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신묘년 산행 /2011.2.16 도봉산

2011.2.16. 도봉산 산행 수도권

아베베1 2011. 2. 17. 13:35

 수도권 산악회 산행

 능원사 -도봉사- 보문능선 -우이암 - 헬기장 -주능선 - 칼바위아래 - 관음암 -

 마당바위 - 천축사 - 매표소 원점 회귀  

○ 세 지방의 분수령으로부터 산세가 불쑥 일어나서 철령이 되고, 한 가지는 동남쪽으로 뻗쳐 내려가다가

  금성(金城)ㆍ 금화(金化) 사이를 지나 꾸불꾸불 내려가서 영평(永平) 백운산이 되고, 적목치(赤木峙)가 되   었으며, 북쪽으로 되돌아서 주엽산(注葉山)이 되고, 축석현(祝石峴)이 되었으며, 서북쪽으로는

 불곡산(佛谷山)이 되고, 남쪽으로 내려가서 도봉산ㆍ삼각산ㆍ백악ㆍ인왕산이 되고, 한양 경성이 되었다

 

  마당바위에서 단체사진

   도봉의 멋진 모습 정상부 암릉

   칼바위 능선  봄이면 한번 타보아야 할듯

   도봉산 작은 물개바위의 모습

  능원사의 모습

 

  정조 16년 임자(1792,건륭 57)
 9월11일 (정미)
광릉을 참배하다

광릉(光陵)에 전배(展拜)하였다. 아침에 양주목을 출발해서 축석령(祝石嶺)에 이르러 말에서 내려 앉아서 쉬었다. 이때 새벽비가 살짝 지나가고 아침 햇살이 깨끗하였는데, 사방의 산들이 수려함을 다투는 듯 영롱히 빛났다. 상이 승지 서영보에게 이르기를,
“이 축석령은 백두산(白頭山)의 정간룡(正幹龍)이요, 한양(漢陽)으로 들어서는 골짜기이다. 산의 기세가 여기에서 한 번 크게 머물렀다가 다시 일어나 도봉산(道峰山)이 되고 또 골짜기를 지나 다시 일어나 삼각산(三角山)이 되는데, 그 기복(起伏)이 봉황이 날아오르는 듯하고 용이 뛰어오르는 듯하여 온 정신이 모두 왕성(王城) 한 지역에 모여 있다. 산천은 사람의 외모와도 같은 것이어서 외모가 좋은 산천은 기색(氣色) 또한 좋다. 어제 오늘 지나온 산천은 모두가 좋은 기색이거니와 더구나 아침에 비가 개인 모습은 더욱 명랑하고 수려함을 깨닫게 한다. 예전 병진년 행행 때에도 마치 이번처럼 아침에 비가 내리다 금방 개였는데 이 또한 우연한 일이 아닐 것이다.”
하였다. 능에 이르러 작헌례(酌獻禮)를 행한 다음 홍살문 밖으로 걸어 나와 좌의정 채제공에게 이르기를,
“본릉(本陵)의 형국(形局)은 옛부터 매우 좋다고 칭해 왔었는데 문서로만 보다가 이번에 와서야 그 진면목을 보게 되었다. 누원 동쪽으로 무수한 산봉우리들이 차례차례 겹겹이 나타나 이곳으로 모여들고 있는데 웅장하고 깨끗한 기색을 말로 형용할 수 없다. 비로소 눈으로 보는 것이 귀로 듣는 것보다 크게 나은 것임을 알게 되었다.”
하였다. 대가가 동구(洞口)에 이르러 선전관에게 명하여 봉선사(奉先寺)의 중을 위로하고 무휼하게 하였는데, 봉선사는 광묘(光廟)의 원당(願堂)이다. 포천 경계에 이르렀을 때 현감 오태첨(吳泰詹)이 부로(父老)들을 이끌고 공경히 맞이하니 상이 대가를 멈추고 위로하였다. 축석령으로 되돌아왔을 때 구경 나온 백성들이 산과 들을 가득 메웠다. 상이 백성의 고통에 대해 두루 묻자, 백성들이 ‘한 집에서 받는 조곡(糶穀)이 10여 석에 이르기도 하는데 모두 군포(軍布)로 바치고 남는 것이 없다.’고 말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감사와 수령이 있으니 조정에서는 그들을 신칙하여 너희들이 해롭고 지치는 일이 없게 하고 금년의 적모(糴耗)는 특별히 감면시켜 줄 것이다. 칙수(勅需)나 군향(軍餉)에 소용되는 곡식은 아무리 흉년이 든 해라 할지라도 원래 견감시켜 주는 규례가 없으나 이 또한 규례에 매이지 않고 모두 제거해 주도록 하겠다. 조관(朝官)과 사서인(士庶人) 중에서 70세 이상 된 자들은 자급을 올려 주고 유생(儒生)과 무사(武士)는 과장(科場)을 베풀어 선발할 것이다. 그리하여 위로는 선조(先朝)의 융성한 덕을 몸받고 아래로는 백성의 소원을 위로해 줄 것이니, 너희들은 모름지기 이 뜻을 알도록 하라.”
하였다. 양주에 이르러서도 고을의 부로들을 불러 포천에서와 같이 면유(面諭)하고 저녁에는 양주목에서 묵었다.
【원전】 46 집 333 면
【분류】 *왕실(王室) / *구휼(救恤) / *군사(軍事) / *재정(財政) / *인사(人事) / *윤리(倫理)


