성·양산·용화 세 현(縣)을 산성에 할속시키고 또 읍호(邑號)를 승격시키고 나면 반드시 재능을 두루 갖춘 문관(文官)에게 그곳 지방관을 제수하여 고을을 잘 다스릴 수 있는 뒷받침으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대체로 적상 산성은 무주(茂朱)의 경내(境內)에 있어 지세가 아주 험준한데, 임진 왜란 이후에 비로소 그 성을 쌓고 묘향산(妙香山)에 있는 실록을 이곳으로 옮겨 저장하였으며, 또 무주의 곡식을 이곳으로 운반해 두어서 위급한 때에 대비하였습니다. 그런데 산중 고을이라 쇠잔하고 척박하여 군사가 적고 군량도 부족하기 때문에 다른 고을을 떼내어서 여기에 보태자는 논의가 일어나 이에 따른 편리한 점을 많이 말하였는데 아직껏 시행되지 못했으니, 이태연이 논한 말에 따라 시행하소서.”
하였는데, 그후에 묘당에서 그 의논을 주장하는 자가 없어 그 일이 끝내 시행되지 않았다.
【원전】 35 집 231 면
【분류】 *군사-관방(關防) / *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 *역사-편사(編史)


[주D-001]경술년 : 1610 광해군 2년.
[주D-002]기묘년 : 1639 인조 17년.
인조 18년 경진(1640,숭정 13)
 7월8일 (정해)
전 강원 감사 최현의 졸기

전 강원 감사 최현(崔晛)이 죽었다. 최현은 영남 사람으로 문예가 있고 단아하기로 이름이 높았다. 반정(反正) 후에 청현직(淸顯職)을 두루 지내고 강원 감사로 나갔다가 이인거(李仁居)의 모반 사건에 연좌되어 폐치되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죽었다.
【원전】 35 집 95 면
【분류】 *인물(人物)

인조 13년 을해(1635,숭정 8)
 2월24일 (을사)
임금에 대한 농담을 한 생원 이기안 등을 추국하다

전라 감사 원두표(元斗杓)가 치계하기를,
“지금 삼례 찰방(參禮察訪) 민희안(閔希顔)의 첩보를 보건대, 생원 이기안(李基安)이 사근 찰방(沙斤察訪) 김경(金坰)과 서로 모여서 농을 하다가, 기안이 험담 끝에, 성상의 잠저 때의 군호(君號)를 들어 하는 말이 ‘아무개 군은 믿을 수가 없다. 그가 오래 갈 수 있을까?’ 하였다고 합니다. 기안의 부도한 말은 차마 들을 수가 없습니다. 의금부로 하여금 처치토록 하소서.”
하니, 기안을 잡아다 추국하라고 명하였는데, 기안이 추국에서 이 사실을 자백하였다. 추국청이 아뢰기를,
“기안이 이미 자백하였습니다. 그의 공초에 나온 백이문(白以文)·김세연(金世淵)·김세렴(金世濂)·이민환(李民寏)·정온(鄭蘊)·최현(崔晛)·이준(李埈)·옥천(玉川)【이원엽(李元燁)의 종.】·유진(有眞)【이원엽의 아내.】·이영식(李英植)【이원엽의 아들이다.】 등도 모두 잡아와야 하겠는데, 그 중 이민성(李民宬)은 이미 죽었으니 나문하지 마소서.”
하니, 답하기를,
“백이문·김세연·이민환·옥천·유진·영식 등은 우선 나문하고, 이기안은 그대로 가두어 두라.”
하였다. 그 뒤에 기안은 처형되고 세연은 형장을 맞다가 죽었으며, 나머지는 모두 석방되었다.
대개 기안이 맨 먼저 ‘왜인에게 청하여 난을 일으킨다.’라는 말을 제창하여 서로 전파하여 조정 대신까지 끌어들이고 인심을 현혹시켰다. 정온까지도 연루되어 사람들이 모두 놀랍게 여겼는데 상이 기안만을 죽이라고 명하였고, 정온·최현·이준은 애당초 잡혀오지 않았으며, 세렴은 잡혀 왔다가 곧장 석방되었고, 그밖의 다른 연루자들도 모두 용서를 받았다. 세연만은 무진 역옥(戊辰逆獄)에 동참한 과거가 있기 때문에 신문을 받다가 죽은 것이다.
【원전】 34 집 586 면
【분류】 *사법-치안(治安)


인조 8년 경오(1630,숭정 3)
 3월14일 (갑오)
우의정 이정구를 보내 풍수설을 아는 사람들을 이끌고 목릉 안의 여러 언덕을 살피도록 하다

우의정 이정구(李廷龜)를 보내 술관(術官)과 지술(地術)을 아는 조사(朝士)들을 이끌고 목릉(穆陵) 안의 여러 언덕을 살피도록 하였다. 전 감사 최현(崔晛), 병조 좌랑 이상형(李尙馨), 전 현감 박홍중(朴弘中), 신령 현감(新寧縣監) 성력(成櫟), 전 참봉 성여춘(成汝櫄)이 참여하였다.
【원전】 34 집 368 면
【분류】 *왕실-종사(宗社) / *사상-토속신앙(土俗信仰)

인조 6년 무진(1628,숭정 1)
 4월10일 (신축)
이귀가 소무 공신과 영사 공신의 책정에 잘못이 있다고 차자를 올리다

우찬성 이귀가 차자를 올리기를,
“소무 공신(昭武功臣)과 영사 공신(寧社功臣) 두 훈적을 감정한 것에 대해 공론이 미심쩍게 여기고 있는데도 전하께서는 원훈이 감정한 것이라는 핑계로 끝내 고치려 하지 않으시니, 신은 몹시 답답합니다. 신경영(辛慶英)과 이윤남(李胤男)이 공도 없이 녹훈에 참여된 것에 대해 나라 사람들이 모두 통분하게 여기고 있으니, 홍보(洪靌)가 속인 것을 차마 말할 수 있겠습니까. 허적에 이르러서는, 역모를 안 지 이미 오래 되었는데도 황진(黃縉) 등이 고변하려 한다는 말을 듣고는 이에 한 장의 서찰을 써서 황진과 허선(許選)에게 부쳐 보냈습니다. 황진 등은 이미 김진성(金振聲) 등과 군사를 일으킬 날을 약속하고서 고변하려 하였으니, 비록 허적의 서찰이 없더라도 고변하지 않았을 리가 만무합니다. 허적이 병을 핑계대고 즉시 자신이 고변하지 않고 단지 한 장의 서찰을 부쳐 보냈으니, 법으로 따진다면 역모를 알고서도 고변하지 않은 죄를 면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신이 탑전에서 고변한 자인 최산휘(崔山輝)와 황진을 수공(首功)으로 삼고 김진성 등 5인을 다음으로 삼으며, 허적이 서찰을 부쳐 보낸 공은 그 다음에 기록하여야 한다고 청하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후에 고쳐 감정하는 날에는 도리어 허적을 수공으로 삼고 최산휘를 3등의 끝에다 기록하였으며, 또 홍서봉은 허적의 서찰을 본 공으로 2등의 위에다 놓았으며, 황진의 아비 성원을 제3등으로 삼았고 허선의 아비 계를 제4등으로 삼았습니다. 황성원과 허계가 고변한 자의 아비라고는 하나 모두 자기 집에 있으면서 즉시 고변하지 않은 것은 허적과 차이가 없으니, 전도되고 착란됨이 심합니다.
그리고 고변한 자 외에 만약 변을 듣고 주선한 공으로 말한다면 김류(金瑬)와 홍서봉이 조금도 차이가 없습니다. 김류는 이미 공훈을 사양하여 허락을 얻었으니, 홍서봉도 마땅히 극력 사양하여 공훈을 차지하지 말았어야 합니다. 그런데 허적에게 그르친 바가 되어서 끝내 사양하지 않았으니, 염치가 너무도 없습니다. 그리고 황성원과 허계·최현(崔晛)은 모두 고변한 자의 아비이기는 마찬가지인데 황성원과 허계는 봉군(封君)되기까지 이른 반면, 최현만은 훈적에 참록되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먼 변방에 쫓겨나 있으니, 어찌하여 공에 보답하는 법의 후하고 박함이 현격하게 다르단 말입니까.
임금이 말을 받아들이는 도리는 그 말이 옳으냐 그르냐를 보고 취사하는 것이며, 모든 일은 타당함을 얻는 것이 귀하니, 진실로 타당하지 않다면 열 번을 고치더라도 해될 것이 없습니다. 전하께서 만약 신의 말이 그르지 않다고 여긴다면 다시 대신과 원훈으로 하여금 정사 공신(靖社功臣)을 감정할 때와 같이 탑전에서 다시 감정하도록 하소서. 그렇게 되면 성상께서 살펴보는 아래에서 어찌 사정(私情)을 따르는 자가 있겠습니까. 바라건대, 신의 간절한 정성을 애처롭게 여기어 속히 다시 사핵하게 하여, 한편으로는 시비를 분명하게 하고 한편으로는 상벌을 공정하게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두 번 세 번 감정한 일을 이와 같이 가볍게 의논하니, 몹시 타당하지 않다. 다시 번거롭게 하지 말라.”
하고, 이어서 전교하기를,
“이귀가 매번 녹훈을 감정한 것이 공정하지 않다고 의심하면서 여러 차례 차자를 올리니, 일이 몹시 소란스럽다. 묘당으로 하여금 일일이 회계하여 그의 의심스런 마음을 풀어주도록 하라.”
하였다. 신흠(申欽)과 김류는 모두 이름이 차자 속에 들어 있어서 감히 회계할 수 없다고 하였다. 오윤겸(吳允謙)이 아뢰기를,
“여러 대신과 원훈이 회의한 다음 품지(稟旨)하여 감정한 것으로, 그때 등급을 정하고 숫자를 가감한 곡절에 대해서는 전후의 차자에 상세하게 갖추어져 있는바, 지금 다시 별도로 의논하기는 곤란합니다. 다만 상께서 전에 감정한 것이 미진하다고 여기시어 다시 고하를 정하고 원수(元數)를 증감하고자 하는 것이라면, 이는 막중한 일이어서 신 한 사람이 회계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만약 이귀가 따진다는 이유만으로 묘당으로 하여금 그의 의혹을 풀어 주게 하고자 하는 것이라면 사체에 있어서 아마도 온당치 못한 점이 있을 듯합니다.”
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답하였다.
【원전】 34 집 269 면
【분류】 *정론-정론(政論) / *인사-관리(管理) / *사법-치안(治安) / *변란-정변(政變)

인조 6년 무진(1628,숭정 1)
 4월8일 (기해)
최산휘가 공신에 오르는 것을 사양하다

부호군 최산휘(崔山輝)가 상소하기를,
“신의 아비 최현(崔晛)이 중한 죄에 빠졌는데, 성상께서 곡진히 용서하시어 끝내 목숨을 보전하게 되니 신 부자는 감읍하여 분골쇄신 충성을 바칠 것만 생각하였습니다. 흉도(凶徒)들의 불측한 말이 마침 신의 귀에 들어올 수 있었던 것은, 대개 신의 아비가 바야흐로 사느냐 죽느냐 하는 갈림길에 있으므로 신이 반드시 화를 좋아하는 마음을 품고 있을 것이라고 여겨서 흉계를 알린 것이니, 몹시 통분스럽습니다. 고해온 흉언의 허실을 처음에는 알지 못했으나 이미 내일 밤에 거사할 것이라고 하였으니, 의심스러워 믿을 수 없는 일이라고 핑계되고 급급히 달려가 고하지 않아서는 절대로 안 될 일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즉시 김류에게 말하고 그로 하여금 훈신과 재신들에 통보하여 여러 대신과 대장들에게 알리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시골에 사는 서생이 사체에 어두워 직접 조정에 나아가 고하지 않은 결과 흉도들을 놓쳐 정형(正刑)을 가하지 못하게 되었으니, 신의 죄가 더욱 큽니다. 그런데도 외람되이 훈적에 기록되었으니, 속히 삭제하도록 명하시어 적소에서 병든 아비를 귀성(歸省)할 수 있게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너는 큰 공이 있어서 이번 공신에 참여한 것이니 무슨 부끄러울 것이 있겠는가. 사양하지 말라.”
하였다.
【원전】 34 집 268 면
【분류】 *정론-정론(政論) / *인사-관리(管理) / *사법-치안(治安) / *변란-정변(政變)


인조 5년 정묘(1627,천계 7)
 11월12일 (을해)
이귀가 이인거 역모에 대한 국문에 하자가 있다는 이유로 삼사를 탄핵하였으나 답하지 않다

우찬성 이귀(李貴)가 차자를 올렸다. 대략에,
“신하에게는 두 임금이 없고 나라에는 두 왕(王)이 없는 것이 천하의 일정한 이치이며 고금의 공통된 의리입니다. 신하된 자가 참으로 ‘진주(眞主)’라는 말이 역괴(逆魁)의 입에서 나온 것을 들은 이상 차마 그대로 듣고 끝까지 캐물으려 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이런 말을 물을 필요가 없다고 하고 캐묻고자 하는 것을 도리어 차마 들을 수 없는 말이라고 하면서 ‘아주 윤리(倫理)가 없다.’고 말하니 이는 한갓 진주(眞主)가 있다는 김유만 옹호하고 역적을 토멸하는 대의(大義)를 모르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김유를 신문하고자 하는 어리석은 신이 윤리가 없는 것입니까, 김유를 신문하고자 하지 않는 대간에게 윤리가 있는 것입니까? 신하로서 그 진주(眞主)의 출처를 캐물으려 하지 않는 대간을 도리어 스스로 순리(順理)이고 윤리가 있다고 하니 군신(君臣)의 의리는 쓸어버린 듯 없습니다. 이는 신하에게 두 임금이 있고, 나라에 두 왕이 있다는 데 가까운 짓이 아니겠습니까.”
하고, 또 말하기를,
“국청(鞫廳)에서 재삼 김유(金裕)와 한인발(韓仁發)을 국문하기를 청한 것은 군신의 분의(分義)를 안 것이라고 할 수 있겠으나, 만약 어리석은 신이 담당했더라면 어찌 두세 번에 그쳤겠습니까. 반드시 죽음으로 간쟁하여 기필코 천청(天聽)을 돌리고 말았을 것입니다. 대간의 체면은 이와는 달라서 재상은 가하다 했더라도 대간은 안 된다고 했으니, 최현(崔晛)의 감사(減死)에 대하여 국청에서 이미 상의 하교가 윤당(允當)하다고 헌의(獻議)하였더라도, 대간은 법률로 따져서 논쟁하는 것이 직분상 당연한 것입니다. 김유 무리의 ‘진주’가 있다고 한 죄는 역적을 토멸하지 않은 최현보다 중한데도 대간은 김유는 버려두고 유독 최현에게만 죄를 주었으니, 과연 무슨 뜻입니까?”
하고, 또 말하기를,
“신의 전번 차자에서 이른바 ‘진주(眞主)가 있는 줄만 알고 전하(殿下)가 계신 줄은 모른다.’고 한 것은 삼사(三司)가 참으로 그런 실상이 있다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하기를 마지 않으면 그 유폐(流弊)가 마침내는 임금을 잊고 나라를 파는 데 이를 것이니, 신의 이 말은 참으로 지나치지 않습니다.”
하였는데, 차자를 들였으나 답하지 않았다.
【원전】 34 집 237 면
【분류】 *정론-정론(政論) / *사법-치안(治安)

