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도권 산악회 산행
능원사 -도봉사- 보문능선 -우이암 - 헬기장 -주능선 - 칼바위아래 - 관음암 -
마당바위 - 천축사 - 매표소 원점 회귀
○ 세 지방의 분수령으로부터 산세가 불쑥 일어나서 철령이 되고, 한 가지는 동남쪽으로 뻗쳐 내려가다가
금성(金城)ㆍ 금화(金化) 사이를 지나 꾸불꾸불 내려가서 영평(永平) 백운산이 되고, 적목치(赤木峙)가 되 었으며, 북쪽으로 되돌아서 주엽산(注葉山)이 되고, 축석현(祝石峴)이 되었으며, 서북쪽으로는
불곡산(佛谷山)이 되고, 남쪽으로 내려가서 도봉산ㆍ삼각산ㆍ백악ㆍ인왕산이 되고, 한양 경성이 되었다
마당바위에서 단체사진
도봉의 멋진 모습 정상부 암릉
칼바위 능선 봄이면 한번 타보아야 할듯
도봉산 작은 물개바위의 모습
능원사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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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11일 (정미) | ||||||||||||||||||||||||||||||||||||||||||||||
광릉(光陵)에 전배(展拜)하였다. 아침에 양주목을 출발해서 축석령(祝石嶺)에 이르러 말에서 내려 앉아서 쉬었다. 이때 새벽비가 살짝 지나가고 아침 햇살이 깨끗하였는데, 사방의 산들이 수려함을 다투는 듯 영롱히 빛났다. 상이 승지 서영보에게 이르기를, “이 축석령은 백두산(白頭山)의 정간룡(正幹龍)이요, 한양(漢陽)으로 들어서는 골짜기이다. 산의 기세가 여기에서 한 번 크게 머물렀다가 다시 일어나 도봉산(道峰山)이 되고 또 골짜기를 지나 다시 일어나 삼각산(三角山)이 되는데, 그 기복(起伏)이 봉황이 날아오르는 듯하고 용이 뛰어오르는 듯하여 온 정신이 모두 왕성(王城) 한 지역에 모여 있다. 산천은 사람의 외모와도 같은 것이어서 외모가 좋은 산천은 기색(氣色) 또한 좋다. 어제 오늘 지나온 산천은 모두가 좋은 기색이거니와 더구나 아침에 비가 개인 모습은 더욱 명랑하고 수려함을 깨닫게 한다. 예전 병진년 행행 때에도 마치 이번처럼 아침에 비가 내리다 금방 개였는데 이 또한 우연한 일이 아닐 것이다.” 하였다. 능에 이르러 작헌례(酌獻禮)를 행한 다음 홍살문 밖으로 걸어 나와 좌의정 채제공에게 이르기를, “본릉(本陵)의 형국(形局)은 옛부터 매우 좋다고 칭해 왔었는데 문서로만 보다가 이번에 와서야 그 진면목을 보게 되었다. 누원 동쪽으로 무수한 산봉우리들이 차례차례 겹겹이 나타나 이곳으로 모여들고 있는데 웅장하고 깨끗한 기색을 말로 형용할 수 없다. 비로소 눈으로 보는 것이 귀로 듣는 것보다 크게 나은 것임을 알게 되었다.” 하였다. 대가가 동구(洞口)에 이르러 선전관에게 명하여 봉선사(奉先寺)의 중을 위로하고 무휼하게 하였는데, 봉선사는 광묘(光廟)의 원당(願堂)이다. 포천 경계에 이르렀을 때 현감 오태첨(吳泰詹)이 부로(父老)들을 이끌고 공경히 맞이하니 상이 대가를 멈추고 위로하였다. 축석령으로 되돌아왔을 때 구경 나온 백성들이 산과 들을 가득 메웠다. 상이 백성의 고통에 대해 두루 묻자, 백성들이 ‘한 집에서 받는 조곡(糶穀)이 10여 석에 이르기도 하는데 모두 군포(軍布)로 바치고 남는 것이 없다.’고 말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감사와 수령이 있으니 조정에서는 그들을 신칙하여 너희들이 해롭고 지치는 일이 없게 하고 금년의 적모(糴耗)는 특별히 감면시켜 줄 것이다. 칙수(勅需)나 군향(軍餉)에 소용되는 곡식은 아무리 흉년이 든 해라 할지라도 원래 견감시켜 주는 규례가 없으나 이 또한 규례에 매이지 않고 모두 제거해 주도록 하겠다. 조관(朝官)과 사서인(士庶人) 중에서 70세 이상 된 자들은 자급을 올려 주고 유생(儒生)과 무사(武士)는 과장(科場)을 베풀어 선발할 것이다. 그리하여 위로는 선조(先朝)의 융성한 덕을 몸받고 아래로는 백성의 소원을 위로해 줄 것이니, 너희들은 모름지기 이 뜻을 알도록 하라.” 하였다. 양주에 이르러서도 고을의 부로들을 불러 포천에서와 같이 면유(面諭)하고 저녁에는 양주목에서 묵었다. 【원전】 46 집 333 면 【분류】 *왕실(王室) / *구휼(救恤) / *군사(軍事) / *재정(財政) / *인사(人事) / *윤리(倫理)