태종 9년 기축(1409,영락 7)
 7월3일 (계유)
강풍과 폭우로 경기·강원 등지의 많은 인명과 가축들이 죽다

큰 바람이 불고 비가 내리며, 우뢰와 번개가 몹시 심하여, 도봉산(道峯山)이 무너졌다. 양주(楊州)에서 산이 무너진 것이 더욱 심하였다. 의정부(議政府)에서 임금에게 아뢰고 서운 감후(書雲監候) 김종선(金種善)을 보내어 시찰하게 하니, 벽제(碧蹄)와 고령(高嶺) 사이에 산이 무너진 곳이 2백 70곳이나 되었는데, 고령사(高嶺寺) 아랫 마을에서 한 가족 22인이 모두 압사(壓死)하였다. 경기(京畿) 도관찰사(都觀察使)가 아뢰기를,
“이달 초3일 수재(水災)에 산이 무너져, 양주(楊州)·포천(抱川)·풍양(豐壤) 등처에서 사람이 죽은 자가 55명이나 되고, 소가 죽은 것이 5두(頭), 말이 죽은 것이 5필(匹)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울면서 말하기를,
“예전에 제왕(帝王)이 경계하고 두려워하며 행실을 닦은 이가 있었는데, 어떤 것이 행실을 닦는 일이 되는가?”
하였다. 개성 유후사(開城留後司)에 표류(漂流)한 민가(民家)가 9호(戶)이고, 강원도(江原道) 조종현(朝宗縣)에 산이 무너져 압사(壓死)한 자가 남녀 20명이고, 말이 죽은 것이 7필, 소가 죽은 것이 3두였다.
【원전】 1 집 497 면
【분류】 *과학-천기(天氣) / *과학-지학(地學) / *왕실-국왕(國王) / *사상-불교(佛敎)

세종 30년 무진(1448,정통 13)
 12월10일 (임술)
삼군 진무소에서 강무장을 선정하여 아뢰다

삼군 진무소(三軍鎭撫所)에서 풍양현(豐壤縣)의 입관산(入串山)·거질을산(居叱乙山), 적성현(積城縣)의 산천참산(山泉站山)·성산(城山)·주을동산(注乙洞山)·진벌산(榛伐山)·직등동산(直等洞山)·묘적산(妙寂山)·고라산(高羅山)·독간산(禿干山)·백달유산(白達酉山)·다지산(多只山)·정암산(井嵒山)·소이산(所伊山)·저적산(猪積山)·고읍동산(古邑洞山)·도봉산(道峯山)·임당산(林堂山), 양주(楊州)의 홍복산(洪福山)·달이산(達伊山)·장흥산(長興山)·우괴동산(牛塊洞山)·대모성산(大母城山)·범금릉동산(凡金陵洞山)·사동산(寺洞山)·산막동산(山幕洞山)·대랑동산(大郞洞山)·서을곡산(西乙谷山), 포천현(抱川縣)의 무둔산(無屯山)·주엽산(注葉山)·웅전산(熊前山), 가평현(加平縣)의 어리내산(於里內山)·마산(馬山)·전좌산(全佐山)·소야동산(所也洞山)·송현산(松峴山)·심곡산(深谷山), 원평부(原平府)의 고령산(高嶺山)·중산(中山), 고양현(高陽縣)의 혜음산(惠陰山)·대자암산(大慈庵山)·말질산(末叱山), 광주(廣州)의 이부산(李夫山)·진벌산(榛伐山)·태장산(胎藏山)·검단산(儉丹山)·청계산(靑溪山)·혜괘산(鞋掛山) 등을 강무장(講武場)으로 삼기를 청하니, 병조에서 아뢰기를,
“상항(上項)의 여러 산 가운데 예전에 강무장(講武場)으로 된 것을 제외하고 그 나머지의 여러 산들도 아울러 벌목(伐木)을 금하면, 서울 근처에 나무를 할 곳이 없어서 폐단이 또한 적지 아니하오니, 소재관(所在官)으로 하여금 동·서교(東西郊)의 예(例)에 의하여 금렵(禁獵)만 행하게 하소서.”
하매, 그대로 따랐다.
【원전】 5 집 107 면
【분류】 *군사-병법(兵法) / *농업-임업(林業) / *사법-법제(法制)