인조 5년 정묘(1627,천계 7)
 11월2일 (을축)
주강하다. 청과의 무역, 황주의 성랑 설치에 대한 폐단, 이인거 역모 관련자 처리 등을 논하다

조강에 《중용(中庸)》의 수장(首章)을 강하였다. 지사 이귀(李貴)가 아뢰기를,
“학문을 하는 공부는 이(理)와 성(性)을 구명하는데 있으니 만약 연구하지 않고 범연하게 보아 넘기면 비록 만 권의 책을 읽더라도 위기(爲己)의 학문에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하고, 좌의정 오윤겸(吳允謙)은 아뢰기를,
“심법(心法)의 공부는 단지 계신(戒愼)·공구(恐懼)하는 데 있으니, 반드시 뜻이 전일하여 잡념이 없은 연후에야 마음이 항상 보존되어 외물에 부림을 받지 않게 됩니다. 인군(人君)이 참으로 심법의 요체를 착실히 공부하려면 그 뜻을 연구하고 잠심(潛心)·묵계(默契)하여 체행(體行)하는 터전으로 삼아야 합니다. 또 밤중 사물을 접하지 않는 때에 마음을 성찰(省察)하는 것이 학문하는 요체로 이보다 더 좋은 것은 없습니다.”
하였다. 강을 마치자 오윤겸이 나아가 아뢰기를,
“개시(開市)하자는 청을 완강히 거절하여 만일 흔단을 야기하고 화를 재촉하게 되면 매우 염려스럽게 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시종 완강히 거절하기만은 어려운 형세이다. 만약 봄 가을로 개시하는 것을 정식(定式)으로 하면 편리하고 합당할 듯하나 다만 관서(關西)에 개시한 이후로는 장사치들이 그곳으로만 몰려들어 부산(釜山)의 시장으로 가는 장사치가 많지 않을 것이고 그로 인해 왜노(倭奴)와의 흔단이 생길까도 염려된다.”
하였다. 이귀가 아뢰기를,
“황주(黃州)에 성랑(城廊)을 설치하는데 전결(田結)에 따라 백성을 부려 원망과 비난이 이미 극도에 이르렀습니다. 서쪽 백성들이 혹심한 병화(兵火)의 피해를 입었으니 죽음에서 구원해 주어도 부족한데, 백성을 수고롭혀 쌓인 원망이 이처럼 극도에 이르렀으므로 신이 여러 차례 영장(營將)의 폐단을 말하였습니다. 이제 와서 들으니, 영장의 폐해가 과연 형언하기 어렵다고 합니다. 일마다 조처함이 이처럼 합당함을 잃고서야 어떻게 나라를 다스리겠습니까.”
하였으나, 상이 답하지 않았다. 사간 정홍명(鄭弘溟)이 아뢰기를,
“변란 때 여러 도감(都監)에 저장된 미포(米布)를 추수 후에 상환하기로 약속하고 원하는 사민(士民)과 서민에게 대여해 주었는데 지금까지 갚을 의사가 없다고 합니다. 일일이 거두어 들여 국용(國用)에 보태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이귀(李貴)가 아뢰기를,
“이우(李佑)에 대한 논의를 어제 이미 아뢴 대로 하라고 하셨다 하니, 신은 경악스러움을 금하지 못하겠습니다. 고변자는 죄범(罪犯)이 비록 중하다 하더라도 끝까지 다스려서는 마땅하지 않은데 정광적(鄭光績)의 무리는 단지 공이 있는 이우와 죄 없는 최현(崔晛)만 엄히 다스릴 줄 알았지 역당(逆黨)을 엄히 다스릴 줄은 몰랐습니다. 김유(金裕)는 이인거(李仁居)의 모의에 참여하여 알았고 진주(眞主)의 설도 그의 입에서 나왔으니, 이는 역괴(逆魁)의 심복보다도 더한 자인데 무단히 석방하였습니다. 광적은 장관(長官)으로써 국문에 참여하였는데, 이에는 한 마디도 언급하지 않았으니 매우 한심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은 매양 이러한 말을 하는데, 너무나 무의미한 말이다. 이것이 경의 병통이다.”
하자, 이귀가 대답하기를,
“신은 충분(忠憤)이 격동하여 말을 조심하지 못합니다. 매양 탑전에서 이렇게 진달하는데 한 번도 쓰이지 못하니, 신은 마땅히 물러나 교외(郊外)에 엎드려 부원군의 녹(祿)이나 받으며 여생을 보전해야 하겠습니다. 그렇게 되면 신의 요구가 그칠 것입니다.”
하였다.
【원전】 34 집 234 면
【분류】 *변란-정변(政變) / *사법-치안(治安) / *인사-관리(管理) / *왕실-경연(經筵) / *무역(貿易) / *외교-야(野) / *군사-군정(軍政) / *군사-관방(關防) / *군사-군역(軍役) / *재정-국용(國用)

인조 5년 정묘(1627,천계 7)
 10월5일 (무술)
이인거 역모와 관련하여 전 감사 최현을 국문하다

전 감사 최현(崔晛)이 공술하기를,
“신은 역적의 괴수 이인거를 평소에 전혀 몰랐으나 제법 고사(高士)라는 명성이 있었으며 성상께서도 우대하는 예를 가하여 자주 음식을 제급(題給)하라는 전교를 내리시기에 신도 찬물(饌物)을 보냈었습니다. 지난해 겨울에 인거가 찾아와서 신에게 사례하므로 신이 비로소 만나 볼 수 있었습니다. 그후 인거가 홍보(洪靌)와 신에게 편지를 보냈는데, 내용 중에 불평하는 말이 있었습니다. 홍보가 신에게 ‘인거의 편지에 「만고에 없었던 일이다.」라는 등의 말은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고 하기에 신이 ‘나도 괴이쩍게 여긴다.’ 하였으며, 답장에는 대략 안부만 물었을 뿐이니, 그러한 괴이한 말에는 답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신이 순심(巡審)하며 횡성에 이르자 홍보도 함께 왔는데 이튿날 아침에 인거가 사람을 보내어 ‘상소를 하기 위해 어제 읍내에 와 있다.’고 전하기에, 신이 내일 가서 만나보겠다고 답하였습니다. 홍보가 신에게 ‘아침에 인거를 만나 상소하는 까닭을 물었더니, 장차 창의(倡義)하여 적을 토벌하고자 하는데, 군사 2백여 명을 얻었다고 하더라.’고 하기에 신이 ‘적이 경내에 없으니 지금은 의병을 일으킬 때가 아니다.’ 하니, 홍보는 또 ‘군기와 군량을 어디서 마련하겠는가고 물으니, 인거가 「호서와 호남에 가서 빌리고자 한다. 내가 나라를 위해 적을 토멸하려 하는데 수령으로서 누가 감히 따르지 않겠는가. 따르지 않는 자는 마땅히 참수해야 한다.」고 하더라.’고 하였습니다. 신이 횡성 현감 이탁남(李擢男)과 현에 사는 유학(幼學) 진극일(陳克一)에게 ‘일찍이 이런 말을 들은 적이 있는가?’ 물었더니 모두 모른다고 답하였습니다. 얼마 후 인거가 들어오기에 신이 ‘너의 상소하고자 하는 바가 무슨 일이냐?’ 하였더니, ‘국가에서 오랑캐와 강화를 하여 예의의 나라가 장차 오랑캐가 되게 되었으므로 분개함을 이기지 못해 상소하고 창의하여 적을 토멸하고, 상경하여 숙배한 후에 강화를 주장한 간신 참수하기를 청하고, 이어 서쪽으로 가고자 한다.’고 하였습니다. 신이 ‘적이 이미 물러갔는데 어디서 싸울 것인가?’ 하니, ‘오랑캐의 사신을 참수하고자 한다.’고 하였습니다. 신이 말하기를 ‘오랑캐의 사신을 참수하는 것은 어렵지 않겠으나 적이 만약 대거(大擧)하여 나오면 그 2백 명 의병으로 대적해낼 수 있겠는가? 또 간신 참하기를 청한 것이 옛날에는 혹 있었지만 군사를 일으켜 궁궐을 범한 일도 있었던가?’ 하니, 인거가 나가버렸습니다. 신이 홍보와 이탁남 두 사람에게 ‘만약 조정의 명령을 기다리지 않고 지레 먼저 군사를 일으켜 적을 토멸하고 간신 베는 것을 명분으로 삼는다면 이는 임금의 측근에 있는 간악한 무리를 숙청한다는 것을 빌미로 하는 짓과 다름이 없으니, 곧바로 체포하여야 하는데, 그 사람은 중한 명망이 있는 데다 종적이 아직 드러나지 않아서 문답한 말만으로 잡아 치죄하겠다고 계문(啓聞)하면 조정에서 믿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온 나라가 처사(處士)를 무함하여 죽였다고 할 것이니, 그 실상을 가지고 치계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이튿날 신이 홍보·이탁남과 함께 인거를 찾아갔더니, 인거가 상소의 초안을 꺼내어 보여주기에 신이 말하기를 ‘소의 내용 중 군사를 일으켜 간신을 죽인다는 등의 말은 조정에서 들어줄 리가 만무한데, 허락하기 전에는 결단코 군사를 일으켜서는 안된다.’고 하면서 중지할 것을 반복하여 말하였습니다. 인거가 말하기를 ‘그렇다면 상소의 답이 내리기를 기다리겠다.’고 하였습니다. 신은 갈 길이 바빠서 먼저 일어나며 은밀히 홍보와 이탁남에게 부탁하기를 ‘알려야 할 일이 있으면 모름지기 즉시 통지하라.’ 하였습니다. 신이 홍천(洪川)에 이르러 시열(試閱)할 때에 인거의 소가 이르렀는데, 그 소의 내용에 현저하게 패역한 말은 없었습니다. 만약 받지 않고 물리치면 저지하고 억제하는 것이 되겠기에 그 소를 받아 보냈습니다. 장계에 이른바 ‘군사를 일으키는 것은 그 때가 아닌 듯한데 어떻게 처치하여야 할지 모르겠다.’고 한 말은 조정에서 미리 그 정상을 알도록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날 밤 횡성현 문보(文報)에 ‘현감이 원주에 가 있는데 인거의 아들이 군기(軍器)와 활 30여 장을 훔쳐 냈으나 금지시키지 못하였다.’고 하였기에 신은 이에 그가 군사 일으킨 것을 알고 비로소 치계(馳啓)하였으며, 얼마 후 홍보와 이탁남 두 사람의 보고를 보고는 또 치계하였던 것입니다. 신의 군관이 와서 ‘인거는 단지 그의 무리 30여 명과 관노 영수(永壽)의 집에 있었는데 군사를 동원하기 전에 원주의 군사가 그 집에 달려 들어가 일시에 생포하는 것을 목격하고 왔습니다.’ 하기에 신은 또 그러한 내용을 치계하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대로 홍천에 머물면서 적들을 모조리 다 잡기를 기다려 원주로 이송하였고, 괴수의 처자를 횡성현에 가둔 후에야 춘천으로 나갔습니다.
신이 사람을 알아보는 것이 밝지 못하고 지나치게 사람을 믿어 미리 인거의 역모하는 정상을 알아서 사전에 잡아 다스리지 못하였고, 또 제때에 군사를 거느리고 직접 가서 체포하지 못한 것 등의 죄는 실로 달갑게 받겠습니다. 신이 홍보·이탁남과 서로 밀약(密約)하여 시종 함께 일하면서 한편으로는 들은 대로 치계하고 한편으로는 그의 동정을 살피면서 군사를 정돈하고 계책을 세워 기회를 틈타 나아가 소탕한 것이 한두 번이 아닙니다. 인거가 횡성에서 군사를 모을 때에 이탁남은 원주에 있었고 신은 홍천에 있었는데, 횡성에서 원주의 거리는 40리이고 홍천과는 70리로서, 본현에서 먼저 원주에 보고하여 신에게 전보(轉報)하였으니, 사기(事機)의 완급(緩急)과 장계의 선후는 형세상 면키 어려운 것입니다. 신의 실정을 남김 없이 밝혔습니다.”
하였는데, 국청에서 상이 관대하고 인자하여 최현을 죽이지 않을 것을 알고는 곧바로 조율하기를 청하고 형신(刑訊)을 청하지 않았다. 상이 처음에는 옥사의 체모를 잃은 것으로써 전교하였으나, 금부에서 사죄로 결단하자 특별히 사형을 감하여 유배하라고 명하였다. 양사에서 해를 넘기도록 고집하여 논란하였으나 끝내 윤허하지 않았다.
【원전】 34 집 231 면
【분류】 *사법-치안(治安)