아침에는 흐리다가 늦게 맑았다. 평명(平明 해뜰 무렵)에 떠났다. 따르는 사람들이 모두 수레를 세내어 타는데, 수레는 태평거(太平車)이다. 수레의 제도는 대개 우리나라 좌거(坐車)와 같은데, 두 바퀴 위에 휘장을 쳐 집을 만들었다. 두 필 노새에 매어 몰이꾼이 길다란 채찍을 잡고 앞의 왼쪽 장대 위에 걸터앉아서 채찍을 휘두르면, 채찍 끝에서 벼락 같은 소리가 울린다. 두 마리의 노새는 채찍 그림자만 보면 죽으라고 달려, 왼쪽으로나 오른쪽으로나 오직 사람이 지휘하는 대로 숨소리를 죽이고 가는데, 감히 제 멋대로 가지 못한다. 서(徐)가 성을 가진 사람 하나가 같은 성이라 일컬으면서 와서 보고 반가워한다. 내가 묻기를, “그대가 서종맹(徐宗孟)의 자손인가?” 하니, 대답하기를,“그렇습니다. 봉성(鳳城) 서북쪽 아래에 있는 큰 장원(莊院)이 우리집이며, 우리 일족 가운데 한 사람이 지금 황성(皇城)에서 통관(通官)으로 있습니다.” 한다. 책문에 있는 서가 성은 자고로 우리와 일족이라 하는데, 관향의 내력을 물으니, 그 사람은 글자를 모르므로 필담(筆談)으로는 자세히 알 수 없었다.봉황성(鳳凰城)을 보기 위해 10리를 돌아서 안시성(安市城)을 지났다. 이 성은 봉황성 안에 있다. 당 태종(唐太宗)이 친히 고구려를 칠 때에 이 성이 여러 달을 두고 항복하지 않았고, 성을 지키던 장수 양만춘(楊萬春)의 화살에 왼쪽 눈을 맞았다. 당 태종이 회군(回軍)할 때에 양만춘이 성에 올라가서 절하고 사과하니, 태종이 명주 100필을 주었다 한다. 이 이야기는 김부식(金富軾)이 지은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실려 있으나, 《통감(通鑑)》과 《당사(唐史)》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다. 성터가 여태껏 그대로 있고 한 갈래 길이 통할 수 있다 하나, 갈 길이 바빠서 가보지는 못했다. 도로 봉황성에 들어가서 봉황사(鳳凰寺)에서 쉬었다. 누각에 올라가서 봉황산을 바라보니, 파란 하늘 위로 우뚝 솟아 있어서 남색 절벽과 퍼진 산봉우리가 손바닥을 쪼개어 손가락을 갈라 놓은 것 같아서, 뜻밖에도 삼각산과 도봉산을 다시 여기에서 보게 되니, 마음과 눈이 한꺼번에 즐거워져서 여행하는 피로가 싹 가셔버렸다. 옛날 책문은 외봉성(外鳳城)에 있었는데, 강희(康煕) 때에 인구가 번성하자 20여 리를 더 물려 지금 있는 책문을 설치하였다 한다. 길가에서 보니 큰 수레가 떼를 지어서 연달아 다닌다. 그 제도가 둔박하여 우리나라 짐수레와 같다. 짐을 산더미같이 싣고 차부(車夫)는 그 위에 앉았다 누웠다가 하며, 노새나 말이나 소나 나귀를 4, 5마리 혹은 6, 7마리 혹은 8, 9마리를 매었다. 수레의 크고 작음을 막론하고 수레바퀴의 살은 똑같이 정(井) 자 모양이고 굴대바퀴는 똑같은 척도(尺度)여서 앞 수레나 뒷 수레가 궤도(軌道)에 맞지 않은 것이 없다. 저자 집과 일반 집들이 즐비하고 장려(壯麗)하기는 과연 책문보다 나아서 역시 하나의 도회였다. 건자포(乾子浦)에서 숙박하였다. 저물녘부터 찬바람이 몰아닥치어 밤에는 더 심하였다. 도중에서 절구(絶句) 한 수를 우연히 읊었는데, 다음과 같다. 금석산 앞에서 해는 저물고 / 金石山前日欲曛 봉황성 밖에는 눈이 날린다 / 鳳凰城外雪紛紛 수레에 앉아서 앞길 헤어보니 / 車中坐計燕行路 삼분에 일분만 겨우 왔나보다 / 路去三分僅一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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