 농암집 제5권
 시(詩)
밤에 무우단(舞雩壇)에서 술을 마시며 여수례(旅酬禮)를 행하다. ‘공산무인 수류화개(空山無人水流花開)’로 운자를 나누어 시를 지었는데 나는 ‘공(空)’ 자를 얻었다.

봉우리 높이 솟은 도봉산이여 / 峨峨道峯山
숲 나무 울창하다 서울 동쪽에 / 鬱鬱神京東
그 아래 일백 굽이 흐르는 시내 / 下有百折溪
수석 서로 어울려 영롱하다오 / 水石相玲瓏
삼나무며 소나무 흰 구름 닿고 / 杉松矯白雲
줄사철이 청풍나무 타고 오르네 / 薜荔裊靑楓
옛 현인 은거하여 소요하던 곳 / 昔賢所盤桓
사당 안에 놓인 제기 엄정하여라 / 俎豆儼明宮
선현의 곧은 절개 되새겨보니 / 曠世挹遺烈
진한 감동 나약함을 떨쳐 세우네 / 感慨激懦衷
삼월이라 늦봄에 이곳 찾으니 / 我來三月暮
초목은 그새 벌써 녹음 짙은데 / 草樹已葱蘢
여러 명의 푸른 옷 우리 유생들 / 侁侁靑衿子
무우단 부는 바람 함께 쏘일 제 / 共追舞雩風
조용한 뜰 늙은 괴목 그늘이 지고 / 閒庭老槐陰
해묵은 제단에는 붉은 꽃 날려 / 古壇飛花紅
사흘 동안 머무는 즐거움이란 / 留連三日歡
취한 밤과 맑은 대낮 가릴 것 없네 / 夜飮淸晝同
주나라 예법 따라 예를 행하며 / 揖讓用周禮
두 말들이 술동이 비지 않으니 / 朋樽殊不空
거문고를 탈 것이 무어 있으랴 / 點瑟何用鼓
샘 소리가 다름 아닌 거문고 가락 / 鳴泉自絲桐
세속의 얽매임을 떨쳐버리자 / 物累良已遣
깊고도 조화로운 도심이로세 / 道心穆以融
한번 웃고 세상 속 되돌아보니 / 一笑顧世間
봄날의 아지랑이 가물거리고 / 野馬春濛濛
도봉산 봉우리만 구름 위 솟아 / 獨有雲表峯
풍진 속에 떨어지지 아니하였네 / 不墮塵
벗들이여 여러분께 당부하거니 / 歎息謂諸子
영원히 이끗 명예 멀리했으면 / 永謝利名叢

[주C-001]여수례(旅酬禮) : 제사를 마친 뒤, 제사에 참여한 사람들이 한자리에 모여 연회를 즐기는 자리에서 서로에게 술잔을 권하는 의식이다.
[주C-002]공산무인 수류화개(空山無人水流花開) : 소식(蘇軾)의 《동파전집(東坡全集)》 권98 〈십팔대아라한송(十八大阿羅漢頌)〉의 끝구이다.