인조 5년 정묘(1627,천계 7)
 10월1일 (갑오)
원주 목사 홍보도 전 익찬 이인거의 역모를 상변(上變)하자, 그 대책을 세우다

원주 목사 홍보(洪靌)가 치계하기를,
“이달 26일, 신이 감사 최현(崔晛)을 따라 횡성현에 갔는데 현에 사는 전 익찬 이인거가 와서 감사에게 ‘내가 소를 올리고자 한다.’ 하므로 감사가 ‘상소하고자 하는 것이 무슨 일인가?’ 하니, 인거가 ‘조정에서 노적(奴賊)과 화친하므로 의병을 일으켜 곧바로 서울로 향하여 화친을 주장하는 간신 한 사람의 머리 베기를 청하고 그대로 서쪽으로 가서 적을 토벌하겠다.’ 하였습니다. 감사가 ‘그렇다면 서쪽으로 간 후에는 곧바로 오랑캐의 소굴을 치겠다는 것인가?’ 하니, 인거가 ‘소굴에 들어갈 수는 없다.’ 하자, 감사가 ‘적은 이미 철수해 돌아갔는데, 어느 적을 치고자 하는가?’ 하니, 인거는 답하지 않고 잠시 후 물러갔습니다. 28일 아침에 감사가 홍천(洪川)으로 출발하였는데, 그때 신이 횡성 현감 이탁남(李擢男)과 같이 인거를 찾아가 보니, 인거가 상소문의 초안을 내 보였는데 고약한 말이 많았습니다. 감사가 ‘군사는 어디에 있으며 몇 명이나 모집하였는가?’ 하니, 인거가 ‘수백여 명을 모집하였다.’고 하였습니다. 감사가 신과 횡성 현감에게 자세히 탐지하여 치보하도록 하였는데, 신은 즉시 관아로 돌아와 장관(將官)에게 명령하여 군사를 모아 변에 대비하게 하였습니다.
29일, 횡성 현감 이탁남이 달려와 ‘이인거가 제멋대로 본현의 장관·출신(出身) 등에게 전령하여 군병(軍兵)을 모으고 있다.’고 하였으니, 인거가 역모한 형상은 명백하여 의심할 나위가 없었습니다. 신이 이탁남과 군마(軍馬)를 거느리고 나아가 토벌하는 한편 감사가 다른 고을에 순시 중이기에 신이 보고 들은 바를 치계합니다.”
하였다. 감사 최현이 인거의 소를 치계하여 올려 보냈는데, 그 소에 이르기를,
“국운이 불행하여 이처럼 어렵게 되었는데 신은 천심(天心)이 왜 전하께 노하여 이런 변이 있게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전하께서는 적변(賊變) 이래로 몸소 갑옷을 입으시고 바람과 이슬을 피하지 않으면서 조종(祖宗)께서 배양해 놓으신 여러 신하와 더불어 콩죽과 보리밥을 먹고 와신 상담(臥薪嘗膽)하면서 한마음 한뜻으로 지성껏 하늘에 빌었어야 했습니다. 그리하였다면 귀신을 감동시키고 천지도 감격시켰을 것인데 하물며 사람이겠습니까. 그러한 자세로 적을 제압하면 어느 적인들 꺾지 못하겠으며, 이로써 공을 도모하면 무슨 공인들 이루지 못하겠습니까. 전하께서 중흥할 수 있는 근본은 오로지 이에 있는데, 이는 하지 않고 안으로는 오랑캐의 사신 접대를 일삼고, 밖으로는 눈치나 살피는 것으로서 계책으로 삼으니, 무슨 까닭입니까. 이것이 천지와 귀신이 함께 분노하는 바입니다. 대체로 흉노(匈奴)는 스스로 천도를 저버렸기 때문에 천하의 큰 적(賊)입니다. 제 아비를 죽이고 어미를 아내로 삼으니, 이른바 견융(犬戎)이라고 하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2백 년의 역사를 지닌 예의의 나라가 도리어 견융의 땅이 되었으니, 종사(宗社)는 어디에 의지하고 성묘(聖廟)는 어디에 의탁하겠습니까. 그리고 오랑캐의 풍습을 차마 하겠습니까. 생각이 이에 미치니 차라리 일찍 죽어서 편안한 것만 못하겠습니다. 신이 비록 몸은 빈천(貧賤)하나 성품은 사람이니 의리를 따져 나서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신은 대의(大義)를 앞장서 제창하여 분연히 군사를 일으킨 것입니다. 원하건대 신이 군사 일으킨 것을 망령되다 하시지 말고 특별히 병권(兵權)을 내려 주시어 토적(討賊)의 대의를 펴게 한다면 화친을 주장한 매국(賣國)의 간신을 목베어 전하의 만세(萬世) 수치를 씻은 연후에 숙배(肅拜)하고 서쪽으로 내려가겠습니다. 신은 너무나 강개(慷慨)스럽고 괴로운 마음을 금하지 못하겠습니다.”
하였다. 빈청(賓廳)이 계청하기를,
“급히 선전관을 보내 그 종적(蹤跡)을 탐지하고, 관찰사 최현을 나문(拿問)하고 새 감사를 차송(差送)하며, 또 대장(大將) 한 사람을 보내어 포수(砲手)와 서울의 군사, 그리고 기내(畿內)의 병사를 이끌고 전진하여 격멸하게 해야 합니다. 그리고 수원(水原)의 군병도 체신(體臣)으로 하여금 전령(傳令)하여 올라오게 해야 합니다. 저 적이 충청도로 향할 뜻이 있다고 하니, 감사와 병사에게 비밀히 하유하여 힘을 합쳐서 체포하게 해야 합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이 적은 곧 잡히겠지만 혹시라도 연결된 곳이 있을까 싶으니, 예방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경상도와 전라도에 은밀히 하유하고, 신경인(申景禋)을 토포사(討捕使)로 삼아 포수 7백 명을 거느리고 먼저 양주(楊州)로 가게 하며, 초군(哨軍)은 양주의 영장(營將)으로 하여금 거느리고 전진하게 해야 합니다.”
하고, 또 계청하기를,
“승전색(承傳色)과 선전관(宣傳官)을 파견하여 역적 집안의 문서를 수색하게 하고, 해당 부(府)로 하여금 그 처자를 잡아오게 해야 합니다.”
하니, 상이 모두 그대로 따르고, 드디어 오숙(吳䎘)을 강원 감사(江原監司)로 삼았다.
【원전】 34 집 228 면
【분류】 *사법-치안(治安) / *변란-정변(政變)

인조 5년 정묘(1627,천계 7)
 5월30일 (을미)
용천 부사 정봉수가 쌀을 구한 경위를 치계하다

용천 부사(龍川府使) 정봉수가 치계하였다.
“양곡이 다 떨어지고 전염병이 크게 성하여 죽은 노약자가 1천 3백 70여 명에 이르고 도망간 자의 수도 이와 비슷합니다. 그러나 어찌할 계책이 없어 성중의 마소 40여 두를 거두어 모영(毛營)에 팔아 양곡 1백여 포를 사와서 겨우 다급한 목숨을 구제하였습니다.
당차(唐差) 모영선(毛永璇)이 급한 사정을 모영에 보고하자 다행히 독부(督府)가 불쌍히 여겨, 쌀 7백 포를 내주는 은혜를 입었습니다. 안위(安衛) 이찬(李穳) 등이 피잡곡(皮雜穀) 7백 90여 포를 가져왔고, 성준구(成俊耉)가 은(銀) 3백 냥과 인삼 30근을 보내왔으며, 김기종이 은 3백 냥을 보내왔고, 개성 유수 조익(趙翼)이 인삼 50근과 은 38냥을 보내왔으며, 강원 감사 최현(崔晛)이 전마(戰馬) 1필, 면포(綿布) 50필, 영전(令箭)·화약(火藥)·연환(鉛丸) 등의 물건을 보내왔고, 강서 현령(江西縣令) 조신준(曺臣俊)이 은 50냥을 보내왔습니다. 보내온 은화(銀貨)를 가지고 가도(椵島)에 가서 쌀을 무역해 오다가 불행하게도 풍랑에 배가 전복되었는데 쌀은 거의 다 건져내어 지금 다시 배에 싣고 떠났습니다.
성중의 군졸들은 쌀을 무역해 온다는 말을 듣고부터는 도망갈 생각을 조금 덜하나 새로 도착한 의주 사람들은 점차 몰래 도망가서 지난달에 3천 명이던 것이 지금은 3백 명도 되지 않으니 실로 가슴 아픕니다. 전후 참획(斬獲)한 21급(級)은 모영으로 보냈습니다.”
【원전】 34 집 208 면
【분류】 *군사-병참(兵站) / *보건(保健) / *외교-명(明) / *외교-야(野)

인조 5년 정묘(1627,천계 7)
 5월10일 (을해)
비국이 적상 산성을 수리하여 지킬 것을 청하다

비국이 아뢰기를,
“적상 산성(赤裳山城)은 형세가 나라 안에서 으뜸이니 성을 수축하고 곡식을 저축하여 꼭 지켜야 할 곳으로 삼는다면 삼남(三南)의 한 보장(保障)이 되기에 충분합니다. 전에 최현(崔晛)의 상소로 인하여 서서히 의논해서 시행하겠다는 전교가 계셨습니다. 그러나 지금 호남 유생 양귀생(梁貴生) 등의 상소를 보니 본도의 민심을 잘 알 수 있습니다. 상소에 이른바 ‘수령 중에서 물정(物情)을 알고 민심을 얻은 자를 골라 그 일을 전담시키면 시행하는 데 큰 힘을 들이지 않고도 일을 이룰 수 있다.’고 한 말은 요령을 터득했다고 할 만합니다. 대체로 얼음이 언 뒤에 적이 다시 온다면 한강 이남에는 지킬 만한 데가 한 곳도 없습니다. 그러나 이 성만은 현재의 규모에 약간의 보수만 더하고 백성들을 모집하여 그들로 하여금 수호(守護)하게 하면 됩니다. 다만 곡식과 무기를 비축하는 한 가지만은 본도 감사로 하여금 상황을 살피고 물력을 요량하여 자세히 계문(啓聞)하고 편의에 따라 조처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원전】 34 집 201 면
【분류】 *군사-관방(關防)
인조 5년 정묘(1627,천계 7)
 1월18일 (병술)
비국이 이서와 최현에게 임진강 수비를 맡기지 않는 것이 좋다고 아뢰다

비국이 아뢰기를,
“이서와 최현(崔晛)으로 하여금 임진강을 수비하도록 하는 것이 편리할 지의 여부를 의논해 처리하라는 분부를 하셨는데, 임진강은 상하 50리에 곳곳이 얕은 여울이고 군병은 고단하고 세력은 약하니 한 번이라도 실수하는 날이면 차례대로 와해될 것입니다. 남한 산성에 전력하여 강도를 응원하도록 하는 것만 못합니다. 이서가 이미 같이 수비하지 않는다면 관동(關東)의 수천 명의 군병이 남아 있더라도 유익할 것이 없습니다. 또 최현도 오랫동안 본도를 떠나 있을 수 없으니 도로 보내도록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원전】 34 집 160 면
【분류】 *군사-관방(關防)
인조 4년 병인(1626,천계 6)
 8월27일 (병인)
과장의 폐단, 모문룡의 정세, 호패 어사 발송, 언관 대우, 인성군 간호에 대해 논함

상이 좌의정 윤방(尹昉)과 도체찰사 장만(張晩), 충청 감사 권반(權盼), 강원 감사 최현(崔晛)을 인견(引見)하였다. 윤방이 아뢰기를,
“신은 병이 아직 완쾌되지 않았지만 국가에 일이 많아 부득이 억지로 나왔습니다. 원소(園所)에 행행하실 날짜가 박두하였습니다. 성상의 지극한 정이야 어찌 가이 있겠습니까마는, 날씨는 춥고 해는 짧은 데다 거리까지 가깝지 않으니, 밤을 지내고 왕복하는 것은 매우 불편한 일입니다. 내년에 이장(移葬)하는 행사가 있을 것이니, 명년 봄을 기다려서 하시는 것이 어찌 온편하지 않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것을 내가 어찌 모르겠는가. 그러나 정리상 그만 둘 수 없다. 더구나 이미 택일하였고 부교(浮橋)도 만들어졌으니, 이제 와서 중지한다 하더라도 폐단을 제거하는 것이 얼마나 되겠는가. 나는 질병이 조금도 없으니, 갔다 오는 데 무슨 손상이 있겠는가.”
하고, 또 이르기를,
“요즘 삼공(三公)이 정고(呈告)한 데다 시사(時事)가 걱정스러워 매우 민망하다. 경이 오늘 출사하니 매우 기쁘다.”
하였다. 윤방이 아뢰기를,
“우상(右相)이 과장(科場)의 일에 연관되어 불안하여 인혐하고 들어갔습니다. 신은 우상과 알고 지낸 지 오래입니다만, 자제(子弟)를 위해서 사(私)를 행사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대간도 어찌 우상이 사를 행사하였다고 한 것이겠는가. 사람들의 말이 다 옳은 것은 아닐 것이며, 설사 사정(私情)을 부린 일이 있다 하더라도 우상이 어찌 알았겠는가.”
하였다. 윤방이 아뢰기를,
“요즘 서쪽 변방의 일이 염려스럽기 때문에 체찰사가 내려가려고 합니다. 남이흥(南以興)과 이완(李莞)은 곧 변이 일어날 것이라 여기는데, 여기서 보기에는 그렇게 급박한지를 모르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만일 뜻밖에 변이 생기면 사세에 따라 대처해야 하겠지만, 곧 일이 일어나기야 하겠는가.”
하였다. 장만이 아뢰기를,
“대체로 사태가 발생한 뒤에 대응하는 것이 옳지, 격동해서 자초해서는 안 됩니다. 그가 중국을 배반하여 반역의 정상이 분명하게 드러나면 천하가 함께 토벌하여야 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정상이 분명치 않은데 먼저 격동하여 치게 되면, 천하 사람들이 혹 ‘모장(毛將)이 오래도록 그 나라에 있으면서 군량을 요구해 왔기 때문에 그의 침해를 싫어하여 그러한 일이 있었다.’고 할 것이니, 그 역시 두려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신은 경솔하게 움직일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반역의 정상은 있지마는 이완의 무리는 지나치게 경솔히 행동하니, 만일 조정에서 조차 선동하게 되면 변방의 장수들이 필시 서로 더욱 격동할 것이다. 이 일은 잘 처리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하였다. 장만이 아뢰기를,
“남장(南將)이 은밀히 격문을 우리에게 보내면 우리는 이를 근거로 삼아 도와야 할 것이며, 중국에 주문(奏聞)하는 일에도 내세울 말이 있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우리 나라는 따라서 하는 것은 옳으나 스스로 판단해서 하는 것은 안 된다. 그가 먼저 행동하기를 기다려서 우리는 그에 대응해야 하니, 경은 내려가서 여러 장수들에게 이 뜻을 유시하도록 하라.”
하였다. 윤방이 아뢰기를,
“어사에 관한 일은 아직 결정되지 않았는데, 감사 두 사람이 지금 입시하였으니, 그에 대한 편리 여부는 하문해 보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2∼3개월 물려서 보내려고 하는데, 그 동안에 과연 이해(利害)되는 것이 있는가?”
하였다. 윤방이 아뢰기를,
“감사와 수령이 정돈해 놓은 다음에 어사를 보내는 것이 편할 듯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어사가 가면 백성들에게 어떤 피해가 있으며, 수령이 직접하면 백성에게 어떤 편리함이 있는가?”
하자, 권반이 아뢰기를,
“어사와 수령이 별로 다를 것은 없으나 민심이 그러합니다.”
하였다. 윤방이 아뢰기를,
“국가의 거조는 민심에 순응해서 조처해야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면 천천히 보내도록 하라.”
하였다. 윤방이 아뢰기를,
“요즘 성상께서 언관을 대우하심이 전과 다릅니다. 언관의 말이 그르면 받아들이지 않으면 될 뿐인데, 특별히 체차까지 한 것은 잘못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의 말이 옳다. 하지만 목성선은 말이 비록 적중하지는 않았지만 구언(求言)으로 인하여 진언(進言)하였다. 처음 정언(正言)에 제수하자 논박하여 체직하였고, 이제 또 제거하려고 하니, 어떻게 이토록 심한 일이 있단 말인가. 목성선이 비록 ‘조정이 이이첨(李爾瞻)이 용사할 때보다 못하다.’고 하였더라도 스스로 돌이켜 보아 그렇지 않으면 무슨 관계가 있겠는가.”
하였다. 상이 또 최현(崔晛)에게 이르기를,
“인성군(仁城君)이 도내에 있는데 근래에 계속 중병을 앓고 있으니, 경은 각별히 후하게 대우해 주도록 하라.”
하니, 최현이 아뢰기를,
“감히 마음을 다하지 않겠습니까.”
하였다. 이어 장만에게 호피(虎皮)와 궁전(弓箭)을 하사하고, 권반과 최현 등에게 호피와 궁전을 하사하였다.
【원전】 34 집 136 면
【분류】 *왕실-종친(宗親) / *왕실-사급(賜給) / *왕실-국왕(國王) / *왕실-행행(行幸) / *군사-군정(軍政) / *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 *행정-중앙행정(中央行政) / *호구-호적(戶籍)
인조 4년 병인(1626,천계 6)
 7월18일 (무자)
정경세·윤지경·이명 둥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정경세(鄭經世)를 대사헌으로, 윤지경(尹知敬)을 사간으로, 이명(李溟)을 경기 감사로, 최현(崔晛)을 강원 감사로 삼고, 특명으로 권반(權盼)을 충청 감사로, 김기종(金起宗)을 도로 충청 수사로 삼았다. 김기종은 사람됨이 진실하지 못했으나 청고(淸苦)하려고 노력했으며, 또 일을 다스리는 능력이 있었으므로, 이르는 곳마다 명성이 있었다. 그러나 사람들로부터 부정한 방법으로 출신(出身)했고 규방을 잘 다스리지 못했다는 비방을 받았다. 이민구(李敏求)를 임천 군수(林川郡守)로 삼았다. 이민구는 승지로 있을 때 편파적인 행동을 했기 때문에 이 명이 있게 된 것이다.
【원전】 34 집 126 면
【분류】 *인사-임면(任免) / *인물(人物)


인조 4년 병인(1626,천계 6)
 윤 6월24일 (갑자)
민여임·최현·김시양에게 관직을 내리다

민여임(閔汝任)을 공조 참판으로, 최현(崔晛)을 좌부승지로, 김시양(金時讓)을 경상 감사로 삼았다.
【원전】 34 집 119 면
【분류】 *인사-임면(任免)

인조 4년 병인(1626,천계 6)
 2월18일 (신묘)
이귀·최현·이준·신계영·정홍명·심지원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이귀(李貴)를 연평 부원군(延平府院君)으로, 최현(崔晛)을 승정원 우부승지로, 이준(李埈)을 시강원 보덕으로, 신계영(辛啓榮)을 필선(弼善)으로, 정홍명(鄭弘溟)을 이조 정랑으로, 심지원(沈之源)을 홍문관 수찬으로 삼았다.
【원전】 34 집 75 면
【분류】 *인사-임면(任免)


인조 2년 갑자(1624,천계 4)
 1월26일 (신사)
최현을 독전 어사로 삼아 서로에 내려보내다

최현(崔晛)을 독전 어사(督戰御史)로 삼아 서로(西路)에 내려보냈다.
【원전】 33 집 574 면
【분류】 *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 *변란-정변(政變) / *군사-군정(軍政)


인조 3년 을축(1625,천계 5)
 10월17일 (임진)
세자의 작헌례 및 입학시의 부·빈객과 이하 관원에게 상을 내리다

상이 하교하였다.
“세자의 작헌례(酌獻禮) 및 입학할 때의 부(傅) 좌상 윤방에게는 호피(虎皮) 1령(領)을, 빈객(賓客) 예조 판서 김상용(金尙容)에게는 표피(豹皮) 1령을, 박사(博士) 대제학 김류에게는 숙마(熟馬) 1필(匹)을, 보덕(輔德) 정종명(鄭宗溟)에게는 가자(加資)를, 대사성(大司成) 최현(崔晛)과 필선(弼善) 오준(吳竣)에게는 각각 아마(兒馬) 1필씩을, 묘사 전사관(廟司典祀官)·배시(陪侍)·시강원 관원에게는 각각 상현궁(上弦弓) 1장(張)씩을, 익위사 관원에게는 각각 부장궁(不裝弓) 1장씩을 장명(將命) 생원(生員) 이행진(李行進)에게는 《맹자》 1질을, 봉향(奉香) 생원 한필명(韓必明)과 봉로(奉爐) 생원 이유수(李幼洙)에게는 《중용》·《대학》 중에서 각각 1질 씩을, 집사(執事) 생원 유경소(柳景紹) 등 7인에게는 지필묵(紙筆墨)을 하사하고, 관하인(館下人)들은 해조로 하여금 미포(米布)를 제급(題給)하게 하라.”
【원전】 34 집 37 면
【분류】 *왕실-종친(宗親) / *왕실-사급(賜給) / *왕실-의식(儀式) / *인사-관리(管理) / *교육-인문교육(人文敎育)

인조 3년 을축(1625,천계 5)
 3월6일 (갑인)
대사성 최현이 사직을 청하다

대사성 최현(崔晛)이 상소하여 사직하니, 답하기를,
“상소를 보고 자세히 알았다. 그대는 재질과 학문이 그 소임을 감당할 만하니 힘을 써서 크게 선비들의 풍습을 고치라.”
하였다. 최현은 본래 학식이 없고 잡술(雜術)을 일삼았으며 성품이 또한 어두워 명망과 실제가 맞지 않은 자였으므로, 성균관 대사성에 제배되자 실망하는 선비가 많았다.
【원전】 33 집 686 면
【분류】 *인사-임면(任免) / *인물(人物)

선조 40년 정미(1607,만력 35)
 3월23일 (병술)
정사가 있어 정창연·홍여순·허성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정사(政事)가 있었다. 정창연(鄭昌衍)을 좌참찬으로, 홍여순(洪汝諄)을【거리낌없이 탐욕스러운 행위를 하였으므로 사람들이 더럽게 여겨 욕하였다.】 우참찬으로, 허성(許筬)을 예조 판서로, 신흠(申欽)을 상호군(上護軍)으로, 이수일(李守一)을 호군(護軍)으로, 오백령(吳百齡)을 사인(舍人)으로, 이육(李堉)을 종부 정(宗簿正)으로, 박동망(朴東望)을 내자시 정(內資寺正)으로, 이필영(李必榮)을 상의원 정(尙衣院正)으로, 송석경(宋錫慶)을 사직(司直)으로, 허균(許筠)을 삼척 부사(三陟府使)로, 이형원(李馨遠)을 병조 정랑으로, 유업(柳)을 병조 좌랑으로, 최현(崔晛)을 검열(檢閱)로, 이희성(李希聖)을 경흥 부사(慶興府使)로, 우치적(禹致績)을 북도 우후(北道虞候)로 삼았다.
【원전】 25 집 318 면
【분류】 *인사-임면(任免)

선조 40년 정미(1607,만력 35)
 12월17일 (을해)
간원에서 전 검열 최현·삼척 부사 한덕을 탄핵하다

간원이 아뢰기를,
“지난번 상께서 편찮으실 때에 온 나라가 당황하여 비록 말미를 받아 시골에 내려간 자와 산직(散職)으로 지방에 있는 사람들까지도 급히 예궐(詣闕)하지 않은 자가 없었는데, 전 검열(前檢閱) 최현(崔晛)은 가까이 모시는 반열에 있으면서도 버젓이 시골 집에 돌아가 있었고 소명(召命)을 두 번이나 내렸는데도 신병(身病)으로 핑계하여 끝내 올라오지 않았으니, 자못 신하로서 임금의 병에 급히 달려가는 의리가 없습니다. 파직을 명하소서. 삼척 부사(三陟府使) 한덕(韓德)은 부임한 뒤로 오로지 약탈만을 일삼아 민간의 출궐(出闕)에 반드시 포자(布子)를 징수하니 온 경내가 시끄럽고 원성이 날로 심해집니다. 파직을 명하소서.”
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답하였다.
【원전】 25 집 378 면
【분류】 *정론(政論) / *인사-임면(任免) / *인사-관리(管理) / *사법-탄핵
  광해군 2년 경술(1610,만력 38)
 2월8일 (갑인)
정각·이귀·민덕남·유경종·유희분·오억령·최현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정각(鄭殼)을 평산 부사(平山府使)로,【정각은 임인년에 대간이 되어 힘을 다해서 성혼(成渾)을 공격하고 당여(黨與)를 모아 들인다고 지적하였는데 자기편 사람 중에서도 그를 그르게 여기는 자가 있자 글이 짧아 실언을 하였다는 이유로 피혐하였다.】 이귀(李貴)를 숙천 부사(肅川府使)로,【이귀는 뜻이 크고 말이 곧았으며 성질이 우직했다. 이이와 성혼을 스승으로 높이고 이 두 사람이 무함당한 것을 분하게 여겨 글을 올려 분소(分疏)한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정인홍이 대사헌이 되었을 때 이귀가 소를 올려 인홍의 잘못과 악행을 곧바로 지척하여 조금도 돌아보는 바 없이 하니 사람들이 그를 소마(疏魔)로 지목하였다. 또 나라일을 담당하면서 견해가 있으면 말을 하였으며, 공무를 수행할 때는 법을 받들어 흔들리지 않았고 이해를 돌아보지 않았으며, 강포한 무리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당돌하고 과감하며 순서를 기다리지 않고 감정대로 행동하였다. 이 때문에 세상의 비방을 사서 가는 곳마다 낭패를 보았다.】 민덕남(閔德男)을 사간으로,【덕남의 사람됨은 용렬한데 유영경 때는 오랫동안 청반(淸班)에 있었고 지금은 유희분에게 빌붙어 시망(時望)이 더욱 중해졌다.】 유경종(柳慶宗)을 집의로,【유경종은 전에 간관이 되었을 때 허준(許浚)의 일을 논하려 하다가 김대래(金大來) 등에게 배척당하였는데 이번에 다시 청반의 대열에 들게 되었다.】 유희분(柳希奮)을 이조 참판으로,【유영경 때부터 늘 청반에 있었는데 상이 즉위하자 그 권세가 막강해졌다. 그러나 정창연(鄭昌衍)이 전조(銓曹)의 장이고, 각각 당여를 두고 있으므로 희분이 누차 요직을 사양해 오다가 이때에 이르러 아전(亞銓)이 되자 다시 사양하지 않으니, 〈 권세가 다 그 사람에게로 돌아 갔다.〉 대저 왕이 즉위한 뒤에 전조는 정창연 부자와 유희분 형제가 서로 주고받는 자리가 되었으나 왕이 둘 다 용인해 주었으니 〈 시정을 알 만하다.〉 .】 오억령(吳億齡)을 병조 참판으로,【사람됨이 온화하고 단정하며 지조와 행실에 오점이 없었다. 〈 평소 거칠고 사나운 얼굴빛과 욕하고 꾸짖는 소리가 없어 그를 대하면 사람으로 하여금 야비한 마음과 인색한 마음이 저절로 사라지게 만들었다.〉 항상 부드러운 말씨로 경계하였으며 면전에서 거절하거나 조정에서 다투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으므로 비록 사론이 둘로 갈라졌어도 늘 청아한 명망을 보존하고 있었다. 말년에는 이이첨에게 거슬림을 당하여 개성 유수가 되어 〈 잠시 해서(海西)를 안찰한 적이 있었다. 나중에는 늑장을 부리며 잠자코 따르기만 하고 관록을 유지하기 위하여 비굴하게 굴었다는 기롱을 면치 못했으니 애석하다.〉 】 최현(崔晛)을 지평으로, 유희량(柳希亮)을 전적으로 삼았다.【유희량은 유희분의 아우이다. 출신(出身)이 된 지 얼마 후에 한림원의 설서와 정언을 거쳐 곧바로 전랑(銓郞)이 되니 그때 사람들이 서둘러 천거하고 이끌어서 아첨으로 척리(戚里)에 붙으면서도 오히려 미치지 못할 듯이 하고 있었는데 〈 청론(淸論)을 주장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희량도 사론을 칭탁하여 잘난 체하였으니 희분과는 조금 달랐다. 윤승훈(尹承勳)·허성(許筬) 등 문하의 명사들이 다 그를 허여하여 호를 청척리(淸戚里)라고 하였는데 실은 모두가 탁란(濁亂)을 야기시키는 장본인들이었다. 그러나 왕은 유희분처럼 그를 대우하지는 않았다.】
【원전】 31 집 493 면
【분류】 *인사-임면(任免)

광해군 2년 경술(1610,만력 38)
 2월11일 (정사)
자신의 파직을 지평 최현이 청하다

〈 지평 최현(崔晛)이 아뢰기를,
“신이 지난 무신년 겨울에 성절사의 서장관으로 사신(使臣) 신설(申渫)·윤양(尹暘) 등을 따라 갔다가 북경에서 돌아올 때, 예부의 회답 자문을 받아가지고 나왔습니다. 봉함이 매우 조밀하였고 또 ‘조선국 권서 국사 개탁(朝鮮國權署國事開坼)’이란 아홉 글자가 있었으므로 지엄한 국서를 먼저 열어 본다는 것은 마음이 편치 않은 일이기에 그대로 싸가지고 조정에 돌아왔던 것인데 그 속에 미안한 말이 있을 줄은 몰랐습니다. 그런데 양사가, 흐리멍덩하게 받아가지고 와서 조정에 욕을 끼쳤다는 죄로 아울러 논하고 옥에 가두어 추고하기까지 하였으니, 놀랍고 황공하여 몸둘 바를 몰랐습니다. 만 번 죽어도 오히려 달게 여길 것인데, 성상께서 특별히 굽어살피시어 마침내 은총으로 용서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형편없이 사명을 받은 죄가 신상에 붙어 있어서 마치 실절한 아낙네나 패전한 장수와 같으므로 백관의 반열에 설 면목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시골로 돌아가 묻혀 살면서 허물을 반성하고 있었는데, 뜻하지 않게 지난해 겨울에 다시 사간원의 직을 제수하시고 역마를 이용하여 올라오라는 부르심의 은총을 특별히 받았습니다. 비록 도중에 발생한 병 때문에 대궐에 나아가 스스로 진달하지 못하였으나 위축되어 편치 못한 마음과 부르시는 명을 저버린 죄가 이에 이르러 극도에 달하였습니다.
국상(國祥)의 기일이 가까워짐에 신민이 함께 슬퍼하는데 감히 몸에 죄가 있고 병이 있다고 하여 물러가 사실(私室)에 있지 못하고 병든 몸을 이끌고 와서 반열을 따라 교위(校尉)의 인원수를 채운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이 대헌(臺憲)의 직을, 이미 시험해 보신 형편없는 신에게 다시 더하시니, 부끄러운 마음이 들뿐만 아니라 사람들의 꾸지람을 받게 되었습니다. 은혜에 감사하는 마음은 있으나 명기(名器)에 욕을 끼쳤으니 어찌해야 합니까. 신의 관직을 파척하여 대간의 풍기를 격려하소서.”
하니, 사직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다.〉
【원전】 태백산본
【분류】 *외교-명(明) / *왕실-종사(宗社) / *인사-임면(任免)