몽경당일사 제1편
 마자인정기(馬訾軔征紀) ○ 을묘년(1855, 철종 6) 11월[1일-16일]
1일(경신)

아침에는 흐리다가 늦게 맑았다. 평명(平明 해뜰 무렵)에 떠났다.
따르는 사람들이 모두 수레를 세내어 타는데, 수레는 태평거(太平車)이다. 수레의 제도는 대개 우리나라 좌거(坐車)와 같은데, 두 바퀴 위에 휘장을 쳐 집을 만들었다. 두 필 노새에 매어 몰이꾼이 길다란 채찍을 잡고 앞의 왼쪽 장대 위에 걸터앉아서 채찍을 휘두르면, 채찍 끝에서 벼락 같은 소리가 울린다. 두 마리의 노새는 채찍 그림자만 보면 죽으라고 달려, 왼쪽으로나 오른쪽으로나 오직 사람이 지휘하는 대로 숨소리를 죽이고 가는데, 감히 제 멋대로 가지 못한다. 서(徐)가 성을 가진 사람 하나가 같은 성이라 일컬으면서 와서 보고 반가워한다.
내가 묻기를,
“그대가 서종맹(徐宗孟)의 자손인가?”
하니, 대답하기를,
“그렇습니다. 봉성(鳳城) 서북쪽 아래에 있는 큰 장원(莊院)이 우리집이며, 우리 일족 가운데 한 사람이 지금 황성(皇城)에서 통관(通官)으로 있습니다.”
한다. 책문에 있는 서가 성은 자고로 우리와 일족이라 하는데, 관향의 내력을 물으니, 그 사람은 글자를 모르므로 필담(筆談)으로는 자세히 알 수 없었다.
봉황성(鳳凰城)을 보기 위해 10리를 돌아서 안시성(安市城)을 지났다. 이 성은 봉황성 안에 있다. 당 태종(唐太宗)이 친히 고구려를 칠 때에 이 성이 여러 달을 두고 항복하지 않았고, 성을 지키던 장수 양만춘(楊萬春)의 화살에 왼쪽 눈을 맞았다. 당 태종이 회군(回軍)할 때에 양만춘이 성에 올라가서 절하고 사과하니, 태종이 명주 100필을 주었다 한다. 이 이야기는 김부식(金富軾)이 지은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실려 있으나, 《통감(通鑑)》과 《당사(唐史)》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다. 성터가 여태껏 그대로 있고 한 갈래 길이 통할 수 있다 하나, 갈 길이 바빠서 가보지는 못했다. 도로 봉황성에 들어가서 봉황사(鳳凰寺)에서 쉬었다. 누각에 올라가서 봉황산을 바라보니, 파란 하늘 위로 우뚝 솟아 있어서 남색 절벽과 퍼진 산봉우리가 손바닥을 쪼개어 손가락을 갈라 놓은 것 같아서, 뜻밖에도 삼각산과 도봉산을 다시 여기에서 보게 되니, 마음과 눈이 한꺼번에 즐거워져서 여행하는 피로가 싹 가셔버렸다. 옛날 책문은 외봉성(外鳳城)에 있었는데, 강희(康煕) 때에 인구가 번성하자 20여 리를 더 물려 지금 있는 책문을 설치하였다 한다.
길가에서 보니 큰 수레가 떼를 지어서 연달아 다닌다. 그 제도가 둔박하여 우리나라 짐수레와 같다. 짐을 산더미같이 싣고 차부(車夫)는 그 위에 앉았다 누웠다가 하며, 노새나 말이나 소나 나귀를 4, 5마리 혹은 6, 7마리 혹은 8, 9마리를 매었다. 수레의 크고 작음을 막론하고 수레바퀴의 살은 똑같이 정(井) 자 모양이고 굴대바퀴는 똑같은 척도(尺度)여서 앞 수레나 뒷 수레가 궤도(軌道)에 맞지 않은 것이 없다. 저자 집과 일반 집들이 즐비하고 장려(壯麗)하기는 과연 책문보다 나아서 역시 하나의 도회였다.
건자포(乾子浦)에서 숙박하였다. 저물녘부터 찬바람이 몰아닥치어 밤에는 더 심하였다. 도중에서 절구(絶句) 한 수를 우연히 읊었는데, 다음과 같다.

금석산 앞에서 해는 저물고 / 金石山前日欲曛
봉황성 밖에는 눈이 날린다 / 鳳凰城外雪紛紛
수레에 앉아서 앞길 헤어보니 / 車中坐計燕行路
삼분에 일분만 겨우 왔나보다 / 路去三分僅一分
피하여 무이산으로 들어가서 문인들과 함께 강학(講學)을 하였던 무이정사(武夷精舍)를 말하는데, 여기서는 각각 절간과 서원의 비유로 사용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