광해군 2년 경술(1610,만력 38)
 5월7일 (신해)
사과 최현이 산림의 발탁을 상소하니, 의논토록 하다

사과(司果) 최현(崔晛)이 상소하기를,
“미천하고 보잘것없는 신이 밝은 시대를 만나서, 지금 왕세자의 관례를 행하는 날에 백관의 반열에 서서 모시게 되었습니다. 우러러 훌륭하신 자질을 보게 되니 비록 나이는 적으나 하늘이 내린 훌륭한 자질이었습니다. 주선(周旋)하여 나가고 물러나는 것이 모두 법도에 맞았으며, 거동과 말은 모두 법도에 어긋남이 없었습니다. 참석했던 신하들이 머리를 맞대고 서로들 축하하면서 모두들 전하께서 일찌감치 나라의 근본을 정하시어 종묘 사직과 백성을 위한 계책이 여러 왕보다도 훌륭한 점에 대하여 우러러 보았습니다. 그리고 다시 많은 궁료들을 선발하여 그들로 하여금 아침 저녁으로 학문을 강론하게 하셨으니 보필하여 기르는 도리가 지극하고도 극진하다고 하겠습니다. 아무튼 생각해 보면 태자의 나이가 장성하지 못하고 신기가 충실하지 못하므로 진실로 하루 종일 책을 읽고 외우기만 하여 심신을 피곤하게 해서는 안 될 것이니, 요컨대 한가하게 학문의 깊은 뜻을 완미하여 게으르고 흐트러지지 않게 하면 된다고 봅니다. 기거하고 동작하는 가운데 섭양하는 공력이 글을 읽고 외우는 때에 더욱 절실하다고 하겠습니다. 돌아보건대 춘추가 비록 어리지만 세월은 쉽게 흐르는 것이니, 지금과 같이 뜻과 생각이 집중되고 전일하여 기호가 정해지지 않은 때에 몽양(蒙養)하는 공력을 주밀하게 하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만약 한 푼만큼 더 힘쓰신다면 한 푼만큼의 효과가 나타날 것이며, 한 푼만큼 게을리 하신다면 한 푼만큼의 해가 있을 것입니다. 한 푼이 모여서 자[尺]와 치[寸]에 이르게 되고, 자와 치가 모여서 심(尋)과 장(丈)에 이르게 되는 것이니, 성인(聖人)이 되거나 미치광이가 되는 갈림길은 바로 오늘에 있다고 하겠습니다.
이른바 학문이라고 하는 것은 총명을 계발하는 것이 위주이므로, 문자의 음과 해석에 있지 않으며, 이른바 보익(輔翼)한다는 것은 훌륭한 덕을 성취하는 것이 위주이므로, 말단을 추구하는 데에 있지 않은 것입니다. 삼가 요즈음 시강하는 관리들을 살펴보건대, 인원수는 비록 많으나 혹은 다른 직책을 겸하고 있기 때문에, 분주하게 직무에 종사하고 나서 온전하게 학문을 연마하는 실효를 얻기가 어렵습니다. 따라서 예전에 배운 학문은 거칠어지게 되고 새로이 배우는 것도 적습니다. 자기의 소견이 투철하지 못하다면 입시하여 어떻게 짧은 시간에 깊은 뜻을 환히 해석할 수 있겠습니까. 조종조에서 경서를 강론하는 신하를 별도로 선발하여 세월을 두고 길러서, 그들로 하여금 전심 전력하여 학문을 강론하게 하였던 것은 그 뜻이 있어서였습니다.
무릇 세상에서 말하는 ‘학문이 넓고 예를 좋아하는 자’가 간혹 산림에 묻혀 있으나 일상적인 관례에 구애되어 시강관의 자리에는 오르지 못하고 있으므로, 스승과 벗으로 삼을 만한 어진이를 끝내 가까이 접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경연에 참석하는 신하도 경전과 사서의 깊은 뜻을 완미할 여가가 없어서 범범하고 유유하게 형식적인 겉치레에서 벗어나서 못하므로, 오히려 사대부의 집안에서 자제들을 위하여 스승과 친구를 택해 주어 책 상자를 짊어지고 그들을 따라가 배우게 하는 것만도 못한 실정입니다.
〈 신은 본디 어리석고 노둔한데다 먼 곳에 있어서 조정의 사체를 모르므로 다만 치우친 소견을 가지고 상께 우러러 아뢰고자 합니다.〉 오직 원하건대 일상적인 관례를 깨고 옛날의 도를 간직하시어, 산림에 진실로 학문이 넓고 행실이 독실한 선비가 있을 경우 시강하는 자리에 선발하여 앉히되, 비단 빈객(賓客)이나 보양(輔養) 등의 자리뿐만이 아니라, 보덕(輔德)이나 필선(弼善) 이하의 자리도 이러한 사람을 추천하여 앉히도록 하소서. 그리고 조정 관원으로서 춘방(春坊)에 소속된 자는, 실직인 경우에는 다른 관직을 겸직하지 못하도록 하고, 겸직인 경우에는 다만 옥당의 직책만을 겸하게 하여 항시 관원에서 숙직하면서 전적으로 학업에만 전념하게 하소서. 그리하여 〈 세월을 두고 연마시켜 알지 못하는 것은 더욱 연구하게 하고, 정미롭지 못한 것은 더욱 치밀하게 하도록 하여, 이미 묻는 의견에 대해 충분히 답변할 여유가 갖추어지거든 보필하여 인도하는 직책을 겸하게 하소서.〉
전하께서는 간혹 좋은 아침, 조용한 저녁때나 일을 마치고 한가하게 거처하시는 여가에, 간혹 강원으로 친히 납시든가 아니면 편전으로 불러들이고 궁료들도 아울러 입시하게 한 다음 질문을 하여 배운 바를 시험해 보소서. 그러면 비단 시위하는 관리들이 강학을 게을리 하지 않을 뿐만이 아니라, 세자도 일깨워지고 계발되는 여지가 많을 것입니다. 신이 일찍이 본원에 있으면서 자주 서연(書筵)에 참석하였습니다. 그런데 진강(進講)할 때에 예모가 존엄하여 엎드려 숨을 죽이고 소리도 제대로 내지 못하였습니다. 강습과 토론에는 조용하고 한가한 것이 중요한 일인데, 몸을 움추리고 앉아 짧은 시간에 어떻게 그 온오한 뜻을 모두 펼 수가 있겠습니까. 더구나 강을 마치고 난 뒤로는 궁중과 멀리 떨어져 있어서 궁중 안의 동정을 알 수 없으니, 또 연회하며 노는 사이에 배웠던 요지를 잊어버렸거나 실천하는 것이 잘못되었는지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신이 세자에게 바라는 것은 다음과 같습니다. 스승을 대하는 예로서 빈부(賓傅)를 대하고 친구처럼 궁료들과 가까이하여, 진강할 때에는 일상적인 예에 구애되지 말고 차분하게 묻고 논하며, 강을 마치고 나서도 궁료를 수시로 불러들여 의심나고 어려운 것을 질문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앉고 눕거나 기거하는 동안에도 반드시 그들과 함께하여, 날마다 서로 친해져서 마치 집안 식구나 부자 사이와 같이 된다면, 동작하고 말하는 사이에 보탬이 되는 바가 많을 것입니다.
〈 가의(賈誼)의 말에 ‘생각건대 천하에서 몸가짐이 단정하고 효도와 우애가 있으며 학문이 넓고 도술(道術)이 있는 자로 태자를 보필하게 하되, 그들로 하여금 태자와 더불어 함께 거처하게 하여 전후 좌우에 올바른 사람이 아닌 자가 없게 한다면 비록 바르게 되지 않으려고 하더라도 바르게 될 것이다.’ 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신이 말한 ‘산림의 어진 선비를 널리 뽑아 궁료로 앉혀, 항상 좌우에서 모시도록 하여 보필하여 기르는 도리를 극진히 하자.’는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성명께서는 일상적인 규칙에 구애하지 마시고 단연코 이를 시행하소서. 그리하여 성왕의 도를 오늘에 다시 볼 수 있도록 하고, 국가의 명맥을 끝없이 누릴 수 있게 하소서. 그러면 이는 실로 종사 신민의 태평만세의 복인 것입니다.〉 ”
하니, 답하기를,
“상소를 살펴보고 임금을 사랑하는 독실한 정성을 충분히 알 수 있었으므로 매우 가상하게 여긴다. 내 마땅히 의논하여 시행하도록 하겠다.”
하고, 이어 〈 정원에〉 전교하기를,
“이 상소를 사부(師傳)와 의논하여 아뢰도록 하라.”
하였다.
【원전】 31 집 535 면
【분류】 *정론-정론(政論)

광해군 2년 경술(1610,만력 38)
 5월10일 (갑인)
시강원에서 최현의 상소에 대해서 아뢰다

시강원이 아뢰기를,
“최현(崔晛)의 상소를 좌상 이항복에게 의논해 보았더니, 말하기를 ‘삼가 상소의 말을 살펴보니 대개의 뜻은 널리 산림의 선비를 뽑아서 궁료(宮僚)에 두자는 뜻이었습니다. 그 중에 항상 시종하도록 하자는 한 조목은, 성상께서 동궁으로 계실 때에 신이 일찍이 대략 아뢴 바가 있으며, 지난번 회강(會講)의 자리에서도 이러한 말을 세자에게 아뢴 적이 있습니다. 비록 옛날처럼 전사(前師)·후부(後傅)·좌보(左輔)·우승(右承)의 제도는 갖추지 못하더라도 밤낮으로 강론에 힘쓰고 수시로 불러들여서 같이 주선을 하게 하신다면, 자연히 유신들과 가깝게 될 것이고 아첨을 잘하여 총애받는 자들과는 자주 접하지 못하게 될 것이니, 오늘날의 폐단과는 같지 않을 것입니다.
산림의 어진 선비들을 접할 때 비록 이전까지의 법규를 모두 개혁하여 할 수는 없다고 하더라도 가까이 보좌하는 반열에 두어서 역시 전(殿)에 올라와 진강할 수 있도록 하신다면 도움되는 바가 적지 않을 것입니다. 당·송(唐宋) 이후로 10세 이상 된 공경의 자제들 중에서 단정하고 선량하며 재주가 뛰어난 자들을 널리 선발하여, 그들로 하여금 항상 태자를 모시게 한 것도 이러한 뜻에서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이 외람되이 빈사(賓師)의 자리에 있으면서 자주 이에 대하여 말씀드렸던 것인데, 이는 비단 세자에 대해서만 그러한 것이 아닙니다. 지난번 입시하였을 때에 수시로 불러들여서 대면하게 하고 또 승지로 하여금 친히 여러 가지의 일들을 아뢰도록 하자고 누누이 말씀드렸던 것은 역시 이 때문에서였습니다.’ 하였습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잠시 사(師)가 올라오기를 기다려서 함께 의논하여 결정하도록 하라.”
하였다.【이때 영상 이덕형이 어버이를 뵈러 지방에 가 있었다.】
【원전】 31 집 536 면
【분류】 *정론-간쟁(諫諍) / *인사-선발(選拔) / *인사-관리(管理)


광해군 2년 경술(1610,만력 38)
 5월18일 (임술)
채경선과 최현을 어사로 삼다

〈 전교하였다.
“채경선(蔡慶先)과 최현(崔晛)을 어사로 패초하라.”〉
【원전】 태백산본
【분류】 *인사-임면(任免)


광해군 2년 경술(1610,만력 38)
 6월4일 (정축)
시강원에서 최현의 산림 천거 상소에 대해 아뢰다

시강원이 아뢰기를,
“영의정 이덕형이 ‘삼가 최현(崔晛)의 상소를 보니, 나라의 근본을 〈 일찌감치 가르치는〉 【보양(輔養)하는】 뜻에 대하여 지극하게 설파하였습니다. 지금 나라의 백성들이 간절히 바라고 치하하는 때를 맞아 세자를 보도하는 데 있어 좋은 방법은 모두 써보아야 할 것입니다. 현재 서연(書筵)의 강론이 형식적으로만 진행될 뿐이어서 훈도 함양(薰陶涵養)의 효과를 보기 어렵기 때문에 신 또한 일찍이 단정하고 훌륭한 인물을 선발하여 조석으로 함께 있게 해야 된다는 뜻을 전하께 진달하였습니다. 학문에 뜻을 둔 외방의 선비를 선발하여 강관(講官)의 자리에 두어 의심스러운 문제를 논란하고 마음속의 뜻을 털어놓아 인도하게 한다면 참으로 큰 보탬이 있을 것입니다. 규례에 얽매이지 않고 특별한 방법으로 처리하는 것은 오직 전하께서 어떻게 결단을 내리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근래에 보니, 춘방(春坊)의 관원을 이리저리 옮겨 주의(注擬)하는 게 일반 관원들과 같은데, 이와 같이 하고서야 직분을 다하라고 독책할 수 있겠습니까. 인물을 잘 가려 오래도록 맡기는 것이 가장 급선무입니다. 대개 한가한 때에 자주 접견하여 의심나는 문제를 질문하기도 하고 훈계를 받기도 하여, 친밀하게 절차 탁마(砌磋琢磨)하는 공효가 있고 내외(內外)가 막히는 폐단이 없게 된 뒤에라야 이 일을 비로소 의논할 수 있습니다. 삼가 들으니, 인묘(仁廟)가 동궁에 있을 때, 중묘(中廟)가 한때의 유신(儒臣)을 극도로 가려 오랫동안 강관(講官)에 있게 하고 서연(書筵)에 구애받지 말고 자주 인접하게 하였으며, 인묘도 남의 좋은 점을 취하기를 좋아하며 널리 묻는 것을 꺼리지 않았습니다. 그리하여 정원과 옥당의 입직 관원 중에 고사에 박식하고 독서한 자가 있을 경우 서로 묻고 논란하기를 마지 아니하였습니다. 이것이 성조(聖朝)에 내려오는 왕가의 법으로 오늘날 마땅히 따라 행해야 될 것입니다.’ 하였습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알았다. 이 계사를 이조에 전하고, 앞으로 궁관(宮官)을 선발할 때에는 충분히 가려서 뽑아 오랫동안 맡기고 자주 바꾸지 않음으로써 성과를 올리게 하라.”
하였다.
【원전】 31 집 542 면
【분류】 *인사-임면(任免) / *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광해군 2년 경술(1610,만력 38)
 12월22일 (계사)
비변사가 최현으로 하여금 남방을 순회하게 하기를 청하니 따르다

비변사가, 사과(司果) 최현(崔晛)을 본사(本司)의 낭청이라고 칭하여 남방을 순회하며 살펴보게 하기를 청하니 그렇게 하라고 전교하였다.
처음에 비국이, 주사 구관 당상(舟師句管堂上) 장만의 종사관 1명을 비변사 낭청이라 칭하여 남쪽 변방에 먼저 파견하여 규획하게 하기를 청하여 마침내 윤허를 얻었었다. 이때에 이르러 또 아뢰기를,
“봄이 멀지 않았으니, 유랑민을 소집하고 둔전을 설치하여 농사를 짓게 하는 일과 순회하여 형세를 살펴 방신(防汛)을 도모하는 일은 하루가 급합니다. 다만 이 일은 남쪽 지방의 형편을 상세히 알고 있고 성의를 다하여 위를 받드는 자가 아니고는 효과를 기대하기 어려우며, 조치하고 호령하는 때에 열읍(列邑)에 폐단이 생기는 일도 없지 않을 것입니다. 사과 최현은 집이 남쪽에 있어 백성들의 실상을 익숙히 알고 있으며 또 성의가 간절하니, 진실로 이 직책을 맡기기에 적합합니다. 현재 체부(體府)의 계책에 참여하고 있으므로 아뢰기가 곤란하였는데, 체부에서 ‘피차가 다 나랏일이니 옮겨보내도 무방하다.’고 하였습니다. 최현이 현재 선산(善山) 땅에 있으니, 이 직책을 맡겨 해도(該道)에 공문을 보내어 올라오게 한 다음 사목(事目)을 지시하여 떠나보내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따른 것이다.
【원전】 31 집 592 면
【분류】 *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 *인사-임면(任免) / *호구-이동(移動) / *농업-권농(勸農)

광해군 3년 신해(1611,만력 39)
 2월2일 (임신)
사과 최현이 국방에 진력하기를 청하는 상소를 올리다

사과(司果) 최현(崔晛)이 상소하여 주사(舟師)의 이로움과 해로움을 조목조목 아뢰고, 급하지 않은 일을 정지하여 낭비를 줄이고 국방에 전력할 것을 청하니, 비국에 계하하여 【의논해 처리하게 하였다.】
【원전】 31 집 601 면
【분류】 *정론-정론(政論) / *군사-군정(軍政)


광해군 3년 신해(1611,만력 39)
 2월16일 (병술)
비변사에서 체찰 부사 이시발이 남행하는 일을 중지시키기를 청하니 의논하게 하다

비변사가 아뢰기를,
“도체찰사(都體察使)에게 물으니【【이시발(李時發)이 이때에 체찰 부사(體察副使)가 되어 막 배를 검열하기 위해 남으로 내려가려는 참이었는데, 왕이 직명을 띠고 가야 하는 것인지의 여부를 비국과 도체찰사에게 물었다.】】 ‘체찰의 임무는 비록 정사(正使)라도 그렇게 긴급하지 않으며, 부사(副使)는 더욱 할 일이 없으니, 직명을 띠고 다녀오더라도 그리 크게 방해되지는 않을 것이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신들의 생각으로는, 지금 서북 지방에 대한 우려가 나날이 다급해지고 있으니, 이곳에서 일을 처리하려면 주관하는 사람이 없어서는 안 될 것으로 여깁니다. 도체찰사가 오랫동안 공무를 보지 못하고 있는데다가 부사마저 남으로 내려갈 경우 돌아오는 시기도 기약할 수 없으며, 새로운 사람을 뽑아 맡긴다면 반드시 서투르게 할 우려가 있습니다. 지금 좌상의 이러한 생각은 필시 이 일을 자기의 임무로 여기지 않았기 때문에 감히 막하(幕下)에 그를 머물러 있게 하자고 청하지 못한 것이겠으나 사실 전혀 그렇지 않은 점이 있습니다. 이시발이 명을 받고 나서 이제 남쪽으로 가 한번 돌아보려는 것은 직분상 당연한 것입니다. 그러나 다만 큰일을 다시 설치하느냐의 여부에 대해서는 대신이 모두 모여 상의한 연후에 결정을 내릴 수 있을 것이고, 최현(崔晛)도 지금 이미 내려갔으니 반드시 형세를 살펴보고 사유를 갖추어 치계할 것입니다. 그런데 논의가 결정되기도 전에 단지 현존하는 주사(舟師) 약간 척을 점고 검열하기 위해 갑자기 내려가는 것은 아마도 아무런 이익이 없을 것 같기에 감히 아룁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본사로 하여금 의논하여 처리하게 하라.”
하였다.
【원전】 31 집 603 면
【분류】 *군사-군정(軍政) / *인사(人事)



광해군 3년 신해(1611,만력 39)
 1월21일 (임술)
비변사에서 남부의 바다 인근 지역에 최현을 파견하여 순찰하게 하는 문제를 논하다

비변사가 아뢰기를,
“【교지를 내리셔서】 양남(兩南)의 바다에 인접한 각처에 백성을 모집하여 둔전을 설치하는 일에 대해 재가하는 사항 내에 ‘파견할 낭청을 빨리 뽑아 보내어 폐단이 없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당초에 사과 최현(崔晛)이 본도의 사정에 대해 익히 알고 있고 또 정성을 다하는 자이므로 신들이 의논하여 택한 다음 재가를 받아 지금 떠나게 되었습니다. 다만 생각건대, 남쪽 지방은 계절이 빨라 농사철이 이미 닥쳐왔으므로 금년 둔작(屯作)은 미칠 수 없을 듯하지만, 변방의 백성을 모집하여 바닷가를 순찰하는 일은 하루가 급할 듯하므로 하루이틀 내에 출발하게 하라는 〈 뜻으로 감히 계품합니다.〉 ”
하니 알았다고 전교하였다.
【원전】 31 집 600 면
광해군 5년 계축(1613,만력 41)
 3월6일 (갑자)
김질간·권척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 인사행정이 있었다.〉 김질간(金質幹)을 장령으로, 권척(權倜)을 봉교로, 박승종(朴承宗)을 겸 병조 판서로, 황신(黃愼)을 겸 호조 판서로 삼았다.【정1품에 승진시켰기 때문이다.】 정경세(鄭經世)를 강릉 부사로, 조우인(曺友仁)을 은계 찰방(銀溪察訪)으로, 송극인(宋克訒)을 장령으로, 최현(崔晛)을 문학으로, 기윤헌(奇允獻)을 공조 정랑으로, 윤지양(尹知養)을 대교로 삼았다.
【원전】 32 집 156 면
【분류】 *인사-임면(任免)


광해군 5년 계축(1613,만력 41)
 3월6일 (갑자)
김질간·권척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 인사행정이 있었다.〉 김질간(金質幹)을 장령으로, 권척(權倜)을 봉교로, 박승종(朴承宗)을 겸 병조 판서로, 황신(黃愼)을 겸 호조 판서로 삼았다.【정1품에 승진시켰기 때문이다.】 정경세(鄭經世)를 강릉 부사로, 조우인(曺友仁)을 은계 찰방(銀溪察訪)으로, 송극인(宋克訒)을 장령으로, 최현(崔晛)을 문학으로, 기윤헌(奇允獻)을 공조 정랑으로, 윤지양(尹知養)을 대교로 삼았다.
【원전】 32 집 156 면
【분류】 *인사-임면(任免)


광해군 5년 계축(1613,만력 41)
 3월6일 (갑자)
김질간·권척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 인사행정이 있었다.〉 김질간(金質幹)을 장령으로, 권척(權倜)을 봉교로, 박승종(朴承宗)을 겸 병조 판서로, 황신(黃愼)을 겸 호조 판서로 삼았다.【정1품에 승진시켰기 때문이다.】 정경세(鄭經世)를 강릉 부사로, 조우인(曺友仁)을 은계 찰방(銀溪察訪)으로, 송극인(宋克訒)을 장령으로, 최현(崔晛)을 문학으로, 기윤헌(奇允獻)을 공조 정랑으로, 윤지양(尹知養)을 대교로 삼았다.
【원전】 32 집 156 면
【분류】 *인사-임면(任免)

광해군 9년 정사(1617,만력 45)
 12월3일 (갑오)
기자헌·유희발·이항복 등의 처벌을 청하는 유학 서의중의 상소

유학 서의중(徐義中)이 상소하기를,
“삼가 생각건대, 역적을 다스리는 법이 엄격하지 못하기 때문에 역적을 비호하는 무리가 늘어나는 것입니다. 대체로 최현(崔晛)은 심희수(沈喜壽)의 부추김으로 전에 죄를 지었으며 김세렴(金世濂)은 유희발(柳希發)의 사주를 받아 그 후에 일을 저질렀습니다. 심희수야 은혜를 온전히 해야 한다는 말을 극력 주장하여 일찍부터 전하를 저버린 자이므로 다시 거론할 것이 없겠지만, 유희발은 가까운 인척인만큼 고락을 함께 해야 할 터인데 김세렴을 꼬여서 정론(正論)을 회피하게 하였으니 유희발은 과연 무슨 속셈을 가지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신이 근래에 도성 안의 논의를 들으니 ‘유희분은 헌의할 때에 자기의 의견은 말하지 않고 좌상 정인홍에게 미루었다고 하는데, 교묘하게 회피한 정상이 여지없이 드러난 것입니다. 유충립(柳忠立)은 사인(舍人)의 신분으로 당하의 백관을 거느리고 가서 합의하여 진달하지 않았다고 하니, 기자헌의 낭청으로서 한집의 사론(邪論)에 물든 자라고 하겠습니다. 박자응(朴自凝)은 박승종(朴承宗)의 아들이며 박자흥(朴自興)의 아우인데 이 막대한 논의를 당하여 감히 병을 핑계대는 글을 올렸으니, 이는 부형(父兄)의 가르침을 우선으로 하지 않고 역적을 비호하는 마음을 중하게 여긴 것입니다. 이항복·정홍익·민형남 등은, 혹은 역적 정협을 천거한 모주(謀主)이기도 하고 혹은 칠신(七臣) 중의 하나인 허성(許筬)에게 아부하기도 하고 혹은 유희분의 괴이한 논의에 물들기도 하였으니, 이들은 모두 역적을 모의한 무리들로서 왕법(王法)에 용서받지 못할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임금의 이목과 같은 삼사의 처지로서는 마땅히 탄핵하고 공격하기를 마치 새매가 참새를 덮치듯이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자헌 한 사람말고는 다시 언급조차 하지 않고 있습니다. 기자헌의 죄는 진실로 용서받을 수 없지만 그밖의 역적을 비호한 무리들을 유독 놓아두고 논의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삼가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먼저 직무 수행을 제대로 하지 못한 삼사의 잘못을 문책하시고, 반대하는 의견을 내세운 기자헌의 죄를 다스린 다음, 김세렴을 사주한 유희발의 죄를 다스리고 이항복 이하는 차례대로 논죄하소서. 그리하신다면 대론이 저절로 바로잡히고 화근도 제거될 수 있을 것입니다. 삼가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필부의 말이라고 해서 가볍게 여기지 마시고 승락하는 명을 속히 내리소서. 그리하신다면 종묘 사직의 처지에서 이보다 다행한 일이 없을 것입니다.”
하였는데, 의정부에 계하하였다.
【원전】 32 집 666 면
【분류】 *정론-정론(政論) / *변란-정변(政變) / *사상-유학(儒學) / *사법-탄핵(彈劾)


광해군 9년 정사(1617,만력 45)
 12월3일 (갑오)
기자헌·유희발·이항복 등의 처벌을 청하는 유학 서의중의 상소

유학 서의중(徐義中)이 상소하기를,
“삼가 생각건대, 역적을 다스리는 법이 엄격하지 못하기 때문에 역적을 비호하는 무리가 늘어나는 것입니다. 대체로 최현(崔晛)은 심희수(沈喜壽)의 부추김으로 전에 죄를 지었으며 김세렴(金世濂)은 유희발(柳希發)의 사주를 받아 그 후에 일을 저질렀습니다. 심희수야 은혜를 온전히 해야 한다는 말을 극력 주장하여 일찍부터 전하를 저버린 자이므로 다시 거론할 것이 없겠지만, 유희발은 가까운 인척인만큼 고락을 함께 해야 할 터인데 김세렴을 꼬여서 정론(正論)을 회피하게 하였으니 유희발은 과연 무슨 속셈을 가지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신이 근래에 도성 안의 논의를 들으니 ‘유희분은 헌의할 때에 자기의 의견은 말하지 않고 좌상 정인홍에게 미루었다고 하는데, 교묘하게 회피한 정상이 여지없이 드러난 것입니다. 유충립(柳忠立)은 사인(舍人)의 신분으로 당하의 백관을 거느리고 가서 합의하여 진달하지 않았다고 하니, 기자헌의 낭청으로서 한집의 사론(邪論)에 물든 자라고 하겠습니다. 박자응(朴自凝)은 박승종(朴承宗)의 아들이며 박자흥(朴自興)의 아우인데 이 막대한 논의를 당하여 감히 병을 핑계대는 글을 올렸으니, 이는 부형(父兄)의 가르침을 우선으로 하지 않고 역적을 비호하는 마음을 중하게 여긴 것입니다. 이항복·정홍익·민형남 등은, 혹은 역적 정협을 천거한 모주(謀主)이기도 하고 혹은 칠신(七臣) 중의 하나인 허성(許筬)에게 아부하기도 하고 혹은 유희분의 괴이한 논의에 물들기도 하였으니, 이들은 모두 역적을 모의한 무리들로서 왕법(王法)에 용서받지 못할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임금의 이목과 같은 삼사의 처지로서는 마땅히 탄핵하고 공격하기를 마치 새매가 참새를 덮치듯이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자헌 한 사람말고는 다시 언급조차 하지 않고 있습니다. 기자헌의 죄는 진실로 용서받을 수 없지만 그밖의 역적을 비호한 무리들을 유독 놓아두고 논의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삼가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먼저 직무 수행을 제대로 하지 못한 삼사의 잘못을 문책하시고, 반대하는 의견을 내세운 기자헌의 죄를 다스린 다음, 김세렴을 사주한 유희발의 죄를 다스리고 이항복 이하는 차례대로 논죄하소서. 그리하신다면 대론이 저절로 바로잡히고 화근도 제거될 수 있을 것입니다. 삼가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필부의 말이라고 해서 가볍게 여기지 마시고 승락하는 명을 속히 내리소서. 그리하신다면 종묘 사직의 처지에서 이보다 다행한 일이 없을 것입니다.”
하였는데, 의정부에 계하하였다.
【원전】 32 집 666 면
【분류】 *정론-정론(政論) / *변란-정변(政變) / *사상-유학(儒學) / *사법-탄핵(彈劾)



광해군 9년 정사(1617,만력 45)
 12월3일 (갑오)
기자헌·유희발·이항복 등의 처벌을 청하는 유학 서의중의 상소

유학 서의중(徐義中)이 상소하기를,
“삼가 생각건대, 역적을 다스리는 법이 엄격하지 못하기 때문에 역적을 비호하는 무리가 늘어나는 것입니다. 대체로 최현(崔晛)은 심희수(沈喜壽)의 부추김으로 전에 죄를 지었으며 김세렴(金世濂)은 유희발(柳希發)의 사주를 받아 그 후에 일을 저질렀습니다. 심희수야 은혜를 온전히 해야 한다는 말을 극력 주장하여 일찍부터 전하를 저버린 자이므로 다시 거론할 것이 없겠지만, 유희발은 가까운 인척인만큼 고락을 함께 해야 할 터인데 김세렴을 꼬여서 정론(正論)을 회피하게 하였으니 유희발은 과연 무슨 속셈을 가지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신이 근래에 도성 안의 논의를 들으니 ‘유희분은 헌의할 때에 자기의 의견은 말하지 않고 좌상 정인홍에게 미루었다고 하는데, 교묘하게 회피한 정상이 여지없이 드러난 것입니다. 유충립(柳忠立)은 사인(舍人)의 신분으로 당하의 백관을 거느리고 가서 합의하여 진달하지 않았다고 하니, 기자헌의 낭청으로서 한집의 사론(邪論)에 물든 자라고 하겠습니다. 박자응(朴自凝)은 박승종(朴承宗)의 아들이며 박자흥(朴自興)의 아우인데 이 막대한 논의를 당하여 감히 병을 핑계대는 글을 올렸으니, 이는 부형(父兄)의 가르침을 우선으로 하지 않고 역적을 비호하는 마음을 중하게 여긴 것입니다. 이항복·정홍익·민형남 등은, 혹은 역적 정협을 천거한 모주(謀主)이기도 하고 혹은 칠신(七臣) 중의 하나인 허성(許筬)에게 아부하기도 하고 혹은 유희분의 괴이한 논의에 물들기도 하였으니, 이들은 모두 역적을 모의한 무리들로서 왕법(王法)에 용서받지 못할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임금의 이목과 같은 삼사의 처지로서는 마땅히 탄핵하고 공격하기를 마치 새매가 참새를 덮치듯이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자헌 한 사람말고는 다시 언급조차 하지 않고 있습니다. 기자헌의 죄는 진실로 용서받을 수 없지만 그밖의 역적을 비호한 무리들을 유독 놓아두고 논의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삼가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먼저 직무 수행을 제대로 하지 못한 삼사의 잘못을 문책하시고, 반대하는 의견을 내세운 기자헌의 죄를 다스린 다음, 김세렴을 사주한 유희발의 죄를 다스리고 이항복 이하는 차례대로 논죄하소서. 그리하신다면 대론이 저절로 바로잡히고 화근도 제거될 수 있을 것입니다. 삼가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필부의 말이라고 해서 가볍게 여기지 마시고 승락하는 명을 속히 내리소서. 그리하신다면 종묘 사직의 처지에서 이보다 다행한 일이 없을 것입니다.”
하였는데, 의정부에 계하하였다.
【원전】 32 집 666 면
【분류】 *정론-정론(政論) / *변란-정변(政變) / *사상-유학(儒學) / *사법-탄핵(彈劾)

인조 1년 계해(1623,천계 3)
 11월7일 (계해)
비변사가 선비로서 장수의 재질이 있는 10인을 천거하다

비변사로 하여금 선비 가운데 장수의 재질이 있는 자를 천거하도록 하니, 심기원(沈器遠)·최현(崔晛)·윤수겸(尹守謙)·이명(李溟)·이창정(李昌庭)·이성구(李聖求)·이민구(李敏求)·김시양(金時讓)·심광세(沈光世)·정기광(鄭基廣) 등 10인을 천거하였다. 반정 초기에 당시의 인재들이 성했다고 할 수 있는데, 묘당에서 천거한 장재(將才) 가운데에는 실제로 쓸 만한 사람이 하나도 없었으며, 그 중에는 전연 근사하지 않는 자마저 있었다. 재상이 이처럼 사람을 알아보지 못하니, 탄식을 금할 수 있겠는가.
【원전】 33 집 566 면
【분류】 *인사-선발(選拔)

인조 2년 갑자(1624,천계 4)
 1월26일 (신사)
최현을 독전 어사로 삼아 서로에 내려보내다

최현(崔晛)을 독전 어사(督戰御史)로 삼아 서로(西路)에 내려보냈다.
【원전】 33 집 574 면
【분류】 *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 *변란-정변(政變) / *군사-군정(軍政)













인조 2년 갑자(1624,천계 4)
 3월5일 (기미)
남한 산성의 축조와 군량 및 기인의 가포 등에 대해 논의하다

저녁에 상이 또 자정전에 나아가 삼공과 비국(備局)의 제신(諸臣)을 인견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조정에 군현(群賢)이 거의 다 모였으므로 내가 덕이 없고 어리석더라도 소강(小康)을 바랄 수 있는데, 이제 난망(亂亡)을 면하지 못하게 되었으니, 경들은 할 말을 다하기 바란다.”
하자, 영의정 이원익(李元翼)이 아뢰기를,
“상께서 정신을 가다듬고 다스리기를 꾀하시는 것이 지극하십니다. 신이 수상의 자리에 있으면서 국사를 담당하고 싶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본디 재주와 국량이 없는 데다가 노병(老病)이 날로 심하여 국청(鞫廳)·비국의 회좌(會坐)에 모두 참여하지 못하고 명초하실 때에만 겨우 들어올 수 있는데, 마침 국사가 위급하기 때문에 감히 사퇴하지 못할 뿐입니다. 군현이 다 모인 것은 과연 성교(聖敎)와 같습니다. 장현광(張顯光)으로 말하면 산야 사람으로서 이제 또한 왔으니, 백성의 향배(向背)는 진실로 알 수 없으나, 선비의 마음이 굳게 맺어질 것은 이미 알 수 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내가 참으로 만나기를 원했는데, 이제 다행히 만났다.”
하였다. 이원익이 아뢰기를,
“신에게 병이 없더라도 여든 살에 조정에 있는 것은 사대부의 염치에 관계되는데, 더구나 병이 깊은 데이겠습니까. 도체찰사를 이미 갈도록 윤허하지 않으셨으니, 신은 한번 도문(都門)을 나가서 방비하는 대책을 시험해 보고 싶습니다. 국내의 역적은 천고에 없었던 것이니 어찌 다시 이런 변란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다만 서쪽 변방의 일이 매우 근심스럽습니다. 강도(江都)의 보장(保障)에 관한 대책은 이성구(李聖求)에게 전임시켰으나, 강도는 한 구석진 곳이므로 온 나라를 호령하기에 어려울 듯합니다. 사변이 있을 경우 원자(元子)는 남한 산성에 들어가면 중앙에 있으면서 절제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남한 산성은 쉽게 축조하기 어려울 듯하니, 이제 이서(李曙)를 장수로 정하여 성을 쌓는 일을 전담시키면 겨울이 오기 전에 일을 끝낼 수 있을 것입니다. 신이 죽기 전에 마음과 힘을 다하여 부체찰사(副體察使)와 처리하고 싶으니, 오늘 계책을 정하기 바랍니다.”
하고, 좌상 윤방(尹昉)이 아뢰기를,
“신이 경기 감사로 있을 때 강도의 보장과 남한 산성이 동서에서 서로 응하여 급할 때에 힘이 될 수 있는 방책에 대해서 갖추어 장계하였으나 말이 시행되지 못하였습니다.”
하고, 우상 신흠(申欽)이 아뢰기를,
“남한 산성을 쌓는 것은 나라의 큰 계책입니다. 옛날 백제(百濟)의 임금도 이 성에 있었으니 이제 수선하지 않을 수 없겠으나 백성을 괴롭히고 대중을 동원시킬 수는 없습니다.”
하고, 병조 판서 김류(金瑬)는 아뢰기를,
“대중을 동원시키는 일을 할 수 없으니, 먼저 그 공정(功程)을 헤아린 뒤에야 미리 처리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고, 우찬성 장만(張晩)은 아뢰기를,
“영상의 생각은 도망했던 포수(砲手)들에게 속죄하는 것으로 성을 쌓게 하려 하나, 좋은 계책이 아닙니다. 대개 포수들은 본시 놀고 먹는 사람인데 성을 쌓는 일을 전담시키면 반드시 원망을 일으킬 것이고, 또 큰 일을 홀로 감당하기 어려우므로 형편상 백성의 힘을 써야 할 것입니다. 오랑캐를 피하는 방책은 강도를 주로 해야 하는 것으로서 만약에 두 곳에 모두 일을 일으키면 힘이 나뉘어 쉽게 성취되지 못할 듯합니다.”
하고, 호조 판서 심열(沈悅)은 아뢰기를,
“성을 쌓는 일은 매우 크므로 백성을 번거롭히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성을 쌓게 한다는 명령을 들으면 민심이 반드시 먼저 놀랄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서가 나가서 살펴보려 하는데 필시 그 공역을 헤아릴 수 있을 것이다. 돌아오기를 기다려서 의논하여 정하도록 하라.”
하였다. 상이 또 이르기를,
“이번에 강구하여 정하는 일은 적을 피하려는 계책이지 적을 막으려는 계책이 아닌데, 적을 막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
하니, 예조 판서 이정구(李廷龜)가 아뢰기를,
“이번에 도성을 떠났던 계책은 어쩔 수 없는 데에서 나왔던 것인데 한번 도성 문을 나간 뒤로 관부(官府)의 문적(文籍)과 기계(器械)·양향(粮餉)이 일시에 죄다 없어졌습니다. 그래도 다행히 하늘이 묵묵히 도와서 광복(匡復)할 수 있었는데 이제 또 적을 피할 방책을 먼저 강구하는 것은 좋은 계책이 아닙니다. 신은 전에 경기 감사였으므로 남한의 형세를 잘 아는데, 그곳에 대가(大駕)가 멈추려면 영조(營造)하고 수선해야 할 일이 많을 뿐더러 공역이 커서 쉽게 성취하지 못할 형세이므로 산성의 일은 결코 할 수 없으니, 사람을 보내어 가보도록 할 필요가 없습니다. 오직 적을 막는 방책을 강구해야 할 것인데, 1만의 군사를 정하게 뽑아 목장의 말을 나누어 주고 늘 조련시키면 급할 때에 쓸 수 있을 것입니다.”
하고, 김류가 아뢰기를,
“기병(騎兵)은 본디 정하게 뽑아야 하겠으나, 양향이 모자라는 것이 걱정스럽습니다. 도감의 포수도 먹이기 어려운데, 더구나 새로 뽑는 기병이겠습니까.”
하니, 상이 호조 판서에게 묻기를,
“양향은 장만할 수 있는가?”
하자, 심열이 아뢰기를,
“지금 세입(歲入)을 줄이고 있으므로 군향(軍餉)을 장만해 낼 수 없을 듯싶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군사를 조발하는 일은 하지 않을 수 없다. 원수(元帥)가 앞에 있으니 소견을 말하라.”
하니, 장만이 아뢰기를,
“이시발(李時發)이 전에 황해도의 별승군(別勝軍) 3천 인을 뽑아 힘써 훈련하였으므로 이제 쓸 만한 군사가 되었고, 또 이원익이 관서(關西)의 방백(方伯)으로 있을 때 영포수(營砲手)를 따로 뽑았는데 지금도 그 규례를 시행하고 있습니다. 이번에 힘을 얻은 것은 오로지 이 두 군사에 의지한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근래 연소한 대간들이 함부로 자기들의 뜻을 가지고 어지러이 논계하는데 대신과 상의해서 한 것인가?”
하니, 영상·좌상이 아뢰기를,
“대간이 반드시 대신의 논의를 봉행한다면 뒷날의 폐단이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장만이 아뢰기를,
“지난해에 죄를 입은 무리는 용서해 주는 범주에 들어 있어야 했는데, 곧 대간의 논계로 인하여 그만두었습니다. 대간이 법을 지키는 논의에 있어서 어찌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지금 임금이 대궐로 돌아오신 경사를 당하였으니 널리 은택을 베풀어야 할 것입니다.”
하고, 김상용(金尙容)은 아뢰기를,
“온 도성 안의 백성이 거개가 역적 이괄에게 붙었었는데, 왕법으로 논하면 본디 죽여야 마땅합니다. 하지만 사람마다 모두가 의구하는 마음을 품을 것이니 작은 염려가 아닙니다. 지난해에 죄를 입은 사람은 누구인들 스스로 지은 죄가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팔방이 같이 경하하는 이때를 당하였으니 죄를 풀어주는 은택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때 대간이 대신에게 묻고서 이런 계사가 있었던 것으로 생각하였다. 그들을 방면하여 용서하라.”
하였다. 김류가 아뢰기를,
“폐모(廢母)한 사람은 본디 쉽게 용서할 수 없습니다. 적에게 붙은 자 가운데에서 어리석은 백성들은 논하지 않아야 하겠으나, 사대부로서 적에게 붙은 자에 대해서는 용서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대간이 모든 일을 대신에게 묻는다면 또한 간관의 풍채가 아닌데, 상의 하교에 망언이라고까지 하신 것은 간관을 우대하는 도리에 매우 어긋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역적을 따른 사람을 낱낱이 치죄한다면 폐조 때와 다를 것이 없을 듯하다. 어떻게 처치해야 하겠는가?”
하였는데, 신흠이 아뢰기를,
“진실로 너그러이 용서하여 죄를 씻어 주어야 하겠으나, 사대부로서 역적을 따른 자는 용서할 수 없을 듯합니다. 명나라 태조(太祖) 때에 주살(誅殺)이 매우 많았으니 어찌 원망하는 자가 없었겠습니까. 그러나 태조가 여러 번 출사(出師)하여 친히 오랑캐를 쳐서 위엄을 떨쳤으므로 백성이 감히 움직이지 못하였습니다. 그리고 우리 세조(世祖) 때에도 주살하는 것으로 위무(威武)를 떨쳤는데 말년에 이시애(李施愛)의 변란을 곧바로 진정시켰고, 성종(成宗) 때에도 문성군(文城君)의 변란이 있었으나 마침내 토평하였습니다. 대개 나라의 형세가 당당할 때에는 조정의 조처에 혹 알맞지 않은 점이 있더라도 백성이 감히 원망하지 못하지만, 쇠약한 세대에는 한 가지 잘못이 있더라도 백성이 문득 원망을 하게 됩니다. 지금의 시세는 마치 사람이 늙고 병들어 숨이 끊어지려는 것과 같아서 우연히 작은 병을 얻더라도 곧 죽게 될 것이니, 널리 혜택을 베풀어 빨리 옥사를 끝내야 하겠습니다.”
하고, 정경세(鄭經世)는 아뢰기를,
“기익헌(奇益獻)의 죄는 반드시 죽여야 마땅합니다. 그가 정성을 보낸 글은 뒷날의 여지로 삼은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의 마음은 반드시 일이 이루어지면 부귀할 것이고 일이 이루어지지 않아도 죽음을 면할 수 있을 것이라고 여겼던 것입니다. 이리하여 처음에는 흉역(兇逆)을 도와 못하는 짓이 없다가 그 형세가 궁해진 뒤에야 목을 베어가지고 온 것입니다. 그의 애초의 마음 먹은 것이 이러한 데에 지나지 않는데, 이제 죽이지 않는다면 난신적자가 뒤를 이어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신흠이 이른바 주살함으로써 진복(鎭服)한다는 것은 이 때문입니다. 오늘날의 일은 두 가지가 있는데, 인심을 기쁘게 하는 데에 힘쓰고 백성의 힘을 넉넉하게 하는 것입니다. 거의(擧義)한 처음에 호령이 신의를 잃었기 때문에 백성이 지금까지 원망하는 것입니다. 이제 듣건대, 제향(祭享)과 진상(進上)의 물품을 모두 줄였다 하니, 이것은 백성을 넉넉하게 하는 정사입니다. 그리고 기인(其人)의 가포(價布)에 대해서 당초에 신이 아뢴 말대로 감면하라는 영이 있었으나, 단지 반 필만 줄이고 세 필은 그대로 두어서 줄인 것이 너무 적으니, 이제 다시 줄여야 하겠습니다.”
하고, 이원익이 아뢰기를,
“신이 전에 듣건대, 선조(先朝)의 나인(內人)들이 모두 말하기를 ‘사대부 집 종들도 온돌에 거처하는데 나인으로서 마루방에 거처해서야 되겠는가.’ 하므로 이로부터 대궐 안에 온돌이 많아졌다 하니, 마루방으로 바꾸면 낭비를 줄일 수 있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기인의 나무는 대궐 안에 쓰이는 곳이 많을 뿐만 아니라 선왕의 후궁과 아직 가취(嫁娶)하지 않은 왕자(王子)의 집에도 모두 나누어 보낸다. 그런데 그 용도를 전일에 줄인 것이 많았는데 가포를 반 필만 줄였다고 하니, 어찌 이렇게 적은가?”
하였다. 상이 또 이르기를,
“대비전(大妃殿)의 어공(御供)은 줄일 수 없다.”
하니, 이원익이 아뢰기를,
“자전께서 ‘종묘의 제향도 줄였는데 내가 무슨 마음으로 혼자 진상을 받겠는가.’ 하신 말씀이 지극하시니, 따르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자전의 분부는 매우 성대한 뜻이나, 아랫사람의 도리로서는 따르기 어려울 듯하다.”
하니, 오윤겸(吳允謙)이 아뢰기를,
“대체로 사람이 어버이를 섬기는 도리에 있어 극진하게 하지 않는 것이 없어야 할 것이니, 자전께 공봉(供奉)하는 물건은 줄이지 않아야 할 듯합니다.”
하자, 김상용이 아뢰기를,
“신의 소견도 오윤겸과 같습니다.”
하였다. 정경세는 아뢰기를,
“자전께 진상하는 것을 줄이지 않는 것은 이른바 입과 몸을 봉양한다는 것이고, 진상을 줄이는 것은 이른바 뜻을 기른다는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먼 지방에서 진상하는 것은 자전의 분부대로 줄여도 괜찮겠으나, 일용의 공상(供上)은 줄일 수 없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호종한 사람을 녹공하지 않을 수 없다.”
하니, 이원익이 아뢰기를,
“녹공은 결코 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젊은 신진들에게는 따로 상전(賞典)을 베풀어도 무방하겠습니다.”
하고, 심열·김류·정경세도 모두가 녹공해서는 안 된다 하였다. 장만이 아뢰기를,
“김효신(金孝信)은 한명련(韓明璉)의 중군(中軍)으로서 강작(康綽)을 베어가지고 신에게 귀순하였고, 유순무(柳舜懋)·이탁(李)·이신(李愼)·이윤서(李允緖) 등은 4천의 군사를 데리고 일시에 와서 귀순하였습니다. 적의 대세가 이로부터 꺾였으니, 이들은 녹훈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녹훈까지 하는 것은 옳지 않을 듯하다.”
하였다. 장만이 아뢰기를,
“김효신은 어떻게 처치해야겠습니까?”
하자, 상이 대신에게 물으니 이원익이 아뢰기를,
“김효신은 원래 적에게 함몰되지 않고 충절을 지키다가 죽었으니, 유순무 등에게 비교하면 더욱 가상합니다.”
하였다. 승지 홍서봉(洪瑞鳳)이 아뢰기를,
“이시애(李施愛)의 변란 때에 잡혀서 절의를 지키다가 죽은 사람도 훈적에 참여되었으니, 김효신은 이에 따라 녹훈해야 할 듯합니다.”
하고, 장만이 아뢰기를,
“이시발(李時發)은 신과 함께 시종 일을 같이 하였으니 본디 경중을 논할 것이 없고, 김기종(金起宗)은 신의 종사관으로서 가장 공로가 있으며 이민구(李敏求)·김시양(金時讓)·남이웅(南以雄)·최현(崔晛) 등도 모두 녹공할 만합니다. 이 사람들을 녹공하지 않는다면 신이 어떻게 혼자 훈적에 참여할 수 있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대신의 생각은 어떠한가?”
하였다. 삼공이 모두 아뢰기를,
“녹훈하는 일은 원훈(元勳)에게 맡겨야 합니다. 신들이 어떻게 전진(戰陣)에서 있던 일을 알 수 있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렇기는 하나 상의해서 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상이 또 이르기를,
“당초에 원수를 내려 보내어 변방의 일을 처리하게 하려 하였으나 싸움터에서 분주할 즈음에 병이 생길까 염려되었다. 이제는 얼음이 풀렸고 변방의 일이 조금 늦추어졌으니, 가을이 되거든 내려 보내는 것이 어떠하겠는가?”
하니, 윤방과 김류가 아뢰기를,
“중앙에 있으면서 절제할 수 있으니, 내려 보낼 필요가 없습니다.”
하였다. 정경세가 아뢰기를,
“지난번 행재소에 계실 때 윤황(尹煌) 등의 차자에 답하신 내용에 훈신을 모해한다는 분부까지 있었습니다. 윤황은 종묘 사직이 파천하는 것을 보고서 울분을 견디지 못하여 그런 차자를 올렸던 것이니, 중도에 지나쳤다고 할 수는 있으나 모함한다고 하는 것은 실로 그의 본정(本情)이 아닙니다. 왕언(王言)이 어찌 이러할 수 있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귀(李貴)는 군사를 거느리는 장수가 아니었으니 군율을 적용해서는 안 되는 것인데 그처럼 차자를 올렸기 때문에 그런 말을 했던 것이다.”
하였다. 정경세가 아뢰기를,
“옛날 사람은 배 안에서도 《대학》을 강독하였습니다. 6∼7건(件)의 《논어》를 지금 이미 모았으니, 이제 경연을 열 수 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해야 하겠다.”
하였다. 상이 승지 홍서봉에게 이르기를,
“전에 도원수가 하사받은 은(銀)을 부체찰사에게 나누어 주려 하기에 내가 따로 주겠다는 뜻으로 답하였다. 은 30냥을 부체찰사 이시발에게 내리고 20냥을 독전 어사(督戰御使) 최현(崔晛)에게 내리라.”
하였다. 그뒤 삼공이 장만의 말대로 이시발 등 여섯 사람을 모두 녹훈하기를 청하니, 상이 윤허하지 않으며 이르기를,
“군진에서 역전한 사람만을 녹훈하도록 하라.”
하였다. 장만이 다시 상소하기를,
“이시발이 충성스런 마음으로 나라를 위해 몸바쳐서 안현(鞍峴)의 싸움을 약속한 것은 모든 군사가 다 아는 사실입니다. 종사관 김기종은 안현에서 교전할 때에 혼자 말을 타고 달려 들어가 직접 장수들을 독촉하여 큰 공을 이루었습니다. 그리고 남이웅은 끊임없이 군량을 운송하여서 군사들이 굶지 않게 하였습니다. 이민구·김시양·최현 등도 정성을 다하고 마음을 다한 공효가 없다고 할 수 없는데 혹 일에 앞서 출사(出使)하거나 남의 막하(幕下)에 있었으니 인원이 너무 많은 것을 꺼린다면 혹 의논할 여지가 있습니다마는 이 세 사람은 그 공로가 이러한데 신만이 무슨 낯으로 감히 종정(鐘鼎)의 영예를 차지하겠습니까. 바라건대 신의 이 소(疏)를 대신에게 내려 특별히 신의 훈명(勳名)을 삭감하고 세 사람을 추록하게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상소한 사연에 대해서 의논하여 처리하겠다.”
하였다.
【원전】 33 집 591 면
【분류】 *왕실-국왕(國王) / *왕실-비빈(妃嬪) / *왕실-경연(經筵) / *군사-군정(軍政) / *군사-병참(兵站) / *군사-관방(關防) / *정론-간쟁(諫諍) / *사법-탄핵(彈劾) / *사법-행형(行刑) / *재정-진상(進上) / *재정-역(役
인조 2년 갑자(1624,천계 4)
 7월30일 (임오)
헌부가 명례궁의 하인을 벌 준 일에 대해 정원에 하교하다

상이 정원에 하교하기를,
“어제 헌부가 사소한 일로 명례궁(明禮宮)의 장무(掌務)를 형신(刑訊)하였다 하니, 매우 놀랍다. 속담에 쥐에게 돌을 던지려 해도 그릇을 깰까 못 던진다고 하였다. 쥐가 그릇 가까이 있어도 꺼려서 던지지 못하는데, 더구나 자전(慈殿)께 속한 궁가(宮家)의 하인이겠는가. 대간은 일단 한 나라의 기강을 잡는 책임이 있는 이상 궁가의 하인들 중에 간사하고 외람된 자가 있을 경우 일에 따라 바로 잡는 것이 그 직분이라고는 하겠다. 그러나 상전(上殿)에 속한 사람으로 말하면 사체가 자별(自別)한데 까닭없이 형신하여 자전을 놀라게 해드렸으니, 존경하는 도리에 흠이 될 뿐만 아니라 내 마음에도 매우 미안하게 여겨진다. 이 뒤로는 이러한 일에 대해 충분히 삼가고 경계하라는 뜻을 헌부에 이르라.”
하였는데, 승지 홍명형(洪命亨)·최현(崔晛)이 아뢰기를,
“신들이 삼가 하교를 보건대, 명례궁의 장무는 자전에 속한 하인인데 법부(法府)에서 형신하였다고 하시면서, 쥐에게 돌을 던지려 해도 그릇을 깰까 못 던진다는 비유를 드셨는데, 그 비유가 본디 지당하긴 합니다. 그러나 생각건대, 법부의 직임은 서정(庶政)의 기강을 세우는 것이니 간사한 짓을 하여 법을 범한 사람은 궁(宮)과 부(府)를 막론하고 바로잡아 다스려야 할 것입니다. 더구나 명례궁의 장무는 정몽필(鄭夢弼)의 버릇을 배워 감히 도장이 찍힌 문서를 만들어 경기 고을을 마구 다니며 민간을 침탈하고 어지럽혔으므로 보고 들은 사람이 모두 놀라와 합니다. 따라서 법부가 적발하여 형신한 것은 그 직분을 수행한 것이니, 사리로 헤아려도 어찌 미안한 점이 있겠습니까. 지금 만약 충분히 삼가하고 경계하라는 뜻을 헌부에 내린다면, 아마도 대관(臺官)의 기세는 꺾이고 하인들의 기만 돋구어 과거 방자하게 굴던 버릇을 오늘날 다시 보게 될 것이니, 미안한 것으로 무엇이 이보다 큰 것이 있겠습니까. 신들은 후설(喉舌)에 대죄하면서 감히 봉행할 수 없기에 삼가 봉환(奉還)합니다. 바라건대, 성명께서는 다시 더 깊이 생각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다시 생각할 것도 없다. 그대들 마음대로 하라.”
하고, 또 하교하기를,
“근래 정원이 사체를 모르고 하교한 것을 마음대로 도로 들이니, 매우 놀랍다. 입직(入直)한 승지를 모두 추고하라.”
하였다.
【원전】 33 집 633 면
【분류】 *사법-탄핵(彈劾) / *왕실-궁관(宮官)

인조 2년 갑자(1624,천계 4)
 10월17일 (무술)
대사간 최현이 훈신들의 군관 폐해를 지적하다

대사간 최현(崔晛)이 아뢰기를,
“신은 천성이 어리석고 고지식하며 세련되게 일처리를 하지 못해 사람을 대할 적에도 그저 속마음을 털어놓기만 할 뿐 조금도 숨길 줄을 모르고, 일을 논할 적에도 반드시 곧이 곧대로 진술하려 할 뿐 거리끼는 점이 있다고 피하지를 못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신을 인정해 주는 것도 이 점 때문이고 신을 죄 주는 것도 이 점 때문입니다.
지난 번 본원이 차자를 올릴 때 동료들이 훈신(勳臣)들의 군관(軍官)에 관한 한 가지 조목은 삭제하자고 하기에, 신이 말하기를 ‘생각하고 있는 바가 이러하므로 감히 진달하지 않을 수 없다.’ 하였습니다. 이에 동료들이 말하기를 ‘군관 때문에 어찌 대단하게 폐해가 되는 일이 있겠는가.’ 하기에, 신이 말하기를 ‘지금은 큰 폐단이 없다 하더라도 뒷날 어찌 반드시 없으리라고 장담하겠는가. 그리고 훈신들 중에 장자(長者)는 꼭 그렇지 않겠지만 50명이나 되는 공신들 모두가 어찌 진선(盡善)하여 한결같이 지공무사(至公無私)하다고 할 수 있겠는가.’ 하였습니다. 또 ‘1천 명 또는 1백 명씩 무리를 지어 사실(私室)을 호위한다.’고 한 말을 빼려고 하기에, 신이 말하기를 ‘대간의 말이 과격한 점이 있는 듯 하더라도 실제로 그런 일이 있다면 무슨 관계가 있겠는가.’라고 했는데, 이 때문에 물정(物情)을 크게 거스리게 되었습니다.
그 뒤에 신이 우찬성 이귀(李貴)에게 문병하러 갔을 때 이귀가 침실로 들어오게 하기에 이런 일을 언급했습니다. 그리고 나서는 신 역시 병이 무거워 문을 닫고 나가지 않은 지 여러 날이 되었는데, 자못 사실과 다른 말들이 있게끔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어제는 좌석 중에서의 발언을 혐의하면서 ‘옛적부터 공신들이 사람들에게 기피당해 제대로 보전된 경우가 드물다.’고 신이 말했다는 이야기까지 나왔는데, 이는 곧 중신(重臣)이 반복되어 나도는 소문에 현혹되어 의심하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일 따름입니다.
현재는 국가의 일이 날로 잘못되어 천문(天文)으로 경계를 보이고 있으니 비상 시국에 처했다 할 것입니다. 따라서 차자에서 진달드린 것은 서로 책려(責勵)하려는 뜻에 불과한 것이고, 군관에 관한 한 가지 일 역시 각자 검칙하여 후환을 남기지 않도록 제때에 일찍 혁파하려고 한 것일 뿐입니다. 어찌 이로 인해 한층 더 의혹이 깊어져 신의 죄가 점점 무겁게 될 줄이야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그리고 이것이 어찌 신의 본심이었겠습니까. 신이 평소 사람들에게 신임받지 못한 데다가 하는 말에 요령이 없이 시휘(時諱)에 저촉되었으니, 뻔뻔스럽게 그대로 직위에 있을 수 없습니다. 신의 파직을 명하소서.”
하고, 사간 유백증(兪伯曾), 헌납 정홍명(鄭弘溟)이 서로 이어 인피(引避)하였다. 헌부가 아뢰기를,
“차자에 한 말은 시국에 대한 근심에서 나온 것이니, 모두 출사(出仕)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으나 최현은 특별히 체직시켰다.
【원전】 33 집 649 면
【분류】 *정론-간쟁(諫諍) / *인사-임면(任免) / *인사-관리(管理)


인조 4년 병인(1626,천계 6)
 2월18일 (신묘)
이귀·최현·이준·신계영·정홍명·심지원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이귀(李貴)를 연평 부원군(延平府院君)으로, 최현(崔晛)을 승정원 우부승지로, 이준(李埈)을 시강원 보덕으로, 신계영(辛啓榮)을 필선(弼善)으로, 정홍명(鄭弘溟)을 이조 정랑으로, 심지원(沈之源)을 홍문관 수찬으로 삼았다.
【원전】 34 집 75 면
【분류】 *인사-임면(任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